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 처형식 (1)
이날 있었던 일은 제국을 뒤흔들었다.
유스넨은 그녀가 바란 대로 에스텔레의 유해에 손을 쓴 게 자신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마왕의 손에 의해 에스텔레의 유해가 불에 탔다고 여기게 되었다.
“새로운 마왕이 출현했다니?”
“타란툴라를 능가하는 마왕이래.”
사람들은 새로운 마왕의 출현에 겁에 질렸다.
하지만 새로운 마왕의 출현은 여섯 공작가에 일어난 여파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쥬웰이 의도한 대로 어마어마한 충격이 온 제국, 정확히는 여섯 공작가를 강타했다.
첫째, 검왕 록슬론이 사망했다.
가주가 죽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주의 최정예 기사단인 청염 기사단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고 어마어마한 충격에 휘말렸다.
더욱 문제는 다음 가주가 될 이가 마땅치 않았다는 건데, 원래 후계인 라디트 때문이었다.
라디트는 오른손을 잃었고 아직 재활을 해내지 못했다.
더구나 이번 성배 사건 때 알 수 없는 이유로 커다란 부상을 입어 거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라디트 백작은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다친 거지? 얼굴이 완전히 뭉개졌다고 하던데.”
“부상 정도가 심해 평생 일그러진 얼굴로 살아야 할 거라고.”
덕분에 사파이어 공작가는 커다란 혼란에 휩싸였다.
거기다 다이아 공작가는 에메랄드 공작가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었다.
무려 1억 골드였다.
처음 배상 금액을 들은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1억 골드? 1천만 골드가 아니라?”
1천만 골드만 해도 영지를 몇 개는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런데 1억 골드라니?
“맞는다고 해.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의뢰금으로 2천만 골드를 지급했고, 대신 위약금을 다섯 배로 설정했다는군.”
“허어?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그걸 정말 다 받아낸다고 하던가?”
“그렇다는군. 계약이니까. 그래서 다이아 공작가가 발칵 뒤집힌 모양이야.”
1억 골드는 나라 하나를 통째로 살 수도 있는 금액이다.
그러니 그런 금액을 내면 다이아 공작가라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상단 중 상당수를 파는 것은 물론, 가지고 있는 영지도 엄청나게 처분해야 한다는군. 이러다가 다이아 공작가가 뿌리째 흔들리겠어.”
그 말이 맞았다.
1억 골드는 다이아 공작가라도 주춧돌이 흔들릴 금액이었다.
또한, 매리엇에게 더욱 최악인 일이 일어났다.
쥬웰이 추가로 손을 쓴 것이다.
‘다이아 공작가의 지배 지분을 손에 넣었지.’
다이아 가문은 상인의 가문이다.
그러면, 다이아 가문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무엇일까?
바로 세 개의 은행이다.
다이아 공작가의 가주는 이 세 개 은행의 지분을 가짐으로 전체 상단의 지배력을 획득한다.
따라서, 이 은행들의 지분은 절대로 외부인이 획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1억 골드를 토해내고 여러 자산을 매각하면서 그 절대적인 지분 구조에 변동이 생겼고, 쥬웰은 그 틈을 노렸다.
다이아 공작가의 2인자인 다카펠을 이용해 은행들의 지분을 확보한 것이다.
지분 확보에 필요한 자금은 마리가 모은 500만 골드를 사용했다.
‘500만 골드를 다 쓸 필요도 없었지. 고작 100만 골드도 안 되는 지분으로 수억 골드 이상 되는 자산을 운용하다니.’
다이아 공작가의 은행과 상단의 지분은 복잡한 순환 출차 구조로 얽혀 있다.
최소한의 지분만으로 상단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는데, 쥬웰에게는 굉장히 다행인 일이었다.
핵심 지분만 확보하면 다이아 공작가 전체를 먹을 수 있는 것이니까.
쥬웰은 그 핵심 지분을 다카펠을 앞세워 구하였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 다이아 공작가의 두 번째 주주가 되었다.
즉, 다이아 공작가에 매리엇 다음의 권한을 지니게 된 것이다.
‘내가 얻은 이득은 그것만이 아니지.’
쥬웰은 차분히 생각을 이어갔다.
‘에메랄드 공작가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어.’
의외였다.
이번 일로 에메랄드 공작가는 1억 골드를 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1억 골드는 독이었다.
그것도 에메랄드 공작가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독.
일전에도 말했지만, 에메랄드 공작가의 힘은 ‘신성’이다.
그리고 신성의 위력은 가진 탐욕을 내려놓을수록 커진다.
그런데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던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빌미로 1억 골드를 뜯어낸다?
이제 누가 에메랄드 공작가를 ‘신성’하다 존중하겠는가?
에메랄드 공작가는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들이 가진 강점을 내려놓은 것이다.
무엇보다, 쥬웰은 계획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종교 개혁의 불씨를 댕겨야겠어. 이번 일은 충분한 명분이 되겠지.’
종교 개혁과 함께 에메랄드 공작가는 완전히 산산이 분해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본 가장 큰 이득은 바로 이것이지.’
마침, 세바트찬이 들어왔다.
“아가씨,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성배 일은 참으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죄인, 로튼 백작입니다!”
가넷가의 법정에 들어가 앉아 있으니, 곧 놀라운 인물이 나타났다.
로튼 백작이었다.
그가 밧줄에 묶인 채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의도한 대로 흑마도사를 사주해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불태운 죄를 덮어쓴 것이다.
“나, 나는…… 이, 이건…….”
로튼 백작은 시체 같은 얼굴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였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 않는 듯했다.
당연했다.
그는 흑마도사들에게 이번 일을 의뢰할 때 나름대로 기밀을 유지했다. 특히, 물적 증거가 남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런데 이런 꼴이 되다니?
‘설마?’
로튼 백작은 법정에 무릎 꿇고 나서야 자신이 쥬웰의 음모에 당했음을 깨달았다.
‘십마 아낙스와 쥬웰, 저년이 한패였던 거야! 둘이 짜고서 날 함정에 빠트렸어!’
하지만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꼴 좋군.’
쥬웰은 차갑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비루한 처지가 되어 덜덜 떨고 있는 로튼 백작을 보니, 성배 일을 진행하며 겪었던 괴로움이 조금은 보상받는 것만 같았다.
‘그래, 난 바로 이 복수의 순간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거야. 복수를 위해서라면 내가 겪는 고통 따위는 아무 상관 없어.’
문지기가 외쳤다.
“토른 공작 전하이십니다!”
곧 재판을 주관할 토른 공작이 나타났다.
여섯 공작가는 치외 법권을 인정받아 죄를 지어도 가주가 처벌을 결정한다.
따라서 보통은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무려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불태운 죄이니까.
온 제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가넷이라도 이번 죄만큼은 절대로 가볍게 덮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토른 공작은 로튼 백작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왜?
로튼 백작의 죄가 끔찍해서?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다.
로튼 백작은 싸움에 진 패자이니까.
토른 공작은 오로지 승자의 편일 뿐, 패자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법정에서 자주 보는 것 같구나, 로튼.”
“아, 아버지.”
로튼 백작은 허겁지겁 바닥에 고개를 숙였다.
“억울합니다, 아버지! 저, 저는 전혀……!”
하지만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토른 공작이 이렇게 말하였다.
“넌 참 억울한 일이 많구나.”
“……!”
