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악마의 기도
로튼이 일으킨 반란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쥬웰은 미루지 않고 로든 왕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로든 왕국에 다녀오겠다고?”
“네, 할아버지. 새로운 가넷의 왕으로 속국들을 살피는 것도 필요한 일이니까요.”
세상의 중심은 라인하르트 제국이다.
그 주위에 여러 속국이 있고, 타란툴라가 있는 로든 왕국은 그중 하나다.
“마침 초청도 왔고요.”
뜻밖에 아피엘 왕녀에게서 서신이 왔다.
부디 왕국에 방문해 주셨으면 한다는 초청이었다.
‘무슨 의도지?’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아피엘 왕녀는 마왕 타란툴라다.
이젠 확실했다.
타란툴라도 쥬웰이 끔찍한 마왕임을 알고 있을 텐데, 이런 초청이라니?
‘결투장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서신의 뉘앙스가 이상했다.
정말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부탁의 내용이었다.
‘뭐, 상관없지. 내 용건은 하나니까.’
타란툴라를 죽이는 것. 그것 외에 다른 용건은 없었다.
마침 아피엘 왕녀는 은밀한 곳에서 따로 만남을 갖기를 청했다.
쥬웰이 경계할 걸 염려했는지, 제국과 로든 왕국의 국경 근처라 함정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쥬웰은 그곳에서 타란툴라를 곧바로 제압할 계획이었다.
“뭐,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다만, 조심해야 하느니라. 넌 이제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이니까.”
쥬웰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요?”
토른 전 공작은 툴툴 투덜거렸다.
“넌 이 할아비의 가장 소중한 손녀이니, 조심해야 하느니라.”
“헤헤, 사랑해요.”
쥬웰은 토른 전 공작의 품에 안겼다.
점점 토른 공작의 품이 따뜻해지는 쥬웰이었다.
“그런데 엔리크 그놈과는 같이 가도 되지 않느냐? 너와 함께 가고 싶어 했는데.”
“네, 그냥 혼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지금 엔리크를 가넷 공작령에 보내놓은 상태였다.
앞으로 로든 왕국을 시작으로 제국은 그녀가 일으킨 전화(戰火)에 휩싸일 거니,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그래, 가기 전에 하나 너에게 일러줄 이야기가 있다.”
“무엇인가요?”
“여섯 공작가의 가주들에게만 전해지는 비사다.”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넌 가넷의 왕으로 어떤 일을 해도 된다. 하지만 단 하나 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다.”
“무엇인가요?”
“절대 오펜하임을 죽여선 안 된다.”
난데없는 이야기에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정확히는 셀레네 황가의 맥을 끊어선 안 된다. 오펜하임을 죽이고 싶다면 그가 아이를 낳아, 황가의 맥이 이어지면 그때 죽이도록 하여라.”
“아니, 할아버지. 그게 무슨…….”
쥬웰은 당황해 물었다.
“이 할아비가 왜 황위에 오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사실, 이 할아비는 얼마든지 황제가 될 수 있었는데.”
“그건…….”
쥬웰은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토른 공작은 이미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누리고 있었으니까.
“셀레네 황가가 이 제국……. 정확히는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요?”
“300년 전, 세상을 멸망시킬 거대한 침식이 있었고, 초대 황제가 그 침식을 봉인하고 제국을 건국한 건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는 이야기다.
“밖으로는 퍼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초대 황제는 스스로를 제물 삼아 그 침식을 봉인했어. 하지만 그 봉인은 완벽하지 않았고, 셀레네 황가의 핏줄이 그 봉인을 담당하는 자물쇠가 되도록 하였다.”
“그러면? 역대 황제들이?”
“그래, 역대 황제들이 봉인을 유지하는 자물쇠 역할을 해왔지. 사망하면 후대로 그 역할이 넘어가고 말이다. 현재 셀레네 황가의 생존자는 오펜하임이 유일하니, 그가 핏줄을 남겨 역할을 넘길 수 있기 전까지는 목숨을 유지하게 해야 한다.”
토른 공작은 클클 웃었다.
“물론 살려만 두면 상관없으니, 어디 유폐시키거나 팔다리를 잘라 폐인으로 만드는 건 괜찮다. 초대 황제가 봉인한 어둠을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는 한, 맥만 끊지 마.”
“……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의 비사이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 * *
이후, 쥬웰은 곧바로 로든 왕국으로 출발했다.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동행자가 생겼다.
“……왜 대공이 함께.”
“우연이군요. 길이 겹치는 것 같습니다.”
“하필, 지금 대공께서도 로든 왕국으로 가는 길이라고요?”
유스넨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마침 일이 있는지라. 참, 공교로운 우연입니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장난하지 마. 어서 돌아가.”
둘은 같은 마차에 단둘이 타고 있었다. 유스넨이 스리슬쩍 쥬웰의 마차로 들어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장난 아닙니다. 정말 용무가 있습니다.”
“어떤 용무?”
“마왕 타란툴라를 잡는 것.”
“……!”
쥬웰이 흠칫하였다.
유스넨이 진중한 눈빛으로 말하였다.
“지금껏 정확한 정체를 알지 못해 놔두고 있었지만……. 이번에 당신 덕에 알게 되었으니 응당 처리해야겠지요.”
쥬웰은 잠시 침묵했다.
“거짓말. 날 도와주려는 의도잖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의무에 부합하는 일 아닙니까?”
할 말이 없어지는 대답이었다.
“네가 처리해야 할 어둠은 지금 네 눈앞에도 한 명 있을 텐데? 그건 외면하는 건가?”
“글쎄요. 전 안 보이는군요.”
유스넨이 쥬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사랑스러운 이만 보일 뿐입니다.”
“…….”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지.’
마왕 타란툴라를 잡는 데 유스넨과 함께하면 도움은 될 것이다.
유스넨의 규율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문제는 유스넨이 내 일을 눈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타천의 업과가 쌓인다는 건데.’
쥬웰은 유스넨의 이마에 새겨진 역십자 문양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계속 쥬웰을 모른 척 감싸고, 편을 들다 보면 타천이 ‘확정’되리라.
‘그렇다고 얘가 내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유스넨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쥬웰의 복수를 돕기로.
“난 네 도움이 없어도 복수를 이룰 수 있어.”
“알고 있습니다. 이미 대부분 뜻을 이룬 상황이란 것도요. 이제 몰락만이 남아 있지요.”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끔찍한 일을 하실 계획 아닙니까?”
쥬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로든 왕국에서부터 전란을 일으켜 제국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여섯 공작가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한 일환이지만,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리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복수로 쌓일 당신의 죄과를 나누고 싶습니다.”
유스넨이 무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당신의 죄과를 나누면 어쩌면 당신을 구원할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요.”
유스넨은 에덴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덴이 쥬웰의 깨진 영혼을 구할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사람이 어떤 선악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은 에덴과 게헨나에 쌓이게 된다.
그녀는 지금껏 누구보다도 많은 선행을 에덴에 쌓아온 성녀.
그 선행을 통해 기적을 일으켜 보겠다는 건데, 그녀가 새롭게 쌓고 있는 복수의 죄악이 그 기적을 가로막을 수 있으니, 유스넨이 그 죄과를 나누겠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죄과가 덜 쌓여 기적이 성공할 확률이 올라가게.
‘가장 확실한 건, 복수를 말리는 거지만.’
그건 절대로 불가능하니, 이런 궁여지책을 낸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용납할 거라고 생각해? 네가 타천할 텐데?”
쥬웰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유스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허락은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도 절박하니까요. 당신을 구원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전 무슨 일이라도 할 생각입니다.”
“너…….”
쥬웰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스넨의 꽉 다문 입매에서 강력한 고집이 느껴졌다.
‘아니,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쥬웰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유스넨을 말리는 건 어려워 보였다.
말려봤자 어떻게든 그녀를 위해 타천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옆에 두고, 그가 타천하지 않도록 수를 강구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이 와도 유스넨의 타천을 피하게 할 하나의 방법이 있으니까.’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녀도 유스넨의 타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유스넨이 그녀를 구원하길 바라듯, 그녀도 유스넨이 행복해지길 바라니까.
그녀는 복수를 이룬 후, 유스넨 또한 타천의 파멸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래, 대신 조건이 있어.”
“무엇입니까?”
“난 네가 타천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그러니 만약 역십자의 표식이 한계에 도달하면 난 널 봉인하겠어.”
쥬웰은 강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 널 봉인하겠어.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뇌리에 하나의 음성이 떠올랐다.
‘그녀가 걷는 복수의 길을 잘 지켜봐. 그녀가 걷는 길은 파멸과 구원에 맞닿아 있으니.’
라플 공작과 베스윈이 유스넨에게 남겼던 말.
그 말대로 곁에서 그녀의 길을 지켜보며 그녀를 구원해 내고 말 것이다.
* * *
대(大) 가넷가와 페리도트가의 동시 행차이다.
길을 가로막는 장해는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고, 일행은 별다른 일 없이 국경에 도달하게 되었다.
“오늘은 국경에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공작 전하.”
호위를 맡은 라이져 경이 말했다.
“그래,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다만, 로든 왕국은 최근 치안이 좋지 않아 국경을 넘으면 주의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무슨 일이 있나?”
“정체 모를 악마가 살육을 저지르고 다닌다고 합니다.”
쥬웰은 그 악마의 정체를 바로 떠올렸다.
‘리샤크.’
데스 나이트가 된 리샤크가 로든 왕국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유의점은?”
“그리고…… 필바하의 혁명군이 로든 왕국과의 접점으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단순한 이동인지,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군의 움직임은 이전에 그녀가 오펜하임에게 관해 이야기한 것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 가서 쉬도록. 내일부터 또 강행군이니.”
잠시 휴식을 취하니 사위가 금세 어둠에 잠겼다.
쥬웰은 간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후 창밖으로 나와 성의 첨탑에 올랐다.
‘드디어.’
국경 인근에서 아피엘 왕녀, 마왕 타란툴라를 만나기로 하였다.
그런 그녀의 옆에 유스넨이 나타났다.
“마왕 타란툴라를 잡는 건 저의 의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하겠어.”
“누나.”
타란툴라를 상대하다가 그녀가 다칠까 걱정이 깃든 음성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왕 타란툴라는 내 원수 중 하나야. 내가 수세에 몰릴 경우, 그때 도와줘.”
유스넨의 도움을 무작정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유스넨의 말대로 이건 그의 책무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가급적 스스로의 손으로 타란툴라를 잡아 죽이고 싶었다.
“가지.”
쥬웰은 훌쩍 어둠 속으로 뛰어내렸다.
유스넨은 한숨을 내쉬고 그 뒤를 따랐다.
둘은 쏘아진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이동했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외딴곳에 자리한 별장이었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는데, 누군가 등잔을 켜놓은 건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끼익.
이윽고 저택의 문이 열렸다.
일전 면식이 있는 선한 인상의 미녀, 아피엘 왕녀였다.
“구원자, 옵시디언을 뵙습니다.”
그녀가 이전에 비해 삐쩍 마른 얼굴로 쥬웰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타란툴라라고 합니다. 위대한 이여.”
* * *
타란툴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쥬웰의 이성이 마비되었다.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파앗!
쥬웰의 목에 걸려 있던 은빛 목걸이가 사슬로 변해 아피엘 왕녀에게 날아갔다.
“……!”
아피엘 왕녀는 쥬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왜, 왜?”
아피엘 왕녀는 사슬을 피했다.
쥬웰은 이를 악물며 힘을 끌어올렸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피엘 왕녀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쥬웰이 멈추지 않자, 아피엘 왕녀도 결국 힘을 끌어올렸다.
아피엘 왕녀의 얼굴에도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쥬웰은 아피엘 왕녀의 악마화를 보고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악마화의 빛깔이?’
흑마도사들은 힘을 내려받은 증거로 악마의 낙인을 받는다.
낙인의 종류는 다양한데, 가장 강력한 상징은 악마의 꽃이었다.
그 악마의 꽃도 내려받은 힘에 따라 형태가 달랐는데, 쥬웰의 경우 흑암처럼 시커먼 빛이었다.
그런데 아피엘 왕녀의 경우엔…….
‘왜 색이 옅지?’
쥬웰은 힘을 더욱 강하게 끌어올렸다.
악마화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가지와 줄기가 뻗어 나갔고, 섬뜩한 어둠의 꽃이 쥬웰의 몸에 송이송이 피어올랐다.
아피엘 왕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도 결연한 빛으로 악마화를 끌어올렸다.
쥬웰과 마찬가지로 가지와 줄기가 뻗어 나갔는데, 차이가 있었다.
쥬웰의 경우엔 악마화가 촘촘하게 피어올랐는데, 아피엘 왕녀는 듬성듬성했다.
많아 봐야 20송이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아피엘 왕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쥬웰의 힘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뭐야?’
쥬웰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날 능멸하려는 건가? 어서 제대로 힘을 발현해.”
“아, 아니……. 무슨.”
“어서!”
은빛 사슬이 아피엘 왕녀의 마기를 찢어발겼다.
“커억!”
아피엘 왕녀가 새빨간 피를 왈칵 토했고, 쥬웰은 은빛 사슬로 아피엘 왕녀의 목을 휘감아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아아아악!”
그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을 들으며 쥬웰은 우뚝 굳었다.
“뭐야, 너.”
쥬웰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왜 이렇게 약해?”
힘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니다.
아피엘 왕녀, 타란툴라의 힘은 2품. 최대한 높게 봐야 2품의 중간급 정도다.
2품의 최상급인 유스넨보다도 훨씬 못 미쳤다.
쥬웰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날 인신 공양을 주관한 이는 마왕 타란툴라가 아니었어.’
* * *
그날 인신 공양을 주도한 이는 역천(逆天)의 기적을 일으켰다.
따라서 쥬웰은 타란툴라가 자신의 힘을 뛰어넘는 대단한 흑마도사일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저 정도 힘으로는 절대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중, 유스넨이 뒷수습을 하였다.
“꿇어라.”
아피엘 왕녀를 포박용 성유물로 구속해 쥬웰 앞에 무를 꿇게 했다.
“쿨럭, 커억.”
속이 진탕된 것인지 아피엘 왕녀는 연신 피를 토하며 떨리는 눈으로 쥬웰을 올려다보았다.
“구, 구원자여. 어째서 저를?”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나?”
“모, 모르겠습니다. 전 당신을 적대한 적이 없는데.”
진심으로 쥬웰이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음성.
의문이 더욱 커졌다.
“에스텔레를 모르나?”
“다, 당연히 압니다. 하지만 그저 소문을 들어 알 뿐, 전 그녀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그녀의 죽음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아피엘 왕녀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네, 이전에 만났을 때도 물으셨지만, 전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쥬웰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거짓으로 들리진 않는다.
하지만 타란툴라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그런 기적이 가능한 이는 인세에서 타란툴라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아직 믿을 수는 없어.’
쥬웰은 차갑게 말했다.
“못 믿겠군. 영혼을 걸고 맹세할 수 있나?”
아피엘 왕녀의 눈이 커졌다.
쥬웰이 한 말의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그녀는 곧 결연하게 말했다.
“네, 제 영혼을 걸겠습니다. 제 말이 거짓이면, 제 영혼은 게헨나의 수확자에게 당장 끌려가 억겁의 고통에 떨어질 겁니다.”
절대 거짓을 고할 수 없는 흑마도사의 맹세였다.
쥬웰은 힘이 풀렸다.
정말 타란툴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원수들의 정체가 감이 잡히질 않아 초조함이 치밀어 올랐다.
‘혹시 단서를 알고 있지는 않을까?’
타란툴라는 현시대 최고의 흑마도사다.
그러니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짐작되는 바가 있을 수도 있다.
“에스텔레 성녀는 인신 공양으로 바쳐져 에덴이 아닌 게헨나에 영혼이 끌려갔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경우를 알겠나?”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무언가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아니, 확실해. 내가 직접 겪은 일이니까.”
쥬웰의 정체를 알게 된 아피엘 왕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러면 당신은?”
“그래, 내가 에스텔레다. 지금 이 몸은 너처럼 흑마법으로 차지하게 된 거고. 어쨌든 정말 불가능한가?”
“네, 네. 그런 일은 세상의 섭리를 어기는 일. 라플 공작이라도 불가능할 겁니다.”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어쩌지? 다른 원수의 정체를 알아내야 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야.’
쥬웰은 로튼 백작의 목숨을 거둘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로튼 백작이 죽자, 금제의 기운이 흩어졌다.
‘분명 목숨을 매개로 한 연계 금제였어. 원수들의 목숨을 하나하나 거두다 보면 마지막에 금제가 깨져 원수들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복수를 더욱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그런데 아피엘 왕녀가 파리한 안색으로 쿨럭 기침하였다.
쥬웰은 물끄러미 그런 아피엘 왕녀를 바라보았다.
‘아피엘 왕녀는 어떻게 하지?’
쥬웰이 타란툴라를 잡으려고 했던 건 단지 다른 원수의 정체를 짐작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깨진 영혼을 고칠 제물로 삼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원래는 복수의 일환으로 제물로 삼을 작정이었는데.’
자신의 죽음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게 밝혀져 마음 편히 그러기가 곤란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줄 수도 없어.’
그녀의 영혼은 완전히 산산이 조각나 타란툴라 정도 되는 이를 제물로 삼지 않으면 수습할 수가 없다.
고민되어 입술을 질끈 깨무는데, 유스넨이 말했다.
“이자는 끔찍한 어둠. 죄책감 가질 필요 없습니다.”
심판의 검이 아피엘 왕녀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피가 흘러내렸고, 아피엘 왕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전 오늘 광휘로서 이 악마를 처단할 겁니다. 그러니 연민 가지지 마십시오.”
진심이라는 듯, 유스넨의 눈빛은 한없이 무정했다.
쥬웰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는 쥬웰을 위해서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내려칠 것이다.
그런데 아피엘 왕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당신이 말했던 인신 공양에 대한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지?”
쥬웰은 다급히 물었다.
“생각해 보니…… 3년 전, 당신이 인신 공양을 당하기 전, 기이한 손님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타란툴라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자는 제게 흑마도사의 인신 공양에 대해 제게 이것저것 물었어요.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는데…….”
“누구지?!”
쥬웰은 다급히 물었다.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얼굴을 가리고 정체를 숨기고 있어서 저도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라인하르트 제국 수도의 고위 귀족이었어요.”
타란툴라는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말투가 제국 최상류층만 쓰는 리하트 억양이었습니다.”
어느 나라나 그렇듯, 같은 언어라도 지역, 신분에 따라 어휘나 억양이 달라진다.
라인하르트 제국 수도도 평민, 귀족들은 다른 억양을 쓰는데, 특이한 건 같은 귀족 내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최고 명문 귀족들은 자신들만의 억양인 리하트 억양을 사용한다.
명문가의 자부심으로 어릴 때부터 그런 억양을 쓰도록 교육받는 것이다.
‘리하트 억양을 쓰는 귀족은 여섯 공작가와 일부 개국 명문가들뿐. 수도 내에서도 얼마 되지 않아.’
즉, 이 말의 뜻은 다른 원수들은 여섯 공작가 소속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였다.
‘내가 모르는 여섯 공작가 내의 원수가 더 있어.’
“리하트 억양을 쓰는 귀족 중, 당시에 수도를 보름 이상 떠났던 이들을 찾아보면 되겠군요.”
유스넨이 답을 내놓았다.
“그런 고위 귀족이 움직일 시에는 반드시 언제, 어디로 향했는지 기록이 남게 되어 있으니까요. 행적이 묘연했던 이가 있다면 그자를 의심하면 될 것 같습니다.”
타란툴라가 말한 시점과 행적이 불분명한 시점이 일치하는 이가 있다면, 그자가 바로 용의자일 것이다.
“당장 페리도트가의 체이서들에게 일러, 해당하는 이를 추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쥬웰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드디어 다른 원수들의 정체에 접근한 것이다.
이 정도로 구체적인 정보면 정말 순식간에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로든 왕국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수도로 돌아갔을 때쯤에는 알 수 있을 거야.’
쥬웰은 타란툴라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넌 날 왜 부른 것이지?”
이 만남은 아피엘 왕녀가 청한 것이었다.
아피엘 왕녀의 눈동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처럼 흔들렸다.
“다, 당신 구원자께 부탁할 게 있어서 이 만남을 청했습니다.”
“부탁이라고? 무엇이지?”
아피엘 왕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뭐?”
아피엘 왕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칠 테니, 부디 대신 제 원한을 갚아주십시오!”
* * *
뜻밖의 이야기다.
“전 호박족입니다. 흑마법을 이용해 아피엘 왕녀의 몸을 차지한 거고요.”
아피엘 왕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였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타란툴라가 호박족일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
호박족은 지상에서 가장 커다란 고통을 받는 족속이었다.
제국의 여섯 공작가처럼 아름다운 보석안을 타고났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자신을 지킬 힘을 가지지 못했다.
차라리 다른 보석안의 일족처럼 사냥꾼에게 멸족당했으면 나으련만, 그들은 더욱 끔찍한 처지가 되었다.
로든 왕국의 노예가 된 것이다.
로든 왕국은 호박족을 한곳에 몰아놓고 ‘광산’을 만들었다.
보석안을 채굴하는 ‘광산’을.
“아시다시피 우리 호박족은 광산에 갇혀 살며 보석안이 아름답게 성장할 시기인 소년, 소녀가 되면 눈을 뽑힙니다. 그리고 순도를 유지하기 위해 근친을 강요받고 있고요.”
강제로 아이를 낳고, 눈이 뽑히고…… 그렇게 대를 이어 끝없이 고통받고 있었다.
“전 그런 일족의 복수를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지만, 불행히도 힘이 모자랐어요. 저 혼자의 힘으로는 로든 왕국을 멸망시킬 수가 없습니다.”
쥬웰이라면 홀로 로든 왕국을 뒤엎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1품에 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에, 2품 정도인 타란툴라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절망에 빠져 지내던 차, 당신의 정체가 구원자 옵시디언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피엘 왕녀, 아니, 타란툴라는 처절히 울부짖으며 외쳤다.
“당신은 우리 흑마도사들을 구원하기 위해 게헨나에서 강림한 이.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칠 테니, 부디 제 원한을 대신 갚아주십시오!”
타란툴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찌나 깊은 고통을 품고 살았는지, 손끝이 저릿하며 떨릴 정도로 한이 느껴졌다.
쥬웰은 한탄하였다.
‘어찌 세상에는 이토록 가련한 이들이.’
어쨌든 로든 왕국을 멸망시키는 건 원래 그녀가 하려던 일이었다.
타란툴라의 영혼까지 얻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리라.
“묻겠다. 정말 그대의 영혼을 나에게 바치겠는가?”
악마의 언어였다.
타란툴라는 간절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신께 영혼을 바치나니, 제발 제 원한을 풀어주시옵소서!”
쥬웰은 타란툴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나…… 그대의 영혼을 받겠으니, 그대는 안식과 구원을 얻으리라.”
쥬웰에게는 다른 흑마도사들을 구원할 권능이 있다.
딱히 대단한 권능은 아니었다.
어차피 머지않아 소멸할 운명이니, 그들의 죄과를 자신의 영혼에 짊어지는 것이다.
지상에서 끝없이 고통받아야만 했던 가련한 흑마도사들은 모든 짐을 그녀에게 내려놓고 안식을 얻게 되리라.
그런데 왜일까.
쥬웰이 타란툴라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려왔다.
쥬웰은 놀란 얼굴을 했다.
‘신의 축복?’
성스러운 빛이 쥬웰을 감쌌고, 그 빛을 바라본 타란툴라는 벅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아……. 신이 내리신…… 당신은 정말…… 구원자…….”
그걸 끝으로, 타란툴라는 눈을 감았다.
