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막 흑막 영애의 탄생
Prologue
1막 가넷 공작가
Chapter 1-1 쥬웰
Chapter 1-2 악마의 기적
2막 위선의 성녀
Chapter 2-1 Saint? Evil? (1)
서막 흑막 영애의 탄생
Prologue
에스텔레는 공작의 사생아였다.
원래는 길거리에서 자라야 할 운명이었지만, 그녀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강력한 성력을 각성했고, 덕분에 공작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말 잘 듣고, 착하게 살아야 한단다.’
어머니는 돈 몇 푼에 공작에게 그녀를 넘기며 신신당부를 하였다.
딱히 딸을 염려한다기보다는 딸이 잘못해 자신이 책잡힐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어쨌든 어머니가 당부한 말에 따라, 에스텔레는 항상 아버지의 말을 따르며 남을 위하는 삶을 살려고 했다.
‘더러운 게.’
‘너한테는 차라리 가축이 먹는 비료가 어울려.’
그러나 공작가의 가족들과 주변 이들에게 모진 괴롭힘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에스텔레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그들도 마음을 열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한 곳에 나섰다.
부패한 공작가의 앞잡이로 사람들에게 몇 번의 돌팔매를 당했는지, 몇 번의 죽음을 넘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주변 이들을 사랑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끔찍한 잘못을 해도 에스텔레는 늘 그들을 용서했다.
열 번이고, 백번이고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들을 사랑하려고 애썼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아버지도, 가족도, 주변 이들도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줄 거라 믿었다.
그런 에스텔레의 노력은 결국 빛을 발했다.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녀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은인으로 여겼다.
가족들도, 주변 이들도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아버지 웰링턴 공작, 언니 플랑드나, 친구 매리엇 등.
그녀에게 잘못하던 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다.
‘미안해, 우리가 잘못했어.’
‘앞으로 넌 우리의 소중한 가족이야. 용서해 줘.’
사과 한 번에 에스텔레는 그들을 모두 용서했다. 그들은 그녀의 소중한 이들이 되었다.
사랑하는 이도 만났다.
라디트.
어린 시절에는 그녀를 경멸했지만, 남들을 위하는 그녀의 모습에 감동해 결국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드디어 행복이 찾아왔다.
하지만 행복은 모두 착각일 뿐이었다.
스물세 살이 되는 날.
그녀는 끔찍한 배신을 당했다.
인신 공양.
일평생 그녀가 사랑하려고 노력해 왔던 이들의 끔찍한 음모에 빠져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다.
성녀는 악마가 탐내는 최고의 먹잇감.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마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된 것이다.
* * *
최후의 순간.
화염에 휩싸인 채 에스텔레는 수많은 목소리를 들었다.
‘천한 핏줄이 섞인 주제에.’
‘주제도 모르는 멍청한 년.’
수많은 비수가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저 말들이 어떤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주의 말을 뱉는 자들이 그녀가 일평생 사랑하고자 노력했던 이들이란 것이 그녀의 심장을 산산조각 내었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약혼자.
그녀의 노력 끝에 마음을 열었던 친구.
지금까지의 잘못을 뉘우치며 그녀를 아낀다고 하였던 언니.
아버지.
등등.
수많은 이가 그녀의 최후를 보며 조소하였다.
그때, 허공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시…… 묻겠다. 제물…… 을 바치겠는가?]
에스텔레는 죽어가는 와중에 소스라치게 떨었다.
그녀의 영혼을 가져가려는 악마의 음성이었다.
‘아, 안 돼……! 제발……!’
그녀는 직감하였다.
저 악마에게 끌려가는 순간,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할지 몰랐다.
에스텔레는 간절히 외쳤으나,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물을 바치겠습니다! 계약을 이루어주십시오!”
잠시 어둠이 일렁였다.
[다…… 시 묻겠다. 이 영혼은 억겁의 세월 동안 영원히 고통받게 될 것이다. 그래도…… 제물로 바치겠는가?]
“바치겠습니다! 대신,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십시오!”
‘안 돼……! 제발……! 제발……!’
에스텔레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으나, 이건 ‘인신 공양’이었다.
그것도 제국을 지배하는 여섯 공작 가문 중 다섯 가문과 마왕급 흑마도사가 협력하여 이루어진 절대적인 의식이었다.
‘제물’로 바쳐진 그녀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에스텔레와 한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희미하게 드러난 눈동자만으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약혼자였다.
‘제발…… 제발. 라디트. 날…… 제발 구해줘. 제발.’
