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연회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칼리반 백작은 기분이 저조했다.
레오나 때문이었다.
“레오나가 백작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연회에서 레오나는 누구보다 빛나 보였다. 황족은 물론 많은 귀족이 레오나를 칭송했다.
“황실을 지킨 구국의 영웅이라고?”
황제는 황실과 제국을 지킨 레오나에게 훈장을 내리고 작위와 막대한 재산까지 내렸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레오나가 훨씬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
“후우.”
깊게 심호흡한 칼리반 백작은 설렁줄을 당겨 집사를 호출했다.
“당장 가서 로임 자작을 불러와라.”
잠시 후, 로임 자작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네는 알고 있었지?”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칼리반 백작이 화를 삭이며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레오나 말이야.”
로임 자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제 와 아쉽기라도 하십니까?”
아쉽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레오나가 그렇게 승승장구할 줄 알았다면, 호적을 정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날 탓하는 것인가?”
“우스워서 그럽니다.”
“뭐라?”
“가문의 수치라고 손수 아가씨를 호적에서 정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이제 와서 핏줄이라고 내세워 보려 하심입니까?”
칼리반 백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미 물 건너간 일입니다. 아가씨께서는 백작가를 버리셨으니까요.”
칼리반 백작이 으르렁거렸다.
“자넨 다 알고 있었군. 그 아이가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로임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로임 자작은 레오나가 독립을 원하였을 때의 표정을 떠올렸다.
미련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도 흔쾌히 도와주었다.
가문의 아집에 사로잡혀 시들어 가는 것보다, 그게 훨씬 그녀에게 나은 선택이니까.
“참으로 대견하시지 않습니까.”
로임 자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가문의 수치라 불리며, 조롱을 받았던 레오나가 가문에서 독립해 자수성가하였으니, 얼마나 대견한가.
칼리반 백작은 로임 자작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레오나를 내보낸 것은 그의 말마따나 자신이었고, 자신의 손으로 호적도 정리하였다.
레오나의 미래를 보지 않았던 것이다. 레오나가 전무후무한 신성력을 가진 기사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제 복을 제가 걷어찬 셈이었다.
“다시 돌아오지는 않겠지…….”
“꿈 깨시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칼리반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나가보게.”
로임 자작이 나가고, 칼리반 백작은 장식장으로 걸어가 술 한 병을 꺼내 마개를 열고 벌컥벌컥 마셨다.
도저히 술을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너무나 배가 아파서.
제 손으로 버린 주제에 말이다.
레오나는 이제 칼리반 백작가를 웃도는 막대한 자산가가 되었다.
손을 내민다고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입맛이 썼다.
* * *
리리엘은 죽을 맛이었다.
칼리반 백작이 연회에 다녀온 이후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엄해졌기 때문이다.
“그 자세로 가전 검술을 마스터할 수 있겠느냐! 누구는 혼자서도 재능을 꽃피워 작위까지 따냈는데 넌 어찌 그 모양이야!”
리리엘은 그 누군가가 레오나를 지칭한다는 걸 깨달았다.
사교계에선 연일 레오나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제국을 공포에 물들였던 흑마법사를 물리치고, 황실을 구한 영웅.
위대한 신성 검사.
온통 난리였다.
연회에서 레오나가 입고 나온 드레스와 장신구는 팔지 못해서 난리였다.
제도는 레오나의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인기리에 팔리고 있었다.
구국의 영웅, 신성한 빛의 영웅.
거의 신화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시 검을 잡아라.”
리리엘은 이를 악물고 가전 검술을 익혔다.
“힘을 좀 더 빼고.”
칼리반 백작의 목검이 리리엘의 무릎을 쳤다.
“무릎을 좀 더 굽혀.”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였다. 동작을 반복할 때마다 칼리반 백작은 리리엘과 레오나를 비교했다.
어린 시절 레오나와 리리엘을 비교했던 것처럼, 이제는 리리엘과 레오나를 비교하고 있었다.
리리엘은 청기사단에 입단했지만, 백기사단에 입단한 레오나보다 못한 처지였다.
레오나는 단기간에 정예기사가 되었고, 공을 세워 작위까지 받은 반면, 그녀는 아직도 준기사의 신분이었다.
게다가 가전 검술을 익히는 것도 버거웠다.
사교계에 나가도 귀부인들이 레오나와 리리엘을 비교했다.
‘레오나 경이, 칼리반 백작가의 장녀였다면서요?’
‘칼리반 백작은 참 아쉽겠어요. 그렇게 훌륭한 따님을 내보내다니.’
‘듣자 하나, 레오나 경은 황실의 신임도 두텁다고 하더라고요.’
‘왜 아니겠어요. 흑마법사였던 비비안 황녀를 몰아내 황실을 지켜주었는데 저라도 고맙다고 절을 하겠어요.’
황녀였던 비비안이 흑마법사가 되어 제국을 수렁에 빠뜨릴 뻔하였다는 사실은 아직도 충격적인 이야기로 통했다.
레오나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제국이 비비안 황녀의 손에 놀아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딜 가나 레오나에 대한 이야기만 들려왔다.
리리엘은 너무나 분했다.
레오나의 뛰어난 능력을 두 눈으로 목격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가문의 수치였던 레오나가 영웅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칼리반 백작이 아쉬워하는 게 이해가 되었다.
* * *
저택 안 서재에서 일을 보고 있던 레오나는 뜻밖에 초대장에 눈길을 주었다.
초대장은 칼리반 백작가에서 온 것이었다.
칼리반 백작이 만나고 싶다며, 만남을 요구한 것이다.
지금까지 소식 하나 없다가, 이제 와서 만나자고 하다니, 의도가 뻔했다.
레오나는 초대장을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칼리반 백작가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휴버트가 들어왔다.
“백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칼리반 백작가에서 로임 자작님께서 만나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려, 곧 갈게.”
“예, 백작님.”
레오나는 대충 서류를 정리하고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 들어서니 오랜만에 보는 노신사가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아니, 이제는 백작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오랜만이에요, 자작.”
로임 자작은 레오나가 칼리반 백작가에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훌륭하게 성공하신 모습을 보니, 제가 잘했단 생각이 드는군요.”
“자작에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자작 덕분에 어머니의 유산을 챙길 수가 있었으니까요.”
“보기 좋습니다. 그리고 백작님께서 많이 아쉬워하고 계십니다.”
레오나는 피식 웃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자신이 성공하면 제일 먼저 배 아파할 사람이 칼리반 백작이란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돌아와 달라고 자작을 보낸 거예요?”
로임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에 백작님 얼굴 한 번 보려고 온 겁니다.”
레오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향에 내려가요?”
“예, 저도 이제 늙었으니까요. 쉴 때도 되었지요.”
“아버지가 많이 아쉬워하시겠네요.”
“글쎄요.”
칼리반 백작은 그런 것에 아쉬워할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양반이었으니까.
사직서를 냈더니, 칼리반 백작은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사직서를 수리해 주었다.
칼리반 백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제 더 승승장구하실 일만 남으셨군요.”
레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지금으로도 충분해요. 이미 분에 넘칠 만큼 받았거든요.”
비비안 황녀의 일로 황실에서는 그녀에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을 주었다.
덕분에 일만 엄청 늘었다.
“언제 또 뵐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건강하십시오.”
“벌써 가려고요?”
“가야지요. 바쁘신 분의 시간을 오래 빼앗을 수가 있습니까.”
로임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오시지 마십시오.”
“그래도 배웅은 해주고 싶어요.”
레오나는 로임 자작을 배웅하였다.
뒤돌아가는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지만, 홀가분해 보이기도 하였다.
* * *
레오나는 보름간에 포상휴가를 마치고 오랜만에 황궁으로 출근하였다.
연회 직후 황제는 레오나에게 수고했다며, 휴가를 주었다.
덕분에 레오나는 오랜만에 미뤄 두었던 일을 볼 수 있었고, 휴식도 취할 수 있었다.
레오나는 말을 타고 황궁으로 움직였다. 경비병은 레오나를 보자마자 문을 열어주었다.
예전에는 신분 확인을 받고 입궁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이 없었다.
“수고해요.”
경비병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황궁에 들어갔다.
마구간에 말을 맡기고 기사단으로 향하는데 리리엘과 마주쳤다.
리리엘은 무척 수척해 보였다.
서로 반갑게 인사할 사이는 아니기에 레오나는 리리엘을 지나쳤다.
그러자 리리엘이 말을 걸었다.
“넌 참 행복해 보인다.”
“뭐?”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무슨 소리야?”
“가문에 있을 때 일부러 신성력을 숨긴 거지?”
레오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뭐야?”
“아버지가 매일같이 너와 나를 비교해.”
“그래서?”
“비교를 당하다 보니 어릴 적 네 입장이 이해되더라고.”
어릴 적에 레오나는 늘 리리엘과 비교를 당했다. 리리엘의 성취가 올라가면, 칼리반 백작은 늘 레오나를 탓했다.
그것밖에 안 되냐고.
“아버지가 이제는 나한테 그것밖에 안 되냐고 말해. 난 늘 널 이겼는데 이젠 널 이길 수 없어.”
이제 레오나와 리리엘은 격차가 너무 많이 벌어졌다.
리리엘은 레오나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레오나는 리리엘을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넌 이길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
“어릴 적에 비교당했던 내 입장이 이해된다고 했지? 아니, 아직 멀었어. 난 그때 정말 죽고 싶었거든. 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잖아? 그러니 엄살은 그만 피워. 너도 이세 성인이야.”
레오나는 가볍게 몸을 돌렸다.
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럴 정도로 리리엘에게 애틋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칼리반 백작과는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까.
그 집안이 어떻게 굴러가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은 자신이 일군 가문으로 충분하니까.
이제 와서 놓친 사냥감이 아쉽다고 한들 이미 늦었다.
그들이 다시 자신을 잡아들이지는 못할 정도로 레오나는 성공을 거두었으니까.
황실과 제국을 구한 구국의 영웅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은 황실에 반기를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놓친 사냥감이 아무리 아쉬워도 그들은 절대 레오나를 손에 쥘 수 없다.
자신 때문에 리리엘이 칼리반 백작에게 시달리는 것 같지만, 그것도 리리엘이 견뎌내야 할 몫이었다.
과거 레오나가 그러했던 것처럼.
레오나는 자신만의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꽃길이 될 것이다.
그녀는 그걸 누릴 자격이 되니까.
리리엘은 멀어지는 레오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 빛나는 길 위에 있는 레오나가 부러울 뿐이었다.
리리엘은 언제나 빛나는 꽃길이 자신에게만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빛나는 꽃길은 그 길을 걸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펼쳐지는 것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 * *
아발로인 후작가의 저택.
미첼은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곁을 지키는 것은 후작과 그녀의 오라비 다니엘이었다.
미첼의 몸을 차지했던 마왕 벨지안이 정화되어 사라진 직후, 미첼은 줄곧 잠들어 있었다. 숨은 쉬고 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발로인 후작은 미첼을 위해 한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미첼을 위해 했던 일은 결국, 미첼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결코, 미첼이 마왕의 그릇이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지은 죄가 커서 아발로인 후작은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미첼의 곁을 지켰다.
황제는 아발로인 후작의 지극한 부성을 감안하여 그를 사직시키는 것으로 그쳤다.
다니엘도 적기사단을 그만두었다. 아발로인 후작가의 장남으로서 그도 책임을 느꼈다. 적기사단에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미첼이 잠든 지 한 달이 되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미첼의 두 눈이 뜨였다.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두통이 일었다.
잠시 후,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넓고 푸른 하늘이었다.
“이게 저한테 주신 벌입니까?”
이 몸은 죽은 몸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던 부친은 잘못된 방식으로 그녀의 생명을 억지로 늘렸다.
진즉, 사라졌어야 할 목숨인데 아무래도 신은 그녀에게 이런 방식으로 벌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천계의 일족이었던 저를, 인간으로 살라 하시는 겁니까?”
어쩌면 신의 마지막 자비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천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고, 이 세상을 멸하는 악이 되기도 하였다.
“참으로 상과 벌이 적절하시네요.”
신은 그녀의 숭고함을 사랑했지만, 그녀의 잘못을 용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신은 용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창문이 저절로 열리며, 새하얀 깃털을 가진 새가 포르르 날아와 그녀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기쁩니다. 절 잊지 않아주셔서.”
그녀는 새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하얀 새가 부리를 벌렸다.
[아이네, 네 영혼이 진실로 깨끗해지면 넌 신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 말을 남긴 새는 다시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아이네는 날아가는 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신은 이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줄 모양이었다.
신의 말이 다시 들렸다.
[그 이름으로 살며, 진실로 깨끗해지길 바라마. 아이네.]
미첼이란 여인의 이름으로 살면서, 갚으라는 이야기다.
그것만이 타락한 영혼을 용서해 주는 길이라며.
