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 데스 발키리의 춤
갑작스러운 전란에 수도가 소란스러워졌다.
다만, 사람들의 반응은 갈렸다.
“반란이라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일반 백성은 어두운 얼굴로 두려워했다.
하지만 조금만 윗선으로 올라가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감히 투란스 요새를 공격하다니. 적사자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요.”
“지금껏 자신들을 놔둔 게 제국이 힘이 없어서라 착각하기라도 한 건지.”
제국을 통치하는 이들은 그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력에 비교가 되지 않았으니까.
제국이 필바하의 혁명군을 지금껏 지켜본 건,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번거로워서였다.
정말이었다.
만약 필바하의 혁명군이 제국에 위협이 되었으면, 진즉 토벌군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치도 없었기에 지켜보고 있었던 거였다.
거슬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번거롭게 손을 쓰기에는 애매한 하찮은 벌레.
이게 제국이 혁명군을 바라보는 시점이었다.
특히, 반란을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슬슬 한 차례 전쟁을 일으킬 때가 되긴 했지요. 오팔족을 토벌한 이후 평화가 길었으니.”
그 말처럼, 제국은 주기적으로 적을 지정해 전쟁을 일으켰다.
왜?
전쟁은 여러모로 제국에…… 정확히는 여섯 공작가에 이득이 되니까.
전쟁은 힘 있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돈벌이 기회.
전쟁을 통해 여섯 공작가가 얻는 이득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넷은 가넷대로.
다이아는 다이아대로.
사파이어는 사파이어대로.
에메랄드는 에메랄드대로.
아메티스트는 아메티스트대로.
각자, 본인의 입장에서 돈과 정치적 이득을 쓸어 담았다.
그래서 혁명군의 반란을 들은 제국 상층부는 오히려 축제가 일어나기라도 한 듯 반기는 분위기였다.
전란에 휩쓸린 백성들의 고달픔이야 늘 그렇듯, 위정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만약 혁명군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여섯 공작가는 수년 내에 어딘가 희생양을 지목해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희생양으로 지정하는 상대는 대중이 없었다.
주로 타국이 되었지만, 제국 내부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지방 영주에게 역모죄를 덮어씌워 희생양으로 삼기도 했다.
아마, 이번엔 혁명군이 그다음 희생양으로 지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이 전란은 시간의 문제였지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일반 백성의 희생은 거의 없겠지.’
쥬웰은 무심히 생각했다.
‘내가 이 전쟁에 직접 손을 쓸 거니까.’
그러니 이 전쟁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깔끔하게, 최소한의 피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로.
‘내가 노리는 건 오로지 라디트니까.’
쥬웰의 눈빛이 싸늘히 차가워졌다.
대연회 때, 라디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지금도 에스텔레, 그녀를 사랑해.’
미칠 듯 역겨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금 살심이 끓어오르려고 해,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이제 본격적인 파멸의 시작인데, 쉽게 죽게 해줄 수는 없어.’
쥬웰은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 앞에 수북하게 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었다.
많았다.
‘이제 나는 일반적인 영애가 아니니까.’
그녀는 현재 제국의 상급 의원이었다.
또한, 이번에 사교계의 왕이 된 후 기뻐한 토른 공작에게 상을 받아 여러 직책을 추가로 맡았다.
따라서 현재 그녀의 공식 직함은 이러했다.
가넷가의 안주인이자, 바톤령의 남작, 또한 제국의 상급 의원이자, 행정부의 부부장, 재무 대신.
참고로 행정부의 부부장과 재무 대신은 가넷가에서 굉장히 의미가 큰 직책이었다.
가넷가의 최고 중요 인물이 맡는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제 그녀는 단순히 토른 공작의 총애를 받는 루키가 아니라, 실제 공식적인 직위로도 서열과 권위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특히 행정부 부부장직을 맡은 이는 훗날 가넷가의 후계가 되는 일이 많아, 한 차례 가넷가가 요동쳤다.
토른 공작이 쥬웰을 후계로 삼을 의향을 드디어 공식적으로 대외에 공포한 것이다.
‘그나저나 휘란드 오라버니가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휘란드.
로튼 백작의 장자이자 제국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자로 쥬웰이 두각을 드러내기 전, 토른 공작의 총애를 받던 이였다.
‘휘란드 오라버니를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쥬웰은 고민했다.
그녀는 로튼 백작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열쇠로 휘란드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결정한 건 아니었는데, 휘란드가 어떤 이인지 직접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직접 만나 그가 어떤 이인지 확인 후 그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때, 쥬웰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네. 몸도 좋지 않고.’
맡은 직책이 늘어나 할 일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리고 전쟁을 그녀의 의도대로 진행하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도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라디트를 전장으로 끌어들여야 해.’
반란이 일어났다고,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가 바로 출정할까?
절대로.
사파이어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라디트를 전장에 보내기 위한 밑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일단, 사파이어의 자존심을 한 차례 짓밟아야 해.’
쥬웰은 차갑게 생각했다.
자존심 때문에 라디트를 보내지 않는다면, 해결책은 간단했다.
사파이어를 한 차례 짓밟아주면 된다.
그래서 그러기 위한 계획을 진행 중인데…….
문제는 몸의 상태였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자꾸 아픈 건지.’
쥬웰은 이마를 만져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열이 끓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몸인지, 왜 이렇게 툭 하면 아픈지 모르겠다.
‘원래 쥬웰의 몸은 건강한 체질이었다고 하던데.’
그녀는 서랍을 열어 약재를 꺼냈다.
‘그나마 새로운 약재 배합을 개발해 다행인데.’
너무 자주 아프니, 아플 때마다 앓아누울 수도 없고, 특히 엔리크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쥬웰은 새로운 약 배합을 개발해 냈다.
해열 효과가 있는 여러 약초를 한 번에 섞은 것으로 열을 내리는 효과가 극단적으로 뛰어났다.
다만, 독한 약을 여러 개 섞은지라 몸에 당연히 무리가 갔고, 두통은 도리어 더욱 심해지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그 정도야 뭐.
아픈 건 괜찮은 척 숨길 수 있지만, 열이 끓는 건 숨길 수가 없다.
그러니 몸이 좀 힘들고 안 좋아져도, 열이 나는 걸 숨길 수 있다면 그게 훨씬 이득이었다.
다른 이들, 특히 엔리크 자작에게 아픈 걸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녀는 엔리크 자작이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싫었다.
그가 걱정하면, 그녀도…… 마음이 아릿하였다.
‘잠깐만…… 눈 좀 붙이고 있자.’
의자에 기대 가만히 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아련히 그녀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씨.”
“…….”
“아가씨!”
“……!”
쥬웰은 퍼뜩 눈을 떴다.
룬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잠이 들려고 하려는 차, 룬이 들어온 것 같았다.
짧은 순간, 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갈증이 나 쥬웰은 옆에 놓인 물을 마셨다.
“……괜찮으세요?”
“응, 잠깐 피곤했나 봐.”
“…….”
태연히 답했지만, 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쥬웰이 아픈 걸 눈치챈 듯했다.
“말하지 마. 특히 아버지에겐.”
“……아가씨.”
“명령이야.”
룬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룬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차올랐다.
“안 돼요. 말할 거예요.”
“뭐?”
“말 안 하면, 절대 안 쉬실 거잖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티 안 내시고…… 계속 무리할 거잖아요.”
룬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고 있어요. 아가씨가 아픈 거 숨기려고, 억지로 독한 약을 드시고 있는 거. 왜 그렇게 항상 아가씨는…….”
“룬.”
쥬웰이 룬의 말을 끊었다.
“주제넘지 마.”
“……!”
룬의 안색이 하얘졌다.
룬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런 룬의 눈동자에 핑 눈물이 돌았다.
거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룬은 결국 한마디를 더 하였다.
“하, 하지만. 저…… 아가씨가 걱정되어요.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
룬은 자신이 말한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무리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쭈욱 옆에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쥬웰은 본인을 전혀 살피지 않는다.
그게 너무 위태로워 보여, 룬은 울컥 눈물이 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한담.’
쥬웰은 룬을 질책하려는 의도로 말한 게 아니었다.
최근, 룬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는 태도를 보이었다.
무례하단 게 아니라, 오늘처럼 과한 걱정이나 애정을 표현하곤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쥬웰을 단순히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로 여기는 걸 넘어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마치, 마리가 그랬던 것처럼.
‘함께 지내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긴 하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쥬웰은 룬을 끌어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울지 마. 누가 그렇게 울래?”
“끄윽, 죄, 죄송해요.”
자신의 품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룬의 모습을 보며, 쥬웰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쥬웰이 소중한 이들과 나름의 벽을 치려는 건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 때문이었다.
자신이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받을 상처를 염려했던 거다.
‘더 살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깨진 영혼을 되살리는 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대천사도 대악마도 못 한다.
그런데 왜일까?
문득, 쥬웰은 한 인물이 떠올랐다.
흰 강아지, 유스넨이었다.
그녀는 유스넨에게 성력을 받을 때마다 받은 느낌을 반추해 보았다.
‘흰 강아지의 성력을 받을 때면, 깨진 영혼이 조금 안정되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확실히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유스넨의 성력을 이용하면 내 수명을 연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흰 강아지의 성력이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해. 괜히 쓸데없는 기대 하지 말자.’
이미 그녀의 영혼은 완전히 산산 조각난 상태라, 그런 정도로 붕괴를 연장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룬.”
쥬웰은 자신에게 안겨 있는 룬에게 속삭였다.
“고마워.”
* * *
한편 그때.
수도 근처에 있는 페리도트 대공가의 고성.
메디안 백작이 퀭한 눈빛으로 성을 걸었다.
“전하? 전하? 아, 또 어디 가신 거야?”
그의 손에는 서류가 잔뜩 들려 있었다.
대법관으로서의 업무 서류였다.
유스넨에게 결재받아야 하는 서류였는데, 산더미 같았다.
그간, 유스넨이 업무를 등한시한 탓이다.
‘이거 완전히 직무 유기잖아!’
메디안 백작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유스넨은 무언가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쥬웰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랑에 빠져도 그렇지. 한마디 해야겠어.’
그가 확 문을 열었다.
최근 유스넨이 자주 틀어박혀 있는 서재였다.
과연, 은발의 유스넨이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게 보였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메디안 백작이 들어온 걸 눈치도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전하, 너무한 것 아닙니까? 누가 보면 전하가 아니라, 제가 대법관인 줄 알겠습니다. 이건 직무 유기…….”
거기까지 이야기한 순간이었다.
메디안 백작은 우뚝 입을 다물었다.
유스넨이 시선을 돌렸는데…… 섬뜩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치 무언가에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눈동자가 퀭하게 비어 있었는데, 옅은 광기가 흘러 소름이 돋았다.
메디안 백작은 유스넨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
“……전하.”
“왜 오셨습니까?”
“그게…….”
원래는 기세등등하게 일 좀 하라고 타박 주려고 온 거지만, 메디안 백작은 주눅이 들어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다.
지금 유스넨을 잘못 건들면 안 됨을.
결국, 메디안 백작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일이 있어서 왔는데, 제가 다 알아서 하면 되겠죠? 대법관 직인 써도 됩니까?”
셀프 야근 확정이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용무는 끝난 겁니까?”
얼른 나가라는 소리였다.
메디안 백작은 유스넨이 매달려 있는 서고를 힐끗 보았다.
‘페리도트가의 비사.’
천사의 피를 각성한 페리도트가의 역대 인물들이 300년에 걸쳐 겪은 수많은 일을 기록한 서고다.
유스넨은 왜 저런 걸 보고 있는 걸까?
‘……쥬웰 남작 때문이겠지.’
메디안 백작은 침음을 삼켰다.
‘도대체 어떻게 되려고.’
‘어둠에 마음을 뺏기면, 광휘는 빛을 잃는다’.
그 가훈이 떠올라, 메디안 백작의 가슴을 묵직하게 했다.
‘어쩌면 전하께서는 이미…….’
그때, 유스넨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지시한 건, 조사하고 있습니까?”
“네? 네.”
메디안 백작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넨은 에스텔레 성녀의 순교 당시의 정황을 재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본가의 ‘체이서’들에게 시켜 다시금 재조사 중입니다. 특히 전하께서 지시한 대로 에스텔레 성녀님과 연관 있던 여섯 공작가의 중요 인물이 당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 위주로 조사 중입니다.”
체이서는 페리도트 대공가의 산하 정보 조직이었다.
페리도트 대공가는 어둠과 적대하는 가문이고, 따라서 어둠을 색출하기 위한 정보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메디안 백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뒷조사를 했다는 걸 알면, 다른 공작가에서 불쾌해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사이가 틀어질 수도…….”
“무슨 상관입니까?”
“…….”
유스넨은 묵직하게 말했다.
“그따위 놈들.”
메디안 백작은 숨을 들이켰다.
유스넨의 발언에 놀란 것이다.
짧은 말이었지만, 아찔한 적의가 느껴졌다.
