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 마왕(魔王)
대답은 반 박자 늦게 나왔다.
무언가 메마른 음성이었다.
“영애께서 여기에 어떻게?”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유스넨의 기색이 이상했다.
‘설마?’
가슴 철렁한 의문이 떠올랐으나 고개를 저었다.
저 광휘의 대공이 그녀의 진면목을 목격하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저 성녀잖아요. 마침 근처에 있었는데 침식의 징조를 느껴 뛰어왔고, 간신히 큰 사달 전에 정화할 수 있었어요.”
“……큰일을 하셨군요.”
“네, 위대한 빛께서 가호하셔서 간신히 해낼 수 있었어요.”
“페리도트 대공가를 대표해 영애의 공을 치하합니다. 오늘 해내신 일은 제국 모든 사람이 칭송하게 될 겁니다.”
그럴 것이다.
침식은 재빨리 해결하지 않을 시 제국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사건.
그런 일을 홀로 뛰어들어 해결했으니 온 제국민의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쥬웰은 배시시 미소를 짓고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상 안 주세요?”
“……네?”
“저 힘들어요. 피로 회복제 부탁해요.”
유스넨은 잠시 침묵하였다.
“전하?”
“……아닙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잡으십시오.”
“네, 감사해요.”
평소보다 더욱 차가운 손이 닿았다.
파아앗!
유스넨의 성력이 그녀의 몸에 깃들었다.
쥬웰은 상쾌한 활력이 차오름을 느꼈다. 아마 오늘 밤도 악몽 없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유스넨은.
“…….”
입술을 짓깨물었다.
성력을 발현하는 순간, 그의 눈앞에 또다시 시커먼 무저갱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이 현상의 이유를 알겠다.
그녀가 어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뭘 망설이는 거냐? 죽여야 해.’
유스넨은 가면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방심하고 있는 지금.
허를 찔러 목을 베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평소의 모습을 가장하는 게 좋았다.
그때, 쥬웰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매번…… 감사해요. 혹시…… 앞으로도 가끔 이렇게 성력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쥬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의 성력을 받으면 푹 잘 수가 있어서요.”
“…….”
“아, 실례되는 부탁이라면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쥬웰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고, 왜일까?
유스넨은 다시 가슴에 저릿한 아픔을 느꼈다.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아픔이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했다.
‘이건……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당황을 감추며 물었다.
“……평소 잠을 잘 주무시지 못합니까?”
“네, 조금 불면증이 있어서요. 그런데 이상하게 전하의 성력을 받으면 괜찮아서 부탁한 건데…….”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괜한 이야기를 했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
유스넨은 알 수 없는 안타까움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다가 흠칫하였다.
‘뭐 하는 거냐! 상대는 어둠의 존재야! 지금이라도……!’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적개심을 피울 수가 없었다.
담담히 웃고 있지만, 아파 보였다.
유스넨이 이를 악무는 순간.
난데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리샤크였다.
리샤크는 황망한 얼굴로 날듯이 뛰어왔다.
“까, 깜빡 잠이 들어서…… 저,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허겁지겁 쥬웰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다가 옆의 유스넨 대공을 발견하고는 싸늘한 얼굴을 하였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아가씨께는 무슨 일이신지?”
“…….”
유스넨은 리샤크를 바라보았다.
삭월의 기사, 리샤크.
유명한 이다.
저런 이의 훼방을 받으며 그녀를 죽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물러가야겠군.’
유스넨은 그녀를 처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안도를 느꼈다.
‘일단 생각을 정리해야겠어.’
유스넨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전 침식된 마을 안을 살피겠습니다. 뒷마무리는 제가 할 테니, 영애께서는 이만 돌아가서 쉬십시오. 오늘 일은 제가 황실에 보고하겠습니다.”
“치, 침식이라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리샤크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쥬웰은 유스넨에게 말했다.
“오늘 성력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녀의 인사를 듣는데 다시 가슴이 저려와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쥬웰과 리샤크는 길가로 내려가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리샤크가 다급히 물었다.
“침식이라니? 정말입니까? 아가씨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응, 나 괜찮아. 피곤하니…… 조금 잘게.”
쥬웰은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마차에서 곯아떨어졌다.
유스넨의 성력 때문일까?
단잠을 잘 수 있었다.
* * *
“…….”
쥬웰을 태운 마차가 떠났고, 유스넨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둠의 존재이다.
당연히 처단해야 한다.
어둠을 제거하는 건, 광휘의 대공인 그에게 어떤 변수도 끼어들 수 없는 절대적 명제였다.
그런데 그는 왜 아까 손을 쓰지 못했는가?
아니.
……왜 손을 쓰지 않았는가?
손을 쓸 수 없었던 게 아니다.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유스넨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혼란스러웠다.
* * *
마차 안에서, 쿨쿨 잠에 빠진 쥬웰은 꿈을 꾸고 있었다.
악몽이 아니었다.
성력을 받은 날에 늘 그렇듯, 유스넨 꿈이었다.
‘누나…… 다쳤어요?’
‘어…… 그냥 넘어졌어.’
신전 비리 사건 때문에 분노한 군중에게 아버지 웰링턴 공작을 대신해 돌팔매를 당한 때였다.
간신히 군중을 진정시킨 후, 곧바로 유스넨에게 왔다.
사실 너무 아파 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 웰링턴 공작 때문이었다.
‘……넘어졌다고요?’
‘응, 별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마. 여기 너 좋아하는 간식들 가져왔어. 내가 바빠서…… 오늘은 조금 부실하네. 헤헤.’
‘…….’
어린 유스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돌에 맞아 한쪽 눈두덩이 붓고, 다른 한쪽 눈은 다쳐 시력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유스넨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왜…… 왜. 그렇게 늘 무리하시는 거예요?’
‘뭐?’
‘왜! 왜 항상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거냐고요!’
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왜냐고?
그야 당연히…….
‘난 성녀니까. 그런데, 너 우니? 하여튼 울보…….’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린 유스넨은 물기에 젖은 소리로 외쳤다.
‘그런 것 아니잖아요! 사실 성녀 일 하는 거 싫어하잖아요!’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자신이 성녀인 게 싫었다.
성녀라서 끔찍한 광경을 보는 것도, 위험한 장소에 끌려가는 것도, 어린 몸으로 괜찮은 척 남들보다 앞에 나서야 하는 것들도 다 싫었다.
하지만.
‘……성녀가 아니면, 난 아무런 쓸모도 없을 테니까.’
그녀는 성녀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는 것이다.
성녀가 아닌 그녀는 어떤 가치도 없다.
‘내가 성녀로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아버지도, 우아한 플랑드나 언니도, 예쁜 매리엇도, 멋진 라디트도 날 괴롭히지 않고 좋아해 줄 거야.’
물론 안다.
그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도리어 지극히 경멸한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그들의 마음도 열릴 거라고 믿었다.
그때, 어린 유스넨이 잔뜩 울음을 머금은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꼭…… 꼭. 제가 누나를 지켜 드릴 거예요.’
‘…….’
‘끄윽. 흑. 훌쩍. 정말이에요. 나중에 크면 정말 제가 누나를 지킬 거예요.’
어린 유스넨은 맹세하듯 말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누나를 행복하게 해줄게요.’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웃었다.
어린 유스넨이 귀엽다고만 생각했다.
실제로 헤어진 후 그녀는 그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치기 어린 소년의 약속을 의미 있게 기억하기에 그녀는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하지만 단 한 번.
그와의 약속이 떠오른 순간이 있었다.
모두가 배신했을 때.
그때, 유스넨이 와주길 조금은 기대했었다.
* * *
덜컹덜컹.
마차가 흔들렸다.
리샤크는 잠든 쥬웰의 얼굴을 홀린 듯 훔쳐보았다.
곤히 잠든 모습이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곱게 눈을 감고 있는 게 마치 천사와도 같았다.
‘이렇게 천사 같은 분이 있을까?’
외모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아니, 자주 무서웠지만 쥬웰은 참 착한 아가씨였다.
늘 무심한 얼굴이지만 쥬웰이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리샤크는 잘 안다.
‘……그런데 왜 아파하시는 걸까?’
리샤크는 무겁게 생각했다.
늘 그녀를 보고 있어 눈치챌 수 있었다. 쥬웰이 간혹 보이는 표정이 깊은 아픔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으음.”
그때, 그녀가 추운지 살짝 몸을 떨었다.
이제 슬슬 추울 계절이었다.
리샤크는 고민하다가 자신의 외투를 벗었다.
“편히 주무세요, 아가씨.”
그녀에게 외투를 덮어주려는 순간이었다.
쥬웰이 작게 잠꼬대를 하였다.
“거짓말쟁이…… 안 지켜줬잖아.”
“……!”
리샤크는 흠칫하였다.
그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이에게 하는 이야기.
쥬웰의 감긴 눈에서 또르르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다렸는데.”
* * *
쥬웰이 있는 마차에서 멀디먼 곳.
창공의 구름 위. 마법으로 지탱하는 부유 섬에서 한 소년이 빨개진 얼굴로 망원경을 부여잡고 있었다.
수백 킬로를 내다볼 수 있는 마법 망원경이었다.
“너, 너무 멋있잖아.”
소년은 영상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방금 쥬웰이 그렘린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 먼 곳에서 쥬웰의 움직임을 훔쳐보고 영상으로 기록까지 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소년이라면 가능했다.
소년의 정체는 마탑주 라플 공작.
300년.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온 지상 최강의 괴물이었으니까.
“……완전히 내 이상형이야……. 반했어.”
라플 공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쥬웰이 그렘린들을 학살하는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피가 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라플 공작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너무 예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와 닮았어.”
* * *
침식!
수도 근처에서 일어난 이번 사건은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침식은 제국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재앙이었으니까.
실제로 침식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마경으로 변한 지역 인근은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은 수도 옆에서 그런 끔찍한 재앙이 일어났다는 것에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충격이 큰 만큼 더 높게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쥬웰 드 가넷.
이번 침식을 해결한 성녀였다.
“쥬웰 성녀님이면 그 가넷 공작가의 성녀를 말하는 건가?”
“응, 그분이 이번 침식을 홀로 해결했다고 하더군.”
“대단해. 사람들 희생도 거의 없었다던데.”
사람들은 경탄하여 이야기하였다.
“더러운 가넷 공작가에서 그런 훌륭한 분이 나타나다니.”
“빈민가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데, 마치 에스텔레 성녀님이 재림하신 것 같다더군.”
에스텔레 성녀.
그 이름이 들리자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그녀는 제국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성녀였다.
“혹시 쥬웰 성녀님은 에스텔레 성녀님이 재림한 건 아닐까?”
“맞아. 침식을 해결하신 것도 그렇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최근 13년간, 제국에는 총 일곱 차례의 침식이 있었다.
그때마다 침식을 정화하는 데 늘 앞장선 게 에스텔레 성녀였다.
마물과 시체들 사이에서 누구보다도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섰고, 그래서 침식하면 사람들은 에스텔레를 떠올렸다.
특히 에스텔레 성녀가 고작 열네 살 때 기사 일천 명이 사망했던 최악의 침식, 게이볼그 마경을 정화해 낸 건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다.
“예끼, 아무리 그래도 에스텔레 성녀님과 비교하나?”
“그래, 에스텔레 성녀님과는 비교할 수 없지. 그분 같은 분은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거야.”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어쨌든 위대한 성녀님이 탄생하셨어.”
사람들 사이에서 쥬웰의 이름이 성녀로 완전히 각인되었다.
* * *
그 소식에 토른 공작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야기 들었다, 하하! 침식을 해결했다고? 우리 공주님이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일을 했을꼬?”
“운이 좋았어요.”
“위험하지는 않았고?”
토른 공작이 염려스럽게 바라봤다.
쥬웰은 방긋 웃었다.
‘내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분이 걱정하는 척하기는.’
뭐, 상관없었다.
그녀가 토른 공작에게 바라는 건 애정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위험하긴 했지만, 감수했어요.”
“흠?”
“가넷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토른 공작이 살짝 놀란 눈을 하였다.
“말씀드렸잖아요? 가넷가를 위해 민심을 얻어보겠다고. 그걸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위험쯤이야. 싼값이죠.”
“……!”
토른 공작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그래, 네 말은 알겠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조심하는 게 좋기는 하겠구나.”
“왜요?”
쥬웰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토른 공작은 손녀의 안위를 걱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왜긴?”
토른 공작이 한없이 기특하단 음성으로 말했다.
“그딴 사소한 이득 따위보다는 네가 더 소중하니까 그렇지.”
“……!”
소중하다.
이건 할아버지로서 손녀를 아끼는 말이 아니다.
바로 ‘가주’로서 쥬웰이 가넷가에 가치 있는 인물이라 인정한 것이다.
쥬웰의 미소가 짙어졌다.
드디어 토른 공작의 마음속에서 그녀의 가치가 격상했다.
철부지 귀여운 손녀에서.
당돌한 손녀로.
그리고 오늘 드디어 가문의 중요한 ‘보물’이 되었다.
‘그럴 만하지. 내가 그때 했던 이야기가 허황하지 않다는 걸 증명해 냈으니까.’
성녀로서 민심을 얻어 가넷가에 날개를 달아주겠다는 이야기.
이미 권력을 지닌 가넷이 민심마저 얻으면 그 파급력은 상상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쥬웰은 이번 일로 그 이야기가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는 걸 입증해 보였다.
“할아버지.”
쥬웰은 활짝 웃으며 토른 공작의 팔짱을 꼈다.
“이번 내기는 제가 이겼나요?”
“그래, 그래. 이 할아비가 졌다. 넌 내게 가넷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어.”
토른 공작이 인자하게 말했다.
“정말 기특한 일을 해냈어.”
토른 공작답지 않게 대단한 칭찬이었다.
가넷가가 다른 공작가들을 굴복시키는 건 토른 공작이 일평생 소망했던 일이니까.
쥬웰이 그 가능성을 보여준 거니, 토른 공작이 기꺼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공주님이 언제 이렇게 기특한 보물이 되었을꼬?”
“헤헤.”
쥬웰은 귀엽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때가 무르익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를 향한 토른 공작의 흐뭇함이 최고조로 이른 지금.
그녀는 이번 단막의 클라이맥스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고작 토른 공작의 총애만 얻자고 이런 고생을 한 건 아니니까.’
토른 공작의 총애는 그저 중간 과정일 뿐.
쥬웰은 더욱 큰 계획을 짜고 있었다.
원수, 로튼 백작의 날개를 하나 더 찢어낼 일이었다.
“할아버지, 내기에 이겼으니 상 주실 거죠?”
“그래, 어떤 상을 원하느냐?”
“그건 할아버지께서 정해주세요.”
“흐음?”
“할아버지가 주는 걸로 받고 싶어요.”
토른 공작이 쥬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좋은 선물을 주어야 하지 않느냐?”
“후음. 사랑하는 손녀한테 나쁜 선물 주시려고 했어요?”
“이런. 당연히 아니지. 알겠다. 내 생각해 보마.”
“고마워요. 그리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되어요?”
“말해보아라.”
“선물 주실 때 최대한 화려하게 주세요.”
“흐음?”
“바톤 영지를 안 주셔도 돼요. 무슨 선물을 주셔도 되니, 대신, 사람들도 잔뜩 부르고, 최대한 화려하고 거창한 식을 거행해 상을 주세요.”
쥬웰은 강하게 말했다.
“그저 할아버지에게 받는 선물이 아닌, 위대한 가넷의 왕이 내리는 선물을 받고 싶어요.”
“……!”
토른 공작은 잠시 쥬웰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쥬웰은 웃고 있었다.
강한 탐욕이 넘실거리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유를 알 수 없게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제국 최고의 거인 토른 공작조차 흠칫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 너는 원래 자랑하는 걸 좋아했지. 그렇게 해주마. 최대한 화려한 식을 통해 상을 내리마.”
“감사해요! 할아버지, 사랑해요. 아, 유스넨 대공도 초청해 주시면 안 되어요?”
“그 미친놈도?”
“네, 이제 제 약혼자가 될 분이잖아요.”
토른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승낙했다.
“클클, 알겠다.”
토른 공작은 아마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그날 시상식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쥬웰이 어떤 극을 꾸미고 있는지 말이다.
그렇게 이번 단막의 클라이맥스가 도래했다.
* * *
쥬웰이 상을 받기로 한 날.
가넷 공작가가 북적거렸다.
직계, 방계 혈족들은 물론 봉신들까지 한번에 몰려든 것이다.
그 외 가넷 공작가를 따르는 의회 의원들 등등.
수많은 이가 가넷 공작가로 몰려들었다.
“토른 공작 전하께서 크게 기쁘셨나 봅니다. 이렇게 크게 수여식을 열다니.”
“그럴만하지요. 가넷 공작가에서 대단한 성녀가 탄생했으니.”
토른 공작을 따르는 무수한 사람이 이번 쥬웰의 일을 떠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이었던 건 아니다.
로튼 백작.
쥬웰의 원수인 그는 한없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마음이 편치 않겠지. 토른 공작을 독살하려고 한 게 들통나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데, 내가 치고 올라오니까.’
쥬웰은 싱긋 웃으며 로튼 백작에게 다가갔다.
“백부님.”
“아, 우리 쥬웰 공주님이구나.”
로튼 백작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바쁠 텐데 시간 내서 와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공주님이 대단한 일을 해냈는데 당연히 이 백부가 와봐야지. 네가 참 기특하구나.”
“헤헤, 감사해요.”
쥬웰은 나직이 말했다.
“오늘은 참 좋은 날이 될 것 같아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로튼 백작은 알까?
그녀가 지금 로튼 백작의 발밑에 어떤 덫을 놓았는지.
‘기대되네.’
수여식이 끝나고 나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쥬웰은 곧 로튼 백작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그때, 낮은 음성이 들렸다.
“쥬웰.”
그녀는 그 익숙한 음성에 반갑지 않은 얼굴을 했다.
“아버지.”
엔리크 자작이었다.
그가 늘 그렇듯, 염려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쥬웰은 엔리크가 또 뭐라고 답답한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좋은 날이잖아요. 오늘은 그냥 지켜만 보고 있어 주세요.”
“……그래.”
하지만 엔리크 자작은 기어코 잔소리를 시전하였다.
“……다음부터…… 침식 같은 일에는 나서지 말아라.”
“전 성녀인걸요?”
“……위험하지 않으냐! 기사의 호위도 없이 혼자 침식을 정화하다니! 잘못되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 나.’
그래, 저런 걱정.
짜증 났다.
‘뭐가 저렇게 하나하나 다 걱정되는지.’
어쩔 수 없이 이전 아버지, 웰링턴 공작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에스텔레의 나이 열네 살 때.
일천의 기사가 죽은 최악의 침식, 게이볼그 마경을 정화할 때였다.
페리도트 대공가가 전멸한 상태라 침식에 대처하는 게 미흡했고, 일천에 달하는 기사가 죽는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다.
그때. 에스텔레는 일천의 토벌대에 소속되었다가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빌었다.
‘끄흑. 아버지, 저 다시 가기 싫어요. 제발, 제발. 죽고 싶지 않아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흐윽. 흑. 흑. 앞으로 말 잘 들을게요. 아무리 때려도 안 울게요. 굶겨도, 감옥에 가둬도 착하게 참을게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제발.’
눈앞에서 일천 명에 달하는 이들이 도륙당하는 장면은 고작 열네 살 어린 소녀의 정신이 감당할 만한 게 아니었다.
에스텔레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지만, 그는 매정했다.
‘차라리 가서 죽어라.’
‘……!’
진심이었다.
웰링턴 공작은 침식을 해결하지 못한 대신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게이볼그 마경 사태는 인재(人災)였다.
여러 이들의 실책으로 이토록 피해가 커졌고, 누군가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성녀인 그녀라면 희생양으로 충분하리라.
결국, 그녀는 다시 게이볼그 마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죽으러 가는 거였다.
그녀를 보내는 이들 모두가, 에스텔레 본인도 자신이 그곳에서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기적적으로 죽지는 않았지.’
그때 일이 생각나 확 짜증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조금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해결했는데 이렇게 걱정하면 오늘 일어날 일은 어떻게 보려고?’
상을 받을 때.
얼마 전 해결했던 침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참혹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판을 짜두었으니까.
엔리크 자작이 그 광경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아버지.”
쥬웰은 빙긋 웃었다.
“그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
“전 아버지의 축하를 받고 싶지 않아요.”
정확히는 이제 곧 일어날 일을 엔리크 자작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엔리크 자작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될 일이었다.
그가 아파하는 걸, 눈물 흘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어서요. 아버지가 계속 여기 있으면 제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아요.”
“…….”
엔리크 자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이나 그녀를 쏘아보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난 돌아가마. 대신……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리하지 말고 너도 빨리 돌아가 쉬어라.”
엔리크 자작은 무거운 안색으로 돌아섰다.
쥬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엔리크 자작의 안 좋은 얼굴을 보니 그녀도 썩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엔리크 자작을 위해서라도 이게 나았다.
‘나중에 일이 끝난 후 소식으로 전해 들으면 충격이 덜하겠지.’
쥬웰은 고개를 저어 감정을 떨쳤다.
이제 곧 일어날 일에 집중해야 했다.
한편,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유스넨이었다.
그는 일찍이 도착해 먼발치에서 쥬웰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유스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쥬웰이 어둠의 존재란 걸 확인했다.
그러니 당연히 처단해야 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이건만, 유스넨은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잖아. 그런데 처단하는 게 맞는 건가?’
그래, 쥬웰이 지금까지 한 일들.
놀랍게도 모두 남들을 위하는 일밖에 없었다.
토른 공작을 살리고, 빈민 진료소에서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침식에 맞서 사람들을 구하기까지 했다.
최소, 그의 앞에서는 어떤 악행도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단하는 게 정말 옳은 걸까? 단순히 어둠의 존재란 이유만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유스넨은 실소하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처단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은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답은 하나다.
무조건 처단해야 했다.
그게 그의 사명이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꺼려진단 말인가?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죽이고 싶기는커녕……
‘왜 이렇게 볼 때마다 아픈 거지?’
유스넨은 인상을 찌푸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끝없이 아릿함이 들고,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이 감정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하였다.
그녀가 어둠의 존재라는 걸 눈치채고 나서도 더더욱.
‘정신 현혹에라도 걸린 건가?’
그런 생각을 하였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런 잡스러운 사이한 현혹에 천사의 피를 각성한 그가 걸려들 리가 없었으니까.
이건, 그의 가슴이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마치 영혼이 울부짖는 듯한 느낌이라 유스넨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토른 공작이 단상에 나섰다.
스스로 일어서 걷는 모습에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쥬웰 성녀님의 성력이 정말 대단한 것 같군요.”
“저렇게 정정해지시다니.”
사람들이 술렁였고, 토른 공작이 수여식의 시작을 알렸다.
“다들 본가에 와주어서 고맙소이다. 본 가넷 공작가에 커다란 경사가 있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소이다.”
토른 공작은 흐뭇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쥬웰을 향해서였다.
“다들 들었겠지만, 본 가문에 위대한 성녀가 탄생했소이다. 특히 이번에 홀로 침식을 해결해 제국의 위기를 막은바, 본 공작은 가넷의 왕으로서 상을 내리고자 하오. 쥬웰, 이리로 올라오거라.”
쥬웰은 일어서서 단상으로 걸어갔다.
차분하면서 당당하게. 또한 기품 있게.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탄성을 토했다.
오늘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원래 쥬웰의 철부지 모습을 기억하던 이들이다.
그런데 풍기는 분위기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정말…… 완전한 성녀가 되셨구나.’
진실한 성자나 성녀에게서는 깊은 아우라가 풍긴다.
지금 쥬웰에게서 그런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홀린 듯 쥬웰의 모습을 바라봤고, 토른 공작은 진정 기쁜 듯 웃음을 흘렸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아가.”
쥬웰은 대답 대신 가만히 미소 지었다.
토른 공작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작게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창백할꼬? 혹시 몸이 안 좋으냐?”
“……괜찮아요.”
쥬웰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사실, 몸이 안 좋긴 했다.
오래되었다.
벌써 보름째.
꽤 오랫동안 안 좋은 몸을 버티고 있었다.
왜냐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조금만 더 참자.’
비릿한 핏물을 삼키며 쥬웰은 말했다.
“어서 할아버지의 상을 받고 싶어요.”
“……그래.”
토른 공작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수여식을 진행하였다.
“나 토른은 가넷의 왕으로서 쥬웰의 이번 공로를 인정하여, 바톤 영지를 내리도록 하겠다.”
“……!”
토른 공작의 말에 참석한 이들이 술렁였다.
바톤 영지.
커다란 의미가 있는 영지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쥬웰은 바톤 남작이 될 것이며, ‘소(小)가넷’으로 예우받게 될 것이다.”
소가넷!
가넷 공작의 직계 자식 중 가주 후보들을 뜻하는 말이다.
현재 소가넷은 두 명이다.
로튼 백작과 엔리크 자작.
그런데 이 순간 한 명이 추가되었다.
즉, 지금 토른 공작은 쥬웰을 일개 손녀가 아닌, 가주 후보 중 하나로 대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그만큼 토른 공작이 이번 일을 기뻐한다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러면 로튼 백작은?’
이미 차기 공작은 로튼 백작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쥬웰을 새로운 소가넷으로 임명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어쩌면 앞으로 쥬웰이 하기에 따라 로튼 백작의 후계 계승이 엎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묘해졌다.
‘설마…… 쥬웰을 키워 로튼 백작을 내치려는 건가?’
‘그럴 수도 있어. 로튼 백작은 토른 공작 전하를 독살하려고 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로튼 백작은 웃는 낯으로 빠득 이를 갈았다.
밑으로 숨긴 주먹이 파르르 떨었다.
그런 로튼을 보며 쥬웰은 조용히 웃었다.
‘피의 각인’을 통해 로튼 백작이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이 그녀의 영혼에 전달되었다.
‘부족해. 턱없이.’
쥬웰은 갈증을 느꼈다.
로튼 백작.
그리고 다른 원수들의 절망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싶었다.
그들이 고통 속에서 처절히 비명 지르는 걸 보고 싶었다.
쥬웰은 숨을 들이쉬어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제가 이곳에 모인 분들께 몇 가지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그래, 얼마든지 하려무나.”
토른 공작은 흐뭇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쥬웰은 고맙다는 듯 미소 짓고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족한 몸임에도, 커다란 상을 내리신 가주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온 사람들의 시선이 쥬웰에게 집중되었다.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
그런데 그때.
쥬웰은 말을 멈추었다.
울컥.
속 깊은 곳에서 피가 올라왔던 것이다.
지난 보름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어온 출혈 증상이다.
이런 증상이 생긴 이유는 간단했다.
보름 동안 내내 독을 먹어왔으니까.
흑마법을 통해 독의 증상이 발현되는 걸 억눌러 왔다.
“드리고…… 싶은 말이…….”
쥬웰의 음성이 떨렸다.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쥬웰은 독을 억누르는 흑마법을 해제했다.
파아앗!
지난 보름 동안 몸속에 응축해 놓았던 독이 순식간에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화끈, 몸이 안쪽에서부터 타오르며 동시에 가닥가닥 혈관이 끊어지는 느낌이 온 전신에 엄습했다.
‘아아, 익숙한 느낌이네.’
쥬웰은 나직이 생각했다.