미첼은 하늘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미첼은 손안에 머물렀던 따스함을 꼭 움켜쥐었다.
신이 그녀에게 남겨준 따스함이었다. 앞으로 그녀는 이 따스함을 가슴에 품은 채 생을 다하는 날까지 살게 될 것이다.
신이 만든 사랑스러운 세상을 위해서.
끼익거리며 방문이 열렸다.
미첼의 시선이 석상처럼 굳어진 채 서 있는 두 사람에게 향했다.
“미첼…….”
“너…….”
미첼을 그토록 사랑하고 아꼈던 아발로인 후작과 오라비 다니엘이었다.
미첼은 그 두 사람을 향해 웃어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방 안으로 뛰어와 미첼을 끌어안았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신께 감사 인사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진짜 미첼이 될 수 없었지만, 미첼이란 이름으로 살며, 두 사람의 가족이 되었다.
그게 그녀가 두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 * *
레오나는 미첼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후작가로 달려갔다.
미첼이 레오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있었고, 레오나도 미첼을 걱정하고 있던 터라 그녀가 깨어나면 알려달라고, 다니엘에게 부탁했었다.
“미첼 영애, 괜찮은 겁니까?”
미첼은 정원 안 벤치에 앉아 레오나와 단둘이 만났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세리아.”
미첼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레오나가 크게 놀랐다.
“…….”
“맞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에요. 나.”
“세상에…… 어떻게 된…….”
너무 놀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미첼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모든 건 그분의 뜻이 아닐까요?”
레오나는 마왕이 된 그녀를 정화시켰다.
마지막에 웃으며 고맙다고 말을 전하든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분께선 새로운 방식으로 저를 용서해 주실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해방된 그녀는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이것이 신이 내린 방식의 용서인 모양이었다.
레오나가 비죽 웃었다.
“잘 되었네요, 안 그래도 또래의 친구가 없었는데. 좋은 친구가 생겼네요. 신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이제, 세리아와 아이네라는 이름은 과거의 이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가 말이다.
“몸은 좀 어때요?”
“노력하고 있어요. 음식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고요.”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탓에 미첼의 몸은 영양 상태가 나빴다.
걸어서 정원으로 나오는 것도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자주 놀러 와주실 거죠?”
“그럼요. 저는 당신의 친구인걸요.”
“기뻐요.”
레오나와 같은 시대를 살며,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니. 그녀는 진심으로 기뻤다.
“다음에 올 때는 제도에서 유행하는 맛있는 디저트를 사 올게요. 영애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그거 기대되는걸요.”
두 사람은 다음을 기약하며 행복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아발로운 후작가를 나오며 레오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손을 모았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신은 그 나름대로 용서를 해주기로 한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그녀가 신께 용서를 받을 수 있으니, 용서를 받으면 그녀는 신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신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니.
레오나도 함께 추억을 공유할 친구가 생겨서 기뻤다.
애석하게도 그녀에겐 또래의 친구가 없었다.
기사단에선 그녀가 유일한 여자였고, 죄다 남자 동료들뿐이었다.
또한, 연회나 각종 모임에서는 모두 본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과 친분을 맺으려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 부분에 염증을 느껴 사교계 모임이 잘 참석하지 않았다.
백작가를 꾸려나가는 일도 바빴고, 기사단 일도 병행해야 했으니까.
그 이후로 레오나는 시간이 나면 미첼을 만나러 왔다.
약속한 대로 달콤한 디저트를 양손에 가득 사 들고 미첼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발로인 후작도 레오나가 자주 방문해 준 덕분에 미첼이 활기를 찾아 나가고 있다고, 그녀를 은인처럼 대해주었다.
다니엘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니엘도 미첼, 레오나와 함께 다과를 즐기는 사이가 되었다.
레오나가 아발로인 후작가를 자주 드나들자, 제도에 소문이 퍼졌다.
“레오나 경이 아발로운 후작의 며느리가 될 모양이에요?”
“어머, 정말이에요?”
“네, 레오나 경이 항상 디저트를 사 들고 아발로인 후작가를 자주 방문한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 그럼 우리도 아발로인 후작과 친분을 쌓아두는 게 나을까요?”
아발로인 후작가는 지난 일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후작은 황실에 사직서를 내었고, 그 아들도 적기사단을 그만두었다.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레오나 경이 다니엘 경과 굉장히 친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죄인 가문은 좀 그렇지 않나요? 레오나 경에 명성에 어울리지 않네요.”
“맞아요, 레오나 경과 죄인 가문이 연을 맺다니, 반갑지는 않네요.”
소문은 날개가 달린 듯 퍼져 나갔고, 레오나의 귀에도 들어갔다.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소문을 전해주러 온 아스텔과 시엘을 보았다.
두 사람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아스텔은 자처해서 레오나의 가신이 되었다.
그녀의 곁을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꺾을 수 없어, 결국 레오나는 그들을 받아주었다.
시엘은 흑기사단을 그만두고, 레오나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도 참 어이가 없네, 어떻게 소문이 그런 식으로 날 수가 있지?”
“정말 아닙니까?”
“정말 아닙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질문을 하자, 레오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야, 난 미첼 영애를 만나러 가는 거라고. 다니엘 경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란 말이야.”
아스텔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그럼, 양손이 디저트를 가득 사 들고 가는 건 뭡니까?”
“당연히 미첼 영애에게 주려는 거지, 그녀는 아직 몸이 낫지 않아 외출을 못 하니까. 그러니 내가 찾아가는 수밖에.”
“미첼 영애와 그렇게나 친하신 줄 몰랐네요.”
“당연하지. 그녀는 내 유일한 동성 친구니까.”
미첼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레오나는 행복했다.
“그런데 그 소문 누구 낸 거야?”
레오나가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자, 아스텔도 같은 눈빛을 하였다.
“지금 당장 알아보죠.”
“나도, 누군지 모르지만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시엘이 으르렁거리자, 레오나가 한마디 했다.
“시엘, 아무 짓도 하지 마. 그랬다간 백작가에 얼씬도 못 하게 할 거니까.”
“칫.”
시엘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러니까 아스텔처럼 나도 백작가의 자리 좀 마련해 주면 안 됩니까?
“안 돼.”
“왜죠?”
“사고만 칠 테니까.”
“뒤치다꺼리하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시엘은 어이가 없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아스텔이 소문의 출처를 알아내 집무실로 찾아왔다.
“어디라고?”
“칼리반 백작가입니다.”
어이가 없었다.
“칼리반 백작가에서 왜 그런 소문을 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흠집 내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레오나는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제국을 구한 영웅이었고,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게 된 부호였으며, 황실의 신임도 두텁고, 귀족들과 제국민들의 존경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칼리반 백작가 출신. 그녀를 내친 칼리반 백작가는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버린 딸이 백작이 되어 돌아왔으니, 말이 아닐 터.
어떻게 해서든 레오나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칼리반 백작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미 연이 끊어진 가문이었고, 그럴 가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 질척거린다고,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얻는 게 대체 뭐란 말인가.
다음 날, 아발로인 후작가에서 편지가 왔다. 소문을 들었는지, 다니엘이 사과를 한 것이다.
칼리반 백작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진흙탕 싸움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면 어쩔 수 없다.
레오나는 즉시 황제를 알현했다. 그리고 소문 때문에 곤란하다는 표명을 전하자, 황제도 크게 진노했다.
황제뿐만이 아니라, 황태자, 황후, 1황녀 다이앤도 몹시 화를 냈다.
화를 내는 건 황실뿐만이 아니었다.
단장인 데미안도 화를 냈다.
그는 레오나를 아끼고 있었다. 아니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제 사람을 건드리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칼리반 백작가, 가만히 놔두면 안 되겠군.”
그는 즉시 통신구를 연결해 공작가의 가신들을 소집했다.
아무래도 압박을 좀 가해야 할 것 같았다.
황실에서도 칼리반 백작가에 직접 사람을 보냈다.
칼리반 백작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레오나와 다니엘의 추문은 그녀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고귀한 영웅과 죄인과의 인연이라니, 레오나가 정말로 아발로인 후작가의 사람이 된다면, 황실에서도 그녀를 마냥 좋아하지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아발로인 후작가의 딸이 마왕이 될 뻔하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이 사실은 황실에서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중앙회의 귀족들뿐이었다.
중앙회는 제국의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는 귀족들의 대표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칼리반 백작은 그런 중앙회의 일원이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아발로인 후작의 사직 원인을 알고 난 직후에 레오나가 그 가문을 자주 드나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문을 흘렸다.
레오나와 다니엘이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성 소문을 말이다.
고귀한 영웅과 죄인의 가문과의 결합이라니, 이는 레오나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과 동시에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원래 소문이라는 것이 추측만으로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낳는 법이다.
레오나의 이미지는 금방 실추될 것이다. 그때 이미지가 망가진 레오나에게 자신이 손을 내밀면 그녀는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즐겁게 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황실에서 기사가 나와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잘못 들은 거지요?”
기사가 짜증을 냈다.
“당분간 자택에서 근신하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근신이라니…….”
칼리반 백작을 바라보는 기사의 눈빛이 사나웠다.
“감히, 구국의 영웅에게 더러운 구정물을 씌우려 하다니, 폐하께서 심한 유감을 표하셨습니다. 경은 폐하께서 부르실 때까지 황궁에 입궁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사는 할 말을 전하고는 차갑게 돌아섰다.
기사가 나가고 얼마 후, 백작가의 집사가 헐레벌떡 집무실로 뛰어들었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칼리반 백작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무슨 일인데?”
방금 나간 황제의 기사 때문에 안 그래도 기분이 나쁜데, 집사까지 오두방정이니 기분이 별로였다.
“거래 중이던 상단들이 일방적으로 해지 통보를 해왔습니다.”
“뭐?”
칼리반 백작가는 공예 사업을 하고 있었다.
칼리반 백작가가 운영하는 공방에서 만들어내는 고가의 공예품을 제국의 여러 상단을 통해 판매하고 있었는데 상단들이 해지를 해왔다는 것이다.
칼리반 백작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이번에는 또 뭔데!”
“고, 공방의 장인들이 모두 이직했습니다.”
“뭐라고?”
칼리반 백작은 소식을 들고 온 가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장인들이 이직하다니, 어디로!”
가신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 모두, 라이오넬 공작가로 갔습니다.”
“라이오넬 공작가라고?”
그곳은 백작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의 공방 직원들을 채간단 말인가.
“가만, 라이오넬 공작가라면…….”
현 백기사단의 단장이 가주로 있는 곳이다.
그리고 백기사단엔 레오나가 있다.
‘이 모든 게 그 계집애 때문이라고?’
그것이 그토록 영향력이 있었단 말인가.
칼리반 백작이 집무실에서 괴성을 질렀다.
* * *
제도에 소문이 퍼졌다.
“칼리반 백작가에서 헛소문을 냈다면서요?”
“네, 쫓아낸 딸이 영웅이 되고 같은 백작이 된 게 배가 아팠던 모양이더라고요.”
“어머, 속도 좁지. 그렇게 안 봤는데.”
레오나가 칼리반 백작가 출신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딸이 영웅이 되었고, 막대한 자산을 가진 백작이 되었다.
“레오나 경에게 그렇게 속 좁은 아버지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정말이지, 인연이 끊어진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어딜 가나, 주 이야기가 칼리반 백작가에 대한 험담이었다.
칼리반 백작가가 악의적으로 레오나를 깎아내리기 위해 아발로인 후작가와 엮어 소문을 냈다는 것이 알려지자, 여론은 칼리반 백작가를 적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여론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데 기여한 건 아스텔이었다.
그는 플랑드르라는 정보조직을 운영하고 있었고, 플랑드르는 열심히 칼리반 백작가에 대한 소문을 퍼 날랐다.
소문이 점차 커지자, 리리엘도 소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그녀가 몸담고 있는 청기사단에도 영향을 줬다.
리리엘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따가웠던 것이다.
“리리엘, 너도 가담한 거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
“너희 가문에서 레오나 경과 아발로인 후작가를 엮어서 일부러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며.”
레오나는 기사단에서 인망이 두터웠다.
그래서 그녀를 싫어하는 기사들은 없었다. 오히려 추종자들까지 생겨났다.
리리엘에게 따지러 온 선배도 추종자 중 한 명이었다.
“저와는 상관없어요. 아버지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입니다.”
“그래, 다행이네. 적어도 우리 기사단에서 레오나 경에게 악의를 품은 자가 없어서.”
리리엘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네 말을 믿을게. 우린 동료니까.”
선배가 리리엘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사라졌다.
이게 다 자신이 칼리반 백작을 아버지로 둔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칼리반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었는지 회의가 들었다.
후계자만 되면 뭐든 원하는 대로 잘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꽃길이라고 여겼던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나도 독립해?’
