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도훈은 설향에서 거래처 사장들과 만남을 가졌다.
서로 바쁜 사람들이라 짧게 얼굴만 보이고 음식값을 계산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신기하게 멀리서도 중정에 서 있는 은하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 데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도 신기한 일이기에 모른 척 지나가지 않고 정원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듣고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그런 상황이었으면 오늘 아침에만 말했어도 제 손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다른 일 다 제쳐두고 그녀의 집부터 찾았을 테니까.
“저도 오늘 당장 이런 자리를 만드실 줄 몰랐어요. 얘기는 계속 들었지만…….”
그동안 시달렸던 걸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숨이 턱턱 막혔다.
“도훈 씨가 때맞춰 아는 체를 해주셔서 다행이었네요.”
아니었으면 오늘 밤 내내 그 남자의 시중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고마웠다. 고맙다는 말을 할까 말까 입술을 들썩이고 있는데, 도훈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 나왔다.
“그래서 저녁은.”
“네?”
“먹었나?”
은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지금 이 상황에, 그의 입에서 갑자기 밥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이곳에서 약속이 있었다고 했으니 이미 먹었을 텐데…….
물론 은하야 밥은 한 숟갈도 못 먹고 찬숙과 실랑이만 벌였지만.
“……식사 안 하셨어요?”
“내가 먼저 물었어.”
“…….”
비록 두 번의 만남이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만나서 몸만 섞었지 같이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오늘 아침 호텔에서도 밥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거부했으니까.
은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눈을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네. 먹었어요.”
배도 고프고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왠지 방금 전 찬숙과 만난 상황으로 제 치부를 드러낸 것 같아 부끄러웠다.
돈이 필요하다며 결혼을 구걸할 때 이미 밑바닥까지 다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더 부끄러울 게 남았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잘했네. 그럼, 곧 상견례 날짜를 잡아서 연락하지.”
“네.”
그게 끝이었다. 도훈은 돌아서 나갔고, 은하는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을 풀며 제대로 된 숨을 돌렸다.
***
제일일가가 살고 있는 평창동 저택.
도훈은 아침 일찍 이곳을 찾았다.
한때는 도훈도 이곳에서 할아버지인 이학과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바람둥이였던 아버지 일준이 내연녀 선주와 그 사이에 낳은 아들 세훈을 데리고 들어오면서 모든 파국이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하고 우울증을 앓았던 도훈의 친모 혜련은 그들이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 약물중독으로 요절했다. 도훈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앓아누웠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선주가 이 집에 기어이 들어와 눌러앉은 이유가 제일그룹을 갖기 위해서라는 걸.
그리고 제 엄마 혜련 역시 그들이 아닌 도훈이 제일그룹을 갖기를 바랐다는 걸.
그걸 알게 된 후로 도훈은 이를 악물고 살았다. 그들에게 제일그룹을 절대로 뺏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제일그룹을 가져서 엄마에게 떳떳한 아들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은하와 무리한 계약결혼을 선택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이학은 최근 두 손자를 놓고 후계자 경쟁을 시키는 중이었다.
도훈은 뭐든 상관없었다. 무슨 경쟁이든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학은 그중 하나로 결혼을 꼽았다. 가정을 잘 이끄는 사람이 회사 경영도 잘하는 거라나.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데 실패하고, 여전히 여자 치마폭에 놀아나는 일준에 대한 일침 같기도 했다.
이학의 뜻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으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평생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겠다 결심한 도훈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사이 세훈은 보란 듯이 사귀고 있던 여자랑 냉큼 결혼했고, 최근에는 그가 기획했다는 제일푸드 신제품이 정식 출시되기 전부터 반응이 좋아 그룹 내 자신의 입지를 넓히는 중이었다.
이러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그룹을 뺏길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학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회사의 안위가 중요한 사람이라 도훈이 제 기준에 못 미친다 싶으면, 언제라도 세훈을 후계자로 내세울 수 있었다.
그래서 계약결혼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은하를 만난 것이다. 제 발로 찾아와 까다로운 조건을 맞춰주겠다니, 도훈으로서도 잘된 일이었다.
도훈은 며칠 전 ‘설향’ 정원에 서 있던 은하를 떠올렸다. 상황이 힘들어서였을까, 고되고 지쳐 보였다.
그래서 다른 불쾌한 내색을 하지 못하고, 밥은 먹었냐는 소리가 먼저 나갔다.
잠시 흔들리던 눈빛, 살짝 말아 물던 입술. 그때 이미 도훈은 직감했다. 그녀의 대답이 무엇일지.
아니나 다를까, 은하는 금세 표정을 바꾸더니 밥을 먹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괜한 오기로 그래도 같이 먹자고 데리고 나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렇게까지 그녀를 괴롭힐 이유도, 꼭 같이 밥을 먹을 이유도 없었으니까.
‘내가 그 정도로 불편한 건가.’
