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2 악마의 기적 (3/18)

Chapter 1-2 악마의 기적

엔리크 자작이었다.

그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쥬웰의 앞에 앉았다.

“왜 앉나요?”

“할 이야기가 있다.”

쥬웰은 마주 인상을 찌푸렸다.

‘파르페 먹어야 하는데.’

귀한 아이스크림이라 녹게 하기 아까웠다.

“먹으면서 들어도 되죠?”

“……그래.”

엔리크 자작의 눈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날 어떻게 한 거지?”

쥬웰은 스푼을 움직이며 성의 없이 답했다.

“이야기했잖아요. 그냥 감이었다고. 독 이야기는 이전 에스텔레 성녀님께 들은 적 있었을 뿐이에요.”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버지.”

이번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음, 역시 딸기가 더 맛있다.

“제가 어떻게 알아냈든, 그게 아버지와 무슨 상관인가요?”

“……!”

“이전처럼 패악을 부린 것도 아닌데 지나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나요?”

쥬웰은 여전히 파르페를 바라보았다.

다음엔 뭘 먹을까?

딸기? 바닐라? 과자? 아니면 주스? 옆에 꽂힌 체리?

그렇게 파르페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엔리크 자작의 무서운 눈빛을 피했다.

‘선을 긋는 게 나아.’

쥬웰은 인정했다.

‘미워할 수 없는 분이잖아.’

몇 번의 만남일 뿐이지만.

더욱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엔리크 자작은 좋은 아버지였다.

지금 저렇게 씹어 잡아먹을 것만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만 봐도 확실했다.

‘이전 생에서는 아버지께 저런 눈빛을 한 번이라도 받아봤으면 했는데.’

이전 ‘아버지’의 음성이 스쳐 지나갔다.

‘왜 내가 원하지도 않은 것이 태어나서.’

의술, 정치학, 경제학, 예술, 화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괴물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건 사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컸다.

엔리크 자작은 그때의 아버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좋은 아버지였다.

그러니 더욱 선을 그어야 했다.

저런 이를 우롱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우리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잖아요. 앞으로 말썽을 부리거나 할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 주세요.”

파르페에 집중하며 끝까지 엔리크 자작의 눈은 보지 않았다.

그런데 엔리크 자작이 예상 밖의 행동을 하였다.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 것이다.

“넌 내 딸이다, 쥬웰.”

“……!”

유리잔에 비친 쥬웰의 적안이 일순 흔들렸다.

“난 널 지켜야 한단 말이다.”

엔리크 자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형님이 널 가만히 둘 것 같으냐? 넌 이번 일로 사선(死線)에 올라간 거야.”

“……할아버지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가 보죠?”

“그래, 너무 늦었어. 에스텔레 성녀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아버지는 살아날 수 없어. 형님은 예정대로 공작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엔리크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난 네가 이번에 해낸 일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세상일은 올바르게만 돌아가지 않아. 당장 로든 왕국으로 떠나라.”

로든 왕국.

엔리크 자작이 깊게 연을 맺고 있는 왕국이었다.

그곳이라면 확실히 안전하리라.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가지 않겠어요.”

“쥬웰!”

엔리크 자작이 나직하게 외쳤다.

그의 적안에 감정의 일렁임이 커졌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딸을 향한 걱정이 선명히 보였다.

“형님은 공작위에 오르면 절대 너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거기까지 들은 후, 쥬웰은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제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절 죽일 거란 거죠?”

“……뭐?”

엔리크 자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알고 있어요. 백부가 어머니를 독살했다는 건. 그렇게 저도 죽일 테니 도망가란 말인가요? 아버지가 일평생 도망 다녔던 것처럼?”

엔리크 자작은 침묵했다.

도망 다녔다.

외교 대신이 되어 가문 내 싸움을 피한 걸 의미한다.

“너…….”

“물론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그랬다는 건 알아요. 계속 후계 싸움을 하면 어머니뿐만 아니라 저도 살해당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과연 옳은 행동이었나요?”

쥬웰은 일부러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어머니의 원수에게 고개를 숙이는 걸 제가 기뻐했을 거로 생각했느냐고요.”

“…….”

“아버지는 제가 왜 엇나갔는지는 생각지도 않는군요.”

거짓말이다.

사실 쥬웰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엔리크 자작을 자극하는 게 필요했다.

그게 다소 잔인하더라도 말이다.

우두커니 침묵하는 엔리크 자작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진정으로 절 위한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세요.”

“……뭐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성대한 송별 예배를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엔리크 자작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건 어렵진 않지만…….”

“여섯 공작 가문이 모두 모여야 해요.”

“……!”

“특히 가주들과 후계자들은 모두 참석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쥬웰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여섯 공작가의 가주와 후계들.

바로 그녀의 원수들.

즉, 쥬웰은 원수들을 한자리에 모을 계획이었다.

그러는 이유가 있었다.

한편, 쥬웰의 속마음을 모르는 엔리크 자작은 더더욱 의아한 얼굴을 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려 한단 말인가?

쥬웰은 그저 이렇게만 설명하였다.

“수많은 이가 모인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절 믿고 진행해 주세요.”

“……그래.”

엔리크 자작은 물었다.

“황실은? 황실도 부르느냐?”

“아니, 황실은 필요 없어요. 여섯 공작 가문만 불러주세요.”

황실은 이번 극의 배역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존경할 만한 분이니 이런 일에 끼어들게 할 필요는 없겠지.’

쥬웰은 문득 약혼자에 대해 떠올렸다.

비운의 황태자 오펜하임.

만약 멀쩡한 황실에서 태어났다면 능히 성군이 될 재목이나, 황실이 쇠락해 능력이 썩고 있는 인물이었다.

어쨌든 이번 일에 그를 끼어들게 할 필요는 없으리라.

“황태자 전하께 파혼 편지를 쓸 테니 그거나 황실로 보내주세요.”

“……파혼?”

