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Chapter 3-3 처형식 (2) (17/18)

목차

Chapter 3-3 처형식 (2)

4막 악마의 기도

Chapter 3-3 처형식 (2)

“이런 이야기를 농담으로 할 리가 있나요?”

“왜? 갑자기?”

놀람인지 기대인지, 아니면 긴장인지 오펜하임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반면 쥬웰은 무심하게 말했다.

지극히 사무적으로.

“전하와의 결혼은 정략적으로 제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여러모로.”

오펜하임과 결혼하면 쥬웰이 얻을 이득은 의외로 굉장히 많았다.

그는 황태자니까.

황태자인 그를 반려로 삼으면 쥬웰은 황실의 정통성까지 얻게 된다.

진정한 황제가 되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 이득 말고도, 추후 내가 죽은 후 오펜하임에게 힘을 나누어주기도 유리하겠지.’

그녀는 자신이 죽은 후, 황실의 힘을 어느 정도 돌려줄 생각이었다.

가넷과 황실이 균형을 이룰 수 있게.

‘어느 한쪽이든 힘을 독점하면 썩게 되는 법이니까.’

그러니 가넷과 황실의 이원 체제가 백성들을 위해 가장 좋은 지배 체제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펜하임이 자신의 반려가 되면 자신이 죽은 후 힘을 나누어주기 훨씬 좋을 것이다.

‘그러니 이 결혼은 나쁘지 않아. 결혼은 사랑하는 이와 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니.’

사실 쥬웰은 오래전부터 꿈이 있었다.

에스텔레 때부터 간직하던 꿈이었다.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이루어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것.

즉, 그녀가 진정으로 결혼하길 바라는 상대는 흰 강아지 유스넨이었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그러니 누구와 결혼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람.

‘이왕이면 이득이 될 이와 하는 게 낫겠지.’

죽기 전, ‘결혼’이란 ‘패’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도 아쉽긴 했다.

결혼은 사용하기에 따라 커다란 정략적 이득을 볼 수 있는 수단이니까.

특히 오펜하임과 그녀의 결합은 아주 커다란 파급력을 가지게 될 거고, 원수들을 짓밟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흰 강아지에게도 이게 나아.’

쥬웰은 일부러 잔인하게 생각했다.

‘나와 멀어지는 게 흰 강아지의 미래를 위한 길이니까. 내가 다른 이와 결혼하면 흰 강아지도 마음을 포기하겠지.’

안다. 자신의 이런 생각이 답답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지금 수단, 방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원수들을 더욱 처절히 짓밟기 위해서.

또한, 유스넨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해야 했다.

그런 마음으로 쥬웰은 오펜하임에게 말하였다.

“어떤가요? 저와의 결혼.”

“…….”

“전하께도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데.”

오펜하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쥬웰이 오로지 정략적 이유만으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을 알고 있다.

비참하지만 쥬웰은 그에게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제안을 선뜻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를 그만큼 바라니까.

이런 이유로라도, 그녀와 하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데, 왜 그렇게 아파하는 눈동자인 거요?”

“……!”

쥬웰은 당황했다.

오펜하임은 슬프게 말했다.

“결혼을 이야기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픈 눈동자를 하다니. 세상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그런 눈동자를 보며 결혼을 받아들이겠소?”

“…….”

쥬웰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아.”

오펜하임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뜻밖의 말을 하였다.

“하지만 난 그대의 제안 받아들이겠소.”

“네?”

쥬웰은 놀란 눈을 하였다.

거절할 것처럼 그러더니?

오펜하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니. 배려한답시고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하는 건 영원히 친구로만 남을 머저리들이 하는 바보짓이겠지. 단, 조건이 있소.”

“조건이라면?”

“결혼은 그대가 내게 마음을 열고 난 다음 할 거요.”

“……뭐라고요?”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오펜하임은 미의 여신처럼 환하고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난 욕심쟁이이니까. 그대와 결혼할 기회도 놓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그대가 슬퍼하는 결혼도 하고 싶지 않소. 그러니 그대와 결혼은 하되, 그대가 내게 마음을 열고 이 결혼을 행복하게 생각할 때 할 거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할 거면 지금 바로 하십시오.”

“싫소. 어쨌든 오늘 약속한 거요.”

마침, 곡이 진득하게 변하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춤동작에 맞추어 오펜하임이 그녀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둘의 거리가 완전히 밀착하였고, 오펜하임이 강렬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앞으로 나와 결혼할 거라고. 그러니 우리는 이제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 것이오.”

“…….”

다시 춤동작에 맞추어 오펜하임의 품에서 멀어진 쥬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네.’

오펜하임의 태도를 봤을 때 정략결혼 건은 안 될 것 같았다.

‘흰 강아지라면 왠지 그냥 앞뒤 안 따지고 바로 결혼하자고 했을 것 같은데.’

유스넨은 계속 선 결혼 후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니 이런 제안을 들으면 앞뒤 따지지 않고 냉큼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펜하임은 기회가 와도 살리질 못하다니.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로맨스 소설 속 친구로만 남는 서브 남주 같은 모습을 보이는 오펜하임이었다.

“결혼 건은 그만 되었고, 또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쥬웰은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전하가 필바하 맞지요?”

“……!”

오펜하임의 눈이 커졌다.

혁명군의 필바하가 오펜하임이라는 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실이었는데?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전하와 저는 한편이니 저에겐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펜하임은 당황한 얼굴을 얼른 숨겼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혁명군으로 은밀히 로든 왕국을 칠 준비를 해주십시오.”

“……!”

뜻밖의 이야기였다.

로든 왕국은 라인하트르 제국의 동맹국인데 칠 준비를 하라니?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전하의 힘이 너무 약하니까요.”

“…….”

쥬웰은 무심히 설명하였다.

“전하가 지닌 혁명군의 힘, 너무 약합니다. 제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정도로요. 로든 왕국을 집어삼키면 비로소 제게 도움이 될 힘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무고한 이들을 칠 수는 없소.”

오펜하임다운 대답이었다.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로든 왕국이 무고하지는 않지요. ‘호박 광산’만 보더라도 말입니다.”

“……!”

보석안의 일족인 앰버 일족의 눈동자를 채굴하는 ‘인간 광산’을 뜻한다.

‘인간이 벌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죄악이 자행되고 있는 곳이지. 그것도 왕국의 이름으로.’

쥬웰은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로든 왕국의 백성들은 왕가의 학정에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명분은 충분할 겁니다.”

“…….”

하지만 오펜하임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로든 왕국을 치며 흐를 피가 걱정되는 듯했다.

쥬웰은 그 걱정을 잠재워 주었다.

“혁명군의 피해가 걱정되면 염려 마십시오. 전하를 돕는 조력자가 있을 거니, 큰 희생 없이 로든 왕국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조력이라면? 그때 그 마왕을 뜻하는 거요?”

과거, 혁명군이 반란을 일으킬 때 정체 모를 마왕이 오펜하임을 도왔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왕의 정체는 쥬웰로 이번에도 그녀가 나설 것이다.

‘마침, 마왕 타란툴라는 로든 왕국의 왕족인 아피엘 왕녀이니 타란툴라를 제거하며 로든 왕국의 왕가도 함께 무너뜨려야지.’

“은밀히 로든 왕국을 칠 준비를 한 후, 로든 왕국 내부에서 소란이 일어나면 혁명군으로 점령해 주십시오. 손쉽게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그런데 그렇게 내가 로든 왕국을 얻으면 그대에게 어떤 이득이 되는 것이오?”

쥬웰은 설명해 주었다.

“로든 왕국을 점령해 힘을 갖추면 제가 이야기하는 것에 맞추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주십시오. 그러면 전 그 반란을 명분 삼아 여섯 공작가를 무너뜨리겠습니다.”

그녀의 계획은 이러했다.

힘을 쌓은 오펜하임이 커다란 규모의 반란을 일으키고, 그 반란의 원인을 가넷을 제외한 다른 공작가에 돌리는 것이다.

그러면 쥬웰은 명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반란의 원흉이 된 공작가들을 짓밟을 명분 말이다.

‘특히 난 이미 백성들의 민심을 사로잡은 상태니까. 백성들은 내가 여섯 공작가를 짓밟는 것을 절대적으로 지지할 거야.’

외부의 혼란과 그녀가 움켜쥔 힘이 합쳐지면 다른 공작가들은 속수무책으로 짓밟히는 처지가 되리라.

“…….”

오펜하임은 쥬웰의 계획에 소름이 돋는지 잠시 아무런 대답도 못 하였다.

“무섭구려.”

“그래서 싫습니까?”

“아니, 더욱 결심이 드는구려.”

오펜하임은 웃음을 지었다.

“그대와 반드시 결혼해야겠다는 결심 말이오.”

오펜하임이 강한 눈빛으로 말하였다.

“오늘 약속한 것 잊지 마시오. 나와 결혼하기로 한 것 말이오.”

쥬웰은 그 말에 피식 웃었고, 곧 춤이 끝났다.

끝나고 났더니 왠지 서늘한 시선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유스넨이 보내는 시선이었다.

“…….”

왜인지 유스넨의 눈빛이 아까보다 한층 더 어둑하고 집착 어린 시선으로 변해 있었다.

쥬웰은 곧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오펜하임과 결혼 이야기한 걸 들었구나.’

그녀는 남들에게 안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유스넨은 천사의 힘을 지닌 이. 초월적인 청각으로 둘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기분 나빴을지도. 아니, 뭐 상관없나?’

멀어지기로 다짐했는데 이런 일을 일일이 눈치 보는 것도 우스웠다.

쥬웰은 유스넨이 그러든 말든 일부러 외면했다.

한편, 그런 쥬웰과 유스넨의 모습에 연회장의 사람들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쥬웰과 유스넨 당사자들은 심각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왜인지 설레는 광경이었다.

특히, 기혼의 귀부인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흥미진진 두근두근 속닥거렸다.

“어머어머, 광휘의 대공 전하께서 쥬웰 소공작을 보는 눈빛 보세요. 마치 잡아먹을 것 같은…….”

“나도 누가 저렇게 바라봐 주었으면. 내 남편 웬수 놈은, 으이고.”

사람들은 마치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을 실제로 보듯 호호, 후후 의미심장 반짝반짝 눈빛을 보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연애사에 빠삭한 이들은 직감했다.

왜인지 저러다가 유스넨 대공이 사고를 터뜨릴 것만 같다고.

그것도 아주 가슴 설레고 흥미진진한 사고를.

그리고 쥬웰도 비슷한 위기감(?)을 느꼈다.

억지로 외면하고 있는데, 유스넨의 시선이 점점 집요해지고 있었다.

‘……흰 강아지, 저러다가 돌발 사고라도 치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설마 흰 강아지가 그러지는 않겠지.’

쥬웰은 불안감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유스넨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때, 뜻밖의 인물이 쥬웰에게 다가왔다.

“저도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칼날을 벼린 것처럼 차가운 얼굴.

추기경 리델하트였다.

그 신청에 사람들은 어머, 어머, 다시 경탄을 터뜨렸다.

‘리델하트 추기경께서 쥬웰 소공작님의 네 번째 약혼자 자리를 바란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건가?’

‘리델하트 경도 매력 있으시지.’

참고로, 리델하트도 은근히 인기가 많았다.

금욕적이면서 날카로운 분위기가 왜인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위험한 매력?

아니, 저 고고한 철벽을 무너뜨리고 싶은 매력. 즉, 넘어뜨리고 싶은 매력이었다.

당사자인 쥬웰은 당황해 리델하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가 왜 춤 신청을?’

리델하트는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냥, 신청하는 겁니다. 특별히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정말 절대로.”

“……그런가요.”

쥬웰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의미도 없으면, 그냥 춤을 신청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면 왠지 화낼 것 같았다.

‘뭐, 춤 한 곡 추는 거야 어려울 것 없으니까.’

손을 잡고 단상에 나섰는데, 문제가 있었다.

“…….”

첫째로, 흰 강아지 유스넨.

또 다른 남자와 춤을 추러 단상에 오른 쥬웰을 보는 그의 눈빛이 더욱 어둑해졌다.

그거야 어떻게든 무시하면 된다 치더라도.

‘……춤추자고 했으면서 오라버니는 왜 이렇게 뻣뻣이 얼었는데?’

함께 춤을 추는 리델하트의 몸이 목석같았다.

완전히 긴장한 모습.

“……뭐가 불편한가?”

쥬웰은 의아해 물었다.

아까는 사람들의 시선이 있으니 경어를 쓴 거고, 춤을 출 때는 다른 이들이 대화를 들을 일 없으니 편하게 말을 낮춘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쥬웰은 고개를 갸웃하고, 다음 춤동작을 하였다.

그러니까, 리듬에 따라 리델하트의 품에 파고든 것이다.

“……!”

그러자 리델하트의 목이 확 붉어졌다.

그는 버럭 말했다.

“가까이 붙지 마십시오!”

“……가까이 붙지 말라고?”

쥬웰은 당황해 반문했다.

“……그러면 춤을 어떻게?”

연회장에서 추는 사교춤은 서로 간의 접촉이 불가피했다.

“그, 그렇다고…… 꼭 붙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먼저 춤을 신청하고는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리델하트가 빨개진 얼굴로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황태자 전하와 결혼하실 겁니까?”

“……뭐?”

“그…… 아까 춤을 추는 걸 보고 사람들이 그리 떠들어대서 말입니다. 로드께서 황태자 전하를 결혼 상대로 선택할지도 모른다고.”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는단 말인가?

“뭐, 고려하고 있긴 한데. 황실과의 결합은 여러모로 내게 이득이 될 테니.”

쥬웰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결혼하면 하는 거고, 상황상 안 되면 안 하는 거고.

아까 꺼낸 오펜하임과의 결혼은 딱 그 정도 생각이었다.

‘뭐, 정황상 실제 결혼하게 될 가능성은 극히 적어 보이지만.’

그런데 리델하트가 또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난데없는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정치적 이득을 따지면, 허수아비 황실보다 성전이 낫지 않습니까?”

“……뭐?”

쥬웰이 멍한 얼굴로 반문하였다.

지금 뭐라고?

“……그러니까…… 정치적 이득을 따지자면…….”

떠듬떠듬 말하던 리델하트의 얼굴이 갑자기 사과처럼 화악 붉어졌다.

“그, 그러니까 그냥 말해본 겁니다! 괜히 쓸데없는 오해 하지 마십시오!”

춤이 끝난 후 리델하트는 거친 동작으로 부리나케 사라졌다. 그래 봤자 사과처럼 변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지만.

쥬웰은 황망히 그런 리델하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황실보다 성전이 낫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보고 결혼하자고?’

쥬웰은 어안이 벙벙해 눈을 끔뻑거렸다.

‘……뭐야? 리델하트 오라버니, 날 진짜 좋아하는 거야?’

뭔가 리델하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은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는 거의 고백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쥬웰은 리델하트가 남긴 충격을 깊게 고민할 수가 없었다.

뒷덜미로 음습한 시선이 느껴졌다.

유스넨이었다.

“…….”

또, 대화를 들은 건지 흰 강아지 유스넨의 눈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한기마저 돋는 눈빛으로, 귀부인들은 그런 유스넨의 집착 어린 눈빛에 자신들이 더 흥분해 서로 환호성을 질렀다.

‘……난 모르겠다. 모른 척하자. 난 모른다. 모른다.’

쥬웰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저리 뚫어질 듯한 시선을 보내는데 모른 척하기도 참으로 곤혹이었다.

‘저러다가 진짜 사고라도 치는 건?’

그렇게 불안해하는 순간.

정말 일이 벌어졌다.

유스넨이 쥬웰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 어머.’

‘과연?’

귀부인들은 자신들이 더 흥분해 서로의 팔을 부둥켜안았다.

그렇게 장내가 고요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유스넨과 쥬웰에게 집중되었다.

쥬웰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이런.’

두근.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유스넨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요동을 쳤다.

숨 한 번 쉴 때마다 유스넨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유스넨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일부러 더더욱 냉랭한 표정으로 유스넨을 맞았다.

“페리도트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철저히 공적이고 사무적인 응대.

유스넨의 눈동자에 순간 아릿함이 스쳐 지나갔다.

쥬웰도 가슴이 아릿했지만, 참았다.

“혹시 전하께서도 춤을 신청하러 오신 건가요? 죄송하지만 그건 곤란할 것 같군요.”

“……아니, 그런 이유로 온 게 아닙니다.”

유스넨이 한 발짝 늦게 답하였다.

“그러면?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쥬웰은 팔짱을 끼었다.

계속해서 거리를 두는 언행과 태도였다.

“……당신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십시오.”

“……남들의 눈앞에서 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잠시, 제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쥬웰은 고개를 저으려 했다.

단둘이 있자니.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부탁합니다. 제발.”

유스넨의 눈빛을 보는 순간.

쥬웰은 또 자신의 결심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

지독히도 끔찍한 아픔이 깃든 눈빛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칠 듯 아릴 정도로.

“잠시라도 좋으니, 부디…… 제게 시간을 나누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 * *

결국, 쥬웰은 유스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유스넨과 둘이서 연회장 밖으로 나온 쥬웰은 속으로 한숨을 팍팍 내쉬었다.

유스넨의 처연한 눈동자를 본 순간, 그의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건 핑계일지도.’

쥬웰은 실소했다.

그녀도 원했다.

유스넨과 함께 있기를.

유스넨을 위해 그러면 안 됨을 알고 있음에도, 잠시라도, 찰나의 순간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다.

유스넨과 단둘이 있게 되자 두근두근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의 품에 안기고 싶어.’

그뿐일까.

찰나의 순간, 그를 향한 수많은 바람이 떠올랐다.

‘제길.’

“……그래, 네 부탁대로 나왔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

유스넨은 대답 대신 말없이 쥬웰을 바라보았다.

마치, 간신히 얻은 이 기회를 통해 그녀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눈동자에 담고 싶다는 듯.

그의 눈빛에 쥬웰은 울컥 가슴이 흔들렸다.

“어서.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누나.”

“내 마음을 돌이킬 생각은 마. 난 너와 이루어질 생각이 없어.”

하지만 유스넨이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지금 당장 그런 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유스넨이 슬프게 웃었다.

“속 편하게 그런 걸 바랄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

“제가 지금 누나께 바라는 건, 그저 하나입니다. 당신이 구원받는 것. 그래서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 전 당신을 구원하고 말 겁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마치 맹세하는 듯한 유스넨의 말에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쥬웰은 근본적인 문제를 깨달았다.

유스넨은 그녀의 구원을 바란다.

불가능한 일을.

그리고 그 불가능한 일에 매달림으로 타천에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심지어, 유스넨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누나의 복수에 조력을 주면 안 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 광휘 주제에.”

“광휘로서 누나를 돕겠다는 겁니다.”

“뭐?”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전 지상의 어둠을 처단하기 위한 에덴의 대리자입니다. 누나의 원수들은 모두 변명의 여지가 없는 끔찍한 악인들이니, 그들을 처단하는 것도 제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궤변을.”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광휘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런 게 아니었다.

유스넨은 지금 억지를 부리려는 것이다.

“그런 일을 했다가는 넌 정말로 파멸할 거야.”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유스넨이 절박한 눈으로 말하였다.

“일전, 이야기했지요? 복수를 포기하면, 에덴의 힘을 이용해 누나의 소멸을 막고 구원할 가능성이 있다고요. 하지만 복수를 포기하는 게 불가능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러니 복수의 끔찍한 일은 제가 모두 대신하겠습니다. 그래서 누나가 짊어질 업과를 제가 나누어 누나가 구원받을 가능성을 만들겠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었다.

