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가넷 공작가
Chapter 1-1 쥬웰
에스텔레…… 아니, ‘쥬웰’이 사라진 후.
그녀가 있었던 근처에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이곳입니까, 전하? ‘어둠’이 느껴진 곳이?”
“네, 분명히 느꼈습니다.”
답한 이는 은발에 옅은 녹색 눈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지극히 부드럽고 아름다운 외모. 금속 안경이 지적인 느낌을 주었다.
마치 천상의 천사가 내려온 듯한 남자였다.
은발 남자는 심각히 말했다.
“이 근처에서 거대한 어둠의 출현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은발 남자의 대화 상대인 뚱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둠의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전혀 어둠의 흔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은발 남자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유스넨 대공.
그게 이 은발 남자의 정체였으니까.
놀랍게도 이 은발의 아름다운 남자는 제국의 대법관이자 여섯 공작 가문의 일좌, ‘광휘’의 페리도트 대공가의 가주였다.
페리도트 대공가는 300년간 제국을 지켜온 수호 가문.
그런 페리도트가의 수장이 하는 말이니 그냥 흘려넘길 수 없었다.
“이상하군요. 대공 전하께서 잘못 느끼셨을 리는 없을 텐데요.”
뚱한 인상의 젊은 남자, 대공가의 가신 메디안 백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스넨 대공은 안경을 어루만졌다.
고민이 될 때 그의 습관이었다.
“제 착각이거나, 아니면.”
대공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제 시선을 피할 정도로 강대한 어둠이겠지요.”
메디안 백작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였다.
“그런 어둠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제 착각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신경이 곤두서 예민했던 것 같군요.”
예민.
그 말에 메디안 백작은 무겁게 물었다.
“3년 전, ‘그날’의 일을 아직도 자책하시는 겁니까?”
유스넨 대공은 입을 다물었다.
“……자책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의 입에서 짓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그렇게 죽었는데.”
메디안 백작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에스텔레 성녀가 어둠에 제물로 바쳐지는 걸 못 막은 건 대공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위로는 유스넨 대공의 마음을 달래지 못하였다.
그가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말하였다.
“제가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는지 아십니까?”
“…….”
“무려 10년입니다. 10년 동안 그녀를 만나길 손꼽아 기다려 왔는데. 그런데…….”
유스넨 대공은 성녀인 그녀에게 은혜를 입었던 사람 중 하나이다.
10년 전.
아니, 이제 그녀가 죽은 지 3년이 되었으니, 13년 전.
유스넨 대공이 어린 소년 시절이었다.
에스텔레도 함께 어렸던 그 시절.
유스넨 대공은 어린 성녀 에스텔레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아니, 내가 그녀에게 받은 건 고작 은혜란 말 따위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녀를 떠올린 유스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그녀에게 구원받았다.
목숨과 영혼까지.
구원이란 표현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었다.
에스텔레가 아니었다면 그는 정신이 망가진 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이가 포기할 때, 오로지 그녀만이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참히 망가진 그를 온 정성을 다해 돌보아주었고 결국 그는 상처를 딛고 일어설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약속이야. 꼭 이겨내고 반드시 누나 찾아와야 해. 알았지? 누나랑 한 약속 지키면 선물로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 사줄게.’
어렸던 소년은 그 약속에 의지해 10년간의 참혹한 시련을 이겨냈고, 제국을 수호하는 ‘광휘’의 대공이 될 수 있었다.
오로지 그녀를 다시 만나겠다는 바람 하나만으로.
‘하지만 이미 그녀는 세상에 없었지.’
유스넨은 참혹한 얼굴을 하였다.
“전하.”
수하의 안타까운 부름에 유스넨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감정을 잃었다.
그저 광휘의 대공에게 주어지는 대법관으로서 의무 및 또 다른 사명.
‘어둠’을 처단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어쨌든 혹시 모르는 일이니 앞으로 주의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유스넨 대공은 나직이 말했다.
“제가 방금 느낀 게 착각이 아니라면 세상에 커다란 재앙이 내려온 것일 테니까요.”
“만약 사실이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유스넨 대공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의 허리춤에 걸린 페리도트 대공가의 가보, ‘심판의 검’이 반짝 빛났다.
“처단해야겠지요.”
* * *
에스텔레, 아니, 쥬웰이 된 그녀는 차를 마셨다.
가넷 공작가에 온 지 이제 삼 일째.
그녀는 순조롭게 공작가에 적응하고 있었다.
쥬웰이 어떤 아이였는지 에스텔레 시절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모자란 부분은 얼마 전 별장에서 있었던 사고로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었다고 둘러대었다.
‘그나저나 3년이 지난 상태라고? 내 죽음은 어둠을 막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된, 자발적 순교로 알려져 있고?’
쥬웰은 수집한 정보를 떠올렸다.
당시 그녀는 아주 은밀하게 제물로 바쳐졌다.
그래서 원수들 말고는 누구도 당시의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차를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쨍그랑!
하녀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녀를 시중들던 하녀가 그만 실수를 한 것이다.
방 안 분위기가 싸하게 식었다.
다들 바들바들 떨며 곧 닥칠 일을 두려워했고, 사고를 친 당사자는 이성을 잃고 벌벌 떨며 빌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를……!”
“……괜찮아. 치우고 새 차를 내오도록.”
“제발 살려……! 네?”
하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스텔레, 아니, 쥬웰은 쯧 혀를 찼다.
“괜찮으니 차를 새로 내오라고.”
‘쥬웰, 얘는 평소 아랫사람들에게 어떻게 했길래 다들 이래?’
하녀들은 모두 엉거주춤하였다.
경을 칠 거로 생각했는데 너무 온순한 반응이었다.
쥬웰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해? 차를 새로 내오라고.”
“네, 네! 자비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녀가 마치 목숨이라도 건진 것처럼 감동해서 나간 후,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쥬웰로 살기로 했다고 해서 못된 성격을 그대로 따라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아니,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된다.
그녀가 쥬웰이 된 건 명확한 목표가 있어서였으니까.
‘가넷 공작가를 내 수중에 넣어야 해.’
그녀는 가넷 공작가를 손에 넣고, 그 힘을 이용해 원수들을 처참히 몰락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흠 잡히지 않을 올곧은 모습을 보이는 건 필수였다.
‘그리고 이곳 가넷 공작가에도 내 원수가 한 명 있지.’
쥬웰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곳 가넷 공작가에도 그녀의 원수가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원수의 이름을 읊조렸다.
“가넷 공작가의 가주 대리, 로튼 백작.”
로튼 백작!
정계의 어마어마한 거물이었다.
병석에 누워 있는 노가주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가넷 공작가를 이끄는 인물이며, 제국의 재상으로서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참고로 그는 에스텔레에게 학문을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했다.
한때 그를 존경했지만 돌아온 건 추악한 배신뿐이었다.
‘가넷 공작가를 내 손아귀에 넣고, 원수인 로튼 백작을 철저히 몰락시켜야 해.’
그녀는 첫 번째 복수 대상을 가넷가의 로튼 백작으로 잡았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넷 공작가의 구성도는 이러했다.
가주인 토른 공작.
그리고 둘째 아들이자 가주 대리인 로튼 백작.
셋째 엔리크 자작.
쥬웰은 그 엔리크 자작의 딸이었다.
즉, 그녀는 가주의 손녀였다.
‘귀여움은 받지만 별 실권 없는 손녀이지. 황태자의 약혼녀라 해도 황권이 약해 별달리 의미 있는 건 아니고.’
