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 잿빛 천사
Chapter 3-1 내 흰 강아지
그렇게 생각한 쥬웰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 침식 때 흰 강아지를 사냥해야 해.’
그녀는 이번 침식을 통해 유스넨을 봉인할 계획이었다.
‘더는 미룰 수 없어. 지금이 딱 적당한 시기야.’
사실, 그녀는 유스넨을 봉인하는 걸 최대한 미루고 싶다.
왜?
아프니까.
지금 그를 봉인하는 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칼로 가슴을 도려내듯 통증이 밀려왔다.
하고 싶지 않다.
한다고 해도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다.
더 그의 따뜻함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된다.
첫째, 여기서 더 가까워지면, 그때는 더 아플 것이다.
둘째, 유스넨이 타천할 가능성이 있었다.
‘어쩌면 유스넨은 이미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그는 기꺼이 나를 위해 타천을 감수할 거야.’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니 그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못하게, 그를 고이 봉인해야 했다.
“하.”
거기까지 생각한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누나, 전 누나랑 결혼할 거예요.’
흰 강아지의 음성이 떠올라,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침 바람이 불었다.
청명한 하늘과 다르게 가슴이 텅 비는 듯했다.
* * *
그렇게 쥬웰이 이끄는 토벌군은 수도로 복귀했고, 곧바로 소식이 전해졌다.
침식이 시작되었다는 비보였다.
위치는 제국 동부의 요충지.
게이볼그였다.
하필, 일전 끔찍한 재앙이 일어났던 그 마경에 다시 침식이 일어난 것이다.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 * *
침식은 제국의 안위를 뒤집을 수도 있는 최고 긴급 사태.
당장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쥬웰 성녀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성전 기사단의 성기사였다.
침식은 페리도트가와 에메랄드가의 의무다.
따라서 에메랄드가의 성전 기사단이 전면에 나서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쥬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채비할 테니, 기다려 주게.”
“죄송합니다. 돌아오시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성기사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침식 사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천사의 힘을 지닌 광휘의 대공과 성력을 쓸 수 있는 성녀였다.
그래서 쥬웰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쥬웰의 옆에 있던 엔리크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버지.”
엔리크의 얼굴에는 속상함과 걱정이 가득했다.
당연했다.
딸이 방금까지 피가 튀는 전장에 있었는데, 돌아오자마자 마물, 악마와 맞서야 하는 침식 현장에 출진해야 하게 생겼으니.
아버지로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네.’
쥬웰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본의 아니게 걱정하게 만들어 미안했다.
그런데 엔리크의 말은 예상과 달랐다.
“미안하다. 네가 제일 힘들 텐데, 옆에서 괜히 심란하게 만들어서.”
“네?”
엔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난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내가 옆에서 쓸데없이 이래 봤자, 네 마음만 힘들 테니, 나도 굳게 마음을 먹으마.”
“……아버지.”
엔리크는 쥬웰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쥬웰을 담았다.
왜인지…… 울컥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어떤 걱정보다 더욱 따뜻한 눈빛.
엔리크의 눈동자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 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보석.
내 모든 것.
그 절절한 아버지의 마음에 쥬웰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하나만 약속해 주겠느냐?”
“……네, 말씀하세요. 무엇이든.”
쥬웰은 엔리크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엔리크를 향한 쥬웰의 마음이었다.
“침식을 해결하고 와서 이 아비와 데이트를 해주지 않겠느냐?”
쥬웰은 웃었다.
무사히 다녀오라는 엔리크식 당부였다.
‘엔리크 자작과의 데이트라.’
물론, 그녀는 좋았다.
하지만 그의 사랑을 더욱 느끼고 싶어 일부러 튕겨보았다.
“흐음, 제 시간은 비싼데요? 데이트하려면 선물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선물?”
엔리크는 쥬웰의 장난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무엇이든 말하여라. 내 딸이 바라는 거면, 무엇이든 가져올 테니 말이야. 저 하늘의 별이라도 가져와 주마.”
듣기 좋은, 따뜻한 봄 같은 달콤한 음성이었다.
쥬웰은 문득 엔리크가 젊은 시절 인기가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많았을 것이다.
가문을 떠나 저 외모, 성격이면 인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지금도 많을지도?’
솔직히 젊은 놈팡이보다 엔리크가 훨씬 훌륭하지 않은가?
‘재혼이라도 알아봐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싶네.’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또 싫었다.
그냥 심술 궂은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말했다.
“제가 바라는 건 다른 게 아니고요.”
“무엇이냐?”
“가기 전 꼬옥 안아주세요.”
“……!”
엔리크의 눈이 커졌다.
쥬웰이 잔잔히 웃었다.
“떠나기 전, 아버지의 포옹. 그거면 데이트 대가로 충분할 것 같아요.”
“…….”
엔리크는 잠시 침묵하였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그거야 얼마든지.”
엔리크의 따뜻한 품이 쥬웰을 감싸 안았다.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말고. 떠날 때요.”
“그때도. 지금도. 떠나기 전까지 매일, 매일 꼬옥 안아주마.”
“그건 싫거든요? 제가 애인지 알아요?”
“애지. 나에게 너는 영원한 애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그렇게 엔리크는 기어코 쥬웰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쥬웰은 싫은 척, 고개를 젓는 척하다가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엔리크의 품이 좋았다.
단단하면서, 부드럽고 또한 따뜻하고, 포근했다.
‘아아, 주책이네.’
쥬웰은 스스로에게 실소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주책이라 생각했다.
쥬웰은 손을 들어 마주 엔리크의 등을 꼬옥 껴안았다.
그렇게 그의 따뜻한 품에 안겨 있으니, 아주 잠시 일전 라디트와의 일, 앞으로 있을 유스넨과의 일 등 모든 괴롭힘이 잊히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 * *
긴급회의 장소는 에메랄드 공작가였다.
채비를 마치고 떠나려는데, 쥬웰은 예상치 못한 상대와 마주쳤다.
토른 공작이었다.
그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왜 네가 에메랄드 공작가로 간다는 말이냐? 볼일이 있으면 그놈들이 가넷가로 와야지.”
꼬장꼬장한 투덜거림이었다.
별걸 다 트집 잡는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 투덜거림의 주체가 토른 공작이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제국 최고 권력자.
스스로 먼저 발걸음 한 적 따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쥬웰은 위압감보다 왠지 토른 공작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쳤나. 저 괴물 노인네를 귀엽다고 느끼다니.’
쥬웰은 얼떨떨했다.
하지만 진짜였다.
투덜투덜하는 토른 공작이 귀엽게 느껴졌다.
쥬웰은 배시시 웃으며 토른 공작의 팔에 매달렸다.
“할아버지, 침식은 성전의 일이잖아요. 그러니 제가 가는 게 맞지요.”
“에잉.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다. 난 가넷의 왕이 된 이후 무슨 일이든 한 번도 내 쪽에서 발걸음 한 적이 없어.”
쥬웰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토른 공작도 사람인데, 먼저 발걸음 한 적이 없을 리가.
‘……아닌가. 황실을 무너뜨린 다음에는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을 테니.’
어쨌든 지금 토른 공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손녀가 에메랄드가의 들러리가 되는 게 싫어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물론 쥬웰은 이름 높은 성녀다.
하지만 이번 침식의 해결 주체는 에메랄드 공작가다.
그러니 쥬웰은 주역이 될 수 없었다.
이렇게 그녀가 에메랄드 공작가에 ‘찾아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증명하는 거였고, 토른 공작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귀엽네.’
쥬웰은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와 토른 공작을 더 쿡쿡 찔러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전 가넷의 왕이 아닌걸요?”
“……!”
토른 공작이 흠칫하였다.
쥬웰은 일부러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전 차기 가넷도 뭣도 아닌, 가넷가의 일개 일원일 뿐이니 이런 수모야 어쩔 수 없지요.”
지금 쥬웰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자신을 후계로 삼지 않지 않았냐고.
그래놓고 뭘 그렇게 아끼는 척하냐고.
‘옛날이었으면 이런 발언은 상상도 못 했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이제 그녀와 토른 공작 사이에는 이 정도 발언은 용납할 수 있는 유대감이 쌓여 있었다.
토른 공작은 헛기침하였다.
“그건…… 크흠. 때가 되면 어련히 이 할아비가 정해주지 않겠느냐?”
그 대답에 쥬웰은 살짝 놀랐다.
당연히 그녀는 토른 공작이 대답을 회피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도리어 긍정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 방금 말씀, 제가 잘못 알아들은 건 아니죠?”
“다 알면서 그러는구나.”
토른 공작은 쥬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마음은 이미 너에게 향하고 있거늘.”
“……!”
“난 당연히 너에게 후계위를 물려주고 싶단다. 하지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어.”
쥬웰을 공식 후계로 인정하면 여기저기서 반발이 있을 거란 이야기였다.
“넌 뛰어나지만 어려. 심지어 대를 건너뛴 계승이지. 당연히 잡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 알고 있겠지?”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아직 로튼 백작이란 경쟁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지 않은가?
물론 쥬웰은 지금껏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문의 모두가 그녀를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뛰어나다고 모두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세상일은 간단치 않으니까.
각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아직도 로튼 백작을 지지하는 이들이 적잖이 있었다.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가문이 흔들리는 무리한 계승을 진행할 수는 없으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오로지 너의 손에 달려 있다.”
쥬웰이 그 잡음을 완벽히 잠재울 수 있어야지 후계로 공표하겠다는 뜻이었다.
“네, 알겠어요. 뭐, 어렵지 않겠네요.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고.”
“흐음?”
토른 공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문 내 잡음을 잠재우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쥬웰은 무슨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 썰어 먹듯 대수롭지 않게 답한 것이다.
“생각해 둔 묘수가 있는 거냐?”
“간단하죠. 백부를 쳐내면 되잖아요?”
“……!”
토른 공작의 눈이 굳었다.
쥬웰은 싱긋 웃었다.
“상대를 내 앞에 무릎 꿇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죠. 하나는 인망으로 마음을 얻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그래, 공포로 무릎 꿇리는 방법이 있지.”
토른 공작이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백부가 몰락하면, 누가 감히 내게 거스를 생각을 하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쥬웰은 혀로 입술 속살을 핥았다.
‘이제 로튼 백작을 완전히 쳐낼 때가 되었지.’
쥬웰은 곧 진행할 사건들로 로튼 백작을 향한 복수를 마무리 지을 것이다.
‘로튼 백작만이 아니야. 다른 원수들도 한 번에 짓밟을 거야.’
그런 마음으로 토른 공작에게 말했다.
“이번 침식을 시작으로 제국에는 커다란 사건들이 몰아칠 거예요. 전 그 사건들을 이용해 백부를 완벽히 몰락시킬 거고요. 아니, 다이아, 에메랄드까지 묶어 한 번에 짓밟을 거예요. 철저히. 다이아와 에메랄드, 사파이어가 깨질 정도로.”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지금껏 자잘한 타격을 주었던 것과 다르게, 진정으로 각 공작가에 뿌리 깊은 타격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여섯 공작가는 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몰락의 시작을 맞게 될 것이다.
“…….”
토른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쥬웰의 눈이 섬뜩한 광기에 일렁이고 있었다.
간담만큼은 제국 제일이라 자부하는 토른 공작이지만, 이런 쥬웰의 모습을 볼 때마다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꺼림칙한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쥬웰은 그가 가장…… 아니, ‘유일’하게 아끼는 ‘가족’이다.
그런 손녀가 조금 섬뜩한 모습을 보이는 게 뭐 어때서?
토른 공작은 오히려 기껍고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백부를 몰락시키고 다른 공작가들을 짓밟으면, 할아버지께서는 제게 어떤 선물을 주실 건가요?”
토른 공작은 주저 없이 답했다.
“너에게 제국 재상직과 소넷 백작령을 주겠다.”
재상직과 소넷 백작령.
이건 모두 현재 로튼의 것이었다.
로튼이 백작인 이유는 바로 소넷 백작령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넷 백작령은 대대로 차기 가넷으로 확정된 이에게 주어지는 영지였다.
즉, 지금 토른 공작은 쥬웰에게 가넷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 * *
“…….”
쥬웰을 태운 마차가 달렸다.
‘넌 차기 가넷이 될 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
차기 가넷으로 인정되면, 가넷의 왕까지는 순식간이었다.
토른 공작의 나이 때문이었다.
아마, 그녀는 차기 가넷으로 인정받은 후 몇 달도 되지 않아 완전한 가넷 공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라 마지않던 일.
하지만 왜일까?
쥬웰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흰 강아지.”
쥬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침식 사건 때, 그녀는 유스넨을 봉인할 것이다.
복수를 위해서.
그리고…… 흰 강아지를 위해서.
그때, 앞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아가씨, 성전입니다.”
“……그래.”
참고로 에메랄드 공작가는 성전에 붙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한숨을 삼킨 후 마차에서 내리던 쥬웰이 멈칫하였다.
내리자마자 생각지 않은 인물을 마주했다.
찬란한 은발과 부드러운 둥근 안경.
안경 뒤에 숨어 있는 매혹적인 눈매.
유스넨이었다.
“…….”
쥬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거 반칙이잖아.’
아직 마음의 준비를 못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마주해서일까?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 빌어먹을 일은, 유스넨을 보는 순간 두근두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
반가워서.
‘보고 싶었으니까.’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전장에 나가 있는 내내 그녀는 유스넨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덜컥 그를 만나자 가슴이 흔들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렇게나 좋은데.
“…….”
한편, 속으로 가슴의 진동을 억누르고 있는 건 유스넨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그녀와 다르게 남몰래 그녀를 실컷 훔쳐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움이 덜하다는 건 아니다. 남몰래 보고 또 봤지만, 여전히 갈망이 가득했다.
“기다렸습니다. 함께 들어가시지요.”
“아. 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리도트가는 이번 침식 사태 해결의 최고 주역이었다.
그러니 함께 회의에 참석하려는 것이다.
옆에 서서 걸어가려는데 뜻밖의 감촉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유스넨의 손이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조심히 잡았다.
“……!”
예상 밖의 잡음이라 흠칫하였는데, 그녀의 반응에 유스넨이 죄송하다는 얼굴을 하였다.
“미안합니다.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실례를 범했다는 듯 손을 떼려고 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급히 그의 손을 낚아챘다.
“괜찮아요.”
“……영애?”
“좋아요.”
그 말을 하는 쥬웰은 살짝 뺨이 붉어졌다.
별것도 아닌 말인데, 유스넨에게 하니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유스넨도 마찬가지인지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부드럽게 쥬웰의 손을 감쌌다.
기분 좋은 서늘함.
가슴이 잔잔히 가라앉는 듯해 쥬웰은 생각했다.
‘놓고 싶지 않아.’
유스넨도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놓고 싶지 않군.’
유스넨은 계속 이렇게 그녀의 손을 잡고만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니, 다른 것 따위 다 때려치우고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고 싶었다.
‘……이번엔 내가 지키겠어.’
그는 옆에 선 쥬웰을 바라보았다.
한 인물이 겹쳐 보였다.
‘누나.’
절대 그녀가 그런 파멸을 맞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 * *
‘오랜만이네.’
쥬웰은 에메랄드 공작가의 모습에 잠시 추억에 잠겼다.
‘추억…… 이라고 해야 할지는 의문이지만.’
그녀가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가지고 있는 기억은 모두 끔찍한 것들뿐이었다.
특히 언니 플랑드나와 관련한 기억이 많았다.
플랑드나는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학대했다.
‘괜찮아. 이제 다 갚아줄 테니.’
쥬웰은 눈빛을 낮게 가라앉혔다.
복수심이 들끓어 올라 다행이라는 마음도 들었다.
유스넨을 보며 느꼈던 아릿함이 복수심에 가려져 다소 완화되었던 것이다.
“들어가죠.”
회의장에 들어가니 이미 여러 인물이 모여 있었다.
주로 이번 일의 주역인 페리도트가와 에메랄드 공작가의 봉신들이었지만, 그 밖에 다른 공작가의 봉신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침식은 제국 전체에 영향을 끼칠 심각한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분위기도 혁명군, 필바하가 일으킨 반란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제국이 이번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공식 석상에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드문 황태자 오펜하임이 회의장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쥬웰은 의자에 앉아 있는 오펜하임을 보며 살짝 놀란 얼굴을 하였다.
‘언제 수도로 돌아온 거야. 지금 반란군 일 때문에 한창 바쁜 것 아니었어?’
오펜하임은 얼마 전 함락한 투란스 성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침식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황태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그만큼 심각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회의에 참석한다고 해서 별다른 발언권은 없겠지만.’
여섯 공작가는 황실의 힘을 철저히 빼앗았다.
따라서 황태자 오펜하임이 할 수 있는 건 무력하게 여섯 공작가가 결정한 걸 승인하는 것뿐.
무언가를 결정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펜하임이 이번 회의에 참석한 건 제국을, 정확히는 제국 백성들을 걱정하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여섯 공작가가 침식이란 국가 대재난 사태에도 자신들의 이득에 눈이 먼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든 제지해 보려고.
‘저런 면은 확실히 존경할 만하지.’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힘이 부족해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녀는 오펜하임이 품고 있는 이상과 영혼의 빛을 존경했다.
그런데 마침 오펜하임이 쥬웰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이구려.”
오랜만에 만난 쥬웰의 모습에 오펜하임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는데, 순간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쥬웰과 유스넨이 꼬옥 손을 붙잡고 있는 걸 본 것이다.
“…….”
오펜하임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껏 본 오펜하임의 표정 중 가장 무거운 얼굴이었다.
과거 아무리 많은 거절을 당했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작 손 하나 잡은 것일 뿐이지만.
이 맞잡음은 쥬웰과 유스넨이 마음을 나누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니까.
오펜하임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는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별일은 없었소?”
“네, 전하.”
쥬웰은 고개를 꾸벅했다.
오펜하임이 지금 무슨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지 짐작되었지만, 딱히 언급하지 않았다.
오펜하임이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한 번쯤 겪고 지나야 할 일이었다.
괜히 어설프게 미안해하거나, 위로하는 게 더 최악이리라.
‘한번 아프고 나면, 나를 향한 마음도 접겠지.’
그러나 그건 그녀의 오산일 뿐이었다.
오펜하임이 억지로 웃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
“……네?”
오펜하임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마 앞으로 흘러내린 흑발을 쓸어 올렸다.
미의 여신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고, 붉은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웃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사나이여서 말이오.”
“…….”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니 말이오. 나도 그대의 마음을 얻도록 노력해 보겠소. 물론, 불편하게 추근대겠다는 건 아니오. 그러니까…… 그대가 불편하지 않게 직진…… 아, 나도 내가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군.”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이 인간이. 미쳤나.’
침식을 해결하러 모인 자리인데, 거침없이 구애하고 있다.
회의장에 미리 모여 있던 여러 귀족이 흥미 가득한 눈으로 반짝반짝 오펜하임과 쥬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를 파악 못 하는 건 오펜하임만이 아니었다.
“전하께서 그러시는 것 자체가 제 약혼녀를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
“불편한 관심은 거두어주시지요. 불쾌하니.”
유스넨이었다.
착각일까?
쥬웰의 손을 잡은 유스넨의 손에 살짝 더 힘이 들어갔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서로 맞잡은 손을 슬쩍 앞으로 내민 것이다.
오펜하임에게 더 잘 보이도록.
‘……너 지금 뭐 하냐?’
쥬웰은 황당한 눈으로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스넨은 진지해 보였다.
진지한 건 오펜하임도 마찬가지였다.
오펜하임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말이 지나치군. 그녀가 그대의 여인이라도 된 말투야.”
“아니, 그건 아닙니다.”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자신의 여인.
글쎄.
유스넨은 그녀에게 ‘감히’ 그런 표현을 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도리어.
“제가 그녀의 것이 되었지요.”
“……!”
유스넨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게 그녀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목숨과 영혼까지.
이미 아득한 옛날. 그녀에게 구원받았을 때부터 그러했다. 그때부터 그의 모든 것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남자로서 불쾌하니 지나친 관심은 거두어주셨으면 합니다.”
오펜하임은 한 방 먹었다는 듯,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역시 오펜하임. 그도 만만치 않았다.
“아직 기회가 닫힌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도 그녀의 것이 되고 싶어서 말이야.”
“……전하.”
“바꿔서 물어보지. 그대가 내 입장이라면 포기하겠는가?”
이번엔 유스넨의 말문이 막혔다.
만약 그가 반대로 오펜하임의 입장이면?
그러면 그는 그녀를 포기할 건가?
‘……절대로.’
유스넨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바득 물고는 흠칫하였다.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걸 떠나 그녀에게 자신 말고 다른 남자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게 누구든 세상에서 지우고 싶을 것이다.
이런 자신의 생각이 집착남이나 할 법한 상상인 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스넨은 인정했다.
자신에게 집착남의 자질이 있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것은 자신만이어야 하니까.
그 자리는 오로지 자신만 독점해야 했다.
‘오늘 아예 싹을 밟아버려야겠군.’
유스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추하군요. 전하의 그런 마음. 제가 용납할 것 같습니까?”
“그대야말로. 너무 자신만만한 것도 좋지 않아. 나중에 나한테 그녀의 마음을 뺏기고 나서 울지도 모르니 말이야.”
점점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말도 유치해졌다.
결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
때아닌 치정 싸움에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였고, 쥬웰은.
‘……그만해. 부끄러움은 내 몫이라고.’
한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쌌다.
‘왜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 혼자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데.’
수습하려고 나서려는데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 분 다 적당히 하시지요. 이게 뭐 하는 짓들입니까?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칼날처럼 날카로운 음성.
추기경 리델하트였다.
그가 역시 얼음 칼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둘을 쏘아보았다.
“부끄럽군요. 침식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자리입니다. 치정 싸움은 적당히 해주십시오. 보고 있으니 화가 나려고 합니다.”
그 거침없는 지적에 사람들은 의외란 얼굴을 하였다.
‘리델하트 추기경은 왜 저리 날이 서셨지?’
‘그러게. 재밌는데. 왜 끼어드는 거야?’
물론 리델하트는 항상 날이 서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날이 선 정도가 평소보다 심했다.
이전에는 그저 무심하게 차가웠다면 지금은 불쾌감이 잔뜩 깃든 얼굴?
무심함이 아니라 불쾌함이었다.
눈치 빠른 이들은 그 차이를 인지했다.
‘왜 기분 나빠 하시는 거지?’
‘이게 기분 나빠 할 일은 아니지 않나?’
뭐,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치정 싸움이었지만, 아직 회의가 시작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가십거리로 재밌는 구경거리였다.
치정 싸움 구경은 언제나 짜릿한 법이니까.
침식 때문에 너무 긴장해 있기도 했고, 분위기도 풀 겸 모두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기계처럼 무심한 리델하트 경답지 않은 모습인데.’
평소의 리델하트라면 눈앞에서 치정 싸움을 하든 말든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게 더 어울렸다.
심지어 방금 리델하트의 발언은 점잖게 다툼을 말리는 게 아니라 시비를 거는 것에 더 가까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몇몇 사람은 리델하트가 대연회 때 쥬웰의 춤 상대를 자청했다는 걸 떠올리고는 상상을 하였다.
‘……혹시 정말로 리델하트 경께서 쥬웰 남작님의 네 번째 약혼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신 건 아니겠지?’
사람들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진실이야 어떻든, 뭐 상상은 자유니까.
‘그러면 리델하트 경까지 합세해 삼파전이 되는 건가?’
과연, 유스넨과 오펜하임 모두 리델하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둘 다 남자의 직감으로 느낀 것이다.
리델하트가 무언가 사심(?)이 있어서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것을.
“경도…… 설마?”
“그런 거 아닙니다. 절대로!”
리델하트가 버럭 대답했다.
아니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더더욱 흥미진진한 시선을 보냈고, 당황인지 아니면 말 못 할 다른 이유 때문인지 리델하트의 칼날 같은 얼굴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그렇게 상황이 점점 막장 단막극처럼 흥미진진하게 치닫는 순간.
즐거운 구경이 막을 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문이 열리며 마지막 주역인 플랑드나 성녀가 들어온 것이다.
옆에는 그녀의 부군이자 성전 기사단장인 죠제프가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플랑드나가 들어오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한 번에 정리되었다.
한편, 쥬웰은 뒤늦게 등장한 플랑드나를 보며 실소했다.
‘일부러 늦게 등장했군.’
성녀인 플랑드나는 이번 침식 사태의 주인공.
그러니 회의에도 일부러 가장 늦게 등장한 것이다.
심지어 황태자와 페리도트 대공이 먼저 와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왜?
