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학은 그 강렬한 눈빛을 볼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지곤 했다. 도훈의 무서운 집념을 깨운 건 자신이었으니 할 말은 없었다.
그 시절, 도훈의 나이 겨우 열두 살.
어미를 잃고 식음을 전폐한 아이에게 이학이 할 수 있는 건, 살아갈 목표를 심어주는 말뿐이었다.
그래서 알려주었다. 죽은 네 엄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다행히 도훈은 정신을 차렸고, 그때부터 무서운 집념을 보이며 성장해 지금은 제일그룹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력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이학이 보기에는 그걸로 부족했다. 요즘은 장손이라고 무조건 경영권을 넘기는 것도 어려운 데다 무턱대고 넘겼다가는 선주와 세훈의 견제가 만만치 않을 테니까.
그래서 정정당당한 경쟁을 시키기로 했다. 가정을 꾸리는 것부터 그룹 내 입지와 성과까지. 다 비교해서 고를 작정이었다.
후계자를 정하는 수순이 불투명한 것이 싫었고, 그로 인해 누구든 안일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도훈은 그런 이학의 속내를 바로 파악했다. 그동안 그룹 내 입지와 성과는 단연 최고였다.
하지만 완벽한 도훈에게는 결혼이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과제에 어떻게 대응할지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바로 결혼한다니 기쁠 수밖에.
“당장 에미에게 일러서 좋은 혼처로 알아보라고 전하마.”
“아뇨, 결혼할 여자도 있습니다.”
“그래?”
이학이 의외라는 듯 도훈을 보았다.
어머니 일과 결혼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그동안 여자도 멀리하고 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여자가 있었다니.
“그래, 어느 집 여식이냐? 내가 아는 집이야?”
“하늘식품 외동딸입니다.”
“하늘식품?”
하늘식품이면 이학도 잘 알고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그만큼 기술력도 탄탄하고 이미지도 좋아서 제일푸드를 키울 때 나름 신경 쓰이던 기업 중에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하늘식품이 잘나갈 때조차 제일그룹에는 명함도 못 내밀었거늘, 망한 하늘식품과 혼사라니.
제일그룹을 갖겠다는 목표를 가진 도훈치고는 너무 부족한 상대였다.
“제일푸드의 동종업계 여식과 연애결혼이라니, 특별한 인연이라 생각할 수야 있겠지만 우리 집안에는 한참 못 미친다. 이래가지고 세훈이와 경쟁이 되겠느냐?”
세훈의 아내 하리는 금융투자사 집안의 딸이었다. 아주 유명한 투자사는 아니어도 돈이 워낙 많아서 세훈의 이번 제일푸드 신제품 개발 투자 자금도 직접 운용했다. 처가가 세훈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셈이었다.
그런데 사세가 기운 하늘식품과의 결혼이라면 집안에서부터 차이가 너무 났다.
앞으로 도훈과 세훈의 성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제가 처가 덕을 봐야만 할 정도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세상일은 혼자서 잘났다고 되는 게 아니다.”
능력이 출중한 데는 도훈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하지만 이학은 도훈이 혼자 힘만으로 제일그룹을 이끌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도훈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핏줄인 자신이 그런데 하물며 주주들은 오죽하랴.
세훈은 도훈보다는 못 미치지만, 가족이 든든히 받쳐주는 데다 최근 들어 성과를 보이고 있으니 여론도 언제 뒤집힐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학의 생각을 읽었는지 도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돈은 아니지만, 기술력으로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뭐라?”
“하늘식품의 기술력을 도움받아서 제일푸드의 성장에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겠죠.”
“허……!”
이학이 눈을 크게 뜨고 도훈을 보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얘기에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면서 도훈의 속내도 바로 파악했다. 그는 하늘식품의 기술력을 제일푸드에 흡수시키겠다는 제법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했다.
하늘식품은 망한 회사긴 하지만 기술력으로는 알아주는 곳이었고, 이대로 사장되기에는 아까운 제품도 많았다.
자본력은 크지만 아직 이렇다 할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한 제일푸드가 그걸 인수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투자든 인수합병이든 명분 없이 진행하면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잡아먹는다 어쩐다 말이 나올 수 있지만, 사돈지간에는 어떤 결정이든 전략적으로 보일 터.
그렇게 생각하니 제법 괜찮은 혼처인 듯하여, 이학은 그런 생각을 한 도훈을 다시 봤다.
이제 보니 도훈은 지금까지 본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자였다.
“그래, 한번 지켜보마. 거듭 말해 두지만 난 성과로만 평가를 할 것이야. 나중에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허락은 하겠지만 결혼 후 하늘식품과 일궈낼 결과는 직접 책임지라는 엄포였다.
도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도훈은 어차피 처가 덕은 볼 생각도 없었다. 투자나 인수합병의 경우도 하늘식품을 살리는 방안을 고민하다 보니 윈윈으로 생각한 것이지, 딱히 전략적으로 접근한 건 아니었다.
굳이 하늘식품을 이용하지 않아도 제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많이 있었고, 세훈의 성과 정도는 가뿐히 이길 수 있으니까.
어쨌든 도훈은 은하와의 결혼을 허락받은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
“에미야, 밥은 다 준비된 게냐?”
