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 옵시디언 패밀리 (1)
끔찍한 밤이 지나고 기적이 일어났다.
정말로 흑사병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모든 환자가 단번에 나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벼운 경증 환자부터 증상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추가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환자가 늘어났던 걸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중증 환자들도 악화 없이 조금씩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말로 기적이 내려왔음을 깨닫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아. 정말 기적이 일어났어!
“쥬웰 성녀님의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 거야!”
제국을 뒤흔들 기적이었다.
무려 기도로 신의 진노를 잠재운 거니까.
더구나 이번 흑사병 사태는 제국 전역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심지어 다이아 공작가의 경우,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관련 물품을 미친 듯 매집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적을 일으켰으니 쥬웰의 숭고함은 제국 전역으로 퍼질 것이다.
실제로 바셋 성 전체에 감격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쥬웰 성녀님이 우리를 구했어!”
“쥬웰 성녀님 만세!”
그렇게 온 사람이 경외의 외침을 질렀지만, 정작 쥬웰은 그 기쁨을 같이 누리지 못했다.
그녀는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 * *
‘아. 아프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흑사병은 아닌 것 같고. 그냥 무리해서 생긴 열병인가?’
일주일간 엄청나게 무리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가벼운 열병이 아닌지 의식이 혼미했다.
전신이 망치로 끝없이 두들겨 맞는 듯했고, 무거운 물에 빠진 듯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들었다.
‘뭐, 불사의 저주를 걸었으니 죽지야 않겠지만 곤란하네. 얼른 수도에 돌아가 봐야 하는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녀는 흑마도사들을 소탕하며 로튼 백작이 개입한 증거를 손에 넣었다.
이제 그 증거를 바탕으로 로튼 백작의 날개를 한 차례 더 잘라낼 것이다.
‘그리고 매리엇.’
쥬웰은 나직이 읊조렸다.
그녀의 소중한 친구, 매리엇의 구겨진 얼굴을 봐야 했다.
‘이번 일로 어마어마하게 손해 봤을 테니까.’
쥬웰은 고열로 달뜬 얼굴로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매리엇은 쥬웰과 미리 약조한 대로 흑사병 관련 물품을 깡그리 사재기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으니 모조리 손해였다.
‘물론 다이아 공작가 전체로 보면 흠집도 안 날 사소한 손해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타격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일로 매리엇의 아성에 흠집이 갈 테니까.
‘크게 체면을 구기겠지.’
황금의 공녀 매리엇.
어릴 때부터 어마어마한 상재를 보인 매리엇의 별명이었다.
그녀는 고작 열 살 때부터 스스로 상단을 창립해 운영했고, 상단을 운영하며 보인 상재 덕에 공작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어마어마하게 큰 실패를 했으니 체면을 구기게 된 것이다.
매리엇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가서 감상하고 싶었다.
‘물론 여기서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긴 하지만.’
쥬웰은 영혼에 연결된 ‘피의 각인’을 활성화했다.
원수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전달받는 각인이었다.
로튼 백작은 충격과 두려움을.
매리엇은 분노와 커다란 모멸을 느끼고 있었다.
‘모자라. 더 강하게 느끼고 싶어. 더. 더.’
쥬웰은 입이 말랐다.
특히 매리엇.
‘고작 자존심 상하는 거로 끝낼 수는 없지.’
고작 체면 하나 구기게 하려고 그때 그녀와 역겨운 만찬 자리를 가지며 회동을 했던 게 아니다.
쥬웰은 이번 일로 매리엇의 팔을 하나 잘라낼 생각이었다.
‘마리가 움직이고 있으니. 이미 시작했겠지. 듣고 싶어, 매리엇이 비명 지르는걸.’
쥬웰은 간절히 바랐다.
피의 각인이 있긴 했지만, 거리가 멀어 그들의 비명이 너무 흐릿하게 들렸다.
가급적 직접 만나 매리엇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말했다.
“리…… 샤크.”
“네, 아가씨.”
“마차를 준비해.”
“……뭐라고요?”
리샤크의 얼굴이 구겨졌다.
쥬웰은 쿨럭쿨럭 기침하였다.
“수도로 돌아가야겠어. 해야 할 일이…… 많아.”
“…….”
리샤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안 됩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괜찮아……. 무리해도 죽지는 않을 거야.”
“아가씨!”
리샤크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쥬웰은 흠칫하여 입을 다물었다.
리샤크는 한없이 괴로운 눈으로 쥬웰을 내려 보았다.
“도대체……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제발 부탁이니, 스스로를 아껴주십시오.”
‘……괜찮은데.’
아무리 심각한 열병이어도 그녀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쥬웰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통증이 밀려와 아아, 신음을 흘렸다.
괴롭다기보다는 고통에 따른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리샤크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은 것처럼 반응하였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여기, 의사! 진통제를!”
“아…… 응. 괜찮아. 괜찮으니…….”
“마차에 타는 건 절대 안 됩니다! 그렇지요, 라이져 단장님?”
라이져도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불허합니다. 아가씨가 무리하는 건 가주님께서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글쎄…… 할아버지…… 가주님께서는 별 관심 없으실 것 같은데…….”
“아가씨!”
리샤크가 외쳤다.
“아가씨가 이러는 것, 엔리크 자작님이 슬퍼하실 겁니다!”
“…….”
그 말에 쥬웰은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엔리크 자작은 그녀가 무리하는 걸 크게 슬퍼할 것이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그녀는 엔리크 자작에게 약했다.
웰링턴 공작과 전혀 다른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에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고구마.’
쥬웰은 투덜거렸다.
사실 지금 출발해도 매리엇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긴 했다.
이미 마리의 ‘공작’은 시작된 지 오래이니까.
‘……이왕 이렇게 된 것, 민심이나 확실히 얻고 돌아가자.’
기적을 일으켰으니, 이제 그녀는 영웅이었다.
민심을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단단히 다져야 했다.
간단했다.
‘지금 딱 상태가 좋네. 아픈 몸으로 일어나 다른 이를 돌보면, 더욱더 감동할 테니.’
아픈 몸을 이끌고 다른 이를 돌보는 숭고한 성녀!
사람들을 현혹하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실제 그녀는 에스텔레 때 웰링턴 공작의 명령에 따라 아픈 몸을 이끌고 환자들을 돌본 적이 여러 차례 있었고, 그때마다 환자들은 더욱 크게 감동해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아, 아가씨? 또 왜?”
“환자를 보려고. 아직 흑사병 환자들이 다 나은 건 아니잖아.”
“아가씨!”
쥬웰은 귀찮단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흑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건 가넷가를 위한 일이야. 내가 아픈 몸으로 무리할수록 백성들은 내게 더욱 감동할 거고, 그 민심은 고스란히 가넷가의 힘이 될 거야.”
“아가씨…….”
“이해했으면, 더 말리지 말도록.”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설명했는데, 왜일까?
리샤크와 라이져는 그저 참담한 표정으로 쥬웰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가씨……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맞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무리하지 말아주십시오.”
흡사 비는 듯한 부탁이었다.
‘아,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성가시게. 혹시 가넷가 기사단의 식단이 고구마인가?’
쥬웰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열병이 심해도 죽을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다.
불사의 저주가 아니라도 그렇다.
그들도 그녀가 죽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면 됐지, 왜 저렇게 난리란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녀를 한없이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그때,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저는 가넷가의 일원은 아니지만…… 영애의 약혼자이자 주치의로서 기사분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쥬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안경을 쓴 은발의 미남, 유스넨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흰 강아지, 쟤는 언제 여기에 온 거야? 수도에 있었던 것 아니야?’
쥬웰은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악몽을 헤맬 때 유스넨을 봤던 것도 같다.
“여기는 어떻게?”
유스넨은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의사로 의료 봉사를 왔습니다.”
“의사요?”
“네, 제가 사실 취미로 의사 생활도 하고 있는지라.”
“…….”
“진짜입니다. 에스텔레 성녀 때문에 시작한 취미 활동입니다. 실력은…… 뭐 별반 뛰어나진 않지만, 그래도 영애께서 쓰러져 계실 때 제가 치료했습니다.”
쥬웰은 진짜냐는 듯 리샤크를 보았다.
리샤크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유스넨을 삐딱하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공 전하가 아가씨를 치료한 건 맞습니다. 실력이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여기 바셋 성에는 멀쩡히 남아 있는 의사가 별로 없어서.”
“……그래.”
유스넨은 옅게 미소 짓더니 말했다.
“그러면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네?”
“주치의로서 확인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주치의요?”
“네, 저는 영애의 약혼자이니 앞으로 주치의 역할도 겸임해야죠. 보아하니 앞으로도 자주 아프실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억지 궤변 같았지만, 쥬웰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유스넨이 손을 들더니 그녀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
쥬웰은 흠칫하였다. 그가 자신을 만져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의사로서 체온을 측정하려는 행동이니까.
놀란 이유는 유스넨의 손과 닿으니, 알게 모르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뭐지? 시원해서인가?’
유스넨은 체온이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손이 닿으면 차가운 느낌이 들었는데, 열이 끓고 있어서인지 기분 좋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아니, 단순히 열이 끓고 있어서가 아니야. 이전에도 비슷한 편안한 느낌이 들었어.’
이전.
유스넨이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포근했다. 마치 그의 성력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 말이다.
왠지 기분이 좋아 표정이 풀어졌는데, 유스넨은 정반대의 얼굴을 하였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것이다.
“아직 열이 심각하군요. 거동하실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움직인다고 죽을 상태도 아니에요.”
