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2-4 구원자 (2)
Chapter 2-5 데스 발키리의 춤 (1)
Chapter 2-4 구원자 (2)
아예 자리를 비켜주었다. 곧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역시, 소문대로네.’
삭월의 기사.
전장에서 보인 악귀 같은 모습에 리샤크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순둥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리샤크는 피를 뿌리는 데 굉장히 익숙한 이였다.
‘제국 기사 중에서도 손에 많은 피를 묻힌 이 중 하나이니까.’
참고로 제국의 기사 중 지금껏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인물을 꼽으면 단연코 검제 샤피렌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리샤크가 꼽힐 것이다.
리샤크는 가넷가에 들어오기 전, 정말 정말 많은 피를 흘렸었다.
괜히 여러 사람이 리샤크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게 아니었다.
‘순둥해 보이는 모습도 어디까지 진짜일지.’
쥬웰은 문득 궁금해졌다.
리샤크의 진짜 속마음이 어떨지.
물론, 그가 수상쩍다는 건 아니다.
리샤크가 그녀를 대하는 마음은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진심이었다.
그녀를 향한 모욕에 저렇게나 분노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다른 부분은?
그의 속마음은 겉모습처럼 밝을까?
절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하아.”
문득 한숨을 내쉬고 쥬웰은 깨달았다.
자신이 리샤크를 아끼고 있음을.
그가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음을.
‘아아. 곤란하네.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때,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관리가 쥬웰에게 말했다.
“저, 저. 안에 괜찮은 겁니까?”
“아마?”
“그, 그…… 내무 장관님께서 곧…….”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오면 곤란한데.’
만약…… 다카펠이 쥬웰에게 그딴 눈빛을 보낸 걸 엔리크가 알면?
주먹질을 넘어 목을 베려고 들 수도 있었다.
엔리크는 따뜻한 봄 같은 마음씨를 가진 주제에, 딸과 관련한 일에서는 가끔 대놓고 과격해지는 남자였으니까.
“자네,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네?”
“아버지가 이곳으로 못 오게 잠시만 막아주게. 어떤 핑계를 대도 좋으니.”
“네? 네?”
그리고 쥬웰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다카펠 자작은 처참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리샤크는 자신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쥬웰의 눈치를 살폈다.
“아가씨를 보던 눈빛이 너무 화가 나서…… 죄송합니다.”
“음, 조금 심하긴 하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 불구가 된 건 아닌 것 같으니. 잠깐, 나가 있어 줄래?”
리샤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숙이고는 나갔다.
“끄어어.”
쥬웰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다카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파앗! 성력을 발현했다.
따뜻한 빛이 다카펠의 몸에 깃들었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다.
일부러 쥬웰이 적당한 선에서 치료를 멈춘 탓이다.
‘뭐,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만 치료하면 되겠지.’
“어이, 오라버니. 정신이 조금 들어?”
“으으…….”
다카펠이 공포에 질린 눈빛을 하였다.
누군가를 때리면 때렸지, 이런 무자비한 폭력을 당한 건 난생처음이었을 테니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내 몸을 바란다고?”
쥬웰은 피식 웃고는 다카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바짝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죽고 싶어?”
“……!”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오라버니에게 남겨진 길은 둘 중 하나야. 내게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하든지, 아니면 처참히 불에 타 죽든지.”
다카펠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그러다가 쥬웰의 말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닫고 물었다.
“불에 타 죽다니, 그게 무슨?”
“모르는 척하지 마. 오라버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 이미 알고 있으니까.”
“……!”
다카펠의 얼굴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충격으로 뒤덮였다.
그의 전신이 덜덜 떨렸다.
“무, 무슨…….”
“내가 성녀인 걸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게는 오라버니의 영혼에서 나는 썩은 악마의 악취가 느껴져.”
거짓말이다.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걸 눈치챈 이유는 그녀가 성녀라서가 아니라, 도리어 악마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어둠은 잔챙이 어둠을 알아보는 법이니까.’
원래 어둠은 스스로를 숨기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흑마도사는 진즉 박멸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이상 수준의 흑마도사가 작정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면 상대가 누구든 그걸 알아보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쥬웰의 정체를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흑마도사가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을 갖추었을 때의 이야기다.
다카펠은 그냥 딱 잔챙이였다.
‘악마들이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할 추악한 영혼이니까.’
심지어 다카펠은 어떤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경우였다.
‘영혼을 판 대가로 금전적 축복을 내려받았겠지.’
악마에게 받을 수 있는 건 비단 힘뿐만이 아니다.
플랑드나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악마가 내릴 수 있는 축복은 다양했다.
그중 다카펠은 자신의 영혼을 바쳐 상재를 내려받았다.
쥬웰은 조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가주위를 차지하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지?”
“…….”
“그래놓고도 가주 자리를 빼앗기다니. 이렇게 가련하고 한심할 수가.”
그 조롱에 다카펠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 분노는 채 피어오르기도 전에 다른 감정에 뒤덮였다.
두려움이었다.
쥬웰의 눈빛을 마주한 다카펠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뱀 앞에 선 쥐가 포식자를 알아보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쥬웰의 핏빛 선홍색 눈동자가 다카펠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지금 선택해. 악마의 주구인 게 밝혀져 불에 타 죽든지, 아니면 내 개가 되든지.”
“……!”
“단, 혹시 모르지. 내 말을 착하게 잘 따르면 내가 오라버니를 어여삐 여겨 나중에 다이아 공작가를 던져줄지도.”
쥬웰은 픽 비웃음을 지었다.
“물론 보증 따위는 없어. 오라버니가 바랄 수 있는 건 내 자비뿐이야.”
* * *
다카펠은 그녀에게 복종하기로 하였다.
‘뭐, 불에 타 죽기는 싫었을 테니까. 그래도 강하게 경고했으니 허튼 생각은 못 할 거야.’
다카펠은 아주 교활한 이이다.
그러니 강하게 목줄을 걸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 정도로 해놨으니 감히 그녀를 배신할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이후,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뜻밖의 손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쥬웰은 상대를 보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아아, 생각보다 더 빠르네.’
익숙한 창백한 얼굴.
린셀 남작 부인이었다.
그녀가 딱딱히 굳은 얼굴로 쥬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쥬웰은 상대가 마음을 굳혔다는 걸 깨달았다.
“날씨가 추운데 안으로 들어갈까요, 부인?”
“아니요.”
린셀 남작 부인은 고개를 젓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외람되지만, 지금 저와 함께 린셀 남작가에 가주실 수 있습니까?”
“린셀 남작가요?”
“네, 저희 남작가에서 아까 못다 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보여 드려야 할 것도 있고요.”
쥬웰은 힐끗 하늘을 바라보았다.
잔뜩 늦은 시간이다.
옆에서 리샤크가 곤란한 얼굴을 하였다.
“그건……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아니, 괜찮아.”
“아가씨?”
“다녀올게.”
쥬웰이 린셀 남작 부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처절히 울부짖는 듯한 눈동자였다.
쥬웰은 그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 지금 바로 출발할까요?”
* * *
쥬웰은 가넷가의 마차를, 부인은 린셀 남작가의 마차를 타고 각각 출발하였다.
워낙 늦은 시간이어서일까?
아니면, 오늘 많은 일을 하여서일까?
쥬웰은 마차 안에서 살짝 선잠이 들었고, 여지없이 안 좋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가씨!”
“……!
“아가씨!”
쥬웰은 퍼뜩 눈을 떴다.
“아.”
“괜찮으십니까?”
리샤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쥬웰은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이마에 손을 대니,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나왔다.
“내가…… 잤나?”
“……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망할,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내가 어땠지?”
리샤크는 잠시 멈칫하였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냥 별건 없었습니다. 가위에 눌리신 것 같아 깨운 겁니다.”
“정말?”
“……네.”
진짜일까? 아니면, 그녀를 배려해 모르는 척하는 걸까?
이미 벌어진 일이라 쥬웰은 어쩔 수 없이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래도 잠깐 잠든 거라 크게 흉한 모습을 보인 것 같지는 않으니.’
그때, 리샤크가 조심히 물었다.
“혹시…… 안 좋은 꿈이라도 꾸신 겁니까?”
“글쎄.”
쥬웰은 방금 꾼 꿈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걸 악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근 쥬웰이 꾸는 꿈은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다.
주로 매리엇과 라디트 꿈이었다.
둘이 번갈아 등장해 그녀를 학대하고 멸시했다.
하지만 방금 꾼 꿈은 달랐다.
누군가에게 고통받는 꿈이 아니라, 생각지도 않았던 한 인물을 만나는 꿈이었다.
그리고…… 쥬웰은 그 인물을 꿈속에서 만나고 끔찍한 괴로움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실.”
쥬웰은 멍하니, 꿈속에서 만났던 인물의 이름을 읊었다.
세실.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진.
지금 쥬웰이 이용하려는 린셀 남작 부인의 딸 이름.
난데없이 그녀가 쥬웰의 꿈에 나타난 이유가 있었다.
사실 쥬웰은 에스텔레 때부터 세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냥 안다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았다.
꽤 깊은 인연을 맺었으니까.
친구였던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해 스쳐 지나가듯 알던 사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실과 그녀는 깊은 여운이 남는 인연을 맺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세실과 난 같은 종류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 밖에서 쥬웰의 상념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도착하였습니다, 남작님.”
“……그래.”
쥬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세실과 만났던 과거의 장면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때처럼,
꿈속에서 세실은 울고 있었다.
* * *
마차가 린셀 남작가에 도착했다.
기울어진 가세를 보여주듯 남작가는 작고 남루했다. 거리의 불이 꺼진 밤이다 보니, 을씨년스러운 폐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례지만 기사님은 밖에서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린셀 남작 부인이 또 곤란한 요청을 하였다.
“그건.”
“밖에서 있어 줘, 리샤크.”
“……아가씨.”
“괜찮으니 그렇게 해줘.”
어쩔 수 없이 리샤크는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혹시 일이 있으면 바로 소리를 질러주십시오.”
남작가로 들어갔다.
발을 디디자 낡은 나무 계단이 끼익 비명을 질렀다.
‘고용인은 아무도 없나 보군.’
쥬웰은 쥐 죽은 듯 고요한 남작가 안을 살피며 생각했다.
안에 들어오니, 밖에서 봤을 때보다 더더욱 폐가 같았다.
분명 생활을 하며 지내는 곳일 텐데, 별다른 삶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쥬웰은 그게 남작 부부가 어떤 희망도 없이 죽지 못해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란 걸 눈치챘다.
‘남작은 딸의 행방불명 이후 아예 폐인이 되었다니.’
그때, 부인이 말하였다.
“……마실 것을 내드릴까요? 변변한 건 없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그런데 보여 줄 게 있다고 하셨는데?”
“…….”
린셀 남작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네, 따라와 주세요.”
남작 부인은 쥬웰을 남작가 가장 안쪽의 방으로 이끌었다.
방 밖에 도착했는데, 쥬웰은 기이함을 느꼈다.
온통 낡고, 헤지고 먼지 가득한 저택이었건만 이 방 근처만이 깨끗이 관리되어 있었다.
또한, 쥬웰은 남작가의 구조상 이 방이 가장 채광이 잘 드는 좋은 위치란 걸 눈치챘다.
덕분에 쥬웰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어떤 방인지.
남작 부인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섬뜩한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이었다!
햇볕이 드는 위치에 시체를 안장하는 관이 놓여 있었다.
관 안에는 선한 인상의 소녀가 깨끗한 드레스를 입은 채 고이 잠들어 있었다.
관 안의 소녀는 쥬웰이 아는 이였다.
쥬웰은 소녀의 이름을 읊었다.
“……세실.”
소녀의 정체는 행방불명되었다던 세실 영애였다!
남작가 안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잠들어 있는 게 아니지. 이미 죽었어. 그것도 한참 전에.’
쥬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마법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특수 처리를 한 것일 뿐, 이미 생명이 떠난 지 오래인 시체였다.
그럼에도 남작 부부가 장례를 치르지 않고 이런 기행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도저히 떠나 보낼 수가 없어서겠지.’
그때, 린셀 남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잔뜩 메말라 이제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는,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음성으로.
“세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남작님도 다 아실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요.”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말처럼 그녀는 세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더 자세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실과 난 똑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쥬웰은 무겁게 생각했다.
똑같은 아픔.
매리엇에게 고통을 받았음을 뜻한다.
‘세실도 매리엇에게 희생당한 아이 중 하나였지.’
쥬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매리엇은 어린 시절 에스텔레를 악독하게 괴롭혔다.
하지만 매리엇이 괴롭힌 이가 에스텔레 하나일까?
아니다.
매리엇은 변덕스럽고 잔학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에스텔레뿐만 아니라 여러 상대를 지목해 고통을 주었다.
특히 가문이 한미해 제대로 저항도 못 할 이를 골라 고통스럽게 했다.
왜?
재밌으니까.
‘어머. 장난이었어, 에스텔레.’
매리엇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상대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고, 매리엇은 환하게 웃기를 즐겼다.
세실은 그렇게 매리엇에게 지목당한 이 중 하나였고, 극심한 괴롭힘을 당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매리엇의 눈 밖에 나 같은 꼴이 될까 무서웠으니까.
그러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
큰 모욕을 당한 밤, 세실은 남작가에서 사라졌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수도에 흐르는 강 근처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있었지만, 그 뒤 세실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다.
“저와 남편은 미친 듯이 세실을 찾았고…… 결국 한참이 지난 후 강의 하류에서 세실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
“우리는 도저히 세실을 보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런 상태로 몇 년이고 죽은 듯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어떻게도 못 하고. 언제라도 이 아이가 눈을 뜰 것 같은 미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뚝.
남작 부인의 눈동자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무너지듯 쥬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 아이의 원한을 갚아 세실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
처절한 오열이었다.
쥬웰은 꾹 눈을 감았다.
이런 장면.
다 예상하고 온 거지만, 역시나 예상보다 더 참혹하고 안타까웠다.
‘왜 도대체.’
쥬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항상 선한 이들만 고통받는 걸까? 왜 선한 이들만 눈물 흘려야 하는 걸까?
“부인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어요. 단, 부인께서 고통을 감내할 마음이 있다면.”
“무슨 말이죠?”
“복수를 위해 다시 마음이 무너질 각오가 되어 있냐는 물음이에요.”
섬뜩한 물음.
린셀 남작 부인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그게…… 정확히 무슨?”
쥬웰은 간단히 자신의 계획을 언급했다.
“전 매리엇 공작이 세실 영애에게 했던 잘못을 이용해 그녀를 무너뜨릴 계획이에요.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되돌려 받게 할 생각이죠. 단, 무척 참혹한 과정이 될 거고, 남작 부인의 마음은 한 차례 더 무너질 거예요. 복수를 위해 그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있나요?”
“…….”
린셀 남작 부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정확히 쥬웰이 어떤 일을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세실의 죽음을 이용해 끔찍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부인의 선택을 존중하겠어요.”
쥬웰은 그렇게 린셀 남작 부인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하지만…… 그녀는 부인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다.
남작 부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남작 부인의 눈빛이 처참하게 일렁였다.
“딸이 저렇게 되었는데.”
“…….”
“제 마음은 얼마든지 무너져도 돼요. 몇 번이라도. 딸의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쥬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세실 영애와 잠시만 둘이 있을 수 있게 해주겠어요?”
“둘이요?”
“세실 영애를 위해…… 기도해 드리고 싶어요.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린셀 남작 부인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쥬웰의 말이 뜻밖이었다.
그러다 쥬웰이 진심인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합니다.”
이윽고 홀로 남은 쥬웰은 세실의 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런 기도 따위, 위선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래도 위선일지라도.
앞으로 자신이 벌일 참혹한 일을 속죄하고 싶었다.
또한 자신 때문에 또 상처 입을 남작 부부를 축복하고 싶었다.
“위대한 빛이여, 나 간절히 바라옵나니.”
왜인지 가슴이 울컥하여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 기도를 이어갔다.
나 또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려 하오니.
나의 끔찍함을 용서하옵소서.
가련히 눈감은 양과 상처 입은 가족들을 축복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쥬웰의 몸에 은은한 빛무리가 아른거렸다.
그런데 기도를 끝마치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가련한 성녀님.]
이런 희미한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쥬웰은 흠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 못한 이가 허공에 나타나 있었다.
관에 누워 있는 소녀와 똑같은 얼굴의, 순한 인상의 귀여운 소녀.
죽은 세실의 원혼이었다.
[내 유일한 은인…… 뵙고 싶었어요.]
* * *
원혼.
커다란 한을 품고 죽은 이가 세상에 남기고 가는 잔류 사념이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원혼은 죽은 이의 영혼은 아니다.
세상의 법칙상 모든 영혼은 죽는 순간, 에덴이나 게헨나로 가게 되어 있으니까.
원혼은 그런 영혼이 남긴 잔류 사념, 그러니까 찌꺼기 같은 거였다.
도저히 이대로 세상을 떠날 수 없어 남기는 미련.
그러니 지금 눈앞에 나타난 세실은 실제 생전에 만났던 세실이 아니라, 그녀가 죽을 때 남기고 간 부정적인 원한의 찌꺼기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제가 어떻게 모를까요? 아파하는 절 유일하게 감싸주셨던,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착한 성녀님인데.]
세실의 원혼은 담담히 답했다.
원혼은 세상의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능력을 지니기도 한다.
덕분에 쥬웰의 영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오랜만이네요.]
“……그래.”
쥬웰은 이 대화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세실이든, 그녀든.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끼리, 이 무슨 한가한 인사란 말인가?
“……나 너를 이용할 거야. 복수해야 하거든.”
[들었어요.]
“내가 어떤 일을 하려는지 짐작돼?”
[네, 대충은요. 제가 겪었던 일을 이용해 무언가 끔찍한 일을 하려는 거겠죠.]
“그런데 괜찮아? 만약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아니, 괜찮아요. 성녀님이 원하는 대로 다 하세요.]
세실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쥬웰은 세실의 원혼이 다른 원혼과 다소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다른 원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처절한 원한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지치고 슬퍼 보였다.
[제가 원혼으로 남은 건,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님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슬퍼하실 부모님 때문에 도저히 그냥 떠날 수가 없었어요.]
“…….”
[그래서 오히려 부탁해요. 성녀님이 하시려는 일. 설사 아프더라도, 그래도 원한을 갚으면 부모님께서도 후련해지실 수 있을 거예요.]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왜일까?
담담히 말하는 세실의 원혼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무언가 치밀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세실의 원혼은 그런 쥬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성녀님은 괜찮으신가요?]
“……무슨 이야기지?”
[성녀님께서는 워낙 착하고 여려 그런 끔찍한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잖아요.]
쥬웰은 실소했다.
“난 이제 네가 아는 성녀가 아니야. 보시다시피 끔찍한 악마가 되었어.”
[그런가요?]
세실의 원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지금 울고 계세요?]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울다니, 무슨……”
[제게는 보여요. 성녀님의 영혼이 눈물 흘리고 있는 게.]
“……!”
[지금 아파하고 계시잖아요. 영혼이 처절히 눈물 흘릴 정도로.]
쥬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이런 끔찍한 일을 하는 건 성녀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
[저는 알 수 있어요. 성녀님이 여전히 너무나 착하다는 사실을. 차라리 완전히 악독해질 수 있으면 당신에게 축복일 텐데. 여전히 선하고 여려 이런 일을 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세실의 원혼이 안타까운 얼굴을 하였다.
[이대로라면 성녀님의 영혼은 더욱더 참혹히 상처받을 거예요. 그러니…….]
한참이나 침묵하던 쥬웰은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
“뭐, 어쩌라고?”
쥬웰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주제넘게 이야기하지 마. 네가 방금 이야기한 내용은 내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야.”
어쩌면 세실이 한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끔찍한 일을 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괴로움을 느꼈던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쥬웰은 그딴 것보다 복수하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게 설사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라도.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엇이든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세실은 뭐라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그러면, 제가 당신을 축복해 줘도 괜찮을까요? 성녀님은 생전에 절 위해준 유일한 분이었잖아요.]
“…….”
[제게는 여러 친구가 있었지만, 막상 절 위해 나섰던 건 성녀님이 유일했어요. 심지어 크게 곤란할 것을 알고도 나서주었잖아요. 그러니 저도 성녀님을 축복해 주고 싶어요.]
“……그래.”
세실의 원혼이 쥬웰을 감싸 안았다.
[축복받고, 축복받길. 내게 유일한 빛이었던 분이여.]
쥬웰은 눈을 감았다.
실체가 없는 원혼이었지만, 마치 정말로 안긴 듯한 따뜻함이 전해져 왔다.
괜히 가슴이 먹먹해 와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위대한 빛이여, 부디 이분을 가련히 여겨주소서. 부디 축복하소서.]
그렇게 달빛 밑에서 세실의 원혼이 쥬웰을 축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후, 쥬웰은 린셀 남작 부인과 정식으로 ‘계약’을 하였다.
계약의 대가는 매리엇의 파멸이었다.
그리고 사교계에 섬뜩한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했다.
행방불명되었던 세실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었다.
* * *
세실의 생환!
사람들은 그 소식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말이 행방불명이지, 사실은 모두가 세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후 목격 장소가 수도의 강가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오다니?
하지만 소문은 진위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린셀 남작가가 철저히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덕분에 사교계는 한동안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 소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세실은 한미한 가문의 보잘것없는 영애일 뿐이다. 그녀의 죽음도, 생환도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세실이 살아 돌아왔다고? 그렇군.’
이게 사람들의 정확한 반응이었다.
특히, 세실의 죽음과 직접적 연관자라 할 수 있는 매리엇은 그 소문을 듣고 어떤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게 매리엇이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오히려 사교계의 사람들이 여전히 신경 쓰는 건 쥬웰과 매리엇의 갈등이었다.
어느덧 겨울 사교계 시즌도 중후반에 접어들었다.
귀부인들이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커다란 사건은 없었다.
쥬웰은 그저 차분히 사교계 시즌을 보냈다.
사람들을 초대하고, 담소를 나누고, 이따금 소규모 연회에 참석하고.
어떤 소란도 일으키지 않고 그저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사교계의 사람들은 그런 쥬웰의 모습에 거듭 감탄하였다.
‘저렇게나 예의 바르고 배려가 넘치시다니. 그러면서 위엄도 가득해.’
‘마치 대귀족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 아닌가?’
덕분에 쥬웰을 만난 모든 이는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매리엇 전하와 저토록 다르다니.
특히 사교계의 사람들은 평소 매리엇이 부리던 패악에 질려 있었던 터라, 더더욱 쥬웰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저렇게나 훌륭한 쥬웰과 시비가 붙다니. 둘의 싸움은 매리엇의 잘못이 아닐까? 하는.
사실 엄밀히 말해 둘의 싸움의 원인은 쥬웰 때문이다.
쥬웰이 먼저 끔찍한 무례를 범했으니까.
하지만 사교계의 누구도 그때 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몰랐다.
매리엇이 자존심 때문에 쥬웰이 범한 무례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연스레 둘의 싸움을 매리엇의 책임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매리엇이 지금껏 사람들에게 보인 행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감히 대놓고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는 이는 없었다. 매리엇의 진노가 두려웠으니까.
그렇게 사교계의 여론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쥬웰의 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의 반응은 쥬웰이 의도한 바였다.
‘데뷔탕트 때 있을 일을 위해서는 철저히 여론을 등에 업어야 하니까.’
그녀는 겨울 사교계의 클라이맥스인 대연회 데뷔탕트 때 매리엇을 몰락시킬 계획이었다.
‘사람들이 매리엇을 철저히 악역으로 여기게 해야 해.’
매리엇은 악역.
쥬웰은 선한 희생자.
이게 그녀가 바라는 구도였다.
그래서 쥬웰은 매리엇이 악역으로 더욱 열심히 날뛸 수 있게 화이팅, 하라는 의미로 격려차 편지를 한 장 보냈다.
[언니, 안녕히 지내시는지요?
날씨가 추워지니 언니 생각이 나네요. 언니가 좋아하는 선물을 하나 보낼 테니, 맛있게 먹기 바라요.]
그러며 하나의 선물을 동봉했다.
발로 짓밟은 디저트였다.
이전 쥬웰이 준 모욕을 떠올리게 하는.
그 선물을 받은 매리엇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야 안 봐도 뻔했다.
저 멀리서도 ‘피의 각인’을 통해 매리엇이 느낀 분노가 쩌릿쩌릿하게 전달될 정도였으니까.
이제 매리엇은 더더욱 미쳐 날뛰어 줄 거고, 완전한 ‘악역’이 되어줄 것이다.
쥬웰이 의도한 대로 말이다.
‘아아, 감질나.’
쥬웰은 혀를 핥았다.
원수들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은 그녀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더더욱 짓밟고 싶었다.
어서, 빨리.
‘빨리, 데뷔탕트가 왔으면.’
쥬웰은 초조히 생각했다.
데뷔탕트가 끝난 후, 매리엇의 모습이 기대되었다.
‘데뷔탕트만이 아니지.’
그녀가 원수들을 위해 준비한 계획은 데뷔탕트가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차곡차곡 원수들을 위한 만찬들이 준비되어 있다.
만찬이 하나하나 끝날 때마다 원수들은 한 계단, 한 계단 참혹히 몰락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들이 기대되어 쥬웰은 초조함을 참기 어려웠다.
그때, 따뜻한 음성이 쥬웰을 불렀다.
“괜찮으십니까, 영애?”
부드러운 느낌의 둥근 안경.
그 안에 감춰진 매혹적인 눈매. 찬란한 은발.
흰 강아지 유스넨이었다.
유스넨은 약혼자로서 그녀의 파트너로 파티에 참석 후 같이 귀가하는 길이었다.
그가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코앞에서.
“아.”
쥬웰은 순간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아까 매리엇의 분노를 느끼고 뛰던 두근거림과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었다.
깊고 따뜻했다.
그리고…… 좋았다.
‘아, 곤란한데.’
쥬웰은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유스넨을 볼 때마다 점점 가슴의 고동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곤란한 일이었다.
‘아니, 곤란한 일이 맞나?’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왜 곤란하지? 어차피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서?’
쥬웰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루어지지 못하면 어때? 그냥 잠시만, 이 순간을 즐기면 안 되나?’
둘의 결말은 파국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을 즐겨도 되는 것 아닐까?
쥬웰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욕심부리고 싶어.’
끝이 정해져 있더라도.
지금은 그냥 이 따뜻함을 느끼고 싶었다.
물론 안다.
유스넨과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가슴엔 더 커다란 상처가 남게 될 것을.
그래도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때, 서늘한 손이 쥬웰의 이마를 덮었다.
“혹시 또 아프신 건 아니지요?”
유스넨의 얼굴이 더욱 쥬웰에게 가까워졌다.
그의 보석안이 그녀의 얼굴을 한가득 담았다.
그녀의 눈에도 유스넨이 한가득 담겼다.
얼핏 그의 체향이 닿을락 말락 느껴지며 두근,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영애?”
“……너무 가까워요.”
“네?”
“얼굴, 너무 가깝다고요.”
순간 유스넨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런, 실수를.’
쥬웰을 보는데, 알 수 없이 또 아련한 마음이 들어 참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간 것 같다.
“죄송합니다, 실례를.”
“아니.”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유스넨의 손을 붙잡았다. 마치 가지 말라는 듯.
“영애?”
“그냥 이대로 더 있어 주세요. 잠시만.”
“……!”
유스넨은 순간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녀의 숨결이 아슬아슬 닿을 듯했다. 하지만 곧 그런 사실마저 잊었다.
쥬웰의 붉은 눈이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유스넨도 감람빛 눈동자로 쥬웰을 보았다.
순간, 세상이 고요해졌다. 마치 온 세상에 둘만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근.
심장이 한 차례 크게 뛰었다.
쥬웰, 유스넨 모두 그 고동 소리를 들었다.
누구의 심장이 뛴 소리였을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의 소리일 수도 있었다.
쥬웰은 그 고동 소리에 취해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유스넨이 흰 강아지였을 때의 기억이 환몽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렸을 때 귀여웠던 기억.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했던 일.
그리고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하염없는 눈빛.
그런 현실과 과거가 몽롱하게 뒤섞였다.
그래서였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행동을 한 것은.
멍하니 손가락을 들어 유스넨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예뻐요.”
“……!”
말을 꺼내놓고, 쥬웰은 아차 했다.
분위기에 취해 어마어마한 무례를 저지른 것이다!
‘내가 미쳤지.’
쥬웰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유스넨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실례를 용서해 주시길…….”
그런데 그러기 전 탁, 서늘한 손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실례 아닙니다.”
“……!”
“만지셔도 괜찮습니다.”
쥬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유스넨이 재차 말했다.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아니, 좋습니다.”
먼저 얼굴을 만진 건 쥬웰이지만 대놓고 저리 말하니 민망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때 유스넨이 빨개진 쥬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렇게 있으시니…… 너무 귀엽군요.”
“……!”
“사실, 저보다는 당신이 훨씬 예쁩니다.”
두근.
왜일까? 민망함 속에서도 다시 심장이 뛰었다.
쥬웰은 멍하니 유스넨을 올려 보았다.
유스넨도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둘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둘 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저도…… 만져보아도 되겠습니까?”
쥬웰은 가만히 답했다.
“네.”
유스넨의 손가락이 쥬웰의 얼굴에 다가왔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걸 마주한 듯.
감히 만지기 주저된다는 듯 그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렸고, 쥬웰의 가슴도 그에 맞춰 희미하게 떨렸다.
유스넨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에 닿으려는 순간.
유스넨이 우뚝 멈추어 섰다.
“……?”
“안 되겠습니다.”
유스넨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더 나가면, 아쉬워 영애를 돌려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
쥬웰은 묘한 얼굴을 하였다.
‘괜찮은데?’
아직 이른 저녁이다.
당장 집에 안 돌아가도 된다.
그러니 저리 신사도를 발휘할 필요는?
‘하긴, 진도(?)가 너무 빠르긴 하니까. 우리 순수한 강아지가 주저하는 것도 당연하지.’
쥬웰도 급작스럽게 진전된 지금 분위기가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순진한(?) 유스넨에게는 더욱 당황스러웠으리라.
그러니 아쉬웠지만, 쥬웰은 자신이 이해해 주기로 하였다.
사실 언젠가 둘은 칼을 맞대어야 할 텐데, 이렇게 너무 가까워지는 게 마냥 옳은 일은 아니기도 했고.
“알겠어요. 그러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볼게요.”
“네, 조심히 가십시오.”
쥬웰이 가넷가의 마차에 올랐다.
유스넨은 웃는 얼굴로 쥬웰의 모습을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차가 사라지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사실, 그는 방금 거짓말을 하였다.
그녀의 얼굴을 만지지 못한 건 보내기 아쉬울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닿는 순간.
간신히 억눌렀던 자신의 감정이 폭발할까여서였다.
“누나.”
유스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만 그녀와 에스텔레가 겹쳐 보였다.
방금, 쥬웰이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당신, 예뻐요.’