“네, 저같이 못된 게 황태자랑 결혼이라니. 아버지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공식적인 서한은 차후 보낸다고 쳐도, 그전에 미리 의사를 표시해 놓는 게 좋으리라.

‘어차피 황태자도 망나니 쥬웰과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 좋아하겠지.’

이후, 쥬엘은 엔리크 자작과 헤어졌다.

룬이 조심스럽게 쥬엘에게 다가왔다.

“아, 아가씨.”

“응?”

“이, 이런 말 결례일지 모르지만…… 힘내세요.”

쥬웰은 가만히 룬을 바라보았다.

“뭘?”

“또 자작님께 혼나셨잖아요. 아가씨, 이제 훌륭하신데!”

쥬웰은 룬이 귀여워 웃음을 흘렸다.

멀리서 들어서 혼난 것으로 보였나 보다.

“응, 고마워.”

쥬웰은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쥬웰은 작은 키라 룬이 훨씬 키가 커, 발을 들어야 했지만 말이다.

이후, 토른 공작의 상세는 계속해서 악화를 거듭했다.

임종을 앞둔 직전.

가넷 공작가에서 나머지 여섯 공작가에 정중한 초청장을 보냈다.

위대한 거인, 토른 공작의 송별 예배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이었다.

* * *

“토른 공작의 송별 예배라고요?”

유스넨 대공은 안경을 낀 채 딱 잘라 말했다.

“불참하겠습니다.”

유스넨 대공은 토른 공작과 가넷 공작가를 혐오했다.

‘제국이 인세의 지옥이 되게 한 이들.’

메디안 백작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가주나 후계자분은 꼭 참석해 달라고 초청장이 왔습니다. 대공께서는 사고 이후 혼자시니 대신 보낼 분이 없지 않습니까?”

13년 전 유스넨의 각성 의식 때 일어난 ‘사고’로 페리도트 대공가의 직계는 모조리 사망했다.

따라서 현재 페리도트 대공가의 직계 일원은 유스텐 대공 혼자뿐이었다.

“무슨 상관입니까? 무시하면 될 것을.”

“……그건.”

“무시하면 안 됩니까? 이 페리도트가 가넷을?”

“……아니요. 무시해도 되죠.”

메디안 백작은 얼떨떨하게 수긍했다.

가넷 공작가는 최고의 권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공작가 위에 군림하는 건 아니었다.

여섯 공작가는 각자 다른 강점들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특히 페리도트 대공가는 제국의 성역과도 같은 곳이었다.

페리도트(Peridot, 감람석(橄欖石)).

악령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해 준다는 보석.

그 보석의 뜻처럼 페리도트 대공가는 수백 년에 걸쳐 어둠을 퇴치해 오며 제국을 수호해 왔다.

인간을 가련히 여겨 지상에 살아 현신한 천사의 가문.

그게 바로 페리도트 대공가였다.

페리도트 대공가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제국은 이미 옛적에 어둠의 범람으로 멸망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거절 서신을…….”

“아니, 잠깐만요. 그냥 가겠습니다.”

“전하?”

유스넨 대공은 무심히 말했다.

“생각해 보니 쥬웰 영애를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메디안 백작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어둠과 연관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유스넨 대공은 서류를 보며 무심히 답했다.

“죽여야지요.”

그는 어둠을 혐오했다.

* * *

초청을 받은 건 페리도트 대공가만이 아니었다.

‘심연’의 아메티스트가.

보랏빛 눈동자를 한 중년인이 한숨을 내쉬며 서신을 봤다.

“아, 왜 귀찮게 가주를 찾는 거야? 우리 가주님, 못 가는 것 알면서.”

중년인의 이름은 멜린 후작.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가주 대리였다.

대리이지만 사실 가주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가주가 미쳐 있기 때문이다.

‘잘 알면서. 번거롭게. 쯧.’

멜린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단 이야기는 해봐야겠지.’

파앗!

멜린 후작은 허공에 떠올라 어딘가로 날아갔다.

놀랍게도 그는 마법사였던 것이다.

그것도 보통의 마법사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백마도사’들의 이인자.

마탑의 부탑주였다.

원래 대대로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가주 대리는 마탑의 부탑주직을 겸임하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아메티스트(Amethyst, 자수정(紫水晶)) 공작가는 마법사들을 지배하는 가문이었다.

‘정확히는 백마법사들만 이끄는 거지만.’

흑마도사들을 지배하는 보석은 따로 있었다.

바로 흑요석(Obsidian, 黑曜石).

언젠가 흑요석이 게헨나에서 올라와 흑마도사들의 왕이 될 거라는 전설이 있었다.

‘물론 전설이고 흑요석이 실제로 나타난 적은 없지. 후우, 어쨌든 긴장되네.’

목적지에 도착한 멜린 후작은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는 온 세상을 통틀어 손꼽는 강자이지만, 이곳에만 오면 가슴이 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왔어?”

“……!”

멜린 후작은 숨을 들이켰다.

십 대 후반쯤?

지극히 귀여운 외모의 보랏빛 눈동자 소년이 머리가 백팔십도로 돌아간 채 그를 맞은 것이다.

즉, 눈이 등 뒤를 보고 있었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응? 왜 왔어?”

소년은 머리를 원래 자리대로 돌리려다가 잘 안 되는지 끔찍한 짓을 하였다.

목에서 툭 떼어내고 휙 돌린 후 다시 조립한 것이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역시 가주님.’

멜린 후작은 침음을 삼켰다.

그렇다.

이 소년이 바로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가주, 라플 공작이었다!

세상 모든 백마도사의 미쳐 버린 왕.

‘어려 보이지만…… 어리지 않지.’

영혼 전이 덕분이었다.

라플 공작은 계속해서 육체를 갈아타며 영생하고 있었다.

실제 나이가 몇인지, 원래 어떤 존재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마탑의 주인이며, 인세 최강의 마법사란 것만 알려져 있다.

