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3-2 나의 누나 (2)
Chapter 3-3 처형식 (1)
Chapter 3-2 나의 누나 (2)
‘어쨌든 이런 것도 좋네.’
쥬웰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밤이 깊어 온통 별이 가득했고, 마음이 평안해지니 유스넨 생각이 났다.
‘흰 강아지는 이제 슬슬 의식을 차리고 일어났겠지? 몸에는 이상 없으려나? 같이 왔어도 좋았을 텐데.’
쥬웰은 상상해 보았다.
유스넨과 둘이 이런 여행을 하는 장면을.
좋을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는 걸 보니 말이다.
‘……그런 기회가 있을까?’
멍하니 생각하는데 문득 밤하늘에서 빛이 번뜩했다.
유성이었다.
‘소원이나 빌까?’
평소라면 유성을 봐도 콧방귀도 뀌지 않았겠지만 그냥 마음이 동했다.
‘내 소중한 이들이 행복했으면. 특히, 흰 강아지가.’
소원을 빈 그녀는 문득 고개를 저었다.
‘흰 강아지와 이런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으면.’
그렇게 생각한 쥬웰은 피식하였다.
달콤한 여행이 이어졌다.
“다음은 뤼른베르시예요.”
“거긴 왜 들르는 거지? 꼭 안 들러도 되는 것 아닌가?”
“예쁜 곳이니까요?”
“…….”
“그리고 야영은 피부에 안 좋답니다. 저야 상관없지만, 로드처럼 사랑스러운 분의 피부가 상하는 건 인류 유산의 소실이니 가급적 피하는 게 좋아요.”
마리는 진지하게 말했고 쥬웰이 가장 좋아하는 미끼를 던졌다.
“뤼른베르시에 명물 스테이크집이 있는데 음식이 천상의 맛이라고 해요.”
“……혹시 등심인가?”
자신도 모르게 물은 쥬웰은 흠칫하였다.
그녀는 모든 요리 중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를 가장 좋아했다.
“……그냥 물어본 것이다. 딱히 맛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네, 네. 알고 있답니다.”
마리가 그런 쥬웰이 사랑스럽다는 듯 엄마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로드가 좋아하는 등심 스테이크 맛집이에요.”
쥬웰은 헛기침을 했다.
‘성배 사건을 벌일 때까지 시간 여유가 있으니, 조금은 느긋하게 가도 되겠지.’
명물 등심 스테이크를 맛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절대로.
물론, 간 김에 맛을 보긴 했다.
맛있었다.
“맛있죠?”
“……그럭저럭 나쁘진 않군.”
“한 그릇 더 시킬까요?”
“미디엄 레어로.”
쥬엘은 자신도 모르게 또 답하고는 멈칫하였다.
“……그러니까. 이건.”
“네, 알아요. 딱히 마음에 들어서 더 시키는 건 아니란 거죠?”
“……그래.”
마리의 눈동자가 흐뭇함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사랑스럽다니!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눈빛이 불손해.”
“로드를 향한 존경으로 가득한 눈빛인데요? 리델하트 님보다는 낫지 않나요?”
리델하트는 스테이크를 썰며 말없이 뚫어지라 쥬웰을 보고 있었다.
어찌나 뚫어지는 듯한 시선인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할 법한 시선이었다.
‘……오라버니는 날 왜 그렇게 보고 있는데?’
쥬웰은 얼떨떨한 얼굴을 했고, 마리가 뽀로통하게 말했다.
“그렇게 보시다가 로드 얼굴 뚫어지겠어요, 리델하트 님.”
리델하트는 흠칫하더니 시선을 접시로 돌리고는 누가 봐도 어색한 동작으로 스테이크를 세게 썰었다.
“……안 봤다.”
티 나는 거짓말에 옆에서 마리가 대놓고 비웃었다.
“거짓말은. 리델하트 님도 로드가 사랑스러워 본 것 맞죠?”
“……아니다.”
“뭐, 이해해요. 로드의 사랑스러움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니, 넋을 잃고 볼 수도 있죠.”
리델하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더욱 세게 스테이크를 썰며 짜증 내듯 말했다.
“정말 안 봤다. 난 그냥…….”
리델하트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다.”
그 반응에 쥬웰은 잠시 묘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리델하트의 이런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설마 나한테 반한 건가?’
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쥬웰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니까.
누구든 반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상대가 리델하트란 것이다.
‘리델하트 오라버니는…… 원래 날 좋아했지.’
그러니까 리델하트는 원래 ‘에스텔레’를 좋아했다.
가족으로?
아니, 이성으로.
리델하트는 다 큰 성인이 되어 정치적 목적으로 입양되었다.
그가 에메랄드가에 들어왔을 때 나이는 이십 대 초반이었다. 에스텔레도 다 커서 스무 살 남짓했을 때였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에스텔레를 비롯한 에메랄드가의 사람들을 진짜 가족으로 느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에스텔레에게 이성으로서 마음을 뺏겼다.
다만 그 마음을 일절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에스텔레가 곤란해할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향한 리델하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었다.
‘이런 끔찍한 복수를 바랄 정도였으니.’
그런데 그런 리델하트가 흔들리고 있다?
‘……어쩌면, 오라버니는 내가 에스텔레임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같은 영혼이니까.
본능적으로 느끼고 끌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마리도 본능적으로 내가 에스텔레임을 느끼고, 끌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쥬웰은 속으로 번뜩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미 다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쥬웰은 마리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아무리 원래 성격이 엉뚱하다고는 해도 그녀를 대하는 마리의 태도가 너무 스스럼없었다.
‘……설마.’
그때, 마리가 말했다.
“디저트도 먹어야죠. 여기 디저트 가게도 유명한 곳 있는데, 어떤 것으로 드시겠어요?”
“……딸기 케이크.”
“네, 어서 가요. 쥬스는 당연히 딸기 주스죠? 딸기 아이스크림도 얹을까요?”
“……그래.”
날씨가 좋아 야외에서 디저트를 먹었다.
멍하니 노곤하게 거리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어?’
쥬웰은 순간 멈칫했다.
생각지도 않은 인물을 본 것이다.
“왜 그러세요, 로드?”
“…….”
하지만 쥬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방금 본 인물이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누굴 보시는지……?”
마리와 리델하트는 쥬웰의 시선을 따라가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평범한 평민 여인이었다.
나이는 사십 대 중반? 후반?
다소 고운 얼굴이긴 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인물이었다.
“로드, 왜? 아시는 분인가요?”
쥬웰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나이 지긋한 종업원에게 물었다.
“이보게.”
“네, 나리.”
“저 여인에 대해 아나?”
“네? 아, 네. 시에나를 말하는군요. 근처에서 남편과 가게를 하는 이입니다.”
“……남편과?”
“네, 20년 전쯤 결혼했지요.”
“……저 여인이 이 도시에 온 지는 얼마나 됐지?”
종업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25년? 그 정도 되었을 겁니다. 저랑 비슷한 시기에 이 도시에 왔으니까요. 이곳에 오기 전에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난 건지 큰돈을 가지고 있어서 도시에 오자마자 집을 사고 가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정착한 지 5년 뒤쯤 지금의 남편을 만났지요.”
그렇게 설명한 종업원은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시에나가 나리께 무슨 실례라도?”
귀족임이 분명한 쥬웰이 난데없이 평민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자 경계심을 보인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아니네. 혹시 아이는? 아, 저기 딸이 있군.”
마침 한 소녀가 시에나라고 불린 여인에게 달려가 엄마라 부르며 꼭 안겼다.
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쥬웰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녀였는데 시에나란 여인의 딸인 듯했다.
둘은 서로를 보며 환하고 다정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쥬웰은 왜인지 기분이 울렁였다.
“……로드?”
마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쥬웰의 기분이 가라앉았음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곧 피식 웃었다.
“아니, 별일 아니야.”
“……마스터.”
“진짜로. 진짜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도록.”
시에나.
저 평민 여인은 쥬웰, 아니, 에스텔레의 친모였다.
그러니까.
정말 별일 아니었다.
쥬웰은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딸기 케이크를 먹었다.
딸기 케이크는 여전히 달콤하니 맛있었다.
* * *
그렇게 달콤한 여행은 끝났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중북부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쥬웰의 얼굴은 딱딱히 굳었다.
정확히는 창백하게 질렸다.
“로드?”
“……아니. 신경 쓰지 말도록.”
마리와 리델하트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사실 이곳은 절대 오고 싶지 않았는데.’
이곳은 에스텔레 시절, 가장 끔찍한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오긴 했지만 역시나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바로, 원혼을 찾으러 가지.”
“……네.”
무거워진 쥬웰의 분위기에 마리와 리델하트의 얼굴도 같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뜻밖의 방해가 있었다.
“출입할 수 없습니다.”
“뭐?”
“이 근방은 페리도트 대공가에서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페리도트 대공가라니? 광휘의 대공의 명령이란 건가?”
“네, 그렇습니다.”
쥬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스넨이 시킨 일이란 것이다.
왜?
“어쨌든 그건 따를 수 없겠군. 안에 꼭 들어가 봐야 하니 비켜주도록.”
“……그게.”
“비키라고 했네.”
어렵게 설득할 필요 없었다.
쥬웰은 간단히 앞을 가로막은 이들에게 정신 조작을 걸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딱딱히 얼굴을 굳혔다.
저 너머에 작은 외딴 마을이 있었는데,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기운이라니? 도대체 원혼의 힘이 얼마나 크길래? 아니, 얼마나 깊은 한을 지닌 원혼이길래?’
흑마도사의 힘이 지닌 상처에 비례하는 것처럼, 원혼이 지닌 힘도 지닌 한에 비례한다.
아직 모습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멀리서도 소름이 끼칠 정도의 힘이라니.
지금껏 숱한 원혼과 만나본 그녀이지만 이렇게나 강한 힘을 지닌 원혼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에메랄드 공작가에 어떤 원한을 지닌 인물인 거지?’
무거운 얼굴로 쥬웰과 일행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순간.
휙.
저 멀리서 잔영처럼 무언가가 지나갔다.
문제의 원혼이었다.
그리고 그 원혼을 본 순간.
쥬웰은 멍하니 굳어버렸다.
‘……거짓말.’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건가 했다. 아니, 제발 잘못 본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제대로 본 게 맞았다.
절대로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쥬웰의 안색이 시체처럼 질렸다.
손끝이, 아니,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로드?”
“괜찮으십니까?”
“돌아가.”
“네?”
“너희는 돌아가라고!”
쥬웰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리와 리델하트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쥬웰은 그들을 신경 쓸 수 없었다.
“명령이야. 당장 돌아가. 어서!”
거칠게 말한 쥬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가 있었다. 방금 봤던 원혼의 모습.
‘에스텔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즉, 저 원혼은 에스텔레, 그녀가 죽으면서 남기고 간 원혼이었다.
* * *
저벅.
둘을 돌려보낸 후, 쥬웰은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은 텅 비어 고요했다.
쥬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목격자를 정리했대요.’
‘아마, 에메랄드 공작가에 원한을 지닌 인물인 것 같아요.’
왜 짐작 못 했을까?
바보같이.
이곳은 바로 ‘그 끔찍한 일’이 일어났던 곳인데.
3년 전, 그녀는 소중한 이들에게 속아 이 근방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졌다.
즉, 이곳은 그녀의 인신 공양이 일어난 장소였고, 끔찍한 죽음을 당한 그녀의 한이 원혼으로 남은 것이다.
“하.”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본인의 원혼을 만나게 되다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세상 누구보다 끔찍한 죽음을 맞았으니 원혼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특별하게 생각할 것 없어. 어차피 원혼은 죽은 이가 남긴 찌꺼기니, 저건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들은 원혼을 대단한 무언가로 거창하게 여기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죽은 이가 남긴 한(恨).
아무것도 아닌 찌꺼기였다.
‘차라리 잘됐어. 모르는 이의 원혼을 희생시키는 건 찝찝하다고 생각했으니. 내 원혼이면 거리낄 것 없어.’
쥬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본인이 남긴 원혼이니 어떤 거리낌 없이 제물로 삼으면 됐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일까?
뚝,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왜?’
쥬웰은 당황해 자신이 흘린 눈물을 바라보았다.
왜 눈물을 흘린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뭐야, 짜증 나게.”
강하게 눈가를 닦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고, 원혼이 있는 집 안으로 향했다.
끼익.
문을 열자 집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집 안의 정경을 본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왜 자신의 원혼이 이 집에 들어왔는지 눈치챈 것이다.
아늑한 햇볕 드는 방.
복작복작하게 행복한 가족이 살았을 것 같은 집이었다.
과거, 에스텔레 시절 바라던 광경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아늑한 집에서 소중한 이들과 행복한 일상을 살아보고 싶었다.
‘……날 좋아해 주는 사람과 맛있는 식사를 하고, 서로 손을 잡고 마음 편히 산책도 해보고 싶어요.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도 꾸려보고 싶어요. 저녁노을을 보며 오늘 하루 좋았다고 생각해 보고 싶어요.’
이게 바로 에스텔레가 바라던 꿈이었으니까.
그 꿈을 바라, 저 원혼은 이 집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쥬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집 안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익숙한 얼굴.
생전, 에스텔레의 모습이었다.
-…….
원혼은 멍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왜?
원혼은 단번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본 듯했다. 당연했다.
쥬웰은 숨을 들이켰다.
일단,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말문이 탁 막혔다.
뭐라고 이야기한단 말인가?
지금 자신의 처지를 뭐라고?
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 없었다.
같은 존재여서일까?
원혼은 단번에 그녀의 상황을 모조리 다 알아차린 듯했다.
-너…… 너…… 왜 이런 모습인 건데?
“……뭐?”
-너 왜 이따위 모습이냐고!
원혼이 버럭 화를 내었다.
단순히 소리만 지른 게 아니다.
어마어마한 기세가 몰아쳤다. 저릿저릿한 소름이 올라왔다.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힘.’
쥬웰은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이야기야? 나는…….”
-왜 이렇게 비참한 모습이냐고!
원혼은 버럭 외쳤다.
-난 ‘내’가 이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는데! 행복해지길 바랐는데! 왜 이렇게 끔찍한 꼴이냐고!
“…….”
쥬웰은 우뚝 입을 닫았다.
지금, 원혼이 말하는 건 외양이 아니었다.
바로 현재 끔찍이 ‘불행한’ 그녀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원혼의 눈에 핏발이 섰다.
원혼에게서 점점 더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위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일이 터졌다.
원혼이 쥬웰을 공격한 것이다.
퍼억!
얼굴을 얻어맞은 쥬웰은 뒤로 물러났다. 입술에서 주룩 피가 흘러나왔다.
‘이…….’
하지만 원혼은 멈추지 않았다.
더욱 거친 기세를 내뿜으며 쥬웰을 공격했다.
-난 내가 행복해지길 바랐어! 근데, 넌 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 왜 이런 끔찍한 꼴이냐고!
퍼억!
다시 강렬한 공격이 작렬했다.
버티지 못하고, 쥬웰은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이……!”
쥬웰은 이를 악물고 반격하려 하였다.
하지만 원혼의 얼굴을 보는 순간 탁 힘이 풀렸다.
원혼은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을 보자, 쥬웰은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원혼은 계속해서 쥬웰을 공격했다.
울면서.
쥬웰은 멍하니 어떤 방어도 하지 않고 원혼이 휘두르는 공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았다.
순식간에 쥬웰의 얼굴과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하지만 쥬엘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공격을 당할 때마다 상처가 생겼지만 뜻밖에 아프지 않았다.
아니, 통각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게 괴롭다는 감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정작 쥬웰을 괴롭히는 건, 다른 것.
원혼이 흘리는 비통한 눈물이었다.
저 눈물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왜! 왜! 이따위 꼴인 거냐고! 난 내가 행복하길 바랐는데!
쥬웰은 그 말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그런 건가.’
저 원혼의 정확한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저 원혼은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 마음이 남긴 한이야.’
원혼은 죽은 이의 한이 남긴 잔류 사념이다.
그리고 그 한은 다 제각각이었다.
미련, 복수심, 못 이룬 꿈에 대한 갈망 등등.
같은 죽음을 맞았어도 원혼이 남는 이유는 다 달랐다.
그리고 지금 저 원혼은 못 이룬 에스텔레의 꿈, 행복을 향한 갈망이 남은 거였다.
‘하긴. 게헨나에 처음 떨어졌을 때만 해도 내 복수심은 크지 않았으니.’
게헨나에 떨어진 초창기만 해도 그녀는 영혼의 빛을 잃지 않았다.
찬란한 영혼의 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던 영혼이 600년의 세월 동안 고통받으며 시커멓게 변해 복수만을 갈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저 원혼은 원수를 향한 복수심보다는 자신이 행복해지길 바랐고, 쥬웰이 끔찍한 악마가 된 것에 비통해하는 것이었다.
쥬웰은 원혼을 진정시키기 위해 말했다.
“난 이제 행복을 바라지 않아. 그러니…….”
-거짓말!
“……!”
원혼이 발악하듯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 너도 지금 스스로의 처지에 비통해하고 있잖아! 끔찍한 악마가 된 것에!
“……그만.”
하지만 원혼은 멈추지 않았다.
-사실은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잖아! 누구보다! 행복을 갈망하고 있잖아! 소중한 이들과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잖아!
“그만하라고!”
결국 쥬웰은 바락 외쳤다.
“네가 뭘 안다고! 너 따위가!”
퍼억!
쥬웰도 더는 참지 않았다.
주먹을 휘둘러 원혼을 후려쳤다.
원혼의 영체가 흔들렸다.
하지만 에스텔레의 원혼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강력한 원혼.
쓰러지지 않고 더욱더 강렬하게 달려들었다.
-왜! 왜 이따위 꼴이냐고! 왜!
원혼이 울부짖었다.
서로 공격이 오갔다.
둘 다 방어는 도외시하며 오로지 상대를 공격하기만 했다.
쥬웰은 원혼이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은 후, 주룩 피를 흘리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어쩌면 저 원혼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이번에 여행을 오며 즐겁다고 생각했으니까. 또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으니까.
이런 생각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었다.
새로 생긴 아버지 엔리크와도 더욱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흰 강아지, 유스넨과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쥬웰은 어느덧 자신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 전.
우연히 만났던 시에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껏 소식을 모르고 있던 에스텔레의 친모.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던 어머니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것도 행복한 얼굴로.
어머니의 품에 안긴 이름 모를 동생도 행복해 보였다.
그녀도…… 그렇게.
행복하고 싶었다.
“그만하라고!”
결국 쥬웰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제발…… 제발 그만해. 아악! 아아아아악!”
발작을 일으킨 듯한 처절한 비명에 그녀의 원혼이 우뚝 멈추어 섰다.
쥬웰은 바닥에 바짝 수그린 채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알고 있어. 다 알고 있다고. 으흑. 흐으윽. 흑. 흐흑.”
-…….
쥬웰의 울음에 원혼은 멍하니 선 채 마주 눈물만 흘렸다.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던 집에는 통곡 소리만 가득 울렸다.
쥬웰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눈에 핏발 선 광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행복을 바라. 하지만 불가능하잖아.”
-…….
쥬웰은 바락 외쳤다.
“불가능하다고! 원수들이 저렇게 살아 있는데!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냐고!”
쥬웰의 손이 원혼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마치 울분을 풀려는 듯.
그때, 원혼이 생각지 못한 물음을 하였다.
-……복수를 포기하면?
“……뭐?”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잖아.
쥬웰은 뻣뻣이 굳어 멍한 얼굴을 했다.
지금…… 뭐라고?
-알고 있잖아. 복수가 널 결국 파멸시킬 거란 것.
원혼이 한없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쥬웰의 눈물을 닦았다.
-……넌 결국 복수 때문에 파멸하게 될 거야.
그 말에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웃음은 곧 터질 듯한 광소가 되었다.
“아하하하하하하!”
쥬웰은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얼굴로 기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관없어. 내 파멸 따위는.”
쥬웰의 눈동자에 미칠 듯한 광기가 일렁였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난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쥬웰은 손에 힘을 쥐었다.
마치 미련을 버리듯.
“이만 내 제물이 되어 사라져.”
* * *
일이 끝났다.
원혼은 제물이 되어 그녀의 영혼을 치료하는 희생양이 되었다.
깨진 영혼을 치료했으니 앞으로 당분간은 큰 문제가 없으리라.
문제없이 해결되었지만, 왜일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 쥬웰은 멍하니 마을을 나와 걸었다.
“…….”
마침, 두득두득 비가 내렸다.
‘하필 이럴 때 비라니. 너무 삼류 소설 같은 설정이잖아.’
쥬웰은 텅 빈 눈빛으로 생각했다.
삼류 소설 같았다.
이런 거지 같은 상황도.
울고 싶은 마음에 뺨 때리듯 때에 맞춰 내려주는 비도.
터덕터덕 발걸음을 옮겼다.
기껏 비가 내려주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사실, 눈물 흘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아까도 너무 흥분했다는 생각이었다.
그깟 원혼 만난 게 무슨 큰일이라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건 애초에 잘 알고 있던 일 아닌가?
“그러니…… 괜찮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쥬웰의 눈에 헛것이 보였다.
유스넨이었다.
유스넨이 저 앞에서 참혹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헛것인가? 아니면, 또 삼류 소설 같은 설정?’
가련한 여주인공에게 때에 맞춰 남자 주인공이 나타난다.
그야말로 삼류 소설 같은 설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삼류 소설이어도 좋으니, 헛것이 아니었으면.’
지금 눈앞에 나타난 유스넨이 헛것이 아니길.
그리고 다행히 헛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와락.
유스넨이 그녀를 껴안은 것이다.
한없이 아픈 얼굴로.
그 단단하며 따뜻한 품을 느낀 순간, 쥬웰은 유스넨이 헛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진짜다.
그 사실이 좋아 쥬웰은 헤실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
“내가 에스텔레인 것.”
유스넨의 눈빛이 흔들렸다.
쥬웰은 재차 말했다.
“알고 있잖아.”
에스텔레의 원혼이 나타난 곳을 폐쇄한 건 유스넨이었다. 즉, 그는 그녀의 죽음의 진실을 짐작하고 있다는 이야기였고, 쥬웰은 그가 자신의 정체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껏 그가 그녀에게 보인 모습이 설명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유스넨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구나.”
쥬웰은 더 묻지 않았다.
더 물을 기운이 없었다.
그냥 그의 품에 기대고만 있었다.
하지만 쥬웰은 마음 편히 그의 품에 기대 있지도 못하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이건? 왜?’
유스넨의 머리카락이었다.
그의 찬란한 은발에 희미한 잿빛이 섞여 있었다.
‘하.’
쥬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느꼈던 괴로움보다 더욱 커다란 좌절이 그녀의 가슴속에 차올랐다.
저 잿빛 머리카락의 의미는 하나였다.
유스넨의 타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타천(墮天)의 모래시계가 흐르기 시작했다.
* * *
짹. 짹.
아침 새가 울렸다.
호텔 방에서 눈을 뜬 쥬웰은 멍하니 생각했다.
‘밤을 보내고 났더니, 아침 새가 짹짹이고……. 이건 또 무슨 삼류 소설 같은 장면인 거지…….’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어젯밤, 그녀는 유스넨과 밤을 보냈다.
그녀의 옆에는 흰 강아지 유스넨이 곱게 잠들어 있었다.
‘……내가 왜 그랬지.’
쥬웰은 옆에 누워 잠들어 있는 유스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맑은 얼굴로 곱게 잠들어 있는 그를 보니, 이유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취했던 것도 아니고.’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와 밤을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비에 젖어 호텔 방에 왔는데 왜인지 또 눈물이 났고, 유스넨이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입맞춤을 하였고,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밤을 보내게 되었다.
어젯밤의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린 쥬웰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가 덮친 거잖아. 망할.’
유스넨은 아주 다정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위로하려고만 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를 넘어뜨린 건 그녀였다.
‘……왜 그랬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텅 비어버린 마음을 무엇에라도 매달려 잊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유스넨과 하나가 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연달아 터진 일로 제정신이 아니라, 반쯤 미쳐 버릴 것만 같은 마음이었던지라, 이성적인 판단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미안하네.’
흰 강아지는 침대 옆에서 곱게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순백한 얼굴을 보니 왠지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았다.
‘그런데 몸이 왜 이리 상쾌하지? 최근 들어 가장 상쾌하네?’
아니, 최근 들어서가 아니라 게헨나에서 돌아온 이후 가장 상쾌한 아침이었다.
‘제물로 영혼을 치료해서? 아닌데?’
쥬웰은 곧 이유를 깨달았다.
‘흰 강아지 효과구나.’
이전부터 유스넨과 접촉하면 컨디션이 좋아지는 그녀였다.
성력은 물론, 가벼운 신체 접촉만 해도 좋은 영향을 주었는데 심지어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 어마어마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흰 강아지의 몸이 보약인 건가.’
쥬웰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좋네. 이렇게 연인 옆에서 일어나는 것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연인과 같이 사랑의 밤을 보낸 후 호텔 방에서 기분 좋게 일어나는 것.
이전 에스텔레 시절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생각지 않게 소원 하나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소원이 하나 더 있었지.’
쥬웰은 내친김에 그 소원도 이루기로 하였다.
잠들어 있는 연인에게 뽀뽀하는 것이다.
천천히 그녀의 입술이 흰 강아지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지려는 순간.
와락!
유스넨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껴안았다.
마치 도망가지 말라는 듯.
쥬웰은 흠칫 놀랐지만 순순히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일어나 있었나요?”
“……말 놓으십시오.”
“네?”
“이제 이전처럼 이야기해도 되지 않습니까?”
에스텔레 시절, 그녀는 친동생을 대하듯 편하게 유스넨을 대했다.
쥬웰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유스넨의 눈이 스르르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말하니, 좋군요.”
많은 의미를 함축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손 좀.”
쥬웰은 여전히 유스넨에게 껴안긴 상태였다.
하지만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안 놔줄 겁니다.”
“뭐?”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요. 평생. 평생 안 놔줄 겁니다. 집착남이 되어서 꼭 껴안고만 있을 겁니다.”
그러며 유스넨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은 제 누나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쥬웰의 가슴이 알 수 없게 두근거렸다.
‘이전에 들었을 때랑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르지? 섹시해져서인가?’
과거, 유스넨이 누나, 누나 할 때는 그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따라다니는 느낌?
그런데 똑같은 단어인데, 지금은 왜 이렇게 매혹적으로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귓가에 대고 뜨거운 숨길을 속살거리는 것만 같았다.
‘외모 때문인지도.’
쥬웰은 유스넨의 얼굴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어릴 적 유스넨은 볼살 통통한 귀여운 애기였다. 괜히 강아지라 부른 게 아니다.
하지만 지금 유스넨은…… 솔직히 강아지란 명칭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은빛 맹수, 그중에서도 은빛 늑대란 명칭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외모였다.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쥬웰은 단순히 그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이런 두근거리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바로 유스넨의 눈빛.
오로지 그녀를 향한 갈망만이 가득했다.
그 진득한 갈망을 느낀 순간, 다시 가슴이 떨렸다.
유스넨이 그녀를 안지 않은 다른 한쪽 손을 들어 앞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녀는 그의 몸에 올라탄 상태고, 그의 단단한 팔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옭아매듯 안고 있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잖아?”
침식 사건 내내 같이 있다가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유스넨이 고개를 젓고는 뜻밖의 말을 하였다.
“아니, 지난 13년을 말하는 겁니다.”
“……!”
유스넨의 눈동자에 아픔이 차올랐다.
“그동안…… 정말…… 정말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쥬웰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를 향한 아득한 그리움과 갈망이 가슴을 흔들었다.
가슴이 벅찼고, 동시에 아팠다.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지금껏 서로 일부러 외면해 왔던 사실을 꺼냈다.
“난 네가 알고 있던 에스텔레가 아니야.”
“……누나.”
“그렇게 부르지 마. 네가 알던 에스텔레는 이미 죽었어.”
쥬웰은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난 이제 끔찍한 악마가 되었어. 그러니 너와 난…….”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유스넨이 중간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당신이 어떻게 변했든 상관없어요. 당신은 여전히 제 누나이고…… 제 모든 것입니다. 제 목숨보다, 영혼보다 소중한.”
유스넨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혀 끔찍하지 않아요.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그렇지 않아.”
“아니, 제 말이 맞아요.”
유스넨은 입술을 옮겼다. 코에도, 뺨에도 입을 맞추었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아요. 설사 당신이 악마의 겉모습을 하게 되었더라도 전 압니다. 당신이 얼마나 찬란한 존재지.”
유스넨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설사, 당신이 진실로 끔찍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은 제 누나인데. 제게 당신이 어쩐 존재인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설사 누구보다 끔찍해졌더라도, 당신은 제게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 말을 듣는데, 왜일까?
쥬웰은 눈물이 주룩 한 방울 흘렀다.
“아.”
쥬웰은 허겁지겁 눈물을 닦았다.
‘왜 울어? 바보같이? 네가 울보야? 맨날 울게?’
하지만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미, 미안.”
“……뭐가 미안합니까? 이리로 오십시오.”
유스넨은 고개를 젓고는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단단한 품이 자신을 감싸는 순간.
쥬웰은 왈칵 울음이 터졌다.
그저 눈물만 흐른 게 아니라, 정말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끄윽, 끅. 흐윽. 흑.”
유스넨은 아무런 말 하지 않고 그런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다는 듯.
그리고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쥬웰은 자신이 왜 눈물 흘리는지 깨달았다.
안도였다.
사실, 그녀는 본인도 모르게 걱정하고 있었다.
유스넨이 그녀가 끔찍한 악마임을 알고 그녀에게 실망할까 봐. 경멸하게 될까 봐.
우스운 마음이었다.
그녀와 유스넨이 가까워지는 건 사실 옳은 일이 아니다.
둘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끔찍한 파멸만이 기다리게 될 테니까.
그러니 그를 위해서는 오히려 그가 그녀를 적대하는 게 옳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막상 유스넨이 자신이 끔찍한 악마임을 알고도 흔들림 없이 그녀를 바라보니 안도감이 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깨달았다.
‘유스넨과 멀어지기 싫어.’
그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유스넨에게 다가올 미래 따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 바라고 싶었다.
그게 그녀의 솔직한 본마음이었다.
‘빌어먹을.’
쥬웰은 이를 악물고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말했다.
“미안, 옷이 다 젖었네.”
“괜찮습니다. 아니, 좋습니다.”
“……좋다고?”
유스넨은 그녀의 눈물로 젖은 자신의 셔츠를 보며 말했다.
“이 셔츠. 안 빨 겁니다. 보물로 삼을 겁니다.”
“……보물로?”
“네. 당신의 흔적이 남은 거니까요.”
그 말에 쥬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눈물이 젖은 셔츠를 보물로 삼겠다니.
그건 좀 아니지 않나?
“……너 지금 한 말, 변태 같은 것 알아?”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듣자 유스넨은 충격을 받은 듯 당황했다.
“그, 그렇습니까? 하…… 하, 하지만, 전 그런 뜻이 아니라…… 당신의 흔적이 남은 건 다 소중하니…… 아, 아니…… 불쾌하시면…….”
유스넨은 당황해 말을 버벅거렸다.
쥬웰은 그런 유스넨의 모습이 귀여워 쿡쿡거렸다.
“그러지 말고.”
쥬웰은 손을 뻗어 유스넨의 목을 감쌌다.
그러고는 그의 귀에 살짝 입맞춤하였다.
“……!”
그녀의 감촉이 귀에 닿았다가 떨어지자 유스넨은 벼락에 맞은 듯, 아찔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누…… 누나?”
쥬웰은 빙긋 웃었다.
“이런 흔적 따위를 쓸데없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고.”
유스넨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왜인지 쥬웰의 말이 유혹적으로 들렸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음?”
“……참기 어렵습니다.”
쥬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진하게 물었다.
“뭘 참아?”
“그, 그게…….”
유스넨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모습에 쥬웰은 다시 쿡쿡 웃었다.
‘아아.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지.’
쥬웰은 충동이 들어, 그대로 움직였다.
도둑처럼 유스넨의 입술을 훔치고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도망친 것이다.
“……!”
유스넨은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얼굴을 하였다. 그의 얼굴이 이제는 애처로울 정도로 붉어졌다.
“그, 그만.”
애원하는 듯한 음성.
아까 말했듯 둘은 찰싹 붙어 있는 상태이다.
쥬웰이 유스넨의 몸에 올라타 있었다.
원래는 유스넨이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가둬 이런 자세를 만든 거지만, 상황이 역전되었다.
유스넨은 당황해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녀는 순순히 그가 달아나게 놔두지 않았다.
양손으로 꼭 강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이번에는 그의 목에 간질간질하게 입을 맞추었다.
“……!”
유스넨이 다시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그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제발…… 더는 정말 참기 어렵습니다.”
쥬웰이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였다.
“너 눈치가 없구나?”
“……네?”
“참지 말라고 이러고 있는 거잖아.”
“……!”
유스넨의 눈이 커졌다.
뻣뻣이 굳은 그의 눈동자가 쥬웰과 마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향한 갈망으로.
이번엔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녀가 했던 것처럼, 짧은 도둑 입맞춤이 아니었다.
깊고 깊은 탐하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쥬웰은 강렬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유스넨이 물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미칠 듯한 갈망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억지로 억누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만약, 바라지 않으신다면…….”
“바라.”
쥬웰이 유스넨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도 그를 향한 갈망이 담겼다.
“너를 원한다고. 넌…….”
내 흰 강아지니까.
그 말과 함께 다시 서로의 입술이 겹쳐졌다.
이번엔 누가 먼저가 아니었다.
서로를 원하듯 거친 입맞춤이 이어졌다.
사고가 멎고, 서로만을 느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갈망이 방 안을 뜨겁게 달구었다.
* * *
‘……좋네.’
쥬웰은 멍하니 생각했다.
뜨거운 열기가 가신 후, 둘은 멍하니 누워 있었다.
아니, 멍하니 있는 건 쥬웰뿐.
유스넨은 여전히 뜨거운 눈빛으로 쥬웰을 보고 있었다.
전혀 식지 않은 그의 눈빛을 보고 쥬웰은 찔끔하였다.
‘……뭐야? 아직도? 잘못 유혹한 건가.’
쥬웰의 머릿속에 유스넨은 여전히 흰 강아지였다.
귀엽고, 부둥부둥 해줘야 할 것 같은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물론 유스넨은 훌쩍 컸지만, 머릿속 기억이 그랬고, 은연중 그를 어리게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누나 같은 마음으로 유혹했는데…… 자신의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훌쩍 큰 건 외모만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배려해 억누르고 있었을 뿐.
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래, 우리 흰 강아지가 어른이 되었어. 어른이. 아니, 짐승이 된 건가.’
쥬웰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여전히 유스넨의 뜨거운 눈길이 닿는 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하였다.
힘들어서 이제는 더 못 한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노곤해 손끝 하나 까닥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유스넨도 더 욕심내지 않았다.
아니, 욕심은 여전히 가득한 듯했지만, 그녀를 배려해 길게 한숨을 내쉬어 마음을 억누르고는 말했다.
“먹을 걸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그 전에 씻겠습니까? 목욕물도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음…… 다 귀찮은데.”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먹는 것도, 씻는 것도 다 귀찮았다.
그런데 유스넨이 그런 쥬웰의 반응에 말했다.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지요. 귀찮으면, 제가 다 먹여 드리겠습니다.”
“먹여준다고?”
“네,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다 먹여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쥬웰은 헤실 웃음을 지었다.
흰 강아지가 직접 포크로 먹여준다라.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간질간질 기분이 좋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로. 디저트는 딸기 케이크. 음료는 딸기 주스.”
“네, 전부 준비시키겠습니다. 씻는 것은 귀찮을 테니 그것도 씻겨 드리겠습니다.”
“돼, 됐거든?”
쥬웰은 질색하여 말하였다.
아니, 얘가?!
씻겨주겠다니?
‘어른이 된 게 아니라, 변태가 되었어!’
하지만 유스넨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마침 페리도트가의 고용인도 함께 와 있으니, 하녀장에게 부탁하겠습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쥬웰은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 흰 강아지가 그러면 그렇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런데 왜 페리도트가의 하녀장을?”
“……그냥, 왠지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데려왔습니다.”
“천사의 직감?”
“네.”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쥬웰은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고작 이런 일에 천사의 직감이 발현돼?”
“고작이 아니지 않습니까?”
“응?”
유스넨이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왜일까?
이런 가벼운 입맞춤에도 가슴이 두근 뛰는 건.
“당신과 관련한 일이니, 절대 고작이 아니지요. 당신과 관련한 일은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 천사의 직감이 발현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래.”
쥬웰은 방금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뜨거웠다.
‘……뭐야.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이마에 살짝 입맞춤하고 마는 건 뭐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는 흠칫했다.
짐승이 된 건, 유스넨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도 짐승이 된 것 같았다.
마침, 둘의 눈빛이 마주쳤다.
두근.
두근.
서로의 심장이 뛰었다.
도대체 이놈의 심장은 왜 시도 때도 없이 뒤는 걸까?