얼마 전, 에스텔레의 유해를 유스넨이 대신 성화시켰던 것처럼.

그녀가 앞으로 저지를 끔찍한 일을 유스넨이 대신해 업과를 나누어 짊어지면, 어쩌면 그녀는 소멸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단, 그러면 흰 강아지는 타천하게 되겠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

자신을 위하는 유스넨의 마음에 가슴이 울컥하여, 쥬웰은 등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힘이 빠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유스넨이 놀라 그녀를 붙들었다.

“누나, 안색이?”

“놔!”

탁!

쥬웰은 거칠게 유스넨의 손을 쳐내었다.

하지만 유스넨은 물러나지 않았다.

“안색이 정말 좋지 않습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내가 어떻든,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최대한 차갑게 내뱉었지만 유스넨의 눈동자는 더더욱 걱정에 물들었다.

정말 쥬웰이 걱정되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쥬웰은 몸에 이변을 느꼈다.

‘뭐지?’

갑작스레 격통이 밀려온 것이다.

그것도 끔찍한.

‘갑자기 왜?’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순간, 더더욱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욱.”

갑자기 토기가 밀려온 것이다.

“누나!”

“괘, 괜찮아. 속이 안 좋은 것이니…… 욱.”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왜 이러는 거야. 뭐 먹은 것도 없는데.’

어떻게든 토기를 억누르려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쥬웰은 바닥에 무릎 꿇고 안의 내용물을 왈칵 토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토한 내용물을 보고 뻣뻣하게 굳었다.

음식물이 아니었다.

피였다.

그것도 시커멓게 죽은.

그녀는 지금 피를 토한 것이다.

‘왜?’

쥬웰은 피에 물든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난데없이 피를 토하다니? 당황스러웠다.

“누나!”

유스넨이 놀라 그녀를 부축하며 성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왜? 왜, 이런 피를?!

“……호들갑 떨지 마.”

“호들갑 떨지 말라니. 피를 토했는데!”

“시끄러우니, 호들갑 떨지 말라고 했어.”

“……!”

쥬웰의 나직한 말에 유스넨이 우뚝 굳었다.

쥬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를 토한 건 짐작되는 이유가 있어. 그러니 신경 쓰지 마. 그것보다 남들에게 절대로 이 일을 이야기하지 마.”

쥬웰은 당부했다.

“절대로. 이 일이 발설되면 난 크게 곤란해져. 그러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방금 한 말처럼 피를 토한 건 짐작되는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남들에게 이 모습을 들키지 않는 것이다.

‘승계 기간’이었으니까.

트집 잡힐 어떤 약한 모습도 보여선 안 된다.

“……누나.”

유스넨이 참혹한 얼굴을 하였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흑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몸과 드레스에 묻은 피를 깨끗이 제거하였다.

“이야기는 끝났어. 더 할 이야기 없으니 그만 돌아가. 난 연회에 다시 참석해야 하니.”

“……연회에 참석한다고요? 피를 토했는데?”

“그러면?”

“당장 쉬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럴 수는 없어.”

쥬웰은 자신을 향한 걱정으로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유스넨을 뒤로하고는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새로운 가넷의 왕으로서의 모습을 완벽히 보여준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쉬겠다는 핑계로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그녀는 문을 잠그고 피를 왈칵 토하였다.

연회 내내 참고 참았던 탓일까?

이번엔 더 많은 양의 피를 토하였다.

침대를 완전히 빨갛게 물들일 정도로.

쥬웰은 피에 물든 침대에 쓰러져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 * *

악몽을 꾸었다.

뜻밖에도 베스윈을 만나는 악몽이었다.

과거, 에스텔레 시절 게이볼그 마경에서 베스윈과 나누었던 대화.

‘창세 이래 가장 고귀하며 가련한 영혼이여. 넌 앞으로도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베스윈은 그때 그녀가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였다.

정확한 예언이었다.

그런데 베스윈은 하나의 이야기를 더하였다.

‘그런데 넌 궁금하지 않으냐?’

베스윈이 잔인하게 웃으며 물었다.

‘누구보다도 고결한 영혼을 가진 네가 ‘왜’ 이토록 잔혹한 운명을 타고났는지 말이다.’

“……!”

쥬웰은 번뜩 눈을 떴다.

‘뭐지? 무슨 악몽을 꾼 거지?’

베스윈과 대화를 나눈 일을 꿈꾸었다는 건 어렴풋이 기억났는데, 꿈속에서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베스윈과 나눈 대화는 제대로 기억난 적이 거의 없으니. 모르겠다.’

쥬웰은 고개를 젓고는 다른 생각을 하였다.

‘내 몸 상태.’

쥬웰은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지기 직전, 피를 토한 흔적을 바라보았다.

양이 많았다.

침대보 전체가 검게 죽은 피에 물들어 있을 정도.

많은 양의 피를 토해서인지, 머리도 어지러웠다.

한숨을 내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흑마법이 발현되며, 그녀의 피가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흔적은 그렇게 지웠지만, 몸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니, 칼로 쑤시는 듯 끔찍한 격통이 전신에 몰아쳤다.

쥬웰은 이유를 짐작했다.

“……영혼의 붕괴가 육신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거야.”

영혼의 영향.

원래 육신과 영혼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육신이 병들면, 영혼도 함께 병들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녀의 영혼의 상태는 산산이 조각나 붕괴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몸에도 영향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영혼을 따라 육체도 함께 붕괴하기 시작됐어. 이대로라면, 이 몸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예상했던 일이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닥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예상했던 것보다 진행이 훨씬 빠르다는 점이었다.

‘벌써 육신이 붕괴하기 시작하다니. 이대로라면, 내 남은 수명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짧을 거야.’

쥬웰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육신의 붕괴는 죽음을 뜻한다.

곤란한 일이었다.

그녀는 아직 복수를 마무리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남은 시간을 가늠해 봐야겠어.’

쥬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쥬웰은 곧바로 외출할 준비를 하였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가는 것이다.

외출 채비를 하는데, 뜻밖의 소식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리샤크가 또 휴가를 떠났다고?”

“네, 급한 용무가 생겼다고 쪽지를 남겨두고 사라졌습니다.”

가넷 기사단의 기사단장, 라이져 경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원래 라이져 경은 토른 공작을 모셨지만, 승계가 결정되었으니 새로운 공작이 될 쥬웰을 보필하게 되었다.

“수하 기사를 관리하지 못한 건, 기사단장인 제 책임입니다. 절 벌해 주십시오.”

무단이탈은 엄연한 죄.

그러니 총책임자인 라이져 경이 벌을 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벌을 줘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리샤크가 걱정이 되었다.

‘리샤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면 이렇게 쪽지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질 리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여러 석연찮은 모습을 보이고는 하지 않았는가?

‘어쩌지? 내가 직접 나서야 할까?’

쥬웰은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 리샤크에게 중요한 분기점이란 것을.

리샤크를 위하려면 그녀가 직접 나서야 한다.

어쩌면 지금이 리샤크를 위할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쥬웰은 선뜻 그럴 수는 없었다.

궁지에 몰린 건, 그녀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육신의 붕괴가 빨리 시작해 시간이 없었다.

남은 시간 내에 원한을 갚아야 한다는 초조함에 그녀는 어쩌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 선택을 했다.

“……벌은 됐다. 대신, 리샤크를 반드시 찾아서 내 앞에 데려오도록.”

자신이 나서는 게 아니라 다른 이에게 리샤크를 부탁한 것이다.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기사단을 동원해 반드시 리샤크를 찾아오겠습니다!”

라이져는 고개를 숙이며 결연히 답했다.

쥬웰은 리샤크를 향한 미안함이 들었지만, 그녀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녀는 지금 본인의 일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았으니까.

초조함에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외출하겠다. 최소한의 인원만 경호 인원으로 따르게 하도록.”

“그러면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가넷 기사단의 단장인 라이져도 제국 십검 중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쥬웰의 호위로는 손색이 없었다.

“……옵시디언 상회의 저택으로 향하도록.”

옵시디언 상회.

마리의 저택이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을 알아보는 것을 가넷가의 저택에서 하기는 곤란했다.

그러니 마리의 저택을 빌리려는 것이다.

* * *

“로드?”

마리는 예상치 못한 쥬웰의 방문에 놀란 얼굴이었다.

“왜 갑자기? 혹시 절 보고 싶어서? 저도 로드 보고 싶었…… 아, 아니…… 죄송해요.”

마리는 평소처럼 실없는 농담을 하다가 쥬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안색이? 혹시 몸이?”

“……괜찮…… 아니, 좋지는 않군.”

쥬웰은 잠시 고민하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약한 모습 보여도 되니.’

생각해 보면, 이곳은 그녀가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이들 앞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유스넨, 엔리크 앞에서도 약한 모습은 보이기 힘들었으니까.

‘유스넨은 말할 것도 없고, 엔리크 자작도 지나치게 걱정할 테니 이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 난 아버지가 아파하는 게 싫으니.’

그러니 그나마 이곳이 가장 마음 편한 곳이었다.

어떤 긴장도 없이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곳.

한편, 마리는 그녀가 아프다는 말에 안절부절못하였다.

“어, 어떻게 해. 당장 여기 침대에 누우세요.”

“아니, 괜찮…….”

“권속으로서 명령이에요!”

쥬웰은 픽 웃음을 지었다.

권속으로서 명령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그녀는 순순히 마리의 말에 따랐다.

“당장 의사를 불러올게요.”

“아니, 괜찮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픈데, 의사가 필요 없다니. 고집부리지 말고…….”

“의사가 와도 소용없어.”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쥬웰이 한 말의 의미를 눈치챈 것이다.

쥬웰의 몸 상태는 의사가 와도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육신이 붕괴하는 걸 막을 수 있는 의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로드.”

마리의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본 순간, 쥬웰은 순간 하나의 감정이 들었다.

마리가 자신이 에스텔레임을 몰라서 다행이라는 감정.

만약 그녀가 에스텔레인 것을 알면, 마리는 정말 크게 아파할 것이다.

그러니 몰라서 참 다행이다.

“의사는 되었고, 카이싱 경에게 연락해 와달라고 해.”

“카이싱 경이요? 그분이 누구?”

마리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백마법사야. 이런저런 생체를 연구하는. 필요하니 데려와 줘.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마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데려올게요.”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카이싱 경은 평범한 중년 남성 마법사였는데,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가넷 소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그대가 카이싱인가? 생체 백마법을 전공하고 있는?”

“네, 그렇습니다. 보잘것없는 솜씨라 마법사라 칭하긴 부끄럽습니다. 전 마법사라기보다는 생체학자에 더 가깝습니다.”

알고 있다.

쥬웰은 카이싱의 생체학자로서 능력 때문에 부른 것이니까.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네. 내 몸의 상태를 검진해 주겠나?”

“전하의 몸을 말입니까?”

“그래, 나도 의술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스스로의 몸을 제대로 진단하기는 어려워서 말이야.”

카이싱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마법적으로 쥬웰을 살폈다.

“……!”

그러고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쥬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얼마나 남았나?”

카이싱은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안 좋은 진단을 내리기 전, 주저하는 의사와도 같은 모습이라 쥬웰은 그의 짐을 덜어주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이미 다 알고 있네.”

“……!”

카이싱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답하였다.

“……어째서인지 육체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아마 두 달. 정말 길어야 두 달 반 정도일 겁니다.”

두 달.

그 말에 쥬웰은 탁 긴장이 풀렸다.

‘다행이야. 아주 최악은 아니구나.’

그 정도면 복수의 시간표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왕 타란툴라를 잡아 내 영혼을 치료할 제물로 삼으면 두 달에서 조금은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

그것까지 계산하면 아마, 시간은 넉넉할 듯하다.

‘다행이야. 복수에는 문제가 없을 테니.’

“고맙네. 그러면 날 다시 봐주겠나?”

카이싱은 별생각 없이 쥬웰의 얼굴을 마주 봤다가 멍하니 눈빛이 풀렸다.

쥬웰이 건 정신 조작에 걸린 것이다.

“그대가 오늘 여기 와서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거야. 알겠나?”

“네……. 네.”

쥬웰이 두 달 안에 육체가 붕괴하리라는 게 알려지면 그녀의 공작 위 계승은 당연히 취소된다.

그러니 반드시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이후, 카이싱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이 왜 여기에 온 것인지 기억 못 하는 상태로 돌아갔고, 저택은 정적에 잠겼다.

쥬웰은 남은 시간이 충분함에 한결 안도하여 편한 얼굴을 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끄윽. 흑.”

마리였다.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니, 마리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왜, 왜 그러냐니.”

마리가 뻘게진 눈으로 더듬거렸다.

“다, 당신께서 그렇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 내가 어떻게…….”

쥬웰은 아차 싶었다.

방금 카이싱과 이야기를 할 때, 마리도 옆에 있었다.

그러니 쥬웰이 곧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같이 들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못 듣게 내보낼 걸 그랬나?’

사실 마리가 자신 때문에 저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지 예상을 못 해 배려하지 못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

“……벼, 별일 아니라고요?”

“그래, 네가 바라는 복수를 하는 데 지장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 말에 마리는 입술을 와락 깨물었다.

그러고는 감정에 받쳐 쥬웰을 쏘아보았다.

“내, 내가 지금 고작 복수를 이루지 못할까 봐, 이러는 것 같나요?”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마리의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다, 당신이 걱정된다고요! 이 바보야!”

“……!”

마리가 쥬웰에게 다가와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왜! 왜 당신은 항상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거야! 누구보다 힘들면서. 왜! 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었다.

쥬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마리를 마주 안아주었다.

“난…… 괜찮아. 내가 바라는 목표만 이룰 수 있으면, 다른 건…….”

“거짓말하지 마!”

“……!”

마리가 엉엉 울며 발악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당신도 사람인데! 똑같이 아픔과 슬픔을 느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괜찮냐는 말이야!”

“…….”

그 말을 듣는 순간, 쥬웰은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 마리의 말이 옳다.

괜찮지 않다.

어떻게 괜찮겠는가? 그저 괜찮은 척할 뿐.

‘……죽기 싫어.’

쥬웰은 숨기고 숨기었던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었다.

죽기 싫다.

더 살고 싶다.

나의 소중한 아버지 엔리크 자작과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흰 강아지 유스넨과도 사랑을 나누고 싶었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리, 리델하트와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죽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쥬웰은 결국 마리의 품에 안겨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물을 쏟았다.

쥬웰이 울자, 마리도 더 이상 감정을 참지 못하고 더욱 커다란 울음을 터뜨렸다.

* * *

한참을 울고 난 후, 간신히 감정을 추렸다.

쥬웰은 일부러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실컷 울었군. 앞으로 이런 행동은 삼가.”

“……로드.”

“그만. 너와 나는 권속 관계일 뿐이야. 더는 주제넘게 행동하지 마.”

마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참기라도 하는 걸까? 그녀의 입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마리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죄송했습니다.”

“그래.”

쥬웰은 마차에 오르기 전, 잠시 주저하더니 짧게 말하였다.

“그래도 오늘 걱정해 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쥬웰이 마차를 타고 사라지자, 홀로 남은 마리는 다시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제가…… 제가 어떻게 당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마리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 바보 성녀님.”

* * *

마차 안에서 쥬웰은 곧바로 처형식 계획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 처형식으로 플랑드나는 완벽히 몰락하게 될 거고, 매리엇의 다이아 공작가는 파산 직전에 몰리게 될 것이다.

‘문제는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다른 원수들인데. 그 원수들을 처리할 시간이 부족하면 어떻게 하지?’

지금까지 그녀는 정체를 모르는 다른 원수들을 처리하는 걸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그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정체 모르는 다른 원수가 누구든, 지금 밝혀진 원수들보다 처리하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알고 있는 원수들은 여섯 공작가의 주인들이니까. 그들에 비하면 처리하기 쉽겠지.’

그녀는 이제 가넷의 왕이다.

그러니 그 권력을 이용하면 상대가 누구든 손쉽게 몰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알고 있는 원수들에 비하면, 원한이 깊지도 않을 거고.’

로튼, 매리엇, 라디트, 플랑드나, 웰링턴 공작.

그녀가 그들에게 끔찍한 원한을 품게 된 건, 단순히 그들이 자신을 지옥에 떨어뜨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삶, 그녀에게 저질렀던 끔찍한 악행이 쌓여 이토록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반면, 정체를 모르는 원수들은 그녀와 그렇게 깊은 악연이 있는 이들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내가 정체를 짐작 못 하는 거겠지.’

쥬웰은 인신 공양 때를 떠올렸다.

당시 인신 공양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원래 악마와 마주할 때는 가면을 쓰는 게 인신 공양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매리엇, 라디트 등의 원수들을 알아본 건, 가면을 쓴 몸의 실루엣만으로도 그들의 정체를 알아볼 만큼, 그들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반면, 정체 모를 다른 원수들의 정체는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그 말은, 그들이 그녀와 깊은 연을 맺은 이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신 공양 말고, 다른 악연은 없을 테니, 복수의 과정도 이토록 길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누구일까? 내 힘으로 손쉽게 복수할 수 있는 인물들이어야 할 텐데.’

시간이 얼마 없다 생각하니, 쥬웰은 초조한 마음이 들어 누군지 모르는 다른 원수들의 정체를 추측해 보았다.

‘내가 아예 모르는 이들은 아닐 거야. 당연히 제국의 인물일 테니. 안면은 있는 이들일 가능성이 커.’

그녀와 안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깝지는 않았던 이들.

그게 바로 누군지 모를 원수들의 정체일 것이다.

‘당시 실루엣을 떠올려 보면…….’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그녀는 당시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절대로 잊을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억을 토대로 정체 모를 원수들의 실루엣을 다시 머릿속에 그려 보았는데.

그 순간이었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뭐야?’

쥬웰의 안색이 시체처럼 하얘졌다.

‘왜…… 왜 익숙한 느낌이?’

쥬웰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정체를 몰랐던 원수들의 실루엣을 떠올리는데……. 이전과 다르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뭐, 뭐지? 내가 뭔가 착각하는 건가?’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기억한다.

인신 공양 때 쥬웰은 정체 모를 원수들의 실루엣이 굉장히 낯설었다.

그런데 오늘 정체 모를 원수들의 실루엣을 돌이켜 떠올려 보니, 과거와 다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쥬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 삶에서 익숙해진 인물 중에 원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나친 생각이야.’

일단 그녀의 기억이 정확한 건지 자체도 명확하지 않다.

물론, 그녀는 당시의 일을 방금 겪었던 일처럼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무려 600년이나 전에 겪었던 일이다.

실루엣같이 세세한 건 완벽히 정확히 기억 못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600년 전에 겪었던 기억의 실루엣만으로 익숙하다, 안 익숙하다고 판별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느낀 느낌도 제대로 된 느낌인지 의문이고.’

명확한 근거 없는 감일 뿐이다.

‘……내가 많이 초조하긴 한가 보네. 이런 근거 없는 느낌에 흔들리다니.’

쥬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곧 마왕 타란툴라를 잡으면 다른 원수들의 정체는 알게 될 테니,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남들을 의심하는 것도 나에게 좋을 건 없으니.’

괜히 이래봤자 초조함에 사로잡혀 정신만 갉아 먹힐 뿐이다.

쥬웰은 그렇게 찝찝한 느낌을 넘겼다.

마침,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려는 순간이었다.

“소공작 전하, 그런데 이런 으슥한 곳에는 어째서?”

라이져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지금 쥬웰이 향한 곳은 수도 외곽에 버려진 저택이었다.

음침하기 그지없는 저택을 보며, 라이져는 껄끄러운 얼굴을 하였다.

“만날 사람이 있네.”

“이런 곳에서 말입니까?”