플랑드나니까.
존경받는 성녀이자 성전의 이인자.
신과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이.
그런 그녀에게 감히 뭐라 할 수 있는 인물은 세속에 누구도 없었다.
그런 자신의 ‘권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플랑드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회의를 시작하지요.”
* * *
“법왕 예하께서는 최근 기도로 무리해 몸이 상해 이번 회의에는 참석이 어려워 제가 대신 회의를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쥬웰은 플랑드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기도라고? 그 인간이?’
쥬웰은 그 핑계가 새빨간 거짓말이란 걸 눈치챘다.
살롱에 가 술을 처마신 탓에 술독이 올랐으면 모를까, 기도 때문에 몸이 상할 인간은 아니었다.
다만 최근 웰링턴 공작이 에메랄드가의 중요 행사에 빠진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닌지, 고위 신관들은 모두 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흐음?’
문득 얼마 전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최근 자주 와서 심하게 과음하고 가세요.’
살롱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리델하트도 최근 웰링턴 공작이 에메랄드 공작가의 일에 소홀해졌다고 전하였다.
‘왜 그러는 거지?’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원수들이 빛나게 잘 지내길 바란다.
그래야 복수의 기쁨이 클 테니까.
특히 웰링턴 공작은 아직 어떤 손도 대지 않았는데 다른 이유로 망가지면 곤란했다.
‘정확한 상황을 알아봐야겠군.’
어쨌든 그렇게 웰링턴 공작이 빠져 회의는 성전의 이인자인 플랑드나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그러고 쥬웰은 회의의 진행 양상을 보며 피식하였다.
‘이래서 할아버지가 가넷 공작가에서 회의를 하자고 성질을 부렸던 거군.’
강아지도 자기 앞마당에선 몇 수 먹고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곳은 에메랄드 공작가.
그리고 침식은 에메랄드 공작가의 소관.
따라서 이번 회의에서 플랑드나가 보이는 위세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쥬웰을 무시하였다.
“쥬웰 성녀님께서는 가넷 공작가가 이끄는 제국군과 대기하고 있음이 어떨까요? 아무래도 침식이 진행된 내부는 위험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플랑드나의 제안에 쥬웰은 피식 웃음을 삼켰다.
‘노골적이군. 귀엽네.’
침식을 진압하는 건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다.
일단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과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마법사들이 하급, 중급 마물을 상대한다.
중하급 마물까지는 딱히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제거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급 마물부터는 이야기가 달랐다.
어둠을 제압하는 ‘성검(聖劍)’이 필요했다.
즉, 성전 기사단의 힘이 필요했다.
‘성전 기사단은 성검을 다루는 기사들의 집단이니까.’
그렇게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과 성전 기사단이 힘을 합쳐 마물을 상대해 길을 뚫으면, 그 틈을 타 페리도트가의 광휘의 대공이 침식을 주도한 고위 악마를 처단하는 것이다.
이후, 성력을 지닌 성녀가 침식에 오염된 땅을 정화하고.
참고로 이 과정에서 일반 제국군이 하는 역할은 없다.
게헨나의 마물은 일반 병사들이 상대하기 어려우니까.
침식이 일어난 지역 주변에 방어벽을 친 채 혹시나 뛰쳐나온 하급 마물이 주변으로 퍼지지 않게 막는 게 고작이었다.
즉, 쥬웰에게 일반 제국군이 있는 곳에 머물고 있으란 이야기는 침식을 해결하는 데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흐음.’
쥬웰은 플랑드나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참 닮았다.
이전 에스텔레의 얼굴과 말이다.
당연했다.
둘은 비록 배는 달랐을지언정 친자매였으니까.
다만 차이가 있었는데, 비슷한 외모임에도 플랑드나는 참으로 우아하고 청초했다.
시궁창 속에 서 있어도 홀로 고결하게 빛날 것만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이전 에스텔레가 비슷한 외모임에도 늘 기가 죽고 주눅 들어 있어 비루하게 보였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에스텔레의 성격이 주눅 들었던 건 전적으로 플랑드나 때문이었다.
에스텔레가 에멜라드 공작가에 들어갔던 건 다섯 살 남짓일 때.
그 어린 시절부터 플랑드나에게 끔찍이 괴롭힘당했으니까.
‘또 잘못했네? 하아, 천한 피는. 어쩔 수 없겠네. 오늘도 굶어야겠어. 알지? 이건 다 널 위한 벌이란 것.’
원수 중 그녀를 가장 크게 학대한 건 매리엇이 아닌 플랑드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친자매였으니까.
늘 같이 있었고, 그만큼 더 잦은 학대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방법도 다양했다.
플랑드나는 아주아주 영악한 아이였고, 또한 수완이 좋았다.
에메랄드 공작가의 모두가 플랑드나를 따랐고, 그 권력을 이용해 온갖 수로 괴롭혔다.
매리엇이 그 괴롭힘에 동참하게 된 것도, 라디트가 그녀를 경멸하게 된 것도 사실 플랑드나의 영향이 컸다.
플랑드나가 일부러 그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아니었다면 매리엇과 라디트는 에스텔레란 하찮은 벌레에게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았다.
심지어 플랑드나의 괴롭힘은 주변 이들을 움직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직접 손을 쓰는 것도 즐겼다.
‘훈육’이란 핑계로 당한 채찍질이 얼마인지 모른다.
플랑드나 때문에 어린 시절 남은 흉터가 커서도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에스텔레 시절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이는 다름 아닌 플랑드나였다.
‘아아, 다 추억이네.’
쥬웰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마침, 플랑드나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하실 말씀이 있나요, 쥬웰 성녀님?”
“전혀요.”
쥬웰은 웃었다.
“존경하는 플랑드나 성녀님의 말씀. 경청하고 있답니다.”
비꼬는 걸로 들린 걸까?
희미하게 플랑드나의 눈이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혹시라도 다른 의견이 있다면 말씀 주세요. 쥬웰 성녀님께서도 신의 사랑을 받는 분이니 말이에요.”
쥬웰 성녀님께서도.
은연중 본인이 더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며 쥬웰을 깔아뭉개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기분이 상하다기보다는 의외란 마음이 들었다.
‘흐음? 플랑드나 언니답지 않은 발언인데?’
원래 플랑드나는 본인의 속마음을 극도로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천사처럼 선한 척, 뒤로 다른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게 플랑드나의 장기였으니까.
그러니까 저런 식으로 눈에 띄는 적대 발언은 플랑드나답지 않았다.
‘아아. 많이 초조한가 보군. 하긴.’
쥬웰은 피식했다.
플랑드나가 저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간 쥬웰이 쌓은 명성 때문이었다.
원래 쥬웰이 성녀로 등장하기 전만 해도 제국 최고의 성녀는 플랑드나였다.
아이러니하게, 에스텔레의 자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플랑드나는 최고의 성녀가 될 자격이 차고도 넘쳤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어느덧 제국에서 제일 존경받는 성녀는 쥬웰이 되었다.
그러니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귀엽네.’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이번 인선에 이견이 있으신지요?”
플랑드나가 부드럽게 물었다.
하지만 쥬웰은 이렇게 답했다.
“성녀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전 뒤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다들 뜻밖이란 반응이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었는데 불만이 있을 리가.’
플랑드나가 제안한 것처럼 자신이 뒤에 있는 건 도리어 쥬웰이 바라던 바였다.
쥬웰은 자신 대신 플랑드나가 침식 해결의 선봉에 서길 바랐다.
왜?
당연히 복수를 위해서.
플랑드나는 지금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침식 정화 때 본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되네.’
두근 심장이 뛰어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뜻밖의 반대가 있었다.
“난 이 인선에 반대하오. 쥬웰 성녀는 제국 최고의 성력을 보유한 자. 그런 이를 뒤에만 놔두자는 거요?”
오펜하임이었다.
그가 삐딱한 음성으로 따졌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쥬웰 성녀야말로 이번 침식 해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생각하는데.”
오펜하임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가 있었다.
플랑드나를 비롯한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너무 대놓고 쥬웰을 배척하려는 게 화가 났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침식은 보통 침식이 아니었다.
하필 게이볼그 마경에서 일어났다.
게이볼그 마경.
대단히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에스텔레 성녀가 기적을 일으킨 곳이니까.
과거, 에스텔레 성녀가 고작 열네 살이었을 때 침식이 일어났고, 무려 1천 명의 기사가 사망했다.
제국 사람들 모두 침식 정화에 실패했다고 여겼다.
그때 분연히 일어선 게 에스텔레 성녀였다.
1천의 기사가 사망할 때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에스텔레 성녀는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마경으로 향했고, 홀로 마경을 정화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고작 열네 살의 나이로.
그때부터 에스텔레 성녀는 제국 최고의 성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따라서 똑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이번 침식을 해결하면 성녀로서 아주 커다란 명성을 얻을 게 분명했다.
에스텔레의 후인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그걸 아니, 플랑드나도 공을 독식하려고 드는 거였다.
“난 이번 인선에 찬성할 수 없군. 쥬웰 성녀를 선봉으로 추천하오.”
하지만 오펜하임이 그렇게 나옴에도 플랑드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손히 이렇게만 말하였다.
“전하의 고견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
오펜하임은 눈썹을 꿈틀하였다.
그렇게 하겠다, 아니면 따르지 못하겠다, 도 아니었다.
힘없는 황태자의 의견 따위 전혀 들을 가치가 없으니 아예 무시하겠다는 뜻이었다.
모욕감에 오펜하임의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이었다.
쥬웰이 나섰다.
“절 배려해 주신 전하의 의견 감사합니다.”
“…….”
“다만, 전 침식에 관해 잘 알지 못하니 경험이 많은 에메랄드 공작가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오펜하임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쥬웰이 무언가 의도를 숨기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 대단한 쥬웰이 에메랄드 공작가의 횡포를 저리 순순히 따를 리가 없으니까.
같은 사실을 깨달은 걸까?
플랑드나의 얼굴도 좋지 못했다.
플랑드나도 쥬웰이 무언가 흑심을 숨기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과연, 쥬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신 회의가 끝난 후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플랑드나 성녀님?”
“……이야기요?”
“네, 긴히 드릴 제안이 있어서요.”
플랑드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지금 쥬웰은 선봉 자리를 플랑드나에게 내주는 대신, 따로 뒷거래를 하자는 것이었다.
* * *
회의가 끝난 후, 잠시 시간이 남아 쥬웰은 에메랄드 공작가를 걸었다.
‘오랜만이네.’
여러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주로 플랑드나와 관련된 ‘추억’들이었다.
‘아버지, 웰링턴 공작도 잘한 건 없지만.’
웰링턴 공작도 그녀를 괴롭게 한 건 마찬가지였다.
플랑드나처럼 직접적으로 학대한 건 아니다.
학대도 관심이 있어야 저지르는 거니까.
웰링턴 공작은 에스텔레에게 어떤 관심도 없었다.
그저 신전의 ‘도구’로만 사용했다.
그녀가 어떤 꼴이 되든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집에서는 학대받고 성전에 나가서는 가장 험하고 위험한 일에 앞장서야 해야 했다.
그리고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 ‘대가’를 치렀다.
‘참 기구한 삶이었네.’
쥬웰은 스스로 든 생각에 피식하였다.
어찌하면 이리 기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로 자신의 삶을 쓰면 개연성 없는 삼류 소설이라고 욕먹을 만큼 기구함만 가득한 삶이었다.
‘이렇게 기구하기도 힘들 텐데.’
그렇게 상념에 잠겨 걸었다.
무려 20년 가까이 지내온 ‘집’이니 별생각 없이 걸은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은 다음일까?
그녀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아.’
쥬웰은 입을 우뚝 다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웬 창고 같은 방에 도착한 것이다.
바로, 이전 그녀가 쓰던 방이었다.
“…….”
쥬웰은 멍하니 이전 자신이 쓰던 방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쓰던 짐은 이미 사라져 없었다.
대신 웬 잡동사니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당연했다.
이곳은 원래 창고였으니까.
창고를 방으로 쓰라고 내어주었던 것이다.
당연히 창문 따위 없었고, 난방도 되지 않으니 겨울에는 완전히 냉방이었다.
‘나중에 성녀로서 명성을 얻은 다음에는 제대로 된 방으로 옮기긴 했지만.’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 얇은 이불 하나로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기다리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 쥬웰.”
고아한 음성.
플랑드나였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쥬웰에게 다가왔다.
회의장에서와는 다르게 친근하고 따뜻한 말투로.
“여기는 왜 왔니? 여긴 더러운 곳이라 너같이 고결한 아이가 올 만한 곳이 아니야.”
그 말에 쥬웰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한번 궁금해서 와봤어요.”
“궁금해서?”
“에스텔레, 그 바보 병신이 쓰던 방이 어떤 곳인가 해서요.”
“……!”
플랑드나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설마, 쥬웰이 에스텔레에 대해 말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던 것이다.
쥬웰은 짙게 미소 지은 채 창고를 둘러보았다.
일그러진, 어딘지 섬뜩해 보이는 미소였다.
“역시 주제 모르고 나대던 그 병신이 쓰던 방답게 비루한 곳이네요.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아, 이전처럼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그래.”
플랑드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에스텔레는 내가 사랑하던 동생이란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마음이 불편해.”
“그런가요?”
쥬웰은 소리 내어 비웃고 싶어졌다.
참고로 이 창고를 방으로 내준 건 플랑드나였다.
원래 웰링턴 공작은 그래도 멀쩡한 방을 주었는데, 플랑드나가 수작을 부린 것이다.
뭐, 상관없었다.
“헤헤, 기분 상했으면 죄송해요, 언니. 오랜만에 에스텔레 그 바보가 떠올라서.”
쥬웰은 사랑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플랑드나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지. 우리를 위해 그렇게 희생했는데 말이야.”
우리를 위해.
쥬웰은 그 말에 눈빛을 가라앉혔다.
맞는 말이다.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치고 플랑드나는 악마의 성력을 받았으니까.
“그래, 그런데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보자고 한 거니? 그냥 보자고 한 건 아닐 텐데.”
플랑드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누가 침식을 정화할지는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니, 그런 것 때문에 보자고 한 것 아니에요. 사실 전 침식을 해결해 성녀로서 공을 세우는 것은 전혀 관심 없어요.”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성녀 행세를 하는 건 가넷 공작가를 손에 넣기 위한 거라서. 솔직히 이만하면 명성은 충분하잖아요?”
“그러면? 지금 따로 보자고 한 건?”
“언니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요.”
플랑드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가깝지 않니? 난 널 가까운 동생으로 많이 아낀단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손을 잡자는 거예요. 정확히는 전략적 동맹이라고 하지요.”
“……!”
“제가 백부를 몰락시키는 데 언니가 도움을 주세요.”
플랑드나의 눈빛이 변했다.
흥미를 느낀 것이다.
하지만 짐짓 고아하게 말하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난 신관. 세속의 다툼에 관여하지 않아.”
“언니.”
쥬웰은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제 앞에서는 가식 안 떠셔도 돼요. 우린 서로 손을 잡고 그년을 같이 지옥에 떨어뜨린 각별한 사이잖아요.”
“……!”
순간적으로 플랑드나의 가면이 깨졌다.
온화함이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하여간. 못 말리겠구나.”
“헤헤. 전 가넷이라 원래도 성격이 못돼 언니처럼 착한 척하면서는 못 살겠어요.”
플랑드나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로튼 백작을 몰락시킨다고? 어떻게?”
“간단해요. 이번에 침식을 해결하기 위한 물품들을 가넷가를 통해서 조달해 주세요. 정확히는 로튼 백작 쪽으로요. 그렇게 해주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플랑드나는 쥬웰의 말을 알아들었다.
“로튼 백작에게 신성 모독죄를 덮어씌울 거구나.”
“빙고.”
“이런, 그건 로튼 백작이 너무 불쌍한걸.”
플랑드나는 빙긋 웃었다.
말과는 다르게 흥미가 동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내가 너를 아낀다고 해도 그런 일에 쉽게 동조할 수는 없단다. 알지?”
쥬웰은 플랑드나의 말을 알아들었다.
거절의 말이지만, 아니었다.
플랑드나는 방금 ‘쉽게’ 동조할 수 없다, 고 했다.
즉, 네가 내놓을 대가는 무엇이냐.
보통의 대가로는 협조하지 않겠다는 말뜻이었다.
원래 플랑드나의 화법이 이러했다.
“이번 침식 때 종사제가 되어 언니를 섬길게요. 그 정도 대가면 충분할까요?”
“……뭐?”
플랑드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쥬웰을 바라보았다.
섬긴다는 건 하급 신관이 상급 신관을 따라다니며 보조하는 것을 뜻한다.
“네가…… 그런 일을 하겠다고?”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언니의 밑 사람으로 언니를 따라다니며, 언니가 침식을 정화하는 걸 도울게요. 그러면 언니는 성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을 수 있겠죠. 괜찮은 제안 아닌가요?”
“……진심이니?”
플랑드나는 평소와 다르게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당연했다.
한창 이름 높은 쥬웰이 그녀를 섬기며 돕겠다니.
이 일이 널리 퍼지면 플랑드나는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쥬웰이 스스로 플랑드나보다 못함을 인정한 셈이니까.
플랑드나는 쥬웰을 뛰어넘어 제국 최고의 성녀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건 플랑드나의 가학적인 성향을 충족하는 일이기도 했다.
에스텔레를 괴롭힌 것으로 알 수 있듯 플랑드나는 가학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런 그녀를 최근 가장 자극하는 건 다름 아닌 쥬웰이었다.
하지만 감히 가넷을 건드릴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먼저 이런 일을 자청하다니?
“……정말 침식 때 날 섬기겠다는 거니?”
“네, 말했다시피 제가 성녀로 행세하는 건 가넷가를 얻기 위해서예요. 잠시 언니를 섬기고 로튼 백작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면 제게 이득이죠.”
플랑드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심정을 숨기며 부드럽게 쥬웰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머, 섬기다니. 가당치 않아. 그저 네가 옆에서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쥬웰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고마워요, 언니.”
“고맙긴. 오히려 내가 고맙지. 아, 로튼 백작 일은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하는 대로 처리해 줄 테니.”
플랑드나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쥬웰은 속으로 피식 입꼬리를 비틀었다.
플랑드나가 지금 안으로 품고 있는 생각이 훤히 보였다.
‘교묘하게 수를 써 날 모욕 줄 생각을 하고 있겠지.’
저 플랑드나가 이런 기회를 헛되이 날릴 리가 없었다.
분명 뒤로 술수를 쓸 작정이리라.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날 주인공이 되는 건 당신이니까.’
아마 플랑드나는 까마득하게 모를 것이다.
쥬웰이 어째서 침식 때 그런 일을 자처했는지.
지금 음모에 걸려든 이가 누구인지 말이다.
로튼 백작의 일은 그저 플랑드나의 눈을 가릴 위장일 뿐.
플랑드나는 축제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날 일어날 일이 기대되어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심장이 뛰었다.
* * *
용무가 끝난 후 에메랄드 공작저를 나오니 한 인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 강아지, 유스넨이었다.
“제가 가문으로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
쥬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복수를 기대하며 두근 뛰었던 가슴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착 가라앉았다.
“죄송해요. 그냥 혼자 돌아갈게요. 생각을 정리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까?”
“네.”
쥬웰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가넷가의 마차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유스넨이 쥬웰을 불렀다.
“저, 영애.”
“……?”
“헤어지기 전, 잠시만 손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쥬웰은 뭐라 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유스넨은 승낙으로 알아들었는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당기더니, 양손으로 마치 감싸듯 포갰다.
그리고 진중한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뭐 하는 건가요?”
“제 기운을 넣어드리고 있습니다.”
“네?”
“기분이 좋지 않으신 듯해서요. 제 기운 받고 힘내십시오.”
“…….”
쥬웰은 잠시 황당하다는 듯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유스넨은 멋쩍은 얼굴을 하였다.
“……별로 기운이 나지 않는 것 같군요.”
“…….”
“아직 기운이 모자란 것 같으니 더 오래 기운을 넣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아지실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손을 잡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그 겸연쩍으면서 뻔뻔한 말을 듣는 순간, 쥬웰은 웃음이 나왔다.
‘반칙이잖아. 저렇게 사랑스러우면.’
콩깍지가 씐 걸까?
유스넨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사랑스럽기만 한 게 아니었다.
잘생기고, 멋지고, 매혹적이고, 귀여우면서, 성격도 좋고…… 그가 다 좋았다.
쥬웰이 웃자, 유스넨도 마주 잔잔히 웃었다.
“다행이군요. 조금 기분이 좋아지신 것 같아서요.”
“네, 답례를 해드려야겠는데요?”
“답례요? 이런 걸로 무슨. 괜찮습니다.”
“아니, 전 꼭 답례를 드리고 싶어요.”
쥬웰은 유스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뚫어질 듯한 시선이었다.
그런데 방향이 이상했다.
눈을 보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밑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입술 쪽을.
창백한 피부와 대조적으로 유혹적이게 붉은 유스넨의 입술이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유스넨이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채고 눈을 크게 뜨는 순간이었다.
쥬웰의 입술이 재빠르게 유스넨의 입술을 훔쳤다.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말캉하고 촉촉했다. 달콤하며, 동시에 한없이 강렬한 느낌이 짜릿하게 서로에게 전달되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진 후, 쥬웰이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답례…… 예요.”
“…….”
유스넨은 얼어붙어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쥬웰은 고개를 돌렸다.
사실 얼굴이 화악 달아올라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 민망했다. 몸이 뜨거웠다.
“답례로 모자라지는 않죠? 가볼게요.”
“…….”
쥬웰은 마차에 올라 사라졌고, 유스넨은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모자란데.”
그는 멍하니 입술을 만졌다.
그녀가 남기고 간 흔적이 화인처럼 뜨거웠다.
그 감촉이 너무 뜨거워서일까?
유스넨은 생각했다.
모자라다고.
더욱 갈망이 들었다.
* * *
한편, 쥬웰도 마차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자란데. 너무 도망치듯 왔나?’
그녀는 입술을 만졌다.
흰 강아지의 감촉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조금 더 그 감촉을 깊게 새겼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아쉬움만 남은 입맞춤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해진 게 있었다.
‘흰 강아지는 내가 지킬 거야. 반드시.’
쥬웰은 생각했다.
‘그러려면 준비를 잘해야 해.’
지금 그녀는 유스넨을 봉인할 함정을 준비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를 조금도 안 다치게 고이 봉인하려면 미리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남작님, 가넷가로 가시는 게 아닌 겁니까?”
“그래, 수도 근교의 내가 이야기한 장소로 가주도록.”
“알겠습니다.”
마부와 기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리샤크는 지금 그녀의 옆에 없었다.
오늘뿐만 아니라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휴가를 떠났다고 했나?’
무슨 용무인지는 전해 듣지 못했다.
왜인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지만, 당장은 리샤크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혼자 가보겠네. 기다리고 있도록.”
“하지만…….”
“괜찮아. 기다리고 있어. 내 눈을 보도록.”
“아…….”
간단히 정신 조작을 걸었다.
마부와 호위 기사들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가 된 쥬웰은 걸음을 옮겼다.
수풀을 헤치니 빈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모 가문의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가문이 멸문하며 함께 버려진 저택이었다.
빈 저택 앞에 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신 휙 위로 뛰어올랐다.
파앗!
악마의 날개가 두 장 솟아올랐고, 그 날갯짓에 힘입어 저택 옥상까지 올라갔다.
저택 위에 오르니 막 황혼이 지는 수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쥬웰은 날개를 다시 안으로 집어넣은 후 저택 지붕에 선 채 잠시 그 황혼 녘을 바라보았다.
홀릴 듯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니 사위가 어둠에 잠겼다.
암흑과 고요가 그녀의 주위로 내려앉았다.
이윽고 쥬웰이 말하였다.
“나와.”
그 말과 함께 갑자기 어둠밖에 없던 허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놀라운 인물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백조처럼 고아한 아름다운 미녀.
플랑드나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플랑드나가 허공에서 나타나다니?
이유가 있었다.
‘이런 장난을.’
쥬웰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허공에 나타난 이는 플랑드나가 아니었다.
그저 플랑드나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상대’가 허공에 뜬 채 플랑드나의 얼굴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등 뒤로 길게 펼쳐진 시커먼 네 장의 날개가 섬뜩하게 펄럭였다.
[위대한 분들의 총애를 받는 퀸을 뵙습니다.]
‘상대’가 한 손을 가슴 쪽으로 올리며 과장되게 예를 올렸다.
[2품 악마, 욕망의 군주 메이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
지금 쥬웰 앞에 나타난 이는 바로 악마.
