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 나의 누나 (1)
그때, 유스넨은 쥬웰의 짐작처럼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했다.
악몽은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는데, 무슨 내용인지 보고 있으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뭐지?’
유스넨은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이 꿈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설마 예지몽?’
유스넨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천사의 피를 각성했기에 예지 능력이 있었고, 과거에도 몇 번 예지몽을 꾼 적이 있었다.
‘그러면 혹시 그녀와 관련한 미래가?’
그는 눈을 부릅뜨고 스쳐 지나가는 예지몽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분명 보고 있는데.
어떤 장면인지 눈에 들어오는데.
그게 무슨 장면인지 머릿속에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뇌를 다친 사람이 뇌의 문제로 어떤 장면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했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야 하는데.’
유스넨은 초조하게 생각했다.
그는 직감했다.
이 예지몽이 그녀의 운명에 굉장히 중요한 내용임을.
하지만 도저히 무슨 의미인지 알아볼 수 없는 장면만 쭈욱 지나치다가 한순간,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쥬웰이 웃고 있는 장면이었다.
유스넨의 눈이 커졌다.
잘못 본 건가 했지만, 아니었다.
쥬웰이 웃고 있었다.
그것도 지금껏 본 꾸민 웃음과 달리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장면이었다.
“하. 하.”
유스넨은 왜인지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울컥 가슴이 흔들려 눈물이 주륵 흘렀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닥칠지 모르지만, 결국 그녀가 웃게 되지 않는가?
그러면 괜찮았다.
다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기쁨을 산산조각 내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하지 말도록. 저건 그저 가능성일 뿐이니.
유스넨은 흠칫하였다.
타천사 베스윈의 음성이었다.
“네놈이 어떻게?”
-넌 지금 내 마검 듀란달의 악몽에 들어왔으니, 당연히 내가 네 꿈에 간섭할 수 있지.
베스윈은 쿡쿡 웃었다.
-물론 지금은 다친 상태라 말을 거는 정도밖에 못 하지만.
유스넨은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저 장면이 가능성에 불과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야. 천사의 예지가 정확하지는 않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래.”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유스넨은 자신에게 별일 없을 거라 안심했는데, 이런 큰일을 겪지 않았는가.
‘아니, 결국, 무사하긴 했으니, 틀린 예지는 아니었던 건가?’
어쨌든 천사의 예지는 완전히 정확한 건 아니었다.
-네가 방금 본 장면도 실제로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는 몰라. 사실 거의 희박한 확률이라 할 수 있겠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 난 반드시 그녀를 구원할 거야.”
유스넨은 맹세하듯 짓씹듯 말했다.
하지만 베스윈은 비웃었다.
-어떻게?
“……!”
-방법이 있나?
유스넨은 답하지 못했다.
베스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내가 찾아온 것이다. 네놈을 그냥 놔두면 그렇지 않아도 희박한 확률. 완전히 말아먹을 게 분명하니까.
“그녀를 구원할 방법을 알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런 건 나도 몰라.
유스넨은 인상을 찌푸렸다.
모른다면서 뭘 알려준다는 말인가?
“모르면 꺼져.”
-다만 힌트는 알고 있지.
유스넨은 다급히 물었다.
“무엇이지?!”
-……너무 줏대 없이 매달리는 것 아닌가?
“그녀를 위한 일인데, 줏대 따위가 중요한가?”
-……그렇긴 하지.
베스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에 잘 통하는 둘이었다.
-어쨌든 내가 아는 힌트는 둘. 첫째는 그녀가 맞이할 운명은 그녀가 지금 걷고 있는 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스넨은 입을 다물었다.
라플 공작에게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걷는 길이라면…… 복수를 말하는가?”
-그래, 그러니 그녀가 걷는 복수의 길을 옆에서 지켜보면 그녀를 구원할 방법이 보일 수도 있어. 물론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말을 들은 유스넨은 한 가지 사실을 머릿속에 깊이 새겼다.
그녀가 맞이할 운명은 그녀의 복수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
그러니 그녀를 구원할 방법도 그녀의 복수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다른 힌트는 뭐지?”
-만약 네가 첫 번째 힌트로 그녀를 구원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때 알려주지.
“……뭐?”
베스윈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넌 아마, 그녀의 복수와 관련해서 그녀를 구원하는 일에 실패할 것이다.
“…….”
-하지만 그래도 절망하지는 말도록. 그럼에도 최후의 방법은 남아 있으니까.
유스넨의 눈빛이 깊어졌다.
워낙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라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그는 하나의 사실에만 집중했다.
“어쨌든 그녀를 구원할 길이 있다는 거지?”
-그래, 큭큭. 네가 하기에 따라 가능은 하다. 이런 희박한 확률을 ‘가능’이란 단어로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베스윈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러자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유스넨의 가슴에 마치 인두로 찍은 듯한 표식이 생긴 것이다.
악마의 낙인이었다.
“이건? 무슨 짓이지?”
-그녀를 구원할 희망의 씨앗이다. 싫은가?
유스넨은 입을 다물었다.
천사인 그에게 악마의 낙인이라니.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그는 이미 그녀를 위해 타천할 각오까지 했다.
