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마탑의 그림자 (1)
이른 아침.
레오나는 출근하자마자 데미안의 호출을 받았다.
단장실에서 데미안과 독대하게 된 레오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레오나.”
“네, 단장님.”
“마법을 배워볼 생각 없나?”
레오나가 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마법을요?”
“뜬금없다는 거 안다.”
데미안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마탑에서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뭡니까?”
“마탑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를 찾아내는 것이다.”
레오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제국에서도 가장 폐쇄적이고 견고하기로 유명한 마탑에 흑마법사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탑에 흑마법사가 있습니까?”
데미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더러 마법을 배우라고 하셨군요.”
“나는 너를 마탑주에게 소개할 것이다.”
“제가 마탑주님께 마법을 배우는 겁니까?”
“형식상으론 그렇게 되겠지. 너는 그 안에서 흑마법사를 찾아내면 된다. 할 수 있겠나?”
레오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제가 찾아내겠습니다.”
마탑에 흑마법사가 숨어 있다니, 이는 필시 마탑주를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레오나는 데미안과 함께 말을 타고 마탑으로 향했다.
마탑 입구에 도착하니 하늘 높이 솟은 건물의 위용에 다시 한번 놀랐다.
“들어가지.”
“네.”
데미안은 레오나를 데리고 마탑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마탑 안으로 들어가니, 방문객을 맞는 마법사가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데미안 경과 레오나 경 되십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주님께서 두 분이 오시면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두 사람은 마법사를 따라 움직였다. 마법사는 두 사람을 이동 마법진으로 데리고 갔다.
마법사는 능숙한 솜씨로 이동 마법진 옆에 있는 석판과 마정석을 조정했다.
그러다 바닥에 황금빛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건 바로 마탑주의 방으로 바로 이동이 되는 이동 마법진이었다.
“오르시지요.”
마법사에 안내에 두 사람은 이동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그러자 마법사가 이동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순식간에 빛에 휩싸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마탑의 최상층, 마탑주의 방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아델라가 소파에 여유로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어서 와.”
데미안이 먼저 인사를 하였고, 이어서 레오나가 인사를 건넸다.
“네가 그 아이로구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델라가 매우 흥미로운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참 어여쁘기도 하지. 이리 와 앉으렴.”
두 사람은 아델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충 사정은 들었을 것 같구나.”
“예, 마탑주님.”
“그래, 나도 우리 마탑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구나, 잘해주길 바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델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최선이 아니라 반드시 찾아내야 할 거야. 정말로 흑마법사가 있다면 큰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데미안 네가 책임을 져야 할 게다.”
“알겠습니다.”
데미안의 대답에 아델라는 피식 웃었다. 데미안이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 너는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게 될 거다.”
예상은 한 일이었다.
마탑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출퇴근하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지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레오나는 짐작했다.
마탑에 가게 된 순간부터 짐작한 일이었다.
“그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마탑을 구경시켜 줘야겠구나.”
“저도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러렴.”
데미안이 레오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레오나, 믿겠다.”
“염려 마십시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내게 연락하도록.”
“그러겠습니다.”
레오나를 격려한 데미안이 아델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레오나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말거라. 내 잘 건사할 테니.”
데미안은 눈빛으로 믿고 맡기겠다는 말을 하고서는 마탑주의 방을 나갔다.
데미안이 사라지자, 아델라는 레오나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레오나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델라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잠시 빌려주렴.”
레오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델라가 마력을 움직여 레오나의 몸에 흘려보냈다.
이질적인 기운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자, 레오나는 움찔했다.
“걱정할 것 없단다, 잠시 보는 것뿐이니.”
“네.”
아델라의 마력이 한 차례 몸 안을 훑고 지나갔다. 마력을 거둔 아델라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일이구나.”
“네?”
“마력에 재능이 없는 아이인 줄 알았는데.”
아델라는 레오나를 만나기 전, 미리 사전 조사를 했었다. 마탑에 들이는 일인데 조사는 필요한 수순이었다.
“네 몸에 이상한 것이 있구나.”
“예? 그게 무슨.”
“마력을 전혀 다루지 못한다지?”
“전혀는 아니고, 조금은…….”
“움직여 보겠느냐?”
레오나는 있는 힘을 다해 마력을 움직였다. 그러나 쥐꼬리만 한 마력은 움직여 봤자, 티도 안 났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본 아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상해.”
“그게 무슨…….”
“네 심장에 이상한 것이 붙어 있다, 이 말이다.”
레오나의 눈이 커졌다.
“제 심장에요?”
“그래.”
전혀 몰랐다.
자신 심장인데 이상한 게 붙어 있다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아델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를 만도 하지. 마력을 쓰지 못하니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 말씀은…….”
“마력으로만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지.”
“그게 무엇입니까?”
“흑사의 열매다. 설명하자면, 마력을 쓰지 못하게 하는 효능이 있는 열매지.”
아델라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력을 저장하려고 하면, 흩어지고 말지.”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가 가진 기억에서 그러했기 때문이다.
마나 심법을 이용해 마력을 심장에 저장하려고만 하면 이상하게 마력이 흩어졌다.
그래서 레오나는 마력의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다 흑사의 열매 탓이다. 넌 그걸 먹은 것이다.”
“제가 그걸 먹었다고요?”
“그래, 누군가 먹였을 수도 있고.”
레오나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떼어낼 방법이 있습니까?”
“없는 것은 아니다만, 불가능에 가깝다.”
“알려주십시오.”
“흑사의 열매와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백화를 먹으면 된다.”
