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도훈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은하는 양심에 걸려서 그런지 마냥 웃고 넘길 수가 없었다.
“내가 또 그런 파렴치한은 아니니까.”
“…….”
은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그때 일 때문에 마음 상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 자신도 느낀 감정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과라도 해야 하나, 그러면 마음이 좀 풀릴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고 있는데, 어느새 가까이 온 도훈이 은하의 눈을 빤히 보며 말했다.
“지난 5년 동안 말이야.”
“네……?”
안 그래도 바로 앞에 서 있어서 긴장되는데, ‘5년’이라는 말에 더 긴장하며 은하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어제 대낮부터 그녀를 룸으로 데리고 올 때에도, 5년 동안 은하가 침대에서 어떻게 변했을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했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자꾸만 벌어지는 가운을 여미며 은하가 눈동자를 굴렸다.
“다른 남자를 안 만난 모양이더군.”
도훈의 말에 은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바로 티가 날 줄 몰랐는데…….
그런데 도훈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5년 전에도 내가 첫 경험이었던 걸로 아는데.”
“…….”
은하는 당황하여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남자,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가 제 성생활을 모두 알아차렸다는 것도 민망했고, 제가 미숙하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것 같아서 그 점도 신경이 쓰였다.
경험 많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있다고 하던데, 도훈도 그런 부류였나.
은하가 난처하고 민망해서 입술을 짓씹으며 물었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아니. 문제 될 건 없지.”
도훈이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사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말이었다. 몸짓은 타고난 요부가 틀림없는데, 들어갈 때마다 너무 힘겨워서.
흥분하는 몸짓도, 신음 소리도 떨림이 강하게 느껴졌다. 경험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문란한 여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여서 놀랐다.
5년 전에도 사라진 자리에 핏자국만 남겨 사람을 놀래키더니.
그래서 그렇게 소유욕이 발동했는지도 모르겠다. 밤새 그녀를 안고 또 안아도 더 안고 싶었다.
소유욕으로 머리가 물들자 은하의 목덜미에 있는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새겨 놓은 자국이었다.
도훈이 은하의 가운을 열어젖혔다. 허리에 묶은 끈마저 풀어져 은하는 순식간에 알몸이 드러났다.
“지금 뭐 하시는…….”
은하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도훈이 가운을 열어젖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심하네.”
“…….”
은하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활활 타든지 말든지, 도훈은 제가 만들어놓은 붉은 자국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가장 심한, 가슴 쪽을 뚫어져라.
“괜찮아요.”
은하가 정색하며 가운을 다시 잡아 여미려고 할 때였다. 도훈이 가운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정말 괜찮아?”
“네.”
은하가 얼른 대답했다. 빨리 수습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다음 도훈의 말이 가관이었다.
“괜찮다니 더 하고 싶네.”
“미쳤……. 흣.”
도훈은 어느새 은하를 벽으로 밀치고 그녀의 한쪽 가슴에 입을 갖다 댔다. 한 손은 다른 쪽을 살살 주무르면서.
가운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은하는 알몸으로 슈트를 입은 그와 마주해야 했다.
“이러지……. 말아요. 제발……. 읏.”
“하아.”
미약하나마 제 가슴께에서 콩콩대는 주먹을 느끼자, 도훈은 그제야 은하를 놔주었다.
이렇게 정신을 잃으려 한 건 아니었는데.
제가 만들어놓은 빨간 가슴이 너무 예뻐 보였더랬다. 그래서 한 번만 입에 넣어본다는 게, 순간 이성을 잃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그동안 너무 굶주렸나. 아니면 이 여자가 정말로 요부인가.
5년 전에도 잠자는 그의 욕망을 깨워 활활 태우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잠깐만 방심했다간 영혼까지 통째로 바칠 지경이었다.
천하의 최도훈이, 여자의 몸을 탐하고 싶어 안달 내다니.
도훈은 자신의 한심함에 피식 웃으면서 떨어진 가운을 끌어 올려 은하에게 입혀주었다.
“아쉽네. 바로 나가봐야 해서.”
“…….”
은하는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고는, 얼른 가운을 여몄다. 그것도 아주 꽉.
마치 가운이 느슨해서 풀렸던 것처럼.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하고 표정은 굳어 있다.
자존심이 상한 건가. 갑자기 물고 빨아서?
표정을 잘 숨기는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에는 어김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게 꽤 귀여웠다.