유스넨은 곤란한 얼굴을 하였다.
“영애. 영애도 환자를 돌보는 성녀이니, 본인의 주장이 얼마나 무모한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솔직히 환자가 그런 말을 하면 뭐라고 하실 겁니까?”
“…….”
“물론 환자를 생각하는 영애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죠. 제게 이틀만 빌려주십시오.”
“……이틀이요?”
“네.”
유스넨은 이번엔 쥬웰의 손을 붙들었다. 워낙 자연스럽게 잡아 쥬웰은 뭐라 반응할 수가 없었다.
다시금 서늘한 느낌에 흠칫하는 순간.
파아앗, 따뜻한 성력이 그녀의 몸에 스며들었다.
쥬웰은 놀란 눈으로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잔뜩 무거웠던 몸이 살짝 가벼워졌다.
유스넨은 여전히 부드러운 눈으로. 하지만 낯선 감정을 담아 말했다.
“영애의 약혼자 겸 주치의로서 이틀 안에 영애가 회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이틀만 시간을 빌려주십시오.”
쥬웰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유스넨의 눈을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낯선 감정.
유스넨은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말이다.
* * *
그렇게 이틀간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의술을 배웠다는 게 거짓이 아닌지, 유스넨은 제법 전문적인 치료를 하였다.
“……의술은 언제 배우신 건가요?”
쥬웰은 의아해 물었다.
유스넨은 어린 시절만 해도 의술의 의 자도 몰랐다.
“낙원에서 배웠습니다.”
“낙원이요?”
뜻밖의 이야기에 쥬웰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유스넨은 어린 시절 그녀에게 치료받은 후 10년간 낙원, ‘에덴’에서 시련을 받았다.
“네, 시련을 받을 때 의술을 아는 대천사장이 있었거든요. 그분께 배웠습니다.”
“……시련에 의술을 배우는 내용이 있었나요?”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스넨이 받은 10년간의 시련.
그건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징벌이자 정화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의술을 배우다니?
“그건 아닙니다. 시련받는 중간중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때 부탁해서 배웠습니다.”
“대공께서 따로 부탁한 거라고요?”
“네.”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힘든 시련 와중에 구태여 대천사장에게 부탁해 의술을 배웠다는 것이다.
왜?
“……원래 의술에 관심이 있으셨나 보죠?”
“아닙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건 사실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왜?”
유스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옅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쥬웰은 그 미소가 억지로 꾸민 미소란 걸 곧바로 알아봤다. 흐릿한 아픔이 담겨 있었다.
“그냥…… 따로 이유가 있어 배웠습니다.”
말하기 꺼리는 분위기라 쥬웰도 더 묻지 않았다.
‘뭐, 이런 속사성까지 알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 약혼자, 약혼녀 관계이지 둘은 적이다.
그것도 둘 중 한 명이 사라져야 끝맺음 날 숙적.
굳이 자세한 속 내용을 알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그런데…….’
쥬웰은 눈매를 가늘게 떴다.
“왜 계속 있으세요?”
“주치의니까요?”
“……주치의라고 계속 있을 필요는?”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빨리 회복시키려면 최대한 열심히 치료해 드려야지요. 앞으로 이틀간은 계속 옆에 있을 겁니다.”
“이틀 내내요?”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유스넨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옆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치료해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처럼요.”
유스넨이 쥬웰의 손을 부드럽게 붙들었다.
어째 자주 손이 닿는 느낌이라 인상을 찌푸릴 때, 파앗 성력이 흘러들었다.
잔잔한 성력이었는데, 쥬웰은 기분이 한결 좋아짐을 느꼈다.
“그리고 꼭 의사로서가 아니어도, 당신 옆에 있어야 합니다.”
“왜요?”
“약혼자이니 간병해 드려야지요. 주치의 겸 간병인 겸 보호자로 이틀간 있을 예정입니다.”
“……간병은 기사들에게 맡겨도 되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리샤크가 아주 열성적으로 간병하려고 했다.
그런데 유스넨이 간병이 미숙하다고 쫓아내 버렸다.
“기사들보다는 의사인 제가 훨씬 나을 겁니다. 그리고 간병은 마음으로 하는 거니 딱딱한 기사들보다는 약혼자인 제가 하는 게 훨씬 회복에 좋을 겁니다.”
“…….”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간병하다가 빈틈을 노려 날 제거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의심이 들었으나, 그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녀가 어둠의 존재인 걸 눈치챘으면, 지금 이렇게 얌전히 앉아 있을 리가 없으니까.
심장에 청진기를 대는 대신, 칼로 찌르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얘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지?’
옛날 어린 시절에는 제대로 이야기도 못 하고 울먹거리기만 했던 것 같은데. 애가 변했다.
‘하긴. 13년이 지났으니.’
변한 게 말뿐이겠는가?
얼굴만 해도 완전히 달라졌다.
옛날에는 젖살이 있어 귀여운 인상의 강아지였지만, 지금은.
‘……잘생겨졌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움이라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리는 잘생김이었다.
황태자 오펜하임이 여인처럼 고아하게 생겼다면, 유스넨은 아름답게 잘생겼다.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아름다움이었다.
입가에 맺힌 미소와 둥근 안경 덕에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자세히 보면 날카로운 느낌이 강했다.
특히 눈매가 그랬다.
부드러움 속에서 날카로움이 공존한다고 할까?
사실 이제는 흰 강아지보다는 은빛 맹수가 더 어울리는 외모 같았다.
부드럽게 웃지만, 날카로움을 숨긴 은빛 맹수 말이다.
‘조금…… 유혹적인 것 같기도.’
쥬웰은 묘한 얼굴을 하였다.
천사의 피를 각성한 유스넨에게 그런 표현은 실례일지도 있지만, 날카로운 눈매가 살짝 매혹적인 느낌을 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잘생기셔서요.”
쥬웰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유스넨은 살짝 당황한 듯 답했다.
“……그렇습니까?”
“네. 그런데 왜 둥근 안경을 쓰시는 건가요? 다른 스타일의 안경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둥근 안경. 잘 안 어울리는데.’
물론 이상한 건 아니었다.
어떤 안경이든 최고급 액세서리로 만드는 사기적인 얼굴이니까.
둥근 안경이 날카로운 눈매를 죽이며 한결 부드러운 인상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조금 날렵한 안경이 그의 눈매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건 곤란합니다. 날카로운 인상이 될 테니까요.”
“그러면 안 되나요? 대법관이시잖아요. 부드러운 느낌보다는 강한 느낌이 나을 것 같은데?”
“…….”
유스넨은 침묵했다.
뭔가 또 아릿한 얼굴을 하여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자꾸 왜 그래?’
유스넨은 다시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영애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냥…… 이 안경은 제 못 버린 미련 때문입니다. 영원히 버리지 못할 미련이지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물어볼 필요도 없고.’
쥬웰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데 강아지는 왜 날 걱정하는 걸까? 날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
쥬웰은 베개에 머리를 파묻으며 생각했다.
열이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정신이 혼몽해져 생각이 띄엄띄엄 이어졌다.
‘……강아지가 날 설마 좋아하나?’
피식 웃었다.
설마.
‘뭐, 반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강아지도 남자니까. 솔직히 이 몸의 아름다움은 극강이잖아.’
아름다움을 전투력으로 환산할 수 있다면, 이 몸의 전투력은 마탑주 라플 공작에 필적할 것이다.
즉, 제국 최강의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유스넨이 딱히 외모로 그녀에게 반했을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유스넨이 그녀를 보는 눈빛은 반한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다만, 걱정이 스쳐가는 게 보였다.
왜?
왜 걱정한단 말인가?
지금도 이상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열이 또 오르는군요.”
유스넨의 감람빛 눈동자에 다시금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걱정이다.
잘못 본 게 아니다.
결국, 쥬웰은 물었다.
“왜…… 걱정해 주시나요?”
유스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자꾸 그녀를 떠올리게 하니까.’
유스넨은 쥬웰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살펴보았다.
이 감정을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확실한 건 지독히 아프다는 것이다.
에스텔레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아파 도저히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물론 이게 잘못된 행동인 건 안다. 광휘의 대공이 어둠의 존재에게 호의를 베풀다니. 이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면 그에게 돌을 던질 것이다.
‘아니, 단순히 돌을 던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겠지.’
‘잊지 마십시오. 어둠에 마음을 뺏겼던 선대 가주분들이 결국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경고가 스쳐 지나갔지만, 유스넨은 쥬웰을 볼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아파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영혼이 울부짖는 듯한 아픔이었다.
“주무십시오.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나을 겁니다.”
유스넨의 성력이 부드럽게 쥬웰에게 흘러들었다.
따뜻한 느낌에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옅게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항상 반대 입장이었는데.’
어릴 때는 누워 있는 유스넨을 그녀가 치료해 주었다.
지금 유스넨이 하는 것처럼 하루 종일 붙어서 성력을 넣어주고, 불편한 점을 살피고, 간병해 주고 했다.
그런데 반대 입장으로 누워 있으니 무언가 기분이 묘했다.
‘그때는 툭하면 우는 울보였는데. 이렇게 듬직하게 크다니. 그래도 뿌듯하네.’
유스넨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란 데는 그녀가 그때 열심히 치료해 준 몫도 조금은 있으리라.
그런 생각이 드니 기분이 좋아졌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힘들 텐데 눈을 붙이십시오.”
“괜찮은데…….”
하지만 따스한 성력 때문일까?
조곤조곤 잠이 왔다.