그런데 유스넨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순간 쥬웰은 독심술이라도 발현한 듯 그의 마음이 읽혔다.
입 맞추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누나가 힘들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쥬웰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뽀뽀는 괜찮은데.”
“……하지만 힘들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나도 아쉽고.
하지만 왠지 민망해 그 말은 속으로 삼키고 대신 말했다.
“어차피 네가 다 해줄 거라 손끝 하나 까닥할 필요 없다며.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그렇긴 하죠. 제가 다 해드릴 테니, 괜찮을 겁니다.”
쥬웰은 쿡쿡 웃고는 눈을 감았다.
곧, 유스넨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았다.
따뜻하고 행복한 감촉이었다.
‘좋아.’
이후, 나른한 시간이 흘렀다.
쥬웰은 유스넨이 불러준 하녀장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었다.
솔직히 남의 도움을 받아 씻는 건 취향이 아니었지만 유스넨이 일부러 그녀를 위해 준비한 배려이니 군말 없이 받았다.
다음은 식사 시간이었다.
아주 맛있어 보이는 등심 스테이크가 등장했다.
‘그런데 왜 직접 가지고 왔지?’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호텔 직원이 아닌, 유스넨이 트레이를 끌고 왔다.
“자, 아 하십시오.”
“아.”
약속했던 대로 유스넨이 직접 먹여주었다.
이것도 사실 민망한 일이었지만, 그냥 받았다.
오늘은 이러고 싶었다.
우물우물 맛을 봤는데,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맛있잖아. 이렇게 맛있는 등심 스테이크가 세상에 있다니?’
물론, 등심 스테이크가 맛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
등심 스테이크니까. 소고기 등심은 언제나 진리인 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등심 스테이크는 그런 수준을 넘었다.
얼마 전 마리, 리델하트와 먹었던 등심 스테이크 맛집보다도 훨씬 훌륭했다.
‘고작 호텔 룸서비스 스테이크가 이렇게 훌륭하다니? 혹시 은거 스테이크 기인이 숨어 있는 곳인가?’
“맛있다.”
“그렇습니까?”
“응, 최고야.”
그 말에 유스넨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구운 겁니다.”
“……뭐?”
“씻고 계신 동안 주방을 빌려서 제가 구워 왔습니다.”
쥬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이 스테이크를 네가?”
“네.”
“어떻게?”
“등심 스테이크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 말에, 쥬웰은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어릴 때였다.
‘누나는 무슨 요리 좋아해요?’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
그 말을 듣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바보같이.’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등심 스테이크 애호가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이 스테이크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노력이 깃들어 있는지.
특히, 등심 스테이크는 어떻게 구워도 맛있지만 반면에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기는 굉장히 어렵다.
이 정도면 등심 스테이크 외길 인생길을 걸은 요리의 명인이 바칠 법한 노력을 했어야 가능한 솜씨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노력을 그녀를 위해 했다는 것이다.
고작,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왜인지 가슴이 울렁여 쥬웰은 말했다.
“……고마워.”
“천만에요. 사실 이건, 저를 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응?”
“이런 일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당신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미쳤을지도 모르니까요.”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유스넨은 부드럽게 웃었다.
“어쨌든 오늘 당신 덕분에 소원을 두 개나 이룰 수 있었습니다.”
“어떤?”
“하나는 제가 해준 스테이크를 당신께 맛보게 해주는 것과.”
유스넨은 스테이크를 썰어 쥬웰의 입에 건네주었다.
“당신께 이렇게 직접 음식을 먹여주고 싶었습니다.”
“…….”
“평생 이루지 못할 줄 알았는데…… 드디어 이루었군요.”
쥬웰은 침묵했다.
그녀는 가만히 있다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유스넨, 사실 나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쥬웰이 하려는 말을 짐작한 걸까?
유스넨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 다시 웃는 낯으로 돌아와 말했다.
“하지 마십시오.”
“……!”
“식사 중 아닙니까? 부디, 이 순간의 행복을 온전히 제가 누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유스넨은 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하실 이야기는 식사가 끝난 후 부탁하겠습니다. 대신, 저도 당신께 할 이야기가 있으니, 같이 하겠습니다.”
“할 이야기? 너도?”
“네.”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뭐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하려는 말과 비교하면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아, 하십시오.”
“아.”
“꼭꼭 씹어 드십시오.”
“응, 꼭꼭.”
쥬웰은 유스넨이 건네주는 스테이크를 꼭꼭 씹었다.
꿈에서 깨어나기 싫어 뒤척이는 것처럼.
최대한 천천히 꼭꼭,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자, 여기 딸기 주스입니다.”
“맛있어. 설마, 이것도?”
“네, 저만의 특별한 레시피를 섞어보았습니다.”
“무슨 레시피인데?”
“비밀입니다.”
“가넷가에서도 만들어 먹고 싶은데?”
그만큼 유스넨이 만든 주스는 훌륭했다.
상큼하고, 깊은 맛이 났다.
하지만 유스넨은 단호했다.
“따로 가넷가에서 드시지 못하게 안 알려 드리는 겁니다.”
“음?”
“이 주스를 드시고 싶으면 저와 결혼하면 됩니다. 그러면 맨날 맨날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쥬웰은 황당한 눈으로 유스넨을 흘겨보았다.
그러니까 딸기 주스가 탐나면 자신과 결혼하라는 이야기였다.
“그거 청혼이야?”
“네.”
허를 찌른 대답에 쥬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가 할 말이 있다고 했지요?”
유스넨이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 누나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이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
쥬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거 너무 멋없는 청혼인데.”
“……제대로 된 청혼은 따로 할 겁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지게요.”
하지만 타박한 것과 다르게 쥬웰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뭐야, 이러는 건 반칙이잖아.’
오늘 하루 종일.
유스넨은 반칙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을 무너뜨릴 반칙을 말이다.
‘이렇게 행복한 꿈에 취하게 하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쥬웰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행복한 꿈.
지금 유스넨과 보내는 순간은 그 단어가 어울렸다.
모든 불행과 끔찍한 일을 잊고, 행복함에 취하게 하는 꿈.
‘하지만 이제…… 꿈에서 깰 때가 왔어.’
현실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쥬웰은 다시금 낮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 한숨과 함께.
꿈은 끝이 났다.
“그 말씀은 받아주기 어렵군요.”
쥬웰의 입에서 딱딱한 경어가 흘러나왔다.
“……누나?”
“이제 그 호칭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절 부를 때 바톤 남작이란 호칭으로 부탁해요.”
외인이 쥬웰을 부를 때 쓰는 공식 호칭이었다.
쥬웰이 이러는 이유를 깨달은 유스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페리도트 대공 전하, 저도 당신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쥬웰은 최대한 차가운 눈빛이 되길 노력하며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저와 파혼해 주십시오.”
* * *
순간,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쿵. 쿵.
쥬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팠다.
하지만 참았다.
‘이게 맞아.’
물론, 쥬웰은 유스넨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안 됐다.
‘이대로 그와 더 가까워지면 그는 완벽히 타천하게 될 거야.’
그녀는 유스넨의 은발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잿빛이 보였다.
오로지 영안을 지닌 이들에게만 보이는 빛깔로, 유스넨이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저 은발이 완전한 잿빛으로 물드는 순간, 유스넨은 영광된 빛의 천사에서 끔찍한 타천사가 되어 징벌을 받고 게헨나의 억겁의 고통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건 절대로 피해야 하는 일이야.’
쥬웰이 유스넨에게 바라는 건 하나였다.
그가 행복해지는 것.
물론 사실, 여러 욕심이 더 있긴 했다.
그와 더 함께 있고 싶고.
사랑을 나누고 싶고.
데이트도 하고 싶고.
이것저것 맛있는 것도 같이 먹어보고 싶었고.
결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바람보다 우선시되는 건 그의 행복이었다.
그녀는 유스넨이 자신 때문에 타천하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기에 유스넨이 그녀를 죽일 운명을 맞게 되는지.
의문이 많았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였다.
유스넨이 끔찍한 미래를 맞는 걸 피하도록 노력하는 것.
‘헤어지는 건 싫지만, 지금 조금 아픔을 감수하는 게 나아.’
그런 마음으로 차갑고 잔인하게 말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 끔찍한 악마라고. 당신에게 접근했던 것도 그저 광휘의 대공인 당신을 방심시키려는 목적일 뿐이었습니다.”
“…….”
“지금은 굳이 당신과 가까이 있을 필요 없으니…… 그러니…… 그러니…… 그러니까.”
거기까지 이야기한 쥬웰은 순간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가슴이 아려왔다.
“……어쨌든 파혼해 주십시오.”
강하게 이야기하고, 결연한 눈동자로 유스넨을 바라봤다. 쥬엘은 흠칫했다.
유스넨의 얼굴이 생각보다 태연했다.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뭐지?’
뜻밖의 모습이라, 쥬웰은 얼떨떨하게 말했다.
“파혼해 달라는 제 말 들었습니까?”
“네, 그런데 안 들어줄 건데요?”
“……뭐라고요?”
“안 들어줄 거라고요.”
“……!”
유스넨은 오늘 저녁 메뉴는 샐러드라고? 절대 안 먹을 건데? 내가 오늘 저녁에 먹을 건 무조건 등심 스테이크야, 라고 말하는 듯 태연한 말투로 말하였다.
“전 당신과 결혼할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요? 가넷가로 돌아가면 당장 파혼 서류 보낼 겁니다.”
“흐음.”
유스넨은 묘한 얼굴을 하였다.
“거참, 공교로운 일이군요. 전 결혼을 진행할 청혼 서류를 보내려고 했는데.”
“…….”
“그리고 뭔가 잊고 계신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유스넨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 제국에서 귀족이 약혼 파혼하려면 누구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 줄 압니까?”
“……!”
쥬웰은 아차 싶었다.
귀족이 약혼을 파혼하려면 대법관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국의 대법관은 눈앞의 흰 강아지였다.
“부당히 권한을 휘두르겠다는 겁니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전 여섯 공작가의 가주라 면책 특권이 있어 이런 정도로는 기소도 안 됩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파혼해 주십시오.”
“싫은데요? 당신과 결혼할 겁니다.”
답답해져 쥬웰은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 바보야. 이대로 있다면, 넌 파멸한다고!’
유스넨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러는 건, 그녀를 위해 타천을 각오했기 때문이리라.
‘안 돼. 절대 용납할 수 없어.’
그때 유스넨이 쥬웰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놔!”
“싫습니다.”
유스넨은 평소와 다르게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더욱 꼭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마치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그거 압니까?”
“……뭘?”
“누군가 저보고 집착남의 싹이 있다고 하더군요.”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흰 강아지와 집착남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유스넨이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전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당신을 놓아주고 싶지 않거든요. 절대로 안 놓을 겁니다.”
그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듣는 순간.
쥬웰은 다시금 깨달았다.
흰 강아지가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 된 그는 맹수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는 걸.
그것도 상대를 물고 절대로 놓지 않는 집요한 맹수 말이다.
“절 밀어내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신께 끝없이 집착할 테니까요.”
그러며 유스넨은 맹세하듯 말했다.
“당신이 행복해질 때까지 말입니다.”
* * *
결국, 쥬웰은 유스넨과 파혼하는 데 실패했다.
물론 청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혼해 줘.’
‘싫습니다. 결혼해 주십시오.’
무슨, 서로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듯 이야기가 평행선을 이어나가 결국, 쥬웰은 유스넨을 놔두고 헤어졌다.
그리고 마리와 리델하트와 다시 합류해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에 탔다.
‘어떻게 유스넨과 파혼하지?’
쥬웰은 마차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뚜렷한 묘책이 없어 보였다.
‘젠장, 방법이 없잖아. 법을 바꾸지 않는 한.’
제국법은 합의 파혼이 아닐 경우, 여러 복잡한 절차를 명시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숙려 기간과 대법관의 승인이었다.
대법관의 승인의 경우, 원래는 형식적인 절차였지만.
‘약혼 상대가 대법관인 경우 이건 파혼할 방법이 없잖아. 진짜 법을 바꿔야 하나?’
물론, 법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기는 했다.
가넷 공작가는 국가의 삼권 중 입법과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특히 의회는 가넷가의 개인 소유나 마찬가지인지라 원하면 법 하나 바꾸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차기 가넷 공작위를 물려받기 직전인데, 사적인 이유로 의회를 이용하면 봉신들에게 좋지 않게 여겨질 거야.’
쥬웰은 골치가 아팠다.
결국, 유스넨과의 파혼은 가넷 공작위를 물려받은 뒤에야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왜일까?
가넷 공작이 된 뒤에도 유스넨과의 파혼이 쉽지 않을 것 같은 것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기세이던데.’
오히려 파혼은커녕 결혼 공세를 막는 게 걱정이었다.
유스넨은 작정을 했는지 헛소리를 지껄였다.
‘요즘 로맨스 소설에는 이런 것이 유행이라고 하더군요. 선 결혼 후 연애라고.’
‘……뭐?’
‘그러니, 그 유행에 맞춰 우리 일단 결혼부터 하는 게 어떻습니까?’
쥬웰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파혼하자는 사람한테, 선 결혼 후 연애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뭐, 우리의 경우에는…… 선 결혼 후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로 하면 되겠군요. 어쨌든 결혼해 주십시오.’
‘파혼할 거거든?’
‘이런. 그건 들어주기 불가능한 소망이군요. 그래서 결혼식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화려하게? 아니면, 스몰로? 그것도 아니면 일단, 서류 먼저?’
쥬웰은 한숨을 팍 내쉬었다.
대화가 통하질 않았다.
강적이었다.
‘유스넨이 이런 고구마 스타일이었다니.’
그런데 그때 마차 옆의 테이블에서 쥬웰을 빤히 보던 마리가 말했다.
“로드,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뭐?”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쥬웰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니거든.”
하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닌지, 리델하트도 말했다.
왜인지 기분 나쁜 음성으로.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혹시 약혼자들이라도 만난 겁니까?”
“…….”
마리가 추가로 툴툴거렸다.
“로드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건, 저였으면 했는데, 쳇.”
그런 둘의 이야기에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좋다라.
자신도 모르게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보다.
‘……솔직히 흰 강아지가 청혼한 게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니.’
……그래, 인정하자.
기분은 좋았다.
유스넨이 이렇게 결혼하자고 해주는 게.
참, 복잡한 기분이었다.
파혼해야 하지만 청혼은 기분이 좋다니.
이건 살을 빼야 하지만, 저녁 메뉴로 등심 스테이크가 나왔을 때와 비슷한…….
‘아니, 그게 무슨 황당한 비유야. 어쨌든 무조건 파혼해야 해!’
이러다가 파혼은커녕 유스넨의 청혼 공세에 넘어갈까, 쥬웰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일단, 흰 강아지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더 중요한 일을 하자.’
이제 슬슬 ‘성배 사건’을 진행할 때가 되었다.
마침, 저 멀리서 음성이 들려왔다.
-끄아아아악! 쥬웰 님! 저 죽을 것 같아요! 진짜 죽어요!
해밀턴의 음성이었다.
그는 제국 최악의 마경 골란 고원에서 ‘하이킹’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해밀턴의 비명을 무시하며 쥬웰은 입을 열었다.
“너희에게 시킬 일이 있다.”
쥬웰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둘도 자세를 갖추었다.
“말씀하세요.”
“말씀하십시오.”
쥬웰은 일단 마리에게 말했다.
“옵시디언 상단의 재력을 이용해 한 인물을 찾아주도록.”
“누구를 찾으면 될까요?”
“아낙스.”
“……!”
마리가 살짝 놀란 눈을 하였다.
“아낙스면? 설마?”
“그래, 최강의 십마이지.”
십마(十魔).
마왕 타란툴라를 제외한 최강의 흑마도사 10인을 뜻한다.
그중 한 명인 카비우스는 쥬웰과 맞선 후 소멸한 바 있다.
아낙스는 십마 중에서도 최강의 존재였다.
“혹시, 어째서인지 물어도 될까요?”
“이제 슬슬 옵시디언 패밀리를 확장할 때가 되었으니까.”
둘은 놀란 얼굴을 하였다.
십마 아낙스를 휘하로 들일 거란 뜻이었다.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난 마왕이니, 그에 걸맞은 사악한 부하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정확히는 곧 있을 성배 사건 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성배 사건 말고도 앞으로 벌일 여러 일을 생각하면 밑의 수족이 되어줄 사악한 흑마도사들이 필요했다.
‘이제 마왕으로서 본격적으로 제국을 뒤흔들어야 하니까.’
“아낙스는 우리 가넷가와 연이 깊은 흑마도사니, 로튼 백작의 뒤를 파면 대략적인 행방을 알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옵시디언 상단이 동원할 수 있는 재력이 지금 어느 정도이지?”
“500만 골드 정도 되어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성 몇 개는 통째로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거듭된 투자 성공으로 마리는 제국 최고의 거부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쥬웰은 이렇게 평하였다.
“아직도 부족하군.”
마리는 부정하지 않았다.
“네, 아직 부족해요. 다이아가에 비교하면.”
그들이 노리는 건 다이아 공작가다.
제국 최고의 부를 지닌 가문.
다이아 공작가가 쌓은 금력에 비하면, 옵시디언 상단의 재력은 우스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생채기 정도는 낼 수 있겠군. 프리만 은행의 지분을 잠식할 방법을 내보도록.”
다이아 공작가 소유의 은행 중 하나였다.
사실상 다이아 공작가의 최고 핵심이었다.
“하지만 로드, 외부인은 절대 프리만 은행의 지분을 건드릴 수 없어요.”
“외부인은 그렇지.”
쥬웰은 나직이 설명하였다.
“하지만 다이아 공작가의 이인자 다카펠이면 가능해.”
“……!”
한때 가주 경합을 벌였던 매리엇의 사촌 형제로 일전 쥬웰에게 약점이 잡혀 수족이 된 이였다.
“얼마 후 일어날 사건에서 다이아 공작가는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 기회를 잘 살려보도록.”
마리는 눈빛을 빛냈다.
얼마 후 일어날 사건.
쥬웰이 무언가 획책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리델하트, 그대는 또 신의 뜻을 거슬러야 하는데, 괜찮겠나?”
섬뜩한 이야기였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리델하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신께서는 제 동생, 에스텔레의 고통을 돌보지 않았죠. 그러니 저도 그분을 향한 마음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그 말에 쥬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래도 그건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닌데.’
이율배반적인 생각이었다.
쥬웰은 씁쓸했다.
일전, 자신의 원혼이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너도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잖아!’
‘……넌 결국 복수 때문에 파멸하게 될 거야.’
자신은 복수로 파멸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주변 이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니.
무슨 모순적인 생각이란 말인가?
“곧, 제국에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거야.”
“커다란 사건이면?”
“성배가 출현하게 될 것이다.”
“……!”
둘은 놀란 얼굴을 하였다.
“그것도 역대 최고의 성배가 나타날 거야. 그러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짐작하겠지?”
성배는 은총의 그릇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혹자는 이 성배를 ‘신의 저주’라고 부르는 이가 많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제국에 폭풍이 몰아닥치겠군요.”
“그래.”
그 성배를 탐낸 인간들의 탐욕 때문이다.
성배가 등장할 때마다 제국에는 커다란 피바람이 몰아쳤다.
‘특히 이번 성배의 ‘종류’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폭풍이 몰아치겠지.’
쥬웰은 궁금했다.
과연, 이번에 등장한 성배를 보고 여섯 공작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성배가 나타날 때마다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늘 여섯 공작가였다.
에메랄드는 에메랄드대로.
다이아는 다이아대로.
사파이어는 사파이어대로.
가넷은 가넷대로.
자신의 탐욕을 따라 움직였다.
특히, 이번 성배는 지금까지와는 궤를 달리하는 종류였다.
과연, 원수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얼마나 추레해질까?
쥬웰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쥬웰은 해밀턴에게 명하였다.
-듣고 있나, 해밀턴?
대답이 돌아왔다.
-쥬, 쥬웰 님?
-그대로 골란 고원 안으로 더 들어가. 가장 깊숙한 성지까지.
쥬웰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 안에서 내 권능으로 ‘성배’를 만들어낼 테니.
* * *
이후, 며칠간의 시간이 흘렀다.
페리도트가의 고성으로 돌아온 유스넨은 늘 그렇듯 익숙한 비명을 들었다.
“으아아아! 드디어 돌아오신 겁니까, 전하?!”
퀭한 눈빛의 메디안 백작이었다.
유스넨이 떠넘기고 간 업무에 과로한 것이다.
“누가 보면, 제가 진짜 대법관인 줄 알겠습니다!”
“그렇군요. 항상 고생이 많습니다. 감사하고요.”
눈 하나 끔뻑 안 하고 공치사하는 유스넨을 보며 메디안 백작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무슨 죄로, 저런 악덕 상사를!’
솔직히 유스넨 같은 나쁜 상사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유스넨은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지 메디안 백작의 어깨를 탁 하고 잡더니 뻔뻔하게 이런 말이나 지껄였다.
“제가 백작을 믿는 것 알지요?”
“모릅니다!”
“항상 감사하며, 믿고 있습니다.”
즉, 앞으로도 고생하란 이야기였다.
‘이 나쁜!’
하지만 메디안 백작은 곧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이렇게 고생하는 일도 앞으로는 없을 테니까요.”
“흐음?”
“전하, 오늘부로 차였습니다.”
그러며 메디안 백작은 한 장의 서류를 유스넨에게 내밀었다.
“오늘 대법원에 도착한 서류입니다.”
서류를 보니, 약혼 파혼 신청서였다.
정말 쥬웰은 수도에 돌아오자마자 파혼 신청을 한 것이다.
메디안 백작은 겉으로 애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속마음을 숨기지 못해, 상사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라는 듯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쥬웰 남작은 첫 번째 약혼자인 황태자 전하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
“이해합니다. 황태자 전하는 여성미와 남성미를 동시에 지닌 매력남이니…… 아니면, 라플 공작 전하인가? 그분도 귀여움과 위험한 매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니 대공 전하가 아무리 조신한 섹시남이라도 무리였겠지요.”
“…….”
“그러니 애석하게 되었지만…… 이제 전하는 저와 같은 솔로입니다. 일이나 열심히…….”
그런데 유스넨이 뜻밖의 행동을 보였다.
부욱.
쥬웰이 보낸 파혼 신청서를 단번에 찢어버린 것이다.
“아, 아니! 법원에 낸 신청서를 그리……!”
“무슨 문제 있습니까?”
“있지요! 판결이 나기 전에는 절대 훼손하면 안 되는 것 알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대법관의 권한으로 지금 약식 판결을 하죠. 기각입니다.”
“……!”
메디안 백작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런 게 어디 있냐는 얼굴이었지만, 유스넨은 한술 더 떴다.
“아, 그리고 보석상을 불러주십시오.”
“보석상은 왜요?”
“청혼해야 하는데, 맨손으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릴 보석을 골라보려고 합니다.”
메디안 백작은 돌았습니까, 휴먼? 이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방금 파혼 신청서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슨 청혼입니까?”
“대법관의 권한으로 기각했으니 파혼 이야기는 무효입니다. 그러니 이제 결혼하면 되겠지요.”
“무슨 그게 말도 안 되는 기적의 논리의……! 대법관 맞습니까?!”
“맞습니다. 보석상이나 불러주십시오. 그리고 제 남은 업무도 잘 처리해 주시고요.”
“A$!#!”
메디안 백작은 팔짝 뛰었지만, 계급이 깡패인지라 뭐, 의미 없는 일이었다.
‘조금 미안하긴 하군.’
유스넨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업무를 맡기는 건…… 생각해 보니 해도 되는 일인 것 같았다.
‘메디안 백작은 유능하니까. 굳이 이런 일에 내가 직접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정말 필요한 일이라면, 그가 나섰을 것이다.
이를테면, 메디안 백작 선에서 처리하기 힘든, 여섯 공작가끼리 분쟁이라든지 말이다.
그런 것 아니면, 뭐.
메디안 백작만 조금 더 고생하면 되는 일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난 그녀를 구원할 방법을 찾아야 해.’
유스넨은 굳게 다짐했다.
문제는 막막하단 것이다.
감도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베스윈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걷는 길에 그녀를 구원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녀가 걷는 길.
복수를 뜻한다.
동시에 라플 공작이 남긴 말도 떠올랐다.
‘그녀가 걷는 길은 파멸과 구원에 동시에 닿아 있어.’
이 말들이 과연 무얼 말하는 걸까?
그녀의 복수와 그녀를 구원할 방법이 어떻게 연관이 있다는 거길래?
답답한 마음에 그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자신이 받은 신탁을 다시 펼쳤다.
[이는 위대한 빛이 내리신 신탁.]
[300년 후. 16대천사장에게 저주받은 커다란 어둠이 세상에 강림할 것이니.]
[나 베스윈은 신탁을 받아 그 어둠을 대비해 후인을 남긴다.]
그런데 거기까지 읽은 유스넨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16대천사장이지? 17이 아니라?’
대천사장의 숫자는 17이다.
이는 창세 이래 고정이었다.
새롭게 대천사장이 된 베스윈이 타천해 게헨나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건 비공식적인 일이지만, 비어 있는 차기 대천사장으로 내정된 이는 유스넨이었다.
만약 유스넨이 별다른 문제 없이 인간의 삶을 마친다면, 승천 후 대천사장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실제 그렇게 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왜 16대천사장이란 표현을 쓴 거지? 굳이?’
[16대천사장에게 저주받은 커다란 어둠이 세상에 강림할 것이니.]
저주받은.
유스넨은 이 문구에 주목했다.
어둠의 존재에게 흔히 쓰이는 관용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유스넨은 이 표현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의 생각을 끊는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서재의 문이 열린 것이다.
메디안 백작이었다.
“백작? 제가 서재에 있을 때는 가급적 들어오지 말라고…….”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어리석은 놈.”
“……!”
유스넨은 놀란 눈을 하였다.
메디안 백작이 한 말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말이 돌아온 것이다!
“백작? 업무가 많이 힘들었습니까? 그래도 이건…….”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그제야 유스넨은 무언가 이변이 일어났다는 걸 눈치챘다.
지금 나타난 이는 메디안 백작이 아니었다.
메디안 백작의 몸에 누군가 ‘빙의’한 것이다.
유스넨은 싸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누구지?”
메디안 백작, 아니, 다른 누군가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래도 날 못 알아보겠나? 혐오스러운 이여.”
“……!”
유스넨은 침음을 흘렸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베른힐트.”
에덴의 2품 트론즈 천사.
타천한 베스윈의 보좌관이자, 유스넨을 끔찍이 혐오하던 이가 메디안 백작의 몸에 빙의해 나타난 것이다.
유스넨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께서? 절 혐오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싫어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아니었다.
베른힐트는 유스넨을 벌레를 보듯 혐오했다.
사실, 그건 대다수 에덴의 천사가 마찬가지였지만, 베른힐트는 그 정도가 심했다.
베른힐트, 그녀는 자신이 섬기던 베스윈이 유스넨 때문에 또 한 번의 죄를 저질렀다고 여겼다.
사실 유스넨으로서는 억울한 면이 있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유스넨을 혐오했다.
“나도 네놈을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
“무엇입니까?”
“네가 받은 소명을 이대로 외면하고 있을 건가?”
유스넨은 얼굴을 굳혔다.
그녀를 처단하는 일을 뜻한다.
“그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전 그녀를 구원할 겁니다. 그러면 그 사명도 이루게 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방법은 있고?”
유스넨은 말문이 막혔다.
“그건…….”
“우스운 꼴이군. 이미 타천의 모래시계가 흐르기 시작한 건 알고 있겠지?”
메디안 백작, 아니, 베른힐트는 비웃음을 지었다.
“넌 지금 굉장히 위험한 상태야. 말은 그녀를 구원한다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현혹’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이지. 내 말이 틀렸나?”
하지만 유스넨은 입술을 깨물었다.
‘현혹이 뭐?’
어쩌면 그가 쥬웰에게 현혹되었다는 베른힐트의 말은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끔찍한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구원하고자 바라는 게 현혹이라면.
유스넨은 현혹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설사 그 대가가 영겁의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게 끝입니까?”
“아니, 고작 이런 말이나 하려고 너 따위를 보러 왔을 리가 없지.”
“그러면?”
“곧 네게 사명이 내려올 것이다. 그녀를 처단하라는.”
“……!”
유스넨의 눈이 커졌다.
‘그딴 명령,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무시하겠어.’
주먹을 꽉 움켜쥐는 순간, 베른힐트가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사실 이건 우리도 바라는 바가 아니야.”
“그게 무슨?”
“에덴도 사실 그녀의 처단을 바라지 않는다고.”
“……!”
베른힐트가 복잡한 얼굴을 하였다.
“그녀가 에스텔레인 건 이제 알고 있겠지? 그녀가 어째서 끔찍한 어둠이 되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유스넨은 들끓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는 에덴에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다.
에덴은 어째서 그녀가 게헨나에 끌려가는 걸 방치했는지.
그리고 이토록 가련한 사연을 가진 그녀를 처단하려고 하는 건지.
고작 이런 게 에덴의 ‘정의’인 건지.
“사실, 그녀는 에덴에서 가장 영광된 자리에 올랐어야 할 성인. 그럼에도 부당한 방법에 의해 게헨나에 가서 고통받았지. 이건 우리가 원했던 바도, 옳은 일도 아니야. 심지어, 그녀는 소멸을 앞두고 있지.”
“…….”
“이대로라면 그녀의 영혼은 곧 소멸할 거야.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1년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이건 얼마 전 그녀가 베스윈에게 영혼을 다친 탓이었다.
영혼의 붕괴가 가속화되어 남은 시간이 급속도로 준 것이다.
자신의 원혼을 제물로 바쳐 임시방편 치료를 하긴 했지만, 줄어든 수명까지 회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유스넨은 차갑게 되물었다.
그녀가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할 때 방치하던 이들이 인제 와서, 위하는 척하니 화가 들끓어 올랐다.
베른힐트는 잠시 묘한 눈빛으로 그런 그를 보다가 말하였다.
“그녀를 구원하고 싶지 않나?”
“……!”
“방법이 있다면, 따를 것인가?”
유스넨이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적대심을 억누르고 매달리듯 물었다.
“에덴에서는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아니, 우리도 뚜렷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야. 깨진 영혼을 회복시키는 건 대천사장, 대악마들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다만, 혹시나 방법이 있을까 노력하고 있다. 그녀가 이대로 끔찍이 파멸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니까.”
베른힐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어떤 방법을 찾아도 무의미해. 그녀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
“무슨?”
“그녀가 지금 걷는 복수의 길.”
“……!”
“아무리 억울한 일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복수의 길은 옳지 않아. 알고 있겠지?”
유스넨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일단, 복수는 그녀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는 파멸의 길이다.”
“…….”
“그녀가 끔찍한 일을 할 때마다 그녀의 영혼에는 상처가 늘고 있지. 그리고 결국 되돌릴 수 없게 될 거야. 무엇보다 우리 에덴은 그녀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걸 좌시할 수 없어.”
베른힐트가 준엄히 말했다.
“만약 이대로 그녀가 계속해서 죄악을 저지른다면, 우리 에덴은 너에게 사명을 내려 그녀를 처단할 수밖에 없어.”
“……!”
“그러니 그녀의 복수를 막도록. 그녀가 복수를 포기한다면, 우리 에덴이 그녀의 영혼을 회복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보겠다.”
유스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가슴속에서 터져 올라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녀가 그런 끔찍한 고통에 떨어지는 건 좌시하더니, 인제 와서 복수는 용납할 수 없다니.
지독히도 독선적이었다.
하지만 원래 에덴의 정의는 이런 식이었다.
악마가 ‘악’을 추구한다면, 천사는 ‘정의’를 추구한다.
다만, 그 ‘정의’는 때로는 독선적이고 비정해 잔혹할 때가 있었다.
‘제길.’
유스넨은 미칠 듯 끓어오르는 분기를 억지로 억누르려 노력했다.
에덴의 천사에게 화를 내는 건, 그녀를 구원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에덴을 잘 설득해 봐야 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절대 복수를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베른힐트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정말 그런가?”
베른힐트는 빤히 되물었다.
“정말 방법이 없냐는 말이다.”
“……!”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너에게는 방법이 있어. 아주 쉽고, 간단한.”
유스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베른힐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운 무언가를 회상하듯.
그러고는 그녀는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난 지상에서 베스윈 님의 부관이었지. 너와 메디안 백작과의 관계와 비슷했어.”
“…….”
“난 베스윈 님을 존경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어쩌면…… 사랑의 감정이었을지도. 하지만, 그렇게 그분을 소중히 여김에도 타천은 막지 못했지. 그분이 그릇된 선택을 해서 게헨나의 영겁의 고통에 떨어지는 걸 지켜봐야만 했어.”
베른힐트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내가 했던 후회가 뭔지 아는가? 어쭙잖게 상대를 배려해서는 안 되었다는 거야. 그분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원망하게 되든 상관 말고 오로지 그분을 위한 선택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난 그 뒤 영원히 후회하고 있지.”
유스넨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내 말이 무엇인지 알겠나?”
“…….”
“네가 그녀를 구원하고 싶다면, 어쭙잖게 배려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게 훗날 억겁의 후회를 하는 것보다 백 배는 나아.”
베른힐트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난 분명히 너에게 그녀를 구원할 가장 쉽고 명확한 길을 알려주었다. 선택은 너의 몫. 넌 나와 같은 후회를 하지 말아라.”
이윽고 베른힐트가 사라지려고 하자, 유스넨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베스윈이 타천한 것과 그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이전부터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었다.
베스윈과 라플 공작은 그녀를 이전부터 알고 있는 듯 이야기했다.
도대체 어떻게?
동시대를 살았던 베른힐트라면 관련한 진실을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베른힐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금기라 말할 수 없어. 그리고 알아봤자 좋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이 ‘최초의 진실’은 그녀의 파멸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그녀는 복수의 끝에 도달한 순간, 복수와 자신에 관련한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거고, 그리고…… 그 진실로 인해 완벽히 파멸하게 될 것이다.”
“……!”
베른힐트는 끔찍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녀는 자신이 태어났음을, 자신의 영혼이 지음받았음을 저주하게 되겠지.”
유스넨의 손끝이 떨렸다.
“그러니 네가 해야 할 건, 그녀가 복수의 길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게 해 이 진실이 밝혀지지 않게 하는 거야.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때가 그녀가 가장 끔찍이 파멸하는 순간이니.”
그 말을 끝으로 베른힐트는 사라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메디안 백작은 멍한 눈으로 말하였다.
“저, 전하? 내가 왜 여기에? 몽유병이 생겼나? 일을 너무 과하게 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메디안 백작은 떽떽거리다가 입을 우뚝 다물었다.
유스넨의 얼굴이 심각했던 것이다.
메디안 백작은 곤란한 얼굴로 유스넨을 위로했다.
“전하? 쥬웰 남작에게 차인 것 때문에 그렇습니까? 전하의 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어쩔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섹시 조신남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으니, 업무에 집중하는 열정 유능남의 매력을 더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유스넨은 별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고, 메디안 백작은 뻘쭘하게 사라졌다.
이후, 유스넨은 깊은 고뇌에 잠겼다.
베른힐트가 남긴 말을 숙고하는 것이다.
‘네가 그녀를 구원하고 싶다면, 어쭙잖게 배려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게 훗날 억겁의 후회를 하는 것보다 백 배는 나아.’
이 말의 뜻은 간단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녀의 복수를 막으란 것이다.
그리고 유스넨에게는 사실 그녀의 복수를 막을 방법이 있었다.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그는 결국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메디안 백작을 불렀다.
“만찬을 열어주십시오.”
“네? 만찬이요?”
메디안 백작은 의아한 듯 물었다.
“쥬웰 남작을 초청하게요?”
“아니, 그녀는 제외하고.”
유스넨은 짓씹듯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말하였다.
“로튼 백작, 매리엇 공작, 라디트 백작, 플랑드나 성녀, 웰링턴 공작을 초청해 주십시오.”
메디안 백작의 눈이 커졌다.
“그분들은 왜?”
“시키는 대로 해주십시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메디안 백작이 나간 후, 유스넨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눈빛을 시커멓게 가라앉혔다.
그런 유스넨의 은발에 깃든 잿빛 기운이 조금 더 짙어졌다.
* * *
그때, 가넷가로 돌아온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아가씨? 피곤하세요?”
“응, 이제 슬슬 자려고.”
침대에 누운 쥬웰은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그녀가 해밀턴을 통해 곧 만들 성배는 아주 특별한 종류의 것으로 원수들이 에스텔레에게 저질렀던 죄악을 정면으로 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과연, 원수 중 단 한 명이라도 올바른 모습을 보이는 이가 있을까?
쥬웰은 곧 피식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 * *
그때, 골란 고원.
제국 최악의 마경을 한 비리비리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해밀턴이었다.
“으흑. 쥬웰, 이 나쁜 마녀. 원망할 거야. 미워할 거야. 으아아. 무서워.”
그는 소심하게 덜덜 떨며 고원을 걸었다.
하지만 막상 큰일을 겪진 않았는데, 쥬웰이 새긴 악마의 낙인 때문이었다.
