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2-3 옵시디언 패밀리 (2)
Chapter 2-4 구원자 (1)
Chapter 2-3 옵시디언 패밀리 (2)
애초에 기대하는 게 없으니 서운하고 말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답했다.
“할아버지가 절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걸요. 사실…… 아주 살짝 서운하긴 했지만 가주로서 당연하신 거죠.”
“그렇게 이해해 주니 고맙구나.”
“대신, 앞으로는 쥬웰한테 더 잘해주실 거죠?”
“더? 클클, 그래. 당연하지. 이렇게 사랑스러운 공주님한테 어떻게 더 잘해주지 않을꼬?”
그런 두 조손의 정겨운 대화를 지켜보던 가신들이 질린 얼굴을 하였다.
괴물 토른 공작에 어울리는 괴물 손녀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쥬웰. 이번에 어떤 선물을 받고 싶으냐?”
“선물이요?”
“그래, 흑사병을 해결해 가넷가의 위신을 높이지 않았느냐? 해충 같은 놈들도 찾아 박멸하고. 그러니 이 할아비한테 선물을 받아야지.”
쥬웰은 눈빛을 빛냈다.
선물.
그러지 않아도 토른 공작이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렸다.
“음, 원하는 게 있긴 한데. 말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조금 무리한 부탁이어서.”
“무리? 이 할아비가? 쥬웰, 너도 알다시피 이 할아비는 아주 힘이 세고 부자란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제가 하려는 부탁은 들어주기 힘들 수도 있어요.”
토른 공작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우리 요정 공주님이 어떤 선물을 바라서 이러는 것일꼬?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다이아 반지? 아니면, 오팔족의 보석안?”
오팔족의 보석안.
말 그대로 오팔족의 눈알을 파내 특수 처리한 후 조각해 만든 보석을 뜻한다.
‘세상에는 보석안을 타고나는 일족들이 여럿 있으니까.’
가넷 공작가를 비롯해 여섯 공작가, 황가가 그런 보석안의 일족이다.
그리고 그들 말고도 다른 일족이 여럿 더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보석안의 일족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보석안을 노리는 사냥꾼들 때문이었다.
산 채로 보석안을 빼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
예컨대 가넷 공작가 일원의 눈을 빼내 특수 처리하면 일반 가넷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아름다운 가넷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반드시 산 채로 빼내야 한다는 것이다. 심장이 멈추면 보석안은 급속도로 빛을 잃는다.
그래서 힘이 없는 보석안의 일족들은 인간 사냥꾼들에게 사로잡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오팔족은 지금껏 살아남은 보석안의 일족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인간이 아니라, 보석안을 지닌 요정족이었다.
오팔족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팔족은 요정 왕국의 요정 왕족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5년 전 멸망했다.
요정 왕국이 멸망하며 그들도 함께 멸망한 것이다.
인간들은 요정 왕국을 불태우고, 오팔 왕족의 보석안을 모두 빼내 보석으로 만들어 전리품으로 삼았다.
요정족, 그것도 멸망한 왕족의 눈알을 빼낸 보석이란 특수성이 더해져 오팔족의 보석안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으로 여겨진다.
“음. 제가 원하는 선물은 그것보다 훨씬 비싸요.”
“오팔족의 보석안보다 더 비싸다고?”
“네, 비교도 안 되게요. 그래서 할아버지도 무리일지 모르겠다고 한 거예요.”
토른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요정들의 왕족, 오팔족의 보석안보다 비싼 보물은 없다.
도대체 무슨 선물을 바라길래?
재판정에 남아 있던 다른 이들도 궁금하단 얼굴을 하였다.
다들 해산하지 않고 아닌 척 쥬웰과 토른 공작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할아버지, 한 달 뒤가 무슨 날인지 아세요?”
“당연히 알지. 우리 공주님이 사교계에 데뷔하는 날 아니냐?”
한 달 뒤.
겨울 사교 시즌이 시작한다.
그때, 쥬웰은 열여덟 살 성년이 되어 사교계에 데뷔할 것이다.
“제가 바라는 선물은 아주 아주 멋진 데뷔탕트를 하는 거예요. 지금껏 제국 역사상 어떤 영애와도 비교되지 않게 가장 멋지고 의미 있게.”
그 말에 사람들은 의외란 얼굴을 하였다.
저 쥬웰이 저런 허영(?) 찬 부탁을 하다니?
지금껏 보인 쥬웰의 대단한 모습답지 않은 부탁이었다.
토른 공작도 마찬가지 마음인지 살짝 실망스러운 어조로 답하였다.
“흐음. 그렇지 않아도 네 데뷔탕트는 아주 성대하게 치를 것이다. 다이아 공작가의 매리엇 공작도 네 데뷔탕트를 후원한다니, 아주 화려한 데뷔탕트가 될…….”
“아니, 전 단순히 화려한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쥬웰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반짝반짝 화려한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전 그런 겉껍데기 같은 데뷔탕트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아주 아주 의미 있는 데뷔탕트를 원해요.”
“의미 있는?”
토른 공작은 그제야 쥬웰이 한 말의 행간을 짚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이냐?”
쥬웰은 토른 공작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곳 법정은 저택 별관의 고층에 있어 창밖으로 수도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제 데뷔탕트를 임시 국경일로 지정해 주세요.”
“……!”
“전 제 데뷔탕트가 온 제국에 널리 퍼지길 바라요. 그래서 온 제국 백성들이 제 이름을 높여 부르며 제 성년을 축하하고 칭송하기를 바라요.”
장내가 조용해졌다.
성년식을 임시 국경일로 지정해 달라니.
어마어마한 요구였다.
“그건…….”
토른 공작이 곤란한 얼굴을 하였다.
그의 권력이면 임시 국경일 지정 자체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고작 손녀의 성년식을 축하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하면 그의 위엄이 훼손된다.
“이건,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넷가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일이에요.”
“가넷가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고?”
“네, 백성들에게 제 성녀로서의 명성을 다시 한번 되뇌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 명성이 올라감과 더불어 가넷가의 위엄도 덩달아 올라가게 될 거예요.”
토른 공작은 쥬웰의 말을 알아들었다.
지금 쥬웰은 자신의 데뷔탕트를 단순한 성년식이 아닌, 성녀로서 그녀의 숭고함을 칭송하는 기회로 만들자는 것이다.
위대한 성인(聖人)의 탄신 축일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데뷔탕트를 국경일로 지정한다고 백성들이 네가 원하는 반응을 보인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백성들의 반감을 살 수도 있어.”
데뷔탕트 및 겨울 사교 시즌은 귀족들만의 축제다.
수많은 백성이 추위에 떨며 고통받을 때 귀족들은 호화로운 연회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평민들은 데뷔탕트를 국경일로 삼는 데 반감을 보일 수 있다.
“그렇죠. 그러니, 할아버지께서 힘을 써주세요.”
“응?”
쥬웰은 다시 사랑스러운 얼굴로 토른 공작의 팔에 매달렸다.
“제 데뷔탕트가 있기 전 흑사병이 휩쓸고 간 바셋 성에 구휼을 베풀어주고, 새로 생긴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해 주세요. 그리고 수도에는 축제를 열어주세요.”
“구휼과 축제를?”
“네, 꼭 제 이름으로 하지 않아도 돼요. 가넷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위로해 주세요. 그러면 추위와 흑사병의 공포에 지쳤던 백성들은 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가넷가의 이름도 함께 높여 칭송할 거예요.”
토른 공작은 감탄하였다.
구휼과 축제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자니.
훌륭한 계책이었다.
구휼을 베풀고 축제를 연 토른 공작과 가넷가의 명성은 크게 올라가리라.
‘물론, 가장 큰 이익을 볼 건 이 아이겠지만.’
토른 공작은 가느다란 눈으로 손녀를 바라보았다.
이 일로 가장 큰 수혜를 볼 이는 쥬웰이다.
가넷가의 이름으로 구휼한다고 해도, 결국 백성들은 그녀의 이름을 가장 높여 칭송할 것이다.
그녀의 명성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으리라.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쥬웰의 힘, 권력이 될 것이다.
‘도대체 이 아이는…….’
토른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는 인정했다.
그의 손녀는 괴물이었다.
사랑스러운 얼굴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꽈리를 틀고 있었다.
“그러면 제 부탁을 들어주실 건가요?”
토른 공작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워낙 커다란 일이었으니까.
지출도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토른 공작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하자꾸나.”
만약 단순히 쥬웰에게만 이득이 될 일이면 토른 공작은 이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영악하게 가넷가의 이득을 함께 거론했다.
확실히 가넷가에도 커다란 이득이 될 계획이었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감사해요!”
쥬웰은 활짝 웃으며 토른 공작의 품에 다시 안겼다.
한편,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가신들은 그런 쥬웰의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 재판 때 두 봉신과 로튼 백작을 궁지에 몰았던 것부터 토른 공작을 설득해 백성들의 민심을 얻으려는 계획까지.
쥬웰이 보인 어마어마한 모습에 경악한 것이다.
그들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쥬웰은 뛰어났다. 전율이 일 정도였다.
일부 토른 공작과 비슷한 연배의 노가신들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마치 토른 공작 전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 아닌가?’
아니, 저 위대한 거인 토른 공작조차 어린 시절에 저 정도로 뛰어나진 않았던 것 같다.
순간, 가신들의 머릿속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로튼 백작님과는 비교할 수가 없어.’
로튼 백작은 최근 뛰어난 모습을 보이긴커녕, 거듭 실책만 저지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오늘은 여러 가신의 신뢰를 저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둘의 모습이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앞으로 후계 구도는 어떻게?’
수많은 이가 그런 의문을 품었다.
그렇게 여러모로 커다란 파란이 있었던 재판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 재판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가넷가에 커다란 파장을 끼치게 되었다.
첫째, 로튼 백작이 측근들에게 보인 추한 모습 때문에 가신들의 신뢰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번 한 번의 일로 가신들이 등을 돌린 건 아니다. 여전히 가신들은 로튼 백작을 따랐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분명한 금이 갔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깨져 나갈지 모를 균열이다.
그리고 둘째, 쥬웰은 단순히 가주의 총애받는 손녀를 넘어 본격적인 후계 후보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로튼 백작의 거듭된 실책과 쥬웰의 부상으로 모두가 깨닫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변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무시하기에는 너무 거친 돌풍이었다.
가넷가의 모든 이가 쥬웰의 행보를 주목하게 되었다.
제국 제일 권세의 가문.
가넷 공작가가 보이지 않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성공적으로 뜻을 이룬 쥬웰은.
“……괜찮다니까요. 이제는 다 나았어요.”
방에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앞에서 아버지, 냉미남 엔리크가 한없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바셋 성에서 열병이 심했다고 들었다. 아직도 미열이 남아 있어. 당분간 절대로 침대에서 내려오면 안 된다.”
엔리크는 쥬웰의 이마를 손으로 어루만지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미세한 열이 남아 있었다.
실제로 쥬웰은 아직 몸이 다 회복하지 않았다.
‘……크게 앓긴 했으니까.’
더구나 몸이 다 낫길 기다리지 않고 마차를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해 다시 탈이 난 것 같다.
‘그래도 마차를 타고 오면서 강아지의 성력을 잔뜩 받았는데,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니. 이 몸. 왜 이렇게 병약한 거야.’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잔병치레가 많은 건 상관없다.
그녀는 몸의 고통으로 괴로움을 느끼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프면 몸을 움직이기 불편해지니 그건 곤란했다.
그리고 더욱 곤란한 것 하나.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엔리크는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붉은 눈이 일그러져 있었다.
딸의 아픔을 속상해하고 있었다.
어색한 마음이 들어 쥬웰은 일부러 퉁명하게 말했다.
“감기 기운 정도예요.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괜히 호들갑 떨지 마세요.”
“호들갑이 아니다.”
엔리크는 딱딱하게 말했다.
“네가 아픈데. 어떻게 그걸 호들갑이라고 하느냐?”
“…….”
“……네가 가는 걸 어떻게라도 말렸어야 했는데. 하아.”
엔리크의 붉은 눈이 괴로움으로 물들었다.
선명한 부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팠으면 하는 듯했다. 실제로 저 엔리크라면, 할 수만 있다면 딸 대신 자신이 아프길 바랄 것이다.
욱신.
쥬웰은 다시금 가슴이 아려왔다.
‘……내가 진짜 쥬웰이었다면.’
순간, 얼핏 그런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엔리크 자작이 그녀의 진짜 아버지였다면.
그러면 마음 편히 그의 부정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이룰 수 없는 바람이고, 의미 없고, 쓸데없는 생각이다.
괜히 마음만 더욱 심란해져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엔리크 자작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이 한 번의 맞잡음만으로도 엔리크 자작이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쥬웰.”
“……네, 아버지.”
“하나만 약속해 주겠느냐?”
엔리크 자작의 붉은 보석안이 쥬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네가 어떤 길을 가든 네 뒤를 지키고 지지할 것이다. 그게 어떤 길이라도 말이다.”
“…….”
“대신 아프지 말아라.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절대로 아프면 안 돼. 그것 하나만 약속해 주겠느냐?”
쥬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약속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냥, 거짓말로 약속하면 되잖아.’
하지만 왜일까?
그러면 되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탁 막힌 듯,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가슴의 욱신거림이 미친 듯 커졌다.
다행히 엔리크 자작은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쥬웰이 대답을 피한다고 생각하고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렇게 끝맺었다.
“이만 돌아가 보마. 푹 쉬어라.”
그리고 엔리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하였다.
“……추워요.”
“뭐라고?”
“잠깐만, 안아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추워서.”
엔리크 자작의 눈이 커졌다.
처음 듣는 딸의 애정 어린 부탁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쥬웰은 아차, 하였다.
충동적으로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해버렸다.
‘내가 왜 이런 부탁을? 미쳤지.’
크게 후회하고는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따뜻한 그림자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덮었다.
엔리크 자작이었다.
“얼마든지.”
그가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두근.
두근.
쥬웰의 심장이 뛰었다.
이전 삶,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에게 안겨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안기는 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아버지의 품은 생각보다 더 따뜻하고, 포근했다.
엔리크 자작이 그녀의 진짜 아버지가 아님에도 말이다.
‘……모르겠어.’
쥬웰은 눈을 감았다.
‘정말 모르겠어.’
그녀는 자신이 옳지 못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마음 편히 이 사랑을 받을 수 없음에도, 자꾸만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지금껏 힘들었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답을 내지 못하고, 쥬웰은 엔리크 자작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제 괜찮아요.”
엔리크 자작은 아쉽다는 얼굴을 하였다.
“더 있어도 된단다.”
“이제 안 추워요.”
쥬웰은 민망함에 더욱 딱딱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괜히 시선을 마주하기 곤란해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버지께 부탁이 있어요.”
“무엇이든 말하거라.”
“절 대신해 가신들과 접촉해 주세요.”
“……!”
엔리크 자작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쥬웰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후계 다툼에 가신들의 지지는 필수야. 이 문제는 엔리크 자작에게 맡기는 게 좋겠지.’
쥬웰은 자신이 지닌 단점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리다.
이건 후계 다툼에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가신들은 한참이나 어린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길 꺼릴 것이다.
하지만 엔리크 자작이 도와주면 어떨까?
그가 그녀의 지지자가 되어 나서준다면, 훨씬 가신들의 마음을 포섭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하마.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기거라.”
“감사해요.”
“대신, 나도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네?”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무언가 심각한 용건인지, 엔리크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아까 가주님께 말하였던 축제는 취소하면 안 되겠냐?”
“취소라고요?”
쥬웰은 놀란 얼굴을 하였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건…… 왜 그러시죠?”
“최근, 수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
쥬웰은 흠칫하였다.
“살인 사건이요?”
엔리크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파이어 공작가의 봉신, 램필드 자작이 살해당했다.”
쥬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램필드 자작.
최상급 기사인 마스터 나이츠로 그녀의 원수인 라디트의 최측근이었다.
‘마스터 나이츠가 살해당하다니? 범인이 누구길래?’
마스터 나이츠.
오라를 다루는 최강급의 기사를 일컫는 존경의 칭호다.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마스터 나이츠는 쉰 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살해당하다니?
“범인은 아직 모르는 거죠?”
“그래. 수법이 잔인해 원한 관계로 인한 살인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 조사 중이다.”
엔리크 자작이 걱정스레 말했다.
“그래서 혹시나 네가 위험할까 괜히 걱정되는구나. 축제가 벌어지면 거리가 더욱 혼란해지니 말이다.”
쥬웰은 엔리크 자작의 걱정을 이해했다.
이번 축제는 그녀가 주인공이다. 가넷 공작가의 이름으로 개최할 거지만 백성들 모두가 성녀인 그녀를 주인공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거리에 나서 백성들과 함께해야 한다.
엔리크 자작은 축제의 혼란 속에서 쥬웰이 흉악범에게 당하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것이다.
‘기우는.’
쥬웰은 피식 웃었다.
이번 사건은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일 것이다.
그러니 흉악범이 그녀를 노릴 리도 없고, 설사 노린다고 해도 그녀가 위험해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범인이 유스넨, 마탑주 라플 공작, 마왕 타란툴라, 검제. 이 네 명 중 하나가 아닌 한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답해주었다.
“축제 때 최대한 조심할게요.”
“……예정대로 진행하려는구나.”
“이미 가주님께 꺼낸 이야기니 무를 수는 없어요. 그리고 제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이번 축제를 통해 그녀는 커다란 명성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명성은 가넷가를 얻는 데 꼭 필요했다.
‘그뿐만이 아니지.’
쥬웰은 눈빛을 낮게 가라앉혔다.
‘이 축제는 전야제야. 성공적인 데뷔탕트를 위한.’
데뷔탕트.
그녀는 단순히 명성만을 얻기 위해 토른 공작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게 아니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바로 복수.
그녀는 데뷔탕트 때 복수의 한 걸음을 더 내디딜 것이다.
그녀의 데뷔탕트는 아주아주 화려하고, 끔찍한 절망이 함께하게 될 것이다.
축제는 그걸 위한 전야제였다.
“대신 조심할게요. 리샤크가 있잖아요. 딱 옆에 붙어 있을게요.”
참고로 리샤크도 마스터 나이츠다. 그것도 제국 전체로 봐도 손꼽는 강력한 마스터 나이츠였다.
엔리크 자작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걸 알기에 더는 강요하지 못했다.
이후 엔리크 자작은 돌아갔고, 이번엔 룬이 와서 그녀를 귀찮게 했다.
“아가씨,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룬이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와 쥬웰을 품 안에 안았다.
쥬웰은 룬의 품 안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잘 지냈지?”
“네, 네. 소식 전해 들었어요. 저 아가씨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너무 존경해요!”
글쎄.
그녀가 바셋 지방에서 한 일은 별로 존경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끔찍했지.
하지만 별말 안 하고, 안긴 품 밖으로 손을 빼내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러 번 말했듯 쥬웰은 룬보다 체구가 훨씬 작다. 룬이 크다기보다는 쥬웰이 워낙 작은 체구였다.
그래서 조그만 쥬웰이 룬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어색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동시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이후, 룬은 쥬웰의 얼굴을 살피더니 울상을 지었다.
“아가씨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 얼마나 고생하셨으면.”
“괜찮단다.”
“안 괜찮아요! 제가 먹을 걸 내올게요. 당분간은 꼭 잘 먹고, 잘 쉬기만 하세요. 침대에서는 나오지 말고요! 알았죠?”
‘그렇게까지 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쥬웰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엔리크 자작과 룬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으니 싫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전 삶, 에스텔레 때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도 반겨주는 이가 없었다.
‘가끔,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먹을 걸 좀 가져다줄래?”
“네! 그렇지 않아도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들로 다 준비해 놓으라고 했어요!”
쥬웰은 음식 중에는 등심 스테이크, 디저트류 중에는 딸기가 들어간 생크림 케이크, 딸기 아이스크림을 제일 좋아했다.
주방장이 솜씨를 부린 최고급 스테이크로 먼저 식사를 한 후 삼단 트레이에 온갖 화려한 딸기 디저트가 등장했다.
쥬웰은 느긋하게 온갖 딸기가 들어간 디저트를 맛보았다.
그렇게 맛있는 딸기 디저트를 먹으며 오래간만에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거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들어온 인물을 보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오라버니?”
해밀턴이었다!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웬일이지?’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지금껏 해밀턴은 그녀로부터 도망가기에 바빴지, 직접 찾아온 적은 없었다.
“주…… 주인…… 아니, 쥬웰.”
해밀턴은 어버버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같이 있던 룬이 슬그머니 빠져주었지만, 여전히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왜?”
“……오늘 같이 자면 안 돼요?”
“뭐?”
쥬웰은 그녀답지 않게 얼빠진 얼굴을 하였다.
지금 뭐라고?
“……나랑 자자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도 쥬웰 님 싫거든요!”
해밀턴의 얼굴이 폭발할 듯 붉어졌다.
그는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께 맞기 싫어서요.”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해밀턴이 왜 이러는지 이해한 것이다.
‘하긴. 로튼 백작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
오늘 잔뜩 모멸을 겪었으니, 해밀턴에게 분풀이할 게 분명했다.
분명 밤에 찾아와 곤죽을 만들 테니 도망쳐 온 것이다.
“…….”
“……그, 그게……! 전 바닥에서 자도 되니까…… 그냥 방에 있을 수만 있게……. 그, 그…… 안 되는 것 알지만. 그게…… 혹시나 해서…… 아, 안 되겠죠? 죄, 죄송해요.”
해밀턴은 횡설수설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부탁이라 여긴 것이다.
“……그만 가볼게요. 쓸데없는 이야기 해서 죄송해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깨가 늘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쥬웰은 불쑥 말했다.
“이전에도 로튼 백작이 오라버니를 때렸어?”
“……!”
해밀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릴 때부터 항상. 전 형과 다르게 항상 미운 아들이었으니까요.”
미운 아들.
로튼 백작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
휘란드.
제국 아카데미 수석 졸업 예정자.
곧 가문으로 복귀할 거고, 그녀와 적대하게 될 인물이었다.
“흐음.”
쥬웰은 팔짱을 꼈다.
‘사실 해밀턴이 얻어맞든 말든 신경 쓸 바 아니지만.’
해밀턴은 그녀의 동료가 아니다.
그녀의 노예였다.
그것도 죄를 저지른 추악한 노예.
그러니 그가 어떤 고통을 겪든 신경 써줄 이유는 없지만.
‘마침, 부려먹을 일이 있었으니.’
“잠시 가문을 나갈래?”
“……!”
해밀턴의 눈이 커졌다.
“도, 도와주시려는?”
쥬웰은 차갑게 말했다.
“착각하지는 마. 오라버니가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는 것일 뿐이니.”
이건 그를 위하는 게 아니었다.
마침 그를 써먹을 일이 있을 뿐이다.
“해, 해야 할 일이라면?”
해밀턴이 대번에 두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쥬웰이 시킨 일 중 끔찍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흐응.”
쥬웰은 대답 대신 해밀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마치 감평이라도 하듯.
그 시선에 해밀턴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왜, 왜 그렇게 보시는?”
“자세히 보니, 그럭저럭 반반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네, 네?”
쥬웰은 여상이 말했다.
“이번에 오라버니가 해야 할 일은 미남계거든.”
“…….”
해밀턴의 몸이 우뚝 굳었다.
“……뭐, 뭐라고요?”
“미남계. 몰라? 귀부인 한 명을 꾀어야 해. 물론 오라버니의 신분은 속이고.”
“그, 그렇군요.”
해밀턴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쥬웰이 시킨 일들에 비해 아주 무난하고 정상적인 임무였다.
‘귀부인 유혹이야 간단하지.’
해밀턴은 자신 있는 얼굴을 하였다.
보석안의 일족들은 대체로 미형을 타고난다.
해밀턴도 미형이었다. 약간 야비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반반한 미남이었다.
이런 처지가 되기 전, 사교계에서 나름대로 인기도 있었다. 물론 평은 최악이었지만.
반반한 겉모습과 다르게 쓰레기.
이게 해밀턴의 평이었다.
어쨌든 겉모습은 번듯하단 뜻이었다.
“그런데…… 저 거기가 없는데, 어떻게 하죠?”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처음 쥬웰에게 징벌받을 때 잘려 없는 상태였다.
쥬웰은 팔다리는 붙여주었지만 그곳은 안 붙여주었다.
“괜찮아. 그 귀부인 취향상 가운데 그게 있든 없든 크게 신경 안 쓸 거야.”
“그, 그래요?”
해밀턴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신적 사랑을 추구하는 순수한 귀부인인가?’
아마 그런 것 같다.
‘귀엽겠네. 크흑. 어쨌든 이 악마보다는 나을 거야.’
상대 귀부인이 누구든 이 저택에 있는 것보다는 행복할 것이다.
틈만 나면 그를 두들겨 패는 로튼 백작에 악마 쥬웰까지. 이 저택은 해밀턴에게 지옥이었다.
‘오래간만에 천국으로 가는 거야! 귀여운 귀부인을 미남계로 꾀어 알콩달콩 사랑을!’
그런데 쥬웰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조심해.”
“네, 신중히, 조심히 잘 꾀겠습니다.”
“아니, 몸조심하라고.”
“네. 가다가 다치는 일 없이, 조심해서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죽지 말라고.”
“……네?”
“귀부인을 유혹하다가 다치는 건 괜찮은데, 죽지는 마. 특히 목은 잘리지 마. 목이 잘리면 나도 회복시키기 귀찮으니 죽게 내버려 둘 거야.”
해밀턴은 눈을 끔뻑였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귀부인을 유혹하는데 다치고 죽어? 목이 잘린다고?
“오라버니가 상대할 귀부인. 가학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조금 심해서…… 남녀 불문하고 미인을 납치해 고문하다가 살해하는 게 취미거든.”
“……네?”
“오라버니 얼굴이 그 귀부인의 기준에 조금 못 미칠 수도 있어서 어떨지 모르겠네. 하여튼 잘 아양 떨어봐. 귀엽게 굴면 외모가 조금 부족해도 예쁘게 봐줄 수 있으니.”
“……네? 네?”
“그렇다고 너무 깊게 빠지게 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밀당 잘해야 해. 오라버니에게 빠지게 하되, 죽지는 말고 내가 지정한 날짜, 장소로 귀부인을 데리고 와. 이제 나 잘 거니까 짐 싸서 지금 바로 출발해. 당장.”
해밀턴은 멍하니 방에서 쫓겨났다.
곧 방 밖에서 해밀턴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제물 하나는 해결했고.’
쥬웰은 느긋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해밀턴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간단했다.
그 흉악한 귀부인을 그녀의 데뷔탕트를 화려하게 빛나게 할 제물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건 시작일 뿐이지.’
이것 말고도 준비할 게 많았다.
최고의 데뷔탕트가 되기 위해.
그리고 원수들에게 끔찍한 선물을 주기 위해.
‘라디트. 매리엇.’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번 데뷔탕트의 목표는 라디트와 매리엇이었다.
그녀는 이번 데뷔탕트를 통해 그 둘에게 최고의 선물을 줄 것이다.
쥬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만월이 떠 있었다.
눈을 찌르듯 밝은 월광이었다.
곧 일어날 일을 참혹히 축복하듯 말이다.
* * *
며칠간 평온한 시간이 지났다.
‘쥬웰’이 된 이후, 처음 맞는 평온이었다.
‘이렇게 쉬니 이상하네.’
그녀는 왠지 어색했다.
에스텔레 때도, 그리고 쥬웰이 되어서도 이런 평온한 휴식은 처음이었다.
‘당장 급하게 해야 할 일은 없으니 쉬어도 되겠지. 축제 준비야 실무진이 알아서 하는 거고.’
그녀가 의견을 제시하긴 했지만, 원래 높은 사람은 의견만 제시하는 법.
실무는 밑의 사람들 몫이다.
쥬웰은 중간중간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체크만 하였다.
“그런데 아가씨.”
부집사 세바트찬이 여러 사항을 결제받던 중 물었다.
“정말 직접 축제에 참가하실 겁니까?”
“응, 그래야지.”
쥬웰은 딸기 주스를 빨대로 마시며 답했다.
“성녀로서 백성들과 함께해야 축제의 효과가 극대화될 테니까. 가주님께서도 그걸 바랄 거야.”
“하지만…….”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세바트찬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최근 수도에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서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연쇄 살인 사건?”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살인 사건이 있었다고 엔리크 자작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희생자가 또 생겼다고?
“네, 치리언 추기경이 살해당했습니다.”
“……!”
쥬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치리언 추기경.
안면 있던 인물이다.
에메랄드 공작가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어떻게 된 거지?”
“조사 중이라 아직 밝혀진 건 없습니다. 다만, 램필드 자작 때처럼 시신이 잔혹하게 훼손되어 이번 살인도 원한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원한? 하지만 램필드 자작과 치리언 추기경은 별다른 공통점이 없지 않나?”
원한으로 인한 연쇄 살인 사건이면 희생자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둘은 별달리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세바트찬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둘 다 여섯 공작가의 핵심 인물이란 겁니다.”
“……!”
“범인은 여섯 공작가에 원한을 가진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리 있는 추리였다.
여섯 공작가는 지금껏 셀 수 없는 원한을 쌓아왔으니까. 그들 때문에 눈물 흘린 이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누군가 여섯 공작가에 원한을 품고 끔찍한 범죄를 자행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축제에 직접 참여하는 건 재고하라고 한 거군.”
“네, 범인이 여섯 공작가의 인물들을 노리는 거라면, 아가씨께서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축제 때는 거리가 혼란스러우니 특히 위험합니다.”
세바트찬은 염려스럽게 말하였다.
확실히 걱정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쥬웰은 잠시 고민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축제에는 참여하겠어.”
“아가씨.”
“고작 누군지도 모를 흉악범 때문에 이런 중요한 일을 그르치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 호위를 충분히 하는 것으로 하지.”
일개 집사에 불과할 뿐인 세바트찬은 더 강권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반드시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래, 걱정해 주어 고맙네.”
이후, 홀로 남게 된 쥬웰은 고민에 잠겼다.
‘여섯 공작가를 향한 원한 때문에 벌어진 연쇄 살인이라고? 정말 그런 걸까?’
그녀가 의문을 품는 이유가 있었다.
희생된 램필드 자작과 치리언 추기경.
둘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원수들인 라디트와 플랑드나의 최측근이라는 거였다.
‘혹시…… 누군가 내 원수를 갚으려 이런 짓을 벌인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쥬웰은 픽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비약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죽음은 여섯 공작가가 철저히 비밀로 감추어 진실을 아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순교’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원수를 갚으려는 사람이 있을 리가.
‘세바트찬의 말처럼 여섯 공작가에 원한을 품고 저지른 범죄라고 보는 게 더 합당하겠지.’
하필 희생된 이가 원수들의 최측근인 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원수들은 모두 여섯 공작가의 후계거나, 가주였으니까.
‘어쨌든 이 문제는 차차 알아보고 오늘은 이만 자자. 피곤하네.’
쥬웰은 하품을 하고는 침대에 들어갔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원래 그녀는 아무리 피곤해도 최대한 잠을 자는 걸 미루었다.
