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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2화 (2/72)

2화.

은하도 알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이 남자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미국의 라스베이거스.

그래, 그곳이 은하가 그와 하룻밤을 보낸 곳이었다.

당시 은하는 새엄마의 동생이자, 자신에게는 외삼촌인 찬우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찬우는 도박 빚 대신 은하를 하룻밤 상대로 누군가의 방에 들여보낼 생각이었고, 그걸 거부하다 카지노에서 싸움에 휘말린 것을 도훈이 구해준 게 인연이었다.

따귀를 맞아 얼굴이 부풀고, 넘어져서 무릎이 깨졌어도 찬우가 자신을 그렇게 취급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더 아팠던 그날.

은하는 자신을 구해주고, 제가 묵고 있는 호텔로 데려간 도훈에게 같이 자고 싶다는 객기를 부렸다.

공부만 하느라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 본 은하는 그때까지 남자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남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달려들지 못해 안달이었다.

어차피 도훈이 아니었다면 늙은 도박꾼의 하룻밤 상대로 전락했을 몸, 차라리 첫 경험은 도훈처럼 멋진 남자와 하고 싶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어쩐지 기품이 흐르고,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찢어진 옷 사이로 몸매가 드러난 자신을 보면서도 속살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남자.

이 남자라면 어쩐지 제 처음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를 흔들었고, 결국 그의 품에 안겼다.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낯 뜨겁고 강렬한 정사였다. 서툴렀지만 짜릿했고, 아팠지만 황홀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정신을 차렸을 땐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를 유혹한 것도, 밤새 그의 아래서 본능에 허우적댄 것도…….

그래서 도망쳤다. 어차피 하룻밤 인연으로 끝날 사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다시 볼 줄 알았다면, 그렇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도망치진 않았을지도.

‘후우.’

은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 다시 표정을 바꿨다.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기억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 신음 소리를 예쁘게 흘리는 여자는 처음이었어서.”

은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웬만해서는 흥분하지 않겠다 다짐했는데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쉽게 무너지는 게 한심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을 짓씹고 있는데, 도훈이 말을 이었다.

“물론 다음 날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진 여자도 처음이었고.”

“……어차피 하룻밤 인연이었잖아요.”

자신을 비난하는 말투에 은하가 작게 항변했다.

다음 날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건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오히려 그가 일어날 때까지 남아 있었으면 은하가 더 상처받지 않았을까.

후에 우연히 보게 된 경제잡지에서 그가 제일그룹 후계자라는 걸 알았을 땐 그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귀티가 흐른다 생각은 했지만, 그런 대단한 배경을 가진 남자일 줄이야. 그와 하룻밤을 보낸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룻밤 인연이라……. 당신에게는 섹스가 참 쉬운가 봅니다.”

섹스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은하의 얼굴이 또다시 화끈거렸다. 그때로 돌아간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결혼도 쉽고.”

“…….”

“그러니 이렇게 아무에게나 결혼하자고 하는 거겠지.”

도훈은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그게 귀에 거슬렸다.

혹시라도 내게 미련이 있었다 이야기하는 걸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찰나의 밤이었고, 지나간 세월은 길었다.

그냥 자존심이 상했던 거겠지.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니, 한 번도 여자에게 그런 취급을 받아본 적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은하가 저를 취하고 버렸다 생각해서 화가 난 건지도.

그의 얼굴에 가득 깃든 조소는 은하의 생각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너무 돌려 말했나요? 무례하다고 말하고 있는 건데.”

“…….”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무례한 건 사실이니 할 말이 없었다.

“아무나하고 섹스하고 결혼하는 그쪽 개인 취향이야 상관없으나, 난 그러질 못해서.”

도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우리가 더 할 얘기는 없을 것 같군요.”

더 이상 그녀에게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에게 품어 왔던 환상도 이미 깨졌으니까.

잘난 외모만 믿고 모든 남자를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만한 여자.

제 앞에 있는 은하의 실체는 바로 그런 여자로 보였고, 그런 여자는 도훈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그렇게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돈이 필요해요.”

그제야 꽉 닫혀 있던 은하의 입이 열렸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가 되셨거든요.”

처음 입을 떼기는 어려웠는데, 막상 입을 열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운영하시던 사업체도 망해서 거리에 나앉기 직전이고요.”

아빠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은하는 지금쯤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그에게 구걸하는 일도 없었겠지.

은하는 서글퍼지는 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주먹을 작게 말아 쥐었다.

“그럼 돈을 빌려 달랬어야지, 결혼은 아니지 않나?”

