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Chapter 2-1 Saint? Evil? (2) (5/18)

목차

Chapter 2-1 Saint? Evil? (2)

Chapter 2-2 마왕(魔王)

Chapter 2-3 옵시디언 패밀리 (1)

Chapter 2-1 Saint? Evil? (2)

“바로, 민심이에요.”

“……!”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에 토른 공작의 눈이 커졌다.

“민심…… 이라고?”

“네.”

쥬웰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해 보세요. 온 제국의 백성이 우리 가넷을 지지한다면. 그러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쥬웰은 강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이미 가넷은 권력을 쥐고 있어요. 그런데 백성들의 지지마저 등에 업는다면? 과연 누가 우리 가넷을 거스를 수 있을까요?”

그제야 토른 공작은 침음을 삼켰다.

쥬웰이 한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을 때를 상상한 것이다.

가넷가의 힘은 권력.

그런 권력이 백성들의 지지까지 얻는다면?

그 파괴력은 상상할 수 없었다.

가넷은 진정한 절대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쥬웰이 사랑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마어마할 거예요. 가넷은 곧 제국이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다른 공작가들 따위가 어떤 강점을 지니고 있는지 그딴 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

“부? 무력?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는 무의미해요. 하나하나 날개를 뜯어가면서 다른 공작가들을 몰락시키면 돼요. 여섯 공작가 모두 우리 가넷에게 무릎을 꿇게 될 거예요. 상상만 해도 달콤하지 않나요?”

토른 공작은 부정하지 못했다.

정말 달콤한 생각이었다.

늙은 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겠느냐?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게?”

“쉽지는 않겠죠.”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너도 알겠지만 백성들은 우리 가넷가를 원망해.”

맞는 말이다.

여섯 공작가 중 백성들의 원성을 가장 많이 사는 건 첫째가 다이아가. 둘째가 가넷가였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있으면 가능해요. 전 성녀니까요.”

“……!”

“성녀로서 백성들을 현혹하겠어요. 마치 3년 전 죽은 에스텔레 성녀처럼. 그녀처럼 제국 백성들을 휘어잡겠어요.”

토른 공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쥬웰의 말처럼 그녀가 에스텔레 같은 명성을 얻는다면 가넷가가 민심을 얻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에스텔레 성녀는 제국 역사상 최고로 존경받은 이야. 앞으로도 그런 성녀는 나오지 않을 거야.”

“그래 봤자 어리석게 죽은 년이죠.”

“……!”

“전 남들만 생각하던 그런 어리석은 바보 천치와는 달라요.”

그래, 그녀는 ‘에스텔레’와 전혀 달랐다.

“전 그녀를 뛰어넘을 거예요. 바보같이 남들만 위하다가 죽는 게 아닌, 모두를 이용하고 잡아먹고 말 거예요.”

“…….”

토른 공작은 한참이나 침묵했다.

전율이 일 것 같은 이야기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었다.

과연 저 아이가 그런 명성을 얻을 수 있을까?

쥬웰이 그 의문에 답하듯 말했다.

“앞으로 약속 기간은 5일이 남았어요. 그때까지 제가 에스텔레 성녀를 능가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무얼 하려는 거냐?”

“비밀이에요. 기대하고 있으세요.”

쥬웰은 싱긋 웃고는 인사했다.

이제 산책을 끝낼 때였다.

“5일 뒤. 할아버지는 제게 큰 선물을 준비하셔야 할 거예요.”

* * *

쥬웰은 방으로 돌아왔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뭘?”

“안색이 창백합니다.”

리샤크가 걱정스레 물었다.

“많이 이상해 보여?”

“……네,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신지?”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오늘은 방에서 쉴 거니, 너도 가서 개인 시간 보내.”

“아니, 괜찮습니다. 아가씨를 지키겠습니다.”

“……방에서 안 나갈 거라니까? 아니면, 방까지 따라 들어오려고?”

“아, 아니. 그건…….”

쥬웰은 쿡쿡 웃고는 손을 흔들었다.

“쉬어. 좋은 시간 보내고. 아, 쉬라는 거 명령이니 꼭 쉬어.”

리샤크는 결국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쥬웰은 하녀들도 물렸다.

“몸이 안 좋아. 너희도 물러가. 잘 테니.”

“……네, 아가씨.”

하녀들이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쥬웰은 하녀들이 자신을 탐색하듯 살피는 걸 놓치지 않았다.

뭐, 상관없었다.

“절대 누구도 들어오면 안 돼. 알겠나? 들어오면 경을 칠 거야.”

“네, 아가씨.”

이윽고 혼자가 된 쥬웰은 침대에 누웠다.

‘아직 시간이 남았네. 기다려야지.’

그녀가 홀로 된 이유.

중요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였다.

그 일을 하려면 밤이 되어야 했다.

‘조금 잘까? 아, 오늘은 피로 회복제 안 받았지. 자고 싶은데.’

쥬웰은 아쉽다는 마음이 들었다.

피로 회복제.

유스넨의 성력이었다.

그의 성력을 받았으면 푹 낮잠을 잘 수 있을 텐데.

‘이거 중독되겠어.’

쥬웰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악몽 없는 밤을 몇 번 경험했더니 그의 성력이 아쉬워졌다.

그만큼 그녀의 밤은 끔찍했으니까.

