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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15화 (15/72)

15화.

도훈은 은하가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오늘 장인어른인 은표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누워 계시니 상견례 때 따로 만날 수도 없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또 날을 잡아 오는 것도 서로 번거로울 것 같았다.

그러니 은하를 데려다주러 들른 김에 가볍게 인사라도 하면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은하는 도훈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자신을 뒤따라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도훈이 병원을 가로지르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환자와 보호자들은 물론 병원 의료진까지 도훈을 홀린 듯 쳐다보기 바빴다. 은하가 봐도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에 비율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도훈은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바로 VIP 병동으로 향했다.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김 박사님, 항상 수고가 많으십니다.”

VIP 병동에 들어서자마자 도훈은 담당 의료진부터 만났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인 건지 의료진과의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여은표 씨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수술 부위는 잘 회복되고 있습니다만, 의식이 언제 회복될지는 저희도 알 수가 없는 거라서요. 기다려보시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은표는 사고로 실려 올 때부터 출혈이 심해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고 했다. 바로 수혈을 하고, 장기 파열과 뇌출혈이 의심돼 수술까지 마쳤으나 아직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은하가 그 소식을 들은 건 두 달 전 미국에서였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본 은표의 모습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뺑소니 사고라고 했나?”

병실로 가면서 도훈이 은하에게 물었다.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CCTV도 없고 인적이 드문 이차선도로. 사건장소는 집 근처도 공장 근처도 아닌 낯선 곳. 게다가 밤 12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은표는 그곳에서 잠시 차를 세웠고, 동시에 마주 오던 차량과 부딪쳤다고 했다.

길에 떨어진 조각들로 보아 부딪친 것이 화물트럭이라는 것만 추정할 뿐, 아무것도 밝혀진 건 없었다.

하필 왜 그 시간에, 그런 곳에서…….

사고가 나려니까 그런 거겠지만, 은하는 별 게 다 원망스러웠다.

그날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빠에게 제발 집에 일찍 들어와 쉬시라고 싶었다.

“내가 괜한 걸 물었군.”

눈가가 촉촉해진 은하를 보며 도훈이 짧게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이쪽이에요.”

은하는 바보처럼 아빠 생각에 빠져 도훈을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고는 얼른 병실로 안내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넓은 VIP 병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문이 큼직해서 평소 낮에는 채광도 무척 좋았다.

침대는 오른쪽에 위치했다. 은표는 그 침대에서 산소호흡기를 낀 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은하는 그 모습이 익숙한 듯 병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무렇지 않게 밝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빠, 저 왔어요.”

은하의 뒤를 따라 도훈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많이 기다렸어요? 잠깐 친구한테 갔다 오느라고 늦었어요.”

은하는 마치 건강한 아빠와 대화하듯 혼자서 재잘대며 은표의 상태부터 살폈다. 도훈은 의외의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몇 번 만나는 동안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은하에게 이토록 밝은 면이 있었나 새삼 놀라는 중이었다.

“참, 오늘은 인사시켜드릴 사람이 있어요.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제가 결혼할 사람이거든요.”

은하가 제 옆에 서 있는 도훈을 가리키면서 은표에게 설명했다.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만약 은표가 건강했다면 은하는 절대 아빠를 속이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도 이렇게 덜덜 떠는데, 건강한 아빠와 마주했다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기만 했을 터였다.

물론 은표가 건강했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계약결혼을 제의할 일도 없었겠지만.

“인사하세요, 도훈 씨. 우리 아빠예요.”

도훈이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은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도훈 역시 건강한 장인을 마주하듯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정식으로 제 소개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 최도훈이라고 합니다.”

도훈의 입에서 ‘아버님’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오자 은하의 가슴이 또 한 번 알 수 없는 감정에 요동쳤다.

의식도 없이 누워 있는 아빠에게 정성스레 인사하는 도훈이 멋있어 보인 것은 물론이요, 그 멋진 남자와 자신이 정말로 결혼한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은하 씨에게 얘기 들으셨겠지만, 갑작스럽게 결혼을 결정하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도훈은 차분히 설명을 덧붙이더니, 은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 결혼식에 함께하지 못하시더라도, 더할 나위 없이 예쁜 신부로 맞이하겠습니다.”

그 순간. 은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마치 진심으로 아빠에게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예쁜 신부라는 표현이 은하의 마음을 간질였다.

