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Chapter 2-5 데스 발키리의 춤 (2) (12/18)

목차

Chapter 2-5 데스 발키리의 춤 (2)

3막 잿빛 천사

Chapter 3-1 내 흰 강아지

Chapter 3-2 나의 누나 (1)

Chapter 2-5 데스 발키리의 춤 (2)

“단장님?!”

“이놈?!”

록필드 기사단의 기사들이 당황해 외쳤다.

하지만 가장 당황한 건 오펜하임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방금 충돌한 기사단장은 무려 마스터 나이츠였다.

오펜하임이 달의 능력을 써도 쉽게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는데,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이변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기사단장도.

그 밑의 상급 기사도.

오펜하임과 검을 맞대는 순간, 모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오펜하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 일이 아니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순간, 하나의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설마 마왕 옵시디언? 그가 날 돕고 있는 건가?’

마왕 옵시디언.

정체 모를 두려운 마왕.

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종용했으며, 이번 교전이 있기 전에도 본인의 수하를 보내 몇 가지 조언을 하였다.

그 마왕이 지금 반란군을 돕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디서? 근처에 있는 건가?’

오펜하임은 고개를 돌렸으나 마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쥬웰은 여기 없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쥬웰은 이곳에 존재하기도 했는데.

교전이 벌어지는 근처 산.

쥬웰의 ‘권속’이 있었다.

해밀턴이었다.

“으…… 으으.”

해밀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은 궁(弓)을 치켜들었다.

그런 해밀턴의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기이한 흑색 빛이 맴돌고 있었다.

아까 쥬웰의 눈동자에 내려앉은 흑암과 똑같은 빛으로, 쥬웰을 상징하는 ‘흑요석’의 빛이었다.

쥬웰이 먼 거리에서 해밀턴의 눈동자를 빌려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빌린 건 눈동자만이 아니었다.

몸도 쥬웰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 멀리 황궁의 탑에서 쥬웰이 활을 쏘는 자세를 취하자, 해밀턴의 몸이 똑같이 움직였다.

시커멓게 검은 궁이 끼긱 비명을 지르며 시위가 당겨졌다.

‘무, 무서워.’

해밀턴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 검은 궁의 정체는 쥬웰이 건네준 마병.

쥬웰이 자신의 피를 직접 바쳐 소환한 게헨나의 ‘마검(魔劍) 바리사다’였다.

원래는 검의 형태였지만 쥬웰이 원하는 대로 모양을 바꿀 수 있어 활로 바꾼 것이다.

휘익! 피슉!

쥬웰이 해밀턴의 몸을 조종해 궁을 쏠 때마다 실체가 없는 무형의 화살이 쏘아져 나갔고, 기사들이 목숨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난 후일까?

전세가 역전되었다.

기사단을 이끄는 상급 기사가 쥬웰이 쏜 무형의 화살에 모조리 전사한 것이다.

“후, 후퇴해!”

하지만 소용없었다.

하필 록필드 기사단이 진격한 곳은 후퇴가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 마왕이 얼마 전 전언을 보내 이곳을 전장으로 삼으라고 했지. 설마 이런 상황을 예측한 건가?’

오펜하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얼마 전, 혁명군의 진영에 마왕의 수하가 왔다.

얼굴을 가려 정체는 알 수 없었는데, 왠지 야비한 느낌에 주눅 들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때, 마왕의 수하는 이번 교전에 대해 마왕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첫째, 마왕이 그를 도울 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둘째, 대신 적의 수뇌부를 완전히 박멸하라고. 단, 일반 병사는 살려주길 당부하였다.

오펜하임은 그 전언에 착실히 따랐다.

“모두 항복해라! 일반 병사들은 항복하면 죽이지 않겠다!”

그 외침에 토벌군의 일반 병사들이 무기를 버렸다.

“너, 너희?!”

수뇌부, 귀족들이 당황해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오펜하임은 그런 귀족들을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우연일까?

이번 토벌대에 포함된 귀족들은 하나같이 수도에서 유명한 쓰레기들이었다.

모조리 죽여도 전혀 거리낄 것 없는 짐승들.

“모두 쳐라! 저 썩어빠진 놈들을 모두 죽여라!”

그 외침과 함께 쓰레기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자욱한 피가 흘렀다.

* * *

한편, 다시 황궁의 탑.

쥬웰은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무리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손으로 흘린 피 때문이다.

최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죽여 마땅한 이들로 토벌대를 구성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지금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괜찮아. 어차피 난 끔찍이 저주받았으니까.’

이미 끔찍한 괴물이 되었는데 하나의 죄악을 더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애써 생각하려 하였지만, 아니었다.

아팠다.

얼마 전 세실의 원혼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아파하고 있잖아요. 끔찍한 일을 할 때마다 괴로워 영혼이 울부짖고 있잖아요.’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끔찍한 일들을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그 끔찍한 행위들이 그녀의 영혼을 갈기갈기 갉아먹게 되더라도 그녀는 멈춰 설 수 없었다.

“왜…… 왜…… 날 이렇게 만들었어.”

쥬웰의 입에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필, 얄궂게 저 밑의 홀에서 성가가 울려 퍼졌다.

숭고하면서 한없이 웅장하고 거룩한 성가였다.

그 성가가 너무나 거룩하고 찬란해 쥬웰은 결국 한 방울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이런 괴물로 만든 원수들이 원망스러웠다.

* * *

결혼식이 끝난 후.

비보가 전해졌다.

토벌군이 패했다는 소식이었다.

록필드 기사단의 상급 기사 모두.

그리고 함께 종군했던 귀족들 전원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

* * *

추가 토벌대가 소집되었다.

회의 분위기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칼날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필바하의 힘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 같습니다.”

“네, 어쩌면 제국 십검에 준하는 실력자일 수도 있습니다.”

십검.

제국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기사를 뜻한다.

회의장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특히 지난 토벌대를 조직했던 휘란드의 안색은 하얗게 창백해졌다.

가문에 돌아온 뒤 첫 행보였는데 완전히 일이 어그러진 것이다.

아직 잘잘못을 따질 상황은 아니지만 누군가 이번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건 휘란드의 몫이었다.

‘안 돼!’

책임을 피할 길은 단 하나였다.

바로 최종 승전하는 것.

휘란드는 이를 악물었다.

“더 강한 전력을 보내야 합니다.”

휘란드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사파이어 공작가의 대표로 참석한 라디트였다.

라디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염 기사단을 출진시키겠습니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필바하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착각일까?

그렇게 말하는 라디트의 시선이 얼핏 쥬웰을 스쳐 지나갔다.

* * *

가넷가에서도 참전이 결정되었다.

휘란드가 참전하기로 한 것이다.

첫 토벌군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인물이 전장에 가기로 하였다.

쥬웰이었다.

“쥬웰, 네가?”

휘란드는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넌 기사가 아니지 않으냐?”

“성녀로서 병사들을 치료하게요.”

그 말에 다들 걱정 섞인 반응을 보였다.

“쥬웰.”

엔리크가 딸을 염려하는 마음에 딱딱한 얼굴로 나섰다.

하지만 그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을 하는 이가 있었다.

“위험하다.”

뜻밖에도 토른 공작이었다.

“네 간담이 대단함은 알고 있으나 전장은 네 영역이 아니야. 어떤 위험에 휩쓸릴지 모른다.”

다들 쥬웰이 힘없는 여린 영애라고 알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물론 그녀가 괴물인 건 다들 안다. 누구도 그녀를 얕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정치, 사교계에서의 일이다.

전장은 야만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곳이니 아무리 쥬웰이라도 어떤 위험한 일을 겪을지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제가 어떤 답을 할지는 알고 계시죠?”

쥬웰은 싱긋 웃었다.

“성녀로서 가넷의 위상을 드높일 절호의 기회예요. 그런데 위험할지 모른다고 얌전히 집에 있으라고요?”

“…….”

“농담하시는 거죠? 아니면 그냥 보내기 그러니까, 한번 걱정하는 척해보신 거나.”

지극히 쥬웰다운 대답이었다.

쥬웰이 저럴 거야 예상이야 했지만, 절대 딸의 고집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달은 엔리크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런데 토른 공작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예상치 못한 말을 하였다.

“이 할아비가 부탁하니, 다시 생각해 줄 수 없겠느냐?”

부탁.

토른 공작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할아버지?”

“네가 이 할아비를 닮아 강단 있는 건 잘 알고 있다. 네 나름대로 무언가 계획하고 있음도 알고 있고. 하지만 전장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니까…….”

토른 공작은 머뭇거리다가 말하였다.

“이 할아비는 네가 걱정되는구나. 이번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네가 위험할 것 같으니 생각을 바꿀 수는 없겠느냐?”

쥬웰은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

‘설마 진심인 거야?’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그게 토른 공작이다.

그런데 지금 토른 공작은 마치 사람 같았다.

피와 눈물이 흐르는 인간적인 사람 말이다.

‘날 진짜 가족으로 여기게 된 건가?’

‘가족’.

그저 가문의 일원과는 다르다.

애착을 가지고, 정을 나누는 진짜 가족.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지금껏 토른 공작에게는 가문의 일원은 있었어도 ‘가족’은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쥬웰을 ‘가족’으로 여기게 된 것 같았다.

토른 공작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뭐, 나쁜 일은 아니긴 한데.’

토른 공작의 호의는 쥬웰에게 유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쥬웰은 토른 공작에게 다가가 그를 꼭 안아주었다.

“할아버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조심할게요.”

“……고집대로 하겠다는구나. 나쁜 것. 누구를 닮아 이리 고집이 셀꼬.”

“누구겠어요?”

“에잉.”

토른 공작은 툴툴거린 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반드시 조심하여라. 알겠느냐?”

쥬웰은 웃음으로 그 대답을 넘겼다.

순간,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토른 공작과 그녀는 여러모로 닮은 면이 많았다.

원래 서로를 이용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토른 공작은 쥬웰을 가문을 위할 도구로 보았고, 쥬웰도 토른 공작을 복수를 위한 도구로만 여겼다.

그런데 토른 공작이 변했다.

그녀에게 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내게 토른 공작은 어떤 존재인 거지?’

쥬웰은 문득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 * *

2차 토벌군은 빠르게 조직되었다.

쥬웰이 준비할 건 별로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전투에 직접 나서는 게 아닌, 성녀로서 병사들을 위하려고 참전하는 거니까.

시간이 남아 한 곳을 방문했다. 페리도트 대공가의 고성이었다.

전장을 가기 전, 흰 강아지를 보고 싶었다.

“오랜만이네요.”

“……영애.”

유스넨이 그녀를 맞으러 나왔다.

쥬웰은 살짝 놀란 마음이 들었다. 결혼식 때 스치듯 봤을 때는 몰랐는데, 말랐다. 마치 병이라도 앓았던 것처럼. 눈빛도 좋지 않았다.

“아니, 왜 이렇게?”

“그냥…… 별일 아닙니다. 잠깐 몸이 안 좋아서.”

유스넨은 고개를 젓고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미소를 보는데, 왜일까?

쥬웰은 가슴이 울컥 일렁였다.

‘거짓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도 웃는데 아파 보였다.

‘흰 강아지가 아픈 것, 보고 싶지 않아.’

쥬웰은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가 아픈 게 싫었다.

유스넨이 항상 즐겁고 행복했으면 했다.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유스넨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누가…… 그렇게 아프라고 했어요. 내 허락도 없이.”

유스넨은 쥬웰의 그 말이 왠지 기분 좋게 들려 웃음 지었다.

“아프려면 당신께…… 허락받아야 합니까?”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유스넨이 이렇게 훌륭히 성장한 것에 본인의 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런 주장 정도는 괜찮으리라.

“네, 아프려면 제 허락 받고 아프세요. 당신은…….”

내 강아지니까?

순간 쥬웰은 말을 고민했다.

무언가 그럴싸한 말이?

그런데 유스넨이 눈매를 스르르 접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것이니까요.”

“……!”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말에 쥬웰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아닙니까?”

“아니, 그건…….”

“전 당신의 약혼자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

유스넨의 눈빛이 그녀를 담았다.

갈망이 담긴 눈빛이었다.

“전 제가 당신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스넨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닿은 쥬웰의 손을 감쌌다.

쥬웰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져, 유스넨의 가슴을 먹먹하고 따뜻하게 하였다.

유스넨은 그 취할 듯한 따뜻함에 순간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베스윈의 서에 적힌 내용이 뭐라고.

뭘 그렇게 괴로워했단 말인가?

신탁 따위 무시해 버리면 되는 것을.

그가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금 가슴을 간질이는 감정이 너무 좋아, 유스넨은 쥬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좋군요.”

“뭐가요?”

“당신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좋습니다. 너무나. 차마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스넨의 눈동자가 뚫어지라 쥬웰을 바라보았다.

두근.

쥬웰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민망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크게 간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별로 보러 오지도 않으셨잖아요.”

베스윈의 서를 본 후.

유스넨은 충격에 쥬웰을 자주 보러 오지 못했다.

쥬웰을 볼 때마다 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유스넨은 무언가 결심하듯 말했다.

“앞으로는 맨날 보러 가겠습니다.”

쥬웰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어쩌죠? 당분간은 보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흐음?”

“전장에 나가기로 했거든요. 반란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보기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보러 온 거예요.”

유스넨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다른 이들처럼 만류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언가 쥬웰에게 뜻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렇군요.”

“그래서 그러는데.”

쥬웰은 머뭇거렸다.

“징표 안 주세요?”

“아.”

“나 받고 싶은데. 당신에게.”

‘뭐, 내가 위험해질 일은 없지만.’

솔직한 마음은 이 핑계로 유스넨의 물건을 받고 싶었다.

“여기 페리도트가를 상징하는 브로치입니다.”

“……너무 귀한 것 아닌가요?”

쥬웰은 유스넨이 건네준 브로치를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커다란 페리도트가 박힌 브로치였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이건 가문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전혀요. 당신에게 주는 건데 귀하다니요. 가문의 상징물 따위 당신과 비교하면 전혀 귀하지 않습니다.”

쥬웰은 상서로운 녹색 빛으로 반짝이는 페리도트를 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가문의 가보이니 원래는 받기 부담스러운 선물이지만, 브로치에 박힌 페리도트는 유스넨의 녹색 보석안을 떠올리게 했다.