반면 원수인 로튼 백작은 이미 병석에 누운 공작을 대신해 가주 역할을 하고 있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제국의 재상이자 귀족원의 위원장이었다.
공작의 일개 손녀에 불과할 뿐인 그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만 그녀는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어. 하나하나 무너뜨려 가면 되니까. 즐거운 과정이 되겠어.’
그녀는 상대의 거대함에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했다.
마치 눈앞에 수많은 만찬이 놓여 있는 것처럼.
원수가 많은 것에 감사했다.
그만큼 더욱 많은 좌절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때, 하녀가 다시 돌아와 차를 따랐다.
에스텔레는 다시금 차 맛을 음미했다.
‘그런데.’
에스텔레는 한 가지 거슬리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이름이 뭐지?”
“네?! 네?!”
“이름이 뭐냐고.”
“루, 룬입니다.”
하녀는 벌벌 떨었다.
아까 실수로 자신을 벌주려고 한다고 짐작한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로 물어본 게 아니었다.
“나이와 생일은?”
“……여, 열아홉 살, 열째 달에 스무날입니다.”
하녀는 의아한 얼굴을 했으나, 감히 묻지는 못했다.
“그래, 알았으니 그만 나가보도록.”
하녀는 십년감수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에스텔레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그녀가 이러는 이유는 악마가 사용하는 ‘주시자의 눈’으로 하녀의 ‘운명’을 엿봤기 때문이다.
에스텔레는 가볍게 하녀의 미래를 점쳤다.
포츈 텔러(예언가)는 악마에게 미래를 엿듣는 자.
당연히 그녀도 강력한 점을 칠 수 있었다.
허공에서 한 장의 카드가 떠올랐다.
흉악한 시커먼 손이 비명을 지르는 여인에게 다가오는 카드였다.
“흐음.”
에스텔레는 탁자를 두드렸다.
이 카드의 의미는 간단했다.
저 하녀에게 곧 커다란 비극이 닥칠 거란 뜻이었다. 그것도 주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냄새가 나는데.’
그래, 냄새가 났다.
공작가의 구린 냄새가 말이다.
‘이건 이용할 수 있겠는데.’
공작가의 추악함은 그녀에게는 기회였다.
원수의 목을 죌 기회 말이다.
‘알아봐야겠군.’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았다.
에스텔레는 옅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 *
늦은 밤.
공작저가 고요한 밤에 빠져들었을 때, 에스텔레는 방을 빠져나왔다.
‘달빛이 예쁘네.’
에스텔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게헨나에서 저 달빛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처음 공작저에 왔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몇 시간이나 멍하니 달빛을 봤을 정도였다.
‘모든 게 다 그리웠지.’
하지만 오늘은 달빛을 감상하러 나온 건 아니었다.
에스텔레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조그마한 검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손 안에 스며들었다.
그녀의 명에 따라 무언가를 감시했던 게헨나의 나비였다.
에스텔레는 나비를 소환 해제시키고 발걸음을 옮겼다.
공작저 뒤편에 자리한 울창한 숲이었다.
산책을 즐기는 용도이지만, 공작가의 위세를 보여주듯 굉장히 울창했다.
이런 밤에는 으스스하기 그지없는 곳.
에스텔레는 말없이 깊고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마주했다.
이미 또 다른 인물들이 숲속에 있었다.
두 명.
그런데 야밤에 산책을 나온 이들이 아니었다.
추악하고도 역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흐, 흐흑.”
익숙한 얼굴의 하녀였다.
‘아까 찻잔을 깨뜨렸던 하녀군. 이름이 룬이라고 했나?’
에스텔레는 무심히 생각했다.
그녀가 울음을 흘리고 있었고, 웬 남자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는 뻔했다.
에스텔레는 빤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걸까? 남자는 흠칫 외쳤다.
“누, 누구? 쥬웰?!”
“네, 오라버니.”
오라버니.
남자는 쥬웰의 사촌 오라버니인 해밀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원수인 로튼 백작의 작은 아들이었다.
“네가 여기에는 왜? 어서 돌아가거라!”
“싫은데요?”
“뭐?”
쥬웰은 나무에 기대어 섰다.
“오라버니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해야 하거든.”
‘로튼 백작을 궁지에 몰려면 주변부터 하나하나 팔다리를 잘라내야 하니까. 저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쥬웰은 고민했다.
마치 눈앞에 놓인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궁리하는 것 같은 종류의 고민이었다.
그때, 해밀턴이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술에 잔뜩 취해서일까?
달빛에 비친 쥬웰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저년이 저렇게 아름다웠나?’
원래도 쥬웰은 요정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못된 성질머리 때문에 아름다움이 가렸다.
하지만 얼굴에 깃든 평소의 패악함이 사라지자 그녀의 아름다움이 선명히 보였다.
더구나 무심함이 깃든 눈빛은 도리어 사람을 강렬하게 매혹했다.
해밀턴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충동적으로 말했다.
“네, 네년.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뭐?”
“그렇지 않아도 네년을 어릴 때부터 눈여겨보기는 했었지. 차라리 잘됐어. 이번 기회에 오라버니를 존중하게 해주마.”
쥬웰은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설마?’
술에 취한 해밀턴의 눈빛이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그 추악한 눈빛을 본 순간,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쥬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더니.’
가넷가에 있는 원수 로튼 백작.
에스텔레의 스승이었던 그가 그녀를 배신한 이유는 간단했다.
제자인 그녀를 추행하려다 실패하고는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도 똑같은 짓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어쨌든 고민할 필요 없었네.’
해밀턴의 처리가 결정되었다.
* * *
오래 걸리지 않았다.
쥬웰은 힐끗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커, 커…… 커억…… 컥.”
해밀턴이 쓰러져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손과 발은 모조리 끔찍이 부러져 움직일 수 없었다. 영원히 불구가 될 게 확실한 부상이었다.
거기다 바지는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영영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음. 너무 과했나?’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은 심하게 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게헨나에서는 아주 자비로운 처사인걸.’
만약 억겁의 세월 중 단 하루만이라도.
하루의 형벌을 이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다면, 게헨나의 모든 죄인은 영혼을 열 번이고 팔 것이다.
‘그래도 이곳은 지상이니 앞으로는 조금 주의하는 게 좋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쥬웰은 무릎을 꿇었다.
“오라버니.”
해밀턴이 꿈틀하였다.
그의 눈빛이 공포에 물들었다.
“너, 넌 누…….”
공포에 질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대충 ‘넌 누구냐’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나야 오라버니의 동생 쥬웰이지.”
쥬웰의 말투로 답한 그녀는 설명을 이어갔다.
“이런 힘을 갖게 된 건…… 며칠 전 죽을 위기를 넘겨서라고 하자. 어쨌든 어떻게 할래? 이대로 죽을래?”
“……!”
“선택해. 지금껏 잘못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순순히 죽을지, 아니면 내 노예가 되어 추악하게 삶을 이어갈지.”
해밀턴은 그녀의 직접적 원수는 아니었다.
그래서 쥬웰은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깔끔하게 삶을 마무리할 기회 말이다.
“난 솔직히 오라버니가 지금까지의 잘못을 인정하고 올바른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죽는 걸 권한다는 이야기야.”
이건 그녀가 베푸는 최후의 자비였다.
그녀가 지금 그에게 제시하는 건 아주 끔찍한 권속의 맹약.
차라리 죽음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물론, 죽음 이후도 안식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내 노예가 되면 굉장히 끔찍한 괴로움을 겪게 될 거야. 그러니 신중히 선택해.”
쥬웰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손을 그었다.
뚝. 뚝. 뚝.