도훈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딴 걸 핑계라고 말하냐는 듯이.

“한두 푼이 아니라서요. 빌린다고 갚을 능력도 없고. 그게 더 염치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은하는 자포자기하듯 속내를 털어놓았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그와 거래를 하고 싶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자신을 어디든 팔아넘기려는 새엄마, 찬숙과 똑같은 행보였지만 이것 외에 방법은 없었다.

가진 건 이 몸뚱이밖에 없으니까. 이 몸뚱이로 거래를 하는 수밖에.

“무모한 건 여전하네.”

“…….”

“그래서, 나를 유혹해서 집을 살려보겠다?”

“그런 거만한 생각은 한 적 없어요. 당신을 유혹할 자신도 없고.”

진심이었다. 그의 마음에 들고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은 있었으나, 그를 유혹할 자신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유혹하는지도 모르고, 유혹한다고 과연 넘어오기나 할까.

하지만 도훈은 은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만한 속내를 감추고 그를 떠보는 상황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매력적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5년 전 그날 밤에도 그녀를 보고 침을 흘리는 남자들의 시선을 충분히 의식하는 듯했다.

그런데 유혹할 자신이 없다니. 벌써 도훈이 그녀에게 넘어가서 하룻밤 잤던 사실을 잊은 걸까.

“다만, 당신이 원하는 조건을 제가 다 들어드릴 순 있어요.”

“내가 원하는 조건?”

“결혼할 상대를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쩔 수 없이 결혼해야 하는데, 몇 년만 살다 이혼할 여자를 찾으면 좋겠다고…….”

도훈의 이마가 불쾌하게 구겨졌다.

‘진성우, 이 자식을 진짜.’

성우의 주선으로 은하를 만난 거니, 분명 이 얘기도 그 녀석이 해줬을 것이다.

도훈은 당사자는 듣지도 못하는 욕을 속으로 지껄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럴 수 있다?”

“네. 당신의 입맛대로 모든 걸 맞출게요.”

“그게 뭐든?”

“네. 뭐든.”

은하의 입술이 앙다물렸다. 결심이 꽤 단호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심리가 불쑥 튀어나온 것은.

“임신도 되나?”

“……임신이요?”

“후계자 자리를 굳히려면 아이가 최고니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제일그룹 회장이자, 할아버지인 이학이 지금은 결혼만을 원하지만, 결혼을 하면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말을 바꿀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예상대로 은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건…….”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나랑 몇 년 살다 이혼할 조건으로 결혼할 여자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어.”

“아…….”

“나랑 결혼이라도 해보는 게 소원인 여자도 많고, 이혼하더라도 위자료를 두둑이 챙길 테니까.”

하긴, 그렇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일그룹의 후계자니까.

게다가 배우 뺨치게 잘생긴 얼굴과 몸매까지.

유효기간이 있는 결혼일지언정 잠시나마 내가 저 사람을 가졌다 우쭐대고 싶은 여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까지 낳아야 하는구나.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은하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뒤로 물러설 곳이 없으니 더욱.

아빠 은표가 사고를 당하고 가세가 기울면서, 새엄마 찬숙이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이 은하의 결혼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나이 들어서 제값 못 받기 전에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결혼을 시켜야 한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야 집안의 생활비도 마련하고, 은표의 병원비도 마련한다고.

아빠가 건강했다면 눈치가 보여서라도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을 일을, 그녀는 이번 참에 핑계 좋게 수면 위로 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부리나케 찾아보고 여기저기 재보던 중, 가장 돈을 많이 준다는 지방의 땅부자가 낙찰됐다.

40대 중반에 이혼까지 한 번 한 그는 은하의 사진만 보고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당장 만나지 못해 안달이라고도 했던가.

‘재취 자리라도 그런 자리가 없다. 돈 많지, 사람 준수하지. 그 사람이 너랑 결혼하면 준다는 돈이 자그마치 3억이야, 3억. 네가 어디 가서 그 정도 돈을 받고 시집을 가?’

찬숙은 그렇게 회유와 협박을 했다. 그러면서도 몹시 의기양양했다. 자기가 그렇게 좋은 자리를 찾아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그 돈이라도 있어야 네 아빠 살리지. 회사도 집도 다 넘어가게 생겼는데 무슨 수로 병원비를 더 마련해? 네가 이 결혼 안 하면 우리 다 거리에 나앉고 네 아빠는 이대로 죽는 거야! 알았어?’

하지만 은하는 그렇게 제 삶이 저당 잡히는 건 싫었다. 그렇다고 은표의 병원비를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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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 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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