물론, 유스넨이 다른 여섯 공작가를 경멸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다니.
‘위험해.’
메디안 백작의 머리에 경고음이 울렸다.
무언가 유스넨에게 위험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메디안 백작으로서는 손을 쓸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그만 나가보십시오.”
“…….”
“어서요.”
거듭된 축객령에 메디안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하아. 앞날이 걱정되는군.’
메디안 백작은 서재 밖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이여, 제발 대공 전하와 페리도트 대공가를 지켜주소서.’
한편, 메디안 백작의 바람과 다르게 유스넨의 상태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유스넨은 눈을 질끈 감고, 욕설을 내뱉었다.
‘여섯 공작가든 뭐든,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모조리. 진짜 그럴까?’
감람빛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죽음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후. 유스넨은 점점 살의를 참기가 어려웠다.
아직 정확히 증거를 확인한 건 아니지만, 그저 의심만으로도 그녀의 죽음과 연관 있을 거로 추정되는 이들을 모조리 찢어 죽이고 싶었다.
대연회 때도, 그녀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그는 라디트를 죽였을 것이다.
‘하아.’
유스넨은 감정을 강제로 억눌렀다.
일단,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녀와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확인해야 해.’
죽은 이가 게헨나에서 돌아온 걸 적이 있는지.
‘그리고…… 그녀를 구원할 방법을 찾아야 해.’
유스넨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그녀의 정체를 확인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를 구원하는 거였다.
물론 막막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스넨은 그녀가 반드시 행복해지길 바랐다. 지금처럼 억지로 비튼 웃음이 아닌, 진심으로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지금 이렇게 서고에 매달려 있는 건, 그럴 수 있는 실마리를 무엇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페리도트가의 역사는 어둠과 함께한 역사. 어쩌면, 내 물음의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녀의 정체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녀를 구원할 실마리.
그 의문들의 답을 찾기 위해 유스넨은 미친 듯이 서고에 매달려 과거의 기록을 탐독하고 있었다.
무려 300년에 걸쳐 가문의 인물들이 중구난방으로 남긴 문서이기에 터무니없이 방대하고 불친절한 기록이었지만, 유스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떤 한구석에 그녀를 위할 실마리가 있을지 몰라 샅샅이 집중하여 탐독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건 아니야. 이것도.”
300년의 기록을 끝없이 살피었지만, 그가 알고자 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점점 서고의 끝이 보여갈수록 유스넨은 초조해졌다.
어서 한시라도 답을 찾아 그녀를 위하고 싶은데, 방향을 잃고 한없이 헤매고만 있는 것 같아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어둠은 결국 어둠일 뿐이다. 어둠은 처단해야 할 악(惡)일 뿐이니, 후대여, 미혹되지 말도록.]
그 문구에 유스넨은 버럭 화를 내었다.
“닥쳐!”
콰앙!
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서고의 바닥을 내려쳤다.
문구의 내용도 그를 자극했지만, 지금껏 쌓여온 울분과 초조함이 터진 것이다.
“하아.”
유스넨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겼다.
‘누나.’
유스넨은 울컥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그러던 차 어떤 일이 일어났다.
툭, 책 하나가 그의 앞에 떨어진 것이다.
아까 바닥을 칠 때 서고가 울리며 위의 책장에 있던 책이 떨어졌다.
“봤던 책인가?”
유스넨은 인상을 찌푸리며 책을 들었다.
그런데 순간 흠칫하였다.
생각지도 않은 제목이 표지에 적혀 있었다.
<베스윈의 서(書).>
타천사 베스윈.
놀랍게도 지옥의 66 대악마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그 끔찍한 악마가 남긴 책이 페리도트가에 남아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타천사 베스윈은 원래 우리 페리도트가의 초대 가주였으니까.’
경악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진실이었다.
‘승천 후 에덴의 17대천사장이 되었고, 이후 원인 모를 이유로 타천했다고 하지.’
천사의 피를 각성한 페리도트가의 인물은 죽은 후 에덴으로 승천해 천사가 된다.
유스넨도 별문제 없이 삶을 마치면, 에덴의 영광된 천사가 될 것이다.
베스윈도 에덴에 가 천사가 되었다.
특히, 그는 제국의 역사를 연 개국 공신.
라플 공작처럼 초대 황제를 도와 거대한 어둠을 막은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무려 1품 대천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타천해 끔찍한 최악의 악마가 되었다.
‘베스윈과 관련된 기록은 전부 말소했다고 들었는데, 태우지 않은 책이 아직 있나 보군.’
유스넨은 차갑게 생각했다.
그는 베스윈을 증오했다.
13년 전 각성 의식 때 유스넨의 몸에는 천사가 아닌, 악마가 강림했다.
그때 강림한 악마가 베스윈이다.
베스윈은 유스넨의 몸을 차지해 유스넨의 혈육을 모조리 도륙했다.
즉, 베스윈은 유스넨의 원수였다.
‘지금 당장 태워 버려야.’
그런데 유스넨은 멈칫했다.
베스윈은 1품 대천사가 된 이다.
그러니 그가 남긴 기록도 보통 내용이 아닐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녀를 도울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
유스넨은 잠시 갈등했다.
원수가 남긴 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등은 길지 않았다.
그녀를 위한 일이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개인적 증오 따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리고 책의 첫 장을 넘긴 유스넨의 눈이 찢어지라 커졌다.
“이건……?”
그곳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 베스윈은 신탁을 받아, 300년 뒤 거대한 어둠을 마주할 후예에게 이 글을 남긴다.]
거대한 어둠.
그리고 그 어둠을 마주할 후예.
쥬웰과 유스넨을 뜻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초대 가주였던 베스윈이 300년의 세월을 넘어 유스넨에게 남긴 글이었다.
‘도대체?’
뒤에 이어진 내용을 본 유스넨은 경악하여 신음을 흘렸다.
상상도 못 한,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 * *
한편, 다시 가넷가.
쥬웰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린 룬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후, 쥬웰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헤헤.”
룬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쥬웰이 자신을 내쫓지 않아 기쁜 듯했다.
“그, 그런데, 아가씨.”
“응?”
“……저, 정말 조금만 쉬시면 안 돼요?”
“…….”
룬은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그……! 주제넘게 나서는 게 아니라요! 요, 요즘…… 너무 무리하시긴 했잖아요. 잠도 거의 안 주무시고…… 그래서 몸도 안 좋은 걸 테니…….”
룬은 또 혼이 날까 힐끗힐끗 쥬웰의 눈치를 살폈다.
쥬웰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쉴 필요가 있긴 하지.’
맡은 직책도 많고, 행정부 부부장, 재무 대신으로서 반란과 관련해 처리할 일이 많아 확실히 무리하긴 했다.
‘많이 했으니, 오늘은 이만 쉬어도 괜찮을지도.’
“알겠어. 이제 그만 잘 테니, 대신 내가 아픈 건 아버지께는 이야기하면 안 돼. 알았지?”
“네, 대신 오늘은 꼭 푹 쉬셔야 해요!”
쥬웰은 룬이 귀여워 피식 웃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룬은 쥬웰의 손길이 좋은지 헤헤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잘 준비를 하는데, 순간 쥬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또 그 꿈을 꾸겠지?’
쥬웰은 늘 악몽을 꾼다.
그건 특별할 게 없었는데, 최근 꾸는 악몽은 더 견디기 괴로운 종류였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쉬며 문득 그가 떠올랐다.
‘흰 강아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스넨 곁이면 푹 잠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간에 그를 만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진짜 결혼이라도 할까?’
쥬웰은 실없이 생각했다.
결혼하면 같은 침대를 쓸 테니까.
악몽에 시달리는 일도 줄 것이다.
‘달빛이 밝네.’
침대에 눕기 두려워 멀뚱멀뚱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창밖으로 유스넨이 짠, 하고 나타났으면 좋겠다…… 라고 실없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창밖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 이 아니라, 오펜하임의 얼굴이 보였다.
“……?”
쥬웰은 잠시 눈을 비볐다.
‘웬 헛것이?’
갑자기 생뚱맞게 오펜하임의 환영이라니.
별 황당한 헛것도 다 보네, 란 생각을 하였는데.
‘……헛것이 아니었어?’
여전히 오펜하임의 얼굴이 보였다.
놀라 황당한 표정을 짓는데, 창밖의 오펜하임이 헛기침을 하였다.
“……아직 안 잤나? 시간이 늦었는데?”
“……전하야말로 뭘 하는 겁니까? 이 시간에…… 아니, 이런 곳에서?”
쥬웰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지금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고, 오펜하임이 있는 곳은 4층 창문 밖…… 허공이었다.
즉, 그는 하늘에 떠 있는 상태였다.
‘아니, 그것보다 지금 반란군을 이끄는 것 아니었어? 언제 온 거야?’
한창 바쁠 인물이 생뚱맞게 여기서 뭐 하고 있단 말인가?
“……보고 싶어서 왔네.”
“이 시간에, 창문 밖으로요?”
“……아니, 사실…… 그게. 원래는 올 생각이 아니었는데.”
오펜하임은 스스로도 혼란스러운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대의 저택 앞이더군. 불빛이 켜져 있길래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와봤네.”
“…….”
아마 달의 능력을 무의식적으로 발휘해 그녀의 근처로 이동한 것 같다.
오펜하임은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아, 혹시나 오해할까 말하는 건데 그대를 엿본다든지, 실례를 범할 생각은 없었어. 깨어 있는 기척이 없으면 바로 돌아가려고 했네.”
쥬웰은 잠시 오펜하임을 바라보았다.
월장석 보석안이 정체 모를 괴로움에 물들어 있었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창문을 열어주었다.
“……고맙네.”
“앉아 있으세요. 차를 내줄 테니.”
쥬웰은 룬을 부를까 하다가, 고개를 젓고는 스스로 차를 끓여 내왔다.
“그대가 직접 끓여주는 차를 마시게 되다니. 밤손님이 된 보람이 있군.”
“……다음엔 미음도 없습니다. 그냥 내쫓을 겁니다.”
오펜하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더욱 소중히 마셔야겠군. 어쩌면 그대에게 받는 마지막 차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
쥬웰은 오펜하임을 살폈다.
웃으며 농담을 건네고 있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힘이 없었다.
마음이 좋지 않아 보여 쥬웰은 잠시 말없이 오펜하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반란 때문에 그렇습니까?”
“……!”
“이번 반란, 전하와 연관이 있지 않습니까.”
오펜하임은 흠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대도 알고 있다시피 필바하는 나와 관련이 있는 자야.”
관련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동일인인 것까지 알고 있었지만, 쥬웰은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전란에 휩싸여 희생될 백성 때문에 염려하는 겁니까?”
쥬웰이 아는 오펜하임이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오펜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상관없어.”
“상관없다고요?”
“그래,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피가 흐르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도리어 두려움에 피를 흘리는 걸 피하면, 그게 백성들을 위해 더욱 나쁜 일이란 것 잘 알고 있네.”
의외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옳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무릇 훌륭한 군주라면, 올바른 일에 피를 흘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그러면 왜 심란해하는 겁니까?”
“…….”
오펜하임은 입을 다물었다.
쥬웰에게 약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는 친구 아닙니까?”
“……친구? 그런 것 안 한다고 했을 텐데? 그대와 내가 닿을 목적지는 오로지 결혼뿐…….”
“듣기 싫으니, 어쨌든 말해보십시오.”
“…….”
오펜하임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실패할까 두렵네.”
“…….”
“그래서 백성들이 흘리는 피가 헛되게 될까 두렵네. 결국, 아무것도 변하게 하지 못할까 미칠 듯이 무서워.”
그렇게 말한 오펜하임은 씁쓸히 말했다.
“괜한 이야기 해서 미안하네. 못 들은 걸로 해주게. 그만 가보겠네.”
오펜하임은 괜한 말을 한 게 후회스러운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차는 가져가겠네. 그대가 준 거니, 아껴 마셔야겠어.”
그러며 찻잔을 허공에 던졌는데, 달빛이 반짝하더니 찻잔이 찻물과 함께 통째로 사라졌다.
모종의 능력으로 아공간에 찻물을 보관한 것 같다.
전장에서 생명수로라도 삼으려는 듯한 모습이라, 쥬웰은 실소하고는 말했다.
“그거 압니까?”
“응?”
“제가 전하를 나름대로 존경하고 있음을.”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오펜하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 말의 의미는……?”
“……또. 기회만 되면 오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존경한다는 것이니까요.”
“…….”
오펜하임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능력이 부족한데 무슨 의미가 있겠나.”
정확히는 오펜하임 홀로 맞서기에는 여섯 공작가의 벽이 너무 높았다.
“제가 돕겠습니다.”
“……뭐?”
“필바하가 승전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요.”
오펜하임은 놀란 눈을 했다.
쥬웰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 병권을 쥔 가넷가의 실권자죠. 출정을 조율하고 있으니, 반란군에 유리하도록 판을 짜보겠습니다.”
