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겁도 없이 결혼-10화 (10/72)

10화.

“경영권이 도훈이에게 갔다가는 우리 다 죽는 거예요. 그 녀석이 우리를 가만두겠냐고요.”

선주는 일준에게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듯 일렀다.

그녀는 도훈이 경영권을 가져간다는 생각만 해도 불안했다.

세훈이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중에 도훈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들을 제 엄마를 죽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텐데, 도훈이 제일그룹을 차지해서 힘을 가지게 되면 절대 가만둘 리 없을 거라는 게 선주의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어? 그리고 도훈이가 그렇게 성정이 못된 녀석은 아니야. 좀 무뚝뚝해서 그렇지.”

일준은 도훈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도훈은 제 아들이지만 어릴 때부터 대하기가 어려웠다. 제 엄마, 혜련을 닮아 도도하고 기품이 흘러서였을까.

혜련이 죽고 나서는 더 했다. 말 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왠지 혜련이 죽은 이유로 저를 원망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더 도훈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부자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점점 더 서먹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준은 도훈의 성정을 좋아했다. 무뚝뚝하긴 했지만, 차분하고 지적인 데다 심성이 고왔다. 어릴 때 제가 본 도훈은 결코 남에게 억하심정을 갖는 녀석은 아니었다.

물론 선주는 엄마 일을 겪으면서 괴물이 되었을 거라고 하지만, 적어도 일준이 아는 도훈은 그랬다.

그리고 아무리 선주라 해도 도훈을 욕하는 건 듣기 싫었다. 이것도 선주 말마따나 못난 아버지 노릇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에요?”

“니 편 내 편이 어디 있어? 다 내 자식들인데.”

어쨌든 일준은 도훈의 편을 들며 선주의 말을 일축했다.

이럴 때마다 선주는 화가 나는 걸 겨우 참았다.

지금껏 도훈이랑 얘기도 몇 마디 안 하고 옆에 둔 적도 없으면서, 이럴 땐 꼭 도훈 편을 드니 그 속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난 이렇게 애들 경쟁시키는 아버지가 이해가 안 가고, 당신이 안달복달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 씻고 나올게.”

일준은 그 말을 남기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선주는 화가 나서 부르르 떨었지만 달리 다른 방도는 없었다.

***

일준이 선주와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는 세훈과 하리까지 모두 식탁에 모여 있었다.

“늦었습니다.”

“잘하는 짓이다.”

이학이 손자들보다 늦게 나온 일준을 혀를 쯧쯧 차며 쳐다보았다.

“밥부터 먹자. 먹고 얘기해.”

하지만 다 차려진 밥상에서 잔소리하며 진을 뺄 수는 없는 법. 이학이 먼저 수저를 들며 말했다.

“네.”

일준이 대표로 대답하고는 다 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이학이 아무 말이 없으니 다른 이들도 말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선주는 식사 시간이 참으로 길고 숨이 막혔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긴장된 채로 밥을 먹자니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겨우 밥을 다 먹고 후식으로 소화에 좋은 매실차를 먹을 때였다. 드디어 이학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도훈이가 결혼을 한다는구나.”

“네?”

이학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도훈에게 집중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에 결혼을 쉬이 하지 못할 거라고 방심하고 있던 선주와 세훈은 순간 당황했다.

특히 도훈이 고집 한번 부리지 않고 이학의 의견에 바로 꼬리를 내린 것에 더 충격을 받았다.

도훈 역시 제일그룹을 가지기 위해 그만큼 안달이라는 뜻이니까.

선주는 다시 불안해졌고, 세훈은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누가 쉽게 뺏길 줄 알고.’

세훈이 속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자신이 일곱 살 때부터 첩의 자식으로 차별을 감내하며 이 집에서 계속 비굴하게 살고 있는 이유는 오직 제일그룹을 차지하고 싶어서였다.

이학은 아닌 척했지만 대놓고 도훈과 저를 차별했고, 심지어 집에 있는 고용인들도 도훈을 항상 먼저 챙겼다.

물론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나 나는 형이기도 했지만, 본처 아들, 장손이라는 것을 무시 못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저를 무시하고 도훈을 챙긴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제일그룹은 꼭 제 손안에 들어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훈은 제일그룹을 갖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돼 있었다.

도훈이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진 선주와 세훈을 돌아보며 여유 있게 말했다.

“네. 다들 제 일처리 능력보다 혼사에 관심이 많은 듯해서요. 저도 돌아보니 너무 일만 한 것 같기도 하고. 세훈이 제수씨와 결혼해서 잘 사는 걸 보니 부럽기도 하니까요.”

도훈의 입에서 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하리는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혼자서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자신이 도훈을 의식하듯, 도훈도 자신을 좋아한 것 같았다. 그러니 부럽다는 말을 하는 거겠지.

‘역시 도훈을 먼저 만났어야 했는데…….’

하리는 자신의 이상형인 도훈이 결혼을 한다니 안타까워서 속으로 중얼거리며 탄식했다.

세훈은 결혼 전에는 잘 해주더니 결혼한 뒤에는 세상 차가운 남자로 변했다. 게다가 경영권 욕심으로 일만 하느라 하리에게는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불만인 하리는 그나마 아주버님으로 인해 대리 설렘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끝나게 된다니 마냥 속상했다.

