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 구원자 (1)
라디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에스텔레에게 마음을 준 건 맞지만, 한때의 흔들림일 뿐이야. 내가 어릴 적부터 에스텔레를 경멸했던 것 잘 알잖아. 더구나 에스텔레의 예민함 때문에 난 그녀와 육체적 사랑을 나눈 적이 없어. 몸에 흉측한 흉터도 가득했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너와는 비교도 되지 않아. 난 이제 너밖에 없어, 매리엇.”
그 말에 매리엇은 입을 다물었다.
매리엇의 기분이 조금은 진정된 것을 느끼고 라디트는 입맞춤을 이어갔다.
입술에서, 목으로.
매리엇이 다시 열락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라디트의 머리를 품으로 끌어안으며 이번엔 뜻밖의 요구를 하였다.
“그러면 쥬웰, 그년을 욕해줘.”
“……!”
“어서. 그년을 저주해 줘.”
라디트는 잠시 주저했다.
쥬웰과 그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친한 사이긴 했지만, 그건 그저 대귀족 사이의 의례적인 친분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녀를 욕하는 거야, 과거 연인이었던 에스텔레 때와 다르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어줘도 되는 요구다.
하지만 왜일까?
라디트는 쉽게 쥬웰을 욕하는 말이 꺼내지지 않았다.
쥬웰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가며 멈칫하게 되었다.
“안 해?”
매리엇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아니야.”
라디트는 매리엇의 귓가에 속삭였다.
“쥬웰, 그년은 네 앞에 무릎 꿇은 채 피눈물 흘리게 될 거야.”
하지만 매리엇은 만족하지 않았다.
표독하게 요구했다.
“더.”
라디트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는 말했다.
“쥬웰, 그 건방진 년은 본인이 했던 말 그대로, 네 발 앞에 무릎 꿇어 처절히 눈물 흘리며 네게 용서를 빌게 될 거야.”
그제야 매리엇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였고, 방 안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 * *
그렇게 거친 열락의 순간이 지나갔고, 매리엇은 라디트의 품에 기댄 채 숨을 내쉬었다.
“마실 것을 내오라 할까?”
“아니, 그냥 이대로 있어 줘.”
평소와 다른 음성이었다.
라디트는 매리엇이 평소와 다르게 열락의 여운을 즐기는 게 아닌,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쥬웰 생각하는 거야?”
“그래,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어.”
매리엇이 이를 갈았다.
“그년을 내 앞에 무릎 꿇려야겠어.”
“…….”
라디트는 잠시 침묵했다.
아까 쥬웰을 욕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매리엇이 쥬웰과 적대하는 걸 찬성하는 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쥬웰은 가넷이야. 알지?”
가넷이니까.
가넷, 그 단어는 오만과 공포를 상징한다.
“그래, 알지. 그러니 내가 그때 그 모욕을 참았던 거고.”
매리엇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지만 가넷이라고 우리 위에 군림하는 건 아니야.”
가넷은 여섯 공작가 중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공작가들 위에서 군림하며 지배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특히, 너와 내가 결혼해 우리 다이아가 사파이어를 품게 되면 아무리 가넷이라도 다이아를 함부로 대할 수 없어.”
사파이어를 품는다.
그 말에 라디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누누이 말했듯 여섯 공작가는 동등하지 않다.
힘의 우열이 있다.
특히 가넷은 다이아에 강하다. 힘의 속성 덕이다.
권력은 금력에 절대 우위를 지니는 법이니.
그러면 다이아는?
사파이어에 특별한 우위를 지니고 있다.
사파이어의 힘은 ‘무력’.
그리고 무력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대대로 사파이어는 다이아에 저자세를 취해왔다.
그래서 혹자는 매리엇과 라디트의 결혼을 다이아가 사파이어를 집어삼키는 거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매리엇. 아무리 우리 사파이어의 무력이라도 가넷의 권력을 넘지는 못해.”
사파이어의 무력의 근원은 막대한 숫자의 기사들이었다.
직계, 방계 기사단의 이천여 기사.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얽힌 육천이 넘는 기사들.
총 합쳐 팔천이 넘는 어마어마한 기사 전력이 사파이어가 가진 힘이었다.
하지만 가넷은?
기사의 숫자는 사파이어에 비해 훨씬 모자라다. 약 1,500명 정도가 가넷 휘하 기사의 숫자였다.
하지만 가넷은 권력을 통해 일반 제국군을 움직일 ‘병권’을 지니고 있다.
원래 병권은 황실의 소유였지만, 토른 공작이 황실을 무너뜨리며 가넷의 것이 된 것이다.
따라서 상비군만 10만.
유사시 추가로 모집할 수십만 제국군이 가넷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매리엇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알아. 하지만 사파이어는 가넷을 찌를 수 있는 비수야. 오만한 가넷이 유일하게 경계하는 가문이지. 그러니 우리 다이아가 너희 사파이어를 품으면 아무리 가넷이라도 지금처럼 다이아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
“그리고 우리 다이아는 가넷이 지니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어.”
매리엇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사교계.”
“……!”
“우리 다이아는 사교계의 지배자야. 마침, 쥬웰의 데뷔탕트가 예정되어 있으니, 그년을 사교계에서 철저히 무릎 꿇리겠어.”
무릎 꿇게 한다.
그건 그저 관용적 표현이 아니었다.
매리엇은 정말로 쥬웰을 자신의 발 앞에 무릎 꿇려 용서를 빌게 할 생각이었다.
매리엇은 이를 갈았다.
“반드시 그날의 일을 후회하게 만들겠어. 내 사교계의 영향력이면 충분히 가능해.”
매리엇이 이렇게 나올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사교계는 단순히 가문의 힘으로만 돌아가지 않으니까.
훨씬 복잡하고 섬세한 요소들이 작용한다.
그리고 매리엇은 그런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가넷가도 뭐라 하지 못할 교묘한 방법으로 사교계에서 철저히 매장해 주겠어. 그래서 날 찾아와 무릎 꿇고 빌지 않으면 사교계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겠어.’
사교계에서의 매장은 귀족 여성에게 사회적 사형을 뜻한다.
그러니 쥬웰은 매리엇을 찾아와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매리엇은 상상했다.
쥬웰이 자신 앞에 무릎 꿇고 그날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상상만 해도 흥분되었다.
과거, 에스텔레가 자신 앞에 무릎 꿇을 때처럼 짜릿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매리엇은 에스텔레가 비루하게 떨며 자신 앞에 무릎 꿇는 걸 즐겼다.
이번엔 쥬웰이 될 것이다.
매리엇은 기분이 좋아져 라디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방 안이 다시 열락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둘이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뜨거운 열기로 차오른 창밖.
그곳에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는 것을.
나비는 더듬이를 흔들었다.
마치 둘을 관찰하기라도 하듯.
그리고 훌쩍 사라졌다.
* * *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가넷가의 정원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손에 나비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놀랍게도 다이아 공작가에 나타났던 그 나비였다.
나비의 정체는 쥬웰이 흑마법으로 소환한 게헨나의 나비였다.
쥬웰이 매리엇의 움직임을 염탐하려고 보냈다.
‘다이아 공작가까지 정찰 나비를 보내는 건 내게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보내보길 잘했군.’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날 이후 하도 얌전해서 혹시나 꼬리를 말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내 예상대로 움직여 주고 있어. 다행이야. 사랑스럽고 고마운 매리엇.”
그날, 디저트를 엎은 날.
쥬웰은 매리엇에게 일부러 극심한 모욕을 주었다.
분노를 못 이긴 매리엇이 그녀의 데뷔탕트에 맞추어 발칙한 행동을 해주길 바라서.
그렇다.
지금 매리엇의 행동은 모두 쥬웰이 의도한 바대로였다.
왜 그런 걸 의도했냐고?
‘최대한 철저히 짓밟아야 하니까.’
쥬웰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사교계에서 아무런 명분도 없이 상대를 짓밟을 수는 없으니. 철저히 짓밟으려면 먼저 매리엇이 악역이 되어주는 게 필수지. 기대되네.’
이번 데뷔탕트는 아주아주 화려하고 끔찍한 데뷔탕트가 될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에 쭈뼛 소름이 돋을 정도로.
하지만 곧 쥬웰의 얼굴이 굳어졌다.
둘의 역겨운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어릴 적부터 에스텔레를 경멸했던 것 잘 알잖아. 더구나 에스텔레의 예민함 때문에 난 그녀와 육체적 사랑을 나눈 적이 없어. 몸에 흉측한 흉터도 가득했고.’
예민함.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라디트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녀의 정신적인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매번 잠들 때마다 그런 끔찍한 악몽을 꿀 정도인데, 그런 일이 가능했을 리가.
기분 상해하는 라디트에게 미안해 어떻게든 노력해 보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매리엇, 플랑드나, 웰링턴 공작에게 받은 학대, 그리고 성녀로서 겪었던 수많은 상처들.
라디트와 관계를 가지려고 할 때마다 겹겹이 흉터로 남은, 아니, 채 아물지도 않은 과거의 상처들이 떠올라 얼음처럼 몸이 굳었고, 라디트가 원하는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라디트는 그녀의 어린 시절 학대의 가해자이기도 했으니까.
그는 그녀를 직접 괴롭히진 않았다.
그저 경멸했다.
가끔 매리엇, 플랑드나를 말려주기도 했지만 그건 그저 몸에 밴 기사도의 습관 때문일 뿐, 그는 그녀를 멸시하고 혐오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경멸의 시선이 때로는 어떤 육체적 괴롭힘보다 더욱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다.
‘됐어. 이제 내 차례이니까.’
쥬웰은 차갑게 생각했다.
이번 데뷔탕트의 목표 사냥감은 매리엇만이 아니었다.
라디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디트는 이 데뷔탕트를 시작으로 하나씩, 하나씩 추락하게 될 것이다.
끔찍하고, 처참하게.
최악의 밑바닥에서 추한 발버둥을 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라디트 때문에 이런 감정 느낄 필요 없어. 역겨워할 필요도 없고.’
라디트를 떠올린 후 계속 속이 울렁거려 쥬웰은 흔들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신을 만지던 라디트의 손길이 떠올랐다.
점심을 많이 먹은 것도 아니건만, 다 게워낼 것만 같은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고작 라디트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아 억지로 토기를 억누르고 있을 때였다.
뜻밖의 음성이 들렸다.
“……괜찮습니까?”
“……!”
쥬웰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은발의 아름다운 남자. 둥근 안경 속에 매혹을 숨기고 있는 감람빛 녹색 눈동자. 유스넨이었다.
‘아.’
왜일까? 갑자기 쥬웰은 유스넨을 보자 마음이 잔잔히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전하께서 어떻게?”
“수도에 도착하면 온다고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다.
쥬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넨이 북부 대공령을 간 이후 둘은 처음 재회하는 거였다.
‘……보고 싶었지.’
쥬웰은 그간 유스넨을 향해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유스넨이 없는 동안 그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재회한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정확히는 그것보다 조금 더 깊었다. 더 따뜻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설마 수도에 오자마자 달려온 것입니까? 밀린 일이 많지 않습니까?”
쥬웰은 의아하게 물었다.
수도에 도착해도 며칠은 있다가 올 줄은 알았는데?
“……다행히 밀린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음?”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법관으로서 미룰 수 없는 일들이 많을 텐데?’
그 시선에 유스넨은 어색하게 답했다.
“사실, 보고 싶어서 바로 왔습니다.”
“……네?”
유스넨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둥근 안경 속, 매혹적인 감람빛 보석안이 그녀를 담았다.
“보고 싶었다고요, 당신을.”
“……!”
그 말을 듣는 순간.
쥬웰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가슴이 두근 뛰었다.
쥬웰은 당혹을 숨기기 위해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군요.”
“아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혹스러운 건 유스넨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라면 쌓인 일 먼저 해야 했다.
그런데 메디안 백작이 비명을 지르는 걸 무시하고 바로 쥬웰에게 달려온 것이다.
그녀가 보고 싶어서.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잘 지내고 있었는지. 안 좋은 일은 없었는지. 초조함이 들어 미칠 것 같아 참지 못하고 달려온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녀를 확인하고 싶었다.
유스넨은 주저하더니 말했다.
“쥬웰.”
“……네.”
“한 가지만 실례되는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유스넨의 아련한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았다.
“……무슨 부탁인데요?”
“잠시만…… 손을 잡아봐도 되겠습니까?”
왜?
그 부탁을 들은 쥬웰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하지만 유스넨의 아릿한 눈동자를 보고 쥬웰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 정도는 들어줘도 될 것 같았다.
‘이전에도 손은 잡은 적 있으니.’
“여기요.”
유스넨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을 마주 잡았다.
한없이 조심스럽게.
마치 깨지기 직전의 유리를 만지듯.
