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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Saint? Evil? (1) (4/18)

2막 위선의 성녀

Chapter 2-1 Saint? Evil? (1)

‘성공적이야.’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일단 토른 공작을 소생시켰다.

가넷 공작가를 손에 넣을 가장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아, 아버지……! 다, 다행입니다!”

토른 공작은 의식을 차리려는지 나직이 신음을 흘렸고, 그런 공작에게 로튼 백작이 창백한 얼굴로 부르짖었다.

다행이라는 말의 내용과 다르게 파리한 얼굴이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토른 공작을 죽이려 했던 장본인이니 당연히 두렵겠지. 진실이 밝혀지면 파멸일 테니까.’

두근. 두근.

로튼 백작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전달되었다.

로튼 백작에게도 ‘피의 각인’을 새겨놓았던지라 그가 느끼는 두려움이 선명히 전달되는 것이었다.

‘모자라.’

쥬웰은 갈증을 느꼈다.

피를 갈구하는 악마처럼, 더욱더 큰 절망의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그녀에게 즐거움을 준 게 로튼 백작만이 아니란 거였다.

원수들 모두.

그녀의 성력을 보고 사색이 되어 사라졌다.

마치 에스텔레가 살아 돌아온 듯한 기시감을 느낀 것이다.

그들이 느꼈던 섬뜩함이 ‘피의 각인’을 통해 그대로 쥬웰에게 전달되었다.

‘고작 이런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감미로운데. 과연 앞으로는 얼마나 즐거울까?’

쥬웰은 앞으로 그들이 내지를 비명이 기대되었다.

‘하여튼 여러모로 성공적이야. 여섯 공작가 앞에서 완전히 성녀로 자리매김했고.’

오늘의 일은 금세 제국 전역에 퍼질 거고 그녀는 새로운 성녀로 추앙받으리라.

‘물론 에스텔레 때처럼 성녀로 살 생각은 없지만 있는 힘을 안 사용할 이유는 없지.’

성력은 그녀의 무기 중 하나였다.

이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활용이 가능한 강력한 무기 말이다.

그녀는 이 성력을 이용해 빛의 천사를 가장한 악마가 될 작정이었다.

그때, 여러 사람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쥬웰 영애!”

“방금 성력은 도대체 어떻게?”

순식간에 그녀는 겹겹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쥬웰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기도하는 사이 하늘의 축복을 받은 것 같아요. 저도 어떻게 된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아아!”

“하늘의 축복이! 새로운 성녀의 탄생이야!”

사람들이 경악하여 외쳤다.

쥬웰은 담담히 웃으며 사람들이 알아서 반응하도록 놔두었다.

그런데 묵직한 음성이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잠깐만! 다들 물러서십시오!”

“……!”

쥬웰의 아버지 엔리크 자작이었다.

“아버지?”

그는 무뚝뚝한 평소와 다르게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뭐라고 묻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쥬웰을 다그치기보다는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미안하지만 다들 물러가 주십시오.”

“하지만…….”

“물러가라 하였습니다.”

엔리크 자작의 딱딱한 음성에 사람들은 우물쭈물 물러갔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쫓는 거야?’

그녀의 숭고한(?) 모습을 소문내 줄 사람들인데 쫓아내다니.

엔리크 자작이 쥬웰을 돌아보았다.

“쥬웰. 너…….”

“기도하는 사이 하늘의 축복을 받은 것 같아요.”

사람들과 똑같은 질문을 하려는 것 같아 앵무새처럼 답변해 주었다.

하지만 엔리크 자작이 물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몸은 괜찮은 거냐?”

“……!”

“네가 성력을 사용하다니. 성력은 몸에 부담을 많이 준다고 들었는데. 혹시 괴롭거나 몸에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느냐?”

성력의 사용은 몸에 무리를 준다.

그러니 갑작스레 성력을 각성한 딸의 몸에 이상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이전 아버지, 웰링턴 공작이 늘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직도 고작 그 정도 성력인 거냐? 쯧, 한심한 것. 내가 왜 널 데려왔는데.’

‘죄, 죄송합니다.’

‘잊지 마라. 천한 피가 섞인 너를 데려온 건 오로지 성력 때문이란 것을.’

웰링턴 공작은 그녀가 만족스러운 성력을 발현하지 못하면 밥을 굶기거나 매를 들었다.

그녀는 몸이 엉망진창이 되어 쓰러질 때까지 성력을 사용하고 또 사용해야 했다.

고작 말문이 갓 트인 어린 시절에 말이다.

그런데 고작 성력 한 번 썼다고 저런 걱정이라니.

“……네, 특별히 안 좋은 점은 없어요.”

엔리크 자작이 집요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파리한 안색인데, 괜찮다고?”

“……그냥 피로할 뿐이에요.”

엔리크 자작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쥬웰의 팔을 잡았다.

차가운 외모와 다르게, 부드럽게. 온기가 느껴지는 손이었다.

“……아버지?”

“더 이야기 안 하겠다. 오늘은 들어가자. 집사, 쥬웰의 별채로 마차를…….”

함께 가려는 듯한 모습이라 쥬웰은 엔리크 자작의 손을 뿌리쳤다.

“쥬웰?”

“저 혼자 가겠어요.”

엔리크 자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아버지.”

쥬웰은 차분히 말했다.

“지금 저와 함께 있는 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인 것 아닌가요? 지금은 할아버지께 가보셔야 하지 않나요?”

엔리크 자작은 입을 다물었다.

토른 공작은 아직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그가 내일쯤이면 완전히 회복할 것으로 판단했고 쥬웰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만큼 강력한 성력을 퍼부었으니까.

어쨌든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후계 다툼이 다시금 시작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엔리크 자작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한참이나 쥬웰을, 정확히는 그녀의 하얀 안색을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다고?”

“네, 괜찮아요. 아니, 조금 안 괜찮다고 해도.”

쥬웰은 무심히 말했다.

“아버지께 걱정해 달라고 한 적은 없어요.”

“……!”

엔리크 자작의 적색 눈동자가 굳었다.

하지만 내친김에 한 번 더 내질렀다.

“우리 그렇게 가까운 부녀는 아니었잖아요. 지금 이러시는 것 솔직히 조금 불편해요.”

아.

심하게 말해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엔리크 자작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차가운 외모와 다르게 딸을 향해 얼마나 깊은 마음을 감추고 있는지 이제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거리를 두는 게 나아. 엔리크 자작을 위해서라도.’

엔리크 자작은 입술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부디 가서 푹 쉬어라.”

쥬웰은 고개를 숙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별채에 도착하니 룬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 아가씨, 들었어요! 역시 아가씨께서는……!”

귀찮아서 대충 머리 쓰다듬어 주고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사실 몸이 안 좋긴 했다.

‘성력을 쓰면 체력이 송두리째 떨어지니까. 피곤해.’

침대에 누우니 급속도로 수마가 밀려왔다.

‘아…… 피곤…… 조금만…… 아니…… 잘 준비…… 해야…… 일어나야…… 이렇게 잠들면 안…….’

쥬웰은 억지로 눈을 뜨려고 했다.

잠들기 전 반드시 ‘조치’해야 할 게 있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 성력을 쓴 탓인지, 몸이 너무 무거워 쥬웰은 딱 1분…… 아니, 30초만 있다가 일어나려고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크게 후회하게 되었다.

* * *

꿈을 꾸었다.

에스텔레 시절의 꿈이었다.

‘잘하여라.’

아버지, 웰링턴 공작.

‘널 가족으로 받아들인 건, 오로지 네가 쓸 만한 도구이기 때문이니.’

에스텔레는 웰링턴 공작이 술에 취해 길거리의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고 낳은 딸이었다.

물론 웰링턴 공작은 에스텔레를 딸로 키울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돈을 쥐여 주고 그걸로 없는 인연으로 할 생각이었다.

어린 에스텔레가 성력만 각성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마침 당대 에메랄드 공작가에는 성력을 각성한 이가 없어 곤란한 처지였다.

하늘의 축복이 에메랄드 공작가를 떠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 터라 웰링턴 공작은 그녀를 딸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차라리 어머니와 지냈으면 더 행복했을까?’

에스텔레는 씁쓸히 생각했다.

아니, 그렇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녀를 낳은 어머니도…… 사실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학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관심과 애정을 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방치되어 자랐다.

앙상한 손으로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실제로 그녀가 에메랄드 공작가로 떠난 이후, 어머니는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지금은 어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았다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래서였다.

아버지와 주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건.

살면서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어리석었지.’

노력하면,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약혼자의 꿈도 꾸었다.

‘사랑해. 목숨보다도, 너를.’

라디트는 모든 면에서 훌륭한 남자였다.

아름답고, 믿음직스러웠으며, 강하고, 굳건했다.

처음에는 사생아인 그녀를 경멸했지만 결국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뜨거운 사랑이었다.

올바른 타오름, 정염(正炎).

그 말과 참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항상 마음이 포근했다.

드디어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좋았지. 그날까지만 해도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에스텔레, 아니, 쥬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 망할.”

쥬웰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큰일 났다.”

사고를 쳐버렸다.

침대에 피가 낭자했다.

* * *

그러니까.

이건 원래 잠들 때 습관이었다.

그녀는 잠들 때마다 늘 끔찍한 악몽을 꾼다.

따라서 깊게 잠들면 악몽 때문에 심하게 몸부림을 쳤고, 그 여파로 때때로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이런, 손을 묶고 잤어야 했는데. 깜빡 잠들어 버렸어.’

쥬웰은 혀를 찼다.

‘하필 목 부위를 다쳤네.’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찰과상이었다.

다만, 다친 위치가 눈에 띄는 목 부위라 곤란했다.

‘목이 확실히 가려지는 옷을 입어야겠네.’

성력으로 치료하는 건 무리였다.

그녀는 지금 어둠의 존재라 성력이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 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흑마법으로 치료하는 방법도 있지만 악마의 힘인 흑마법으로 치료하면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따른다.

깊은 상처면 모를까 이 정도 상처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다.

손을 튕겼다.

그러자 침대를 물들였던 피가 허공으로 몰려들었다.

흔적을 없애려는 것이다.

‘아, 저 피 버리기 아까운데.’

그녀의 피는 흑마술의 강력한 재료였다.

고민하다가 호신용 단도를 꺼냈다.

‘마침 사용할 일이 있으니까. 잘됐네.’

“축복받으라, 미물이여. 이제 그대는 영원한 안식의 주관자가 될지니.”

그녀의 피가 단도에 스며들었다.

은색 단도가 그녀의 피를 머금고 시뻘겋게 물들었다. ‘마검(魔劍)’이 된 것이다.

제법 멋들어진 모습이라 쥬웰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잘 뽑혔네.’

어차피 곧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 옷도 갈아입으려고 직접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쥬웰은 엔리크 자작처럼 따로 별채에 나와 살아 방 옆에 커다란 드레스 룸이 있었다.

사치스러운 쥬웰의 성격답게 온갖 옷이 다 있었지만, 목을 가릴 만한 옷은 별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하나.

‘흠, 이건 너무 정복 같은가?’

굉장히 단정한 원피스였다.

가슴 부위는 목 위까지 올라오는 하얀 색상의 블라우스였고, 팔을 비롯해 가슴 주위와 나머지 부위는 치마까지 차분한 검은색이었다.

‘쥬웰은 이런 것 안 입던데.’

그래도 목을 가릴 만한 게 그나마 이것밖에 없는 것 같아 그 옷으로 선택했다.

‘화려한 드레스보다 훨씬 편하네.’

사실 평소 그녀의 취향은 이런 단정한 스타일이긴 했다.

‘그나저나 컬렉션이 대단하네. 보석 장신구도 많고. 이게 다 얼마야?’

쥬웰은 장신구들을 살피다가 하나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다.

얇은 은사슬을 겹겹이 둘러 만든 목걸이였다.

펼치면 제법 길이가 될 것 같았다.

‘이건 무기로 제법 유용하게 쓸 수 있겠는데?’

풀어서 길게 늘어뜨리면 훌륭한 채찍 대용품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컬렉션을 구경하는데, 룬이 들어왔다.

“아가…… 씨?”

“왔니? 왜 그러니?”

“너, 너무 예쁘셔요!”

룬은 침을 꿀꺽 삼켰다.

화려한 평소와 다르게 단정하게 입으니 오히려 아름다운 외모가 더욱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무심한 짙은 적안이 검은 정복 디자인의 옷과 대조되어 홀릴 듯 강렬한 매혹을 자아냈다.

은사슬 목걸이도 그런 분위기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들었고.

“아, 아마 아가씨가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예요!”

쥬웰은 성의 없게 답하였다.

“그래? 하긴, 이 몸이 예쁘긴 하지.”

솔직히 쥬웰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 아름다움이 아니긴 했다.

그녀는 순전히 객관적으로 답했고, 룬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최고예요! 황홀해요!”

“응, 그래. 어쨌든 나갈 채비를 하려무나.”

“네, 어디를?”

쥬웰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할아버님을 뵈러 가려고.”

토른 공작.

슬슬 그가 깨어날 때가 되었다.

‘효심 넘치는 손녀가 되어야지.’

이것저것 뜯어먹을 게 많았다.

* * *

토른 공작의 방에 가니 이미 많은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다.

“쥬웰.”

엔리크 자작이 그녀를 맞았다.

딸이 괜찮은지 살폈으나 어제 그녀가 했던 이야기 때문인지 밖으로 걱정을 내뱉지는 않고 이렇게만 물었다.

“……잘 쉬었느냐?”

“네, 푹 잤어요.”

쥬웰은 무심히 답했다.

옆에서 다른 인물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와, 왔느냐, 쥬웰?”

로튼 백작이었다.

“네, 백부님.”

쥬웰은 엔리크 때와 다르게 싱긋 웃었다.

로튼 백작의 안색이 하얬다.

‘어제 걱정으로 한숨도 못 잤군. 토른 공작에게 독을 먹인 장본인이니 말이야.’

쥬웰은 골려주고 싶어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님께서 깨어나셔서 너무 기뻐요. 란 남작 부인이 어서 입을 열어야 독을 사주한 범인도 밝혀질 텐데. 그쵸?”

“그, 그러게 말이다.”

“혹시 진범이 입막음이라도 할까 걱정이에요.”

로튼 백작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역시 이미 손을 썼군.’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던 일이었다.

사실 그녀는 로튼 백작이 란 남작 부인에게 손을 써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그렇지 않아도 어제 사고가 있었던 것 같구나.”

“그런가요?”

“그래, 암살자가 잠입해 란 남작 부인에게 독을 주입했어. 아마 진범의 짓인 것 같다.”

“그러면 죽은 건가요?”

로튼 백작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니. 극독에 당했다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구나. 간신히 숨만 붙어 있다고.”

그랬을 것이다.

쥬웰이 미리 손을 써두었으니까.

쥬웰은 란 남작 부인에게 ‘불사의 저주’를 걸어 죽음의 안식을 맞는 걸 금지해 두었다.

그러니 중독되고도 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죽으면 안 되니까. 내 계획대로라면 딱 지금 상태 정도가 적당해.’

쥬웰은 생각했다.

‘어쨌든 꽤나 괴로운 상태겠는걸. 죽을 독에 당하고도 죽지 못하고 있는 거니.’

뭐, 그 고통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용무가 끝나면 해방해 줄 거니까.

“그 돌팔이 갈턴은요?”

“……그치는 아는 게 없더구나. 아마 사건과 연관이 없는 것 같아.”

그때, 못 보던 의사가 나왔다.

끌려간 갈턴 대신 새로 들어온 주치의 같았다.

“쥬웰 영애십니까?”

“네, 할아버님의 상태는 어떠신가요?”

“……믿을 수 없게 완벽히 좋아지셨습니다. 영애께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의사는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에스텔레 성녀님 이후로 이런 강력한 성력은 처음입니다. 플랑드나 성녀님의 성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요.”

쥬웰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언니가 들으면 속 좀 쓰리겠는걸?’

그녀의 언니, 플랑드나.

그녀는 일평생 성력을 갈구했다.

그러다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치고 악마에게 성력을 안수받았다.

‘악마도 성력 흉내를 낼 수 있으니까. 거짓 위장이어서 그렇지.’

다만, 악마의 거짓 성력은 화려하지만 효과는 별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별반 효과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겉에 보이는 증상만 좋아진달까?’

그런데 새롭게 강력한 성력의 소유자가 탄생했으니 얼마나 속이 탈까?

어쨌든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은 일.

“할아버님께 들어가 봐도 될까요?”

“네, 공작 전하께서도 영애를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안광이 부리부리한, 강렬한 인상의 노인이 침대에 앉아 미음을 먹고 있었다.

토른 공작이었다.

“쥬웰…… 이냐?”

“할아버님!”

쥬웰은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토른 공작에게 뛰어갔다.

“흐윽, 흑. 많이 걱정했어요. 끄윽.”

쥬웰은 눈물 흘리며 생각했다.

‘아, 어색하네.’

하지만 토른 공작은 쥬웰을 토끼처럼 귀여워했으니, 이런 연기는 꼭 필요했다.

다행히 ‘신체 강탈’로 평소 ‘쥬웰’이 보이던 모습 그대로 어색하지 않게 눈물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

토른 공작은 자신에게 안겨 펑펑 눈물을 흘리는 손녀를 보며 한없이 따뜻한 눈으로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만 울어라. 이제 이 할애비는 괜찮단다. 우리 요정 공주님 때문에 다 좋아졌어.”

토른 공작은 허허 웃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구나. 네가 성력을 펼치다니.”

쥬웰은 순순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할아버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늘이 축복해 준 것 같아요.”

쥬웰은 ‘할아버지를 위해’란 부분에 악센트를 주었고, 토른 공작은 감탄성을 토했다.

“우리 공주님이 이 할애비를 그렇게나 걱정했다니. 정말…… 정말 고맙구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감동한 것이다.

죽다 살아난 상황이어서 더욱 손녀의 마음이 고마운 것 같았다.

토른 공작이 신기하다는 듯 자신의 몸을 살폈다.

“쥬웰, 네 성력이 정말 강력한 것 같구나. 몸이 상쾌해.”

“정말 다행이에요.”

“아니, 아무리 성력이라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허허. 몸이 마치 젊어진 것 같아.”

토른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실제로 토른 공작은 훨씬 정정해 보였다.

이전에는 침대에서도 벗어나지 못할 몸 상태였는데, 지금은 얼추 주변을 걸어 다니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생명력을 넣어주었으니까.’

단순히 성력만으로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쥬웰은 해밀턴에게서 뺏은 10년 치의 수명을 토른 공작에게 넣어주었다.

‘전달 효율이 20 대 1 정도로 나빠, 실제로는 육 개월 정도 젊어진 효과겠지. 나머지 수명은 그때, 그때 봐서 보충해야겠어.’

앞으로 진행되는 상황을 봐서 토른 공작의 수명을 그것보다 연장할지 말지를 결정하면 될 것 같았다.

“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할아버지가 깨어나서 너무 기뻐요.”

쥬웰은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지었고 토른 공작은 다시 허허 웃었다.

“네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혹시 원하는 게 있느냐?”

토른 공작은 부드러운 눈으로 손녀를 바라보았다.

“뭐든 말해보아라. 이 토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쥬웰은 토른 공작의 굳건한 적색 눈빛을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능구렁이가.’

여기서 질문.

토른 공작은 쥬웰을 사랑할까?

물론 사랑한다.

그러면 토른 공작은 착한 사람일까?

절대로.

그는 천하에 다시 없는 악인이었다. 토른 공작으로 인해 눈물 흘린 사람이 몇 명인지 모른다.

그러면 토른 공작의 쥬웰을 향한 사랑은 무엇일까?

딱 선이 정해진 사랑이었다.

귀엽고 아끼지만, 그뿐이다.

못난 ‘쥬웰’에게는 가문의 중요한 것 하나라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지. 그게 토른 공작이니까.’

황실을 무너뜨리고 여섯 공작가의 시대를 연 거인.

그런 이가 아무리 귀여운 손녀라도 녹록한 모습을 보일 리 만무했다.

그건 지금처럼 그녀가 생명을 구해준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난 그저 기회를 받은 거지. 내가 어떤 요구를 하느냐에 따라 토른 공작이 앞으로 날 대하는 태도가 결정될 거야.’

지금처럼 철부지 귀여운 토끼로 남느냐.

아니면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느냐.

지금, 이 순간의 대화에 달려 있다.

물론 그녀는 답을 이미 정해놓고 왔다.

“황태자와 파혼하도록 해주세요.”

“……!”

토른 공작은 뜻밖이란 얼굴을 했다.

“황태자와?”

“네.”

“흠.”

토른 공작은 말끝을 흐렸다.

“그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란 것을 알겠지? 더구나 이 약혼은 쥬웰, 네가 원했다는 걸 잊었느냐?”

그건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쥬웰이 먼저 이 약혼을 바란 거라고? 쥬웰은 왜 황태자와 결혼하려고 했던 거지?’

토른 공작은 이어 말했다.

“물론 황태자와 파혼 자체는 어렵지 않다. 우리 가넷이 황실의 눈치를 살필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유는 알아야겠구나. 혹시 변심한 이유가 있느냐?”

여기가 중요했다.

쥬웰은 똑바로 토른 공작을 보았다.

방금처럼 귀여운 손녀의 눈빛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를 담아.

마치 에스텔레 때처럼.

“저도 ‘충성’의 가넷이 되고 싶어요.”

“……!”

“보잘것없는 황후 따위가 아니라, 가문을 빛내는 자랑스러운 가넷이 되고 싶어요.”

‘충성’.

가넷의 상징 말이었다.

하지만 그 충성은 황실과 백성을 향한 게 아니었다.

바로 가문을 위한 것.

그래서 가넷가의 일원들은 가문을 향한 충성을 가장 중요시한다.

“……진심이냐?”

토른 공작이 여실히 놀란 눈을 하였고, 쥬웰은 여전히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존경하는 할아버지를 본받는 인물이 되어 가문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황태자와 파혼을 바라는 거예요.”

‘충성’의 가넷에 표본과도 같은 인물이 토른 공작이었다.

그는 오로지 가문을 위해 황실을 무너뜨렸으니까.

“…….”

토른 공작은 잠시 쥬웰의 눈동자를 살폈다.

아까처럼 애정이 깃든 눈빛이 아니었다.

바로 가주로서 밑의 일원을 살피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묵묵히 토른 공작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그리고.

“하하하하하!”

토른 공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커다란 웃음이지만, 유쾌하기보다는 중압감이 느껴졌다.

“내가 너를 지금껏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니면 못 본 사이 변한 거냐?”

토른 공작이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네, 얼마 전 사고가 있었고, 죽을 위기를 겪으며 새롭게 살기로 했어요.”

“저런. 사고가 있었다니. 우리 공주님이 얼마나 놀랐을꼬?”

다시금 토른 공작이 좋은 할애비의 모습을 보이자 쥬웰도 귀여운 손녀의 모습으로 맞춰주었다.

“할아버지, 저 정말 할아버지를 본받고 싶어요.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네?”

“그래, 그래. 알겠다. 그러면 한 가지만 물으마. 네가 ‘충성’의 가넷으로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

이런 능구렁이.

또 시험이었다.

“할아버지를 독살하려고 한 놈을 잡아 죽여야지요.”

“……!”

쥬웰은 화려하게 웃었다.

“감히 할아버님을 독살하려 하다니. 누구의 수작인지 알아내, 최대한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내릴 거예요.”

토른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방금 쥬웰의 눈빛이 토른 공작이 보기에도 섬뜩했던 것이다. 찰나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살이 떨리는 살기였다.

하지만 그뿐.

토른 공작은 오히려 기껍게 여겼다.

‘착해 빠지기만 한 것보다는 낫지. 자기 아비, 멍청한 엔리크 놈보다 훨씬 낫군.’

애초에 쥬웰이 패악한 건 토른 공작도 익히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거인 토른 공작은 생각 기준이 일반인과 달랐다.

그는 착함보다는 가문에 이로운 독심을 훨씬 기꺼이 여겼다.

둘째 아들 로튼이 셋째 엔리크의 아내를 죽이는 걸 못 본 척한 것도.

결국, 여러모로 유능한 엔리크보다 상대적으로 모자란 로튼의 손을 들어준 것도 그래서였다.

엔리크에게는 오로지 가문만을 위하는 독심이 없었다.

‘이 아이는 한번 지켜볼 만하겠군.’

지켜볼 만하다.

그게 오늘 쥬웰을 보고 내린 판단이었다.

그는 섣불리 사람을 믿지 않았으니 이만하면 대단한 평가였다.

“허허, 알겠다. 그러면 범인을 찾는 데 도움을 주겠니?”

“네, 제가 직접 란 남작 부인을 만나볼게요. 허락해 주시겠어요?”

“물론이지. 누구 부탁인데 거절하겠느냐?”

란 남작 부인과 독대하는 것.

쥬웰은 두 번째 원하는 걸 얻었다.

“황태자에게는 오늘 바로 연락하마. 앞으로 그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네, 감사해요.”

“감사는. 고작 황실에 결혼시키기에는 네가 너무 아깝지.”

토른 공작은 느긋하게 물었다.

“혹시 새롭게 바라는 약혼자가 있느냐? 한번 이야기해 보아라. 누구든 맺어주겠다.”

쥬웰은 혀를 찼다.

또 시험이었다.

‘여기서 토른 공작이 듣고 싶은 정답은 가문과 결혼하고 싶다겠지만.’

쥬웰은 다른 답을 내었다.

“페리도트 대공가의 유스넨 대공과 혼담을 넣어주세요.”

“……뭐?”

뜻밖인지 토른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유스넨, 그 미친 살인마 놈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냐?”

미친 살인마.

13년 전, 유스넨이 페리도트 대공가에서 일으켰던 끔찍한 ‘사건’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전혀요.”

“그러면 왜?”

“다른 여섯 공작가는 사실 결혼해도 얻어낼 이득이 없어요. 우호 관계야 증진하겠지만 전 고작 그런 용도로 소모되고 싶지 않아요.”

옳은 말이었다.

“그런데 왜 유스넨 대공과 맺어지고 싶다는 거냐?”

“그와 맺어지면 페리도트 대공가를 가넷의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요.”

“……!”

“13년 전 일로 대공가의 다른 일원은 모조리 사망한 상태예요. 그러니 유스넨 대공과 결혼하면 우리 가넷이 페리도트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어요.”

쥬웰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전 가넷이 모든 보석 위에서 빛나기를 바라니까요.”