유스넨의 보석안도 ‘페리드토’였으니까.

그래서 욕심을 내어 받기로 하였다.

“알겠어요. 감사해요.”

그리고 쥬웰은 다시 머뭇거렸다.

“이게 다인가요?”

“…….”

쥬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유스넨은 잠시 눈빛을 끔뻑거렸다.

쥬웰은 화악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괜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미쳤지.’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건 징표만이 아니다.

연인…… 의 입맞춤도 있었다.

기사가 전장을 나서기 전, 레이디가 징표를 건네주며 입맞춤을 해주는 건 하나의 관습과도 같은 일.

즉, 쥬웰은 유스넨에게 입맞춤을 요구한 것이다.

‘내가 왜 이런 걸.’

원래 그녀는 이런 유의 신체 접촉을 좋아하지 않았다.

라디트와의 신체 접촉은 끔찍하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오늘따라 유스넨의 유혹적인 붉은 입술을 보니 두근 가슴이 떨렸다.

입을…… 맞추고 싶었다.

흰 강아지와는 괜찮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들었다.

괜히 확 민망한 마음이 들어 쥬웰은 몸을 돌렸다.

“그러면 이만 가볼게요. 다시 볼 때까지 안녕히…….”

다급히 멀어지려는데.

덥석.

유스넨이 쥬웰의 손을 잡았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유스넨의 하얀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긴장한 얼굴.

징표로 쥬웰에게 입맞춤하려는 것이다.

긴장 때문인지 그의 목울대가 꿀꺽 흔들리는 게 보였다.

“생각해 보니 당신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데 브로치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유스넨의 눈동자가 쥬웰을 강렬히 담았다.

두근.

쥬웰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유스넨의 가슴도 미친 듯 뛰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징표로 입을 맞추어도 괜찮겠냐는 물음이다.

쥬웰은 유스넨의 팔뚝을 강하게 잡았다.

긴장을 풀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손으로 유스넨의 단단한 근육의 감촉이 느껴지며 더욱 긴장하게만 되었다.

“……그런 것 묻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랬지요.”

하지만 유스넨은 쉽게 그녀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감히 그녀에게 입을 맞추게 되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에 아득한 마음이 들며 긴장한 것이다.

그렇게 유스넨이 머뭇하자, 쥬웰은 입이 말랐다.

긴장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다.

갈증 섞인 긴장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쥬웰은 말했다.

“어서 해주세요.”

그리고 유스넨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고.

아득한 긴장감에 눈을 질끈 감았는데.

입술이 쥬웰의 뺨에 닿았다.

그러니까…… 뺨에.

“…….”

쥬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야? 뺨에 하는 거였어? 내가 애기야?’

당연히 입술에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뺨이라니.

……뭘까. 이 아쉬움은.

반면, 유스넨의 뺨은 달아올라 있었다.

뺨에 하는 입맞춤만으로도 터질 듯한 심장을 주체하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매혹적으로 생겼지만 유스넨은 여자 경험이 전무했다.

그에게는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따라서 이런 입맞춤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반응은 그가 입맞춤 경험이 전무한 조신 숙맥남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니까.

감히, 닿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그런데 입을 맞추었다.

유스넨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꼭…… 무사 귀환…….”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어려운지, 유스넨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결국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여우니까 봐준다.’

지금 뺨에 한 입맞춤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리는 유스넨의 모습은…… 어릴 때 흰 강아지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아쉬운데.’

쥬웰은 유스넨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어루만졌다.

뜨거웠다.

라디트 때와 다르게 전혀 싫지 않았다.

도리어 갈증이 났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네, 무사히 돌아올게요. 그런데.”

팔을 뻗어 유스넨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살짝 그녀 쪽으로 당겼다.

“……!”

유스넨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서로의 눈이 서로를 담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심장이 서로에게 여과 없이 비쳤다.

쥬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발의 뒤꿈치를 들었다.

그러자 둘의 얼굴이 더욱, 화악 닿을 듯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졌다.

심장이 타버릴 것같이 뜨거워, 쥬웰은 달아오른 음성으로 말하였다.

“아까 제대로 못 하신 것 같아서요. 무사 귀환을 위해서는…… 더 제대로 입맞춤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저도…… 허락받지 않아도 되죠?”

“……!”

유스넨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그대로 유스넨의 입술을 훔쳤다.

‘아.’

말캉한 감촉과 함께 찰나 정신이 아득해졌다.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일순간, 사고가 멈추며 몸의 감각이 확 한쪽으로 쏠렸다.

화상을 입은 듯 뜨거웠고 동시에 미칠 듯 애달팠다.

그렇게 서로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짧지만, 아득한 입맞춤이었다.

쥬웰은 더는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이제는 완전히 사과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건 유스넨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유스넨은 더 심했다.

뻣뻣이 굳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이대로 기습 공격하면, 100% 이길 수 있을 것같이 모든 정신이 해제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면…… 저 정말 갈게요.”

“……쥬웰.”

하지만 그녀는 듣지 않고 마차로 멀어졌다.

“…….”

유스넨은 여전히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내가…… 꿈을 꾼 건가?’

그는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득한? 황홀한?

그가 아는 세상의 단어로는 감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잔상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굳어 있었을까?

그의 정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슬슬 정신 차리시지요.”

“…….”

메디안 백작이었다.

그가 못마땅한 눈으로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첫 입맞춤이라고 해도 너무 좋아하시는 것 아닙니까? 천연기념물인 것 티 납니다.”

그 놀림에 유스넨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그녀이기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그녀가 아니라면 그가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일 리도 없으리라.

아니, 거부감에 역겨움만 느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유스넨은 자신에게서 느껴진 반응에 한 가지 사실을 재차 깨달았다.

‘역시, 그녀는…….’

입맞춤하고 나서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에스텔레가 아니었다면, 그가 방금 같은 느낌을 받았을 리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유스넨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요동을 쳤다.

그녀와 입맞춤을 하다니.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녀를 10년이 넘게 그리워하고 바라왔지만, 이런 유의 상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상상으로도 그녀를 욕보일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런데 내가 그녀와 입맞춤을…… 입맞춤을…….’

유스넨은 멍하니 거듭 아까 일을 떠올렸다.

방금 입맞춤 때 느꼈던 감각이 떠오르며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오색찬란하게 그의 정신을 어지럽혔고, 결국 메디안 백작이 성질을 내었다.

“그만 좀 하십시오.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백작, 솔로였습니까? 사귀는 영애 있었던 걸로?”

“차였습니다! 맨날 일만 한다고!”

당신 때문이잖아! 이 나쁜 상사야!

메디안 백작은 버럭 하려다가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다.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쁜 상관을 만난 자신의 죄였다.

“……그런데 도대체 징표니 무사 귀환 기원이라느니…… 그런 건 왜 한 겁니까?”

메디안 백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전하, 어차피 전장에 따라갈 것 아니었습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죠. 짐을 다 싸놓지 않으셨습니까?! 심지어 대법관 직인은 제 방에 올려놓고!”

메디안 백작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빽 외쳤다.

그렇다.

유스넨은 이번에 쥬웰을 따라 전장에 갈 예정이었다.

그래놓고 징표니, 무사 귀환 기원 입맞춤이니…… 난리를 친 것이다.

메디안 백작은 기가 차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입니까? 광휘는 전쟁에 참여하면 안 되는 것 모르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쟁에 참여할 생각 없으니. 아니, 애초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가는 겁니까? 쥬웰 남작을 스토킹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유스넨은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녀의 뒤를 졸졸 몰래 따라다닐 생각이니까.”

그의 천사의 은신 능력을 쓰면, 쥬웰에게 들키지 않고 뒤를 밟을 수 있었다.

“……그렇게 따라다니는 것 범죄인데요. 아무리 대법관이라도 범법 행위는. 그리고 그런 집착남 요즘 트렌드에 안 맞는 것 아시죠? 요즘 로맨스 소설 보면 트렌드는 조신남입니다.”

“……전 조신한데요.”

맞는 말이라 메디안 백작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유스넨은 조신남이었다. 그것도 매혹적으로 생긴 주제에 여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뭔가 지는 것 같아 메디안 백작은 발끈해 말했다.

“조신하셔도 본인의 일에 충실 안 하잖습니까?! 상대에게 빠져 본인의 일에 충실하지 않아도 매력 없습니다!”

하지만 유스넨은 이번에도 지지 않았다.

“제가 충실하지 않다니요.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가 다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요.”

유스넨은 손가락으로 메디안 백작을 가리켰다.

“제 능력은 유능한 수하를 거느린 것. 백작이 한 일은 다 제가 한 일이나 다름없으니, 전 제 직무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메디안 백작은 화병이 나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더 뭐라고 하지는 못했는데, 유스넨이 웃음을 거두고 진중하게 말한 것이다.

“어쨌든 그녀를 따라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유스넨은 딱 잘라 말했고, 메디안 백작은 묘한 얼굴을 했다.

“혹시 쥬웰 남작에 대해 무언가를 느끼신 겁니까?”

천사로서 직감. 즉, 본능적인 예지 능력을 말한다.

“비슷합니다.”

유스넨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뭐라 말하기 모호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불안해. 이번 전쟁 때 왠지 그녀가 커다란 위기를 맞을 것 같아.’

유스넨은 지그시 눈썹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쥬웰이 누군가?

인세에 적수를 찾을 수 없는 강대한 어둠이었다.

그런데 위기라니?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유스넨은 막연한 불안감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무언가 커다란 위협이 그녀에게 다가올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떤 위협이지? 에덴은 아니야. 인과율상 불가능해. 게헨나의 악마도 마찬가지야.’

에덴의 천사나 게헨나의 악마들은 지상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대리자를 세운다.

악마들은 흑마도사를, 천사들은 페리도트가를.

따라서 천사나 악마가 직접 나서는 건 아닐 것이다.

고민해도 어떤 위협인지 알 수가 없어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지켜야 해.’

그렇기에 유스넨은 수호천사처럼 그녀의 주위를 맴돌 작정이었다.

그녀의 곁에 있다 보면, 어떤 위협이 다가오는지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어떤 위협이든, 반드시 지킬 것이다.

‘악마를 지키는 수호천사라.’

유스넨은 문득 웃음이 나왔다.

에덴에서 보면 기가 차다 못해 불벼락을 내릴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이미 결심했다.

그녀를 ‘구원’하기로.

물론 방법은 아직 모른다.

막막하지만, 상관없었다.

반드시 해낼 테니까.

그의 영혼을 바쳐서라도.

‘누나.’

유스넨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과거,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어둠에 잠식돼 혈사를 일으킨 후 모두가 그를 죽이려고 할 때 세상에서 단 한 명, 그녀만이 그를 감쌌다.

덜덜 떠는 그를 강하게 안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젠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지켜줄 거야.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할 거야.’

이제는 그가 그녀를 지킬 차례다.

* * *

그때, 다른 곳에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매리엇과 라디트였다.

“꼭 승전하고 와.”

매리엇이 그의 소매에 직접 커프스를 해주었다.

다이아와 사파이어가 교차하듯 박힌 호화로운 커프스로, 매리엇이 라디트를 위해 직접 주문 제작한 물건이었다.

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기 위한 징표.

물론, 매리엇은 라디트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쥬웰, 그년을 짓밟기 위해서는 네가 이번에 꼭 제대로 된 공을 세워야 해. 알고 있지?”

지금 라디트는 사파이어가의 후계에 불과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만, 부족했다.

쥬웰을 짓밟기엔 말이다.

“네가 전쟁 영웅이 되어야 해.”

단순한 후계가 아닌, 전쟁 영웅.

그게 매리엇이 이번에 라디트에게 바라는 바였다.

쥬웰이 성녀로서 명성을 얻어 큰 힘을 얻었듯, 매리엇은 라디트가 전쟁 영웅으로서 힘을 얻기를 원했다.

“필바하 따위 네게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제 너는 벽을 뚫은 마스터 나이츠니까.”

벽을 뚫은.

그 말에 라디트는 눈썹을 꿈틀했다.

이건 그의 역린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여섯 공작가는 각자 후계 선정 기준이 있었다.

장자? 남녀? 중요하지 않았다.

각 가문이 가장 중요시하는 능력을 지닌 이가 가주가 된다.

가넷은 치열한 권력 다툼으로 권좌에 오를 자격을 증명해야 했으며.

다이아가는 상계의 재능.

페리도트는 강력한 천사의 피를 각성해야 했다.

사파이어는 검의 실력이었다.

마스터 나이츠.

그것도 제국 십검급의 실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라디트는 스물이 넘도록 마스터 나이츠가 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천재적 재능을 보였지만 의외로 마스터 나이츠의 벽을 뚫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스물이 훨씬 넘어 마스터 나이츠가 되는 이는 많다.

하지만 모든 기사의 왕인 사파이어의 가주가 될 이는 그래서는 안 됐다.

덕분에 라디트는 자존심을 구기고 큰 곤란에 처했었다.

그런 그가 벽을 뚫고, 강력한 마스터 나이츠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치고 악마의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

에스텔레를 바친 대가로,

매리엇은 상계의 재능.

플랑드나는 어둠의 성력.

라디트는 오라를 내려받았다.

당연히 라디트가 꺼내기 싫어하는 이야기였다.

스스로의 재능으로 벽을 뚫지 못하고 악마에게 능력을 내려받았으니까.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더 정확한 본심은…… 에스텔레 이야기를 하는 게 싫었다.

그것도 매리엇이.

“…….”

라디트는 물끄러미 매리엇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장미처럼 아름다운 얼굴.

그런데…… 왜일까?

그는 더는 매리엇이…….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난 매리엇을 사랑해.’

라디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더구나 이제 그들은 부부였다.

진정한 하나가 된 것이다.

“라디트?”

라디트가 아무런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자 매리엇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때, 라디트가 깜짝 놀랄 행동을 하였다.

거칠게 매리엇을 끌어안더니, 입을 맞췄다.

매리엇은 눈을 크게 떴다.

평소 라디트는 늘 젠틀해 이런 식의 거친 스킨십은 절대 하지 않았다.

심지어 라디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랑해.”

“……!”

“널 정말 많이 사랑해. 내 목숨보다.”