그리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녀의 손과 닿으니, 그제야 마음이 안도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이렇게 자신과 닿아 있다는 사실에 그녀와 떨어지고 느꼈던 미칠 듯한 초조함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한편, 쥬웰도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포근해.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유스넨의 체온은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손이 닿으면 얼음이 닿은 듯 서늘했다.
하지만 동시에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성력을 받을 때처럼. 가슴이 편안해졌다.
심지어 그녀는 아까 라디트를 떠올리고 느꼈던 역겨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래서였다.
“죄송합니다. 무례를 범한 것, 용서해 주십시오.”
유스넨이 잡은 손을 빠르게 뗐을 때 아쉬움이 든 것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한 것은.
“더 잡고 있어도 돼요.”
“……네?”
유스넨의 눈이 커졌다.
쥬웰도 자신이 뱉은 말에 당황했다.
‘하지만 놓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알 수 없게 그와 닿고 있으면 치유받는 느낌이 들었다. 아픈 상처가 조금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가 천사의 피를 각성해서?
글쎄,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다른 천사가 그녀를 잡으면 오히려 거부감만 들 테니.
어쨌든 이유는 모르지만, 그 따뜻함이 아쉬워 쥬웰은 뻔뻔하게 이야기했다.
“우리 약혼 관계잖아요. 손 정도는 잡으셔도 돼요.”
비록 전무후무한 양다리 약혼이고, 결혼 생각은 전혀 없는 허울뿐인 약혼이지만 현재 약혼 관계인 건 맞다.
나중에 함정에 빠뜨려 봉인하려면 어떻게든 더 가까워지는 게 좋으니, 이렇게 손을 잡는 것도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아니, 다 필요 없고.
그냥 이 순간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러니, 손잡아주세요.”
“…….”
유스넨은 잠시 침묵하였다.
“……싫으면 말고요.”
그가 예상외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쥬웰은 민망한 마음에 손을 뒤로 뺐는데.
유스넨이 손을 뻗었다.
그의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을 덮었다.
“……!”
“싫기는요.”
유스넨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깊은 눈이 그녀를 담았다.
“그러면 앞으로는 놓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묘한 음성의 말이었다.
단순히 손을 놓지 않겠다는 의미치고는 더욱 깊고, 묵직했다.
쥬웰은 그 음성에 취한 것처럼 가슴이 울렸다.
“……네, 놓지 않으셔도 돼요.”
“약속한 겁니다?”
“……?”
쥬웰이 대답하기 전, 유스넨은 싱긋 웃었다.
“허락한 것으로 알고, 이제 절대로 놓지 않겠습니다.”
쥬웰은 그런 유스넨을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유스넨은 부드럽게 웃은 상태로 말했다.
“지금 바쁘십니까?”
“왜요?”
유스넨은 시계를 보았다.
“식사를 청해도 될까 해서 말입니다.”
“식사요?”
“네, 우리 그래도 약혼 관계인데, 너무 내외가 없지 않았습니까?”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유스넨은 싱긋 웃었다.
“맞습니다. 데이트 신청입니다.”
유스넨은 흔들의자에 앉은 쥬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가로 이끌었다.
데이트를 신청할 때, 약혼자로서 예를 올리려는 것이다.
손등에 닿기 전, 그의 입술이 잠시 멈칫했다. 감히 닿아도 될지 망설이듯.
그사이 그의 숨결이 희미하게 손등을 스쳤고, 쥬웰의 가슴도 희미하게 울렸다.
그리고 유스넨의 붉은 입술이 쥬웰의 손등에 포개졌다.
정중한 입맞춤과 함께 유스넨이 물었다.
“오늘 하루, 약혼자로서 당신을 에스코트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 * *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차례 몸살을 앓고 난 뒤라 상태도 좋았고, 오늘은 드물게 날이 따뜻했다.
잠시 나들이를 하고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급히 해야 할 일도 없으니.’
쥬웰은 생각했다.
‘데뷔탕트 건은…… 매리엇이 먼저 움직여 주어야 나도 움직일 수 있으니. 어서 빨리 움직여 주었으면. 이왕이면 사교계가 떠들썩할 정도로 요란하게.’
이번 데뷔탕트는 매리엇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다.
매리엇이 충분히 발칙한 짓을 해주어야 명분을 얻어 제대로 짓밟을 수 있었다.
‘한 번 더 도발해야 할까?’
쥬웰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마차 안 건너편 자리에서 유스넨이 물었다.
“데뷔탕트 생각을 했어요.”
“데뷔탕트요? 그러고 보니, 곧이군요.”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뜻밖의 말을 하였다.
“제가 당신의 카발리에를 해도 되겠습니까?”
쥬웰은 의외란 얼굴을 했다.
카발리에.
데뷔탕트 때 에스코트를 해주는 파트너를 뜻한다.
‘아, 의외는 아니구나. 흰 강아지는 내 약혼자이니까.’
약혼자니 카발리에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난 약혼자가 한 명이 아닌데. 어쩌지?’
또 한 명의 약혼자, 오펜하임을 떠올린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거침없는 오펜하임의 성격상 그도 당연히 그녀의 카발리에를 자청할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아직도 파혼 소송을 접수하지 않은 상태라, 오펜하임은 엄연히 그녀의 법적인 약혼자 상태였다.
‘아, 미리미리 파혼 소송했어야 했는데. 귀찮아서 미루다 보니 데뷔탕트랑 겹쳐 뭔가 시기가 애매해져 버렸어.’
그녀의 데뷔탕트는 사교계 모든 이가 주목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오펜하임에게 파혼 소송을 한다?
모두에게 그 파혼 소송이 알려질 거고, 오펜하임은 사교계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약혼녀에게 버림받은 황태자로 말이다.
‘파혼 소송을 당하는 건 끔찍한 불명예로 여겨지니. 그러니 진즉 합의해 달라니까. 쯧.’
그렇지 않아도 오펜하임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그의 명예는 더더욱 시궁창에 박힐 것이다.
‘오펜하임이 밉상이면 그의 명예 따위 신경 안 써도 되겠지만, 그건 또 아니니.’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오펜하임을 아낀다. 그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지난번 친 점괘를 봤을 때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자신 때문에 그가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파혼은 데뷔탕트 끝나고 사람들의 시선이 잠잠해지면 그때 조용하게 신청할 수밖에. 최대한 오펜하임의 명예가 상하지 않게.’
쥬웰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약혼자가 두 명인 상태로 사교계 데뷔를 치르게 되었지만, 뭐 그런 것쯤이야.
그녀가 평범한 집안의 영애였다면 이런 양다리 약혼을 비난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만’의 가넷이었다. 그것도 손꼽는 유력한 실권자.
그런 그녀가 두 명의 약혼자를 두고 있다고 해서 감히 누가 뭐라고 비난하겠는가?
솔직히 그녀 정도 되는 급의 여인이면 남자를 몇 명을 거느려도 흠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전 여성 공작들의 경우, 정실 남편 말고 흔하게 정부를 두고는 했으니까.
특히 오만의 가넷답게, 가넷의 전대 여성 공작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남성 편력을 자랑했다. 열 명이 넘는 정부를 갈아치운 이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황태자를 나중에 정부 삼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쨌든 약혼자가 두 명이니 카발리에를 누구로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약혼자가 두 명이라고 연회 파트너마저 두 명이 되는 건 아니다.
카발리에를 정해야 했다.
“혹시, 카발리에로 저 말고 다른 이를 생각하시고 있습니까?”
유스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날카로워 보이는 듯도 했다.
‘……혹시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정말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는 눈빛이었다.
‘음, 흰 강아지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순간, 쥬웰은 이전 기억이 떠올랐다.
‘누나, 앞으로는 라디트, 그 새ㄲ…… 아니, 그 형이랑은 안 놀면 안 돼요?’
유스넨은 어린 시절에도 종종 질투심을 내비치고는 했었다. 물론 젖살 통통한 흰 강아지가 하는 질투는 귀엽기만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유스넨과 약혼 관계가 되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니 쥬웰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유스넨과 결혼하면 어떨까?’
쥬웰은 유스넨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
애초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쥬웰은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와 결혼하게 되면 어떨지.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처럼 추악한 악마가 아니어서, 평범하게 그와 결혼을 하면 어떨지.
행복할까?
……그럴지도.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그와의 결혼 생활을 상상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좋을 것도 같았다.
‘……아니야. 그냥 생각하지 말자.’
더 상상하면 왠지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결혼은 무슨. 어쩌면 내 손으로 죽여야 할 수도 있는데.’
쥬웰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녀는 유스넨을 가급적 죽이지 않고 봉인할 생각이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른다. 뜻하지 않게 싸워야 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유스넨을 죽여야 한다.
‘물론 이제 내 정체를 안다고 유스넨이 무턱대고 날 처단하려 들 것 같지는 않지만.’
쥬웰은 유스넨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음을 명확히 자각했다.
유스넨은 그녀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느낌이지만, 확실했다.
어쩌면 호감 이상의 감정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전에 걱정했던 것처럼 정체를 들켰다고 무턱대고 그녀를 처단하려 달려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내 모든 정체를 털어놓으면…… 내 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안 돼.’
만약 유스넨에게 그녀의 사정을 털어놓으면.
그래서 그녀가 에스텔레란 걸 고백하면 유스넨은 그녀의 편에 설 수도 있었다.
지금껏 봐온바, 유스넨은 에스텔레에게 깊은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기꺼이 에덴을 배신하고 그녀의 편에 설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그녀는 ‘어둠’이다.
‘빛’인 유스넨이 그녀의 편에 선다는 건 파멸을 뜻한다.
‘유스넨은 타천하게 될 거야. 게헨나에 떨어져 억겁의 고통을 받게 될 거야.’
타천(墮天).
천사가 타락해 악마가 되는 걸 뜻한다.
어둠에 마음을 뺏긴 페리도트 대공가의 인물에게 내려지는 가장 최악의 형벌이었다.
‘그건 절대 안 돼.’
쥬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타천한 천사의 말로는 끔찍한 파멸이었다.
악마가 된 타천사는 이후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녀는 절대로 유스넨이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도리어 행복하길 바랐다.
마리, 리델하트, 오펜하임의 행복을 바라듯.
아니, 그들 누구보다 유스넨의 행복을 가장 바랐다.
그러니 절대로 자신이 에스텔레인 걸 유스넨에게 말할 수 없다.
그녀가 에스텔레임을 아는 순간, 흰 강아지는 기꺼이 파멸을 감수할 테니까. 게헨나에 떨어지는 걸 아랑곳하지도 않고 말이다.
‘최선은 끝까지 내 정체를 들키지 않고, 유스넨을 봉인하는 데 성공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소멸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스넨이 날 그저 추악한 악마로 기억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야.’
유스넨이 행복해지려면.
에스텔레인 걸 들키지 않고, 그를 봉인해야 했다.
그래서 유스넨이 그녀를 그저 자신을 능멸한 추악한 악마로만 알게 하고 세상을 떠야 했다.
유스넨이 그녀의 소멸 이후 어떤 후회와 미련, 슬픔도 가지지 않게.
그녀를 향해서 그저 분노와 증오만 품게.
그래서 그녀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녀와 상관없이 영광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야 했다.
‘어차피 내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니.’
그녀의 남은 시간은 길어야 3년이다.
아니, 실제로는 그것보다 훨씬 짧을 것이다. 쥬웰은 자신의 영혼이 붕괴하는 속도가 가속되고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남은 시간이 턱없이 적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 시간 동안만 유스넨을 속이면 됐다.
왠지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왔지만 티 내지 않도록 쥬웰은 미소를 지었다.
유스넨이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좋지 않군요.”
“……아니에요.”
“혹시 또 열이 오르는 건? 실례하겠습니다.”
유스넨이 조심스레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 열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상쾌한 서늘함이 확 번져 쥬웰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고맙다뇨. 저는 영애의 약혼자이자 주치의 아닙니까?”
쥬웰은 그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영애?”
“그렇죠. 제 약혼자이자 주치의지요.”
쥬웰은 중얼거리듯 반복했다.
과거 에스텔레 때 행복을 꿈꾸던 시절, 그녀는 의사와 결혼하길 바랐다.
함께 진료 여행도 아니고, 남편이 주치의가 되어 자신을 돌봐주는 낭만을 꿈꿨다.
그런데 흰 강아지가 하필 저렇게 이야기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기분이 좋았다.
이전 꿈꿔왔던 낭만이 떠올라서.
‘흰 강아지와 이런 관계가 오래가지는 못하겠지만.’
둘의 관계는 얇은 얼음 위에 서 있듯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런 마음으로 쥬웰은 탁 유스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 안 잡아주세요? 안 놓는다면서요?”
쥬웰의 말에 유스넨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잡아도 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유스넨은 아예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손을 잡았다.
옆에 그가 앉으니. 쥬웰은 괜히 그가 더 예민하게 의식이 되었다.