“가주님, 드릴 말씀이…….”

“응, 너 근데 내 핏줄인가? 란트, 아리트, 투르 중 누구의 후손?”

“란트 님이 제 선조이십니다.”

미치광이 라플 공작은 영생을 살았지만 후손을 낳지 않았다.

대신 그의 형제들이 낳은 후손이 직계와 방계로서 공작가를 이루며 그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지닌 이가 가주 대리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무슨 용무? 설마 가넷 공작가에서 초청인가?”

“네? 어떻게?”

멜린 후작은 깜짝 놀랐다.

라플 공작은 싱긋 웃었다.

“며칠 전 가넷가에서 내 정해진 운명을 만날 거라는 예언을 받았거든.”

“……예언이라고요?”

“응, 가넷 공작가에 가면 내가 300년 동안 기다려 온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던데?”

“도대체 누가 그런 예언을?”

“내가. 심심해서 미래를 엿봤는데, 그렇게 나오던데?”

‘무슨 말이야! 미래를 엿보다니!’

라플 공작이 순수한 얼굴로 한 말에 멜린 후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또 무슨 끔찍한 장난을 하려는 거지?’

라플 공작은 평소 마법 연구에만 몰두해 있다.

하지만 가끔 무언가에 관심을 두고는 했는데, 그게 무엇이든 결국 모두 끔찍하게 망가뜨렸다.

괜히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어쨌든 가넷 공작가라고 했지? 갈게! 토른, 그 늙은이 죽는 꼴도 봐야지.”

“아, 아니. 꼭 가실 필요는…….”

“내 운명의 상대가 어떤 모습일지 너무 기대돼. 잘 보여야 하니 최대한 예쁘게 입고 가야지. 히히.”

멜린 후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왜 이런 초청장을 보내서.’

가넷가가 원망스러웠다.

‘……제발 별 탈 없이 넘어갔으면.’

부디 하녀나, 별 볼 일 없는 인물을 주워 오길 바랐다.

그러면 망가져도 가넷 공작가가 너그럽게 넘어가 줄 테니까.

* * *

초청장을 받은 건 페리도트 대공가, 아메티스트 공작가만이 아니었다.

‘번영’의 다이아 공작가.

가주의 침실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이 하늘하늘한 잠옷을 입은 채 창밖으로 나왔다.

여인의 이름은 매리엇.

다이아가의 젊은 가주였다.

“라디트?”

발코니에는 굳건한 인상의 미남이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빛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 해?”

“아, 매리엇.”

매리엇은 남자의 단단한 등에 기대었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난 가끔 자기가 멀게 느껴지더라. 내 착각인 거지?”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지나가던 누구라도 돌아볼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남자와 여인의 입술이 겹쳤다.

가볍게 시작한 입맞춤은 점점 더 격정적으로 변하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여인이 물었다.

“진짜 무슨 생각 했어?”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그냥 토른 공작 생각을 했을 뿐이야. 그 거대했던 분이 돌아가신다고 하니까 실감이 안 나서.”

“그래?”

여인은 피시시 웃으며 남자를 끌어안았다.

“에스텔레 생각한 것 아니지?”

“……!”

남자, 라디트.

에스텔레의 약혼자였던 그는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야. 내 마음 잘 알잖아, 매리엇.”

여인, 매리엇.

다이아가의 공작이자, 이제는 라디트의 새로운 약혼녀로서 곧 결혼을 앞둔 그녀는 입을 다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매리엇은 에스텔레의 ‘친구’로서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끔찍이 학대했다.

매리엇이 에스텔레를 그렇게 학대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천한 피를 타고난 게 거슬렸으니까.

그리고 매리엇은 자신과 곧 결혼해야 할 라디트가 그런 경멸스러운 에스텔레와 한때 연인 사이였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질투?

아니다. 매리엇은 에스텔레를 질투해 본 적이 없다. 서로 격이 달랐으니까.

그저 혐오였다.

라디트라는 완벽한 보석에 오물이 묻어 있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에스텔레라는 오물 말이다.

라디트는 달래듯 말했다.

“이제 내게는 너뿐이야, 매리엇.”

“그러면 저주해 줘, 에스텔레를.”

“……!”

“내 앞에서 그년을 욕하고 저주해 줘.”

잠시 정적이 흘렀다.

라디트는 부드럽게 매리엇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알잖아. ‘정염’은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아.”

올바른 타오름, ‘정염(正炎)’.

남자의 가문인 사파이어 공작가의 상징이었다.

대신 남자의 입술이 매리엇의 이마에서 입술로, 그리고 목으로 내려갔다.

달뜬 신음이 흘렀고, 매리엇은 라디트를 강하게 껴안았다.

“사랑해, 정말로.”

“……응, 나도, 매리엇.”

곧 방 안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 * *

‘축복’의 에메랄드 공작가에도 초청장이 갔다.

다섯 공작가는 송별 예배에 참석할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단 한 곳.

초청장을 받지 못하고 소외된 곳에서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황실이었다.

“송별 예배에 초청장조차 보내지 않는다니. 황실에 이런 결례를!”

궁내 부장의 분통에 한 음성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결례가 아니라 배려일 수도 있겠지.”

“저, 전하!”

지극히 아름다우면서 선이 여린 여인 같은 생김새의 남자였다.

길게 기른 흑발이 찰랑거렸다.

쥬웰이나 엔리크 자작처럼 빠져들듯 짙은 흑발이 아닌, 밤하늘을 담은 것처럼 선명하고 빛나는 듯한 흑발이었다.

남자는 서류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토른 공작은 우리 황실의 원수다. 참가해 봤자 분통만 터졌을 테니 말이야. 안 그런가?”

“저, 전하. 그래도 이건 대단한 결례입니다.”

남자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서류를 보아봤자 그에게 결정할 권한은 없었다.

모두 여섯 공작가의 뜻대로 될 테니까.