토른 공작을 크게 만족시킨 답변이었다.

그는 일평생 가넷 공작가가 다른 다섯 공작가 위에 군림하는 걸 꿈꿔왔다.

“하하하! 맞는구나. 당장 진행토록 하겠다.”

“감사해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후, 쥬웰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조소했다.

‘페리도트 대공가는 무슨. 관심 없어.’

토른 공작에게 한 말은 거짓말.

그녀가 유스넨 대공과 혼담을 부탁한 이유는 다른 이유였다.

‘기회를 봐서 유스넨 대공을 죽여야 하니까.’

유스넨 대공은 그녀의 숙적이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그를 죽여야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단 말이지. 그는 내 고통에 아무런 잘못도 없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역시 썩 내키지 않았다.

특히 그는 어린 시절 그녀와 나름대로 각별한 관계 아니었는가?

그래서 그녀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봉인시키면 돼. 복수가 끝날 3년간만.’

봉인.

힘을 뺏고 어딘가 가둬놓겠다는 거였다.

‘문제는 그를 봉인시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데.’

송별 예배 때 확인한바, 그의 힘이 만만치가 않은 것 같았다.

어둠과 빛의 격(格)으로 따지면 그녀의 우위였다.

그래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이기더라도 커다란 피해가 있을 게 분명했다.

단순히 이기는 것조차 그런데 봉인이라니? 더욱 까마득히 어려운 난이도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혼담을 빌미로 그와 가까워져 함정을 팔 생각이었다.

그의 방심을 유도하고 함정에 빠뜨리면 큰 피해 없이 그를 봉인시키는 것도 가능하리라.

‘뭐, 정 안 되면 결국 죽여야겠지만. 가급적 죽이지 않고 봉인하고 싶으니까. 어쨌든 최소한의 피해로 유스넨 대공을 제압하려면 그와 가까워져 방심을 유도해야 해.’

쥬웰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그녀의 노예, 해밀턴의 방을 향해서였다.

* * *

유스넨 대공이 가급적 건드리고 싶지 않은 상대라면, 해밀턴은 아무렇지 않게 건드려도 될 인물이었다.

“오라버니? 사랑스러운 동생, 쥬웰이 왔어요.”

“또, 또 왜?”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서 왔지.”

‘쥬웰’의 목소리를 흉내 내자 해밀턴은 소름 끼친단 얼굴을 하였다.

물론 그녀도 하고 싶어서 하는 연기는 아니었다.

주변 하녀들의 시선을 의식한 거였다.

‘아, 눈치 없네. 안 내보내고 뭐 해?’

하지만 해밀턴은 눈치가 없는 게 아니었다.

쥬웰과 단둘이 남는 게 무서워 밑의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으려는 거였지만 쥬웰이 이렇게 말하니 화들짝 놀라 따랐다.

“오라버니와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 아! 네, 네! 너희는 물러가라!”

둘만 남게 된 후, 쥬웰은 차가운 얼굴을 하였다.

해밀턴은 평소보다 싸늘한 쥬웰의 얼굴에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왜……?”

“혹시 생각해 봤어?”

“……뭘요?”

“죽는 것.”

“……!”

해밀턴은 딸꾹질했다.

“가, 갑자기 무슨?”

“이야기했잖아. 벗어나고 싶으면 죽어도 된다고.”

해밀턴은 쥬웰이 무언가 심각한 용무가 있음을 눈치챘다.

“오라버니가 해줄 일이 있거든. 물론……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야.”

쥬웰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설명을 듣는 해밀턴의 눈동자가 파도를 만난 듯 흔들렸다.

“……나, 나보고 그런 일을 하라고…… 요?”

“강요하지는 않겠어. 원하지 않으면 그냥 죽어도 돼. 뜻대로 해.”

아무리 해밀턴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라도 이번 일은 너무 괴로운 걸 수도 있다.

그러니 선택 기회를 주기로 했다.

지금껏 잘못에 속죄하고 고통에서 벗어날 기회를 말이다.

쥬웰은 품에서 단도를 꺼내 해밀턴에게 던졌다.

아침에 피를 먹여 만든 ‘마검’이었다.

“‘안식의 마검’이야. 그 마검을 들고 있으면 내 명령에서 벗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어. 마검의 효과로 고통도 거의 없을 거야.”

해밀턴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네 명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래.”

쥬웰은 물끄러미 해밀턴의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미칠 듯한 갈등이 해밀턴의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고.

돌발 행동을 하였다.

“크아아아악!”

쥬웰에게 단검을 들고 달려든 것이다!

푸우욱!

시뻘건 마검이 쥬웰의 가슴을 꿰뚫었다.

‘서, 성공했어!’

해밀턴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변했다.

“죽어! 이 망할 년아! 감히! 나를 이렇게!”

화풀이하려는 순간이었다.

해밀턴은 싸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이렇게 쉽게 당하다니?

과연.

등 뒤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다.

“원하면 조금 더 화풀이해도 돼. 아, 이 쿠키 먹어도 되지?”

쥬웰이었다.

그녀가 탁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쿠키를 손가락에 들고 있었다.

해밀턴은 눈앞의 쥬웰과 저쪽 쥬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이건?”

“뭐겠어? 환영이지. 이 쿠키 누가 만든 거야? 오빠 하녀들한테 부탁하면 되나? 맛있네.”

오독, 태연히 쿠키를 씹는 그녀의 모습에 해밀턴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다, 당했어.’

시험에 넘어간 것이다.

쥬웰이 손가락을 튕기자 해밀턴 앞의 환영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다행히 쥬웰은 해밀턴의 행동을 뭐라고 탓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만 말하였다.

“내일까지 시간이 있으니 고민해 봐. 죽을지, 내 말에 따를지.”

그녀는 밖으로 나가며 해밀턴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죄책감 덜게 해줘서 고마워.”

* * *

토른 공작의 행동력은 과연 어마어마했다.

곧바로 황실에 파혼 통보를 보내고, 페리도트 대공가에는 혼담을 넣은 것이다.

그래서 쥬웰도 이번 기회에 용무 하나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외출할 준비를 해주겠니?”

“어디로요?”

“황실로. 황태자 전하를 뵈려고.”

룬은 놀란 얼굴을 하였으나 더 묻지 않고 말을 따랐다.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치장을 시작한 것이다.

“……아니, 뭐 하는 거니?”

“황태자 전하 뵈러 가는 거잖아요. 아가씨께서 사랑하는 분이니 최고로 예쁘게 꾸며야죠.”

그녀는 헛기침하였다.

‘사랑?’

아무래도 ‘쥬웰’은 황태자를 짝사랑했나 보다.

‘하긴, 황태자 전하는 아름다운 분이니 반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아름답다.

그건 외면과 내면을 모두 표현하는 말이었다.

황태자 오펜하임은 그녀가 지금껏 만난 인물 중 가장 ‘완벽’한 인물이었으니까.

사실 그녀는 에스텔레 시절, 황태자 오펜하임을 존경했다.

‘라디트가 없었다면, 어쩌면 나는 황태자 오펜하임을 사랑했을지도.’

그녀는 과거를 반추했다.

그만큼 황태자 오펜하임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아니, 그렇게 말고. 최대한 단정하고 깔끔하게.”

“아가씨?”

“사과 인사하러 가는 거니까.”

갑작스러운 파혼 통보가 황태자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치욕스러우리라.

쥬웰은 직접 만나 무례를 사과하기로 하였다.

‘물론 그건 겸사겸사고. 더 중요한 목적이 있지만.’

이후 쥬웰은 별채에서 나왔고,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뜻밖의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쥬웰.”

“아버지.”

쥬웰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귀찮은 용무로 왔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아버님께 이야기는 들었다. 충성의 가넷이 될 작정이라고?”

“네, 맞아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느냐?”

엔리크 자작은 무거운 얼굴이었다.

쥬웰은 아버지가 저러는 이유를 짐작했다.

‘싫겠지. 가넷가의 이기적인 행태를 혐오하는 분이니.’

가넷의 ‘충성’.

그 충성을 핑계로 가넷가의 일원들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많이 저질렀는가?

그들은 오로지 자기 가문만을 위했다.

‘잘 알지. 나도 예전에는 가넷가의 행태를 혐오했으니까.’

그러니 엔리크 자작이 저런 반응이리라.

쥬웰은 엔리크 자작의 신념을 존중하지만, 불행히도 그걸 따를 생각은 없었다.

“네, 알아요.”

“다시 생각해 봐라. 그건…….”

“아버지.”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신념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요. 저는 제가 뜻한 바대로 할 테니…….”

그런데 엔리크 자작이 생각지 않은 답을 하였다.

“신념이 아니라, 네가 위험해진단 말이다!”

“……!”

쥬웰은 흠칫하였다.

엔리크 자작은 평소와 다르게 격정적인 눈빛으로 딸을 노려보고 있었다.

쥬웰은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엔리크는 고작 신념 때문에 그녀를 반대하려는 게 아니었다.

딸을 향한 걱정 때문이었다.

“너는 지금 네가 얼마나 위험한 길에 발을 들였는지 모르고 있어. 형님과 형님을 따르는 봉신들이 너를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으냐? 네 할아버님이 너를 터럭이라도 지켜줄 것 같으냐?”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엔리크 자작의 말이 맞았다.

지금 그녀는 사선(死線)에 발을 올렸다.

이제 로튼 백작은 본격적으로 그녀를 ‘적’으로 인식할 것이고, 할아버지 토른 공작은.

‘그냥 지켜보겠지. 내가 죽든 말든 말이야.’

엔리크 자작이 쥬웰의 손을 잡았다.

“물론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는 건지는 짐작한다. 하지만…….”

“아버지.”

쥬웰은 싱긋 웃었다.

“타린 왕국으로 언제 돌아가시나요?”

“……!”

“외교 대신이니 돌아가셔야죠. 너무 오래 임지에서 벗어나 있는 것 아닌가요?”

엔리크 자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손을 빼었다.

“아버지의 걱정은 알아요.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일이에요.”

쥬웰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가넷의 왕’이 될 거예요.”

“……!”

가넷의 왕.

가넷가의 가주를 뜻한다.

그녀는 원수들의 ‘완벽한’ 몰락을 바라니까.

그러려면 여섯 공작가를 무너뜨려야 하고, 가넷가의 힘이 필요했다.

“그런 저에게 힘을 보태주시지 않을 거면…… 아버지께서는 그냥 타린 왕국으로 돌아가세요.”

쥬웰은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방해만 돼요.”

진심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엔리크에게 바란 건 가넷가를 손에 넣기 위한 협력 상대가 되는 거였다.

이렇게 훼방만 할 거면, 차라리 눈앞에서 없어지는 게 나았다.

엔리크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말했다.

“네가 그러는 건 복수 때문이냐?”

“……!”

쥬웰은 흠칫하였다가, 엔리크가 말하는 복수가 그 복수가 아님을 알아챘다.

로튼 백작에게 암살당한 쥬웰의 어머니. 그녀의 복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건 아니지만, 굳이 착각을 정정해 줄 필요는 없겠지.’

쥬웰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용무가 있어 가볼게요. 제가 한 이야기는 잘 생각해 보세요.”

쥬웰은 마차에 올라 눈을 감은 후 호위 기사, 녹튼 경에게 말했다.

“황궁으로 출발하세요.”

“네, 아가씨.”

다그닥.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 뒤 눈을 떠 뒤를 보니 엔리크 자작이 아까 있던 곳에 우두커니 선 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슬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슬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체 강탈의 부작용 때문인가?’

‘신체 강탈’은 신체의 모든 걸 빼앗는 것이다. 그래서 원주인의 행동 습관을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딸려오는 부산물이 있었다.

원주인의 ‘감정’이었다.

감정은 영혼과 심장에 각인되니까.

그래서 엔리크 자작을 볼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 * *

그 시각, 페리도트 대공가.

유스넨 대공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놀랍습니다. 그런 성력이라니.”

마주 앉은 메디안 백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쥬웰 영애가 그때 나타났던 어둠일 가능성은 없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죠.”

“전하?”

유스넨 대공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대악마라면 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메디안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날 쥬웰 영애의 성력은 진짜가 아니었습니까? 악마의 성력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숭고했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유스넨은 부정하지 못했다.

너무나 숭고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성력이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찝찝하지.’

유스넨 대공은 안경을 어루만졌다.

고민될 때 버릇이었다.

‘무언가 분명히 있긴 있어. 하지만 도저히 모르겠군.’

그때, 메디안 백작이 유스넨에게 물었다.

“정말 쥬웰 영애가 어둠이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대공께서 집착하시는 것 보면, 그런 것 아닙니까?”

집착.

메디안 백작은 그런 단어를 썼다.

실제로 지금 유스넨이 보이는 모습은 집착이란 표현이 어울렸으니까.

물론 남녀 간의 애틋한 집착을 말하는 게 아니다.

광휘의 대공으로서 ‘어둠’을 향한 집착이었다.

“전하께서 이토록 집착하시는 걸 보니, 확률이 없지는 않겠군요.”

메디안 백작은 어두운 얼굴을 했다.

유스넨 대공은 천사의 피를 각성했다. 그러니 영적 육감이 일반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이런 어둠과 관련된 일에 그의 직감은 굉장히 정확한 편이었다.

‘어둠을 처단하는 것을 삶의 유일한 의미로 삼으시는 분이니까.’

13년 전.

유스넨은 어둠에 휩쓸려 스스로의 손으로 모든 가족을 죽였다.

더구나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에스텔레마저 어둠에 제물로 바쳐져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유스넨은 어둠을 극도로 혐오하며, 어둠을 처단하는 일만을 삶의 유일한 의미로 여기고 있었다.

메디안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더 관찰을 해보겠습니다. 하필 재수 없는 가넷가의 일원이라 살피는 데 애로 사항이 있긴 합니다만.”

“아니, 제가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유스넨은 어깨를 으쓱했다.

“마침 오늘 이런 연락이 왔더군요.”

가넷가에서 급보로 온 서신이었다.

“쥬웰 영애와 혼담을 고려해 달라는 약식 서신입니다.”

“……!”

메디안 백작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아니, 그녀는 황태자의 약혼녀 아닙니까?”

“오늘 파혼한다는군요.”

“……그런데, 바로 혼담 서신을 보냈다고요?”

“정식은 아니고, 그냥 의향을 묻는 서신이긴 합니다만. 가넷가. 아니, 토른 공작다운 오만한 행동입니다.”

유스넨도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잘됐습니다. 이 혼담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네?”

메디안 백작은 당황해 반문했다.

“곁에서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요.”

“……그러다가 진짜 결혼하시게 되면요?”

유스넨은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맞는 거죠.”

“……그 농담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메디안 백작은 정색하여 답했다.

유스넨은 가끔씩 농담을 하였는데, 누가 북부에 영지를 가진 대공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재미없고 썰렁했다.

메디안 백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어둠이라고 그만큼이나 확신하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유스넨도 모른다.

다만, 메디안 백작의 말처럼 이상한 ‘집착’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메디안 백작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며 밖으로 나갔고, 홀로 남은 유스넨은 가만히 생각했다.

‘쥬웰이라.’

문득 그녀가 기도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또르르, 흐르던 한 방울의 눈물.

왜일까?

다시 욱신, 가슴이 아파져 왔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이상하게 아릿함이 들었다. 전혀 이런 감정이 느껴질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지그시 인상을 찌푸렸다.

자꾸만 쥬웰이 신경 쓰였다.

* * *

마차는 수도를 가로질러 황실로 향했다.

제국 최고의 권세가 가넷가의 마차를 가로막을 간 큰 인물은 없어서 주욱 거리를 가로질렀고, 곧 황궁에 도착했다.

‘오랜만이네.’

쥬웰은 황궁을 보며 생각했다.

에스텔레 시절, 황궁에 가끔 왔었다.

그녀는…… 오펜하임과 친구였다.

‘아니, 친구가 맞나? 조금 애매하네. 그냥 친구라고 해도 되겠지?’

관계가 깊었던 건 아니다.

실제 만난 횟수도 굉장히 적었으니까.

그래도 오펜하임과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게 많았다.

‘3년 사이 더 낡아진 것 같은데. 관리가 안 되어서 그런가?’

그러다가 어느 지점을 넘어서 쥬웰이 말했다.

“그만.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지.”

“아가씨?”

가넷가의 기사가 물었다.

“아직 황태자 전하가 계시는 벨세 궁까지는 거리가 멉니다.”

걸어서 10분 이상은 가야 했다.

“그래도 원래는 여기부터 걸어가는 게 황실의 예법 아닌가?”

“그렇기야 하지만…….”

여섯 공작가 중 누구도 지키지 않는 예법이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슬슬 걸어가면 되지. 답답하니 걷고 싶구나.”

물론 산책이 목적은 아니었다.

황태자를 향한 예우였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괜히 기분 상하게 할 필요 없겠지.’

그녀는 여섯 공작가의 오만이 황실의 인물들에게 얼마나 큰 치욕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그런 마음으로 걸어갔는데, 순간 실책을 깨달았다.

‘뭐야, 이 몸. 왜 이렇게 약해.’

얕은 오르막길이었는데, 숨이 차올랐다!

‘아, 힘드네. 황실에서 흑마법을 쓸 수도 없고.’

어제 성력을 전력으로 써서 몸이 축난 것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숨차 하며 걸어 올라가니, 기사가 곤란한 얼굴로 권했다.

“그러지 마시고 마차를…….”

“……아니, 괜찮네.”

“얼굴이 하얗습니다.”

기사가 쩔쩔매고 있을 때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기사의 말이 맞는 것 같구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마차를 타는 게 어떻겠소?”

“……!”

놀라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여인처럼 곱고 아름다운 얼굴.

쥬웰의 약혼자, 황태자 오펜하임이었다.

그가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오, 내 델피나.”

델피나.

황가의 인물이 자신의 사랑하는 반려를 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

* * *

‘화났구나.’

쥬웰은 힐끗 앞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금 황실의 마차를 함께 타고 있었다.

오펜하임이 쥬웰을 배려해 마차를 불러준 것이다.

덕분에 편하게 갈 수 있었지만,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어야 했다.

오펜하임은 선명히 붉은 입술을 굳건히 닫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불쾌한 얼굴이었다.

더구나 ‘델피나’라니.

그건 황실의 인물이 사랑을 속삭일 때 사용하는 은어로 명백히 쥬웰을 비꼬는 단어였다.

‘그나저나 보자마자 저렇게 적대감을 드러내다니. 하긴, 원래 속마음을 감추는 성격이 아니었지.’

쥬웰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본 친우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오펜하임은 그런 쥬웰의 반응에 그린 듯 아름다운 눈썹을 꿈틀했다.

쥬웰은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나야말로 고맙구려. 그대가 황실을 이토록이나 생각해 주는지는 몰랐소.”

알쏭달쏭한.

비꼬는 건지, 진심인 건지 모를 말이었다.

‘……평소 쥬웰의 행태를 보면 비꼬는 거에 가깝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뭘 말이오?”

“그간 저질러 왔던 무례. 그리고 오늘 저지를 또 다른 커다란 무례를요.”

“……!”

오펜하임의 얼굴이 굳었다.

쥬웰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오늘 저지를 무례. 그건 파혼 통보를 뜻한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오펜하임은 입을 다물었고, 이후 마차는 정적에 잠겼다.

* * *

벨세 궁.

오랜만에 오는 황태자의 궁이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익숙한 광경에 쥬웰은 반갑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쪼르륵.

집무실에 도착 후 황태자는 직접 차를 내주었다.

“드시오. 그대가 즐기는 차이니.”

“……감사합니다. 직접 내주실 필요는…….”

쥬웰이 고개를 젓자, 오펜하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대가 부탁한 것 아니오? 시종이 아닌, 내가 내주는 차를 먹고 싶다고.”

“……그렇군요.”

쥬웰은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쥬웰, 얘는 황태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민폐 정도가 정말 상상 초월이었다.

더구나 더욱 놀라운 건.

‘이 차 맛없잖아? 왜 타달라고 한 거야?’

쥬웰은 차를 한 입 대고 당황했다.

황태자가 타준 차가 상상을 초월하게 맛이 없었다.

도저히 못 먹을 맛이라 내려놓으니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잘 안 마시는군. 더 안 타줘도 되겠소?”

“더…… 말입니까?”

“늘 더 타달라고 귀찮게 떼쓰지 않았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민폐.

그녀는 곧 아, 하였다.

‘쥬웰은…… 황태자가 자신에게 차를 타주는 것 자체를 기뻐했구나.’

왜?

간단했다.

‘……쥬웰은 황태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어.’

그녀는 실소하고는 손을 들어 가슴에 가져다 댔다.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종류의 떨림이었다. 과거, 그녀가 라디트를 볼 때 느끼던 떨림.

사랑이었다.

물론 이건 그녀의 감정이 아니었다.

‘쥬웰’의 심장에 각인된 감정이다.

‘쥬웰’은 진심으로 황태자를 사랑했던 것이다. 황태자는 전혀 짐작 못 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하긴. 이토록 아름다우니 사랑에 빠져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녀는 오펜하임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살폈다.

마치 신이 직접 빚은 듯했다.

불쾌한 듯 지그시 찌푸리고 있는 눈썹마저도 아름다워 감탄이 나왔다.

더구나 더욱 아름다운 건, 겉의 외면만이 아니었다.

‘영혼.’

쥬웰은 주시자의 눈을 발현하고는 경악했다.

마치 눈이 멀듯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엔리크 자작도 환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펜하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토록 빛나는 영혼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 낙원의 대천사들이 보면 기쁨의 찬트를 부를 찬란한 영혼이었다.

‘얼마나 지금껏 올바르게 살았으면.’

영혼의 빛은 단순히 타고나는 게 아니었다.

살아온 행실로 결정된다.

황태자는 지금껏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올바른 길만 살아온 것이다.

‘대단하네.’

그래서였다.

쥬웰은 조금 더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저런 존경할 만한 이를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 들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오펜하임은 답하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쥬웰을 바라볼 뿐이었다.

실제로 그는 쥬웰의 속마음을 살피고 있었다.

‘난데없는 파혼 통보에 사과라니.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오펜하임은 가만히 생각했다.

그는 오랜 기간 ‘쥬웰’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가넷가의 금지옥엽이라 내치지도 못했고, 쥬웰은 툭하면 찾아와 그에게 모욕을 주었다.

사실 그래서 파혼 소식을 들었을 때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쥬웰’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던 일인 것이다.

‘아마 내가 싫증 난 거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직접 찾아와 사과라니?

이건 또 다른 신종 모욕인가?

“장난하는 거라면…….”

그런데 쥬웰이 생각지도 않은 행동을 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펜하임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아니, 영애?”

어지간한 오펜하임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행동이오?”

“사과를 드리는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쥬웰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껏 전하께 범했던 무례, 그리고 오늘 드리는 파혼 통보. 모두 깊이 사과를 드립니다.”

“…….”

“지금 전하께서 느끼시는 당황과 분노를 이해합니다. 이런다고 전하의 마음이 위로되지는 않겠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오펜하임은 입을 다물었다.

쥬웰의 음성이 진심임을 깨달은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문득 몇몇 장면이 떠올랐다.

쥬웰이 눈물 흘리며 성력을 발휘하는 장면.

그리고 황실에 무례를 범하기 싫다고 아까 말하던 장면.

‘……설마 변한 건가?’

저 쥬웰이 변화라니. 믿을 수 없지만 그렇지 않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아는 ‘쥬웰’은 절대 누군가에게 이렇게 고개를 숙일 인물이 아니었다.

오펜하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편히 앉으시오.”

“아닙니다. 이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쥬웰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전 서신을 한 차례 보냈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와의 약혼을 파기해 주십시오, 전하.”

“…….”

오펜하임의 얼굴이 굳었다.

사실, 그는 지긋지긋한 쥬웰과 파혼하길 바라고 있긴 했다.

그런데 왜일까?

갑자기 이런 물음이 튀어나왔다.

“이유가 무엇이오?”

“네?”

“나와 파혼하려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오?”

쥬웰은 침묵했다.

‘이유라.’

복수에 걸리적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앙금을 남길 필요는 없었기에 말을 골랐다.

“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

“얼마 전 사고가 있었고, 이전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잘못 살았던 과거를 후회하고 새롭게 살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얼마나 부족한지 이제 아니, 파혼을 청하는 겁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황태자같이 빛나는 인물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진짜 ‘쥬웰’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본인.

황태자는 피에 물든 자신 같은 이가 아닌, 올바른 짝을 만나는 게 좋을 것이다.

“…….”

황태자는 대답 없이 한참이나 침묵하며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황태자의 침묵을 동의로 생각하고는 다음 이야기를 꺼내었다.

사실, 이게 더욱 중요한 본론이었다.

‘사과만 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그래, 사과만 할 거라면 굳이 직접 올 필요 없었다.

더욱 중요한 용무가 있었다.

쥬웰은 그 용무를 꺼냈다.

“저와 파혼하는 게 전하께도 이득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전 전하와 파혼 후, 가넷의 왕이 될 생각입니다. 그런 제게 조력해 주시면, 차후 전하를 황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오펜하임의 담청색 눈이 커졌다.

황제.

라인하르트 제국의 최고 지배자.

황태자는 황제의 후계자를 뜻하는 직위니 당연히 미래에 황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쥬웰이 이런 조건을 내거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황태자는 황제가 없음에도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으니까.’

지금 제국에는 황제가 없다.

붕어한 지 무려 10년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왜?

여섯 공작가에서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까.

‘길들이기를 하는 중이지. 지금 오펜하임은 전혀 고분고분하지 않으니까.’

만약 다른 황족이 있었다면 그자를 황위에 올렸겠지만, 불행히도 지금 셀레네 황가의 황족은 오펜하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여섯 공작가는 오펜하임이 말 잘 듣는 ‘개’가 될 때까지 기를 죽이는 중이었다.

“…….”

오펜하임은 빠드득 손을 움켜쥐었다.

여섯 공작가를 향한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오펜하임은 그 분노를 쥬웰에게 돌렸다.

“조력하라니. 그 말은, 나보고 네 전용 개가 되라는 건가?”

“……제 말을 오해하셨군요.”

“오해라고? 내가 네게 고개를 숙이길 바라는 것 아닌가?”

오펜하임은 강렬한 눈빛으로 쥬웰을 노려보았다.

“네가 가넷가의 주인이 된다고 해도 결국 토른 공작에서 쥬웰, 너로 핍박하는 상대만 바뀔 뿐. 내가 허수아비인 건 바뀔 것 없을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제위에 올라도 지금 이대로라면 그는 허수아비 황제가 될 터. 그런 황제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쥬웰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분노지.’