“……옆에 앉으란 이야기는 아니었는데요?”
“이쪽이 더 당신의 손을 잡고 있기 좋아서요. 혹시 불편하면 다시 앞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뭘 돌아가요. 마차 달리는데 움직이면 다쳐요.”
서로가 의식되어서일까?
옆에 앉은 둘은 잠시 입을 다물었고, 침묵이 흘렀다.
말이 없어 옆에 앉은 상대가 더욱 신경이 쓰이지만, 그렇다고 불편하지는 않은, 오히려 따뜻한 편안함이 흐르는 침묵이었다.
‘아, 잠 오네.’
쥬웰은 문득 그리 생각하였다.
사실, 최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악몽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편안히 유스넨 곁에 앉아 있으니 노곤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어 잠이 왔다.
‘왠지 지금은 악몽도 안 꿀 것 같고.’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되었다.
유스넨과 함께 있으면 악몽 대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유스넨이 말했다.
“피곤한 것 같은데 잠시 주무십시오. 아직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그러며 유스넨은 자신의 어깨를 툭 쳤다.
“원래 약혼자의 어깨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쥬웰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없죠. 그냥 잠시만 눈을 감을게요.”
쥬웰은 차마 유스넨의 어깨에 기대지는 못하고, 반대쪽 창가 쪽으로 얼굴을 기대 잠을 청했다.
노곤한 따뜻함에 취한 탓일까? 금세 잠이 몰려왔다. 예상대로 악몽은 꾸지 않을 것 같았다.
“참, 카발리에는 정말 그놈한테 맡길 겁니까?”
그놈.
황태자를 지칭하는 표현치고 다소 과격했다.
이미 반쯤 잠에 취해 쥬웰은 그러려니 넘어갔다.
“글쎄요…… 오늘 하시는 것 보고요. 제 옆자리가 탐나면…… 오늘 열심히 잘해보세요.”
몽롱하게 답했고, 쥬웰은 완전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게 마차가 커브를 돌며 흔들리자 그녀의 머리는 툭 하고 유스넨의 어깨에 기대게 되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는 유스넨의 눈빛이 순간 아릿하게 물들었다.
‘쥬웰.’
그녀를 볼수록.
이렇게 함께 있을수록 아릿함이 커졌다.
아니, 이제는 아릿함이라 표현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 순간마다 끔찍한 아픔이 심장을 파고들어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찰나, 그의 눈동자에 갈등이 스쳐 지나갔다.
꾹 다문 붉은 입술이 희미하게 떨렸다.
주저하는 듯한 모습.
실제로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 하나의 단어를 꺼내기 위해.
억겁 같은 순간이 스쳐 지나갔고,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하나의 단어를 그녀의 앞에 꺼냈다.
“누나.”
유스넨은 다시 말했다.
“누나.”
물론 잠에 빠진 그녀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단어를 꺼낸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픔이 유스넨의 심장을 관통했다. 마치 수천, 수만 조각으로 심장을 조각내는 듯한 아픔이었다.
머리가 하얘지듯 아득했다.
유스넨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라고? 이렇게 아픈데?’
에덴의 대천사들은 말했다.
죽은 이가 게헨나에서 돌아오는 건 세상의 법칙상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에덴의 대천사들은 오로지 진실만 이야기할 수 있으니, 그 말은 거짓이 아닐 거다.
하지만 그들이 했던 말이 진실이라면 왜 이렇게 아프단 말인가?
어째서 이렇게 그녀를 볼 때마다 심장을 산 채로 도려내는 것 같단 말인가?
“누나.”
유스넨은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당장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이 정말 에스텔레냐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섣불리 접근하면, 벽을 세울 거야.’
만약, 쥬웰이 에스텔레가 맞는다면?
솔직히 정체를 드러내려 할까?
절대로.
그녀의 상황상 자신의 정체를 인정할 리가 없었다.
도리어 경계심만 세우고 유스넨에게서 도망치듯 멀어질 것이다.
이렇게 그가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건, 그녀가 방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전혀 자신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는 방심.
그러니 어설프게 접근하는 건 절대 금물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
유스넨은 굳게 다짐했다.
‘절대로. 놓지 않겠어. 당신을.’
쥬웰은 알까?
아까 놓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 유스넨이 어떤 맹세를 했는지?
그는 절대로 그녀를 놓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모든 진실을 알아내고 그녀를 구원하고 말 것이다.
“행복한 꿈 꾸십시오.”
유스넨은 손을 들어 쥬웰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녀는 이미 깊게 잠들어 있었다.
평온한 얼굴로.
유스넨은…… 그리고, 쥬웰은 알까?
지금 이 평온한 얼굴은 게헨나에서 돌아온 이후…… 아니, 지난 삶을 통틀어 그녀가 처음 짓는 표정이었다.
* * *
데이트가 끝났다.
무얼 했냐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쥬웰 때문이었다.
워낙 잠이 깊게 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유스넨은 마차 안에서 무려 여섯 시간이나 쥬웰에게 어깨를 내준 채 앉아 있어야 했다.
아니, 나중에는 쥬웰이 스르르 옆으로 쓰러져 무릎을 내주었다.
심지어 유스넨은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춥지 않게 천사의 능력을 내내 일으켜 마차 안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쥬웰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실례를.”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쥬웰은 스스로의 실수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유스넨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뭘요. 저는 좋았는데요.”
“네?”
“덕분에 실컷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았습니까?”
“……!”
“그렇지 않아도 떨어져 있는 동안 당신을 많이 보고 싶었는데, 전 좋았습니다. 그리고.”
유스넨은 싱긋 웃었다.
“잠드신 모습, 귀여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보여주시면 좋겠군요.”
쥬웰은 핫핫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게 자신의 실수로 인한 민망함 때문인지, 유스넨의 귀엽다는 말이 부끄러워서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흰 강아지. 언제 저렇게 능글맞아진 거야.’
그녀가 기억하는 유스넨은 저렇지 않았…….
‘아니, 생각해 보니 어릴 때도 저랬구나.’
대놓고 그녀랑 결혼하겠다고, 누나가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다고 떠들던 유스넨이었다.
그러니 저런 직접적인 표현은 이전이랑 똑같은 것일지도.
다만, 받아들이는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둥글둥글 귀여운 강아지가 하던 맹랑한 말이랑, 저렇게 매혹적인 은빛 맹수가 하는 말이 같게 느껴지기는 어려우니까.
“그리고 제게 좋았던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뭐죠?”
“식사를 못 했으니, 그 핑계로 또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유스넨은 싱긋 웃었다.
“오늘 못 한 데이트는 꼭 다음에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기대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지은 죄(?)가 있는 터라 쥬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끝내고 가넷가에 돌아왔다.
‘아, 그래도 좋았네.’
쥬웰은 숨을 들이켰다.
푹 잘 수 있어 좋았고…….
유스넨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인정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잠으로 그 시간을 보낸 게 아쉬울 정도로.
그렇게 정말 드물게 상쾌한 마음으로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택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무언가 일이라도 터진 듯 어수선했다.
‘뭐지?’
그때, 부집사 세바트찬이 다가왔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아가씨의 데뷔 티 파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데뷔 티 파티.
처음 사교계에 데뷔하는 영애들이 데뷔탕트를 앞두고 사교계의 여러 인사를 초청해 친분을 나누는 파티였다.
첫 사교계 데뷔를 축하받는 자리인지라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고, 영애의 신분과 가문의 영향력에 따라 티 파티 때 초청하는 손님의 수준이 결정되었다.
쥬웰의 경우, 당연히 사교계 최고의 명사들을 초청하였다.
“무슨 문제이지?”
“초청장을 받은 인원 중 절반 이상이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
초청 거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데뷔 티 파티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의 행사다.
성년이 되는 영애가 처음으로 사교계에 발을 딛는 행사이니.
따라서 미리 사전 조율을 끝내고 초청장을 보낸다. 서로 얼굴을 붉히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일어나다니?
그것도 가넷가 영애의 데뷔 티 파티인데?
세바트찬은 이를 꽉 악물었다.
“감히 이런 무례를. 도대체 우리 가넷을 뭘로 보고. 강력히 항의해야…….”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아가씨?”
세바트찬은 흠칫하였다.
쥬웰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녀는 화내지 않았다.
도리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기쁘다는 듯.
실제로 그녀는 기뻐하고 있었다.
상대의 어리석음에.
‘설마 했는데, 정말 이런 식으로 움직여 주다니.’
이번 일은 당연히 매리엇이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것일 터였다.
쥬웰이 기대한 대로 말이다.
쥬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매리엇이 날 위해 최고의 선택을 해주었어.’
물론 그 최고는, 쥬웰의 입장에서였다.
쥬웰은 매리엇이 사교계가 떠들썩하게 움직여 주길 바랐으니까.
이번 매리엇의 행동은 쥬웰이 기대하던 것 이상이었다.
‘사교계에서 자신의 힘을 과신한 거겠지. 뭐,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이런 사교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토른 공작이라도 함부로 개입할 수 없으니까.’
사교계는 반드시 가문의 힘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가문의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사교계에는 사교계의 법칙이 따로 있었다.
아무리 지체 높은 가문의 귀부인이라도 ‘교양 없다’고 낙인찍히면 사교계에서 매장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그녀가 가넷가의 영애라도 무턱대고 가문의 힘으로 상대를 핍박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물론 가넷가의 힘을 쓰면 상대는 고개를 숙일 것이다.
하지만 가문의 힘으로 상대를 ‘대놓고’ 핍박하는 건, 사교계에서 터부시되는 일.
‘교양 없다’고 여겨지는 일이니, 뒤에서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매리엇도 그걸 믿고 이런 짓을 벌인 거겠지만, 그래도 대단하네. 감히 가넷을 상대로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그때 모욕의 충격이 생각보다 더 컸던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고마울 수가.’
매리엇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 쥬웰이 간절히 바라던 바라고는.
‘아아, 기대되네.’
쥬웰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기대되어 초조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때 다급한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가넷가의 기사를 총괄하는 이이자 토른 공작의 직속 수하, 라이져 경이었다.
그가 딱딱한 얼굴로 쥬웰 앞에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
“아가씨의 티 파티 초청 건과 관련해 토른 공작 전하께서 직계 가족분들을 소집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만찬회장으로 오시라고 합니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가지.”
“저, 아가씨.”
라이져 경이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조심하십시오.”
“무얼 말인가?”
“이번 티 파티 일로 공작 전하께서 많이 진노하셨습니다.”
쥬웰은 라이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극도로 자존심이 높은 분이니. 이번 일이 분노스럽겠지.’
토른 공작의 가문을 향한 자긍심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가넷가가 보낸 초청을 거절하다니?
분노하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분노의 방향이었다.
분노한 토른 공작 앞에서 잘못 처신하면, 분노의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이번 일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녀는 이제 토른 공작의 깊은 총애를 받고 있지만, 그래도 토른 공작은 방심할 수 없는 이.
한순간에 총애가 뒤집히는 것도 가능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다.
“고맙군. 걱정해 주어서.”
라이져 경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도록.”
쥬웰은 짙게 미소를 지었다.
매리엇이 발칙하게 나올 시 토른 공작이 분노할 것도 당연히 예상하였다.
아니, 그녀는 도리어 토른 공작이 분노해 주길 바랐다.
의도한 바가 있었다.
‘이번 기회에 벌레나 한 번 더 짓밟아야겠군.’
벌레.
그녀의 또 다른 원수 로튼 백작.
‘매리엇만 응징하면 아쉬우니까.’
쥬웰은 혀를 핥았다.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토른 공작의 분노를 이용해 로튼 백작을 짓밟기 위해.
오늘, 로튼 백작은 한 차례 더 밑바닥으로 추락하리라. 그녀는 그런 로튼 백작을 짓밟으며 조소할 것이고.
두근. 기대되었다.
마침 저녁 시간이다.
토른 공작은 가족 만찬회를 소집했다.
쥬웰은 만찬회장으로 향했다.
“쥬웰.”
미리 도착해 있던 엔리크 자작이 그녀를 맞았다.
“아버지?”
엔리크의 표정을 본 쥬웰은 살짝 놀랐다.
그는 항상 부드럽던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니까…… 화가 난 듯 말이다.
최근 부드러운 엔리크의 모습만 보다가, 저런 모습을 보니 쥬웰은 놀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엔리크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미리 도착해 있던 로튼 백작이 끼어들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쥬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구나. 네 성년식에 이런 일이라니. 속이 많이 상하겠구나.”
짐짓 걱정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전혀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긴, 좋겠지.’
쥬웰은 피식 웃었다.
‘간신히 내 꼬투리를 잡을 일이 생겼으니까.’
로튼 백작은 이번 일을 쥬웰의 책임으로 돌릴 심산일 것이다.