매리엇은 당황했다.

무언가 라디트가 평소와 달랐다.

하지만 당황은 잠시.

매리엇도 같이 열정적으로 응했다.

“약속해 줘. 쥬웰, 그년을 짓밟기 위해 꼭 승전하고 오겠다고.”

찰나.

라디트는 멈칫했다.

누구도 눈치 못 챌 찰나의 멈춤.

하지만 라디트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할게. 널 위해 승전하고 오겠다고.”

매리엇은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순간, 라디트의 귓가에 하나의 음성이 스쳐 지나갔다.

‘더러운 놈.’

곧, 침실이 달뜬 열락으로 가득 찼다.

거친 숨결과 함께 매리엇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이 라디트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찼다.

그런데 라디트의 머릿속에 이 순간 절대 떠올라서는 안 되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쥬웰이었다.

‘그저 제게 욕정 하는 건 아니고요?’

라디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기 위해 더욱 거칠게 매리엇을 탐닉했다.

매리엇이 놀란 신음을 흘렸다.

“라디트? 아아.”

그 신음을 듣는 순간. 라디트는 번뜩 자신의 진심을 깨달았다.

이 신음이 쥬웰의 것이었으면. 지금 자신에게 안긴 이가 쥬웰이었으면.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쥬웰을 안고 싶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

라디트는 눈을 질끈 감고, 열락에 집중해 매리엇을 거칠게 안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추악했지만.

마치 쥬웰을 안는 것처럼.

* * *

그리고 또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었다.

뜻밖에 에메랄드 공작가. 백조처럼 우아한 미녀, 플랑드나였다.

조각 같은 미남이 플랑드나 앞에 무릎 꿇은 채 그녀의 발을 주물러 주며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부인?”

이 옅은 푸른 머리에 짙은 금안을 지닌 남자는 플랑드나의 남편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죠제프 드 에메랄드.

신전의 성전 기사단의 수장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에메랄드 공작가의 데릴사위로 들어왔다.

“그냥. 내 동생 에스텔레 생각이 나서.”

플랑드나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그녀의 배는 이제 눈에 띄게 부르고 있었다.

“아직,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겁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동생인데.”

죠제프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플랑드나의 손을 잡았다.

“그분의 순교는 당신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도 이제 당신이 슬픔에서 벗어나 행복하길 바랄 겁니다.”

“그럴까?”

“네, 제가 아는 에스텔레 성녀님이라면요.”

죠제프는 굳건히 답했다.

“우리 아이의 이름도 에스텔레로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새로운 에스텔레와 함께 행복해지는 게 그분이 바라는 길일 겁니다.”

플랑드나는 설핏 웃었다.

한 떨기 꽃처럼 처연하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그럴까? 그런데, 나 사실 하나 화나는 일이 있어.”

“무엇입니까?”

“쥬웰.”

뜻밖의 이름이 플랑드나에게서 흘러나왔다.

“속이 시커먼 그 아이가 에스텔레 성녀의 재림이라고 듣는 게 너무 화나. 쥬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성녀 흉내를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

플랑드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반란 때도 분명 위선적인 모습을 잔뜩 보이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속을 거고.”

“…….”

“물론 가넷이니 그런 행동도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동생 에스텔레의 이름을 팔아먹는 것 같아서 화가 나. 내가 속이 너무 좁은 걸까?”

죠제프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생각이지요.”

“차라리 내가 전장에 나설까?”

죠제프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부인께서는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침식에 대비하셔야지요.”

침식.

게헨나가 인간 세상과 겹쳐 수많은 마물이 범람하게 되는 걸 뜻한다.

과거 에스텔레가 숱하게 침식을 해결했듯, 에메랄드 공작가의 성녀는 그 침식에 나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징조가 있지 않습니까? 샤피렌 공이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뜻밖의 이름이 죠제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검제 샤피렌.

마경에서 마물을 상대하고 있는 초월자였다.

마경은 침식을 막지 못해 지상의 땅이 영원히 게헨나의 일부가 된 곳이다.

끝없이 마물이 튀어나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샤피렌 공이 최근 마경에서 처단한 고위 마물이 이런 말을 하였답니다. 곧 지상에 침식이 일어날 거라고. 그것도 굉장히 고위 악마가 그 침식을 주도할 거라더군요.”

죠제프는 긴장하여 말했다.

“게헨나의 모든 대악마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퀸(Queen)이란 별명의 악마라는데, 심상치 않을 것 같습니다.”

플랑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이미 들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제국에는 광휘의 대공이 있으니까.

퀸이란 악마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광휘의 대공 유스넨이 처단할 것이다.

플랑드나는 유스넨이 퀸이란 악마를 처단하면, 뒤에서 안전하게 침식을 해결해 영광을 얻을 생각이었다.

이번엔 쥬웰에게 양보할 생각 없었다.

사람들도 알게 되리라.

진정 위대한 성녀는 쥬웰이 아니라 플랑드라, 라고.

“그래, 걱정하지 마. 신께서 날 지켜주실 거니.”

죠제프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배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평안히 쉬고 계시길. 내가 사랑하는 분이여.”

“아버지께 가려고?”

“네, 법왕 예하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래. 아.”

플랑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비슷한 상태셔?”

죠제프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네, 비슷하십니다.”

“그렇구나. 큰일이네. 어서 기운을 차리셔야 할 텐데.”

순간, 플랑드나의 얼굴에 희미한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를 향한 경멸이었다.

물론, 그 경멸은 찰나에 사라져 죠제프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이후 죠제프는 방을 나섰고, 복도를 걷는데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칼을 벼려 만든 것 같은 서늘한 인상의 미남자.

추기경 리델하트였다.

에메랄드 공작가의 양자로서 신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고 실권자 중 하나.

“추기경을 뵙습니다.”

죠제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리델하트는 인사를 받지 않았다.

차갑게 죠제프를 보더니 누구에게도 안 들리게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눈과 귀가 썩은 새끼.”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죠제프는 얼굴을 굳혔다.

워낙 희미하게 이야기해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욕하는 이야기였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도 리델하트는 죠제프를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시는 거지?’

죠제프는 이해할 수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제법 친한 친우였다.

에스텔레 성녀가 순교한 이후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공유했을 정도이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리델하트가 돌변했다.

마치 원수라도 보듯 죠제프를 적대시하였다.

그래…… 정말 원수를 보는 눈빛이었다.

“왜 그러는 겁니까? 제가 추기경께 잘못한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말해달라고?”

“네, 말해주지 않으면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리델하트는 실소하였다.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그 눈과 귀는 버리는 게 좋을 텐데.”

“……뭐라고요?”

“됐다. 너랑 드잡이할 시간 없으니. 중요한 일이 있다. 수도의 고위 신관들을 모조리 소집해 주도록.”

죠제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게 신탁이 내려왔다.”

“……!”

죠제프의 눈이 커졌다.

신탁!

신이 직접 자신의 음성을 신관에게 내리는 것으로,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당연히 거짓말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까칠하긴 해도 리델하트는 명성 높은 최고위 신관이니까.

더구나 신탁을 거짓되게 일컫는 건, 신의 저주를 받을 일.

어떤 타락한 신관이라도 감히 그런 일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리델하트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신의 저주 따위 두렵지 않다는 듯이.

“이번 전쟁과 관련해 신의 음성이 내려왔다. 어서 사람들을 소집해 주도록.”

그렇게 사람들이 모였고, 갑작스러운 신탁에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

신탁의 내용은 간단했다.

‘환란 때 신의 전사가 강림하리라’.

신의 전사가 직접 전쟁에 임할 거라는 신탁이었다.

* * *

그리고.

또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번엔 수도가 아니었다.

아니, 수도이긴 했지만 수도가 아닌 곳.

수도 위 아득한 창공 위였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 섬이 떠 있었다.

마탑주 라플 공작의 거처이자 연구소였다.

그곳에서 라플 공작이 쥬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히히, 어떻게 입는 게 공주님한테 예뻐 보일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라플 공작은 여러 화려한 연미복을 돌려 입으며 떠들었다.

그런데 기이한 게 있었다.

라플 공작은 평소와 다르게 혼자가 아니었다.

두 명이 있었다.

아니, 이걸 ‘있다’라고 표현해도 될까?

석고가 가득한 통 안에 몸이 갇힌 채 머리 부위만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청년 두 명은 발악하듯 외쳤다.

“머, 멋지십니다!”

“다 멋집니다……! 공작 전하가 무조건 최고입니다!”

“흐음.”

라플 공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 그냥 아무렇게나 답하는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제, 제발…… 살려만……!”

머리만 위로 튀어나와 있는 두 명은 공포에 질려 눈물 콧물을 질질 흘렸다.

둘이 이런 처참한 꼴이 된 이유는 간단했다.

라플 공작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왜?

“너희 아직 별로 반성 안 하는 것 같다? 그냥 몸에서 머리를 분리해 줄까?”

“아닙니다! 쥬웰 성녀님을 욕한 것. 정말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렇다.

이 두 명은 대연회 때 쥬웰을 욕했던 영식들이다.

그때 라플 공작은 둘을 용서하고 넘어가 주는 듯했지만 아니었다.

뒤에서 납치해 이렇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잘하라고. 혹시 알아? 잘하면 내가 풀어줄지. 히히.”

“잘하겠습니다!”

“자비에 감사합니다!”

두 명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흐음. 그나저나 어쩌지?”

라플 공작은 심각한 표정을 하였다.

“요즘 로맨스 소설을 보면, 집착남은 트렌드가 아니던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내가 공주님께 집착할 것 같아서. 내가 집착하면 공주님이 싫어할까?”

두 명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미친놈의 집착을 받는다, 라.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만약 라플 공작이 주인공인 소설이 있다면, 그건 로맨스가 아니라 사이코 호러물일 것이다.

하지만 둘은 이렇게 답했다. 살고 싶었으니까.

“아닙니다! 공작 전하는 세상에서 최고 미남! 집착을 받아도 황홀할 겁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할 겁니다!”

“그래? 히히. 고마워. 그러면 납치도 괜찮을까?”

“……네?”

“납치 말이야. 납치. 데려와서 잔뜩 사랑을 주고, 최고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

둘은 입을 우뚝 다물었다.

저 미친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데려와서 세상에서 최고로 귀한 선물을 주고, 맛있는 것을 먹이고, 예쁜 옷을 입히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라플 공작은 풀이 죽었다.

“이건 역시 그런가? 그래도 나만 그녀를 보고, 그녀도 나만 보게 하고 싶은데. 역시 그건 조금 그렇겠지? 납치는 범죄니까?”

둘은 라플 공작이 원하는 답이 뭔지 몰라 눈치만 보았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납치하면 공주님이 날 정말 싫어하게 될까? 공주님이 날 싫어하게 되는 건 싫거든.”

“그, 그건…….”

“……아, 아무래도. 납치 감금을 좋아하는 이는…….”

그런 범죄를 세상 누가 좋아하겠는가?

특히 상대가 저런 또라이 미친놈인데.

하지만 둘은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라플 공작의 눈동자에서 광기가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납치하면 공주님이 날 싫어하게 될 거란 뜻이야?”

“……!”

“응? 난 납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공주님이 날 싫어할 거라고? 응응?”

덜덜, 둘의 눈이 떨렸다.

그들만이 아니다.

그의 광기에 주변 공간 모두가 진동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라플 공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납치하면 날 싫어하게 될 수도 있겠지.”

“…….”

“어쩌지, 미움받기 싫은데.”

돌변한 라플 공작의 태도에 둘은 울고 싶었다.

미친놈답게 감정이 휙휙 바뀌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라플 공작은 언제 주저했냐는 듯 또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공주님이 날 싫어하게 되어도 감수해야 해. 이건 공주님을 위한 일이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납치가 공주님, 즉 쥬웰을 위한 일이라니?

단순히 미친놈의 헛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라플 공작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이런 말을 덧붙인 것이다.

“납치하려면 공주님을 조금 다치게 하기는 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지. 이건 ‘객관적으로’ 그녀를 위한 일이니까.”

대연회 때, 그는 그녀에게 맹세했다.

그녀를 해치지 않겠다고.

하지만 단서를 달았다.

‘널 위하는 경우가 아니면 내가 널 다치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이건 영혼을 건 맹세. 그러니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문구가 아니었다.

정말 ‘객관적’으로 그녀를 위하는 일에 한해서만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게 가능하단 뜻이다.

즉, 지금 그가 하려는 납치가 정말 ‘객관적’으로 그녀를 위하는 거란 의미였다.

“공주님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어.”

라플 공작은 광기 어린 웃음을 흘렸다.

“내가 공주님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공주님이 그런 운명을 맞는 걸 가만히 지켜보라고? 절대로 싫어. 납치해서라도 그녀를 지킬 거야.”

그의 전신에서 보라색 마력이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섬뜩한 기운.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어. 대신. 납치하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하고 아껴줘야지. 히히.”

그렇게 쥬웰이 모르는 곳에서 위기가 피어올랐다.

최악의 위기였다.

* * *

2차 토벌군은 기세등등하게 진군했다.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당연했다.

무려 ‘적염 기사단’이 출진했으니까.

사파이어 공작가의 직속 기사단은 총 세 개다.

가주가 이끄는 청염.

검제 샤피렌의 백염.

그리고 후계, 라디트가 이끄는 적염.

이 세 개의 기사단이야말로 가히 제국 최강의 기사단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 적염 기사단을 이끄는 라디트의 얼굴은 마치 이야기 속 전쟁 영웅처럼 굳건하고 아름다웠다.

“진군!”

“충!”

라디트의 명에 따라 병력이 움직였다.

기사들은 듬직한 라디트의 모습을 보며 신뢰를 느꼈다.

“라디트 백작님이 직접 나섰으니 필바하도 이제 끝이군.”

“그러게 말이오. 아마 라디트 백작께서 직접 필바하의 목을 치지 않겠소?”

모두 라디트를 믿음직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라디트도 그 신뢰에 보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강력한 기사이자, 신뢰받는 지휘관.

그게 지금 라디트의 모습이었다. 다만 일부가 염려스러운 음성으로 떠들었다.

“그런데 신탁은 도대체 뭘까요?”

“리델하트 추기경이 받은 신탁이니 거짓은 아닐 텐데.”