특히 최근에는 매일같이 성력을 받은 터라 오랫동안 악몽을 꾸지 않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끔찍한 밤을 보내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뜬 눈으로 째각째각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고, 부엉이가 우는 시간.

쥬웰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쳤다.

달빛마저 가려진 어둠 속.

그녀는 촛불을 켰다.

“나 위대한 어둠을 알현하니. 금지된 의식을 시작하겠다.”

그녀의 입에서 언령이 흘러나왔다.

흑마도사의 ‘의식’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섬뜩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사랑……하는 우리의…… 여왕이여…….]

악마의 음성이었다!

쥬웰은 차갑게 답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다.”

[무언…… 가?]

“5일 안에 수도 근처에서 한꺼번에 죽음을 맞을 운명인 이들을 알려줘.”

그렇다.

지금 그녀는 포춘 텔러로서 점을 치는 거였다.

그리고 이런 걸 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성녀로서 영웅이 되기 위해.

‘성녀로서 대규모 사상 사건을 막아 영웅이 되겠어.’

이미 그녀는 진료소에서 봉사해 수도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놓았다.

여기에 더해 대규모 죽음이 예고된 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구해내면 완벽한 영웅이 되리라.

토른 공작과의 내기에서도 승리하는 건 당연하고.

다만 이전과 다르게 단순한 카드 점이 아닌, 이런 의식까지 치르려는 건 이게 단순한 점과 달랐기 때문이다.

[네가…… 바라는 건…… 예언의…… 영역…… 이다.]

예언.

정해진 한 사람의 운명이 아닌, 불특정한 이들의 미래를 엿보는 거니 훨씬 고차원의 일이었다.

세상의 법칙에서 금지된 금기의 일.

하지만 상관없었다.

“제물을 바치겠어.”

[……어떤?]

“너희가 바라는 건 간단하잖아?”

그리고 단도를 꺼내 손가락을 살짝 베어 피를 내었다.

뚝. 뚝.

그렇다.

그녀가 바치려는 건 그녀의 피.

악마들이 가장 좋아하는 제물이었다.

‘원래는 이런 예언을 받으려면 훨씬 더 대단한 제물을 바쳐야 하지만.’

워낙 악마들이 그녀를 총애해 피를 바치면 그걸로 대부분 해결되었다.

악마들은 악인 백 명의 목숨보다 그녀의 피 한 방울을 귀하게 여기니까.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부족…… 하다…….]

“뭐?”

쥬웰은 놀란 얼굴을 했다.

“더 제물을 받고 싶어서 그런 거면 집어치워.”

[그런…… 게…… 아니다…… 예언의 내용…… 에 비해…… 제물이…… 부족해…….]

쥬웰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고작 사고 사건에 관한 예언이다.

그런데 제물이 모자라다니?

물론, 몇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악마들은 그녀의 피를 어떤 제물보다 값지게 여기는데?

“더 피를 바쳐야 하는 건가?”

그런데 놀라운 답이 들려왔다.

[피로는 부…… 족하다.]

“뭐? 말도 안 되는…….”

순간, 쥬웰이 입을 다물었다.

악마는 이런 일에 관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말로 예언의 내용에 비해 제물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는 건?

‘5일 안에 일어날 사건이 단순한 사고 사건이 아닌 거야.’

쥬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무언가 상상하지 못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예정인 게 분명했다.

[예언을…… 바라면…… 더 큰…… 제물을…… 바쳐라…….]

쥬웰은 잠시 고민하였다.

“어떤 제물을?”

[목…… 숨. 인신…… 공양을 해라.]

“……!”

마법진 너머로 악마가 시커멓게 웃는 게 들렸다.

[룬이란…… 아이의 목숨이 좋겠군. 아니면, 마리? 리샤크…… 그 아이도…… 탐이 나는군.]

“닥쳐.”

[아니면…….]

마법진 너머 악마가 조롱하듯 한 이름을 담았다.

[널 사랑하는 아버지…… 엔리크……?]

“닥치라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쥬웰은 아차 했다.

악마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역시 그를…… 소중히…… 생각하는구나……. 착한…… 에스텔레…….]

쥬웰은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같이 감정을 드러내 버렸다.

“아니, 전혀 소중하지 않아. 답답하고 짜증 나기만 할 뿐.”

[그래……?]

“그래. 그러니 그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마.”

쥬웰은 으르렁거렸다.

[알겠다……. 어차피…… 우리는 너한테만…… 관심 있으니…… 어쨌든…… 아무라도…… 좋아. 네가…… 직접 바치는…… 거면…… 누구의…… 목숨도…… 괜찮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악마가 지금 바라는 건 목숨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사랑하는 그녀가 끔찍한 일을 저지르길 바라는 것이었다.

“하아.”

쥬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런 쓸데없는 것 말고 다른 걸 받아. 너희가 환장하게 좋아하는 것 있잖아.”

[어떤……?]

“내 고통.”

[……!]

마법진 너머로 악마가 시커멓게 숨을 들이켜는 게 들렸다. 그녀의 제안에 흥분한 것이다.

그녀는 탁자 위를 살펴 적당한 물건을 찾았다.

나선형 스크루가 달린 와인 오프너였다.