그 말은 에스텔레가 과거 그와 지낼 때 숱하게 했던 말이었다.
‘너 예뻐. 우리 흰 강아지.’
점점 그 잔상이 커져 자신의 손이 그녀에게 닿는 순간, 이 감정을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마음이 무너져 버릴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렇게 그녀를 보냈음에도 아릿한 감정은 참아지지 않았다.
또륵.
결국 유스넨의 눈동자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를 향한.
그녀를 위하는 눈물이었다.
정작 유스넨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그녀가 떠난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저 미칠 듯이 아팠다.
* * *
한편, 쥬웰은 마차 안에서 엉뚱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카발리에를 누구로 하지?’
현재 그녀의 카발리에 자리를 노리는 이는 총 네 명이었다.
두 명의 약혼자와 주책 아버지.
……그리고 라플 공작이 있었다.
‘라플 공작, 그 미친놈은 왜 갑자기 내 카발리에가 되겠다고 신청한 거야?’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전 라플 공작에게서 난데없이 서신이 왔다.
그녀의 카발리에를 서고 싶다고.
‘물론 카발리에를 신청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인기 있는 영애의 경우 여러 영식이 카발리에를 자청한다.
그러니 이런 서신을 보낸 게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보낸 이가 라플 공작이란 것만 빼면 말이다.
‘그때 보니, 진짜 미친놈이던데.’
‘그, 그러면 나는 갈게. 아프지 마. 알았지?’
축제 때 봤던 그의 기이한 모습이 떠올라 쥬웰은 골치가 아파졌다.
‘어쨌든 미친놈은 탈락.’
그나마 다행인 건, 라플 공작은 다소 심기가 상해도 여섯 공작가를 건들 위인은 아니란 것이다.
누군지 모를 라플 공작의 ‘그녀’가 라플 공작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라플 공작이 말하는 그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라플 공작을 제외했으니, 남은 세 명 중 한 명을 골라야 했다.
‘황태자 오펜하임도 탈락. 나중에 파혼해야 하는데 무슨 놈의 카발리에.’
참고로 오펜하임은 최근 쭉 모습을 안 보이는 상태였다.
뜻밖의 일이었는데, 쥬웰은 그가 무슨 일에 골몰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적사자로 활동하느라 바쁘겠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일전, 흑사병 사태를 해결할 때.
쥬웰은 마왕으로 화해 오펜하임이 변장한 적사자 필바하에게 제안하였다.
두 달 뒤 반란을 일으켜 사파이어 공작가의 요새를 치라고.
이제 슬슬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데뷔탕트가 끝난 직후 반란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모두 쥬웰이 계획한 시간표대로였다.
‘데뷔탕트, 그리고 필바하의 반란까지 끝나면 라디트와 매리엇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네.’
데뷔탕트.
적사자의 반란.
이 두 만찬은 바로 라디트와 매리엇 두 명을 노린 거였다.
두 만찬을 기점으로 둘은 본격적으로 불행의 나락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혁명군의 반란은 나중에 생각하자.’
평소라면 기대감에 갈증이 일었겠지만 쥬웰은 다른 생각에 더 집중했다.
유스넨이었다.
‘오늘 좋았지.’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았다.
짧게 만나고 헤어지는 게 아쉬울 정도로.
‘엔리크 자작과 흰 강아지 중 누구를 카발리에로 해야 하지? 고민되네.’
물론 상식적으로 보면 유스넨을 고르는 게 옳았다.
카발리에를 아버지로 하다니.
주책도 그런 주책이 없으니까.
하지만 쥬웰은, 그리고 가넷은 원래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냥 자기가 좋으면 그만이었다.
둘 다 막상막하라 결정이 쉽지가 않았다.
‘음, 사실 난 엔리크 자작이 더 당기긴 하는데.’
쥬웰이 된 후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다름 아닌 딸 바보 엔리크 자작이었다.
‘하지만 엔리크 자작을 선택하면 흰 강아지가 아쉬워하려나? 그래도 아버지가 서운해하는 걸 보는 건 더 싫어서 말이지.’
쥬웰은 엔리크가 실망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무언가 귀여울 것 같아 쥬웰은 설핏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은 미소였다.
그리고 흠칫하였다.
쥬웰은 자신이 원수들에게 고통을 줄 때 말고도 이런 평범한, 즐거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보며 리샤크가 뿌루퉁하게 말하였다.
“기분이 좋은 것 같습니다.”
“음? 아아.”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샤크의 얼굴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는 유스넨 때문에 쥬웰이 기쁜 얼굴을 했다고 오해했는지 이런 말을 하였다.
“저 대공. 기분 나쁩니다.”
“……혹시 질투하는 거니?”
“남자의 감입니다.”
쥬웰은 쿡쿡 웃었다.
그러더니 돌연 물었다.
“리샤크, 하나만 물어도 돼?”
“네?”
“너 정말 나 좋아하니?”
“……!”
생각지 못한 돌직구에 리샤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그건…….”
쥬웰은 대답하라는 듯 빤히 리샤크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짚고 넘어갈 때가 되었으니까.’
쥬웰은 리샤크를 아낀다.
그러니 인제는 슬슬 결정해야 했다.
리샤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는…… 가급적 리샤크를 자신의 옆에서 치울 생각이었다.
‘그게 서로를 위한 길이니까.’
리샤크는 얼굴이 붉어진 채 한참이나 입술을 옴짝달싹하더니 말했다.
“……신경 쓰이긴 합니다.”
“정확히.”
“……좋아합니다.”
리샤크의 얼굴이 이제 안쓰러울 정도로 붉어졌다.
“왜? 내가 예뻐서?”
“……예뻐서라고요?”
리샤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했다.
“물론 아가씨께서는 인간 같지 않게 아름답긴 하시지만…… 제가 어떤 존재인지 아가씨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게 인간의 미추는 어떠한 감흥도 줄 수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 그러면 왜? 솔직히 내가 사랑스럽지는 않잖아?”
일전 관리들이 보여준 반응에서 알 수 있듯 대다수는 쥬웰을 아주 무서워했다.
그런 자신을 좋아하다니?
그런데 리샤크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사랑스럽습니다.”
“……뭐?”
“아가씨, 사랑스럽다고요.”
“…….”
리샤크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있었다.
쥬웰은 황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리샤크, 너 혹시 눈이?”
“……멀쩡합니다.”
“네가 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전혀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악한 사람이야.”
악한. 아주 순화한 표현이다.
리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무섭고, 어떨 때는 누구보다 독한 분이란 것 알고 있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 제 목을 치실 분이지요.”
“그래, 맞아.”
쥬웰은 부정하지 않았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녀는 리샤크의 목을 칠 것이다.
“……하지만, 그때.”
리샤크가 아련하게 말했다.
“환자를 치료할 때 진심으로 짓던 미소를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무서운 아가씨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선한 마음을 품고 있음을요.”
“…….”
“또한 아가씨께서 누구보다도 깊은 상처를 품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리샤크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전 그런 아가씨가 사랑스럽고 안쓰럽고…… 힘들어하면 토닥여 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그렇습니다.”
“…….”
“무, 무례한 마음 죄송합니다.”
쥬웰은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리샤크, 너와 난 이루어질 수 없어. 알지?”
“……압니다.”
“만약 네가 바라면, 날 호위하지 않아도 괜찮아.”
쥬웰은 리샤크를 위해 말하였다.
사실 이건 리샤크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그녀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리샤크를 보면 자꾸 눈에 밟혔다.
그러니 서로를 위해 이만 갈라지는 게 나을 것이다.
“이만 아버지에게 돌아가. 호위는 다른 이에게 맡기면 되니.”
리샤크는 가만히 있더니 답하였다.
“싫습니다.”
“뭐?”
“안 간다고요. 절대로.”
평소답지 않은 강한 어조였다.
“리샤크, 그러지 말고.”
쥬웰은 좋은 말로 달래었다.
그런데 리샤크가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돌연 쥬웰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리샤크?”
“절 내치지 말아주세요.”
리샤크의 눈동자가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아릿함에 물들었다.
“아가씨와 이루어지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니, 어떤 욕심도 품은 적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저 아가씨 곁에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리샤크.”
쥬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곁에 있으면 넌 상처 입을 뿐이야.”
“……상처요? 그딴 건 상관없습니다.”
리샤크는 헛웃음을 흘렸다.
순간 쥬웰은 놀랐다.
리샤크의 눈동자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감정이 깃들었다.
공허함이었다.
마주하기 아찔한 정도로 깊은.
“……어차피 제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숨 쉬는 것도 벅찬데. 이제 제게 의미 있는 건 아가씨뿐입니다. 그나마 아가씨를 보면서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저를 내치지만은 말아주십시오.”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리샤크의 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리샤크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었다.
끔찍한 절망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그에게 남은 애착은 홀연히 나타나 그의 마음을 빼앗아 간 쥬웰뿐.
그러니 그녀의 곁에 매달려 있으려는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무너진 마음을 지탱할 게 없으니까.
그때 리샤크가 쥬웰의 손을 붙들었다.
마치 버림받기 전, 강아지가 주인에게 애원하듯.
“제발…….”
리샤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쥬웰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난 네 아픔을 구원해 줄 수 없어.”
“그런 건 상관없어요.”
감정이 격해져서일까?
리샤크의 푸른 눈동자가 은은한 오색 창연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착각이 아니다.
찬란한 빛으로 세상의 아픔을 치료한다는 보석.
‘희망’의 오팔.
그 리샤크의 보석안이 처음으로 쥬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그저…… 아가씨의 곁에만 있게 해주면 안 될까요?”
리샤크.
오팔족의 피가 섞인 최후의 후예이자, ‘꺾인 희망’이 그렇게 쥬웰 앞에서 비참히 간청하였다.
* * *
결국 쥬웰은 리샤크를 내쫓지 못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내쫓아.’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샤크는 시한폭탄이었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그런 걸 생각하면 옆에서 잘라내는 게 최선이겠지만, 하지 못하였다.
‘모르겠다. 리샤크 일은 나중에 고민하자.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
일단은 눈앞에 닥친 데뷔탕트 먼저 신경 쓰는 게 우선이었다.
‘이제 곧이야.’
이틀만 지나면, 대망의 대연회였다.
그때 파국이 일어날 것이다.
‘마지막 준비를 해야지.’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지금껏 그녀는 데뷔탕트를 위해 여러 준비를 하였는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며 끔찍한 준비가 남아 있었다.
‘다행히 ‘제물’도 늦지 않게 도착했어.’
마침, 제물을 준비해 온 이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서, 성공했어요, 쥬웰 님! 말씀하신 장소에 그 악독한 마녀를 데리고 왔어요.]
해밀턴이었다.
그는 쥬웰에게 사이코패스 귀부인을 꾀어 지정한 장소로 데려오라는 임무를 내려받았는데, 성공해 낸 것이다.
‘용케 잘 해낸 것 같네.’
쥬웰은 생각했다.
‘의외로 둘의 궁합(?)이 잘 맞았나?’
구제 불능 쓰레기 해밀턴과 사이코패스 귀부인이라니. 은근히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기도 했다.
‘일단 자자. 내일은 힘들 테니.’
쥬웰은 침대를 보고 주저했다.
잠이 드는 건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잠을 안 잘 방법은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 잠들 ‘준비’를 한 뒤 눈을 감았다.
역시나 악몽이 그녀를 덮쳤다.
이번엔 라디트의 꿈이었다.
* * *
꿈속 내용이 정확히 언제 적의 일인지는 기억이 안 났다.
그저 어릴 때.
흔하디흔하게 겪은 학대 후였다.
솔직히 무슨 종류의 학대 이후였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워낙 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선명히 기억나는 게 있었다.
‘일어나. 더러우니 이걸로 닦아.’
누가 봐도 잘생긴.
강인한 눈매의 꼬마 아이가 엉망진창 흙에 묻어 쓰러져 있던 그녀의 앞에 손수건을 툭, 하고 던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 앞에 떨어진 손수건을 보았다.
물론 알고 있다.
이 친절이 그녀를 향한 호의로 인한 게 아니란 걸.
‘뭐 해, 안 일어나고?’
소년의 눈에 깃든 멸시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정염(正炎).
올바른 타오름.
소년은 그 기사도를 숭상하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답게 그저 약자에게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물론, 사파이어 공작가의 대부분 일원이 그러하듯 그들의 기사도는 무척이나 자기 위주였다.
즉, 내키는 대로였다.
소년, 라디트는 평소에는 벌레처럼 그녀를 멸시했다.
딱히 해코지를 한 건 아니지만 때로는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그녀는 매리엇, 플랑드나의 괴롭힘보다 그의 시선을 받는 게 더 아플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그는 가끔 이렇게 변덕을 부렸다.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마치 난 훌륭한 아이이니, 잠들기 전 착한 일을 하나 해야지, 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아무런 의미 없는 친절이었다.
당장 내일 소년은 그녀를 다시 멸시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값싼, 어떤 의미도 없는 친절에 그녀는 마음을 뺏겨 버렸다.
당시에는 그런 손길마저 베푼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까.
아차, 하는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라디트가 깊게 들어와 버렸고…… 그 뒤는 더욱 끔찍한 지옥이었다.
이전에는 그의 경멸의 시선을 받는 게 그저 아팠다면, 이후로는 비참하고 참혹했다.
마음을 버리고자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그저 너무 아팠다.
그의 경멸의 시선을 받는 게.
그리고 가끔 내미는 친절은 더더욱.
하지만 이후 시간이 흘렀다.
많은 게 변했고.
라디트도 변했다.
오로지 변하지 않았던 건 그녀뿐.
라디트는 결국 지금까지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널 사랑해. 내 목숨보다도.’
그 고백을 들은, 그녀는.
웃었다.
바보 천치같이.
* * *
“……!”
쥬웰은 눈을 떴다.
‘아.’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또 그 꿈이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데뷔탕트가 코앞이어서일까?
최근 자꾸 매리엇과 라디트 꿈을 꾸었다.
특히 라디트 꿈을 자주 꾸는 느낌이었다.
‘뭐, 다 갚아줄 거니 괜찮아.’
쥬웰은 간밤에 꾼 꿈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나저나 찝찝하네. 씻어야겠다. 오늘 해야 할 일도 있고.’
쥬웰은 자신이 오늘 할 데뷔탕트의 마지막 준비를 떠올리고는 눈빛을 낮게 가라앉혔다.
이후, 목욕물을 준비해 씻고 아침을 먹었다.
“이제 곧 데뷔탕트네요. 저 기대되어요. 아가씨가 얼마나 아름다우실지.”
룬이 쥬웰의 머리를 만져주며 말하였다.
쥬웰은 성의 없게 대답했다.
“응, 나 그날 아주 예쁠 거야.”
“당연하죠. 제가 최고로 꾸며 드릴게요!”
“아니, 적당히 꾸며도 예쁠걸?”
“음? 설마 대연회 날도 대충 하고 가실 생각은 아니겠죠? 안 돼요! 의회에 가는 게 아니라고요! 반드시 잘 꾸며야 해요!”
룬은 의지에 불타올랐다.
쥬웰은 피식 웃었다.
‘뭐, 그렇게까지 노력할 필요는 없을 텐데. 진짜 적당히 꾸며도 예쁠 거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쥬웰은 대연회 날 완벽한 주인공이 될 예정이었다.
오늘 할 마지막 준비는 바로 그걸 위한 것이었고.
대연회에 참석한 모두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룬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후 등심 스테이크, 딸기 케이크 디저트, 딸기 주스까지 마신 후였다.
의회에 올라온 안건과 가넷가의 안살림과 관련한 서류들을 보고 나니 시간이 꽤 흘렀다.
‘벌써 시간이. 늦지 않게 움직이려면 빨리 처리해야겠네.’
어서 마저 남은 서류를 결재하고 움직이려고 하던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아까 꾸었던 라디트 꿈이 떠올랐다.
‘재수 없게.’
고개를 터는데, 세바트찬이 다가왔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약속한 이가 있었나?”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돌려보내도록. 감히.”
쥬웰은 언짢은 얼굴을 했다.
그녀는 가넷가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안주인이자 실세였다. 동시에 의회의 상급 의원이었고.
그러니 그녀와 만나고자 하는 이는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 만나고 싶다고 덜컥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특히 오늘은 이제 곧 해야 할 마지막 준비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세바트찬이 말했다.
“그게…… 돌려보내기가…….”
“왜 그러지?”
“라디트 백작입니다.”
“……뭐?”
라디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쥬웰의 심장이 차갑게 굳었다.
세바트찬이 곤란한 얼굴로 말하였다.
“아가씨를 위해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주인의 심기가 급속도로 나빠진 걸 눈치챈 세바트찬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저러시지?’
“……그냥 돌아가라고 할까요?”
“아니.”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활짝 웃었다.
“응접실로 모셔.”
쥬웰의 미소를 본 세바트찬은 주춤하였다. 분명 웃고 있는데 섬뜩했다. 등줄기에 소름이 쭈뼛 솟아올랐다.
“바로 뵈러 가실 겁니까?”
“아니, 기다리고 있으라 하도록. 하던 일은 마무리해야 하니. 약속 없이 온 것이니, 그 정도는 기다리게 해도 되겠지.”
세바트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디트는 여섯 공작가 중 한 곳의 정식 후계이다.
그러니 기다리게 하는 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무턱대고 찾아온 쪽이 먼저 잘못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가 시킨 대로 하겠습니다.”
쥬웰은 다시 처리하던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남은 서류는 적지 않았다.
째각, 시간이 흘렀고, 무려 한 시간이 지난 후 세바트찬이 다시 찾아왔다.
“더 기다리라고 할까요?”
“그래. 내가 이야기하기 전에는 찾아오지 말도록.”
세바트찬은 잠시 침묵했다.
쥬웰이 일부러 라디트를 기다리게 하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왜?’
이렇게 찾아온 손님을 방치시켜 기다리게 하는 건, 보통 일부러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려고 할 때 범하는 결례였다.
하지만 세바트찬은 더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이 지났다.
아무리 약속 없이 찾아왔다지만, 상대를 무려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셈이다.
이 정도면 정말 심각한 결례였다.
고용인들이 힐끗힐끗 쥬웰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쥬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가로 30분이나 더 서류를 본 후, 모든 업무를 끝내고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바트찬이 조심히 물었다.
“이제 라디트 백작에게 가실 겁니까?”
“아니, 룬을 불러줘. 저녁에 중요히 나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치장을 먼저 해야겠어.”
“……네.”
룬이 들어와 쥬웰의 눈치를 살폈다.
“그, 매리엇 공작님의 남편분이 와 계시던데.”
“남편은 아니고, 약혼자.”
“어, 어쨌든! 아가씨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일부러 엄청 쓰고 맛없는 차를 넣어주었어요.”
쥬웰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잘했어. 역시 우리 룬이 최고네.”
“헤헤.”
“그러면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줄래?”
“네, 라디트 백작님 때문에요?”
지금 쥬웰은 편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손님을 맞기 적합하지 않은 차림.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말대로 라디트 백작은 나쁜 놈인데, 내가 왜 그런 나쁜 놈 때문에 귀찮게 옷을 차려입겠니? 저녁에 따로 나가볼 곳이 있어서 그래.”
“아. 그러면 어떤 스타일로 치장하면 될까요?”
“최대한 정숙하게.”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쥬웰이 즐겨 입는 스타일이었다.
“내일 대연회 때는 그렇게 입으시면 안 돼요. 최대한 화려하고 예쁘게 입으셔야 해요.”
“응, 당연하지.”
룬이 부지런히 치장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라디트 백작이 너무 늦는다고 아가씨께 화내면 어떻게 해요? 아까 갔을 때 보니까 계속 시계만 보고 계시던데.”
“화를 낸다고? 누가, 누구한테?”
쥬웰은 차분한 음성으로 되물었고, 룬은 흠칫하였다.
세상에 가넷에 화를 낼 수 있는 이는 없다.
그건 상대가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라도 마찬가지이다.
룬은 허겁지겁 쥬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이야기를 했어요.”
“괜찮으니 일어나.”
딱히 룬을 질책하려던 건 아니었던지라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다만 하나의 생각이 났다.
에스텔레 시절, 라디트와 사랑을 나누기 시작한 후.
둘이 만남을 가질 때 항상 기다리던 측은 그녀 쪽이었다.
뭐, 그 사실을 당시에는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도 딱히 그 일을 보복하려고 기다리게 하는 건 아니고.
다만 그녀가 시간을 끌며 라디트를 기다리게 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존심이 무척 강하니, 지금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겠지. 이왕이면 최대한 기분 상해하고 있으면 좋겠는데.’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짓밟기 좋게.’
사실 오늘 라디트가 온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저절로 걸어온 기회를 마다할 필요가?
쥬웰은 대연회 전에 애피타이저 삼아, 오늘 라디트를 가볍게 한 번 짓밟을 생각이었다.
‘이왕 하기로 한 것, 제대로 하는 게 좋겠지.’
쥬웰은 짓궂은(?) 생각이 떠올라 룬에게 말했다.
“드레스 지금 그거 말고, 내가 말한 것으로 다시 가져와 줄래? 장신구도 내가 지정한 것으로.”
“아가씨?”
룬은 살짝 의아한 얼굴을 했다.
쥬웰이 옷차림을 지정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쥬웰은 딱히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아 보통 편한 옷 위주로 챙겨주는 대로 입었다.
더구나 쥬웰이 지목한 드레스와 장신구들은 평소 그녀가 전혀 쳐다도 보지 않던 스타일이었다.
어쨌든 룬은 그대로 지시에 따랐고, 치장을 끝낸 쥬웰을 보며 감탄하였다.
“아가씨, 너무 예쁘세요.”
“그러니? 이상하지는 않고?”
“전혀요!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룬은 열렬히 말하였다.
“이런 밝은 색상도 잘 어울리니 진즉 자주 입으실 걸 그랬어요. 천사님 같아요!”
천사.
그 말대로였다.
원래 쥬웰은 검은색, 회색, 짙은 적색 등 어두운 색상의 옷을 즐겨 입었다.
그런데 화려하면서도 새하얀 드레스를 입자 마치 천사가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순백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천사보다는 성녀 같지 않니? 숭고한 성녀. 조금 화려하긴 하지만.”
쥬웰은 싱긋 웃으며 자화자찬했다.
“아, 아! 맞아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우신 성녀님 같아요! 그런데, 왜 오늘은 이런 색상으로 입으신 거예요?”
“왜?”
“아가씨, 하얗고 밝은 색상의 옷은 이전에 싫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늘 어두운 색상의 드레스만 가져왔는데.”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룬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이런 색상의 옷을 아주 싫어했다.
‘에스텔레 때도 썩 좋아하던 색상은 아니지.’
그런데 굳이 싫어하는 색상의 옷을 꺼내 입은 이유는 간단했다.
라디트 때문이었다.
‘이왕 모욕을 줄 거면, 제대로 주는 게 좋겠지.’
쥬웰은 그런 마음을 숨기고 따뜻하게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 가자, 라디트 백작에게.”
그렇게 말하는 쥬웰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눈빛만이 아니다.
마치 핏방울이 떨어진 듯, 그녀의 가슴이 깊게 침잠했다.
한없이.
* * *
“…….”
라디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쥬웰은 아직인가?”
세바트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밀린 일이 많으셔서 늦을 듯합니다.”
“아직도? 내가 온 지 벌써 세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이제 거의 네 시간째 아닌가?”
라디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인 그는 지금껏 어디에 가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세바트찬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가씨가 늦는 건 일부러 의도하신 것.’
사실 쥬웰은 진즉 라디트에게 올 수 있었다.
미룰 수 없는 서류들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일부러 라디트를 기다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가씨께 무언가 의도가 있을 거야. 아가씨의 뜻이 그렇다면 나도 맞춰 따라야겠지.’
세바트찬은 주인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기로 하였다.
“더 기다리기 곤란하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뭐?”
“아가씨께서도 백작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곤란해하던 차였으니까요.”
“…….”
라디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세바트찬은 지금 약속도 없이 온 주제에 투덜거리지 말라고 일침한 것이다.
일개 집사가 여섯 공작가의 후계에게 하기에는 지나치게 건방진 발언.
과연, 라디트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였다.
“네놈이 경을 치고 싶은가 보군.”
“…….”
“집 지키는 개 주제에 자신이 가넷이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건가?”
세바트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백작님께서 계신 이곳은 가넷이지요.”
“……!”
“그러니 예의를 갖추어 주셨으면 합니다.”
라디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더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가넷. 그 이름에는 그만큼의 무게가 있었으니까.
그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약속도 없이 찾아온 내 잘못이지. 더 기다리겠네.”
그 반응에 세바트찬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생각보다 감정 조절이 빠르군. 다른 이였으면 나한테 화풀이를 하려고 했을 텐데.’
사실 세바트찬은 그걸 의도했다.
손님으로 온 이가 행패를 부리면 그만큼 쥬웰에게 유리한 상황이 될 테니까.
‘소문대로 못난 인물은 아니군.’
라디트.
사파이어 공작가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인재.
외모, 검술 실력, 인성, 모두 훌륭하다는 게 세간의 평이었다.
“그래도 한 번 더 기별을 넣어주지 않겠나? 쥬웰을 위해 꼭 전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
그때 뜻밖의 음성이 들렸다.
“그럴 필요 없어요.”
“……!”
쥬웰이었다.
고개를 돌린 라디트는 흠칫하였다.
지극히 아름다운.
룬이 이야기했던 대로, 마치 에덴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순백한 아름다움을 품은 쥬웰이 나타났다.
“…….”
라디트는 입을 다물었다.
쥬웰이 너무 아름다워서는 아니었다.
쥬웰이 아름다운 거야 온 제국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니.
오히려 라디트가 주목한 건, 쥬웰의 차림이었다.
순백하게 입은 쥬웰의 차림이 그의 무언가를 불편하게 건드렸다.
라디트는 과거 종종 저런 차림을 하던 여인을 한 명 알고 있었다.
그녀는 라디트 때문에 저런 옷을 자주 입었다.
‘난 네가 칙칙하게 하고 다니는 게 싫어.’
라디트의 그 한마디에, 어떻게든 그의 바람에 맞추려 했었던 것이다.
“…….”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쥬웰도 그녀 나름대로 라디트를 보니, 감정이 격동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라디트와 단둘이 만나는 첫 번째 자리였으니까.
그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가슴속에 섬뜩한 감정이 극렬히 치솟아 올라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당장 죽여 버리고 싶어.’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저런 일로 핑계 대며 라디트를 한참이나 기다리게 했는지 깨달았다.
일부러 불쾌감을 주기 위해?
아니, 그건 핑계였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주하는 순간, 찢어 죽이고 싶은 이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 것 같아서.
‘널 사랑해. 내 목숨보다.’
그에게 숱하게 들었던 고백이 떠오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라디트의 파멸을 위해 계획한 ‘만찬’들이고 뭐고, 당장 찢어 죽이고 싶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혀, 자신을 만지던 손.
지금 당장 모두 하나하나 끔찍이 뽑아내고 싶었다.
쥬웰은 그런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활짝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형부.”
“……그래, 오랜만이구나.”
“무슨 일로 오셨나요?”
라디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무려 네 시간 가까이나 기다린 상태다.
그런데 냉랭히 안부 먼저 묻는 쥬웰의 태도에 불쾌감이 생겼던 것이다.
그는 친근한 어조로 그 불쾌감을 드러냈다.
“서운하구나.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만날 사이는 아니지 않으냐? 물론 네가 바쁜 거야 이해하지만 말이다. 먼저 차라도 한 잔 주었으면 좋겠구나.”
“차요?”
“그래, 네가 주는 차를 마시면 기다리느라 지친 것도 다 괜찮아질 것 같구나.”
쥬웰은 침묵했다.
‘이런 말투는 여전하군.’
라디트는 항상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
그래서 불쾌한 일이 있어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친절한 모습을 가장한다.
지금도 차 대접을 빙자해, 자신을 기다리게 한 걸 사과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쥬웰은 별반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으니까.
“글쎄요. 지금 우리가 친근하게 차를 마실 상황은 아니지 싶은데요. 형부는 제 적인 매리엇 언니의 정혼자 아닌가요?”
“……!”
라디트의 얼굴이 굳었다.
“매리엇이 네 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닌가요?”
“그래, 잠깐 서로 오해가 있지만 적이라니. 넌 우리의 친동생과도 같은 아이 아니냐?”
쥬웰은 웃음을 흘렸다.
라디트다운 말이었다.
“그러면 형부께서 오늘 오신 건, 매리엇 언니와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선가요?”
라디트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너와 매리엇과의 싸움을 더 두고 볼 수가 없어 왔단다.”
“역시 그랬군요. 형부는 항상 착하시니 그럴 거로 생각했어요.”
쥬웰은 담담히 말했다.
“죄송하지만, 헛걸음하신 것 같아요. 형부의 말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라디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쥬웰, 이건 너를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야.”
“절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요?”
“그래, 매리엇은 대연회 때 너에게 끔찍한 수모를 줄 생각이야. 다시는 사교계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말이야.”
“흐음.”
“아무리 네가 가넷이라도, 그런 수모를 당하면 사교계에서 입장이 아주 곤란해질 것이다.”
쥬웰은 팔짱을 꼈다.
‘그럴지도.’
대연회 같은 곳에서 모두에게 회자될 끔찍한 망신을 당하면, 그건 회복 불가능한 타격이었다.
사교계에서 영원히 웃음거리가 된다.
하지만 쥬웰은 별반 동요하지 않았다.
‘매리엇이 대연회 때 무언가 손을 쓸 거라는 건 이미 계산 아래 있는 일이니까.’
아니, 도리어 쥬웰은 매리엇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면 그걸 빌미로 그녀에게 더욱 커다란 타격을 줄 계획이었다.
다만, 쥬웰은 기분이 점점 더 가라앉음을 느꼈다.
‘쥬웰, 너를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야.’
그 이야기가 자꾸 라디트와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다시금 살심이 끓어오르려고 해 쥬웰은 빙긋 웃었다.
“형부는 늘 친절하네요. 알았어요. 매리엇 언니와 화해하도록 할게요.”
“정말이냐?”
“그래요, 매리엇 언니가 제 앞에 찾아와 무릎 꿇고 잘못을 빌면 말이에요.”
“……!”
라디트의 얼굴이 굳었다.
쥬웰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형부, 방금 이야기 무척이나 주제넘었던 것 아시죠?”
“……쥬웰.”
“형부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하는 것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죠. 다이아가 감히 가넷에게 대든 일인데.”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히 굳었다.
쥬웰은 비웃음을 지었다.
“아니면, 형부가 매리엇 언니를 대신해 제게 무릎 꿇고 사죄라도 하겠어요?”
“……!”
“두 분은 서로 사랑하시잖아요. 그러니 매리엇 언니를 위해 무릎을 꿇는 것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지 않은가요?”
라디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쥬웰, 말이 심하구나.”
“…….”
“난 그저 널 친동생처럼 여겨 한 말일 뿐이야. 그런데 그런 모욕적인 말이라니. 네가 아무리 가넷이라도 날 모욕하지는 말아라.”