‘신의 전사가 강림하리라’.

의아할 수밖에 없는 신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애써 좋게 생각했다.

“신의 전사가 필바하를 처단한다는 뜻 아닐까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아니면 라디트 백작님께서 신의 전사가 되신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토벌군은 화기애애하게 떠들었다.

하지만 단 한 명.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는 이가 있었다.

쥬웰이었다.

‘피곤하네.’

그녀는 마차 안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저질 체력이라 먼 거리를 이동하니 피로했다.

‘그래도 라디트가 안 찾아오니 한결 낫네. 찾아와서 치근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리샤크도 없으니.’

지금 그녀는 혼자였다.

아니, 토른 공작이 붙여준 호위 기사들은 있었지만 리샤크가 없었다.

이는 리샤크의 출신 때문이었다.

리샤크는 제국의 손에 멸망한 오팔족의 마지막 후예.

그런 그를 제국군과 함께 전쟁에 참전시키는 건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따라오지 못했다.

어쨌든 리샤크가 있으면 라디트가 와도 잘 막아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라디트가 치근대면 귀찮을 뻔했는데, 라디트는 천만다행으로 쥬웰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아마 결혼 후 매리엇에게 책임감을 느껴 본인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 이번 만찬의 클라이맥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에 괜한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눈이나 감고 있자. 힘들어.’

전장에 성녀로 나서는 거니, 당연히 좋은 마차를 가져오지 못했다.

따라서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는 평민들이나 타는 일반 마차였다. 자리가 불편해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그래도 잠은 푹 잘 수 있으니. 생각보다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유스넨 덕분이었다.

‘흰 강아지가 준 선물 덕에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어.’

쥬웰은 자신의 가슴에 매달린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유스넨이 준 징표로, 볼 때마다 그를 떠올리게 해 마음이 따뜻해졌다.

또한 예상외의 효과가 있었는데 이 브로치를 손에 쥐고 자면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아마, 흰 강아지의 성력이 깃들어 있어서겠지?’

이 브로치는 유스넨이 무려 3년이나 하고 다닌 것이다.

그러니 그의 성력이 자연스레 깃든 것 같았다.

‘정식 성유물이 아니라 성력이 오래 머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악몽에서 해방되는 건 그녀에게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리고 흰 강아지의 자취가 남아 있는 물건이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정화되는 기분.

쥬웰은 브로치를 손에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유스넨이 곁에 있었으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쥬웰은 피식 고개를 저었다.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우스웠다.

하지만 가슴속 감정은 더욱 커졌다.

그가 보고 싶었다.

* * *

밤에 토벌군은 잠시 진격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고, 보초를 서는 병사 말고 다른 이들은 깊은 잠이 들었다.

쥬웰도 마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누구도 눈치 못 채는 사이 한 인물이 마차에 다가왔다.

찬란한 은발.

매혹적인 눈매.

유스넨이었다.

“…….”

사실, 그는 토벌군이 출진했을 때부터 몰래 멀리서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전쟁의 혼란 중 그녀에게 어떤 위협이 닥칠지 몰라 불안해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다만, 천사의 은신 능력을 쓰고 있었기에 누구도 그가 따라오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유스넨은 실소했다.

‘이 은신 능력은 사실 어둠을 은밀히 추적해 격살하기 위한 능력인데.’

그런데 반대로 어둠인 쥬웰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유스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그녀밖에 없었다.

‘아무리 천사의 능력이라도 이렇게 가까이 오면 들킬 수도 있는데.’

유스넨은 고민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가 보고 싶어서.

저 멀리서 자취만 쫓는 게 아니라, 그녀의 얼굴을 옆에서 보고 싶어 충동을 못 이기고 찾아온 것이다.

‘잠깐만. 잠깐만 보고 가면 안 될까?’

유스넨은 갈등했다.

마차에는 창이 있지만,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살짝만 문을 열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가고 싶었다.

유스넨은 그런 자신의 마음에 실소했다.

‘……중증이군.’

그래, 중증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좋은걸.

마음이 이끄니 어쩔 수가 없었다.

유스넨은 자신이 그녀를 봐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그녀가 혹시라도 춥게 자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담요를 덮어주고 갈까? 아직 추우니, 열병에 걸릴 수도…… 아니면, 자세가 불편하게 자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억지로 생각을 짜내는 와중.

마차 안에서 희미하게 이런 음성이 들렸다.

“……유…… 스넨.”

“……!”

유스넨은 흠칫했다.

하지만 그를 눈치챈 건 아니었다.

잠꼬대였다.

그녀가 꿈속에서 자신을 불렀다는 걸 아는 순간, 유스넨의 심장이 쿵 뛰었다.

더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끼익.

혹시나 그녀가 깰까 봐 최대한 천천히 문을 여는데, 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본인이 조심스럽게 여는 탓이지만, 천천히 열리는 문이 야속했다.

어서 빨리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하.”

쥬웰의 얼굴은 본 순간, 유스넨은 탄식을 뱉었다.

쥬웰은 색색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가 선물해 준 브로치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그 모습을 보니, 왜일까?

유스넨은 미칠 듯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억지로 고개를 젓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렇게 자면 춥습니다.”

걱정했던 대로 담요가 밑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찬 바람이 그녀를 때렸다.

“몸도 약하면서.”

최대한 부드럽게 담요를 그녀에게 덮어줬다.

담요에서 보슬보슬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지, 쥬웰은 고양이처럼 한 차례 몸을 떨더니 눈을 감은 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유스넨은 홀린 듯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야 하는데.’

이제 얼굴을 봤으니 가야 한다.

더 머물면 아무리 천사의 은신술을 쓰고 있다고 해도 들킬 위험이 높았다.

하지만 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까?

이대로 영원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고 싶었다.

‘이렇게 집착하는 남자는 인기가 없다고 했는데.’

문득 메디안 백작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 유스넨의 모습이야말로 집착남의 모습 아닌가!

‘……그런데 정말 집착하면 안 되는 건가?’

이렇게 좋은데.

유스넨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제가 이렇게 당신을 바라니…… 당신께 집착하면 안 되겠습니까?”

영원히 그녀만 바라보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를 행복하게 하리라.

그때는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한없이 그녀만 보고, 그녀 옆에만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그런 때가 오기를 바라며, 그는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흐트러진 담요를 다시 제대로 덮어주었다.

그리고 잠시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득 어떤 충동이 들었다.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에 유스넨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미친 듯 뛰었다.

일전 그녀와 입을 맞추었던 감촉이 떠올랐다.

‘그건 안 돼. 아니, 안 되나?’

그때, 쥬웰은 말했다.

원하면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다면 입을 맞추어도 되지 않을까?

더구나 그녀는 전장에 향하고 있지 않은가?

무사 귀환을 바라는 의미로 입을 맞추면 안 될까?

‘……이미 한 번 하긴 했지만, 무사 귀환은 여러 번 빌어줄수록 좋은 거니.’

그런 핑계를 대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다.

유스넨은 솔직하기로 했다. 그냥 그녀가 욕심이 났다.

입 맞추고 싶었다.

천천히, 유스넨의 얼굴이 쥬웰에게 가까워졌다.

아직 닿지 않았음에도 유스넨의 심장이 터질 듯 진동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쥬웰의 입술에 닿았다.

“……!”

유스넨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역시나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득한 감각과 타오르는 듯한 갈증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찔하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은 모자란다는 거였다.

그녀가 허락한다면, 더욱 깊은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유스넨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좋은 꿈 꾸십시오.”

이제 정말 가야 할 때였다.

그는 떠나기 전, 마지막 미련이 남아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제 꿈 꾸시길.”

그 바람이 이루어진 걸까?

유스넨이 떠난 후, 쥬웰은 정말로 유스넨의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의 꿈이 아니었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

아니, 바람. 희망.

그녀와 유스넨이 서로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행복한 꿈이었다.

* * *

하지만 달콤한 행복도 찰나였다.

쥬웰을 비롯한 토벌군은 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전장에 도착하는 순간.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이건…….”

까악.

시체를 파먹던 까마귀가 울었다.

수많은 시체가 나무 꼬챙이에 꽂혀 있었다.

바로 첫 번째 토벌군에 포함되었던 귀족들의 시체였다.

“…….”

그 섬뜩한 모습에 토벌군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유람이라도 떠나온 듯하던 가벼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죽음이 지배하는 전장에 들어왔음을 실감한 것이다.

토벌군을 이끄는 두 지휘관, 라디트와 휘란드는 수많은 시체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한참이나 입을 다물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두 분 모두 전장의 경험이 없으니.’

경험 많은 기사들은 둘의 눈치를 보았다.

라디트와 휘란드 둘은 모두 천재로 불리지만, 그렇다고 전장의 경험이 있는 건 아니다.

처음 보는 전장의 끔찍한 모습에 충격을 받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휘를 해주셔야 하는데.’

‘뭐라고 조언하지?’

이럴 때 경험 많은 부관들이 둘을 이끌어주어야 하지만, 두 명 모두 워낙 고귀한 신분이라 섣불리 조언하면 무례로 느껴질까 다들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어서 시체를 수습하지요.”

쥬웰이었다.

라디트와 휘란드는 흠칫하였다.

그녀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장 경험이 없는 둘과 다르게 그녀는 에스텔레 시절 숱하게 비슷한 광경을 봐왔다.

따라서 시체가 산처럼 쌓인 이런 모습도 익숙했다.

“일부는 시체를 수습하고, 본대는 성에 합류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각하?”

라디트와 휘란드는 이 토벌군의 지휘관이다. 그러니 그녀는 각하란 호칭을 썼다.

“……그렇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라디트와 휘란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 병력만 남고. 모두 투란스 요새로 향한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쥬웰이 마차를 세워 시체들 곁에 남은 것이다.

“쥬웰?”

라디트가 눈썹을 꿈틀했다. 그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물었다.

“뭐 하는 거냐?”

“전 남으려고요.”

“……뭐?”

쥬웰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전 부상병들을 살펴야지요.”

“……!”

쥬웰은 시선을 돌렸다.

요새의 밖에는 시체만 있는 게 아니다.

직전 산발적인 전투가 있었는지, 부상병들이 전장 여기저기 흩어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스스로 거동을 못 할 정도로 다쳐 버려진 이들이다.

저대로 놔두면 모두 죽게 될 테니 살피겠다는 것이다.

“…….”

하지만 왜일까?

라디트는 잠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언가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허락할 수 없어. 위험하다.”

“하지만 저들을 모두 죽도록 놔둘 건가요? 제국을 위해 싸우다 다친 이들인데?”

라디트는 입을 다물었다.

쥬웰의 말이 맞았다.

이대로 놔두면 모두 죽음을 맞으리라.

그렇다고 전장 전체에 뿔뿔이 흩어져 죽어가는 부상병들에게 일일이 구조대를 보내서 성으로 데려올 수도 없었다.

“하지만 네가 위험한 건?”

“위험? 전 성녀예요. 그러니 반란군도 함부로 절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의사와 신관을 건드리지 않는 건 전장의 불문율이다.

그 점을 이용해 전장을 활보하며 부상병들을 살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디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된다.”

“각하.”

“안 된다고!”

라디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는 아차 했다.

주변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디트를 바라보았다.

원래 라디트는 항상 신사적이어서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그런데 저런 모습이라니?

심지어 별반 언성을 높일 만한 일도 아니다.

‘왜 화를 내신 거지? 쥬웰 성녀님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쥬웰 성녀님이 그렇게 걱정되셨나?’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 라디트가 왜 언성을 높인 건지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 쥬웰은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냉정한 척하는 건 그저 위장일 뿐.

지금 라디트의 가슴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쥬웰을 향한 마음으로.

‘더러워.’

숨기지 못한 경멸이 얼굴에 떠오르려는 찰나.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괜찮지 않겠습니까, 백작님?”

“……휘란드 경.”

“쥬웰의 말대로 설마 반란군이 성녀를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쥬웰을 지키기 위한 가넷가의 호위 기사들도 있고 말입니다.”

뜻밖에 쥬웰을 편드는 휘란드였다.

아니, 편이 아니었다.

쥬웰은 휘란드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흉측한 마음을 읽고 피식하였다.

‘내가 전장을 돌아다니다가 반란군에게 습격당하길 바라고 있군.’

라디트 놈이나, 휘란드 놈이나.

웃음이 나왔다.

둘 다 추악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악마가 되어도 죄책감 느낄 필요 없을 테니.’

“성녀인 전 적염 기사단 소속이 아닌, 군부 지휘부의 소속. 지휘부를 이끄는 군부 차관 휘란드 경께서 허락하셨으니,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쥬웰은 마차에서 환자를 치료할 약제와 도구를 담은 커다란 봇짐을 꺼내 따로 준비해 온 커다란 흑마의 등에 실었다.

그리고 안장을 밟고 훌쩍 말에 올라탔다.

이제부터는 마차가 아닌, 직접 말을 타고 움직이며 전장을 활보할 작정이었다.

“그러면 이만.”

구두 뒷굽으로 말의 허리를 차자 놀란 말이 히힝거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기다려 주십시오!”

토른 공작이 붙여준 호위 기사들이 허겁지겁 그런 쥬웰을 따라갔다.

그렇게 멀어지는 쥬웰을 보며 휘란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쥬웰은 알아서 잘할 겁니다.”

천연덕스러운 말에 라디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쥬웰이 잘못되길 바라는 건 아니고요?”

“네?”

라디트의 적개심 섞인 발언에 휘란드는 당황해 반문했다.

물론 휘란드는 쥬웰이 잘못되길 바란다. 후계 경쟁 상대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시비야? 쥬웰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라고?’

하지만 라디트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휙 고개를 돌리고는 외쳤다.

“모두 성으로 들어간다!”

* * *

이번 전쟁은 한 번의 전면전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게 대부분 이들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전면전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토벌군과 혁명군 모두 서로를 탐색한 것이다.

특히 토벌군은 필바하가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전장에는 전면전 대신 자잘한 산발적인 전투가 주를 이었다.

산발적 전투가 벌어지면 전장에는 상처를 입은 부상병들이 바닥에 버려졌다.

원래라면 덧없이 죽어 까마귀의 밥이 되어야 할 이들.

하지만 이번 전쟁은 달랐다.