그간 얼마나 분노하고 비통했을까?

저런 분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노만 해서는 바뀔 게 없지.’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강하게 이야기할 필요를 느꼈다.

그녀는 똑바로 오펜하임을 바라보았다.

“투정 부리지 마십시오.”

“……!”

“물론, 그렇게 할 생각은 아니지만 설사 제가 전하를 능멸한다고 해도 전하께서 감히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감히.

그 말에 오펜하임의 얼굴이 굳었다.

“제가 아닌, 다른 이가 가넷의 왕이 되어도. 아니, 다른 공작가 중 누군가 전하를 농락한다고 해도 한마디도 하실 수 없는 게 전하의 현실 아닙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울분이 난다면, 이런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란 말입니다.”

“……!”

쥬웰은 차갑게 말했다.

“제 방금 제안에 전하께서 보이셔야 할 반응은 분노가 아니라 냉철입니다. 제 제안을 어떻게든 이용해 진정한 황제가 될 생각을 하는 게 옳은 반응이란 말입니다.”

오펜하임은 우뚝 입을 다물고는 강하게 쥬웰을 노려보았고, 쥬웰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터질 듯한 긴장이 방 안에 일순 몰아쳤다.

그리고 오펜하임은 돌연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기분 나쁜 웃음이 아니었다.

정말 유쾌하다는 웃음이었다.

“이거 한 방 먹었군. 그래, 영애 말이 맞소. 화가 나면 영애에게 투정 부릴 게 아니라 힘을 얻을 생각을 해야지.”

쥬웰은 살짝 놀랐다.

분명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이었는데 웃음으로 넘긴 것이다.

거짓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방금 대화로 분명히 알았소. 정말 변했구려. 사람이 이렇게 변하다니.”

오펜하임은 신기하다는 듯 말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영애가 한 말은 나도 늘 하는 생각이오. 어떻게든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고 나름대로 노력 중이지.”

오펜하임은 아까와는 다른 눈빛으로 쥬웰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서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오? 이렇게 날 자극하는 걸 보면 단순히 가넷의 왕이 되는 게 목표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했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정한 본론을 말하였다.

“전 가넷의 왕이 되어 다른 공작가들을 모조리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

오펜하임의 눈이 커졌다.

쥬웰은 천천히 선득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여섯 보석 중 오로지 가넷만이 남게 할 생각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그런 저를 뒤에서 돕는다면 황실이 이전과 같은 권위를 찾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오펜하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쥬웰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제국에는 두 개의 보석, 가넷과 셀레네만이 빛나게 될 겁니다.”

셀레네(Selene, 월장석(月長石)).

여섯 공작가 위에 군림하는 또 다른 보석, 황실의 상징석이다.

즉, 쥬웰은 다른 공작가들을 몰락시키고 가넷 공작가와 황실 두 곳만이 제국을 지배하는 체계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거였다.

“…….”

오펜하임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실현만 가능하다면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물론 쥬웰이 가넷의 왕이 되어야 의미가 있는 제안이지만…….

‘설사 그녀가 실패하더라도 내가 손해 볼 것은 없어. 어차피 난 더 뺏길 게 없으니까.’

즉, 이건 터지면 잭팟.

터지지 않아도 뜯길 돈이 없어 손해 볼 것 없는 유리하기만 한 베팅이었다.

‘문제는 확률인데.’

과연 그녀가 가넷의 왕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면 구태여 힘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 빛나 보인단 말이지.’

오펜하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쥬웰을 살폈다.

이전과 똑같은 얼굴.

하지만 전혀 달라 보였다.

새사람이 되기로 했다는 그녀의 말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순간, 그날 송별 예배 때의 광경이 떠올렸다.

눈물을 흘리며 기적을 발현하던 그녀의 모습.

뭉클.

저도 모르게 가슴이 흔들린 오펜하임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가능할 수 있지도 않을까?’

오펜하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가넷가의 가주가 되는 게 가능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막연히 그런 마음이 들었다.

물론 오펜하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일을 하려는 거지?”

“제 의도가 중요한가요?”

“당연히. 제국 백성들을 또 다른 지옥에 빠뜨릴 계획이면 동참하지 않겠소.”

오펜하임은 딱 잘라 말했다.

“그릇된 일에 힘을 보탤 바에는 나 혼자 스스로 황실의 힘을 찾도록 하겠소. 물론 훨씬 어렵겠지만 그게 낫소.”

역시나.

빛나는 영혼을 지닌 이다운 답변이었다.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백성을 해롭게 하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위대한 빛께 맹세할 수 있어요.”

백성을 해롭게 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하려는 일을 달성하면 백성들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처지가 될 것이다.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이 정도 답변으로는 부족한가요?”

오펜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충분하지.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됐소.”

그 답에 쥬웰은 오펜하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동맹을 제안하는 악수예요.”

오펜하임은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여린 외모와 다르게 행동거지가 호탕한 편이었다.

“좋소. 그대와 나의 미래를 위하여 악수하지.”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오펜하임의 말이 묘했다.

“어쨌든 곧 정식으로 파혼 서신이 올 거니…….”

“파혼할 생각은 없는데?”

“네?”

오펜하임은 여전히 손을 맞잡은 상태로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웃음기가 깃들어 있지만 기이하게 강렬히 빛나는 눈빛.

“파혼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소.”

확인하는 듯한 단단한 음성.

“그대가 그런 마음이라면 굳이 파혼할 이유가 있소?”

“……뭐라고 하셨습니까?”

“꼭 파혼해야 가넷의 왕이 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그건 그랬다.

사실 전혀 상관없었다.

황후가 되어 공작가의 주인 노릇을 하면 되니까.

역사상 전례도 여러 차례 있었고.

전통상 황제의 배우자는 무조건 여섯 공작가 출신이어야 해서, 황후나 여황의 남편이 여섯 공작가의 가주직을 겸한 일이 적지 않게 있었다.

물론 가능하다는 거지, 쥬웰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내가 무슨 약혼이고 결혼이야.’

그런 귀여운 이야기 따위 연 없었다.

무엇보다 복수에 걸리적거렸다.

하지만.

“난 파혼하기가 싫은데?”

오펜하임이 물끄러미 말했다.

“……!”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쥬웰을 싫어하는 것 아니었어?’

“뜻밖이군요. 절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싫어했지. 내게 온갖 모욕을 다 주었으니까.”

오펜하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방금 사과하지 않았소? 진심으로 사과했으니 됐소.”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사과했으니 됐다니?

더욱 황당한 건, 오펜하임이 진심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껏 쥬웰에게 받은 모욕을 사과 한 번에 정말로 다 털어버린 듯했다.

결국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 파혼하고 싶습니다.”

“난 싫소.”

“제 말씀을 이해 못 하시는 것 같은데…….”

“이해 못 하는 건 그대 같은데?”

오펜하임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섯 공작가와 황실의 인물은 모두 보석안을 타고난다.

가넷가의 인물은 붉은 가넷의 보석안을. 사파이어가의 인물은 푸른 사파이어의 보석안을. 이런 식으로 말이다.

따라서 오펜하임의 눈동자는 월장석의 담청색 보석안이었다.

그 월장석이 그녀의 얼굴을 담았다.

한없이 깊이.

“난 그대를 놓아주기 싫다고 말하는 거요.”

“……!”

마침, 창살로 빛이 들어왔다.

월장석은 빛의 산란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는 보석.

지금…… 오펜하임의 눈빛은 담청색에서 은은한 갈색빛이 돌았다.

굳건하면서, 어떤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갈색빛이었다.

“지금…… 그대를 놓아주면 후회할 것 같아. 그러니 내게 시간을 줄 수 있겠소?”

“……시간이라면?”

“당연히.”

오펜하임이 맞잡은 그녀의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없이 조심스럽게 쥬웰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대의 마음을 얻을 시간이오.”

* * *

‘오펜하임이 이러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녀는 황실 뒤편의 정원에 있었다.

뭔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홀로 정원에 온 것이다.

물론, 그녀는 오펜하임의 청을 거절했다.

‘아니,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파혼하겠어요.’

하지만 오펜하임도 만만치 않았다.

‘파혼하고 싶으면 소송하시오. 제국 법상 약혼 파혼도 조정 기간이 있어서 육 개월 정도 걸리지 않나?’

제국 법상 약혼도 합의 없이 파혼하려면 소송이 필요하다.

물론 약혼의 경우 분배해야 할 재산이 없기에 소송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고 합의로 대부분 끝난다.

무엇보다 파혼하지 않겠다고 매달리는 게 각 개인에게 굉장히 구차한 일인지라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별반 불명예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따위 말을 한 것이다.

‘육 개월이면 충분한 시간이군. 그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겠소. 만약 그때도 날 거절하면, 깨끗이 포기하겠소.’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곤란해. 황태자가 이렇게 나오다니.’

솔직히 귀찮았다.

‘더 설득해 본 후 정 물러나지 않으면 파혼 소송해야겠어. 더 신경 쓰지 말자.’

사실 황태자와 약혼 따위.

어찌 되든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앞으로 황태자가 그녀를 도와주는 체스 말이 되었다는 것. 그게 오늘 만남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다.

“돌아가야지.”

용무가 끝났으니 더 황실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황태자는 더 있다 가기를 권하였지만 거절하였다.

마차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새 한 마리가 날개를 다쳐 끼잉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쥬웰은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죽겠네.’

힐끗 보니,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뭐, 그러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라 다시 발걸음을 옮기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그녀의 손에서 파앗 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냥 변덕이었다.

저런 작은 새 한 마리 살리는 데는 티끌만 한 성력으로도 충분하니까.

사실 내일 끔찍한 일을 할 거라 미리 착한 일을 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해밀턴은 어떻게 할지 결정했으려나?’

새가 고맙다는 듯 짹짹거리며 날아올랐다.

피식 웃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새를 좋아하시는 것 같군요.”

“……!”

놀라 고개를 돌리니, 생각지 않은 인물이 서 있었다.

천사처럼 부드러운 인상의 은발 미남.

유스넨 대공이었다!

‘왜, 유스넨 대공이?’

갑작스러운 만남에 쥬웰의 가슴이 싸하게 식었다.

숙적을 만난 듯한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 과거, 치료해 주었던 각별한 인연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싸워야 할 상대이니 꺼림칙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내 정체를 알아보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직접 증거를 보이지 않는 한, 누구도 그녀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없었다.

일단 그녀는 예를 표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또 뵙는군요. 그때 성력은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제국에 탄생한 새로운 성녀께 경외의 인사를 드립니다.”

누구라도 반할 것 같은 감미로운 음성.

하지만 쥬웰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황궁에는 어떻게 오신 건지요? 황태자 전하를 뵈러?”

“아니요. 황태자 전하께는 특별한 용무 없습니다.”

“그러면 황실에는 왜?”

“영애, 당신 때문입니다.”

“네?”

“당신을 뵈러 왔다고요.”

“……실례지만, 갑자기 왜?”

유스넨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저한테 혼담을 넣지 않았습니까?”

“……!”

쥬웰은 검고 물컹한 뭔가를 씹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토른 공작에게 그런 부탁을 하긴 했다.

‘……벌써 혼담을 보냈다고? 무슨 행동력이.’

과연 시대를 풍미한 거인.

행동력이 돌진하는 몬스터 같았다.

“그래서 뵈러 온 거죠. 제 신부가 될 분이니까요.”

“아니…….”

쥬웰은 뭔가 상황이 꼬였음을 느꼈다.

아직 황태자와 파혼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혼담이 진행되게 된 것이다!

‘아니, 아무렴 상관없나?’

황태자와는 결국 파혼할 거고, 유스넨과도…… 어차피 함정을 파려고 위장 혼담을 건넨 거니 괜찮을 것 같았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쥬웰은 고개를 숙였다.

“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송하다니요. 저야 영광인 일이지요. 그런데, 혹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유스넨이 친절한 어조로 물었다.

“사실 우리 둘이 전혀 연이 없었던 터라. 혼담을 청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너 제거하려 함정 파려고.

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다른 답을 말했다.

“이전부터 대공 전하의 소문을 많이 들었어요. 광휘의 대공으로서 오로지 정의를 실천하려는 모습에 이전부터 흠모하는 마음을 품었답니다.”

쥬웰은 양손을 모으며 순수한 소녀의 모습을 연기했다.

“얼마 전, 성력을 각성 후 앞으로의 제 삶을 고민했거든요. 대공 전하시라면 제 동반자로서 최선이라 생각하여 청하였습니다.”

유스넨은 대답 대신 잠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쥬웰은 유스넨의 눈에 안경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안경 안 쓰고 왔네?’

둥근 안경이 없으니, 어쩐지 눈매에서 살짝 날카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가넷가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담을 드려 죄송해요.”

“천만에요. 그런데…….”

유스넨은 슬쩍 눈썹을 찌푸리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목에 상처가 있군요.”

“……!”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어젯밤 잠이 들었을 때 스스로 남긴 상처였다.

목 부위에 제법 큰 상처가 남아 목까지 올라오는 상의로 숨기고 있었는데 단추가 풀린 것이다.

‘이런, 언제 풀렸지?’

쥬웰은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누가 봐도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라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냥 흑마법으로 치료할걸.’

흑마법의 부작용 때문에 상처를 치료하지 않은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부작용을 감수하고 치료를 할 걸 그랬다.

역시나 유스넨도 말했다.

“왜 성력으로 치료하지 않았습니까?”

“……!”

쥬웰은 곤란함을 숨기고 미소 지었다.

성력은 어둠의 존재에 효과가 없다.

오히려 거부 반응만 일으킨다.

“성력을 이런 잔 상처에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흠, 그렇습니까? 역시 성녀님다운 마음이시군요.”

유스넨이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느낌일까?

눈이 가라앉아 보였다.

“그래도 다친 새를 치료하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상처를 치료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착.

쥬웰의 가슴이 가라앉았다.

‘……설마 날 의심하고 있는 건가?’

아니, 아닐 것이다.

어떤 의심할 만한 점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유스넨의 눈을 마주한 순간, 쥬웰의 등줄기에 싸늘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유스넨 대공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런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냥 내가 지레 과민할 것일지도.’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유스넨의 말은 그저 순수한 걱정일 것이다.

이 불안은 그녀의 제 발 저린 예민일 가능성이 컸다.

쥬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재간 있게 답하였다.

“사실 어제 성력을 발현 후 많이 무리가 되었어요. 원래 방금 성력도 사용하면 안 되는 건데, 새가 불쌍해 보여서……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이야기죠.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유스넨이 더욱 철렁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 제가 상처를 치료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성녀님께 비하면 부족하겠지만, 저도 천사의 성력을 쓸 수 있어서 말입니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안 돼. 성력을 받으면 거부 반응이 일어날 거야.’

그러면 유스넨은 그녀가 어둠의 존재란 걸 당장 눈치챌 것이다.

절대 받으면 안 됐다.

“그런 폐를 끼칠 수는…….”

“폐라니요. 성력은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건데요. 오히려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거절했지만 역시나 먹히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거절하는 게 더욱 어색하다.

‘……지금 죽여야 하나?’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아무리 광휘의 대공이라도 그녀가 전력을 다하면 죽일 수 있다.

문제는 이곳은 황실.

그런 소란을 일으키면 제국 모두에게 정체가 들통날 거고, 가넷가를 집어삼켜 원수들을 몰락시키려는 계획도 실패였다.

‘제길, 이곳이 인적 없는 곳이었으면 거리낄 게 없을 텐데.’

일단 쥬웰은 결론을 내렸다.

‘최대한 속여보자. 흑마법을 교묘하게 쓰면 안 들킬 수도 있어.’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바로 흑마법으로 유스넨의 눈을 속이는 것이다.

성력이 닿는 순간, 흑마법으로 거부 반응을 억누르면서 상처를 낫게 하면 된다.

그러면서 마기는 일절 드러내지 않아야 하니 어마어마한 난이도였지만 일단 해보기로 했다.

‘……실패해서 들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죽여야겠지.’

그녀가 죽이려고 하지 않아도, 유스넨이 먼저 심판의 검을 꺼내 들 것이다.

“……알겠어요. 부탁해요.”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유스넨이 고개를 끄덕인 후,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훌쩍 그녀의 공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맑은 그의 체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죄송합니다. 제 성력은 직접 신체를 접촉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어서.”

“……괜찮아요.”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손이 상처 난 목덜미에 닿았다.

부드러운 외모와 다르게 차가운 손이었다.

그런데 유스넨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성력을 발휘하지 않고 얼굴을 굳힌 것이다.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유스넨은 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상처에 손이 닿는 순간.

일전 느꼈던 아릿함이 다시금 심장에 작렬했다.

그것도 지난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다랗게.

마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아릿함이라 유스넨은 일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뭐 하시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유스넨의 이상한 반응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성력이 발현되는 타이밍에 맞춰서.’

쥬웰은 긴장하여 집중했다.

성력이 발현되는 순간, 그녀도 흑마법을 써야 했다.

들키지 않게 교묘히.

그리고.

파앗!

유스넨의 성력이 발현됐다.

‘지금.’

쥬웰도 흑마법을 발현했다.

아니, 발현하려고 했다.

기적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스스스.

유스넨의 손에서 펼쳐진 성력이 그녀의 상처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아니?’

쥬웰은 크게 놀라 눈을 떴다.

거부 반응 없이 성력에 상처가 아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거부 반응은커녕…….’

오히려 굉장히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따뜻한 빛무리에 둘러싸인 듯 포근함이 몸을 어루만진 듯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상이라 굳어 있을 때, 유스넨이 싱긋 웃었다.

“다행히 잘 아물었군요. 앞으로는 조심하십시오.”

“……아, 네.”

쥬웰은 당황을 숨기고, 미소를 지었다.

“조심히 들어가시길.”

“……전하께서도요.”

쥬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곧 마차가 황궁을 떠나기 시작했고 유스넨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유스넨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아까.’

유스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닿았을 때 느껴졌던 아릿한 통증.

그 통증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 또 있었다.

그녀가 등을 돌리는데 알 수 없는 아련함이 치밀어 올랐다.

그 아련함은 지금도 남아 있어, 그녀가 탄 마차가 벌어지는데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왜?

‘……이해할 수가 없군.’

고개를 젓는데, 주변에 있던 메디안 백작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떠신 것 같습니까?”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아직도요?”

메디안 백작은 놀란 얼굴을 하였다.

유스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의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심판의 눈으로 봐도 전혀 보이지 않더군요.”

유스넨은 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평소 그의 심판의 눈을 봉인하는 안경으로, 그는 어둠을 재단할 때만 안경을 벗었다.

“그러면 괜찮은 것 아닙니까? 심판의 눈으로 봐도 이상한 점이 없고, 성력에도 거부 반응이 없으니.”

타당한 의견이었다.

하지만 유스넨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기이한 광경을 하나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까 찰나.’

성력이 그녀에게 작용하는 순간.

어째서인지 유스넨은 하나의 환상을 보았다.

지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

마치 번개가 번뜩하듯, 명멸하는 하나의 환상이었다.

끔찍한 나락.

바닥이 보이지 않는 참혹한 무저갱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거지?’

유스넨은 고심했다.

지금껏 숱한 어둠을 마주해 봤지만, 한 번도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

‘내가 제대로 본 건 맞는 건가?’

지나치게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가 실제로 본 게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단순히 헛것을 떠올린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모르겠군. 더 의문만 남아.’

유스넨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떠올렸다.

이해할 수 없는 아릿함과 갈증.

그리고 확실치 않은 섬뜩한 환상.

유스넨은 답답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단순히 의문을 풀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고 난 이후,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이 들었다.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떨쳐지지 않는 답답함에 유스넨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가넷가에 연락하십시오. 쥬웰 영애와의 혼담을 받아들이겠다고.”

“……!”

메디안 백작은 놀란 얼굴을 하였다.

“정말로 그렇게 하실 겁니까?”

“네, 혼담을 진행하며 그녀를 곁에서 살피겠습니다.”

메디안 백작은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상대는 그 재수 없는 ‘오만’의 가넷가입니다. 한번 승낙하면 절대 무를 수 없습니다.”

‘오만’의 가넷은 자신들이 파혼을 통보하면 했지, 절대 상대의 파혼을 용납하지 않는다.

즉, 쥬웰이 어둠의 존재가 아니면 유스넨은 반드시 쥬웰과 결혼해야 한다.

하지만 유스넨은 이렇게 답했다.

“전 결정했습니다.”

메디안 백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유스넨도 사실 자신의 선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인 감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곁에 다가가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 * *

“아가씨, 페리도트 대공가에서 연락이 왔대요! 아가씨와 결혼을 진행하겠다고!”

쥬웰은 잠옷을 입은 채 케이크를 먹다가 살짝 놀랐다.

헤어지고 난 후 반나절도 안 되었는데 답변이 온 것이다.

‘……다들 무슨 행동력이.’

쥬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나쁜 일은 아니군. 아무래도 유스넨과는 혼담을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단 말이지.’

정확히는 위장 혼담이었다.

오늘 만나고 나서 직감했다.

유스넨은 위험했다.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오늘 같은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미리 혼담을 빌미로 처리해 두는 게 좋겠어.’

그런데 룬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저…… 아가씨. 그런데 다른 연락도 왔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파혼하지 않으시겠다고.”

“……그래.”

쥬웰은 다시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황태자는 아까 그녀의 이야기를 거절한 걸로 모자라 직접 가넷가에 파혼 거부 서신을 보낸 것이다.

‘……귀찮게 하네. 뭐,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쥬웰은 심드렁하니 생각했다.

아직 약혼을 파하지 않은 채, 또 다른 남자와 혼담을 진행하는 전무후무한 상황이었지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어차피 난 지금 가넷이니까. 남들이 입방아를 떠는 것 따위를 신경 쓸 필요 없지.’

가넷.

많은 걸 포함하는 의미의 단어였다.

원래 유아독존 가넷은 남의 시선을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오죽하면 남들이 가넷을 ‘오만’의 가넷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겠는가?

“어, 어떻게 하죠? 두 분 다 잘생기고 대단한 분이라고 하던데! 아, 아가씨께서 너무 훌륭하고 아름다우시니 이런 비극이!”

룬은 뭔가 설레는 얼굴로 횡설수설하였다. 쥬웰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단다. 다 내 뜻대로 될 테니.”

황태자와의 파혼도.

유스넨과의 혼담도.

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네, 네! 맞아요! 당연하죠! 다 아가씨의 뜻대로 될 거예요!”

“그러면 이만 나가주겠니? 피곤하구나.”

“네, 편히 주무세요!”

“룬, 주의해야 할 것 알지?”

“네, 알고 있어요. 주무실 때 절대로 방에 들어오지 않기.”

“명심해. 어기면 화낼 거야.”

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착해진 쥬웰이지만 가끔 서늘하게 무서울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네, 절대로 들어오지 않을게요.”

“그래, 너도 푹 쉬렴.”

홀로 방에 남게 된 쥬웰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거울을 봤다. 확인할 게 있었다.

말끔해진 목이 보였다.

“이상하단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성력이 든 거지?”

파앗!

그녀의 손에서 성력이 발현되었다.

그대로 자신의 몸에 흘려보냈더니, 곧바로 격통이 몰려왔다.

“큭. 우읍. 커억!”

쥬웰은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입으로 손을 가렸다.

성력의 거부 반응이었다.

‘밖으로 발현하는 건 가능해. 하지만 이렇게 몸에 흘려 넣으면 역시나 거부 반응이 드는데.’

쥬웰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까는 왜 괜찮았지?’

유스넨의 성력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거부 반응은커녕 포근하기 그지없었다.

‘천사의 성력이라 무언가 특이한 건가?’

하지만 천사의 성력이라고 딱히 괜찮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더욱 강한 거부 반응이 들면 들어야 했지.

‘모르겠군.’

쥬웰은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다시 그의 성력을 받을 일은 없을 테니 중요한 일은 아닐 터다.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준비’를 하였다.

먼저 자물쇠로 방문을 잠갔고 침대에 앉았다.

손을 등 뒤로 하고 마법으로 비단을 움직여 묶었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몸부림치다가 다치는 걸 막기 위한 준비였다.

‘이렇게 하면 잠들어도 괜찮지. 자자. 내일도 바쁠 테니.’

내일.

해밀턴과 중요한 일을 해야 했다.

로튼 백작을 나락으로 한 걸음 밀어 넣을 것이다.

쥬웰은 금방 잠이 들었다.

* * *

잠이 든 쥬웰은 꿈을 꿨다.

생각지 않은 꿈이었다.

바로 유스넨의 꿈.

정확히는 그가 어렸을 때의 꿈이었다.

그가 어둠에 농락당해 자신의 모든 걸 잃고, 그녀에게 치료받을 당시의 꿈.

짜악!

어린 소년, 유스넨의 뺨이 달아올랐다.

멍한 눈빛이 마찬가지로 어렸던 그녀에게 향했다.

그는 치료를 거부 후, 목숨을 끊으려다가 그녀에게 혼나던 중이었다.

‘왜…… 왜 죽으려고 해.’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서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두 좋은 분들이셨잖아. 널 돈 몇 푼에 팔지도, 채찍으로 때리지도 않았고, 굶기지도 않았고, 골방에 감금하지도, 가축이라고 부르지도, 오물을 먹이로 주지도 않았잖아. 내 부모님과는 비교도 안 되는…… 모두 널 사랑하시던 좋은 분들이잖아.’

그녀는 버럭 외쳤다.

‘그러니,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으라고!’

그 외침을 들은 어린 소년은.

주룩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눈물 흘리는 어린 소년을 말없이 안아주었다.

어렸던 그녀의 눈동자에도 함께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시 유스넨 열한 살. 에스텔레 열세 살 때의 일이었다.

꿈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제법 지난 후.

그녀의 치료 덕에 유스넨은 안정을 찾았고, 그녀는 떠날 때가 되었다.

‘꼬, 꼭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죠?’

어린 소년, 유스넨이 울먹거리며 물었다.

당시 유스넨은 또래보다 작은 체구라 나이보다 더욱 어려 보였다.

그래서인지 흰 강아지 같은 인상이었다.

마찬가지로 어렸던 그녀가 유스넨을 안아주었다.

‘응, 당연하지. 약속해. 앞으로는 울지 않는다고.’

‘끄윽. 끅.’

유스넨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녀는 곤란히 웃었다.

‘다 이겨내고. 꼭 누나 보러 와. 알았지? 기다릴게.’

