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도훈이 떠나고 은하는 다시 샤워를 했다. 찰나였지만, 그의 입술이 머물렀던 자리가 여전히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쓰읍.”
아프기는 또 엄청 아프고.
먹잇감을 해치우듯 제 가슴을 탐닉하던 그를 떠올리자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미쳤어.”
은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내고는 얼른 샤워를 마쳤다.
그런데 막상 옷을 입으려니 지금껏 깨닫지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입고 온 원피스는 목과 가슴 쪽이 드러나는 옷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키스마크가 선명하니, 이대로 호텔 밖을 나갔다는 남자와 밤을 보낸 여자라고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한숨이 짧게 새어 나왔다.
도훈에게 접근하고 계약결혼까지 얻어낸 건 좋았는데, 이 꼴로 호텔 방에 남아 있는 제 꼴이 우스웠다.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살겠다고 해놓고서 자꾸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쳤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나가야 할 테니까.
“그래,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
은하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일단 옷을 갈아입었다. 역시나 목덜미와 가슴께로 이어지는 붉은 키스마크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녀가 시선을 돌려 도훈이 두고 간 서류 봉투를 보았다. 안에 뒤져보니 정말로 명함이 있었다.
<제일그룹 전략기획본부 박영철 비서실장>
은하는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정확하게 두 번의 신호음이 가고 연륜이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최도훈 본부장님을 모시고 있는 박영철 실장입니다.
남자는 전화를 받자마자 깍듯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은하도 이름 정도는 밝혀야 할 것 같아서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여은하라고 합니다.”
-서류 다 작성하셨으면 지하로 내려오시겠습니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제 할 말만 하고 무심하게 가더니 차를 대기시켜놓은 것인가.
은하는 잠시 차갑던 도훈의 뒷모습을 생각하다가 이내 감상을 털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아직 서류 작성하기 전이에요. 그 전에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도훈 씨보다는…… 실장님이 나을 것 같아서요.”
사실 도훈의 연락처를 모른다. 그 사실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말을 돌렸다.
그리고 만약 도훈의 연락처를 안다고 하더라도 도훈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스카프 하나만 구해다 주세요. 조금 큰 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더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아뇨. 그거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은하는 전화를 끊고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민망하긴 했지만, 지금은 도움을 청할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었다. 이 꼴로 여기를 나갈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영철에게 스카프를 부탁한 뒤, 은하는 생각해둔 계약 조건을 써내려 갔다.
그녀의 조건이라 해봤자, 가장 먼저 쓸 건 당연히 돈이었다.
‘10억.’
정말 그 돈을 적을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은하는 자신에게 현재 필요한 돈을 가늠해보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아버지 병원비와 집 생활비였다.
찬숙의 생활비까지 주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지 않으면 이 결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도 분명 고려해야 했다.
그리고 하늘식품 직원들에게 줘야 할 밀린 월급.
은표는 최근 신제품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모든 과정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지금까지 쏟아부은 기술 개발비는 그대로 빚더미로 남고 말았다.
공장과 부지를 팔아서 어느 정도 빚을 감당했지만, 직원들의 월급은 아직 주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 더 줄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은하는 용기 내어 필요한 돈의 액수를 적었다. 그러고는 펜을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돈 말고 더 요구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어떤 내용까지 써야 할지 가늠이 잘 안 됐다.
도훈은 간단하게 쓰긴 했지만, 자신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이 계약서에 쓴 조항 외에는 고려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것도 계약서니까…… 세세한 게 좋겠지?’
결국 은하는 몇 가지 조항을 더 쓴 뒤에 펜을 내려놓았다.
30분쯤 지났을까. 영철이 스카프를 가지고 찾아왔다.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영철은 은하를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깍듯했다.
여자 몸에 키스마크를 새기고, 그 뒤치다꺼리를 부탁할 만큼 철없는 재벌 3세 도련님이 못마땅할 법도 한데 전혀 동요하는 것도 없었다.
“저는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혹시라도 불편하실까 봐서요.”
그는 역시 노련한 비서였다. 은하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짚어냈다. 호텔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다 보니 그가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해서 지하로 내려가겠습니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건네는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
베이지 원피스에 체크 스카프는 꽤 잘 어울렸다. 은하는 스카프를 두르면서 영철의 안목에 감탄했다.
‘내 옷차림도 몰랐을 텐데…….’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꼭 어울리는 스카프를 구해온 걸까. 역시 비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은하가 지하로 내려오자, 영철은 기다렸다는 듯 세단의 문을 열었다.