잠을 자면 악몽을 꾸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놀랍게도 악몽을 꾸지 않았다. 흰 강아지, 유스넨 덕분이었다.
‘흰 강아지가 넘겨준 성력 덕분에 악몽을 꾸지 않고 있어.’
‘제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성력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병을 회복하는 걸 넘어 체력이 강해지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바셋 성에서 돌아올 때, 유스넨은 그녀의 체력을 강화해 준다는 이유로 온종일 성력을 전달해 주었다.
그 성력이 남아 그녀가 악몽을 꾸는 걸 막아주고 있었다.
‘대신 흰 강아지 꿈을 꾸기는 하지만. 악몽보다야 훨씬 낫지.’
나은 정도가 아니다.
그녀는 꿈에서 유스넨을 보는 게 싫지 않았다.
주로 어린 시절의 유스넨을 꿈에서 만나게 되는데, 어린 시절 유스넨은 정말 강아지같이 귀여워서 꿈을 꾸고 나면 무언가 힐링되는 느낌이었다.
‘꼭 어린 시절의 유스넨만 꿈에서 만나는 건 아니지만.’
쥬웰은 순간 묘한 얼굴을 하였다.
어제.
다시 재회한 커다란 유스넨이 꿈에 등장했다.
그것도 한없이 무거운 얼굴로.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꿈에서 유스넨은 깊이를 알 수 없게 아픈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혹하게. 괴로운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꿈속에서 유스넨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나 시리고 아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어차피 꿈인데.”
꿈에서 상대가 어떤 눈빛을 보냈든, 진지하게 신경 쓰는 게 더 우스웠다.
‘잠이나 자자.’
침대에 눕는 순간.
쥬웰은 한 가지 걱정이 들었다.
‘……어제 꿈이 그저 단순히 헛된 꿈이 아니라면?’
그녀 정도 되는 존재는 꿈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스쳐 지나간 꿈이 언젠가 마주할 미래의 조각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녀는 지금 유스넨에게 정체를 숨기고 있다.
하지만 만약 유스넨이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면?
그러면 유스넨이 그런 눈빛을 보내는 것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유스넨이 내가 에스텔레인 걸 알게 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쥬웰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막히는 듯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 반드시.’
쥬웰은 무겁게 생각했다.
추악하게 변한 자신의 정체를 유스넨이 알게 되는 것도.
그래서 유스넨이 아파하는 것도 모두 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너무 잔인한 일이잖아.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죽여야 하는데.’
유스넨은 빛의 천사였다.
반면, 그녀는 추악한 어둠이었고.
그녀가 어둠인 게 발각되는 순간,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했다.
불행히도 싸우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건 그녀와 유스넨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 선택 사항은 없어. 정체를 들키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죽여야 해.’
만약.
정말로 만약에.
유스넨이 그녀의 정체를 알고도 묵인하고자 한다면.
그건 더 큰 일이었다.
광휘의 대공으로서 사명을 외면한 그는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끔찍한 대가를.
‘……그건 절대 안 돼.’
그녀는 유스넨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니 그녀와 유스넨이 닿을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하나였다.
‘내 정체를 들키지 않고, 그를 다치지 않게 봉인하는 데 성공하는 거야.’
그래서 모든 복수가 끝난 후 그녀가 소멸하여 사라지게 되면, 유스넨이 그녀와 상관없이 영광된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게 둘 사이에 유일한 최선의 결말이었다.
“하.”
쥬웰은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이딴 게 최선의 결말이라니.
정말 빌어먹을 일이었다. 잔인할 정도로.
하지만 그녀의 삶에 잔인하지 않았던 일이 있던가?
이건 그녀에게 주어진 수많은 불행 중 하나에 불과했다.
‘자자.’
쥬웰은 씁쓸히 잠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해,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꿈을 꾸었으면.’
그녀는 속으로 오늘 밤은 흰 강아지, 어린 유스넨을 만나길 바랐다.
그러면 꿈속에서라도 작게나마 행복할 테니까.
하지만 무거운 생각을 하며 잠에 든 탓일까?
그녀는 유스넨 꿈 대신, 악몽을 꾸었다.
* * *
다행히 끔찍한 악몽은 아니었다.
그저 어릴 적 흔하게 경험한 일 중 하나였다.
‘내, 내가 훔친 게 아니야.’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
그녀는 매리엇 앞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아니라고? 네 방에서 내가 잃어버린 보석이 나왔는데?’
‘나, 난…… 아니야.’
무슨 일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비슷한 일이 원체 많아서.
그저 숱하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누명을 썼다.
범인도 뻔했다.
매리엇, 플랑드나.
둘이 그녀에게 죄를 덮어씌운 것이다.
왜?
글쎄.
왜 그랬을까? 별다른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어린애가 벌레의 다리를 뜯는 데 이유는 없는 법이니까.
매리엇은 예쁜 눈을 들어 겁에 질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훔친 보물은 내가 가장 아끼는 소중한 보물이야. 더구나 흠집까지 내다니. 네 몸뚱이를 팔아도 이 보석 값의 반도 나오지 않을 텐데. 어떻게 갚을 거야?’
‘나, 난…….’
‘네 눈을 하나 내게 주는 건 어때? 네 천한 보석안 따위 세공해도 값도 안 나가겠지만, 그래도 우린 친구이니 그 정도로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파르르 소름이 돋았다.
장난일까?
아니, 매리엇의 눈동자는 잔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매리엇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눈을 파낼 수 있을 만큼 잔혹한 아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옆의 고아한 인상의 소녀, 플랑드나가 나섰다.
‘한 번만 용서해 주는 게 어떻겠니?’
‘플랑드나 언니?’
‘어떻게 하겠니. 더러운 피 때문에 또 나쁜 손을 놀린 것 같은데. 고결한 혈통의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 대신, 내가 나중에 교육은 확실히 할게.’
매리엇은 픽 웃었다.
‘언니는 쓸데없이 너무 착하시다니까요. 알겠어요. 대신.’
철퍼덕.
옆에 있던 케이크를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구두로 밟아 짓뭉개 버렸다.
‘깨끗이 핥아.’
‘……!’
매리엇이 인형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잔인하게 웃었다.
‘못 들었어? 개처럼 깨끗이 핥아먹으라고. 그러면 용서해 줄게. 어차피 너한테 어울리는 일이잖아?’
그 뒤,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리엇은 이처럼 그녀에게 굴욕을 주길 즐겼다.
하지만 악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플랑드나가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곧이어 벌어질 일을 짐작한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에스텔레.’
‘…….’
‘할 말이 있니?’
그녀는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듣지 않을 것이다.
아니, 도리어 그걸 트집 잡아 더 잔인하게 굴 것이다.
그러니 이럴 때는 그저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래야 최대한 빨리, 덜 아프게 끝낼 수 있다.
플랑드나는 천사 같은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래도 착하네. 네가 한 잘못은 잘 알고 있지?’
‘……네.’
‘그러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겠네. 옷을 내려.’
플랑드나가 여전히 천사 같은 얼굴로, 하지만 잔혹하게 재촉했다.
‘어서.’
플랑드나는 채찍을 꺼내 들었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지? 그러니까…… 이건 언니로서 널 생각해서 내리는 벌이야.’
* * *
“……!”
쥬웰은 번뜩 눈을 떴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 강아지가 준 성력이 벌써 소진되었나.’
그런 것 같다.
‘재수 없는 꿈을.’
쥬웰은 고개를 털었다.
그래도 끔찍한 꿈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그녀에게 귀여운 축에 속하는 악몽이었다.
그저 재수 없고, 기분 나쁜 정도인.
‘어차피 모두 갚아줄 거니.’
쥬웰은 무거운 눈빛으로 생각했다.
에스텔레 때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매리엇, 라디트, 플랑드나, 웰링턴 공작.
매리엇은 사실 귀여운 수준이었다.
죽고 싶을 만큼 그녀를 괴롭히긴 했지만 그저 끔찍한 괴롭힘 수준이었으니까.
그녀에게 진정 처참한 고통을 주었던 건 가족이었던 언니 플랑드나와 아버지 웰링턴 공작이었다.
‘모두 갚고 말 거야.’
그녀는 맹세하듯 되뇌었다.
자신이 원수들에게 받았던 고통 전부를.
단 하나도 빠짐없이 갚고 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노력하는 거고.’
원수들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원수들을 잡아 와 고문하며 손발을 찢어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손쉬운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고작 그런 죽음에 만족하기에는 그녀가 겪은 고통이 너무 커다랬다.
최대한, 가장 끔찍한 나락 속에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게 해야 했다.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했다.
‘이렇게 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쥬웰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수들을 나락에 떨어뜨리기 위한 일보를 내딛기 위해 지금껏 미뤄두었던 일 하나를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어딜 가십니까?”
리샤크였다.
“잠깐 가볼 곳이 있어서. 혼자 다녀올게.”
“절대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쥬웰은 팔짱을 끼었다.
‘혼자 다녀와야 하는데.’
그녀는 한 인물을 만나야 했다.
하지만 그 인물과 그녀가 연관이 있다는 건 아직 다른 이들에게 알려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혼자 가려고 했지만 리샤크는 완강했다. 최근 수도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 때문에 더욱 그러는 듯했다.
“알겠어. 그러면 조용히 나갔다가 오고 싶으니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마.”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쥬웰은 리샤크와 둘이 가문을 나섰다.
이후 목적지에 도착한 리샤크는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주로 수도의 하급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쓰는 흔한 저택이었다.
“이곳엔 왜 온 것입니까?”
“내 비밀 아지트라서.”
“네?”
“리샤크. 잠깐 날 볼래?”
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린 리샤크는 곧 동공이 풀렸다.
쥬웰이 건 정신 조작에 당한 것이다.
“넌 여기에 온 적 없는 거야. 알았지?”
“……네.”
“그래, 착해. 잠깐만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어.”
리샤크는 멍하니 다른 곳으로 향했다.
쥬웰은 살짝 미안해졌다.
‘매번 정신 조작을 거니 미안하네. 후유증은 남지 않게 하고 있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건 비밀로 해두어야 하니까.
곧 놀라운 인물이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군요.”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
하지만 낮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
그렇다.
오늘 그녀가 만날 인물은 에스텔레 시절 그녀의 시녀였던 마리였다.
마리는 쥬웰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로드를 뵙습니다.”
* * *
로드.
충성을 맹세한 권속이 주인을 부르는 호칭이다.
비록 ‘가계약’이긴 했지만, 3년 동안 그녀를 주인으로 섬기기로 했으니 그런 호칭을 쓰는 것이다.
‘마리에게 이런 호칭을 듣고 싶지는 않은데.’
쥬웰은 씁쓸히 생각했다.
마리는 에스텔레 시절, 그녀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베풀어준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마리는 항상 그녀를 아끼고 지켜주려 하였다. 그녀에게 고통만 주었던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런 마리를 권속으로 삼은 게 가슴이 아팠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내가 에스텔레인 건, 마리를 위해서 밝혀선 안 돼.’
그녀는 마리가 지금 이상으로, 그녀에게 얽혀드는 걸 바라지 않았다.
마리가 그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했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에스텔레인 건 숨겨야 했다.
하지만 완전히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워 일부러 더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옵시디언 상단의 상황은 어떻지?”
옵시디언 상단.
마리가 그녀의 명에 따라 개설한 상단의 이름이다.
“말씀하신 대로 매리엇 상단에 커다란 피해를 주었고, 상단의 자본을 크게 증식하였습니다.”
“그래, 앞으로는 여기 목록의 주(株)들을 검토해 투자토록.”
마리는 목록을 받아 들고 눈을 크게 떴다.
모두 투자하기에 따라 커다란 돈을 벌 수 있는 주(株)들이었다.
“그 목록을 최대한 활용해 상단의 자본을 불려.”
“……알겠습니다.”
원수 중 하나, 매리엇의 다이아 공작가를 무너뜨리려면 가넷 공작가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또 다른 칼이 필요했다.
쥬웰은 마리를 대리인으로 삼아 다이아 공작가의 급소를 찌를 거대 상단을 만들 계획이었다.
‘사실, 마리를 연관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완전히 배제하는 건 불가능하니.’
이렇게라도 복수에 참여시키지 않으면 마리는 다른 악마를 찾아서라도 복수하려고 할지 몰랐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따로 할 말이 있나?”
마리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이게 끝인가요?”
“무슨 말이지?”
“제게 권능을 나누어주진 않으실 건가요?”
“……!”
마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결연한 얼굴로 쥬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 이런 소꿉장난이 아닌, 에스텔레 성녀님을 위한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제발 제게 권능을 나누어주십시오!”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마리는 처절히 부르짖었다.
“매리엇, 라디트, 플랑드나. 에스텔레 성녀님을 참혹히 괴롭히던 놈들을 모조리 이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어요. 그러니…… 제발 제게 권능을……!”
그 외침에, 쥬웰은 가슴이 욱신 아파왔다.
자신을 위하는 마리의 마음이 그녀의 가슴을 처참히 흔들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았다.
마리에게 권능을 내리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 마리는 ‘어둠’의 존재가 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건방지구나.”
“……!”
마리는 우뚝 입을 다물었다.
“네까짓 게 무엇이건대, 감히 내게 권능을 주어라, 말라 그러는 거지? 분명 내가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나?”
쥬웰은 일부러 더욱 싸늘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하지만 마리는 놀랍게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제게 권능을 줄 생각이 없지 않나요?”
“뭐?”
“다 눈치채고 있어요. 당신이 제게 권능을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제가 바라는 건 복수. 원수들을 처참히 죽이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제게 권능을 주지 않는다면, 저도 당신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주인을 섬기겠습니다.”
마리는 결연한 눈빛으로 말하였다.
쥬웰은 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주인.
힘을 줄 다른 악마와 계약을 맺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넌 파멸해. 결국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된다고.’
쥬웰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마리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저지르면,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그만큼 그녀, 에스텔레의 복수를 원하기에 저러는 것이리라.
가슴이 다시 미치듯 아파져 왔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마리가 행복하길 바란다. 이렇게 복수에 미쳐 파멸의 나락에 떨어지길 바라지 않았다.
“어리석구나. 이미 넌 복수의 걸음을 내디디고 있거늘.”
“그게 무슨 말이죠?”
“내가 방금 준 목록을 다시 자세히 보아라.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마리는 의아한 얼굴로 목록을 살피다가 눈을 크게 떴다.
깨달은 것이다.
이 목록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건 단순한 투자 목록이 아니었다.
“네가 하기 나름이겠지만 이 목록들을 잘 이용하면 다이아 공작가의 사업체들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은…….”
“그래, 나는 널 다이아 공작가를 찌를 칼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종국에는 이 옵시디언 상단을 이용해 다이아 공작가의 손발을 찢어낼 거야.”
원수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선 여섯 공작가를 먼저 무너뜨리는 게 필수였다.
이 옵시디언 상단은 그중 다이아 공작가를 무너뜨릴 칼이었다.
마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네가 바라는 복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네.”
마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에스텔레 성녀님은…… 분명 끔찍한 최후를 맞았을 거예요. 전…… 지금 당장 그들을 직접 찢어 죽이고 싶어요.”
쥬웰은 씁쓸한 얼굴을 하였다.
마리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당장 그녀를 안고, 자신이 에스텔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고 말하였다.
“고작? 네가 바라는 복수는 고작 그딴 손쉬운 것이냐?”
“……!”
“그토록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렇게 찢어 죽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냐는 말이다.”
마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쥬웰은 시선을 낮추어 마리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명히 말하지.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난 너와 목표가 같아. 나도 네 원수들의 파멸을 바란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딴 손쉬운 죽음이 아니야.”
쥬웰의 음성에 광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런 자비로운 죽음을 그들에게 내릴 수는 없어. 난 그들이 최악의 좌절 속에서 발버둥 치다가 천천히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기를 바란다.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그들에게 주고 말 거야.”
마리는 입을 우뚝 다물었다. 쥬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섬뜩한 광기가 넘실거렸다.
“난 네가 그 일을 도왔으면 했거늘. 너는 성급한 마음에 그들에게 손쉬운 죽음을 내리고자 하는 것이냐? 그런 걸로 만족한다고?”
마리는 한참이나 침묵하였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대신, 아까와는 다르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하였다.
“제게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제 모든 걸 바쳐 당신의 일을 돕겠으니, 꼭 에스텔레 성녀님의 원수들에게 방금 말한 처참한 죽음을 선사해 주겠다고.”
“당연히.”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그렇게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쥬웰은 저택을 나서기 전 상자를 내밀었다.
“받도록.”
“이건?”
상자를 열어본 마리는 놀란 눈을 하였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브로치 등등.
수많은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최고급 보석이 박혀 있는 장신구들이었다.
“……어째서 제게 이런 걸?”
“호신용 마도구들이다. 위급한 상황 시 널 보호해 줄 마법 및 호신 마수들이 깃들어 있으니 늘 하고 다니도록.”
마리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대리인이 되어 다이아 공작가를 찌를 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다이아 공작가의 표적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몸을 지킬 수단이 필요했다.
‘호위 기사를 데리고는 다니겠지만, 그걸로는 턱도 없겠지.’
그래서 최상급 호신 마수들을 보석 안에 소환해 놓았다.
어떤 암살자가 와도 마리의 손끝 하나 건들 수 없으리라.
그리고 꼭 호신 목적이 아니라도, 이러한 선물을 준비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마리에게 이전부터 이런 보석 선물을 주고 싶었으니까.’
마리는 귀족가의 귀한 숙녀였다.
그런데 천대받던 그녀를 따르며 많은 손해를 보았다.
그래서 이전 에스텔레 때부터 마리에게 꼭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특히 마리는 보석을 좋아했으니 귀한 보석들을 선물해 주고 싶었는데, 사정이 안 되어 못 하다가 결국 제대로 된 선물 한 번 못 주고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렇게 빨리 죽게 될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선물을 해주었을 텐데.’
쥬웰은 씁쓸히 생각했다.
그러니 쥬웰이 된 지금에서라도 선물한 것이다.
‘이전 마리의 취향대로 하였으니 싫어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마리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마리는 보석들을 보며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말하였다.
“……감사합니다.”
이후, 밖으로 나온 쥬웰은 생각에 잠겼다.
‘원수들을 무너뜨릴 또 다른 칼이 필요해.’
쥬웰은 강대한 존재였다.
하지만 여섯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건 홀로 할 수 없었다.
마리 말고도 손발이 되어줄 이가 더 필요했다.
‘특히 에메랄드 공작가를 무너뜨릴 칼이 필요해.’
다이아 공작가에는 마리의 옵시디언 상단을.
사파이어 공작가에는 반란군의 필바하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에메랄드 공작가였다.
‘날 도와 내부에서 신전의 권위를 무너뜨릴 인물을 구해야 해.’
에메랄드 공작가의 힘은 신성이었다.
성녀 플랑드나와 법왕 웰링턴 공작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면, 그녀와 힘을 합쳐 내부에서 신전의 권위를 무너뜨릴 인물이 필요했다.
‘적절한 인물이 한 명 있긴 한데.’
한 인물이 떠올라 쥬웰은 그 이름을 읊조렸다.
“리델하트 오라버니.”
추기경 리델하트.
에메랄드 공작가에 입양된 피 안 섞인 오라버니로, 유일하게 그녀를 아끼던 가족이었다.
그런 그라면 내부에서 신전의 권위를 무너뜨릴 협력자가 되기 적합하리라.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큰 도움이 되겠지만, 복수에 리델하트 오라버니를 엮이게 하고 싶지는 않아. 번거롭더라도 다른 인물을 물색해 보자.’
리델하트는 마리와 더불어 에스텔레 시절,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마리가 이렇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아픈데, 리델하트마저 끔찍한 길에 동참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리델하트가 그녀와 상관없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리델하트 오라버니는 꼭 행복해야 해.’
하지만 쥬웰은 순간 하나의 생각이 떠올라 염려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가증스러운 죽일 년.’
그녀를 향해 중얼거리던 음성.
‘리델하트 오라버니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거지? 잘…… 지내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다행히 전해 들은 소문에 의하면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추기경으로 성전의 최고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들었던 말이 떠올라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쥬웰은 나중에 기회가 될 때 리델하트의 근황을 직접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한 후, 리샤크를 만났다.
“아, 아가씨!”
정신 조작이 풀린 리샤크는 자신이 어딜 헤맸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미안하네.’
쥬웰은 혀를 찼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자꾸 리샤크에게 몹쓸 일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가넷가의 저택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흐음.”
쥬웰은 팔짱을 꼈다.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중심가로 가자.”
“네, 어째서?”
“일단 가자.”
쥬웰이 향한 곳은 무기 상점이었다.
“아가씨?”
“골라.”
쥬웰은 리샤크의 검을 바라보았다.
리샤크는 가넷가의 기사들에게 배급되는 일반 장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딴 싸구려 검은 버리고. 이 상점에서 제일 좋은 검으로 하나 골라.”
“아, 아가씨……?”
리샤크는 놀란 얼굴을 하였다.
“오해는 하지 말고. 그래도 내 호위 기사인데 싸구려 검을 들고 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니까.”
쥬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낡은 커프스, 망토, 장갑도 다 버리고. 오늘 새로 다 마련해. 최고로 비싸고 좋은 것으로.”
가넷가의 기사들 복장은 제복으로 균일하다.
하지만 커프스, 망토, 장갑 같은 것은 개인 소유 물품을 착용할 수 있는데, 기사들은 그런 소품에서 한껏 멋을 부렸다.
반면 리샤크는 그런 소품조차 보급품이었고, 심지어 죄다 낡았다.
“괘,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널 위해서가 아니라 네 작은 주인인 날 위해서 명하는 거니 오늘 최대한 좋은 것으로 싹 다 바꿔.”
사실, 정확한 이유는 미안해서였다.
자꾸 정신 조작을 해 미안해서, 리샤크에게 뭐라도 사주고 싶었다.
“가, 감사합니다.”
리샤크는 백 배, 만 배 감동한 눈빛을 보냈다.
“고마워할 필요 없다니까? 어쨌든 최대한 좋은 것으로 골라. 수준 떨어지는 것 고르면 다 퇴짜 놓을 테니.”
리샤크는 쭈뼛쭈뼛 고민하다가 물건들을 골랐다.
“이, 이걸로 골랐습니다.”
“싸구려잖아.”
“추, 충분히 비싼데요?”
“안 돼. 더 비싼 것으로. 무조건 가장 비싼 것 중에서 골라.”
“그, 그렇게까지 필요하지는…….”
“명령이야.”
리샤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물건을 골랐고 결국 최고급 보검, 소품들을 착용하게 되었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멋지네.”
쥬웰은 리샤크의 말을 끊고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리샤크의 모습을 살폈다.
“그렇게 차리니 훨씬 멋져 보여.”
진심 어린 칭찬에 리샤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괜찮나요?”
“응, 멋있어.”
리샤크가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귀여운 모습에 쥬웰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괴롭히고 싶어지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꾸미니…….”
왕자 같다.
라고 말하려던 쥬웰은 우뚝 입을 다물었다.
‘아, 실수할 뻔했다.’
왕자.
리샤크 앞에서 절대 꺼내서는 안 되는, 그의 상처를 후벼 파는 단어였다.
‘리샤크가 왕자였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과거를 연상시킬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겠지.’
다행히 리샤크는 쥬웰이 하려던 이야기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네, 아가씨?”
“아니야. 우리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괜히 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쥬웰은 리샤크를 이끌었다.
리샤크에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맛난 음식을 먹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앉아.”
“하, 하지만 어떻게 제가 아가씨 앞에…….”
“내가 명령하는 거니 괜찮아. 날 호위하는 거야, 뭐. 네 실력이면 식사하면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잖아?”
리샤크는 쩔쩔매다가, 거듭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앞에 앉았다.
“오늘만입니다. 앞으로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리샤크가 정색하자 쥬웰은 쿡쿡 웃었다.
그녀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리샤크는 속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
쥬웰은 알고 있었다.
리샤크가 얼마나 끔찍한 상처를 지니고 있는지.
‘악마에게 손을 뻗으면, 당장 마왕급의 권능을 내려받을 만한 끔찍한 상처.’
그런 상처를 지니고 있으니, 겉으로 밝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글쎄.
그게 진실한 모습일까?
쥬웰은 리샤크의 속마음이 궁금했지만 깊게 캐물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도울 수 없는 일이야. 저 아이가 어떤 파국을 맞더라도.’
그녀는 전능하지 않다.
리샤크 앞에 놓인 운명은 그녀가 도울 수 없는 종류였다.
리샤크는 오로지 홀로 그 운명에 맞닥뜨려야 했고 그리고 아마…….
‘파멸하게 되겠지.’
씁쓸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뭘 신경 쓰는 거야. 나 따위가 뭐라고.’
그래, 그녀는 본인의 복수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남의 미래까지 신경 써줄 여유는 없었다.
지금 리샤크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한순간의 변덕일 뿐이었다.
“뭐 먹을지는 골랐어?”
“아…… 그게.”
“고민되면 당기는 것 다 시켜. 한 입씩만 먹고 남겨도 되니까.”
“그, 그건…….”
“괜찮다니까?”
그렇게 이야기할 때였다.
갑자기 생각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 쥬웰. 이게 웬일이야?”
“……!”
쥬웰의 눈동자가 굳었다.
가장 혐오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가장 섬뜩하게 갈망하는 음성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저 음성이 비명으로 물들었으면 하고 바라는 존재.
쥬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사한 장미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쥬웰은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매리엇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매리엇. 그녀가 레스토랑에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또 다른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하얀 백조처럼 고아했다.
매리엇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
성녀 플랑드나였다.
‘플랑드나 언니.’
생각지 않은 만남에 쥬웰의 가슴이 섬뜩하게 얼어붙었다.
두근, 차갑게 식은 심장이 뛰었다.
갑자기 살의가 치솟아 올라, 쥬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장 찢어 죽이고 싶어.’
이전에 말했듯, 플랑드나는 그녀를 가장 악독하게 고통 준 인물이었다.
마리에게 자제하라고 말한 주제에, 막상 플랑드나를 마주하자 들끓어 오르는 살심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억지로 살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쥬웰은 활짝, 화사하게 웃었다.
“플랑드나 성녀님도 함께 뵙습니다. 매리엇 전하뿐만 아니라 신전 최고의 성녀라 불리게 되는 성녀님도 함께 뵙게 되다니. 제가 오늘 운이 좋나 봐요.”
“……성녀라니. 네가 그러니 부끄러워. 이전처럼 편하게 언니라고 하렴.”
플랑드나는 이전 기억 속의 모습처럼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따뜻한 음성과 다르게 지금 플랑드나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다.
에스텔레로 살 때, 항상 플랑드나의 기분을 살피며 지냈기에 곧바로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아. 혹시?’
쥬웰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날 보러 온 건가?’
과연, 매리엇이 이런 말을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너무 반가워.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은데 오랜만에 같이 이야기나 할까?”
쥬웰은 그 물음에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일부러 날 만나러 온 거군.’
이 만남은 자연스러운 만남이 아니다.
무언가 석연찮은 두 명의 얼굴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둘 다 그녀에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별로 좋은 이야기를 하러 온 것 같지는 않군.’
쥬웰은 피식 웃었다.
둘이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눈치챈 것이다.
‘재밌겠네.’
쥬웰은 입 안쪽에서 입술 부위를 핥았다.
곧이어 벌어질 일이 기대되었다.
막간의 작은 여흥 정도는 되리라.
“네, 전하. 저야 영광이지요.”
“전하라니. 우리 사이에 무슨. 사적인 자리에서는 언니라고 편하게 부르라니까. 어쨌든 위쪽을 비워두라고 했으니 올라가자.”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리샤크와 식사하려고 했으나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리샤크, 너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하지만…….”
“매리엇 공작 전하, 플랑드나 성녀님과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혹시나 문제가 있으면 신호를 보낼 테니 바로 와줘.”
리샤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매리엇은 리샤크의 이름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이아 공작가의 주인답게 리샤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리샤크? 그 삭월의 기사가 이 아이야?”
“네, 맞아요.”
“흠.”
매리엇은 꺼림칙한 존재를 마주한 것처럼 불쾌한 얼굴을 했다.
“예쁘긴 하지만, 주인을 물지도 모를 개는 호위로 적합해 보이지 않는데.”
거침없는 이야기에 리샤크가 움찔하고는 쥬웰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쥬웰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건 주인인 제가 알아서 할 일이죠.”
“……!”
외부인이 신경 쓸 일이 아니란 뜻이었다.
짧지만 뼈가 있는 반박에 매리엇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어쨌든 올라가요.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매리엇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이야기 좀 해.”
* * *
매리엇은 레스토랑 위층을 통째로 전세 내놓은 상태였다.
“여기, 주문한 차와 디저트입니다.”
지배인은 자리에 모인 세 명을 보고 놀란 얼굴을 하였다.
쥬웰. 매리엇. 플랑드나.
대륙제일검 검제(劍帝) 샤피렌을 제외하고, 제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지닌 여인 3인을 꼽으면 그들이 꼽힐 것이다.
검제 샤피렌은 유배지인 마경(魔境)에서 거의 벗어나질 않으니 사실상 제국 최고의 권력을 지닌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인 셈이라 놀라울 만했다.
하지만 지배인은 그것 이상 호기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세 명 사이에 흐르는 왠지 모를 싸한 분위기를 느끼고 부리나케 사라졌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쥬웰은 느긋하게 딸기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딸기 파르페를 한 모금 먹었다.
매리엇은 그런 쥬웰을 인상을 찌푸린 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쥬웰, 내게 할 말 없니?”
“왜 그러시는지요?”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 네 제안을 따르고, 우리 매리엇 상단이 얼마나 큰 손해를 봤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역시나, 일전 흑사병 일을 따지려는 것이었다.
‘아. 공작이나 되면서 구질구질하게 이전 일을 따지려고 직접 찾아오다니.’
쥬웰은 티 나게 피식 웃었다.
“아. 당연히 알고 있죠. 언니의 매리엇 상단의 피해가 아주 컸다고. 다이아 가문 쪽의 은행에서 돈을 끌어와 간신히 파산을 피하셨다고 들었어요. 손해가 커서 언니가 속상하셨을 것 같아요.”
그 태연한 음성에 매리엇은 눈썹을 꿈틀했다.
“속상?”
“네, 근데, 그걸 왜 저에게 이야기하는 건가요?”
“……뭐?”
“위로를 받으려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설마 제게 책임을 묻는 것인가요?”
“……!”
그 당돌한 물음에 매리엇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쥬웰은 도리어 빤히 말했다.
“전 제안을 했을 뿐이고, 선택은 언니가 한 것 아니었나요? 왜 저에게 그러는 것인지?”
“……!”
“예상과 다르게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긴 했지만…… 그건 투자를 결정한 언니가 감수해야 할 몫 아닌가요?”
매리엇은 입을 다물었다.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쥬웰은 그저 제안했을 뿐. 모든 책임은 결정한 매리엇이 지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게 옳다고 해도 다이아 공작가의 주인인 그녀에게 이리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너…….”
“물론 저도 안타깝게 생각해요. 난데없이 새로운 마왕이 나타나 흑마도사들을 전멸시키다니. 생각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글쎄요. 그렇다고 제게 따지고 든다면…….”