그녀는 치마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허벅지를 향해 와인 오프너의 나선형 스크루 부분을.

파앗!

그대로 내려찍었다.

그러나 송곳 부분이 허벅지에 닿기 직전.

악마가 뜻밖에도 그녀를 제지했다.

[그만…….]

“왜 그러지?”

[전혀 망설이지도 괴로워하지 않으니…… 재미가 없군…….]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악마에겐 애석하겠지만, 이제 이런 육체적 고통은 그녀에게 조금도 괴로움을 주지 못한다.

그때, 마법진이 일렁이며 악마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너…… 는…… 아직도…… 빛나는구나…….]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닥쳐.”

[정말…… 이야……. 어떻게…… 아직도…… 빛나는 거지? 너 같은…… 영혼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는 거지?]

“닥치라고. 제물을 받지 않을 거면, 예언이나 알려줘.”

악마가 킬킬 웃었다.

[카드를…… 받도록.]

마법진이 꺼지며 한 장의 카드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서른세 명의 목이 잘린 이들이 새겨진 카드였다.

밑에 문구가 적혀 있었다.

[트레만 마을. 익일 오후 3시경에 서른세 명 사망 예정.]

* * *

트레만 마을은 수도 옆에 자리한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평화롭네.’

쥬웰은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트레만 마을에 방문하고는 하품을 하였다.

별것 없는, 너무 평화로워 따분하기까지 한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모조리 몰살한다고? 오늘 갑자기?’

확인해 보니 트레만 마을의 주민 수는 딱 서른세 명이었다.

악마의 예언대로라면 마을 전체가 몰살당하게 되는 것이다.

‘틀린 예언은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었다.

어제 그녀와 대화를 나눈 악마의 격(格)을 생각하면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이길래?’

쥬웰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리샤크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가씨. 이런 곳에는 왜 온 것인지?”

“그냥 나들이. 소풍?”

“하지만…… 이곳은 딱히 나들이할 만한 곳이…….”

“몰라, 맛있는 것 좀 사다 줘.”

“네? 네?”

리샤크는 당황했다.

“여기는 간식을 살 만한 곳이……?”

“몰라. 맛있는 주스 먹고 싶어. 구해다 줘. 목마르단 말이야. 응?”

쥬웰은 투정을 부리듯 장난스럽게 말했고, 왜일까?

리샤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 그…… 아,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구해볼 테니 기다리십시오.”

리샤크는 뻣뻣이 굳은 동작으로 마을로 사라졌다.

쥬웰은 털썩 언덕에 눕고는 카드 한 장을 꺼내었다.

어제 악마에게 받은 예언 카드였다.

[트레만 마을. 익일 오후 3시경에 서른세 명 사망 예정.]

다시 봐도 확실했다.

“도저히 그럴 만한 기미가 안 보이는데. 심지어 이거 ‘반 확정 예언’이란 말이야.”

카드의 뒷면을 보니 섬뜩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펼친 손바닥을 못이 찌르고 있는 문양.

이건 정말 커다란 변수가 있지 않은 한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이었다.

세상 대부분 일은 변수를 가지고 가변적으로 일어나기에 이런 ‘반 확정 예언’을 내려받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지진? 산불? 아니면, 갑작스러운 산적 떼?’

하지만 다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모르겠다. 시간이 되면 알겠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쥬웰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랗디파란 하늘이 보였다.

‘하늘빛이 예쁘네. 옛날에 이렇게 누워 라디트랑 자주 봤었는데.’

라디트.

그녀는 이전 약혼자를 무심히 떠올렸다.

한때 목숨보다 사랑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깊은 원한만이 가득할 뿐.

‘언제쯤 널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을까? 매리엇과 결혼할 때까지는 기다려야겠지? 더욱 처참하게 만들려면?’

그녀는 복수를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복수의 기회는 원수당 단 한 번뿐이니까.

급한 마음에 서둘러 그 즐거움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완벽하게. 그리고 가장 괴로운 파멸을 선사하고 말 것이다.

‘라디트, 너만이 아니지. 매리엇, 플랑드나 언니, 아버지, 그리고 로튼 백작. 모두 하나하나 파멸에 이르게 할 거야.’

쥬웰은 그러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짚었다.

‘그리고 다른 원수들도 알아내야지.’

그날, 인신 공양 의식 때 가면을 쓴 다른 이들이 있었다.

그녀가 모르는 이들.

그들이 누군지도 알아내서 파멸을 선사해야 했다.

‘한 명은 짐작되는 이가 있지. 마왕 타란툴라.’

마왕 타란툴라!

유스넨과 더불어 그녀가 경계하는 네 명의 초월자 중 한 명이었다.

제국 역사상 최강, 최악의 흑마도사라 일컬어지는 마왕.

아마, 그 마왕 타란툴라가 그때의 의식을 주관했을 것이다.

‘그 정도 되는 마왕이 아니면 실행 불가능한 인신 공양 의식이었으니까.’

쥬웰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타란툴라도 잡아야 해.’

사실, 그녀는 타란툴라에게 딱히 원한은 없었다.

살인자가 칼을 써서 살인을 저지르면 칼을 원망할 건가?

타란툴라는 그저 원수들이 휘두른 도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잡으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어째서 내 영혼이 게헨나에 떨어진 건지 알아내야 해.’