밥 한 끼도 같이 먹기 싫은데, 결혼이라…….
도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누구랑 결혼하게 되든 별 감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하랑 하면 조금은 재밌어질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힘든 결혼이겠지만.
“도훈이 네가 웬일이냐? 아침에 얼굴을 다 비추고.”
아침부터 나타난 도훈을 보고 선주가 경계하며 말했다. 도훈의 등장에 긴장하면서도 여유 있게 보이려고 노력 중이었다.
“어머, 아주버님. 안녕하세요?”
결혼을 하고 본가에 들어와 사는 세훈의 아내 하리도 도훈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신인 여배우였다던 하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다.
그녀는 남자를 볼 때 외모를 가장 중요시하다 보니, 세훈과 결혼을 추진할 때부터 도훈이 더 눈에 들어왔다.
세훈보다 도훈이 키도 훨씬 크고, 더 잘생기고, 분위기까지 완벽한 건 사실이었으니.
“할아버지께서 부르셔서요.”
도훈의 말에 선주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애써 펴졌다. 아침부터 이학이 불러들였다는 게 영 께름칙했기 때문이었다.
‘둘이 또 무슨 작당을 하려나.’
선주는 이학과 도훈이 단둘이 이야기한다고 하면 걱정부터 들었다. 저희들 몰래 이학과 도훈이 단둘이 결정하는 중대사가 생길까봐.
도훈은 제집인 양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가끔 오는 사람이 아니라 내내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물론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다 나간 집이긴 하지만, 벌써 몇 년째 밖에서 살며 가끔 일 있을 때만 들르는데 이토록 자연스러울 일인가 싶었다.
도훈이 독립해서 나갈 때만 해도 선주는 드디어 안방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를 차지한 것 같아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건 저만의 착각이었던 건지, 도훈이 한 번씩 들를 때마다 자신이 다시 객식구가 되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학이 불렀다는데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 선주가 마지못해 그를 반겼다.
“잘했네. 앞으로 자주 와. 덕분에 우리도 얼굴 보고 좋네.”
선주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자, 도훈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렇게 반겨주실 줄 알았으면 더 자주 올 걸 그랬네요. 저는 어머니가 제 얼굴 보는 거 싫어하실 줄 알았거든요.”
도훈의 도발에 선주가 멈칫했으나 이내 평정심을 찾고 되받아쳤다.
“내가 널 왜 싫어해? 싫어할 이유가 없는데. 안 그래도 회장님 부쩍이나 기운 딸려 하시는데, 너라도 와서 옆에서 아양 떨고 하면 나도 좀 수월하지 않겠니?”
선주도 결코 말로는 지지 않았다. 도훈이 피식 웃었다. 속에서 애간장이 타는 게 다 보이는 데도 아닌 척 표정을 숨기는 게 우스워서였다.
그 와중에도 하리는 치명적인 도훈의 웃는 모습에 혼자서 설레 하는 중이었다.
“왔느냐?”
그때 이학이 서재에서 나오며 도훈을 챙겼다.
“네, 할아버지.”
도훈이 얼른 표정을 정돈하고 깍듯이 인사했다. 두 사람은 서로 판박이라고 할 정도로 똑 닮아 있었다.
선주는 그것도 짜증이 났다. 제 남편 일준은 이학의 아들이긴 했지만, 외탁을 해서 이학과 크게 닮지 않았다.
그런데 손자인 도훈은 이학을 쏙 빼다 박은 외모는 물론 성격도 비슷했다.
이왕 손주가 할아버지를 닮는 김에, 제 아들 세훈도 이학을 닮았으면 오죽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세훈은 외탁한 일준의 판박이었다.
아무래도 사람은 저랑 닮은 쪽에게 더 관심이 가는 법.
이러나저러나 이학의 눈에 도훈보다 세훈이 덜 들까 싶어 선주는 오늘도 전전긍긍이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왜 문간에 섰어? 따라 들어와.”
“네.”
도훈은 떨떠름하게 쳐다보는 선주와 바보같이 웃고만 있는 하리를 일별하고, 이학을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
“그래, 드디어 결혼을 하겠다고?”
이학은 어제 오후 도훈의 전화를 받고, 아침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훈이 전화로 결혼 의사를 밝히자, 이학은 얼굴을 보고 다시 얘기하자며 당장 본가로 불러들였다.
“네.”
이학은 덤덤히 대답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도훈이 가진 결혼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학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정략결혼한 친모가 일찍 생을 마감했으니,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강할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제법 일찍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만큼 제일그룹에 욕심을 낸다는 뜻이니까.
“잘 생각했다. 난 또, 그동안 아무 말이 없기에 이제 너는 제일그룹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지.”
“그럴 리가요.”
도훈이 웃으면서 이학을 바라보았다. 한 번 목표로 삼은 이상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집념의 눈빛이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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