“뭐, 어쩌겠는가? 황실에 힘이 없어서 이런 것을.”

가벼운 음성과 다르게 남자, 황태자 오펜하임의 눈빛이 깊게 타올랐다.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파혼이라고?’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송별 예배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갑작스레 온 서신이 더 중요했다.

[존경하는 황태자 전하께. 불민한 약혼녀가.]

‘쥬웰’답지 않게 대단히 정중한 필체로 온 편지였다.

자신의 부족함을 이유로 약혼을 재고하였으면 하고 고하는 편지.

문제는 보낸 이가 ‘쥬웰’이란 것이다.

‘또 무슨 모욕을 하려는 거지?’

지금껏 ‘쥬웰’이 그와 황실에 범한 모욕은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필체가 정중해도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오펜하임은 결정하였다.

“가넷가에 가보겠다.”

“전하?”

“아무리 그래도 우리 황실의 원수, 토른 공작의 최후는 지켜봐야겠지.”

오펜하임은 마지막으로 말하였다.

“내 ‘사랑스러운’ 약혼녀님도 만나보고 말이야.”

그렇게 운명의 송별 예배 날이 다가왔다.

* * *

송별 예배가 시작 전, 황혼이 내리는 이른 밤.

쥬웰은 가넷 공작가의 첨탑에 서 있었다.

옆에서 뜻밖의 인물이 눈물 흘리고 있었다.

“흐, 흑. 흑. 끄흑.”

해밀턴이었다.

서러운 울음이었다.

“왜 울어?”

“왜, 왜 우느냐니…… 요! 네, 네가…… 아니, 당신이 흑마술로 내 수명을 가져갔잖아…… 요!”

“이거?”

쥬웰은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밝은 빛이 일렁였다.

방금 해밀턴한테서 빼앗은 생명력이었다.

“이거 얼마 안 돼. 10년 치밖에 안 되는데?”

“10, 10년! 어, 얼마 안 된다니……! 남의 수명이라고……!”

“넌 수명대로 살지도 못할 텐데, 아쉬워할 것 없지 않아?”

“……!”

해밀턴의 눈빛이 흔들렸다.

쥬웰은 오늘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네, 하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차피 너 오래 못 살아.”

“어, 어째서?”

“그야, 내가 오래 살려둘 생각이 없으니까?”

마찬가지로 소고기는 등심이 최고지, 하는 듯한 여상한 음성이었다.

진심이었다.

해밀턴은 구제 불능의 추악한 쓰레기.

용도가 다하면 폐기 처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해밀턴이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히고 서러운 듯했다.

“꺼억. 꺽. 크흑. 이 악마!”

“……나 악마 맞는데. 새삼스럽게. 넌 날 도대체 어떤 존재로 생각한 거야?”

쥬웰은 툭 말했다.

“말했잖아. 괴롭고 힘들 거라고. 넌 내 노예. 그리고 난 너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어. 네가 권속의 맹약에서 벗어날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야.”

다만 그녀는 한 가지 길은 열어놓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그러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흑마도사의 세계에서 이게 얼마나 자비로운 처사인지, 해밀턴은 짐작도 못 하리라.

해밀턴은 더욱더 커다랗게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껏 참은 설움이 터진 것 같았다.

우는 것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기에 쥬웰은 어깨만 으쓱했다.

확실히 해밀턴 입장에서 서럽고 울고 싶으리라.

‘지금껏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동정할 가치도 없지만.’

해밀턴은 이제 겨우 스무 살밖에 안 되었음에도 화려한 죄악 목록을 가지고 있다.

죽으면 바로 게헨나 직행이었다.

그나마…… 지금이 행복한 때라는 걸, 게헨나에 가기 전까지는 모르리라.

그때, 저 멀리 불빛이 보였다.

“그만, 조용히.”

“……!”

쥬웰의 ‘명’에 따라 해밀턴은 우뚝 입을 다물었다.

쥬웰은 인상을 굳혔다.

저 멀리 화려한 마차들이 저택에 다가오는 게 보였다.

송별 예배에 참여하려는 다른 공작가의 마차들이었다.

행렬은 여섯 공작가의 위세를 보여주듯 화려하고 웅장했다.

“…….”

쥬웰의 눈빛이 침잠했다.

드디어 600년간 그리워했던 이들이 오고 있었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잘 지내고 있었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녀를 제물로 바치고 악마에게 커다란 축복을 받았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쥬웰은 원수들이 부디 잘 지내고 있었길 빌었다.

그래야 더욱 참혹히 복수할 수 있을 테니까.

높은 곳에 있을수록 추락이 끔찍한 법이니까.

마침, 고요한 바람이 불었다.

쥬웰의 기다란 흑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해밀턴은 쥬웰의 가라앉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첫 번째 마차가 도착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첫 마차는 원수의 마차가 아니었다.

문지기가 외쳤다.

“아메티스트 공작가의 가주, 라플 공작 전하이십니다!”

쥬웰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라플 공작?’

보랏빛 눈동자의 귀여운 소년이 마차에서 내렸다.

송별 예배가 아니라 무슨 선이라도 보러 온 듯 잔뜩 단장했는데, 어린 외모와 달리 기이하게 광기로 번뜩이는 눈빛을 보니 라플 공작이 맞았다.

‘저 미치광이가 왜 왔지?’

그녀는 라플 공작을 초청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관심 밖이었다.

‘굳이 엮일 필요 없는 인물인데.’

아메티스트 공작가도 그날 일과 연관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가주인 라플 공작은 아니었다.

저 마법에 미친 미치광이는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왜 온 거야?’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라플 공작은 그녀도 주의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지상의 수많은 강자 중, 그녀가 유의해야 할 네 명의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뭐, 마법에만 미친 놈이니 크게 엮일 일은 없겠지.’

쥬웰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제일 큰 문제는 유스넨 대공인데.’

그녀가 유의해야 할 네 명 중 또 다른 한 명이 유스넨 대공이었다.