막 잠에 빠지는데, 이런 음성이 귀에 들렸다.
“당신이 아픈 것 보고 싶지 않습니다.”
* * *
유스넨의 성력을 잔뜩 받아 악몽 걱정은 없었다.
대신, 그의 성력을 받을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유스넨 꿈을 꾸었다.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던 꿈이다.
‘누나는 누구랑 결혼하고 싶어요?’
‘라디트?’
‘……아니, 그 재수 없는 새ㄲ…… 형아 말고 어떤 남자랑 결혼하고 싶으냐고요?’
흰 강아지의 상태가 제법 좋아지고 난 다음이었다.
둘은 함께 있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였는데, 어느 날 유스넨이 이상형을 물어봤다.
그녀는 속으로 멀뚱히 생각했다.
‘라디트 말고 다른 이상형은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녀는 라디트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라디트는 그녀를 경멸했다.
그런데 그녀가 라디트에게 반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매리엇과 플랑드나의 행패에 아파할 때, 그가 몇 번 도움의 손길을 주었던 탓이다.
‘올바른 타오름(正炎)’을 숭상하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답게 약자인 그녀에게 동정의 손길을 베푼 것이다.
그리고 그 손길 몇 번에 그녀는 오랜 짝사랑에 빠졌다.
아주아주 오랜.
‘글쎄. 부드럽게 웃어주는 남자가 좋을 것 같아.’
라디트가 부드럽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매리엇과 플랑드나를 향해서였다.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 잊히지가 않았다.
라디트가 자신에게 그렇게 웃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을 종종 했었다.
‘부드럽게요?’
어린 유스넨은 심각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듣더니 억지로 웃음을 지어봤다.
‘이렇게?’
‘어, 음…… 그래.’
미안하지만, 유스넨은 날카로운 눈매를 가져서 젖살이 빠지면 날카로운 냉미남으로 자랄 것 같았다.
부드러운 미소보다는 차가운 미소가 어울릴.
‘음…… 넌 둥근 안경을 쓰면 귀여울 것 같아.’
‘둥근 안경이요?’
‘응.’
미래의 유스넨은 훌륭한 냉미남이 될 것 같지만, 지금은 귀여운 강아지였다.
유스넨의 하얀 젖살이랑 둥근 안경은 아주아주 귀엽게 어울릴 것 같았다.
‘둥근 안경…….’
유스넨은 심각하게 중얼거리더니 물었다.
‘그것 말고는요?’
‘음…… 내가 해주는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좋겠어.’
‘안 돼요.’
‘응?’
‘왜 누나가 요리해요. 오히려 누나한테 맛있는 요리를 해줄 남자를 만나야죠.’
유스넨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게 하지 않고, 절대절대 고생 안 시키고, 맨날 맨날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남자여야…… 아, 그러고 보니 누나는 무슨 요리 좋아해요?’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
사실, 안 상하고 더러운 거 안 섞이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요리면 그냥 다 좋아한다.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 그거 말고는요?’
유스넨은 꼬치꼬치 물었다.
그녀는 대충 몇 개 답해주었는데, 왜인지 심각하게 유스넨은 그 요리들을 외웠다.
‘……스테이크는 어떻게 해야 잘 구울 수 있는 거지?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어떻게 만드는 거고?’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리고 또? 또요?’
‘왜 자꾸 물어?’
‘……그, 그냥 궁금해서 그렇죠. 혹시…… 남편으로 바라는 직업은?’
그녀는 고민하다가 답했다.
‘나랑 결혼할 사람은 같이 환자를 치료할 의사였으면 좋겠어.’
‘……의사요? 법관은 어때요?’
‘법관은 갑자기 왜?’
‘……그, 그냥요. 의사는 왜 바라는데요?’
그녀는 대답 대신 헤실헤실 웃었다.
이건, 그녀의 꿈이었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래서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녀는 자신이 생각해도 비현실적이라 여겨져 멋쩍게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헤헤, 그런데 그냥 나 사랑해 주는 사람이면 누구든 다 좋을 것 같아.’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어린 유스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 돼요.’
‘응?’
‘사랑해 주면 누구나 괜찮다니. 절대로 안 돼요.’
유스넨은 왜인지 화난 얼굴이었다.
‘목숨…… 아니, 영혼을 바칠 정도로 사랑해야 하고, 최고로 잘나고, 절대 울리지 않고, 누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해요. 그리고…… 누나가 방금 말한 이상형 조건도 모두 만족시켜야 해요.’
한창 열을 내며 말하던 어린 유스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돼요?’
* * *
“……!”
쥬웰은 번뜩 눈을 떴다. 주변을 보니 깊은 밤이었다.
“아…….”
꿈속 내용이 스쳐 지나가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깨닫게 된 것이다.
유스넨이 왜 어울리지도 않는 안경을 쓰고 있는지.
왜 관심도 없는 의술을 배운 건지.
모두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를 그리워해서 그런 일들을 한 것이다.
‘뭐야, 강아지. 정말 진심이었던 거야?’
어린 시절, 유스넨은 종종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별반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기껏해야 어린 동생의 풋풋한 귀여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설마…… 지금까지 날 그리워하고 있다니.’
유스넨의 감정은 고작 풋풋한 귀여움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깊어 보였다.
진심이 분명했다.
“하아.”
쥬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인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유스넨이 보였다.
유스넨은 문 쪽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밤새 간병하다가 잠든 건지, 옆에 약, 물수건 등이 놓여 있었다.
“…….”
쥬웰은 망설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사이 열심히 성력을 넣어준 건지, 몸이 훨씬 가벼운 느낌이었다.
조심히 걸음을 옮겨 유스넨의 앞에 갔다.
‘……잘생겼네.’
쥬웰은 다시금 감탄하였다.
잠든 유스넨의 얼굴에서 안경이 살짝 흘러내려 있었다.
그 모습이 무언가 무방비스러우면서 유혹적인 느낌을 주었다.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달빛을 받아서인지 평소보다 붉게 보였다. 매혹적인 빛이었다.
‘죽일까?’
쥬웰은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단번에 목을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유스넨은 그녀의 가장 큰 적이니, 지금처럼 무방비할 때 처리하는 게 복수를 위해서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쥬웰은 악마화를 피우는 대신, 손을 들어 유스넨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조심히.
부드럽게.
유스넨은 눈썹만 꿈틀할 뿐, 깨어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성력을 많이 쓴 탓인지 깊게 잠든 것 같다.
“유스넨? 흰둥아?”
몇 차례 불러도 유스넨이 잠에서 깨지 않자, 쥬웰은 속에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강아지. 이 바보야.”
강아지.
그 말을 하는 순간, 쥬웰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직접.
“난…… 이제 네가 기다리던 에스텔레가 아니야. 네가 알던 에스텔레는 영원히 죽었어.”
달빛이 내려앉았다.
은을 뽑아 만든 듯한 유스넨의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산산이 반짝였다.
왜일까?
그 모습이 추악하게 변한 자신과 다르게 너무 찬란해서일까?
쥬웰은 가슴이 울렁였다.
“……난 이제 추악한 악마야. 난…… 더는 네가 기억하던 것처럼 빛나지 않아.”
쥬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제 그녀는 유스넨이 기억하는 에스텔레가 아니었다.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악마.
그게 그녀였다.
‘……내 이런 모습. 네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쥬웰은 씁쓸히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 추악하게 변했다는 걸 유스넨이 알게 되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 참담하리라.
쥬웰은 유스넨이 앞으로도 계속 그녀를 지금처럼 좋게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었다.
“네가 아는 에스텔레는 이제 세상에 없어. 그러니…… 넌 나와 상관없는 빛나는 삶을 살도록 해.”
원수들을 처단하다 보면, 언젠가는 유스넨과 싸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가급적 그를 다치지 않게 봉인하기로 다짐했다.
이렇게나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그를 해칠 수가 없었다.
‘누나가 최대한 아프지 않게 봉인해 줄게. 내가 소멸하여 사라질 때까지 조금만 참아줘.’
어차피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한다.
길어야 3년.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그녀의 영혼은 산산이 붕괴해 소멸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짧게 봉인하면 되리라.
‘내가 죽고 난 후, 너는 나와 상관없이 찬란히 빛나는 삶을 살았으면 해. 가급적 최대한 행복하게.’
비록 이렇게 추악한 악마가 되었지만.
그녀는 유스넨의 행복을 바란다.
“그래도 고마워. 날 소중히 기억하고 있어 주어서. 솔직히…… 많이 감동이었어.”
쥬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자꾸 가슴이 울렁였다.
눈가도 뜨거워졌다.
쥬웰은 손가락으로 유스넨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정말…… 고마워.”
그녀는 고민하다가 유스넨의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마치 어릴 때 했던 것처럼.
그가 잠 못 이룰 때 해주었던 것처럼, 똑같이.
“축복받길, 강아지.”
달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찬란하게. 시릴 정도로.
* * *
유스넨이 했던 약속처럼 이틀 후, 쥬웰의 몸은 많이 회복하였다.
쥬엘은 바셋 성의 사람들을 한 차례 살펴 민심을 다진 후,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사뭇 달랐다.
“쥬웰 성녀님, 만세!”
“감사합니다!”
수많은 이가 그녀의 마차를 알아보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녀의 마차를 보며 무릎 꿇고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쥬웰은 마차에서 ‘성녀’처럼 미소 지으며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성공적인 여행이었어.’
쥬웰은 지그시 생각했다.
이번 일로 얻은 이득이 많았다.
