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찬숙이 은하를 데리고 야외로 나섰다. ‘설향’은 가운데 정자와 소나무, 그리고 작은 연못을 두고 동그랗게 룸들이 들어서 있는 구조였다.
화를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며 걷던 찬숙은 정자 근처에서 팽하니 은하를 보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작게 소리쳤다.
“너 미쳤어? 정말 이 결혼 망치려고 환장한 거야?”
당장이라도 은하를 가만두지 않을 듯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은하도 그 정도쯤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저분에게 비위 맞추고 싶은 생각 없어요.”
“뭐?”
“저분과 결혼 안 할 거니까요.”
“이게 진짜 미쳤나!”
찬숙은 황당한 표정으로 은하를 노려보았다.
“효녀인 척 그 생난리를 칠 땐 언제고. 너 진짜 이대로 네 아빠 죽게 만들겠다, 이거야?”
“아빠 병원비, 그리고 어머니 생활비까지 대 드릴게요. 그러니까 제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하게 해주세요.”
“허……!”
찬숙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입만 벙싯거렸다.
그 말이 뭐라고, 은하는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계속 스트레스였는데 방법이 없어서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도훈과의 계약결혼에도 넘어야 할 산이 많겠지만, 적어도 제 의지로 내린 결정인 데다 이제는 찬숙에게 끌려다니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돈 밝히고 이중적인 사람과는 상종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은하의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진 반면, 찬숙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너, 지금 나 새엄마라고 무시하는 거냐?”
“네?”
“내가 친엄마였어 봐, 내가 알아 온 혼처를 이렇게 대놓고 무시했겠냐고!”
친엄마였다면, 이런 자리에 내보내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은하는 그 말은 꾹 참고 넘겼다. 어쨌거나 새엄마도 엄마였고, 아빠의 사랑하는 여자였고, 여기는 공공장소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넌 항상 그랬어. 쪼그만 게 지 아빠 빽만 믿고, 항상 지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찬숙은 처음부터 은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그런지 은하는 매사에 당당했다.
새엄마라고 먼저 기죽고 들어온 적도 없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드는 은하를 하루 빨리 눈앞에서 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머니…….”
은하는 찬숙의 속마음을 듣고 허망해서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저를 미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뼛속 깊이 자신을 싫어하는 줄은 몰랐다.
이제 결혼하고 나면 자주 보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누가 네 몸뚱이만 바라고 돈을 준다고 했나 본데, 그런 거 하나도 쓸데없어. 네가 그렇게 살면 네 아빠 욕먹이는 거지. 더불어 나도 욕먹고. 그래도 괜찮은 사람한테 시집가서 잘 사는 거 보여줘야 나도 새엄마로서 노력했다는 소리 들으니까 내 딴에는 고르고 고른 건데.”
마치 돈 때문에 고른 사람이 아니라는 듯 찬숙은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 사람이 돈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들이밀지도 않았을 것을. 게다가 이렇게 비위를 맞추기나 했을까.
은하는 점점 더 환멸이 차기 시작했지만 이내 마음을 비웠다.
“걱정 마세요. 적어도 저분보다는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이니까요.”
“뭐야?”
“사회적 이미지도 더 좋고, 돈도 더 많고, 더 젊어요. 그럼 어머니 평판이 나빠질 일 없으시겠죠?”
“네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만나서?”
은하가 조목조목 병태와 비교하자, 찬숙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은하를 보았다.
그런 사람이 있는데 왜 여태 말을 안 했냐는 건지, 아니면 네 주제에 어떻게 그런 사람을 만났냐는 의미인지는 헷갈렸지만 어쨌든 찬숙을 당황시킨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어디서 어떻게 만났든 제가 그분과 결혼을 약속했다는 게 중요하죠. 앞으로 어머니 생활비도 보내드릴 거고, 어머니 평판도 나빠질 일 없으시니, 이제 이 결혼 이야기는 그만해주세요. 저도 더는 저분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아요.”
“안 돼.”
“네?”
은하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분명 설명을 다 했는데, 왜 안 된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찬숙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녀를 다시 몰아세웠다.
“네 말을 어떻게 믿어?”
“…….”
“네가 이 자리 피하려고 꾸며내는 말인 줄 어떻게 아냐고? 이 사람 놓치면 이런 조건의 사람 다시 구하기 힘든데, 네 말 하나만 믿고 그런 무리수를 둘 순 없지.”
“어머니……!”
“그러니까 끝까지 시중들어. 그리고 네가 말한 남자는, 다음에 내가 한번 만나보고 나서 다시 얘기해.”
