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렇게 괴로워하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은하는 우연히 친한 지인 성우가 통화하는 것을 듣고, 도훈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도훈아, 그래도 명색이 재벌가 결혼인데 몇 년만 살다 깔끔하게 이혼해줄 여자가 어디 있어?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네 입맛에 맞는 여자 구하기 쉽지 않을걸.’
몇 년 살다 이혼하면 많은 돈을 준다고?
그 내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럼 적어도 평생 40대 아저씨 수발이나 드는 인생은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거니까.
게다가 도훈은 40대 아저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외모와 배경을 가진 남자였으니,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라면 이쪽이 훨씬 좋은 조건이었다.
그와 다시 만나야 한다는 부담감만 빼면 은하에게는 기회 같기도 했다.
그의 입맛에 맞는 여자가 되어 주고, 자신은 아빠 병원비를 구하고.
그래서 성우를 졸랐다. 예전부터 도훈의 팬이었으니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성우는 은하의 시커먼 속내는 알지도 못한 채 자리를 주선했고, 결국 오늘 그를 만나 모든 조건을 맞춰 주겠다 협상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조건 중에 아이가 있을 줄이야.
“그럼 아이의 양육권은…….”
“당연히, 내가 가져.”
“…….”
“대신 그 아이는 내가 책임지고 부족함 없는 제일그룹의 후계자로 키우지.”
아이를 낳는 것보다 양육권을 빼앗기는 게 더 슬펐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정말 수도 없이 많이 생각하고 이 자리에 나온 거니까.
그나마 그 아이가 제일그룹을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할게요.”
은하가 결심을 굳히고 대답했다. 이렇게라도 그와 결혼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만약 임신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막상 임신과 결혼을 결정하니 그 문제가 걱정이 됐다. 요즘은 건강한 부부 사이에도 아이가 안 생기는 경우가 많다는데.
“그러니까 노력해야겠지? 밤이든 낮이든.”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그와 함께했던 밤이 떠올라 심장이 쿵쿵댔다.
“그래도 안 생길 땐, 누구 쪽 잘못이냐를 따져 보고 서로 합의하도록 하지.”
그 정도면 은하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무조건 배상하라는 것도 아니니.
“알겠어요. 노력하겠습니다.”
은하가 대답했다. 얘기가 끝났으니 얼른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었다. 임신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볼이 화끈거리는 느낌이라서.
“그럼 오늘부터 해야겠네.”
“네? 뭘요?”
“노력.”
“…….”
이렇게 갑자기?
결국 은하는 볼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럼 올라갈까?”
“지금, 당장이요?”
은하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도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확률은 많이 할수록 높아지는 거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임신이 조건인 결혼이니, 확률이 높을수록 은하에게도 좋았다.
“그리고.”
도훈이 은하를 빤히 보며 말을 덧붙였다.
“난 결혼 전에 내 여자와 섹스 정도는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결혼생활에 그것도 중요하니까.”
속궁합이 중요하다는 얘기는 은하도 알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미 5년 전에 몸을 섞어본 사이였다.
은하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데 그가 친절히 다시 입을 열었다.
“5년이면 침대 위에서 서로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니까. 확인하는 차원에서.”
“아.”
은하의 얼굴이 또 한번 화르륵 불타올랐다. 하지만 거절할 명분 따위는 없었다.
은하는 무섭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던 걸까, 도훈의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비서에게 전화해서 일정을 조정한 도훈은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났다.
그와 함께 호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도 은하는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남자와 단둘이 룸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긴장한 티를 냈다가는 이 기회도 날릴 것 같아 마음을 다잡았다.
“같이 씻지.”
“네?”
스위트룸에 들어서자마자 도훈이 윗옷을 벗으며 이야기했다.
은하가 표정을 무너뜨렸다. 아무리 모든 조건을 다 수용하고 임신을 전제로 결혼을 하는 거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같이 씻자는 말은 아니지 않나?
얕잡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여자로서 수치스러웠다.
“당신은 여기 공용욕실에서, 난 룸 안쪽 욕실에서. 시간을 절약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은하는 그제야 자신이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한 공간에서 같이 씻는 것도 거부감이 없었으면 하는데. 원래 부부는 그런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도훈의 말이 맞았다.
계약결혼이긴 하지만, 어쨌든 부부였다. 부부끼리는 그 정도 노출과 스킨십은 자연스러울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민망한 감정이었다. 그에게 결혼을 구걸하면서 제 자존심을 세우려 하다니.