“타시죠. 본부장님께서 모셔다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서류는 제가 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네.”
예상대로 도훈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지시했다.
이런 걸 챙기는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딴에는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은하는 그에게 서류 봉투를 넘기고 차에 올라탔다.
매끈하게 잘 빠진 세단이 막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였다.
전화가 걸려왔다. 새엄마 찬숙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재중 통화가 몇 통 와 있었지만 도훈에게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느라 다시 걸 생각조차 못 했다.
어젯밤 말도 안 하고 외박을 했으니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애정이 있어서 난리를 부리는 게 아니고, 결혼을 앞두고 몸가짐을 조심시킨다는 이유였다.
좋은 소리 못 들을 게 뻔한데, 통화를 하기엔 운전하고 있는 영철이 신경 쓰였다. 그는 분명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도훈에게 보고할 테니까.
하지만 전화는 끈질기게 울렸다. 안 받는 게 더 민폐일 것 같아서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찬숙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너 지금 어디야? 연락도 없이 외박에, 하루 종일 전화도 안 되고!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 집에 가고 있어요. 가서 말씀드릴게요.”
은하는 영철을 신경 쓰며 작게 말했다. 하지만 찬숙은 듣기 싫다는 듯 제 할 말만 했다.
-됐고. 지금 전화해 둘 테니까 미용실에 가서 머리랑 화장하고, 저녁 6시까지 ‘설향’으로 와.
‘설향’은 고급 한정식집으로, 허영심 있는 찬숙이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곳이었다. 은하가 좋지 않은 예감에 되물었다.
“거긴 왜요?”
-오라면 올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늦지 말고 와.
“저기 어머니…….”
다급하게 찬숙을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른 말을 더 할 수도 없었다.
***
호텔에서 나온 도훈은 곧장 회사로 와서 밀린 업무를 봤다. 어제 저녁과 오늘 오전을 호텔에서 시간을 낭비했으니 일이 제법 많았다.
다행히 일정이 맞아 오찬 회의에도 참석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오전 회의처럼 취소를 시키거나 대타를 들여보냈을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그녀를 호텔에 혼자 두고 나오고 싶진 않았으니까.
서둘러 업무를 처리하면서, 자신이 생각해도 이게 무슨 심보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보란 듯이 자신은 그녀와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저 그녀에게 환심을 사고 싶은 것인지. 그조차도 헷갈렸다.
그렇게 급한 업무를 끝낸 오후, 본부장실로 돌아오니 때마침 영철이 와 있었다.
은하를 집에 데려다주고 곧장 도훈에게 온 영철은 은하가 작성한 서류와 함께, 상황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본부장님이 지시하신 대로 체크 스카프로 사다 드렸습니다. 잘 어울리시더라고요.”
도훈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베이지 원피스에는 체크 스카프지.
오늘 오전 영철에게 전화를 받은 건, 도훈이 막 회사에 돌아왔을 때였다.
은하가 스카프를 요구한다고 했다. 그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목이며 가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는데, 너무 무책임했나 싶기도 했다.
‘자존심도 상했겠군.’
아니라고 하지만, 자존심이 상할 때마다 표정을 못 숨기는 걸 보니 자존심도 세고, 고집도 센 여자일 터였다.
그런 그녀가 비록 돈 때문이긴 하지만, 자신의 아래에서 울부짖는 건 좀 짜릿한 느낌도 있었다.
“룸에서는 한 시간 정도 머무셨고, 스카프를 사다 드린 후에는 10여 분 정도 더 있다가 나오셨습니다.”
도훈은 영철의 보고를 흘려들으며, 은하가 썼다는 요구사항을 봉투에서 꺼냈다.
그녀가 뭘 요구할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돈. 돈 때문에 결혼한다고 대놓고 얘기한 사람이니까.
다만, 얼마를 요구했을지가 궁금했다.
그녀의 배포와 욕심을 보고 싶달까?
하지만 서류를 확인하자마자 도훈은 픽,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분명 10억 이상이어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그녀는 딱 10억만 적었다. 돈 욕심이 많은 것처럼 굴더니 역시나 속을 모르겠는 여자다.
대신 아버지의 치료비가 많이 들 경우를 대비한 건지, ‘치료비는 별도’라고 적혀 있었다. 꽤 현실적이고 똑똑한 처사로 느껴졌다.
그렇게 아래로 시선을 옮기던 도훈은 다음 조항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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