쥬웰은 가만히 라디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진짜 화났군.’
사파이어 보석안에 시퍼런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는 게 느껴졌다.
의도한 대로였다.
쥬웰은 본격적으로 라디트의 자존심을 짓밟기로 하였다.
‘당장 찢어 죽이고 싶지만, 지금은 아쉬운 대로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죄송해요. 저도 감정이 격해져서 험한 말을 했네요. 형부는 절 생각해서 한 말씀일 텐데.”
“……아니다.”
“그런데 우리 둘의 화해를 바란다면 매리엇 언니를 설득하는 게 옳은 것 아닌가요? 이 싸움은 언니가 일으킨 건데.”
라디트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번 싸움의 발단은 쥬웰이었다.
쥬웰이 먼저 모욕을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매리엇에게 책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서로의 감정 다툼을 사교계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키운 건 매리엇이었으니까.
그러니 싸움을 말리고자 한다면 매리엇을 설득하는 게 옳긴 했다.
하지만 라디트는 그러지 못했다.
쥬웰이 그 이유를 비웃듯 꺼냈다.
“하긴 형부는 매리엇 언니에게 어떤 이야기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처지였지요. 사파이어 공작가의 운명이 매리엇 언니의 손에 달려 있으니 말이에요.”
“쥬웰!”
아픈 곳을 찔린 라디트가 결국 소리를 높였다.
사피아어 공작가는 기사들의 가문. 수천 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있다.
문제는, 기사들은 어떤 생산성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부도 창출하지 않은 채 막대한 돈을 잡아먹었고, 따라서 재정 문제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고질적인 약점이었다.
특히 당대에 와서는 몇 차례에 걸친 커다란 투자 실패로 결국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다.
문제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부채의 상당 부분이 다이아 공작가에게 진 것이란 것이다.
가주인 매리엇의 뜻에 따라, 사파이어 공작가는 파산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래서 라디트가 매리엇과 약혼한 걸 두고 ‘돈에 팔려 갔다’고 이야기하는 이가 많았다.
쥬웰은 거침없이 그 아픈 사실을 찔렀다.
“아니었나요? 전 형부가 매리엇 언니와 결혼하려는 걸, 가문의 빚 때문으로 알고 있었는데.”
라디트는 이를 바득 악물었다.
“아니야. 나는 매리엇을 사랑해. 그래서 결혼하려는 것이다.”
“……그런가요?”
“그래, 매리엇은 내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이야.”
“…….”
쥬웰의 얼굴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대화를 나눌수록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참기 어려웠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가넷가가 사파이어 공작가의 부채를 대신 감당해 준다면요?”
“……뭐?”
“저도 친오라버니를 대하듯, 형부를 위해 하는 말이에요. 우리 가넷이 사파이어 공작가가 진 빚의 상당 부분을 변제해 주겠어요. 파산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요.”
“……!”
“그래도 매리엇 언니와 결혼하실 건가요?”
라디트의 얼굴이 더욱더 굳어졌다.
그는 마치 화가 난다는 듯 매섭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
“제 이야기가 관심이 없나 보죠?”
“매리엇과 파혼하라니. 네 질 나쁜 장난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지.”
분노가 가득해 얼핏 진심으로 들리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피식 웃었다.
‘조금 더 흔들어볼까?’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면요?”
“……!”
“형부는 설마, 제가 이런 중대한 일을 장난으로 꺼낼 이로 보이나요? 저는 그저 가넷 입장에서도 다이아와 사파이어가 결합하는 게 좋지 않기 때문에 하는 제안이에요.”
라디트는 딱딱하게 굳어 입을 다물었다.
쥬웰은 악마가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가넷이 바라는 조건은 단 하나예요. 형부가 매리엇 언니와 파혼할 것.”
“…….”
“그렇게 해준다면, 즉시 자금을 융통해 주겠어요. 솔직히 약점이라도 쥔 것처럼 돈을 움켜쥐고, 형부를 자신의 몸종처럼 대하는 매리엇 언니보다 제 제안이 훨씬 후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
라디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감히 자신에게 이런 모욕적인 제안을 하는 쥬웰에게 분노하는 걸까?
아니면, 흔들리는 동요를 감추려는 걸까?
그는 매섭게 쥬웰을 노려보았다.
“그만해라.”
그 반응에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참, 이상하네요.”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라디트에게 다가갔다.
발을 옮길 때마다 멀었던 거리가 좁혀졌다.
이윽고, 이전처럼.
서로의 거리가 과거처럼 좁혀졌고, 쥬웰은 나긋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차피 누군가를 버리는 것. 형부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잖아요?”
“……!”
라디트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이번에는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선명한 동요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쥬웰은 그 모습에 미칠 듯이 토기를 느꼈다. 왜 동요한단 말인가? 그토록 무참히 버려놓고. 자신을 지옥에 던져놓았으면서.
‘죽여 버리고 싶어. 당장, 처참하게.’
꽈득 입안 속살을 깨물며 감정을 진정시킨 후, 속삭이듯 말하였다.
“그때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에스텔레, 그 바보 천치 같은 년을.”
“……!”
라디트의 얼굴이 이제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쥬웰은 조소를 지으며 한 걸음 더 라디트에게 다가갔다.
둘의 거리가 더욱 좁혀졌다.
예전 사랑을 속삭였을 때처럼.
쥬웰은 그때처럼 설핏 웃으며 말했다.
“그때도 목숨보다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너…… 너…….”
라디트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음성만이 아니다.
팔 끝이,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필, 쥬웰이 입고 있는 옷차림이 그를 더욱 흔들었다.
하얀색에 화려한 옷차림.
이건, 그가 에스텔레에게 요구했던 옷차림이다.
늘 칙칙한 신관복만 입고 다니는 게 답답해 화사한 옷을 입어달라 했고, 그 뒤 그녀는 항상 그를 만나러 올 때마다 지금 쥬웰이 입고 있는 옷차림을 하고 왔다.
성녀로서 어떤 힘든 일을 겪든 상관없이 그를 위해.
그래서 라디트는 마치 죽은 에스텔레가 눈앞에서 그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년을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세상 무엇보다.”
쥬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년은 알았을까? 형부가 그렇게 자신을 버릴 거라는 걸? 바보 천치라서 몰랐겠지. 그러니 맨날 이렇게 멍청이같이 웃었던 거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러며 쥬웰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그때 에스텔레처럼.
순간, 전혀 다른 얼굴이지만 완전히 같은 이미지가 겹쳐졌다.
그리고.
“……!”
그 미소가 라디트의 이성을 끊어버렸다.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고, 그러다 라디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손을 들어 눈앞의 쥬웰의 뺨을 후려쳐 버린 것이다.
타악!
순간 경악이 흘렀다.
다행히 라디트의 손은 쥬웰의 뺨에 닿지 못했다.
쥬웰이 손을 들어서 라디트의 손목을 잡아낸 덕이다.
“……!”
라디트는 눈을 부릅떴다.
손찌검이라니. 그는 자신이 이런 끔찍한 일을 벌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죠?”
쥬웰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라디트는 주춤 뒷걸음질 쳤다.
이성을 잃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 이건…… 네, 네가…….”
쥬웰은 하,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꽈악, 라디트의 손목을 더욱 거세게 움켜쥐었다.
순간 끔찍한 통증에 라디트는 눈을 크게 떴다.
‘무, 무슨?’
손목이 부서질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맹수가 손목을 짓누르는 듯했다.
“크윽! 쥬웰!”
그 비명을 들으니, 쥬웰은 더욱 살심이 치밀어 올랐다. 도저히 참기 힘들게.
‘왜? 왜 동요해? 네가 뭔데?’
쥬웰은 라디트가 손찌검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에스텔레 때문에 동요했다는 게 미치도록 화가 났다.
차라리 라디트가 에스텔레를 비웃고 저주했으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무엇이건대.
그딴 배신을 해놓고 동요한단 말인가?
뭘 잘했다고?
순간, 쥬웰은 분노에 눈앞이 하얘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다른 손을 움직여 라디트의 목을 움켜쥐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사고를 칠 것을 직감했다.
‘안 돼!’
이대로라면 그녀는 참지 못하고 라디트를 죽일 것이다.
절대 안 되었다.
그녀가 받은 고통은 고작 이런 편안한 죽음으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라디트는 누구보다도 더욱 끔찍한 파멸을 맞아야 했다.
결국, 쥬웰은 혀를 깨물었다.
순간, 피 내음과 함께 화악 고통이 밀려오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일단 라디트의 손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풀었다.
벌써 부러지면 곤란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곧 이어질 ‘만찬’들을 위해 이 손목은 고이 보관해 두어야 했다.
“쥬, 쥬웰.”
하지만 오늘 일을 이렇게 끝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히더니 손을 움직였다.
짜아악!
뺨을 후려친 것이다.
그것도 그냥 후려친 게 아니다.
강력한 힘을 담아 쳤다.
라디트의 얼굴이 휙 옆으로 돌아갔다.
“……!”
라디트는 머리를 울리는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화끈한 통증보다 더욱 충격적인 건 치욕이었다.
자신이 뺨을 얻어맞다니?
그러나 쥬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싸늘한 얼굴로 연달아 따귀를 올렸다.
짝! 짝! 짝!
라디트는 지은 죄가 있는 터라 막지도, 피하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뺨을 얻어맞았다.
조각 같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변했다.
“쥬, 쥬웰…….”
그가 자신을 부르자, 쥬웰은 다시 살심이 치솟아 올라 이를 악물었다.
온 힘을 다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짜아아악!
마치 채찍이 떨어진 것처럼,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음이 들렸다.
“크으윽!”
결국, 라디트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쥬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따귀를 올렸지만 가슴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살의만 치솟았다.
당장 저 빌어먹을 놈을 씹어 죽이라는 듯.
마치 악귀가 귓가에서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듯했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그녀의 귓가에 환청이 들렸다.
[모자라.]
[모자라.]
[당장 죽여 버려.]
[찢어 죽이라고!]
쥬웰은 그 아찔한 환청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쥬, 쥬웰, 나는…….”
라디트는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듯 허겁지겁 말하며 쓰러진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쥬웰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구두를 들어 일어나려는 그의 가슴을 콱 짓밟았다.
“크윽!”
“듣고 싶지 않으니, 닥쳐요.”
“……!”
쥬웰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곤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손찌검하려 드는 게 형부가 평소 자랑스러워하던 사파이어 공작가의 기사도, 정염인가 보죠?”
라디트는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의도한 게 아니다. 그냥 저절로 비웃음이 지어졌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도 멸시가 가득 담겼다.
마치 어린 시절, 라디트가 그녀를 바라봤던 것처럼.
쥬웰은 벌레를 보듯 라디트를 내려다보았다.
왜일까? 라디트는 그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욱신, 가슴이 저렸다.
“쥬, 쥬웰, 나는…….”
“됐어요. 어떤 이야기든 듣고 싶지 않아요.”
쥬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 마디 욕설보다 상대에게 더욱 큰 모멸감을 주는 한숨이었다.
그녀는 라디트의 가슴에서 발을 뗐다.
라디트의 신체에 닿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극도의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빌어먹을.’
쥬웰은 라디트의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모든 게 다 역겨웠다.
피가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면 이 응접실을 통째로 태워 버려야 할 것 같아 쥬웰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그의 발치에 툭 던졌다.
마치 거지에게 던져주듯.
“됐고, 더러우니 닦아요.”
“……!”
라디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딱히 그녀가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거지에게 적선하듯 손수건을 던져주는 건 어린 시절 라디트가 그녀에게 자주 베풀던 ‘친절’이었다.
라디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안하다. 정말로.”
라디트는 쥬웰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쥬웰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역겹고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벌레를 보듯 라디트를 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받은 라디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
결국 라디트는 더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가넷가를 나갔다.
* * *
늦은 저녁.
수도 밖 교외로 향하는 마차 안.
“괜찮으시겠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리샤크가 조심히 물었다.
“……괜찮아.”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까 라디트 때문이었다.
라디트의 모든 것이, 특히 아까 에스텔레 때문에 동요하던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시간도 너무 잡아먹었어.’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약속이 있기에 그렇게 꾸미시고 가는 겁니까?”
“중요한 약속.”
“오늘이요? 데뷔탕트 전날인데요?”
리샤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망의 데뷔탕트가 바로 내일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일찍 잠드는 게 보통인데, 이런 늦은 시간에 중요한 약속이 있다니?
‘그것도 저렇게 차려입으시고?’
리샤크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지금 쥬웰은 짙은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빛이 나는 듯 매혹적이었다.
원래도 아름답지만 그만큼 공을 들여 꾸민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이라면 그녀를 본 순간, 홀린 듯 시선을 뺏길 만큼 아름다웠다.
‘마치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특히 지금 마차가 가는 곳도 교외다.
밀회를 나누기 좋은.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라 리샤크는 퍼뜩 물었다.
“혹시…… 그 불길한 대공을 만나려 하는 겁니까?”
“……불길한 대공? 설마 유스넨 대공 전하를 말하는 거니?”
“……네.”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라 쥬웰은 멀뚱멀뚱 리샤크를 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웃으십니까?”
“너 귀여워서.”
리샤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귀, 귀여운 건 아가씨가 더 귀엽습니다.”
“흐음?”
“진짜입니다. 아가씨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진지하게 하는 말에 쥬웰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아, 고맙네.’
시궁창에 박혀 있던 기분이 리샤크의 귀여움(?)에 조금은 나아졌다.
제국에서 가장 피를 많이 묻힌 기사에게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쥬웰은 리샤크가 귀여웠다.
“고마워, 리샤크. 오늘 날 즐겁게 해준 일은 나중에 보답할게. 바라는 게 있어?”
“아, 아닙니다. 이런 걸로 무슨 보답을…….”
리샤크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뭘 받을지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너한테 미안해야 할 일도 있어서.”
쥬웰의 눈빛이 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난 오늘 또 널 속일 거거든.”
“……!”
쥬웰의 미간에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정신 조작을 하려는 것이다.
리샤크의 눈빛이 단번에 몽롱해졌다.
워낙 자주 정신 조작을 걸어 이제는 전혀 저항을 못 하는 듯했다.
쥬웰은 리샤크를 아예 깊게 잠들게 해 마차에 눕혔다.
‘오늘은 진짜 들키면 안 되는 일이니까.’
“아가씨, 이제 곧 도착합니다.”
앞에서 마부가 말했다.
“그래, 수고했네. 자네도 여기서 쉬고 있도록.”
그 말과 함께 쥬웰은 마부에게도 정신 조작을 걸었다.
마부는 멍하니, 마차를 길가 한편에 대었다.
쥬웰은 문을 열어 홀로 마차에서 내려왔다.
목적지까지는 혼자 걸어갈 생각이었다.
‘춥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짙은 보랏빛 드레스 위에 덧입은 외투를 여몄다.
쥬웰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있었다.
‘오늘 해야 할 일과 딱 어울리는 날씨긴 하네.’
쥬웰은 픽 웃음을 짓고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 탓일까? 괜히 스산하게 느껴졌다.
저벅, 저벅.
인적 없는 수풀을 헤치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익숙한 폐저택이었다. 일전, 리델하트가 연쇄 살인을 저지르던 그 장소.
미리 도착해 있던 인물들이 그녀를 맞았다.
“로드를 뵙습니다.”
마리, 리델하트, 그리고 해밀턴까지.
그녀의 권속들, 옵시디언 패밀리였다.
* * *
쥬엘은 그들과 함께 저택에 들어갔다.
“로드.”
“왜 그러지?”
마리가 힐끗 쥬웰의 안색을 보며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쥬웰은 피식 웃었다.
‘아까 라디트의 일이 지금도 티가 났나 보군.’
“괜찮아. 잠깐 속이 안 좋을 뿐이야.”
그런데 마리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아니, 이제 곧 할 일. 괜찮으시냐고요.”
“……!”
“만약, 꺼려지시면…….”
마리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쥬웰을 염려하는 것이다. 곧 있을 일에 그녀가 괜찮을지.
하지만 쥬웰은 얼굴을 굳혔다.
“건방지군.”
“……죄송합니다.”
쥬웰은 차갑게 말했다.
“너야말로 꺼려지면 지금 당장 떠나도록. 말리지 않을 테니.”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건 아니었어요. 전 그저…….”
당신이 걱정되어서.
마리는 뒷말을 삼키고는 눈치를 살폈다.
쥬웰의 얼굴은 지나치게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마리는 한숨을 삼켰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오늘 쥬웰은 평상시와 달랐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훨씬 예민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곧 그녀가 할 끔찍한 일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런 끔찍한 일과 어울리지 않는 분이면서.’
마리는 쥬웰이 무서운 겉모습과 다르게 여리고 따듯한 속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말릴 수는 없겠지.’
쥬웰은 인세에 적수를 찾기 어려운 강력한 흑마도사다.
그 말은, 그녀가 그만큼 절박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 끔찍한 일도 서슴지 않고 하려는 것이리라.
그때, 오랜만에 듣는 음성이 들려왔다.
“쥬, 쥬웰 님.”
잘생겼지만 왠지 때려주고 싶게 밉상인 얼굴.
해밀턴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다섯 배는 수척해진 얼굴로 등장했다.
“수고했네. 그 ‘마녀’를 꾀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잘했어, 오라버니.”
“흑…….”
그 말에 해밀턴은 울컥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지, 진짜 힘들었어요.”
해밀턴이 맡았던 임무는 사이코패스 귀부인을 꾀어 오는 거였다.
오늘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
중간에 해밀턴이 그 귀부인에게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진짜 많이 힘들었나 보네.’
쥬웰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오라버니? 옷 벗어봐.”
“오, 옷이요?”
“어서.”
해밀턴은 주저하다가 상의를 탈의했다.
역시나 등에 채찍 자국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고는 성력을 펼쳤다.
“고생했네.”
찬란한 빛이 해밀턴의 몸에 스며들었다.
따뜻한 기운이 자신을 감싸자 해밀턴은 뭐가 서러운지 히끅히끅 울기 시작했다.
쥬웰은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불쑥 말했다.
“직접 복수하게 해줄까?”
“……!”
“원하면 말해.”
해밀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살려줄 수는 없는 거죠?”
“살려줘?”
“……네.”
쥬웰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저 마녀를? 진심이야?”
“…….”
쥬웰은 수상쩍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좋았던 건 아니지? 오라버니 취향이 사실 그쪽이었다거나.”
해밀턴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냥…… 알고 보니…… 끔찍한 악마가 맞긴 한데…… 불쌍한 면도 있더라고요.”
“불쌍한 면?”
“……네, 나름의 사연이 있달까?”
“…….”
쥬웰은 한심하다는 듯 해밀턴을 바라보았다.
“그거 알아?”
“네?”
“오라버니, 지금 홀린 상태야. 흑마법에.”
“……!”
“괜히 마음이 가고, 안쓰럽고, 불쌍하고 그러지?”
“네, 네. 어떻게 그걸?”
“그게 저 마녀가 사용하는 흑마법이거든. 남자든 여자든 마음에 드는 이들을 흑마법을 걸어 매혹해 자신의 노예로 만든 다음 실컷 가지고 놀며 즐기다가 싫증나면 죽이곤 했지.”
“…….”
“오라버니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났으면, 저 마녀를 위해서 어떤 고통을 당해도 기쁜 그런 처지가 되었을걸?”
해밀턴의 안색이 하얘졌다.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 그러면 어떻게?”
“걱정하지 마. 오늘 밤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테니.”
해밀턴은 말을 알아들었다.
대부분의 흑마법은 펼친 주체가 사라지면 효과도 사라진다.
즉, 쥬웰은 오늘 저 마녀의 목숨을 거둘 거라는 뜻이었다.
‘제물’로.
“어쨌든 이번에 고생했으니 휴가를 줄까?”
“휴, 휴가요?”
“그래, 싫으면 말고. 그냥 저택으로 돌아올 거야? 백부가 벼르고 있던데.”
저택으로 올 거냐는 물음에 해밀턴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는 지금 무단 가출 상태다. 그러니 가넷가로 돌아가면 로튼 백작에게 어떤 꼴이 될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저 마녀에게 당한 고문 따위 쾌락으로 느껴질 정도로 무참히 두들겨 맞게 될 것이다.
“그, 그런데 정말 휴가인가요?”
지금껏 쥬웰에게 당한 게 많은 해밀턴이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그래, 투란스 지방에 가서 쉬고 있어.”
투란스 지방.
그 말에 해밀턴의 얼굴이 환해졌다.
남부의 곡창 지대로, 기후가 따뜻하고 풍광이 아름다워 귀족들 사이에서 휴양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더구나 투란스 지방에는 해밀턴의 친구가 있었다.
‘동시에 사파이어 공작가의 요충지 중 하나이지.’
그리고…… 곧 전쟁이 일어날 곳이기도 했다.
쥬웰의 사주를 받은 적사자 필바하, 즉 오펜하임이 반란을 일으켜 투란스 지방을 공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쥬웰은 해밀턴을 전쟁터에서 체스 말로 이용하려고 미리 가 있으라고 한 것이다.
‘뭐, 위험하겠지만. 그거야 알아서 하겠지.’
그때, 해밀턴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었다.
“저, 정말 그냥 휴가인 거죠? 쉬면 되는 거죠?”
“응, 가서 사냥이나 하고 있으면 돼.”
“사냥…… 이요?”
해밀턴은 눈을 끔뻑였다.
웬 사냥?
투란스 지방은 사냥터가 아니다.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해밀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응, 곧 투란스 지방은 사냥터가 될 것이거든.”
사파이어 공작가와 ‘원수’를 사냥할.
해밀턴은 그녀가 부리는 체스 말이 될 거고.
“그러니 투란스 지방에서 벗어나면 안 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요?”
“응, 죽을 것 같아도 절대로 도망치면 안 돼. 혹시나 무서워서 무단으로 투란스 지방을 벗어나면 내가 오라버니를 죽일 테니. 꼭 명심해.”
“@!#!”
그제야 또 끔찍한 일을 맡은 것임을 눈치챈 해밀턴은 와락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쥬웰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가끔은 오라버니가 고맙네. 험하게 부려먹어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으니.’
해밀턴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죄인이다.
최근엔 불쌍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거야 쥬웰에게 굴복해서 그런 것이고.
해밀턴의 본질이 악인인 건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쥬웰은 그에게 딱히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해밀턴은 영원히 그녀의 노예로 고통받다가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같이 목숨이 거둬질 것이다.
“어쨌든 난 안의 마녀를 처리할 테니 밖에서 쉬고 있어. 마리, 너도 쉬고. 둘 다 안으로는 절대 들어오지 마.”
그때, 얼굴을 굳히고 있던 마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로드.”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명령이야. 절대로 들어오지 마.”
마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 줘요. 로드께서도 무리하지 않겠다고.”
쥬웰은 황당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아까부터 주제넘게 건방지군. 도대체 넌 날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지?”
“…….”
마리는 침묵했다.
그녀는 권속. 쥬웰은 그녀의 주인이다.
그러니 이런 걱정은 주제넘은 것이었다.
‘하지만 자꾸 걱정되는데 어떻게 해.’
마리는 스스로도 본인의 마음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쥬웰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안쓰러웠다. 껴안고 보듬어주고 싶었다.
“……몰라요. 저도 로드의 유혹 마법에 걸렸나 보죠.”
“뭐?”
“그냥 이유 없이 로드가 걱정된다고요. 주제넘고 건방지다고 느껴져도 어쩔 수 없어요.”
“…….”
그 당돌한 말에 쥬웰은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마리의 성격은 원래부터 이랬다.
“……그런 걱정, 거슬리니 자중하도록.”
일부러 더 쌀쌀맞게 이야기 후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그리고 굳게 닫힌 철문을 여니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 귀부인이 기둥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데뷔탕트를 화려하게 장식할.
‘제물’이었다.
귀부인의 옆에는 리델하트가 있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까?”
리델하트는 무심한 눈빛으로 힐끗 한편을 가리켰다.
“필요하실 것 같아 도구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귀부인의 눈동자에 공포가 깃들었다.
고문 도구들이었다.
쥬웰은 잠시 침묵했다.
‘……도대체, 리델하트 오라버니는 어디서 저런 도구들을.’
그녀의 기억 속 리델하트는 항상 올곧은 인물이었다. 차갑고 무뚝뚝하지만, 그릇된 일은 하지 않는 바른 생활 신관.
그런데 저런 도구를 서슴지 않고 준비해 놓다니. 끔찍이 변모한 그의 모습을 보니 다시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다 치워.”
“악마에게 바칠 제물로 사용하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니, 틀려.”
리델하트는 의아한 눈빛을 하였다.
쥬웰은 그들에게 이 귀부인…… 아니, ‘마녀’를 제물로 바칠 거라고 하였다.
당연히 악마에게 바치는 거로 생각했는데?
“제물로 바칠 거긴 한데, 악마에게 바칠 건 아니야.”
“……?”
“일단 재갈을 풀어주도록.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리델하트는 더 묻지 않고 순순히 명에 따랐다.
곧 입이 풀린 귀부인은 발악하였다.
“다, 당신……! 아무리 당신이 가넷이라도 날 이렇게 하고 괜찮을 거라 생각하나요?!”
“글쎄,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뭐?”
“어차피 너. 죽어도 아쉬워할 사람 없잖아? 네 남편은 오히려 기뻐할 것 같은데?”
귀부인, 동부 지방의 유력가 러트만 백작가의 부인은 흡 말문이 막혔다. 쥬웰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대로 죽어도, 남편은 오히려 축배를 들 것이다.
원래 그런 사이였으니까.
“오늘 넌 죽을 거야.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어?”
쥬웰은 무심하게 물었다.
러트만 부인은 덜덜 떨며 빌었다.
“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전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잘못이 없다고? 농담이지?”
러트만 부인은 우뚝 입을 다물었다.
“네 손에 고문당하다가 죽은 이가 몇인지 내가 직접 알려줘야 해? 남자든 여자든, 어린애든 성인이든 가리지 않고.”
“…….”
상대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음을 눈치챈 러트만 부인의 눈빛이 절박해졌다.
“그, 그건…… 난 외로웠어! 남편은 늘 외간 여자와 놀아나고. 난 항상 혼자여서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쥬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외로워서 그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니.
변명치고는 조악했다.
“개소리하지 마.”
“……!”
“네 변명을 들으려는 게 아니야.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길 이야기나 해.”
“……!”
진심이다.
정말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걸 깨달은 러트만 부인의 눈동자가 공포에 젖어들었다.
“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난 당신에게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죽인 이들은 다 고아거나 돈 없는 평민들이었어! 평민을 몇 명을 죽이든 당신과 전혀 상관없잖아! 그런데 왜 난데없이 이러는 거야?!”
러트만 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내게는 잘못한 게 없지.”
“그, 그런데?”
쥬웰은 툭, 하나의 이름을 말하였다.
“아를렌.”
“……뭐?”
“기억나? 누구인지?”
러트만 부인은 눈을 깜빡였다.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카비우스는?”
“……모, 몰라요. 그런 사람들.”
쥬웰은 실소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네가 죽였잖아. 이제 갓 열 살밖에 안 된 소녀를 죽여, 그녀의 피로 목욕해 ‘매혹의 축복’을 얻었잖아.”
“……!”
“아, 그렇게 죽인 이가 한두 명이 아니어서 누구인지 모르려나?”
흑마법 중 ‘피의 목욕’이란 게 있다.
민간에도 유명한 흑마법으로 정순한 처녀의 피로 목욕해 매혹의 힘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은근히 자주 시행되는 흑마법이지. 고래로 매혹의 힘을 바라는 이는 숱하게 있었으니까.’
[너희 인간은, 가끔 보면 우리 악마보다 더욱 끔찍해.]
쥬웰은 악마들이 했던 말에 동의했다.
때로 인간들은 악마보다 더욱 끔찍했다.
눈앞의 귀부인은 그런 악마보다 더욱 끔찍한 인간이었다.
‘숱한 아이들을 희생시켜 매혹의 힘을 얻었고, 그렇게 얻은 매혹의 힘으로 자신이 마음에 든 이들을 유혹해 고문해 죽였지.’
쥬웰은 러트만 부인의 지금껏 행각을 생각했다.
한편, 러트만 부인은 쥬웰에게 물었다.
그녀가 ‘아를렌’이란 아이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 그…… 아, 아를렌이란 아이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당신의 가족?”
“아니, 나도 사실 누군지 몰라.”
“뭐?”
러트만 부인이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그냥 부탁을 받았거든. 아를렌이란 아이의 복수를 대신 해달라는.”
흑사병 사태를 해결할 때.
십마(十魔) 카비우스에게 마왕 타란툴라의 정보를 얻는 대신 약속했다.
카비우스의 동생 아를렌의 복수를 대신 해주기로.
그녀는 이 마녀를 악마에게 제물로 바치려는 게 아니었다.
“넌, 너에게 희생당한 원혼들에게 제물로 바쳐질 거야.”
그 말과 함께 쥬웰은 러트만 부인의 눈에 손을 대었다.
“자, 볼래? 네 죽음을 기다리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
러트만 부인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쥬웰의 힘으로 영안(靈眼)이 눈을 뜨며 지금껏 보지 못하던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무수한 원혼이었다.
그녀의 손에 억울한 죽임을 맞이한.
그중에는 카비우스의 동생, 아를렌도 있었다.
모두 처절한 눈빛으로 그녀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아, 아…… 아…….”
러트만 부인이 공포에 질려 신음을 흘렸다.
쥬웰은 조소를 지으며 원혼들에게 ‘축복’을 걸었다.
“이 추악한 마녀를 그대들, 가련한 자들에게 제물로 바치겠다. 나 ……의 이름으로 선언하나니, 그대들은 이제 만찬과 축제를 즐기리라.”
현실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원혼들을 일시적으로 실체화시켜 현실에 강림시키는 흑마법이었다.
이제 원혼들은 잠시간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게 가능했다.
즉, 저 마녀에게 직접 복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 정말…… 복수해도 되나요?]
[정말? 정말?]
원혼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다들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쥬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마녀는 내가 너희에게 바치는 진혼(鎭魂) 제물이야.”
그리고 쥬웰은 뒤로 물러났다.
남은 일은 원혼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원혼들은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러트만 부인에게 다가갔다.
[너 때문에 죽었어.]
[너 때문에……. 우리 가족들은…….]
[왜, 나를…….]
원혼들이 내지르는 섬뜩한 울부짖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 안 돼!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으아아아악!”
그게 러트만 부인의 마지막 말이었다.
쥬웰은 그 광경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저 귓가로 소리만 들었다.
의외로 러트만 부인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욱 선명히 들리는 건, 원혼들의 울부짖음이었다.
그들은 비통히 슬퍼하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자신들의 운명을.
그들의 슬픔이 가슴을 적셔와, 쥬웰은 나직이 작은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찬트였다.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그렇게 나직한 진혼곡(鎭魂曲)이 울려 퍼졌다.
[…….]
[…….]