쥬웰은 빙글 웃었다.
“제가 언니의 아랫사람으로 보이세요?”
“……!”
“우리가 비록 사적으로 친하다지만. 제가 누구인지 잊고 계신 것은 아니죠? 전 가넷이에요.”
가넷.
그 말에 매리엇의 얼굴이 한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쥬웰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무심히, 싸늘한 어조로 말하였다.
“존귀한 다이아 공작 전하.”
“……!”
“똑같이 여섯 공작가라고 불리지만. 알고 계실 텐데요. 여섯 공작가가 동등하지 않음을. 특히, 다이아와 우리 가넷은요.”
그래, 여섯 공작가는 동등하지 않다.
권력은 모든 힘 중 가장 강력한 법.
가넷은 항상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났다.
특히, 가넷이 절대 우위를 점하는 가문이 있었다.
바로 다이아 공작가였다.
‘권력은 금력에 절대적인 우위를 보이는 법이니까.’
권력은 돈을 쌓을 수 있게도, 반대로 쌓인 돈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아니, 애초에 권력의 비호 없이 다이아 공작가 같은 부를 쌓는 건 불가능했다.
다이아 공작가가 지금과 같은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건 모두 가넷 공작가의 비호 덕분이었다.
“언니가 그러시니 저도…… 조금 기분이 상하네요. 앞으로 가넷 때문에 손해를 보면, 또 지금처럼 가넷에게 항변할 건가요?”
“……그건.”
“아니, 질문을 바꾸죠. 보세요.”
쥬웰은 딸기 파르페가 들어 있는 잔을 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천천히 기울였다.
투둑. 철퍼덕.
아이스크림과 음료, 과자가 뒤섞인 디저트가 오물이 되어 형편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쥬웰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구두를 들어 짓밟았다.
마치 꿈에서 매리엇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우리 가넷이 다이아에 이 오물을 핥으라 묻는다면. 따르지 않을 건가요?”
“……!”
매리엇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분노와 치욕, 굴욕이 한순간에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다.
하지만 버럭 화를 내지는 못했다.
쥬웰이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다이아 가문의 가주로서 신중히 답해주세요. 전 가넷을 대표해 물은 거니.”
“……!”
주먹을 움켜쥐고 파르르 떨 뿐, 매리엇은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가넷이 시킨다면.
다이아는 따라야 했다.
그게 무슨 일이든.
지금껏 늘 그랬다.
짓밟은 디저트? 그것보다 더한 치욕을 감수할 때도 많았다.
그게 두 가문의 역학 관계였다.
매리엇이 한계까지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떨었다.
분노와 굴욕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아아. 사랑스럽네.’
쥬웰은 매리엇의 분노를 한껏 즐겼다.
‘더 짓밟고 싶지만…… 적당히 멈추어야겠지. 나중에도 기회는 많을 테니.’
아무리 가넷이 다이아의 위에 군림한다고 해도 지나치게 선을 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쥬웰은 매리엇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한 걸음 물러나 주었다.
“농담이에요.”
“……뭐?”
쥬웰은 활짝 웃었다.
“그냥 농담한 거라고요. 혹시 기분 나쁘셨던 건 아니죠? 제가 언니에게 그런 못된 부탁을 할 리가 없잖아요.”
쥬웰은 장난스럽게 말하였고, 매리엇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매리엇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당장 쥬웰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은, 아니,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매리엇은 어떤 손찌검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욕을 하지도 못했다. 대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쥬웰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될 테니까.
다이아 공작가는 쥬웰이 차기 가넷 공작이 될 확률을 굉장히 높게 보고 있다.
심지어 먼 미래도 아니다. 토른 공작은 오래 살지 못할 테니까.
곧 새로운 가넷의 왕이 될지도 모를 쥬웰과 척을 지는 건, 다이아 공작가로서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 당연히 장난인 것 알고 있지.”
“헤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제가 언니 많이 좋아하고 따르는 것 알고 있죠?”
“그래.”
분노를 참기 위해 매리엇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결국, 한계인지 매리엇은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어머? 벌써요?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더 있다 가시면 안 돼요?”
그 천연덕스러운 만류에 매리엇의 눈가가 애처로울 정도로 떨렸다.
“……아니야.”
“너무 아쉽네요. 그러면 조심히 들어가 보세요. 데뷔탕트 때 뵐게요.”
매리엇은 꽉 주먹을 움켜쥐더니, 대답하지 않고 휙 사라졌다.
쥬웰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제대로 화난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나오려나? 뒤에서 수작 좀 부려주려나?’
누군가 오늘 쥬웰의 행동을 봤으면 경솔했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쥬웰은 일부러 매리엇을 자극했다.
분노한 매리엇이 도리어 뒤에서 수작을 부려주길 바랐다.
‘그러면 내가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쥬웰은 섬뜩하게 생각했다.
‘곧 있을 데뷔탕트가 더욱 화려해지려면, 매리엇이 뒤에서 수작을 부려주어야 해.’
곧이어 고개를 돌려 고아한 아름다움을 품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플랑드나 언니.’
플랑드나는 차분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방금 험한 이야기가 오갔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정숙한 자태였다.
“안 좋은 모습을 보여서 죄송해요, 언니.”
“어머, 아니야.”
플랑드나는 온화하게 고개를 저었다.
“‘축복’의 에메랄드로서 모두가 화평하게 지내길 바라지만 그럴 수만은 없는 게 각 가문의 현실이니까. 다 이해해. 매리엇 전하도 시간이 지나면 기분이 풀리실 거야.”
“그러실까요?”
“응, 걱정되면 내가 나중에 잘 말해줄게.”
플랑드나는 염려 말라는 듯 말하였지만, 쥬웰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잘 말해주긴. 무슨.’
플랑드나의 최고 특기가 이간질이었다.
그녀는 정말 숨을 내쉬듯 자연스럽게 남을 이간질하고, 모함했다.
대단한 건, 철저히 위장해 그녀의 추악한 진면목을 아는 이가 드물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플랑드나를 그저 숭고한 성녀로만 알고 있다.
‘피눈물 흘린 희생자들이나 알고 있지.’
어쨌든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혹시 언니도 제게 하실 말씀이 있나요?”
“아.”
플랑드나는 차를 내려놓았다.
“응, 사실 용건이 있어서 널 찾아왔어.”
“무슨 용건인데요?”
“쥬웰, 너 혹시 성전에 귀의할 생각은 없니?”
“……!”
뜻밖의 이야기에 쥬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귀의.
성전에 몸을 의탁하는 신관이 되라는 뜻이었다.
“갑자기…… 왜요?”
“그간 성녀로서 네 활약을 전해 듣고 많이 감탄하고 감동했거든. 너처럼 뛰어난 성녀가 신께 귀의하면, 백성들에게 큰 축복이 될 거로 생각해서.”
플랑드나는 일절 사심 없이,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성녀의 얼굴로 말하였다.
하지만 쥬웰은 플랑드나의 속이 훤히 보여 피식 웃었다.
‘날 견제하려는구나.’
설마 쥬웰이 정말로 신전에 귀의하길 바라고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이건 일종의 견제였다.
성전 소속의 신관도 아니면서, 수많은 백성의 추앙을 받는 새로운 성녀를 향한.
‘플랑드나 언니는 항상 본인이 최고이길 바랐으니까. 난데없이 내가 성녀가 되어 추앙받으니 속이 탔겠지.’
플랑드나가 에스텔레를 괴롭혔던 이유는 복잡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못난 사생아를 핍박하는 학대였다.
하지만 그녀가 점점 위대한 성녀로 추앙받자 학대의 이유는 질투로 바뀌었다.
그녀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플랑드나의 괴롭힘도 악독해졌다.
‘자애로운 겉모습과 다르게 지독한 열등감 덩어리지.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네.’
쥬웰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플랑드나는 에스텔레를 지옥에 떨어뜨린 대가로 악마의 축복을 받아 성력을 얻었다.
꿈에 그리던 ‘성녀’가 되어 추앙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쥬웰이 새로운 성녀가 되어 나타났다.
그것도 과거 에스텔레를 연상시킬 만큼 강력한 성력과 숭고함을 갖추고.
이대로라면 플랑드나의 명성이 쥬웰에게 가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플랑드나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질시를 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속이 추악하게 타들어 가고 있으리라.
“절 좋게 봐주셔서 고맙지만, 그건 어려워요. 전 ‘충성’의 가넷이니까요. 무엇보다 언니도 아시잖아요. 제가 그런 착한 성녀가 아니란 것을.”
쥬웰은 일단, 플랑드나가 원하는 답을 하여주었다.
“전 그저 힘을 얻기 위해 성녀로서의 명성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에요.”
쥬웰의 답변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플랑드나는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네 성력은 백성들을 위한 축복이니…….”
“백성들에겐 언니가 있잖아요. 위대한 빛께 축복받은.”
“……!”
쥬웰의 말에 담긴 뼈를 느낀 걸까?
순간, 플랑드나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었다.
쥬웰은 여전히 미소 지은 채 재차 말했다.
“백성들을 위한 축복은 저 같은 위선 덩어리 가짜 성녀가 아닌, 위대한 빛께 축복받은 진짜 성녀이신 언니가 담당해야지요.”
“너…….”
플랑드나가 쓴 가면이 깨졌다. 그녀의 입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빛께 축복받은 성녀.’
이 문장은 그녀의 치부를 후벼 파는 말이었으니까.
모든 성자, 성녀는 위대한 빛께 축복받아 성력을 각성한다.
하지만 플랑드나는 아니었다.
그녀는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쳐 악마에게 성력을 안수받았다.
‘그것도 불완전한 성력이지.’
악마가 내린 성력은 겉으로 화려해도 결함이 있었다.
당연했다. 가짜 성력이었으니까.
치료되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안 좋아지거나, 생각지도 않은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암암리에 고위 귀족들을 중심으로 플랑드나의 성력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저 같은 위선적인 가짜가 아닌, 언니처럼 숭고한 진짜 성녀가 있어서 제국 백성들의 축복이에요.”
쥬웰은 일부러 활짝 웃으며 말했다.
플랑드나는 하얀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어쨌든 전 가넷의 권좌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 없어요. 백성들 따위 이용할 대상일 뿐,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람? 백성들은…… 진정한 성녀인 언니에게 맡길게요.”
쥬웰은 여전히 화사하게 웃는 채로 말을 이었다.
“대신, 제가 언니를 응원하듯 언니도 절 응원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
“그렇게만 해주면, 저희 가넷도 언니를 진정한 성녀로서 ‘인정’하고 존경해 드릴게요.”
과연 플랑드나는 쥬웰이 한 말을 알아들을까?
쥬웰은 지금 경고한 것이다.
자신은 그저 가넷가를 바라는 것이니 괜히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플랑드나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당연히 난 너를 응원할 거야. 걱정하지 말렴.”
“네, 고마워요.”
쥬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이야기가 끝났으니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점점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참기가 힘들었다.
“바쁜가 보구나. 그래, 다음에 또 보도록 해. 다음에는 그이와 같이 보자.”
그이.
그 말에 쥬웰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저야 영광이죠. 이름 높은 성전 기사단장님과 만날 수 있다면.”
성전 기사단장 죠제프.
플랑드나의 남편이었다.
당연히, 그녀와도 안면이 있는 이였다.
‘존경할 만한 이였지. 플랑드나 언니와 이어졌다는 이야기에 놀랐지만.’
신전은 대체로 다 썩었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중 하나가 젊은 성전 기사단장 죠제프였다.
플랑드나는 이전부터 죠제프를 짝사랑했었고, 에스텔레가 지옥에 떨어진 후 이어진 모양이었다.
“그이도 널 보면 반가워할 거야.”
플랑드나는 남편 이야기를 하며 문득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살짝 부풀어 오른 배.
그 배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 꾸민 듯 가식적인 미소가 아닌, 진실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본 쥬웰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아…… 그러고 보니.’
플랑드나는 임신 중이었다.
‘……아이의 이름이.’
일전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에스텔레로 이름 지을 거야.’
두근.
쥬웰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다시금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아이는 잘 자라고 있나요?”
“응, 그런 것 같아. 아이가 착한지 입덧도 별로 안 하고.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기대돼.”
쥬웰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름은? 혹시 그때 말씀했던 것처럼?”
“응, 에스텔레로 지으려고 해. 내가 많이 사랑했던 동생, 에스텔레를 닮은 딸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 이야기를 들은 쥬웰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왜…… 왜. 이렇게까지 혐오스럽게 구는 거야? 이렇게까지 추악할 필요는 없잖아?’
자애롭게 웃는 플랑드나의 모습이 너무 혐오스러워 쥬웰은 도저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화가 치밀어 올라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미칠 듯 광소가 터져 나올 것 같기도 했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단번에 플랑드나의 손발을 찢어 죽여 버릴 것 같아서, 쥬웰은 이를 악물고 짙게 미소를 지었다.
“언니.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응?”
“제가 배 속 아이의 대모가 되어도 될까요?”
플랑드나는 살짝 놀란 얼굴을 하였다.
“그건…….”
“언니의 아이면, 제 아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쥬웰은 들끓는 살의를 억누르고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거면…….”
“어머, 아니야. 네가 부족하긴. 오히려 영광이지. 내가 부탁해야 할 일을 먼저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역시나 플랑드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러면 제가 배 속 아이에게 축복 안수 기도를 해도 될까요?”
“지금 바로?”
“네, 좋은 일은 빨리할수록 좋은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러면 부탁해도 될까?”
쥬웰은 안수 기도를 위해 플랑드나 앞에 무릎 꿇고는 플랑드나의 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두근.
짧은 순간, 미친 듯한 갈등이 치밀어 올랐다.
죽여.
당장 죽여.
갈기갈기 찢어.
마치 귓가에 대고 아귀들이 외치듯 끔찍한 환청이 울려 퍼졌다. 버티기 어려운 살의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그녀의 손이 플랑드나의 배에 닿았다.
마치 뱀을 만진 듯 역겨운 소름이 올라왔지만, 역시 또 참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플랑드나는 아버지 웰링턴 공작 다음으로 가장 깊은 원한을 지닌 상대였다.
절대 편안한 죽음을 선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참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배 속의 아이는 잘못이 없으니까.’
그저 어미가 플랑드나라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쥬웰은 이 아이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러야 했다.
어미인 플랑드나를 죽일 거니까.
그것도 나락으로 떨어뜨린 후 죽일 것이다.
이 아이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어미를 잃고 홀로 자라게 될 것이다.
젖을 떼기 전에 어미의 죽음을 경험하고,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였다.
이 아이의 대모가 되겠다고 한 것은. 축복의 기도를 하겠다고 한 것은.
이건 속죄였다.
아이를 위해?
아니.
그녀 스스로를 위해.
아이를 향한 죄책감을 덜려는 얄팍한 술수였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나, 위대한 빛께 기도하오니.”
“……!”
플랑드나의 눈이 커졌다.
나직한 음성과 함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쥬웰의 몸에서 은은한 빛무리가 일어났다.
신께서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증거인 성스러운 빛무리, 성운(聖雲)이었다.
플랑드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전에 보던 광경이었다.
그녀의 동생, 에스텔레가 성전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 가끔 저런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반면 플랑드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이적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신은 플랑드나에게 어떤 기적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플랑드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 깊은 곳에 숨길 수 없는 질시가 스쳐 지나갔다.
한편, 쥬웰은 그런 플랑드나의 마음을 눈치채고 속으로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성운이라니. 하긴, 신은 항상 내 기도를 듣고 계시지.’
듣고 계신다.
그건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그녀는 신이 항상 그녀의 기도를 듣고 있음을 느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말이다.
‘난 신께 버림받았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지.’
불경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버림받지 않았다면 그녀가 그런 끔찍한 지옥에 떨어졌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기이하게도 신의 눈길이 늘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신은 그녀를 사랑한다.
착각이 아니었다.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어떨 때라도.
심지어 그녀가 이렇게 추악한 악마가 되었음에도 신의 사랑은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도대체 왜일까?
그렇게나 그녀를 사랑하는데, 왜 그녀를 그런 지옥에 떨어지게 놔두었고……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신의 커다란 뜻을 인간이 헤아릴 수는 없는 법이니.
그저 그녀는 단 한순간도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그녀가 원망한 건 오로지 원수들뿐.
그래서 그녀는 확신했다.
자신이 어떤 기도를 하든지 신은 들어줄 것이라고.
그녀가 어떤 추악한 일을 해도, 신께서는 가련하게 바라봐 줄 것이라고.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였다.
“나 간절히 바라옵나니.”
당신께 또 추악한 청을 하옵니다.
“이 아이의 삶을 굽어살피사.”
나 이 아이에게 끔찍한 불행을 안길 것이니.
“이 아이를 사랑으로 바라봐 주시옵소서.”
부디, 나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이 아이를 가련히 여겨주옵소서.
“그저 이 아이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이의 삶을 이끌어주옵소서.
그렇게 그녀는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하였다.
자신 때문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끔찍한 불행이 예정된 아이를 위해.
가증스럽게.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파아앗!
기도가 이어질수록 그녀 주위에 빛무리가 점점 짙어졌다.
수많은 빛의 천사가 그녀를 감싸 안는 듯한 장관이었다.
쥬웰은 그 따뜻한 빛무리 속에서 왜인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아 꾹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매리엇과 플랑드나와 헤어진 쥬웰은 저택으로 돌아왔고, 시간이 흘렀다.
쥬웰이 토른 공작에게 제안한 겨울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겨울이 다가왔다.
수도 백성들은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는군.”
“쌓일 것 같은데, 치울 준비를 해야겠어.”
쌓이는 눈을 방치하면 도시가 마비된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어나 눈을 치울 채비를 하였다.
겨울은 백성들에게 혹독한 계절.
추위가 그들의 몸에 아리게 파고들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이번 겨울은 쥬웰 성녀님 덕분에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겠어.”
“맞아. 가넷 공작가에 그런 숭고한 분이 나오다니. 믿을 수 없어.”
바로 쥬웰 덕분이었다.
가넷 공작가는 다가오는 겨울에 맞추어 특별 명(令)을 내렸다.
첫째, 흑사병에 피해를 입은 지역에 구휼을 베풀었다.
그리고 둘째, 흑사병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고아원을 설립하기로 하였고.
셋째, 장작세를 파격적으로 감면하기로 하였다.
백성들이 가장 기뻐한 건 바로 이 장작세 감면이었다.
“장작세가 줄었으니, 이번 겨울은 장작을 때울 수 있겠어.”
“맞아. 세금이 너무 혹독해 차라리 얼어 죽는 게 나을 지경이었는데.”
장작세.
말 그대로 겨울에 장작을 때울 때마다 내는 세금이었다.
제국 백성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착취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 악독한 세금으로, 이 장작세가 버거워 장작을 때우지 못하다가 얼어 죽는 사례도 많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장작세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쥬웰 덕분이었다.
“장작세를 줄여주다니. 쥬웰 성녀님께 너무 감사해.”
“그거 들었는가? 이 장작세를 줄이기 위해 쥬웰 성녀님께서 의회에서 크게 싸웠다는군.”
“정말인가?”
“그래, 이번에 처음 의원이 되셨는데 의회에 첫 출석 하자마자 이 장작세 폐지를 주장해 다른 의원들과 크게 다툼을 벌였대.”
진짜였다.
쥬웰은 얼마 전, 제국 의회의 의원이 되었다.
참고로 제국 의회는 가넷 공작가의 개인 소유나 다름없다.
의원의 8할 이상이 가넷 공작가의 봉신이었으니까. 의회의 위원장도 현 후계인 로튼 백작이었다.
따라서 쥬웰은 본격적으로 후계 싸움을 하기 위해, 의회에 발을 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장작세 폐지를 밀어붙였다.
봉신들에게 존재감을 과시함과 더불어 백성들의 민심을 장악하기 위해서.
물론 쥬웰은 딱히 백성들을 위해서 그랬다기보다 자신의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감행한 일이지만, 백성들은 그저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어떤 이유에서든 백성들을 위해 이런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까.
“바셋 성의 구휼도, 고아원 설립도 모두 쥬웰 성녀님이 하신 거겠지?”
“당연하지. 안 봐도 뻔해. 쥬웰 성녀님이 아니면 가넷가의 악마 놈들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대단해. 이전에는 침식을 혼자 해결하더니, 바셋 성에 가서 기도로 흑사병을 없애는 기적을 일으키고.”
“요즘도 무료 진료소에 나와 종종 봉사 활동을 하고 계시지 않는가? 이런 대단한 성녀님은…… ‘그분’ 이후로 처음일세.”
그분.
순간, 백성들 사이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제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던.
하지만 지나치게 빠르게 사라진 성녀.
너무 숭고해 차마 함부로 입에 담지도 못할 위대한 이름이 백성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에스텔레 님 이후로 이렇게 존경스러운 성녀님은 처음이셔. 그것도 그 악독한 가넷가에서 이런 대단한 성녀님이 나시다니.”
“맞아. 마치 에스텔레 성녀님이 우리를 위해 재림하신 것 같아.”
백성들은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쥬웰과 에스텔레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하지만 백성들을 위하는 숭고함만은 똑같았다.
그래서일까? 백성들은 자신도 모르게 쥬웰과 에스텔레를 겹쳐 보았다.
그때, 한 인물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어쩌면 쥬웰 성녀님이 가넷가의 차기 공작이 될 수도 있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그래, 내 동생이 가넷가에서 일하는 하급 하녀인데. 저택 분위기가 심상치 않대.”
그 말에 백성들은 눈빛을 빛냈다.
“하. 제발, 쥬웰 성녀님이 가넷가의 공작 전하가 되었으면.”
“맞아. 그러면 우리의 삶도 바뀔 텐데.”
가넷가의 가주는 사실상 제국의 최고 권력자다.
원래도 황제에 못지않은 권력을 누렸고, 작금에 와서는 황실조차 발아래로 내려다보는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니 누가 가넷가의 가주가 되냐는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었다.
‘원래는 누가 가주가 되든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다 똑같은 악마들이니.’
하지만 쥬웰이 등장한 후 백성들은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만약 백성들을 위하는 그녀가 제국 최고 권력자인 가넷 공작이 되면, 그들의 삶도 조금이나마 나아질 게 분명했으니까.
여기저기서 쥬웰이 가넷가의 가주가 되었으면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쥬웰이 의도한 대로, 민심을 얻는 게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번 축제가 많이 기대돼.”
“맞아. 이 축제도 쥬웰 성녀님이 우리를 위해 제안하신 거라며?”
“정말 고마우신 분이야. 그러고 보니, 쥬웰 성녀님도 축제에 참여하신다던데?”
그 말에 백성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정말인가?”
“그래, 직접 축제에 참여해 우리와 시간을 보낼 거라고 하더군.”
“하, 그분을 직접 뵐 수만 있으면 내 소원이 없겠네.”
그렇게 백성들은 기대에 찬 음성으로 곧 있을 축제를 떠들었다.
특히, 백성들의 가장 주요 관심사는 쥬웰이었다. 과연 그녀가 축제 때 어디서 백성들과 시간을 보낼지가 모두의 초유 관심사였다.
다들 존경하는 그녀를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기를 원했다.
‘제발, 내가 있는 곳 근처에 오셨으면.’
‘제발!’
그렇게 춥지만, 평소보다 따뜻한 겨울의 한순간.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꺄아아아악!”
골목 뒤쪽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가보세!”
골목 뒤쪽으로 달려간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시체가 있었다.
“아, 아…… 아아.”
처음 시체를 발견한 여인은 넋을 잃고 눈물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체는 귀족가의 여식으로 보였는데 끔찍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 그…… 연쇄 살인마야.”
목격자들은 두려움에 가득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연쇄 살인마.
이게 처음이 아니란 뜻이었다.
실제로 수도에서 이런 끔찍한 시체가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무려 네 번째였다.
“도, 도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그때였다.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비켜라! 현장을 확인하겠다!”
수도의 경비와 치안을 담당하는 수도 경비대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얼음꽃처럼 아름다운 흑발의 미남자가 현장에 나타났다.
기사들은 깍듯한 태도로 흑발 미남자에게 보고하였다.
“네 번째 희생자입니다, 내무 장관님.”
내무 장관.
엔리크가 무거운 눈빛으로 시체를 보았다.
“또 여섯 공작가 관련 인물인가?”
“네, 가문의 문장을 보니 다이아 공작 전하의 시녀였던 세나 영애로 보입니다.”
세나.
다이아 공작가를 따르는 봉신가의 영애로, 매리엇을 옆에서 보필하던 최측근이었다.
비록 작위를 물려받은 건 아니지만 사교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끔찍이 살해당한 것이다.
“행방불명된 지 하루 만에 이렇게 발견되다니. 누구의 소행인지 단서는 있나?”
“확인 중입니다만,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엔리크는 침음을 삼켰다.
“범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야. 수도의 경비는 강화했나?”
“네, 사파이어 공작가와 아메티스트 공작가도 협조하고 있습니다.”
“문제군. 범인이 누구인지 아직 짐작도 되지 않으니.”
엔리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내무 장관.
연쇄 살인범을 잡을 의무가 있다.
하지만 단순히 책무가 아니라도, 그는 이 연쇄 살인범을 반드시 잡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엔리크는 무겁게 생각했다.
‘쥬웰이 표적이 될 수도 있어.’
범인은 여섯 공작가의 인물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가장 주목받는 여섯 공작가의 인물을 꼽으면 단연코 쥬웰이었다.
충분히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안 돼. 절대로.’
엔리크는 주먹을 하얗게 움켜쥐었다.
쥬웰.
그의 딸. 그의 모든 것.
만약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는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다.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 해.’
그때, 현장을 살피던 기사들이 놀라 외쳤다.
“자, 장관님! 여기 범인이 남긴 문자가 있습니다!”
“……!”
놀라서 가보니, 피로 쓴 섬뜩한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위선자.]
다음 범행 대상을 암시한 메시지였다.
그리고 엔리크는 눈치 못 채고 있지만, 이 단어가 지목하는 대상은 명확했다.
가증스러운 위선의 성녀, 쥬웰이었다.
범인은 다음 살해 대상으로 쥬웰을 지목한 것이다.
* * *
그때, 제국 북부.
은발의 아름다운 남자가 말에 탄 채 광활한 얼음의 대지 위를 달리고 있었다.
오로지 얼음밖에 존재하지 않는 정경.
사람이 살 수 있는 마지막 영역, 페리도트 대공령 최북단에서도 한참이나 위로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자는 멈추어 서지 않았다.
잠도 자지 않고 말을 재촉했다.
남자가 탄 말이 전설의 영수, 유니콘과의 혼혈마가 아니었다면 진즉 탈진해 쓰러졌을 강행군이었다.
남자, 유스넨이 그렇게 무리하는 이유가 있었다.
“쥬웰.”
그 이름을 읊조리는 순간.
격통이 밀려와 유스넨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릿해져 오는 존재.
수도를 떠난 이후, 꽤 오랜 시간 그녀와 멀어져 있었지만 이 아픔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아파져 오기만 했다.
이해할 수 없게도.
마치……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영혼이 비통히 눈물 흘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알아야 해. 그녀가 누구인지.’
그가 이렇게 강행군하는 것은 그녀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였다.
세상의 북쪽 끝에는 에덴으로 향하는 틈새가 있으니까.
그는 에덴의 대천사들을 통해 그녀의 정체를 알아낼 단서를 얻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유스넨은 무심코 걱정하고는 실소하였다.
그와 그녀는 서로 걱정할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흑사병을 창궐한 흑마도사들을 참살한 날.
그녀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지 봤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고가 일어났다.
파삭!
말이 밟은 얼음이 부서지며 순간적으로 말의 몸체가 앞으로 크게 기운 것이다.
히이잉!
다행히 낙마하지는 않았지만,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말이 지나치게 지친 것 같아 유스넨은 어쩔 수 없이 잠시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빨리 가야 하는데. 제길’
유스넨은 몸에 쌓인 눈을 거칠게 털어냈다. 마음이 초조했다.
둥근 안경을 벗고 있어 그는 부드럽다기보다는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었는데, 인상을 찌푸리니 더욱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남쪽을 바라보았다.
머나먼.
쥬웰이 있을 수도 쪽이었다.
그는 또 걱정하였다.
‘별일은 없는 거겠지?’
사실, 우스운 걱정이었다.
그토록 강대한 어둠인 그녀를 누가 해친다고.
그녀는 누군가를 해쳤으면 해쳤지, 위험을 겪을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스넨은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필 그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얼음이 깨진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불길한 징조인 건 아니겠지? 혹시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는.’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근거 없는 지나친 생각이었다.
‘내가 진짜 미쳤나 보군. 이런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다니.’
지나치게 그녀 생각을 하다 보니 느끼게 된 쓸데없는 걱정.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바랐다.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쥬웰이 아무런 일 없이 무사하길.
또한 아파하지 않고 있기를.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고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그 시각, 제국 수도.
쥬웰은 연쇄 살인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범행 암시 메시지를 남겼다고? 곤란하네.’
쥬웰은 툭툭 탁자를 두드렸다.
위선자.
그녀는 곧바로 메시지가 누구를 지목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살인범은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아마 축제 때 그녀를 살해할 생각이리라.
“아가씨, 여기 딸기 아이스크림, 딸기 케이크요.”
“응. 고마워, 룬.”
쥬웰은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디저트를 먹으며 고민을 이어갔다.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범행 대상으로 지목되었다고 해도 딱히 긴장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녀를 힘으로 위협할 수 있는 이는 제국에 네 명뿐이니까.
그저 궁금했다.
누가 이런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건지.
‘여섯 공작가를 노리는 단순 테러범일 가능성이 높지만.’
쥬웰은 딸기 아이스크림을 입에 집어넣으며 고민했다.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순간, 섬뜩한 가정이 하나 떠올랐다.
만약. 정말로 만약에.
이게 단순히 여섯 공작가를 노린 테러범의 소행이 아니라면?
다른 목적을 가진 살인이라면?
한 가지 떠오르는 추측이 있었으나 쥬웰은 억지로 그 생각을 부인했다.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아닐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이건 그저 단순 테러범의 소행이어야 했다.
그녀가 방금 추측했던…… ‘그 사람’의 짓이면 절대로 안 되었다.
‘아닐 거야.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도 없으니.’
희생자들의 면면을 보면 범인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제국 최강자 4인방 같은 초월자급은 아니라도, 거의 그에 근접하는 강자일 것이다.
기사로 치면 최상급 마스터 나이츠인 제국 십검(十劍), 백마법사로 치면 대마법사 이상의 실력자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흑마도사로 치면…… 최소 십마(十魔) 이상급이고.’
그러니 그녀가 방금 떠올린 인물이 범인일 가능성은 절대로 없었다.
‘어쨌든 이번 축제 때 잡긴 잡아야겠어.’
연쇄 살인범이 수도에 돌아다니면 그녀의 계획에도 좋을 건 없었다.
그녀는 축제로 민심을 장악하고, 이어서 최고로 ‘화려한’ 데뷔탕트를 치러야 하니까.
이렇게 분위기를 흐리는 벌레가 있으면 목적에 방해된다.
