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연락은 받아줄 것.’
‘외박할 땐 얘기해줄 것.’
‘한 달에 한 번씩은 장인을 찾아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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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없었다.
결혼을 하는 부부로서 이런 건 당연한 건데.
자신에게 뭔가를 기대하지 말라고 했더니,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 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너무 딱딱하게 굴었던가.’
괜한 심술도 있었지만, 계약결혼에 굳이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고 싶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그래도 그녀가 느끼기에는 이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완전히 파렴치한이라 생각하는 수준이었다.
도훈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집에는 잘 들어갔습니까?”
“네. 댁까지 모셔다드리고 왔습니다.”
도훈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잘못했다간 괜한 가십에 오르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밤새 안은 여자의 뒤치다꺼리를 부탁한다는 게 여간해서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영철은 마지막까지 도훈의 친모를 돌봐주었던 가사도우미 영옥 아주머니의 아들로, 도훈에게는 친형 같은 사람이었다.
어떤 허물을 다 보여줘도 책잡힐 일 없이 넓은 사랑으로 덮어주는 사람. 그래서 이번 일도 영철에게는 부탁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다.
“그런데, 본부장님.”
그런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도훈에게 운을 띄웠다.
“네, 말씀하세요.”
“외람됩니다만, 정말로 그분과 결혼을 할 작정이십니까?”
“제가 한 입 갖고 두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왜, 박 실장님 눈에는 안 차던가요?”
도훈이 영철의 마음을 가늠하며 물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제 상사가 오해할까 싶어 영철이 바로 대답했다.
“저야 본부장님 눈에 드는 분이라면 마냥 좋지만, 본가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도훈은 영철의 기우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후계자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배다른 동생 세훈의 처가 집안과 너무 차이가 난다 생각한 것이다.
“나름 경영학을 전공한 재원에 하늘식품 딸이라는 것도 저는 놀랍던데. 그 정도면 됐지 않겠습니까?”
도훈은 이미 은하에 대해서 조사를 끝낸 상태였다.
비록 지금은 휴학 중이긴 했지만, 경영학을 전공했고 학교 성적도 우수했다.
놀라운 건 그녀의 집안이었다.
‘하늘식품.’
솔직히 어떤 집안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늘식품이라면 오히려 그에게도 유리했다.
최근에 은하의 부친이 사고를 당하고, 공장이 문을 닫기 전까지는 나름 잘나가는 식품업체였다.
중소기업이긴 했지만 뛰어난 기술력과 품질로 일부 품목에서는 ‘제일푸드’보다 더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 점을 잘 활용하면 오히려 도훈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집안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단 하나. 은하의 나이였다.
스물다섯이라니. 헛웃음이 다 나왔더랬다.
그럼 5년 전 자신에게 같이 자자고 덤빈 게 고작 스무 살 때였다. 그때 도훈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얼굴이야 화장을 했으니 몰라봤다 쳐도, 몸매가 그렇게나 성숙한데 스무 살이었다니. 그런 여자를 제 성욕을 못 이기고 물고 빨았다니. 마치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뽀얗고 부드러운 속살이 꽤나 자극적인 건 사실이라 자제가 되질 않았다.
도훈은 얼른 고개를 털어 그녀의 생각을 접었다. 은하만 생각하면 시도 때도 없이 몸이 반응하는 게 문제였다.
어린 여자에게 끌리는 취향이었나.
도훈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영철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는 제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도훈이 자신감 있게 말하자 그제야 영철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럽게 펴졌다.
도훈은 그런 영철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철은 자나 깨나 도훈 걱정밖에 없었다.
영옥 아주머니가 항상 도훈의 어머니를 걱정하고 챙겼듯이 영철은 도훈을 그렇게 챙기고 있었다. 업보든, 대물림이든, 운명이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길이었다.
“참, 여 대표님은 VIP 병실로 옮겨드리고, 앞으로는 제일가 일원으로 관리받을 수 있게 조치 취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영철의 대답을 들으며 도훈은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얼굴에 그늘이 지던 은하를 떠올렸다.
은하는 병원비만 대면 된다고 했지만, 도훈은 제 식대로 은표를 챙기기로 했다.
적어도 이 결혼으로 은표를 케어하는 것만큼은 만족할 수 있도록.
***
저녁 6시, ‘설향’.
은하는 도착하자마자 룸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어서 와라.”
웃으면서 은하를 반기던 찬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팍 구겨졌다. 은하가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지 않고 수수하게 온 것이다.
심지어 옷차림도 목을 다 가리는 데다 전체적으로 루즈하게 떨어지는 펑퍼짐한 블랙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디 장례식장을 가는 것도 아니고.