마물이 나타나도 그 낙인을 보고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물론, 겁쟁이 해밀턴은 마물이 나타날 때마다 식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악! 저리 가! 저리 가라고!”
-크르르.
마물들은 입맛을 쩝쩝 다졌다.
한입에 먹고 싶은데, 악마의 낙인 때문에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표정이라 해밀턴은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모든 마물이 그를 봐준 건 아니었다.
무식한 게 용감하다고.
쥬웰이 새긴 낙인을 못 알아보는 저지능의 하급 마물은 그냥 다짜고짜 그를 공격하였고, 그때마다 그는 목숨 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으아아. 살려주세요, 쥬웰 님! 저 진짜 죽을 것 같아요!’
그렇게 쥬웰에게 메시지를 보내봤자, 이런 답만 돌아왔다.
-응, 괜찮아. 너 안 죽어.
쥬웰이 그에게 불사(不死)의 저주를 건 탓이다.
마물 때문에 다쳐도 아플지언정 그는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해밀턴은 꺼이꺼이 울음을 흘리며 고원 안을 걸었다.
정확히는 성지를 향해.
‘도대체 왜 성지로 가라는 거야? 성지는 초대 황제에 의해 거대한 어둠이 봉인된 장소잖아.’
300년 전.
인간들의 악이 쌓여 사상 최악의 침식이 일어났다.
그 침식을 ‘봉인’하고 인간을 구원한 게 초대 황제였다.
다만, ‘봉인’이었다.
완전히 해결한 게 아니란 뜻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66대악마가 한 번에 세상에 강림하려고 했다나?’
해밀턴은 전래 동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과거의 전설을 떠올렸다.
워낙 거대한 침식인지라, 초대 황제와 여섯 공작가의 시조인 여섯 영웅의 힘으로도 봉인하는 게 고작이었고, 골란 고원의 성지는 그 거대한 침식의 틈이 봉인되어 있는 장소였다.
‘으으. 무서워. 거기에 무슨 성배가 있다는 거야?’
심지어 쥬웰은 성배를 ‘만든’다고 하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또 끔찍한 일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쥬웰같이 끔찍한 악마는 세상에 다시는 없을 거야.’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가슴 철렁한 일이 일어났다.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너, 토른 할아범의 핏줄이구나! 잘 만났다! 날 구해줘!”
“허어억!”
해밀턴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보라색 보석안을 지닌 귀여운 소년의 얼굴이었다.
워낙 유명한 얼굴이라 해밀턴은 상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라, 라플 공작 전하?!”
“히히, 맞아. 내가 라플 공작이야. 토른 공작, 그 할아범은 잘 지내지?”
“따, 딸꾹.”
해밀턴은 혼이 나간 듯한 얼굴을 했다.
단순히 이 외딴곳에서 라플 공작을 만나서가 아니었다.
‘왜 목만 있는 건데?!’
해밀턴은 울고 싶었다.
라플 공작은 덩그러니 목만 뒹굴고 있었다. 몸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 이거 별거 아니야. 내가 지금 신체가 분리되어 봉인된 상태라.”
“보, 봉인이요?”
“응, 웬 사기꾼 천사 놈한테 속아서. 그러니 나 좀 봉인 풀 수 있게 도와줄래? 물론 나 혼자서도 할 수는 있는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날 도와주면, 너에게 대가를 줄게.”
그 말에 해밀턴이 눈을 빛냈다.
‘라플 공작이면 그 쥬웰 악마를 해치울 수 있을 거야!’
해밀턴은 희희낙락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게 꼭 대가를 치러야 해요. 알았죠?”
“그래, 근데 무슨 대가를 원하는데?”
“쥬웰, 그 악마를 처단해 주십시오!”
그런데 라플 공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네?”
“일단, 나 좀 들어볼래?”
해밀턴은 얼떨떨하게 라플 공작의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꽈악!
“끄아아아악!”
라플 공작이 해밀턴의 귀를 깨물어 버렸다.
“너 죽고 싶니? 응? 감히 누구를?”
“으아아아악! 사. 살려……!”
“아니면 지금 나처럼 목만 남아서 영원히 죽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싶어? 그러고 싶어서 지금 이러는 거지? 감히, 뭐라고? 그녀를?”
라플 공작의 눈동자에 광기가 휘몰아쳤다.
해밀턴은 눈물을 흘리며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으허허허어엉!”
그는 간신히 라플 공작을 떨치고는 허겁지겁 도망쳤다.
목만 남은 라플 공작이 씩씩대며 외쳤다.
“너! 감히 그딴 생각을 더 하면, 각오해! 가만두지 않을 테니! 나 무섭고 집요한 미친놈인 것 알지?!”
“엉엉엉엉!”
해밀턴은 정신없이 도망가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해! 엉엉.’
그렇게 얼마나 도망친 다음일까?
해밀턴은 우뚝 멈추어 섰다.
웬 유적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목적지인 ‘성지’였다.
* * *
그때, 다이아 공작가.
저택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주 내외의 외출 준비 때문이었다.
“광휘의 대공이 웬일인지 모르겠네. 갑자기 만찬회라니.”
매리엇은 치장하며 투덜거렸다.
“짐작 가는 게 있어, 자기야?”
하지만 따뜻한 호칭과 다르게 눈빛에는 짜증과 내리까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당연했다.
라디트는 이전의 라디트가 아니었으니까.
오른손이 잘린 이후, 라디트는 기사로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처참한 몰락을 하였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그렇지? 별일이네. 그나저나, 차림이 그게 뭐야?”
매리엇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화를 내었다.
“당신은 이 매리엇의 남편이라고. 그런데 팔 병신이 된 것으로도 모자라 이딴 차림으로 만찬회에 나가 다른 이들을 만나겠다고? 지금 장난해?”
그 말과 다르게 라디트의 차림은 별반 흠잡을 게 없었다.
매리엇은 그저 짜증을 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녀는 최근 모든 일이 짜증이 났다.
자신을 모욕한 쥬웰이 버젓이 잘나가는 것도.
기껏 결혼한 남편이 칠칠치 못하게 팔 병신이 된 것도.
다 최악이라 온갖 짜증을 내고 있었고, 그 짜증은 특히 라디트에게 집중되었다.
“왜 대답이 없어? 내 말이 틀렸어? 그런 몰골이면, 다른 차림이라도 신경 써야 할 것 아니야.”
“……갈아입도록 하지.”
라디트가 다시 옷을 갈아입으려 사라지자 홀로 남은 매리엇은 갑자기 미친 것처럼 왈칵 성질을 내었다.
“아아아악!”
와장창!
온갖 장신구가 깨어져 나갔다.
매리엇의 이런 행동은 하루 이틀이 아닌지, 고용인들은 놀란 얼굴도 없이 그런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난리를 피운 매리엇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쥬웰.’
매리엇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모든 분노의 근원은 라디트가 아니라 쥬웰이란 것을.
쥬웰을 끔찍이 응징하지 않는 한, 매리엇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네년을 끔찍이 죽여주겠어.’
매리엇이 눈빛을 희번덕 빛냈다.
그때, 라디트가 돌아왔다.
“……이제 괜찮나?”
훤칠히 다시 꾸민 모습이었다.
비어 있는 오른 소매가 다시금 매리엇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그녀는 성질을 억눌렀다.
어쨌든 매리엇은 라디트를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 사랑해 왔다.
사랑보다 자신의 성질, 욕심이 우선이라 그렇지, 그녀는 지금도 라디트를 사랑했다.
“그래, 진즉 그렇게 꾸몄으면 좋잖아. 내가 이러는 건 자기를 위한 것인 것 알지? 자기가 재활에 성공해 사파이어 공작가를 물려받으려면 누구에게든 조금이라도 얕보이면 안 되잖아.”
오른손이 잘렸지만, 의외로 라디트는 사파이어 공작가에서 내쳐지지 않았다.
기회를 받은 것이다.
왼팔로 검술을 다시 익혀 재활에 성공할 시 사파이어 공작가를 물려주겠다고.
이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가주 록슬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어쨌든 덕분에 라디트는 매리엇과도 파혼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처지가 이전과 같다는 건 아니었다.
과거에는 고고한 왕자였다면, 지금 그는 밑바닥에 떨어진 채 재기만을 바라는 패배자의 꼴이었으니까.
매리엇이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혹시 방금 내가 짜증 냈던 것, 기분 나빴던 건 아니지? 응?”
라디트는 잠시 침묵했다.
기분이 나빴더라도, 지금 라디트는 그걸 티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분 나쁠 리가.’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매리엇을 바라보았다.
제국 제일의 미인을 꼽으면 쥬웰이 꼽힐 것이다.
그다음이 바로 눈앞의 매리엇과 플랑드나였다.
특히 화려함으로 따지면 매리엇이 독보적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코앞에 들어왔지만, 라디트는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역겨웠다.
라디트는 매리엇에게서 역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오래되었다.
‘어차피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운데, 그런 행동에 더 기분 나쁘고 할 것도 없지.’
라디트는 이런 자신의 감정을 자각했을 때는 크게 당황했다.
처음에는 매리엇의 행패 때문에 서운해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냥 매리엇의 존재 자체가 역겨웠다. 싫었다.
특히, 그런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가 있었다.
‘쥬웰, 그년을 욕해줘.’
쥬웰을 욕보이려고 할 때. 그때마다 더욱 강렬한 역겨움이 치솟았고, 라디트는 이 감정의 이유를 깨달았다. 쥬웰 때문이었다.
그는 쥬웰을 바랐다. 정확히는…… 쥬웰을 사랑했다. 그러니 매리엇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매리엇을 향한 자신의 역겨움을 참았다.
참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척 연기했다.
이유야 당연했다.
‘난 반드시 다시 일어나야 해. 그러려면 일단 매리엇이 필요해.’
라디트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이토록 간절히 발버둥 치는 이유가 있었다.
‘다시 일어나야만, 쥬웰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
쥬웰을 바라서.
반드시 다시 일어나,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물론, 이런 자신의 생각이 추악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는 더는 자신의 갈망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쥬웰을 바란다. 바라고 욕정하고 있다.
그러니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때, 매리엇이 속삭였다.
“키스해 줘.”
라디트는 잠시 매리엇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역겨움이 치솟았지만 참았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역겹지만, 할 수 있었다.
쥬웰을 떠올리면 되니까.
* * *
추악한 건, 매리엇과 라디트만이 아니었다.
초청받은 다른 이.
에메랄드 공작가의 플랑드나 또한 속으로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쥬웰, 가만히 두지 않겠어.’
얼마 전 침식 때.
플랑드나는 쥬웰에게 당한 모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모욕이라고 칭해질 일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플랑드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대폭 싸늘해졌다.
에메랄드 공작가는 그날 침식 사건에서 일어난 플랑드나의 성력의 오염을 단순한 사고라고 둘러대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에메랄드 공작가의 위세가 두려워 대놓고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따라서 플랑드나의 성녀로서의 위상은 완전히 바닥까지 추락한 상태였다.
그런데 플랑드나의 분노는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왜 내 성력은 이토록 모자란 거야.’
플랑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그날, 침식 공간에서 자신의 성력이 그런 기이한 변화를 보인 게 성력이 부족해서라고 착각했다.
‘에스텔레, 그년을 더욱 잔혹하게 제물로 바쳤어야 했는데.’
플랑드나는 끔찍한 생각을 하였다.
‘에스텔레를 너무 곱게 제물로 바쳐서일지도 몰라. 그래서 성력이 부족하게 내려받은 것일지도. 제물로 바칠 때 악마가 기뻐하게 최대한 고통을 주었어야 했는데.’
그때,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페리도트 대공가입니다.”
플랑드나는 성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만찬회 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성녀님.”
들어가니, 미리 도착한 다른 이들이 있었다.
로튼 백작, 매리엇, 라디트였다.
플랑드나는 예법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매리엇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로튼 백작, 라디트 백작께서도 안녕하셨는지요? 법왕 예하께서는 오늘도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고아한 인사에 매리엇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오랜만이에요, 언니. 최근, 고생이 많으셨다 들었어요.”
걱정하듯 친근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말 내용은 사실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쥬웰에게 모욕당한 것을 뜻하는 거니까.
플랑드나는 순간 울컥하였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원래 여섯 공작가의 관계는 이러했다.
겉으로 보면 누구보다 가까운 척하지만, 물어뜯을 빌미가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뜯는 게 여섯 공작가 인물들의 관계였다.
그런데 뜻밖의 음성이 들렸다.
“마침 플랑드나 성녀님의 이야기가 나와 그러는데,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소.”
로튼 백작이었다.
그가 이전에 비해 팍삭 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악마에게 충분한 제물을 바쳤소. 그런데 다들 이런 처지가 되다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오?”
잠시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들은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쳐 대가를 받았다.
한데 모두 곤란한 처지가 된 것이다.
“백작님, 지금 그런 이야기는.”
플랑드나가 웃으며 만류했지만, 로튼 백작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끼리인데, 무슨 상관이오. 그리고 페리도트 대공이 들으면 어떻소?”
로튼 백작은 비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광휘의 대공은 일반인을 상대로 힘을 쓰지 못하오. 그러니 그런 허수아비 따위 신경 쓸 필요 없소.”
모두 입을 다물었다.
로튼 백작이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페리도트 대공가의 인물들은 강력한 천사의 힘을 가지는 대신, 엄격한 에덴의 규율에 속박된다.
그 에덴의 규율에 따라 그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힘을 쓰는 건 금지되어 있다.
“어쩌면 악마의 축복이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소. 생각해 보면 그때, 에스텔레 그년이 너무 편안히 죽음을 맞게 했지. 최대한 고통을 주어 더욱 끔찍한 죽음을 맞게 했어야 했는데.”
로튼 백작은 플랑드나가 했던 생각과 똑같은 이야기를 내뱉었다.
더욱 끔찍한 건, 모두가 로튼 백작의 말에 동조하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라디트조차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가 더욱 강한 힘을 받았다면, 이런 꼴이 되지 않았겠지?’
라디트는 남은 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쥬웰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만약, 쥬웰이 엿들었다면 광소를 터뜨릴 법한 추악한 모습들이었다.
심지어 추악한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악마에게 더욱 강력한 축복을 받을 방법이 없지는 않아요.”
“흐음? 무슨 말입니까, 매리엇 전하?”
“똑같이 성녀를 한 번 더 제물로 바치면 되죠.”
매리엇의 눈빛이 추악한 불길로 일렁였다.
“우리가 힘을 합쳐 그때처럼, 쥬웰을 다시 악마에게 제물로 바치는 거예요. 쥬웰도 에스텔레 못지않은 성녀이니 악마도 아주 기뻐하겠죠. 어떤가요? 제 생각이?”
그 말에 로튼 백작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참 좋은 생각입니다. 암, 좋고 말고요. 반드시 그렇게 해야겠군요.”
물론, 차기 가넷으로 주목받는 쥬웰을 제물로 바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래, 쥬웰, 그년을 죽일 때는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야겠어. 최대한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반드시 쥬웰을 몰락시켜 자신들 앞에 무릎 꿇린 후, 악마에게 제물로 바치겠다고.
그들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는 얼굴을 하였다.
단 한 명, 라디트만이 다른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더욱 추악한 생각을.
쥬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방법을 번뜩 떠올린 것이다.
간단했다.
쥬웰을 몰락시키면 된다.
‘쥬웰을 무너뜨리면, 내 걸로 만들 수 있어.’
그러면 온전한 그의 소유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라디트는 시커멓게 눈을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그들의 추악함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끼익, 문이 열렸다.
“페리도트 대공 전하이십니다!”
유스넨이었다.
그가 평소와 다르게 차가운 눈빛으로 만찬회장으로 들어왔다.
모두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제국의 수호자인 페리도트 대공은 예법상 황제, 황태자 다음가는 위치이기에 모두 먼저 예를 표한 것이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
그런데 유스넨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꾹 입을 다물고 있을 뿐, 가타부타 답이 없었던 것이다.
“대공 전하?”
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인 그를 보며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유스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놈들.’
유스넨은 방금 일부러 만찬회장에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역시나였다.
‘누나는 저런 끔찍한 놈들 때문에.’
미칠 듯한 분노가 치솟았다.
동시에 당장에라도 구역질을 하고 싶을 만큼 역겨웠다.
저런 추악한 놈들 때문에 그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비통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늘…… 다 죽여 버리겠어.’
유스넨의 눈에서 흉포한 기운이 일렁였다.
그가 이들을 초청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들을 처단하기 위해.
그가 대신 복수하면, 그녀도 파멸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음을 이미 굳히고 초청한 것이지만, 저들의 추악함을 다시 목도하니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저런 놈들을 죽이는 대가로 타천해야 한다면, 기꺼이 하리라.
더구나 그게 그녀의 파멸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면, 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대공 전하?”
“하나만 묻겠습니다. 당신들 말고 에스텔레 성녀님의 죽음에 관여된 이들을 알고 있습니까?”
순간, 그들은 흠칫하였다.
그러다가 그들 모두의 눈빛이 흐릿해지더니 멍한 얼굴을 하였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유스넨은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금제?’
누군가 저들의 정신에 금제를 건 것이다.
다른 연루자를 발설하지 못하도록.
‘누가?’
천사나 악마가 직접 건 금제는 아니었다. 지상의 누군가 건 금제였다.
일단 떠오르는 이는 한 명이었다.
마왕 타란툴라.
지상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초월자는 극소수이니까.
오로지 라플 공작과 마왕 타란툴라만이 가능했다. 검제는 능력의 특성상 불가능했다.
그중 라플 공작은 아닐 가능성이 높으니, 마왕 타란툴라의 짓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 그게 맞는가? 혹시 다른 이의 소행일 가능성은?’
하지만 저런 수준의 금제가 가능한 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유스넨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녀가 가장 깊은 원한을 지닌 이들은 바로 이자들이야. 오늘 다 죽여 버리겠어.’
설사 정체 모를 다른 원수가 있다고 해도, 이들만큼 추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스넨은 그녀를 위해 오늘 이들을 모조리 죽이기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당신들은 그날, 에스텔레 성녀님을 제물로 바친 것을 정말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까?”
“……!”
유스넨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놀란 눈을 하였다.
“대공 전하?”
“대답하십시오. 당장.”
그들은 주춤하였다.
유스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대공 전하! 갑자기 왜 우리를 핍박하는 건지 모르겠구려. 우리가 어떤 일을 했건, 그건 당신과 상관없는 일! 당신의 소명은 지상에 강림한 어둠을 상대하는 것에 있는 것 아니오?!”
로튼 백작이 되려 불쾌하다는 듯 외쳤다.
매리엇, 플랑드나, 라디트도 같은 얼굴이었다.
유스넨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참회할 거로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지만.
‘괜한 걸 물었군.’
더 대화를 나누기도 싫었다. 아니, 저딴 것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웠다.
단번에 끝내려는 순간. 생각지도 않은 음성이 들렸다.
“그래요. 에스텔레, 그년을 제물로 바친 건 우리의 개인적인 일. 대공 전하께서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는군요.”
“……!”
유스넨의 눈이 커졌다.
쥬웰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자 원수들도 당황한 얼굴을 하였다.
쥬웰은 잠시 싸늘한 얼굴로 원수들을 바라보았다.
“하아.”
그러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다들 돌아가.”
“……뭐?”
“당장 꺼지라고. 지금 죽여 버리기 전에.”
그렇게 쥬웰이 말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모두의 눈이 흐릿해지더니 쥬웰의 명에 따르게 된 것이다.
방금 있었던 일을 잊게 하는 기억 조작과 간단한 최면을 함께 건 것이다.
원수들이 사라지자, 장내에는 유스넨과 쥬웰만 남게 되었다.
“…….”
유스넨은 우뚝 굳어 쥬웰을 바라보았고, 쥬웰은 평소와 전혀 다른 냉막한 눈빛으로 유스넨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쥬웰이 말했다.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
“누가 네게 이따위 짓을 하라고 했지?”
유스넨은 입술을 깨물었다.
쥬웰이 진심으로 분노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난 누나의 원수를…….”
“시끄러워.”
“……!”
“내가 언제 너한테 원한을 대신 갚아달라고 했지?”
쥬웰의 눈동자가 섬뜩한 광기로 일렁였다.
“원수들은 오로지 내 거인데. 네가 뭔데 감히 내 원한을 대신 갚는다고 나서는 거냐고!”
“……!”
와장창창!
쥬웰에게서 발산된 강렬한 기운에 만찬회장의 창문이 모조리 깨져 나갔다.
유스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제가 이렇게 안 하면, 당신은 파멸할 테니까요.”
“뭐?”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당신은 복수에 잡아먹혀 파멸할 거라는 사실을!”
이대로라면, 쥬웰은 복수에 먹혀 파멸할 것이다.
실제로 쥬웰은 복수를 위해 끔찍한 일을 할 때마다 영혼에 상처를 입고 있으니까.
결국, 그녀의 영혼은 갈기갈기 상처 입어 끔찍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 나도 그건 알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
“내가 파멸해도 어쩔 수 없잖아! 원수들이 저렇게 끔찍한데! 내가 어떻게 복수를 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
유스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어떻게 복수를 포기하겠는가? 원수들이 저토록 끔찍한데.
“그리고 네 말은 틀린 게 있어.”
쥬웰은 유스넨에게 비웃음을 흘렸다.
“난 이미 끔찍이 파멸한 상태야. 여기서 더 파멸하고 말 것도 없어.”
“……누나.”
유스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아. 아직, 희망이 있어.’
그때.
“잘 들어.”
쥬웰이 유스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만약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두지 않겠어.”
“……!”
“넌 내 적이 될 거야.”
쥬웰은 차갑게 선언했다.
“내가 널 죽이겠어.”
* * *
이후, 한바탕 소란을 마무리하고 쥬웰은 가넷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기분이 최악이었다.
특히 흰 강아지와 다투었다는 사실이 기분을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설마, 흰 강아지가 이런 일을 저지르려고 할 줄은.’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원수들을 모조리 잃었겠지.’
그리고 쥬웰은 또 하나의 섬뜩한 사실을 생각했다.
‘흰 강아지는 타천하게 되었을 거야.’
쥬웰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아.’
겉으로 유스넨에게 화냈던 것과 다르게 그녀의 가슴을 가장 격동시킨 건 바로 이거였다.
유스넨이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 타천할 뻔했다는 것.
‘잿빛이 더 짙어졌어.’
유스넨의 은발에 깃든 잿빛 기운이 이전보다 한층 더 짙어졌다.
그만큼 타천에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실제로 오늘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완전히 타천했을 것이다.
‘제길.’
유스넨이 타천할 뻔했다는 사실.
그게 그녀의 가슴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아.’
그래서 방금 더욱 거칠게 경고했다.
유스넨이 다시는 이딴 어리석은 일을 벌일 생각 하지 못하게.
강하게 경고했으니, 또 이런 일을 저지르려고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그가 타천하지 않을 근본적인 방법을 생각해야 해.’
그러다가 순간,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난 왜 이딴 고민이나 해야 하는 거지.’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혔다.
‘보통 연인들이 하는 고민은…… 내일 뭐 먹을지, 데이트 코스는 어떻게 할지, 아니면, 다른 이성과 어울려 기껏해야 귀여운 질투나, 투닥거림 정도 아닌가?’
그런데 그녀는 이딴 고민이라니.
참 빌어먹을 일이었다.
‘즐거운 생각이나 해보자. 등심 스테이크, 딸기 주스…….’
제일 좋아하는 음식들을 떠올려 봤지만, 이전에 호텔에서 유스넨이 만들어준 등심 스테이크와 딸기 주스가 생각나며 괜히 기분만 더 저조해졌다.
‘이런 것 말고, 다른 기분 좋은 생각…….’
그러자 쓸데없이 이런 생각이나 났다.
‘선 결혼 후 연애 어떻습니까? 우리의 경우에는 선 결혼 후…… 뒤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가 되겠군요.’
쥬웰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생각했다.
‘모르겠다. 진짜,\ 뒷일 생각하지 말고, 결혼이나 해버릴까? 인생 뭐 있어?’
그때, 마부가 말했다.
“아가씨, 가문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한숨을 내쉬며 마차에서 내려왔는데, 뜻밖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샤크였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리샤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휴가를 다녀왔다고?”
“네.”
순간, 쥬웰은 직감했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구나.’
근거는 없지만,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언급하지는 않았다.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남의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쥬웰도 정신적으로 한계였다.
솔직히 미칠 듯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리샤크 일은 나중에.’
그런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려는데, 리샤크가 그녀를 불렀다.
“……저, 아가씨.”
“응?”
“……아닙니다.”
리샤크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어쩌지?’
아마 꺼내기 힘든 내용이라 리샤크는 망설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쥬웰이 물어봐 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쥬웰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말하였다.
“다음에 이야기할래? 내가 지금은 피곤해서.”
“……네.”
리샤크는 힘없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편히 쉬십시오.”
“……응.”
리샤크의 미소가 걸렸지만, 더는 한계였다.
방 안으로 돌아간 쥬웰은 바깥에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게 결계를 친 후 베개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발작하듯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더욱 빌어먹을 일은,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도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정신 차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성배’를 만들 차례였다.
* * *
‘성지’에 들어온 해밀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곳이 초대 황제가 거대한 어둠을 봉인한 곳?’
성지는 성전과 같은 형식의 건물이었다.
어둠을 봉인한 후 그 위에 성전을 건설한 것이다.
벽에는 여러 그림과 조각상이 있었다.
‘이게 건국 영웅들인가?’
해밀턴은 가장 앞면에 놓인 일곱 명의 인물상을 보며 생각했다.
그런 것 같았다.
평소 초상화로 보던 여섯 공작가의 시조들과 초대 황제의 모습과 일치했다.
특히 아까 만났던 라플 공작은 그때나 지금이나 얼굴이 똑같았다.
‘으으, 불길해.’
해밀턴은 300년이 지났는데도 똑같은 라플 공작의 얼굴을 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대신 다른 조각상들을 봤는데, 역시나 눈길을 끄는 건 초대 황제의 조각상이었다.
‘미인이셨네.’
초대 황제의 조각상은 젊은 여인이었다.
아니, 어리다고 해야 할까?
기껏해야 이십 대 초반 정도로만 보였다.
‘이십 대 중반도 되기 전에 단명했다고 하니. 그런데 왜 죽었다고 했지?’
초대 황제는 제국을 건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았다.
정확한 사인이 전해져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어둠을 봉인하는 커다란 일을 한 대가로 수명이 단축되었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혀 기록된 게 없네? 무려 초대 황제의 죽음인데.’
해밀턴은 새삼스레 의문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초대 황제가 어떤 핏줄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기에 현재 셀레네 황가의 황족들은 사실 초대 황제의 직접적인 핏줄은 아니었다.
초대 황제와 같은 일족이 2대 황제로 황위를 물려받은 후 핏줄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왜 오라고 한 거야? 뭐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해밀턴은 뻘쭘하게 주저앉아 생각했다.
‘혹시 그냥 날 골탕 먹이려고 이런 곳에 오라고 한 것은 아니겠지?’
왠지 그럴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처음에 선택지도 주지 않았던가?
사해의 섬이나 칼날 산맥, 심연 옥 중에 고르라고.
그러니까 딱히 골란 고원에 뭐가 있어서 가라고 한 건 아니란 것이다.
‘크아아악! 도대체 왜 이 고생을 시킨 거야?! 이 나쁜 주인!’
비명을 지를 때, 번뜩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성지에 도착했나?
쥬웰이었다.
해밀턴은 바짝 긴장해 외쳤다.
“넵! 도착했습니다, 쥬웰 님!”
-뭔가 나 욕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닙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쥬웰 님!”
-……됐고.
나직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잠시만 자고 있도록.
“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툭, 해밀턴의 의식이 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쥬웰의 의식이 ‘빙의’되었다.
권속의 맹약에 근거해 쥬웰이 일시적으로 해밀턴의 몸을 차지한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해밀턴의 눈동자는 석륫빛 보석안이 아닌 짙은 흑색으로 빛났다.
쥬웰의 상징인 흑요석의 빛이었다.
쥬웰은 자신이 차지한 해밀턴의 몸이 어색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해밀턴 놈의 몸이라니. 왠지 기분 나쁘군.”
쥬웰은 해밀턴의 몸으로 혀를 찼다.
“빨리 끝내야겠어.”
‘골란 고원의 성지이니. 새로운 성배가 등장할 위치로는 최고이군.’
제국 최고의 성지에 등장한 성배라 화제성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쥬웰은 해밀턴의 몸으로 손을 들었다.
‘성배’를 만들려는 것이다.
“나 어둠의 총애를 받는…… 이가 명하나니. 이곳에 영원한 어둠에 잠겨 있는 하나의 그릇을 소환하고자 하노라.”
쥬웰이 흑마법을 시작하자 파앗, 그녀의 밑으로 어두운 마법진이 생겨났다.
얼핏 보기만 해도 불길해 보이는 마법진이었다.
쥬웰은 계속해서 주문을 이어갔다.
“나…… 이가 사령(死靈)의 주구로서 명하나니. 어둠에 잠긴 저주받은 자여. 지금 내 명에 따를지니. 이곳에 강림할지어다.”
그 주문과 함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법진에서 어둠의 불길이 넘실거리더니 한 명의 인물이 소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미 죽은 이의 시체였다.
‘지금 내가 펼친 건 죽은 이의 시체를 소환하는 사령술이니까.’
보통은 죽은 이의 시체를 강제로 움직이게 하거나, 언데드 마물로 변화시키는 용도로 쓰이지만 이런 식으로 특정 인물의 시체를 소환하는 것도 가능했다.
파아아아앗!
끔찍한 어둠과 함께 사령술이 완료되었고 한 인물의 시체가 소환되었다.
그런데 소환된 시체의 외모가 놀라웠다.
선한 인상의 여인이었는데 굉장히 익숙했다.
쥬웰은 나직이 그 인물의 이름을 불렀다.
“에스텔레.”
쥬웰이 소환한 건, 바로 이전 삶 자신의 시체였다.
왜?
‘성배’로 사용하기 위해.
성인(聖人)의 유해는 신의 은총이 가득 담긴 최고의 ‘그릇’이니까.
‘원래 성배는 성인의 유해를 뜻하는 말이지. 다행히 잘 보존되어 있었군. 지상이 아니라 게헨나에 있었으니.’
쥬웰은 무심히 이전 삶,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악마에게 영혼이 바쳐졌을 때, 생명을 잃은 그녀의 육신도 함께 게헨나로 끌려갔다.
그 때문에 그녀의 육신은 부패하지 않고 이전 삶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얗디하얀 안색을 제외하면 마치 당장에라도 숨을 내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봤자 잘 보존된 시체일 뿐이지. 이미 모든 장기의 기능을 상실한.’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이게 살아 있는 몸이란 건 아니다.
생명을 잃은 시체일 뿐이었다.
도리어 썩지 못하고 죽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 죽어서도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영원히 안식을 취하지 못할 그녀의 운명처럼 말이다.
“…….”
쥬웰은 잠시 빤히 자신의 시체를 보았다.
이렇게 있으니 과거의 자신과 조우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괜한 감상에 빠진 걸까?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었다.
“그거 알아? 넌 참 X신 같은 년이야.”
쥬웰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 같은 바보 X신은 세상에 누구도 없을 거야.”
거기까지 이야기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긴 했지만, 관두었다.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려고 자신의 시체를 소환한 게 아니니까.
이 시체는 복수에 굉장히 중요한 도구였다.
그녀는 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위대한 성인.
그런 그녀의 시체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고의 ‘성배’였다.
따라서 에스텔레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제국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히리라.
특히, 쥬웰은 원수들이 에스텔레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확히는 어떤 추악한 몰골을 보일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렇게 제국에 폭풍이 들이닥쳤다.
여섯 공작가를 발칵 뒤흔들 폭풍이었다.
* * *
쥬웰의 도움을 받아 해밀턴은 곧바로 골란 고원을 빠져나왔고, 성지에서 에스텔레의 유해, ‘성배’를 발견하였다는 소문을 내었다.
쥬웰의 예상대로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뭐? 성지에서 성배가 발견되었다고?”
“에스텔레 성녀님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해!”
갑자기 성지에서 에스텔레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것에 의아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에스텔레는 어둠에 맞서 순교했다고만 알려졌지, 구체적으로 어디서 죽음을 맞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원수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에스텔레의 영혼을 바칠 때 그녀의 시체도 같이 게헨나에 끌려갔었다.
그러니 악마들의 변덕에 따라 성지에서 그녀의 유해가 나타난 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당장 모셔와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하지!”
“어서 모셔와야 해!”
백성들은 떠들썩 외쳤다.
다만, 귀족들의 셈법은 조금 달랐다.
‘에스텔레 성녀의 성배라니.’
‘누가 성배를 가져가는 거지?’
성인의 유해, 성배는 여러 면에서 대단한 가치가 있었다.
일단 정치적 가치.
성배를 자신의 가문으로 모실 시, 성인이 생전에 누렸던 명성을 가져오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물리적인 힘.
성인의 유해는 그 자체로 신의 강력한 은총이 깃든 축복의 ‘보구’였다.
누구든 성인의 유해에 깃든 신의 은총을 흡수할 수 있다면 대단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성배의 은총을 흡수 후 커다란 축복을 받은 이가 역사상 여럿 있었다.
또한 신앙적인 의미도 있었고, 마지막으로 금전적인 의미도 있었다.
성인의 유해, 성배는 감히 값을 상정할 수 없는 ‘보물’이었으니까.
상상해 보자.
만약 성인의 유해를 누군가 발견해 소유했다면, 그 가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앞서 말했듯 성인의 유해는 어마어마한 효용이 있어서 바라는 이가 많았다.
그러니 부르는 게 값인 보물이 되는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의아해할 수도 있다.
성인의 유해는 원래 성인이 속했던 가문의 것 아니냐고.
원래 당연히 그래야 옳지만 힘의 논리는 상식을 압도한다.
성인의 유해를 탐내는 이들은 그런 원칙을 뒤엎었다.
성인은 생전 만인에게 축복을 베풀던 이이니, 그런 성인의 유해도 만인의 것이라는 억지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이런 특수성 성배가 발견되자, 제국은 온통 난리가 났다.
힘 있는 이들은 온갖 목적으로 성배, 성인의 유해를 노렸고 덕분에 피바람이 불었다.
특히 여섯 공작가가 욕심을 내었다.
‘그래도 에스텔레 성녀는 에메랄드 공작가 소속이었으니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가져가게 되겠지?’
‘하지만 다른 여섯 공작가에서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까?’
‘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던 에스텔레 성녀의 성배이니. 얼마나 끔찍한 쟁탈전이 일어날지.’
‘피바람이 불 거야.’
그렇게 모두가 긴장할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성배와 관련해 신의 신탁이 내려온 것이다.
추기경 리델하트를 통해서였다.
-이 성배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이의 그릇.
-이 그릇을 통해 가넷의 내 딸에게 내 은총을 전달하고자 하니, 신탁을 듣는 이들은 그 뜻에 따르거라.
그 신탁을 들은 제국의 모든 이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가, 가넷의 내 딸이라면? 쥬웰 성녀님?”
“그러면 이 신탁의 의미는?”
명확했다.
쥬웰에게 성배의 은총을 전달하라는 신의 명령이었다.
제국이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다.
쥬웰이 에스텔레의 후인으로 신께 직접 인정받은 것이다.
이제 에스텔레의 유해를 가져와 성배에 깃든 은총을 내려받는다면, 쥬웰은 명실공히 에스텔레의 후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신탁이 내려왔으니 성배는 가넷가로?’
‘하지만 다른 여섯가가 그걸 가만히 좌시할까?’
원래 에스텔레의 가문인 에메랄드 공작가는 물론, 다른 공작가도 성배가 가넷 공작가로 가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쥬웰이 에스텔레의 후인이 되는 건 다른 공작가 모두 바라는 바가 아니니까.
특히 쥬웰과 각을 세운 원수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쥬웰에게 에스텔레의 성배가 전달되는 걸 막으려 들 것이다.
신탁인데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애초에 신의 뜻을 신경 쓰는 이들이었다면 여섯 공작가가 이토록 타락할 일도 없었다.
‘과연 성배의 행방은 어디로?’
그렇게 모두가 숨을 죽여 긴장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폭풍 전 고요였다.
* * *
쥬웰은 그런 분위기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다 새빨간 거짓말 신탁이지.’
그녀는 등심 스테이크를 썰며 생각을 이어갔다.
‘확실히 리델하트 오라버니의 신학자로서의 명성이 도움된단 말이야. 조작해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니.’
지금 리델하트가 받은 신탁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쥬웰이 이런 거짓 신탁을 꾸민 이유는 간단했다.
원수들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어떻게 나오려나?’
그렇지 않아도 거침없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쥬웰이었다.
그런데 에스텔레의 은총까지 내려받아 공식적으로 신이 인정한 에스텔레의 후인이 된다면?
쥬웰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명성은 곧 힘이었다.
‘특히 난 가넷이니까.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겠지.’
명성과 권력은 대단한 시너지 효과를 보이니까.
그녀가 그런 힘을 얻는 걸 원수들이 잠자코 보고만 있으려고 할까?