‘무엇보다 원수들은 내 몫이라고. 혹시나 살인범이 원수들을 건들게 놔둘 수는 없어.’
쥬웰은 섬뜩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살해범은 아직 다행히 그녀의 원수들을 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해 동선을 보아 할 때, 그녀의 원수들에게 손을 뻗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원수들을 아껴두고 있는데. 손끝 하나 건들게 할 수 없어.’
그렇게 쥬웰은 결정하였다.
이번 축제 때, 살인범을 처단하리라고.
그때,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부르세요.”
“할아버지가?”
“네.”
룬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토른 공작은 가넷의 절대 왕.
그러니 소식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긴장하는 것이다.
‘음, 디저트 다 못 먹었는데.’
쥬웰은 아쉬운 표정으로 딸기 아이스크림과 딸기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살인범에 대해 고민하느라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그냥 먹고 갈까?’
그렇게 생각하던 쥬웰은 피식 웃었다.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할 정도로 토른 공작이 편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실제로 최근 그녀와 토른 공작은 부쩍 가까워졌다.
정확히는 토른 공작이 그녀를 이전보다 더욱 총애했다.
‘가자.’
쥬웰은 자리에서 일어나 토른 공작에게로 향했다.
“할아버지!”
“왔느냐, 우리 요정 공주님.”
토른 공작이 웃으며 쥬웰을 안아주었다.
“잘 지냈느냐? 이 할아비가 보고 싶지는 않았고?”
“당연히 보고 싶었죠. 할아버지도 쥬웰 보고 싶었어요?”
“그럼. 이 할아비야 항상 우리 공주님을 그리워하고 있지.”
토른 공작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했다.
“이제 이 할아비도 갈 날이 머지않았는데, 떠나면 우리 공주님 보고 싶어서 어찌할꼬?”
쥬웰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토른 공작답지 않은 약한 이야기였다.
당장 사경을 헤매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할 인물이 아닌데?
그녀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괴조 카르탄의 영향이구나.’
까악.
저 뒤쪽 새장에서 아름다운 흑조가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녀가 선물한 괴조 카트란이었다.
‘지난 삶을 돌아보게 하는 저주를 내리니, 점점 더 마음이 약해지고 있어.’
뭐, 그녀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덕분에 토른 공작이 이렇게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더 의존하게 되었으니까.
토른 공작에게는 ‘가문’은 있지만, ‘가족’은 없었다.
그에게 혈육이란 가문의 부속품일 뿐이었다. 누구와도 가족 간의 감정적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음이 약해지니 쥬웰에게 기대게 된 것이다.
‘잘됐어. 모두 내가 의도했던 대로야.’
쥬웰은 섬뜩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애초에 이런 효과를 바라고 괴조를 선물했다.
토른 공작이 그녀에게 기댈수록 그녀의 입지는 강해질 테니까.
쥬웰은 토른 공작의 마음을 더욱 파고들기 위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속상해요.”
“클클, 뭘 속상해하느냐? 어차피 다 때가 있는 법이거늘. 네가 살려준 덕분에 조금이나마 더 시간을 가졌으니, 고마울 뿐이지.”
“안 돼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되지 않게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이야기만으로도 고맙구나.”
토른 공작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토른 공작은 알까?
쥬웰이 빈말을 한 게 아니란 것을.
쥬웰은 토른 공작이 죽음을 맞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토른 공작이 그녀에게 필요 없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수명을 넣어줄 것이다.
“그런데 혹시 오늘 제게 하실 말씀이 있나요?”
“아, 그래. 잠시만 기다리려무나. 올 사람이 있으니, 오면 같이 이야기하자꾸나.”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곧, 방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아버지?”
“쥬웰.”
얼음꽃 냉미남 엔리크였다.
그는 토른 공작에게 예를 표한 후 쥬웰 옆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 혹시 기다린 분이 아버지였나요?”
“그래, 엔리크와 내가 함께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쥬웰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왠지 용건이 짐작되었다.
“혹시 저보고 축제에 참석하지 말라는 건가요?”
“……그래. 맞다.”
토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이야기는 들었으리라 본다. 이번 축제에 참여하는 건 너무 위험해. 그렇지 않으냐, 엔리크?”
“맞습니다, 가주님. 연쇄 살인범이 혼란스러운 축제 속에서 쥬웰을 노린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쥬웰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였다.
“할아버지, 제가 뭐라고 답할지는 아시죠?”
“그래, 안다. 그러니 우리 둘이 함께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쥬웰이 말을 안 들을 것 같으니, 두 명이 함께 고구마 설득을 날린 것이다.
‘아버지야 그렇다고 쳐도 토른 공작마저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이것도 괴조 카르탄의 영향인가?’
토른 공작은 원래 이렇게 손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괴조 카르탄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며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날 걱정해 주는 건 좋지만, 그래도 이런 건 반갑지 않은데.’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하겠어요. 전 무조건 이 축제에 참가할 거예요.”
“쥬웰.”
“할아버지. 지금 이런 모습, 가넷답지 않은 것 아닌가요?”
“……!”
토른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쥬웰은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설사 죽더라도, 가문을 위해. 이게 우리 ‘충성’의 가넷의 신조 아니었나요?”
“…….”
토른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지금 이 모습은 가넷답지 않았다.
원래의 토른 공작이라면, 가문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쥬웰이 참여할 축제가 바로 그런 가문을 위하는 일에 해당했다.
그녀가 백성들 사이에서 축제를 함께 보냄으로써 얻을 선전 효과는 어마어마할 테니까.
고작 실제로 있을지도 모를 살해 위험이 겁나 그 기회를 날리는 건 말도 안 됐다.
“할아버지께 저는 뭐죠? 그저 귀여운 손녀인가요? 아니면, ‘충성’의 가넷인가요?”
“…….”
“만약, 절 그저 귀여운 손녀로만 여긴다면 축제에 참여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절 가넷의 자랑스러운 일원으로 인정한다면.”
쥬웰은 똑바로 말했다.
“고작 그딴 위험 때문에 몸 사리고 있지 않겠어요. 가넷은 오만하니, 설사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법이니까요. 할아버지가 일평생 그러셨던 것처럼요.”
토른 공작은 침음을 흘렸다.
쥬웰이 말이 옳았다.
원래 가넷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서도 안 된다.
토른 공작도 일평생 암살 위험에 시달렸지만,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움츠리고 있었던 적은 없다.
가넷은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는 왕이 되어야지, 겁먹어 비루한 새끼가 되면 안 되는 법이니까.
‘또 한 방 먹었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토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넷은 지극히 오만해 상대가 누구든, 어떤 위험이 기다리든 피하는 법이 없지. 내가 괜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구나.”
“가주님!”
토른 공작이 넘어가자 엔리크가 당황한 얼굴을 하였다.
그는 다급히 말했다.
“물론 가넷의 긍지는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연쇄 살인범은 분명 대단한 강자입니다.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까 엔리크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했다.
토른 공작은 어딘지 장난스러운 어조로 쥬웰에게 물었다.
“네 아버지가 그렇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음, 가넷답지 않은 발언이라고 생각해요.”
“쥬웰!”
엔리크가 눈썹을 꿈틀했다.
쥬웰은 나른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가넷의 오만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아요.”
“뭐?”
“가넷의 오만은 그저 무모한 용기를 뜻하는 게 아니에요. 정확히는, ‘피’를 뜻해요.”
“……!”
엔리크의 얼굴이 굳었다.
“우리 가넷은 위협하는 이를 곱게 내버려 둔 적이 없으니까요.”
가넷의 오만은 그저 ‘무모한 용기’를 뜻하진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가넷은 권좌를 이토록 오랫동안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가넷은 위협이 나타나면 겁먹고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모조리 철저히 짓밟았다.
“난 이번 축제에서 범인이 노리는 사냥감이 될 생각이 없어요. 오리혀…… 사냥을 할 생각이에요.”
가넷의 역사는 피의 역사.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위협이 나타나면, 제거한다.
그게 가넷이었다.
쥬웰은 씨익 웃으며 가넷답게 말했다.
“축제의 혼란을 역으로 이용해 연쇄 살인범을 잡아내겠어요.”
그렇게 사냥이 선언되었다.
그녀가 노리는 사냥감은 연쇄 살인범이었다.
* * *
드디어 축제가 시작됐다.
하얀 눈과 함께 수도 거리가 환호성으로 물들었다.
“와아!”
“가넷가 만세!”
“쥬웰 성녀님 만세!”
백성들은 이런 축제를 베풀어준 가넷가와 쥬웰의 이름을 높여 불렀다.
물론 쥬웰의 이름을 부르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리고 수도 거리의 중심.
수많은 백성이 운집한 대광장에 흑발, 적안의 요정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쥬웰이었다.
그녀는 평소 즐겨 입는 수수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여성 신관들이 입는 성복과 느낌이 비슷해 성녀의 숭고한 분위기가 흘렀다.
“와아아!”
“쥬웰 성녀님 만세!”
쥬웰이 광장에 나타나자 떠나갈 듯한 함성이 다시금 수도 거리를 뒤흔들었다.
경호를 서는 기사들이 흠칫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외침이었다. 백성들이 얼마나 쥬웰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대단한 환호성에 축제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함께 자리하고 있던 여타 귀족들이 묘한 얼굴을 하였다.
‘저런 환호성이라니.’
‘백성들이 쥬웰 남작을 따르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야.’
순간, 몇몇 인물의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영웅.
세상은 힘 있는 자들이 지배한다.
하지만 가끔 백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이가 나타나 세상을 뒤흔들 때가 있었다.
백성들은 그런 이들을 ‘영웅’이라 부르며 따랐다.
‘물론 영웅이 실제로 세상을 바꾼 적은 없었지만.’
영웅의 말로는 두 가지였다.
덧없이 스러지거나, 아니면 현실과 타협해 또 다른 기득권이 되거나.
세상은 힘 있는 자들이 지배하니까.
아무리 백성들의 커다란 지지를 받아봤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영웅이 힘까지 가지고 있다면?
쥬웰이 그러한 경우였다.
그녀는 이미 세상 힘 있는 자들의 정점인 가넷 공작가의 핏줄이었다.
그것도 차기 권좌에 가까운 이였다. 그런 그녀가 백성들의 지지마저 등에 업는다면 그 파괴력은?
‘상상하기 어렵군.’
그런 생각을 한 인물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심지어 그녀를 향한 백성들의 지지는 지금도 끝없이 올라가고 있다.
이번 축제가 끝나면 그녀의 위상은 또 한 번 끝 간 데 모르고 올라가리라.
나중에 쥬웰이 어떤 존재가 될지 사람들은 두렵다는 마음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축제 시작 전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자 광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부드럽지만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담긴 음성이었다.
아까 혼란스럽던 광경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모두 그녀의 말에 집중하였다.
그녀는 짧게 개회사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모두 즐거운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신께 청하옵나니, 이 자리의 모든 분이 축복받기를 기원합니다.”
그 말과 함께, 기적이 일어났다.
파아아아아앗!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쥬웰에게 내려온 것이다.
그 장엄한 기적에 백성들은 크게 감격했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쥬웰 성녀님 만세!”
“신이여! 쥬웰 성녀님을 축복하소서!”
아까도 소란스러웠지만, 지금은 마치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거센 환호였다.
가넷가의 기사들은 진땀을 흘리며 백성들을 제지하였다.
쥬웰은 그런 백성들의 반응을 보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성공적이야.’
마지막 장면은 사실 기적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성력을 사용해 일부러 보인 퍼포먼스였다.
원래 사람들은 이런 시각적인 퍼포먼스에 약했으니까.
과도하게 성력을 사용한 탓에 몸이 휘청하긴 했지만, 효과는 충분했던 것 같다.
‘잠깐만 쉬자.’
쥬웰은 천막에 들어갔다. 축제 중간에 휴식을 취하러 미리 준비해 놓은 천막이었다.
‘이제 다음 일을 해야지.’
쥬웰은 눈빛을 낮게 가라앉혔다.
다음 일.
바로 사냥이었다.
이제 연쇄 살인범을 잡을 차례였다.
마침, 과묵한 인상의 기사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됐습니다, 아가씨.”
가넷 기사단의 총 책임자 라이져 경이었다. 리샤크도 함께 왔다.
“연쇄 살인범을 잡을 작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제 백성들과 시간을 보낼 테니 그대들은 내 뒤를 은밀히 따라오게. 연쇄 살인범이 날 습격하면 그때 그대들이 연쇄 살인범을 잡는 거야.”
가넷가가 세운 작전은 간단했다.
쥬웰은 예정대로 백성들과 시간을 보내고,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그 주위를 은밀히 경호한다.
그러다 연쇄 살인범이 나타나면 주살한다는 거였다.
즉, 그녀가 범인을 낚을 미끼가 되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무 호위가 과하지 않는가?”
“그건…….”
“범인을 끌어들이려면 호위를 조금 느슨하게 해서 빈틈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이래서는 범인이 오다가도 도망가지 않겠는가?”
라이져 경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가씨가 정말 위험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호위 인원. 3분지 1로 줄여.”
“안 됩니다.”
라이져 경은 단호히 답했다.
“범인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아가씨의 안전입니다.”
쥬웰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가주님의 뜻인가?”
“모두의 뜻입니다.”
토른 공작, 엔리크 자작, 심지어 눈앞의 라이져 경까지 쥬웰이 위험을 감수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 단체로 고구마를 삶아 먹었나.’
쥬웰은 팔짱을 꼈다.
물론 이해는 간다.
워낙 흉악무도한 살인범이니, 아차 하다가 쥬웰이 정말 살해당할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하지만 이래서는 범인을 잡을 수가 없다.
“그래, 알겠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네?”
다행히 쥬웰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대책을 준비해 왔다.
“마리. 이리로 와봐.”
“……!”
라이져와 리샤크는 흠칫하였다.
천막 안쪽에 또 다른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우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라이져와 리샤크는 모두 오라를 다루는 마스터 나이츠였다.
그것도 최상급의.
검술로 따지면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심지어 나타난 이는 대단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귀족 영애였다.
“아가씨, 이분은?”
“마리야. 어차피 기억을 못 하게 될 테지만…… 그래도 인사해.”
“오늘 잘 부탁해요.”
마리는 두 기사에게 꾸벅 인사했다.
라이져와 리샤크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된 것이다.
그때, 쥬웰이 영문 없는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이 아이가 쥬웰이 될 거야.”
“네?”
라이져와 리샤크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오늘은 이 아이가 내가 될 거라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짙은 어둠이 나타나더니, 마리의 몸에 깃들었다.
그리고 마리의 외모가 변하기 시작했다.
“……!”
라이져와 리샤크의 눈이 찢어지라 커졌다.
분홍빛 머리가 짙은 흑빛으로.
푸른 눈동자가 핏빛을 머금은 석류안으로.
외모는 요정처럼.
키도 줄어들어 체구가 작아졌다.
그러니까, 쥬웰과 똑같은 외모가 된 것이다!
“이, 이, 이게…… 무슨?! 아가씨?!”
라이져와 리샤크가 경악해 외치는 순간.
“둘, 나를 봐.”
“……!”
둘은 흠칫하였다.
사락.
쥬웰의 미간에 악마화 한 송이가 피어올랐다.
쥬웰의 요요한 눈동자가 두 명을 바라보았다.
정신 조작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둘 다 잘 들어. 오늘은 이 아이가 내 대역이 될 거야. 너희는 그저 축제 동안 이 아이를 ‘쥬웰’로 알고, 이 아이를 지키면 돼.”
“으…… 으.”
“알겠지?”
역시나 마스터 나이츠.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악마화가 두 송이, 세 송이가 되는 순간.
라이져의 눈동자가 풀렸다.
정신 조작에 완전히 걸려든 것이다.
“믿음직한 라이져 경,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이분이 아가씨라고 하였습니다. 축제 동안 이분을 지키겠습니다.”
“그래, 착해.”
쥬웰은 칭찬하듯 라이져 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이번엔 리샤크를 바라보았다.
“…….”
확인할까, 하다가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리샤크에게는 워낙 자주 정신 조작을 걸었던 터라 따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마리.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겠지?”
“네, 로드를 대신해 축제에서 백성들과 시간을 보내면 되는 거죠?”
“그래. 잘할 수 있겠지?”
마리는 답하지 않았다.
어련히 잘할 텐데, 뭘 그런 걸 묻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야 워낙 야무지니. 알아서 잘하겠지.’
“위험할까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호위도 엄중하고, 무엇보다 살해범 정도의 능력이면 네가 대역인 걸 곧바로 눈치챌 테니. 구태여 대역인 널 건들려 하지는 않을 거야. 진짜 쥬웰인 날 찾아오겠지.”
“……그러면 당신은 홀로 나가서 미끼가 되려는 건가요?”
“그래.”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를 대역으로 삼는, 이런 번거로운 일을 꾸민 이유는 간단했다.
가넷가의 호위를 따돌리고 홀로 미끼가 되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녀는 홀로 거리로 나가 살인범이 진짜 쥬웰인 자신을 죽이러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마리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조심하세요.”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왜일까? 마리의 걱정을 들으니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렸다.
쥬웰은 가슴의 동요를 숨기려고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건방진 걱정이군.”
싸늘하게 말했지만, 마리는 별반 흔들리지 않았다.
지난번 만남 이후, 마리는 무언가 변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원래 건방진 편이에요. 어쨌든 제가 당신을 걱정하는 건 자유이니 조심하세요.”
이전 에스텔레 때 마리와 조금 비슷해진 느낌이었다.
원래 마리는 저런 당돌한 성격이었으니까.
‘부탁이니, 그만 날 떠나요.’
‘싫은데요? 제가 성녀님을 따르는 건 자유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옛날 마리와의 대화가 떠올라 쥬웰은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 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쥬웰은 휙 등을 돌려 천막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마리와의 대화에 감정이 흔들려 그 순간 쥬웰이 놓친 게 있었다.
리샤크였다.
쥬웰이 천막에서 나간 후, 리샤크의 옅은 푸른 눈동자가 흐릿하게 변하였다.
마치 잉크가 번지듯 다른 빛깔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무척이나 신비한 빛깔이었다.
오색 창연한,
파란, 노란, 녹색, 암회색이 눈동자로 퍼졌다.
그렇게 신비한 빛깔이 퍼진 리샤크의 눈동자는 더는 푸른색이라 할 수 없었다. 마치 신비한 하나의 보석을 연상시키는 빛깔이었다.
하지만 그때.
리샤크가 흠칫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눈동자에서 오색 창연한 빛깔이 사라지고 다시 옅은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음?”
그때, 이제는 쥬웰로 변신한 마리가 리샤크 앞에 서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리샤크는 아까 있었던 변화가 거짓이라는 듯, 멍한 눈빛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리는 별다른 이상을 눈치채지 못하고 천막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마리가 등을 돌리자, 리샤크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는 더는 흐릿하지 않았다. 낮게 가라앉은 리샤크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 * *
쥬웰은 몸을 가릴 로브를 구해 후드를 뒤집어썼다.
전신을 가리는 로브라 거리를 지나다니는 이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서 내 위치를 찾아내 오겠지?’
그녀가 짐작하기로 연쇄 살인범은 대단한 실력자였다.
그리고 범행 수법이나, 잔혹성 등을 고려할 때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마법사급 백마법사나, 십마(十魔)급 흑마법사.
그러니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든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그녀는 인적 없는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사람이 많으면 연쇄 살인범도 나서기 어려울 테니 일부러 인적 드문 곳에서 연쇄 살인범이 자신을 죽이러 오기를 기다릴 예정이었다.
‘이 정도가 적당하겠군.’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길 잃은 취객들이나 가끔 찾아올 만한 으슥한 골목이었다.
당장 어떤 범죄가 일어나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음침하고 어두운 곳.
쥬웰은 그런 골목 가운데 자리를 깔고 앉았다.
‘자, 이제 기다리자.’
그런데 그녀는 하나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음침한 골목 길바닥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오히려 그녀가 수상쩍어 보였다.
가끔 드물게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녀를 수상쩍은 눈빛으로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음…… 이러다가 연쇄 살인범보다 경비대가 먼저 찾아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있을 방법이 없나?’
고민하다가 쥬웰은 곧 묘안을 찾아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카드가 주르륵 나타났다.
운명을 엿보는 카드들이었다.
쥬웰은 그 카드를 앉은 자리 앞에 주르륵 늘어놓았다.
축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점쟁이로 위장한 것이다.
‘대충 으슥한 골목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점쟁이로 보이겠지. 실제로 난 그럭저럭 유능한 포춘 텔러이기도 하고.’
그럭저럭 유능하다.
그건 굉장히 겸손한 표현이었다.
점쟁이, 포춘 텔러(Fortune teller)는 악마의 힘을 이용해 미래를 엿보는 자.
그러니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포춘 텔러였다.
그녀가 치는 점은 예언의 수준. 점이 틀릴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됐다.
‘자, 기다리자.’
그렇게 쥬웰은 본격적으로 자리를 깔고 살인범을 기다렸다.
하지만 범인은 곧바로 나타나진 않았다.
‘시간이 걸리겠지. 기다리자.’
째각, 시간이 흘렀고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점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귀찮게.’
어쩔 수 없이 점을 쳐주었다.
행인들은 그녀의 점을 그저 축제의 여흥으로 여기고 재밌다는 듯 사라졌다.
“…….”
쥬웰은 침묵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 살인범은 여전히 나타날 생각을 안 했다.
‘뭐야, 왜 이렇게 안 나타나는 거야? 춥잖아.’
한겨울에 골목 바닥에 앉아 있으니 추위가 극심했다. 두꺼운 로브를 입고 있긴 했지만 추위를 막아주긴 역부족이었다.
‘……이러다가 또 열나는 것 아니야?’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쥬웰의 몸은 굉장히 약했다. 체력도 부족하고 잔병치레가 심했다.
툭하면 아파서 얼마 전에도 감기에 시달렸었다.
‘아파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잔소리는 듣기 싫다고.’
아프면, 아픈 것보다 엔리크 자작이 잔소리하는 게 듣기 싫었다.
별것도 아닌 잔병치레에 어찌나 속상해하는지.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평범한 발걸음 소리였다.
하지만 달랐다.
골목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마치 거인이 짓누르는 듯한 위압감이 골목에 가득 들어찼다. 동시에 폭주하는 듯한 광기가 불꽃이 터지듯 일렁였다.
섬뜩한 위기감이 쥬웰의 등줄기를 쫘악 타고 올랐다.
‘마, 말도 안 돼.’
쥬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상대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만큼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어째서 저 인물이 이곳에?’
눈으로 보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단번에 상대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이는 제국에서 단 네 명, 초월자들밖에 없었으니까.
특히 이런 조절되지 않는 위험한 광기를 가진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저 인물이 연쇄 살인범이었다고? 말도 안 돼.’
그때 저벅, 발소리가 울렸다.
상대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쥬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게헨나에서 돌아온 후, 처음 느끼는 위기감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뚝, 상대가 멈추어 섰다.
정확히 그녀 앞에 멈춘 것이다.
차가운 그림자가 그녀의 몸에 드리워졌다.
고개 숙인 쥬웰의 후드 너머로 작은 구두가 보였다. 보랏빛 보석이 박힌 구두였는데,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기이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안녕?”
밀랍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소년이 그녀를 향해 광대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그러진, 기이한 미소였다.
“점쟁이니?”
하지만 쥬웰은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신음을 삼키며 상대의 정체를 속으로 읊조렸다.
‘……마탑주 라플 공작.’
* * *
마탑주 라플 공작.
명실상부한 지상 최강자.
그가 난데없이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왜 마탑주 라플 공작이 여기에?’
쥬웰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지상에서 단 네 명의 초월자만이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고 여기고 경계했다.
마탑주 라플 공작.
마왕 타란툴라.
광휘의 대공 유스넨.
검제 샤피렌.
이들이 그 네 명의 초월자다.
그중 유스넨과 검제 샤피렌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큰 피해를 입겠지만, 결국 죽는 건 그들이 될 것이다.
마왕 타란툴라의 경우 정확한 정보가 없어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탑주 라플 공작의 경우에는.
‘……높은 확률로 내가 죽게 될 거야.’
쥬웰은 침음을 삼켰다.
라플 공작은 무려 300년을 넘게 산 괴물이다.
아니, 300년 전 라인하르트 제국이 건국될 당시에도 그는 이미 마탑주로 영생을 살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의 세월을 산 것인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괴물.
‘어쩌지?’
쥬웰은 갈등했다.
생각지 않게 찾아온 위기였다.
‘라플 공작과 부닥치는 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는 백마법사들의 집단인 아메티스트 공작가에 큰 원한이 없었다.
물론, 그들도 그녀의 죽음에 한 손 거들긴 했다.
일부 백마법사들이 인신 공양 마법진을 보조했으니까.
하지만 딱히 그녀에게 악의가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다른 원수들의 요청에 도움을 주었던 것일 뿐이니, 그녀도 큰 원한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저 당시 인신 공양에 도움을 주었던 백마법사들만 찾아내 선택적으로 응징하는 것으로 아메티스트 공작가에 관한 원한을 끝낼 계획이었다.
그러니 라플 공작과도 엮일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연쇄 살인범이 설마 라플 공작이었을 것이라고는.’
침음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쥬웰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라플 공작이 연쇄 살인범이 맞나?’
라플 공작이 지금껏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다니?
무언가 이상했다.
라플 공작은 미쳤지만, 그렇다고 이런 커다란 사고를 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은신처에서 마법에 빠져 지냈고, 가끔 흥미를 느낀 ‘장난감’과 시간을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그의 소유가 된 ‘장난감’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망가지게 되지만, 라플 공작의 힘과 위치를 생각하면 그 정도야 뭐.
몇십 년에 한 번 정도 ‘장난감’을 망가뜨리는 것 외에는 큰 사고를 치지 않으니 사람들도 그 정도는 용인하였다.
오히려 ‘장난감’을 미친 광룡에게 바치는 제물 정도로 여겼다.
특히 라플 공작은 제국에 큰 위해가 갈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건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죽을 때 부탁했거든. 제국을 잘 지켜달라고, 히히.’
라플 공작이 말한 그녀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선을 지키는 미치광이였다.
하지만 이번 연쇄 살인 사건은 그 선을 넘는 일이었다.
제국의 주축인 여섯 공작가의 핵심 인물을 연달아 살해한 것이니.
지금껏 라플 공작이 보인 행동과는 맞지 않았다.
‘……뭐지?’
쥬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앞에 선 라플 공작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어떤 살의도 비치지 않고.
쥬웰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라플 공작은 연쇄 살인범이 아니었다.
그냥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왜 날 찾아온 거지?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그냥 이 골목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만나게 된 건가?’
저 대단한 라플 공작과 우연히 만난다, 라.
그럴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해 보였지만 딱히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힐끗 눈을 들어 훔쳐보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마탑주 라플 공작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새하얀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무언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뭐야?’
쥬웰은 상대가 라플 공작인 것도 잊고 황당한 얼굴을 했다.
“저, 점쟁이 맞니?”
“……네.”
“예, 예쁜 점쟁이구나.”
“…….”
“그, 그러니까…… 음. 그게…… 나는 마법사인데, 축제를 즐기다가 우연히 이 골목에 왔는데…… 그게…… 정말로 일부러 널 보러 온 게 아니라, 우연히 지나가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라플 공작은 이제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로 어버버, 말을 더듬고 있었다.
쥬웰 입장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뭐 하고 있는 건가?
‘……미친놈이라더니.’
라플 공작은 한참이나 버벅거리다가 말하였다.
“그러니까, 너처럼 예쁜 점쟁이를 만나서 기쁘다고.”
“…….”
쥬웰은 이 미치광이한테 도대체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어, 어…… 이게 아닌가? 분명 이렇게 하면 될 거라 했는데.”
라플 공작은 그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뒤로 휙 돌아서더니 머리를 쥐어뜯고는 중얼거렸다.
“뭐, 뭐가 잘못된 거지? 우연을 가장해 만나서 호감을 사라고 했는데? 여자들한테 인기 많은 바람둥이 놈을 납치해 얻어낸 비결이니 분명 맞을 텐데? 아…… 아. 어떻게 해야 하지?”
워낙 작고 횡설수설해서 쥬웰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이었다.
쥬웰은 그저 이렇게 생각했다.
‘소문대로 진짜 미친놈이구나.’
라플 공작의 광기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실제로 만나 보니 소문보다 더 미친놈 같았다.
그때, 라플 공작이 휙 그녀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의 붉은 눈을 꿰뚫었다.
섬뜩한 광기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
그 불길한 눈길에 쥬웰은 눈동자를 가라앉혔다.
‘……날 죽이려는 건가?’
그녀는 마기를 끌어올릴 준비를 하였다.
가급적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이지만, 그가 먼저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죽여야 했다.
‘내 힘을 모조리 단번에 끌어올리면, 라플 공작이라도 일정 시간은 압도할 수 있을 거야. 그때 영혼을 찢어발기면 승산이 있어.’
각오하는 순간, 라플 공작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춥지 않니……?”
“……네?”
“그…… 추울 것 같은데. 너 얼굴이 창백해.”
쥬웰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춥긴 추웠다.
감기 100% 예약이었다.
라플 공작은 환하게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이거 받아.”
화르륵!
푸른 불꽃이 그의 손에서 피어올랐다.
이어,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파차창.
불꽃 주위로 투명한 유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크리스털로 화해 불꽃을 유리 안에 가두어 버렸다.
쥬웰은 그 ‘이적’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궁극의 수준에 이른 연금술. 창조의 기적이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기체 입자를 재조합해 유리를 창조해 냈다.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고 크리스털로 세공했다.
더욱 경악스러운 건 불꽃이 크리스털 안에서 끝없이 타오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연소시킬 산소도 없이 말이다.
세상의 법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기적이었다.
‘역시 백마법사들의 왕.’
쥬웰은 경계 어린 눈을 하였다.
같은 마법사로 칭해지지만, 백마법은 흑마법과 체계가 완전히 달랐다.
흑마법은 악마의 힘을 사역하는 것이다.
반면, 백마법은 스스로가 신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힘이다.
그들은 신의 섭리를 어기고, 오만하게 세상의 법칙을 비틀어 힘을 발현한다.
그 정점에 이른 이가 라플 공작이었다.
“자, 받아. 따뜻할 거야.”
“…….”
“어서. 추우면 아플 수도 있잖아.”
쥬웰은 가만히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불꽃이 일렁이는 크리스털을 건네받았다.
쥬웰이 자신의 선물을 받자, 라플 공작의 얼굴이 다시금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 그러면 나는 갈게. 아프지 마. 알았지?”
“…….”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라플 공작은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쥬웰은 가만히 크리스털 속에서 일렁이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았다.
참고로, 푸른 불꽃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정열’…… 정확히는 ‘뜨거운 사랑’을 뜻한다.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설마 라플 공작이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고개를 저었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방금 보인 라플 공작의 모습이 무언가 찝찝했다.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바보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이 몸의 아름다움은 극강이라 누구라도 반할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하필 라플 공작이라니. 곤란한데.’
평범한 이면 몇 명이 반하든 상관없지만 무려 라플 공작이다.
인세 최강자일 뿐 아니라, 미친놈.