쥬웰에게 영혼을 바치고 숨이 끊어진 것이다.
쥬웰은 씁쓸한 얼굴로 타란툴라를 바닥에 눕혀주었다.
“……누나.”
“난 괜찮아.”
쥬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치켜뜬 눈동자에는 그녀의 몸을 감싼 성스러운 빛과 전혀 다른 흑암(黑暗)이 가득했다.
흑요석의 빛.
“로든 왕국을 멸망시키러 가지.”
* * *
며칠 후.
로든 왕국에 끔찍한 재앙이 강림했다.
한 악마가 로든 왕국의 왕궁을 침입한 것이다.
악마는 하얀 무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너, 넌 누구냐?!”
왕궁의 기사들이 당황해 검을 겨누었다.
“마왕 옵시디언.”
마왕이란 이야기에 로든 왕국의 기사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곧 비웃음을 지었다.
“마왕이라고?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상대가 심상치 않은 힘을 지닌 존재란 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역대 어떤 흑마도사도 이렇게 전면으로 왕국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녀봤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 기사들은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왕의 힘은 지금껏 상대했던 어떤 흑마도사들과도 달랐다.
마치 하늘을 가를 듯한 파천의 힘.
은빛 사슬이 허공을 번뜩일 때마다 기사들은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특히 우연인지 평소 악행을 많이 하던 기사들이 집중적으로 목숨을 잃었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힘이라니.”
“으, 으…… 괴, 괴물…….”
또한, 악마는 혼자 오지 않았다.
은발의 정체불명 가면을 쓴 이도 함께 있었는데, 그자의 힘도 마왕의 힘에 못지않았다.
“네가 나설 필요 없어.”
“당신 혼자 무리하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조력자 유스넨은 바위처럼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싸우실 겁니까? 곧 군대가 몰려올 겁니다. 우리 둘이서 그들마저 상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건 왕궁을 지키는 기사들과 근위병들이었다.
강력한 정예이지만, 상대적으로 소수의 병력.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규모 왕국군이 몰려올 것이다.
“나 혼자 왕국군까지 상대할 생각은 없는데?”
“그러면?”
“설마 내가 단신으로 왕국을 상대하는 만용을 부릴 리가 없잖아?”
다 계획이 있었다.
곧 당황한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아악! 또 다른 악마가?!”
“죽음의 기사야!”
리샤크였다.
그가 어둠의 기운에 휩싸인 채 나타나 왕국군을 도륙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샤크는 혼자 오지 않았는데, 시커먼 목이 없는 마물들을 이끌고 있었다.
게헨나에서 소환된 죽음의 기사 군단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네, 네놈들은?!”
“어떻게 광산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호박족이 나타났다.
그들은 쥬웰에 내려받은 새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게헨나에서 소환한 마물의 눈이었다.
‘뭐, 저걸 이식한다고 몸에 해로운 건 아니니.’
그들은 지금껏 고통받은 처절한 한에 휩싸여 무기를 휘둘렀고, 그 끔찍한 기세에 로든 왕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그리고 마지막.
“바, 밖에서 군대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누구지?! 지원군인가?”
“원군이 아닙니다! 제국의 혁명군입니다!”
“……!”
오펜하임이 때에 맞춰 달려온 것이다.
필바하로 화한 오펜하임은 선두에 서서 외쳤다.
“문을 열어라! 우리 혁명군이 로든 왕국의 학정에서 백성들을 구하겠다!”
“안 돼!”
호박족들이 성문을 열었다.
놀라운 건, 백성들도 별달리 혁명군을 적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로든 왕국의 왕가는 끔찍한 통치로 유명했으니까.’
호박족을 학대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로든 왕국의 왕가는 피와 공포로 백성들을 압제했다.
그러니 왕가를 전복하는 이번 일에 어떤 반감도 가지지 않고 순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날.
로든 왕국이 멸망하였고,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 * *
쥬웰은 곧바로 수도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혁명군을 이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당장 토벌군을 보내야 합니다!”
혁명군을 지금껏 가만히 내버려 둔 건, 큰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든 내키면 짓밟을 수 있는 벌레.
하지만 로든 왕국을 집어삼킴으로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원래 차지하고 있던 제국 남부 지방의 3할에 로든 왕국의 영역까지 합쳐지면 무시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로든 왕국의 힘을 수습하는 순간, 언제든 제국을 위협할 비수가 될 수 있었다.
“조용히.”
가넷 공작 쥬웰의 말에 장내가 우뚝 멈추어섰다.
“토벌군을 준비토록 하죠. 단, 사파이어가 말고, 우리 가넷에서 해결토록 하겠습니다.”
쥬웰의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사파이어가는 이런 상황에 항상 앞장섰다.
그런데 사파이어 가를 배척하려고 한다니?
쥬웰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사파이어가는 이번 사태를 해결할 역량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에요.”
당연히 반발이 있었다.
“……우리 사파이어가를 무시하는 겁니까?”
라디트였다.
그는 얼굴 일부를 붕대로 가리고 있었는데, 성배 사건 때 유스넨에게 폭행당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때 무너져 내린 골격이 완전히 낫지 않아 일전의 아름다움을 잃고 흉측한 외모였다.
“무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라디트 소공작, 당신은 이번 일을 해결할 능력이 되지 않아요.”
라디트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는 매리엇에게도 무시당하고, 사파이어 공작가 내에서도 입지가 좋지 않아 계속해서 성격이 삐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을 품고 있던 쥬웰에게 이런 무시까지 당하니, 비틀린 심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은 나 라디트와 우리 사파이어가를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모욕이 아니라, 전 그저 사파이어가를 걱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걱정이라, 큭큭.”
라디트의 눈동자가 탁하게 일렁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군요. 혁명군을 처리하는 건 우리 사파이어 공작가가 하겠습니다. 단 오늘의 발언은 반드시 제게 직접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라디트는 거칠게 회의장을 나갔다.
바로 출정 준비를 하러 가는 것이다.
라디트는 이를 악물었다.
‘공을 세워야 해. 그래서 날 무시하는 이들에게 본때를 보이고 사파이어 공작가를 손에 넣어야 해.’
라디트는 추악하게 생각을 이어갔다.
‘그래야 쥬웰을 손에 넣을 수 있어.’
바닥에서 추악하게 뒹굴고 있는 자신과 다르게, 쥬웰은 이미 가넷 공작으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반드시 이번에 필바하의 목을 베어 공을 세워야 한다고 라디트는 다짐했다.
‘더러운 놈.’
쥬웰은 라디트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걸려들었어.’
쥬웰은 일부러 라디트를 도발했다.
사파이어 공작가가 전면에 나서 출진하게 하려고.
라디트의 추악한 마음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다.
‘이번엔 라디트, 너야.’
쥬웰은 차갑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로튼, 플랑드나를 몰락시켰다.
이번엔 라디트 차례였다.
* * *
사파이어 공작가의 출정이 결정되었고, 쥬웰은 또 다른 준비를 하였다.
“죽음의 기사 리샤크와 함께 제국 전역에서 민중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도록.”
“반란을 말입니까?”
십마 아낙스가 놀란 얼굴을 하였다.
“그래, 마왕 옵시디언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백성들은 여섯 공작가의 학정에 지쳐 있다.
이끌어주는 이가 있다면, 들판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순식간에 떨치고 일어서리라.
“그리고 난 가넷의 왕이자 성녀로서 백성들의 반란의 원흉이 된 다른 공작가들에 죄를 추궁하겠어.”
쥬웰은 백성들의 반란 원인을 사파이어, 에메랄드, 다이아에게 돌려 죄를 물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성녀로서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상황이니 얼마든지 그렇게 상황을 이끌 수 있었다.
‘이미 힘이 약해진 그들 가문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겠지.’
여섯 공작가는 이전의 여섯 공작가가 아니었다.
쥬웰이 지금껏 해왔던 공작에 의해 전성기의 힘을 상당 부분 잃은 상태다.
‘거기에 더해 이번 전쟁 때 사파이어 공작가의 힘을 완벽히 꺾고, 다이아 공작가에서 2억 골드를 징수하고, 종교 개혁을 일으키면, 그들은 팔, 다리가 완전히 끊어진 신세가 되겠지.’
이후 백성들의 반란을 통해 그들 가문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게 그녀의 계획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복수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사파이어가가 혁명군을 상대하러 출정하는 날이 다가왔고, 쥬웰도 맞춰 전쟁을 준비하였다.
마왕 옵시디언으로서 사파이어가를 꺾을 것이다.
그런데 막 저택을 나가려는데 유스넨이 나타났다.
“3년 전 타란툴라가 말했던 시점에 수도를 벗어났던 고위 귀족을 조사하였습니다.”
예상보다 빠른 결과였다.
“모두 수도 귀족이라 빠르게 조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쥬웰의 심장이 뛰었다.
“누구였지?”
“……해당하는 자가 없습니다.”
“뭐?”
“조사했는데, 리하트 억양을 쓰는 최고위 귀족 중 당시 수도를 벗어나 있던 이는 총 22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자신의 영지나 제국 내의 다른 지방이 목적지였고, 국경을 벗어난 이는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확실한 거야?”
“네, 해당자들이 정말 그 지역에 간 게 맞는지 이중 확인까지 했는데, 모두 행적이 일치하였습니다.”
쥬웰은 미간을 좁혔다.
곤란한 결과였다.
“수도에 있던 귀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군.”
“네, 그렇습니다. 리하트 억양을 쓰지만, 드물게 수도가 아닌 외부에서 머물고 있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쥬웰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젠장, 그러면 조사 범위가 너무 넓어지는데.’
곤란해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세바트찬입니다. 엔리크 자작이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아버지가?”
“네, 안부 서신입니다.”
쥬웰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었지.’
아버지와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립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엔리크를 사랑하니까.
반가운 마음에 서신을 펼쳐보려는 순간이었다.
쥬웰의 가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잠깐.’
쥬웰이 입이 바싹 말랐다.
‘그러고 보니 한 명 있잖아. 조건에 맞는 사람이.’
리하트 억양을 쓰면서.
당시 수도에 있지 않고, 국외에 있던 사람.
외교 대신이었던 엔리크 자작이었다.
* * *
쥬웰이 눈이 컴컴해졌다.
‘말도 안 돼. 헛생각이야.’
쥬웰은 억지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엔리크 자작이 그럴 리가 없잖아.’
그저 조건이 맞을 뿐이다.
하지만.
‘……정체를 모르는 원수들은 이번 생에 새롭게 익숙해진 이들일 가능성이 높아.’
인신 공양 당시에는 그들의 실루엣이 낯설었다. 확실히 처음 보는 실루엣이었다.
그런데 다시 돌이켜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니, 실루엣이 과거와 다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새롭게 익숙해진 것처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쥬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피부가 창백하게 질려 핏줄이 드러났다.
‘엔리크 자작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잖아. 다른 원수와 달리 그렇게 빛나는 분인데.’
쥬웰은 주시자의 눈으로 본 엔리크 자작의 영혼을 떠올렸다.
환하게 빛나던 영혼.
그토록 찬란한 영혼을 지닌 이가 인신 공양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쥬웰은 다소 안도가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엔리크 자작이 인신 공양을 했다면 영혼이 어두운 빛으로 물들었을 거야.’
쥬웰은 다소 편해진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확인은 해보자.’
범인으로 의심해서 하는 확인은 아니었다.
도리어 엔리크를 향한 의심을 완전히 거두기 위한 확인이었다.
그를 믿지만, 그래도 확실히 확인하지 않으면 꺼림칙한 느낌을 지우지 못할 테니까.
쥬웰은 펜을 들었다.
[아버지, 가넷가로 돌아와 주세요.]
쥬웰은 망설이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랑해요.]
* * *
쥬웰은 라디트를 몰락시키기 위한 마지막 수작을 부리기로 했다.
출정 전날, 라디트를 만나러 갔다.
“쥬웰?”
라디트는 눈을 크게 뜨며 쥬웰을 맞았다.
당황과 혼란…… 그리고 기대와 욕망이 섞인 눈동자였다.
“출정 전날, 괜히 불러낸 게 아닌가 싶군요. 이렇게 밤늦게 나와도 매리엇 언니께 괜찮은가요?”
“매리엇? 괜찮다. 괜찮아.”
라디트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괜히 매리엇 때문에 쥬웰이 돌아가 버리기라도 할까, 안달 나 하는 태도였다.
“그런데 어째서 혹시?”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라디트의 얼굴에 차올랐다.
쥬웰은 팔짱을 꼈다.
“출정을 말리러 온 거예요. 형부의 힘으로 마왕 옵시디언을 상대하는 건 무리예요. 만용 부리지 말고, 포기하세요.”
“혹시 날 걱정해 주는 거냐? 그렇다면…….”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한결같네.’
게헨나에서 돌아온 이후, 계속해서 역겨운 모습만 보여주는 라디트였다.
“전 가넷의 가주이니, 제국의 국정을 책임지는 이로서 하는 걱정일 뿐이에요. 어쨌든 형부에게는 무리니 포기하세요.”
“그럴 수는 없다.”
라디트는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가 사망했음에도 난 아직도 공작 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어. 그러니 이번에 반드시 공을 세워야 한다. 당당히 사파이어 공작가를 내 손에 넣을 거야.”
그래서 널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
라디트는 속으로 말했다.
“형부의 뜻은 알지만 무리한 일이에요.”
“아니, 무리이지 않아. 난 새로운 힘을 얻었으니.”
라디트의 푸른 보석안이 기이하게 빛났다.
쥬웰은 라디트가 어떤 힘을 얻었는지 눈치챘다.
‘악마에게 다시 영혼을 팔았군.’
라디트는 알까.
자신이 게헨나에 끌려간 후 얼마나 처참한 고통을 받게 될지.
하지만 쥬웰은 그걸로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도 무리에요. 가넷가에서 파악한바 옵시디언의 힘은 초월자에 준한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
라디트는 단단히 굳힌 입매를 풀지 않았다.
쥬웰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알겠어요. 형부의 뜻이 그렇다면. 단, 만약 정말로 옵시디언을 이기고자 한다면 이 방법을 사용하세요.”
쥬웰은 하나의 양피지를 내밀었다.
“무엇이지?”
“형부에게 힘을 더 줄 방법이에요.”
“……!”
쥬웰은 악마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옵시디언과 싸울 때 힘이 모자란다면 그 양피지에 쓰여 있는 방법을 쓰세요. 그러면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힘이 형부에게 깃들 거예요.”
라디트는 양피지를 펼쳐보았다.
딱 봐도 섬뜩하기 그지없는 마법진과 문양,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악마의 힘을 빌리는 건가?”
“네, 맞아요. 미리 말하지만 이 힘을 사용하면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그러니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도록 하세요.”
“……그래. 걱정 고맙구나.”
라디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양피지를 꽉 움켜쥐었다.
“필요하다면, 하겠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눈앞의 쥬웰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쥬웰은 그런 라디트의 마음을 느끼고, 토기가 치밀어 올라 등을 돌렸다.
그런데 라디트가 하나 남은 팔로 쥬웰의 손을 낚아챘다.
“……무슨 짓이죠?”
“하나만 부탁하마. 이번에 공을 세우면 날 바라봐 줄 수는 없겠느냐?”
“……매리엇 언니는요?”
“매리엇은 상관없어. 난 그녀를 혐오해. 너만 있다면 매리엇과는 이혼할 것이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에스텔레는요? 형부는 에스텔레를 사랑하지 않았나요? 그녀에게 미안하지 않나요?”
라디트의 눈이 일그러졌다.
찰나의 망설임 이후, 참으로 역겨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에스텔레 따위 이제 아무래도 좋아. 널 위해서라면 난 에스텔레를 다시 지옥에 떨어뜨릴 수 있다.”
쥬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고 출정 날이 다가왔다.
* * *
사파이어 공작가는 기사들의 가문이다.
따라서 전원 말을 타는 기병이었고,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이동이 빨랐다.
오래지 않아 로든 왕국의 국경에 도달했고, 혁명군을 이끄는 필바하가 사파이어 공작가를 상대하기 위해 나섰다.
“어마어마하군.”
필바하, 아니, 오펜하임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라디트는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을 끌어왔다.
무려 2천에 달하는 기사 병력이었다.
‘숫자 자체는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최정예의 기사들.’
반면 혁명군은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이대로 충돌이 일어나면 혁명군은 호랑이에게 맞선 쥐새끼의 신세가 되어 산산이 와해될 것이다.
하지만 오펜하임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가능하겠습니까?”
오펜하임은 공손하게 옆에 서 있는 전신 갑주를 입은 인물에게 말했다.
지금껏 그를 도와왔던 마왕 옵시디언의 수하…… 해밀턴이었다.
해밀턴이 지난번 반란 때처럼 마검 바리사다를 이용해 오펜하임을 도울 계획이다.
“…….”
해밀턴은 갑주를 입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게를 잡으려는 게 아니라, 속으로 벌벌 떠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으으…… 무서워. 왜 나는 맨날 이런 일에! 이 나쁜 악마!’
해밀턴은 지난번 플랑드나에게 고문당했을 때를 떠올렸다.
다행히 그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겪지 않았다.
나병의 저주로 통각이 차단되었고, 또한 쥬웰이 아예 정신 지배를 걸어 흐리멍덩한 의식으로 당시의 고문을 받은 덕분이다.
따라서 그는 당시의 고문을 제대로 기억 못 하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하잖아! 고문도 모자라 또 전쟁에 나서라고 하다니. 엉엉.’
해밀턴은 사파이어 공작가의 무시무시한 위용을 보고 눈물을 삼켰다.
한편, 오펜하임은 그런 해밀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설마. 내 착각이겠지.’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저 무시무시한 마왕의 수하가 두려움을 느낄 리가 없으니까.
마침 해밀턴의 손에 들린 붉은 마검, 바리사다가 기이한 괴성을 토했다.
그에 맞춰 사파이어 공작가에서도 함성이 터졌다.
라디트가 앞으로 나섰다.
“나와라, 필바하! 일대일로 자웅을 겨루어 보자!”
지휘관끼리 일대일 기사 전을 제의한 것이다.
여러 신비한 능력이 있지만, 전투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오펜하임으로서는 응할 수 없는 제의였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었다.
옆에 있던 해밀턴이 앞으로 나선 것이다.
‘으아아! 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야!’
해밀턴의 발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의 허리를 찼고, 놀란 말이 라디트에게 뛰어갔다.
라디트의 검이 오러에 휩싸였고, 둘이 교차했다.
결과는,
쩌억!
“각하!”
“백작님!”
해밀턴의 마검 바리사다가 라디트의 안면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 * *
장내가 경악에 휩싸였다.
결투는 일방적이었다.
전신 갑주에 쌓인 마왕의 수하는 붉은 마검으로 라디트를 셀 수 없이 후드려 팼다.
“커억!”
라디트는 강한 오러를 뿌리며 마왕의 수하에 맞섰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라디트의 전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가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건, 마왕의 수하가 일부러 치명상을 피한 탓이다.
마왕의 수하는 일부러 검날이 아닌 검면으로 때리든지, 목숨을 거두지 않을 정도만 상처를 입히게 한다든지 해서 라디트가 죽지 않게 하였다.
농락이란 말이 어울리는 장면.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듯했다.
마왕 수하 해밀턴이 이런 무용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쥬웰 때문이었다.
쥬웰은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근처 언덕에 은신하여 흑마법을 부려 직접 해밀턴의 몸을 조종하고 있었다.
즉, 지금 라디트를 실제로 농락하고 있는 건 해밀턴이 아닌 쥬웰이었다.
“커어어억!”
“소공작님!”
처참한 광경에도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은 나서지 못했다.
마왕의 수하가 기사들이 나서는 순간, 라디트의 목을 베겠다고 경고한 탓이다.
“이놈! 쿨럭, 커억. 커어억!”
그래서 라디트는 사파이어 공작가와 혁명군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끔찍한 굴욕을 당하고 있었다.
전신이 피에 물들었고, 얼굴은 제 형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러진 뼈도 여럿 되었다.
보는 이가 질릴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지만, 해밀턴의 몸을 조종하는 쥬웰의 눈빛은 더더욱 차갑게 가라앉기만 하였다.
‘아직이야.’
슬슬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쥬웰은 직접 몸을 움직였다.
은신을 풀고, 언덕 위로 올라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침 탁 트인 곳에 자리한 언덕이라 라디트는 쥬웰을 볼 수 있었다.
‘쥬, 쥬웰.’
라디트는 몸을 떨었다.
그는 쥬웰을 바란다.
그런데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이다니.
남자로서 밑바닥에 처박히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거기에 쥬웰은 그의 마음을 불에 지피는 행동을 하였다.
한숨을 내쉬며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
먼 거리였지만, 라디트는 마스터 나이츠.
거기에 악마에게 영혼을 바쳐 추가 힘을 얻어 오감이 지극히 발달해 쥬웰의 경멸 어린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쥬웰은 그 뒤 휙 등을 돌려 사라졌다.
라디트 따위 더 바라볼 것도 없다는 듯이
‘이…….’
비참한 상황.
욕망하던 여인의 비웃음.
그게 라디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주저하던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출정 전날 쥬웰에게 건네받았던 양피지에 적힌 주문을 외운 것이다.
“나, 나…… 라디트가 저주받은 이의 이름을 걸고 어둠에 바란다. 내게 어둠의 축복이 깃들도록. 날 가로막는 모든 이를 벨 힘을 내려주도록!”
주문을 외우자 라디트의 영혼에 섬뜩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는…… 이미 영혼을 바쳤다. 더는 우리에게 바칠 대가가 없다.
악마의 목소리였다.
라디트는 피가 말랐다.
‘어떻게 된 거지? 양피지에 적힌 대로 저주받은 이의 이름을 걸면 힘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저주받은 이.
누구를 뜻하는 건지 라디트는 알 수 없었다.
“그,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하면 힘을 받을 수 있냐는 말이다!”
악마의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대가 건 이름은 아주 특별한 존재의 것. 그 존재의 이름을 봐서 그대의 청을 들어주지.
“그러면?”
라디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대는 이미 사후의 영혼을 바쳤으니, 현세의 삶에서 대가를 받아가겠다. 동의하는가?
“동의해! 어떤 대가라도 바치겠어!”
라디트는 절박하게 외쳤다.
-다시 묻겠다. 힘을 받는 대신 네 삶은 망가질 것이다. 그래도 계약하겠는가?
섬뜩한 이야기다.
하지만 욕망에 눈이 먼 라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고!”
쥬웰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삶이 망가져도 괜찮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라디트는 지금 일그러져 있었다.
게헨나 건너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윽고 라디트의 몸에 형용할 수 없는 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힘이라면, 누구라도 이길 수 있어!’
라디트가 환희에 찬 표정을 짓는 순간.
생각지도 않은 변고가 일어났다.
두둑.
라디트의 골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어깨뼈였다.
“어……?”
라디트는 당황한 얼굴을 하였다.
“이, 이게……?”
어깨뼈에서 시작된 변화는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팔, 다리가 변했고, 얼굴의 골격도 변했다.
마치 흉악한 인간형 마물처럼.
“크, 크륵? 크륵!”
라디트는 놀라 입을 열었지만, 끔찍하게도 흘러나온 건 사람의 말이 아니라 괴물의 흉성이었다.
장내에 죽을 듯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혁명군은 물론,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괴물이 된 라디트를 바라보았다.
라디트는 덜덜 떨며 악마에게 외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비웃는 듯한 음성이 라디트의 영혼에 울려 퍼졌다.
-네가 원하는 대로 힘을 주지 않았냐?
‘뭐, 뭐라고?’
-어리석은 것. 자신이 사용한 주문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다니. 네가 사용한 마법은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어 강대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저주의 주술이다.