삼십여 분의 독대 후 이학이 방을 나오면서 선주를 찾았다.
그때까지 거실에서 입술을 짓씹으며 이학의 방문을 주시하고 있던 선주는 깜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 네. 지금 거의 다 됐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모르고 부엌 상황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선주가 옆에서 하릴없이 앉아 있던 하리에게 얼른 눈짓을 했다. 하리가 상황을 보러 부엌으로 뛰어갔다.
“아직까지 밥도 준비 안 하고 뭐 한 게야? 게다가 도훈이도 왔는데. 쯧쯧.”
이학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선주는 이럴 때마다 꼭 고용인이 된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실제로 이학은 밥타령할 때 빼고는 거의 선주를 부르지 않았다.
후처라고 시아버지까지 무시하는 처사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본처 자리를 빼앗고 집에 들어앉으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지난 20년 동안 행복했던 적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남편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계속해서 바깥으로 돌고, 시아버지라는 자는 끼니때마다 고용인 취급이었다.
게다가 의붓아들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니, 극한 직업도 이것보다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나마 이학이 세훈을 손자 대접을 해주는 데다 후계자 경쟁도 붙여줘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세훈이 제일그룹을 물려받을 수만 있다면 이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모든 보상을 다 받을 거라고 믿으니까.
그러자면 세훈이 무조건 후계자가 되어야 하고, 그녀 역시 어떻게든 이학에게 잘 보여야 했다. 그래서 못마땅해도 이를 악물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밥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어떻게 시간을 딱딱 맞출 수 있겠어요, 아버님. 게다가 중요한 얘기 중이신 것 같기에 조금 천천히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선주가 능글맞게 둘러대는 사이, 하리가 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된 것 같으니 들어가시죠.”
이학은 혀를 쯧쯧 차고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아범이랑 세훈이는 왜 아직 얼굴도 안 보이는 게야?”
“세훈이는 이번에 발표하는 신제품 때문에 어제도 회사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했거든요. 그래도 곧 씻고 내려올 겁니다.”
선주가 도훈을 의식하며 이때다 싶어 세훈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시제품도 벌써부터 시장 반응이 너무 좋다지요? 출시되기만 하면 아주 난리가 날 거예요.”
“누가 보면 네가 사업하는 줄 알겠구나? 어디 한자리 마련해주랴?”
이학의 뼈 있는 말에 선주가 입을 다물었다. 집에 있는 사람은 바깥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학은 선주를 한 번도 따듯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늘 들어와 익숙한 냉대도, 이렇게 도훈 앞에서 들을 때면 더 이가 갈리는 건 사실이었다.
“아범은? 그 녀석은 왜 또 코빼기도 안 비쳐?”
“……그이도 어젯밤에 늦게 들어와서요.”
“하는 것도 없는 놈이 맨날 외박에……. 하여간 잘 하는 짓이다.”
이학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선주를 보는 눈초리가 더 가늘어졌다.
아직도 일준의 마음 하나 못 잡고 뭐 하냐는 일종의 압박이었다. 나중에 들어와 본부인 몰아내고 제일가 안주인 자리를 차지했으면, 자리값을 하라는 뜻도 되었다.
선주가 모욕감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오늘은 도훈이 일로 할 말이 있으니, 당장 데리고 나와.”
“하실 말씀이라뇨?”
선주가 불안감을 느끼며 되물었다. 하지만 이학이 일갈했다.
“데리고 오면 알아. 밥도 얼른 내오고.”
“네.”
이번에도 또 고용인 취급이었지만 선주는 바로 일준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드는 지금으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깨워서 데리고 나가는 것이 뭐라도 도움이 될 터였다.
***
“여보, 빨리 일어나요. 아버님 호출이에요. 도훈이도 왔어요.”
어젯밤에도 술이 떡이 되어 들어온 일준을 깨우는 손이 분주했다.
선주라고 이런 남자가 좋아서 붙어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야 제일그룹 외아들이라고 하니 좋아서 무조건 매달린 게 사실이지만, 이렇게 노는 것에 진심인 남자일 줄이야.
일은 하는 척만 하고 나이 오십 줄에 아직도 밤낮으로 술에 절어 살았다.
게다가 여성편력도 장난이 아니었다. 와이셔츠에 여자 립스틱을 묻혀 오는 것도 수십 번.
그나마 이학이 한 번만 더 밖에서 여자나 배다른 자식을 데리고 왔다가는 가문에서 쫓아내겠다 엄포를 놓았기에, 저 말고 또 다른 여자가 찾아올 일은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도훈이가 왔다고? 아니 왜?”
도훈이 이야기에 일준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되물었다. 아직도 술이 덜 깨 숙취로 푸석푸석한 얼굴이었지만, 정신은 번쩍 든 표정이었다.
선주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나이 오십이 넘어서 이학에게 야단맞는 게 더 싫을 거 같은데, 일준은 항상 도훈을 더 신경 썼다.
늘 바깥으로 돌고 아들이라고 한 번 제대로 보듬어준 적도 없으면서, 꼴에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건가?
“그건 저도 모르죠. 얼른 나가봐요. 난 괜히 아버님이 변덕을 부려서, 갑자기 도훈이에게 제일그룹을 전부 물려준다고 할까봐 심장이 다 벌렁거리니까.”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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