복수에 어떤 변수가 될지 몰랐다.
‘설마 가넷가의 인물인 날 장난감으로 삼으려 들지는 않겠지만.’
지금껏 라플 공작의 장난감 중 귀족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여섯 공작가의 인물을 장난감으로 삼아 망가뜨린 적은 없었다. 아마 누군지 모를 ‘그녀’가 남긴 유지 때문으로 보였다.
‘앞으로는 라플 공작도 신경을 써야겠어.’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두 명의 초월자와 적대할 예정이었다.
유스넨과 마왕 타란툴라.
이 둘과 충돌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라플 공작마저 변수로 끼어들게 된 것이다.
좋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라플 공작까지 죽여야 할지도.’
쥬웰은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생각했다.
‘어쩔 수 없지. 싸우길 바라진 않지만 최악의 상황인 경우 라플 공작도 죽일 수밖에. 철저히 대비하면 가능해.’
쥬웰은 차갑게 생각했다.
그녀와 라플 공작이 정면으로 충돌하면 승산은 라플 공작에게 있다.
하지만 미리 철저히 대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승산을 거머쥘 방법이 있었다.
‘일단 지금은 연쇄 살인범을 잡는 데 집중하자.’
생뚱맞게 등장한 라플 공작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 연쇄 살인범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간이 충분히 흘렀으니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다.
‘빨리 나타났으면.’
한참을 골목길에서 앉아 기다렸더니 지쳤다.
어서 연쇄 살인범이 나타나길 바라고 있던 찰나.
저벅.
다시금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 * *
한편, 그때.
사라진 라플 공작은 저 멀리서 쥬웰을 바라보며 떨리는 눈동자를 하였다.
“지, 진짜였어. 내 착각이 아니었어.”
그는 아까 스치듯 쥬웰에게 닿았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 진짜 오래 기다렸는데…… 드디어.”
뜻 모를 이야기가 울려 퍼졌다.
* * *
저벅.
쥬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행인이 아니었다.
일순간 바뀐 골목길의 분위기가 그걸 증명했다.
그저 발걸음이 울렸을 뿐이지만, 묵직한 분위기가 골목길에 내려앉았다.
다만, 라플 공작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아까는 아슬아슬 위험한 광기가 골목에 가득 찼다면, 지금은 중후한 굳건함이 느껴졌다.
쥬웰은 당황했다.
‘왜 그가 여기에?’
그녀는 나타난 이의 정체를 곧바로 눈치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익숙한 기운이었으니까.
연쇄 살인범이 아니었다.
그녀가 익히 잘 아는 인물이었다.
‘……왜 여기 온 거지? 축제에 참여했다가 우연히 이 골목에 들어선 건가?’
쥬웰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연쇄 살인범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라는 연쇄 살인범은 안 오고 자꾸 다른 인물만 나타나니 곤란했다.
‘그냥 지나쳐라.’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후드로 전신을 가리고 있으니 상대가 그녀를 못 알아볼 가능성도 높았다.
괜히 그녀를 알아봐 봤자 연쇄 살인범을 잡는 데 방해만 되니 가만히 모른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정확히 그녀의 앞에 멈추어 섰다.
“점쟁이인가?”
“……!”
익숙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쥬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차 물음이 들려왔다.
“점쟁이가 맞느냐고 물었다.”
쥬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어쩔 수 없이 답했다.
고개를 여전히 밑으로 숙인 채.
“……네. 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점을 봐줄 수 있겠는가? 사례는 충분히 주지.”
쥬웰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했다가는 더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았다.
‘점을 보고 나면 그냥 가겠지.’
“알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카드를 섞으려는 찰나, 상대가 물었다.
“이름과 태어난 날은 알 필요 없는가? 점을 치는 데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말씀하십시오.”
“오펜하임. 아홉 번째 달의 열하루 날이다.”
쥬웰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지금 나타난 인물은 바로 황태자 오펜하임이었다.
‘……도대체 황태자가 왜 이런 골목길에 혼자 돌아다니냐고.’
쥬웰은 후드 사이로 힐끗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신이 빚은 듯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지독히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유스넨의 아름다움이 치명적인 매혹을 품고 있었다면, 오펜하임은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러면 점을 치겠습니다.”
쥬웰은 카드를 손에 모으고 셔플링하였다.
촤르륵.
수많은 카드가 그녀의 손에서 뒤섞였고, 그중 하나의 카드를 꺼내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카드의 내용을 보았는데.
“……!”
쥬웰의 눈동자가 굳었다.
‘……뭐지? 잘못 친 건가?’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카드가 나와 버렸다.
오펜하임이 의아한 물음을 하였다.
“왜 그러지?”
“……아닙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다시 점을 치겠습니다.”
‘실수한 걸 거야. 오펜하임에게 이런 점괘가 나올 리가?’
쥬웰은 다시 카드를 섞었다.
그러고는 이번엔 집중하여 점을 쳤다.
아까는 별생각 없이 가볍게 친 점이라면, 이번엔 달랐다. 포춘 텔러로서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
쥬웰의 얼굴이 다시금 딱딱하게 굳었다.
똑같았다. 믿을 수 없게도 아까와 동일한 카드가 뽑혔다.
‘진짜 이게 오펜하임의 운명이라고? 말도 안 돼.’
쥬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만큼 카드의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사례는 안 받을 테니 점은 안 쳤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급히 카드를 덮으려 했지만, 오펜하임이 빨랐다.
그는 카드를 빼앗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이 카드는……?”
끔찍한 문양이 그려진 카드였다.
산산이 금이 간, 해지고 상한 부러진 검에 심장이 꿰뚫린 인물이 피눈물을 흘리며 비참히 통곡하고 있었다. 뒤로는 무너진 탑이 섬뜩하게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불길한 미래를 예지하는 카드인지라 오펜하임은 입을 다물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잘못 나온 점괘일 뿐이니.”
쥬웰은 곤란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펜하임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괜찮다는 듯 말하였다.
“그렇겠지. 성녀인 그대가 치는 점괘가 정확할 리는 없으니까 말이오.”
“……!”
“설마 내 약혼녀에게 점을 치는 취미가 있었을 줄은 몰랐구려.”
그 말에 이미 오펜하임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음을 깨닫고 쥬웰은 후드를 벗었다.
달의 능력으로 마리가 대역임을 알아보고 그녀를 찾아온 것 같았다.
“대역을 내세우고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오?”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쉬고 있었다고?”
“네.”
“흐음.”
그녀가 정확한 대답을 꺼리자, 오펜하임은 더 묻지 않았다.
“전하야말로 이런 으슥한 곳엔 웬일입니까? 혹시 일부러 절 찾아온 겁니까?”
“그렇소.”
오펜하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당연하지 않소? 연쇄 살인범 때문에 가뜩이나 흉흉한데 약혼녀가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걱정되어서 찾아왔지. 그리고.”
오펜하임이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싱긋 웃었다.
“보고 싶었으니까.”
“……!”
“이런 기회가 아니면 그대를 만나기 어려우니까. 보고 싶어서 왔소. 축제는 연인들의 장.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겠소?”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와 전 연인이 아닙니다만.”
“그렇긴 하지만 그대는 내 약혼녀지. 그러니 같이 축제를 즐길 사이로 충분하지 않겠소?”
쥬웰은 눈살을 찌푸렸다.
“곧 파혼할 사이지 않습니까?”
“흐음.”
그런데 오펜하임은 알 수 없게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파혼 소송하지 않았던데?”
“……네?”
“파혼 소송, 아직 법원에 접수되지 않았단 말이오.”
그 말에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파혼 소송을 접수한 기억이 없었다.
‘……까먹고 있었다.’
워낙 중요한 일이 많으니, 파혼 소송하는 걸 잊어먹고 있었다.
가넷가의 다른 이들도 그녀의 파혼 진행에 별반 관심이 없었고.
‘이런, 제길. 파혼하려면 신청 후 6개월간 조정 기간이 필요한데.’
그러니까 앞으로 최소 6개월은 더 오펜하임과 약혼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유스넨과 양다리 약혼인 상태에서.
‘아, 오펜하임이랑 이런 식으로 엮여서 좋을 게 없는데.’
그녀가 오펜하임에게 바라는 건 딱 거래 관계였다.
무엇보다 자신 같은 추악한 악마와 이 이상 깊게 엮여서 그에게 좋을 게 없었다.
그러니 쥬웰은 일부러 쌀쌀맞게 말하였다.
“좋아하지 마십시오. 전하와의 약혼 관계 따위. 제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파혼 신청을 잊고 있었던 것일 뿐이니까요.”
잔인한 이야기였다.
그와의 약혼 관계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을 정도로 그녀에게 어떤 비중도 차지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실제로 그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와의 약혼 관계에 어떤 중요한 의미도 두지 않고 있었다.
그저 번거롭게 처리해야 하는 일거리? 이 정도의 의미였다.
과연, 오펜하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괜찮소. 어떤 이유에서든 그대와 끈이 이어져 있으면 난 기쁘니.”
“……!”
오펜하임은 무릎을 꿇고는 앉아 있는 쥬웰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쥬웰의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연인, 혹은 미래를 약속한 약혼자가 손등에 하는 입맞춤이었다.
유스넨 때와는 전혀 다른, 뜨거운 느낌이 손등에 작열했다.
오펜하임은 쥬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상태로 말하였다.
“어쨌든 아직 그대와 나는 약혼 관계이오. 그대와 약혼식도 안 치른 그놈 따위보다 훨씬 진정한 약혼자라고 할 수 있지.”
“…….”
“그러니 감히 청하오. 오늘 축제 때 그대의 에스코트를 하는 영광을 내게 허락해 주겠소?”
* * *
거절했다.
애초에 그녀의 목적은 축제를 즐기는 게 아니라 연쇄 살인범을 잡는 것이었으니까.
오늘은 왠지 연쇄 살인범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리와 겹치면 안 되니, 마리는 흑마법을 풀고 돌아가게 하였다. 마리는 내일 다시 그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아가씨, 고생하셨어요! 씻을 물을 준비했어요. 식사도 아가씨 좋아하는 등심 스테이크로……!”
“아니, 다 괜찮아. 잠시 혼자 있게 해줄래?”
“아가씨?”
“그냥 피곤해서. 방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줘.”
룬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방에 남은 쥬웰은 커튼을 모조리 쳤다. 어떤 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게.
방 안이 완벽한 어둠에 잠겼다.
그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켰다.
‘어떻게 된 거지?’
쥬웰은 무겁게 생각했다.
‘왜 오펜하임에게 그런 점괘가?’
사실 오펜하임의 에스코트를 거절한 건, 다른 것보다 이 이유가 컸다.
아까 친 점괘가 신경이 쓰여 축제든, 연쇄 살인범이든 젖혀두고 돌아온 것이다.
‘다시 확인해 보자. 정확히.’
쥬웰은 단도를 들어 손목을 그었다.
뚝. 뚝. 뚝.
피가 은쟁반에 떨어졌다.
그러고 곧 화악 붉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이후 쥬웰은 손을 허공에 뻗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치 종이가 찢어지듯, 허공이 찢어지며 검은 구멍이 시커먼 입을 드러냈다.
게헨나의 틈새였다.
그녀는 그 틈새로 손을 집어넣어 게헨나에서 직접 한 장의 카드를 꺼내었다.
오펜하임의 미래를 예지하는 카드였다.
‘똑같아.’
쥬웰은 무겁게 생각했다.
심장을 꿰뚫는 부러진 검.
끔찍한 피눈물. 비참한 통곡.
무너진 탑.
이 카드가 구체적으로 어떤 미래를 의미하는지까지는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명확한 게 있었다.
‘……오펜하임은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될 거야.’
쥬웰은 신음을 삼켰다.
어째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펜하임처럼 대단한 이가 왜 그런 미래를?’
그녀는 오펜하임을 존경한다.
비록 불운한 환경을 타고났지만 백성을 위하는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끔찍한 운명을 맞는단 말인가?
‘심지어 ‘확정’ 미래야.’
그녀는 카드를 뒤집었다.
그러자 또 다른 끔찍한 문양이 보였다.
펼친 손바닥을 못이 관통하고 있는 그림.
이미 세상의 뜻에 의해 운명이 고정되었다는, 어떤 노력을 해도 피할 수 없다는 ‘확정’ 미래였다.
‘‘반 확정’ 미래라면 희박한 확률로 피할 수 있다지만, ‘확정’ 미래는 그럴 수도 없어. 오펜하임은 무조건 끔찍한 미래를 맞게 될 거야.’
쥬웰은 무겁게 생각했다.
도대체 왜?
그 찬란한 영혼을 지닌 오펜하임이 끔찍한 미래를 맞는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한두 개인가?
‘고결한 영혼을 지녔다고 반드시 행복한 결말을 맞는 건 아니니까.’
쥬웰은 씁쓸히 생각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착하고 고결하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당장 그녀, 에스텔레만 해도 그런 끔찍한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던가?
‘오펜하임의 이런 운명이 나와 연관이 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끔찍한 미래를 맞는다는 것만 알 수 있지, 구체적으로 어떤 미래가 도래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니까.
카드의 문양을 보고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는 있지만, 말 그대로 불확실한 추측일 뿐이다.
그래도 구태여 추정해 보자면…… 무너진 탑이 있으니, 꿈을 이루지 못한 좌절일까?
하지만 그것도 모른다.
무너진 탑은 반드시 꿈의 좌절을 뜻하는 게 아니다.
꿈의 좌절일 수도, 아니면 꿈이 이루어진 후 그 꿈을 무너뜨릴 정도로 또 다른 커다란 비극이 다가옴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해지고 상한 부러진 검은? 그것도 해석할 변수가 너무 많아.’
정말 그런 부러진 검에 심장이 뚫린다는 의미일 수도, 다른 상징적 의미가 있어 그를 해칠 누군가를 간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문양들만으로는 그에게 다가올 비극이 그녀의 복수에 영향을 줄지, 전혀 상관없을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그가 끔찍한 미래를 맞는다는 것뿐이었다.
‘내 복수가 어떻게 될지 확실히 알고 싶으면, 내 미래를 점쳐봐야 해.’
그녀는 강력한 포춘 텔러.
스스로의 미래를 엿보는 것도 가능했다.
‘확인해 볼까?’
그녀는 갈등했다.
방금 오펜하임의 미래를 엿봐서인지, 자신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확인하고픈 유혹이 들었다.
어려울 것 없었다. 그냥 피를 바치고 카드를 꺼내 보면 된다. 하지만.
‘……관두자.’
쥬웰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확인해서 어쩔 건데?’
미래 예지는 세 종류로 나뉜다.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변 미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반드시 이루어지는 ‘반 확정 미래’.
어떤 노력을 해도 무조건 이루어지는 ‘확정 미래’.
점을 쳐서 셋 중 어떤 종류의 미래가 나와도 반갑지 않았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는 어차피 뒤에 바뀔 수 있으니 의미가 없고. 확정 미래가 나오면 그건 더욱 문제야.’
만약 미래를 엿보았는데, 안 좋은 결과가 ‘확정’되어 있으면, 그걸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무너질지도 몰랐다.
“하아.”
쥬웰은 점을 그만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인지 마음이 미치도록 무거웠다.
* * *
다음 날이 다가왔다.
축제는 이틀 동안 진행된다.
연쇄 살인범을 잡아야 하니 둘째 날도 마리가 그녀의 대역을 하기로 하였다.
“괜찮으신가요?”
마리는 물끄러미 쥬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얼굴이 좋지 않아서요.”
“…….”
쥬웰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제 오펜하임의 점괘를 본 이후로 내내 이런 상태였다.
‘티가 심하게 났나 보네.’
“괜찮아. 너는 네 일이나 잘하도록.”
마리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전 로드의 노예예요.”
“무슨 말이지?”
“힘든 일 있으면 절 이용해도 된다고요. 물론 실질적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때로는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며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이 강대한 존재라고 해서 힘든 일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쥬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리다운 위로였다.
“……고맙군.”
이후 연쇄 살인범을 잡으러 으슥한 골목길로 갔는데, 순간 한숨이 나왔다.
‘피곤한데 관둘까?’
연쇄 살인범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이런 수고까지 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 그딴 벌레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고작 벌레 한 마리 때문에 너무 심력을 쏟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내가 이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놈이 아쉬우면 알아서 찾아올 텐데. 찾아오면 그때 밟아 죽이면 되고.’
무엇보다 기분이 좋지 않아 살인범 따위 때문에 힘을 쏟고 싶지가 않았다.
‘어디 조용한 데 찾아가서 쉬자.’
그렇게 생각할 때 한 인물과 마주쳤다.
여인처럼, 아니, 여인보다도 선이 여린 아름다운 얼굴, 오펜하임이었다.
그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는 싱긋 웃었다.
“반갑구려. 오늘도 또 ‘우연히’ 만나다니 기쁘오. 하늘이 우리 둘을 축복하는 것 같소.”
“…….”
쥬웰이 답을 하지 않자, 오펜하임의 얼굴이 굳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무슨 일이 있소?”
그가 걱정을 잔뜩 담아 다가왔다.
“말해보시오. 누가 그대를 기분 나쁘게 했소? 약혼자인 내가 가서 혼내주겠소.”
‘……당신 때문이잖아.’
쥬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지금 심란하고 힘이 없는 건, 모두 오펜하임에게 예정된 참혹한 운명 때문이었다.
쥬웰은 물끄러미 그의 영혼의 빛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찬란했다.
추악하게 변한 그녀의 영혼과는 전혀 다른 눈부신 빛. 질투가 날 정도다.
그런데 저렇게나 찬란히 빛나는 영혼을 지닌 그가 끔찍한 미래를 맞을 거라고?
‘뭐, 이런 거지 같은 일이.’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오펜하임을 나름대로 아꼈다는 걸.
그래서 그가 행복해지길 바랐는데, 그런 결말이 예정되었다니 화가 났다.
그때, 오펜하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안 좋은 얼굴이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
월장석을 담은 듯한 담람빛 보석안이 그녀를 향한 걱정으로 일렁였다.
“알겠소. 말하기 곤란한 것 같으니 더 묻지 않겠소. 대신, 이리로 와보시오.”
“……?”
오펜하임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축제가 한창인 거리였다.
오펜하임이 멈추어 선 곳은 무언가 신기한 것을 파는 노점 앞이었다.
“이건?”
쥬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알록달록 털 뭉치 같은 게 꼬치에 꽂혀 있었다.
정체 모를 알갱이들을 불에 넣으니 확 불이 붙으며 저런 알록달록 털 뭉치로 변하였다.
오펜하임이 털 뭉치를 산 후 그녀에게 내밀었다.
‘장난감인가? 근데 너무 커서 들고 다니기 불편할 것 같은데?’
그런데 오펜하임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먹어보시오.”
“먹으라고요? 이걸요?”
“그렇소. 깜짝 놀랄 거요.”
쥬웰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털 뭉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맛있었다!
“어떻소?”
“……맛있네요.”
쥬웰은 신기하단 얼굴을 했다.
마치 구름을 뜯어먹는 것 같은데, 톡톡 쏘며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솜사탕이란 거요. 재밌는 간식이지.”
쥬웰은 다시 한입 베어 물었다.
재밌고, 맛있었다.
“……좋네요.”
오펜하임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대가 좋아하니 나도 기쁘구려. 그러면 이쪽으로 오시오.”
“또 어딜 가게요?”
“어딜 가긴? 그대에게 맛있는 걸 먹이러 가는 거지. 신기한 게 잔뜩 있소.”
축제라 그런지, 그의 말처럼 신기한 간식이 많았다.
감자를 재밌는 모양으로 꽂은 간식.
빵을 얇게 잘라 설탕에 저민 간식 등등.
오펜하임은 쥬웰을 데리고 다니며 그녀의 입에 온갖 간식을 물려주었다.
“어떻소?”
“……다 맛있네요.”
쥬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 맛있었다.
특히 축제의 흥겨운 분위기와 어우러져 더욱 색다른 맛이 났다.
“그런데 그만 사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많아요.”
쥬웰의 양손에는 간식이 잔뜩 들려 있었다. 입안에도 한가득 간식이 들어 있어 볼이 부풀어 있었고.
오펜하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펜하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귀엽군.’
귀엽다.
쥬웰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요정처럼 아름답지만, 그녀를 아는 누구도 귀엽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오펜하임의 눈에 비치는 그녀는 정말 귀여워 보였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누구도 보지 못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오펜하임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만 아는 그녀의 모습.
앞으로 더욱더 이런 모습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욕심인 것 알았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마음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이렇게 좋은데.’
오펜하임은 속으로 씁쓸히 생각했다.
그도 안다. 자신이 신사답지 못하다는 것을.
구질구질하게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그를 진심으로 질색하지 않는 한,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노력해 보고 싶었다.
그때 쥬웰이 말했다.
“고마워요.”
“흐음?”
“제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일부러 데리고 다니며 신경 써주신 거죠? 고마워요.”
“……별말씀을.”
오펜하임은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그녀를 위해서였지만, 그도 좋았다.
그녀와 이렇게 시간을 보내보고 싶었다.
‘더 욕심부리면 안 되겠지.’
아쉽지만.
더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싶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으니, 오펜하임은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기로 하였다.
그런데 쥬웰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이제 뭐 할까요?”
“……뭐라고 하였소?”
“……에스코트해 준다면서요?”
쥬웰이 팔짱을 꼈다.
“전하 덕분에 축제를 즐기고 싶어졌으니, 어디 한번 에스코트해 보세요.”
그 말을 들은 오펜하임의 표정은.
“……!”
뭐라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완전히 들떠 흥분했던 것이다.
“에, 에스코트하겠소. 그럼, 얼마든지 해야지! 맡겨만 주시오!”
‘……어째 라플 공작이 보였던 모습과 비슷한 것 같기도.’
쥬웰은 실소했다.
그녀는 나풀나풀 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원래 그녀는 오펜하임을 밀어낼 생각이었다. 그게 그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모르겠다.
어제 엿본 오펜하임의 미래가 너무 참혹해서일까?
아니면 방금 보인 그의 배려가 고마워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방금 맛본 간식, 특히 솜사탕 맛이 너무 감동적이라 그저 축제를 즐기고 싶어서일까?
그냥 오늘 하루 정도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착각하지는 마세요. 약혼은…….”
“파혼할 거라는 거지? 알고 있소.”
오펜하임은 씨익 웃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지. 파혼이, 결혼이 될지 누가 알겠소?”
“…….”
오펜하임은 이걸 농담이라고 한 걸까?
아니, 진지한 표정을 봤을 때 그냥 진담인 것 같다.
“어쨌든 이리로 오시오. 해야 할 게 많소.”
“뭘 하게요?”
“뭘 하긴. 축제를 즐겨야지.”
오펜하임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늘 그대에게 최고의 시간을 선물해 주겠소.”
그렇게 말하며 지은 미소는 마치 신이 직접 그린 듯한 아름다운 미소였다.
쥬웰은 보면 볼수록, 오펜하임의 아름다움에서 경이로움을 느꼈다.
마치 빛이 나는 듯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남자가 저렇게 예쁜 건, 반칙 아닌가?’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스넨이 선이 날카로운 매혹적인 느낌이라면, 오펜하임은 예쁘게 아름다웠다.
그녀가 가만히 자신의 얼굴만 보고 있자 오펜하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안 따라오고 왜 그렇게 보고 있소?”
“예뻐서요.”
“……!”
오펜하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 예쁘단 말 싫어하나?’
쥬웰은 오펜하임이 자신의 여인 같은 외양을 싫어했음을 떠올리고는 사과했다.
“아, 기분 나빴으면…….”
“아니, 전혀 기분 나쁘지 않소.”
오펜하임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여전히 살짝 붉은 상태였다.
“원래 예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대에게 들으니 기분이 좋군. 그러니 앞으로도 더 예뻐해 주어도 좋소.”
“……뭐라고요?”
“앞으로도 날 많이 예뻐해 달란 말이오.”
쥬웰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펜하임이 그런 그녀의 웃음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이군.”
“네?”
“그대가 진심으로 웃는 것 말이오. 처음 봐.”
그 말에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게헨나에서 돌아온 후…… 진심으로 웃었던 적이 있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기도.’
아니, 사실 에스텔레 때도 웃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물론 ‘미소’는 많이 지었다.
성녀로서 따뜻한 미소. 꾸민 미소. 싫어도 억지로 짓는 미소.
하지만 진실로 웃은 횟수를 꼽으면? 하루에 몇 차례나 웃었을까?
아니…… 한 달, 1년에 몇 차례나 웃었을까?
웃음은 그녀와 거리가 먼 표정이었다.
그때, 오펜하임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자. 잡으시오.”
“……?
“내가 최고의 시간을 보내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에스코트할 테니, 오늘 하루 그대가 실컷 웃게 해주겠소.”
오펜하임은 호언장담하듯 말했다.
쥬웰은 픽 웃고는 오펜하임의 손을 맞잡았다.
“어디 한번 지켜보지요.”
이후, 시간이 흘렀다.
오펜하임은 쥬웰을 이끌고 축제 곳곳을 돌아다녔다.
여러 맛있는 먹거리를 사주었고, 신기한 볼거리를 구경시켜 주고, 재밌는 체험이 있는 곳에 데리고 가주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십니까?”
쥬웰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오펜하임은 마치 여러 번 와보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에 맛있는 먹거리와 신기한 놀잇거리가 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뭐, 평민들 거리 축제야 다 비슷비슷하니. 황궁에만 갇혀 있기 심심해, 종종 몰래 참석했었소. 어쨌든 축제는 어떻소?”
“……나쁘지 않네요.”
쥬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괜찮았다.
여러 신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흥겨운 노랫소리와 춤. 그리고 재밌는 볼거리들.
즐겁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즐거움을 느끼다니.’
굉장히 생소한 감정이라 쥬웰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축제는 좋은 거군.’
쥬웰은 무심코 생각했다.
사실, 그녀는 축제를 즐기는 게 처음이었다.
쥬웰 때뿐만 아니라, 에스텔레 때도 즐겨본 적이 없었다.
비단 축제뿐일까?
흔한 연극 관람, 음악회, 여행, 카페에서의 한담 등등.
즐기기 위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었다.
‘에스텔레 때는 이런 일상을 즐겨보는 게 꿈이었지.’
에스텔레 때 그녀가 바랐던 꿈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저 소중한 사람과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것.
하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런 행복은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오펜하임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음?”
“전하가 아니었다면, 이런 즐거움은 평생 경험해 보지 못했을 테니까요.”
이제 그녀는 감히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불가능한 꿈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오펜하임에게 고마웠다.
오늘 행복의 단편을 조금이라도 맛보게 해주었으니까.
그녀가 만약 꿈을 이루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어떤 행복을 누리었을지 조금이나마 엿보게 해주었으니까.
그게 진심으로 고마워 쥬웰은 오펜하임에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
그런 쥬웰의 미소를 보며, 오펜하임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름다웠다.
쥬웰은 오펜하임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었다.
진정 아름다운 건 그녀였다.
오펜하임은 세상 어떤 아름다움도 그녀 옆에 서면 빛을 잃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위태로움을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답지만, 오펜하임은 그녀를 보며 늘 아슬아슬 위태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마치 낭떠러지 위에 놓인 외줄에서 홀로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가혹하고 외롭게.
지금 미소도 그러했다.
아름답지만, 왜 이렇게 아파 보이는 걸까?
가슴이 시큰 아파져 왔다.
안타까웠다.
‘왜…… 왜 그렇게 웃는 거지?’
당장 그녀를 품에 안아주고 싶었다.
무엇인지 모를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었다.
오펜하임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쥐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고맙긴.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고맙지.”
“전하께서 어째서요?”
“그야…….”
그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오펜하임은 대답을 삼켰다.
그녀에게 최고의 시간을 보내게 해주겠다고 했으면서, 정작 최고의 시간을 보낸 건 오펜하임 본인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축제가 너무 즐겁고 행복해, 오펜하임은 매 순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옆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마치 꿈속을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걸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오펜하임은 한창 축제를 즐기고 있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다른 이유를 말하였다.
“그대 덕분에 백성들이 행복해하지 않소. 셀레네 황가를 대표해 그대에게 감사하오.”
그 말에 쥬웰은 물끄러미 오펜하임을 바라보았다.
“백성들을 많이 생각하시는군요.”
“그거야 당연히. 초대 황제께서 내리신 셀레네 황족의 의무이니까.”
쥬웰은 그 말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어제 봤던 점괘가 다시 떠올랐다.
저토록 백성을 위하지만,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을 그의 운명이 그녀의 속을 안타깝게 할퀴었다.
“전하,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만약 안 좋은 결과가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전하께서는 남은 삶을 최선을 다해 노력하실 건가요?”
오펜하임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쳤던 점 때문에 그러는 거요? 신경 쓰지 마시오. 그대가 진짜 포춘 텔러도 아니고, 그 점괘가 무슨 의미가 있겠소.”
“어쨌든 대답해 주세요.”
오펜하임은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결과를 생각하고 노력하는 게 아니니까.”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그렇소. 솔직히 지금 내가 바라는 일은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지 않소?”
“…….”
오펜하임이 바라는 일.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여섯 공작가를 무너뜨리고 황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그대 덕분에 조금 더 희망적인 상황이 되었지만 그전에는 정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소. 솔직히 안 될 거로 생각하고 있었지. 하지만 한 번도 포기할 생각은 안 했소.”
“어째서입니까?”
“설사 좌절하고 스러질지언정 백성을 위하는 게 내 의무이니까.”
“……!”
“그러니 내 앞에 어떤 끔찍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소. 그저 나는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 뿐이오. 한 번 사는 삶,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지 않겠소?”
그러며 오펜하임은 싱긋 웃었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난 그대에게도 최선을 다할 거란 말이지. 그대가 날 정말 싫어하지 않는 한 끝없이 그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오.”
쥬웰은 대답 대신 오펜하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찬란히 빛나는 영혼의 광채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저렇게 빛나는 걸까?’
쥬웰은 의문을 품었다.
‘상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오펜하임이 가진 상처는 다른 이들에 비해 결단코 못 하지 않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참혹하게 잃었다.
여섯 공작가, 정확히는 가넷가의 토른 공작은 그의 어머니, 황후에게 누명을 씌워 독을 내렸다.
그의 아버지, 황제는 좌절한 끝에 아직 어렸던 그의 앞에서 목을 매달았다.
그뿐인가?
다른 황족들도 모조리 억울한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다들 누명을 쓰거나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는 식으로 제거되었다.
현재 셀레나 황가에서 살아 있는 변변한 황족은 오펜하임뿐이었다.
일족이 여섯 공작가에 의해 몰살당한 셈이다.
심지어 그는 황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끝없는 굴욕을 당하고 있다.
‘다른 이였다면, 충분히 비틀리고 망가졌을 상처인데.’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올곧게 빛나며, 오로지 백성들만 생각하고 있었다.
쥬웰은 오펜하임의 그런 찬란함이 존경스러웠다.
‘저토록 빛나는데. 그런 운명을 맞을 예정이라니.’
쥬웰은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났다.
어째서 소중하고 빛나는 이들에게는 그따위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마리도, 리샤크도.
