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도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여은하 씨가 먼저 제의했어. 난 실리를 따져서 오케이를 했고. 그러니까 진성우, 네가 간섭할 일 아니야.”
“최도훈!”
“그리고 세상에는 조건 맞춰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아. 그렇게 생각하면 크게 비정상적인 결혼도 아니지.”
도훈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처럼 당당할 수 있었다.
그녀의 3년과 아이를 담보로 잡은 거지만, 그만큼 충분한 돈으로 보상할 생각이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10억보다 더 줄 수도 있겠지.
그렇게 따지면 은하도 결코 손해 보는 입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은하가 우리랑 몇 살 차이인 줄이나 알아?”
성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득하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어린 여자를 이용하는 건 아니지 않냐고.
그런데 도훈의 대답은 성우의 예상을 벗어나고 말았다.
“난 너랑 달라, 진성우.”
“뭐?”
“어려서 더 좋다는 뜻이야. 딱 내 취향이거든.”
도훈이 은하와 은근하게 눈을 마주치며 대꾸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은하의 얼굴이 홧홧하게 불타올랐다.
여기서 ‘내 취향’은 누가 들어도 성적인 취향을 말하는 거였다.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있어도 되는 건지 은하도 헷갈리는 와중에 심장만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성우도 충격이었는지 놀란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은 간섭하지 마. 아무리 친구라도 용서 안 할 거니까.”
도훈의 서슬 퍼런 말에도 성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도훈의 말이 충격이었다.
“여은하, 그만 나가지? 결혼 이야기마저 하려면.”
“네? 아……. 네.”
도훈이 ‘결혼’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야 이 상황이 정리될 것 같아서였다.
그때까지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던 은하는 그 말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테이블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놔둬. 내가 할 테니까.”
성우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멍한 표정으로 은하를 보고 말했다. 이 와중에도 은하가 테이블을 치우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끼는 은하인데…….
이런 은하가 어찌 됐건 도훈과 결혼을 하고 섹스까지 한다고 생각하니 뒷머리가 쭈뼛 서는 건 사실이었다.
“본인이 한다는데 그냥 나가지?”
“아……. 알겠습니다.”
도훈의 말투에 짜증이 어리자, 은하가 멈칫하고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오빠, 저 가볼게요.”
은하는 미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도훈과 스튜디오를 나섰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 성우는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
도훈은 은하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는 잘 빠진 고급 세단 앞에서 보조석 차 문을 열어 은하에게 고갯짓을 했다.
“타.”
차도 주인을 닮았는지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은하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그의 몸에서 나던 시트러스 우디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와 밤을 보내고 난 뒤 오랫동안 잊히지 않던 그 향기였다.
안 그래도 방금 전에 그가 한 말이 뇌리에 남아 머릿속을 맴도는데, 자연스레 침대 위에서 본 그의 모습도 겹쳐 떠올랐다.
‘어려서 더 좋다는 얘기야. 딱 내 취향이거든.’
사실이었을까?
그래서 평소에 이토록 차갑고 단정한 사람이 침대 위에서는 그렇게 집요하게 달려든 걸까?
생각해 보니 어쨌거나 그의 취향이라면 은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남자 경험이 없어서 도훈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한 건 사실이니까.
그 생각만 하는데도 은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들켰다간 크게 민망할 것 같아서 티 내지 않으려고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 했다.
“생각보다 당돌하네.”
“네?”
그때 도훈이 입을 열었다. 은하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깜박이며 도훈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성우도 몰랐던 거잖아. 당신의 속마음을?”
“……네.”
당연히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랬다면 절대 소개시켜 주지 않았을 테니까.
말은 안 해도 성우가 자신을 얼마나 위하는지 은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은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하려는 걸 알았다면, 그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성우의 반응이 훨씬 더 거세서 마음이 많이 쓰였다. 게다가 도훈에게 괜한 오해까지 받게 한 것도 미안했다.
은하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 도훈 씨.”
“말해.”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정말로 성우 오빠랑 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도훈은 대답을 하는 대신 빤히 은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순간 당황했지만 은하는 하고 싶은 말을 마저 했다.
“오빠가 저 때문에 오해를 받게 돼서 되게 황당했을 거예요.”
“황당한 건 난데.”
“네?”
“나랑은 밥 먹기 싫어서 거짓말까지 하지 않았나?”