천사의 피를 각성한 광휘의 대공.

그는 어둠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제국의 수호자이니, 악에 물든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유스넨 대공과는 이전에 인연이 있었구나. 잘 컸으려나, 흰 강아지?’

쥬웰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어린 성녀였던 시절.

그녀는 유스넨을 구해주었다.

‘나름대로 각별했는데. 마지막으로 본 지 13년이나 지났는데 날 기억하고 있으려나?’

어쩌면 까먹었을지도.

오래됐으니까.

아니, 중간에 종종 서신을 보내왔던 걸 보면 기억은 할 것 같았다.

‘귀여웠었는데.’

그녀의 기억 속 유스넨은 열 살 남짓한 어린 꼬맹이였다.

커다란 상처를 입고, 비에 맞은 채 죽어가는 강아지 같던 가련한 눈빛이 떠올랐다.

‘훌륭히 잘 컸다고 하던데. 이제는 별로 안 귀엽겠지?’

쥬웰은 잠시 추억에 잠겼다.

‘뭐, 다 지나간 일이지.’

그래, 그와의 추억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그가 광휘의 대공이란 것이다.

페리도트 대공가는 지상에 현신한 천사의 가문.

그녀 같은 어둠을 처단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원하면 따르고, 원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의무가 아니다.

그들은 무조건 어둠, 그중 그녀 같은 ‘거악(巨惡)’을 처단해야 했다.

그건 천사의 현신인 그들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자 맹약, 또한 속박이었다.

‘그와 싸우는 건 피할 수 없어. 그러니 내가 먼저 그를 죽여야 해.’

쥬웰은 생각했다.

솔직히 싸우고 싶지 않았다.

서로 모른 척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악마의 주구가 된 그녀와 광휘의 유스넨 대공은 양립할 수 없는 사이였다.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마침, 문지기가 크게 외쳤다.

“페리도트 대공가의 가주, 유스넨 대공 전하이십니다!”

다른 공작가의 마차와 비교해 확연히 수수한 마차에서 아름다운 사내가 내려왔다.

깔끔한 정복.

차분한 은발.

감람석(페리도트)의 녹색 눈빛과 옅은 안경.

학자처럼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자, 유스넨 대공이었다.

쥬웰은 자신이 기억하던 소년이 훌쩍 컸음에 놀랐다.

‘……진짜 훌륭히 자랐구나. 나와 만났을 때만 해도 귀여운 강아지 같았는데.’

쥬웰은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반갑긴 반갑네.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인사라도 했을 텐데.’

그때, 저 멀리.

거리를 격하고 유스넨 대공이 그녀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

어둠을 뚫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날 보는 건가?’

그런 것 같다.

천사의 피를 각성한 유스넨 대공은 라플 공작 등과 더불어 제국의 최강자. 먼 거리의 시선을 느낀 것이리라.

쥬웰은 묵직하게 가슴이 뛰었다.

이전 인연을 만난 것에 관한 희미한 반가움이었다.

“…….”

유스넨 대공의 안경 유리알 속 눈동자에도 일순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고, 곧 고개를 돌렸다.

왜일까?

그렇게 유스넨 대공을 보고 났더니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해밀턴이 숨마저 죽이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문지기의 다음 외침이 들렸다.

“에메랄드 공작가의 가주 웰링턴 법왕 예하와 후계자 플랑드나 성녀님이십니다!”

“……!”

두근.

심장의 고동이 울렸다.

방금 유스넨 대공과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울림이었다.

당연했다.

저들은 원수.

그중 그녀의 ‘아버지’와 ‘언니’였으니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선한 인상의 중년 남자, 웰링턴 공작이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한 손으로 부드러운 외모의 여인을 에스코트했다.

언니, 플랑드나였다.

로튼 백작이 그들을 맞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법왕 예하.”

“감사라니요. ‘축복’의 에메랄드로서 응당 와야 하는 자리이지요. 얼마나 슬픔이 크십니까?”

‘축복’의 에메랄드 공작가는 성전의 예배를 담당하는 신관 가문.

제국 전체에 걸쳐 백성들에게 지대한 정신적 영향을 끼치는 가문이었다.

에메랄드가의 가주는 대대로 신전의 최고위직, ‘법왕’직을 맡게 되어 있다.

“플랑드나 성녀님도 오랜만에 뵙는군요. 안녕하셨습니까?”

쥬웰은 그 이야기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성녀라고?’

그녀가 알기로 언니, 플랑드나는 성녀가 아니었다.

쥬웰은 곧 이유를 깨달았다.

‘아아. 악마의 축복을 받아서 성녀가 된 거야. 악마도 성력을 위장할 수 있으니.’

플랑드나는 설핏 웃었다.

쥬웰이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의 미소였다.

“네, 사람들을 돕느라 최근 바빠서…….”

“역시 성녀님다우시군요. 아! 회임 사실은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해요.”

“아이 이름은 혹시 지으셨습니까?”

“이름은 제 사랑하는 동생, 에스텔레의 이름을 따서 짓기로 하였어요.”

플랑드나가 안타까운 얼굴을 하였다.

“동생의 희생을 잊지 않고, 동생의 거룩한 뜻을 제 아이가 이어가길 바라거든요.”

로튼 백작은 감탄한 얼굴을 하였다.

“그렇군요. 대단한 뜻입니다. 어쨌든 들어가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곧 두 부녀가 꼭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

쥬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게 침묵하며 자신의 내면을 관조해 보았다.

‘생각보다 미칠 듯 화가 나지는 않네.’

내심 걱정했다.

저들을 직접 보면, 감정을 참지 못할까 봐.

하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그저 더욱더 깊게 가라앉기만 하였다.

지옥의 끔찍한 심해처럼 말이다.

그때, 마지막 마차가 도착했다.

지금껏 도착한 마차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커다란 마차였다. 마치 금과 보석으로 도배한 듯한 모습이었다.