원래 모든 영혼은 살면서 쌓은 죄과에 따라 사후 세계가 결정된다.

이건 세상의 절대적인 법칙으로 인신 공양 된 목숨도 마찬가지였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악마에게 바치는 인신 공양은 ‘목숨’을 의미하는 거지, ‘영혼’을 뜻하는 게 아니다.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져 목숨을 잃어도 그 영혼은 원래 예정된 곳으로 떠난다.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인지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게헨나에 떨어졌다.

당시에는 흑마법적 지식이 없어서 이상함을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당시 인신 공양은 단순한 인신 공양이 아니었다. 무언가 비밀이 있었다.

‘의식을 주관했던 타란툴라가 그 비밀을 알고 있을 거야. 잡아서 알아내야 해.’

그때, 주스를 구하러 간 리샤크가 돌아왔다.

“아가씨! 여기 아가씨가 좋아하는 딸기 주스를 구해 왔습니다!”

리샤크는 헐레벌떡 뛰어왔다. 마치 주인에게 돌아오는 강아지 같아 쥬웰은 자신도 모르게 쿡쿡 웃었다.

원수들을 떠올려 더러워졌던 기분이 리샤크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는 살짝 좋아졌다.

“음, 근데 나 오늘 딸기 주스 별로 안 먹고 싶었는데.”

“네? 그, 그러면 다른 걸로……!”

리샤크는 당황하더니 정말 다른 주스를 구하러 가려 했고, 쥬웰은 웃으며 리샤크의 손을 잡았다.

“장난이야.”

쥬웰은 진심으로 웃으며 말했다.

“주스, 구해다 줘서 고마워.”

“히, 힘들게 구했으니 맛있게 드십시오.”

“그래? 음. 맛있는데?”

“정말인가요?”

“응, 정말 맛있어.”

“가, 감사합니다!”

리샤크는 환한 얼굴로 답했다.

그때, 갑자기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얼음처럼 딱딱하고 창백하게.

리샤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혹시 딸기 주스에 돌이라도……?”

“……리샤크, 지금 몇 시야?”

“2시입니다.”

아직 예언의 시간 때까진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섬뜩한 징조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오로지 거대한 마인 그녀만 느낄 수 있는 징조였다.

“……말도 안 돼. 설마 이런 재앙이었다고? 터무니없는.”

쥬웰은 신음을 흘렸다.

리샤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시지? 웬 재앙?’

산골 마을은 여전히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때, 쥬웰이 리샤크를 바라보았다.

“리샤크. 당장 이곳을 떠나.”

“네? 네?”

“떠나라고!”

쥬웰이 버럭 소리 질렀다.

리샤크는 놀란 얼굴을 했지만, 말에 따르지는 않았다.

“안 됩니다. 저는 아가씨를 곁에서 지켜야…….”

“닥치고, 당장 내 명령 따라! 떠나라고! 당장!”

“아, 아가씨?”

리샤크는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쥬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가 여기 남아 있으면 죽으니까 그렇지, 이 답답한 놈아.’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리샤크는 가넷가 최강 기사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으면 죽는다니?

그만큼 지금 이곳에는 끔찍한 재앙이 도래하고 있었다.

‘제길. 어쩔 수 없지.’

“리샤크. 내 눈을 봐.”

“네? 네?”

“어서!”

리샤크는 그 명령마저 거부하진 않았다.

쥬웰의 붉은 눈동자를 본 순간.

리샤크의 눈이 딱 풀렸다.

흑마도사의 세뇌였다.

“명령하니,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

쥬웰은 언령을 뱉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리샤크는 그 언령을 버텨내었다.

“아, 안 돼…… 난…… 당신을…… 지켜야…….”

쥬웰은 살짝 놀랐다.

리샤크의 정신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명령하겠다. 당장…… 이곳을 떠나.”

쥬웰의 미간에 한 송이 악마화가 피어올랐다.

“으…….”

그럼에도 리샤크는 굴복하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제길, 무슨 정신력이 쓸데없이.’

쥬웰은 욕설을 내뱉고는 더 힘을 발현했다.

악마화가 가지를 뻗어내기 시작했다.

뻗어낸 가지에서 새로운 악마화가 송이송이 피어올랐다.

그런 악마화가 무려 다섯 송이가 넘게 피어오른 후.

결국, 리샤크는 굴복하였다.

“최대한 빨리, 멀리! 가서 낮잠 자!”

쥬웰은 초조히 외쳤고, 다행히 리샤크는 명령에 순응했다.

파앗!

빠르게 사라진 것이다.

쥬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끔찍한 이변이 일어났다.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방금까지 파랗던 하늘이 회색으로 변하였다.

하늘만이 아니다. 녹음이 우거졌던 산도, 마을도, 개울물도. 모두 잿빛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쥬웰은 이런 광경을 무려 600년이나 봐왔다.

“……침식.”

쥬웰은 신음을 흘렸다.

‘침식’.

게헨나와 세상 일부가 겹치는 것을 뜻하는 현상이다.

지금 쥬웰이 있는 마을이 게헨나의 일부와 겹쳐졌다.

* * *

그때, 빈민가의 진료소.

은발의 부드러운 미남, 유스넨은 서신을 보고 있었다.

잔뜩 때가 묻은 낡은 서신.