그것도 지옥을 다스리는 군주급 최고위 2품 악마였다.
쥬웰은 침식 때 유스넨을 봉인하기 위한 함정을 준비하려고 악마를 소환한 것이다.
2품 악마.
게헨나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이었다.
1품 대악마들은 ‘인격체’라기보다는 초월적인 관념의 존재에 가까워 직접적으로 게헨나를 통치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실질적으로 게헨나를 통치하는 군주들은 2품 악마들이었다.
그 드높은 2품 악마가 쥬웰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얼굴은 치우지. 역겨우니.”
상대 악마가 굳이 플랑드나의 얼굴로 나타난 이유는 간단했다.
쥬웰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원래 악마란 족속들은 늘 이런 식이니.’
쥬웰은 혀를 찼다.
상대 악마, 메이란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습니다. 일부러 당신을 생각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건데, 조금 더 당신 취향의 모습으로 바꾸죠.]
그러며 얼굴을 바꿨는데, 더 가관이었다.
룬의 얼굴로 바꾼 것이다.
“…….”
쥬웰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지자, 메이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게 아닌가? 그러면 이쪽이 더 취향인가요?]
이번엔 마리의 얼굴이었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쥬웰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고, 악마 메이란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예쁘게 봐주시라고요. 당신 마음에 들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니까.]
“내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고?”
-네, 당신은 퀸이잖아요. 하찮은 2품격 악마인 제가 바짝 엎드려 눈치를 봐야 하지 않겠어요?
쥬웰은 실소하였다.
‘시끄러운 놈이군.’
당연하지만, 악마마다 성격은 다 제각각이다.
눈앞의 악마는 ‘쾌활’하고 ‘장난기’가 넘치는 성격 같았다.
‘물론 이 장난기도 악마스러운 잔혹한 장난기겠지만.’
어쨌든 뭐 상관없었다.
지금 이 자리의 주도권은 그녀가 가지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내가 널 부른 용무는 알고 있겠지?”
[그럼요. 침식 때 당신의 명령을 하나 따르라는 거죠? 우리 사이에 생겼던 앙금은 그걸로 끝나는 거고요?]
“그래, 그러면 지난번 네 쪽에서 내게 저지른 잘못은 없던 일로 해주지.”
눈앞의 악마와 쥬웰은 악연이 하나 있었다.
정확히는 눈앞의 악마가 아니라, 밑의 수하 악마가 쥬웰에게 커다란 잘못을 하나 저질렀다.
메이란은 그때 일을 떠올리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찢어 죽일 빌어먹을 것은 왜 주제도 모르고 하필 당신에게 시비를 걸어서.]
일전, 마리와 리델하트를 건드렸던 3품 악마가 있다. 결국, 쥬웰에게 끔찍한 죽음을 맞았던 악마.
그 3품 악마의 주인이 바로 눈앞의 메이란이었던 것이다.
메이란은 수하의 잘못 탓에 덩달아 같이 연좌제로 엮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2품 악마인 메이란은 게헨나에서 쥬웰의 위상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66 대악마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왕.
쥬웰이 손가락질 한 번만 하면, 대악마들은 기꺼이 메이란을 수천, 수만 조각으로 찢어주리라.
아니, 거기서 끝나지 않고 억겁의 고통에 처하게 만들 것이다.
악마 메이란은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쥬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빌어먹을 년이 저지른 잘못은 제 뜻이 아니었어요. 전 몰랐던 일이니, 부디…….]
“닥쳐.”
[……네?]
“네가 그때 일을 몰랐다고? 정말로?”
쥬웰의 붉은 눈이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악마, 메이란은 입을 우뚝 다물었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쥬웰은 피식 웃었다.
‘몰랐을 리가 없지.’
2품 악마와 3품 악마의 관계는 지상에서 군주와 신하를 생각하면 된다.
다만 차이가 있는 것은, 철저히 상하 지배적인 복종 관계라는 것이다.
아래 악마는 절대로 위의 악마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즉, 그때 3품 악마가 마리와 리델하트에게 수작을 부렸던 건 지금 눈앞의 2품 악마 메이란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 요, 용서를…… 저는 그저 당신이 무료할까 봐 유희를 주고자.]
“유희?”
쥬웰은 다시 실소했다.
말도 안 되는 멍멍이 소리였다.
‘아니, 악마들에게는 그런 일이 유희이려나?’
악마는 인간들과 사고방식이 아예 다르다.
그들은 ‘악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다른 이들의 불행과 고통에서 본인의 행복을 느낀다.
그러니 유희란 말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을 수 있었다.
“어쨌든 좋아. 이번에 내가 시킨 일만 완벽히 해낸다면 그때 잘못은 잊어주지.”
[네, 뭐든 시켜만 주세요. 개가 되어 멍멍 짖으라고 해도 따를게요.]
“…….”
[지금 해볼까요? 멍멍.]
또 황당한 발언에 쥬웰은 상대 악마를 흘겨보았다.
참고로 지금 상대 악마는 ‘마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마리의 모습으로 멍멍거리며 개처럼 꼬리를 흔들기라도 할 것 같은 태도라니.
참, 적응 안 되는 악마였다.
“간단해. 침식 때 강림해 광휘의 대공을 상대하도록.”
[흐음? 광휘의 대공이면 당신의 노리개 아닌가요?]
“……노리개는 아니야.”
꼭 선택해도 본인 같은 단어를 선택한 악마였다.
악마, 메이란은 쿡쿡 웃었다.
[어쨌든 알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나라도 광휘의 대공을 죽이는 건 어려운데. 이번 대 광휘의 대공은 특히 강한 편이잖아요?]
“죽일 필요는 없어. 아니, 절대 그건 용납하지 않아.”
쥬웰이 서늘하게 말했다.
메이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그냥 힘만 소모하게 하도록.”
메이란은 눈을 반짝였다.
쥬웰의 의도를 눈치챈 것이다.
[제가 광휘의 대공의 힘을 소모하게 하면, 당신이 뒤에 나서서 제압하려는 거군요.]
“그래.”
쥬웰이 짠 계획은 간단했다.
1차로 2품 악마인 메이란이 유스넨과 맞서게 한다.
유스넨과 메이란은 서로 동격인 2품.
따라서 유스넨은 메이란과 싸우며 커다란 힘을 소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힘이 빠진 유스넨을 쥬웰이 나타나 제압해 봉인할 계획이다.
“단, 광휘의 대공과 맞설 때 주의할 게 있다.”
[어떤?]
“그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말도록.”
[……뭐라고요?]
메이란은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명령이야. 그에게 티끌만 한 상처라도 생기면, 생채기 하나마다 너의 날개를 하나씩 찢어버리겠어.”
메이란은 가슴을 쳤다.
[말도 안 돼요! 2품격의 광휘의 대공과 싸우면서 상처를 입히지 말라니!]
메이란은 표정을 바꾸고는 은근한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이건 어떤가요? 당신, 광휘의 대공을 가지고 싶은 것 아니에요? 그러니 제가 광휘의 대공의 팔, 다리를 모조리 잘라 버릴게요.]
“…….”
[팔다리 없이 오로지 당신에게만 의지하게. 당신의 품에 갇혀 당신만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애완동물로 만드는 거예요. 어때요?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지 않나요?]
악마다운 발언이었다.
문제는 진심이란 것이다.
메이란의 눈동자에 잔혹한 장난기가 일렁였다.
진짜로 유스넨의 팔다리를 자를 생각인 것이다.
결국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고할 필요를 느꼈다.
“얼굴 바꿔.”
[네?]
“플랑드나, 그년의 얼굴로 다시 바꾸라고.”
메이란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명령에 따랐다.
안개가 꿈틀하더니 메이란의 얼굴이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플랑드나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뀌자마자.
퍼억!
쥬웰의 주먹이 메이란의 얼굴을 강타했다.
[커억?!]
쥬웰의 경고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은빛 목걸이가 비틀거리는 메이란의 목을 휘감았다.
[커, 컥. 퀴, 퀸……?]
“닥쳐.”
쥬웰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쥬웰의 미간에 악마화가 피어올랐고, 은빛 사슬이 출렁이더니 메이란의 몸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아앙!
[크아아악!]
그냥 내리꽂은 게 아니었다.
어찌나 강하게 내리꽂았는지 저택 옥상의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메이란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쥬웰은 바닥에 처박힌 메이란 위에 올라타서는 어둠의 기운에 감싼 주먹을 그녀의 얼굴에 내리꽂았다.
[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쥬웰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광기가 번득이는 눈빛으로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끝 하나 건들지 말라고. 내가 하는 말이 지금 장난으로 들리나?”
비명이 계속 울렸다.
지금 쥬웰이 가하는 타격은 영혼을 직접 뒤흔드는 것이라 끔찍한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으, 으…… 죄, 죄송합니다. 제, 제발 자비를…….]
메이란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쥬웰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메이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생길 시, 넌 내게 죽어. 게헨나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널 소멸시킬 거야.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하게.”
메이란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쥬웰의 협박에 못 이겨서 메이란은 영혼을 걸고 맹세하였다.
유스넨에게 손끝 하나 상처 입히지 않겠다고 말이다.
이후, 메이란은 사라졌고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이렇게 하면 유스넨을 조금도 다치지 않게 봉인할 수 있을 거야.’
사실 쥬웰은 메이란의 도움 없이도 홀로 유스넨을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유스넨은 2품 중에서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는 게 불가능해 이런 일을 꾸민 것이다.
유스넨이 힘이 빠진 상태면 그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않고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바라는 건 유스넨의 행복이니까.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생각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히끗.”
“……?”
“끄윽.”
딸꾹질 소리였다.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니 못난이 해밀턴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쥬웰을 보고 있었다.
쥬웰이 악마를 제압하는 광경을 보고 기가 질린 것 같았다.
“으아아.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전 때리지 말아주세요, 쥬웰 님!”
“……안 때리거든. 그나저나 오라버니가 여긴 왜?”
“그…… 그 왜긴요! 여긴 내 집이니까! 남의 집에 난입해 난장을 피워놓고!”
“오라버니 집? 여기 빈 저택 아닌가?”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해밀턴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가넷가로 돌아가기 무서워 여기서 노숙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 제 소중한 보금자리를…… 크흑.”
“…….”
쥬웰은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폐저택치고는 아기자기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마 해밀턴이 보금자리로 삼고 이것저것 꾸며놓은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방금 쥬웰이 부린 난동으로 지금은 다 엉망이 되어 과거형이 되었지만.
“왜 공작저로 돌아오지 않고 이런 곳에…… 아니, 백부 때문에 돌아올 수가 없겠구나.”
해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는 여러 사고(?)를 치고 장기 가출 중이었다.
돌아가면 로튼 백작에게 매타작만 당할 테니 안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반만 맞는 짐작으로 해밀턴의 속마음은 따로 있었다.
‘저택 가면 당신이랑 같은 집에 있어야 하잖아. 이 악마야! 네가 제일 무섭거든?!’
해밀턴은 속으로 쥬웰을 욕했다.
쥬웰이 무서워 일부러 빈 저택을 찾아 홀로 아늑한 보금자리까지 꾸몄거늘, 이렇게 난입해 망가뜨리다니.
그의 주인은 진짜 나쁜 악마였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은 숨기고 해밀턴이 헤헤 웃었다.
그는 쥬웰이 무서웠으니까.
쥬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여기 망가진 건 너무 아쉬워하지 마.”
“네, 네. 괜찮습니다. 주인님이 부순 건데 다 괜찮고 말고요. 힘없는 제가 안 괜찮으면 어쩔 겁니까? 그러니 어서 돌아가기만 해주시면…….”
“어차피 오라버니는 여행을 다녀와야 하거든.”
“……네?”
해밀턴은 흠칫하였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신 건지?”
“여행. 여행 싫어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갑자기 여행이라니.
불길함이 마구마구 해밀턴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알다시피 쥬웰은 비슷한 명령을 몇 번 내린 적이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해밀턴은 변태 사이코패스 귀부인의 노리개가 되든지, 전쟁에 참전해 칼침을 맞든지 하는 지옥을 맛봐야 했다.
‘이 나쁜 악마! 이번엔 또 뭘 시키려고!’
해밀턴은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어차피 그에게 선택 사항은 없었다.
그저 이번엔 부디 정상적인 임무이길 바랄 수밖에.
“호, 혹시 뭘 시키려는 건지?”
“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번엔 정말 여행만 다녀오면 되는 거니까.”
“저, 정말이요?”
“그래, 약속.”
해밀턴의 안색이 환해졌다.
“저, 정말인 거죠?”
“그래, 속고만 살았나.”
그 천연덕스러운 답변에 해밀턴은 억울해 속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비굴하게 헤헤 웃었다.
“그러면 어디를 다녀와야 하는 건지?”
“흐음.”
쥬웰은 잠시 고민했다.
그녀가 갑자기 해밀턴에게 여행을 다녀오게 하는 이유는 다음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침식’ 뒤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준비하려는 것이다.
‘어차피 사기극이라 장소는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서 가볍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원하는 데로 가게 해줄게.”
“제, 제가 원하는 데로요?”
“응, 골라. 등산, 크루즈 유람, 온천, 하이킹. 어떤 여행을 제일 좋아해?”
“…….”
해밀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불안했다.
“저, 정확히 목적지가 어디인데요?”
“등산을 좋아하면 칼날 산맥의 기간트 봉, 온천을 좋아하면 심연 옥(獄), 하이킹을 좋아하면 골란 고원, 유람선 여행을 좋아하면 사해(死海)의 섬.”
“…….”
해밀턴은 잠시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쥬웰이 말한 장소는 지상에서 가장 험난한 지형에 자리한 곳들이었으니까.
아니, 고작 험난한 수준이 아니었다.
‘전문 탐험대가 가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아니, 십중팔구 죽음을 맞는 위험한 곳들이잖아!’
심지어 심연 옥은 용암 화산이었다.
지금 쥬웰은 온천을 좋아하면 용암 화산에 다녀오라고 한 것이다.
‘아무리 온천을 좋아해도 용암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고!’
속으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해밀턴은 끔찍한 죄를 저지른 죄인.
그에게 안식은 없었다.
처음 쥬웰에게 영혼을 바쳤을 때 들었던 경고처럼 그는 쥬웰의 노예로 영원히 고통받게 될 것이다.
‘크흑. 내 처지가 어쩌다가.’
해밀턴은 눈물을 그렁그렁했다. 울고 싶었다.
심지어 쥬웰은 그렇지 않아도 울고 싶은 처지의 해밀턴의 뺨을 때려주는 행동을 하였다.
“참, 만난 김에 수명 좀.”
“네?”
“수명 가져간다?”
해밀턴은 입을 뻐금뻐금하였다.
골목 양아치가 동전 한 푼 뜯어가는 것처럼 수명을 가져가겠다니?!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할아버지한테 드리려고 하는 거야. 10년 어치만 추가로 가져갈게.”
‘이전에 연장한 수명이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
쥬웰은 이전에 토른 공작의 수명을 연장했다.
6개월이었다.
전달 효율이 20 대 1로 나빠 10년의 수명을 뺏어봤자 6개월의 연장 효과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그 수명이 벌써 다 소모되고 있었다.
‘원래는 가넷 공작가를 손에 넣을 때까지만 살려두려고 했지만.’
최근 그녀는 고민이 되었다.
토른 공작을 어떻게 할지.
이제 곧 그녀가 가넷 공작이 되면, 사실 토른 공작은 오래 살려둘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난 네가 이겼으면 좋겠구나.’
토른 공작이 그녀에게 가족의 정을 느끼기 시작했듯, 쥬웰도 마찬가지였다.
토른 공작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차기 가넷이 되어도 일단은 더 수명을 연장할 생각이었다.
여기, 마침 오래 살려둘 필요 없는 못난 쓰레기도 있었으니까.
“엉엉, 이 악마! 악마!”
해밀턴은 수명을 뺏긴 후 서러움이 터진 듯 울음을 터뜨렸다.
“……효도한다고 생각하라고.”
“몰라요. 난 밖에 내놓은 불효자식인데, 무슨 효도야. 엉엉!”
너무 서럽게 우니, 왠지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해밀턴 오라버니한테 남은 수명은 별로 의미 없는데.’
그녀는 자신이 죽을 때 해밀턴의 목숨도 같이 거둘 생각이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만약 해밀턴이 지금까지의 죄악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완벽히 갱생한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전혀 아니었다.
해밀턴은 전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으니까. 쥬웰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도 그저 공포에 의한 굴복일 뿐이다.
그렇다고 ‘어차피 너 오래 살려둘 생각 없는데?’라고 이야기해 봤자 더 울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대신, 달래줄 다른 사람을 불렀다.
“부르셨나요, 로드?”
마리였다.
“이 밤에 저를 왜? 혹시?”
마리는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가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해밀턴을 보고는 쳇 하고 혀를 찼다.
“절 보고 싶어서 부른 건 아닌 것 같군요.”
“……내가 왜 그대를 보고 싶나.”
“전 로드 보고 싶었는데요?”
“…….”
마리는 빤히 쥬웰을 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 가슴은 언제든 로드의 외로움을 달래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요.”
‘……필요 없거든?’
쥬웰은 황당함에 헛기침하였다.
마리의 성격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다.
‘아니, 에스텔레 때도 이랬나? 생각해 보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 것 같기도.’
‘성녀님, 너무 귀여워서 잡아먹고 싶어요.’
“…….”
에스텔레 시절 마리가 했던 말이 얼핏 스쳐 지나가 쥬웰은 잠시 침묵했다.
‘이거 아무한테나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의문이 들어 쥬웰은 삐딱하게 마리를 바라봤다.
쥬웰의 마음을 눈치챈 건지, 마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제가 이러는 사람은 로드가 유일하니까.”
“…….”
“정말이에요. 아, 이전의 한 분은 제외.”
그렇게 말한 마리의 눈동자에 순간 아련함이 깃들었다.
“바보같이 착하고 사랑스러워서…… 제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분이지요.”
누구를 말하는 건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자 쥬웰도 마주 기분이 가라앉아 고개를 저었다.
“……됐고, 오라버니가 여행을 간다는데 좀 챙겨줘.”
“여행이요?”
“내, 내가 언제 간다고 했어요?!”
해밀턴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하지만 무시하고 마리에게 말하였다.
“온천이 제일 좋다고 했나? 온천 간다는데.”
“오, 온천 싫어요!”
“그래? 그러면 바다?”
“바다도 싫어! 사해의 섬 가는 배 거의 9할 이상 난파하잖아요! 그게 무슨 크루즈 유람이야! 아니, 죽고 싶은 미친놈들 말고는 가는 배 자체가 없잖아!”
“……까다롭네. 그러면 골란 고원으로 해. 하이킹은 괜찮지?”
“으아아! 거기는 최악의 마경(魔境)이라 엄청 위험한 마물 출몰지잖아요! 생환율 5%도 안 되는!”
5할이 아니라, 5%다.
마리가 냉큼 물었다.
“골란 고원으로 가는 마차를 준비하면 될까요?”
“안 간다고! 안 가!”
“그러면 준비할게요. 경은 이리로 오세요.”
마리는 해밀턴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이거 놔! 아악!”
해밀턴이 반항했지만, 마리는 무려 검제의 피가 사돈의 팔촌급으로 섞인 무술의 천재.
해밀턴 같은 약골 따위 가볍게 제압하고 끌고 갔다.
심지어 마리는 떠나며 쥬웰을 향해 가볍게 윙크까지 하였다.
‘……윙크는 안 해도 되거든?’
쥬웰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였다.
* * *
어쨌든 그렇게 쥬웰은 차곡차곡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였다.
토른 공작의 수명을 보충하였고.
로튼 백작에게 신성 모독죄를 덮어씌울 음모도 꾸몄다. 이건 휘란드를 이용했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없이 일을 진행하느라 피곤했다.
‘이제 내일이네. 출정이.’
왜일까?
그 생각이 떠오르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유스넨 때문이었다.
‘보고 싶네.’
그때 회의장에서 만난 이후로 보질 못했다.
출정 준비로 서로 바빴고, 무엇보다 쥬웰이 그를 피했다.
하지만 이제 그를 볼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미칠 듯한 그리움이 치솟았다.
‘볼까?’
순간 갈등이 들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오늘 정도는 욕심을 내도 되겠지.’
어쩌면 마지막 기회이니까.
쥬웰은 욕심을 부리기로 하였다.
본인을 위해.
그리고 유스넨을 위해.
“아가씨, 어디 가세요?”
룬이 놀란 얼굴을 했다.
“응, 나갔다 오려고.”
“시간이?”
이미 훌쩍 늦은 시간이다.
룬은 염려스럽다는 얼굴을 하다가 곧 눈을 반짝였다.
“약혼자님 만나러 가시는 거죠? 그 예쁜 대공님?! 제가 꾸며 드릴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순순히 끄덕였다.
오늘은 유스넨에게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차피 흰 강아지는 겉으로 보이는 거죽의 아름다움 따위 별로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해 만날 준비를 하고 싶었다.
룬은 후다닥 솜씨를 발휘했다.
늦은 밤이니 지나치게 화려한 치장은 삼가고 대신 쥬웰의 순백한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도록 꾸민 것이다.
그러며 고혹적인 느낌이 들게 하였다.
치장이 끝난 후, 룬은 멍하니 쥬웰을 바라보았다.
“너, 너무 예뻐요.”
“그래? 난 원래 예쁘지 않나?”
“그, 그렇긴 하지만! 오늘은 정말 반할 것 같아요!”
그 말대로였다.
누구라도 반하지 않고 버틸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오늘은 들어오지 마세요!”
룬은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쥬웰이 뜻밖의 답을 하였다.
“그래.”
“네?”
“오늘 안 들어올 거라고.”
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쥬웰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밖에서 자고 올 테니 기다리지 마.”
아마.
오늘이 유스넨과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밤일 것이다.
그러니 쥬웰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로 하였다.
오늘은 그의 밤을 독점하고 싶었다.
* * *
그때, 페리도트 대공가의 고성.
유스넨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메디안 백작이 하품하며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은 유스넨의 방에 찾아왔다.
“뭐 합니까? 안 주무십니까?”
“잠이 안 오는군요.”
“침식 일이 걱정되시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닙니다. 침식은 잘 해결되겠지요.”
담담한 답에 메디안 백작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뭔가 예지를 느끼신 겁니까? 침식이 잘 해결될 거라는?”
“예지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런데 크게 걱정은 안 되는군요.”
메디안 백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스넨은 무려 2품 천사의 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의 감은 가히 예언과도 같았다.
유스넨이 별일 없을 것이라 예감하면, 실제로 이번 침식은 별일 없이 무사히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우거지상이십니까? 혹시 쥬웰 남작님 때문에?”
메디안 백작이 샐쭉하게 물었다.
“최근 쥬웰 남작님이 안 만나주어서 삐진 겁니까?”
“……그런 것 아닙니다.”
“맞지 않습니까? 만남을 거절당할 때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으면서!”
메디안 백작이 신이 나서 유스넨을 놀렸다.
사실, 메디안 백작은 유스넨 쥬웰 커플에 유감이 많았다.
쥬웰이 어둠일까 봐?
그런 점도 있지만, 유스넨이 쥬웰에게 정신이 팔려 모든 일을 메디안 백작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즉, 그의 야근의 근본적인 원흉은 쥬웰이었다.
“그러니까, 연애 선배로서 조언하지 않았습니까? 전하 같은 스타일은 심심해서 별로 매력이 없다고. 어쩌면 쥬웰 남작님은 매력 덩어리인 황태자 전하에게 흔들리고 있을지도……!”
“백작.”
유스넨이 가만히 말했다.
“닥치십시오.”
“……넵.”
메디안 백작은 합죽이가 되었다.
흥분해 자신의 발언이 너무 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메디안 백작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메디안 백작은 투덜쟁이 주제에 소심한 성격이라 상관의 눈치를 많이 봤다.
“혹시…… 제 말에 기분 상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상하신 것 같은데요?”
“……아니라고요.”
“사실 대공 전하가 더 섹시합니다. 황태자 전하야 엄청 아름답고, 성격도 멋지고, 외적으로는 여성미를, 내적으로는 남성의 야수미를 동시에 지닌 매력 넘치는 남자긴 하지만…… 그래도 섹시함은 대공 전하께서 더…… 대공 전하는 섹시한데 심지어 조신하기도 하니…….”
“닥치라고요.”
“넵.”
아무래도 진짜 삐친 것 같아, 메디안 백작은 더더욱 합죽이가 되었다.