“내가 네게 바란 것은 이렇게 매번 비루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아니거늘.”
토른 공작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토른 공작이 로튼을 후계로 세웠을 때 바란 건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도리어 어떤 적이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무릎 꿇리는 절대자의 모습을 바랐건만, 늘 이런 비루한 모습이라니.
동정을 느낄 가치도 없었다.
“더구나 넌 내가 독살당할 뻔했을 때도 억울하다고 말하였지.”
로튼 백작의 얼굴이 하얘졌다.
과거, 로튼 백작은 토른 공작을 독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토른 공작은 그 일을 덮어주었다.
로튼 백작 말고 후계로 삼을 이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 일을 다시 입 밖에 꺼내었다.
이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방청석에 앉아 있는 봉신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토른 공작 전하께서 완전히 마음을 돌리셨어.’
‘끝났구나.’
로튼 백작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토른 공작이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왜 그랬느냐?”
“저, 전…….”
로튼 백작이 말을 더듬었다.
그는 추한 몰골로 어떻게든 변명해 보려 하였다.
“다, 다……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독살 사건도…… 이번 에스텔레 성녀의 사건도…… 저, 전부…… 전부…….”
하지만 뭐라 변명하겠는가?
자신이 맞이할 끔찍한 운명이 두려운 듯 로튼 백작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토른 공작은 그런 못난 아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런 한심한 변명을 듣고자 물은 게 아니다. 솔직히 네 입장에서 날 독살하려고 했던 거나,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불태운 일이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
이해할 수 있다니?
황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게 원래 토른 공작의 스타일이니까.
토른 공작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쓰든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게 아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패륜을 저지른 거라도,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니 토른 공작은 지금 로튼 백작이 단순히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책망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물은 건 왜 그리 머저리처럼 굴었냐는 것이다. 네 잘못은 끔찍한 수단을 사용한 게 아니라, 머저리처럼 군 것이다.”
“……!”
“로튼, 난 네게 참으로 많은 기회를 주었어. 네가 병신같이 굴어도 참고 또 참았지. 솔직히 난 쥬웰보다 너에게 훨씬 많은 기회를 주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토른 공작은 쥬웰에게 훨씬 혹독한 잣대를 갖다 대었으니까.
지금에야 쥬웰에게 마음을 열었다지만, 과거에 토른 공작은 쥬웰에게 공작위를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속으로 쥬웰의 실패를 바라기도 했다.
대를 넘은 승계, 어린 나이 등.
쥬웰에게는 약점이 너무 많았으니까.
만약, 쥬웰이 한 번의 실패라도 하였다면 토른 공작은 쥬웰을 향한 총애를 곧바로 거두었을 것이다.
반면, 로튼 백작에게는 몇 번의 실패를 해도 계속해서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너는 어떤 기회도 살리지 못하고 지금 이렇게 무릎 꿇는 처지가 되었지.”
토른 공작은 차갑게 말했다.
“넌 패했다. 그게 네 잘못이다. 그리고 가넷에 비루한 패자는 필요 없어.”
토른 공작은 망치를 두드려 판결을 내렸다.
“로튼에게서 소넷 백작위를 거두겠다.”
“……!”
법정에 소란 없는 파문이 일어났다.
소넷 백작위.
가넷의 직계 중 후계자에게 내려지는 작위였다.
즉, 지금 토른 공작은 로튼의 후계자 위를 정식으로 거둔 것이다.
“소넷 백작위뿐만 아니라, 가넷의 가주로서 로튼에게 내렸던 귀족원의 위원장 직위도, 제국 의회의 의장직도, 행정부의 재상직도 모조리 거두겠다.”
끝났다.
로튼 백작을 따르던 이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권한과 직위를 박탈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직위를 거두었을 뿐, 이번 일에 관한 처벌을 내리지 않았으니까.
이제 로튼은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불태운 죄에 관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숙청당하겠지.’
‘토른 공작께서 살려둘 리가 없어.’
같은 생각을 한 로튼은 벌벌 떨며 토른 공작에게 눈물범벅으로 애원했다.
“아, 아버지. 제발 살려주십시오. 목숨만은. 제발……!”
하지만 토른 공작은 삐딱하게 되물었다.
“왜 나한테 비느냐?”
“네?”
“네가 빌어야 할 이는 나 말고 따로 있지 않으냐?”
“……!”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로튼이 빌어야 할 이.
쥬웰을 뜻한다.
“네 처벌은 내가 아니라 쥬웰이 정할 것이다. 새로운 가넷의 주인이 될 이로서 말이다.”
새로운 가넷의 주인.
쥬웰을 가넷의 공식 후계인 소공작으로 세우겠다는 선언이었다.
로튼이 패해 밀려났으니, 승자인 쥬웰이 후계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저 말은 단순히 쥬웰 님을 소공작으로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공작위 승계도 빠르게 마무리 짓겠다는 뜻이야.’
‘토른 공작 전하의 연세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
토른 공작은 지극히 노쇠했다.
지금 정정히 돌아다니는 게 기적일 정도로.
그러니 후계가 결정된 이상, 빠른 공작위 계승을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로튼 전 백작의 처벌을 쥬웰 님께 맡기겠다니.’
‘패자를 짓밟을 승자의 권한을 주겠다는 거야.’
아니, 아니다.
고작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지금 토른 공작은 쥬웰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패배자인 로튼 백작을 완전히 짓밟음으로, 새로운 가넷의 주인이 될 이로서 권위를 세울 기회를.
그뿐만이 아니다.
이건 봉신들을 그녀의 앞에 무릎 꿇릴 기회기도 했다.
지금껏 상당수의 봉신은 로튼 백작을 따라왔으니까.
새로운 가넷의 주인이 될 이로서 그들을 굴복시켜야 했다.
‘아니면 로튼 백작과 함께 깔끔히 숙청해도 되겠지. 이건 내 선택이야.’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토른 공작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맡긴 것이다.
로튼 백작의 생사는 물론, 그를 따르던 봉신들의 생사까지.
시험이 아니다.
이제 쥬웰은 가넷의 주인이 될 이니까.
모든 건 가주의 뜻대로.
가넷의 그 절대적인 규율에 따라, 쥬웰은 가넷의 모두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이번 판결은 그런 가넷의 주인으로서의 첫걸음이었다.
저벅.
쥬웰이 걸음을 옮기자,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작지만 모두의 귓가에 천둥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판결석에 오른 쥬웰은 밑을 내려다보았다.
로튼 백작, 아니, 이제는 작위를 박탈당한 로튼이 두려움에 질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꿀꺽.
쥬웰은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드디어 원수 중 한 명을 몰락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자신이 당해야 했던 고통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가슴이 심해처럼 가라앉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원수들 모두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겠어. 내가 당했던 고통처럼.’
원수들의 몰락은 복수의 종착지가 아니다.
도리어 시작이었다.
그녀는 원수들을 몰락시켜 바닥에서 추락시킨 이후 아주 죽을 때까지 끔찍한 고통과 절망을 줄 것이다.
자신이 과거 받았던 고통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도록.
그런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가넷의 소공작으로 묻겠다. 죄인 로튼은 이번 일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하대였다.
당연했다.
이제 쥬웰은 가넷의 새로운 주인이 될 이.
반면 로튼은 모든 걸 잃은 죄인이었으니까.
로튼은 비참한 마음이 드는지 이를 악물었다.