평소 행실이 잘못되어 이런 사태를 유발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역시나, 로튼 백작은 슬그머니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구나. 혹시 쥬웰, 너는 짐작 가는 게 없느냐?”
“짐작이요?”
“그래, 그네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을 테니 네가 무언가 실수를 했을 가능성이…….”
로튼 백작이 거기까지 이야기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콰앙!
만찬회장에 깜짝 놀랄 굉음이 울린 것이다.
엔리크 자작이었다.
그가 앞의 테이블 위를 내려친 것이다.
“에, 엔리크?”
“형님,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로튼 백작은 입을 우뚝 다물었다.
엔리크의 적빛 눈동자가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잔뜩 분노를 담아 섬뜩한 핏빛을 일렁이며.
“감히, 그깟 것들이 내 딸에게 이런 모욕을 주었는데…… 실수한 것 아니냐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로튼 백작은 안색이 하얘져 어떤 답도 못 했다.
엔리크의 기세에 완전히 압도당한 것이다.
한편, 쥬웰도 놀랐다.
‘엔리크 자작에게 저런 면모가 있다니?’
얼음꽃 같은 외모이면서, 껍질을 벗겨보면 실상은 따뜻한 봄 같은 남자가 엔리크였다.
그런데 저런 거친 분노라니.
‘아버지도 나름대로 가넷은 가넷이란 건가? 어쨌든 로튼 백작을 너무 기죽이면 곤란한데.’
쥬웰은 이번 기회에 벌레, 로튼 백작을 한 차례 더 밟아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분노는 고맙지만, 로튼 백작이 겁에 질려 주눅 들면 그를 짓밟을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쥬웰은 로튼 백작의 기를 살려주기로 하였다.
“아버지, 그만하세요.”
“쥬웰.”
“백부께 말해서 무엇하겠어요.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실 텐데. 백부는 원래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백모가 끔찍이 유폐되어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으시는 분인걸요? 그런데 저 같은 걸 걱정하겠어요?”
“…….”
순간, 정적이 흘렀다.
면전에서 대놓고 욕하는 말에 로튼 백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왔다.
그것도 보통 욕이 아니라, 쥬웰의 음모에 당해 노예로 신분이 강등당해 평생 유폐 형에 처한 부인까지 언급한 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증오하던 쥬웰이 저렇게 욕을 하자, 로튼 백작은 이성을 잃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
“너, 너…… 쥬웰……!”
그런 로튼 백작을 향해 쥬웰은 피식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연히 대놓고.
로튼 백작은 분노를 어쩌지 못하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로튼 백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순간.
마침 기다리던 인물이 등장했다.
“토른 공작 전하이십니다!”
“……!”
장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래, 모두 모였느냐?”
토른 공작이 자리에 앉았다.
평소와 비슷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아아. 진짜 화났네.’
눈빛.
토른 공작의 붉은 눈동자가 한없이 섬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핏빛이 떨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토른 공작이 저렇게 분노하는 건 처음 보았다.
“그래, 들자. 다 같이 하는 식사는 오랜만이구나.”
시종들이 뻣뻣이 굳어 음식을 내왔다.
토른 공작은 포크를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해밀턴은?”
“……가출 중입니다.”
“쯧, 언제 철이 들려고. 휘란드는 겨울 사교계 시즌이 끝난 후 돌아온다고?”
로튼 백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휘란드.
그의 첫째 아들로 로튼 백작의 자랑이었다.
“네, 수석 졸업이라 아카데미 졸업식을 빠질 수 없어 그때 돌아오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기대되는구나.”
“네, 휘란드는 우리 가넷의 등불이 될 겁니다.”
그러며 로튼 백작은 쥬웰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네년이 기고만장한 것도 지금까지다. 휘란드만 돌아오면, 네년 따위야.’
한편, 쥬웰은 그런 로튼 백작의 마음을 읽고 픽 웃었다.
‘그나저나 휘란드, 라.’
쥬웰의 등장 전 가넷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유망주.
사실…… 휘란드를 기다리는 건 로튼 백작만이 아니었다.
쥬웰도 휘란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휘란드를 로튼 백작을 완전히 몰락시킬 열쇠로 이용할 계획이었다.
로튼 백작은 휘란드 때문에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지.’
로튼 백작을 짓밟는 일을.
마침 토른 공작이 때에 맞추어 용건을 꺼내주었다.
“그래, 오늘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은 다들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쥬웰, 로튼. 너희 생각을 이야기해 보아라.”
순간, 쥬웰은 이게 또 토른 공작의 시험인 걸 눈치챘다.
토른 공작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후계 후보들의 그릇을 평가하려는 것이다.
한편, 로튼 백작은 쥬웰을 의기양양하게 노려보았다.
이번 기회에 토른 공작 앞에서 쥬웰을 크게 곤란하게 만들 작정인 듯했다.
“이번 사태는 정확한 이유를 확인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
“감히 우리 가넷을 상대로 저들 가문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사태를 일으켰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말에 토른 공작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로튼 백작은 그것도 모르고 더욱 기세등등하여 쥬웰을 형형히 노려보았다.
“……더 이야기해 보아라.”
“사실 짐작되는 바가 있습니다. 얼마 전, 시내에서 쥬웰과 다이아 공작이 크게 다툰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혹시 그게 이번 사태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쥬웰은 팔짱을 끼었다.
‘역시 매리엇이 로튼 백작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군. 이번 일의 발단은 나한테 있으니 이걸 빌미로 날 핍박하라고 하였겠지.’
쥬웰은 픽 웃었다.
하지만 로튼 백작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지금 토른 공작이 정확히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후계 후보들에게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후우.”
토른 공작이 숨을 들이마셨다.
무언가 끓어오르지만,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모습이다.
한편, 로튼 백작은 그런 토른 공작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의 반응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쥬웰이 끼어들었다.
“네, 제가 실례를 하긴 했어요.”
“무슨 말이지?”
쥬웰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디저트를 바닥에 엎고 매리엇 공작에게 개처럼 핥아보라고 했거든요.”
“……!”
장내에 경악이 내려앉았다.
로튼 백작이 흥분해 손을 떨며 쥬웰을 손가락질했다.
“어, 어떻게 그런 짓을?! 쥬웰, 네가 미쳤구나! 가주님, 당장 쥬웰을 엄벌하고 다이아 공작가에 사과를……!”
그런데 토른 공작이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닥쳐라.”
“……네?”
“사과? 우리 가넷이 다이아 따위에게? 너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토른 공작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 외침에 로튼 백작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토른 공작이 이렇게 언성을 높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극도로 분노한 것이다.
“후우우.”
토른 공작은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그래, 내가 너에게 무얼 바라겠느냐?”
“아, 아버지.”
“듣기 싫으니 닥치고 있어라.”
“……!”
토른 공작은 이번엔 쥬웰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쥬웰, 너는 왜 그런 일을 했지? 정당한 이유가 없었을 시 죄를 묻겠다.”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넷을 업신여겨서요.”
“……뭐?”
“감히 주제도 모르고, 다이아 따위가 절 핍박하고 가넷을 업신여기는 것 같아 처지를 알게 해주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쥬웰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그 이유가 중요한가요? 제가 매리엇 공작을 모욕한 게 뭐가 큰일이라고.”
“……!”
“다이아가 가넷에게 이빨을 드러냈는데. 감히 우리 가넷을 얼마나 깔보았으면.”
쥬웰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전 지금 아주 많이 화가 나는데…… 다른 분들, 특히 백부는 그렇지 않은가 봐요.”
로튼 백작의 얼굴이 하얘졌다. 쥬웰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이다.
토른 공작은 무조건 가넷 공작가를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러니 쥬웰의 잘못 따위 관심사가 아니었다.
원래 가넷은 오만하여 스스로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으니까.
설사 정말 가넷이 잘못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상대가 바랄 수 있는 건 가넷이 적선하듯 베푸는 오만한 사과뿐이다.
그런데 원한을 품고, 가넷에 이빨을 드러냈다? 감히?
절대로 용납할 가넷이 아니었다.
“로튼, 가주 대리로서 설명해 보아라. 다이아가 어떻게 우리 가넷을 상대로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도대체 우리 가넷을 얼마나 우습게 보았으면.”
토른 공작의 붉은 눈동자가 로튼을 향했다.
“그, 그건…….”
“너는 나를 대신하는 가주 대리가 아니냐? 지난 3년간 어떤 꼴을 보였길래, 감히 다이아 따위가 이딴 발칙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해 보란 말이다.”
로튼 백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넷가의 인물들은 분노할수록 보석안이 짙어져 석류빛이 점점 핏빛으로 변한다.
지금…… 토른 공작의 눈동자는 뚝뚝 떨어지는 선홍색 핏방울 같았다.
로튼 백작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아, 아버지…….”
입을 달싹하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토른 공작은 그런 못난 아들의 모습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겠다. 이만 나가보아라.”
“아, 아버지.”
“나가라고 하였다.”
로튼 백작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반응임을 깨달은 것이다.
토른 공작은 그에게 실망하였다.
그리고 그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로튼.”
토른 공작이 차갑게 말하였다.
“날 더는 실망시키지 말아라.”
“……!”
로튼 백작의 얼굴이 더는 창백해지지 못할 정도로 하얘졌다. 시체와 같았다.
그는 파르르 손끝을 떨더니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만찬회장을 빠져나갔다.
이후 만찬회장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엔리크는 하얀 안색으로 쥬웰을 살폈다.
토른 공작의 분노가 딸에게 향할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정작 쥬웰은 표정을 관리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아, 달콤하네.’
‘피의 각인’을 통해 만찬회장을 나간 로튼 백작이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이 영혼에 전달되었다.
다른 때보다 부정적 감정이 더욱 컸다.
토른 공작의 마지막 말이 충격과 공포였던 듯했다. 이대로는 후계 자리에서 내쳐질 위기였으니 말이다.
‘직접 가서 표정을 감상하고 싶은데. 아쉽네.’
갈증이 치밀어 쥬웰은 테이블 위의 와인을 들어 마셨다.
그런데 토른 공작이 묘한 눈빛으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넌 괜찮은 거냐, 쥬웰?”
“네, 가주님?”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건 너의 사교계 데뷔 무대이다. 그걸 망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속상하지 않으냐?”
마치 걱정이라도 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뭐지?’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이 말이 또 다른 시험인지, 정말 걱정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속상할 게 뭐가 있어요. 저는 오히려 좋은걸요?”
“좋다고?”
“네, 정당히 다이아를 짓밟을 명분이 생겼잖아요.”
“……!”
쥬웰은 나이프를 들어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기를 썰었다.
빨간 고기의 단면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쥬웰은 천천히 고기를 들어 씹었다.
비릿한 피 내음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이아가 건방지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되었다고 생각해요. 이번 기회에 비루한 자신의 주제를 알게 해주면 좋겠죠.”
그 대답에 토른은 복잡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쥬웰의 예상과는 다소 다른 반응이었다.
오만한 토른이라면, 쥬웰의 말을 마냥 기특하게 여길 거로 생각했는데?
토른 공작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다이아에게 현실을 알게 해주어야지. 하지만 말이다, 쥬웰.”
“……?”
“이번 일이 잘못되면 네가 커다란 상처를 입는다. 그건 알고 있겠지?”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엔리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토른 공작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만약 쥬웰이 다이아와의 기 싸움에서 밀리면?
쥬웰은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후계 계승을 바라는 쥬웰에게 치명적인 상처였다.
‘사교계에서 제대로 처신도 못 하는 내게 가문을 물려주면 안 된다고 모두가 들고 일어서겠지.’
쥬웰은 뛰어나다.
로튼 백작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제 가넷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로튼 백작이 아직도 후계위를 유지하고 있는 건 쥬웰이 여러 핸디캡이 많기 때문이다.
여성인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섯 공작가는 능력 있는 여성의 가주 계승을 막지 않으니까.
라인하르트 제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부터가 여성이어서, 제국은 여성의 작위 계승에 부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쥬웰은 어리다.
살아온 세월이 짧고, 따라서 인맥이 부족하며, 가넷가에 이루어 놓은 것도 로튼 백작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이건 정말 어떻게 해도 극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따라서 쥬웰이 후계위를 물려받으려면 어떤 흠도 없이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누구도 반대하지 못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게 말이다.
그러니 사교계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건 필수다.
아니, 단순히 뛰어난 수준이 아니라 최고의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런데 다이아와의 싸움에 밀려 사교계에서 웃음거리가 된다? 그 순간, 후계 계승은 까마득히 멀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흐음, 그나저나.’
쥬웰은 고개를 기우뚱했다.
“혹시…… 지금 저 걱정해 주시는 거 맞죠, 할아버지?”
“……!”
순간, 토른 공작의 표정이…… 참으로 기이하게 변했다.
흠칫하며 딱딱히 굳었는데, 얼핏 보면 화난 것 같지만…… 아니었다. 당황한 표정이었다.