독은 에스텔레 시절에도 숱하게 먹었었다. 독살당할 뻔한 적이 도대체 몇 번인지.
그러니 이런 느낌. 익숙했다.
“……나는…… 앞으로…… 가넷가를…… 위해…….”
쥬웰의 음성이 뚝뚝 끊겼다.
의도한 게 아니었다.
격통에 말이 자연적으로 떨린 것이다.
“영애?”
“……저, 저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토른 공작도 눈을 크게 떴다.
“쥬, 쥬웰…… 너?”
쥬웰은 덜덜 떨리는 몸으로 토른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도 지독히 아팠으니, 딱히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하, 할아버지…… 나, 나…… 모, 몸이…… 아, 아파…….”
“쥬웰!”
토른 공작이 외치는 순간.
울컥.
쥬웰이 시커멓게 죽은 피를 토했다.
조금이 아니다.
단상이 새빨개질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달아 피를 토한 쥬웰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무릎을 꿇었다.
급작스러운 출혈로 전신에 힘이 빠졌다.
“쥬웰!”
“영애!”
“뭣들 하느냐? 어서 의사를! 영애!”
비명이 퍼지고, 난리가 났다.
침착한 사람은 단 한 명. 쥬웰뿐이었다.
당연했다. 이 사태는 다 그녀가 꾸민 음모였으니까. 그녀는 여러 목적을 노리고 이번 일을 기획했다.
‘어차피 독을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 그녀가 복용한 독은 과다 출혈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극독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일부러 유스넨을 불렀으니, 치료해 주겠지. 뭐…… 치료 안 해줘도 상관없고.’
그녀는 몸에 불사(不死)의 저주를 걸었다. 아무리 피를 토해도 죽지 않는다.
물론 고통은 그대로 느껴졌지만, 육체적 고통은 그녀에게 어떤 괴로움도 주지 못한다.
‘조금 아픈 것 정도야. 이번 일로 얻을 이득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남는 장사이지.’
쥬웰은 쓰러진 채 로튼 백작과 옆의 에블린 백작 부인을 보며 진득하게 웃었다.
자, 여기서 질문.
과연 누가 이번 독살의 범인으로 지목될까?
자작극으로는 절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원래라면 절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독이니까.
더구나 가넷가에는 독살이 특기인 부부가 있었다.
바로 로튼 백작과 에블린 백작 부인.
당연히 그들이 범인으로 지목될 것이다.
쥬웰은 특히 오늘을 위해 촘촘히 덫을 깔아놨다.
‘일부러 에블린 백작 부인의 사람으로 하녀들을 다 바꿔놓았지.’
심지어 독을 먹을 때도 모두 그녀들이 내어주는 주스를 통해 마셨다.
그리고 해밀턴도 이용했다.
독을 제조할 수 있는 물질을 해밀턴을 통해 에블린 백작 부인 쪽으로 반입했다.
원래는 화장용품으로 사용하는 물품이지만, 다른 연금 물질과 배합하기에 따라 지금 쥬웰의 증상과 똑같은 증상을 내는 독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조사하면 에블린 백작 부인의 소행으로 결론이 날 것이다.
과연, 로튼 백작과 에블린 백작 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장내의 모두가 부부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우리는 아니에요! 절대로!”
그들은 하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
이미 얼마 전 로튼 백작은 토른 공작을 독살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니 모두 그들이 범인이라 생각하였다.
“오해가……! 우리는 절대로……!”
로튼 백작이 당황해 외치는 순간이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
토른 공작이었다.
그가 마치 사신이 바라보듯 매섭게 로튼 백작을 노려보았다.
“……아, 아버지.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 너는 모르는 일이겠지.”
토른 공작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내가 독으로 죽을 뻔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로튼 백작이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그, 그건……!”
“그만.”
토른 공작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지. 누가 저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인지.”
평소 토른 공작답지 않게 커다란 격노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토른 공작은 쥬웰을 통해 가넷의 새로운 미래를 보았다.
물론 아직 씨앗 같은 가능성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토른 공작의 가슴을 떨리게 하기에 부족함 없는 포부였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만약 쥬웰이 단순한 손녀였다면 토른 공작은 이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쥬웰은 가넷 공작가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러니 토른 공작이 이렇게나 분노하는 것이다.
‘계획대로네.’
쥬웰은 흐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토른 공작의 저런 반응을 바라고 일부러 성녀로서 공을 세운 후 일을 진행했다.
‘아…… 이제 자야겠다.’
로튼 백작의 덜덜 떠는 얼굴을 더 감상하고 싶은데, 의식이 흐릿해졌다.
자고 일어나면 일이 마무리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뜻밖의 음성이 들렸다.
“안 돼! 쥬웰! 안 돼!”
‘엔리크 자작?’
쥬웰은 당황했다.
그가 처절히 부르짖으며 쥬웰에게 달려왔다.
‘이런.’
미리 보내놓았건만, 부득불 찾아와 그녀가 피 흘리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안 돼! 으아아악!”
쥬웰은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아, 이럴까 봐 가 있으라고 한 건데.’
사정을 모르는 엔리크 자작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일이리라.
‘미안하네. 별것 아닌 일인데.’
쥬웰은 덜덜 떨리는 손을 엔리크 자작에게 뻗었다.
어쩔 수 없이 엔리크 자작을 달래주어야 할 것 같았다.
“……저…… 괘, 괜찮아요. 자,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예요.”
최대한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이야기해 보았지만, 그의 얼굴은 더욱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엔리크 자작의 단정한 얼굴이 온통 눈물로 뒤덮였다.
“쥬웰…… 제발. 제발…… 아아. 제발…….”
엔리크 자작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욱신.
어쩔 수 없이 쥬웰의 가슴이 아릿해졌다.
“……미…… 안해요.”
진심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이런 모습을 목격하게 해서 엔리크 자작에게 진실로 죄스러웠다.
하지만 그 사과를 들은 엔리크 자작의 얼굴은 더욱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아…… 제발. 제발…….”
엔리크 자작의 눈물이 뚝뚝 쥬웰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 뜨거운 눈물이 닿는 순간, 왜일까?
쥬웰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엔리크 자작이 진짜 아버지였으면.’
‘……조금 욕심을 내면 안 되는 걸까?’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난 추악한 악마잖아. 그러니…… 조금만 욕심을 부리면 안 될까? 그냥 모른 척 그의 사랑을 받으면 안 될까?’
달콤하기 짝이 없는 유혹.
모른 척 그의 사랑을 받고 싶다.
정신이 혼몽해서 그녀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나중에 후회할 말을 하였다.
“……사…… 랑해요, 아버지.”
엔리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쥬웰은 질끈 눈을 감았다.
‘……모르겠다. 이제…… 정말 자자.’
의식이 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따뜻한 느낌이 몸을 감싸며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힘겹게 눈을 뜨니 흐릿한 시야 속 화난 듯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유스넨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성력을 발현해 준 것이다!
‘……치료해 줄 거면 조금 빨리 오지. 왜 지금에야 온 거야? 또 늦었잖아. 느림보 강아지.’
쥬웰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의식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잠에 빠졌다기보다는 과다 출혈로 인한 혼수상태라 자상(自傷)할 걱정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악몽은 꾸었다.
길게 의식을 잃은 탓에 온갖 악몽을 꾸었는데, 그중 특별히 기억나는 건 두 가지였다.
첫째.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에스텔레.’
화려한 프릴이 달린 드레스를 입은 인형같이 예쁘고 아름다운 소녀가 에스텔레의 손을 붙들었다.
‘네가 이렇게 될지 정말로 몰랐어. 장난이었어.’
에스텔레의 나이 아홉 살 때였다.
그녀는 ‘친구’ 매리엇이 준 차를 먹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매리엇은 평소 에스텔레가 마실 차에 종종 더러운 것을 섞어 내어주었다.
이번에도 단순히 그런 장난인 줄 알았는데, 쥐약이었다.
덕분에 에스텔레는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그냥 장난이었어. 네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과연 장난이었을까?
모른다.
하지만 에스텔레는 늘 그렇듯 매리엇을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나…… 괜찮아.’
‘고마워! 역시 넌 착해! 다음에는 이런 장난은 절대 하지 않을게!’
매리엇은 신이 나서 사라졌고, 홀로 남겨진 에스텔레는 주룩 눈물을 흘렸다.
몸이 너무 아팠다. 전신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몸보다 아픈 건 마음이었다.
이렇게나 끔찍이 아픈데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와서 위로해 주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 속상해 어렸던 에스텔레는 끝없이 눈물을 훌쩍거렸다.
두 번째 기억나는 악몽은 다소 특이한 것이었다.
게이볼그 마경.
일천의 기사가 사망했던 그 끔찍한 침식 사건 악몽을 꾼 것이다.
‘왜 또 죽으러 온 거지?’
보통의 침식은 2품, 3품 악마들이 주도한다.
하지만 게이볼그 마경은 무려 1품 대악마가 강림했다.
일천의 기사를 홀로 도륙했던 대악마가 다시 죽으러 온 에스텔레를 향해 나른히 물었다.
‘다시 오면 죽이겠다고 말했을 텐데?’
당시, 에스텔레는 덜덜 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를 수행하던 호위 병력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뒤였다.
‘사, 살려…….’
‘살려달라고?’
1품 대악마.
게헨나를 지배하는 66대군주 중 한 명.
한때 낙원을 수호하는 17대천사 장 중 한 명이었다가 타락한 악마가 된 타천사 베스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는 천사였다가 악마가 된 이라, 다른 악마들과는 다소 성격이 달랐다.
‘왜 살길 바라지? 차라리 죽는 게 너에게는 구원 아닌가?’
비꼬는 게 아니었다.
진실로 궁금하단 음성이었다.
에스텔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쩌면 저 악마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삶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으니까.
‘살아 있어 봤자 앞으로도 끔찍한 불행만이 가득할 터인데. 왜 살려는 거지?’
타천사 베스윈은 왜인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창세 이래 가장 고귀하며 가련한 영혼이여. 넌 앞으로도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
쥬웰은 눈을 떴다. 전신이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무슨 꿈을 꾼 거야. 매리엇 꿈이야 원래 자주 꾸는 악몽이지만…… 웬 게이볼그 마경?’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침식 사건을 해결해서인지, 생각지도 않은 꿈을 꾸었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인데.’
덜덜 떨며 들어갔다가 타천사 베스윈을 만난 기억만 난다.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마경을 정화해 낸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상관없는 일이지.’
그때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소녀가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있는 게 보였다.
룬이었다!
“아, 아가씨?”
“……아, 룬.”
쥬웰은 미소를 지어 보이려다가 잘 안 됨을 깨달았다.
아직 몸이 만신창이였다.
바짝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물을 조금…….”
“으허헝! 아가씨, 아가씨……! 살아나셔서 다행이에요! 엉엉!”
룬은 쥬웰에게 안겨들었다.
“많이 걱정했니?”
쥬웰은 곤란한 얼굴로 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걸 말이라고! 앞으로 저 절대로 아가씨 곁에서 안 떨어질 거예요! 엉엉!”
“……아버지는? 아.”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시선을 돌리자마자 침대 옆 의자에 엔리크 자작이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룬이 조심히 말했다.
“5일 동안…… 한잠도 안 주무시다가 방금 잠드셨어요.”
“5일?”
쥬웰은 자신이 5일 만에 깨어난 것임을 깨달았다.
“네, 식사도 안 하시고, 잠도 안 주무시고 아가씨 곁에서 간호하셨어요.”
쥬웰은 그 말에 혀를 찼다.
‘그런다고 내가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어리석긴. 차라리 푹 쉬지.’
아니, 어리석은 게 아니다.
그녀도 안다.
엔리크 자작이 어떤 마음으로 그랬을지.
‘……미안하네.’
쥬웰은 피폐해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독을 먹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신체적 고통 따위 전혀 괴롭지 않으니까.
오히려 얻을 이득을 생각하면 굉장히 편리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엔리크 자작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젠장, 그냥 차라리 못된 아버지면 마음이 편할 텐데. 왜 이렇게 바보 답답이 아버지가 걸려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엔리크 자작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쥬웰과 눈이 딱 마주쳤다.
“……!”
엔리크의 붉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쥬웰?”
“……네, 아버지.”
그녀의 메마른 음성을 듣는 순간.
엔리크의 붉은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리고.
“……!”
그가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단단한 품에서 전달되는 부정에 쥬웰은 순간 울컥하였다.
‘아, 이런 거 익숙하지 않은데.’
아버지의 포옹이라니.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일이라, 도대체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뻣뻣이 굳어 있다가 어색하게 말했다.
“……아버지, 저 불편해요.”
“……!”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엔리크는 후다닥 뒤로 떨어졌다.
“미, 미안하다. 네가 아직 아픈 건 생각 못 하고…… 아니, 아니. 내가 이러는 게 불편하겠지.”
엔리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쥬웰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여기고 자리를 피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이만 가보마. 혹시라도 몸이 안 좋거든, 바로 룬에게 이야기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쥬웰은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엔리크의 손을 잡았다.
“조금 더 있어 주세요.”
“……뭐?”
“더 있어 달라고요.”
“……!”
엔리크의 눈이 커졌다.
쥬웰은 엔리크의 시선을 피했다.
“……그냥. 조금만 더…… 있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 모르겠다.’
원래대로라면 이러면 안 된다.
엔리크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따뜻한걸.’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따뜻하고 먹먹해 그의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오늘만.
딱 하루만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하루쯤 욕심내도 되잖아.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사랑 못 느껴봤는데.’
에스텔레 시절.
독을 먹고 사경을 헤맬 때도 늘 혼자였다.
그러니 이런 욕심 정도 내도 되지 않을까?
“……있어 주실 거죠?”
“……쥬웰.”
엔리크의 눈동자가 격랑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뭐라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당연히. 난 네 옆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편히 쉬어라.”
쥬웰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잠이 다시 소곤소곤 밀려왔다.
“……손잡아주세요.”
꼬옥.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고, 쥬웰은 따뜻함 속에서 잠이 들었다.
* * *
그사이, 가넷 공작가는 폭풍이 몰아닥쳤다.
일단 황태자가 와서 난동을 부렸다.
‘감히…… 내 약혼녀를 독살하려고 하다니.’
오펜하임은 칼부림이라도 부릴 것같이 분노를 토하였다.
아름다운 그가 흉악한 맹수처럼 포효를 내지르는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범인을 반드시 색출해 내도록. 안 그러면, 황실은 남은 모든 힘을 다해 가넷가를 물어뜯겠다.’
물론 그런 황태자의 협박이 가넷가에 위협이 되는 건 아니다.
어차피 황실은 쇠락했으니까.
하지만 쇠락해도 황실은 황실이다.
황실이 남은 저력을 모두 모아 가넷가와 적대하려고 하면, 무서울 건 없어도 귀찮아진다.
그리고 이 건에 관해서는 토른 공작도 황태자와 뜻을 같이했다.
‘걱정하지 말고 제게 맡기십시오, 전하.’
토른 공작은 싸늘하게 말했다.
‘감히 내가 사랑하는 손녀를 독살하려 하다니. 범인은 이번 일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덕분에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몰아쳤다.
일단 쥬웰의 하녀들이 치도곤을 당했다.
“사, 살려주세요!”
“저희는 아무것도 몰라요!”
“저희는 모두 에블린 백작 부인의 명에 따른 것에 불과해요!”
죽음이 목전에 닥치자 그들은 자신들이 모시던 에블린 백작 부인을 팔았다.
실제로 에블린 백작 부인은 하녀들에게 쥬웰을 감시하라고 명령했으니까.
또한, 해밀턴을 통해 독극물 제조에 필요한 물질을 반입한 것도 확인되어 에블린은 누명을 벗을 수가 없었다.
“아, 아니…… 나는……! 아니에요!”
에블린은 처절히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금방 조사 결과가 나왔다.
독살을 주도한 이는 에블린 백작 부인.
반면, 로튼 백작은 증거 불충분이었다.
토른 공작 때처럼 심증은 있으나, 판결을 내릴 만한 증거는 명확지 않은 것이다.
‘로튼 백작은 다른 방식으로 밑바닥에 떨어지게 할 거니까.’
쥬웰은 느긋하게 생각했다.
쿵쿵.
‘피의 각인’을 통해 로튼 백작이 지금 느끼는 공포와 충격이 전달되었다.
감미로웠다.
하지만 모자랐다. 사막에서 한 방울 물을 마신 것처럼 더욱 갈증만 생겼다.
당장에라도 원수들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최대한 공을 들여야 해.’
쥬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수당 복수의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단 한 명의 복수도 허무하게 할 수 없었다.
천천히 미식을 맛보는 것처럼 원수들이 최대한의 좌절을 느끼게 할 것이다.
‘일단 오늘 있을 일을 감상해야지.’
쥬웰은 휠체어를 타고 공작가 내 법정에 나섰다.
여섯 공작가의 일원은 치외 법권을 인정받아 범죄를 저지를 시 가주의 판결을 받는다.
토른 공작이 차갑게 피고석에 선 에블린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공작 전하! 제발! 제발! 저는 아니에요! 아닙니다!”
에블린 백작 부인이 미친 듯 울부짖었다.
이대로 판결이 나면 그녀는 사형이다.
하지만 그녀를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토른 공작의 눈빛이 더욱더 싸늘해질 때.
에블린 백작 부인이 로튼 백작 앞에 무릎 꿇고 그의 발에 매달렸다.
“여보! 제, 제발 날 살려주세요! 난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제발!”
모두가 그 모습을 주목했고, 쥬웰은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였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쥬웰은 바로 이 장면을 보려고 일부러 로튼 백작을 증거 불충분으로 만들었다.
로튼 백작이 더욱 추악하게 추락하길 바라니까.
‘어떤 선택을 할까?’
로튼 백작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 부인을 옹호하는 것.
하지만 에블린이 개입한 증거가 명확해 이 경우 그도 토른 공작의 분노를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다.
둘째. 부인을 버리고 외면하는 것.
그러면 로튼 백작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당연한 일이지만 로튼 백작은 일평생 함께해 온 아내를 외면했다.
쥬웰이 예상한 대로였다.
“닥쳐라, 이 악녀.”
“……!”
“감히 어디라고 그 더러운 손을!”
로튼 백작가 발로 아내를 차버렸다.
에블린 백작 부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졌고, 로튼 백작은 토른 공작 앞에 무릎 꿇었다.
“가주님! 이번 사건은 모두 저 악녀가 혼자서 저지른 짓입니다! 저는 모르는 일이니, 저 악녀를 처벌하십시오!”
법정이 싸늘해졌다.
로튼 백작은 과연 알까?
지금 자신의 행동이 토른 공작에게 어떻게 보일지.
‘어리석긴. 차라리 아내를 감싸 함께 분노를 사는 게 낫지. 저런 추한 모습을 보이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토른 공작이지만, 한 가지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
바로 가넷 공작가.
그리고 지금 로튼 백작은 아내를 버림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위해 가넷 공작가도 버릴 수 있다는 걸 보인 것이다.
“그만.”
“아, 아버님!”
“닥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
로튼 백작의 얼굴이 하얘졌다.
토른 공작이 한없이 차가운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경멸하는 눈빛이었다.
털썩.
로튼 백작은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로튼 백작은 깨달았다. 더는 토른 공작의 총애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로튼 백작에게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로튼 백작에게 실망한 이는 토른 공작만이 아니었다. 법정에 있는 모든 방계 혈족, 봉신들도 로튼 백작의 이기적인 모습에 실망감을 표했다.
오늘 보여준 추한 모습으로 앞으로 로튼 백작의 입지는 대폭 줄어들게 될 것이다.
토른 공작은 그런 로튼 백작의 못난 모습을 일별하고는 차갑게 말했다.
“지금 판결을 내리겠다. 주모자인 에블린은 화형. 독살을 시도한 하녀들은 모두 교수형이다. 형은 내일 바로 집행하도록.”
“……!”
“마지막으로 이들을 변호할 이가 있느냐?”
뒷말은 로튼 백작을 향한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것이다.
여기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토른 공작의 실망이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로튼 백작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로튼, 정말 할 말 없느냐?”
“어, 없습니다. 저는 이번 일에 아는 바가 없습니다.”
끝까지 본인의 안위만 챙기는 모습에 토른 공작은 혀를 찼다.
헤아릴 수 없는 실망감이 차올랐다.
“……그래, 판결을 내리도록 하겠다.”
그때, 뜻밖의 음성이 법정을 갈랐다.
“백모의 벌을 감해주면 안 될까요?”
“……!”
모두 깜짝 놀라 음성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울 정도의 하얗디하얀 안색.
이번 독살 사건의 가련한 희생자, 쥬웰이었다!
토른 공작이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벌을 감하다니? 에블린은 널 죽이려 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백모가 사형당하는 건 피했으면 좋겠어요.”
쥬웰은 마치 성녀처럼 가련한 음성으로 말했다.
법정에 모인 이들이 감탄의 얼굴을 하였다.
아까 로튼 백작의 모습과 너무 대조되었다.
심지어 쥬웰은 피해자다. 그런데 저런 자비라니?
하지만 모두가 감탄한 건 아니다.
특히 토른 공작.
“이유가 뭐지?”
그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가 아는 손녀, 쥬웰은 절대로 착한 이가 아니다.
분명 어떤 의도가 있어서 지금 이러는 것일 것이다.
정확했다.
쥬웰은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선처를 빈 것이다.
“가넷가를 위해서예요.”
“가넷가를 위해서?”
“네.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지만, 지금껏 가넷가를 위해 일한 분을 단번에 사형시키면 가문이 동요할 거예요.”
“……그것만으로는 사형을 피할 이유로 불충분하다.”
“그리고 백모는 아직 가넷가를 위해 필요한 존재예요.”
“어떤 면에서?”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앞으로는 제가 가넷의 안살림을 챙겨야 할 텐데. 아직 저는 미숙한 바가 많거든요. 가끔 백모의 조언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
모두가 흠칫하였다.
쥬웰은 지금 당당히 가넷의 안주인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건…… 누가 너에게 가넷의 안주인 역을 맡긴다고 했느냐?”
토른 공작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가넷의 안주인.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자리였다.
가주인 토른 공작, 후계자 로튼 백작의 뒤를 이어 가넷 공작가의 세 번째 실권자가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만 허락하면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쥬웰은 싱긋 웃으며 로튼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나요, 백부?”
“……!”
로튼 백작은 주먹을 우두둑 움켜쥐었다.
지금, 쥬웰은 그에게 협박하는 것이다.
에블린 백작 부인의 목숨을 붙여주는 대신, 자신이 가넷의 안주인이 되는 데 동의하라고.
‘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나를.’
로튼 백작은 이 모든 일이 쥬웰의 음모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극히 교묘해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이었다.
‘친모를 독살한 복수를 이렇게 하는 건가?’
로튼 백작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는 자신이 쥬웰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했다.
언제고 밟아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방심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손발이 다 뜯기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쥬웰을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지금 그는 추레한 패자일 뿐이었다.
로튼 백작은 비참히 쥬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그래. 쥬웰, 너라면 가넷의 안주인 역할을 충분히 잘해낼 것으로 생각한다.”
토른 공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가주인 그가 반대하면 쥬웰은 가넷의 안주인이 되지 못한다.
물론, 토른 공작은 별로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토른 공작은 지그시 쥬웰을 바라보았다.
‘감탄스럽구나. 어떻게 이렇게 대단하단 말인가?’
토른 공작은 로튼 백작과 쥬웰을 비교해 보았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내를 버린 로튼.
그런 에블린을 위해 나선 쥬웰.
물론 쥬웰은 순수한 선의로 나선 건 아니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나선 거였다.
하지만 토른 공작은 그게 더 기꺼웠다.
그는 착한 바보를 싫어했다.
이득을 챙길 줄 알면서 가문을 위하는 이를 최고로 여겼다.
하지만 엔리크와 로튼 둘 다 그런 이가 아니었다.
엔리크는 유능하지만 답답한 선인.
반면 로튼은 이기적인 악인.
둘 중에는 그나마 로튼이 낫기에 그를 후계로 세운 것이지만…….
‘……저 모습이야말로 내가 가장 바라던 모습 아닌가?’
지금 쥬웰은 에블린에게 자비를 베풂으로써 가문의 동요를 막고, 동시에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얻어냈다.
그뿐인가?
오늘 보인 자비로 수많은 이가 쥬웰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가주의 가장 필수적 덕목, 인망을 얻게 된 것이다.
‘정말 대단해. 대단해.’
토른 공작은 거듭 감탄하였다.
최근 쥬웰이 보이는 모습 중 감탄스럽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백모님에 관한 판결은…… 감옥에서 종신형 정도가 어떨까 싶어요. 가주님의 고견은 어떠신지요?”
“피해자인 네가 그렇게 선처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마.”
토른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최종 판결을 내리겠다. 에블린을 종신형에 처한다. 또한 모든 작위를 몰수하며 노예 신분으로 강등하겠다.”
토른 공작은 말을 이었다.
“쥬웰, 너에게는 에블린이 담당하던 일을 맡기겠으니 에블린, 너는 쥬웰이 찾아오면 이전의 인연을 잊고 윗사람을 섬기듯 공손히 대하도록.”
그렇게 공작가에 커다란 파란이 일었다.
에블린은 감옥에 갇혔고, 로튼 백작의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다.
반면, 쥬웰은 새롭게 떠오르는 공작가의 실세가 되었다.
‘모두 계획대로.’
쥬웰은 나직이 미소를 지었다.
쥬웰은 눈을 감아 ‘피의 각인’을 통해 영혼에 전달되는 비명을 들었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로튼 백작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로튼 백작이 느끼는 좌절이 하나, 하나 전달되었다.
하지만 로튼 백작은 알까?
아직 제대로 된 좌절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걸.
‘기다리라고.’
쥬웰은 혀를 핥았다.
점점 더 갈증이 심해졌다.
* * *
‘이걸로 만족할 수는 없지.’
쥬웰은 곧바로 다음 계획을 떠올렸다.
‘다음은 내 소중한 친구 매리엇 차례네.’
매리엇.
그녀가 일평생 노력했던 소중한 친구.
하지만 결국, 끔찍한 배신을 한 친구.
다음엔 로튼 백작과 그 매리엇을 한 번에 칠 생각이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있었다.
‘……그 전에 몸이 나아야겠지만.’
아직 몸을 더 회복해야 했다.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5일 정도 더 지난 후 쥬웰은 몸을 거의 회복하였다.
생각보다 빠른 회복이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유스넨 덕분이었다.
그가 하루에 몇 차례씩 들러 성력을 퍼부어주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쥬웰은 묘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는 반대였는데.’
과거 13년 전.
저 커다란 은발 대공이 조그만 강아지였을 때.
그녀가 이렇게 매일매일 성력을 쏟아부어 주었다.
그런데 그 귀엽던 강아지가 이렇게 커서 자신을 치료해 주고 있으니 참 감회가 새로웠다.
“별말씀을. 당신은 제 약혼녀 아닙니까?”
“……약혼은 아직 이야기만 오간 것으로 아는데요.”
“그러면 저와 약혼하지 않을 겁니까?”
“……아니요.”
“그러면 서로 동의한 거니, 약혼 관계가 맞지요.”
쥬웰은 애매한 얼굴을 했다.
‘아직 황태자랑 파혼 못 했는데.’
졸지에 약혼자가 두 명인 여자가 되어버렸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유스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빨리 낫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감사해요.”