부상병들이 생긴 곳에 어김없이 한 인물이 등장했다.

커다란 흑마.

드레스가 아닌, 가벼운 기사용 의복.

화살에 대비하기 위한 흉갑.

망토.

그리고 찬란한 흑발. 요요한 적안.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얼굴.

쥬웰이었다.

그녀가 전투가 벌어졌던 참혹한 현장에 나타나 부상병들을 치료해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성녀님. 크흑.”

쥬웰에게 구함받은 병사들이 왈칵 눈물을 흘렸다.

쥬웰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얼굴로 묵묵히 환자를 치료할 뿐이었다.

하지만 부상병들은 그 손길에 한없는 위로를 느꼈다.

마치, 그녀의 무거운 얼굴이 그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는 듯했다.

“당신은…… 우리의 은인이에요.”

그런 그녀에게 하나의 별명이 붙었다.

발키리.

‘신의 전사’란 뜻이다.

말을 타고 부상병들을 위해 달려오는 모습이 너무나 숭고하고 강인해 보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혹시 신탁의 신의 전사는 쥬웰 성녀님을 뜻하는 것 아닐까?’

많은 이가 그런 생각을 하였다.

파앗!

쥬웰은 성력으로 마지막 부상병을 치료하고는 자신을 따르는 호위 기사들에게 말했다.

“치료한 병사들을 성으로 옮겨주게.”

“알겠습니다, 아가씨.”

호위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토른 공작이 붙여준 기사들은 뜻하지 않게 쥬웰이 치료한 병사들을 이송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쥬웰을 지켜야 하니 곁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지만, 감히 일개 평기사 주제에 쥬웰의 위압감 어린 명령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무엇보다 반란군도 성녀인 쥬웰을 절대로 건드리려 하지 않아, 기사들은 호위 임무보다 치료한 병사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하는 데 주력했다.

“난 반대편 전장으로 가 있을 테니 병사들을 옮긴 후 그쪽으로 오도록.”

“네.”

그렇게 기사들을 모두 보내고 홀로 다음 전투 현장으로 달려가려고 말에 올랐는데, 문득 그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군.’

지금 성녀의 모습은 가증스러운 위장일 뿐이다.

‘클라이맥스가 얼마 남지 않았어.’

그때, 듣고 싶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쥬웰.”

라디트였다.

마침 근처를 왔다가 쥬웰과 마주한 것이다.

라디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고생하는구나.”

“네.”

쥬웰은 짧게 답했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이라도?”

더 대화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라디트는 망설였다.

사실, 그는 쥬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널 원해’.

스스로가 생각해도 추악한.

절대로 꺼낼 수 없는 말.

하지만 라디트는 그녀를 향한 갈망을 점점 더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외면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더욱 커지기만 하였다.

“……나는.”

그렇게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는 라디트를 보며 쥬웰은 조소했다.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참자.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어. 저 역겨운 모습도.’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말의 고삐를 돌리려는데, 문득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떠올라 충동적으로 물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형부?”

“……말해라.”

“그날의 일을 후회하나요?”

“……!”

라디트의 얼굴이 굳었다.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친 날을 말했다.

“형부는 에스텔레 언니를 사랑했잖아요. 그런데 당시의 일을 후회하지 않나요?”

라디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동요하는 것이다.

“나…… 난…….”

그런 라디트의 모습에 쥬웰의 가슴이 더욱더 가라앉았다. 마치 심연처럼.

‘당연히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겠지? 라디트의 성격상?’

쥬웰도 라디트가 그렇게 답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곧 있을 복수가 훨씬 통쾌할 테니까.

그런데 라디트가 믿을 수 없는 답을 하였다.

“……후회해.”

“……!”

라디트가 질끈 눈을 감았다.

감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회해. 미치도록. 시간을 돌리고 싶을 만큼.”

뚝. 뚝.

라디트가 흘린 눈물이 땅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만약 다시 기회가 돌아온다면…… 난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야.”

그 모습을 본 쥬웰은 멍한 얼굴을 했다.

‘……후회한다고?’

도대체 이 대답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어떤 마음을 느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쥬웰은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휙 말을 미친 듯이 달렸고, 이윽고 홀로 있는 곳에 도착하자.

쥬웰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하!”

광소였다.

너무 우스워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 * *

다음 날.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전면전이 펼쳐진 것이다.

“개문!”

투란스 성의 문이 열리며 도개교가 내려왔다. 제국군이 성을 나와 앞에 포진하였다.

건너편에는 필바하, 아니, 오펜하임이 이끄는 혁명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양측 모두 모든 전력을 동원해 전면전, 회전(會戰)을 벌이려는 것이다.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이번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리라.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오펜하임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사기는 혁명군이 높았다.

그들에게는 사명감이 있었으니까.

썩은 여섯 공작가를 징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사명감이.

하지만 객관적인 전력은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솔직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야.’

오펜하임은 신음을 흘렸다.

제국군.

그중 정 가운데 포진하고 있는 기사단을 보았다.

붉은 불꽃에 휩싸인 사파이어의 문장.

적염 기사단이었다.

명실상부 제국 최강의 기사단 중 하나.

특히 그들을 이끄는 건 제국 십검 중 하나인 라디트 백작이었다.

그 기사단이 돌진하면 오합지졸 혁명군은 단번에 무너지리라.

‘하지만 이겨야 해. 안 그러면, 절대 여섯 공작가의 세상을 끝낼 수 없어.’

만약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혁명군은 제국 남부의 3할을 얻을 수 있다.

여섯 공작가를 위협할 당당한 하나의 세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패하면 모든 희망은 끝이었다.

‘그래도 믿을 구석이 있으니.’

오펜하임은 힐끗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다.

전신 갑주로 무장한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마왕의 수하였다.

마왕이 혁명군을 도와주기 위해 수하를 따로 보내놓은 것이다.

“믿겠소.”

“그…… 그……! 나, 나는……!”

그런데 갑주로 얼굴 및 전신을 가린 수하의 반응이 이상했다.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마치 싸움에 나서길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착각이겠지. 마왕의 수하가 전투를 무서워할 리가.’

오펜하임은 자신의 의구심을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갑주 안으로 느껴지는 인상은 비열하고 만만하고, 약하고 겁 많아 보이긴 하지만…… 그것도 착각이겠지.’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철제 투구 안에 숨어 있는 마왕의 수하는 다름 아닌 해밀턴이었으니까.

비열하고, 만만하고, 약하고, 겁 많다는 건 모조리 맞는 판단이었다.

해밀턴은 철제 투구 안에서 곧 있을 전투가 겁이 나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무, 무서워! 으아아! 내가 왜 전투에 나서야 하는 건데!’

그의 주인, 쥬웰은 명했다.

전장에 나서 혁명군을 도우라고.

물론 의아할 수 있는 명령이었다.

알다시피 해밀턴은 약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쥬웰은 방법을 내었다.

-키킥. 키킥. 피를. 피를 줘…….

섬뜩한 음성이 해밀턴의 영혼에 전달되었다.

해밀턴은 잔뜩 겁먹은 눈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투박한 대검을 바라보았다.

바리사다(Balisada).

쥬웰이 직접 피를 바쳐 소환한 마검이 해밀턴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다.

이제 전투가 벌어지면, 저 마검이 해밀턴의 몸을 대신 차지해 피의 축제를 벌일 것이다.

-어서. 어서. 피를.

‘으아아. 싫어. 무섭다고. 저런 끔찍한 마검이 내 몸을 지배할 거라니.’

참고로 저 마검은 오로지 피만 갈구한다.

즉, 자신이 차지한 몸의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다칠 수도 있었다.

그 문제를 따지니 쥬웰은 쿨하게 답했다.

‘걱정하지 마. 불사의 저주를 걸어줄 테니 아무리 다쳐도 안 죽을 거야. 목만 잘리지 마. 붙이기 힘드니.’

‘나빠! 이 악마! 자기 몸 아니라고!’

해밀턴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쥬웰의 노예. 선택 사항은 없었다.

그때, 전면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중군 진군!”

제국군이 진격을 시작한 것이다.

필바하, 아니, 오펜하임도 검을 치켜들었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오늘 새 하늘이 열릴 것이다!”

“와아아아!”

해밀턴도 속으로 외쳤다.

‘아악! 무서워! 살려줘! 죽기 싫어!’

그렇게 수많은 이의 운명이 바뀌게 될 회전이 시작되었다.

* * *

끼룩.

죽음의 냄새를 맡은 걸까?

까마귀가 몰려들었다.

한 병사가 왈칵 배에서 피를 쏟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 아…… 제…… 제발 살려줘…….”

하지만 누구도 그를 돌보지 않았다.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병사의 눈에서 점점 생명의 빛이 꺼졌다.

까마귀들은 곧 있을 만찬을 기대하며 더욱 섬뜩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까마귀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 인물이 병사에게 다가간 것이다.

다친 이들을 위한 전장의 발키리.

쥬웰이었다.

그녀가 병사에게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서, 성녀님…… 살려주세요…….”

쥬웰은 가만히 병사를 살폈다. 그러곤 고개를 저었다.

늦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살릴 수 없었다.

대신, 말했다.

“기도해 주겠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병사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하지만 발악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신이 가망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이…… 이걸 제 가족에게…….”

병사는 피에 젖은 물건을 쥬웰에게 건네주었다. 칼로 조각한 목제 장난감이었다.

“제…… 제 딸에게 주려고 만든 건데…… 부…… 부탁드려도…… 될지…….”

감히 쥬웰에게 이런 걸 부탁해도 될지 몰라 망설이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에 매달린 보자기를 열어 보였다.

비슷한 물건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지금껏 그녀의 치료를 받다가 죽은 병사들에게 부탁받은 물건들이었다.

“내가 높은 사람인 건 알고 있겠지? 내가 전달 안 하고 밑의 사람 시킬 테니 부담 안 가져도 되네. 어느 마을 출신이지?”

그 말에 병사는 옅게 미소 지었다.

“제 고향은…… 칸트란 마을로…… 감사…… 감사…… 합니다…… 당신 덕에…… 편히…….”

그 말을 끝으로, 툭 병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쥬웰은 무심히 성호를 그었다.

가련히 죽은 이의 축복을 기원하는 신관들의 성호였다.

그때, 한 무리의 기사가 쥬웰이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피에 젖은 혁명군의 기사들이었다.

쥬웰을 적으로 오해하고 달려온 것이다.

“누구냐?!”

“죽여라!”

다들 전장의 광기에 젖어 다짜고짜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쥬웰을 알아본 이가 화급히 동료를 만류했다.

“안 돼! 쥬웰 성녀님이셔! 멈춰!”

“발키리?”

혁명군의 기사들은 흠칫하였다.

지난 시간, 쥬웰은 비단 제국군의 병사들만 치료한 게 아니었다.

혁명군의 병사들도 가리지 않고 치료했다.

물론 적군을 치료하는 건 이적 행위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었지만, 누가 감히 가넷인 쥬웰을 비난하겠는가?

쥬웰은 남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를 치료했고, 덕분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깊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혁명군의 기사들은 쥬웰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신께서 당신을 축복하길, 위대한 성녀시여.”

짙은 진심이 느껴지는 경의였다.

비록 적이지만 쥬웰은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위대한 이였으니까.

혁명군의 기사들은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이후, 만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국군이든 혁명군이든 모두 쥬웰에게 경의를 표하고 사라졌다.

그렇게 수많은 비명과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이었지만, 쥬웰이 서 있는 곳만은 예외였다.

성역.

그녀가 서 있는 곳만이 숭고하게 빛났다.

“당신은…… 진정한 성녀이십니다.”

쥬웰에게 치료받던 한 병사가 감동하며 말하였다.

하지만 쥬웰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모두 그녀를 숭고하다 여겼지만 아니었다.

‘지금 내 이런 행위도 단순한 선의 때문이 아니니까.’

그녀가 이렇게 병사들을 살리려 매달리는 건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찬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대의 죽음을 축복하니…….”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레퀴엠이었다.

다만, 곡조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가의 레퀴엠과 희미하게 달랐다.

‘이건 악마들이 부르는 레퀴엠이니까.’

성가의 레퀴엠에서 몇 가지 리듬을 바꾸면, 같은 틀에서 완전히 다른 음악이 된다.

바로, 악마들.

정확히는 타락한 신의 전사들인 ‘데스 발키리’가 적을 죽이며 부르는 섬뜩한 레퀴엠으로 탈바꿈한다.

지금 쥬웰이 부르기에 딱 알맞은 레퀴엠이었다.

“아아…… 성녀님.”

쥬웰이 부르는 레퀴엠을 들은 병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분명 그녀가 부르는 건 악마의 노래였건만, 듣는 사람들은 도리어 깊은 숭고함을 느꼈다.

착각이 아니었다.

쥬웰이 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희미한 빛의 운무가 바닥에 내렸다.

지극히 숭고한 성인이 성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발걸음할 때 피어난다는 ‘빛의 그림자’였다.

쥬웰은 자신에게서 일어난 성스러운 현상을 보며 실소했다.

‘빛의 그림자라니. 이건 무슨 의미이지.’

기도할 때 피어나는 성스러운 운무, 빛의 그림자 같은 숭고한 현상은 성자, 성녀가 의도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발현된다.

그녀는 끔찍한 악마의 레퀴엠을 부르고 있건만 이런 성스러운 현상이 나타나다니.

신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곧 저지를 죄악을 눈감아주겠다는 뜻일까?’

어쨌든 중요한 건 아니다.

그녀가 속삭이듯 부르는 레퀴엠이 점점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파아아앗!

살기. 공포. 증오 등.

전장에 가득한 끔찍한 부정적 기운이 그녀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현상.

그렇다.

쥬웰이 지금 레퀴엠을 부른 건.

더 나아가 이렇게 전장을 배회한 건, 단순히 죽어가는 이들을 가련히 여겨서만은 아니었다.

하나의 흑마법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이 레퀴엠은 그저 평범한 안식 곡이 아닌, 강력한 흑마법의 주문이니까.’

그녀는 그 흑마법의 이름을 읊었다.

“데스 발키리의 무도회.”

데스 발키리.

악마가 된, 타락한 신의 전사들.