혹시 아나 레오나처럼 다른 세상이 열릴지.
리리엘은 진심으로 칼리반 백작가를 나와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도 망했고…….’
최근 칼리반 백작가의 사업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주요사업이라 할 수 있는 공예 사업이 폭상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공방의 직원들이 모두 사직하였고, 거래하던 상단들도 모두 해지 통보를 해온 탓이었다.
그 결과 칼리반 백작가는 자금난을 겪게 되어 미래가 불투명하게 되었다.
이게 레오나라는 돌이 가져온 결과였다.
작은 돌은 커다란 돌이 되어 백작가를 강타했다.
* * *
라이오넬 공작가에서 칼리반 백작가의 공방 장인들을 채용했다는 소식을 들은 레오나는 기사단으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단장님이 하신 거라면서요?”
“뭘 말이지?”
“칼리반 백작가의 공방 장인들을 라이오넬 공작가에서 데려갔다고 하더라고요.”
라이오넬 공작가는 데미안이 가주로 있는 곳이었다.
데미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맞네, 맞아. 제 소문 때문에 백기사단에 많이 난처했어요?”
데미안이 푸른 눈으로 레오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너 때문이란 생각은 안 드나?”
“네?”
“아니다.”
레오나가 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방금, 저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하신 거죠, 맞죠.”
“둔하지는 않군.”
레오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단장님, 혹시 저 좋아하세요?”
반 농담 삼아 물은 것이다.
그런데 데미안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면?”
“예?”
레오나의 입이 벌어졌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미간을 찌푸린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퇴궁해야겠군…….”
“단장님, 그냥 가시면…….”
데미안은 레오나가 붙잡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레오나는 급하게 사라지는 그를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진짜라고? 말도 안 돼. 농담이겠지.”
어떻게 단장과…….
레오나는 세차게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 레오나! 단장님이 널 왜 좋아해, 농담이야, 농담일 거라고.”
재빨리 정신을 차린 레오나는 백작가로 돌아왔다.
백작가로 돌아온 그녀를 맞이한 것은 아스텔이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어?”
“표정이 이상해서 묻는 겁니다.”
“내 표정이 어떤데?”
“정신이 나간 듯 보입니다만.”
“내가 그랬나?”
레오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칼리반 백작가에 대한 소문, 네가 낸 거지?”
“예. 기분이 언짢으십니까?”
혹시라도 그녀가 본인이 몸담고 있던 가문이라 신경을 쓰는 게 아닌가 싶어 물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잘했어, 그 집안이랑은 이제 엮이고 싶지도 않았거든. 잘 망했지 뭐.”
그것보다 제일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도망치듯이 떠난 단장의 태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게 그렇게 도망칠 일이야?’
이상했지만, 생각을 지웠다.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농담이란 것을 하진 않는 양반이니, 창피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 * *
공작가로 돌아온 데미안은 침실에 외투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하아.”
아무래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장님, 혹시 저 좋아하세요?’
레오나가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데미안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말이 그 정도로 충격적으로 들릴 일인가?
물론, 레오나와 관련된 안 좋은 일에 자신이 지나치게 간섭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화가 났다.
레오나와 다니엘이 정말로 그런 사이는 아니겠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모두 기우였고, 칼리반 백작이 벌인 헛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화가 났다.
자신에게 그런 더러운 기분을 맛보게 하다니. 그는 평상시 매우 점잖고, 정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었다. 자신의 사람이라 여기던 사람들이 다치면, 그게 누구든 가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레오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각하는 게 조금 늦긴 했지만, 그녀만 보면 기분이 좋았다.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단장님, 레오나 좋아하시죠?”
함께 자리에 있었던 부단장 란젤로가 제일 먼저 알아챘다.
“단장님은 레오나를 바라볼 때 무척 즐거워 보이십니다.”
점점 자각하게 되었다.
레오나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고,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다가오면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게 미적거리다가 다른 사람이 먼저 채갈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답답함을 눈여겨본 란젤로가 진심으로 해준 충고였다.
그 후, 레오나와 다니엘의 추문이 퍼졌다.
무언가 이성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레오나와 다니엘의 스캔들.
사람들은 연신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며 입을 놀렸다.
사태가 심각해지지, 황실에선 다니엘을 불러 추궁했다. 다니엘은 적극적으로 해명하였다.
자신으로 인해 레오나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소문은 모두 거짓이라고 레오나와는 연인 관계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조사를 하였는지, 소문의 출처가 칼리반 백작가라는 것까지 고했다.
그 말을 들은 황실은 즉시 조사를 시작하였고, 다니엘의 말대로 소문의 출처가 칼리반 백작가라는 것이 밝혀졌다.
칼리반 백작이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벌인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황실은 크게 분노했고, 그 소식을 들은 데미안도 화가 났다. 그랬는데 레오나 앞에만 있으면 멍청해진다.
“내가 이렇게 멍청이일 줄은 몰랐군.”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도망치듯이 오는 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마냥 피할 일이 아니다. 부딪쳐야 할 일이고, 겪어내야 할 일이었다. 도망치는 것은 자신답지 않았다.
* * *
레오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자신 앞으로 온 초대장들을 바라보았다.
매일같이 초대장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일일이 챙길 여유도 없었다. 대부분의 답장은 아스텔이 맡아 하고 있어 크게 걱정은 없었다.
그의 글 솜씨는 끝내주니까.
“무슨 걱정 있습니까?”
서류에 사인은 하지 않고 멍하니 있으니, 아스텔이 대신 인장을 찍어주며 물었다.
“요새, 단장님이 조금 이상해.”
“단장이라면, 데미안 경 말씀입니까?”
“응.”
“어떻게 이상한데요?”
레오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데미안는 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막상 물어보면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곤 하였다.
어제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계속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인데 물어보면 피한단 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대체 왜 그럴까?”
아스텔이 미간을 찌푸렸다.
“데미안 경이요?”
그가 아는 데미안은 맺고 끊는 게 명확하고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엄격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책임감도 남달랐다.
“정말 그런다는 겁니까?”
“그렇다니까.”
하루 종일 자신만 주시하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먼저 시선을 피한다.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다가 흘깃거려 보았다. 집요하게 시선이 따라붙고 있었다.
한 번은 땀에 젖은 셔츠를 그대로 입고 돌아다녔더니, 순식간에 나타나 자신의 겉옷을 걸쳐 주는 게 아닌가.
물론, 겉옷은 깨끗이 세탁한 후에 돌려줬다.
레오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네?”
“이대로는 도저히 찝찝해서 집중할 수가 없다고.”
“어쩌시려는 겁니까?”
“담판을 지어야지.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칼리반 백작가의 갈등이 있은 직후, 데미안의 태도가 유독 심해졌다.
게다가 그는 직접 나서서 칼리반 백작가의 오랜 사업을 망하게 하였다.
공예 사업은 칼리반 백작가의 중요한 자금줄이나 마찬가지인데 제대로 가동이 안 되니, 숨통이 막히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을 위해 화를 내주는 것은 고맙지만, 행동이 너무 과하다.
“나 대신 일 좀 부탁해.”
아스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레오나는 괜히 미안해져서 말을 덧붙였다.
“대신, 돌아오면 맛있는 거 사 줄게.”
“단둘이 말입니까?”
“당연하지.”
“후우, 알겠습니다.”
아스텔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레오나는 아스텔에게 뒷일을 맡기고 황궁으로 향했다.
마침, 데미인이 퇴궁할 시간이기도 했다. 레오나는 그의 퇴궁 시간에 맞춰 황궁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데미안이 말을 몰고 황궁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단장님!”
레오나의 부름에 데미안이 어깨를 흠칫했다.
“레오나?”
“퇴궁하시는 거죠?”
“그런데…….”
“저랑 대화 좀 나눠요. 괜찮으시죠?”
데미안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제가 아는 찻집이 있는데 그리로 가시죠. 조용하니 대화 나누기에 딱입니다.”
레오나는 데미안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제도 외곽에 있는 조용한 찻집으로 향했다.
3층을 통째로 빌린 레오나는 데미안과 마주 앉았다.
“단장님, 이제 말씀해 보세요?”
“…….”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잖아요.”
한숨을 내쉰 데미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찻잔을 들어 맛을 보더니 다시 내려놓았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너를 놀라게 할 수도 있다.”
이건 일방적인 그의 마음이었다.
몇 번이고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아 결국 도망만 다닌 꼴이 되었다.
“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편히 말씀하세요.”
레오나는 데미안의 태도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심란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데미안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내가 너를 이성으로 보고 있다.”
“네?”
레오나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방금 뭐라고…….”
“너를 여자로 보고 있다고 했다.”
레오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 당황해서 할 말을 잊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 그러니까. 단장님이 저를…….”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얼굴도 붉어졌다.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순간 차가운 것이 이마에 닿았다.
데미안의 손이었다.
“다행히 열은 없군.”
레오나는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데미안의 손이 떨어졌다.
“얼굴이 붉어졌군.”
“아!”
당황한 레오나가 손부채질로 얼굴의 열을 식혔다.
“갑자기 당황스러운 말을 하셔서…….”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언제부터 저를…….”
“글쎄, 언제라고 말하기 어렵군. 너를 처음 보았을 때인 것도 같고, 너와 대련했던 때인 것도 나도 헷갈리거든. 그만큼 네가 나한테 인상 깊은 기억을 남겨 주었으니까.”
“…….”
“지금 당장 네 마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가 불쑥 레오나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모른 척하지만 말아다오.”
“그 말씀은…….”
“내 마음이 네게로 향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달란 뜻이다. 난 적어도 네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싶지는 않거든.”
고개를 뒤로 물린 그가 빙그레 웃었다. 레오나는 저런 식으로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언제나 무표정에 가끔 보이는 미소는 저렇게 다정하지 않았으니까.
“궁금한 것이 있다.”
사실은 전부터 신경 쓰였던 것이었다.
“궁금한 것이요?”
“흑기사단의 시엘과는 어떤 사이지?”
시엘은 레오나를 위해 흑기사단에 입단했다. 지금은 그만두었다.
“시엘은 목숨을 걸고 싸운 전우라고 할까요?”
“전우?”
“네, 동료요.”
“다른 감정은 없는 건가?”
“당연하죠.”
레오나는 시엘에게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시엘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데미안도 알았다.
“그쪽은 아닌 것 같다만…….”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맞아요. 시엘은 단장님처럼 절 이성적으로 좋아해요.”
데미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라도 레오나가 시엘의 마음을 받아주게 될까 봐 초조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그녀의 말에 데미안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거절했어요. 받아줄 수 없다고.”
“……거절했군.”
“시엘은 제게 이성이 아니었으니까요.”
다행이었다. 데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레오나의 손을 잡은 데미안이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부디 대답은 천천히 해주길 바란다.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 되었거든.”
물론, 시간을 들여서 레오나에게 다가갈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 레오나의 대답은 보류하고 싶었다.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군……. 오늘 많이 놀랐을 테니까.”
“…….”
“내일 기사단에서 보지.”
레오나는 찻집을 나가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레오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데미안이 잘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데미안이 그동안 자신의 주위를 맴돌았던 이유가.
“그러니까, 그건 나를 좋아해서…….”
입에서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말도 안 돼. 왜?”
자신은 여인으로서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기사로의 삶이 중요해서, 레이디들의 교양 같은 건 차리지도 않았다.
칼리반 백작가에 있었을 때도 어린 시절에나 드레스와 장신구를 걸쳐봤지, 검을 든 이후로는 귀족 영애들이 주로 하는 것들은 하지 않았다.
손바닥은 검을 잡은 탓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단련으로 인한 몸 역시 부드럽기보다는 단단한 편에 속했다.
늘 땀에 절어 살았다.
여성으로서 응당 갖춰야 할 조건을 포기한 셈이다.
“그런데도 내가 좋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방금 전 시엘에 대해 물어본 건…… 신경이 쓰였던 건가?”
레오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웠다. 여러모로 마음이 너무 심란했다.
단장이 자신을 좋아한다니.
정말 깜짝 놀랐다.
“오늘 잠은 다 잤군.”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 같았다. 게다가 데미안의 입술에 닿았던 손등이 너무 화끈거렸다.
그 생경한 감촉이라니.
“하아, 이럴 어쩐다…….”
레오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데미안의 고백은 그녀에게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레오나는 아스텔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스텔은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데미안 경이 백작님께 고백을 했다고요?”
“그래, 나를 여자로 보고 있었대.”
아스텔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그도 레오나를 이성으로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는 그를 친구로만 여길 뿐이었다.
그게 아스텔은 몹시 서운했다.
레오나도 자신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차게 차였었지.’
과거에 고백했다가 대차게 차였다. 그런데도 자신은 여전히 그녀의 곁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레오나는 그때의 기억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 정도로 레오나는 연애 감정에 대해 둔했다.