쥬웰은 침대에 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라면 금세 돌아갔을 유스넨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산책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산책이요?”
“네, 너무 오랫동안 누워만 있는 것도 회복에 안 좋으니까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으면, 재깍재깍 돌아다니는 게 회복에 좋습니다.”
유스넨은 옅게 웃었다.
“제가 가장 은애하는 분이 해주신 말씀이죠.”
쥬웰은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 말.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으려는 어린 유스넨에게 한 말이었다.
‘그나저나 은애라니. 이게 무슨 뜻이야?’
은애(恩愛).
다양한 뜻의 말이었다.
부부, 연인 간의 이성적 사랑을 뜻하기도, 아니면 조금 더 넓은 의미의 은혜와 사랑을 뜻하기도 하는 단어였다.
‘후자겠지.’
쥬웰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녀는 그를 치료해 준 은혜가 있으니 맥락상 후자의 뜻이 더 맞았다.
오랜만에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몸이 휘청하였다. 아직 완전히 몸이 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잡으십시오.”
유스넨이 손을 내밀었다.
쥬웰은 고민하다가 그 손을 잡았다.
어차피 약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으니 이 정도쯤은 괜찮을 것이다.
“그날 엔리크 자작께서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아, 네. 아무래도요.”
“칼을 들고 로튼 백작의 목을 베려고 했으니까요.”
“……네?”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엔리크 자작이…… 뭐라고?
몰랐던 이야기다.
“엔리크 자작이 워낙 뛰어난 실력의 기사라 아차 하면 로튼 백작의 목이 떨어질 뻔했습니다.”
“……그렇군요.”
쥬웰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마터면 원수를 허무하게 잃을 뻔했다.
‘로튼 백작에게 호위 마수라도 붙여야 하나?’
그때, 유스넨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왜 그랬습니까?”
“네?”
“왜 스스로 독을 먹었냐는 말입니다.”
“……!”
쥬웰이 눈이 커졌다.
유스넨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하지만 쥬웰의 등줄기가 쭈뼛 오싹해졌다.
‘……알고 있어?’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영애.”
유스넨이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누구인지 잊으셨나 보군요. 제게 거짓말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광휘’의 대공의 또 다른 이명은 바로 ‘심판’의 대공.
그들은 천사의 권능을 사용해 거짓말을 꿰뚫어 본다. 물론 모든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악한 의도의 거짓말일 경우 심판의 대공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페리도트 대공은 늘 제국 대법관의 직위를 맡는다.
‘내게는 그 능력이 통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유스넨과 그녀의 격은 그녀가 우위였다.
그러니 유스넨의 능력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제길, 로튼 백작, 에블린 백작 부인의 말을 꿰뚫어 보았구나. 그들이 진범이 아님을 눈치챈 거야.’
쥬웰은 혀를 찼다.
하지만 곧 평정을 찾았다.
“가넷가의 일에 끼어드실 건가요?”
“천만에요.”
유스넨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여섯 공작가는 치외 법권. 제가 대법관이라도 끼어들 권한은 없죠. 솔직히 가넷가 내부의 쟁투는 관심 없습니다.”
유스넨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들 백작 부부는 평소에 제가 경멸하는 이들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왜 묻는 거죠?”
“궁금해서요.”
유스넨의 감람색 보석안이 쥬웰의 눈을 향했다.
“제 약혼녀께서 어떤 절박한 이유로 스스로 독을 먹었나 하는.”
“…….”
쥬웰은 고민하였다.
‘일단 내 진면목을 꿰뚫어 본 건 아니야.’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지금 얌전히 있기에.
천사의 피를 이은 페리도트 대공가의 인물들은 어둠의 존재를 발견한 즉시 척살하게 되어 있다.
이건 그들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의무이자, 제약이라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쥬웰은 자신의 정체를 유스넨에게 귀띔도 할 생각을 못 했다.
그녀가 어둠의 존재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유스넨은 반드시 그녀를 죽여야 하니까.
이건 그의 개인감정과 상관없이 영혼에 새겨진 강제적인 의무라 선택 여지가 없었다.
‘내 정체를 들키지 않은 거면 긴장할 필요 없어.’
쥬웰은 곧 생각을 정리했다.
진실과 거짓을 섞어 이야기하기로 한 것이다.
“복수를 위해서예요.”
“복수…… 말입니까?”
“네, 제 개인적인 일이니 더는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이렇게만 말해도 적당히 알아들을 것이다.
다행히 ‘쥬웰’은 로튼 백작과 에블린 백작 부인에게 원한이 있었다.
친모가 둘에게 독살당했으니까.
충분히 이번 일을 저지를 만했다.
“……그렇군요.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말씀하세요.”
“복수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까?”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답은 ‘그렇다’였다.
원수를 나락에 떨어뜨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끔찍한 일이라도 저지를 것이다.
하지만,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지.’
“아니요. 괜한 희생은 없도록 할 거예요. 비록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지만 전 성녀. 남들을 위하는 마음은 잊지 않고 있어요.”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남들을 위하는 마음 따위 없다.
성녀의 위장도 모두 복수를 위한 것일 뿐이다.
“…….”
유스넨은 말없이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담담히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았다.
이윽고 유스넨이 말했다.
“방금 말씀, 믿겠습니다.”
“…….”
“하지만 이번 같은 일은 삼가주십시오.”
“……어째서죠?”
“당신은 제 약혼녀니까요.”
그렇게 말한 유스넨은 잠시 침묵하였다.
쥬웰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한숨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아프지 않길 바랍니다.”
* * *
다그닥.
페리도트 가문의 마차가 가넷 공작가를 빠져나갔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전하?”
함께 탄 메디안 백작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또 쥬웰 영애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
맞다.
지금 그는 그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메디안 백작이 무뚝뚝한 얼굴로 뚱하게 물었다.
“그거 아십니까? 최근, 전하 평소 같지 않습니다. 정말 반하기라도 한 겁니까?”
“……아닙니다.”
유스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아프지 않길 바랍니다.’
자신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한 걸까?
굳이 할 필요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와서 그녀를 치료할 필요도 없지.’
지금 이렇게 찾아와 치료해 주는 것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어둠의 존재인데.
처단하지는 못할망정, 직접 와서 치료라니.
누가 알면 그에게 돌을 던져도 할 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저…… 정말로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가 있었다.
‘그때. 독 때문에 피를 토할 때.’
당시 유스넨은 쥬웰 근처에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그래서 바로 옆에서 보게 되었다.
엔리크 자작이 울부짖을 때 그녀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눈빛을 보였는지.
‘사…… 랑해요, 아버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아프고 슬퍼 보여, 유스넨은 참지 못하고 나서서 그녀를 치료해 주었다.
그때부터 유스넨은 명확히 자신의 감정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녀의 아픈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어둠의 존재인지, 아닌지 아직도 판별하지 못한 겁니까?”
유스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거짓말을 하였다.
“네, 아직 모르겠습니다.”
“거참, 이상하군요. 이렇게나 오래 보았는데 아직 모르시다니. 뭔가 기가 허하신 것 아닙니까?”
메디안 백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명심하십시오. 어둠의 존재에게 마음을 뺏기면, 광휘는 빛을 잃습니다.”
빛을 잃는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페리도트 대공가의 일원이라면 가장 섬뜩하게 유의해야 할 말이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유스넨은 무겁게 답했다. 그러다가 물었다.
“백작, 하나만 묻겠습니다. 어둠의 존재가 선할 수 있을까요?”
메디안 백작은 해괴한 농담을 들은 표정을 지었다.
“절대로. 어둠의 존재는 악하기에 어둠인 겁니다.”
“그렇지요?”
“당연한 이야기를 왜?”
“아닙니다.”
유스넨은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는 그녀는 악하지 않다.
심지어 이번 독살 사건 때도 희생자가 최소화되도록 하였다.
그녀는 에블린 백작 부인의 선처만 부탁한 게 아니었다.
연루된 하녀들도 선처해 피가 흐르는 걸 막았다.
그가 아는 그녀는 선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그녀를 어둠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꼭 처단해야 하는 건가?’
유스넨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실소했다.
또, 그녀를 처단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 * *
사건 이후, 완전히 회복한 쥬웰은 가넷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어려울 것 없었다.
쥬웰은 먼저 별채에서 나와 저택의 본관으로 이사했다.
거기다 에블린 백작 부인이 쓰던 가장 커다랗고 화려한 방을 보란 듯이 차지했다.
그리고 에블린 백작 부인을 따르던 측근들을 모조리 내쫓았다.
그러고는 이전부터 눈여겨봐 오던 고용인들을 중심으로 저택을 개편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잡음이 없던 건 아니었다.
쥬웰은 워낙 어렸으니까.
이제 갓 성인식을 치를 열일곱 살이었으니, 나이 많은 고용인들 중심으로 무시하는 시선도 있었다.
특히 총괄 부집사 세바트찬이 노골적인 반감을 표했다.
총괄 집사가 저택의 관리보다는 외부의 여러 대소사를 챙기는 역할이라면, 총괄 부집사는 저택을 관리하는 이다.
부집사 세바트찬은 작위가 몰수된 몰락 귀족 출신의 중년 남성으로 에블린 백작 부인 파는 아니었다.
그저 고지식하게 저택을 관리하는 이였다.
그래서 일부러 내치지 않고 놔두었는데, 쥬웰을 무시하려 들었다.
‘새파랗게 어린 내가 안주인 역할을 맡는 게 마냥 달갑지는 않겠지.’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가만히 두고 보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부집사.”
“……네, 아가씨.”
“이건 내가 분명 아까 했던 이야기 같은데 말이야.”
부집사 세바트찬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쥬웰의 붉은 눈동자가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심하게.
하지만 왜일까? 차분한 눈빛이건만 어떤 매서운 눈빛보다 더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토른 공작 전하를 뵙는 것처럼
‘무슨……?’
부집사는 움켜쥔 손바닥이 긴장에 촉촉하게 젖음을 느꼈다.
그는 그녀를 잘못 판단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린 내가 가문의 안살림을 맡는다는 게 불만스러운 것 같군. 그렇지?”
“아, 아닙니다.”
“아니야?”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따위의 일 처리라니?”
“공작 전하의 권한을 위임받은 내가 우스운 건가?”
“……!”
세바트찬의 얼굴이 하얘졌다.
쥬웰은 지금 토른 공작의 허락하에 안주인 역할을 맡았다. 그런 쥬웰을 무시하는 것은 가주의 권한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세바트찬은 허겁지겁 쥬웰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
쥬웰은 대답 대신 가만히 세바트찬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이나.
마치 벌을 내리듯.
쿵쾅.
무릎 꿇은 세바트찬의 심장이 뛰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쥬웰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난 지금껏 묵묵히 저택을 관리해 온 그대의 공을 인정해 가급적 앞으로도 계속 그대를 신뢰하고 싶어. 그런데…… 고작 이런 모습이면 내가 그대를 계속 옆에 두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
부드러운 목소리다.
하지만 부집사는 마치 포식자를 마주한 초식동물처럼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어린 윗전을 무시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바싹 두려움이 차올랐다.
쥬웰은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말했다.
“선택해. 앞으로 내게 너의 가치를 입증해 보일지, 아니면 이대로 가넷가를 나갈지. 네가 내게 가치를 입증한다면 그에 맞는 보상을 해주겠지만, 굳이 강요하지 않겠어. 원하는 대로 해.”
진심이었다.
어차피 대체할 이는 널리고 널렸다.
불손한 이를 구태여 데리고 있을 이유가 있을까?
“……보상이면 무얼 말하는 겁니까?”
부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돈과 권력.”
쥬웰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녀는 주는 것 없이 충성만을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를 위해 능력을 바치는 이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릴 것이다.
“그대의 헌신에 따라 보상은 달라질 거야. 그대가…… 날 아주 흡족하게 한다면, 어쩌면 훗날 가문의 작위를 복원해 줄지도 모르지.”
“……!”
부집사의 눈이 흔들렸다.
작위.
가넷 공작가에서 작위를 내릴 수 있는 존재는 하나였다.
가주.
지금 쥬웰은 공공연히 공작위를 노리고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금 선택해.”
부집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결정했다.
쥬웰의 발아래 납작 고개를 숙였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렇게 세바트찬의 충성을 받아내고 난 다음에는 일사천리였다.
그 어떤 불손한 시선도 사라졌다.
밑 사람들을 장악하고 난 다음에는 안주인으로서의 업무를 순식간에 처리하였다.
에스텔레 때 익혔던 어마어마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전혀 어려울 게 없었다.
‘난 단순한 성녀가 아니었으니까. 환자만 치료했던 게 아니라고.’
성녀는 존경의 존칭이고, 그녀의 신전 내 공식 직위는 따로 있었다.
에스텔레 당시, 그녀의 공식 직위는 추기경이었다.
법왕(法王)의 뒤를 잇는 신전의 최고위직.
원래 에메랄드 공작가의 인물들은 신전 내 고위직을 독점한다. 총주교 이상급은 모조리 에메랄드 공작가나 봉신가 인물들의 몫이었다.
비록 핍박받았지만, 에스텔레도 에메랄드 공작가의 일원. 특히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성녀였다.
그러니 추기경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물론, 웰링턴 공작의 견제로 권한은 거의 없는 빛 좋은 개살구였지만 신전의 최고위직으로서 여러 서류 업무에도 통달해 있었다.
그때 하던 일들에 비하면 고작 가문의 안살림을 챙기는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다만, 뜻밖에 그녀를 귀찮게 하는 이들이 있었다.
무려 세 명이나.
엔리크.
유스넨.
황태자.
그들이 자꾸 그녀를 성가시게 했다.
첫째로 엔리크.
“너무 무리하는 것은 아니냐?”
“……괜찮아요.”
틈만 나면 그녀를 찾아왔다.
“점심을 걸렀다고 들었는데, 여기 먹을 것을 가져왔다. 네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와 스트로베리 주스, 그리고 베리베리 샌드위치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쥬웰은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지난번 유혹에 못 이겨 그의 손을 붙들었지만 또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용하는 관계.
그와의 관계는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그런 마음으로 최대한 싸늘하게 말했지만, 이제 엔리크 자작의 애정도 더욱 강력해졌다.
쥬웰이 매정하게 이야기해도 전혀 상처받지 않고는 오히려 안쓰러운 표정만 지어 보였다.
마치 ‘네 마음 다 알고 있다’라는 표정이었다.
‘제길, 내가 그때 왜 그래서.’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쥬웰이 그의 손을 잡은 이후, 엔리크 자작은 그녀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답답이가 완전체가 되었어.’
쥬웰은 떨떠름한 마음으로 엔리크 자작이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먹거리를 챙겨도 또 얼마나 정성스럽게 챙겨 오는지, 엔리크 자작이 가져다주는 음식은 하나같이 훌륭하고 맛있기 그지없었다.
‘이 샌드위치, 케이크는 가넷 공작가 밖에서 사 온 거잖아. 유명 디저트 집에서 사 온 것 같은데.’
“설마 직접 다녀온 건가요?”
엔리크 자작이 시선을 피했다.
“……아니다. 다른 사람을 시켰다.”
대답이 한 호흡 느렸다.
누가 봐도 거짓말하는 모습이었다.
‘……얼음 귀공자처럼 차갑게 생겨서는 귀여운 모습 보이지 말라고.’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흑발 적안의 냉미남이 디저트집에서 샌드위치와 케이크를 포장해 가지고 오는 모습을 상상하니…….
음.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들었다.
‘엔리크 자작의 천직은 내조일지도.’
실없이 그렇게 생각할 때, 엔리크 자작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사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뭔데요?”
“출사하기로 했다.”
쥬웰은 물끄러미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출사(出仕).
중앙 관직에 나간다는 말이다.
“내무 장관이 되기로 했다. 가주님께 이미 재가를 받았어.”
내무부.
국내의 안전, 치안, 형사, 첩보 등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원래 황실에서 임명하는 직위이지만, 현재 제국의 모든 권력은 가넷가가 쥐고 있으니 토른 공작의 임명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
“네게 도움이 되겠어.”
엔리크 자작은 짓씹듯 말했다.
“다시는…… 네가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하겠다.”
그의 붉은 보석안이 핏빛처럼 물들었다.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엔리크가 내무 장관이 되기로 한 이유는 자명했다.
로튼 백작을 노린 것이다.
로튼 백작은 제국의 재상으로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니 치안, 형사, 첩보 등을 담당하는 내무 장관의 힘으로 그를 몰락시키려고 이런 선택을 한 게 분명했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군.’
쥬웰이 애초에 엔리크 자작에게 바란 게 이런 것이다.
그녀를 돕는 체스 말이 되는 것.
분명히 바라는 대로 되었지만, 신체에 각인된 감정 때문일까?
아니면 그날 잡았던 손의 따뜻함 때문일까?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감정을 떨쳐내고는 말했다.
“내무 장관이 되면 하셔야 할 일이 있어요.”
“무엇이냐?”
“흑마도사들의 동태를 살펴주세요.”
엔리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거야 내무부의 수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왜 따로 부탁하는 거냐?”
‘타란툴라를 잡아야 하니까.’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왕 타란툴라.
그날 인신 공양을 주도한 최고의 흑마도사다.
그를 잡아야 그날 일의 완전한 전모를 알아낼 수 있다.
문제는 흑마도사들은 철저히 정체를 숨겨 행적을 알아내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내무부의 정보력을 이용하면 한결 일이 쉬워지리라.
그리고 흑마도사들의 동태를 살피는 건 비단 타란툴라 때문만은 아니었다.
“흑마도사들은 권력의 개니까요.”
“……!”
“흑마도사들의 뒤를 쫓으면 자연히 백부의 치부도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무수한 세월 동안 흑마도사들은 권력자의 더러운 손발이 되어왔다.
로튼 백작은 제국의 재상으로 온갖 더러운 일을 해왔으니, 흑마도사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게 뻔했다.
“그래, 명심하마. 그런데 쥬웰.”
“네?”
“꼭 조심하여라.”
엔리크 자작이 간절한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또 지난번 같은 일이 생길까 두려운 것 같았다.
쥬웰은 실소하였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누누이 말하지만 그녀의 안위를 위협할 이는 제국에서 네 명의 초월자뿐이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말했다.
“네, 조심할게요.”
이후 엔리크 자작이 물러갔고, 또 다른 2인이 그녀를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명의 약혼자, 유스넨과 황태자였다.
“페리도트 대공께서 만남을 청하셨습니다.”
“바쁘다고 해.”
“황태자 전하께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적당히 대신 답장해 줘.”
마치 자신이 진짜 약혼자라고 주장하고 싶은 걸까?
둘 다 끈질기게 연락을 해왔다.
‘뭐, 이유야 이해가 되지만.’
황태자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얼마 전 독살 사건까지 겪었으니 염려하는 마음에 연락하는 것이다.
유스넨…… 은 모르겠다.
왜 보자고 하는 건지.
‘……굳이 지금 흰 강아지를 볼 필요는 없으니까.’
흰 강아지, 유스넨.
지금 모습은 사실 흰 강아지라기보다는 은빛 맹수에 가까웠지만, 원체 옛날 인상이 강해 자꾸 강아지가 연상되었다.
어쨌든 이번에 그녀가 기획하는 단막에 유스넨의 역할은 없었다.
도리어 그가 끼면 방해만 된다.
그것도 커다란 방해가.
‘이번엔 피를 봐야 하는데. 옆에서 걸리적거리게 하면 안 되지.’
쥬웰은 섬뜩한 생각을 하였다.
피.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뜻이다. 그것도 직접. 심지어 한두 명의 피가 아니었다.
‘큰 피를 흘려야 해. 그러니 당분간 유스넨과는 거리를 두는 게 좋아.’
피를 흘리는 장면을 유스넨이 보면 굉장히 곤란해진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를 가십니까, 아가씨?”
리샤크였다.
독살 사건 이후, 리샤크는 다소 어두운 안색이었다.
자신이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것 같았다.
‘얘도 문제인데.’
쥬웰은 팔짱을 꼈다.
리샤크는 항상 그녀를 쫓아다닌다. 독살 사건 이후에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피를 흘릴 장소에 데리고 갈 수는 없는데. 정신 조작을 하려고 해도 쓸데없이 정신력이 강해서 쉽지가 않고.’
고민 끝에 쥬웰은 불쑥 말했다.
“리샤크, 너는 날 좋아하니?”
“……네?”
“나 좋아하냐고.”
난데없는 물음에 리샤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무, 무슨…… 장난은 하지 말아주십…….”
하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쥬웰의 붉은 눈동자가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리샤크가 떠듬떠듬 말했다.
“……다, 당연히 싫어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제가 섬기는 분이니까요.”
“그래서 좋아해?”
“……싫어하냐, 좋아하느냐 물으면 좋아하는 쪽…….”
쥬웰은 물끄러미 리샤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하며.
핏물처럼 붉은 입술을 움직이며 속삭였다.
“그래서 좋아해?”
“…….”
리샤크의 얼굴이 빨갛다 못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사슴 같은 눈동자가 울 것처럼 달아올랐다.
쥬웰은 쿡쿡 웃고는 리샤크의 어깨를 툭 쳤다.
“그냥 장난으로 물어본 거야. 신경 쓰지 마.”
“……네.”
당연하지만 그냥 장난은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남의 진심을 우롱할 필요는 없으니까.
방금, 그녀는 리샤크의 마음을 흔들어 모종의 세뇌를 걸었다.
‘상대에게 강한 호감을 품을 때 정신 방벽은 일시적으로 낮아지니까.’
지난번 침식 때, 리샤크가 강력한 정신 방어를 보여 낸 고육지책이었다.
이제 앞으로 리샤크는 쥬웰의 정신 조작에 크게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내 방에서 ‘그거’ 가져와.”
“아, 네.”
리샤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쥬웰의 방에 다녀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새장이 들려 있었다.
“이 새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카나리아처럼 생긴 새였다.
그런데 깃털이 검고 어두웠다.
물론 음침해 보이는 건 아니었다.
밤하늘을 머금은 듯한 깊은 어둠을 간직한 깃털이었다. 밤의 요정이라고 불리는 쥬웰의 머리카락처럼.
고고하고 매혹적인 느낌이 흘렀다.
“지옥의 마물?”
“네, 네?”
“농담이야. 멀리 이방에서 온 상인에게 구한 길조야.”
쥬웰은 손가락으로 새의 부리를 톡 건드렸다.
“할아버지께 선물로 드리려고. 적적하신 것 같아서.”
* * *
“할아버지!”
쥬웰은 늘 그렇듯 사랑스럽게 토른 공작에게 뛰어갔다.
토른 공작은 쥬웰을 크게 반가워했다.
“우리 귀염둥이 요정 공주님 오셨구나.”
“할아버지 보고 싶어 왔어요.”
“흐음? 할아비한테 뭐 뜯어내려고 온 것 아니고?”
“아니거든요? 진짜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온 것이거든요?”
쥬웰은 일부러 뽀로통한 얼굴을 했고, 토른 공작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할아비가 복도 많지. 이렇게 사랑스럽고 잘난 손녀도 두고 말이야.”
“저도 좋은 할아버지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좋은?”
“아니, 능력 있는 할아버지라고 할게요.”
토른 공작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이란 표현은 그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우리 귀여운 손녀가 능력 있는 할아비에게 무슨 일로 왔을꼬?”
용건을 말하라는 뜻이었다.
쥬웰도 귀여운 손녀의 모습은 그만두고 본론을 꺼냈다.
“남부의 바셋 지역에 다녀오려고 해요. 허락해 주세요.”
“……뭐?”
토른 공작은 흠칫하였다.
“바…… 셋? 내가 제대로 들은 거냐?”
“네, 맞아요.”
쥬웰은 싱긋 웃었다.
“흑사병이 창궐하는 바셋 지역에 가려고 해요. 성녀로서 이름을 떨치려고요.”
“……!”
흑사병!
이번 단막의 배경이었다.
쥬웰은 흑사병을 해결하며 로튼 백작과 매리엇의 날개를 뜯을 예정이었다.
흑사병과 둘이 무슨 관계냐고?
‘상관이 있지. 아주.’
쥬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흑사병은 로튼 백작과 매리엇, 둘이 일으킨 거니까.’
놀라운 이야기였다.
흑사병을 둘이 일으켰다니?
‘바셋 지방의 흑사병은 자연 발생한 게 아니야. 흑마도사가 일으킨 거야.’
흑사병은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쥐로 인해 전파되는 자연적인 것.
둘째는, 흑마도사가 창궐시키는 것.
지금 바셋 지역에 창궐하는 흑사병은 후자였다.
로튼 백작과 매리엇이 손을 잡고 흑마도사들을 사주해 흑사병을 창궐시킨 것이다.
왜 그런 짓을 했냐고?
전염병은 돈이 되니까.
물론 전염병은 경제를 붕괴시킨다.
하지만 그게 이득이 되는 사람이 있다.
‘어차피 바셋 지방은 다이아가의 상권이 미치는 지역이 아니니. 흑사병으로 경제를 붕괴시킨 후, 헐값에 바셋 성의 자산을 사들일 생각이겠지. 상권도 본인들 쪽으로 흡수하고.’
그러면서 여러 전염병 관련 물품을 팔아먹는 건 덤이었다.
그렇게 바셋 지방 백성들의 희생 속에 로튼 백작과 매리엇은 어마어마한 이득을 볼 계획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흑사병으로 희생될 이들에게 큰 관심은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을 역으로 이용하면 둘에게 적잖은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좋은 기회야.’
쥬웰은 낮게 혀를 핥았다.
이번 일로 매리엇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질 걸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성녀로서 큰 명성을 얻을 일이니…….”
그런데 그녀는 뜻밖의 반대를 마주했다.
토른 공작이 얼굴을 굳힌 것이다.
“안 된다.”
“할아버지?”
“너무 위험해. 넌 이제 가넷의 소중한 보물이다. 그런 위험한 곳에 가게 할 수는 없어.”
흑사병의 치사율은 말할 필요가 없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도리어 횡액을 당할 수도 있다…… 라고 걱정하는 것이다.
“할아버지, 잘 생각해 보세요. 제가 흑사병을 해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 어마어마한 명성을 얻게 될 것이고 제가 말한 가능성에도 훌쩍 가까워질 거예요.”
그녀가 말한 가능성.
민심을 장악해 절대 권력을 얻어 다른 공작가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래도 안 돼. 위험해.”
결국, 쥬웰은 한숨을 내쉬고는 빤히 되물었다.
“가넷가를 최고로 만들길 원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고작 제가 위험한 게 문제인가요?”
“……!”
토른 공작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설사 조금 위험하면 어떤가요? 어차피 제가 지금 걷는 길은 한 끗만 실수해도 죽음에 이르는 길인데.”
쥬웰의 눈이 차갑게 일렁였다.
“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넷을 최고로 만들고 다른 공작가를 뛰어넘을 거예요. 아니, 짓밟고 깨부술 거예요. 에메랄드든, 사파이어든, 다이아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말이에요.”
토른 공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그만 소녀인 쥬웰의 몸에서 섬뜩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제국 최고의 거인인 토른 공작마저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의 섬뜩함이었다.
“그런데 고작 흑사병 따위가 무서워서 물러나 있으라고요?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제 바람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쥬웰의 눈동자에는 핏빛 광기가 몰아쳤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섬뜩한 광기였다.
결국, 토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 뜻대로 하도록 하여라.”
“감사해요!”