그녀에게 도움이 될 일이라면 악마의 낙인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큭큭. 너무 걱정은 말라고. 흑마도사의 낙인 같은 건 아니니까. 이 낙인을 받았다고 타천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 네 영혼에 잠들 씨앗일 뿐이니, 천사들도 전혀 눈치 못 챌 거야.
베스윈의 몸이 흐릿해졌다.
-더 자라고. 그 낙인이 네 영혼에 숨어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테니까.
유스넨은 베스윈에게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베스윈은 왜 그녀를 이토록 위하는 걸까?
하지만 대답해 줄 리가 없어 다른 걸 물었다.
“……하나만 묻지. 넌 내가 그녀를 구원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글쎄.
베스윈은 아리송한 얼굴을 하더니 대답 대신 엉뚱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전 게이볼그 마경 침식 사건을 아나?
“……네가 일으킨 침식을 말하는 건가? 당연히 알고 있다.”
유스넨은 베스윈이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을 하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때, 난 그녀와 함께 온 천 명의 기사를 죽였지. 내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아나?
“그거야 네놈이 끔찍한 악마라서…….”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야.
베스윈은 광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 천 명의 기사가 그녀를 모욕했기 때문이야.
“……!”
-당시 그녀는 성녀로 토벌군에 참여했다. 모두 그녀를 무시하고 모욕했지. 그래서 모조리 죽여 버렸다.
유스넨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런 이유로 천 명에 달하는 이를 죽이다니. 그야말로 악마다운 끔찍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유스넨의 가슴 한구석에서는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모욕한 놈들 따위, 모조리 죽어 마땅하다고.
그런 유스넨의 마음을 읽은 건지, 베스윈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그 마음을 잊지 말아라.
“……!”
-그녀를 위해서는 어떤 미친 짓이라도 할 수 있어야 그녀를 구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베스윈은 쿡쿡 광소를 흘렸다.
-하긴. 내가 이렇게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왜인지 네놈은 날 능가하는 미친놈이 될 것 같군. 그러니 네게 희망을 걸어보마.
“…….”
-그러면 자도록.
그 말과 함께 유스넨의 의식이 다시 깊게 침잠했다.
* * *
‘왜 이렇게 안 깨는 거야?’
쥬웰은 유스넨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일어날 때가 지났는데, 유스넨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베스윈이 심은 낙인이 유스넨의 영혼에 자리매김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으나 쥬웰도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몸에 문제는 없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유스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몸은 내가 더 좋지 않으니.’
그날 베스윈과 일전을 겪은 후 쥬웰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혼이 상처 입은 탓이었다.
‘마지막 순간, 베스윈이 힘을 거둔 덕에 최악의 사태는 피했지만, 그래도 영혼이 입은 상처가 커.’
그렇지 않아도 그녀의 영혼엔 이미 금이 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큰 상처를 입어 영혼의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졌다.
그리고 안 좋아진 영혼의 상태는 그녀의 육신에도 영향을 주었다.
‘건강한 영혼에 건강한 신체라는 말은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니.’
몸과 영혼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영혼에 문제가 있는 이들은 건강을 잃는다.
원래는 건강했던 쥬웰의 몸이, 에스텔레의 영혼이 깃든 이후 잔병치레가 많아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영혼의 상태가 안 좋아져 몸에도 안 좋은 영향이 오고 있었다.
‘이거 문제인데.’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통은 참으면 된다. 참는 건 익숙하니.
문제는 단순히 아프고 말 상태가 아니란 것이다.
이대로는 신체에 커다란 문제가 생긴다.
그녀는 몸의 문제가 복수에 영향을 끼칠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당장 가넷 공작위를 물려받는 것에도 악영향을 받을 수 있어.’
토른 공작은 이미 쥬웰에게 공작위를 물려주기로 마음을 반쯤 굳힌 상태이다.
하지만 쥬웰의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알려지면?
그때는 결정이 번복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내 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돼.’
그래서 지금 쥬웰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일절 몸이 안 좋은 티를 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쥬웰이 완전히 회복한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상태가 심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티를 내지 않는 것도 한계가 있어. 깨진 영혼을 회복시켜야겠어.’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악마의 비술 중에는 깨진 영혼을 회복시키는 것도 있었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고 임시방편이었지만 그녀는 복수할 때까지 버틸 수 있으면 되니 상관없었다.
‘가넷가로 돌아가면 당장 진행해야지.’
쥬웰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유스넨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흰 강아지의 손을 잡으니, 조금은 통증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윽고, 토벌군은 수도로 귀환했다.
백성들의 성대한 환영이 이어졌고, 쥬웰은 개선 영웅이 되어 가넷가로 귀환했다.
가넷가도 성대한 환영을 준비하였다.
이런저런 화려한 준비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환영은 이거였다.
토른 공작이 나와 있었다.
그것도 무려 외성의 대문에.
이건 놀라운 일이었는데, 가넷 공작저는 하나의 저택이 아니었다.
직계가 사는 저택, 방계 및 봉신들이 사는 중간 지대, 그리고 기사단이 머무는 외곽이 있는데 그 외곽의 성벽까지 토른 공작이 마중을 나온 것이다.
토른 공작이 누군가를 마중하기 위해 외성의 대문까지 나온 건 그가 공작이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할아버지!”
쥬웰은 환한 얼굴로 토른 공작에게 뛰어갔다.