상대가 고백했을 때에 알아차렸으니까.
“난, 단장님이 나를 상대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잖아. 나는 다른 예쁜 레이디들과 달리 관리하는 것도 아닌걸. 이것 봐.”
레오나는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엔 이렇게 굳은살이 박여 있다고. 어떤 레이디가 손바닥을 이렇게 혹사해?”
“그래서 데미안 경이 백작님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요?”
“뭐?”
“다른 레이디분들과 다르니까.”
레오나는 금빛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다른 레이디들과 달라서 호감이 생겼을 수도 있단 거야?”
“데미안 경이 평범한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응?”
“백작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내가 왜?”
“저도 예전에 백작님께 고백했던 남자입니다.”
아스텔이 남자에 강조를 두었다.
“그런 제게 연애 상담을 하시다니, 잔인하시네요.”
거짓말처럼 레오나의 입이 다물어졌다.
아스텔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텔…… 난…….”
“압니다. 백작님께 저는 연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레오나가 급히 사과했다.
“미안해. 너를 배려하지 못했어.”
“됐습니다. 저도 한번 심술을 부려 본 거니까요.”
의외의 면에 레오나는 놀란 얼굴을 하였다.
“심술도 부릴 줄 아는구나.”
“그럼요, 저도 사람이니까요.”
레오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럼 누구한테 연애 상담을 해야 하나?”
생각해 보니, 레이디 중에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래서 사교계 인맥이 중요하구나.”
“앞으로도 생각하실 일이죠.”
“응?”
“백작가를 꾸려나가려면, 백작님께서도 사교계 활동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다.
사교계는 단순한 놀이 모임이 아니었다. 인맥의 장이었다.
지금은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만 운영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가문을 이끌어 나가기엔 부족하다.
교류를 통해 사업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영지를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받은 영지는 매우 좋은 곳이었다. 딱히 레오나가 관여하지 않아도, 황실에서 파견해 준 관리가 돌보고 있으니까.
현재 레오나는 아스텔을 제외하고는 가신이 없었다. 황실에서도 그걸 알기에 황실의 인재를 빌려준 것이다.
“그래, 나도 슬슬 가신들이 필요하긴 해.”
가신들은 레오나를 도와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동료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스텔이 명단을 내밀었다.
“올해 황립 아카데미를 졸업한 인재들입니다. 이 중에서 고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언제 이런 걸 준비했어?”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에게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레오나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아스텔을 보았다.
“아스텔, 정말 고마워.”
아스텔이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헛기침을 했다.
“일단 보십시오.”
“알았어.”
레오나는 명단을 훑어보았다.
* * *
데미안은 최근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레오나에게 고백한 이후, 그녀와 단둘이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레오나가 기사단 훈련에 참가하고 있지만, 공적인 일이 끝나면 그녀는 칼같이 퇴궁을 하였다.
지금은 평화로운 시기라 외부 임무가 없었다. 제국은 큰 우환을 겪었고, 회복 중에 있어서 내부의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흐음…….”
데미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퇴궁 시간이 되자, 레오나가 기사단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무척 바쁜 걸음이었다.
“뭐가 저렇게 바쁜 거지?”
레오나가 자신을 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훈련 도중 눈이 마주치면, 예를 표했고, 인사도 거르지 않았다. 그것뿐이었다.
데미안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졌다.
“어딜 그렇게 보십니까?”
단장실로 들어온 란젤로가 데미안이 보고 있는 창가를 슬쩍 내다보았다.
데미안의 시선이 정확히 어딜 향해 있는지.
“……레오나를 보고 계셨습니까?”
“요새 계속 바쁜 것 같더군.”
란젤로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새로 꾸릴 가문에 인재가 필요한 모양이더라고요. 올해 졸업한 아카데미 인재들을 만나고 있답니다.”
데미안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만…….”
“레오나가 너한테 그런 이야기도 하나?”
란젤로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그럼요, 저와 레오나 꽤 친하거든요.”
장난으로 이야기한 것인데 데미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단장님, 왜 그러시는…….”
“요새 많이 한가한 모양이군.”
“네?”
“나는 이렇게 일이 쌓여 있는데 말이야.”
데미안이 턱짓으로 단장실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가리키자, 란젤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네가 다 처리하고 가도록.”
“예? 하지만 저건 단장님의 일이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단장이 부재중일 예정이라, 부단장이 처리해도 괜찮을 듯해.”
란젤로의 입이 벌어졌다.
“……무슨.”
데미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옷걸이에 걸어놓은 외투를 걸쳐 입고는 란젤로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모두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더군, 그럼. 수고하지.”
그렇게 말한 데미안이 단장실을 나갔다. 단장실에 혼자 남겨진 란젤로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데미안은 급히 할 일이 있었다.
레오나가 인재 때문에 시간이 없는 것이라면, 그 시간을 덜어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는 안 돼.’
그녀의 곁에 보좌하는 남자, 항상 붙어 다닐 게 아닌가.
그건 곤란했다.
안 그래도 일방적인 마음인데, 다른 남자가 그녀의 주위에 얼쩡거리는 건 보기 힘들었다.
공작가로 향한 그는 가신들을 모집했다.
“지금 당장 아제르티아 백작가가 접촉한 인재들을 알아보도록?”
가신들은 어리둥절했지만, 데미안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 * *
가신들을 닦달한 덕에 데미안은 레오나가 접촉했던 인재들의 명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명단을 쭉 훑어본 데미안은 인상을 굳혔다.
죄다 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 여성 인재가 그렇게 없나?”
“네?”
“왜 죄다 인재들이 남자들뿐이지?”
한 가신이 어깨를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올해는 여성 졸업생들의 성적이 우수해 이미 다른 가문에서 선점을 마친 상황입니다.”
데미안이 미소를 지었다.
“선점만 했지, 계약을 한 건 아니잖아.”
가신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데미안을 보았다.
데미안은 서류에서 보았던 인재 중 몇을 추렸다.
“여기 보니, 형제들이 있더군. 모두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고.”
“그 말씀은…….”
“아제르티아 백작가의 가신이 된 인재들의 동생들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라이오넬 공작가에서 일할 기회를 주겠다고 전해.”
가신들은 데미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같은 일을 시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용감한 가신이 질문을 하였다.
“공작님, 죄송하지만 왜 그렇게 아제르티아 백작가에 관심을 두시는 겁니까?”
“내가 사랑하거든.”
가신들의 눈이 커졌다.
데미안이 가신들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못을 박았다.
“내가 아제르티아 백작을 사랑해. 그러니 그녀 주위에 날파리들이 꼬이면 곤란하지 않겠어?”
가신들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자신들이 그동안 알아왔던 그가 아닌 것만 같았다.
“더 질문 없으면 서둘러.”
“예? 예.”
데미안이 축객령을 내리자, 가신들이 부리나케 집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가신들은 충실하게 그의 명을 따라 여성 인재들을 데미안에게 데리고 왔다.
“저희가 아제르티아 백작가의 가신이 되면, 정말 내년에 졸업할 제 동생을 받아주실 겁니까?”
올해, 수석으로 졸업한 여인의 말이었다.
“이름이 진저라고 했나?”
“네.”
“올해 수석으로 졸업했군.”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 다방면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녀는 소녀 가장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제도에 변변치 않은 자작 가문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 부모가 모두 사고로 죽었다.
해서 그녀는 홀로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다.
“네가 아제르티아 백작 가문의 가신이 된다면, 네 동생을 공작가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지.”
“저, 저도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진저의 옆에 서 있던 단발머리의 여인이 말했다.
그녀는 린델 백작가의 차녀, 세리나 린델이었다.
수석인 진저보다는 등수가 낮았지만, 한 분야에선 점수가 높았다.
그 분야는 경제였다.
“린델 백작가는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유한 것으로 아는데 왜 기회를 얻고 싶은 거지?”
“제 동생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요. 제 동생은 성적이 우수하지 못하거든요.”
데미안은 그녀의 서류를 훑어보았다.
“삼남매라…….”
가문의 차남은 확실히 미래가 불투명했다. 보통 귀족가에선 차남이 성인이 되면 성혼을 시켜 분가를 시키거나, 적당한 재산을 떼어주고 내보낸다.
하지만 대부분의 차남이 풍족한 삶을 사는 건 아니었다.
린델 백작가의 차남은 성적이 그리 우수한 편은 아니었다. 중하위권 정도여서 어중간했다.
“좋다. 기회를 주지.”
데미안은 가신들이 데려온 다섯 명의 인재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저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녀의 가신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이었다.
데미안은 그녀들에게서 한 가지 약속을 얻어냈다.
아제트티아 가문에 자신이 그녀들에게 한 제안을 비밀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약속해야만 했다. 데미안의 눈빛이 약속을 안 지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웠으니까.
* * *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면접 요청을 했다고?”
레오나는 아스텔이 가져온 면접 신청서를 보았다.
모두 아카데미 성적이 우수한 인재였다. 게다가 모두 여성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모두 다른 가문이 먼저 선점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건너뛴 거잖아.”
인재들을 먼저 선점한 가문에서 인재들을 가로채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파렴치한 일이기도 했고.
그런데 모두 자신에서 자신의 가문에 본인이 면접 신청을 하였다.
“모두 거절했다더군요.”
“거절했다고?”
“네.”
“흐음…… 일단 만나보자.”
“알겠습니다.”
아스텔은 면접신청자 모두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들은 아제르티아 가문으로 면접을 왔다.
면접자는 레오나와 아스텔이었다.
레오나는 면접을 보러온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먼저, 저희 가문에 면접 신청을 해주어 고마워요.”
레오나는 그녀들에게 다른 곳의 계약을 거절하고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진저가 대답했다.
“일을 잘해서 성과를 올리면 인센티브를 준다고 들었어요.”
진저에겐 보살펴야 할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 부유한 편은 아니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녀는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보수였다.
“맞아요. 성과에 따라 특별 인센티브와 매년 정기 휴가도 일주일 정도 줄 생각이에요. 물론 다 유급이고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휴가 기간에도 보수를 준다니.
다른 가문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야근할 시에 특별 수당도 드릴 겁니다.”
야근할 시에 특별 수당이라니.
생경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가신은 야근을 당연하게 여긴다. 보수를 바랄 수 없는 환경이란 뜻이다.
진저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희가 무얼 하면 될까요?”
“그건 여기 있는 아스텔이 여러분을 테스트할 거에요. 테스트를 통과하면 채용하도록 하죠.”
레오나가 아스텔을 보았다.
아스텔은 그녀들을 상대로 여러 가지 테스트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최종 두 명으로 합격자가 추려졌다.
레오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스텔을 보았다.
“이 두 사람이 가장 좋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최근 여러 사람을 상대로 면접과 테스트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명쾌하게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이 없었다. 아스텔의 기준이 높은 것도 있었지만, 레오나도 마음에 안 들었다.
어떤 자들은 대놓고 레오나에게 고백까지 하였다. 그들은 모두 아스텔의 손에 질질 끌려 나갔다.
그렇게 몇몇이 끌려 나가자, 보는 눈이 높아졌다.
그런데 웬걸, 포기하고 있었던 인재들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온 것이 아닌가.
다른 가문이 선점하고 있어서 포기했는데 거절하고 오다니.
게다가 테스트도 훌륭하게 통과하였다. 아스텔의 기준을 통과했다면 그녀들은 훌륭한 인재들이다.
레오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들에게 합격 통보를 하였다.
합격한 사람은 진저와 세리나였다.
* * *
데미안은 진저와 세리나에게서 아제르티아 가문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머진 떨어진 모양이군.”
“그쪽 보좌관이 무척 까다롭다고 합니다.”
“보좌관?”
“네,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백작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라고 합니다.”
데미안은 그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훑어보았다.
“아스텔?”
이름은 아스텔이고 남자였다.
그리고 무척 잘생겼다.
머리카락 색은 하얀색으로 무척 희귀했다.
데미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남자가 그녀의 최측근이라고?”
“네.”
“마음에 안 들어.”
가신들이 의아한 얼굴로 데미안을 보았다.
“너무 잘생겼어.”
데미안의 말을 들은 가신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이 점점 그동안 알던 사람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미안은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레오나의 최측근 보좌관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흑기사 시엘은 레오나가 거절했다고 해서 한 시름 놓았는데, 다른 남자가 거슬린다.
자신이 이렇게 유치해질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먼저 좋아한 입장에선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레오나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하니 강제로 떼어낼 수도 없었다.
“골치 아프군.”
하나를 해결하였더니, 새로운 복병이 등장했다.
“설마, 이 남자도 그녀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정말 갈 길이 멀군.”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새로 채용한 가신들은 모두 여성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란 마음이 들었다. 점점 유치해지는 기분이었다.
고백해서일까, 데미안은 레오나에게 더 이상 거리를 두지 않았다. 주위를 맴돌지도 않았고, 할 말이 있으면 했다.