‘그리고 어쩌면 리델하트 오라버니도.’
쥬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증스러운 죽일 년.’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다.
과연 리델하트는 잘 지내고 있는 게 맞을까?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리델하트는 100일 기도를 시작해 그날 이후 만나질 못했다.
‘내 행복은 바라지도 않아. 그저 주변의 소중한 이들이라도 행복했으면 할 뿐인데.’
하지만 세상은 그 바람조차 이루어주지 않았다.
어째서 세상은 그녀에게 이토록 가혹하단 말인가?
그때, 하늘 위로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꽃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밤하늘을 형형색색 불꽃이 수를 놓았다.
마침, 둘은 인파를 피해 조용한 골목길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이라 고요히 불꽃을 감상할 수 있었다.
“소원을 비시오.”
“소원이요?”
“원래 불꽃놀이를 보며 소원을 비는 거요.”
“……그런가요? 전하께서는 소원을 비셨나요?”
“물론.”
오펜하임은 답했다.
“그대와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지.”
“……!”
쥬웰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펜하임은 진심인 듯했다. 쥬웰을 바라보는 눈빛이 진중했다.
그녀를 바라는 선명한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결혼 말고 친구는 어떤가요?”
“……친구?”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오펜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싫소.”
“……싫다고요?”
“그렇소. 단순 친구라니. 절대로 싫소.”
오펜하임은 강하게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그대의 반려이자, 영혼의 동반자가 되는 거요.”
오펜하임의 눈빛이 그녀를 똑바로 주시했다.
폭죽 빛이 반사한 걸까? 월장석을 품은 듯한 담람빛 눈동자가 선명한 붉은빛으로 변하였다. 마치 타오르는 태양 같은 붉은빛이었다.
“난 그대의 반려가 되어, 그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소. 고작 이런 축제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좋은 곳, 행복한 곳에 그대를 데려가 주고 싶소. 무엇보다…… 그대가 항상 진심으로 웃게 만들고 싶소.”
“…….”
왜일까?
‘쥬웰’이 남긴 마음이 아직도 심장에 각인되어 있던 걸까?
그녀는 심장이 한 차례 진동함을 느꼈다.
하지만 역시나 받을 수 없는 마음이다.
쥬웰은 일부러 얼굴을 굳혔다.
“죄송하지만…….”
“그만, 대답은 하지 않아도 되오.”
오펜하임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그대의 마음은 알고 있으니 말이오. 다 괜찮소. 그저 내가 그대를 위한다는 것만 알고 있어 주시오.”
“…….”
그래도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닌지 오펜하임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실 거나 사 오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녀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펜하임이 골목에서 사라진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이변이 일어났다.
파아아앗!
갑자기 그녀의 등 뒤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튀어 오른 것이다!
‘무슨?’
쥬웰은 곧바로 자신의 그림자에서 나타난 것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흑마법! 마물 소환이야!’
지옥의 마물, 가고일이었다.
누군가 흑마법을 사용해 그녀의 그림자에서 마물을 소환한 것이다.
쥬웰은 곧바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연쇄 살인범!’
지금껏 잠잠하던 연쇄 살인범이 드디어 행동에 나선 것이다.
터억!
허공으로 치솟은 가고일이 그녀의 로브를 붙잡았다.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라 그녀를 납치하려는 작정인 듯했다.
‘이런 식으로 희생자들을 납치해 살해한 건가?’
쥬웰은 손을 쓸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순순히 납치당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범인은 분명 은밀한 곳에 숨어 있을 터. 여기서 가고일을 해치우면 범인을 추적하기 귀찮아져. 그냥 얌전히 납치당하는 게 최선이야.’
가고일에게 납치당하면 연쇄 살인범 코앞까지 데려가 줄 테니, 번거롭게 추적하는 수고를 덜어도 된다.
그런 마음으로 몸에 힘을 풀고 순순히 납치당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방해가 있었다.
“쥬웰!”
오펜하임이었다.
음료를 사러 가던 그가 변고를 눈치채고 달려온 것이다.
“안 돼! 이놈!”
오펜하임이 검을 꺼내 들었다.
파앗!
검이 환하게 빛났다.
오펜하임은 상당한 수준의 기사. 오러로 가고일을 격퇴하려고 했다.
쥬웰은 곤란히 생각했다.
‘아, 납치당해야 하는데.’
워낙 주변에 괴물이 많아서 그렇지, 오펜하임도 만만한 이가 아니었다.
반란군의 적사자라고까지 불리고 있지 않은가?
달의 능력만 아니라, 기사로서의 실력도 출중했다.
잘못하면 그녀를 살인범 앞까지 고이 납치해 줄 귀한(?) 가고일이 격퇴당할 수도 있었다.
‘어쩌지?’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손을 쓰기로 하였다.
‘오펜하임에겐 미안하지만.’
그녀는 손을 등 뒤로 살짝 숨긴 후, 손가락을 튕겼다.
어둠의 마력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오펜하임의 뒤쪽 허공에서 마물의 팔이 튀어 오르더니 그대로 그의 머리를 가격한 것이다.
“커억!”
불의의 일격을 당한 오펜하임은 힘이 빠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이……!”
오펜하임은 당연히 방금 공격이 쥬웰의 짓임을 전혀 눈치 못 챘다.
이를 악물며 쥬웰을 구하려 발버둥 쳤다.
“저, 절대…… 놓치지 않는다. 절대……!”
오펜하임의 담람색 눈동자가 강하게 일렁였다.
황족의 능력, 월장력을 발현하려는 것이다.
강한 힘이 그의 주위로 몰아쳤다.
‘쯧. 그냥 쓰러지지.’
쥬웰은 혀를 찼다.
오펜하임에게 더 손을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아까보다 더욱 강하게.
그에 비례해 마물의 팔이 더욱 강력히 오펜하임의 머리를 가격했다.
퍼억!
결국 오펜하임은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 쓰러졌고, 졸지에 자신을 구해주려 한 왕자님을 쓰러뜨린 공주님이 된 쥬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네.’
“뀌륵?”
가고일도 눈을 깜빡였다.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연쇄 살인범을 처리하고 돌아오기로 하였다.
‘늦게 돌아오면 일이 커질 테니.’
그런 마음으로 가고일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뭐 하니? 얼른 네 주인에게 날 데려가야지.”
“뀌륵?”
“어서.”
가고일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날갯짓을 했다. 가고일에 붙들린 쥬웰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범인이 미리 흑마법을 쓴 건지, 곧 어둠이 가고일과 쥬웰을 가렸다.
덕분에 사람들은 허공에 떠오른 가고일과 쥬웰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렇게 쥬웰은 연쇄 살인범에게 ‘납치’당했다.
* * *
그때, 제국의 북쪽 끝.
파창!
얼음이 깨져 나갔다.
“……!”
발을 헛디딜뻔한 유스넨의 얼굴이 굳었다.
이곳은 세상 끝.
얼음이 깨지며 천 길 낭떠러지로 변하기도 하는 곳이라 아차 하는 순간 큰일이 날 수도 있다.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지만 유스넨은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그녀를 향한 걱정이 커져갔다.
마치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만 같은 불안감이었다.
괜히 그녀의 곁을 떠나온 건지 후회마저 들었다.
‘지금에라도 돌아가야 할까?’
유스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찬란한 광채가 그의 눈을 찔렀다.
유스넨은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광채였다.
동시에 중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의 대리자여.]
이후, 그의 앞에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났다.
빛의 날개를 지닌, 천사였다!
에덴에서 직접 그를 마중 나온 것이다.
“위대한 빛의 천사를 뵙습니다.”
[과례는 필요 없습니다. 그대의 품계 역시 본인보다 낮지 않으니 말입니다.]
유스넨은 2품 트론즈 천사의 품계를 받았다.
지상에 살아 현신한 천사.
에덴의 대리자.
그게 광휘의 대공, 유스넨의 진실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먼 길을 오셨습니까, 우리의 대리자여?]
유스넨은 숨을 들이켰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여쭙고자 하는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한 존재에 관해 여쭙고자 합니다.”
유스넨은 마른침을 삼켰다.
초조함과 긴장을 억누르며 천천히, 똑바로 말하였다.
“쥬웰, 그녀의 정체를 여쭙고자 합니다. 열여섯 대천사장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 *
가고일은 쥬웰을 납치해 한참을 날아갔다.
‘어디까지 온 거지? 별장?’
가고일이 도착한 곳은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한 폐별장이었다.
끔찍한 살인이 일어나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장소.
가고일은 열린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연쇄 살인범은 아직인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쥬웰은 주변을 살피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어떤 놈이지?’
아니, 질문을 바꾸었다.
‘도대체 여섯 공작가에 얼마나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거지?’
단순히 사이코패스의 엽기 행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거였으면, 굳이 여섯 공작가의 핵심 인물을 노릴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이건 분명 극심한 원한을 가진 이의 보복이었다.
‘어쨌든, 무슨 사정이든 더는 봐줄 수 없어.’
솔직히 그녀는 범인이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지르든 큰 관심 없었다.
아무리 연쇄 살인범 놈이 저지르는 일이 끔찍하다고 해도 그녀의 끔찍함만 할까?
그녀야말로 연쇄 살인범을 능가하는 가장 끔찍한 악마였다.
하지만 연쇄 살인범이 저지르고 있는 짓은 그녀의 복수에 방해가 되었다.
단지 그것이었다.
그녀가 연쇄 살인범을 처리하려는 이유는.
‘얼른 처리하고 돌아가자. 가급적 오펜하임이 깨기 전에 돌아가야 해.’
오펜하임이 깨면 일이 커진다.
가넷가에 납치 소식이 전해질 거고, 엔리크 자작이 걱정할 것이다.
그녀는 엔리크 자작이 걱정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빨리 처리하자.’
쥬웰은 팔짱을 낀 채 연쇄 살인범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놈이군.’
쥬웰은 희미하게 열린 방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연쇄 살인범이었다.
저벅, 저벅.
고요한 폐저택에 발소리가 울렸다.
다른 이였다면 공포에 떨었을 상황이었지만, 쥬웰은 침착히 범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떤 놈인지 얼굴만 확인 후 곧바로 제거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발걸음이 방문 앞까지 가까워졌을 때.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잠깐.’
그녀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영혼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방으로 다가오는 인물에게서 굉장히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아니. 아닐 거야. 설마 그럴 리가……?’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착각일 것이다. 절대로 그 인물일 리가 없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추측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하지만 이윽고.
끼이익, 낡은 문이 열렸고 한 인물이 등장했다. 그리고 나타난 인물의 얼굴을 본 순간.
‘아.’
그녀의 세상이 멈추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쥬웰은 전신에 힘이 풀려,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증스러운 년.”
마치 무기질처럼 차가운.
섬뜩한 눈빛이 그녀에게 내려앉았다.
추기경 리델하트.
그녀가 사랑했던, 그리고 그녀를 사랑했던 오라버니가 연쇄 살인범이 되어 그녀를 죽이러 나타난 것이다.
* * *
‘마, 말도 안 돼.’
충격으로 그녀의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사실 이럴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걱정하긴 했었다.
어쩌면 이 연쇄 살인이 에스텔레의 복수를 하려는 누군가의 소행이 아닌가 하고.
하필 희생자들은 원수들의 최측근이자, 원수들과 함께 에스텔레를 핍박하던 이들이었으니까.
특히 리델하트를 걱정했다.
‘가증스러운 죽일 년.’
그때 보았던 그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일단 리델하트는 이런 일을 저지를 능력이 없었다.
그는 신실한 신관이자 뛰어난 신학자일 뿐 어떤 힘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가능성을 뒤로 미루어두고 있었는데……
쥬웰은 리델하트의 얼굴…… 정확히는 미간을 본 순간, 좌절하였다.
악마의 낙인.
그것도 악마의 커다란 총애를 받는 이만 내려받는다는 악마화(惡魔華)였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어.’
그녀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아, 아니야. 이건…… 그럴 리가 없어. 안 돼.’
그녀는 강하게 부정하였다.
눈으로 보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서.
제발 이게 현실이 아니길 바라서.
하지만 아니었다.
리델하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흉포한 살의가 그녀에게 내리꽂혔다.
마치 칼로 심장을 난도질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 어째서……?”
“어째서냐고?”
리델하트가 서늘하게 되물었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가증스러운 위선자여? 에스텔레를 그런 죽음으로 몰아놓고?”
“……!”
쥬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리델하트는…… 그녀의 복수를 위해 연쇄 살인범이 된 것이다.
그것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왜? 왜!’
쥬웰은 울고만 싶었다.
그녀는 그저 리델하트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이란 말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으면서! 도대체 왜!’
이제 리델하트는 구원받지 못한다.
게헨나에 끌려가 영겁의 고통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마치 그녀가 겪었던 것처럼 말이다.
한편, 리델하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떨고 있는 쥬웰을 보며 공포에 질린 것으로 오해했는지 이렇게 말하였다.
“에스텔레도, 그렇게 두려워했겠지.”
“……!”
리델하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쥬웰의 뺨을 쓸었다.
섬뜩하게.
곧 있을 잔혹한 진혼곡을 기대하듯.
“내 동생은 아무런 죄도 없이 끔찍한 죽음을 맞았어. 너희 가증스러운 놈들의 탐욕 때문에.”
리델하트의 눈빛에 점점 광기가 차올랐다.
그녀는 리델하트가 저런 눈빛을 하는 걸 처음 보았다.
마치 슬픔이 극한에 치달아 미쳐 버린 듯한, 오로지 피만을 갈구하는 광인 같은 눈빛이었다.
“에스텔레를 죽음으로 몰아간 너희 원수들에게…… 다…… 똑같이 돌려주겠어.”
리델하트의 눈동자가 쥬웰의 얼굴, 팔, 다리, 모든 걸 훑었다.
마치 에스텔레를 위로할 제물로 바치듯, 쥬웰의 모든 신체를 끔찍이 고문해 복수하려는 것이었다.
리델하트의 얼굴에 악마화가 점점이 이어졌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다섯 송이…… 다섯 송이.
무려 다섯 송이의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최강급 흑마도사에 버금가는 힘이었다.
짙은 암흑이 리델하트의 손에 맺혔다.
그 손을 천천히 쥬웰의 얼굴에 가져갔다. 암흑이 맺힌 손이 닿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산산이 찢어지리라.
하지만 그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그만.”
멍하니 있던 쥬웰이 낮게 읊조렸다.
리델하트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였다.
쥬웰의 음성을 들은 순간, 갑자기 소름이 돋은 것이다.
‘내가 소름이 돋았다고?’
그때, 쥬웰이 또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타악!
리델하트의 손을 낚아챈 것이다.
“……!”
리델하트는 놀란 얼굴을 했다.
그는 지금 마기를 강하게 일으킨 상태다.
원래라면 그의 손을 잡은 쥬웰의 손바닥은 산산이 찢어져 피가 낭자했어야 한다.
하지만 쥬웰의 손바닥은 멀쩡했다. 어떤 반응도 없었다.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리델하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자신을 잡은 쥬웰의 손을 본 순간, 리델하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기였다.
그것도 그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짙고 어두운.
“……누구야?”
질척한.
무저갱에서 흘러나온 듯한, 깊게 가라앉은 음성이 쥬웰에게 흘러나왔다.
“너…….”
“누구냐고 물었어.”
그녀의 얼굴에서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다섯 송이…… 열 송이…… 스무 송이…….
관자놀이에서 뺨으로, 목으로, 어깨로, 가슴으로…….
끝없이 퍼지는 악마화의 향연에 리델하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쥬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미칠 듯한 마기가 그의 전신에 몰아쳤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악마화의 숫자는 들어본 적도……!’
그는 강렬한 고위 악마와 계약했다. 하지만, 고작 다섯 송이의 악마화를 내려받는 데 그쳤다.
이 정도만 해도 최강급 흑마도사에 버금간다고 알고 있는데, 저런 숫자의 악마화라니?
그때 쥬웰이 웃었다.
마치 우는 듯한 웃음이었다.
시뻘게진 그녀의 눈동자에 섬뜩한 분노가 일렁였다.
“어떤 새끼냐고, 당신을 유혹한 악마가.”
“……!”
방 안을 가득 메운 어마어마한 마기에 리델하트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영혼을 짓누르는 듯한 압도적인 위압감이 그를 압박했다.
“하.”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어떤 악마인지, 절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아. 죽여 버리겠어.’
분명 리델하트를 꾄 악마가 있을 것이다.
찬란히 빛나는 영혼을 지닌 이는 악마들이 가장 탐내는 먹잇감이었으니까.
“어떤 새끼인지, 나와.”
쥬웰은 짓씹듯 말했다.
“게헨나로 찾아가서 소멸시키기 전에 당장 나오라고!”
파창! 파차창!
그 외침과 함께 저택의 창문이 모조리 깨어져 나갔다.
리델하트의 얼굴이 더욱더 창백해졌다.
그리고 직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리델하트의 동공이 풀리더니 털썩 쓰러진 것이다.
누군가 일부러 그의 의식을 잠재운 듯했다.
그리고 허공에서 나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런, 퀸.]
고혹적인 여성체의 외모.
어둠이 깃든 두 장의 날개.
악마였다!
리델하트를 유혹한 악마가 쥬웰의 부름을 듣고 나타난 것이다.
[내가 경고하지 않았던가요?]
악마가 싱긋 웃었다.
[절 건드리신 것 후회할 거라고.]
쥬웰은 눈빛을 낮게 가라앉혔다.
놀랍게도 안면이 있는 악마였다.
그것도 무려 두 차례나.
일전 그녀가 수도 근처에 일어난 침식을 막았을 때.
그리고 마리를 타락시키려 꾀려던 악마를 쫓아내었을 때.
그때, 그녀와 악연이 생긴 이름 모를 3품 악마였다.
악마는 리델하트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잔혹한 미소였다.
[당신을 위한 선물로 특별히 유혹했지요. 어떤가요, 소중한 이가 망가진 걸 본 기분이? 제 선물이 마음에 드시나요?]
* * *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쥬웰은 차갑게 악마를 노려보았다.
“나 때문에 일부러 유혹했다고?”
[맞아요. 당신이 아파하는 걸 보고 싶었거든요.]
악마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하였다.
[고작 인간 주제에 대악마들의 총애를 받고 날뛰는 당신이 건방져서 말이에요.]
악마는 권능을 사용해 쓰러진 리델하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의식을 잃은 그의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물론, 이 영혼이 탐이 나기도 했고요. 동생을 잃은 슬픔에 울부짖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나요? 물론, ‘동생’을 향한 순수한 애정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지요.]
악마는 짙게 미소를 지었다.
[게헨나에 떨어진 후, 이 찬란한 영혼이 어찌나 아름답게 비명을 지를지 기대되지 않나요? 아주, 아주 예뻐해 줄 거예요.]
쥬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예뻐한다.
그건 영겁의 세월 동안 참혹한 고통을 주겠다는 것이다. 에스텔레가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건 악마와 계약한 모든 흑마도사들 앞에 놓인 미래였다.
악마와 계약한 흑마도사들은 모두 이러한 끔찍한 영겁의 고통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단, 하나의 방법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만둬.”
[흐음?]
“계약을 파기하라고.”
악마가 계약을 파기해 주면, 그 영혼은 해방될 수 있다.
물론……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창세 이래, 자신의 손에 떨어진 영혼을 그냥 놔준 악마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과연, 악마는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왜요?]
그녀는 조롱하듯 싱긋 미소 지었다.
[전 이 영혼에게 아주 아주 참혹하게 고통을 줄 거예요. 영원의 세월 동안 말이에요. 참으로 즐거울 것 같지 않나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네요.]
쥬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3품 악마 따위가. 평소라면 감히 내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할 것이.’
3품 악마.
게헨나에서 귀족으로 분류되는 고위 악마이다.
하지만 쥬웰이 지닌 어둠의 격에 비하면 한참이나 밑이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3품 악마보다 훨씬 높은 어둠의 격과 힘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쥬웰은 원한다면 당장 눈앞의 악마를 찢어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지금 저 악마를 소멸시키면, 리델하트 오라버니는 구원받을 방법이 없어.’
악마가 소멸하면 계약은 끝난다.
하지만 악마가 남긴 낙인의 흔적 때문에 ‘죄인’으로 분류되어 결국 게헨나로 끌려가게 된다.
악마의 개인 소유가 되는 최악은 피하게 되지만, 게헨나에서 고통받는 운명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리델하트 오라버니를 구할 방법은 하나야. 계약을 파기해 낙인을 지우는 것. 즉, 저 악마가 스스로 계약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해.’
쥬웰의 머릿속에 찰나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리델하트를 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고, 다행히 곧 방책을 떠올렸다.
‘저 악마가 원하는 건 결국 내 고통이야. 그렇다면 그걸 이용해 함정을 팔 방법이 있어.’
쥬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다짐했다.
리델하트를 건드린 저 악마를 절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고. 반드시 산산이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저 악마를 함정에 빠지게 해야 했다.
다행히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리델하트를 구하고, 저 어리석은 악마를 찢어 죽일 방법이 말이다.
‘문제는 나도 곤란을 겪어야 한다는 거지만.’
곤란…… 정확히는 굴욕이었다.
쥬웰은 순간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그깟 굴욕 잠깐 감수하면 그만이었다.
대신 죽음으로 돌려주면 된다.
‘절대로 곱게 죽이지 않겠어.’
섬뜩하게 생각한 쥬웰은 놀라운 일을 하였다.
털썩.
악마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부탁하니, 리델하트 오라버니와 계약을 파기해 줘.”
[……!]
악마가 놀란 얼굴을 했다.
곧 악마의 눈동자에 희열이 차올랐다.
자신보다 격이 높은 쥬웰이 무릎 꿇은 모습에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흐음, 퀸. 곤란하네요. 대악마들의 총애를 받는 당신이 이렇게 내 앞에 무릎을 꿇다니.]
악마는 허리를 숙여 쥬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참, 비루하고 미천해 짓밟아 죽이고 싶어지잖아요.]
악마의 눈동자가 희번덕 빛났다.
탐나는 장난감을 바라보는 잔혹한 눈빛이었다.
쥬웰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더욱 숙였다.
“부탁이야. 리델하트 오라버니와 계약을 파기해 줘. 대신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해주겠어.”
[원하는 대로?]
“그래, 네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어. 설사 내 영혼을 바란다고 해도.”
악마의 눈빛이 빛났다.
숨길 수 없는 욕망이 악마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다.
쥬웰은 상대가 자신의 미끼를 물 것임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이건 어떤 악마라도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었으니까.
[진심인가요, 퀸? 정말 당신의 영혼을 내게 바치겠다는 건가요?]
쥬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델하트 오라버니를 해방해 주면 내 영혼을 네게 바치겠어. 물론 난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내 복수가 끝난 후 네 노예가 되겠어.”
그 말에 악마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영혼은 게헨나의 모든 악마가 탐내던 영혼이다. 리델하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너무 고귀하고 사랑스러워 오로지 1품 대악마들만이 그녀의 영혼을 독점했다.
2품 군주급 악마들조차 그녀의 영혼을 훔쳐보기만 할 뿐,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고귀한 영혼이 고작 3품 귀족인 그녀의 노예가 되겠다니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악마의 모습을 보며 쥬웰은 속으로 차갑게 비웃음을 지었다.
‘역시 예상대로 멍청하군. 2품 군주급 악마들이 왜 날 건들 엄두를 못 냈는지 생각도 못 하는 건가.’
저 멍청한 악마는 상상도 못 하고 있으리라.
지금, 이 제안에 어떤 함정이 숨어 있는지.
어쨌든 그녀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조금만 더 참자.’
그런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악마는 오연한 태도로 말하였다.
[좋아.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나 3품 악마 ……는 지금, 이 순간 부로 리델하트와의 계약을 해지한다.]
그 말과 함께, 리델하트의 이마에 피어올랐던 악마화들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악마의 낙인에서 해방된 것이다.
‘됐어.’
쥬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대신, 너 ……의 영혼은 복수가 끝난 이후 나 ……에게 귀속되리라.]
악마는 손목에서 피를 내어 밑으로 떨어뜨렸다.
뚝. 뚝.
섬뜩한 붉은 피가 악마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핥아.]
이건, 굴종의 의식.
저 피를 핥는 순간, 이제 쥬웰의 영혼은 저 악마에게 귀속될 것이다.
‘괜찮아. 한 번만 참으면 돼. 피를 핥는 것 정도야, 뭐. 아픈 것도 아니니.’
쥬웰은 무심히 바닥에 떨어진 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악마는 악마답게 이 의식을 더욱 굴욕적으로 바꾸었다.
바닥에 떨어진 피를 구두를 들어 짓밟은 것이다.
“……!”
이제 피를 핥으려면, 구두를 핥아야 했다.
심지어 악마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르르.
악마의 얼굴이 변하였다.
매리엇.
그녀가 가장 증오하는 여인 중 한 명의 얼굴로.
과거, 매리엇이 자주 짓던 잔혹한 표정을 그대로 똑같이 재현하며 말했다.
[핥아. 천한 개처럼.]
“……!”
악마가 희열에 찬 표정으로 쥬웰을 내려다보았다.
쥬웰이 과연 어떤 굴욕적인 얼굴을 할지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쥬웰의 반응은 악마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차분히 악마의 얼굴을 한 차례 일견하고는 허리를 숙여 무심한 표정으로 구두에 묻은 피를 핥은 것이다.
기계적으로.
어떤 얼굴의 변화도 없이.
굴욕은커녕, 오히려 보는 이를 소름 끼치게 하는 섬뜩한 모습이었다.
[…….]
과연 악마의 얼굴이 굳었다.
쥬웰은 피식 조소했다.
‘고작 이런 것으로 굴욕을 느끼기엔 내가 지금껏 겪은 일들이 너무 화려해서.’
이윽고 구두에 묻은 피를 깨끗하게 핥은 후, 쥬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퉤 침을 뱉었다.
“됐나? 계약은 이루어진 거지?”
[……그래.]
악마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답했다.
‘건방진 년. 나중에 내게 영혼이 넘어오기만 해봐라. 다시는 이런 건방진 태도를 보이지 못하게 하마.’
악마는 이를 바득 갈고는 게헨나로 사라지려고 하였다.
[……내게 오는 날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도록. 널 참혹히 사랑해 줄 테니.]
섬뜩하게 말하며 게헨나의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쥬웰이 그녀를 불러세운 것이다.
“잠깐. 리델하트 오라버니의 영혼은 확실히 해방된 거지?”
[그래, 저 영혼은 이제 나와 어떤 관계도 없다. 낙인의 흔적이 남아 게헨나에 끌려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쥬웰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였다.
파아앗!
목에 걸고 있던 은목걸이를 풀더니 악마에게 날린 것이다.
[……!]
은빛 목걸이가 순식간에 악마의 목과 날개, 팔, 다리를 묶어버렸다.
[무슨?!]
악마는 당황해 손발을 휘저었지만, 소용없었다.
리델하트 때문에 저자세로 나왔을 뿐, 애초에 어둠의 격을 따지면 악마보다 쥬웰이 까마득히 높았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은빛 목걸이가 풀리지 않자, 악마는 이를 갈며 그녀를 위협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내 노예가 되기로 한 걸 벌써 잊었나?]
하지만 쥬웰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래, 네 노예가 되기로 했지. 그런데 너 하나 잊은 것 없어?”
[……뭐?]
“내가 너를 죽이면 안 된다는 특약을 안 넣었잖아.”
악마의 눈이 커졌다.
[……뭐?]
“그러니 네 노예가 되기 전에, 그냥 너를 죽여 버리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
쥬웰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악마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다섯, 열, 스물, 서른…….
끝없이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악마화는 무려 게헨나를 지배하는 66대악마들이 직접 새긴 악마화들.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어마어마한 마기를 품고 있었다.
악마는 쥬웰에게서 피어오르는 어마어마한 마기에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제 알겠니?”
쥬웰은 싱긋 웃었다.
“너 사기 계약 당했어.”
* * *
그때, 얼음의 대지 북쪽 끝.
유스넨은 ‘틈새’를 통해 에덴으로 들어갔다.
화악!
찬란한 빛이 눈을 찔렀다.
천사들과 고귀한 영혼이 안식을 누리는 천국, 에덴이었다.
[그만. 더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스넨은 에덴의 초입에서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천사가 막아선 것이다.
천사가 적개심 어린 눈빛으로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저는 천사의 피를 각성한 대리자. 에덴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그대는 아직 죄과를 완전히 씻지 못했습니다.]
죄과.
13년 전 유스넨이 일으켰던 끔찍한 참사를 뜻한다.
유스넨은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적개심이었다.
‘원래도 천사들은 날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대다수 천사가 유스넨을 경원시했다.
“그러면 대천사장분들은 뵙지 못하는 겁니까?”
[그분들께서 직접 이쪽으로 오실 겁니다.]
그 말과 함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파아앗!
하늘에서 열여섯 줄기의 찬란한 빛이 내려온 것이다.
에덴을 수호하는 16대천사장들이었다.
무려 여섯 장의 날개를 지닌 1품 대천사, 세라프들.
낙원에서 가장 숭고한 열여섯 명의 대천사들이 유스넨을 내려다보았다.
“열여섯 대천사장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대리자여?]
고저가 없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마치 무기질의 존재가 이야기하듯 무심한 음성이었다.
“여쭐 게 있어서 왔습니다.”
[여쭐 거라.]
선두에 선 대천사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유리같이 투명한 눈동자가 유스넨을 꿰뚫었다.
[무슨 의문이기에 여기까지 온 것인지 의아하군요. 당신에게는 중요한 의무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거대한 어둠이 제국에 창궐하고 있는 걸 모르고 있단 말입니까?]
질책이었다.
책무를 내던지고 여기까지 온 행동에 대한.
하지만 유스넨은 도리어 눈빛을 빛냈다.
거대한 어둠.
쥬웰을 말하는 것임을 곧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역시, 에덴은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어.’
유스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정체 또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어둠인 쥬웰, 그녀의 정체를 여쭙고자 합니다. 그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두근.
질문을 던진 유스넨의 심장이 뛰었다.
과연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째서, 그녀는 그를 이렇게나 아프게 하는 걸까?
안타깝고, 괴롭게 하는 걸까?
그리고…… 왜 자신은 그녀를 볼 때마다 이토록 비통함을 느끼는 걸까? 왜 영혼이 칼로 도려내듯 아픈 걸까?
이제 그 답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
대천사장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천 년과도 같은 순간이 지나갔다.
미칠 듯한 초조함을 억누르며 답을 기다린 끝에.
선두의 대천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걸 왜 묻는 겁니까?]
“……!”
[쥬웰, 그녀는 당신이 처단해야 할 어둠일 뿐입니다. 그녀의 정체가 무엇이건, 당신과 전혀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건…….”
유스넨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녀를 처단할 수 없었다.
그토록 안타까운 그녀를 어떻게 처단한단 말인가?
절대로 불가능했다.
[…….]
그런 유스넨을 보는 대천사들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설마 현혹당한 겁니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강대한 흑마도사들은 늘 안타깝고 매혹적인 존재이지요. 그래서 그녀에게 현혹당한 것 아닙니까?]
“……!”
