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대미궁
황량한 모래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구멍은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위에서 보면 사막이 입을 벌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곳을 연구하기 위해 수많은 학자와 모험가들이 구멍 안으로 들어갔지만, 살아서 나온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세계 불가사의였다.
그곳에 두 사람이 나타나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 사람은 여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서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노인이었다.
노인을 힐끗 쳐다본 여인은 그의 뒷덜미를 잡아 끝없는 미궁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한참을 내려가 구멍 안 바닥에 착지한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입구를 바라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여인은 노인을 미궁의 입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기서 그가 살아남든 죽든 상관은 없었다.
노인은 이곳에 마탑주 아델라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오래 버티길 바라지.”
노인을 집어삼킨 미궁을 바라보며 여인은 몸을 돌렸다.
그녀의 임무는 이제 여기서 끝이었다. 나머진 주인께서 알아서 하리라.
여인은 그곳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미궁 안에 남겨진 노인, 5장로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이를 갈았다.
한 번의 실수로 사람을 이 꼴로 만들다니. 하지만 아직 비장의 수가 남아 있었다.
5장로는 있는 힘을 다해 마법을 펼쳤다. 그의 앞에 문이 나타났다.
문을 연 그는 그곳에서 리즈를 소환했다. 소환된 리즈의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날개는 더욱 커져 있었고, 단단한 뿔이 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진 피부는 또 어떠하랴.
나름대로 자신이 보낸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기른 모양이었다.
“크크크, 아, 아주 마음에…… 드는군.”
5장로가 리즈에게 손을 뻗었다.
“이, 이리 와라, 나, 나의 종아.”
힘이 없는 탓에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리즈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의 언령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리즈가 그에게 걸어왔다.
5장로가 히죽 웃었다.
“너, 너의 모, 모든 것을…… 내, 내게 너, 넘겨라.”
몸을 숙인 리즈가 5장로에게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5장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리즈의 머리채를 쥐려는 순간.
“컥!”
도리어 리즈가 5장로의 목을 움켜쥐었다.
5장로가 두 눈을 부릅떴다.
리즈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줘야 하지?”
“이, 이게 무슨…….”
리즈가 다른 손의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아, 놀랐구나. 미안하지만 당신이 내 머릿속에 걸어놓은 세뇌 마법은 진즉에 깨부쉈어.”
5장로는 그녀를 깊고 어두운 지옥의 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곳은 5장로의 실험체들이 있는 곳이었다.
5장로는 완벽한 마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체 실험을 하였고, 그 실패작이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 있는 것들은 모두 의지가 없는 본능에 가까운 괴물들이었다.
유일하게 의지를 가진 것은 리즈가 유일했다.
리즈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찾아냈다. 그곳에서 죽인 자의 힘을 자신이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라 죽이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리즈는 약한 것부터 시작해 강한 것들과 싸워 힘을 흡수했다.
그 힘을 이용해 5장로가 머릿속에 걸어놓은 세뇌부터 해결했다.
세뇌 마법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힘을 얻음으로써 내부에 변화가 일어났고, 머릿속에 기이한 마법을 발견했다.
그게 바로 세뇌 마법이었다.
5장로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실험체에 세뇌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용서할 수 없었다.
힘을 얻기 위해 그의 제자가 되었고, 원하던 힘을 얻었지만, 5장로의 명령으로 레오나와 싸우다가 친구인 라이카를 잃었다.
그리고 라이카가 살려준 자신의 목숨은 5장로에 의해 버려졌다. 리즈는 살아남아야 했다.
라이카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5장로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주기 위해서라도 죽을 수는 없었다.
리즈가 경악한 5장로를 바라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이 만들어낸 실험체들이 내게 선물을 주었어. 이제 당신이 선물을 받을 차례야.”
리즈는 손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톱은 날카로운 병기가 되어 예리하게 번뜩였다.
길어진 그녀의 손톱이 5장로의 가슴을 꿰뚫었다.
“쿨럭!”
5장로가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그의 생명력이 무서운 속도로 리즈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그렇게 5장로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 채 미라가 되어 죽었다.
5장로에게서 손을 뗀 리즈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어둠뿐이었다.
“라이트.”
빛의 구를 생성해 공간을 밝혔다. 그러자 그녀의 발밑을 중심으로 기이한 문양과 벽면 가득 그려진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리즈는 입구를 찾았다.
그녀가 서 있는 반대편에 문이 보였다. 문으로 걸어간 그녀가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사악한 것이 침입하였구나. 철퇴를 가하리라.]
알 수 없는 음성과 함께 리즈가 서 있던 바닥에 무너졌다.
“꺅!”
리즈는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비명은 점점 멀어졌다.
* * *
마탑에서 복귀한 레오나는 며칠간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첫 번째로 저택으로 돌아가 자신의 무사 귀환을 알렸다.
휴버트와 엠마가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다 함께 저녁 만찬을 즐겼다.
고용인들 모두에게도 특별 보너스를 지급했다.
다이아몬드 광산에 대한 것은 휴버트가 잘 맡아서 관리하고 있어서 레오나가 크게 할 일은 없었다.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벌어들이는 돈 일부는 저택 관리비용으로 쓰고, 남은 비용은 모두 레오나의 은행 계좌에 차곡차곡 저축되었다.
그리고 기사단에 출근하면 선배 기사들과 훈련하며 시간을 보내고, 간간이 마나 심법 수련도 꾸준히 하였다.
누군가 자신에게 먹인 흑사의 열매의 기운을 없애려면, 아델라가 전수해 준 마나 심법을 완전히 마스터해야만 했다.
그건 또 하나의 숙제나 다름없었다. 마나 심법 훈련을 마친 레오나는 퇴근 준비를 하였다.
그때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시엘이 나타났다.
“레오나 경.”
레오나는 단번에 인상을 구겼다. 퇴근하는 길에 생긴 방해꾼이 달가울 리 없었다.
“무슨 일이야?”
“마탑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오던 참입니다.”
“돌아온 지가 언젠데 이제 와?”
시엘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소식을 듣고 곧장 남부에서 달려왔는데 전혀 반갑지가 않은 모양이네요.”
레오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남부 지방에서 달려왔다고?”
“물론이죠. 최대한 임무를 빨리 마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왔습니다.”
노력이 가상했다.
“보다시피, 난 다친 데 없고 무사해.”
그 말에 시엘이 씩 웃었다.
“혹시나 다쳤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됐으면, 그만 가서 쉬어라.”
시엘이 짐짓 서운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쉬라니요. 당신을 보기 위해 달려온 접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셔야죠.”
“약속?”
시엘이 충격받은 듯한 얼굴을 하였다.
“설마, 잊으신 겁니까?”
잊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가 그런 약속을 했던가?”
“너무합니다. 저는 그때 목숨까지 걸었는데…….”
저대로 놔뒀다간 한없이 땅속으로 파고들어 갈 기세라 레오나는 장난은 그쯤 하기로 하였다.
“그만 고개 들지. 나랑 술 마시고 싶어서 온 거 아냐?”
시엘의 고개가 번개같이 들렸다.
“저랑 술 마셔줄 겁니까?”
레오나가 고갯짓을 했다.
“가자.”
시엘이 기쁜 얼굴로 레오나의 옆에 섰다.
“제가 아주 기가 막힌 술집을 알아놨습니다. 그리고 가죠.”
시엘이 신이 나서 앞장서자,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이동했다.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데미안이었다.
그는 퇴근하는 레오나를 만나기 위해 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레오나는 흑기사단의 시엘과 만나고 있었다.
둘이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무척이나 친해 보였다. 거기다 둘이 같이 말까지 타고 가버렸다.
“둘이 꽤 친한 모양이군.”
그럴 만도 했다.
임무도 몇 번 같이한 데다, 시엘이 찾고 있다던 여인이 레오나였다는 사실도 있으니.
친분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이 불쾌감은 뭐란 말인가.
“마음에 안 드는군.”
이 찝찝한 기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해결을 해야겠어.”
결심한 데미안은 그길로 바로 퇴근을 하였다.
* * *
시끌벅적한 술집 안.
시엘이 레오나를 데리고 온 곳은 최근 개점한 주점이었는데 3층짜리 건물에 루프 탑이 끝내주는 곳이었다.
위치도 좋았고, 루프 탑에서 내려다보는 제도의 야경은 술맛을 당기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없는 사이에 이런 데가 다 생겼네.”
“마음에 들다니, 다행입니다.”
시엘은 능숙하게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오늘 계산은 레오나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문은 모두 시엘에게 맡겼다.
잠시 후, 레오나와 시엘이 앉은 테이블에 맛깔나는 음식이 차려졌다.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겹겹이 쌓아 올린 카프레제와 홀스래디쉬소스를 곁들인 훈제 연어.
그리고 시엘이 직접 고른 와인까지 완벽했다.
“자, 레오나 경의 무사 귀환을 위해 건배할까요?”
시엘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와인잔을 들어 올리자,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건배를 해주었다.
콰직.
그런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두 사람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은 그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두 사람을 보았다.
왠지 화가 났다.
애꿎은 스푼만 그의 손에서 부러졌다.
“왜 화가 나는 거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저 두 사람을 보니 화가 났다. 자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레오나에게 단독 임무를 맡겼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곳에서 위험에 처하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레오나가 위험할 뻔했다는 아델라의 말에 마탑으로 달려갔다.
마탑은 일련의 사태로 정신이 없었고, 그 와중에 레오나는 마법사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사함을 확인하자, 안도감이 들었다. 통신으로 아델라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레오나가 위험했다.
이 단어가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레오나가 위험했다가 레오나가 죽었다가 될까 봐.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데미안은 자신 앞에 놓인 와인을 단번에 들이켰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는 고위 귀족이었고, 언제나 기품 있게 행동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지금 만큼은 기품이고 뭐고 나 내팽개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머리는 왜 쓰다듬는 거지?”
레오나가 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주 좋아 죽는군.”
시엘의 표정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너무 얄미웠다.
“그만 일어나야겠군.”
아무래도 이건 자신다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되찾기로 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주점을 나갔다. 계속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자신을 버리게 될 것 같았다.
“괜히 왔군.”
주점을 나와 루프 탑을 한 번 올려다본 그는 몸을 휙 소리 나게 돌렸다.
* * *
2황녀 비비안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마탑의 5장로 드미트리가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레오나가 멀쩡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에게 보상을 내렸다. 그의 알량한 혀에 놀아나서 말이다.
다행히 마탑에서 도망친 그를 잡아다가 족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2황녀 전하께선 기분이 무척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그러게요. 평소답지 않으신 것 같아요.”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내비친 탓인지 귀부인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오늘의 모임은 역사 토론회였다. 역사를 좋아하는 귀부인들이 모여 주제를 정하고 그에 관련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대부분의 부인이 모두 학자 가문 출신이었다.
이 모임에 든 것은 필요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래전에 일어난 천마 전쟁이라든가, 유물들의 행방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유용한 정보가 오가는 모임이라, 2황녀는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는 세계 불가사의라 불리는 대미궁에 관한 것이었다.
비비안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제가 조금 피곤했던 것 같아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정중하게 이야기를 하자, 귀부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은 그만 돌아가 쉬시는 게 어떨까요?”
모임의 장인 마거릿 부인이 권유하자, 비비안은 미소를 잃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꼭 참여하고 싶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본격적인 토론을 시작해 볼까요?”
대미궁에 관련한 토론이 이어졌다. 서로 본인이 가진 지식을 꺼내놓으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그리고 비비안은 의외의 수확을 건졌다.
평소 천족과 마족이란 종족에 관심을 보였던 귀부인 중 한 명이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대미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대미궁의 중심에는 황금빛의 핵이 존재하고, 그 핵이 주는 시험을 통과하면 대미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어머, 그런 사실이 있군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실은 남편이 이 분야에 연구를 많이 했답니다. 그래서 학자나 모험가들을 많이 만나고 다녔죠, 이 이야기는 대미궁 탐험에 참가했다가 포기했던 어떤 모험가가 해준 이야기랍니다.”
“그분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요?”
“거기까진 저도 잘 몰라요.”
마거릿 부인이 박수를 쳤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다른 분들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으실 것 같은데 어느 분이 먼저 하실까요?”
빙그레 미소를 지은 비비안이 손을 들었다.
마거릿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모두 황녀 전하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비비안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이곳의 모임은 돌아가면서 한 번씩 꼭 발언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비안이 꺼낸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고, 거기에 살을 조금 더 붙여서 들려주었다.
“황녀 전하께서도 공부를 많이 해오셨군요.”
마거릿 부인이 칭찬하자, 비비안은 미소로 화답했다.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좋은 태도예요. 자, 다음 분 이야기하실까요?”
토론은 반나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토론의 끝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포상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오늘의 포상은 황금빛 핵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부인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모임은 끝을 맺었고, 비비안은 황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시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가면을 썼다.
그리고 지하 궁전으로 향했다.
지하 궁전에 도착하자, 수하 아이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해.”
“드미트리를 대미궁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마탑에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확실하게 증거까지 넘겨줬겠지?”
“물론입니다, 대타를 세워 찍은 영상을 마탑에 보냈습니다.”
“영상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볼 가능성은?”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단순한 가짜가 아니라, 진짜 분신을 만들어 낸 것이니까요.”
비비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분신 능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모양이구나.”
“주인님께서 내려주신 능력 덕분에 수월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잘했다. 마탑의 반응은 어떻지?”
“아직까진 조용합니다.”
“조용하다라…….”
“어떻게 할까요?”
“조금 더 지켜본 다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알리도록 해.”
“예, 주인님.”
“그리고 마르코라는 모험가에 대해서 좀 알아봐.”
마르코는 오늘 모임에서 포상을 받은 귀부인이 언급했던 모험가였다.
비비안은 그 부인에게 모험가에 대해서 물었다. 부인은 알려주길 꺼려 했다.
하지만 부인은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솔깃한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올해 데뷔탕트를 치르는 부인의 딸에게 힘을 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는 영애에게 사교계에 입지가 굳건한 비비안이 친분을 과시해 주면, 영애는 다른 영애들보다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이린이 사라지자, 비비안은 비밀의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손을 뻗자, 거울이 일렁이며 대미궁의 모습을 비췄다.
그런데 의외의 것을 보게 되었다. 대미궁 밖으로 무언가가 기어올라 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건…….”
등에 피막 날개가 달렸고, 이마엔 뿔까지 달려 있는 마족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살아 나온 거지?”
대미궁은 마기를 품은 자들의 무덤이었다. 그런데 기어서 살아나온 마족이라니.
흥미가 생겼다.
“직접 봐야겠는걸.”
어쩌면 대미궁에 대해서 더 알아낼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헉헉헉.”
리즈는 푹푹 꺼지는 사막의 모래 속에서 팔과 다리를 움직여 기어올랐다.
대미궁의 밑바닥까지 추락해, 올라가기까지 정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마족이 가진 특성 덕분에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주, 죽을 뻔했어.”
진짜로 죽을 뻔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황금빛 화살은 맞는 순간 피부가 타들어갔다.