어린 유스넨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찾아갈게요. 그러니.’

그의 감람석(페리도트)을 닮은 녹색 눈이 그녀를 간절하게 담았다.

‘저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꼭. 꼭. 저 잊으면 안 돼요? 알았죠?’

* * *

쥬웰은 퍼뜩 잠에서 깼다.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웬 흰 강아지 꿈?’

흰 강아지.

어렸을 시절, 그녀가 유스넨 대공을 부르던 별명이었다.

‘유스넨 꿈을 꾼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각별한 관계긴 했었지만.

유스넨에게는 미안하게도 사실 그녀는 이후에 그를 거의 떠올리지 못했다.

제물로 바쳐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10년간.

그녀에게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그는 스쳐 지나간 인연이 되었다.

이런 꿈을 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꿈을…….’

의아해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퍼뜩 얼굴을 굳혔다.

‘지금 몇 시야? 얼마나 잔 거야?’

창밖을 보니 이미 해가 뜬 상태였다.

세상모르고 잠든 것이다.

‘이런. 너무 깊게 잠들었어.’

화들짝 놀라 몸을 살폈는데,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전혀 아프거나 다친 데가 없었다!

‘……뭐지?’

그녀는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

이 정도로 깊게 잠이 들면 손목을 발버둥 치느라 최소 묶인 부위가 욱신거리게 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심지어 악몽도 하나도 안 꿨다!

악몽 없이 이렇게 깊게 잠든 건 처음이었다.

‘어째서? 설마 그의 성력 때문에?’

쥬웰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유스넨의 성력을 받고 하루 종일 몸이 상쾌하긴 했다. 하지만 잠까지 푹 자다니?

고작 잠 한번 잘 잔 게 뭐? 할 것이 아니었다.

수면 시간은 그녀가 가장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아무런 괴로움 없이 넘어간 것이다.

‘……모르겠군.’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방 밖에서 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아가씨?”

“응, 일어났단다.”

방문을 열어주니 룬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어? 오늘 얼굴이 좋으세요.”

“오래간만에 푹 잤구나.”

“여기 식사요! 다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들이에요!”

쥬웰은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푹 자서 오래간만에 몸 상태가 좋았다.

오늘 계획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아침을 먹고 해밀턴을 찾아갔다.

해밀턴은 한잠도 못 잔 듯 퀭한 눈빛이었다.

“생각해 봤어?”

“…….”

해밀턴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답을 알 수 있었다.

해밀턴의 눈에 독한 핏발이 섰다.

밤사이 각오를 한 것 같았다.

“너…… 넌 악마야.”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새삼스럽게.”

그녀는 악마였다.

오늘 벌이려는 일도 악마에 걸맞은 끔찍한 일이었고.

“그래도 너한테 하나 위로를 줄게.”

“……무슨.”

“넌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오늘 넌 내 인형이 되어 네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게 될 거야.”

해밀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인형.

쥬웰이 그의 손발을 인형처럼 움직여 끔찍한 일을 벌이겠다는 뜻이었다.

“그게…… 어째서 나를 위한 위로란 거지?”

해밀턴은 쥬웰의 배려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

“그러니까 넌 내 인형이 되어 강제로 움직이는 거니, 오늘 벌어질 일에 어떤 죄책감도 느낄 필요 없다는 거야. 넌 그냥 마음 편히 날 원망하고 저주하면 돼.”

“……!”

해밀턴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쥬웰은 핏빛 단도를 그의 손에 강제로 쥐여 주었다.

그녀의 피를 먹인 ‘안식의 마검’.

이 마검은 찔린 상대를 어떤 고통도 없이 평안히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안식을 원하는 자가 갈구할 마검이었다.

“잘 가지고 있어.”

이후, 쥬웰은 자신의 별채로 돌아와 룬에게 말했다.

“외출 준비를 하렴.”

“어디를 가실 건가요?”

“모튼 남작가에.”

“……!”

모튼 남작가.

란 남작 부인의 가문을 뜻한다.

쥬웰은 지그시 말했다.

“사랑하는 할아버님을 독살하려 했던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내야지.”

* * *

란 남작 부인은 가넷 공작가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쥬웰은 감옥으로 향하는 대신 그녀의 저택으로 발걸음 했다.

‘어차피 지금 가봤자 원하는 답변을 얻어내기는 어려울 테니까.’

란 남작 부인은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꾹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이유가 있었다.

‘로튼 백작이 그녀의 아들을 두고 입을 다물라고 협박했을 거야.’

란 남작 부인의 가정사는 다소 복잡했다.

그녀는 가넷 공작가의 봉신인 모튼 남작의 후처였다.

그리고 모튼 남작은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전처에게서 낳은 첫째 아들.

그리고 란 남작 부인에게서 낳은 둘째 아들.

그리고 전처에게서 태어난 첫째 아들은 사고로 사망한 상태라 모튼 가문에는 란 남작 부인이 낳은 둘째 아들만 남아 있었다.

‘입을 열면 그녀가 낳은 아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협박했겠지. 물론…… 이대로 입을 열지 않아도 그녀의 아들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지만.’

무려 토른 공작을 독살하려 한 일이다.

그녀의 아들이 앞으로 어떤 운명이 될지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저택의 앞을 지키던 기사가 놀란 얼굴로 쥬웰을 맞았다.

“안에 들어가 봐도 되겠나?”

“지금 이 저택은 폐쇄되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 말대로 저택은 가넷가의 주도하에 폐쇄되어 있었다.

란 남작 부인의 아들도 어딘가로 이송되어 구금되어 있는 상태였다.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말이야.”

“하지만…….”

“경.”

쥬웰은 빤히 기사를 바라보았다.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말이야. 부탁해도 되겠나?”

쭈뼛.

친절한 음성이다.

하지만 쥬웰의 붉은 눈동자가 빤히 주시하자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상냥하지만, 더욱 무서워지셨다더니.’

상냥하지만, 어렵다.

그게 변한 쥬웰을 향한 가넷가 고용인들의 평가였다.

분명 친절하고 착해지셨는데, 이렇게 가끔 섬뜩한 위압감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대신, 안의 증거물들을 건들면…….”

“그런 건 걱정하지 말게.”

쥬웰은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배려해 주어 고맙네. 이름이 뭐지?”

“난칸이라고 합니다!”

“기억하고 있지.”

가볍게 이야기하고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 내부는 황량했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고 수사 과정 중에 여기저기 부서지고 깨진 집기들만 뒹굴고 있었다.

“안에 더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쥬웰의 전속 호위 기사 녹튼 경이 말했다.

“응, 혼자 둘러볼 테니 경도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뭐가 위험하겠나?”

녹튼 경은 머뭇거리다가 밖으로 나갔다.

홀로 된 쥬웰은 시선을 돌렸다.

사실, 저택에는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보이고 들리지 않을 뿐.

누군가가 머물고 있었다.

쥬웰은 ‘인기척’이 들리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허밍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딘지 무겁고 음울한 허밍.

망자를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이었다.

그 진혼곡에 반응한 걸까?

저택의 구석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흑. 흑. 나, 난 죽고 싶지 않았는데.]

쥬웰은 무표정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고, 볼 수 있었다.

눈물 흘리는 어린아이를.

사고로 사망했다는, 모튼가의 첫째 아들의 ‘원혼’이었다.

아까 말했듯 모튼 남작가의 첫째 아들은 사고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사실, 란 남작 부인이 사고로 위장해 죽인 거였지.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유산을 모두 물려주려고.’

그러면 이곳에는 왜 왔냐고?

제령(구마(驅魔), Exocism).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원혼을 달래면 사라지기 전, 부탁을 하나 들어주니까.’

즉, 그녀는 이 어린아이의 원혼을 자신의 계획에 이용할 생각이었다.

[누나, 정말 제가 보이세요?]

“응, 잘 보인단다. 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

[헤헤.]

어린아이는 헤실 웃었다.

사고로 죽을 당시의 모습이라 보기 좋지 않은 몰골이었지만, 확실히 생전에는 귀여웠을 것 같다.

[너무 반가워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 이야기해도 돼요?]

“응, 얼마든지.”

쥬웰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아예 바닥에 털썩 앉았다.

먼지투성이 바닥이라 드레스가 더러워지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제가 누구냐면…… 이름은 모인이고요. 애칭은…….]

어린아이는 구구절절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하였다.

쥬웰은 가만히 그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때,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처음 아빠랑 엄마랑 호수를 갔었는데요!]

“그래, 좋았겠구나. 황도 근처 말하는 거지? 나도 거기 약혼자랑 자주 가봤어.”

[그리고 저는 사실 팬케이크를 좋아하고요! 호수 놀러 갈 때 꼭 챙겨 갔는데.]

“그건 나도 좋아해. 오늘 저녁 디저트로 먹어야겠다. 생크림 뿌리고 꿀에 찍어 먹어야지.”

그렇게 얼마나 이야기한 후일까?

어린아이가 헤헤 웃었다.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누군가한테 꼭 다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혼은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이들이 세상에 남긴 잔류 사념이다. 그러니 저렇게 제령 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사라지기 전, 원하는 게 있니?”

[우음.]

“복수? 널 죽게 만든 계모, 란 남작 부인을 똑같이 죽게 해줄까? 아니면 더욱 처참하게 찢어 죽여줄까?”

제령의 마지막 단계였다.

원혼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

수많은 원혼이 복수를 바라기에 그걸 먼저 물었다.

하지만 뜻밖에 어린 원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른 걸 하고 싶어요.]

“다른 걸?”

[네. 계모도 밉지만, 이거 마지막 소원이잖아요. 그러니 다른 걸 하고 싶어요.]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복수 외에 다른 걸 바라는 원혼도 있으니까.

“그러면 어떤 걸?”

[예전 엄마랑 갔었던 코트레앙 호수에 가보고 싶어요.]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은 요구였다.

‘여기서 멀잖아. 마차로 왕복 여섯 시간은 걸릴 텐데.’

어린아이도 무리한 부탁인 걸 아는지 눈치를 살폈다.

[사실…… 그날 엄마가 그리워 아빠를 졸라 같이 호수에 가다가 사고를 당했거든요. 헤헤…… 역시 어렵겠죠?]

쥬웰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대신 사라지기 전, 내 부탁을 꼭 하나 들어주어야 한단다. 알겠지?”

[네, 꼭 들어드릴게요!]

“무엇이든?”

[네, 네! 약속할게요! 제 영혼을 걸고요!]

그렇게 ‘거래’가 성립되었다.

쥬웰은 방을 살피다가 인형을 들었다.

“여기로 들어와.”

[네!]

어린 원혼이 인형에 들어갔다.

쥬웰은 밖으로 나와 전속 호위 기사 녹튼에게 말했다.

“코트레앙 호수로 가지.”

“네, 네?”

“호수의 전경이 보고 싶어서 말이야. 안 되나?”

“아, 아닙니다.”

코트레앙 호수는 수도 귀족들이 나들이로 자주 가는 곳이었다.

갑작스러운 호수 방문이 당황스러웠지만, 감히 누구의 이야기를 거부하겠는가?

그리고 과거 쥬웰이 벌이던 괴상망측한 패악들에 비하면 난데없이 호수에 가겠다는 건 무척이나 착한(?) 요구였다.

“아, 팬케이크도 하나 사 가고.”

“……팬케이크를 말입니까?”

“응, 가서 먹으려고.”

녹튼 경은 당혹을 숨기고 군말 없이 그녀의 명에 따랐다.

다그닥.

마차가 말을 달렸고, 세 시간 정도 지난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코트레앙 호수였다.

[와아아! 호수다! 너무 고마워요!]

인형에서 벗어난 어린 영혼이 신이 나서 외쳤다.

[저 조금 놀아도 돼요?]

“얼마든지. 이 팬케이크도 먹고 싶으면 먹고.”

[와아! 팬케이크! 엄마랑 이 호수에서 맨날 먹었는데! 고마워요, 착한 누나!]

어린 원혼은 신이 나서 호수를 뛰어다녔다.

물론 그녀에게만 보이는 광경이었다.

녹튼을 비롯한 이들은 괜히 몸이 으스스하네? 하고만 느낄 뿐이었다.

쥬웰은 가만히 어린 영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침 화창한 날이라 햇살이 내리쬈고, 보석처럼 호숫물이 빛났다.

호수를 보며 엄마의 흔적을 발견한 걸까?

그림 같은 광경을 배경으로 피에 젖은 어린 원혼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우면서 왜인지 씁쓸한 광경이라 쥬웰은 한참이나 그 모습을 보았고, 이윽고.

어린 원혼이 다가왔다.

[저, 저 이제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령이 성공하였음을 알리는 말이었다.

이제 저 원혼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리라.

[고, 고마워요, 착한 누나. 사라지기 전 누나의 부탁을 들어줄게요. 어떤 걸 원하세요?]

아까보다 훨씬 흐릿해진 모습으로 원혼이 말했다.

쥬웰은 잠시 원혼을 바라보았다.

‘착한 누나, 라.’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저 원혼에게 바라는 게 있어서 이런 일을 한 것일 뿐이었다.

“나와 함께 네 원수를 보러 가자.”

[……!]

“마지막으로 원수에게 한 방 먹여주고 가.”

쥬웰이 어린 원혼에게 바란 것.

란 남작 부인에게 지옥을 엿보여 주는 것이었다.

* * *

가넷가의 저택은 수도 외곽에 있었다.

말이 저택이지 가히 작은 영지만 한 크기였다.

바깥에는 성벽이 두르고 있었고, 외곽 쪽에는 고용인들이 사는 곳, 중간에는 기사단 및 봉신이 사는 지역, 그리고 최중심에는 혈족들이 사는 구역으로 나뉘었다.

그런 규모이니, 전용 감옥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쥬웰은 늦은 밤 무렵 감옥에 도착했다.

‘딱 적당할 때 도착했네.’

그녀가 지금 하려는 일은 낮보다는 밤이 훨씬 어울렸다.

“란 남작 부인을 보러 왔어요.”

“그, 그건…….”

간수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제가 만나면 안 되나요?”

“그, 그건 아니지만…… 고귀한 아가씨께서 보시기에는 좋지 못할 몰골이라…….”

대충 뭘 염려하는지 알 수 있었다.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란 남작 부인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서요.”

“독종이라 한마디도 안 할 겁니다.”

“그건 이야기를 나눠봐야 알겠죠?”

쥬웰은 싱긋 웃었고, 간수는 이유 모를 서늘한 섬뜩함을 느꼈다.

“이쪽입니다. 역겨우실 수 있으니…….”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과연 왜 저토록 염려하는지 알 수 있었다.

참혹했다.

‘가넷가의 고문 수준도 보통은 아니네.’

쥬웰은 순수한 의미로 감탄했다.

무려 토른 공작을 독살하려 했으니, 고문 기술자들이 최고의 솜씨를 뽐낸 것 같았다.

일전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딱 적당한 상태네. 내가 원하는 상황을 연출하기 좋은.’

쥬웰은 이번 독살 사건에 조금 복잡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진범을 밝히기.

즉, 로튼 백작을 궁지에 몰기.

둘째. 하지만 진범이 처벌받지 않게 하기.

즉, 로튼 백작이 처벌받는 건 피하게 하기.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처벌받지 않게 하겠다니.

‘범인이 밝혀지면 무조건 사형인데, 로튼 백작이 사형당하게 둘 수는 없잖아. 내가 지금 왜 참고 있는데.’

죽일 거면 이미 직접 잡아 죽였다.

아직 제대로 된 절망은 하나도 주지 못했는데, 로튼 백작이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쥬웰은 두 가지 목적, 진범을 밝혀 로튼 백작을 궁지에 몰면서, 허망하게 사형당하지 않게 하려고 오늘의 일을 기획했다.

로튼 백작을 천천히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오늘이 그 첫 시작이 될 것이다.

“란 남작 부인?”

“으으.”

“날 볼래?”

아직 의식이 있었던 건지, 란 남작 부인이 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으으…….”

“뭐라고?”

“주, 죽여줘. 제발…….”

고통이 큰지 진심 어린 바람이었다.

“정말? 정말 죽고 싶어? 네 앞에 놓인 미래를 알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쥬웰은 무표정하게 손을 들어 란 남작 부인의 눈을 덮고는 마법을 발현했다.

‘영안(靈眼)’을 뜨게 하는 마법이었다.

“……!”

영안을 뜬 란 남작 부인이 공포에 젖은 얼굴로 몸부림쳤다. 잔뜩 쉰 목으로 비명을 질렀다.

“시, 싫어! 아아악! 제, 제발……! 살려줘! 살려줘! 제발……!”

처절한 비명.

본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게헨나의 탐욕스러운 악마들을.

죽음은 끝이 아니다.

이제 그녀는 지금껏 살면서 쌓은 죄과에 따라 영겁의 고통에 처하리라.

“시끄러우니 그만.”

“……!”

“넌 오늘 죽을 거야.”

파멸을 선언하는 듯한 나직한 음성에 란 남작 부인의 눈이 커졌다.

“너, 넌 쥬웰 아가씨가 아니야. 너, 너는…… 도대체?”

그제야 쥬웰의 정체가 의아한지 물었다.

“내 정체가 지금 중요한 건 아닐 텐데.”

쥬웰은 무감정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너한테 중요한 건 따로 있지 않을까?”

“……!”

란 남작 부인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흔들렸다.

“이를테면 지금 너한테 중요한 건…… 남겨진 아들의 운명 같은 것 아닐까?”

“뭐, 뭐?”

“궁금하지 않아? 네가 죽은 후 남은 아들은 어떻게 될지?”

“……!”

란 남작 부인의 얼굴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창백해졌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으르렁거렸다.

“내, 내 아들을 건들면…….”

“건들면 뭐? 네까짓 게 감히 어쩔 건데?”

쥬웰은 비웃음을 보였다.

“……로, 로튼 백작님이 약속대로 내 아들을 지켜…….”

쥬웰은 피식하였다.

“정말 그 말을 믿어? 자신의 아버지까지 죽이려 했던 그 더러운 인간이 그런 약속을 지킨다고? 너 되게 순진했구나?”

란 남작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로튼 백작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란 것을.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작은 악마는 로튼 백작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난 단순히 네 아들을 해코지하지 않을 거야. 더 끔찍한 일을 저지를 거야.”

“무, 무슨……?”

“모인, 나와봐.”

쥬웰은 갑자기 누군가를 불렀다.

모인.

아까 만났던 어린 원혼이었다.

란 남작 부인은 어린 원혼을 알아보고는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니! 어, 어떻게……?”

“구면이지? 인사나 해.”

[안녕, 오랜만이에요, 계모.]

모인은 란 남작 부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주, 아주.]

피에 젖은 얼굴로.

쥬웰이 시킨 대로. 섬뜩하게 말했다.

[유크는 어디 있나요? 내 사랑하는 동생, 유크도 보고 싶은데.]

란 남작 부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이제야 눈앞의 악마가 어떤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눈치챈 것이다.

“난 네 아들 유크를 저 원혼에게 넘겨줄 거야. 그러면…… 네 아들은 이 세상에서 온갖 불행을 다 겪다가 결국 끔찍한 게헨나에 떨어지겠지. 네가 이제 갈 그 지옥에 말이야.”

“……!”

그 말에 란 남작 부인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협박이었다.

“제, 제발 그것만은…… 제발…… 제발! 차라리 날!”

그 처절한 외침에 쥬웰은 나직이 물었다.

“아들을 살리고 싶어?”

“네, 네! 제발!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정말 내 말에 따를 거야? 네 죽음을 내게 바칠 수 있어?”

죽음을 바치다.

그 섬뜩한 표현에 란 남작 부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선택 사항은 없었다.

“무,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내 아들만은!”

“그래, 너의 바람대로 계약은 이루어졌다.”

쥬웰은 언령을 뱉었다.

“그대의 죽음을 받겠으니, 그대는 평안한 안식을 얻으리라. 또한 그대의 아들도 지상에서 안락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위 약속은 나 ……의 이름으로 맹세하겠다.”

이건 죽음을 바치는 계약.

죽음의 순간, 란 남작 부인은 쥬웰이 바라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쥬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끝났습니까?”

“네, 들어가 볼게요. 고생하세요.”

쥬웰은 싱긋 웃었다.

소리를 차단해 간수는 안의 비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감옥 밖으로 나온 그녀는 모인과 작별 인사를 하였다.

[저 이만 가볼게요!]

“그래, 고생했어.”

[아니에요, 저도 좋았어요! 계모한테 한 방 먹여줘 후련했고요! 한이 다 풀린 것 같아요!]

모인의 영혼이 흐릿해졌다.

모든 한이 풀려 사라지려는 것이다.

‘원혼은 죽은 이가 남기고 간 잔류 사념. 한을 풀면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니까.’

그런데 마지막 순간, 어린 원혼이 물었다.

[그런데, 방금 했던 협박 진짜였어요? 유크를 끔찍하게 만들겠다는 거?]

“아니, 거짓말이었는데?”

쥬웰은 피식 말했다.

산 자를 원혼에게 바치는 일은 꽤나 귀찮은 일이다.

‘별것도 아닌 꼬맹이한테 그런 수고까지 벌일 이유는 없지.’

모인은 까르르 유쾌하다는 듯 웃으며 사라졌다.

[고마웠어요, 착한 누나! 행복하세요!]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착한 누나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지금만 해도 그녀는 끔찍한 일을 벌일 예정이다.

쥬웰은 첨탑 위로 올라갔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특이한 도구가 들려 있었다.

십자형의 나무에 실이 달려 있었고, 끝에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인형극을 할 때 인형을 움직이는 도구였다.

쥬웰은 첨탑 위에서 가넷가의 저택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작은 악마화(Flower of Devil, 惡魔華)가 피어올랐고, 인형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저택의 본 건물에서 한 인물이 은밀히 걸어 나왔다.

해밀턴이었다.

고용인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하얗게 질린 안색의 그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고용인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쥬웰은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인형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이건 지옥의 인형극.

해밀턴은 그녀의 인형이 되어 극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해 줄 것이다.

인형의 끝없는 춤과 함께 해밀턴은 어딘가로 걸어갔고,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방금 쥬웰이 나왔던 감옥이었다.

그리고 해밀턴이 든 안식의 마검이 란 남작 부인에게 안식을 선사했다.

안식의 마검은 평온한 죽음을 선사하는 마검.

란 남작 부인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죽음을 맞았고, 쥬웰과 했던 계약대로 자신의 죽음을 바쳤다.

마지막 순간.

쥬웰의 뜻대로 움직인 것이다.

란 남작 부인은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자신의 피로 하나의 문자를 썼다.

[R.]

로튼 백작을 지목하는 다잉 메시지였다.

그렇게 쥬웰은 잠자리의 날개를 뜯듯, 로튼 백작의 날개를 하나 뜯어버렸다.

* * *

그날 벌어진 사건은 가넷 공작가를 발칵 뒤집었다.

R.

누가 봐도 로튼 백작을 지목하는 다잉 메시지였다.

더구나 란 남작 부인을 살해한 이는 로튼 백작의 둘째 아들 해밀턴.

이번 일의 배후가 로튼 백작임이 명확해진 것이다.

‘좋네.’

쥬웰은 숨을 들이켰다.

‘각인’을 통해 로튼 백작이 지금 느끼는 공포의 감정이 전달되었다.

짜릿한 느낌이었다.

‘이제 첫걸음일 뿐이니.’

쥬웰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래, 이제 시작일 뿐, 아직 멀었다.

늪에 빠뜨려 죽이듯 천천히.

모든 원수를 하나하나 끔찍한 절망 속에 빠뜨릴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즐거움이 남아 있을까?’

상상만 해도 기뻤다.

물론, 지금은 이번 일의 파장을 즐기는 게 우선이지만.

“아, 아닙니다, 아버님!”

가족 만찬회 시간이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토른 공작이 만찬회에 참석했고, 로튼 백작은 덜덜 떨며 토른 공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해입니다! 전 정말 그런 일을 저지른 적이……!”

로튼 백작의 안색은 백지장을 넘어 완전히 시체 같았다.

항상 당당하던 로튼 백작이 저렇게나 두려움에 떠는 건 다들 처음이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로튼 백작은 다른 가족들의 놀란 시선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전 아닙니다! 해밀턴은 그저 아버님을 위하는 마음에 일을 저지른 것일 뿐! 절대 저는 아닙니다!”

쾅! 쾅!

로튼 백작은 토른 공작 앞에서 무릎 꿇은 채 바닥에 머리를 몇 번이나 찧었다.

만찬회장이 죽은 듯한 고요에 잠겼다.

오늘, 로튼 백작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단, 한 명.

쥬웰만이 딸기 주스를 마시며 느긋하게 그 광경을 구경했다.

‘너무 두려워하는 것 아니야? 강단이 저렇게 없어서야.’

쥬웰은 차갑게 생각했다.

‘조금 더 강한 모습을 보여달라고. 벌써 이러면 곤란하니.’

제대로 된 복수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세상이 무너진 듯 이러면 곤란했다.

그녀는 원수들이 최대한 오래, 강하게 버텨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에게 최대한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길 바랐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전 절대로……!”

“둘째야.”

토른 공작이 부드럽게 말했다.

“밥이나 먹자꾸나.”

“……!”

로튼 백작의 얼굴이 시체처럼 하얘졌다.

따뜻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름 끼치는 음성이었다.

토른 공작은 로튼 백작의 항변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즉, 침묵으로 인정한 것이다.

자신을 독살하려 한 배후가 둘째 아들, 로튼 백작이 맞다고.

가넷가에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 *

가넷 공작가에서, 아니, 제국에서 토른 공작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가주 대리?

제국의 재상 직위?

토른 공작의 한마디면 모조리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토른 공작을 독살하려고 했다.

가넷가의 모두가 이번 일의 파장에 대해 전전긍긍하였다.

확실한 건, 이번 사건으로 로튼 백작의 확고한 계승 구도가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로튼 백작이 어쩌면 후계위에서 버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짐작에 쥬웰은 느긋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단번에 끝나면 너무 아쉽잖아?’

그녀는 로튼 백작을 천천히 말려 죽일 것이다.

‘다행히 토른 공작은 이번 일로 단번에 후계위를 거두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조금 더 고민하겠지.’

이유는 간단했다.

‘로튼 백작을 내쳐도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까.’

토른 공작은 노쇠했다.

이번에 기적적으로 살아나긴 했지만, 그의 수명이 오래 남지 않았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니 후계를 생각해야 하는데, 로튼 백작 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다.