“당연하지. 집안을 꾸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가정이 안정돼야 바깥일도 잘 할 수 있는 게야.”

이학은 도훈의 결정을 환영하며 말을 보탰다.

사실 후계자 조건에 결혼이 들어간 것은 당연했다. 미혼인 상태로 후계자를 선정했을 때 갖게 되는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구설수도 많을 테고, 결혼도 또 하나의 변수로 작용할 테니까.

하지만 이학은 그 이유 말고도, 도훈에게 결혼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다

결혼 트라우마를 극복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좋은 가정을 꾸리다 보면 가족에게 받은 상처도 언젠가는 잊히지 않을까 생각도 든 것이다.

도훈을 위해서도 나쁜 기억은 그만 털어내는 게 더 좋은 일이었다.

“맞아요, 아버님. 이제라도 도훈이가 정신 차려서 다행이네요. 저는 또 결혼 안 하겠다고 고집을 부릴까봐 어찌나 걱정했던지.”

“그럴 리가요. 저는 이 집안의 장손 아닙니까? 할아버지의 깊은 뜻을 받들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결혼할 생각이었습니다.”

이학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몇 마디 덧붙였을 뿐인데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도훈을 보니 선주는 속이 다 부글부글 끓었다.

장손이라는 말도, 뜻을 받든다는 말도 다 거슬렸다.

하지만 선주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물었다.

“그래, 봐둔 여자는 있고? 내일 당장이라도 마담뚜를 불러들여야 하나?”

생각해 보니 어차피 정략결혼이라면 맞선을 보게 하든, 여자를 만나게 하든 선주가 할 일이 생긴다. 결혼하겠다는 도훈의 생각을 바꿀 순 없겠지만, 상대를 물색하는 과정에 시간을 들여 중간에서 이학의 눈 밖에 나게 만들 순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건 걱정 마세요, 어머니. 결혼할 여자도 있으니까요.”

도훈이 이번에도 선주의 속내를 알아차린 듯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선주는 뜨끔하면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구? 언제 연애를 했어?”

“안 지는 좀 됐는데 최근에 마음에 들어와서요. 얼마 전에 청혼했고, 그쪽에서도 오케이 했습니다.”

도훈은 은하와 말을 맞춘 대로 천천히 상황을 설명했다.

일준과 하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세훈은 콧방귀를 꼈다.

어차피 회사를 갖기 위해 하는 결혼일 텐데, 로맨티스트 흉내를 내는 도훈이 아니꼬웠다.

“형님에게도 그런 로맨틱한 면이 있다는 거 이번에 알았네요. 여자는 아예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 나도 놀라는 중이야. 아마도 임자를 제대로 만난 거겠지.”

세훈의 비꼬는 말투에도 도훈은 여유롭기만 했다. 이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니 다행이지. 최대한 빨리 결혼시킬 생각이다. 그러니 다들 그렇게 알아.”

“아니, 아버님. 뭘 그리 급하게 서두르세요? 어떤 아가씨인지도 모르는데.”

선주가 괜히 신경이 쓰여 말리려 들었으나 이학은 넘어가지 않았다.

“다 정해진 결혼, 뭐 하러 늦춰? 서로 구설수만 오르지.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집도 아니더구나. 기울긴 해도 그 정도면 괜찮아.”

“어딘데요?”

세훈이 물었다. 혹시나 하리보다 좋은 조건일까 조바심이 난 탓이었다.

“하늘식품.”

“네? 어디라고요?”

선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세훈을 보았다. 세훈 역시 크게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고 도훈은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왜 이렇게 놀라? 설마 우리 제일푸드의 동종업계인 하늘식품을 모르진 않겠지?”

“모를 리가요. 그렇게 차이 나는 집안과 결혼시키려는 아버님이 신기해서 그러는 거겠죠. 도훈이 정도면 재벌가는 물론 국회의원, 장관급에서도 결혼시키고 싶어 줄을 서는데…….”

선주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지만 크게 티 날 정도는 아니어서 다들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게요, 할아버지. 얼마 전에 대표가 사고를 당해서 누워 있고, 집안도 망한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로 그 집이랑 결혼시키시게요?”

어느새 마음을 추스른 세훈도 거들었다. 왜 하필 도훈이 좋아한다는 여자가 하늘식품 딸인지, 당황스러웠다.

도훈은 눈에 띄게 동요하는 선주와 세훈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자신의 결혼을 싫어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하늘식품이라는 사돈 집안을 들이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망하고 별 볼 일 없는 처가라 신경 쓸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유독 예민하게 구는 선주와 세훈의 모습은 의외였다.

“알고 있어. 그래도 딸은 잘 키웠더구나. 평판도 나쁘지 않고 공부도 곧잘 했어. 그 정도면 돼.”

“할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너도 네가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하지 않았더냐? 도훈이도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한다는데, 뭐가 문제냐.”

이학이 더는 이 일에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뜻으로 딱 잘라 말했다. 선주와 세훈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도훈이 너는 한시라도 빨리 해치우게 상견례부터 잡아.”

“네. 알겠습니다.”

도훈이 여전히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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