첫째, 어마어마한 민심을 얻었다.
이제 제국의 모든 이가 그녀를 숭고한 성녀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짜 이득은 따로 있지.’
쥬웰은 신문을 펼쳤다.
헤드라인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충격, 매리엇 상단 천문학적인 손해를 봐!]
매리엇 상단.
이름 그대로 매리엇의 상단이었다.
‘다이아 공작가 소유가 아닌, 매리엇의 개인 상단이지.’
매리엇은 열 살 꼬마 때 개인 상단을 창립했다.
그게 바로 매리엇 상단이다.
이후, 어마어마한 성장세를 이루며 매리엇이 공작가에서 인정받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다이아 공작가가 소유한 다른 상단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굉장히 큰 상징적 의미가 있는 상단이지. 현 가주가 어린 시절부터 직접 일군 상단이니까.’
그런데 천문학적인 손해라니?
이유가 있었다.
매리엇은 다이아 공작가의 상단이 아닌, 개인 소유인 매리엇 상단을 통해 이번 흑사병 관련 물품을 사재기한 것이다.
‘원래도 매리엇 상단은 이런 더러운 수단으로 돈을 벌었으니까.’
그런데 흑사병이 하루아침에 해결되며 어마어마한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천문학적인 손해라고 하기 부족해서 내가 추가로 손을 썼지.’
쥬웰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마리를 통해 매리엇 상단의 주식에 장난을 쳤다.
‘다운’ 포지션에 거액을 건 것이다.
다이아 공작가는 투자자들의 눈먼 돈을 강탈하기 위해 여러 옵션 투자를 만들어놨다.
그중 하나가 업, 다운 옵션 투자였다.
‘업’은 주식 시장에 상장된 상단이 기간 내에 이득을 내면 투자자가 돈을 버는 옵션 투자였다.
상장된 상단은 기간 내 본 이득과 투자자가 투자한 금액에 비례해 돈을 주어야 했다.
‘다운’은 반대였고.
즉 상단의 기간 수익이 이득일지 손해일지 맞추는, 주식으로 하는 도박에 가까웠다.
이런 옵션 투자의 특징은 리미트가 없고, 상단이 내는 손익이 크면 클수록, 의외의 결과가 나올수록 어마어마한 금액이 오고 가게 된다는 것이다.
‘완전히 도박이지.’
쥬웰은 피식 웃었다.
이 옵션 투자는 계산법상 어중간한 확률에 투자하면 무조건 손해다.
희박한 확률에 일확천금을 노리고 거액을 베팅해야 돈을 벌 수 있게 계산법이 되어 있다.
‘내가 마리에게 준 금액이 얼마였지?’
쥬웰은 가넷가의 지위를 이용해 비밀리에 커다란 금액을 마련했고, 그걸 세탁해 마리에게 넘겼다.
그리고 마리는 그 거액의 돈을 그대로 ‘다운’ 포지션에 걸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다운 포지션에 걸 시 배당 금액은 투자한 금액, 확률, 손해 규모에 비례한다.
‘이번에 매리엇 상단이 단기 손해를 볼 확률이 계산상 0.08%였던가?’
흑사병이 창궐했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해결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매리엇 상단이 단기 손해를 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희박한 확률의 일이 일어났고.
하필 그 손해 금액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거액의 베팅, 희박한 확률, 어마어마한 손해율.
이 삼박자가 모두 맞아떨어진 것이다.
결과는?
천문학적인 배당금이었다.
매리엇 상단은 최근 몇 년간 벌어들인 수익을 모조리 토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이아 공작가의 자금을 끌어와 간신히 파산을 막았다.
매리엇의 상재를 빛내는 자부심에서 빚더미 상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설마 다이아 공작가를 상대로 이런 수작을 부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이 옵션 투자는 다이아 공작가가 눈먼 투자자들의 고혈을 빼먹거나 적대 상단을 비열하게 무너뜨릴 때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반대로 다른 이들은 다이아 공작가를 상대로 누구도 감히 이 제도를 사용하지 못했다.
왜?
후환이 두려우니까.
하지만 쥬웰은 뭐.
‘다이아 공작가가 분노해서 날뛰어주면 더 좋지.’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피의 각인을 통해 전달되었다.
매리엇이 지금 느끼는 분노, 모멸이.
[아아아아아아악!]
열 살 때부터 키워온 그녀의 자부심이 빈털터리가 될 정도의 손해를 입었으니, 충격이 작지 않으리라.
먼 거리였음에도 매리엇이 느끼는 커다란 부정적 감정이 쥬웰의 영혼에 전달되었다.
‘수도에 있었으면. 더 선명히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쥬웰은 매리엇의 괴로움을 느끼자, 크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모자랐다.
탈진한 상태에서 딱 한 방울의 물만 마신 것처럼, 입만 더욱 말랐다.
원수들의 고통을 바라는 갈증이 너무 심해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냥 지금 죽여 버릴까?’
쥬웰은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당장 매리엇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게 하고 싶었다.
참혹한 고통을 주면.
그래서 비명 속에서 매리엇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이 갈증이 나아질까?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참아야 해. 그렇게 죽이면, 잠깐 목을 축여도 더욱 큰 아쉬움만 남게 될 거야.’
쥬웰은 자신이 설계한 매리엇의 미래를 생각하며 마음을 달래었다.
매리엇은 모든 걸 잃고, 추레한 몰골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악독하게 괴롭힌 것 이상으로 참혹한 괴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로튼 백작도 기대되네.’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로튼 백작이 이번 사태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에블린 백작 부인이 누명을 쓸 때만큼 추레한 꼴을 보여줄까?
곧 로튼 백작이 보일 비루한 모습이 보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앞에서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 괜찮으십니까?”
유스넨이었다.
그가 같은 마차에 타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 너머 감람색 눈동자가 그녀를 주시하였다.
쥬웰은 흉악한 속마음을 숨기고 착한 약혼녀의 모습을 연기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쉬었다 갈까요?”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넷가에 도착해 로튼 백작이 궁지에 빠지는 걸 보고 싶었다.
“아니,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흐음. 너무 무리하는 것 같습니다만.”
“괜찮아요.”
유스넨은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는 생각했다.
‘정말 똑같군.’
사실, 쥬웰의 몸은 완전히 회복하지 않았다. 아직 열이 남아 있었다.
더 요양해야 하는 상태건만, 부득불 우겨 출발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아프든 말든 신경 안 쓰는 게 정말 에스텔레를 똑 닮았다.
유스넨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손 빌려주십시오.”
“네?”
“영애의 체력이 많이 약한 것 같으니, 제가 강화해 드리겠습니다.”
“강화요?”
쥬웰은 놀란 얼굴을 하였다.
성력으로 다른 사람의 체력을 강화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하지만 굉장히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면…….
유스넨이 설명하였다.
“제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성력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병을 회복하는 걸 넘어 체력이 강해지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고마운 제안이지만, 그러려면 유스넨이 너무 고생해야 한다.
“그러려면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천천히 성력을 불어 넣어주어야 할 텐데요?”
“네, 그러려고 합니다.”
“그건…… 죄송해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군요.”
유스넨은 부드럽게 말했다.
“죄송하지 않습니다. 전 영애의 약혼자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아픈 게 더 죄송한 거니, 손을 빌려주십시오.”
“…….”
쥬웰은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생각이지?’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만, 둘 사이에 어떤 감정적 교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스넨은 진심인 듯했다.
재차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서요.”
“…….”
“그냥 조금 번거로울 뿐 제게 무리가 되는 일은 아니니, 부담 가지지 마십시오. 도리어 영애께서 계속 아프신 게 제게 더 안 좋습니다.”
왜?
쥬웰은 고민하다가 물었다.
“……왜 그렇게 절 걱정하시는데요?”
지난번에 했던 질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제대로 답을 듣지 못했다.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절 걱정해 주실 이유는 없잖아요.”
유스넨은 침묵하다가 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유스넨의 감람색 눈동자가 쥬웰을 향했다.
“그냥 영애를 보면, 걱정이 됩니다.”
“…….”
뜻밖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게 유스넨의 진심이었다.
그는 도리어 이렇게 반문했다.
“제가 영애를 걱정하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요.”
“그러면 손 주십시오.”
어쩔 수 없이 쥬웰은 손을 내밀었다.
유스넨은 아예 쥬웰의 옆에 앉아 손을 잡았다.
차갑지만 이제는 기분 좋게 느껴지는 서늘함이 손을 타고 전달되었다.
옆에 앉아서인지 왠지 유스넨이 의식되었다.
천사의 향기일까? 맑고 기분 좋은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천천히 전달할 테니 편안히 있으십시오.”
“……네, 감사해요.”
성력이 은은하게 그녀의 몸에 전달되었다. 평소 성력을 받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왠지 간질간질한 느낌이 가슴을 건드렸다.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질간질하면서 기분 좋은 충만감이 몸에 차올랐다.
따뜻한 물에 담긴 것처럼 노곤하기도 했다.
‘……졸리네.’
쥬웰은 인상을 찌푸리며 잠을 쫓아냈다.
유스넨이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주무셔도 됩니다.”
“……아니, 그래도 그건.”
“괜찮습니다. 쉬십시오.”
마치 자장가처럼 들리는 아늑한 목소리였다.
결국,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쥬웰은 문득 하나의 생각이 나서 말하였다.
“쥬웰.”
“네?”
“그냥 쥬웰이라고 불러도 돼요.”
유스넨은 잠시 침묵하더니 답하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무십시오.”
다그닥.