핏방울이 해밀턴의 앞으로 떨어졌다.
“만약 비굴하게나마 추한 삶을 이어가고 싶다면 이 피를 마셔.”
이건 권속의 맹약.
이걸 받아들이면 앞으로 해밀턴은 그녀에게 영혼이 종속되어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신중히 선택…….”
하지만 해밀턴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허겁지겁 그녀의 피를 마셨다.
쥬웰은 헛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언령의 말이었다.
“이로써 계약은 성립되었다. 앞으로 너 해밀턴의 영혼은 나, ……에게 영원히 종속되리라.”
그 계약을 증명하듯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땅속에서 돌연 어둠으로 이뤄진 팔이 튀어나온 것이다.
“……!”
해밀턴은 눈을 부릅떴다.
어둠의 팔은 해밀턴의 팔, 다리, 혀로 파고들었다.
그러더니 부러진 해밀턴의 다친 팔다리를 회복시켰다.
“으, 으…… 으.”
해밀턴은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이 어둠이 단순히 몸을 회복시키는 게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 짐작은 맞았다.
해밀턴의 몸에 깃든 어둠은 ‘저주’였다.
쥬웰은 저주가 제대로 걸렸는지 확인했다.
“꿇어봐.”
퍽!
그대로 무릎을 꿇은 해밀턴은 화들짝 놀랐다.
“어, 어떻게? 왜, 왜? 발이 내 마음대로?”
“시끄러워. 조용히.”
“……!”
해밀턴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조용히’라는 말이 나온 순간 어떤 말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제대로 됐네.’
지금 보는 것처럼 어둠이 깃든 신체는 술사의 명령에 복종한다.
이제 해밀턴은 오로지 그녀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말하는 살아 있는 마리오네트가 된 것이다.
“이만 가서 쉬어.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평상시처럼 생활하고.”
해밀턴의 눈동자가 터질 듯 부릅떠졌지만 어떤 말도, 손짓도 못 하고 사라졌다.
이후,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 하녀.’
쥬웰은 한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뒤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하녀, 룬이 생각지 못한 행동을 하였다.
“저, 저도 권속으로 받아주세요, 마녀님!”
“음?”
“은혜를 갚고 싶어요!”
이게 갑자기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더구나 마녀라니?
쥬웰은 머리를 긁적였다.
“넌 내가 누구인지 아니?”
“마, 마녀님 아니신가요? 여섯 공작가를 응징하시려는!”
“…….”
의의로 정확한 짐작이었다.
룬은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마녀님이 아니었다면 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예요. 꼭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권속으로 삼아주세요.”
쥬웰은 주시자의 눈을 통해 룬의 운명이 변했음을 눈치챘다.
‘흐음. 어쩐담.’
권속으로 삼으면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하녀 중에서 자신의 손발이 될 이가 있으면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쥬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거절하겠어.”
“어, 어째서?”
쥬웰은 속으로 답했다.
‘내 권속이 되면 넌 파멸할 테니까.’
그녀가 가려는 길은 끔찍한 나락.
그 끝은 결국 파멸밖에 없다.
해밀턴같이 추악한 놈이면 모를까, 룬처럼 빛나는 영혼을 지닌 이를 그런 끔찍한 길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제발…….”
“그만.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룬은 입을 다물었다.
쥬웰은 옅게 웃었다.
“그래도 고마워. 네 마음에 대한 답례로 선물을 하나 줄게.”
“선물이라면?”
“좋은 기억을 남겨줄게.”
원래 쥬웰은 오늘 룬의 기억을 송두리째 지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이번에 받은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게 된다.
기억은 없어지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영혼에 멍에가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공을 들여 세심히 기억을 조각해 주기로 하였다. 무의식중에라도 멍에가 남지 않게 말이다.
그런데 룬이 또 뜻밖의 말을 하였다.
“마, 마녀님에 관한 기억은 안 지우면 안 되나요?”
“그건 안 돼.”
“그, 그러면 마녀님에 관한 감사한 마음이라도 남겨주세요!”
쥬웰은 잠시 고민했다.
그건 훨씬 더 귀찮은 공을 들여야 했다.
하지만.
“그래, 네 소원을 이루어주마. 편히 잠들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룬의 시야가 검게 변했다.
* * *
제국 황도 북쪽의 고성.
광휘의 페리도트 대공가의 저택.
유스넨 대공은 번뜩 눈을 떴다.
“하아, 하아.”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또 그 꿈.’
유스넨 대공은 항상 에스텔레 꿈을 꾸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는 그녀를 다시 만날 희망을 꿈꾸었고, 그날 이후에는.
그녀가 죽음을 맞는 장면을 꿈꾸었다.
“…….”
뚝.
유스넨 대공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슬픔이 옅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맞았는데 광휘의 대공이든 뭐든 모두 무슨 소용일까?’
‘광휘’의 페리도트 대공가.
천사의 피가 흐르는 가문이었다.
대대로 가주는 천사의 피를 각성한 이가 되었고, 후계자였던 유스넨은 13년 전 각성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그때.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다.
‘저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다니!’
‘죽여야 해!’
‘내 잘못이 아니야…….’
그때의 참사는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텅 빈 눈으로 죽음을 맞으려 할 때 단 한 명, 에스텔레만이 그를 감싸주었다.
그리고 산산이 무너진 그를 돌보고 ‘치유’해 주었다.
이후, 그는 에스텔레를 다시 만나겠다는 희망 하나만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온전히 천사의 피를 각성하게 되었으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되었다.
이제 세상에는 에스텔레가 없었다.
그 사실에 다시금 가슴이 저릿해졌다.
‘당신이 없는데, 이 세상이 무슨 의미일까.’
유스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메디안 백작을 불렀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어둠을 처단하는 광휘의 대공으로서의 사명뿐이었다.
“그날, 출현한 거대한 어둠을 조사한 결과는 나왔습니까?”
“네, 전하. 하나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유스넨 대공은 안경을 낀 채 메디안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메디안 백작의 보고를 들은 유스넨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가넷 공작가?”
“네, 가넷 공작가의 못난이 철부지 쥬웰 영애가 그날 근처에서 사고를 겪었다고 하더군요.”
쥬웰.
그 이름에 유스넨 대공의 얼굴에 옅은 혐오가 스쳐 지나갔다.
‘황태자의 약혼녀인 악독한 그 영애를 말하는 건가?’
유스넨 대공의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때 출현한 어둠과 그 악독한 영애가 상관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이긴 하지만.’
오늘 꾼 에스텔레의 악몽이 준 여운이 가슴에 답답하게 남아서일까?
유스넨 대공은 말했다.
“쥬웰 영애를 한번 확인해 봐야겠군요.”
* * *
며칠간의 시간이 지났다.
가넷 공작저는 이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눈에 띄는 기이한 변화가 있었는데, 쥬웰의 변화였다.
하녀들의 공포 대상이었던 그녀가 어떤 패악도 부리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정말 변하신 건가?’
하녀들은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쥬웰을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정말 이전 같은 패악함이 얼굴에서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차분하고 고요한 느낌만 감돌았다.
완전히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물론 여전히 무섭긴 하지만.’
하녀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만 이전과 무서움의 종류(?)가 달라졌다.
전에는 어떤 해코지를 당할까 무서웠다면, 지금은 알 게 모르게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압도되는 느낌?
‘어쨌든 지금이 훨씬 좋지. 어떤 해코지도, 트집도 잡지 않으시니까.’
심지어 조금은 친절한 것 같기도 하다.
‘제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으셨으면.’
