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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12화 (12/72)

12화.

“난 지나가다가 할 말도 있고, 술도 한잔할 겸.”

도훈이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성우와 은하를 보며 말했다.

“잘 왔어. 일단 와서 앉아.”

성우가 도훈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도훈은 성큼성큼 걸어서 소파로 다가오더니 은하를 마주 보며 앉았다.

은하는 왠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가 등장할 때부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몸을 짓누른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으나 도훈의 얼굴은 차갑기만 했다.

“이제야 저녁을 먹는 건가?”

“아, 네…….”

도훈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왠지 감정이 실린 것 같아서 은하가 당황한 사이, 성우가 설명했다.

“은하가 아직 밥을 안 먹었다고 사 갖고 왔지 뭐야. 너도 안 먹었으면 같이 먹든지.”

“…….”

“아, 맞다. 넌 이런 거 안 좋아하지? 항상 비싸고 좋은 것만 드시는 부잣집 도련님이니까.”

성우가 놀리듯이 도훈에게 말했다. 사실 성우도 만만치 않게 부자면서 꼭 도훈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오늘 도훈은 성우의 말에 트집을 잡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은하를 만난 것이 더 중요하니까.

오늘 저녁 은하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받질 않았다. 상견례 날짜를 정하기 위한 연락이었다.

그런데 받질 않으니 바쁜 일이 있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러다 성우 생각이 났다. 은하에게 제 처지를 다 떠벌린 뒤 은하를 제 앞에 데려다 놓은 놈. 입이 싼 것도 단죄를 묻고, 결국 은하와 결혼을 하게 됐다는 소식도 전할 겸 들른 참이었다.

그런데 연락이 안 되던 은하는 이곳에 성우와 함께 있었다.

심지어 저랑은 같이 밥 먹기 싫어 거짓말까지 하던 여자가, 성우와는 맛있게 떡볶이와 순대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자 뭔지 모르게 기분이 불쾌했다.

‘왜 저렇게 보는 걸까?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한편 은하는 도훈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혹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티슈를 뽑아다가 얼른 입매를 정돈했다.

그런데도 도훈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은하를 주시했다.

시선을 옮길 때마다 마주치는 도훈의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은하는 눈빛만으로도 바짝 긴장이 됐다. 괜히 얼굴도 화끈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게 일주일 만인 듯했다. ‘설향’에서 마주친 뒤로 처음이니까.

“전화를 해도 안 받더니, 여기에 있었네.”

도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의외의 말에 은하가 놀라서 되물었다.

“……전화하셨어요?”

“얘기했잖아. 상견례 날짜 잡으면 연락한다고.”

“아.”

은하는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못 보던 전화번호로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그가 전화를 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라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무슨 사이라도 된 것처럼 그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가져봤자 힘들기만 할 테니까.

그래서 여태 전화번호도 몰랐지만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VIP 병실로 옮겨졌을 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기도 했지만, 번호를 모른다는 핑계로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물론 비서 영철을 통하거나 성우에게 물어보면 연락처를 얻는 거야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당장 연락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내 전화, 꼬박꼬박 받았으면 좋겠는데.”

“아……. 알겠습니다.”

화가 난 걸까.

말투가 너무 차갑고 냉랭해서 은하는 괜히 움찔했다.

‘연락은 받아줄 것.’

그건 은하가 요구했던 결혼 조건이었다.

그것을 들먹이며 상기시키는 걸 보니, 은하가 전화를 받지 않아 확실히 마음이 상한 듯했다.

일부러 안 받은 것도 아니고 나중에라도 부재중 전화를 보고 연락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당장 그가 마음이 상했다고 생각하니 얼른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역시, 도훈이 연락이 안 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답답하고 화가 날 수도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아직 결혼하기 전이지만, 도훈도 같은 걸 원한다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성우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깜짝 놀라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야, 상견례라니?”

“여은하 씨가 얘기 안 했나?”

“뭘?”

“우리 결혼한다는 거.”

“뭐?”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결혼 사실을 밝혔지만, 은하는 난감함에 얼굴을 구겼다.

성우에게 조금의 언질도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우는 너무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럴 줄 알고 직접 설명하고 싶었는데…….

성우가 놀라는 것도 은하는 당연히 이해했다. 팬이니까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서 만나게 해주었는데, 갑자기 그와 결혼한다는 소식이라니.

성우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울까.