적막 속에서 마차가 달렸다.
쥬웰은 결국 잠에 빠졌고 의도치 않게 옆에 앉은 유스넨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게 되었다.
유스넨은 자신의 어깨에 닿은 쥬웰의 느낌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쥬웰을 볼 때마다.
그녀와 가깝게 닿을 때마다 가슴의 아픔이 더더욱, 미칠 듯 심해지고 있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영혼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그 아픔 속에서 유스넨은 한 가지 다짐을 하였다.
‘그녀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어.’
그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 * *
드디어 가넷가에 도착했다.
유스넨은 중간에 페리도트가로 돌아갔고, 마차에서 내린 쥬웰은 놀란 눈을 하였다.
생각지 못한 인물이 마중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
토른 공작이 직접 나와 있었다!
쥬웰은 후다닥 뛰어가 토른 공작에게 안겼다.
“어이쿠, 우리 요정 공주님. 고생이 많았다. 그사이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이 할아비 속상하게.”
“헤헤, 저 엄청 열심히 했어요.”
쥬웰은 사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토른 공작은 한없이 기특한 얼굴이었다.
“다 들었다. 네가 얼마나 기특한 일을 했는지 들었어. 이 할아비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자랑스럽다.
토른 공작 기준으로 어마어마한 칭찬이었다.
옆에 있던 로튼 백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위험한 일은 안 된다. 이 할아비가 널 걱정하느라 얼마나 잠을 설쳤는지 아느냐?”
‘거짓말은.’
쥬웰은 피식 웃었다.
토른 공작이 그녀를 걱정했을 리가.
아, 물론 걱정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손녀를 향한 걱정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가넷가의 미래를 바꿀지도 모르는 인재이니까. 가주로서 걱정했을 것이다.
뭐, 상관없었다.
쥬웰은 토른 공작이 원하는 답변을 해주었다.
“하지만 전 가넷가의 미래가 가장 중요한걸요. ‘충성’의 가넷으로서 가문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가넷가를 위해서라면 전 어떤 희생도 할 수 있어요.”
토른 공작을 흡족하게 하려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토른 공작이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희생이라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할아버지?”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평소라면 가문을 향한 충성심에 마냥 기뻐했을 토른 공작이다.
토른 공작은 오로지 가문만을 위하니까. 그에게 핏줄은 가문을 이루는 부품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토른 공작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정말 그녀를 염려하고 있었다.
‘뭐지? 토른 공작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쥬웰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유를 눈치챘다.
‘아, 카르탄의 저주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구나.’
바셋 지방으로 가기 전, 쥬웰은 지옥의 마수 카르탄을 선물하고 갔다.
카르탄은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저주를 내리는 괴조.
함께 있으며 심적 동요가 생긴 걸 수도 있다.
‘물론 그래 봤자 희미한 흔들림 정도겠지만.’
쥬웰은 토른 공작을 잘 안다.
그는 커다란 거악(巨惡).
쉽게 동요할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 쥬웰을 염려하는 것도, 언제든지 쉽게 거둘 값싼 변덕에 불과할 것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헤헤, 죄송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그래, 꼭 조심해야 한단다. 그러면, 들어가서 그간의 일을 듣자꾸나.”
그때, 딱딱한 음성이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가주님, 쥬웰은 쉬어야 합니다.”
엔리크 자작이었다.
그는 무거운 얼굴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오기 전, 열병을 앓았다고 들었다. 아직 몸이 안 좋을 테니 일단 일은 뒤로 미루고 가서 쉬자꾸나.”
역시나 딸의 안위만 생각하는 엔리크였다.
‘……뭐, 싫은 건 아니지만.’
쥬웰은 팔짱을 꼈다.
사실 그녀는 엔리크가 저런 걱정을 해주는 게 싫지 않았다.
에스텔레 때, 간절히 바랐던 부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토른 공작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중요한 일?”
“네,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요.”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셋 성에서…… 흑사병을 해결하며 놀라운 흔적을 발견했거든요.”
“어떤 흔적이냐?”
“가넷가에 벌레가 있다는 흔적이요.”
“……!”
그 섬뜩한 말에 주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특히, 로튼 백작의 안색이 하얘졌다.
쥬웰이 말한 벌레가 무슨 뜻인지 눈치챈 것이다.
쥬웰은 그런 로튼 백작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벌레들을 박멸해야 하니 제가 말한 봉신들을 소집해 주시겠어요, 백부?”
두근.
쥬웰의 심장이 뛰었다.
곧 일어날 일이 기대되어 입이 바짝 말랐다.
* * *
한편, 유스넨은 중간에 헤어져 페리도트 대공가의 고성으로 향했다.
“으아아, 대공 전하!”
눈이 퀭해진 메디안 백작이 그를 맞았다.
원래도 불퉁한 표정이었던 그는 마치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상관을 맞이했다.
“도대체 이렇게 늦게 오시면……!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유스넨은 휘릭 서류들을 보더니 얄밉게 말하였다.
“흠. 모두 훌륭히 처리하셨는걸요? 역시 제가 가장 신뢰하는 백작답습니다. 앞으로 믿어도 되겠군요.”
“아니, 그걸 말씀이라고! 잠깐, 설마?”
메디안 백작은 눈을 크게 떴다.
“앞으로도 계속 저에게 일을 떠맡기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미안하지만 당분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혹시 쥬웰 영애 때문입니까?”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디안 백작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역시 그녀는 어둠의 존재가 맞았던 겁니까?”
쥬웰이 어둠의 존재로 판명되었다면, 일을 미루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어둠을 처단하는 건 페리도트 대공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의무이니까.
하지만 유스넨은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녀는 어둠의 존재가 아닙니다. 절대로.”
유스넨은 자신도 모르게 강하게 부정하고는 흠칫하였다.
그녀는 어둠의 존재가 맞다.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저 없이 거짓말을 해버렸다.
광휘의 대공답지 않은 태도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둠의 존재가 아니라고요? 그런데, 왜?”
“그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알아본다고요?”
메디안 백작은 황당한 눈빛을 보냈다.
“어둠의 존재가 아닌데, 뭘 알아보겠다는 겁니까?”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인데 당연히 깊이 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연애 때문에 일을 맡기겠다고요?”
“중요한 일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요. 대공비가 되실 분이니, 이런 판결들 따위보다는 중요한 일이긴 하죠.”
메디안 백작은 순식간에 납득했다.
쥬웰이 어둠의 존재가 아니라면, 그는 이 결혼 찬성이다.
하지만 정말 아닌가?
그도 눈치가 있다.
무언가 이상했다.
유스넨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정말 아닌 건가?’
메디안 백작은 무겁게 생각했다.
만약, 유스넨이 거짓말을 하는 거면?
혹시라도…… 그가 어둠에 마음을 뺏긴 거라면?
‘아니야. 설마. 절대 그건 아니겠지.’
어둠에 마음을 뺏기면 광휘는 빛을 잃는다.
페리도트 대공가에 있어 가장 끔찍한 일이다.
그러니 메디안 백작은 그 가능성을 일축하고 유스넨을 믿기로 하였다.
“……그러면 쥬웰 영애께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대공 전하, 그런 면에서는 영 아니지 않으십니까?”
“음. 데이트도 좋겠지만 다른 식으로 알아보려고 합니다.”
“다른 식이라면? 정보 길드에 문의라도 해보시게요? 쥬웰 영애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농담 삼아 한 이야기지만, 놀랍게도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당사자의 동의가 없는 정보 수집은 불법 아닙니까?”
“뭐,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대법관인데 조금 위법을 저질러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당당히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메디안 백작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였다.
“어떤 정보 길드에 문의하려고 합니까? 쥬웰 영애는 최근 가넷가의 최고 실세로 떠오르고 있으니, 정보를 캐내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까요.”
메디안 백작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지만, 유스넨은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정보를 물으려는 곳은 바로 낙원, ‘에덴’이었으니까.
즉, 그는 에덴의 천사들에게 쥬웰의 정체에 대해 물을 작정이었다.
‘북부의 대공령에 다녀와야겠군.’
북부에는 얼음의 대지가 펼쳐져 있다.
페리도트 대공가는 대대로 그 얼음의 대지를 다스리고 있다.
페리도트 대공가가 얼음의 대지를 다스리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얼음의 대지에는 낙원, 에덴으로 통하는 틈새가 있었다.
천사의 피를 각성한 페리도트 대공가의 인물들은 그 틈새를 이용해 에덴에 왕래할 수 있었다.
“조금 오래 자리를 비울 것 같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백작.”
메디안 백작의 소리 없는 비명을 뒤로하고, 유스넨은 발걸음을 옮겼다.
메디안 백작과 헤어진 유스넨은 성의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가니 커다란 곰돌이 인형이 보였다.
광휘의 대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인형이었다.
하지만 무슨 가보라도 모시듯 보석함 안에 애지중지 보관되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이 인형은 에스텔레가 어린 시절 그에게 주었던 선물이었다.
‘여기, 혼자 자기 무서울까 봐 구해왔어. 무서울 때 꼭 끌어안고 자. 알았지, 우리 강아지?’
물론 이제 인형을 끌어안고 자는 일은 없지만, 유스넨은 인형을 보며 그녀를 추억했다.
‘이것 말고도 흔적이 많지.’
유스넨은 씁쓸히 생각했다.
에스텔레는 상처받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여러 선물을 구해주었다.
비싼 선물이 아니라, 정성이 담긴 선물들.
이 침실에는 그런 그녀의 흔적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하아.’