“어째서…….”
사실, 이건 원래 의도한 일이었다.
그녀는 반란군에 유리하게 판을 짜 사파이어 공작가에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줘, 라디트를 전장에 끌어들일 작정이었으니까.
물론, 다른 이유를 댔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다른 공작가들을 무너뜨리는 게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대의 계획으로 제국군이 패전하게 되면 그대가 곤란해지는 건 아닌가?”
제국군이 패전하면 누군가 책임을 물어야 한다.
혹시나 쥬웰에게 여파가 갈까 염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덮어씌울 미운 사람이 많은데 패전의 책임을 제가 물 이유는 없겠지요. 도리어 제게는 이득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펜하임은 웃었다.
쥬웰의 말은 패전의 책임을 자신의 정적에게 덮어씌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며 자신은 모종의 방법으로 이득을 볼 작정이리라.
‘쥬웰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오펜하임은 단숨에 사교계를 휘어잡은 쥬웰의 수단을 떠올렸다.
“그렇군. 하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현명한 여인에게 괜한 걱정을 했어.”
똑똑하고 현명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오펜하임은 쥬웰이 사랑스러웠다. 그것도 미치도록.
‘닿고 싶어.’
눈앞에 있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었다.
그 사실이 오펜하임에게 참을 수 없는 갈증을 주었다.
하지만 이 거리는 강제로 좁힐 수 없었다.
미칠 듯 안타깝지만 오로지 쥬웰이 허락할 때만 한 걸음씩 좁힐 수 있었고, 불행히도 쥬웰은 오펜하임에게 어떤 허락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오펜하임은 다른 말을 꺼내었다.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나?”
“……?”
“전장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되겠지?”
쥬웰은 물끄러미 오펜하임을 바라보았다.
오펜하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로서 전장에 나설 생각인 것 알고 있네. 하지만…… 그대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아. 그러니 부디…….”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오펜하임은 입을 다물었다.
쥬웰의 눈동자는 잔잔했다.
즉,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제가 어떤 대답을 할지는 아시겠지요?”
“……그래.”
오펜하임은 한탄했다.
예상했던 답이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힘이 있었다면, 그녀가 저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오펜하임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가 힘이 있었다면.
여섯 공작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지도. 그래서 그녀가 위험한 전장에 나설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런 자책감이 든 것이다.
물론, 쥬웰의 진정한 목적을 몰라 생긴 완전히 방향이 빗나간 안타까움이었지만, 오펜하임은 쥬웰에게 뭐든 해주고 싶고, 뭐든 걱정되었다.
왜?
‘……좋아하니까.’
오펜하임은 쓴웃음을 짓고 그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언젠가는 당당히 자신의 마음을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갈망하며.
“대신, 조심하겠다고 약속해 주겠는가? 그대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난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펜하임의 걱정은 개미가 호랑이를 걱정해 주는 것과 비슷했지만,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면 가보겠네. 부디 조심하길.”
“잠깐만요.”
쥬웰은 하나의 물건을 꺼내 오펜하임에게 주었다.
목걸이였다.
“……?”
“길에서 주운 건데, 호신 마법이 내장된 마도구예요. 가지고 있으세요.”
전장에서 오펜하임이 죽으면 곤란하니 주는 거였다.
‘최상급 호신 마법이 내장되어 있으니 어지간하면 죽을 일은 없겠지.’
“…….”
오펜하임은 한없이 감격한 눈으로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그대에게 징표를 받게 되다니…….”
징표는 전쟁에 나가는 연인에게 주는 선물로,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부적이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또, 틈만 나면 오해하지 말라고 했죠? 그러니까…… 이건 우정 선물 정도라 생각하십시오.”
“…….”
오펜하임은 천천히 목걸이를 품에 넣었다.
한없이 소중한 보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아니, 이건 우정 선물이 아니라 징표야. 왜인지 아나?”
오펜하임은 씨익 웃으며 창문 위에 올라섰다.
“그대와 난 친구가 될 일이 없거든. 그러니 미래의 반려에게 받은 징표라고 생각하고 있지.”
“아니…….”
“그러면 이만.”
쥬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오펜하임은 훌쩍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오펜하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달의 능력으로 공간을 뛰어넘은 것 같았다.
‘하여간.’
쥬웰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 * *
수도 정계는 토벌군을 논의하느라 시끌시끌하였다.
필바하를 토벌할 병력을 보내야 하는데 누구를, 어떤 규모로 보낼지가 문제였다.
물론 당연히 라디트를 보낸다는 의견은 누구도 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대신, 사파이어 공작가의 봉신 가문 중 한 곳의 기사단을 보내기로 의견이 모이고 있었다.
애초에 투란스 요새에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또 다른 봉신 가문의 기사단인 라인힐트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다.
거기에 또 다른 기사단이 추가되는 거니, 오합지졸 반란군을 상대하기에 차고도 넘쳤다.
그리고 젊은 영식 중에 자발적으로 참전을 원하는 이가 많았다.
“이거 공을 세울 기회인 것 같은데. 나도 참전할까?”
“너도? 나도 출전하려는 생각인데.”
누구도 제국군이 패할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학살과도 비슷한 전쟁이 될 테니, 이 기회에 공을 세우려 참전하려는 것이다.
“답답했는데, 이번 기회에 시원하게 몸이나 풀고 오려고. 피 맛 본 지도 오래됐고.”
“필바하든 뭐든. 나한테 걸리면 한 방일 텐데.”
그렇게 수도 귀족들은 전쟁 준비로 시끌시끌하였고 쥬웰도 본격적인 밑 작업에 들어갔다.
“외출할 준비를 해줘.”
“지금 말입니까?”
룬과 리샤크는 놀란 얼굴을 했다.
이미 저녁 10시가 훌쩍 넘은 늦은 시간이다.
누군가를 만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시간.
리샤크는 퍼뜩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는지 어두운 기색으로 물었다.
“혹시, 약혼자분들을 만나러 가시는 것입니까?”
저녁 10시.
늦었지만 연인들끼리 은밀한 밀회를 가지기에는 딱 적합한 시간이었다.
‘얘, 이제 대놓고 질투심을 보이네.’
쥬웰은 리샤크의 뿌루퉁한 반응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쥬웰에게 본인의 마음을 드러낸 이후 리샤크는 종종 자신의 감정을 비치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리샤크가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받아달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문득문득 위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리샤크를 동물의 과(科)로 분류하면 명백히 위험한 맹수과 쪽에 속한다.
겉으로는 초식 동물처럼 보이지만 그냥 겉모습만 그런 거고 실제는 전혀 아니었다.
‘조금씩, 내게 집착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약혼자들에게 가는 건 아니야.”
“그러면?”
“술 마시려고.”
“네?”
룬과 리샤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다.
“왜? 나도 사람인데, 쉴 때도 있어야지. 이제 성년이기도 하고.”
쉬러 술을 마시러 가겠다니.
그럴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쥬웰이 이야기하니 당혹스러웠다.
“그, 그렇긴 하죠. 그런데 술은 왜 밖에서? 그냥 제가 준비해 올까요?”
제국에서 좋은 술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이 가넷가의 저택이다.
뇌물을 바치려는 이들이 온갖 진귀한 술을 가져다 바치니까.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왕 쉴 것, 제대로 노는 게 낫겠지. 로열 살롱에 가서 마실까 싶은데?”
“……!”
룬과 리샤크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아가씨?”
둘 다 크게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왜?”
룬이 와락 외쳤다.
“로얄 살롱은 나쁜 곳이잖아요!”
“왜? 나도 이제 성인이라 로얄 살롱을 방문해도 상관없는데?”
“그, 그렇지만…….”
그래도 룬과 리샤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룬이 빽 외쳤다.
“거긴, 애인을 만드는 곳이잖아요!”
리샤크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일반적으로 낮에 티 등을 마시며 교류를 나누는 장소를 살롱이라 하면, 로얄 살롱은 밤에 귀족들이 술을 마시며 즐기는 장소를 뜻한다.
코르티잔, 코르티어와 함께.
‘뭐, 지저분한 곳은 아니지만.’
그런 곳은 따로 있었다.
로얄 살롱은 그저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끝이었다.
따라서 살롱 사람들이 중요하게 갈고닦는 것은 외모보다도 귀족들을 재기 있게 상대할 예법, 화술, 재치, 교양, 상식, 예술적 능력이다.
더 기품 있고, 교양 있고, 재기가 넘칠수록 높은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만약 술에 취한 귀족이 그런 살롱 사람에게 무례를 범하려 들면 야만인처럼 여겨져 사교계에서 큰 망신을 당하고 영원히 출입이 금지된다.
무례를 범한 죄질에 따라 법적 처벌을 받는 것도 물론이다.
그래서 귀족들은 남자든 여자든 오락을 즐기는 기분으로 로얄 살롱을 방문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늘 그렇듯, 술을 마시다 서로 눈이 맞아 연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자발적 의지에 의한 연애는 당연히 자유로이 허락되니까.
그래서 남자 귀족이든 여자 귀족이든 살롱의 코르티잔, 코르티어를 애인으로 두는 건 귀족 사교계의 공공연한 문화였다.
유명한 살롱의 인물을 애인으로 삼는 데 성공하면 그걸 명예로 여기는 분위기조차 있었다.
인기 있는 살롱의 인물을 애인으로 삼기 위해 온갖 구애를 하는 귀족도 숱하게 많았다.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딱히 그러려고 가는 건 아닌데.’
처치 곤란한 약혼자가 세 명이나 있는 판국에 무슨 놈의 애인이란 말인가.
그녀가 로얄 살롱에 가는 건 ‘복수’를 위한 계획 때문이었다.
‘중요한 용무가 있지.’
하지만 룬과 리샤크는 완전히 오해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리샤크의 얼굴이 우중충 어두워졌고, 룬은 무슨 상상을 한 건지 사과처럼 빨개진 얼굴로 허둥지둥 말했다.
“그…… 그! 저는 반대예요!”
“어째서?”
“그……! 그……! 그게……! 애인은…… 나쁜 거니까요!”
그런 룬이 귀여워, 쥬웰은 웃으며 장난을 쳤다.
“왜? 나 정도 되면 애인을 두어도 되지 않나?”
“그…… 그, 그건 그렇지만…… 그렇지만…….”
룬은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쥬웰 정도 되는 인물이 애인을 두겠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그때, 리샤크가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만약 애인이 필요하신 거면, 저는 어떻습니까?”
“……응?”
“……?”
쥬웰은 얼빠진 반문을 하였고, 룬은 멍하니 리샤크를 돌아보았다.
리샤크는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애인이 필요하신 거면…… 살롱의 누군지 모를 이보다…… 그래도 곁의 제가 낫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
“원래…… 기사가 충성을 맹세한 레이디께 ‘봉사’하는 건…… 명예로운 일이니…….”
본인이 말을 하고도 뭔가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리샤크의 말이 점차 흐려졌다.
쥬웰은 눈을 끔뻑거렸다.
‘……너 지금 이거 진심이지?’
레이디께 봉사한다는 말은 기사와 레이디 간의 은밀한 밀회를 뜻하는 은어다.
기사와 모시는 레이디가 애인이 되는 건 로맨스 소설뿐 아니라 실제 세상에서도 흔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음, 리샤크 정도면 애인이 되자는 제안을 많이 받았을 것 같기도 하고.’
헛기침하는데, 갑자기 룬이 결연히 외쳤다.
“저, 저도요! 애인이 필요하신 거면 저도 아가씨의 애인이 될게요!”
“…….”
“진짜예요! 전 좋…… 아니, 괜찮아요!”
‘……내가 잘못했다.’
둘의 환장 난리에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려고 가는 것 아니야. 용무가 있으니, 갈 준비나 해.”
* * *
쥬웰은 현재 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다.
그런 쥬웰의 방문에 살롱은 난리가 났다.
“바, 바톤 남작님을 뵙습니다. 저희 살롱에는 어떤 일이신지?”
지배인이 쩔쩔매며 쥬웰을 맞았다.
잔뜩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는데, 설마 저 대단한 쥬웰이 그저 술이나 마시고자 찾아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눈치였다.
“술을 마시러 왔네.”
“……네?”
“내가 못 올 곳을 온 건가.”
“아, 아닙니다!”
지배인은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그, 그저 당황해서. 귀인을 맞아 저희는 영광입니다! 여봐라! 남작님을 안내해라!”
그러며, 지배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원하시는 코르티어(Courtier)가 있습니까?”
코르티어.
방문한 여성 귀족과 시간을 보내는 살롱의 남자를 뜻한다.
“저희 살롱에서 가장 유명한 코르티어로…….”
“아니, 코르티어 말고, 코르티잔으로 부탁하지.”
코르티잔은 살롱의 예인 중 여자를 뜻한다.
당황스러운 요구였지만 지배인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취향이야 다양한 법이니까.
동성의 예인을 찾는 일도 가끔씩 있었다.
“알겠습니다. 가장 유명한…….”