두 손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다리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날개가 찢어지고, 상처가 늘어났지만, 살아야 했다. 대미궁엔 온갖 함정이 존재했고, 그 함정을 간신히 피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듯한 목소리였다.
[가련한 자여, 인간을 버리고 마인이 되었구나.]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공격이 약해졌다.
마치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듯했다.
“대체 뭐야…….”
대미궁을 빠져나오니, 그런 의문점들이 자꾸 들었다.
“어찌 되었든 살았어.”
살았으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검은 블랙홀이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리즈는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검은 블랙홀에서 하얀 가면을 쓰고 검은 로브를 입은 여인이 걸어 나왔다.
비비안이었다.
비비안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리즈를 보았다.
리즈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누, 누구야.”
“그건 내가 묻고 싶구나.”
“뭐?”
비비안이 검지로 대미궁을 가리켰다.
“어떻게 해서 저곳을 빠져나온 거지?”
리즈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당신이 알아서 뭐 하게. 난 할 말 없으니 가보겠어.”
리즈가 몸을 돌려 날아가려는 순간. 무언가가 날아와 그녀의 등을 때렸다.
퍽 소리와 함께 날아가려던 리즈가 곤두박질쳤다.
“크으, 무슨!”
고개를 돌린 리즈가 비비안을 노려보았다.
“아직 얘기가 안 끝났는데 도망치면 곤란하지.”
몸을 벌떡 일으킨 리즈가 소리쳤다.
“난 할 말 없어.”
“그래? 곤란한데.”
피식 웃은 비비안이 리즈에게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리즈의 목이 비비안의 손에 잡혔다.
리즈는 크게 당황했다.
“조금 아플 거야.”
비비안의 반대쪽 손이 리즈의 정수리에 닿았다.
“뭐 하는 짓이야?”
“잠시 들여다보려는 것뿐이니, 걱정 마.”
정수리에 닿은 비비안의 손에서 마기가 흘러나왔다.
마기는 리즈의 머리를 감쌌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아아아악!”
리즈가 괴성을 질렀다.
두 눈을 감은 비비안은 마기를 통해 리즈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녀가 두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엿보기 위해서다.
리즈의 기억을 엿본 비비안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잠시 후, 비비안은 리즈에게서 손을 뗐다.
리즈가 맥없이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그런 리즈를 바라보며 비비안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재미있게 됐는걸?”
비비안은 손을 뻗어 검은 블랙홀을 생성했다. 그리고 리즈를 그곳으로 던지고, 자신도 블랙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마탑 상층부에서 회의가 열렸다.
5장로의 행방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에 관련해 탑주와 장로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5장로가 대미궁으로 도망쳤다는 게 사실입니까?”
7장로의 말에 1장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5장로가 대미궁에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3장로가 당장에라도 잡으러 갈 기세로 묻자, 1장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누군지는 저도 모릅니다. 익명의 제보였으니까요.”
며칠 전, 마탑으로 익명의 제보가 날아들었다.
마탑에서는 5장로에게 현상금을 걸어 수배를 내린 상황이었다.
수배는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에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실을 맺었다.
1장로가 영상구를 꺼냈다.
“일단 이걸 보시죠.”
1장로는 회의 테이블 중앙에 영상을 재생시켰다.
영상에는 5장로의 모습이 담겼는데 그가 대미궁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영상에는 녹색의 로브를 입고, 스태프를 든 노인이 대미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영상이 확대되더니, 5장로의 얼굴이 비쳤다.
“맙소사!”
4장로가 놀라움을 드러냈다.
“5장로가 아닙니까.”
1장로가 말을 이었다.
“익명의 제보자가 수배 전단을 보고 이 영상과 함께 제보했습니다.”
영상에 5장로의 모습이 찍혔으니, 이보다 더 정확한 증거는 없었다.
장로들의 시선이 탑주 아델라에게 향했다.
모두 그녀의 생각을 듣고 싶은 눈치였다.
5장로를 붙잡아 죄에 대가를 치르게 하고, 본보기로 삼아야 마탑의 체면을 지킬 수 있다.
만약 이대로 5장로를 내버려 둔다면, 마탑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위대한 마탑에 배신자가 나온 것도 모자라, 도망치는 것을 잡지도 못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마탑이 무능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가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탑은 굳건해야 했다.
잠시 후, 무겁게 닫혀 있던 아델라의 입이 열렸다.
“지금 이 시간부로 마탑은 대미궁으로 5장로를 잡으러 가겠습니다.”
장로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1장로가 물었다.
“출정 인원은 어떻게 정하시겠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대미궁는 저 혼자 갑니다.”
그녀의 말에 장로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됩니다.”
제일 먼저 1장로가 말렸다.
“탑주님 혼자 가시게 할 순 없습니다.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 갑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장로들이 함께 가겠다고 발언하였다.
하지만 아델라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대미궁은 저 혼자 갑니다. 반론은 받지 않겠습니다.”
아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죠.”
탑주 아델라가 회의실을 나가자, 장로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회의실을 나갔다.
1장로는 아델라의 뒤를 따라잡았다.
“탑주님.”
“1장로,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압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곳은…….”
뒤돌아선 아델라가 1장로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제 방에서 조용히 이야기 좀 하죠.”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탑주의 방으로 이동했다. 방에 도착한 아델라는 게이트를 열어 비밀의 방으로 1장로를 데리고 갔다.
단둘이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1장로, 나는 대미궁에 혼자 가지 않습니다.”
1장로가 눈을 크게 뜨고 아델라를 보았다.
아델라가 말을 이었다.
“저는 레오나와 함께 갈 겁니다.”
“레오나와 말입니까? 또 계시가 내려온 겁니까?”
아델라가 무겁게 말했다.
“레오나는 내 뒤를 이을 아이가 될 겁니다.”
“그 말씀은…….”
“그대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습니다.”
1장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분들의 계시입니까.”
“언제나 선택은 그분들이 하시죠. 그리고 저는 그 선택을 따라야 하고요.”
“하지만…….”
아델라가 미소를 지었다.
“난 충분히 오래 살았어요. 이제 좀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장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미궁은 레오나와 내가 함께 갑니다. 그러니 1장로는 내 대신 마탑에 남아 후일을 대비하세요.”
1장로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곧 재앙이 올 겁니다. 마탑은 그것에 대비해야 합니다.”
“당신이 없으면 마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탑도 이제 변해야 합니다. 그걸 누구보다 그대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델라를 보내는 건 싫었다.
“마탑에는 저 말고도 인재가 많습니까.”
“압니다. 하지만 모두를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은 그대뿐입니다.”
“기어이 저를 배제하시겠다는 뜻이군요.”
“아니요. 그대를 믿기에 맡기는 겁니다. 나는 더 이상 마탑의 아이들이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희생은 5장로의 만행으로 충분합니다.”
“탑주님.”
“앞으로 다가올 재앙에서 아이들을 지켜주세요. 그대라면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1장로는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은 늘 절 서운하게 합니다.”
“1장로.”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당신의 말을 거역할 수 없군요.”
이 또한 자신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고마워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아델라는 미소를 지을 뿐 약속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1장로는 바랐다.
아델라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 * *
깊은 밤.
레오나는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온통 검은 세상이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불빛 하나 없었다. 레오나는 어둠 속을 걸었다.
두렵지 않았다.
여기서 두려움을 느낀다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레오나는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마침내 불빛이 가까워졌을 때, 거대한 빛을 보았다.
허공에 떠 있는 황금빛의 구체가 레오나를 비추고 있었다.
[나의 아이야, 기다리고 있단다.]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너를 만나는 날을 고대하고 있단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순간 빛이 가까이 다가와 레오나의 황금빛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빛은 흡수되듯 사라지더니, 다시 캄캄한 어둠이 되었다.
레오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었나…….”
꿈치고는 너무 생생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레오나는 침대 옆 다탁에 놓인 물병을 들어 컵에 따랐다.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이자, 현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꿈이 맞았어.”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의 방 안이었다.
시엘과 저녁에 만나 술 한 잔을 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술을 꽤 많이 마셨기에 잠이 금방 쏟아져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사이 하녀들이 옷을 갈아입힌 모양인지 잠옷을 입고 있었다.
“대체 그 빛은 뭘까?”
자꾸 생각이 났다.
“날 기다린다고?”
기다릴 테니 만나러 와달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어디서 누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때 창문으로 무언가가 날아와 두드렸다.
톡톡톡.
반복적인 두드림에 레오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새하얀 새가 방 안으로 날아오더니, 레오나의 주위를 맴돌다가 빛으로 화하며 사람으로 변했다.
레오나는 화들짝 놀랐다.
“탑주님!”
“그렇게 놀라는 걸 보니 재미는 있구나.”
레오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델라를 보았다.
“이 시간에 저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그럼, 내가 누굴 만나러 왔겠니. 말을 이상하게 하는구나.”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일단 앉아서 말씀하시죠.”
“그렇게 하자구나.”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다.
잠시의 정적 후 아델라가 입을 열었다.
“네게 할 말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나와 함께 대미궁에 좀 가줘야겠구나.”
레오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미궁이요?”
“너도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워낙 유명한 곳이니까요. 미스터리한 곳이기도 하고요. 그런 곳에 저와 가자고 말씀하신 겁니까?”
“그래.”
“그곳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곳입니다.”
“그렇지.”
레오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저와 함께 그곳에 가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장로가 대미궁에 있다. 그리고 그곳은 네게 꼭 필요한 곳이기도 하지.”
“두 가지의 이유이군요.”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구나.”
하지만 이해 못 할 한 가지가 있었다.
“제게 필요한 곳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 힘의 근원. 네 힘의 시작이 너를 부르고 있다.”
이번엔 진심으로 놀랐다.
“저를…… 부른다고요?”
“그래.”
레오나는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에 꿈을 꾸었는데, 아델라가 꿈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
레오나는 꿈에 대해 아델라에게 설명했다.
“그건 아마 꿈을 통해 네게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 아닐까 싶구나.”
“메시지요? 도대체 누가 그런 메시지를…….”
“글쎄, 아마도 저 위에 누군가가 아닐까?”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가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그렇군요.”
레오나는 나름대로 수긍했다.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다고 할까?
“그건 그렇고 대미궁은 무엇입니까?”
“그 이야기를 하자면 길단다.”
아델라는 대미궁이 생겨난 이유와 그 정체에 대해 레오나에게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레오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미궁이 그런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니, 놀랍습니다. 그럼, 제가 가진 신성력의 근원이 대미궁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그래.”
잠시 뜸을 들인 아델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의 힘 또한 그렇지.”
“탑주님의 힘이요?”
아델라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레오나에게 설명했다.
아델라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가 그제야 이해가 되는 레오나였다.
아델라의 출생과 신성력의 시작.
레오나가 함께 가야 할 이유로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델라가 웃었다.
“출발할 때 미리 연락을 줄게. 그때까지 준비 잘하고 기다리고 있어.”
“그러죠.”
“그럼, 나중에 봐.”
화악!
아델라가 다시 새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레오나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레오나는 신기한 듯한 얼굴로 날아가는 아델라를 바라보았다.
아델라를 볼 때마다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었는데 그녀가 천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대미궁이라…….”
소문이 무성한 그곳이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천마 전쟁 때 한 천족이 자신의 생명을 바쳐 마족들을 묻어버린 곳.
그곳은 마족의 무덤이었다.
마족은 육체가 죽어도 영혼만 살아 있으면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것을 막고자, 한 천족이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 마족의 육체와 영혼을 완전히 묻어버렸다.
다시는 부활할 수 없도록.
그곳이 대미궁이었다.
궁금한 것이 많지만, 나머진 직접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확신이 들었다.
* * *
다음 날, 레오나는 단장 데미안과 독대를 하였다.
레오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데미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전에 다녀간 아델라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레오나 그 아이가 널 찾아와 허락을 구할 거다. 그러니 허락해 주도록 해.’
다짜고짜 찾아와 레오나가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무슨 일로 부탁하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건 레오나가 찾아와 직접 말할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무슨 용건이지?”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허락?”
레오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탑주 아델라 님과 함께 대미궁에 가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대미궁이란 말에 데미안은 적잖게 놀랐다.
“대, 대미궁이라고?”
“예.”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말하는 건가?”
“아델라 님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데미안의 미간이 펴질 줄 몰랐다.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할 수 없다면?”
“그래도 허락해 주십시오.”
레오나가 강력하게 허락을 구하자, 데미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아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마탑에서도 넌 위험할 뻔했다. 그런데 또 위험을 감수하고 가겠다는 건가?”
마탑에서 레오나는 죽을 뻔하였다. 그 생각만 하면 데미안은 후회가 치밀었다.
레오나를 혼자 마탑에 보낸 것에 대해 자책도 많이 했다.
그런데 레오나는 또 위험한 곳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넌 목숨이 몇 개라도 되나? 왜 그렇게 목숨을 거는 거지?”
“물론, 목숨은 한 개입니다. 저도 제 목숨은 소중하고요. 하지만 이번엔 위험하지 않습니다. 아델라 님도 함께하시고요.”
데미안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레오나의 금빛 눈이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허락해 주십시오. 단장님.”
“내가 네 단장이긴 한 모양이군, 하지만 단장인 난 부하를 사지로 내몰 수는 없어.”
“사지가 아닙니다. 저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고요.”
레오나는 반박했지만 데미안의 의지가 확고했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다, 과연 대미궁이 널 공격하지 않을까?”
“저도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대미궁이 그냥 들여보내 주진 않을 것이다. 어떠한 것이든 공격을 하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있었다.
탑주인 아델라도 있었고, 자신의 능력을 믿으니까.
“단장님은 절 못 믿으시는 겁니까?”
“…….”
데미안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입술이 꾹 닫혔다.
레오나가 말을 이었다.
“백기사단은 어떤 위험한 임무에서도 반드시 성공을 거두는 기사들이 모인 곳이지 않습니까. 그러한 사지를 걸어 나왔기에 백기사단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오나.”
“저 역시 백기사단의 정예답게 당당하고 싶습니다. 제 목숨 하나 아끼자고 임무를 포기할 순 없습니다.”
“이건 임무가 아니다.”
“압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레오나가 허리를 90도로 꺾어 허리를 숙였다. 간절하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아델라가 다녀갔다.”
그 말에 레오나가 숙였던 허리를 폈다.
“마음 같아선 가지 말았으면 하지만, 그래도 넌 가겠지.”
레오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도록 해.”
“감사합니다, 단장님.”
“단, 반드시 살아서 돌아온다는 약속을 해.”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데미안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레오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출발은 언제지?”
“아델라 님이 연락을 주실 겁니다.”
“아직 시간이 있다는 뜻이군.”
레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이 레오나에게 말했다.
“특훈이다.”
“네?”
“대미궁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오늘부터 넌 나와 특별수련을 한다.”
레오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데미안과의 수련은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레오나는 마다치 않았다.
“좋습니다.”
“따라 나오도록.”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부터 시작이다.”
레오나는 데미안을 따라 연무장으로 나갔다.