쥬웰은 난생처음 보는 토른 공작의 당황한 얼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정말 날 걱정해 주는 거였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녀와 토른 공작은 사이좋은 손녀 할아비 관계이다. 최근에는 더욱 가까워졌고.
하지만 쥬웰은 알고 있다.
그녀와 가문의 이득을 저울질해야 한다면, 토른 공작은 언제든 기꺼이 그녀를 내팽개칠 거란 사실을 말이다.
토른 공작에게 가문보다 중요한 건 없다.
그와 아무리 가까워져도,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런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에서 가문보다 그녀를 먼저 걱정하다니?
토른 공작에게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본인도 그걸 자각했는지, 토른 공작은 당황을 숨기지 못하였다.
“……당연하지 않으냐? 넌 우리 가넷의 일원. 널 모욕하는 건 우리 가넷을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헤헤.”
쥬웰은 기회를 헛되이 놓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풀쩍 토른 공작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저 걱정해 주셔서.”
“……그런 거 아니래도.”
“후음, 정말 아니에요? 저 할아버지한테 살짝 감동했는데.”
토른 공작은 클클 웃음을 흘렸다.
“요 귀여운 것이. 할아비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구나. 그래, 걱정한 게 맞다.”
“헤헤, 고마워요. 그거 아시죠? 제가 할아버지 많이 사랑하는 것?”
“클클, 우리 손녀가 말도 예쁘게 하는구나. 누구 닮아 이리 예쁘고 사랑스러울꼬.”
“저야 할아버지 닮아서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죠.”
그렇게 때아닌 정겨운 광경이 펼쳐졌다.
엔리크 자작은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라지만, 쥬웰의 이런 가증스러운(?) 모습은 적응이 안 되는지 아무런 말 없이 테이블만 바라보았다.
토른 공작은 자신에게 안긴 쥬웰의 등을 두드리더니 은근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매리엇, 그 망할 것을 네 앞에 무릎 꿇려주랴?”
“……!”
쥬웰은 토른 공작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험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토른 공작은 정말 쥬웰을 위해 매리엇을 무릎 꿇릴 작정이었다.
‘토른 공작이 직접 나선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흐음?”
“할아버지가 나서면 일이 너무 싱겁게 끝나잖아요.”
토른 공작이 나서면 모든 게 순식간에 마무리될 것이다.
어떤 충격도, 파문도 없이 ‘싱겁게’ 말이다.
그런 건…… 쥬웰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토른 공작이 눈동자를 빛냈다.
“우리 사랑스러운 손녀가 무언가 생각하는 게 있나 보구나.”
쥬웰은 토른 공작의 품에서 벗어나 싱긋 웃어 보였다.
“네, 맞아요. 전 이번 기회를 빌려 사교계에서 다이아 공작가를 짓밟을 생각이에요.”
“흐음?”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다이아 따위가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쥬웰은 손목에 찬 팔찌를 풀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형형색색 여러 보석이 가득 박힌 팔찌였는데, 그중 투명한 보석 다이아를 떼 손가락에 들었다.
쥬웰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손가락에 들린 다이아를 바라보았다.
“사실 전 납득이 가지 않거든요. 이런 천박하고 밋밋한 보석이 사교계의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니. 이딴 싸구려 보석은.”
툭, 손가락을 튕겼다.
힘없이 떨어진 다이아는 먹다 남은 음식물 사이로 떨어졌다.
쥬웰은 짙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비루한 수준이 딱 어울리는 데 말이에요.”
“……!”
그 광오한 발언에 토른 공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래, 네 말이 맞다. 다이아 따위가 사교계의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라니. 말도 안 되지.”
토른 공작은 지그시 물었다.
“그러면, 너는 이번 기회에 가넷을 사교계의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겠다는 거냐?”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온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보석은 가넷이니. 응당 사교계의 찬사도 가넷에게 향하는 게 옳겠지요.”
토른 공작은 쥬웰의 말이 흡족한 듯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가타부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쥬웰은 토른 공작이 말을 아낌을 눈치챘다.
“할아버지는 가넷이 사교계의 왕이 되는 게 어려울 거로 보시는 건가요?”
“물론 난 네 의견에 찬성한다. 우리 가넷이 있는데 다이아 따위가 사교계에서 가장 빛나다니. 우습지도 않은 일이지. 하지만 말이다.”
토른 공작은 냉철히 말하였다.
“네가 말한 바를 이루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이아 공작가가 사교계에서 쌓아온 저력은 무시할 바가 못 돼.”
옳은 말이었다.
매리엇이 사교계의 여왕인 이유는 단 하나다.
다이아 공작가가 누대에 걸쳐 사교계에 쌓아온 저력 때문이다.
정확히는 사교계를 향한 막대한 금액의 ‘투자’가 다이아를 사교계의 지배자로 군림하도록 만들었다.
‘다이아 공작가는 사교계의 가장 큰 후원자이지.’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 공작가는 압도적인 부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온갖 귀족 문화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그러니 이런 아성을 쌓을 수 있었다.
“물론 우리 가넷이라고 그런 투자를 못 할 이유는 없겠지만, 단기간에 벌어진 격차를 좁히기는 어렵다.”
참고로 다이아 공작가 다음의 제국 최고 부자 가문은 가넷 공작가다.
그러니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다이아처럼 사교계의 후원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토른 공작의 말처럼 오랜 세월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쥬웰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우리가 그럴 필요가 뭐가 있나요? 우린 가넷인데.”
“흐음?”
“탐나는 게 있으면, 그냥 뺏으면 되죠.”
의미심장한 말에 토른 공작이 눈을 빛냈다.
“뺏는다고?”
쥬웰은 악당처럼 말하였다.
“네. 남이 탐나는 걸 가지고 있으면 그걸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뭐겠어요? 똑같은 노력을 한다? 천만에. 우린 가넷인데 어리석게 왜 그런 일을 하나요? 그냥 뺏으면 그만이지. 그게 가넷이 선호하는 방법 아닌가요?”
토른 공작이 흥미를 보였다.
“더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간단해요. 할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상대를 굴복시키면, 상대가 가진 모든 건 자연히 우리의 것이 되는 법이란 것을.”
“그 말은?”
“네, 맞아요.”
쥬웰은 지그시 말했다.
“매리엇 공작을 제 발밑에 굴복시키면 돼요. 그래서 그녀를 내 시녀나 다름없는 처지로 무릎 꿇리면, 사교계는 저절로 제 발밑에 들어오게 되지 않겠어요?”
“……!”
“지켜보세요. 매리엇 공작이 절 찾아와 무릎 꿇고 굴복하는 걸 보게 될 테니.”
토른 공작은 잠시 침묵하였다.
매리엇을 시녀와 다름없는 처지로 만들겠다니.
토른 공작조차 경악할 수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였다.
“……생각하는 방법이 있느냐?”
“물론이죠.”
“미리 말하지만, 사교계에서 네 역량은 매리엇, 그 아이에게 미칠 바가 못 돼.”
“상관없어요. 전 가넷의 방식으로 매리엇 공작을 무릎 꿇릴 거니까요.”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가넷의 방식.
그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랄하고 잔학하게 상대를 물어뜯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건 사교계의 법칙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사교계는 가문의 힘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명목상의 모습일 뿐.
가문의 힘이 당연히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다만 가문의 힘을 대놓고 사용하는 대신, 온갖 비열하고 추잡한 수단이 사용된다.
따라서 고아한 겉모습과 다르게, 어쩌면 정계의 싸움보다 더욱 추악한 싸움이 사교계에서의 싸움이다.
그러니 쥬웰은 그 법칙대로 악랄하고 참혹하게 매리엇을 무릎 꿇릴 작정이었다.
“……가넷의 방식이라. 그렇게 말하면, 우리 가넷이 악당처럼 느껴지지 않느냐?”
토른 공작이 클클 웃으며 말하자 쥬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사랑스럽게 토른 공작의 품에 안기며 되물었다.
“어머, 할아버지. 우리 가넷은 악당이 맞잖아요?”
“……!”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요?”
가넷은 악당이었다.
추악하게 타락한 그녀와 딱 어울리는.
토른 공작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뭐? 하하! 그래. 우리 가넷은 악당이 맞지. 그러면, 우리 악당 손녀에게 이번 일을 기대해도 되겠느냐?”
“네, 즐겁게 기대하고 있어 주세요.”
쥬웰은 짙게 미소를 지었다.
개미의 다리를 뜯기 전, 끔찍한 일을 기대하는 잔혹한 미소였다.
“아주 즐거운 일이 벌어질 테니. 대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면 안 돼요? 알았죠?”
* * *
이후 식사를 끝내고 쥬웰은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있었다. 엔리크가 그녀를 따라왔다.
“아버지?”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엔리크는 딱딱한 얼굴로 한참이나 그녀를 보더니 무겁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느냐?”
“……!”
“무엇이든 좋다. 내무 장관으로서 힘을 쓰든, 내 인맥을 동원해서든 네 일을 돕겠다.”
쥬웰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쥬웰은 엔리크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챘다.
딸의 데뷔탕트에 수작을 부린 거에 크게 분노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제안이라니.’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엔리크가 한 제안은 권력을 이용해 월권행위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항상 공명정대한 방식을 추구하는 그답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런 일은 아버지가 원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이제부터 쥬웰이 하려는 일은 아주 비열하고 추악한 것들이었다. 엔리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엔리크는 또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쥬웰, 나도 가넷이다.”
“……!”
“그리고 진정한 가넷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가장 소중한 대상에 충성을 바치지. 그게 우리가 ‘충성’의 가넷이라 불리는 이유니까.”
그렇다.
가넷의 보석 말이 ‘충성’인 이유는, 진정한 가넷이라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에 충성을 바치기 때문이다.
물론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가넷 모두가 다 달랐다.
토른 공작은 가문에 충성을 바쳤다.
그리고 엔리크 자작의 경우에는.
“쥬웰.”
그가 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강인하게.
그의 눈동자가 굳건하게 그녀를 향했다.
“내 충성의 대상은 바로 너이다.”
“……!”
“이건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단 한순간도 변하지 않았던 사실이야.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너를 위해서다.”
두근.
아버지의 시선을 받는 쥬웰의 가슴이 뛰었다.
유스넨 때와는 다른 느낌의 두근거림이었다.
마치 단단한 요람에 덮인 듯, 깊고 따뜻했으며…… 아팠다.
‘내가 정말 쥬웰이었다면.’
엔리크의 마음을 받을 때마다 숱하게 하였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엔리크의 마음을 밀어내지 않기로 하였다.
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못 했다.
이 따뜻함이 너무 치명적이어서, 놓을 수가 없어서 쥬웰은 그릇된 말을 하였다.
“……아버지, 안아주세요.”
엔리크의 팔이 쥬웰을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따뜻한 품이 쥬웰을 감쌌다.
쥬웰은 왜인지 울컥 눈시울이 붉어져 이를 악물었다. 엔리크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더욱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엔리크는 말없이 달래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 하나에도 그가 얼마나 깊은 사랑을 품고 있는지 쥬웰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절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으세요?”
엔리크는 주저 없이 답했다.
“그게 널 위한 일이라면.”
널 위한 일이라면.
지금껏 엔리크가 보인 모든 모습을 설명해 주는 문장이었다.
엔리크는 쥬웰을 위해 후계위를 포기하고 외교 대신이 되었다.
이후 딸이 엇나가자, 딸을 위해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녀가 후계위를 바라자 묵묵히 그녀의 뒤를 지지해 주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신념에 어긋남에도 딸을 위해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어찌 이런 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쥬웰은 하필 엔리크가 이토록 완벽한 아버지란 것이 악마의 농간인지, 신의 축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축복…… 이겠지. 저주라면 기꺼이 받을 수밖에 없는 달콤한 저주이고.’
그렇게 생각한 쥬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원래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그러면 부탁해도 될까요?”
“뭐든지.”
“내무 장관의 권한을 이용해 제가 말한 내용들을 조사해 주세요.”
내무 장관은 제국의 안정을 지키는 자리이다.
그 안정에는 치안이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당연히 수사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 어떤 내용이냐?”
“그건…….”
쥬웰의 설명을 들은 엔리크의 눈이 커졌다.
쥬웰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너, 설마……?”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 할아버지에게 말한 ‘가넷의 방식’대로 하겠다는 건 빈말이 아니에요. 전 악랄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매리엇 공작을 무릎 꿇릴 거예요.”
“…….”
“만약 이 일이 아버지의 신념에 어긋난다면 들어주지 않아도 되어요.”
엔리크 자작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답했다.
“아니, 하겠다.”
“아버지?”
뜻밖의 대답이었다.
쥬웰은 엔리크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딸을 위한다지만, 그의 신념과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니까.
“물론 이번 일은 내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지. 하지만.”
엔리크는 가만히 말하였다.