“아니, 바라는 이가 있네. 내가 말한 이로 부탁해. 마가렛이란 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쥬웰의 말을 들은 지배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건…….”
“왜? 곤란한가?”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뜻밖이어서.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마가렛은 살롱에서 현재 가장 인기 없는 예인이었다.
한때 뛰어난 재기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날개가 꺾인 것처럼 사람이 어두워졌다.
재기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예인을 찾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살롱 예인들의 인기는 귀족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 즉, 예법, 화술, 재치, 교양, 예술적 능력 등에 크게 좌우되었으니까.
그 탓에 그녀는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상관없어. 아, 그리고 단둘이 편하게 있고 싶으니 다른 이는 물러주도록. 허락 없이는 방에 누구도 들어오지 말게 하고.”
“……그건.”
지배인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예인과 고객이 단둘이 있게 하는 건, 가급적 피하게 한다. 혹시나 귀족이 예인에게 무례를 범할까여서였다.
“그건 염려할 필요 없어. 이래 돼도 난 성녀가 아닌가?”
“그, 그렇지요.”
지배인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얄 살롱에 오는 성녀라니.
아이러니했지만, 쥬웰이 실제로 지극히 숭고한 성녀임은 제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신전의 우두머리인 법왕도 살롱의 단골손님이니 성녀가 살롱에 드나드는 것 정도야.’
쥬웰은 태연히 생각했다.
에스텔레의 아버지인 법왕 웰링턴 공작.
그의 사생활이 지저분한 것은 사교계에 유명한 일이었다.
그는 툭하면 살롱에서 애인을 만들어 갈아치웠다.
‘거리의 여인에게서 날 낳았을 정도이니, 얼마나 방탕한지 말할 것도 없지.’
쥬웰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살롱에 오니 문득 친어머니 생각이 났다.
‘살아는 있을는지.’
어릴 적 헤어진 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어릴 때…… 우연히 스쳐 지나가듯 본 게 다였지. 그때까지는 살아 있었는데.’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뭐, 굳이 알아볼 필요는 없겠지. 그쪽도 반가워하지 않을 거고.’
아주 옛날에 우연히 만났을 때, 친모는 그녀를 외면했었다.
그러니 문득 생각이 들었을 뿐, 구태여 다시 찾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이쪽입니다.”
화려한 방으로 안내받았고, 곧 한 여인이 방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외모였지만 표정의 그늘이 눈에 띄었다.
‘제대로 찾아왔군.’
쥬웰은 속으로 생각하며 술잔을 들었다.
“앉아.”
“……네, 남작님.”
여인은 조심히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쥬웰은 말없이 홀로 잔에 술을 따라 마셨고 여인, 마가렛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혹시, 저를 부른 이유가 있으신지요?”
“왜 묻는 거지?”
“……이제 절 찾는 이는 아무도 없거든요.”
마가렛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제가 전해 들은 남작님이라면 따로 절 찾으신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요.”
정확했다.
그녀는 한 가지 의도가 있어서 마가렛을 불렀다.
“그대에게 하나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어.”
“부탁이요?”
마가렛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래.”
쥬웰은 빤히 마가렛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빛을 잃은 시커먼 눈동자.
“네게 도움받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하지만…… 제가 감히 남작님께 어떤 도움을…….”
마가렛은 가당치 않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할 수 있어. 오히려 그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지.”
“……?”
쥬웰은 상상치 못한 이야기를 하였다.
“살생부를 써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어?”
“……네?”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악마처럼.
“죽을 사람을 골라야 하는데 누굴 고를지 잘 모르겠어서 말이야. 네가 보기에 죽어도 될 사람…… 아니, 죽어야 할 사람을 내게 알려달라고.”
죽어야 할 사람. 말 그대로였다.
‘이번 전쟁 때 죽을 이를 정해야 해.’
그녀는 이번 전쟁을 최소한의 피해로 끝낼 생각이었다.
특히 죄 없는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작정이었다.
그럴 방법은 하나였다.
밑의 병사가 아닌, 병사들을 이끄는 수뇌부를 무너뜨려야 했다.
‘병력을 이끄는 수뇌부인 귀족들의 몰살은 피할 수 없어.’
하지만 아무리 귀족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게 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평민이라고 모두가 착하지 않고, 귀족이라고 모두가 악한 건 아니니 말이다.
쥬웰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죽어 마땅한 이가 죽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다만, 누가 실제로 죽어 마땅한 이인지는 그녀라도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웠다.
‘주시자의 눈으로 보면 지금껏 쌓아온 선악이 감별되긴 하지만, 그것만 보고 판단하면 괜히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도 있으니.’
그래서 이곳 살롱을 찾아온 것이다.
살롱의 코르티어, 코르티잔은 귀족들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엿보는 자들.
겉모습에 가려진 귀족의 진면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이니까.
‘그리고 귀족들이 저지르는 추악한 죄악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되는 자들이지.’
앞서 말했듯, 살롱의 사람은 귀족과 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살롱의 사람이 귀족에 비해 철저한 약자란 것이다.
따라서 귀족들이 휘두르는 여러 죄악에 손쉽게 노출되었다.
물론, 살롱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장치와 사교계의 평판 때문에 귀족이 살롱의 애인들에게 큰 잘못을 범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당연히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인간 말종은 어디나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인간 말종들이 힘 있는 자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란 것이다.
감히 살롱이 함부로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그래서 귀족들이 휘두른 악행에 당한 살롱의 희생자들은 어디 호소도 못 하고 홀로 눈물을 삭이는 경우가 많았다.
‘교양 있는 오락은 개뿔.’
쥬웰은 조소했다.
사실, 그녀는 돈과 권력으로 남들의 웃음을 사는 이런 살롱 문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교계 밤 문화의 정점?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이다.
“그, 그 말씀은…… 제 원한을 갚아주시겠다는 건가요?”
마가렛의 음성이 떨렸다.
“드, 들었어요. 지난 대연회 때 억울한 죽음을 맞은 영애의 한을 남작님이 갚아주었다는 것을.”
쥬웰은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저 사무적으로 말했다.
“네가 아는 인간 말종을 말해. 너에게든, 아니면 다른 이에게든 죽어 마땅한 끔찍한 죄를 저지른 이로. 단, 거짓은 허락하지 않아.”
“네, 말씀드릴게요.”
마가렛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수없이 많은 귀족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쓰레기가 많네.”
쥬웰은 탄식하였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쓰레기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도 사소한 잘못은 제외하고,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이들이었다.
가문의 힘과 권력을 믿고, 힘없는 이들의 영혼을 처절히 짓밟은 자들.
심지어 살인죄를 저지른 이들도 있었다.
마가렛은 씁쓸히 말했다.
“저는 차라리 운이 좋았던 편이에요. 끔찍한 일을 당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니까요.”
“…….”
“……그거 아세요? 살롱의 사람 중 조용히 실종되는 이가 많다는 것을.”
마가렛은 헛웃음을 흘렸다.
“잘못을 저지른 후 깔끔히 죽여 없애 버리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거든요. 어차피 천한 살롱 사람 따위가 실종되었다고 경비대에서 관심을 가지지는 않으니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귀족과 연관된 범죄임을 알고, 그냥 조용히 덮으려고 모른 척하는 것이다.
괜히 열심히 조사했다가 권세가의 인물과 얽히면 본인만 곤란해지니까.
‘썩었군. 모두.’
쥬웰은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 술을 들이켰다.
물론,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할 자격이 없었다.
이 썩은 제국의 정점에는 가넷 공작가가 있기 때문이다.
“미안.”
“아, 아닙니다.”
“아니, 다 우리 가넷의 잘못이야.”
설마 쥬웰이 이런 사과를 할지 몰랐던 마가렛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쥬웰은 다시 술을 한 잔 마신 후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마가렛은 묘한 눈빛으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남작님이 가넷가의 가주가 되시면요?”
열의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실제로, 마가렛은…… 아니, 제국의 수많은 이가 쥬웰이 가넷의 가주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숭고한 성녀이자 백성을 위하는 이니까.
그런 쥬웰이 가넷의 가주가 되면, 썩어빠진 제국을 변혁시켜 줄 거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작님, 술이 과하신 것 같은…….”
“아아, 괜찮아.”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알겠어. 네가 한 말이 진실이면 그들은 합당한 벌을 받게 될 거야.”
마가렛이 방금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죽을 이를 결정하는 일이니까.
일단, 마가렛의 이야기를 토대로 주시자의 눈으로 교차 확인할 계획이었다.
‘죽어 마땅한 이가 너무 많아 문제인데…… 이번에 처리 못 할 말종은 기억해 두고 있다가 다음 만찬 때 사용하면 되겠지.’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물었다.
“웰링턴 공작 전하는 요즘도 살롱에 자주 오시나?”
웰링턴!
이전 삶 그녀의 친부.
그리고…… 원수.
살롱에 오니 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최근 본 적이 없으니. 이상하게 못 마주쳤단 말이야.’
매리엇, 라디트야 자주 보고 있고, 플랑드나도 사교계에서 활동하며 이따금 보고 있는데 웰링턴 공작은 최근 전혀 얼굴을 보질 못했다.
‘신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하지.’
웰링턴 공작은 살롱의 단골이니, 근황을 알까 물어본 것이다.
마가렛은 왜 쥬웰이 웰링턴의 소식을 묻는 건지 의아한 얼굴인 듯했지만, 순순히 답하였다.
“여전히 자주 오세요. 어제도 왔다가 가셨어요.”
“그렇군.”
쥬웰은 피식 웃었다.
두문불출이기에 뭘 하고 있나 했는데, 방탕하게 즐기며 지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최대한 즐기고 있으라고. 당신 차례도 멀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가렛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최근 조금 이상해지셨어요.”
“흐음?”
“이전과 다르게 와도 전혀 즐거워하지 않고, 술만 마시다 돌아가시고는 해요. 술을 너무 마셔서인지 몸도 많이 마르셨어요.”
뜻밖의 중요한 정보였다.
‘에메랄드 공작가에 내가 모르는 문제라도 생긴 건가?’
쥬웰은 한 번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변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 이야기 고마워.”
쥬웰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또 다른 물음을 하였다.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음성으로.
“혹시…… 시에나란 여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나?”
“시에나요?”
마가렛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요? 혹시 살롱 쪽 사람인가요?”
“비슷한데…… 아니다. 아니야. 방금 물어본 건 그냥 잊어.”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시에나는 에스텔레의 친모의 이름이었다.
문득 궁금증이 떠올라 물었지만 딱히 알 필요 없는 일이었다.
대신, 쥬웰은 다른 중요한 질문을 하였다.
“휘란드 오라버니에 대해서는 아나?”
“……?”
마가렛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휘란드 님이면…… 제국 아카데미에 계신 가넷가의 큰공자님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좋아. 휘란드 오라버니에 대해 들은 걸 말해보도록.”
휘란드의 대외적 평판은 완벽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아카데미 재학생들도 살롱에 많이 오니, 취해 휘란드의 이야기를 떠든 적이 있을 것이다.
“가넷가의 큰 공자님다운 훌륭한 분이라고 듣긴 했는데…….”
쥬웰은 마가렛의 음성에 실린 머뭇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쥬웰은 웃었다.
“가넷가의 사람답다는 건, 욕인데? 세상에서 제일 나쁜 악인이라는 뜻이잖아?”
마가렛은 당황했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마가렛은 쥬웰의 눈치를 보았다.
“휘란드 님에 대해 여쭤보시는 건…… 그분이 남작님의 적이기 때문이죠?”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가 가넷가의 권좌를 노리고 있는 건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니.
“그러면…… 저도 남작님을 응원하는 의미로 말씀드릴게요. 저는 남작님이 우리 백성들을 위해 가넷가의 가주가 되셨으면 하니까요.”
“고마워.”
“……휘란드 님이 가문에 돌아오면, 조심하는 게 좋으실 거예요.”
“조심?”
의외의 이야기였다.
“일전…… 아카데미 재학 중인 영식분들과 만남을 가진 적이 있는데…… 휘란드 님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요.”
“흐음.”
“무서운 분이시라고.”
마가렛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하셨는데…… 그게 순수한 실력으로 한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
“사실 아카데미에는 휘란드 님보다 더 뛰어난 경쟁자가 몇 명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모두 휴학하거나 학업을 멈추었대요. 정확한 뒷일은 당사자들 말고는 모르지만…… 저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분들 모두 휘란드 님을 두려워했어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쥬웰은 팔짱을 꼈다.
“아카데미 총회장이기도 했는데 그분께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분들도…… 어느 순간 모두 그분에게 고개를 조아리게 되었대요. 그것도 두려워하면서…… 덕분에 아카데미 모두가 그분의 눈치를 봤다고 해요.”
“그렇군.”
“그러니…… 가넷가로 돌아오면, 꼭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마가렛은 쥬웰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이야기하였다.
반면 쥬웰은 다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별것 없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애매한데.’