“다이아 공작가의 가주, 매리엇 공작 전하이십니다!”

매리엇.

그녀의 ‘소중’했던 친구였다.

가넷 공작가의 사람들이 젊은 공작의 등장에 술렁였다.

쥬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리엇이 가주라니.

원래 매리엇은 3년 전만 해도 공작이 아니었다.

후계긴 했지만 꽤나 위태로운 처지였는데 3년 만에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바라던 대로 공작위를 얻는 데 성공했구나. 잔뜩 악마의 축복을 받았으니 돈을 쓸어 담았겠지.’

다이아 공작가는 가장 상재가 뛰어난 이에게 후계위를 물려준다.

매리엇은 악마에게 받은 축복을 통해 공작위에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이 분명했다.

‘사파이어 공작가는?’

아직, 그녀가 가장 고대하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다이아 공작가의 마차에서 한 명의 인물이 더 내렸다.

문지기가 상대의 얼굴을 보고 당황해 외쳤다.

“사,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자, 라디트 백작님이십니다!”

“……!”

가넷가의 고용인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다이아 공작가의 마차에서 사파이어 공작가의 후계자 라디트가 내리다니.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뭐, 곧 한 가족이 될 테니. 같은 마차 타는 것 정도야.’

쥬웰은 팔짱을 꼈다.

라디트의 손이 다정하게 매리엇의 허리를 껴안았다.

먼 거리였지만 둘의 손가락에 반짝이는 한 쌍의 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왜일까?

사랑하던 약혼자와 가장 소중한 친구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데도 가슴이 들끓지 않는 이유는?

‘아아.’

옛 연인의 변심을 향한 질시.

쥬웰의 가슴에는 그런 귀여운 감정 따위가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저 한없이 무거운 분노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주연이 도착하였고, 그들은 공작저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

“…….”

쥬웰은 한참이나 그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쥬…… 쥬웰…… 님?”

해밀턴이 조심스레 말했다.

“내, 내려가도 될까요? 송별 예배에 참석해야 해서.”

“같이 가.”

“네?”

“나도 손녀인데 참석해야지.”

해밀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쥬웰은 잔잔히 웃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쭈뼛 소름이 돋았다.

해밀턴은 울상지었다.

‘가, 같이 가기 싫은데!’

하지만 쥬웰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송별 예배.

말 그대로 죽어가는 이를 위해 축복하고 예배하는 자리이다.

하지만 토른 공작 정도 되면 그런 송별 예배도 범상치 않은 법이다.

거창하고 화려한 송별 예배가 펼쳐졌다.

“위대한 빛이여.”

“축복하소서.”

성전에서 나온 신관들이 찬트를 불렀다.

커다란 연회장이 거룩한 음성으로 가득 찼고, 수많은 이가 모여 공작의 죽음을 애도할 준비를 하였다.

‘내가 공작이면 그냥 조용히 죽음을 맞고 싶을 것 같은데. 죽기 직전에 이런 곳에 침대째로 끌려 나오다니.’

쥬웰은 실소했다.

사실 이런 거창한 송별 예배는 임종을 맞는 이가 아니라, 차기 후계자를 위한 것이었다.

송별 예배를 주도함으로 새로운 가주가 되었음을 만인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이번 경우는 로튼 백작이었다.

‘아주 좋아 죽는군. 당연히 좋겠지.’

로튼 백작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인사하기 바빴다.

비통한 얼굴이었지만, 희극적이게 하나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도 토른 공작을 애도하는 것보다 새로이 공작이 될 로튼 백작에게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때,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 쥬웰. 산에서 사고를 당했다며, 괜찮니?”

쥬웰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언니였던 플랑드나였다!

본격적인 송별 예배 시작 전 안면 있는 쥬웰에게 인사하러 온 듯했다.

‘아아, 생각보다 빠른 만남인데.’

플랑드나는 한껏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전 에스텔레를 봤을 때처럼 말이다.

‘항상 눈빛은 따뜻했지. 뒤에서 아닌 척 학대를 해서 그랬지.’

플랑드나는 항상 친절했다.

추악한 속마음과 다르게 말이다.

플랑드나는 겉으로는 친절한 척, 하지만 뒤에서 교묘히 학대를 주도했다.

어린 시절, 에메랄드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그녀를 인간 취급하지 않은 건 모두 이 플랑드나의 사주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없이 언니를 용서했다.

언젠가는 사랑해 주기를 바라면서.

뭐…… 결과는 아는 바와 같지만 말이다.

쥬웰은 싱긋 웃었다.

“걱정해 줘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괜찮아요, 성녀님.”

“어머, 성녀라니. 편하게 이전처럼 언니라고 부르렴.”

“네, 언니.”

“어쨌든 공작 전하께서 돌아가시게 되어서 네가 마음이 많이 상하겠구나. 위대한 빛의 축복이 너와 그분께 함께하길.”

“감사합니다.”

다른 이도 다가왔다.

그녀의 아버지였던 웰링턴 공작이었다.

“갈수록 아름다워지는구나. 쥬웰, 밖에서 보면 요정으로 착각하겠어. 너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될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법왕 예하.”

“토른 공작님의 일로 낙담이 심할 텐데, 위대한 빛의 축복이 너에게 함께하기를.”

일전, 한 번도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축복에 쥬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들이 모여 있자 다른 이들도 모여들었다.

매리엇, 라디트였다!

둘은 여전히 다정하게 붙어 있었다.

“쥬웰. 잘 지냈니? 이게 얼마 만이야? 요즘 많이 바빴나 봐. 얼마 전 연회에서도 안 보이고.”

“쥬웰은 한창 배울 때니 당연히 바쁘겠죠. 어쨌든 쥬웰, 많이 슬플 텐데 힘내거라.”

매리엇, 라디트는 가까운 동생에게 하듯 친근하게 말했다.

“네, 두 분. 감사해요.”

“아, 우리 곧 결혼하는 것 알지?”