데미안은 연습용 목검이 아닌 진검을 레오나에게 권했다.
진검을 받아 든 레오나는 깜짝 놀랐다. 진검의 무게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건 특수 제작한 진검이다. 중량화 마법이 걸려 있지. 나도 같은 것을 들었다.”
전혀 같은 검으로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아주 가볍게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도 검을 몇 번 휘둘러 보았다. 제법 묵직하지만,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에 연무장에서 서로 마주 보고 검을 휘두르고 있자, 옆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던 정예 기사들이 놀란 눈으로 보았다.
“무슨 일이래?”
“단장님이 특수 진검을 들었어.”
“특수 진검?”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오나도 같은 진검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나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그러게. 단장님이 특수 진검을 들었다는 건 아주 화가 많이 났을 때인데.”
“맞아. 나도 저 검을 들고 상대하다가 단장한테 엄청 얻어터졌지.”
“너뿐이겠냐, 여기 있는 모두가 경험했을걸?”
“헤헤, 그런가.”
“자자, 잡담은 그만!”
어느새 나타난 부단장이 정예 기사들에게 소리치자, 모여서 떠들고 있던 정예 기사들이 부리나케 흩어져 정렬했다.
“체력 단련이 끝났으면, 지금부터 일대일 지목 대결을 하겠다.”
부단장 란젤로는 첫 번째로 누군가를 지목했고, 그는 상대를 지목해 대결을 하였다.
정예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란젤로는 데미안과 레오나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단장님이 단단히 벼른 모양이군.”
특수 진검을 들고 수련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또한 단장이 특수 진검으로 직접 누군가를 수련을 시키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이다.
주로 임무에 실수가 있었던 날에 하는 수련이다. 그걸 레오나와 한다는 것은 레오나가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레오나는 크게 실수한 게 없는 걸로 아는데, 단장님은 무엇 때문에 저리 벼르고 있으신 거지?’
그게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생각을 접은 란젤로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게 임했다.
레오나는 있는 힘을 다해 데미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특수한 마법이 걸린 검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속도가 느렸다.
“느리군.”
데미안은 가차 없이 레오나의 검을 밀어내고 일침을 가했다.
데미안의 검이 레오나의 뒷목을 향해 날아왔다.
기겁한 레오나는 급히 몸을 숙여 피한 후, 거리를 벌렸다.
“최선을 다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데미안은 정말로 죽일 듯이 급소만을 노려 레오나를 공격했다.
휘두르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같은 검을 들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게까지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같은 검이 맞을 것이다.
‘강해.’
데미안은 확실히 강했다. 그게 체감으로 느껴졌다.
‘난 아직 멀었구나.’
레오나의 금빛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나도 강해질 수 있어.’
끊임없이 노력하다 보면, 강해질 수 있다. 레오나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갑니다.”
레오나는 기합을 지르며 검을 쥔 손목에 힘을 주었다.
슈웅!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달라졌다.
검이 공기를 가르며 데미안의 목을 베었다. 데미안은 턱 끝을 스치는 검을 보며 피식 웃었다.
레오나의 검이 제법 날카로워졌다. 간발의 차이로 검이 비껴가자, 레오나는 혀를 찼다.
나름 회심의 공격이었는데, 데미안이 피했기 때문이다.
“다시 공격해 봐라.”
“안 그래도 그럴 겁니다.”
레오나가 힘차게 바닥을 박차고 쏘아져 나갔다. 검을 휘두르는 척하다가 몸을 회전시켜 데미안의 등 뒤를 노렸다.
데미안은 자세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검을 등 뒤로 넘겼다.
등 뒤로 넘어간 검이 레오나의 검을 튕겨냈다.
몸을 돌린 데미안이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부터 신성력을 써봐라.”
지금까지는 순수한 검술만을 사용한 대련이었다. 그런데 이제 신성력을 쓰라고 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그럼, 사양 않고 쓰죠.”
레오나는 신성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마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단장님은 마력을 안 쓰시는 겁니까?”
“그렇다.”
“그럼, 제가 쓰게 해드리죠.”
“얼마든지.”
레오나의 검에 신성력이 어렸다. 또한 그녀의 몸에 신성 마법이 더해져, 훨씬 빨라졌다.
레오나의 목표는 데미안이 마력을 쓰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데미안의 눈앞에 쇄도한 레오나의 검이 변화했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검의 잔상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데미안은 진짜를 찾아내 검을 뻗었다. 데미안의 검신이 레오나의 검신을 타고 미끄러졌다.
눈을 크게 뜬 레오나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검을 타고 뻗어온 데미안의 검이 레오나의 목 옆을 스쳤다.
레오나의 검에는 신성력이 어려 있는데, 평범한 데미안의 검이 검신의 신성력을 갈랐다.
레오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신성력의 흐름을 파악했어.’
모든 힘에는 결이 존재한다. 데미아는 그 결의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레오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신성력을 접한 적이 많이 없을 터였다. 제국은 마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검술이 발전했다.
신성력을 접한 것은 레오나가 유일했다.
‘간파했다고?’
게다가 그와는 자주 겨룬 적이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괴물.’
천재를 넘어서 괴물이란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 많았던 탓일까, 데미안에게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생각이 많군.”
레오나는 두 손을 들었다. 데미안의 눈썹이 올라갔다.
“벌써 졌다고 하는 건가?”
“아직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데미안이 검을 거뒀다.
레오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했다.
“어떻게 안 겁니까?”
“뭘 말하는 거지?”
“신성력의 흐름을 간파하셨잖아요.”
“보이더군.”
“네?”
“보였다.”
레오나는 기가 막혔다.
“조금 지친 것 같으니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시작하지.”
“안 지쳤어요.”
오기가 생겼다. 단 한 번 공격했을 뿐이다. 몇 번을 공격해서라도 그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레오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다시 갑니다.”
레오나의 기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데미안은 흔쾌히 응해주었다.
* * *
“뭐야, 아직도 안 끝났어?”
정예 기사들은 해가 졌는데도 겨루고 있는 데미안과 레오나를 보며 혀를 찼다.
“단장님은 그렇다 치고, 레오나에게 저렇게 끈질긴 구석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네.”
“그러게. 어떻게 해서든 단장님께서 마력을 사용하게 만들려는 것 같은데, 참 대단하다.”
“나도 그랬는데.”
“너만 그랬냐. 여기 있는 모두 단장님의 마력을 구경하려고 했을걸.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지만.”
“나는 레오나가 성공했으면 좋겠다.”
“그러게. 이렇게 보고 있으니 응원하고 싶어지네.”
정예 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큰 소리로 레오나를 응원했다.
“레오나, 힘내라!”
“단장님께 한 방 먹여!”
“우린 네 편이다!”
멀리서 들리는 응원 소리에 레오나는 고개를 돌렸다.
훈련을 마친 정예 기사 선배들이 레오나에게 손을 흔들며 응원하고 있었다.
레오나는 그에 화답하듯 최선을 다해 데미안을 공격했다.
예상대로 데미안은 신성력의 흐름을 간파하고 막아냈지만, 거기서 레오나는 두 번째 연계 공격을 하였다.
목을 노리는 듯 뻗은 검을 데미안이 막으려는 순간 유연한 손놀림으로 검을 미끄러트려 허리를 베었다.
이건 데미안도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절묘하게 들어간 공격이었기 때문에 피할 방법이 없었다.
두 눈을 반짝인 데미안은 마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데미안이 순간 가속 마법으로 공격을 피하자, 레오나의 검은 허공을 가를 수밖에 없었다.
레오나는 뒤로 물러나 있는 데미안을 향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공격은 제가 이긴 것 같은데요?”
그건 데미안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지. 이번 공격은 네가 이겼다.”
씩 웃은 레오나가 자신을 응원하고 있던 선배 정예 기사들을 향해 손으로 V자를 그렸다.
그러자 선배 정예 기사들이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환호했다.
검을 거두고 양 허리에 손을 얹은 레오나가 데미안을 도전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한 번이지만, 내일은 두 번 이길 겁니다.”
“기대하지. 수고했다. 그만 돌아가도록.”
“예, 수고하셨습니다.”
레오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벤치에 올려둔 수건으로 닦아내며 수통을 열어 물을 마셨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수통을 머리에 들이부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를 적시자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물기 젖은 머리를 뒤로 젖히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데미안이 보였다.
레오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데미안은 헛기침하더니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그대로 몸을 돌려 멀어지는 데미안을 바라보던 레오나도 몸을 돌렸다.
“레오나!”
한달음에 달려온 선배 기사들이 레오나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다.”
“아픕니다.”
“엄살피우지 마. 인마.”
레오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저 잘했습니까?”
그러자 선배 기사들이 다 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엄청 잘했다.”
“대견하다.”
레오나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저녁 먹으러 갈 거지? 같이 가자.”
“네, 선배님들.”
레오나는 선배들과 나란히 걸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데미안은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젖은 셔츠가 신경 쓰였다. 그것도 모르고 선배라는 자들이 가려주기는커녕, 어깨동무까지 하다니.
아주 못마땅했다.
더 못마땅한 건, 자신의 셔츠가 젖은지도 모르는 채 걸어가는 레오나였다.
둔해도 정도가 있지, 본인이 여인임을 잊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결국, 참지 못한 데미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레오나에게 뛰듯이 다가가 손목을 낚아챘다.
“단장님?”
레오나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데미안은 손목을 놓아주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지. 따라오도록.”
레오나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는 데미안을 바라보며, 선배 기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를 따라갔다.
선배 기사들은 식당에서 보자며, 자리를 떠났다.
둘만 남게 되자, 레오나는 데미안에게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네?”
레오나는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차림으로 식당에 가려고 했나?”
“제 옷차림이요?”
레오나는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그제야 자신의 옷 윗부분이 생각보다 많이 젖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런 건 늘 상 있는 일어서 레오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좀 많이 젖었긴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안에 속옷도 제대로 갖춰 입었고, 속살이 비치는 것도 아니었다.
나직이 혀를 찬 데미안은 자신의 재킷을 벗어 레오나에게 걸쳐 주었다.
“넌 네가 여인이라는 자각이 없는 듯하군.”
“전 여인이기 이전에 기사니까요.”
한숨을 내쉰 데미안이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저놈들도 남자다. 그걸 잊지 말도록.”
그제야 데미안의 말을 알아들은 레오나는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기사단 생활이 익숙하고 편해서,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본 동료 기사들의 기분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곳은 신성국의 기사단과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다.
신성국의 기사들은 철저히 신의 기사로서의 교육을 받는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공평하게 똑같은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는다.
여자로 봐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섞여 있어도 서로 의식할 틈도 없었다.
성별에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신의 기사들이니까. 하지만 제국은 다르다.
이곳은 엄격하게 성별이 존재한다. 차별도 있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최소한의 몸가짐은 가져야 한다. 레오나는 그것을 간과했다.
그래서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한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됐다. 가보도록.”
“재킷은…….”
“깨끗하게 세탁해서 돌려주도록.”
“……네.”
데미안이 몸을 돌리자, 레오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아, 바보같이…….’
자꾸 신성국이 아니라는 것을 잊는 것 같다. 여긴 제국이다.
자신은 신성국의 기사가 아니라 제국의 기사다.
그 말을 되새기며, 레오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숙소로 향했다.
이때까지도 레오나는 알지 못했다. 데미안이 자신을 기사가 아닌 이성으로 보게 된 사실을.
* * *
깊은 밤, 자정.
도시가 캄캄한 어둠 속에 잠기는 시간에 두 개의 그림자가 제도에서 제일 높은 건물 지붕에 드리워졌다.
시엘과 아스텔이었다.
아스텔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지붕 위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혼자 청승맞게 여기서 뭐 하는 짓이야.”
시엘이 투덜거리며 아스텔의 옆에 앉았다.
“늦었네.”
“내가 너와의 약속을 꼬박꼬박 지켜야 할 의무는 없어.”
아스텔이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할래.”
시엘은 술잔 대신 아스텔의 옆에 놓은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술은 이렇게 마셔야 제맛이야.”
“무식하긴.”
“누구더러 무식이래.”
술잔을 내려놓은 아스텔이 몸을 일으켜 휘황찬란하게 떠 있는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레오나가 대미궁에 갈 것 같더군.”
그 말에 시엘이 인상을 썼다.
“레오나가 대미궁에 간다고?”
“그래.”
“거긴 왜?”
“마탑이 움직였겠지.”
“탑주 그 늙은이가 개입된 건가?”
“아마도.”
달빛을 바라보는 아스텔의 눈빛이 처연해졌다.
“대미궁에 갈 생각이다.”
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텔이 대미궁이 간다면, 그건 레오나 때문일 테니까.
“나도 갈 거야.”
“그럴 줄 알았어.”
아스텔이 예상한 대답이었다.
“널 위해서가 아니라, 레오나를 위해서 가는 거야. 난 죽어도 레오나의 옆에서 죽을 거야.”
“그것참 슬픈 일이군.”
대미궁엔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 있다. 아마, 그 파편으로 인해 그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다.
만약, 그곳에서 레오나가 아끼는 사람이 죽는다면 그녀는 정말 많이 슬퍼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엔 초연하면서도 아끼는 사람들의 죽음엔 그렇지 못했다.
그걸 알기에 자신이 죽어도 슬퍼해 줄 사람을 만들기 싫어했다.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있어 아픈 기억이 될 테니까.
그래서 위험한 전투에 홀로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싸우다 죽는 것은 기사로서의 최고의 긍지다. 그녀는 그러한 긍지를 몸으로 실천한 훌륭한 기사였다.
그래서 존경했고, 사랑했다.
신께서 그녀에게 숭고한 희생을 바랄 때도 그녀는 마다치 않았다.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녀는 수많은 기적을 쌓았다. 아스텔은 사랑하는 그녀를 늘 곁에서 지켜봤다.
그래서 모든 힘을 동원해 그녀를 살렸다. 그녀의 육신은 살리지 못했지만, 적어도 영혼만은 구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는 레오나라는 이름으로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또다시 커다란 싸움의 한가운데에 그녀가 서게 되었다.
그래서 신이 정말 잔인하다고 생각하였다.
신이 잔인하게 그녀를 몰아세운다면, 자신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으로부터 그녀를 구할 것이다.
설령 자신이 죽는 한이 있었다.
그는 그럴 각오를 하고 하였다.
대미궁은 그러한 그의 각오가 실현되는 최후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이 기대되었다.
그녀가 바라던 만남이 아닐지라도 그녀는 대미궁에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자신을 볼까?
무척 설레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난 간다.”
술병의 술을 모두 마셔 버린 시엘이 몸을 일으켜 인사를 했다.
그도 자신이 그러했듯 본인의 운을 결정한 모양이다.
하나로 뭉쳐 있었던 두 개의 그림자는 그렇게 서로 갈라졌다.
* * *
며칠이 흘렀다.