휘란드는 토른 공작의 총애를 받는 손자였다.
그리고 알다시피 토른 공작은 착한 바보를 좋아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악하더라도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똑똑한 악인을 더 좋아했다.
그러니 휘란드도 비슷한 부류일 거라고는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문제는 악질의 ‘수준’이었다.
악인도 저지른 죄악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그냥 평범한(?) 가넷다운 짓거리 정도잖아.’
마가렛의 이야기에 따라 추정하면, 죽거나 불구가 될 정도로 크게 다친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가문의 힘으로 협박하거나 약점 정도 잡은 것 같은데, 그 정도면 그냥 평범한(?) 가넷다운 행동이었다.
‘물론 그것도 나쁜 행동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내 복수에 휘말리게 해도 될 정도인지는 판단이 서질 않네.’
그녀는 로튼 백작을 무너뜨리기 위해 휘란드를 끔찍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휘란드가 그래도 될 만한 악인인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직접 만나봐야 판단할 수 있겠어.’
“어쨌든 고맙군.”
이후, 쥬엘은 일어났다.
용무가 끝났으니 저택으로 돌아가 볼 생각이었다.
참고로 리샤크는 살롱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향하는데, 쥬웰은 예상치 못한 문제를 발견했다.
“……잠깐. 기다려.”
“남작님?”
“조금만 쉬었다 가지.”
쥬웰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망할. 취했어.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마가렛과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모로 답답해 술을 연거푸 마신 탓이었다.
살롱에서 나오는 술은 당연히 최고급 술이었고, 그런 술은 대부분 독하다.
뒤늦게 화악 취기가 올라오며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일단, 살롱 안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기로 했다.
‘아, 알딸딸하네. 이 몸이 되어 취한 건 처음인가.’
화끈화끈 얼굴이 뜨겁고, 시야가 빙글빙글했다.
진짜 제대로 취한 것이다.
‘……이거 위험한데?’
쥬웰은 긴장했다.
진짜 위험했다.
‘이러다가 원수라도 만나면…… 감정을 못 참고 죽여 버리면 어떻게 하지?’
취기와 함께 두근, 살기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원수들을 찾아가 심장을 뜯어버리고 싶었다.
눈앞에 원수가 보이면 충동을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안 돼. 누구든 마주치기 전에 피해야 해.’
비틀거리며 억지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뜻밖의 손길이 그녀를 붙들었다.
“아름다운 레이디, 괜찮으신지요?”
낯선 부드러운 음성.
“제가 당신께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쥬웰을 살롱의 여인으로 착각한 건지, 수작을 거는 음성이었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일 없으니…… 손 놓으시죠.”
“그러지 말고.”
상대 남자가 휙 그녀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상대의 얼굴을 본 쥬웰은 우뚝 굳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하늘색 머리칼의 쾌활한 인상의 미남자.
그리고…… 석륫빛(가넷) 보석안.
상대 남자도 쥬웰을 알아본 듯했다.
놀란 얼굴을 하더니 맥빠진 음성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뭐야, 웬 요정이 있는가 했더니…… 쥬웰, 너였나? 하긴, 너 말고 이만큼 아름다운 이가 있을 리가 없지.”
“……그러게요.”
쥬웰은 손목을 털어 상대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는 말했다.
“휘란드 오라버니.”
휘란드. 난데없이 살롱에서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둘은 살롱의 정원으로 나왔다.
“마셔라. 술을 깨게 해주는 음료다.”
휘란드가 쥬웰의 손에 시원한 잔을 쥐여 주었다.
“……고마워요.”
“고맙긴. 그나저나 네가 이런 곳에는 왜? 아니,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먼저 해야 하는 건가?”
휘란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반갑구나. 1년 만인가? 이런 곳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네.”
쥬웰은 짧게 답했다.
하필, 완전 취했을 때 휘란드를 만나 머리가 울려 길게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쥬웰의 다소곳(?)한 모습에 휘란드는 석륫빛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소문은 들었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이전에는 왈가닥이기만 했는데, 이제는 훌륭한 레이디가 되었어. 당장 결혼을 가도 되겠어.”
쥬웰은 그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놈 봐라?’
은근히 쥬웰을 내리까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결혼을 ‘가다’니?
만약 그녀가 결혼하면 데릴사위를 데리고 ‘오는’ 게 마땅했다.
휘란드는 일부러 저런 식으로 말한 게 분명했다.
왜?
쥬웰을 폄훼하려고.
‘귀엽네.’
쥬웰은 휘란드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는 생각했다.
지금, 휘란드는 쥬웰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했다.
원래 가넷가는 휘란드의 아버지인 로튼 백작에게 이어지고, 차후 그의 것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눈여겨보지도 않았던 사촌 동생이 난데없이 두각을 드러내 권좌를 빼앗아 갈 판국이니,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수도에 왔음에도 바로 가넷가로 돌아오지 않고 밖에서 나돌고 있는 건 먼저 수도의 돌아가는 상황, 특히 나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서인가?’
그런 듯했다.
적을 맞닥뜨리기 전에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는 건 기본이니까.
‘그나저나 정말 애매하네.’
쥬웰은 팔짱을 꼈다.
‘주시자의 눈’을 발현하자 휘란드의 영혼의 빛이 보였다.
거멨다.
그런데 심하지는 않았다.
‘나쁜 놈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심하지는 않아. 끔찍한 잘못은 아직 저지른 적이 없어.’
의외의 이야기였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건 아니다.
자잘한 잘못은 숱하게 저지른 것 같다. 그러니 저렇게 영혼의 빛이 거멓지.
다만…… 끔찍한 잘못, 즉 죽어 마땅한 잘못을 저지른 적은 아직 없어 보였다.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순수한 젊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아카데미에 있기도 했고. 덜 타락했어.’
쥬웰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휘란드가 이대로 성장하면 로튼 백작 못지않은 이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어쩌지?’
쥬웰은 휘란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쥬웰의 모습을 오해한 건지, 휘란드가 웃으며 말했다.
“술 때문에 많이 힘든가 보구나. 어서 마시거라. 술이 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마워요.”
쥬웰은 별생각 없이 휘란드가 건네준 잔을 입에 가져갔다가 흠칫하였다.
‘이 발칙한 놈 봐라?’
쥬웰은 휘란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눈빛 너머, 흐릿한 기대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쥬웰이 음료를 마신 후 일어날 일을 기대하는 것이다.
‘잘됐네. 이걸 기회로 판단하면 되겠어.’
쥬웰은 휘란드의 수작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이후 휘란드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휘란드는 모르리라.
지금 자신이 악마가 내린 시험대에 올랐음을.
꿀꺽, 꿀꺽.
쥬웰은 휘란드가 내민 음료를 한번에 비웠다.
그리고.
‘아…….’
역시나 핑 정신이 아득해졌다.
예상했던 대로 음료에 약이 타져 있었다.
“쥬웰? 괜찮으냐?”
“……오…… 라버니?”
쥬웰은 일부러 약효를 억제하지 않았다.
딱, 의식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약효가 날뛰게 하였다.
쥬웰의 눈빛이 텅 빈 것처럼 흐릿해졌고, 반면 휘란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가 손을 들어 툭툭 쥬웰의 뺨을 두드렸다.
“쥬웰? 쥬웰?”
여전히 반응하지 않음을 확인 후, 휘란드의 눈동자에 독기가 흘렀다.
그리고.
짜악!
그가 쥬웰의 뺨을 후려갈겼다.
“……!”
물론, 손바닥이 닿는 순간, 희미하게 마기를 일으켜 쥬웰이 실제로 받은 타격은 없었다.
휘란드의 손은 쥬웰이 일으킨 마기에 닿았을 뿐, 실제 쥬웰의 뺨에는 닿지 못했다.
쥬웰은 옆으로 쓰러지는 연기를 하였다.
“건방진 년.”
휘란드는 쓰러진 쥬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건 네년 때문에 굴욕을 겪은 어머니의 몫이다.”
쥬웰의 음모에 당해 평생 유폐형에 처한 에블린 백작 부인을 말하리라.
휘란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멱살을 쥐어 쥬웰을 일으키더니, 으르렁거렸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잘도 나댔다지. 하지만 그것도 지금까지야.”
“날…… 죽일 건가요?”
쥬웰은 간신히 정신을 차린 척, 떠듬떠듬 연기하며 말하였다.
“아니, 그래도 같은 핏줄인데 죽일 수까지는 없지.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휘란드는 비릿하게 웃었다.
“네가 방금 먹은 약은 극심한 중독성을 지닌 약. 앞으로 넌 내 말에 거스르지 못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가주직을 순순히 포기하면 해독약을 주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쥬웰은 이 우습지도 않은 연기를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시험은 끝났다.
“그래, 알았어.”
갑자기 명료해진 쥬웰의 음성에 휘란드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여기 목에 더러운 손 좀 치울래? 잘라 버리기 전에.”
“……!”
그 거친 말에 휘란드는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하지만 휘란드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쥬웰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압도당한 것이다.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쥬웰은 빤히 휘란드를 보았는데,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이 휘란드를 짓눌렀다.
마치 뱀을 마주한 생쥐처럼 휘란드의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거지? 그게 어떤 비열하고 끔찍한 수단이든.”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때가 덜 타고 순수한 면이 남아 있지만 확실히 가넷다웠다.
끔찍한 괴물 토른 공작이 총애할 만하달까?
“그러면…… 나도 오라버니한테 똑같이 해도 되지? 내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지?”
“……!”
정체 모를 위기감에 휘란드는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늦었다.
악마화가 피어올랐고,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둠의 그림자가 확 휘란드를 덮쳤다.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섬뜩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마워. 죄책감 덜게 해주어서.”
* * *
다음 날.
휘란드가 가넷가에 돌아왔다.
그는 전날 있었던 일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듯했다.
“쥬웰? 어제 우리?”
“네, 만났어요.”
쥬웰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휘란드는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만났는데…… 만났다는 것만 기억났다.
‘살롱에 가긴 했는데…… 쥬웰을 어디서 본 거지? 내가 어제 술에 많이 취했었나?’
어쨌든 큰 공자의 귀환에 저택이 한바탕 들썩였다.
믿음직한 아들이 합류하자 로튼 백작은 기세등등해졌고, 가문의 사람들은 남몰래 긴장하였다.
‘과연, 앞으로 어떻게 일이?’
휘란드가 쥬웰의 새로운 적이 됨은 기정사실이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후계 다툼이 진행될지 모두 촉각을 기울였다.
그때, 토른 공작이 나왔다.
“휘란드, 왔느냐?”
“가주님을 뵙습니다!”
휘란드가 쾌활, 씩씩한 얼굴로 토른 공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장래가 기대되는 싱그러운 청년답게 밝고 믿음직한 겉모습이었다.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네, 가문에 누가 되지 않고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래, 들었다. 기특하구나.”
토른 공작은 푸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이 많았어.”
그 칭찬에 휘란드는 환한 얼굴을 했다.
“멈추지 않고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앞으로 ‘충성’의 가넷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그 외침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보직을 달라는 거였다.
여기서 토른 공작이 휘란드에게 어떤 직위를 내리냐에 따라, 앞으로의 후계 정국은 요동을 칠 것이다.
그런데 토른 공작이 예상 밖의 대답을 하였다.
푸근히 미소를 짓더니 쥬웰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 쥬웰 네 생각에는 오라비에게 어떤 보직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으냐?”
“……!”
모두가 깜짝 놀랐다.
휘란드의 보직을 쥬웰보고 결정하라니?!
이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휘란드와 로튼 백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 아버지? 그건…….”
로튼 백작이 떠듬떠듬 항변했다.
토른 공작이 빤히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
로튼 백작은 입을 우뚝 다물었다.
토른 공작의 음성은 그저 잔잔할 뿐이었다.
하지만 토른 공작이 저리 말하는데, 더 반론을 꺼낼 수 있는 이는 세상에 누구도 없었다.
“그래. 말해보아라, 쥬웰.”
쥬웰은 놀란 마음이 들었다.
‘이 능구렁이가 웬일로 이러는 거지?’
그녀는 토른 공작을 바라보았다.
토른 공작은 여전히 웃는 낯빛이었다.
쥬웰은 토른 공작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게 기회를 준 거야. 휘란드를 짓밟을 수 있는.’
쥬웰은 새삼스레 생각했다.
‘이렇게 대놓고 편을 들어주다니. 의외네.’
이건 토른 공작의 마음이 휘란드 따위 안중에도 없고 쥬웰에게 향하고 있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로튼 백작이 완벽히 토른 공작의 눈 밖에 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과연, 어떤 직위를 주어야 휘란드를 낭패하게 할 수 있을까?’
많았다.
그럴싸하지만, 실권은 전혀 없는 직위야 널렸으니까.
하지만 쥬웰은 전혀 뜻밖의 답변을 놓았다.
“휘란드 오라버니께 어울리는 보직은…… 군부 차관직이 어떨까 싶네요.”
“……!”