킬킬, 수많은 악마가 그를 향해 소를 날렸다.
-혹시나 기대할까 하는 이야기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도록. 넌 이미 우리에게 네 삶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으니 말이야.
“……!”
-너는 죽은 후 게헨나에서 영겁에 고통에 처하는 건 물론, 살아서도 영원한 괴물로서 고통받을 것이다.
라디트는 손을 들었다.
이전처럼 하얀 피부가 아닌, 도마뱀처럼 끔찍한 비늘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한 괴물이 된 것이다.
장내의 모두가 그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라디트는 모든 진실을 깨달았다.
‘쥬, 쥬웰이 날 속였어? 어, 어떻게 쥬웰이 나를?’
그때 언덕에서 사라졌던 쥬웰이 사파이어 공작가의 진영에 나타났다.
그녀는 경멸을 가득 담아 명령했다.
“힘을 얻기 위해 어둠에 영혼을 팔다니. 다들 뭐 하고 있느냐?! 재상의 권한으로 명하니, 저 괴물을 처단하도록!”
쥬웰은 가넷 공작일 뿐 아니라, 제국 재상이니 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었다.
사파이어가의 기사들은 무기를 들었다.
다들 혼란했지만, 쥬웰의 외침에 상황을 파악했다.
‘힘을 위해 괴물이 되다니.’
‘사파이어의 수치.’
아무리 라디트가 사파이어의 정통 후계였다지만, 저런 괴물이 되었는데 살려둘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그들의 손으로 척결해야 했다.
더러운 오물은 닦아야 하는 법이니까.
“기사단, 모두 착검! 재상 각하의 명을 받들어 저 괴물을 처단한다!”
그런 사파이어가의 기사들의 모습에 라디트는 머리가 하얘졌다.
이로써 그의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다.
여기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흉측한 괴물로서 영원히 쫓겨 다니며 고통받는 신세가 될 것이다.
‘이, 이…… 쥬웰!’
그녀를 향한 욕망. 그리고 배신감. 추악한 마음들이 뒤섞여 라디트의 이성이 끊겼다.
“크르륵! 크아아아악!”
라디트가 시뻘겋게 눈이 달아올라 쥬웰에게 달려들었다.
“막아!”
“크악!”
사파이어가의 기사들이 나섰으나 소용없었다.
혐오스럽게 변한 라디트의 손톱이 쥬웰의 몸을 가르려는 순간.
퍼어어억!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라디트의 몸이 튕겨 나갔다.
유스넨이었다.
“감히.”
유스넨의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가 라디트를 내려다보았다.
“저 괴물을 처단하는 건, 광휘인 제 의무. 이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쥬웰과 유스넨이 눈이 마주쳤다.
쥬웰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로 말했다.
-죽이진 마.
그녀는 괴물이 된 라디트가 당장 목숨을 잃기보다는 더 오랫동안 고통받기 원했다.
유스넨은 알겠다는 듯 눈빛을 보낸 후, 라디트에게 다가갔다.
“크, 크륵. 크아아아악!”
라디트가 유스넨에게 다시 달려들었고.
유스넨의 눈빛이 얼음처럼 번뜩였다.
‘나도 이 순간을 바랐지.’
원수를 처단하길 바라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유스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라디트가 유스넨의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순간.
섬광이 빛났다.
라디트의 남은 팔 하나가 잘려져 나갔다.
* * *
유스넨의 검에 하나 있던 팔마저 잃은 라디트는 전장에서 벗어나 달아났다.
“안 쫓아가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어차피 양팔을 다 잃었으니 비참히 쫓겨 다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 없겠지.”
괴물이 된 라디트는 모두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좌절을 맛보게 될 것이다.
‘불사의 저주를 걸어놨으니, 잡혀 죽을 걱정도 안 해도 될 거고.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 저주이니까.’
쥬웰은 라디트가 충분히 고통을 경험한 후 차라리 죽음을 갈구할 때, 직접 목숨을 거둘 생각이다.
“내 처사가 잔인하다고 생각해?”
쥬웰은 유스넨에게 물었다.
유스넨은 곧바로 답했다.
“……아니. 전혀요.”
유스넨의 음성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누나가 당했던 일에 비하면 어떤 고통을 주어도 부족합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쥬웰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야.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
쥬웰은 시선을 돌렸다.
저 밑에서는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라디트가 사라진 후, 혁명군과 사파이어가의 기사 간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라디트가 괴물이 되어 사라졌고, 쥬웰이 은밀히 흑마법으로 도움을 주어 전장은 일방적으로 혁명군의 우세였다.
사파이어 기사들의 비명이 끝없이 퍼졌다.
‘기사 중 지금껏 죄악을 저지른 악인들 위주로 희생되게 흑마법으로 조정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일은 절대로 옳다고 할 수 없지.’
쥬웰은 빤히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넌 그런 나를 처단하는 게 옳지 않아?”
유스넨은 미간을 찌푸렸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게는 세상 모두의 목숨보다 당신 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른 이들 따위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닙니다.”
유스넨이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당신을 도와 복수를 이루고 반드시 당신을 구원하고 말 겁니다.”
광휘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에 쥬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 유스넨의 타천을 막을 수 있을까?’
유스넨은 그녀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 타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특히 오늘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을 처리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기도 했다.
쥬웰 홀로 끔찍한 일을 하게 놔두지 않겠다며, 조력을 준 것이다.
덕분에 유스넨의 이마에 새겨진 역십자가 더욱 짙어진 게 보였다.
쥬웰은 고개를 젓고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입 맞춰줄 수 있어?”
대답 대신, 유스넨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유스넨을 느끼며, 쥬웰은 다짐했다.
‘절대 널 타천하게 놔두지 않겠어. 반드시.’
* * *
라디트의 괴물화.
사파이어가의 대패.
이 두 소식은 제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경악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갔다.
“전군 진군! 제국 백성들을 고통에서 해방하겠다!”
필바하가 이끄는 혁명군이 제국을 향해 검을 빼 들었다.
이제 혁명군은 과거의 오합지졸 군대가 아니었다.
로든 왕국군을 흡수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문제는 혁명군뿐이 아니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지금껏 고통받던 백성들이 혁명군에 호응하여 한꺼번에 일어선 것이다.
“와아! 여섯 공작가를 무찌르자!”
심지어 황태자 오펜하임이 이 반란을 지지하였다.
-나 오펜하임은 셀레네 황가를 대표하여 그대들의 의지에 경의를 표하노라.
대혼란의 시작이었다.
이 모든 건 쥬웰의 의도대로였다.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토른 전 공작이 기가 질린 얼굴로 쥬웰에게 물었다.
“말했잖아요. 전 다른 여섯 공작가를 모조리 몰락시킬 계획이라고요.”
쥬웰은 차분히 차를 마시며 답했다.
“제가 지금껏 성녀로서 쌓은 업적 때문에 백성들은 우리 가넷을 적대하지 않을 거예요. 도리어 절 의지하겠지요.”
이것 또한 쥬웰이 의도한 바였다.
쥬웰은 민중 반란을 계획하며, 미리 사람들을 선동했다.
가넷의 성녀인 쥬웰이 새 시대를 열어줄 거라고.
그러니 그녀를 믿고 따르라고.
그래서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은 쥬웰을 자신들의 정신적 지도자를 여기고 있었다.
“……백성들의 힘을 손에 쥐고 휘두르겠다는 거구나.”
“빙고, 맞아요. 전 이 반란을 이용해 다른 가문을 모조리 무너뜨릴 거예요.”
여섯 공작가로 한꺼번에 지칭하지만, 백성들이 원한을 가진 가문은 그중 다이아, 에메랄드, 사파이어, 가넷이었다.
페리도트와 아메티스트는 민중들의 삶과 큰 관련이 없었으니까.
그중 이미 사파이어는 몰락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가넷은 쥬웰 덕분에 이미지 쇄신을 해서 원성을 벗었으니 남은 건, 다이아, 에메랄드였다.
“원래라면 고작 힘없는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다이아와 에메랄드가 흔들릴 일은 없지만, 이제 그들도 원래의 다이아와 에메랄드가 아니니까요.”
쥬웰이 지금껏 해낸 일로 그들은 날개 꺾인 독수리 신세였다.
다이아는 쥬웰에게 2억 골드를 갚아야 해 파산 직전의 신세였으며, 에메랄드는 리델하트가 때에 맞춰 일으킨 종교 개혁으로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쥬웰은 사랑스럽게 토른 전 공작의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지켜보세요.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제국에는 우리 가넷만이 빛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쥬웰은 시선을 돌렸다.
“라이져 경.”
“네, 공작 전하.”
“병사들을 이끌고 다이아가를 점거하도록. 그리고 다이아가의 모든 재산을 압류해.”
“……!”
라이져는 놀라 물었다.
“다이아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무슨 상관이야?”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해 이런 반란이 일어나게 한 책임을 물어야지. 아직 받지 못한 2억 골드의 배상금은 물론, 모든 재산을 뺏어. 백성들에게 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매리엇의 모든 걸 뺏어 백성들을 달래겠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쥬웰을 칭송할 거고.
‘매리엇은 완벽히 거지가 되겠지.’
쥬웰은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원수마다 각자 바라던 결말이 있었다.
권력을 바라던 로튼은 모든 권좌를 잃고 밑바닥에 떨어져 가장 미천한 노예가 되게 하였고.
성녀가 되길 바라던 플랑드나는 본색을 드러내 백성들의 돌팔매를 받는 추악한 마녀가 되게 하였으며.
명예를 중시하던 라디트는 혐오스러운 괴물이 되어 모두의 멸시를 받게 했다.
이제 매리엇 차례였다.
그녀는 모든 부를 잃고, 비참한 거지가 되어 뒷골목을 전전하며 비참한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굶주림에 남이 먹다 남긴 오물을 뒤지는 처지가 될 것이다.
“다이아가의 재산 중 단 한 푼도 남겨두지 마. 매리엇이 걸칠 옷 한 벌만 남겨두고 모든 걸 압류해.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라이져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고, 토른 전 공작이 왜인지 염려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괜찮은 거냐?”
“왜 그러세요?”
토른 전 공작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굴이 좋지 않아서 말이다.”
“네?”
‘내가 그렇다고? 다 잘 풀리고 있는데?’
쥬웰은 집히는 게 있었다.
‘걸리는 게 있긴 하지.’
첫째. 엔리크 자작의 문제였다.
곧 그가 도착한다.
설마 그가 정체 모를 원수는 아닐 거로 믿지만, 그래도 희미하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둘째.
‘유스넨의 타천을 막아야 해.’
쥬웰의 눈빛이 짙어졌다.
더는 놔둘 수가 없었다.
이제 손을 쓸 때가 되었다.
* * *
한편 그때, 유스넨은 페리도트가의 고성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난 과연 그녀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녀가 유스넨의 행복을 바라듯.
그도 그녀의 구원을 바란다.
‘에덴에서는 가능하다고 했어. 하지만 과연 이 방법이 맞는 걸까?’
그는 지금 쥬웰의 죄과를 나눔으로 그녀를 구원하는 기적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에덴에서 대답까지 들었지만, 옳은 방법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
유스넨은 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아.”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음성이 들렸다.
[한심한 놈.]
“……!”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빛에 휩싸인 천사가 보였다.
베른힐트였다.
유스넨은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놈이 하고 있는 일이 답답하여 왔다. 넌 고작 그런 방법으로 그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가?]
유스넨은 주춤하였다.
“그녀의 죄과를 줄임으로써 그녀의 붕괴하는 영혼을 되살릴 수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미 대천사장들에게 확인까지 한 이야기다.
[확실히 네 계획대로라면, 그녀의 소멸은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네?”
베른힐트가 조소를 지었다.
[고작 소멸을 피하는 것. 그걸 과연 진정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녀의 앞에 예정된 운명을 생각하면 그녀에게는 차라리 죽음이 자비일 것이다.]
“……!”
유스넨의 목덜미가 딱딱해졌다.
“도대체 그녀에게 어떤 운명이 예정된 겁니까? 그녀가 하려는 복수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그래.]
베른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으로 그녀를 구원하길 바란다면 넌 그녀의 복수를 막아야 해. 그녀는 복수의 끝에서 파멸하게 될 테니까.]
“……!”
[조금 더 정확히 말해주지. 그녀는 복수의 끝에서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거고, 그 진실이 그녀를 파멸하게 할 것이다.]
유스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복수에 무슨 진실이 숨어 있길래?
“도대체 그 진실이 무엇입니까? 혹시 그녀가 모르는 원수들의 정체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니, 고작 그런 게 아니다.]
베른힐트는 피식 웃었다.
[고작 그런 거였다면, 베스윈 님이 그렇게 타천까지 할 필요 없었겠지.]
“…….”
[자세한 건 말할 수가 없어. 어차피 그녀가 걷는 복수의 길의 끝에서 모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베른힐트는 씁쓸히 말하였다.
[하지만 나는 너와 그녀가 이 진실을 알지 못하였으면 하는군. 너무 잔혹하기에.]
베른힐트는 잔혹하게 덧붙였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났음을, 자신의 영혼이 지음 받았음을 신께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미치거나,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지.]
“…….”
유스넨의 몸이 덜덜 떨렸다.
너무 끔찍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바로 너다.]
“……무슨 말입니까?”
베른힐트는 주저하더니, 결심을 굳힌 후 말을 이었다.
[넌 신께서 그녀를 위해 예비한 조커이니까.]
유스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커.
카드 게임에서 법칙을 무시한 패를 뜻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원래 베스윈 님을 비롯한 우리는 너를 그녀를 처단할 운명을 타고난 대적자로만 여겼어. 네가 부여받은 신탁의 내용을 생각하면, 그게 당연한 판단이었지.]
베른힐트는 아리송한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네가 이토록 그녀를 위하는 모습을 보니, 다른 생각이 드는군. 어쩌면 너란 존재는 신께서 그녀를 가련히 여겨 마련해 둔 희망의 가능성이 아닐까 하는.]
그 말이 끝난 다음이었다.
베른힐트가 왈칵 피를 토하였다.
금제에 반작용이 온 것이다!
“베른힐트 님?!”
[……괜찮아. 이 정도는…… 크윽.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유스넨은 이를 악물었다.
베른힐트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지만, 그녀를 배려해 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구원할 단서를 하나라도 더 얻어야 했다.
베른힐트는 광소를 흘렸다.
[참고로 말하면 그녀가 맞을 운명은 아주 오래전, 무려 300년 전에 예비되었던 것이다. 그건 이제 짐작하고 있겠지?]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스윈과 라플 공작의 이야기를 토대로 짐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이야기하였으니까.
[300년 전 그녀의 운명이 결정된 이후, 신탁이 내려왔다. 바로, 후대에 그녀를 처단할 이를 예비하겠다는 신탁이었지.]
금제에 걸리는 이야기인지, 베른힐트는 다시 왈칵 피를 토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 베스윈 님과 나는 그 신탁을 받고서 이해할 수가 없었어. 신께서는 분명히 그녀를 가련히 여겼는데, 왜 그런 신탁을 내린 거지? 왜 그녀를 처단하기 위한 대적자를 예비한 걸까?]
“…….”
[지금도 신의 뜻은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어.]
“무엇입니까?”
[신께서는 그녀를 가련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것.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베른힐트가 안타까운 얼굴을 하였다.
[따라서 신이 그녀를 해하려고 그런 신탁을 내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내 짐작이야. 결국, 너에게 내려온 신탁은 그녀를 위한 신의 안배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특히 그녀를 위하는 너의 모습을 보면 더더욱.]
베른힐트는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건 너는 신께서 마련한 유일한 ‘변칙’이야. 그녀가 맞을 운명에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는. 300년 전 그녀의 운명이 예비 되었을 때, 너라는 존재는 전혀 계산에 있지 않았어. 갑자기 신께서 너를 끼워 넣은 거야. 즉, 유일한 변칙인 거지. 희망일지 모르는.]
유스넨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희망일지 모르는, 유일한 변칙.
그 말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그 말은…….”
[그래, 네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그녀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거야.]
유스넨은 침묵했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많았다.
도대체 그녀의 복수의 끝에 어떤 참혹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는 건지.
어떻게 하면 자신이 그녀를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건지.
명확히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걸 알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자신이 그녀를 구원할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그녀를 구원하는 게 가능하단 거야.’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옅은 희망이라도 반드시 거머쥐고 말 테니까.
[어쨌든 내 말을 명심하도록.]
“……감사합니다.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왜 제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겁니까?”
[호의가 아니야. 난 여전히 널 싫어한다.]
“그런데?”
[내가 이러는 건…… 베스윈 님 때문이다.]
“베스윈 때문이라고요?”
[베스윈 님이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그러니 조력을 주는 것이다. 어쨌든 더 묻지 말도록.]
베른힐트는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유스넨은 복잡한 얼굴을 하였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어서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복수를 어떻게?’
하지만 그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유스넨.”
“……!”
쥬웰이 찾아온 것이다.
유스넨은 순간 긴장했다.
쥬웰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한없이 딱딱하면서 아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누나?”
“부탁이 하나 있어서 왔어.”
두근.
유스넨의 심장이 불길함에 물들었다.
“날 위해 죽어줄 수 있어?”
* * *
빛과 함께 사라진 베른힐트는 에덴의 틈새 근처로 이동했다.
그런데 에덴으로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마치 두렵다는 듯.
곧이어 놀라운 무리가 등장했다.
여섯 장의 날개.
대천사장들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대천사장들 모두 싸늘한 눈빛으로 베른힐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베른힐트가 커다란 죄를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가 저지른 죄를 알겠지요, 베른힐트?]
베른힐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금기를 어겼습니다.]
[…….]
대천사장들은 무겁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운명은 300년 전부터 계획된 것. 우리는 그 운명이 예정대로 이루어지게 이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스넨에게 그런 말을 한 겁니까? 그녀의 죄과를 나누면 그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새빨간 거짓말 아닙니까?]
[…….]
대천사장들은 침묵하였다.
베른힐트의 말이 맞다는 거였다.
[그게 그녀에게 정해진 운명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변곡점이 생기면 당신은 그 잘못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건 옳은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대답해 보십시오.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 그게 진정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대천사장들이 술렁였다.
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옳은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게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우린 정의를 수호하는 천사로서 모두를 위할 의무가 있습니다.]
베른힐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전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애석하군요. 결국, 베스윈과 같은 길을 가겠다니.]
대천사장들은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중 한 명이 손을 뻗었다.
[더 할 말은?]
베른힐트는 대답 대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대천사장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빛의 성창(聖槍)이 베른힐트를 꿰뚫었다.
* * *
쥬웰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무심한 척하지만 유스넨은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픔을 느낀 순간,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려왔다.
“……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요.”
유스넨은 잔잔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쥬웰은 표정을 풀고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며칠간 시간을 내줄 수 있어?”
“시간 말입니까?”
“응, 너와 가보고 싶은 곳이 있거든. 여행도 하고.”
마음 편히 여행할 상황은 아니긴 했지만, 유스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하죠.”
쥬웰과 유스넨은 제국이 혼란에 뒤덮인,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 여행을 떠났다.
쥬웰은 정확히 어떤 용무인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듯, 유스넨과 최대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하였다.
“저거 어때? 우리 저것도 먹어볼까?”
마치 평범한 연인이 데이트하듯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했고, 여행길 중간중간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하였다.
“이렇게 있으니 좋네.”
그녀는 인적 없는 산길에 마차를 세운 후 유스넨과 함께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와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군요.”
어딘지 어두운 그의 음성에 쥬웰은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넌 좋지 않은가 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유스넨은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똑바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좋습니다. 영원히 이렇게 함께 있고 싶을 정도로요.”
영원히.
그 단어가 그녀의 심장을 아프게 건드렸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억지로 웃었다.
“입 맞춰 줘.”
“…….”
“어서.”
재촉에 유스넨의 얼굴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너무나 소중해 감히 닿기 주저된다는 듯, 희미하게 그의 입술이 떨렸고, 천천히 부드러운 감촉이 와 닿았다.
부드럽게 시작한 입맞춤은 금세 뜨거웠다.
열정적인 불길로 변하였고, 둘은 정신없이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유스넨은 왈칵 가슴이 흔들렸다.
이렇게 영원히 있고 싶다.
놔주고 싶지 않아.
차라리 날개를 꺾어서라도.
그런 갈망이 그의 가슴에 차올랐고, 그는 안타까움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불렀다.
“……누나.”
하지만 유스넨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걸까.
“그만.”
그녀는 유스넨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마. 그냥 지금은 널 느끼고만 싶어.”
유스넨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더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눈물을 잔뜩 머금고 일렁이고 있었던 탓이다.
“사랑해.”
그녀가 유스넨의 귓가에 속삭였다.
뚝.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려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
“정말. 내가 정말로 널 많이 사랑해. 넌 내게 가장 소중한 흰 강아지야.”
유스넨은 질끈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고백이었다.
이후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진, 종유석 동굴.
유스넨을 봉인하기 위해 쥬웰이 준비해 놓은 장소였다.
* * *
“이곳은?”
유스넨의 얼굴이 굳었다.
동굴에 새겨진 마법진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정해진 상대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는 저주의 마법진이었다.
“그래, 널 봉인하기 위한 장소야.”
“제가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쥬웰은 그를 달래듯 말하였다.
“유스넨, 어쩔 수 없어. 이대로 내 옆에 있으면 넌 타천할 거야. 영겁의 고통에 떨어질 거라고.”
“누나는요?”
유스넨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당신이야말로 절 봉인 후,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질 생각인 것 아닙니까! 혼자 파멸할 생각 아닙니까!”
그 외침에 쥬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했잖아. 이대로라면 넌 타천해 게헨나에 떨어질 거라고!”
타천한 천사의 말로는 하나였다.
게헨나에 떨어져 억겁의 고통을 받게 된다.
일전 그녀가 받았던 것처럼.
“전 상관없습니다.”
“내가 상관없지 않아!”
쥬웰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였다.
“네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데. 그런 네가 게헨나에 떨어져 영겁의 고통에 빠지는 걸 내가 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설사 그래서 내가 소멸을 피한다고 해도, 그게 내게 구원이겠냐고!”
쥬웰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게 나한테 더욱 잔인한 일이란 걸 왜 모르는 거야, 이 바보야!”
유스넨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누나.”
“절박한 건 너뿐이 아니야. 나도 널 사랑해. 네가 파멸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쥬웰은 애원하듯 말하였다.
“그러니 부탁이야. 제발 내 말을 들어 이대로 봉인되어줘.”
유스넨은 입안 속살을 질끈 깨물었다.
‘제길. 빌어먹을!’
어째서 그들은 이따위의 운명을 타고났단 말인가?
서로의 앞에 놓인 운명이 너무 잔혹했다.
“죄송합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것만은 따를 수 없습니다.”
이대로 봉인되면 그녀를 위할 방법도 없어진다.
유스넨은 결연한 얼굴로 심판의 검을 꺼내 들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번만큼은 당신에게 적대하겠습니다.”
파아앗!
심판의 검이 빛을 내었고, 그의 등 뒤로 네 장의 날개가 펼쳐졌다.
완전히 쥬웰과 맞설 각오를 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성유물이 유스넨의 주위로 떠올랐다.
유스넨은 아무런 생각 없이 쥬웰을 따라온 게 아니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 직감하고 만반의 태세를 하고 왔다.
쥬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시 한번 묻겠어. 정말 뜻을 돌이킬 생각이 없어?”
“네, 절대로요. 당신을 위해서 전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이번엔 최선을 다할 거니, 지난번과 같을 것으로 생각하진 마십시오.”
쥬웰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성배 사건 때 유스넨은 적극적으로 쥬웰과 맞서지 않았다.