데미안과의 특별 훈련으로 시간을 보낸 레오나는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
마나 심법도 끊임없이 수련하여 2서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며칠 만에 이룬 성과치곤 대단했다. 그만큼 레오나에게 재능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레오나는 자신이 재능이 없어 마력을 쓰지 못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재능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함정에 빠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아델라를 만나 알게 되었고, 해결책도 찾을 수 있었다.
백화를 찾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건 너무 요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델라에게서 특별한 마나 심법을 배울 수 있었다. 꾸준히 마나 심법을 훈련하면 흑사의 열매가 만들어놓은 함정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준비는 할 했으리라 믿는다. 3일 후, 아침 8시에 마탑에서 보자꾸나.]
아델라가 보내온 메시지였다.
메시지는 일정이 끝난 저녁, 저택에서 쉬고 있을 때 왔다.
일반적인 전서구나 서신이 아닌 마법 메시지였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창문을 통해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나비는 창문을 통과하여 레오나의 손에 내려앉더니 편지로 변했다.
“삼 일 후, 마탑이라…….”
대미궁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는 소리다.
“드디어 가는구나.”
그동안 데미안에게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레오나는 그 훈련을 모두 소화하였다.
지켜보던 선배 기사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 결과 레오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톡톡.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레오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된 게 쉬고 있을 때마다 창문으로 손님이 찾아올까.
창문에 다가가자, 시엘이 열어달라는 행동을 취했다.
열어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 열어주면 강제로 들어올 것이 뻔해 그냥 열어주었다.
“도둑고양이가 따로 없어.”
레오나의 투덜거림에 시엘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제가 그렇게 귀엽습니까?”
“뭐?”
“고양이는 귀여운 동물이니까, 제가 귀여워 비유한 거 아닙니까?”
레오나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정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귀여운 건 애완 고양이고, 넌 도둑고양이라고.”
“애완 고양이나, 도둑고양이나 다 같은 고양이니 귀여운 거 맞지 않습니까?”
말이 안 통한다.
“됐고,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그냥 보고 싶어서요.”
레오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봤으면 그만 가지?”
“방금 들어왔는데 금방 내쫓으면 서운하죠.”
“얼굴 보러 왔으면 얼굴만 보고 가면 되잖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습니다.”
레오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너 어디 가? 왜, 다신 안 볼 사람처럼 굴지?”
시엘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레오나를 두고 어딜 갑니까. 저는 죽을 때까지 레오나의 곁에 있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싫다.”
“왜요, 저 이래 봬도 꽤 잘 나갑니다. 미모 받쳐주지, 성격 좋아, 힘도 세. 인기 많다니까요.”
“그 인기가 나한테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레오나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꿈 깨시지.”
그렇게 말한 레오나는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시답지 않은 농담이나 하자고 온 건 아닐 테고 진짜 용건이 뭐야?”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눈빛을 보아하니 진심이었다.
그래서 조금 어울려 주기로 하였다. 대미궁에 가게 되면 시엘을 보지 못할 테니까.
물론,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다면 상관없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예전에도 시엘과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긴장감을 덜어내곤 하였다.
흑마법사들과의 전투는 늘 치열하고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계속되는 긴장에 지쳐갈 때면 시엘이 농담을 던지곤 하였다.
어이없는 농담에 레오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긴장감을 덜어주려는 그의 노력을 가상히 여기기도 하였다.
오늘 밤도 그러한 시간을 보냈다. 시엘과 있으면, 그런 시간이 어색하지가 않았다.
아스텔과 다르게 시엘은 가볍고, 편했으니까. 아스텔은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늘 소신을 가지고 임했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었다.
그에 반해 시엘은 책임감은 한 톨도 없었다.
시엘은 늘 자기중심적이었고, 독단적인 행동을 많이 해서 레오나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레오나는 시엘이 동생처럼 느껴진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건 변함없었다.
장난기 많고, 사고치고, 투정부리고, 보살펴줘야 하는 그런 느낌이 강하다.
물론, 그런 게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시엘은 충분히 강함에도 불구하고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오늘은 그만 갈게요, 또 봐요.”
“그래, 잘 가라.”
레오나는 창문 앞에서 서서 시엘을 배웅했다. 창문 앞에서 배웅하는 사람은 아마 자신이 유일할 것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
제국 사회에서 남의 집 창문을 통해 방문하는 경우는 범죄자로 몰리기 십상이니까.
시엘을 보낸 레오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미친…….”
4시간 동안이나 시엘과 수다를 떨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그렇게 수다쟁이가 아닌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주로 말을 많이 한 쪽은 시엘이었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재미있는 염문설과 맛있는 술집과 맛집이 어딘지에 관한 평범한 대화였다.
대단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4시간 동안 하다니. 그걸 또 들어준 자신은 또 뭔가.
자신이 4시간 동안이나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완전히 미쳤다.
“잠이나 자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면, 조금이라도 자둬야 했다.
대미궁으로 떠나기 전날까지 데미안은 자신을 굴리는 것을 멈추지 않을 테니까.
* * *
대미궁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저택을 나서자, 휴버트와 엠마, 하녀들이 그녀를 배웅했다.
“몸 조심히 잘 다녀오십시오.”
“응, 무사히 잘 다녀올게.”
레오나는 저택 식솔들의 배웅을 받으며 아델라가 있는 마탑으로 향했다.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 마탑에 도착하니, 아델라가 레오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나.”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래.”
그런데 아델라의 뒤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메리벨?”
메리벨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네가 온다고 하길래.”
“그랬구나.”
메리벨을 살펴보니 전보다 조금 더 강해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로브의 색이 지난번과 달랐다.
“로브의 색이 달라졌네?”
“응, 1장로님의 제자가 되었어.”
레오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1장로님의 제자?”
메리벨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탑주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탑주님께서 추천해 주셨거든.”
레오나의 시선이 이번엔 아델라에게 향했다.
아델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질이 뛰어나더구나. 1장로라면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다.”
동의한다는 듯이 레오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다.”
“고마워. 네 덕분이야.”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한 것도 없는데, 뭘. 잘해봐.”
“응, 열심히 할 거야.”
메리벨을 격려해 준 레오나는 아델라를 보았다.
“이제 출발하죠.”
“그래야겠구나.”
메리벨이 인사를 건넸다.
“잘 다녀와.”
“그래.”
메리벨의 인사를 받으며 레오나는 아델라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내 옆에 서렴.”
“네.”
레오나가 아델라의 옆에 서자, 그녀가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시야가 어지럽게 변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대미궁 앞에 도착했다.
레오나는 사막 한가운데 놓인 시커먼 구멍을 바라보았다.
저곳이 대미궁이다.
걸음을 옮기기 전, 아델라가 물었다.
“레오나, 데미안에겐 제대로 인사를 하고 왔니?”
“네, 어제저녁에 헤어지면서 인사를 나눴어요.”
데미안은 출발 전날에도 레오나를 훈련시켰다. 훈련이 끝난 시간은 저녁 9시였다.
정말 열심히 굴린 것이다.
훈련을 마치고 헤어지기 전 데미안이 신신당부했다.
‘다치지 마라.’
이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다치는 것에 대해 데미안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예전의 아스텔처럼.
“다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아델라가 설핏 웃었다.
“가자꾸나.”
“네.”
레오나와 아델라는 대미궁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입구에 도착하니 거대한 문이 보였다.
아델라가 앞에 서자, 문은 반기듯이 활짝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긴 복도가 나왔다. 복도에 발을 들인 순간 어두웠던 공간에 빛이 들어왔다.
“기네요.”
“그래.”
길이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고 복도의 폭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정도로 넓었다.
레오나와 아델라는 나란히 서서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미궁에 오기 전 레오나는 책을 통해 여러 정보를 습득했다.
첫 번째는 반기지 않는 자에게는 함정이 발동한다는 것.
두 번째는 마기를 지닌 자들에게는 죽음을 내린다는 것.
세 번째는 고대의 유물이 잠들어 있다는 것 등이다.
다행히 두 사람에겐 함정은 발동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대미궁이 두 사람을 반긴다는 뜻이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발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고개를 내려 살펴보니 해골이었다.
아마도 이곳에 들어와 죽은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여기에도 함정이 있나 보네요.”
“그렇단다. 자세히 보면 벽 사이사이에 작은 구멍이 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모두 구멍에서 쏟아지는 독침에 맞아 죽은 거란다.”
“독침이요?”
“그래.”
섬뜩한 일이다. 반기지 않는 자들은 첫 관문부터 독침 공격을 받은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긴 복도도 드디어 끝이 보였다.
복고 끝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문은 아델라가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저절로 열렸다.
* * *
대미궁에서 떨어진 마른 나뭇가지 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았다.
까마귀의 붉은 눈동자가 대미궁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았다.
아델라와 레오나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까마귀는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갔다.
까마귀가 날아간 곳은 장미궁 안에 있는 침실이었다.
비비안은 창문을 열어 날아오는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까마귀는 그녀의 손이 닿자 먼지처럼 사라졌다.
“대미궁에 들어갔군.”
비비안의 오렌지빛 눈동자 속에 대미궁에 들어가는 아델라와 레오나의 모습이 비쳤다 사라졌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비비안이 몸을 돌렸다.
“그럼, 나도 준비를 해볼까.”
테이블로 걸어간 비비안은 그곳에 놓인 황금색의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런 다음 설렁줄을 당겨 시녀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비비안은 황금색 봉투를 시녀에게 내밀었다.
“이걸, 아발로인 후작가의 미첼 영애에게 보내렴.”
“예, 전하.”
시녀가 나가자 비비안은 치장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1년에 한 번 있는 황족 만찬회가 있는 날이었다.
황족 만찬회는 모든 황족이 모이는 날이었다. 궁에 사는 황족들뿐만 아니라, 독립해 바깥에서 사는 황족들도 모두 모인다.
이는 제국이 생겨난 이래 내려온 전통이었다. 황족 만찬회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단 한 명도 빠져선 안 되었다.
“가장 화려하게 치장을 부탁해.”
“예, 전하.”
황족들에게 좋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쁘게 보이려고 일부러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가 나쁠수록, 황족들은 자신을 경계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그들에게 있어 자신은 불순물일 뿐이었다. 후계 서열에도 끼지 못하는 티끌만 한 존재.
하지만 비비안은 상관없었다.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그녀는 안전할 테니까.
‘머지않았어. 그때가 되면…… 모두 비참한 꼴이 될 것이다.’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기어 다니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이.
그리되면 발로 지그시 밟아줄 생각이었다. 벌레는 발로 밟아 죽여야 하는 존재니까.
“다 됐어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확인한 비비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마음에 들어.”
하지만 시녀는 우려 섞인 눈빛으로 비비안을 보았다.
“전하, 이대로 나가시면…….”
시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기에 비비안은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돼.”
“…….”
싱긋 웃은 비비안이 치장해 준 시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난 괜찮단다. 걱정 말렴.”
“예.”
몸을 돌린 비비안은 만찬장으로 향했다.
* * *
아발로인 후작저.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첼에게 하녀가 편지를 건넸다.
“아가씨, 황궁에서 온 초대장이에요.”
미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초대장을 받았다.
황금색의 봉투였는데 장미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봉투에 장미가 그려진 건 장미궁에서 보내는 초대장이었다.
“2황녀 전하께서 왜 내게 이걸.”
미첼은 2황녀와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의아했다.
미첼은 초대장의 내용을 확인했다.
“장미정원 티파티에 초대한다고?”
장미정원 티파티는 유명한 모임이었다. 주최자가 2황녀인데다가 각 가문에 유명한 영양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미첼은 한 번도 초대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초대장이 왔다.
황녀가 직접 보낸 초대장이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기회이기도 하였다.
‘레오나 경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레오나는 백기사단의 기사이고, 황궁에서 근무한다.
이 초대를 빌미로 황궁에 갈 수 있게 된다면, 레오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동안 아발로인 후작이 외출을 허락하지 않아, 저택에만 있어야 했다. 이 초대장은 저택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동안 몸이 아파서, 요양하느라 레오나에게 편지를 보내지도 못했다.
저택에만 갇혀 있다시피 하니 답답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장미정원 티파티의 초대장은 기회였다.
그러려면 일단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했다.
“아버님을 만나야겠어.”
초대장을 들고 일어선 미첼은 아발로인 후작을 찾아갔다.
아발로인 후작은 집무실에 있었다.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발로인 후작이 반갑게 맞았다.
“미첼, 어서 오거라.”
“아버님, 상의드릴 일이 있어요.”
“그래, 앉으렴.”
아발로인 후작은 집사를 불러 다과를 내올 것을 지시하고 미첼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집사가 다과를 내왔다.
아발로인 후작은 직접 미첼에게 차를 따라주며 물었다.
“상의할 일이 뭔지 말해보렴.”
“장미궁에서 초대장이 왔어요.”
“장미궁?”
“네, 이번 장미정원 티파티에 저를 초대하고 싶데요.”
“장미정원 티파티라…….”
손으로 턱을 쓰다듬은 아발로인 후작이 말했다.
“이번 장미정원 티파티에는 다이앤 황녀 전하께서도 참석하신다고 들었다.”
원래, 장미정원 티파티는 2황녀 비비안이 주인공인 자리였다. 주최자도 2황녀였다.
그런데 거기에 다이앤 황녀가 온다는 것은 의미가 컸다.
건강이 안 좋은 다이앤 황녀를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보이겠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동안 다이앤 황녀는 건강이 안 좋아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했다.
대신 2황녀 비비안이 사교계 활동을 이어갔다.
황후도 사교계 활동을 했지만, 젊은 영식과 영애들과 어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2황녀가 다이앤 황녀를 대신해 사교계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다이앤 황녀가 건강을 회복했다.
그 의미는 컸다.
1황녀가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니까. 그동안은 2황녀가 1황녀를 대신해 왔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2황녀의 자리를 1황녀가 차지하게 될 거란 소리다.
1황녀는 현 황후의 소생이었고, 2황녀는 죽고 없는 황비의 소생이었다.
귀족들은 별 볼 일 없어진 2황녀 대신 1황녀에게 붙을 확률이 높아졌다.
“참석해도 좋을 것 같구나.”
다이앤 황녀와 친분을 쌓아두면 미첼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다.
“괜찮을까요?”
슬쩍 운을 떼 보았다.
“그래, 황궁이라면 안전할 것도 같고.”
미첼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참석한다고 답신을 보낼게요.”
“그러렴.”
기뻐하는 미첼을 보자, 아발로인 후작은 마음이 안쓰러웠다.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구나.”
미첼은 고개를 저었다.
“저를 염려하셔서 그러신 거잖아요.”
“이해해 주니 고맙구나.”
“뭘요, 그럼 저는 답신을 써야 해서 이만 일어나 볼게요.”
“그러려무나.”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방으로 돌아온 미첼은 곧장 답신을 써서 장미궁으로 보냈다.
오랜만에 외출이었다.
설레지 않으면 거짓말이었다.
“준비해야 할 게 많겠어.”
일단, 드레스도 새로 맞춰야 했다.
신이 난 미첼은 하녀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아가씨.”
“지금 당장 드웨인을 불러줘. 새 드레스가 필요할 것 같아.”