“왜 이렇게 멀리 나오셨어요? 몸도 안 좋으신데.”
“우리 위대한 성녀님이 오시는데, 이 할아비가 나와 있어야지. 안 그렇느냐?”
토른 공작이 기특하다는 듯 쥬웰을 마주 껴안았다.
쥬웰은 사랑스러운 얼굴로 토른 공작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감사해요. 할아버지가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어요.”
“내 덕분은 무슨. 그래도, 이 할아비가 널 많이 걱정하긴 했단다.”
토른 공작은 평소 그의 모습과 다르게 따뜻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고생이 많았다. 이 할아비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넌 이 가넷의 자랑이야.”
가넷의 자랑.
토른 공작의 노골적인 애정 표현에 봉신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놀라운 발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네가 빛내 나갈 가넷의 미래가 기대되는구나.”
“……!”
그 말을 들은 이들은 경악했다.
토른 공작이 쥬웰에게 가넷가를 물려줄 의향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다.
‘하긴, 쥬웰 남작님이 지금껏 해내신 일들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
‘반면, 로튼 백작님은 못난 모습만 보이고 있으니.’
토른 공작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쳤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진 거냐?”
“그럼요. 다 나았어요. 제가 얼마나 튼튼한데요? 팔팔해요.”
“흐음, 그래? 아직 얼굴이 안 좋은 것 같은데?”
토른 공작이 말끝을 흐리고는 쥬웰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살피는 듯한 시선이었다.
쥬웰은 가슴이 철렁했다.
실제로 지금 그녀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정신력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토른 공작에게 내 상태를 들키면 안 돼.’
병약한 몸은 그녀의 약점 중 하나였다.
원래도 잔병치레가 많아 지적을 듣고 있었다.
육체적으로 하자가 있는 이는 대가문의 가주로 적합하지 않다.
그러니 몸 상태가 안 좋아진 건 절대 토른 공작에게 들키면 안 되었다.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고 했는데 순간 아찔한 어지럼이 밀려오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위험해!’
쥬웰은 다급히 입술 속살을 꽉 깨물었다.
순간적으로 의식을 놓을 뻔했다.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는 최선을 다해 활짝 웃었다.
“아니에요. 멀쩡해요. 안색은 오래 여행해서 피부가 상한 거고요.”
“흐음, 그래?”
“네, 보실래요?”
쥬웰은 과장되게 손을 펼치고는 움직여 보였다.
“자, 멀쩡하죠?”
그러던 찰나.
쥬웰은 가슴이 덜컥했다.
아버지, 엔리크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들켰어.’
쿵. 쿵.
눈 한 번 마주쳤을 뿐이지만, 쥬웰은 직감했다.
엔리크가 자신의 상태를 알아봤음을.
당연했다.
엔리크는 오로지 쥬웰만 바라보니까.
그러니 보자마자 그녀의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제발.’
쥬웰은 순간 간절히 바랐다.
엔리크가 자신의 상태를 모른 척해주길.
이렇게 많은 이가 모인 곳에서 몸 상태가 안 좋은 게 드러나면 그건 악재였다.
이제 가넷 공작위를 손에 넣기 직전이니, 이런 악재는 반드시 피해야 했다.
다행히 엔리크는 눈치 없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저 꽉 눈을 감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안타까운 얼굴로.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쥬웰도 가슴이 미어졌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활짝 웃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쥬웰의 모습에 토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클클, 그래. 어쨌든 무리하지 말아라. 네가 무리할 때마다 이 할아비는 가슴이 덜컹덜컹하니까.”
“헤헤, 네.”
“그나저나 바라는 상이 있느냐?”
다시 돌아온 보상 타임이다.
토른 공작이 묘한 음색으로 말했다.
“커다란 공을 세웠으니, 네가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주마.”
“정말 뭐든요?”
“그래, 이 할아비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쥬웰은 그 말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건 토른 공작이 공식적으로 준 기회였다.
가넷가를 집어삼킬 기회.
같은 걸 느꼈는지 일부 사람들의 안색이 하얘졌다.
쥬웰의 경쟁자인 로튼 백작과 그를 따르는 일파였다.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고는 토른 공작이 내민 기회를 잡았다.
“저에게 가넷가를 조사할 내사권을 주세요.”
“……!”
그 이야기에 토른 공작은 눈빛을 빛냈다.
쥬웰이 아주 똑똑한 보상을 요구했음을 눈치챈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가넷가를 집어삼키는 데 가장 도움이 될 보상이었다.
‘일단, 내사권은 가주의 권한이지. 이 아이는 그 내사권을 달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차기 가주라고 선언하는 거야.’
또한, 얻는 이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토른 공작은 쥬웰에게 물었다.
“내사권이라. 정확히 어떤 이유로 요구하는 거냐?”
“가문에 벌레가 있어서, 잡으려고요.”
쥬웰은 싱긋 웃었다.
“신을 모독한 간 큰 벌레가 있더라고요.”
그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특히 일부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로튼 백작과 휘란드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작님?”
“말 그대로예요. 이번에 침식을 정화하는 데 필요한 성물들을 우리 가넷가에서 조달했는데, 누군가 그 성물에 장난을 쳤더라고요.”
“……!”