‘엔리크 자작은 토른 공작의 눈에 차지가 않겠지.’

토른 공작의 아들은 두 명이다.

로튼 백작.

엔리크 자작.

첫째가 있었지만, 옛적에 사고사했다. 참고로, 첫째의 죽음도 로튼 백작의 소행임을 의심하는 이가 많았다.

그럼 둘 중 하나가 후계위를 이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엔리크 자작은 토른 공작의 기준에 맞지 않았다.

‘가문을 위해 패륜을 저지른 아들을 후계로 놔두느냐, 아니면 기준에 맞지 않는 못난 아들을 후계로 새로 세우냐. 고민이 되겠지.’

토른 공작은 오로지 가넷가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고민하는 것이다.

패륜을 저질렀더라도 가문을 위해서라면 로튼 백작이 낫지 않을까 하고.

‘나한테는 다행인 일이지. 로튼 백작을 더욱 고통스럽게 나락에 빠뜨릴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로튼 백작의 날개를 하나하나 뜯으며 그를 정상에서 밑바닥으로 추락시킬 것이다.

무척 즐거운 과정이 되리라.

“룬, 나갈 준비를 해줄래?”

“아가씨?”

“할아버님을 뵈러 가려고. 심란하실 테니까. 착한 손녀로서 위로해 주어야지.”

쥬웰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른 공작을 흔들 차례였다.

“아, 역시! 아가씨가 가시면 공작 전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룬이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쥬웰은 싱긋 웃었다.

“응, 내 생각도 그래. 참, 이 서신 좀 내가 말하는 데 전해줄래?”

“이건?”

“뭐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룬은 서신의 수신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 아가씨, 설마?”

“그냥 취미 삼아 쉬엄쉬엄 해보려고.”

“드디어 성녀로서 위대한 일보를 나아가시려는군요! 저 응원할게요!”

쥬웰은 피식 웃고는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별채를 나가는데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엔리크 자작이었다.

“쥬웰.”

“네, 아버지. 무슨 일인가요?”

쥬웰은 팔짱을 꼈다.

엔리크 자작을 만나니,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말씀하세요.”

엔리크 자작은 딱딱한 얼굴을 하더니 예상 밖의 말을 하였다.

“앞으로는 경호 인원을 늘리거라. 지금 인원은 안 돼. 내가 추천해 준 인물의 경호를 받아라.”

쥬웰은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암살 걱정을 하시는 건가요?”

“그래, 형님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대비해야 해.”

근거 없는 걱정은 아니었다.

현재 가넷가의 직계는 로튼 백작과 엔리크 자작 둘뿐.

그러니 미리 손을 써 엔리크 자작과 그녀를 암살하려 할 가능성이 있었다.

둘이 사라지면, 토른 공작은 로튼 백작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면 아버지의 경호는 어떻게 하게요?”

무작정 기사의 수를 늘리는 건 도움이 안 된다.

대다수가 로튼 백작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을 테니.

당장 쥬웰의 호위 기사 녹튼 경만 해도 로튼 백작파였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이의 경호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 엔리크 자작은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기사를 배정시키겠다는 것이다.

“나는 괜찮다.”

“괜찮다고요?”

“그래, 다른 것보다 네 안전이 우선이야.”

쥬웰은 실소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해 주는 건지.’

지상에서 그녀를 힘으로 위협할 수 있는 건 단 네 명이다.

유스넨 대공.

마탑주 라플 공작.

마왕 타란툴라.

그리고 검제(劍帝) 샤피렌.

이들 네 명의 초월자만이 그녀를 위협할 수 있다.

그중 가장 큰 위협은 역시 300년을 넘게 산 라플 공작.

그와 싸우면 그녀도 패할 확률이 높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일반 암살자들은 그녀를 전혀 위협하지 못한다.

‘더구나 암살 위험도 본인이 훨씬 높으면서?’

로튼 백작이 손을 쓰면 엔리크 자작에게 쓰겠는가, 어린 조카에게 쓰겠는가?

엔리크 자작이야말로 암살 대상 1순위였다.

누구보다 조심해야 하는 상황에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기사들을 딸에게 배치하겠다고?

“거절하겠어요.”

“쥬웰!”

“제 안전은 제가 알아서 챙겨요. 아버지나 조심…….”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나, 엔리크 자작은 뜻밖에 거친 반응을 보였다.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모르는 거냐?!”

“……!”

“나는 네가 너무 걱정된다! 지금도 불안해 일도 손에 안 잡히는데, 왜 그렇게 날 속상하게 하는 거냐!”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여섯 공작가의 인물들은 모두 보석안을 타고난다.

가넷가는 장미를 닮은 석류석.

감정이 치밀어오르면 적색을 넘어 핏빛이 일렁인다.

그리고 지금 엔리크 자작의 눈빛은 짙은 핏빛이었다.

욱신.

쥬웰은 다시 가슴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심장에 각인된 ‘쥬웰’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다.

‘거절해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지.’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고지식한 남자가 딸의 안전보다 본인을 챙기려 할 리가 없었다.

‘성가시게.’

혀를 차고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알았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말해라.”

“행동에 제약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딱 한 명만 받겠어요.”

엔리크 자작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딸이 요구한 바에 적합한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알겠다. 리샤크를 보내겠다.”

삭월(朔月) 기사, 리샤크.

엔리크 자작이 가장 신뢰하는 그라면 충분히 딸을 지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리샤크는 명실상부 가넷가 최강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리샤크를 보내면 본인 경호는 어떻게 하려고?’

진짜 답이 안 나오는 고구마 답답이였다.

결국, 쥬웰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두 번째 조건도 있어요. 제 선물을 하나 받아주세요.”

“선물?”

“이 반지예요.”

쥬웰은 끼고 있던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검은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흑요석?”

엔리크는 놀란 얼굴을 했다.

흑요석은 쉽게 발견되지 않아 지극히 진귀하다.

“우연히 어제 길에서 주운 반지예요. 아버지 흑발이랑 어울려서 드리는 거니 꼭 가지고 있어 주세요.”

되는 대로 이야기했지만, 그 이유가 아니었다.

“손가락에 맞지 않을 테니 낄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어딜 가든 가지고 있어 주세요. 안 그러면 저도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겠어요.”

저건 그녀가 직접 만든, 소유자를 보호하는 마물이 담겨 있는 반지였다.

위기 상황이 오면 반지 안의 마물이 엔리크 자작을 보호해 주리라.

‘뭐, 나한테는 없어도 크게 상관없는 반지이니.’

그런데 엔리크 자작이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무언가 이상한 눈으로 반지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반지가 마음에 안 들어도…….”

“아니, 마음에 안 들지 않다.”

엔리크 자작은 강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예쁜 보석은 처음이구나. 이건 앞으로 내 것이다. 절대로 돌려주지 않겠다.”

반지를 꼬옥 주먹으로 움켜쥐었다.

혹여나 다시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듯한 행동이라 쥬웰은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뭐야, 설마 감동한 거야? 별로 특별한 의미로 준 건 아닌데.’

로튼 백작 따위에게 엔리크 자작이 다치거나 죽으면 기분이 너무 더러울 것 같아서 준 것일 뿐이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어쨌든 타린 왕국에는 언제 돌아가시나요?”

“돌아가지 않는다.”

“네?”

“오늘부로 외교 대신은 그만두기로 했다.”

“……어째서요?”

엔리크 자작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쥬웰이 준 반지를 쓰다듬으며.

“널 곁에서 지킬 것이다.”

* * *

‘널 곁에서 지킬 것이다.’

‘필요 없는데.’

엔리크 자작의 말을 떠올린 쥬웰은 혀를 찼다.

사실 그녀는 그가 타린 왕국으로 돌아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체스 말로 이용해야지. 꺼림칙해서 그렇지 확실히 도움은 될 테니까.’

혼자서 가넷가를 집어삼키는 것보다야 믿을 만한 조력자가 있는 게 힘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저택 뒤의 인공 호수였다.

토른 공작이 휠체어에 탄 채 호수를 보고 있었다.

‘작아 보이는군.’

황당한 생각이었다.

토른 공작은 제국의 가장 커다란 거인. 그런 그가 작아 보인다니?

하지만 오늘 그는 실제로 작아 보였다.

‘충격이 없을 수는 없겠지. 가장 아끼던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게 밝혀졌으니까. 아무리 거인이라도 사람이니.’

문득, 쥬웰은 궁금해졌다.

토른 공작은 과연 어떤 죽음을 맞이할까?

생명력을 주입했지만, 실제로 그의 최후가 언제일지는 모른다.

6개월을 넘길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전에 사망하게 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그는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것이다.

그녀가 그의 운명을 비틀며 저주했으니까.

‘점을 치면 대충 알 수 있겠지만. 가까운 사람의 점은 안 치는 게 좋으니.’

토른 공작의 점을 치면 가까운 관계인 그녀의 운명도 같이 엮여 엿보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우연히라도 본인의 운명을 엿보는 건 굉장히 기분 더러운 일이라 삼가는 게 좋았다.

‘뭐, 그가 어떤 최후를 맞든 중요한 일은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토른 공작을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토른 공작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쥬웰은 토른 공작을 뒤에서 껴안았다.

“허허, 쥬웰이냐?”

토른 공작이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웃었다.

그녀는 토른 공작의 웃음에 평소보다 힘이 덜하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좋은 기회였다.

사람이 감상적이 되면, 찌를 틈이 많아지니까.

“그래, 무슨 일이냐?”

“그냥 호숫가에 왔는데 할아버지가 보여서 달려왔어요. 혹시 제가 방해했나요?”

“아니, 아니란다.”

토른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마침 쓸쓸하던 참이었단다. 우리 요정 공주님 보니 기분이 좋구나. 우리 공주님 사실 이 할애비를 걱정해서 온 것 맞지?”

“헤헤, 맞아요.”

그녀는 ‘쥬웰’의 신체에 각인된 습관에 따라 사랑스럽게 웃었다.

“식사 때 할아버지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저도 마음이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찾아왔어요. 혹시 괜히 온 거면 죄송해요.”

“허어. 괜히라니. 이렇게 고마운걸. 그래도 날 생각해 주는 건 우리 공주님밖에 없구나.”

그냥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실제로 이번 사건 이후, 토른 공작을 개인적으로 위로해 주려고 찾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제왕의 눈치를 살필 뿐, 자식에게 독살당할 뻔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이는 쥬웰이 처음이었다.

“우리 공주님에게 계속 고맙기만 하구나. 고마워서 어쩔꼬. 혹시 바라는 게 있느냐?”

“없어요.”

“흐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우리 욕심 많은 공주님이 바라는 게 없다고?”

토른 공작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쥬웰은 도리도리 귀엽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있는데,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아요. 대신 저랑 산책 좀 하면 안 돼요?”

“산책?”

“네, 저기 저 정자에 함께 가고 싶어요.”

“흐음?”

호수 반대편의 정자를 뜻한다.

토른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승낙했다.

“그래, 가자꾸나. 이 할아비야 우리 공주님과 함께 산책하면 좋지.”

쥬웰의 의도가 궁금하단 얼굴이었다.

기사가 휠체어를 끌었고, 쥬웰이 옆을 걸었다.

문득 토른 공작은 가족 중 누군가와 이렇게 산책을 함께하는 게 무척이나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제왕.

피를 나누었지만, 가넷가의 가족들은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어린 손녀와 함께 호숫가를 산책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니까…… 왠지 모르게 간지러우며 묘한,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들이 자신을 독살하려고 한 게 밝혀진 뒤라서 더욱 감상적으로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허허, 너와 이렇게 호숫가를 산책하니 왠지 늙은이가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는 것 같구나. 천만금을 주어도 누리지 못할 호사야.”

“에이, 이게 무슨 호사예요.”

“호사지. 늙어서 사랑하는 손녀와 산책을 하는 게 어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일인 줄 아느냐?”

토른 공작은 클클 웃었고, 쥬웰은 토른 공작의 팔을 귀엽게 껴안았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앞으로 자주 산책하면 되죠.”

“흐음? 정말 그래 주겠느냐?”

“당연하죠. 저도 좋은걸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맞은편 정자에 도착했다.

그리고 정자에 들어간 순간.

“……!”

토른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쥬웰이 왜 이곳에 오자고 한 건지 눈치챈 것이다.

정자에 들어가니, 호수 너머로 그가 일평생을 지키고 가꾸어 온 가넷가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헤헤, 제가 좋아하는 곳이에요.”

“그러고 보니 할아비도 이전에 자주 왔던 곳이구나. 젊었을 적에는 이곳에 자주 와서 저택을 구경하고는 했는데.”

토른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젊었을 적 이곳에서 저택의 정경을 보며, 가넷가를 최고로 일구리라고 다짐하고는 했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토른 공작은 옅게 웃으며 물었다.

“나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곳에 온 것 아니냐?”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오늘 착한 손녀 노릇을 한 건, 오로지 지금 발언 기회를 얻기 위해서.

쥬웰은 나직이 말했다.

“로튼 백작님의 잘못을 눈감아주세요.”

“……뭐?”

토른 공작의 눈이 커졌다.

“지금 그게 무슨…….”

쥬웰은 말을 돌리지 않았다.

“할아버님의 실망과 낙담은 이해해요. 하지만 로튼 백작님은 가넷가를 위해 아직 필요한 분이에요.”

“……!”

“그러니 가넷을 위해 로튼 백작님을 눈감아주세요.”

토른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저히 쥬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넌 네 어미의 원수가 백부임을 모르는 거냐?”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의 선처를 바란다고? 로튼, 그 아이는 네 적이다. 내가 죽으면 로튼은 널 살려두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의 대화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섬뜩한 대화였다.

하지만 지극히 가넷다운 대화이기도 했다.

쥬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로튼 백작님이 가넷가에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

쥬웰은 똑바로 토른 공작을 바라보았다.

“물론 전 백부를 원망하고 죽이고 싶어요. 하지만 다른 대체할 인물이 있지 않은 한, 백부는 가넷가에 필요해요.”

“……!”

토른 공작은 뚫어지라 손녀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인물도 받아넘기기 어려운 강렬한 눈빛.

하지만 그녀는 무심히 그 눈빛을 받아넘겼다.

‘이 아이가 이런 아이였단 말인가?’

변했음은 지난번 만남에서 깨달았지만, 이건 생각했던 바를 아득히 초월했다.

‘이 아이는 지금 둘째를 선처하라고 부탁하는 게 아니야.’

토른 공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쥬웰의 지금 말의 진의(眞意)를 깨달은 것이다.

쥬웰은 방금 말했다.

‘눈감아’달라고.

용서를 말한 게 아니었다.

더구나 이런 말도 했다.

‘아직’ 대체할 사람이 없으니, 로튼 백작이 필요하다고.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대체할 사람이 있다면 로튼 백작을 굳이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할 사람은?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는 거야.’

쥬웰은 지금 이렇게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이 로튼 백작을 뛰어넘어 보겠다고.

그래서 로튼 백작이 필요 없어지면, 그때 로튼 백작을 처단하라고.

“하하하하하!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모르겠구나. 정확히 물으마.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이냐?”

“이전에 말했잖아요. 할아버지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욕심이 많아요.”

쥬웰은 화려하게 웃었다.

이런 부분은 돌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솔직한 욕망을 드러내는 게 토른 공작을 기쁘게 할 것이다.

“전 가넷의 왕이 되고 싶어요.”

“……!”

“물론 제가 부족함은 알아요. 지금 제 말이 터무니없이 들릴 것도 알고요.”

쥬웰은 토른 공작의 눈을 직시했다.

“지금 당장 뭘 바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켜봐 주세요. 앞으로 제 모습을. 반드시 로튼 백작님을 뛰어넘어 가넷의 왕이 될 자격이 있음을 할아버지께 증명해 보일 테니까요.”

그 당돌하면서 어마어마한 말에 토른 공작은 허허 웃음을 흘렸다.

“어째서 가넷의 왕이 되길 바라느냐?”

“가넷이 모든 보석 위에서 빛나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

“외람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지금 가넷가의 상황에 만족하시나요?”

토른 공작은 흠칫하였다.

만족하냐고?

누가 들으면 황당해할 질문이었다.

현재 가넷가는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토른 공작은 단 한 번도 가넷가의 상황에 만족한 적 없었다.

그가 바란 건 이것보다 더 아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결국, 이루지 못했지만 말이다.

일평생을 꿈꾸어왔던 그의 숙원이 손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 만족하지 못해요. 전 가넷의 왕이 되어 가넷을 모든 보석 위에서 빛나게 할 거예요. 아니, 가넷만이 빛나게 할 거예요. 에메랄드든, 페리도트든, 사파이어든, 다이아든 모두 짓밟아 부숴 버리는 것. 그게 궁극적으로 제가 바라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쥬웰의 눈에는 토른 공작조차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기이한 한기가 돌았다.

토른 공작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곧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광소와 같은 웃음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이 아이에게 듣다니?’

쥬웰이 말한 것이야말로 토른 공작이 궁극적으로 바라던 소원이었다.

가넷이 제국의 유일한 주인이 되게 하는 것.

하지만 그는 실패했다.

황실에 승리했고 가넷을 여섯 공작가 중 최고로 만들었지만, 그뿐이었다. 다른 공작가들 위에 군림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사랑스러운 손녀가 당돌하게 그 목표를 입에 담은 것이다.

토른 공작은 여전히 웃음기를 띤 채 물었다.

“그게 과연 가능하다고 보느냐?”

“당연히요.”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넷이니까요.”

그래, 가넷이니까 가능했다.

이곳이 만약 다른 공작가였다면 그녀는 목표를 다른 방향으로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넷이었기에 다른 공작가를 모조리 무너뜨릴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가넷이라 가능하다, 라…….”

토른의 눈은 더는 웃고 있지 않았다.

토른 공작은 고개를 젓고는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 할아비를 놀리면 안 된다. 헛된 망상은 망상에서 그쳐야 해. 알겠느냐?”

인자한 할아버지의 음성이 아니었다.

태산 같은 가주로서 가문의 일원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허튼 이야기는 삼가라고.

‘헛된 망상이라.’

쥬웰은 가만히 생각했다.

토른 공작이 그렇게 말할 만큼 하나의 공작가가 다른 곳 모두를 압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여섯 공작가는 모두 저마다의 강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충성의 가넷은 권력을 가졌지.’

‘번영’의 다이아는 부를.

‘축복’의 에메랄드는 신성을.

‘정염’의 사파이어는 무력을.

‘심연’의 아메티스트는 마법을.

‘광휘’의 페리도트는 정의와 심판을.

이렇게 다 저마다의 강점이 있어서 한 곳이 다른 곳을 압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가 증명해 보일게요.”

“……뭐?”

쥬웰이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게 보름만 시간을 주세요. 그러면 제가 오늘 한 이야기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 드릴게요.”

“……!”

토른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진심이냐?”

“네.”

“이 할아비에게 장난을 치면 안 돼. 이 할아비는 아주아주 무섭단다.”

일부러 장난스럽게 으름장을 놓았으나, 쥬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보름. 그 안에 할아버지가 보지 못했던 가넷의 가능성을 보여 드릴 테니, 대신 제게 선물을 주시겠어요?”

“선물?”

쥬웰은 사랑스러운 손녀의 모습으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네, 손녀가 기특한 모습을 보이면 선물을 주셔야죠. 주실 거죠?”

토른 공작은 결국 딱딱한 표정을 풀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가 날 놀라게 한다면 그깟 선물이 문제이겠냐? 네가 바라는 거면 무엇이든 주마. 바라는 선물을 말해보아라.”

“바톤 영지요.”

“……뭐?”

쥬웰은 싱긋 웃었다.

“선물로 바톤 남작령을 주세요.”

토른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바톤 영지.

가넷 공작령에 속한 작은 영지였다.

별다를 것 없는 작은 마을 영지. 그것도 단승 영지라, 죽으면 공작가에 돌려주어야 하는 볼품없는 영지였다.

이 영지의 의미는 다른 점에 있었다.

바톤 남작령은 가넷 공작의 자식들에게 주어지는 ‘소(小)가넷’의 영지 중 하나로, 로튼 백작과 엔리크 자작이 이러한 소가넷의 영지를 받은 상태다.

즉, 이 영지를 받는다는 건 가주 후보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쥬웰은 자신을 로튼 백작과 엔리크 자작과 동일한 선상에 놓아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토른 공작은 긍정적인 답을 하지 않았다.

쥬웰도 독촉하지 않았다.

단번에 승낙을 얻어낼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은 의향을 표시한 것만으로 충분하지.’

중요한 건 소가넷의 영지를 받냐 안 받느냐가 아니라, 토른 공작에게 후계로 인정받냐 받지 않느냐였다.

오늘의 대화로 토른 공작은 그녀를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될 것이다.

단순히 사랑스러운 손녀에서, 가주위를 바라는 당찬 손녀로.

‘뭐, 당장 깊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당돌한 손녀.

지금 토른 공작의 쥬웰을 향한 속내는 딱 이 정도일 것이다.

상관없었다.

앞으로 하나하나 그에게 인정받아가면 된다.

인정받을 방법은 많았다.

‘원수들의 날개를 잘라가면서 해나가면 되지.’

즐거운 과정이 될 것 같아, 쥬웰은 입술을 핥았다.

직속 기사 녹튼 경이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쥬웰은 잠시 녹튼을 바라보았다.

‘이자도 로튼 백작의 끄나풀이지. 슬슬 개인적으로 부릴 수족을 만들긴 해야겠어.’

“산책하고 싶어요. 먼저 돌아가 주세요.”

“따르겠습니다.”

“혼자 하고 싶어요.”

“하지만…….”

“경.”

쥬웰은 싱긋 웃었다.

“제가 겨우 이딴 일로 경 따위에게 두 번이나 이야기해야 하나요?”

“……!”

녹튼의 얼굴이 하얘졌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그러면 쉬고 있으세요.”

홀로 된 쥬웰은 가문의 감옥으로 향했다.

해밀턴을 보기 위해서였다.

해밀턴은 그나마 가장 좋은 방에 갇혀 있었다.

“오라버니? 보러 왔어요.”

“너, 너……!”

“많이 힘드시죠?”

쥬웰의 다정한 음성에 해밀턴은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얼굴을 하였다.

표정만 그런 게 아니라,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음, 힘들긴 했나 보네. 얼굴이…… 퉁퉁 부어 있네.’

주먹으로 엄청나게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분노한 로튼 백작에게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쥬웰은 간수에게 말했다.

“잠시 저쪽으로 가 있어 주겠나? 오라버니랑 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

“아, 아니, 가지 마!”

“잠깐이면 되네.”

해밀턴이 간절히 외쳤지만, 간수는 쥬웰의 예쁜 미소가 훨씬 무서웠다.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아, 문도 좀 열어줄래? 잠깐 들어가 보려고.”

해밀턴은 절대 안 된다는 듯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지만, 간수는 쥬웰의 말만 신경 썼다.

“그건…….”

“안 돼? 오라버니의 상처를 봐주려는 거니 꼭 부탁할게.”

쥬웰은 부드럽게 웃었다.

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섬뜩함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미소라 일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아, 알았습니다. 대신 바로 나오셔야…….”

“응, 고마워. 금방 나올게.”

쥬웰이 들어가자, 해밀턴은 히익 하며 감옥 구석으로 뒷걸음질 쳤다.

자신의 우리에 들어온 육식 맹수를 보는 토끼라도 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왜, 왜?!”

“말했잖아. 상처 봐주려고 들어왔다고.”

“뭐, 뭐요? 무슨 개…… 소리를.”

“이리로 와봐.”

쥬웰이 ‘명령’하자 해밀턴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팔다리를 움직여 쥬웰 앞에 도착했다.

쥬웰은 손을 들더니 성력을 발현해 해밀턴의 얼굴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해밀턴은 정말로 쥬웰이 자신을 치료해 주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욱신욱신 아프던 상처가 모두 가라앉았다.

“……왜, 왜 나를?”

“그냥?”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구태여 이유를 찾자면, 성력을 몸에 익히려는 정도?

‘하도 오랫동안 안 써서 성력 조절이 어색해. 앞으로 성력을 쓸 일이 많을 테니까. 미리미리 연습하는 것도 좋겠지.’

쥬웰은 해밀턴의 얼굴을 살피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왕년의 성녀 실력이 어디로 가지 않은 듯 완벽히 깔끔히 나은 모습이었다.

“도, 도대체? 다, 당신은……?”

해밀턴은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였다.

“나 나쁜 악마 맞아. 그러니 헷갈릴 필요 없어.”

“…….”

“어쨌든 여기 감옥 지낼 만해? 자주 와도 될 만큼?”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지낼 만할 리가……!”

해밀턴은 황당한 얼굴로 외치다가 입을 우뚝 다물었다.

뭔가 묘한 뉘앙스를 느낀 것이다.

“실례지만, 무슨…… 뜻으로 그런 걸 물으시는…… 지요?”

“지낼 만했으면 좋겠어. 조만간 또 와야 할 테니.”

“……네?”

해밀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쥬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감옥의 침대에 앉았다.

“넌 곧 석방될 거야. 나한테 고마워해도 좋아. 내가 방금 할아버지께 졸랐거든. 너는 잘못이 없으니 풀어달라고.”

살인을 저지르긴 했지만, 어차피 란 남작 부인은 심문을 받고 처형이 예정되었던 죄인.

특히 해밀턴이 주장한 살해 이유는 이거였다.

‘감히 사랑하는 할아버님을 독살하려 하다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안 믿는 핑계였지만, 어쨌든 정상 참작이 될 만한 사유였다.

그러니 토른 공작에게 졸라서 빼낼 수 있었다.

“그, 그런데…… 왜 또 감옥에?”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거든.”

“……!”

해밀턴이 딸꾹질을 하였다.

“걱정하지 마. 지난번 같은 일은 아니니까. 그냥 저택의 고용인 중 하나를 매수해 몇 가지 일만 해주면 돼. 그걸로 끝이야.”

“……그런데, 왜 내가 다시 감옥에?”

“그야, 네가 조만간 가넷가에서 벌어질 커다란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게 될 테니까?”

해밀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뭔 일을 꾸미는 건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끔찍한 일을 벌여놓고 그에게 누명을 덮어씌우겠다는 거였다!

“이…….”

해밀턴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곧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하…… 겠어요.”

“흐음?”

“대신, 하나만 부탁을 들어줘…… 요.”

해밀턴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 지난번같이 인형처럼 움직이는 건…… 하,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정신적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쥬웰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삼가도록 하지.”