한편, 다소 다른 생각을 하는 하녀가 한 명 있었다.
룬이었다.
그녀는 기억은 잃었지만, 자신의 소원대로 쥬웰을 향한 감사함을 잃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자각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가씨는 원래 착한 분이 아니실까?’
그녀는 가만히 생각했다.
‘원래 상처가 많으셨던 분이잖아. 그러니 이번 사고로 충격을 받으신 후 원래 성품이 나온 것 아닐까?’
물론 전혀 아니었지만, 룬은 이렇게 다짐했다.
‘나, 이제 아가씨를 열심히 섬길 거야.’
그렇게 룬은 쥬웰의 전속 하녀가 되었다.
한편, 쥬웰은 가넷가를 집어삼킬 준비를 차곡차곡하였다.
‘좋아.’
그녀는 옅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오늘인가?’
쥬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없이 깊은 푸르름이 눈에 들어왔다.
원수의 목을 칠 첫발을 내딛기 좋은 날이었다.
‘오늘 저녁 공작가 만찬회. 그때 시작이야.’
가넷가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하고 있으리라.
오늘 만찬회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니, 어떤 ‘기적’이 일어날지.
오늘 밤, 가넷가는 송두리째 뒤집히게 될 것이다. 쥬웰의 뜻에 따라 말이다.
그때 룬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아가씨!”
룬이 다급히 달려왔다.
“엔리크 자작님이 타린 왕국에서 돌아오셨어요!”
엔리크 자작.
쥬웰의 아버지였다.
룬의 착한 눈에 잔뜩 긴장이 담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쥬웰과 엔리크 자작은 지독한 앙숙이었으니까.
서로 증오할 정도로 말이다.
둘이 마주치기만 하면 폭풍이 몰아치니 하녀들 모두 잔뜩 긴장하였다.
하지만 쥬웰은 태연히 반응했다.
“아아, 그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갈 준비를 해주겠니?”
“아가씨?”
쥬웰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지.”
* * *
‘다행히 늦지 않게 왔군.’
사실, 쥬웰은 엔리크 자작을 기다렸다.
그녀의 계획에 엔리크 자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늘 밤 그녀가 기획한 무대에 그녀의 아버지 엔리크 자작은 꼭 필요한 배역이었다.
‘아버지라…….’
쥬웰은 여상히 생각했다.
‘딱히 딸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다행히 엔리크 자작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서로 애틋한 부녀는 아니었다고 하니까.’
애틋하기는.
생전, 쥬웰은 에스텔레에게 아버지 원망을 어마어마하게 털어놓았다.
곤란하게 웃으며 쥬웰을 달래주었던 기억이 선했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쥬웰이 습관처럼 하던 말이었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둘이 사랑 깊은 부녀였으면, 그녀로서도 대하는 게 곤란했을 테니까.
‘난 그를 체스 말로 이용하면 그만이니.’
말 그대로 복수를 이루기 위한 체스 말.
그게 딱 그녀가 생각하는 ‘아버지’ 엔리크 자작의 용도였다.
쥬웰은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제국 최고 권세를 지닌 가문답게 공작저는 크고 넓었다.
건물도 여러 채였다.
한참을 걸어 엔리크 자작의 거처인 별채에 도착했다.
“아니,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별채의 집사는 놀란 얼굴로 쥬웰을 맞았다.
쥬웰과 엔리크 자작은 사이 나쁜 부녀였기에 쥬웰이 먼저 찾아온 게 뜻밖인 듯했다.
“인사를 드리러 왔네. 아버님께 기별하여 줄 수 있겠나?”
“실례지만, 무슨 일로?”
드잡이하러 왔을까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아버지께서 먼 길을 다녀오셨는데 딸이 찾아와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
집사가 뜨악한 눈빛을 보냈다.
넌 누구냐? 하는 눈빛이라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고 이후로 심경이 바뀌어서 말이야. 들여보내 주지 않을 건가?”
“……아, 알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엔리크 자작이 있었다.
‘처음 만나네.’
엔리크 자작은 국외를 돌아다니는 외교 대신이었다.
그래서 에스텔레 시절에도 만날 일이 없었다.
‘쥬웰이랑 신기할 만큼 닮았네.’
어깨까지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흑발에 가넷가 특유의 짙은 적안.
쥬웰의 아버지답게 대단한 외모였다.
단, 쥬웰이 밤의 요정 같다면 아버지인 엔리크 자작은 얼음 조각을 깎아 빚은 듯한 냉미남이었다.
그리고 쥬웰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영혼의 빛.’
쥬웰은 ‘주시자의 눈’을 발현하고는 감탄했다.
그의 영혼에 환한 빛이 보였다.
선한 이들에게만 보이는 찬란한 빛이었다.
쥬웰은 엔리크 자작이 지금껏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눈치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인데?’
쥬웰은 엔리크 자작을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단순히 이용만 할 인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잘못 판단한 건 엔리크 자작의 그릇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
그때,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엔리크 자작이 설핏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쥬웰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하러 찾아뵈었습니다.”
“인사?”
엔리크 자작의 눈에 깃든 의문이 깊어졌다.
“네가? 나에게?”
“…….”
평소 두 부녀 사이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는 한마디였다.
엔리크 자작은 뭐라 이야기하려다가 말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내게 그냥 왔을 리는 없겠지. 분명 또 안 좋은 용건으로 왔을 터. 무슨 용건인지 말하거라.”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쥬웰은 묘한 얼굴을 하였다.
‘딸에 관해서도…… 소문과는 다른데?’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엔리크 자작이 나쁜 아버지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는 딸을 사랑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사랑하지 않으면, 저런 눈으로 볼 리가 없지.’
물론 지금 엔리크 자작의 눈빛에 따뜻함이나 애정이 보인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화만 가득할 뿐이었다.
하지만 저 깊은 곳에 흐릿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딸을 향한 안타까움이었다.
에스텔레 시절, 아버지에게 단 한순간도 부정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도리어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엔리크 자작은 딸을 싫어하지 않았다.
도리어 사랑하니, 못난 딸의 모습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물론 표현하는 방법은 굉장히 서툰 것 같지만.’
쥬웰은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조금 샘이 나는데.’
에스텔레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말이다. 도리어 그날 끔찍한 일에 가담해 그녀를 지옥에 빠뜨렸다.
‘……질투가 나. 뺏을까?’
순간 그런 유혹이 들었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딸로서 사랑을 속삭이면 저 바보같이 우직한 남자는 오래지 않아 마음을 열리라.
그렇게 엔리크 자작을 진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로 만들면,
‘쥬웰’에게도 훌륭한 복수가 되지 않을까?
그런 유혹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엔리크 자작은 죄가 없으니까.’
엔리크 자작의 영혼이 발하는 환한 빛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잘못한 건 ‘쥬웰’이지, 엔리크 자작은 죄가 없었다.
이미 딸을 죽인 것만으로 그에게는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
물론 그녀가 쥬웰을 죽인 건 정당하지만, 엔리크 자작의 입장에서 그녀는 딸의 원수.
그런데 딸의 모습을 하고 거짓 사랑을 속삭이는 건 그의 영혼에 너무 잔혹한 처사였다.
‘차라리 못된 인물이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텐데.’
쥬웰은 혀를 차고는 결정했다.
엔리크 자작과 선을 긋기로.
딱히 서로 사이좋은 부녀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
공작가를 차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체스 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엔리크 자작에게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난 오래 못 살 테니 내가 죽은 후 가주 자리를 넘겨받으면 될 테니까.’
3년.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게헨나의 기준이 아닌, 이곳 지상에서의 기준으로 3년이었다.