그 데스 발키리의 힘을 본인의 몸에 강림시키는 흑마법이었다.

파아아.

흑마법이 완성되자 쥬웰의 작은 몸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깃들었다.

바로 데스 발키리의 힘이었다. 전사로서 그 누구와 겨루어도 지지 않을 힘.

쥬웰이 이 힘을 본인의 몸에 강림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직접 피를 봐야 하니까.’

이제 쥬웰은 악마가 되어 전장에 참전할 것이다.

마침 신호가 왔다. 해밀턴의 비명이었다.

-크아아악! 쥬웰 님! 저 죽어요! 적염 기사단 놈들이 자꾸 칼빵을! 아악, 아파! 엉엉. 제발 살려줘요!

힐끗 고개를 돌리니, 해밀턴이 핀치에 몰려 있었다.

아니, 핀치에 몰린 건 해밀턴만이 아니었다.

오펜하임도, 혁명군도 궁지에 몰려 있었다.

‘오래 버텼지.’

전투 초반만 해도 양군은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마검에 지배당한 해밀턴의 분투 덕도 있었고, 무엇보다 적염 기사단이 참전하지 않았다.

라디트와 적염 기사단은 혹시나 혁명군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지 않을까 신중하게 전장을 지켜봤다.

이후, 별다른 게 없음을 확신하고 참전한 것이다.

그 뒤는 일방적이었다.

전열이 무너지고 있으니, 곧 일방적인 학살이 일어나리라.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때가 됐어.’

쥬웰은 발걸음을 옮기며 시선을 돌렸다.

전장에 참전하기 전, 위장을 먼저 해야 했다. 정체를 드러내고 참전할 수는 없으니.

마침, 딱 적합한 게 있었다.

죽어가는 혁명군의 기사였다.

“서…… 성녀님?”

혁명군의 기사는 쥬웰을 알아보고 입을 끔뻑였다.

쥬웰이 나직이 물었다.

“죽기 전 바라는 게 있나?”

“어…… 없습니다. 그저…… 사명을 이루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펜하임을 비롯한 혁명군은 제국의 백성을 위하겠다는 사명 하나로 일어선 이들이다.

그러니 죽어가는 와중에도 사명이 꺾임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 사명 내가 대신 이루어주도록 하지.”

“……성녀님?”

“그러니 편히 쉬도록.”

쥬웰은 성력을 펼쳐주었다.

치료하기 위한 성력이 아니었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곧 기사는 평안한 얼굴로 잠에 들듯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쥬웰은 위장을 하였다.

일단 흑마법을 써서 남들의 시선을 가렸다.

그리고 죽은 기사의 몸에서 갑주를 벗겼다.

마침 죽은 기사의 갑옷은 전신 갑주, 풀 플레이트 아머였다.

얼굴을 비롯해 온몸을 가리는 갑옷.

위장하기에 딱 적합했다.

‘혼자 입기는 쉽지 않은 갑옷이지만, 내게는 예외이지.’

흑마법을 일으켜 갑옷을 해체 후 자동으로 그녀의 몸에 착용하게 하였다.

흉갑, 팔 보호대, 다리 가리개, 등등이 허공을 날아 그녀의 몸에 착용되었다.

마지막으로 투구까지.

전신 갑주로 무장하니, 쥬웰은 그저 한 명의 기사로만 보였다.

쥬웰은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주웠다.

양손 대검, 츠바이 핸더였다.

길이만 180㎝ 이상의, 장정들도 들기 힘들어하는 무구였다.

하지만 데스 발키리는 모든 무구를 만능으로 다룬다.

쥬웰은 능숙하게 그 검을 착검하였고, 죽은 기사의 말에 올라탔다.

그러곤 말의 허리를 찼고, 그대로 전장으로 돌진했다.

“저건 뭐야?”

“웬 놈이지?”

적염 기사단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기운 전투다.

그런데 웬 기사 한 명이 단신으로 돌격하고 있었다.

적염 기사단의 기사들은 별 긴장 없이 돌진하는 기사를 막아섰다.

“죽어라!”

자신들을 막아선 기사들을 본 쥬웰은 지그시 그들을 살폈다.

상대가 지금껏 살아온 선악을 판별하는 악마의 권능, 주시자의 눈을 발현한 것이다.

‘죽여도 되는 놈이 두 명. 죽이면 안 되는 놈이 한 명이군.’

귀족이라고 모두가 악하고 착한 게 아니듯, 적염 기사단도 마찬가지다.

죽여 마땅한 놈이 있고, 착한 이가 있다.

이왕이면 구별해 죽여야 한다.

판별 결과, 앞을 막아선 세 명 중 두 명은 게헨나에 떨어질 놈이다. 지금껏 살며 여러 죄악을 저지른 놈들.

반면, 한 명은 올곧게 산 이다.

그 판별에 따라 곧바로 검을 움직였다.

파아아아앗!

피가 튀어 올랐다.

죽어 마땅한 두 명의 몸에서 피가 솟았고, 올곧게 산 이는 검면으로 후려쳐 말에서 떨어뜨렸다.

해밀턴의 몸을 지배하는 마검 바리사다에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죽여야 하는 이의 피만 보고 올곧게 산 이는 가급적 죽이지 않고 제압하게 말이다.

“아, 아니?!”

순식간에 기사들이 당하자 모두가 경악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쥬웰은 다시금 주시자의 눈으로 전장을 살폈다.

죽여야 할 이.

죽여선 안 될 이가 한눈에 판별되었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갑작스레 전장에 피의 폭풍이 몰아닥쳤다.

아이러니하게 피를 뿌리는 쥬웰의 몸에는 여전히 성스러운 빛무리가 감돌고 있었다.

리델하트가 말한 신탁의 내용처럼, 정말 신의 전사가 강림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 *

한편, 그때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유스넨은 딱딱히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누나.’

쥬웰이 전장에 뛰어드는 게 보였다.

가슴이 덜컥했다.

혹시라도 다치면?

물론 안다.

쥬웰이 전장에 난입한 건 토끼들 사이에 뛰어든 호랑이와 같은 상황이란 것을.

지금 걱정해야 할 건, 오히려 상대측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스넨에게는 전장에 있는 모든 생명보다 그녀의 상처 하나가 더 중요했으니까.

‘……광휘로서 가질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유스넨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는 그녀 말고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직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타천(墮天)하게 될 수도 있음을.

물론 두렵다.

게헨나에서 억겁의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만약 그녀를 위해 그래야 한다면, 기꺼이 하게 되리라.

‘그나저나 이 소식은 뭐지. 퀸이라고?’

얼마 전 급보가 왔다.

침식의 기미가 있으니, 어서 복구하라는 급보였다.

침식은 페리도트 대공으로서 어떤 일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일.

하지만 유스넨은 따르지 않았다.

쥬웰을 위해서였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침식을 주도할 악마의 별명이 퀸이라고.’

퀸(Queen).

의미심장한, 왠지 한 명의 인물이 떠오르는 별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스넨은 이 퀸이란 별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크아아악! 퀸!’

일전, 수도 근처에서 침식이 있었을 때.

쥬웰이 어둠의 존재임을 처음 알아차렸을 때였다.

그때 쥬웰은 홀로 침식을 해결했고, 상대 악마는 쥬웰을 ‘퀸’이란 호칭으로 불렀다.

‘……어쩌면, 이번에 일어날 침식은 그녀가 주도하는 것일지도.’

유스넨은 침음을 삼켰다.

그녀의 어둠의 격은 어마어마했다.

사실, 유스넨은 그녀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가늠되지 않았다.

2품 천사의 격을 지닌 그가 가늠 못 할 정도이니, 어쩌면 그녀는 1품 대악마에 비견할 만한 격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대악마로서 충분히 침식을 주도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벌이는 일이라면…… 최악의 결과는 일어나지 않겠지.’

유스넨은 쥬웰을 잘 안다.

그녀는 악마다.

하지만 어떤 성인보다 숭고했다.

지금 전장의 모습만 봐도 그러했다.

유스넨도 주시자의 권능과 비슷한 심판의 권능이 있었다.

따라서 보였다.

끔찍이 피의 폭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녀의 검은 오로지 악인들의 피만 뿌리고 있다는 것을.

선한 이가 가로막으면 죽이지 않고 적당히 제압하는 선에서 그쳤다.

세상에 어떤 악마가 저렇게 한단 말인가?

지금 쥬웰은 악마라기보다는 악한 이를 처단하기 위해 내려온 신의 전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니 곧 있을 침식이 그녀가 일으키는 거라면, 최악의 결과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선에서 그치겠지.’

유스넨은 그리 짐작했다.

그는 도리어 다른 면에 주목했다.

‘어쩌면…… 이번 일로 그녀의 정체를 확실히 알게 될지도.’

아마 이번 침식 사건이 진행되며, 그녀의 정체와 관련한 명확한 증거를 얻게 될 것이다.

유스넨은 이번 침식 사건을 겪으며 그녀와 관련한 모든 의문이 사라지리란 직감이 들었다.

‘누나.’

유스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두근, 가슴이 뛰었다.

“……!”

유스넨은 돌연 눈을 번뜩 떴다.

갑자기 섬뜩한 불길함이 등줄기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지금껏 자신이 느낀 불길함, 쥬웰을 위협하는 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 인물이 허공에 나타난 것이다.

광기가 깃든 보랏빛 눈동자.

섬뜩하게 넘실거리는 마력.

라플 공작이었다.

그가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안녕? 넌 왜 여기 있니? 베스윈이 남긴 가증스러운 핏줄아.”

그가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설마, 너 신탁에 따라 우리 공주님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 * *

얼마나 검을 휘두른 다음일까?

전장이 고요해졌다.

적염 기사단의 기사들은 쥬웰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두려움에 질린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 최강의 기사들이 두려움에 질리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쥬웰이 보인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이건 쥬웰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일부러 요란하게 손을 썼지. 효과가 있군.’

쥬웰은 악한 이를 베며 피를 뿌릴 때, 최대한 요란한 모습을 연출했다.

상대를 두려움으로 압도해 빠르게 전투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적염 기사단의 기사들은 이제 감히 쥬웰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그리고 요란하게 피를 뿌린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넌 누구냐?”

하얀 갑주를 입은 아름다운 남자가 멀리서 나타났다.

라디트였다.

라디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쥬웰이 이 모든 일을 꾸민 목적은 단 하나였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녀는 전장에서 직접 라디트를 응징할 계획이었다.

“대답할 생각은 없나 보군. 죽어라.”

파아앗!

라디트의 검에서 오라가 피어올랐다.

제국 십검의 위명에 걸맞은 강렬한 오라였다.

반면, 쥬웰이 든 양손 대검, 츠바이 헨더는 투박하기만 했다.

하지만 적염 기사단의 기사들은 저 투박한 츠바이 헨더가 얼마나 강한 위용을 보이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기사가?’

‘설마…… 신탁의 신의 사자가 저 기사인 건 아니겠지?’

적염 기사단은 쥬웰의 몸에 깃든 빛무리를 바라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신은 그들의 편일 것이다.

그때, 라디트가 말의 허리를 찼다.

그가 쥬웰에게 돌격했다.

그리고 쥬웰도 동시에 라디트에게 돌진했다.

서로가 교차했다.

검광이 번뜩였다.

* * *

유스넨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라플 공작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그녀를 죽일 거라니?”

“어? 너 몰라? 베스윈이 남긴 신탁 못 봤어?”

라플 공작은 고개를 기우뚱했다.

“분명 너에게 남긴 신탁인데. 이제 봤을 때가 됐는데?”

유스넨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봤다.

하지만 라플 공작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를 죽일 거라니?

“신탁의 내용을 아나?”

“당연히 알지. 나랑 베스윈 친구야. 그것도 되게 친했어.”

페리도트가의 시조인 베스윈은 초대 황제를 도와 거대한 어둠을 막고 제국을 세운 건국 영웅.

마찬가지로 건국 영웅인 라플 공작과는 친구였다.

“신탁의 뜻이 정확히 뭐지?”

“뭐긴 뭐야? 내용 그대로지.”

라플 공작이 기이하게 눈을 번뜩였다.

“네가 공주님의 영혼을 취해 영광을 얻게 된다는 거야.”

“……!”

영혼을 취한다는 것은 어둠을 처단한다는 걸 뜻한다. 즉, 그가 쥬웰을 죽이게 된다는 것이다.

유스넨은 이를 악물었다.

“웃기지 마. 내가 그럴 리가…….”

“흐음. 히히.”

라플 공작은 뜻 모를 웃음을 흘렸다.

“운명이란 게 그렇게 쉽게 피할 수 있는 거면, 내가 미치지도 않았겠지.”

“뭐?”

“애초에 네가 13년 전, 그때 죽지 않고 지금껏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증거야.”

유스넨은 눈을 끔뻑했다.

13년 전.

그의 몸에 베스윈이 강림해 페리도트가의 혈족들을 모조리 도륙한 사건을 뜻한다.

라플 공작은 히히 웃었다.

“원래 너 13년 전 그때 죽었어야 했거든. 하지만 살았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원래라면 유스넨은 그때 죽었을 것이다.

에스텔레가 아니었다면 무조건 죽었을 것이다.

“베스윈의 가증스러운 핏줄아. 넌 내가 왜 미쳤는지는 아니?”

라플 공작은 광대처럼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광기가 흐르는, 하지만 동시에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라.”

미친놈의 떠벌림이어서일까?

횡설수설하는 게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 모를 거야. 히히. 나도 조금 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고 싶긴 한데. 자, 봐.”

라플 공작은 입을 열었다.

“……ĦŦđʑʥ.”

무언가 말을 하는 듯 입을 뻐끔거렸는데, 유스넨의 귀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커억!”

라플 공작이 피를 왈칵 토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마치 벼락 맞은 물고기처럼 바닥에 쓰러져 퍼덕거렸다.

라플 공작은 힘겨운 음성으로 말했다.

“보다시피 자세한 내용은 말하는 게…… 금지되어 있어서 말이야.”

“…….”

유스넨의 얼굴이 혼란스러워졌다.

라플 공작은 미친놈이다.

하지만 지금 놈이 하는 말을 단순히 미친놈의 헛소리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라플 공작은 바닥에 꿈틀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섬뜩한 광소였다.