“앞으로는 자주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네?”
“당신 가슴이 너무 예뻐서.”
도훈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잡으며 말했다. 은하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으니까,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아, 표정을 못 숨겼구나.
은하는 그제야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렇게 예고도 없이 들이대니 화가 나야 하는데, 흥분이 먼저였던 것도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알몸인데 그는 완벽한 슈트 차림인 것도 짜증 나고, 자존심은 또 얼마나 상하는지.
그래도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는데, 잘 안 된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는 언제 은하를 탐했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은하는 심장이 벌렁대서 미칠 것 같은데.
하지만 이래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걸 은하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자존심을 세워봤자 소용도 없고, 말도 안 된다는 걸.
“아침은? 아니 점심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 없어요.”
안 그래도 아침을 잘 안 먹지만, 방금 전의 행위에 입맛이 싹 달아났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도훈의 말에 은하가 그를 쳐다보았다.
“저기.”
도훈이 느슨해진 넥타이를 똑바로 고쳐매며 테이블 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 A4 용지가 놓여 있었다.
“내 요구사항이야.”
“아…….”
“뒷말이 나오지 않으려면 서류화하는 게 피차 편할 테니까.”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이게 좋았다. 나중에 말 바뀌고 서로의 기억이 다를 경우를 대비해서.
“결혼생활은 3년. 그동안 제일가의 며느리이자 최도훈의 아내 역할에 충실할 것.”
은하가 서류에 눈길을 주는 동안, 도훈은 제가 원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가 강조하는 아내 역할에 임신도 포함되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하는 결혼인 만큼, 어설픈 쇼윈도는 안 돼. 집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씀드릴 거고. 부부관계든 가족모임이든 하나도 허투루 생각해서는 안 될 거야. 우리 가족은 눈치가 빠르거든.”
“네.”
“쉽진 않을 거야. 뭐든 꼬투리라도 잡으려고 갖은 수를 쓰기도 하니까.”
은하는 도훈의 말속에서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사실 제일그룹의 가정사는 세상에 제법 공개돼 있어 은하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도훈은 집안의 장손으로서 후계 서열 1위지만, 친어머니는 돌아가신 뒤 바람둥이 아버지가 계모와 이복동생을 데리고 오는 바람에 후계자 자리가 위태위태하다는 풍문이었다.
“내게 뭔가를 기대할 생각도 하지 마. 바빠서 여력도 없겠지만, 그런 걸 챙길 것 같았으면 계약결혼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번에도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갑고 냉정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엄연한 계약결혼인데, 아무리 힘들어도 그에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 그럴게요.”
“이제 당신이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적어.”
도훈은 제 서류 옆에 마련된 또 하나의 A4용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용지는 백지였다.
원하는 걸 적으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옆에 만년필이 같이 놓여 있었다.
“계약서 이외의 사항은 고려하지 않을 거니까 당신이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걸 다 적는 게 유리할 거야. 돈이 필요하면 구체적인 액수까지 적도록.”
“……얼마까지 되나요?”
은하는 염치 불고하고 물었다. 돈을 바라고 하는 결혼이니 당연히 돈의 액수가 중요했다. 게다가 그 정도로 힘든 결혼생활이라면, 돈이라도 많이 받고 싶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금액까지.”
“……10억도 되나요?”
은하가 잠시 고민하다 다시 물었다. 이왕 돈 보고 결혼하는 거 그 정도는 불러보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그만큼의 돈을 자기에게 줄지, 이상하게 그의 마음이 궁금하기도 했고.
“물론.”
자신은 어렵게 물었는데 대답이 너무 쉬웠다.
“더 원해도 가능해. 내 아이를 낳아주는 조건인데, 그 정도면 적은 돈 아닌가?”
‘원한다면 더 줄 수도 있다’는 그의 말에 한 번, ‘내 아이’라는 말에 두 번. 은하의 가슴이 속절없이 뛰었다.
왠지 그 돈의 가치만큼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 것 같아서 이상한 희열까지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다 적고 나서는 봉투에 있는 명함으로 전화해. 나머지는 알아서 정리할 거니까.”
“네.”
은하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도훈이 만족스럽게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럼, 연락하지.”
할 말만 하고 룸을 빠져나가는 도훈의 발걸음에는 어떤 미련도 없었다.
그제야 은하는 자신이 지금 겨우 두 번 본 남자와 계약결혼을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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