[13년 전, 어둠에 현혹당해 그런 끔찍한 일을 벌여놓고, 또 같은 일이라니. 한심하군요.]
유스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13년 전.
각성 의식 전날, 그는 페리도트 대공가에서 처형을 기다리던 흑마도사를 우연히 만났다.
마왕급 흑마도사였다.
강대한 어둠답게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이였고, 아직 어렸던 유스넨은 흑마도사의 안타까운 사연에 동정을 품었다.
매료되었다고 하여도 되었다.
진심으로 흑마도사의 사연을 돕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서였다.
비극이 일어난 것은.
흑마도사는 어린 유스넨의 동정을 역으로 이용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천사 각성 때 악마를 소환하게 수작을 부린 것이다.
때문에 각성 당일, 천사가 아닌 1품 대악마 타천사 베스윈이 유스넨의 몸에 강림했고, 유스넨은 자신의 손으로 모든 일가족을 죽이게 되었다.
그게 13년 전 비극의 전말이었다.
이후 유스넨은 폐인이 되었다.
에스텔레가 아니었다면 그는 그때 말라 비틀어 죽었을 것이다.
[당신은 이미 겪지 않았습니까? 어떤 안타까움을 지니고 있든, 어둠은 어둠일 뿐입니다. 어둠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
순간 유스넨은 무심코 그럴지도, 란 생각을 하였다.
쥬웰도 그러했다.
어떤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든, 그녀의 본질은 끔찍한 어둠이었다.
대천사는 한숨을 내쉬고는 달래듯 말했다.
[대리자여, 묻겠습니다. 악한 이가 결국 뉘우치고 참회의 삶을 살며 숱한 선한 일을 한다면…… 그자는 악인입니까, 선인입니까?]
“…….”
유스넨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그자는 선인이었다.
[반대로 묻겠습니다. 선했던 이가, 결국 타락해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는 이가 된다면, 그자는 선인입니까, 악인입니까?]
“…….”
유스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천사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그자는 악인입니다. 세상, 모든 강대한 흑마도사가 그러합니다. 선인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악인이 된 이들이지요.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세상 수많은 이를 위해 그런 어둠을 처단하는 것입니다.]
“…….”
유스넨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빌어먹게도, 대천사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어둠은 어둠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둠의 끔찍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유스넨은 대천사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따지면, 저도 13년 전 그때 죽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야말로 누구보다 끔찍한 죄악의 존재였을 텐데요.”
[……!]
그가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을 때.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그를 감싸주었던 이가 있었기에.
‘누나.’
유스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에스텔레.
이 세상 모두가 그를 저주하고 죽이려 할 때.
오로지 그녀 혼자만이 그를 감싸주고 위해주었다.
끔찍한 죄인인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 따뜻함을 경험했기에.
어둠조차 감싸는 따뜻함을 알기에.
유스넨은 대천사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어둠은 어둠이다.
하지만 유스넨은 대천사를 향해 비릿한 비소를 지었다.
“그런 어둠조차 감싸 안아야 하는 게 우리 빛의 진정한 의무 아닙니까?”
* * *
[감히!]
쥬웰에게 제압당한 악마는 버럭 화를 내었다.
[인간 따위가! 후회하게 해주마!]
악마는 쥬웰의 목걸이를 풀려고 힘을 끌어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흐음, 지금 자신의 처지가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쥬웰이 목걸이에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목걸이가 악마의 몸에 파고들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인간이 이런 힘을? 이건 2품 군주급 악마보다……!]
“그래, 내가 더 강하지.”
악마화가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서른 송이, 서른다섯 송이…… 마흔 송이, 쉰 송이…….
가슴에서 배로, 팔, 다리로…… 이윽고 손등과 발등에도, 전신에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피어오른 악마화의 숫자는 예순여섯 송이.
지옥을 지배하는 대악마들의 숫자였다.
그렇다.
쥬웰은 66대악마들 모두에게 악마화를 내려받은 것이다.
[이, 이런 마기는…… 마, 말도 안 되는…….]
악마는 경악해 말을 더듬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왕 처리할 것, 제대로 처리해야지.’
쥬웰은 아예 끝을 보기로 하였다.
투득. 특.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쥬웰의 몸에 벌어진 일에 악마의 동공이 미친 듯 요동쳤다.
날개였다.
쥬웰의 등 뒤로 악마의 날개가 피어오른 것이다!
그것도 한 쌍이 아니었다.
무려 세 쌍.
여섯 장의 날개가 섬뜩한 자태를 드러냈다.
[1품의 격(格)!]
악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르짖었다.
날개의 숫자는 악마와 천사의 격에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특히 악마 중 날개를 지니는 건 귀족이라 불리는 3품 악마부터이다.
그 이하 격의 악마들은 날개 대신 뿔이나 꼬리 등으로 영혼의 격을 나타낸다.
즉, 날개를 지닌 악마부터 고위 악마라 칭하였다.
3품 악마들은 두 장의 날개를.
그리고 2품 군주급 악마는 네 장의 날개를 지닌다.
그리고 여섯 장의 날개를 지니는 건 오로지 지옥을 지배하는 1품 대악마들뿐이다.
그 말은, 지금 쥬웰이 지닌 어둠의 격이 1품 대악마와 동일하다는 뜻이었다.
66대악마들에게 모조리 악마화를 내려받은 덕에, 이러한 어마어마한 격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나도 이런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지만.’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영혼의 상태 때문이었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산산이 깨져 있다. 부서지기 직전의 그릇과 같았다.
그래서 이러한 강대한 힘을 오래 유지하는 건 무리였다.
지금도 깨진 영혼이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단순히 육체적 고통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괴로움이 그녀의 온 영혼과 정신을 뒤흔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담아 영혼이 안에서부터 쪼개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온갖 고통에 익숙한 그녀이지만,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은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신음이 흘러나오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녀는 참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하얀 안색으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바둥거리는 악마에게 다가갔다.
“이제 알겠니? 네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인지는?”
악마는 이를 악물며 악을 썼다.
[이런 짓을 벌이면……! 게헨나에서 널 가만히 둘 것 같으냐?]
“아아.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쥬웰은 비웃음을 지었다.
“고작 너 따위 벌레 한 마리 밟아 죽이는 게 내게 뭐 큰일이라고?”
[……!]
“대악마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한번 볼래?”
그렇게 이야기한 순간이었다.
허공에 끔찍한 광경이 나타났다.
예순여섯 쌍의 눈동자가 나타나더니, 악마를 섬뜩하게 노려본 것이다.
대악마들의 눈동자들이었다.
끔찍한 사기(邪氣)가 섬뜩하게 휘몰아쳤다.
[……!]
악마의 얼굴이 시체처럼 변했다.
느낀 것이다.
지금 대악마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대악마들은 감히 3품 악마 따위가 자신들이 사랑하는 그녀에게 손을 대려 한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제 알겠니? 지금 네가 어떤 처지인지? 넌 이제 내 손에 죽음을 맞게 될 거야.”
쥬웰이 나직이 말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말이야.”
그녀는 악마의 등에 뻗어 나온 날개 하나를 잡았다. 그리고.
찌이익.
그대로 찢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악마의 날개는 영혼이 형상화된 것이다.
그걸 찢는 건 영혼을 그대로 찢는 것과 동일했다. 그 어떤 고문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영혼에 작렬하게 된다.
쥬웰은 날개를 반쯤 찢은 상태로 멈추었다.
[제, 제발…… 제발…… 아아아아아악.]
악마가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다.
쥬웰은 발을 들어 그런 악마의 얼굴을 짓밟았다.
“그거 알아? 난 사실 너희 악마들을 별로 싫어하지 않아.”
뜻밖의 이야기였지만, 사실이었다.
악마들이 악한 행동을 하는 건, 그저 본능이었으니까.
배고픈 늑대가 먹이를 먹듯. 그저 당연한 행동이니, 그녀는 악마를 증오하는 걸 포기했다.
“그런 의미에서 네가 나에게 저질렀던 잘못도 이해는 해. 넌 그냥 악마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거잖아?”
그 말에 악마는 희망 어린 얼굴을 했다.
[제, 제발…… 용서를…….]
“하지만.”
쥬웰은 차갑게 선언했다.
“넌 아주 아주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될 거야. 다른 악마들에게 보여줄 본보기로.”
[……!]
“네 처참한 죽음을 보고, 주제 모르는 악마들이 감히 날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말이야.”
그래, 그녀는 딱히 악마를 증오하지 않는다.
그게 악마의 본능인 걸 알기에.
하지만 그래서 더욱 오늘 끔찍한 죽음을 내려야 했다.
다른 악마들이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을 벌일 엄두도 내지 못하게.
공포에 질려 다시는 그녀의 것을 건드릴 생각도 하지 못하게.
즉, 이건 경고였다.
다른 악마들을 향한.
쥬웰은 상대 악마의 얼굴을 밟은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끄아아아아아악!]
“희망은 갖지 마.”
쥬웰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잔혹한 미소를 짓도록 노력했다.
무리하게 끌어 올린 힘으로 깨진 영혼의 그릇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지만, 티 내지 않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섬뜩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너에게 편안한 죽음은 찾아오지 않을 테니.”
악마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렸다.
그렇게 끔찍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 * *
[……!]
유스넨의 말에 대천사들이 술렁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둠을 지켜보겠다는 겁니까?]
대천사들이 날카롭게 물었다.
하지만 유스넨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켜보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녀를 구원해 보겠다는 겁니다.”
[……!]
“위대한 빛께서 바라는 것도 무분별한 처단은 아닐 테니까요.”
대천사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은 자비로운 존재.
설사, 어둠이라도 가련하게 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사명과 어긋납니다. 당신은 어둠의 존재를 처단하고 사람들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건 아닙니다. 다른 방식으로 그 의무를 수행하겠다는 겁니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유스넨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구원해 보겠습니다. 반드시. 저를 지켜봐 주십시오.”
유스넨은 강렬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그녀를 구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는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더는 눈물짓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녀가 행복해지도록 만들고 싶었다.
간절히.
[그건…….]
대천사들이 술렁였다.
너무 당황스러운 제의였던 것이다.
그때, 뜻밖의 음성이 장내를 가로질렀다.
[한 번 기회를 주지요.]
[베른힐트…….]
구석에 자리한 네 장의 날개를 지닌 천사였다
2품 트론즈 천사.
300년 전 타천한 1품 대천사장 베스윈의 직속 수하 천사.
베른힐트는 차갑게 말했다.
[기회를 준 후, 결과에 따라 처결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패하면, 저자도 함께 처단하는 것으로.]
유스넨은 실소했다.
지금 베른힐트는 유스넨의 편을 들어준 게 아니었다.
베른힐트는…… 유스넨을 증오했다.
다른 천사들도 대체로 유스넨을 혐오했지만, 베른힐트는 더욱 그게 심했다.
13년 전 사건에 베른힐트의 상관이었던 타천사 베스윈이 엮였기 때문인데, 베른힐트는 유스넨의 어리석음 때문에 자신의 상관 베스윈이 다시 한번 죄를 지었다고 원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유스넨까지 처단하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기회를 주지요. 그대를 지켜보겠습니다.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길.]
“감사합니다.”
유스넨은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됐어.’
에덴의 승인하에 그녀를 위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곧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단,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실패할 경우, 그대에게 어떤 대가가 기다릴지는. 그대는 빛을 잃게 될 겁니다.]
빛을 잃는다.
페리도트 대공가의 인물에게 가장 끔찍한 파멸.
타천(墮天)을 뜻한다.
그는 타천사가 되어 게헨나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스넨은 물러서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유스넨은 굳건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그는 그런 파멸을 맞을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그녀를 구원해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
그런 마음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녀를 구원하고 말 테니까요.”
대천사들은 잠시 가만히 침묵하다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지켜보겠습니다.]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야기하십시오.]
유스넨은 숨을 들이켰다.
아마 대천사들은 쥬웰의 정확한 정체를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천사들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
대천사들이 순순히 그녀의 정체를 밝혀주지 않을 가능성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정체를 유추해야 했다.
꼭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 있었다.
“게헨나에 떨어진 자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
대천사들이 굳었다.
쿵. 쿵.
질문을 던진 유스넨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이걸 묻고자 이 먼 거리를 온 것이다.
혹시나…… 절대로 아니겠지만, 가능성을 확인해 보기 위해.
‘과연?’
유스넨은 방금 자신이 떠올린 가능성을 생각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아득함이 영혼을 엄습했다.
머리가 하얗게 질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심장이 칼로 수천, 수만 조각으로 토막 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대천사들을 바라보았다.
알아야 했다.
방금 자신이 떠올린 일이 가능한 일인지.
이윽고 대천사들이 입을 열었다.
[신께서 정한 세상의 법칙상 불가능합니다.]
“……!”
[66대악마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고 해도 이미 죽은 이의 영혼을 지상에 되돌아오게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유스넨은 맥이 탁 풀렸다.
좌절일까? 아니면, 어떤 마음일까?
전신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진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유스넨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
대천사는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이건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아니라고?’
혼란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이토록 아프단 말인가?
왜 이토록 미칠 것만 같단 말인가?
그렇게 대천사들과의 만남이 끝났고, 유스넨은 지상으로 돌아왔다.
“하, 하…….”
유스넨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빌어먹을!”
주룩, 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꼭 누나 만나러 와야 해. 알았지?’
왜일까?
에스텔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유스넨은 이를 악물었다.
뜨거운 눈물이 뚝뚝 밑으로 떨어졌다.
“포기하지 않아. 반드시 알아낼 거야. 그리고…… 구할 거야.”
그렇게 얼음의 대지에서 유스넨은 홀로 눈물을 흘렸다.
그녀를 생각하며.
* * *
그리고 유스넨이 사라진 후.
에덴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있었다.
[왜 거짓을 말한 겁니까?]
[거짓은 아닙니다. 세상의 법칙상 66대악마들은 죽은 영혼을 지상에 되돌아오게 할 수 없으니까요.]
대천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하나의 말을 덧붙이지 않았을 뿐이다.
[신께서 허락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신께서 허락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 말은, 신께서 허락하면 죽은 영혼이 세상에 돌아오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건 어마어마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쥬웰이 지상에 돌아온 건, 신께서 허락한 일이란 뜻이다.
[정확히는…… 신의 의지가 개입된 일이라고 봐야겠지요.]
대천사들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에스텔레의 ‘진실한’ 정체를 생각하면,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위대한 빛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건지.]
그녀의 ‘진실한’ 정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대천사들은 대화를 이어갔다.
[대리자, 유스넨도 문제입니다. 그는 결국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겁니다.]
[그렇겠지요. 이미 반쯤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누구인지 느끼고 있는 듯하니까요.]
[차라리 ‘금제’를 다시 거는 게 어떻습니까?]
그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금제(禁制)’.
상대에게 정신적 제약을 가하는 걸 뜻한다.
즉, 유스넨의 정신을 제약하자는 것이다.
심지어 그 말을 꺼낸 대천사는 ‘다시’란 단어를 사용했다.
유스넨의 정신에 ‘금제’를 가한 게 처음이 아니란 뜻이었다.
다른 대천사가 그 일을 언급했다.
[소용없을 겁니다. 우리가 건 금제도 이미 대부분 풀린 상태이니까요.]
[맞아요. 에스텔레 성녀의 죽음을 알고 유스넨이 미쳐 날뛸 때 그를 제지하기 위해 건 금제가 이렇게 간단히 풀려 버리다니.]
[그만큼 유스네의 그녀를 향한 마음이 깊다는 거겠지요.]
과거, 유스넨이 처음 에스텔레의 죽음을 들었을 때.
그는 그야말로 광인처럼 날뛰었다.
그러며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려 온갖 곳을 들쑤셨다.
그래서 대천사들이 나섰다.
유스넨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에스텔레의 죽음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이들을 모조리 도륙하려고 했다.
만약 그대로 놔두었다면 어마어마한 피가 흘렀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피를 각성한 이가 어둠이 아닌, 평범한 인간을 해치는 건 절대적으로 금지된 일.
대천사들은 유스넨을 제압하고 강력한 정신적 금제를 가했다.
에스텔레의 죽음에 어떤 의문도 품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금제조차 지금은 희미해져 있었다.
아마 유스넨은 머지않아 모든 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녀의 정체도.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군요.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위대한 빛께서도 어떤 답을 주지 않으시니.]
대천사들은 답답한 얼굴을 했다.
그녀가 게헨나에서 돌아온 데에는 분명히 신의 뜻이 개입했다.
그런데 그에 관해 여쭈어도 신은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유스넨이 가장 걱정입니다. 그가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되리라 보십니까?]
[글쎄, 좋지 않겠지요.]
대천사들은 염려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최악의 상황은 그가 그녀에게 완전히 ‘현혹’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시, 그는 파멸하게 될 것이다.
그걸 걱정했기에 대천사들은 그녀의 정체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지켜봅시다. 어쩌면 그가 정말로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대천사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쥬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잠을 자지는 않았다.
잠을 자면, 끔찍한 악몽을 꾸니까.
특히 오늘처럼 힘을 사용하고 난 다음에는 더욱 참혹한 악몽을 꾼다.
‘너무 힘을 많이 썼어.’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아주 끔찍한 밤을 보내게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흰 강아지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쥬웰은 씁쓸히 생각했다.
‘꽤 오래 못 본 것 같은데. 페리도트 대공령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고 했나? 보고 싶네.’
보고 싶다.
무심코 생각하고는 쥬웰은 흠칫했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젓고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다.
‘아니, 보고 싶을 수도 있지. 나도 사람인데.’
그녀도 사람이었다.
이렇게 끔찍한 악마가 되었지만 똑같이 감정이 있다.
그러니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아픈 일이 있을 때 아파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 그녀는 어지간한 일은 고통으로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일은…… 많이 아팠다.
‘리델하트 오라버니.’
주제넘은 짓을 한 악마는 결국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쥬웰은 작심하고 악마에게 끔찍한 죽음을 내렸다.
게헨나의 모든 악마가 그 끔찍한 죽음을 지켜보았을 테니, 앞으로 감히 함부로 그녀를 건들 생각을 못 할 것이다.
문제는 남겨진 리델하트였다.
그녀는…… 그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또 누가 너를 울게 했지?’
과거, 리델하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래 리델하트는 한미한 가문 출신의 둘째 아들이었다.
한미한 가문의 자제들이 흔히 그렇듯 원래 기사를 지망했다가 신의 부름을 받고 신관으로 전향한 경우였다.
이후 젊은 나이에 신학자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고, 에메랄드 가문의 양자로 들어왔다.
원래부터 에메랄드 공작가는 신전의 요직을 모조리 자신들 가문 사람으로 채우기 위해 신관으로서 뛰어난 싹을 양자로 입양하곤 했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진짜 아들로 키우기 위한 입적이 아니었으니, 리델하트가 에메랄드 공작가에 양자로 들어온 건 이미 장성한 뒤였다.
그녀도 훌쩍 자라고 난 이후.
그래서 오누이 관계였지만 둘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델하트는 그녀를 진심으로 위해주었다. 마치 진짜 오라버니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지만.’
리델하트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칼날을 품은 것처럼 날카롭고 불퉁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는 빈말로도 따뜻한 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왜 다친 거지?’
그 말과 함께 건넨 손을 잡은 이후, 그녀는 리델하트가 겉보기처럼 날카롭기만 한 이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니, 날카로운 성격인 건 맞았으나 단 한 명, 그녀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는 그녀를 아꼈다.
동정하고, 가련히 여겼다.
또한 그녀가 생각하기엔 정말 별것 아닌 상처에도 대신 아파해 주었다.
‘만약 어렸을 적에도 리델하트 오라버니가 있었다면, 조금은 덜 괴로웠을지도.’
나중에야.
아주 한참 뒤에야 그의 마음이 단순히 동생을 향한 순수한 애정과는 다르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게 그의 마음을 폄훼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 동생 이상의 감정을 품었다고 해서 그 감정을 강요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아니, 티를 냈던 적조차 없다. 그녀를 배려해서.
무엇보다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위해주었다.
그래서였다.
리델하트가 행복하길 바란 것은.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다니.’
쥬웰은 한탄했다.
악마를 소멸시켜 리델하트가 게헨나에 끌려가는 최악은 피했지만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리델하트는 앞으로도 여전히 그녀의 복수를 갈구할 것이다.
악마와의 계약이 무효화되었으니 또 다른 복수의 수단을 찾겠지.
그리고…… 영원히 행복해지지 못한 채 파멸할 것이다.
‘안 돼. 절대로.’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리델하트 오라버니가 그렇게 되게 놔둘 수는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리델하트를 이 끔찍한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가 자신과 상관없는 행복한 삶을 살도록 만들 것이다.
굳게 다짐하는 순간, 방문이 열렸다.
“로드.”
마리였다.
지금 쥬웰은 남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의식을 잃은 리델하트를 마리의 저택에 옮겨놓은 상태였다.
“몸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많이 피로해 보이는데, 눈은 조금 붙이셨나요?”
“……조금.”
사실 전혀 못 잤지만, 아니, 정확히는 잘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가넷가에서 나올 때 혼란 없도록 잘 처리했나?”
방금까지 마리는 쥬웰의 모습으로 대역을 하고 있었다.
“네. 잘 둘러대었으니 너무 늦게만 안 들어가면 괜찮을 거예요.”
쥬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엔리크가 걱정하는 건 질색이다. 다행히 마리가 현명하게 처신한 것 같다.
“……그런데 저분은?”
마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리는 에스텔레의 시녀였다.
그러니 당연히 리델하트와도 안면이 있었다.
“일어났나?”
“네, 그런데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아서…….”
“않아서? 혹시 도주했나?”
쥬웰은 얼굴을 굳혔다.
“아니에요. 제압해 묶어놓았어요.”
“누가?”
“제가요.”
“……네가? 어떻게?”
“예전에 재미 삼아 호신술을 익힌 적이 있거든요. 어지간한 남자는 간단히 제압할 정도는 되어요.”
“…….”
‘……도대체 언제 그런 무술을.’
마리가 무술의 실력자였다니.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다.
은근히, 아니, 대놓고 엉뚱한 마리니까.
귀족가의 숙녀였으면서, 무술 실력자라는 것도 영 이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지금 그건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가보지.”
쥬웰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솔직히 쥬웰은 리델하트와 대면하는 게 편치 않았다.
리델하트는 그녀 때문에 끔찍하게 망가진 셈이니까. 그러니 안타까움, 죄책감 등 괴로운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리델하트를 위해서.
끼익,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꽤 거칠게 난동을 피웠던 건지 리델하트는 잔뜩 흐트러진 차림으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제압당하면서 다친 듯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있었다. 심지어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너무 거칠게 제압한 것 아니야?’
힐끗 마리를 보자, 마리는 어깨만 으쓱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리델하트가 고개를 돌렸다.
“……!”
쥬웰을 본 리델하트의 눈빛이 단번에 사나워졌다.
사지가 결박당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했다.
“재갈을 풀어줘.”
“괜찮으시겠어요?”
지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 중 한 명인 쥬웰을 걱정해 주는 마리였다.
“그래, 그리고 나가 있어. 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마리는 순순히 명에 따랐다.
이윽고 둘만 남자, 리델하트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에스텔레를 그렇게 죽이더니. 역시나 가증스러운 위선자답게 끔찍한 힘을 숨기고 있었군. 도대체 내게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수작?”
“그래, 어째서 내게 아무런 힘도 안 느껴지느냔 말이다! 도대체 내게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리델하트의 눈동자에 섬뜩한 핏발이 섰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일단 오해를 풀기로 하였다.
“먼저 할 이야기가 있는데. 오해를 풀지. 난 네가 알고 있는 그 쥬웰이 아니야.”
“……쥬웰이 아니라고?”
“그래, 그 가증스러운 년은 죽었어. 바로 내 손에. 내 얼굴을 보도록.”
쥬웰은 증거를 보여주었다.
악마화가 피어올랐고, 그 강렬한 마기를 느낀 리델하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이렇게 강력한 마기라니?”
“이제 내가 쥬웰이 아니란 걸 믿겠나?”
리델하트는 잠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곧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넌 쥬웰의 몸을 대신 차지한 흑마도사…… 아니, 이 정도의 마기면 마왕이겠군. 마왕인 건가?”
“그래, 정확한 사정은 이야기할 수 없지만 나도 가넷가를 비롯한 여섯 공작가에 원한이 있어서.”
그녀가 자신의 원수가 아니란 걸 안 리델하트의 적의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면 내 힘은 어떻게 된 거지? 아까부터 악마와의 연결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리델하트의 눈빛에 다시금 끔찍한 살의가 타올랐다.
“어서 날 원래대로 돌려주도록.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야 할 일.
복수를 말함이다.
그런 리델하트의 모습에 쥬웰은 씁쓸한 얼굴을 하였다.
역시 리델하트는 에스텔레의 복수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결국 자신이 끔찍이 파멸할 때까지 복수를 멈추지 않으리라.
‘안 돼. 절대로. 그렇게 놔두지 않아.’
쥬웰은 다시 굳게 다짐하고는 말했다.
“원래대로 힘을 돌려주는 것은 불가능해.”
“뭐?”
“너와 계약한 악마는 이미 내 손에 소멸했으니까. 계약도 당연히 무효화되었고, 너는 이제 흑마도사가 아니야.”
“……!”
리델하트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그런 짓을 했지?”
“…….”
“왜 그랬느냔 말이다! 내게 그 힘이 얼마나 중요한데!”
거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쥬웰은 무표정하게 그런 리델하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복수 때문에 비통해하는 리델하트를 보는 게 안타까웠지만, 티 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지금은 그의 마음을 돌이키는 게 더욱 중요했다.
“왜 힘을 바라는 거지? 복수를 원한다고 했나? 에스텔레 성녀의?”
“그래, 그녀를 위해서 나는 반드시 복수를…….”
“글쎄, 그게 정말 에스텔레 성녀가 원했던 일인가?”
“……!”
리델하트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 유명한 에스텔레 성녀라면 아무리 자신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복수 따위를 원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이건 거짓말이다.
그녀는 복수를 원한다. 간절히.
하지만 그건 오로지 그녀 혼자만의 길이었다.
소중했던 리델하트가 이런 파멸의 길을 걷는 건 원하지 않았다.
“……네가 뭘 안다고.”
“너보다는 잘 알고 있지. 난 에스텔레 성녀의 최근 모습을 본 적이 있으니까.”
“뭐?”
“에스텔레를 본 적이 있다고.”
리델하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의자에 묶인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지? 그녀를 본 적이 있다니?”
쥬웰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하였다.
“난 강대한 흑마도사다. 게헨나를 엿볼 수 있지. 최근 우연히 게헨나에 떨어진 에스텔레 성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
“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은…….”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은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
쥬웰은 픽 비웃음을 지었다.
“내가 한 말이 거짓이면 신의 저주가 내게 내릴 거야.”
쥬웰의 맹세를 들은 리델하트의 눈동자가 끝없이 흔들렸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흑마도사들도 신의 이름을 거짓되게 일컫는 걸 꺼린다. 신의 저주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물론, 쥬웰은 예외였다.
‘나야 뭐. 신의 저주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지.’
그녀는 이미 끔찍이 저주받았다.
그러니 새삼스레 저주를 두려워할 이유가?
따라서 이런 거짓 맹세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신이 고작 이런 일로 자신을 벌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신은 그녀를 사랑하니까. 가련하게 여기고 있으니까 말이다.
결국 그녀의 말을 진실로 여긴 리델하트는 허겁지겁 절박하게 물었다.
“그, 그녀는…… 어땠지? 어떤 상태인 거지? 게헨나에서 고통스러워하지는?!”
“잘 지내고 있더군. 악마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네가 걱정하는 그런 끔찍한 일은 당한 적 없이 오히려 숭고한 성녀로 대접을 받으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쥬웰은 말하며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았다.
게헨나에서 600년.
그때 겪은 고통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하리라.
게헨나에서 받는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특히 그녀는 악마들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지옥의 어떤 죄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런 내가 잘 지냈다니. 세상에서 가장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지.’
그녀도 이런 거짓말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도리어 말하고 싶었다.
정말 괴롭고 끔찍했다고.
그 참혹했던 고통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됐다.
리델하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으면 이딴 자기기만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때, 엿본바 그녀는 복수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지상에 남겨진 이들을 걱정하고 있었어. 자신이 사랑하던 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지.”
“…….”
“네 이런 행동은 에스텔레 성녀가 바라는 게 아니야. ”
리델하트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침묵하였고, 잠잠한 그의 반응에 쥬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된 건가?’
아무래도 에스텔레를 직접 언급한 게 먹혀들었던 것 같다.
“그러니, 너도 복수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그런데 그때였다.
섬뜩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웃기지 마.”
“뭐?”
“웃기지 말라고!”
“……!”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리델하트가 끔찍이 일그러진 눈빛으로 쥬웰을 노려보았다.
“날 기만하는가? 내 동생이 행복해졌다고? 그딴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
“끔찍이 불행했던 아이야. 평생 한 번도 진실하게 웃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늘 밤마다 끔찍한 악몽에 스스로의 몸을 상하게 할 정도로 불행했던 아이라고! 그런데 지옥에 떨어졌는데 행복해졌다고? 감히 그딴 우습지도 않은 거짓말을 해?!”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그리고 쥬웰은 우뚝 굳어 한마디의 답도 하지 못했다.
정확한 이야기였기에.
“그래, 어쩌면 에스텔레라면, 그 착한 아이라면 복수를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 죄 없는 아이가. 불쌍한 아이가 그토록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그 혐오스러운 연놈들을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
“난 절대 멈추지 않아. 설사 내가 끔찍이 파멸하게 되더라도, 난 그 아이를 위한 복수를 할 테니.”
리델하트는 울고 있었다.
시퍼렇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처절한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쥬웰은 하얗게 멈춰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가슴이 미친 듯 아파져 왔다.
“잠깐…… 기다리도록.”
쥬웰은 리델하트를 안에 두고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몸에 힘이 풀려 문에 쓰러지듯 기대었다.
“로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리가 놀란 얼굴을 했다.
“……저리 가.”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마리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 저리 가라고!”
마리가 그 말을 따랐는지 안 따랐는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와 시야를 가렸다.
‘제길, 왜. 왜.’
뚝, 뚝.
끝없이 눈물이 밑으로 떨어졌다.
‘왜 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거야.’
결국 그녀의 속에서 참고 참았던 말이 흘러나왔다.
너무나 힘들었다.
지금껏 겪은 불행이. 그리고 모든 게.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순간도 행복했던 적이 없다.
아까 리델하트의 말처럼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습관은 사실 게헨나 때 생긴 게 아니었다.
이전에.
에스텔레 때 받은 학대로 생긴 증상이었다.
그렇게 한 번도 진실하게 웃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녀의 삶은 항상 끔찍했다.
‘난 많은 걸 바란 적이 없는데.’
오히려 그저 남들을 위한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가혹하기만 했다.
‘왜 나는 어째서?’
일전, 타천사 베스윈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장 고귀하며, 동시에 저주받은 아이야. 넌 영원히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다. 태어났음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그 말처럼,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에게 행복은 영원히 없을 것임을.