하지만 에스텔레는 나락에 떨어지는 절망을 느껴야 했다.
그녀를 목숨보다 사랑한다고 했던 약혼자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때, 다시금 섬뜩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역시. 너희…… 인간은 우리 악마의 그림자답군. 좋다. 제물을 받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당신에게 요청했던 바는?”
[이 영혼은 창세 이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고결한 영혼. 과분한 제물을 바친바. 너희의 소원은 모두 이루어주겠다.]
그렇게 제국 한구석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끔찍한 인신 공양 의식이 치러졌다.
에스텔레의 영혼은 지옥, ‘게헨나’에 끌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악마가 경고한 억겁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 * *
에스텔레의 영혼은 누구보다도 고결했다.
이토록 고결한 영혼은 창세 이래 처음이라는 악마의 말처럼, 그녀의 영혼은 게헨나 악마들의 마음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원래 추악한 악마들은 역설적으로 고결하고 빛나는 영혼을 갈망하니까.
악마들은 모두 에스텔레에게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인간이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악마들에게 사랑은 끔찍한 악의(惡意).
그들은 에스텔레의 고결하고 빛나는 영혼을 더욱 혹독하고 끔찍하게 짓밟고 망가뜨리고자 했다.
그게 악마들의 사랑 방식이었으니까.
그렇게 무려 600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옥, ‘게헨나’의 성.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방 한가운데 한 여인이 쇠사슬에 매달려 있었다.
여인 앞에서 한 악마가 나직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에스텔레. 사랑하는 에스텔레. 빛나는 별. 사랑받는 별.]
고저 없는 노래가 섬뜩했다.
악마는 마치 예술품을 만드는 장인처럼 여인, 에스텔레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에스텔레. 사랑하는 에스텔레. 빛나는 별. 사랑받는 별.]
째각. 째각.
시계의 초침이 끝없이 흘렀다.
악마는 영원의 세월을 사는 존재.
그들에게 시간은 무한하다.
한번 사랑에 빠지면 느긋하게 끝없는 ‘애정’을 줄 수 있었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지난 후.
에스텔레 앞에 있던 악마는 손을 내려놓았다.
[이제 그만하자꾸나.]
에스텔레의 영혼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또…… 어떤?’
지금껏 600년 동안.
그녀는 온갖 종류의 고통을 받아왔다.
앞으로 또 어떤 참혹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웠다.
‘이제 그만. 제발…… 제발……!’
그녀는 울부짖었지만, 알고 있었다.
악마의 말과 다르게 끝은 없다는 것을.
지옥, 게헨나는 지상에서 죄를 저지른 죄인이 억겁의 고통에 떨어지는 곳이니까.
안식이란 없었다.
‘내가…… 내가…… 왜 이런 고통을?’
에스텔레는 게헨나에서 고통받는 다른 죄인들과 다르게 지상에서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고통을 받는 이유는 단 하나.
원수들 때문이었다.
‘도대체…… 난 언제까지…… 이런 고통을?’
그런데 악마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아서 정말 그만해야겠어.]
“……?”
[네 영혼. 이제 곧 사라진다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녀의 영혼이 곧 소멸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게헨나에서 지난 600년의 세월 동안 받은 고통 때문이었다.
[조금 섬세히 다루었어야 했는데.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우리가 널 지나치게 심하게 다루었나 봐.]
영혼의 내구에도 한계가 있다.
보통 게헨나에 떨어진 죄인들의 영혼은 짧으면 5천 년. 길면 1만 년의 세월 동안 고통받은 후 소멸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남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영혼이었음에도 600년 만에 소멸 직전에 이른 것이다.
‘소멸…… 되어도 괴로운 건 똑같잖아.’
에스텔레는 탄식했다.
영혼의 소멸은 끝이 아니었다.
자아와 존재조차 없어진 채 게헨나의 일부가 되어 끝없는 고통을 영원히 이어 가게 된다.
[어쩌지. 우리는 너를 놔주기 싫은데.]
악마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말했다.
[너처럼 사랑스럽고 찬란히 빛나는 영혼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텐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악마는 에스텔레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처음 게헨나에 왔을 때처럼 찬란히 빛나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희미하게 빛나는 부분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지옥에 떨어진 그녀의 영혼은 저 밑바닥에서 끝없이 추락하고, 깨부숴졌다.
그런데도 아직도 빛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악마를 매혹시킬 정도로 찬란한 빛이.
[저 빛을 꺼뜨리고 싶은데. 어떻게든. 어쩌지? 어쩌지?]