그러한 분위기를 기사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요즘 단장님 분위기 많이 바뀐 것 같지 않아?”
“맞아. 나는 단장님이 제대로 웃는 거 처음 봤다니까.”
단장이 웃을 때는 항상 입꼬리를 말아올 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 아주 기쁘게 웃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혹시, 단장님 레오나 좋아하는 거 아냐?”
“레오나를?”
“응, 내가 유심히 살펴봤는데 단장님이 레오나를 보면서 그렇게 웃더라고.”
“진짜?”
기사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레오나가 무척 매력적이란 건 인정한다. 그들도 레오나를 좋아했으니까.
백기사단뿐만 아니라 타 기사단에서도 레오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기사가 몇몇 있었다.
접근은 하지 못하고, 그냥 바라보는 정도였다.
그리고 청기사단에서는 아예 레오나의 추종자들이 모여 레.사.모를 결성했다고 했다.
레오나를 사랑하는 모임.
유치한 이름이라고 몇 번 놀렸더니, 대련까지 할 뻔했다.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레오나가 밝게 웃으며 연무장에 나타났다.
레오나가 왔을 뿐인데 칙칙했던 연무장 분위기가 한층 밝아진 느낌이었다.
“좋은 아침이다, 레오나.”
“네, 선배님도요.”
“가주가 되더니, 요즘 무척 바쁜 모양이더라.”
“그러게요. 생각보다 할 일이 많네요.”
“그래도 대견하다. 그 바쁜 와중에도 훈련은 빠지지 않고 나오니.”
“당연히 그래야죠. 저는 백작이기 이전에 백기사단의 기사니까요.”
작위는 부수적인 것일 뿐이었다.
레오나는 기사로서의 삶이 좋았다. 천직이기도 했고.
게다가 요즘은 가신들을 새로 채용한 덕분이 일거리가 확실하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전보다 여유가 조금 생겼다. 많이는 아니지만, 숨 한 번 돌릴 정도는 되었다.
“훈련 시작하자.”
“네.”
레오나는 선배들과 어울려 훈련을 하였다.
체력 단련을 시작으로 가볍게 검술 훈련을 하고, 마나 수련도 하였다.
그렇게 오전 훈련을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레오나, 단장님이 부르신다.”
란젤로의 말에 레오나는 수건으로 땀을 대충 닦고는 단장실로 향했다.
최근 데미안과 조금 친해진 느낌이었다. 고백 이후, 사소한 대화도 나누고 대련도 한 적이 있었다.
단장실에 들어가니, 데미안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단장님, 부르셨어요.”
데미안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런데 레오나의 모습이 조금 무방비했다.
셔츠와 바지만 입고 있을 뿐이었는데 땀을 흘린 탓인지, 셔츠가 조금 젖어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물로 머리를 대충 닦은 느낌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선정적으로 다가와서 데미안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은 옷걸이에 걸어둔 외투를 레오나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레오나가 의아한 얼굴로 보았다.
“넌 자각을 좀 가질 필요가 있다.”
“네?”
데미안의 턱짓으로 레오나의 가슴 부분을 가리켰다. 땀 때문인지 셔츠 앞부분이 살짝 젖어 있었다.
“아!”
민망함에 외투를 여몄다.
선배들도 남자다.
그들도 레오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데미안은 그걸 지적한 거다.
“외투는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그래. 일단 앉아.”
레오나는 데미안과 마주 앉았다.
그러자 데미안이 용건을 꺼냈다.
“마탑에서 초대장이 왔다.”
“초대장이요?”
“너와 나를 초대한다는군. 아델라가 직접 보냈으니 읽어봐.”
레오나는 데미안이 건넨 초대장을 읽어 보았다.
초대장엔 간단한 안부 인사와 레오나와 데미안을 마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탑도 안정을 어느 정도 되찾은 모양이네요.”
마탑에서도 큰 곤란을 겪었다.
내부에 흑마법사가 분탕을 치는 바람에 여러 마법사가 다쳤고, 마탑 내부도 망가졌다.
그로 인해 마탑은 한동안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두 사람에게 초대장이 온 것이다.
“요즘 많이 바쁜 것 같던데, 시간이 나는지 모르겠군.”
“괜찮아요. 최근에 새로운 가신들을 채용했고, 제가 처리해야 할 일거리도 줄었거든요.”
“새 가신들을 채용했나?”
데미안은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네, 황립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들인데 운 좋게 저희와 계약을 진행할 수 있었거든요.”
“잘됐군.”
데미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내 고백에 대한 대답은 생각해 봤나?”
“아, 그게…….”
“재촉하는 건 아니야.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레오나가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제가 이런 부분에선 좀 약한가 봐요.”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어떻게요?”
“나와 한 달간 사귀어보는 거지. 그러면 느낌이 오지 않을까?”
데미안이 살짝 낚시를 던졌다.
지난번 가신 회의 때 한 가신이 해준 조언이었다.
계약 연애라고 기간 한정을 두고 연애를 해보는 것이다.
서로의 교류를 통해 감정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이다.
확실히 데미안의 방법은 효과적으로 보였다.
데미안의 고백을 들은 직후, 밤마다 생각했다. 시엘의 고백을 들었을 때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거절의 말이 잘 나오지도 않았다.
“좋아요. 한 달간 사귀어봐요.”
한 달간 사귀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면 되는 것이다.
레오나가 수락하자, 데미안이 환하게 웃었다.
레오나는 그의 환한 웃음에 눈이 커졌다. 여태껏 그를 봐오면서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기쁘군.”
“아, 네…….”
“그럼,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하지.”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
“네?”
“사귀는 동안에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하는 게 어때?”
레오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 이름이요?”
“그래, 나만 네 이름을 부르고 있으니, 불공평한 것 같아서. 너도 내 이름을 부르도록 해.”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이 보면…….”
선배들이나, 동료들이 들으면 무척 난감할 것 같았다.
레오나의 곤란함을 간파했는데 데미안이 제안을 했다.
“그럼, 단둘이 있을 때만 서로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건?”
“……그건 괜찮을 것 같아요.”
“지금 단둘이 있으니, 한 번 불러봐.”
“지금요?”
“얼른.”
“데, 데미안.”
힘겹게 이름을 내뱉자, 데미안의 표정이 이상했다.
“단장님?”
“한 번 더.”
“데미안.”
“훨씬 듣기 좋군.”
레오나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니, 데미안은 가슴이 설렜다.
이게 그렇게 두근거릴 일인가 싶었지만, 엄청나게 두근거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음성이 자신의 이름을 담았을 때 가슴이 무척 벅찼다.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푸른 눈을 반으로 접으며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레오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얼굴로 저렇게 웃으니 반칙인 것 같기도 했다.
* * *
퇴궁을 하고 백작가로 돌아온 레오나는 데미안과 한 달간 사귀기로 했다는 걸 아스텔에게 알렸다.
그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한 달간 사귀기로 했다고요?”
“응.”
아스텔이 의외란 얼굴이었다.
“사귀어보고 아니면 거절하려고. 그게 더 확실할 것 같아서.”
아스텔은 레오나의 마음을 짐작했다. 고백을 받았는데 자신이나 시엘 때처럼 단칼에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레오나가 데미안에게 호감이 있다는 뜻이다.
“시엘이 모르게 하십시오. 그 녀석이 알면, 귀찮게 굴 겁니다.”
“그건 나도 알아.”
레오나는 시엘의 고백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데도 그 녀석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뭔데, 그렇게 둘이 심각해?”
레오나는 깜짝 놀랐다.
“뭐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방금 왔는데?”
레오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라도 시엘이 아스텔과의 대화를 들었을까 봐 가슴이 철렁했다.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닌데 둘 사이의 묘한 기류가 흐르는걸?”
감하는 정말 귀신같은 놈이다.
“별거 아니니, 신경 끄고 용건이나 말해.”
아스텔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시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말 돌려, 내가 들으면 안 될 말이라고 있는 거야?”
“용건 없으면 가, 바빠.”
“바쁘면 너나 가라, 난 레오나한테 용건 있으니까.”
“백작님도 바빠. 너처럼 백수가 아니란 말이야.”
시엘이 인상을 왈칵 구겼다.
“레오나, 나도 한자리 줘.”
레오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왜!”
“네가 도와줄 일이 없으니까. 아 스텔처럼 서류를 보고 검토할 줄도 모르잖아.”
“그거 말고 몸으로 하는 건 잘해.”
“딱히 몸으로 때울 만한 게 없어서.”
시엘이 씩 웃었다.
“기사단 만드는 건 어때? 내가 끝내주게 훈련시켜 줄게.”
“그건 시기상조야. 절차도 복잡하고.”
기사단을 꾸리는 건 백작가가 안정을 되찾고 나서 해도 된다. 지금 레오나의 가문은 이제 막 시작한 신생 가문이고,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집무실의 문을 열고 진저가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급한 건이라.”
“들어와.”
레오나가 허락하자, 진저가 아스텔에게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훑어본 아스텔이 시엘을 바라보았다.
“마침, 네가 할 일이 생겼다.”
시엘이 반색했다.
“그게 뭔데?”
“백작님께서 하사받은 영지 알지?”
“당연히 알지.”
“방금 올라온 보고인데 그곳에 산적이 나타났다고 한다.”
레오나도 눈을 크게 떴다.
“산적이라고?”
“영지로 가는 입구에 터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통행세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레오나는 기가 막혔다.
“시엘, 네가 해보는 게 어때?”
아스텔이 권유하자, 시엘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들이 레오나의 영지를 건드렸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나서야지.”
시엘이 웃으며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 나한테 맡겨. 그놈들 제대로 처리해 줄 테니까.”
“죽이는 건 안 돼. 적당히 손 봐서 치안대에 넘겨.”
“시시하지만, 레오나의 부탁이니 들어줄게.”
시엘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레오나는 아스텔을 보았다.
필시 이 일을 맡긴 건 며칠만이라도 시엘을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아스텔의 계산이 아닌가 싶었다.
레오나는 아스텔이 건넨 산적 관련 서류를 보았다.
‘보통 산적이 아닌 것 같았다. 암살자 길드 출신의 산적들이라…….’
시엘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겠지만, 이들도 도망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쉽게 붙잡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암살자 출신들이 산적 질을 하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상해.’
느낌이 이상했다.
* * *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오는데 휴버트가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다가왔다.
튤립이었다.
“백작님, 받으십시오.”
“응?”
“백작님께 온 선물입니다. 여기 카드도 있군요.”
레오나는 엉겁결에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카드를 확인했다.
[영원한 사랑을 그대에게.]
누가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휴버트, 서재에 놔줘.”
휴버트에게 꽃다발을 다시 건네고 출근을 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매일 아침 다른 종류의 꽃이 배달되었다.
[장미, 사랑을 맹세합니다.]
[해바라기,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리시안셔스, 변치 않을 사랑입니다.]
[달리아, 당신의 사랑이 절 아름답게 만듭니다.]
어디서 조사를 하는 것인지 의미가 담긴 꽃과 함께 카드가 보내졌다.
서재는 물론, 침실까지 꽃으로 장식되어 레오나는 꽃밭에 사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게 싫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데미안을 찾아가 그만하라고 말을 못 했다.
레오나는 오늘 받은 카라를 휴버트에게 주고는 데미안을 만나러 갔다.
단장실로 들어가니, 데미안이 심각한 얼굴로 책을 보고 있었다.
“흐음…….”
레오나는 그가 보고 있는 책을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데미안이 꽃 도감을 보며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데미안 단장님, 뭘 그렇게 열심히 보시는 겁니까?”
데미안은 레오나에게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레오나는 도저히 이름만 부를 수는 없어 단장님을 붙이는 것으로 협상하였다.
데미안이 서둘러 책을 덮었다.
민망한 모양이었다.
“매일같이 책을 보고 꽃을 찾아서 저희 집으로 보내시는 거였습니까?”
데미안이 두 눈을 반달로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마음에 들었나?”
레오나는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뭐,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군. 아침마다 꽃을 받으면, 하루의 시작이 기분 좋다고 하더군.”
솔직하게 꽃을 받고 기분이 조금 좋기는 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러자 데미안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지?”
“이미 제 서재고 침실이고 꽃으로 가득 찼거든요.”
“아, 그렇군. 앞으론 양을 조금 줄이도록 하지.”
안 보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안 보내시면 안 될까요?”
“받으면 기분이 좋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만, 매일 그렇게 받으면 질릴 것 같습니다.”
질릴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데미안이 수긍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그도 연애가 처음이었다.
그때 부단장 란젤로가 단장실로 들어왔다.
“단장님, 훈련 시간 다 되었습니다.”
“알겠다, 나가지.”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이 지나가면서 레오나의 손을 잡았다.
“가자, 레오나.”