“당연히 알죠. 꼭 찾아뵙도록 할게요.”

쥬웰은 웃으며 생각했다.

‘지금 다 죽여 버릴까?’

저기 저 로튼 백작까지.

원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강렬한 유혹이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힘을 드러내기에는 라플 공작과 유스넨 대공이 걸렸고, 무엇보다.

‘……그건 전혀 시원한 복수가 아니니까.’

고작 그런 허무한 복수를 위해 지상에 돌아온 게 아니었다.

‘잊지 마. 복수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리면 안 돼.’

저들의 모든 행복을 산산이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고 좌절과 고통 속에서 차라리 죽음을 갈망하도록 만들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그런 마음으로 말했다.

“제가 오늘 오실 귀한 분들을 위해 준비한 게 있는데, 혹시 받아주시겠어요?”

“그래? 우리야 고맙지.”

“룬, 가져오렴.”

룬은 접시에 무언가를 가져왔다.

“초콜릿?”

“네, 한번 만들어봤어요. 부디 맛있게 먹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원수들은 영문을 모르고 웃었다.

쥬웰이 귀엽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고맙구나.”

“맛있네. 우리 요정 공주님이 이런 솜씨가 있었다니?”

요정 공주님. 쥬웰의 별명이었다.

원수들은 생각보다 훌륭한 맛에 쥬웰을 칭찬하고는 흩어졌다.

자신들이 무얼 먹은 건지 상상도 못 하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저건 쥬웰의 피로 만든 초콜릿이었다.

강력한 흑마법, ‘피의 각인’이 담겨 있다.

‘영혼에 피의 흔적이 남게 되지. 이제 어떤 악마들도 저들을 건드리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영역 표시 같은 거였다.

이 영혼은 자신의 먹이로 점찍어두었으니 누구도 건드리지 말라는.

‘이제 너희는 모두 내 것이야.’

쥬웰은 남몰래 입술을 혀로 적셨다.

사실, 지상에 온 후 많이 초조했다.

악마들이 그녀의 목표를 낚아챌까 봐 말이다.

이제 조금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각인에는 또 다른 중요한 효과가 있었다.

바로, 그들이 내지르는 고통과 비명을 공유할 수 있었다.

악마들이 노예의 괴로움을 더욱 즐기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으로, 앞으로 쥬웰도 선명하게 그들의 괴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복수의 즐거움이 몇 배가 되리라.

‘운이 좋았네. 다 먹일 수 있을지 걱정했었는데.’

이번 송별 예배의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한 쥬웰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더 중요한 두 번째 목적을 달성할 차례였다.

‘곧 시작이군.’

그때, 뜻밖의 음성이 들렸다.

“그 초콜릿, 저도 먹을 수 있습니까?”

“……!

쥬웰은 숨을 들이켰다.

안경을 낀 은발의 부드러운 미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스넨 대공!’

두근.

원수들을 마주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울림이 들렸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희미하게 반가운 마음이 든 것이다.

하지만 쥬웰은 짐짓 숨기고 예의 바르게 웃음 지었다.

“죄송합니다. 소중한 분들을 위해 준비한 거라 이제 남는 게 없네요.”

“그런가요?”

“네.”

쥬웰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스넨 대공이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놀란 듯한 시선으로 쥬웰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우두커니.

“전하?”

“아니, 죄송합니다. 그만 결례를 범했군요. 용서해 주시길.”

유스넨 대공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뭐야?’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내 정체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빛’과 ‘어둠’의 격(格)만으로 따지면 유스넨 대공보다 쥬웰이 훨씬 높았다.

그러니 직접 마기를 사용하는 걸 목격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진면목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때, 커다란 종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본격적인 송별 예배가 시작되는 소리였다.

* * *

“어떠셨습니까, 전하?”

메디안 백작이 물었다.

유스넨 대공은 안경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군요.”

“……모르겠다고요? ‘심판의 눈’을 사용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심판의 눈.

악마들의 ‘주시자의 눈’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능력이었다.

“심판의 눈으로 봐도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죠. 대악마라면 심판의 눈조차 속일 수 있으니. 빛의 성자로도 위장할 수 있는 게 그들 아닙니까?”

메디안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어둠의 존재가 지상에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유스넨 대공은 말끝을 흐렸다.

“전하?”

“아니, 아닙니다.”

유스넨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이게 뭔지 모르겠군.’

쥬웰을 마주한 순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욱신.

마치 심장이 칼로 도려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진 것이다.

‘왜?’

유스넨 대공은 자신이 느낀 감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아프단 말인가?

착각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지금도 끔찍한 통증이 낙인이 찍히듯 심장에 남아 있었다.

‘뭐지?’

유스넨 대공은 다시금 쥬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또다시 욱신, 가슴이 저릿해 왔다.

‘……이해할 수가 없군.’

더 그녀를 바라보았다가는 감정의 동요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말을 돌렸다.

“……어쨌든 당분간 쥬웰 영애를 잘 살펴야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본격적인 송별 예배가 시작되었다.

신관들의 찬트 소리가 더욱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모든 이가 지정된 자리에 앉아 묵념하였다.

성전을 대표하는 웰링턴 공작이 단상에 나와 엄숙히 축복의 이야기를 선포하였다.

“토른 공작 전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위대한 거인으로, 오늘 위대한 빛의 품으로 나아가니…….”

쥬웰을 비롯한 가넷가의 일원들은 검은 예복을 입은 채 가장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 축복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루하네. 이전이랑 똑같아.’

하품을 간신히 참았다.

사실 에스텔레 시절에도 아버지 웰링턴 공작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진심 없이 겉에 발린 이야기라서일까? 지루해도 너무 지루했다.

‘이제 금방이니 참자.’

그녀가 기획한 이번 극의 절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그녀는 복수를 위한 첫 일보를 내디딜 것이다.

바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이윽고.

“그러면 가족분들께서 축복의 기도를 하겠습니다.”