에스텔레가 그에게 보냈던 서신이었다.

서신을 보는 유스넨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 가면을 쓴 듯한 미소가 아닌, 진심 어린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참혹함으로 변했다.

서신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중에 만나.]

결국, 그런 날은 오지 않았으니까.

유스넨은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기다란 한숨을 내쉬고는 창밖으로 그녀가 남긴 유일한 흔적인 진료소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진료소를 보고 있으니, 왜일까? 문득 한 소녀가 떠올랐다.

‘쥬웰.’

새롭게 나타난 흑발의 성녀.

그리고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릿한 소녀.

‘그녀는…… 정말 어둠일까?’

유스넨은 고민했다.

그는 천사의 피를 각성했다.

그래서 어둠을 감별하는 첨예한 직감을 가지고 있고, 그녀를 볼 때마다 경계심이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어둠이라고 볼 수는 없는 모습들인데.’

그녀가 보인 눈물.

환자를 대하는 진심 등등.

어둠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어둠이 빛으로 위장할 수 있다지만…… 그런 진심을 가장할 수 있을까?’

유스넨은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서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유스넨의 얼굴이 굳어졌다.

갑작스럽게 끔찍한 ‘징조’를 느낀 것이다.

“설마 이건…… 침식?”

침식. 말 그대로 게헨나의 일부가 지상을 침식하는 것이다.

‘라인하르트 제국이 거대한 어둠의 무덤 위에 건국된 나라라서 생기는 현상이지.’

쥬웰은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300년 전.

거대한 어둠이 대륙에 강림했고, 일곱 명의 영웅, 황가와 여섯 공작가의 선조들이 힘을 합쳐 그 어둠을 봉인한 게 제국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 봉인은 완벽한 건 아니었다.

불안정하여 가끔 게헨나의 일부가 지상을 침범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게 바로 지금 나타난 ‘침식’ 현상이다.

‘이래서 반 확정 예언이었군. 침식은 막을 수 없으니까.’

쥬웰은 혀를 찼다.

갑작스러운 괴현상에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 하늘이 잿빛으로?!”

“살려줘! 아아악!”

사람들 모두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잿빛으로 변한 하늘은 시작일 뿐이었다.

[고오오…….]

섬뜩한 귀곡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게헨나에서 고통받는 망자들이 지르는 비명들이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하나둘 마물이 출현할 거고, 이곳은 점차 완전한 어둠의 땅, 마경(魔境)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악화하기 전에 해결되겠지만. 곧 흰둥이가 오겠지.’

흰둥이.

바로 유스넨 대공이다.

페리도트 대공가는 이런 일에 나서라고 존재하는 것이니까.

보통 완전한 마경이 되기 전에 페리도트 대공가에서 나서서 해결한다.

마침 수도 근처에 발생한 침식이니 초기 단계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곳 사람들은 그전에 다 죽는다는 거지만.’

쥬웰은 펜던트 시계를 꺼냈다.

2시 30분.

사람들이 몰살한다고 예정된 시간은 3시였다.

앞으로 30분인데, 그 안에 유스넨 대공이 도착할 수 있을까?

무리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재수가 없었다고밖에. 이건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쥬웰은 냉담히 생각했다.

이건 홍수나 화산,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내가 나설 수도 없고.’

물론 그녀가 나서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어둠의 존재인 그녀가 침식을 해결하는 건 상당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이 침식을 주도한 고위 악마와 원수를 질 걸 각오해야겠지.’

그건 절대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냥 내버려 두어야 했다.

‘난 복수를 하러 지상에 온 거지.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러 온 게 아니니까.’

쥬웰은 무심하게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째각 흘렀다.

2시 40분.

드디어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물이 등장한 것이다.

[키릭! 키리릭!]

섬뜩한 괴성.

겁에 질려 떨던 마을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칼을 든 작은 난쟁이들이었다.

‘그렘린.’

쥬웰은 마물의 정체를 떠올렸다.

“끄아아악! 도망가!”

“살려줘!”

마을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도망쳤고, 그렘린들은 쥐를 쫓는 고양이처럼 마을 사람들을 쫓았다.

곧 하나하나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죽어갔다.

‘일단 악한 이들 먼저 죽이려는 건가?’

쥬웰은 그렘린의 행동 양식을 파악했다.

악마들이 착한 영혼을 가진 인간을 좋아하듯, 마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 중 악한 이들을 빠르게 먼저 잡아 죽이고, 착한 영혼을 가진 이들을 뒤에 남겨 천천히 죽일 심신인 것 같았다.

맛있는 반찬을 뒤로 남겨두듯.

‘그냥 자연재해일 뿐이야. 나랑 상관없어.’

쥬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치 비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처럼.

비명이 이어졌다.

이런 작은 마을에도 게헨나에 떨어질 죄인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게헨나의 분류로 ‘죄인’의 처단이 끝났다.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남겨진 선한 이들을 잡아 죽이려는 것이다.

[키릭. 키릭.]

그렘린들이 문이 닫힌 집 한 채로 다가갔다.

한 일가족이 숨어든 곳이다.

그때, 돌발 상황이 일어났다.

문이 열리더니 한 중년의 남성이 나온 것이다.

그러고 다급히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곡괭이를 든 채 덜덜 떨며 그렘린들에게 외쳤다.