덕분에 손쉽게 무릎 꿇릴 수 있었지만, 이번엔 분위기가 달랐다.
성유물까지 동원하였으니 아무리 쥬웰이라도 그를 쉽사리 상대할 수 없었다.
‘어쩌면 봉인에 실패할지도.’
봉인은 쉬운 게 아니었다.
차라리 단순히 목숨을 거두는 거면 쉽다.
하지만 상대를 살아 있는 채로 완전히 제압해야 가능하니, 유스넨이 저런 식으로 나오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돌연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좋아. 네 뜻이 그렇다면.”
쥬웰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굴에 새겨져 있던 마법진이 섬뜩한 빛을 내었다.
곧 다가올 충격에 유스넨이 방어 태세를 취하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마법진의 빛이 유스넨이 아닌 쥬웰을 향한 것이다.
저주의 빛에 휩싸인 쥬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무슨?! 누나!”
“……서, 선택해.”
쥬웰이 파르르 떨리는 몸으로 떠듬떠듬 말하였다.
“이건 영혼을 파훼하는 게헨나의 저주. 이대로라면 내 영혼은 이 자리에서 소멸하게 될 거야. 네가 봉인되지 않으면 난 이 빛을 거두지 않겠어.”
“……!”
유스넨의 얼굴이 참혹하게 무너졌다.
“어,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까지.”
“마, 말했잖아.”
쥬웰이 왈칵 피를 토하였다.
“난 네가 파멸하지 않기를 바라.”
그녀와 유스넨이 바라는 건 같았다.
서로가 구원받는 것.
하지만 양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이런 걸 제가 바랄 것 같습니까?”
유스넨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쥬웰은 마주 가슴이 저렸다.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그녀도 알았다.
이건 유스넨이 바라는 일이 아니란 것을.
그에게 가장 잔혹한 처사란 것을.
“……그런 건 상관 없어.”
쥬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스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쥬웰은 그의 입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래도 난 네가 파멸하지 않기를 바라.”
유스넨의 주위로 검은 줄이 생겨났다.
그를 봉인할 어둠의 줄이었다.
“……전,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쥬웰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유스넨은 여전히 눈물 흘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었다.
“설사 봉인된다고 하더라도, 전 반드시 당신을 구원할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그 순간.
쥬웰이 모르는 일이 일어났다.
유스넨의 심장 속.
어둠의 씨앗이 시커먼 입을 벌렸다.
타천사 베스윈이 심어놓았던 씨앗이었다.
유스넨이 맹세하듯 말하였다.
“기다리고 계십시오.”
베스윈이 심어놓은 씨앗이 쥬웰이 펼치는 봉인의 기운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게.
* * *
봉인이 끝났다.
쥬웰은 덜덜 떨리는 몸으로 동굴을 빠져나왔다.
힘이 빠져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흐윽. 끄윽. 끅.”
그녀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유스넨과의 만남은 이제 마지막이다.
봉인이 풀려 그가 세상에 돌아올 때쯤에는 그녀는 이미 소멸하여 사라지고 없으리라.
‘왜, 왜 나는 이렇게…….’
이 빌어먹을 운명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지도 못하고, 이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이 너무나 잔인했다.
‘왜 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까? 신이여.’
단 한 번도 신을 원망한 적 없는 그녀였지만, 이 순간은 묻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하면서 어째서 이런 고통을 내렸는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만약 신께서 바라셨다면 얼마든지 그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었을 텐데.
‘신께서 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하지만 왜? 왜 어째서 조금의 자비도?’
넋을 잃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을 때였다.
“괘, 괜찮니?”
쥬웰의 등줄기에 섬뜩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마치 천적을 마주친 것처럼 입이 바짝 말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쥬웰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린애처럼 귀여운 외모.
하지만 광기가 흐르는 보랏빛 눈동자.
지상 최악, 최강의 존재 라플 공작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라플 공작, 무슨 일인가요?”
쥬웰은 애써 태연한 척했다.
‘하필 최악의 상황에.’
방금 그녀는 유스넨을 봉인하며 막대한 힘을 소모한 상태다.
그런데 그녀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맞서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라플 공작을 만나다니.
‘제발, 별일 없이 넘어가길.’
하지만 그 바람은 불행히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라플 공작의 눈동자에 위험한 광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많이 히, 힘든 것 같구나. 역시 가만히 두면 안 되었어. 결국, 이렇게 되었잖아.”
“……?”
“고, 공주님. 네게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넌 지금 복수를 바라고 있지? 그…… 게, 게헨나로 끌려가기 전 시절의 복수를.”
“……!”
쥬웰은 호흡을 멈추었다.
하지만 금방 진정했다.
라플 공작 정도 되면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아는 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복수를 멈출 수는 없어?”
“……뭐라고요?”
“넌 그 복수의 끝에서 완벽하게 파멸하게 될 거야.”
쥬웰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야. 넌 네가 지금 이런 고통을 겪는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라플 공작은 괴이한 웃음을 지었다.
광대처럼 기괴하며, 동시에 울음을 참는 것 같은 기이한 웃음이었다.
“이상하지 않아? 네가 지금껏 겪어야 했던 고통. 너무 심하잖아. 마치, 세상의 모든 불행을 한 몸에 억지로 욱여넣은 것처럼. 심지어 너는 이토록 찬란한 영혼을 타고났는데 말이야.”
쥬웰은 뭐라 답하지 못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어째서 이토록 커다란 불행을 타고났단 말인가?
물론, 그녀 말고도 불행을 겪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찬란한 영혼을 지닌 성인들이 삶을 살며 고난을 겪더라도, 결국 궁극적으로는 보상을 받게 되는 것과 다르게 그녀는 게헨나에 떨어지기까지 했다.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산 것뿐만 아니라, 죽어서 지옥에서 고통받았으며, 지금도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제는 영원한 소멸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쥬웰의 분위기가 스산해졌다.
상대는 라플 공작.
최강자이자, 세상의 진실에 누구보다 가까운 이다.
가볍게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내 불행이 누군가 의도한 거란 건가?”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어. 금지된 일이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하나야.”
라플 공작은 처연하게 말하였다.
“네게 예정된 불행은 아직 끝이 아니란 것. 네가 걷는 복수의 길 끝에서 넌 완벽한 파멸을 맞이하게 될 거야.”
“……!”
라플 공작이 미친놈처럼 낄낄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넌 자신이 태어났음을, 영혼이 지음받았음을 원망하게 될 거야! 신을 저주하게 될 거라고!”
그 끔찍한 말에 쥬웰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거짓말이 아니란 걸 느꼈다.
“네가 그 끔찍한 운명을 피할 방법은 단 하나야. 여기서 멈추는 것.”
“뭐?”
“그러니 부탁이야. 이만 복수를 멈춰줘.”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라플 공작이 놀랍게도 쥬웰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라플 공작은 양손을 쥬웰 앞에 모으고 싹싹 빌며 애원했다.
“제발, 이렇게 빌게. 난 네가 그런 운명을 맞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어. 대신, 내가 널 행복하게 해줄게. 난 널 위해 무려 300년이나 기다렸어. 내 힘이면, 네 소멸도 어떻게든 피하게 할 수 있을지 몰라. 그러니, 제발 내 말에 따라줘.”
쥬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혼란스러웠다.
“……하나만 묻지. 넌 나와 정확히 무슨 관계이지?”
라플 공작은 첫 만남부터 그녀에게 이해할 수 없는 애정을 보였다.
혹시나 그녀가 에스텔레인 것을 알고 그런 건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라플 공작은 그녀를 보며 에스텔레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스윈처럼.’
타천사 베스윈도 그랬다.
에스텔레 시절 베스윈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반응이었다.
라플 공작과 베스윈 모두 그녀에게서 다른 인물을 보고 있었다. 마치 이전에 인연이 있었다는 듯.
“그, 그건 말해줄 수 없어. 그걸 말해주면 너에게 어떤 파멸이 예정되어 있는지 반쯤 말해주는 것과 같은 거라 금기를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야. 봐.”
라플 공작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쿨럭! 커억.”
와락 피를 토하였다.
금제에 반작용이 온 것이다.
그 모습에 그녀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라플 공작에게 저런 수준의 금제를 걸다니?’
원수들에게 금제가 걸린 건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상을 지배하는 권력자였지만,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라플 공작은 초월자였다.
그것도 1품 대천사장과 1품 대악마와 맞서도 밀리지 않는 강력한 초월자.
도대체 누가 저런 금제를 걸 수 있다는 말인가?
“공주님, 내가 너와의 관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야. 과거, 난 너를 아주 많이 미워했어.”
“미워했다고?”
“응, 너무 소중했거든. 너무 소중하고, 아껴서 너 없이는 살 수가 없는데. 넌 너무 제멋대로였어. 지켜보는 이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최악의 선택을 했어.”
라플 공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렇게나 날 아프게 했잖아. 무려 300년이나. 지금도 이렇게 아픈데, 네가 예정된 파멸을 맞게 되면 난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야.”
“…….”
쥬웰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해봤자 난 너를 전혀 몰라.”
“히히, 알아. 상관없어.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 건 전혀 아니니까. 난 그저 네가 파멸을 피하길 바랄 뿐이야. 그러려고 300년 동안 죽지 않고 너를 기다려 온 거고.”
라플 공작이 다시 애원했다.
“그러니 제발 모든 걸 버리고, 나와 함께 떠나자. 아예 다른 세상으로 가버리는 건 어때? 널 최고로 행복하게 해줄게. 지금까지 있었던 상처는 모두 잊히도록 최고의 최고의 행복만 줄게.”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어.”
“……힘들어?”
“……그래. 난 복수를 포기할 수 없어.”
복수의 끝에 도달하면 어째서 파멸하게 된다는 건지.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지 모르지만, 그녀는 멈춰 설 수 없었다.
아니, 도리어 그 숨겨진 비밀을 알기 위해서라도 운명에 맞서야 했다.
‘날 농락한 운명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어.’
쥬웰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라플 공작이 말한 대로라면, 그녀가 겪었던 불행은 자연적인 게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한 것.
그렇다면 그녀를 농락한 이가 누구인지도 알아내야 했다.
누군지 알아내서 파멸시켜야 복수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안 돼? 응?”
“……그래.”
“……그렇구나.”
라플 공작이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라플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쥬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라플 공작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소름 끼치는 광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조금 널 아프게 하더라도, 강제로라도 널 행복하게 만들 수밖에. 히히.”
‘위험!’
쥬웰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라플 공작의 머리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쥬웰이 마기를 움직여 라플 공작을 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라플 공작은 쓰러지지 않았다.
피에 젖은 채 광적인 웃음을 흘렸다.
“히히, 너에게 최고의 행복만 줄 거야.”
이를 악물고 다시 힘을 움직였다.
뜻밖에 라플 공작은 이번에도 속수무책으로 공격에 당했다.
이번엔 더욱 강력한 마기를 움직였기에 아예 머리가 사라져 버렸다.
라플 공작의 몸체는 기우뚱하더니 털썩 쓰러졌다.
‘해치웠나?’
쥬웰은 숨을 몰아쉬었다.
‘인간’이라면 저런 상처를 입고 살아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과연.
저벅.
발소리가 울렸다.
“히히, 역시 우리 공주님. 300년이 지났어도 손이 맵구나. 방금 건 아팠어. 그래도, 난 공주님의 공격이면 다 좋지만.”
멀쩡한 몸의 라플 공작이 나타났다!
쥬웰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영혼 전이.’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라플 공작의 몸은 두 개였다.
방금 쥬웰이 공격해 머리를 잃고 쓰러진 몸체.
그리고 새롭게 나타난 몸체.
“미리 준비한 새로운 몸으로 갈아탄 건가?”
라플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더미를 미리 넉넉히 준비해 놨거든. 300개쯤 되나? 아무리 날 죽여도 소용없을 거야.”
기가 질리는 이야기였다.
직감적으로 이길 수 없는 예감이 들었지만, 쥬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 간단하군.”
쩌적.
쥬웰의 등에서 날개가 솟아올랐다.
1품 대악마의 격을 상징하는 여섯 장의 날개였다.
“300번 널 죽이면 될 테니.”
냉랭한 음성에 라플 공작은 몽롱한 얼굴을 하였다.
“……똑같아.”
“뭐?”
“네 경멸하는 눈빛. 그리웠다고.”
쥬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죽어.”
라플 공작의 몸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하지만 라플 공작은 멈추지 않았다.
“네 모든 게 그리웠어.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를 거야.”
라플 공작의 눈에서 피 섞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 네가 주는 이런 고통조차 기쁠 정도로. 널 기다렸어.”
“허억, 헉.”
쥬웰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몇 번이나 해치웠지?’
셀 수 없었다.
이미 주변은 라플 공작의 더미들이 흘린 피로 가득 차 있었다.
족히 200번 이상은 쓰러뜨린 것 같지만.
“많이 힘든 것 같아. 괜찮아?”
다시 라플 공작이 나타났다.
처음과 똑같은 광기 어린 눈동자로.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이제 힘이 없어. 더는 버틸 수 없어.’
쥬웰은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만약 그녀가 최상의 상태였다면, 이렇게 빨리 힘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그녀는 영혼이 붕괴하며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유스넨을 봉인하느라 막대한 힘을 쓴 게 치명적이었다.
‘일단 시간을 끌어 힘을 회복해야 해.’
대화로 시간을 벌어볼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왜 방어하지 않는 거지?”
지금껏 라플 공작은 일체의 방어도 없이 그녀에게 다가오기만 하였다.
그녀에게 어떤 공격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듯. 아니, 심지어 조금은 기뻐 보이기도 하였다.
“이 고통도 공주님이 주는 거잖아.”
“뭐?”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공주님이 주는 건데 감사하게 받아야지. 난 공주님이 주는 거면 뭐든 다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거든, 히히.”
괜히 물어봤다.
라플 공작이 더욱더 괴물처럼 느껴졌다.
쥬웰은 필사적으로 힘을 발현했고, 라플 공작은 다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였다.
지나친 힘의 발현에 속이 울렁거려 헛구역질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귓가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
라플 공작이었다.
그가 그녀의 바로 등 뒤에 나타나 있었다.
‘언제?’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라플 공작이 빨랐다.
강한 압력이 그녀의 몸을 뒤덮었고,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큭!”
그녀가 외마디 신음을 흘리자, 라플 공작이 안절부절못하였다.
“아, 아파? 밑에 마법으로 쿠션 깔아 최대한 안 아프게 하려고 했는데.”
라플 공작의 말대로 그녀가 쓰러진 바닥에는 바람으로 만든 쿠션이 깔려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제길.’
자신을 짓누르는 압력에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힘을 소모할 대로 소모한 상태로 불가능했다.
“날 그렇게나 생각하면 꺼져. 내버려 두라고.”
쥬웰이 이를 갈며 으르렁댔다.
하지만 라플 공작은 처연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 그럴 수 없어. 네가 또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걸 볼 바에는 차라리 너에게 영원히 미움받는 게 나을 테니.”
라플 공작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쥬웰은 아찔한 소름이 돋았다.
라플 공작이 그녀의 영혼의 날개를 잡은 것이다.
“너 설마?”
영혼의 날개를 봉인하려는 것이다.
“하지 마! 제발!”
영혼의 날개가 묶이면, 모든 힘을 잃게 된다.
라플 공작이 괴로운 얼굴을 하였다.
“나, 나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 최, 최대한 아프지 않게 할게.”
라플 공작이 힘을 끌어올렸다.
더미를 상대하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그녀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과한 힘을 끌어 올린 건지, 라플 공작의 안색이 하얘졌다.
“고, 공주님의 힘이 너무 강해서 나도 힘이 드네. 최대한 완벽하고, 하나도 안 아프게 힘을 묶어야 하니까. 그래도, 빨리 끝내줄게.”
‘안 돼!’
저 마법이 완성되는 순간, 끝이었다.
눈앞이 컴컴해져 어떻게든 발악하려는 순간이었다.
“어?”
라플 공작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검 한 자루가 라플 공작의 가슴을 꿰뚫고 앞으로 솟아 나와 있었다.
파시식, 라플 공작이 끌어올리던 마법의 힘이 흩어져 사라졌다.
“심판의 검?”
“……그래.”
유스넨이었다.
쥬웰은 그의 등장에 놀랐다.
‘어떻게? 봉인했는데?’
무슨 수를 쓴 건지, 봉인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도망가! 어서! 라플 공작은 네 상대가 아니야!”
쥬웰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유스넨은 물러서지 않았다.
“나 대리자가 명하니, 그릇된 이를 속박하라!”
봉인형 성유물이었다.
투명한 빛의 밧줄이 라플 공작의 몸을 얼기설기 묶었다.
성유물은 여러 신비한 능력이 담긴 에덴의 보구.
에덴의 힘으로 라플 공작이 죽어도 다른 더미로 영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라플 공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장이 꿰뚫린 상태에서도 고개를 돌려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넌 내가 손속에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지.”
라플 공작은 시커멓게 웃었다.
“지난번처럼 요행은 기대하지 마. 이미 난 공주님과 한 맹세의 맹약을 풀어버린 상태니까.”
라플 공작의 손에 붉은빛이 모여들었고, 그 빛은 곧바로 유스넨을 강타했다.
“……!”
커다란 타격을 입은 듯 유스넨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라플 공작이 히죽 비웃음을 지었다.
“자, 물러가. 안 그러면 널 산산이 찢어 죽일 테니.”
하지만 유스넨은 와락 이를 깨물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다시 심판의 검으로 라플 공작을 찔렀다.
“……너?”
라플 공작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저리 꺼지라고!”
다시 빛의 무리가 유스넨을 강타했다.
아까보다 더욱 강렬해 보이는 공격이었다.
“안 돼!”
하지만 유스넨은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공격을 감당했다. 입에서 피가 왈칵 솟아 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라플 공작을 심판의 검으로 찔렀다.
“너…… 너?”
라플 공작의 몸도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가! 가라고!”
무참한 난타전이 이어졌다.
라플 공작은 어떻게든 유스넨을 떨쳐내려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유스넨은 그 공격을 그대로 몸으로 감당했다.
그리고 묵묵히 심판의 검으로 라플 공작을 찔렀다.
라플 공작의 몸에서 급속도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심판의 검은 에덴의 힘이 깃든 검.
따라서 영혼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준다.
지금 라플 공작은 단순히 더미가 상처 입는 게 아닌, 영혼이 상하고 있었다.
“이이익!”
라플 공작이 필사적으로 힘을 끌어 올렸다.
전력을 다해 단번에 유스넨을 죽이려는 공격이었다.
위기를 직감했는지 유스넨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고 마주 힘을 끌어올렸다.
눈이 멀듯 밝은 성투기가 심판의 검에 깃들었다.
“소용없어! 내가 더 빨라!”
라플 공작이 두려운 벌레를 떨치듯 허겁지겁 공격을 펼쳤다.
그 말처럼 심판의 검이 닿기 전, 라플 공작의 공격이 유스넨의 목숨을 끊을 것이다.
덥석.
그런데 하얀 손이 라플 공작의 손을 붙들었다.
“어?”
“날 잊지 않았나?”
쥬웰이었다.
그녀가 시커먼 흑암, 흑요석의 빛으로 뒤덮인 눈동자로 라플 공작을 꿰뚫어 보았다.
“죽여.”
그 말과 함께 유스넨의 검이 라플 공작의 심장을 다시금 꿰뚫었다.
라플 공작의 눈동자의 빛이 완벽하게 꺼졌다.
* * *
라플 공작은 쓰러졌다.
‘완전히 죽은 건 아니야. 마지막 순간, 영혼이 빠져나갔어.’
그래도 타격을 심각하게 입었으니 당분간은 등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복수가 마무리될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문제는 다른 거야.’
‘넌 네가 지금 이런 고통을 겪는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쥬웰은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 불행이 누군가 의도한 거라고? 도대체 누가?’
누군가 그녀의 운명을 쥐고 흔들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는 거의 없었다.
일단, 필멸자는 불가능했다.
‘설마 신께서?’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신은 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면 에덴의 누군가?’
쥬웰의 심장이 싸늘히 굳었다.
이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었다.
에덴의 천사들은 신의 종들이다.
하지만 인간이 모두 제각각이듯 천사들도 각자 생각이 있고, 행동 방향이 달랐다.
무엇보다 에덴은 지금껏 그녀의 고통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게헨나에 끌려갈 때도 말이다.
‘하지만 왜? 에덴의 천사들이 내게 그럴 이유가 없잖아. 차라리 게헨나의 악마라면 모를까.’
혼란스러웠다.
‘확실한 건 원수들을 모두 처리하면 알게 되겠지.’
원수들에게 걸린 금제는 목숨을 매개로 한 연계 금제라, 마지막 원수를 죽이는 순간 모든 금제가 풀리게 되어 있다.
그때는 모든 진실을 알 수 있으리라.
그때,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누…… 나.”
유스넨이었다.
그는 지금 파리한 안색으로 쥬웰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상처가 심각해.’
라플 공작의 강대한 공격을 몸으로 그대로 받은 유스넨의 상태는 심각했다.
쥬웰이 최대한의 성력을 발현해 치료했지만, 여전히 위중했다.
어느 정도 심각하냐면 생명의 끈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라플 공작이 정말로 유스넨을 죽일 생각으로 공격을 퍼부은 탓이다.
쥬웰의 성력이 아니었다면, 유스넨은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빌어먹을 미친놈.’
유스넨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지는지 억지로 인상을 찌푸렸다.
“잠이 오는군요. 자면…… 안 되는데…….”
“무리하지 마. 상태가 좋지 않아.”
쥬웰은 유스넨의 눈을 억지로 감겨주었다.
상태를 봤을 때 얼마간 혼수상태일 듯했다.
“……잠들었다가…… 일어났을 때 누나가 사라져 있으면 어떻게 하죠?”
유스넨이 떨리는 음성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불안감이 가득한 음성에 쥬웰은 가슴이 아릿하게 흔들렸다.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그러지 않을게.”
“정…… 말입니까?”
“그래, 가더라도 너 보고 갈게.”
쥬웰은 진심으로 약속했다.
‘차라리 잘됐어. 유스넨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복수를 마무리하자.’
만약 유스넨이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녀는 재차 그를 봉인해야 했을 것이다.
‘최대한 서두를 테니, 유스넨이 깨어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겠지.’
원래 그녀는 원수들에게 더욱 긴 고통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원수들 말고도 그녀의 삶을 농락한 진정한 배후가 있다는 걸 안 이상, 그 배후를 알아내는 게 최우선이었다.
‘더 빨리 원수들의 목숨을 거두어야겠어. 대신, 더 확실한 고통을 주고.’
쥬웰은 유스넨에게 말했다.
“약속할게. 네가 깨어날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고.”
유스넨이 옅게 웃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누나랑…… 행복해지고 싶다.”
쥬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도.”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다행히 유스넨은 더 보채지 않았다.
“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
“당신이 어떤 길을 걷든, 어떻게 되어도.”
점점 의식이 꺼지는지 유스넨의 눈동자가 점점 흐릿해졌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의 눈동자가 강렬한 빛을 발했다.
마치 주문을 걸듯.
“결국 제가 행복하게 해줄게요. 어떻게든. 반드시. 그러니 절 믿으세요.”
* * *
유스넨을 안전한 곳에 옮긴 후, 쥬웰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가 향한 곳은 수도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빈민들이 주로 머무는 허름한 거리에 자리한 기울어가는 건물로 들어갔다.
삐거덕.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무판자가 비명을 질렀다.
벽에는 거미줄이 가득했고, 벌레와 쥐가 손님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서 만나야 할 이가 있었다.
“열어.”
쥬웰을 따라온 기사가 답했다.
“네, 전하.”
문을 열자 생각지도 않은 이가 있었다.
매리엇이었다.