영혼이 갈기갈기 찢긴 탓에 어떤 수를 써도 그 이상의 시간은 살 수 없었다.
‘지금도 영혼이 계속 붕괴하고 있으니 최대한으로 잡아 3년이고, 실제로는 훨씬 짧겠지.’
그 안에 복수를 끝내고 엔리크 자작에게 가넷 공작가의 가주 자리를 넘겨주면 충분한 선물이 되리라.
그런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간 잘못은 죄송했습니다. 사과를 드립니다.”
“……뭐?”
엔리크 자작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쥬웰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사고가 있어, 그간의 일을 돌이켜 보았고 많이 반성하였습니다. 지금껏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
엔리크 자작의 짙은 적색 눈이 쥬웰을 살폈다.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을 품는 것 같았다.
‘꿍꿍이…… 가 있긴 하지.’
쥬웰이 이런 사과를 하는 건, 일단 신뢰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이전같이 못난 모습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을 테니. 기본적인 신뢰는 얻어야지.’
너무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엔리크 자작은 한참이나 입을 다물다가 말했다.
“……사고가 있었다고?”
“네, 혼자 폐 저택을 구경하다가 들짐승을 만나 큰일을 겪을 뻔했어요. 다행히 천운이 따라 다치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앞두고 많이 후회하고 반성했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앞으로는 조금 달라진 삶을 살려고 해요.”
엔리크 자작은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쉽게 믿지는 않는 듯했다.
그간 ‘쥬웰’에게 당한 게 많기 때문이리라.
‘뭐, 차차 믿게 만들면 되겠지.’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 몇 마디로 신뢰를 형성하는 건 당연히 무리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지금 중요한 용건은 따로 있으니.’
아주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오늘 저녁, 그녀가 계획하는 단막에서 엔리크 자작은 중요한 배역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아버지께 바라는 게 있어요.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엇이냐?”
엔리크 자작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을 하였다.
딸이 무언가를 얻어내려 앞의 말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슨 기대를 한 거냐.’
엔리크 자작이 실망한 마음을 하는 순간.
쥬웰이 입을 열었다.
“제가 바라는 건…….”
그리고 그녀의 말이 이어지고, 엔리크 자작은 아까와 같은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도저히 생각지 못했던.
그 악독한 ‘쥬웰’이 한 이야기라고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오늘 저녁, 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힘써주세요.”
“……뭐?”
쥬웰은 ‘처연히’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돌아가실 분. 그간 속 썩인 것에 사죄드리고 싶어요.”
할아버지.
노가주이자 제국 최고의 거인 토른 공작.
그에게 마지막 속죄를 하는 것.
그게 쥬웰의 부탁이었다.
* * *
“……왜 그런 부탁을 하는 거지?”
“손녀가 곧 돌아가실 할아버지께 속죄하는 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요?”
쥬웰은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녀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토른 공작을 만나려는 거였다.
‘노가주를 면회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노가주의 상세가 심각해진 터.
의사의 조언에 따라 노가주를 면회하는 건 금지되어 있다.
노가주를 만나려면 가주 대리인 로튼 백작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 오늘 가족 만찬회 때 부탁해 달라는 것이다.
“꼭 부탁드릴게요.”
이후 쥬웰은 돌아갔다.
홀로 남은 엔리크 자작은 깊게 침묵했다.
방금 딸이 남기고 간 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께 사죄하고 싶다고? 무슨 속셈이지?’
엔리크 자작은 순순히 쥬웰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믿기에는 그간 쥬웰이 보여준 패악이 너무 깊게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산속에서 죽음을 앞두고 많이 후회하고 반성했습니다.’
‘……정말인 건가?’
엔리크 자작은 고심했다.
확실히 죽을 위기를 경험했으면 사람이 변하는 것도 가능하긴 했다.
‘분명 변하긴 변했어.’
엔리크 자작은 외교 대신.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난다.
따라서 딸이 어떤 식으로든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착해졌다고? 믿을 수 없어.’
엔리크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딸을 잘 안다.
쥬웰은 쉽게 뉘우칠 아이가 아니었다.
아무리 죽을 위기를 겪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이제 곧 돌아가실 분. 그간 속 썩인 것에 사죄드리고 싶어요.’
그 말을 하던 쥬웰의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뉘우치기라도 한 듯 처연했다.
결국, 엔리크 자작은 말했다.
“……집사를 부르도록.”
이내 집사가 왔고, 그 역시 놀란 얼굴을 하였다.
“아가씨를 모시는 하녀를 불러달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최근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
‘주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내 앞에서만 연극을 한 건지, 정말로 뉘우친 건지.’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쥬웰 곁에 가장 가까이 머물렀던 하녀를 불러주게.”
“네, 알겠습니다.”
집사는 고민했다.
‘최근 아가씨를 가장 가까이 모시던 하녀가?’
쥬웰은 늘 하녀를 거칠게 대해 오래 버티는 이가 적었다.
하지만 최근엔 그녀를 가까이서 모시는 이가 한 명 있었다.
곧 착하게 생긴 한 소녀가 별채에 들어왔다.
“루, 룬이라고 합니다. 자작님을 뵙습니다.”
“그래, 쥬웰에 대해 듣고자 불렀다. 쥬웰이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느냐?”
룬은 앞치마 앞에 모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순간, 룬의 순한 눈에 알 수 없는 결의가 떠올랐다.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 * *
저녁이 되었고, 가족 만찬 시간이 다가왔다.
“아가씨, 기분이 좋아 보여요.”
“응? 아아. 그렇네.”
쥬웰은 순순히 긍정했다.
“기분이 좋아.”
‘드디어 시작이니까.’
가족 만찬.
그곳에서 처음 시작될 것이다.
가넷 가문을 손에 넣을.
동시에 로튼 백작을 추락시킬 계획이.
‘천천히. 나락으로 떨어뜨려야지.’
쥬웰은 절대로 복수를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허무한 복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원수들을 절망의 늪에 빠뜨려, 하나하나 모든 걸 무너뜨리며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그런데 룬이 오해하고는 말했다.
“아가씨, 저도 응원할게요!”
“응?”
“힘내세요!”
‘뭘? 복수를?’
쥬웰은 헛기침하였다.
물론 룬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가씨는 훌륭한 분이시니까요! 만찬회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이실 수 있을 거예요!”
룬이 뭘 응원하는 건지는 곧 알 수 있었다.
만찬장에 들어가니 무시와 경멸의 시선이 쏟아졌다.
‘뭐, 쥬웰의 평소 행태를 보면 당연한 거지.’
쥬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마냥 무시하기 힘든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은 웬일로 얌전하시군요.”
우아한 중년 여성.
란 남작 부인이었다.
공작저의 여성 고용인들을 총괄하는 하녀장이었으며, 동시에 노가주의 병시중을 들고 있었다.
‘토른 공작 정도의 거물이면 병 수발도 평민이 들 수 없는 법이니까.’
토른 공작.
쥬웰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
여섯 공작가의 가주 중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이였다.
그런 토른 공작의 총애를 받아서인지, 란 남작 부인은 종종 안하무인인 태도를 보였다.
지금처럼 말이다.
“늘 오늘 같으시면 좋을 텐데. 아가씨 때문에 노가주님께서 지금도 걱정이 많으시답니다. 아가씨께서는 황후가 되실 분이니 행실에 더욱 각별히…….”
‘흠.’
쥬웰은 대답 대신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곧 죽을 사람이라 그런지 별로 상대하고 싶지가 않네.’
섬뜩한 이야기였다.