드웨이는 아발로인 후작가가 애용하는 단골 드레스숍의 디자이너였다.
“장신구도 필요할 것 같으니, 팸플릿도 가져오라고 해줘.”
“예, 아가씨.”
하녀를 내보내고, 미첼은 설레는 마음으로 디자이너를 기다렸다.
‘드디어 레오나 경을 만날 수 있어.’
미첼의 가슴이 설렜다.
* * *
대미궁은 복잡한 미로였다.
미로는 선택이다.
어느 쪽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길이 달라진다.
잘못 선택하면 막히는 길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아델라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길을 아는 사람처럼 거침없이 미로를 헤쳐나갔다.
그래서 의아해진 레오나가 물었디.
“탑주님, 길을 잘 아시는 겁니까?”
고개를 돌려 빙그레 미소를 지은 아델라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와보는 길이다.”
“예?”
레오나가 놀란 눈을 하자, 아델라가 왜 그러는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허락되었다고요?”
“대미궁은 허락된 자에게 길을 알려주지.”
그러며 아델라가 검지로 천장을 가리켰다.
위를 올려다보자, 천장에 촘촘하게 박힌 구슬이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길 안내를 하듯이.
하지만 반대쪽에는 빛이 없었다.
아델라를 쫓아가느라 주변을 살피지 않아서 미처 몰랐다.
“이해되었으면, 서두르자꾸나.”
“아, 네.”
레오나는 아델라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자 거대한 문을 만날 수 있었다.
“도착했구나.”
레오나는 고개를 들어 거대한 문을 올려다보았다.
돌로 만들어진 문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아래로 헤엄을 치듯이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여인이 손을 뻗은 곳에는 동그란 수정이 박혀 있었다.
아델라가 수정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러자 아델라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빛은 수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석문이 열렸다.
아델라가 말했다.
“여기가 대미궁의 중심이다. 들어가자꾸나.”
고개를 끄덕인 레오나는 아델라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 놀라운 것이 보였다.
둥근 원형의 공간 중심부에 있는 제단, 그리고 그 제단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황금색의 구체가 신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레오나는 홀린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구체를 떠도는 글자들이 보였다.
알 수 없는 고대 문자였다.
옆으로 다가온 아델라가 레오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에 네 신성력을 흘려보내거라.”
아델라가 가리킨 곳은 제단 아래였다. 제단 아래에 손바닥 모양의 석판이 있었다.
레오나는 조심스럽게 석판에 손바닥을 대고 신성력을 내보냈다.
그러자 신성력을 머금은 석판이 금이 가더니 갈라졌다.
갈라진 석판에서 나온 것은 열쇠였다. 열쇠를 거머쥐자, 순간 현기증이 나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레오나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온화하게 웃으며 쓰러지는 자신을 받아주는 아델라의 모습이었다.
* * *
장미정원에서 열리는 티파티.
미첼은 설레는 마음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티파티에 초대된 사람은 영향 있는 가문의 젊은 영식과 영애들이었다.
마차에서 내려 장미정원 입구에서 시종에게 초대장을 보여주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화려한 장미들이 가득 핀 정원은 향기로운 꽃내음이 가득했다.
장미궁의 자랑이라 할 만했다.
티파티는 장미정원 한가운데에서 열렸다.
잘 깎은 잔디 위에 차려진 티테이블과 거기에 어울리는 의상을 차려입은 귀족들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티파티의 주최자이자, 아름다운 2황녀 비비안이 있었다.
2황녀는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한 붉은 머리가 붉은 드레스와 너무 잘 어울렸다.
“어서 와요, 미첼 영애.”
싱그럽게 미소 지으며 2황녀가 미첼에게 다가와 살갑게 인사를 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곳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저도 영광이랍니다. 아발로인 후작가에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가 있었다니, 반가워요.”
미첼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과찬이세요.”
“이리 오세요. 제가 소개를 해드릴게요.”
비비안은 미첼에게 친근하게 굴며, 여러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대단한 가문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미첼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아버지, 아발로인 후작의 말처럼 좋은 기회의 자리였다.
하지만 미첼의 목적은 인맥을 쌓는 것이 아니라 레오나를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긴장한 탓인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비비안이 달콤하게 다가와 속삭였다.
“미첼 영애, 레오나 경을 흠모한다고 들었어요.”
미첼의 두 눈이 커졌다.
“저, 전하께서 어떻게 그걸…….”
“다 아는 수가 있답니다.”
비비안이 뱀처럼 그녀를 유혹했다.
“만나게 해드릴까요?”
미첼의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 * *
레오나는 사방이 새하얀 곳에서 눈을 떴다. 아무것도 없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문 하나가 있었다. 레오나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
문을 열고 보인 세상은 천국이었다. 기이한 꽃들이 사방을 메우고, 그 위를 하얀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향기로운 꽃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하늘은 푸르렀고, 뭉게구름이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곳이었다.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얀 드레스에 긴 은발을 늘어뜨린 여인이었는데, 얼굴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서 와요.”
“누구세요?”
“내 소개를 하기 전에 자리를 옮길까요?”
레오나는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꽃밭 한가운데에 놓인 테이블이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레오나는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테이블에는 피크닉을 나온 것처럼 차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녀가 찻주전자를 들어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찻잔에 담긴 차는 기이한 빛을 품고 있었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차니, 들어요.”
“이상한 게 들어 있는 건 아니죠?”
차라고 하기에는 색이 묘했다.
투명한 액체에 일렁이는 오색의 빛. 향기는 또 어찌나 향기로운지 모르겠다.
“그럴 리가요.”
후후 웃은 그녀가 먼저 차를 입에 넣었다.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레오나는 향기로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온몸이 찬물로 샤워한 듯 시원했다.
“이 차는 피로를 풀어준답니다.”
확실히 그랬다.
정신이 맑아지고, 온몸에 활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대미궁의 주인이에요.”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녀가 다음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람입니다.”
“저를요?”
“이곳에 잠든 수많은 영혼을 해방시켜 줄 선택받은 자.”
레오나가 금빛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혼들을 해방시켜 줄 선택받은 자라니,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이곳엔 죄 많은 영혼들이 잠들어 있답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가 피어 있는 꽃들을 가리켰다.
“이곳에 있는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잠들어 있는 영혼들이죠.”
그녀의 목소리가 짐짓 슬픈 듯이 떨렸다.
“당신은 이들을 해방시켜 줄 유일한 사람입니다. 제 임무는 그런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었죠.”
“그게 무슨…….”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아주 긴 이야기랍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레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태초에 일어난 천마전쟁의 발단.
인간을 너무 사랑한 창조주를 질투한 일부의 천족이 타락하였다. 그들이 마족이다.
창조주는 그들을 깊고 어두운 곳에 가두었는데 그곳이 마계였다.
타락한 천족들은 마계에서 힘을 길렀고, 창조주가 사랑하는 피조물이 살아가는 중간계를 공격했다.
이것이 천마전쟁의 발단이었다.
천족과 마족의 싸움으로 중간계가 파괴되기 시작하자, 창조주가 슬퍼했다. 그리하여 천족들은 선택을 하게 된다.
마족들을 봉인시키기로.
천족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마족들을 봉인시켰고, 그렇게 천마전쟁은 종식되었다.
그게 바로 대미궁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천마전쟁이 끝나고 수천 년이 지난 어느 날, 중간계에 마왕이 나타났다.
마왕 벨지안.
타락한 영혼들의 힘이 한데 뭉쳐 탄생한 악의 결정체.
그리고 그 결정체를 가슴에 품은 것은 마족들을 봉인시켰던 천족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 마족의 영혼들을 봉인시켰고, 거대한 결계를 만들어 자신의 육체를 대미궁이란 공간에 가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결계는 약화되어 금이 갔다. 더 이상 이 땅에 신의 손이 닿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의 힘이 약해지자, 결계는 파괴되었고, 악의 힘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게 바로 마왕 벨지안이었다.
벨지안은 세상의 재앙을 불러왔다. 인간들은 마왕 벨지안이 부리는 일곱 명의 종에 의해 타락하여 서로 물고 뜯었다.
피가 마를 날이 없고, 세상은 통곡과 비명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신은 아직 세상을 버리지 않았다.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를 필두로 한 인간들이 마왕 벨지안을 물리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천년전쟁.
천 년 동안 이어진 긴 전쟁에서 마왕 벨지안은 패하고 말았다.
“그 용사의 힘을 이은 사람이 당신이에요, 레오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전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아니, 상상을 초월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믿을 수 없었다.
“잘못 아신 거예요. 저는…….”
“알고 있습니다. 원래 사라졌어야 할 당신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되었다는 것을.”
레오나가 두 눈을 부릅떴다.
“천 년 전쟁에서 용사는 힘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알았죠. 마왕 벨지안이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
“그는 자신의 힘을 전승시키기로 했습니다. 육신이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도록.”
“그게…….”
“맞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용사의 영혼입니다.”
“하지만 전 용사의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을 다른 영혼에 옮긴 것은 아스텔이란 녀석이고요.”
“당신의 영혼을 전승시킨 것은 그자가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였습니다.”
“펜던트?”
그녀가 손을 휘젓자, 허공에 펜던트의 모습이 이미지로 나타났다.
“이건…….”
아스텔이 늘 목에 걸고 다니던 목걸이였다.
“그렇다면 이것이…….”
“맞습니다. 죽은 영혼을 되살려 줄 수 있는 힘이 깃든 펜던트죠.”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영혼이 전승될 때마다 당신의 곁엔 늘 저 펜던트가 함께였습니다.”
“내 영혼을 전승시켜 주기 위해서…….”
“그래요.”
레오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놀라운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 두근대던 심장도 이제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그때 불현듯 이명이 들렸다.
머릿속을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를 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이제 효과가 나타나나 보군요.”
수많은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고통은 잠시였다.
고통이 사라지자, 레오나는 감았던 두 눈을 떴다.
“나는…….”
“기억이 돌아온 모양이군요.”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난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레오나의 눈빛이 변했다.
“오래 기다리게 했네. 아이네. 아니, 벨지안.”
오랫동안 그녀는 이곳에 잠들어 있는 영혼들과 갇혀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세리아.”
먼 길을 돌아 오랜 세월에 걸쳐 두 사람이 마주했다.
* * *
미첼은 레오나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비비안의 말에 기쁜 얼굴을 하였다.
티파티 내내 비비안은 미첼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미첼은 비비안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미첼 영애, 티파티가 끝나면 저와 단둘이 차 한잔 더 하실래요?”
“네, 좋아요.”
미첼은 비비안의 호의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황녀 전하께선 미첼 영애가 상당히 마음에 드신 모양이군요.”
가까이 다가온 영애의 말에 비비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미첼 영애는 나이에 비해 사려가 깊고 상냥하답니다.”
“어머, 그래요? 저랑 같은 분이 계실 줄은 몰랐네요.”
그녀는 은근슬쩍 자신을 어필했다.
“저 역시 미첼 영애 못지않게 상냥하고 사려가 깊답니다.”
비비안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애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영애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황녀 전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건 미첼 영애보다 제가 더 많을 거예요.”
그녀가 은근슬쩍 미첼을 견제하며 말하자, 비비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군요. 제가 미첼 영애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자리 좀 비켜줄래요?”
“예?”
“비켜달라고요.”
비비안의 축객령에 영애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피했다.
비비안이 피곤한 얼굴로 미첼 영애를 보았다.
“방금 그 영애가 한 말은 귀담아듣지 말아요, 영애.”
“전 괜찮아요.”
“영애는 이해심도 깊네요.”
“과찬이세요.”
미첼이 쑥스러운 듯 미소 짓자, 비비안도 미소 지었다.
그리고 비비안은 슬슬 티파티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도 많이 지났고,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티파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비비안은 미첼을 장미궁의 응접실로 초대했다.
미첼은 장미궁의 응접실에서 비비안과 두 번째 티타임을 가졌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이런 모임은 처음이라 긴장했는데 전하의 배려 덕분에 마음이 편안했어요.”
“그랬다니, 다행이네요.”
비비안이 손수 차를 따라 미첼에게 권했다.
“마셔요. 심신이 편안해질 거예요.”
“향이 정말 좋네요.”
“그렇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차랍니다.”
비비안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다음 미첼을 바라보았다.
찻잔을 조심스럽게 든 미첼이 차를 입에 가져다 대다가 멈칫하더니 말했다.
“전하, 레오나 경을 만나게 해주신다 말 진짜인가요?”
“물론이에요. 전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답니다. 걱정 마세요.”
“감사합니다, 전하. 제게 이런 호의까지 베풀어주시고.”
“뭘요.”
자리에서 일어나 미첼에게 가까이 다가온 비비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영애, 저만 믿어요.”
그렇게 속삭인 비비안이 반대쪽 손으로 마력을 움직여, 미첼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비비안의 마력이 미첼의 목 뒤로 스며들었다. 순간 미첼은 몽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비비안이 상냥하게 웃으며 미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상한 게 아니라, 좋은 것이랍니다. 푹 자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미첼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힘없이 늘어지는 미첼의 몸을 소파에 기댄 비비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영애. 영애는 아주 귀한 분을 위해 그 몸을 바치는 겁니다.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비비안이 손을 뻗자 검은 마력이 흘러나와 미첼의 온몸을 휘어 감았다.
“게이트.”
비비안의 외침에 응접실에 문이 나타났다. 비비안이 미첼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마력에 휩싸인 미첼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미첼의 몸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비비안이 따랐다.
* * *
기억이 돌아왔다.
아주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내겐 시간이 얼마 없어요, 세리아.”
벨지안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레오나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알아.”
“나는 곧 여기서 사라지게 될 거예요.”
레오나는 벨지안 주위에 넘실거리는 검은 형체들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영혼이 한데 엉켜 하나의 새카만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벨지안이 두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그녀의 양 손바닥 위에 각각 검은색 구슬과 단도가 나타났다.
그것이 무엇인지 레오나는 잘 알고 있었다.
“파편이군.”
벨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파편이 한 곳에 모일 거예요.”
“그렇겠지.”
파편을 움켜쥔 벨지안이 레오나를 바라보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번엔 꼭 저를 해방시켜 주세요.”
그 말에 레오나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하다, 벨지안. 내가 못난 탓에 너를 지옥에 가둬서.”
벨지안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한 일입니다. 그때 폭주하여 마왕이 된 제가 세상을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막아주셨으니까요.”
레오나가 굳게 결심하며 말했다.
“약속할게. 이번엔 꼭 널 해방시켜 줄게.”
“믿을게요.”
파편을 품에 쥔 벨지안이 일어섰다.
“이만 헤어질 시간이에요.”
“그래.”
미소를 지은 벨지안이 파편과 함께 검은 마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레오나 역시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레오나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아델라의 품에 안겨 있었다.
“탑주님…….”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구나.”
몸을 일으킨 레오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구체를 보았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
레오나가 황금빛 구체에 손을 뻗자, 그 안에 있던 빛이 레오나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구체의 빛을 모두 흡수한 레오나는 두 눈을 감았다.