“어, 억울합니다. 나는 그러한 죄를 저지른 적이…….”
“증거가 명백한데 그런 발뺌이라니. 어리석은 건지 아니면 본 소공작을 우습게 여기는 건지 모르겠군.”
쥬웰은 담담히 선언했다.
“분명히 말하지. 이대로라면 난 너에게 화형을 선고할 거야. 성녀의 유해를 불태웠으니 화형대에 올라도 부족하지. 너는 신과 위대한 성녀를 모독한 벌로 끔찍이 고문당한 후 불에 태워질 것이다.”
로튼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떨렸다.
실제로, 로튼이 저지른 죄는 쥬웰이 말한 벌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대로라면 그는 끔찍이 고통스럽게 처형당할 것이다.
‘아, 안 돼! 어, 어떻게든 살아야……!’
그런데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쥬웰이 물끄러미 로튼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살고 싶으면, 내 마음을 움직여 보도록.”
“……네?”
“너와 내가 정적이긴 했으나, 그래도 한때 가넷의 일원이었던 그대를 그리 끔찍이 처형하는 게 내키지는 않는군. 그러니 어떻게든 노력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풀 마음이 들게 해보도록.”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 마음을 움직일 방법은…… 글쎄.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을 다해 노력해 보도록. 개처럼 비루하게 고개를 조아려서라도 말이야.”
“……!”
장내의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지금 쥬웰이 하는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
자신에게 비참히 목숨을 구걸해 보라는 이야기였다.
‘잔인한.’
‘하지만 저게 원래 쥬웰 님의 모습이지.’
성녀로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쥬웰이 아주 무서운 인물이란 것을 가넷가의 모두가 알고 있다.
토른 공작을 닮은 작은 괴물.
그게 쥬웰의 별명이었으니까.
그러니 저런 잔혹한 모습도 당연했다.
아니, 도리어 가넷가의 새로운 주인이 될 이로서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실망스러울 것이다.
가넷이니까.
패자에게 아량을 베푸는 어설픈 머저리는 가넷의 가주로 어울리지 않는다.
저런 잔혹한 면모는 가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소양이었다.
‘과연 로튼 전 백작의 선택은?’
‘쥬웰 님께 고개를 숙일 건가?’
사람들의 시선이 로튼 백작에게 집중되었다.
쥬웰에게 고개를 숙여 목숨을 구걸하는 건, 토른 공작에게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쥬웰은 로튼의 손아래 조카였고 동시에 지금껏 권좌를 두고 다투었던 정적이었으니까.
그런 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분노와 비참함으로 로튼 백작의 몸이 애처롭게 떨렸다.
쥬웰은 로튼 백작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승자의 눈빛으로 오만하게.
이윽고 로튼이 말했다.
“제, 제발…… 부탁합니다. 살려주십시오.”
뚝, 처참한 눈물이 로튼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로튼은 덜덜 떨며 무릎 꿇은 채 쥬웰 앞에 바짝 고개를 숙였다.
“부, 부디 소공작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 애처로운 구걸과 함께 장내에 충격이 퍼졌다.
오연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쥬웰.
그리고 비참히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로튼.
승자와 패자의 완벽한 구도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새삼 쥬웰이 가넷의 새로운 주인이 될 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쥬웰은 패자인 로튼을 비참히 자신 앞에 무릎꿇림으로써 승자로서 완벽한 권위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제 누구도 쥬웰의 권위를 부정하지 못하리라.
‘부족해.’
하지만 정작 로튼을 무릎 꿇린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수없이 갈망하던 광경인데 만족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커다란 갈증만 느껴졌다.
쥬웰은 로튼을 짓밟기 위한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면 죄인에게 하나 묻겠다. 이 서류에 적힌 공범들에 관한 내용이 사실인가?”
“……!”
그 말에 방청석이 술렁였다.
특히, 로튼 전 백작을 따르던 측근들의 얼굴이 시체처럼 질렸다.
‘그런 서류가 있다고?’
‘그러면 우리도?’
만약 로튼이 저 서류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 그를 따르던 이들은 모조리 죄를 함께 뒤집어쓰게 된다.
“답하도록. 이 서류에 적힌 이들이 네가 죄를 저지른 데 함께했는지. 솔직히 이야기하면 네 죄를 감해주겠다.”
로튼의 몸이 다시 덜덜 떨렸다.
끔찍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냐, 아니면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파느냐.
어느 쪽을 선택하든 끔찍한 일이었다.
특히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파는 건, 어떻게 보면 죽음보다 더욱 추레한 일이었다.
신의가 있고 명예를 아는 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
하지만 지금껏 늘 그랬던 것처럼 로튼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남을 파는 선택을 하였다.
“……소, 소공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 서류에 적힌 이들 모두 제 일을 도운 공범입니다.”
“……!”
장내의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쥬웰은 비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그, 그렇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제, 제발 빕니다.”
그 비루한 선택에 로튼 백작을 따르던 이들의 얼굴이 시체처럼 변하였다.
쥬웰은 힐끗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군. 어떻게 생각하는가?”
로튼 백작을 따르던 이들은 두려움에 질려 쥬웰을 향해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자비를!”
“살려주십시오!”
그 모습에 나머지 이들은 숨을 죽였다.
죄를 덮어쓴 이들은 감히 부정할 생각도 못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실제로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는지, 진위가 아니니까.
쥬웰의 뜻.
그것 하나만이 중요했다.
그녀가 손짓 한 번 하면 로튼을 따르던 그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리라.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쥬웰이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뭐, 상관없겠지.”
“……네?”
“이제 너희의 주인은 나니까.”
찌익. 찌익.
그러고는 손에 들린 서류를 찢어버렸다.
그 모습에 로튼을 따르던 이들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서류를 없애다니? 설마?’
쥬웰은 무심하게 말하였다.
“이제 너희는 날 새 주인을 섬기게 되었으니, 과거 섬기던 못난 주인의 잘못으로 저지른 일을 따지는 것은 옳지 않겠지.”
“……!”
“혹시 아직도 저 죄인을 따르고 싶은 이가 남아 있는가? 날 주인으로 섬기는 게 탐탁지 않은 이가 있다면 지금 말하도록.”
로튼을 따르던 이들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지금 그녀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신, 과거 로튼과의 일을 잊어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들을 판 로튼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
로튼을 따르던 봉신들은 울컥 감동하여 진심으로 외쳤다.
“쥬웰 소공작님을 따르겠습니다!”
“저희의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쥬웰이 봉신들을 완전히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했다.
‘과연 쥬웰 백작님. 봉신들을 이렇게 단번에 무릎 꿇리다니.’
가넷의 힘은 ‘권력’.
권력은 곧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다.
따라서 가넷의 진정한 주인이 되려면, 봉신들을 자신의 밑에 굴복시켜야 했다.
봉신들을 굴복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권위와 공포였다. 어려운 건 마음을 얻는 거고.
권위와 공포로 굴복시키는 방법은 쉬운 만큼 강한 충성을 받기는 어려웠다.
반면, 마음을 얻는 건 진실한 충성을 받게 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런데 쥬웰은 로튼을 무릎을 꿇림으로 권위와 공포를 보였고 동시에 봉신들에겐 자비를 베풀어 마음까지 얻어낸 것이다.