“백화요?”
“눈부시게 하얀 꽃으로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로 백 년에 한 번 피는 꽃이지.”
레오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불가능한 일이네요.”
아델라가 의아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실망하지 않는 게냐.”
“실망은요, 제겐 다른 능력이 있는 걸요. 그 능력으로도 충분히 잘 해내고 있고요.”
“그렇구나.”
레오나를 바라보며 아델라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일어나자꾸나. 마탑을 소개해 주마.”
“예, 마탑주님.”
“호칭이 참 거슬리는구나.”
“그럼, 뭐라 불러드릴까요?”
“이제부터 넌 내 제자이니, 스승님으로 불러라. 그게 훨씬 듣기 좋구나.”
“알겠습니다. 스.승.님.”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해서 불러주자, 아델라가 피식 웃었다.
“당돌하긴. 가자.”
레오나는 아델라의 뒤를 따라 마탑주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여러 곳을 소개받았다.
마탑의 서고, 연구실, 장로들의 방, 수련실, 아티팩트 제작실 등 여러 방을 견학했다.
각 방을 담당하는 마법사들은 레오나가 아델라의 새로운 제자가 되었다는 말에 놀람과 시샘을 느꼈다.
하지만 레오나는 개의치 않았다. 익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마탑주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레오나에게 당부했다.
“너는 마탑의 핵심 인물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중에 흑마법사가 있는지 알아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잘 아는구나.”
“제일 먼저 접촉하게 될 자들은 마탑의 장로들이다.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네가 머물 방을 안내해 주마. 너는 내 제자이긴 하나, 특별 대우는 해줄 수가 없다.”
레오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다른 수습 마법사들과 같은 층에 있는 숙소에 머물게 될 것이다.”
“질문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외출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내게 말하면 된다. 단, 마탑 내의 일은 절대 바깥에 발설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마탑은 폐쇄적인 곳이다 보니, 규율도 엄격했다. 레오나는 당분간 그 규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외출이 필요한 이유는 미첼 영애에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나서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이 걸려서 외출에 대해서 물어본 것이다.
레오나는 마탑 수습 마법사들과 같은 층에 있는 숙소로 배정을 받았다. 숙소는 2인 1실이었다.
마탑주의 지시로 레오나는 숙소를 안내받았다.
“여기가 당신이 머물 곳입니다.”
숙소를 안내해 준 사람은 수습 마법사들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중급 마법사 론펠이라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서른 중반이고, 그도 마탑주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이라, 마탑주가 믿어도 된다고 말하였다.
“이 카드를 받으십시오.”
레오나는 론펠이 건네주는 손바닥만 한 카드를 받았다. 론펠이 카드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여기 보이는 문양에 카드를 대십시오.”
레오나는 시키는 대로 문손잡이 옆에 새겨진 사각 모양의 문양에 카드를 가져다 대었다.
잠시 후, 끼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레오나는 신기한 얼굴로 카드와 론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카드키라는 겁니다.”
“신기하네요.”
론펠이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처음에 레오나처럼 신기한 얼굴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없으면, 방문을 열 수 없으니 잃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레오나는 궁금하다는 듯이 론펠을 보았다.
“마탑 내에는 방마다 고유 카드키가 존재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장소마다 다른 카드키가 존재합니다.”
“그렇군요.”
“더 질문이 없으시면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론펠이 돌아서자, 레오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10평 남짓한 방 안엔 두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중 오른쪽 침대엔 누군가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외형으로 보아, 여인이었다.
레오나는 왼쪽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오른쪽 벽에는 자그마한 창문이 나 있었고, 녹색의 커튼이 달려 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는지 바람에 커튼이 나부꼈다. 그 사이로 햇살이 여인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레오나는 방 안을 살펴보았다.
두 개의 침대 사이로 자그마한 테이블이 경계선처럼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문 옆에는 마법 서적이 꽂힌 책장이 있었다.
궁금함에 책장 가까이 다가갔다.
마법에 대한 다양한 서적이 책장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레오나는 그중에서 마법의 기초라는 책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누워 있던 여인이 번개같이 나타나 레오나의 손을 막았다.
“누구 마음대로 내 책에 손을 대는 거야?”
레오나보다 한 뼘 작은 그녀는 두 눈을 치켜뜨고 레오나를 노려보았다.
“아, 미안합니다.”
뒤로 한 발 물러난 레오나가 사과를 하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레오나를 보았다.
“미안하면 됐어.”
“그런데 초면에 반말은 아니지 않나요?”
“꼬우면, 너도 말 놓든가.”
“그렇게 하지.”
단번에 말을 놓자, 여인이 피식 웃었다.
그러곤 비꼬듯이 말했다.
“너 그 나이에 부끄러운 줄 알아. 늦은 나이에 마법을 배우다니. 아마 네가 최초일걸?”
“배움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
“뭐라고?”
레오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무튼, 잘 지내보자. 룸메이트.”
그렇게 말한 레오나는 왼쪽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그런 레오나를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오나를 외면하고 방을 나온 그녀는 곧장 마법 연습실로 향했다.
마법 연습실은 수습 마법사들이 언제든지 수련할 수 있도록 개방된 공간이었다.
마법 연습실에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수습 마법사 둘이 그녀를 반겼다.
리즈와 라이카였다.
리즈는 곱슬머리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고, 라이카는 훤칠한 키의 남자였다.
두 사람은 메리벨의 동기로 같은 해에 수습 마법사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들었어, 새로운 룸메이트.”