몸 안에 꽁꽁 묶어 두었던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금제였다.
레오나가 되기 전부터 봉인되었던 영혼의 힘이었다. 영혼의 주인은 흑사의 열매를 먹고 마력을 봉인했다.
때가 될 때까지 드러나지 않도록, 영혼에 가둬 두었다. 그리고 그 힘의 일부를 대미궁에 남겼다.
마왕 벨지안이 부활하는 날이 올 때를 대비해서.
그리고 레오나는 그 힘을 다시 찾았다. 레오나의 하늘빛 머리카락이 끝에서부터 은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녀의 본래 모습이었다. 온몸에 휘도는 에너지는 레오나의 몸을 좀 더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거기에 아델라가 전수해 준 마나 심법이 운용되었다. 레오나의 몸에 마력이 휘돌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결된 길은 방대한 마력과 신성력을 순환시켰다. 신성력과 마력이 한데 어우러져 심장과 단전에 자리를 잡았다.
각자의 역할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아델라는 그 모습을 황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제야 레오나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당신은…….”
레오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아델라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저를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탑주님.”
“역시, 제 역할은 당신을 여기로 데려오는 것이 맞았군요.”
레오나가 아델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가지고 계신 벨지안의 파편을 제게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델라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까?”
“그럴 필요가 없을 듯하군요. 세리아.”
레오나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이름을 벨지안이 아닌 아델라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느낌이 남달랐다.
아델라는 봉인해 두었던 두 개의 파편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파편을 건네받은 레오나는 파편에 걸린 속박을 풀었다.
“가거라. 너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편이 부르르 떨며, 제 주인을 찾아 모습을 감추었다.
레오나가 말했다.
“이제 곧 마왕 벨지안이 부활할 겁니다.”
아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오래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그게 바로 레오나가 해야 할 일이었다.
“탑주님은 탑으로 돌아가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피신시켜 주십시오.”
“같이 안 가십니까?”
“저는 여기서 누구를 좀 만나야 해서요.”
“알겠습니다.”
아델라가 이동 마법진을 펼쳐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레오나는 두 눈을 꽉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아스텔, 오랜만이구나.”
언제부터 있었는데 아스텔이 걸어 나왔다.
달라진 레오나의 모습을 본 아스텔의 눈동자가 떨렸다.
“오랜만입니다. 율리아나, 아니, 레오나.”
아스텔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힘을 되찾으셨군요. 아니, 더 강해지셨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네 덕분이야.”
아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당신이 산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미련한 녀석.”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 사명을 다해야겠지.”
아스텔은 레오나의 앞을 막았다.
“안 됩니다. 가지 마십시오.”
“내가 해야 할 일이야.”
“어째서 당신이 해야 합니까!”
입술을 짓씹은 레오나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마왕 벨지안을 해방시켜 줘야해, 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레오나…….”
레오나가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 난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는 것뿐이야.”
레오나의 금빛 눈동자가 결연한 의지를 가진 채 반짝였다.
“그럼,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것까진 막지 말아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레오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막지 않을게.”
레오나가 마법을 펼쳤다.
이동 마법진이었다.
이젠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함께 가자, 아스텔.”
아스텔이 기꺼이 레오나의 손을 잡았다.
* * *
아스텔은 대미궁으로 향하는 레오나와 아델라를 뒤쫓았다.
눈치채지 못하게 두 사람의 뒤를 몰래 밟았다.
기척을 내어 레오나 앞에 나타날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켜봐야 할 것만 같았다.
대미궁은 함정으로 가득한 곳이라 들었다. 사악한 마음을 품은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 곳이었다.
다행히 대미궁은 아델라와 레오나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을 환대하듯 길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아스텔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따라가는 내내 함정에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진 신성력.
신성력은 신이 내린 축복의 힘. 그리고 대미궁은 천족이 만들어낸 곳이다.
아스텔의 몸에 깃든 신성력을 대미궁이 반겨주는 것이다.
대미궁의 중심부에 들어간 레오나가 황금빛 구체가 있는 제단에 접촉했다.
쓰러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녀를 받아주는 아델라를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델라는 쓰러진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적어도 그녀가 위험한 일에 빠진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델라의 품에서 벗어나, 황금빛 구체로 다가가더니 그 빛을 흡수했다.
빛을 흡수한 그녀의 머리카락 색이 하늘색에서 은빛으로 바뀌었다.
그게 본래의 색이었다는 것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 그리고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범접할 수 없는 오라가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기운이었다.
과거에 처음 만났던 율리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전율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그래서 동경했고, 사랑했다.
그녀의 모든 것이 좋았다. 웃는 모습, 화내는 모습, 동료가 죽으면 남몰래 슬퍼하는 모습까지도.
그녀가 그런 사람이기에 끌렸고, 곁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또다시 죽음과 이어지는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그녀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고,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의지였다.
그렇다면, 함께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녀의 곁에서 모든 것을 두 눈에 담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대미궁에서 레오나가 무언가를 얻으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곳에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 있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레오나가 벨지안의 파편을 놓아주는 것을 보았을 때, 아스텔은 그녀가 큰 싸움을 결심했다는 것을 알았다.
마왕 벨지안의 부활.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핸 그녀의 싸움.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말린다고 해도 레오나는 듣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녀에 대해 잘 알았다.
그렇기에 지켜보고 싶었다.
적어도 그 숭고한 장소에 자신이 있었음을 그녀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녀가 죽음으로 가는 문턱에서 잠시 멈출 수 있기를.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녀의 죽음을 막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그가 목숨을 버리는 일이 될지라도.
두 번 다시 그녀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
‘제가 막을 겁니다. 제 생명을 버리고서라도.’
그렇게 아스텔은 결심했다.
* * *
지하 궁전.
음산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그곳에 비비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미첼이 함께였다.
비비안은 미첼을 제단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혔다.
미첼이 의자에 앉자, 제단에 있던 벨지안의 파편들이 미세하게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비어 있던 자리에 새로운 파편들이 나타나 자리를 잡은 것이다.
마치 그곳이 자신의 자리인 양.
“탑주가 가지고 있던 파편들이 알아서 찾아들다니…….”
아무래도 탑주 아델라가 봉인을 푼 것이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파편이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비비안은 탑주가 무슨 이유로 봉인을 푼 것인지 궁금했다.
“무슨 꿍꿍이지?”
“그 이유는 내가 설명해 줄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비비안은 화들짝 놀랐다.
“무슨…….”
제단 바로 앞에 은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당신은…….”
“어디에 꼭꼭 숨었나 했더니, 이런 곳에 숨어 있을 줄이야.”
비비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다행히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그녀의 얼굴은 상대에게 드러나지 않았다.
“레오나, 당신이 왜 여기에 그리고 그 머리는…….”
“아, 이거?”
레오나가 은발로 변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며 툭 내뱉었다.
“원래의 힘을 되찾았더니 변하더라고.”
“원래의 힘이라고?”
“응, 그런 게 있어.”
레오나가 비비안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흠칫 놀란 비비안이 뒤로 물러나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이 왜 물러나야 한단 말인가, 물러나야 하는 쪽은 레오나였다.
비비안은 침착하게 이성을 찾으며 물러났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았지?”
“간단해.”
레오나가 제단에 놓인 파편들을 가리켰다.
“파편들이 길을 알려주더라고.”
레오나는 아델라가 가지고 있던 파편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파편은 흔적을 남기며 길을 안내했다.
이동 마법진으로 제도에 도착했을 때 레오나는 제일 먼저 파편의 흔적을 찾았다.
파편은 황궁으로 향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황궁 지하에 마왕 부활을 위한 제단이 있을 것이라곤 꿈에도 상상 못 했으니까.
“기가 막히지만, 이미 늦었어. 그리고 고마워.”
빙그레 미소 지은 비비안이 완성된 제단을 보았다.
“마왕 벨지안 님의 부활을 위한 제단을 완성시켜 주어서.”
레오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고 있어.”
“뭐?”
“자, 얼른 시작해. 마왕 벨지안을 부활시켜야지.”
비비안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레오나의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막아도 모자랄 판에 부활시키라고 재촉하다니, 제정신인가?
“무슨 생각이야?”
“별생각 안 해. 마왕 벨지안의 부활을 기다릴 뿐이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레오나의 말에 속아 방해를 받을 순 없었다.
비비안은 수하인 흑마법사들을 불렀다.
열 명이 넘는 흑마법사들이 레오나를 포위했다.
그 순간 아스텔이 모습을 드러내 레오나의 앞을 막아섰다.
레오나의 앞을 호위 기사처럼 지키고 선 남자를 바라본 비비안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단둘이서 자신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내 일을 방해 못 하도록 막아.”
그렇게 명령을 내린 비비안은 몸을 돌려 제단을 바라보았다.
제단은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그릇이 될 존재, 마왕의 파편들과 그동안 흘렸던 수많은 이의 피까지.
이제 남은 건 의식을 진행하는 것뿐이었다.
흑마법사들은 혹여라도 레오나와 아스텔이 공격을 할까 봐 두 사람을 경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가만히 선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레오나는 부활을 진행하는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비비안이 마기를 폭발적으로 쏟아내 제단에 퍼부었다.
우우우우웅!
바닥이 진동했다.
비비안이 외쳤다.
“위대하신 마왕 벨지안 님이시어! 이 땅에 강림하여 그 존재를 각인시켜 주소서!”
콰앙!
제단에서 엄청난 마기가 기둥처럼 솟아올랐다.
그리고 파편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의자에 앉아 있는 미첼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미첼의 몸이 경련했다.
심장이 맥동하고, 그녀의 양팔에 핏줄이 붉어졌다. 드레스가 찢어지고 드러난 맨다리에 붉은 핏줄이 돋았다.
“아아아아악!”
미첼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곤 머리카락이 위로 솟구치며 검게 물들었다.
마기의 기둥이 점점 약해지며 미첼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미첼이 입고 있던 옷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검은색의 드레스가 새로 입혀졌다.
동시에 등 뒤에 여섯 장의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비비안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아, 마왕 벨지안 님이시여. 부활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비비안의 외침에 흑마법사들도 함께 절을 올렸다.
“경하드립니다!”
전신에 검은색 마기를 두른 그녀가 바닥에 엎드린 비비안을 내려다보았다.
* * *
레오나가 지하 궁전에 도착하기 전, 아델라는 레오나의 통신을 받고 곧바로 마법사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황궁에서 벗어나야 한다니!”
황제는 황당한 얼굴로 아델라를 보았다. 아델라는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황궁 지하에 마왕 부활을 위한 제단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곧 마왕이 부활할 거라고?”
“그렇습니다.”
“그 말을 짐더러 믿으라는 것인가?”
느닷없이 알현실로 찾아와 마왕이 부활하니, 피해야 한다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델라도 황제가 납득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을 보십시오.”
아델라가 건넨 것은 영상구였다.
영상구에는 지하 궁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하얀 가면을 쓴 여인과 제단, 그리고 그 여인을 상대하고 있는 은발 여인.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마, 맙소사! 이제 정말인가?”
“예, 지금 지하궁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흑마법사들이 은발 여인을 포위했다. 그리고 하얀 가면을 쓴 여인이 마기를 뿜어냈다.
“시간이 없습니다.”
굳은 결심을 한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서두르지.”
황제는 기사단장을 불러 황궁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을 피신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황후와 황태자, 1황녀와 2황녀에게도 피신할 것을 지시했다.
그렇게 황궁은 때아닌 소란을 겪게 되었다.
황제 일가와 황궁에 있던 사람들은 아델라가 데리고 온 마법사들의 도움으로 황궁을 벗어났다.
황제 일가는 제도에서 떨어진 저택에 몸을 피했다. 그곳은 황궁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황족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안전가옥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황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황태자와 황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황제는 아델라가 해주었던 말을 가족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황태자는 두 눈을 부릅떴고, 황후는 상당히 놀랐는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이앤 황녀는 그런 황후를 부축했다. 그러다 그녀는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어마마마, 아바마마. 오라버니.”
세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다이앤 황녀를 바라보았다.
“비비안은요?”
“뭐?”
“비비안이 없어요.”
황제가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2황녀가 없었다.
황제는 가까이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2황녀는 왜 안 보이는 것이냐?”
기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장미궁에 가보았는데 시녀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냐?”
“예, 폐하.”
다이앤 황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해요. 비비안이 아직 황궁에 있나 봐요.”
황제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탑주와 연결된 통신구를 가져와라.”
기사가 서둘러 나갔다.
잠시 후, 황제는 탑주 아델라와 통신을 연결했다.
아델라는 이곳으로 황실 일원들을 데려다주고 곧바로 다시 제도로 돌아갔다.
제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피신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폐하, 무슨 일입니까?
“황궁에 2황녀가 있는 것 같소.”
-네?
“이곳에 2황녀가 없단 말이오.”
미간을 찌푸린 아델라가 마법사 하나를 불러 상황을 물었다.
설명을 들은 아델라가 황제에게 말을 전했다.
-제 휘하 마법사가 기사들과 함께 장미궁에 갔는데 전하께선 안 계셨다고 했습니다.
“장미궁에 없었다면,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지 않소.”
-그래서 황궁을 뒤져 2황녀 전하를 추적했는데 없었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다시 가서 찾아가 보시오!”
-알겠습니다. 다시 황궁을 수색해 보겠습니다.
“고맙소.”
통신을 끊은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몇 시간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콰앙!
그때 바깥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황제는 황급히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황궁에서 새카만 기둥이 솟아올라 밤하늘을 물들였다.
“저게 무슨……!”
황제의 곁으로 황후와 황태자, 1황녀가 다가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기운이 황궁에 번지고 있었다. 제국에 암운이 드리워진 것만 같아 불안했다.
“아바마마, 비비안은 괜찮겠죠?”
“탑주에게 부탁했으니, 무사할 게다.”
황제의 미간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몸이 약했던 다이앤을 신경 쓰느라 비비안에겐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비안은 제 몫을 잘해냈다.
다이앤을 대신해 황가를 대신하여 사교활동을 하여 인맥을 쌓았다.
그 인맥은 나중에 다이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다이앤을 위해서 네가 노력해야 한다고 다그치기도 하였다. 단 한번도 칭찬을 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막상 비비안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미안했던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무사해다오.’
황제는 비비안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 * *
레오나는 아련한 얼굴로 마왕 벨지안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천족이었으나,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그녀는 수많은 마족의 영혼을 품에 안은 채 마왕으로 태어났다.
처음 태어났을 때, 레오나는 그녀를 완벽하게 해방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그녀는 부활하여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마왕 벨지안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전율 앞에 흑마법사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마왕 벨지안이 팔을 뻗어 위로 올렸다. 그러자 바닥에 있던 지하궁전이 위로 솟아올라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당황했다. 그리고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는 마왕 벨지안을 바라보았다.
몇몇은 기세에 짓눌려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각 기사단의 단장들과 몇몇 단원은 꿋꿋하게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마왕 벨지안을 마주했다.
“레오나!”