악마는 안달이 났지만, 더는 손을 대지 못했다.
정말 더 손을 댔다가는 그녀의 영혼은 곧바로 소멸할 것이다.
그때, 악마는 번뜩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에스텔레, 너는 우리를 원망하니?]
에스텔레는 텅 빈 눈을 들었다.
이제 그녀의 눈은 과거처럼 빛나지 않았다.
“……아니.”
처음엔 악마들을 원망했다.
하지만 악마들의 본질을 깨닫고 원망이 의미 없음을 깨달았다.
악마들은 ‘악’의 근원이었다.
굶주린 늑대가 눈앞의 먹이를 먹듯, 저들에게는 이런 악의가 그저 당연한 행동이었다.
‘굶주린 맹수의 우리에 빠졌다고, 맹수를 원망할 수는 없으니까.’
원망할 건 그녀를 이 고통에 떨어뜨린 이들이었다.
‘……절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순간, 에스텔레의 눈에 짙은 어둠이 깃들었다.
악마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이런 에스텔레, 사랑스러운 너는 이곳에서 이토록 고통받는데 널 배신한 이들은 참으로 행복하구나. 한번 볼래?]
참고로 게헨나는 인계와 시간 축이 어긋나 게헨나에서 흐른 시간은 인계와 전혀 다르다.
파앗.
그녀의 앞에 여러 영상이 떠올랐다.
‘아.’
에스텔레는 신음을 흘렸다.
600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이들.
바로 그녀를 이 지옥에 빠뜨린 원수들의 모습이었다.
[다들 널 제물로 바쳐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 여기 이 잘생긴 남자는 네 약혼자였지? 새로운 피앙세를 만나 행복한 결혼 준비를 하고 있네. 아, 새 신부는 네 가장 소중했던 친구 매리엇이야.]
에스텔레의 영혼이 떨렸다.
[여기는 네 언니야. 다행히 언니도 행복해 보이지? 아기도 임신했어. 아기 이름은 에스텔레로 짓기로 했대. 널 기리는 마음으로.]
“……그만.”
하지만 악마는 멈추지 않았다.
[네 아버지도 다행히 행복해 보이네. 원래도 너를 사랑하진 않았지만, 넌 그래도 효심 깊은 딸이었잖아. 다들 널 제물로 바친 덕에 우리의 축복을 잔뜩 받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
“그만! 제발! 아아아아악!”
에스텔레가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방이 쩌렁쩌렁 울렸다.
악마는 에스텔레 영혼의 찬란한 빛이 꺼질 듯 일렁이는 걸 보며 몸을 떨었다.
악마는 저 찬란한 빛이 줄어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이윽고 악마가 말했다.
[복수할래?]
“…….”
에스텔레가 검게 물든 눈으로 악마를 바라보았다.
[네가 원한다면, 저들이 가장 찬란히 빛나는 순간으로 보내줄게. 어때?]
“……어째서?”
악마는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이유?]
악마는 싱긋 웃었다.
간단했다.
-너의 빛이 완전히 꺼지길 바라니까.
하지만 그런 말 대신 이렇게 말하였다. 마치 유혹하듯.
[저들을 짓밟고 절망 속에서 죽게 하는 거야.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지 않아?]
에스텔레는 부정할 수 없었다.
지옥에서의 600년간.
단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그들에게 처절히 복수하는 상상을 하였으니까.
[어차피 네 영혼은 이제 곧 소멸해. 길어봐야 인간 세상의 기준으로 3년이야. 마지막 순간, 원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악마는 부드럽게 말했다.
[말해. 그들에게 복수하길 원한다고. 그러면 그들이 가장 찬란히 빛나는 순간에 맞추어 그들의 곁으로 보내주겠어.]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애초에 고민할 일조차 아니었다.
“……원해.”
악마는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뭐라고? 안 들리는데?]
“……원해.”
에스텔레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그들의 죽음을. 고통을. 절망을. 비명을. 다 원해.”
목소리는 낮지만, 더욱 섬뜩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마치 소리 없이 울부짖는 듯했다.
악마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언령의 말이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에스텔레, 너에게 축복을 내리니, 너의 바람은 모두 이루어지리라.]
악마는 마지막으로 어딘지 짓궂게 말했다.
[일어나면, 특별한 선물을 하나 줄게. 네가 가장 바라던 선물이니 부디 최대한 행복하게 즐기길.]
* * *
에스텔레는 눈을 떴다.