“꺼, 꺼져! 이 괴물들아! 절대 이 안으로는 못 들어간다!”

가상한 용기였지만, 그렘린들은 도리어 신이 난다는 반응이었다.

“아, 안 돼! 여보!”

“아빠! 엉엉! 안 돼!”

집 안에서 쿵쾅 소리가 들렸지만, 중년의 남성은 도망치지 않았다.

무심히 그 처절한 장면을 보고 있던 쥬웰은 불쑥 하나의 음성을 떠올렸다.

그녀의 아버지, 웰링턴 공작의 음성이었다.

‘쓸모없는 년.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지. 그러면 다 해결되었을 텐데.’

이전 에스텔레 시절, 어릴 때.

에메랄드 공작가의 신전 비리에 분노한 군중을 달래러 나갔을 때였다.

그녀는 돌팔매를 당했고, 사경을 헤매고 일어난 다음에 아버지에게 저런 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당장 다시 나가 제대로 처리하고 와! 못 하겠으면, 차라리 거기서 죽어!’

그때, 군중의 분노는 보통이 아니었다. 누군가 죽어 나가야 진정될 분노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 대신 다시 사지로 나설 수밖에 없었고, 돌에 맞아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사람들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고작 열세 살밖에 안 되었던 작은 소녀의 처참한 사과에 군중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일을 해결 후 퉁퉁 부은 얼굴로 곧바로 원래 하던 일을 하러 떠나야 했다. 조금도 쉬지 못하고 말이다.

그게 아버지, 웰링턴 공작의 뜻이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아버지와 저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아버지는 너무나 달랐다.

똑같은 아버지인데도 말이다.

‘아버지가 저런 모습을 한 번이라도 내게 보여주었다면…… 이토록 원망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또 하나 떠오르는 음성이 있었다.

‘널 곁에서 지킬 것이다.’

엔리크 자작.

그녀가 꿈꾸어왔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런 엔리크 자작의 음성이 떠오르자, 쥬웰은 갑자기 울컥 가슴이 흔들렸다.

바득 이를 깨물고는 목에 걸린 기다란 사슬형 목걸이를 풀고 손가락에 피를 내어 목걸이에 먹였다.

그리고 그렘린의 칼이 중년 남자를 찌르려고 할 때.

무언가 날아와 그렘린의 머리를 쳤다.

[끼릭? 끼릭!]

다른 그렘린들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였다.

죽음의 사신처럼, 흑발을 늘어뜨리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그녀의 손에는 피가 묻은 은사슬 목걸이가 섬뜩하게 길게 늘어져 있었다.

[키릭? 키릭?]

그렘린들이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우왕좌왕할 때 또다시 그녀의 목걸이가 반짝였고, 구경하던 그렘린들에게서 피가 튀어 올랐다.

목걸이가 번쩍할 때마다 그렘린들이 죽어 나갔고, 곧 중년 남자 주위의 그렘린들은 전멸하였다.

“하아.”

쥬웰은 뚝뚝 피가 떨어지는 은사슬 목걸이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 쳤네.’

* * *

‘늦었어.’

유스넨은 침식을 인식하자마자 전력을 다해 해당 장소로 이동하였다.

다행히 거리가 멀지는 않았다.

바로 수도 옆의 산골 마을이었으니까.

침식 초기에 사태를 진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살리지 못하겠지.’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의 희생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침식이 일어나면, 해당 지역의 사람이 생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최대한 초기에 사태를 진압하는 것이다.

사태 진압이 늦어질수록 침식 범위는 넓어지고, 더욱 강력한 마물과 악마가 출현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 해당 지역이 마경(魔境)으로 변한다.

영원히 게헨나의 일부가 되어 마물의 서식지가 되는 것이다.

현재 제국에는 그런 마경이 한 군데 있었다.

그래도 전력을 다해 이동한 덕에 유스넨은 예상보다 이르게 침식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눈앞의 광경에 흠칫하였다.

생각지도 않은 인물이 안에 있었다.

‘……쥬웰?’

유스넨은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녀가?

‘설마?’

한 가지 섬뜩한 추측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우연히 이곳에 있다가 휘말린 것일 수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그녀는 평소 하고 다니던 은사슬 목걸이를 풀었고, 손가락에 피를 내 목걸이에 먹였다.

그리고.

파앗!

은사슬 목걸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렘린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

그 광경에 유스넨은 얼음처럼 굳었다.

그녀가 생각지 못한 힘을 발현해서가 아니다.

그의 눈에 그녀의 뺨에 떠오른 문양이 선명히 들어왔다.

악마의 낙인, 악마화(惡魔華)였다.

그녀가 어둠의 존재라는 걸 그 어떤 것보다 확실히 입증하는 문양이었다.

* * *

‘젠장, 이러면 안 되는데.’

쥬웰은 혀를 찼다.

그러면서 손을 움직여 마물들을 학살했다.

[크륵? 키릭! 키리릭!]

마물들이 당황해 항의하였으나, 무시하였다.

은빛 선이 번뜩일 때마다 마물들이 튀어 올랐다. 벌레를 짓눌러 죽이듯 무심한 동작이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물의 시체가 쌓였고, 수백은 되었을 마물이 순식간에 몰살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마물들의 우두머리, 그렘린 로드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렘린 로드는 상급 마물답게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알았다.