쥬웰은 언제 광기를 내뿜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토른 공작에게 매달렸다.
토른 공작은 어색하게 웃으며 쥬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신, 꼭 조심해야 한단다. 알겠지? 넌 이제 우리 가넷의 보물이니까 말이야. 이 할아비가 너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고 있지?”
‘사랑은 무슨.’
쥬웰은 토른 공작의 품에 안긴 채 싸늘하게 실소했다.
토른 공작은 여전히 로튼 백작을 내치지 않았다.
가문의 후계를 뜻하는 백작위를 거두지도 않았고, 재상위를 거두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의미겠는가?
토른 공작은 지금 지켜보는 것이다.
과연 쥬웰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보일지.
만약, 그녀가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내쳐지는 건 그녀가 될 것이다.
‘하여튼 능구렁이.’
뭐, 상관없었다.
사실 그녀는 토른 공작의 이런 면이 싫지 않았다.
그에게 나쁜 일을 해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할아버지, 제가 사실 선물을 하나 가져왔는데요.”
“흐음?”
토른 공작이 놀란 얼굴을 했다.
“무엇일꼬?”
“헤헤, 제가 신경 써서 준비한 거니 아마 마음에 드실 거에요.”
그 말에 토른 공작은 짓궂은 얼굴을 했다.
“글쎄? 이 할아비가 세상의 선물이란 선물은 다 받아봐서 말이야. 이 할아비의 마음에 들려면 보통의 선물로는 안 될 텐데?”
“그래도 아마 마음에 들걸요? 리샤크!”
멀찍이 있던 리샤크가 검은 천에 싸인 커다란 무언가를 가져왔다.
토른 공작은 선물보다 사슴같이 예쁜 미소년에게 먼저 흥미를 보였다.
“그대는?”
“리샤크라고 합니다, 공작 전하.”
“아아, 그대가 삭월의 기사인가? 엔리크가 데려온?”
“……부끄럽지만,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토른 공작의 눈빛이 돌연 싸늘해졌다.
“네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지. 혹시 쓸데없는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요행히 목숨을 건졌으면, 허튼 생각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가넷가를 위해 살도록. 알겠나?”
경고였다.
리샤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이미 잊은 일입니다. 전 이제 가넷의 기사일 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그래.”
토른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가 보도록.”
리샤크가 멀찍이 다시 사라지자, 토른 공작이 혀를 찼다.
“엔리크, 이놈은 왜 저런 골칫덩어리를 살려 와서. 쥬웰.”
“네, 할아버지.”
“저놈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느냐?”
“대충은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리샤크는 끔찍한 과거를 품고 있었다.
“저놈이 수상쩍은 모습을 보이면 당장 목을 쳐라. 알겠느냐?”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정말로?”
“할아버지. 전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때 망설일 만큼 무르지 않아요. 그를 죽여야 한다면 죽일 거예요.”
이건 진심이었다.
‘리샤크는……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게 나을지도.’
쥬웰은 가만히 생각했다.
사실, 그녀는 포춘 텔러로서 리샤크의 미래를 점친 적이 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아니, 끔찍했다.
심지어 ‘반 확정 미래’였다.
커다란 기적이 없는 한, 리샤크는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문제는 리샤크의 상처는 그녀가 도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란 것이다.
리샤크는 먼 미래에 스스로 커다란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선택의 대가로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리샤크는 제 거예요. 그러니 그를 죽이고 살리는 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단호한 음성에 토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어쨌든 우리 공주님이 무슨 선물을 준비했을꼬?”
“헤헤, 한번 직접 보세요.”
토른 공작이 검은 천을 거두었다.
그러자 커다란 새장에 아름다운 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토른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이방의 상인에게 구한 길조예요. 할아버지께서 적적하신 것 같아, 선물로 가지고 왔어요.”
“정말…… 아름다운 새구나.”
토른 공작이 감탄하였다.
그는 제국 최고의 권력자로 온갖 진귀한 선물을 받아봤다.
영수라 불리는 동물도 많이 받았지만, 어떤 영수도 이토록 아름답고 기품 있지는 않았다.
“저랑 닮았죠?”
“그렇구나. 우리 밤의 요정 공주님과 닮았어.”
토른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어둠을 품은 깃발이 마치 쥬웰의 분위기와 흡사했다.
‘뭐, 분위기가 나랑 닮을 만하지. 이건 지옥의 최고위 마물 괴조 카르탄의 화신체(化神體)니까.’
괴조 카르탄.
게헨나를 날아다니며 죄인들을 징벌하는 최상위 마물이었다.
최상위 악마와 비슷한 격의 마물.
그녀는 자신의 피를 바쳐 그 카르탄의 화신체, 아바타를 소환한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토른 공작을 지켜야 해.’
로튼 백작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까?
절대로.
이제 그도 반격할 것이다.
그중 하나가 토른 공작 암살이었다.
현재 상태에서 토른 공작이 죽으면 공작위는 그에게 그대로 넘어올 테니까.
물론 토른 공작이 순순히 당할 리는 없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 만전을 기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단순한 호위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쩌면 이게 더욱 중요한 이유였다.
‘단순히 호신이 목적이면, 이런 최상위 마물의 화신체까지 소환할 필요는 없지.’
쥬웰이 그 이유를 떠올리려고 할 때, 토른 공작이 말했다.
“참 고맙구나. 마침 적적했는데 위로가 되겠어.”
토른 공작답지 않게 쓸쓸함이 섞인 음성이었다.
철의 거인인 그와 인간적인 교류를 나누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다.
쥬웰이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렸다.
“저라고 생각하고 꼭 아껴주셔야 해요. 알았죠? 이름은 쥬웰 주니어, 쥬주가 어때요?”
“그래, 그래. 내 꼭 아끼마. 쥬주. 예쁜 이름이구나.”
토른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선물 고맙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쥬웰은 자신의 ‘계획’이 통하였음을 직감했다.
괴조 카르탄.
게헨나에서 죄인들에게 징벌을 내리는 마수였다.
어떤 징벌을 내리느냐고?
과거 저질렀던 죄악을 직면하게 한다.
그리고 화신체도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 토른 공작은 악몽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과거의 잘못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과거의 잘못을 직면한 토른 공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지만.’
만약, 토른 공작이 과거를 직면해 지난 과오를 조금이라도 뉘우치면 그에게는 행운일 것이다.
죽은 후 게헨나에서 받을 형벌이 조금은 줄어들 테니까.
하지만 아마 토른 공작은 조금도 뉘우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녀가 바라는 건 토른 공작이 뉘우치는 게 아니니까.
뉘우치든, 뉘우치지 않든 한 가지 확실한 건 과거의 죄악을 직면한 토른 공작의 정신은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릴 거라는 것이다.
쥬웰이 바라는 건 그것이었다.
철의 거인 토른 공작을 무너뜨려 자신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
* * *
토른 공작과 헤어져 자신의 방에 돌아온 쥬웰은 부집사 세바트찬에게 말했다.
“손님을 초청해 줘.”
“누구를 말입니까?”
“다이아가의 매리엇 공작.”
쥬웰은 짙게 미소 지었다.
“가넷의 새로운 안주인으로서 사교계의 여왕님을 초청해야지. 초청장을 보내줄 수 있겠어?”
물론 그냥 얼굴만 보려는 건 아니었다.
쥬웰은 흑사병을 무대로 단막을 진행할 것이다.
하지만 그냥 진행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자극적이고 화려한 단막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를 해야 했다.
매리엇과의 만남은 그 준비를 위한 일환이었다.
다행히 매리엇은 금방 초청을 받아들였다.
쥬웰이 가넷가의 새로운 실세가 된 덕에 재깍 초청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름다운 마차가 가넷 공작가에 도착했다.
마치 보석으로 만든 듯한, 아니, 그 자체가 보석인 듯한 화려한 마차였다.
그곳에서 그 어떤 꽃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내려왔다.
금을 뽑아낸 듯한 화려한 금발, 짙은 은빛의 보석안.
매리엇이었다.
“어머, 쥬웰. 초청해 줘서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었는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미리 마중을 나왔던 쥬웰이 고개를 숙였다.
두근.
오랜만에 매리엇을 보니, 심장이 뛰었다.
‘역시 너는 오물을 뒤집어쓴 꼴이 훨씬 어울리는구나? 어머, 너 우는 거야? 울지 마, 그냥 장난이었어. 자자, 착하지? 웃어봐. 그러면, 내가 너와 어울려 줄지도 모르잖아?’
매리엇이 과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매리엇은 다이아가의 후계였다.
언니 플랑드나와 한패를 먹고 그녀를 혹독히 학대했다.
이후, 결국 잘못을 뉘우치고 소중한 친구가 되었지만…… 끝은 다들 아는 바와 같다.
“정말 반가워요.”
쥬웰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매리엇도 마찬가지로 꽃처럼 활짝 웃었다.
쥬웰이 요정 같다면, 매리엇은 꽃 같은 미녀였다.
그것도 화사하고 화려한 꽃 말이다.
매리엇은 장미와 튤립이 한 몸에 섞인 듯 고아하고, 매혹적인 유혹을 품고 있었다.
“나도 정말 반가워, 쥬웰.”
매리엇은 쥬웰을 껴안았다.
쥬웰은 작은 체구라 키가 큰 매리엇의 품에 쏙 들어갔다.
“이렇게 와주셔서 기뻐요, 전하.”
“전하는 무슨. 우리 사이에.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두근. 두근.
매리엇의 몸이 살갗에 닿자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살의가 치솟아 올랐다.
‘지금 죽여 버리고 싶어.’
당장 손발을 자르고 저 아름다운 얼굴을 벗겨내고 싶었다.
하고자 한다면 당장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간신히 그 욕망을 억눌렀다.
‘내가 계획한 네 최후는 고작 그런 게 아니야.’
쥬웰은 원수들이 어떤 몰락과 최후를 맞게 할지 하나하나 계획을 짜두었다.
원수마다 어떤 최후를 맞을지는 다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차라리 죽음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네, 언니. 그러면 안으로 들어오세요.”
“아, 라디트도 왔어.”
다시 심장이 싸늘해졌다.
다이아 공작가의 마차에서 단단하고 굳건한 인상의 미남이 내렸다.
그녀의 약혼자였던 라디트였다.
그가 자신에게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너를 사랑해. 영원히.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쥬웰은 다시 화려하게 웃었다.
“반가워요, 형부. 매리엇 언니와 곧 결혼할 거니 이제 형부라고 불러도 되죠?”
“형부란 말은 아직 조금 이르지 않을까?”
라디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매리엇이 라디트의 팔을 꼬집었다.
“이르긴. 혹시 딴생각하는 건 아니지?”
“딴생각은.”
라디트는 매리엇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깊은 사랑이 담긴 손길이었다.
“내게는 너밖에 없는 것 알잖아, 매리엇? 벌써 그렇게 부르면 네가 부끄러울까 봐 그렇지.”
그 다정한 모습에 또다시 라디트가 자신에게 속삭이던 음성이 떠올랐다.
‘내게는 너밖에 없어, 에스텔레.’
쥬웰은 가만히 미소 지으며 라디트가 매리엇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차가우니 안으로 들어오세요. 만찬을 준비해 놨어요.”
* * *
한편, 그때 페리도트가의 고성.
유스넨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쥬웰에 대한 생각이었다.
‘요즘은 쥬웰, 그녀 생각만 하는 것 같군.’
유스넨은 픽 웃었다.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꾸 그녀 생각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복수를 위해서라고?’
유스넨은 쥬웰과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왜 그런 일을 저질렀냐 물으니 쥬웰은 복수를 위해서라고 하였다.
일견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쥬웰’의 어머니가 로튼 백작 부부에게 독살당했음은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니까.
하지만 유스넨은 왠지 쥬웰의 답변이 석연치 않았다.
본능적인 ‘감’이었다.
‘그래, 고작 그런 이유가 아니야. 그녀가 진정 바라는 건 뭐지?’
그런데 왜일까? 그 순간, 유스넨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 떠올랐다.
에스텔레. 그녀의 죽음이 말이다.
‘누나.’
유스넨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칼로 도려내듯이 아팠다.
‘거대한 어둠을 막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 순교하였다고 했지.’
그게 세간에 알려진 그녀의 죽음이다.
유스넨도 그렇게 알고 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미치는 줄 알았지.’
유스넨은 아릿하게 생각했다. 10년간의 시련을 통과하고 그녀를 찾아왔는데, 이미 그녀는 스스로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죽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그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혹시 누군가 그녀를 죽이고 거짓된 소문을 퍼뜨린 건 아닌지 확인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어.’
유스넨은 당연히 순순히 그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혹시나 어떤 의혹이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품었고, 조사한 결과…….
‘……아니, 조사했었나?’
순간, 유스넨은 흠칫하였다.
‘……조사 결과가 어땠었지?’
유스넨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때, 그는 분명히 확인했다. 그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하지만 확인했었나?
왜 의혹이 없다고 생각했었지?
어째서 그녀가 순교했다고, 순순히 받아들였지?
거기까지 의문을 품은 순간이었다.
찰나 끔찍한 두통이 그에게 작렬했고, 그리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유스넨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맞나?
그때, 마침 근처에 있던 메디안 백작이 말했다.
“또, 멍하니 계십니까?”
“제가 멍하니 있다고요?”
“네.”
메디안 백작은 익숙하다는 듯 말했다.
“종종 무언가 생각하다가 멍해지는 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
유스넨은 잠시 침묵했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있었나 보다…… 하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왜일까?
유스넨은 이상함을 느꼈다.
‘이전에도 종종 그랬다고?’
유스넨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상해.’
무언가 섬뜩한 경고가 울렸다.
‘내가 지금 뭘 놓치고 있는 거지?’
* * *
그때, 가넷가.
쥬웰과 매리엇, 라디트 세 명의 만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바셋 지방에 갈 거라고?”
“네, 성녀로서 흑사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려고요.”
“하지만…….”
매리엇은 애매한 얼굴을 했다.
당연했다.
바셋 지방의 흑사병은 매리엇과 로튼 백작이 손을 잡고 꾸민 일이니까.
쥬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알고 있어요. 이번 흑사병의 원인. 언니와 백부의 작품이죠?”
“……!”
매리엇은 흠칫하다가 되물었다.
“그런데 바셋 지방에 가겠다고?”
“네.”
“우리를 훼방하겠다는 거니?”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요? 오히려 반대예요. 언니, 제가 백성들 따위를 위할 위인으로 보이세요?”
“…….”
매리엇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녀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쥬웰, 너는 그런 아이가 아니지.”
“맞아요. 전 백성들이 얼마나 죽던 그딴 건 전혀 관심이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그저 제 명성과 이득일 뿐이에요.”
매리엇은 눈빛을 빛냈다.
“그러면 네가 지금 성녀로 활동하는 건?”
“당연히 제 가문 내 입지를 위해서죠. 설마 제가 에스텔레, 그 바보 천치 같은 년처럼 정말 백성들을 위해서 성녀로 활동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실망인데요?”
매리엇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흘렸다.
“그렇구나. 난 또 오해했잖니. 솔직히…… 네가 에스텔레, 그년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제 마음을 놔도 되겠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전 그 한심한 바보 년과 다르니까.”
쥬웰은 짙은 경멸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쥬웰은 라디트의 얼굴이 굳음을 눈치챘다.
그녀가 에스텔레 욕을 할 때였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흐릿하게 눈썹이 꿈틀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정확히 라디트의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이였다.
저건 불쾌해하는 것이다.
‘뭐야? 설마 꼴에 이전 약혼자라고 불쾌한 거야?’
쥬웰은 속이 거북해졌다.
그때, 매리엇이 붉은 와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 그러면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제가 성녀로서 위기감을 고조시켜 판을 크게 넓힐게요. 언니는 흑사병과 관련된 상품을 독점해 주세요.”
“독점?”
“네, 시장에 나와 있는 모든 흑사병 관련 상품, 약초, 장례 물품, 구호 물품 등을 독점해 주세요.”
“하지만 만약 그만한 수요가 요구되지 않으면? 그러면 다 손해야.”
흑마도사가 인위적으로 창궐시킨 흑사병은 전염력에 한계가 있다.
그러니 섣불리 관련 물품을 독점했다가 흑사병이 사그라지면 손해였다.
쥬웰은 싱긋 웃었다.
“제가 판을 키울 거예요. 성녀인 제가 위기감을 고조시키면 사람들은 불안감에 미친 듯이 상품을 사들일 거예요. 그러면 상품을 독점한 언니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거예요.”
매리엇은 눈을 반짝였다.
쥬웰의 말대로 된다면, 실제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흑사병이 사그라지면 어쩌지?”
“그럴 걱정이 뭐가 있어요? 최고위 흑마도사에게 의뢰한 것 아닌가요?”
“그건 그렇긴 하지……. 네 백부가 손을 쓴 거라 정확히 누구에게 의뢰한 건지는 모르지만, 십마 중 한 명에게 의뢰했다고 하니까.”
십마(十魔).
마왕 타란툴라를 제외한 가장 강력한 열 명의 흑마도사를 뜻한다.
‘십마라. 그 정도 흑마도사면 타란툴라의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큰데. 어쩌면 이번에 타란툴라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쥬웰은 뜻밖의 정보에 눈빛을 가라앉혔다.
“흑사병은 의식에 참여한 흑마도사를 죽이지 않으면 멈추게 할 수 없어요. 십마를 비롯해 최소 수십 명의 흑마도사가 의식에 참여했을 터. 그들이 모조리 죽지 않는 한, 흑사병이 갑자기 사그라질 가능성은 없어요.”
매리엇은 놀란 얼굴을 했다.
흑마도사가 죽지 않으면 흑사병 창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쥬웰, 너 흑마법에도 조예가 있구나?”
“헤헤. 조금 아는 거예요.”
“어쨌든, 그래. 네가 바라는 건?”
“수익의 30%.”
“흐음.”
매리엇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20%. 너와 손을 잡는 건 로튼 백작과 척을 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20% 이상은 안 돼.”
“로튼 백작과 척을 지는 게 뭐가 무섭죠?”
“……뭐?”
쥬웰은 빤히 매리엇을 바라보았다.
“다이아라면 알 텐데요. 나와 백부, 둘 중 누가 가넷가의 주인이 될지.”
매리엇은 침묵했다.
다이아가는 최근 가넷가에서 벌어진 쟁투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권력 최상위 포식자인 가넷가의 차기 주인이 결정될 일이었으니까.
분석 결과, 다이아가는 쥬웰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물론 아직은 로튼 백작의 절대 우세이다.
지금껏 쌓아온 세력에서 비교가 안 된다.
하지만 쥬웰은 토른 공작의 총애를 받고 있다.
또한 성녀로서의 면모. 최근 보여준 뛰어난 모습 등을 감안하면 쥬웰이 어떤 돌풍을 일으킬지 모른다.
‘다이아가에서 분석한 승률은 현시점에서는 로튼 백작 80%, 쥬웰이 20%이지만…… 그건 현시점에서의 일일 뿐이지. 만약 쥬웰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계속 보이면,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지 몰라.’
매리엇은 고민하였다.
기존의 강자인 로튼 백작과 계속 연을 맺느냐, 아니면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쥬웰과 연을 맺느냐.
그때, 쥬웰이 명쾌한 답을 내었다.
“고민되면 언니는 저와 백부, 둘 모두에게 끈을 대세요.”
“뭐?”
“상인으로서 여러 곳에 팔을 뻗는 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죠. 그러다가 한쪽이 승기를 잡으면 그쪽에 힘을 실어주면 되잖아요.”
그 말에 매리엇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말이 맞네. 너와도 손을 잡을게. 그러면 수익 배분은 30%로 할게.”
“아니, 40%.”
“……뭐?”
“30%는 아까 이야기했던 거고요. 언니가 한 번 거절했으니, 같은 조건으로는 안 되죠.”
쥬웰은 싱긋 웃었다.
“그게 거래의 기본 아닌가요?”
매리엇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곧 원래의 아름다운 미소로 돌아왔다.
“그래, 40%. 우리 쥬웰이 이렇게나 훌륭히 자라다니. 기특하네.”
“헤헤, 고마워요. 그래서 말하는데,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떤?”
“곧 있을 제 데뷔탕트를 다이아가에서 후원해 주시겠어요?”
매리엇은 놀란 얼굴을 하였다.
“쥬웰, 너의 데뷔탕트를?”
“네, 물론 가넷가에서 챙기겠지만, 다이아가가 함께 후원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이왕이면, 언니가 제 샤프롱이 되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고요.”
매리엇은 기쁜 얼굴을 하였다.
“걱정하지 마. 이 언니가 확실히 후원해 줄게. 샤프롱도 당연하지. 내가 아니면 누가 네 샤프롱이 되겠니?”
가넷가는 제국 최고의 가문이다.
그리고 쥬웰은 떠오르는 실세.
그런 그녀의 데뷔탕트를 챙기는 건 다이아가 입장에서도 굉장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물론 매리엇은 모를 것이다.
쥬웰이 무슨 목적으로 이런 부탁을 한 건지.
그 데뷔탕트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면 저렇게 웃지 못하겠지.’
쥬웰은 나직이 생각했다.
‘데뷔탕트는 아직 나중의 일이니까. 지금은 이번 흑사병 일에 집중하자.’
흑사병.
데뷔탕트.
그리고 그다음 계획하는 일.
이 일들이 끝난 후, 과연 매리엇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무척 궁금해진 쥬웰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대화를 마친 후 매리엇과 라디트는 마차에 올랐다.
그때, 라디트가 쥬웰을 바라보며 말했다.
“쥬웰.”
“네, 형부?”
“조심하거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쥬웰과 라디트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별것 아닌 인사.
하지만 그 말을 들었는데.
“…….”
쥬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조심해. 제발 무리하지 말고.’
라디트와 사랑을 나누기 시작한 이후.
그녀가 험한 곳에 나갈 때마다 그가 늘 했던 이야기였다.
‘사랑해. 널 내 목숨보다.’
‘널 만난 건 내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이야.’
‘너와 영원히 함께할 거야.’
라디트가 했던 속삭임이 파라락 떠올랐다.
쥬웰은 결국 웃지 못하고 그들을 배웅했다.
“……쥬웰?”
“아니에요. 갑자기 피곤해서. 조심히 들어가세요.”
매리엇과 라디트는 갑작스레 어두워진 쥬웰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둘이 마차로 들어갔고, 커튼이 쳐졌다.
커튼 너머로 둘이 깊은 입맞춤을 나누는 실루엣이 보였다.
그렇게 마차가 떠난 후, 쥬웰은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갑작스레.
“……우욱!”
메스꺼움이 치밀어 올라 쥬웰은 먹은 음식을 토하였다.
“아,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리샤크가 놀라 쥬웰을 부축했다.
“……나가.”
“네?”
“다들 나가라고!”
쥬웰은 버럭 외쳤고, 리샤크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흠칫하였다.
“우욱!”
쥬웰은 다시 구역질하였다.
리샤크는 쥬웰을 향해 손을 뻗다가 멈칫하였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시종인들을 향해 손짓했다. 모두 방을 나갔다.
쥬웰은 소파를 부여잡고 무릎 꿇은 채 끝없이 구토하였다.
‘빌어먹을.’
쥬웰은 자신이 한심했다.
고작 방금 만남이 뭐라고 이런 반응이란 말인가?
하지만 둘의 입맞춤을 보는 순간.
자신을 만지던 라디트의 손길이 떠올랐다.
너무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안의 모든 걸 다 비워 버리고 싶었다.
이미 토할 만큼 토했지만, 구역질이 멈추지 않아 헛구역질만 하고 있을 때였다.
뜻밖에 걱정하는 음성이 들렸다.
“……괜찮은가?”
“다들…… 나가라고!”
버럭 외치다가 쥬웰은 멈칫하였다.
고용인들이 아니었다.
찬란한 흑발. 신이 빚은 듯한 아름다운 얼굴.
빛의 산란에 따라 달라지는 담람색 보석안.
황태자 오펜하임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에 커다란 걱정을 담고 말이다.
* * *
“전하께서 어떻게?”
쥬웰은 당황해 예를 표하는 것도 잊고 눈을 깜빡였다.
“그대가 걱정되어서…… 온 건데.”
“그러니까…… 어떻게?”
그녀는 그의 방문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아니, 그걸 떠나 그녀는 그의 방문을 허락한 적이 없다.
황태자 오펜하임은 어색한 얼굴을 했다.
“몰래 들어왔네.”
“……몰래라고요?”
“……걱정되는데 도무지 만나주질 않으니까. 그래서 몰래 얼굴만 잠깐 보고 싶어서 들어왔네. 저기 창문으로.”
“…….”
그러니까 무단 침입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창문으로.
‘아니, 그런데 여기 4층인데? 어떻게 창문으로? 경비는 어떻게 뚫은 거야?’
가넷가의 경비는 어마어마하게 삼엄하다.
이곳 저택에 들어오려면 외벽, 외곽 지역, 중간 지역, 내성을 모조리 통과해야 하는데?
그걸 혼자 뚫고 잠입해 들어왔다고?
황태자는 눈을 돌리며 자세한 설명은 피했다.
“……내가 원래 이런 일을 잘해서.”
“잘한다고요? 남의 집 무단침입을? 전하, 도둑이셨습니까?”
“도둑은 아니지만 비슷한 일은 많이 해봤지. 내가 사실 황궁에서 얌전히만 지내는 건 아니어서.”
답변은 더욱 가관이었다.
쥬웰은 자신이 황태자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어쨌든, 그대…… 괜찮은가?”
쥬웰은 아차 하였다.
의도치 않게 추한 모습을 보여 버렸다.
널브러진 토사물.
헝클어진 머리. 얼굴도 당연히 엉망일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추한 모습을 보였군요. 그러게 왜 도둑처럼 들어와서 못 볼 꼴을 보십니까?”
“못 볼 꼴?”
“네, 추한 꼴을 봐서 불쾌하셨어도 이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멋대로 들어오신 탓이니…….”
“……불쾌라고?”
오펜하임의 음성이 낮아졌다.
쥬웰이 의아한 얼굴을 하는 순간.
“……그대의 지금 모습. 절대로 추하지 않아. 더구나 불쾌라니. 그저 안타깝고, 도움이 되지 못해 괴로울 뿐인데. 도대체 날 뭐로 보고 그런 말을?”
오펜하임이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말했다.
절대로 추하지 않았다.
오펜하임이 들었던 마음은 그저 찢어질 듯한 안타까움 뿐.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나 괴로워한단 말인가?
그녀의 눈가에 맺힌 흐릿한 물방울이 그의 가슴을 칼로 찌르는 듯했다.
‘제길.’
쥬웰이 당황하는 사이, 오펜하임이 성큼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겠네.”
그러고는 자신의 소매를 들어 쥬웰의 입가에 묻은 흔적들을 닦아주었다.
“아, 아니, 옷이 더러워집니다.”
“괜찮아.”
오펜하임의 눈빛이 강하게 타올랐다.
“그대가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이까짓 옷이 문제인가? 약혼자가 되어서 그대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는데?”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오펜하임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지난 독살 사건. 그것도 그대가 스스로 의도한 것이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스스로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대는 독을 피할 수 있었는데 피하지 않았어. 얻을 이득을 위해. 그렇지 않나?”
얼추 비슷한 판단이었다.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그대는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아. 본인이 다치고 깨져 나가는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짙은 안타까움이 담긴 음성이었다.