모두가 깜짝 놀랐다.
군부 차관은 군부에서 두 번째 실권직으로 가넷가에서 손꼽게 중요하게 여기는 직위였다.
참고로 가넷가의 가주는 이런 직위를 겸임한다.
재상, 귀족원의 위원장, 제국 의회의 최고 의장, 그리고…… 군부 대신.
이 중 가장 중요한 직위는 재상직과 군부 대신직이었다.
특히 제국군을 움직일 수 있는 병권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힘이기에 군부 대신직은 절대로 다른 이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토른 공작도 로튼 백작에게 재상직과 귀족원의 위원장, 의회의 최고 의장직은 넘겼어도, 최후의 최후까지 군부 대신직은 넘기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지금도 제국의 군부 대신은 토른 공작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군부이기에 차관직도 가넷가의 최고 핵심 인물이 맡는다.
‘보통은 후계가 맡게 되지.’
가넷가 후계의 보직은 보통 행정부 부부장, 군부 차관직이다.
그중 하나인 행정부 부부장은 쥬웰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남은 하나인 군부 차관직을 휘란드에게 넘기겠다는 것이다.
“……진심이냐?”
토른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의도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토른 공작만이 아니다.
장내의 모든 사람.
특히 로튼 백작과 휘란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쥬웰은 그저 빙긋 웃었다.
“네, 휘란드 오라버니라면 잘할 수 있을 거로 믿어요.”
“…….”
“마침 반란도 일어났으니 휘란드 오라버니가 능력을 입증해 보이기에도 적절하고요.”
결국 토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에 따르마. 휘란드, 너는 오늘 중으로 황실에 들러 군부 차관의 직인을 새로 받아 와라. 알고 있겠지만 황태자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네, 알겠습니다.”
휘란드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모임이 파했는데, 토른 공작이 쥬웰을 불렀다.
“요 귀여운 녀석.”
토른 공작이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자 쥬웰은 그에게 뛰어가 애교를 부렸다.
“할아버지! 제가 이야기한 대로 해주셔서 감사해요. 역시 할아버지가 최고예요!”
토른 공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네 말대로 해주긴 했다만. 무슨 생각이냐?”
“후음. 알고 계시지 않나요?”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할아버지라면 당연히 눈치챘을 것 같은데.”
토른 공작은 쥬웰에게 장난스럽게 꿀밤을 먹이는 척하였다.
“욘석. 할아비를 놀리려 들면 못쓴다.”
“헤헤. 그래도 짐작하고 계신 것 맞잖아요.”
“클클.”
토른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군부 차관직을 맡긴 후, 음모에 빠뜨려 휘란드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 맞느냐?”
“네, 맞아요.”
쥬웰은 미소를 지었다.
“그냥 한직을 주는 건 너무 싱겁잖아요. 별달리 정치적 타격을 입힐 수도 없고요.”
사랑스러운 미소와 다르게 흘러나오는 말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할아버지께서 기회를 주셨으니 허투루 날릴 수 없죠. 전 이번 기회에 휘란드 오라버니에게 큰 타격을 줄 거예요.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쥬웰이 휘란드에게 중요 보직을 맡긴 이유는 간단했다.
더욱 큰 상처를 주기 위해.
토른 공작은 잠시 묘한 눈빛으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쥬웰, 그것 아느냐? 넌 참 날 많이 닮았어. 나 같은 괴물은…… 내 평생 네가 처음이다.”
“후음, 그래서 싫은가요?”
“싫을 리가. 더욱 사랑스럽지.”
“헤헤.”
토른 공작은 웃으며 쥬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침 반란이 일어났으니 토벌군을 일부러 패하게 한 후 휘란드에게 그 책임을 덮어씌울 생각이냐?”
“네, 그렇지 않아도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를 꺾어줄 때가 됐으니까요. 겸사겸사 휘란드 오라버니도 함께 엮어 짓밟으려고요.”
“클클. 그런데 가능한 것이냐? 필바하, 그 허접한 놈이 이끄는 오합지졸이 토벌군에 승리할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데?”
쥬웰은 웃음만 지었다.
“자세한 사항은 영업 비밀인 것 아시죠?”
“클클. 그래, 더 묻지 않으마. 네가 알아서 하겠지.”
“헤헤, 고마워요.”
“다만, 하나만 알아두어라. 난 승자의 편이다.”
“…….”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토른 공작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나 덧붙였다.
“하지만 난 네가 이겼으면 좋겠구나.”
* * *
그때, 페리도트가의 고성.
메디안 백작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유스넨 때문이었다.
한참이나 서재에 틀어박혀 있다가 얼마 전 나왔는데,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표정이 한없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말을 걸기조차 어려운 분위기였다.
“……전하?”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신 겁니까?”
메디안 백작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유스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냐고?’
그럴 리가.
유스넨은 서재에서 읽었던 책, ‘베스윈의 서’를 떠올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말도 안 돼.’
베스윈의 서에는 상상도 못 하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지금 유스넨은 충격받은 정신을 추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
메디안 백작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유스넨 앞에 놓인 책을 힐끗 훔쳐보았다.
‘저 책 때문에 저러시는 것 같은데…… 저건 그냥 소설책 아닌가?’
유스넨은 서재에서 하나의 책을 가지고 나와서 반복해 읽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책이 별것 없는 소설책이란 것이다. 도대체 왜 페리도트가의 서재에 있었는지 알 수도 없는.
“……소설의 내용이 많이 별로였습니까?”
“소설이라고요?”
“앞에 놓인 소설 때문에 지금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유스넨은 실소했다.
“백작의 눈에는 지금 이게 소설책으로 보이십니까?”
“아닙니까? <쉬고 싶은 능력 시녀님은 외과 의사>. 허접한 싸구려 삼류 소설 같은 제목인데요?”
유스넨은 큭큭 웃음을 흘렸다.
듣는 이가 섬뜩해지는 통한의 웃음이었다.
“그렇게 보이는군요. 알겠습니다. 어쨌든 나가보십시오. 홀로 있고 싶으니.”
“……알겠습니다.”
메디안 백작은 조심히 사라졌다.
그리고 홀로 남은 유스넨은.
“……빌어먹을.”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빌어먹을!”
베스윈의 서의 내용을 부정하고 싶지만, 아니었다.
책에 적힌 내용은 진실이었다.
메디안 백작이 이 책을 못 알아보고 있는 게 그 사실을 증명했다.
이 책은 오로지 예언이 지정한 이만 읽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는 책이다.
유스넨은 참담한 얼굴로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는 위대한 빛이 내리신 신탁.
300년 후. 16 대천사장에게 저주받은 커다란 어둠이 세상에 강림할 것이니.
나 베스윈은 신탁을 받아 그 어둠을 대비해 후인을 남긴다.
페리도트가는 그 어둠을 대비해 남겨둔 내 핏줄. 나의 핏줄을 물려받은 후인이여. 그대가 신탁이 지정한 이라면, 이 책을 읽을 수 있으리니. 그대는 선택된 자이다.
선택된 후인이여. 그대는 세상에 도래할 거대한 어둠 때문에 지음받은 자이니.
거대한 어둠의 영혼을 취해 영광을 얻어라.]
유스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책이 말하는 바는 명료했다.
신탁은 끔찍한 어둠, 쥬웰이 세상에 나타날 것을 미리 예지하고 대적자를 준비하였다.
그게 유스넨이다.
즉, 그는 쥬웰과 맞서 싸워 죽여야 할 운명을 타고났다.
무려 300년이나 전에 정해진 사명에 의해.
“웃기지 마.”
유스넨은 비틀린 소리를 내었다.
“웃기지 말라고!”
거친 투기가 발산되었고, 성의 창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빛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위험한 발언을 내뱉었다.
“신탁 따위.”
그런 유스넨의 눈동자가 위태로운 시뻘건 빛으로 번뜩였다.
* * *
휘란드가 군부 차관이 된 후, 토벌군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그러면 오늘 최종 결정을 하지요.”
가넷가의 대회의실.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모인 이들은 당연히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중 눈에 띄는 이는 단연코 세 명이었다.
첫째는 당연히 쥬웰.
둘째는 신임 군부 차관이 된 휘란드였다.
휘란드는 잔뜩 기가 산 얼굴이었다.
‘귀엽네.’
쥬웰은 휘란드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고는 생각했다.
지금껏 끔찍하고 추악한 이들을 주로 상대하다가 ‘비교적’ 순수한(?) 휘란드를 보니 싱그럽고 풋풋한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회의장 건너편에서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주목받는 세 번째 인물.
라디트였다.
그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대표로 이 회의에 참여했다.
‘뭘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역겹게.’
라디트와는 대연회 이후로 따로 만난 적 없었다.
오늘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는데, 라디트는 민망할 정도로 쥬웰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라디트의 시선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헛기침하였다.
‘라디트 백작님께서 쥬웰 남작님께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건가?’
‘설마, 네 번째 약혼자가 되게 해달라고 청하려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은 실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뭐, 당연히 농담 삼아 하는 생각이지만 그만큼 지금 라디트의 눈빛이 심상치 않기는 했다.
뭐라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반적인 시선이 아님을 모두가 짐작하였다.
‘진짜 왜 저러시는 거지?’
결국 쥬웰은 주의를 줄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면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라디트는 한발 늦게 대답하였다. 하지만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아니, 거두려고 하다가 다시 쥬웰에게 향하였다.
‘아, 짜증 나게.’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역겨운 벌레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듯해 불쾌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무시하고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러면 논의했던 대로 사파이어 공작가의 산하 기사단이 출정하는 것으로 하지요. 혹시 다른 의견이 있는지요?”
군부 차관인 휘란드가 회의를 이끌며 말하였다.
참고로 군부 대신인 토른 공작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쥬웰 남작님께서는 따로 의견이 없으신지요?”
휘란드가 돌연 쥬웰에게 물었다.
특별한 의미로 물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결정된 일이니까.
그저 회의를 주도하는 자신의 위치에 취해 쥬웰에게 자신의 권위를 내보이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런데 쥬웰의 말은 예상을 깼다.
“전 지금 안에 반대합니다.”
“……!”
회의장이 살짝 술렁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필바하는 교활한 이라 뒤로 어떤 수단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터. 봉신 가문의 기사단 하나로는 혹시 모를 사태에 반격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승리를 위해서는 최대한 빈틈없는 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대비라면 뭘 말하는 겁니까?”
“그거야 어떤 승리를 바라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쥬웰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만약 완전하고 희생 없는 승리를 바란다면 검제 샤피렌 공을 출전시키는 게 최선이겠지요.”
“……!”
장내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검제(劍帝) 샤피렌!
천하제일 검.
검 한 자루로 초월자가 된 여인.
그녀가 출전한다면 능히 홀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으리라.
‘만약 정말 제국과 백성을 위한다면 검제 샤피렌을 보내는 게 제일 합당하지. 어떤 피해도 없이 일이 마무리될 테니까.’
하지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사파이어 공작가가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크흠, 샤피렌 공은 마경에서 마물들을 상대하느라 반란 따위를 신경 쓰기 어려울 겁니다.”
사파이어 공작가의 귀족들이 불편한 얼굴로 말하였다.
쥬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정말로 샤피렌을 보내려고 이야기한 게 아니었다.
검제 샤피렌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 쥬웰도 마찬가지이니까.
‘이미 유스넨, 라플 공작, 타란툴라와 모조리 엮인 상황에서 샤피렌까지 적이 되는 건 사양이야.’
샤피렌은 명백히 ‘정의’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것도 지극히 올곧아 타협의 여지가 없는.
세상에 나타나면 당연히 쥬웰과 맞서게 될 것이다.
그러니 샤피렌 이야기를 꺼낸 건 그저 다음 꺼낼 이야기의 밑밥일 뿐이었다.
“아니면 사파이어 공작가의 적염 기사단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적염(赤炎) 기사단.
사파이어 공작가는 봉신들의 기사단 말고도 세 개의 직속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다.
적염 기사단은 그중 하나였다.
‘후계의 직속 기사단이지.’
즉, 적염 기사단은 라디트가 이끄는 기사단으로, 적염 기사단이 출진하면 라디트도 당연히 전장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역시나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그건…… 너무 과합니다. 어찌 반란군 따위에 적염 기사단을.”
“맞습니다.”
“더구나 라디트 백작님께서는 곧 큰 경사가 있지 않으십니까?”
라디트는 곧 매리엇과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며칠 남지 않았다.
고작 허접한 반란군 때문에 결혼을 미루는 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쥬웰은 더 주장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결혼식이 끝난 후 라디트가 출전하는 게 좋으니까.’
라디트는 이번 반란으로 나락에 떨어지게 될 거다.
이왕이면, 결혼한 이후 추락하는 게 더욱 비참한 몰골이 될 테니, 쥬웰도 찬성이었다.
오늘은 적염 기사단의 출진을 언급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면 록필드 기사단을 출정시키도록 최종 결정하겠습니다. 록필드 기사단과 함께할 병력은 군부에서 최종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휘란드의 선언을 끝으로 회의가 파했고,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뜻밖의 음성이 그녀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쥬웰.”