[여기는 침식된 땅! 이들을 학살하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한이자 의무입니다! 아무리 당신이 위대한 분들의 총애를 받는 퀸이라도……!]

“그래, 맞는 말이지.”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렘린 로드의 말이 맞았다.

굶주린 맹수가 눈앞의 먹이를 먹듯, 마물이 먹이로 던져진 인간을 잔인하게 사냥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그렘린들은 그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촤라락.

은 사슬 목걸이가 기형적으로 늘어났다.

그녀의 피를 먹은 목걸이는 이제 마병(魔兵). 그녀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환시킬 수 있었다.

[흐, 흡?]

그렘린 로드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제, 제발……!]

“사람들을 죽이는 게 네 당연한 권리라고 했니?”

쥬웰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러면…… 눈앞에 거슬리는 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도 내 당연한 권리 아닐까?”

[그, 그……. 제, 제발…… 제발……!]

“그렇잖아? 너같이 하찮은 것. 이 몸이 죽인다고 해도 감히 누가 뭐라고 할 거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피가 튀어 올랐다.

그렘린 로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사고 쳤네. 그냥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과연.

[크아악! 감히 내 수족들을! 퀸!]

게헨나 저편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침식을 계획한 악마의 비명이었다.

그런데 놀랍게 익숙한 음성이었다.

‘마리를 꼬시려던 그 악마잖아?’

쥬웰은 놀란 얼굴을 했다.

하필 얼마 전 악연이 있었던 그 악마였다.

‘이런. 완전한 원수가 되었네. 번거롭게 되었어. 그나마 2품이 아니라 3품 악마라서 다행인가.’

뭐,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3품이라도 고위 악마.

이제 저 고위 악마는 전력을 다해 그녀를 적대하려고 들 테니까.

쓸데없이 적을 만든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쥬웰은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친 사고. 어쩔 수가 없었다.

“시끄러우니 꺼져.”

[퀸!]

악마는 비통한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할 수 없지. 이왕 벌어진 사고이니, 상황을 최대한 내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밖에.’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완전히 침식을 해결해 영웅이 되겠어.’

이미 손을 댔으니, 내친김에 완전히 침식을 해결해 낼 작정이었다.

침식은 제국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

그런 커다란 사건을 홀로 해결하면 영웅이 되기에 충분했으니까.

먼저 손가락을 튕겼다.

마물들의 시체가 영적인 불에 타 사라졌다.

그다음 단계는 성력을 발현했다.

갑자기 성력을 발현한 이유는 간단했다.

침식된 땅을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초기 단계라 성력이 많이 필요하진 않겠네. 한번에 해낼 수 있겠어. 저쪽이 침식의 핵인가?’

그녀는 단번에 침식 공간의 축을 이루는 핵을 파악했다.

사실 그녀, 에스텔레는 침식 정화의 최고 전문가였다.

죽기 전 10년 동안 제국에서 발생한 모든 침식 정화에 관여했었으니까.

파앗!

그녀의 성력이 빛처럼 퍼져 나갔다.

그러자 마치 유리가 깨지듯 침식 공간에 쩌적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단번에 어둠의 기운이 정화된 것이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어쩌지?’

쥬웰은 자신을 경악스럽게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대략 스물다섯 명이 조금 넘어 보였다.

‘내가 어둠의 힘을 쓴 기억을 남길 수는 없으니, 기억을 지워야겠지. 숫자가 너무 많아서 정교하게 지우진 못하겠지만.’

부작용이 남지 않게 기억을 조작하려면 대단한 공이 필요했다.

하지만 스물다섯 명도 넘는 이들을 어떻게 일일이 그런단 말인가?

그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녀님!”

“마녀님 덕분에 살았어요!”

“마녀님은 우리의 은인이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그중 몇몇 인물에게 시선이 닿았다.

아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가족들을 지키려던 아버지와 일가족이었다.

그들이 눈물이 범벅인 얼굴로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쥬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그녀는 결국 마을 사람들의 기억을 하나하나 섬세히 조작하였다.

어떤 부작용도 남지 않게.

심지어 이번 일로 받을 정신적 트라우마도 최소화하게 말이다.

‘이런 큰일을 겪으면 정신적 트라우마가 남으니까. 최대한 충격이 덜하게 손을 봐주면 그나마 낫겠지.’

사건을 겪은 기억 자체를 지울 수는 없다. 그러면 비어버린 기억으로 더 큰 부작용을 겪는다.

대신, 사건을 겪은 사실 자체는 남기되 끔찍했던 공포와 상처를 최대한 섬세하게 덜어내는 것이다.

이 많은 이에게 그런 공을 들이는 건 그녀에게도 힘든 일이었지만…….

‘다들 운 좋은 줄 알아. 특별 서비스니까.’

쥬웰은 투덜거렸다.

그녀가 이러는 이유는 하나.

아까 가족들을 위해 나섰던 이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아버지가 마음에 변덕을 일으켰다.

그녀는 부정(父情)을 평생 동경해 왔기에 이런 이들에게 약했다.

어쩔 수 없이 강한 능력을 써야 했기에 악마화가 송이송이 얼굴에 피어올랐다.

* * *

한편, 유스넨은 심판의 검을 꺼내 들었다.