찬숙은 차갑게 내뱉고 은하를 조소했다. 은하가 황당해하며 무슨 말이든 항변하려고 할 때였다.
“굳이 다음으로 넘길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뒤에서 부드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가 바로 저니까요.”
은하는 목소리만 듣고도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가 도훈이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도훈이 어둠을 벗어나며 불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도훈 씨가 왜 여기 있지? 설마 다 들었을까?’
은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찬숙도 놀라긴 마찬가지인지 다가오는 도훈과 은하를 번갈아 쳐다보며 잔뜩 경계했다.
“뭐야, 너 남자를 여기까지 끌어들였어? 내 허락도 없이?”
그러다가 남자의 이목구비와 옷맵시를 확인한 찬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도가 낮은 조명도 남자의 타고난 근사함은 가릴 수 없었는지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낯이 익었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뭔가 오해를 하시는 모양인데,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라서요. 제 개인 약속으로 들렀다가 방금 은하 씨를 보고 인사차 정원으로 들어섰고, 뒷말만 우연히 들었을 뿐입니다.”
도훈이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표정이 없어서 그의 기분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찬숙은 도훈을 어디에서 봤는지 생각 중이었다.
“곧 정식으로 찾아뵈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됐네요. 최도훈입니다.”
“최도훈? 설마 제일그룹?”
“네. 제일그룹 전략기획본부장 최도훈입니다.”
도훈이 제 소개를 마치자 찬숙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얼굴이 익숙하다 했더니 제일그룹의 황태자 최도훈일 줄이야.
최도훈이라면 찬숙도 잘 알고 있었다. 국내 굴지의 기업 제일그룹의 장손인 데다 후계자 서열 1위. 타고난 집안만큼이나 능력도 외모도 뛰어나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줄을 서는 대단한 집안의 여식이 한둘이 아니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런 최도훈이 은하와 연애, 아니 결혼을 한다고?
“그럼, 우리 애가 말한 사람이 본부장님……?”
“네.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을 얘기하시는 거라면, 아마 맞을 겁니다.”
도훈이 찬숙에게 대답하며, 은하의 의견을 구하려는 듯 눈을 맞추자 은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찬숙은 서로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두 사람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 사정을 알고도 우리 애랑 결혼을 하겠다는 말이죠?”
찬숙은 혹시나 하며 한 번 더 도훈의 의중을 확인했다. 문득 은하가 그를 속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게 아니면, 도훈 같은 사람이 이렇게 풍비박산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여겨졌다.
“결혼을 결정한 사이에 집안 사정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은하 씨에게 말해주려고 했는데, 내일부터 아버님은 제일병원 VIP실로 옮겨서 최고의 의료진과 최고의 장비로 치료를 받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어머님께도 생활에 부족하지 않도록 금전적인 지원을 해 드리겠습니다.”
도훈의 말에 찬숙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정말로 다 알고서도 결혼하는 데다 처가 대우도 파격적이었다.
“어떠십니까? 이 정도면 저 안에 있는 분보다 나은 조건입니까?”
도훈이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순간 당황한 찬숙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이 조건을 보는 속물이라는 걸 들킨 것 같아서였다.
“그럼요. 아무래도 제일그룹 후계자와는 비교할 수가 없죠.”
어차피 속물인 것도 들켰으니 찬숙은 솔직하게 말했다.
은하의 말처럼 외모, 재력, 능력까지 어떤 조건을 놓고 봐도 모두 도훈의 압승이었다.
솔직히 은하가 얄미워서라도 좋은 데 시집가서 잘 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으나, 재벌가 사돈 자리는 자신에게도 떨어지는 콩고물이 어마어마할 터라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럼, 한시라도 빨리 안에 계신 분을 정리해주시겠습니까? 제 아내 될 사람이 다른 남자의 시중을 들었다고 생각하면 상당히 불쾌하니까요.”
도훈이 한순간에 표정을 싸늘히 굳히며 찬숙에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찬숙은 아차 싶었다. 당연히 저라도 기분 나쁠 수 있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얼굴 한번 보고 밥 먹는 자리였으니까. 혹시나 맘 상했다면 풀어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거라서……. 어쨌든 이번 만남은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은하 너도 걱정하지 말고.”
찬숙은 갑자기 은하를 챙기는 척하더니 그대로 혼자 룸으로 돌아갔다.
찬숙과 말싸움으로 지친 데다, 또다시 그 남자 수발을 들어야 하는 줄 알고 잔뜩 긴장했던 은하가 그제야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하의 표정이 풀어지는 걸 보고 도훈이 물었다.
“왜 말을 안 했지?”
“…….”
“그랬으면 처음부터 내가 나서서 차단했을 텐데.”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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