성우는 잠시 은하와 도훈을 번갈아 보며 말을 잇지 못하더니,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은하에게 물었다.

“은하야, 이게 무슨 말이야? 네가 말해 봐. 네가 정말로 이 녀석이랑 결혼을 한다고?”

“네…….”

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싶은데, 앞에 떡하니 도훈이 앉아 있으니 뭐라고 덧붙이기도 뭐했다.

성우는 기가 막혀 은하와 도훈을 번갈아 보았다.

“그날 둘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다 필요 없고. 은하 너, 이 녀석이 어떤 마음으로 결혼하는지 알고나 이러는 거야?”

“알아요…….”

“알아?”

“네……. 오빠가 도훈 씨랑 통화하는 걸 들었었거든요.”

‘오빠?’

도훈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위로 들려 올라갔다. 안 그래도 자신을 무슨 파렴치한 취급하는 것 같아서 둘의 대화가 몹시 거슬리는 참이었다.

그러던 중 오빠라는 단어까지 와 박히니 도훈은 짜증이 치솟았다.

성우는 성우대로 어이가 없어서 은하를 쳐다보았다.

“너, 그럼 일부러……?”

“네. 맞아요.”

“그렇다고 진짜로 도훈이 장단에 맞춰 결혼을 하겠다고?”

“그렇게 해서 아빠 병원비를 댈 수 있고, 제가 그 집에서 나올 수 있다면 충분해요. 사실 도훈 씨와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으면 저는…… 어머니가 알아본 다른 남자한테 팔리듯 시집갈 신세였거든요.”

은하는 ‘설향’에서 만났던 병태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 남자보다는 도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았다.

찬숙은 그날 병태와 자리를 정리하고 돌아와서 한동안 씩씩거렸다. 아마 병태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은 모양이었다.

도훈이라는 강력한 신랑감이 나타날 줄 모르고, 너무 쉽게 진행하려 한 제 탓도 있었으니 찬숙은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오빠에게는 미안해요. 일부로 속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저는…… 정말로 도훈 씨와 결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은하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거뿐이었다.

어쨌든 성우는 자신을 믿고 친구를 소개시켜 줬는데 그 남자를 꼬셔서 결혼하는 여자가 돼버렸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정상적인 결혼도 아니니 더더욱.

성우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은하를 보았다.

은하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돈으로 압박을 받는지도 몰랐고.

상황을 알았다면 아무리 졸라도 소개시켜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괜히 은하의 인생을 망친 건 아닐까 불안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제 그만하지.”

도훈이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냉랭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친했는지 모르겠지만 은하가 성우에게 절절매면서 구구절절 변명을 덧붙이는 게 심하게 거슬렸다.

“결혼할 사람 앞에 두고 다른 사람에게 미안해하는 거, 더는 못 봐주겠으니까.”

도훈이 차갑게 내뱉자 성우가 도훈에게 쏘아붙였다.

“야, 최도훈. 다른 여자 찾아. 은하는 아니야.”

“왜?”

“뭐?”

“네가 뭔데, 내 결혼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거냐고?”

도훈이 정색하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우의 오지랖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배신당한 건가?”

“뭐?”

“아니에요. 그런 거.”

은하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해받는 건 싫었다. ‘배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자신과 성우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아니면, 짝사랑?”

그러자 도훈이 성우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성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최도훈. 말이면 다인 줄 알아?”

기어이 성우의 언성이 높아졌다.

성우에게 은하는 늘 챙겨주고 싶은 제 막냇동생 같은 아이였다. 순수하고 맑고 화사한 미소가 너무 예쁜.

요즘 집안일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햇살 같은 존재였다.

처음 만났을 때 은하가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일까, 성우는 은하를 감히 여자로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 왜 이렇게 발끈하는 건데?”

“이 결혼은…… 말도 안 되니까. 적어도 결혼이라는 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니까! 은하는 특히 내가 아끼는 동생이야. 잘못된 선택을 하는데, 당연히 나라도 말려야지. 안 그래?”

성우가 진지하게 제 생각을 피력했지만 도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보니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파악된 것이다.

바보 같고 모범생인 성우는 제 감정 하나 파악을 못 하고 있었고, 은하는 성우에게 속내를 밝히지 않고 저를 소개받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꽤 골치 아프게 됐다. 하필 오랜 친구인 성우가 좋아하는 여자일 줄이야.

그렇다고 은하를 양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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