“이는 명백한 신성 모독죄.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벌레를 가만히 둘 수는 없지요. ‘충성’의 가넷으로서 그 벌레를 처단하려고 해요.”
장내의 모든 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 성물을 조달하는 건 다이아 공작가의 일이야. 그런데 이번에 우리 가넷가가 맡게 되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설마 쥬웰 남작님의 음모인 건가?’
눈치 빠른 몇몇은 전말을 눈치챘다.
쥬웰이 단순한 성녀가 아니라, 토른 공작에 비견할 만한 무서운 이라는 건 가넷가의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특히 쥬웰이 권모술수에 능통함은 유명했다.
그러니 이번 사태도 어쩌면 쥬웰의 음모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 짐작은 맞았다.
쥬웰은 로튼 백작에게 신성 모독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뒤에서 이번 일을 획책했다.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신성 모독죄면 그냥 가볍게 넘어갈 죄가 아니야.’
‘더구나 쥬웰 남작님이 작정하고 칼을 뽑았으니.’
물론 가넷 공작가 정도 되면 신성 모독죄도 무마할 수 있다.
아무리 성전이라도 가넷 공작가를 건드릴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칼을 뽑아 든 건 성전이 아니라 쥬웰이었다.
쥬웰이 휘두르는 칼은, 성전이 휘두르는 칼보다 훨씬 무서울 것이다.
더구나 쥬웰은 토른 공작의 은총까지 입고 있지 않은가.
“너, 너무 성급한 이야기구나. 신성 모독죄라니.”
로튼 백작이 시체처럼 질려 떠듬떠듬 말했다.
쥬웰은 로튼 백작의 모습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로튼 백작이 느끼는 두려움, 공포, 분노가 쥬웰의 가슴에 전달되었다.
그 달콤한 쾌락이 쥬웰이 겪는 아픔을 위로해 주는 듯했다.
‘난 원수들의 고통을 위해 살아 있는 거니까.’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원수들의 고통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건 조사해 보면 알겠지요. 엔리크 자작님, 가주님의 권한을 대행해 요청하니 이 건에 대해 조사해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쥬웰이 가주의 권한을 대행해 말했기에, 엔리크도 예를 갖추어 경어를 썼다.
그렇게 쥬웰이 던진 커다란 충격이 가넷가를 강타했다.
사람들은 로튼 백작을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로튼 백작님은 과연 어떻게?’
‘이대로 몰락할 건가?’
한 가지 확실한 건, 로튼 백작은 벼랑 끝에 선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발악하지 않으면 벼랑에서 밀려 떨어지리라.
그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는지 로튼 백작은 파리한 안색으로 이를 악물다 휙 등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휘란드가 허겁지겁 뒤를 따라갔다.
쥬웰은 로튼 백작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마 가만히 있지 않고 어떻게든 꿈틀대려고 하겠지.’
쥬웰은 입술 속살을 핥았다.
‘바라고 있는 바니, 제발 최선을 다해 열심히 꿈틀대 달라고.’
쥬웰은 이것을 의도했다.
궁지에 몰린 로튼 백작이 꿈틀대 주는 것.
‘신성 모독죄 하나만으로는 처절히 몰락시키기 부족하니까.’
그래도 지금껏 가넷가의 후계였던 이다.
신성 모독죄만으로 그녀가 원하는 수준으로 처참하게 몰락시키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녀는 로튼 백작이 정말로 비참하게 무너지길 바라니까.
따라서, 이건 로튼 백작을 초조하게 만드는 미끼.
진짜 덫은 따로 있었다.
‘곧 있을 성배 사건을 엮여 완전히 몰락하게 해야지. 그러니 열심히 꿈틀대 달라고.’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꿈틀대는 만큼 더욱 비참히 몰락하게 될 테니까. 기대되네. 로튼 백작뿐만 아니라 다른 원수들의 추한 모습을 모조리 볼 수 있을 테니.’
곧 진행할 성배 사건.
그때, 쥬웰은 로튼 백작만 아니라 모든 원수의 가문을 엮을 것이다.
다이아 공작가, 사파이어 공작가, 에메랄드 공작가가 그녀가 기획한 성배 사건에 휘말릴 것이고, 여섯 공작가의 파멸이 시작될 것이다.
그때, 토른 공작이 말했다.
“그런데 내사권 말고 다른 건 바라는 게 없느냐?”
“음.”
쥬웰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나 필요한 게 있었다.
“휴가를 다녀올 수 있게 해주세요.”
“휴가?”
토른 공작이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네, 잠시 쉬었다가 오고 싶어요. 대신, 제가 어딜 가도 찾지 말아주세요.”
“흐음. 하긴, 휴식도 필요하지. 그런데 진짜 휴가더냐?”
토른 공작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남들에게 안 들리게 속삭이듯 물었다.
“남몰래 뭔가를 하려는 건 아니고?”
쥬웰은 피식하였다.
‘눈치는.’
반쯤 맞았다.
그녀는 휴가를 빌미로 하나 중요한 일을 할 계획이었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료하러 가야 해.’
괜찮은 척 버티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곧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다친 영혼을 치료해 몸 상태를 회복시켜야 했다.
‘다행히 방법이 있어. 어렵지 않으니 휴가 삼아서 다녀오자.’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쥬웰은 저택 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더는 무리야.’