“넌 왜 신이 공주님을 저렇게나 사랑하며, 너에게는 그런 끔찍한 신탁을 남겼다고 생각해?”

“…….”

“이상하지 않아? 히히. 앞뒤가 안 맞잖아.”

그런 라플 공작의 눈동자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눈물이었다.

유스넨은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말했다.

“상관없어.”

“뭐?”

“내가 그 신탁을 따를 일은 없을 테니.”

라플 공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탁을 따르지 않으면, 넌 타천할 텐데?”

“타천 따위.”

유스넨은 비릿하게 웃었다.

이미 그는 타천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감내할 것이다.

“하하. 그래. 가상하네. 하지만 괜찮아.”

라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주님은 내가 납치해 갈 테니까.”

“뭐?”

“공주님을 세상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납치할 거라고.”

라플 공작의 눈에서 광기가 넘실넘실 흘렀다.

“그래서 평생 품에 두고 안전하게 지킬 거야. 최고로 좋은 것만, 사랑만 베풀어줄 거야.”

“…….”

“물론, 도망갈 게 걱정인데…… 악마의 날개는 다 잘라야겠지? 다리도 잘라야 할까? 족쇄로 안 되면 한쪽 다리 정도는 잘라 고이 보관하는 게 나을지도.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만 다시 끼워주면 되니까.”

“…….”

“음, 이러면 공주님이 날 증오하려나? 어쩔 수 없어. 미움받더라도 공주님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히히.”

유스넨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하나 확실한 건 있군.”

“뭐?”

“네놈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심판의 검을 꺼냈다.

라플 공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음? 고작 2품 트론즈의 위계 주제에 날 상대하겠다고? 1품 대천사장조차 단신으로는 날 이기지 못하는데?”

라플 공작이 비웃음을 띠었다.

“미안하지만, 이 지상에서 그나마 날 이길 가능성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는 이는 공주님밖에 없어.”

라플 공작은 인간으로서 가장 강력한 경지에 오른 이.

그것도 300년 전에 이미 그러했다.

300년이 지난 지금,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쌓았고 현재 라플 공작이 지닌 힘은 1품 대천사장이나 대악마들조차 능가했다.

그런데 유스넨은 별반 두려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도리어 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와 관련해 네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금제 때문에 절대 말해주지 못하는 건가?”

“응? 응.”

“그러면 네게 그 이야기를 들을 방법은 없겠군. 고문해도 소용없겠지?”

“응, 그렇지? 고문당해도 말 못 해.”

라플 공작은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넨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러면 널 살려둘 이유가 전혀 없겠군.”

“……뭐?”

“설마, 넌 내가 네가 출현할 걸 예상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유스넨은 이미 라플 공작의 출현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그녀를 위협할 만한 존재는 라플 공작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라플 공작은 전혀 겁먹지 않고 비꼬았다.

“흐음. 과연 어떤 준비를 하셨을까?”

그런데 그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심판의 검이 라플 공작의 심장을 꿰뚫었다.

“어?”

라플 공작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무슨 준비를 했냐고?”

유스넨은 싸늘하게 말했다.

“당연히 널 죽일 준비를 하였지.”

그리고.

파앗!

심장을 꿰뚫은 검이 다시 번뜩였다.

이번엔 목이었다.

라플 공작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 * *

다그닥.

말이 달렸다.

얼굴을 가린 투구의 눈 틈(사이트, Sight) 너머로 상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라디트였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쥬웰은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걸로 닦아.’

툭.

바닥에 엉망으로 주저앉아 있을 때, 라디트가 던져준 손수건.

그 적선하듯 건네진 호의를 받은 이후로 그녀는 아주 오랜 열병을 앓았다.

길고도 긴, 아픈 열병을.

‘널 사랑해. 널 만난 건, 내 삶의 가장 큰 축복이야.’

행복하기도 했다.

그를 사랑했던 마음은 진실이었으니까.

그와 함께한 순간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의 고백을 듣는 게 기뻤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파창!

라디트와 그녀가 교차하였다.

검광이 번뜩였고, 거친 금속 충격음이 전장에 울렸다.

“오오오!”

“저 괴물의 일격을 막았어!”

“라디트 백작님!”

적염 기사단이 환호성을 퍼뜨렸다.

라디트가 저 정체불명 기사의 일격을 받아낸 것이다.

지금껏 최초였다.

심지어 라디트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정체불명 기사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더 깊었으면 목을 베었을 수 있었을 정도.

한 번의 겨룸이었지만, 라디트가 우위를 보인 것이다.

적염 기사단은 흥분해 환호성을 질렀지만, 정작 라디트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방금 겨룸이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 탓이다.

‘……저 기사의 실력은 내 밑이 아니야.’

라디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상대가 자신보다 못하지 않음을.

아니, 훨씬 강함을.

그의 아버지, 사파이어 공작가의 가주 록슬론 공작을 연상시키는…… 아니, 그것조차 뛰어넘는 실력이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방금 겨룸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했다는 게.

원래라면 그가 밀렸어야 정상이었는데.

‘혹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건가?’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결투에 집중하지 못할 때.

지금 상대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지닌 실력에 비해 검이 날카롭지 못했다.

‘어쨌든 나에게는 다행인 일.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을 베어주마!’

라디트는 다시 말을 박찼다.

라디트의 백마가 맹렬한 기세로 정체불명의 상대 기사, 쥬웰에게 돌진했고, 쥬웰의 눈빛이 더더욱 가라앉았다.

돌진해 오는 라디트의 얼굴을 보니 다시 과거의 일들이 촤르륵 떠올랐다.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좋아.’

‘네가 걱정되었어. 네가 아픈 게 싫어.’

‘사랑해, 에스텔레.’

‘넌 내 삶에 나타난 최고의 축복이야.’

그 수많은 말이 떠오르며 속이 미칠 듯이 울렁였다.

토할 것만 같았다.

그때, 다시 라디트와 쥬웰이 교차했다.

차아앙!

검과 검이 맞부닥쳤고, 다시 라디트는 무사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라디트가 우세하다고도 볼 수 있는 공방이었다.

“와아!”

“라디트 백작님 만세!”

적염 기사단이 거친 함성을 내질렀다.

한편,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바보같이.’

사실 그녀는 진즉 이 승부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선뜻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미칠 듯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제야 쥬웰은 깨달았다.

라디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그녀는…… 과거 정말 깊게 라디트를 사랑했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그와 보낸 순간 하나하나가 소중했을 정도로.

그렇기에 라디트를 볼 때마다 이토록 역겨웠던 것이다.

그를 향한 마음이 깊었기에 반대로 이토록 큰 증오가 일었다.

‘내가 사랑한 건…… 오로지 에스텔레뿐이야.’

‘난…… 지금도 그녀, 에스텔레를 사랑해.’

그 음성을 떠올리며 쥬웰은 눈을 잠시 질끈 감았다.

미칠 듯 끓어오르는 가슴을 억누르기 위해.

그리고 다시 뜬 그녀의 눈동자에는 무저갱과도 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왜…… 왜 그랬어.’

쥬웰은 묻고 싶었다.

왜 그토록 사랑하면서, 그런 끔찍한 배신을 하였는지.

어째서 자신을 이런 끔찍한 악마로 만들었는지.

물론 답은 안다.

라디트는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보다 스스로의 욕심이 더 중요했다.

그뿐이다.

주룩.

결국, 투구 속 쥬웰의 눈동자에 한 방울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한때 미치도록 소중했던 이를 향한 원망?

자신을 향한 연민?

역겨움? 회한?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았다.

뭐든지 상관없었다.

그저, 확실한 건 이 역겨운 모든 걸 끝낼 때가 왔다는 것이다.

파악!

말의 허리를 찼다.

쥬웰의 말이 라디트에게 돌진하였다.

라디트도 마주 쥬웰에게 돌진하였다.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한때 그녀가 목숨처럼 사랑했던 아름다운 얼굴이 가까워졌다.

‘후회해.’

다시금 미칠 듯 떠오르는 음성.

‘후회해. 미치도록. 시간을 돌리고 싶을 만큼.’

최후의 순간.

수많은 감정이 들끓어 올랐다.

하지만 모두 무시했다.

시야를 가리는 눈물도 무시했다.

그저 이를 악물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오로지 증오와 복수심뿐이었다.

그에게 역겨워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쥬웰은 꽉 주먹을 움켜쥐었고.

검을 움직였다.

양손 대검, 츠바이 헨더가 이전과 다른 궤적을 그렸다.

라디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파아앗!

피 분수와 함께, 검을 든 라디트의 오른 손목이 잘려 허공으로 치솟았다.

세상이 멈추어 섰다.

그 잘라냄과 함께.

그녀는 라디트와 자신 사이에 이어져 있던 모든 고통의 끈을 잘라내었다.

* * *

“어? 어?”

목이 베인 라플 공작은 당황해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심장이 꿰뚫리고 목이 베인 상태임에도 라플 공작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멀쩡히 이런 물음을 던졌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못 막았지? 너 무슨 수를 쓴 거야? 신기하다.”

진짜 궁금하단 목소리.

심지어 지금 상황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는 듯했다.

당연했다.

라플 공작은 진정으로 인간을 초월한 자.

어떤 부상을 당해도 죽지 않으니까. 온몸이 불에 타 사라져도 그는 죽지 않는다.

“히히, 어쨌든 각오는 됐지?”

그런 라플 공작을 바라보는 유스넨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유스넨의 주위로 성스러운 기운을 띤 여러 물건이 나타나 떠올랐다.

라플 공작은 아하 하며 이해했다.

“성유물이구나. 성유물의 도움을 받았어.”

성유물(聖遺物).

말 그대로 성력이 담긴 유물이다.

페리도트가의 인물들은 이런 성유물의 힘을 빌려 자신의 힘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잔재주에 불과할 뿐인데. 뭐, 각오는 됐겠지? 잘됐네. 히히.”

라플 공작이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나 너 손 좀 보고 싶었거든. 너 따위가 우리 공주님의 제일 소중한 약혼자라니. 마음에 안 들잖아. 질투 나.”

“……!”

피에 젖은 라플 공작의 몸이 삐그덕 움직였다.

마법을 펼쳐 유스넨을 공격하려는 것이다.

파아아앗!

라플 공작의 손에 빛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 빛이 유스넨을 공격하려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피시시.

촛불이 꺼진 것처럼, 마법이 사그라든 것이다!

“어? 어? 왜 이러지?”

라플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의도한 게 아닌지, 진짜로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때 다시 유스넨이 움직였다.

파밧.

검광이 네 갈래로 번뜩였다.

이번엔 팔다리였다.

라플 공작의 팔다리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유스넨은 그물 모양의 성유물을 꺼내 들었다.

강대한 어둠을 봉인할 때 사용하는 성유물이었다.

“나, 에덴의 대리자가 명하나니 속박하여라!”

그 외침과 함께 그물이 라플 공작의 머리를 덮쳐 가두었다.

심지어 그물 모양의 성유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총 여섯 개.

머리, 몸통, 팔, 다리.

각자 따로 그물이 덮쳐 속박하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그물에 갇힌 라플 공작의 머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유스넨이 무심히 답했다.

“그때, 대연회 때 맹세하지 않았나?”

“뭐?”

“그녀에게 소중한 이를 해치지 않겠다고.”

라플 공작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때, 그가 한 맹세는 단순히 쥬웰을 해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주변 이도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도 있었다.

“난 그녀의 소중한 이이니, 넌 당연히 날 해칠 수 없지.”

라플 공작은 낭패해 입을 뻐끔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미친놈.

사려가 깊을 리가 없다.

그러니 설마 이런 상황이 닥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그때 그런 맹세를 한 것이다.

“어? 어? 어? 어? 그, 그런 게 아니라……!”

라플 공작은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유스넨이 사용한 그물은 마왕 이상의 존재를 봉인하기 위한 강력한 성유물이다.

그걸 무려 여섯 개나 사용해 머리, 손, 다리를 모조리 따로 속박했으니 해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죽일 수는 없으니.’

유스넨은 아쉽게 생각했다.

사실, 최선은 죽여 없애는 거겠지만 불가능했다.

저 괴물의 몸을 죽여 없애봤자, 영혼만 도망가 미리 준비해 놓은 다른 몸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영생을 살고 있는 괴물이니.

그러니 이런 식으로 봉인하는 게 최선이었다.

“안 돼! 놔줘! 난 그녀를 납치해야 한단 말이야!”

라플 공작은 발악하였다.

“이대로라면 그녀는 파멸한다고!”

순간, 유스넨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하나만 묻지. 넌 정말로 그녀를 위하는 건가?”

“그, 그래. 난 정말 공주님을 위해 공주님을 납치하려고 한 거라고.”

“그렇군.”

유스넨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플 공작의 눈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러니, 어서 나를…….”

유스넨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그녀에 대해 네가 말할 수 있는 걸 다 말해. 금제를 피해서 말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그, 그러면 날 풀어줄 거야?”

“그래.”

거짓말이었다.

유스넨은 라플 공작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라플 공작은 순진하게 유스넨의 말을 믿고는 떠벌떠벌 말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알고 있는 것도 금제 때문에 대부분 말할 수 없고. 하지만 말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말해볼게. 대신, 꼭 풀어줘야 해?! 알았지?”

유스넨은 일단 가장 묻고 싶은 걸 물었다.

“그녀는…… 에스텔레가 맞는가?”

그 물음을 하는 순간.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라플 공작이 입을 열 때까지 찰나의 짧은 순간, 세상이 멈추는 듯했다.

그런데.

“에스텔레가 누군데?”

“……장난하나? 에스텔레 성녀를 모른다고?”

“지, 진짜 모르는데?”

라플 공작이 눈을 끔뻑거렸다.

“거짓말하면…….”

유스넨이 심판의 검을 들어 라플 공작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아악! 검 치워! 심판의 검 아프다고! 나 20년 동안 광기에 빠져 지내서 정신이 오락가락했단 말이야! 최근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거고. 그래서 누가 누구인지 잘 몰라.”

“…….”

유스넨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하던 걸 더 자세히 말해보도록. 그녀의 운명에 대해 말이야.”

“어…… 그것도 금제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는데.”

라플 공작은 떠듬떠듬 말하였다.