‘절대로 그러지 않겠지. 어떻게든 내가 성배를 손에 넣는 걸 훼방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고 할 거야.’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내가 의도한 대로 말이야.’
사파이어 공작가.
다이아 공작가.
에메랄드 공작가.
이 세 공작가는 탐욕에 눈이 멀어 쥬웰이 판 함정에 빠지게 될 거고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때, 음성이 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토른 공작이었다.
지금 쥬웰은 가넷가의 일원들과 가족 만찬 중이었다.
쥬웰은 빙긋 웃었다.
“그냥, 신탁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클클, 그렇구나. 우리 사랑스러운 손녀가 신의 인정까지 받다니. 어찌 이리 기특할꼬.”
토른 공작은 웃으며 말했지만, 쥬웰은 퍼뜩 토른 공작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신탁이 내가 꾸민 거짓인 걸 꿰뚫어 보고 있구나.’
역시 늙은 너구리.
아니, 너구리란 표현은 토른 공작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제국 최악의 괴물이란 표현 외에 토른 공작을 표현할 말은 없었다.
어쨌든 그런 괴물답게 누구도 감히 의심 못 하는 신탁 조작을 눈치챈 것이다.
‘뭐, 토른 공작도 비슷한 일을 왕왕했을 테니.’
토른 공작은 쥬웰이 신탁을 조작한 걸 전혀 책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신탁 조작 따위 필요하면 할 수도 있지. 이런 얼굴?
그저 토른 공작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지금, 쥬웰은 제국에 폭탄을 던진 상황이다.
정확히는 여섯 공작가에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쥬웰은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제가 뭐 따로 할 게 있나요?”
“흐음?”
쥬웰은 나이프를 들어 앞의 스테이크를 썰었다.
“일단, 지켜봐야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쥬웰은 맞은편에 창백한 얼굴로 앉은 중년 남성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나요, 백부?”
“……!”
쥬웰은 빙글 웃으며 물었다.
“과연 이 신탁을 들은 다른 이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절 싫어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백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넌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도발이었다.
쥬웰이 에스텔레의 후인이 되지 않길 바라는 이들에는 로튼 백작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로튼 백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는 정치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다.
쥬웰에게 밀려 후계위에서 끌어내려지기 일보 직전이라 미칠 지경인데, 쥬웰의 도발까지 들으니 빡 머리가 돌았다.
쥬웰은 조금 더 로튼 백작을 긁었다.
“제가 에스텔레 성녀님의 후인이라니. 참 기뻐요. 백부께서도 기쁘시죠? 아니, 딱히 기쁘지는 않으시려나? 얼굴 푸세요. 그렇게 찌푸리고 계시면 속 좁게 질투라도 하는 것 같잖아요.”
콰당!
결국, 로튼 백작은 의자가 넘어질 정도로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죽일 듯 쥬웰을 노려보았다.
그 살벌한 눈길에 옆에 앉은 엔리크의 얼굴이 꿈틀하였다.
쥬웰은 만류하기 위해 급히 엔리크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로튼 백작의 분노를 온전히 달콤하게 즐기고 싶었다.
‘이런 반응, 좋아.’
쥬웰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왜 그러나요, 백부? 제가 무슨 이야기를 잘못했나요?”
쥬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로튼 백작의 복장을 터지게 할 도발을 추가로 하였다.
“혹시 절 보니 갑자기 백모가 저지른 죄가 떠올라 그러시는 건가요? 이제 백모는 죄인의 신분이니 그만 그리움을 잊는 게 낫지 않을까요?”
쥬웰의 음모에 당해 신분을 강등당하고 종신 유폐 형에 처한 그의 아내를 모욕하는 말까지 꺼냈다.
로튼 백작의 얼굴이 이제는 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빨개졌다. 눈에도 핏발이 섰다.
당장에라도 쥬웰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심정이 절절히 느껴졌다.
물론, 아내를 모욕해서 화내는 게 아니었다.
로튼 백작은 아내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까. 애초에 그의 아내가 유폐당한 것은 그의 책임도 한몫하지 않았는가?
로튼 백작이 당시 자신의 아내를 감쌌다면 에블린 백작 부인은 유폐 형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그저 쥬웰을 향한 분노일 뿐이었다.
“너…… 너…….”
당장에라도 사고를 칠 것 같은 얼굴.
쥬웰은 기대되었다.
솔직히 로튼이 사고를 쳐주었으면 했다. 그걸 빌미로 더욱 ‘즐거운’ 상황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튼.”
토른 공작이 나선 것이다.
“앉아라. 식사 중 뭐 하는 거지?”
“…….”
놀랍게도 로튼 백작은 토른 공작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꽉 깨물더니 휙 등을 돌렸다.
“……입맛이 없어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정말로 만찬회장을 나가 버렸다.
휘란드가 허겁지겁 그런 로튼의 뒤를 따랐다.
“허어?”
만찬회장에 남은 모두가 로튼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히 토른 공작의 앞에서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특히, 로튼 백작은 늘 바짝 엎드려 토른 공작의 눈치를 살폈던 이라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단, 한 명.
쥬웰만이 느긋하게 속으로 생각했다.
‘일부러 긁은 보람이 있네. 이제 미쳐 무모한 짓을 벌이려 하겠지.’
로튼 백작은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의도한 대로 움직여 줄 것 같았다.
그때, 토른 공작이 혀를 찼다.
“저리 어리석긴. 무릇 가넷이라면 궁지에 몰려도 여유를 잃지 않아야 하는 법이거늘.”
쥬웰이 배시시 웃으며 토른 공작에게 다가갔다.
“가넷에는 제가 있잖아요, 할아버지.”
어서 로튼 백작을 내치고 자신을 차기 공작으로 세우라는 애교였다.
“뭐? 하하. 그래, 네가 있지. 우리 사랑스러운 요정 공주님. 안아봐도 되겠느냐?”
“그럼요.”
쥬웰은 늘 하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손녀를 연기하며 토른 공작의 품에 안겼다.
‘이것도 이제는 익숙하네.’
워낙 여러 번 연기해서일까.
이렇게 토른 공작의 품에 안기는 것도 진짜 손녀가 된 듯 익숙했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진짜 손녀가 된 건가.’
쥬웰은 순간, 마음이 복잡 미묘했다.
토른 공작에게 보이는 이런 자신의 행동이 마냥 ‘연기’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엔리크를 ‘아버지’라고 여기게 된 것처럼.
어쩌면 그녀는 토른 공작도 ‘할아버지’라고 여기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정말 그럴지도. 난 정에 약하니까.’
토른 공작은 그녀를 진정한 ‘가족’으로 여기며 각별하게 대했다.
원래는 안 그랬는데 어느덧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런 토른 공작의 마음을 느끼며 그녀도 그에게 정을 품게 된 것 같았다.
‘……이게 과연 좋은 일인 건지, 나쁜 일인 건지.’
설마 괴물 토른 공작에게 정을 느끼게 되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쥬웰은 혼란스러웠다.
토른 공작이 그런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괴물 토른 공작의 손길이라고는 상상 못 할 정도로 따뜻해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가 네게 이럴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토른 공작이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가넷의 왕을 어린애 취급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토른 공작은 곧 그녀에게 공작 위를 물려줄 것이라 말한 것이다.
“할아버지?”
“물론, 아직 관문이 남았다. 이번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이용해 커다란 일을 꾸미려는 것이지?”
“네, 이번 일이 끝나면, 누구도 제가 가넷의 왕이 되는 걸 반대하지 못할 거예요.”
토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고, 대신 짧게 말했다.
“그러면 잘해라. 지켜보겠다.”
그 말에 쥬웰은 싱긋 웃었다.
“기대하세요. 아주 재미있을 테니.”
그녀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수들을 비웃으며 그들의 머리를 짓밟을 것이다.
* * *
만찬이 끝났고, 만찬장에는 쥬웰과 엔리크 부녀만 남았다.
“혹시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쥬웰은 물었다.
무언가 엔리크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느낀 것이다.
그런데 엔리크의 말은 뜻밖이었다.
“넌 앞으로도 내게는 애다.”
“……네?”
갑자기 웬 등심 스테이크 육즙 터지는 소리?
고개를 갸웃하는데, 엔리크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넷의 왕이 되어도 너는 내 딸이고, 내게는 영원한 아이란 뜻이다. 그러니 언제든 내게 기대어도 된단다.”
엔리크는 굳건한 눈빛으로 말하였다.
“난 네 아버지이니까.”
그러니까.
가넷의 왕이 되어도 자신이 그녀의 기댈 곳이 되어주겠다고.
엔리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왜일까.
쥬웰은 아버지의 그런 말을 듣는데, 괜히 가슴이 울컥하였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러면, 지금 기대어도 되나요?”
엔리크는 대답 대신,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엔리크가 딸의 모습을 속상한 듯 바라보더니 말했다.
“네게 거슬리는 건, 내가 다 처리해 주는 건 어떻냐?”
“네?”
“로튼 형님이든 누구든, 네게 거슬리는 것들은 이 아비가 모조리 처리해 주마. 힘든 일은 모조리 이 아비에게 넘기고 너는 편안히 앉아 있기만 하는 거지. 그렇게 하면 안 되겠느냐?”
그 말에 쥬웰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사실 엔리크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일 것이다.
‘힘들면 다 내려놓으면 안 되겠느냐?’
엔리크는 그녀가 힘들어하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가 짐을 내려놓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바라는 게 아니니, 저렇게라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저, 가서 쉴게요.”
괜히 마음이 흔들려 그렇게 말하자 엔리크가 뚱하니 물었다.
“같이 쉬면 안 되겠냐?”
“네?”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요즘 네가 바빠 도통 같이 있지 못하지 않았느냐?”
“…….”
엔리크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데이트도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약속은 언제 지키려는 거냐?”
쥬웰은 잠시 눈을 끔뻑끔뻑하였다.
‘데이트? 그랬나?’
생각해 보니 이전에 그런 약속을 했던 것도 같다.
“설마,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당연히. 가넷의 약속은 중요한 법이니. 잊지 않고 있었다.”
엔리크는 왜인지 토라진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쥬웰은 그런 아버지가 귀여워 쿡쿡 웃음을 흘렸다.
‘저런 얼음꽃 같은 얼굴로 너무 귀여운 것 아닌가?’
엔리크는 자신이 생각해도 주책이라고 여겼는지, 민망한 얼굴을 하더니 곧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꼭 오늘 해달라는 건 아니다. 너도 피곤한 것 같으니.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무조건 할 것이다, 데이트.”
결국, 빵 터져 쥬웰은 배를 잡고 웃었다.
기분이 좋아진 쥬웰은 엔리크의 팔짱을 꼈다.
“그냥 오늘 해요.”
“응?”
“지금 하자고요, 데이트.”
“하지만 넌 피곤하지 않느냐?”
“아버지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팔팔해요.”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엔리크의 얼굴은, 뭐랄까.
눈이 커지고 소년처럼 살짝 뺨이 붉어지는데, 무슨 소원을 이룬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면 지금 준비하마!”
휙, 바람처럼 사라지는 엔리크의 모습에 쥬웰은 다시 쿡쿡 웃었다.
‘좋네.’
그녀는 엔리크가 좋았다.
너무나.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 * *
이후 쥬웰은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는 뜻밖의 일이었는데, 지금 그녀는 화제의 중심이었다.
새롭게 나타난 성배와 관련한 신탁의 주인공이어서 모두가 쥬웰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쥬웰은 아무런 행보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원수들이 추악한 민낯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렇게 기다리는 것 외에 딱히 할 게 없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아가씨, 또 보석이 왔어요.”
“……이번엔 누가 보낸 건데?”
“광휘의 대공님이요.”
“……반품해.”
“……선물 또 있는데. 황태자 전하도 보내셨어요.”
“……그것도 반품해.”
막간을 이용해 두 남자가 선물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아니, 갑자기 이 난데없는 선물 공세는 뭔데?’
쥬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시작은 유스넨이었다.
지난번 있었던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사과하는 의미로 선물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무시했다.
딱히 기분이 안 풀려서라기보다는 앞으로 유스넨과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런데 얼씨구?
유스넨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과의 선물을 보냈다.
계속 무시했지만 선물은 점점 더 정성스러워지고 비싸졌다.
‘아니, 자꾸 이러지 말라고. 우리 둘은 멀어져야 한다고.’
쥬웰은 유스넨이 보낸 선물을 보고는 고구마 먹은 얼굴로 팍팍 한숨을 내쉬었다.
유스넨이 보낸 보석이 갓 캐낸 싱싱한 고구마처럼 보였다.
이만큼 거절했으면 그녀의 뜻을 눈치챘을 텐데 유스넨은 굴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도 고집이 장난 아니었지.’
조그만 흰 강아지 때도 똥고집이 있던 기억이 났다.
‘얘 진짜, 집착남 되는 것 아니야?’
쥬웰은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섹시 조신 집착남이라니…… 그것참 바람직……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리 거절해도 유스넨이 끝없이 돌진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다.
결혼에 성공할 때까지 말이다.
‘……바짝 정신 차려야겠어. 잘못하면, 어어 하다 넘어가겠어.’
파혼은커녕 어어, 하다가 결혼식장에 유스넨에게 안겨 들어가는 상상을 하며 쥬웰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유스넨의 선물 공세는 예상외의 부작용을 낳았다.
‘대 선물 경쟁 시대’를 연 것이다.
두 번째 주자는 황태자 오펜하임이었다.
유스넨이 선물 공세를 펼치니 질세라 선물을 가져다 바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오.”
창문으로 미의 여신처럼 아름다운 얼굴의 오펜하임이 싱긋 웃으며 나타났다.
“……도대체 왜 매번 창문으로.”
“정문으로 오면 안 만나주지 않소?”
“그리고 오랜만이라니. 이틀 전에도 보지 않았나요? 그때도 선물 준다고.”
“매일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이틀이면 아주 오랜만이지. 여기, 내 마음이오.”
오펜하임이 한쪽 무릎을 꿇더니 곱게 포장한 선물을 쥬웰에게 내밀었다.
“……무슨 선물을 매일 이렇게…….”
“앞으로도 매일매일 그대를 위한 선물을 바치고 싶소. 생각 같아서는 이 제국이라도 그대에게 주고 싶으니.”
“……그럴 능력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오펜하임은 멋쩍게 말했다.
쥬웰은 상자를 열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특이한 선물은.’
선물 공세를 펼치는 주자들은 각자 선물의 특색이 달랐다.
유스넨은 휘황찬란 반짝반짝 보석 위주로 선물을 퍼부었다.
돈 자랑을 하려 하기보다는…… 레이디와 교제를 해본 적 없는 순진 조신남이라 선물 머리가 없는 눈치였다.
솔직히 쥬웰은 한 세 번쯤 보석을 받고 나서는 유스넨에게 선물 코치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런 선물 별로라고.
반면, 오펜하임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진귀한 보물들을 선물로 가져왔다.
성유물, 보구, 골동품 같은 걸 말이다.
……아마 황가에 돈이 없어 직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발굴한 보물들을 가져다 바치는 것 같았다.
물론 값어치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것들이긴 했다.
참 기특한 마음이지만, 역시나 레이디에게 주는 선물로는 별로였다.
‘……오펜하임도 의외로 선물 센스가 별로네. 이성 교제 경험이 없는 조신남이었던 건가. 하긴, 요즘 사교계 유행은 무조건 조신남이니…… 아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쥬웰은 생각이 딴 곳으로 새어 퍼뜩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선물 좀 그만 가지고 오십시오. 어차피 제 마음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모르는데.”
“저 전하한테 티끌만큼의 마음도 없습니다.”
“…….”
“진짜, 먼지만큼도요.”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힌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역시나 오펜하임.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소. 지금까지 그대의 마음이 그랬다고, 앞으로도 똑같으리란 법은 없으니.”
“…….”
“그리고 이렇게 선물을 주는 건 내게도 이로운 일이오.”
“이롭다고요?”
“그렇소. 이 선물을 준다는 핑계로 그대를 자주 만날 수 있지 않소?”
“…….”
“선물 한 번에 그대와 만남 한 번이면 아주아주 남는 장사이지.”
여전히 흔들림 없는 오펜하임의 태도에 쥬웰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전…….”
“페리도트 대공에게 마음이 있지. 알고 있소. 그런데, 파혼 신청했다며?”
“…….”
“그러면 내게도 기회가 생긴 것 아니오?”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것 전혀 아니거든?’
하지만 오펜하임 입장에서는 그렇게 여겨질 것 같았다.
짝사랑하던 이가 연인과 파혼하려 하고 있었으니.
심지어 쥬웰은 아직도 오펜하임과 약혼 상태였다.
이런저런 일이 겹쳐 아직도 파혼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당장 파혼 서류를 넣어야…… 아니, 그래도 소용없구나. 망할, 숙려 기간.’
왜 법이 이따위로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재판을 통한 약혼 파혼 시 6개월간의 숙려 기간을 가져야 한다.
‘6개월 너무 길잖아. 어떤 놈이야? 이렇게 정한 사람.’
분명 지금의 오펜하임처럼 파혼당하기 싫어, 억지로 상대에게 매달리던 놈이 만든 법일 것이다.
어쨌든 오펜하임은 마냥 좋다는 듯 떠들었다.
“옆에서 연모하는 이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응원해 주는 건, 평생 친구로 남을 바보들이나 하는 머저리 짓이지. 이럴 때일수록 곁에서 그대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소?”
“……됐고, 돌아가는 길에 파혼 서류나 법원에 접수해 주십시오.”
“싫은데? 그러지 말고 이거 어떻소? 그대가 혹할 제안이 있소.”
“뭘 말입니까?”
오펜하임은 계략남처럼 말했다.
“나와 계약 연애를 하는 거요.”
“……계약 연애요?”
쥬웰은 소고기 등심 옆구리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대는 유스넨과 헤어지길 바라고 있지 않소. 그러니 확실히 하기 위해 나와 계약 연애를 하는 거지. 물론 난 계약 연애에서 시작해서 그대로 결혼까지 골인할 계획이지만.”
“……얼른 돌아가기나 하십시오.”
약혼자 중 한 명은 선 결혼 후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하고 다른 한 명은 계약 연애를 하자고 지껄이고.
참, 정신이 혼미해지는 난장 파티였다.
어쨌든 오펜하임을 내쫓고 났더니 ‘선물 경쟁’의 다음 주자가 나타났다.
……주책 아버지 엔리크였다.
두 약혼자가 경쟁하듯 선물을 보내자 질세라 그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왜 아버지도 선물 경쟁에 뛰어든 거냐고.’
쥬웰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엔리크가 얼음꽃같이 냉랭한 얼굴로 선물을 가져다주는 모습은…… 참…….
‘……귀엽지.’
쥬웰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차가운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매번 어색한 얼굴로 선물을 가져다주는 모습이 참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쥬웰이 생각하기에 모든 선물 경쟁 주자 중 엔리크의 선물이 1등이었다.
“쥬웰, 여기 네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사 왔다.”
“……고마워요.”
포장된 상자를 여니, 케이크와 함께 예쁜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참 신기하게 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머리핀이었다.
엔리크가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오다 우연히 봤는데 네게 어울릴 것 같아서 사 왔단다. 그러니까, 우연히 지나가다가 봐서.”
‘……무슨 그런 우연을 일주일에 다섯 번이나…….’
안 봐도 뻔했다.
작심하고 딸이 기뻐할 선물을 찾기 위해 길거리를 쏘다니며 온갖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이런 센스 넘치는 선물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이럴 필요까지는. 그래도 좋긴 좋네.’
쥬웰은 엔리크의 마음이 고마워 그에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아버지. 마음에 들어요.”
엔리크의 얼굴이 화사한 봄처럼 밝아졌다.
그러고는 왠지 민망한 마음이 들었는지 헛기침하고는 나가려 했다.
“업무를 보느라 바쁠 텐데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그러면 쉬엄쉬엄하여라.”
쥬웰은 현재 가넷의 중요 인물로서 온갖 직위를 주렁주렁 가지고 있어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긴 했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젓고 엔리크의 손을 잡았다.
“그러지 말고 여기서 같이 해요.”
“음?”
“아버지도 처리할 업무 많잖아요.”
엔리크도 최근 여러 직위를 추가로 맡았다.
차후 가넷의 왕이 될 쥬웰을 보좌하기 위해서다.
엔리크는 사르르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되겠느냐?”
“그럼요. 같이 있어 주세요.”
쥬웰은 아버지와 함께 업무를 보았다.
쥬웰은 힐끗 자신 옆에 앉은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엔리크를 보면, 어쩔 수 없이 원래의 아버지 웰링턴 공작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다른지.’
사실, 아버지와 같이 일을 하는 건 에스텔레 때도 자주 있었다.
성녀로서 웰링턴 공작과 같이 일한 적이 많으니까.
하지만 엔리크는 웰링턴과는 전혀 달랐다.
옆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간질간질,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엔리크와 시간을 보낸 후, 다음 주자가 선물을 가져왔다.
리델하트였다.
“……오다 들렀습니다.”
“……왜?”
“…….”
“…….”
리델하트는 무슨, 결투라도 신청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손에는 커다란 리본이 매달린 화사한 상자를 들고 있었다.
안을 열면 귀여운 토끼 인형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상자였다.
“……설마 선물?”
“……딱히 당신을 위해 주는 건 아닙니다.”
선물이 맞다는 말이다.
‘리델하트 오라버니와 리본 선물 박스라니.’
이 아스트랄한 대혼돈 미스 매치에 쥬웰은 얼떨떨하게 말하였다.
“……놓고 가. 고마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딱히 당신을 위해서 주는 건……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마시고…….”
리델하트는 구질구질하게 사족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리고 주자는 리델하트가 끝이 아니었다.
마리도 있었다.
마리는 거부가 된 자신의 재력을 자랑하려는지 온갖 화려한 선물 공세를 펼쳤다.
심지어 선물 경쟁에 뛰어든 주자에는 해밀턴도 있었다.
[존경합니다, 쥬웰 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쥬웰 님!]
이런 아부가 가득 담긴 편지와 함께 선물을 보낸 것이다.
물론 진심일 리는 없고, 이건 뇌물이었다.
제발 앞으로 그만 좀 괴롭히라는 뇌물.
‘음…… 제일 힘든 일이 남아 있는데, 어쩌지. 미안하네.’
쥬웰은 해밀턴이 앞으로 해줘야 할 일을 떠올리고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끔찍한 일이 남았는데.’
해밀턴이 들으면 사색이 되어 펄쩍 뛸 이야기였다.
지금까지도 매번 지옥을 경험했는데, 그것들과 비교도 안 될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니.
하지만 해밀턴에게는 슬프게도 진짜였다.
쥬웰이 ‘미안함’을 느낄 정도로 해밀턴은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일단 조금 뒤의 일이니, 지금은 이야기하지 말고 내버려 두고 있자.’
쥬웰은 해밀턴의 선물을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룬.
“저, 저도 선물을 가져왔어요! 여기 등심 스테이크예요!”
“……그래, 네 선물이 제일 좋구나. 등심 스테이크가 최고이지.”
쥬웰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때아닌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머릿속에서 예상 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와주실 수 있나요, 로드?
‘뭐지?’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리였다.
‘얼마 전 봤는데?’
그런데 또 부르는 것을 보니 무언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후 쥬엘은 마리의 저택으로 향했다.
쥬웰은 마차 안에서 맞은편에 앉은 리샤크를 바라보았다.
“리샤크?”
“네, 아가씨?”
“……아니야.”
그날, 이후 리샤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쁜 티도 내지 않았다.
그냥 평소의 리샤크와 똑같았다.
하지만 쥬웰은 리샤크가 정말로 괜찮은 건지 의심이 들었다.
‘뒷조사를 해봤지만 딱히 나오는 건 없던데.’
최근 여유가 있을 때 사람을 시켜 조사를 해봤는데, 딱히 걸리는 건 없었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없어서 나오는 게 없는 건지, 리샤크가 은밀히 ‘숨긴’ 탓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물어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쥬웰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어쩌면 그날 쥬웰이 리샤크를 외면했을 때 리샤크의 마음이 열릴 기회는 끝난 것일 수도 있었다.
쥬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리의 저택이었다.
마리는 돈을 벌어 이제 귀족들이 모여 사는 거리의 번듯한 저택으로 이사했다.
“들어갔다가 올게. 기다리고 있어.”
“네.”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리를 만난 쥬웰은 흠칫하였다.
마리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던 것이다.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마치 눈물이라도 흘린 듯.
“……왜 그러지?”
“로드.”
마리는 눈물을 참으려는 것처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십마 아낙스의 행방을 찾았어요.”
십마 아낙스.
타란툴라를 제외하고는 최강의 흑마도사.
일전 쥬웰은 마리에게 그 아낙스의 행방을 찾으라고 시켰다.
“그래, 수고했군. 그런데 왜 그러는 거지?”
쥬웰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로튼 백작이 아낙스에게 접근했어요.”
“어째서?”
“흑마도사들을 동원해 에스텔레 성녀님의 유해를 훼손하고 불태워 달라고.”
“……!”
“그뿐만이 아니에요. 에스텔레 성녀님의 유해가 나타나 여섯 공작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동향을 살폈는데, 모두 다 끔찍했어요.”
“……어떻지?”
“사파이어 공작가와 다이아 공작가는 곧바로 손을 합쳐 골란 고원에 병력을 파견했어요. 에스텔레 성녀님의 유해를 가넷가가 아닌, 다른 곳에 비싸게 팔아치우려는 속셈이에요.”
마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에메랄드 공작가는 중간에 에스텔레 성녀님의 유해를 가로챌 작정이에요. 성녀님의 유해에 깃든 은총을 자신들의 것으로 뺏으려고.”
마리의 눈동자에서 결국 주룩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죠? 에스텔레 성녀님은 그들 때문에 끔찍한 죽음을 맞았는데, 어떻게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할 수 있죠?”
쥬웰은 마리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들은 에스텔레를 끔찍이 죽인 이들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죽인 에스텔레의 유해가 나타났음에도 반성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이용하려는 원수들의 작태에 마리는 분노했다.
하지만 쥬웰은 덤덤했다.
‘뭘 겨우 그런 걸 가지고. 원수들이 속으로 에스텔레의 유해를 진짜 어떻게 하려고 하고 있는지 알면 기절하겠군.’
방금 마리가 한 이야기는 겉으로 드러난 여섯 공작가의 ‘공식’ 입장일 뿐이었다.
쥬웰은 게헨나의 나비를 통해 원수들의 은밀한 동태를 정찰했고, 듣게 되었다.
실제, 원수들이 뒤에서 에스텔레의 유해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말이다.
끔찍했다.
‘기대한 대로였지. 아니, 기대 이상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나.
원수들은 그녀가 기대한 것 이상의 추악한 행동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군.”
“……로드.”
“고작 이런 일에 흔들리다니. 정신 차리도록. 그런 약한 마음으로 뭘 하겠다는 거지?”
마리는 하얀 안색으로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괜찮으신가요?”
쥬웰은 그 물음에 잠시 침묵했다.
‘안 괜찮을 이유가 있나?’
아니, 생각해 보니 솔직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원수들이 자신의 유해에 그런 끔찍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게.
하지만 쥬웰은 답했다.
“무슨 상관이 있나? 에스텔레, 그 바보 같은 여자의 유해를 놈들이 어떻게 대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마리는 그녀가 에스텔레임을 모르니까.
그래서 일부러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말했는데, 마리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괜찮지 않잖아요! 당신은 사실!”
거기까지 이야기한 순간이었다.
마리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마치 말실수한 것처럼.
마리는 쥬웰의 눈치를 보더니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은 사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거지?”
마리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쥬웰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 착하신 분이라고요. 그러니 함께 분노하실 거로 생각했어요.”
뭔가 의아한 답변이었지만 쥬웰은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피식 웃고는 경고했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네.”
마리는 다시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려 쥬웰의 눈치를 보았다. 곧 알 수 없는 이유로 살짝 안도하는 얼굴을 하였다.
의아한 모습이었지만 다른 생각에 집중하고 있던 쥬웰은 그런 마리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쨌든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군.”
“로드?”
“때가 무르익었어.”
쥬웰은 싱긋 웃고는 시선을 저택 창밖으로 향했다.
마침, 이번 음모의 첫 번째 사냥감인 에메랄드 공작가가 창문으로 보였다.
‘기대되네.’
원수들을 본격적으로 함정에 빠뜨릴 때가 되었다.
쥬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 * *
쥬웰은 곧바로 움직였다.
마리의 저택에서 나와서 에메랄드 공작가로 향했다.
“쥬, 쥬웰 성녀님?”
“법왕 예하를 뵈러 왔네. 안내해 주겠나?”
공작저를 지키는 성기사가 당황해 물었다.
“하, 하지만? 혹시 선약을 하셨는지?”
“선약? 그런 게 필요한가?”
쥬웰은 싱긋 웃었다.
“난 가넷인데?”
“……!”
그것도 차기 공작으로 가장 유력한.
즉, 그 말은 이제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높은 이가 될 것이란 뜻이다.
라인하르트 제국에서 최고로 존엄한 이는 황제도 황태자도 아닌, 가넷 공작이었으니까.
물론 에메랄드 공작, 법왕은 신전의 일인자로 존중받아 마땅한 위치였지만 그래도 둘 사이의 우위를 따지면 가넷 공작이 더 위였다.
“자,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난 기다리는 걸 아주 싫어하니 빨리 답변을 주도록.”
성기사는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고, 곧 놀라운 인물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쥬웰.”
백조처럼 고아한 여인.
플랑드나였다.
그녀는 여전히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웠는데, 이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쥬웰을 보는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흐음. 언니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네.’
쥬웰은 빙긋 웃었다.
플랑드나는 항상 고결한 모습을 가장했다.
속으로 어떤 시커먼 악의를 품고 있을지라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은 고결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가장을 하지 못했다.
쥬웰 때문에 여유를 잃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침식 때 끔찍한 모욕까지 당했으니 플랑드나는 독기를 숨기지 못했다.
플랑드나는 한기가 풀풀 날리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무슨 일로 온 거니?”
“흐음.”
쥬웰은 고개를 기우뚱하더니, 플랑드나를 데리고 나온 성기사에게 말했다.
“이상하군. 난 분명 법왕 예하를 뵙고자 한다고 했는데.”
“……!”
“지금 내 말이 우스운 건가?”
성기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정말 극적인 반응을 보인 건 플랑드나였다.
지금, 쥬웰은 플랑드나 따위와 할 이야기 없다고 말한 것이다.
플랑드나는 수치와 분노로 화악 붉어진 얼굴을 하였다.
“쥬웰, 너…… 너…….”
쥬웰은 플랑드나에게 무심히 말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요. 난 언니 따위를 보러 온 게 아니에요. 난 지금 이 자리에 가넷을 대표해서 온 것. 격에 맞게 법왕 예하를 불러오세요.”
당신 따위는 자신과 격이 맞지 않는다고 대놓고 내리까는 이야기에 플랑드나의 팔 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더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쥬웰이 가넷의 이름을 꺼냈으니까.
가넷의 이름 앞에서는 플랑드나도 감히 고집을 부릴 생각을 못 하였다.
플랑드나가 휙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뜻밖의 일이 있었다.
“아가씨, 여기 양산을. 햇볕이 셉니다.”
리샤크가 센스 좋게 양산을 위로 쳐준 것이다.
“고마워, 리샤크.”
그런데 양산을 드리우며 둘 사이가 가까워지자 리샤크가 속삭였다.
“저 추한 성녀. 제가 처리할까요?”
“……!”
쥬웰은 흠칫하여 시선을 돌렸다.
리샤크는 여전히 천진난만 순수한 얼굴이었다.
그는 눈을 끔뻑하며 말했다.
“아가씨를 보는 눈빛이 불손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침식 때도 아가씨께 무례를 범했다고 하고요.”
“…….”
“만약 필요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은밀히 손을 쓰겠습니다.”
리샤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아가씨께 해드릴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요.”
“리샤크, 너…….”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리샤크의 얼굴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귀엽고, 예쁘고, 순박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름이 쫙 돋았다.
‘얘가 갑자기 왜…… 아니, 원래도 이런 면이 있었지.’
리샤크는 순박해 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살인과 폭력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모습은 딱히 놀라울 게 아니긴 했지만, 왜인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리샤크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외침이 들렸다.
“법왕 예하가 오십니다!”
“……!”
쥬웰은 순간, 가슴이 두근 뛰었다.
‘드디어.’
법왕 웰링턴 공작.
그리고…… 그녀의 ‘진짜’ 아버지.
동시에 원수.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를 만나는 것은.
‘다른 원수들과 다르게 오랫동안 잘 지내고 있었지.’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제 곧 당신의 차례이니 기다리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중, 드디어 웰링턴 공작이 나타났다.
그리고 웰링턴 공작의 모습을 본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쥬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그만큼 지금 웰링턴 공작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왜 저런 꼴이야?’
원래 웰링턴 공작은 사람 좋은 호인형의 미남이다.
풍채도 좋고, 만나는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시원한 태도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웰링턴 공작은 전혀 달랐다.
일단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삐쩍 말랐다.
마치 병이라도 크게 앓았던 것처럼. 이전 커다란 풍채는 온데간데없었다.
변한 건 풍채만이 아니다.
태도도 변했다.
시원시원하고 호방한 태도는 사라지고 어딘지 무거운 기운이 가득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장 크게 변한 건 이거였다.
눈빛.
항상 기분 좋게 빛나던 에메랄드빛 보석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 왜…… 이런 모습이야?’
물론 리델하트에게 듣기는 했다.
웰링턴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쥬웰이 충격을 받아 우뚝 굳어 있을 때 웰링턴이 말했다.
“날 찾았다고 들었소, 바톤 남작.”
“……네, 그렇습니다, 법왕 예하.”
웰링턴 공작이 어딘지 무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오시오.”
* * *
웰링턴 공작을 따라가며 쥬웰은 뒤죽박죽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상상도 못 했다.
‘중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니야.’
어찌나 뜻밖이었는지, 쥬웰은 악마의 권능까지 동원해 웰링턴 공작의 몸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특별히 병환을 앓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저런 꼴이란 말인가?
그때,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음성.
‘웰링턴 공작 전하는 최근 술만 마시고 가세요.’
‘무언가 크게 낙심하기라도 한 건가?’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물어도 외부인인 쥬웰에게 대답해 줄 리가 없었다.
쥬웰은 지그시 인상을 찌푸렸다.
‘곤란해. 난 원수가 최대한 빛나고 있기를 바랐는데.’
저런 맥 없는 모습은 쥬웰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어쨌든 자리가 마련되었고, 하인이 차를 내오자 웰링턴이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분명 중요한 일이기에 본 법왕을 보자 청한 거겠지?”
경고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사소한 일로 자신을 부른 게 아니길 바란다는.
하지만 쥬웰은 곧 그게 아니란 걸 눈치챘다.
‘경고가 아니야. 그냥 지금 나와의 만남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어.’
한때 잔뜩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살았기에 그녀는 웰링턴 공작의 표정을 예민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웰링턴 공작은 이 만남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의욕이 없어 보였다.
‘정말?’
그녀는 자신이 착각한 건가 하였지만, 아니었다.
정말로 모든 게 귀찮고, 관심 없다는 무심한 눈빛이었다.
‘뭐야, 도대체?’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면 믿을 수 없는 태도였다.
과거의 웰링턴 공작은 탐욕의 화신이었으니까.
사람 좋은 얼굴로 끝없이 탐욕을 좇으며 얼마나 많은 이의 피눈물을 흘리게 했는지 몰랐다.
이미 세상에서 손꼽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음에도 그의 욕심은 만족할 줄 모르는 아귀와도 같아 심지어 자신의 딸을 악마에게 바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저 한심한 얼굴은 뭐란 말인가?
‘뭐냐고, 도대체!’
한편, 웰링턴 공작은 쥬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바톤 남작?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한 것이오?”
“아, 이야기하겠습니다.”
쥬웰은 들끓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는 용건을 꺼냈다.
‘정신 차려. 중요한 자리야. 지금 이 만남의 결과에 앞으로의 복수가 달려 있어.’
쥬엘이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가넷과 에메랄드의 동맹을 제의하러 왔습니다.”
웰링턴 공작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고, 옆에 앉아 있던 플랑드나도 눈을 크게 떴다.
“잘 이해가 안 되는군.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가깝지 않은가?”
“가깝기야 하지요. 하지만 같은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웰링턴 공작은 말을 알아들었다.
“누군가를 노린 동맹을 맺자는 거군.”
동맹에는 보통 공동의 적이란 목적이 있다.
지금 쥬웰은 서로 힘을 합쳐 하나의 적을 상대하자고 하는 것이다.
“네, 다이아 공작가를 향한 동맹입니다.”
“……!”
웰링턴 공작과 플랑드나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더 이해가 안 되는군. 다이아는 가넷의 개 아닌가?”
웰링턴 공작은 노골적으로 가넷과 다이아의 관계를 표현했다.
맞는 말이다.
다이아는 가넷의 개였다.
하지만.
“개이지만, 건방진 개이지요. 콧대도 높고요.”