다만, 이전과 완전히 다른 행색이었다.
화려한 옷차림은 온데간데없었다. 평민들, 그것도 가난한 이들이나 입을 법한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헤져 있었다.
장미 같은 얼굴은 치장은커녕 오랫동안 씻지 못했는지 땟국물이 가득했고, 몸 여기저기가 더럽혀져 있었다.
황금 같던 머리칼은 빛을 잃고 푸석했다.
‘다카펠이 제대로 했군.’
매리엇이 이런 처지가 된 건 쥬웰이 손을 쓴 탓이다.
쥬웰은 일전 성배 사건 이후, 다이아 공작가의 제2주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2억 골드를 뜯어내며, 쥬웰은 2주주의 권한을 이용해 매리엇을 가주 자리에서 몰아내고 다카펠을 새로운 가주로 추대했다.
여러 실책으로 가문을 파산 지경에 이르게 했고, 또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한 원흉이었기 때문에 매리엇은 어떤 저항도 못 하고 가주 자리에서 쫓겨났다.
심지어 한 푼도 챙기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매리엇을 도와주려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자신의 인망으로는 누구의 마음도 얻지 않았으니. 이런 처지가 되는 것도 당연하지.’
그 때문에 매리엇은 빈민가에 숨어들어 고립되었다.
그나마 최후까지 남은 조력자가 있어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던 거였지만, 그 조력자마저 지금은 도망가 버렸다.
“누, 누구?”
매리엇이 두려운 음성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쥬, 쥬웰?”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전 같은 독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매리엇이 지금껏 고고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지니고 있던 힘 덕분.
모든 게 무너진 지금, 매리엇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쥬웰은 매리엇을 훑듯 보더니 툭 내뱉었다.
“더럽군. 냄새도 나.”
매리엇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문에서 쫓겨난 이후, 열흘이 넘었다.
당연히 한 번도 씻지 못했다.
몸을 씻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법이니까.
매리엇은 사람의 몸에서 이런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냄새가 자신의 몸에서 나는 것이라는 게 참을 수 없이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진짜 심각한 비참함은 몸에서 나는 악취가 아니었다.
“오물도 치우지 않은 건가?”
쥬웰이 인상을 찌푸렸다.
한 명 몸을 눕히기도 힘든 좁디좁은 방 안에 오물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매리엇이 이 은신처에 숨어든 지 5일이 넘었는데, 누군가 오물을 치워주지 않으니 이런 광경도 당연한 일이었다.
매리엇 스스로 치우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 탓에 매리엇은 벌레와 쥐, 오물이 가득한 이 방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것도 굶주림에 떨면서.
쥬웰은 썩어가는 오물과 그 오물을 먹는 벌레, 쥐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의외로 잘 어울리는군.”
“……!”
매리엇의 얼굴이 더는 달아오를 수 없을 정도로 붉어졌다.
마지막 자존심인 건지, 매리엇이 파르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 날 더 모욕하지 마.”
“하지 말라고?”
“그래! 난 다이아 공작이야! 아무리 네가 승자라도 날 모욕할 권한은 없어! 차라리, 날 죽여!”
쥬웰은 그 말에 물끄러미 매리엇을 바라보았다.
“진심인가?”
“……그, 그래.”
매리엇은 막상 죽는다고 이야기하니 두려운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쥬웰은 피식하고는 말했다.
“그러면 이건 어떤가?”
쥬웰은 손짓했다.
따라온 기사가 보따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빵과 우유였다.
“……!”
매리엇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맹렬한 식탐을 느낀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얼마나 굶었지? 한, 4일 정도 되었나? 반응을 봤을 때 더 오래 굶었을 수도 있겠군.’
삼 일만 굶어도 사람은 눈이 돌아가게 된다.
특히, 매리엇은 일평생 단 한 끼도 굶주림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자존심? 고고함?
그건 극한의 굶주림 속에서 어떤 의미도 없어진다.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나 보군.”
매리엇은 치욕에 화악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쥬웰은 피식 웃었다.
“1페니야.”
“……뭐?”
“이 빵과 우유 가격. 1페니를 주고 내게 사 먹으면 돼.”
1페니.
골드, 실버 밑의 최하 화폐 단위였다.
평민들의 한 끼 식사 가격.
제국 최고의 부를 누리던 매리엇은 아예 만져본 적도 없는 하급 화폐였다.
“뭐야, 없는 건가? 1페니도?”
매리엇은 이를 악물었다.
한때, 제국 최고의 부자였던 그녀는 한 끼 밥을 사 먹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면 1페니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면 되겠군. 뭐가 좋을까?”
쥬웰은 느긋이 고민하더니 말하였다.
“난 너그러우니 이렇게 하지. 내게 무릎 꿇고 이 빵과 우유를 달라고 빌어봐.”
“……!”
“그러면 1페니를 치렀다고 여겨줄게.”
매리엇의 얼굴이 가련할 정도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쥬웰은 최고의 모욕을 강요하는 것은 물론, 매리엇의 사과가 1페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폄훼하고 있는 것이다.
매리엇이 표독한 눈빛으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자,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싫어? 어쩔 수 없지.”
툭, 우유가 든 병을 발로 찼다.
철퍽.
우유가 더러운 바닥에 흩어졌고 매리엇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쥬웰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구두를 들어 빵을 짓밟았다.
먹을 수 없게.
“아, 안…….”
자신도 모르게 내뱉던 매리엇은 우뚝 입을 다물었다.
쥬웰은 무심히 말했다.
“매리엇, 너는 모를지도 모르지만, 저 밖의 평민들은 이런 음식을 구하기 위해 무릎 꿇고 비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 가족을 죽일 정도로 절박하게 살아. 지금 네가 겪는 건 사실 그들이 일평생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평민들이 그런 궁핍함을 겪게 한 것에 최고 공신은 바로 눈앞의 매리엇이었다.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마. 밖에 가져가면 이런 음식이라도 감사히 먹을 사람이 널렸으니까.”
쥬웰이 기사에게 턱짓했다.
“치워.”
“……네.”
기사가 망가진 음식을 치우려는 순간이었다.
덜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머, 먹을게.”
“뭐?”
“머, 먹는다고.”
매리엇의 눈동자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지만, 쥬웰은 차갑게 말했다.
“그러면 빌어.”
“뭐, 뭐?”
“말했잖아. 대가를 치르라고. 이런 음식이라도 먹고 싶으면 내게 자비를 빌라고.”
매리엇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오열하였다.
“으윽. 제, 제발 부탁이야. 내게 이 빵과 우유를 줘.”
쥬웰은 무심히 그 애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이 떨어지자 매리엇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쥬웰이 밟은 빵을 먼지가 묻은 손으로 허겁지겁 들어 먹었고, 목이 메는지 캑캑거리며 마실 것을 찾았다.
하지만 우유는 이미 땅에 엎어진 다음이었고, 먹으려면 하나의 방법밖에 없었다.
핥아먹어야 한다.
갈증과 굶주림에 이성이 마비되어 앞뒤 가리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고개를 숙이는 순간, 매리엇은 다시 무너졌다.
처절한 울음을 터뜨렸다.
쥬웰은 그 모습을 무심히 보더니 기사에게 말했다.
“나가 있도록.”
“네.”
둘이 되자, 매리엇은 멍하니 쥬웰을 올려다보았다.
“왜…… 왜? 왜 이렇게 잔인한 거야? 내게 왜?”
“왜냐고?”
쥬웰은 웃고 싶었다.
그녀는 진실을 꺼내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누구인지?”
“……뭐?”
“잘 봐.”
쥬웰은 과거 에스텔레 시절 자주 짓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누군가 떠오르지 않아?”
“……!”
매리엇의 얼굴이 마치 악마를 본 듯 두려움에 질렸다.
“서, 설마?”
“맞아.”
쥬웰은 매리엇 앞에 한 걸음 나아갔다.
“내가 에스텔레야.”
쥬웰이 기괴하게 웃었다. 웃지만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섬뜩해 보이는 미소였다.
“돌아왔어. 너희를 지옥에 떨어뜨리기 위해서.”
쥬웰의 구두가 바닥에 놓인 매리엇의 손등을 밟았다.
“아아아악!”
난생처음 겪는 육체의 고통에 매리엇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아파?”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난 너희 때문에 무려 600년이나 고통받아야 했는데? 이런 게 고작?”
매리엇의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 살려…….”
하지만 매리엇은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존재가 에스텔레가 맞는다면, 자신을 살려줄 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쥬웰이 손을 들어 매리엇의 뺨을 쓸었다.
“난,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무, 무슨……?”
“너희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고 싶은데. 아주 비참하고 끔찍한 고통을 주어 내가 당했던 고통을 위로받고 싶은데…….”
쥬웰의 뺨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너희에게 어떻게 해도, 내 고통이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오랜 시간 쥬웰을 괴롭혀 온 딜레마였다.
원수들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고 싶다.
하지만 어떤 고통을 주어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끔찍한 고통을 주어도, 자신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1만 분의 1도 되지 않을 텐데.
어떤 복수를 해도 결국 허무함만 남으면 어떻게 하지? 그게 쥬웰을 미치게 했다.
“응?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응? 응?”
쥬웰의 눈빛에 광기가 깃들었다.
매리엇의 손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을 들었지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쥬웰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사과해 봐.”
“……뭐? 뭐?”
“나에게 저질렀던 모든 잘못. 다 사과해 보라고.”
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원수들에게 사과를 듣지 못했다.
매리엇은 떠듬떠듬 에스텔레에게 저질렀던 죄를 사죄하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필사적인 음성이었다.
쥬웰은 무심히 그 사죄를 들었다.
역시나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더, 더. 심한 고통을 주어야 해.’
쥬웰의 눈동자가 완전히 광기에 차올랐다.
극한의 고통을 주면, 조금은 마음이 달래지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서 더 어떤?
고문을? 아니면, 더욱 심한 비참함을?
쥬웰이 매리엇에게서 떨어져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에게 극한의 고통을 주려고 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두려움을 못 이긴 매리엇이 돌발 행동을 하였다.
품에서 단도를 꺼내더니, 푸욱 자신의 심장을 찔러 버린 것이다.
“……!”
“꺼, 꺼억…….”
매리엇은 울컥 피를 토하더니, 툭 고개를 떨구었다.
쥬웰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죽었어? 아직, 제대로 한도 풀지 못했는데?’
쥬웰은 고민했다.
‘살릴까?’
네크로맨시의 주술을 사용하면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매리엇에게 저주를 걸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려는 순간이었다.
쥬웰은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매리엇에게 어떤 고통을 주어도 자신은 위로받지 못할 것임을.
그 사실을 깨달은 쥬웰은 미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뚝, 뚝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야. 아직, 원수들이 남았어. 다른 원수들에게도 복수하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
반드시 그래야 했다.
다음은 라디트였다.
* * *
라디트는 매리엇보다 더욱 비참한 처지였다.
괴물이 되어 온갖 고통을 받게 되었으니까.
쥬웰이 다시 찾아갔을 때는 두 눈으로 봐주기 힘든 끔찍한 몰골이었다.
[크, 크륵…….]
라디트는 쥬웰이 나타나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완전히 괴물이 된 그는 인간의 말을 하지 못했다.
비참함인지, 라디트의 눈동자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랜만이네, 형부. 아니, 딘.”
딘.
그 낯선 호칭에 라디트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아명이었다.
그리고 인제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호칭이었다.
‘그녀’가 사라진 이후 말이다.
쥬웰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었다.
“나야, 에스텔레.”
[……!]
라디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떨었다.
쥬웰은 흑마법을 사용해, 라디트가 다시 인간의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네, 네가 에…… 에스텔레라고?]
“그래, 나야.”
쥬웰은 나긋이 말했다.
“어때? 날 많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쥬웰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었어. 내가 사랑하던 라디트.”
라디트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전신을 떨었다.
그러다가.
[크아아아아악!]
이성을 잃고 등을 돌려,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떤 말도 없이 다짜고짜 도망이라니.
역시나 추레한 모습이었다.
쥬웰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라디트가 디디려던 땅이 무너져 내렸고, 라디트는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다.
[크, 크으…… 크윽.]
라디트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쳤지만, 도망갈 곳은 없었다.
쥬웰은 위에서 라디트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사과를 받을까?’
됐다.
그딴 사과 받아봤자, 어떤 후련함도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더욱더 비참함을?
하지만 이미 라디트는 모든 명예를 잃고 인간으로서 최악의 비참함을 맛보았다.
결국, 줄 수 있는 고통은 하나였다.
물리적 고통.
손가락을 까닥이자, 어둠이 라디트의 몸에 깃들었다.
환영으로 최악의 물리적 고통을 주는 저주였다.
라디트의 눈동자에 끔찍한 환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배신했던 에스텔레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인제 그는 환영 속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그리고 버렸던 에스텔레에게 끝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악!]
길고 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쥬웰은 구덩이 위에서 라디트가 고통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라디트가 고통 속에서 처절히 비명 지르며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환영이지만, 실제와 똑같은 물리적 고통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일평생 사랑하던 이의 손에 당하는 것이니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고통이지만, 역시나 왜일까?
쥬웰은 전혀 마음이 나아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하, 하…….”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어떤 복수로도 달래지지 않는 것이다.
그녀가 당한 고통은, 영혼에 새겨진 흉터는 고작 복수 따위로 위안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쥬웰의 눈에서 처참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향한 연민이었다.
‘왜, 왜 나는 이런 고통을?’
‘넌 네가 지금 이런 고통을 겪는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그 순간, 쥬웰은 다짐했다.
위로 따위는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농락해 이런 고통에 빠지게 한, 진정한 배후를 알아내야 했다.
그자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 * *
쥬웰은 복수에 더욱 속력을 내었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모든 진실을 알아야 해.’
다음은 플랑드나였다.
미루어두었던 화형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방해가 있었다.
마리가 나타났다.
“……로드.”
“왜 그러지?”
“이만 멈춰주시면 안 될까요?”
“뭐?”
뜻밖의 이야기에 쥬웰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이야기지? 이건, 너도 바라던 바 아니었나?”
“……그랬지요. 하지만 로드가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복수를 하길 바란 건 아니었어요.”
“스스로를 망가뜨리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쥬웰이 실소하는 순간, 마리가 이를 악물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의 정체.”
“……뭐?”
“알고 있다고, 이 바보야!”
마리는 왈칵 눈물을 흘리며 쥬웰을 껴안았다.
“이 바보 성녀님! 우리가, 내가 모를 줄 알았냐고!”
쥬웰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이 굳었다.
‘다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쥬웰은 과거를 떠올렸다.
맹목적인 마리의 애정이 떠올랐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정체를 알게 된 지 오래된 것 같다.
마리는 그녀를 품 안에 껴안은 채 눈물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거야, 맨날! 엉엉! 이제 그만하라고! 다 내려놓으면 되잖아!”
쥬웰도 눈을 꾹 감았다.
그녀도 이대로 모든 걸 내려놓고, 마리의 품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안, 마리.”
쥬웰은 손을 들어 마리를 마주 껴안았다.
“그래도 난 절대로 멈출 수 없어.”
쥬웰도 사실 두려웠다.
이 복수의 길 끝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을지. 아니, 어떤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
하지만 그래도 가야 했다.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사랑해, 마리.”
* * *
쥬웰은 강제로 마리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또 다른 방해가 있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성녀님!”
뜻밖에 성전 기사단장 죠제프였다.
그가 자신의 아내인 플랑드나의 구제를 위해 쥬웰을 찾아와 납작 무릎을 꿇었다.
쥬웰은 물끄러미 죠제프를 바라보았다.
‘죠제프는 과연 플랑드나 언니의 진면목을 몰랐을까?’
아닐 것이다.
죠제프는 바보가 아니다.
하지만 플랑드나를 사랑하기에 그녀의 잘못을 모른 척했을 뿐이리라.
그러니 지금 이런 상황에도 찾아와 플랑드나에게 자비를 베풀길 청하고.
‘죠제프도 잘못한 건 마찬가지야. 플랑드나의 모든 잘못을 방관했으니.’
쥬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더 할 이야기 없으니, 돌아가도록. 플랑드나는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
“전하!”
“단, 배 속의 아이에게는 죄를 묻지 않도록 하지.”
플랑드나의 처형을 미룬 건, 더욱 큰 모욕을 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태중에 임신한 아이가 걸리는 이유도 있었다.
다행히 마침 산통이 시작된 상태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전하, 마녀 플랑드나에게 변고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가?”
“방금 아이가 태어났는데, 사산하였습니다.”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생각지 않은 일이었다.
‘플랑드나의 안 좋은 상태에 영향을 받은 건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원래 출산 중 아이가 잘못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완전히 연관이 없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아…… 아…….”
죠제프가 뒷걸음질 쳤다.
그가 핏발이 선 눈으로 쥬웰에게 외쳤다.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아이를 죽였어!”
쥬웰은 텅 빈 눈으로 죠제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
“그 아이가 잘못된 게 내 잘못일 수도 있지. 하지만 뭘 어쩔 거지?”
원래의 그녀라면, 이 일에 극심한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 때문에 어떤 죄도 없는 아이가 잘못된 거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말라비틀어져 황폐해진 마음은 어떤 죄책감과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자신 앞에 놓인 모든 걸 빨리 마무리하고 싶을 뿐이었다.
“저,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
죠제프는 이를 갈았다.
“반드시 둘의 한을 갚고 말겠어! 이 악녀.”
죠제프는 짙은 원한을 내뱉고 사라졌다.
붙잡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내버려 두었다.
아이를 잃었으니 누구라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잡아서 처리하기도 지쳤다.
‘어차피 이제 시간이 없으니, 원한을 가져봤자 뭔가를 할 수도 없을 거고.’
쥬웰은 말했다.
“플랑드나를 화형대에 올려.”
* * *
불길이 피어올랐다.
화염에 휩싸인 플랑드나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
쥬웰은 무심한 눈길로 플랑드나가 불길에 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불을 붙이기 전, 플랑드나에게도 자신이 에스텔레임을 밝혔다.
마녀로 몰린 후 당한 모욕,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플랑드나는 완전히 넋을 잃었고, 허무하게 불길에 휩싸였다.
‘끝난 거야? 고작 이렇게?’
쥬웰은 멍하니 생각했다.
플랑드나는 원수 중 그녀를 가장 악독하게 괴롭힌 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라니?
어떤 후련함도 기쁨도 없는 복수에 몸에 힘이 풀렸다.
가슴이 뻥 뚫려 텅 빈 것만 같았다.
복수가 모자랐던 건 아니다.
그녀는 플랑드나를 완전히 몰락시킨 후, 마녀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게 하였다.
플랑드나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극심한 모욕을 겪어야 했다.
심지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아이도 잃게 하였다.
할 수 있는 복수는 모조리 했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이리 괴롭단 말인가?
복수를 이루기 전보다 더욱 괴로운 것만 같았다.
순간, 쥬웰은 하나의 섬뜩한 가정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복수의 허무함조차 내게 예정된 고통인 것 아닐까?’
라플 공작은 말했다.
그녀는 끔찍한 불행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그렇다면 이 복수의 결말조차 의도된 것일 수도 있었다.
‘하…….’
쥬웰은 머리가 핑 돌아 비틀거렸다.
미칠 것만 같았다.
“쥬웰! 괜찮으냐?”
걱정스레 딸을 보던 엔리크가 쥬웰을 붙들었다.
엔리크는 막 수도로 돌아온 차였다.
“아버지.”
쥬웰은 떨리는 손으로 엔리크의 어깨를 붙잡았다.
“부탁할 게 있어요.”
“무엇이냐? 무엇이든 말만 해보아라.”
따뜻한 음성에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랑한다고 해주세요.”
“쥬웰?”
“제발요. 부탁이에요. 제발…….”
쥬웰의 눈동자가 가련하게 흔들렸다.
엔리크가 와락 딸을 껴안았다.
“사랑한다. 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내 딸이야. 내 목숨보다,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평소라면 가슴이 안정되었을 따듯한 음성.
그런데 쥬웰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내 딸, 이란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난…… 엔리크 자작의 딸이 아니잖아.’
지금껏 숱하게 억지로 부정하였지만, 이건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그녀는 엔리크의 딸이 아니다.
딸인 척하고 있을 뿐.
쥬웰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엔리크의 품에서 벗어났다.
“쥬웰?”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쥬웰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쥬웰. 안색이…….”
엔리크가 손을 뻗자,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탁 하고 손을 쳐버렸다.
“……!”
엔리크의 얼굴이 놀람으로 굳었다.
쥬웰도 자신의 행동에 놀라 안색이 딱딱해졌다.
“……죄송해요. 예민해져서. 저, 가볼게요.”
쥬웰은 대답을 듣지 않고 등을 돌렸다.
엔리크가 뭐라고 하였지만, 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하나 섬뜩한 가정이 떠올렸다.
쥬웰은 바득 이를 갈았다.
다시 미칠 것만 같은 원망이 떠올랐다.
왜, 왜 자신의 운명은 이렇단 말인가?
심지어 복수를 이룬 다음조차도 괴로움은 떠나질 않는다.
심지어 엔리크는 어쩌면…….
‘아니야. 지나친 생각은 하지 말자. 아직 아무것도 몰라.’
쥬웰은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남은 원수 웰링턴 공작을 향하여.
이제 진실을 알 때가 되었다.
그를 처단하면, 금제가 깨져 모든 사실을 알 수 있으리라.
* * *
리델하트가 진행한 종교 개혁으로 에메랄드 공작가와 성전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웰링턴 공작은 의외로 도주하지 않고, 공작저에 남아 있었다.
‘무슨 꿍꿍이지?’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남아 있어 봤자, 웰링턴 공작에게 펼쳐질 미래는 화형대에 매달리는 것이다.
평소 성격이라면 진즉 줄행랑을 치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지금껏 저지른 죄에 대해 스스로 벌을 받겠다는군요. 그 뒤 법왕의 집무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 중입니다.”
리델하트가 답했다.
리델하트는 종교 개혁 후 새로운 법왕이 될 예정이었다.
단, 이전처럼 성전의 권력을 독점해 군림하는 법왕이 아닌, 종으로서 백성들을 섬기는 법왕이.
쥬웰의 뜻대로.
“……그나저나, 괜찮으십니까?”
“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쥬웰은 잠시 리델하트를 바라보았다.
리델하트도 쥬웰을 보고 있었다.
순간, 쥬웰은 알 수 있었다.
리델하트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
쥬웰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쥬웰 너머 에스텔레를 보고 있었다.
마리처럼 리델하트도 오래전부터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다.
이전 에스텔레 시절 때처럼.
리델하트는 항상 그녀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죽여왔으니까.
‘……미안.’
쥬웰은 리델하트에게 사과했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돌아봐 줄 수 없었다.
만약 모든 복수가 끝나고 여유가 생기면…… 그런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녀에게 그런 축복이 주어질 리가 없었다.
그를 외면하고 웰링턴 공작에게 향하려는데, 리델하트가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만 멈추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너도 알지 않는가? 내가 절대 멈출 수 없다는 것.”
리델하트가 무겁게 말했다.
“사실, 제게 얼마 전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신탁이?”
“신께서는 당신이 복수를 멈추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정확히 말해봐.”
리델하트는 신탁을 말하였다.
-창세 이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여. 그대의 걸음은 멸망의 나락으로 향하고 있으니, 부디, 길을 멈추어라.
라플 공작이 했던 말과 동일한 이야기였다.
“……들을 수 없는 신탁이야.”
“로드.”
“비켜.”
쥬웰은 그를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날 사랑한다고?’
쥬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신탁의 내용을 보면, 신은 마치 그녀를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데 왜 날 이런 고통에 놔두셨나요?’
그녀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신을 향한 첫 원망이었다.