“그래, 이런 폐저택이 어울리는 끔찍한 놈이지.”

라이져는 더더욱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저 안에 들어가는 걸 말리고 싶지만, 듣지 않으시겠죠. 제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위험 요소가 없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저런 폐저택에는 들짐승이나, 범법자들이 숨어 사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라이져 경, 날 보겠나?”

“전하?”

의아한 표정을 짓던 라이져는 순간 눈이 탁 풀렸다.

쥬웰의 정신 조작에 걸린 것이다.

라이져뿐이 아니었다. 함께 온 마부와 다른 기사들도 모조리 정신 조작에 걸렸다.

이제 그들은 이 폐저택에 발걸음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될할 것이다.

“저쪽으로 가서 쉬고 있게. 금방 돌아갈 테니, 말이야.”

“으으……. 알겠습니다.”

라이져와 호위 기사들은 말 잘 듣는 인형처럼 멍한 눈빛으로 사라졌고, 쥬웰은 혀를 찼다.

‘익숙한 리샤크가 아니라서, 정신 조작을 걸기 불편하네.’

리샤크 생각이 떠오르자, 쥬웰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리샤크 일은 어쩔 수 없지. 난 내 복수만으로도 벅차.’

비정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쥬웰은 걸음을 옮겨 폐저택으로 향했다.

스산하게 바람이 불었고, 칠흑 같은 흑발과 마찬가지로 짙은 검은 드레스가 바람에 휘날렸다.

곧 만날 이와 어울리는 흉흉한 분위기.

끼익-

문을 열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흉악한 얼굴, 비열한 미소.

“로드를 뵙습니다.”

십마 라이든이었다.

* * *

십마.

지상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흑마도사들. 그 말은, 그들이 그만큼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쥬웰은 지난번 성배 사건 때, 그런 십마들을 대거 권속으로 받아들였다.

눈앞의 라이든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십마 모두가 영혼의 찬란한 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니다.

라이든은 순백하게 빛나던 영혼을 지녔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완전히 끔찍한 악마가 되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한 거지?”

쥬웰이 물었다.

이 만남이 라이든이 요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라이든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너무 차가운 것 아닙니까? 그래도 전 로드의 권속인데 말입니다. 조금 따뜻하게 대해 주십시오.”

“따뜻하게?”

“네, 안 그러면 제가 서운함에 삐쳐 로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다닐지 모르지 않습니까?”

쥬웰은 라이든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쥬웰의 정체가 끔찍한 악마라는 걸 사람들에게 폭로하겠다는 협박이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아니, 협박이라니요? 제가 감히 어찌 로드께.”

라이든은 손사래를 쳤다.

“그저 제가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잘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드리는 말이지요.”

라이든은 흉측하게 이를 드러내었다.

“가넷의 성녀가 사실은 끔찍한 마왕이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과연 어떻게 될지 권속으로서 걱정이 들어서요. 혹여라도 제가 서운한 마음에 그런 소문을 퍼뜨리기라도 하면 큰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협박이었다.

라이든은 비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 혹시나 절 죽여 입을 막을 생각이라면 소용없을 겁니다. 이미 믿을 수 있는 측근에 유서를 전해놓고 왔거든요. 제가 여기서 죽으면, 곧바로 소문이 퍼질 수 있도록.”

쥬웰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경멸스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얼마를 바라지?”

“네?”

“네놈이 이러는 건 결국 돈 때문 아닌가? 얼마를 바라지?”

“큭큭, 역시 가넷의 새로운 왕이 되실 분답게 판단이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제가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성의를 보여주십시오.”

“500만 골드면 되겠나?”

라이든은 500만 골드란 이야기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500만 골드면, 성을 몇 개는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설마 쥬웰이 그런 거금을 단번에 내놓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500만 골드 이상은 안 돼. 이게 내가 쓸 수 있는 돈의 한계야. 아무리 가넷 공작이 되어도, 이 이상의 공금을 유용하는 건 무리가 있어서.”

“그, 그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라이든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답했다.

그러고는 눈을 위아래로 굴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나 돈을 주고, 절 죽여 되찾을 생각이면 삼가는 게 좋을 겁니다. 언제, 어느 때이고 제가 죽음을 맞으면 곧바로 당신의 소문을 퍼뜨리도록 손을 써놓은 상태이니까요.”

비열한 놈답게 안전장치를 미리 마련해 두었다.

쥬웰이 그를 죽여 입막음하지 못하도록.

쥬웰은 그런 라이든이 짜증 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쥬웰은 종이에 백지 수표를 대충 적어주었다.

“이 수표를 가지고 내가 말한 은행에 은밀히 가도록. 그러면 돈을 내줄 테니. 대신 부디 입을 다물도록.”

“헤헤, 그거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신용 하나는 최고인 놈이니 말입니다.”

라이든은 기분이 좋아진 듯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게 대화가 끝나 기쁘군요. 큭큭.”

날카로운 쥬웰의 시선을 뒤로하고, 저택을 나선 라이든은 혼자가 되자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년. 가넷의 왕이라더니, 순진해 빠져서는. 내가 고작 500만 골드에 만족할 리가 있나?”

라이든은 휘파람을 불었다.

“가넷의 성녀가 사실은 마왕이었다니. 이 정보를 다이아 공작가나 에메랄드 공작가에 팔면, 그쪽에서는 과연 얼마를 줄까?”

그는 애초에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쥬웰에게 방금 돈을 뜯은 것은 입을 싹 닫고, 다이아 공작가, 에메랄드 공작가에도 정보를 팔아 이중, 삼중으로 돈을 챙길 계획이다.

일평생 펑펑 써도 남을 어마어마한 거금을 챙길 수 있을 게 분명하리라.

후환이 두렵지 않냐고?

‘두려울 리가. 이 소문이 퍼지면 저년은 당장 화형대에 오르게 될 텐데.’

라이든은 씨익 미소를 짓고는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음에 향할 곳은 다이아 공작가였다.

* * *

한편, 쥬엘은 그런 라이든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고 있었다.

쥬웰의 뒤로 한 인물이 스르르 나타났다.

십마 아낙스였다.

“저 흉측한 놈이 절대 입을 다물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낙스는 걱정스레 말하였다.

하지만 쥬웰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알고 있어. 다이아 공작가와 에메랄드 공작가에 쪼르르 가서 일러바치겠지.”

“로드?”

아낙스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방금 일부러 라이든에게?”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내가 의도한 바야.”

방금 쥬웰은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라이든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흑마법으로 금제를 거는 법 등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일부러 어리숙하게 돈을 뜯기는 모습을 보였다.

왜?

라이든이 방심하도록.

그래서 그녀의 원수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말하도록.

“설마 처음부터 이런 의도로 라이든을 권속으로 삼은 겁니까?”

“그래.”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라이든은 쥬웰이 권속으로 바라는 조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였다.

쥬웰은 십마 중 여전히 찬란한 영혼의 빛을 간직한 이를 권속으로 맞이하길 바랐으니까.

그런데도 저런 흉악한 놈을 권속으로 받아들여 의아했었는데, 이런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로드의 정체가 밝혀지는 건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험하지. 하지만 위험한 만큼 얻을 게 많아.”

상상해 보아라.

지금 매리엇과 플랑드나는 쥬웰에게 이를 갈고 있다.

그녀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기세였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얻는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둘 다 눈이 돌아가겠지. 앞뒤 가리지 못할 거야.’

쥬웰은 진득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낙스,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이야기한 대로 덫을 파주도록.”

“말씀하십시오.”

쥬웰은 이번 계획의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건…….”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아낙스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망설였다.

“왜 그러지?”

“그렇게 하면 당신께서는?”

쥬웰은 피식 웃었다.

“왜? 내가 걱정되나?”

“…….”

“쓸데없는 걱정이야.”

하지만 아낙스는 여전히 주저하였다.

쥬웰이 염려되는 듯했다.

아낙스가 그런 걱정을 할 만큼 쥬웰이 이번에 기획하는 계획은 끔찍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내게는 시간이 없으니까.’

만약 시간이 느긋했다면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시간이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안에 원수들을 모조리 몰락시키려면,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라도 사용해야 했다.

“걱정하지 말래도. 난 이번 일로 내 적들의 머리를 짓밟고 웃게 될 테니. 계획이 실패할 일은 없어.”

“……계획의 실패를 걱정하는 건 아닙니다.”

아낙스는 고개를 저었다.

쥬웰이 짠 계획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녀의 적이 가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러니 실패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그저?”

십마 아낙스는 머뭇거렸다.

“……과거 제 모습과 로드의 모습이 겹쳐 보여 그렇습니다.”

사실 십마 아낙스는 쥬웰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른다.

그저 여섯 공작가에 끔찍한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만 짐작하고 있다.

복수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쥬웰의 모습이 과거 복수에 미쳐 있던 자신의 모습과 똑 닮아 십마 아낙스는 주제넘게 입을 열었다.

“……하나만 충언해도 되겠습니까?”

쥬웰이 아낙스를 바라보았다.

“……스스로를 살피십시오.”

“뭐?”

아낙스는 씁쓸한 얼굴을 하였다.

“저도 로드처럼 복수를 위해서 모든 걸 바쳤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제게 남은 건 황폐해진 영혼뿐이었습니다.”

“…….”

아낙스는 과거에 복수의 길을 걸었다.

원수들 모두를 처참히 죽이는 데 성공하였지만, 결국 남은 것은 허무함과 상처 입은 자신의 영혼뿐이었다.

그래서 아낙스는 쥬웰이 걱정되었다.

쥬웰은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 어떤 상처를 받든 상관없다는 듯이.

“이대로라면 로드께서도 끔찍이 상처 입을 테니…….”

하지만 아낙스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닥쳐.”

“……!”

쥬웰의 눈동자에 섬뜩한 광기가 일렁였다.

“네가 뭘 안다고. 복수로 내가 입을 상처가 걱정돼?”

쥬웰은 아낙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쥬웰의 몸에서 미칠 듯한 마기가 치솟아 올랐다.

“네가 뭘 안다고!”

와장창창!

쥬웰의 외침과 함께 저택의 창이 모조리 깨져나갔다.

아낙스의 얼굴이 시체처럼 질렸다.

쥬웰의 마기에 영혼이 짓눌려 타격을 입은 것이다.

아낙스는 왈칵 피를 토하고는 신음을 흘렸다.

“로, 로드…….”

쥬웰은 그런 아낙스의 모습에 마기를 풀고 아낙스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버렸다.

“쿨럭! 커억!”

아낙스가 피 섞인 기침을 하였다.

쥬웰은 차갑게 말하였다.

“다음엔 이렇게 끝내지 않을 테니, 주제넘은 말은 하지 말도록.”

“……죄, 죄송합니다.”

아낙스는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가보도록.”

아낙스는 비틀거리며 물러갔다.

홀로 된 쥬웰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방금 아낙스에게 저지른 일이 후회되었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이 아닌데.

아낙스는 자신보다 먼저 복수의 길을 걸었던 이로써 그저 그녀를 염려하여 이야기한 것일 뿐일 텐데.

“제길.”

그런데 그때, 생뚱맞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 딸꾹.”

“…….”

“딸꾹. 딸꾹.”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딸꾹질 소리.

의아한 눈으로 시선을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겁에 질려 서 있었다.

해밀턴이었다.

* * *

“……오라버니는 왜 또 여기에?”

쥬웰은 당황해 물었다.

이 폐저택은 이전 해밀턴이 숨어 살던 저택이 아니다.

그런데 또 나타난 것이다.

“……그, 그…… 여기가 제집이니까요?”

“집이라고? 이 폐저택이? 이사했어?”

“……네, 지난번에 로드께서 제집을 부수었잖아요.”

해밀턴은 억울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기 가출 중이라, 수도 근처의 폐저택을 보금자리로 삼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쥬웰이 2품 악마와 싸우며 쑥대밭을 만들어, 새로운 폐저택으로 이사해 보금자리를 꾸렸는데, 또 찾아와 쑥대밭을 만든 것이다.

참고로 지금 그들이 있는 폐저택은 방금 쥬웰이 마기를 발산하며, 창문이 모조리 깨지고, 내부의 약한 목조들이 와장창 부서져 더 이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왜 맨날 내가 사는 저택에만 찾아와 박살을 내는 건데! 이 나쁜 악마!’

해밀턴은 속으로 쥬웰을 욕하였다.

하지만 쥬웰이 무서웠기에 헤헤 비굴하게 웃으며 비위를 맞추었다.

“공작 위 승계가 결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헤헤. 바쁘실 테니, 얼른 공작가로 돌아가시는 게…….”

“아니, 안 갈 건데?”

“네?”

“오라버니랑 할 이야기가 있었거든.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 했는데, 이렇게 만나서 잘됐네.”

해밀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또, 또 무슨 끔찍한 일을 시키려고!’

쥬웰이 그에게 가질 용건은 뻔하다.

끔찍한 일을 시키려는 게 분명하다.

쥬웰이 자신에게 시켰던 끔찍한 일들의 목록을 촤르륵 떠올린 해밀턴은 두려움에 질려 물었다.

“이, 이번에도 어려운 일인 거죠?”

“어렵지는 않아.”

“그, 그러면?”

“그냥……. 음. 어렵지는 않은데, 괴롭긴 할 건데……. 음.”

쥬웰은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해밀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렵지는 않은데, 괴로울 거라니.

이게 무슨 끔찍한 이야기인가?

더구나 쥬웰이 말하길 망설이는 모습이 더욱 두려웠다.

‘도, 도대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시키려고 저 악마가 망설이는 거지?’

쥬웰은 그에게 일을 시키며 단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망설이는 게, 정말 어마어마하게 끔찍한 일을 시키려는 것 같았다.

‘안 돼! 더는 이렇게 살 수는 없어!’

해밀턴은 이를 꾹 악물며 손을 조심스레 바지 뒤 춤으로 가져갔다.

호신용 단도가 만져졌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너 죽고, 나 죽고 하는 게……. 아, 아니야. 저 악마가 나한테 당할 리가 없는데. 어, 어쩌지?’

발칙한 반란을 꿈꾸었지만, 못난이 겁쟁이라 실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였다.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크윽.”

쥬웰이 갑작스레 허리를 굽히며 신음을 흘린 것이다.

“……로드?”

해밀턴은 눈알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했다.

왜 그러는 거지?

쥬웰은 그런 해밀턴의 모습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 이럴 때 발작을.’

지금 그녀는 육신이 붕괴하기 시작하며 끔찍한 고통이 작렬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참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오고는 하였는데, 하필 저 해밀턴 앞에서 그런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제길. 볼품 사납게.’

억지로 괜찮은 척 허리를 펴보려 하였지만, 그 순간 더더욱 심한 통증이 밀려와 결국 털썩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파.’

육신이 붕괴하며 오는 통증이라, 다른 일반적인 고통과는 궤가 다르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참을 수 없이 몸이 덜덜 떨렸다.

‘안 돼. 해밀턴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쥬웰은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그녀와 해밀턴의 관계는 철저히 힘과 공포로 이루어진 주종 관계다.

그러니 제가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면, 해밀턴이 발칙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다.

특히 쥬웰은 해밀턴이 틈만 나면 자신의 등을 찌를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 정말로 어리석은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쥬웰은 힘겹게 시선을 들어 해밀턴을 바라보려 하였다.

하지만 고통에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해밀턴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밑의 몸통과 다리만 볼 수 있었는데, 해밀턴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우두커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쥬웰은 그런 그의 모습이 자신의 등을 찌를까 말까 고민하는 것이라 직감하고는 힘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해밀턴이 다급히 어딘가로 뛰어갔다.

쥬웰은 당황해 그런 해밀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날 죽이려 제대로 된 무기를 가지러 가는 건가?’

그런 것 같았다.

‘예상대로네. 차라리 잘됐어. 해밀턴이 저렇게 나와주니, 곧 시킬 일에 죄책감 느낄 필요 없겠어.’

쥬웰은 해밀턴에게 하나의 일을 시킬 계획이었다.

이번 계획의 중추가 될 임무였다.

문제는 그 임무가 아주 괴로운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껏 해밀턴에게 시킨 다른 끔찍한 일보다 훨씬 더. 전에 시킨 일들이 애교스러운 휴가로 느껴질 정도로.

아무리 흉악한 해밀턴이라도 이 정도의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게 올바른 것인가 고민이 들었는데, 해밀턴이 저렇게 나와주면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제압하고, 강제로 일을 시켜야…….’

그런데 곧 다시 나타난 해밀턴의 모습을 본 쥬웰은 당황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무기를 들고 온 게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웬 약통이 들려 있었다.

“그…… 건?”

“아, 몰라요!”

해밀턴은 허겁지겁 쥬웰 앞에 다가와 약통을 열었다.

“여기 구급약입니다. 웬만한 증상에는 다 듣는 만병통치약이니, 어서 드십시오.”

“…….”

쥬웰은 눈을 끔뻑끔뻑하였다.

“……오라버니, 미쳤어?”

“안 미쳤거든요?!”

“그러면 이거 혹시 독약? 날 독살하려고?”

“그것도 아니야!”

해밀턴이 빽 외쳤다.

“약 맞습니다! 따지지 말고 드시기나 하십시오! 저도 제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으니!”

해밀턴은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으아아. 나 뭐 하는 거야?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다니?’

해밀턴은 이렇게 약한 쥬엘의 모습을 처음 봤다.

끔찍이 괴로워하는 게, 칼로 찌르면 죽일 수 있을 것처럼 약해 보였다.

하지만 해밀턴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게 그러지 않았다.

칼로 찌르기는커녕 위급 상황을 대비해 거금을 들여 마련해 놓은 만병통치약을 가져왔다.

“정말 미친 것 아니지?”

“아,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건……!”

해밀턴은 자신 행동의 당위성을 찾았다.

“그, 그러니까 이건…… 당신께 잘 보이려고! 그래, 앞으로 좀 잘해주십사, 하는 마음에 드리는 뇌물인 겁니다!”

“……그래.”

쥬웰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놈 해밀턴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솔직히 놀라웠다.

“그런데 이거 약 아닌데?”

“네?”

“그냥 잡풀들이잖아. 이거 먹으면 배탈만 날 것 같은데?”

“그, 그럴 리가? 엄청 비싸게 들여 약 장수한테 샀는데? 어떤 병에 걸려도 이 약초 하나 먹으면 씻은 듯이 나을 거라고.”

“……설마 그런 허접한 사기를 믿은 거야? 세상에 만병통치약이 어디 있다고.”

그녀는 제국에서 둘째라면 서운할 의학의 대가다. 그래서 해밀턴이 내민 약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그냥 잡초들이었다.

즉, 해밀턴은 약장수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하찮은 해밀턴다운 한심한 모습이었다.

“……어, 엄청 비싸게 주고 산 건데.”

해밀턴의 황망한 모습에 쥬웰은 쿡쿡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안 좋았었는데, 해밀턴의 하찮은(?) 모습에 헛웃음이나마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어쨌든 고맙네.”

“그, 그렇죠? 그러니, 앞으로는 제발 잘해 주……!”

“그건 안 돼.”

쥬웰은 딱 잘라 말했다.

오늘 이런 모습을 보였다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하나 선물을 줄게.”

“선물이라면?”

해밀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곧 이어진 쥬웰의 말에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저주를 하나 걸어줄게.”

“저, 저주? 그게 무슨 선물이라고!”

“오라버니에게 필요한 저주야. 잠시 있어 봐.”

쥬웰은 악마화 하나를 피워 올려 해밀턴에게 저주를 내렸다.

“저주받으라. 신의 진노가 그대에게 임할지니, 그대는 세상 모두에게 배척받는 자가 될 것이다.”