다이아는 가넷의 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이아 공작가가 마냥 고분고분하냐?
매리엇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가넷이 우위에 서 있지만 다이아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가넷을 거역하려 신경전을 벌일 때도 많았다.
쥬웰은 그 점을 명확히 표현했다.
“전 가넷이 다이아를 완벽히 발아래에 굴복시키기 바랍니다.”
“…….”
그 놀라운 이야기에 웰링턴 공작과 플랑드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 일에 에메랄드가 손을 보태라는 건가?”
“네, 가넷 혼자서 다이아를 굴복시키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대신, 에메랄드 공작가는 중간에서 다이아 공작가의 부를 집어삼키며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을 테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쁘지 않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다이아의 부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다이아의 부를 찢어 삼킬 기회이니, 원래의 웰링턴 공작이라면 눈이 돌아갈 제의였다.
하지만 웰링턴 공작은 뜻밖에도 별로 반색하지 않았다.
그저 물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계획인 건지 들어나 보지.”
쥬웰은 그런 웰링턴 공작의 반응에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석연찮음을 느낀 것이다.
‘설마, 거절하는 건?’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이 판에 서게 된 원수들 모두.
다 그녀의 뜻대로 미끼를 물게 될 것이다.
그렇게 판을 설계했으니까.
쥬웰은 잠시 숨을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 발견한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이용할 계획입니다.”
그러고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제물로 희생시켜 다이아 공작가에 커다란 타격을 줄 계획입니다.”
*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웰링턴 공작과 플랑드나 모두 쥬웰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무슨 말인가?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제물로 바치겠다니.”
착각일까.
웰링턴 공작의 음성이 다소 날카로워졌다.
쥬웰은 그런 아버지의 심기를 느끼고는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설마? 불쾌해하는 건가?’
하지만 곧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주제에 그럴 리가.’
그날, 인신 공양을 당할 때가 떠올랐다.
악마에게 끌려가며 그녀는 간절히 아버지에게 빌었다.
‘아버지, 제발! 제발! 구해주세요! 제발, 아버지!’
그래도 아버지니까.
다른 이들과 다르게 구해주지 않을까 희망을 품은 것이다.
하지만 그때 웰링턴 공작은 냉랭히 그녀의 애원을 무시했다.
그랬던 주제에 방금 자신이 한 이야기를 불쾌해할 리가 없었다.
‘역겨워.’
그날 일을 떠올렸더니 눈앞에 있는 웰링턴 공작을 향한 증오심이 불쑥 치밀어 올라, 쥬웰은 감정을 잠시 다스렸다.
“이야기한 대로입니다. 실례지만, 여쭙겠습니다. 에메랄드 공작가에서는 이번에 나타난 성배를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쥬웰은 물었다.
“설마, 신이 내린 신탁대로 제가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에 깃든 은총을 내려받길 바라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웰링턴, 플랑드나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에메랄드 공작가 입장에서 쥬웰이 성배의 은총을 받는 건 절대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아니,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미 사전 조율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발 빠르게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확보한 다이아 공작가에 거금을 주어, 중간에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은밀히 에메랄드 공작가 쪽으로 빼돌릴 계획이지요? 그리고 플랑드나 언니께서 은총을 대신 받고요.”
“……그래, 맞아.”
플랑드나가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에스텔레의 유해에 깃든 은총을 대신 받을 계획이야. 아무리 신탁이 있었어도 양보할 수 없어. 내가 사랑하던 동생, 에스텔레의 몸에 깃든 은총이니까.”
사랑하던 동생.
플랑드나의 그 말을 들은 쥬웰은 다시금 미칠 듯한 역겨움이 치솟아 올랐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고 말했다.
“글쎄, 하지만 그건 현명한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요?”
“뭐?”
“언니는 이미 악마의 은총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에 깃든 신의 은총을 받는다고 효과가 있을까요?”
“……!”
플랑드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쥬웰이 한 말의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쥬웰은 진득한 비웃음을 지었다.
“성배에 깃든 건 신의 축복. 그런데 이미 악마의 주구가 된 언니가 신의 축복을 받는다라. 그랬다가는 도리어 분노한 신의 저주가 임하는 게 아닌지 걱정되네요.”
“…….”
플랑드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쥬웰이 방금 지적한 사실은 플랑드나 스스로도 걱정하고 있었던 이야기다.
쥬웰은 의자에 허리를 기댔다.
“이래 뵈어도 전 언니랑 다르게 나름대로 신의 사랑을 받는 몸이어서 짐작할 수 있는데요. 언니, 성배에 깃든 은총을 받는 순간 끔찍이 저주받을 게 분명해요.”
플랑드나의 앙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쥬웰 너는 어떻게 하자는 거지?”
“어차피 언니에게 해롭기만 할 신의 은총 말고, 다른 걸 노리라는 거지요.”
“다른 걸?”
“네, 아까 이야기했듯 다이아 공작가 말이에요. 정확히는 다이아 공작가가 소유한 돈.”
쥬웰은 나직이 말했다.
“제 제안에 따른다면, 에메랄드 공작가가 1억 골드를 벌 수 있게 해주겠어요.”
“……!”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참고로 1~2백만 골드만 있어도 성 하나를 살 수 있다.
그런데 1억 골드라니.
나라 하나는 통째로 사고도 남을 정도의 돈이었다.
제국의 부를 움켜쥔 다이아 공작가라도 주춧돌이 흔들릴 어마어마한 금액.
그제야 플랑드나는 힘을 합쳐 다이아 공작가를 무릎 꿇리자는 쥬웰의 제안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1억 골드를 토해내면 다이아 공작가라도 무사할 수 없으니까.
“……구체적인 계획을 이야기해 봐.”
플랑드나가 흥미를 보이자, 쥬웰은 잠시 웰링턴 공작 쪽을 바라보았다.
웰링턴 공작은 이상하게 계속 말이 없었다.
이전이었다면 이 제안을 듣자마자 탐욕에 미친 돼지처럼 헐떡였을 텐데, 지금은 그저 무표정해 속을 알 수 없었다.
쥬웰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이유를 알 수 없게 다시금 기분이 불쾌해졌다.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넘겨받는 대가로 원래 다이아 공작가에 얼마를 지불할 계획이었지요?”
“……500만 골드. 위치가 하필 골란 고원이어서 어쩔 수가 없어.”
500만 골드 역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이건 에스텔레가 역사상 최고로 위대한 성녀였고, 그녀의 유해가 발견된 위치에 따른 특수성 때문이었다.
‘골란 고원은 제국 최악의 마경이니 그만큼 운송비가 높게 책정된 거지. 내가 의도한 대로야.’
쥬웰이 해밀턴에게 칼날 산맥, 용암 화산, 사해의 섬 같은 위험한 오지에 가라고 했던 이유는 이거였다.
위험도 때문에 에스텔레의 유해를 운송하는 비용에 높은 금액이 책정되게.
“그 금액, 2천만 골드로 올리세요.”
“……뭐?”
플랑드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2천만 골드! 말도 안 되는 돈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태연히 말하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인데, 도리어 500만 골드가 적은 것 아닌가요? 제 생각에는 2천만 골드 정도는 되어야 적당할 것 같은데. 대신, 그 어떤 성배보다 귀중한 성배이니 위약금을 통상의 세 배에서 다섯 배로 올리도록 협상하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플랑드나는 고민하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리 성전이라도 2천만 골드를 단번에 현찰로 지불할 여력은 없어.”
에메랄드 공작가는 다이아, 가넷 다음으로 돈이 많은 곳이다.
2천만 골드는 그런 에메랄드 공작가라도 지불이 어려울 정도의 금액이었다.
물론 에메랄드 공작가가 보유한 땅, 건물, 신전의 보물 등은 2천만 골드를 훌쩍 뛰어넘는다.
하지만 보유한 현금은 그것보다 훨씬 모자란다.
저런 금액이 현금으로 동원 가능한 가문은 오로지 다이아 공작가와 가넷 공작가뿐이다.
“꼭 현찰로 지불할 필요는 없겠지요. 신전의 재산을 담보로 잡고 수표로 지불해도 될 텐데요.”
“그건…….”
신전의 재산을 담보로 잡으라니.
무리한 요구였다.
하지만 쥬웰이 말했다.
“어차피 담보만 잡을 뿐, 실제 지불할 필요는 없을 텐데 뭐가 걱정인가요?”
“……!”
플랑드나의 눈빛이 빛났다.
“그게 무슨 말이지?”
“모름지기, ‘운송비’는 ‘물건’이 제대로 도착했을 때 지불하는 법이니까요.”
쥬웰은 싱긋 웃었다.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가 중간에 불에 타 사라지면, 2천만 골드를 실제로 지불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거죠.”
플랑드나는 눈을 크게 떴다.
쥬웰의 말을 모두 알아들은 것이다.
“너, 설마?”
“네, 맞아요.”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제가 흑마도사들을 동원해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불태우겠어요. 다이아 공작가는 성배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할 거예요.”
위약금.
이번 경우에는 다섯 배였다.
즉, 2천만 골드의 계약이니 1억 골드의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플랑드나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소름 끼치는 이야기였다.
만약 쥬웰의 이야기대로 된다면, 정말 1억 골드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그런데 가능한 이야기야? 다이아 공작가는 확실한 운송을 위해 사파이어 공작가를 용병으로 고용했어.”
에스텔레의 유해 소문이 퍼진 후, 최초로 그 유해를 차지한 건 다이아 공작가다.
전 대륙에 뻗어 있는 상단의 유통망을 이용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골란 고원은 최악의 마경.
유해를 확보했다고 해서 안전한 이송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이아 공작가는 에스텔레의 유해를 완벽히 이송할 최강의 용병을 고용했다.
사파이어 공작가다.
“듣기로는 검왕이 직접 골란 고원으로 향했다고 해.”
검왕(劍王).
라디트의 아버지이자 사파이어 공작가의 가주인 록슬론 공작을 뜻한다.
검왕이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록슬론 공작은 검제 샤피렌을 제외하고는 제국 최강의 기사였다.
그런 이가 직접 호위하고 있으니, 에스텔레의 유해를 불태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검왕이라도 막을 수 없을 수를 낼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하세요.”
쥬웰은 싱긋 말했다.
쥬웰에게 무언가 방법이 있음을 짐작한 플랑드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곧 날카롭게 물었다.
“네 말은 알겠어. 그런데 그렇게 해서 네가 얻을 이득은 무엇이지? 다이아 공작가를 약화시키는 것? 하지만 넌 에스텔레의 후인이 될 기회를 버려야 하는데?”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성녀로서 위대해지는 건 제 관심사가 전혀 아니에요. 제가 성녀 행세를 하는 건 오로지 권력을 얻기 위해서니.”
쥬웰은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하였다.
“전 이번 일을 통해 가넷 공작위를 손에 넣을 거예요.”
“……!”
플랑드나는 흠칫하였다.
“혹시, 너?”
“네, 맞아요.”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불태운 죄를 제 경쟁자인 로튼 백작에게 덮어씌울 거예요. 마침, 백부가 어리석게 이리저리 소문을 퍼뜨려 놨으니 누명을 씌우기 딱이죠.”
그날, 가족 만찬에서 궁지에 몰려 뛰쳐나간 후 로튼 백작은 백방으로 알아봤다.
에스텔레의 유해를 불태울 방법을 말이다.
그런 탓에 로튼 백작이 에스텔레의 유해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여러 사람에게 퍼졌고, 쥬웰은 그 소문을 이용해 그에게 누명을 덮어씌울 것이다.
아무리 로튼 백작이라도 그런 죄를 덮어쓰면 끝장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히 몰락하겠지.’
즉, 이건 다이아 공작가와 로튼 백작을 동시에 노린 함정.
아니, 사실은 눈앞의 에메랄드 공작가마저 노린 함정이었다.
플랑드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이게 끔찍한 독이 든 잔이란 것도 모르고, 욕심을 부리긴.’
쥬웰은 플랑드나의 눈동자에 잔뜩 깃들어 있는 탐심에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1억 골드를 뜯어내면…… 에메랄드 공작가와 다이아 공작가의 관계는 영원히 끝장이지.’
플랑드나와 매리엇의 친근한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듯, 원래 다이아 공작가와 에메랄드 공작가는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다이아 공작가는 성전의 가장 커다란 후원자였으니까.
하지만 에레랄드 공작가가 다이아 공자가로부터 1억 골드를 뜯어내는 순간, 두 공작가는 원수가 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지. 에메랄드 공작가는 자신들의 가장 큰 무기인 ‘신성’을 잃게 될 거야.’
에메랄드 공작가의 힘은 돈이 아니다.
신을 향한 예배를 담당한다는 ‘신성’이다.
이 ‘신성’ 때문에 어떤 누구도 함부로 에메랄드 공작가를 건드릴 생각을 못 했다.
그런데 누구보다 고결해야 할 성전이 탐욕에 눈이 멀어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빌미로 1억 골드를 뜯어낸다?
그 누가 에메랄드 공작가를 ‘신성’하다 존중하겠는가?
에메랄드 공작가의 힘은 대폭 훼손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추후 진행할 종교 개혁의 빌미가 되어주겠지.’
쥬웰은 속으로 지그시 생각했다.
그녀는 리델하트를 통해 에메랄드 공작가를 몰락시킬 종교 개혁을 준비 중이었다.
에메랄드 공작가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에 의해 개혁의 횃불이 밝혀지는 순간, 에메랄드 공작가는 산산이 몰락하게 되리라.
이번 함정은 그 파멸의 시작이었다.
‘이번 성배 사건을 기점으로 여섯 공작가는 본격적인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될 거야.’
그런데 가만히 있던 웰링턴 공작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할 이야기는 그게 끝인가? 그러면, 돌아가 보도록.”
“……!”
거절의 말이었다.
‘뭐?’
쥬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돼. 웰링턴 공작이 이 제안을 거부한다고?’
그녀는 웰링턴 공작을 잘 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딸까지 악마에게 바친 인물.
절대 이런 제안을 거절할 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웰링턴 공작의 눈을 마주한 쥬웰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진짜야?’
웰링턴 공작의 눈빛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심인 것이다.
심지어 언뜻 이유 모를 분노도 느껴졌다.
‘왜?’
쥬웰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 돼. 이번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해.’
아까 생각했듯, 에스텔레의 유해를 이용한 이번 계획은 원수들을 몰락시키는 데 아주 중요했다.
반드시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했다.
쥬웰은 빠르게 이 난관을 타개할 방책을 고민했다.
‘뭐가 문제인 거지? 내 계획에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는 건가?’
하지만 자신의 계획 중 어떤 점이 웰링턴 공작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그때 플랑드나가 나섰다.
“쥬웰, 잠깐. 나랑 따로 이야기 좀 할까? 아버지는 들어가세요.”
웰링턴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플랑드나.”
“괜한 훼방 넣지 말고 그만 들어가시라고요. 어차피 아버지, 성전의 일에 관심도 없잖아요. 들어가서 늘 하던 것처럼 술이나 마시세요.”
플랑드나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웰링턴 공작에게 말하였다.
이것 또한 처음 보는 모습이라 쥬웰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플랑드나 언니는 항상 아버지에게 공손했는데?’
하지만 익숙한 일인지 웰링턴 공작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딱딱히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이윽고 둘만 남게 되자 플랑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이야기인데 미안. 사실, 보다시피 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으셔.”
“……그렇군요.”
도대체 왜 그런 건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일단 참았다.
지금은 방금 하던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나는 쥬웰 네 이야기에 찬성이야.”
“그런가요?”
“네 말이 다 옳아. 내게 신의 은총이 효과 있을지 의문이고, 확실하지도 않은 신의 은총보다는 1억 골드가 훨씬 낫겠지.”
플랑드나는 짐짓 고결한 말투로 말했다.
“1억 골드면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 등을 말이야.”
쥬웰은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1억 골드 중 1%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 거면서.’
플랑드나가 1억 골드를 탐내는 이유는 그저 탐욕이었다.
1억 골드이니까.
누구든 눈이 돌아갈 금액이었다.
‘탐욕이 자신의 목을 죄는 것도 모르고. 신전의 신성은 탐욕을 내려놓을수록 강해지는 법이거늘.’
쥬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신성’은 남들에게 베풀수록, 탐욕을 내려놓을수록 강해지는 속성이 있다.
에메랄드 공작가는 탐욕을 좇음으로 스스로 자신들의 강점을 버리고 있었다.
“그러면, 제가 이야기한 대로 하는 건가요?”
“난 그러고 싶은데 아버지가 저런 태도이니 곤란해. 너도 알다시피 성전의 모든 결정권은 법왕인 아버지가 가지고 있으니.”
그게 문제였다.
“언니께 방법이 있으니,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겠죠?”
“그래, 내가 아버지를 설득해 볼게.”
“설득이 가능한가요?”
쥬웰은 아까 웰링턴 공작의 완강한 태도를 떠올리고는 물었다.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방법이 있으니. 물론 아버지를 설득하는 건 내게도 쉬운 일이 아니란 건 알고 있겠지?”
생색을 내는 듯한 말투에 쥬웰은 기민하게 플랑드나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법왕 예하를 설득해 주는 대신, 따로 제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군요.”
“그래.”
“무엇인가요?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은 불가해요.”
“그런 건 아니야. 사소한 건데.”
플랑드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의아한 모습.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지 의아한 얼굴로 기다렸고 이윽고 플랑드나가 입을 열었다.
“에스텔레의 유해를 불태울 때, 최대한 끔찍이 훼손시켜 불태워 줘.”
“……!”
플랑드나의 눈동자가 희번덕 광기로 물들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끔찍하고 잔인하게.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욕한 후 불태워 줘. 그게 내 개인적인 부탁이야.”
“…….”
쥬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
두근. 두근.
상대의 끔찍함에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하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은 이런 감정을 티 낼 때가 아니었다.
‘정신 차려. 언니가 원래 이런 건 알고 있었잖아.’
쥬웰은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요. 저도 마침 그러려고 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에스텔레, 그년의 시체는 세상에서 가장 비루하게 망가져 불태워질 거예요.”
그 말에 플랑드나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쥬웰, 최근 서로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사실 난 너와 잘 지내고 싶어. 너와 난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거든.”
“……저도 그래요, 언니.”
“법왕 예하를 설득하는 건 나에게 맡기렴. 그러면 조심히 돌아가.”
플랑드나는 쥬웰에게 다가가 작별의 포옹을 하였다.
키 차이가 있어, 체구가 작은 쥬웰이 플랑드나의 품에 꼬옥 들어갔다.
플랑드나의 품속에서 쥬웰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죽이고 싶어.’
두근. 두근.
심장이 떨리며 미칠 듯한 살심이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왈칵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걸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추악할 수 있는 걸까?
너무 화가 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억지로 참고 미소를 지었다.
이후, 헤어지기 직전, 쥬웰이 물었다.
“혹시 하나만 여쭈어도 될까요?”
“뭘?”
“법왕 예하께서는 최근 왜 그러시는 건가요?”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리델하트를 비롯한 신전의 중핵들도 웰링턴 공작의 상태가 왜 안 좋은 건지 이유를 모르고 있었으니까.
아마 굉장히 은밀한 사유일 것이다.
그런데.
“쥬웰, 너에게는 말해도 되겠지. 너도 ‘그날’ 함께했던 이 중 하나이니까.”
플랑드나가 입을 열었다.
“에스텔레 때문이야.”
“……네?”
“아버지는 그날,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친 걸 후회하며 괴로워하고 있어.”
“……!”
플랑드나가 진득한 비웃음을 지었다.
“웃기지도 않게 말이야.”
* * *
터벅. 터벅.
에메랄드 공작저를 나오는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하얬다.
밖에서 기다리던 리샤크가 그녀를 보고는 흠칫했다.
“……아가씨?”
“…….”
쥬웰은 멍하니 리샤크를 바라보았다.
리샤크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당황했다.
“아, 아가씨? 어째서 눈물을……?”
“아?”
쥬웰은 그제야 자신이 눈물 흘리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이거 왜 이래?’
짜증스러운 동작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순간, 왈칵 더욱 울음이 터졌다.
“아가씨!”
“괜찮아.”
“하, 하지만……!”
“괜찮다고!”
날카로운 외침에 리샤크가 흠칫하였다.
쥬웰은 여전히 눈물 흘리는 채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
리샤크는 주저하다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둘은 마차에 탔다.
“……들를 데가 있어. 테란로 28번가로 가줘.”
“……네, 아가씨.”
마차가 움직였다.
쥬웰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물에 젖은 듯 흐릿한 게 계속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짜증 나게. 계속 왜 이러는 거야.’
쥬웰은 연신 거칠게 눈가를 훔쳤다.
그러다가 다시 못 참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그저 눈물만 흘리는 게 아니었다.
추하게 울음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손으로 입을 허겁지겁 가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쥬웰은 질끈 눈을 감았다.
참는 것도 더는 무리였다.
결국, 포기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터져 나오는 대로 울었다.
‘제길, 빌어먹을. 이게 무슨 꼴이야.’
‘아버지는 그날,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친 걸 괴로워하고 있어.’
모르겠다.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아니, 지금 느껴지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미칠 것 같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제길…… 제길! 빌어먹을!’
그렇게 얼마나 운 다음일까?
쥬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신 차려! 아버지가 그날의 일을 후회하는 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게 지금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웰링턴 공작이 그날의 일에 죄책감을 느끼든 말든 변하는 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원수였고, 그녀는 그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도리어 아버지의 변덕으로 인한 계획 실패야.’
웰링턴 공작이 어쭙잖은 죄책감으로 끝내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면 그게 더 큰 일이었다.
‘플랑드나 언니가 설득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꼬일 걸 대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는데, 불현듯 아까 웰링턴 공작이 보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에스텔레의 시체를 훼손한다고 할 때 불쾌해하던 모습.
그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울컥하였다.
분노였다.
‘웃기지 마. 인제 와서 가증스럽게.’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아버지 생각을 떨치기 위해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샤크가 뻣뻣이 굳은 채 쥬웰을 보고 있었다.
“미안, 리샤크. 놀랐지?”
“……아가씨.”
쥬웰을 보는 리샤크의 눈동자에 아릿함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쥬웰이 고개를 저었다.
“그만. 너에게 숨기고 싶은 일이 있듯, 나도 마찬가지야. 방금 일은 이야기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네.”
선을 긋는 이야기에 리샤크는 잠시 침묵하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샤크에게는 매번 미안하네.’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의 아니게 리샤크와는 계속 엇갈리는 느낌이다.
괜히 마음에 걸려 이런 말을 하였다.
“리샤크, 난 너를 좋아해.”
“……아가씨?”
“물론 오해하지는 말고. 이성으로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좋아한다는 뜻이야.”
리샤크가 물끄러미 쥬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일까.
평소 보이던 순박한 눈길이 아니었다.
어쩌면 리샤크의 본질에 더 가까울지 모르는, 무거운 눈빛이었다.
리샤크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가씨는 저에 대해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 난 몰라.”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건 진심이야. 그러니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혹시나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주었으면 좋겠고.”
“…….”
그 말을 들은 리샤크는 입을 우뚝 다물었다.
그는 한참이나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괜한 말을 한 건가, 후회할 때 리샤크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리샤크의 눈동자가 쥬웰을 바라보았다.
순간, 희미하게 그의 눈동자가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오팔의 빛이었다.
그 형형색색의 빛에 그녀가 담겼다.
마치, 그녀의 모습을 자신의 눈동자에 품으려는 것처럼 리샤크는 그녀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 꿰뚫는 듯한 시선에, 진심이 담긴 감사에 쥬웰은 괜히 머쓱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 이후, 마부가 말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 * *
“아가씨, 그런데 왜 이런 곳에?”
리샤크가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테란로는 수도에 유명한 우범 지대다.
특히, 지금 쥬웰이 온 28번가는 수도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최악의 우범 지대였다.
쥬웰이 마차에서 내리자 온갖 불온한 시선이 꽂혔다.
리샤크가 바짝 긴장해 쥬웰에게 붙었다.
“위험합니다. 돌아가시는 게.”
“괜찮아.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쥬웰은 태연하게 답했다.
“그리고 여기 용무가 있어서.”
쥬웰은 한 허름한 건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리샤크가 식겁해서 뒤를 따랐고, 안으로 들어가니 지하실로 연결되는 계단이 나타났다.
누가 봐도 불길해 보이는 계단.
리샤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왜, 겁나?”
쥬웰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리샤크는 제국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기사, 제국 십 검에 속하는 강자다.
특히, 쥬웰은 리샤크가 제국 십 검 중에서도 최상위라고 파악하고 있다.
즉, 리샤크는 사실상 제국에서 가장 강한 이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이곳이 아무리 위험한 우범 지대라도 리샤크에게는 어떤 위협도 되지 않을 텐데?
“……혹시 아가씨가 다치는 일이 생길까 봐 겁나는 겁니다.”
“네가 잘 지키면 되지.”
“그래도, 혹시 손끝 하나라도 다치시면 안 되니까요.”
쥬웰은 고맙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쨌든 들어가자. 만날 인물이 있으니.”
계단은 꽤 깊었다.
안으로 내려갈수록 매캐한 냄새가 났는데 냄새의 정체를 알아챈 건지 리샤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편 냄새였다.
“아가씨, 혹시 여기는?”
“아편굴은 아니야. 그냥, 겸사겸사 취미 삼아 아편을 하는 이들이 있는 거지.”
리샤크의 얼굴이 더욱 무거워졌다.
보통 심상치 않은 곳이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쥬웰이 마음을 굳힌 걸 알아 더 만류하지는 못했다. 그저 결연한 얼굴로 허리춤에 둘러메진 검을 다시 어루만졌다.
위급 시 당장 출검할 수 있게 대비한 것이다.
깊은 지하로 내려오자 섬뜩한 느낌의 철문이 나타났다. 문 주변으로 이리저리 피가 튀어 있었다.
“들어가자.”
“……네.”
끼익 문을 여니 뜻밖의 광경이 나타났다.
커다란 규모의 지하 바(Bar)였다.
어둑한 마법 조명 속에서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이들이 이리저리 흐트러져 엉망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두운 조명만큼이나 음침한 느낌의 이들이었다.
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쥬웰과 리샤크에 흥미를 보였다.
“누구지?”
“웬 예쁜이들이?”
그들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한눈에도 순수한 호기심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마치 흥미로운 장난감을 만난 듯한 잔혹한 악의를 담은 눈동자가 여기저기서 빛났고, 리샤크의 얼굴은 더더욱 굳었다.
리샤크가 그들의 시선에서 쥬웰을 가리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하지만.”
“있어 봐. 만날 사람이 있으니.”
쥬웰은 눈을 돌려 안에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
그녀가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비운 건가? 기다려야겠군.’
그녀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리샤크가 경악해 외쳤다.
하지만 쥬웰은 멈추지 않았고 바 안에 있던 이들은 더더욱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쥬웰은 그대로 바의 빈자리에 가서 앉고는 안쪽의 바텐더에게 말했다.
“적당히 마실 걸 주겠나? 이왕이면 알코올이 없는 것으로.”
쥬웰의 몸은 술이 약하다.
적당히 시간 때울 겸 음료를 시켰는데, 바텐더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귀여운 아가씨군. 이곳이 어디인 줄은 알고 온 건가? 뭐, 알고 왔든 모르고 왔든 일단 발을 들인 이상 벗어날 수 없겠지만.”
바텐더는 웃음을 지었다.
섬뜩한 미소였다.
흐트러진 채 술을 마시던 이들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쥬웰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동자가 광기에 일렁였다.
“모르는 것 같아 설명해 주자면, 이곳에 있는 이들은 아주아주 끔찍한 이들이야. 그리고 이곳에 발을 들인 이상, 아가씨는 오늘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될 거고. 어쩌면 미칠지도 몰라. 우리 애들이 조금 거칠어서.”
바텐더는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쿡쿡거렸다.
“아, 그래도 미치지는 않으려나? 어차피 살아남지 못할 테니 말이야. 미치는 것도 살아남아야 가능한 법이니. 겁도 없이 오지 말아야 할 곳에 발걸음 한 자신을 원망하라고.”
바 안에 있던 이들이 천천히 쥬웰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리샤크가 다급히 쥬웰의 옆에 다가왔다.
“아가씨. 당장 피하십시오! 제가 막겠습니다.”
이제 리샤크는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듯했다.
쥬웰은 리샤크의 말에 따르는 대신 팔짱을 꼈다.
“괜찮아.”
“아가씨!”
“괜찮다고.”
나직한 음성에 리샤크는 흠칫하였다.
쥬웰은 바텐더에게 말했다.
“음료를 시켰는데, 주지 않을 건가?”
“음료?”
바텐더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상황 판단이 안 된 건가? 음료는 곧 네 피를 뽑아서 과일과 믹스해서 만들어줄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블러디 프루츠 주스이지. 실컷 마시게 해주지.”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내 취향이 아닐 것 같은데. 아쉽군. 사실 음료값으로 아주아주 비싼 값을 치르려고 했는데.”
“비싼 값?”
“응, 너희의 목숨.”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는 이도 있고,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진짜야. 너희가 내게 선의를 베풀었으면, 나도 조금은 자비를 베풀어볼까 했거든.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쥬웰은 다시 눈을 돌려 이곳에 모인 이들을 살폈다.
이번엔 ‘주시자의 눈’을 사용했다.
주시자의 눈은 지금껏 살아오며 상대가 쌓은 선악을 살피는 악마의 권능.
그 권능을 통해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과거에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지 속속들이 확인한 쥬웰은 리샤크에게 말했다.
“리샤크.”
“네?”
“여기 있는 놈들, 모두 죽여.”
섬뜩한 명령이 떨어졌다.
순간, 리샤크는 당황했다.
“안 도망가고요?”
“왜 도망가? 난 여기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니까? 벌레가 얼쩡거리는 게 거슬리는 거면.”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청소하면 되지. 다 죽여.”
리샤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더 되묻지 않았다.
“이 손수건으로 눈 가리십시오.”
대신 은은한 향기가 나는 손수건이 쥬웰의 눈을 가렸다.
리샤크는 재빠르며 조심스러운 손동작으로 손수건을 안대처럼 묶어 주었고.
그리고.
피가 튀는 소리가 울렸다.
* * *
굉음이 울리고 끔찍한 비명과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샤크의 검에 당하고 있는 이들의 비명이었다.
20 대 1의 싸움이지만, 일방적이었다.
‘잔챙이라도 나름대로 흑마도사들인데 리샤크의 실력이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
놀라운 이야기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의 정체가 흑마도사라는 뜻이다.
정확히는 잔챙이 흑마도사들이었다.
자신의 탐욕과 사악한 마음으로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이들.
‘사실 대부분의 흑마도사는 그런 부류이지.’
빛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가 상처를 입고 흑마도사가 된 이는 드물었다.
대신, 그런 이들은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흑마도사가 된다.
지금 이 흑마도사 소굴에 있는 이 중에 그런 ‘진짜배기’는 없었다.
모조리 잔챙이들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진짜배기이지, 잔챙이가 아니니까. 잔챙이들은 기회가 있을 때 청소하는 게 좋겠지.’
그런 마음으로 리샤크가 일을 끝내길 기다렸다.
째각, 째각 시간이 흘렀고 점점 비명이 잦아들더니 곧 침묵이 찾아왔다.
“끝났습니다.”
리샤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 그가 흘린 피는 아니고, 대부분 흑마도사들의 피가 묻은 것 같았다.
“수고했어.”
눈을 묶은 손수건을 풀려는데, 리샤크가 다급히 쥬웰을 만류했다.
“아, 안 됩니다.”
“왜?”
“그…… 보시기 좋은 장면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걱정하는 모습에 쥬웰은 피식 웃고는 손수건을 풀었다.
리샤크가 염려했던 대로 역시나 보기 편치 않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쥬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잘 청소했네. 깨끗해졌으니 넌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을래?”
“아가씨?”
“아까 말했듯 난 여기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어차피 나쁜 놈들은 네가 다 처리했잖아.”
리샤크는 절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쥬웰은 빤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명령이야.”
리샤크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소리를 지르십시오.”
“응, 위에서 쉬고 있어.”
“꼭, 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래, 그래.”
리샤크가 올라간 후, 장내는 적막에 잠겼다.
싸움 중에 마법 조명이 깨져 지하는 온통 어둡기 그지없었는데, 쥬웰은 자욱한 시체들을 헤치고 바 안으로 들어갔다.
싸움의 여파로 안의 식기들도 온통 다 깨져 있었다. 온전한 음료병과 잔을 찾아 쪼르르 음료를 따랐다.
그런데 이상한 게 그녀가 꺼낸 잔이 두 개였다.
하나는 자신의 쪽으로 가져온 후, 쥬웰은 나머지 하나의 잔을 허공에 들었다.
마치 저편에 누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만 나와 한잔하지.”
쥬웰은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십마 아낙스.”
* * *
허공에 흐릿한 잔영이 나타났다.
인두로 찍은 듯 이마에 흉측한 흉터가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여인이었다.
“처음 보는군. 그대가 십마 아낙스인가?”
여인, 아낙스는 대답 대신 형형한 눈빛으로 쥬웰을 노려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지? 가넷의 공주여.”
아낙스는 쥬웰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쥬웰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쓰레기들을 청소한 것일 뿐인데?”
“청소라고?”
아낙스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 어차피 살려둬 봤자 끔찍한 죄만 저지를 미친 악인들. 그런 놈들을 처리한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낙스는 침묵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가넷의 공주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하긴 하지. 어쨌든 왜 이곳에 온 거지?”
“아낙스, 널 바라서.”
“……!”
“내 밑에 무릎을 꿇도록.”
아낙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가넷의 공주여. 아니, 이제 곧 왕이 될 이인가? 어쨌든 난 가넷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아.”
“한때, 할아버지의 개였던 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낙스는 눈썹을 꿈틀했다.
쥬웰의 말처럼 아낙스는 한때 쥬웰의 할아버지, 토른 공작의 개였다.
흑마도사와 권력자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니까.
권력자가 흑마도사를 부리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건 지난 일이다. 토른 공작 전하와의 거래 관계는 이미 끝났어. 가넷가와의 인연은 끝난 지 오래야.”
아낙스는 차갑게 말했다.
“더러운 짓을 대신해 줄 개가 필요한 거면, 다른 흑마도사를 찾는 게 나을 것이다. 가넷의 개가 되어줄 불쌍한 흑마도사는 세상에 많고도 많으니.”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내가 바라는 이는 너야.”
“왜지?
“난 최고의 개를 바라니까.”
아낙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안타깝군. 난 이미 복수의 꿈을 이루었고, 넌 내게 줄 수 있는 게 없어. 불행히도 난 부귀영화에 관심 있는 타입은 아니어서.”
‘진짜배기’ 흑마도사들은 끔찍한 상처를 입고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원하는 갈망을 이룬 이후에는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
두 갈래로 나뉜다.
삶의 의미를 잃고 은인자중하는 타입.
혹은 부귀영화에 탐닉하는 타입.
아낙스는 전자였다.
그녀는 그저 술과 약에 취해 시간만을 죽이고 있었다.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 난 어떤 것도 바라는 게 없어.”
하지만 쥬웰이 빤히 반문했다.
“정말?”
“뭐?”
“정말 바라는 게 없느냐는 말이야.”
“그거야…….”
아낙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없었다.
그녀는 일평생 오로지 복수만을 바랐으니까. 복수를 이룬 지금은 그저 다가올 파멸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왜일까?
꿰뚫는 듯한 쥬웰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의문이 든 것이다.
정말, 바라는 게 없는가?
아니다.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일이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불가능한 바람을 쥬웰이 말했다.
“아낙스, 넌 구원을 바라지. 그렇지 않나?”
“……!”
“다른 모든 흑마도사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야.”
아낙스의 눈이 커졌다.
흑마도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다. 그들의 끝은 파멸뿐이다.
죽은 후 게헨나에 끌려가 영겁의 고통에 떨어지게 된다.
특히, 강한 힘을 내려받은 이였을수록 더욱 끔찍한 고통이 예정되어 있다.
“모든 흑마도사는 사실 구원을 바라지. 그렇지 않나? 다가올 영겁의 고통이 두려워 술이나 약에 취하거나, 부귀영화를 탐닉하는 거니까.”
“…….”
아낙스는 이를 악물었다.
쥬웰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아낙스는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 네가 그 구원을 내려주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래. 내가 너희를 구원해 주지.”
쥬웰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낙스는 더욱 분노했다.
“날 능멸하지 말도록. 네가 아무리 가넷의 왕이 될 이라도, 그건 지옥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름일 뿐이야.”
지상에서 아무리 드높았던 이라도 죽으면 다 끝이다.
지상에서 가장 존엄한 이가 지옥에서 가장 미천한 이가 되고, 반대로 가장 천했던 이가 드높은 에덴의 영광을 받는 일은 흔하디흔한 일이니까.
가넷의 이름은 살아 있을 때나 의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기우뚱하며 말하였다.
“뭔가 오해하고 있군. 난 가넷의 왕으로서 널 수하로 받아들이겠다고 이야기한 게 아닌데.”
“뭐?”
“흑요석의 전설을 아나?”