사람들 앞에서 억지로 괜찮은 척하느라 몸 상태가 극심히 좋지 않았다.
어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를 붙드는 사람이 있었다.
“쥬웰!”
엔리크였다.
‘아, 하필.’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엔리크가 좋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마주하기 싫었다.
“괜찮으냐? 도대체 침식 때 얼마나 다쳤기에…….”
엔리크가 허겁지겁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탁.
그런데 쥬웰이 엔리크의 손을 쳐냈다.
“……!”
엔리크가 흠칫하였다.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은 안 돼.’
평소 잔병치레라면 그냥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가깝게 접근하게 놔두면 그녀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분명 눈치챌 거고, 엔리크는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을 느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쥬웰.”
“괜찮으니, 그냥 돌아가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아버지가 이러는 것 귀찮아요.”
일부러 강하게 말했지만 엔리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쥬웰. 그러지 말고…….”
“괜찮다고요!”
쥬웰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아차 싶었다.
몸이 안 좋아, 실수했다.
‘이런 실수를.’
엔리크의 보석안에 아픔이 깃들었다.
딸이 소리친 것에 서운해하는 게 아니었다.
방금 소리 지름으로 쥬웰의 몸 상태가 정말 안 좋음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제길, 빌어먹을.’
쥬웰은 이를 악물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하지만 엔리크는 더 뭐라 말하지 않았다.
“……알겠다.”
대신, 성큼 다가오더니 휙, 쥬웰을 안아 들었다.
그것도 공주님 안기로.
“아, 아버지?”
“……걷는 것도 힘들지 않으냐.”
사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안기는 건!’
고개를 저으려는데, 엔리크가 괴로움을 잔뜩 억누른 음성으로 말하였다.
“제발…… 내게 이 정도는 허락해 주어라.”
“…….”
“지금…… 미칠 것 같지만…… 더 뭐라고 안 할 테니. 제발…….”
쥬웰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욱신.
가슴이 아파 와 그녀는 한참이나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이후, 엔리크는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보물을 안은 것처럼 최대한 조심하여 쥬웰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쥬웰은 그런 아버지의 품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따뜻하고 포근해.’
유스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요람에 누운 것처럼 아늑하고 편안했다.
‘이게…… 아버지의 느낌인 걸까?’
에스텔레 때 항상 갈망하던 아버지의 느낌.
그게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더욱 기대만 있고 싶었다.
그때, 엔리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쥬웰.”
“네?”
엔리크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우뚝 다물었다.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그녀는 왠지 엔리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지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발 앞으로 무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려는 거였겠지.’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쥬웰이 부담을 느낄까 입을 다문 것이리라.
그렇기에 엔리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지 말라고는 안 하겠다. 대신 힘들고 아플 때는 내게 기대어줄 수 없겠느냐?”
“……아버지.”
쥬웰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전 아버지가 저 때문에 아픈 게 싫어요.”
그게 그녀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엔리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란 존재는 원래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
“널 위해서라면 난 얼마든지 아파도 좋다. 아니, 네가 혼자 끙끙대는 게 훨씬 더 아파. 그러니 힘들면 이 아비를 이용해다오. 내 존재는 오로지 널 위한 거니. 부탁이다.”
난 오로지 널 위한 존재.
그 말에 쥬웰은 가슴이 울렁거려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아버지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분이 진짜 내 아버지였으면.’
그녀는 이 순간 ‘쥬웰’이 너무나 부러웠다.
이런 아버지가 있다니.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엔리크 자작은 내 아버지이기도 해.’
그녀는 엔리크의 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를 부렸다.
‘난 엔리크를 진짜 아버지로 여길 거야. 물론 진실을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버지로 생각하니 그는 내 아버지야.’
그녀는 엔리크를 진실로 아버지로 여겼다.
그러니……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니, 엔리크는 그녀의 아버지인 것 아닐까?
모르겠다.
억지란 것, 욕심이란 것 그녀 스스로도 알았다.
하지만 억지면 어떻고, 욕심이면 어떻단 말인가?
‘내 삶은 이토록 잔혹한데, 나도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엔리크에게 말했다.
“……사랑해요, 아버지.”
“……!”
순간, 엔리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어떤 햇살보다 따뜻하며, 깊은 눈길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 순간 그녀가 가장 바라는 말을 해주었다.
“나도. 나도 사랑한단다, 내 딸아.”
내 딸아.
그 말에 그녀는 헤실 미소를 지었다.
그 한마디를 듣자 모든 아픔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쥬웰은 다시 속으로 생각했다.
‘고마워요, 아버지. 사랑해요. 정말로.’
* * *
쥬웰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곧바로 ‘휴가’를 떠났다.
리샤크는 아직도 외유 중이었다.
“곧 돌아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흐음.”
쥬웰은 슬슬 리샤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없어서 다행이지.’
영혼을 치료하는 과정은 리샤크에게 보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악마’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옆에 있으면 어떻게든 따돌렸을 것이다.
쥬웰은 일단 마리의 저택으로 향했다.
“로드?”
마리는 쥬웰의 파리한 안색에 놀랐다.
마리의 저택에 들어온 쥬웰은 긴장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로드!”
“……괜찮아.”
“괜찮기는요! 안색이 완전 시체 같은데!”
마리의 얼굴이 걱정으로 차올랐다.