라이카의 말에 메리벨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리즈가 메리벨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왜, 별로야?”
메리벨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낙하산이 뭐가 좋겠어. 별로지.”
그 말에 라이카가 혀를 찼다.
“탑주님의 제자라며, 잘 지내봐.”
“내가 왜?”
“잘 지내서 나쁠 건 없잖아. 잘만하면 탑주님한테 잘 보일 수 있고.”
메리벨이 라이카를 쏘아보았다.
“난 실력으로 인정받을 거야.”
그러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메리벨은 시골 마을 출신으로 지나가던 상급 마법사가 추천으로 마탑에 오게 되었다.
원래부터 마법사가 되는 게 꿈이었고, 상급 마법사의 추천서는 그녀에게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추천서로 마탑에 수습 마법사가 된 메리벨은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수업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수습 마법사가 된 지 2년 만에 3서클이 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에 들어온 리즈와 라이카가 그녀를 제치고 마탑 장로의 제자가 되었다.
마탑 장로의 제자가 된 두 사람은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순식간에 메리벨을 뛰어넘는 마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격차는 1년이 지난 지금 확연히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은 4서클이 되었는데 메리벨은 여전히 3서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리벨은 아직도 스승이 없었다. 마탑에 있는 수습 마법사의 수는 50명이다.
수습 마법사는 들어온 연차에 따라 1년 차부터 5년 차까지 계급이 나뉜다.
메리벨은 올해로 3년 차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스승이 없는 마법사였다.
“너도 얼른 스승을 만나야 할 텐데.”
리즈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하자, 메리벨은 이를 악물었다.
“리즈, 연구실로 복귀할 시간이야.”
“아, 벌써 그렇게 됐어?”
장로를 스승으로 얻은 수습 마법사들은 장로의 연구실을 출입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각 스승의 연구를 돕고 있었다.
“메리벨, 우린 그만 가볼게. 열심히 해.”
라이카가 격려를 보내자, 리즈도 메리벨을 위로했다.
“너도 잘될 거야, 나중에 또 보자.”
연습실에 혼자 남겨진 메리벨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나 호흡법을 시작했다.
그녀가 익힌 것은 기본적으로 널리 알려진 호흡법이었다. 수습으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이 기본 호흡법이다.
그리고 스승이 생기면 상위의 호흡법을 배우는데 메리벨은 스승이 없이 상위 호흡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게 두 사람과의 격차가 생긴 이유였다. 메리벨은 자신에게 왜 스승이 없는지 이유를 잘 알았다.
귀족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반면 리즈와 라이카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가끔가다 선배들과 후배들이 그녀를 보고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3년 차인데 아직도 스승이 없는 건 신분이 미천해서라고 말이다.
마탑이라고 바깥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걸 메리벨은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귀족들이 너무 싫었다.
리즈와 라이카는 함께 고생한 동기들이어서 친구로 지내고 있지만, 그들과 있으면서 느끼는 열등감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후우.”
메리벨은 상념을 지우고 호흡법에 집중했다.
심장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가 다시 심장으로 모였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세 개의 고리가 강렬하게 회전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메리벨은 집중했다. 세 개의 고리 옆에 또 다른 고리를 만들기 위해 마력을 모으고 모았다.
희미하게 4번째 고리의 형태가 보였다. 희열에 찬 메리벨은 정신을 가다듬고 집중했다.
‘할 수 있어.’
희미한 고리가 생성되려는 찰나 팅하는 소리와 함께 생겨나려던 고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메리벨은 허망한 마음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하아, 왜 안 되는 거야.”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아낸 메리벨은 호흡법을 관두고 마법훈련을 시작했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종류별로 펼치며 연습하고 연습했다.
단련하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고, 기회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메리벨은 연습을 관둘 수가 없었다.
* * *
이른 아침, 레오나는 지친 얼굴로 들어오는 메리벨을 힐끔거리다가 그녀가 침대에 눕는 것을 보았다.
메리벨은 레오나와 설전 이후,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얼굴을 본 것이다.
그녀의 상태를 보아, 밤새 훈련이라도 한 사람 같았다. 레오나도 그런 때가 있어서 잘 알았다.
메리벨은 레오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레오나도 굳이 아는 척을 하진 않았다.
잠시 후, 메리벨은 잠이 들었고, 레오나는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 론펠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부터 론펠이 레오나에게 기본적인 마나 상식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건 원래 론펠이 처음 들어오는 수습 마법사에게 교육하는 것이어서, 특별대우는 아니었다.
레오나는 론펠의 연구실에서 개인 교습을 받았다.
마나의 대한 기초 상식이었다. 기초 상식은 칼리반 백작가에 있었을 때 이미 배운 것이어서, 어렵진 않았다.
실전이 딸려서 문제였지.
두 시간에 걸친 이론 수업이 끝나고 레오나는 개인 연습실을 안내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수습 마법사들을 소개받았다. 그들은 레오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레오나의 나이에 마법에 입문하는 사람은 처음이었고, 게다가 레오나가 마탑주의 제자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어 주었다.
레오나는 신성력으로 살며시 수습 마법사를 탐지해 보았다. 딱히 걸리는 사람은 없었다.
론펠은 레오나를 그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친목을 다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론펠이 자리를 비우자, 수습 마법사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원래 기사라면서요?”
한 수습 마법사가 용기 있게 레오나에게 말을 걸었다.
“제 이름은 탄트예요.”
“레오나입니다.”
“정말 기사예요?”
“그렇습니다.”