실제로 유스넨은 지금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다만, 메디안 백작이 걱정하는 대로 그에게 삐친 것은 아니었다.
‘왜 이리 꺼림칙한 느낌이 들지. 이번 침식.’
곧 있을 침식 정벌.
유스넨, 본인에게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정벌 자체도 무난히 성공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굉장히 중요한 감이었다.
그는 천사의 예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 본인의 신변에 큰 위협이 닥칠 경우 그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번 침식을 앞두고는 별다른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왠지 모를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해.’
유스넨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느끼는 불길함의 방향은 놀랍게도 본인이 아니라, 오히려 쥬웰을 향해 있었다.
이번 침식 때 오히려 쥬웰이 커다란 곤경을 겪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말이 안 되는데.’
이번 침식의 주모자는 바로 다름 아닌 쥬웰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위기에 처한단 말인가?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감이었다.
지난번 불길함을 느낀 후 라플 공작이 나타났듯, 그의 예지는 무척 정확한 편이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불길함이 그때보다도 더 심해. 그녀에게 정말 커다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유스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지난번 라플 공작의 위협을 예지할 때도 이렇듯 불길함이 크진 않았다.
이번에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불길함이 넘실거렸다.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 정말 커다란 일이 닥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를 정도의 불길한 느낌이었다.
‘안 돼.’
순간, 유스넨은 눈앞이 컴컴해졌다.
그녀가 죽는다?
상상한 것만으로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절망이 느껴졌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는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나으리라.
‘안 돼. 절대 그렇게 두지 않겠어. 내가 그녀를 지키겠어. 그녀가 손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유스넨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메디안 백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참, 체이서들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페리도트가 휘하의 정보 조직으로 유스넨의 명을 받고 에스텔레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었다.
“무엇입니까?”
유스넨이 바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언가…… 석연찮은 점이 있긴 하다더군요. 전하의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
에스텔레의 죽음이 순교가 아니라, 여섯 공작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감히.’
유스넨은 바득 이를 갈았다.
‘절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그의 감람빛 눈동자가 희번덕 살기로 넘실거렸다.
메디안 백작은 그런 유스넨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불안해. 괜찮을지.’
에스텔레를 향한 유스넨의 마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과연 유스넨은 어떻게 나설 것인가?
복수를?
하지만 그건 천계의 금기를 어기는 것이다.
유스넨은 무조건 타천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유스넨이 기꺼이 타천을 감수할 것 같다는 점이다.
메디안 백작은 결국 최대한 조심스럽게 만류의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복수는…… 에스텔레 성녀님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을 겁니다.”
“…….”
“에스텔레 성녀님은 원수라도 사랑했을 그런 분이니까요.”
그 말에 유스넨은 맥이 탁 풀렸다.
메디안 백작의 말이 옳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메디안 백작의 말은 틀렸다.
쥬웰은, 아마 에스텔레일 가능성이 확실할 그녀는 도리어 복수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껏 쥬웰이 보인 행보가 설명되지 않았다.
쥬웰은, 에스텔레는 오로지 복수만을 바라고 있다.
문제는 그 복수에 유스넨이 개입하는 걸 쥬웰이 바랄 거냐는 거였다.
‘아마, 바라지 않겠지.’
유스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아는 그녀라면 그럴 것이다.
그가 복수의 업을 같이 짊어지는 걸 바랄 리가 없었다.
곤란한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
그의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하면, 그는 곧바로 에덴의 징벌을 받게 된다.
타천해 게헨나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건 상관없지만. 그러면 그녀를 구원하려는 계획도 물거품이 돼.’
유스넨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복수를 넘어 그녀를 구원하는 것이다.
복수하게 되는 순간, 그녀를 구원하려는 바람 또한 이룰 수 없게 된다.
‘하, 무슨 이런 빌어먹을.’
유스넨은 이를 꽉 악물었다.
‘그녀의 구원도, 그녀의 복수도 함께 이룰 방법을 찾아야 해.’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메디안 백작이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리고 보고드릴 내용이 더 있습니다.”
“뭡니까?”
“체이서들이 에스텔레 성녀의 죽음을 추적하다가 알아낸 바인데…… 믿을 수 없는 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메디안 백작은 조심스럽게 서류를 내밀었다.
어떤 장면을 마법 영상으로 찍은 걸 인화한 서류였다.
그리고 그 영상을 본 유스넨은.
“……!”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게 진실입니까?”
“……그렇습니다.”
“하, 정말…… 정말이라고요?”
메디안 백작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실입니다. 에스텔레 성녀가 이 근처에서 죽음을 맞은 게 확실해 보입니다.”
“하…… 하.”
유스넨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끝없이 흔들렸다.
“이 사실을 아는 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다고요? 분명 소문이 퍼졌을 텐데?”
“정리되었습니다.”
유스넨은 흠칫하였다.
정리.
누군가의 손에 죽었다는 뜻이었다.
“누가?”
“에메랄드 공작가입니다.”
“……!”
“법왕, 웰링턴 공작이 직접 지시했다고 합니다.”
유스넨은 이를 바득 갈았다.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주변을 정리한 이후 근처는 텅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폐쇄하십시오.”
“네?”
“페리도트 가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그 근방을 폐쇄하십시오. 아니, 그 일대를 모조리 사들이십시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이번 침식이 해결된 후 곧바로 제가 직접 가보겠습니다.”
메디안 백작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레에 관련해서는 사리 판단을 잃는 유스넨이었다.
그러니 이번 일도 만류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누나.’
유스넨이 눈을 질끈 감으며 가슴의 요동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시종이 들어왔다.
“전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 시간에? 그것도 출정 전날인데?”
메디안 백작이 유스넨 대신 꼬장꼬장하게 말했다.
“돌아가라고 하도록.”
“그게…… 쥬웰 남작님이신데요?”
“……!”
가만히 있던 유스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보겠습니다.”
“아, 아니? 전하?”
유스넨은 메디안 백작의 말 따위 신경 쓰지도 않고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를 봐야 이 미칠 듯한 가슴이 조금은 진정될 것 같았다.
‘누나. 에스텔레.’
이를 꽉 물었다.
그녀를 보고 싶은 초조함에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 천년만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오랜만이네요.”
자신을 향해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쥬웰을 보는 순간.
유스넨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겼다.
그리고 그는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행동을 하였다.
와락.
쥬웰을 품에 껴안은 것이다.
“대, 대공 전하?”
쥬웰은 당황해 그를 불렀다.
하지만 유스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욱더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강하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마치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가 눈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유, 유스넨.”
‘왜 이러지?’
한편, 쥬웰은 유스넨이 왜 이러는지 몰라 당황했다.
하지만 자신을 구속하듯 단단히 감싸는 그의 느낌이 싫지 않아…… 아니, 좋아 마주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제가 많이 보고 싶었나 봐요.”
“……네.”
유스넨은 잠시 침묵 후 답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미치도록.”
아니다.
고작, 보고 싶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왜인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유스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전해오는 그녀의 느낌에 미치도록 아릿한 마음이 들어 팔에 더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렇게 온몸으로 그녀를 느끼며 유스넨은 다짐했다.
‘놓지 않을 거야.’
둘은 잠시 그렇게 있었다.
쥬웰은 유스넨이 이러는 이유를 정확히 짐작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의 느낌이 좋아 가슴에 기대 눈을 감았다.
‘오늘은 욕심내도 되겠지.’
그녀는 오늘 잔뜩 욕심을 부리기로 하였다.
“오늘 피곤하세요?”
“아니,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저 당신과 심야 데이트 하고 싶었는데. 괜찮을까요?”
유스넨이 살짝 놀란 눈을 하였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설사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당신과의 데이트는 할 겁니다.”
쥬웰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유스넨도 마주 웃음을 지었다.
사실, 지금도 그녀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미칠 듯이 아팠지만, 유스넨은 참았다.
“어떻게 모시면 되겠습니다, 마이 레이디?”
“흐음. 저 사실 하고 싶은 것 있는데.”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 하늘의 별에 가고 싶다고 해도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쥬웰은 그 말에 다시 쿡쿡 웃음을 흘렸다.
유스넨의 말을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그의 말이 딱히 재밌다기보다는 그와 함께 있으니 그냥 즐거운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런 것 말고 다른 하고 싶은 것 있어요.”
“무엇입니까?”
쥬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유스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둘은 여전히 꼬옥 껴안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고개를 빼꼼히 드니 서로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
그녀의 숨결이 입술을 스치는 순간, 유스넨의 얼굴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이전 쥬웰과의 입맞춤이 떠오른 것이다.
하필 그녀가 머뭇거리며 침묵이 흘렀고, 더욱 긴장감이 들었다.
쿵쿵. 가볍게 발돋움한 그의 심장은 자신이 뛴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미칠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고장 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득한 마음이 들며, 유스넨은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들었다.
‘이번엔 내가 입 맞추고 싶어.’
해도 될까? 허락 맡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감히?
그때 쥬웰이 입술을 우물쭈물 움직였다.
“음, 그러니까 제가 바라는 건요.”
그녀가 말을 꺼내자 입맞춤 타이밍을 놓친 유스넨은 자신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쉽다니. 무슨, 그런 삿된 생각을!’
“……어떤 걸 바라십니까?”
“음.”
쥬웰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라 유스넨이 의아한 얼굴을 하던 차. 입을 열었다.
“술이요.”
“……네?”
쥬웰의 붉은 보석안이 유스넨을 똑바로 담았다.
“당신과 단둘이 술을 마시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쿵.
유스넨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 늦은 밤에 단둘이 술.
아까 한 번 나쁜 생각이 들어서일까?
또, 머릿속에서 나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반성했다.
감히 그녀에게 이런 나쁜 생각을 하다니.
‘유스넨, 네가 미쳤구나. 그녀는 그저 술이 마시고 싶은 것뿐일 텐데.’
하지만 한번 떠오른 나쁜 생각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생각을 떨치기 위해서 강하게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성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가넷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오래된 좋은 술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쥬웰이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니, 성안에서는 싫어요.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서 밖에서 마셨으면 해요.”
“아…….”
확실히 페리도트가의 고성은 오래되고 칙칙한 장소라 술을 마시는 기분이 안 날 수 있었다.
이왕이면 멋들어진 곳에서 술을 마시고자 하는 마음이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시간이 늦어 술을 마실 만한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밤늦게까지 하는 주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곳은 정말 대중적인 술집들이라 지금 그들이 방문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괜찮아요. 예약해 놓은 곳이 있으니.”
“그렇군요. 어디입니까?”
“프리망스요.”
“……네?”
유스넨은 순간 얼빠진 반문을 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프…… 뭐라고요?”
“프리망스요.”
유스넨은 딱딱히 굳었다.
그가 이러는 이유가 있었다.
프리망스는 호텔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연인들이 주로 방문하는…… 그러니까 사랑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최고급 부티크 호텔.
“혹시 싫은가요?”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쿵. 쿵.
유스넨의 얼굴이 화악 붉어지며 심장이 미칠 듯 뛰었다.
다시 나쁜 생각이 떠오르며 그를 괴롭혔다.
쥬웰은 그런 유스넨의 얼굴을 빤히 보며 생각했다.
‘너무 사랑스럽잖아.’
붉어진 흰 강아지의 얼굴이라니!
항거 불능, 반칙적인 사랑스러움이었다.
쥬웰은 충동을 참지 못하고 발꿈치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까웠던 둘의 얼굴이 좁혀졌고, 멍하니 방심하고 있던 유스넨의 입술과 그녀의 입술이 와 닿았다.
“……!”
유스넨은 속수무책으로 도둑 뽀뽀를 당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쥬웰은 쿡쿡 웃고는 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러면 따라와요.”
“……네, 네.”
유스넨은 뻣뻣이 굳어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터질까 걱정이 들었다.
* * *
그때, 수도에서 멀찍이 떨어진 제국 서부 지역.
아슬란 마경(魔境)에서였다.
한 소녀가 수풀을 걷고 있었다.
이제 십 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곱슬거리는 분홍빛 머리.
하늘빛의 싱그러운 눈동자.
마물이 출몰하는 끔찍한 마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녀였다.
어울리지 않는 건 외모만이 아니었다.
복장 또한 그러했다.
마치 수도 사교계의 귀족 영애나 할 법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비교적 움직임이 편한 스타일이라고는 해도 마경 안에서 드레스라니.
눈을 의심할 만한 차림이었다.
더구나 아슬란 마경이 어떤 곳인가?
마물이 출몰하는 마경도 단계가 있다.
단순히 마물의 서식지인 일반 마경과 다르게, 아슬란 마경은 바로 악마가 직접 강림하는 곳이었다.
50년 전 침식 정화에 실패한 후 그대로 게헨나의 일부가 된 곳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게헨나.
그곳이 바로 여기 아슬란 마경이었다.
따라서 이곳의 하늘은 게헨나의 하늘처럼 회색빛이었다. 낮이나 밤이나.
초대 황제가 거대한 어둠을 봉인했다는 골란 고원과 더불어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그런 끔찍한 곳을 거닐고 있는데도 소녀의 얼굴은 그저 태연했다. 마치 뒤뜰에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분위기였다.
모르는 이가 보면 미쳤다고 할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아슬란 마경의 누구도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샤피렌.
그게 소녀의 이름이었으니까.
천하제일검 검제(劍帝).
검 한 자루로 초월자의 경지에 오른 이가 바로 이 소녀였다.
어려 보이는 외모는 경지를 초월하며 육체적 시간이 역행한 탓일 뿐, 실제 나이는 쉰을 훌쩍 넘은 상태였다.
소녀, 아니, 샤피렌은 잠시 자신의 목걸이에 매달린 펜던트를 열어보았다.
펜던트 안에는 푸른 사파이어빛 보석안을 가진 소년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무슨 관계일까?
소년을 보는 샤피렌의 눈동자에 그리움과 아릿함이 깃들었다.
그때, 다급한 발걸음이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각하를 뵙습니다!”
남자, 사파이어 가문의 최정예 백염 기사단의 부단장이 샤피렌 앞에 부복하였다.
백염 기사단은 샤피렌과 더불어 아슬란 마경의 마물을 상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샤피렌은 급히 펜던트를 닫았다. 마치 자신이 소년을 봤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것처럼.
“무슨 일인가?”
“3품 악마가 출현하여 보고드리고자 왔습니다!”
어마어마한 고위 악마였다.
다른 곳에서라면 구경도 할 수 없는 그런 악마가 출현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이 지상의 게헨나기에.
침식 정복에 실패한 대가로 이곳 아슬란 마경은 영원히 게헨나의 일부가 되었고, 게헨나의 마물과 악마가 거침없이 침범하는 통로가 되었다.
그래서 제국은 이곳 아슬란 마경에 방어벽을 유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재원을 쏟아붓고 있었다.
이번 쥬웰이 일으킨 침식 사태 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침식 정화에 실패 시 파장이 이토록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침식이 실패한 곳 주변은 광범위하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3품이면, 내가 나서야겠군. 가지.”
“……죄송합니다. 쉬고 계신데.”
백염 기사단의 부단장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나마 이곳 아슬란 마경에서 별다른 큰 피해가 나지 않고 있는 건 전적으로 눈앞의 여인 덕분이었다.
검제 샤피렌은 무려 20년이나 이 아슬란 마경을 지켜왔다.
“그대가 죄송할 것 있나. 난 어차피 사파이어 가문의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이거늘.”
샤피렌은 씁쓸히 말하였다.
“……각하.”
“됐네. 내가 선택한 일이니. 후회하지 않아.”
백염 기사단의 부단장은 뭐라 더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최근 고위 악마의 출현이 잦군. 이상해. 혹시 이번에 게이볼그 마경에서 일어난 침식과 연관이 있는 건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뭐, 잡아보면 알겠지.”
얼마 전에도 샤피렌은 고위 악마 한 명을 잡아 고문해 게이볼그 마경 침식에 관한 정보를 얻어냈다.
이번에도 잘하면 추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 몰랐다.
샤피렌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나뭇가지 하나가 그녀에게 날아왔다.
어차피 이제 날붙이의 날카로움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도 없었다.
그녀의 손에 들리면 한낱 나뭇가지도 세상 최고의 명검을 능가하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게 검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그대로 세상에 발현하는 그녀의 ‘권능’이니까.
나뭇가지를 든 그녀는 발을 굴렀다.
통. 통.
왈츠를 추듯 가볍게 뛰어오른 그녀의 몸은 곧 어마어마한 속도를 내며 악마가 출현한 장소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 * *
쿵. 쿵.
유스넨의 심장이 계속해서 뛰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호텔 방이었으니까!
그녀와 함께.
‘……내가 이런 곳에 오다니.’
상상도 못 해봤다.
하필, 이 호텔은 연인들이 주로 방문하는 곳이었다.
덕분에 부티크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술은 제가 저택에서 가져왔는데. 혹시 좋아하는 주종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마치 기계처럼 딱딱히 대답하는 유스넨을 보며 쥬웰은 묘한 얼굴을 하였다.
‘지금 긴장한 것 맞지?’
그런 것 같다.
얼굴이 창백하니 딱딱했으니까.
‘역시 흰 강아지한테 이런 곳은 무리였나?’
쥬웰은 가벼운 입맞춤에도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유스넨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순수한(?) 유스넨에게 이런 장소는 무리일지도.
‘하지만 오늘은 욕심내고 싶었는걸.’
그러니까.
오늘 밤은 오로지 그를 독점하고 싶었다.
단둘이어서.
그래서 일부러 이런 호텔을 잡은 건데.
‘음, 잘못했나.’
살짝 후회가 들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혹시 불편하면 그냥 돌아갈까요?”
괜히 미안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덥석.
유스넨이 다급히 쥬웰의 손을 잡았다.
빨개진 얼굴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네? 하지만 불편해 보이는데…….”
“안 불편합니다.”
“괜히 무리하지 않으셔도…….”
“무리 아닙니다.”
유스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울렁이는 게 선명히 보였다.
“계속 있고 싶습니다.”
“……계속 있고 싶다고요?”
“……네.”
“…….”
“…….”
유스넨이 붉어진 얼굴로 쥬웰을 보는데, 왜일까?
쥬웰도 괜히 마주한 얼굴이 핫핫 달아올랐다.
그녀도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수, 술이나 마시죠.”
“네, 네.”
쪼르르.
쥬웰은 미리 준비해 온 술을 잔에 따랐다.
“무슨 술입니까?”
“모르겠어요. 할아버지의 컬렉션에서 하나 그냥 훔쳐서 가지고 나왔어요.”
토른 공작의 주류 컬렉션은 가히 제국 최고라고 할 만했으니 무조건 좋은 술일 것이다.
“훔쳐도 되는 겁니까?”
“뭐, 할아버지야 이런 술 마셔봤자 건강에만 안 좋을 테니 오히려 효도하는 거죠.”
유스넨은 그녀의 말이 재밌다는 듯 쿡쿡 웃음을 흘렸다.
쥬웰도 같이 웃었다.
그렇게 서로 웃으니 살짝 긴장이 풀렸다.
“아, 안주도 챙겨 왔어요.”
“안주를 말입니까?”
유스넨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호텔에서 시키면 되지, 뭘 굳이 챙겨 왔단 말인가?
더구나 쥬웰이 꺼낸 안주의 내용물을 보니 더욱 의문은 커졌다.
이상했다.
그러니까, 무언가 굉장히 어설펐다.
‘가넷가의 주방장 솜씨는 제국 최고일 텐데? 가져오다가 망가진 건가?’
“제가 만든 거예요.”
“……!”
유스넨의 눈이 커졌다.
쥬웰이 살짝 겸연쩍은 듯 말했다.
“그냥 한번 생각나서 오기 전에 간단히 만들어봤어요. 아마 맛없을 테니, 맛만 보세요.”
“…….”
유스넨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눈앞의 안주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만든…….’
역시 어쩐지 세상에서 가장 진귀해 보인다고 했다.
유스넨은 그녀가 자신을 위해 이런 걸 준비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음식을 마주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안주를 집었다.
가슴이 울렁거려 정확히 어떤 맛인지는 판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고일 것이다.
그녀가 해준 것이니까.
“이런 건…… 앞으로 하지 마십시오.”
“네? 그렇게 이상해요?”
“아니. 최고입니다. 제가 먹어본 요리 중 가장 진미입니다. 낙원의 진미조차 이 요리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과한 칭찬에 쥬웰은 피시시 바람 빠진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요?”
“그야…… 이런 건 제가 당신에게 해드려야 하는 일이니까요.”
“……!”
“안주든, 어떤 요리든. 이런 건 다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저 편하게 제 옆에만 있으십시오.”
유스넨은 굳건한 음성으로 말했다.
쥬웰은 문득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왜 누나가 요리해요. 오히려 누나한테 맛있는 요리를 해줄 남자를 만나야죠.’
어릴 적, 유스넨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다.
꼬마 흰 강아지 유스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말을 하였다.
‘목숨…… 아니, 영혼을 바칠 정도로 누나를 사랑해야 하고, 최고로 잘나고, 절대 울리지 않고, 누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해요. 그리고…… 누나가 방금 말한 이상형 조건도 모두 만족시켜야 해요.’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혹시…… 제가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돼요?’
거기까지 떠올린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는 귀엽게만 생각했는데.’
“우리, 술 마시죠. 저 술 먹고 싶어요.”
“……네.”
그렇게 쥬웰과 유스넨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둘 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기에 잠시 별다른 대화 없이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몇 잔이나 마신 후일까?
쥬웰은 예상 못 한 몇 가지 문제점을 깨달았다.
첫째.
‘이 술 왜 이리 독해?’
쥬웰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술병을 바라보았다.
영롱한 빛깔.
맛도 독한 느낌 없이 달콤하기만 했는데, 취기가 장난 없이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이 몸 술 약하잖아.’
두 번째 깨달은 문제점.
생각해 보니, 이 몸은 술에 아주 약했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핑그르르 시야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깨달은 문제점.
“괜찮으십니까?”
쥬웰은 눈을 끔뻑끔뻑하였다.
염려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유스넨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이렇게 잘생겨 보이는 거야?’
술에 취하니 유스넨이 더욱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순은을 뽑은 듯한 머리칼.
기다란 속눈썹.
창백한 피부.
동시에 붉디붉은 입술.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까지.
그의 모든 게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요염했다.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은…… 괜찮습니까?”
유스넨이 걱정을 가득 담아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맑은 체향이 확 느껴지며,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이 뛰던 그녀의 가슴을 자극했다.
“저리…….”
“네?”
“저리…… 가라고요…….”
쥬웰은 떠듬떠듬 말했다.
술 몇 잔에 단단히 취한 건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제길, 안 되겠다.’
자신이 일어서서 멀찍이 멀어지려고 했는데, 취한 탓에 발이 꼬였다.
“조심!”
유스넨이 급히 그녀의 팔을 붙들었고, 덕분에.
털썩.
쥬웰은 완전히 그의 몸에 기대 쓰러지게 되었다.
유스넨의 품 위로 쓰러진 쥬웰은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무슨 삼류 소설 같은 상황?’
아니, 삼류 소설도 이런 장면은 쓰지 않을 것이다. 유치하고 작위적이라 욕먹을 테니.
하지만 어쨌든 상황은 벌어졌고, 다급히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
“잠시만.”
희미하게 떨리는 유스넨의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파고들었다.
“잠시만,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쥬웰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한 건 유스넨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떨리는 게 보였다.
쿵쿵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쥬웰은 고개를 들었다.
유스넨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마침, 유스넨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얽혔고, 잠시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공기가 떨리는 듯했다.
유스넨이 한쪽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제가 입을 맞추어도 되겠습니까?”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은 물음.
쥬웰은 멍하니 대답했다.
“그런 것…… 물어보지 말라고요.”
“……!”
그 허락과 함께.
유스넨의 눈동자에 일순 번뜩이는 갈망이 일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녀를 향한 갈망이었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천천히.
유스넨의 입술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감히 자신이 하려는 행동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똑바로 그녀의 입술로 다가왔다.
‘아.’
닿을락 말락 한 애달픈 느낌에 쥬웰은 탄성을 흘렸고 그 순간 둘의 입술이 겹쳐졌다.
이전 몇 번 느꼈던 부드러우며, 말캉한, 저릿한 느낌이 서로의 입술에 닿았다.
하지만 이전과 달랐다.
서로의 입술이 닿는 순간, 유스넨이 그녀의 허리를 훅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이번엔 도망가지 말라는 듯.
“……!”
쥬웰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 순간.
데일 듯 뜨거운 느낌이 그녀의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쥬웰은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깊은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당황은 잠시. 자신의 안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의 느낌에 온 정신을 쏟았다.