***

“오늘, 감사합니다.”

병실을 나온 뒤 은하가 도훈에게 말했다. 은하는 지하 주차장까지 도훈을 배웅했다.

“원래 고집이 센 편인가?”

도훈이 은하를 돌아보더니 장난스레 물었다. 은하는 그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해 눈을 깜박였다.

“네?”

“굳이 할 필요 없다는데 자꾸 감사 인사를 하는 걸 보니 고집이 꽤 센 것 같아서.”

“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도훈이 콕 집어 지적하니 그런 것도 같았다.

굳이 지하 주차장까지 배웅하러 따라온 것도 그녀의 고집이었으니까.

그런데 유독 도훈에게만 그랬다. 조금이라도 신세를 지는 기분이 싫어서였다.

어차피 돈이 오고 가는 계약관계에 그런 생각을 갖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희한하게 그에게는 더 그런 감정이 들었다.

자격지심인가? 아니면…….

뭐가 됐든 자신도 모르게 정말로 도훈에게만 더 특별하게 반응한 것 같아서, 은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고집 센 여자도 내 취향이긴 한데.”

훅 들어온 도훈의 말에 은하의 심장이 어김없이 쿵쿵 뛰어댔다.

자꾸 대놓고 자기 취향이라고 하니,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래도 감사 인사는 그만했으면 해. 서로 지켜야 할 예의는 지키는 게 내가 원하는 거니까.”

“……네.”

결혼할 사이에 갖춰야 할 예의, 도리.

도훈이 그래서 아빠에게 인사를 했다는 걸 은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고마운 걸 부인할 수가 없어서 그랬는데……. 그게 불편했으려나.

그나저나 왜 자꾸 자기 취향이라는 둥 사람 마음을 흔들어놓는지.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이겠지만, 은하는 숨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난 뭐든 말로만 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 빈말 같으니까.”

은하가 뜨끔하여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고맙다고 말은 하면서도, 감정은 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혹시라도 그를 향해 가지는 또 다른 감정이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건네는 감사 인사를 가식으로 느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의 아니게 그를 농락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사과를 하는 것도 이상해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자니, 도훈이 주차된 자신의 차를 향해 걸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그때 시끄러운 경적소리와 함께 오토바이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은하 쪽을 향해 달려왔다.

도훈이 놀라서 은하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훈은 한 손으로 은하의 허리를, 또 다른 손으로는 은하의 머리를 끌어안고 오토바이를 등지도록 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오토바이는 아슬아슬하게 그들을 지나쳐 갔다. 음식을 배달하러 온 오토바이인 모양이었다.

도훈은 욕지기가 나오는 걸 겨우 참아 넘기고 품에 안긴 은하를 보았다.

그녀는 겁에 잔뜩 질렸는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많이 놀란 건가…….

하긴 도훈도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두근거렸던 마음이 가라앉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만큼 놀랐기 때문이었다.

도훈이 은하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보고자 잠시 움직일 때였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더 깊게 파고들었다.

오토바이는 벌써 지나갔는데 제 품에 안겨서 떨어질 줄 모르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도훈은 기분이 묘했다.

그 와중에 두 팔로 제 허리를 야무지게 감아 매달리는 듯한 감각에는 그녀와 보냈던 밤이 생각나면서 아찔해지기까지 했다.

이 순간에도 욕망이 꿈틀대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도훈의 움직임이 묘해져서였을까.

황이 끝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은하가 깜짝 놀라 도훈의 품에서 벗어났다.

오토바이를 만난 것보다 더 놀란 듯 제 품을 빠져나가는 은하를 보니 도훈은 입안이 썼다.

굳이 이렇게까지 당황할 건 또 뭔지.

“괜찮아?”

“이제,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은하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놀라서 그의 품에 안기긴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민망했다.

심장은 또 왜 이렇게 뛰는지, 그의 귀에 다 들릴 것만 같았다.

“놀랐을 테니, 병원에서 너무 무리하진 마.”

“네…….”

아까 병실에서 나오면서 도훈은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은하는 은표 옆에 조금 더 있다가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의 고집을 말릴 수 없음을 알기에 도훈도 더 길게 말하진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더 이상 관여할 순 없었다. 결국 도훈은 걱정되는 마음을 털어버리고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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