탄트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와, 그런데 마법까지 배우러 온 거예요?”
“그런 셈이죠.”
레오나의 대답에 탄트가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였다.
“고생 엄청 할 텐데. 힘내요. 게다가 룸메이트가 메리벨이라면서요.”
“제 룸메이트가 메리벨이란 사람이었군요.”
그 말에 탄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몰랐어요?”
“서로 통성명도 안 한 사이라서요.”
탄트가 입을 벌리다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벨의 성격이라면 그럴 만하죠.”
“잘 아는 사이입니까?”
탄트가 작게 속삭였다.
“유명해요.”
레오나가 관심을 보이자, 탄트는 메리벨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메리벨은 나와 같은 3년 차인데 아직도 스승이 없어요. 보통 1년 차나 2년 차가 되면 스승이 정해지는데 아무도 메리벨을 제자로 받지 않았죠.”
“그렇군요.”
메리벨에 유독 날카로운 이유. 탄트의 말을 들어보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짙은 열등감이었다.
“스승이 없으면 곤란한 겁니까?”
탄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당연히 곤란하죠. 스승이 없으면 상위 호흡법을 배울 수가 없는데…… 그 차이는 극명하다고요.”
마나 호흡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호흡법과 좀 더 고차원적인 호흡법이 있는데, 그건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상위 호흡법은 마탑 내에서도 장로들만이 알고 있는 호흡법이었다.
상위 호흡법을 배우느냐, 배우지 못하느냐에 따라 실력이 극명하게 갈린다.
탄트의 설명이 이어졌다.
“메리벨을 제외한 3년 차 수습들은 모두 스승을 만나 상위 호흡법을 배웠어요, 그리고 그 차이는 명확하게 나타났죠. 우리는 모두 4서클이 되었지만, 메리벨은 아직 3서클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스승을 만나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다들 당신을 왜 부러워하는지 이해되죠?”
레오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마탑주는 마탑의 최고 권력자이고, 레오나는 그런 사람의 제자인 것이다.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습 마법사 중에서도 마탑주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 * *
아델라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위에 몸을 누인 채 유유자적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둥 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그녀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쾅쾅!
울려대는 폭음에 아델라는 짜증이 났다. 폭음을 물리치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 사이로 눈부신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아델라는 황금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지 못했다.
황금빛은 노래하듯 아델라의 눈과 귀에 스며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처럼.
아델라는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탑주의 방 침대 위였다.
아델라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았다.
“이 나이에 꿈을 꾸다 식은땀을 흘리다니…….”
하지만 그 꿈.
범상치 않았다.
꿈은 아델라에게 뭔가를 보여주었고, 알려주었다.
“내게 내려온 마지막 숙제인 것인가.”
마치 자신에게 생애 마지막으로 해야 할 무언가를 알려주는 듯한 꿈이었다.
아델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나도 죽을 때가 되긴 되었구먼.”
하지만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꿈이었다.
“후우.”
심호흡한 아델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론펠을 불렀다.
* * *
탑주의 방.
론펠은 아델라의 부름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탑주님.”
“어서 오게.”
아델라는 론펠에게 자리를 권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아델라는 용건을 꺼냈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레오나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어서네.”
“말씀하십시오.”
“레오나의 이론 수준은 어떤가?”
론펠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론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래?”
“네, 이론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론에는 문제가 없다라…….”
론펠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실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델라가 질문을 던졌다.
“지금 수습 마법사들의 수준은 어떻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론펠은 미리 준비해 온 자료를 아델라에게 건넸다.
아델라는 자료를 훑어보았다.
“가장 실력이 좋은 자가 5서클에 도달했고, 나머지는 4서클과 3서클 정도의 수준이라…….”
이 정도 수준이면 레오나가 따라잡기엔 벅찬 면이 있었다.
“함께 실전 수업을 듣는 건 별로겠어. 실력 차이가 확실하게 나니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레오나가 자신의 제자로 들어온 이상 가르칠 생각이었다.
형식상으로 마탑의 흑마법사를 색출하기 위해 들어오긴 했지만, 마탑의 규율상 레오나가 마음대로 마탑을 휘젓고 다닐 수는 없었다.
레오나가 자신의 제자로서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흐음, 어쩔 수 없나…….”
레오나가 상대해야 할 장로들은 만만치 않은 자들이다.
‘다들 괴짜이기도 하고…….’
장로들은 성격이 각기 다르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고집쟁이들이다.
게다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경쟁을 벌이는 사이다. 결코 사이가 좋을 수 없단 소리다.
그래서 탑주인 아델라의 존재가 마탑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다.
아델라가 있기에 장로들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아델라는 마탑의 구심점이나 다름없었다.
아델라의 지고함을 인정하기에 장로들도 따르는 것이다.
아델라가 씩 웃으며 론펠을 보았다. 불길한 미소에 론펠이 어깨를 움츠렸다.
“론펠.”
“예, 탑주님.”
“레오나에게 네 마나 심법을 전수할 생각이야.”
론펠의 눈이 커졌다.
“예?”
론펠은 두 눈을 비비며 다시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진심이야.”
론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델라는 미소를 지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계시를 받았다고 할까?”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농담으로 들리나?”
론펠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델라가 말을 이었다.
“또한 장로들에게 일주일씩 레오나의 실전 수업을 맡길 생각이야.”
크게 놀랐는지 론펠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탑주님……그건 너무…….”
“레오나에게 편의를 봐주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수습 마법사 중에는 장로들의 제자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자도 많습니다. 그들의 불만은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아델라가 론펠을 향해 검지를 까닥거렸다. 그러자 론펠이 가까이 다가왔다.