아니, 쏟을 필요도 없었다.
마치 녹는 듯 타오르는 듯 그의 느낌에 휘말렸다.
유스넨은 언제 망설였냐는 듯 강렬하게 그녀의 안을 헤집었다.
참고 참았던 갈망이 터지며 살짝 이성의 끈을 놓은 것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쥬웰도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의 안으로 들어온 그의 뜨거움을 마주 감쌌다.
서로 미칠 듯한 탐닉이 이어졌다.
‘좋아.’
쥬웰은 더욱더 강하게 그를 탐닉했다.
그를 탐닉할수록 아팠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그녀가 그의 입술 안으로 파고들었다.
유스넨이 당황해 숨을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자, 잠깐. 그, 그만.”
그의 하얀 얼굴은 마치 사과처럼 빨개져 있었다.
쥬웰은 여전히 그의 입술과 맞닿은 상태로 물었다.
“……싫은가요?”
“아니, 아닙니다. 하지만…….”
유스넨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더…… 나아갔다가는 제가 참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하지만 쥬웰은 도리어 빤히 말했다.
“……참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
유스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쥬웰은 유스넨을 뒤로 밀었다.
마침 그녀는 침대 앞에 앉아 있던 상태라 유스넨은 그대로 침대에 걸치듯 눕게 되었다.
쥬웰이 유스넨 위로 기대며 입술을 다시 맞추었다.
‘원래 이러려고 했으니까.’
그녀가 왜 호텔을 예약했겠는가?
단둘이 술?
설마. 당연히 핑계였다.
오늘 그녀는 그를 안고 싶었다.
가슴의 통증을 억지로 외면하며 손을 움직였다.
유스넨이 입은 셔츠의 단추를 풀어나가는데.
갑자기 유스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만. 이제 그만하십시오.”
“……?”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착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아까 사랑스럽게 달아올랐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딱딱이 얼굴이 굳어 있었다.
“혹시…… 싫으신가요?”
“그게 아니라.”
유스넨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괴로운 한숨이었다.
“……지금 울고 계시지 않습니까?”
“……!”
쥬웰은 흠칫하였다.
“그럴 리가.”
고개를 젓는데,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눈물 흘리고 있음을.
뚝, 뚝.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 아니, 이게 왜?”
당황해 다급히 손으로 닦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더 걷잡을 수 없이 심해져만 갔다.
유스넨이 아픈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로 오십시오.”
그의 손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마치 위로하듯.
따뜻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아무 말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이대로 있으십시오.”
“……!”
그 말에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 순간 바라는 건 그를 안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간절히 바라는 건 다른 것이었다.
‘그를 봉인하고 싶지 않아.’
유스넨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영원히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니, 더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끄윽. 끅. 흐윽.”
쥬웰은 유스넨의 품에 매달린 채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쥬웰을 바라보는 유스넨의 눈동자에 깊은 아픔이 깃들었다.
‘누나.’
그녀의 울음을 보니 가슴이 미칠 듯 아파져 왔다.
그녀가 아파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심장이 갈기갈기 뜯어지는 것 같았다.
더욱 비참한 건, 그녀의 아픔에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스넨은 이를 악물고는 손을 들어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제발 괜찮아지라는 듯.
간절히 바라니.
이 순간, 유스넨은 자신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는 쥬웰을 보며 다시금 굳게 다짐했다.
반드시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한 웃음을 짓는 걸 보고 말겠다고.
마침 달빛이 내려앉았다.
마치 가련한 둘을 감싸는 듯한 달빛이었다.
* * *
드디어 침식을 정복할 토벌군이 출정하였다.
토벌군의 정확한 명칭은 ‘정화군’이었다.
침식을 해결하려면 오염된 땅을 정화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화를 해낼 성녀의 존재는 광휘의 대공과 더불어 토벌군에서 가장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침식을 해결하러 떠나는 토벌군에서 가장 환호받는 건 광휘의 대공과 더불어 성녀였다.
“와아! 광휘의 대공 만세!”
“심판의 대공 만세!”
선두에 선 유스넨이 백마를 타고 내성을 나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만 유스넨은 어제 쥬웰과의 일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아 적극적으로 그 환호에 호응하지는 못했다.
그저 가볍게 목만 숙였지만, 그게 의외로 그의 외모와 잘 어울려 사람들은 더욱 커다란 환호를 내질렀다.
그다음은 두 번째 주인공인 성녀였다.
이번 토벌군에서 주역을 맡기로 한 플랑드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욱 공을 써 치장한 상태였는데,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빛이 나듯 아름다웠다.
말 그대로 거룩한 성녀가 현현한 듯한 모습.
플랑드나는 곧 자신에게 터져 나올 환호성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늘 그렇듯, 부드럽고 자애롭게 웃으며 손을 흔들 준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
환호성이 그쳤다.
그리고 당혹스러운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쥬웰 성녀님은?”
“당연히 쥬웰 성녀님이 가시는 것 아니었어?”
백성들이 플랑드나 말고 쥬웰을 찾았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간 쥬웰은 백성을 위해 숱한 일을 하였다.
그게 설사 자신의 복수를 위한 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은 쥬웰에게 깊은 감사를 품고 있었다.
반면, 플랑드나는?
숭고하다고 명성이 높긴 하지만, 막상 백성들은 플랑드나가 자신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물론 플랑드나도 백성들을 위한 봉사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평판을 관리하기 위한 꾸며진 봉사로, 실제로 백성들의 삶을 살피며 백성들을 위한 행동을 한 쥬웰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최고의 성녀는 이미 쥬웰이었고, 이번 침식 때도 쥬웰이 주역으로 나설 거로 예상했는데 웬 플랑드나가 나오니 실망한 것이다.
“…….”
플랑드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백성들의 반응에 감당할 수 없는 모욕감이 치솟아 올랐다.
특히 누군가와 비교되는 건 플랑드나가 끔찍이 싫어하는 거였다.
그녀는 한평생 동생 에스텔레와 비교당해야 했으니까.
정확히는 플랑드나 스스로 에스텔레를 향한 열등감에 시달렸던 것이지만, 어쨌든 플랑드나는 누군가가 자신 위에 있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괜찮아. 이번 침식이 끝나면, 쥬웰은 철저히 몰락할 테니.’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번 침식의 주인공은 플랑드나 그녀였다. 쥬웰은 그저 플랑드나를 섬기는 보조 역할일 뿐이었다.
심지어 플랑드나는 쥬웰을 곤경에 빠뜨릴 계획도 꾸미고 있었다.
‘고작 주인공이 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쥬웰이 날 섬기는 걸 기회 삼아 철저히 짓밟아야 해.’
플랑드나의 눈빛에 악독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스스로 아랫사람이 되기를 자처한 쥬웰의 잘못이었다.
어차피 여섯 공작가의 인물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
기회가 왔을 때 물어뜯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쥬웰을 짓밟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안정되어 플랑드나는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짓고는 손을 들어 백성들에게 흔들었다.
백성들은 어색하게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
“플랑드나 성녀님 만세!”
기대했던 것과 다른 초라한 함성이었지만, 괜찮다고 플랑드나가 애써 마음을 다스릴 때였다.
갑자기 백성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백성들의 반응에 플랑드나는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뭐지?’
그때, 백성들이 외쳤다.
“저기 저 뒤쪽에 쥬웰 성녀님이셔!”
“정말?!”
플랑드나를 외치던 소리는 단번에 끊겼다. 대신, 사람들은 저 멀리 행렬의 끄트머리에 검은 말을 타고 나타난 소녀를 보았다.
밤하늘을 담은 듯한 흑발. 요요한 붉은 눈동자. 행정부의 관료들이 입는 검은 정복. 눈을 뗄 수 없는 칠흑의 매혹이 느껴지는 소녀.
쥬웰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백성들이 열렬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쥬웰 성녀님 만세!”
“사랑해요!”
“제국의 희망!”
“축복받으소서, 우리의 빛이여!”
아까 플랑드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니, 유스넨 때와도 비교되지 않는 열렬한 함성이었다.
고작 행렬의 끄트머리에 등장했을 뿐인데 백성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백성들이 고래고래 내지르는 함성에 수도가 떠나갈 것 같았다.
“…….”
플랑드나는 백성들을 향해 올린 손을 어색하게 내렸다.
플랑드나의 하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표정 관리에 능한 플랑드나지만, 지금 치미는 수치심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플랑드나가 그러거나 말거나 백성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쥬웰의 이름을 높여 불렀다.
“쥬웰!”
“쥬웰!”
쥬웰은 그 함성에 호응하기 위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행렬의 가장 끝에서 선두로 향한 것이다.
그녀가 탄 검은 말이 자신의 앞을 지나갈 때마다 백성들은 마치 눈물을 흘릴 것같이 열렬히 반응하였다.
아니, 실제로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 쥬웰의 복장은 숭고함과는 거리가 먼 온통 흑빛이었지만, 사람들은 플랑드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렬한 숭고함을 느꼈다.
당연했다.
숭고함은 고작 겉으로 보이는 차림새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과거 살아온 행실로 결정되는 거니까.
쥬웰이 지금껏 보인 행실은 가식적인 플랑드나 따위와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백성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다가 순간 의문을 느꼈다.
‘쥬웰 성녀님은 왜 직접 말을 타신 거지?’
전장에 나가는 거니 일반 신관들은 당연히 직접 말을 몬다.
하지만 쥬웰은 일반 신관이 아니라 성녀다.
그리고 아무리 전장에 나가는 거라도 고귀한 성녀가 직접 말을 모는 경우는 없다.
당장 플랑드나만 하더라도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특별히 제작한 마차에 타고 있지 않은가?
수수한 척했지만 굉장히 고가의, 티 안 나게 화려한 마차였다.
그런데 쥬웰은 그런 마차는커녕 직접 말을 몰고 있었다.
물론 쥬웰이 직접 말을 모는 모습은 무척이나 멋들어졌지만,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왜지?’
그렇게 의문이 퍼질 때.
쥬웰이 그 의문에 답이 되는 행동을 하였다.
플랑드나 앞에 도착해서 고개를 숙인 것이다.
“플랑드나 성녀님을 뵙습니다. 이번 침식 때 임시 종사제로 플랑드나 성녀님을 섬기게 되어 인사를 드립니다.”
순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쥬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종사제?’
‘우리가 아는 그 종사제?’
종사제(從司祭).
고위 신관을 보조하며 수발을 드는 하급 신관을 뜻한다.
그런데 그 종사제 이야기가 왜 쥬웰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설마?’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쥬웰이 플랑드나 성녀의 수발을 들기로 했다는 것이다!
‘말도 안 돼!’
‘왜 쥬웰 성녀님이 플랑드나 성녀 따위를?!’
순간, 백성들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건 에메랄드 공작가의 농간이 분명해!’
‘이 썩을 신전 놈들! 에스텔레 성녀님 때도 그렇게나 농간을 부리더니!’
백성들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에스텔레 성녀가 에메랄드 공작가의 수작 때문에 얼마나 험한 일을 많이 겪었는지.
에스텔레 성녀는 늘 백성들 옆에서 함께했기에 백성들은 그녀가 당해야 했던 부조리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
백성들이 싸늘하게 플랑드나를 노려보았다.
그 적대적인 분위기에 플랑드나는 크게 당황하였다.
쥬웰이 종사제가 된 건, 쥬웰이 먼저 자처한 거였다. 그런데 도리어 플랑드나가 욕을 먹게 된 것이다.
‘설마? 이걸 일부러 의도하고?’
순간 떠오른 가정에 플랑드나는 눈을 크게 떴다.
쥬웰이 그녀를 보며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확실했다.
지금 이 상황은 쥬웰이 의도한 바였다.
그리고 그 추측은 옳았다.
쥬웰은 당연히 플랑드나를 섬기려고 종사제를 자처한 게 아니었다.
도리어 조롱하고 모욕하고 짓밟으려고 종사제를 자처한 거였다.
‘최대한 철저히 짓밟아주겠어.’
플랑드나를 보는 쥬웰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사실 지금 그녀는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유스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저조한 기분은 원수들을 향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너희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원수들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이런 끔찍한 악마가 될 일도.
유스넨과 아파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쥬웰은 지금 자신이 아픈 만큼 원수들에게 끔찍이 되돌려 주기로 다짐하였고, 그런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이번 침식 때 잘 부탁드려요, 플랑드나 성녀님.”
악마가 먹이를 바라보는 섬뜩한 미소였다.
* * *
토벌군은 출정하여 게이볼그 마경으로 향했다.
게이볼그 마경은 동부 지방에 자리하고 있어 상당 시간 진군해야 했다.
그렇게 토벌군이 한창 진군하고 있을 때.
게이볼그 마경의 반대편에 자리한 아슬란 마경.
회색빛 하늘 밑에서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끄…… 어어…….]
남성체 악마가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얼마 전 아슬란 마경에 강림한 3품 고위 악마였는데, 샤피렌에게 제압당해 도리어 고문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악마의 몰골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등 뒤에 난 고위 악마의 상징인 날개는 진즉 찢긴 지 오래였다.
그리고 저항하지 못하게 양팔, 양다리가 성스러운 은빛 말뚝에 박힌 상태였다.
“말해. 이번 게이볼그 마경 침식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그런 악마 앞에 사랑스러운 외모의 분홍빛 머리 여인, 샤피렌이 무심히 뜨겁게 달군 인두를 들고 있었다.
“버텨봤자 소용없어.”
[크으으…….]
“난 딱히 고문을 좋아하진 않아. 하지만 필요하다면 망설이지도 않지. 그리고 난 끈기가 아주 강하고, 남아도는 시간도 무척이나 많아.”
샤피렌은 사무적으로 말했다.
“내게 허락된 일은 너희 악마 놈들을 때려잡는 것 말고는 없거든.”
인두가 다시 악마를 지졌다.
[크아아아악!!]
“그러니 말해. 게이볼그 마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결국 악마는 버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번 침식 때…… 광휘의 대공은 사망하게 될 거야.]
“뭐?”
샤피렌은 인상을 찌푸렸다.
“퀸이란 악마 때문인가?”
[큭큭. 퀸도 운명의 수레바퀴에 휘둘리는 가련한 꼭두각시일 뿐……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 여기까…….]
거기까지 이야기한 순간.
갑자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돌연 허공에서 커다란 어둠의 손이 나타나더니, 악마를 짓누른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악!]
악마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까 고문을 당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
샤피렌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 후 손날로 허공을 베었다.
‘벤다’는 의지가 허공을 갈랐다.
커다란 어둠의 손이 파악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치 물이 갈라진 후 다시 합쳐지듯 금방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지끈.
벌레를 눌러 죽이듯.
커다란 어둠의 손이 악마를 짓눌렀고, 악마는 그대로 납작하게 짓눌려 죽음을 맞았다.
이후 커다란 어둠의 손은 스르륵 허공으로 사라졌고 피로 새겨진 하나의 단어만이 바닥에 남았다.
[Knight of Queen.]
마치 표식과도 같은 단어였다.
“…….”
샤피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20년의 세월 동안 마경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더 놀라운 건 느껴졌던 마기였다.
오싹.
샤피렌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두려움이 들었던 것이다.
샤피렌은 직감했다.
‘이번 게이볼그 침식 위험해.’
‘Knight of Queen’이 무얼 의미하는 건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이번 침식 때 무언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알려야 해.’
샤피렌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 * *
샤피렌은 다급히 이 소식을 외부로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원래 아슬란 마경은 외부와 연락하는 수단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먹통이 되었다.
샤피렌은 그게 또 하나의 ‘징조’인 걸 눈치챘으나, 더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샤피렌이 알아낸 이 소식은 게이볼그 마경으로 향하는 토벌군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한편, 게이볼그 마경으로 향하는 토벌군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짐작 못 하고 다소 편안한 분위기였다.
다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모두 무난히 이번 침식을 정복할 거로 예상했다.
‘광휘의 대공이 함께하고 있으니 별문제 없이 정복할 수 있겠지.’
기사들은 신뢰 가득한 눈으로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유스넨은 무려 2품 천사의 위계를 각성했다.
이는 페리도트 가문 내에서도 굉장히 뛰어난 수준으로, 심지어 유스넨은 2품 중에서도 상위의 격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대단한 광휘의 대공이 함께하고 있으니 별문제 없을 것이다, 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토벌군을 더욱 든든하게 하는 이가 있었다.
쥬웰이었다.
‘쥬웰 성녀님도 계시니. 광휘의 대공님과 쥬웰 성녀님이 함께라면 아무런 문제 없을 거야.’
‘쥬웰 성녀님은 어쩌면 에스텔레 성녀님의 현신일지도 모르니.’
쥬웰이 에스텔레 성녀의 현신.
사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많은 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둘의 행보가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덕분에 토벌군은 쥬웰을 보며 커다란 신뢰를 느꼈다.
에스텔레 성녀는 침식 해결의 최고 전문가였다.
페리도트 가문이 비극을 겪은 후 10년 동안 제국은 광휘의 대공의 조력 없이 침식을 정복해야 했고, 그때 늘 최전선에 선 게 에스텔레 성녀였다.
그러니 에스텔레 성녀가 다시 돌아온 듯한 쥬웰과 함께라면 이번 침식도 다 괜찮지 않을까, 하고 안도감이 든 것이다.
‘그나저나 쥬웰 성녀님은 정말 에스텔레 성녀님이 다시 돌아온 것 아닐까?’
수많은 기사가 쥬웰을 보며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하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다리를 다친 건가?”
“네, 네, 성녀님!”
“치료해 줄 테니 무리하지 말도록. 저기 마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회복할 때까지는 타고 이동하고.”
“가, 감사합니다!”
“이자는 탈수 증상이군. 중간중간 목을 축여야 한다고 듣지 않았나? 수하들이 무리하지 않게 장교인 자네가 신경 쓰도록.”
“네, 성녀님!”
쥬웰은 끝없이 쉬지 않고 움직이며 토벌군을 살폈다.
다른 이들을 살피는 그 모습이 에스텔레 성녀와 판박이라 그녀를 끝없이 연상시켰다.
특히, 에스텔레 성녀와 침식 해결에 여러 번 나섰던 적이 있는 연륜 있는 성기사들은 더더욱 그런 기시감을 느꼈다.
그런 이 중 하나가 성전 기사단장 죠제프였다.
죠제프는 성기사들의 수장으로 에스텔레 성녀와 숱하게 침식을 해결한 전우(戰友)였다.
“쥬웰 성녀님은 참 대단하군요. 에스텔레 성녀님을 정말 많이 닮았어요.”
죠제프의 칭찬에 플랑드나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렇지 않아도 쥬웰 때문에 잔뜩 심기가 불편한데 남편의 말이 거슬렸다.
쥬웰이 바쁘게 토벌군을 살피는 것과 다르게 플랑드나 성녀는 마차 안에만 있었다.
그러니 비난의 시선이 쏟아졌다.
특히 ‘감히’ 쥬웰을 종사제로 삼은 것에 토벌군의 불만이 가득했는데, 쥬웰과 비교되는 모습까지 보이자 더더욱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플랑드나는 마차 안에 있으면서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플랑드나는 자신의 불편한 심정을 남편에게 티 내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만 말했다.
“응, 쥬웰은 참 대단해. 저리 다른 사람을 위하다니. 다만, 저렇게 미리 기운을 빼서 정작 침식 현장에 가서 힘을 쓰지 못할까 걱정이야.”
플랑드나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때로는 더 중요한 일이 있는 법인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일의 위중을 따지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건 안타까워.”
죠제프는 따뜻하게 그런 플랑드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당신이 잘 이끌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마침, 이번에 당신의 종세자로 종군하기로 하였으니까요.”
플랑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종사제.
이걸 이용해 반드시 쥬웰을 짓밟아야 했다.
미리 준비한 계획이 있었다.
‘아직은 이르지만.’
플랑드나는 분위기가 완전히 쥬웰에게 넘어가기 전에 계획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쥬웰 성녀. 슬슬 축복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니, 성수를 준비해 주시겠어요?”
플랑드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말 그대로 성스러운 기운, 성력이 담긴 물이었다.
제국에는 이런 성수가 나오는 몇 곳의 성지가 있었고 중요한 종교 행사 전, 성수를 이용해 여러 의식을 거행했다.
플랑드나는 성녀로서 신께 축복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하려 하는 것이다.
“네, 플랑드나 성녀님.”
쥬웰은 군말 없이 축복 의식을 거행할 준비를 하였다.
“쥬웰 성녀님, 그냥 있으십시오! 저희가 준비하겠습니다!”
성기사들이 허겁지겁 나서려 했으나 쥬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축복 의식을 준비하는 건, 종사제인 저의 의무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금 쥬웰에게 감탄하였다.
참고로, 축복 의식은 단순히 성수만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성전의 엄밀한 규칙에 따라 복잡한 준비 과정을 거쳐야 했고, 당연히 육체적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쥬웰은 권세 높은 가넷가의 인물이자 동시에 성녀인데도 그런 궂은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감탄할 만했고, 동시에 플랑드나를 향한 원망은 짙어졌다.
‘쥬웰 성녀님께 저런 일을 시키다니.’
‘편히 마차에 앉아 있기만 하면서.’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플랑드나는 눈썹을 꿈틀했다.
하지만 불쾌함을 티 내지는 않았다.
조금만 있으면 쥬웰은 큰 곤경에 빠질 테니까. 그 장면을 상상하면 지금 불쾌함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한편, 그 모습을 인상을 찌푸린 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유스넨이었다.
‘감히.’
유스넨은 훤히 보였다.
플랑드나가 쥬웰을 향해 어떤 흑심을 품고 있는지.
순간, 플랑드나를 향한 극심한 살심이 밀려 올라왔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쥬웰이 도리어 역으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축복 의식을 준비하는 쥬웰의 눈동자에는 흐릿한 기대감이 감돌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드디어.’
쥬웰은 속으로 입술 속살을 핥았다.
그녀는 플랑드나가 이렇게 먼저 나서주길 바랐다.
그래야 좋은 그림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쥬웰은 착한 ‘희생자’, 플랑드나는 못된 ‘악역’으로.
쥬웰이 선호하는 구도였다.
그렇게 쥬웰과 플랑드나 모두 흉심을 숨긴 채 축복 의식이 준비되었다.
플랑드나가 쥬웰이 준비한 단상 앞에 섰다.
“위대한 빛이여. 거대한 어둠을 맞아 당신의 검이 되어 싸우고자 하오니, 우리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리소서.”
정해진 기도문을 읊고, 성수를 신께 바치는 게 의식의 차례였다.
그런데 쥬웰이 준비한 성수를 들었을 때였다.
플랑드나가 얼굴을 굳혔다.
“쥬웰 성녀,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왜 그러시죠?”
“성수가 오염되었잖아요.”
“……!”
그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성수는 신께 바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성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건 커다란 중죄로 여겼다.
“쥬웰 성녀님이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 리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렸다.
하지만 확인해 보니 성수는 정말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수의 오염은 전적으로 성수를 다룬 종사제인 쥬웰의 책임이었다.
“이런.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종사제로서 성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오염시키다니.”
플랑드나는 곤혹스럽다는 얼굴을 하였다.
“신께 바칠 예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건 성전 법에 따라 중죄인 것 아시죠? 지금 쥬웰 성녀는 임시 종사제의 신분이니 성전 법에 따른 처벌을 피할 수 없어요.”
쥬웰은 그 말에 실소하였다.
이런 경우 성전 법에 따르면 태형을 받게 되어 있다.
즉, 지금 플랑드나는 쥬웰을 매질하겠다는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수많은 사람이 발끈하였지만, 플랑드나의 논리에 허점은 없었다.
신을 향한 죄이다.
그러니 누구이든 잘못을 저질렀으면 성전 법에 따라 처벌받는 게 옳았다.
특히 이번 일은 쥬웰이 스스로 무죄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꼼짝없이 죄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경우였다.
‘물론 증거 따위 남기지 않았겠지. 플랑드나 언니의 솜씨이니까.’
플랑드나는 이런 뒷공작의 전문가였다.
허투루 증거를 남기는 애송이 짓을 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섣불리 무죄를 주장해 봤자 더욱 곤란한 처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그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왜인지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역시 플랑드나 언니. 이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네.’
이전, 플랑드나에게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또 잘못을 저질렀구나. 이건 못된 손버릇을 가진 너를 고치기 위한 매질이야. 언니가 너 위하는 것 알지?’
이렇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건 플랑드나가 즐기던 레퍼토리였다.
그녀는 재미 삼아 개미를 짓밟는 것처럼, 유흥 삼아 에스텔레를 괴롭히는 걸 즐겼으니까.