주시자의 눈으로 본 건 아니었다.
그 정도의 확정된 미래를 보려면 ‘점’을 쳐야 한다.
그럼에도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오늘 일이 끝나면 그렇게 될 테니까.’
란 남작 부인은 알까?
자신이 오늘 연극의 주연으로 배정되었다는 것을?
참고로, 연극의 장르는 희극이자 비극이었다.
쥬웰을 비롯한 몇몇 이에게는 희극.
란 남작 부인과 원수들에게는 비극.
‘뭐, 억울하진 않겠지. 지금껏 저지른 잘못들이 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대충 넘어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그만하시오, 부인.”
엔리크 자작이었다.
그가 조각 같은 얼굴로 차갑게 란 남작 부인을 쏘아보았다.
“관심은 고마우나 딸아이의 교육은 이 몸이 알아서 하겠소.”
뜻밖의 개입에 란 남작 부인은 당황했다.
하지만 뭐라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녀를 보는 짙은 적안이 깊게 침잠해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남작 부인은 꼬리를 말고 도망쳤고, 쥬웰은 별일이라는 생각을 들었다.
‘엔리크 자작이 웬일이지? 미운 딸, 때려도 자기가 직접 때린다인가?’
어쩌면 자존심 문제일 수도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쥬웰은 그의 딸. 그녀를 모욕하는 건 그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런데 나선 이는 엔리크 자작 혼자만이 아니었다.
“나, 남작 부인이 무례했습니다.”
“……뭐라고요, 공자?”
해밀턴이었다!
그가 잔뜩 겁먹은 눈으로 쥬웰을 곁눈질했다.
“남작 부인께서 주인…… 아, 아니, 쥬웰…… 니…… 에게 사과하는 게 좋겠습니다.”
쥬웰의 눈치를 보고 알아서 충성을 자진 상납하는 거였다.
쥬웰은 실소했다.
‘열심히 해도 거긴 안 고쳐 줄 건데.’
그때 해밀턴은 남자의 중요 부위가 잘린 상태였다. 당연히 영원히 회복시켜 줄 마음 따위 없었다.
어쨌든 해밀턴은 가주 대리의 친아들.
무시할 수 없는 상대라 란 남작 부인은 빨개진 얼굴로 쥬웰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아요.”
쥬웰은 환하게 웃었다.
“절 걱정해서 그런 것이잖아요. 고마워요.”
란 남작 부인의 얼굴이 더더욱 빨개졌다.
쥬웰이 저렇게 반응하자, 그녀만 정말로 나쁜 년이 된 것이다.
그 뒤 만찬이 시작되었다.
제국 최대 공작가답게 나오는 음식은 진귀하고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쥬웰은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훌륭해. 아주. 최고야.’
지상에 온 후 가장 반가운 건 달빛도, 하늘도 아닌 이 음식들이었다.
‘게헨나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으니까.’
허기는 느낀다.
하지만 음식이 없다. 영원히 굶주리는 것이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건, 끔찍하게 역겨운 게헨나의 벌레들뿐이었다.
‘한 방울의 물을 놓고 수천, 수만 명의 죄인이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니까.’
그러니 어떤 음식이든 감사히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먹은 탓일까?
누군가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엔리크 자작이었다.
‘……음. 뭘 보는 거지? 너무 맛있게 먹었나? 그래도 예법에 어긋나게 먹은 것은 아닌데.’
근데 단순히 복스럽게 먹어서 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입을 달싹이는 게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아버지?”
“……아니다.”
“……?”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주인공이 등장했다.
“이런, 늦었구려. 국정 회의가 늦어져서. 다들 즐겁게 시간 보내고 있었나?”
그 음성이 들리는 순간.
쥬웰의 즐거운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람 좋아 보이는 호인.
로튼 백작이었다.
원수 중 한 명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만나는군.’
쥬웰의 가슴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격정하며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소리 없이 웃었다.
‘얼굴도 환하고, 잘 지낸 것 같네.’
잘 지냈을 것이다.
지금 로튼 백작은 에스텔레를 제물로 바친 대가로 악마의 ‘축복’을 받고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으니까.
‘로튼 백작뿐만이 아니지.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쥬웰은 옅게 웃었다.
‘다행이야.’
속으로 읊조렸다.
그녀는 원수들이 잘 지내줘서 도리어 고마웠다.
찬란히 빛나고 있어 기뻤다.
더욱 처절히 짓밟을 수 있을 테니까. 더욱 큰 절망의 비명을 지르게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다른 원수들은 누구일까?’
그녀가 정체를 명확히 아는 원수는 총 여섯 명이었다.
쥬웰.
로튼 백작.
아버지 웰링턴 공작.
언니 플랑드나.
친구 매리엇.
약혼자 라디트.
하지만 그날 인신 공양에 참석한 이들은 그들 여섯 명만이 아니었다.
가면을 쓴 인물이 몇 명 더 있었다.
‘누구인지 일부는 짐작이 가는데, 일부는 모르겠군. 뭐, 복수해 나가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쥬웰은 느긋하게 생각했다.
그때, 마침 로튼 백작이 쥬웰 부녀에게 말을 걸었다.
“엔리크, 오랜만이구나. 타린 왕국은 잘 다녀왔느냐?”
“네, 형님.”
“그렇게 밖에서 고생하지 말고 이제 슬슬 국내에 정착하라니까, 쯧.”
엔리크 자작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가 외교 대신이 된 건 형의 뜻이었으니까.
로튼 백작은 가문 내 경쟁자인 아우가 국내에서 자리를 잡는 걸 원하지 않았다.
즉, 저건 그냥 하는 입에 발린 말이었다.
‘만약 엔리크 자작이 외교 대신이 되지 않았다면 불의의 사고로 살해당했겠지.’
쥬웰은 여상히 생각했다.
로튼 백작은 이번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쥬웰, 너는 볼 때마다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 같구나. 제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황후가 되겠어.”
쥬웰은 싱긋 웃었다.
“감사해요, 백작님.”
“백작이라니, 그냥 백부라고 부르렴. 우리는 한 가족이지 않니?”
로튼 백작은 사람 좋게 웃었고, 쥬웰도 마주 미소 지었다.
‘이전이랑 똑같은 모습이네.’
로튼 백작은 항상 좋은 사람의 모습을 보였다.
겉모습만 보면 그처럼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때 속았지.’
쥬웰은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설마, 그딴 이유로 날 배신하다니.’
쥬웰은 당시의 일을 떠올리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배신자 중 추악하지 않은 이가 없지만 로튼 백작의 추악함은 손에 꼽았다.
그녀를 추행하려다 실패하고 앙심을 품었으니까.
쥬웰은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와 핏빛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아니, 차라리 단순히 추악한 게 나은 건가. 다른 이들은…….’
약혼자.
언니.
아버지.
친구.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끔찍이 학대한 이들.
하지만 그녀가 일평생 사랑하고자 노력했던 이들.
그녀의 끝없는 노력 덕에 잘못을 뉘우치고 그녀를 소중하다고 말해주었지만, 결국 그런 끔찍한 배신을 하였다.
‘그들에 비하면 로튼 백작은 차라리 나을지도.’
아니, 낫나?
끔찍함을 도저히 우열 가릴 수 없어 그녀는 웃었다.
‘괜찮아. 이제는 내 차례니까.’
곧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 뛰었다.
마침, 로튼 백작이 입을 열었다.
“오늘 사실 중요히 할 말이 있소이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만찬장에는 평소와 다르게 공작가의 직계뿐만 아니라 여러 봉신 귀족들도 함께 있었는데, 굉장히 중대한 발표가 있을 거란 의미였다.