“론펠, 지금 마탑엔 암운이 드리워져 있어.”
“그건…….”
아델라는 론펠을 믿기에 중대한 사안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사실을 들은 론펠은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믿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탑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아델라가 말했다.
“레오나를 데려온 이유를 자네는 알지 않나. 하루라도 빨리 색출을 해내야 하지.”
“설마, 장로 중에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래서 엮어주려는 게야. 지금 레오나의 수준으로 장로들을 만날 방법은 없으니까.”
“장로들이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알아. 그래서 조건을 준비했어.”
“조건이요?”
“단 하루만 레오나를 가르치고 그만둬도 괜찮다는 제안이지.”
기간은 일주일이지만, 하루 동안 가르쳐 보고 그만둬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정도는 받아들일 것 같은데, 어때?”
“그거라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알겠습니다. 탑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마워, 론펠.”
론펠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수년간 아델라를 곁에서 봐왔지만, 그녀는 종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그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아델라는 미래의 무언가를 내가 본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론펠은 그렇게 믿었다.
* * *
오전에 있는 론펠의 이론 수업을 마친 레오나는 지난번에 만난 수습 마법사 탄트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마탑에서도 수습 마법사들을 위한 전용 식당이 있었다. 그런 걸 보면 기사단과 별다른 게 없는 구조였다.
“레오나, 이론 수업 재밌었냐?”
“그냥 그래. 다 아는 내용이라서.”
“그래?”
레오나는 어릴 때 마나 이론에 대해 배운 것을 탄트에게 설명해 주었다.
“확실히 미리 배운 게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는 탄트, 넌 실전 수업 어때?”
“나야 늘 그렇지 뭐. 별것 없어.”
탄트와 이야기하는 사이, 식당 입구에서 메리벨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메리벨은 구석에 앉아, 혼자 식사를 하였다.
레오나의 시선이 메리벨을 향하자, 탄트의 시선도 그리로 향했다.
그러고는 혀를 찼다.
“재는 항상 혼자 먹어.”
“그래?”
“응.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싫어하고, 어울리려 하지 않거든. 완전 개인주의.”
레오나는 왠지 메리벨이 외로워 보였다.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그녀와는 껄끄러운 사이였다.
그렇다고 오지랖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친근한 척 다가가는 것은 민폐기 때문이다.
레오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메리벨이 레오나를 향해 두 눈을 치켜떴다.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자 메리벨도 코웃음을 치며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론펠이 레오나를 불렀다.
“탑주님께서 부르신다.”
레오나는 론펠과 함께 아델라가 있는 탑주의 방으로 향했다.
이동 마법진을 타고 단숨에 탑주의 방에 도착한 두 사람을 아델라가 맞아 주었다.
“이리 와 앉거라.”
언제 준비했는지 아델라는 차와 함께 다과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저는 이만 수업이 있어 가보겠습니다.”
“수고했네, 론펠.”
론펠이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레오나는 아델라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아델라는 손수 레오나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내가 즐겨 마시는 녹차란다.”
레오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제 취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모습에 아델라가 호쾌하게 웃었다.
“늙은이 취향이니 젊은이에겐 맞지 않을 수도 있지.”
차를 후루룩 마신 아델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여기로 부른 이유는 네 마력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레오나는 굳은 얼굴로 아델라를 보았다.
“지난번에 제가 흑사의 열매를 먹어서 마력을 다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마력을 늘린다는 거죠?”
아델라가 나직이 혀를 찼다.
“저런, 많이 속이 상했던 모양이구나.”
“그렇진 않습니다. 불가능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델라는 여유로운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백화를 먹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해보겠느냐?”
레오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방법이 있다니, 지난번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델라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레오나는 아델라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사실은 내가 꿈을 꾸었어.”
“…….”
“꿈에 나온 황금빛에서 네가 보였다.”
“정말입니까?”
“안 믿겨지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아델라가 웃었다.
“나도 그래. 내 꿈에 네가 나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
아델라가 진지한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내 마나 심법을 익혀라.”
레오나의 눈이 커졌다.
아델라가 말을 이었다.
“네 마력을 되찾을 또 다른 방법은 내 마나 심법으로 흑사의 열매를 능가하는 것이다.”
레오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진심이십니까?”
마법사는 아무에게 자신의 마나 심법을 전수하지 않는다. 그건 목숨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선별한 제자들에게만 전수하는 것이 마법사들의 심리다.
그런데 무려 마탑주가 본인의 마나 심법을 주겠다 하고 있었다.
“왜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마법사가 될 사람이 아닙니다.”
레오나는 기사였다.
마법사로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마탑에 얽매어 폐쇄적인 삶을 사는 것은 레오나에게 맞지 않는 일이었다.
“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생각보다 마탑에 드리운 암운이 심상치 않아서 말이야. 적과 아군이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섣불리 나설 수도 없지. 게다가 장로들은 만나기가 쉽지가 않아.”
“장로들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나는 마탑의 모든 마법사를 의심해야 해. 장로들도 예외는 아니지. 그러기 위해선 네 힘이 필요하지.”
“굳이 제가 탑주님의 마나 심법을 배울 이유가 있습니까?”
“네가 장로들의 손에 죽으면 곤란하거든. 장로들은 꽤 위험한 자들이라서 말이야.”
“제가 탑주님의 마나 심법을 배운다고 달라지겠습니까?”
“달라지지.”