“내가 네게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이대로라면 그녀는 파멸을 맞을 거라는 것. 그리고 네가 그녀의 대적자로 점지되었다는 것뿐이야.”

라플 공작은 키득거렸다.

“사실 더 아는 게 있긴 한데, 빌어먹게도 이것 말고는 말할 수가 없어. 킥킥.”

라플 공작의 음성에 광기가 차올랐다.

“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아마 나처럼 미치게 될걸?”

“…….”

유스넨은 잠시 침묵했다.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지?”

“응?”

“네가 말한 그 빌어먹을 내용들.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냐고.”

라플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따로 알아낼 방법은 없어.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자연히 알게 될 거라고?”

“응, 너와 공주님이 그 진실을 알게 되는 것 또한 운명이 정한 미친 수레바퀴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라플 공작은 키득거렸다.

“공주님이 지금 향하는 복수의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모든 진실과 마주하게 될 거야. 내가 말한 공주님의 운명은 지금 공주님이 걷고 있는 복수의 길과 깊은 연관이 있으니까.”

거기까지 이야기한 라플 공작은 갑자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이,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는 거잖아! 아아아악! 빌어먹을, 금제!”

마치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 라플 공작의 몸이 파닥거렸다.

과도한 이야기를 했다가 금제에 의해 제약을 받은 것이다.

어쨌든 라플 공작이 해준 말 덕에 유스넨은 하나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라플 공작이 말한 비밀은 그녀가 하고 있는 복수와 연관이 있어.’

그녀가 맞닥뜨리게 될 운명은 그녀의 복수와 연관이 있고, 그녀가 복수의 길을 걷다 보면 모든 숨겨진 진실을 알 수 있게 될 거란 뜻이었다.

“그렇군. 알겠다.”

유스넨은 심판의 검을 착검했다.

라플 공작은 희망에 찬 얼굴로 외쳤다.

“다, 다 말했으니 어서 날 풀어줘!”

“내가 왜?”

유스넨은 기우뚱하게 물었다.

“대답하면 풀어준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했나? 기억이 안 나는데. 오래 살아서 노망이 들었나 보군.”

유스넨은 뻔뻔하게 말했고, 라플 공작은 황당해 입을 뻐끔거렸다.

“너, 너! 광휘가 거짓말을!”

“천사는 거짓말하면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지!”

“그것참. 미안하군.”

성의 없이 답한 유스넨은 또 다른 성유물을 꺼냈다.

항아리처럼 생긴 성유물이었다.

“그, 그건 설마?”

성유물의 정체를 알아본 라플 공작의 얼굴이 하얘졌다.

“날 이 세상 멀리 날려 버려 봉인하려고?”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항아리 성유물의 이름은 ‘장난꾸러기 요술 항아리’.

항아리 안에 물건을 집어넣으면 이 세상 저 멀리 어딘가로 이동시켜 버린다.

문제는 ‘장난꾸러기’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항아리가 물건을 날려 보내는 장소가 대부분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깊은 심해 바닥, 용암 속, 지하 수맥 깊은 곳, 산맥 외딴곳 등등이란 것이다.

“아, 안 돼! 너, 너! 하지 마!”

라플 공작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유스넨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여섯 개의 봉인구를 각각 따로 떼어내 항아리에 하나씩 집어넣었다.

즉, 팔, 다리, 몸통, 머리를 각각 따로 봉인하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라플 공작은 괴물이라 몸이 분리되어도 먼지만큼도 타격입지 않으니 이런 식으로 봉인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파앗!

봉인구에 속박된 라플 공작의 몸은 하나씩 항아리에 들어갈 때마다 세상 저 멀리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

라플 공작의 머리를 항아리에 집어넣으려는 찰나.

유스넨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혹시, 그녀를 구할 방법은 알고 있나?”

질문한 유스넨은 가슴이 두근 뛰었다.

그래, 다른 것보다 이게 가장 중요했다.

그녀를 구원하는 것.

그것만 이룰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어찌 되어도 좋았다.

그때, 라플 공작이 되물었다.

“대답해 주면 나 풀어줄 거야?”

“그래.”

또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라플 공작은 미친놈답게 바보처럼 또 속았다.

“아, 알았어. 그러면 말할게! 거짓말이면 안 돼! 용서 안 할 거야!”

유스넨은 긴장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초조한 마음에 라플 공작이 입을 여는 찰나의 순간이 천년만년처럼 느껴졌다.

끝났다. 쥬웰은 생각했다.

라디트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피 분수를 흘리며 그가 쓰러지는 모습이 마치 느리게 튼 영상처럼 그녀의 눈으로 들어왔다.

순간 수많은 생각, 감정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라디트는 그녀에게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고.

그녀는 그 잘못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다.

그게 지금 일어난 일의 모든 의미였다.

그 외에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크아아악!”

바닥에 쓰러진 라디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다가 추욱 늘어졌다. 기절한 것이다.

“백작님!”

“안 돼!”

뒤늦게 적염 기사단의 기사들이 라디트를 수습했다.

하필 오른손이 잘렸다.

기사로서 생명이 끝난 것이다.

이제 라디트는 끝장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순간, 수많은 기사가 그런 생각을 하였다.

불구가 된 기사의 미래는 끔찍했다.

모든 영광을 잃는다.

그래서 불구가 될 바에는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걸 바라는 기사도 많았다.

라디트는 모든 영광을 잃고 추레하게 몰락할 것이다.

더구나 라디트는 평범한 기사가 아니었다.

가주의 후계자였다.

또한, 다이아 공작 매리엇의 남편이었다.

찬란히 높은 곳에서 빛났던 만큼, 몰락도 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후계위가 박탈될 게 분명했으며, 다이아 공작과의 미래도 불투명했다.

‘차라리 결혼하기 전이었으면 나았을 텐데.’

사파이어 공작가의 봉신들은 라디트에게 다가올 처참한 미래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이아 공작 매리엇이 라디트와 결혼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랑?

천만에.

사파이어 공작가의 힘을 바라서였다.

그런데 라디트가 저런 꼴이 되었다.

오른손을 잃은 불구는 사파이어 공작가를 물려받을 수 없다.

그러면 라디트의 이용 가치도 없어진다.

즉, 라디트는 기사로서 몰락함은 물론, 사파이어 공작가에서도, 다이아 공작가에서도 버림받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라디트 백작에게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물론, 이 모든 건 쥬웰이 의도한 바였다.

쥬웰은 라디트가 철저히 몰락하길 바랐다.

라디트는 그녀를 사랑함에도, 본인의 욕심 때문에 그녀를 끔찍이 버렸으니까.

그래서 그가 간절히 바라던 모든 걸 빼앗고 몰락시키기 위해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

쥬웰은 가만히 기절해 있는 라디트를 바라보았다.

다른 원수들과 달리 라디트와 그녀의 관계는 특별했다.

그와 에스텔레 사이에는 단순한 증오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함이 있었다.

사실 그녀에게 못되게 군 건 매리엇, 플랑드나가 훨씬 심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라디트 때문에 더욱 커다란 고통을 느꼈다.

왜?

라디트는 특별했으니까.

게헨나에 떨어진 후, 처음 100년간은 라디트가 자신을 배신한 걸 받아들이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소중했던 라디트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아팠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었다.

방금 라디트의 손을 자름으로써.

그를 나락에 떨어뜨림으로써 그녀는 라디트와 관련해 본인에게 남아 있던 모든 찌꺼기를 털어냈다.

이제 라디트에게 역겨움을 느끼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자 드는 생각은 오로지 경멸뿐이었다.

‘고작 저런 놈 때문에 나는…….’

라디트가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동안 라디트 때문에 괴로워했던 게, 허무할 정도로 볼품없었다.

이토록 역겹고 하찮은 놈 때문에, 그동안 자신이 겪어야 했던 아픔이 허무했다.

‘라디트, 네 고통은 이제 시작일 뿐이야.’

쥬웰은 차갑게 눈빛을 가라앉혔다.

아직 자신이 받았던 고통의 1만 분의 1도 돌려주지 못했다.

앞으로 처절히.

밑바닥으로 추락시키며 지옥을 경험하게 해줄 것이다.

오늘 일은 그 시작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쥬웰은 근처에 우뚝 굳어 있던 필바하, 아니, 오펜하임에게 말하였다.

“마무리하도록.”

“……!”

그러고는 휙 말을 몰아 전장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필바하가 검을 들어 외쳤다.

“전군, 공격!”

혁명군의 승리를 알리는 외침이었다.

* * *

그렇게 전쟁은 혁명군의 승리로 끝났다.

필바하가 이끄는 혁명군은 남부의 요충지 투란스 성에 혁명군의 깃발을 꽂았다.

드디어 혁명군이 잔챙이 벌레가 아닌, 여섯 공작가도 무시할 수 없는 군벌로 성장하는 순간이었다.

토벌군은 대패하여 한참을 뒤로 물러났는데, 예상외로 인명 피해는 적었다.

쥬웰 덕분이었다.

“남작님, 감사합니다. 남작님 덕분에 병력을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기사들이 쥬웰에게 고개를 숙였다.

쥬웰은 토벌군이 패배하며 물러날 때 다시 합류하였다.

그리고 라디트가 쓰러져 우왕좌왕하는 토벌군을 이끌었다.

‘모두 정신 차리도록!’

그렇게 강렬히 외치는 쥬웰 덕에 토벌군은 후퇴하는 와중에도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별다른 추가 피해 없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원래 전장에서 가장 큰 인명 피해는 후퇴하며 일방적인 학살을 당할 때 일어나는 법이니까.

‘만약 쥬웰 남작님이 아니었다면, 후퇴하면서 어마어마한 피해가 생겼을 거야.’

‘반면, 또 다른 지휘관인 휘란드 경은…….’

기사들은 구석에서 넋을 놓고 있는 휘란드를 흘겨보았다.

이 토벌군을 이끈 이는 라디트와 휘란드였다.

따라서 라디트가 쓰러졌으니 휘란드가 군을 지휘해야 했지만, 전혀 제 몫을 하지 못했다.

도리어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이 어깨에 박힌 후 찢어지라 비명을 지르기만 했다.

‘아직 어리긴 하지만.’

물론, 휘란드도 변명할 말은 있었다.

패배해 후퇴하는 상황에서 군을 수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경험 많은 이에게도 그러한데, 휘란드는 이런 전장에 나온 경험 자체가 처음이었다.

능숙히 군을 통솔하는 건 당연히 무리였다.

‘하지만 쥬웰 남작님은 하셨지.’

사람들은 쥬웰을 감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경험 부족을 핑계로 하기엔, 쥬웰이 보여준 모습이 너무나 뛰어났다.

마치, 백전노장을 보는 듯한 지휘 모습이었다.

저렇게 어린데 말이다.

덕분에 토벌군의 모두는 휘란드가 아닌, 쥬웰을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여기고 따르게 되었다.

‘음, 휘란드에게 조금 미안하네.’

쥬웰은 힐끗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휘란드를 보며 생각했다.

사실, 그녀가 휘란드를 군부 차관으로 추천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패전의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니.

즉, 휘란드가 저런 추레한 꼴이 된 건 그녀가 의도한 바였다.

‘뭐, 그렇다고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겠지.’

그녀와 휘란드는 적이었다.

특히 휘란드는 그녀에게 약까지 먹이려 하지 않았던가?

동정할 가치가 없었다.

그때, 기사들이 다가왔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남작님? 이곳에서 추가 지원군을 기다릴까요?”

“아니, 수도로 복귀한다.”

그 말에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수도에서 추가 지원군이 올 겁니다.”

패배해 투란스 요새를 뺏겼지만, 전쟁이 끝난 건 아니다.

아니, 이제야말로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껏 제국은 혁명군을 무시해 큰 전력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얕보다가 이런 패배를 겪었으니, 온 힘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필바하와 혁명군은 버티지 못하리라.

그런데 쥬웰은 예상외의 말을 했다.

“추가 지원군은 오지 않아. 전쟁은 끝났어.”

“네?”

“이제 우리 제국은 혁명군 따위에 신경 쓰지 못하게 될 테니까.”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기사들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입니까? 혹시 다른 전쟁이라도 일어난단 뜻입니까?”

“아니, 전쟁보다 더 큰 일.”

쥬웰은 나직이 말했다.

“곧 게헨나에서 ‘침식’이 일어날 거네.”

“……!”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침식!

어떤 재앙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게헨나의 마물과 악마가 직접 지상에 강림하는 일이니까.

정말 침식이 일어나는 게 맞는다면, 지금 반란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 정말입니까?”

“난 성녀다. 침식의 징조를 느낄 수 있어. 곧 소식이 전해질 거야. 커다란 재앙이 강림할 게 분명해.”

기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누구도 숭고한 성녀 쥬웰의 말을 의심하지 못했다.

“그러면 어서 수도로 복귀해야겠군요.”

“그래, 준비하도록.”

기사들이 혼비백산 사라졌다.

홀로 남은 쥬웰은 말 위에서 지그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거운 전장의 공기와 다른 청명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재앙이 강림하긴 할 거지. 지금껏 있었던 침식들과 비교할 수 없게.’

침식을 주도하는 악마는 보통 2품이나 3품급 고위 악마였다.

유일한 예외는 과거 게이볼그 마경 사태 때 타천사 베스윈이 강림한 경우였다.

그때, 이해할 수 없게 1품 대악마였던 타천사 베스윈이 강림했고 무려 1천의 기사가 사망했다.

그 경우를 제외하고는 침식은 모두 2품 악마나 3품 악마가 주도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1품 악마와 동일한 급의 존재가 침식을 주도할 거니까.’

그녀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성녀라서? 아니.

“이 침식은 내가 주도하는 거니까.”

쥬웰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유스넨의 짐작이 정말로 맞았던 것이다.

그녀가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복수에 필요하니까.’

그렇다.

이건 복수를 위한 만찬 중 하나였다.

‘오래 평안했지, 언니?’

쥬웰은 지그시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제 언니 차례야.’

그녀는 이번 침식을 통해 ‘성녀’ 플랑드나의 몰락의 막을 열 것이다.

플랑드나는 숭고한 성녀에서 밑바닥으로 추악하게 굴러떨어지게 되리라.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사실, 어쩌면 이게 더욱 중요한 목표이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