원혼들이 그 위로의 찬트를 듣고, 멈추어 섰다.
이미 러트만 부인은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원혼들은 멍하니 쥬웰을 바라보았다.
쥬웰의 몸에 은은한 빛무리가 어우러져 있었다. 숭고하고, 성스러운 빛무리였다.
그녀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원혼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괜찮니?”
그 물음에 원혼들은 다들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방 안이 원혼들이 내지르는 울음으로 가득 찼다.
쥬웰은 재촉하지 않고, 원혼들이 충분히 슬픔을 풀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피에 젖은 원혼들이 울먹이며 말하였다.
[가,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는 원한에서 벗어나 구원받게 되었어요.]
그중에는 어린 소녀, 아를렌도 있었다.
[오, 오빠도 당신 덕분에 편안히 눈을 감았을 거예요. 끄윽, 감사해요.]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우리의 구원자예요.]
구원자.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너희를 위해서 한 일은 아니야.”
그녀는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번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원혼들은 그녀의 말을 들었음에도 감사한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래도 방금 찬트는 진심이셨겠지요.]
[복수보다 당신의 위로가 우리를 달래주었어요.]
[누구도 우리를 그렇게 위로해 주지 않았거든요.]
쥬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너희에게 바라는 게 있어. 승천하기 전, 날 축복해 주도록.”
원래 원혼들은 자신의 한을 풀어준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어 있으니까.
[네, 알겠어요.]
[당신은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모든 축복을 받으시길.]
원혼들은 하나둘 세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며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불렀다.
마치 쥬웰이 그들을 위해 진혼곡을 불러주었던 것처럼.
그들도 쥬웰을 축복하는 찬트를 불렀다.
[신이여, 이분을 축복하소서.]
[축복하소서.]
그렇게 피에 젖은 원혼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신께 쥬웰의 축복을 노래하는 모습은 참으로 섬뜩하고 기이하며, 동시에 가슴이 아릿하게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한편, 리델하트는 옆에서 입을 우뚝 다문 채 그 장면들을 지켜보았다.
그는 최고위 신관.
원혼들을 볼 수 있는 영안이 뜨여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건…….’
그의 가슴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방금 제령(濟靈)의 장면이, 한 명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에스텔레.’
그의 동생이자, 감히 바라지 못할 마음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성녀였으며 동시에 당대 최고의 제령가였다.
숱한 원혼을 위로해 승천시켰다.
그때 원혼들을 위하던 동생의 모습과 쥬웰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아니야. 달라.’
에스텔레였다면, 아무리 원혼들을 위해서라지만 이런 끔찍한 보복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식으로 위로했을 것이다.
즉, 쥬웰의 제령과 에스텔레의 제령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다른가?’
리델하트는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저 하늘 가득 메운 원혼들이 쥬웰을 축복하는 게 그의 눈에 보였다.
장엄하기 그지없는 모습.
에스텔레와는 다르다. 하지만 숭고함만은 같았다.
그렇게 리델하트가 혼란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파아앗!
쥬웰의 몸에서 한없이 성스러운 광채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광채는 곧 쥬웰의 몸속으로 사그라들었고, 이어 쥬웰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숭고하며, 성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
신관인 리델하트는 그 변화에 눈을 부릅떴다.
“로드? 이건?”
“그래.”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원혼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이들. 이들의 축복은 성녀에게 아주 커다란 효과가 있지.”
원혼을 달래는 제령은 ‘성녀’의 일.
즉, 그녀는 성녀로서 축복을 받은 것이다.
왜?
‘필요하니까.’
그녀는 원혼들에게 받은 축복을 내일 대연회 때 매리엇을 몰락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지.’
쥬웰은 발걸음을 옮겼다.
찰랑.
바닥에 고인 피가 구두에 닿았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피 웅덩이에 완전히 들어갔고, 드레스 자락이 피에 젖어 들었다.
리델하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더없는 숭고함을 품고 피에 젖은 모습은 섬뜩하면서 동시에 매혹적인 광경이었다.
“설마, 피의 목욕을 하려는 겁니까?”
“그래.”
쥬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성녀로서의 숭고함과 악마로서의 끔찍함을 동시에 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리델하트가 그녀를 말렸다.
“워낙 추악한 마녀의 피라 피의 목욕을 해도 원하는 효과가 나오지 않을 겁니다.”
피의 목욕은 순수한 이의 피를 제물로 사용해야 효과가 나오는 법이니까.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오히려 바라는 바야.”
“네?”
“내가 바라는 건 누군가를 매혹하는 게 아니니까.”
쥬웰은 나직이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누군가를 유혹하는 게 아니라, 파멸시키는 것이거든.”
순수한 피로 피의 목욕을 하면 원하는 상대를 매혹할 힘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추악한 피를 사용하면 전혀 다른 효과가 나타난다.
‘저주를 걸 수 있지. 그것도 상대의 비뚤어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효과가 나타나는.’
상대가 올바른 이라면 어떤 안 좋은 영향도 받지 않지만, 상대가 그릇된 이라면 끔찍한 효과가 나타난다.
“나가 있도록.”
“……네.”
홀로 된 쥬웰은 드레스를 스르르 내렸다.
마침 구름이 가시며 달빛이 비추었다.
쥬웰은 그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하염없이.
그런 그녀의 눈가에 희미한 투명한 빛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고.
대망의 데뷔탕트 날이 다가왔다.
* * *
드디어 운명의 대연회 날이었다.
수도가 들썩였다.
“오늘이 쥬웰 성녀님의 성인식 날이지?”
“드디어 쥬웰 성녀님이 성인이 되시는군.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나 훌륭하셨는데 앞으로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지.”
토른 공작은 쥬웰의 성년식에 맞춰 오늘을 임시 국경일로 선포했다.
따라서 온 백성들이 쥬웰이 성년식을 기뻐하게 되었고, 다들 기대에 찬 칭송을 하였다.
“그런 숭고한 분은 에스텔레 성녀님 이후로 처음이야.”
“가넷 공작가 만세!”
“쥬웰 성녀님 만세!”
눈 덮인 수도에 온통 쥬웰을 칭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귀족들은 다소 분위기가 달랐다.
“오늘…… 과연 어떨까요?”
“매리엇 공작 전하가 이를 갈고 있다던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숨을 죽이고, 오늘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있었다.
“오늘 결말이 나겠네요.”
“맞아요.”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리엇과 쥬웰의 다툼은 오늘 결판이 날 것이다.
그리 둘 중 한 명은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 * *
가넷가도 들썩였다.
드디어 쥬웰의 성인식이었기 때문이다.
룬과 하녀들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쥬웰을 치장했다.
쥬웰도 오늘은 군말 없이 치장을 받았다.
그리고.
“어떤가요, 할아버지?”
“……!”
토른 공작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싱긋 웃는 쥬웰의 모습이 아름다워도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요정?
고작 그런 게 아니었다.
평소 토른 공작이 쥬웰을 부르는 ‘요정 공주님’이란 말은 감히 지금 쥬웰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만큼 압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 대단한 토른 공작조차 말문을 잃을 정도였다.
“……안 되겠다.”
“네?”
“내 손녀가 이렇게 예쁘다니. 연회 때 썩을 사내놈들이 널 볼 생각하니, 열불이 나서 널 못 보내겠다.”
쥬웰은 피식 웃고는 평소처럼 말했다.
“감히 내게 추악한 시선을 보내는 놈이 있으면, 다 눈알을 파버리면 되죠. 뭘 걱정이세요. 안 그래요?”
“……!”
토른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쥬웰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다.
어제 원혼들의 축복을 받아, 성녀의 숭고함이 잔뜩 주변에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토른 공작조차 쉽게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쥬웰이 평소와 같이 악당처럼 이야기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 맞다! 감히 내 손녀에게 누가 삿된 시선을 보낼까? 그런 놈이 있다면 다 눈알을 파버리면 되지.”
그러면서 토른 공작은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오늘 계획은 있는 거냐? 설마 이 할아비를 속상하게 하는 건 아니겠지?”
매리엇과의 다툼을 말한다.
속상하게, 라고 이야기했지만 쥬웰은 이 말이 경고란 걸 눈치챘다.
‘고작, 매리엇 따위에게 당하는 건 아니겠지?’
라는 의미였다.
쥬웰은 사랑스럽게 웃었다.
“흐음, 할아버지는 아직도 절 믿지 못하는 거예요? 저, 서운한데요?”
“허허. 그런 게 아니다. 우리 공주님이 걱정되어서 그렇지.”
“걱정 대신, 기대해 주세요. 아주아주 재미난 구경을 하게 될 테니.”
토른 공작이 눈빛을 빛냈다.
쥬웰이 무언가 계획하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이 할아비가 도와줄 건?”
“전혀 아무것도 없어요. 단, 하나 지켜주어야 할 게 있어요.”
쥬웰은 짧게 당부했다.
“절대 나서지 말아주세요.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모두 제게 맡겨주세요.”
토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기대되는구나. 즐거운 하루가 되겠어. 그런데.”
토른 공작이 묘한 얼굴을 하였다.
“저놈을 카발리에로 삼은 건, 네 계획을 위해서냐?”
토른 공작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얼음 꽃 같은 미남이 서 있었다.
엔리크였다.
그가 저 멀리서 세상을 다 가진 행복한 얼굴로 쥬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엔리크가 저런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치열한 카발리에 쟁탈전(?)에서 승했기 때문이다.
“저놈을 카발리에로 하는 건 조금…… 넌 약혼자가 두 명이나 있지 않으냐?”
토른 공작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아버지를 카발리에로 하다니.
주책은 맞았으니까.
하지만 쥬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음?”
“이건 그냥 제가 원한 일이니 바꾸지 않을래요.”
유스넨과 비교해 보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엔리크의 승리였다.
흰 강아지도 좋지만, 그녀는 엔리크가 제일 좋았다.
“저 착하기만 한 덜떨어진 놈은 하여튼 복도 많지.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너처럼 사랑스러운 딸이 있으니 말이야.”
토른 공작은 투덜대었다.
마치 아들을 질투하기라도 하는 듯한 음성에 쥬웰은 장난스럽게 토른 공작의 팔에 매달렸다.
“왜요? 전 할아버지의 손녀기도 하잖아요. 아니면, 할아버지를 카발리에로 할까요?”
“클클, 정말 그래도 되겠느냐?”
“네. 자, 여기 손이요. 에스코트해 주세요.”
잠시 두 노손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토른 공작은 거짓말처럼 웃음을 지우고 나직이 말했다.
“어쨌든, 잘해라.”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축제가 될 테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고 있었다.
오늘 있을 일이 기대되어.
* * *
대연회장은 황궁이었다.
황궁이 겨울 사교계 대연회장으로 사용되는 건, 라인하르트 제국이 건국된 이래로 변하지 않은 전통이었다.
인적 없이 휑하던 황궁에 오랜만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시덤불과 거미줄이 덮여 있던 황궁도 오랜만에 새 단장을 하였다.
그래 봤자 연회장 근처만 수리한 것이지만.
돈도 황실이 아닌 여섯 공작가에서 대었다.
정확히는 다이아 공작가가 대부분을 대었다.
다이아 공작가는 전통적으로 이런 사교계 행사를 후원하는 가장 큰손이었으니까.
덕분에 연회장의 주인도 황실이 아닌 다이아 공작가처럼 보였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황태자 오펜하임을 찾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그가 있는지 없는지도 관심 가지지 않았다.
모두 매리엇을 찾아와 인사하느라 바빴다.
“공작 전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전하.”
“항상 감사합니다, 전하.”
사람들은 비굴할 정도로 매리엇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괜히 밉보였다가는 큰일이니까.
매리엇은 고개만 까닥이며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요. 다들 즐거운 연회 되세요.”
우아한 화법을 구사하는 평소와 다르게 냉막한 태도였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매리엇의 심기가 극도로 불편함을 눈치채고 침을 꿀꺽 삼켰다.
‘쥬웰 남작님 때문에 그러는구나.’
‘제발, 무사히 오늘 대연회가 끝나길.’
이번 대연회에 피바람이 몰아칠 것은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떤 식의, 어떤 방향의 피바람이냐는 것이다.
다들 자신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랐다. 일부 쥬웰을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과연, 쥬웰 남작님은 괜찮으실까?’
매리엇이 잔뜩 벼르고 있음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쥬웰은 딱히 무언가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사교계 시즌을 보냈을 뿐이다.
마치 세간에 소문이 난 성녀처럼.
그런 쥬웰을 보며 많은 사람이 감탄했지만, 동시에 걱정을 하였다.
악독한 매리엇에 맞서기에는 지나치게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쥬웰 남작님이 매리엇 공작 때문에 큰 곤란을 겪지 않았으면.’
쥬웰의 진면목(?)을 아는 이가 들으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테지만, 실제로 많은 이가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이건 쥬웰이 의도한 바였다.
쥬웰은 매리엇이 ‘악역’, 자신은 ‘희생자’의 구도가 되기를 의도했으니까.
이런 사람들의 엇갈린 인식은 곧 일어날 대연회의 일의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소문이 정말이었네요.”
사람들은 힐끗힐끗 연회장 구석을 바라보았다.
밀랍처럼 하얀 안색의 소녀가 우뚝 서 있었다.
행방불명되었다는 세실 영애였다.
순간, 사람들 사이에 꺼림칙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실은 사교계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세실이 곤경을 겪을 때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실은 원래 밝은 성격으로 두루두루 친분이 넓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도와준 건 모두가 경원시했던, 심지어 세실 본인도 매정하게 대했던 성녀 에스텔레뿐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세실에게 먼저 다가갈 수 없었다.
다행인 건 세실도 우두커니 서 있을 뿐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는 있는 게 맞는 건가?’
‘인형 같잖아.’
몇몇 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간신히 살아 돌아왔으니 저런 모습도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어쨌든 매리엇 전하도 세실 영애 때문에 기분이 편치는 않으시…… 지는 않은 것 같군.’
‘전혀 신경 안 쓰시네.’
사람들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매리엇은 세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하는 게 아니다.
정말 신경을 안 쓰고 있는 것이다.
세실 ‘따위’는 매리엇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머리는 지금 오로지 쥬웰로 가득 차 있었다.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어.’
매리엇은 빠득 이를 갈았다.
그런 그녀의 옆으로 장신의 미남이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약혼자 라디트였다.
“매리엇, 얼굴 풀어. 그런 표정, 아름다운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하지만 매리엇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어제, 어디 갔었어?”
“……!”
라디트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어제 쥬웰에게 뺨을 맞은 흔적이었다.
급히 치료를 받았지만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가문에 다녀왔어.”
“정말이야? 확인해 봐도 돼?”
“…….”
“혹시 그년과 있었던 장소에 갔던 건 아니겠지? 지난번처럼?”
라디트는 곤란하게 웃었다.
매리엇은 항상 그를 의심했다.
특히, 그가 아직도 에스텔레를 잊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초조해했다.
지금처럼 심기가 불편하면 그런 의심 증상은 심해졌고 더욱 그를 속박하려 들었다.
“그때 에스텔레와 있던 장소에 간 건, 에스텔레를 추억하려고 간 게 아니야. 마침 그곳에 볼일이 있었다는 건 너도 알잖아. 내게는 너밖에 없어.”
하지만 매리엇의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결국 라디트는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속삭여 주었다.
“넌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야. 에스텔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
“…….”
그래도 매리엇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라디트는 매리엇이 에스텔레 말고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함을 깨달았다.
쥬웰을 욕하는 이야기였다.
요즘 매리엇은 잠자리에서 늘 쥬웰을 욕해주길 요청했다.
“…….”
하지만 라디트는 왜인지 이전처럼 쉽게 쥬웰을 욕하는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제 그토록 치욕을 당하고 왔으니 화풀이할 겸 욕을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왜일까?
‘됐고, 더러우니 닦아요.’
경멸을 가득 담은 쥬웰의 눈빛이 떠오르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 말은 그게 끝이야?”
결국 매리엇이 강요했고, 라디트는 한숨과 함께 속삭였다.
“에스텔레처럼 쥬웰도 네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거야.”
“더.”
“오늘 온갖 망신을 당한 끝에 비참히, 천박하게 눈물 흘리며 네 용서를 구하게 될 거야.”
그제야 매리엇의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그래,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어.”
“…….”
“오늘 온갖 망신을 줘서 다시는 사교계에 발을 못 들이게 하겠어. 그래서 내게 무릎 꿇고 싹싹 빌게 하겠어.”
매리엇은 표독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그녀는 겹겹이 준비를 해놓았다.
쥬웰을 망신 주게 할.
오늘, 쥬웰의 평판은 밑바닥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넷가의 후환을 걱정할 것도 없어.’
차가운 표정으로 매리엇은 생각했다.
쥬웰이 무서운 건, 차기 가넷이 될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사교계에서 몰락하면 쥬웰이 가넷의 왕이 될 일도 없어진다.
자연스레 로튼 백작이 가주가 될 테니, 그때는 쥬웰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로튼 백작이 가주가 되면 가넷가의 위세도 이전만 못하겠지.’
매리엇은 그리 판단했다.
그리고 그때 연회장 입구에서 높은 외침이 들렸다.
“가넷 공작가의 쥬웰 남작님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연회장의 입구로 향했다.
드디어 또 다른 주인공이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뚝.
모두의 시간이 멈추었다.
“……?”
매리엇은 갑작스레 얼어붙은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지금 쥬웰을 바로 돌아보지 않은 상태다.
쥬웰이 오자마자 허겁지겁 시선을 돌려 바라보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쥬웰의 등장과 함께 연회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고, 매리엇도 결국 의문을 못 참고 쥬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매리엇도 함께 우뚝 굳어버렸다.
‘이게, 무슨……?’
매리엇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름다웠다.
아니, 단순히 그런 단어로 표현되는 미(美)가 아니었다.
찬란히 빛나는 짙은 칠흑의 흑발, 요요한 붉은 보석안, 창백하게 파리한 피부.
그리고 장미가 핀 것처럼 화려한 붉은 드레스에 체인을 감은 듯한 은빛 목걸이.
겉으로 보이는 외모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장내의 사람들을 넋을 잃게 하는 건, 쥬웰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였다.
“……성녀.”
누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처럼, 쥬웰의 전신에 찬란하고 숭고한 느낌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성화 속 성녀처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단순히 숭고하기만 한 게 아니란 것이다.
입고 있는 짙은 붉은색 드레스처럼.
쥬웰은 숭고함 속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유혹도 함께 품고 있었다.
찬란히 성스러우면서도, 지독히 매혹적이었다.
그 모순적인 아름다움에 장내의 모든 사람은 넋을 잃고 쥬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쥬웰이 사람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 봐요, 아버지. 사람들이 절 너무 바라보네요.”
“……!”
그 말에 사람들이 당황하였다.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것이다.
엔리크는 불만스럽게 이야기했다.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렇지 않으냐.”
“어머, 그런가요?”
쥬웰은 배시시 웃었다.
사랑스럽게.
그러더니 정확히 매리엇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매리엇 전하께서도 제가 너무 어여뻐 저렇게 넋을 놓고 보고 계신 걸까요?”
“……!”
“그런 거면 좋겠는데.”
장내의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쥬웰이 오자마자 매리엇을 저격한 것이다.
매리엇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실제로 그녀는 쥬웰의 아름다움에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고, 그 사실이 참을 수 없게 치욕적이었다.
* * *
“흐음.”
쥬웰은 나긋한 얼굴을 하였다.
“잠시만요, 아버지. 매리엇 전하께 인사를 하고 올게요.”
쥬웰은 매리엇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또각.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울릴 것같이 고요한 연회장에서 구두 소리가 울렸다.
점점, 매리엇과 쥬웰의 거리가 좁혀졌다.
매리엇은 한없이 굳은 얼굴로 쥬웰을 바라보았고, 쥬웰은 싱글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쥬웰의 미소가 짙어졌고, 연회장의 사람들은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이윽고 쥬웰이 예를 올렸다.
“다이아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
매리엇은 매섭게 쥬웰을 노려보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사교계의 대화에서 미소는 방패이자 무기였다.
“……반갑군요, 쥬웰 남작.”
공식적인 자리이기에 서로 경어를 썼다.
쥬웰은 여전히 싱긋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머,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전하와 제가 그런 불편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옆의 형부도 반가워요.”
“……그래, 쥬웰.”
라디트도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쥬웰은 어제 일 따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밝은 음성이었다.
쥬웰은 매리엇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오늘 제 데뷔탕트의 샤프롱이 되어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샤프롱.
사교계에 처음 데뷔하는 영애를 이끌어주는 부인을 뜻한다.
우습게도 쥬웰의 샤프롱은 매리엇이었다.
일전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매리엇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감사하기는. 넌 내 친동생 같은 아이 아니니? 네가 갓난아이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감회가 새롭구나.”
에스텔레, 매리엇, 라디트, 플랑드나 등과 쥬웰은 나이 차이가 제법 있었다.
쥬웰이 그들보다 대략 여덟 살 정도 어렸고 따라서 쥬웰이 갓난아이 시절, 그들은 이미 큰 소년, 소녀들이었다.
매리엇은 쥬웰을 깔아뭉갠 것이다.
자신에 비해 갓난아이 애송이라고.
쥬웰은 잠잠히 웃다가 불쑥 말하였다.
조용히.
딱, 매리엇과 라디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그렇게나 어린 동생에게 시비를 걸어 참 자랑스럽겠어요?”
“……!”
매리엇이 흠칫하였다.
하지만 매리엇이 뭐라 반응하기 전, 쥬웰이 한마디 더 하였다.
역시 조용히.
“여덟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무릎을 꿇고 지금까지의 잘못을 사죄하려면…… 참 굴욕적이고 힘들 텐데. 잘하실 수 있겠어요?”
매리엇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쥬웰, 너!”
매리엇이 자신도 모르게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는 아차 싶었다
연회장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매리엇을 보았다.
‘이.’
매리엇은 바득 이를 갈았다.
지금껏 쥬웰에게 쌓인 감정 때문에 단순한 도발에 넘어간 것이다.
한편, 쥬웰은 과장되게 놀란 얼굴을 하였다.
가련하고, 가증스럽게.
“어머, 전하. 제가 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요. 그저 전 전하와 다시 이전처럼 가까워질 방법을 이야기한 거였는데.”
“…….”
매리엇이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도발이었다.
무릎 꿇고 사죄하는 이야기를 한 후 그게 가까워질 방법이라 표현하고 있다.
즉, 쥬웰은 자신과 다시 가까워지고 싶으면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말한 것이다.
“너, 너…….”
쥬웰은 턱 끝을 들어 매리엇을 바라보았다.
연회장의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오로지 매리엇에게만 보이는 오만한 눈길이 매리엇에게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다시 속삭였다.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전 관대하니 전하께서 제게 무릎 꿇고 진심을 다해 사죄하면 지금까지의 일을 너그럽게 용서해 드릴게요.”
“……!”
매리엇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 화가 나 입을 여는 순간 버럭 목소리를 높일 것 같아, 분기를 어떻게든 참기 위해 노력했다.
쥬웰은 그런 매리엇에게 피식 비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즐거운 연회 되시길.”
쥬웰은 등을 돌렸고, 매리엇은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매리엇의 눈에 핏발이 섰다.
‘가만히 두지 않겠어! 절대로!’
한편 눈빛을 가라앉힌 건 쥬웰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났으면.’
이제 일어날 일을 상상하니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굶주린 상태에서 만찬을 앞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후,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둘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분명 흥겨운 음악이 울리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연회이건만, 살얼음 위에 서 있는 듯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특히 쥬웰과 대화를 나눈 후 매리엇의 표정이 지나치게 사나워져 사람들은 잔뜩 눈치를 보았다.
반면 쥬웰은 전혀 긴장 따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부드럽고 기품 있는 태도로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연회를 이끌어갔다.
‘일단 연회의 주인공이 되어야 해.’
오늘 매리엇을 무릎 꿇리는 건 단계별로 진행될 것이다.
첫 단계는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무조건적으로 그녀의 편을 들도록.
“반가워요, 영애. 오늘 즐거운 연회 되었으면 좋겠네요.”
“아, 네. 남작님.”
“백작 부인께서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요. 다음에는 따로 티 타임을 가졌으면 하는데, 시간이 괜찮을까요?”
“네, 네, 초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인, 아드님께서 이번에 변방에서 공을 세우셨다는데 축하드려요.”
“어머, 남작님. 감사합니다. 그런 것까지 기억해 주고 계시다니.”
그런 능숙하고 차분한 태도에 사람들은 또다시 쥬웰에게 감탄하였다.
연회장의 가장 상석에서 분기를 삭이지 못하고 매섭게 얼굴을 굳히고 있는 매리엇과 비교되어도 너무 비교되었던 것이다.
인성?
예법, 교양?
아름다움?
‘모두 쥬웰 남작님의 압승이야.’
‘비교도 할 수 없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둘을 그렇게 비교 평가했다.
특히 쥬웰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성녀처럼 숭고한 분위기가 경외심을 자아내 사람들을 압도했다.
‘어제 원혼들의 축복을 받은 효과가 있군.’
쥬웰은 사람들의 경외심 어린 시선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제 그녀가 받은 축복의 정확한 명칭은 ‘원혼의 경외’였다.
그 명칭처럼, 원혼이 경외를 느낀 정도에 따라 축복받는 이의 몸에 깃드는 숭고함이 달라진다.
승천하는 원혼이 커다란 경외를 담아 축복할수록 몸에 깃드는 숭고함도 깊어지는 것이다.
어제 원혼들은 쥬웰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감사와 경외를 품었고, 덕분에 쥬웰의 몸에는 짙은 숭고함이 깃들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쥬웰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숭고함을 느꼈고 손쉽게 강렬한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더구나 지금 쥬웰은 숭고함만 품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안에 치명적인 매혹도 똬리를 틀고 있어 사람들은 쥬웰을 향해 경외심과 동시에 강렬한 매력을 느꼈다.
그 결과는?
쥬웰은 단숨에 연회의 중심이 되었다.
매리엇과 함께 두 명의 주인공?
아니다.
지금 연회장에서 빛나는 건 오로지 쥬웰이었다.
매리엇은 그저 찬란히 빛나는 쥬웰을 훼방하는 추한 악역에 불과할 뿐이었다.
심지어 쥬웰을 더욱 빛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 쥬웰에게 다가오더니 예를 올린 것이다.
“제국에 명성 높은 쥬웰 성녀님을 뵙습니다. 로든 왕국의 아피엘 왕녀라고 합니다. 성년을 맞으신 것 경하드립니다.”
“……!”
아피엘 왕녀.
로든 왕국의 유력한 차기 왕위 계승자였다.
그녀가 쥬웰의 성년식을 축하하기 위해 먼 거리를 직접 발걸음 한 것이다.
‘보통은 밑의 귀족들이 축하 사절로 오는데 저토록 서열 높은 왕족이 직접 오다니.’
‘과연, 쥬웰 성녀님이시구나.’
사람들은 그렇게 감탄하였다.
한편, 아피엘 왕녀를 마주한 쥬웰은 쿵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아피엘 왕녀.’
사실 아피엘 왕녀가 직접 온 건 쥬웰이 의도한 것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이번 연회의 내 목표 중 하나.’
쥬웰은 낮게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이번 연회 때 매리엇을 무릎 꿇릴 생각이다.
하지만 오늘 사냥감으로 삼은 목표가 매리엇만인 건 아니었다.
아피엘 왕녀는 쥬웰이 노리는 또 다른 사냥감 중 하나였다.
‘과연, 아피엘 왕녀가 마왕 타란툴라와 관련이 있을까?’
그녀를 지옥에 떨어뜨린 의식을 주도한 것으로 의심되는 마왕.
쥬웰은 아피엘 왕녀가 마왕 타란툴라일 가능성을 짐작하고 직접 초청한 것이다.
어쩌면 라플 공작과 함께 인세 최강일지도 모르는 존재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지금까지 나른했던 기분이 달아나며 솜털이 선 듯 긴장감이 돋았다.
‘아직 겉모습만으로는 모르겠군.’
고위 흑마도사들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정체를 알아내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피엘 왕녀도 그저 선한 인상의 미녀로만 보였다. 어둠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끔찍한 마왕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겉모습을 가장하고 있는 건 쥬웰도 마찬가지 아닌가?
‘정확한 정체를 확인하는 건, 중간에 기회를 봐야겠지. 연회는 기니까.’
그렇게 생각하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먼 거리임에도 이렇게 직접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든 왕국의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요. 다른 분도 아닌, 가넷가의 고귀한 분이자 위대한 성녀님의 성년식인데 당연한 일이지요. 도리어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피엘 왕녀는 그러며 선물을 쥬웰에게 내밀었다.
“본 왕국에서 성녀님의 성년을 맞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부디 기쁘게 받아주시길.”
“감사합니다. 무엇인가요?”
“본 왕국의 자랑, 호박안입니다.”
“……!”
순간, 장내에 놀람이 퍼졌다.
호박안(琥珀眼, Eye of Amber).
말 그대로 보석안의 일족 중 하나인 앰버(호박)족의 눈동자를 가공한 보석으로 로든 왕국의 ‘특산품’이었다.
“이 호박안은…… 로든 왕국에서 ‘생산’해 낸 보석인가요?”
“네, 맞습니다. 이번에 특등의 보석안이 생산되어 특별히 성녀님을 위한 선물로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쥬웰은 침묵하였다.
보석안은 사람의 눈알로 가공한 보석이다.
그러니 극히 희귀하다. 광산에서 채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박안은 다소 달랐다.
정기적으로 새로운 물량이 시장에 공급되었는데, 그건 이유가 있었다.
로든 왕국이 호박안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생산이지.’
의아한 표현일 수도 있다.
사람의 눈을 가공한 보석을 생산해 내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잘못된 표현이 아니었다.
로든 왕국은 모종의 방법을 통해 ‘호박안’을 정말로 생산해 내고 있었고, 그 생산처를 ‘광산’이라 불렀다.
사람의 눈에서 호박안을 ‘채굴’해 내는 ‘광산’.
‘끔찍한 일이지.’
쥬웰은 로든 왕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믿기지 못할 행위를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때로 인간은 악마보다 끔찍한데, 이 호박안의 생산 과정이 그러했다.
왠지 입맛이 떨어져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런 선물은 받을 수가 없군요.”
“성녀님?”
“그냥 로든 왕국의 마음만 받도록 할게요. 감사해요.”
쥬웰이 왜 호박안을 거절한 건지 눈치챈 듯, 아피엘 왕녀는 눈동자에 살짝 이채를 띠었다.
“역시 소문대로 자애로운 마음을 지니셨군요.”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마왕 타란툴라일지도 모를 상대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쥬웰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선물 대신,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네, 무엇이든지요.”
“중간에 시간이 될 때, 따로 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왕녀님과 긴밀히 교분을 나누고 싶어서요.”
아피엘 왕녀가 마왕 타란툴라인지 따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너무 보는 눈이 많으니.’
쥬웰은 눈빛을 낮게 가라앉혔다.