뭐가 어떻게 달라진다는 건지 레오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아델라는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내 마나 심법은 특별하거든. 모든 독의 내성을 가질 수 있고, 정신 공격도 막아낼 수 있지.”
레오나의 입이 벌어졌다.
아델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흑사의 열매가 가진 기운을 없앨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델라는 레오나를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세상에 드리운 암운에 레오나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를 지켜주는 것. 그게 꿈속에서 아델라에게 전해졌던 마지막 숙제였다.
* * *
원탁에 마탑의 장로 7명이 모였다. 원탁은 장로들이 회의할 때 모이는 장소였다. 게다가 일곱 명의 장로가 모두 참석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장로들은 성향 탓에 입고 있는 로브의 색깔이 각기 달랐다. 장로들은 각각 붉은색, 황토색, 초록색, 파란색, 검은색, 회색, 갈색을 입고 있었다.
붉은 로브를 입은 긴 수염의 노인이 말했다.
“탑주가 새로 들인 제자에게 제대로 마법을 전수해 줄 모양이야.”
“별일이군. 지금까지 탑주가 애착을 가지고 제대로 가르친 제자는 없었는데, 이번엔 다른 모양이군.”
이번엔 녹색 로브를 입은 키 작은 노인이었다.
“다들 탑주의 행동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군.”
푸른색 로브를 입은 점잖아 보이는 외모의 노인이 말하자,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나왔다.
“재미있군. 흥미가 돋아.”
검은 로브를 입은 음침해 보이는 노인이 말하자, 다른 장로들이 혀를 찼다.
“퍽도 재미있겠다. 이러다간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키우는 제자들의 앞길에 걸림돌이 생기는 일이 아닌가.”
장로들은 차기 탑주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현 탑주는 나이가 많고, 언젠간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누가 탑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 장로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장로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경쟁하고 있었다.
제자를 기르는 것도 세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탑주에게 제자가 생겼다.
자칫하다간, 차기 탑주의 자리를 그 제자가 차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탑주가 직접 가르치고 있다니, 우리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황토색 로브를 입은 덩치 큰 노인이 말하자,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는 말이네.”
“하지만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붉은색 로브의 노인이 투덜거리자, 회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지금은 지켜봄세. 그 아이가 자질이 어떠한지 아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회색 로브 노인의 말에 갈색 로브 노인이 동조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네. 자네들은 어떤가?”
“나도 같은 생각일세.”
푸른색 로브의 노인이 동의하자, 차례대로 붉은색, 황토색, 초록색, 검은색 로브의 노인이 동의했다.
“그럼, 일단 지켜보는 것으로 알고, 먼저 일어나 보겠네.”
회색 로브의 노인이 먼저 일어나자, 갈색 로브의 노인도 따라서 일어났다.
그렇게 장로들의 원탁회의는 끝을 맺었다.
* * *
레오나는 본격적으로 아델라에게 마나 심법을 전수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알려져 봤자, 분란만 커질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시기하는 자가 나올 수도 있고, 그들이 무슨 짓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오전엔 론펠에게 이론 수업을 듣고, 오후엔 탑주와 따로 만나 마나 심법 수련을 하게 되었다.
수련은 탑주의 전용 수련관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은 오로지 탑주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라, 철저한 보안이 유지되는 곳이었다.
마탑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라고 아델라가 자랑하듯 말했다.
“여기 앉아라.”
아델라가 단상 위를 가리키자, 레오나는 그 위에 앉았다.
“일단 이걸 먹거라.”
“이게 뭡니까?”
아델라가 건넨 것은 손톱만 한 황금빛 구슬이었다.
“내 마나가 집약된 단약이다. 내 마나 심법을 익히려면 필요한 것이니 먹거라.”
단약을 받아 든 레오나는 그것을 꿀꺽 삼켰다. 단약은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눈처럼 녹아 없어졌다.
“지금부터 나는 네 몸에 마나 로드를 개척할 것이다.”
마나 로드는 마력의 순환을 돕는 길이다.
그 길이 잘 닦여 있어야 마력이 돌고 돌아 순환할 수 있다.
해서 마나 로드를 개척하는 일은 마법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숙제였다.
“조금 괴로울 거야.”
레오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마.”
아델라는 손바닥을 레오나의 이마에 대었다.
“윽.”
머리를 관통하듯 마력이 몸 안으로 쭉 뻗어 들어왔다. 괴로웠지만, 레오나는 꾹 참았다.
마력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 * *
숙소로 돌아온 레오나는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마나 로드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온몸이 찢겨 나갈 것 같은 고통이라니.
어느 정도 고통에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후우.”
길게 심호흡한 레오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땀 냄새가 코를 자극해 참을 수가 없었다.
샤워실에서 씻고 나오자, 집요한 메리벨의 시선이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던 메리벨은 레오나를 탐색하듯 훑었다.
“왜 그렇게 빤히 보지?”
흠칫한 메리벨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비꼬듯이 말했다.
“너, 수업 따로 듣는다며.”
“그런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싶어서. 탑주의 제자라고 혼자만 특별 수업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레오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너도 탑주님의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지 그래.”
“뭐?”
“너 스승이 없다며.”
그 말에 메리벨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오나는 말을 계속 이었다.
“너 그러다가 평생 독학만 하다 끝날걸.”
“지금 말 다했어?”
“먼저 시비를 건 건 너잖아.”
“너…….”
이를 악문 메리벨이 레오나를 노려보았다.
“스승이 선택을 안 하면 네가 스승을 선택해서 배울 생각을 해야지. 꼴사납게 혼자 자존심 세우는 꼴이라니.”
