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도훈이 그렇게 자책하는 사이, 은하는 얼른 옷부터 수습했다.
풀어진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고 치마를 내려서 탁탁 주름을 폈다.
얼굴도 금세 정돈했다. 언제 눈물이 고였냐는 듯 이내 표정을 수습하더니, 침착하게 가방에 있는 휴대용 티슈를 꺼내 입가를 닦았다.
방금 도훈이 본 건 허깨비였나 싶을 만큼, 그녀는 순식간에 말끔히 정돈된 상태로 창밖을 응시했다.
내 쪽은 쳐다보기도 싫다는 건가.
아닌 척하지만 이 정도면 무지하게 상처받은 얼굴이라는 걸, 도훈도 이제는 슬슬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하긴, 자존심이 상할 법했다. 앞뒤 설명 없이 아무렇게나 그녀를 취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다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도훈이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제야 은하가 고개를 돌려 도훈을 보았다.
“고의는 아니었어.”
말해놓고 나니 변명처럼 들렸다. 심지어 매번 같은 말로 변명하는 듯했다. 지난번에 호텔에서도 온몸에 붉은 키스마크를 새기곤 비슷한 말을 했으니까.
도훈이 낭패스런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는데, 은하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
차라리 원망이든 분노든 표출하면 좋겠는데, 은하는 그러지 않았다.
말간 얼굴 뒤로 제 표정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마치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으면서도 도도한 척 꾸미고 앉아 있는 새끼 암고양이 같았다.
“그럼 다행이고.”
도훈은 더 달래줄까 하다가 단념했다. 그게 더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 같아서.
그리고 은하도 도훈이 더 깊게 캐묻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사실 그를 원망하는 마음은 정말로 없었다. 다만 자신에게 화가 났을 뿐.
결국 그에게 굴복하고 키스를 받아들인 건 그녀였으니까.
심지어 그와의 키스를 즐긴 것도 사실이었다.
점점 열기를 더해 오는 몸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더 해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처음 계약결혼을 제의하고자 마음먹었을 땐 이런 상황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결혼도 하기 전에 그에게 휘둘리게 될 줄은…….
하지만 이제 와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 다른 대안은 없었으니까.
“성우와는, 앞으로 만나지 마.”
은하가 복잡한 심정을 곱씹고 있을 때, 도훈이 쐐기를 박았다.
“아직도 오빠와 제 사이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다른 걸 다 떠나, 성우와 자신의 사이를 의심하는 건 정말로 속상한 일이었다. 성우에게도 너무 미안하고.
“난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다는 주의라. 서로 불필요한 신경은 쓰지 않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까지 차단할 필요는 없지만, 말 그대로 괜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성우의 짝사랑이라고 해도, 은하도 제법 성우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어 보였다. 왠지 도훈은 그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집에서도 그런 걸 허용해주는 분위기가 아니니까.”
도훈이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집에서 알게 돼서 좋을 건 없었다.
당사자들이 그저 편하게 만났다 한들 소문이 어떻게 날지 모르고, 그러면 은하만 더 힘들어질 것이다.
“……알겠습니다.”
도훈이 이렇게 나오니 은하도 수긍했다. 결혼할 사람이 싫다는데, 고집부리며 이성 친구를 만날 여자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냥 결혼도 아니고 계약결혼에 재벌집 며느리로 들어가는 건데, 당연히 행동거지 하나도 조심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
안 그래도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데, 대놓고 먹잇감을 던져줄 필요는 없으니까.
다만 성우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벌써부터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친했던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지는 것도 신경 쓰였다.
“저도 그럼…… 부탁이 하나 있어요.”
“부탁?”
“저 때문에 성우 오빠랑 다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성우는 분명, 이 결혼을 끝까지 반대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또다시 도훈과 부딪칠 수도 있을 것이고.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당연히 의견 다툼이 있겠지만, 최대한 노력해달라는 말이었다.
“노력은 하지.”
“감사합니다.”
은하는 도훈이 그 정도로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한시름 덜었다고 해야 하나.
“참, 상견례는 다음 주 토요일쯤 생각하는데.”
“네…….”
“이왕 하는 거 빨리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
“어머니 일정을 여쭤볼게요.”
“그럼, 집에 데려다주지.”
할 말을 마친 도훈이 내비게이션을 켜고 그녀의 집을 등록하려고 할 때였다.
은하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병원으로 갈게요.”
“병원?”
은하는 혹시나 도훈이 오해할까 싶어 빠르게 덧붙였다.
