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도훈이 돌아가고 이학과 일준도 출근한 뒤 선주는 조심히 별채로 건너갔다.
그곳에는 아직 출근하지 않은 세훈이 먼저 와 있었다.
세훈은 안절부절못하며 왔다 갔다 하는 중이었고, 두 사람 다 낯빛이 파리했다.
그들은 밖에 누가 있나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 조심스레 대화를 나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도훈이가 왜 갑자기 하늘식품 딸과 결혼을 해?”
“저도 지금 그게 의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혹시 그 일…… 눈치챈 건 아니니? 도훈이 녀석이 워낙 여우 같아야 말이지.”
선주는 매번 웃으면서 자신을 긴장하게 만드는 도훈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여우도 그런 여우가 없는 게, 제 속은 한 번도 보이지 않으면서 선주의 속은 잘도 읽어냈다. 그래서 도훈과 있으면 더 긴장되고 불안했다.
이번에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만약 우연이라면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인 거고.
“눈치챘어도 전혀 티를 안 내겠죠. 그리고 바로 저에게 말해서 협박하지 않고 결혼을 감행하는 거 보면…… 말씀하신 대로 또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럼 어떻게 해? 결혼이라도 말려야 하는데, 네 할아버지는 내 얘기는 매번 무시하니.”
선주는 이학을 생각하니 더 열이 받았다. 아무리 첩이라고 해도 이 집에 들어와 살림한 지가 20년인데 시아버지한테 매번 무시를 당하니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뇨. 할아버지 고집에 결혼을 못 하게 할 것도 아니고, 우리가 자꾸 말리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거예요.”
세훈이 제 생각을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세훈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선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쩌려고?”
“우선 두 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예요. 아니면 꿍꿍이가 있는 게 확실한 거니까. 그리고 만약 말도 안 되게…… 진짜로 둘이 좋아해서 결혼하는 거라고 쳐도, 결혼한 뒤에 무슨 수를 써서 여자가 먼저 이혼을 요구하게 만드는 것도 괜찮고요.”
“이혼?”
“네. 일에서는 형님 약점을 잡을 수가 없지만, 사생활은 엮을 것도 많잖아요. 말이 사랑이지, 결혼해서 아버지 같은 모습 반만 봐도 정나미가 떨어지고도 남을 테니까.”
세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선주를 보았다.
선주는 순간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제 아들이지만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치밀할 줄은 몰랐다.
이혼이라니.
하긴 결혼을 안 하는 것보다 이혼당하는 게 도훈에게는 더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것도 사생활로 이혼당하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쉽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번 도훈의 결혼이 오히려 그들에게 아주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일단 할아버지 비위 맞추면서 결혼준비나 잘 해주세요. 나중에 말 나오지 않게. 혹시나 형수님을 만나게 되면 잘 살펴보시고요. 저는 저대로 알아볼 테니까요. 어차피 꿍꿍이가 있는 결혼이면 티가 나게 돼 있으니까.”
“알았어.”
세훈의 비장한 말에 선주도 동의했다.
어차피 이학이 오케이를 한 이상 이 결혼은 무조건 하게 돼 있다. 그렇다면 어떤 꿍꿍이가 있든 간에 결혼해서 끝장을 봐야 했다.
세훈이 그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아 선주는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
<진 스튜디오>
은하는 단정한 고딕체 간판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늦은 저녁이라 영업은 끝난 것 같지만, 다행히 안에서는 아직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퇴근 안 하셨구나. 다행이다.’
이곳은 성우가 운영하는 사진 스튜디오였다.
성우는 사진작가로, 고등학교 때 우연히 만난 자신에게 모델을 부탁하면서 서로 친해진 사이였다.
그 사람이 도훈과 친구라는 사실은 지금도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아저씨, 저 왔어요.”
은하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출입문에 달려 있는 방울 소리가 경쾌해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올라가 버렸다.
스스로도 말해놓고 너무 시끄러웠을까 신경 쓰고 있는데, 성우가 반갑게 은하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아니고 오빠.”
성우는 한 번도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은하의 인사를 유쾌하게 받아쳤다.
“아, 맞다.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셨죠.”
은하가 매번 입에 붙지 않는 단어를 연습하듯 ‘오빠’를 입 안에서 굴리며 컴퓨터 앞에 있는 성우에게 다가갔다. 그는 낮에 찍은 사진 중에 오케이컷을 고르는 중인 듯했다.
“많이 바쁘세요?”
“아니, 우리 은하가 왔으니까 하나도 안 바빠.”