레오나를 발견한 데미안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는 달라진 레오나의 모습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우선 마왕 벨지안을 막는 게 시급하니까.”
그 말을 남긴 레오나는 훌쩍 뛰어올라 마왕 벨지안 앞에 나타났다.
벨지안은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으로 솟구쳐 재앙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벨지안, 이제 해방시켜 줄게.”
레오나는 마왕 벨지안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마기로 이루어진 방어벽이 레오나를 밀어냈다. 레오나는 지지 않고 버티며 신력을 움직였다.
신력은 신의 힘이었다. 신성력은 신으로부터 내려받은 힘이라면, 신력은 신 그 자체의 고유 힘이었다. 차원이 다른 능력이었다.
레오나는 대미궁에서 신성력의 결정을 얻었다. 결정은 레오나의 신성력과 결합하여 신력이 되었다.
아무리 마왕이라 할지라도 신력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레오나의 손이 마기로 이뤄진 방어벽을 찢었다. 그녀의 손이 마왕 벨지안에게 닿았다.
레오나는 신력으로 마왕 벨지안의 사악한 마기를 정화했다.
검게 물들었던 마왕 벨지안의 몸은 점차 찬란한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까아아아아-
신력으로 정화가 됨에 따라 반발하는 마기가 괴성을 질러댔다.
더는 견디지 못한 마기가 마왕 벨지안의 육신에서 뛰쳐나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허공에 떠돌던 마기 덩어리를 가로챈 건 하얀 가면을 쓴 여인이었다.
그녀가 마기를 집어삼킨 것이다. 황홀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동시에 그녀의 등 뒤에서 새카만 날개가 돋아났다.
허공에서 포효한 그녀가 크게 웃었다.
“이제 모든 것이 내 발아래 고개를 조아리게 될 거야.”
레오나는 미첼 영애의 몸을 바닥에 눕혔다. 그러자 눈을 뜬 그녀가 레오나의 손을 잡았다.
일순 그녀의 눈빛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세리아, 부탁해요.”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짜낸 아이네의 영혼이 레오나에게 부탁했다.
“걱정 마. 날 믿어.”
“고마워요.”
미소를 지은 그녀가 이내 두 눈을 감았다.
레오나는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부탁합니다.”
데미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맡긴 레오나는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제는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을 꾸민 이가 2황녀 전하일 줄은 몰랐군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
비비안의 양손에 마기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수십, 수백 개가 그녀의 등 뒤에 나타났다.
“죽어.”
수백 개의 마기의 구체가 레오나를 향해 쏟아졌다.
레오나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을 타고 뻗어 나간 신력이 마기의 구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소멸시켰다.
비비안은 경악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너, 정체가 뭐야. 어떻게 그런 힘을…….”
레오나가 사용한 힘은 그녀가 알고 있던 신성력이 아니었다. 그 궤를 달리하는 아주 신성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그만 내려놓으세요.”
“그럴 수 없어! 어떻게 얻은 힘인데!”
비비안이 양팔을 뻗었다.
그러자 하늘에 거대한 소환진이 나타났다.
비비안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밸리알, 당신 차례야.”
소환진을 뚫고 거대한 팔이 튀어나왔다.
-클클클, 드디어 해방인가.
쇠를 긁는 듯한 기묘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며 팔의 주인에게 향했다. 그리고 신검 에키온을 소환해 휘둘렀다.
난도질당한 팔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다.
밸리알이 기겁했다.
레오나는 싱긋 웃으며 소환진을 찢고 놈을 끌어냈다.
“오랜만이야, 밸리알. 그동안 잘 지냈어?”
레오나를 바라본 밸리알이 커다란 눈을 부릅떴다.
“넌…….”
“오랜만이지?”
레오나가 주먹을 들어 밸리알의 턱을 올려쳤다.
“큭!”
대악마가 인간의 주먹에 맞고 휘청거리다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없었다고 이런 짓을 꾸미고 있었어?”
“그, 그건…….”
레오나가 씩 웃었다.
“이런 짓을 꾸몄으면 그만한 각오는 했겠지?”
문득, 오래전에 기억이 떠오른 밸리알은 치를 떨었다.
신의 선택을 받아 막강한 힘을 가졌던 인간이 있었다. 그 인간은 마왕을 물리치고 마왕이 소환한 대악마들도 물리쳤다.
그중 하나가 밸리알이었다.
밸리알이 급히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비비안에게 말했다.
“인간, 계약은 해지다. 네가 알아서 해라.”
밸리알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고 꽁무니를 빼며 달아났다.
레오나는 굳이 잡지 않았다.
비비안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레오나와 사라진 밸리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레오나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전에 나한테 맞은 놈이거든.”
이에 화가 난 비비안은 더더욱 레오나를 가만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를 일찌감치 제거했어야 했다. 자신의 실수였다.
“다 죽여버리겠어.”
비비안이 광대한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가 지정한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대마법이었다.
“모두 피해요!”
레오나의 외침에 기사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단장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아스텔이 데미안에게 다가왔다.
“피하십시오. 당신들의 힘으론 막을 수 없습니다.”
데미안이 뒤에 시립한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황궁을 벗어나라.”
부단장 란젤로가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단장님은…….”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란젤로는 이미 대답을 들었다.
“모두 황궁을 벗어난다!”
부단장 란젤로가 기사들을 독려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단장에게 말했다.
“부디 무사하십시오.”
데미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사단이 물러나자, 다른 기사단장들도 휘하 기사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본인들은 데미안과 함께 남기로 결심한 듯 자리를 지켰다.
데미안이 검을 치켜들었다. 대마법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다크 메테오.
검은 불꽃을 머금은 돌덩어리가 황궁을 뒤집어 놓았다.
콰아아앙!
여기저기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
데미안이 방어벽을 만들어 남은 자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레오나 역시 마법을 무사히 막아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대, 대마법이 이렇게 허무하게!”
비비안이 발악했다.
“나의 종들아 일어나 세상을 악으로 물들여라!”
바닥을 뚫고 마물들이 소환되었다.
데미안이 기사단장들을 보았다.
“막읍시다.”
기사단장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마리도 내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그들은 싸움에 끼어들었다.
아스텔도 합류했다.
아스텔의 옆에 시엘도 합류하였다.
레오나는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하죠.”
“누구 마음대로!”
비비안이 레오나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공격을 퍼부었다.
뇌전을 머금은 마기, 마기의 불꽃, 마기의 파도, 마기의 벽, 마기의 화살 온갖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단 하나도 레오나를 다치게 하지 못했다.
“어째서! 어째서!”
가까이 다가온 레오나가 비비안의 손목을 잡았다.
“이제 그만 해방시켜 줘.”
레오나의 손바닥이 비비안의 가슴에 닿았다.
“아, 안 돼! 이거 놔!”
레오나는 비비안의 손목을 그러 쥔 채 신력을 뿜어냈다.
“아아악!”
비비안이 비명을 질러댔다.
레오나는 비비안의 몸에 깃들어 있는 수많은 영혼을 보았다. 그 안엔 레오나가 익히 알던 영혼들이 있었다.
‘리즈, 거기 있었구나.’
사라진 리즈는 비비안에 의해 삼켜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알면 메리벨이 정말 슬퍼할 것 같았다.
레오나는 그 안에 있던 모든 영혼을 해방시켰다. 한데 뭉쳐 있던 영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안 돼, 가지 마. 내 거야. 내 힘이라고.”
비비안이 발악하며 붙잡으려고 했지만, 영혼들은 이미 흩어진 후였다.
레오나는 그중에서 가장 반짝이는 영혼을 두 손에 담았다.
“아이네. 이제 해방이야.”
레오나가 영혼을 놓아주자, 아이네의 영혼이 하늘 높이 사라졌다.
힘을 잃은 비비안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이럴 수는 없어.”
그녀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환했던 마물들이 소멸하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에 흑마법사들도 보였다.
이를 악문 비비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흑마법사 하나를 낚아챘다.
“네 힘을 내게 바쳐!”
“악!”
흑마법사에서 마기를 뽑아낸 그녀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흑마법사를 공격해 힘을 갈취했다.
참으로 추한 모습이었다.
흑마법사들이 하나둘씩 그녀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비비안은 만족하지 못했다.
“모자라, 더, 더, 더 내놓으란 말이야!”
모든 흑마법사가 그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만행을 레오나를 비롯한 기사단장들은 혐오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2황녀 전하께서 저러실 줄이야.”
“그러게.”
“어쩌다 저리되셨는지.”
“추하군.”
마지막은 데미안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비비안이 두 눈을 치켜떴다.
“추하다고? 내가 추해! 그러는 너희는 얼마나 고결해!”
그녀의 원망은 이제 레오나에게 향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저주할 거야.”
비비안의 증오 가득한 눈빛을 마주한 레오나는 그동안 그녀가 저질렀던 만행에 대한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그동안 당신이 죽였던 자들의 기억입니다.”
허공에 비비안이 그동안 죽였던 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재생되었다. 해방된 영혼들이 남기고 간 기억들이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재생된 영상엔 사람으로서 저질러선 안 되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문 비비안이 레오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레오나에게 닿지도 못한 채 막혔다.
아스텔이 그녀를 걷어찬 것이다.
바닥에 볼썽사납게 널브러진 그녀가 악다구니를 썼다.
“강해지고 싶은 게 죄야? 살아남으려면 무슨 짓인들 못해!”
레오나는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저지른 일들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악을 쓰던 비비안은 급기야 울기까지 했다.
“너 대체 뭐야! 어째서 그렇게 강한 거지?”
마왕 벨지안도,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강력한 힘.
레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비안은 고귀한 척 구는 레오나가 짜증이 났다.
비비안이 소리쳤다.
“저주할 거야! 내 목숨을 다해 널 저주하겠어!”
“저주해. 하지만 소용없을 거야.”
“뭐?”
“당신이 날 저주해도 저는 당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레오나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녀의 손바닥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육망성이 떠올랐다. 육망성에는 고대어로 된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그건…….”
“알아보는군요.”
“마, 말도 안 돼! 모든 저주 무효화라고? 어째서 그런 게 너한테 있을 수 있는 거지? 대체 신은 네게 어디까지 허락하신 거야!”
레오나가 비비안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건, 아마도 당신의 신이 허락하지 않는 곳까지일 겁니다.”
비비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 하하.”
결국, 이렇게 될 거였나?
그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일이 이런 식의 결말을 맺기 위함이었다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레오나는 허망해진 비비안의 오렌지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동자 속에 담긴 증오를 보았다. 그건 그녀가 가지고 있던 기억이었다.
그 기억이 레오나에게 전달되었다.
그 기억은 비비안의 외로웠던 황궁 생활이었다.
비비안은 피로 연결된 한 가족인 황제, 황후, 황태자, 1황녀를 늘 부러운 얼굴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들은 그녀를 황녀로서의 예우해주었지만, 가족이 되어주진 않았다.
황제는 황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황비와 비비안은 실수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실수가 흑마법사를 불러들인 계기가 되었다. 황비였던 비비안의 어머니는 흑마법사였다.
황제는 흑마법사의 현혹에 빠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황비가 원하는 것은 황손을 품어 그 아이로 하여금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으로 낳은 원념을 비비안의 곁에 머물게 하였다.
원념은 외로웠던 비비안의 틈을 노려 계속 파고들어 그녀를 부추겼다.
‘저들처럼 되고 싶으면 강해져야 돼.’
끊임없이 속삭이며 비비안을 현혹했다. 결국, 비비안은 현혹되고 말았다. 그것이 비비안이 흑마법사가 된 계기였다.
흑마법사가 된 비비안은 많은 짓을 저질렀다. 증오하는 다이앤을 저주했고, 더욱 강한 힘을 얻기 위해 인신 공양으로 대악마와 계약까지 하였다.
마탑을 오염시키고, 분란을 만들었으며, 마왕 부활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 모든 일의 시작은 비비안을 흑마법사로 만든 강인한 원념이었다.
레오나는 비비안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었다.
레오나는 손을 휘저어 비비안의 양손과 발목에 구속구를 채웠다.
체념했는지 비비안은 얌전히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다가왔다.
“레오나!”
데미안이었다.
흑마법사들이 쓰러지자, 한달음에 레오나에게 달려온 것이다.
“단장님.”
데미안은 레오나의 전신을 훑었다.
“다친 데는 없나?”
“없습니다.”
그러며 시선을 비비안에게 향했다. 데미안이 굳은 얼굴로 비비안을 보았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턱짓으로 끌고 가라고 명을 내렸다.
비비안은 기사들에 의해 힘없이 끌려갔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얼굴이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힘을 잃은 그녀는 평범한 여인일 뿐이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데미안이 미소를 지었다.
레오나도 한결 가벼운 듯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방된 아이네가 고맙다며 인사를 하는 듯했다.
‘이제 편이 쉬어, 아이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지상에 내려와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그녀를 레오나는 위로하고 싶었다.
신을 위해 싸웠지만, 어쩔 수 없이 마왕이 되어야만 했던 그녀를 신께서 갸륵하게 여겨주시길 바랄 뿐이었다.
* * *
황제와 황후, 황태자, 1황녀는 굳은 얼굴로 데미안에게서 그간의 일을 보고받았다.
데미안은 비비안을 감옥에 가두고, 곧장 레오나를 데리고 황제 일가가 있는 안전가옥으로 와 그동안의 일을 보고했다.
황제는 침음을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게 비비안 그 아이의 짓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흑마법사였다니…….”
“그리고 여기…….”
데미안은 가지고 온 서류를 황제에게 보여주었다.
지하 궁전에 대한 보고서였다.
“하, 발칙하게 황궁 지하에 이런 곳을 만들어놓았다니. 게다가 제단을 만들어 인신 공양까지 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실종된 자들의 유품을 발견했습니다.”
황제는 이마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아, 그 아이가 그런 짓을…….”
그리고 황제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아니길 바랐지만, 혹시나 해서 데미안에게 물었다.
“그럼 혹시 다이앤을 저주한 것도 그 아이 짓인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레오나 경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황제의 시선이 데미안의 옆에 서 있는 레오나에게 향했다.
“대답해 보게.”
“예, 폐하.”
레오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다이앤 황녀 전하를 노린 저주는 비비안 전하께서 하신 것이 맞습니다.”
황제의 두 눈이 커졌다.
믿고 싶지 않았던 말을 직접 들으니 충격이 더욱 컸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황후는 충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어마마마.”
황태자가 황제를 보았다.
“일단 어마마마를 모시겠습니다.”
“그래.”
황태자는 황후를 부축해 방을 나갔다. 그 뒤를 1황녀가 뒤따랐다.
황후를 다른 방 침대에 눕힌 황태자를 보며 1황녀 다이앤이 말했다.
“난 비비안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
그런 다이앤을 바라보는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차려, 그년은 널 저주했다고!”
다이앤이 이를 악물었다.
비비안은 아픈 자신에게 다정했다. 그런데 그녀의 행동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다이앤은 슬펐다.
비비안이 자신을 저주하고 제국을 멸망시키려 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사실이었고, 다이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제국 전역이 들썩였다.