앞으로도 그녀의 시간은 가혹하기만 할 것임을.
그녀에게 구원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지금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 복수만 이룰 수 있다면 다른 건 어찌 되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외면하고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 아팠다.
그녀도 인간이었으니까.
괜찮지 않았다.
가혹한 운명에 괴로웠다.
‘제길. 그만.’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꾹꾹 억눌렀다 터진 감정은 둑이 무너진 것처럼 수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억지로 감정을 추렸다.
홀로 슬퍼해 봤자 변하는 건 없으니까.
도리어 이 감정에 휩쓸려 약해지기 전에, 그래서 무너지기 전에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그러니까, 병신같이 질질 짜는 건 그만하라고!’
짝!
그녀는 스스로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화끈, 강한 통증과 함께 간신히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하아.”
눈을 질끈 감은 후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시 차가운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복수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건가?”
“절대로.”
리델하트가 서늘히 말했다.
“차라리 지금 날 죽여.”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더는 리델하트를 포기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그가 복수의 길을 걷더라도 파멸하지 않게 하는 것.
그럴 방법은 하나였다.
“알겠다. 널 도와주지. 대신, 내 권속이 되도록.”
“……!”
리델하트가 놀란 얼굴을 했다.
“네 권속이 되라고?”
“그래, 내 노예가 되면 네 복수를 돕겠다. 마침 나도 여섯 공작가에 원한이 있으니. 내 영혼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네 원수들은 모조리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쥬웰은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만약 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난 지금 네 한쪽 다리를 자르겠다. 복수 따위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겠어.”
진심이었다.
리델하트가 복수의 길을 걷다 끔찍이 파멸할 바에는 차라리 한쪽 다리가 없는 불구가 되게 하는 게 낫다.
‘파멸하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해.’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선택해. 내 노예가 되든지. 아니면 복수를 포기하든지.”
리델하트는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다시금 가슴이 아려왔지만 쥬웰은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마주 차가운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좋아.”
리델하트가 으르렁거렸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누구의 노예가 되든 무슨 상관일까. 네 권속이 되어주지.”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도를 꺼내 손목에 상처를 내었다. 이제 숱한 흉터가 자리한 손목에 한 줄기 상처가 더해졌다.
주욱.
피가 방울방울 흘러나와 흐르기 시작했다.
손목에서 손바닥으로.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는 피가 맺힌 손가락을 들어 리델하트의 얼굴로 가져갔다.
“입을 벌려.”
리델하트가 명령에 따랐다.
뚝. 뚝.
그녀의 손가락에 맺힌 피가 리델하트의 입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제길.’
쥬웰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각오하고 있었지만, 리델하트가 그녀의 피를 마시며 굴종의 의식을 치르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보기 괴로웠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더욱 참혹한 건 리델하트의 반응이었다.
분명 역하고 비릿할 텐데 리델하트는 미동도 하지 않고 피를 받아먹었다.
이런 역한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참을 정도로, 처절히 그녀의 복수를 바라는 것이다.
쥬웰은 그런 리델하트의 모습에 다시 가슴이 울컥하였다.
‘이건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니야. 난 오라버니를 권속으로 삼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를 파멸에서 지킬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녀는 일그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계약의 언령이 흘러나왔다.
“나 ……는 너 리델하트를 권속으로 삼겠다. 이 순간 부로 너 리델하트는 나 ……의 노예가 될 것이며, 나 ……는 너, 리델하트의 주인이 될 것이다. 너, 리델하트는 이 권속의 맹약에 동의하는가?”
리델하트의 몸을 묶은 밧줄이 잘렸고, 리델하트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굴종 의식의 마지막 단계였다.
“동의하겠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에게 바치나니, 당신을 제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그 의식이 끝남과 함께, 리델하트의 미간에 악마화 한 송이가 찍혔다.
그녀의 노예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낙인이었다.
쥬웰은 더는 리델하트를 보기 힘들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창밖에는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쥬웰은 그 달빛을 보며 한탄하였다.
빌어먹게도 찬란한 월광이었다.
환한 빛이 축복하듯 눈 덮인 지상을 내리쬐고 있었다.
먹먹하게.
그렇게 리델하트가 그녀의 권속이 되었다.
해밀턴, 마리, 다음으로 세 번째 권속이었다.
* * *
다음 날, 쥬웰은 크게 앓았다.
‘아, 역시. 무리하긴 했지.’
쥬웰은 침대에 누워 눈을 끔뻑끔뻑했다.
축제 첫날 연쇄 살인범을 잡는다고 한참이나 골목길에 앉아 있었던 게 결정적인 것 같았다.
그때부터 으슬으슬 열기가 돌았다.
가뜩이나 몸이 안 좋았는데, 어제 잔뜩 무리해 버렸다.
오펜하임과 축제 즐기기, 3품 악마 잡기, 리델하트와의 권속 계약 등.
덕분에 잔뜩 탈이 나버렸다.
‘특히 밤새 거의 자지도 못했으니.’
몸도 안 좋은데, 악몽이 두려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덕분에 피곤함에, 열 기운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더…… 자기는 어려울 것 같고. 얼른 해열제 먼저 먹자.’
정신이 몽롱한 게 고열이었다.
이 정도면 39도는 확실히 넘을 것 같았다.
‘룬이 오기 전에 얼른 해열 약초를 먹어야.’
아픈 건 사실 상관없었다.
그녀는 신체적 고통으로 괴로움을 느끼지는 않으니까.
아파도 그냥 그러려니 여겼다.
다만 엔리크 자작이 걱정하는 건 질색이었다.
‘뭘 그렇게 매번 걱정하는 건지. 아플 때마다 질리지도 않고 똑같이 걱정하니.’
쥬웰은 혀를 찼다.
약한 몸으로 무리해서일까? 최근 그녀는 무척 자주 아팠다.
또 아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엔리크 자작은 그렇게 그녀가 아플 때마다 질리지도 않는지 항상 시리도록 저린 걱정을 하였다.
‘지난번에 그만큼 걱정했으면 됐지.’
원래 아버지가 웰링턴 공작이었던 탓일까?
그녀는 엔리크 자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아플 때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같이 속상해해서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정확히는…… 엔리크 자작이 속상해할 때마다 그녀의 가슴도 같이 아팠다. 미안하고.
그래서 그녀는 엔리크 자작이 자신 때문에 걱정하는 게 싫었다.
‘얼른 열 먼저 떨어뜨리자. 최대한 걱정하지 않게.’
쥬웰은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억지로 일으켰다.
일어나자마자 핑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이런, 망할. 약초 먹는다고 가라앉을 수준이 아닌데?’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제대로 열이 오른 것 같다.
서랍에서 약을 꺼내 정량 이상으로 독하게 먹었지만,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 안 되는데.’
쥬웰은 침대에 힘없이 걸터앉아 고민하였다.
이대로라면 엔리크의 폭풍 걱정 공격 확정이었다. 옆에서 룬도 어시스트할 거고.
벌써부터 엔리크 자작이 먹먹한 얼굴을 하는 게 상상되었다.
쥬웰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차라리 나갔다 올까?’
하루 정도 다른 곳에서 몰래 쉬고 오면 한결 나아질 것 같았다.
‘마리의 저택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뜻밖의 음성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로드! 혹시, 잠시 와주실 수 있을까요?]
마리였다!
그녀와 마리는 권속의 맹약으로 묶여 있어 원격으로 의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참고로 해밀턴도 가능했다.
그는 열심히 가학 성향 귀부인을 꼬시는 임무를 수행 중인지 중간중간 비명 섞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살려달라고.
[무슨 일이지?]
[그게…… 일이 생겨서. 리델하트 경이 찾아와서 난동을 부렸어요.]
마리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로드께 사기 계약을 당했다고 난리를 쳤어요.]
* * *
쥬웰은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마리의 저택으로 향했다.
방에는 중요한 볼일이 있어 하루 정도 나갔다 온다고 서신을 써놓고 리샤크와 함께 나왔다.
이후, 리샤크에게 정신 조작을 건 후 저택으로 향했다.
“리샤크, 이제 너는 근처를 돌아다니고…….”
무심코 이야기하려던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밖에 돌아다니려면 추울 텐데, 그냥 같이 안에 들어와 있게 할까?’
쥬웰은 리샤크를 보며 고민했다.
자꾸 세뇌 거는 것도 미안한데 추운 날씨에 밖에 떠돌아다니게 하기 미안했다.
아무리 리샤크가 강력한 마스터 나이츠라도 추위를 느끼는 건 똑같을 테니.
“리샤크, 그냥 안에서 쉬고 있어. 추우니 난로 옆에서.”
“네……. 아가씨.”
“대신 명심해. 넌 이 저택이 누구의 저택인지 모르는 거야. 아니, 아예 온 적도 없는 거야. 알았지?”
“네…….”
이후, 쥬웰은 마리와 만났다.
“리델하트는?”
“저기, 안에요.”
“……또 어제처럼 제압했나?”
“네.”
마리는 새초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델하트 오라버니가 약골도 아닌데, 얘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제압하는 거야?’
리델하트는 원래 기사 훈련생이었다가 이후 신관으로 진로를 바꾼 경우였다.
특히 리델하트는 신관이 된 이후에도 신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니 리델하트의 신체 능력은 웬만한 기사급 이상일 텐데, 매번 이렇게 쉽게 제압하다니?
“제가 샤피렌 님과 같은 핏줄이어서인지, 선생님이 저보고 천재라고 하긴 했어요. 꾸준히 무술을 익히면 역대급 마스터 나이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네가 검제 샤피렌과 같은 핏줄이라고?”
쥬웰은 놀란 얼굴을 했다.
검제 샤피렌.
천하제일검이자, 검 한 자루로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이이다.
마리가 그런 샤피렌과 같은 혈통이었다고?
“외가 쪽으로 살짝요? 어머니의 사촌의 팔촌쯤 되는 관계래요.”
“……그래. 그런데, 왜 중단을?”
정말 마리가 그런 재능을 지니고 있다면 무술을 중단한 건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마리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운동하면 땀내 나잖아요. 싫어요.”
“…….”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세상의 최고는 돈이죠. 돈 버는 게 더 좋아요.”
“……그래.”
다이아 공작가의 봉신 가문 출신 다운 답변이었다.
마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몸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어머.”
쥬웰의 손을 잡은 마리는 뜨거움에 깜짝 놀랐다.
“열이 이렇게나. 열 기운에 좋은 차와 약을 준비해 놓을게요.”
“……필요 없어.”
“필요 없지 않아요. 아무리 당신이 강대한 마왕이라도 이렇게 열나면 똑같이 아플 것 아니에요. 누구든 아프면 좋은 것 먹고, 쉬어야 해요.”
마리는 놀랍게도 쥬웰에게 겁도 없이 잔소리하였다.
“차는 안쪽에 준비해 놓을 테니 리델하트 경과 이야기한 후 마시세요.”
그러며 휘적휘적 안으로 사라졌다.
쥬웰은 묘한 눈빛을 하였다.
마리의 이런 배려.
익숙했다.
에스텔레 시절 늘 마리에게 받던 거였다.
항상 마리는 이렇게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
‘아무리 당신이 위대한 성녀라도 아프고 다치면 똑같이 괴로울 것 아니에요.’
과거 생각이 떠올라 쥬웰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저나 손을 잡는 걸 별생각 없이 허락했네.’
에스텔레 시절, 마리가 자신의 손을 잡는 데 익숙해서 별 경계 없이 허락해 버렸다.
고개를 젓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리델하트가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고는 재갈을 풀어주었다.
리델하트는 이를 갈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슨 말이지?”
“내게 힘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리델하트는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한 톨의 힘도 낼 수 없는 겁니까?!”
그렇다.
쥬웰의 권속이 되었음에도 리델하트는 티끌만큼의 힘도 내려받지 못한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쥬웰은 뻔뻔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힘을 내려준다고 했지?”
“……뭐라고요?”
“무언가 착각한 것 같군. 난 너의 복수를 도와준다고 했지. 힘을 준다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리델하트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계약하려면, 계약 내용을 잘 살피고 했어야지.”
즉, 어제 계약이 사기 계약이었단 뜻이다!
쥬웰은 팔짱을 끼었다.
‘힘을 주면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닐 줄 알고,’
그녀는 일부러 리델하트에게 사기를 쳤다.
가만히 놔두면 또다시 그런 참혹한 일들을 저지를 게 뻔했으니, 자신의 권속으로 만들어 손발을 묶은 것이다.
‘날 원망해도 할 수 없어. 난 오라버니가 파멸의 길을 걷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이런 끔찍한 상황이 되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리델하트의 행복을 바란다.
마리도 마찬가지다.
복수가 끝난 후, 리델하트, 마리, 둘 다 자신과 상관없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거고.
그녀가 에스텔레임을 알게 되면, 둘은 그녀의 그림자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복수를 마지막으로 둘은 날 잊고 행복해져야 해.’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지금 리델하트의 원망 따위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다.
“이…… 이…….”
리델하트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건 내가 바라던 게 아니야! 계약을 파기해 줘.”
“싫은데?”
“당장! 죽여 버리기 전에 계약을 파기하라고!”
쥬웰은 물끄러미 리델하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오라버니는 성격이 한층 더러워진 것 같다. 이전에도 착한 성격은 아니긴 했지만.
일단 그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 보였다.
“어리석군. 내가 약속하지 않았나? 네 복수를 반드시 이루어주겠다고.”
“뭐?”
“하나 묻지. 넌 원수들에게 어떤 복수를 하길 바라지?”
“그거야……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리델하트가 으르렁거렸다.
“가장 참혹한. 고통스러운 죽음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왜 그따위 하찮은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뭐?”
“연쇄 살인범이 되어 고작 고문하다 죽이다니. 그런 걸 진정한 복수라고 할 수 있나? 몇 시간 고통을 주다 죽이는 걸 진정한 복수라고 할 수 있냐고.”
리델하트는 입을 다물었다.
차분한 음성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쥬웰의 눈동자는 깊게 일렁였다.
그 핏빛 눈동자에 넘실거리는 광기에 리델하트는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잘 들어. 진정한 복수란 말이야. 고작 그런 게 아니야.”
고작 몇 시간 육체적 고통을 주었다고 복수라니.
그런 허망한 일을 어떻게 진정한 복수라 할 수 있겠는가?
쥬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원수의 모든 걸 빼앗고 짓밟고 나락에 떨어뜨린 다음, 희망조차 없는 지옥 속 좌절의 늪에 빠뜨려야지. 그렇게 최악의 절망 속에서 천천히 말려 죽이는 것. 그 정도는 해야 원수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
리델하트는 쥬웰에게 압도되어 어떤 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난 네가 내 한쪽 팔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무슨 말이지?”
“하나 묻지. 에스텔레 성녀의 가장 최악의 원수는 누구이지?”
리델하트는 고민 없이 답했다.
씹어 삼킬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라디트, 플랑드나, 웰링턴 공작.”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했다.
그녀가 정확히 정체를 아는 원수는 로튼 백작, 매리엇, 라디트, 플랑드나, 웰링턴 공작 다섯 명이다.
그중 가장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는 건 라디트와 플랑드나, 웰링턴 공작이다.
그리고 그들 세 명 중에서도 그녀에게 가장 악독하게 군 건 가족이었던 플랑드나와 웰링턴 공작이었다.
“세 명 중 라디트는 잊어. 라디트는 네 몫이 아니야.”
“뭐, 그건?”
“여섯 공작가에 원한이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 라디트를 파멸시키는 건 내가 직접 할 것이다.”
쥬웰은 서늘하게 덧붙였다.
“참고로 이건 경고야. 절대로 라디트의 털끝 하나 건드릴 생각 하지 마.”
라디트는 그녀가 직접 파멸시킬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 만지던 손길, 사랑을 속삭이던 혀…… 그의 모든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대신, 쥬웰은 리델하트에게 바라던 바를 꺼냈다.
“너는 플랑드나와 웰링턴 공작을 파멸시킬 수 있도록 내게 조력을 주도록.”
“……조력이라면?”
“플랑드나와 웰링턴 공작에게 최악의 상황은 무엇이라 생각하지?”
리델하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신전의 권위가 무너지는 거겠지.”
“그래, 난 에메랄드 공작가의 신성을 완전히 무너뜨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배교자로 만들어 산 채로 지옥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해줄 거야.”
리델하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되면, 확실히 최고의 복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네가 아무리 가넷가의 힘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무리야. 에메랄드 공작가의 신성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니까.”
옳은 말이었다.
여섯 공작가는 동등하지 않다.
가장 높게 빛나는 건 항상 가넷이었다.
하지만 에메랄드 공작가는 별격의 존재였다.
신성은 세속이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니까.
아무리 권력의 주인인 가넷이라도 에메랄드 공작가의 아성을 흔들 수는 없었다.
“그렇지. 하지만 나는 가능해. 난 ‘성녀’니까.”
“……!”
“너는 내가 왜 이런 귀찮은 성녀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단순히 명성을 얻기 위해서? 아니야.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다.”
리델하트가 놀란 얼굴을 하였다.
“설마?”
“그래, 나는 성녀로서 신의 뜻을 대리하는 이가 되어 에메랄드 공작가를 단죄할 생각이다.”
“……!”
그렇다.
쥬웰이 꾸준히 성녀로서 명성을 쌓는 이유는 바로 에메랄드 공작가를 노려서였다.
물론 단순히 명성 높은 성녀가 된다고 해서 에메랄드 공작가를 흔들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성녀가 아니다.
권력의 주인인 가넷의 왕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가넷의 권력과 성녀로서의 명성이 합쳐지면?
신성과 권력이 결합하는 것이다.
그 파괴력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때는 에메랄드 공작가마저 짓밟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런…….”
그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리델하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에메랄드 공작가의 저력은 깊다. 그것만으로 에메랄드 공작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건 부족할 텐데?”
쥬웰은 동의했다.
에메랄드 공작가는 무려 300년이나 신성을 독점해 왔다.
이른바 뿌리 깊은 거목이었다.
쥬웰이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니게 된다 해도 그 거목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래, 맞아. 나 혼자만으로는 무리가 있지. 그래서 에메랄드 공작가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면 내부의 조력이 필요해.”
쥬웰은 똑바로 리델하트를 바라보았다.
“난 네가 신전 내부에서 날 도와주었으면 한다. 연쇄 살인범이 아닌, 신관으로서 내게 도움을 주는 거야. 네가 내부에서 날 도우면 에메랄드 공작가를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어.”
“…….”
리델하트는 한참이나 침묵하였다.
“하나만 묻겠다. 내가 널 도우면, 정말 원수들에게 가장 참혹한 복수를 해줄 것인가?”
“이미 답했던 것 같은데? 그녀의 원수들 모두,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가장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그 답에 리델하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좋다. 널 돕도록 하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어. 정확히 신전 내부에서 어떤 조력을 하면 되는 거지? 나와 동조할 이를 모으면 되는가?”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에메랄드의 신성은 단순히 내부 동조자를 구한다고 무너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면?”
“리델하트, 넌 너의 강점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리델하트는 의문이 섞인 얼굴을 하였다.
그는 추기경이다. 동시에 에메랄드 공작가의 양자였고, 향후 신전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갈 이였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강점은 그런 게 아니었다.
“넌 신관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발표한 논문으로 최연소 천재 신학자로 명성을 떨쳤지. 그래서 에메랄드 공작가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작금에 와서는 신학의 최고 석학으로 여겨지고 있어. 맞나?”
“……그래.”
신학의 최고 석학.
그게 리델하트가 가진 최고 강점이었다.
“신학자로서 널 돕길 바라는 건가?”
“그래.”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전부터 구상하였던 거대한 계획 하나를 입 밖으로 꺼내었다.
“종교개혁을 준비하도록.”
* * *
한편, 그때 마리는 열 기운에 좋은 차를 직접 달이고 있었다.
고용인이 없어 직접 달이는 건 아니었다.
인적을 찾기 어려운 저택이지만, 고용인이 없는 건 아니다. 입이 무거운 이들을 고용인으로 두고 있다.
그러니 하녀를 시켜도 되었지만 일부러 직접 차를 달이는 이유가 있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 보석.’
마리는 쥬웰에게 받은 장신구들을 바라보았다.
온갖 진귀한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런 화려한 보석들을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순순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팠다.
이 보석들이 에스텔레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마리, 언젠가 내가 꼭 좋은 보석을 선물해 줄게요.’
‘괜찮아요. 가난한 성녀님.’
‘아니에요. 마리한테는 항상 너무 고마워서…… 언젠가 꼭, 꼭 마리가 좋아하는 예쁜 보석들을 선물할 테니 기다려요.’
그런 에스텔레가 귀여워 피식 웃고 넘어갔던 기억이 났다.
“거짓말쟁이. 선물 준다고 했으면서. 그렇게 죽어버리고.”
마리는 눈가가 시큰해져 소매로 닦았다.
어쨌든 이 보석들이 에스텔레를 떠올리게 해, 마리의 쥬웰을 향한 반감은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아니, 이제 마리는 쥬웰이 안쓰러웠다.
‘……상처가 많은 사람.’
그녀는 쥬웰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아는 게 있다.
쥬웰이 세상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운 강대한 어둠이란 것.
그 말은 그만큼 쥬웰의 상처가 크다는 것이다.
흑마도사의 힘은 지닌 상처에 비례하는 법이니까.
실제로 마리는 얼핏 쥬웰의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착한 사람.’
우스운 이야기다.
저런 끔찍한 어둠이 착하다니.
하지만 마리는 쥬웰의 속마음 깊은 곳에 남을 향한 선함이 숨어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 나와 리델하트 경이 파멸하는 걸 지켜보지 못하는 거겠지. 정작 자신이 상처 입는 건 아랑곳하지도 않고.’
마리는 다 눈치채고 있었다.
쥬웰이 그녀와 리델하트의 파멸을 바라지 않는다는 걸.
그들에게는 복수의 과정 중 빛나고 올곧은 부분만을 맡기고, 끔찍한 악행은 오로지 홀로 덮어쓰려고 하고 있었다.
파멸을 맞이하는 건 자신 혼자만으로 족하다는 듯.
“하아.”
그래서 마리는 쥬웰을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무 안타깝고 바보 같아서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챙겨주고, 보듬어주고 싶었다.
‘특히 어제는.’
마리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어제 쥬웰이 눈물 흘리던 광경이 떠올랐다.
참고, 참은.
그래서 결국,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온 울음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편히 울지 못하고 억지로 참으려는 참혹한 모습.
마리는 그렇게 울던 사람을 과거 한 명 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쥬웰을 품에 안아 위로해 주려다가 흠칫 멈추어 섰다.
‘하아.’
쥬웰을 생각할수록 가슴이 먹먹해져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차를 한 잔 들어 저택의 응접실로 향했다.
쥬웰 말고 다른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
“드세요, 기사님.”
리샤크였다.
“감…… 사합니다.”
마리는 잠시 묘한 눈으로 쥬웰의 세뇌에 걸려 있는 리샤크를 바라보았다.
‘이 기사님도 참 기구하지.’
마리도 삭월의 기사 리샤크의 사연을 알고 있었다.
마리는 문득 이 저택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소했다.
‘우연인가? 하필 흑요석의 저택에 이런 사람들이 모인 게.’
이 저택은 마리가 세운 유령 상회, 옵시디언(흑요석) 상단의 저택이었다.
그리고…… 흑요석의 보석 말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보통은 이러했다.
고통, 상처, 절규…….
그런 끔찍한 의미를 나타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흑요석은 전혀 다른 의미의 보석 말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구원’이었다.
세상 모든 고통받는 가련한 사람들을 위한 구원.
‘이 보석 말에 따르면, 로드는 세상의 고통받는 자들을 위하는 구원자인 건가?’
마리는 실없이 생각하고는 리샤크에게 말했다.
“편히 쉬다 가세요, 기사님.”
그리고 등을 돌려 사라졌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흐릿하던 리샤크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것이다.
리샤크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리샤크의 눈동자는 더는 푸른색이 아니었다.
오색 창연한.
하나의 보석을 연상시키는 빛이었다.
오팔(Opal).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끔찍한 상처를 품은 보석.
그 찬란한 보석의 빛이 리샤크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 * *
“종교…… 개혁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리델하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간단해. 신전이 독점하는 신성을 무너뜨리자는 거지. 더 자세히 말하면 신을 향한 예배를 신전이 독점하는 게 아닌, 백성들에게 돌려주자는 거지.”
“……!”
“애초에 신을 향한 예배를 한 가문에서 독점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
쥬웰은 피식 비웃었다.
“신은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의 곁에 있는 법인데. 그걸 왜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독점하냐는 말이야. 신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건 사실 에스텔레 때부터 했던 생각이었다.
지금 제국의 신전은 올바르지 못했다.
한 가문이 신전의 모든 걸 독점하고, 오로지 그들을 통해서만 신을 향해 예배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게 과연 신의 뜻일까?
‘절대로.’
이건 그저 탐욕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구조일 뿐이었다.
거기에 신을 향한 섬김은 없었다. 인간의 비틀린 탐욕만 가득할 뿐.
‘이제 이런 건 별로 관심 없지만.’
하지만 종교개혁을 해내면 에메랄드 공작가를 완벽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한편, 쥬웰의 말을 이해한 리델하트는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플랑드나 성녀와 웰링턴 공작을 신의 뜻을 왜곡한 배교자로 만들자는 거군.”
“맞아.”
쥬웰은 싱긋 웃었다.
“난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을 거야. 얼굴에 배교자의 낙인을 찍고 최악의 바닥을 기게 하겠어. 그리고 절망 속에서 모든 고통을 겪게 한 후, 가장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할 거야. 어때, 아주 즐거울 것 같지 않아?”
“…….”
리델하트는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의 계획보다 훨씬 잔혹한 복수였다. 듣는 그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불가능하지도 않지.”
쥬웰은 담담히 말했다.
“내가 가넷의 왕이 되고, 성녀로서 에메랄드 공작가를 압도할 명성을 얻어 네 종교개혁을 지지하면 충분히 가능해.”
리델하트 혼자 종교개혁을 주장해 봤자 그는 이단으로 몰려 화형장의 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쥬웰이 가넷의 왕이자, 백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최고의 성녀가 되어 리델하트를 지지한다면?
종교개혁도 충분히 가능했다.
에메랄드 공작가는 신의 뜻을 농락한 배교자가 되어 무너질 것이다.
리델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오늘 보인 무례는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 일어나도록.”
리델하트가 그녀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은 별로 편한 장면이 아니었다.
‘아, 머리 아프네.’
대화를 마치고 났더니 핑 긴장이 풀리며 열이 올라왔다.
‘잠깐 쉬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침 문이 열렸다.
마리였다.
그녀가 따뜻한 차를 쥬웰에게 건네었다.
“자, 여기 열 기운에 좋은 차예요. 방을 따뜻하게 덥혀놨으니 한숨 쉬다 가세요.”
“……그래.”
마리는 차분해진 리델하트를 힐끗 보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잘 해결되신 것 같네요. 그러면 우린 로드의 클랜원들인가요?”
“……클랜?”
“네, 맞지 않나요?”
클랜.
씨족을 의미하는 단어로 강대한 흑마도사 밑에 모인 권속들을 뜻하기도 한다.
그들은 쥬웰 밑에 모인 권속들이니 클랜원이 맞았다.
“……그렇군.”
쥬웰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클랜명은 어떻게 할까요? 흑요석 일가(一家), 옵시디언 패밀리로 하면 될까요?”
“……알아서 하도록.”
마리는 빙긋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뭐지?”
“클랜 첫 창단이니 파이팅 해야죠. 다들 제 위로 손 올리세요.”
쥬웰과 리델하트는 마리의 분위기에 휩쓸려 어색하게 손을 올렸다.
“그런데 우리 둘 말고 다른 권속은 더 없나요?”
“해밀턴이라고 한 명 더 있는데, 쓰레기라 몰라도 돼. 임무 중인데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고.”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앞으로 다들 잘 부탁해요. 옵시디언 패밀리를 위하여!”
그렇게 흑요석 일가의 탄생과 함께 긴 축제가 막을 내렸다.
그리고 겨울 사교계 시즌.
고대하던 데뷔탕트가 다가왔다.
다음 사냥감은 매리엇과 라디트였다.
* * *
수도 정중앙에 커다란 저택이 하나 있었다.
마치 금은으로 만든 듯 화려하기 그지없는 저택이었다. 화려함만 따지면 제국 제일 가문인 가넷가의 저택마저 압도하는 듯했다.
이곳이 바로 ‘번영’의 다이아 공작가였다.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금권의 가문.
그런 다이아 공작가의 가주 집무실.
아직 밝은 대낮임에도 낯뜨거운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집무실 안에 놓인 소파에서 장미처럼 화려한 금발의 여인이 발개진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드레스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의 곁엔 강인한 인상의 미남자가 있었다.
매리엇과 라디트였다.
둘은 밝은 대낮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띤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 주인의 모습이 익숙한지, 다이아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집무실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방 안의 열기가 짙어졌다.
열락이 짙어지며 매리엇이 라디트의 등을 손톱을 들어 할퀴었다.
찌릿, 통증이 일었으나 라디트는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다음 순간 이어질 매리엇의 말을 기다렸다.
이렇게 흥분이 극에 달하면, 매리엇은 늘 한 인물의 욕을 하였다.
‘에스텔레, 찢어 죽일 년.’
매리엇이 그런 욕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라디트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매리엇은 열락의 순간, 라디트가 사랑했던 에스텔레를 모욕하며 더욱 강한 쾌감을 느꼈다.
그런데 오늘은 다소 달랐다.
매리엇이 이를 악물며 이렇게 으르렁거렸다.
“……쥬웰, 이 찢어 죽일 년.”
“……!”
“반드시 찢어 죽여 버리겠어.”
라디트는 흠칫하였다.
매리엇이 에스텔레가 아닌, 다른 이를 욕한 것이다.
그것도 그들과 가까운 쥬웰의 욕을.
하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매리엇은 최근 툭하면 히스테리를 부렸으니까.
그날, 쥬웰에게 모욕을 당한 이후부터였다.
‘이 오물을 핥으라 묻는다면. 따르지 않을 건가요?’
매리엇 일생에서 그토록 처절한 모욕은 처음이었다.
더 분통이 터지는 건, 쥬웰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넷이 시키면, 다이아는 따라야 한다.
그 말은 쥬웰이 매리엇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아직 쥬웰이 공작위를 물려받은 건 아니다. 하지만 다이아 공작가는 높은 확률로 쥬웰이 가넷 공작가를 물려받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매리엇은 다시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가만두지 않겠어. 언젠가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내 발밑에 무릎 꿇린 후 얼굴을 난도질하고, 끔찍하게 죽여 버리겠어!”
라디트는 손을 들어 매리엇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입술을 맞추고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말을 해주었다.
“진정해, 매리엇. 사랑해.”
매리엇은 그의 사랑 고백을 가장 기뻐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날 정말 사랑해?”
매리엇의 눈빛이 희번들해졌다.
“……물론.”
“에스텔레, 그년을 아직도 못 잊은 건 아니고?”
“……!”
라디트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곧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것 알잖아?”
“그러면 저주해 봐. 에스텔레를.”
“……매리엇.”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