아피엘 왕녀가 정말 마왕 타란툴라인지 겉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방법은 하나.
아피엘 왕녀가 직접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쥬웰에게는 그렇게 할 방법이 있었다.
‘정말 마왕 타란툴라가 맞으면…… 죽여야지.’
죽이고, 베일에 싸인 또 다른 원수들의 정체를 알아낼 것이다.
물론 위험한 일이다. 마왕 타란툴라의 힘은 그야말로 미지수니까.
그녀가 짐작하고 있는 대로 타란툴라가 정말 라플 공작에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으면, 도리어 그녀가 죽임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했다. 어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괜찮을까요?”
아피엘 왕녀는 다행히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영광이지요. 중간 휴식 시간 때 뵙겠습니다. 그러면 즐거운 시간 되시길.”
아피엘 왕녀는 공손히 예를 표하며 물러났고 쥬웰은 그 예를 받았다.
한편, 사람들은 감탄의 시선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지금 쥬웰은 타국의 왕녀에게 자연스레 예를 받았다.
마치 자신이 예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 본인이 상대보다 윗사람임을 기품 있게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로든 왕국은 라인하르트 제국의 조공국이다.
그리고 쥬웰은 라인하르트 제국의 가장 고귀한 가문의 핏줄이고.
그러니 저런 태도는 당연했다.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쥬웰이 가넷임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야.’
숭고하며, 매혹적이고, 기품 있고, 위압감이 넘쳤다.
그야말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저 높은 곳에서 고고히 빛나며 찬란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끝없이 쥬웰에게 감탄하였고,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적당히 된 것 같군.’
연회는 이제 시작했을 뿐이다.
사람들을 홀리는 건 그저 밑그림일 뿐.
본격적인 만찬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슬슬 준비해 볼까?’
쥬웰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였다.
“연회는 즐거우신가요, 세실 영애?”
“……!”
구석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세실에게 말을 건 것이다.
세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있어요.”
사람들은 흠칫하였다.
희멀거니 텅 빈 눈빛.
고저 없는 음성.
마치 시체가 입을 연 듯 섬뜩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 생각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지금 연회장에 나타난 ‘세실’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니까.
‘이건 내가 만들어낸 ‘인형’이지.’
쥬웰은 강력한 흑마법을 이용해 생전의 세실과 똑 닮은 인형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 ‘인형’은 연회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끔찍하게.
“오랜만에 연회에 나와 어색하실 것 같아요.”
“아…… 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 주세요.”
쥬웰은 세실의 손을 잡아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쥬웰에게 다시금 감탄하였다.
원혼들의 축복 덕에 숭고함이 깃들어 쥬웰의 이런 행동은 단순한 겉치레가 아닌, 진정으로 여겨졌다.
특히 쥬웰은 마치 에스텔레 때 했던 것처럼 세실을 향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쥬웰이 정말로 가련한 마음을 품고 불쌍한 세실을 돕고자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것 역시 매리엇과 대조되는 행동이었다.
세실을 끔찍이 괴롭히고 아랑곳하지도 않는 매리엇.
반면 본인과 상관없는 사이임에도 가련한 세실을 도우려는 쥬웰.
누가 올바르고 선한 이인지는 명백했으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뇌리에 쥬웰과 매리엇이 선과 악으로 딱 굳혀지는 순간이었다.
“성년 무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본격적인 메인 행사가 막을 올렸다.
겨울 대연회의 주역은 바로 이번에 성년이 된 영애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주연이 되는 차례가 있었다.
바로 성년 무도회였다.
성년을 맞은 영애들이 여러 영식과 춤을 추는 것이다.
오로지 성년을 맞은 영애들만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고, 가장 많은 춤 신청을 받은 영애가 그해 겨울의 주인공이 되어 겨울의 보석이란 영광된 호칭을 받게 된다.
‘올해 겨울의 보석은 당연히 쥬웰 남작님이겠지?’
‘볼 것도 없지.’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사람들에게 떠올랐다.
‘……누가 쥬웰 남작님의 첫 춤 상대가 되는 거지?’
‘설마, 약혼자가 두 명이나 있는데 엔리크 자작님과 첫 춤을 추지는 않을 거고.’
아버지를 카발리에로 삼은 것도 기이한 일인데 설마 첫 춤까지 아버지와 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첫 춤은 두 명의 약혼자 중 한 명과 추게 될 텐데, 누가 그녀와 첫 춤을 추는 주인공이 될지는 사람들의 초유의 관심사였다.
그녀와 첫 춤을 추는 이가 우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
과연 황태자 오펜하임이냐, 아니면 광휘의 대공 유스넨이냐.
쥬웰이 둘 중 누구와 맺어지느냐는 사교계의 최고 흥밋거리 중 하나였다.
‘과연 둘 중 승리하는 이는?’
한편, 모두와 다르게 차가운 눈빛을 보내는 이가 있다.
매리엇이었다.
매리엇은 표독스럽게 생각했다.
‘드디어 시작이야. 가만두지 않겠어.’
그녀는 이번 연회 때 쥬웰을 망신 주기 위해 겹겹이 덫을 준비했다.
그 시작이 성년 무도회였다.
‘쥬웰, 네년이 웃는 것도 지금까지야. 최악의 망신을 주어 다시는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해주겠어.’
한편, 쥬웰은 그런 매리엇의 얼굴을 멀리서 보고 피식 웃었다.
속이 훤히 보였다.
‘최대한 열심히 해주라고.’
쥬웰은 살짝 입술을 핥았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드디어 연회의 두 번째 단계였다.
이제 그녀는 매리엇을 짓밟기 시작할 것이다.
‘밑밥은 충분히 깔았으니.’
지금껏 쥬웰은 사교계 시즌 내내 올곧은 모습을 보였다.
또한, 어제 원혼들에게 받은 축복과 오늘 보인 훌륭한 태도 덕에 연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은 쥬웰에게 강렬한 호감을 품게 되었다.
반면, 쥬웰의 모습과 대조되어 매리엇을 향한 반감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즉, 쥬웰은 연회장의 사람들을 자신의 편에 서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쥬웰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매리엇은 그 사실을 까마득히 간과하고 있었다.
태생이 지극히 오만해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며 살아온 탓이다.
‘사교계의 여왕 자리도 스스로 쟁취한 게 아니니. 그저 다이아의 핏줄로 태어났을 뿐.’
만약 매리엇이 치열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사교계의 여왕 자리를 쟁취한 거면, 조금 더 세밀하게 주변을 살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매리엇은 가만히 있어도 남들의 칭송을 받아왔고, 마치 타고난 왕족처럼 저절로 사교계의 여왕이 되었다.
그러니 그저 쥬웰을 짓뭉갤 생각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제 발로 만찬 테이블에 올라온 쥐새끼의 처지가 되었다는 것도 모르겠지.’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제 쥬웰은 사람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매리엇을 짓밟아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잔뜩 매리엇을 추레한 몰골로 만든 후, 준비한 계획을 통해 클라이맥스를 장식할 것이다.
기대감에 두근, 심장이 뛰었다.
‘어서 매리엇이 어리석은 행동을 해주었으면.’
그때, 한 인물이 쥬웰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약혼자 중 한 명인 유스넨이었다.
그가 연미복으로 한껏 차려입은 채 쥬웰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게 첫 춤의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유스넨의 모습에 사람들, 특히 미혼의 영애들이 감탄성을 뱉었다.
원래도 매혹적으로 아름다운 유스넨이 무릎을 꿇고 춤을 신청하니 마치 이야기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쥬웰의 약혼자는 두 명이었다.
당연히 그녀와의 첫 춤을 쟁취하기 위해 경쟁을 벌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연회에 안 오셨나?’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연회에서 보이지가 않았다.
‘하긴. 이 연회는 여섯 공작가의 축제이니 오기 싫을 수도 있지.’
말이 황태자지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처지이니 이런 자리가 기쁠 리가 없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할 때, 연회장 입구에서 뜻밖의 외침이 들렸다.
“잠깐! 기다리도록!”
“……!”
모두가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여인처럼 선이 여린, 아름다운 얼굴.
황태자 오펜하임이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연회장에 나타난 것이다.
‘뭐야? 어디에 있다가 지금 나타난 거야?’
사람들은 당황했다.
어디서 잔뜩 구르고 오기라도 한 듯한 몰골이었다.
연미복은커녕 일반 평민들이 입을 법한 여행복을 입고 있었고, 그것마저 잔뜩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몰골이어도 그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했는데, 그가 들어오니 또 다른 빛이 연회장에 비치는 듯했다.
유스넨과는 완전히 다른 유의 아름다움이었다.
유스넨이 금욕적인 차분함 속에 아슬아슬한 매혹을 숨기고 있다면, 오펜하임은 신이 직접 그린 듯한 극상의 미를 뽐내고 있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오펜하임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곧바로 쥬웰에게 직진했다.
그리고 무릎 꿇고 있는 유스넨을 보며 말했다.
“요즘은 데뷔탕트의 첫 춤을 약혼식도 치르지 않은, 가짜 약혼자와 추는가 보지?”
“……!”
유스넨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힐끗 오펜하임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분이 왔군요.”
“……!”
“딱히 전하와 나눌 이야기 없습니다. 이 자리는 제 소중한 약혼녀를 위한 자리이니, 전(前) 약혼자분께서는 조용히 돌아가 주시길.”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예상보다 더욱 센 공방이었다.
분명 단상에는 무도회를 위해 화려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건만, 마치 칼을 겨눈 것처럼 싸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런데, 쥬웰의 첫 춤을 노리는 이들은 유스넨과 오펜하임뿐이 아니었다.
아무도 모르는 어두컴컴한 허공에서 보랏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가?
장내의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뜬 채 두근두근 긴장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유스넨과 오펜하임을 보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다렸다.
특히 아직 미혼의 또래 영애들은 마치 자신이 쥬웰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한편, 그때. 다소 다른 눈빛으로 장내의 해프닝을 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미리 매리엇의 사주를 받은 영애, 영식들이었다.
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쥬웰의 첫 춤을 두고 두 약혼자가 다투는 장면은 사교계의 모든 이가 예상하던 장면이었다.
그래서 매리엇은 술수를 내었다.
쥬웰의 이중 약혼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이중 약혼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쥬웰이 가넷이었으니 논란되지 않았던 거지, 원래라면 크게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이제 매리엇의 지시에 따라 이들이 쥬웰을 비난하는 포문을 열면, 매리엇이 공개적으로 쥬웰을 망신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
“…….”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다들 지금껏 보인 쥬웰의 모습에 압도당한 탓이다.
‘쥬웰 남작님을 욕하는 이야기를 해도 될까?’
‘감히?’
그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쥬웰은 고고히 두 남자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오만한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였다.
‘쥬웰 정도 되는 이가 두 명의 약혼자를 거느리는 게 어때서?’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지어 저런 오만한 모습조차 숭고해 보였다.
마치 드높게 경외스러운 여왕과 같아 두 명의 아름다운 남자가 그녀를 향해 구애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그들의 모습에 매리엇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왜 가만히 있는 거야?’
포섭해 놓은 이들이 연회장 곳곳에서 쥬웰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것에 맞춰 쥬웰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려고 했는데?
‘뭐 하고 있어? 당장 시작해!’
매리엇은 눈빛을 보냈고, 결국 한 영식이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약혼자가 두 명이라니. 참 놀라운 일이네요.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 건지.”
그 말에 주변 이들이 흠칫한 눈빛으로 그 영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영식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가문은 다이아 가문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었다.
매리엇의 뜻을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처지였다.
지금 매리엇의 명령을 받은 이들 대부분이 그런 처지였다.
“도대체 쥬웰 남작님께서는 왜 약혼자를 두 명이나 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올바른 일이 아니란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다른 영식도 용기를 내어 동조하였다.
“두 분과 모두 결혼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요?”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약혼자를 두 명이나 두고 있다니. 그게 잘못된 일임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영식들은 매리엇이 지시한 대로 점점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혹시 한 명을 정실로, 나머지 한 명을 정부로 들이려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거기까지 이야기한 순간.
그들은 우뚝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들의 의견에 동조해 주지 않았다.
도리어 싸늘한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다.
그 시선의 의미는 이러했다.
‘너희가 뭔데 감히? 주제넘게 그딴 이야기를?’
물론, 이중 약혼이 상리와 어긋나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쥬웰 정도 되는 이가 약혼자를 두 명 거느린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주제넘은 참견이었다.
특히 이중 약혼의 당사자들인 오펜하임과 유스넨마저 싸늘히 노려보기 시작하자, 그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니…… 우리는.”
“그런 뜻이 아니라……”
화급히 변명해 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고, 급기야 상상도 못 한 음성이 섬뜩하게 들려왔다.
“너희, 목이 몸이랑 분리되고 싶니?”
“……?!”
“감히, 우리 예쁜 공주님을 험담해? 하찮은 것들 주제에?”
섬뜩한 이야기에 놀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영식들의 시야가 뒤집혔다.
휙 허공에 거꾸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뒤집힌 시야에 드러난 인물을 보고 숨을 삼켰다.
이제 갓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외모.
인형처럼 귀엽지만 광기가 서린 보랏빛 눈동자.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그 인상적인 외양에 연회장의 누군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라플 공작 전하!”
“……!”
마탑주 라플 공작.
그가 생각지도 않게 대연회장에 나타난 것이다.
‘아니, 라플 공작이 왜 대연회에?’
‘최근 10년 동안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으면서?’
사람들은 당황해 웅성거렸다.
라플 공작은 보랏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허공에 거꾸로 떠오른 두 영식에게 말했다.
“잘했니, 잘못했니?”
“……네, 네?”
두 영식은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반문했고, 대가를 치러야 했다.
“혼 좀 나봐야겠구나.”
“으아아악!”
“끄아아악!”
라플 공작이 손가락을 위아래로 까닥하자, 연회장 천장으로 휙 올라갔다, 다시 떨어졌다가를 반복하게 된 것이다.
고무줄에 매달린 장난감처럼.
그것도 잔상이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수도 없이.
“으어…… 어…….”
정신을 못 차리는 그들의 뺨을 라플 공작이 툭툭 두드렸다.
“원래는 혀를 잘라내려고 했지만…… 그러면 우리 공주님이 싫어할 것 같아서 참은 거야. 알았어?”
라플 공작은 히히 웃었다.
“어쨌든 이번엔 잘 대답해. 안 그러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든 후, 목만 잘라서 살아 있는 장신구로 만들어줄 테니까. 아니, 못생겨서 장신구는 안 어울리고, 그냥 고문하면서 놀게 목만 남은 장난감으로 만들까?”
“……!”
거꾸로 떠 있는 두 영식의 얼굴이 공포에 시체처럼 질렸다.
“잘했니, 잘못했니?”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두 영식은 덜덜 떨며 목이 찢어지라 외쳤다.
“뭘?”
“우리가 주제도 모르고 감히 쥬웰 남작님께 허튼소리를 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두 영식은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외쳤다.
라플 공작은 거의 세상에 출현하지 않지만, 출현할 때마다 미친 짓을 벌여 악명이 높았다.
물론 그는 선을 지키긴 했다.
하지만 그가 지키는 선은 여섯 공작가까지였다.
그 밑의 귀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감으로 만들어 놀곤 했다.
이번엔 그 희생자가 본인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둘은 공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뻣뻣이 얼어붙은 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저 미치광이가 갑자기 나타나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다들 눈치만 보았다.
그때 라플 공작이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하였다.
“나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약혼 청하려고 했던 말이야. 그런데 너희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공주님께 거절당하면 어떻게 해. 응?”
“……!”
약혼을 청하려 했다니?
‘라플 공작은 지금껏 반려를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제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최소 300년 이상.
어마어마한 세월을 살았지만 라플 공작은 단 한 명도 반려를 맞은 적이 없었다. 반려는커녕 여인을 안은 적도 없다.
지금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후예들은 라플 공작 형제들의 핏줄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약혼 청혼이라니?
‘도대체 누구에게?’
‘설마?’
순간, 떠오른 생각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방금 라플 공작은 건방진 영식들에게 말했다.
너희의 발언 때문에 자신의 청혼이 실패하면 어떻게 하냐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쥬웰에게 청혼하겠다는 것이다.
과연, 라플 공작은 고개를 삐뚜름하게 돌리더니 시선을 움직였다.
쥬웰을 향해서.
라플 공작이 입꼬리를 광대처럼 들어 올렸다.
“히히. 오랜만이네, 예쁜 공주님. 보고 싶었어.”
파앗!
그러더니, 공간을 뛰어넘어 쥬웰의 앞에 나타났다.
곁에 있던 두 약혼자, 유스넨과 오펜하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무슨 일이지, 공작? 아무리 그대라도 내 약혼녀에게 무례는 허락지 않는다.”
오펜하임이 황태자의 위엄을 들어 라플 공작을 제지했고, 유스넨은 더욱 거친 모습을 보였다.
스르릉.
여차하면 라플 공작을 베어버리기 위해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니는 심판의 검을 살짝 꺼내 든 것이다.
하지만 라플 공작은 그런 두 명의 모습에 횡설수설하였다.
“아, 지, 진정해. 나 나쁜 짓 하러 온 것 아니야. 나는 그냥 우리 예쁜 공주님한테 청혼하러 온 거야!”
“……뭐?”
“그, 그러니까…… 여기, 공주님. 아,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까 공주님이라고 해도 되지? 어쨌든, 예쁜 공주님.”
라플 공작은 쥬웰을 향해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 공주님이랑 가까워지고 싶어서 고민해 봤는데, 공주님은 이미 약혼자가 있더라고. 그런데 하필 약혼자들이 셀레네랑, 페리도트라서 죽여 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방법을 고민해 봤는데.”
라플 공작이 쥬웰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품에서 커다란 자수정 보석을 꺼내 내밀었다.
“날 네 세 번째 약혼자로 받아줘!”
“…….”
“너랑 가까워지고 싶어!”
이 갑작스럽고 웃을 수 없는 촌극에 대연회장이 조용해졌다.
다른 이가 했다면 끌어내 경을 쳤겠지만, 하필 상대가 미치광이 라플 공작이다.
‘과연 쥬웰 남작님이 어떻게 처신을?’
모두가 긴장하여 쥬웰을 바라보았다.
쥬웰은 난감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미친놈은, 도대체.’
라플 공작이 연회에 올 수 있다고 생각은 했다. 일전 서신으로 카발리에를 청했으니까.
하지만 난데없는 청혼이라니.
‘왜 이러는 거야? 정말 내가 마음에 들어서?’
쥬웰은 표정을 가라앉혔다.
코앞에서 라플 공작이 초롱초롱 자수정 보석안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과도 같은 얼굴이라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왜 갑자기? 내가 그렇게 예쁜가? 아니, 물론 예쁘긴 하지만. 그래도 라플 공작과는 엮여서 좋을 게 없는데.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해.’
그때, 토른 공작과 엔리크 자작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무리 쥬웰이라도 상대가 미치광이 라플 공작이니, 그를 제지하러 오는 것이다.
옆의 유스넨과 오펜하임도 움직였다.
라플 공작을 강제로 쫓아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어 그들 모두를 말렸다.
‘이 미친놈은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해.’
이번 연회는 그녀가 주인공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 한다.
설사 뜻하지 않게 미친 광룡이 난입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일단 쥬웰은 라플 공작의 청혼을 받는 대신, 먼저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을 하였다.
‘미친놈 때문에 일이 꼬이긴 했지만 원래 목적을 잊으면 안 되지.’
매리엇을 짓밟는 걸 갑작스럽게 나타난 미친놈 때문에 그 일이 흐지부지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저 두 명은 계속 저렇게 허공에 떠다니게 놔둘 건가요?”
“……!”
아까 그녀를 헐뜯던 두 명의 영식들이다.
그들은 몸에 작용하는 중력을 잃은 건지, 마치 먼지처럼 허공에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아, 아! 그냥 죽여 버릴까?”
“……아니, 제 앞으로 데려와 주세요. 할 말이 있으니.”
라플 공작이 손짓하자, 휙! 화살이 쏘아진 듯 두 명의 영식이 날아와 쥬웰 앞에 쓰러졌다.
두 영식은 허겁지겁 쥬웰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남작님!”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공포에 질려 두 영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쥬웰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제가 약혼자가 여러 명인 게 두 분의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요.”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두 영식은 허겁지겁 외쳤다.
쥬웰은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물었다.
“그러면 왜 그러셨나요?”
“……!”
두 영식의 입이 우뚝 닫혔다.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진심이 아니었다면, 절 그렇게 비난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 그건…….”
쥬웰은 피식 웃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혹시 누군가 절 욕하라고 시키기라도 했나요?”
“……!”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 쥬웰의 의도를 깨달은 것이다.
지금 쥬웰은 매리엇을 지목하고 있었다.
과연, 매리엇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쥬웰을 망신시키려 한 계획이었건만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목이 졸리게 생긴 것이다.
‘안 돼!’
여기서 저 둘이 매리엇의 이름을 꺼내면 그녀의 체면은 시궁창에 빠지게 된다.
“그, 그건…….”
두 영식이 덜덜 떨며 하얀 안색을 하였다.
매리엇의 이름을 꺼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가넷을 모욕한 죄를 덮어쓰게 생겼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떨고 있는데, 쥬웰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왕 매리엇에게 치욕을 줄 거, 더 굴욕적으로 줘야지.’
“그나저나 뒤에서 이런 이야기나 퍼트리게 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참 한심한 짓거리네요. 도대체 얼마나 비루하고 못난 분인지.”
그러며 쥬웰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매리엇 공작 전하?”
“……!”
연회장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매리엇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방금 두 영식의 험담이 매리엇의 사주임을 짐작하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즉, 쥬웰은 모두가 범인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매리엇을 조롱하듯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의 짓인지 모르지만, 참 불쌍한 사람인 것 같아요. 얼마나 못났으면 다른 사람의 뒤에 숨어 험담이나 시켰을까요?”
“…….”
“이런 못난 짓을 할수록 스스로가 불쌍해지고 추해진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매리엇의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쥬웰은 대놓고 매리엇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것도 연회장 모두의 앞에서.
하지만 매리엇은 당연하게도 여기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도도한 사교계의 여왕 매리엇이 굴욕을 당하고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특히, 과거의 어떤 장면들을 떠올린 사람들은 더욱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마치, 매리엇 전하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줄 때의 광경과 비슷하지 않은가?’
매리엇은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인물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걸 즐겼다.
그때, 매리엇에게 당하던 이들과 지금 매리엇의 광경이 비슷하게 겹쳐 보였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매리엇의 굴욕적인 모습에 통쾌함을 느끼고 쥬웰을 응원하게 되었다.
쥬웰은 빙글 웃으며 매리엇을 모욕주었다.
“전하께서는 제가 이번 일을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무, 무슨 말인가요?”
“이대로 누구의 짓인지 공개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자비를 베풀어 넘어가는 게 좋을지 말이에요. 누군지 몰라도 분명 한심하고 못난 분일 텐데 이름까지 공개되면, 너무 불쌍할 테니까요.”
매리엇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외통수였다.
본인의 짓이니, 당연히 이름을 공개하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름을 공개하지 말라고 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최악이었다.
스스로 이번 일을 사주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될 테니까.
모두가 뒤에서 비웃음 지으리라.
특히, 이 선택은 쥬웰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과 다름없어 굴욕적이기 그지없는 선택이었다.
이름이 공개돼 최악의 망신을 당하냐, 아니면 쥬웰에게 고개를 숙이는 굴욕을 당하냐.
매리엇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고, 쥬웰은 차가운 눈빛으로 지그시 그런 매리엇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종용하듯.
결국, 매리엇은 흔들리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자, 자비를 베푸는 게 좋지 않을까 싶군요.”
“……!”
쥬웰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전하의 뜻이 그렇다면야. 누군지 모를 그 못난 분도 절 자비롭다고 여기겠죠?”
그 짓궂은 물음에 매리엇은 입을 꽉 물었다.
쥬웰은 다시 매리엇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매리엇이 입을 열 때까지.
결국, 매리엇은 스스로 굴욕적인 말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자도 남작이 자비롭다고 여길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매리엇의 얼굴은 파랗다 못해 거무죽죽해 완전히 시궁창 속에 처박힌 듯한 몰골이었다.
그런 매리엇의 모습에 장내에 보이지 않는 파문이 퍼졌다.
‘매리엇 공작 전하를 저렇게 완벽히 짓밟다니.’
쥬웰은 피식 웃고는 돌연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 그런데 전하. 얼굴이 안 좋으신 것 같아요. 잠시 테라스에서 바람이라도 쐬다 오시는 게 어떨까요?”
“……!”
매리엇은 결국 터져 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휙 등을 돌려 연회장을 나갔고, 라디트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갔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 아직 멀었어.’
쥬웰은 입술 속살을 핥았다.
이번 연회는 정찬이었다.
쥬웰이 매리엇을 짓밟는 코스로 이루어진 정찬.
그리고 그 달콤한 정찬의 끝에서 매리엇은 쥬웰의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사교계의 여왕 자리에서 몰락해 고개 숙인 채 비참히 눈물 흘리며 자비를 구하게 될 것이다.
‘기대돼.’
하지만 그녀는 느긋이 자신의 그런 느낌을 감상할 수가 없었는데, 눈앞의 남자들 때문이었다.
특히 라플 공작.
그의 청혼에 대해 답을 해야 했다.
“예, 예쁜 공주님. 내 청혼을 받아줄 거야?”
“…….”
“받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라플 공작은 소심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마치 강도가 목에 칼을 겨누고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청혼이었다.
‘음.’
쥬웰은 고민했다.
라플 공작과 엮어서 좋을 것 없다.
하지만.
‘……엮이지 않는 게 가능한가?’
쥬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약혼을 거절한다고, 라플 공작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눈앞에서 치우는 게 불가능하면, 날개를 꺾어야 해.’
중요한 건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폭탄의 위협을.
최고의 방책은 위협 자체를 멀리 치우는 것이지만 그게 어렵다면.
‘폭탄의 심지를 잘라 버리는 방법도 있겠지.’
“좋아요. 전하의 약혼 청혼을 받아들이겠어요.”
“……!”
장내가 경악으로 뒤덮였다.
설마, 쥬웰이 저 청혼을 받아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쥬웰! 억지로 그럴 필요 없다!”
엔리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섰다.
“라플 전하! 아무리 당신이어도 그런 무리한 요구를 강요할 수는 없소!”
진정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거칠었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어 엔리크를 진정시켰다.
“전 괜찮아요.”
진심이었다.
약혼이야 사실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니.
“쥬웰!”
“진짜예요. 제게 생각이 있어요.”
쥬웰은 라플 공작에게 말했다.
“당신을 제 약혼자로 받아들이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뭐든 괜찮아! 누구를 죽이는 거든, 어떤 보물을 바라든 다 들어줄게!”
“저와 제 소중한 사람들을 해치지 마세요.”
“……응?”
“당신의 영혼을 걸고, 저와 제 소중한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세요. 그게 제가 거는 조건이에요.”
장내가 조용해졌다.
쥬웰의 말은 뜻밖이었다.
‘하지만 라플 공작의 미친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요구일지도.’
지금껏 라플 공작의 만행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쥬웰의 요구가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맹견을 옆에 두려면 입마개는 필수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쥬웰은 단순히 그런 소극적인 의도로 이야기한 건 아니었다.
‘이러면 내게 라플 공작은 어떤 위협도 될 수 없어. 아니, 도리어 내가 라플 공작을 죽여 버릴 수도 있어.’
물론, 이 맹세 하나만으로 라플 공작이 무력화되는 건 아니었다.
영혼을 건 맹세라고 절대적인 건 아니니까.
특히, 라플 공작 정도 되는 존재면 영혼의 맹세도 억지로 어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강력한 페널티를 받게 되지.’
그렇게 되면 승리는 당연히 쥬웰의 것이었다.
‘허울뿐인 약혼으로 가장 위험한 위협을 제거할 수 있으면, 나쁘지 않은 거래이지.’
그런데 라플 공작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한 것이다.
“내, 내가 너를 해친다고?”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냐는 듯한 음성이었다.
‘……당연히 있을 수 있지. 넌 미친놈이잖아.’
그런데 라플 공작이 뜻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였다.
“내, 내가 너를…… 지금껏 얼마나 기다렸는데.”
“네?”
순간, 라플 공작은 흠칫하였다.
그러고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쓸데없는 이야기를. 아, 아무런 뜻도 아니었어. 못 들은 것으로 해줘.”
마치 자신이 큰 말실수를 하기라도 한 것처럼 당황했다.
‘……뭐지?’
어쨌든 쥬웰은 말했다.
“제 약혼자가 되고 싶으면 맹세해 주세요. 절 해치지 않겠다고.”
“……매, 맹세할게.”
라플 공작은 풀이 죽은 눈빛으로 말했다.
“그, 그런 맹세 아니어도…… 난 널 해치지 않아. 아니, 못 해.”
“……?”
“하지만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널 위하는 일이라면, 이 맹세는 무효야.”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네 소중한 이를 해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하지만, 호, 혹시라도 널 위해…… 부득이 너를 해쳐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이 맹세는 무효라고.”
기이했다. 전혀 납득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를 위해 그녀를 해쳐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그건 무슨…….”
“이 조건은 나도 절대 양보할 수 없어.”
라플 공작은 강하게 말하고는 표정이 돌변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말했다.
“하지만 널 위하는 경우가 아니면 내가 널 다치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진짜야. 내가 어떻게 그래, 너한테.”
쥬웰은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끔뻑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미친놈이 하는 말답게 횡설수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라플 공작은 자신이 내민 조건을 양보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안 되는데.’
쥬웰이 바라는 건 확실한 안전장치였다.
하지만 이 이상은 타협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이 정도만 해도 위협 요소는 크게 제거한 거니까.’
그녀를 위하는 경우에만 그녀를 해하겠다니.
라플 공작이 말하는 일은 사실 성립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신 쥬웰은 자신에게 유리한 다른 조건을 걸었다.
“알겠어요. 대신, 약혼자가 되어도 약혼자로서 권리를 주장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으, 응?”
“만남, 교제, 모두 제 의지에 달려 있어요. 즉, 전하께서 저와 시간을 보내는 건 오로지 제가 허락할 때만 가능해요.”
‘귀찮게 하면 곤란해.’
원하니 약혼자로 받아들이지만, 미친놈인 그와 가까워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라플 공작이 난색을 표했다.
“그, 그건…….”
“동의하지 않으면 전하와의 약혼, 거부하겠어요.”
라플 공작은 끙끙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하지만 나는 너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은데.”
처량한 음성이었지만 미친놈의 헛소리에 진지하게 반응해 주는 것도 우스운 일이리라.
“그거야 전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죠. 아무리 전하라도 절 강제할 수 없어요.”
“그, 그건 그렇지……. 대, 대신 나 노력할게! 네 마음을 살 수 있도록! 그러면 나 자주 봐줄 거지?”
“절 직접 만나서 노력하는 건 안 돼요. 안 만나줄 테니. 아, 선물도 거절하겠어요.”