“…….”
“그러면서 성우와는 맛있게 야식을 같이 드시고?”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도훈과는 불편해서 밥조차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을.
그제야 오해할 만했다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결혼할 사람은 도훈인데 그와는 불편해서 피하고, 성우에게는 자신이 직접 간식까지 사가지고 왔으니.
은하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몰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곤란한 상황에서 자주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도훈이 그런 은하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자꾸 그렇게 씹어 대면 키스할 건데.”
“네……?”
“못 들었어? 당신 기가 막히게 내 취향이라는 말.”
놀리는 건가?
은하가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해 자꾸만 흔들리는 동공을 그에게 고정시킬 때였다.
도훈은 은하의 머리를 그의 커다란 손으로 끌어당기고는 이내 정말로 입술을 부딪쳐왔다.
“흡! 도훈 씨…….”
은하의 뒷말은 그의 입술에 그대로 삼켜졌다. 놀라서 저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도훈의 말랑한 살덩이가 거침없이 밀고 들어온 탓이었다.
당황한 은하가 그의 품에서 버둥거렸지만 도훈은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입술을 더 깊이 맞물렸다. 결코 한 줌의 공간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렇게 영역을 넘어온 그의 살덩이는 때론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유영하며 속수무책으로 그녀를 무너뜨렸다.
도훈의 혀가 제 잇새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은하는 까무러칠 만큼 정신이 혼미해졌다.
지금 그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무례하게 제멋대로 구는 게 싫은데도, 몸은 저절로 그에게 젖어 들어갔다.
너무 달아서, 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살아나는 경험이라서…… 도저히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키스만으로 이토록 황홀할 수 있다는 것을 은하는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으읏. 도, 도훈 씨.”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은하는 허벅지 사이를 훑고 들어오는 차가운 감촉에 화들짝 놀라 다시 한번 버둥거렸다.
키스를 하면서 가슴을 움켜쥐는 손을 마다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을까.
그의 손은 대범하게도 이제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이곳에서 끝까지 갈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은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그만해요. 여기 주차장이에요.”
은하가 가까스로 이성을 차리고 그에게 애원했다.
도훈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입술을 떼고 보니 은하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립스틱은 보기 흉하게 번져 있었고, 입술 주변은 침으로 범벅이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촉촉이 맺혀 있었다.
옷은 또 어떤가. 분명 깔끔했던 블라우스는 구겨지고 풀어져 가슴이 반 이상 드러났다.
치마 역시 말려 올라가 허벅지를 휑하니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미쳤군, 최도훈.’
이건 누가 봐도 미친놈의 소행이었다.
항상 냉철하고 이성적이라 자만하던 그였다.
여자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로 여자를 옆에 둔 적도 없었지만, 어쩌다 두게 될 때도 늘 무미건조하게 몇 개월 만나다 헤어진 게 다였다.
그런데 은하와 같이 있으면 자꾸만 이성을 잃고 본능이 앞섰다.
도훈은 스스로도 제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약 은하가 거기에서 멈춰주지 않았다면, 아마 이곳에서 바로 욕정을 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환한 공공장소에서 그러는 걸 떠올리기만 해도 아찔하지만, 그만큼 도훈이 흥분했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녀석은 한없이 커져서 빨리 옷 밖으로 꺼내달라 그에게 계속 강한 아우성을 보내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도훈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제 말에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은하가 입술을 깨물며 난처해하기에 농담 삼아 한 말이었다.
멀쩡한 입술을 깨물어서 기어이 피를 보고 있는 것도 신경 쓰였고, 그 입술을 보고 있자니 제법 달았던 그녀의 입술을 또 한 번 먹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인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서른둘이나 먹었는데 그 정도 유혹쯤이야 못 참을까.
하지만 그때 할 말이 남았다는 듯 급하게 그들을 찾아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성우를 본 게 발단이었다.
여자의 촉이 무섭다고 하지만, 남자의 촉도 무시 못 했다.
도훈은 어떻게든 성우를 단념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은하에게 키스한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성공했다. 성우는 놀라서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다가 기둥 뒤로 사라져버렸으니.
그러면 키스도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그런데 도훈은 그러질 못했다. 결국 본능에 무릎 꿇고, 저도 모르게 은하와의 키스에 깊이 빠져들고 만 것이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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