“…….”
쥬웰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라디트였다.
그가 잔뜩 일그러진 눈빛으로 쥬웰을 바라보고 있었다.
“쥬웰, 너에게 할 말이…….”
“아니, 하지 마세요.”
“……!”
“형부에게 듣고 싶은 말 따위 없으니.”
“……쥬웰.”
쥬웰은 싸늘히 라디트를 바라보았다.
라디트의 눈동자가 일렁이는 걸 보니, 지난번 들었던 말이 또 떠올랐다.
‘난…… 지금도 에스텔레, 그녀를 사랑해.’
미칠 듯한 역겨움이 치밀어 올라 또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제길, 난 왜 괜히 저주를 걸어서.’
지금 라디트가 이렇게 쥬웰에게 흔들리는 건 ‘진실한 마음’을 보게 되는 저주의 영향 때문이었다.
에스텔레와 같은 영혼을 지닌 쥬웰에게 본능적으로 흔들리는 것이다.
‘설마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는.’
어찌 상상했겠는가?
그렇게 끔찍한 배신을 해놓고,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마 라디트가 이렇게까지 추악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또 토하는 건 사양하고 싶어, 휙 고개를 돌려 사라지려고 했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라디트가 덥석 쥬웰의 손목을 잡은 것이다.
“……!”
뱀이 손을 휘어 감는 듯해 쥬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무례인지 모르겠군요. 놓으세요.”
“미, 미안하다.”
라디트는 본인도 자신이 저지른 무례에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쥬웰이 사라지려고 하자 마음이 급해져 앞뒤 따지지 못하고 손을 잡아버린 것이다.
‘더러운 놈.’
쥬웰은 혐오감 가득한 눈동자로 라디트를 바라보았다.
“당장 돌아가세요, 형부.”
왜일까? 그 단어가 라디트의 마음을 거슬리게 건드렸다.
라디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네게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
“…….”
“네가 말한 대로, 적염 기사단을 출진해 필바하의 목을 가져오면 날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
쥬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용서.
그딴 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정말 순수히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 맞나요?”
쥬웰은 비릿한 비웃음을 지었다.
숨길 수 없는 경멸이 목소리에 묻었다.
“그저 제게 욕정 하는 건 아니고요?”
“……!”
라디트의 안색이 화악 붉어졌다.
치욕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뭐라 목소리를 높이진 못했는데, 지난번 쥬웰에게 저지른 일 때문이다.
“그, 그런 게 아니다.”
“아니라고요?”
쥬웰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러면 발정 난 개새끼처럼 기웃거리지 말고 꺼지세요. 형부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매리엇 언니에게.”
“…….”
“어서요. 그렇지 않아도 두 분의 결혼 날이 얼마 안 남지 않았나요? 이제 곧 새신부가 될 피앙세의 곁에 있지 않고 저한테 뭘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네요.”
라디트는 입을 꾹 다문 채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쥬웰은 픽 등을 돌려 사라졌다.
라디트가 여전히 우두커니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다시금 미칠 듯한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참았다.
곧 라디트를 위한 만찬의 순간이 다가올 테니까.
‘그래, 이제 머지않았어.’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는 이렇게 역겨워하는 일도 없어질 거다.
* * *
록필드 기사단을 주축으로 토벌군이 조직되어 출진하였다.
“사피아어 공작가 만세!”
“록필드 기사단 만세!”
기사들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치, 전장이 아니라 축제라도 나가는 듯한 분위기였다.
누구도 패배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토벌군을 배웅하는 이들도 이미 이기고 돌아온 승전군을 대하듯 열띤 함성을 질렀다.
다만, 다소 다른 시선으로 토벌군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이 질 리는 없겠지?’
‘세상에 정의는 없구나. 하아.’
록필드 기사단은 인간 말종이 모인 것으로 유명한 기사단이었다.
사파이어 공작가의 산하 기사단 중 가장 악명이 높은 곳.
록필드 기사단 기사들의 횡포에 당해 눈물 흘린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더구나 우연일까?
록필드 기사단과 함께 출진한 귀족 장교들도 하나같이 악명 높은 이들이었다.
가문의 권세를 믿고 힘없는 자들을 핍박한 이들.
물론 당연히 우연이 아니었다.
‘휘란드를 조종했지.’
쥬웰은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생각했다.
그날 살롱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휘란드의 정신에 살짝 손을 대었다.
토벌군에 어떤 귀족이 포함되게 할지는 군부 차관인 휘란드가 결정하는 몫.
그녀가 노리는 나쁜 놈들을 토벌군에 포함하게 하도록 휘란드의 정신에 최면을 걸었다.
‘자주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은 아니지만, 한 번쯤은 괜찮겠지.’
리샤크에게 하는 것처럼 단순한 명령이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고차원적인 행동을 조종하는 건 굉장히 어렵고 위험 부담이 높은 술수였다.
한 번 이상 반복하면, 대상자가 스스로의 정신이 이상함을 눈치채 들킬 가능성이 높아 자주 쓸 수는 없었다.
‘뭐, 한 번이면 충분하지.’
그때, 분홍 머리의 사랑스러운 미녀가 쥬웰에게 다가왔다.
마리였다.
“토벌군이 출발했으니 지시한 대로 하면 될까요, 로드?”
쥬웰은 마리에게 일러 옵시디언 상단의 모든 투자금을 토벌군이 패배할 시 이득 보는 주(株)에 걸게 하였다.
토벌군이 패배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되리라.
마리의 옵시디언 상단은 이번 반란 때 이런 베팅을 몇 번 더 반복할 거고, 천문학적인 돈을 쓸어 담게 될 것이다.
‘다이아가에 타격을 주는 건 덤이지. 옵시디언 상단이 쓸어올 돈은 모두 다이아가의 돈이니까.’
“그래, 시키는 대로 하도록.”
“……네.”
그런데 마리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쥬웰을 빤히 바라보았다.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따로 할 말이 있나?”
“……저 그럭저럭 봐줄 만하지 않나요?”
“……뭐?”
“예쁘지 않냐고요.”
물론 마리는 사랑스럽게 예쁘다.
그런데 갑자기 웬?
마리는 묘한 눈빛으로 말했다.
진담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는 음성으로.
“살롱에 가셨다고 들어서요. 혹시나 애인이 필요하신 거면 저는 어떤가요?”
쥬웰은 황당한 얼굴로 답했다.
“……네가 그런 쪽 취향인지는 몰랐는데.”
“그런 쪽 취향 아닌데요? 저는 그냥 로드가 좋은 건데요?”
마리는 쥬엘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로드, 제 취향이세요.”
“…….”
“…….”
쥬웰은 당황해 헛기침하였다.
“……일 없다.”
‘……하여간. 누가 마리 아니랄까봐.’
일전 에스텔레 시절에도 마리는 이런 엉뚱한 호감을 표현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데, 옆에 있던 리델하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애인을 만들려고 하셨군요.”
쥬웰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였다.
‘오라버니는 또 왜 그러는데.’
리델하트의 지금 얼굴은 뭘까.
불쾌함? 원래도 항상 찌푸린 얼굴이지만, 찌푸림의 강도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런 것 전혀 아니니, 쓸데없는 이야기는 다들 접어두도록.”
쥬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른 생각을 하였다.
‘곧 중요한 일이 있지.’
그녀가 기다려왔던 라디트와 매리엇의 결혼식이 곧이었다.
“리델하트, 내가 한 이야기는 생각해 보았는가?”
“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괜찮겠나?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신성을 모독하는 건데?”
쥬웰은 리델하트에게 이번 반란과 관련해 신탁을 조작하라고 시켰다.
추기경인 그로서는 가장 끔찍한 죄악이었다.
“만약, 원치 않으면…….”
“아니, 괜찮습니다.”
리델하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짓씹듯 뱉었다.
“내 동생, 에스텔레의 복수에 보탬이 될 일 아닙니까? 그러니 신성 모독이 무슨 상관입니까? 복수를 위해서라면 전 신의 분노를 사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쥬웰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리델하트의 저런 모습이 썩 반갑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걱정은 말도록. 아마 신께서도 이해해 주실 테니까.”
“이해해 주신다고요?”
“그래, 세상에서 가장 불쌍했던 에스텔레 성녀를 위하는 일 아닌가?”
쥬웰은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 이런 귀여운 신성 모독쯤은 신께서도 이해해 주시겠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런 끔찍한 악마가 되었지만.
신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
착각이 아니다.
성력만 봐도 확실했다.
신이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성력을 진즉 거두어갔을 테니까.
또한, 그런 눈에 보이는 증거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자신을 향한 신의 사랑을 항상 느끼고 있다.
다만 이건 다소 의아한 사실이었다.
왜 신께서는 그녀를 그렇게나 사랑하면서 그런 끔찍한 지옥에 떨어지게 놔두었단 말인가?
또한, 지금 쥬웰은 모르고 있는 일이지만 유스넨에게 왜 그런 신탁을 남겼단 말인가?
‘신의 뜻은 너무나 드높아 필멸자들은 헤아릴 수 없다’.
그 격언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그럼에도 신이 그녀를 사랑함은 확실했다.
그러니 이번 반란 때 그녀가 벌일 끔찍할 일도 눈감아주실 것이다.
‘나 당신을 원망하지 않으니, 부디 제가 저지를 죄악을 용서하소서.’
쥬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했다.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 그녀의 눈을 찔렀다.
이후 시간이 지났고, 수도에서 출진한 토벌군은 필바하의 혁명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첫 교전이었다.
그리고 수도에는 또 다른 큰일이 있었다.
드디어 라디트와 매리엇이 결혼식을 올렸다.
* * *
둘의 결혼식이 있는 날.
쥬웰은 꿈을 꾸었다.
늘 그렇듯 악몽이었다.
아니, 이걸 악몽이라고 해야 할까?
끔찍한 고통을 꿈꾼 건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행복했던 순간을 추억하는 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건 악몽이었다.
그것도 어떤 악몽보다 끔찍한.
‘라디트’와 함께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꿈이었으니까.
‘널 사랑해.’
꿈속에서 그녀는 라디트를 보며 웃었다.
바보 천치같이.
그녀는 진심으로 라디트를 사랑했으니까.
라디트의 사랑도 믿었다. 영원히 함께할 거로 생각했다.
‘에스텔레.’
라디트의 뜨거운 눈길이 그녀를 향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한없이 소중한 것을 대하듯.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이윽고 라디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만졌다.
‘입을 맞추어도 될까?’
‘…….’
그녀는 흠칫하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라디트를 사랑하지만 그와 신체 접촉을 하는 건 그녀에게 쉽지 않았다.
과거 쌓인 상처들 때문이었다.
특히, 라디트는 그녀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 중 하나였으니까.
비록 다 용서하였지만 그의 손이 닿으면 과거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참았다.
라디트를 사랑했으니까.
그가 실망하는 게 싫었으니까.
그를 사랑하니 이 상처도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노력했다.
‘……응. 입 맞춰줘.’
천천히 라디트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뱀이 얽히는 듯했지만, 억지로 참는 순간.
‘사랑해.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라디트가 속삭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 * *
“……!”
쥬웰은 퍼뜩 눈을 떴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늘 그렇듯, 전신이 흠뻑 땀에 젖어 있어 손을 들어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또…… 토했군.’
라디트의 꿈을 꾸면 자해하진 않는다.
다만 꼭 이렇게 구토를 하였다.
그래서 최근 그녀는 일부러 저녁을 거르고 잠이 들었다.
‘룬에게 미안하네.’
한숨을 내쉬었다.
가급적 혼자 뒤처리하려고 했지만 최근 잠들 때마다 토하는 일을 반복하여 룬에게 들키게 되었다.
종을 당긴 후, 곧 룬이 들어왔다.
“……아가씨.”
룬의 커다란 눈동자에 한가득 걱정이 담겼다.
하지만 뭐라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쥬웰이 원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수건을.”
“여기요.”
쥬웰은 차분히 더럽혀진 얼굴을 닦았다.
그런 쥬웰을 보는 룬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쥬웰이 왜 저렇게 괴로워하는지 룬은 모른다.
하지만 하나 아는 것은 있다.
괴물이라 불리며 경외받는 쥬웰이지만, 사실 그녀의 속은 차마 헤아릴 수도 없는 상처로 가득하다는 것을.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아파하고 있음을 말이다.
특히 오늘 쥬웰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아 보여 룬은 가슴이 아팠다.
결국 망설이다가 짧게 한마디 하였다.
“아가씨, 힘내세요.”
“아아…….”
쥬웰은 피식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오늘은 기쁜 날이거든.”
‘둘이 결혼하기를 기다렸지.’
높고 찬란한 곳에 오를수록, 더욱 끔찍이 추락하게 되는 법이다.
그녀는 매리엇과 라디트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서 추락하길 바랐고, 그래서 이 결혼을 손꼽아 기다렸다.