“말 함부로 하지 마.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듣기 싫으면, 너부터 조심해. 비꼬는 것도 적당히 좀 하고.”
“하!”
“싫은 말 듣기 싫으면, 너도 남이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안 그래?”
아무 말도 못 한 메리벨은 그대로 돌아누웠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레오나는 눈을 감았다.
* * *
어둠이 가득한 공간에 두 명의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습 마법사 리즈와 라이카였다.
두 사람 앞에 노인이 히죽 웃으며 서 있었다. 그의 양손에는 검은 액체가 든 컵이 들려 있었다.
“마시거라.”
리즈와 라이카는 각각 컵을 받아 들었다. 검은 액체는 기괴했지만, 마시고 나면, 마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효과를 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누구보다 빠르게 4서클에 도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검은 액체를 들이켰다. 맛은 더럽게 없었지만, 몸 안에서 나타난 효과는 대단했다.
“스승님, 마력이 또 늘어났습니다.”
“저도요.”
“클클클, 그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만 주는 아주 특별한 약이니까.”
두 사람은 희열에 찬 얼굴로 노인을 존경스럽게 바라보았다.
“자, 마나 심법을 운용해 보거라.”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하며, 마나 심법을 운용했다. 몸 안의 마나가 활기차게 휘돌며, 전신을 누볐다.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빛이 일순간 붉은빛을 띠었다는 것은 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제대로 약발이 들고 있군.’
조만간 두 사람은 인간의 탈을 벗은 마물이 될 것이다.
그것도 강력한 마법사의 힘을 가진 마물로 말이다. 그건 노인에게 아주 좋은 부하나 다름없었다.
성공만 한다면 더 많은 제자를 들여 만들어낼 수가 있다. 그게 바로 노인이 두 사람을 제자로 들인 이유였다.
* * *
다음 날, 메리벨은 리즈와 라이카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모두 두 사람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리즈, 라이카. 마력이 또 늘었다며. 정말 부럽다.”
“다 스승님 덕분인걸.”
“우리 스승님은 뭐하나 몰라.”
“그런 말 하지 마. 너도 충분히 강해.”
순간, 리즈와 라이카는 메리벨과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아는 척을 한 건 리즈였다.
“메리벨!”
“어?”
“잘 지내?”
“자, 잘 지내.”
“다행이다.”
리즈와 메리벨이 대화를 주고받자, 주변에 있던 수습 마법사들이 메리벨을 흘겨보았다.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메리벨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또 보자, 메리벨!”
리즈가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했지만, 메리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 메리벨을 바라보며 수습 마법사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정말.”
“리즈, 뭐 하러 메리벨한테 친절하게 굴어.”
“하지만 메리벨은 내 친구야.”
“리즈, 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안 그래. 라이카?”
“어, 그게…….”
바로 그때였다.
또 다른 수군거림이 리즈와 라이카에게 들려왔다.
“어, 저기 걔잖아.”
“누구?”
리즈와 라이카의 시선이 다른 수습 마법사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하늘빛 머리카락을 한 여인이 하얀 로브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저 로브는…….”
“맞아. 쟤가 탑주님의 제자야.”
하얀색 로브는 탑주만이 입는 색으로 다른 마법사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예외는 있었다.
바로 탑주의 제자였다.
“저 사람이 탑주님의 제자라고?”
“응,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
리즈와 라이카는 스승과 함께 연구실에서 지내느라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레오나의 시선이 리즈와 라이카를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동안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리즈였다.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건 라이카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왠지 모르게 레오나가 껄끄럽게 느껴졌다.
“나 이만 가볼게. 수련해야 해서.”
“나도.”
리즈가 먼저 자리를 뜨려고 하자, 라이카도 리즈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 레오나는 두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지, 왠지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레오나는 두 사람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탄트에게 두 사람에 대해 물어보았다.
“리즈랑 라이카?”
“이름이 리즈와 라이카야?”
“맞아. 우리 동기 중에선 가장 강한 마력을 지닌 친구들이지.”
“그래?”
탄트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근데 두 사람은 왜?”
“이상하게 묘한 느낌이 들어서.”
“이상한 느낌.”
“그런 게 있어. 더 아는 건 없어?”
“5장로의 제자들이라는 것 정도?”
“5장로의 제자라고?”
“응,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두 사람이 제일 먼저 5장로의 제자가 되었지.”
“그렇구나.”
“아, 나도 5장로의 제자로 들어갔어야 하는 건데.”
레오나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5장로가 그렇게 강해.”
“강한 건 둘째 치고, 5장로의 제자가 되면 마력이 빠르게 는대. 선배 중에도 그런 사람이 다수 있고, 리즈와 라이카만 봐도 알 수 있지.”
뭔가 수상한 느낌이 났다.
마력이 빨리 는다니.
‘5장로에게 뭔가가 있는 건가?’
수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심증뿐, 확실하지는 않은 정보였다.
“그나저나, 너는 좀 어떠냐?”
“뭘?”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아, 그랬나?”
“식당에도 잘 안 왔잖아.”
오전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탑주에게 불려가 함께 점심을 먹고 바로 수련에 들어갔기 때문에 탄트와 다른 수습 마법사들과 마주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이론 수업이 일찍 끝나서 모처럼 시간이 비어 탄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넌, 스승님께 열심히 배우고 있어?”
“야, 말도 마. 매일같이 구른다니까? 우리 스승님은 너무 과격해.”
“네 스승님이 1장로님이라고 했지?”