“널 위하는 일이니, 괜찮다.”
“……!”
“내 신념보다는 네가 더 중요하니까.”
쥬웰은 숨을 들이켰다.
또 그녀의 가슴이 흔들렸다.
아까처럼 감정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쥬웰은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다른 용건을 꺼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부탁할 게 있어요.”
“뭐지?”
“로든 왕국에서 아피엘 왕녀가 제 데뷔탕트에 올 수 있게 초청해 주세요.”
엔리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쥬웰의 데뷔탕트 때 로든 왕국에서 축하 사절이 오긴 할 것이다.
고작 일개 영애의 데뷔탕트에 무슨 타국의 축하 사절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아니었다.
쥬웰은 제국의 최고 권력가인 가넷가의 금지옥엽 영애이니까.
황족의 데뷔탕트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필 아피엘 왕녀라니?
“이유를 물어도 되겠냐?”
“아피엘 왕녀는 로든 왕국의 왕위 후보 중 가장 주목받는 이라고 들었어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교분을 나누고 싶어요.”
엔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로든 왕국의 왕가와는 외교 대신 때 연을 맺어두었으니 이야기해 보마. 아마 내가 부탁하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고마워요.”
그렇게 대화가 끝났고, 엔리크가 말했다.
“그러면 이만 가보마. 푹 쉬어라.”
그는 지금도 본 저택 밖의 별채에서 머물고 있었다.
등을 돌려 엔리크가 멀어졌다.
점점 자신의 방에서 멀어지는 엔리크를 보며 쥬웰은 왠지 모르게 아련한 상실감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하였다.
“아버지, 별채에서 머무는 게 불편하지는 않으신가요?”
“……?”
엔리크는 고개를 기우뚱하였다.
“아니, 딱히?”
“……아, 그렇군요. 가보세요.”
쥬웰은 괜히 핫핫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쳤지.’
난데없이 그런 걸 물어본 이유.
그의 거처를 본 저택으로 옮기는 게 어떨지 물어보려 한 것이다.
지금 머무는 별채는 너무 머니까.
‘정신 차려. 무슨. 어린아이도 안 할 법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편, 딸의 민망한 얼굴을 본 엔리크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다가 아, 하였다.
쥬웰이 왜 저러는지 깨달은 것이다.
엔리크는 빛이 나듯 환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내일 바로 옮기겠다. 이왕이면 네 방 옆으로. 세바트찬에게 시켜 옆방을 비우라고 해야겠군.”
“……그런 것 아니거든요.”
“아니면 지금 바로?”
“아니라고요. 전혀 그런 의미 아니었으니 가서 주무시기나 하세요.”
하지만 엔리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가 다시 쥬웰에게 다가오더니 딸을 와락 껴안았다.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쥬웰은 부끄러움에 바둥거리다가 다음 말에 멈칫하였다.
“사랑한다, 쥬웰.”
“…….”
쥬웰의 얼굴이 찰나 굳었다.
가슴이 저릿했다.
하지만 그녀는 웃었다.
어렵지 않았다.
가슴이 아픔과 동시에 기뻤으니까.
그녀는 엔리크가 좋았다.
“……고마워요, 아버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쥬웰은 눈을 감고 아버지의 품을 느꼈다.
그런데 엔리크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쥬웰…… 나도 하나만 부탁해도 되느냐?”
“네?”
“네 데뷔탕트 때 약혼자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 말에 쥬웰은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졌다.
약혼자‘들’.
엔리크가 전무후무한 양다리 약혼을 언급하니 확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아, 그건…….”
뭐라 변명을 하려는 찰나, 엔리크가 고개를 저었다.
“약혼이든 파혼이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하여라. 솔직히 열 명쯤 약혼자를 만들고 그중 가장 쓸만한 놈을 간택해 골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
생각지 못한 발언이었다.
“물론, 누구든 너와 결혼하려면 내가 허락할 만한 놈이어야겠지만 말이다.”
엔리크는 왠지 모르게 무서운 음성으로 말하였다.
“다만, 내가 허락할 만한 놈이 세상에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떤 놈을 데려와도 네게 부족할 테니.”
“…….”
“어쨌든 그걸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 카발리에는 어떻게 할 거냐?”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왜?”
그러다 번뜩 눈치채고 엔리크에게 놀란 시선을 보냈다.
그는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네가 괜찮다면, 내가 네 데뷔탕트의 카발리에를 해도 되겠느냐?”
“……아버지?”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아버지가 카발리에라니.
그건 조금 주책이 아닌가요, 라는 얼굴이었다.
물론 엔리크는 웬만한 젊은 청년 못지않게 동안에다가 초절정 얼음 꽃미남이긴 하다. 그가 카발리에가 되면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조금 많이 주책…….’
그러나 엔리크는 꿋꿋이 변명했다.
“……말했듯, 어떤 놈한테 맡겨도 네게는 부족할 것 같아서 말이다.”
“…….”
“이건 다른 놈들의 잘못이다. 맡길만한 놈이 없으니 차라리 내가 하는 게 가장 좋겠지.”
“…….”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은 의지가 느껴져 쥬웰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후, 엔리크는 방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쥬웰은 두 명의 약혼자와 아버지 중에 카발리에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 * *
‘……어쨌든 지금 카발리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방금, 엔리크와 나눈 대화 중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이것이었다.
‘아피엘 왕녀가 정말 올까?’
아피엘 왕녀.
최근 로든 왕국에서 급속도로 부각하는 왕녀였다.
원래 존재감이 없다가 갑작스레 변모해 기존의 왕위 계승자를 밀어붙이고 있는 떠오르는 신성(新星).
마치…… 지금의 쥬웰처럼 말이다.
쥬웰이 그녀를 초청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쩌면, 아피엘 왕녀가 마왕 타란툴라일 수도 있어.’
쥬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왕 타란툴라는 로든 왕국의 왕궁에 있습니다.’
일전, 흑사병 사태 때 십마 카비우스에게 들었던 정보이다.
타란툴라가 로든 왕국 왕성에 있다면, 아피엘 왕녀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반드시 타란툴라를 만나야 해.’
쥬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황상 그녀를 악마에게 바친 인신 공양은 타란툴라가 주도했을 것이다.
그러니 타란툴라를 잡아 죽여야 했다.
물론 그녀는 타란툴라를 다른 원수처럼 증오하는 건 아니었다. 타란툴라는 그저 원수들에게 고용된 칼이었을 뿐이니까.
목숨을 거두는 것만으로 그때 일의 대가를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용건이 있어.’
쥬웰은 그 용건을 떠올렸다.
사실 타란툴라를 죽이는 일보다 이게 타란툴라를 만나야 하는 진정한 이유였다.
‘나머지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내려면 마왕 타란툴라를 잡는 게 필수야.’
그녀를 악마에게 바친 원수는 로튼 백작, 매리엇, 라디트, 플랑드나, 웰링턴 공작이 전부가 아니었다.
정체 모를 이가 몇 명 더 있었다.
그들을 알아낼 열쇠가 마왕 타란툴라에게 있었다.
‘하필 로든 왕국에 있어서 가보지를 못했지. 내가 가기에는 너무 멀었으니.’
지금 그녀는 가넷가의 계승을 두고 경쟁 중이다. 그러니 로든 왕국에 가는 건 가넷가를 완전히 손에 넣은 이후나 가능해 미루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마왕 타란툴라와 싸우기 꺼려졌으니까.’
놀라운 생각이었다.
마치 그녀가 마왕 타란툴라를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마왕 타란툴라에게 어느 정도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마왕 타란툴라와 싸우면 죽는 건 내가 될 가능성이 높아.’
쥬웰은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사실 마왕 타란툴라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다만 그녀는 마왕 타란툴라가 마탑주 라플 공작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힘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날 날 제물로 바친 공양 의식은 세상의 법칙을 송두리째 무시한 거니까.’
선한 이는 낙원으로, 악인은 지옥으로.
그게 세상의 절대적 법칙이다.
따라서 인신 공양을 당해도 영혼은 그 법칙에 따라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악마가 받을 수 있는 건 희생자의 ‘목숨’뿐. 당사자가 스스로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았는데 지옥에 떨어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낙원에 가야 할 내 영혼이 게헨나에 떨어졌지.’
그녀는 그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마왕 타란툴라는 어떻게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게 가능했단 말인가?
얼마나 강한 권능을 지니고 있기에?
‘지금 내가 가진 힘으로도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마왕 타란툴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그녀는 마왕 타란툴라와 부닥치는 게 꺼려졌다. 패배해 죽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해야 해. 나머지 원수를 알아내려면.’
쥬웰은 굳게 생각했다.
마왕 타란툴라와 싸우는 건 피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설사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해내야 했다.
문득 실없이 이런 생각이 났다.
‘내가 죽으면, 엔리크 자작이 슬퍼하겠지?’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 꼴을 보기 싫어서라도 쥬웰은 반드시 마왕 타란툴라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기로 다짐했다.
* * *
겨울 사교계 시즌은 두 개의 막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첫째는 프리 시즌이다.
각 가문에서 소규모로 티 파티나 연회 등을 열며 친목을 다지는 것이다.
그렇게 충분히 서로 교분을 나눈 후 본 막이 올라간다.
겨울 시즌의 클라이맥스, 대연회였다.
이때 성년이 된 영애들의 데뷔탕트가 있으며 수많은 낭만이 꽃피게 된다.
그러니 지금은 대연회 전 프리 시즌이었다.
마침 눈이 내렸다.
라인하르트 제국의 수도가 하얀 눈에 덮였다.
이제 막을 올린 겨울 사교계 시즌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수도 귀족들은 그 아름다움을 느긋하게 감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칼날이 드리운 것처럼 무거운 긴장감이 수도 귀족들 사이에 흘렀다.
쥬웰과 매리엇의 다툼 때문이었다.
원래 사교계에서 다툼은 흔하다.
치정, 이권 문제, 자존심 싸움 등.
귀족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수도 없었고, 그런 싸움들은 사교계를 즐겁게 달구어주는 화젯거리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느긋하게 즐기기엔 너무나 거인들의 싸움이었다.
수도의 귀족들은 이 싸움으로 인한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전전긍긍하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원래 두 분은 사이가 가까운 줄 알았는데.”
“어쨌든 조심해야 해요. 괜히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희생양이 되는 수가 있으니.”
자고로 고래가 싸움을 일으키면 정작 커다란 피해를 입는 건 싸움에 휘말린 피라미들이다.
밑의 귀족들은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될까 전전긍긍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런 불안감을 극도로 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귀족들은 혀를 차며 그 불쌍한 이들을 언급하였다.
“그나저나 참 불쌍하네요. 그 귀부인들도.”
“그러게요. 감히 가넷가의 초청을 거절하다니.”
바로 쥬웰의 초청을 거절한 귀부인들이었다.
귀족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쩔 수 없었겠죠. 지금껏 다이아 공작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온갖 특혜를 받아와 매리엇 공작 전하에게 거스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그래도 나라면 너무 무서울 것 같아요. 가넷이잖아요.”
가넷.
그 이름을 말한 귀부인은 무섭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가 그 귀부인들 입장이면, 정말 울고 싶을 거예요.”
다들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실제로 정확한 추측이었다.
쥬웰의 초청을 거절한 귀부인들은 지금 극도의 초조, 불안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가넷가가 대놓고 그들을 핍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교계의 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아주 ‘교양 없는’ 일로 치부하니까.
하지만 가넷 정도의 가문이라면 사교계의 터부를 피해 교묘하게 그들을 응징할 방법은 많았다.
“그런데 아직은 조용하네요?”
“그러게요. 당장 큰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사건 이후, 가넷가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저 다른 이들을 초청해 예정대로 데뷔 티 파티를 치르겠다는 이야기만 전해졌다.
“그러고 보니, 티 파티가 오늘이죠?”
“네, 맞아요.”
“궁금하네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아무래도 얼마 전 그런 일이 있었으니 무서운 분위기 아닐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쥬웰 남작님은 이전에도…… 성격이 보통은 아니셨잖아요. 요즘은 성녀로 추앙받긴 하지만.”
“가넷가의 봉신 가문 쪽 이야기를 들으니 달라지긴 하셨다지만, 무서운 건 이전보다 더 심해졌다고 하더라고요. 의회나 가문 회의에서 자기 남편들이 쥬웰 남작님과 눈빛도 마주하기 어려워한다고. 무서운 게 토른 공작 전하를 쏙 빼닮으셨대요.”
“토른 공작 전하를요? 그건…….”
귀부인들은 말을 삼켰다.
토른 공작은 제국에서 ‘괴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과 쏙 빼닮았다니?
귀부인들은 상상만으로도 두렵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편, 그렇게 사교계 귀족들의 두려움을 한 몸에 받는 쥬웰은 티 파티에서.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예의 바르게.