난데없는 이야기에 아낙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게헨나에서 흑요석이 강림해 우리 흑마도사들을 구원할 거라는 전설을 말하는 건가? 당연히 알고 있지. 갑자기 그건 왜?”
“그거야…….”
쥬웰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간에 악마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 흑요석이니까.”
아낙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고, 쥬웰의 미간에 피어오른 악마화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갔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다섯 송이…… 열 송이…….
그렇게 악마화가 늘어날 때마다 숨이 막힐 듯한 마기가 주변을 덮었고 아낙스의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무, 무슨……?”
“사실, 난 그 전설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내가 흑요석인 건 맞는데 난 그런 거창한 일을 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
정확한 흑요석의 전설은 이러했다.
-가장 빛나고 끔찍한 이가 게헨나에서 강림해 세상 모든 고통받는 이를 구원할 거라고.
쥬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네 하찮은 영혼 하나 정도는 구원할 수 있겠지. 내게 영혼을 바쳐 충성을 맹세하도록.”
쥬웰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면, 내가 널 파멸에서 구원해 줄 테니.”
* * *
아낙스는 쥬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의도한 바를 이룬 이후, 가넷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리샤크는 조심스레 물었다.
“얼굴이 좋지 않으십니다. 역시 충격이…….”
“아아, 그런 건 아닌데? 기분도 나쁘지 않아.”
아낙스를 수하로 만들었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쥬웰은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뜻하는 바를 이루었지만 기분이 영 좋지가 않았다.
‘왜지? 딱히 기분이 나쁠 이유는 없는데?’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일단, 너 씻어야겠다. 다들 놀라겠어.”
리샤크는 아까 그 상태 그대로 피에 젖어 있었다.
근처에 있는 호텔로 가 씻으라고 리샤크를 올려보냈다.
이후, 가만히 로비에서 앉아 리샤크가 씻고 오기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계속 기분이 안 좋지?’
쥬웰은 뚱하니 생각했다.
이유를 모르겠다.
나쁠 이유가 없는데, 기분이 나쁘다.
아까 웰링턴 공작의 반응 때문에?
아니면 쓰레기들을 청소하느라 피를 봐서?
모르겠다.
‘……흰 강아지를 보면 기분이 조금 좋아지려나?’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고는 흠칫하였다.
사실, 보고 싶었다.
본 지 꽤 되었으니까.
‘……얘는 선물만 보내고 나타나질 않네. 빵점이야.’
쥬웰은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실소하였다.
유스넨을 거부한 건 자신이다.
그런데 막상 안 보니 보고 싶고, 안 나타나니 서운했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뭐란 말인가?
‘뭐긴, 내가 흰 강아지를 좋아한단 뜻이지. 좋아하는 건 맞으니까.’
보고 싶다, 흰 강아지.
쥬웰은 멍하니 생각했다.
안 만나니 금단 증상이라도 생긴 걸까?
유스넨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어릴 때 순둥하고 귀여웠던 얼굴도 아른거리고, 얼마 전 뜨거운 사랑을 나눌 때 봤던 탄탄한 몸매도 떠올랐다.
‘아, 생각보다 훨씬 탄탄했지. 호리호리한 줄만 알았는데, 옷 안에 그런 매혹적인 몸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쥬웰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야말로 아름답고 완벽한 몸이었다.
그리고 얼굴도 떠올랐다.
천사 주제에 유혹적인 느낌이 가득한 예쁜 얼굴.
그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보고 싶은 마음이 큰 탓일까?
정말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
쥬웰은 눈을 끔뻑거렸다.
눈앞에 떠오른 유스넨의 얼굴이 선명해도 너무 지나치게 선명했다.
진짜, 눈으로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뭐지? 너무 보고 싶으면 이렇게 생생한 환각이 보이기도 하는 건가?’
그런데 환각으로 나타난 유스넨의 표정이 무언가 이상했다.
잔뜩 뚱해 있는 게 토라지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거기까지 느낀 순간, 쥬웰은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헛것이 아니었다.
진짜 유스넨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런 호텔에 오신 겁니까?”
잔뜩 서운한 음성으로.
“당신의 약혼자는 저인데.”
* * *
쥬웰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왜 갑자기 유스넨이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왜 여기에?”
“……우연히 당신이 이 호텔로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왔습니다.”
쥬웰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호텔로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왔다고? 왜?
그러다가 곧 깨달았다.
‘설마 내가 바람이라도 피우려는 줄 알고?’
그런 것 같았다.
잔뜩 토라져 시선을 피하는 얼굴이 질투에 가득 찬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밀회 전문 호텔이지.’
리샤크의 피를 닦기 위해 아무 가까운 호텔이나 온 것인데, 하필 이곳은 연인 전문 호텔이었다.
특히 수도 으슥한 곳에 위치해 정식 연인이나 부부보다는 은밀한 밀회를 즐기는 이들이 방문하는 곳.
즉, 바람피우는 이들이 주로 방문하는 곳이었다.
‘……그런 것 전혀 아닌데.’
쥬웰은 헛기침을 하였다.
“그런데, 내가 이 호텔에 들어오는 건 어떻게 본 거야?”
“……우연히 봤습니다.”
“우연히? 진짜야? 혹시 뒤에서 몰래 나 따라다니기라도 한 거 아니야?”
유스넨은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고, 쥬웰은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그냥 떠본 건데 진짜인 것 같았다.
유스넨은 그녀의 뒤를 몰래 따라다녔던 것이다.
유스넨은 더듬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그랬던 건 절대 아닙니다. 잠깐…… 잠깐. 먼발치에서나마 보고 싶어서 본 것일 뿐입니다. 잔뜩 보고 싶지만 계속 만나주질 않으셔서 그랬습니다.”
쥬웰이 유스넨을 못 만나 금단 증상을 느꼈듯, 유스넨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유스넨이 훨씬 더 심했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미칠 듯 보고 싶었지만 쥬웰의 태도가 너무 냉랭해 도저히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사의 은신술을 사용해 몰래 그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본 것이다.
딱히 어떤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정말로 순수하게 먼발치에서나 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유야 어쨌든 남 뒤 몰래 따라다니는 거 범법 행위인데.”
쥬웰이 짐짓 엄하게 말하자 유스넨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쥬웰은 팔짱을 끼고 대답하지 않았다.
쥬웰이 기분 상한 줄 알고, 유스넨은 더욱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쥬웰은 사실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다.
입을 다문 건 다른 이유.
지금, 그녀는 그를 만나 기뻤다.
그것도 쿵쿵, 가슴이 뛸 정도로 좋아 마음을 진정시키려 일부러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심장은 더욱 크게 뛰었다.
‘젠장, 심장아. 가만히 있어. 이러다가 들키겠잖아.’
지금 쥬웰은 유스넨을 거부하는 중이다. 파혼 신청서도 줄기차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얼굴을 봤다고 이렇게 설레다니.
들키면 곤란하다.
특히, 유스넨은 초월자라 청각만으로 쥬웰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도 있었다.
‘심장을 멈추게 하는 마비 저주라도 걸어야 하나.’
쥬웰은 마음을 숨기며 최대한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쨌든 돌아가. 난 이곳에 용무가 있으니.”
사실 용무 따위 없지만 유스넨을 돌려보내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유스넨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용무인 겁니까?”
“응?”
“설마, 정말 다른 이와 밀회를 나누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 그게 무슨…….”
멍멍이 소리야?
‘……날 뭘로 보고.’
라고 생각했다가, 그녀는 자신이 약혼자만 세 명인 대외적으로 제국에서 가장 핫한 남성 편력을 가진 이란 걸 떠올렸다.
유스넨이 걱정할 만도 했다.
“그런 것…….”
오해를 바로잡으려다가 쥬웰은 생각을 바꾸었다.
유스넨의 오해가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른 이와 밀회를 나누면?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인데?”
“……누나.”
“착각하지 마. 너와 난 아무 관계도 아니야. 내가 다른 이와 밀회를 나누든 말든 그건 내 자유이지 너와는 상관없어.”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자신이 순간 무척이나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유스넨의 상처받은 눈동자를 보니 그러했다. 마치 상처받은 강아지의 눈동자 같았다.
“……우리가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는 않습니까? 어릴 때부터, 누나와 저는…….”
“그건, 과거일 뿐이야.”
유스넨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물러서지 않고 매달렸다.
“그러면 얼마 전 우리는 하나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고요?”
“……그날은 그냥 실수였어.”
아.
방금 발언, 정말 나빴다.
이건 쓰레기나 할 법한 발언 아닌가.
‘상처 입겠지? 그래도 이게 나아. 잘라내야 해.’
그런데 유스넨은 딱딱히 얼굴을 굳히더니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거짓말 아니야.”
“그거 아십니까? 누나, 거짓말할 때마다 눈 찡그리는 습관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있던 습관인데 여전하시군요.”
“무슨? 그럴 리가?”
쥬웰은 크게 당황했다.
자신에게 그런 습관이 있었다고?
그런데 유스넨이 어딘지 얄미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거짓말입니다. 그런 습관 없습니다.”
“뭐……?”
“하지만 당황하는 반응을 보니 방금 하신 말은 거짓말이 맞는 것 같군요.”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흰 강아지의 수작에 당한 것이다.
“……거짓말 아니야.”
애써 부정해 보았지만 유스넨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누나.”
유스넨이 쥬웰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쥬웰은 의자에 앉아 있고 유스넨은 서 있는 상태라 자연히 쥬웰이 유스넨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유스넨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런 쥬웰의 얼굴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쥬웰은 유스넨의 손이 얼굴에 닿자 찌릿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소름이 돋고,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 심장 고동 소리를 엿들은 것처럼 유스넨이 속삭였다.
“정말 저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요?”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하고 계신 겁니까?”
“……!”
“누나의 심장 고동 소리가 제 귓가에까지 들리는걸요.”
쥬웰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급히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하지만 유스넨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그녀의 턱을 조심스레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도록.
“누나, 절…… 제 눈을 봐주십시오.”
“……유스넨.”
“거짓말하는 건 나쁘다고 어릴 때 저한테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까?”
유스넨이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꿰뚫듯. 옭아매듯.
결국 쥬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유스넨을 마주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그냥…… 더 묻지 말고 돌아가 줘.”
“싫습니다.”
“난 너와 있고 싶지 않아.”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거짓말이다.
그와 더 있고 싶다.
아니, 그뿐일까? 입도 맞추고 싶고, 껴안고, 하나가 되고 싶었다.
셀 수도 없이. 영원히.
하지만 입을 앙다물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유스넨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뭘?”
“밀회를 나누러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밀회 저랑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쥬웰은 실소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유스넨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쥬웰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향한 아픔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그 아픔을 마주하니 가슴이 흔들려 더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제발……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결혼해 달라는 이야기도, 절 버리지 말아달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을 테니 잠시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안 되겠습니까?”
유스넨이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냥 당신과 같이 있고 싶습니다. 제발요.”
* * *
그 뒤 일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 모르겠다.
쥬웰은 유스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잠시 더 같이 있기로 했다.
그랬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지금 둘은 호텔의 스위트 룸이었다.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쥬웰은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유스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스넨은 나신이었다.
매혹적인 몸이 눈에 들어왔다.
유스넨이 옷을 벗고 이런 예쁜 몸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야 간단했다.
‘이러려고 했던 건 전혀 아닌데.’
쥬웰도 비슷한 상태로 유스넨 옆에 누운 채 멍하니 아까의 일을 생각했다.
씻고 내려온 리샤크를 먼저 가넷가로 돌려보내고 둘은 로비에서 같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있던 중 쥬웰의 배가 꼬르륵거렸다.
오늘 아침 이후로 계속 굶었던 탓이다.
근처에 식당이 없어서 유스넨이 호텔 룸서비스나 시켜 먹자고 하여 방에 오게 되었고, 방에 들어오는 순간.
‘짐승이 되었지.’
누가?
둘 다.
정신없이 서로를 탐닉했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쥬웰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헤어지려고 노력 중인데 이런 잠자리를 가져 버리다니.
그때, 유스넨이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조각같이 탄탄한 몸이 어떤 중간 장벽 없이 여과 없이 느껴졌고, 쥬웰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몸의 반응은 솔직했다.
아니, 몸뿐 아니라 마음도.
머릿속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몸과 마음은 속절없이 그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입 맞추어도 됩니까?”
“……이미 실컷 맞추었잖아.”
“모자랍니다.”
짙은 갈망이 담긴 음성.
음성만이 아니었다.
유스넨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그녀를 담았다. 지독한 갈증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유스넨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고, 결국 쥬웰은 거절하지 못하고 그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뜨거운 불길로 집어삼키는 듯한 입맞춤이 끝난 후, 쥬웰은 다시금 녹녹하게 녹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오늘 일, 후회된다는 생각.”
“……후회되십니까?”
“……응. 어쩔 수 없잖아.”
유스넨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나는.”
쥬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사실 더 있고 싶었지만 있을수록 미련만 남고 가슴이 아파지니 빨리 헤어지는 게 나았다.
“잘 지내. 이런 일은 오늘이 마지막이야. 너와 또 만날 일은 없을 거야.”
최대한 차갑게 말하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런데 유스넨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만약, 제가 누나를 구원한다면요?”
“뭐?”
쥬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전 사실, 당신을 구원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모두 행복해질 수 있게요.”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요?”
쥬웰은 흠칫했다.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지?”
그런데 유스넨의 반응이 이상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쉽게 입을 열지 않은 것이다.
곤란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당신이 복수를 포기하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뭐?”
쥬웰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유스넨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에덴에 물어봤습니다. 당신을 구원할 방법이 없는지.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무슨 방법이지?”
“당신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성녀 에스텔레기 때문에, 그간 당신이 살아오며 쌓아온 선행을 이용해 기적을 시도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당신이 복수를 포기해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
쥬웰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에덴의 입장에서는 내 복수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인가?”
에덴의 천사들은 ‘정의’를 추구한다.
그런 천사들의 ‘정의’의 기준에 비출 때 그녀의 복수는 ‘옳지’ 않다.
유스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이 하는 복수가 당신의 영혼에 난 상처를 악화하기 때문입니다.”
쥬웰은 유스넨의 말을 알아들었다.
복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파괴적인 행위이다.
어떤 복수든 그러했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해도, 영혼에 분명한 상처가 남는다.
특히 오로지 복수심에 매몰된 이들이 받는 상처는 더더욱 컸다.
그들의 삶과 영혼은 피폐해지고 온갖 흉터로 얼룩지게 된다.
지금 쥬웰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당신의 영혼은 이러한 상처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받게 될 겁니다. 어떤 수도 쓰지 못하게 말입니다.”
즉, 복수를 포기하지 않으면 영혼의 상처가 악화하여 어떤 기적으로도 그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군. 그러면 이만.”
그녀는 자신의 구원보다 복수가 중요했다.
유스넨이 간절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면 이번 성배 사건이라도 포기해 줄 수는 없겠습니까?”
“뭐?”
“복수를 포기해 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어떤 심정인지 아니까요. 하지만 최소한, 이번 성배 사건만이라도 포기해 줄 수 없겠습니까?”
“어째서?”
“……이번 성배는 누나의 유해이지 않습니까? 누나의 유해가 상하게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유스넨의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특히 누나는 지금 복수를 위해 스스로의 손으로 본인의 유해를 훼손하고 희생시키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유스넨의 말처럼 쥬웰은 직접 본인의 유해를 훼손할 생각이었다.
사파이어가의 호위를 뚫고 유해를 훼손하려면 마왕으로서 직접 나서 힘을 쓰는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만약 그런 일을 하면…… 당신의 영혼에 얼마나 큰 상처가 남을지 걱정됩니다.”
쥬웰은 유스넨이 무얼 걱정하는지 이해했다.
그녀가 끔찍한 일을 할 때마다 그녀의 영혼에는 상처가 남는다.
그러니 유스넨은 그런 끔찍한 일을 한 그녀의 영혼에 큰 상처가 생길까 걱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냉소했다.
“하등 쓸데없는 걱정이군.”
“누나.”
“무엇보다 난 이번 사건을 절대 포기할 수 없어. 원수들의 가문을 몰락시킬 결정적인 단초가 될 사건이니.”
쥬웰은 딱딱히 말했다.
“경고하지만, 지난번처럼 쓸데없이 관여할 생각 말도록. 그때는 넌 내 적이 될 테니.”
냉랭히 말하고, 등을 돌리고 난 다음이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아?’
띵, 하고 머리가 울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아찔한 어지럼증이 들어 쥬웰은 머리를 짚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유스넨이 놀라 그녀에게 다가왔다.
“누나? 괜찮으십니까?”
“괜찮…….”
입에서 나오는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누나!”
유스넨이 다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쥬웰의 전신에서 급속도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설마 이 증상은?’
쥬웰의 눈이 커졌다.
과거, 이것과 비슷한 증상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누나!”
유스넨의 부르짖음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쥬웰은 짧은 꿈을 꾸었다.
황당하게 유스넨과 결혼하는 꿈이었다.
‘뭐야, 무슨 이런 개꿈을?’
쥬웰은 실소했다.
하도 청혼 공격에 시달린 탓일까?
‘내가 흰 강아지와 결혼할 수 있을 리가. 그런데 이 꿈 왜 이렇게 선명해?’
예지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선명했다.
‘……이거 진짜 예지몽인 건 아니겠지?’
쥬웰은 눈을 끔뻑끔뻑하였다.
그러던 차, 꿈에서 깨어났다.
“……!”
“괜찮으십니까?”
유스넨이 다급히 물었다.
“아…….”
방금, 자신이 의식을 잃었음을 기억한 쥬웰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갑자기 의식을 잃은 거지? 혹시?’
한 가지 추측이 들었다.
확인을 위해 물었다.
“내가 얼마나 의식을 잃었어?”
“길지는 않았습니다. 한 5분?”
역시나 짧았다.
쥬웰은 자신의 추측이 맞음을 짐작하고는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어?”
“……!”
“아니, 내게 무슨 신탁이 내려왔지?”
신의 음성이 그녀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이건 신탁을 받을 때 나타나던 증상이니까.’
과거, 에스텔레 시절 그녀는 여러 번 신탁을 내려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겪었던 증상과 지금 증상은 똑같았다.
‘갑자기 신탁이라니. 웬일인지 모르겠군.’
쥬웰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재차 물었다.
“무슨 신탁이 내려온 거지?”
신탁을 받을 때 의식을 잃으면 막상 당사자는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때는 옆에서 신탁을 전해 들은 이들을 통해 내용을 알게 된다.
그런데 유스넨의 반응이 이상했다.
“…….”
꾹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무슨 내용이기에?”
“……이번 성배 사건…… 정확히는 누나의 유해에 관한 신탁입니다.”
“뭐?”
쥬웰은 흠칫했다.
“정확히 말해봐.”
유스넨이 신탁의 내용을 읊었다.
“이 성배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이의 그릇. 그릇된 마음을 가진 이들은 모두 돌이키라.”
유스넨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하던 이의 그릇을 헛되이 욕보이는 자, 영겁의 고통에 떨어지게 되리라, 라는 신탁이었습니다.”
쥬웰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이나 침묵 후 그녀가 말했다.
“이 신탁. 함구해.”
“누나.”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절대로. 꼭. 누구의 귀에도 이 신탁이 들어가지 않게 해줘.”
* * *
쥬웰은 굳은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다.
리샤크를 먼저 가넷가로 보내서 지금 그녀는 혼자였다.
덕분에 혼자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내 유해를 훼손하지 말라는 신탁이야.’
왜?
왜 이런 신탁이 내려왔단 말인가?
답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유해니까.’
에스텔레는 신이 가장 사랑했던 이.
그러니 그런 이의 유해에 나쁜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경고였다.
‘하필 이럴 때에.’
쥬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절대로 이 신탁이 퍼지게 하면 안 돼.’
신탁이 퍼지면 그녀의 계획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나인데.’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지금 에스텔레의 유해를 해하려는 가장 큰 흉수가 누구인가?
바로 그녀 본인이었다.
즉, 신은 어쩌면 그녀를 향해 이 신탁을 내린 것일 수도 있었다.
음모를 거두라고.
‘하지만 신탁을 따를 수는 없어.’
쥬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에메랄드 공작가에 가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번 성배 사건에는 정말 많은 것이 걸려 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
무려 신이 직접 내린 신탁이다.
그러니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때 마침 마차 옆으로 작은 성전이 보였다.
“잠깐만, 멈추도록. 성전에 들렀다가 가겠다.”
신께 기도해 직접 여쭈기로 한 것이다.
마차에서 내린 쥬웰은 성전에 들어갔다.
작은 성전이라 그런지 신관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쥬웰은 허름한 의자에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위대한 분이여. 당신께서는 제 마음을 아십니다.”
꼭 두 손을 움켜쥐었다.
신께서 부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껏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왜일까?
기도를 하는데 주룩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니 부디 절 가련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사, 제가 가고자 하는 길에 은총을 내려주시옵소서.”
이번 성배 사건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기도하는 그녀의 몸 주위로 파앗, 성스러운 빛무리가 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신께서 기도를 듣고 있다는 성스러운 운무였다.
그리고 신비로운 현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응답이 들려왔다.
그녀의 영혼에 직접 전해지는 응답이었다.
-불허한다.
“……!”
쥬웰은 꽉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다시 간절히 기도하였다.
격식을 던지고 애원하듯 기도하였다.
“당신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원수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러니 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제가 가는 길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부디, 부디.”
주룩,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신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불허한다.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 하.”
아무리 기도해도 신의 응답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쥬웰은 힘없이 마차에 올라타 가넷가로 돌아갔다.
* * *
신탁이 내려왔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쥬웰은 여전히 자신의 계획을 진행하였다.
‘인제 와서 신의 진노를 사는 걸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번 일로 신의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걱정할 건 없어. 다행히 두려운 종류의 진노는 아니니까.’
다행히 그녀에게 내려온 신탁에는 신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을 시 어떤 진노를 내릴 건지를 명시하였다.
‘영겁의 고통’이라고 하였다.
이미 영겁의 고통을 살고 있는 그녀로서는 전혀 감흥 없는 저주였다.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저주면 복수에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어.’
복수만 이룰 수 있다면 이후 영겁의 고통에 빠지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 마음으로 쥬웰은 착착, 계획을 진행하였다.
로튼 백작에게 죄를 덮어씌울 증거를 조작하였고.
십마 아낙스를 동원해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을 상대할 준비를 하였으며.
플랑드나와의 협상을 조율하였다.
‘아직 웰링턴 공작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고? 뭘 그리 꾸물거리는 건지.’
쥬웰은 살짝 초조해졌다.
웰링턴 공작이 제안을 거절하면 이번 계획은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였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 탐욕스러운 아버지가 이 제안을 거절할 리가.’
하지만 얼마 전 보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유해를 불태운다고 하였을 때 불쾌해하던 반응.
그 얼굴을 떠올리니 쥬웰은 자신이 없어졌다.
어쩌면 웰링턴 공작은 이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쥬웰은 역겨운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울컥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되어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들 나가.”
“아가씨?”
쥬웰을 보필하던 세바트찬과 룬이 흠칫하였다.
“당장 모두 나가라고!”
날카로운 외침에 모두 놀란 눈을 하였다.
룬이 당황해 뭐라 말을 하려다가 시뻘겋게 충혈된 쥬웰의 눈동자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 말을 건넬 상태가 아니란 걸 눈치챈 것이다.
모두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고, 홀로 남게 되자.
와장창!
쥬웰은 비명을 지르며 닥치는 대로 주변의 집기들을 집어 던지고 깨부쉈다.
깨진 유리에 손이 다쳐 피에 물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웰링턴 공작의 역겨움도.
자신을 말리려는 신의 신탁도.
파국이 예정된 유스넨과의 관계도.
모두 미칠 듯 짜증이 났다.
그렇게 깨부술 수 있는 모든 걸 깨부순 후, 쥬웰은 숨을 몰아쉬며 으르렁거렸다.
“웃기지 마.”
쥬웰은 머리를 움켜쥐며 미칠 듯 부르짖었다.
“다 웃기지 말라고!”
* * *
이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잠이 들었는데 빌어먹게도 악몽을 꾸었다.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잠에 들 때마다 악몽을 꾸니까.
그녀의 악몽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특히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아서일까, 더더욱 짓궂고 괴로운 악몽을 꾸었다.
원수들이 게헨나에 떨어져 고통받는 그녀의 모습을 광대를 보는 것처럼 구경하며 낄낄대고 조롱하는 악몽이었다.
하지만 정말 괴로운 악몽은 그게 아니었다.
잠에서 깨기 전, 마지막 순간.
생각지도 않은 인물이 꿈속에 나타났다.
과거의 그녀, ‘에스텔레’였다.
꿈속에 나타난 ‘에스텔레’는 그녀를 아릿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안타깝다는 듯.
“뭔데? 넌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데?”
꿈속에서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꺼져! 너 같은 병신과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과거의 그녀, ‘에스텔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안타까운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짜증 나니 꺼지라고!”
와락 비명을 지르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아가씨!”
“쥬웰!”
눈을 뜨니 익숙한 얼굴들이 한가득 걱정을 담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룬과 엔리크였다.
“쥬웰, 괜찮으냐?”
딸을 향한 걱정으로 일그러진 엔리크의 눈빛에 쥬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평소라면 아버지의 저 걱정이 기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걱정을 받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혼자 있고 싶어요. 나가주세요.”
“……쥬웰.”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쥬웰은 대화를 거부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엔리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걱정과 아픔이 그의 얼굴에 깃들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쥬웰은 한탄했다.
‘왜…… 내 진짜 아버지는 이분이 아닌 거지?’
만약 그녀가 정말로 엔리크의 딸로 태어났다면.
그랬으면 그녀가 이런 고통에 떨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이분이었다면 웰링턴 공작처럼 내가 지옥에 끌려가는 걸 보고 있지 않았을 거야.’
차라리 자신이 지옥에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딸이 그런 꼴을 당하게 놔둘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하였다.
진짜 아버지 웰링턴 공작이 원망스러웠고, 동시에 또 다른 아버지 엔리크도 원망스러웠다.
왜 그는 자신에게 이런 달콤함을 알게 했단 말인가.
그러면 웰링턴 공작의 추악함을 보며 덜 아팠을 텐데.
진짜 아버지의 추악함에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쉬고 싶어요. 혼자 있게 해주세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하는 순간,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세바트찬입니다. 중요한 용무가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그 말에 엔리크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얼음꽃 외모답게 차갑고 싸늘한 음성으로 세바트찬에게 말했다.
“자네는 내 딸이 쉬고 있는 게 안 보이는 건가? 하필 이럴 때 일을 가져와야 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중요한 용무라서.”
“어떤 용무라도 내 딸에 비하면 중요치 않아. 나중에 다시 오도록.”
“그게…….”
세바트찬이 곤란한 어조로 말했다.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아가씨.”
“……!”
쥬웰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순간, 쥬웰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용무임을 직감한 것이다.
과연, 세바트찬이 낮은 음성으로 말하였다.
“지금 당장 와달라고 하십니다. 아가씨 혼자서요.”
* * *
‘내가 방금 일으킨 소란 때문일 가능성이 높아.’
쥬웰은 낭패한 얼굴을 했다.
‘감정을 다스렸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지금 그녀는 가주 후보 경합 중이었다.
즉, 실시간으로 끝없이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같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다니.
크게 감점을 받을 실책을 저지른 것이다.
‘특히, 토른 공작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중요하게 여겨. 가넷을 이끌 이로 필수적인 자질이니. 그러니 오늘 내가 벌인 일로 내게 실망했을 수도 있어.’
쥬웰은 초조한 얼굴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약점이 많았다.
그 모든 약점을 탁월한 능력으로 잠재운 건데, 안 좋은 빌미가 될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것도 하필, 가넷 공작위를 물려받기 직전인 중요한 상황에.
‘이번 일로 가넷 공작위를 물려받는 데 지장이 생기면 안 되는데.’
그녀는 불안했다.
물론, 고작 실수 한 번으로 모든 게 무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여러 일로 워낙 심적인 여유가 없어서일까.
그녀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번 실수를 저지르기 전부터 극도로 쌓인 스트레스에 초조,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쥬웰은 평소답지 않게 냉철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자꾸 초조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원수들을 몰락시키는 데 가넷 공작위는 필수이니까.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승계에 먹구름이 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본인이 저지른 실수가 후회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제길, 바보, 멍청이.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해서 이딴 실수를 저지르다니.’
곧 토른 공작의 방에 도착한 쥬웰은 숨을 들이켰다.
“가주님께 내가 왔다고 알려주게.”
“네, 아가씨.”
곧 끼익 문이 열렸다.
주먹을 꽉 움켜쥔 후, 쥬웰은 앞으로 나아갔다.
“왔느냐?”
하필 햇살이 강하게 비추고 있어서 창문을 등지고 있던 토른 공작의 표정은 역광에 보이지가 않았다.
쥬웰은 일단 곧바로 토른 공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쥬웰?”
토른 공작의 당황하는 음성이 들렸다.
쥬웰은 무릎 꿇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
“방금 있었던 일에 사죄를 드립니다. 가넷의 일원으로서 부족한 미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니? 일어나라.”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 토른 공작의 만류가 진심인지 아니면 시험인지 모른다.
어쨌든 확실한 건 그녀는 잘못을 했다.
토른 공작이 실망할 수도 있는 잘못을.
그녀는 간절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부족한 모습에 가주님께 심려를 끼치게 했습니다. 이번 일은 부디, 이 못난 손녀에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혹자가 보면, 과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사죄였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이런 사죄로 토른 공작의 실망을 거둘 수만 있다면, 그래서 공작위 승계만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다면, 그녀는 이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때, 토른 공작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표정을 읽을 수 없어 어떤 의미의 한숨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붙든 것이다.
“일어나거라. 왜 그러느냐? 난 네 할아비이거늘.”
“……!”
그제야 토른 공작의 눈을 마주한 쥬웰은 긴장이 탁 풀렸다.
천만다행으로 질책하는 눈길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를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토른 공작이 씁쓸히 말하였다.
“네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다 내 잘못이겠지. 내가 평소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사랑하는 손녀가 나를 이리도 무서워하는 건지.”
“아, 아닙니다, 가주님.”
“가주님? 할아버지, 라고 해야지.”
“네, 할아버지.”
토른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쨌든 지금 이 모습은 너답지 않구나.”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토른 공작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지금 지나치게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평소 여유로운 모습과 다르게.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라…… 아니다, 됐다. 앉아라.”
쥬웰은 토른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토른 공작은 가넷 공작가의 총집사에게 말했다.
쥬웰을 보필하는 세바트찬은 부집사이고, 가주를 보필하는 최고 총집사는 따로 있었다.
“마실 것을 좀 내오너라.”
“네, 가주님. 어떤 걸 내오면 되겠습니까?”
“커피로…… 아니, 이 아이에겐 핫초코가 좋겠군.”
토른 공작은 어딘지 짓궂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린이에겐 달달한 게 필요하니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곧 커피와 핫초코가 내어져 왔다.
“마셔라.”
“……네, 할아버지.”
“그래, 소란이 있었다기에 걱정되어서 불렀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쥬웰은 순간 고민하였다.
‘어떻게 답하지?’
어떤 의도로 묻는 건지.
그리고 어떤 식의 답변이 토른 공작에게 가장 괜찮게 들릴지 고민하는데, 토른 공작이 다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머리 굴려 고민하지 말아라. 그저 할아비로서 손녀가 걱정되어서 묻는 거니.”
“…….”
“난 우리가 이제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나 보구나.”
진심으로 서운하단 음성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게 당신이 살아온 방식이잖아.’
아무리 가까워져도, 필요에 따라 한없이 냉철해질 수 있는 게 토른 공작이었다.
그러니 쥬웰도 토른 공작과 아무리 가까워져도 끝까지 방심하지 못했다.
“최근 스트레스가 있었습니다. 다시 이런 일은 없을 테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래.”
쥬웰의 대답이 성이 차지 않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토른 공작은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게 끝인 건가? 정말 걱정되어서 부른 거라고?’
쥬웰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역시나 토른 공작이 다른 용건을 꺼내었다.
“사실, 네게 하나 할 이야기가 있단다.”
“말씀하십시오.”
쥬웰은 바짝 긴장했다.
토른 공작은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네가 꾸미고 있는 일. 그만두는 것이 어떻냐?”
쥬웰의 눈이 커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이용해 다른 공작가에 함정을 판 일을 말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토른 공작은 그녀의 계획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직접 마왕으로 나설 거라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다.
하지만 어떤 기상천외한 수를 동원해서든 에스텔레의 유해를 훼손해 낼 거라고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그 일, 그만두었으면 한다.”
너무 뜻밖의 이야기라 쥬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는지요? 혹시, 이번 일이 가주님의 뜻에…….”
“할아버지.”
“……혹시 할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점이 있나요?”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감탄이 나오는 계책이지. 네가 의도한 대로 되면 확실히 다이아와 에메랄드, 사파이어 모두에게 커다란 타격을 줄 수 있겠더구나. 그들은 완전히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되겠어.”
토른 공작은 웃음을 흘렸다.
“누굴 닮은 건지, 네가 참 머리가 좋아. 이런 대단한 계획을 짜다니.”
토른 공작의 말에 쥬웰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만두라고 하시는 건지요?”
“네가 힘들어하고 있지 않으냐?”
“……!”
쥬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토른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사실 네가 왜 이번 일로 힘들어하는지는 몰라. 위대한 성녀, 에스텔레의 유해를 훼손하려는 일을 꾸며 죄책감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 때문인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이번 일을 진행하는 걸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 아닙니다.”
“아니라고? 정말?”
토른 공작이 반문했다.
쥬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발작한 일 하나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너는 모르고 있는 듯하지만 최근 네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았어.”
“……그런가요.”
“그래, 그러니 이번 일은 그만두어라.”
“하지만…….”
토른 공작은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일을 포기해도 가넷 공작위는 너에게 물려주겠다. 그러니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말아라.”
“……!”
쥬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곧 토른 공작이 진심이란 걸 깨달았다.
‘어째서 토른 공작이 이런 선택을?’
손녀의 의문을 눈치챈 건지 토른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살날도 얼마 안 남은 몸. 그리 깐깐하게 굴어서 무엇하겠느냐?”
“…….”
“난 이미 너에게 공작위를 물려줄 마음을 굳힌 상태다. 원래는 네가 최고의 공을 세워 잡음이 없을 때 물려주려고 했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겠지.”
쥬웰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토른 공작의 성격상 저게 얼마나 대단한 결정인지 알고 있는 탓이다.
토른 공작은 순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런 결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감동보다 이런 대답이 흘러나온 것은.
“아니, 거부하겠어요.”
“쥬웰.”
“이번 일은 반드시 진행해야 해요. 제 목적은 고작 가넷 공작위를 얻는 것으로 끝이 아니니까요. 이전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 다른 공작가를 무너뜨리길 원해요.”
쥬웰은 말을 이었다.
“물론,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힘들긴 해요. 그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확실히 이번 일은 생각외로 그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힘들다고 멈출 수 없어요. 전 제가 힘든 것보다 제가 뜻하는 바를 이루는 게 훨씬 중요해요.”
“쥬웰.”
“할아버지. 할아버지야말로 오늘 왜 이러시는 건가요. 지금 보이시는 이런 모습이야말로 할아버지답지 않은 것 아닌가요?”
쥬웰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가족을 오로지 가문을 위한 도구로만 여겼으면서.
새삼스레 왜 이런단 말인가?
자신이 조금 힘든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손녀의 날카로운 말에 토른 공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답지 않다, 라. 그래, 네 말이 맞다. 지금 모습은 나답지 않은 거지. 그런데 나다운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
“아니, 말을 바꾸마. 지금껏 그렇게 살아온 내 인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난 사실 최근 회의가 드는구나.”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저 토른 공작의 입에서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이야기가 나오다니?
토른 공작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쥬웰, 너는 이 할아비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느냐?”
“그야…….”
당연히 안다.
토른 공작의 일대기는 매우 유명하였으니까.
토른 공작의 삶은 이 시대 살아 있는 역사나 다름없었다.
토른 공작은 클클 웃더니, 전혀 예상 밖의 물음을 하였다.
“그러면, 이 할아비가 이전에 아주 잘생겼었다는 건 알고 있느냐?”
“네?”
쥬웰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황당한 이야기란 말인가?
“……할아버지는 지금도 잘생기셨는데요.”
엔리크의 아버지답게 토른 공작은 지금도 미형의 노인이었다.
“클클, 고맙구나. 그런데 젊었을 적에는 그 정도가 아니었어. 내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음유시인도 있을 정도였지. 어쨌든 젊었을 때 난 지금과 꽤 다른 존재였단다.”
난데없는 젊은 시절 자랑.
쥬웰은 토른 공작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손녀에게 이야기해 주려 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토른 공작은 잠시 아련한 눈빛을 하였다.
“뜨거운 사랑도 했었지. 네 할머니와 말이야. 얼마나 뜨거웠는지, 우리의 사랑을 소재로 한 로맨스 소설도 나왔을 정도이다.”
토른 공작은 서재에서 하나의 책을 가져다 쥬웰에게 보여주었다.