그 저주의 문구를 들은 해밀턴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얼핏 들어도 보통 흉악한 저주가 아니다.

어둠의 기운이 해밀턴에게 깃들자, 쥬웰은 저주가 제대로 먹혔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러니까 치마에서 단도를 꺼내 그대로 해밀턴의 허벅지를 찍어버렸다.

푹!

“끄아아아아아아악! 가, 갑자기 왜?!”

해밀턴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파?”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정말로? 아파?”

쥬웰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묻자 해밀턴은 입을 다물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 안 아프네요?”

“그럴 거야. 네가 받은 저주는 ‘나병’의 저주이니까.”

나병.

피부가 문드러지는 병을 뜻한다.

정확히는 감각 손상으로 통각을 잃어, 고통을 느끼지 못해 종국에는 피부가 상해 문드러지게 된다.

즉, 이제 해밀턴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 된 것이다.

“왜, 왜 내게 이런 저주를? 설마?”

해밀턴의 눈이 커졌다.

쥬웰이 자신에게 어떤 일을 시키려는지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일이 분명했다.

“아, 안 해! 절대로!”

“미안, 불행히도 오라버니에게 선택 권한은 없어.”

쥬웰이 말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해밀턴의 눈빛이 탁 풀렸다.

정신 지배에 당한 것이다.

이제 해밀턴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쥬웰의 뜻에 따르게 될 것이다.

쥬웰은 그런 해밀턴에게 악마처럼 말하였다.

“정말로 미안해. 날 원망해도 좋아.”

* * *

그렇게 해밀턴을 통해 함정을 판 쥬웰은 가넷가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엔리크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엔리크였다.

쥬웰과 단둘이 있는 자리이기에 엔리크는 편하게 말하였다.

“부탁이 있어서 뵙자고 했어요.”

“부탁?”

엔리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이든 말하여라. 어떤 일이든 다 들어줄 테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잠시 저 대신 가넷 공작령(領)에 다녀 와주세요.”

엔리크는 더더욱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하필 지금?”

가넷 공작가는 당연히 영지가 있다.

가넷 공작은 수도에 머물며 정계를 경영하고, 영지는 방계 혈족에게 대리로 운영토록 하는 게 보통이다.

“가더라도 네 승계가 마무리된 다음에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

“승계가 마무리되면 곧바로 아버지와 함께 로든 왕국에 다녀올 계획이에요. 그러니 그 전에 공작령에 다녀와 주세요.”

“…….”

하지만 엔리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없는 승계 기간 때, 쥬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걱정되는 듯했다.

특히 매리엇과 플랑드나가 쥬웰에게 이를 갈고 있음은 유명했으니까.

그런 아버지의 걱정에 쥬웰은 괜찮다는 듯, 강한 척 미소를 지었다.

“괜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잘 알잖아요? 저 쥬웰이에요. 할아버지의 뒤를 잇는 가넷의 새로운 괴물.”

그 말에 엔리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대신, 꼭 조심하여라. 널 믿지만, 그래도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걱정하지 말래도요.”

“어떻게 걱정하지 않겠느냐?”

엔리크가 한숨을 내쉬더니, 쥬웰에게 다가와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이렇게 소중한데. 내가 널 걱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쥬웰은 그저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런데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유스넨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대공?”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엇인가요?”

“플랑드나 성녀를 처단할 계획이시면, 제가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냉랭히 답했다.

“말하지 않았나? 복수는 내 몫이라고. 난 네 참견을 원하지 않아.”

“아니, 틀립니다.”

유스넨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플랑드나 성녀는 악마에게 성력을 내려받은 후, 신을 능멸한 자. 그러니 그런 악마를 처단하는 건 광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쥬웰은 말문이 막혔다.

맞는 이야기긴 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잖아?”

“네, 사실 누나의 복수를 돕고자 하는 게 제 목적입니다.”

유스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쥬웰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짊어질 짐을 나누겠다고.”

“…….”

“그리고 제 광휘로서의 직위를 이용하면 플랑드나를 처단하기 훨씬 용이할 텐데요?”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번 경우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알겠어. 단, 조건이 있어.”

“무엇입니까?”

“함부로 나서지 말고 오로지 내가 이야기한 대로만 움직여줘.”

쥬웰은 차갑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하였다.

“플랑드나 언니를 파멸시키는 건 내가 직접 해야 하니까.”

유스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

쥬웰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주저하며 말했다.

“……더 꼭 안아줘.”

유스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쥬웰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 * *

며칠 후, 쥬웰은 외부에서 다른 업무를 마치고 가넷가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피곤해.’

얼른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다 했어. 이제 원수들이 함정에 빠지길 기다리면 돼.’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아주 짧게 휴식을 취하려고 할 때였다.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가넷 공작저에 밝게 불이 켜져 있었다. 모두 잠이 들어 어둑해야 할 시간인데 말이다.

뿐만 아니라 수군수군 시끄러웠다.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무슨 일이지?’

고개를 갸웃하며 저택에 들어가니, 놀랍게도 토른 공작이 밖에 나와 있었다.

“쥬웰? 어딜 다녀왔느냐?”

“……행정부에 업무를 보고 왔어요. 무슨 일인가요?”

쥬웰은 토른 공작의 얼굴을 보고, 무슨 사고가 일어났다는 걸 직감했다.

토른 공작의 눈빛이 형형히 날카로웠던 것이다.

과연.

“일이 생겼다.”

“……무슨 일인가요?”

“대량 살인 사건이 일어났어.”

쥬웰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뭐 큰일이라고 토른 공작까지 이 밤에 일어나서 이러고 있단 말인가?

“……몇 명이나 희생되었는데요?”

“어제 시점으로 300명이 넘는다. 어쩌면, 지금쯤이면 500명이 넘을 수도 있지.”

“……!”

쥬웰은 얼굴을 굳혔다.

300명. 500명. 어마어마한 숫자다.

이 정도면 살인 사건이 아니라, 학살이다.

토른 공작이 직접 챙길 만한 사건이다.

“전쟁이라도 일어난 건가요? 희생자들의 숫자가 어째서?”

“전쟁? 비슷하지. 기사단 하나가 몰살당했으니까.”

“……정확한 경위를 이야기해 주세요. 제가 해결하겠어요.”

가넷의 가주는 제국의 최고 권력자다.

그러니 이런 커다란 사건이 생기면 나서서 해결할 의무가 있다.

‘특히 지금은 승계 기간이니까. 할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나서는 게 맞아.’

그런데 토른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넌 빠져라.”

“……뭐라고요?”

“이 건은 내가 직접 해결하겠다.”

쥬웰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였다.

“할아버지? 지금 전 승계 기간이에요. 그러니 가주가 될 이로서 책무를 다할 의무가 있어요.”

승계 기간 때 후계자는 가주와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그러니 이번 일은 쥬웰이 맡는 게 옳다.

하지만 토른 공작은 더더욱 황당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렇다면 승계 기간을 뒤로 늦추겠다. 이번 사건을 해결 후, 다시 승계를 시작하겠다.”

“할아버지!”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승계 기간을 늦추겠다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다.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건가요? 설마 절 못 믿는 건가요?”

“……그건 아니다.”

“그러면?”

하지만 토른 공작은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다물 뿐, 정확한 이야기를 해주려 하지 않았다.

쥬웰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토른 공작을 바라보자, 옆에서 가만히 있던 라이져 경이 나섰다.

“가주님께서는 소공작을 배려해서 그러는 겁니다.”

“이게 어째서 절 위한 배려라는 거죠?”

“범인이 리샤크입니다.”

쥬웰은 우뚝 굳었다.

지금…… 뭐라고?

라이져가 씁쓸한 얼굴로 말하였다.

“리샤크가 광기에 빠져 닥치는 대로 살육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리샤크가 왜?’

너무 뜻밖의 이야기라 쥬웰은 뻣뻣이 얼어붙었다.

토른 공작이 화를 내었다.

“엔리크, 이 멍청한 자식은 왜 그딴 녀석을 살려와서는. 내 언제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라이져가 쥬웰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리샤크가 오팔족의 마지막 후예인 건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어.”

오팔(Opal)족.

요정 왕국의 왕족이다.

제국의 손에 멸망한.

리샤크는 그 오팔족의 피가 섞인 최후의 후예였다.

‘인간의 피가 섞여 왕족 대접은 받지 못했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요정과 인간의 피가 반 절씩 섞인 하프였다.

그래도 박대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식 왕족으로 인정받지는 못해도, 오팔 일족은 리샤크를 가족으로 대우해 주었다.

‘그러니 과거에 그런 일을 일으켰겠지.’

요정 왕국이 멸망 당한 후, 오팔족의 생존자들은 뿔뿔이 도망쳐 흩어졌다.

하지만 그 도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요정족의 외모가 너무 눈에 튀기도 했고, 무엇보다 인간들은 잔인할 정도로 집요하게 오팔족을 추적했다.

오팔족의 눈을 세공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니까.

보석안을 노리는 인간 사냥꾼의 사냥감이 된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오팔족이 인간 사냥꾼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요정 왕국 멸망 때, 가족들의 도움으로 몸을 피했던 리샤크는 흩어졌던 가족들이 인간 사냥꾼에게 사로잡혔던 소식을 듣고 다시 가족들을 구하러 돌아왔고, 보게 되었다.

모든 가족이 눈을 잃고 죽어 있는 모습을.

“그때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리샤크는 정말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리샤크의 손에 죽임당한 기사가 셀 수도 없었으니까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리샤크도 그때 죽었겠지.”

절망 속에서 완전히 망가져 죽어가던 리샤크를 살린 게 엔리크 자작이었다.

엔리크 자작은 인간들이 요정 왕국에 벌인 작태에 깊은 분노와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다가 리샤크 소식을 전해 들어 구하러 간 것이다.

“그냥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때 엔리크 그 멍청한 놈의 부탁을 들어주어서. 쯧.”

토른 공작은 짜증이 나는지 거듭 화를 내었다.

쥬웰은 할아버지가 왜 이토록 화를 내는지 눈치챘다.

‘할아버지는 날 걱정하는구나.’

리샤크는 그녀의 기사다.

그것도 개인적으로 꽤나 사이가 가까웠던.

그러니 그녀를 걱정하는 것이다.

이런 사건을 벌인 이상, 리샤크에게 내려질 운명은 하나였으니까.

죽음.

그리고 이건 가넷가에서 나서서 집행해야 할 일이다.

즉, 그녀는 리샤크를 죽여야 한다.

가넷의 가주로서 책무를 다하기 위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일이 그녀의 가슴에 큰 상처로 남을 게 뻔하니, 토른 공작이 대신 나서겠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일은 제가 하겠어요.”

“……쥬웰.”

토른 공작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나도 네가 직접 나서는 게 옳다는 건 알고 있다. 사소한 정에 휩쓸리는 건 가넷 공작으로서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니.”

토른 공작은 머뭇거리며 말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내게 맡겨다오. 널 위한 할아비의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려무나.”

쥬웰은 그 말에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 철혈의 괴물, 토른 공작이 저런 말을 하다니. 과거에 비하면 참 많이 변했다.

“배려해 주셔서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래도 이번 일은 제가 하겠어요.”

“승계 기간이 뒤로 미루어지는 게 그리도 싫은 거냐?”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승계 기간을 뒤로 미루는 것도 용납할 수 없지만, 그것보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리샤크의 일이기 때문이에요.”

“……!”

“전 리샤크의 주인. 그러니 이번 일의 책임은 제게 있어요. 제가 해결하겠어요.”

쥬웰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하였다.

* * *

지금 이 순간에도, 살육은 진행 중이다.

쥬웰은 곧바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마차로 이동할 여유가 없어서 말에 올라탔다.

“말로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히.”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능숙한 승마 실력은 작위를 이어받을 이에게는 필수 소양이다.

“그런데 리샤크가 왜 그런 광기에 빠진 건지 아는가?”

“지난번과 비슷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비슷하다면?”

“리샤크가 몰래 오팔족의 생존자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가까운 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쥬웰은 한탄했다.

‘최근에 그런 일이 있었군.’

근래 리샤크는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다.

이후에도 어딘가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또 똑같은 일이 일어났나 보군.”

“네, 그렇습니다. 그 오팔족이 숨어 있던 은신처 근처의 영주가 오팔족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강제로 연행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보석안을 파냈을 겁니다.”

쥬웰은 어두운 얼굴을 하였다.

‘내 책임이야. 내가 돌봤어야 했는데.’

사실 쥬웰은 이번 일을 막을 수 있었다.

리샤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다급함을 이유로 리샤크를 돌아보지 않았고, 결국 이런 사달이 일어나게 되었다.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물론 그녀도 변명할 말은 있었다.

도저히 남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니까. 지금도 초조함에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쥬웰은 짙은 자책감이 들었다.

‘리샤크 일은 내가 해결해야 해.’

다급히 출발하려는데, 토른 공작이 그녀를 불렀다.

“쥬웰, 정말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느냐? 내가 나서겠다.”

“…….”

쥬웰은 말 위에 올라탄 상태로 토른 공작을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거절이었다.

토른 공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명심해라. 가넷의 왕으로 나서기로 한 이상,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정에 휩쓸려 실책을 범하지 말아라.”

“……걱정하지 마세요.”

쥬웰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태는 제가 책임지고 완벽히 해결할 테니.”

이후, 쥬웰은 말을 달렸다.

리샤크를 향해서.

* * *

리샤크가 있는 곳은 수도에서 일반적인 속도로 갔을 때, 말로 3일은 달려야 한다.

쥬웰은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도 생략한 채 말을 달렸다.

“소공작 전하, 쉬셔야 합니다! 더는 무리입니다!”

라이져가 다급히 외쳤지만, 쥬웰은 멈추지 않았다.

말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면 갈아타며 계속해서 달렸고, 덕분에 3일의 거리를 2일로 단축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산처럼 쌓인 시체의 더미를.

그리고 그 시체의 산 너머로 검게 죽은 눈빛의 리샤크가 요새의 성벽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 * *

“재상 각하를 뵙습니다!”

리샤크가 있는 요새를 포위하고 있던 병사의 지휘관이 쥬웰을 보며 경례하였다.

현재 쥬웰은 재상직을 맡고 있어서, 공적 업무로 만난 이들은 그녀를 재상으로 부르고 있었다.

“정확히 어떻게 된 상황인 거지?”

대략적인 내용 보고를 듣긴 했지만,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기 위해 물었다.

“저 악마가 갑자기 이곳 영지의 영주 성에 난입해 영주 내외를 죽이고, 영주 성에서 끔찍한 살육을 저질렀습니다.”

“정확히 누구를 죽였지?”

“네?”

“리샤크가 영주 내외 말고 누구를 죽였느냐는 말이다.”

토벌군을 이끌던 지휘관은 말문을 더듬었다.

“그……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였다고……. 영주 성의 기사단도 전멸시키고, 병사들도…….”

“확실한가? 리샤크가 성 내의 일반 평민들까지 죽였다고?”

“…….”

지휘관은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희생자 중 일반 평민은 없었다.

그때, 조금 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한 하급 지휘관이 나서서 말했다.

“……저자가 죽인 이는 영주 내외와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 열린 연회에 초청받았던 상인들입니다. 그 외 다른 희생자는 저자를 추적하다가 역으로 당한 기사와 병사들이 전부고요.”

“상인들? 무슨 상인들이지?”

“영주가 진귀한 보석을 구했다고 상인들을 초청했습니다.”

“……혹시 그 보석이 오팔족의 보석안인가? 보석안을 파내고, 그 보석안을 팔려고 상인들을 초청한 거고?”

쥬웰은 한탄하였다.

역시나 예상대로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하급 지휘관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끔찍한 내용이었다.

“아니, 아직 ‘가공’하기 전의 상태였습니다. 영주는 상인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고, 아직 살아 있는 요정을 연회장에 세워 농락 후, 보석안을 빼냈습니다.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났을 때 저자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보석안만 도려낸 게 아니라, 연회장에 세워 모욕 후에 눈을 빼냈다는 것이다.

보석안을 빼낼 때의 오랜 전통이었다.

쥬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유희.’

끔찍하게도 보석안을 도려내는 일은 유희로 여겨진다.

마치 고대에 사자 우리에 죄수들을 던져 죽어가는 모습을 즐긴 것처럼 고통받는 걸 보며 즐기는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종족인지 알려주는 일이다.

‘문제는 이게 불법이 아니란 거지.’

물론 인간에게 저런 짓을 저지르는 건 중죄다.

하지만 요정족은 인간이 아니다.

요정 왕국이 건재했을 때는 인격체로 대우받았지만, 지금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노예일 뿐이다.

즉, 인격 없는 동물을 학대한 것처럼 끔찍한 일을 해도 법적으로 무죄라는 것이다.

여기서 죄를 저지른 건 리샤크 혼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넷의 왕으로서 그런 리샤크에게 죽음을 내려야 했다.

“저희가 가서 처결하겠습니다.”

라이져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리샤크는 가넷 기사단 소속이다. 그러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라이져도 리샤크에게 나름대로 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수하가 이런 끔찍한 일을 겪었다니. 마음이 좋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에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리샤크는 죽어야 할 죄를 저질렀고, 그들은 리샤크를 죽여야 했다.

“아니, 내가 가겠어.”

“소공작 전하?”

“리샤크에게 벌을 내리는 건 나야.”

“위험합니다!”

라이져가 깜짝 놀라 외쳤다.

“지금 리샤크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소공작 전하께 위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리샤크는 날 해치지 않을 거야. 봐.”

쥬웰은 리샤크가 앉아 있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마침 리샤크도 쥬웰을 보고 있었다.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사자(死者)의 눈빛으로.

“리샤크는 날 부르고 있어.”

“……전하.”

“설사 위험하더라도 가야 해. 그게 그의 주인인 내가 할 일이니까.”

쥬웰은 손을 내밀었다.

“검을.”

그 말에 라이져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직접 처형을 거행하려는 겁니까?”

“…….”

쥬웰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라이져에게 검을 받은 후 리샤크를 향해 다가갔다.

* * *

그때, 수도 인근.

화려한 정원에서였다.

그 정원은 수도 귀족들의 휴양을 위해 꾸며놓은 곳으로, 플랑드나도 머리가 복잡할 때 종종 방문하여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플랑드나는 정원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성녀답게 고고해 보이는 광경이었지만, 플랑드나의 속은 시커멓게 타오르고 있었다.

‘쥬웰이 사실 마왕이었다고? 무슨 황당한.’

그녀는 얼마 전에 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쥬웰이 끔찍한 악마라는 믿을 수 없는 정보.

하지만 그 정보를 전해온 이가 무려 십마였다.

그것도 얼마 전, 그 마왕과 함께 사파이어 공작가를 친 십마.

그런 이가 전한 정보이니 헛소리라 치부하며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지. 쥬웰이 마왕이었다면 지금까지의 일이 다 설명돼.’

갑자기 돌변한 쥬웰의 성격.

이후 쥬웰의 곁에서는 끝없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그게 모두 쥬웰이 마왕의 능력을 이용해 저지른 짓이라면, 다 이해가 되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플랑드나는 직감했다.

쥬웰이 끔찍한 어둠이 맞는다는 것을.

어쩌면, 그러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야 쥬웰을 화형대에 매달아 불태울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이걸 어떻게 밝히냐는 건데.’

무턱대고 쥬웰이 마왕이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역풍만 맞을 것이다.

‘다이아 공작가와 힘을 합칠 수 있으면 수월할 건데.’

성전의 가문인 에메랄드 공작가보다 상인의 가문인 다이아 공작가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더 많다.