이제 봉신들은 쥬웰에게 거역할 생각을 못 하는 것은 물론, 마음을 바쳐 강한 충성까지 하게 되리라.
‘과연 쥬웰 소공작님.’
‘대단하신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때, 토른 공작이 흡족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그래, 그러면 저 죄인은 어떻게 처벌할 것이냐?”
토른 공작이 쥬웰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조용한 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죽여라.”
“……!”
쥬웰은 토른 공작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토른 공작의 눈동자는 한없이 싸늘했다.
그래도 피를 이어받은 아들인데 죽이라니.
섬뜩한 일이었지만 토른 공작이 가족의 정을 느끼는 건 쥬웰이 유일했다.
“굳이 후환을 남겨둘 필요 없겠지. 난 깔끔히 처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단다. 널 위해서 말이야.”
“충고 고마워요.”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 말씀은 따르지 않겠어요.”
로튼을 살려두겠다는 이야기였다.
“왜냐? 어설픈 선의는 추후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토른 공작은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였다.
하지만 쥬웰은 싱긋 웃었다.
“어머, 적에게 선의라니. 할아버지는 제가 그런 착한 아이로 보이나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전 도리어 백부에게 더욱 끔찍한 벌을 내리려는 거예요. 때로는 죽음보다 살아 있는 게 더욱 가혹한 법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쥬웰의 눈동자에 광기가 깃들었다.
그녀가 로튼을 살려주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렇게 쉽고 편안한 죽음을 내릴 수 없으니까.
로튼의 고통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로튼은 완전히 몰락한 채 밑바닥의 나락에서 고통에 허우적대다가 최악의 절망 속에서 죽음을 갈구하며 가장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로튼만이 아니지. 다른 원수 모두 마찬가지야.’
토른 공작은 그런 쥬웰의 광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괴물이라 불리는 토른조차 쥬웰의 이런 광기를 마주할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사람들은 백부의 처참한 모습을 볼 때마다 저를 향한 두려움을 느낄 거예요. 그러니 이건 저에게도 이로운 일이지요.”
“……그래, 알겠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여라.”
쥬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언하였다.
“소공작으로서 죄인, 로튼에게 다음과 같은 벌을 내리겠다. 지금 이 시간부로 로튼에게서 가넷의 성을 몰수하고 신분을 노예로 강등하겠다.”
“……!”
로튼의 눈이 커졌다.
참고로 라인하르트 제국에는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제도가 없었다.
예외적으로 노예 신분을 받는 이들은 단 하나.
이종족 포로나 끔찍한 죄를 저지른 죄인들뿐이었다.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또한, 죄인은 가넷가의 노예가 되어 영원토록 노역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
장내가 다시 술렁였다.
한때 가넷 공작가의 가주 대리로서 제국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에게 노예 노역형을 선고하다니.
죽음보다 처참한 벌이었다.
‘더구나 가넷가의 노예면…… 쥬웰 백작님의 노예나 마찬가지 아닌가?’
쥬웰은 가넷의 주인이 될 이로 이제 가넷의 모든 것은 쥬웰의 것이었다.
따라서, 로튼은 쥬웰의 노예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끔찍이 치욕적인 일.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 거야.’
순간,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였다.
로튼도 마찬가지의 생각인지 부들부들 몸을 경련하였다.
하지만 그는 어떤 반발도 하지 못했다.
그저 꾹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곧 기사들이 나와 로튼을 끌고 갔다. 이제 여러 절차를 거친 후, 로튼은 노예가 될 것이다.
토른 공작은 쥬웰을 보더니 말했다.
“그러면 수여식을 거행하겠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네, 가주님.”
정식으로 작위를 내리는 것이다.
쥬웰은 토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토른은 가넷의 상징인 지팡이를 들어 쥬웰의 어깨 위에 올렸다.
“지금 이 시간부로 쥬웰, 너에게 소넷 백작위를 내리겠다. 앞으로 너는 소넷 백작이 될 것이며 가넷의 후계가 될 것이다.”
정식으로 쥬웰이 소공작이 되는 순간이었다.
토른 공작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가넷의 가주로서 너에게 중임을 내리겠다. 앞으로 너는 귀족원의 위원장직, 제국 의회의 의장직, 행정부의 재상직, 군부 장관의 직을 맡게 될 것이다.”
그 말에 장내에 다시 경악이 퍼졌다.
쥬웰이 소공작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저 직위를 곧바로 내리는 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참고로 가넷 공작은 이 네 개의 직위를 겸한다.
재상직.
군부 장관직.
귀족원의 위원장.
의회의 최고 의장.
즉, 행정부와 군부, 귀족원, 입법부를 한 손에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로튼 전 백작이 소공작이 되었을 때도 저 직위를 한 번에 내려받지는 않았다.
로튼 전 백작이 저 직위들을 물려받은 건 3년 전 토른 공작이 노환으로 쓰러지며 가주 대리로 섭정하기 시작할 때부터다.
그런데 지금 토른 공작은 저 네 개의 직위를 한 번에 쥬웰에게 물려준 것이다.
가주로서 자신의 권한을 모조리 쥬웰에게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설마 저 말의 의미는?’
모두의 시선이 토른 공작에게 쏟아졌다.
과연, 토른 공작의 입에서 중대 발언이 발표되었다.
“오늘부로 공작위를 승계할 준비를 하겠다. 한 달간의 승계 기간을 거친 후 쥬웰은 새로운 가넷의 왕이 될 것이다.”
곧바로 쥬웰에게 공작위를 물려주는 절차를 시작하겠다는 선언이었다.
* * *
쥬웰의 가넷 공작위 승계 소식은 제국…… 아니, 온 대륙을 뒤흔들었다.
가넷이니까.
가넷은 실질적으로 제국의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가문이었다.
즉, 가넷 공작은 제국의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가넷 공작위 승계 소식에 온 대륙 사람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람들은 입장에 따라 쥬웰의 가넷 공작위 승계에 다소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일단, 제국 백성들은 두 팔을 벌려 열렬히 환영하였다.
“와아! 쥬웰 성녀님 만세!”
“쥬웰 공작 전하 만세!”
쥬웰은 백성들에게 최고의 성녀였으니까.
특히, 그녀는 지금껏 줄곧 백성을 위한 행보를 보여주었고, 따라서 백성들은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크게 기대하였다.
‘미안하네. 난 전혀 새 시대를 열 생각이 없는데. 뭐, 그래도 내가 하는 복수는 백성들에게 나쁘지 않겠지. 내 복수는 결국, 백성들에게도 도움이 될 일이니까.’
그녀는 복수를 위해 여섯 공작가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니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라도 그녀의 복수가 끝나면 백성들의 삶은 한결 나아지게 될 것이다.
‘더구나 내가 죽고 난 뒤에는 엔리크 자작과 오펜하임이 제국을 지배하게 될 테니. 백성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건 그들이 잘해주겠지.’
그녀는 자신이 죽은 후 가넷을 엔리크 자작에게 물려주고, 오펜하임에게 황실의 권한도 되찾아줄 계획이었다.
그래서 가넷과 황실의 이원 체제로 서로 협력하며 제국을 번영하게 할 것이다.
그녀가 존경하는 두 인물, 엔리크와 오펜하임이면 충분히 잘 해내리라.
‘유스넨도 남아 그들을 도울 거고.’