허름한 가구들이 보였다.
어떤 방 안의 모습이었다.
정말 지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에스텔레는 방 안을 살폈다.
‘저택? 그리고…… 원래 에스텔레의 몸?’
에스텔레는 방 안에 있는 낡은 거울에 몸을 비추어 보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그녀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닮았을 뿐 다른 인물이야.’
쌍둥이로 착각할 만큼 닮긴 했지만, 이전 자신과는 다른 이의 몸이었다.
‘왜 이런 몸에 들어오게 한 거지? 구태여?’
‘악마’가 한 일이다.
분명, 어떤 추악한 의도가 섞여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기는?’
원래 그녀가 살던 가문의 저택은 아니었다.
관리가 전혀 안 된 걸 보니, 주인이 없는 폐저택이나 별장으로 보였다.
제국 수도 인근에는 주인을 잃고 비어 있는 별장이 종종 있었으니까.
‘보통 이런 곳은 귀족들이 은밀한 범죄를 저지를 때 이용하는데.’
왠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어 인상을 찌푸리는데, 갑자기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릉.
방의 열린 문으로 늑대형 마수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수? 시작부터.’
에스텔레가 인상을 찌푸릴 때, 마수의 뒤를 따라 한 남자와 소녀가 따라 들어왔다.
소녀가 입꼬리를 뒤틀며 말했다.
“재수 없는 얼굴을 지닌 것. 내가 진즉부터 널 잡아 죽일 기회를 노렸지.”
이제 십 대 후반?
놀랍도록 아름다운 흑발의 소녀였다. 석류처럼 짙은 적안이 깊게 반짝였다.
어떤 보석도 빛을 잃을 것 같은 빼어난 아름다움. 마치 밤의 요정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튀어나오는 말과 표정은 흉악했다.
“그때, 에스텔레, 그년이 죽은 것처럼 오늘 너도 마수의 밥이 될 거야.”
에스텔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만큼 커다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쥬웰…… 드 가넷?’
쥬웰.
라인하르트 제국을 지배하는 여섯 공작 가문 중 하나인 가넷 공작가의 금지옥엽 영애였다.
생전, 그녀를 친언니처럼 따르던 동생.
그리고 ‘그날’ 그녀를 음모에 빠뜨려 악마에게 제물로 바친 원수 중 하나였다.
‘하.’
에스텔레는 웃음을 흘렸다.
‘선물이 이런 의미였군.’
악마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일어나면, 특별한 선물을 하나 줄게.]
원수 중 하나를 곧바로 마주하게 해준 것이다.
‘생각보다…… 흥분하거나 떨리지는 않네.’
원수를 만났지만, 에스텔레의 가슴은 차분했다.
격정도 마음이 온전해야 느낄 수 있다.
지난 600년 동안 찢기고 산산이 부서진 마음과 정신은 잔뜩 뒤틀리고 망가져, 격정 같은 순수한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다.
대신, 잔잔한 호수에 무거운 한 방울의 핏방울이 떨어진 듯.
분노가 더욱 깊이 침잠하여 쥬웰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그런 에스텔레의 눈빛에 쥬웰은 순간 움찔하였다.
쥬웰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에스텔레가 깃든 몸의 눈빛이 변하였다.
방금만 해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마치 텅 빈 무저갱이 들어찬 듯했다.
“너, 너! 감히! 그딴 눈빛은 뭐야!”
쥬웰은 옆에 동행한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에게 외쳤다.
“저년을 당장 죽여! 어서!”
“알겠습니다.”
검은 로브의 인물이 늑대 마수를 소환한 것 같았다.
‘흑마도사인가?’
에스텔레는 피식 웃었다.
흑마도사.
악마와 계약을 맺고 어둠의 힘을 사역하는 이들이었다.
‘고작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을 가졌다고 흑마도사를 동원해 죽이려고 해?’
쥬웰이 저러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지금 이 몸이 에스텔레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죽이려는 것이다.
‘원래 귀족들. 특히 여섯 공작가의 인물들이 평민을 사람으로 취급 안 하긴 했지만. 심하군.’
그때, 흑마도사가 거칠게 주문을 외웠다.
“나 어둠의 종속자가 명하노니, 당장 눈앞의 먹이를 산산이 찢어발겨라!”
크르릉!
늑대 마수가 에스텔레에게 거칠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에스텔레는 반응하지 않았다.
두려움에 질리지도, 피하지도, 반격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저 가만히 마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향하는 순간.
마수가 덜컥 멈추어 섰다.