2황녀가 흑마법사였다.
그녀가 마왕을 소환하여 제국을 비롯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였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졌다.
일부러 소문을 낸 것은 아니었다.
황궁에서 일어난 대형사고와 제도에서 벌어진 전투 흔적을 몸소 겪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이야기가 흘러간 것이다.
“세상에, 2황녀 전하가 흑마법사였다니.”
“아우, 끔찍해라. 저는 그것도 모르고 2황녀 전하를 제 모임에 초대했는데.”
“말도 마요. 얼마나 감쪽같이 속였는지 저도 2황녀 전하를 제가 주최하는 모임에 초대했다니까요.”
“누가 알았겠어요. 그 상냥한 미소 속에 지독한 악의를 숨기고 있을 줄.”
“그러게요.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랬데요?”
“이유야 뻔하죠. 적통이 아니시잖아요. 아마 콤플렉스가 심하지 않았을까요?”
앞에서는 2황녀라고 대우를 해주었지만, 알게 모르게 뒤에서 2황녀가 적통이 아니란 이유로 깎아내내렸다.
귀족들이 심란한 만큼, 황실 또한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안전가옥에서 나온 황제 일가는 황궁으로 돌아와 부서진 황궁 재건과 피해를 입은 제도를 수습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황제는 빗발치도록 올라오는 서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의 내용은 모두 2황녀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제도 비비안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까.
하지만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자식인지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바마마,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황태자가 단호하게 나왔다.
“그래, 그렇겠지.”
황제는 결국 비비안을 참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서류에 사인 하려고 하는데 집무실의 문을 열고 다이앤이 들어왔다.
황제와 황태자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다이앤…….”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다이앤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비비안을 만나게 해주세요.”
황제의 두 눈이 커졌다.
“안 돼.”
막아선 것은 황태자였다.
“네 오라비의 말이 맞다. 위험하다.”
“레오나 경과 함께 갈게요. 그럼 안전할 거예요. 꼭 만나야 해요. 부탁드려요. 아바마마. 오라버니.”
다이앤이 눈물로 호소하자, 두 사람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말했다.
“꼭 레오나 경을 데려가도록 하거라.”
“그럴게요.”
허락을 받은 다이앤은 집무실을 나와 레오나를 만났다.
다이앤은 레오나에게 비비안을 만나러 가는 것에 동행을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레오나 경.”
레오나는 다이앤과 함께 2황녀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황제가 허락했기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여깁니다.”
간수가 한 감옥을 가리키자, 그곳에 초췌한 얼굴을 한 비비안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언제나 탐스러웠던 붉은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져 있었고, 그동안 식사를 걸렀는지 볼이 푹 들어가 있었다.
다이앤은 씁쓸한 얼굴로 비비안을 불렀다.
“비비안.”
그러자 비비안이 목소리에 반응하며 고개를 돌렸다.
초점이 없던 그녀의 눈동자에 다이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너 때문이야…….”
있는 힘껏 감옥 창살로 다가온 비비안이 다이앤을 노려보았다.
“널 죽여 버렸어야 했어.”
다이앤이 슬픈 얼굴로 비비안을 보았다.
“왜 그렇게 날 미워한 거야?”
다이앤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비비안이 히죽 웃으며 이죽거렸다.
“넌 모든 걸 다 가졌으니까.”
“뭐?”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넌 결코 날 이해하지 못해.”
비비안은 늘 외로웠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했다.
“미안해.”
다이앤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튀어나오자, 비비안이 멍해졌다.
“뭐라고?”
“미안해, 비비안. 난 네가 그렇게 외로운 줄 몰랐어.”
“닥쳐! 네가 미워! 너를 비롯한 모두가 미워 죽겠어!”
그렇게 외친 비비안의 눈에는 지독한 악의가 득실거렸다.
다이앤이 말했다.
“네가 날 저주했다는 거 들었어.”
“…….”
“그리고 지금 알았어. 네가 날 저주한 건 외로워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는 걸. 그게 나였구나.”
“…….”
“하지만 난 널 용서할 거야. 그러니 나에 대한 죄는 없는 거야.”
“너…… 끝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다이앤은 늘 그랬다.
혼자 착한 척, 괜찮은 척 굴었다.
자신의 저주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누군가를 탓한 적이 없었다.
그저 몸이 건강하지 못한 자신을 탓할 뿐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착하기만 한 것인지 비비안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싫었다.
“잘 있어. 비비안.”
아마 이것이 비비안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다.
다이앤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가요, 레오나 경.”
레오나는 아무 대답 없이 조용히 다이앤의 뒤를 따랐다.
뒤를 따르며 레오나는 다이앤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 * *
비비안의 처형이 만장일치로 확정되었다.
처형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진행되는 공개 처형으로 결정이 났다.
처형 당일. 비비안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이렇게 만든 황제와 황후, 황녀 다이앤에게 악을 퍼부어 댔다.
그녀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 사정이 딱하긴 하였지만 그녀가 저지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귀족들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본보기 삼아 비비안의 목을 효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황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비비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황실의 체면 때문이었다.
황족이 흑마법사가 되어 피해를 입혔으니, 황족으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비비안이 타락하게 된 계기가 그녀를 방치한 자신 때문이기도 해서 황제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비비안의 처형으로 제국은 한동안 떠들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잊혀질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슈가 있었다. 흑마법사 비비안을 막아내고, 제국을 구한 영웅에 관한 이야기였다.
신성한 힘으로 흑마법을 물리치고, 다친 사람을 치유한 영웅. 성스러운 힘을 가진 여인.
누구는 그녀를 여신의 강림이라고 칭송했고, 더러는 신이 보내준 영웅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레오나 아제르티아. 그 이름이 제국 전역을 들썩였다.
“유명인이 된 기분이 어떻습니까?”
연무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시엘이 다가와 물었다.
“글쎄, 실감이 잘 안 나.”
“당신은 항상 어려운 길만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영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진 않습니까?”
레오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과거에도 그녀는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그녀에겐 그게 당연히 해야 할 일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 일은 매우 대단한 일이었다.
“영웅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레오나. 이번엔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고마워.”
시엘이 존경스럽다는 눈빛으로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운 눈빛은 치우지?”
“제 눈빛이 어때서요?”
“그윽한 게 너무 부담스럽거든?”
시엘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다들 제 눈빛을 보면 얼굴을 붉히던데. 당신한텐 통하지 않는군요.”
레오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
레오나는 혀를 끌끌 찼다.
평화로운 날이었다.
* * *
얼마 후, 레오나는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알현실에서 만난 황제의 얼굴은 무척 초췌해 보였다.
그동안 황제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예, 폐하.”
“이번 일에 그대의 공이 컸다 들었다. 그대 덕분에 제국이 위기를 넘겼어.”
“과찬이십니다.”
레오나가 비비안을 막아낸 일은 데미안과 기사단장들의 말을 통해 자세하게 들었다.
“그대 같은 영웅이 제국에 있다는 게 자랑스럽군. 모든 귀족이 그대를 칭찬해.”
황제의 칭찬에 레오나는 어쩐지 쑥스러웠다.
“제국을 구한 그대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 귀족들과 내 입장이네.”
“걸맞은 대우라 하시면…….”
“그대에게 무공훈장을 내리기로 결정이 되었어.”
“무공훈장이요?”
“그래.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지. 지금처럼 귀족들과 나의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는 없었다네.”
“황공하옵니다.”
가까이 다가온 황제가 레오나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폐하…….”
“비비안, 그 아이를 막아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네.”
레오나가 비비안을 막지 못했다면, 제국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에 재앙이 닥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식을 제 손으로 죽여야만 했지만, 그 아이가 저지른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였다.
“황실에서는 별개로 그대의 공을 치하하고자 포상을 내릴 생각이라네, 또한 그대를 위한 연회를 열기로 하였어.”
“폐, 폐하.”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황후와 황녀가 특별히 내게 찾아와 부탁한 일이니 거절하지 말게. 부담 가질 필요도 없어.”
“감사합니다. 폐하.”
“시간이 괜찮으면 잠시 나와 차 한잔하겠나?”
“물론입니다.”
레오나는 황제와 티타임을 가졌다. 티타임에서는 공적인 이야기가 아닌 사적인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예를 들면 레오나의 결혼 상대라든가 하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였다.
* * *
며칠 후, 레오나에게 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무공훈장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영웅에게 내리는 영예로운 훈장이었다.
레오나가 그것을 받게 된 것이다.
레오나는 기사단 정복을 입고, 임시로 마련된 대전에서 많은 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훈장을 받았다.
대전이 있던 황제의 궁이 마왕의 부활로 인해 무너졌기 때문에 황제의 궁 다음으로 큰 라포르테 궁에서 치르게 되었다.
라포르테 궁은 황제가 병이 있거나, 모종의 이유로 양위를 하였을 때 머무를 수 있는 궁이었다.
즉, 황제의 아버지가 기거하는 궁인 셈이다.
황제는 황제의 궁이 복원될 때까지는 라포르테 궁에서 지내게 되었다.
무공훈장 수여 후, 황제는 레오나에게 또 다른 포상을 내렸다.
“레오나 아제르티아를 백작으로 승작하겠다. 또한 제도에서 가까운 서부지역의 봉토를 하사하겠다.”
서부지역의 봉토는 풍요로운 땅을 가진 곳으로, 매년 쌀과 각종 식자재가 생산되는 제국에서도 가장 알토란인 곳이었다.
그곳은 원래 황가의 소유였으나, 황제가 레오나에게 하사한 것이다.
귀족들이 부러운 눈으로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엔 질투가 아닌 선의가 가득했다.
레오나는 제국을 구한 영웅이었고, 다친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다. 다친 사람 중에는 그들의 부모와 자식들도 있었다.
제도에 흑마법사가 출현하였을 때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 중 일부가 귀족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은 예외였다.
그건 바로 레오나의 부친인 칼리반 백작이었다.
칼리반 백작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무공훈장을 수여받는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백작위와 봉토까지 하사받는 레오나를 보니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레오나와 자신이 같은 위치가 된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다.
“레오나, 축하한다.”
레오나의 곁으로 데미안이 다가왔다. 그도 오늘은 기사단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꽤 근사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데미안이 미소를 지으며, 레오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나름의 칭찬이었다.
“이제 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가 되었군.”
“하하, 그 정도는 아닙니다.”
“레오나 경, 축하해.”
“축하해.”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고.”
각 기사단의 단장들이 다가와 레오나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뿐만 아니었다. 이 자리에는 탑주인 아델라도 있었다.
“레오나, 잘해냈구나.”
“탑주님…….”
“훌륭하다.”
레오나는 쑥스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기사단장들과 탑주까지 레오나의 주위에 모여 있자, 귀족들은 눈을 더욱 반짝였다.
레오나와 친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수여식이 완료되자,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는 황궁에서 가장 크다는 사파이어 홀에서 열렸다.
연회장에는 대신들을 비롯하여, 그들의 자녀들도 참석해 북적였다.
특히, 레오나의 주위엔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제국의 4대 기사단장이 함께 있었다.
마탑주 아델라는 레오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 뒤, 연회는 질색이라며 마탑으로 돌아갔다.
“레오나, 축하한다. 이제는 백작님인가?”
바스티안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백기사단의 기사인 라파엘이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라파엘뿐만 아니라, 백기사단의 동료들이 레오나를 축하해 주었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익숙하지 않던 레오나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 * *
북적거리는 연회장을 피해 테라스로 나온 레오나는 한숨을 돌렸다.
기사단장들과 동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네고 돌아가자, 틈을 노리고 있던 다른 귀족들이 레오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레오나 경, 루펜다 백작입니다. 제국을 구한 영웅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오나 경, 제페토 후작입니다. 이렇게 가까이서 뵙게 되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자이드 백작입니다.”
“쿠스토 자작입니다.”
각각 가문을 소개하며 레오나에게 인사를 건네기 바빴다. 어떻게 해서든 친분을 쌓고 싶어 했다.
대충 인사를 받아주고, 간신히 몸을 피해 테라스로 나왔다.
“아, 살 것 같다.”
테라스 난간에 기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큰 싸움을 벌였는데 지금은 너무 평화로웠다.
“하아.”
바람을 쐬고 있으니, 답답함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많이 답답했나 보군.”
테라스 문을 열고 데미안이 들어왔다.
“단장님.”
데미안은 자연스럽게 레오나의 옆에 몸을 기대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받은 기분이에요.”
“그만큼 네가 세운 공이 크니까.”
“그런가요?”
손을 뻗은 데미안이 레오나의 어깨를 꾹 눌렀다.
“넌 항상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어. 가끔은 긴장을 풀어도 좋아.”
“아, 제가 그랬군요.”
고개를 돌린 데미안이 레오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넌 항상 무언가 큰 짐을 지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
“단장님 눈에는 제가 그렇게 보였군요.”
레오나는 심호흡을 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깨에 힘을 빼니 긴장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백기사단엔 계속 남아 있을 건가?”
“물론이죠. 저는 백기사단의 정예기사니까요.”
피식 웃은 데미안이 농담을 던졌다.
“백기사단의 정예 중에서 가장 출세를 빨리한 건 너일 거다. 선배들이 배 아파하더군.”
“그러고 보니…….”
백기사단의 정예 중에서 백작 위를 받은 건 레오나가 유일했다.
다들 전부 레오나보다 작위가 낮았다.
“그렇겠는데요. 앞으로 선배님들도 저를 함부로 대하진 못하겠네요.”
“지금을 실컷 즐겨둬라. 내일부턴 바빠질 테니.”
그 말을 들으니 레오나는 급 우울해졌다.
데미안이 손을 내밀었다.
“모처럼의 연회니 나와 한 곡 추는 건 어때?”
피식 웃은 레오나는 기꺼이 손을 잡았다.
“좋아요.”
테라스에서 두 사람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춤을 춰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인생 대부분이 전쟁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오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연회를 즐기고 싶었다.
긴 싸움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은 기념으로 나쁘지 않았다.
* * *
사파이어 홀 연회장 지붕 위에서 아스텔과 시엘이 레오나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레오나와 데미안이 춤추고 있는 테라스를 말이다.
“뭐야, 춤도 같이 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본 아스텔이 피식 웃었다.
“질투하나?”
“넌 안 나나?”
“안 나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 두고만 본다고?”
아스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레오나가 웃고 있으니까.”
시엘의 시선이 레오나의 얼굴로 향했다. 아스텔의 말대로 레오나가 웃고 있었다.
“제기랄.”
투덜거린 시엘이 지붕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오늘은 봐준다.”
그런 시엘을 바라보며 아스텔도 그윽한 눈빛으로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레오나가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여 다행이었다.
긴 싸움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늘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아스텔은 그녀가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일을 해결한 건 그녀였지만,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스텔은 만족했다.
‘부디 그대가 행복하기를.’
앞으로 그녀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든 그는 곁에서 지켜줄 생각이었다.
자신은 그녀의 가디언이니까. 레오나를 바라보는 아스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