* * *

쥬웰은 해밀턴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나도 지옥의 인형술에 당하는 건 끔찍하긴 했으니까.’

지옥의 인형술은 그녀가 게헨나에서 고통받을 당시 당하던 고문 중 하나였다.

그녀는 무척이나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고, 악마들의 ‘총애’에도 비교적 오랫동안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악마들이 그녀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지옥의 인형술이었다.

당한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인형술에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정신은 완전히 무너졌으니까.

즉, 지옥의 인형술은 그녀가 게헨나에서 겪었던 것 고통 중 ‘투견장’과 더불어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입맛이 써져, 쥬웰은 괜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한 걸까?’

해밀턴을 가련히 여기는 건 아니다.

그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 악인이고, 지금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

그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저 공포에 대한 굴복일 뿐이다.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그런 악인이라고 해도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 게 정당한 걸까?’

쥬웰은 그런 고민이 들었다.

해밀턴이 아무리 죄인이라고 해도 이런 고통을 주는 게 과연 올바른지.

하지만 곧 답은 나왔다.

‘당연히 올바르지 않지. 무슨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쥬웰은 픽 웃었다.

애초에 그녀의 모든 게 올바르지 않거늘.

그녀는 자신이 추악한 악마임을 명확히 자각하고 있다. 그녀의 모든 행위는 끔찍한 악이 맞았다.

자신이 저지르는 잘못들을 변명할 생각도 없었다.

상관없다.

애초에 선악을 구분하려 지상에 온 게 아니니.

그녀에게 중요한 건, 복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별채에 가서 말했다.

“룬, 이제 내 별채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

“네, 네?”

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가씨?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울 것 같은 눈동자였다.

쥬웰은 팔짱을 꼈다.

‘음, 뭐라고 하지.’

룬이 잘못한 건 전혀 없다.

하지만 룬은 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쥬웰은 섬뜩한 생각을 하였다.

‘여기 있으면 죽을 테니.’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녀의 근처에 있으면, 룬이 죽게 된다니?

하지만 사실이었다.

얼마 뒤 쥬웰의 주위로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때 룬이 곁에 있으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반드시 떨어뜨려 놔야 했다.

곧 좋은 핑계가 떠올랐다.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널 가장 믿어서 그렇단다.”

“네?”

“아버지께 가줄래?”

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 말씀은?”

“아버지의 주위에 있으면서 아버지를 지켜줘. 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가 독살당하지 않게 해줘.”

엔리크 자작을 향한 독살 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마물의 반지를 선물했지만, 독까지 막아주진 못한다.

반드시 믿을 만한 이가 옆에서 독을 걸러주어야 했다.

“하, 하지만…….”

룬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쥬웰은 부드럽게 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룬은 열아홉 살, 쥬웰은 아직 성년식을 앞둔 열일곱 살이다.

키도 쥬웰이 룬보다 훨씬 작다.

그런 쥬웰이 자신보다 큰 룬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어색하지만, 이상하게 묘하게 어울리는 광경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위해 부탁할게. 너 말고 믿을 사람이 없어.”

“…….”

널 믿어.

그 말에 룬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룬은 이런 물음을 속으로중얼거렸다.

‘제가 가면…… 아가씨는 누가 지키죠?’

룬이 떠나면 쥬웰은 혼자가 된다.

다른 하녀들이 있지만 믿을 만한 이들이 아니다.

그런 룬의 마음을 눈치채고 쥬웰이 말했다.

“걱정하지 말렴.”

쥬웰은 옅게 웃었다.

“난 괜찮단다. 아버지를 부탁할게.”

“…….”

“아, 내가 보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 아버지 성격에 받아들일 리가 없으니까. 왜 왔냐고 물어보면…… 내 변덕과 짜증을 더는 못 참아서 왔다고 해.”

엔리크 자작이 딸이 자신을 위해 보낸 룬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는 고지식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왜일까?

쥬웰의 말을 들은 룬의 눈동자가 빨갛게 물들었다.

“아, 아가씨는 도대체…….”

룬은 소매로 눈매를 강하게 문지르더니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아가씨의 명을 완수할게요. 대신, 아가씨도 조심해 주세요.”

“그래, 그래.”

“꼭요! 다시 만날 때까지 아무 일도 없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래, 그래.”

쥬웰은 룬이 귀여워 고개를 끄덕였다.

룬과는 에스텔레 시절에 만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좋은 관계가 되었을 텐데. 마리처럼 말이야.’

마리.

그리운 이름을 떠올린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마리는 에스텔레 시절에 그녀를 룬처럼 따르던 이였다.

‘마리는 귀족가 출신이라 하녀는 아니고 시녀였지만.’

룬이 귀여운 호들갑쟁이면, 마리는 정반대였다.

마리는 귀족가의 별종 잔소리쟁이였다.

언니 스타일이랄까? 실제로 나이도 에스텔레보다 많았다.

‘……난 당신이 아픈 게 싫어요.’

한숨을 내쉬던 마리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마리와는 이번 생에는 연이 없을 터였다.

‘마리의 가문은 다이아 공작가의 봉신 가문이니 잘살고 있겠지. 다이아 공작가를 무너뜨릴 때 한 번쯤은 볼 일이 있으려나. 마리의 가문은 보존해 줘야지.’

쥬웰은 쓴맛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문득 보고 싶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허를 찌르듯, 예상치 못하게 떠오른 감정이라 일순 가슴이 흔들렸다.

‘마리, 리델하트 오라버니…… 다 보고 싶네.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이가 그녀를 배신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 그녀를 배신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마리와 리델하트였다.

‘리델하트 오라버니는 추기경이 되었다고 하던데.’

리델하트.

에메랄드 공작가에 입양된 피 안 섞인 오라버니다.

공작가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었던 이였다.

‘물론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리델하트는 마치 날 선 고슴도치 같았다.

그녀에게도 항상 날카롭게 대했다.

하지만 에메랄드 공작가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진심으로 잘 대해준 이였다.

‘……오늘은 또 어디서 울고 온 거지?’

싸늘하지만, 따뜻한 음성이 떠올랐다.

그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억지로 억눌렀다.

‘봐서 뭐 하게?’

그때, 룬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꼭! 꼭! 조심하셔야 해요. 아무나 믿으면 안 되시고요.”

“그래, 그래.”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니, 웃지만 마시고!”

“고마워서 그래.”

“……!”

룬의 눈이 커졌다.

쥬웰이 잔잔하게 말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아버지 부탁할게.”

룬은 또 뭐에 감격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 차, 코를 훌쩍거리며 나갔다.

쥬웰은 홀로 차를 마셨다.

잔뜩 걱정해 준 룬에게는 미안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룬의 바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고.

쥬웰은 스스로 커다란 위험에 노출될 테니까.

‘덫을 놓기 위해서 어쩔 수 없으니까.’

덫.

스스로를 미끼로 음모를 꾸밀 생각이다.

‘이미 시작되었지.’

심지어 방금 쥬웰이 생각한 것처럼, 그 음모는 이미 시작됐다.

곧 입질이 올 때가 되었다.

과연.

“아가씨, 에블린 백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모시도록.”

가넷가 저택에서 백작은 단 한 명, 로튼 백작뿐이다.

그러니 백작 부인은 로튼 백작의 아내, 에블린이다.

원수의 아내.

“부인께 인사를 올립니다.”

“어머, 부인이라니. 어색하게 왜 그러니, 쥬웰. 그냥 백모라고 부르렴.”

에블린 부인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남편인 로튼 백작과 똑 닮은 미소였다.

“네, 어떤 일이신지요?”

“어떤 일이긴. 우리가 무슨 용무가 있어야 볼 사이니? 가족이잖니. 네가 따로 떨어져 나와서 사니 걱정되어서 와봤단다.”

쥬웰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쥬웰이 본 저택에서 떨어져 나와 사는 이유.

그건 로튼 백작 일가족이 엔리크 자작 일가족을 내쳤기 때문이다.

“어휴, 별채가 관리도 제대로 안 되고. 이 먼지는 뭔지. 여기 하녀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구나. 경을 쳐야겠어.”

에블린이 방을 둘러보더니 혀를 찼다.

“안 되겠다. 이렇게 지내는 걸 보니, 내가 속상해서 안 되겠어. 본 저택에서 하녀들을 보내줄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렴.”

“그건…….”

“사양하지 말렴. 난 네 어머니나 다름없지 않니?”

어머니.

그 말에 쥬웰은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쥬웰’의 친모는 바로 저 여자와 티 타임을 가지다가 죽었다. 그런데 뻔뻔하게 저런 이야기라니?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지.’

에블린 부인이 로튼 백작과 함께 이전에 어떤 죄과를 저질렀는지, 주시자의 눈으로 본 그녀의 영혼이 얼마나 추악한 어둠에 싸여 있는지, 그건 전혀 알 바 아니었다.

지금 관심 있는 건 단 하나.

“네, 고마워요, 백모님. 부탁할게요.”

쥬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사냥감’이 그녀가 파놓은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 * *

‘첫걸음은 순조롭군. 이렇게 쉽게 걸려들다니.’

쥬웰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토른 공작과 약속한 보름.

그사이 여러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제 다음 일을 해야지.’

토른 공작에게 호언장담한 대로 가넷가의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로 향하는데, 뜻밖의 인물이 그녀를 맞았다.

“앞으로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대는?”

“리샤크라고 합니다.”

쥬웰은 팔짱을 끼고 상대를 살폈다.

‘생각보다 어리네?’

삭월의 기사, 리샤크.

가넷가의 명성 높은 기사다.

그런데 앳된 소년처럼 보였다.

‘왜 이렇게 귀엽게 생겼어? 인정사정없는 잔학한 검술로 이름 높으면서?’

쥬웰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상대를 살폈다.

옅은 갈색 머리.

순한 푸른 눈동자.

착한 사슴 같은 인상이었다.

‘어린 유스넨이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면, 얘는 그냥 귀여운 꽃사슴 같네. 괴롭히고 싶은.’

물론 이건 겉모습일 뿐이다.

리샤크는 아주 유명한 기사였다.

그는 제국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기사 중 하나였다. 물론 적의 피로.

‘영혼은 어떻지?’

쥬웰은 주시자의 눈을 발현하고는 살짝 놀란 눈을 했다.

‘이것 봐라? 악마들이 끝장나게 좋아할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악마들이 좋아할 영혼.

쥬웰은 주시자의 눈을 통해 한참이나 리샤크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리샤크는 정말 악마들이 보면 환장할 것 같은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곤란한데. 이런 영혼을 가진 이들은 결국 끝이 좋지가 않던데.’

좋지가 않다.

굉장히 순화된 표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끔찍한 파멸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쥬웰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리샤크는 살짝 당황했다.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쥬웰은 한참 상대의 영혼에 집중하다가 별생각 없이 답했다.

“예뻐서.”

“네, 네?”

리샤크의 귓불이 빨개졌다.

“노, 놀리지 마십시오!”

“진짜인데? 너 몇 살이야?”

“스물두 살입니다.”

“흐음. 더 어려 보이는데? 나이 속이는 것 아니야?”

“……사실, 스무 살입니다.”

쥬웰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귀여운 리샤크 경. 앞으로 잘 부탁해.”

“그,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귀여운 건 영애가 훨씬 더 귀엽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난 쥬웰이잖아. 내 귀여움과 아름다움은 최고야.”

“…….”

그 말처럼 쥬웰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가히 정신 나간 아름다움이라 할 만했다.

“어쨌든 귀엽다고 칭찬해 줘서 고마워, 리샤크 경. 그런데 난 지금 처치 곤란한 약혼 상대가 두 명이나 있어서, 네 관심까지는 조금…….”

“과, 관심 없습니다!”

리샤크의 얼굴이 사과처럼 변했고, 쥬웰은 다시 웃었다.

왠지 쿡쿡 찔러 계속해서 괴롭히고 싶은 타입이었다.

‘아, 마리도 이런 마음으로 날 놀린 건가?’

쥬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전 시녀였던 마리는 그녀에게 장난치는 걸 즐겼다.

‘성녀님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탓이에요. 자꾸 쿡쿡 찔러 괴롭히고 싶어지잖아요.’

왜인지 오늘따라 자꾸 마리 생각이 났다.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이제 출발하지. 목적지는 알고 있지?”

“네……. 그런데, 정말 ‘그곳’에 가는 겁니까?”

“응, 바로 가지.”

리샤크가 묘한 시선을 보냈다.

왜 ‘쥬웰’이 ‘그곳’에 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출발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아가씨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올 사람이 없는데?

“스토가 남작가의 마리 영애이십니다.”

“……뭐? 지금 누구라고?”

쥬웰의 얼굴이 굳었다.

마리…… 라면 그 마리?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 마리일 리가 없다.

“잘못 말한 거지? 난 그 영애를 몰라.”

리샤크도 왜 이런 인물이 찾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저희도 의아해 다시 확인했는데, 스토가 남작가의 마리 영애가 맞다고 하십니다. 아가씨께 용무가 있다고 합니다.”

쥬웰은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멎어버린 것만 같았다.

‘마리가? 왜?’

리샤크가 조심스레 쥬웰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돌려보낼까요?”

쥬웰은 하얀 안색으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되물었다.

“무슨 용무래?”

“네?”

“날 찾아온 이유를 물어봤을 것 아니야. 왜 왔대?”

“무언가 부탁드릴 게 있다고 합니다. 정확히 무슨 부탁인지는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부탁.

아, 하고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용무가 있을 뿐, 내가 에스텔레임을 알고 온 건 아니야.’

그래, 이 세상에서 그녀가 에스텔레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돌려보낼까요?”

“아니, 그러지 말고…….”

쥬웰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선약이 먼저이니, 일단 목적지에 가겠어.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고 오라고 해줘.”

“네, 알겠습니다.”

사실, 선약 따위 무시해도 상관은 없었다.

왜? 그녀는 가넷이니까.

그럼에도 이러는 건 이유가 있었다.

지금 당장 마리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 쓰던 가면으로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다.

조금 마음을 가다듬은 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다그닥.

마차가 수도의 거리를 달렸다.

마차 안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쥬웰이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리샤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왜 기분이 나쁘신 거지?’

리샤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셨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마리라는 분이 찾아와서 그런 건가?’

하지만 애초에 둘이 안면도 없는 사이 아닌가?

리샤크의 상식상 모르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기분 나쁠 이유는 없었다.

‘그러면 내가 뭘 잘못한 건가? 혹시 내가 귀엽다고 해서 화났나?’

리샤크는 덜컥 걱정이 들었다.

그는 작위 없는 평기사.

공작가의 영애에게 귀엽다는 말은 어마어마한 실례였는지도 모른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응?”

“아까 제 무례 때문에 기분이 상하신 것 아닙니까? 정말 귀여워 보이셔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일 뿐, 아무런 뜻도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쥬웰은 잠시 이게 무슨 롤 케이크 옆구리 터지는 소리야?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아니…… 그게! 저 때문에 그런 거면 정말 죄송합니다!”

“……너, 진짜 귀엽구나.”

“네? 네?”

“아니야.”

쥬웰은 옅게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조금 기분 좋아졌어.”

“…….”

마침 햇볕이 마차의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반짝, 빛나는 듯한 미소라 리샤크는 순간 멍해졌다.

아름다운데, 왜인지 보는 이의 가슴을 욱신거리게 만드는 미소였다.

“왜?”

“아, 아닙니다!”

리샤크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 뭘 넋 놓고 보는 거야! 저분은 은인의 따님이셔! 내가 할 일은 저분을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다!’

그의 은인, 엔리크 자작은 당부했다.

반드시 딸을 지켜달라고.

그것 외에 다른 건 생각하면 안 된다.

그래도 자꾸 방금 본 쥬웰의 미소가 떠올라 리샤크는 횡설수설 말을 돌렸다.

“그, 그……! 이번에 목적지를 듣고 놀랐습니다!”

“왜?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어서?”

“그, 그게…… 네. 변하셨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시구나 해서.”

쥬웰은 쿡쿡 웃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악녀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란 거지?”

“그, 그게 아니라……! 죄, 죄송합니다!”

“아니, 이해해. 사실 지금 가는 곳은 나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곳이 맞기는 하지.”

쥬웰은 마차 밖을 힐끗 바라보았다.

가넷가를 떠난 마차는 귀족들의 거리를 지나, 부유한 평민층의 거리를 지났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일반 평민들의 거리마저 지난 후, 이제는 우범 지역인 빈민들의 거리에 진입한 상태였다.

그리고 저 앞에 목적지가 보였다.

<사랑과 희망의 진료소.>

촌스러운 이름의 건물.

이곳이 그녀가 향하는 목적지였다.

“그, 그런데 정말 이곳에는 왜?”

“왜긴?”

쥬웰은 여상히 답했다.

“본격적으로 성녀가 되려고.”

히힝!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었다.

밖으로 나온 쥬웰은 감회가 새로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네.’

그녀는 간판을 바라보았다.

‘이름은 조금 성의 있게 지을 걸 그랬나? 어릴 때 지은 거라 언제 봐도 촌스럽네.’

[사랑과 희망의 진료소.]

에스텔레 성녀가 선행을 베풀던 장소였다.

즉, 이곳은 그녀가 이전 삶에서 명성을 쌓았던 장소이다.

쥬웰이 이곳에 온 건 성녀가 되기 위해, 정확히는 에스텔레로서 쌓았던 명성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명성은 힘이 되니까. 특히 나처럼 힘 있는 가문의 사람은 더더욱 말이야.’

쥬웰은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이 명성은 원수들의 목을 조이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에스텔레 때처럼 진심을 다해 선행을 베풀 마음은 전혀 없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복수.

그걸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명성만 얻을 생각이었다.

‘어려울 것도 없지.’

그런 마음으로 진료소에 들어갔다.

명성을 얻어야 하니, 최대한 부드럽고 착한 모습으로 연출하며.

“쥬웰이라고 합니다. 연락드린 대로 찾아뵈었습니다.”

그 다소곳한 자태에 옆의 리샤크가 넌 누구냐?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상대를 보았다.

하지만.

“반갑습니다, 성녀님.”

상대, ‘진료소장’을 본 순간.

그녀의 웃음이 깨졌다.

짧게 자른 은발.

둥근 안경.

감람색의 날카로운 눈동자.

천사처럼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

익히 익숙한 인물이 그녀를 맞은 것이다.

“아니, 약혼자님이라 불러야 할까요? 어쨌든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유스넨 대공.

그가 그녀에게 환한 인사를 건넸다.

* * *

“……전하께서 왜 이곳에?”

어지간한 쥬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여기의 주인이니까요?”

“네?”

“3년 전, 에스텔레 성녀님이 사라진 후 방치되던 곳을 제가 인수했습니다.”

유스넨은 잠시 아련한 눈빛으로 방의 곳곳을 보았다.

이곳은 원래 진료소장이었던 에스텔레가 사용하던 방이다.

“이곳은 제가 최고로 아끼는 보물이지요.”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

유스넨은 그 말을 삼켰다.

3년 전 그녀의 죽음을 듣고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른다. 미칠 지경이었다.

그나마 그가 삶의 끈을 이을 수 있게 한 게 바로 이 진료소였다.

그녀가 세상에 남긴 뜻을 끊기지 않고 이어가게 하고 싶었다.

“……전하께서 진료소를 맡기에는 너무 바쁘시지 않나요? 대법원장의 직위는?”

‘광휘’의 페리도트의 가주는 대대로 대법원장의 직위를 맡고 있었다.

“그것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쪽이 훨씬 소중합니다.”

쥬웰은 말문이 막혔다.

“……에스텔레 성녀님이 전하께 소중한 분이셨나 보네요.”

“…….”

유스넨은 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도 영혼이 타오르듯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어, 도저히 말로 그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쥬웰 양을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서신은 잘 봤습니다. 봉사 활동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에스텔레 성녀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진심입니까?”

“……!”

유스넨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제 가장 소중한 성역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제 반려가 되실 분이라도 함부로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진심이 아니면 돌아가 주십시오.”

“전하, 말씀이…….”

은인의 딸을 무시하는 발언에 옆에서 리샤크가 발끈하였다.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어 그를 말렸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이렇게까지 날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진짜다.

물론 그녀와 유스넨은 어릴 적 각별한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 기억은 지나간 추억 정도에 불과했다. 이후, 수많은 일을 겪은 그녀는 당시의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러나 유스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저토록 아련한 눈빛으로 방을 보는 걸 보면 말이다.

심지어 진료소 한쪽에는 소중히 서신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에스텔레가 우리 강아지에게.]

서로 보지 못하던 10년간.

유스넨은 꾸준히 그녀에게 서신을 보냈고, 그녀는…… ‘마리’에게 대필시켜 답장을 보냈다.

일부러 무시한 건 아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성녀로 명성을 얻은 후 저런 편지가 너무 많이 와 도저히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끙끙거리는 걸 보다 못한 ‘마리’가 대신 대필을 해주었다.

‘팬레터예요? 일일이 답장하다가 과로사하시겠어요. 이리로 줘보세요.’

이러며 말이다.

‘……저거 내가 답장한 것 아닌데. 설마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쥬웰은 순간 식은땀을 흘렸다.

왠지 그런 것 같았다.

서신에 손때가 가득했다!

보고, 또 보고 한 눈치였다!

‘……뭐, 진실은 영원히 모를 테니. 상관없겠지.’

쥬웰은 어색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조금 고맙네.’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다.

‘가급적 죽이지 않고 봉인시켜야겠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냐고?

그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이제 유스넨이 그리워하는 에스텔레가 아니다.

추악한 어둠이었다.

광휘의 페리도트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었다.

‘정체를 드러낸 후 설득해 보는 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유스넨은 천사의 피를 각성했다.

그 말은 단순히 천사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다.

지상에 현신한 천사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수히 많은 규칙과 제약에 속박된다.

그중 제일 원칙은 어둠을 처단하는 것이다.

페리도트 대공가는 천사들이 어둠에 시름겨워하는 인간들을 가련히 여겨 내린 핏줄이니까.

‘그러니까 정체를 드러내면 서로의 뜻과 상관없이 무조건 싸워야 해. 그러면…… 나는 그를 죽여야겠지.’

쥬웰은 심각히 생각했다.

위험해질까 그러는 게 아니다.

설사 싸우게 된다고 해도 그녀는 유스넨에게 지지 않는다.

피해는 입겠지만, 죽는 건 결국 유스넨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진료소를 소중히 여기는 유스넨을 보니 더욱 그를 죽이기 싫어졌다.

‘절대 정체를 들키면 안 되겠어. 약혼을 빌미로 가까워져 기회를 봐서 봉인해야지.’

어쨌든 그건 차후의 일.

당장은 눈앞의 일 먼저 해결해야 했다.

“진심이 아니면 돌아가라고 하셨나요?”

“기분 나쁘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쥬웰 양께서 뜻을 펼칠 곳은 이곳 말고도 많으실 테니…….”

“그러면, 진심을 보여 드리면 되겠군요.”

“네?”

쥬웰은 팔을 걷으며 말했다.

“환자들에게 안내해 주세요.”

과거 그녀는 성녀이자, 당대 최고의 의술 실력을 갖춘 의사.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할 때가 왔다.

* * *

‘……아, 오래간만에 실력 발휘했더니 피곤하네.’

그녀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렀다.

쥬웰 몸의 체력, 너무 저질이었다.

한편, 그런 그녀를 수많은 이가 경악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의술이라니?”

“성력도 어마어마해. 플랑드나 성녀님과는 비교도 안 돼.”

“마, 마치 에스텔레 성녀님이 살아 돌아오신 것 같은.”

쥬웰은 피곤함을 억누르고 선하게 미소 지었다.

“부끄럽네요. 감히 에스텔레 성녀님께 비교하기에는 제가 많이 부족하지요.”

그녀의 겸양에 사람들이 찬사를 토했다.

“정말 훌륭하시군요. 이전 영애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전혀 헛소문이었군요.”

“아니, 그 소문은 맞아요. 이전의 저는 못된 악녀였지요.”

쥬웰은 처연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많이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했어요. 이후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다시 감탄하였다.

지금 쥬웰의 모습은 정말 성녀 같았다.

그때, 유스넨이 질문했다.

“어떻게 그런 의술을 배운 겁니까?”

그가 놀람인지, 다소 아리송한 음성으로 물었다.

“단기간에 이룩한 성과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저도 의술을 공부해 보았지만, 보통 어려운 공부가 아니던데.”

당연히 나올 거라 예상한 질문이었다.

답안도 생각해 놨다.

“사실 의술은 이전부터 공부한 적이 있었어요. 에스텔레 성녀님께 배운 적이 있거든요.”

진료소의 의사들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성녀님은 제가 재능이 있다고 했어요. 배워놓기만 하고 쓸 생각을 못 했지만…… 최근 새롭게 살기로 다짐 후, 에스텔레 성녀님의 뜻을 잇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 중이에요.”

“정말, 제국의 축복입니다!”

주변이 온통 난리가 났다.

지금 쥬웰은 에스텔레의 후예를 자처한 것이다.

에스텔레, 그 이름이 제국 백성들에게 주는 무게는 어마어마했기에 곧 이 소식은 제국 전역에 퍼지게 될 것이다.

단 한 명.

유스넨 대공만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쥬웰은 당돌히 그에게 물었다.

“이제 제 진심을 확인하셨나요?”

유스넨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충분합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며 유스넨은 뜻밖의 행동을 하였다.

“사죄의 의미로 제가 작은 선물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선물이요?”

“네.”

유스넨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악수를 청하듯.

‘뭐지?’

쥬웰은 인상을 찌푸리며 마주 손을 내밀었다.

둘의 손이 맞닿았다.

‘차갑네.’

쥬웰은 생각했다.

이전에도 느낀 거지만, 체질적으로 참 차가운 손이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유스넨의 반응이 이상했다.

손을 잡은 채 우뚝 굳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번 그녀의 목에 손이 닿았을 때처럼.

“전하?”

“아, 아. 죄송합니다.”

유스넨은 화들짝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이게 제 선물입니다.”

파아앗!

성력이었다!

쥬웰은 흠칫하였지만, 가만히 있었다.

‘이번에도 과연?’

은은한 빛이 그녀의 몸에 스며들었다.

역시 이번에도 어떤 거부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포근한 느낌만 가득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유스넨의 성력만?’

쥬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게 선물인가요?”

“네, 제 성력은 쥬웰 양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나름대로 피로감을 덜어줄 테니. 도움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쥬웰은 아리송한 얼굴로 답했다.