“그, 그러면?”
“기도하세요. 제 마음을 사게 해달라고.”
“그, 그래. 나 원래…… 기도 안 하는데…… 아, 알았어. 열심히 해볼게!”
그렇게 라플 공작은 강아지처럼 답변했고, 그 모습을 지켜본 연회장의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쥬웰 남작님.’
‘……라플 공작을 저렇게 다루다니.’
사람들은 쥬웰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을 하였다.
허울뿐인 약혼 관계로 라플 공작의 목에 목줄을 채워놨으니 말이다.
덕분에 약혼자가 세 명이 되었지만, 저 대단한 쥬웰이니 약혼자가 세 명인 것도 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쥬웰과 가까운 이들은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허울뿐이라지만, 그녀가 미치광이 라플 공작과 연을 맺게 되었다는 게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유스넨, 오펜하임, 엔리크의 표정이 가장 좋지 않았다.
“쥬웰. 난 찬성할 수 없다.”
엔리크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라플 공작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엔리크는 상대가 라플 공작임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전하라도 내 딸에게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따, 딸?”
라플 공작은 엔리크의 말에 당황했다.
원래 그는 버럭 화를 내려고 하였는데, 상대가 쥬웰의 아버지란 이야기에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하였다.
“그, 그…… 저 착하게 있을게요.”
천하의 라플 공작이 마치 강아지처럼 귀를 늘어뜨리다니.
믿기지 않는 광경이지만, 엔리크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쥬웰은 엔리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제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니.”
진심이었다.
일단, 완벽하지 않아도 라플 공작의 위협을 상당 부분 제거했으니.
이건 그녀에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껏 라플 공작 때문에 남모르게 전전긍긍했었다.
혹시나 그가 끼어들면 모든 게 엉망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이제 그럴 위험은 크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약혼했다고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
그 말에 세 명의 약혼자가 흠칫했다.
“결혼은 제가 원하고, 아버지가 허락하는 사람이랑 할 테니 안심하세요.”
물론 이건 엔리크를 달래기 위해 그냥 하는 입에 발린 이야기였다.
그녀는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쥬웰은 활짝 웃었다.
“그러면 이제 제대로 된 성년 무도회를 시작해 볼까요?”
그 말에 사람들은 퍼뜩 정신 차렸다.
라플 공작의 난입으로 연회가 멈추었던 것이다.
다시 화려한 춤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과연 쥬웰 남작님의 첫 춤은 누가?’
‘경쟁자가 세 명이 되었어.’
유스넨, 오펜하임에 라플 공작까지 약혼자 대열에 가세했다.
과연, 세 명 중 누가 그녀의 선택을?
모두의 시선이 쥬웰에게 집중되었고, 쥬웰이 드디어 손을 내밀었다.
엔리크에게.
“쥬웰?”
“뭘 멍하니 있어요, 아버지?”
쥬웰이 싱긋 웃었다.
“저와 첫 춤을 추어주셔야지요.”
사실, 첫 춤을 누구와 출지는 그녀도 고민하였다.
고민 결과.
그녀는 역시 엔리크가 제일 좋았다.
주책맞은 일이더라도 말이다.
* * *
단상에 화려한 춤이 펼쳐졌다.
이제 막 성년이 된 영애들이라 다들 풋풋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쥬웰이었다.
쥬웰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이번에 데뷔한 영애들은 운이 없네요.”
“그러게요. 쥬웰 남작님밖에 보이지 않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영애들이 쥬웰에게 원망을 품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감히 그럴 만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도리어 영애들은 쥬웰과 같은 무대에서 춤을 춘다는 것에 영광을 느꼈다.
“그런데…… 첫 춤을 아버지와 추다니.”
“카발리에부터, 첫 춤까지.”
“……부녀가 참 사이가 좋네요.”
사람들은 헛기침하였다.
차마 주책맞다고는 못하고, 좋게 표현한 것이다.
“그래도…… 두 분 다 참으로 아름답네요.”
“맞아요.”
쥬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엔리크의 외모도 극강이었다.
30대 후반이란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동안. 얼음 꽃 같은 아름다움.
세상에 ‘아름다운 아빠 대회’가 있다면 1등 할 게 분명한 외모였다.
심지어 입가에 걸린 행복한 미소까지.
사람들은 빙그레 웃었다.
“엔리크 자작님이 저렇게 웃고 있는 것은 처음이군요.”
“그러게요. 세상을 다 가지신 듯한 표정이에요.”
“하긴, 나라도 그럴 것 같긴 합니다.”
딸과 데뷔탕트 첫 춤을 추다니.
주책맞으면 뭐 어떤가? 아버지로서 그것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첫 춤이 끝났고, 다음 차례가 되었다.
‘이번에는 과연 누구를?’
사람들은 눈빛을 빛냈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간택’인 것이다.
그런데 쥬웰은 고민 없이 한 명을 선택했다.
황태자 오펜하임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
유스넨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라플 공작은 멍하니 멀뚱멀뚱하고 있었고.
유스넨과 대조적으로 오펜하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 쥬웰이 무심하게 말했다.
“특별한 오해는 마십시오. 제국의 신하로서, 황실에 예를 표하는 것이니까요.”
“……!”
사람들은 그 말에 아 하고 수긍했다.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오펜하임은 황태자였다.
비록 다 기울었다지만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인 것이다.
그러니 춤의 순서를 정한다면 사감을 떠나 오펜하임이 우선이 되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두 번째 춤이 시작되었다.
오펜하임은 흙먼지가 묻은 여행자용 외투를 벗은 후, 깔끔한 차림으로 단상에 올랐다.
오펜하임이 쥬웰에게 말하였다.
“꿈만 같구려. 그대와 춤을 추다니.”
“오해 말라고 했지요?”
“오해 안 하오. 그대의 마음 잘 아니. 그래도 좋은 것을 어떻게 하겠소?”
“…….”
“그리고 고맙소.”
오펜하임이 진심으로 말했다.
“황실의 면을 살려주어 말이오.”
쥬웰은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예우일 뿐이니, 쓸데없는 착각은 말아주십시오.”
그 말에 오펜하임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것 아시오?”
“……?”
“그대가 벽을 세울수록, 내 마음은 더욱 깊어지기만 한다는 것을.”
“……흰소리하지 마십시오. 사교계 시즌 끝나면 바로 파혼 신청할 테니 서류에 도장 찍을 준비나 해주십시오.”
“파혼? 흐음.”
오펜하임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네 뜻대로 될까?
이런 얼굴이었다.
그리고 쥬웰은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이제 곧 적사자 필바하가 반란을 일으킬 거잖아.’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그러면 파혼도 처리가 안 돼.’
전란 중에는 이혼, 파혼 절차가 중단된다.
그러니 반란이 마무리될 때까지 오펜하임과의 파혼도 안 되는 것이다.
‘……젠장, 도대체 언제 파혼할 수 있는 거야.’
그때 음악이 깊어졌고, 음악에 맞춰 오펜하임이 쥬웰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당겼다.
후욱.
오펜하임과 쥬웰의 거리가 좁혀졌다.
둘의 얼굴이 코앞으로 가까워졌다.
쥬웰의 붉은 눈이 바로 앞에서 보이자 두근, 오펜하임의 가슴이 미친 듯이 떨렸다.
“물론, 그대의 마음이 내게 향하지 않는다는 것 알고 있소. 그래도 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이래 뵈어도 내가 불굴의 의지를 가진 남자란 말이지.”
“……전하께서 그래 봐야 상처만 입을 뿐입니다.”
“상처 입으면 어떻소?”
오펜하임은 미소 지었다.
워낙 아름다운 얼굴이라, 그가 짓는 표정은 하나하나가 마치 그림 같았다.
특히 천장의 조명이 그의 월장석 보석안에 내려앉으며 신비한 빛을 내었다.
“그대가 주는 상처라면 어떤 아픔이든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으니 괜찮소.”
그렇게 두 번째 춤이 끝났다.
세 번째는 라플 공작이었다.
“나? 나? 정말로?!”
라플 공작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펄쩍펄쩍 뛰었다.
“네, 전하께서는 제국을 건국한 구국의 영웅시니까요.”
순전히 가문의 위계를 따지면, 페리도트가가 황실 다음의 두 번째 가문이었다.
제국의 수호 가문으로서 유일하게 대공의 칭호를 허락받은 가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라플 공작에 비할 수는 없었다.
라플 공작은 초대 황제와 함께 대륙을 침범한 게헨나의 어둠을 몰아내고, 제국을 세운 살아 있는 건국 영웅이었으니까.
그런데…… 라플 공작이 미친놈답게 예상 밖의 모습을 보였다.
커다란 자수정 보석안에 눈물을 글썽였던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뚝 눈물을 흘리자 쥬웰은 당황했다.
‘왜 이래?’
라플 공작도 본인의 눈물에 놀랐는지 허겁지겁 눈가를 닦았다.
“아, 아니, 미안! 너무 감동해서.”
“……춤 한번 추는 게 그렇게 감동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나, 나한테는 대단한 일이야. 정말로.”
라플 공작이 알 수 없게 아련한 말을 하였다.
“정말…… 정말로. 너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내가…… 얼마나…… 너를…….”
또 이해 못 할 말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라플 공작은 퍼뜩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잘못 이야기했어! 아무런 의미 아니니 못 들은 것으로 해줘! 히히.”
“…….”
라플 공작은 활짝 예쁘게 웃었다.
“어쨌든 오늘은 그냥 갈게. 진짜 너랑 춤을 추면 나 못 참고 울 것 같아서. 그러니 춤은 다음 기회로 미룰게.”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미친놈의 감정선과 대화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대신, 미뤄두는 거니 다음에는 꼭 춤추어주어야 해?! 알았지?”
“……그러시든지요.”
“히히, 약속한 것이다?! 고마워!”
파앗!
그렇게 라플 공작은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지는 것도 당혹스러웠다.
잠시, 연회장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 힐끗힐끗 라플 공작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갔군.’
‘다행이야.’
사람들은 라플 공작이 그래도 아무런 사고(?)도 안 치고 사라졌다는 것에 안도하였다.
이어서 다시 연회가 재개되었고, 쥬웰에게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면 이번에는 제게 그대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찬란한 은발.
부드러운 느낌의 둥근 안경.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매혹적인 눈매.
유스넨이었다.
그가 쥬웰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마든지요.”
드디어 쥬웰이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잡는 순간.
두근.
지금까지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울림이 쥬웰의 심장을 건드렸다.
* * *
춤이 시작되었다.
“……혹시 오늘 일, 기분 나쁘셨나요?”
쥬웰은 물었다.
카발리에를 거절당하고, 나름대로 약혼자임에도 첫 춤을 쟁취하기 위해 경쟁해야 했으며, 난데없이 약혼녀에게 새로운 약혼자가 생겼고, 무려 네 번째 춤 상대가 되었다.
유스넨 입장에서 충분히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우리 착한 흰 강아지라면 그냥 그러려니 이해해 주었으려나?’
하지만 유스넨은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솔직히.”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진 않더군요.”
“…….”
“당신의 주변을 맴돌던 다른 이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스스로가 당혹스러울 정도로요.”
유스넨은 아까 자신의 감정에 당황했다.
오펜하임이든, 라플 공작이든.
심지어 카발리에와, 첫 춤을 뺏어간 엔리크 자작에게도.
질투심이 났다.
그것도 강하게.
‘설마,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유스넨은 쥬웰을 똑바로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저만 바라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
흰 강아지가 한 말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쥬웰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흡 숨을 들이켰다.
마침 턴이 돌며, 유스넨이 그녀를 끌어안았던 것이다.
순식간에 그와 그녀의 거리가 좁혀졌다.
일반적인 춤 동작이었건만, 달랐다.
일단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그의 동작이 조금 더 강했다.
마치 춤 동작이 아닌, 진짜로 끌어안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더욱 다른 건, 그녀의 반응이었다.
그에게 안기며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런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며 유스넨이 말했다.
흰 강아지가 아니라, 맹수에 가까운 눈빛으로.
그러니까…… 매혹적인 눈빛으로.
“저도 모르게 그런 욕심이 들었습니다. 당신의 카발리에도, 첫 춤도…… 약혼도 모두 제가 독점했으면 하는.”
유스넨은 무겁게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욕심났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쥬웰의 심장이 다시 쿵 뛰었다.
유스넨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메마르면서 갈증을 억지로 참는 듯한 한숨이었다.
그리고 쥬웰이 유스넨의 갈증을 느낀 순간, 본인도 입이 바짝 말랐다.
심장도 희미하게 떨렸다.
그때, 춤 동작에 따라 둘의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쥬웰은 순간 아쉬움을 느꼈다.
더 그의 품에 안겨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또한 귓가에서 심장을 직접 간질이는 듯한 그의 음성을 더 듣고 싶었다.
하지만 유스넨은 다시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 오지 않았다.
대신 거리를 두고 깍듯이 이렇게 말했다.
잘못을 범했다는 듯.
“죄송합니다. 이런 마음.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아쉬운 느낌이 들었던 거다.
쥬웰은 충동적으로 속삭였다.
“그냥 안아주세요.”
“……!”
유스넨은 흠칫했다.
쥬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품에 기대었다. 곧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마침 서정적인 곡이 흘렀다.
덕분에 쥬웰은 그의 품에 완전히 얼굴을 묻을 수 있었다.
한편, 유스넨은 이를 악물고 그런 쥬웰을 내려다보았다.
품에 안겨 있어 쥬웰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이토록 아릿한 느낌이 드는 것은.
춤 따위 때려치우고, 그녀를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너무 아팠다.
‘빌어먹을.’
그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물었다.
“제가…… 당신을 도울 수는 없습니까?”
쥬웰은 잠시 멈칫했다.
무슨 뜻의 물음일까?
“그냥…… 당신에게 무엇이든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전혀. 필요 없어요.”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게 어떤 도움도 주려 하지 마세요.”
그 단호한 음성에 유스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당신을 지키는 건 괜찮겠습니까?”
“……?”
“아까 라플 공작이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아.”
“혹시 그가 수상쩍은 행동을 할 경우, 제가 그를 죽여도 되겠습니까?”
뜻밖의 이야기라, 눈을 크게 뜨고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스넨은 진심으로 보였다.
감람빛 눈동자가 딱딱했다.
‘얘 왜 이래?’
쥬웰은 놀란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라플 공작이 미친 분이라도…… 그래도, 죽이겠다니.”
“단순히 그가 미치광이여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유스넨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그럽니다.”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냥 넘길 말이 아니었다.
유스넨은 천사.
본능적인 감이 굉장히 뛰어났다.
“……라플 공작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라플 공작이 미친 분이라도 가넷인 절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까 그가 맹세한 것도 있고요.”
쥬웰은 고개를 저으며 유스넨을 말렸다.
미안하지만, 유스넨은 라플 공작보다 두 수는 아래였다.
싸우면 무조건 죽는다.
그나마 라플 공작과 싸워 승산이 있는 건 쥬웰뿐이었다.
‘아까 제약까지 걸었으니 이제 내가 훨씬 유리하겠지. 그래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쥬웰은 유스넨의 경고를 기억에 새겨 라플 공작을 경계하기로 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약속해 주십시오. 꼭 조심하겠다고요.”
“네, 약속할게요. 고마워요.”
쥬웰은 유스넨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게 괜히 기분이 좋아,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춤이 끝났다.
드디어 세 명의 약혼자와의 춤이 마무리되었지만 성년 무도회가 끝난 건 아니었다.
아니,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과연, 누가 쥬웰 남작님의 다음 춤 상대로?’
사람들은 기대했다.
약혼자만 춤 신청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저 대단한 쥬웰의 다음 춤 상대는 누가 될 것인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가 단상에 올랐다.
“아, 아니?”
“저분은?”
모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기질처럼 한없이 차가운.
이런 연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뚝뚝한 인상의 아름다운 남자.
추기경 리델하트였다.
“제게도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영광이지요.”
쥬웰은 손을 잡았다.
‘웬일이지, 리델하트 오라버니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관이라고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차분히 담소를 나눌 뿐, 무언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 리델하트가 춤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웬일이신가요?”
쥬웰은 정말 궁금해 물었고, 리델하트는 머뭇거렸다.
“……그냥, 모르겠습니다.”
“……?”
“가끔, 이렇게 연회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신청한 겁니다.”
거짓말이다.
쥬웰은 단번에 리델하트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저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리델하트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하지만 이유를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기에 더 묻지는 않았다.
실제로, 리델하트는 지금 굉장히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미친 건가.’
그날.
쥬웰이 원혼들의 축복을 받은 이후, 그는 말도 안 되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자꾸만 쥬웰에게서 그의 동생, 에스텔레가 겹쳐 보였던 것이다.
‘전혀 닮지 않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물론, 쥬웰과 에스텔레가 닮은 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성력을 사용하고 백성들을 위하니까.
하지만 쥬웰의 끔찍함은 에스텔레와 전혀 달랐다.
그런데도 리델하트는 이상하게 쥬웰이 자꾸만 에스텔레와 겹쳐 보였다.
그래서였다.
쥬웰이 다른 남자들과 춤을 추는 게 거북하게 느껴졌던 건.
계속 불편한 마음을 느끼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나와서 춤을 신청한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자신도 모르게 쥬웰에게 에스텔레를 향한 마음을 투사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못난 놈.’
리델하트는 크게 자책했다.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다시는, 이런 일은.’
입술을 질끈 깨무는 순간이었다.
쥬웰이 말했다.
지금 이 자리의 그녀는 ‘로드’가 아닌, ‘쥬웰’이니 말을 높였다.
“아마 그분은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을 거예요.”
“……무슨 말입니까?”
“에스텔레 성녀님이라면, 지금처럼 당신이 복수심에 본인을 잃는 걸 바라지 않았을 거라고요.”
쥬웰은 석류빛 보석안으로 똑바로 리델하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지금까지처럼 끔찍한 일은 할 생각 하지 마세요. 그런 게 필요하면 제가 할 테니.”
쥬웰은 그렇게 춤을 기회로 리델하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리델하트는 지금 독기가 너무 깊었다.
끔찍한 연쇄 살인을 저질렀을 정도니.
그녀는 리델하트가 이전의 오라버니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리델하트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상관하지 마십시오.”
“경.”
“당신이 뭔데, 자꾸 이래라저래라 하는 겁니까?”
리델하트는 으르렁거렸다.
왜일까?
쥬웰의 말을 듣는데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화가 났다.
에스텔레의 복수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해서?
아니다. 무언가 다른 이유였다.
담담히 끔찍한 일은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쥬웰을 보니, 걷잡을 수 없게 화가 났다.
이유도 알 수 없게.
“…….”
리델하트는 춤이 끝나고 휙 사라졌고,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마음을 가라앉히긴 힘들겠지.’
사실, 이기적인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본인도 복수심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상대에게 그걸 강요하다니.
한편, 연회장의 사람들은 휙 기분 나쁘게 사라진 리델하트의 모습에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추기경께서 왜 저러는 걸까요?”
“설마 다른 약혼자들을 향한 질투?”
“……리델하트 경께서 쥬웰 남작님의 네 번째 약혼자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그럴지도요.”
이윽고 다음 춤 신청자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눈을 흡 부릅떴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다카펠 남작!”
다이아 공작가의 다카펠 남작이었다.
유들유들 비열하게 잘생긴 그가 쥬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게 춤을 추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그 모습에 연회장이 술렁거렸다.
다카펠은 매리엇과 가주 경쟁을 하던 이였다.
그런 이가 쥬웰에게 춤 신청을 하다니?
‘설마, 다카펠 남작이 가넷가와 손을 잡은 건가?’
모두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정확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지금 이 모습도 쥬웰이 일부러 연출한 것이었고.
쥬웰은 매리엇을 견제하기 위해, 다카펠이 가넷의 개가 되었음을 공표한 것이다.
“영광이지요.”
쥬웰은 다카펠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허리에 손대면 죽여 버릴 거야, 오라버니.”
“……!”
다카펠이 흠칫하였다.
“그, 그러면 어떻게 춤을?”
“티 나지 않게 대는 척만 해. 실제로 닿으면, 각오해.”
다카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손을 대지 않고, 대는 것처럼 보이란 말인가!
하지만 쥬웰의 무서운 눈빛을 마주한 순간, 다카펠은 깨달았다.
그녀가 진심이란 것을.
어떻게든 해야 했다.
그렇게 다카펠은 눈물을 삼키며 초고난도의 춤을 췄고, 사람들은 감탄하였다.
“올해 겨울의 보석은 쥬웰 남작님의 확정이군요.”
“춤을 신청한 사람의 숫자도, 숫자인데…… 면면이 정말 화려하군요.”
엔리크 자작.
황태자 오펜하임.
광휘의 대공 유스넨.
마탑주 라플 공작.
천재 신관 추기경 리델하트.
거기에 다카펠까지.
순간, 사람들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무려 여섯 개의 보석이 쥬웰 남작님께 고개를 조아렸네요.”
가넷, 셀레네, 페리도트, 아메티스트, 에메랄드, 다이아.
오늘 쥬웰에게 춤을 신청한 이들의 면면이다.
“저 정도면…… 겨울의 보석이 아닌, 제국의 보석이라 해도 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들은 감탄하였다. 그리고 모두의 머릿속에 이런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사교계의 여왕.
저런 이를 사교계의 여왕이라고 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를 그렇게 칭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쥬웰이야말로 진정 사교계의 여왕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성년 무도회가 끝났고, 때에 맞추어 매리엇이 연회장에 돌아왔다.
그녀는 간신히 기분을 가라앉힌 것 같았다.
다만, 사람들은 더는 매리엇이 이전처럼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진정 찬란히 빛나는 이를 본 탓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매리엇의 독이 오른 눈매가 추악하다고 느꼈다.
한편, 쥬웰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또 짓밟히러 왔군.’
그러며 쥬웰은 매리엇 옆에 있는 라디트를 보았다.
‘한 대 맞았나?’
라디트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상처였다.
매리엇이 성질을 부리며 한 대 후려친 것 같았다.
‘참, 예쁜 사랑이네.’
어제 라디트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웃음이 나왔다.
‘어디, 한번 낚아볼까?’
쥬웰은 지그시 라디트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눈이 마주친 라디트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쥬웰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더욱 노골적으로 라디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더욱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쥬웰은 눈빛을 낮게 가라앉혔다.
이번 연회의 메인 사냥감은 매리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리엇만 사냥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쥬웰은 오늘 라디트에게도 파멸의 씨앗을 심을 생각이었다.
‘눈빛을 보냈으니 알아들었겠지.’
방금 보낸 눈빛은 조금 이따가 은밀히 만나자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라디트라면 아마 알아들었을 것이다.
기대되었다.
‘그 전에 매리엇을 한 번만 더 짓밟고.’
쥬웰은 씨익 웃고는 단상에 나섰다.
“오늘은 참 기쁜 날이네요. 이 자리에 참여하신 분들을 위해 제가 한 곡 연주를 바치고자 합니다. 괜찮으신지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연회 중간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영식, 영애가 사람들 앞에서 간단한 연주를 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다만, 사람들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쥬웰 남작님이 악기 연주에 능했나?’
이렇게 연회장에 나와 연주를 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이들은 흔치 않았다.
‘도리어, 이런 연주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 명에게 옮겨졌다.
‘매리엇 전하가 전문인데.’
‘설마?’
사람들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매리엇 전하를 향한 도발?’
쥬웰이 맞는다는 듯 싱긋 매리엇에게 웃어 보였다.
“이왕이면, 제 샤프롱이신 매리엇 공작 전하와 합주를 하였으면 하는데 전하께서는 어떠신가요?”
매리엇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매리엇은 예술의 후원자인 다이아 공작가 출신답게 비르투오소(Virtuoso)에 준하는 악기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다.
반면, 쥬웰의 악기 연주 실력이 볼품없음은 매리엇이 아주 잘 알고 있다.
‘건방지게.’
매리엇은 이를 바득 갈고는 우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좋지요. 다만, 제 연주를 따라오지 못해도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대놓고 화려한 연주 실력으로 쥬웰의 연주를 짓뭉개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도리어 더욱 짙게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요. 그러면 시작해 볼까요?”
* * *
완벽히 짓밟았다.
쥬웰이 매리엇을.
쥬웰은 연주가 끝난 후, 매리엇이 지은 표정을 떠올리고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아, 영상 마법으로 보관하고 싶은 표정이었지.’
원래 쥬웰은 연주에 문외한이다.
하지만 에스텔레는 아니었다.
에스텔레는 매리엇 못지않은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성전도 음악 연주가 필수인 곳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음악 소리가 울리는 곳은 성전이었다.
그러니 연주에 소양을 가진 신관이 많았다.
특히 에스텔레는 음악에 재능이 뛰어난 편이었고 대단한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쥬웰의 몸은 연주가 익숙하지 않지만.’
하지만 쥬웰은 부족한 부분은 악마의 힘을 빌려 보충했다.
‘악마들도 악기 연주의 달인이니.’
최고의 연주가들을 보면,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악마가 연주하는 듯 소름 끼치게 뛰어나다고. 이 말은 악마들이 대단한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음을 은유하는 말이다.
실제로, 악마들은 대단한 음악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악마들의 힘을 빌린 쥬웰의 연주는 미치도록 소름 끼치게 뛰어났다.
동시에 원혼들이 내린 축복까지 겹쳐 숭고함마저 가득했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쥬웰의 연주를 감상했고, 반면 합주였음에도 매리엇의 연주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완전히 묻혀 버린 것이다.
매리엇은 덜덜 떨며 어떻게든 연주를 이어가려고 했지만, 중간에는 그것마저 할 수 없었다.
넋을 잃고 멍하니 쥬웰을 바라만 보았다.
‘이왕이면, 이성을 잃고 내 머리채라도 잡아당겨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쥬웰은 다시 쿡쿡 웃었다.
즐거웠다.
하지만 즐거움은 여기까지.
이제 다른 일을 할 차례였다.
‘인터미션은 한 시간. 그 안에 다른 일들을 마무리 지어야 해.’
이제 대연회도 후반부로 접어들고 있었다.
후반부에는 쥬웰이 준비한 ‘클라이맥스’가 터질 테니, 그 전에 다른 일들을 끝내놓아야 했다.
‘서두르자.’
쥬웰은 중간 휴식 시간, 인터미션을 맞아 사람들을 피해 발걸음을 옮겼다.
인적 없는 황궁의 모처로 향한 것이다.
오랜 시간 아무도 발걸음 하지 않은 곳이라 건물 안에는 거미줄이 가득했다.
끼득, 정체 모를 땅벌레가 쥬웰을 바라보며 옆으로 기어갔다.
그녀가 이런 곳에 온 건 이유가 있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곧 만날 이를 생각하니 두근, 심장이 뛰었다.
반가움, 설렘, 그런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이 중 한 명인 그녀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니?
하지만 곧 만날 인물의 정체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 음성이 들려왔다.
“……쥬웰 성녀님?”
여린 음성.
선한 인상의 아름다운 외모.
아피엘 왕녀였다.
마왕 타란툴라로 추정되는 이.
그녀가 건물로 들어왔다.
한편, 쥬웰이 있던 건물 밖.
“허억, 허억!”
아피엘 왕녀가 공포에 질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피엘 왕녀가 놀라운 말을 하였다.
“어, 어떻게 인간이 그런 강대한 힘을? 말도 안 돼. 여섯 장의 날개는 1품 대악마나 가능한 것인데!”
쥬웰의 힘을 정확히 가늠한 것이다.
날개의 숫자에 따라 악마의 품계가 나누어지는 건 일반인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즉, 이런 사실을 안다는 건 아피엘 왕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피엘 왕녀가 아까 쥬웰의 겁박에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건 이유가 있었다.
아피엘 왕녀는 덜덜 떨며 생각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힘이었어.’
방금, 그녀는 죽음이 다가옴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체를 드러내도 상대를 이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만약 헛되이 반항하려 했다면, 그녀는 단숨에 죽임당했을 것이다.
그만큼 둘 사이 힘의 격차는 컸다.
따라서 도박한 것이다. 저항하지 않고, 상대가 자신을 죽이지 않기를.
‘당장 로든 왕국으로 돌아가야 해. 다시 잡혀 죽임당하기 전에.’
아피엘 왕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까 쥬웰에게서 느꼈던 공포 때문이다.
“나, 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절대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없어.”
짙은 한이 서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아피엘 왕녀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빛났다.
찬란한 노란빛.
호박(앰버)빛의 보석안이었다.
* * *
“쥬웰, 도대체 이게 무슨…….”
“어서요. 거절하면, 어제 형부가 제게 저질렀던 무례를 모두에게 공표하겠어요.”
라디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쥬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염을 숭상하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가 어린 여인에게 손찌검하려 했으니.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
라디트는 꽈득 주먹을 움켜쥐었다.
만만치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특히 쥬웰은 가넷가의 영애가 아닌가?
어마어마한 파문이 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라디트가 선뜻 결정을 못 내리자 쥬웰이 비꼬듯 말했다.
“어차피 아무에게나 사랑을 속삭이는 값싼 입술. 어디에 입을 맞추든 상관없지 않나요?”
“……!”
라디트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는 사납게 쥬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쥬웰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왜? 제 말이 틀렸는가요?”
“……분명히 말하지만, 난 매리엇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네가 자꾸 왜 이러는 건지, 난 이해가 안 가는구나.”
라디트는 짓씹듯 말했다.
“네 말에는 따라주겠다. 대신, 이걸 마지막으로 다시는 날 모욕할 생각 하지 말아라.”
“…….”
쥬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라디트에게는 애석하게도, 그가 앞으로 겪어야 할 모욕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하아.”
라디트는 한숨을 내쉬고 쥬웰에게 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장갑을 들었다.
장갑은 바닥에 가득 쌓였던 흙먼지가 묻어 더럽기 그지없었다.
한평생 고결하게 살아온 라디트가 입을 맞추기에는 더럽기 그지없는 물건.
그런데 그 더럽혀진 장갑을 보는데 왜일까?
문득 라디트는 쥬웰이 어제, 오늘 자신에게 보낸 눈빛이 떠올랐다.
최근 쥬웰이 그를 보는 눈빛은 한결같았다.
마치 이 더러워진 장갑을 보는 것처럼. 역겨운 혐오를 담고 있었다.
왜?
‘이유가 뭐지?’
라디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런 쥬웰의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울컥했다.
처음엔 이 감정이 모멸감으로 인한 분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도대체 왜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저릿함이었다.
‘됐고, 더러우니 닦아요.’
어제 사건 이후.
그런 쥬웰의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였다.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내가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라디트는 이를 악물고는 해야 할 일을 하였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장갑의 등 부분에 입술을 가져갔다.
“…….”
하지만 라디트는 잠시 멈칫하였다.
장갑에 묻은 흙먼지 때문이 아니었다.
라인하르트 제국에서 손등에 하는 입맞춤은 연인들 간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지금 이 행위는 어쨌든, 장갑이지만 손등에 하는 입맞춤의 연장선이었다.
그래서일까?