문득 흰 강아지를 떠올린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유해를 불태우며 눈물 흘리던 유스넨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아릿해져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유스넨 생각은 하지 말자. 어차피 나와 흰 강아지는 이어질 수 없어.’
유스넨을 떠올릴수록 아플 뿐이다.
그녀는 괜히 더 가슴이 미어져 오기 전에, 다른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자신 앞으로 온 서신 하나를 펼쳐 읽었다.
[존경하옵는 쥬웰 성녀님께.
가넷 공작위 승계를 경하드립니다.
-성녀님을 존경하는 로든 왕국의 아피엘이.]
로든 왕국의 아피엘 왕녀가 보낸 축하 서신이었다.
쥬웰은 잠시 침묵했다.
‘역시 아피엘 왕녀가 마왕 타란툴라가 맞았어.’
일전, 그녀는 아피엘 왕녀에게 표식을 새겼다.
어둠의 힘을 사용하면 곧바로 알아볼 수 있게.
이후 계속 소식이 없었는데 얼마 전 신호가 왔다.
아피엘 왕녀가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신호가 말이다.
‘그러면 왜 그때 가만히 있었던 거지? 내 손에 죽을 위기였는데.’
쥬웰은 알 수 없어 고민했다.
‘어쨌든, 공작위 승계가 끝나면 곧바로 로든 왕국으로 가야지. 가서 아피엘 왕녀를 잡아야 해.’
쥬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다른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해.’
당시 그녀가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질 때, 정체 모르는 인물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쥬웰은 고민에 잠겼다.
모두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체가 짐작되지 않았다.
‘타란툴라를 잡으면 알게 되겠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만.’
쥬웰은 차를 마시며 생각을 이어갔다.
‘이번 승계 기간 때, 원수 중 한 명을 추가로 몰락시켜야 해.’
그녀는 곧 원수 한 명을 추가로 몰락시킬 계획이었다.
그녀가 계획하고 있는 새로운 만찬, ‘처형식’을 통해.
‘플랑드나 언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그녀가 이번에 노리는 원수는 플랑드나였다.
처형식이란 이름대로, 플랑드나는 아주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몰락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다이아 공작가도 파산시키겠어.’
놀라운 이야기였다.
지난번 1억 골드를 뜯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예 다이아 공작가를 파산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승계 기간을 이용해야 해.’
쥬웰은 속으로 더 자세한 생각을 하였다.
‘승계 기간은 아주 특별한 기간이니까.’
제국을 지배하는 여섯 공작가는 후계자가 공작위를 물려받기 전, 일정한 기간을 갖는다.
‘승계 기간’이라 칭해지는 시간이었다.
여러 예법적인 절차를 치르기 위함과 동시에 새로운 공작으로서 권한을 물려받고 입지를 다지기 위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최종적인 검증의 시간이기도 하지.’
가주에게 막대한 권한이 집중되는 여섯 공작가의 특성상 잘못 가주를 선정하면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여섯 공작가는 최종적인 검증의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게 바로 이 승계 기간이었다.
승계 기간 동안 후계자는 실제 가주에 준하는 권한을 내려받게 된다.
문제는 책임도 함께 내려받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때 가주가 되기에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면 승계가 엎어질 수도 있지.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하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다. 아니, 은근히 종종 일어났다.
이 승계 기간에 후계자를 노린 온갖 견제와 음모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쥬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내 경우엔 원수들이 날 노리겠지.’
특히 매리엇, 플랑드나.
그들 둘의 입장에서 쥬웰이 가넷 공작이 되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어떻게든 수작을 부리려 할 거야.’
그리고 쥬웰은 그들의 수작을 역으로 이용할 것이다.
‘기대되네.’
쥬웰은 지그시 생각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오늘이 중요해.’
오늘, 중요한 일이 예정되어 있었다.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엔리크 자작이었다.
“네, 들어오세요.”
“그래, 연회 시간이 됐는데 준비는 다 했느냐?”
엔리크 자작의 말처럼 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가넷 공작가의 저택이 온통 시끌시끌하였다.
가넷 공작가에서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쥬웰의 공작위 계승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였다.
엔리크는 쥬웰을 에스코트하러 온 건지 연미복을 입고 있었는데, 원래도 아름다운 얼굴이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쥬웰은 전혀 꾸미지 않은 차림새였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냥 이대로 참석할 생각인데요?”
“그대로?”
“네, 뭐 문제가 있나요?”
지금 쥬웰은 연회용 드레스가 아닌, 관료용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연회에 참석하겠다니?
하지만 엔리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되지. 넌 이제 이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이가 될 거니까. 그 누가 너에게 뭐라 할 수 있겠느냐?”
가넷의 왕.
그 말은 단순히 가넷 공작가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 제국, 아니, 온 대륙에서 가장 드높은 이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연회에 어떤 의복을 입고 참석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녀의 뜻이 곧 법도이고 질서이니 그녀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되고, 제복을 입고 참석하고 싶으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넌 어떤 옷을 입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니 말이다.”
그 팔불출 같은 말에 쥬웰은 잠시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저 잠깐 안아주세요.”
다행히 엔리크는 별다른 물음을 하지 않았다.
그저 꼬옥, 힘을 주어 부드럽고 따뜻하게 그녀를 안아주었다.
마치, 진짜로 아버지에게 안긴 느낌에 쥬웰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아버지.”
그 말에 엔리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더니 곧 답해주었다.
“나도. 나도 사랑한단다, 내 딸아.”
쥬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충동이 들어 이야기했다.
“아버지, 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무엇이든. 말만 하여라.”
그 굳건한 음성이 마치 정말 진실된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아 쥬웰은 용기를 내어 말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엔리크에게 미움받을 게 가장 두려웠다.
엔리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혹시나 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걱정이 드는 눈빛이었다.
“그냥요. 제가 아버지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에요. 아버지에게 미움받기 싫어서요.”
“……내가 너를 미워할 리가 없지 않느냐?”
“그러면 됐고요.”
쥬웰은 일부러 밝게 미소를 지었다.
엔리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더 캐묻지는 못했는데, 시간이 되어 연회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바트찬이 와서 연회의 시작을 알렸고 쥬웰은 엔리크의 에스코트를 받아 가넷 공작가의 연회장에 참석했다.
“쥬웰 소공작 전하이십니다!”
현재, 쥬웰의 정식 작위는 소넷 백작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로튼 때와는 다르게 쥬웰에게 백작이라는 호칭보다 소공작이란 호칭을 주로 사용하였다.
승계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자리는 쥬웰의 가넷 공작위 승계를 축하하는 자리.
쥬웰이 주인공인, 오로지 쥬웰을 위한 자리였다.
“쥬웰 소공작 전하가 오셨군요.”
연회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쥬웰에게 쏠렸다.
쥬웰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관료용 제복을 입은 채 어떤 화려한 치장도 하지 않았지만, 연회장의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운 모습.
하지만 사람들은 단순히 쥬웰의 외적 아름다움보다는 다른 점에 주목하였다.
제복 위에 수놓아진 왕관을 쓴 가넷의 문장(紋章).
오로지 가주와 승계가 결정된 소공작에게만 허락되는 문장으로 이제 곧 가넷의 왕이 될 그녀의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모두의 눈동자에 경외와 두려움이 깃들었다.
이제 쥬웰은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서 절대자로서 군림하게 될 것이다.
모두 긴장하여 쥬웰의 눈치를 보았다.