“일단 들어오시오, 박사.”
안경을 낀 중년의 인물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토른 공작 전하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주치의 갈턴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로튼 백작이 어떤 발표를 할지 짐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토른 공작 전하의 상세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십니다. 아마…… 이대로라면, 깨어나시기 힘들 것으로 판단됩니다.”
“……!”
봉신들이 놀라 물었다.
“그러면 공작 전하께서는 얼마 정도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이오?”
“아마 일주일도 남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다들 곧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가주의 상태가 안 좋은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차피 로튼 백작이 가주 대리로 수년째 집권해 오고 있으니 큰 소요는 없을 것이다.
‘변하는 건 하나. 로튼 백작이 가넷 공작가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거겠지.’
쥬웰은 가만히 로튼 백작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얼마나 기쁠까?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글쎄.
딱히 주시자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지금 로튼 백작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절로 느껴졌다.
“참으로 비통함을 금할 수 없지만, 공작가를 이끄는 이로서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는 일. 오늘부로 본 백작은 공작위를 승계할 준비를 하겠소.”
공작위 승계!
역시나 그게 본 목적이었다.
당연히 반대 의견은 없었다.
이미 로튼 백작은 가넷 공작가의 지배자였으니까.
토른 공작도 병석에 쓰러지기 전, 로튼 백작을 후계로 지목한 상태였고.
그러니 이 작위 계승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면, 모두 아버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기도로 축복해 주시길 바라오.”
“위대한 빛께서 축복하길.”
만찬회장의 모두가 엄숙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기도가 끝난 후.
뜻밖의 음성이 만찬회장에 울렸다.
“혹시 백부님, 할아버님을 위한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쥬웰이었다.
로튼 백작은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쥬웰 공주님. 무슨 부탁이니?”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찾아뵈어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별다를 것 없는 부탁이었다.
손녀라면 응당 할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뜻밖에 로튼 백작은 곤란한 얼굴을 하였다.
“그건 어려울 것 같구나. 그렇지 않소, 박사?”
“네, 각하. 현재 노가주님의 상태가 지극히 안 좋으신바. 면회는 절대로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쥬웰은 손을 맞잡았다.
“정말 어려울까요?”
“그래, 미안하지만, 마음속으로만…….”
그때 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잠시 뵙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엔리크 자작이었다.
그가 어째서인지 복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쥬웰을 많이 아끼셨습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엔리크, 너…….”
로튼 백작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동생 엔리크 자작은 한 번도 그의 의견에 토 단 적이 없었다.
그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말이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로튼 백작은 거듭 반대하였다.
다소 의아한 모습이었다.
봉신들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쥬웰이 생각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돌아가시기 전, 꼭 지금껏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고 싶었는데…….”
또르르.
쥬웰의 눈동자에 물이 고이더니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
장내가 술렁였다.
처연하면서 동시에 빠져들듯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 쥬웰의 모습은 다 연기였다.
‘눈물 흘리는 거야 간단하지. 원수들 모습을 생각하면 되니까.’
쥬웰은 속으로 비웃음 지었다.
하지만 겉모습은 그야말로 진심으로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라 만찬회장 모두가 탄식을 토했다.
다들 ‘잠시 면회 정도는 괜찮지 않나?’ 생각한 것이다.
그 순간, 또 생각지 않은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저, 저도 쥬웰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해밀턴이었다!
그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로튼 백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님께서는 이전부터 쥬웰을 가장 귀여워하셨으니 분명 기뻐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해밀턴이 그러는 건 진심이 아니었다.
‘으아아! 왜 저절로 이러는 거야!’
바로 쥬웰의 의지.
손, 발, 혀까지 어둠의 저주를 받은 해밀턴은 쥬웰이 명령하면 꼭두각시처럼 그대로 움직이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엔리크 자작이 한마디 하였다.
“제가 아는 아버지라면 아무리 안 좋은 상황이라도 고작 손녀를 만나는 걸 피하지 않으실 거로 생각합니다.”
장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말이 맞았다.
토른 공작은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
그런 이가 아무리 죽어가는 상황이라도 손녀를 피할까?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결국, 로튼 백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겠다. 그러면 잠시만 뵈어야 한단다. 알겠느냐?”
쥬웰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 * *
공작의 방은 공작저 본관 최상층에 있었다.
‘진짜 넓네. 무슨 방이 어지간한 저택만 해?’
비유가 아니라, 한 층의 절반을 방으로 쓰고 있었다.
저택 안에 또 다른 저택이 있는 구조.
방 안을 걸어가는데 엔리크 자작이 조용히 말했다.
“뭔가 말썽을 부리려는 거면 지금 그만두어라.”
엔리크 자작의 눈빛이 낮게 일렁였다.
“만약 허튼짓을 할 속셈이면 이번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아까는 도와주긴 했지만, 역시나 아직 그녀를 믿지는 않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로 할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이니.”
지금 그녀가 하려는 건 토른 공작을 위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쥬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곳입니다. 쥬웰 아가씨만 혼자 들어갔다가 나오십시오.”
넓디넓은 방 안쪽에 또 다른 방이 있었다.
토른 공작이 누워 있는 방이었다.
“하여튼 성가시게.”
란 남작 부인이 낮게 혀를 찼다.
주치의 갈턴도 철부지를 대하듯 말했다.
“전하의 상세가 안 좋으니 최대한 빨리 나오셔야 합니다.”
쥬웰은 어깨를 으쓱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검버섯이 잔뜩 피어오른 노인의 모습을.
토른 공작이었다.
토른 공작을 본 쥬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저게 토른 공작.’
쥬웰은 새삼스럽다는 마음이 들었다.
‘3년 만에 저렇게 되다니.’
에스텔레 시절, 토른 공작과는 안면이 여러 차례 있었다.
사실…… 그녀는 토른 공작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국이 인세의 지옥이 되게 한 장본인.’
쥬웰은 차갑게 생각했다.
원래 라인하르트 제국은 여섯 공작가와 황실이 균형을 맞추어 번영하였다.
하지만 균형의 추는 점점 여섯 공작가로 넘어갔고, 여섯 공작가는 그에 맞춰 썩어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방점을 찍은 게 토른 공작이다.
그의 손에 황실이 무너졌고, 제국은 여섯 공작가의 손에 완전히 넘어갔다.
이후 제국은 인세의 지옥이 되었다.
‘당신은 게헨나에서도 가장 끔찍한 곳에 떨어지겠지.’
주시자의 눈을 통해 보였다.
온갖 악마들이 토른 공작이 죽음을 맞이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존귀했던 그는, 지옥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가 되어 처참한 고통을 받으리라.
벌레만도 못하다 여겼던 거지를 부러워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악한 당신이라도 쓸데가 있지.’
침대로 다가간 쥬웰은 토른 공작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미 운명이 다하긴 했지만…….’
정해진 수명이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수를 써도 살릴 수 없다.
도리어 살리려는 행동이 죽음을 촉발할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운명을 비틀면 돼.’
쥬웰은 토른 공작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저주받길, 악마의 주구여.”
싸늘히 토른 공작을 바라보는 쥬웰의 눈가에 조그만 악마화(惡魔華) 한 송이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당신으로 인해 눈물 흘린 모든 죄 없는 이들의 비통이 당신에게 임하길.”
이건, 강력한 저주의 언령.
토른 공작 때문에 눈물 흘린 이들의 원념이 토른 공작에게 쇄도했다.
그들의 원념 때문에 토른 공작의 운명이 바뀌었다.