유스넨은 늘 그랬듯, 씁쓸히 시선을 돌렸다.
에스텔레의 흔적을 본다고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끔찍이 아팠다.
이제 세상에 그녀는 없으니까.
그녀를 추억할수록 그 잔인한 사실을 더욱 선명히 떠올리게 된다.
가슴속 텅 빈 공허가 더욱더 벌어지는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유스넨은 그녀를 추억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에스텔레는 그의 삶의 유일한 의미였으니까.
‘당신이 없는 삶 따위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건만.’
유스넨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낙원에서의 10년.
그는 끔찍한 시련을 받았다.
징벌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고통이었다.
낙원의 천사들은 끔찍한 죄악을 저지른 유스넨을 증오했다.
차라리 소멸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참혹한 시련을 내렸고, 유스넨은 그 끔찍한 시련을 오로지 그녀를 생각하며 버텼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시련에 탈락해 정화의 불에 소멸하였을 것이다.
그의 모든 것 에스텔레.
그래서일 것이다.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쥬웰이 이토록 신경 쓰이는 이유는.
‘하지만 무언가 이상해.’
유스넨은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렸다.
‘왜 나는 쥬웰에게 이토록 흔들리는 거지?’
에스텔레를 떠올리게 해서?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여기기에는 이상했다.
유스넨은 자신이 쥬웰과의 첫 만남부터 흔들렸다는 거에 주목했다.
‘그래, 나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흔들렸어.’
토른 공작의 송별 예배 때.
그저 스치듯 만났을 뿐인데 그때부터 그녀에게 흔들렸다.
왜?
왜 흔들렸단 말인가?
유스넨은 더욱 근본적인 의문을 품었다.
‘쥬웰의…… 정체는 무엇이지?’
황태자의 약혼녀. 그리고 가넷가의 천덕꾸러기 못된 영애.
이게 쥬웰 드 가넷의 원래 모습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변하였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때, 산맥에서 조난한 이후부터야. 거대한 어둠을 내가 처음으로 감지했을 때.’
쥬웰이 조난했을 때.
유스넨은 그 산맥에서 거대한 어둠을 느꼈다.
쥬웰이 변한 건 그때부터다.
‘……지금 쥬웰은 원래의 쥬웰이 아니야. 그때,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차지했어.’
유스넨은 쉽게 진실에 도달했다.
그녀가 산맥에서 조난했을 때.
거대한 어둠이 원래 쥬웰의 몸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지금 쥬웰은 누구지?’
유스넨은 물었다.
게헨나의 악마가 직접 강림한 건 아닐 것이다.
그건 세상의 법칙상 불가능했다.
지옥의 악마들은 오로지 흑마도사와의 계약이나 몇몇 특별한 수단으로만 인간 세상에 개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지?’
유스넨은 재차 물었다.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유스넨은 가능한 경우를 모두 고려해 보았다.
하지만 다 설명이 되지 않았다.
‘신탁을 받아야겠어.’
쥬웰에게 물어도 절대 대답해 줄 리 없었다.
유스넨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에덴에 물어보기로.
‘에덴이라고 지상의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게헨나가 지상을 살피듯, 에덴의 천사들도 지상을 살피고 있다.
쥬웰 정도의 강대한 어둠이면 당연히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쥬웰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바로 출발해야겠어.’
마음이 초조했다.
쥬웰을 향한 가슴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더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의 진실한 정체를 알아내야, 이 초조함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 * *
가넷가에 자리한 법정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가주의 권한으로 가넷가의 일원 및 봉신들에 관해 판결을 내리는 치외 법정이었다.
‘이제 시작이네.’
쥬웰은 증인석에 앉아 느긋이 생각했다.
네스튼 남작.
보른 자작.
그녀가 소환해 달라 요구한 봉신들이다.
“그, 그들은 왜 부르라고 한 거냐?”
로튼 백작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로튼 백작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곧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피의 각인이 아니라도, 그가 지금 느끼는 불안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런 로튼 백작의 두려움을 느낀 쥬웰은 가슴이 뛰었다.
만찬을 앞둔 것처럼 침이 꿀꺽 넘어갔다.
‘오늘 있을 일을 만찬이라고 표현하기는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입 요기 정도는 될 것이다.
어서 빨리 이런 입 요기가 아닌, 원수들의 처절한 고통을 맛보길 기원하며 쥬웰은 싱긋 웃었다.
“바셋 성에서 놀라운 단서를 발견했거든요. 그 두 명이 재밌는 일을 벌였더라고요.”
“어떤……?”
“흐음, 모르시는 건가요? 두 봉신은 백부와 가까운 분들이잖아요.”
로튼 백작은 어색한 얼굴로 대답하지 못했다.
쥬웰은 빙글 웃은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 당연히 둘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백부께서도 알고 계실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뼈가 있는 말이었다.
로튼 백작은 직접 흑마도사와 접촉하지 않았다.
두 봉신을 시켰다. 소환한 네스튼 남작, 보른 자작이다.
그들은 로튼 백작의 명에 따라 흑마도사를 사주했다.
그러니 지금 쥬웰의 말은 로튼 백작이 저지른 잘못을 직접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로튼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꽉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로튼 백작의 보석안에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당혹, 두려움, 그리고 살의.
그는 두려워하며, 분노하고, 쥬웰을 죽이고 싶어 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 단둘만 있었다면 그는 커다란 손으로 쥬웰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한편, 쥬웰은 달콤한 마음으로 그 부정적인 감정들을 감상했다.
피의 각인을 통해 전달받는 것도 좋지만 역시나 직접 눈앞에서 원수가 괴로워하는 걸 감상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모자라.’
더. 더. 더.
더 분노하고, 좌절하고, 괴로워했으면 좋겠다.
로튼 백작뿐만 아니라 매리엇, 라디트, 플랑드나, 웰링턴 공작.
그리고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원수들까지.
그들이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을 지르는 걸 보고 싶었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쥬웰은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중요한 건, ‘빠르게’보다 가장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는 것이다.
단 한 명의 원수도 빠지지 않게, 모두 최악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해야 했다.
그때, 초대한 배역들이 도착했다.
“보른 자작, 네스튼 남작입니다!”
둘은 곧 있을 일을 짐작했는지 하얀 안색이었다.
이어 토른 공작도 자리에 들어왔다.
그가 판결석에 앉은 후 말했다.
“그래. 이야기해 보아라, 쥬웰.”
쥬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갑작스러운 소집 요구를 들어주신 가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놀라신 봉신들께도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바셋 성에서 흑사병 사태를 해결하며 놀라운 사실을 알아낸바, 이런 자리를 요청하였습니다.”
“어떤 사실을 알아냈느냐?”
“이번 흑사병의 발병에 저 두 명의 손길이 닿아 있었단 사실입니다.”
“……!”
법정이 경악에 빠졌다.
법정에 자리한 모두가 쥬웰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남작님?”
“흑사병 발생과 저 둘이 연관되어 있다니.”
이번 흑사병 사태는 극비리로 이루어진 거라 로튼 백작과 최측근 외에는 전모를 아는 이가 없었다.
“흑마도사들이 흑사병을 창궐시킬 수 있다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전 해밀턴 오라버니의 도움으로 이번 흑사병 창궐에 흑마도사의 손길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쥬웰은 법정 옆에 서 있는 해밀턴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증언해 주세요.”
“……해, 해밀턴입니다.”
해밀턴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인 로튼 백작이 눈을 부릅뜨며 씹어먹을 것 같은 눈빛을 보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매번 몽둥이를 휘두르는 아버지도 무서웠지만 끔찍한 악마 쥬웰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해밀턴은 그날 봤던 쥬웰의 모습 때문에 지금도 두려움에 잠을 설쳤다.
흑마도사들을 죽이며 피를 뿌리던 쥬웰의 모습은 정말로 악마 그 자체였다.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나도 그렇게 죽을 거야.’
해밀턴은 발발 떨며 증언하였다.
쥬웰이 환자를 치료할 때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흑마도사들의 흔적을 찾았고, 우연히 증거를 입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과 동떨어진, 조작한 발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실제로 증거가 있었으니까.
쥬웰이 흑마도사들을 죽이며 얻어낸 증거였다.
“오라버니가 입수한 서류에 흑마도사들을 사주한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보른 자작, 네스튼 남작입니다.”
“……!”
해밀턴은 서류를 토른 공작에게 전달하였고, 토른 공작은 말없이 서류를 살폈다.
보른 자작과 네스튼 남작은 시체처럼 질려 바닥에 엎드렸다.
“절대로 아닙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하지만 서류에 찍힌 직인은 분명 둘의 것이었다.
명백한 증거.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토른 공작이 그 증거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참 서류를 보며 눈살만 찌푸렸다.
두 봉신은 더욱 처절히 울부짖었다.
“저희는 절대 아닙니다!”
“이건 음모입니다!”
“입 다물어라.”
토른 공작의 나직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너희 둘은 내가 진본 서류를 분간도 하지 못할 얼간이로 보이는가?”
두 봉신은 하얗게 질려 입을 닫았다.
마치 사신을 마주한 듯 그들의 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때 토른 공작이 서류를 흔들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 이건 저 천치 두 명의 직인이 맞는 것 같군. 그런데 이게 어쨌다는 거냐?”
“……!”
“고작 이런 일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 한 거냐, 쥬웰?”
장내가 이번엔 다른 의미로 경악하였다. 사람들은 토른 공작을 바라보았다.
토른 공작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게 진정한 분노라기보다는 번거로운 일을 마주한 짜증에 가까운 감정이란 걸 눈치챘다.