‘어리지만, 보통이 아닌 분.’
‘가볍게 생각하면 경을 치르게 될 거야.’
‘절대 눈 밖에 나면 안 돼.’
이 자리의 모두가 로튼이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아니, 소문만이 아니다.
쥬웰은 원래 계획했던 대로 나락에 떨어진 로튼에게 본격적인 고통을 주었다.
로튼은 쥬웰이 목숨을 거두기 전까지 끝없는 굴욕을 당하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덕분에 손님들은 가넷 저택에 들어오는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로튼이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을 맞았단 것이다. 정확히는 마차의 말들을 마구간으로 이끄는 역을 하게 했다.
한때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던 로튼에게 노예로서 손님들의 마차를 끄는 일을 맡기다니.
원수인 로튼에게 고통을 주려는 의도임과 동시에,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경고한 것이다.
이처럼 되기 싫으면 허튼 생각 하지 말라고.
그러니 누구도 쥬웰을 함부로 무시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잔뜩 움츠려 쥬웰의 비위를 살폈다.
‘그런데 쥬웰 님이 결국 가넷의 왕이 되게 되었으니, 이제 다이아가와 에메랄드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매리엇과 플랑드나가 쥬웰과 사이가 좋지 않음은 익히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결국 쥬웰이 가넷의 왕이 되었으니 둘 다 크게 곤란한 처지가 될 게 분명했다.
‘더구나 매리엇 공작과 플랑드나 성녀 모두 쥬웰 소공작께 크게 불리한 처지이니. 과연, 두 분의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
이 자리에는 당연히 매리엇과 플랑드나도 와 있었다.
자신들에게 닥칠 난관을 예감한 걸까. 둘은 딱딱히 굳은 얼굴로 쥬웰의 등장을 보고 있었다.
그때, 쥬웰이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은 분이 절 축하해 주러 오시다니. 모두 감사합니다.”
연회의 주인공으로서 참석한 이들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쥬웰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특히 이 자리에 오실 거로 예상하지 못했던 분들도 참석해 주셨군요. 매리엇 공작, 플랑드나 성녀님, 두 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이건 단순한 감사 말이 아니었다.
둘을 저격한 것이다.
과연, 쥬웰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사실 전 두 분께서 이 축하 연회에 참석해 주실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쥬웰은 묘한 어조로 말끝을 흐렸다.
“두 분은 제 공작위 승계를 기뻐하지 않으실 거로 여겼거든요. 그렇지 않나요?”
“……!”
둘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그들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저희가 소공작의 공작위 승계를 반가워하지 않는다니.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답니다.”
“그런가요?”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얼마 전 성배 사건 때 왜 그러셨나요? 두 분 다 제가 에스텔레 성녀님의 후인이 되는 걸 훼방하려 했잖아요.”
“……!”
쥬웰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놓고 제 축하 연회에 참석하다니. 두 분 다 무슨 저의인지 모르겠군요.”
연회장에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다. 이번 성배 사건 때 잘못을 저지른 건 로튼 백작만이 아니다.
매리엇, 플랑드나도 잘못을 저질렀다. 쥬웰에게 에스텔레의 은총을 내려받으라는 신탁이 내려왔음에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 때문에 그 신탁을 훼방하였으니까.
지금 쥬웰은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두 분께 묻겠어요. 저를 조롱하러 이 연회에 참석한 건지, 아니면 과거 있었던 일을 사죄하고 저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참석한 것인지.”
그 말에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과거의 일을 용서받고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으면, 지금 여기서 고개를 숙이라는 이야기였다.
‘이…….’
매리엇과 플랑드나의 얼굴이 분노와 치욕으로 시뻘게졌다.
이 많은 사람이 앞에서 고개를 숙이라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매리엇 공작, 플랑드나 성녀 모두 쥬웰 소공작을 당해낼 수 없어.’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쥬웰은 가넷의 왕이 되었다고 막무가내로 무식하게 둘을 밀어붙이는 게 아니었다.
도리어 반대.
철저한 계산이 섰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바로 승기를 잡았다는 계산.
‘이번 성배 사건으로 매리엇 공작, 플랑드나 성녀 모두 크게 힘이 약화하였으니.’
매리엇은 1억 골드를 잃음으로, 가문 내에서 크게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다이아 가문 자체가 휘청이고 있으니까.
플랑드나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우습게도 정반대의 이유였는데,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빌미로 1억 골드를 뜯어낸 것으로 어마어마한 비난이 쇄도했다.
돈에 눈이 멀었다고.
성녀로서 이러한 비난은 당연히 치명적이었다.
즉, 둘 다 입지가 크게 위태위태한 상황.
반면 쥬웰은 제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심지어 이제 매리엇 공작, 플랑드나 성녀는 과거처럼 사이가 좋지도 않으니. 두 분이 힘을 합쳐 쥬웰 소공작께 대항할 수도 없겠지.’
1억 골드를 뜯음으로써 다이아와 에메랄드는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 힘을 합치는 건 불가능.
이것도 쥬웰에게 유리한 요소였다.
‘설마, 쥬웰 소공작께서는 이걸 모두 노리고 그때 성배 사건을 방관한 건가?’
일부 눈치 빠른 사람들은 놀란 마음으로 생각했다.
성배 사건 때, 쥬웰은 신탁의 주인공임에도 대외적으로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침묵했을 뿐이다.
그런 쥬웰의 행보에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나고 결과를 보니 섬뜩할 정도였다.
쥬웰의 정적들은 탐욕에 빠져 모조리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고 덕분에 쥬웰 홀로 커다란 이득을 보았다.
‘무서운 분.’
사람들은 고고히 서 있는 쥬웰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쥬웰은 둘에게 말하였다.
“두 분 모두 왜 아무런 대답도 없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싱긋 웃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시든지요.”
최후통첩이었다.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든, 돌아가든.
매리엇과 플랑드나 모두 터질 듯 얼굴이 붉어졌다. 애처로울 정도였다.
하지만 둘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당장 자리를 박차고 연회장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공개적으로 쥬웰을 적으로 선언하는 행동이다.
그건 둘이 처한 상황상 굉장히 곤란한 일이었다. 특히 힘의 균형추는 쥬웰에게 넘어간 상태이니.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자존심 때문에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있는데, 쥬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내키지 않으시나 보네요. 전 두 분과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두 분의 뜻 잘 알겠어요.”
“……!”
“축하는 되었으니 편히 쉬도록 하세요. 따로 마중하지는 않을게요.”
둘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축객령이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건 둘이었다.
특히 매리엇이 다급해졌다.
플랑드나와 매리엇 중, 매리엇의 상황이 훨씬 안 좋기 때문이었다.
결국 매리엇이 먼저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그때 일은 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쥬웰 소공작.”
“…….”
쥬웰은 물끄러미 매리엇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도 없이.
고작 그런 억지 사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치욕감에 매리엇의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더욱 비참한 음성으로 재차 말하였다.
“미, 미안합니다. 쥬웰 소공작, 이렇게 부탁하니, 제가 당신에게 한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경악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오만한 매리엇이 저런 사과라니.
쥬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매리엇은 고개를 숙인 채 굴욕감에 전신을 떨고 있었다.
참으로 비참한 모습.
하지만 쥬웰은 감흥 없이 생각했다.
‘모자라.’
그녀가 매리엇에게 받아야 할 사과가 고작 이런 것이겠는가.