특히, 에스텔레에게 큰 잘못을 덮어씌우고 그 핑계로 채찍질하는 걸 즐겼다.
‘물론 이제 난 에스테렐가 아닌, 쥬웰이지만.’
가넷인 그녀를 실제로 매질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신 그만큼 곤란하게 만들 작정인 게 분명했다.
만약 쥬웰이 가문의 권위를 내세워 매질을 피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비난의 구실이 될 테니까.
어쩌면 플랑드나가 노리는 건 그쪽일 수도 있었다.
쥬웰이 가문의 권위를 내세워 신을 향한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그건 신을 능멸하는 또 다른 큰 죄이니까.
‘어쨌든 고맙네. 이렇게 나와줘서.’
여기서 질문.
쥬웰이 플랑드나가 수작을 부릴 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전혀.
도리어 기다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런 성수 오염은 이전의 삶 때도 플랑드나에게 당했던 누명이었다.
어린 시절 에스텔레는 플랑드나 때문에 성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끔찍이 매질 당한 뒤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이왕이면, 조금 더 창의적인 방법을 내어주지. 싱겁게.’
쥬웰의 머릿속에 촤라락 대처 방안이 떠올랐다.
뭐, 몇 가지 있었다.
플랑드나가 모르는 성수의 특성을 이용해 본인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
아니면, 교묘히 분위기를 이끌어 이번 일의 잘못을 상급자인 플랑드나에게 돌리는 것 등등.
어떤 것이든 어려울 것 없었다.
이제 그녀는 과거의 힘없고 순진한 에스텔레가 아니니까.
그중 가장 구미가 당기는 건 플랑드나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오히려 플랑드나는 제 꾀에 본인이 곤경에 처하게 되리라.
‘아니야.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는 없지.’
하지만 쥬웰은 뇌리에 떠오른 손쉬운 방법들을 지웠다.
이번 일을 이용해 역으로 플랑드나에게 커다란 모욕을 줄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쥬웰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요. 전 성수를 잘못 관리한 적이 없는데. 성수가 오염되다니.”
“쥬웰 성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건 큰 죄랍니다. 물론 쥬웰 성녀께서도 고의로 실수한 건 아닐 테니 일부 죄를 경감해 줄 수는 있답니다.”
플랑드나는 짐짓 쥬웰을 생각하는 척 말하였다.
“하지만 정말입니다. 아까 의식을 준비하기 전에 확인했을 때만 해도 성수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걸요. 그렇지 않나요?”
맞는다는 듯 다른 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랑드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의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염되었겠죠.”
“증거가 있나요?”
“뭐라고요?”
“제가 의식을 준비하면서 성수를 오염시켰다는 증거 말이에요. 혹시 제가 성수를 오염시키는 걸 본 사람이 있나요?”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성수는 플랑드나가 미리 풀어놓은 특별한 비약에 의해 오염된 거니까.
플랑드나가 푼 비약은 약의 농도에 따라 미리 정해놓은 시간에 맞추어 반응이 오는 것이라 이런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 사람은 없더라도, 성수를 만진 사람은 쥬웰 성녀, 당신밖에 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아니면 성수를 오염시키는 건 불가능해…….”
“아니죠.”
쥬웰은 지그시 고개를 저었다.
“제 잘못이 아니어도 성수가 오염될 수 있어요.”
그 확신에 가득 찬 말에 플랑드나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설마 내가 사용한 비약을 눈치챈 건가?’
하지만 이 비약은 오로지 플랑드나만이 아는 비약. 쥬웰이 눈치챘을 리가 없다.
설사 알고 있더라도, 비약은 성수를 오염시키고 곧바로 녹아 사라지기 때문에 증거를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안심한 플랑드나는 도도히 되물었다.
“어떤 경우에 가능하단 거죠?”
그리고 쥬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뜻밖의 것이었다.
“바로 신이 진노하셨을 때예요.”
“……!”
플랑드나는 당황했다.
갑자기 무슨 황당한?
“그게 무슨……?”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성전에 이런 구결이 있지 않나요? 특별한 이유 없이 신께 바칠 예물에 문제가 생기면 신께서 의식을 기뻐하지 않는 거니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 보라고.”
플랑드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런 구결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관용적인 구결일 뿐이다.
실제로 신이 진노해 예물이 망가지는 경우는 없다.
“전 성수를 잘못 다룬 적이 없고, 그런데 신께 바칠 성수는 오염되었으니 이유는 하나겠죠. 신께서 이번 축복 의식에 진노하신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나요?”
장내가 조용해졌다.
사건이 예상치 못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플랑드나는 입을 우뚝 다물었다.
무언가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감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부정하려는 찰나, 하나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광휘의 대공, 유스넨이었다.
그가 잠시 차갑게 플랑드나를 노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쥬웰 성녀님의 말씀대로 신께서 진노하신 게 아닌지 먼저 되돌아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스넨은 토벌군에서 가장 높은 인물.
그가 이렇게 나오자 플랑드나는 쥬웰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플랑드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죠, 쥬웰 성녀? 신이 진노했다면 이유가 있을 텐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거야 간단하죠.”
쥬웰은 싱긋 말했다.
“플랑드나 성녀님과 저. 둘 중 한 명에게 진노하신 거겠죠.”
“……!”
“이번 축복 의식에 참여한 이는 오로지 우리 둘뿐이니까요. 그러니 우리 둘 중 한 명에게 진노하셨을 거예요.”
플랑드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쥬웰의 속셈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 쥬웰은 내게 신의 진노를 덮어씌우려고 하고 있어!’
과연,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만약 신이 둘 중 한 명에게 진노했다면 과연 누구에게 진노했겠는가?
사람들은 보나 마나 플랑드나라고 생각했다.
왜?
저토록 숭고한 쥬웰에게 분노했을 리는 없으니까.
그게 사람들의 당연한 생각이었다.
“물론 누구에게 분노했는지는 모르죠. 그러니 신께 물어보면 어떨까요?”
“……물어본다고요?”
“네, 마침 축복 의식을 진행해야 하니. 우리 둘 다, 축복 의식을 진행하는 거예요. 그러면 신의 뜻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플랑드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함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결국 이리 으르렁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쥬웰 성녀, 신을 능멸하는 죄는 가볍지 않아요. 알고 있겠죠?”
차가운 물음에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제가 아는 건 신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뿐이라.”
“……!”
플랑드나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바득 갈았다.
신의 사랑.
플랑드나는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것이다.
신은 오로지 그녀의 동생, 에스텔레만 사랑했으니까.
첫 차례는 플랑드나였다.
이 자리에서 플랑드나를 믿는 유일한 인물인 남편 죠제프가 플랑드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평소라면 남편의 따뜻한 말을 듣고 마음이 안정되었겠지만, 플랑드나의 얼굴은 좋아지지 않았다.
플랑드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해진 차례에 따라 예식을 올렸다.
“……저희를 축복하소서.”
그다음 차례는 땅에 성수를 뿌리는 거였다.
문제는 이게 비약으로 오염된 성수란 것이다.
성수를 땅에 뿌리자 치이익, 시커먼 연기가 솟아올랐다.
마치 악마의 연기처럼.
불길하기 짝이 없는 연기라 지켜보는 이들은 플랑드나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이, 이건…… 성수가 오염되어서.”
플랑드나는 다급히 변명했다.
오염된 성수를 땅에 뿌리면 원래 이런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일부만 아는 사실일 뿐.
모르는 이의 눈에는 신께서 플랑드나의 예식을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쥬웰이 앞으로 나섰다.
“이번엔 제가 해볼게요.”
“…….”
플랑드나는 창백한 얼굴로 쥬웰이 단상에 오르는 걸 지켜봤다.
만약 여기서 쥬웰이 기적을 일으킨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쥬웰도 똑같을 거야.’
플랑드나가 애써 불안감을 억누르는 순간이었다.
쥬웰이 기도를 시작했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파아앗!
쥬웰의 몸에서 성스러운 빛무리가 일어난 것이다.
신의 사랑을 뜻하는 빛의 운무였다.
“오오오!”
“역시 쥬웰 성녀님!”
사람들이 경탄을 터뜨렸고, 반면 플랑드나의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쥬웰은 속으로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나 위대한 빛께 기도하오니.”
쥬웰은 빛무리에 휩싸인 채로 기도문을 낭독했다.
“부디 당신의 축복이 임하옵소서.”
성수를 바닥에 뿌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플랑드나 때처럼 시커먼 연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오염되지 않은 성수를 뿌린 것처럼 성스러운 기운이 반짝였다.
신의 은총이 그녀에게 깃든 덕이다.
쥬웰은 자신을 향한 신의 사랑을 확신하고 이번 일을 벌인 것이다.
심지어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찬란한 빛이 쥬웰에게 내려왔다.
“아아…….”
사람들은 그 찬란한 빛에 울컥하였다.
차마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숭고한, 한없이 거룩한 빛이었다.
마치 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아이를 내가 사랑한다, 고.
그 기적을 목도한 사람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쥬웰은 그 빛무리에 휩싸인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렇게까지 전폭적으로 은총을 내려줄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쥬웰은 단상 위에서 플랑드나를 내려다보았다.
“신께서 누구에게 진노한 건지는 명확한 것 같은데요?”
“……!”
플랑드나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과연, 플랑드나 성녀님의 어떤 면이 신을 진노케 했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나, 나는…….”
그때 당장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건 플랑드나 성녀가 쥬웰 성녀님을 종사제로 삼아서 생긴 일이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감히 쥬웰 성녀님을 종사제로 삼다니! 당장 사과하십시오!”
이토록 신이 사랑하는 쥬웰을 종사제로 삼다니.
신이 진노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플랑드나에게 비난의 시선을 보냈다.
“…….”
플랑드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야. 아니라고.’
이건 신의 진노가 아니라, 모두 쥬웰의 음모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누구도 듣지 않을 것이다.
이미 승부는 끝났다.
플랑드나는 쥬웰과의 승부에서 패배했다.
그것도 완전히.
플랑드나는 다급히 일을 수습하려고 했다.
“쥬, 쥬웰. 종사제 건은 없었던 일로…….”
“흐음. 고작 그런 걸로 될까요?”
“……!”
“저야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마무리하고 싶지만 그걸로는 신의 진노가 풀리지 않을까 봐서요.”
“……그러면?”
쥬웰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플랑드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쥬웰이 아주 잔혹한 아이란 것을.
어쩌면 자신을 능가할 정도로 말이다.
“신의 진노를 풀 방법은 하나 아닐까요? 잘못한 만큼 속죄하는 것이지요.”
“……!”
플랑드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쥬웰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잘못한 만큼 속죄.
플랑드나보고 똑같이 쥬웰의 종사제가 되라는 것이다.
‘저, 절대 할 수 없어. 나보고 종사제라니.’
플랑드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플랑드나는 에메랄드 공작가의 적통으로 애초에 신관 생활을 주교급으로 시작하였다.
종사제 같은 천한 일 따위 꿈속에서도 해본 적 없다.
하지만 토벌대의 모두가 싸늘히 플랑드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쥬웰의 붉은 눈동자가 플랑드나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마치 이미 잡은 먹이를 내려다보는 잔혹한 눈빛이었고 플랑드나는 자신이 벗어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녀는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쥬, 쥬웰 성녀님. 제, 제가 당신의 종사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아.’
쥬웰의 가슴에 하나의 감정이 퍼졌다.
‘사랑스러워.’
쾌감이었다.
일그러진 플랑드나의 얼굴이, 피의 각인을 통해 전달되는 플랑드나의 분노와 모욕감이 참을 수 없는 쾌감을 전해주었다.
물론 쥬웰은 티를 내지 않고, 가증스럽게 플랑드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머, 플랑드나 성녀님. 전 이런 일을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이해 부탁해요.”
“아, 아닙니다.”
플랑드나가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 쾌감이 피어올랐다.
‘아직 부족해.’
침식이 끝날 때까지 시간은 많았다.
이제 쥬웰은 자신의 종사제가 된 플랑드나에게 본격적인 모욕을 줄 것이다.
어려울 것 없었다.
플랑드나가 과거 그녀에게 했던 짓의 반의반의 반만 참고하여도 충분히 잔혹할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쥬웰은 싱긋 웃었다.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해요.”
* * *
표독하게 했던 다짐과 다르게 모욕을 주려고 따로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기만 해도, 플랑드나에게는 충분히 모욕적인 상황이 되었으니까.
예컨대 이렇다.
“다리의 열상이 심하군. 지금 당장 치료를 해야겠네.”
쥬웰은 늘 하던 것처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살폈다.
그러면 플랑드나는?
종사제이니 열심히 쥬웰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다.
누군가의 밑 사람이 되어 뒤를 따라 다닌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플랑드나에게는 참을 수 없이 모욕적인 상황이었다.
더구나 쥬웰은 신분 낮은 병사에게도 일정한 예를 갖추었다.
쥬웰이 그렇게 하니, 쥬웰의 수발을 드는 플랑드나도 똑같이 자세를 낮추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천한 병사에게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니.
그럴 때마다 플랑드나는 극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여기 다친 다리에 붕대를 감아주시겠어요?”
“……네, 쥬웰 성녀님.”
빠드득.
플랑드나가 속으로 이를 가는 게 피의 각인을 통해 느껴졌다.
‘감히 내게 이런 천한 일을.’
이러며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플랑드나의 반응에 쥬웰은 황당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평상시 봉사 활동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성녀라며? 빈민 봉사 활동 같은 건 전혀 안 했나?’
물론 플랑드나가 겉으로 불쾌한 티를 냈다는 건 아니다.
플랑드나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특히 속마음을 숨기는 것에 아주 능숙했다.
하지만 쥬웰은 ‘피의 각인’을 통해 플랑드나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플랑드나는 고귀한 자신이 천한 병사들을 직접 수발드는 것에 끔찍한 수치심을 느끼며 분노하고 있었다.
‘가만히 두지 않겠어, 쥬웰. 절대로. 절대로. 이 치욕을 반드시 갚아주겠어.’
그런 원한 가득한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런 원망은 쥬웰을 즐겁게 해줄 뿐이었다.
한편, 의외로 플랑드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데 한쪽 팔을 거들어주는 이가 있었다.
플랑드나의 남편 죠제프였다.
“많이 힘드시지요, 부인?”
“……죠제프.”
플랑드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죠제프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얼굴을 하였다.
“부인이 쥬웰을 종사제로 삼은 걸로 설마 신께서 진노하셨을 줄은. 하지만 부인이 이토록 병사들을 위하고 있으니 신께서도 기뻐할 거로 생각합니다.”
“…….”
“그러니 비록 힘들겠지만, 전 기쁩니다. 부인의 노고를 신께서 기뻐하고 계실 테니까요.”
플랑드나는 눈치 없는 남편에게 속으로 바득 이를 갈았다.
죠제프는 자신이 뭘 잘못 말했는지 전혀 모르고 그저 한없이 굳건하고 믿음이 담긴 눈빛으로 플랑드나를 볼 뿐이었다.
물론 그 눈치 없는 믿음 가득한 눈빛은 플랑드나의 복장을 더더욱 긁었다.
쥬웰은 헛기침을 하였다.
‘……원래도 죠제프는 저런 눈치 없는 스타일이었지.’
그리고 드디어 토벌군이 침식 내부에 진입했다.
“하늘이…….”
처음 침식을 경험하는 이들은 하늘을 보고 창백한 얼굴을 하였다.
침식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기준은 간단했다. 바로 게헨나의 회색빛 하늘이었다. 푸르르던 하늘이 잿빛으로 변했다.
“…….”
토벌군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자신들이 게헨나에 발을 들였다는 실감이 난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침식 같은 끔찍한 현상이…….”
한 병사가 신음을 흘렸다.
옆을 지나던 쥬웰은 속으로 이유를 답했다.
‘그야, 인간들의 죄악 때문이지.’
원래 에덴과 게헨나는 인간 세상에 개입할 수 없다.
인과율, 즉, 명분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악이 가득하게 되면, 게헨나의 악마들은 인간 세상에 개입할 명분, 인과율을 얻게 된다.
‘그렇게 나타난 이들이 바로 흑마도사들이지.’
흑마도사들은 인간들의 악으로 인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악마들은 인간들의 죄악으로 명분을 얻고, 흑마도사를 통해 세상사에 관여한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들의 죄악이 더욱 쌓이게 되면, 게헨나가 직접 인간 세상과 겹치게 된다.
그게 바로 ‘침식’ 현상이었다.
‘역사상 가장 큰 침식은 바로 300년 전, 초대 황제가 봉인한 거대한 어둠이었다고 하지.’
이와 같은 현상은 에덴, 천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세상에 인간의 선이 가득해지면 천사들은 명분을 얻어 인간 세상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선이 더더욱 쌓이면 아마 낙원과 인간 세상이 겹치는 현상도 일어날 것이다.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없지만.’
쥬웰은 비소를 흘렸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인간의 선이 악을 능가한 적은 없다.
선한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악인의 죄악이 선한 이들의 선을 늘 압도했다.
비단 커다란 악인들 때문이 아니다.
주위를 보라. 도처에 얼마나 악이 가득한가?
시골 작은 마을에만 가도 게헨나에 떨어질 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에는 늘 어둠만 범람하게 되었고, 따라서 에덴에서 고육지책을 낸 게 바로 페리도트 대공가였다.
범람하는 어둠을 상대하기 위해 천사의 혈통을 인간에게 직접 내린 것이다.
그게 바로 페리도트 가문이 탄생한 이유였다.
‘어쨌든 뭐, 이런 비사는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지.’
이번 침식을 주도한 끔찍한 악마 주제에 인간의 죄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는 것도 우스웠다.
그때, 유스넨이 쥬웰에게 다가왔다.
“이제 침식 내부이니, 꼭 조심하십시오.”
쥬웰은 잠시 그런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그를 마주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전하도요.”
“유스넨.”
“네?”
“유스넨이라고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에 고집이라니.
쥬웰은 유스넨이 귀여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손잡아주세요.”
유스넨은 순순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둘은 말없이 손을 잡았다.
하지만 길게 손을 잡고 있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마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기사들과 성기사들이 마물을 상대하면, 유스넨은 그 틈을 타 침식의 핵으로 향해야 했다.
쥬웰은 순간 충동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다치지 마세요.”
“네?”
“다치지 말라고요. 조금이라도 다치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
쥬웰은 말하면서도 자신의 말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쥬웰은 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기 위해 공들여 함정을 팠고, 실제로 조금도 그가 다치지 않게 할 것이다.
유스넨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해 주시니 기분 좋군요. 어쨌든 염려 마십시오. 전 괜찮을 테니.”
괜찮을 것이다.
이건 유스넨이 느끼는 직감, 정확히는 예지였다.
유스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신변에는 별문제가 없을 거야.’
앞으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유스넨은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자신은 괜찮을 것 같았다.
걱정되는 건 도리어 쥬웰 쪽이었다.
“당신께서도 약속해 주십시오. 반드시 조심하겠다고요.”
“네, 알겠어요.”
“꼭, 꼭 약속입니다.”
강아지가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맹수를 생각해 주는 듯한 걱정이라 쥬웰은 웃음을 지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유스넨은 능력을 일으켰다.
파아앗!
네 장의 빛의 날개가 유스넨의 등 뒤에서 뻗어 나왔다.
그가 천사의 피를 각성했음을 상징하는 광익(光翼)이었다.
“그러면, 먼저 앞으로 가보겠습니다.”
펄럭.
유스넨은 날갯짓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고, 그가 날아가는 방향에 있던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멸하였다.
그런 유스넨의 모습을 보며 쥬웰은 무거운 얼굴을 하였다.
유스넨이 침식의 ‘핵’에 도달하면 그때 함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전에 다른 일을 마무리해야 해.’
바로 플랑드나 일.
‘내 목표는 고작 종사제로 삼아 모욕 주는 게 아니니까.’
쥬웰은 이번 침식 때 플랑드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힐 계획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플랑드나에게 말하였다.
“플랑드나 성녀님,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겠어요?”
“어떤?”
플랑드나는 긴장하여 되물었다.
쥬웰은 차가운 음성으로 말하였다.
원래는 차갑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곧 있을 유스넨과의 일 때문에 말투가 자연스레 딱딱하게 나왔다.
“이곳 침식 외곽을 정화하는 걸 담당해 주세요.”
플랑드나는 뜻밖이란 얼굴을 하였다.
정화는 굉장히 중요한 일로, 침식 해결의 가장 커다란 공이라 당연히 쥬웰이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냥, 플랑드나 성녀님이 경험이 많으니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쥬웰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지만, 당연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플랑드나의 성력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드러나게 해야지.’
플랑드나가 하나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이곳은 게헨나와 겹쳐진 침식의 공간. 마기가 득실거렸다.
그리고 플랑드나의 성력은 악마가 내린 성력이다.
이 말의 뜻은 이러했다.
‘내가 의도만 하면, 플랑드나 언니의 성력에 깃든 악마의 기운을 움직여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거지.’
밖에서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곳 침식 공간의 가득한 마기를 이용하면 가능했다.
즉, 쥬웰은 플랑드나가 성력을 펼치면 그걸 조작해 끔찍한 결과가 나타나게 할 속셈이었다.
그러면?
플랑드나는 불길한 성력을 사용한 대가로 어마어마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지금껏 플랑드나가 필사적으로 쌓은 성녀로서의 알량한 명성을 다 잃게 됨은 물론이었다.
즉, 플랑드나를 성녀의 자리에서 추락시키는 게 오늘 쥬웰의 목적이었다.
* * *
유스넨은 왠지 모를 초조함에 빠르게 침식의 핵으로 진입했다.
‘원래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하지만.’
쥬웰을 향한 불안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 무리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침식의 핵에 도착하니 고요한 공간이 그를 맞았다.
“…….”
외곽에 마물들이 득실거리던 것과 다르게 핵 안은 조용했다.
하지만 유스넨은 이게 정말로 조용한 게 아니란 걸 눈치챘다.
공포였다.
압도적인 공포가 공기를 짓눌러, 벌레조차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포의 근원은 명확했다.
악마.
저 앞에 한 여성체 악마가 앉아 있었다.
“……2품 악마.”
유스넨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여성체 악마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등 뒤로 네 장의 날개가 보였다.
유스넨과 동격의 2품 군주급 악마였다.
‘다행히 아주 강한 것 같지는 않군.’
같은 2품이어도 당연히 힘의 차이가 있다.
다행히 지금 앞에 나타난 2품 악마는 강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따지면, 2품 악마 중에서는 하위에 속하는 격.
반대로 유스넨은 2품 천사 중에서도 상위의 격을 지녔으니, 무난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상당한 힘을 소모해야 한다는 거지만. 최대한 힘을 보존하며 제압해야겠어.’
유스넨은 눈앞의 2품 악마가 최종 주모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뒤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최대한 힘을 아껴가며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성유물을 최대한 활용하면 가능해.’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아래로 숙인 얼굴을 든 2품 악마가 피를 가득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피? 어째서?’
유스넨은 놀란 얼굴을 했다.
다른 곳에서 묻은 피가 아니었다.
본인이 흘린 피였다.
눈, 코, 입, 귀.
얼굴에 난 구멍 모두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지?’
그때, 상대 악마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 제발…… 사, 살려…… 자, 자비를…….]
유스넨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비는 말이었다.
[나, 나…… 메이란…… 위, 위대한 분께…… 비오니…… 제, 제발…… 사, 살려…….]
하지만 그 순간.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짓누르는 것처럼 상대 악마, 메이란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으어어…… 아아아아악!]
악마, 메이란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마치 찰흙을 뭉개듯 얼굴이 짓눌렸고.
퍼억.
그대로 얼굴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털썩 쓰러지더니,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소멸한 것이다.
“…….”
유스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2품 중에서 하위에 속한다지만, 그래도 군주급 악마가 저렇게 죽다니?
도대체?
‘이건 그녀가 벌인 짓이 아니야.’
아무리 쥬웰이 강대한 어둠이라도 이런 일이 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설마?’
순간, 유스넨의 등줄기에 섬뜩한 추측이 떠올랐다.
‘그녀 말고 또 다른 악마가 이 침식에?’
쥬웰조차 사실은 꼭두각시였을 뿐.
아마 쥬웰조차 모르고 있는 진정한 배후가 따로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배후는.
‘피해야 해!’
거기까지 생각한 유스넨은 다급히 날갯짓했다.
그의 추측이 맞는다면,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안 그러면 모조리 죽을 것이다.
유스넨은 물론, 토벌군 모두.
쥬웰까지.
‘안 돼! 최소한 그녀만이라도!’