플랑드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매리엇도 이 정보를 들었어. 아마 나름대로 움직이고는 있는 것 같은데.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니, 효과가 덜해.’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따뜻한 음성이 그녀에게 닿았다.

“무슨 고민을 하십니까, 부인?”

그 음성의 주인공은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자, 성전기사단장 죠제프였다.

플랑드나는 매서운 눈빛을 얼른 추스르고, 자애로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냥,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어 이런저런 고민을 했어. 요즘 여러모로 뒤숭숭하잖아.”

“그러시군요. 부인께서 이토록 다른 이들을 위한다는 걸 밖의 사람들도 알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죠제프는 플랑드나의 배를 어루만졌다.

“그래도 너무 무리는 마십시오. 곧 저희의 에스텔레가 태어날 예정이지 않습니까?”

어느덧 플랑드나는 만삭에 가까워져 있었다.

플랑드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죠제프, 날 사랑해?”

“당연히요.”

죠제프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 세상 모두가 당신의 진심을 오해한다고 하더라도, 전 당신의 편에 설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죠제프도 귀가 있으니, 최근 플랑드나를 향한 비난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치 않은 믿음과 사랑을 과시했다.

플랑드나는 죠제프의 품에 기대며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면 하나만 더 물어도 돼?”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에스텔레를 잡아먹었다는 소문은 어떻게 생각해?”

“……!”

죠제프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오래전부터 돌았던 유명한 소문이었다.

에스텔레의 죽음을 추모하며, 플랑드나에게 비난의 화살을 보낸 백성들이 많았다.

죠제프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하는 이가 있다면, 제 검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겁니다.”

플랑드나는 그런 남편의 믿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악인이라도 사랑하는 이는 있다.

플랑드나에게는 죠제프가 그러했다. 죠제프에게만큼은 절대로 자신의 진면목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잠시 산책을 다녀올게.”

“모시겠습니다.”

“아니, 머리가 복잡해 혼자 다녀올게. 성전기사단 일로 바쁠 텐데, 먼저 가문으로 돌아가도 좋아. 난 머리를 식힌 후에 천천히 돌아갈게.”

쥬웰을 잡아 화형대에 올릴 계획을 짤 것이다.

죠제프 옆에서 그런 생각을 하기는 적합하지 않아, 먼저 돌려보내려는 거였다.

“그러면 사용인들이라도 대동하십시오. 이곳은 외곽이라 혹시라도 들짐승이 들어올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응, 고마워.”

이후 고용인들을 대동해 정원을 걸으며 고민에 잠겼다.

플랑드나는 상상해 보았다.

쥬웰이 화형대에 묶여 불길에 휩싸여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광경을.

과거, 에스텔레가 악마에게 끌려가는 광경 때만큼이나 짜릿할 것이다.

‘확실한 증거까지도 필요 없어. 적당한 증언이나 정황 증거만 있어도 충분한데. 그러면 우리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가지고 있는 ‘방법’을 이용해 쥬웰이 어둠인지 판별할 수 있을 테니.’

방법.

에메랄드 공작가는 성전의 가문답게 어둠을 판별할 수 있는 고유 방법이 있다.

문제는 아무에게나 이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쥬웰처럼 대단한 이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이 방법을 사용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 그런 증거를? 증거를 조작해 누명이라도?’

증거 조작을 통한 누명.

플랑드나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플랑드나는 눈을 끔뻑였다.

생각지도 않은 인물을 정원 저편에서 본 것이다.

‘저자는?’

가넷가의 해밀턴 공자였다.

쥬웰의 최측근.

‘성배 사건 때, 해밀턴 공자가 에스텔레의 유해를 발견해 내었지.’

순간, 플랑드나는 번개 같은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단순한 측근이 아니야. 해밀턴 공자는 쥬웰의 흑마법을 내려받은 하수인이 분명해!’

쥬웰이 정말 마왕이라면, 밑에 부리는 권속도 있을 것이다.

정황상 해밀턴은 그런 권속일 가능성이 컸다.

‘해밀턴 공자에게 쥬웰이 어둠이라는 자백을 받으면?’

그러면 쥬웰에게 에메랄드 공작가의 판별 ‘방법’을 사용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뒤를 밟아보자.’

플랑드나는 남몰래 해밀턴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보았다.

“……!”

정원의 구석에서 해밀턴이 은밀히 어둠의 힘을 일으키는 광경을 말이다.

‘이럴 수가.’

플랑드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해밀턴이 어둠의 종자였다니.

그 말은 쥬웰이 마왕이 맞는다는 증거였다!

심증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플랑드나는 호위 기사에게 다급히 명했다.

“해밀턴 공자의 뒤를 쫓아.”

“……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조용히 모셔와.”

호위 기사가 흠칫하여 물었다.

조용히 모셔 오라.

그것은 납치를 해오라는 플랑드나 식 표현이었다.

* * *

호위 기사는 평소에도 플랑드나의 더러운 명령을 도맡아 하던 이였지만, 오늘은 당황해 반문했다.

“하, 하지만? 저분은 가넷의 공자가 아닙니까?”

“어둠의 힘을 일으켰잖아!”

“어둠의 힘이라고요?”

기사는 더욱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였다.

무언가 이상한 반응이었지만, 쥬웰을 화형대에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한 플랑드나는 기사의 반응을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당장! 멀어지고 있잖아! 어서 뒤를 밟아! 그리고…….”

성전으로 끌고 가면 소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플랑드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하였다.

“내 비밀 별장의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

호위 기사는 다시 흠칫하였다.

플랑드나의 비밀 별장은 그녀가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을 처리할 때 사용하는 곳으로 지하 감옥이 있었다.

정확히는 고문실이었다.

즉, 그녀는 해밀턴을 고문할 작정인 것이다.

‘쥬웰이 마왕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실토하게 하겠어.’

플랑드나는 눈을 빛내며 생각하였다.

곧, 쥬웰을 화형대에 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밀턴은 인적없는 곳에서 플랑드나의 호위 기사에게 제압당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은밀히 지켜보고 있던 이가 있었다.

십마 아낙스였다.

“덫에 걸렸군.”

쥬웰의 예상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플랑드나는 덫에 걸렸다.

그것도 끔찍한 덫에.

* * *

저벅저벅.

쥬웰은 리샤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라이져가 준 검이 그녀의 체구보다 길어, 걸음을 옮김에 따라 질질 끌렸다.

끼릭, 검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귓가에 거슬리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쥬웰은 성벽에 올라, 리샤크 앞에 섰다.

리샤크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쓰러져 앉아 있었다.

“……나 왔어.”

리샤크가 힐끗 시선을 들어 쥬웰을 바라보았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아니, 어쩌면 이전과 같은 느낌의 죽은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리샤크의 눈동자는 밝으면서도, 항상 죽어 있었으니까.

“……오셨군요.”

리샤크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우는 것처럼 느껴지는 미소였다.

“기다렸습니다.”

“……왜?”

“이왕이면 아가씨의 손에 죽고 싶었으니까요.”

쥬웰은 무너져 있는 리샤크를 무겁게 내려다보았다.

“이전에 아가씨께서 말씀하셨죠? 도와줄 일이 있다면 말하라고요.”

리샤크는 말라비틀어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그 부탁을 하겠습니다. 절 직접 죽여주십시오.”

뚝, 리샤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힘듭니다.”

쥬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돌렸다.

시체 한 구가 리샤크의 뒤에 놓여 있었다. 눈이 파여 있는 시체였다.

눈뿐만 아니라 전신에 흉측한 상처가 가득했다.

눈이 뽑히기 전, 인간들의 유희를 위해 고문을 당한 흔적이었다.

“……네 가족인가?”

“동생입니다. 이렇게 못난 저를 오라비라 부르며 따르던 귀여운 동생이었지요.”

동생.

훼손되어 나이를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체구가 작긴 했다.

대략 15살도 안 되었을 것 같았다.

“제 이야기는 들어 아실 겁니다. 전 오팔족의 후예입니다. 정확히는 반쪽이지요. 과거, 모든 가족을 잃었고 얼마 전에는 이렇게 마지막으로 만난 동생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리샤크의 눈동자가 이전과 다르게 오색 창연한 색을 냈다.

오팔족의 보석안이었다.

오팔의 보석 말은 ‘희망’.

하지만 리샤크의 눈빛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마치 꺾인 희망처럼.

“그냥……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힘듭니다. 그만 죽여주십시오.”

짙은 절망이 담긴 음성이었다.

쥬웰은 리샤크가 진정으로 죽음을 바라고 있음을 눈치챘다.

“어서요. 어차피 아가씨도 절 죽여야 하는 처지 아닙니까? 저도 아가씨가 내리는 죽음이라면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쥬웰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말하였다.

“내가 네가 죽길 바라지 않는다면?”

리샤크는 멍하니 쥬웰을 올려다보았다.

“내 힘이면 널 살려줄 수 있어.”

무리한 일이지만.

그녀가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 어떻게든 이번 일을 무마하면, 리샤크를 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리샤크가 살았으면 하였다.

이기적인 바람일지라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리샤크.”

“바라지 않는다고요. 더는 힘듭니다.”

리샤크는 무릎 속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과거, 제 가족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십니까?”

안다.

하지만 쥬웰은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나 끔찍했기에.

“그냥 눈이 파이고 죽음을 맞은 게 아니에요. 온갖 농락과 고문을 당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었어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

“인간들은 별다른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일을 저지른 게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 그렇게 죽었어요. 요정족이 비명 지르는 걸 보고 싶다고.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악할 수 있는 겁니까?”

분노일까, 슬픔일까.

리샤크의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전 그런 인간이 치가 떨리도록 싫습니다. 지금도요. 맨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인간들을 향한 살심을 억누르며 살았습니다. 모조리 다 죽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왔어요.”

쥬웰은 한탄하였다.

이게 바로 리샤크가 지닌 영혼의 상처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가씨도 저와 마찬가지 아닙니까?”

“……!”

쥬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

리샤크가 비릿하게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께서도 저와 비슷한 끔찍한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제 마음을 이해할 텐데요?”

리샤크의 눈이 광기로 일렁였다.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이 원한을요. 아무리 노력해도, 전 인간들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제 이런 마음, 아가씨께서도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

쥬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리샤크의 말이 옳다.

그녀는 리샤크의 마음을 이해한다.

복수에 미쳐 있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엔리크 자작님은 절 살려주며 원한을 잊어보라고 하였지요. 노력해 보았지만 무리입니다. 살아 있어 봤자,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은 증오심에 힘들기만 할 뿐이니, 그냥 죽여주십시오.”

그런 리샤크의 모습에 쥬웰은 가슴이 아릿했다.

‘나와 똑같아.’

원한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도.

복수에 미친 모습도.

……또한, 그런 주제에 선한 심성을 지니고 있어서 완전히 끔찍한 모습이 되지 못하는 것까지 다 똑같았다.

그녀는 그런 리샤크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주변 이들이 자신을 보며 왜 이리 아파하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그녀가 안타까웠던 것이다.

지금 리샤크의 모습처럼.

“……그래도 난 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아.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겠지?”

리샤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복수를 포기하는 것.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든 리샤크를 살리고 싶었다.

정작 자신은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할 거면서.

“큭큭.”

리샤크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말, 하실 자격 없다는 것 아시죠? 본인도 복수를 포기하지 못할 거면서.”

“……그래.”

“어쨌든 절 그리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를 향한 제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리샤크가 흐릿하게 웃었다.

“아가씨 덕분에 마지막에 조금은 즐거웠습니다. 사실 즐겁기보다는 안타까울 때가 많았습니다만. 보고 있으면 조마조마할 때가 많아서……. 어쨌든, 이제 보지 못한다니, 그건 조금 아쉽군요.”

죽이라는 이야기다.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리샤크의 모습에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리샤크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리샤크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니까, 그의 마음을 돌이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결국, 쥬웰은 검을 들었다.

“하나만 묻겠어.”

“말씀하십시오.”

“죽고 난 다음에도, 날 따르지 않겠어?”

리샤크는 쥬웰의 물음을 큰 의미 없이 생각하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만 된다면 저도 그러고 싶군요. 불가능하겠지만요.”

리샤크가 죽게 되면 운명은 뻔하다.

그의 영혼은 게헨나에 떨어져 고통받게 될 것이다.

“……그래.”

그렇게 마지막 대화를 나눈 후.

쥬웰의 검이 리샤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피가 튀었다.

리샤크의 몸이 스르르 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 * *

한편, 성벽 밖에서 라이져 경을 비롯한 기사들은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성벽 위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지?”

“리샤크를 설득하는 건가?”

거리가 워낙 멀어 둘이 나누는 대화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라이져는 간절히 생각했다.

‘제발,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군.’

리샤크는 가넷 기사단 안에서 겉도는 존재였다. 출신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래도 라이져는 리샤크를 나름대로 아꼈다. 리샤크의 본성이 선함을 알아보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다니.

리샤크의 참담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죄였다.

‘그나마 희망은 쥬웰 소공작님.’

쥬웰이라면, 어쩌면 리샤크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쥬웰도 속으로는 그걸 바라는 듯했고.

지금도 리샤크를 설득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

쥬웰이 검을 꺼내 들었다.

거리가 멀어,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져는 검음이 들리는 듯했다.

‘아.’

쥬웰은 리샤크의 목을 겨눈 채 몇 마디의 말을 더하는 듯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리샤크는 무슨 대답을 하는 걸까?

리샤크가 힘없이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그리고 쥬웰의 검이 리샤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

쥬웰의 전신이 피로 물들었고, 스르르, 리샤크의 몸이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죽은 것이다.

그 처참한 광경에 가넷가의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쥬웰은 피에 젖은 검을 들고 성벽을 내려왔다.

“소공작 전하!”

라이져가 다급히 쥬웰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라이져는 흠칫하였다.

쥬웰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빛이 무저갱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피곤하군. 오늘은 근처에서 쉬고, 내일 가넷가로 출발하도록 하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이져는 아끼던 이의 목숨을 직접 거둔 쥬웰이 어떤 심정일지 상상이 되지 않아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 리샤크의 시체는 그대로 두도록.”

“……소공작 전하?”

남몰래 수습해 묻어주려 했던 라이져는 당황해 반문했다.

하지만 쥬웰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당부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도록.”

“……알겠습니다.”

* * *

깊은 자정.

구름에 달이 가려 한 치의 빛도 비치지 않는 적막 속이었다.

리샤크가 죽음을 맞았던 성벽에도 시커먼 어둠만이 가득했다.

시체가 늘어져 있어, 스산하기 그지없는 곳에 나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쥬웰이었다.

그녀가 어둠을 헤치고 나타난 것이다.

“…….”

리샤크를 추모하려는 걸까?

쥬웰은 낮에 자신의 손으로 리샤크를 죽였던 성벽 위로 다시 올라갔다.

쥬웰이 당부한 대로 리샤크의 시체는 아까 죽음을 맞았던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런데 쥬웰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일어나.”

시체에게 일어나라고 하다니?

시체는 역시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쥬웰이 이렇게 저주의 말을 내뱉는 순간.

“나 사령(死靈)의 주구가 명하나니, 그대는 안식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일어나도록.”

믿을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났다.

우뚝 굳어 있던 리샤크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눈을 뜬 것이다!

리샤크에게서 버썩 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이건? 왜…… 왜 내가?”

자신이 깨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은 얼굴이었다.

곧, 이게 쥬웰이 부린 수작임을 깨닫고 리샤크는 원망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저, 절 죽여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죽였어.”

“……네?”

“너 죽었다고. 심장을 만져 봐.”

리샤크가 당황해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 그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심장은 멈춰 있었다.

“넌 이미 죽은 상태야. 이렇게 깨어난 건, 내가 너에게 사령의 저주를 건 탓이지.”

사령의 저주.

시체를 다루는 흑마법, 네크로맨시를 뜻한다.

리샤크는 당황했다.

“사, 사령술이라고요? 하지만 그건? 사령술로 시체를 일으켜도 이렇게 생전의 의식은 갖지 못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리샤크의 말이 옳다.

네크로맨시로 살아난 시체는 그저 술사의 뜻에 움직이는 인형이나 괴물이 될 뿐이니까.

죽은 이의 영혼은 생전의 죄과에 따라 정해진 사후 세계로 떠나야 한다는 세상의 절대적인 법칙 때문이다.

“원래는 그렇지. 하지만 넌 죽기 전에 나한테 약속했잖아.”

쥬웰이 말을 이었다.

“죽고 난 이후에도, 날 따르기로.”

“……!”

“그 맹약에 따라 네 영혼은 게헨나로 가지 않고, 날 따르게 된 거야.”

리샤크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

최후의 순간.

쥬웰은 물었다.

죽은 다음에도 자신을 따르지 않겠냐고.

리샤크는 피식 웃으며 그때 죽어서도 그녀를 따르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설마 그게 이런 의미였을 줄이야.

“만약 네 영혼이 에덴에 갈 운명이었다면, 그런 맹약 따위는 의미 없었겠지. 맹약보다 에덴으로 가야 하는 세상의 법칙이 우선될 테니까.”

쥬웰은 설명을 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네 영혼은 게헨나에 떨어질 운명이었고, 게헨나의 비공식적인 67번째 대악마인 내가 간섭할 수 있었던 거야.”

리샤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이래서는 죽은 게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습니까? 되, 되돌려주십시오.”

하지만 쥬웰은 차갑게 답했다.

“싫어.”

“아가씨!”

“내 정체를 알고 있다고 했지? 난 악마야. 그러니 네 운명은 내 마음대로 하겠어.”

원래 사령술은 죽은 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체를 농락하는 끔찍한 흑마법이다.

그러니 쥬웰도 자신의 뜻대로 리샤크를 대하겠다는 것이다.

“난 네가 이대로 죽길 바라지 않아.”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 원한을 버리지 못합니다.”

리샤크가 씁쓸히 말하였다.

“아가씨가 이런 억지를 부려 봤자 복수를 포기하지 못하니…….”

“포기하지 마.”

“……네?”

“원하는 대로 실컷 복수하라고.”

리샤크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 그게 무슨? 제가 바라는 바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전 인간들의 피로 세상을 물들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알아. 네가 바라는 대로 해. 대신, 내 권속이 되어서.”

“……!”

쥬웰이 자신의 손목을 그어, 리샤크 앞에 피를 뚝, 뚝 떨어뜨렸다.

“널 내 기사로 삼겠어. 넌 내 죽음의 기사가 되어 인간들을 마음껏 살육해.”

죽음의 기사(Death knight).

고위 악마들이 부리는 게헨나의 기사로, 지금, 쥬웰은 리샤크에게 그 악마의 기사가 되기를 권하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려면, 날 대신해 세상에 혈겁을 일으켜 줄 이가 필요해. 그러니 정 원한을 참을 수 없다면, 내 죽음의 기사가 되어 인간들을 향한 원한을 갚아.”

“…….”

리샤크의 눈이 시뻘게졌다.

그가 말없이 쥬웰을 올려다보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

“무엇입니까?”

“인간을 향한 복수를 해도 죽어 마땅한 이들만 죽여.”

“……!”

“너도 인간이 모두 악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알 것 아니야?”

리샤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인간을 향한 원한을 지니고 있다.

종족 혐오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 모두가 나쁜 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가 존경하는 엔리크 자작, 은애하는 쥬웰 또한, 인간이니까.

“데스 나이트가 되면,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주시자의 눈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그 악마의 권능을 이용해 선악을 따져, 죽어 마땅한 이들만 죽여. 단, 정말 죽어 마땅한 놈이어야 해.”

쥬웰은 당부했다.

사람들은 선인과 악인만으로 나뉘지 않는다. 대부분은 중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애매한 중간에 있는 이들까지 모조리 죽이는 건 곤란하다.