이런 명예로운 죽음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에 따라 참혹한 최후를 맞을 운명으로 바뀐 것이다.
간단히 말해, 토른 공작은 코앞에 다가온 정해진 죽음을 유예하였다.
그는 훗날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더욱 끔찍한 최악의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았다고 절규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더 살 수는 있겠지.’
쥬웰은 미리 준비한 단도를 꺼내 토른 공작의 손가락을 그었다.
뚝뚝.
피가 흘렀고, 단도의 날이 그 피를 흡수하더니 기이한 빛을 내었다.
이후 쥬엘은 밖으로 나왔다.
“인사는 충분히 했느냐?”
로튼 백작이 물었다. 어딘지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네, 제가 반가우셨는지 할아버지께서 제게 한마디 말씀을 하셨어요.”
“말씀을?”
로튼 백작은 흠칫하였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니, 분명히 말씀하시던데요?”
쥬웰은 빤히 말했다.
“살고 싶으시다고요.”
“……!”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거북한 얼굴을 하였다.
쥬웰이 장난을 친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일부 안색이 하얘진 사람이 있었다.
갈턴 박사가 곤란하게 말했다.
“영애. 그런 장난은…….”
“장난?”
쥬웰이 웃었다.
그리고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짜아악!
쥬웰이 갈턴 박사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아, 아니!”
“쥬웰!”
엔리크 자작이 대노해 외쳤다.
결국, 사고를 친 것이다!
하지만 쥬웰에게 달려가지는 못했다. 쥬웰이 더욱 끔찍한 일을 한 것이다.
번뜩.
쓰러진 갈턴 박사의 눈앞에 작은 단도를 들이밀었다. 아까 토른 공작의 손가락을 벤 단도였다.
“여, 영애? 가, 갑자기?”
“감히 나에게 장난이라고 했나?”
쥬웰이 싸늘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독에 당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돌팔이 주제에?”
“……!”
장내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특히 로튼 백작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뭐라고? 독이라고?”
“네, 이건 마법 금속으로 만든 단검이에요. 독에 극미량이라도 닿으면 반응하죠. 끝을 보세요.”
토른 공작의 손가락을 벤 부분이었는데, 검게 변해 있었다.
토른 공작의 혈액에 독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할아버지의 상세가 악화하였다는 이야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 보았는데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그녀가 중독 사실을 눈치챈 건,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방금 말한 정황적 의심.
그리고 한 가지 지식 덕분이었다.
‘병에 걸린 것처럼 검버섯을 피어오르게 하는 독이 있지. 워낙 구하기 어려운 독이라 흔히 볼 수는 없지만.’
단, 그 독은 병과 한 가지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귀밑에 푸른 점이 생긴다.
독극물에 전문가가 아닌 한, 아는 이가 극히 드문 지식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런 지식을 어떻게 아느냐고?
‘난 성녀였으니까.’
그녀는 수많은 사람을 살린 성녀였다.
가지고 있는 의술 지식도 어떤 의사보다 깊었다. 사실상 당대 최고의 의학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 공작 전하께서 독이라니?”
장내의 모든 이가 경악에 빠졌다.
어마어마한 사건이 밝혀진 것이다.
“갈턴 박사를 끌어내어 심문하라!”
“아, 아니! 전 모르는 일입니다!”
엔리크 자작이 외쳤고, 갈턴 박사는 울부짖으며 끌려갔다.
“쥬웰…….”
엔리크 자작은 경악한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쥬웰은 심드렁하게 반문했다.
“갈턴 박사만 끌고 가면 안 될 텐데요?”
“뭐?”
“독을 먹인 사람도 끌고 가야죠.”
“……!”
쥬웰은 시선을 돌렸다.
안색이 하얗다 못해 시체처럼 변한 여인에게.
“저 독은 남방의 마리화 꽃에서 추출한 독. 아주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음식에 섞여 먹이지 않으면 저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요.”
쥬웰은 차분히 말하였다.
“더구나 미리 음식에 섞어도 안 되고, 음식을 먹기 직전에 소량씩 조심히 섞어야 저런 효과가 나타나죠. 그래서 거의 쓰는 이가 없는 독이에요.”
모두의 시선이 쥬웰이 바라보고 있는 이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이 저택에 한 명뿐이네요. 안 그런가요, 란 남작 부인?”
쨍그랑!
유리가 깨졌다.
비틀거린 란 남작 부인이 장식물을 깨뜨린 것이다.
“아, 아니! 난! 억울해요! 제발!”
란 남작 부인은 비통히 울며 고개를 저었지만 소용없었다.
기사들이 그녀를 끌고 갔다.
이제 그녀는 진실을 털어놓을 때까지 감옥에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
“…….”
장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모두 경악해 단번에 범인까지 지목한 쥬웰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낸 이답지 않게 쥬웰은 태연한 안색이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저, 가볍게 이렇게 말했다.
“독이라니. 참으로 끔찍한 일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백부님?”
“그, 그래.”
로튼 백작은 앞에 끌려간 이들만큼 하얀 안색으로 답했다.
쥬웰은 설핏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전 이만. 피곤해서 쉬고 싶네요.”
나가기 전.
쥬웰은 주시자의 눈을 발동했다.
로튼 백작을 향해.
주시자의 눈은 악마가 게헨나에 끌고 갈 죄인을 판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영안.
따라서 상대의 영혼이 게헨나에 갈 운명인지, 낙원에 갈 운명인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효능이 있지.’
게헨나에 갈 영혼의 경우, 살면서 지은 커다란 죄악 목록들을 볼 수 있었다.
‘로튼 백작의 경우는…… 목록 한번 화려하네. 역시.’
쥬웰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로튼 백작의 죄악 목록은 끝이 없었다.
부정부패, 강제 추행, 살해 시도, 폭행, 사기 등등…….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수많은 온갖 죄악 목록이 떠오른 후, 이런 문구가 떠올랐다.
[패륜.]
쥬웰은 싸늘하게 웃었다.
토른 공작을 독살하려고 한 배후가 로튼 백작이란 뜻이었다.
* * *
토른 공작 독살 소식에 공작가가 뒤집혔다.
다들 실제 독살을 사주한 이가 누군지 주목했다.
하지만 란 남작 부인은 아무리 심문을 받아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 리가 없겠지. 여는 순간 죽는다는 걸 알 테니.’
쥬웰은 따사로운 정원에서 달콤한 파르페를 먹으며 생각했다.
상큼한 주스에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올리다니. 정말 혁명이었다.
이전 삶도 공작가의 딸이었지만, 이런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그때는 음식에 오물이 섞이지만 않아도 감사했으니까.
‘란 남작 부인은 로튼 백작이 자신을 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게 유일한 살길이니. 버티다 보면 토른 공작이 먼저 죽을 수도 있을 거고. 그러면 잘하면 살아날 수도 있겠지.’
충분히 가능성 큰 계획이었다.
이미 상할 대로 상한 토른 공작이 소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니까.
토른 공작은 이대로 죽을 것이다.
그게 모두의 생각이었다.
‘내가 운명을 비틀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겠지.’
쥬웰은 스푼을 들었다.
딸기 아이스크림과 바닐라 아이스크림 중 뭘 먼저 먹을지 골라야 하는데, 선택은 당연했다.
딸기 아이스크림이었다.
‘딸기 아이스크림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애초에 비교할 수가 없지. 아이스크림은 딸기가 최고야.’
냠 맛있게 입에 집어넣는 순간, 뜻밖의 음성이 들렸다.
“……파르페라니. 입맛이 변했구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