“……!”
흑마도사는 당황해 외쳤다.
“무엇하느냐! 어서 상대를……!”
하지만 더욱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늑대 마수가 끼잉 신음을 흘리며 뒷걸음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어, 어째서?”
에스텔레는 천천히 늑대 마수에게 다가가 마수의 뺨을 쓸어주었다.
“어둠은 더 거대한 어둠에 순종하는 법이니까. 감히 나를 건들기는 어렵겠지.”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게…….”
에스텔레는 말을 고민했다.
“너 따위보다는 내가 더 커다란 어둠이란 거지.”
에스텔레의 관자놀이에서 문신처럼 한 송이 검은 꽃이 피어올랐다.
“……!”
“비교도 할 수 없게 말이야.”
악마의 가장 커다란 총애를 받는 흑마도사만이 받는다는 낙인, ‘악마화(惡魔華, Flower of Devil)’였다.
흑마도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심지어 한 송이가 아니었다.
줄기와 가지가 뻗어 나왔고, 얼굴 전체로 악마의 꽃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목으로, 몸 전체로.
그 어마어마한 악마화의 숫자에 흑마도사는 벌벌 전신을 떨었다.
“마, 말도 안 돼! 저건 마왕급……! 아니, 마왕도 저 정도 숫자의 악마화는? 도, 도대체!”
에스텔레가 웃었다.
웃는 법을 잊었지만, 지금은 웃어야 할 것 같아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반가워, 쥬웰. 보고 싶었어. 정말 많이.”
[네가 가장 바라던 선물이니 부디 최대한 행복하게 즐기길.]
아아.
에스텔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최고의 선물이었다.
아름다운 흑발의 소녀, 쥬웰은 공포에 질려 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이미 늦었다.
시커먼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 * *
흑마법은 악마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악마의 큰 사랑을 받을수록 더욱더 커다란 힘을 사역할 수 있었다.
에스텔레는 창세 이래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악마의 사랑을 받은 이였다.
당연히 손발을 다루듯 흑마법을 쓸 수 있었다.
“아…… 아…….”
쥬웰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몸을 게헨나에서 소환된 어둠이 감싸고 있었다.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저주의 어둠이었다.
그 때문에 쥬웰은 죽음을 맞지도 못하고,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에스텔레가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제발…….”
살려달라는 걸까?
아니면, 차라리 죽여달라는 걸까?
쥬웰은 고통 속에서 끝없이 빌었지만 에스텔레는 무심한 눈빛을 할 뿐이었다.
‘생각보다 후련하지 않네.’
에스텔레는 속으로 생각했다.
게헨나에서 고통받을 때 이 순간을 끝없이 상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단한 감흥은 없었다.
‘왜일까?’
에스텔레는 고민하다가 부드럽게 물었다.
“힘드니?”
쥬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제 고작 30분이 지났을 뿐이야. 그런데 힘들어?”
난 너희 때문에 600년이나 고통당해야 했는데, 고작?
“제, 제발 살려…….”
“내가 왜?”
에스텔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널 살려줘?”
쥬웰의 눈이 절망에 빠졌다.
에스텔레는 나긋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난 너를 살려주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 잘 볼래? 누가 떠오르는지?”
에스텔레는 기억을 돌이켜 따뜻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성녀 시절 때처럼.
사악한 마기에 휩싸인 채 숭고하게 웃는 모습은 기괴하기 그지없었지만, 쥬웰은 벼락 맞은 듯한 얼굴을 하였다.
깨달은 것이다.
눈앞의 이가 누구인지.
“서, 설마! 어, 어떻게?”
에스텔레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왜 너를 살려주지 못하는지는 이해했지? 그러면 선택해. 아주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할지, 이만 깔끔한 죽음을 맞이할지.”
쥬웰은 절망에 빠졌다.
믿을 수 없었지만, 눈앞의 여인이 그녀가 짐작하는 이가 맞는다면 자신을 순순히 놓아줄 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에스텔레는 조곤조곤 말했다.
“만약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면 네 몸을 내게 바쳐. 그러면 널 바로 고요한 안식으로 이끌어줄게.”
“……!”
쥬웰은 눈을 크게 떴다.
에스텔레의 속마음을 눈치챈 것이다.
“내, 내 몸을 바치라는 거는?”
“그래, 나는 이제 네가 될 거야.”
“……!”
“제국 제일 가문인 가넷 공작가의 못난이 철부지 금지옥엽이자, 황태자의 약혼녀인 네가.”