“세상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쓰레기들만 죽여. 그런 이들만 골라 죽여도 원 없이 네 복수를 할 수 있을 거야.”

세상에는 그만큼 끔찍한 이들이 많았다.

“……알겠습니다. 오히려 그게 제가 바라는 복수에 더 걸맞은 일이기도 하군요. 제 원수들은 모두 아가씨가 말씀하신 끔찍한 악인들이니까요.”

리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까?”

“하나 더 있어.”

“무엇입니까?”

“실컷 복수한 이후,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리면 새로운 삶을 사는 걸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리샤크는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그러니까…… 네가 바라는 복수를 한 이후에는 나에게서 벗어나, 새 삶을 살았으면 한다는 거야. 피에 물들지 않는, 새로운 삶을.”

그녀는 자신의 주변 이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리샤크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런 끔찍한 상황이 되었지만, 그가 종국에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손을 써놨지. 내가 죽은 후에도 리샤크가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원래 네크로맨시를 시전한 술사가 소멸하면 대상도 같이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쥬웰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꼼수를 부렸다.

아까 검으로 심장을 꿰뚫을 때 리샤크를 완전히 죽인 게 아닌, 가사(假死) 상태로 만든 것이다.

즉, 지금 리샤크는 정말 사망한 게 아닌, 생체 기능만 멈추어 있는 ‘가짜 사망’의 상태였다.

생체 기능이 멈췄음에도 움직일 수 있는 건, 쥬웰의 마력 때문이고.

그녀가 소멸하는 순간, 그에게 걸었던 가사의 저주가 풀리며, 생명을 되찾게 되리라.

그녀는 자신이 죽은 후, 리샤크가 본인을 얽어매었던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기를 바랐다.

‘……이런 내가 바랄 소원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쥬웰은 씁쓸히 웃었다.

본인은 복수를 위해 파멸도 아랑곳하지 않는 주제에, 남의 행복을 바라다니.

이율배반적인 마음인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정말로 리샤크가 행복했으면 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리샤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쥬웰이 맹약의 말을 내뱉었다.

“……가 명하나니, 그대, 리샤크를 나 ……의 죽음의 기사로 임명하노라.”

아까 쥬웰이 떨어뜨린 피에서 끔찍한 어두운 빛이 흘러나와 리샤크를 감쌌다.

이어서, 리샤크의 눈동자 동공이 완전한 흑색 빛으로 변하였다.

쥬웰을 따르는 죽음의 기사가 된 것이다.

이제 리샤크는 쥬웰이 소멸하는 순간까지, 끔찍한 지옥의 기사가 되어 혈겁을 저지르리라.

그런데 리샤크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응?”

“아가씨가 시키는 살육만 저지르겠습니다.”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리샤크가 이유를 말했다.

“아무리 악인들만 노린다고 해도 닥치는 대로 살육을 일으키면 아가씨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악인 중에서도 아가씨가 허락하고 원하는 살육만 저지르겠습니다.”

끔찍한 악마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리샤크다운 말이었다.

쥬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로든 왕국으로 가.”

“로든 왕국 말입니까? 호박족이 있는 왕국이군요.”

“그래, 너와 같은 아픔을 지닌 이들이 있는 곳이지.”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아픔을 겪은 이들은 오팔족이 아니다.

그래도 오팔족은 한 번에 깔끔히 멸족당했으니까.

현재도 벗어날 수 없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일족이 있다.

바로 앰버(Amber, 호박) 일족이다.

“로든 왕국으로 가서 소란을 일으켜줘. 로든 왕국이 공포와 혼란에 빠지게.”

그녀는 이번 계획이 마무리된 후, 곧바로 로든 왕국에 가서 로든 왕국을 멸망시킬 계획이었다.

미리 리샤크를 통해서 손을 써놓으면 일이 한결 수월하리라.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리샤크는 쥬웰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나의 주인님.”

* * *

그렇게 리샤크를 데스 나이트로 삼은 후, 쥬웰은 곧바로 수도로 돌아갔다.

다만, 처음 왔을 때처럼 급하게 이동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마차를 타고 천천히 움직였다.

중간중간 시찰을 핑계로 여러 도시에 들러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끈 이유가 있었다.

‘내가 수도에서 자리를 비우고 있어야지. 그래야 매리엇과 플랑드나 언니가 마음 편히 추악한 술수를 부릴 테니까.’

십마 라이든을 통해 플랑드나와 매리엇 모두 그녀가 끔찍한 마왕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쥬웰은 그들이 마음껏 일을 벌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기대되네.’

그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수도로 향했고.

수도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이전과 다른 공기가 쥬웰을 맞았다.

수도에는 그녀가 어둠의 존재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 * *

가넷가는 깊은 적막에 잠겼다.

최근 수도에 돌고 있는 소문 때문이었다.

쥬웰이 끔찍한 어둠이라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쾅!

토른 공작은 평소답지 않게 격분하여 탁자를 내려쳤다.

“그딴 헛소리를 하는 놈들은 모조리 당장 잡아 와라! 잡아 와서 모조리 목을 쳐버려!”

“알겠습니다. 기사들을 보내 허튼소리를 한 이가 있다면, 모조리 목을 쳐 본보기로 삼겠습니다.”

라이져 경도 단단히 화가 났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가넷.

피를 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렇게 수도에 피바람이 들이닥치려는 차, 쥬웰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쥬웰?”

“헛소문인데,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토른 공작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야. 넌 이게 자연스러운 소문이라고 보느냐?”

“…….”

“갑자기 이런 악의적인 소문이 퍼진 건, 누군가 작정하고 의도한 것이다.”

토른 공작의 말이 옳다.

원래 쥬웰은 성녀로 이름 높았다.

그런데 황당하게 그녀가 악마라니?

누군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리지 않는 한, 이런 소문이 도는 건 불가능했다.

“뭐, 그래봤자 믿는 사람도 많지 않을 텐데요. 대부분 헛소문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쥬웰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실제로 소문이 돌고 있지만 그 소문을 진실로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껏 성녀로서 보인 모습 때문이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이런 소문을 퍼트린 이를 가만히 둘 수는…….”

“누가 가만히 둔대요?”

“……!”

토른 공작과 라이져의 눈이 커졌다.

쥬웰은 싱긋 웃었다.

“전 가만히 둔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오소소 소름이 돋는 미소였다.

토른 공작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너, 일부러 더 소문을 키우려는 거구나.”

“빙고. 역시 할아버지. 그러면 제가 몇 개 질문할게요.”

쥬웰은 손가락을 들었다.

“이 소문은 누가 퍼뜨렸을까요? 참고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으면서 멍청하도록 간 큰 이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죠.”

멍청하다.

쥬웰은 그리 표현했다.

감히 가넷을 향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멍청한 게 맞았다.

”……다이아가 퍼뜨린 거겠지.“

“네, 맞아요. 가넷과 다이아 공작가가 아니면, 단기간 내에 이렇게 소문을 퍼뜨릴 수 있는 이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둘째 질문.”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에메랄드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제가 악마란 소문에 가장 기뻐할 이는 에메랄드 공작가인데.”

토른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을 거란 거냐?”

“네, 에메랄드 공작가는 성전의 가문. 어둠과 관련한 일에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죠.”

쥬웰은 설명을 이어갔다.

“따라서 에메랄드 공작가도 무언가 강력한 한 방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그걸 기다리겠다고?”

“네, 그래야 그들을 역으로 더욱 커다란 곤경에 빠뜨릴 수 있을 테니까요.”

토른 공작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들이 그런 일을 해도 넌 괜찮은 거냐?”

쥬웰은 웃음을 흘렸다.

“전 어둠이 아닌데, 그들이 어떤 수작을 부리든 무슨 상관이에요. 도리어 본인들의 발등만 찍는 격이지요.”

토른 공작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했다.

쥬웰이 어둠의 존재가 아닌데, 저들이 어떤 수작을 부리든 무슨 걱정이겠는가?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런데 토른 공작의 반응이 이상했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무언가 석연찮은 표정이었다.

“할아버지?”

“다들 자리를 비켜주겠나? 소공작과 긴밀히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모두 의아한 얼굴로 자리에서 나갔다.

이윽고 단둘이 되자, 토른 공작이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정말 아닌 게 맞느냐?”

“……네?”

“악마에 영혼을 판 게 아니냐는 말이다.”

“……!”

쥬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토른 공작의 눈동자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치챘어?’

그렇다.

토른 공작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쥬웰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토른 공작이 정말로 자신의 정체를 아는 거면, 끝장이다.

공작 위를 물려받는 건 물론, 모든 게 어그러지리라.

그런데 토른 공작이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아. 널 추궁하는 게 아니야. 널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다. 이 할아비한테는 솔직히 말해야 해.”

“…….”

“매리엇이 아무런 근거도 이런 소문을 퍼뜨렸을 리가 없지 않으냐? 만약, 네가 정말로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게 맞는다면, 솔직히 말해다오.”

토른 공작은 쥬웰의 손을 움켜잡았다.

“난 네 편이니, 이 할아비가 어떻게든 널 지켜주겠다.”

쥬웰은 멍하니 그런 토른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

가슴이 울컥하였다.

토른 공작의 말이 너무 뜻밖이면서, 고마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

쥬웰은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들어 토른 공작을 와락 껴안았다.

“아니, 뭐 하는 거냐? 이럴 때가 아니지 않으냐?”

토른 공작이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쥬웰은 더욱 강하게 그를 껴안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할아버지.”

“……!”

토른 공작이 우뚝 멈추었다.

지금껏 필요에 의해 속삭이던 애교와는 결이 다르다는 걸 느낀 걸까, 토른 공작이 마주 손을 들어 그녀를 꽉 안아주며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래,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 넌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가족이야.”

그 말에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고 토른 공작의 품을 느꼈다.

‘내 할아버지.’

쥬웰은 왜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으며 웃음을 지었다.

“헤헤, 정말 사랑해요. 정말 정말 많이요.”

그 말에 토른 공작은 에잉 투덜거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말해다오.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 맞느냐?”

쥬웰은 토른 공작의 품에서 벗어나고는 답했다.

“아니에요.”

“……정말이냐?”

“네, 모두 헛소문이에요.”

토른 공작은 쉽게 의심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만약 거짓말하는 거면 안 된다. 너도 알다시피 에메랄드 공작가에는 어둠을 감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

“네가 말한 대로 지금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침묵하고 있는 건, 그 ‘방법’을 너에게 사용할 명분을 모으려는 걸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사용하면, 어떤 어둠도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없어.”

토른 공작의 말이 옳다.

에메랄드 공작가에는 어떤 어둠이든 정체를 판별할 수 있는 비장의 방법이 있다.

한때, 에메랄드 공작가의 인물이었던 쥬웰도 그 방법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전 아니에요.”

“……!”

쥬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

토른 공작은 결국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냐. 정말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네, 오히려 좋은 기회인걸요.”

좋은 기회.

쥬웰의 그 말에 토른 공작은 하나의 사실을 눈치챘다.

“설마…… 이 소문을 다이아 공작가에 흘린 게 너냐?”

“네, 맞아요.”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말했잖아요. 전 다른 공작가들을 무너뜨리길 원한다고요. 이 일은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다이아와 에메랄드를 무참히 짓밟을. 감히 헛소문으로 가넷을 끔찍이 모욕한 거니까요.”

“…….”

토른 공작은 오소소 다시 소름이 돋았다.

“넌…… 도대체…….”

“너무 사랑스럽다고요?”

“그래, 맞다. 누구 손녀이기에 이리도 훌륭한 건지. 클클.”

“쥬웰이야,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닮은 거죠.”

쥬웰은 다시 토른 공작에게 애교를 부리며 안겼다.

토른 공작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면 이 할아비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냐?”

“적당히 군불을 피워 주세요.”

“정확히 어떻게 말이냐?”

“소문을 듣고 저를 냉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다이아와 에메랄드가 제가 곤경에 처했다고 착각하게 말이에요.”

쥬웰은 속삭였다.

“할아버지가 저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 소문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흔들릴 거예요. 그러면 다이아와 에메랄드는 아주 기고만장해지겠죠. 발칙하게 나올 거예요.”

“그리고 주제도 모르고 발칙하게 군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거구나.”

“네, 아주 혹독하게요.”

쥬웰은 웃으며 말했다.

토른 공작은 마주 웃더니 물었다.

“그래, 대신 하나만 묻겠다.”

“말씀하세요.”

“진짜로 괜찮은 거냐? 정말 아닌 게지?”

정말 어둠에 영혼을 판 게 아닌 건지 묻는, 진심이 담긴 걱정.

쥬웰은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 * *

이후,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처음 소문이 퍼졌을 때만 해도 대다수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도리어 버럭 화를 내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예끼! 감히, 쥬웰 성녀님께! 천벌을 받으려고!”

“어떤 놈인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놈이!”

하지만 그런 반응에도 불가하고 소문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다이아 공작가 때문이었다.

다이아 공작가는 상단의 가문.

따라서 어마어마한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들을 동원해 계속해서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소문을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일부 ‘설마?’ 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극소수의 반응일 뿐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뒤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토른 공작이 쥬웰을 냉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언가 공식적으로 어떤 조처를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과 확연히 다르게 쥬웰을 차갑게 대하였고, 권력의 향방에 예민한 가넷의 봉신들은 그 사실을 재빠르게 눈치챘다.

‘설마? 정말로 쥬웰 소공작님이 어둠에 영혼을?’

몇몇 이가 그런 의심을 품었고, 그 사실은 끄나풀을 통해 곧바로 다이아 공작가와 에메랄드 공작가에 흘러 들어갔다.

그중 쥬웰을 노리는 다음 수작을 준비하던 플랑드나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 * *

“토른 공작이 쥬웰을 냉대하기 시작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호위 기사는 플랑드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토른 공작이 소문을 믿기 시작한 건가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태도가 바뀌었다는 건 확실합니다.”

“흐음.”

플랑드나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매리엇이 일을 제대로 처리해 주었어.’

매리엇과 척을 지게 돼 힘을 합치지 못해 곤란했는데, 매리엇 혼자 알아서 일을 잘해 주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함께 손발을 맞추었으면 훨씬 더 파급력 강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지만, 상관없다.

이제 모든 채비가 끝났으니 말이다.

호위 기사가 주저하며 물었다.

“……저자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 물음에 플랑드나는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끔찍한 광경이 보였다.

해밀턴이 쇠사슬에 매달려 전신에 상처를 입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플랑드나에 의해 고문당한 것이다.

“으…… 으…….”

해밀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플랑드나는 나긋하게 해밀턴에게 다가가 채찍의 끝으로 해밀턴의 뺨을 툭툭 쳤다.

“그, 그만…….”

해밀턴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플랑드나는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자, 다시 말해봐. 쥬웰의 정체가 뭐라고?”

해밀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주저하며 입을 열지 않자, 플랑드나가 해밀턴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손을 휘둘렀다.

지켜보던 호위 기사의 안색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섬뜩한 광경.

‘플랑드나 성녀님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호위 기사는 두려움에 질려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도 플랑드나는 잔혹한 성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정도가 지나쳤다.

쥬웰을 향한 질투, 증오와 원망에 완전히 눈이 돌아간 것 같았다.

결국, 해밀턴은 고통에 이기지 못하고 말하였다.

“쥬, 쥬웰은…… 어둠에 영혼을 판 악마야.”

그 답에 플랑드나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그녀는 악마의 성력을 발휘해 해밀턴의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래, 방금 한 말 잘 기억해둬. 사람들 앞에서 그대로 증언해야 할 테니.”

플랑드나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대신, 잘 증언만 해주면, 너는 살려줄게. 화형대에 올라가는 건 쥬웰 혼자만이 될 거야.”

해밀턴은 그 말에 고개를 떨구었다.

이후, 플랑드나는 비밀 고문실을 나와 성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선언했다.

“종교 재판을 열겠어요.”

“……!”

성전의 사람들이 술렁였다.

플랑드나가 말한 종교 재판이 누구를 지목하는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고인은 쥬웰이에요.”

플랑드나는 짙게 미소 지었다.

“죄목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죄. 화형을 선고하겠어요.”

* * *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

쥬웰에게 종교 재판이 벌어진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것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말도 안 돼! 무슨, 그런 헛소리를!”

“에메랄드 공작가 이 썩은 놈들!”

백성들은 당장에라도 봉기라도 일으킬 분위기였다.

하지만 곧 찬물을 끼얹는 일이 일어났는데,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제시한 ‘증거’ 때문이었다.

“가넷가의 해밀턴 공자가 증언했다는군. 쥬웰 님이 악마의 종자가 맞는다고.”

“뭐? 말도 안 돼!”

그 소식에 수도가 또다시 뒤집혔다.

해밀턴은 쥬웰의 최측근이다.

그런 이의 증언이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래도 많은 백성은 여전히 쥬웰을 믿었다.

문제는 다이아 공작가와 에메랄드 공작가가 살포한 바람잡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쥬웰이 악마의 종자로 판명되기라도 했다는 듯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토른 공작께서도 쥬웰 님을 냉랭히 대했다고 하고 하던데.”

“어쩌면 쥬웰 님은 정말로 악마의 종자일 수도 있어.”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이들이 발끈해 외쳤다.

“이놈들! 닥쳐! 감히, 쥬웰 님께!”

그런 다툼이 수도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난장판이 벌어졌는데도, 쥬웰은 입을 다문 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죄를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종교 재판에 출석하지도 않았다.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고, 사람들은 그런 쥬웰의 침묵에 더더욱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어떤 반박의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게 의문을 자아냈던 것이다.

그런데 쥬웰이 마차를 타고 업무차 행정부로 향하던 길에 이변이 일어났다.

일단의 무리가 쥬웰의 마차를 막아선 것이다!

“무슨 일인가?”

“……막는 이들이 있습니다. 에메랄드 공작가의 성전기사단입니다.”

라이져가 딱딱히 굳은 얼굴로 답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성기사들이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죄인 쥬웰은 더는 피하지 말고, 당장 우리를 따라와 신께 죄를 고하라!”

“……!”

쥬웰이 종교 재판을 회피하자, 강제로 연행하기 가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이익, 감히.”

라이져가 시뻘게진 얼굴로 분노하였다.

“감히 가넷에 저런 실례를 범하다니. 당장 모조리 베어버리겠습니다.”

라이져는 은근히 불같은 성미가 있었다.

진짜로 성기사들의 목을 베려 검을 들고 일어서려는 순간.

쥬웰이 고개를 저었다.

“성기사를 해치는 건 신성 모독죄야.”

“하지만 소공작님! 저들이 감히!”

“라이져, 그대는 나를 믿나?”

라이져는 입을 우뚝 다물었다.

“당연히. 전 소공작님을 믿습니다.”

“어째서지? 모두가 날 의심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소공작님처럼 숭고한 분이 어둠에 영혼을 팔았다니. 믿을 이야기를 해야지요.”

라이져는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그때, 흑사병을 해결하실 때 전 똑똑히 봤습니다. 백성들을 위하는 소공작님의 숭고한 모습을요. 만약 소공작님이 악마면, 어떤 천사보다도 숭고한 악마일 겁니다.”

쥬웰은 새삼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꽤 오래전 일인데, 라이져의 인상에 남았던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러면 앞으로 있을 일에도 날 믿어주지 않겠나?”

“…….”

“날 믿고 절대로 경솔히 나서지 말아 주게.”

라이져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쥬웰이 무언가 위험한 일을 하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소공작님.”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네.”

말을 마친, 쥬웰은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마차를 에워싼 성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성기사들은 적대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회피할 것입니까? 당장, 성전에 출두해…….”

“건방지군.”