찬숙의 입에서 쯧,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찬숙은 은하에게 눈을 흘기고는 병태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병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표정을 찡그리고는 은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중이었다.
“너는 참, 미용실에 다녀오랬더니 왜 그냥 왔어?”
“죄송합니다. 저는 이런 자리인 줄 몰랐어요.”
은하는 룸 문이 열리자마자 분위기를 짐작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남자와 만나는 자리일 줄이야.
순간 미용실도 가지 않고 옷도 수수하게 입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 사람에게 잘 보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찬숙은 제 성질대로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가 병태를 보고 겨우 말소리를 낮췄다. 그러고는 얼른 병태를 향해 사과했다.
“얼굴 보러 멀리서 오셨는데 죄송해서 어떡해요, 사장님. 제가 확실하게 주의를 줬어야 했는데. 애가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줄 몰랐네요.”
찬숙은 대놓고 은하를 타박하는 중이었다. 목소리에서부터 미운 티가 팍팍 났다.
“살림살이를 하려고 해도 눈치가 기본인데, 참……. 설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닌지…….”
병태 역시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일부러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원래 어릴 때부터 지 아빠가 오냐오냐 키워서 눈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옆에 사람 숨 막히게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외모가 무기 아니겠습니까? 보세요, 하나도 꾸미지 않아도 이 정도면 어디 데리고 다니기 창피하지 않을 겁니다.”
찬숙은 혹시라도 이 결혼이 파투가 날까 전전긍긍하면서 은하의 외모를 가지고 그에게 어필했다. 병태도 그 점은 동의하는지 마지못해 은하의 얼굴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외모는 병태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냥 수수하게 입혀도 저 정도인데, 제대로 입히면 얼마나 대단한 미모일까 가늠하는 중이었다.
병태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 같자, 찬숙은 이때다 싶어 은하에게 눈치를 줬다.
“뭘 멀뚱멀뚱 섰어? 저쪽 자리로 가서 앉아.”
“네?”
은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찬숙이 가리킨 곳은 병태의 옆자리였다. 은하가 당황하며 쳐다보자 찬숙은 눈으로는 윽박지르며 입으로는 부드럽게 말했다.
“뭐 해? 얼른 가서 앉으라니까?”
“큼큼.”
남자는 찬숙의 기지가 싫지 않다는 듯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찬숙을 보는 눈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은하는 할 수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싫다고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찬숙은 여기에서 한 술 더 떴다.
“사장님 술이 없으시네. 술부터 일단 한 잔 따라드려.”
“어머니…….”
“어서!”
이번에도 찬숙은 눈을 부라렸다.
“아휴, 놔두십시오. 요즘 젊은 여자들, 누구 술 따르고 이런 거 싫어하더라고요.”
또다시 불쾌해진 남자가 직접 술병을 잡고 술잔에 따르려고 할 때였다.
“그래도 그게 아니죠. 이제 신랑될 사람인데 이 정도도 못 해서야 되겠습니까.”
찬숙이 나서서 그의 손에 있던 술병을 뺏어오더니 은하의 손에 쥐여 줬다.
“지난번에 내가 말했지? 황 사장님. 땅도 많고 건물도 많아서 지방에서는 알아주는 부호시다. 우리 집안 망한 거 아시고, 많이 도와주시는 분이야.”
‘그러니까 얼른 술 따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은하는 술병을 손에 든 채 잠시 파르르 떨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남자의 비위를 맞추라는 찬숙이 황당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찬숙을 망신시킬 수는 없으니까.
은하가 천천히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남자가 술잔을 들어 은하와 보조를 맞췄다.
쪼르르. 술이 경쾌하게 술잔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 참, 술 한 잔 받아먹기 어렵습니다.”
“너무 가벼운 여자보다야, 이런 도도한 맛도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렇긴 하죠.”
병태는 술병을 내려놓고 눈을 내리깐 은하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은하가 나직이 찬숙을 불렀다.
“어머니.”
“왜?”
찬숙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병태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중에 해.”
“아뇨. 지금 꼭 드려야 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도훈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이 공간에서 빨리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은하의 강경한 태도에 찬숙의 얼굴은 또다시 구겨졌다.
“이따가 하래도?”
“제 결혼과 관련된 얘기예요.”
은하가 기어이 ‘결혼’이라는 말을 내뱉자, 찬숙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병태는 다시 불쾌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이거 참……. 따님께서는 확실히 제가 마음에 안 드나 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희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인데. 오늘 얘가 뭘 잘못 먹었나봅니다. 노여움 푸시고 잠시만 계시면, 제가 잘 타일러서 데리고 들어오겠습니다.”
찬숙은 병태에게 웃으면서 양해를 구한 뒤, 은하에게는 무섭게 뇌까렸다.
“따라 나와.”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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