이딴 생색내기 사과 따위 받아봐야 가슴의 어떤 위안도 되지 않는다.
쥬웰은 매리엇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어 고마워요. 저도 언니와 화해하고 싶었어요. 언니는 제 소중한 ‘시녀’이잖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그 말에 매리엇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시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매리엇과 쥬웰의 개인적인 관계.
과거, 사교계 싸움에서 패한 이후 매리엇은 쥬웰의 시녀가 되기로 하였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가넷과 다이아의 관계였다.
가넷은 권력의 가문.
금력의 가문인 다이아는 그런 가넷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권력은 돈을 벌게도, 잃게 할 수도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따라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이아를 가넷의 시녀라고 부른다.
즉, 지금 쥬웰은 개인적으로나, 가문으로나 매리엇이 자신의 시녀라고 폄훼하며 이야기한 것이다.
“언니도 저와 지금처럼 잘 지내고 싶으신 거죠?”
상전과 아래 시녀의 관계로.
쥬웰의 말뜻을 알아들은 매리엇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 그렇죠. 저, 저도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바득, 매리엇이 이를 가는 소리가 앞에 있는 쥬웰에게 전달되었다.
쥬웰은 피식 웃고는 매리엇을 놔주었다.
“얼굴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혹시 몸이 불편한 거면 그만 들어가서 쉬셔도 될 것 같아요.”
치욕감이 한계에 이른 매리엇은 확 붉어진 얼굴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앙칼진 성격상 끝까지 분노를 숨기지는 못하는 모양새였다.
한편, 사람들은 매리엇의 굴욕적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쥬웰 백작님이 아직 공작위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이런 모습이라니.’
‘쥬웰 백작님이 완전히 공작위에 오르면 과연 다이아 공작가는 어떻게 될지.’
‘매리엇 공작 전하도 이대로 순순히 무릎을 꿇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문제는 그거였다.
만약 이대로 매리엇이 쥬웰에게 철저히 굴복하면, 여기서 더 상황이 악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굴욕적이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다이아와 가넷의 관계는 역대로 늘 이러했으니.
하지만 저 고고한 매리엇이 마냥 납작 엎드려만 있을 리가 없었다.
방금도 끝내 분노를 숨기지 못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상황이 불리해 고개를 숙였지만 결국 매리엇은 쥬웰을 향해 발톱을 휘두를 거고, 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어쩌면 쥬웰 소공작 전하는 그걸 바라고 매리엇 공작 전하를 도발한 것일지도. 더욱 철저히 짓밟을 명분을 얻기 위해.’
‘가넷과 다이아가 싸우면, 승자는 가넷이 될 수밖에 없으니.’
일부 눈치 빠른 사람들은 쥬웰의 속마음을 눈치채고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 추측은 옳았다.
쥬웰은 일부러 매리엇을 도발했다.
매리엇이 분노해 무리한 일을 벌여줄수록 그녀에게는 유리한 상황이 될 테니까.
‘그나저나.’
‘플랑드나 성녀님은?’
사람들은 다른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곤경에 처한 건 매리엇만이 아니었다.
플랑드나도 있었다.
플랑드나는 시뻘게진 얼굴로 여전히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빨갛게 핏발이 선 눈을 봤을 때, 매리엇처럼 순순히 고개를 숙일 것 같지는 않았다.
쥬웰은 플랑드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플랑드나 언니는 매리엇처럼 그렇게까지 곤궁한 처지는 아니니까.’
플랑드나는 지금 매리엇처럼 완벽히 궁지에 몰린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고개를 숙일 생각은 않는 것이다.
과연, 플랑드나가 입을 열었다.
“쥬웰 소공작님, 이번 성배 일은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게 아닌, 변명의 이야기.
쥬웰은 차갑게 플랑드나의 말을 끊었다.
“성녀님은 저를 향한 신탁을 방해하려 했지요. 그 일에 어떤 오해가 끼어들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
플랑드나는 입을 다물고 어떤 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끝내 고개를 숙이진 않았다.
도리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은근히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신탁을 무시하는 건, 너도 동의했던 일이잖아.’
사실, 플랑드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때 쥬웰은 은밀히 와서 플랑드나와 밀약을 맺었다.
신탁을 무시하고 에스텔레의 유해를 노리자고.
그런데 인제 와서 그런 적 없었다는 듯 입을 닦고 저런 핍박을 하다니?
하지만 그 밀약은 대외적으로 어떤 증거도 안 남은 일이었고, 플랑드나는 뒤통수를 맞은 처지가 되었다.
그것도 뼈아픈 뒤통수였다.
‘곤란하겠지. 성녀로서 신탁을 무시한 죄를 지은 거니 무슨 말로도 변명할 수가 없을 거고, 그렇다고 내게 고개를 숙이기는 더더욱 싫을 거고.’
플랑드나가 신탁을 무시한 자신의 죄를 무사히 넘길 방법은 하나였다.
신탁의 주인공이었던 쥬웰의 용서를 받는 것.
하지만 플랑드나는 도저히 쥬웰 앞에 고개를 숙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과거 침식 사건 때 음모를 꾸미다가 도리어 쥬웰의 종사제가 됨으로써 한 번 무릎을 꿇은 적이 있지 않은가?
또 그런 일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
그렇게 플랑드나가 입을 다물고 어떤 말도 하지 않자 쥬웰은 피식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어리석긴. 차라리 자존심을 굽히는 게 낫지. 지금 이 선택이 나중에 어떻게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르고.’
플랑드나는 알까?
지금 부리는 이 고집이 훗날 어떻게 자신의 목을 조이게 될지?
‘신탁을 무시했으면서 그 죄를 뉘우치지도 않으니 성녀로서 어마어마한 신성 모독죄지. 고맙네. 이런 빌미를 스스로 만들어주어서.’
뜻대로 되었으니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서로 생각이 다른 듯하군요. 따로 마중은 하지 않을 테니 돌아가는 길 평안하시길.”
축객령이었다.
플랑드나는 꾹 입술을 깨물고는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하였다.
“쥬웰 소공작님, 방금 말씀하신 일은 소공작님의 오해이니 나중에 풀 기회가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소공작님께서도 평안하시길.”
자애로운 미소로 말하였지만 분한 마음에 눈빛까지 꾸미는 데는 실패하였다.
플랑드나는 표독한 눈빛으로 쥬웰을 노려본 후 사라졌다.
그렇게 원수 둘이 사라진 이후, 쥬웰은 생각했다.
‘이렇게 건드렸으니 이제 둘 다 내 뜻대로 움직여 주겠지. 내가 공작위 승계를 마치기 전, 어떻게든 내 승계를 무마시키려고 발버둥 칠 거야.’
그게 쥬웰이 의도한 함정인지도 모르고.
‘기대돼.’
쥬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지럽지.’
쥬웰은 알 수 없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살짝 티 나지 않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둘을 상대할 때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어지럼증이 들었다.
‘특별히 몸이 안 좋을 이유는 없는데. 이러다 곧 괜찮아지겠지.’
쥬웰이 얕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엔리크가 기민하게 딸의 안 좋은 상태를 눈치채고 그녀를 불렀다.
“괜찮으십니까, 소공작 전하?”
그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딸의 얼굴을 살폈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이제 쥬웰은 가넷의 가주가 될 것이니 공식 석상에서는 엔리크도 경어를 쓰는 것이다.