숭고한 성녀의 얼굴로 위장하여.
그렇게 본격적인 사교계 시즌이 시작되었다.
* * *
아까 떠들었던 이들의 이야기처럼, 사교계 귀족들은 쥬웰의 티 파티가 아주 긴장된 분위기일 거로 예상했다.
참석해야 하는 이들도 우거지상이었다.
‘왜 하필 중간에 끼인 처지가 되어서.’
초청받은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명확히 자각하고 있었다.
고래 싸움에 낀 피라미.
그게 딱 그들의 처지였다.
‘이곳이 가넷가.’
초청받은 귀부인들은 마치 요새 같은 가넷가의 부지로 들어오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가넷과 다이아.
둘 다 무섭지만, 둘 중 더 무서운 건 단연코 가넷이었다.
다이아의 힘은 금력.
반면, 가넷의 힘은 권력이다.
그러니 가넷이 마음먹으면 그들의 가문 따위 통째로 멸문시킬 수도 있었다.
‘제발, 아무 일 없이 티 파티가 끝났으면.’
그렇게 잔뜩 긴장하여 가넷의 티 파티장에 도착한 귀부인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환하고 따뜻한 미소의 쥬웰을 마주한 것이다.
쥬웰은 기품 있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눈이 와 길이 험한데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 네. 남작님. 초,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라니요. 저야말로 이렇게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훨씬 어리니 편하게 불러주셔도 됩니다.”
귀부인들은 어색한 얼굴을 하였다.
참고로 데뷔 티 파티는 앞으로 사교계 생활을 축하받는 자리인지라 또래 영애보다는 한 세대 선배격의 나이 많은 귀부인을 초청하는 게 전통이었다.
그러니 이들은 쥬웰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어찌 감히 쥬웰을 편하게 부르겠는가?
쥬웰이 한 말은 그저 예의 바른 사교적 멘트에 불과했다.
‘그래도 예상한 것과는 다른……?’
귀부인들은 손님을 맞는 쥬웰을 바라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전혀 고압적이지 않았다.
친근하고 부드럽고 배려가 있었으며 동시에 깊은 기품이 느껴졌다.
늘 남을 내려다보는 데 익숙한 여섯 공작가의 오만한 모습이 아닌, 진정 감탄스러운 ‘대귀족’다운 모습이었다.
동시에 따뜻한 성녀의 모습도 보였다.
쥬웰의 그런 모습은 티 파티 내내 이어졌다.
그런 쥬웰을 보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해 이런 생각을 하였다.
‘완전히 변했다는 소문이 정말이구나.’
‘매리엇 공작 전하와는 전혀 달라.’
매리엇은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따라서 사교계의 귀부인들은 매리엇과 접할 일이 아주 많았다.
참고로 매리엇은 사교계에서도 평소와 똑같이 오만한 태도였다.
아니, ‘오만’이란 단어는 매리엇의 태도를 무척이나 순화한 표현이었고, 매리엇은 사교계의 모두를 자신의 시녀처럼 대하였다.
귀부인들은 그런 매리엇을 보다가, 이렇게 배려심 넘치고 예의 바른 쥬웰을 보니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둘의 모습이 명확히 대비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쥬웰이 귀부인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귀부인들은 쥬웰이 보이는 친절함 속에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섞여 있음을 명확히 느끼고 있었다.
친절하지만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배려가 있지만 명확히 자신이 윗사람임을 보이는 태도였다.
그야말로 기품 있는 대귀족의 표본 같은 모습에 귀부인들은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대단해.’
‘역시 가넷.’
그렇게 한창 분위기가 좋을 때, 쥬웰이 불쑥 허를 찔렀다.
“오늘, 부인들 덕에 기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을 텐데 힘든 걸음 해주셔서 감사해요.”
귀부인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많은 어려움.
그녀와 매리엇 공작과의 다툼을 말하는 것이다.
뭐라 대답하기 어려운 이야기인지라 귀부인들은 어색한 얼굴만 하였다.
쥬웰은 차분히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어렵게 들을 것 없으세요. 그저 정말 감사해서 하는 이야기니. 저와 매리엇 공작 전하와의 불화에 굳이 부인들을 끼게 해 힘들게 할 생각도 없어요.”
그 말에 귀부인들은 놀란 눈을 하였다.
사실 그들은 오늘 잔뜩 각오하고 가넷가에 왔었다.
쥬웰이 그들에게 자신 밑에 서라고 강요하면 어떻게 할지.
만약 그렇게 되면 그들은 가넷과 다이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들은 가넷과 다이아 중 한쪽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것이다.
일반 귀족 입장에서 어마어마하게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피라미의 등이 터지게 되는 격이었다.
그런데 쥬웰이 그들의 입장을 배려해 굳이 선택할 필요 없다고 이야기해 준 것이다.
귀부인들은 진심으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쥬웰의 배려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만약 오늘 제 티 파티에 참석한 것 때문에 매리엇 공작께서 언짢아하시면 제게 따로 말씀을 주세요. 여러분을 초청한 건 저니 그 정도는 책임져 드려야겠지요.”
쥬웰은 싱긋 웃었다.
“아시다시피 우리 ‘충성’의 가넷은 친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거든요.”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가넷은 피아가 명확했다.
적에게는 가차 없지만, 가넷의 테두리 안이라 분류된 이는 확실히 챙겼다.
귀부인들은 크게 감사한 얼굴로 인사를 하였다.
“남작님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쥬웰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별말씀을요. 당연한 일인걸요. 그리고 여러분께 감사한 마음으로 한 가지 드릴 제안이 있어요.”
“제안이라면?”
귀부인들은 흠칫 긴장한 얼굴을 하였다.
직감적으로 지금 쥬웰이 꺼내는 말이 이번 티 파티의 메인 용건임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그 짐작은 맞았다.
쥬웰은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이들 귀부인을 불러 모은 거였다.
“제가 사교계에 처음 데뷔하니, 여러 불합리한 일이 많은 것 같아서요. 혹시나 억울하거나 속상한 일을 겪은 분이 있다면 제게 이야기해 주셔도 돼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 가넷이잖아요. 힘들어하는 분들을 도와줄 힘이 있으니 누구든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
귀부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어렴풋이 쥬웰의 의도를 깨달은 것이다.
지금 쥬웰의 제안은 단순한 선의가 아니었다.
사교계의 불합리한 일.
그건 모두 다이아 공작가와 연관된 일들이었다.
다이아 공작가는 누대에 걸쳐 사교계의 지배자로 군림하며 온갖 불합리를 자행해 왔으니까.
이 자리의 상당수는, 아니, 사교계의 상당수는 다이아 공작가 때문에 그런 불합리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귀부인 중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사 다소 불합리한 일을 겪었더라도 쥬웰이 말 한마디 했다고 그걸 입 밖에 꺼낼 만큼 순진하지 않았으니까.
쥬웰도 굳이 그들이 입을 열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쥬웰의 목표는 이들이 아니었다.
사실…… 그녀가 노리는 목표는 이 자리에서 단 한 명이었다.
쥬웰의 시선이 귀부인 중 한 명에게 향했다.
창백한 인상의 한 여인.
온갖 화려한 치장을 한 다른 귀부인들과 확연히 다른, 수수한 차림의 중년 귀부인이었다.
그 귀부인은 입술이 파리하게 질린 채 떨고 있었다.
쥬웰의 말에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넘어왔군.’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당장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윽고 파티 마무리 시간이 다가왔다.
“모두 조심히 돌아가세요. 눈에 마차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남작님.”
쥬웰은 가문의 마차에 오르는 귀부인들을 하나하나 직접 배웅해 주었다.
무려 여섯 공작가의 대귀족이 이렇게 아랫사람이 돌아가는 걸 챙기는 건 대단한 친절이었다.
귀부인들은 쥬웰에게 다시 한번 감탄하고, 차례차례 마차를 타고 가넷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아까 파리한 안색으로 떨던 귀부인만이 남았다.
‘역시 제일 마지막에 출발하는군.’
이렇게 파티가 한 번에 파했을 경우, 각자 가문으로 출발하는 것도 정해진 순서가 있었다.
가문의 위세, 나이 등을 고려해 윗사람부터 떠나는 것이다.
즉, 이 창백한 인상의 귀부인은 오늘 초청받은 이 중 가장 한미한 가문이란 뜻이었다.
“조심히 가세요, 린셀 부인.”
“……제 이름을 기억하시는군요.”
“힘들게 오늘 와주셨는데 당연하죠. 그리고 이전부터 린셀 남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어요.”
“저희 가문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린셀 부인의 눈동자에 무거운 어둠이 깃들었다.
린셀 남작가는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하급 귀족가다.
하지만 사교계에서는 아주 유명했다.
이유가 있었다.
참고로 린셀가에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비극’의 린셀가.
이게 사교계의 사람들이 린셀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쥬웰은 부인의 고통스러워하는 눈동자를 보고 가책을 느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세실 영애를 위해서 기도해 드릴게요.”
“……!”
린셀 부인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세실.
린셀 부인의 딸이었다.
행방불명된.
공식적으로 행방불명 처리이지만…… 세실이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사교계의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쉬쉬할 뿐.
“…….”
쥬웰이 딸을 언급하자 린셀 남작 부인의 눈동자가 하얗게 죽었다.
뚝,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마르고 마른, 이제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는 눈물이었다.
린셀 부인이 서슬 퍼렇게 말했다.
“……저와 제 아이를 능멸하시는 건가요? 아무리 당신이 가넷이라도 이런 무례는…….”
“아니요.”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전 그저 부인을 돕고 싶을 뿐이에요.”
“도움이라고요?”
“네, 아까 티 파티에서 말했듯, 제 힘을 이용해서요.”
“하.”
린셀 부인은 말라비틀어진 웃음을 흘렸다.
“물론 당신은 가넷이죠. 위대한 성녀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래도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는 건 불가능해요.”
쥬웰은 부정하지 않았다.
린셀 부인이 바라는 것.
딸이 돌아오는 것이다.
쥬웰도 그 바람을 들어주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한 가지 그녀의 힘으로 가능한 게 있었다.
“대신, 딸의 복수를 도와줄 수는 있죠.”
“……!”
린셀 부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쥬웰은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가련한 귀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악마가 유혹하듯 말했다.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매리엇에게?”
린셀 부인은 대답을 못 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쥬웰은 그녀가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복수의 유혹이 얼마나 커다란지 아니까.
이후, 쥬웰은 쉬지 못하고 곧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준비할 게 많으니까.’
그녀가 향한 곳은 굉장히 뜻밖의 장소였는데, 중앙 행정부 안에 딸린 감옥이었다.
“쥬웰 의원님을 뵙습니다.”
쥬웰을 알아본 행정부 관리들이 예를 올렸다.
참고로 현재 쥬웰은 가넷 공작령에 속한 남작이자, 제국 의회의 상급 의원이었다.
그래서 사람마다 그녀를 부르는 호칭도 제각각이었다.
가넷가 사람들은 이전처럼 아가씨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고, 사교계의 사람들은 작위인 남작으로, 행정부의 관리들은 그녀를 의원으로 불렀다.
“그래, 그자는 옥 안에 있는가? 얌전하고?”
“한창 난리를 피우다 이제 막 얌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내무 장관님께서 자신이 오기 전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곧 도착하실 겁니다.”
쥬웰은 팔짱을 꼈다.
‘아버지와 같이 들어가기는 싫은데.’
그녀는 엔리크 자작에게 부탁해서 한 인물의 뒤를 캐 감옥에 투옥해 달라 하였다.
질이 나쁜 인물이니, 엔리크는 딸이 혹시 나쁜 꼴이라도 볼까 걱정되어 함께 들어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무엇보다 별반 아름답지 않은 면회 장면이 될 터.
쥬웰은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가급적 엔리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나 혼자 들어가지.”
“하지만…….”
쥬웰은 빤히 관리를 바라보았다.
“들어간다고 했네.”
“……!”
관리의 얼굴이 하얘졌다.
‘무, 무슨 위압감이…….’
참고로, 관리들은 엔리크 자작을 대하기 어려워한다.
알고 보면 따뜻한 봄 같은 남자지만, 겉모습은 얼음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딸인 쥬웰이 보이는 위압감은 아버지 엔리크 자작보다 훨씬 심했다.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지그시 눈을 바라보는데, 뱀 앞에 선 쥐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쥬웰은 자신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했는지 관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괜찮네. 아버지 없이 단둘이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무엇보다 난 의회의 상급 의원이니, 제국에 죄를 지은 이를 조사할 의무와 권한이 있지 않은가?”
“……네.”
“설마 내가 어리다고 얕보는 건 아니겠지?”
“저, 절대로 아닙니다!”
관리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그가 10년 안에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무서운 인물을 꼽으면 쥬웰이 당당히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그리고 그건 상당수 관리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딱히 쥬웰이 해를 끼치는 건 아니지만 관리들은 쥬웰을 극도로 어려워했다. 은연중 흘러나오는 위압감 때문이었다.