쥬웰은 고개를 돌렸다.
황궁, 둘의 결혼식이 치러질 곳이었다.
청명한 하늘에서 밝은 빛이 황궁 쪽을 비추고 있었다.
새롭게 한 쌍이 될 그들을 축복이라도 하듯.
그 찬란한 빛을 바라보는 쥬웰의 가슴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라디트와 매리엇은 아주 성대한 결혼식을 하였다.
당연했다.
무려 두 공작가가 결합하는 일이니.
특히 다이아 공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부를 움켜쥔 가문.
말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이란 수식어가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세기의 결혼식에 수많은 이가 몰려들었다.
“드디어 두 분이 결혼하는군요.”
“그런데 원래 일정은 더 뒤였던 것 아닙니까? 급하게 앞으로 당겼군요.”
원래 라디트 매리엇의 결혼은 늦은 봄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직 겨울이 완전히 지나가기도 전에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아직 날씨가 싸늘해 결혼하기 적합한 시기인 것도 아니라 다들 의아하단 반응이었다.
“아마…… 매리엇 전하의 사정 때문이겠지요.”
“아, 그러게요.”
“최근 입지가 좋지 않으시니까요.”
일전 대연회 때.
사교계에서 매장당한 후, 다이아 공작가 내에서 매리엇의 입지는 형편없이 흔들렸다.
쥬웰에게 무릎 꿇어 시녀가 되어, 사교계에서 퇴출당하는 건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가문 내 위상이 예전 같지 않게 된 것이다.
‘다이아의 굴욕’이라 불릴 정도로 그런 치욕적인 사태를 초래한 매리엇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한, 경쟁자인 다카펠이 가넷의 힘을 등에 업고 치고 올라와 가주로서의 권위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결혼을 앞당긴 것이다.
“라디트 백작과 결혼해 사파이어 공작가의 힘을 손에 넣으면, 흔들리던 입지를 다시 잡을 수 있겠지요.”
“이번 결혼으로 가넷 공작가도 심기가 편하지는 않겠군요.”
“그렇겠지요. 두 가문이 힘을 합치는 거니. 더구나 사파이어 공작가는 가넷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비수이니까요.”
가넷의 힘은 사파이어 공작가를 압도한다.
제국군을 움직일 병권을 쥐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파이어 공작가의 8,000에 달하는 기사 전력은 가넷도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그래서 가넷도 사파이어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두 가문이 힘을 합치면 가넷도 쉽게 대할 수 없을 텐데.”
“과연 가넷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군요.”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요. 가넷이니까요.”
“……그렇지요. 가넷이니.”
사람들은 무겁게 이야기했다.
300년 제국 역사 동안 가넷을 위협한 곳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가넷은 그 모두를 하나의 예외도 없이 무릎 꿇렸다.
심지어 황실마저 무너뜨린 가넷 아닌가?
다이아와 사파이어가 손을 잡았다고 해서 움츠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한 차례 정계가 요동치겠군요.”
“그럴 겁니다. 특히, 가넷에는…… 괴물이 있으니.”
뜻밖에 괴물은 토른 공작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쥬웰.
바로 그녀를 뜻하는 말이다.
눈치 빠른 귀족은 이제 슬슬 알아차리고 있었다.
쥬웰이 그저 숭고하기만 한 성녀가 아니란 것을.
어쩌면 토른 공작 못지않은 괴물이란 것을.
“마침, 오셨군요.”
쥬웰이 결혼식장에 도착하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대연회 때처럼 화려한 모습은 아니었다.
주인공이 될 신부를 배려해 일부러 톤을 억누른 건지 그저 단정한 차림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누구보다 강렬히 시선을 끌었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쥬웰을 주목했고, 활짝 웃고 있던 매리엇은 이를 악물었다.
매리엇의 죽일 듯 날카로운 눈빛이 쥬웰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 눈빛 깊은 곳에는 흐릿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매리엇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사실이지만, 끔찍한 굴욕을 당했던 그녀의 무의식은 쥬웰에게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라디트가 그런 매리엇에게 만류하듯 속삭였다.
“매리엇, 눈빛을 풀어.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매리엇은 도리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마침 둘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어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게 가능했다.
“설마, 저년을 편드는 거야?”
라디트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최근 매리엇의 의심증 증상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특히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걸까?
쥬웰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니, 네가 가장 아름다워야 할 날이니 그런 눈빛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면 쥬웰, 저년을 욕해줘. 내 기분이 풀리게.”
“……매리엇.”
“왜? 어차피 지금은 옆에서 듣는 사람도 없잖아.”
매리엇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설마 망설이는 거야?”
라디트는 순간 답하지 못했다.
쥬웰을 욕하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화가 났다.
매리엇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
라디트는 매리엇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신부답게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왜일까? 라디트는 그녀의 모습이…….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 마.’
라디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저 한순간의 흔들림일 뿐이다.
그는 매리엇을 사랑했다.
그래서 말했다.
“쥬웰, 저 저주받은 년은 비참하게 몰락해 네 앞에 처참하게 무릎 꿇고, 끔찍한 처지가 될 거야. 저년에게 바랐던 네 모든 바람이 이루어질 거야.”
“더. 더 자세히.”
“……비참히 몰락해, 볼품없는 처지로 끔찍이 죽임당할 거야. 얼굴은 새가, 살점은 늑대가 찢어 먹어 시체 한 점 제대로 남기지 못하게 될 거야.”
매리엇의 표정이 풀렸다.
그녀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래. 쥬웰, 저년이 죽으면, 저년의 보석안은 내가 직접 파내 장신구로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겠어.”
원래 매리엇은 쥬웰의 죽음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쥬웰에게 세상 누구보다 처참하고 잔혹한 죽음을 내리는 것. 그게 매리엇의 목표였다.
마침, 쥬웰이 그들에게 걸어왔다.
매리엇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 와줘서 고마워요, 쥬웰 남작.”
매리엇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쥬웰이 어떤 시비를 걸지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행히 쥬웰은 그저 얌전히 입을 열었다.
“결혼 축하해요, 언니.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고마워요.”
매리엇은 쥬웰의 눈치를 살폈다.
서로 적이지만, 곧 새신부가 될 그녀를 배려하는 걸까?
쥬웰은 정말 별다른 시비를 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선을 돌리더니 라디트에게 짧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형부도 오늘 최고로 멋져요. 앞으로 언니에게 꼭 잘해주세요.”
착각일까.
그 이야기를 들은 라디트의 눈썹이 희미하게 굳었다.
라디트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그래.”
“그러면, 두 분 모두 행복하세요. 제가 오늘 몸이 안 좋아 먼저 실례할게요.”
인사를 한 후,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매리엇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이가 결혼식에 머무르는 게 좋을 리가 없으니까.
“어머, 몸이 안 좋으셨군요. 힘들 텐데 와주신 것만으로도 기뻐요.”
쥬웰은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이만.”
이후,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결혼식장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그런 쥬웰의 모습을 지켜봤지만, 쥬웰은 끝까지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쥬웰.”
유스넨이었다.
그는 쥬웰이 둘의 결혼식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껴 다급히 찾아온 것이다.
실제로 지금 유스넨의 눈에 비친 쥬웰의 모습은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다.
그저 담담히 무표정했지만 마치 살얼음처럼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아릿한 안타까움이 유스넨의 가슴을 찌를 듯 아프게 해 손을 뻗었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어 유스넨을 외면했다.
“오늘은 죄송해요. 다음에 뵈어요.”
“……!”
유스넨의 얼굴이 굳었다.
거절당한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쥬웰이 걱정되었다.
저 무심한 얼굴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여 어떻게든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쥬웰은 끝까지 유스넨을 외면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난 오늘 악마가 될 거야. 그러니 흰 강아지와 마주할 수 없어.’
이제 그녀는 끔찍한 일을 할 예정이다.
그러니 유스넨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이만.”
이윽고 쥬웰이 완전히 사라진 후, 사람들은 어색하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떠난 쥬웰의 자리를 보며 유스넨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 * *
쥬웰은 결혼식장을 나와 옆의 탑으로 향했다.
참고로 둘의 결혼식장은 황궁이었다. 황궁의 홀을 자신들의 것처럼 쓴 것이다.
따라서 쥬웰이 향한 탑도 황궁의 탑이었다.
“올라 갔다 올게, 리샤크.”
“함께하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바람 쐴 겸 혼자 올라가고 싶어. 대신, 밑에서 아무도 못 올라오게 지키고 있어 줘.”
쥬웰은 혹시나 해서 한마디 덧붙였다.
“페리도트 대공이 오더라도 못 올라오게 막아줘.”
쥬웰은 자신이 저지를 끔찍한 일을 유스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유스넨을 언급하자 리샤크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눈빛을 빛내며 강한 결의를 드러낸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페리도트 대공이 올라가려고 하면 검으로 베어서라도 막을 테니 말입니다.”
검으로 벤다.
그 말에 쥬웰은 황당한 눈빛을 보냈다.
‘너 이거 진심이지?’
리샤크의 사심…… 정확히는 질투심이 엿보였다.
실제로 리샤크는 자신의 질투심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대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전 그 대공 싫습니다.”
“왜?”
“……비밀입니다.”
리샤크는 뾰로통하게 말하였다.
그런 리샤크의 모습에 쥬웰은 쿡쿡 웃었다.
리샤크의 순수한(?) 모습에 결혼식장에서 가라앉았던 기분이 살짝 풀렸다.
“갔다 올게.”
쥬웰은 천천히 탑을 올랐다.
풀렸던 기분도 잠시.
한 걸음, 한 걸음 탑을 오르는데 기분이 다시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라디트가 방금 매리엇에게 속삭이던 소리가 떠올랐다.
‘쥬웰, 저년은 비참히 몰락해 볼품없는 처지로 끔찍이 죽임당할 거야. 얼굴은 새가, 살점은 늑대가 찢어 먹어 시체 한 점 제대로 남기지 못하게 될 거야.’
그들은 쥬웰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못 들었을 거로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모두. 한 어절도 빠짐없이 들었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쥬웰은 그저 무심하게 생각했다.
지금껏 그들이 그녀에게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저런 욕설 따위 놀랄 것도 없는 일이니까.
지금 그녀의 기분이 가라앉는 건, 단순히 둘의 추악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곧 그녀가 해야 할 일 때문이었다.
탑에 오르는 건 ‘흑마법’을 위해서였다.
그녀가 할 일을 위해서는 멀리 볼 수 있는, 시야가 트인 곳이 필요했다.
이윽고 탑 위에 오르니 수도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저 멀리, 수도의 성벽 넘어 드넓은 지평선이 보였다.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곤 ‘흑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악마화가 송이송이 피어올랐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저 지평선 넘어 아득한 곳까지 닿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혁명군과 토벌군이 한창 교전을 벌이고 있는 전장이었다.
아득한 거리를 넘어, 귓가에 전장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죽여!’
‘끄아악! 살려줘!’
얄궂게도 마침, 탑 밑에 있는 결혼식장에서는 축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새로이 한 쌍이 되는 신랑, 신부의 벅찬 행복을 묘사한 웅장한 교향곡, ‘환희’였다.
끝없는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교향곡과 전장의 끔찍한 비명이 아이러니하게 교차하는 순간.
쥬웰이 번뜩 눈을 떴다. 빨간 눈동자에 시커먼 흑암(黑暗)이 내려앉았다.
이제 악마가 될 때였다.
그녀는 두 손을 들었다. 한 손은 앞으로 길게. 그리고 다른 손은 뒤로.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이지만 마치 화살을 쏘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실제로 뒤로 당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팽팽한 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쥬웰은 화살을 쏘아내는 것처럼 손가락을 놓았다.
파앙!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파공음이 울렸고, 잠시 후. 쥬웰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 마리.”
* * *
그때, 토벌군과 반란군이 맞붙은 전장.
처음에는 반란군이 우세했다.
잔뜩 방심한 록필드 기사단을 향해 필바하…… 아니, 오펜하임이 함정을 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사단이 전열을 가다듬으니 오합지졸 반란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역시나 힘의 차이가 심해.’
혁명군에도 강한 기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다수가 죽창 하나 들고 봉기한 일반 백성, 민병들이었다. 전문적인 살인 기계인 기사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오펜하임은 거세게 외쳤다.
“힘없는 백성을 괴롭히는 건 그만두어라! 너희의 상대는 바로 나다!”
“네놈이 필바하냐?”
록필드 기사단의 젊은 단장은 비릿하게 웃었다.
젊은 단장은 반란군의 수괴, 필바하의 목을 베고 다른 반란군을 모조리 도륙할 생각으로 잔인한 웃음을 흘렸다.
“죽여주마!”
말을 몰아 오펜하임에게 돌격하였고, 둘이 교차하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피슉.
무언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어?”
젊은 기사단장의 몸이 멈칫하였다. 그리고 외마디 신음을 흘리더니 말에서 굴러떨어져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