그녀는 허겁지겁 쥬웰을 침대에 눕혔다.
“도대체…….”
“호들갑 떨지 말고…… 내가 시킨 일을 하도록. 강한 원혼이 있는 곳을 알아봐. 최대한 빨리.”
“원혼이요?”
“그래.”
쥬웰은 침대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도 이곳은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써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냥 아파해도 되어서 신음을 흘렸다.
“……다친…… 영혼을 회복…… 해야 하는데, 제물로 삼을 원혼이 필요해.”
깨진 영혼을 인위적으로 치료할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인신 공양.
영혼을 치료할 수단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영양분 삼는 것이다.
‘끔찍한 악마의 수단이지.’
쥬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문제는 진짜 인간의 목숨을 제물로 삼을 수는 없으니.’
고육지책으로 생각한 게 원혼이었다.
원혼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가 남겨둔 잔류 사념.
즉, 영혼의 찌꺼기일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 원혼을 제물 삼아 영혼을 치료하겠다는 것이다.
대신, 진짜 영혼이 아니니 잔챙이 원혼으로는 안 됐다. 가장 커다란 원혼을 찾아야 했다.
“최대한…… 강대한 원혼을 찾아. 어서 빨리.”
그러고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로드! 로드!”
놀란 마리가 외쳤지만 쥬엘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계였다.
* * *
쥬웰은 시간이 꽤 지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 조금 살 만하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을 푹 잔 덕분인지 오랜만에 컨디션이 비교적 괜찮았다.
“……로드.”
마침 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염려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의 눈동자에는 평소 보이던 장난기는 씻은 듯 사라지고 오로지 걱정만 가득했다.
“이제는 괜찮으니,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
“괜찮다고요? 거짓말.”
마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 로드의 권속이니 아프면 그냥 아프다고 해도 돼요.”
그 말에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진짜 괜찮은데.’
그녀는 몸에 진짜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영혼이 안 좋은 여파로 덩달아 몸의 상태가 흔들리는 것이다.
지금은 한 차례 커다란 충격이 가시고 났더니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하지만 마리는 쥬웰이 억지로 괜찮다고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전 무조건 로드의 편이에요. 제 앞에서까지 괜찮은 척할 필요 없어요.”
“……그래.”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의 걱정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닌 게, 지금 잠깐 컨디션이 괜찮아진 것일 뿐 곧 재차 몸이 안 좋아지긴 할 것이다.
‘다친 영혼을 치유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겠지.’
그러니 어서 영혼을 회복해야 했다.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지?”
“강렬한 원혼 말하는 거죠? 찾았어요.”
“그래? 쉽지 않았을 텐데, 빨리 해냈군.”
“저 이제 부자니까요. 돈이면 안 되는 일 없어요.”
마리는 거듭된 투자 성공으로 현재 손에 꼽는 거부가 되었다.
그 돈을 이용해 최고의 정보 조직을 고용해 부렸다고 한다.
“중북부 지방에 강렬한 원혼이 있다고 해요.”
“중북부 지방? 하필?”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안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인데.’
에스텔레의 삶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기억이 있는 곳이라 가급적이면 발걸음하기 싫었다.
“어떤 원혼이지?”
“정확히는 몰라요.”
“흐음?”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원혼을 목격한 이들을 모조리 정리했다고 해요.”
“……에메랄드 공작가 때문에 죽임을 맞은 인물인가 보군.”
“네, 아마도요.”
쥬웰은 혀를 찼다.
안 봐도 뻔한 상황이었다.
무언가 에메랄드 공작가 때문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가 원혼이 되었고, 소문이 나는 걸 막기 위해 목격한 이들을 모조리 정리한 것일 터다.
‘그 정도면 어쩌면 내가 아는 이의 원혼일 수도 있겠는데.’
쥬웰은 팔짱을 꼈다.
“어쨌든, 아주 강렬한 원혼이겠어.”
“네, 그럴 거라 여겨져요.”
“지금 바로 출발할 준비를 하지.”
* * *
빠르게 준비를 하고 쥬웰은 원혼이 나타난다는 중북부로 향했다.
마리가 준비했는데, 쥬웰은 마차를 보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마차 안이…….”
“돈 좀 썼어요. 저 이제 부자니까요.”
“……조금 쓴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마차 밖은 비교적 수수했는데, 안이 궁궐과 같았다.
‘아니, 밖도 팔두마차이니 수수한 건 아닌가?’
무슨 대귀족이나 탈 법한 마차였다.
‘물론 내가 대귀족이 맞긴 하지만. 너무 화려한데.’
하지만 마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로드를 모시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심지어 여덟 마리 말은 마물과 품종을 섞은 튼실한 놈들이었다.
그런 튼실한 말을 쓴 이유가 있었다.
“자, 누우세요.”
“……왜 마차에 침대를?”
“편하게 누워서 가시라고요. 특별히 제작했어요.”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요즘 마차는 안에 침대를 놓는 게 유행인가.’
얼마 전 침식을 해결하고 돌아올 때도 침대 마차에 누워서 왔는데, 이번에도 누워서 가게 생겼다.
‘……뭐, 나쁘진 않지만.’
하나 문제가 있었다.
“……왜 그대도 누워 있는 거지?”
“같이 누우려고요.”
“나랑?”