“그럼 씻고 나올게요.”
은하는 괜히 홧홧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욕실로 도망쳤다.
샤워를 한 뒤 가운만 입고 밖으로 나왔다.
곧 다시 벗을 걸, 굳이 옷을 입어서 부끄러워하는 자신의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사이에 도훈도 씻고 나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역시 샤워가운만 입은 채였다.
가운 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가슴근육과 덜 말라서 촉촉한 머리카락이 꽤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 깨끗한 이미지까지 추가가 되니 신비롭기까지 했다.
은하가 속으로 감탄하는 동안 도훈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럼 들어갈까?”
“네…….”
도훈이 먼저 침실문을 열고 들어가고, 은하가 뒤따랐다.
도훈은 은하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도훈 씨, 제발…….”
은하가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침대도 거부한 채, 문에 기대선 채 그녀를 희롱하는 도훈은 끝내 무릎을 꿇고 은하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온몸에 전기가 오른 것처럼 부르르 떨린 것은 바로 다음이었다. 부드러운 혀가 여린 살을 핥아댈 때마다 몸뚱이가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그만……. 못, 견디겠어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처음에는 호기롭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도훈은 제 말에 책임이라도 지려는 듯 밤새 지치지도 않고 은하를 안았다.
문에 기대선 상태에서, 침대에서, 그리고 거실로 나와 소파와 욕실에서까지…….
그녀를 쫓아다니며 한시라도 가만두지 않았다.
5년 전에는 부드럽게 그녀의 문을 두드렸다면, 이 밤은 야수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
눈을 뜨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새벽에 해 뜨는 걸 보고 정신을 잃듯 잠이 들었으니 그마저도 오래 잔 건 아니었다.
정신이 들자 옆자리부터 살폈다.
도훈은 벌써 일어나 나갔는지, 옆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몸만 탐하고 버려진 기분이었다.
물론 도훈은 조만간 다시 연락해 올 테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녀는 정말로 떠났으니 기분이 더 상했으리라.
그제야 도훈이 자신을 다시 만났을 때 왜 그렇게 날을 세웠는지 이해가 됐다.
“그래도 낯부끄러운 모습은 안 보여도 돼서 다행이네.”
은하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젯밤 그렇게 서로 살을 맞대고, 아침에 아무 일 없이 마주 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어젯밤만 생각하면 은하는 가만히 있어도 얼굴이 불타올랐다. 그저 속궁합만 맞춰보겠다던 도훈은 굶주린 짐승처럼 그녀의 몸을 수도 없이 파고들었다.
정말 임신에 목숨을 건 건가 싶을 정도로.
“아.”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5년 전 도훈을 처음 받아들인 이후, 그동안 누구에게도 침범당한 적 없는 여린 살이었다. 그런데 밤새 시달렸으니, 허벅지가 당기고 허리가 아픈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잡은 호텔방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수도 없으니 일어나야 했다.
“이게 뭐람…….”
욕실의 거울 앞에 선 은하는 제 몸을 뒤덮고 있는 빨간 자국을 보고 기함을 했다.
목덜미는 약과였다. 가슴은 제 색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죄다 빨간 데다 정점은 퉁퉁 부어 있었다.
어쩐지 닿을 때마다 아프더라.
“당분간 조심해야겠네.”
은하는 한숨을 쉬며 샤워를 했다.
***
샤워를 하고 나니 아무래도 기분은 좋아졌다. 아직 몸이 여기저기 쑤시긴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고, 몸에 있는 빨간 자국들이야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분간 옷으로 잘 커버하는 수밖에.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가운만 입은 채로 거실로 나왔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행동한 것이다.
그런데 몇 발자국 떼지 못한 은하가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도훈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서 태블릿PC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어젯밤 같이 뒹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한 슈트로 갈아입은 그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얼굴이 너무 잘나니, 스위트룸의 화려함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구나.
그렇게 감탄하며 그를 보고 있을 때, 도훈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은하를 보았다.
은하는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리고 물었다.
“아직 안 가셨네요.”
당연히 간 줄 알았다. 그가 먼저 떠난 게 기분이 별로긴 했지만 서운하진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도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도훈이 보고 있던 태블릿 PC를 덮어 놓고 은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게 기분 엿 같다는 걸 몸소 배운 적이 있어서.”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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