“……뭐라고요?”

“감히 내 앞에서 고개를 그토록 빳빳이 들고 있다니. 그대들은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나 보지?”

성기사들의 안색이 굳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놀랍게도 그녀의 경고에 굴하지 않았다.

여전히 예를 표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죄인에게 예를 피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지 않니, 쥬웰?”

나긋한 음성.

백조처럼 아름다운 얼굴.

플랑드나였다.

그녀는 한없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을 이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로 너를 찾아와서 참으로 유감이야. 지금도 믿기지 않는구나. 네가 어둠에 영혼을 팔았다니. 도대체 너 같은 애가 왜. 참으로 안타깝구나.”

그렇게 말하는 플랑드나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악의가 가득 일렁였다.

어떻게든 빨리 쥬웰을 화형대에 올리고 싶어, 늘 하던 표정 관리도 잘되지 않는 모습이라 쥬웰은 피식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죄인이라. 그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확정되기라도 한 듯한 말투군요.”

“이미 해밀턴 공자가 모두 자백했어.”

“그것만으로 날 죄인으로 취급한다고?”

쥬웰이 무표정하게 반문했다.

말도 낮추었다.

“제국의 재상이자, 군부 대신, 귀족원의 위원장이자, 의회의 최고 의장이며, 가넷의 소공작인 나를? 감히?”

“…….”

쥬웰이 말에 장내가 싸늘히 고요해졌다.

현재 그녀는 어마어마한 직위를 겸임하고 있다.

그녀가 지닌 직위를 설명하면 이러했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력을 한 손에 쥔 자.

제국 모든 귀족을 대표하며, 제국군의 통솔권을 움켜쥔 자.

그리고 차기 가넷의 왕.

자신들이 그런 어마어마한 이를 핍박하고 있다는 게 새삼스레 실감 난 것이다.

플랑드나도 쥬웰의 기세에 주춤하였다.

하지만 곧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허장성세야. 그때 정원에서 해밀턴이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걸 봤잖아.’

만약 해밀턴이 악마의 힘을 일으키는 걸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면 플랑드나도 이렇게 강하게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역풍이 어마어마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플랑드나는 확실한 진실을 알고 있다.

해밀턴이 어둠의 종자라면, 쥬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넷의 이름이 네 죄를 가려주지는 못할 거야. 네 죄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이니까.”

플랑드나가 그렇게 물러서지 않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플랑드나 성녀. 말 다 했소이까?”

라이져가 살벌한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쥬웰이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소공작님. 저자는 우리 가넷을 모욕했습니다. 이는 성녀라도 용서할 수 없는 죄. 목을 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라이져, 내가 뭐라고 말했지?”

라이져는 이를 악물었다.

아까 쥬웰은 자신을 믿고 경솔히 나서지 말아 달라고 하였다.

“네가 이러는 건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아.”

“……알겠습니다.”

쥬웰은 플랑드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방금 내게 한 이야기 책임질 수 있나, 플랑드나 성녀?”

“……!”

“가넷의 이름으로 묻는 거니, 신중히 답하도록.”

‘가넷의 이름으로 묻는다.’

이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플랑드나의 주장이 허위일 경우, 가넷의 이름으로 죄를 묻겠다는 것이다.

“감히 가넷을 허위로 모욕했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은 건 알고 있겠지? 가넷은 그대에게 진노할 거야.”

장내가 고요해졌다.

플랑드나는 입을 꾹 다물 뿐, 뭐라 답을 하지 못했다.

만약 가넷의 진노가 향하면, 성녀라는 직위도 플랑드나를 보호해 주지 못할 것이다.

‘이이…….’

쥬웰이 어둠의 종자라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가넷의 위용이 두려워 플랑드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쥬웰은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성녀가 아니라, 쥐새끼 같군.”

“……!”

“더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겠어. 그만 가지.”

쥬웰이 휙 등을 돌릴 때였다.

플랑드나는 번뜩 깨달음을 얻었다.

‘허세야!’

어둠의 종자가 맞으니, 저렇게 허세를 부리며, 그녀를 핍박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고.

플랑드나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만! 성전의 최고 추기경으로 명하니, 멈춰! 신의 이름으로 널 심판하겠다!”

최고 추기경.

성전의 이인자인 플랑드나의 공식 직위다.

“결국, 그렇게 나오겠다고?”

쥬웰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쥬웰의 싸늘한 시선에 플랑드나는 다시 심장이 덜컥하였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쥬웰. 너에게 ‘판별식’을 명하겠다. 네가 결백하면 받아들이도록.”

그 말에 장내가 웅성거렸다.

판별식.

어둠의 정체를 판별할 수 있는 에메랄드 공작가의 비장의 수법이다.문제는 이게 굉장히 끔찍한 방식이란 것이다.

플랑드나가 잔혹하게 웃으며 말했다.

“연옥(煉獄)의 성화(聖火)가 판별해 주겠지. 네가 어둠인지, 아닌지 말이야.”

라이져가 이를 바득 갈았다.

“따르지 마십시오.”

판별식.

타오르는 성화에 산 채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이 성화는 영적인 불이라, 만약 시험을 받는 자가 결백하면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어둠에 물든 자라면 영혼에 끔찍한 고통을 준다.

죄인을 정죄하는 연옥의 고통을 말이다.

“물론 아가씨께서는 성화에 들어간다고 해도 어떤 문제도 없겠지만, 아가씨께서 그런 의식을 치를 필요는 없습니다.”

결백하면 아무런 문제 없다지만, 그래도 산 채로 타오르는 불에 걸어 들어가야 하는 일이다.

끔찍하고 두려운 일.

따라서, 이 판별식은 어둠의 종자인 게 확실히 의심되는 경우에만 치러진다.

하지만.

“좋아, 따르도록 하지.”

“……!”

그 선선한 승낙에 플랑드나의 눈이 커졌다.

“뭐, 뭐라고?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반응.

당연했다.

어둠의 존재면, 성화가 주는 고통을 절대로 견딜 수 없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거부하리라 생각했는데?

‘뭐지? 설마?’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린 플랑드나의 눈이 커졌다.

그런 플랑드나에게 쥬웰이 짙게 미소를 지었다.

덫에 걸린 먹이를 바라보는 잔혹한 미소였다.

“대신, 내가 판별식에서 어둠의 종자가 아니란 게 확인되면 그대는 각오해야 할 거야.”

섬뜩한 선언이 내려앉았다.

“감히 가넷을 모욕한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

* * *

쥬웰이 판별식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단번에 수도를 뜨겁게 달구었다.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아니, 부정적인 반응을 넘어 격렬히 분노하였다.

“쥬웰 성녀님이 왜 그런 흉악한 판별식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 빌어먹을 에메랄드 공작가 놈들!”

쥬웰을 따르던 백성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이 판별식만 끝나 봐!”

“쥬웰 성녀님을 음해한 이들 모두 가만히 두지 않겠어!”

그런 백성들의 반응에 이 일을 주도한 플랑드나는 얼굴을 굳혔다.

만약 판별식에서 쥬웰이 무죄하다고 밝혀지면, 가넷이 나서기 전에 백성들이 봉기할 판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해밀턴이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플랑드나는 억지로 불안감을 잠재웠다.

그때, 뜻밖의 손님이 그녀를 찾아왔다.

장미가 핀 듯 고혹적인 미녀, 매리엇이었다.

“오랜만이에요, 플랑드나 성녀.”

“……매리엇 공작 전하.”

이전과 다르게 서로 딱딱한 어투에서 알 수 있듯, 둘의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매리엇이 눈매를 찌푸리며 답했다.

“딱히 반갑지는 않을 테니, 용건만 말하겠어요. 쥬웰이 어둠이라고 확신하였으니, 이런 판별식을 거행한 거겠죠?”

“……그렇죠.”

플랑드나는 한 발짝 늦게 답했다.

매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판별식이 끝난 후, 쥬웰을 제게 넘겨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쥬웰, 그년은 내가 죽이겠다고.”

“……!”

매리엇의 눈동자가 희번덕 빛났다.

“그년에게 유감이 있는 건 언니만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년을 죽이는 건 내 손으로 직접 해야겠어.”

플랑드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나 했더니.

“그건 곤란하군요.”

“뭐?”

“쥬웰은 성전의 규율대로 화형에 처하게 될 거예요.”

매리엇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플랑드나의 말은 핑계일 뿐, 결국 쥬웰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다는 것이다.

“1억 골드를 뜯어갔으면서, 고작 이런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아?”

“이상한 말씀이군요. 누가 들으면, 1억 골드를 우리 성전이 강탈한 것으로 알겠어요. 그저 계약에 따른 배상금이었을 뿐…….”

“닥쳐.”

매리엇이 플랑드나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플랑드나를 노려보았다.

“잊지 마. 언니는 나, 매리엇을 적으로 돌렸다는 것을.”

“…….”

플랑드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걸 두려워해야 하니?”

“……!”

“너야말로 잊지 마. 내가 성녀이자, 차기 법왕이 될 이라는 것을.”

매리엇은 바득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휙 등을 돌려 사라졌다.

홀로 남게 된 플랑드나는 피로한 한숨을 내쉬었다.

‘매리엇과 척을 지게 된 건 의도한 바가 아니었는데.’

그때, 밖에서 거센 외침이 들렸다.

쥬웰을 지지하는 백성들의 외침이었다.

왜일까? 백성들의 외침을 들은 플랑드나는 갑자기 한 가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자신의 옆에 누구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넷은 물론, 사파이어와도, 다이아와도 척을 졌다.

만약 그녀가 곤경에 처하면, 그 누구도 플랑드나를 지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 * *

드디어 판별식 날이 다가왔다.

성전 앞에 광장에 커다란 화형대가 설치되었다.

악을 감별하는 연옥의 성화가 피어오르는 화형대였다.

이제 쥬웰은 저 화형대에 올라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정말 괜찮은 거냐?”

토른 공작이 마지막까지 안심이 되지 않은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어둠이 저 성화에 들어가면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만약 이 할아비에게 숨기는 게 있다면…….”

“할아버지.”

쥬웰은 싱긋 웃으며 말을 끊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전 두려운 게 없으니까.”

그 태연한 대답에 토른 공작은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한편, 플랑드나는 쥬웰이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자 안색이 굳었다.

‘뭐지? 정말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어. 해밀턴 공자가 어둠의 힘을 쓰는 걸 직접 목격했잖아.’

쥬웰의 저런 모습은 허세일 뿐이다.

“언제 시작하는 건가요? 기다리기 지루한데.”

하지만 도리어 쥬웰이 재촉하자, 플랑드나는 이를 악물었다.

“……연옥의 성화를 붙이도록!”

화르륵!

성전의 대신관들이 정해진 기도문을 외우자, 푸른 성화가 화형대에 피어올랐다.

장내에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불길이 상상 이상으로 거센 것이다.

만약 어둠의 존재가 들어갈 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리라.

“판별식을 거행할 테니, 당장 들어가세요.”

“그전에.”

쥬웰은 플랑드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판별식에서 제가 결백하다고 밝혀진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

플랑드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일을 벌였는데 쥬웰이 결백하다고 밝혀지면, 플랑드나는 끝장이다.

쥬웰은 피식 비웃듯 웃고는 천천히 화형대를 향해 걸어갔다.

걸음을 옮기자,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닿았다.

그녀가 어둠의 존재인지라 성화의 열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때, 화형대 건너편에서 유스넨의 시선이 보였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쥬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 괜찮은 건지, 미칠 듯 걱정하며 말이다.

‘흰 강아지에게는 거짓말해서 미안하네.’

쥬웰은 유스넨에게 이 판별식에서 고통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둘러대었다.

그러지 않으면 말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둠의 존재인 이상, 연옥의 불길에 닿으면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되어 있다.

‘그래도 상관은 없지.’

쥬웰은 무심하게 생각했다.

고통을 피할 방법이 없음에도, 이 계획을 진행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딴 고통 따위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헨나에서 받은 600년의 고통 동안, 그녀는 이것 이상의 고통을 수도 없이 경험했다.

‘연옥의 불길이야…… 게헨나에서는 가벼운 축에 속하는 고통이니까.’

그러니 이런 뜨거움 따위 얼마든지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다.

쥬웰은 유스넨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은 괜찮다는 듯. 정말 전혀 아프지 않다는 듯.

그 순간, 유스넨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쥬웰은 유스넨이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챘음을 직감했다.

전혀 티를 내지 않았는데, 귀신같이 알아차린 것이다.

‘훼방하면 곤란한데.’

쥬웰은 곤란한 얼굴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연옥의 불길에 발을 들이는 순간, 유스넨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유스넨은 원래 쥬웰에게 나서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목숨보다 아끼는 그녀가 지옥의 불길에 고통받게 된다는 사실에 이성이 마비되어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파아아앗!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오더니 쥬웰의 몸을 감싼 것이다.

‘이건?’

쥬웰은 놀란 얼굴을 하였다.

신이 내린 성력이었다!

환한 빛이 그녀를 보호하듯 감쌌고, 마치 물이 갈라지듯 연옥의 성화가 그녀의 양옆으로 갈라졌다.

마치 신이 그녀를 직접 보호하는 듯한 그 장엄한 모습에 장내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오오!”

“신의 기적이 쥬웰 성녀님께 임하셨어!”

쥬웰은 잠시 얼떨떨하게 자신을 감싼 빛을 바라보았다.

신의 이런 개입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다.

빙긋 플랑드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로써 제가 어둠의 존재인지는 판별된 것 같은데요? 안 그런가요?”

플랑드나의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발악하듯 외쳤다.

“그,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어둠의 존재임을 증언한 이가……!”

“혹시 이 흑마도사를 말하는 건가요?”

쥬웰이 손짓하자, 놀라운 이가 나타났다.

매리엇과 플랑드나에게 쥬웰이 어둠임을 밀고한 라이든이었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하였나? 내가 어둠의 존재라고?”

라이든은 완벽히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바짝 고개를 숙였다.

“그, 그렇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왜 그랬지?”

“도, 돈이 탐 나서 그랬습니다. 성녀님이 어둠의 존재라고 증언하면 다이아 공작가와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막대한 보상금을 준다고 하여서.”

장내에 경악이 퍼졌다.

물론 이건 쥬웰이 꾸민 거짓말이다.

라이든이 둘에게 쥬웰의 정체를 밀고한 후, 쥬웰은 곧바로 라이든을 잡아 심령을 제압했다.

라이든은 완전히 쥬웰의 꼭두각시가 된 상태로 겁에 질려 거짓 증언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그…… 아, 아니야! 그, 그래! 난 네 수족인 해밀턴 공자가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걸 봤어! 분명 너에게 힘을 내려받은 것으로……!”

“해밀턴 오라버니가 어둠의 힘을 사용했다고요? 그것참 이상하군요.”

쥬웰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또 놀라운 인물이 밧줄에 묶여 나타났다.

플랑드나의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호위 기사였다.

“그대가 플랑드나 성녀의 명을 받아 해밀턴 오라버니를 압송했다고 했지. 정말 해밀턴 오라버니가 어둠의 힘을 사용한 게 맞는가?”

당시 해밀턴이 어둠의 힘을 사용할 때 자리에 있던 건 플랑드나만이 아니었다.

플랑드나를 시중들던 하인들과 호위 기사도 함께 있었다.

“아, 아니요. 전 본 적이 없습니다.”

“뭐?”

플랑드나가 눈을 부릅떴다.

“거짓을……!”

“거짓이 아닙니다! 정말 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뿐 아니라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해밀턴 공자님이 어둠의 힘을 사용한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진실이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이 중 해밀턴이 어둠의 힘을 쓰는 걸 본 건 오로지 플랑드나 혼자였다.

‘내가 수작을 부렸지. 플랑드나 언니 혼자 해밀턴 오라버니가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환각’을 보도록.’

즉, 당시 해밀턴은 어둠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플랑드나 혼자 ‘환각’을 본 것이다.

‘이, 이럴 수가.’

털썩.

모든 게 쥬웰의 음모였음을 깨달은 플랑드나는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플랑드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차갑기 그지없었다.

누구도 그녀를 감싸지 않았다.

“이런. 절 어둠으로 모함한 것으로 모자라, 감히 가넷 가문의 적통을 어둠으로 모함해 고문까지 하다니.”

쥬웰이 차갑게 말했다.

“이래서야 어둠이 누구인지 모를 지경이군요.”

“……!”

“제가 생각하기엔 플랑드나 성녀야말로 어둠에 영혼을 판 것이 아닌지 판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군요.”

플랑드나는 눈을 번뜩 떴다.

지금 쥬웰은 저 화형대 위에 플랑드나를 올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아, 안 돼!’

어둠의 존재인 건 플랑드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이, 이 판별식을 선고할 권한을 지닌 건 우리 에메랄드 공작가뿐이에요!”

“아니, 그렇지 않소.”

그때, 묵묵히 얼굴을 가라앉히고 있던 유스넨이 나섰다.

그는 터질 듯한 분노를 흘리며 플랑드나를 노려보았다.

“우리 페리도트 가문도 저 판별식을 선고할 수 있소. 나 광휘의 대공으로 명하니, 플랑드나 당신에게 저 판별식을 선고하겠소. 그대가 결백하다면 저 화형대 위에 서시오.”

“……!”

“방금 쥬웰 성녀가 했던 것처럼 말이오.”

플랑드나의 얼굴이 파래졌다.

그녀의 눈에 괴물처럼 넘실거리는 푸른 불길이 들어왔다.

이렇게 거리가 먼 데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하, 할 수 없어요.”

플랑드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두려움에 눈물과 콧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유스넨이 차가운 얼굴로 그런 플랑드나에게 다가왔다.

플랑드나가 말을 듣지 않으니, 직접 그녀를 화형대 위에 올리려는 것이다.

“머, 멈추십시오!”

성전의 성기사들 및 남편 죠제프가 그런 플랑드나를 지키려고 나섰지만.

“지금 어둠의 존재를 옹호하는 건가?”

“크악!”

유스넨의 몸에서 성투기가 발현되었고, 성기사들은 자신을 짓누르는 강렬한 기세에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기, 기다리시오! 플랑드나 성녀님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죠제프가 발악하듯 외쳤다.

“그거야 화형대에 오르면 밝혀지겠지.”

“……!”

“만약 플랑드나 성녀가 어둠으로 밝혀지면 성전기사단장 죠제프, 그대의 죄도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오. 진실을 외면하고 눈과 귀를 막고 있었으니.”

거기까지 이야기한 유스넨은 강제력을 행사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플랑드나를 비롯한 원수들에게 강한 원한을 지니고 있는 건 유스넨도 마찬가지이다.

에스텔레를 지옥에 떨어뜨렸으니까.

즉, 이 순간은 쥬웰뿐 아니라 유스넨도 간절히 바라던 순간이었다.

파앗!

더러운 플랑드나의 몸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아 천사의 능력을 발현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플랑드나의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고,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하, 하지 마!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제발!”

그리고 플랑드나가 불길에 들어가는 순간.

“끄아아아아아아악!”

마치 진짜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뜨거워! 제발! 살려줘! 으아아아아악!”

그뿐이 아니었다.

플랑드나의 몸에서 어둠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악마에게 내려받은 성력이었다.

흉측한 성력이 밖으로 흘러나와 성력에 불탔다.

이로써 확실해진 것이다.

‘플랑드나 성녀가 어둠의 존재였다니.’

장내의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플랑드나는 불길 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끄, 끄아아아아아아악!”

판별식의 성화는 실제로 몸을 태우진 않는다.

하지만 타 죽이는 것보다 더욱 잔인하다.

만약 저게 진짜 불이면 기껏해야 고통은 몇 분 안에 끝날 테니까.