정체 모를 감정이 그를 멈칫하게 한 것이다.
떨리는 긴장.
배덕감…… 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빌어먹을. 미친.’
라디트는 자신의 이 황당한 감정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쥬웰의 장갑을 보고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게 미칠 듯 치욕스러웠다.
‘정신 차려. 이건 그냥 장갑일 뿐이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매리엇밖에 없어.’
쥬웰에게 느끼는 이런 감정들은 그저 어제 있었던 일로 인한 혼란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고 장갑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장갑에 닿는 순간.
섬뜩한 일이 일어났다.
스르륵.
쥬웰의 몸에서 장밋빛 향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쥬, 쥬웰?”
라디트는 쥬웰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 흠칫했다.
쥬웰의 눈동자가 요요히 빛나고 있었다.
핏빛처럼.
거부할 수 없는 악마의 매혹을 담고.
“너, 너……?”
“형부…… 아니, 라디트.”
쥬웰이 말했다.
낮게 가라앉은.
마치, 무저갱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음성으로.
악마들의 언어였다.
“날 바라봐. 똑바로.”
그리고 쥬웰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
라디트의 눈이 멍하니 풀어졌다.
‘흑마법’에 걸린 것이다.
‘제대로 됐군. 장갑을 써서 걱정했는데.’
쥬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제대로 된 의식을 위해선 손등에 입을 맞추게 해야 했다.
하지만 라디트의 입술이 닿는 건 끔찍이 싫었기에 편법으로 장갑을 사용했는데 다행히 통한 것 같다.
‘피의 매혹이 제대로 걸렸어.’
지금 쥬웰이 라디트에게 건 흑마법은 ‘피의 매혹’이었다.
어제 제물로 바친 러트만 부인이 즐겨 사용하던 흑마법으로, 정순한 여인의 피로 목욕 후 그 피를 제물로 바쳐 상대를 매혹하는 것이다.
‘물론 라디트에게 매혹을 건 건 아니지만.’
쥬웰은 라디트를 매혹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역겨워 죽을 것 같은데 매혹은 무슨.
그녀가 바란 건 ‘저주’였다.
‘러트만 부인의 피는 추악하기 그지없어서, 전혀 매혹의 효과가 없지. 하지만 대신 하나의 강력한 저주를 걸 수가 있어.’
강력한 저주.
상대에 따라, 삶이 파멸에 이를 수도 있는 끔찍한 저주였다.
“나 ……가 너, 라디트에게 묻겠다. 너, 라디트는 영혼을 걸고, 답하도록.”
“끄으…….”
라디트의 눈동자가 텅 빈 구슬처럼 풀렸다.
완전히 저주에 빠져든 것이다.
이제 쥬웰이 한 가지의 물음을 하면, 저주의 씨앗이 라디트의 심장에 파고들 것이다.
쥬웰은 나직이 속삭이듯 그의 심장에 씨앗을 던졌다.
“라디트, 매리엇을 정말 사랑해?”
“……!”
“네가 내게 그랬잖아. 매리엇을 사랑한다고. 그 말, 진심이야?”
두근.
쥬웰의 심장이 뛰었다.
‘과연, 뭐라고 답할까?’
이 저주의 정확한 명칭은 ‘진실한 마음’이었다.
상대를 파멸에 이를 수도 있게 하는 저주치고는 유순한 이름이었다.
실제로 이 저주는 상대의 마음이 올곧다면, 어떤 안 좋은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도리어 축복과도 같은 효과를 준다.
‘이 저주는 연인을 향한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직면하게 하는 저주이니까.’
의아할 수 있다.
이게 무슨 저주냐고.
하지만 상대에 따라 이건 아주 끔찍한 저주가 될 수 있었다.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피하지 못하고 억지로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연인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진실하였다면, 이 저주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의 사랑을 더욱 깊게 깨달아, 축복과도 같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상대를 향한 마음이 거짓이었다면?
더는 그 감정을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
숨겨왔던 혐오감을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점점 더 상대가 혐오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부정할수록 그 혐오의 감정은 계속해서 커지게 되지.’
그러니 만약 라디트가 자신이 했던 말처럼 매리엇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이 저주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이었다면?
이제부터 라디트는 매리엇을 보며 끔찍한 혐오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도, 라디트는 매리엇을 떠나지 못하겠지.’
라디트는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할 것이다.
어떻게든 매리엇을 사랑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정할수록 매리엇을 향한 혐오감은 더욱 커지게 될 거고, 결국 매리엇과 라디트는 서로 끔찍한 파멸을 맞게 될 것이다.
‘기대되네.’
쥬웰은 두근 심장이 뛰었다.
“대답해. 매리엇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드디어.
라디트가 답했다.
“사랑…… 하지 않아. 한순간도 그래 본 적 없어…….”
예상대로의 답변이었다.
다 짐작하던 일이었지만, 쥬웰은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더러운 놈.’
라디트가 에스텔레를 배신했던 건 매리엇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순간도 매리엇을 사랑한 적이 없다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역겨워.’
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저주가 완성되는 순간.
라디트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사랑한 건…… 오로지 에스텔레뿐이야.”
“뭐……?”
“일평생…… 어릴 적 그녀를 만난 처음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난 오로지…… 에스텔레만을 사랑해 왔어.”
“……!”
쥬웰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 이 빌어먹을 놈이 뭐라고 하는 건가?
라디트의 멍한 눈동자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난…… 지금도 에스텔레, 그녀를 사랑해.”
“……!”
쥬웰의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이 충격적인 고백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를 사랑했다고?
그렇게 경멸했으면서?
그리고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렇게 추악하게 배신해 놓고?
갑자기 속이 미칠 듯 울렁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토기가 치밀어올랐다.
“우, 우윽.”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 꿇고 고개를 돌려 헛구역질하는데, 또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꽈악.
라디트가 쥬웰의 어깨를 붙든 것이다.
“……너?”
쥬웰이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라디트가 쥬웰을 그대로 밀어 바닥에 쓰러뜨렸다.
콰앙!
“……!”
순간, 쥬웰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멍하니 위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하는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라디트가 텅 풀린 눈동자로 갈망하듯 그녀를 불렀다.
“에스…… 텔레.”
“……!”
쥬웰은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아…….’
이 끝없는 추악함에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이 멈춘 듯했다.
지금 라디트가 이러는 건 방금 건 저주의 영향 때문이었다.
저주, ‘진실한 마음’ 때문에, 에스텔레를 향한 마음까지 덩달아 깨닫게 된 것이다.
문제는 라디트의 비틀린 마음에 있었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에스텔레를 향한 마음이 폭주하듯 치솟아 오르며, 일시적으로 이성을 잃고 에스텔레만을 갈망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쥬웰을 에스텔레로 착각해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착각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걸 수도 있었다.
“하…… 하하.”
쥬웰은 도저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웃음은 곧 광소가 되었다.
“아하하하하!”
미칠 듯한 웃음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구역질도 나왔다.
“우윽! 윽! 하하하! 우욱.”
쥬웰은 바닥에 쓰러진 채 마치 미쳐 버린 것처럼, 토하고, 웃고를 반복했다.
라디트가 그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엉망으로 망가진 그녀의 얼굴에 라디트의 손이 닿았다.
“에…… 스텔레.”
“……!”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모든 게 멈추었다.
‘그냥…… 지금 죽여 버리겠어.’
쥬웰은 더는 웃지도, 토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히 가라앉았다.
라디트를 위해 준비한 만찬들?
다 필요 없었다.
그냥, 이대로 목숨을 거둘 생각이었다.
손을 들어 그대로 심장을 뽑아내려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퍼억!
요란한 타격음과 함께 그녀의 몸을 누르고 있던 라디트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익숙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 강아지?’
유스넨이었다.
그가 다급한 안색으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이게 무슨……!”
그 놀라고 다급한 음성을 듣는 순간.
왜일까?
쥬웰은 주룩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안도감은 아니었다.
어차피 라디트 따위에게 위협을 느낀 적은 없었으니까.
그냥 흰 강아지의 얼굴을 보니, 울컥 가슴이 일렁였다.
흰 강아지가 너무 반가웠다.
유스넨은 그런 그녀를 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감히.’
유스넨은 정확한 앞뒤 상황은 보지 못했다.
그저 쥬웰이 계속 자리를 비우고 있어 의아함을 느껴 황궁을 뒤졌고, 그러다가 라디트가 쥬웰을 덮치려드는 걸 본 것이다.
‘가만히 두지 않겠어.’
유스넨의 눈빛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의 분노를 느낀 건지, 주변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유스넨은 바로 라디트를 응징하기보다는 쥬웰에게 허리를 숙였다.
일단은 쥬웰을 살피는 게 우선이었다.
유스넨은 다급히 손수건으로 쥬웰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손수건이 모자라자 자신의 소매를 찢었다.
그리고 성력도 펼쳤다.
외상은 없어 보였지만, 심리적 안정을 주기 위해서였다.
“나……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습니다.”
유스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절대 괜찮지 않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
유스넨은 파리한 쥬웰의 안색을 바라보았다.
물론, 유스넨도 안다.
쥬웰이 실제로 위험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과 심리적인 충격은 별개였다.
그는 지켜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살이 떨리게 분노스럽고 끔찍한데, 직접 당한 쥬웰의 심리적 충격은 어떻겠는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설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제가 당신을 지켰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유스넨은 마치 자신이 잘못하기도 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를 위했다.
충격받았을 그녀를 어떻게든 감싸주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쥬웰은 그녀를 향한 걱정에 안절부절못하는 유스넨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유스넨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놀랐는데, 당신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유스넨이 나타난 순간.
믿을 수 없게도, 그녀를 미칠 듯 괴롭히던 역겨움이 진정되고 마음이 안정되었다.
아마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참지 못하고 라디트를 죽였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평안한 죽음을 내린 것에.
“고마워요.”
“…….”
“와주셔서 기뻐요.”
유스넨은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쥬웰에게 덮어주었다.
“일단 덮고 있으십시오. 그리고 이 안경도 부탁합니다.”
유스넨은 안경을 벗어 쥬웰에게 건네주었다.
부드러운 둥근 테가 사라지며, 날카로운 인상이 부각되었다.
“안경은 왜?”
“쓰레기를 처벌해야 하니까요.”
유스넨이 차갑게 말했다.
마침, 막 라디트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유스넨에게 얻어맞아 이성을 차린 것 같았다.
“이, 이게 무슨……?”
유스넨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라디트의 검을 발로 차 그에게 보내었다.
“대공?”
“검을 들어라.”
라디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유스넨은 차갑게 말했다.
“내 약혼녀를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결투를 신청할 테니, 당장 검을 들어.”
유스넨은 장갑을 고쳐 꼈다.
검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허리에 맨 심판의 검을 풀었다.
“어서.”
유스넨의 기세에 압도되어 라디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라디트가 엉거주춤하는 순간.
퍼억!
유스넨의 주먹이 라디트의 안면을 강타했다.
피가 튀었다.
* * *
쥬웰은 살짝 놀란 눈으로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흰 강아지에게 저런 면이 있다니?’
유스넨은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일방적이고, 끔찍하게.
마치 당하는 이가 가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런 유스넨의 얼굴은 기계처럼 무표정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도리어 더욱 섬뜩한 얼굴이었다.
어떤 흉악한 얼굴보다 선명한 분노가 느껴졌다.
퍼억!
라디트가 피범벅이 된 얼굴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유스넨이 차갑게 말했다.
“끄…… 끄윽.”
라디트가 다시 엉거주춤 일어나자.
퍼억!
기계처럼 주먹이 떨어졌다.
“크악!”
라디트도 자신의 잘못을 알아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술에 취한 것처럼 앞뒤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쥬웰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고 했던 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르려 하다니?’
라디트는 자신의 과오가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건…… 내 뜻이……!”
“닥쳐.”
퍼억!
다시금 주먹이 안면에 꽂혔다.
유스넨은 쓰레기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당장 죽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쥬웰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런 주먹질 따위 하지 않고, 바로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쥬웰은 이 쓰레기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듯했고, 어쩔 수 없이 간신히 참은 것이다.
“크아아악!”
그렇게 끝없이 주먹질이 이어졌고, 결국 라디트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검을 들어 저항했다.
하지만 하지 않느니만 못한 저항이었다.
퍼어억!
저항을 하든, 하지 않든 어떤 의미도 없었다. 라디트의 검은 유스넨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으니까.
유스넨은 손가락으로 라디트가 휘두른 검을 잡고는 힘을 주었다.
파창!
사파이어 공작가의 보검이 단번에 부러졌다.
그리고 무심한 얼굴로 다시 주먹질을 이어갔다.
“크아아악!”
라디트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쥬웰은 그 모습을 보며 팔짱을 꼈다.
‘전혀 상대가 안 되네. 라디트도 나름대로 마스터 나이츠인데. 그것도 수위권의.’
라디트는 그냥 기사가 아니었다.
마스터 나이츠.
그중에서도 무려 제국 십검(十劍).
검제 샤피렌을 제외하고, 제국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참고로 가넷가에서는 리샤크와 기사단장 라이져가 이 제국 십검에 속해 있었다.
즉, 라디트는 리샤크와 동급의 실력자였다.
그런데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긴, 흰 강아지는 네 명의 초월자 중 한 명이니. 그나저나, 저러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라디트의 몰골은 심각했다.
성한 곳이 없었다.
마스터 나이츠라 신체가 극한으로 단련되어 있어 그랬지, 일반인이었다면 진즉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었을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스넨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유스넨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는데, 쥬웰은 유스넨의 분노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실제로 유스넨은 극한의 살심을 느끼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어.’
유스넨의 눈동자에 살심이 희번덕거렸다.
유스넨은 이전부터 라디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에스텔레에게 라디트가 어떤 모욕을 주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놈은 그녀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유스넨의 눈빛이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에스텔레는 스스로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유스넨은 최근 자꾸만 그 사실이 의문이 들었다.
만약 순교가 아니었다면?
누군가에 의해 죽임당한 거였다면?
그렇다면 에스텔레를 해친 이는 그녀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즉, 이 쓰레기, 라디트도 그녀의 죽음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자 단지 의심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살의가 치솟았다.
앞뒤 따지지 않고, 당장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그의 이성이 마비되었고.
파파팟!
그의 주먹에 찬란한 하얀빛이 맺혔다.
천사들의 힘인 성투기(聖鬪氣), 디바인 파워였다.
“……!”
유스넨이 정말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라디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유스넨의 눈동자에 살기가 희번덕거렸다.
하지만 그때, 하얀 손이 유스넨의 팔을 붙들었다.
쥬웰이었다.
“그만. 거기까지.”
“……!”
“이제 그만하세요. 전 괜찮으니.”
유스넨은 잠시 물끄러미 쥬웰을 바라보았다.
성투기를 일으켜, 유스넨의 감람빛 눈동자는 찬란한 광채에 휩싸여 있었다.
“왜 그만해야 합니까?”
“…….”
“저자는 당신을 모욕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제국의 정의를 수호하는 광휘이자, 심판자. 저자를 즉결 처분할 권한이 있습니다.”
유스넨은 제국의 수호자이자 대법관이었다.
끔찍한 죄인을 즉결 처벌할 권한이 있었다.
물론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를 죽이면 파장이 어마어마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하지 마세요.”
그 말에 유스넨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왜…… 왜 말리는 겁니까?”
왜?
쥬웰은 엉망이 된 몰골로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라디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숨기지 못할 경멸이 떠올랐다.
“저런 더럽고 비루한 것. 당신의 손을 더럽힐 가치도 되지 못하니까요.”
“……!”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둬요.”
어차피 곧 일어날 필바하의 반란 때.
쥬웰의 손에 라디트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니 더욱 끔찍한 복수를 위해, 지금은 인내해야 했다.
“쥬, 쥬웰…….”
라디트가 떨리는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쥬웰은 무심히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나 매리엇 언니를 사랑한다더니. 참, 대단한 꼴이네요.”
라디트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그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쥬웰은 마지막으로 짧게 말했다.
짙은 혐오를 담아.
“더러운 놈.”
“……!”
쥬웰은 더는 라디트를 보지 않았다. 역겹고 더러워 쳐다볼 가치도 없었다.
“내버려 두고 그만 가죠.”
“……알겠습니다.”
이윽고 둘은 사라졌고 라디트는 추레하게 홀로 남게 되었다.
“…….”
라디트는 멍하니, 쥬웰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내던 시선을 떠올렸다.
‘더러운 놈.’
그녀가 보낸 끔찍한 경멸이 그를 비참하게 짓밟았다.
* * *
밖에 나온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쥬웰은 복수 생각에 잠겨 있었고, 유스넨은 그런 쥬웰을 바라보았다.
‘왜 저놈을 죽이는 걸 말린 거지?’
유스넨은 의문을 품었다.
물론, 방금 쥬웰의 만류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광휘의 대공이라도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를 다짜고짜 죽여 버리는 건 커다란 문제의 소지가 될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그런 이유로 그를 말린 게 아닌 것 같았다.
‘끔찍한 증오.’
유스넨은 라디트를 향한 쥬웰의 눈동자에 일렁이던 감정을 읽었다.
단순히 추레한 죄인을 보는 경멸이 아니었다.
차마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아찔하도록 끔찍한 증오가 일렁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증오하는 거지? 오늘 저질렀던 끔찍한 잘못 때문에? 아니야, 그것보다 더 오래되고 깊은 증오야.’
유스넨은 순간 이게 ‘그녀’의 정체를 ‘객관적’으로 포착할 중요한 단서임을 눈치챘다.
‘라디트를 그렇게나 증오하는 이유가 뭐지?’
유스넨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라디트는 여섯 공작가의 인물치고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다.
크게 누군가에게 잘못한 적도 없고, 평판 관리에도 힘써 대다수가 그를 좋게 생각했다.
즉, 누군가의 증오를 살 인물이 아니란 것이다.
‘……단, 한 명을 제외하면.’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유스넨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라디트뿐이 아니야. 그녀는 매리엇도 증오하고 있어.’
물론, 매리엇은 누구에게나 원한을 산 인물이다. 하지만 특히 한 명의 인물에게 커다란 잘못을 했다.
바로 에스텔레.
그리고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파창!
“……!”
유스넨은 흠칫했다.
이 순간.
대천사들이 그에게 걸어두었던 금제가 깨졌다.
에스텔레의 죽음의 진실을 의심하지 못하게 하는 금제가 말이다.
유스넨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벌어진 일이다.
“…….”
유스넨은 찰나, 눈을 끔뻑했다.
금제가 깨지며, 일시적으로 혼란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스넨은 정신을 차렸다.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유스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가 지금 하는 짐작대로 에스텔레의 죽음에 그들이 연관이 있다면.
쥬웰이 라디트와 매리엇을 이토록 증오하며 적대하는 게 과연 우연일까?
‘누나.’
유스넨은 쥬웰을 바라보았다.
전혀 닮지 않은 얼굴, 행동, 분위기.
하지만…… 그는 끝없이 쥬웰에게서 에스텔레의 잔향이 보였다.
그리고 이 순간.
마치 환몽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쥬웰과 에스텔레가 구별되지 않았다.
‘내 강아지.’
에스텔레가 그에게 미소 짓던 모습이 떠오르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순간 유스넨은 본능적인 직감을 느꼈다.
‘당시 그녀의 죽음을 다시 파헤쳐 봐야 해.’
유스넨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당시,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이 모든 의혹을 꿰뚫을 열쇠가 되리란 것을.
‘그리고…… 만약 그녀가 순교가 아닌, 누군가에게 죽임당한 게 맞는다면.’
유스넨은 순간,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녀의 죽음과 연관된 모두를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찢어 죽이고 싶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섬뜩한 분노에 주변 공기가 찌르르 떨렸다.
마치 세상이 그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그때, 쥬웰이 말했다.
“그만 기분 푸세요.”
“…….”
“저 괜찮으니.”
유스넨의 분노를 아까 라디트의 잘못 때문으로 오해한 것이다.
유스넨은 잠시 침묵했다.
자신을 보는 쥬웰의 얼굴이 눈동자에 한가득 들어왔다.
유스넨은 그런 쥬웰을 가만히 보다가 불쑥 엉뚱한 이야기를 하였다.
“전……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네?”
“진심으로요.”
유스넨은 쥬웰이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녀가 웃기를 바랐다.
그녀가 진정 ‘구원’이란 말에 어울리는 결말을 맞기를 바랐다.
‘반드시.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겠어.’
아직은 방법조차 모르겠지만, 유스넨은 굳게 다짐하였다.
쥬웰은 그런 유스넨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어서 감사해요. 오늘 도와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아닙니다. 감사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유스넨은 그렇게 답하며, 순간 진한 애달픔을 느꼈다.
이런 대화 말고 그녀를 누나, 라고 불러보고 싶었다.
으스러지듯 껴안고,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며 지금껏 그녀가 아팠을 상처를 보듬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미치도록 안타까워, 유스넨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유스넨.”
“네?”
“앞으로는 유스넨이라 불러도 됩니다.”
“…….”
쥬웰은 순간 침묵했다.
“감히, 어찌…….”
“아니, 그렇게 해주십시오.”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는 똑바로 쥬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쥬웰의 시선에 유스넨의 눈빛에 담긴 아릿함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당신에게, 그렇게 불리고 싶습니다.”
“…….”
순간, 쥬웰의 가슴이 뭉클 흔들렸다.
‘……흰 강아지.’
과거, 유스넨의 모습이 떠오르며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말하였다.
“……유스넨.”
그리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
유스넨은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아득한 아릿함이 심장에서 시작해 그의 사고를 멈추게 했다.
미치듯이 그립고, 미치듯이 애달팠다.
왈칵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아, 유스넨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자신의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군요. 그렇게 불러주시니.”
“……네.”
“앞으로도 부탁합니다. 전하, 란 표현은 너무 멀게 느껴지니까요.”
한편, 쥬웰도 유스넨과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전처럼 그를 흰 강아지라 부르며 안아주고 싶었다.
쥬웰도 유스넨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유스넨.”
이후, 유스넨은 가문으로 돌아갔다.
“연회장으로 가시지 않고요?”
“네, 해야 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해야 할 일요?”
“네.”
유스넨은 더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그저 쥬웰의 손을 붙들더니,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연인으로서 작별의 인사를 하려는 것이다.
“……입 맞추어도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쥬웰은 심장이 간질거림을 느꼈다.
“……이제 그런 것, 안 물어보셔도 돼요.”
그 말에 유스넨이 천천히 손등에 입술을 가져갔다.
입술이 닿기 전.
찰나의 간격.
유스넨의 숨결이 그녀의 손등을 스쳤고, 갈증 섞인 긴장감이 쥬웰의 심장을 파르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짧지만 선명한 입맞춤 후.
유스넨은 깍듯이 인사했다.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성년 축하합니다.”
“감사해요.”
이윽고 홀로 남게 된 쥬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았다.
하지만 좋은 만큼 가슴이 무거워졌다.
‘됐어.’
이후, 쥬웰은 드레스를 갈아입고 흐트러진 치장을 다시 했다.
가넷가에서 따라온 룬이 그녀의 치장을 도왔다.
룬은 왜 그녀의 차림이 흐트러진 건지 의아한 듯했지만, 쥬웰이 대답을 피하자 더 자세히 묻지 못했다.
그저 조심스레 이렇게만 말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얼굴이 안 좋으셔서…… 걱정되어서.”
“아? 아아.”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그래.”
“…….”
룬은 우물쭈물했다.
걱정은 되는데, 쥬웰의 가라앉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더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쥬웰은 피식 웃고는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진짜 괜찮아. 오늘은 기쁜 날이잖니?”
매리엇을 짓밟는 날이니까.
‘이제 클라이맥스군.’
지금, 쥬웰은 연회장 외부에 마련된 대기실에 있었다.
창문으로 연회장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 달빛이 환하게 내리쬐고 있어, 연회장의 풍경은 마치 동화 속처럼 아름다웠다.
쥬웰은 저 아름다운 풍경이 곧 어떻게 변할지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쥬웰이 연회장에 다시 들어간 순간,
갑자기 장내가 싸아아 조용해졌다.
“……?”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연회의 주인공이 재등장해서가 아니다.
무언가 불편한 기색의 침묵이었다.
다들 힐끗힐끗 쥬웰의 눈치를 살폈다.
‘뭐지?’
쥬웰은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언가 일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쥬웰은 곧 이변의 정체를 알아냈다.
연회장의 상석.
매리엇의 곁에 생각지도 않은 인물이 있었다.
평범한 갈색 머리.
수수한 얼굴. 그리고 겁에 잔뜩 질린 눈동자.
‘저 영애는……?’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매리엇이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서며 쥬웰을 바라보았다.
“……여기 먼 곳에서 반가운 분이 오셨어요. 쥬웰 남작도 오랜만이지요? 서로 인사해요.”
매리엇은 잔뜩 움츠린 영애를 앞으로 떠밀었다.
“라시느 남작 영애예요.”
매리엇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누구 때문에 받았던 정신적 상처가 이제야 간신히 회복되어 사교계에 돌아왔답니다.”
장내가 소란해졌다.
누구 때문에.
바로 ‘쥬웰’을 뜻한다.
그렇다.
지금 나타난 영애는 바로 이전 ‘쥬웰’의 괴롭힘에 희생당했던 영애였다.
* * *
원래 ‘쥬웰’은 못된 성격으로 유명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에스텔레와 닮은 평민을 죽이려고 했었으니까.’
그런 ‘쥬웰’이 주변 영애들에게는 착한 모습을 보였을까?
그럴 리가.
원래의 ‘쥬웰’은 매리엇 못지않은 새싹 악녀였다.
‘그나마 어려서 패악을 부리는 데 한계가 있어 망정이었지. 원래대로 장성했으면, 매리엇을 능가하는 악녀가 되었을지도.’
그러니 만만한 주변 또래 영애들에게 못되게 구는 건 일상이었다.
특히, 지금 나타난 라시느 영애는 ‘쥬웰’의 패악에 큰 상처를 입고 수도를 떠나 시골로 은거한 영애였다.
“이렇게 다시 사교계에서 뵐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렇지 않나요, 영애?”
“네, 네, 가, 감사합니다, 전하.”
라시느 영애는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매리엇에게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쥬웰은 매리엇의 속마음이 훤히 보여 피식 웃음을 삼켰다.
‘내 명예를 꺾으려고 일부러 데려왔군.’
지금 그녀는 성녀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매리엇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다.
지금 쥬웰의 숭고한 모습은 다 가식이라고.
쥬웰에게 괴롭힘당하던 이 영애의 모습을 보라고. 다 거짓이니 속지 말라고.
확실히 위협적인 수작이었다.
만약 여기서 잘 대처하지 못하면 쥬웰의 명성은 크게 흔들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고맙네.’
쥬웰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내가 하려는 일을 도와주다니.’
매리엇은 알까?
지금 본인의 수작이, 도리어 쥬웰이 계획한 ‘클라이맥스’에 날개를 달아주는 행위란 것을.
“혹시 라시느 영애께 하실 말씀은 없나요, 쥬웰 남작?”
매리엇이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연회 초반에 당한 치욕을 설복하려는 듯, 기세등등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죄송해요.”
“……뭐…… 라고요?”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쥬웰은 진중한 얼굴로 라시느 영애를 바라보았다.
“일전, 철없는 마음으로 영애께 씻지 못할 상처를 주었어요. 진즉 찾아가 사과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이제야 사과하는 점 용서해 주세요.”
그러며 쥬웰은 허리를 숙였다.
진실한 사죄의 의미로.
“정말 죄송합니다.”
그 광경에 장내가 웅성거렸다.
쥬웰은 가넷이다.
그런데 저런 사과라니?
‘사과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실제로 잘못하기도 했고.’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라시느 영애에게 잘못한 건 그녀가 아닌 원래의 ‘쥬웰’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면 저 가련한 영애가 받은 상처는 누가 위로해 준단 말인가?
그녀는 ‘쥬웰’의 몸을 차지한 이로서 이런 사과 정도는 응당히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거, 거짓말…….”
라시느 영애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쥬웰’에게 크게 상처 입었다.
그러니 저런 사과 한 번에 그 상처가 치료될 리가 없었다.
라시느 영애는 왈칵 울음을 쏟았다.
“다,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제 와서 사과라고?! 웃기지 마!”
절절한 한이 맺힌 외침이었다.
쥬웰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과 따위, 제가 한 잘못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 다만, 그저 정말로 잘못했기에 드리는 사과입니다.”
과거. 그녀, 에스텔레는 끔찍이 다른 이에게 학대당했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에게 남은 상처는 평생을 간다.
그러니 이런 얄팍한 사과는 결단코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쥬웰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감히 용서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게 이런 비겁한 사과밖에 없기에 드리는 사죄입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사죄했다.
비록 그녀가 저질렀던 잘못은 아니지만.
비슷한 상처를 겪었던 이로서 상대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위로받길 바라며.
그런 그녀의 진심을 느낀 걸까?
라시느 영애의 눈동자가 끝없이 흔들렸다.
매리엇의 협박 때문에 억지로 오기 싫은 사교계에 왔지만, 이런 진실한 사과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 나는…….”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라시느 영애는 말을 더듬었다.
다행히 쥬웰은 그녀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억지로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저…… 죄송합니다.”
라시느 영애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쥬웰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실한 사과를 듣는 순간, 무언가 가슴에 꽉 막혀 있던 것이 희미하게 옅어졌다.
그녀의 상처를 갉아먹던 원망과 증오였다.
“나는…… 나는…….”
라시느 영애가 간신히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거, 거짓말……!”
매리엇이 분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쥬웰이 삐뚜름하게 물었다.
“거짓말이라뇨?”
“쥬웰 남작, 그대의 사과는 거짓이야! 그대가 이런 부끄러운 일을 진실로 할 리가……!”
“부끄러운?”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만 해도 될까요, 전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랍니다.”
“……!”
“부끄러운 건, 잘못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거고.”
쥬웰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었다.
“그것보다도 더욱 부끄러운 건,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겠지요.”
장내의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방금, 쥬웰의 말은 매리엇을 지적한 것이다.
지금껏 매리엇은 사교계에서 무수한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었다.
아니, 심지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본인이 지금껏 저지른 일은 생각지도 않고 이딴 일을 저지르다니.’
사람들은 속으로 매리엇에게 비난의 마음을 품었다.
특히, 사람들은 연회장 한구석에 우두커니 시체처럼 서 있는 세실을 바라보았다.
매리엇의 잘못의 대표적인 희생양인 세실이 가련하게 느껴졌던 거다.
한편, 쥬웰은 사람들의 그런 반응에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끝낼 때가 되었군.’
때가 완전히 무르익었다.
이번 막의 끔찍한 클라이맥스의 순간이 다가왔다.
화려한 데뷔탕트는 끔찍한 결말을 맞을 것이고, 매리엇은 사교계에서 완전히 추락하게 될 것이다.
‘넌 곧 내 앞에 무릎 꿇고 자비를 구하게 될 거야.’
두근,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쥬웰은 사람들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기울어질 행동을 하였다.