쥬웰은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제가 그러든 말든 전하와 무슨 상관입니까?”
“……!”
“곧 파혼할 형식적인 약혼 사이 주제에 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와 전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쥬웰은 오펜하임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일전 말했지만, 전하가 생각할 건 황실을 재건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전하는 저를 이용할 생각만 하십시오.”
“…….”
오펜하임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틀려.”
“……전하.”
“물론 그대와 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알아. 형식뿐인 약혼 관계로 그대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오펜하임은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자꾸 신경 쓰여. 계속 걱정되고 아프단 말이야. 내가 지난번 독살 사건을 듣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짐작은 하나?”
“…….”
오펜하임은 조심스럽게 쥬웰의 눈가를 닦았다.
쥬웰의 눈에는 구역질할 때 생리적 반응으로 눈물이 흐릿하게 맺혀 있었다.
“다시는…… 그대의 눈에 이런 빌어먹을 게 맺히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어떻게 그대를 그렇게 이용하듯 바라보겠는가? 그대의 아픔을 어떻게 모른 척하라고. 불가능해.”
욱신.
가슴이 저릿하게 울렸다.
아마…… 이건, ‘쥬웰’의 심장에 새겨진 감정이 반응하는 걸 것이다.
‘쥬웰’은 오펜하임을 사랑했었으니까. 그의 말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겠지.
‘하여튼. 말을 안 듣기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펜하임을 위해서라도 그의 감정은 밀어내는 게 옳다.
하지만 밀어내도 소용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 이야기는 인제 그만. 사실 전하께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전 곧 바셋 지방으로 떠날 겁니다. 흑사병을 해결하려고요.”
“……!”
오펜하임의 얼굴이 굳었다.
“말려도…… 듣지 않겠지?”
“네,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오펜하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녀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곳으로 떠나는데 말리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짜증이 나는 듯했다.
“……그래, 내가 어떤 걸 해주면 되는 거지?”
“유스넨 대공을 수도에 잡아놓고 있어 주십시오.”
“페리도트 대공을?”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넨이 바셋 지방에 오면 일이 귀찮아져.’
유스넨은 최근 그녀의 주변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러니 바셋 지방에 따라오려고 할 수도 있다. 광휘의 대공으로서 따라올 명분도 충분하니.
‘커다란 피를 봐야 하는데, 흰 강아지가 보면 곤란해.’
만약 유스넨에게 정체를 들키면…… 그녀는 그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따라오지 못하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방법은 알아서 해주십시오. 대공가에 황명을 내리든, 아니면 대법관으로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일을 마련하든. 유스넨 대공이 수도를 떠나지 못하게 부탁합니다.”
“그래, 어떻게든 해보지. 그거면 되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쥬웰은 황태자의 보석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적사자 필바하에게 연락해 바셋 지방에 오게 해주십시오.”
“……!”
황태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껏 보인 모습 중 가장 놀라는 모습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자는 반란군의 수괴 아닌가?”
적사자 필바하.
3년 전 제국에 훌쩍 나타난 정체불명의 기사였다.
그는 여섯 공작가의 폭거에 저항해 깃발을 들었다. 백성들을 준동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금세 소탕당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는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현재 제국 남부에서 둥지를 틀고 제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황태자인 나보고 반란군의 수괴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오펜하임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쥬웰은 담담히 경악할 이야기를 하였다.
“둘, 같은 편 아니었습니까?”
“……!”
“전하와 필바하. 같은 배를 탄 것으로 아는데요? 정확히는 필바하가 전하의 수하 아니었습니까?”
오펜하임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마치 시간이 멎어버린 듯한 반응이었다.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펜하임은 부정하려 하였지만, 쥬웰의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맥이 풀렸다.
이미 모든 걸 아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제가 정보력이 뛰어나서요.”
“아니야. 정보력이 뛰어나다고 알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한…… 도대체 어떻게?”
오펜하임은 횡설수설하였다.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사실, 쥬웰이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펜하임, 네가 나한테 직접 이야기해 준 거잖아.’
에스텔레 시절, 오펜하임은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썩어빠진 여섯 공작가를 무너뜨리려면 내부에서는 안 돼. 외부의 힘이 필요해. 난 필바하를 만들 거야.’
‘필바하요?’
‘응, 반란을 일으켜 폭군의 통치를 끝냈다는 고대의 전설적 영웅, 필바하. 난 그 필바하를 만들어 여섯 공작가를 밖에서 무너뜨릴 거야.’
황태자가 반란군을 조직하겠다니?
우스갯소리로 넘긴 이야기였다.
그런데 3년 후 쥬웰의 몸으로 돌아와 보니 진짜로 제국 남부에서 필바하라는 이름의 영웅이 반란군을 이끌고 있었다.
오펜하임의 말이 실현된 것이다.
‘……진짜로 반란군을 조직하다니. 대단하다고 할지. 어이없다고 해야 할지.’
필바하는 황태자의 수하가 분명했다.
황태자의 명을 따라 반란군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반란군의 최종 흑막이 제국의 황태자라니. 웃지 못할 이야기였다.
“……어쨌든 그래. 필바하에게 바셋 지방으로 가라고 이르지. 혹시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오면 알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혁명군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쥬웰은 그렇게만 말했다.
오펜하임은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그대 말고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없겠지?”
“전하가 말씀하지 않았다면 없습니다.”
“……그래,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오펜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지나치게 당황하는 모습이라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절대 누구도 모를 거로 생각하는 거지?’
황태자가 이 사실을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비밀이라 확신하는 것 같아 의문이 들었다.
‘무슨 비밀이 있는 건가?’
어쨌든 오펜하임은 당황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어쨌든 이만 가보겠네. 혹시나…… 힘든 일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게.”
오펜하임은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대에게 위로가 되고 싶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쥬웰은 냉담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오펜하임은 거듭된 그녀의 거절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아까 그대가 한 말 중에 틀린 게 있네.”
“……?”
“곧 파혼할 사이란 말이 틀렸다는 거네. 난 그대와 절대로 파혼하지 않을 테니. 그대와 약혼이 끝나는 건 결혼할 때뿐이야.”
“……뭐라고요?”
쥬웰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묻자, 오펜하임이 여인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심이야. 그러면 다음에 보게. 내 델피나여.”
그리고 사라졌다.
……창문으로.
‘……여기 4층인데.’
창밖을 내려다보니, 표범처럼 가볍게 착지한 오펜하임이 유유히 저택 밖으로 사라졌다.
놀라운 건, 경계를 서는 기사들이 오펜하임의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쥬웰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오펜하임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강력한 능력자였다.
‘신비’의 셀레네.
황족의 신비한 능력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
가만히 황태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세바트찬이 들어왔다.
“아가씨, 서신이 왔습니다.”
“어디서?”
“옵시디언 상단입니다. 처음 듣는 곳인데…… 혹시 아시는 곳입니까?”
옵시디언(흑요석).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아아, 놓고 가.”
“네, 알겠습니다.”
쥬웰은 곧바로 서신을 펼쳐봤다.
발신인은 익숙한 이름이었다.
[마리가, 영애께.]
마리!
이전 에스텔레 때 시녀이자, 얼마 전 가계약 관계를 맺은 이였다.
‘성공적으로 상단을 차렸나 보군. 예상대로 상재가 있어.’
쥬웰은 다이아를 판 금액으로 투자를 명했고, 그 뒤 마리는 그 금액을 몇 배로 불렸다.
이후, 그녀의 명에 따라 상단을 하나 차렸다.
‘물론 아직 어떤 상품도 취급하지 않는 상단이지만. 구색은 갖췄어.’
쥬웰은 서신의 마지막 문구를 읽었다.
[영애의 명대로, 모든 준비를 했습니다. 다이아의 눈물을 위하여.]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리의 상단은 이번 흑사병 사태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제 마지막 배우를 찾아가야겠군.’
마지막 배우.
그녀의 사촌 오라버니, 해밀턴이었다.
* * *
해밀턴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오라버니, 동생 쥬웰이 왔어요.”
사랑스럽게 감옥에 갔는데,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
“어…… 끄억. 어억.”
해밀턴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로튼 백작이 피가 뚝뚝 흐르는 몽둥이를 들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 아버지. 제발…… 사, 살려…….”
해밀턴이 엉망진창으로 부어오른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로튼 백작의 발을 잡았다.
“차라리 죽어! 이 빌어먹을 놈! 너 때문에 내 꼴이!”
로튼 백작은 몽둥이를 들어 다시 해밀턴을 내려치려다가 쥬웰을 발견하고는 흠칫하였다.
“……아, 쥬웰이냐. 이건…… 훈육 중이었단다.”
로튼 백작은 당황해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쥬웰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다가 툭 말했다.
“훈육이 조금 심한 것 아닌가요?”
로튼 백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쥬웰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정신이 회까닥 돌았다.
“이…… 너…… 쥬웰.”
그러다가 로튼 백작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쥬웰은 겁도 없이 혼자 왔다.
더구나 여기는 감옥.
간수도 미리 빼돌렸다.
그러니 저 작은 소녀 따위 한 손으로 목을 꺾을 수 있었다.
일단 죽이고 나면 뒷일은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을 거고.
“너…… 이 빌어먹을 것. 잘됐다.”
로튼 백작이 섬뜩한 눈으로 쥬웰에게 다가왔다.
죽이려는 것이다.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그만하시죠, 백부.”
“그만? 차라리 무릎 꿇고 빌지 그러느냐? 그러면 덜 괴롭게 죽일지 모르는데.”
쥬웰은 피식 웃고는 로튼 백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만하라고.”
“……!”
“지금 당장 찢어 죽여 버리기 전에.”
로튼 백작이 우뚝 굳었다.
쥬웰의 적색 눈이 살기로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사르르.
그녀의 눈가에서 악마화가 한 송이 피어올랐다.
숨 막힐 듯한 마기가 감옥에 넘실거렸다.
“너, 너…… 너…….”
“당장 죽이고 싶은 걸…… 참고 있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쥬웰은 천천히 로튼 백작에게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이 닿을 때마다 진득한 마기가 땅에 흘러내렸다.
“……!”
로튼 백작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쥬웰을 보고 뻣뻣이 굳었다.
마치 뱀을 마주한 쥐처럼, 완전히 위압당해 뒤로 물러서지조차 못했다.
그의 전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앞에 선 쥬웰은 손을 들어 로튼 백작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팔다리를 찢어버리고 싶은 걸 정말 매일매일 간신히 참고 있다고. 그런데…… 이렇게 유혹하면 안 되지. 안 그래, 백부? 아니…….”
쥬웰은 입꼬리를 찢을 듯 올렸다.
“스승님.”
“……!”
로튼 백작은 눈을 부릅떴다.
“너, 너…… 그게 무슨……?”
쥬웰은 화사하게 웃었다.
“그냥…… 여기서 찢어 죽여 버릴까? 다 짜증 나는데?”
“너, 너……!”
“닥쳐, 역겨운 목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
로튼 백작의 입이 우뚝 다물렸다.
쥬웰의 살기가 점점 미친 듯 치솟아 올랐다.
로튼 백작의 몸이 이제는 차마 쳐다보기 비참할 정도로 떨렸다.
“하아.”
쥬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복수의 기회를 날릴 수는 없지.’
이렇게 죽이면, 소중한 기회를 하나 날리게 되는 것이다.
로튼 백작은 아직 제대로 된 고통을 맛보지도 않았으니 죽일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이전부터 궁금하던 걸 물었다.
“있잖아.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칠 때 혹시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인물들이 누구인지 알아?”
“……!”
“당신은 재상이잖아. 그러니 알 것도 같은데.”
‘쥬웰’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로튼 백작은 제국에서 손꼽는 거물이었다.
그러니 그날 인신 공양에 누가 또 관여했는지 알 수도 있었다.
과연.
“그, 그건…….”
로튼 백작의 안색이 하얘졌다.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쥬웰은 두근 심장이 뛰었다.
“말해봐. 말하면 여기서 고통 없이 죽여줄 수도 있으니.”
거짓말이다.
말해도 최대한의 고통을 줄 것이다.
로튼 백작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입을 열려던 찰나.
“……!”
로튼 백작의 동공이 풀렸다.
마치 백치가 된 듯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되물었다.
“응? 방금 뭐라고 했느냐, 쥬웰?”
로튼 백작은 방금 무슨 대화가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당황해 주변을 살폈다.
“……아니에요, 백부.”
쥬웰은 김이 샌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해밀턴 오라버니와 대화를 나누러 왔어요. 괜찮을까요?”
“그, 그래.”
로튼 백작은 얼떨떨한 얼굴로 사라졌다.
쥬웰은 그의 뒷모습을 싸늘히 바라보았다.
‘금제(禁制)야. 그날 의식의 전모를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게 제약받았어.’
이 금제를 건 인물은 안 봐도 뻔했다.
‘마왕 타란툴라.’
역시 타란툴라를 잡아야 그날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밀턴이었다.
“오라버니?”
해밀턴이 화들짝 놀라 넙죽 엎드렸다.
“저, 전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었습니다, 쥬웰 님! 살려주세요!”
“……아직은 오라버니 죽일 생각 없는데.”
쥬웰은 잠시 해밀턴의 상태를 살폈다.
심각하게 구타당해 성한 곳이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는 성력을 발현해 그를 치료해 주었다.
해밀턴은 따뜻한 빛이 자신을 감싸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 그냥…… 눈물이 나와서…… 끄윽. 끅. 끄윽. 으아앙.”
해밀턴은 쥬웰의 눈치를 살피며 눈물을 집어넣으려고 노력했다.
쥬웰은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불쑥 물었다.
“오라버니는 내가 원망스러워?”
“…….”
“나 때문에 로튼 백작에게 이렇게 맞은 거잖아.”
해밀턴은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아버지에게는 원래도 이렇게 항상 맞았는데요?”
“……그래?”
“……네, 아버지는 형님만 편애하셔서. 예전부터 이렇게 얻어맞은 적 많아요.”
형님.
로튼 백작의 큰아들 휘란드를 말하리라.
제국 아카데미 수석 졸업 예정자로 곧 가넷가로 돌아온다.
“……사, 사실 쥬웰 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감사? 내게?”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해밀턴이 그녀에게 고마울 일이 뭐가 있는가?
“어머니를 살려주셨잖아요. 제가 부탁해서 살려주신 것 맞죠?”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해밀턴에게 독살 사건 음모를 들려주었을 때, 그가 이렇게 부탁했다.
제발 어머니, 에블린의 목숨이라도 살려달라고.
‘딱히 그 부탁 때문에 살려준 건 아니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준비해. 바셋 지방에 가야 하니.”
“네? 네?”
해밀턴의 눈이 커졌다.
“거, 거기는 흑사병……!”
“응, 알아. 흑사병 해결하러 갈 거니까, 준비해.”
“나, 나는 환자들을 치료할지도 모르고…… 가봤자, 도움이 안 될……!”
해밀턴이 허겁지겁 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쥬웰이 빤히 말했다.
“넌 가서 환자 안 볼 건데?”
“그러면?”
“더 중요한 일 해야 해.”
“……중요한 일이라면?”
“혹시 낚시 좋아해?”
“……나, 낚시요?”
해밀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웬 낚시? 가서 낚시하라고?
물론 그녀가 말하는 낚시가 보통 낚시는 아닐 것이다.
뭔가 어마어마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시, 싫어합니다. 낚시 세상에서 제일 싫습니다!”
“그래? 아쉽네.”
쥬웰은 고개를 기우뚱했다.
“아니면 납치당한 공주님 구해주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 좋아해? 한번 해볼래?”
쥬웰이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반대 입장으로.”
* * *
이윽고, 쥬웰이 바셋 지방으로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전날 밤.
쥬웰은 느지막이 방에서 나왔다.
“어딜 가십니까, 아가씨?”
“아직 안 잤어, 리샤크?”
쥬웰은 의외란 얼굴을 하였다.
자정이 훌쩍 넘긴 시간인데, 리샤크가 방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지켜주려고 할 필요는 없는데.’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난 독살 사건 이후, 너무 과보호하려는 것 같다.
“리샤크, 저택 안에서는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 없어.”
“안 됩니다. 저택 안도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리샤크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저택 안이 가장 위험하다는 얼굴이었다.
뭐,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당장 저쪽 복도에 로튼 백작 방이 있으니까. 얼마나 내게 암살자를 보내고 싶을까?’
그녀는 피식 웃었다.
사실, 당장 가서 상대를 죽이고 싶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만남 이후, 당장 죽이고픈 유혹이 커져 불쑥불쑥 참기가 힘들었다.
‘암살자라도 보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그걸 빌미로 또 괴롭힐 수 있을 테니까. 혹시 리샤크 때문에 못 오는 건가?’
만약 와야 할 암살자가 리샤크 때문에 못 오고 있는 거면, 그건 손해였다.
그런 마음으로 말했다.
“어쨌든 저택 안에서는 이런 경호는 삼가도록 해. 내가 너무 겁쟁이 같잖아?”
“아가씨.”
“그리고 암살자가 오면 나름대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고.”
“……기회라고요?”
“응, 조금 위험해도 대신 약점을 잡을 수 있잖아.”
리샤크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그는 괴로운 눈빛으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복도의 조명 때문일까? 그의 얼굴에 한층 그림자가 깃들어 보였다.
“……아가씨, 당신은 도대체…… 어째서…… 스스로를 아끼지 않으시는 겁니까?”
“응?”
쥬웰은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얼굴을 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어떤 암살자가 와도 그녀를 위협할 수 없으니 그러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리샤크는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흑사병이 창궐하는 지역에 가신다고 하질 않나, 암살자가 오길 기다리지 않나. 제발 스스로를 아껴주십시오.”
“흐음, 걱정해 주는 거지?”
“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쥬웰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빨개지는 얼굴을 보니 괴롭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삼갔다.
사실 그녀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셋 지방에서 해야 할 일 때문이다.
그녀는 바셋 지방에서 끔찍한 일을 저지를 것이다.
해야 하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갔다 올게.”
“……이 시간에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혼자 가도 되는데?”
“절. 대. 로. 안 됩니다.”
쥬웰은 정신 조작으로 떼놓을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같이 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성전. 기도하러.”
* * *
그녀는 리샤크와 함께 수도의 중심가에 있는 성전으로 향했다.
성전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정말로 기도하러 왔다.
바셋 지방에서 저지를 끔찍한 죄악에 대해서 말이다.
‘……뭐,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냥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왔다.
‘사실 조금 웃긴 일이지.’
쥬웰은 스스로의 마음이 우스워 자꾸만 실소가 나왔다.
그녀는 이미 추악한 악마인데, 무슨 기도란 말인가?
그녀의 끔찍한 죄악이 바셋 지방에서 벌일 일뿐인가?
그녀의 행동 중 끔찍한 죄악이 아닌 게 없다. 이런 기도 따위 위선일 뿐이었다.
하지만 위선이면 어떤가?
그녀는 지옥에 떨어지는 순간에도, 지금도, 그 어떤 순간에도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기도쯤이야 신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리라.
“기도실은 혼자 들어가야 하니, 금방 갔다 올게.”
“네, 혹시라도 일이 있으면 소리 지르십시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부디 걱정 안 하게 해주십시오.”
쥬웰은 쿡쿡 웃었다.
‘아아,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예전에는 성전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쥬웰은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성전의 정경을 훑어보았다.
낙원을 수호하는 17대천사장을 그린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리델하트 오라버니도 주로 성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겠지?’
리델하트.
에메랄드 공작가에 입양된 피 안 섞인 오라버니이다.
그녀에게 늘 까칠했지만, 돌이켜 보니 공작가에서 오로지 리델하트만이 그녀에게 진심이었던 것 같다.
‘또…… 누가 울린 거지?’
그의 음성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봐서 뭐 하게? 영원히 안 보는 게 나아.’
어차피 지금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니 당직 신관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얼른 기도하고 돌아가자.’
하지만 안에 들어가 기척을 알린 순간.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쪽에서 어딘지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기도하러 왔어요. 가넷가의 쥬웰이에요.”
“……쥬웰 성녀님이셨군요.”
끼익, 성전의 내문이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이의 얼굴을 본 순간.
쥬웰의 시간이 멈추었다.
“신관 리델하트라고 합니다.”
‘……뭐?’
쥬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짧게 자른 군청색 머리칼. 진줏빛 눈동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사제복.
마치 칼날을 벼린 듯, 싸늘하면서 절제된 모습. 그러면서 묘하게 이질적인 위험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녀의 오라버니, 리델하트였다.
그가 성전에 있었다.
* * *
‘리델하트 오라버니가 이 시간에 성전에 있다니?’
두근.
생각지 못한 만남에 심장이 뛰었다.
리델하트는 그녀를 끝까지 진심으로 대해준 이 중 하나였다.
그러니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추기경께서 당직을 서고 계실지는 몰랐습니다.”
쥬웰은 평소답지 않게 당황하여 느릿느릿 말을 하였다.
하지만.
“같은 신의 종인데 당직을 서지 않을 이유는 없겠지요. 어쨌든 기도하러 오셨다고요? 어떤 종류의 기도입니까?”
리델하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쥬웰의 가슴이 싸하게 식었다.
차가웠다.
아니, 무심했다. 차가움조차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어떤 관심도 없는 이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
당연했다.
리델하트는 그녀를 모르니까.
“……고해성사하러 왔습니다.”
“그렇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함께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리델하트는 등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갔고, 쥬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게 낫지. 그냥 모르는 사이인 게 나아.’
그래도 못 지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리델하트마저 마리 같은 일을 겪었으면, 그녀는 굉장히 슬펐을 것이다.
표정이 이전보다 어두워진 게 걸리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리델하트의 남은 삶에서 ‘그녀’는 영원히 없는 존재인 게 좋을 것이다.
쥬웰은 리델하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빨리 하고 가자.’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위대한 빛이여, 당신의 종이 고백합니다. 나 지금껏 온전히 당신을 사랑하였으니, 부디 앞으로 제가 저지를 죄악을 용서하시옵소서. 부디 제 앞날을 축복하시옵소서.”
나,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으니.
부디 원수들을 향한 제 죄악을 용서하소서.
끔찍이 흘릴 피를 눈감아주시고.
원수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내리소서.
마침,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반짝 달빛이 스며들었다.
악마의 주구다운 끔찍한 기도였으나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성녀처럼 숭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쥬웰은 고개를 숙였다.
그때, 불쑥 이런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
하지만 억눌렀다.
우연히 만났을 뿐, 그녀는 리델하트와 연을 이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리델하트는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했다.
그게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 오라버니를 향한 그녀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오라버니.’
그렇게 건네지 못할 인사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순간, 리델하트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성녀님께서도 죄를 짓는가 보군요.”
“……?”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고해성사 때 한 기도 내용을 꺼내는 건 불문율 같은 금기였다.
항상 철저한 리델하트가 이런 실례를 하다니?
“……네, 신의 과분한 은총으로 성녀가 되었지만, 저도 같은 죄인이니까요.”
그녀는 ‘성녀’처럼 위장하며 다소곳하게 답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남들을 위하는 삶을 살려고 하고 있답니다.”
리델하트는 잠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진줏빛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듯 주시해, 그녀는 살짝 당황했다.
‘뭐야? 왜 그래?’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리델하트는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조심히 들어가시길.”
“……네.”
고개를 갸웃하며 등을 돌렸다.
그러고 발걸음을 옮겨 문을 나가려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증스러운 죽일 년.”
“……!”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한없이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녀가 강대한 어둠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듣지 못할 조용한 음성.
하지만 분명 리델하트의 목소리였다.
놀라 휙 고개를 돌리니, 리델하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오…… 라버니?’
리델하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다시 무심히 축객령을 내렸다.
“조심히 가십시오, 쥬웰 성녀님. 다음에 또 뵐 때까지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리델하트는 묘한 음성으로 말을 덧붙였다.
“부디요.”
* * *
수도 인근에 자리한 오래된 고성.
무척이나 오래된 성이었는데, 그럴 만하였다.
페리도트 대공가.
제국의 역사와 함께한 수호 가문의 성이었으니까.
13년 전 일어난 비극으로 현 가주를 제외한 온 가문의 일원이 사망해 페리도트 대공가의 성은 항상 고요했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소란스러웠다.
“잠깐. 지금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뚱한 표정의 젊은 미남자, 메디안 백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유스넨을 가로막았다.
“산책 가려던 차였습니다.”
“산책? 이 시간에 그런 복장으로 말입니까?”
“…….”
메디안 백작의 말대로 지금 유스넨은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단단한 차림이었다.
“설마 바셋 지방에 가는 겁니까?”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흑사병의 원인이 흑마도사 때문일지도 모르니까요.”
“이상하군요. 그런 잔챙이 흑마도사를 처리하는 건 에메랄드 공작가의 의무. 전하께 맡겨진 수호의 의무에는 해당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다.
어둠에는 두 종류가 있다.
거악과 소악.
정확히 구분이 나뉘지는 않지만, 보통 일반 기사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둠의 경우 거악으로 분류하고, 일반 기사들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어둠은 소악으로 분류한다.
페리도트 대공가가 담당하는 어둠은 보통 거악 쪽이다.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둠을 천사의 권능으로 퇴치하는 게 그들 페리도트 대공가의 의무였다.
잔챙이 소악을 상대하는 건 에메랄드 공작가의 성전 기사단이 담당하고 있다.
“썩어빠진 에메랄드 공작가 놈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가는 게 낫지요.”
“……정말 그런 이유가 맞습니까?”
메디안 백작이 똑바로 유스넨을 바라보았다.
“혹시 쥬웰 영애 때문에 가는 것 아닙니까?”
유스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이었다.
메디안 백작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됩니다. 황명이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최근 들어 약화한 수도의 결계를 보강하라고.”
“제가 황명을 따라야 합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대법관으로서 쌓인 판결은 어떻게 하고요. 그렇지 않아도 중요한 사안이……!”
하지만 유스넨은 꿈쩍도 하지 않고 무언가를 메디안 백작에게 건네었다.
“……이건? 설마?”
“네, 대법관의 직인입니다. 백작께 모든 권한을 위임할 테니 현명히 중재해 주십시오.”
메디안 백작은 눈을 끔뻑끔뻑하였다.
지금 유스넨이 농담을 하는 건지 바라보았지만, 불행히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유스넨의 눈빛은 한없이 잠잠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지금 이 모습. 대공 전하답지 않습니다.”
“그럴지도요.”
그답지 않다.
유스넨은 그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지금 그의 모습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었으니까.
‘……왜 이렇게 초조한 거지.’
쥬웰이 바셋 지방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무작정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나도 내가 미친 것 같군.’
유스넨은 실소했다.
하지만 반드시 따라가야만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번 여정에 무언가 그녀와 관련해 중요한 전환점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전환점.
유스넨은 어쩐지 이번 여정에서 그녀와의 모호한 관계가 확실히 정리될 것 같다는 느낌이 받았다.
“직감입니까?”
“네.”
메디안 백작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천사의 피를 각성한 유스넨의 직감은 굉장히 정확했다. 반쯤은 ‘예지’라고 봐도 좋았다.
따라서 저런 느낌이 들었다면, 분명 이번 여정에서 쥬웰과 유스넨 사이에 커다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문제는 그게 어떤 전환점이냐는 것이다.
‘쥬웰 영애가 어둠의 존재가 아니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난 둘의 결혼에 찬성이야. 하지만 어둠의 존재가 맞는다면?’