사람들은 섬뜩한 사실을 깨달았다.
‘토른 공작 전하는…… 이번 일의 전모를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거야.’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토른 공작이 누군가? 라인하르트 제국의 최고 권력자였다.
아무리 로튼 백작이 은밀히 일을 진행했다고 해도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다 알고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토른 공작 입장에서 별것 아닌 일이었으니까.
흑사병을 일으켜 무고한 백성들이 몇 명이 죽든, 그게 무슨 신경 쓸 거리란 말인가?
물론 흑사병이 제국을 뒤덮어 근간을 흔들 정도면 그건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제국의 수많은 지방 중 한 곳에 창궐했던 소규모 흑사병이었다.
더구나 이번 일로 가넷가가 입은 손해도 없다.
그러니 굳이 신경 쓸 이유가?
“물론 흑사병을 소환한 게 착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글쎄.”
토른 공작은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애초에 도덕적 기준은 토른 공작의 관심 밖이었으니까.
토른 공작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가넷가에 이롭냐, 해롭냐는 것이었다.
“가주로서 묻겠다. 말해보아라. 이 일이 어떤 커다란 의미가 있길래 이런 자리까지 소집하자고 한 건지.”
“…….”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히 굳었다.
지금 토른 공작은 쥬웰을 추궁하고 있었다. 오늘 소환 요청이 경솔했다고.
최근 그가 쥬웰에게 보인 총애를 생각하면 섬뜩한 태도 변화였지만, 원래 이게 토른 공작의 모습이었다.
총애를 주되, 절대적인 건 없었다.
언제라도 쥬웰이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면 잘라낼 수 있는 사람이 토른 공작이었다.
“가주님. 제가 말씀…….”
결국, 엔리크 자작이 하얀 안색으로 앞으로 나섰다.
딸의 곤란을 못 지켜보고 앞으로 나서려는 것이다.
하지만 쥬웰이 손을 들었다.
“아니에요. 아버지,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러며 쥬웰은 속으로 픽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의 반응이네.’
사실, 그녀는 토른 공작이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했다.
‘토른 공작 본인도 두 차례나 흑사병을 일으킨 적이 있으니까. 당연히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에스텔레 시절 마주했던 흑사병 사태는 바로 저 토른 공작이 일으켰다.
그때, 뒤늦게 진실을 알고 토른 공작을 얼마나 비통히 원망했는지 모른다.
고작 한 사람의 욕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은 뭐. 별생각 없지만.’
다 관심 없었다.
토른 공작의 추악함.
이번 흑사병 사태로 눈물 흘린 수많은 사람.
그딴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녀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복수.
그 복수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걸 이용하면 충분했다.
그런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 저는 소가넷으로서 이번 사건이 지극히 위중하다고 판단되었기에 이런 자리를 요청한 겁니다.”
“위중하다고?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거지?”
토른 공작이 되물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다.
이건 시험이었다.
쥬웰이 어떤 답변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그녀를 향한 토른 공작의 태도가 변할 것이다.
만약…… 토른 공작이 실망할 경우, 총애를 거둘 수도 있었다.
한편, 로튼 백작은 기대감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건방진 년. 주제도 모르고 나대더니, 꼴좋구나. 가주님의 총애가 사라지면, 찢어 죽여주마.’
이윽고 수많은 사람의 주목 속에서 쥬웰이 입을 열었다.
당돌하게.
도리어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군요.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아무도 깨닫지 못하다니. 심지어 가주님마저 간과하고 계시다니.”
사람들은 흡 숨을 들이켰다.
지나치게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토른 공작은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흑사병이 심각한 일이긴 하나…….”
“아니, 저는 단순히 흑사병을 일으킨 걸 말하는 게 아닌걸요?”
쥬웰의 입가가 휘었다.
성녀로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차갑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흑사병…… 그게 뭐 중요한 일인가요? 그깟 백성들. 몇 명이 죽든, 그게 우리 가넷가와 무슨 상관이라고. 도리어 필요하다면, 이것보다 더 끔찍한 일도 일으킬 수 있죠.”
토른 공작을 비롯한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그렇다면 뭐가 심각한 잘못이라는 말인가?
“이번 사건의 중요 쟁점은 겨우 그런 게 아니에요. 진정 중요한 건.”
쥬웰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한없이 매서운 눈빛으로 두 봉신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자신의 욕심 때문에 가넷가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점이에요.”
쥬웰은 싸늘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흑마도사와 손을 잡고 흑사병을 창궐시킨 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가넷가를 위한 일이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저들은 고작 돈 몇 푼을 벌기 위해 가넷가의 이름을 팔고 흑마도사와 손을 잡았어요.”
토른 공작의 안색이 굳었다.
그제야 쥬웰이 말하는 바를 깨달은 것이다.
“저는 이게…… 용서받지 못할 끔찍한 대죄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장내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흑사병을 창궐시킨 건, 토른 공작의 입장에서 큰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가문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행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만한 추악한 일을 저지를 때는 반드시 그럴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이번 일의 목표가 가넷가를 위한 일이었다면 ‘충의’가 되지만 고작 돈 몇 푼을 벌기 위해서였다면 그건 대죄였다.
그것도 가넷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대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토른 공작은 물끄러미 쥬웰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쥬웰에게 또 한 방 먹었음을 인정하였다.
‘저 아이는 항상 내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사실 토른 공작은 이번 일로 쥬웰의 콧대를 한번 꺾으려 했다.
물론, 그는 쥬웰을 총애한다.
하지만 쥬웰이 그의 총애를 믿고 오만방자해지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번 기를 꺾으려 했건만, 웬걸. 더욱 탄복하고만 말았다.
토른 공작은 딱딱히 굳은 표정을 풀고는 평소의 얼굴을 하였다.
“그래, 네 말이 맞는구나. 내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어. 쥬웰, 네가 이 늙은이가 놓친 걸 깨닫게 해주었구나.”
“……!”
사람들은 놀라 토른 공작을 바라보았다.
굉장한 극찬이었다.
사람들은 쥬웰이 또다시 토른 공작의 총애를 거머쥐었음을 눈치챘다.
‘정말 이대로 가면?’
‘후계 구도가 바뀌는 건?’
일부 사람들이 그런 눈빛을 교환했다.
쥬웰의 부상은 가넷가 인물들의 초유의 관심사였다. 차기 후계가 결정될 일이니까.
물론 어린 쥬웰이 로튼 백작을 뛰어넘으리라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점점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쥬웰이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데 성공하면, 이변이 일어날 수 있었다.
한편, 쥬웰은 토른 공작의 칭찬에 맞추어 딱딱한 표정을 풀고 사랑스러운 손녀의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의견을 좋게 여겨주어 감사합니다.”
“부족하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거늘. 어쨌든 저들을 처벌해야겠구나. 어떤 벌을 내려야겠느냐?”
그런 토른 공작의 말에 두 봉신이 바들바들 떨며 울부짖었다.
“아, 아닙니다!”
“절대로! 우리는……! 억울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억울했다.
그들은 로튼 백작의 수족으로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까.
욕심을 챙기려고 했던 이는 로튼 백작이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 로튼 백작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번 일은……!”
그때, 돌발 사태가 일어났다.
짜아악!
거친 파공음이 울렸다.
채찍이 날아들어 그들의 앞을 때린 것이다!
쥬웰이었다.
“닥쳐라.”
둘은 하얗게 질려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검은 채찍을 쥔 채 싸늘히 말했다.
“어딜 감히 죄인 주제에 허락받지 않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지?”
“여, 영애…….”
두 봉신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우, 우리는 억울합니다. 사실 이번 일은…….”
“따로 시킨 이가 있다는 건가?”
“……!”
쥬웰이 그들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두 봉신은 처절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쥬웰은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반성은커녕 추악한 입을 놀려 남을 모함하려고 하는군.”
“모, 모함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미 잘못이 명명백백하거늘. 위증죄까지 더해 더욱 끔찍한 처벌을 받고 싶은 거냐?”
두 봉신은 절망에 빠졌다.
쥬웰이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줄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쥬웰이 지금 이러는 건 이유가 있었다.
‘너희에게 유감은 없지만. 로튼 백작을 연루하게 하면 너무 싱거우니까.’
만약 저들의 입에서 로튼 백작의 이름이 나오면 로튼 백작은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건 고작 처벌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로튼 백작이 이번 무대에서 더욱 추악한 몰골로 추락하길 원한다. 그런 마음으로 토른 공작에게 말했다.
“저 둘은 자신의 욕심으로 끔찍한 죄악을 저질러 가넷가의 위신을 떨어뜨린 바, 사형에 처하고 작위를 몰수하길 청하옵니다.”
토른 공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의견에 따르겠다. 다만.”
토른 공작은 은근한 어조로 말하였다.
“저들의 말을 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저들 말고도 또 다른 연루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말에 로튼 백작의 안색이 눈에 띄게 하얘졌다.
저 둘이 로튼 백작의 수족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토른 공작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토른 공작은 명확히 로튼 백작을 지목해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쥬웰이 고개를 끄덕이면 로튼 백작은 처벌을 피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쥬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능구렁이.’
여기서 질문.
토른 공작은 정말 로튼 백작의 처벌을 원할까?
아니다.
로튼 백작은 가넷가의 후계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그런 이가 흑마도사와 결탁한 일로 처벌받으면 가넷가의 위신은 시궁창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 가넷가를 생각하면 저 둘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마무리 짓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구태여 이런 내용을 물어보는 이유는 간단했다.