죽지 않고, 계속해서 몸이 타고 녹아내리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마치 게헨나에서 고통받는 죄인들처럼.

특히 이 판별식은 어둠의 존재에게 내리는 징벌의 의미도 있어서 어둠의 존재임이 밝혀져도 판별을 끝내지 않고 최대한 오래 끄는 게 관례다.

“제, 제발……. 아아아아악! 아악! 뜨거워! 살려줘! 아아아악!”

그 처절한 비명에 쥬웰은 전율했다.

‘드디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 장면을 고대해 왔는가?

‘아직 끝이 아니야.’

이건 시작일 뿐이다.

쥬웰은 불길 속에서 뒹구는 플랑드나를 보며 유스넨에게 말했다.

“죄인, 플랑드나는 어둠에 영혼을 판바. 가넷의 소공작이자 제국의 재상으로서 광휘의 대공께 청합니다. 죄인에 대한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여섯 공작가는 치외 법권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예외다.

어둠에 영혼을 팔았으니, 광휘의 대공이자 대법관인 유스넨에게 판결 권한이 있다.

“대법관의 권한으로 선고하오니, 화형입니다. 죄인, 플랑드나는 악마의 주구로서 화형대에 올라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유스넨이 차갑게 답했다.

진짜 불에 타 죽을 운명이 된 것이다.

‘그전에 충분히 고통을 받게 해야지.’

쥬웰은 플랑드나에게 징벌을 더 추가하기로 하였다.

“그렇군요. 다만, 하나 자비를 베풀 수는 없을까요?”

“자비라면?”

“죄인, 플랑드나는 현재 임신 중인 몸. 아이는 죄가 없으니, 출산 이후로 화형 집행을 미루길 청합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감탄한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쥬웰은 순수한 의도로 이런 청을 한 게 아니었다.

“대신…… 형을 집행하기 전까지…… 죄인에게 지금까지의 죄를 참회하게 하는 게 어떨까요?”

“……!”

플랑드나가 불길 속에서 고통받는 와중에 눈을 크게 떴다.

쥬웰은 그런 언니에게 입꼬리를 비틀어 보였다.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속죄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중에 태어날 아이도 어미의 죄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한없이 굴욕적이며 잔혹한 처벌이다.

이미 화형이 선고된 죄인인 플랑드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대할까?

더구나 백성들은 플랑드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플랑드나는 화형대에 오르기 전,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진 핍박과 굴욕을 당하게 되리라.

지금 로튼 백작이 노예가 되어 당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혹시 에메랄드 공작가에서는 이 판결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나요?”

“…….”

당연히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성전의 이인자였던 플랑드나 성녀가 사실은 악마의 주구였다니. 참으로 통탄한 일이네요.”

그 말에 성전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썩은 성전인데, 이런 일이 밝혀졌으니, 성전의 위상은 다시금 폭삭 내려앉게 되었다.

지나치게 주저앉아 누군가 툭 밀면 산산이 무너질지도 모를 정도로.

‘다음은 웰링턴 공작이지.’

쥬웰은 성전을 무너뜨리며, 웰링턴 공작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그 전에.’

쥬웰은 싱긋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매리엇을 향해서였다.

“계속 조용하시네요. 하실 말씀이 있을 텐데요.”

매리엇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가 어둠이라는 소문을 잔뜩 퍼뜨렸던데.”

쥬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감히, 그딴 일을 해? 다이아 따위가?”

“……!”

그 거친 언사에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매리엇은 발끈하기는커녕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완전히 외통수에 몰린 것이다.

“나, 난…….”

쥬웰은 팔짱을 꼈다.

“어떻게 할 거지?”

“……무슨?”

“거짓 정보를 퍼뜨려 가넷과 차기 공작인 내 명예를 모욕했으며, 악마의 주구인 플랑드나와 손을 잡고 본가의 적통인 해밀턴 공자를 고문까지 했지. 이 죄를 어떻게 갚을 거냐는 말이다.”

해밀턴은 고문한 건 플랑드나가 벌인 일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매리엇은 만찬 테이블에 올라갔다.

쥬웰이 마음대로 요리할 제물이 되어.

“본가와 차기 공작인 내 명예, 또한 해밀턴 공자가 받은 고통을 합쳐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 2억 골드를 배상하도록.”

“……!”

매리엇의 눈이 커졌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이전에 절반인 1억 골드를 배상할 때 다이아 가문의 주춧돌이 휘청이지 않았는가?

2억 골드를 뱉으면 아무리 다이아라도 파산이다.

매리엇은 쥬웰이 다이아를 파산시키려고 이런 황당한 금액을 제시했음을 깨달았다.

“그, 그건…….”

“가넷의 명예가 2억 골드만 못하다고 하는 건가?”

매리엇의 안색이 시체처럼 변했다.

감당할 수 없는 금액.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그대가 무언가 오해하여 그런 정보를 퍼뜨렸을 거로 생각해 자비를 베풀고 있는 거야. 아니면.”

쥬웰은 싱긋 웃었다.

“혹시 그대도 플랑드나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건 아니겠지?”

매리엇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2억 골드를 배상하지 않으면, 저 판별대 위에 올리겠다는 협박이었다.

매리엇은 두려운 눈빛으로 화형대 위를 바라보았다.

지금도 플랑드나는 불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받고 있다.

완전히 목이 쉬어서 비명은 지르지 못하고 있었지만, 몸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매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 받아들이겠습니다.”

일단은 지금의 위기를 모면해야 했다.

쥬웰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배상하기로 했다 하여 매리엇이 순순히 2억 골드를 내놓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갚지 않으려고 하리라.

하지만 상관없다.

강제로 뜯어낼 방법이 있으니까.

‘돈을 갚지 않는 것도 상대가 만만할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지.’

결국, 매리엇은 가진 모든 걸 다 잃고 거지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다.

‘기대되네. 저 매리엇이 거지꼴이 되는 모습이라.’

두근, 두근.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그때, 유스넨이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움켜쥐었다.

“대공.”

“……소공작.”

유스넨의 눈은 끓듯 타오르고 있었다.

“……걱정했습니다.”

혹시나 판별식에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고통받을까, 미칠 듯 걱정했던 마음이 느껴져 쥬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유스넨은 그저 꼬옥 강하게 손을 움켜쥐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런데 그런 둘을 방해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크흠.”

토른 공작이었다.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쥬웰의 손을 잡고 있는 유스넨의 손을 흘겨보았다.

물론, 유스넨은 그 시선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더욱 꼬옥 움켜잡았다.

토른 공작은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내가 나서서 한마디 해도 되겠냐?”

“네, 가주님.”

토른 공작은 단상에 올랐다.

“본 가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바. 차후 누구도 본가와 소공작을 향해 이런 발칙한 일을 저지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나 토른은 이곳에서 하나의 선언을 하겠다.”

강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승계 기간을 축약하여, 지금 이 순간 쥬웰 소공작에게 공작 위를 계승하겠다.”

“……!”

토른 공작의 따뜻한 시선이 쥬웰에게 향했다.

“앞으로 가넷의 주인은 쥬웰, 바로 너다.”

* * *

판별식이 끝났다.

많은 것이 변하였다. 쥬웰이 가넷 공작이 되었다. 플랑드나는 완전히 몰락했으며, 에메랄드 공작가의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하였다.

또한, 다이아 공작가는 2억 골드를 배상할 처지가 되어 파산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사파이어 공작가 또한 가주 록슬론이 마왕 옵시디언에게 사망한 이후, 흔들리고 있으니 여섯 공작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복수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어.’

쥬웰은 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원수들을 바닥에 몰락시킨 후, 최대한 처참한 굴욕과 고통을 준 후에 목숨을 거둘 계획이다.

‘일단 로든 왕국에 다녀와야지. 수명을 늘리고, 다른 원수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하니까.’

오늘은 편안한 마음으로 쉬려고 눈을 감았다.

‘흰 강아지의 성력을 받았으니, 푹 잘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파앗! 깡! 끄아아악!

창밖에서 소음과 비명이 울린 것이다.

‘뭐지?’

쥬웰은 퍼뜩 침대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가넷가를 공격했다!

‘누가?’

곧 다급히 라이져 경이 들어왔다.

“큰일입니다, 공작 전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 누가?”

“로튼 전 백작입니다!”

쥬웰의 눈이 커졌다.

“몰락한 잔당들과 힘을 합쳐 병사를 일으켰습니다.”

로튼 전 백작이 몰락하며 함께 몰락한 측근들이 있었다.

“상황은? 반란 규모가 큰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순조롭게 진압 중입니다.”

쥬웰이 공작이 되자 참지 못하고 최후의 발악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 같다.

“혹시 모르니, 지하 비밀 통로로 은신해 계십시오.”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넷의 주인으로서 그럴 수는 없지. 할아버지나 안전하게 모시도록.”

“전하.”

“내 말에 따라. 그나저나 그대에게 당부할 말이 있네.”

“……무엇입니까?”

쥬웰은 뜻밖의 명을 내렸다.

“로튼 전 백작은 사살하지 말게. 사로잡지도 말고.”

“네?”

“도주하도록 놔두란 말이야.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라이져 경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으나, 곧 고개를 숙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면 나가보게.”

혼자가 된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반란을 일으켜? 이러면, 죽일 수밖에 없잖아.’

그녀가 원수들을 곧바로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는 밑바닥에서 최대한 더욱 끔찍한 굴욕과 고통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제길, 제대로 고통도 주지 못했는데.’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헉! 허억! 크아악!”

가넷가의 저택은 수도 외곽에 자리해 있는데, 저택 외곽을 산이 성벽처럼 감싸고 있다.

로튼은 비참한 몰골로 두려움에 질려 그 산을 헤매며 도주하고 있었다.

‘제길! 제기랄!’

마지막 잔당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건만, 실패하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운명은 죽음밖에 없었다.

‘아니야. 이곳만 벗어나면!’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추하게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저 건너편에서 시커먼 흑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나타났다.

“로튼.”

“……!”

로튼은 주춤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쥬웰이 나타난 것이다.

당연히 쥬웰을 따르는 병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로튼은 허겁지겁 주변을 살폈다가 눈을 크게 떴다.

호위 병력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혼자 온 거냐?”

“그래.”

쥬웰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고, 로튼은 환한 얼굴을 하였다.

그는 허리 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쥬웰만 죽이면, 모든 걸 제자리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죽일 년. 감히 날 이 꼴로 만들었겠다. 죽여주마!”

로튼의 눈동자가 흉악하게 빛났다.

쥬웰은 그런 로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에스텔레를 기억하나?”

“……뭐?”

로튼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기억하지. 주제도 모르던 건방진 년.”

“……그날의 일을 후회하지는 않나?”

“후회?”

로튼은 정말 난데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후회하는 게 있긴 하지. 그년을 더 고통스럽게 악마에게 제물로 바치지 않았다는 게. 그랬다면, 내게 더욱 강력한 악마의 축복이 임했을 텐데.”

“…….”

“그런데 그년에 대해선 갑자기 왜 묻는 거지? 곧 지옥으로 따라갈 거여서 묻는 건가?”

로튼의 눈동자가 잔혹하게 빛났다.

“어쨌든 편하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말아라. 감히 겁도 없이 혼자 나타나다니. 넌 에스텔레년이 죽었던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쥬웰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로튼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커억!”

그리고 갑자기 끔찍한 어둠이 튀어 올라 로튼의 팔다리를 포박하였다.

“이, 이게 무슨?!”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로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건 어둠의 힘! 쥬, 쥬웰 넌 정말 어둠에 영혼을 판 것이냐?”

“……그래.”

이번엔 쥬웰이 로튼에게 다가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너희에게 원한을 갚으려면.”

“……뭐?”

“어쨌든 오랜만이군요.”

쥬웰이 로튼의 코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과거처럼. 부드럽게.

“이래도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나요, 스승님?”

로튼의 몸이 벼락에 맞은 듯 떨렸다.

‘스승님.’

그 호칭에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그를 따랐던 제자. 하지만 추악한 탐욕으로 능욕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앙심을 품어 지옥에 떨어뜨린 이.

“서, 설마…… 너, 너는……?”

“맞아요.”

쥬웰이 속삭였다.

“내가 에스텔레야.”

“……!”

“지옥에서 돌아왔어. 너희에게 다 갚아주기 위해.”

“마, 말도 안 돼……. 그, 그럴 리가!”

하지만 그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쥬웰, 아니, 에스텔레가 단도를 들어 로튼의 허벅지를 찍어버린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악!”

로튼이 고통에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아파?”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고작 이런 게?”

그녀는 손을 뻗어 로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가 너희 때문에 받았던 고통과 비교하면 1억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 가벼운 고통인데?”

“끄, 끄으…….”

“겨우 이런 게 고통스럽냐고? 응?”

쥬웰이 눈이 희번덕 뒤집혔다.

이번엔 돌이었다.

바닥에 뒹굴던 돌을 들어 그대로 발을 내리찍었다.

발등의 뼈가 으스러졌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널 위해 준비한 게 아직 많이 남아 있었는데, 왜 이런 반란을 일으켰어?”

그녀는 로튼을 노예로 만든 후, 목숨을 거두기 전까지 계속해서 고통과 굴욕을 줄 계획이었다.

그런데 반란을 일으켜 그 계획이 모두 무산되었다.

“이러면 내가 널 죽일 수밖에 없잖아. 응?”

쥬웰이 광기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했냐고. 응? 아직, 너에게 제대로 된 고통을 주지도 못했는데.”

쥬웰의 눈동자의 광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사, 살려…….”

로튼은 그 광기에 잠식되어 공포에 덜덜 떨었다.

“살고 싶어?”

쥬웰은 웃었다.

잔혹한 미소였다.

“그전에 물을게. 나에게 저질렀던 일. 단 한 순간이라도 후회한 적이 있어?”

로튼은 대답하지 못했다.

전혀 그랬던 적이 없다.

쥬웰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 다시 돌을 내리찍었다. 이번엔 반대편 발등을 향해서였다.

“끄아아아아악!”

재차 가해지는 고통에 로튼은 다시금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로튼은 고통과 공포에 이성을 잃고 허겁지겁 빌었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발……. 이렇게 비니…….”

쥬웰은 로튼의 추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있잖아. 네가 어리석은 반란을 일으켜서 난 이 자리에서 널 죽일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래도 하나, 널 위해 마련해 둔 선물이 남아 있어. 뭔지 알아?”

로튼은 두려운 눈길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쥬웰이 딱, 손가락을 튕기자 놀라운 이가 나타났다.

“끄, 끄윽……. 아, 아버지.”

“……!”

로튼이 아끼던 아들, 휘란드였다.

휘란드가 어둠에 사로잡힌 채 나타났다.

“휘, 휘란드는 네게 지은 죄가 없어!”

아무리 악인이라도 핏줄은 소중한 걸까?

로튼은 휘란드를 감쌌다.

“그렇지. 그런데 난 무슨 죄가 있어서 네게 그런 일을 당해야 했나?”

“……!”

쥬웰은 무심히 말하였다.

“내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네 아들인 휘란드 역시 그런 죽임을 당한다고 해서 할 말은 없겠지.”

“이, 이……! 휘란드는 살려줘!”

로튼은 발악했다.

쥬웰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정말, 휘란드를 살리고 싶나? 기회를 주지.”

“……어, 어떤?”

“선택해. 너와 휘란드의 목숨. 둘 중 하나를.”

로튼의 눈이 커졌다.

“네가 휘란드를 대신해 죽겠다면 휘란드는 살려주지. 반대로, 휘란드를 죽게 하면 네 목숨을 살려주겠어. 그러니 선택해.”

로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쥬웰은 악마의 선택을 하게 한 것이다.

가장 아끼는 아들과 자신의 목숨 중 하나를.

‘그냥 단순히 고문해 죽이는 건 싱거우니까.’

처음부터 쥬웰은 휘란드를 이런 용도로 이용할 계획이었다.

쥬웰은 원수들이 정신적으로도 완벽하게 무너지길 바라니까.

“이, 이…….”

로튼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자, 얼른. 대답하지 않으면, 그냥 네가 죽는 것으로 하겠어.”

쥬웰의 손이 천천히 로튼의 심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로튼의 가슴에 닿기 직전.

로튼이 비참하게 말하였다.

“휘, 휘란드를 죽이고 나, 날 살려주십시오.”

쥬웰은 가만히 로튼을 바라보았다.

“아, 아버지!”

“닥쳐라!”

휘란드가 간절히 외쳤지만, 로튼은 그녀가 바랐던 대로 추레하게 짝이 없는 몰골로 목숨을 구걸했다.

“부, 부탁입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놈을 죽여도 좋고, 어떤 짓이든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쥬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장난이야.”

“……네?”

“휘란드의 목숨을 바친다고 내가 널 살려줄 리가 없잖아?”

쥬웰은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던 휘란드의 모습이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모두 환각이었던 것이다.

로튼을 비참하게 조롱하기 위한.

“아……. 아…….”

로튼은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였다.

충격에 완전히 무너져내린 모습이었다.

“아들을 버릴 만큼 소중한 목숨인데……. 애석하게 되었어. 하나만 더 물을게. 그때 있었던 다른 원수가 누구야?”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다.

로튼은 금제에 걸려 있니까.

쥬웰이 손이 다시 움직였고, 로튼은 다시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어서,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해봐.”

로튼의 눈동자가 고통과 공포에 미친 듯 흔들렸다.

“네가 금제를 이기고 대답하면, 내가 고통을 줄여줄지도 모르니까.”

극한의 고통을 받으면 정신적 충격에 금제가 풀릴지도 모른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지금이 로튼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니까.

금제를 풀려는 건 핑계.

최후의 순간이니, 쥬웰은 로튼에게 최고의 고통을 주기를 바랐다.

자신이 받았던 고통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끔찍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 * *

끝났다.

쥬웰은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물론 전신이 완전히 피에 물들어 있었고, 앞에는 목숨을 잃은 로튼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하.”

쥬웰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중간부터 이성을 잃어, 어떻게 고통을 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딴 놈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어야 했던 자신이 가련했다.

“하, 하.”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 이…….”

휘란드였다.

아버지를 따라온 건지, 어느새 나타나 저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아버지가 처참하게 죽는 걸 목격한 그가 핏발이 선 눈으로 쥬웰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휙 등을 돌려 도주했다.

‘쫓아가 죽일까?’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번 반란으로 로튼 일파는 완전히 무너졌다.

휘란드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힘을 키울 수도 있겠지만, 그때 난 이미 사라지고 없을 테니.’

무엇보다 맥이 풀려 손가락 하나 까닥할 기운이 없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키는데, 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로튼의 시체에서 갑자기 투명한 빛이 번뜩였던 것이다.

‘이건?’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금제가 풀렸어?’

아까 로튼이 다른 원수의 정체를 말하려고 할 때마다 제약했던 금제와 동일한 느낌의 기운이었다.

‘목숨을 매개로 묶인 연계 금제인 건가? 원수가 한 명씩 죽을 때마다 다른 원수에게 걸린 금제의 기운이 약해지는?’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정확한 건 타란툴라를 잡으면 알 수 있겠지. 이제 바로 갈 거니까.’

이를 악물며 걸음을 옮기는데, 앞에 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유스넨이었다.

“……누나.”

그가 참혹한 눈빛으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쥬웰은 잠시 그를 보다가 외면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

와락.

유스넨이 강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쥬웰이 그를 밀치려는 순간,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제발, 제발……. 잠시만 허락해 주십시오.”

“…….”

“오늘만은 당신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왜일까?

그 음성을 듣는데, 쥬웰의 눈동자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스넨은 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쥬웰도 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시리도록 아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