가넷 공작가.
제국을 지배하는 여섯 공작 가문 중에서도 수좌로 꼽는 제국 최고의 가문이었다.
그런 곳의 금지옥엽인 쥬웰이 된다면 앞으로의 복수도 수월하리라.
‘사실 지금도 원수들의 목숨을 뺏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그건 너무 허무해.’
에스텔레는 생각했다.
고작 목숨을 뺏는 복수는 너무 허무했다.
지금 쥬웰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어떤 감흥도 들지 않듯.
‘그런 허무한 복수를 하려고 게헨나에서 돌아온 게 아니야.’
그녀는 더욱 커다란 복수를 바랐다.
‘원수들이 가진 모든 걸 뺏고 짓밟아 몰락시키겠어. 나락에 떨어뜨린 후 처절한 절망과 고통 속에서 최악의 최후를 맞게 해주겠어.’
그러려면 제국 최고 권세가인 가넷 공작가의 힘을 손에 넣는 게 필요했다.
에스텔레는 말했다.
“자, 결심이 서면 이야기해. 결심이 늦어질수록 고통은 길어질 거야. 누군가 찾아올 거란 희망은 갖지 마. 지금 이곳은 내가 친 결계로 외부와 유리되어 있으니.”
쥬웰의 눈동자가 끝없이 흔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일까?
고통 속에서 더는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쥬웰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 내 몸을 바치…… 겠으니…… 제발 날 죽여줘.”
에스텔레는 무감정하게 되물었다.
“다시 묻노니, 진심으로 원하는가?”
쥬웰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건 언령.
악마들의 계약 언어였다.
“……지, 진심으로 원해.”
에스텔레는 차갑게 웃으며 ‘선언’했다.
“너의 바람을 들었으니, 이 순간 계약은 이루어졌다. 너는 안식을 얻을 것이다.”
에스텔레의 영혼이 쥬웰의 몸으로 들어갔다.
원래 에스텔레가 깃들었던 몸은 불에 타 사라졌고, 쥬웰의 영혼은.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저런.”
에스텔레는 중얼거렸다.
“게헨나에 떨어졌네.”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악마들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게 들려왔다.
‘거짓말은 안 했다고. 게헨나에 간 건, 네가 살면서 쌓은 죄 때문이니.’
그녀는 마기의 흔적을 지운 후 결계를 해제했다.
그러자 곧 근처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이곳에 계십니까?!”
가넷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쥬웰은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는 걸 숨기려고 호위 기사들을 멀찍이 따돌리고 몰래 홀로 이 폐저택에 왔다.
기사들은 약속된 장소에서 쥬웰을 기다리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자 탐색에 나선 것이다.
“아…… 버려진 저택이 있어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사고가 일어났어요. 드, 들짐승이 나타나서…… 흐윽.”
“들짐승이?! 괜찮으십니까!”
“네……. 다행히 절 해치지 않고 사라졌는데, 너, 너무 무서웠어요. 흐윽.”
에스텔레는, 쥬웰이 되어 몸을 떨었다.
그녀가 사용한 흑마법은 신체 강탈.
신체에 새겨진 이전 주인의 행동 습관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역시 저희가 모셨어야 했는데! 저희를 죽여주십시오!”
“당장 가넷 공작가로 모시겠습니다!”
기사들은 안색이 하얗게 되어 그녀를 둘러쌌고 에스텔레, 아니, 쥬웰은 지그시 웃었다.
‘이제 시작이야.’
앞으로 그녀는 쥬웰이 되어 제국 최고의 가문인 가넷 공작가를 손에 넣을 것이다.
왜?
원수들이 가진 모든 걸 무너뜨리고 나락에 떨어뜨리기 위해서.
그녀는 원수들을 떠올렸다.
아버지 웰링턴 공작, 언니 플랑드나.
친구 매리엇, 약혼자 라디트 등.
원수들은 제국을 지배하는 여섯 공작 가문 중 다섯 가문에 골고루 퍼져 있다.
심지어 지금 그녀가 깃든 쥬웰의 가문인 가넷 공작가에도 원수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러니 제국 최고의 가문, 가넷 공작가를 손에 넣고 그 힘을 이용해 원수들을 최악의 밑바닥으로 몰락시켜 끔찍하고 처절한 최후를 맞게 할 것이다.
두근.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뛰어 그녀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악마가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원수들은 너를 제물로 삼아 빛나는 삶을 살고 있어.]
이제 그녀가 그들을 지옥에 떨어뜨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