축복의 기도.

정해진 기도문을 차례로 읊는 것이다.

온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망자를 위대한 빛의 품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가장 지루한 절차이기도 했다.

온 가족들이 하나씩 나와 똑같은 기도문을 읊는 것이니까.

로튼 백작부터 가까운 직계들이 하나씩 나와 기도문을 읊었다.

“이게 뭐야. 지루해.”

송별 예배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1인, 마탑주 라플 공작은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내 운명의 상대 어디 있어? 분명 오늘 만난다고 되어 있었는데. 따분하기만 하고.”

“……원래 송별 예배는 세상에서 제일 따분한 법입니다, 가주님. 그냥 가시는 건?”

마탑의 부탑주이자 가주 대리인 멜린 후작은 살살 라플 공작을 꾀었지만 라플 공작은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야. 내 예언은 지금껏 틀린 적이 없어. 난 분명 오늘 여기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될 거야.”

“그, 그러지 말고 제발 마탑으로…….”

멜린 후작은 식은땀을 흘렸지만 라플 공작은 전혀 듣지 않았다.

그때, 그들 말고도 지루함에 하품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제 슬슬 가야겠군.”

“저…… 아니, 공자?”

황태자 오펜하임.

그는 마법으로 외모를 바꾼 채 송별 예배에 참석해 있었다!

“쥬웰 영애와는 이야기해 보지 않으십니까?”

애초에 황태자가 온 건 파혼 편지를 보낸 쥬웰 영애 때문이었다.

“……보긴 해야겠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

오펜하임은 저 멀리 무릎 꿇고 있는 쥬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오펜하임은 어떤 슬픔보다 더욱 깊고 무거운 감정을 느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해지는 느낌이었다.

‘토른 공작을 그토록 사랑했던 건가?’

그저 철부지 못된 영애라고만 여겼는데,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

쥬웰의 차례가 다가왔다.

그런데 그녀가 웰링턴 공작에게 뜻밖의 말을 하였다.

“혹시 다른 기도문을 읊어도 될까요?”

“그건 상관없지만, 어떤 기도문을 읊을 예정이냐?”

쥬웰은 이전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에스텔레 성녀님이 남긴 기도문이요.”

“……!”

순간,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웰링턴 공작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당황? 죄책감? 아니면 억지로 잊은 딸을 향한 혐오?

정체 모를 감정이 빠르게 스쳤다가 사라졌고, 웰링턴 공작은 부드럽게 말했다.

“굳이 에스텔레 성녀님의 기도문을 읊으려는 이유가 있느냐?”

쥬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제국 모든 백성이 가장 존경하는 성녀님이시니까요.”

“……!”

반박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래.”

쥬웰은 토른 공작이 누워 있는 침대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빛이여.”

마침 찬트 소리가 웅장하게 예배장 안에 퍼졌고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당신의 사랑을 믿습니다.”

비록 이런 꼴이 되었지만, 그녀는 신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원망한 건 원수들뿐.

그러니.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내 끔찍한 악의를 용서하소서.

“이곳에 모인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고.”

원수들에게 참혹한 저주를 내리사.

“우리가 가는 길을 이끌어주소서.”

원수들의 발을 절망으로 이끌어주시고.

“우리에게 찬란한 광명을 비추어, 영원한 안식 속에서 거하도록.”

원수들이 고통의 비명 속에서 참혹한 지옥을 맛보게 하옵소서.

“아아…….”

왜일까?

그녀의 기도를 듣는 이들의 눈가에 눈물이 핑 맺혔다.

담담하지만, 알 수 없이 가슴을 진동시키는 기도였다.

마침 찬란한 달빛이 위에 뚫린 창문을 통해 그녀에게 내려앉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성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잠깐, 그런데 저건 추모 기도가 아닌…….”

그때,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쥬웰이 읊는 기도는 추모 기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저건 에스텔레 성녀가 기적을 행사할 때……?’

그런 의문이 사람들 사이에 떠오를 때.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파아아.

쥬웰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처음에 사람들은 빛무리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달빛이 내려 비산한 것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저, 저건?!”

“설마?!”

쥬웰은 여전히 무릎 꿇은 채로 기도를 이어가고 있었다.

“날 가련히 여기신다면, 당신의 축복을 내리사.”

주르륵.

쥬웰의 감은 눈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진실한 눈물.

“부디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말이 끝난 순간.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쥬웰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성력.

오로지 선택받은 성자, 성녀만이 사용 가능하다는 그 기적의 힘이 쥬웰의 몸에서 발현된 것이다!

“……!”

“마, 말도 안 돼!”

경악한 외침이 예배장에 퍼졌다.

쥬웰이 이 힘을 쓸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 그녀의 힘이었기에.

에스텔레는 단순히 선하고 뛰어난 의술을 지녔다고 성녀로 불린 게 아니었다.

바로 이 성력이 그녀를 위대한 성녀로 불리게 한 이유였다.

더구나 그녀의 성력은 ‘특별’했다.

쥬웰의 몸에서 휘몰아칠 듯한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눈이 멀듯 강렬하며 숭고해 보이는 빛이었다.

“저런 강력한 성력이라니?!”

“에스텔레 성녀님 말고 저런 강력한 성력은 들어보지도……!”

경악한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쥬웰은 마지막 기도문을 읊었다.

“당신의 축복이 제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내리리라.”

부디. 원수들에게 참혹한 파멸을.

그 바람과 함께.

파아아아앗!

터질 듯한 빛이 토른 공작의 몸에 내려앉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왈칵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숭고한 빛이었다.

마침 달빛과 함께 웅장한 찬트 소리가 울렸다. 그 숭고한 빛과 함께 토른 공작은 소생하였고, 제국에 새로운 성녀가 탄생했다.

훗날 ‘흑요석(黑曜石)의 성녀’라 불리게 될, 창세 이래 가장 높이 추앙받게 될 성녀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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