“아, 네.”
데미안이 레오나의 손을 잡고 단장실을 나오자, 부단장 란젤로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곤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었군.’
데미안과 레오나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두 사람 사이에서 핑크빛 기류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예상은 했던 일이었다.
데미안이 레오나에게 관심이 있었고, 언젠간 둘이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현실이 된 모양이었다.
‘단장님에게도 봄이 왔군.’
매일같이 겨울 분위기만 났는데, 지금은 훈훈한 봄 분위기가 나고 있었다.
‘부럽군.’
그도 모태솔로였다.
그래서 데미안의 연애가 부러웠다.
그건 비단 란젤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단장님이 레오나에게 유독 다정한 것 같지 않아?”
데미안은 레오나의 마나 수련을 돕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부드러웠다.
데미안이 레오나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마나 유도를 하자, 간접적인 접촉임에도 레오나가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레오나를 바라보며 웃는 데미안의 표정이 예술이었다.
“난 단장이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봐.”
“헐, 세상이 뒤집히려나?”
“조용히 하고, 훈련에 집중해.”
란젤로가 호통치자, 기사들이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훈련에 집중했다.
“레오나, 흐름이 느껴지나?”
“아, 네.”
데미안이 유도를 도와준 덕분에 전보다 훨씬 마나를 순환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간도 훨씬 단축되었다.
“마력을 방출해 봐.”
레오나는 손바닥을 펼치고 마력을 방출했다.
“방출과 동시에 원하는 이미지의 마법을 떠올려봐.”
레오나는 시원한 물을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에서 방출된 마력이 물이 되어 분수처럼 내뿜었다.
덕분에 두 사람 다 홀딱 젖었다.
마력을 과다 방출한 탓이었다.
“제어가 어렵지?”
“네, 제어가 좀 어렵네요.”
“마력 제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조급해하지 마.”
“네.”
빙그레 웃은 데미안이 마력을 운용했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젖은 옷이 보송보송하게 말랐다.
레오나는 신기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신기해요.”
“너도 할 수 있어.”
데미안은 몸을 말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레오나는 어느 정도의 마력이 필요한지,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지 세세하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자, 젖었던 몸은 순식간에 보송보송해졌다.
마법이라는 것이 신성력만큼이나 오묘하고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오전 훈련은 이쯤 하자. 점심 먹고 마탑에 가야 하니까.”
“네, 단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레오나가 정중하게 인사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데 데미안이 붙잡았다.
“어디 가?”
“식당에 밥 먹으러요.”
“오늘부터는 나랑 먹어. 가자.”
레오나는 얼떨결에 데미안에게 붙들려 나갔다.
그는 마탑에 간다는 이유로 이른 퇴근을 하고 레오나와 함께 제도로 나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데미안과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게 되다니, 기본이 묘했다.
물론, 사귀는 사이긴 하지만.
“좋아하는 음식이 있나?”
“다 좋아해요.”
“그럼, A코스로 먹을까?”
“좋아요.”
음식은 데미안의 주도하에 먹게 되었다.
음식은 식전 음식으로 나온 양송이 수프와 바게트를 시작으로 크림소스 라비올리와 감자 뇨끼, 토마호크 스테이크 디저트로 케이크까지 배부르게 먹었다.
물론, 고급스러운 와인도 함께.
“단장님, 근데 여기 사람이 하나도 없네요?”
식당에 데미안과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빌렸다.”
“네?”
“너와 둘만의 시간을 위해 빌렸지.”
“…….”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예상대로 들어맞자, 레오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데미안이 자신을 위해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다니.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로맨틱하게 해준 적은 처음이었다.
“식사는 맛이 있었나?”
“네, 엄청 맛있었어요.”
“다행이군. 조사한 보람이 있어.”
데미안은 레오나와 사귀게 되면서, 그녀와 함께 갈 레스토랑과 데이트 코스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레오나의 기분이 좋은 것을 보니, 오늘 선택한 레스토랑은 성공적인 것 같았다.
“차 한잔하고 일어나자.”
“네.”
레오나와 데미안은 따듯한 허브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소한 대화였다.
레오나는 데미안과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았다. 그와는 언제나 공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석에서 사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가 조금 편하게 느껴졌다.
“그만 일어나자. 더 늦으면 아델라가 잔소리할지도 몰라.”
아델라는 시간 약속 어기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레스토랑을 나온 두 사람은 이동 마법진을 통해 마탑으로 향했다.
다행히 약속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와라, 데미안. 레오나.”
아델라가 손수 마중을 나왔다. 그리고 메리벨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데미안 단장님. 어서 와, 레오나.”
메리벨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레오나와 데미안은 아델라와 함께 탑주의 방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마탑 내부를 살펴봤는데 무너진 곳이 잘 복원되어 있었다.
그리고 1층에 죽은 마법사들을 애도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탑은 5장로의 배신으로 크게 몸살을 앓았다. 그리고 많은 마법사를 잃어야만 했다.
그만큼 큰 재앙이었다.
그리고 체계도 바꾸었다고 하였다.
“그럼, 장로직이 없어진 거예요?”
장로직이 없어지고, 모든 제자가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장로들을 교수로 한 수업 체계를 만들었다고 했다.
각 장로의 특기를 살린 과목을 창설하고, 마탑의 제자들이 수업을 수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탑을 마법을 배우는 학교로 만든 것이다.
“장로들도 느끼는 바가 컸던 모양이야.”
그들도 동료가 배신하고, 제자들을 제물로 삼았던 일이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레오나, 마나 수련은 잘 되고 있니?”
“열심히 하고 있어요. 단장님도 도와주시고요.”
“데미안이?”
“네.”
빙그레 웃은 아델라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한번 살펴봐도 될까?”
레오나는 기꺼이 아델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라는 조심스럽게 레오나의 몸 상태를 스캔했다.
“아주 좋구나. 흑사의 열매 흔적도 사라졌어.”
흑사의 열매 탓에 레오나는 마력을 쓸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흑사의 열매의 기운이 모두 사라졌다.
“머지않아, 네게 내 자리를 넘겨줘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아델라가 데미안과 레오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웃었다.
“너희 둘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네?”
“서로 사귀고 있는 거 맞지?”
레오나의 금빛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었다.
“둘 사이에 분위기가 말랑말랑한데 모르면 바보지.”
레오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모습은 또 처음 보는지라, 아델라는 흐뭇하게 웃었다.
“데미안이 잘해주니?”
“네…….”
“속 썩이면 나한테 말해. 혼쭐을 내줄 테니까.”
“듣기만 해도 든든하네요.”
“이제 그만 용건을 꺼내시죠.”
데미안이 딱딱하게 말하자, 아델라가 재미없는 놈이라고 욕을 하며 책을 한 권 꺼냈다.
“받으렴.”
레오나는 의아한 얼굴로 책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아델라가 말을 이었다.
“네 마나 수련도 어느 정도 궤적에 올랐고, 슬슬 마법을 제대로 익혀야 하지 않겠니. 언제까지 기본 마법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건, 내가 직접 쓴 마법 책이다. 내 마법의 정수가 녹아있지.”
“이걸 저한테 주셔도 돼요?”
“물론이지. 넌 하나뿐인 내 제자니까.”
임시로 제자로 삼은 것이었지만, 아델라에겐 임시가 아닌 진짜가 된 모양이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고, 내가 거둔 제자에게 뭐라고 남겨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게 너라서 다행이다.”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감사합니다, 스승님.”
“너무 급하게 익히지 말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익히렴. 알겠니?”
“네, 스승님.”
그 이후로 아델라와 일상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마무리했다.
탑주의 방을 나오자, 메리벨이 레오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리벨.”
“잠깐, 시간 돼?”
레오나가 데미안을 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밖에 있을 테니 이야기 나누다가 와라.”
데미안이 자리를 비켜주자, 레오나는 메리벨과 함께 오랜만에 숙소로 향했다.
메리벨과 동거했던 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레오나, 나 수행을 떠나게 되었어.”
“수행?”
“응, 아마 몇 년간 돌아오지 못할 거야. 그동안 너무 여기에만 매여 살았던 것 같았거든.”
메리벨은 마탑 내에서 외톨이였다. 큰 사건 이후, 마탑도 많이 달라졌지만, 그녀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그녀는 한꺼번에 친한 친구 두 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수행을 떠나기 전에 널 한 번 다시 만나보고 싶었어.”
“어디로 갈지는 정했어?”
“아니, 목적지를 두지 않으려고. 발길 닿는 대로 여행하며, 나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키고 싶어.”
메리벨은 강하지 못한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자신보다 앞서 나가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질투했다.
그게 얼마나 못난 짓이었는지 친구 둘을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돌아오긴 할 거지?”
“응, 돌아올 거야. 결국, 내가 마지막으로 남게 될 곳이 여기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방을 바라보는 메리벨의 눈빛에서 진한 애증이 느껴졌다.
“몸 건강하게 잘 다녀와.”
“고마워.”
“그리고 이거 받아.”
레오나가 내민 것은 자신의 통신 구슬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로 나한테 연락해. 당장 달려갈 테니까.”
“말만이라도 고마운걸? 사양하지 않을게. 통신 구슬은 비싸니까.”
메리벨의 농담에 레오나가 설핏 웃었다.
“농담도 할 줄 알고, 다행이다.”
메리벨이 멋쩍었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레오나는 메리벨이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라고 믿었다.
메리벨은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도 가졌으니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만큼 대단한 것은 없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으니까.
레오나는 메리벨이 전보다 나아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녀와 티격태격했던 순간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 또한 레오나에겐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다.
첫 만남이 좋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론 친구가 되었으니까.
메리벨이 웃으며 말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네 결혼식엔 꼭 갈게.”
“뭐?”
“너, 데미안 단장님이랑 결혼할 것 같거든.”
레오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직 그런 단계 아니야.”
대답하는 레오나의 귀가 빨갰다. 데미안과의 결혼이라니, 아직 거기까진 생각도 못 해봤다.
“부러워. 나도 언젠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응원할게. 네게도 그런 사람이 언젠가 생길 거야.”
레오나는 진심으로 메리벨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이제 행복해도 되니까.
그리고 몇 년 후에 메리벨은 레오나보다 빨리 행복을 맞이하게 된다.
몇 년 후의 일이다.
* * *
레오나와 사귀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데미안에겐 심각한 고민이 하나 생겼다.
진도가 안 나간다는 것.
다른 연인들이 하는 것처럼 같이 밥을 먹고, 차도 마시며 데이트도 했다.
그리고 훈련할 때가 아니면, 레오나와 단둘이 신체 접촉을 못 하는 것이다.
처음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진도를 나가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상의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주위엔 연애 경험이 없는 사람들뿐이니까.
레오나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그녀와는 한 달간 사귀어보기로 한 것이고, 날짜는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그는 퇴근하고 공작가로 돌아와 가신들을 소집했다.
가신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데미안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실수한 것이 있는지 조심스러웠다.
“내가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중대한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가신들이 동시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기억을 그녀에게 각인시키고 싶다. 나 아닌 다른 남자는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어야겠지.”
가신들이 경악했다.
데미안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너무나 진지했다.
“한 명씩, 의견을 내보도록.”
가신들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눈빛이 번뜩였다.
가신들이 숨을 집어삼켰다.
머릿속에서 데미안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쥐어 짜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한 가신이 손을 들었다.
“저…… 그분의 기억에 남으려면, 제일 먼저 그분이 가장 하고 싶어 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좋은 의견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어떤…….”
“내가 직접 그녀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나, 그건 그다지 감동을 줄 수 없을 것 같군.”
“그럼, 그분 주위에 있는 최측근을 공략해 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최측근이라…….”
레오나의 일을 봐주는 보좌관이 하나 있었다. 얼굴도 잘생긴 데다 키도 훤칠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자였다.
게다가 레오나와 오래된 사이라고 하니, 더 껄끄러웠다.
하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니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두었다.
그때 데미안의 머릿속에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내일은 마침 백기사단이 맞는 휴일이었다.
“그녀의 저택을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데미안이 의견을 낸 가신을 바라보았다.
“수고했다. 보상으로 하루 휴가를 주겠다.”
휴가를 준다는 말에 가신의 얼굴이 기쁨으로 차올랐다.
공작가에서 일을 하게 된 이후, 매일같이 야근이었다.
공작의 성격이 워낙 완벽주의다 보니,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을 진행시키기 어려웠다.
그것을 알기에 모두가 부러운 시선으로 그 가신을 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공작의 연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연구를 하겠다고.
데미안은 가신들에게 불을 지펴주고는 회의를 마무리했다.
* * *
오늘은 모처럼 맞는 휴일이었다.
그리고 늦잠을 자겠다는 레오나의 당찬 포부는 뜻밖의 손님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아침부터 데미안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데미안 단장님…….”
“좋은 아침이야, 레오나.”