하지만 늦었다.
섬뜩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오랜만이구나.]
그 음성과 함께 주변 공기가 달라졌다.
마치 공포에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리고 절망이 강림했다.
커다란 여섯 장의 잿빛 날개.
부드러운 인상의 아름다운 얼굴.
섬뜩한 회색빛 머리칼.
[증오스러운 내 핏줄아.]
유스넨의 것과 똑 닮은 감람빛 보석안(페리도트)이 아래를 굽어봤다.
유스넨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게헨나를 통틀어 가장 최악의 악마 중 하나였으니.
“타천사…… 베스윈.”
그렇다.
쥬웰조차 농락한 이번 침식의 진정한 주모자.
그건 바로 1품 대악마, 타천사 베스윈이었다.
유스넨은 뻣뻣이 굳었다.
타천사 베스윈. 한때 영광된 대천사장이었다가 타락하여 악마가 된 이. 시에 페리도트가의 시조이자, 가족들의 원수.
“…….”
유스넨은 과거의 비극이 떠올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13년 전. 그의 각성 의식 때 강림한 건 천사가 아니라, 바로 눈앞의 타천사 베스윈이었다.
베스윈은 어린 유스넨의 몸을 차지하여 페리도트가의 핏줄을 모조리 참살하였다. 즉, 베스윈은 그의 가족을 모조리 죽인 원수였다.
하지만 유스넨은 감히 원한을 갚을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건 베스윈이 지닌 힘 때문이었다.
‘1품 대악마 중에서도 최상위의 힘.’
유스넨이 2품에서 상위의 격이라지만, 베스윈은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1품 대악마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안에 꼽는 지고한 존재.
베스윈은 게헨나의 66 대악마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이 중 하나였다.
“어째서…… 당신이 이런 침식을?”
유스넨은 이를 악물며 물었다.
베스윈은 혈육의 원수.
그런 베스윈을 마주하니 미칠 듯한 살의가 끓어올랐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녀의 안위였다.
다른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타천사 베스윈이 강림한 이상, 이번 침식 정벌은 실패했다.
아니, 단순히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토벌군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과거 일어났던 게이볼그 마경 침식 사태 때 베스윈은 무려 1천에 달하는 기사를 몰살시켰으니까.
쥬웰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어떻게든 쥬웰이라도 안전하게 이 위기를 벗어나게 해야 했다.
“에덴과 게헨나의 협약상 1품 대악마는 침식에 강림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거야 그렇지.]
타천사 베스윈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내가 한다고 하는데, 천사들 따위가 날 어떻게 말릴 것인가?]
“……!”
에덴과의 협약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오만한 말이었다.
[그리고 내가 오늘 강림한 건 하나의 목숨만 거두기 위해서니, 이 정도는 협약을 어겼다고 하기 어렵겠지.]
“하나의 목숨이라면?”
유스넨은 섬뜩한 불길함을 느꼈다.
[바로, 너.]
“……!”
[난 내 증오스러운 핏줄인 네 목숨을 거두러 온 것이란다.]
베스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13년 전, 그때 거두어야 했는데 끈질기게 살아남았으니 이제 거두어야겠지.]
유스넨은 얼굴을 굳혔다.
타천사 베스윈이 그의 목숨을 거두러 강림한 거라니?
“그게 무슨……? 왜 내 목숨을?”
순간, 유스넨은 번뜩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네가 날 죽이려는 건 그녀 때문인가?”
[흐음.]
베스윈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내가 남긴 신탁을 봤나 보군. 그래, 난 그 신탁이 이루어지는 걸 막기 위해 널 죽이려는 것이다.]
“……!”
페리도트가의 후인이 그녀의 영혼을 취하게 될 거란 예언이었다.
[난 원래 13년 전, 내가 남긴 핏줄을 모조리 지우려고 했지. 그러면 신탁이 이루어질 일도 없을 테니 말이야.]
“…….”
[하지만 운명의 굴레는 지긋지긋하게 질겨, 네놈이 살아남았고 신탁의 주인공이 되었지. 이제 그 잘못을 바로잡을 때가 왔다.
유스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내가 어째서 그녀를 파멸시킬 운명이란 거지?”
[…….]
“이 내가 그녀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아픈데.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데.
그녀를 위해서라면 지옥에 떨어져 억겁의 고통까지 감내할 각오를 하고 있는데, 그런 자신이 그녀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베스윈이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그건 모르지.]
“……뭐?”
[앞으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는 나도 모른다고.]
베스윈은 조소를 지었다.
[신께서 어떤 커다란 굴레를 짜놓았는지는 우리 필멸자들 따위가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니까.]
뜻밖의 이야기였다.
대악마는 미래를 엿보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그 능력으로도 그녀와 그가 맞이할 미래를 정확히는 엿볼 수 없다는 거였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그녀는 아주 끔찍한 파멸을 맞는다는 거야. 그녀는 자신이 태어났음을, 자신의 영혼이 지음받았음을 저주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넌 그런 그녀의 영혼을 취하게 되겠지. 신탁의 내용처럼 말이야.]
유스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끔찍한 이야기였다.
“헛소리.”
베스윈은 부드럽게 웃었다.
[나도 내 말이 헛소리였으면 좋겠군.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타천해 끔찍한 악마가 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네가 타천한 게 그녀와 연관이 있다고?”
[그래, 난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지켜봐 왔거든.]
유스넨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라플 공작도 그렇고, 이 베스윈도 그렇고 자꾸만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했다.
“너와 라플 공작, 그녀가 도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
베스윈은 의미 모를 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할 필요 없겠지. 어차피 넌 오늘 여기서 죽을 텐데.]
유스넨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물었다.
“내가 죽으면, 그녀가 파멸을 맞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건가?]
“그래.”
유스넨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그의 목숨은 이미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를 위해 죽는 건 아쉽지 않았다.
확실히 그녀를 구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베스윈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정확히는 몰라. 아마 어렵겠지.]
“……뭐라고?”
[운명의 굴레가 그토록 질기니 아마 널 죽여도 그녀는 예정된 파멸을 맞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왜 날 죽이겠다는 거지?”
[혹시나 하는 가능성 때문에?]
“……!”
[널 죽이면, 운명의 축이 비틀려 어쩌면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생길 수 있으니 절박한 희망을 걸고 도박을 해보려는 거지.]
베스윈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네놈의 하찮은 목숨 따위를 바쳐 그녀의 운명이 조금이라도 바뀔 가능성이 있다면,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이지.]
“…….”
유스넨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고작 그런 거라면, 나도 순순히 죽음을 맞을 수는 없겠군.”
[흐음?]
“그런 확률 희박한 도박 따위에 기댈 생각 없어.”
만약 자신이 죽어 그녀가 확실히 구원받을 수 있다면 유스넨은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이다. 백 번이고 바칠 수 있다.
하지만 고작 도박에 불과한 확률이라면?
그런 희박한 확률에 목숨을 버릴 수 없다.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도박 따위 말고, 난 그녀를 확실히 구원해 낼 방법을 찾고 말 테다. 그러니 여기서 죽을 수 없어.”
그는 반드시 그녀를 구원할 방법을 찾고 말 것이다.
어떤 여지도 없는 확실한 방법을.
그래서 그녀를 구원해 내어 그녀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죽을 수 없었다.
[그래? 뜻은 가상하군. 하지만 어떻게 할 거지? 난 오늘 널 죽일 건데?]
베스윈은 이미 손에 잡힌 벌레를 대하듯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유스넨은 결연한 얼굴을 하였다.
“아무리 네가 1품 대악마라고 해도 내가 전력으로 도주하면 잡을 수 없겠지.”
‘어떻게든 게이볼그 마경만 벗어나면 돼.’
베스윈은 에덴, 게헨나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
불행히도 유스넨의 힘은 베스윈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건 베스윈이 지상에서 행동 제약이 있는 악마란 것이다.
그가 행동 가능한 반경은 침식 장소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니 그녀와 함께 어떻게든 이곳만 벗어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베스윈이 비웃듯 말했다.
[네가 도망가면, 토벌군을 몰살시키겠다.]
“……상관없다.”
유스넨은 무겁게 답했다.
토벌군의 희생은 안타깝지만, 그에게는 그녀가 더 소중했다.
[큭큭. 역시 내 핏줄다운 답이군. 하지만 그녀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
[내가 아는 그녀라면, 절대로 그 많은 사람을 놔두고 가지 못할 텐데.]
유스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이 옳았다.
쥬웰은 절대 사람들의 죽음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악마면서, 어떤 빛보다 숭고한 게 그녀니까.
[네가 도망가면, 토벌군을 모조리 죽이고 그녀까지 죽이겠다.]
“……그녀를 죽이겠다고? 그녀를 위한다고 하지 않았나?”
유스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베스윈은 광인처럼 킬킬 웃더니 섬뜩한 말을 하였다.
[그래, 사실 난 그녀를 죽이고 싶기도 하거든.]
“……!”
유스넨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미친?”
[그녀를 많이 아껴서다. 네 따위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껴서, 죽이고 싶다니?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설명이 필요한가 보군. 넌 사랑하는 이가 끔찍한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거지?]
“…….”
[살아날 희망도 없이 아주 끔찍한 고통만 남아 있다면. 그 고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베스윈의 눈동자에 광기가 깃들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나락에 떨어지는 듯한 섬뜩한 광기였다.
[그녀가 끔찍한 파멸을 피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지금 죽이는 게 낫겠지. 그게 그녀에게는 차라리 자비일 테니까. 그녀는 결국 내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유스넨의 손끝이 파르르 흔들렸다.
그는 방금의 이야기로 베스윈이 끔찍한 ‘악마’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개소리.”
베스윈은 훗훗 웃고는 손을 뻗쳤다.
시커먼 암흑의 검이 베스윈의 손에 소환되었다.
생전에 사용하던 저주받은 성검 듀란달이었다.
[어쨌든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었군. 그만 목숨을 바쳐라.]
유스넨은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닥쳐.”
[흐음? 분명히 말하지만 도망가는 건 불가하다. 네가 도망가면 난 그녀를 죽일 테니 말이야.]
“아니, 도망가지도 네게 목숨을 바치지도 않아.”
유스넨은 심판의 검을 꺼냈다.
“내가 여기서 네놈을 죽이겠다.”
도망가는 게 불가능하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가 베스윈을 죽일 것이다.
물론 둘의 힘의 격차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해내야 해. 반드시 살아남아 그녀를 구원해 내고 말겠어.’
결심을 다지며 유스넨은 자세를 잡았다.
천사의 힘, 성투기(聖鬪氣, Divine power)가 심판의 검에 깃들었다.
베스윈은 그런 유스넨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재밌구나. 그래, 이렇게 나와야 미친 나의 핏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베스윈은 손가락을 까닥했다.
[오너라. 죽여주마.]
그 말과 함께.
유스넨의 검이 베스윈에게 날아들었다.
동시에 피가 튀었다.
* * *
한편 그때, 쥬웰은.
“……!”
안색이 파리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쥬웰 성녀님?”
“……아니. 아니에요.”
쥬웰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들지?’
지금 그녀는 플랑드나를 추락시키기 위한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상태였다.
이제 플랑드나가 성력을 펼칠 거고.
그 성력에 수작을 부려 끔찍한 결과가 나오게 하면 끝이다.
‘드디어. 바라던 순간이야.’
플랑드나를 성녀의 자리에서 추락시키는 건 복수의 가장 중요한 한 과정 중 하나였다.
이제 플랑드나의 추락을 시작으로 에메랄드 공작가를 몰락시킬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순간인데.
쥬웰은 자꾸 유스넨을 향한 걱정만 미칠 듯이 들었다.
‘흰 강아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쥬웰은 지금 안쪽에서 베스윈이 강림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베스윈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유스넨에게 어떤 변고가 닥쳤는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쥬웰은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다.
순간 쥬웰은 고민이 들었다.
‘가볼까?’
그런 충동이 들었다.
가서 유스넨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드디어 고대하던, 플랑드나를 바닥에 추락시킬 순간이 코앞이다.
그저 불길한 느낌이 든다는 이유로 이런 중요한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슴속 불안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이 일을 끝내고 가면 돼.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기껏해야 10분. 아니, 빠르게 해서 5분. 그리고 바로 달려가는 거야.’
그래, 5분이다.
그 뒤 곧바로 유스넨에게 가는 것이다.
드디어 플랑드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면 정화를 시작하겠습니다.”
파앗!
환한 성력이 발현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백색 성력이 시커먼 빛으로 변질된 것이다!
쥬웰의 수작 탓이었다.
“아, 아니? 성력이?”
“저게 어떻게 된?”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렸다.
플랑드나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아니, 성력이 왜?’
누가 봐도 지금 플랑드나가 보인 성력은 빛의 찬란한 성력이 아닌, 악마의 것으로만 보였다.
“이, 이건…….”
다급히 성력을 꺼트린 플랑드나는 말을 더듬었다.
사람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다.
“무, 무언가 문제가…… 그, 그래! 이건 침식 공간의 문제예요! 침식 공간이 제 성력을 오염시킨!”
“침식 공간의 성력을 오염시켰다고요?”
쥬웰이 나섰다.
“무언가 이상하군요.”
쥬웰이 손을 들었다.
플랑드나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찬란한 성력이 뻗어 나오더니.
파창창!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외곽의 침식 지대를 정화해 버렸다.
회색빛 하늘이 사라지고 다시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쥬웰 성녀님!”
사람들이 감동해 쥬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반면, 플랑드나에게는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방금 쥬웰이 보인 한 수로 플랑드나가 문제임이 드러난 것이다.
플랑드나는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아, 아니! 이건…… 무언가 문제가……!”
“문제라, 이상하네요. 성력은 신께서 내리신 건데.”
쥬웰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성력에 문제가 생겼다면 신께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신이 플랑드나 성녀님께 진노한 것일 수도 있으니.”
플랑드나의 얼굴이 파래졌다.
고해 기도를 하란 거였다.
문제는 이런 경우의 고해 기도는 일반적인 때와 달랐다.
신의 진노한 일이니, 신이 분노를 풀도록 모두의 앞에서 공개적인 고해 기도를 하는 게 성전의 규율이다.
끔찍이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일.
그런 일을 하면, 플랑드나의 명성은 바닥에 추락하게 될 것이다.
“그, 그건…….”
“어서요.”
쥬웰이 가증스럽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도 이런 일은 마음이 편치 않지만…… 플랑드나 성녀님이 신의 진노를 사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네요. 상급 사제의 권한으로 명하니, 고해 기도를 시작하세요.”
플랑드나는 지금 쥬웰의 종사제다.
성전의 규율상 상급 사제가 종사제에게 내리는 명령은 강력한 강제력을 지닌다.
플랑드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비참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신이 진노를 풀 때까지 잘못을 구하고, 신의 자비를 구해야 했다.
그것도 모두의 앞에서.
살면서 단 한 차례도 남에게 고개를 숙인 적 없던 플랑드나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모욕적인 일이었다.
‘이번 경우는 내가 성력을 풀어줄 때까지이지.’
당연히 쉽게 풀어줄 생각 없었다.
‘언니가 굴욕당하는 모습을 느긋이 감상하고 있고 싶지만.’
이제는 유스넨에게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쥬웰은 등을 돌렸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전 안의 유스넨 대공께 가볼게요. 다녀올 테니 플랑드나 성녀님은 그동안 고해 기도를 하고 있으세요.”
“쥬, 쥬웰 성녀?”
플랑드나는 황망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정말이었다.
쥬웰은 홀로 침식 내부로 뛰어들었다.
“서, 성녀님?! 기다리십시오! 위험합니다!”
“쥬웰 성녀님을 말려!”
다들 깜짝 놀라 외쳤다.
성기사들이 그녀를 만류하기 위해 쫓아왔다.
쥬웰은 다급히 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막아!’
이곳 침식 공간의 마물은 그녀의 명령에 따른다.
그녀는 지금껏 마물에게 명령해 사람들의 희생을 피했다. 그래서 토벌군은 별다른 인명 피해 없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 마물들이 거칠게 성기사를 막아섰다.
“안 돼! 이놈들 비켜라!”
“쥬웰 성녀님! 안 됩니다! 안쪽은 위험합니다!”
성기사들이 쥬웰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성기사들의 눈에는 한 떨기 꽃처럼 여린 쥬웰이 홀로 위험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여 어떻게든 구하고자 필사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쥬웰은 곤란한 얼굴로 다시금 명했다.
‘반드시 막아! 대신, 사람을 해치지는 말고!’
뀨유?
마물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쥬웰에게 항의했다.
저렇게나 위협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상대를 해치지 말고 막으라니.
너무 무리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단호했다.
‘시키는 대로 따라!’
어쩔 수 없이 마물들은 그 명령에 따랐고, 쥬웰은 홀로 침식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안 됩니다! 돌아오십시오!”
성기사들이 처절히 외쳤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그녀는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했다.
미간에서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한 송이, 두 송이…… 다섯 송이…… 열 송이.
악마화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그녀의 속력도 빨라졌다.
마치 말이 달리는 것처럼.
그리고 새가 나는 것처럼.
이윽고, 쏘아진 화살처럼 그녀가 쇄도했다.
그녀가 지난 자리로 잔상이 남았고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건만 쥬웰의 깊은 초조함을 느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원래 그녀는 플랑드나를 더욱 깊게 모욕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스넨을 향한 걱정 때문에 계획보다 최대한 빨리 일을 빨리 마무리한 것이다.
걱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다치면 혼낼 거야. 아니,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제발. 제발. 다치지 말고 있어. 누나가 가니.’
걱정 끝에.
간신히 유스넨이 있는 곳에 도착한 그녀는 우뚝 굳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푸욱.
흑색 마검이 유스넨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아.’
순간, 쥬웰의 사고가 멈췄다.
유스넨의 가슴을 꿰뚫었던 흑색 마검, 듀란달이 천천히 뽑혔고, 그와 함께 유스넨의 가슴에서 끔찍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유스넨의 몸이 충격으로 한 차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유스넨의 눈동자에서 급속도로 빛이 꺼져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쥬웰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안 돼!”
* * *
아슬아슬했다.
베스윈은 유스넨과 벌였던 일전을 떠올렸다.
유스넨은 2품이란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같은 2품 중에서는 상대가 없을 것 같았다.
과거, 베스윈이 인간이었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네가 무난히 승천한다면, 역대 최강의 대천사장이 될 수도 있겠구나.]
유스넨의 검을 막은 베스윈은 감탄하여 그렇게 말했다.
페리도트가의 인물은 승천 후 다시 품계가 올라간다.
인간으로 살면서 쌓아온 공에 따라 새로운 품계를 받는 것이다.
유스넨은 이미 2품의 품계이니 수명이 다한 후 승천하면 1품 대천사장이 될 가능성이 유력했다.
베스윈이 인간 시절 2품의 품계였다가 초대 황제와 더불어 거대한 어둠을 막은 공로로 승천 후 1품 대천사장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고작 2품 주제에 어떻게 이렇게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지?]
베스윈은 거듭 감탄해 물었지만, 유스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는 오로지 베스윈을 죽이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해 한가로이 대화 따위 나눌 정신이 없었다.
베스윈은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해 시뻘게진 유스넨의 흰자위를 보며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를 향한 마음 때문이군. 그녀를 향한 마음으로 한계 이상의 힘을 내고 있어.]
그렇다.
유스넨은 반드시 베스윈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래서 살아남아, 그녀를 위해 운명에 맞설 생각이었다.
정해진 운명?
웃기지 마라.
순응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잔인한 운명이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다 이겨내고 말 것이다.
그런 다짐으로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거였다.
‘절대 지지 않겠어!’
유스넨의 온 힘을 담은 심판의 검이 베스윈의 심장, 정확히는 핵(核)을 향했다.
핵은 영혼을 이루는 근간.
이 핵이 꿰뚫리면 1품 대악마라도 무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베스윈은 싱긋 웃었다.
[뜻은 가상하지만, 부족하구나.]
심판의 검이 베스윈의 핵을 꿰뚫기 직전.
푸욱!
베스윈의 흑색 마검 듀란달이 유스넨의 가슴을 꿰뚫었다.
승부가 갈린 것이다.
파아아앗!
듀란달을 다시 뽑자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충격에 유스넨의 눈동자에서 급속도로 빛이 꺼졌다.
힘을 잃은 유스넨이 베스윈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 안 돼.’
유스넨은 아찔하게 생각했다.
가슴이 꿰뚫린 끔찍한 고통보다 이 순간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건 쥬웰이었다.
‘내, 내가 이렇게 죽으면 그녀는? 누가 그녀를 구원하지?’
베스윈은 그녀의 운명을 비틀기 위해 유스넨을 죽인다고 하였지만, 유스넨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가 죽는다고 해도 그녀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희망도 없을 것이다.
‘내, 내가 살아야…… 누나를 구할 텐데…….’
하지만 급속도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베스윈의 음성이 들렸다.
[마지막 순간 몸을 비틀어 심장을 피했군. 이번엔 확실히 끝내주마.]
베스윈이 듀란달을 치켜들었다.
그대로 유스넨의 목을 내려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안 돼!”
쥬웰이 비명을 질렀다.
‘누나?’
유스넨은 바닥에 쓰러진 채 멍하니 생각했다.
정신이 혼몽해서인지 지금 나타난 그녀가 누나인지, 쥬웰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아니, 같은 인물이잖아.’
유스넨은 멍하니 생각했다.
‘왜, 왜 울고 있어요.’
저 멀리 나타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울지 마요. 누나가 울면…… 내가 더 아프니…….’
저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데.
손을 뻗어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누나…… 내가 반드시…… 누나를…….’
그게 마지막이었다.
유스넨은 의식을 잃었다.
“안 돼!”
쥬웰은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베스윈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이런, 하필. 타이밍이 좋지 않게 왔구나. 조금만 더 늦게 오지. 한 10초 정도만.]
베스윈은 부드럽게 말하였다.
[금방 끝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지 않겠니?]
이대로 유스넨을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쥬웰은 다급히 눈물을 닦고는 이를 악물었다.
멍청하게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유스넨을 살려야 했다.
‘심장이 뚫린 건 아닌 듯하니, 치료하면 살릴 수 있어.’
한 가지 다행인 건 유스넨이 천사의 피를 각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런 끔찍한 치명상을 입어도 목숨만 붙어 있으면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저 끔찍한 대악마의 손에서 유스넨을 구해야 했다.
“그를 놔줘.”
[흐음.]
쥬웰은 일단 간곡히 부탁하였다.
베스윈은 1품 대악마 중에서도 손에 꼽는 힘을 지니고 있어 쥬웰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최선은 싸우지 않고 베스윈이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아끼는 이야. 제발, 그를 놔줘.”
[…….]
“베스윈, 넌 날 싫어하지 않잖아. 이렇게 부탁할 테니 그를 놔줘.”
쥬웰은 간절히 바랐다.
제발, 베스윈이 이대로 물러나기를.
한 가지 희망을 걸어볼 점은 베스윈이 그녀에게 정체 모를 호감을 지니고 있다는 거였다.
게헨나에서 600년 시절.
베스윈은 유일하게 그녀를 고통 주지 않은 대악마였다.
아니, 도리어 그녀의 고통을 안타까워하였다.
베스윈은 타락한 타천사.
게헨나에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는 처지였기에 그녀를 도와주진 못했지만, 아끼는 건 확실했다.
어쩌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곤란하군. 여기 이자는 그대의 파멸과 연관이 있는 자라서.]
“……뭐?”
쥬웰은 뜻밖의 이야기에 몸이 굳었다.
“유스넨이…… 내 파멸과 연관이 있다니, 무슨 말이지?”
[이자는 네 영혼을 거두기로 예정된 자이다. 신탁에 따라.]
“……!”
쥬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스넨이 그녀의 최후와 맞닿아 있다는 이 이야기는 그녀는 지금 처음 듣는 거였다.
[그러니 그대를 위해서 살려둘 수 없어.]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순간 머리가 복잡하게 꼬였지만, 곧바로 고개를 털었다.
알 수 없는 이야기에 흔들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도 유스넨은 쓰러진 채 피를 흘리고 있다.
그를 구해야 했다.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건가?”
[그래. 그대의 부탁이라도 그건 어려워.]
베스윈이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였다.
“그러면, 어쩔 수 없군.”
쥬웰은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목에서 목걸이를 풀고는 은빛 사슬로 변형시켜 베스윈에게 날린 것이다.
파앗!
은빛 사슬이 베스윈의 몸을 칭칭 묶었다.
[이건 뭐 하는 거지?]
베스윈이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사슬에 묶인 건 베스윈이건만, 도리어 반대의 입장인 것 같다.