토른 공작의 서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민망한 제목의 로맨스 소설이었다.
<공작님이 날 놔주지 않아.>
무언가 삼류 로맨스 소설 같은 제목이었다.
“이 책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소재로 쓴 소설인가요?”
“그래, 당시에 꽤 인기도 있었단다, 클클.”
그냥 구해만 놓은 게 아닌지, 책은 손때가 가득했다. 여러 번 읽은 듯했다.
책을 보는 토른 공작의 눈빛이 과거를 더듬듯 따뜻해졌다.
하지만 쥬웰은 마주 따뜻한 얼굴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랑의 결말을 알기 때문이다.
“난 네 할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했지. 그런데 네 할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토른 공작이 대신 말하였다.
“내가 죽였지. 그토록 사랑했는데.”
“…….”
“황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희생시켰어.”
한창 황가와 가넷 공작가가 줄다리기를 하던 시점.
토른 공작의 부인은 황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 독살당했다.
범인은 함께 차를 마시던 황후였다.
오펜하임의 어머니.
물론 누명이었다.
진짜 범인은 토른 공작이었다.
황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희생시킨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싸움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황후를 비롯한 수많은 황제 일파가 공작 부인 독살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결국 토른 공작은 싸움에서 승리해 황실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때의 일을 후회하시나요?”
“후회?”
토른 공작이 시커멓게 웃었다.
“글쎄.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로 돌아가도 난 아마 똑같은 일을 할 거라는 점이다. 너도 알다시피 이 할아비는 끔찍한 괴물이니까.”
오소소 소름이 돋는 답변이었다.
“이 할아비가 저지른 끔찍한 일이 그것뿐인지 아느냐? 수도 없다.”
쥬웰은 차분히 물었다.
“그런데 오늘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건가요? 할아버지도 그러셨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네가 나와 똑같은 괴물이 될까 봐.”
“……!”
토른 공작이 안타깝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쥬웰, 넌 이 할아비와 참 많이 닮았단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게 그러하지.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어.”
“……무슨 차이인가요?”
“넌 나처럼 악독하지 않아.”
“……!”
“넌 끔찍하면서, 동시에 빛나는 선함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쥬웰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말이었다.
“네가 차라리 나처럼 악독하기만 하다면 어떤 일을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넌 너 자신의 끔찍함을 괴로워하는 선함도 가지고 있어. 그러지 않느냐?”
쥬웰은 대답하지 못했다.
토른 공작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난 네가 나와 같은 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너 자신을 살폈으면 좋겠어.”
토른 공작은 본심을 말했다.
“이렇게 할아비처럼 죽기 전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제국에서 가장 커다랗던 거인인 그가 자신의 지난 삶을 후회한다니.
쥬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 감사해요, 할아버지.”
“……별반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로구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니까요.”
쥬웰은 무심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말했죠. 과거의 일을 후회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머니를 죽일 거라고. 전 사실 할아버지를 이해해요. 당시의 일은 황실을 무너뜨리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죠.”
“…….”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훗날 커다랗게 후회하게 되더라도, 저는 지금 제가 하는 일을 멈출 수 없어요.”
토른 공작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겠다. 피곤할 테니 그만 가서 쉬도록 하여라.”
“네.”
고개를 숙이고 물러가려는데, 쥬웰은 갑자기 돌발적인 마음이 들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전 할아버지의 손녀지요?”
“그야 당연하지. 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손녀이다.”
토른 공작은 강한 음성으로 말했고, 쥬웰은 그 음성에 용기를 내었다.
“그러면…… 저 한번 안아줄 수 있으세요?”
“……!”
토른 공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쥬웰이 토른 공작에게 안기는 건 흔하게 있던 일이다.
하지만 이번엔 평소와 다름을 느꼈다.
토른 공작은 최대한 부드러운 손길로 쥬웰을 안아 토닥거려 주었다.
“우리 아가, 왜 이렇게 마음이 속상할꼬. 이 할아비 가슴이 아프게.”
쥬웰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놀랍게도 토른 공작의 품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마치 진짜로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사실 토른 공작이야말로 새롭게 생긴 내 진짜 할아버지이지. 엔리크 자작과는 다르게.’
엔리크 자작과 토른 공작.
둘은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엔리크 자작이 쥬웰을 사랑하는 건, 그녀가 자신이 낳은 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둘 사이에는 절대로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엔리크를 사랑한다.
이제 그녀는 그를 자신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있고,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엔리크가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하지?’라고 불안해할 만큼.
엔리크를 사랑하지만……
아니, 사랑하니까.
이 가슴속 불편한 마음은 영원히 떨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엔리크의 사랑을 받는 게 기쁘면서도 괴로웠다.
반면, 토른 공작은 달랐다.
토른 공작이 그녀를 아끼는 이유는 엔리크와는 달랐다.
토른 공작은 원래의 ‘쥬웰’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쥬웰’의 몸에 들어온 후, 보인 모습에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즉, 토른 공작은 원래의 ‘쥬웰’이 아닌, 진정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도 토른 공작을 마음 편히 진짜 할아버지라고 여길 수 있었다.
‘……토른 공작은 과연 어떤 최후를 맞게 될까?’
쥬웰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처음 만난 순간.
쥬웰은 토른 공작에게 끔찍한 저주를 내렸다.
수명이 다한 토른 공작의 운명을 비틀고, 훗날 지금껏 저지른 죄과에 어울리는 더욱 끔찍한 최후를 맞게 한 것이다.
그 저주는 지금도 유효했다.
아마 토른 공작은 자신이 가장 바라지 않는, 끔찍한 형태의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쥬웰은 그때 자신이 토른 공작에게 건 저주를 후회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끔찍한 최후를 맞게 하고 싶지 않았다.
* * *
그날 밤, 쥬웰은 가넷 공작가를 나왔다.
특별한 용무가 있었던 건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바람 쐴 겸 나왔다.
“여기 내려줘.”
“네, 아가씨.”
마차가 외딴길에 멈추어 섰다.
일전, 들러 기도했던 작은 성전이었다.
이 성전을 찾아온 이유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였다.
신께서 신탁을 내린 건 혹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단순히 내 유해를 아껴서가 아니야.’
그녀의 머릿속에 지금껏 들었던 여러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번 일로 당신의 영혼에 얼마나 큰 상처가 남을지 걱정됩니다.’
‘난 네가 너 자신을 살폈으면 좋겠구나.’
흰 강아지와 토른 공작이 해주었던 이야기.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스스로 저지른 일에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마 신도 그런 마음으로 신탁을 내린 것 아닐까?
‘하.’
쥬웰은 힘없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기도하러 왔는데, 기도할 힘이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토른 공작이라고 자신의 부인을 죽이는 게 기뻤을까?
황실을 몰락시키기 위해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으니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그의 행동이 옳았다고 비호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당시 토른 공작에게는 그 방법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지금 하려는 일도 같았다.
그러니 멈출 수가 없었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쥬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간절히 바랐지만 이루지 못한 꿈. 앞으로도 영원히 닿지 못할 꿈.
물론, 한 가지 그 꿈을 이룰 방법이 있긴 했다.
증오에서 벗어나면.
그러면 어쩌면 그녀도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정말 에덴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면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을지도.
엔리크와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고, 유스넨과 결혼해 알콩달콩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쥬웰은 물었다.
답은 뻔했다.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생각해 보기 위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에 있던 피아노로 걸어갔다.
연주를 하려는 것이다.
떠오르는 곡은 신을 찬양하는 찬트. 그중 원수를 용서하는 사랑을 선보인 성인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찬트였다.
왜 이런 찬트가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그냥 마음이 동했고,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따란.
곡조가 퍼짐과 함께 쥬웰은 하나의 흑마법을 펼쳤다.
사르륵.
투명한 게헨나의 나비가 그녀의 주위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명에 따라 저 멀리, 원수들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쥬웰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신을 찬양하는 찬트를 연주하며, 원수들의 모습을 게헨나의 나비를 통해 바라보기 시작했다.
* * *
처음 나비가 향한 곳은 다이아 공작가였다.
원수 중 매리엇이 있는 곳.
그리고 라디트도 있었다.
마침 둘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늘 바로 골란 고원으로 출발할 거지?”
라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에스텔레의 유해를 호송하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단에 합류하기로 한 상태였다.
매리엇이 당부하듯 말했다.
“반드시 잘해야 해. 알지? 내가 간신히 기회를 만든 것.”
매리엇의 말처럼 원래 라디트는 이번 호위대에 낄 수 없었다.
그런데 매리엇이 다이아 가문의 힘을 동원해 라디트를 호위대에 동참시켜 공을 세울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래.”
라디트는 매리엇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매리엇, 네가 만들어준 이번 기회를 통해 이 라디트가 죽지 않았음을, 여전히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에 걸맞은 인물임을 입증해 보일게. 바로 매리엇, 내가 사랑하는 너를 위해.”
매리엇은 라디트의 말이 기분 좋은 듯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날 위해서라면 단순히 공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데?”
“그러면?”
“이번에 다녀올 때 내게 선물을 하나 가져다줄 수 있어? 이전부터 꼭 가지고 싶었던 게 있어서.”
라디트는 의아한 눈빛을 했다.
매리엇은 다이아 공작가의 가주다.
그 말은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부자란 뜻이다. 그러니 원하면 손에 넣지 못할 게 없었다.
“에스텔레의 눈동자를 가져와 줘.”
“……!”
매리엇이 잔혹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이전부터 에스텔레, 그년의 눈동자로 보석을 만들어 가지고 싶었거든. 꼭 부탁해.”
여섯 공작가의 일원들은 모두 보석안의 일족이다.
그 일족의 눈을 도려내 특수 가공을 하면 일반적인 보석과 비교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탐내는 것이다.
특히, 매리엇은 어린 시절부터 거슬렸던 에스텔레의 눈동자를 파내 보석안을 만들고 싶어 했다.
“원래 3년 전 그년의 영혼을 악마에게 제물로 바친 후 눈을 가져오려 했는데 시체가 게헨나로 끌려가 소원을 이루지 못했거든. 계속 아쉬웠어.”
끔찍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매리엇은 어떤 가책도 없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시체의 눈을 억지로 떠보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눈동자를 가져와도 티 나지 않을 거야.”
더 놀라운 건 라디트의 반응이었다.
이전이라면 매리엇의 이 부탁에 말없이 불쾌해하는 반응을 보였을 텐데, 전혀 그러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네 말대로 해줄게.”
“정말로?”
“대신, 나도 하나 조건이 있어.”
“어떤?”
“넌 쥬웰을 무너뜨릴 생각이지? 어떻게든?”
매리엇은 왜 그런 걸 묻는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그거야 당연하지.”
라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쥬웰을 무너뜨리면, 죽이지 않고 노예로 삼아줘.”
“……!”
매리엇이 의아해했다.
“왜 갑자기?”
라디트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쥬웰은 우리를 모욕했잖아. 그러니 그에 맞는 벌을 내려야지. 죽이는 것보다는 노예로 삼아 두고두고 모욕하는 게 더 끔찍한 징벌일 테니 말이야.”
매리엇은 라디트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쥬웰 그년에게 편안한 죽음을 내릴 수는 없지. 그년을 내 노예로 만들겠어.”
상상만으로 즐겁다는 듯 매리엇의 눈이 잔혹한 빛으로 일렁였다.
“반드시 그년을 무너뜨려 차라리 죽음을 애원하는 비참한 처지로 만들어줄 거야.”
이어서 둘이 입을 맞추었다.
열정적인 입맞춤이 끝나고 매리엇이 나간 뒤였다.
홀로 남은 라디트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더러운 년.”
매리엇을 욕하는 말이었다.
그는 매리엇이 혐오스러웠다.
갈수록 더. 참기 어려울 정도로.
하지만 참았다.
쥬웰을 손에 넣기 위해.
쥬웰을 손에 넣으려면 일단 쥬웰의 모든 걸 무너뜨려야 했고, 그러려면 매리엇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쥬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라디트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쥬웰, 난 너를 반드시 가지고 말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 망가뜨려서라도.”
라디트의 눈빛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런 둘이 모르던 게 있었다.
방의 한구석에 눈으로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나비가 한 마리 있었다는 것을.
둘의 대화를 모조리 엿들은 게헨나의 투명한 나비는 더듬이를 움직였다.
그러고는 두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 * *
게헨나의 나비가 두 번째 향한 곳은 로튼 백작의 저택이었다.
로튼 백작은 술에 취해 있었다.
“쥬웰, 이 건방진 년. 네년을 반드시 찢어 죽여주마.”
그는 얼큰하게 붉어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스텔레의 유해를 불태워야 해. 알겠나?”
로튼 백작의 앞에는 놀라운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마에 흉터가 자리한 중년의 여인.
쥬웰에게 충성을 바친 십마 아낙스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낙스가 로튼 백작과 함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로튼 백작에게 곧 일어날 일의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일부러 접근한 것이다.
“아낙스, 그대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겠지. 아, 에스텔레의 유해를 불태울 때는 최대한 끔찍이 훼손 후 불태우도록.”
“……어째서입니까?”
“그래야 쥬웰 그년에게 경고가 될 테니까. 그년에게 내려온 신탁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널리 알려줘.”
신탁에 의해 쥬웰은 에스텔레의 후인으로 점지되었다.
그런데 에스텔레의 시신이 끔찍이 훼손되어 사라진다?
신이 내린 신탁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알겠나?”
십마 아낙스의 눈동자에 순간 혐오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감정을 숨기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게헨나의 나비는 그런 로튼 백작의 모습을 살피다가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에메랄드 공작가였다.
* * *
마침 에메랄드 공작가의 두 명의 원수, 플랑드나와 웰링턴 공작은 함께 있었다.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리신 건가요?”
플랑드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웰링턴 공작은 무거운 얼굴로 묵묵부답 답이 없었다.
“아버지, 지금 이런 모습. 가증스럽고 역겨운 것 아시죠?”
“……그만해라.”
“에스텔레가 살아 있을 때는 그 아이가 어떤 꼴이어도 신경 쓰지 않더니 인제 와서. 거참, 눈물이 나는 사랑이네요. 에스텔레가 지옥에서 참 기뻐하겠어요.”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웰링턴 공작이 버럭 외쳤다.
아버지의 노호성에 플랑드나가 움찔하였다.
게헨나의 나비가 그런 둘의 모습을 쥬웰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쥬웰은 멀리서 둘의 모습을 엿보며 문득 만약 웰링턴 공작이 이 제안을 거절하면 난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화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아버지의 뉘우침에 기뻐해야 하는 건가?
순간, 쥬웰은 자신의 진정한 속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난 아버지가 이 제안을 거절해 주길 바라고 있을지도.’
쥬웰은 자신의 생각에 크게 당황했다.
자신이 그렇게 바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이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런 바람이 숨어 있었다.
아버지, 웰링턴 공작이 이 제안을 거절해 주기를.
티끌만큼이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를.
‘아니야, 내가 그런 걸 바랄 리가 없어.’
쥬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도 스스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끔찍이 원망하고 있으면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럽고 역겹기만 한데, 동시에 아버지에게 자신을 사랑해 주는 마음이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다니.
쥬웰은 자신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고 한심스러웠다.
그러는 사이, 플랑드나와 웰링턴 공작이 대화를 이어갔다.
게헨나의 나비가 그 대화를 전달해 주었다.
“그만, 그만하라고 했다. 더는 아무리 너라도 용납하지 않겠다.”
하지만 플랑드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야말로 가식적인 모습은 그만두세요. 지금 이러는 것 가증스러운 위선일 뿐이잖아요.”
“뭐?”
“다 알고 있어요. 사실은 아버지가 누구보다 쥬웰의 제안을 따르고 싶어 하고 있음을.”
웰링턴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에스텔레를 향한 죄책감? 그래, 조금 미안하긴 하겠죠. 하지만 그 죄책감 때문에 1억 골드를 포기한다? 농담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플랑드나가 비웃음을 지었다.
“1억 골드.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돈. 당장에라도 쥬웰의 말을 따르고 싶은데 알량한 죄책감 때문에 거절하는 척하는 거죠?”
“너, 그게 무슨!”
“제 말이 틀렸다면 왜 명확히 거절하지 않는 건데요?”
“……!”
“그거 아세요? 아버지, 쥬웰의 제안을 들은 후 명백한 거절의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저 대답을 피할 뿐.”
그렇다.
웰링턴 공작은 명확한 거절의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플랑드나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에스텔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아버지도 포기하기 아까운 거죠. 1억 골드이니까. 눈 한번 질끈 감고 죄책감만 무시하면 1억 골드를 얻을 수 있을 테니.”
“……플랑드나, 너…….”
“아니면 누군가 설득해 주길 바라고 있는 건 아닌가요? 억지로 등을 떠밀어주기를요.”
웰링턴 공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부정하지 못했다.
사실이니까.
만약 그가 이번 일에 정말로 어떤 탐욕도 없었다면, 쥬웰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명확히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매하게 답을 피했을 뿐, 그러지 않았다.
고민되었으니까.
에스텔레를 향한 죄책감이 있지만 동시에 1억 골드를 향한 탐욕도 들었다.
“하아.”
그런 웰링턴 공작의 모습에 플랑드나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저도 더 실랑이하기 피곤하고 힘드네요. 쥬웰에게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이야기하겠어요.”
“……!”
“그래도 괜찮으시죠?”
최후 통보였다.
더는 끌지 말고 결정하라고.
웰링턴 공작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플랑드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등을 돌렸다.
그러고 그녀가 방을 나가려는 순간.
웰링턴 공작이 깊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플랑드나.”
“왜 그러신가요?”
웰링턴 공작은 이를 꽉 깨물더니 말했다.
“하겠다.”
플랑드나는 물끄러미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1억 골드면…… 성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에스텔레도…… 기뻐할…….”
웰링턴 공작이 가증스럽게 떨리는 음성으로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플랑드나가 차갑게 말을 끊었다.
“되지도 않는 핑계 대지 마세요.”
“……!”
“그저 욕심이 나 1억 골드를 포기할 수 없는 거잖아요. 일전, 에스텔레를 악마에게 제물로 바쳤을 때처럼.”
웰링턴 공작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숙였다.
플랑드나의 말이 옳다는 인정이었다.
플랑드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뭐, 아버지가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이미 죽은 아이, 신경 쓸 필요가 무엇 있나요? 살 사람은 살아야죠. 아마 에스텔레도 지금 아버지의 결정을 이해해 줄 거예요. 착한 아이였으니까.”
플랑드나는 혼자에게만 들리게 희미하게 속삭였다.
착하고 병신 같은 아이였으니.
모두 다 이해할 줄 거예요.
이후, 플랑드나는 악마처럼 말했다.
“그러니 괜한 죄책감 따위 집어치우세요. 아버지랑 하나도 안 어울리니까.”
* * *
게헨나의 나비를 통해 거기까지 엿본 다음이었다.
딱!
쥬웰이 찬트를 연주하던 피아노의 현이 끊어졌다.
“아…….”
쥬웰은 잠시 멍한 얼굴을 하다가 다시 건반을 눌러보았다.
현이 끊어져 더는 찬트 연주를 이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뭐, 상관없나.”
쥬웰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난 뭘 기대한 거였는지.’
웰링턴 공작의 대화를 떠올린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희미하게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나 진짜 바보 같아. 그렇게 당하고도. 뭘 기대했던 거야? 바보 천치 같은 년.’
웰링턴 공작이 뉘우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를 용서해야 하는 건가.
곤란해하면서 고민했던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바랄 것을 바랐어야지.
‘난 정말 구제 불능이야.’
방금 플랑드나가 했던 말이 옳았다.
‘착하고 병신 같은 아이였으니.’
그 말처럼 세상에 그녀 같은 바보 천치는 없을 것이다.
‘됐어.’
쥬웰은 고개를 저어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신께 기도하였다.
“날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에 감사의 기도를 하옵니다. 당신이 날 생각하는 마음을 아오나…… 아오나…….”
그 이상 기도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선언하듯 내뱉었다.
“……전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원수들이 저렇게 추악한데.
쥬웰의 눈빛이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후, 성전을 나왔는데 뜻밖의 인물과 마주했다.
“……누나.”
유스넨이었다.
그가 한없이 아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왔지? 또 따라온 건가?”
유스넨은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함께 있어 주고 싶어서 왔습니다.”
쥬웰이 힘든 마음일 걸 짐작하고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싸늘하게 답했다.
“그딴 것 필요 없어. 비켜.”
“……!”
“어서.”
유스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섬뜩하게 일렁이는 쥬웰의 눈동자를 보고 더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쥬웰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유스넨에게서 멀어졌다.
“하아.”
홀로 남은 유스넨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빌어먹을.”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유스넨의 눈빛에도 섬뜩한 기운이 일렁였다.
착각일까.
그의 은발에 깃든 잿빛이 조금 더 짙어졌다.
* * *
이윽고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사파이어 공작가의 호위 기사단이 골란 고원에서 에스텔레의 유해를 운송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해가 발견된 후 꽤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운송을 시작하지 않았던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골란 고원은 제국 최악의 마경이니 최대한의 채비를 한 것이다.
혹시라도 마물에 의해 유해가 손상되면 큰일이니까.
둘째는 정치적 이유였다.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를 운송하는 건 대단한 업적.
그러니 입김 있는 귀족 가문에서 자신들의 자식들을 호위단에 합류시키기 바랐다.
이들을 기다리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돈 때문이었다.
다이아 공작가와 에메랄드 공작가가 물밑 협상을 마무리 짓느라 오래 걸렸다.
‘운송비 2천만 골드에 위약금 다섯 배로 최종 결정되었다지. 내 의도대로야.’
쥬웰은 가만히 생각했다.
그녀는 지방 영지를 시찰한다는 이유를 대고 가넷가를 빠져나왔다.
물론 거짓 핑계였다.
이제 그녀는 ‘마왕’이 될 것이었다.
그걸 위한 준비를 하였다.
하얀 무면(無面)의 가면을 꺼냈다.
이전 마왕으로 나섰을 때 한 차례 사용한 적이 있던 가면으로, 얼굴에 쓰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붉은 눈동자가 검은 흑요석의 빛으로 변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밤하늘처럼 검던 머리칼은 붉은 기가 감도는 흑발로 변하였다.
누구도 쥬웰인 걸 알아보지 못하게.
목소리도 조금 더 허스키하게 변하였다.
“준비는 다 되었나?”
허공에 이야기하자 놀랍게도 대답이 들려왔다.
-네, 로드.
대답한 이는 원래 그녀의 권속인 마리, 리델하트, 해밀턴이 아니었다.
새롭게 받아들인 권속들.
-말씀대로 사파이어 공작가를 사냥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십마(十魔)들이었다.
-오소서. 우리의 주인, 흑요석의 마왕이여.
그렇게 ‘흑요석의 마왕’이 처음으로 제국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 * *
한편 그때, 골란 고원의 사파이어 공작가의 막사.
수많은 기사와 병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기사의 숫자는 얼핏 봐도 500은 넘어 보였다.
정예 기사의 숫자만 이 정도이고, 따르는 종자(스콰이어)와 병사도 있으니 어마어마한 병력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막사에 꽂힌 깃발이었다.
푸른 불길의 문장.
사파이어 공작가의 최강 기사단인 청염(靑炎) 기사단이 이곳에 있음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염 기사단의 깃발 옆에 검과 왕관이 교차하는 문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사파이어의 가주인 검왕(劍王)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사파이어 공작은 대대로 검왕이란 별명으로 불려왔다.
따라서 저 검왕의 깃발은 사파이어의 가주 록슬론 공작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걸 의미했다.
즉, 지금 이 막사에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최강 전력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다들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다.
“경계에 이상은 없나?”
“네, 이상 무입니다!”
기사들을 보필하는 종자, 스콰이어들이 외쳤다.
“너무 시끄럽게 외치지 말도록. 쓸데없이 마물들을 자극할 수도 있으니.”
스콰이어가 헤헤 웃음을 지었다.
“뭐, 마물들 따위 무슨 상관입니까? 청염 기사단과 검왕께서 계신 데.”
“이놈, 방심은 금물이란 것 모르느냐?”
기사는 짐짓 엄한 얼굴을 하였지만 정작 본인도 크게 긴장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마물들 따위에 긴장하기에는 이곳에 모인 전력이 너무 강했다.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는 말도록. 흑마도사 놈들이 성배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파이어 공작가는 흑마도사들이 자신들을 습격할 거로 짐작하고 있었다.
성배를 노리는 건 비단 귀족들만이 아니다.
흑마도사들도 성배를 바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번엔 가넷가의 로튼 백작이 흑마도사들을 사주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로튼 백작의 사주를 받은 흑마도사들이 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로튼 백작은 평소 사파이어 공작가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리면 언제든 이렇게 틀어지는 게 여섯 공작가의 관계였다.
“하지만 흑마도사 놈들이 공격해도 뭐 별것 있겠습니까? 공작 전하의 검에 모두 줄행랑을 치겠지요.”
“그거야 그렇다. 흑마도사 놈들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지.”
지금 이 막사에는 마스터 나이츠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흑마도사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최강의 흑마도사들이라는 십마라도 지금 이 자리의 기사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마왕이라도 강림하지 않는 한 우리가 질 일은 없지.’
기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왕.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월자급 흑마도사를 뜻한다.
지금 대륙에는 그런 마왕이 한 명 있었다.
바로 타란툴라.
그 타란툴라면 사파이어 공작가라도 꼬리를 말아야겠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마왕이 고작 로튼 백작의 사주를 받고 이런 곳에 나타날 리는 없었다.
‘아니면, 그 새롭게 나타났다는 정체 모를 마왕이면 모를까.’
최근 흑마도사들 사이에 기이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새로운 마왕이 나타났다고.
사파이어 공작가도 첩보를 통해 그 소문을 접했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뜬소문으로 여긴 것이다.
‘기껏 해봐야 십마급 흑마도사가 새로 나타난 거겠지. 가주님의 검에는 안 될 거야.’
기사는 한없이 신뢰 가득한 눈으로 록슬론 공작이 머물고 있는 천막을 바라보았다.
검왕 록슬론.
검제를 제외하고 제국 최강의 기사였다.
그러니 십마급 흑마도사라도 그의 검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방심 말고 잘 경계 서도록!”
“네, 알겠습니다!”
사파이어 기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검왕 록슬론.
그는 지금 일그러진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들, 라디트를 향해서였다.
“한심한 놈.”
록슬론 공작은 완고한 느낌의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비어 펄럭이는 라디트의 오른 소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칠칠치 못한 못난 놈. 그렇게나 기회를 몰아주었건만 이런 X신이나 되다니. 너같이 한심한 놈이 내 아들이라니 통탄스럽구나.”
라디트는 그저 얼굴을 굳히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으니까.
“머저리 같은 놈.”
록슬론 공작은 라디트를 향해 연신 욕설을 내뱉었다.
라디트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팔을 잃었지만,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주님께서 염려하는 못난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겁니다.”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기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록슬론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사로서 가장 중요한 오른팔을 잃었다.
다시 일어서는 데 얼마나 걸릴지, 아니, 일어서는 게 가능할지나 몰랐다.
심지어 라디트는 애초에 그렇게까지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수재에 속하긴 했지만 딱 그 정도일 뿐. 진정 뛰어난 천재는 아니었다.
그런데 라디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였다.
“흑마도사들이 습격하면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뭐?”
“공을 세움으로써 직접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제가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에 부족하지 않음을.”
록슬론 공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오른팔을 잃은 후 몇 달도 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실력은 평범한 기사 이하일 텐데 공을 세울 기회를 달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라디트의 눈빛을 본 록슬론 공작은 말문이 탁 막혔다.
헛되이 고집을 부리는 눈빛이 아니었다.
기이한 광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네놈…… 설마?”
록슬론 공작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호통을 쳤다.
“또 악마에게 힘을 받은 것이냐?!”
록슬론 공작은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쳤다는 정확한 정황까지는 몰랐지만, 라디트가 악마의 축복을 받아 마스터 나이츠가 된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또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한심한 놈!”
“방법이야 상관없지 않습니까?”
“뭐?”
“강한 힘을 지닐 수 있다면, 수단이야 무슨 상관입니까?”
라디트가 반문했다.
“아버지처럼 만년 2등으로 열등감에 시달릴 바에는 차라리 악마의 힘이라도 얻는 게 낫지 않습니까?”
“네놈!”
록슬론 공작의 손이 라디트의 뺨을 후려갈겼다.
입술이 터지며 주룩 피가 흘렀다.
하지만 라디트는 멈추지 않았다.
악마의 축복을 새롭게 받으며 어둠의 광기가 뇌수에 뻗친 걸까?
더더욱 섬뜩한 눈빛을 하며 말했다.
“과정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켜보십시오. 전 어떻게든 최강의 기사가 될 겁니다. 그때는 모두 절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쥬웰을 손에 넣고 말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라디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록슬론 공작은 라디트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라디트의 눈에서 일렁이는 광기에 자신도 모르게 압도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넌 이번 호위에서 전면에 나서는 것 금지다. 에스텔레 성녀의 유해나 옆에서 지키도록.”
라디트는 발끈하였지만, 곧 수긍하였다.
전면에 나서 공을 세우지 못하는 건 좋지 않지만, 에스텔레의 유해 옆을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에스텔레의 유해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라디트의 눈이 시커멓게 가라앉았다.
곧 라디트가 사라진 후, 록슬론 공작은 화가 치밀어 올라 신경질적으로 막사 안 탁자에 놓인 독주를 벌컥 들이켰다.
“……빌어먹을!”
다시 벌컥 독주를 들이켜는데 밖에서 갑작스레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비명이었다.
“무슨 일이냐?”
“큰일입니다, 가주님!”
기사 한 명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흑마도사들이 습격했습니다!”
* * *
골란 고원에 자리한 절벽처럼 깎아내린 언덕 위에 5인의 인물이 있었다.
어딘지 섬뜩한 분위기가 흐르는 그들은 말없이 사파이어 공작가의 막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분은 아직인가?”
“곧 오실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다섯 명의 인물 중 한 명은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었다.
바로 십마 아낙스.
쥬웰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새로운 권속이었다.
나머지 네 명도 비슷했다.
네 명 모두 십마에 속하는 흑마도사들로 쥬웰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였다.
그런데 한 인물이 삐뚤어진 음성으로 말했다.
“……난 사실 잘 믿음이 가지 않아. 흑요석이라니.”
“라이든.”
십마 중 한 명인 그가 회의감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전설이 실제일 리가 없잖아. 더구나 흑요석이 세상에서 제일 사악한 가문인 가넷 가문의 공주라니. 이건 누가 봐도 사기 아니야?”
라이든의 모습에 아낙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로드께서는 왜 이딴 놈을 권속으로 받아들인 거지?’
로드, 쥬웰은 십마 모두를 권속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구원할 이를 ‘선별’하였다.
십마는 모두 강력한 흑마도사다.
그 말은 원래 찬란한 영혼을 지닌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지금까지 영혼의 찬란한 빛을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니다.
흑마도사가 된 후에도 이전과 비슷한 심성을 유지하는 이가 있지만, 어떤 악인보다 끔찍이 타락하는 이도 많았다.
쥬웰은 흑마도사가 된 이후에도 영혼의 선한 빛을 잃지 않은 이들을 선별하였고, 그렇게 뽑힌 이가 여기의 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불만을 터뜨리는 흑마도사 라이든은 전혀 그런 이가 아니었다.
도리어 흑마도사가 된 이후, 끔찍하게 타락한 이였다.
쥬웰의 기준에 전혀 맞지 않는 악인.
그 사실을 지적하자 쥬웰은 아리송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내버려 두도록. 저런 쓰레기도 쓸 만한 용도가 있는 법이니.’
라이든의 끔찍함을 이용해 무언가를 획책할 거라는 이야기인데, 쥬웰이 무얼 꾸미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난 그저 따를 뿐이니.’
아낙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낙스를 비롯한 다른 십마들은 쥬웰에게 완전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녀가 구원을 약속했으니까.
그때, 기다리던 이가 드디어 나타났다.
쥬웰이었다.
“준비는 되었나?”
곧 있을 피의 진혼곡을 위해서일까?
그녀는 칠흑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착 가라앉은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인 이들을 훑어보았다.
“이제 우리는 저 밑에 있는 사파이어 공작가를 칠 것이다. 목표는 에스텔레의 유해, 성배다.”
“……그런데 가능한 겁니까?”
문제의 라이든이 반발하며 나섰다.
“라이든.”
아낙스가 만류했지만 라이든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로드라도 무모한 명령에 따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십마라고 해도 저 전력을 상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저기에는 청염 기사단뿐만 아니라, 검왕까지 있다고요. 솔직히, 로드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라이든은 불경한 태도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물러나자는 건가?”
“아니, 위험 부담이 큰일이니 보수를 다시 상정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말입니다.”
구원을 바라는 다른 십마와 다르게 라이든은 돈 때문에 쥬웰을 섬기기로 한 거였다.
왜 저런 놈을 받아들였냐고?
‘저놈을 체스 말로 쓸데가 있으니까.’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놈은 성배 사건이 끝난 후, 원수들을 치는 데 써야지.’
이 사건 이후 쥬웰은 가넷 공작가를 손에 넣게 될 거고, 초조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원수들은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 라이든은 쥬웰을 배신하여 원수들을 낚을 ‘미끼’가 될 거였다.
그리고 쥬웰은 이 ‘미끼’를 통해 원수들에게 또다시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원수 중 한 명, ‘플랑드나’를 완전히 몰락시킬 것이다.
‘이번엔 로튼 백작, 다음엔 플랑드나 언니이지.’
어쨌든 그건 이번 일이 끝나고의 일.
지금은 눈앞의 일을 완벽히 마무리 짓는 게 중요했다.
“보수는 약속한 것의 두 배로 하지. 그 정도면 되겠나?”
“그 정도면야. 대신, 목숨이 위험하면 도주하는 것도 허락해 주십시오.”
“그것도 허락하지.”
라이든은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쥬웰은 무면(無面)의 가면을 꺼내 썼다.
가면을 쓰자 칠흑의 머리카락에 붉은 기가 돌고, 붉은 눈동자는 흑요석의 빛으로 변하였다.
“그러면, 시작하지.”
다른 십마들도 얼굴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꺼내 썼다.
쥬웰이 먼저 깎아지른 언덕 위에서 풀쩍 뛰어내렸고, 이어 십마들이 뒤를 따랐다.
싸움의 시작이었다.
한편, 라디트는 병영에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소.
바로 성배, 에스텔레의 유해를 모신 곳이었다.
“성소 안에 잠시 들어가 보겠네.”
“하지만?”
성인의 유해는 숭고한 성물.
성전의 여러 엄격한 규율에 따라 이송된다.
함부로 유해를 건드리는 것은 금지되는 것은 물론, 관을 옮길 때 말고는 일정 반경 이상 접근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사들도 멀찍이 둘러서 호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호위하지 않고 말입니까?”
성전의 규율에 따르면 성소 안에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서 호위해야 옳다.
“확인할 게 있어서 그렇네.”
“……하지만.”
“확인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신관을 대동하지 않고 유해를 보겠다니.
규율에 맞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일개 기사가 어찌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의 말을 무시하겠는가?
더구나, 라디트는 오른팔을 잃은 후 과거의 반듯한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종종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아랫사람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 해코지가 무서워 어쩔 수 없이 길을 열었다.
“그, 금방 나오셔야 합니다.”
성배를 모시는 곳이라 커다란 천막이 처져 있었다.
그 천막 안에 들어가 에스텔레의 유해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라디트의 눈이 더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정중앙에 도착한 라디트는 물끄러미 성배, 에스텔레의 유해를 바라보았다.
“…….”
조금도 부패하지 않아 3년이 넘게 지났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모습.
마치 당장에라도 일어나 숨을 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순간, 라디트의 뇌리에 에스텔레와 생전에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날 좋아해 주어서 고마워.’
에스텔레가 그에게 늘 하던 이야기.
그녀는 항상 그를 보며 웃었다.
이런저런 일로 언제나 상처투성이였지만 전혀 아픔을 티 내지 않고, 그를 위하려고 했다.
사실 라디트는 그런 에스텔레의 모습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에스텔레가 자신에게 맞춰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솔직히 둘이 만나서 손해 보는 건 자신 쪽이고 자신이 에스텔레를 ‘만나주는’ 것이니,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잃고 나서야 그녀의 소중함을 알았지.’
라디트는 에스텔레가 죽고 난 후에야 그녀의 소중함을 알았다.
때문에 라디트는 아주 오랜 기간 에스텔레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죽음을 후회해야 했다.
‘그것도 이제 끝낼 때가 되었어. 계속 과거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에스텔레는 죽었다.
이제 그가 바라는 건 다른 여인이었다.
라디트는 이 순간 에스텔레를 완전히 마음속에서 지우기로 하였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기로 했다.
철컥.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
매리엇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에스텔레의 눈을 가져와 줘. 보석으로 만들고 싶어.’
이전이었으면 절대 따르지 않았을 부탁.
아니, 지금도 솔직히 망설여졌다. 한때 사랑하던 여인의 유해에 그런 짓을 하는 게.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망설임을 꾹 억누르고는 손을 들었다.