시험이었다.
쥬웰의 그릇을 판단하려는 것이다.
다행히 쥬웰은 로튼 백작의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건 따로 있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요.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왜지?”
“어떤 증거도 없이 죄인들의 말만 듣고 가문을 들쑤시는 건 옳지 않으니까요.”
더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둘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태를 마무리하자는 이야기였다.
토른 공작이 원하던 답변이었다.
토른 공작이 흡족한 얼굴을 할 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끝낼 수는 없지.’
그녀는 자신이 고대하던 하이라이트를 시작하였다.
“다만, 제 생각은 그런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흐음?”
“이건 가넷가의 위신과 연관된 위중한 일. 다른 분들의 뜻도 중요할 것 같아서요.”
쥬웰은 지그시 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로튼 백작이었다.
“소공작으로서 이번 일의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백부?”
“……!”
쥬웰은 일부러 소공작이란 용어를 썼다.
가넷 가문의 차기 후계로서 의견을 말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녀의 덫이었다.
‘어떻게 답변하기도 어렵겠지.’
쥬웰은 입술을 핥았다.
저 둘의 말에 따라 배후를 찾자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끝내자고 하는 것도 곤란했다.
‘그렇게 되면 모두의 앞에서 자신을 따르던 측근들을 버리는 꼴이 되지.’
쥬웰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저 둘은 로튼 백작을 따르는 이들이다.
그것도 가장 최측근이었다.
이런 은밀한 일의 손발이 될 만큼 말이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의 앞에서 버린다?
그 여파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는 누구도 로튼 백작에게 진실한 충성을 바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즉, 이건 자신의 안위와 수하를 저울질해야 하는 덫이었다.
‘자, 과연 어떤 선택을?’
쥬웰은 한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로튼 백작을 바라보았다.
로튼 백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안색이 하얗게 들떠 마치 시체와 같았다.
그가 지금 느끼는 미칠 듯한 갈등이 영혼에 전달되어 쥬웰의 가슴을 뛰게 했다.
“가, 각하…….”
두 봉신이 한없이 간절한 눈빛으로 로튼 백작을 바라보았다.
만약 로튼 백작이 나서준다면, 그래서 본인이 시킨 일이라고 감싸준다면 둘은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로튼 백작이 과연 그렇게 해줄까?
째각.
찰나, 죽음처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자리의 모두가.
수많은 봉신과 심지어 토른 공작까지 로튼 백작의 결정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쥬웰은 로튼 백작이 어떤 선택을 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과연.
“……둘을 사형시키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
로튼 백작은 낯빛을 굳히며 선언했다.
“둘은 본인들의 욕심을 위해 용서받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고, 가넷가의 위신을 추락시켰습니다. 이에 그에 맞는 처벌이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장내에 소리 없는 파문이 퍼졌다.
균열이었다.
봉신들이, 특히 로튼 백작을 따르던 이들이 눈을 부릅뜨고 로튼 백작을 바라보았다.
‘아아. 역시.’
쥬웰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내 사랑스러운 로튼. 날 실망하게 하지 않네.’
이번 일의 의미는 작지 않았다.
로튼 백작은 지금 모두의 앞에서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수족이라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충성을 바치던 봉신들로서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더구나 로튼 백작의 추레한 추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각하……!”
“이번 일은 모두 당신이 시킨 것 아닙니까?! 이야기가……!”
버림받은 두 봉신이 부르짖었다.
로튼 백작은 거기서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버럭 그들을 꾸짖은 것이다.
“닥쳐라! 감히 누구를 모함하느냐?!”
“……!”
“당장 혀를 뽑기 전에 허튼 이야기는 집어치워라!”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진면목이 드러난다.
로튼 백작은 이번 일에 연루되어 처벌받을까 봐, 정확히는 토른 공작에게 내쳐질까 봐 이성을 잃었다.
“감히 탐욕에 눈이 멀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내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하다니! 여봐라! 어서 이놈들의 목을 쳐라!”
그렇게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던 이들을 내몰았다.
강하게 화를 냄으로써 자신은 이번 일과 상관없다는 듯.
그게 오히려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동이란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생각보다 더 만족스러운 모습인데?’
쥬웰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이 정도까지 추한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다른 봉신들의 얼굴이 더더욱 싸늘하게 굳었다.
로튼 백작의 모습에 실망한 것이다.
로튼 백작은 알까?
지금 자신이 무얼 잃었는지.
후계 다툼에서 가주의 총애 다음으로 중요한 가신들의 신뢰를 잃은 것이다.
그리고 잃은 건 가신들의 신뢰만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
“그만.”
나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토른 공작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못난 아들에게 말했다.
“로튼, 소공작으로서 네 뜻은 잘 알았다. 그만하거라.”
그 무심한 음성을 듣는 순간.
로튼 백작이 우뚝 굳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싸한 불길함과 함께 궁지에 몰려 마비되었던 이성이 천천히 돌아왔다.
“가, 가주님. 저는 이번 일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들은 저를 모함하려는 겁니다.”
토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알겠으니 그만하거라.”
그딴 것, 관심 없다는 투였다.
그제야 로튼 백작은 깨달았다.
토른 공작이 바랐던 정답이 무엇이었는지.
토른 공작은 로튼 백작이 수하들을 감싸주길 원했다.
설사 본인이 손해 보더라도 말이다.
가문과 가문의 일원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가주의 가장 중요한 책무였으니까.
만약 로튼 백작이 스스로 손해를 무릅쓰고 저들을 감쌌다면 토른 공작은 저 둘을 용서함은 물론, 로튼 백작의 잘못도 크게 추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로튼 백작은 정반대의 선택을 하였다.
토른 공작의 눈이 싸늘해졌다.
토른 공작이 시험하는 건 쥬웰만이 아니다. 그는 늘 모두를 시험하고 평가했다.
그런 그에게 로튼 백작은 오늘 최악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점점 아버지의 총애가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 로튼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휘청하였다.
‘아, 안 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와 저들을 감싸는 태도를 보인다고 해봤자 토른 공작의 판단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추레한 로튼 백작의 모습에 쥬웰은 짙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그녀가 의도한 대로였다.
그런데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전혀 생각지 않은 인물이 발언하고 나선 것이다.
“잠깐. 판결 전에 제가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가주님?”
그녀의 아버지, 엔리크였다.
“엔리크, 네가?”
토른 공작은 물론, 모두 놀란 얼굴을 하였다.
엔리크는 이런 공식 석상에서 발언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외교 대신이 됨으로써 후계 다툼을 포기한 후 가문 내에서 죽은 듯이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발언이라니?
‘무슨 말을 던지려고?’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왠지 불안했다.
“말해보아라.”
“비록 잘못이 크지만, 지금껏 둘은 가넷가를 위해 큰 헌신을 해왔습니다. 그러니 사형 및 가문을 멸문시키는 건 처벌이 너무 과하다고 판단됩니다.”
엔리크는 말을 이었다.
“지금껏 둘의 헌신을 생각하여 벌을 감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
잠시 장내에 놀람이 퍼졌다.
뜻밖이었던 것이다.
네스튼 남작.
보른 자작.
이 둘은 로튼 백작의 오랜 측근이다.
즉, 로튼 백작의 정적이었던 엔리크와도 적이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둘은 엔리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나서다니?
‘왜?’
모두 의문을 품었다.
쥬웰도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걱정 가득한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그녀는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원한을 사지 않게 하려는 거구나.’
이번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쥬웰이 주도했다.
로튼 백작을 추락시키기 위한 기획이긴 했지만 쥬웰은 직접 저 둘에게 끔찍한 중벌을 선언했다.
멸문당할 저들 가문은 쥬웰에게 원한을 품게 될 것이다.
또한 저들과 가까웠던 가신들 사이에서 쥬웰에게 불만을 가지는 이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걸 고려하여 딸을 위해 나선 것이다.
‘괜히 쓸데없는 배려를.’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다.
대국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은 아니더라도, 저런 섬세한 배려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고마운 배려였다.
‘……자꾸 잘해주지 말라고.’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다.
엔리크의 이런 걱정과 배려.
싫지 않았다.
그의 부정을 느낄 때마다 싫지 않은 감정이 들었다. 그게 작든, 크든. 실제로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부정은 에스텔레 때, 가장 간절히 바랐던 거니까.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욱신대는 아픔이 느껴졌다.
그녀는 저 부정을 마음 편히 받을 수가 없었다.
기쁜 만큼, 아팠다.
어쨌든 이런 감정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토른 공작이 쥬웰에게 말했다.
“쥬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엔리크의 말에 동의하느냐?”
쥬웰은 고개를 숙였다.
“네, 저도 동의합니다.”
토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둘은 종신형. 하지만 가문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지. 두 죄인의 가문은 후계들이 잇게 될 것이다. 이로써 오늘 판결을 마치겠다.”
그렇게 재판이 끝났다.
두 봉신은 기사들에게 끌려나갔다.
토른 공작은 재판정에서 내려와 쥬웰에게 다가왔다.
“쥬웰.”
“할아버지!”
쥬웰은 활짝 웃으며 토른 공작에게 뛰어갔다.
아까 재판 때의 싸늘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랑스러운 손녀의 모습이었다.
토른 공작도 아까의 날카로운 모습과 다르게, 따뜻하게 쥬웰을 안아주었다.
“그래, 우리 요정 공주님. 아까 할아비에게 서운하지는 않았고?”
능청스러운 물음에 쥬웰은 픽 웃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