“네, 로드랑요. 오붓하게. 제가 옆에 누워서 간호해 드릴게요.”
“…….”
“…….”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가서 앉아.”
“마차에 의자 없는데요?”
“왜?”
“안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옆에 붙어서 오붓하게 간호하려고?”
“……만들어, 당장.”
“쳇.”
마리의 입술이 뿌루퉁하였다.
하지만 쥬웰이 이렇게 나올 걸 예상하기는 하였는지 미리 마차 장인을 대기해 놓은 상태였다.
뚝딱, 침대 옆에 의자와 테이블이 설치되었다.
그러니 마치 잘 꾸민 아늑한 방 같은 모습이었다.
“아메티스트 공작가에 의뢰해 흔들림 방지 마법까지 완벽히 설치했으니 아늑한 여행이 될 거예요.”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엉뚱한 장난기가 있긴 하지만 마리가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신경 써줘서 고맙군.”
“……!”
그 말에 마리는 살짝 놀란 눈을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르르 눈동자를 예쁘게 접었다.
“별말씀을요. 사실, 이건 사심이 잔뜩 들어간 마차예요.”
“……나랑 같은 침대를 쓰려는 흑심?”
“……흑심이 아니라 사심이요. 그리고 그런 사심도 있긴 하지만.”
왜일까?
마리의 눈동자에 아릿함이 깃들었다.
“이런 마차 여행.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 말에 쥬웰은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성녀님, 우리 꼭 다음에 마차 여행을 가요.’
‘으음, 마차 여행요? 난 마차 여행 싫은데. 마차 타면 흔들려서 아프잖아요.’
에스텔레는 마차 여행을 싫어했다.
거친 마차를 타고 온갖 곳을 다니며 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리가 말했다.
‘그런 마차 여행 말고요. 마차 유람 여행이요. 돈을 덕지덕지 발라서 최고급 유람 여행을 다니는 거예요.’
‘……난 돈 없는데.’
‘아아. 진짜 답답하게, 이 언니만 믿어요. 돈 따위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때, 마리는 팔짱을 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마차는 최소 팔두에, 흔들림 방지 마법도 걸고, 안은 궁궐처럼 장식하고, 테이블을 놔서 티 타임도 갖고, 밤에는 같은 침대에 누워서 수다를 떠는 거예요. 어때요? 상상만 해도 좋지 않아요?’
하지만 마리의 이야기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쥬웰은 침묵했다.
왜 마리가 이런 마차를 준비했는지 눈치챈 것이다.
이건 ‘그녀’를 향한 그리움의 표현이었다.
‘이 바보. 이제 날 잊을 때도 됐잖아.’
쥬웰은 괜히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마리는 쥬웰의 한숨에 그녀의 심기가 불편한 건지 눈치를 봤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아니.”
그녀도 사람인데, 마리의 이런 마음이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쥬웰은 말했다.
“과자는?”
“……!”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쥬웰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여행인데 준비가 너무 부실한 것 아닌가? 심심할 때 놀 카드랑 간식, 야영할 때 마실 술 정도는 준비해야지. 아, 냉동 마법으로 보관한 소고기 등심도. 야영할 때 구워 먹어야 하니.”
“…….”
“……물론 오해는 마. 이왕 여행 가는 것 나도 오래간만에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마리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따뜻한 분. 날 배려해서.”
“……아니다. 그냥 나도 오랜만에 휴가 기분 내고 싶어서…….”
“……부끄러워하기까지. 귀여워.”
“…….”
마리는 활짝 웃었다.
“어쨌든 모두 준비할게요. 로드께 최고의 여행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쥬웰은 휴가 여행을 떠났다.
* * *
휴가 여행.
쥬웰은 그 단어가 어색했다.
단 한 번도 휴가를 보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휴가는커녕 여가란 것 자체를 보내본 적이 없었다.
에스텔레 때도, 쥬웰 때도.
‘물론, 난 지금 휴가 기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 휴가를 보낼 생각은 없었다.
영혼만 회복하려고 한 거였는데 마리 덕분에 얼떨결에 진짜 휴가 여행을 와버렸다.
‘뭐, 나쁘진 않나.’
그녀는 지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도대체 마차에 돈을 얼마나 바른 건지 침대는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가넷가의 침대보다 더 아늑한 것 같았다.
끝없이 누워 있고만 싶을 정도였다.
단, 문제가 있었는데.
마리가 의자에 앉은 채 끝없이 흐뭇한 눈으로 그녀가 침대에서 뒹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오구오구 귀여운 애완동물을 보는 눈빛이라 쥬웰은 참…… 뭐라 표현하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날 저런 눈빛으로 본 사람은 네가 처음…… 아니, 마리는 내가 에스텔레 때도 저런 눈빛으로 봤었지.’
“……그만 좀 봐.”
“……왜요? 로드처럼 귀여운 분은 많이 많이 봐야 하는 법이라고요. 그러니 저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누워 있으세요.”
마리의 눈빛이 흑심(?)으로 빛났다.
쥬웰은 헛기침을 하였다.
마리의 부담스러운 눈빛 말고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경.”
“왜 부르십니까?”
칼날처럼 날카로운 음성.
그 매서운 목소리만큼이나 날카로운 냉미남이 보였다.
리델하트였다.