쥬웰은 엔리크의 걱정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 아니, 자작님.”
그녀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방금 걱정. 상황에 맞지 않는 것 아시죠?”
“……!”
쥬웰은 엔리크의 잘못을 지적했다.
“전 가넷의 왕이 될 이예요. 그러니 남들에게 약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런 말은 금물이에요.”
엔리크의 얼굴이 굳었다.
“앞으로는 언행에 주의해 주세요.”
엔리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아릿함이 깃들었다.
서운함이 아니다.
아픔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딸을 향한 걱정이었다.
힘듦에도 무리하는 딸을 향한 걱정.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말하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에 쥬웰은 한숨이 나왔다.
엔리크가 속상해하니 그녀의 가슴도 아팠다.
그래서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최대한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 정말 괜찮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습니까?”
쥬웰은 과장되게 웃어 보였다.
“네, 무엇보다 오늘은 제 승계를 축하하는 좋은 날이잖아요.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아버지도 웃으세요.”
그 말에 엔리크는 걱정을 떨치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세요.”
“소공작께서 남들 앞에서 무리하는 것까지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저에게까지 억지로 강한 모습 보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엔리크의 굳건한 눈빛이 쥬웰을 향했다.
“전 당신의 가신이기 이전에 아버지니까요. 당신이 지치고 힘들 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고 싶습니다.”
그 말에 쥬웰은 가슴이 울컥했다.
‘이 반칙 아버지. 맨날 왜 이렇게 내 가슴을 흔드는 거야.’
가슴이 메어와 쥬웰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중얼거리듯 말하였다.
“이미…… 아버지는 제게 그런 존재예요.”
엔리크는 그녀가 유일하게 심적으로 의지하는 존재였다.
여러 일로 힘들 때마다, 그녀를 위로하고 보듬어준 건 늘 엔리크였으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게 당신과 첫 춤을 추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쥬웰이 자신을 의지한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엔리크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쥬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침 춤을 추는 타임이었다.
“얼마든지요.”
쥬웰도 마주 미소를 짓고 그 손을 잡았다.
부녀는 단상에 올라가 춤을 추었고 사람들은 둘의 모습에 감탄하였다.
“두 분의 모습은 정말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군요.”
“정말 아름다운 춤입니다.”
쥬웰의 아름다움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엔리크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빠 대회를 열면 무조건 1등으로 뽑힐 외모이니 둘이 추는 춤은 마치 천상의 춤처럼 아름다웠다.
둘이 한 바퀴 춤을 추고 나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매리엇과 플랑드나와의 다툼 때문에 날카롭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연회를 즐기게 된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쥬웰 소공작님과 두 번째 춤을 추는 주인공은 누구이지?’
‘쥬웰 소공작님께 과연 누가 간택을?’
간택.
말 그대로였다.
가넷의 왕이 될 쥬웰이 누구를 반려로 선택할지는 제국민 모두의 초유의 관심사였다.
심지어 쥬웰은 약혼자도 세 명이나 되지 않는가?
그것도 하나같이 다 쟁쟁한 이들이었다.
‘아무래도 엔리크 자작 다음으로 첫 번째 춤을 선택받는 이가 간택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
‘과연 누가?’
모두가 흥미진진, 궁금해할 때 드디어 첫 번째 경쟁 주자가 앞으로 나섰다.
황태자 오펜하임이었다.
“공작위 계승을 축하하오. 약혼자로서 그대에게 두 번째 춤을 청해도 되겠소?”
사람들은 그 모습에 눈을 반짝였다.
‘광휘의 대공은?’
‘이번에도 둘이 싸우나?’
유스넨도 당연히 이 연회에 와 있었다.
와 있을 뿐만 아니라,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쥬웰을 줄곧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곧 벌어질 간택 배틀에 조마조마 흥미진진한 눈빛을 보냈는데, 김빠지는 일이 일어났다.
유스넨이 앞으로 나서지 않은 것이다!
‘뭐지? 포기인가?’
‘눈빛을 보면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쥬웰을 보는 유스넨의 눈빛.
어마어마하게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집착남이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이해할 수 없게 앞으로 나서지는 않고 있었다.
‘혹시 두 분이 싸웠나?’
연애사에 빠삭한 몇몇 이는 속사정을 짐작했다.
쥬웰과 유스넨이 싸운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지금 이런 상황에 앞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저런 집착남 같은 무시무시한 눈빛만 보내는 게 아닐까, 하고.
반쯤…… 아니, 거의 90% 맞는 짐작이었다.
그날, 에스텔레의 유해를 불태운 이후 쥬웰은 유스넨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스넨은 쥬웰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물론 쥬웰이 그러는 건 유스넨을 위해서였다.
‘우리가 가까워져 봤자, 남는 건 그의 파멸뿐이야. 그러니 이게 옳아.’
쥬웰은 속으로 씁쓸히 생각했다.
그녀는 영안을 떠 힐끗 유스넨의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절반이 넘게 잿빛으로 변한 모습.
또한, 더욱 심각한 게 있었다.
유스넨의 이마에 아주 희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영안을 집중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흐릿한 문양.
역십자(逆十字)의 문양으로 지옥에 떨어질 죄인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빌어먹을.’
쥬웰은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저 문양이 이마에 새겨지기 시작했다는 건, 유스넨의 타천이 확정되어 간다는 것이다.
‘저런데, 내가 어떻게 그를 받아들여.’
쥬웰은 한탄하였다.
천만다행인 건, 아직 유스넨의 타천이 확정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은 돌이킬 수 있다.
하지만 저 역십자 문양이 완전해지는 순간, 그의 타천은 ‘확정’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쥬웰과 유스넨이 가까워질수록 저 역십자 문양은 빠르게 짙어질 것이다.
빛의 천사로서 끔찍한 어둠인 그녀를 모른 척 용납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지옥에 떨어질 대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니까.
‘제길.’
“소공작?”
그때, 앞에 서 있던 오펜하임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쥬웰은 실례했다는 듯, 오펜하임을 향해 싱긋 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춤을 추도록 하지요.”
곧 둘은 단상에 올랐다.
둘이 단상에 오르자 저 멀리 유스넨의 얼굴이 안 좋아지는 게 보였지만 무시했다.
한편, 오펜하임은 꿈에 바라던 쥬웰과의 춤을 성취했음에도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안색이 좋지 않소.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요?”
“…….”
쥬웰은 잠시 침묵했다.
‘안 좋은 일이라.’
좋은 일을 찾는 게 더 쉽지 않을까.
하지만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그다지.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최근 무리했으니.”
“……그렇구려.”
오펜하임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통탄스럽구려.”
“뭘요?”
“그대를 바란다면서, 막상 그대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 같으니 말이오.”
“……아직도 저를 바라고 있나요?”
쥬웰은 새삼스럽게 말하였다.
오펜하임은 황당하다는 듯 답했다.
“당연하지. 그대에게 마음을 뺏긴 이후, 단 한순간도 그대를 바라지 않은 순간이 없거늘.”
“그러면, 저랑 결혼하실래요?”
“……!”
오펜하임은 순간, 사레에 들려 헛기침을 하였다.
실수하여 발을 삐끗할 뻔하기도 했다.
그만큼 쥬웰의 말에 놀랐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품에서 춤을 추고 있는 쥬웰을 바라보았다.
“……진심이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