그리고 웰링턴 공작이 있는 집무실의 문을 열었는데.
“……!”
쥬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웰링턴 공작이 목을 맨 채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이미 웰링턴 공작은 자살한 뒤였다.
* * *
“마, 말도 안 돼.”
쥬웰의 음성이 덜덜 떨렸다.
“이런 게 어디 있냐고!”
쥬웰은 웰링턴 공작의 시체를 끌어 내려 멱살을 잡았다.
“난 당신에게 어떤 복수도 하지 못했는데. 이, 이런 게…… 이런 게…… 어디……!”
와락 눈물이 흘러내렸다.
방향을 잃은 분노가 가슴을 난도질하였다.
가슴이 찢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그녀의 시선에 하나의 물건이 들어왔다.
웰링턴 공작이 쓰던 일기였다.
쥬웰은 허겁지겁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매리엇과 라디트가 사망했다.]
[금제가 옅어진 탓에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쥬웰, 그 아이가 에스텔레였다니.]
“……!”
쥬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처음부터 몰랐을까? 내 딸, 에스텔레와 그토록 닮았었는데.]
[난…… 그 아이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진실을 눈치챈 웰링턴 공작은 딸을 마주하지 못하고 비겁한 도망을 선택한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쥬웰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미칠 것 같았다.
너무 괴로워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아니야. 이게 끝이 아니야.”
쥬웰은 마치 폐인이 된 것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일기를 넘겼다.
그런데 뒤에 이해할 수 없는 문구가 나타났다.
[비겁한 변명을 하자면, 에스텔레, 그 아이를 제물로 바쳤던 건 법왕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다니?
탐욕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으면서?
그런데 계속해서 이상한 문구가 나타났다.
[매리엇, 라디트, 플랑드나는 몰랐을 것이다. 그때 인신 공양의 진정한 이유를.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탐욕으로 그 의식에 참여했던 거니.]
[하지만 난 법왕. ‘그들’은 내게 이 인신 공양을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들’.
다른 원수를 지칭하는 단어가 나타났다.
쥬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예정된 운명이었다지만,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으면, 그들의 말에 절대로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잔혹한 이름들이 나타났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엔리크와 오펜하임의 말에 따르지 않았을 텐데.]
* * *
뚜둑, 뚜둑.
비가 내렸다.
쥬웰은 완전히 죽어버린 눈빛으로 멍하니 인적 없는 거리를 걸었다.
“거짓말.”
두 이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엔리크 자작과 오펜하임이 내 또 다른 원수였다고?’
다시 중얼거렸다.
“거짓말.”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쥬웰은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엎드렸다.
“으아아아아아악!”
엔리크는 그녀가 이번 삶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오펜하임 또한,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고.
그런 그들이?
그럴 리가 없다.
다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하지만 석연찮은 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무엇보다 그날 인신 공양 당시의 기억.
정체를 모르던 두 명의 실루엣.
돌이켜 생각하니, 그들의 실루엣은…… 오펜하임과 엔리크와 정확히 일치했다.
“흐…… 흐흐. 흐윽. 끄윽. 우욱!”
그녀는 실성한 듯 눈물 흘리다가 왈칵 토하였다.
죽은 피가 쏟아졌다.
하필 붕괴한 몸이 다시금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끔찍한 격통이 몸을 마구 난자하였다.
비 오는 길바닥에 웅크려 바들바들 떨다가 웃음을 흘렸다.
“흐…… 흐윽.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엔리크 자작이 그랬을 리가 없어. 다 거짓말이야.’
어서 엔리크 자작이 보고 싶었다.
그의 품에 안겨서 사랑의 속삭임을 듣고 싶었다. 아이같이 어리광 부리며 위로받고 싶었다.
아주 나쁜 악몽을 꾸었다고.
난 진짜 당신의 딸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걸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겼다.
힘이 들어가지 않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몇 번이고 길바닥에 굴러 넘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 빨리. 더 빨리.’
그때, 간절히 바라던 음성이 들렸다.
“쥬웰! 이게 무슨?!”
엔리크였다.
그가 놀라 쥬웰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냐? 괜찮은 거냐?”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쥬웰의 몸을 살폈다.
아버지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 쥬웰은 헤헤 웃었다.
“아버지, 사랑해요.”
“쥬웰?”
“정말, 정말 사랑해요.”
쥬웰은 엔리크를 끌어안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엔리크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왜 그러느냐?”
“그냥.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어 주세요.”
물어야 한다.
하지만 물었는데.
정말이면 어떻게 하지?
그때는?
그 두려움과 함께 그녀는 직감적으로 진실을 깨달았다.
“……에스텔레를 아시나요?”
“에스텔레?”
엔리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알지. 너 다음으로 위대한 성녀 아니냐?”
“그러면…… 그날, 인신 공양 때 아버지도 있으셨나요?”
쿵. 쿵.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간절히 바라였다.
제발, 아니길.
지금껏 일평생 당한 모든 고통을 더는 원망하지 않고 감사할 테니, 제발 이 잔혹함만은 피해갈 수 있기를.
하지만.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내가 황태자 전하의 요청에 그날의 인신 공양을 주도했음을.”
세상이 멎었다.
얼음처럼 변한 가슴이, 잔인한 못에 산산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의 일은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던 것 아니냐?”
“……왜?”
쥬웰…… 아니, 에스텔레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왜 그러셨나요?”
다른 원수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탐욕에 눈이 멀었으니까.
하지만 엔리크와 오펜하임은 아니지 않은가?
엔리크는 더더욱 의아한 어조로 반문했다.
“이미 다 설명한 사실 아니냐?”
“……그래도 말해주세요.”
“에스텔레는 예정된 제물이었다.”
“……제물이라고요?”
“그래, 너도 알고 있겠지만 300년 전 초대 황제는 게헨나의 어둠을 봉인하였다. 덕분에 인류는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지. 하지만 그 봉인은 완벽한 게 아니었어. 점점 약해져 작금에 와서는 굉장히 불안해졌지. 그래서 10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의 침식이 일어났고 말이다. 그 봉인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했다. 누구보다 깨끗하고 고결한 영혼을 가진 제물이.”
상상하지도 못한 진실이 흘러나왔다.
“에스텔레야말로 그 조건에 가장 적합한 이였다. 에스텔레를 유인하기 위해 그녀와 가까웠던 너와 플랑드나, 매리엇, 라디트 등을 끌어들인 거였지.”
엔리크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을 흐렸다.
“물론, 나도 그 일이 기꺼웠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오펜하임 전하는 제국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한 것이다.”
“……웃기지 마.”
“쥬웰?”
무저갱과도 음성에 엔리크는 놀란 얼굴을 했다.
“웃기지 말라고!”
쥬웰은 엔리크에게서 떨어져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악!”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쥬웰!”
엔리크가 다급히 쥬웰을 잡으려 했으나, 어둠이 그를 가로막았다.
“쥬, 쥬웰 이건?”
엔리크가 쥬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의 마기에 얼굴을 하얗게 굳혔다.
쥬웰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난…… 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배신감?
아니다. 고작 그런 감정이.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게 있었다.
아팠다.
미치도록.
지금껏 겪었던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수해야 해.’
쥬웰의 눈동자가 광기에 차 번뜩였다.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어떤 복수보다도 참혹하게 엔리크를 나락에 떨어뜨릴 방법이.
단 한마디면 되었다.
하지만.
‘해도 될까?’
이 말을 뱉는 순간, 돌이킬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도 망설여질 정도로, 그녀는 엔리크를 사랑했다.
그래서 더 아팠고, 멈추어 설 수 없었다.
“……난 쥬웰이 아니야.”
“뭐?”
“난 네 딸이 아니라고.”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웃으려고 했는데,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렸다.
시체처럼 질려가는 엔리크 자작의 얼굴을 보니, 더더욱 참혹한 마음이 들었다.
그저 미칠 듯 아프기만 하였다.
하지만 멈추어 서지 않았다.
“난 에스텔레야. 네가 제물로 바친. 네 딸, 쥬웰은 내가 죽였어.”
그리고 모든 게 끝났다.
* * *
엔리크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지금껏 했던 어떤 복수보다도 강렬한 복수였다.
상대를 완벽한 나락에 떨어뜨렸으니.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런 생각 없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흰 강아지가 있었으면.’
하지만 그는 아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참, 도움 안 된다니까. 필요할 때마다 옆에 없어.’
아니면, 아버지라도.
그 생각과 함께 쥬웰은 멈추어 섰다.
이제 엔리크는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만들었다.
“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쥬웰의 눈동자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난 이제 어떻게 해야지?
그때, 갑자기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아, 아가…… 아니, 공작 전하!”
룬이었다.
룬이 다급한 얼굴로 그녀에게 뛰어왔다.
“어디에 있으셨어요! 큰일이 일어났어요!”
“……왜?”
쥬웰은 시큰둥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든,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듣는 순간, 쥬웰은 뻣뻣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엔리크 자작님이 자살을 시도하셨어요!”
* * *
“아…….”
쥬웰은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공작가의 주치의가 무겁게 말하였다.
“간신히 즉사는 피했지만,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주치의는 곤혹스럽게 말했다.
“왜 갑자기 이런 선택을…….”
“……비켜.”
“전하?”
“비키라고! 다들 나가!”
모두를 물리고, 쥬웰은 미친 듯 성력을 퍼부었다.
그는 그녀의 원수.
이대로 죽게 놔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손을 멈출 수 없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하지만 엔리크의 상태는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아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그제야 쥬웰은 후회가 되었다.
아니, 후회란 단어가 맞을까?
그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어쨌든 엔리크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무리한 성력 사용에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졌지만, 계속해서 성력을 사용했다.
그녀의 간절한 바람이 닿은 걸까?
이윽고 엔리크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털썩, 쥬웰은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영혼을 잃은 듯한 텅 빈 눈에서 주룩 메마른 눈물이 흘러나왔다.
뭐가 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 수가 없었다.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씁쓸한 음성이 들려왔다.
“……공주님.”
멍하니 시선을 돌리니, 참혹히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라플 공작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
“그래도 다행히 늦지 않았어. 최악의 상황은 아직이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여기서 더 최악이 남아 있다니.
“이제 다 버리고 떠나자. 내가 공주님을 지켜줄게. 제발, 내게 납치당해줘.”
라플 공작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쥬웰은 이번엔 거부하지 않았다.
마법이 쥬웰을 감쌌다.
쥬웰은 눈을 감았다.
빛과 함께, 라플 공작과 쥬웰은 사라졌다.
* * *
며칠이나 지났을까?
쥬웰은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여긴 어디지?’
하늘 위에 떠 있는 창공 섬이었다.
‘뭐, 어디든 상관없나.’
섬이 떠 있는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고, 라플 공작의 마력으로 부유하고 있다는데 그러려니 하였다.
사실 다 관심 없었다.
“여, 여기…… 공주님이 좋아하는 음식들 가져왔어. 그런데…… 또 안 먹었구나.”
며칠째 물 한 모금도 먹지 않고 있는 쥬웰을 보며 라플 공작은 안절부절못하였다.
“이, 이러면 큰일 나. 뭐라도 먹어야지. 응? 응?”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려면 어때.’
뭔가를 먹고 싶어도 몸이 받지 않았다.
물 한 모금만 들어가도 모조리 다 토해, 거르고 있었다. 딱히 배가 고프거나 갈증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최고로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시무룩한 중얼거림에 쥬웰은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너와 난 이전에 연이 있었던 거지?”
“응? 으응, 맞아.”
“정확히 무슨 사이였던 거지?”
라플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금제에 걸리는 질문인 것 같았다.
그래도, 쥬웰은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에스텔레 이전에도 다른 삶을 산 적이 있고, 그 정체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의 진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그러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응, 응. 공주님께 해롭지 않은 거면, 뭐든지.”
“내 인신 공양과 관련된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마법사들을 찾아 죽여줘.”
그날, 인신 공양 때 백마법사들도 있었다.
마법진을 보조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이들로 어차피 도구로 사용된 거니 큰 원한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죽이긴 죽여야겠지.’
쥬웰은 감흥 없이 생각했다.
“해줄 수 있어?”
“으, 응! 금방 처리하고 올게!”
라플 공작은 휙 사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나타났다.
“여, 여기 가져왔어.”
쥬웰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저들이었나?’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가주 대리이자, 부마탑주 멜린 후작 및 차기 후계자의 머리가 라플 공작의 손에 들려 있었다.
졸지에 백마법사 서열 2위, 3위의 인물들이 죽음을 맞은 것이다.
“모, 모자라면 그냥 다 죽이고 올까?”
“다?”
“응, 원하면.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일원 모두.”
“……그래도 네 후손 아니야?”
“정확히는 내 후손은 아니고, 내 동생들의 후손. 뭐, 상관없어.”
라플 공작이 소심하게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걸로 공주님 기분이 풀리면, 얼마든지 다 죽일 수 있어.”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전혀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인제 난 뭘 어떻게 해야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것만 같았다.
쥬웰은 멍하니 걸음을 옮겨 천공 섬의 끝으로 향했다.
“조, 조심! 더 가면 떨어질 수도!”
하지만 쥬웰은 멈추지 않았다.
힐끗 밑을 보니, 까마득한 아래가 보였다.
얼마나 높은지 땅이 보이지도 않는 거리.
그대로 밑으로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쥬웰은 떨어지면서 빛을 잃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디맑은 하늘이 눈을 시리게 찔렀다.
“아, 안 돼!”
라플 공작이 따라 뛰어내려 쥬웰을 받았다.
“왜, 왜? 이러면 죽어!”
“그냥 죽으면 안 돼?”
“뭐?”
“……죽으면 안 되냐고.”
차라리 미리 죽었으면.
이런 끔찍한 고통 따위는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라플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쥬웰은 무심히 말했다.
“그리고 지금 살려봤자 별 의미 없어. 나 곧 죽는 거 알지? 얼마 안 남았어. 한 달도 안 남은 것 같은데.”
몸의 기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 아니야.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 내가 어떻게든 공주님을 살릴 거야.”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라플 공작의 힘이면 붕괴하는 영혼을 살리는 게 가능할지도.’
하지만 그래 봤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제발. 모든 걸 잊고, 행복하게 살자. 응? 난 다른 건 바라지 않아. 공주님만 행복해지면 돼.”
그 애원에 쥬웰은 생각해 보았다.
‘그럴까?’
다 잊고 내려놓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이미 대부분 복수했잖아.’
오펜하임을 제외한 원수들은 모조리 죗값을 치렀다.
여기서 멈추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에덴.”
“공주님.”
“에덴이지? 내 운명을 농락한 진정한 배후는?”
천사들은 ‘정의’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의 정의는 때로는 냉혹할 때가 많았다.
엔리크가 했던 이야기처럼 그녀를 게헨나의 어둠을 봉인하기 위한 제물로 삼기 위해 그녀의 운명을 농락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틀려.”
“에덴이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 에덴이 연관이 있기는 해. 16대천사장들이 공주님의 영혼에 저주를 내렸으니까.”
라플 공작이 처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에덴의 대천사장들은 공주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를 걸었어. 공주님이 일평생에 걸쳐 최악의 불행과 고통을 겪도록.”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결국, 천사들이 그녀를 농락한 원흉이 맞는다는 것이다.
“아, 아니. 그게 아니야. 에덴의 대천사장들도 자신의 의지로 그런 저주를 건 게 아니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에덴의 대천사장들은 신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드높은 격의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뒤에서 부릴 수 있는 이가 있다고?
“어쨌든 가만히 둘 수 없어.”
자신에게 저주를 건 대천사장들과 누군지 모를 진정한 배후까지.
죄를 묻고 말 것이다.
“제. 제발 멈춰! 에덴에 가는 순간, 넌 끝이야!”
“죽는 건 두렵지 않아.”
픽 웃는데, 라플 공작이 다급히 외쳤다.
“아니,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에덴에 가는 순간……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거고, 공주님은…… 진정한 의미로 파멸하게 될 거야.”
“…….”
쥬웰은 경직된 얼굴로 라플 공작을 보았다.
‘도대체 무슨 진실이 숨어 있길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더 충격받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걸로 파멸하게 될 거라니?
하지만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라플 공작의 눈빛은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쥬웰은 직감했다.
라플 공작이 말하는 파멸이 진실임을.
지금껏 겪었던 어떤 괴로움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그래도 가야 해.”
쥬웰을 말릴 수 없음을 깨달은 라플 공작은 절망한 얼굴을 하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 흐윽…… 흑. 왜, 왜…… 결국 이렇게…….”
쥬웰은 물끄러미 라플 공작을 바라보더니, 뜻밖의 말을 하였다.
“그래도 너에게는 고마워.”
“……!”
“무슨 인연이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날 300년이나 위해주었잖아.”
이제 그녀는 자신과 라플 공작이 어떤 인연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다.
‘내 전생이 지금 짐작하는 게 맞는다면, 어째서 내게 이런 고통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모든 건 에덴에 가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끄윽. 끅. 흐아앙!”
라플 공작은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쥬웰은 힐끗 그 모습을 보고는 등을 돌렸다.
그런데 라플 공작이 눈물을 잔뜩 머금은 얼굴로 그녀를 붙잡았다.
“기다려!”
“놔.”
“그, 그게 아니라.”
훌쩍, 라플 공작이 눈물을 닦았다.
“내 힘을 가져가.”
“……뭐?”
“대천사장 놈들을 죽이려는 것 아니야? 지금 공주님 힘으로는 무리야.”
라플 공작의 눈물 젖은 눈동자에 귀기가 서렸다.
“단, 영구적으로 힘을 늘려주는 건 아니야. 내 힘을 사용하고 나면, 무리한 힘을 사용한 대가로 탈력 상태가 되어 얼마간은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건 상관없었다.
“왜 내게 힘을 주려는 거지?”
라플 공작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사실, 나도 대천사장 놈들한테 유감이 있는 건 마찬가지거든. 아무리 자신들의 뜻이 아니었더라도 감히 공주님께 그런 저주를 내렸으니까. 그러니 내 힘을 가져가 놈들에게 실컷 앙갚음해 줘.”
그녀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라플 공작의 힘을 받으면 확실히 에덴을 뒤엎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넌 죽는 것 아닌가?”
라플 공작은 강대한 힘으로 죽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힘을 넘겨주는 순간, 영혼이 산산이 소멸할 것이다.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상관없어.”
라플 공작은 히죽 웃었다.
“어차피 공주님이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삶을 더 이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쥬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거절하지 않겠어.”
“히히.”
라플 공작의 몸에서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힘을 넘겨주려는 것이다.
바슥.
라플 공작의 손가락 끝이 부스러졌다. 그걸 시작으로 그의 영혼이 희미해지는 게 보였다.
“대, 대신 하나 부탁할 게 있어.”
“무엇이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공주님은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할 거야.”
라플 공작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때, 제발 공주님 스스로를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내 부탁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알게 될 거야. 꼭 내 말을 명심해 줘.”
라플 공작은 처연하게 눈물 흘렸다.
그걸 마지막으로, 라플 공작은 산산이 흩어져 사라졌다.
소멸한 것이다.
쥬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라플 공작이 넘겨준 강대한 힘이 안에서 일렁였다.
원래 가지고 있던 1품 대악마의 힘과 상승 작용을 일으켜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파괴적인 힘이었다.
힘을 갈무리한 쥬웰은 번뜩 눈을 뜨고는 파앗 사라졌다.
공간을 넘어 다시 나타난 곳은 에덴의 입구였다.
[아, 아니? 너는?]
[악마의 주구!]
에덴의 입구를 지키는 하급 천사들이 당황해 웅성거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물러나거라!]
쥬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번뜩.
대신 은빛 사슬을 휘둘렀다.
파아아앗!
천사들의 피가 튀며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쥬웰은 천사들의 시체를 보며 나직이 말하였다.
“대천사장들을 불러와.”
저벅,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가 튀었다.
그녀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앞에 보이면 사슬을 휘둘렀고, 천사들은 벌레처럼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소멸하였다.
수많은 피가 튀었지만, 이전과 다르게 어떤 죄책감도, 감흥도 들지 않았다.
이윽고 대천사장들이 나타났다.
쥬웰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왔는지는 알고 있겠지?”
[…….]
“어째서 내 운명을 농락한 거지?”
그런데 대천사장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쩐지 안쓰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는 눈빛이라, 그녀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날 그런 눈빛으로 봐? 내 운명을 그렇게 농락해 놓고?’
이를 악물고 힘을 펼쳤다.
“다, 죽어.”
은빛 사슬이 허공을 갈랐다.
가공할 마기로 변형된 은빛 사슬이 16대천사장들을 한번에 덮쳤다.
그런데 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대천사장들이 어떤 저항도 없이 그 공격을 몸으로 받은 것이다.
파박!
짓이겨진 빛의 깃털과 함께 대천사장들의 푸른 피가 에덴에 비산했다.
‘뭐야?’
쥬웰은 뻣뻣이 굳었다.
“……무슨 속셈이지?”
[…….]
대천사장들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저 어떤 힘도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짓거리냐고!”
그제야 한 대천사장이 입을 열었다.
[이건…… 우리가 감내해야 할 몫이니까.]
“뭐?”
[모두를 위해 희생한 메시야여. 그대는 분노할 자격이 있다. 우리를 죽임으로 그대의 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좋다.]
쥬웰은 미칠 듯 화가 나 바득 이를 갈았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제멋대로 남의 운명을 농락해 놓고, 메시야라고? 미안하니, 화를 풀라면 풀라고?
어찌 이토록 오만하단 말인가?
“좋아. 다 죽여주지.”
은빛 사슬이 대천사장들을 난도질했다.
대천사장들은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다.
날개가 잘려져 나가며, 소멸에 이름에도 그저 묵묵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쥬웰을 더욱더 미치게 했다.
“아아아아아아악!”
이윽고 모든 대천사장이 소멸한 이후, 쥬웰은 마지막으로 남은 대천사장의 멱살을 잡았다.
“말해. 누가 이 일의 진정한 배후인지.”
[…….]
“말하라고!”
하지만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가련하단 눈빛을 보내더니 툭 고개를 떨구었다.
쥬웰은 광기에 빠져 닥치는 대로 은빛 사슬을 휘둘렀다.
얼마나 많은 천사를 소멸시켰는지 모른다.
낙원에 천사들이 흘린 피가 강을 이루어 흘러갔다.
그때,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부상을 입은 건지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는 하얀 안색의 여성형 천사였다.
“……넌?”
[과거, 당신을 따르던 자.]
천사가 슬픈 안색으로 말하였다.
[베른힐트입니다.]
* * *
“……날 따랐다고?”
여성형 천사, 베른힐트는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는 당신의 수호 기사였던 베스윈 님을 따른 거지만요.]
“……정확히 말해.”
쥬웰이 으르렁거렸다.
“한가하게 수수께끼를 하고 있을 정신이 아니니.”
베른힐트는 아픈 미소를 띠었다.
[이제 운명의 때가 다가와 모든 금제가 풀렸군요. 정말 진실을 알기 원하십니까?]
“……당연히.”
[그 진실이 당신을 파멸시킬 텐데요?]
쥬웰은 이를 갈았다.
“몇 번을 묻는 거지? 어서 말해!”
베른힐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건만…… 베스윈 님, 당신의 바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군요.]
뜻 모를 중얼거림 이후, 베른힐트는 말하였다.
[당신의 운명을 농락한 배후는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뭐?”
쥬웰은 멍하니 반문했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당신의 전생이었던, 초대 황제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른힐트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왔다.
잔혹한.
[당신은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선택했어요. 모두를 위해. 16대천사장들에게 저주를 받기를 청하였지요. 당신이 지금껏 겪었던 고통은 전부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 말과 함께.
금제가 풀렸고, 그녀는 모든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300년 전 전생의 기억이었다.