쥬웰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매리엇의 힘을 이용하는 게 필요하니까.
그렇게 그가 추악한 마음으로 천천히 손을 움직이는 순간.
생각지도 않은 음성이 들렸다.
“그만.”
“……?!”
라디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않은 인물이 서 있었다.
그것도 미칠 듯 분노한 눈빛으로.
“다, 당신은……?”
라디트는 상대의 이름을 말하려 했지만,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퍼억!
상대의 주먹이 안면에 꽂힌 탓이었다.
콰직.
한 방에 라디트의 코가 뭉개졌다.
* * *
사파이어 공작가의 가주, 록슬론 공작은 막사에서 나온 후 눈을 크게 떴다.
현장의 상황이 예상과 달랐다.
“다섯 명? 아니, 여섯 명인가? 고작?”
사파이어 공자가는 원래부터 흑마도사의 습격을 예상하고 대비하였다.
그런데 달랑 대여섯 명이라니?
‘뭐지?’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최소 백 명은 넘는 흑마도사가 습격할 줄 알았는데 고작 저런 숫자라니.
“저놈들이 미쳤나 보군.”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그런 반응은 재차 충돌이 일어난 후 없어졌다.
“크아아악!”
“아악!”
흑마도사 한 명, 한 명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제야 기사들은 상대 흑마도사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십마!”
습격한 이들 모두 최강의 흑마도사라는 십마였다!
“조심해라!”
“스콰이어들은 뒤로 물러나! 너희의 상대가 아니다!”
참고로 십마는 제국 십검에 비견되는 강자들이다.
그러니 일반 병사로는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때, 거친 음성이 장내를 가로질렀다.
“갈! 멈춰라! 감히 흑마도사들 따위가!”
록슬론 공작이었다.
그가 전면에 나선 것이다.
강적의 출현에 흑마도사들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소요가 멈추었고, 록슬론 공작은 흑마도사들을 살폈다.
상대의 전력을 정확히 살피려는 것이다.
여섯 명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십마는 워낙 유명한 흑마도사들이라 누가 누구인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십마. 저기 검은 드레스에 무면의 하얀 가면을 쓴 한 명은 누군지 모르겠군.’
록슬론 공작은 가장 뒤쪽에 있는 작은 체구의 여인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존에 알려진 십마는 아닌 것 같은데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별로 신경 쓸 이는 아니겠지.’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신경 쓸 이는 저 정체 모를 무면 가면의 여인이 아니었다.
록슬론 공작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하였다.
“십마 아낙스. 설마 네놈까지 왔을 줄은.”
“……!”
그 말에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십마 아낙스면, 검왕 록슬론도 무시할 수 없는 강자였기 때문이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제국에서 가장 강한 이는 이 네 명이다.
마탑주 라플 공작.
마왕 타란툴라.
광휘의 대공 유스넨.
검제 샤피렌.
이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이로서 초월자라고 불렸다.
그러면 네 명의 초월자 다음으로 가장 강한 이는 누구인가?
다음 세 명이 꼽혔다.
사파이어 공작가의 검왕 록슬론.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가주 대리이자, 마탑의 부탑주 멜린 후작.
그리고 최강의 십마 아낙스.
즉, 아낙스는 검왕 록슬론과 동격의 힘을 지닌 강자였다.
‘설마 아낙스까지 왔을 줄은. 아낙스는 완전히 은퇴했던 게 아니었나?’
예상하지 못한 강적의 출현에 록슬론 공작은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소수다. 전력을 따지면 우리의 압승이야.’
저들이 아무리 강력한 흑마도사라고 해도 고작 다섯 명일 뿐이다.
정체 모를 검은 드레스의 여인이 있긴 했지만 겉으로 큰 힘이 느껴지지 않아 무시했다.
반면, 이곳에는 5백 명이 넘는 기사가 있었다.
하나하나가 손꼽는 정예 기사였다.
마스터 나이츠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흑마도사 한 명에 마스터 나이츠가 두 명이 붙고, 다른 기사들이 도우면 볼 것 없이도 그들의 압승이었다.
‘문제는 최강의 십마인 아낙스인데. 내가 아낙스만 처리하면 되겠군.’
같은 십마여도 아낙스와 다른 십마는 격차가 컸다.
그가 직접 상대해야 했다.
“아낙스, 앞으로 나와라. 나 록슬론이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이 지금까지 벌인 악행을 처벌토록 하겠다.”
그런데 아낙스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검왕, 네놈을 상대할 이는 내가 아니다.”
“뭐?”
“내 주인께서 직접 네놈을 상대할 것이다.”
록슬론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낙스의 주인이라니? 무슨?’
곧 아낙스가 말하는 주인이 저 뒤에 있는 검은 드레스의 여인을 뜻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저자가 누구이기에?’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있던 검은 드레스의 무면 가면의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검왕, 그대 혼자인가?”
“뭐?”
“검제는 오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검제가 없으면 쉽겠군. 다행이야.”
그 말에 록슬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검제 샤피렌은 록슬론의 역린이었다.
그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왕이었지만 가장 강한 이가 아니었다.
사파이어 공작가에서 가장 강한 이는 백염(白炎)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검제 샤피렌이었다.
두 명의 별명을 봐도 알 수 있다.
록슬론의 별명은 왕(王)인 반면, 샤피렌의 별명은 왕 위의 황제를 뜻하는 제(帝)였다.
그래서 록슬론 앞에서 검제 샤피렌 이야기를 꺼내는 건 금기였다.
그런데 지금 저 무면 가면, 검은 드레스의 여인은 록슬론을 대놓고 무시한 거였다.
이 자리에 샤피렌이 아니라, 록슬론이 와서 다행이라고.
“이…….”
분노로 록슬론의 목에 혈관이 솟았다.
그런 록슬론을 보던 검은 드레스의 여인, 쥬웰은 툭 또 의미 모를 이야기를 하였다.
“또 다행이야.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되어서.”
“뭐?”
“오늘 있을 일은 지금껏 살아온 네놈의 과거를 원망하도록.”
록슬론은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갑자기 이게 난데없이 무슨 말인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쥬웰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이야기한 거였다.
쥬웰은 주시자의 눈으로 록슬론 공작의 과오를 살폈다.
‘판별 결과, 게헨나에 떨어질 죄인.’
최악의 악인까지는 아니어도 선과 악으로 구별하면 무조건 악에 속할 인물이었다.
딱 여섯 공작가의 가주답달까.
숱한 죄목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죄목이 있군. 정의자를 핍박했다고?’
정의자(正意者, Justice).
에덴의 기준으로 봤을 때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올바른 이를 뜻한다.
록슬론 공작의 죄목 중에는 그런 이를 핍박한 것도 있었다.
‘어쨌든 죽여도 죄책감 느낄 필요 없겠군.’
쥬웰은 오늘 이 자리에서 검왕 록슬론을 죽이고, 사파이어 공작가의 몰락의 막을 열 계획이었다.
또한, 록슬론 공작을 짓밟고, 마왕 옵시디언의 이름을 제국 전역에 공포의 대명사로 널리 퍼뜨릴 것이다.
“유언은?”
“……뭐?”
“유언은 없냐는 말이다.”
록슬론 공작의 얼굴이 분노로 다시 시뻘게졌다.
파창!
록슬론이 검을 꺼내 들었다.
강맹한 오라가 쥬웰에게 날아들었다. 동시에 쥬웰의 가면 안쪽으로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 * *
그때, 에스텔레의 유해가 있는 성소.
라디트는 끔찍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그만…….”
그의 얼굴은 완전히 뭉개져 끔찍이 망가져 있었다.
주먹에 처참히 얻어맞은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터질 듯 분노한 얼굴로 거듭해서 주먹을 내리꽂았다.
“사, 살려…….”
애원하였지만 상대의 반응은 싸늘했다.
살기를 바라?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고 했으면서?
이런 눈빛이었다.
라디트는 더는 상대의 자비를 구할 수가 없었다.
본인도 자신이 하려던 일이 끔찍한 것이었음을 아니까.
특히 상대의 정체를 생각하면, 그에게 자비를 베풀 가능성은 없었다.
“끄어…….”
끝없이 이어지던 주먹질은 라디트가 의식을 잃고 난 다음에도 이어졌다.
코뼈가 뭉개진 것은 물론, 뼈가 여기저기 으스러져 라디트는 앞으로 영원히 이전의 아름다운 외모를 되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무참한 주먹질은 라디트의 숨이 멎기 직전까지 가서야 겨우 멈추었다.
“빌어먹을.”
라디트를 후려 패던 상대, 유스넨은 성소 구석으로 아무렇게나 라디트를 던져 버렸다.
‘그냥 여기서 죽여 버리고 싶어.’
아까 라디트가 그녀의 유해에 하려던 일을 떠올린 유스넨의 눈에 다시금 미칠 듯한 분노가 깃들었다.
하지만 그는 라디트를 죽이진 못했다.
금기 때문이 아니었다.
쥬웰이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원수에 다른 이가 손대는 걸 원치 않았다.
‘제길.’
유스넨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성소 중앙에 있는 에스텔레의 유해를 향해서였다.
“……누나.”
고이 잠들어 있는 그녀의 유해를 보니, 울컥 가슴이 치밀어 올랐다.
과거 어릴 적 함께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살라고! 왜 죽으려고 해! 이런 나도 사니까, 너도 살라고!’
‘편식하면 안 돼. 다 잘 먹어야지.’
‘넌 내 흰 강아지야.’
‘응, 나중에 나 꼭 만나러 와야 해? 알았지? 약속.’
절망에 빠져 목숨을 끊으려던 자신을 말리던 모습.
힘내라고 안아주던 모습.
밖에서 받은 상처로 남몰래 울던 모습.
본인도 상처 가득함에도 티 내지 않고 그에게 웃어주던 모습.
그랬던 그녀의 모습이 한 번에 떠올라 유스넨은 참지 못하고 왈칵 오열하였다.
‘이렇게나 소중한데. 소중한데.’
유스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잠들어 있는 에스텔레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누나…… 누나.”
그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그녀의 얼굴에 뚝뚝 닿았다.
‘왜 이렇게 잔혹하단 말인가?’
그녀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처참해 유스넨은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정말로. 제 영혼보다.”
유스넨은 에스텔레의 유해를 향해 고백했다.
처참한 고백이었다.
“그러니, 당신은 제가 반드시 구원하고 말겠습니다.”
유스넨의 눈빛이 결연함으로 물들었고, 그의 은발이 조금 더 잿빛으로 짙어졌다.
* * *
“커, 커억?”
검왕 록슬론은 피를 토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게도, 쥬웰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전하!”
뜻밖의 이변에 멍하니 굳어 있던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상상도 못 한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록슬론은 기세등등하게 검을 날렸다.
검왕이란 위명에 걸맞은 강맹한 공격들이었다.
하지만 저 무면 가면의 흑마도사가 움직이는 순간 그런 건 모두 의미가 없어졌다.
은빛 사슬이 하늘을 뒤덮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마왕.’
기사들이 두려움에 질려 생각했다.
마왕!
인간의 격을 넘은 초월자.
저 무면 가면을 쓴 검은 드레스의 여인은 그 마왕이 분명했다.
그것도 지금껏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강력한 마왕이었다.
‘타란툴라라 할지라도 가주님을 저리 쉽게 무릎 꿇리지 못할 텐데?’
‘도대체 얼마나 강하면?’
“도, 도대체 당신은?”
누군가 이렇게 물었고.
“내 이명은 옵시디언(흑요석).”
“……!”
“너희 여섯 공작가의 학정에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게헨나에서 강림한 마왕이다.”
쥬웰이 답했다.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흑요석의 전설은 비단 흑마도사에게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널리 유명했다.
그런데 그 흑요석을 자칭하는 마왕이 나타나다니?
더구나 여섯 공작가의 손에서 백성을 구원하겠다니?
하지만 감히 헛소리라고 소리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쥬웰이 방금 보여준 힘이 그만큼 압도적이었던 탓이다.
“어쨌든 끝낼 때가 되었군.”
쥬웰은 마지막 손을 썼다.
은빛 사슬이 번뜻했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검왕 록슬론은 툭 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죽은 것이다.
“안 돼!”
“가주님!”
“공작 전하!”
가주의 사망에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이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재앙은 이제 시작이었다.
이어, 쥬웰은 장내에 모인 이들을 모두 훑어보았다.
그리고 하나의 흑마법을 펼쳤다.
“여기, 너희 사악한 자들의 먹이가 있나니 기쁨의 함성을 질러라. 잔혹한 추수의 때가 다가왔으니.”
그 흑마법이 펼쳐진 다음이었다.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의 이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표식이 생겼다.
오로지 영안을 통해서만 보이는 표식으로 어떤 이의 이마에는 빛나는 정방향의 십자가 생겼고, 어떤 이의 이마에는 핏빛의 역방향의 십자가 생겼다.
이는 종말의 때에 악마들이 인간들의 영혼을 거두며 사용하는 표식으로 정방향의 십자는 에덴에 가야 할 선인, 역방향의 핏빛 십자는 지옥에 떨어질 악인을 뜻했다.
“역방향의 십자가 새겨진 이들만 해하도록.”
쥬웰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고 역방향 십자가 새겨진 이들을 일부러 모두 찾아 죽이란 건 아니야. 상황이 되는 대로 하도록. 단, 정방향 십자의 이들은 절대로 죽이거나, 크게 다치게 하지 않도록 유의해.”
쥬웰은 그렇게 명령을 내리며 본인 스스로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구별은 그저 그녀 본인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가증스러운 수작일 뿐이었다.
‘이렇게 구분한다고 내가 하는 일이 끔찍해지지 않는 게 아니거늘.’
그래도 다행히 십마들은 순순히 그녀의 명에 따라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로드.”
단 한 명.
썩은 죽정이 라이든만 불만을 표시했다.
“귀찮게…….”
그가 조용히 투덜거리자 쥬웰이 인상을 찌푸렸다.
“죽고 싶나?”
“……!”
“내 명령에 따르지 않을 시 내가 널 먼저 죽이겠다.”
그녀의 살기를 느낀 라이든의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 알겠습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명령한 쥬웰은 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에스텔레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성소를 향해서였다.
“아, 안 돼!”
“막아!”
하지만 무의미한 반항이었다.
십마가 남은 기사들을 상대했다.
그리고 때맞춰 골란 고원의 마물들이 사파이어 공작가의 막사에 들이닥쳤다.
우연이 아니었다.
쥬웰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 주변의 마물을 조종한 것이다.
가주가 죽은 상황에서 십마들뿐만 아니라 마물들까지 들이닥치자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쥬웰은 뒷일을 십마들에게 맡기고 에스텔레의 유해를 불태우려 향했다.
“…….”
그런데 왜일까.
자신의 유해가 보관된 성소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점점 무거워지는 이유는.
답은 당연했다.
그래도 자신의 유해니까.
그 유해를 훼손시키려는 것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인제 와서 왜 이래? 다 알고 시작한 거잖아.’
쥬웰은 고개를 저어 꺼림칙함을 떨쳐내려 하였다.
‘어차피 썩어 없어질 시체를 복수에 이용하려는 것일 뿐이야.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꺼림칙함은 떨쳐지지 않았다.
도리어 얼마 전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이번 일로 당신의 영혼에 얼마나 큰 상처가 남을지 걱정됩니다.’
‘난 네가 너 자신을 살폈으면 좋겠구나.’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 게 뭐가 의미 있다고.’
아니, 솔직히 인정하자.
의미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게헨나의 나비를 통해 엿들었던 원수들의 끔찍함이 떠올랐다.
특히 웰링턴 공작이 했던 선택.
‘하겠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 원수들이었다.
‘빌어먹을.’
그렇게 성소에 도착하였다.
호위를 서던 기사들을 대충 기절시켜 정리한 후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결연한 눈빛으로 성소에 들어간 쥬엘은 눈을 크게 떴다.
“……!”
“……누나.”
유스넨이었다.
그가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보다 확연히 짙어진 잿빛의 머리칼로.
* * *
“……너.”
쥬웰은 당황했다.
유스넨이 이곳에 있다니. 이게 어떻게 된……?
“설마? 나를 막으러?”
유스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쥬웰은 하,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경고하지 않았나? 날 훼방하지 말라고. 비켜.”
하지만 유스넨은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행동을 하였다.
털썩.
쥬웰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너?”
“제발 부탁합니다. 이번 일을 멈추어줄 수 없으십니까?”
유스넨의 눈동자가 처연함에 물들었다.
“제가 빌겠습니다. 이번 일은 당신의 영혼에 끔찍한 상처를 줄 겁니다. 그러니 부디, 멈추어주십시오.”
유스넨의 애원에 쥬웰은 울컥 가슴이 치밀어 올랐다.
‘왜…… 왜 네가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건데?’
그녀 앞에 무릎 꿇어야 할 이는 원수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유스넨이 저토록 아파하며 무릎 꿇어야 하는가?
‘더구나 잿빛 머리카락.’
쥬웰은 참담한 눈으로 유스넨의 은발을 바라보았다.
육신의 눈으로 봤을 때는 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혼의 눈, 영안을 뜨면 선명히 보였다.
그의 은발이 잿빛으로 물든 게.
이전에는 집중해야 간신히 티가 날 정도였다면 지금은 거의 절반 넘게 잿빛으로 물들었다.
‘왜? 왜?’
쥬웰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유스넨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래서 지금껏 억지로 밀어내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런데 저런 꼴이라니?
이대로라면 그의 타천은 확정이었다.
‘지금처럼 밀어내는 것만으로는 안 돼.’
쥬웰은 이 순간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그를 외면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타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를 아끼지만. 아니, 아끼니까. 아프지만, 더 아프지 않기 위해서. 결단해야 할 때가 왔다.
“마지막 경고야. 비켜.”
“……누나.”
“비키지 않으면 넌 내 적이 될 거야. 아니.”
쥬웰은 손가락으로 손에 길게 생채기를 내었다.
유스넨이 그런 그녀의 행동에 아찔한 얼굴로 외쳤다.
“누나, 상처가!”
“지금 이딴 상처가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쥬웰은 일부러 싸늘하게 말하고는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쳐 악마의 병기, 마검 바리사다를 소환하였다.
파앗!
핏빛 마검이 그녀의 피를 먹이 삼아 게헨나에서 소환되었다.
그녀는 그 마검을 들고 유스넨을 향해 겨누었다.
“……누나.”
유스넨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한편, 쥬웰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어서.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당장 왈칵 넘칠 것 같은 눈물을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그녀는 찢어질 듯 아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억지로 외면하며 차갑게 경고했다.
“비키지 않으면, 난 오늘 널 죽일 거야.”
* * *
죽인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어찌 그녀가 유스넨을 죽이겠는가?
그러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그를 봉인할 생각이었다.
‘무리해서 흰 강아지가 다치게 되더라도 그게 나아.’
이전 봉인에 실패하긴 했지만, 유스넨을 봉인할 계획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다만, 유스넨에게 어떤 고통도 상처도 주지 않고 봉인하기 위해 미루어두었던 것이다.
무리해서 봉인하려고 들면 유스넨이 반항할 거고, 그러면 그녀는 그를 다치게 해야 하니까.
그래서 최고의 함정을 파서 최대한 안전하게 그를 봉인하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그는 타천할 테니까.’
그녀는 유스넨의 잿빛이 깃든 머리칼을 다시 바라보았다.
다치게 하더라도 무리해서 지금 그를 봉인하는 게 나았다.
봉인되면 그가 그녀를 위해 잘못을 저지를 일도, 타천할 일도 없어질 테니까.
“……죄송합니다. 오늘은 저도 당신의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유스넨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자신의 성검, 심판의 검을 꺼내 들었다.
“……전 당신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서로를 위해 서로를 적대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파창!
쥬웰의 검이 유스넨에게 들이닥쳤다.
그녀의 검을 받은 유스넨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정말로 진심이라는 것을 이 한 번의 공격으로 느낀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악마화를 전력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한 송이, 두 송이, 열 송이, 스무 송이, 서른 송이…… 예순여섯 송이…….
그녀의 전신에 악마화가 가득 피어올랐고, 숨 막히는 마기가 가득 성소에 퍼졌다.
“……누나.”
유스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다행이야. 가면을 쓰고 있어서.’
쥬웰은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악마화가 피어오른 그녀의 얼굴은 아주 끔찍했다.
그런 모습을 유스넨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악마가 된 자신의 모습을 유스넨에게 보이면 아주 비참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면으로 악마화는 가릴 수 있어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악마의 날개였다.
쩌적.
등에서 영혼의 날개가 뻗어 나왔다.
총 여섯 장. 끔찍한 악마의 날개였다.
“누나!”
쥬웰은 유스넨에게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처참하였지만,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차갑게 말하였다.
“왜? 몰랐어? 말했잖아. 난 네가 아는 에스텔레가 아니야.”
쥬웰은 바락 외쳤다.
“난 이제 혐오스러운 끔찍한 악마라고!”
그녀의 힘에 밀려 유스넨이 뒤로 나뒹굴었다.
“커억!”
내상을 입었는지 유스넨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왈칵 피를 토하였다.
‘아.’
쥬웰은 순간 멈칫하였다.
당장 유스넨에게 달려가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빌어먹을.’
그때, 유스넨이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아…… 닙니다.”
“뭐?”
“당신은…… 전혀 혐오스럽지 않다고요.”
“……!”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입니다.”
가면 속 쥬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스넨의 말에 가슴이 격동하였다. 그의 품에 안겨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다시 검을 날렸다.
“……!”
까앙!
유스넨이 간신히 심판의 검을 들어 그녀의 검을 막았다.
마기와 성투기가 넘실거리며 성소의 천막이 당장에라도 날아갈 듯 흔들렸다.
쥬웰은 거칠게 유스넨을 몰아붙였다.
‘어설프게 다치지 않게 배려하는 것보다 차라리 압도적으로 몰아붙이는 게 나아.’
쥬웰은 1품.
유스넨은 2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의 격차가 아주 크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쥬웰은 영혼의 상처 때문에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반면 유스넨은 2품 중에서도 최상위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상처 입히기 싫어서 애매하게 배려하면 싸움이 어려워지고, 결국 더욱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차라리 단번에 제압하는 게 그를 위한 길이다.
“크윽!”
유스넨이 괴로운 신음을 터뜨렸다.
유스넨에게 상처를 주는 게 쥬웰도 괴로웠지만,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피를 내어 더욱 강력한 흑마법을 펼쳤다.
“나 어둠의 주구가 명하나니, 속박하라! 속박하여 굴복시키라!”
땅속에서 우수수 어둠의 팔이 튀어 올라 유스넨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유스넨도 당하고 있지 않았다.
파아앗!
유스넨의 몸에서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네 장의 날개가 솟아올랐고, 숭고한 기운이 쥬웰이 소환한 어둠의 손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쥬웰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피슉.
쥬웰이 마기를 담아 은밀히 쏘아 보낸 은빛 사슬이 유스넨의 날개 한 장을 꿰뚫었다.
“……!”
유스넨이 눈을 부릅떴다.
천사와 악마의 날개는 영혼을 형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해 날개가 다치면 끔찍한 고통을 느낀다.
그나마 쥬웰이 은빛 사슬을 최대한 얇게 변형시켜 영혼에 큰 상처가 남진 않겠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작렬했을 것이다.
유스넨도 커다란 고통을 느꼈는지, 그의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제길.’
유스넨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쥬웰의 가슴도 미어졌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쥬웰은 유스넨이 극심한 고통에 주춤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흑마법으로 날개를 꿰뚫은 은빛 사슬의 측면에 또 다른 가시를 나오게 해 나머지 세 장의 날개도 꿰뚫어 버렸다.
“……!”
유스넨은 네 장의 날개가 한 번에 뚫리자 격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 꿇었다.
‘끝이야.’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최대한 얇게 사슬을 변형시켰기에 영혼에 남는 후유증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 장의 날개가 모두 꿰뚫렸으니 지금 유스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 고통을 느끼면서 그녀에게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무력화한 틈을 노려 봉인하면 끝이었다.
‘다행히 쉽게 끝났어.’
예상외로 쉬운 결전이었다.
쥬웰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흰 강아지. 나에게 단 한 번도 검을 내밀지 않았어.’
싸움이 시작된 이후, 유스넨은 오로지 방어만 하였다.
그녀에게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고.
그러니 이렇게 일방적인 싸움이 되었던 것이다.
쥬웰은 울컥 다시 가슴이 치밀어 올랐다.
‘왜, 왜 우리는 이렇게…….’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어서 빨리 봉인하자.’
그런데 유스넨이 고통에 몸을 떨면서 말했다.
“……역시…… 이번 일 포기할 수는 없는 거겠지요?”
쥬웰은 새삼스레 또 묻는 유스넨에게 고개를 갸웃하고는 답했다.
“……그래. 난 포기할 수 없어.”
“알겠습니다.”
유스넨은 침통한 얼굴을 하더니 또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싸움을 하며 생각해 봤는데, 전 도저히 누나가 스스로의 유해를 훼손하는 건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
“그러니, 부디 오늘의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쥬웰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드득. 드득.
유스넨의 날개를 꿰뚫었던 은빛 사슬이 지진이 난 것처럼 떨리더니, 곧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무슨?’
쥬웰은 믿을 수 없었다.
악마든 천사든 날개를 제압당하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녀의 힘이 깃든 사슬을 파쇄하다니?
경악스러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파아앗.
유스넨의 등 뒤로 두 장의 날개가 더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한없이 찬란하고 숭고한.
그 날개에 깃든 힘을 느낀 쥬웰의 몸이 전율로 파르르 떨렸다.
‘마, 말도 안 돼! 저건?’
여섯 장의 날개.
1품 대천사장, 세라프의 날개였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쥬웰은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
‘유스넨이 1품으로 승격을?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유스넨이 설명을 해주었다.
“1품으로 승격한 건 아닙니다. 전 아직도 2품 트론즈 천사의 위계입니다.”
“그런데?”
“신께서 일시적으로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
유스넨은 씁쓸한 얼굴을 하였다.
“사실 당신에게 신탁이 내려왔을 때, 제가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습니다.”
당시 쥬웰이 받은 신탁은 이것이었다.
이 성배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이의 그릇. 그릇된 마음을 가진 이들은 모두 돌이키라.
내가 사랑하던 이의 그릇을 헛되이 욕보이는 자, 영겁의 고통에 떨어지게 되리라.
유스넨은 말을 이었다.
“당신과 헤어진 후 제게 하나의 신탁이 더 내려왔습니다. 바로 당신을 막으라는 것이지요. 그 신탁과 함께 제게 신의 가호가 내려왔습니다. 당신을 막을 힘을 받은 것이지요.”
신의 가호로 이번 일에 한정해 유스넨이 1품 대천사와 동일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 이런 최악이.’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유스넨이 저렇게 강해지면, 그를 상처 없이 제압하는 건 불가능했다.
원래 압도적인 힘 차이가 있어야, 상대를 안전하게 제압할 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치명상을 입혀야 간신히 제압 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하지?’
쥬웰은 찰나 고민하였다.
안전한 봉인은 불가능.
아니, 봉인은커녕.
‘이대로 싸우면, 난 유스넨을 죽이게 될 수도 있어.’
그를 죽인다.
그렇게 생각하자 쥬웰은 눈앞이 컴컴해졌다.
자신의 손으로 유스넨의 목숨을 뺏는다고 상상하니,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스텔레, 그년의 시체를 끔찍이 훼손해 줘.’
‘눈알을 가져와 줘. 보석안으로 만들어 가지고 싶어.’
‘그 제안에 따르겠다.’
원수들의 끔찍함이 다시 떠오르며 가슴을 울컥 흔들었다.
이번 일이 실패하면, 그녀의 복수 계획은 얼마나 뒤로 후퇴할지 몰랐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복수에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최악의 경우 6개월. 길어야 1년이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그 안에 여섯 공작가를 모조리 몰락시키고 원수들에게 최악의 절망을 주려면 뒤로 물러설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유스넨이 소중해도 그녀는 오늘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유스넨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비극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쥬웰은 애처롭게 부탁했다.
“제발, 그만 비켜줘. 이렇게 빌게.”
“…….”
“제발, 제발. 부탁이야.”
하지만.
“……죄송합니다.”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왜! 왜!”
왜 다 이따위란 말인가?!
쥬웰은 와락 분노하며 마검을 휘둘렀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친 싸움이 이어졌다.
유스넨도 이번엔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쥬웰을 위협하며 공격하였다.
물론, 유스넨의 공격은 쥬웰에게 큰 상처를 줄 진심 어린 공격은 아니었다.
마치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대련하는 듯한 견제 공격이 주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훨씬 상대가 어려워졌다.
신의 가호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지금 유스넨의 힘은 나보다 미세하게 더 위야.’
쥬웰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안 돼.’
쥬웰은 도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지지부진하게 싸움을 끌어갈 게 아니라, 단번에 힘을 끌어올려 유스넨을 제압하기로 한 것이다.
파아앗!
쥬웰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유스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쩔 수 없이 유스넨은 마주 강력한 공격을 날렸다.
방어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견제를 위해 날린 공격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힘을 끌어 올리던 쥬웰의 영혼에 무리가 가며 그녀에게 갑자기 극심한 통증이 오게 된 것이다.
‘하필 이럴 때.’
원래도 그녀의 영혼은 산산이 금이 가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베스윈에게 당한 타격 때문에 영혼의 불안정한 정도가 크게 늘어나 사달이 일어난 것이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이런. 제길.’
쥬웰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유스넨의 검을 보며 안색이 하얘졌다.
피하긴 무리였다.
“안 돼!”
그때, 유스넨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 그가 날린 공격은 당연히 쥬웰이 받아낼 것으로 계산하고 한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그의 검이 그녀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쥬웰은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아 본능적으로 위기에 대처했다.
영혼의 불안정함을 무시하고 더욱 강력하게 힘을 끌어올린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더욱 강한 힘으로 제압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니까.
영혼에 간 금이 더욱 벌어지며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억지로 참았다.
파창!
다행히 그녀의 강력한 힘에 유스넨의 심판의 검이 뒤로 튕겨 나갔다.
이건 그녀가 끌어올린 마기가 강한 탓도 있었지만, 유스넨이 마지막 순간 억지로 힘을 거두었던 덕이 컸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지금 쥬웰은 최대한 자신의 힘을 끌어올려 마기를 유스넨에게 쏘아냈다.
반면, 유스넨은 힘을 억지로 거둔 상태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이다.
쥬웰이 최대한도로 끌어 올린 힘.
반면, 일시적으로 무력해진 유스넨.
그 둘이 충돌하면 결과는 뻔했다.
유스넨은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죽는다고? 유스넨이?’
쥬웰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안 돼! 절대로!’
방법은 하나였다.
힘을 거두는 것.
하지만 순간 멈칫하였다.
지금 그녀는 영혼의 불안정한 상태를 무시하고 억지로 최대한의 힘을 끌어 올린 상태였다.
그런데 중간에 힘을 거두면?
반작용으로 영혼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싸움에 패함은 물론, 영혼에도 상처를 받을 것이다.
즉, 힘을 거둠은 이번 계획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흰 강아지는 죽어.’
순간, 갈등이 들었다.
유스넨의 죽음이냐.
아니면 포기냐.
원수들의 끔찍함이 다시금 촤르륵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 계획을 포기함은 복수 계획이 전반적으로 어그러짐을 뜻한다.
최악의 경우 남은 시간 내에 복수를 못 마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전 누나랑 결혼할 거예요.’
유스넨이 어릴 적 하던 이야기가 떠오른 순간.
그녀는 다시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다.
힘을 억지로 거둔 것이다.
그 대가는 끔찍했다.
“커어억!”
영혼이 뒤집히는 처참한 고통이 전신에 작렬했다.
쥬웰은 왈칵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영혼에 타격을 입으며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다.
‘끝났어.’
쥬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그녀는 유스넨을 죽이지 못하고 패배를 선택한 것이다.
‘이번 일은 실패했어.’
끔찍한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쩌적.
그녀가 쓰고 있던 가면에 금이 가더니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 안 돼.’
쥬웰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 그녀는 악마화가 가득 피어오른 악마의 모습이었다.
이런 추악한 모습을 유스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허겁지겁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보, 보지 마.”
“……누나.”
“보지 말라고!”
싸우는 도중 참고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자신의 상황이 비참했다.
소중한 이와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도.
소중한 이에게 자신의 이런 추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복수하려 안간힘을 쓰며 이토록 발버둥 치는 것도.
모두 너무 비참해 눈물이 나왔다.
유스넨은 다행히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추하지 않다느니, 괜찮다느니 그런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유스넨이 그런 말을 했으면, 그녀는 더욱 비참했을 것이다.
유스넨은 그저 그녀의 바람대로 말없이 눈을 감고 있어 주었다.
쥬웰은 이를 꽉 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날 죽여.”
“……누나?”
“어차피 네 사명은, 네게 주어진 운명은 날 죽이는 거잖아.”
유스넨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쥬웰은 소리 높여 외쳤다.
“난 지금 저항 못 하니 이 기회에 죽이라고! 차라리 네 손에 지금 죽는 게 나한테도 나을 수 있으니까!”
“……!”
순간, 유스넨의 머릿속에 몇 개의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은 어린 시절,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늘 따뜻한 그녀였기에 유스넨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녀에게 어떤 상처가 있는지.
우연히 그녀가 잠든 방을 지나갈 때 그녀가 악몽을 꾸며 발버둥 치는 걸 보았다.
‘……죽…… 고 싶어…….’
그때, 그녀는 꿈속에서 거듭 그렇게 말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떠오른 장면은 최근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악몽을 꾸는 걸 엿봤을 때.
그때도 그녀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음을 갈구했다.
‘누나.’
유스넨은 참담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홧김에 외치는 게 아니었다.
저건 숨기고 있던 진심이었다.
자신이 둘러싸인 상황이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고 싶다는.
심지어 더욱 끔찍한 건, 그녀가 맞기로 예정된 파멸은 아직 도래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걷는 복수의 길 끝에서, 그녀는 끔찍한 파멸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녀는 자신이 태어났음을, 자신의 영혼이 지음받았음을 원망하게 될 거야.’
라플 공작과 베스윈이 한 예언이었다.
유스넨은 짓씹듯 말했다.
“그렇게 두지 않아.”
어떤 잔혹한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일단, 그러기 위한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이번 일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당신의 뜻을 어겨.”
쥬웰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미 일을 망쳐놓고 저런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마냥 화를 낼 수도 없는 게, 유스넨이 어떤 마음으로 저랬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쥬웰은 다음 순간, 유스넨이 단순히 자신을 훼방한 것을 사과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면 당신의 업과를 제가 나누겠습니다.”
“그게 무슨?”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누나의 시신은 제가 불에 태우도록 하겠습니다.”
“……!”
쥬웰의 눈이 커졌다.
유스넨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누나의 유해에 손을 대다니. 싫지만. 절대로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누나가 직접 손을 쓰는 것보다는 제가 업과를 나누는 게 낫겠지요.”
“안 돼!”
쥬웰은 외쳤다.
유스넨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안다.
그런데 직접 불에 태우겠다니.
그런 일을 하면 그가 얼마나 상처 입겠는가? 그렇게 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 영혼에 입은 상처 때문에 손가락 하나 제대로 까닥할 수 없어 그녀는 유스넨을 말릴 수 없었다.
유스넨은 에스텔레의 유해가 누워 있는 단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망자의 안식을 비는 추모 기도였다.
“위대한 빛이여, 여기 당신의 품으로 돌아갈 가련한 이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유스넨의 음성이 부들부들 떨렸다.
뚝, 뚝.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그녀의 관 앞에 떨어졌다.
“부디, 부디…… 이 가련한 당신의 딸에게 축복을 베푸소서.”
이 기도는 지금껏 안식을 취하지 못한 에스텔레의 유해를 위한 걸까, 아니면 여전히 고통받는 그녀 자체를 위한 걸까?
구별할 의미는 없을 것이다.
썩지 못하고 생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에스텔레의 유해는, 영원히 괴로움에서 허우적대는 그녀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니 유스넨은 이 순간 자신의 손으로 에스텔레의 유해에 안식을 선사하기로 하였다.
그녀의 유해가 오래전에 누렸어야 할 안식을 얻고, 그래서 그녀의 영혼도 구원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부디, 이 가련한 이를 안식 속에 거하게 하소서. 제발.”
그리고 유스넨의 앞에서 푸른 불길이 일어났다.
천사의 성력으로 일으킨 성화(聖火)였다.
그 성화가 에스텔레의 유해에 닿았고, 곧 푸른 불길이 유해를 완전히 뒤덮었다.
“…….”
쥬웰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화장(火葬)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착각일까.
푸른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는 자신의 유해에 미소가 깃든 것 같은 것은.
오랜 기간, 안식을 취하지 못했던 그녀의 시체가 드디어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뚝.
그 모습을 보던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성스러운 불길 속에서 에스텔레의 유해는 신의 품으로 돌아갔고, 유스넨과 쥬웰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하늘 위로 퍼지는 연기가 마치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제(鎭魂祭)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