“아, 네.”
레오나는 얼떨결에 그가 건넨 꽃다발을 받았다.
데미안이 손수 꽃다발을 들고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아주 화려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평소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차림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게 너무 잘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레오나는 데미안을 응접실로 안내해 함께 차를 마셨다.
“저택이 그대를 닮아 아름답더군.”
“아, 죄송해요. 진즉에 초대해야 했는데 제가 생각을 미처 못했네요.”
“아니야. 따지고 보면 나도 아직 그대를 내 저택으로 초대하지 않았으니까.”
“다음엔 꼭 데미안 단장님의 저택에도 가보고 싶네요.”
“조만간 초대하도록 하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들렸다.
“백작님, 아스텔입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응접실 밖에서 아스텔이 소리를 높여 그녀를 찾자, 레오나는 민망한 얼굴로 데미안을 보았다.
“저, 잠깐 실례 좀 할게요.”
“난 괜찮으니, 천천히 일을 보고 오도록 해.”
“그럼…….”
레오나는 서둘러 응접실을 나갔다. 응접실에 혼자 남겨진 데미안은 차를 데우고 있던 집사를 보았다.
집사는 오랫동안 레오나를 곁에서 모셔왔을 것이다. 그라면 레오나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백작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나?”
“백작님은 겉과 달리 소녀 같은 면이 있으십니다.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시죠. 선물하실 생각이시라면 특별한 의미가 담긴 물건이 좋을 듯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유명한 장인이 만든 수제 밀랍 인형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저택에 돌아오시면, 늘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가지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가게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조언 고맙네.”
역시 방문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레오나가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죄송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아니야. 당연히 급한 일이 먼저지.”
“기다리기 지루하지 않으셨어요?”
데미안이 싱긋 웃으며 집사를 보았다.
“훌륭한 집사를 두었더군.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어.”
휴버트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휴버트는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을 때부터 저를 살펴준 사람이에요. 안 좋은 일로 칼리반 백작가에서 나가게 되었다가 제가 다시 불렀죠.”
“그랬군.”
“그에게 네 환심을 살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았는데 좋은 의견을 내주었어.”
“제 환심을요?”
데미안이 우아한 동작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나는 아직 네 환심을 제대로 사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야.”
“…….”
찻잔을 내려놓은 데미안이 레오나의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어떻게 하면, 네가 날 더 좋아해 줄까?”
순간 레오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귓가를 파고들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레오나는 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킬까 봐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는 집요하게 레오나에게 달라붙었다.
“저, 데, 데미안 단장님. 너무 가깝습니다만.”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어진 데미안의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우린 연인 사이인데 가까워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레오나의 손을 잡아들어 올린 데미안이 그대로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 생경한 감촉에 레오나는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더 했다간 네 얼굴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
“아…….”
레오나가 황급히 그에게서 벗어나, 얼굴의 열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식은 차를 들이켰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데미안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레오나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조만간 그대의 환심을 살 만한 아주 근사한 선물을 들고 다시 오도록 하지.”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기대해.”
거절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선물할 모양이었다.
레오나도 말리지는 않았다.
레오나는 데미안을 배웅하고 휴버트에게 물었다.
“대체 뭘 알려준 거야?”
“백작님이 좋아하실 만한 것을 알려드렸습니다. 아무래도 진심이신 모양입니다.”
“…….”
“두 분이 잘 어울리십니다.”
“아까 있었던 일은…….”
“저 혼자만 담고 있겠습니다.”
휴버트가 보는 앞에서 스킨쉽이라니, 너무 부끄러웠다.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남들이 보는 앞에서 스킨쉽을 하게 되면, 정신이 가출할 것만 같았다.
그보다 더한 것도 하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부끄러웠다.
‘이렇게 부끄러운데 더한 건 어떻게 해?’
새삼 이 세상의 모든 연인이 존경스러워졌다.
‘연애도 쉬운 게 아니구나.’
연애하면 신체 접촉은 불가피하지만, 막상 직접 경험해 보고 나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저 닿기만 했을 뿐인데도 이런데, 이보다 더 진한 것을 하게 된다면 얼굴이 터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아, 이보다 더한 걸 어떻게 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일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싫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마음이라니.
몸과 마음이 자신을 배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어?”
“얼굴이 빨간데 열이라도 있으신 건…….”
“아니야, 그런 거.”
레오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창피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얼굴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휴버트는 혼자서 걸어가는 레오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 * *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약속한 한 달이 되었다.
그동안 레오나는 데미안과 시간을 자주 보냈다. 경치 좋은 곳에서 데이트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보통의 연인들이 하는 것들을 즐겼다.
데미안은 정중했고, 매너가 좋았다. 결코 자신의 욕심을 내세우지 않았고, 아주 천천히 진도를 나갔다.
레오나도 싫지 않았다. 그와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좋았고, 두 눈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도 좋았다. 만나거나 헤어질 때 포옹하는 것도 가슴이 뛸 정도로 좋았다.
의외로 그의 품은 아늑했고, 따듯했다.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하루의 피곤이 달아나는 기분마저 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이군.”
마지막 날인 오늘, 데미안은 풀 코스로 데이트를 준비했다.
연인들만의 장소라 불리는 경치 좋은 호수에서 피크닉을 하고, 보트도 탔다.
당연히 노는 데미안이 저었다.
보트의 마주 보고 앉아, 해가 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시간을 가졌다.
고즈넉한 호수 위에서 단둘이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척 유익했다.
호수의 피크닉을 마치고, 고급 와인 바에서 와인도 한 잔씩 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군.”
데미안이 진한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그렇네요.”
와인 잔을 내려놓은 데미안이 진지하게 물었다.
“한 달 동안 나와 보냈던 시간에 대한 느낌을 듣고 싶어.”
레오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좋았어요. 데미안 단장님의 새로운 모습도 많이 봤고요.”
레오나는 진심으로 데미안이 괜찮은 남자라는 것을 느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진지하게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데미안이 처음이었다.
그를 만나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배웠고, 느꼈다.
그래서 레오나는 그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궁금해졌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남자라면 나중에 결혼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결혼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는데 데미안과 만나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배우자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레오나는 혼자 모든 걸 짊어져 왔다. 그래서 외롭고 고독했다.
곁에서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시엘과 아스텔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레오나에게 있어, 전우였고 친구였다. 그 이상으로 발전하는 건 어려웠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건 레오나에게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두 사람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아니었다.
그는 레오나의 상사였고, 남자로서 시작을 하였다.
그래서 레오나는 그를 남자로 인식하고 만났다.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배려해 주고, 아껴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다정하게 바라봐주는 것이 좋았다. 그 눈빛이 자신의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겼다.
“한 달은 너무 짧은 것 같아요.”
“…….”
“저는 진지하게 데미안 단장님과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어요.”
데미안의 두 눈이 커졌다.
“진심으로?”
“네, 진심이에요.”
데미안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이 상체를 숙여,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오나의 입술을 훔치고 떨어졌다.
깜짝 놀란 레오나가 동그래진 눈으로 데미안을 보았다.
“나와 계속 만나겠다는 건 이런 것도 하겠다는 뜻인데 괜찮아?”
레오나는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요. 상대가 데미안 단장님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만나는 동안 몸은 안 돼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요.”
나름대로 용기 있게 낸 대답이었다.
“좋아, 입술로 만족할게. 다른 건 결혼 후에 하면 되니까.”
“저와 결혼하고 싶으세요?”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고 했으니, 끝은 결혼이 맞잖아. 난 너와 헤어질 생각이 없으니까.”
“…….”
“설마, 넌 헤어질 생각도 하는 건가?”
“그건 아니에요.”
데미안을 조금 더 만나보고 싶었다. 그게 가장 컸다. 그와 헤어지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연애의 끝은 그와의 결혼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빙그레 웃은 레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데미안이 했던 대로 그의 입술을 훔쳤다.
데미안의 커진 눈이 보였다.
“나쁘지 않네요.”
“위험한 짓을 했어.”
데미안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초식동물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는 달려들지 않았다.
“다음번엔 정말 위험할지도 몰라.”
“그럴까요?”
“그래, 정말로 위험해. 하지만 오늘은 봐줄게.”
그는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서둘러서 망치는 것보다, 천천히 성공을 거듭하는 게 낫다.
“오늘 데이트는 마음에 들었어?”
“무척이요. 저도 평범한 연인들처럼 해보고 싶었는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의 데이트는 레오나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데 데미안이 준비를 해왔다.
물론, 데미안에게 숨은 조력자인 휴버트가 있다는 건 비밀이었다.
데미안은 종종 레오나의 저택을 방문했고, 휴버트와 대화를 자주 나눴다.
아스텔과도 친해져 보려 했지만, 그는 자신을 지나치게 경계했다.
오늘의 데이트도 휴버트의 조언이 컸다. 휴버트는 레오나가 지나가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들을 기억했다가 데미안에게 알려주었다.
오늘은 무엇을 보고 부러워했고, 어떤 가게에 눈을 빼앗고, 어떤 디저트와 음식이 떠올리는지 등의 사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에겐 더없이 유익한 정보였다. 그의 조언 덕분에 오늘의 데이트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으니까.
한 달 동안 데이트를 하며, 데미안은 레오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거기에 휴버트의 조언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오늘이 레오나와의 마지막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진도도 만족스럽게 나갔고.
무엇보다 레오나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해준 입맞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짜릿했다.
* * *
며칠 후, 데미안은 깊은 고민이 잠겼다.
레오나가 영지에 일이 생겨, 제도를 비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지가 제도에서 가까운 곳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기사단에도 휴가를 낸 상태였다.
영지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진 탓이었다.
데미안은 공작가로 돌아와 즉시 가신들을 소집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부른 것인지 가신들은 긴장한 얼굴로 데미안을 보았다.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아제르티아 백작의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봐라.”
“예, 알겠습니다.”
가신들은 물어보지도 않고 즉각 대답했다. 데미안이 예민하게 나올 때는 무조건 그의 명에 따라야 심신이 고달프지 않았다.
게다가 미래의 공작 부인이 될지도 모를 사람의 일이니, 당장 알아봐야 한다는 사명감이 타올랐다.
유능한 가신들답게 그들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정보를 알아왔다.
“아제르티아 영지에 출신을 알 수 없는 산적 때와 마적 떼가 들끓고 있답니다. 규모도 상당해서 백작님께서 고전 중이신 모양입니다.”
“산적 떼와 마적 떼라고?”
“예. 워낙 신출귀몰한 자들만 모아 놓은 터라, 잡기도 쉽지 않답니다. 포로 잡은 자들은 모두 의리를 지키며 자결까지 한다고 합니다.”
레오나가 고생할 만했다.
그곳은 레오나가 처음으로 하사받은 영지고, 꽤 괜찮은 곳이었다.
“더 자세히 알아봐. 분명 그들을 조종하는 배후가 있을 것이다.”
갑자기 많은 산적 떼와 마적 떼가 한 곳만 괴롭히는 것은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목적에는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 하는 배후가 있는 것이고.
레오나는 아직 영지 경험이 없어, 곤란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도움을 주면 되지 않을까.
안 그래도 레오나와 보내는 시간이 적은데 이런 일까지 생기면, 곤란하다.
* * *
영주의 성.
성의 집무실에서 레오나는 시엘과 아스텔을 만났다.
영지에 출몰하는 산적 떼를 토벌하기 위해 시엘을 보낸 적이 있었다.
시엘은 훌륭하게 산적 떼를 토벌하여 치안대에 인솔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체 어디서 그 많은 산적 떼와 마적 떼가 나타나는 것인지, 잡아서 인솔하면, 다른 놈들이 계속해서 나타나 영지민들을 괴롭혔다.
“아무래도 배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스텔이 내린 최종적인 판단이었다. 배후가 그들을 조종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아스텔의 생각이었다.
“배후가 있다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아무래도 백작님을 시기 질투해서 벌어진 일 같습니다.”
“나를?”
이해가 안 된다.
“날 왜 질투해?”
“백작님이 가진 것들이 부러운 게 아닐까요?”
레오나는 기가 막혔다.
“내가 가진 게 얼마나 된다고 부러워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도 많은데.”
똑똑.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백작님, 제이콥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제이콥은 레오나가 성의 집사로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집사를 전문으로 육성하는 학교 버틀러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휴버트의 추천으로 고용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야, 제이콥?”
“그게 좀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레오나는 제이콥을 따라 집무실을 나왔다.
그 뒤를 시엘과 아스텔이 따랐다.
성문 앞에 다다르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 밧줄이 묶인 채 성문 앞에 있었던 것이다. 입에 재갈까지 물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에 걸린 팻말이 아주 결정적이었다.
나는 산적 떼와 마적 떼를 고용한 자를 알고 있다.
미간을 찌푸린 레오나가 제이콥을 보았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옮겨요.”