“이제 결혼하면 아빠를 많이 찾아뵙지 못할 것 같아서, 요즘 자주 들르고 있어요.”
“그래, 그럼.”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일병원으로 목적지를 등록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
차는 시내를 시원하게 달리는데, 차 안에 흐르는 침묵은 어색하기만 했다.
조용히 있으니 그와 했던 적나라한 키스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볼이 계속 화끈거렸다.
가슴 뛰는 건 또 왜 이렇게 가라앉질 않는지.
이대로 있다가는 숨이 막히거나, 떨리는 마음을 도훈에게 들키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 같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 생각하다가 감사 인사부터 꺼냈다.
“아빠 병실을 옮겨주신 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몇 번이고 인사하고 싶었는데 그에게 연락할 결심이 서지 않아, 다양한 핑계를 대며 미뤘던 말이었다.
“덕분에 아빠가 조금 더 편안해지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일반 병실과 VIP 병실은 시설부터 달랐다. 은하가 같이 지낼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게다가 의료진도 수시로 소통할 수 있어 아빠의 현재 상태를 쉽게 체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새엄마 찬숙은 말로만 아빠를 돌본다고 했지, 전혀 손쓰는 게 없었다.
기적처럼 아빠가 깨어날 수도 있는 건데, 그런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병원비가 많이 들어간다고 치료도 중단하고 병실도 다인실을 쓰게 하는 등 돈을 아끼느라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그걸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 가슴이 아팠는데, 이제는 아빠에게 뭐라도 해줄 수 있게 되어 행복했다.
“결혼 조건이었으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병원비도 걱정 말고.”
“그래도 감사합니다.”
다부진 그녀의 말투에 도훈이 은하를 돌아보았다.
굳이 그런 말은 할 필요 없다는 데도, 기어코 반복하는 그녀의 고집이 느껴져서였다.
그러는 사이, 차는 어느새 제일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은하는 더 이상 어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짧게 안도하며 도훈에게 인사를 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가지.”
“네?”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은하가 영문을 몰라 도훈을 돌아보았다. 도훈은 그 말만 남기고 먼저 차에서 내린 뒤였다. 은하도 급히 뒤따라 내렸다.
“여기까지 온 김에, 아버님께 인사는 드리고 가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어느새 은하 앞까지 걸어온 도훈이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은하는 당황해서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아무리 누워 계셔도 딸이 누구랑 결혼하는지는 궁금하실 테니까.”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도훈이 아빠를 먼저 챙길 줄은…….
어차피 계약결혼이고, 아빠는 혼수상태이니 굳이 따로 인사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결혼 후에는 한 달에 한 번 아빠를 만나러 오는 걸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그건 나중에라도 가족들에게 계약결혼을 들키지 않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빠가 깨어났을 때 할 말도 필요했고.
아빠가 깨어나면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훈과 정말로 사랑해서 결혼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괜히 아빠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려면 적어도 도훈이 아빠를 찾아온 기록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제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 역시 규칙적으로 아빠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될 테니 일석이조였다.
그런데 그가 그 약속과 별개로 은표를 챙기니 은하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찬숙마저도 은표를 죽은 사람 취급하며 찾지 않은 지 벌써 한 달여.
지금껏 누구도 아빠를 찾지 않고 혼자서 아빠 곁을 외롭게 지켜와서일까. 은하는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겠다는 도훈의 한마디에 괜히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냥 형식적인 인사를 한다는 말일 텐데, 이런 걸로 마음이 동요된다는 것이 한심했지만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드는 감정이었다.
“왜?”
은하가 아무 말 없이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도훈이 물었다.
“혹시 늦은 시간에 예고 없이 인사를 드리는 게 불편한가?”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면?”
“계약결혼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은하가 얼른 감정을 수습한 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병원비와 결혼한 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거, 그거면 충분해요.”
은하는 진심이었다. 자신이 쓴 요구사항만 지켜주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그런데 도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멀쩡한 사람, 파렴치한 만들지 마.”
“…….”
“계약결혼이라고 해도 부부간의 예의는 지킬 거니까.”
도훈은 그녀가 결혼 조건으로 내걸었던 요구사항을 상기하며 내뱉었다.
“아버님을 찾아뵙는 건, 당신이 요구사항으로 쓰지 않았어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이야. 지금 인사드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
도훈의 말에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더 설명이 필요해?”
“……아뇨.”
은하가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누워 있다고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들여 인사하겠다는 사람을 누가 마다할까.
“그럼 들어가지.”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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