메디안 백작은 최근 보이는 유스넨의 태도가 걱정되었다.
그는 쥬웰을 향해 알 수 없는 흔들림을 보였다.
연심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처단해야 할 어둠의 존재를 향해 그런 흔들림을 보이는 것 자체가 부적절했다.
“전하, 외람되지만 충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지금 전하, 굉장히 위험해 보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어둠에 마음을 뺏기면 광휘는 빛을 잃는다는 것을.”
메디안 백작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경고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어둠에 마음을 뺏겼던 선대 가주분들이 결국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페리도트가는 수백 년에 걸쳐 어둠과 싸우며 살아왔다.
그들의 적은 게헨나에서 직접 강림한 어둠. 혹은 강대한 마왕급 흑마도사들이었다.
그리고 강대한 흑마도사들은 모두 영혼에 커다란 흉터를 지닌 이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강력하고 끔찍한 흑마도사일수록 원래는 순백한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동시에 안타깝고, 절망적인 상처를 지니고 있다.
악마들이 사랑하는 건 그런 상처 입은 영혼들이었으니까.
수백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그런 가련한 흑마도사들을 사랑한 페리도트가의 일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참혹한 결말을 맞았다.
“그들 모두…….”
“그만.”
유스넨은 나직이 말했다.
그는 묵직하게 메디안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만 이야기하십시오.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자꾸 이야기하니…… 미안하지만, 저도 조금 짜증이 나려고 하는군요.”
“……!”
메디안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처음이었다.
가주직을 계승한 유스넨이 저렇게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건.
‘하아.’
메디안 백작은 크게 탄식했다.
점점 불안감이 커졌다.
하지만 유스넨은 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어둠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더는 그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까?”
“네.”
그렇게 대답하는 유스넨의 머리에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쥬웰의 얼굴에 꽃피던 악마화.
그녀가 어둠의 존재라는 걸 그 어떤 것보다 명확히 증명해 주는 표식.
그녀는 어둠의 존재다. 그가 처단해야 할.
하지만 또 다른 장면도 떠올랐다.
괴로움에 눈물 흘리던 모습.
순수히 다른 이를 위하던 모습.
그녀가 정말 악이라면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그녀는 악이 아니야.’
심지어 이번에는 흑사병을 해결하러 죽음을 무릅쓰고 바셋 지방으로 떠나지 않았는가?
그런 그녀를 어떻게 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분명 어둠이지만, 또한 동시에 어둠이 아니었다. 어둠이라면 빛보다 선한 어둠이리라.
그런 그녀를 처단해야 하는가?
이게 지금 유스넨을 끝없이 괴롭히는 화두였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메디안 백작은 더는 말리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하십시오. 흑사병에 걸리면, 아픕니다.”
유스넨은 옅게 미소를 지은 후, 말을 달렸다.
쥬웰이 떠난 바셋 지방을 향해서였다.
* * *
쥬웰은 바셋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무거운 얼굴을 하였다.
‘가증스러운 죽일 년.’
리델하트가 남긴 말이 자꾸 떠올랐다.
‘잘못 들은 건 절대로 아니야. 무슨 뜻일까?’
가장 가능성 높은 건, 단순한 혐오였다.
리델하트는 원래도 염세적인 성격. 온갖 사람을 혐오하고 있으니까.
‘쥬웰’이라면 리델하트가 충분히 혐오할 만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넘기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리델하트 오라버니가 이런 저열한 혐오를 겉으로 드러냈다고? 이상해.’
더구나 그녀는 리델하트의 음성에 담긴 깊은 증오를 놓치지 않았다.
단순한 혐오가 아니었다.
분명 깊은 증오가 섞여 있었다.
‘……설마, 내 죽음에 관해 무언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쥬웰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리델하트는 에메랄드 공작가의 일원이다. 에스텔레의 죽음의 전모를 알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쥬웰’을 원수로 여기고 있을 터.
성전에서 보인 증오가 설명되었다.
‘……아니야. 확실하지 않아. 이건 흑사병 일이 마무리되고 알아보자.’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니 일단 덮어두었다.
답답한 마음을 떨치기 위해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마차는 남부 지방에 들어선 상태였다.
‘남부 지방은 오랜만이네.’
쥬웰은 밖의 풍경을 보며 살짝 반갑다는 마음이 들었다.
에스텔레 때, 그녀는 제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남부 지방에도 여러 차례 온 적이 있었다.
‘분위기는…… 조금 달라졌네.’
원래 남부 지방 사람들은 쾌활하고 밝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차 밖에서 보이는 풍경은 전혀 달랐다.
삭막하고 어두운 눈빛들이었다.
‘3년 전보다 훨씬 더 궁핍해졌어.’
특히 쥬웰은 마차에 그려진 가넷가의 문양을 향해 백성들이 보이는 적대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럴 만하지. 지금 저들이 이토록 궁핍해진 건 여섯 공작가. 특히 가넷 공작가와 다이아 공작가, 에메랄드 공작가의 영향이 크니까.’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로튼 백작이 제국의 재상이 된 건 3년 전이다. 이후, 어마어마한 전횡을 저지른 것 같다. 겨우 3년 만에 백성들의 삶이 이토록 피폐해진 걸 보면 말이다.
‘백성들의 궁핍이야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쥬웰은 무심히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곤란하지.’
토른 공작에게 말했듯, 가넷가가 다른 공작가를 압도할 힘을 가지려면 민심을 얻어야 했다.
‘내가 이번 흑사병을 해결하면 한결 분위기가 나아지겠지.’
쥬웰은 바셋 지방에서 자신이 하려는 일을 떠올리고는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성녀로서 바셋 지방에 가는 게 아니었다.
도리어 악마가 될 예정이다.
커다란 피를 흘릴 것이다.
그녀가 흘린 피가 거리를 자욱하게 물들이리라.
솔직히 내키지는 않지만, 해야 했다.
백성들을 위해?
전혀. 오로지 그녀의 목표를 위해.
이번 일로 그녀는 목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것이다.
“곧 바셋 지방입니다, 남작님.”
리샤크가 말했다. 주변에 보는 이가 많아 공식적인 직함을 말했다. 이제 그녀는 바톤 남작이었으니까.
먼 거리를 오는 거라 이번엔 리샤크 말고도 따르는 호위 인원이 많았다.
무려 쉰 명에 달하는 기사가 함께하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커다란 성이 보였다.
흑사병이 창궐하는 바셋 성이었다.
‘흐음.’
쥬웰은 팔짱을 꼈다.
멀리서도 어두운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영안을 여니, 수많은 사람의 영혼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일반 기사들도 본능적으로 그런 기운을 느꼈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쥬웰은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리샤크와 소수의 인원만 나와 함께하고,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하도록.”
“남작님?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기사들이 곤란한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다 따라오면 내가 몰래 활동하기 불편해.’
그런 사실을 말할 수는 없으니, 대신 이렇게 말했다.
“왜? 다 함께 들어와서 사이좋게 흑사병에 걸리기라도 하게? 어차피 저 안에서는 그대들이 도움 될 게 없지 않나?”
“……하지만 흑사병이 위험한 건 남작님께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기사단의 책임자 라이져 경이 말했다.
그는 토른 공작의 직속 기사로, 쥬웰을 지키라는 토른 공작의 엄명을 받았다.
“그래, 나도 위험하긴 하지.”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나 흑마도사라고 흑사병에 안 걸리는 건 아니었다. 성녀의 경우에는 더욱 취약했다. 바로 옆에서 환자를 보니까.
실제로, 에스텔레 시절 흑사병을 치료하다가 도리어 전염되어 사경을 헤맨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난 소가넷이다. 가넷가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 이 자리에 온 것이다.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
“하지만 그대들은 가넷의 소중한 검들이 아닌가? 한 명의 헛된 희생자도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바로 가넷가를 위한 일이야. 그러니 그대들은 스스로의 몸을 살피도록.”
그 담담한 말에 기사들이 울컥하였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저 작은 소녀는 가넷의 명예를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감수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을 가넷의 소중한 검이라 표현하며 걱정해 주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소주(小主)가 저렇단 말인가?
‘변하셨다는 소문이 정말이었어.’
아니, 단순히 변한 수준이 아니다.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기사들의 책임자, 라이져 경의 머리에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런 분이 가넷가의 다음 주인이 되면, 어쩌면 가넷가는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할지도.’
토른 공작 때 가넷가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그가 침상에 누워 있는 3년 동안 로튼 백작이 이끌던 가넷가는 보이지 않게 위용이 흔들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더욱 화려해졌지만, 속으로는 내실이 부실해졌다.
하지만 저 소녀가 가넷을 이끌게 된다면?
‘과연, 어떨지 궁금하군.’
그렇게 생각한 라이져 경은 쥬웰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남작님을 호위할 최소 인원은 함께해야 합니다. 저와 리샤크, 그리고 세 명의 기사가 함께하겠습니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섯 명 정도면 흑사병에 걸려도 내 성력으로 치료해 낼 수 있는 범위니까.’
“그리고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무엇인가?”
라이져 경은 똑바로 쥬웰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장 중요한 건 남작님의 안위입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선명한 걱정.
쥬웰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절대로 죽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주지.”
흑사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
아니,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높은 확률로 전염될 것이다.
그래도 큰 상관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몸에 불사의 저주를 걸었으니까. 흑사병 따위는 그녀의 목숨을 위협할 수 없다.
그냥 조금 아프고 일어나면 되니, 저들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뭐, 흑사병에 걸려 아프고 일어나는 것도 괜찮겠지. 더욱 감동적인 스토리가 될 테니까. 민심을 홀리는 데 효과적일 거야.’
그렇게 마차가 바셋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 밖에서 봤을 때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거리 여기저기 시체가 놓여 있었고, 텅 빈 거리가 보였다.
“윽.”
그 참혹한 광경에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 타고 있던 해밀턴의 안색도 하얘졌다.
오로지 단 한 명.
쥬웰만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런 광경을 에스텔레 시절 숱하게 보았다.
‘흑사병만 벌써 네 번째이니까.’
그러고 보니 그녀가 경험한 흑사병 모두 인간들이 창궐시킨 것이었다.
‘때로는 인간들이 악마보다 더 끔찍하니까.’
비단 흑사병만이 아니다.
그녀는 성녀 시절, 이런 참혹한 광경을 숱하게 목격했다.
인간이 만든 지옥.
게헨나보다 더욱 게헨나 같은 광경.
‘내가 알 바 아니지.’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
여기서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한 이득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미 무대와 배역을 준비해 놓았다.
연극이 끝난 후 무대의 막이 내리면 그녀는 수많은 이득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도착했습니다. 환자들이 있는 성전입니다.”
“……저게 성전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성전…… 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성전은 무너져 있었다.
“……폭동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흑사병이 유행하는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런 것 같군. 그래도 신관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근처 마련된 천막에서 나이 지긋한 노인 한 명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쥬, 쥬웰 성녀님이십니까? 새로 바셋 지구에 파견 나온 조스터 신관이라고 합니다!”
조스터.
노인 신관을 보는 쥬웰의 눈이 일순 반짝였다.
일전 에스텔레 때 알던 이였다.
그녀는 무려 15년 가까이 성녀로 활동했으니, 웬만한 신관은 다 안면이 있었다.
‘조스터 신관이면…… 썩어빠진 신전에서 드물게 올곧은 이였지. 그러니 이런 곳에 있는 것이겠지만.’
자, 여기서 하나 질문.
에메랄드 공작가는 이번 흑사병 사태의 원인을 모를까?
절대로. 잘 알고 있다.
알고 방관하는 것이다.
왜?
로튼 백작과 매리엇에게 뒷돈을 받아 챙길 테니까.
그러니 이런 흑사병 유행 지역에는 평소 올곧아 미움받는 이가 파견 나가게 되어 있다.
이전 에스텔레처럼 말이다.
조스터 신관은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붉혔다.
“그렇지 않아도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명성 높은 쥬웰 성녀님이 와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환자들도 쥬웰 성녀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
“글쎄요. 돕긴 하겠지만, 과연 제가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네?”
조스터 신관이 눈을 크게 떴다.
쥬웰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폐허처럼 변해 있는 광경.
수많은 이가 절망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저들을 도와주러 온 게 아니었다.
그녀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얻을 이득뿐.
그래서 서슴없이 하였다.
끔찍한 거짓말을.
“사실 신탁을 내려받았거든요.”
“시, 신탁 말입니까?”
조스터의 눈이 커졌다.
신탁.
성녀나 성자가 낙원, 에덴의 음성을 내려받는 것.
물론 당연히 거짓말이다.
악마인 그녀에게 무슨 신탁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신탁조차 태연히 거짓말할 수 있었다.
“네, 기도 중에 계시가 있었어요.”
“무, 무엇입니까?”
“신의 분노가 임해 바셋 지방을 멸망시킬 거라고요.”
“……!”
“그만이 아니에요. 이 흑사병은 곧 제국 전역으로 퍼질 거라 하였어요.”
그 끔찍한 이야기에 장내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공포에 덮인 경악이 주변을 휩쓸었다.
“아, 안 돼! 우리는 모두 죽을 거야!”
“살려줘!”
아무도 쥬웰의 말을 의심할 생각을 못 했다.
왜?
신탁이니까.
신의 음성을 거짓되게 읊는 이는 영혼에 끔찍한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니 어떤 못된 신관도 신탁을 거짓되게 읊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뭐, 쥬웰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녀의 영혼은 저주받을 대로 저주받았으니.
‘역시 예상대로의 반응.’
쥬웰은 만족스럽게 사람들의 공포 섞인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굳이 거짓 신탁을 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벌일 일의 파급력을 최대한 극대화하기 위해서.
‘최대한 이번 일의 규모를 키워야 해. 그래야 내가 일으킬 ‘기적’이 더욱 크게 주목받지.’
이제 이번 흑사병은 단순히 바셋 지방을 넘어, 제국 전체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제국의 모든 이가 이번 흑사병 사태를 주목하게 될 것이고, 일이 끝난 후 그녀가 얻을 이득도 더욱 커다래질 것이다.
“아아. 도, 도대체 이를 어찌하면…… 아아! 신이여!”
조스터 신관은 절망 속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치 신의 분노가 이미 임하기라도 한 듯한 절망이었다.
그때, 쥬웰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하지만 제가 막아보겠어요.”
“……네?”
노신관 조스터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뜻이었다.
“신의 분노. 성녀인 제가 막아보겠다고요.”
모두가 놀라 쥬웰을 바라보았다.
쥬웰은 ‘성녀’로서 숭고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7일간. 고행 기도를 하겠어요. 7일간의 기도가 끝나면 위대한 빛께서도 분노를 거두어주실 거로 믿어요.”
바셋 지방에서 그녀가 저지를 끔찍한 일의 첫 단계.
그건, 바로 ‘빛의 천사’로 위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제국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바셋의 기적’이 시작되었다.
고행 기도.
7일간 기도를 이어서 하는 것이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쭈욱 이어서 무릎을 꿇고.
어마어마하게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그래서 이름이 고행 기도였다.
하지만 너무 괴로운 고행이었기에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에스텔레 성녀 말고는 단 한 명도 7일간의 고행 기도를 완수해 낸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에메랄드가의 신관들은 은근슬쩍 고행 기도의 뜻을 바꾸었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하는 기도로.
딱딱한 바닥에서 여덟 시간씩 무릎을 꿇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일이기에 고행 기도란 명칭에 충분하긴 했다.
그래서 쥬웰도 그 의미에 따랐다.
‘7일간 이어서 기도하는 것 따위를 못 할 거야 없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야.’
대신 다른 일을 하였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여덟 시간은 환자를 치료했다.
늦은 오후부터 자정까지 여덟 시간은 무너진 성전에서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잠을 자고 나온 후, 같은 일을 반복하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수많은 이가 감동하였다.
“정말…… 위대한 성녀님이셔.”
“내 딸이 저분 덕분에 살 수 있었어. 이제 우리 가족은 저분을 평생 은인으로 여길 거야.”
쥬웰은 이왕 빛의 천사로 가장할 거, 최대한 철저히 했다. 모두가 속아 넘어가게.
환자를 치료할 때는 따뜻하게.
기도할 때는 숭고하게.
어려울 것 없었다. 성녀의 모습을 가장하는 건 그녀에게는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수많은 이가 그녀에게 감동하였고, 이런 마음을 품게 되었다.
“저런 분의 기도라면…… 신께서도 진노를 거두지 않으실까?”
“맞아. 쥬웰 성녀님이라면 기적을 일으킬지도 몰라.”
그렇게 쥬웰의 이름이 순식간에 바셋 지방을 넘어 퍼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성전 근처에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짙은 적발.
환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강인한 인상의 아름다운 남자였다.
단단하게 붙은 옷 안으로 비치는 몸의 굴곡도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남자의 입에서 놀라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 이렇게 남이나 훔쳐보고 있다니. 혁명군을 살필 시간도 부족한데.”
혁명군.
남부 지역 반란군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렇다.
남자의 이름은 필바하.
혁명군을 이끄는 수장, 적사자였다.
하지만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필바하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약혼녀님께서 시킨 일이니, 따를 수밖에.”
약혼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필바하를 바셋 지방에 오게 한 건 황태자 오펜하임의 현 약혼녀 쥬웰의 부탁 때문이다.
그런데 필바하의 입에서 ‘약혼녀’란 말이 나오다니?
곧 답이 흘러나왔다.
“설마, 쥬웰이 황태자인 내가 적사자 필바하와 동일인이란 것을 눈치채고 있는 건 아니겠지?”
충격을 넘어 경악스러운 이야기였다.
황태자 오펜하임과 적사자 필바하가 동일인이라니!
다른 이가 들으면 미쳤다고 할 이야기였다.
일단, 둘의 외모는 판이하게 달랐다.
오펜하임은 선이 여려서 여인같이 고운 인상이었고, 필바하는 선이 강해 신화 속 영웅처럼 각지고 강인한 외모였다.
하지만 필바하…… 아니, 오펜하임이 방금 한 말은 사실이었다.
‘외모를 바꾸는 거야, 내 달의 능력이면 어려운 일이 아니니.’
셀레네.
황가의 가문 명이었다.
그들은 ‘달의 능력, 월장력(月長力)’이라고 불리는 고유한 능력을 타고나며 마법으로 설명 안 되는 여러 신비한 능력을 발현한다.
그리고 황태자 오펜하임은 초대 황제 이후로 가장 뛰어난 월장력을 타고났다.
여러 달의 능력을 타고났는데, 그중 하나가 외모를 바꾸는 거였다.
오펜하임은 자신의 여인 같은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어 아예 정반대의 각진 인상의 외모로 바꾸어 적사자 필바하가 된 것이다!
자세히 보면, 오펜하임의 행동 습관과 지금 필바하의 움직임에 유사한 점이 있었다.
호탕한 듯, 큼직큼직한 행동이 그러했다.
하지만 외모야 바꿀 수 있다지만 설명되지 않는 점들이 있었다.
일단 거리였다.
황태자 오펜하임은 황궁에 있는데, 어떻게 이 먼 남부에 훌쩍 나타났단 말인가?
이 문제에 관한 답은 역시나 월장력에 있었다.
‘난 달의 힘을 이용해 월광이 비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으니까.’
누가 들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이야기였다.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니!
오펜하임이 초대 황제 이후로 가장 강한 능력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오펜하임은 평소에는 황궁에 머물다가 모두가 잠들었을 때 이동해 혁명군의 신비한 지도자 역할을 해냈다.
‘여섯 공작가를 무너뜨릴 때까지 이 이중생활은 계속되겠지.’
필바하, 아니, 오펜하임은 생각하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이중생활은 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구태여 황태자이면서 반란군의 수괴 역할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여섯 공작가를 무너뜨려야 하니까.’
내부에서는 황태자로서.
외부에서는 반란군을 이끌어 여섯 공작가를 무너뜨릴 심산이었다.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쥬웰은 왜 날 부른 거지?’
오펜하임은 지그시 거리를 격해 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조그맣고, 마치 밤의 요정과도 같은 아름다운 소녀.
하지만 내면은 마냥 요정처럼 순백하지 않다.
칼날처럼 강하며, 동시에 빛처럼 숭고한 내면을 지니고 있었다.
‘왜 불렀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이유 없이 부르진 않았을 테니.’
가서 알은척해야 하나 싶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필바하는 특급 현상 수배범이다. 모습을 드러내는 건 곤란했다.
‘그나저나.’
오펜하임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저렇게 환자들에게 붙어서 치료하다니. 흑사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는 환자를 치료하는 쥬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온통 흑사병 환자 천지인 곳에서 거침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전염되는 건 아랑곳하지 않는 듯, 환자들을 위하였다.
환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지만 오펜하임은 속이 타들어 갔다.
그녀는 그의 약혼녀였으니까.
아니, 약혼 관계인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제 오펜하임은 쥬웰을 진심으로 바라보고 있다.
‘제길, 내가 힘이 있다면, 약혼녀가 저런 위험을 감수하게 놔두지 않았을 텐데.’
오펜하임은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환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만 문제인 게 아니었다.
쥬웰은 지금 어마어마한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정신없이 환자를 치료하고, 밤에는 차가운 돌바닥에서 기도를 한다.
심지어 성전이 무너져 차가운 밤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다. 날씨도 추운데!
고행 기도라 따뜻한 외투를 입는 것도 안 된다. 걸친 건 얇은 하얀 원피스뿐이다.
이대로는 흑사병이 아니라 어떤 병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다.
‘빌어먹을.’
오펜하임은 욕설을 내뱉었다.
쥬웰은 전혀 힘들지 않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렸다.
‘무언가 뜻을 위해 저렇게 강한 의지를 품고 있는 거겠지.’
사실, 오펜하임은 쥬웰이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언지 모른다.
그저 그녀가 가넷의 왕이 되고, 다른 공작가를 무너뜨려 새 시대를 열고 싶어 한다는 것만 안다.
어쨌든 어떤 도움도 안 되고, 약혼녀가 저리 괴로움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비참하고 괴로웠다.
한편, 그때 다른 곳에서 비슷한 시선으로 쥬웰을 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녀의 또 다른 약혼자, 유스넨이었다!
“…….”
유스넨은 한없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쥬웰을 보고 있었다.
평소 부드러운 표정과 다르게 그의 얼굴은 딱딱했다.
다만 오펜하임과 이유는 달랐다. 그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왜 저런 일을 하고 있는 거지? 고행 기도를 한다고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텐데?’
이번 사태의 원인은 흑마도사들이다.
기도한다고 나아질 게 전혀 없었다.
흑사병을 해결하려면 흑마도사들을 처단해야 했다.
‘그녀가 이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녀는 강대한 어둠의 존재다.
당연히 이번 사태의 배경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런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혹시, 사태를 더욱 키우려는 건가?’
유스넨은 날카롭게 생각하였다.
‘그녀의 신탁 이야기로 주변이 온통 공포에 빠졌어. 혹시 일부러 노린 건가?’
그럴 수도 있다.
그녀가 만약 사람들이 공포에 빠지길 노린 거라면, 아주 성공적인 계책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건가?’
유스넨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환자를 보는 그녀의 모습 때문이다.
여전히 진심이 가득했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거짓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는 장면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따뜻했다.
더구나 기도는?
하얀 원피스만 입고 추위에 굴복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은 한없이 거룩했다.
유스넨은 지금껏 수많은 신관을 보았지만, 저토록 진실한 기도를 하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어떤 빛보다 더욱 빛 같은 어둠이었다.
도대체 이 괴리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유스넨은 더구나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닮았어.’
그녀가 환자를 대하는 모습은 자꾸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였다.
“……나의 빛…… 에스텔레.”
유스넨은 신음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 이름을 읊는 순간, 가슴이 칼로 찌르듯 아려왔다.
물론 쥬웰과 에스텔레는 전혀 다른 존재다.
행동거지도 전혀 에스텔레를 떠올리게 하는 바가 없었다.
단, 환자를 진심으로 위하는 모습.
거룩한 기도.
그것들이 에스텔레를 떠올리게 하였다.
그가 알기로 저토록 진심으로 환자를 위하며, 거룩한 기도를 하는 이는 에스텔레밖에 없었으니까.
심지어 닮은 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자신을 아끼지 않는 모습.
‘……나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유스넨과 에스텔레는 6개월의 시간을 같이 보냈다.
에스텔레는 그 중간중간 다른 일을 하러 떠났고, 항상 상처를 입어서 왔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말이다.
하지만 늘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였다.
그게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고통을 많이 겪어 오히려 고통에 둔감해진 것이란 걸 나중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반복된 고통에 대한 체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에스텔레와 쥬웰은 완벽히 다른 존재이면서도, 묘하게 닮았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그가 쥬웰을 보며 이토록 아릿함을 느끼는 건.
“하아.”
유스넨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지금 확실한 건 쥬웰이 아픈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오늘도 추위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도하는 쥬웰을 보는 유스넨의 가슴이 시리도록 가라앉았다.
* * *
6일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참고로, 해밀턴은 바셋 성에 오자마자 사라진 뒤 보이지 않았다. 가넷가의 기사들이 찾으려 했지만 쥬웰이 만류했다.
“해밀턴 오라버니는 내 부탁을 받고 다른 일을 하러 갔어. 나중에 올 거야.”
“아, 그렇습니까?”
쥬웰과 해밀턴이 각별한(?) 사촌 사이인 건 유명한 사실.
기사들은 해밀턴의 걱정을 접었다.
어쨌든 지금 걱정되는 건 해밀턴이 아니라 쥬웰이었다.
쥬웰은 지금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리샤크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쥬웰의 안색은 이제 하얗다 못해 시체처럼 창백했다.
“안 되겠습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리샤크.”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왜 그렇게 맨날!”
리샤크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외치다가 입을 다물었다.
쥬웰이 쿡쿡 웃은 것이다.
“아가씨?”
“아니, 미안. 웃으려 한 게 아니라, 걱정해 주니 고마워서.”
쥬웰은 진심으로 웃었다.
“고마워, 걱정해 주어서.”
왜일까?
그 미소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져 리샤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라이져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리샤크의 말이 맞습니다. 이제는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그만하십시오.”
라이져 경이 강하게 말했다.
“전 가주님께 아가씨의 안전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에 있어서 제 의견은 가주님의 말씀과 동일한 권한을 갖습니다.”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쥬웰은 여전히 옅게 웃은 채 말했다.
“라이져 경도 고맙군. 그렇게 날 걱정해 주다니.”
“아가씨!”
“하지만 글쎄. 내가 아는 가주님은 내가 끝까지 일을 완수하길 바랄 것 같은데. 설사 기도하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
라이져 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 상상해 봐. 내가 7일간의 고행 기도를 하고서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면.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어마어마한 파란이 일겠지요.”
“그래, 나는 기도로 신의 진노를 물리친 기적의 성녀가 될 거고, 가넷 공작가의 이름은 하늘 높이 치솟게 될 거야.”
쥬웰은 여전히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강하게 말했다.
사실 지나친 강행군으로 몸에 많이 무리가 오긴 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난 설사 성전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기도를 마무리해야 해. 알겠나?”
“…….”
라이져 경과 리샤크는 결국 더는 쥬웰을 만류하지 못했다.
“……정말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겁니까?”
“어떨 것 같아?”
“모르겠습니다. 흑사병을 해결하는 건, 에스텔레 성녀도 못 한 일이니까요.”
에스텔레 때.
그녀는 흑사병을 해결하기 위해 7일간의 고행 기도를 했다.