그가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마차 구석에 앉아 있었다.
‘……왜 리델하트 오라버니도 따라온 건데. 그것도 저렇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같은 마음인지 마리는 리델하트를 흘겨보았다.
“추기경께서는 바쁘신 것으로 알았는데.”
왜 따라왔냐는 물음이었다.
“……마침 순례 여행을 할 때가 되어서 따라온 것일 뿐이다.”
순례 여행은 신관들이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을 섬긴다.
물론 사전적 의미가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그런 진짜 순례 여행을 하는 신관은 거의 없다.
지금 리델하트도 마찬가지다.
순례 여행은 핑계일 뿐.
누가 봐도 그냥 따라왔다.
“……그리고 레이디 둘만 여행 가면 위험하니 지키려 따라온…….”
“추기경님, 여기서 제일 약하시지 않나요?”
“…….”
리델하트는 쭈구리가 되었다.
그는 마리보다 약했다.
물론 리델하트가 약한 게 아니다.
원래 기사 지망생이었고, 이후에도 신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리델하트는 어지간한 기사를 능가하는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괴물처럼 타고난 무술 능력이 뛰어났다.
“뭐, 어쨌든 잘됐네요. 우리 옵시디언 패밀리. 따로 회식도 한번 한 적 없는데 이번 여행을 기회로 친목 도모나 하자고요.”
누가 들으면 옵시디언 패밀리가 흉악한 흑마도사 모임이 아닌, 동네 사교 스포츠 모임 정도로 여겨질 것 같은 음성이었다.
마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 우리 본격적으로 놀아볼까요?”
“……뭘 하려는 건가?”
“자, 리델하트 님. 앞에 카드 드세요. 한 판에 10골드씩 걸고 내기 카드나 한판 하자고요.”
리델하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10골드? 그건 불법 도박을 넘는 수준이 아닌가?”
10골드면 어마어마한 거액으로 불법 도박도 이 정도 금액을 걸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기 싫어요? 겁나면 말고요.”
그 말이 리델하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여러 차례 몸싸움에 져서 제압당한 경험이 있어 마리에게 은근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는 리델하트였다.
“이 정도 금액이면 도박하다가 옵시디언 상단을 내게 뺏길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 나중에 뺏기고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걱정하지 마세요. 추기경께서야 말로 나중에 돈 잃고 돌려달라고나 하지 마시고요.”
빠지직.
마리와 리델하트가 잠시 눈에 번개를 띠었다.
“나중에 우는소리 해도 소용없다.”
“전 울면 개평 드릴게요. 아, 그리고 이기는 사람이 오늘 로드를 독점하는 게 어때요?”
“……그런 건 관심 없지만 어쨌든 난 지는 걸 싫어하니 반드시 이겨주지.”
관심 없다고 하면서 왜인지 더욱 눈을 번뜩이는 리델하트였다.
‘……아니, 가만히 있는 날 왜 거는 건데.’
쥬웰은 황당한 마음으로 그 카드 게임을 구경했고.
승부가 났다.
리델하트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100골드만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로드?”
“…….”
“……바로 갚겠습니다.”
리델하트는 파산했다.
마리의 사기 도박에 속아서.
마리는 무술의 천재답게 손재주도 뛰어나서 사기 도박 솜씨도 일품이었다.
* * *
그렇게 쥬웰과 옵시디언 패밀리는 때아닌 즐거운(?) 여행을 즐겼다.
실컷 침대에 누워 있기도 하고, 중간중간 좋은 풍광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쥬웰은 정말 오래간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즐거운 휴식을 취했다.
“자, 여기 등심 스테이크입니다.”
“……고맙군.”
쥬웰은 얼떨떨한 얼굴로 리델하트가 직접 요리해 준 스테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중간중간 야영을 했는데, 그때마다 리델하트가 요리를 전담하였다.
‘……리델하트 오라버니가 요리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리델하트가 요리를 전담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그들은 마부를 제외하고 수행원 없이 여행하고 있었는데, 쥬웰이나 마리이나 요리에 완전히 젬병이었다.
특히 마리는 무술의 천재면서 어째서인지 요리 실력은 꽝이었다.
물론, 마리는 당당했다.
얻어먹는 주제에 선심 쓰듯 리델하트에게 말했다.
“나중에 부인분께 사랑받으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노력해 요리 솜씨를 갈고닦는 게 리델하트 님께도 좋지 않을까요?”
“……난 결혼할 생각 없다.”
“뭐, 아니면 로드를 위해서라도요.”
“…….”
“설마 로드를 위한 요리를 하는 건데, 대충 하지는 않으시겠죠?”
리델하트는 힐끗 모닥불 옆에 앉아 있는 쥬웰을 바라보았다.
왜일까?
요리를 하는 그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마치 기사가 일생일대의 숙적을 마주한 듯한 표정.
그 진중한 표정이 리델하트의 칼날 같은 외모와 어울려…… 웃겼다.
요리하면서 저런 무서운 얼굴이라니.
그런데 더 웃음이 나왔던 사실은 맛있다는 것이다.
의외로 요리에 재능이 있는 리델하트였다.
“……로드께 드린다고 특별히 더 신경 쓴 건 아닙니다. 절대로.”
“……그래.”
‘……안 물어봤는데.’
쥬웰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