‘작은 거인.’
관리는 행정부에서 떠도는 쥬웰의 별명 하나를 떠올렸다.
‘거인’ 토른 공작과 똑 닮았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어쨌든 쥬웰은 피식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여기, 옆에 듬직한 호위 기사도 함께 있으니 말이야.”
듬직한 호위 기사.
“그치, 리샤크?”
장난스럽게 물었는데, 대답이 다소 이상했다.
“……네, 아가씨.”
“……?”
한 발짝 느릿하게 대답이 들려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쥬웰은 왜인지 리샤크가 최근 들어 조용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상한 기미가 보이는 건 아닌데.’
평소랑 비슷한 분위기인데, 말수만 살짝 줄었다.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는데 확실하지는 않았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나중에 물어나 봐야겠네.’
그렇게 생각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정식 감옥은 아니었다.
재판으로 죄가 확정되기 전, 용의자들이 임시로 머물며 조사를 받는 감옥이었다.
그래도 감옥은 감옥인지라 몇 차례의 잠금장치를 지나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끼익.
철문이 열렸고, 탁자와 의자만 놓인 돌벽의 삭막한 방이 나타났다.
그리고 손이 뒤로 묶인 남자가 의자에 삐뚜름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쥬웰은 남자를 불렀다.
“오랜만이네요.”
남자는 쥬웰의 음성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상당한 미형이었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쾌활한 느낌이었다. 쉽게 남의 호감을 살 호인형의 인상이지만 자세히 보면 눈매가 뱀처럼 가늘게 찢어져 있었다.
앞으로는 친근하게 밝게 웃으면서, 등 뒤로는 칼을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상이었다.
실제로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남자는 굉장히 유명한 이였으니까.
비열함으로.
쥬웰은 남자의 이름을 말하였다.
“다카펠 오라버니.”
다카펠.
다이아 공작가의 인물이었다.
매리엇의 배다른 오라비였으며, 다이아 공작가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이였다.
당연히 이전 쥬웰과도 안면이 있었다.
“뭐야? 이게 누구야?”
남자, 다카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이아를 박은 듯한 투명한 은빛 보석안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조용히 술 잘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내무부 기사들이 들이닥쳐 끌고 와 난데없이 탈세, 비리, 횡령 혐의를 조사해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더니 쥬웰, 너 때문이었냐?”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아버지께 부탁했어요.”
다카펠은 인상을 찌푸렸다.
참고로 다카펠은 한때 매리엇과 후계 다툼을 했을 정도로 무척이나 머리가 좋은 이.
단번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듯했다.
“우리 가주 때문에 화난 건 이해하는데, 뭔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아니야? 너에게 시비를 건 건 가주인 내 누이 매리엇이지, 내가 아니라고. 왜 가만히 있는 나를…….”
“당신이 이용하기 좋으니까요.”
“……뭐?”
다카펠 남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쥬웰은 엔리크 자작에게 미리 건네받은 서류를 꺼내 내용을 읊었다.
“조사해 보니 다이아 공작가의 힘을 이용해 벌인 죄가 참 많더라고요. 뭐,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겠죠? 탈세, 횡령 같은 금전적인 죄는 차치하고라도 특히, 이거 술에 취해 저지른 실수들은 용서가 안 되는 것 같은데요?”
“……그게 뭐가 문제라고. 그때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내가 죽인 놈은 평민이었어. 그리고 그냥 주먹질 몇 번 한 거지 일부러 죽이려 한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덮기 위해 푼돈만 손에 쥐여 주고 일가족을 수도에서 내쫓았죠?”
“……그래. 그래서 뭐?”
다카펠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죄책감 따위는 눈곱만큼도 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
귀족 중에는 평민들의 목숨을 벌레의 것처럼 여기는 이가 많았으니까.
특히 치외 법권이 적용되는 여섯 공작가의 인물은 ‘고작’ 평민을 죽인 일로 처벌받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난 다이아야. 그런 일 따위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쥬웰도 고작 이런 일로 상대를 압박하려 한 건 아니었다.
이건 그저 확인이었다.
상대가 여전히 그녀가 이전에 알던 대로 인간 이하의 종자가 맞는지 알아보려는 확인.
‘만약 이전의 일들을 뉘우치고 있었으면 조금은 정중히 대할까 싶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네.’
그런 마음으로 쥬웰은 다음 죄목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이건 이야기가 다르겠죠. 다이아 소속의 은행들 지분을 조작해 빼돌리고 있던데.”
“……!”
“다이아의 가법상 이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라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다카펠의 얼굴이 시체처럼 하얘졌다.
쥬웰의 말이 맞았다.
다른 모든 죄를 합친 것보다 방금 하나의 죄의 무게가 더 무거웠다.
다이아 소속 은행들은 다이아 공작가를 지탱하는 뿌리였다.
그런 은행들의 지분을 빼돌리는 행위는 반역과 똑같이 여겨진다.
변명할 여지 없이 사형이었다.
“그, 그걸 어떻게? 와, 완벽히 처리했는데?”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잘난 아버지를 둔 덕에요?”
“뭐, 뭐?”
쥬웰은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나도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유능할 줄은 몰랐지.’
그렇다.
이건 모두 엔리크가 알아낸 것이었다.
엔리크는 쥬웰의 부탁을 받고 모든 힘을 동원해 다카펠의 뒤를 캤다.
그 조사 과정 중 보인 집요함은 쥬웰도 놀랄 정도였다.
딸이 부탁한 일이니까. 딸을 돕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다.
심지어 엔리크는 단순히 다카펠의 뒤를 캐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다이아 공작가의 상단 및 은행도 조사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엔리크의 넓은 인맥 덕분이었다.
‘설마 아버지의 인맥이 다이아 공작가 안에도 뻗쳐 있을 줄은.’
엔리크는 좋은 성품의 소유자답게 두루두루 발이 넓었고, 다이아 공작가 내에도 긴밀한 끈이 있었다.
덕분에 수상쩍은 거래 내역을 확인하고 뒤를 파악해 다카펠의 잘못을 알아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다카펠이 으르렁거렸다.
“복종.”
“……뭐?”
쥬웰은 건너편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오만하게 말했다. 경어도 집어치웠다.
“내가 오라버니에게 바라는 건 복종이야. 방금 말한 죄목은 당신에게 걸 목줄이고.”
“……!”
다카펠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쥬웰과 눈을 마주치고 흠칫하였다.
쥬웰이 진심임을 깨달은 것이다.
“복종이라니…… 도대체 무슨.”
“당신도 매리엇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
“……!”
뜻밖의 이야기에 다카펠은 흠칫하였다.
“매리엇이 오라버니의 모든 걸 빼앗아 갔잖아. 원래 다이아 공작가는 오라버니 거였는데.”
다카펠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이아가는 다음 세대의 아이 중 가장 상재가 뛰어난 이를 후계로 삼는다.
그리고 다카펠과 매리엇은 경쟁 상대였다.
인격 면에서야…… 둘 다 기준 미달이었고, 둘 중 더 상재가 뛰어난 이를 꼽자면 사실 다카펠 쪽이었다.
다카펠은 불법적이고 비열한 술수로 돈을 버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승기를 잡기 직전까지 갔는데, 마지막에 역전되어 패배했다.
“……매리엇을 잡기 위해 날 이용하려는 거군. 하지만 난 별달리 너를 도울 만한 힘이 없는데?”
물론 그는 다이아가의 중책을 맡고 있다.
아직 그를 따르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매리엇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건 상관없어. 오라버니는 내게 복종을 맹세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역할을 하는 거니.”
다카펠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자꾸 웬 복종을…….”
“못 알아듣겠어? 돈 버는 일 말고, 정치적인 머리는 모자란 건가? 오라버니가 내게 복종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정확히는 가넷의 개가 되는 거지.”
여전히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고 더 설명을 해주었다.
“오라버니는 가넷이 다이아에 풀어놓은 사냥개가 되는 거야.”
“……!”
“가넷의 힘을 등에 업고, 매리엇이 빈틈을 보이면 언제든 물어뜯을 수 있는 사냥개.”
다카펠의 얼굴이 변했다.
“그러니까…… 가넷의 개가 되어 매리엇을 견제하라고?”
“그래, 정확히는 시늉만 하고 있으면 돼. 어차피 오라버니가 매리엇을 물어뜯을 역량이 안 되는 건 알고 있어.”
쥬웰은 차분히 말했다.
“가문 내에서 가넷을 등에 업은 사냥개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리엇에게는 큰 위협이 될 테니까.”
다카펠은 침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쥬웰은 그를 다이아 내에서 매리엇을 견제할 패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확실히 위협적인 계략이었다.
비록 후계 경쟁에서 탈락했지만, 다이아 공작가에서 그의 입지는 작지 않았다.
그런데 가넷의 힘마저 업는다?
매리엇은 큰 위협을 느낄 것이다.
여차할 경우, 그가 가넷가의 힘을 업고 공작위를 뒤엎으려 들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내게 다이아 공작위를 줄 건가?”
쥬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카펠은 아주 이기적이고 비열한 자다.
협박만으로는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보상도 제시해야 했다.
“그래, 내 말에 끝까지 순순히 복종하면, 당신에게 다이아 공작가를 주겠어.”
다만, 그녀는 한 가지 말을 생략하였다.
산산이 무너진 것도 괜찮다면.
쥬웰은 다이아 공작가를 완벽히 몰락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니 다카펠이 물려받을 다이아 공작가는 잔해밖에 남지 않은 것이리라.
“……나쁘진 않군. 하지만 확실한 보증이 필요해.”
“보증?”
“그래, 이런 거래를 어떻게 네 말만 믿고 진행하지?”
다카펠이 상인답게 증거를 요구했다.
“어떤 보증을 원하지?”
다카펠이 잠시 물끄러미 쥬웰을 보았다.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의 시선에 옆에 서 있던 리샤크가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다카펠이 상상도 못 했던 말을 하였다.
“바로 너.”
“……뭐?”
“쥬웰, 너와 결혼하게 해주면 믿을 수 있겠지. 내가 정말 차기 다이아 공작이 되면, 나와 결혼하는 것도 네게 나쁘지 않은 것 아닌가?”
공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쥬웰은 화가 나기보다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정신 나간 놈이?’
“미쳤군.”
하지만 다카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망할 혀를 놀렸다.
“약혼자들도 있으니 결혼은 조금 과한 이야기인가? 그러면 네 몸만으로도 괜찮아. 그 정도 성의면 네가 하는 말을 믿어주지.”
다카펠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음심이 떠올랐다.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다이아 공작가 내부에 매리엇을 견제하는 이를 심어두려는 쥬웰의 계획에 적합한 이가 다카펠만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여러 후보 중 굳이 다카펠을 지목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진짜 개였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대해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는.
그런데 지금 보니 개만도 못한 놈이었다. 저런 놈을 개라고 하면, 개한테 미안했다.
‘일단 버릇 먼저 고쳐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번개같이 먼저 움직인 이가 있었다.
퍼억!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샤크였다!
그가 주먹을 들어 다카펠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다.
그냥 친 게 아니었다.
정말 진심을 다해 후려쳤다.
다카펠은 난데없는 봉변에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으아아악!”
다카펠이 끔찍한 고통에 바둥거렸다.
하지만 리샤크는 거기서 멈추려 하지 않았다.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가, 감히! 내, 내가 누군지 알고 일개 기사 따위가?!”
다카펠은 으름장을 놓다가 리샤크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입을 우뚝 다물었다.
다소곳한 평소의 리샤크가 아니었다.
눈동자가 돌아가 희번덕거리며 번뜩이고 있었다.
리샤크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감히, 아가씨께 그따위 모욕을…….
“히, 히끅.”
다카펠은 딸꾹질하였다.
느낀 것이다.
상대가 진심임을.
“사, 살려…….”
리샤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주먹을 날리려다가 흠칫하여 쥬웰의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 나서도 괜찮은지 살핀 것이다.
물론 쥬웰은 리샤크를 말리지 않았다.
“뭐 해? 하던 거 마저 하지 않고.”
‘잘됐네. 내가 직접 손쓰기 귀찮았는데.’
쥬웰은 한마디만 덧붙였다.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만 마.”
리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장갑을 벗었다.
“장갑은 왜 벗어?”
리샤크는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아가씨가 선물해 준 거라서. 더럽히기 싫어서요.”
“……장갑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건데?”
“그래도 싫어요.”
심지어 리샤크는 크라바트, 망토 등 쥬웰이 선물로 준 건 모두 벗어 곱게 한 곳에 개어놓았다.
리샤크는 쥬웰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런 놈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튀면 안 되잖아요. 아가씨가 주신 건데.”
“……그래.”
쥬웰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