지금처럼 약식 고행 기도가 아닌, 정말 7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기도를 한 것이다.
물론 당연히 실패했다.
흑마도사가 일으킨 흑사병이 기도로 해결될 리가.
흑사병의 원인이 흑마도사라는 건, 여섯 공작가 중에서도 최고 수뇌부만 아는 사실이라 그런 실책을 저질렀던 것이다.
라이져 경도 이번 흑사병의 원인이 흑마도사란 건 모르고 있다.
“……하지만 아가씨라면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쥬웰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를 거야. 난 에스텔레보다 위대한 성녀가 될 거니까.”
쥬엘은 성전에 가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싸늘한 돌바닥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차가운 건 바닥만이 아니다.
하필 더더욱 추워지기 시작한 바람이 그녀의 몸을 때렸다.
얇은 원피스 안으로 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피부가 칼로 베이는 듯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를 하려는 순간.
무언가 따뜻한 게 그녀를 덮었다.
망토였다.
“……리샤크?”
그가 자신의 망토를 그녀에게 덮어준 것이다.
“이러면 안 돼. 난 고행 기도 중이라고.”
고행 기도 중에 보온성 옷은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리샤크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위대한 빛께서도 이 정도는 눈감아주실 겁니다. 아가씨가 얼마나 착하신데요. 안 넘어가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하긴. 신께서도 이 정도는 넘어가 줄 것이다.
지금껏 그리 끔찍한 일을 겪고도 그녀는 신께 단 한 번도 원망을 품지 않았으니.
그녀를 티끌만큼이라도 가련히 여긴다면, 이 정도의 잘못쯤이야 백 번이고 넘어가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늘 하던 기도를 하였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나니.
저를 가련히 여긴다면.
제가 저지를 죄악을 용서하길.
원수들에게 끔찍한 최후를 선사해 주길.
부디. 부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마시길.
그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얼마나 기도한 후일까?
주룩.
일주일간 거듭된 기도 끝에 그녀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처연한 눈물이었다.
그리고.
댕! 댕!
종이 울렸다.
자정이 된 것이다.
일주일간 지속한 고행 기도의 끝이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성녀님.”
조스터 신관이 눈시울을 붉히며 다가왔다.
“시, 신께서도 성녀님의 간절한 기도를 들었을 거라 믿습니다.”
쥬웰은 옅게 미소 지었다.
‘글쎄. 과연.’
여하튼 확실한 건 있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흑사병은 사라질 거예요.”
“저, 정말입니까?”
그 확신 어린 말에 조스터 신관의 눈이 커졌다.
“설마 신의 음성을 들은 겁니까?”
“네.”
거짓말이다.
그런 음성 따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고?
‘이제 내가 직접 기적을 일으킬 테니까.’
쥬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일 아침이면 흑사병은 모두 사라질 테니, 다들 이제 안심하세요.”
“아아!”
그 말을 들은 이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고, 곧 성안이 떠들썩해졌다.
쥬웰이 주변 기사들에게 말했다.
“라이져 경. 오늘은 성의 사람들을 봐주겠나? 내 이야기를 듣고 흥분한 사람들이 괜한 사고를 일으킬까 염려가 되는군.”
“아가씨께서는?”
“리샤크와 함께 숙소로 돌아갈게. 피곤해.”
쥬웰의 안색은 이제 파리하다 못해 시체 같았다.
라이져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샤크라면 경호에 충분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부디 편히 쉬시길.”
대답한 라이져 경은 주저하다가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이번 일주일간 남작님께서 보이신 모습에 경의를 표합니다.”
쥬웰은 픽 웃었다.
경의라.
그녀가 한 일은. 그리고 이제 곧 벌일 일은 그런 말을 들을 행동이 아니었다.
“그리 말해주어 고맙군. 수고하도록.”
그녀가 머무는 숙소는 성전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곳의 빈집이었다.
리샤크와 함께 걸어가는데 그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아가씨의 이번 행동, 경의를 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응?”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지금 안색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된다는 거지? 흐음, 정말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 지금 저는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장난이 아닌데?”
쥬웰이 빨간 눈으로 리샤크를 바라보았다.
리샤크는 흠칫하였다.
쥬웰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보석 같은 눈빛이 지금은 섬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가씨?”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봐, 리샤크.”
“……!”
스멀스멀.
악마화가 쥬웰의 눈가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신 조작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자, 착하지, 리샤크.”
“아…… 아가…… 씨.”
리샤크는 저항해 보려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세뇌를 걸어놓았던 탓에 훨씬 쉽게 그는 정신 조작에 굴복했다.
리샤크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리샤크, 너는 날 좋아하는 착한 아이이니, 내가 지금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거지?”
“……네.”
“그래, 나는 이제부터 이 숙소에서 잠들 거야. 어디도 가지 않고 이 숙소에 있을 테니 안심해도 돼. 잘 알았지?”
“……네.”
됐다.
완전히 조작이 먹혀들었다.
이제 리샤크는 그녀가 밖으로 나가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안에서 잠들었다고 믿을 것이다.
‘미안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정신에 생채기가 남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조작을 걸고 있으니 후유증은 없을 것이다.
“너도 오늘은 돌아가 편히 쉬도록 해. 알았지?”
“……그건…… 위험…… 아가씨를 지켜…… 야…….”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 쓸데없이 강한 정신력.’
그녀의 미간에 악마화가 한 송이 더 피어올랐다.
“난 네가 편히 쉬었으면 좋겠어. 난 너를 아끼니까. 그러니 내 부탁을 들어줄래?”
결국, 리샤크는 굴복했다.
“……네.”
그렇게 리샤크를 해결한 쥬웰은 숙소로 들어갔다.
‘기적’을 일으키러 가기 전 준비할 게 있었다.
일단 하얀 원피스를 벗었다.
그녀가 곧 할 일은 하얀 옷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하얀 옷에 피가 묻으면 티가 너무 났다.
대신, 짙은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피가 튀어도 티가 나지 않게.
그리고 평소 하고 다니던 기다란 은사슬 목걸이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소품’ 하나를 꺼낸 순간, 마침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들려왔다.
[끄아아아아아악!]
해밀턴의 음성이었다.
그녀와 해밀턴은 권속 관계라 멀리서도 이렇게 의사를 전달하는 게 가능했다.
[살려주세요, 쥬웰 님! 저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제발요! 끄아아아악!]
한없이 다급한 음성.
하지만 쥬웰은 태연한 안색이었다.
사실…… 그녀는 해밀턴의 이런 비명을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전해 듣고 있었다.
그래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때가 무르익지 않았으니까.
[끄악! 제발! 제발! 이제는 진짜예요! 이놈들 정말 저 죽일 거 같아요! 제발! 살려주세요, 쥬웰 공주님!]
공주님.
그 ‘약속 단어’를 들은 쥬웰은 소품에 손을 가져갔다.
표정 없는 무면(無面)의 하얀 가면이었다.
그 가면을 얼굴에 쓰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흑발에 옅은 핏빛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그녀의 흑발은 어둠을 집어삼킨 듯 짙은 흑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핏빛을 닮은 붉은 빛이 요요하게 감돌았다. 변한 건 그만이 아니었다.
“제대로 되었군.”
목소리도 변하였다. 조금 더 굵고 허스키하게. 목소리만으로는 누구도 쥬웰이란 걸 떠올리지 못할 음성이었다.
또한, 눈동자 색도 변하였다. 핏빛의 보석안에서 적색이 사라졌다. 붉은색이 사라진 눈동자는 짙은 암흑으로 가득했다. 마치 흑요석처럼.
그녀는 작은 주머니칼을 들어 손가락을 베었다.
뚝. 뚝.
피가 바닥에 떨어졌고, 또다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파앗!
피가 녹아 들어간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목이 없는 유령 말이 나타난 것이다.
팬텀 스티드(Phantom steed).
게헨나의 악마들이 부리는 말이었다.
[아악! 공주님! 어서요!]
“기다려. 지금 갈 테니.”
그녀는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해밀턴이 있는 곳.
백마 탄 공주님이 되어 쓰레기 못난이 왕자님을 구할 차례였다.
* * *
“어엉. 흑. 흑.”
그때, 해밀턴은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납치당한 상태이니까.
그것도 연쇄 살인범보다 무시무시한 이들한테.
해밀턴을 납치한 이들은 바로 흑마도사들이었다!
‘으아아. 무서워. 쥬, 쥬웰 님은 언제 오는 거야. 끄아아.’
해밀턴은 공포에 질려 훌쩍거렸다.
한편, 해밀턴을 납치한 흑마도사들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저 새끼는 무슨 강단으로 우리를 찾았지?”
“미친 하룻강아지도 아니고.”
흑마도사들이 일부러 해밀턴을 납치한 건 아니었다.
사실, 이 납치는 해밀턴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는 지난 일주일간 쥬웰의 명에 따라 뒷골목에서 흑마도사들의 행방을 찾았고, 그 모습이 흑마도사들을 자극해 납치당한 것이다.
“어쨌든 죽일까?”
“가넷가의 로튼 백작의 아들이라며?”
“그래서? 우리가 그의 아들을 보호해줘야 할 이유가 있어?”
“……그건 없지. 그래도 큰 고객인데, 괜히 척을 질 필요는 없잖아? 더구나 가넷가는 무섭다고. 척살대를 보내면 어떻게 해?”
“아니야. 이놈 로튼 백작이 내놓은 아들이라고 들었어. 그냥 죽여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냥 조금 고문만 하는 건 어때?”
납치한 지 벌써 삼 일.
흑마도사들은 그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죽일까? 말까? 이런 주제로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들이 한마디할 때마다 해밀턴이 기절할 것 같은 반응을 보며 즐기는 중이었다.
“아, 어쨌든 지겹네. 카비우스 님께서는 별다른 말씀 없으시지?”
“응, 철저히 숨어 있으라는 말밖에.”
카비우스.
십마(十魔)의 일인으로 이번 흑사병을 일으킨 최고위 흑마도사였다.
“저놈은?”
“저놈에 대해서는 별말씀 안 하셨어. 아예 신경 안 쓰는 것 같던데.”
“그러면 진짜 죽일까?”
한 흑마도사가 시커멓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조금 고문만 하고 있자.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상대의 눈빛을 본 해밀턴은 딸꾹질하였다.
‘저 새끼, 진짜 미친놈이야.’
해밀턴 자신도 나쁜 놈이었지만, 상대는 나쁜 놈을 능가하는 미친놈이었다.
결국, 그는 외쳤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왔을 때 내지르기로 한 약속 단어, ‘공주님’을.
‘끄아아악! 살려주세요, 쥬웰 공주님! 저 죽어요!’
하지만 그렇게 외쳤음에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미친놈이 단도를 들고 해밀턴에게 다가왔다.
“자, 귀염둥이. 그러면 우리 진한 대화를 나누어볼까?”
“꺼, 꺼억. 나, 나는…… 제, 제발…….”
미친 흑마도사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때 미친 흑마도사의 목에 한 줄기 선이 그어졌다.
“어?”
목에서 느껴지는 정체 모를 이질감에 흑마도사가 의문성을 토해냈다.
섬뜩하고, 차가웠다. 그리고 아팠다.
‘아파?’
그리고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파아앗!
피를 흘리며 흑마도사가 쓰러졌다.
“……!”
은신처에 있던 흑마도사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무슨?!”
“누구냐!”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목 없는 유령 말을 타고 나타난 가면을 쓴 어둠의 존재를.
단색의 짙은 검은 드레스.
손에는 치렁치렁한 은빛 목걸이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하얀 가면과 대조되는 흑발이 핏빛으로 빛났다.
“누, 누구?”
어둠의 존재, 쥬웰이 무심하게 말했다.
“너희를 지옥에 보낼 악마.”
“뭐, 뭐?”
그들이 물었지만, 쥬웰은 대화를 더 이어나가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러 온 게 아니니까.
쥬웰의 손에 들린 은빛 목걸이가 온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파밧!
피의 폭풍이 몰아쳤다.
흑마도사들은 놀란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고, 은신처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렇다.
쥬웰이 계획한 끔찍한 기적.
그건 이번 흑사병 사태를 일으킨 흑마도사들을 모조리 참살하는 것이다.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말이다.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흑마도사들은 모조리 죽음을 맞게 되리라.
* * *
째각. 째각.
시간이 흘렀다.
첫 처단 이후, 얼마나 지났을까?
바셋 성의 뒷골목은 피로 물들고 있었다.
“어, 어…… 끄어어…….”
한 흑마도사가 신음과 함께 목을 떨구었다. 죽은 것이다.
“스물여섯.”
쥬웰은 무심히 숫자를 카운트했다.
지금껏 죽인 흑마도사의 숫자였다.
옆에 있던 다른 흑마도사가 덜덜 떨며 빌었다.
“사, 살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은빛 목걸이가 번뜩였고, 피 분수와 함께 다른 흑마도사도 털썩 무릎을 꿇었다.
“스물일곱.”
‘앞으로 서른아홉 명 남은 건가?’
흑사병을 소환한 흑마도사는 총 예순여섯 명이었다.
그들을 모조리 죽여야 흑사병은 사라진다.
어려울 것 없었다.
어차피 대다수의 흑마도사는 잔챙이들이었으니까.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녀가 지금 처단하는 흑마도사들은 모두 끔찍한 짓을 저지른 악인들이니 죽여 없앤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할 건가?
‘모든 흑마도사가 고결한 영혼을 지닌 건 아니니까.’
사실 대다수의 흑마도사는 힘과 탐욕을 갈구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다.
고결한 영혼을 지닌 흑마도사는 극히 일부. 대신, 그런 이들은 악마의 사랑을 받아 고위 흑마도사가 된다.
이런 잔챙이 흑마도사들은 동정할 가치도 없는 끔찍한 악인들이다.
따라서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벌레를 잡아 죽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살려두어 봤자, 하등 세상에 좋을 것 없는 벌레를 청소하는 일.
하지만 한 명, 한 명 손을 써나갈 때마다, 검은 드레스가 피로 물들어갈수록 쥬웰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피곤해.’
쥬웰은 그 이유를 피로로 생각했다.
일주일간 지독히 무리했으니까.
사실 내색은 안 했지만 몸도 아팠다. 한기가 들고, 열도 끓고 있었다. 당장 쓰러져 눕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러니 너무 피곤해서 지금처럼 더러운 기분이 드는 걸 것이다.
“왜, 왜? 우리에게 이러시는 겁니까? 마왕이여! 당신도 어둠의 존재 아닙니까?”
한 흑마도사가 절규했다.
“왜?”
쥬웰이 가면 속에서 무표정하게 반문했다.
“너희야말로 왜 그랬니?”
“……!”
“너희 벌레들 때문에 내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잖아. 왜…….”
왜.
왜 내가 구태여 이런 일을 하게 만들어.
왜 이런 더러운 기분이 들게 만들어.
파아앗!
절규하던 흑마도사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스물여덟.”
“사, 사, 사…….”
다른 흑마도사가 벌벌 떨었다.
파라락.
은빛 목걸이가 그 흑마도사의 목을 감쌌다.
“말해. 다른 놈들이 어디 있는지. 말하면 편히 죽게 해줄게.”
흑마도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 절대로 발설하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쥬웰이 손에 힘을 쥐자, 목걸이가 목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나 피곤해. 빨리 끝내자.”
쥬웰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가서 쉬고 싶어.”
* * *
한편, 그때.
그런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유스넨이었다!
그는 쥬웰이 가면을 쓰고 거처에서 나왔을 때부터 뒤를 미행하고 있었다.
반면, 쥬웰은 유스넨의 미행을 눈치채지 못했다.
기척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유스넨의 천사의 능력 때문이었다.
‘설마, 이런 일을 하다니.’
유스넨은 숨을 들이켰다.
쥬웰이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런 일이라니.
‘끔찍한…….’
사망한 흑마도사의 시체를 보며, 유스넨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손속이었다.
쥬웰은 마치 벌레를 눌러 죽이듯 무감정하게 끔찍한 일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뭐가 끔찍하지?
‘……원래 이들은 내가 처단하려던 이들 아닌가.’
유스넨은 일주일간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었다.
흑마도사들의 소재를 파악해 일망타진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쥬웰이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이다.
쥬웰이 아니었다면 유스넨이 저들을 죽였을 것이다.
‘아니야. 그렇게 넘어갈 게 아니야.’
유스넨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지금껏 그녀가 보여온 숭고한 모습과 이번 일은 완전히 성격이 달랐다.
가면을 쓴 채 피를 뿌리는 쥬웰의 모습은 진정한 악마 그 자체였다.
‘하. 결국, 처단해야 하는가?’
유스넨은 한탄하였다.
그는 광휘의 대공.
저런 끔찍한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때였다.
뒷골목에 나직한 허밍이 울리기 시작했다.
쥬웰이 내는 허밍이었다.
‘레퀴엠?’
유스넨은 그게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레퀴엠이란 걸 깨달았다.
레퀴엠 중 유명한 곡이었다.
‘또 다른 어둠으로.’
영혼을 이끄는 사자가 죽은 이를 위로하는 내용의 레퀴엠이다.
‘왜 이런 레퀴엠을?’
죽은 이들을 위로?
하지만 무슨 위로란 말인가?
지금도 그녀는 끔찍이 피를 뿌리고 있었다.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런데 위로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문득, 유스넨은 하나의 궁금증이 떠올랐다.
저 하얀 가면 아래로 쥬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하얀 가면은 피가 튀어 주룩 위아래로 일자의 빨간 선이 그어져 있었다.
하필, 눈가로부터 이어져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선이었다.
혹시 쥬웰은 저 가면 안으로 슬퍼하고 있는 것 아닐까?
황당하기 그지없는 생각이지만 유스넨은 그런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제길. 그래도 이대로 보고 있을 수는…….’
유스넨이 갈등할 때.
커다란 이변이 일어났다.
“그만. 그만 멈추십시오, 정체 모를 마왕이여.”
백발의 젊은 사내가 허공에 나타났다.
“난 카비우스. 당장 멈추지 않으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카비우스!
십마의 1인이자, 이번 흑사병 사태를 일으킨 흑마도사가 나타난 것이다.
마지막이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카비우스를 본 쥬웰이 한 생각이었다.
‘가서 쉴 수 있겠군. 피곤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독히 피곤했다.
‘도망가지 않아서 다행이네. 도망가면 쫓기 피곤했을 텐데.’
그때, 카비우스가 차갑게 다시 경고했다.
“당신의 위대한 힘에 경의를 표해 이대로 물러가면 당신이 이번에 일으킨 일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넘어가지 않으면?”
쥬웰은 고개를 기우뚱하게 기울였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어쩔 건데?”
“……!”
카비우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뭐라 화를 내지는 못했다.
알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이란 것을.
도망가야 한다.
그런 판단이 섰지만, 따르지 않았다.
카비우스에게는 절대로 이번 일에서 물러나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쥬웰이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다른 흑마도사들과는 달라 보이는군.”
“……!”
달라 보인다.
영혼의 빛을 뜻한다.
“너 같은 이가 어째서 이번 일을 저지른 거지? 딱히 이런 일을 선호하는 부류 같지는 않은데?”
그 말 그대로였다.
쥬웰은 주지자의 눈을 통해 카비우스의 영혼을 살폈다.
밝게 빛났지만, 끔찍이 상처 입어 타락한 영혼.
고위 흑마도사의 전형적인 영혼이었다.
더구나 주시자의 능력으로 지금껏 저지른 죄악 목록을 보았는데, 별다른 게 없었다.
흑마도사가 된 이후에도 큰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것이다.
이번 흑사병 사태를 일으킨 게 놈이 저지른 유일한 커다란 죄악이었다.
‘차라리 해밀턴 놈이 더 사악한데?’
아니, 해밀턴 따위와 비교할 영혼이 아니다.
그래서 물었다.
“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거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
카비우스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자신의 사정을 들은 상대가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원수?”
“네, 저는 가족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이번 흑사병 일이 끝나면 로튼 백작이 그 일을 도와주기로 하였습니다.”
카비우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절규하듯 말했다.
“당신도 그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녔다면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커다란 상처를 지니고 있을 터! 제 심정을 이해하지 않습니까? 제발, 물러가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고위 흑마도사들은 대다수 저런 사정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래서 강대한 흑마도사들에게 연민을 갖고 있다.
그들이 어떤 아픔을 지니고 있는지 아니까.
그리고 그들이 어떤 끔찍한 파멸을 맞을지 아니까.
흑마도사의 최후는 오로지 파멸이었다. 어떤 예외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흑마도사들을 동정했다.
하지만.
“미안, 그건 안 되겠네. 나도 사정이 있어서.”
촤라락.
은빛 목걸이가 기다랗게 늘어났다.
“난 너를 살려줄 수 없어. 정말 미안하고, 안타깝지만…… 넌 여기서 죽게 될 거야.”
그가 어떤 안타까운 사정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죽여야 했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어쩔 수 없군요.”
카비우스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에도 끔찍한 악마의 낙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렬한 마기가 치솟았다.
하지만.
파앗!
은빛 목걸이가 카비우스의 마기를 산산이 찢어발겨 버렸다.
카비우스는 이를 악물고 마법을 사역했다.
“지옥의 마물이여, 저자를 처단해라!”
미리 준비한 제물이 타오르고 지옥의 마물들이 소환되었다.
그때, 은빛 선이 다시금 허공에 번뜩였다.
지옥의 마물들이 수십 조각으로 토막 나 죽음을 맞았다.
그 믿을 수 없는 힘에 카비우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 말도 안 돼! 아무리 마왕급이라도 이런 힘은?!”
카비우스가 경악해 외쳤다.
십마라 불리는 이답게 카비우스는 강했다. 아까 그녀가 상대했던 잔챙이 흑마도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쥬웰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미안. 지상에서 날 상대할 수 있는 이는 네 명밖에 없어.”
쥬웰의 가면 밑으로 악마화가 끝없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열 송이, 열한 송이…… 스무 송이…….
끝없이 줄기와 가지를 뻗으며 새로운 꽃을 피워내었다.
얼굴에서 목으로.
목에서 가슴으로. 등으로.
수많은 악마화가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그 어마어마한 마기를 느낀 카비우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쥬웰은 확실히 마무리 짓기 위해 자신의 손목을 깊게 베었다.
그녀의 피는 가장 강력한 흑마술의 제물.
피가 솟구치며, 강대한 마기로 변하였다.
사악한 그림자가 카비우스를 짓눌렀다.
“끄아아아악!”
카비우스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꺼, 꺼억…….”
카비우스는 피를 토했다.
은빛 목걸이가 날아들어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제 쥬웰이 목걸이를 당기면 그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아, 아를렌.”
아를렌.
아마 그의 가족의 이름 같았다.
카비우스의 눈동자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처연히 말했다.
“……주, 죽이십시오.”
카비우스는 곧 찾아올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쥬웰이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카비우스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당신?”
“나와 거래하지 않겠나?”
“……!”
카비우스의 눈이 커졌다.
희미한 희망이 피어올랐지만, 쥬웰은 무참히 짓밟았다.
“널 살려주겠다는 건 아니야. 넌 죽을 거야. 그래야 흑사병을 해결할 수 있으니.”
한번 소환한 흑사병은 일을 일으킨 흑마도사들도 취소할 수 없다.
취소할 방법은 단 하나.
의식에 참여한 흑마도사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밖에 없으니, 쥬웰은 카비우스를 죽여야 했다.
“그, 그러면 무슨 거래를 말하는 겁니까?”
“내가 네 원수를 대신 갚아주겠다.”
“……!”
“대신, 너는 내가 원하는 정보를 줘.”
카비우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생각지 못한 제안이었다.
“무, 무슨 정보를 원하는 겁니까?”
“마왕 타란툴라에 대해서.”
“……!”
쥬웰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며 말했다.
“그자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해. 그러면 네 원수를 대신 갚아주겠다.”
마왕 타란툴라.
그녀를 지옥에 떨어뜨린, 인신 공양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흑마도사다.
그자를 잡아야, 당시 인신 공양에 관한 정확한 전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의식에 참여한 또 다른 원수들이 누가 있는지도 말이다.
“…….”
카비우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지 못한 제안이었지만 어차피 선택 사항은 없었다.
“그녀는…….”
“그녀?”
“네, 마왕 타란툴라는 당신처럼 여인입니다.”
쥬엘은 의아한 어조로 반문했다.
마왕 타란툴라가 여인인 건 흑마도사의 세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래, 그래서?”
“저도 정확히 아는 건 없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고위 흑마도사들은 정체를 철저히 숨기니까요. 다만…….”
카비우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로든 왕국의 왕궁에 있습니다.”
“로든 왕국?”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제국에 있는 게 아니라고?’
대륙에서 가장 커다란 국가는 라인하트르 제국이다.
대륙의 6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대륙에는 당연히 다른 국가들도 있었는데, 로든 왕국은 그중 하나였다.
‘로든 왕국이면 당장은 갈 수가 없는데. 곤란하군.’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었다.
“왕궁이라고? 왕족인 건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왕궁에는 왕족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다만, 간혹 그녀와 연락할 때 마력의 흔적이 왕궁 쪽으로 이어지는 걸 확인했습니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이라면 범위가 엄청나게 좁혀진다.
일단 로든 왕국에 가기만 하면, 찾아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엔리크 자작이 로든 왕국과 연이 깊으니 이용하면 되겠군.’
엔리크 자작은 외교 대신 시절 로든 왕국에 오래 있으며 깊은 연을 맺었다.
그러니 이 일은 그를 이용하면 수월할 것 같았다.
“그, 그런데 당신 같은 존재가 어째서 타란툴라를 찾는 겁니까? 아무리 타란툴라라도 당신에 비할 바는 아닐 텐데.”
“글쎄.”
쥬웰은 타란툴라의 힘을 굉장히 높게 짐작했다.
‘타란툴라는 오히려 나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을 확률이 높아.’
그렇지 않다면, 그날 그런 인신 공양을 해내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날 인신 공양은 무언가 이상했다.
‘원래 내 영혼은 낙원에 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지옥에 떨어졌어.’
죽은 영혼은 생전의 죄과에 따라 낙원이나 지옥으로 간다.
이건 세상의 절대적인 법칙으로 인신 공양을 당해도 그건 예외가 없었다.
그런데 낙원,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으로 가야 하는 그녀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졌다.
세상의 절대적인 법칙을 비튼 것으로, 그런 ‘이적’을 일으킨 타란툴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마탑주 라플 공작에 비견할 만할지도.’
마탑주 라플 공작.
명실상부한 지상 최강자. 그녀도 라플 공작과 싸우면 승리할 자신이 없다. 아니, 높은 확률로 패할 것이다.
마왕 타란툴라도 그에 못지않은 힘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타란툴라를 잡아야 해. 그래야 복수를 완성할 수 있어.’
“이제는 네 이야기를 해보지.”
“……!”
카비우스의 눈이 흔들렸다.
“저, 정말 제 원수를 갚아주시는 겁니까?”
“그래.”
쥬웰이 다시금 말하였다.
계약의 언령이었다.
“약속하나니, 네 피의 바람은 나 ……의 손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 확언에 카비우스는 주룩 눈물을 흘렸다.
지난 세월 겪어온 고통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다.
“제 원수는…….”
카비우스는 짧은 이야기를 하였다.
아를렌.
고아인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동생.
그리고 무참히 끔찍한 죽음을 맞았던 동생.