베스윈의 눈을 보니 맹수를 마주한 토끼처럼 두려움이 들었다.
하지만 쥬웰은 두려움을 떨치고는 말했다.
“뭘 하는 거긴. 당연히, 이러려는 거지.”
쥬웰은 이번엔 손목에 기다랗고 깊게 상처를 내었다.
파앗!
피가 솟았고, 그 피는 허공에 떠오르더니 곧 하나의 형체를 이루었다.
기다란 붉은 검.
그녀의 마검, 바리사다였다.
쥬웰은 그 끔찍한 마검을 손에 든 채 베스윈을 겨누었다.
“널 죽이겠다.”
베스윈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난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은데.]
“그러면 흰 강아지를 놔줘.”
[그건 곤란하군.]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넌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을 수밖에.”
쥬웰은 서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음성과 다르게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베스윈이다.
게헨나와 에덴을 통틀어 가장 강한 존재 중 하나.
그녀가 아무리 1품 대악마에 버금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베스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특히, 그녀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그녀의 영혼은 산산이 깨진 상태라 가진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즉, 그녀가 지금 베스윈과 맞서려는 행동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유스넨을 위해.
“당장 그에게서 물러나.”
단순한 협박으로 그치지 않았다.
쥬웰의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열 송이, 스무 송이…… 서른 송이. 마흔 송이…….
악마화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그녀는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강대한 힘에 조각난 영혼이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마치 머리가 깨질 듯했다.
아니, 머리만이 아니다. 온몸이, 온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더는 무리이니 멈추라고 외치는 듯한 고통이었지만, 쥬웰은 멈추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예순여섯 송이.
모든 악마화가 피어올랐고, 그리고 쩌억 섬뜩한 소리와 함께 쥬웰의 등에서 영혼의 날개들이 솟아올랐다.
악마의 끔찍한 날개였다.
베스윈과 동일한 품계를 뜻하는 그 여섯 장의 날개를 펄럭이며 쥬웰은 선언했다.
“그에게서 물러나지 않으면 게헨나의 예순일곱 번째 대악마로서 널 죽이겠다.”
* * *
베스윈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힘을 끌어올리는 건 그대의 영혼에 큰 무리일 텐데? 그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5분? 10분?]
“…….”
쥬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난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군. 그렇다고 이자를 살려줄 수는 없으니. 이렇게 하면 되겠군.
베스윈은 은빛 사슬에 묶인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는 악마의 언령을 내뱉었다.
[무거워져라. 영혼의 속박이여.]
그 읊조림과 함께 주변 공기가 변하였다.
갑자기 커다란 중압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력이 강해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니, 이건 단순히 중력이 강해진 게 아니야. 영혼을 짓누르는 베스윈의 권능이야.’
그렇다.
베스윈은 영혼에 커다란 압력을 주는 권능을 발현할 수 있다.
아까 베스윈이 2품 악마 메이란의 얼굴을 짓눌러 터뜨린 것도 그 영혼을 짓누르는 권능을 이용한 거였다.
[지금 그대와 내 거리가 한 10m 남짓 되겠군. 이 압력은 그대와 내 거리가 좁혀질수록 비례해서 올라갈 것이다.]
베스윈은 친절한 설명을 내뱉었다.
[더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 지금 그대가 받는 압력을 1이라고 하면, 내 쪽으로 그대가 1m씩 다가올 때마다 받는 압력이 두 배씩 올라가게 될 것이다.]
베스윈은 쥬웰이 걱정된다는 듯 말하였다.
[반면, 거기에 가만히 있으면 그대가 받을 피해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쥬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베스윈이 한 말처럼 지금 이 자리에서 받는 압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1m 가까워질 때마다 두 배씩.
그러니 10m면 2의 10제곱.
1,024배다.
즉, 베스윈에게 다가가 그를 베려면 지금 받는 압력의 1,024배를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압력을 받으면 내 영혼은 붕괴할 거야.’
그렇지 않아도 산산이 금이 간 그녀의 영혼이다.
그런데 그런 끔찍한 압력을 받으면 결과는 볼 것도 없었다. 산산이 붕괴하리라.
[다시 말하면, 난 그대를 해하려고 이런 압력을 펼친 게 아니야. 도리어 그대와 싸우고 싶지 않아 압력을 펼친 거지. 아까 말했듯, 거기 가만히 있으면 그대는 무사할 거야.]
지금 베스윈이 말하는 바의 뜻은 이러했다.
너에게 해를 입히고 싶지 않으니 그냥 가만히 유스넨이 죽는 걸 보고 있으라고.
절대 따를 수 없는 이야기다.
“내가 네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날 정말 죽일 건가?”
베스윈은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만약 그대가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난 그대를 소멸시킬 것이다.]
“……!”
[사실 난 지금도 후회하고 있거든. 차라리 이전에 그대와 만났을 때 그대를 죽일 걸 그랬나, 하고 말이야. 처음 만났을 때 죽였으면 그대가 주변 이들에게 그런 끔찍한 배신을 당하는 일도, 게헨나에서 그토록 고통당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
쥬웰은 베스윈이 뭘 말하는지 눈치챘다.
과거 에스텔레 시절.
그녀는 베스윈과 만난 적이 있다.
하필 장소도 이곳과 동일했다.
게이볼그 마경 침식 때.
1천 명의 기사가 죽은 그 끔찍한 참사 때, 그녀는 베스윈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베스윈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너에게는 죽음이 자비겠구나.’
그녀는 당시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그때 베스윈에게 죽임당했다면, 그토록 끔찍한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베스윈은 섬뜩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차라리 오늘 내 손에 죽음을 맞는 것도 좋겠지. 선택하여라. 그 자리에서 가만히 이자의 죽음을 지켜볼지, 아니면, 이자를 구하려다가 내게 죽음을 맞을지.]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베스윈이 진심임을 깨달았다. 약 그녀가 유스넨을 구하려고 하면 베스윈은 그녀를 죽일 것이다.
따로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유스넨을 구하기 위해 베스윈에게 다가가는 순간, 1,024배의 압력에 영혼이 붕괴할 테니까.
‘죽는 건 괜찮아. 하지만 만약 내가 여기서 죽으면 복수도 못 하게 돼.’
쥬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목숨 따위 아까울 것 없었다. 어차피 수명도 몇 년 남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복수도 할 수 없다. 원수들은 어떤 고통도 없이 이대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에스텔레, 그년을 저주해 줘.’
‘에스텔레, 그 천한 년과 너를 비교할 수 없어.’
‘이건 널 위한 매질이야.’
‘넌 우리 가문의 도구이다.’
원수들이 떠들던 이야기들이 촤르륵 스쳐 지나갔다.
쥬웰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녀는 절대 복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토록 고통받았으니까. 지금도 이렇게나 아프니까.
반면, 원수들은 아직 어떤 고통도 제대로 겪지 않았다.
쥬웰의 눈이 시뻘게졌다.
고통과 분노로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원수들을 향한 통한의 분루(忿淚)였다.
그런 쥬웰의 모습을 보며 베스윈이 따뜻하게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대신, 이자, 네가 소중히 여기는 유스넨에게는 최대한 덜 고통스러운 죽음을 내리도록 약속하마.]
“닥쳐.”
[흠?]
쥬웰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뚝. 뚝.
처참한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며, 아니, 자신이 눈물을 흘린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채 쥬웰은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였다.
저벅.
앞으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너……?]
쥬웰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닥치라고!”
파차창!
쥬웰의 외침에 주변 공간이 흔들렸다.
그녀가 발하는 강렬한 영혼의 기세에 주변 공간이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기운에 타격을 입은 건 베스윈도 마찬가지였다.
왈칵.
베스윈의 입에서 주룩 피가 흘러내렸다.
[너…… 죽음을 감수하겠다는 거냐? 이자를 위해?]
“…….”
쥬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를 꽉 물고 걸음을 더 내디뎠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영혼을 짓누르는 압력이 점점 강하게 올라갔다.
‘이건 어리석은 선택이야. 다시 생각해 봐.’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복수뿐이잖아. 이런 행동은 지금껏 내 바람과 어긋나는 거라고.’
원수들의 고통! 절망! 몰락!
오로지 그걸 위해 달려왔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왜, 왜 그녀는 지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건가?
그녀는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이윽고, 쥬웰과 베스윈의 거리가 5m 이내로 좁혀졌다.
압력이 본격적으로 커졌다.
지금까지는 그저 무겁게 느껴졌다면 이제는 버티기 버거운 수준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저벅.
그럼에도 쥬웰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뚝뚝 눈물을 흘리며.
무얼 위한 눈물일까?
원수들을 향한 원망?
아니면, 유스넨을 향한 마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향한 연민?
모른다.
영혼을 누르는 힘이 미칠 듯 커지며 더는 온전한 사고가 어려워졌다.
베스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만. 이제 물러나라. 아직은 괜찮지만 더 가까이 다가오면, 영혼에 타격이…….]
“……닥쳐.”
저벅.
거리가 3m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왈칵.
쥬웰은 피를 토했다.
시커멓게 죽은 피였다.
베스윈이 어딘지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만 물러나라고! 더 가까이 다가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 어서!]
쥬웰이 버럭 외쳤다.
“닥치라고!”
단순히 외친 게 아니다.
강렬한 기세의 발산!
그 기세에 직격당한 베스윈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베스윈은 와락 죽은 피를 토했다.
그리고 2m.
그녀의 눈에서 이제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강력한 압력에 눈의 핏줄이 터지며 눈물에 피에 섞여 흘러나온 것이다.
‘……아파.’
쥬웰은 신음을 흘렸다.
고통을 버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영혼을 짓누르는 압력이 끔찍했다.
특히 그녀는 영혼에 금이 가, 이런 영혼에 가하는 타격에 취약했다.
지금껏 당해보았던 어떤 고문보다 끔찍한 고통이 그녀에게 작렬했다.
하지만 문제는 고통이 아니었다.
-멈춰야 해.
순간, 그런 직감이 들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어쩌면 그녀는 이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상념들.
매리엇이 그녀에게 모욕을 주던 장면.
라디트가 그녀를 경멸하며, 매리엇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
플랑드나 언니의 학대.
아버지의 잔혹한 처사 등등.
수많은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당해야 했던 600년의 고통도 떠올랐다.
그녀는 도저히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복수해야 하잖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쥬웰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제대로 어떤 복수도 안 해놓고서.
이런 어리석은 짓을.
‘당장 멈춰야 해. 아직은 돌이킬 수 있어.’
타격을 입긴 했지만, 아직은 괜찮다.
지금이라도 뒤로 물러서면 된다.
‘어서.’
하지만 그 순간.
쥬웰의 눈에 흰 강아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이를 바득 갈고는 또다시 도저히 이해 못 할 행동을 하였다.
걸음을 더 내디딘 것이다.
[그만! 그만하라고!]
베스윈이 외쳤다.
하지만 그가 외칠 필요도 없었다.
쥬웰이 더는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쿨럭. 커억. 컥.”
쥬웰은 연신 기침과 구토를 하였다.
기침과 구토할 때마다 피가 튀어나왔다.
‘아아, 내가 미쳤지.’
쥬웰은 미소를 지었다.
미쳐 버린 걸까?
웃음이 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크게 폭소를 터뜨리고 싶었다.
‘지금 이 미친 짓. 나중에 후회하겠지? 미쳤다고?’
당연히 그럴 것이다.
솔직히 그녀는 지금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이해되지 않았다.
당장 멈춰야 하는데.
왜? 왜? 난 이러고 있지?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걸음을 내디뎠다.
뚜둑. 뚝.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영혼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입과 눈만 아니라 코, 귀에서도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무리.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을 때.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누나, 제가 누나의 남편이 되면 안 돼요?’
어린 유스넨이 수줍게 말하던 장면.
그 순간, 쥬웰은 하나를 깨달았다.
‘지금 이 선택. 미친 짓이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지금 이 행동.
미치도록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유스넨은,
“내 흰 강아지니까!”
그 외침과 함께.
베스윈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거친 피를 토했다.
파차차창!
동시에 베스윈의 힘이 무너져 내렸다.
[너…… 너?]
쥬웰이 피에 범벅인 얼굴로 말했다.
“……끝이다.”
그녀의 마검 바리사다가 베스윈의 심장, 핵을 꿰뚫었다.
* * *
‘안 돼, 누나. 안 돼!’
그때, 유스넨은 뜻밖에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의식을 잃은 상태이긴 하지만 드문드문 흐릿하게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을 위해 그녀가 고통을 겪는 게.
피를 흘리는 게. 아파하는 게.
‘차라리, 차라리 내가…… 내가…… 안 돼!’
피에 젖은 유스넨의 눈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그녀의 고통을 겪고 싶었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미친 듯이 아팠다.
심장을 토막토막 칼로 도려내며 고문하는 것 같았다.
‘제발, 그만. 그만. 으아아아아아!’
하지만 손끝 하나 까닥하여 움직일 수 없었다.
빌어먹게도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스넨은 끔찍한 무력함에 죽고만 싶었다.
‘안 돼. 안 돼. 제발…… 난 죽어도 되니…… 제발…….’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그녀가 외쳤다.
“내 흰 강아지이니까!”
그 외침을 듣는 순간.
유스넨의 사고가 정지했다.
에스텔레가 어린 시절 그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즉, 방금 저 말은 그녀가 에스텔레임을 증명하는 말이었다.
역시나 짐작했던 대로 그녀는 에스텔레가 맞았다.
물론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누나.’
유스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나친 출혈 탓에 다시 유스넨의 의식이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사라지기 전 그는 다짐했다.
‘다시는…… 누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지 않을…….’
* * *
쨍그랑!
최후의 타격을 가한 후, 쥬웰은 검을 놓치고 바닥을 뒹굴었다.
끔찍한 고통이 작렬한 것이다.
“커억, 쿨럭. 컥!”
온몸에서 끝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쥬웰은 편하게 고통에 빠지지도 못했다.
적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베스윈은?’
그때,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안…… 타깝군.]
“……!”
쥬웰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시선을 들었다.
베스윈이 아직도 건재할까 봐 두려웠다.
더는 손끝 하나 까닥일 힘도 없었다. 만약 베스윈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때는 끝이었다.
그리고.
“……!”
쥬웰은 맥이 탁 풀렸다.
베스윈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녀가 가한 일격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것이다.
소멸하는 건 아니다.
[이건 나로서도 타격이 있겠군.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어.]
베스윈은 혀를 차고는 어딘지 안타까운 얼굴을 하였다.
[결국,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운명의 수레바퀴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인가.]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왜…… 마지막에 힘을 거둔 것이지?”
[흐음?]
“마지막 순간. 힘을 거두었잖아.”
압력이 512배에서 1,024배로 상승하는 순간.
그녀의 영혼이 산산이 붕괴하기 직전에 베스윈은 힘을 거두었다.
그래서 쥬웰은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후후.]
베스윈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뜻한 게 아니야. 원래 난 그대를 죽이려 했으니.]
“그런데?”
[하지만 그대를 죽이는 건 역시 안 되더군.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 하긴, 가능할 리가 없지. 난 그대의 충성스러운 기사(Knight)이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베스윈의 눈동자에 아릿함이 깃들었다.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아릿함이었다.
왜 저런 눈빛으로 그녀를 본단 말인가?
쥬웰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의 여왕(Queen)이여.]
베스윈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딘지 모를 처연한 미소였다.
말투도 달라졌다.
그녀가 아닌, 누군지 모를 다른 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당신께……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할 수가 없군요.]
“…….”
지금 베스윈은 다른 이가 된 것 같았다.
쥬웰은 그런 베스윈이 이해가 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있다가 다른 걸 물었다.
“유스넨이 내 영혼을 거둘 거라는 이야기는 무슨 뜻이지?”
베스윈이 원래의 말투로 돌아와 답하였다.
[말 그대로란다. 신께서 그대의 영혼을 거둘 이로 예비한 이가 바로 이 유스넨이다.]
“…….”
쥬웰은 침묵했다.
‘신께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신의 사랑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잔혹한 안배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일단, 나중에 정확히 알아보자.’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오히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머리가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완전히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아 일단 뒤로 생각을 미루었다.
베스윈이 씁쓸히 말했다.
[네게 예비된 운명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역시나 안 되는구나. 운명의 굴레가 이토록 질기다니.]
“…….”
[결국, 저자, 유스넨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베스윈은 유스넨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왜일까?
순간, 베스윈의 눈이 커졌다.
[뭐지?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건가?]
“……?”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쥬웰은 베스윈의 시선이 유스넨을 향하고 있지만, 유스넨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아니란 걸 눈치챘다.
그것보다 고차원적인 것.
“혹시 유스넨의 미래를 엿보고 있는 건가?”
베스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완전히 당황한 음색으로 말하였다.
[말도 안 돼. 설마 저런 미래의 가능성이 있다니? 큭큭.]
“……?”
[물론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큭큭. 믿어지지 않는군. 하지만 이게 정말 희망일지는. 모르겠군.]
베스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방금 베스윈은 유스넨의 미래를 엿보았다.
원래는 유스넨과 그녀와 관련한 미래는 구체적인 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끔찍한 파멸을 맞을 거라는 두리뭉실한 결론만 보였는데, 방금은 뜻밖에 구체적인 미래의 단면이 엿보였다.
놀랍게도 희망이었다.
문제는 너무나 희박한 가능성이란 것이다.
거의 불가능한 희망.
‘희망은 때로는 어떤 고문보다 끔찍한 법이거늘.’
베스윈은 한탄하였다.
결국 이루어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면.
그런 희망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차라리 미리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게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
괜히 ‘희망 고문’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니다.
베스윈은 방금 자신이 엿본 미래가 진실로 희망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내려진 운명을 생각하면 이게 진실한 희망일 가능성은 적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베스윈은 바랐다.
[신이여.]
베스윈의 몸이 완전히 흐릿해졌다.
이제 그는 게헨나로 돌아가 다친 영혼을 치유할 회복기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사라지기 전.
베스윈은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쥬웰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제발, 이 가련한 이를 축복하길.]
베스윈은 실소가 나왔다.
악마 주제에 기도라니.
심지어 베스윈은 세상 그 누구보다 신을 끔찍이 저주한 이 아닌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베스윈은 자신이 엿본 희망이 부디 진실한 희망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사라졌다.
“…….”
그리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쥬웰은 멍하니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고,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하나였다.
유스넨을 살려야 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아.’
비틀.
힘이 빠져 털썩 다시 주저앉았다.
유스넨이 있는 곳까지 걸어갈 힘이 없어 그녀는 팔에 힘을 주어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리고 간신히 유스넨에게 다가가 전력을 다해 성력을 펼쳤다.
파아아아앗!
성력이 깃들며 유스넨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녀의 성력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것. 이런 큰 상처도 치료하는 게 가능했다.
유스넨이 고비를 넘겼음을 깨달은 쥬웰은 맥이 탁 풀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숨은 울음으로 바뀌었다.
“흐윽. 흑.”
‘신께서 그대의 영혼을 거둘 이로 예비한 이가 바로 이 유스넨이다.’
“……몰라.”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의식을 잃고 있는 유스넨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에게서 떨어진 피 섞인 눈물이 유스넨의 얼굴에 떨어졌다.
“넌 내 흰 강아지야.”
왜일까?
그 말을 한 그녀는 더욱더 눈물이 나왔다.
둑이 무너진 듯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와 그녀는 유스넨을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 * *
“쥬웰 성녀님!”
“대공 전하!”
간신히 마물들을 돌파한 성기사들은 마경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설마 성녀님께 문제가 생긴 건?’
‘안 돼!’
토벌군들 모두 쥬웰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혹시나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을까 봐 초조히 달려왔다.
그리고 드디어 침식의 핵에 도착한 끝에 그들은 쥬웰과 유스넨을 발견했다.
“…….”
둘 다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쥬웰이 피에 젖은 채 품에 유스넨을 끌어안고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순간, 성기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우뚝 굳었다.
지켜보는 이의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마침 마경의 울창한 수풀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그들을 비추었다.
마치 둘을 보듬는 듯한 빛줄기였다.
성기사들은 흠칫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성녀님!”
“대공 전하!”
성기사들이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침식 사태가 해결되었다.
* * *
침식의 정복!
그 소식은 제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무려 게이볼그 마경에서 일어난 침식이다.
과거 1천 명의 기사가 희생되었던 곳.
그러니 이번 침식 사태는 온 제국 사람이 주목하고 있었는데, 침식이 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들 크게 환호하였다.
더구나 구체적인 소식이 전해지자 제국은 그야말로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쥬웰 성녀님이 다 해결하셨다고 하더군?”
“정말인가?”
“그래, 타천사 베스윈이 강림하여 광휘의 대공께서 큰 위기에 빠졌는데, 그 위기를 눈치채고 쥬웰 성녀님이 달려가 광휘의 대공님을 구하셨다더군.”
“허어! 그러면 쥬웰 성녀님이 아니었으면 침식 정벌에 실패할 뻔한 거군.”
“그 정도가 아니야. 광휘의 대공님은 물론, 토벌군 전체가 몰살당할 뻔한 걸 쥬웰 성녀님이 구하신 거지.”
“대단해. 정말. 쥬웰 성녀님은 그야말로 에스텔레 성녀님의 현신이야.”
“아니, 이 정도면 에스텔레 성녀님을 능가하는 것 같지 않은가?”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
쥬웰이 에스텔레를 능가한다고.
이전이었으면 불벼락을 맞을 이야기였다.
에스텔레 성녀는 백성들 사이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번에는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동조하는 목소리도 은근히 많았다.
“확실히…… 쥬웰 성녀님이라면 에스텔레 성녀님 못지않을지도. 아, 물론 에스텔레 성녀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무슨 소리인지 아네. 쥬웰 성녀님도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그렇게 백성들은 쥬웰을 칭송하였다.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녀 두 명을 꼽으면 쥬웰과 에스텔레를 꼽을 거라고.
그중 1위를 꼽아야 한다면 그거야말로 세기의 대결이 될 거라고.
“그런데 쥬웰 성녀님은 무사하신 건가? 그 끔찍한 악마가 강림했는데?”
“다치긴 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괜찮으시다고 하더군. 오히려 광휘의 대공 전하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계신다고 해.”
“아직도? 혹시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그분은 쥬웰 성녀님의 두 번째 부군이신데. 문제가 생기면 큰일 아닌가?”
두 번째 부군.
정확히는 두 번째 약혼자이지만 뭐, 백성들은 원래 구체적인 건 잘 모른다.
쥬웰 정도면 당연히 여러 명의 남편을 거느리는 게 맞지 않나?
다들 이런 생각이라 쥬웰이 여러 명의 남편을 거느리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냥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그 악마 베스원이 쓴 듀란달이란 성검에 다쳐 그렇다는군. 의식을 차리는 데 한 열흘 정도 걸릴 거라고 하더군.”
듀란달에는 원래 상대에게 악몽을 선사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유스넨은 상처가 회복되었지만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쥬웰 성녀님 만세!”
“만세!”
온 제국에서 그런 음성이 퍼졌다.
하지만 막상 그 칭송의 주인공인 쥬웰은 얼굴이 좋지 않았다.
* * *
‘문제야.’
쥬웰은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흰 강아지를 어쩌지?’
일단 살리긴 했는데, 베스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유스넨은 네 영혼을 취할 존재이다.’
빛의 심판자로서 어둠인 그녀를 처단할 거란 뜻이다.
‘하아. 도대체 왜.’
쥬웰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가 탄 마차는 환자가 누울 수 있게 특수 제작한 커다란 이송형 마차였는데, 유스넨이 누워 있었다.
“신께서는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러시는 걸까?”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유스넨의 손을 잡았다.
지금껏 숱한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금도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아팠다.
‘내 목숨을 거둘 이가 유스넨이라. 다른 이여도 괜찮을 텐데.’
쥬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 죽음을 맞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하필 그게 유스넨이라니.
‘아니, 당연한 일인가?’
그녀는 악마다.
그러니 광휘의 대공인 유스넨이 악마인 그녀의 목숨을 거두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멍하니 질질 짜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해.’
쥬웰은 굳게 생각했다.
그녀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 있었다.
원한을 갚는 것.
자신에게 어떤 끔찍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더라도 복수만은 반드시 해내야 했다.
‘일단 베스윈이 한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해.’
그녀도 유스넨의 미래를 확인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손가락으로 피를 내었다.
그러자 그 피를 머금은 허공에 시커먼 구멍이 나타났다.
게헨나로 향하는 구멍이었다.
그 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카드를 꺼냈다.
유스넨의 미래를 점치는 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