성우는 얼른 하던 작업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하가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그러면서 한 손에 잡고 있는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저 먹을 거 사왔는데, 같이 드실래요?”
“뭐야, 너 아직 밥 안 먹었어?”
“음……. 네.”
성우를 속일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우가 은하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아니에요. 살이 빠지긴요.”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인 듯 은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성우의 눈을 피했다.
요 며칠 병원에서 지내느라 피곤한 데다 잘 챙겨 먹지도 못한 건 사실이었다.
은하는 이제 결혼하면 아빠 옆에 자주 못 오겠지 싶어서 요즘 병원에서 살다시피하고 있었다.
또한 그게 도훈과의 결혼에 과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찬숙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찬숙은 그날, 설향에서 그와 마주친 이후 은하를 쫓아다니면서 도훈과의 관계를 묻고 또 물었다. 설마 말로만 약속한 건 아닌지, 같이 잠도 잔 확실한 사이인지 등등 낯뜨거운 얘기도 서슴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긴, 여은하가 살이 빠졌으면 빠졌다고 솔직하게 말할 사람도 아니긴 하지. 그래, 일단 먹자. 뭔데?”
“떡볶이랑 순대요.”
“넌, 취향 참 한결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으니까 벌써 8년째. 중간에 은하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느라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빼고도, 거의 4년 가까이 알고 지냈으니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많았다.
성우는 은하의 식성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은하는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분식을 아직도 좋아했다. 줄곧 먹었으면 좀 바뀌었을 수도 있는데, 미국 유학 시절 동안에는 먹고 싶어도 못 먹던 음식이라 더 한이 된 것도 있었다.
“취향이 변하면 쓰나요.”
테이블 위에 순대와 떡볶이를 올려놓고 먹으면서 은하가 농담을 한답시고 덧붙였다.
“어쭈, 제법인데?”
성우가 그런 은하를 귀엽게 쳐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가, 벌써 스물 다섯 살인데도 제 눈에는 은하가 마냥 아기 같았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것이 이런 걸까 싶었다.
“아저…… 아니, 오빠는 왜 안 드세요?”
“먹고 있어.”
성우가 눈치껏 하나씩 입에 넣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은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요?”
“이제 말해줄 때가 된 것 같아서.”
“뭘…….”
“최도훈 만난 거 말이야. 너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아직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아…….”
갑자기 튀어나온 도훈의 이름에 은하는 입에 있던 떡볶이를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뛰었다.
“뭐야, 왜 그래? 물도 마시면서 천천히 먹어, 체할라.”
성우가 은하에게 물을 건네자 은하가 얼른 그 물을 받아 마셨다.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당황해서.”
“두 사람, 그날 무슨 일 있었어?”
그러고 보니 도훈을 만난 이후로 제정신이 아니었어서 성우에게 그날 일을 따로 얘기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성우는 지금껏 아무 연락도 없이 물어보지 않은 걸 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결혼을 하기로 했다고 하면, 큰 충격을 받으시겠지?
그래도 얘기를 안 할 순 없었다.
나중에 도훈에게 들으면 더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니까.
은하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응.”
“그게…….”
성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용기를 내어 다시 입을 떼는 은하를 볼 때였다.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튜디오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후 8시가 넘은 시각인데 또 올 사람이 있나 싶어서 입구를 돌아보는 순간, 은하는 그만 모든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도훈이 표정을 굳힌 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최도훈.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냐?”
성우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은하는 조용히 먹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도훈이 들어오기만 했을 뿐인데도 체할 것 같았다.
“설마, 두 사람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거야?”
“아뇨.”
은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올 줄 알았다면 결코 이곳으로 저녁을 먹으러 오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병원에 있다가 도훈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서, 바람을 쐬러 나온 길이기도 했으니까.
그에게 계약결혼을 제의하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고, 그와 보낸 밤은 너무 강렬해서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심지어 ‘설향’에서 자신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던 그의 목소리는 희한하게도 밥을 먹을 때마다 생각났다.
그저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일 텐데도 은하는 그때의 도훈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휘둘려서야, 어떻게 계약결혼을 하겠다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오늘 저녁은 요즘 병원에서 혼자 지내면서 내내 밥도 혼자 먹어서 너무 외로운 걸까 싶어서 일부러 사람을 찾아온 것이었다.
남녀 관계를 떠나, 지금 은하에게는 성우가 가장 친하고 든든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도훈 역시 하필 지금 이곳에 들를 줄이야.
이제는 상견례 때나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딱 마주친 상황에 은하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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