유스넨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면 조심히 가십시오. 또 오실 겁니까?”

“네, 종종 올게요.”

충분한 명성을 얻기 전까지는 자주 올 것이다.

쥬웰은 리샤크와 함께 마차를 타고 사라졌다.

유스넨은 한참이나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페리도트가의 심복, 메디안 백작이 어느새 나타나 그에게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쥬웰의 진료소 방문은 그들에게 초유의 관심사였다.

어쩌면 그녀의 본질을 엿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또 모르겠습니까? 왜 맨날 모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유스넨은 오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러모로 크게 놀란 만남이었다.

첫째로 믿을 수 없는 의술 실력.

하지만 의술 실력은 다른 것들에 비하면 놀랄 거리도 아니었다.

진정 놀란 건 그녀가 환자를 대하던 모습이었다.

진료소를 운영하며 여러 의사를 봐온 유스넨은 의사가 어떤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는지 볼 줄 알았다.

그리고 쥬웰이 오늘 보인 모습은 진심으로 환자를 위하는 의사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환자를 보는 걸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믿을 수 없게 말이다.

‘말도 안 돼.’

유스넨은 고개를 저었다.

친절한 의사는 많다.

하지만 진심으로 환자를 위하는 의사는 드물다.

그리고…… 환자를 보는 걸 즐거워하는 의사는 더더욱 드물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모습은 그래 보였다.

‘앞으로는 꼭 조심하세요.’

그렇게 환자에게 말하며 미소 짓는 모습을 유스넨은 순간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절대 진심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표정이었다.

‘환자들도 그걸 느꼈지. 그래서 다들 크게 감동해서 돌아갔어.’

이것만 봤으면, 유스넨도 그녀를 향한 경계를 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력을 발현했을 때 또 보였다.

무저갱 같은 환상이.

일전 환상보다 더욱 깊고 끔찍한 어둠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유스넨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의문은 또 있었다.

어쩌면 이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그녀와 손이 닿았을 때, 또다시 가슴이 욱신거렸다.

점점 더 아픔은 커져만 갔다.

이 아픔의 정체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유스넨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마차에서 쥬웰은 잠에 빠졌고, 꿈을 꿨다.

또 유스넨 꿈이었다.

별것 아니고 잔소리하는 꿈이었다.

그녀의 치료 덕에 어느 정도 유스넨의 상태가 안정된 이후.

‘또 안 먹을 거야?’

‘하지만 이건 싫어하는 건데. 초콜릿 먹고 싶은데.’

‘……너 걱정되어서 일부러 신전에서 챙겨 온 건데.’

‘근데, 왜 맨날 맛없는 것만 가져와요! 초콜릿!’

‘……그렇게 맛없나? 난 신전 음식 다 맛있던데.’

사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음식을 잘 먹지 못해 아무 음식이나 맛있었다.

특히 에메랄드 공작가에서는 언니 플랑드나의 사주로 툭하면 썩거나 더러운 음식이 나왔기에, 정상적인 음식이 나오는 신전의 음식은 다 좋아했다.

그녀는 풀이 죽어 말했다.

‘……맛없으면 미안. 다음부터는 안 가져올게.’

‘아, 아니에요! 사실 다 맛있어요! 초콜릿보다 더 맛있어요! 누나가 가져온 반찬 최고!’

유스넨이 꾸역꾸역 반찬을 먹는 걸 보며 꿈이 끝났다.

리샤크가 깨운 것이다.

“아가씨, 아가씨?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

쥬웰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밖에서 잠이 들었어? 어쩌다가?’

“왜 안 깨웠지? 내가 분명히 졸면 깨우라고 하지 않았나?”

쥬웰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리샤크에게 따졌다.

라샤크는 당황했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곤히 주무셔서.”

“곤히 잤다고?”

쥬웰은 흠칫하여 몸을 살폈다.

아무런 상처도, 통증도 없었다.

정말 푹 잔 것이다.

“……잠꼬대한 건 없고?”

“유스넨 대공 잠꼬대를 하시긴 했습니다. 꿈까지 꾸시고 서로 사이가 좋은 것 같더군요.”

리샤크는 뚱하게 답하였다.

쥬웰은 복잡한 얼굴을 했다.

‘악몽도 꾸지 않았다고? 왜?’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였다.

유스넨의 성력을 받고 난 후 멀쩡히 잠든 게 말이다.

리샤크가 쥬웰의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 못 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유스넨 대공 전하가 아가씨의 약혼자이신 겁니까? 황태자 전하는?”

“둘 다 약혼자야.”

“네? 네?”

머리가 복잡해 건성으로 답하고 별채에 들어가려는데 뜻밖의 음성이 그녀를 붙들었다.

“아가씨, 손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님?”

“아까 온 마리란 분이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종은 곤란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은 돌아가고 다음에 약속을 잡은 후 다시 오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막무가내라서. 어떻게 할까요?”

“…….”

쥬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별채로 안내해 줘.”

“네? 알겠습니다.”

쥬웰은 소파에 앉은 채 눈빛을 가라앉혔다.

‘도대체 왜 찾아온 거지? 무슨 일로?’

이렇게 온종일 기다린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

두근.

가슴이 떨렸다.

마리는 에스텔레 시절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던 이.

그런 이를 다시 만난다고 하니, 가슴이 떨려 쥬웰은 일부러 얼굴을 더욱 굳혔다.

그리고.

“아가씨, 데려왔습니다.”

“……!”

나타난 이를 본 순간, 쥬웰은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분홍빛 머리.

하늘을 담은 것 같은 옅은 푸른 눈동자.

이제 이십 대 중후반임에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

그녀가 아는 마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아는 마리가 아니었다.

“……쥬웰 영애를 뵙습니다.”

마리가 쥬웰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시커멓게 빛을 잃은 눈동자로.

“간절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처음 보는 마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독특하게 빛나는 영애였다.

다이아 공작가는 제국의 부를 한 손에 움켜쥔 곳.

스토가 남작가는 그런 곳의 봉신 가문이니, 마리도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리고 마리는 부유한 가문의 별종 아가씨로 불렸다.

그래서였다.

마리가 모두가 경원시하던 에스텔레를 따르기로 한 것은.

‘저, 앞으로 성녀님을 따르겠어요.’

‘왜요?’

‘……짜증 나서요.’

‘……네?’

‘당신, 너무 불쌍해요. 보기 짜증 날 정도로.’

다소 황당한 이유로 마리는 에스텔레의 시녀가 되었다.

시녀.

허드렛일을 하는 고용인이 아니라 고위 귀족, 왕족, 황족의 말벗이 되는 하위 귀족의 영애를 뜻한다.

보통 여섯 공작가의 영애들은 봉신 가문들에서 시녀를 둔다. 쥬웰은 엔리크 자작이 내쳐진 처지라 시녀가 없었던 거고.

어쨌든 마리는 원래 다이아가의 영애인 매리엇의 시녀가 되어야 했지만, 에스텔레의 시녀가 되기를 자처했고 오랜 기간 그녀와 함께했다.

‘그래도 내가 명성을 얻은 뒤에 시녀가 된 거라, 나와 가까이 지냈다고 매리엇의 핍박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지.’

그런데.

“…….”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남루한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귀족가의 영애가 입을 옷이 아니다. 아니, 일반 평민들도 이런 옷은 잘 안 입는다.

재질이 천한 걸 떠나, 얼마나 세탁을 못한 건지 더럽기 그지없었다.

몸도 제대로 씻지 못해 여기저기에 땟국물이 껴 있다. 손, 얼굴 등 드러난 곳에 이리저리 생채기가 나 있었다.

‘도대체…… 어째서?’

그녀가 아는 마리는 귀족가의 숙녀라 항상 이런 부분에 철저했다.

쥬웰의 시선을 눈치챈 건지, 마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아, 아니. 괜찮아요. 그런데, 스토가 남작가는 부유한 곳이라 알고 있는데…….”

그 말에 마리는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저희 가문은 다이아 공작가에 의해 2년 전에 멸문했습니다. 워낙 유명했던 일이라 영애께서도 알고 계실 거로 생각했는데.”

“아…….”

쥬웰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사실 얼마 전 사고로 기억 일부를 잃어서. 괜한 이야기를 꺼내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마리는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이것 역시 쥬웰이 모르는 마리의 모습이었다.

도대체 3년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이아 공작가라면, 매리엇이 마리의 가문을 멸문시켰다고?’

쥬웰은 주먹을 빠득 움켜쥐었다.

매리엇.

다이아 공작가의 가주.

그녀의 약혼자였던 라디트의 새로운 결혼 상대.

그리고 그녀의 원수.

쥬웰은 가슴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어쨌든 무슨 일인가요? 내게 부탁할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네, 실례지만 주변을 물려주실 수는 없습니까?”

리샤크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부랑자 행색인 마리가 쥬웰에게 해를 끼치기라도 할까 걱정인 듯했다.

“괜찮아. 다들 물러가 있게.”

“아가씨.”

“리샤크. 내가 물러가라고 했어.”

“……!”

리샤크는 흠칫하였다.

쥬웰의 음성이 평소와 달랐다.

원래도 거스르기 힘든 힘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늘하다 못해 차가웠다.

리샤크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방문 밖에 있을 테니 혹시 문제가 있으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그래, 고마워.”

둘만 남게 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쥬웰은 일부러 더욱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줬어요.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거죠? 저와 영애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지, 무척 의아하군요.”

“…….”

마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쥬웰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마리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였다.

“절 권속으로 받아주십시오, 영애!”

“……뭐라고?”

“당신이 공작가의 영애이면서 위대한 흑마도사인 것 알고 있어요! 제발, 저를 권속으로 받아주세요!”

쥬웰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을 느꼈다.

“그게 무슨 황당한…… 내가 흑마도사라니.”

쥬웰은 매섭게 마리를 노려보았다.

“감히 가넷가의 영애인 날 그따위로 모욕하려고 하다니. 처참한 고문 끝에 불에 타 죽고 싶은가요, 영애?”

싸늘한 말에 마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주, 죽여도 돼요. 어차피 살고 싶지도 않으니.”

“……뭐라고?”

“절 권속으로 받아주지 않을 거면, 차라리 절 죽여주세요.”

말로 그치지 않았다.

챙그랑.

마리는 품에서 쥬웰의 발 앞에 단도를 던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말라붙어 있는 단도였다.

“영애의 권속이 되는 것 말고는 전 이제 어떤 희망도 없어요. 차, 차라리 그걸로 절 죽여주세요.”

“…….”

쥬웰은 잠시 침묵하고는 단도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이 단도에 묻은 건 누구의 피일까? 아니, 누가 묻힌 피일까?

마리는 3년간 어떤 삶을 산 걸까?

‘빌어먹을.’

쥬웰은 끓어오르려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원수들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한 격정이 치밀어올랐다.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왜 나를 흑마도사라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가넷가의 영애인 걸 모르시나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봤어요. 영애께서 코트레앙 호수에서 원혼을 부리는 흑마법을 쓰는 걸.”

아, 쥬웰은 탄식했다.

하필 그 호수에 마리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 코트레앙 호수는 수도 사람들이 많이 발걸음 하는 곳이니까.

하지만 의문이 또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알아보았지?’

그녀는 굉장히 은밀히 흑마법을 썼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말이다.

실제로 그 자리에 숱한 이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흑마법을 쓰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사, 사실 얼마 전부터 눈에 원혼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눈에 원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요?”

“네, 그래서 영애께서 흑마법을 쓰는 걸 알아볼 수 있었어요.”

쥬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곧바로 주시자의 눈을 발현하였다.

그리고 보았다.

환하게 빛나던 영혼이 넝마가 된 모습을.

악마들이 환장하도록 좋아하는 영혼이었다.

‘……‘안수’받았어. 그래서 원혼이 보이기 시작한 거야.’

쥬웰은 침음을 흘렸다.

안수.

악마가 영혼을 점찍는 것이다. 점찍힌 영혼은 십중팔구 곧 악마에게 넘어가게 된다.

실제로 게헨나에서 마리의 영혼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악마가 보였다.

이름 모를 3품(品)격의 고위 악마였다.

[꺼져!]

그 악마가 저 멀리 게헨나에서 그녀를 향해 흉한 이빨을 드러냈다.

[이 영혼은 내 먹이야!]

쥬웰은 얼굴을 굳혔다.

그때, 마리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부탁이에요! 제발 저를 권속으로 삼아 제게 힘을 주세요! 전 원수를 갚아야 해요!”

쥬웰은 한탄하였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녀는 아주 강력한 흑마도사가 될 것이다.

원래 흑마도사들은 악마에게 큰 총애를 받을수록 강력한 힘을 사역할 수 있으니까.

마리같이 가련한 영혼은 악마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혼이었다.

‘마리만이 아니지. 이 세상의 강력한 흑마도사들은 대부분 처절한 사정이 있는 이들이니.’

애초에 원래부터 악한 이들은 악마의 큰 사랑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잔챙이 흑마도사가 될 뿐이다.

하지만 강력한 흑마도사들은 달랐다.

악마들이 사랑하는 건 지금 마리처럼 환하게 빛나다가 일그러진 영혼들이다.

환하게 빛났을수록, 처절하게 일그러질수록 강력한 흑마도사가 된다.

빌어먹게도 말이다.

‘어쩌지?’

쥬웰은 고민했다.

마리를 권속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마리는 악마의 꾐에 넘어가 끔찍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강력한 힘을 얻는 대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쥬웰은 일부러 싸늘하게 말했다.

“흑마도사의 권속이 된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아는 건가요? 힘을 얻는 대신, 당신은 영겁의 고통을 겪을 거예요.”

“알고 있어요.”

마리는 처참하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딴 것, 상관없어요.”

쥬웰은 탄식하였다.

‘……상관없지 않아, 이 바보야.’

모든 강력한 흑마도사가 저런 마음으로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죽음 후 겪게 되는 영겁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하지만 설사 알아도 그들은 결국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만큼 커다란 절망에 빠져 있기에.

“가문을 멸문시킨 이들에게 복수하려는 건가요?”

“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에요.”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 에스텔레 성녀님의 복수를 할 거예요.”

“……!”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동요를 숨기며 물었다.

“에스텔레 성녀님은 어둠을 막기 위해 스스로 순교하였어요. 그런데 복수라니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군요.”

그날, 그녀가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진 사건은 극히 은밀히 이루어져, 그녀를 제물로 바친 당사자들 말고는 아무도 진실을 아는 이가 없었다.

대신, 외부에는 이렇게 알려져 있다.

어둠을 막기 위한 순교.

하지만 마리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순교하신 게 아니에요. 아니, 스스로 순교하셨다고 해도 용서할 수 없어요.”

“……어째서죠?”

“성녀님을 괴롭히던 이들이 순교를 강요했을 테니까요. 그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모든 아픔을 끌어안고 있던 분이니까…… 아무런 거절도 못 하고…… 분명…… 분명…….”

마리는 말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리는 바닥에 고개를 숙였다.

“성녀님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가문마저 멸문당했어요! 이제 남은 희망은 영애밖에 없어요. 제발 저를 권속으로 삼아 힘을 주세요!”

쥬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리, 이 바보 같은 것아. 내가…… 내가 이런 걸 바랄 것 같았어?’

그녀는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하길 바랐다.

복수의 피를 뒤집어쓰는 건 자신 혼자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마리를 말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묻겠어요. 그날, 코트레앙 호수에는 왜 간 것이죠? 제가 짐작하는 이유가 맞나요?”

“…….”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을 잃고 죽으러 갔다는 뜻이었다.

결국, 쥬웰은 말했다.

“정말 각오가 섰는가?”

계약의 언령이었다.

저 게헨나에서 마리를 점찍은 고위 악마가 괴성을 질렀다.

[퀸(Queen)! 당신이라도 내 먹이를 가로챌 자격은……!]

하지만 쥬웰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3품 악마 따위가.’

3품.

고위로 분류되는 악마다.

하지만 쥬웰은 스스럼없이 ‘따위’란 표현을 썼다.

그럴 만했다.

3품 악마는 게헨나에 있을 당시 감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엄두도 못 내던 이들이니까.

왜?

그녀는 3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이들의 총애를 받았다.

최소 2품. 군주급 악마는 되어야 그녀를 훔쳐보기라도 할 자격을 얻었다.

지금도 그녀의 온 영혼에는 게헨나에서 가장 위대한 악마들이 새긴 총애의 낙인, 악마화(惡魔華)가 한가득 새겨져 있다.

즉, 그녀가 지닌 마의 격은 3품 악마 따위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니 저 악마도 괴성을 지를 뿐, 감히 이 계약 의식에 간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시 묻겠다. 영겁의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마리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리다가 굳건히 고정되었다.

“네, 각오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권속이 되길 바랍니다.”

쥬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하였다.

“거절하겠다.”

“네?”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내 권속이 되겠다고 청하는 거지?”

“……!”

마리의 안색이 하얘졌다.

쥬웰의 전신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비루한 존재 주제에 감히 내 권속이 되겠다니. 불쾌하구나. 죽고 싶은 거냐?”

마리의 전신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리는 쥬웰의 압력을 이겨냈다.

발밑의 단도를 들더니 휙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댄 것이다.

“그, 그래요! 전 어떤 것도 내세울 게 없어요. 대신, 제 목숨을 바치겠어요!”

마리는 희번들한 눈빛으로 손을 움직였다.

진짜로 목을 찌르려 한 것이다!

파창!

그때, 보이지 않는 막이 마리의 목을 보호했다.

마리는 눈물이 범벅인 얼굴로 왜 자신을 막았냐는 듯 쥬웰을 바라봤다.

쥬웰이 한숨을 삼켰다.

“알겠다. 대신, 이렇게 하자꾸나. 네게 3년의 시간을 주겠다.”

“그게 무슨……?”

“3년의 시간 동안 날 옆에서 섬기면서 네 자격을 증명해 보여라. 그래서,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면 너에게 힘을 내리겠다.”

마리는 눈을 끔뻑끔뻑하였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불만인 거냐? 힘을 바란다면서 고작 내게 3년의 시간도 바치지 못하는 거냐?”

“아, 아닙니다!”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3년 동안 섬기겠어요! 그래서 제 자격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쥬웰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의 바람대로 계약은 이루어졌다.”

마리는 알까?

이 모든 게 쥬웰이 의도한 바란 것을.

저 게헨나에서 악마의 분노한 괴성이 들려왔다.

[그런 사기 계약을……! 크아악, 퀸!]

이건 마리를 지킬 사기 계약이었다.

쥬웰의 시간은 앞으로 3년도 남지 않았으니까.

3년이 지나면 자연히 소멸할 계약이었다.

‘그리고 3년이면 모든 복수를 이루고 난 다음일 테니, 마리도 악마와 계약할 이유가 없어지겠지.’

특히, 중요한 건 그녀가 마리와 ‘가계약’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3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어떤 악마도 마리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이제 마리의 영혼은 완전히 안전할 거야.’

쥬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는 결연히 불타오르는 눈빛을 하였다.

“이제 어떻게 모시면 될까요, 흑마도사님?”

“……그냥 영애라고 하렴. 내가 흑마법을 쓰는 건 비밀이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쥬웰은 고민하였다.

일단 마리의 영혼을 구하긴 했는데, 앞으로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저택에 들이기는 그렇고.’

들이려면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로 들여야 하는데, 그래도 곱게 자란 귀족 영애에게 그런 일을 시키긴 그랬다.

‘아니, 상관없으려나?’

쥬웰은 마리의 행색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지금의 마리를 귀족가의 영애로 볼까?

분명 지금도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확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항상 깔끔, 사랑스러운 영애였던 마리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지금 사는 곳이 어디지?”

“……빈민가입니다.”

역시나 예상대로다.

“네게 하나의 임무를 내리겠다. 첫 번째 임무이니 반드시 완벽히 수행하도록.”

“말씀만 하십시오.”

마리는 결연히 답했고, 쥬웰은 드레스 룸에 가서 컬렉션 하나를 가져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커다란 다이아 반지였다.

“그건?”

“내가 다이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팔아 돈으로 바꾸도록.”

“……네? 알겠습니다.”

예상 밖의 임무라 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대금은 아가씨의 계좌로?”

“아니, 앞으로 네 활동 자금으로 쓰도록.”

“네?”

쥬웰은 하품을 하였다.

오늘 여러 일이 있어서인지 조금 피곤했다.

“일단 거처를 부유한 평민들이 사는 곳으로 옮기고, 옷도 새로운 것들로 사도록.”

“하, 하지만?”

마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도 될지, 하는 얼굴이었다.

“착각하지 말도록. 내가 너를 생각해서 이러는 것 같나?”

“그, 그건…….”

“지금 네 그런 행색으로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

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쥬웰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최소 내 옆에 있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 되도록. 그게 네게 내리는 첫 번째 임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마리는 결연히 답하고는 하나의 질문을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돈이 남을 것 같습니다. 워낙 상등품의 다이아라.”

“남는 돈은 네가 알아서 굴려봐.”

“네?”

“스토가 남작가 출신이라며. 네 능력을 내게 보여보라고.”

마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이아 공작가는 제국의 부를 거머쥐고 있다.

두 개의 초거대 상단.

그리고 산하의 열두 개의 상단.

세 개의 은행.

이게 모두 다이아 공작가의 소유였다.

스토가 남작가는 그 열두 개의 산하 상단 중 하나를 운영하던 곳으로, 마리도 당연히 상업에 대해 공부했다.

“네가 그 돈으로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따라, 앞으로 네게 맡길 일이 달라질 거야.”

‘다이아 공작가를 무너뜨리려면 권력과 더불어 금력도 필요하니까.’

쥬웰은 다이아 공작가의 황금 제국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만약 마리가 유능한 상재를 보이면 그녀를 기용해도 좋으리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반드시 성과를 보이겠습니다.”

“하나 힌트를 주자면, 동부의 작황에 주목해 보도록. 이번에 가뭄이 심했다지.”

“……!”

마리는 쥬웰의 말뜻을 알아듣고 흠칫하였다.

“관련 주(株)에 투자하란 겁니까?”

“글쎄,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겠지.”

쥬웰은 여상히 말했다.

“이미 동부의 작황이 안 좋은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야. 이번 사태로 누가 이득을 보고, 손해를 볼지는 모두가 알고 있지. 주식에도 이미 반영이 다 되어 있어. 하지만 만약 모두가 놓치고 있는 게 있고 네가 그걸 알아낸다면.”

쥬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잡아볼 만하겠지.”

“……!”

마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시험인 걸 깨달은 것이다.

반드시 성과를 보여야 했다.

“그런데…… 영애께서는 어떻게 그런 사실을?”

마리는 쥬웰이 놀라웠다.

강대한 흑마법뿐만 아니라, 이런 상업 지식까지 갖추고 있다니.

심지어 최근에는 성녀라고 추앙받고 있지 않은가?

“공부해서.”

“……공부라고요?”

“응, 맞아.”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에스텔레 시절 의술만 공부한 게 아니다.

상업, 정치학, 경제학, 법학, 미술, 음악, 사교 예법 등등.

필사적인 노력으로 모두 완벽에 가깝게 익혔다.

‘당시에는 쓸모없다고 생각했지만.’

쥬웰은 지그시 웃었다.

아니었다.

이 모든 능력은 원수들의 목을 얽매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그때, 마리가 조심히 물었다.

“저기, 영애…… 당신의 이명(異名)은 무엇인가요?”

강대한 흑마도사는 각각 이명을 지니고 있다.

쥬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옵시디언.”

흑요석(Obsidian, 黑曜石).

그 이름이 처음 세상에 언급된 순간이었다.

* * *

쥬웰은 매일매일 진료소에 출근해 환자를 보았다.

쥬웰은 막 치료가 끝난 환자의 손을 잡아주었다.

에스텔레 때 했던 것처럼.

“좋아지셔서 다행이에요.”

“가, 감사합니다, 성녀님. 이 은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은혜는요. 어서 빨리 좋아지시는 게 은혜를 갚는 거죠.”

따뜻한 음성에 환자는 진심으로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였고, 수많은 사람이 쥬웰의 모습에 감탄하였다.

‘소문과 전혀 다르시구나.’

‘못된 영애라고 들었는데, 바뀌어도 어떻게 저렇게 바뀌었을 수가.’

‘마치 에스텔레 성녀님이 재림하신 것 같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수도 백성들 사이에서 새로운 성녀, 쥬웰의 소문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단 한 명.

묘한 시선으로 쥬웰을 보는 이가 있었다.

유스넨이었다.

‘뭘 그렇게 봐?’

쥬웰은 뚱하니 유스넨을 마주 바라보았다.

유스넨은 하루 종일 그녀가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찌나 열심히 바라보는지 시선이 닿는 뒤통수가 따가웠다.

‘설마 내 정체를 눈치채서 그런 건 아니겠지?’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유스넨의 시선에 적개심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명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복잡함이 서려 있는 눈빛이었다.

그날 진료를 마친 후.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유스넨이 손을 내밀었다.

쥬웰은 멀뚱히 그 손을 바라보았다.

“또 선물인가요?”

“네, 보수를 거절하셔서 드릴 게 이것밖에 없군요. 제 성력 그래도 나름대로 피로를 회복하는 데 괜찮지 않습니까?”

쥬웰은 부정하지 않았다.

유스넨의 성력은 확실히 좋은 피로 회복제였다.

온종일 상쾌한 느낌이 들었고, 특히 밤에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는 점이 컸다.

유스넨의 성력을 받은 밤에는 신기하게도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솔직히 그녀에게는…… 대단히 커다란 선물이었다.

악몽 없는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 없으니까.

‘도대체 왜 이런 효과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쁠 건 없겠지.’

그런 마음으로 쥬웰은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손이 맞닿는 순간.

찌릿, 유스넨의 손에서 차가운 감촉이 전달되었다. 마치 얼음에 닿는 듯 서늘한 느낌이라, 쥬웰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불편하십니까?”

“……아니, 아니요.”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유스넨은 그린 듯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파앗!

성력이 발현되었고, 쥬웰의 온몸에 포근한 느낌이 한가득 차올랐다.

마치 상처를 감싸 안듯 따뜻한 느낌이라 쥬웰은 일순 가슴이 먹먹함을 느꼈다.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더 죽이기 싫어지잖아.’

그녀를 소중하게 추억하고 있는 것부터, 이런 따뜻한 성력까지.

쥬웰은 점점 유스넨을 죽이기 싫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와 그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존재.

언젠가는 무조건 서로 칼을 맞대게 되겠지만, 그래도 가급적 죽이지 않고 마무리하고 싶었다.