그는 원수를 갚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흑마도사가 되었다.
이후 복수를 노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차, 이번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당신께서는 가능하겠습니까?”
카비우스는 물었다.
쥬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단 뜻이었다.
“원수가 어떤 죽음을 맞길 원하지?”
그 물음에 카비우스는 미친 듯한 웃음을 흘렸다.
처절하면서, 우는 듯한 웃음이었다.
“똑같이. 동생과 똑같은 죽음을 맞기를 바랍니다.”
“그래. 네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약속을 들은 순간.
카비우스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생명이 꺼져가는 눈빛.
쥬웰이 한 게 아니었다.
카비우스 스스로 마기를 움직여 목숨을 끊은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은인이여.”
은인.
쥬웰은 실소했다.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타란툴라를 잡을 정보를 원했을 뿐이고,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려는 것일 뿐이다.
“사, 사실…… 이제 그만 쉬고 싶었습니다…….”
카비우스의 몸이 바사삭 무너져 내렸다.
흑사병 소환이란 끔찍한 흑마법을 사역한 대가로 세상에 시체를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 당신의 이명을 알아도 되겠습니까?”
쥬웰은 고민하다가 답했다.
“옵시디언(흑요석).”
그 이명을 들은 카비우스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렇군요. 당신이…… 예정된 구원자셨군요.”
구원자.
흑마도사들에게는 하나의 전설이 있다.
게헨나에 흑요석이 강림해 그들을 구원할 거라는.
물론 쥬웰은 별달리 그런 의미로 이런 이명을 정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가 정한 이름도 아니었다.
흑요석은 악마들이 그녀에게 붙여준 애칭이었다.
“감…… 사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비우스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키아아아아아악!]
끔찍한 영성(靈聲)이 울려 퍼졌다.
마지막 흑마도사가 죽으면서, 흑사병 소환 흑마법이 취소되는 소리였다.
이제 내일 아침 해가 뜰 즈음, 흑사병은 자취를 감추게 되리라.
‘끝났군.’
쥬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았다.
아까부터 피어오르던 열은 이제 심각한 수준으로 끓고 있었다. 고열과 더불어 전신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이거 꽤 고생하겠는데.’
쥬웰은 몸 상태를 확인하고 혀를 찼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어서 가서 쉬고 싶었지만, 아직 일이 끝난 게 아니었다.
하나 더 처리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만 나오지.”
“……!”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유스넨은 숨이 멎을 듯 놀랐다.
‘어떻게?’
그는 지금 천사의 능력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
은밀히 어둠을 추적하기 위한 능력으로 특히 어둠의 존재에게 절대적인 은신 효과가 있어 아무리 강대한 어둠이라도 눈치챌 리가 없는데?
하지만 그녀는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나와. 아니면, 내가 갈까?”
유스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다.
‘왜 숨는 거냐?’
사실 이렇게 숨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왜 숨는단 말인가?
당장 모습을 드러내고 그녀를 처단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유스넨은 선뜻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모습을 드러내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를 무조건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하는 존재인데. 왜 망설이는 거냐.’
유스넨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 밤 사태로 그는 깨닫게 되었다.
선한 모습을 보였다고 해도, 그녀는 결국 어둠의 존재란 것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당장 모습을 드러내 심판의 검을 꺼내 들어야 했다.
하지만 유스넨은 그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제길.’
그때, 쥬웰이 유스넨이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오지 않는다는 거지.”
“……!”
“좋아.”
파앗!
은빛 목걸이가 번뜩였다.
이를 악물며 심판의 검을 꺼내 들려는 순간,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은빛 목걸이가 유스넨이 아니라, 옆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크윽!”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유스넨은 깜짝 놀랐다.
이 자리에 유스넨 말고, 또 다른 이가 은신해 있었던 것이다!
짙은 적발. 창공을 담은 듯한 푸른 눈동자.
적사자 필바하…… 아니, 황태자 오펜하임이었다.
* * *
‘이, 이런. 어떻게 알았지?’
오펜하임은 낭패한 얼굴을 하였다.
그는 원래 쥬웰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 뒷골목에서 무언가 소요가 일어났음을 눈치채고 정황을 살피려 왔다가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마왕이라니.’
오펜하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힘을 지닌 마왕이었다.
오펜하임은 가면을 쓴 마왕의 정체가 쥬웰이란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일단 머리칼이 쥬웰과 다른 빛깔이었고, 목소리도 달랐다.
무엇보다 오펜하임은 쥬웰을 성녀로 알고 있다.
그러니 성녀인 그녀와 이런 끔찍한 살육을 저지른 마왕을 연결하는 건 아무리 오펜하임이라도 무리였다.
‘어쩌지? 제길, 달의 능력으로 은신했는데 발각당하다니.’
달의 능력.
그는 월광을 왜곡시켜 은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저 무시무시한 마왕의 눈을 완전히 속이기는 무리였던 것 같다.
‘죽는 건가.’
오펜하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안 돼.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오펜하임은 힘을 주어 목을 감싼 은빛 사슬을 풀어내려 하였지만, 소용없었다.
도리어 목걸이가 파고들며 끔찍한 격통만 밀려왔다.
“끄으으윽!”
그때, 쥬웰이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오펜하임은 목이 묶인 채로 휙 그녀에게 날아가 앞에 뒹굴게 되었다.
“……그대가 필바하인가?”
“……!”
오펜하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번에 정체를 발각당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왕이여.”
“…….”
쥬웰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잠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이것 봐라?’
쥬웰은 필바하의 정체를 곧바로 눈치챘다.
‘오펜하임이잖아.’
오펜하임이 들으면 경악할 생각이었다.
쥬웰을 못 알아본 그와 다르게, 쥬웰은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낸 것이다!
‘외모를 바꿔도 영혼의 빛은 그대로니. 못 알아볼 수가 없지.’
쥬웰은 여상히 생각했다.
‘어쨌든 반란군을 이끄는 적사자 필바하가 사실은 황태자 오펜하임이었다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쥬웰은 무심히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적사자라 해서 기대했는데, 형편없군.”
“……!”
“이 정도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겠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쥬웰은 사실 반란군을 이끄는 적사자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밖에서 여섯 공작가를 뒤흔들어 줄 동료가 되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솔직히 기대 이하였다.
‘이 정도로 과연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황태자’ 오펜하임은 그녀에게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아무리 기운 황실이어도 ‘황태자’란 상징성은 여러모로 실용성이 있으니까.
즉, 오펜하임이 쓸모 있는 건 그가 황태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인이어도 반란군의 적사자는?
냉철히 말해 어떤 도움도 안 된다.
물론 오펜하임이 뛰어난 인물인 건 안다. 특히 쥬웰은 그의 훌륭한 인품을 존경했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그는 대단한 성군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섯 공작가와 싸울 때 도움이 되는 건 별개였다.
‘반란군이 지금껏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알겠군. 여섯 공작가에서 일부러 내버려 둔 거야.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으니.’
쥬웰은 필바하…… 아니, 오펜하임의 목에서 사슬을 풀었다.
“흥미가 사라졌다. 가라.”
“……!”
“한 가지 충고하자면 어쭙잖은 놀이는 그만두도록. 괜히 헛되이 목숨을 잃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그 말에 오펜하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빛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상대는 노골적인 실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뭐가 어쭙잖은 놀이란 말이지?”
오펜하임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물론 내가 부족한 건 알아. 당신 같은 강대한 마왕이 보기에 형편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내 의지까지 폄훼할 자격은 없어!”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고고한 눈빛이 오펜하임을 내려다보았다.
한편, 가면 쓴 상대가 쥬웰임을 모르는 오펜하임은 아차 싶었다.
상대는 끔찍한 마왕인데 자신도 모르게 발끈하여 버럭 한 것이다.
‘젠장,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는 강대한 달의 능력을 타고났지만 달의 능력은 여러 신비한 이능에 집중되어 있지, 싸움에는 별반 도움이 안 된다.
저 무서운 마왕이 손가락으로 찍어누르기만 해도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상대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그것도 그렇군. 함부로 이야기한 건 사과하지.”
“……뭐?”
“사과한다고 했다.”
그 말에 오펜하임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였다.
사과하는 마왕이라니?
착한 마왕인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상대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대가 부족하다는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그대는 스스로가 여섯 공작가를 상대로 싸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는가?”
“……아니.”
오펜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여섯 공작가는 제국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
승산 없는 싸움이다.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백성들이 바라고 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있어.”
“……!”
“난 그 바람을 들어줄 의무가 있는 이. 설사, 승산이 없더라도 백성들을 위해 싸우는 게 내게 내려진 소명이다. 그러니 난 멈출 수 없어.”
그래, 그는 황태자. 제국의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자이다.
그러니 설사 스러질 게 분명하더라도 백성들을 위해 싸워야 했다. 그게 바로 초대 황제가 셀레네 황족에게 내린 소명이니까.
“…….”
쥬웰은 침묵하였다.
오펜하임의 환하게 타오르는 영혼이, 백성들을 위해 강하게 타오르는 의지가 그녀의 눈을 시리게 찔렀다.
‘……역시 오펜하임.’
그가 여섯 공작가와 맞서 싸우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하는 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조금은 마음을 다르게 먹었다.
‘부족한 부분은 내가 힘을 보태주면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물었다.
“정말 싸울 의지가 있는가?”
“……그래. 설사 죽게 되더라도.”
“그렇다면 두 달 뒤. 투란스 요새를 치도록.”
“……!”
오펜하임의 눈동자가 커졌다.
투란스 요새.
남부의 요충지였다.
투란스 요새를 함락하면 제국 남부의 3할 이상을 세력권에 넣을 수 있다.
단순히 소수의 반란군이 아니라, 강력한 군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펜하임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투란스 요새에는…… 사파이어 공작가의 라인힐트 기사단이 있다. 우리 혁명군의 힘으로는 아직 무리야.”
사파이어 공작가.
제국의 ‘무력’을 대표하는 곳.
사파이어 공작가는 무려 세 개의 직속 기사단과 봉신 가문이 이끄는 열두 개의 방계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다.
투란스 요새에는 그 열두 개의 방계 기사단 중 라인힐트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어 혁명군의 힘으로는 함락하기 무리였다.
하지만 쥬웰은 이렇게 말했다.
“네 의지가 충분하다면, 내가 돕겠다.”
“……뭐?”
오펜하임이 당황해 반문했다.
쥬웰은 가만히 그를 보며 말했다.
“물론 흑마도사인 내가 전면에 나서는 건 무리야. 하지만 네가 승리할 수 있게 은밀히 도와주도록 하지. 단, 조건이 있다.”
“……무엇이지?”
“싸움이 벌어지면, 사파이어 공작가를 도발해 라디트 백작을 전선으로 불러들이도록.”
“……!”
라디트.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자.
그리고 그녀의 전 약혼자.
‘널 사랑해. 목숨보다.’
라디트의 음성이 떠올라 쥬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물론 라디트를 전장에 불러내 죽이겠다는 건 아니다.
그런 편안한 죽음을 맞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선물을 하나 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선물.
당연히 피의 선물이었다.
‘에스텔레. 널 바라. 영원히.’
자신을 어루만지던 라디트의 손길이 떠올라 미칠 듯 역겨운 느낌이 치솟아 올랐다.
쥬웰은 섬뜩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그의 절규를 제물로 삼아 여섯 공작가에 파멸의 서곡을 울리겠다.”
* * *
오펜하임은 사라졌다.
드디어 일을 마친 쥬웰은 숙소로 돌아왔다.
‘피곤해.’
가면을 벗어 이마를 만지니, 뜨거운 열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얼핏 봐도 39도 이상.
심각한 고열이었다.
‘그렇게 무리했으니 당연한가?’
쥬웰은 피식 웃었다.
당장 쓰러져 눕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피에 젖은 채로 잘 수는 없었으니까.
드레스를 벗어 갈아입고 미리 준비해 둔 물에 몸을 씻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멈칫하였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온 다음이어서일까?
잠자리에 들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보다 더욱 끔찍한 악몽을 꿀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런 유의 예감은 절대로 엇나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을 자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흰 강아지가 있으면 좋을 텐데.’
흰 강아지.
유스넨.
그의 성력을 받으면 편하게 잠들 수 있겠지만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왔으면서 편안한 잠은 무슨.’
쥬웰은 실소했다.
그녀는 자신이 오늘 흘린 피를 후회하지 않는다.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하지만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건 명확히 자각하고 있다.
이 더러운 기분은 단순히 피곤해서가 아니니까.
아무리 상대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인이었다고 해도 그녀가 저지른 일이 끔찍한 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오늘 밤 고통받는 것도 당연하겠지.’
체념하고, 준비하였다.
평소보다 더욱 단단한 매듭과 재갈을 준비해 묶고, 잠들었다.
눈을 감자마자 역시나…….
끔찍한 악몽이 그녀를 덮쳤다.
* * *
그때, 쥬웰의 숙소 근처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있었다.
찬란한 은발.
깊고 깊은 감람색 눈동자.
유스넨이었다.
그는 안경을 끼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부드러운 인상이 아닌, 날카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아니,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단지 안경을 벗어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감람색 눈동자가 한없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언가 결단을 한 것처럼.
그렇다.
그는 지금 쥬웰을 처단하러 온 것이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그는 지금껏 쥬웰이 어둠의 존재임을 알면서도 처단을 미루었다.
쥬웰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오늘 일로 명확해졌다.
쥬웰은 분명한 어둠의 존재이다. 처단해야 했다.
손에 들린 심판의 검이 달빛을 섬뜩하게 머금었다.
“…….”
유스넨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다시금 망설여졌다.
‘과연 죽여야 하는가?’
유스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늘 일도 결국 죽여야 할 악인들을 처단한 것일 뿐인데?’
만약 그녀가 처리하지 않았다면, 그가 해야 했을 일이다.
하지만 유스넨은 굳게 고개를 저었다.
‘죽은 이들이 악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녀가 끔찍한 어둠의 존재란 것이다.
오늘 일은 그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는 일이었고.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잊지 마십시오. 어둠에 마음을 뺏기면 광휘는 빛을 잃습니다.’
메디안 백작이 한 말도 떠올랐다.
이건 광휘의 대공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사명을 미룬 게 이상했던 일이다.
그런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를 살핀 유스넨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는 거지? 그래도 공작가의 영애인데?’
유스넨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고 헛웃음을 흘렸다.
무심코 그녀를 지키는 이가 있기를 바랐다.
왜?
그러면 처단을 뒤로 미룰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처단을 뒤로 미룰 핑계가 없었다.
꼼짝없이 그녀를 처단해야 했다.
유스넨의 마음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제길.’
유스넨은 자신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단해 마땅하건만, 왜 자꾸 이런 마음이 든단 말인가?
마치 끔찍한 수렁에 발이 빠진 것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스넨은 다시금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다.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오늘 그 끔찍한 광경을 봤음에도 말이다.
도리어 그녀가 보여준 다른 장면들만 끝없이 떠올랐다.
처연히 기도하는 장면.
환자를 위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마치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들.
“……누나.”
유스넨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에스텔레.”
13년간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이름.
그의 구원. 그의 빛.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이었던 그녀.
그런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쥬웰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제길.’
유스넨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숙소 안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끄…… 끄윽.”
유스넨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하였지만, 아니었다.
신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고통을 참는 듯 괴롭고 처절한 신음이었다.
“끄, 끅…… 아, 악…….”
거기까지 들은 순간.
유스넨은 발을 박차고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끔찍한 광경을.
* * *
역시나 각오했던 대로 여러 악몽을 꾸었다.
쥬웰은 체념한 채 악몽을 받아들였다.
‘아, 흰 강아지가 짠 하고 나타나면 좋을 텐데.’
쥬웰은 꿈을 꾸며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의 성력을 받으면 악몽도 물러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많은 악몽이 그녀의 정신을 난도질하였다.
‘……싫어.’
쥬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악몽이 너무나 괴로웠다.
어떤 육체적 고통보다도 싫었다.
과거의 고통을 그대로 직면해야 하니까.
그런데 한참 온갖 악몽에 괴로워하던 중, 다소 특이한 악몽이 떠올랐다.
게이볼그 마경.
일천 명의 기사가 사망했던 그 끔찍한 사건에서 1품 대악마, 타천사 베스윈을 만났던 기억이었다.
일천 명의 기사가 사망한 참사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던 그녀는 아버지 웰링턴 공작에게 떠밀려 다시 마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타천사 베스윈을 만났다.
타천사 베스윈은 그녀를 곧바로 죽이지 않고 기이한 대화를 시도했다.
‘그래, 네가 바라는 게 뭐라고?’
에스텔레는 눈을 끔뻑이며 대악마의 눈치를 보았다.
타천사 베스윈은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대악마에게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온화한 웃음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란다. 난 너한테 흥미가 있거든.’
‘……흥미요?’
‘그래,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너를 남몰래 지켜보고 있었단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공포에 질려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말해보렴. 혹시나 아느냐? 대답이 날 흡족하게 하면 너를 살려줄지.’
타천사 베스윈은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 지금 내 손에 죽는 게 너한테는 차라리 축복이겠지만 말이다.’
‘…….’
에스텔레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다가 답했다.
‘제가 바라는 거면…… 꿈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뭐든지.’
‘……행복해지고 싶어요.’
‘행복이면, 어떤?’
타천사 베스윈이 물끄러미 에스텔레를 바라보았다.
‘시킨 일을 제대로 못 했다고 채찍으로 맞을 걱정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밥도 안 굶었으면 좋겠고, 오물이 섞인 차도 이제는 그만 먹고 싶어요. 매리엇이 화를 안 냈으면 좋겠고…… 좋아하는 사람이 날 벌레 보듯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사람?’
‘……네, 있어요. 그 사람은 날 경멸하지만…….’
라디트.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그를 짝사랑했었다.
‘그리고?’
‘……네?’
‘그게 끝이냐? 더 바라는 건 없고?’
에스텔레는 눈치를 보며 더 말을 이어갔다. 사실, 바라는 꿈은 많았다.
‘겨울에 따뜻한 방에서 자고 싶어요. 아, 창문이 있는 방에서도 살고 싶어요. 아플 때 누가 괜찮냐고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요. 맛있는 디저트를 실컷 먹어보고 싶어요. 시장에 나가 장신구를 사보고 싶어요. 생일 선물을…… 받아보고 싶어요.’
왜일까? 그렇게 말하는데 주룩, 눈물이 흘렀다.
에스텔레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으며 타천사 베스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다행히 타천사 베스윈은 여전히 온화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또 바라는 건?’
‘……날 좋아해 주는 사람과 맛있는 식사를 하고, 서로 손을 잡고 마음 편히 산책도 해보고 싶어요.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도 꾸려보고 싶어요. 저녁노을을 보며 오늘 하루 좋았다고 생각해 보고 싶어요.’
그래, 그것들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냥 평범히 행복을 누려보는 것.
에스텔레는 그 당시만 해도, 노력하면 언젠가 이 꿈들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비록 많이 힘들지만, 언젠가는 그런 행복이 올 거라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품고 있구나.’
‘……!’
‘넌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끔찍한 불행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에스텔레는 눈을 크게 떴다.
끔찍한 폭언이었다.
하지만 베스윈과 눈을 마주친 에스텔레는 이게 단순한 폭언이 아님을 깨달았다.
베스윈의 눈은 한없이 담담했다. 그리고 일말의 동정을 품고 있었다.
베스윈은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에스텔레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대악마들은 미래를 읽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혹시…… 당신은 제 미래를 읽은 건가요?’
‘그래.’
베스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지금도 큰 불행을 겪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불행은 시작도 하지 않았단다. 훗날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저갱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더욱 끔찍한 건, 그 고통조차 끝이 아니란 것이다.’
‘……끝이 아니란 건?’
‘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은 후에도, 그때까지의 괴로움이 차라리 자비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참혹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참혹한.
베스윈은 그 표현으로도 그녀가 겪게 될 고통을 묘사하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과연 이 세상의 어떤 단어가 이 아이가 겪을 고통을 묘사할 수 있을까?
이 아이는 자신이 태어났음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빚은 신과 자신을 잉태한 어미를 원망하며 처절히 저주하게 될 것이다.
‘거, 거짓말……’
그 끔찍한 예언에 에스텔레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베스윈의 눈빛은 한없이 잠잠했다.
그저 정해진 사실을 읊는 눈빛이었다.
‘피, 피할 수는 없는 건가요?’
‘흐음.’
‘마, 말씀해 주세요! 제 미래는 ‘확정’인 건가요? 피할 방법은 없는 건가요?’
베스윈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미래를 엿보는 ‘예언’은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 가변 미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뜻한다.
둘째, 반 확정 미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반드시 이루어지는 미래. 반대로 말하면, 기적을 일으키면 바꿀 수 있는 미래였다.
셋째, 확정 미래.
이미 확정된 미래를 뜻한다.
이건 어떤 수를 써서도 바꿀 수가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반드시 확정된 미래가 도래하게 된다.
‘이 미래가 ‘확정’인지 아닌지 그것까지는 엿보지 않아서 모르겠구나. 네가 원하면 알아볼 수야 있겠지만. 그런데 굳이 알 필요가 있겠냐?’
베스윈은 부드럽게 웃었다.
‘만약, 그런 잔혹한 미래가 ‘확정’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 너에게 너무 잔인한 일일 텐데 말이다.’
* * *
유스넨은 시체처럼 굳어 멍하니 방안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의 음성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방 안의 광경은 참혹했다.
침대 위에서 쥬웰이 손이 묶인 채 울부짖고 있었다. 끔찍한 발버둥이었다.
“끄윽. 흑. 흐윽.”
참혹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초점 없이 빨갛게 충혈된 눈에서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목에서는 핏발이 서 있었고,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전신을 뒤틀며 발악하였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묶은 매듭을 풀려 손을 뒤틀었다. 매듭에 손이 상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유스넨은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 도대체…….”
순간, 이전 황궁에서 쥬웰을 치료해 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목에 찢긴 듯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라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때 스스로 상처를 낸 것이다.
지금도 손목을 묶은 매듭과 재갈이 아니라면 끔찍이 자상(自傷)할 게 분명했다.
아니, 이미 손목의 상처만으로도 그 수준은 넘었다.
“하.”
왜일까?
도저히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아파왔다.
심장을 칼로 찢는 듯했다.
너무 아파, 그녀를 처단해야 한다는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했다.
그리고 유스넨은 이제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깨달았다.
‘……누나.’
13년 전.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끄윽. 흑. 흐윽.’
에스텔레는 그를 치료해 주며 페리도트 대공가의 고성에 머물렀다.
그리고 가끔 성녀 일을 하러 밖에 나갔다 왔는데, 그런 날에는 항상 끔찍한 악몽을 꾸며 울부짖었다.
마치 지금 쥬웰처럼 말이다.
‘빌어먹을.’
과거 에스텔레가 괴로워하던 모습이 떠올라 유스넨은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지금 쥬웰은 그때의 에스텔레보다 훨씬 더 괴로워 보였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였다.
심판의 검을 내려놓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성력을 펼친 것이다.
파아앗!
따뜻한 빛이 그녀의 몸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처단해야 하는 악이란 것도.
지금이 어떻게 보면 그녀를 처단할 절호의 기회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에스텔레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가 아픈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녀의 고통을 가라앉게 하고 싶었다.
“끄윽…… 끅. 끅…….”
하지만 쥬웰의 발작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처음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끔찍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재갈 밑으로 이런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 고 싶어…….”
“……!”
유스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이런 음성을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죽…… 고 싶어.’
에스텔레가 악몽에 시달릴 때 간혹 흘리던 절규였다.
유스넨은 이를 악물었다.
순간, 수많은 갈등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어둠의 존재다.
가장 옳은 선택은 지금에라도 그녀를 처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틀린 선택을 골랐다.
“……전 당신의 약혼자이니……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조심히 손을 뻗어 쥬웰의 몸을 끌어안았다.
마치 어린 시절, 악몽을 꾸던 에스텔레에게 했던 것처럼.
에스텔레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가 더는 고통스러워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의 바람이 전달된 걸까?
참혹히 떨리던 쥬웰의 몸이 따뜻한 온기에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 * *
꿈이 이어졌다.
타천사 베스윈이 말하였다.
‘하지만 난 너의 운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타천사 베스윈은 손을 뻗어 에스텔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여섯 장 잿빛 날개가 바람에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네가 소원을 이루었으면 좋겠구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원 말이다.’
‘……가, 가능할까요?’
‘글쎄. 아까 말했듯 나도 너의 미래가 ‘확정’된 것인지는 엿보지 않았으니 뭐라고 정확히 답하기는 어렵구나.’
타천사 베스윈은 지그시 에스텔레를, 정확히는 그녀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 고귀하면서 가련한 영혼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글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네가 행복해지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단다.’
에스텔레의 눈이 절망에 젖어들어 갈 때.
‘다만. 네 미래가 ‘확정’된 게 아니라면. 그래서 한 줄기 희망이 존재한다면.’
타천사 베스윈이 싱긋 웃으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였다.
‘누군가 너를 구원해 줄지도 모르지.’
이후, 또 다른 악몽이 시작되었다.
정신이 혼몽해서 언제의 악몽인지는 헷갈렸다.
그녀는 깊은 굴에 던져져 울고 있었다.
플랑드나? 아니면 매리엇?
누가 저지른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린 시절 비슷한 일이 너무 많아서 구별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벽을 기어오르려 발악하다가 손가락, 손톱이 다 상한 상태로 엉엉 울고만 있었다.
‘제발, 누가 나를 구해주었으면.’
하지만 깊은 밤이 되어도 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덜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꿈이 겹쳤다.
단순히 이전에 경험했던 과거를 보는 게 아니라, 여러 장면이 섞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시커먼 무저갱에서 덜덜 떨고 있는데, 환한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 얼굴이 떠올랐다.
‘……나!’
‘……!’
무저갱 속에서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흰 강아지.
어린 유스넨이었다!
그가 초록빛 감람색 눈동자에 한가득 눈물을 머금은 채 환한 빛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이건 개꿈이네.’
그녀는 설핏 웃었다.
시커먼 굴에 빠진 그녀를 어린 유스넨이 구해주러 오다니.
그녀는 과거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건 개꿈이었다. 아니, 흰 강아지가 나왔으니 강아지 꿈인가?
마치 개꿈이 맞는다는 듯 유스넨의 등 뒤에는 여섯 장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여섯 장.
1품 대천사장이나 가지는 날개 숫자였다.
하지만 유스넨이 각성한 위계는 2품 트론즈 천사였다. 즉, 그의 날개 숫자는 네 개여야 옳았다.
하지만 개꿈이어도, 나쁜 꿈은 아니었다.
어린 유스넨이 이렇게 소리 질렀기 때문이다.
‘누나! 앞으로는…… 앞으로는……!’
그의 눈동자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가 누나를 구해줄 거예요! 반드시 누나를 행복하게 만들 거예요!’
어린 유스넨은 훌쩍 내려와 마찬가지로 어렸던 에스텔레를 품에 끌어안았다.
에스텔레는 그의 품에서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
* * *
유스넨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히 그의 품에 안긴 후 쥬웰은 한결 안정된 상태였다.
그저 간헐적으로 눈물만 흘렸다.
“하아.”
그 눈물을 보고 유스넨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순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깨달았다.
그는 에스텔레와 닮은 이 소녀를 죽일 수 없었다.
설사, 그게 용서받지 못할 잘못된 길이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