연회장의 모두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것이다!
“방금 매리엇 전하께 한 이야기는 저 스스로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제가 지금껏 잘못한 건 라시느 영애에게만이 아닙니다. 이전, 철없는 저의 행동으로 기분이 상했거나 상처 입었던 분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모두 사죄합니다.”
장내의 모두가 놀란 얼굴을 하였다.
설마 쥬웰이 저렇게까지 나올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사죄는 모두의 가슴을 울렸다.
‘대단해.’
‘저런 태도라니.’
수많은 이가 감탄하였다.
이렇게 모두의 앞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허리를 숙이는 건 세상 누구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가넷인 그녀가 서슴없이 저런 모습을 보이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어제 원혼들에게 받은 축복이 그녀의 사과에 진실함을 더해주었다.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하는 그녀의 모습에 경외심을 느꼈다.
‘저런 분이 가식이라니. 말도 안 돼.’
그렇게 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사태를 불러일으킨 매리엇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모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사과해야 할 이는 쥬웰 성녀님이 아니라…… 사실 매리엇 공작 전하 아닌가?’
‘본인의 잘못은 아랑곳하지도 않으면서.’
특히, 이 자리에는 라시느 영애와는 비교도 안 되게 커다란 상처를 지닌 이가 있었다.
세실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구석에서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는 세실을 바라보았다.
그 안타까운 모습에 사람들은 동정심을 느꼈다.
‘불쌍하기도 하지.’
‘매리엇 전하가 과연 세실 영애에게 사과할까?’
글쎄.
사람들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쥬웰이 매리엇에게 말했다.
“혹시, 전하께서는 하실 말씀이 없나요?”
“……!”
매리엇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쥬웰은 매리엇에게도 지금까지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기를 종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매리엇의 옹졸한 성격은 둘째 치더라도, 성녀인 쥬웰의 사과와 매리엇의 사과는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매리엇이 억지로 사과를 해봤자 그저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될 것이다. 최소 매리엇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
그렇게 연회장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는 순간,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정말…… 어떤 말씀도 하실 게 없나요?”
세실이었다!
죽은 듯 가만히 있던 그녀가 연회장 앞에 나서서 매리엇에게 이런 말을 던진 것이다.
“……!”
매리엇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저년이 왜 갑자기.’
매리엇도 당연히 세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죽었다고 소문난 이가 다시 나타난 게 조금 껄끄럽긴 했지만, 저런 하잘것없는 이에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하필 지금 한창 예민할 때 나서서 불편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확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매리엇은 입을 우뚝 다물었다.
연회장 모두가 매리엇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내키는 대로 답할 상황이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사과를?’
순간, 매리엇은 고민하였다.
하지만 그 방법은 떠올리자마자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저런 하잘것없는 이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아까 생각했듯, 쥬웰과 그녀는 달랐다.
쥬웰의 사죄가 사람들에게 높게 인정받은 건, 그녀가 성녀였기 때문이다.
매리엇이 같은 행위를 해봐야 비웃음거리만 될 것이다.
아니, 그런 계산을 떠나서, 수많은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짓 따위 매리엇은 절대로 하지 못한다.
대신, 매리엇은 정반대의 선택을 하였다.
사과 대신, 모든 책임을 세실에게 돌리기로 한 것이다.
“할 이야기라니. 갑자기 무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매리엇은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 난 그저 널 아껴 친근함을 표시했을 뿐이다. 그런데 넌 내 마음을 오해하고 날 뒤에서 험담하고, 어리석은 일을 벌여 도리어 날 크게 곤란하게 하였어. 그리고 오늘은 모두의 앞에서 내게 커다란 무례까지 범하는구나.”
“……!”
사람들은 매리엇의 말에 숨을 들이켰다.
그때의 모욕들이 친근함의 표시였을 뿐이라니.
당시 세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던 이들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매리엇이 사과할 리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예상보다 더욱 잔혹했다.
세실의 영혼을 두 번 죽이는 발언이었다.
“절 아껴…… 친근함을 표시했을 뿐이라고요?”
“그래, 그저 단순한 장난이었을 뿐인데 내 마음을 오해한 건 세실, 너다. 그러니…….”
하지만 매리엇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세실이 멍하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연하디처연한 눈물이었다.
“전…… 그렇게 괴로웠는데…… 당신은 장난이었다고요?”
“……!”
“주, 죽고 싶었는데…… 그게…… 제 오해였다고요?”
그 처절한 물음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매리엇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짜증이 났다. 어서 다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래, 네 오해라고 하였다. 더 이상의 무례는 허락지 않을 테니 물러가도록.”
“…….”
세실은 한참이나 멍하니 매리엇을 바라보았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믿을 수 없다는 듯.
결국, 매리엇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어서!”
그제야 세실은 비틀 등을 돌렸다.
사람들은 그런 세실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매리엇을 향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악독할 수가.’
원래라면, 사람들은 감히 매리엇을 향해 이런 마음을 품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다이아의 왕이니까.
어떤 잘못을 해도 그러려니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매리엇과 완전히 대조되는 쥬웰의 모습을 본 뒤니까.
매리엇을 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에 진한 반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뒤바뀐 공기에 쥬웰은 속으로 지그시 생각했다.
‘이제 끝이군.’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다르게, 방금 나선 세실은 진짜 세실이 아니다.
마리오네트, ‘인형’이었다.
이제 저 ‘인형’은 이 대연회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미안, 세실. 나 널 이용해 끔찍한 일을 할 거야.’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착각일까?
저 멀리서 괜찮다고, 세실의 원혼이 말하는 듯한 느낌이 전달되었다.
그렇게 연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다들 방금 있었던 일로 편치 않은 얼굴이었다.
특히 사교계의 사람들은 과거의 일로 세실에게 심리적 부채를 가지고 있었던 터라, 방금 있었던 일에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세실을 도와주러 나선 이는 없었다.
안타깝긴 하지만, 다이아의 눈 밖에 나는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따라서 그녀가 사라질 때 따라간 이도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런 비겁한 면이 못 참게 부끄러웠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몰래 위로라도 해주어야겠어.’
그렇게 사람들이 씁쓸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연회장 한편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아아악!”
발코니였다.
깜짝 놀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모두 얼음처럼 굳었다.
세실이었다.
그녀가 커튼으로 가려진 발코니 천장에 목을 매달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자살이었다.
“…….”
하얗게 변한 세실의 몸이 힘없이 밧줄에 매달려 흔들렸다.
마치, 모두를 원망하듯.
그런 그녀의 옆에는 피로 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매리엇.]
자신의 죽음이 매리엇 때문임을 알린 다잉 메시지였다.
대연회는 끔찍하게 막을 내렸다.
* * *
급히 치료하려 하였으나, 이미 세실은 싸늘한 시체가 된 뒤였다.
그 끔찍한 비극에 사람들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꽃 같은 영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도 같은 이의 모욕으로.
매리엇은 세실을 두 번이나 죽인 것이다.
아무리 매리엇이 사교계의 여왕이라도, 이건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려 사람이 죽은 일이니까.
그것도 모두의 앞에서, 끔찍하게.
드디어 사람들이 매리엇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물론 평소라면, 아무리 이런 일이 있어도 감히 대놓고 매리엇을 비난할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새롭게 떠오르는 또 다른 여왕이 있었으니까.
쥬웰이었다.
매리엇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진정 존경할 만한 대귀족이자 숭고한 성녀.
사교계의 사람들은 매리엇을 비난하고 대신 쥬웰에게 몰려들었다.
쥬웰이 매리엇을 제치고 사교계의 여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매리엇의 편에 남은 건 다이아 공작가의 봉신이거나, 다이아 공작가에 빚을 진 가문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곧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다이아 공작가에서 매리엇에게 반기를 든 이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런 자격 없는 이를 가주로 섬길 수 없다!”
다카펠이었다.
가넷가의 후원을 바탕으로 매리엇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그러자 가주로서 매리엇의 아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교계에서 입지를 잃었으니, 가주로서 권위를 지키기가 쉽지 않겠지.’
쥬웰은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자, 그럼 다이아 공작가는 지금껏 왜 사교계를 후원해 온 걸까?
단순히 돈이 많아서?
천만에.
사교계를 장악하는 게, 다이아 공작가에 있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이아 공작가는 상계의 가문이다.
그리고 상계의 모든 커다란 거래는 사교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맥을 쌓는 것도, 거래 제안을 하는 것도, 새로운 돈벌이를 찾는 것도, 모두 사교계의 만남을 통해서 성사된다.
그래서 다이아 공작가는 항상 막대한 돈을 투자해 사교계를 자신의 지배 아래에 두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사교계에서 높게 빛나야 할 가주가 사교계에서 매장되다니?
이건 다이아 공작가 입장에서는 손발이 잘린 거나 마찬가지의 일로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었다.
‘하필, 또 경쟁자인 다카펠이 가넷의 힘을 등에 업었으니. 더욱 곤란하겠지.’
쥬웰은 일부러 이런 상황을 예측해 다카펠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었다.
매리엇을 궁지로 몰기 위해.
‘아아, 즐겁네.’
최근 쥬웰은 황홀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피의 각인을 통해 매리엇에게서 끝없이 끔찍한 감정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할 수는 없지.’
쥬웰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이번에 기획한 매리엇의 굴욕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더욱 참혹한 굴욕이 남아 있었다.
‘기대되네. 어떻게 나오려나.’
이제 매리엇에게 남은 길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해야 했다.
사교계에서 매장된 다이아의 가주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매리엇은 정말로 가주 자리를 뺏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사교계에서 매장된 이가 복귀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특히 지금 사교계는 매리엇이 적대했던 쥬웰의 손에 떨어진 뒤니까.
따라서, 매리엇이 사교계에 복귀할 방법은 단 하나였다.
쥬웰의 자비.
즉, 매리엇은 쥬웰에게 용서를 빌어야 했다.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용서를 빌어주려나?’
상상만으로도 짜릿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오늘은 마침 좋은 꿈도 꾸었지.’
물론 쥬웰은 오늘도 악몽을 꾸었다.
하지만 그걸 ‘좋은 꿈’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었다.
‘매리엇의 꿈을 꾸었으니까.’
쥬웰은 보통 과거에 겪었던 학대를 꿈에서 마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기한 건 게헨나에서 겪었던 600년의 고통보다, 에스텔레 때 주변 이들에게 당했던 학대 꿈을 꾸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게헨나 때보다 에스텔레 때 당했던 고통이 더욱 괴로웠다는 것처럼.
어쨌든 오늘도 그녀는 매리엇에게 학대당하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매리엇은 그녀를 비참하게 짓밟고, 굴욕 주고, 괴롭혔다.
하지만 그럼 끔찍한 꿈을 꾸었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
‘오늘 똑같이 돌려줄 거니까. 그대로.’
마침 기대하던 소리가 들렸다.
“다이아 공작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매리엇이 찾아온 것이다. 쥬웰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쥬웰은 진득하게 미소를 지었다.
“손님들과 티 파티 중이니, 기다리라고 해.”
기다려라.
무려 공작을.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세바트찬은 곧바로 쥬웰의 뜻을 알아들었다.
지금 쥬웰은 일부러 매리엇을 모욕하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침, 쥬웰은 눈 덮인 정원의 온실 속에서 여러 귀부인과 티 파티를 하는 중이었다.
이제 막 시작한 터라 한참이나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어머, 매리엇 전하께서 찾아오시다니.”
“혹시 미리 약속하고 오신 걸까요?”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저도 놀랐어요.”
“어머, 그런 무례를. 그래도 방문을 받아주다니, 역시 남작님께서는 마음이 넓으세요.”
“맞아요.”
귀부인들은 매리엇을 폄훼하며 쥬웰에게 아부를 하였다.
쥬웰은 오만하지 않은 태도로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를 받았다.
이제 그녀는 새로운 사교계의 왕이니, 사람들이 저렇게 비위를 맞추려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저희가 자리를 비켜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전혀요. 여러분이 먼저 온 손님이니, 약속도 없이 늦게 온 사람이 기다리는 게 당연하겠지요.”
쥬웰의 차분한 답에 귀부인들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지금 쥬웰이 매리엇에게 일부러 모욕을 주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특히 이런 식으로 상대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는 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모욕.
지금 쥬웰은 매리엇보다 자신이 윗사람임을 보이고 있었다.
‘과연, 매리엇 전하가 이런 모욕을 참을까?’
매리엇의 성질은 사교계 모두에게 유명하다.
과연, 매리엇이 어떻게 나올지 귀부인들은 괜히 자신이 긴장되었다.
하지만 쥬웰은 그저 차분한 태도로 티 파티를 이끌 뿐이었다.
매리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오늘 내린 눈이 예쁘네요. 티 파티를 하기 좋은 날이에요.”
“네, 남작님.”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오늘 티 파티는 유독 길었다.
무려 다섯 시간이 넘게 이어졌고, 귀부인들은 여전히 차분한 쥬웰의 얼굴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매리엇은 기다림에 지쳐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뛰어와 패악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얌전히 응접실에서 쥬웰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쥬웰은 매리엇이 그렇게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는 듯 그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귀부인들은 그런 쥬웰의 태도에 소름이 돋았다.
쥬웰이 그저 착하고 숭고하기만 한 게 아니란 걸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쥬웰 남작님은…… 오늘 매리엇 공작 전하를 철저히 짓밟으려는 거야.’
그리고 드디어.
쥬웰이 말했다.
“매리엇 공작 전하를 모셔 와.”
세바트찬이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귀부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 그러면 이제 저희는…….”
아마 둘 사이 깊은 대화가 이어질 터.
귀부인들은 예의상 자리를 비키려 했다.
하지만 쥬웰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어머, 아직 티 파티가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가시게요?”
“……!”
“전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귀부인들은 쥬웰의 의도를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쥬웰은 여기 있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매리엇을 짓밟을 생각이다.
왜?
그게 매리엇에게 더욱 치욕적일 테니까.
결국 귀부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일단 새롭게 사교계의 왕이 된 쥬웰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고, 사실 이런 마음도 있었다.
‘매리엇 전하가 굴욕당하는 모습. 나도 보고 싶어.’
‘자업자득이지.’
그간 매리엇이 그들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가?
겉으로 티를 못 냈을 뿐, 대다수가 이를 갈았다.
그런데 매리엇이 수모를 겪는다니, 겉으로는 곤란한 척하여도 직접 눈으로 관람하고 싶었다.
한편, 쥬웰은 혀로 입술의 속살을 핥았다.
‘좋아. 이런 느낌.’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점점, 매리엇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피의 각인을 통해 느껴졌다.
매리엇이 느끼고 있는 분노, 치욕, 괴로움이.
아찔할 정도로 짙은 감정이었다.
원수가 느끼는 그 부정적 감정이 너무 좋아, 쥬웰은 손이 떨릴 것 같았다.
“공작 전하께서 도착했습니다.”
세바트찬이 온실에 들어와 알렸다.
힐끗 고개를 돌리니, 온실 밖으로 하얗게 굳은 매리엇의 얼굴이 보였다.
쥬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온실의 문을 열고, 매리엇 앞에 섰다.
“……쥬웰.”
무려 다섯 시간 동안 기다린 게 분한 걸까?
매리엇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아직 정신을 덜 차렸네.’
쥬웰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사실 내가 네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만요, 전하.”
쥬웰이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턱짓으로 힐끗 온실 안을 가리켰다.
“아직 티 파티가 끝나지 않아서요.”
“……!”
쥬웰은 화사하게 웃었다.
“조금 더 기다려 주실 수 있죠?”
매리엇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분노일까? 아니면, 모욕감 때문일까?
매리엇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너…… 너.”
쥬웰은 툭 한마디 더 했다.
“싫으면 그냥 돌아가셔도 되고요.”
“……!”
“저는 상관없으니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요.”
지금 아쉬운 건 너뿐이라는, 철저히 을인 매리엇의 처지를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온실 안의 귀부인들이 숨을 죽이고 그런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꽈드득.
매리엇은 이를 악물었다.
반면, 쥬웰은 싱긋 웃고 있었다.
‘아아, 사랑스럽네.’
과연 매리엇이 어떤 선택을 할까?
너무 기대되었다. 심장이 떨릴 지경으로.
‘이왕이면 화를 내주었으면 좋겠는데. 더욱 처절히 짓밟게.’
너무 순순히 무릎 꿇으면 싱겁지 않겠는가?
분노로 바들바들 떠는 얼굴을 바닥에 처박아 처절히 짓밟고 싶었다.
그리고 매리엇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이렇게 답했다.
“……그, 그래. 내가…… 기다릴게.”
어쩔 수 없이 쥬웰의 말에 따르긴 하지만, 목소리에 섞인 분기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쥬웰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흐음.”
그러고는 불쑥 말했다.
“혹시, 제 부탁. 기분 나쁘신가요?”
“……!”
매리엇은 당황했다.
쥬웰은 문득 어제 꾼 꿈을 떠올렸다.
꿈속에서 매리엇은 쥬웰을 참혹히 괴롭히고는 이렇게 말했다.
‘왜, 기분 나쁘니?’
쥬웰은 그 꿈의 내용처럼 빤히 되물었다.
“지금 기분…… 나쁘신 것 같은데? 아니에요?”
“…….”
“기분 나쁘면 이야기하세요. 저도 굳이 마음 상해하며 언니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 없으니.”
협박이었다.
용서를 빌러 왔으면, 제대로 꼬리를 말라는.
그 이야기를 알아들은 매리엇의 얼굴이 붉었다, 파래졌다 했다.
“아, 아니야. 기, 기분 나쁘지 않아.”
쥬웰은 픽 비웃었다.
“그렇죠? 언니라면 당연히 이해해 주실 거로 생각했어요.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고 쥬웰은 다시 온실로 들어갔다.
세바트찬은 힐끗 매리엇을 일견하고는 그녀를 밖에 놔둔 채 온실의 문을 닫았다.
그렇게 매리엇은 덩그러니 온실 밖에 서 있게 되었다.
홀로.
매서운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온실 안의 쥬웰이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
“…….”
귀부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쥬웰이 저런 식으로 매리엇을 모욕 줄지는 상상도 못 했다.
‘더구나…… 저런 식의 모욕은 매리엇 전하가 자주 사용하던 방식인데.’
매리엇은 마음에 안 드는 영애들에게 벌 내리듯 밖에 우두커니 서 있게 하는 모욕을 주길 즐겨 했다.
세실이 그렇게 자주 당했고…… 일전, 에스텔레 성녀도 어린 시절에 저런 모욕을 숱하게 당했다.
쥬웰은 느긋하게 말했다.
“룬, 새로운 케이크와 차를 내와.”
“아, 네! 네!”
새로운 디저트와 차.
이 티 파티가 짧게 끝나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다시 담소가 시작되었다.
밖에 서 있는 매리엇을 의식해 귀부인들은 크게 목소리를 높이진 못했다.
대신, 쥬웰이 대부분의 대화를 주도했다.
그렇게 시간이 더 지났고, 해가 떨어졌다.
사위가 어둠에 잠겼고 온도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마침 눈발도 날렸다.
그리고…… 매리엇은 온실 밖에서 꿈쩍도 못 하고 서 있었다.
매리엇의 얼굴은 이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가혹한 추위에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이다.
그런데 눈이 내릴 정도로 추운 날씨였고, 지금도 하늘에서는 하늘하늘 눈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바람이 매서워 체감 온도가 낮았는데 해까지 지니 견딜 수 있는 추위가 아니었다.
‘특히, 항상 곱게 지내 이런 식으로 밖에서 덜덜 떠는 걸 경험해 본 건 오늘이 처음일 테니.’
쥬웰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생각했다.
‘더는 버티기 힘들겠지?’
힐끗 매리엇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 더 밖에 새워두고 싶었지만, 한계로 보였다.
이대로라면 추위에 쓰러질지도 몰라 밖에 세워두는 건 그만하기로 했다.
‘다음 굴욕을 주어야 하니.’
매리엇을 위해 준비한 게 많았다.
“공작 전하를 안으로 모셔 와.”
“네, 아가씨.”
매리엇이 추위에 딱딱 턱을 부닥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안색은 백지장 같았고, 곱게 단장했던 머리는 흩날리는 눈발과 매서운 강풍에 휩쓸려 절반쯤 산발이었다.
‘아아, 사랑스러운 모습이네.’
쥬웰은 가증스럽게 걱정하듯 말했다.
“어머, 많이 추우셨나 봐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해요.”
“……아니야.”
“어쨌든 오래 기다리셨죠?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
짓밟힌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추위에 떠느라 모든 진력을 빼앗긴 걸까?
매리엇은 그저 얼굴만 굳히고 있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드디어 쥬웰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순간이 왔다.
매리엇은 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물었다.
“쥬웰, 너에게 긴밀히 할 말이 있어. 주변을 물려…….”
“싫어요.”
“……!”
쥬웰은 빙긋 웃었다.
“그냥 지금 여기서 말씀하세요.”
파랗게 질린 매리엇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지금 매리엇은 쥬웰에게 용서를 빌고 고개를 숙이러 왔다.
끔찍이 굴욕스러운 일.
그런데 쥬웰은 그 굴욕을 모두의 앞에서 시행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 긴밀히 해야 할 이야기여서…….”
매리엇이 떠듬떠듬 말하였다.
평소 매리엇을 생각하면 눈을 의심할 만큼 애처로운 음성이었지만, 쥬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글쎄요. 언니와 제가 그렇게 긴밀한 이야기를 나눌 사이인지 모르겠네요. 특히 언니는 이번 사교계 시즌 때 절 모욕 주려 하셨잖아요.”
먼저 잘못한 건 당신이다.
그러니 용서를 구할 거면, 제대로 고개를 숙여라.
그런 의미의 말이었다.
“…….”
온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구경꾼이 된 귀부인들은 긴장했고, 매리엇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끝을 떨었다.
이렇게 많은 이 앞에서 고개를 숙이라니.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하실 말씀 없는 거죠? 그러면, 일어나 볼게요.”
“……!”
쥬웰은 냉정하게 말했다.
결국 매리엇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해. 내, 내가 네게 잘못된 행동을 했어. 부, 부디…… 제발 용서해 주길.”
그 사과에 지켜보던 귀부인들은 숨을 들이켰다.
매리엇이 저런 이야기를 하다니.
그야말로 굴욕적인.
처절하기까지 한 사과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쥬웰은 만족하지 않았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데요?”
“……뭐?”
“흐음. 제가 언니한테 많이 서운해서일까요? 그런 사과만으로는 기분이 풀리지 않아요.”
쥬웰은 의자에 앉은 채로 지그시 다리를 꼬았다.
그러며 매리엇이 에스텔레에게 자주 그랬던 것처럼 오만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더 진심 어린 사과를 들어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아요.”
매리엇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진심 어린 사과.
그게 무얼 말하는 건지는 매리엇이 가장 잘 알았다.
‘꿇어.’
매리엇이 다른 이를 모욕 줄 때 숱하게 했던 거니까.
즉, 지금 쥬웰은 매리엇에게 자신 앞에 무릎을 꿇으라 말하는 거였다.
“물론, 싫으면 강요하지 않고요. 세바트찬, 전하께서 돌아가시게 문을 열어드려.”
화해의 결렬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쥬웰은 매리엇과 화해하지 않아도 전혀 아쉬울 게 없었다.
지금 아쉬운 건 오로지 매리엇이었다.
쥬웰과 화해하지 못해 사교계에 복귀하지 못하면, 매리엇은 최악의 궁지에 몰릴 테니까.
“……네, 아가씨. 공작 전하, 이쪽으로.”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덜덜.
매리엇이 전신을 경련하듯 떨더니, 천천히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리고 쥬웰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저…… 정말 미안해. 내 잘못을 용서해 줘.”
주륵.
그리고 매리엇의 눈동자에서 통한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분노와 굴욕, 비참함이 처절히 뒤섞인 눈물이었다.
‘아아.’
쥬웰은 그 눈물을 본 순간, 참을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아찔한 쾌락이 그녀의 등줄기를 가로질렀다.
그녀는 이런 걸 바랐다.
원수들의 고통, 눈물.
‘너무…… 너무 사랑스러워.’
쥬웰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매리엇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언니, 왜 우세요.”
손을 들어 눈물을 닦고는 속삭였다.
“장난이었는데, 그냥.”
“……!”
매리엇은 숨을 멈추었다.
끔찍한 굴욕감에 지배당해서일까?
이제 매리엇은 분노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영혼을 짓밟는 쥬웰의 모욕에 가련하게 떨 뿐이었다.
“어쨌든 언니의 말은 알았어요. 사과를 받아들이겠어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조건?”
매리엇은 흠칫하였다.
무언가 잔혹한 조건일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그 예감은 맞았다.
“제 시녀가 되어주세요.”
“……!”
그 끔찍한 말에 매리엇의 눈이 커졌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다이아가의 가주를 자신의 시녀로 삼겠다니?
“너…… 너…….”
매리엇의 음성이 덜덜 떨렸다.
이미 온갖 모욕을 받은 뒤지만, 지금 이 발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쥬웰은 진심이었다.
“왜 놀라요? 다이아가 가넷을 섬기는 게 이상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하급 귀족 여성이 상급 귀족 여성을 섬기는 것을 뜻한다.
참고로, 공작 가문의 여성도 시녀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상대가 황족이나, 왕족의 경우였다.
라인하르트 제국 초창기만 해도 여섯 공작가의 여성이 황족 여성의 시녀가 되고는 했다. 황권이 약해진 후에는 일절 없어졌지만.
어쨌든, 지금 쥬웰은 그렇게 윗사람을 섬기듯 자신을 섬기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만, 이건 제가 언니를 개인적으로 생각해서 제안한 거예요.”
“날…… 개인적으로 생각해서라고?”
“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할아버지께서 언니에게 진노하셨어요.”
“……!”
매리엇의 얼굴이 굳었다.
“언니는 감히 가넷에게 반기를 들었으니까요. 그런 할아버지의 진노를 가라앉힐 방법은 하나예요. 바로 언니가 가넷에 무릎을 꿇는 것.”
“…….”
“그러니 언니가 제 시녀가 되면, 할아버지께서도 진노를 푸실 거예요.”
매리엇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아마 사교계 복귀를 바라는 것 같은데, 언니가 사교계에 복귀하는 걸 사람들이 과연 바랄까요? 대연회 때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매리엇은 이것 역시 어떤 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저도 언니를 돕기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 해요. 그간의 잘못을 속죄하고 성녀인 절 시녀로서 섬기겠다고 하면, 사교계에 다시 돌아올 명분으로 충분할 거예요.”
“…….”
“그러니 선택하세요. 제 시녀가 될지, 아니면 이대로 사교계를 영원히 등질지.”
사교계를 등진다.
이건 매리엇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두근두근.
쥬웰의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피의 각인’을 통해 매리엇이 지금 느끼는 끔찍한 감정들이 폭풍처럼 흘러들었다.
아찔할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다.
“……나…… 나는.”
매리엇의 음성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결국, 비참한 얼굴로 말했다.
“……네 시녀가 될게. 그러니…… 날 용서해 줘.”
“……!”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숨을 멈추었다.
다이아의 가주가 가넷의 시녀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이 사건은 후대에 ‘다이아의 굴욕’이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쥬웰이 준비한 굴욕은 이것도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하나 더 마지막으로 언니에게 요구할 게 있어요.”
“더…… 더?”
매리엇의 눈동자가 떨렸다.
또 어떤 굴욕일지 두려웠다.
쥬웰은 이전과 다르게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두 분, 나오세요.”
그리고 수풀에 가려진 온실 안쪽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장내의 인물들이 놀란 탄성을 뱉었다.
린셀 남작, 남작 부인.
세실의 부모였다.
그들이 눈물에 젖은 눈으로 매리엇을 바라보았다.
‘설마……?’
장내의 인물들이 쥬웰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
과연, 쥬웰은 매리엇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두 분 앞에서 세실 영애에게 했던 일을 사과하세요. 진심을 다해서.”
세실의 원혼을 위로하는 것.
그게 이번 일의 마지막 대미였다.
* * *
세실에게 사과까지 마친 매리엇은 넋을 잃고 다이아 공작가로 돌아갔다.
극심한 굴욕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아마, 충격에서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때쯤 매리엇을 위한 또 다른 만찬이 준비되어 있겠지.’
그녀는 원수들을 위해 여러 계획을 준비해 두었다.
이번 사교계 일은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직 모자라. 한참이나.’
어서.
저 얼굴이 완전한 절망과 좌절로 물드는 걸 보고 싶었다.
엉망인 몰골로 눈물이 범벅이 되어 나락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싶었다.
매리엇만 아니라, 다른 원수 모두.
그때, 떨리는 음성이 그녀의 상념을 깨웠다.
“가, 감사합니다, 남작님.”
린셀 남작 부부였다.
“남작님 덕분에 모든 한을 풀 수 있었어요.”
그들은 뚝뚝 눈물을 흘리며 쥬웰에게 고개를 숙였다.
“남작님은…… 저희의 구원자예요.”
쥬웰은 실소했다.
그녀는 그런 게 아니었다.
이번 일도 그저 매리엇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던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그녀를 자신들을 구원한 이로 여기는 듯했다.
만약 쥬웰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어떤 한도 풀지 못했을 테니까.
심지어 쥬웰의 눈에 이런 광경이 보였다.
[감사해요, 성녀님.]
흐릿한 영혼의 모습.
세실의 원혼이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쥬웰에게 감사 인사를 하였다.
승천하려는 것이다.
[이제, 저 떠날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너무 감사해요. 제 유일한 은인.]
쥬웰은 고개를 저어 세실의 원혼을 배웅했다.
그러고는 린셀 남작 부부에게 말했다.
“이제 로든 왕국으로 갈 건가요?”
“네, 이주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 부부는 아픈 기억이 남은 라인하르트 제국을 떠나기로 하였다.
엔리크 자작이 그들을 도와 자신과 연이 있는 로든 왕국에 이주할 수 있도록 힘을 써주었다.
“위대한 빛의 축복이 성녀님께 함께하길.”
그렇게 린셀 남작 부부가 떠났다.
하지만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녀의 복수는 여전히 진행형이었으니까.
마침, 때에 맞춰 수도에 이런 소식이 전해졌다.
“크, 큰일입니다!”
다급한 음성이었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
“적기사 필바하가 이끄는 혁명군이 투란스 요새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투란스 요새는 남부의 요충지였다.
그곳을 뺏기면, 제국 남부 지대의 3할을 잃게 된다.
전란이 일어난 것이다.
갑작스레 드리운 전운에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
단 한 명.
그 소식에 미소를 짓고 있는 이가 있었다.
위선의 성녀, 쥬웰이었다.
‘드디어.’
이 반란은 그녀가 준비한 만찬이었다.
그리고…… 이번 만찬의 사냥감은 라디트였다.
‘널 사랑해. 내 목숨보다.’
라디트의 끔찍한 음성을 떠올리며, 쥬웰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이번 만찬을 통해 라디트를 파멸시킬 계획이었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라디트는 이번 반란을 통해 영광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거다.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