‘함정에 빠뜨려 3년간 봉인하는 게 최선이야.’

그래서 말했다.

“손이 많이 차시네요. 기운이 안 좋아서 그럴 수도 있으니, 언제 제가 몸에 좋은 음식들을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유스넨은 뜻밖이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저야 감사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어째서 제게 그런 후의를?”

쥬웰은 두 손을 곱게 모았다.

“그야 전하께서는 곧 제 약혼자가 되실 분이니까요. 몸이 안 좋으실까 걱정되어 그러는 건데, 괜찮을까요?”

쥬웰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어 웃을 뻔했다.

지상에 현신한 천사인 광휘의 대공의 몸이 안 좋을까 걱정된다니.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뭐, 걱정은 핑계이고 가까워지는 게 목적이니까.’

그녀는 유스넨과 최대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방심하게 만들어 아무런 피해도 없이 그를 봉인시킬 계획이다.

‘그를 방심시킬수록 피를 흘리지 않고 봉인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

물론 쥬웰이 말하는 ‘피’는 유스넨의 피였다.

만약 봉인 중, 그가 저항을 시도한다면 어쩔 수 없이 그를 다치게 해야 했다. 최악의 경우 죽여야 하고.

그러니 최대한 치밀한 함정을 파서 그가 저항할 새도 없이 봉인에 성공하는 게 제일 최선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건강이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기쁘군요.”

유스넨이 다시 쥬웰의 손을 잡았다.

성력을 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차갑지만, 부드러웠다. 그래서 싫지 않게 느껴지는 손길.

“누군가 절 그렇게 걱정해 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감사합니다.”

그냥 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13년.

에스텔레 이후, 그런 걱정의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으니까.

물론 딱히 쥬웰이 큰 의미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유스넨도 큰 감동을 느끼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었고.

다만.

‘오늘도 한 끼도 안 먹은 거야?’

쥬웰의 말은 에스텔레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일까?

순간, 유스넨의 머릿속에 쥬웰의 여러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쥬웰이 송별 예배 때 기도를 하며 눈물 흘리던 모습.

황궁에서 다친 새를 치료해 주던 모습.

그리고 환자들에게 보이던 따뜻한 모습.

‘과연 그녀는 어둠의 존재일까?’

유스넨은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모두 거짓이라 보기 어려운 진실된 모습들이다.

특히, 황궁에서 다친 새를 치료해 주던 것은 정말 순수한 선의였을 것이다.

당시 그녀 주위에는 누구도 없었으니 만약 위장이 목적이라면 그녀는 다친 새를 치료해 줄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느껴지는 아릿함.

그게 그의 혼란을 증폭시켰다.

지금 손을 잡고 있는데도, 가슴이 저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도대체 이 아픔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 끝에 유스넨은 다소 충동적인 행동을 하였다.

쥬웰의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 쪽으로 가져간 것이다.

유스넨의 감람빛 눈동자가 쥬웰을 똑바로 향했다.

잠시,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고 유스넨이 물었다.

정중하게.

“제가 영애께 헤어짐의 인사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쥬웰은 가만히 있었다.

긍정이라 여긴 것인지, 유스넨의 입술이 쥬웰의 손등에 닿았다.

사랑을 나누는 연인.

혹은 약혼자, 반려의 인사였다.

유스넨이 여전히 그녀를 직시하며 말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영애와의 다음 만남, 기다리겠습니다.”

* * *

쥬웰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등을 돌렸다.

“…….”

유스넨은 말없이 쥬웰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메디안 백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설마 쥬웰 영애에게 반하신 건 아니죠, 전하?”

“……아닙니다.”

“뭐, 워낙 아름다운 영애이시니 반해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만. 마음씨도 소문과 다르게 훌륭한 것 같고.”

“……그런 것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지난번부터 쥬웰 영애를 보는 시선이 조금 이상하신 것 같습니다만?”

메디안 백작이 게슴츠레 물었다.

뭐, 유스넨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건 반대할 일은 아니다.

아니, 솔직히 메디안 백작은 유스넨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뺏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스텔레를 향한 그리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문제는 대상이었다.

쥬웰은 어둠의 존재일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천사의 피를 각성한 유스넨의 직감이 그렇다면, 상당히 높은 확률일 것이다.

“잊지 마십시오. 광휘가 어둠에 마음을 뺏기면, 광휘는 빛을 잃습니다.”

메디안 백작은 무겁게 말했다.

“13년 전 비극이 왜 일어났는지 잊지 마십시오.”

유스넨은 쓴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혀 그런 것 아니니까요. 그저…….”

“그저?”

“……아닙니다.”

유스넨은 말을 삼켰다.

방금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한 이유.

그녀와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아릿함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유를 알 수 없게 점점 더 커지는 아릿함을 말이다.

유스넨은 고개를 저어 가슴속 혼란을 떨치고는 말했다.

“어둠을 처단해야 하는 게 제 사명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잘 알고 있는 것 맞으시죠?”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스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인지 무겁게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 * *

한편, 쥬웰은 말없이 가넷가의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유스넨의 손등 입맞춤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아예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 아니다.

이성으로서 설렜다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런 귀여운 감정 따위를 느낄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유스넨과 닿을 때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포근했어. 성력을 받을 때처럼.’

왜 유스넨에게만 이런 감각이 느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천사라서? 아니야. 오히려 내게 독이 되면, 되어야 했지.’

답이 나오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한편, 옆에서 걷던 리샤크가 그런 쥬웰을 보며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그…… 유스넨 대공 전하. 너무 무례한 것 아닙니까?”

“왜?”

“아직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린 것도 아닌데, 손등에 입맞춤이라니! 이건 가넷 공작가를 향한 무례입니다. 정식으로 항의해야!”

“정식 약혼이나 다름없는 상태인데?”

“그, 그래도……!”

쥬웰이 심드렁하게 반문하자 리샤크는 횡설수설하였다.

“하여튼 유스넨 대공은 뭔가 수상합니다. 남자의 감입니다.”

“……뭐가 수상한데?”

“아가씨께 너무 친절하지 않습니까!”

“……약혼 사이이니, 친절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그, 그렇지만……! 너무 믿지 마십시오. 아가씨를 지키는 호위 기사로서의 충언입니다.”

쥬웰은 잠시 물끄러미 리샤크를 바라보았다.

리샤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였다.

‘하긴. 이 몸이 예쁘긴 하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누구나 호감을 가질 아름다움이긴 했다.

한편, 쥬웰의 붉은 눈이 자신을 향하자 리샤크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보십니까?”

“귀여워서?”

“자, 장난하지 마십시오!”

“진짜인데? 너 진짜 귀여워.”

“귀, 귀여운 건 아가씨께서 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버벅거리는 모습에 쥬웰은 쿡쿡 웃었다.

리샤크의 얼굴은 이제 사과와 같았다. 나뭇가지로 이리저리 쿡쿡 찌르며 괴롭히고 싶은 귀여움이었다.

‘아아, 좋을 때네. 저리 파릇파릇하다니.’

쥬웰은 순간 진심으로 리샤크가 부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그녀는 저런 순수한 마음을 갖지 못하니까.

‘……아니, 리샤크가 순수하단 말은 틀릴지도.’

쥬웰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리샤크를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건 커다란 오산이었다.

그녀는 주시자의 눈으로 다시 리샤크의 영혼을 보았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순수하지만 넝마가 된 영혼이 보였다.

마치 마리처럼 말이다.

밝게 빛나다 커다란 절망을 겪은 이 특유의 영혼.

그것도 보통의 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절망의 크기는 마리보다도 훨씬 커.’

쥬웰은 혀를 찼다.

‘어쨌든 이런 영혼을 가진 이들은 보통 끝이 안 좋은 경우가 많은데. 쯧.’

한편, 리샤크는 쥬웰이 인상을 찌푸리자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 유스넨 전하를 그렇게 말한 건, 다 아가씨를 생각해서였는데…… 혹시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리샤크는 혹시나 자신의 말 때문에 쥬웰이 기분 상했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때, 생각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글쎄. 난 경의 말에 동의하는데 말이오. 유스넨 대공이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긴 하지.”

“……!”

쥬웰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향하던 가넷가의 마차 앞에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찬란한 흑발. 담청색의 짙은 눈동자. 여인처럼 아름다운 얼굴선, 하지만 강인한 눈빛의 남자.

쥬웰의 ‘또 다른’ 약혼자 오펜하임이었다.

“오랜만이오, 내 델피나.”

델피나.

황실의 인물이 반려를 부를 때 사용하는 사랑의 단어.

황태자가 그 단어만큼이나 강렬한 눈빛으로 쥬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를 만나고자 왔소. 내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소?”

* * *

둘은 마차를 함께 탔다.

다그닥, 마차가 길을 달렸고, 황태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방향에 따라 담청색 눈동자가 여러 빛깔로 산란했다.

‘저 보석안은 볼 때마다 신기하네. 역시 ‘신비’의 셀레네인가.’

‘신비’의 셀레네.

그들은 원래 대륙 밖의 특별한 부족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300년 전, 대륙에 마가 범람하자 여섯 공작 가문의 선조와 셀레네 황가의 시조가 힘을 합쳐 마를 봉인한 게 라인하르트 제국의 시작이다.

그때 마를 봉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셀레나 황가의 시조, 초대 황제였다.

초대 황제는 자신들 부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신비한 능력을 사용해 마를 봉인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일은 옛날 전설이 되었지만, 지금도 황가의 인물들은 신비한 능력을 타고난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황태자도 고유 능력을 타고났겠지. 과연 어떤 능력일까?’

쥬웰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황태자 오펜하임이 어떤 능력을 타고났는지는 본인이 철저히 숨겨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 왜 입만 다물고 있어? 기껏 시간을 내달라고 해서 같이 마차에 탔는데.’

쥬웰은 황태자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기분이 안 좋은 건가?’

그래 보였다.

등장할 때부터 불쾌한 기색이었다.

“혹시 제게 불쾌한 일이 있으십니까?”

“…….”

“만약 유스넨 대공과의 약혼 이야기를 들은 거라면 사과를 드립니다. 전하와의 파혼이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새로운 약혼을 진행하여서.”

그녀는 아직 오펜하임과 약혼 상태였다.

그런데 새로운 약혼을 진행하고 있으니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건 그녀 측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게 빨리 파혼에 동의해 주지. 그러면 기분 나쁠 일도 없을 텐데.’

“전하께서 빨리 파혼에 동의해 주시면…….”

“난 파혼할 생각 없소.”

오펜하임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기분 나빴던 건 아니오.”

그녀가 새로운 약혼을 진행해서 기분 나쁜 게 아니었다.

아니,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파혼하자는 걸 억지로 붙들고 있는 처지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대신, 6개월.

그 시간 동안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오펜하임이 불쾌해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왜?”

오펜하임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방금 본 광경을 떠올렸다.

유스넨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던 광경.

특별한 의미를 가질 것 없는, 그저 약혼이 오가는 사이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인사이지만, 왜일까?

그 광경을 보는 순간 기분이 굉장히 나빴다.

“그냥…….”

“……?”

오펜하임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이런 일을 상대에게 이야기하는 게 못난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넘어가자. 쿨하지 못한 남자는 매력 없다고 하니.’

오펜하임은 쥬웰에게 오기 전, 왕년에 수도에서 잘나갔던(?) 궁내부장에게 여러 연애 코치를 받았다.

그때 궁내부장이 한 이야기 중, 쿨한 남자가 되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방금 일을 잊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펜하임은 쿨한 남자가 될 자질은 없는 듯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소심히 이렇게 물었다.

“……유스넨 대공과 많이 가까워 보이던데. 언제 그렇게 가까워진 거요?”

“…….”

쥬웰은 물끄러미 오펜하임을 바라보았다.

오펜하임은 본인이 말을 꺼내고도 민망한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두근거리는 갈망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쥬웰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불쑥 말했다.

“혹시 질투하시는 건가요?”

“……!”

오펜하임은 당황했다.

“그건…….”

질투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당황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오펜하임의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가슴을 차갑게 가라앉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가하군요. 질투라니.”

“……!”

“그런 감정보다는 황가를 되살리는 일에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은데요.”

오펜하임은 쥬웰을 바라보았다.

쥬웰은 무심한 눈빛으로 오펜하임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은 눈빛이라 오펜하임은 맥이 풀렸다.

“제가 전하께 바란 건 그런 쓸데없는 감정 소모가 아닌, 함께 뜻을 이룰 동맹입니다.”

쥬웰은 일부러 더욱 차갑게 말했다.

질투니 뭐니 하는 귀여운 감정에 어울려 줄 마음 따위 없었고, 무엇보다.

‘황태자와는 선을 긋는 게 좋아.’

유스넨과 오펜하임은 경우가 달랐다.

유스넨은 운명의 숙적. 가까워져 피해 없이 제거하려는 목적이 있지만, 황태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공적인 동맹 관계.

황태자와는 이 정도 거리가 딱 적당했다.

하지만 오펜하임은 그녀의 냉대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하하, 맞소. 내가 오늘 또 그대에게 한 대 머리를 얻어맞는구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황실을 재건하는 거지.”

오펜하임은 보석안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와의 약속도 잊지 않고 있소. 그대가 가넷의 왕이 되도록 조력을 주기로 했지.”

“그러니…….”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대를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소?”

오펜하임이 빙긋 미소 지었다.

“난 내 야망과 그대,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그대의 마음도 꼭 얻고 싶소.”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운.

하지만 어떤 말을 해도 굽히지 않을 고집스러운 눈매가 보였다.

‘고집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그를 배려한 건데, 굳이 의미 없는 감정 소모를 하겠다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저와의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지요?”

“당연히. 내가 어떤 도움을 주면 되겠소?”

쥬웰은 마차 밖으로 바뀌는 풍경을 보며 답했다.

“곧 저에게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겁니다.”

“사건?”

“네. 사건이 일어나면 황권을 이용해 제게 도움 될 일을 해주시면 됩니다.”

“……무슨 사건이 일어날 거란 거요?”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소식을 듣게 되면, 어떻게 하셔야 할지 판단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

오펜하임은 입을 다물었다.

“……혹시 위험한 일이요?”

쥬웰은 답하지 않았다.

결과만 보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 과정은…….

‘위험하지. 조금은 고통스러울지도.’

감수해야 할 일이다.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

오펜하임은 대답하지 않고, 무겁게 쥬웰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걱정이 느껴져 쥬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절 위한다면, 쓸데없는 참견보다 제가 방금 한 부탁을 제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알겠소.”

오펜하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시오. 절대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부탁은 들어주지 않을 거요.”

“약속하겠습니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건 계약의 언령이 아니니 거짓말쯤이야 뭐. 상관없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넷 공작가였다.

* * *

황태자는 공작가에 들어오기 전에 마차에서 내려 돌아갔다.

공작가의 직계 혈족들이 머무는 본채에 내리니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쥬웰이냐?”

로튼 백작이었다.

쥬웰은 싱긋 웃었다.

“네, 백부.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구나.”

로튼 백작의 얼굴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만찬회 이후 토른 공작이 어떤 벌도 내리지 않자 깨달은 것이다.

가넷가의 미래를 위해 토른 공작이 그의 죄를 눈감아주기로 했다는 것을.

그 뒤 로튼 백작은 다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뭐, 보기 좋네.’

쥬웰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로튼 백작이 행복해할수록 그녀도 기뻤다. 지금 행복해할수록 나락에 떨어질 때 더욱 큰 절망을 느끼게 될 테니까.

“또 진료소에 봉사를 다녀온 거냐?”

“네, 진료소에서 환자를 보고 왔어요.”

“그것참 기특하구나. 우리 요정 공주님이 정말 성녀가 되었어. 그렇지 않소, 부인?”

옆에 있던 에블린 백작 부인이 고아하게 미소 지었다.

“네, 맞아요. 참 기특해요.”

하지만 말과 다르게 로튼 백작과 에블린 부인 모두 눈빛에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왜 그딴 일을?’

이런 시선이었다.

철저한 귀족인 그들 입장에서 빈민들을 위한 봉사 따위는 하등 쓸데없는, 불결한 행동에 불과했으니까.

심지어 로튼 백작은 안도의 눈빛마저 보였다.

쥬웰이 토른 공작의 눈에 들까 다소 경계했는데 빈민 봉사 활동 같은 어리석은 일을 하니 다행이란 눈치였다.

에블린 백작 부인이 가증스럽게 말했다.

“쥬웰, 네가 이렇게나 훌륭한 모습을 보여 어미 된 입장에서 참 기쁘구나. 하늘에서 동생도 기뻐할 거야.”

동생.

그들이 죽인 쥬웰의 친모를 뜻한다.

“네, 고마워요, 백모.”

“그래, 혹시 도움이 필요한 건 없니?”

“음, 사실 하나 있긴 있어요.”

“뭐니? 뭐든 말해보렴.”

쥬웰은 지그시 웃었다.

반갑지도 않은 그들 부부와 길게 대화를 나눈 이유는 사실 이 용건 때문이었다.

“하녀 중 몇 명을 바꿀 수 없을까요?”

“흐음?”

“일 처리가 마음에 안 드는 이들이 있어서요. 대신, 백모님께서 믿을 만한 이들을 보내주세요.”

에블린 백작 부인은 눈동자를 빛냈다.

이게 웬 떡? 이런 눈빛이었다.

“그래, 당연히 들어줘야지. 당장 그렇게 조처해 줄게. 넌 내 딸이나 마찬가지이니, 내가 가장 믿는 이들을 보내주마.”

쥬웰의 미소가 짙어졌다.

에블린 백작 부인은 알까?

지금 쥬웰의 요구가 무엇을 위한 요구인지?

쥬웰이 요구한 건 ‘덫’이었다.

바로, 에블린 백작 부인을 낚을 ‘덫’.

에블린 백작 부인은 머지않은 훗날,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탄하게 되리라.

“고마워요, 백모.”

쥬웰은 싱긋 웃었다.

이후, 헤어지고 별채에 도착했는데 뜻밖의 인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튼 백작 부부보다 훨씬 껄끄러운 인물.

답답이 냉미남 엔리크 자작이었다!

“아버지.”

엔리크 자작의 표정을 살핀 쥬웰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의 얼굴은 마치 돌처럼 굳어 있었다.

무언가 또 시비를 걸러 온 게 분명했다.

과연 엔리크 자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짓눌린 음성을 내었다.

“……쥬웰.”

“왜 그러시는 거죠?”

“너…….”

그런데 이상했다.

더 말을 잇지 않고 한껏 괴로운 눈빛만 보내는 것이다.

“아버지?”

이윽고 엔리크 자작은 일그러진 얼굴로 말하였다.

“……내가…… 네가 그런다고 해서 기뻐할 거로 생각했느냐?”

“네?”

“날 위해 네가 위험을 자처한다고 해서 기뻐할 거로 생각했느냐고!”

‘아.’

쥬웰은 그제야 엔리크가 이러는 이유를 깨달았다.

‘왜 룬을 보낸 건지 눈치챘구나. 피곤하게.’

쥬웰은 엔리크가 독살당할까 봐 가장 믿을 수 있는 룬을 보냈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엔리크 자작은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분노만 가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아파하고 있었다.

딸이 자신을 위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에 말이다.

욱신.

신체에 새겨진 감정에 따라 그녀의 가슴이 저릿했다.

하지만 무시하고 차갑게 말했다.

“그 아이 일 처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보냈을 뿐이에요. 오해는 말아주세요. ”

“너…… 그걸 믿으라고…….”

“룬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에 보내세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를 받지 않을 거예요.”

엔리크 자작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수많은 감정이 넘실거리는 눈빛이었지만, 그녀는 그냥 저 감정을 뭉뚱그려 분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멋대로 구는 딸에 관한 분노.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게 그녀의 가슴이 편했다.

그러니까 엔리크의 눈동자에 분노보다 더욱 커다랗게 일렁이는 걱정과 아픔은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하며 고개를 돌렸다.

“뭘 염려하는지는 알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네, 저도 생각하는 게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엔리크는 답하지 않고 뚫어지라 그녀를 노려보았다.

쥬웰은 그 눈빛을 마주하기 부담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 볼게요. 피곤해요.”

등을 돌리는데, 엔리크가 덥석 손을 잡았다.

“……잠깐.”

“왜 그러시죠? 말했지만, 룬은 안 받아요. 알아서 하세요.”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내 말을 안 들을 거라는 건 안다. 대신, 이걸 받아라.”

“뭐죠?”

비단 주머니에 기다란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독을 감별하는 도구다. 독에 닿으면 검게 변색하게 되니 앞으로 무언가를 먹을 때는 꼭 직접 그 막대기로 확인해 보고 먹어라.”

“…….”

쥬웰은 엔리크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 잔뜩 일그러져 터져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엔리크의 눈동자가 보였다.

“……고마워요.”

“반드시.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약속할게요.”

엔리크와 헤어지고서 쥬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그녀를 맞았다.

“씻을 물을 준비할까요, 아가씨?”

“응, 시원하게 마실 주스도. 내가 좋아하는 주스 알지?”

하녀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에블린 백작 부인이 직접 선정한 이들답게 움직임이 엄정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감정 없이 움직이는 기계를 보는 것도 같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에서 몸을 씻은 후 가운을 입은 채 탁자에 앉았다.

“여기 말씀하신 주스입니다.”

“응, 고마워.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 있어 줄래?”

“네, 용무가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물기에 젖은 검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쥬웰은 생각에 잠겼다.

방금 엔리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반드시.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죄송해요, 아버지.”

쥬웰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아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막대기를 꺼내었다.

그리고 주스에 담갔다.

치직!

주스에 닿은 막대기가 검게 변색하였다.

쥬웰은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보고는 막대기를 치웠다.

이후 주스를 마셨다.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 * *

다음 날.

쥬웰은 진료소를 쉬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

쥬웰은 펄쩍 뛰어 토른 공작에게 안겼다.

토른 공작은 허허 웃으며 쥬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공주님은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근데,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한고?”

토른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 게 아니라, 쥬웰의 얼굴은 정말 파리했다. 마치 문제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쥬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괜찮은데요?”

“진료소에서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

“헤헤, 아니에요. 할아버지랑 오늘 만난다고 하니 설레서 잠을 설쳐 그런가 봐요.”

“허허. 우리 공주님이 말도 참 착하게 하는구나. 할아버지 놀리면 못써요.”

“진짜인데. 정말 뵙고 싶었어요. 쥬웰이 할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보고 싶단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난번 내기 이후, 드디어 중간 결산 날이었으니까.

‘보름 안에 가넷 공작가가 제국 제일이 될 가능성을 증명해 보인다고 약속했지.’

오늘은 그 후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토른 공작은 당당하게 포부를 선포한 손녀에게 중간 결과를 묻기 위해 부른 것이다.

“말이라도 고맙구나. 사실 이 할애비야말로 너와 만나길 고대하고 있었단다.”

토른 공작은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열흘간 건강이 더욱 좋아져 이제 가볍게 주변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앉아 있으세요. 제가 끌어드릴게요.”

“괜찮다. 앉아 있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걷는 게 몸에 좋겠지. 그런데, 쥬웰 너야말로 정말 괜찮은 거냐?”

토른 공작이 여전히 파리한 손녀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멀쩡해요.”

쥬웰은 빙긋 웃었다.

토른 공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진료소에서 너무 무리하는 것 같구나. 진료소 봉사 활동은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떻냐?”

“그건 안 돼요.”

“왜? 넌 가넷이다. 그딴 빈민들 따위를 만지며 몸을 더럽힐 필요가 없어.”

토른 공작은 냉담하게 말했다.

“플랑드나 성녀도 빈민들 따위는 상대하지 않는 것 알지 않느냐?”

“네, 알아요. 하지만 해야 해요.”

토른 공작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해야 한다니?

“할아버지께 약속했잖아요. 가넷이 제국 제일이 될 가능성을 보여 드리겠다고.”

“……?”

토른 공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봉사 활동과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쥬웰이 사랑스럽게 싱긋 웃었다.

“할아버지, 제가 퀴즈 하나 내도 될까요?”

“퀴즈?”

“네, 제가 왜 이딴 봉사 활동을 하고 있을까요? 설마 더러운 빈민들 따위를 가엽게 여겨서?”

토른 공작은 물끄러미 쥬웰을 바라보았다.

쥬웰의 눈빛은…… 아름다운 미소와 다르게 지극히 차가웠다.

“저 쥬웰이에요. 아시죠? 제가 빈민들 따위를 가련히 여길 아이인가요?”

“……그건 아니지.”

토른 공작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의 손녀는 그런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면 왜 제가 이런 지저분한 일을 하고 있을까요?”

“가넷가를 위해서란 말이냐?”

“네, 맞아요. 그러면 하나 더 물을게요. 제가 빈민들을 돌보는 게 왜 가넷가를 위하는 것일까요?”

토른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글쎄. 잘 모르겠구나.”

“그러면 질문을 바꿀게요. 우리 가넷가가 다른 공작가들을 무릎 꿇리려면 어떤 힘을 얻어야 할까요?”

“…….”

토른 공작은 가만히 쥬웰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쥬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둘은 사이좋은 할아버지와 손녀가 아니었다.

토른 공작은 가넷의 가주로서 말했다.

“네 생각을 말해보아라.”

“할아버지께서도 아시다시피 사실 우리 가넷은 여섯 공작가 중에서 가장 기반이 취약한 가문이에요.”

취약.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현재 가넷 공작가는 제국 최고의 성세를 누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토른 공작은 쥬웰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사파이어 공작가는 제국 최고의 무력을 지니고 있고, 다이아 공작가는 부를 거머쥐고 있죠. 아메티스트 공작가는 마법을, 에메랄드 공작가는 신성을 가지고 있고요. 그 강점들은 그들만의 고유 성역이에요.”

“…….”

“반면, 우리 가넷은 어떠한 고유의 강점도 없죠.”

‘충성’의 가넷.

그들은 제국의 권력을 쥐고 있다.

하지만 권력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떤 힘보다 강력하지만, 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게 또한 권력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제 와서 그들의 강점을 우리의 것으로? 권력을 이용해 부와 무력을 키우면 될까요?”

토른 공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토른 공작은 다른 공작가들을 압도하기 위해 부와 무력을 모았다. 심지어 마법사들도 모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하면 부와 무력 등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미 해당 분야에서 절대적인 아성을 구축한 다른 공작가들을 뛰어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냐?”

“가넷만의 진정한 힘을 가져야 해요.”

“진정한 힘이라면?”

토른 공작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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