* * *
300년 전.
“안 돼! 난 받아들일 수 없어! 안 된다고!”
라플 공작이 미친 듯 울부짖었다.
“난 동의할 수 없어! 동의할 수 없다고!”
‘그녀’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어요. 제가 한 봉인은 일시적인 것. 이대로 놔두면 언젠가 봉인이 풀려 게헨나의 어둠에 의해 세상은 멸망할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왜 네가 희생해야 하냐고!”
“제가 희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녀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섬뜩한 인신 공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세상과 바꿀 만한 고귀한 제물을 바치는 것 외에는 게헨나의 어둠을 잠재울 방법은 없어요.”
게헨나에서 범람한 어둠으로 인해 세상은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초대 황제인 그녀가 어둠을 막는 봉인을 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세상의 멸망을 막을 방법은 단 하나.
세상의 멸망과 상응할 만한 고귀한 제물을 바치는 거였다.
그리고 그럴 만한 제물은 ‘그녀’의 영혼밖에 없었다.
‘그녀’는 창세 이래 가장 고귀한 영혼을 타고났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의 영혼이라도 세상과 바꾸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더욱 가치 있는 제물이 되기 위한 방법을 내었다.
“라플, 고귀한 영혼이 더욱 가치 있는 제물이 되는 방법을 아시나요?”
“몰라, 알고 싶지 않아.”
사실 알고 있다.
라플 공작의 눈에서 참혹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로 가혹한 시련을 겪게 하는 거예요.”
똑같은 빛을 타고난 영혼이라도, 풍족한 환경에서 평탄한 삶을 살다가 죽은 영혼.
가혹한 시련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끝까지 고결함을 유지한 영혼.
둘 중 어떤 영혼이 더욱 찬란하고 가치 있는 제물일지는 자명했다.
“이미 대천사장들에게 말했어요. 다시 태어날 제 영혼에 최악의 저주를 걸도록. 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고통을 겪게 될 거예요. 최고의 제물이 되도록.”
두려운지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저들의 핏줄은 다시 태어난 나를 핍박하게 될 운명을 타고날 거고요.”
각각, 사파이어, 가넷, 에메랄드, 다이아의 보석안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녀’를 도와 제국을 건국했지만, 탐욕에 가득한 이들.
저들의 핏줄에도 저주를 걸어놓았다.
후대에 다시 태어난 ‘그녀’는 저들의 핏줄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 버티지 못하고 타락하게 되면 어떻게 하죠?”
‘그녀’는 두려움을 떨치려는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 넌 그렇지 않을 거야.”
라플 공작의 눈에서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도 이렇게나 바보 같은데. 다시 태어나서도 바보같이 착하겠지.”
그럴 것이다.
안 봐도 뻔했다.
어떤 고통을 겪어도 영혼의 고결함을 잃지 않고, 인간을 향한 사랑을 잃지 않을 것이다.
“왜…… 왜…… 이렇게 하는 거야. 모두,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잖아. 그냥 죽게 내버려 둬.”
세상에 어둠이 범람하게 된 건, 인간들의 죄악 때문이다.
만약 인간들이 조금만 덜 악했다면, 세상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조금의 잘못도 없는 ‘그녀’가 모든 책임을 진단 말인가?
“……그러게요.”
‘그녀’는 힘없는 얼굴을 하였다.
“저도 제가 바보 같네요.”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가 인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을 내던질 만큼.
“미안해요. 바보 같아서.”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요, 아버지.”
아버지, 신을 뜻한다.
신은 ‘그녀’의 이 계획을 반대했다.
신은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설사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그녀’가 이런 고통을 겪게 되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그녀’는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마법진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저 마법진에 들어가는 순간, ‘그녀’는 죽음을 맞이할 거고, 16대천사장의 저주가 영혼에 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월을 건너뛰고 다시 태어나 극한의 고통을 겪고 인간을 위한 제물이 될 것이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있는 녹색 눈의 사내에게 말했다.
“베스윈, 당신에게도 미안해요.”
“…….”
“많이 화났죠? 그래도, 마지막인데 웃어주세요.”
사내, ‘그녀’의 수호 기사였던 베스윈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 아닙니다.”
“……?”
“우리는 다시 만날 겁니다.”
베스윈이 섬뜩하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전 당신의 운명을 바꾸고 말 겁니다.”
* * *
“…….”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긴 어디지? 수도인가?’
쥬웰은 완전히 죽어버린 눈빛으로 멍하니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광인처럼 산발하고 흐트러진 차림새라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힐끗거리며 피하며 지나갔다.
‘모두 내가 저지른 짓이라고?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지금껏 겪었던 모든 고통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니.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모르겠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텅 빈 듯했다.
‘……그냥 죽고 싶어. 다 끝내고 싶어.’
그런 마음으로 멍하니 거리에 앉아 있었다.
마침 수도는 지금 난리 중이었다.
“와아아! 죽여!”
“잡아라!”
그녀가 없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도의 거리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고, 여기저기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난리가 일어난 건지 알아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제국은 격변을 겪는 상황이니. 갑자기 수도에 무슨 난리가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이 난리 중에 자신을 죽여줄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라플 공작의 힘을 받아 사용한 대가로 그녀는 당분간 완전히 무방비해 누구라도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가넷 공작가의 저택이 불탔대.”
“그게 정말인가?”
“그래, 쥬웰 공작님께 쫓겨났던 휘란드 공자와 성기사 죠제프가 손을 잡고 빈틈을 노려 반란을 일으켰다는군. 몰락한 다이아 공작가의 가주 다카펠이 뒤에서 그들을 도왔고. 하필, 가넷 기사단이 외부에 나가 있을 때를 노린 모양이야.”
쥬웰은 멍하니 그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이들이 들고 일어섰던 모양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가넷 공작가의 저택이 불에 탔다고 해서, 이걸로 가넷 공작가가 멸문할 일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알아서 잘 피했겠지.’
불순 불자들의 한때 발악으로 끝날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관심 없었다.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저기, 쥬웰 공작이다!”
“……!”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곧, 두 명의 인물이 앞으로 나왔다.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를 지닌 인물들.
그녀에게 원한을 품은 휘란드와 죠제프였다.
“……이 악마. 죽여주마.”
쥬웰은 지금껏 그들을 위했던 성녀.
사람들은 그런 쥬웰의 위기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일부 사람들이 쥬웰을 지키려고 나서려 했는데.
“다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너희 먼저 죽고 싶은 건가?!”
그들이 칼을 휘두르자 백성들은 겁에 질려 도망갔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아무리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서는 이는 없었다.
쥬웰은 멍한 눈빛으로 그런 백성들의 모습과 휘란드와 죠제프가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서 죽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생각지 않은 외침이 들렸다.
“안 돼! 이놈들!”
‘할아버지?’
쥬웰은 놀란 마음이 들었다.
토른 전 공작이었다.
당연히 어딘가로 피신해 있을 거로 생각한 그가 나타난 것이다.
‘설마, 날 위해 도망가지 않고?’
그런 것 같았다.
토른 전 공작이 몇 안 되는 기사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서, 쥬웰을 데려가! 어서!”
“네!”
그러고 나타난 이는 해밀턴과 마리, 리델하트였다.
그들은 난리가 일어나자 가넷 공작가로 향했고, 토른 전 공작과 합류한 듯했다.
‘아…… 안 돼…….’
쥬웰은 토른 공작의 의향을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
토른 공작은 그녀를 위해 희생할 작정인 것이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토른 공작에게 걸었던 저주가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토른 공작에게 지금껏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치르는 최후를 맞도록 저주를 걸었다.
‘당신은 지금껏 저지른 죄에 상응하는 최후를 맞게 될 거야.’
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아, 안 돼…….”
쥬웰은 바둥거렸다.
하지만 몸에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해밀턴과 마리가 그녀를 끌어 마차에 강제로 태웠다.
토른 전 공작은 마차에 탄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사랑한다, 내 손녀.
그리고 휘란드와 죠제프가 휘두른 검이 토른 전 공작의 가슴을 꿰뚫었다.
“안 돼!”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리고 그녀를 진실로 사랑해 주던 할아버지의 최후였다.
* * *
잔혹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토른 전 공작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시간을 끌었지만, 죠제프와 휘란드는 집요하게 그녀를 추적했다.
결국, 마리가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부터는 내가 막겠어요.”
“마리 양?”
리델하트가 눈을 크게 떴다.
“이대로라면 잡힐 거예요.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 제가 제일 강하니 제가 남아 막겠어요.”
리델하트는 한숨을 내쉬며 같이 마차에서 내렸다.
“아니, 그러지 말고, 내가 막겠소.”
“예하?”
“당신은 제대로 검을 배운 적도 없지 않소?”
마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호신용으로 들고 온 검을 휘둘렀다.
파앗!
오라가 날아갔고, 커다란 나무가 깔끔하게 베어 넘어가는 모습에 리델하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도면 거의 마스터 나이츠에 준하는 실력이었다.
“취미로 배운 솜씨가 있어서.”
“무슨 취미로 마스터 나이츠 급의 실력을.”
“제가 무술의 천재라서.”
리델하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혼자서는 무리요. 정 그렇다면 함께하겠소.”
“혹시 절 걱정해 주는 건가요? 전 이미 로드께 마음을…….”
리델하트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게 아니라 같이 막아야 그나마 오래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러는 거요. 헛소리하지 마시오.”
마리는 흥흥 웃음을 흘리더니, 해밀턴에게 말했다.
“로드를 잘 부탁해요.”
“어…… 어…….”
해밀턴의 안색이 사색으로 질렸다.
“만약, 로드의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면 죽어서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예요.”
해밀턴은 울상을 지었다.
‘어쩌다 내가 이런 신세가?’란 얼굴이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쥬웰은 멍한 눈빛으로 마리와 리델하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 아…….”
지금껏 쌓인 정신적 충격과 토른 전 공작의 죽음을 본 여파로, 쥬웰은 지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쥬웰이 흘리는 괴로운 신음에 마리는 아픈 얼굴을 하더니, 그녀에게 다가가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사랑해요, 내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분.”
“아…… 아…….”
마리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꼭 살아남을 테니, 다시 만나요.”
“아…… 으…….”
“가요, 어서.”
마부석에 앉은 해밀턴이 말을 재촉했다.
마차가 멀어지며 먼지가 피어올랐고, 곧 적들이 들이닥쳤다.
검이 부닥치는 소리와 함께 둘의 모습도 피어오른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 * *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마리와 리델하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다 알 수가 없었다.
해밀턴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았고, 그러다가 무리한 말이 넘어지며 마차가 전복되었다.
그녀는 하필 옆에 있던 낭떠러지로 구르게 돼 해밀턴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아…… 아…….”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여기저기 다쳤지만, 육체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흐…… 흐윽.”
저벅저벅 멍하니 길을 걷다가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운명의 장난일까?
익숙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과거, 옵시디언 패밀리와 휴양차 방문했던 도시.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시에나가 살고 있는 도시였다.
‘……어, 엄마. 엄마.’
그녀는 이성을 잃고, 어머니를 찾아 걸어갔다.
평소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머니를 찾아가지 않았을 테지만, 산산이 무너진 그녀는 누구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엄마…… 엄마…….’
그녀는 미친 듯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거리를 헤맸고, 드디어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에 도착했다.
쾅. 쾅.
힘없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천만다행으로 끼익 문이 열렸다.
그녀의 어머니, 시에나였다.
“누구?”
시에나는 형편없는 몰골의 그녀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 엄마.”
“엄마?”
“저…… 저…… 에스텔…… 레에요. 에스텔레…….”
“……!”
시에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쥬웰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순간.
“……난 그런 딸 둔 적이 없어.”
“어…… 엄마?”
“돌아가세요.”
탁.
문이 닫혔다.
괜한 일에 휘말릴까 봐 거리를 둔 것이다.
“아…….”
그녀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쾅쾅 두드려 보았지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 하하. 하…….”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 흐…… 히…….”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끈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울음인지, 웃음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괴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완전히 빛을 잃게 된 후.
“……누나.”
유스넨이 나타났다.
하지만 쥬웰은 유스넨을 보고도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그저 넋을 잃고 멍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고, 유스넨은 그런 그녀를 보며 처참히 오열하였다.
그렇게 모든 게 무너졌다.
* * *
유스넨은 모든 걸 뒤로하고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영지, 북부의 대공령(領)으로 향했다.
향하는 내내 쥬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죽은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유스넨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막았어야 했을까?’
수많은 이가 경고했다.
그녀는 복수의 끝에서 파멸할 거라고.
‘그녀를 구할 방법은 하나야. 그녀를 막아.’
그 이야기에 따라야 했던 걸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무너진 그녀를 보니, 유스넨은 그제야 후회가 들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막았어야 한다고.
아니다.
그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복수를 막았다면, 그녀는 또 다른 의미로 파멸했을 것이다.
‘왜…… 왜. 당신은 어째서.’
이제 유스넨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고통이 그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란 걸.
세상 모두를 위해.
도대체 누구를 원망해야 한단 말인가?
이 처참한 고통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유스넨은 와락 눈물이 흘러나왔다.
다급히 닦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마리 양과 리델하트 경은 다행히 무사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
정말 천만다행으로 구할 수 있었다.
마리의 검 실력이 예상보다도 훨씬 뛰어났던 덕이다.
“반란을 일으킨 죠제프와 휘란드, 다카펠은 제가 모조리 잡았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혹시, 원하는 처벌이 있으십니까?”
“…….”
“……그냥, 제가 알아서 처형하겠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전혀 반응이 없었지만 유스넨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곧 페리도트령입니다. 아름다운 곳이라, 누나와 한번 와보고 싶었습니다.”
“…….”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저와 계속 함께 있어 주십시오. 최고로 맛있는 음식, 최고로 아름다운 풍경, 뭐든지 최고로 해드리겠습니다.”
결국, 유스넨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사랑합니다.”
* * *
페리도트 영지의 영주성은 낭만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 덮인 대지 위에 놓인 얼음 성 같았다.
유스넨은 다른 이들을 다 물리고, 손수 그녀의 수발을 들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처럼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음식을 주어도 씹지를 않았다.
그녀가 반응을 보이는 건,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았을 때였다.
씻기기 위해 시녀들이 손을 대었을 때 발작하듯 경기를 일으켰다.
유스넨은 그녀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거부하는 거란 걸 알아봤다.
어쩌면 인간 혐오 비슷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녀가 지금껏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마지막 토른 전 공작의 죽음과 어머니의 외면이 지금껏 그녀를 붙들던 끈을 완전히 무너뜨린 듯했다.
유스넨은 직접 그녀의 모든 수발을 들었다.
이미 산산이 금이 간 유리를 대하듯 소중하게.
그렇게 며칠이나 지난 다음일까?
유스넨의 마음을 다시 한번 무너뜨리는 일이 일어났다.
“누…… 나?”
유스넨은 잠깐 잠이 들었다가 옆에 누워 있던 그녀가 사라져서 화들짝 깨어났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창문 위에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유스넨을 한 차례 보더니, 그대로 밑으로 뛰어내렸다.
“아, 안 돼!”
미친 듯이 힘을 발휘해 간신히 참극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도자기를 깨고, 날카로운 파편으로 다시 자신의 목을 찌르려고 하였다.
“그만! 제발! 제발 멈추어주십시오!”
버럭 목소리를 높인 유스넨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텅 빈 눈동자로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녀가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면서도 제발 멈추어달라니.
순간, 유스넨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음이 자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목숨을 유지하게 한다고 해도 고통뿐일 텐데.
‘그래도 안 돼.’
유스넨은 이를 악물었다.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무얼 해도 좋으니…… 제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애원하면서 유스넨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떻게 그녀의 고통을 달래준단 말인가?
그때, 그녀가 멍하니 말하였다.
“왜…… 울어.”
유스넨은 그 말에 자신이 눈물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쥬웰은 손을 들더니, 유스넨의 뺨을 어루만졌다.
“난…… 네가 행복했으면 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어. 우리는…… 왜.”
그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유스넨은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뻣뻣이 굳은 혀를 감싸고,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도 유스넨의 입맞춤에 반응하였다.
파르르, 떨며 유스넨을 끌어안았다.
“안…… 아줘.”
“누나.”
“……어…… 서.”
유스넨은 그녀의 말에 따랐다.
입맞춤을 시작으로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고, 그녀의 모든 영혼을 감싸려고 하였다.
그녀의 상처가 씻기기를 바라며.
텅 빈 쥬웰의 눈동자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달빛이 그런 둘을 아프게 비추었다.
* * *
이후, 그녀는 조금씩 회복세를 보였다.
가볍게 거동을 하였고, 음식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말문도 다시 트였다.
하지만 죽어버린 눈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스넨은 과거, 찬란히 빛나던 별 같은 그녀는 영원히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쥬웰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쁜 곳이네.”
“네, 누나와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나들이를 가고 싶은데.”
유스넨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네, 당장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어디를 가셨으면 합니까?”
“……글쎄. 최대한 예쁜 곳. 기억에 남을 정도로.”
기억에 남다, 그 말이 거슬리게 유스넨을 찔렀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 근처에 얼음 호수가 있습니다. 보석처럼 얼어 빛에 반짝이는 곳이지요. 마음에 들 것입니다.”
“……응.”
그렇게 둘은 나들이를 떠났다.
“와.”
그녀는 호수의 모습에 입을 벌리고 감탄하였다.
에스텔레 시절 수많은 곳을 순례 여행해 봤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는 처음이었다.
유스넨은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에 기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장 그녀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어딘가로 멀리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참, 신은 위대하구나.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라니.”
그녀가 지나가듯 한 말에 유스넨은 울컥하였다.
신 따위.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신을 원망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어째서 당신은 이런 상황이 되어도 이토록.’
유스넨은 가슴이 미칠 듯 아파 억지로 이를 악물었다.
흔들리는 모습을 들킬 것만 같았다.
“있잖아. 나 부탁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유스넨은 가슴이 뛰었다.
직감적으로 아픈 부탁임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한 이야기는 뜻밖의 것이었다.
“우리 결혼하지 않을래?”
“……!”
유스넨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말입니까?”
“응.”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주례도 없고 하객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뭐, 상관없지 않을까? 혹시, 싫어?”
“……아닙니다.”
유스넨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좋습니다. 저도 원합니다.”
그녀는 쿡쿡 웃음을 지었다.
“자, 손.”
서로 손을 잡고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 호수 안에 섰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식장이라니. 최고의 결혼식인걸?”
“……그렇지요.”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싫어?”
“……아닙니다.”
당장 당신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유스넨은 그 말을 삼켰다.
그녀는 옅게 미소를 짓고는 말하였다.
“신께 서약합니다. 당신의 사랑은 끝이 없으니,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심에 감사하며, 또한 우리를 만나게 해주심에 감사를 표합니다.”
결혼의 서약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유스넨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눈물 흘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억지로 웃었다.
“나 에스텔레는 당신을 동반자로 맞아.”
“나 유스넨은 당신을 동반자로 맞아.”
둘은 함께 맹세하였다.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슴이 미칠 듯 아파, 유스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녀가 일부러 짓궂게 웃더니 말하였다.
“자, 키스해야지?”
“……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고마워, 유스넨.”
그녀가 말하였다.
“내 삶 중 유일하게 기뻤던 일은 너와 만났던 거야.”
유스넨은 신이 그녀에게 준 유일한 선물.
위안이었다.
“그러니 꼭 행복해, 내 남편.”
* * *
첫날밤 아닌, 첫날밤을 보낸 후 그녀는 잠에 빠져 있는 유스넨을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페리도트령에 있는 성전으로 향했다.
늦은 밤, 비어 있는 성전의 의자에 앉아 기도를 시작하였다.
“마지막이니, 편하게 기도해도 되겠죠?”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기도는 결국 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
꼭 격식 있는 기도만 기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편하게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듯 입을 열었다.
“음, 흰 강아지를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는 제가 많이 미웠죠?”
전생, 초대 황제 때의 기억을 찾은 이후 그녀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유스넨은 신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안배였다.
고통밖에 없을 그녀의 삶이 가련해, 신이 내린 위로.
‘유스넨이 내 영혼을 취한다는 신탁은 아직도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의 선물 덕에 그녀는 덜 아플 수 있었다.
“알아요. 당신이 제 선택을 반대했음을.”
신은 그녀가 스스로 고통을 겪어 제물이 되는 계획에 반대했다.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억지로 고집을 부려 계획을 강행한 건, 그녀 본인이었다.
“……그런데 저 또 아버지를 실망하게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기도하였다.
“……그래도 절 사랑하실 건가요?”
대답하듯 음성이 들려왔다.
사랑한다고.
그녀가 어떤 일을 하여도 그녀를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을 거라는 음성이었다.
그녀는 옅게 미소를 짓고는 성전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유스넨이 있었다.
“왜 더 안 자고?”
“……가실 겁니까?”
이미 그는 그녀의 속마음을 다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래 생각해 보았는데, 나 복수를 포기할 수 없어. 오펜하임을 죽일 거야.”
“…….”
“웃기지? 결국, 다 내 스스로의 선택이었는데. 누군가를 원망하고 복수하겠다니.”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어떻게 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데. 누구에게라도 원망하지 않으면, 이 아픔을 견딜 수가 없는데.”
“……오펜하임을 죽이면, 제국이 멸망하게 됩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펜하임은 봉인의 열쇠였다.
300년 전, 그녀가 억지로 닫아두었던 게헨나의 어둠이 다시 열리게 될 거고, 제국은…… 아니, 세상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난 참을 수가 없어.”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말리지 않아?”
“왜 말립니까? 당신을 아프게 한 이딴 세상 멸망해도 싼데.”
그녀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내가 죽는 것도 괜찮아? 돌이킬 수 없어질 거야.”
이미 그녀의 영혼은 소멸 직전이었다.
다만, 지금껏 성녀로 해온 선행으로 기적을 일으킬 한 가닥 희망이 있었는데, 오펜하임을 죽이면 그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녀는 뜻밖이란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해 주어 고마워. 마지막인데,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았어.”
만약 유스넨이 말렸다면, 그녀 그를 제압해야 했을 것이다.
그녀는 휙 등을 돌렸다.
더 유스넨을 보고 있으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다행히 유스넨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행복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사라졌다.
그런데 홀로 남은 유스넨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마지막이 아닙니다.”유스넨의 눈빛이 강렬하게 일렁였다.
“전 당신과 함께 행복해질 겁니다.”
그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베스윈이 씨앗을 남긴 곳.
그 씨앗은 이미 완전히 개화한 상태였다.
‘결국, 이렇게 되었지만, 방법이 있어.’
유스넨은 신이 그에게 남긴 신탁을 떠올렸다.
-영혼을 취하리라.
그건 모두의 오해와 다르게 그가 그녀를 해할 것이란 뜻이 아니었다.
그 신탁의 진정한 의미대로, 그는 그녀의 영혼을 취해 구원하게 할 것이다.
이제 완전히 잿빛으로 변한 유스넨의 머리칼이 달빛에 낮게 가라앉았다.
* * *
쨍그랑!
오펜하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휘청였다.
“말도 안 돼. 지금…… 지금 뭐라고 하였소?”
모든 꿈을 이룬 직후였다.
여섯 공작가가 몰락하였고, 오펜하임은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필바하의 이름으로 황도에 입성했다.
오펜하임은 필바하가 자신이었음을 사람들에게 밝혔고, 새로운 제국의 주인이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드디어 일평생을 바라온 숙원을 이루어 황제 위에 오를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쥬웰…… 그녀가 에스텔레였다고?”
오펜하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확인하였다.
엔리크 자작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러면…… 지금껏 그녀가 했던 일들은?’
그제야 쥬웰이 벌여온 행동들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내가…… 그녀의 원수라고?’