“예, 백작님.”
제이콥은 하인들을 시켜 남자를 성안에 있는 빈방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레오나와 시엘, 아스텔이 남자를 심문했다.
“당신은 누구죠?”
“제 이름은 롭입니다. 심부름꾼이죠.”
“심부름꾼?”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분들을 대신하여 심부름을 하는 거죠.”
“자, 그럼. 이 팻말을 목에 걸고 우리 성에 있었던 이유를 들어볼까요?”
이곳에 잡혀 오기 전, 그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아제르티아 백작에게 네가 알고 있는 진실을 모두 말해라, 그리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그 본보기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용병들이 초주검이 되었다.
상대는 대단한 힘을 가진 자였다. 모두 그의 손에 용병들이 쓰러졌다.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아제르티아 백작에게 밝히는 것이었다.
고용주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목숨이 먼저였다. 그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자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이 꼴로 아제르티아 백작성 앞에 버려졌다.
남자는 무거운 입을 열어 진실을 털어놓았다.
“저는 칼리반 백작님의 의뢰를 받고 이곳에 산적 떼와 마적 떼를 고용해 일을 벌였습니다.”
레오나가 깜짝 놀랐다.
“방금 칼리반 백작이라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저는 칼리반 백작님의 의뢰를 받고 이곳 영지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레오나는 아스텔과 시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구지?”
“그러게, 누가 이자를 잡아다 바친 걸까?”
레오나는 무언가 잡히는 곳이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남자의 처분은 아스텔에게 맡겼다. 시엘에게 맡기면, 남자가 온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스텔은 시엘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처리할 테니까. 시엘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타입이라, 믿고 맡길 수가 없었다.
아스텔과 시엘이 롭이란 자를 심문한 결과, 배후는 칼리반 백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롭은 정말로 진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이 났다.
누군가 롭이란 심부름꾼을 찾아냈고, 성문 앞에 두고 갔다. 롭은 자신을 버린 자로부터 무언의 협박을 받아 레오나에게 진실을 말했을 가능성이 컸다.
일단 그건 제쳐 두고.
배후가 칼리반 백작이라니.
도저히 친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내보낸 딸이 잘되길 바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짓을 벌인다고?
레오나가 아스텔을 보았다.
“최근 칼리반 백작가의 상황은 어때?”
잊고 살려고 했다.
그쪽도 그러길 바랐다.
그런데 그쪽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어떻게 안 좋은데?”
“공예품 사업을 시작으로 줄줄이 사업들이 망했습니다.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제도에 있는 백작가의 저택도 저당 잡힌 모양입니다.”
“그게 내 탓이라 여긴 건가?”
“그렇다기보단 배가 아픈 게 아니겠습니까?”
“내보낸 딸이 잘되어서?”
“아무래도요.”
어이가 없다.
“칼리반 백작을 만나봐야겠어.”
이젠 정말 담판을 지을 때다.
서로가 잊기를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 * *
레오나는 아스텔과 함께 롭을 데리고 칼리반 백작가를 찾았다.
사전 허가 없이 쳐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백작가의 안주인인 그레타 부인이 저택을 찾아온 레오나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
“예의를 지키십시오. 이분은 당신이 함부로 말하실 분이 아닙니다.”
아스텔이 살기를 분출하며 차갑게 말하자, 그레타 부인이 창백해진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전 이제 이 가문의 사람이 아닙니다. 엄연한 제국의 백작이죠. 그러니 그에 맞는 예의를 갖춰주시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레타 부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칼리반 백작이 나왔다.
그는 레오나와 아스텔, 롭을 일별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따라와라.”
레오나는 그레타 부인을 지나쳐, 아스텔과 함께 롭을 데리고 칼리반 백작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레오나의 시선이 집무실 곳곳에 붙어 있는 빨간 딱지로 향했다.
많이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용건이 무엇이냐?”
싱긋 웃은 레오나가 칼리반 백작을 보았다.
“예의를 갖춰주시죠. 저도 엄연히 백작인데 반말을 듣는 건 거북하네요.”
“그전에 넌 내 딸이 아니냐.”
“혈연관계는 진즉에 끝난 걸로 압니다. 그러니 서로 남남이죠.”
“…….”
칼리반 백작이 이를 악물고는 말했다.
“용건이 무엇이오?”
레오나는 데리고 온 롭을 들이밀었다.
“제 영지에서 재밌는 일을 벌이셨더군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발뺌하시는 겁니까?”
“난 모르는 일이오.”
빙그레 웃은 레오나가 영상구를 꺼냈다. 롭이 만일을 대비해 감춰두고 있던 보험이었다.
레오나는 칼리반 백작이 보는 앞에서 영상구를 재생시켰다.
영상구는 시엘과 아스텔이 놈을 집요하게 심문하여 얻어낸 증거였다.
영상을 본 칼리반 백작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곤 롭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롭은 어깨를 움츠리며 아스텔의 뒤로 슬금슬금 숨었다.
“네놈이……!”
입을 다문 칼리반 백작이 레오나를 노려봤다.
“가문을 나갔으면, 얌전히 살 것이지, 네가 감히 라이오넬 공작을 이용해 복수를 해?”
“……….”
“네가 어떻게 라이오넬 공작을 꼬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널 망치고 말 것이다.”
아스텔은 표정을 굳혔고, 레오나는 감탄스럽다는 얼굴로 박수를 쳤다.
“다행이에요. 당신이란 사람이 내 아버지가 아니어서.”
“…….”
“듣자 하니 부채가 3억 골드라더군요.”
레오나는 테이블에 붙어 있는 빨간 딱지를 건드리며 이죽거렸다.
“이제부터 그 부채에 관한 권리를 제가 가져올까 해요.”
“뭐?”
“백작님 말대로 저는 라이오넬 공작과 곧 결혼할 사이이니, 그 정도는 충분히 가져올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레오나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오늘은 경고차 온 거예요. 앞으로가 아주 기대가 되네요. 칼리반 백작님.”
그렇게 말한 레오나가 돌아섰다.
“네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여기나?”
흥분했는지 그의 입에서 또 반말이 나왔지만, 레오나는 개의치 않았다.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레오나가 숨겨두었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녀의 위압감이 칼리반 백작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레오나의 실력이 자신 웃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위압감은 두 다리로 견디고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다.
레오나의 말대로 그는 그녀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피식 웃은 레오나가 존재감을 거뒀다.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레오나는 아스텔과 롭을 데리고 칼리반 백작가를 나왔다.
레오나가 나간 직후, 백작가의 집무실에서 괴성과 함께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나는 아스텔에게 롭을 맡기고, 데미안을 만나러 갔다.
그에겐 제도에 오기 전에 미리 연락해 둔 터였다.
일전에 함께 피크닉을 즐겼던 호수에서 레오나는 데미안과 단둘이 만났다.
“데미안 단장님이 하신 일이죠?”
“뭘?”
“성문 앞에 버려둔 남자.”
“난 잘 모르는 일이다.”
“시치미를 떼시는 거예요?”
레오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전 알 권리가 있지 않나요?”
데미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아.”
갑자기 레오나가 한숨을 내쉬자 데미안이 드물게 긴장했다.
“그런 일을 하실 거면 몰래 하실 게 아니라, 제게도 알려주셨어야죠.”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어째서요?”
“도움받는 걸 너는 싫어하니까.”
레오나는 뭐든지 혼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싫어하지 않아요.”
“어?”
“단장님께 도움받는 거 싫지 않다고요.”
“…….”
“앞으론 저와 상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레오나.”
“약속해 주실 거죠?”
“그래, 그럴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레오나가 데미안을 바라보며 웃었다.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뭐든 말만 해.”
“칼리반 백작가의 부채에 대한 권리 저한테 넘겨주세요. 물론, 그냥 달라는 건 아니에요. 원하는 것으로 대가를 치를게요.”
데미안이 레오나의 손을 잡고는 깍지를 꼈다.
“받고 싶은 대가는 내가 원하는 것이면 되나?”
“물론이에요.”
데미안이 레오나의 허리를 한 팔로 휘어 감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숨결이 코끝에 닿았다.
“네 키스면 될 것 같은데…….”
레오나는 손을 들어 그의 목에 감았다.
“정말 그거면 되겠어요?”
레오나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데미안의 푸른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럼, 기꺼이 드려야죠.”
레오나가 먼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었는지 데미안이 레오나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깊게 침투해 왔다.
더없이 격렬하고,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를 꼭 끌어안은 두 사람 사이에서 후끈한 열기의 꽃이 피었다.
그건 서로를 향한 끌림이었고, 유혹이었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 유혹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는 원하는 만큼 레오나에게서 대가를 얻어냈다.
* * *
며칠 후, 칼리반 백작의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다.
서신을 읽은 칼리반 백작은 그 자리에서 서신을 갈기갈기 찢었다.
서신의 내용은 라이오넬 공작가로 온 것이었는데 오늘부로 칼리반 백작가에 대한 부채의 권리를 레오나 아제르티아 백작에게 넘겼다는 것이었다.
레오나가 기어이 라이오넬 공작으로부터 권리를 얻어낸 모양이었다.
“백작님!”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야?”
“좀,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제트티아 백작가에서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뭐?”
집무실을 박차고 나온 칼리반 백작은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당신은…….”
“아제르티아 백작가에서 나온 아스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부채에 대한 권리를 이행하려 합니다.”
“권리 이행?”
“라이오넬 공작가에서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드린 것으로 압니다. 그게 오늘 오전 9시까지였고요.”
“그래서?”
“기한이 지났는데도 갚지 않으셔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백작님께서 부채를 갚지 않아 벌어진 일이니 양해 바랍니다.”
아스텔이 하인들을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모두 수거하도록.”
지시가 떨어지자,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저택을 뒤집어 놓았다.
칼리반 백작을 비롯한 그레타 부인, 사용인들인 멍한 얼굴로 아스텔과 하인들이 벌이는 일을 지켜보았다.
벽에 걸린 액자며, 장신구, 고급스러운 의복들까지 모조리 수레에 실렸다.
“안 돼! 이건 결혼 예물이란 말이야.”
그레타 부인이 보석함을 사수하려고 하자, 아스텔이 위협적인 눈빛으로 그레타 부인을 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에 그레타 부인은 보석함을 든 손에 힘을 빼고 말았다.
그사이 하인이 보석함을 빼앗아 챙겼다.
“아…….”
그레타 부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드레스며 장신구며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은 모조리 수레에 실렸다.
“남은 금액은 물건을 처분한 직후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아스텔이 몰고 온 한차례의 폭풍이 저택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며칠 후, 정확히 남은 부채에 대한 내용이 칼리반 백작가로 전달되었다.
서신을 받은 백작은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기절했고, 그레타 부인은 앓아누웠다.
그리고 칼리반 백작은 남은 부채를 갚지 못했다. 그 결과 백작가의 저택마저 레오나의 손에 넘어갔다.
하루아침에 칼리반 백작은 길거리에 나 앉는 신세가 되었다.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자, 가신들은 모두 그를 등졌고, 사용인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소식을 들은 리리엘은 어머니 그레타 부인만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 없이 칼리반 백작가를 버렸다.
칼리반 백작은 그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지 못했다.
다 자업자득이었다.
* * *
레오나는 아스텔이 가져온 칼리반 백작가에 대한 보고서를 다 읽은 후 덮었다.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칼리반 백작은 빈털터리로 쫓겨났다.
동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저택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긴, 경매에 내놔야지.”
노블레스 타운에 있는 저택이니 좋은 값에 팔릴 것이다.
레오나에게 괴로운 기억만 남겨주었던 그곳은 이제 다른 주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타 부인이 칼리반 백작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했다고 한다.
소송은 칼리반 백작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이혼이 성립하게 되었다.
칼리반 백작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레오나는 그가 모든 것을 잃고 깨닫는 바가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바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레오나는 그가 어쭙잖은 복수심으로 남에게 해코지할까 염려되어 감시자를 붙였다.
예상대로 그는 자신을 버린 그레타 부인에게 해코지하려고 하였고, 현장에서 제압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한때 주름잡던 한 가문의 가주의 비참한 추락이었다.
* * *
“이제 정말 끝이군.”
데미안의 말이었다.
레오나는 데미안과 데이트 중이었다. 오늘은 공작가의 저택에 방문하여 그의 정원에서 산책을 즐겼다.
산책을 즐기며, 레오나는 그에게 칼리반 백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에게서 칼리반 백작가에 대한 부채 권리를 받은 후 레오나는 그에게 칼리반 백작가와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공유했다.
이제 더는 칼리반 백작이 그녀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좋네요.”
“그런가?”
레오나와 데미안은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레오나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따스한 햇살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앞으로도 계속 평화로웠으면 좋겠군.”
“그러게요.”
두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미소가 그려졌다. 두 사람의 얼굴에선 행복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