악마의 꽃, 악마화(惡魔華).

끔찍한 어둠의 존재임을 무엇보다 명확히 증명해 주는 표식.

쥬웰은 어둠의 존재가 맞았던 것이다.

‘역시…… 속인 거였군.’

유스넨의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직감은 옳았다.

그런데 이 감정은 무엇일까?

들끓는 감정이 느껴졌다.

배신감이었다.

유스넨은 헛웃음을 흘렸다.

‘배신감은 무슨. 애초에 믿은 적도 없지 않았나?’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믿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런 감정을 느낄 이유도 없지만, 그럼에도 배신감은 쉽게 떨치지 않았다.

‘하아.’

그녀가 지금껏 그에게 보였던 진실한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기대했을 수도 있다.

저토록 진실해 보이는 그녀가 어둠의 존재가 아니길.

이유 없이 자신의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그녀가 올곧은 존재이기를.

하지만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 남은 건 하나.

그녀를 처단하는 것뿐이었다.

심판의 검에 서늘한 예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어둠의 존재에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성검이 자신의 힘을 발현하려는 순간.

유스넨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쥬웰이 마물들을 모조리 학살하더니 성력을 발현해 침식된 공간을 정화한 것이다.

‘……뭐 하는 거지?’

자신이 잘못 본 건가 했지만, 아니었다.

침식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믿기지 않는 행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쥬웰은 하나하나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을 살폈다.

‘기억 변형? 그런데 왜 저렇게 공을 들여서?’

유스넨도 천사의 능력으로 기억 변형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었다.

쥬웰이 대단히 공을 들여서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다는 것을.

‘한 명, 한 명 일일이 기억을 조작하고 있다고?’

대단히 큰 정신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무슨 이유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녀가 기억을 변형한 이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평안해졌다는 것이다.

마치 정신 치료라도 받은 듯 편안한 얼굴이었다.

놀라운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상처 입은 사람들도 성력으로 모조리 치료해 주었다.

‘왜?’

유스넨의 머리에 혼란이 가득 떠올랐다.

그녀는 어둠의 존재다.

지금도 얼굴에 찍혀 있는 악마의 낙인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데 지금 저 행동은 무엇이란 말인가?

위선?

하지만 무얼 위해?

‘성녀로서 이번 일을 해결했다고 위장하려는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어째서인지 저 악마는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에라도 처단을.’

하지만 환자를 치료하는 그녀의 표정이 그의 발을 붙들었다.

또 그 표정이다.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는 얼굴.

악마의 낙인이 찍혀 있음에도…… 어떤 성자, 성녀보다 숭고해 보이는 눈빛.

‘……왜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 위장?’

하지만 지금 그녀를 지켜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을 사람들? 악마의 능력으로 기억을 조작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데 어째서 또 저런 진실한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인가?

마치 정말로 다른 이들을 위하는 것처럼.

도대체 왜?

답을 알 수가 없었고, 유스넨은 심판의 검을 든 채 움직이지 못하고 우두커니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모든 일을 끝낼 때까지 말이다.

* * *

‘아, 죽겠다. 괜히 무리했네.’

쥬웰은 창백한 얼굴로 생각했다.

최근 몸도 좋지 않았는데, 너무 무리한 것 같다.

‘어쨌든 다들 내가 어둠의 힘을 쓴 건 기억 못 할 거야. 그저 날 자신들을 구해준 성녀로만 여기겠지. 이번 일로 난 영웅이 될 거야.’

무려 침식을 막은 일이다.

원래는 죽었을 수십 명의 생명을 구해냈고 말이다.

영웅이 되기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위대한 빛의 축복이 성녀님께 있기를!”

“영원히 성녀님을 칭송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감사의 인사를 하였고, 쥬웰은 발걸음을 옮겼다.

뒤처리는 뒤에 올 사람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유스넨 이놈은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직무 유기 아니야?’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나타날 생각을 안 했다.

‘곧 오겠지. 일단 나는 돌아가자. 리샤크는 어디 있지? 빨리 가서 쉬고 싶은데. 아, 편히 쉴 수도 없겠구나.’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피로하거나, 성력을 무리해서 쓴 날은 평소보다 더욱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깊은 잠에 빠지는 건…… 그녀에게는 굉장히 무서운 일이었다.

잠에 깊게 들수록, 억누른 ‘무의식’이 더욱 강하게 부상하니까.

즉, 끔찍한 밤을 보내게 된다.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밤이 두려웠다.

고문보다 악몽이 더욱 끔찍했다.

외면하고 있는 상처를 강제로 직시해야 하니까.

‘……유스넨을 만나고 갈까?’

순간,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유스넨을 만나 성력을 받고 갈까, 하는 유혹.

그의 성력을 받으면 편히 잠들 수 있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손을 묶을 단단한 매듭이나 준비하자.’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뜻밖의 인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유스넨이었다.

이제야 도착한 것 같았다.

왜일까?

쥬웰은 순간 그가 반갑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힘을 쓰는 모습을 보진 않았겠지?’

그랬을 것이다.

만약 봤다면, 이렇게 얌전히 나타나지 않고 다짜고짜 그녀를 죽이려고 했을 테니까.

“……지각하셨네요, 예비 약혼자님. 제가 먼저 다 해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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