오펜하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에게 황권을 되찾는 것만큼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면 바로 그녀였다.
그런데 자신이 그녀의 원수라니.
그것도 직접 지옥에 떨어뜨린.
‘이, 이럴 수가…… 아, 안 돼…….’
오펜하임이 몸을 덜덜 떠는 순간이었다.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폐하, 큰일입니다!”
오펜하임이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마왕 옵시디언이 마물들과 함께 황도를 침략하였습니다! 당장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
그녀가 그를 찾아왔다.
복수를 위해.
* * *
“아아아악!”
“살려줘!”
황도는 불길에 휩싸였다.
수많은 마물이 황도에서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쥬웰이 소환한 마물들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리샤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런 무차별적인 살육은 쥬웰이 평소 지양하는 바가 아니었다.
“……상관없어.”
쥬웰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한 발짝 느리게 답했다.
누가 어떻게 죽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그녀는 인간이란 족속에게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난 사람들을 사랑했어.’
300년 전.
초대 황제였던 그녀가 이런 고통을 감수하며 사람들을 구하고자 한 건, 그녀가 그저 인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나 사랑했음에도, 그녀는 항상 사람들에게 상처받기만 하였다.
‘이제 다 지긋지긋해.’
무표정한 얼굴을 하는데, 옆의 십마 아낙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흑마법을 펼쳤다.
수도 사람들의 이마에 표식이 생겼다.
게헨나에 떨어져도 되는 죄인에게 역십자의 표식이 생겼고, 마물들은 본능에 따라 다른 사람은 내버려 두고 역십자의 표식이 새겨진 죄인들을 노렸다.
“……주제넘게 나서 죄송합니다.”
아낙스가 이런 조처를 한 건, 쥬웰이 나중에라도 후회할까 봐서였다.
쥬웰은 무심히 아낙스를 흘끗 보고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일 따위 별로 관심 없었다.
“난 황궁으로 이만 가보겠다.”
“따르겠습니다.”
“아니, 나 혼자 가겠어.”
이제 마지막이라, 그녀는 리샤크에게 말하였다.
“리샤크, 오늘이 지난 후, 넌 이제 해방이야.”
“……마스터.”
“나랑 그때 약속했었지? 실컷 복수하고 난 다음에는 행복하게 살아보기로 하겠다고. 부디 힘들더라도 노력해 주기를 바라.”
리샤크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쥬웰은 옅게 웃고는 십마들에게 말하였다.
“그동안 수고하였다.”
“……로드.”
“내가 너희의 죄과를 대신 짊어질 테니, 염려 말도록. 너희는 모두 구원받게 될 것이다.”
“로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십마들이 그녀를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쥬웰은 홀연히 안쪽으로 사라졌다.
드디어 최후의 순간이었다.
* * *
소란 때문일까?
황궁은 텅 비어 있었다.
쥬웰은 오펜하임의 지시라는 걸 눈치챘다.
황제의 자리인 대전에 들어가니 텅 빈 눈빛의 오펜하임이 보였다.
“오랜만이군요, 오펜하임.”
“……쥬웰.”
오펜하임의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에스텔레.”
그녀는 침묵함으로 그 말을 긍정했다.
혹시나 하는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오펜하임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난…… 난…….”
“알아.”
쥬웰은 말을 끊었다.
“네 잘못이 아니란 것을. 넌 그저 백성들을 위했을 뿐이지?”
오펜하임은 망설이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황제가 황가에 남긴 계시가 있었소. 자신이 죽음 이후 300여 년 뒤 제물이 나타날 테니, 그 제물을 게헨나에 바치라고.”
그녀가 직접 남긴 계시였다.
오펜하임은 주륵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는 거였다면…….”
“그래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잖아?”
“……!”
쥬웰은 무심히 물었다.
“넌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이이니까.”
쥬웰은 오펜하임의 영혼의 빛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오로지 백성들만을 위하는 그의 성정처럼.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쳤던 것 또한 어떤 사욕도 아닌, 백성들을 위했던 거니 그에게는 옳은 행동이었다.
아마 이대로 죽으면 그는 에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서 영광받을 것이다.
‘그건 싫은데.’
그녀는 비뚤어지게 생각했다.
“네가 백성들을 위해 어쩔 수 없었듯이, 나도 널 용서할 수 없어. 이해하겠지?”
오펜하임은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기를 바라지는 않소. 아니, 내 죽음으로 조금에라도 그대의 마음이 위로받을 수 있다면 이 목숨 몇 번이고 그대에게 바칠 수 있소. 다만, 내가 죽으면…… 게헨나의 어둠을 봉인한 결계가 무너지오. 그래도 괜찮겠소? 그대도…… 백성들을,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소?”
“괜찮아.”
쥬웰은 무감정하게 답했다.
그러고 마검 바리사다를 내질렀다.
마검이 오펜하임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오펜하임이 눈을 부릅떴다.
싸늘한 죽음이 그의 전신에 엄습했다.
그와 동시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쿠우웅!
땅이 커다랗게 울렸다.
마치 대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동시에 빛이 사라지며, 사위가 어두워졌고, 불길한 기운이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일렁였다.
오펜하임이 걱정했던 것처럼 게헨나의 어둠을 막은 봉인이 풀리며, 거대한 침식이 일어나려는 것이다.
이제 이 침식은 제국 수도부터 시작해, 온 대륙으로 퍼져나가게 되리라.
사실상 세상의 멸망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왜…… 왜 죽지 않은?”
오펜하임이 의아한 물음을 뱉었다.
그는 심장이 꿰뚫렸음에도 놀랍게도 죽음을 맞지 않았다.
“편하게 죽음을 맞게 하는 건 너에게 너무 자비로운 처사일 테니까.”
“……!”
“대신, 네 심장에 깃든 월광, ‘봉인의 열쇠’를 가져왔다.”
쥬웰의 손에 월광석처럼 신비하게 반짝이는 빛의 구가 떠올랐다.
“이 월광이 뽑힌 이상, 넌 황족도 뭣도 아니야.”
그 말처럼 월광이 뽑힌 오펜하임의 눈동자는 찬란한 셀레네의 빛을 잃고, 평범한 푸른 빛으로 변하였다.
“셀레네를 타고나지 않은 이는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제국법에 따라 너는 황제가 될 수도 없지. 그리고 제국은 오늘 멸망하게 될 것이다.”
“……!”
오펜하임은 쥬웰의 복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가 일평생 바라왔던 황권과 제국을 무너뜨리게 한 것이다.
마지막 황가의 핏줄인 그가 황족의 자격을 잃고, 그녀가 소환한 마물들에 의해 수도와 황성이 무너지고 있었으니, 라인하르트 제국은 사실상 오늘 멸망했다고 봐도 되었다.
“다만. 이걸로도 너를 향한 복수는 충분하다고 할 수가 없군.”
“그러면…… 어떤 일을……?”
쥬웰은 힐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점점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완벽한 잿빛이 되는 순간, 게헨나의 66대악마가 지상에 강림할 거고, 세상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너의 가장 소중한 건 제국과 더불어 바로 나이겠지?”
“그, 그렇소. 이렇게 되었지만, 난 그대를……!”
절박히 답하던 오펜하임의 눈이 커졌다.
쥬웰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서, 설마…… 그대?”
“그래.”
쥬웰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넌 제국뿐 아니라, 나 또한 잃게 될 거야. 바로 그대의 과오로 인하여.”
“안 돼!”
다급히 오펜하임이 몸을 일으켰지만, 늦었다.
쥬웰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바리사다를 꽂았다.
“안 돼! 안 돼!”
털썩, 그녀가 쓰러졌고.
동시에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다.
쓰러진 그녀의 주위로 마법진이 그려졌다.
인신 공양의 마법진이었다.
그녀의 영혼을 게헨나에 바치는.
“이, 이건…… 설마?”
오펜하임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어째서 스스로를 어둠을 막기 위한 제물로?!”
그녀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강림하던 잿빛 기운이 멈추었다.
오펜하임은 그녀가 스스로 제물이 되어 게헨나의 어둠을 봉인하였음을 깨달았다.
“안 돼! 어째서?! 어째서!”
쥬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결국, 이런 선택을 하였네.’
그녀는 오펜하임이 범인인 걸 알고 고민했다.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면 세상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도 복수하면, 게헨나의 봉인이 풀리게 된다.
사람들이야 죽도록 내버려 두면 되지.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결국,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제물이 되어 게헨나의 어둠을 봉인하는 걸 선택했다.
최악의 고통을 겪고도,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고결한 영혼이니, 제물로서 차고 넘치리라.
그리고 그녀는 최후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전생의 내 뜻대로 됐네. 이것도 모두 전생의 내 계획대로였어.’
에스텔레로 태어나 끔찍한 핍박함을 받고 게헨나의 제물이 된 것.
그게 모든 계획의 끝이 아니었다.
전생의 그녀는 더욱 커다란 걸 바랐다.
바로 어둠을 완벽하게 봉인하는 것.
‘에스텔레 시절의 고통만으로는 어둠을 완벽하게 봉인하기는 모자라니까. 더욱 커다란 고통을 내가 겪게 한 거야.’
빛나는 영혼을 지닌 이가 고난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면 더욱 고결한 영혼이 된다.
그래서 초대 황제는 이 모든 걸 준비했다.
게헨나에서 600년의 고통.
그리고 다시 살아난 이후 겪었던 고통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그녀가 완벽하게 무너지게 되는 것까지.
그렇게 되면 그녀는 완벽한 제물이 될 테니까.
실제로 그 모든 고통을 겪고 났음에도. 인간들을 원망하게 되었음에도 그녀는 결국 다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결말을 선택했다.
그녀가 완벽한 제물이 됨으로써 게헨나의 어둠은 이전처럼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히 봉인되게 될 것이다.
‘난 바보 천치야. 그렇게나 당하고도 또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다니.’
쥬웰은 멍하니 생각했다.
‘아버지, 죄송해요. 또 뜻을 어겼어요.’
저 멀리서 신이 자신을 향해 눈물 흘리는 게 보였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몸이 빛으로 산화하여 흩어지기 시작했다.
소멸의 순간이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흰 강아지. 미안해. 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는데.
신이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걸까?
유스넨의 얼굴이 보였다.
“아.”
쥬웰은 마지막 순간 배시시 웃었다.
“손…… 잡아줘.”
뜨거운 손길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뚝, 눈물이 그녀의 뺨에 떨어졌다.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행복…… 해야 해. 그러기…… 힘들까?”
쥬웰은 물으면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흰 강아지가 어떻게 행복해진단 말인가?
그런데 유스넨이 뜻밖의 답을 하였다.
“알겠습니다. 꼭 행복해지겠습니다.”
쥬웰은 힘없이 생각했다.
‘……나 없는데도 행복해진다고 하니까, 그건 또 서운하네.’
유스넨이 행복하길 바라지만, 또 그가 자신 없이 행복해진다고 하니, 서운한 이 마음은 뭘까?
미련이라고 생각하여 그녀는 웃었다.
“응, 꼭…… 행복해. 나 잊고.”
그리고 마지막 순간.
“아니요.”
유스넨이 그녀의 입에 떨리는 입을 맞추었다.
“당신과 함께 행복해질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데리러 갈 테니.”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의식이 멀어지며, 아득하게 이런 말이 들렸다.
“나, 당신의 영혼을 취하여 당신을 구원토록 하겠습니다.”
* * *
그날, 수많은 일이 있었다.
세상을 멸망시킬 거대한 침식이 일어나려 하였으며, 성녀 쥬웰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그 침식을 막았다.
그녀가 죽는 순간, 하늘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마치 울음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신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들렸다.
라인하르트 제국은 300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오펜하임은 황도를 떠났다. 사람들이 만류하였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떠나면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렸다. 성녀 쥬웰은 사실 에스텔레의 재림이었으며, 그녀가 모두를 위해 희생하였음을.
그녀의 희생을, 세상 사람들이 누구 때문에 구원받았는지 모두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알린 것이다.
쥬웰, 아니, 에스텔레는 흑요석의 성녀라 불리며 인류를 구원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녀가 되었다.
그렇게 라인하르트 제국은 무너지고, 그 위에 새로운 제국이 건국되었다.
옵시디언 제국이었다.
흑요석의 성녀, 에스텔레를 기리는 의미의 이름이었다.
초대 황제는 가넷가의 새로운 가주인 엔리크가 되었다.
사실, 엔리크도 오펜하임처럼 모든 걸 뒤로 하고 떠나려 하였지만, 유스넨이 만류하였다.
“그녀는 백성들이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그녀를 제물로 바쳤던 것에 부채 의식이 있다면, 당신이 그 역할을 해주십시오.”
“…….”
엔리크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엔리크 당신은 에스텔레, 그녀를 원망합니까?”
“…….”
엔리크는 새빨개진 눈으로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그는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쳤고, 에스텔레는 그의 딸을 죽였다.
엔리크는 백성들을 위한 일을 하였고, 에스텔레는 자신의 복수를 한 것이니, 누가 잘못했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였으니.
“당연히…… 원망하오. 물론, 그녀의 행동이 정당하였다는 건 알지만…… 쥬웰은 내 딸이었으니. 원망하지 않을 수 없소.”
“……그렇습니까.”
“……그런데 하나 우스운 게 무엇인지 아시오?”
엔리크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난…… 그 아이…… 에스텔레가 그립소. 쥬웰만큼.”
“……!”
엔리크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웃기지 않소? 딸을 죽인 이를 그리워하다니.”
엔리크는 처음에 자신의 감정에 굉장히 당황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에스텔레…… 또한, 내 딸이오.”
에스텔레가 쥬웰이 된 이후의 시간.
그 시간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엔리크는 자신이 에스텔레 또한 딸로 여기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보고 싶소. 만나서 미안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소.”
엔리크는 오열하였다.
유스넨은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말하였다.
“그 바람은 이루어질 겁니다.”
“……무슨 말이오? 에스텔레의 영혼은 소멸하여 게헨나로 돌아간 것 아니오?”
“그렇지요.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게헨나로 가서 직접 그녀의 영혼을 취하여 오겠습니다.”
“무슨…… 당신이 어떻게 게헨나에 간단 말이오? 당신은 천사…….”
엔리크의 눈이 커졌다.
하나의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네, 맞습니다.”
유스넨이 날개를 펼쳐 보였다.
시커먼 잿빛으로 변한 날개.
“전 이제 타천사이니, 게헨나에 갈 수 있지요.”
* * *
유스넨은 과거 베스윈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라플 공작과 싸움 이후 의식을 잃고 있을 때였다.
[아마, 넌 그녀를 구원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네 의지가 굳건한 건 알겠지만, 이건 정해진 운명이야. 그것도 그녀가 직접 정한.]
베스윈은 킬킬 웃었다.
[내 여왕께서 조금이라도 이기적이라면, 파멸을 피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어리석을 정도로 선하기에 결국 자신이 직접 예정한 파멸을 맞고 소멸하게 될 것이다.]
“…….”
[너에게 남긴 씨앗은 그녀가 파멸을 맞이했을 때를 위한 안배이다.]
베스윈이 유스넨에게 말하였다.
[너에게 내 모든 힘을 내려줄 테니, 그녀의 영혼이 소멸하면 게헨나로 와서 그녀의 영혼을 부활시키도록.]
“……!”
유스넨의 눈이 커졌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원래라면 불가능하지.]
베스윈은 구체적인 말을 이어갔다.
[소멸은 영혼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야. 산산이 흩어지는 걸 뜻하는 거지. 그렇게 흩어진 영혼은 게헨나의 일부가 된다.]
“그러면?”
[그 흩어진 영혼을 모조리 다시 모으면, 다시 그녀를 소생시키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베스윈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넌 신께서 그녀를 위해 예비한 조커이니까.]
유스넨은 그제야 그녀의 영혼을 취하라는 신탁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신께서는 그녀가 결국 사람들을 위한 희생할 걸 알았다.
그래서 그녀가 소멸 이후 부활할 수 있도록 유스넨을 안배한 것이다.
게헨나에 흩어진 그녀의 영혼을 취해 부활시키는 게,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끔찍이 고통스러운 과정이겠지. 할 수 있겠나?]
드넓은 게헨나에 흩어진 수많은 영혼의 조각을 모으는 일이다.
도대체 몇백 년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또한, 그동안 게헨나에서 어떤 고난을 견뎌야 할지.
하지만.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군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몇백 년이 아니라 몇천 년이라도, 아니, 영원한 고통이라도 기쁨으로 감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유스넨은 게헨나로 향했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 * *
유스넨이 게헨나에서 수백 년 동안 그녀의 영혼을 모으는 동안, 지상에도 시간이 흘렀다.
다만, 게헨나처럼 몇백 년의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다.
게헨나와 인간계는 시간의 축이 완전히 다르니까.
에스텔라가 600년의 고통을 겪었지만, 지상에는 3년 만이 흘렀던 것처럼.
그래도 많은 것이 변할 시간은 되었다.
리델하트는 성전의 새로운 법왕이 되었다.
에스텔레가 바랐던 대로 종교 개혁을 이끌었고, 성전은 과거와 다르게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가 되었다.
마리는 제국 최고의 거부가 되었다.
하지만 에메랄드 공작가와 다르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거부가 되었다. 이것 역시 에스텔레의 뜻을 따라서였다.
리샤크는 사람들을 향한 원한을 완전히 풀지는 못했다.
하지만 더는 무차별적인 살육은 저지르지 않았다. 대신, 악마보다 더욱 악마 같은 인간들을 처단하는 죽음의 기사가 되었다.
악인들은 언제 죽음의 기사가 찾아올지 몰라 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마지막으로 해밀턴은…… 죽지 않고 새로운 제국의 황태자가 되었다.
‘으아아! 내가 왜 황태자야!’
원래 에스텔레는 최후의 순간, 해밀턴의 목숨을 거두려고 했었다.
그런데 살려준 것은 자비를 베푼 게 아니라…… 까먹어서였다.
마지막, 워낙 정신적으로 극한에 몰려 하찮은 해밀턴 따위를 신경 쓸 수가 없었고 덕분에 해밀턴은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
해밀턴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려고 하였지만, 엔리크에게 잡혔다.
‘남은 시간, 죗값을 치러라.’
해밀턴은 에스텔레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로 생각해 겁을 먹고 열심히 일했다.
최대한 열심히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면, 에스텔레가 돌아와도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약삭빠른 계산이었다.
그러다가…… 황태자가 되었다.
‘내가 황태자라니! 황태자라니! 전혀 바라지 않았다고!’
해밀턴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게 새로운 황가가 된 가넷가에는 손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엔리크는 황제가 되었음에도 재가하지 않았고, 해밀턴밖에 황위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이러면 난 평생 일해야 하는 노예가 되는 거잖아! 그 악마가 무서워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할 거고!’
그렇게 해밀턴은 백성을 위한 노예가 되어 영원히 고통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후 서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사람마다 모두 한가지 공통된 마음을 품었다.
모두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해밀턴 빼고.
* * *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일까?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난…… 누구지? 에스텔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혼이 소멸하면 산산이 흩어져 존재와 자아마저 잃게 된다.
에스텔레도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의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더구나 스스로를 ‘에스텔레’라고 인식하기까지 하다니?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에스텔레…….’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에스텔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 더 깊은 생각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이어서 더 시간이 흘렀다.
흐릿한 의식은 조금 더 명료해졌다.
더 고차원적인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듯해.’
에스텔레는 멍하니 생각하였다.
게헨나라고는 믿을 수 없게, 포근한 느낌이었다.
마치 요람에 들어온 것처럼.
또한, 따뜻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그녀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종종 이런 소리가 들렸다.
[어서 다시 보고 싶습니다.]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 합니다.]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음성이었다.
너무 아련한 음성이어서…… 그녀는 그 음성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욱신 아팠다.
‘……나도…… 보고 싶어. 흰 강아지…….’
그제야 에스텔레는 모든 걸 깨달았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유스넨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영혼이 회복되어가며 기억과 자아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유스넨의 품속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품속이라 이토록 따뜻한 것이다.
‘난…… 후회하나?’
에스텔레는 자신의 과거를 반추해보았다.
지독히도 괴로웠던 삶.
그럼에도 결국 사람들을 위한 선택을 하였다.
후회하냐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너무나 괴로웠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어.’
어서 흰 강아지와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느껴보고 싶었다.
‘내게는…… 그럴 자격이 있지 않을까?’
그녀를 감싼 따뜻함이 강해졌다. 그녀의 물음에 마치 그렇다고 유스넨이 대답하는 듯했다.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어서. 빨리. 힘을 내줘.’
그녀는 유스넨과 만나게 될 날을 꼬박 기다렸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영혼이 회복하며, 아릿하게 들리던 그녀를 부르는 음성이 더더욱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는 마주하게 되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스넨의 얼굴을.
“……누나.”
수백,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을 바라온, 아득한 그리움과 아픔, 갈망이 담긴 눈빛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스텔레는 순간 어떤 말을 하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한마디만 하였다.
“……늦었잖아.”
“……죄송합니다.”
강한 품이 그녀를 감쌌다.
떨리는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제 제가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함께?”
유스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원히.”
* * *
옵시디언 제국이 건국된 지 10년이 지났다.
제국의 사람들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날이 좋네.”
농사를 짓던 농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 좋은 날들이야.”
과거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게 행복한 나날이었다.
백성들을 핍박하던 여섯 공작가가 모조리 사라졌으며, 동시에 게헨나가 완전히 봉인되어 마물들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평화와 행복이 꽃핀 시대.
그리고 사람들은 이게 누구의 덕분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분 덕분이야.”
“그래, 맞아.”
“우리 모두 감사함을 잊지 않아야 해.”
그녀, 흑요석의 성녀.
사람들을 위해 숱한 일을 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영혼을 바쳐 게헨나의 어둠을 봉인한 위대한 구원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녀 덕분에 구원받았다.
“아, 오늘 마을에 의사가 왔다더군.”
“그런가? 이런 곳에?”
워낙 외진 곳이라 따로 의사가 없었다.
의사를 보려면 큰 마을로 나가야만 했다.
“응, 부부인데 외진 곳을 떠돌며 진료 봉사 여행을 다니는 분들이라고 하셔.”
“나도 한번 가봐야겠군.”
마을 회관으로 가니, 이미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농부는 진료를 하고 있는 이들을 보며 감탄했다.
젊은 남녀였는데, 두 명 모두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한 명은 찬란한 은발을 지닌 미남이었는데, 감람빛 눈동자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남자도 아름다웠지만, 더욱 눈을 끄는 건 여인이었다.
선한 아름다운 얼굴, 에메랄드빛 눈동자.
자애로운 미소가 홀린 듯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함이 깃든 미소였다.
‘내가 왜 이러지?’
여인을 보는데 알 수 없게 마치 눈물이 날 것 같은 먹먹함이 느껴졌다.
마치 위대한 성인을 보는 것처럼.
넋을 놓고 여인을 보고 있는데, 냉막한 음성이 들렸다.
“어디 아파서 오신 겁니까?”
“아…… 아.”
여인을 뚫어지라 본 게 마음에 안 들기라도 했는지 남자 의사가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
“아…… 여기, 관절이 안 좋아서.”
“약을 지어줄 테니, 받아가십시오.”
“아, 아, 네.”
남자는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향한 시선을 가렸다.
농부는 뻘쭘한 얼굴로 약을 받았다.
돌아가기 전, 왠지 시선이 끌려 다시 그들을 바라보았는데.
둘은 마침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를 향한 시선에 웃음이 깃들어 있었는데, 참 행복해 보이는 시선이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둘이 서로를 참 많이 사랑하며, 행복해하고 있음을.
그런 둘을 축복하듯 맑은 하늘에 바람이 불었다.
공작가의 흑막 영애님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