“응, 아주 괴팍한 사람이지.”
생각만 해도 진저리쳐진다는 얼굴로 탄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 * *
모처럼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레오나는 잠시 마탑 밖으로 나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데미안과 통신을 했다.
[잘 지내고 있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확은 좀 있었나?]
레오나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일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증뿐이지만요.”
[그게 누구지?]
“5장로입니다.”
[이유는?]
레오나는 탄트에게 들은 정보를 데미안에게 알려주었다.
[빠른 시간에 마력이 증가했다라…… 그것도 다수의 제자가…….]
잠시 생각하던 데미안이 말했다.
[확실히 조사해 볼 필요는 있겠군.]
“네.”
[일단, 너는 탑주의 제자로서 충실히 임하도록. 5장로한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는 생각해 보겠다.]
“알겠습니다.”
통신이 끊어졌다.
길게 한숨을 내쉰 레오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얼마 만에 나와서 구경해 보는 하늘인지 모르겠다. 마탑 안에 있으면, 하루를 바쁘게 보내느라 하늘을 볼 여유가 없었다.
지금 보는 하늘은 마탑에 들어간 지 며칠 만에 보는 하늘이었다.
물론, 마탑 안에서도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볼 수 있지만, 이렇게 탁 트인 장소에서 보는 하늘과는 그 느낌이 완전 다르다.
“하늘 한번 더럽게 맑네.”
하늘을 향했던 레오나의 시선이 마탑으로 향했다.
높이 치솟은 마탑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건 오랜 세월을 견뎌온 마탑이 가진 힘일 것이다.
그런 곳을 흑마법사들이 물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났다.
숭고한 이념으로 세워진 마탑이 사악한 악마의 소굴이 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게 놔둘 수는 없지.”
레오나는 다시 씩씩한 걸음으로 마탑으로 향했다.
* * *
어두운 지하 공간에서 2황녀 비비안은 거울을 통해 누군가와 통신을 했다.
“오랜만이군요. 드미트리.”
[클클클, 오랜만입니다. 주인님.]
“마탑에서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죠?”
드미트리가 음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벌써 실험체가 10명이 되었지요.]
그 말을 들은 2황녀 비비안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좋군요.”
[그건 그렇고,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2황녀 비비안이 말해보라는 듯 기다려주었다.
[탑주가 제자를 들였습니다.]
2황녀 비비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자를 들였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가 저희가 아는 사람 같아서 말입니다.]
“그게 누구죠?”
드미트리가 히죽 웃으며 영상구에 저장한 이미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영상구에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하늘빛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영상을 자세히 들여다본 2황녀 비비안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설마, 레오나입니까?”
[동일인물인지 그저 비슷한 인물인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 확인해 봐요. 레오나 그 여자가 정말로 탑주의 제자가 된 것이라면 우리 계획에 변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드미트리가 음흉하게 웃었다.
[클클클, 믿고 맡겨주시지요.]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물론이지요. 그럼.]
통신이 끊어졌다.
2황녀 비비안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쓰고 있던 하얀 가면을 벗어 테이블에 놓았다.
‘영상 속 그 여자…….’
아무리 봐도 레오나가 맞는 것 같았다. 그 머리카락 색은 흔한 것이 아니니까.
‘정말 탑주의 제자가 된 것이라면…….’
그 이유가 궁금하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 여자가 탑주의 제자가 된 것이란 말인가.
‘일단 그 여자가 기사단에 있는지부터 알아봐야겠어.’
기사단에 있다면, 마탑에 있는 인물은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정말로 레오나가 탑주의 제자가 된 것이다.
‘확인해 봐야 해.’
자리에서 일어난 2황녀 비비안은 장미궁으로 돌아와 황녀의 모습으로 백기사단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을 시켜 알아보는 것보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시녀 둘을 데리고 백기사단을 방문한 2황녀 비비안은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연무장 어디에도 레오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마침 2황녀 비비안은 부단장 란젤로와 눈이 마주쳤다.
란젤로는 연무장에서 내려와 2황녀 비비안에게 예를 올렸다.
“2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예, 전하.”
2황녀 비비안은 훈련하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백기사단이 제국 최강의 기사단인지 알겠네요.”
“과찬이십니다. 하온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다른 건 아니고 백기사단에 레오나 경을 좀 만나려고 왔는데 연무장에는 없네요.”
2황녀 비비안의 입에서 레오나의 이름이 나오자 란젤로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빛냈다.
“레오나를 아십니까?”
“이번에 청기사단에 입단한 리리엘 경과 친분이 있습니다. 레오나 경은 리리엘 경의 언니라 들어서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그러시군요. 그런데 레오나는 지금 임무 수행 중이라 이곳엔 없습니다.”
2황녀 비비안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예 기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벌써 임무 수행이라니, 정말 대단한 모양이네요.”
“레오나가 특별하긴 합니다.”
“그 임무, 언제쯤 끝날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란젤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극비사항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2황녀 전하.”
2황녀 비비안은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임무가 끝나면 찾아뵈라고 전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럼, 바쁘실 테니 전 이만 가보는 게 좋겠네요.”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빙그레 웃은 2황녀 비비안은 란젤로의 배웅을 받으며 장미궁으로 향했다.
궁으로 돌아온 2황녀 비비안은 시녀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정원에서 산책을 했다.
“황궁에 없단 말이지.”
임무 수행 중이라 했으니, 바깥으로 출타 중이란 소리다.
“마탑에 있는 게 맞는 것 같군.”
영상 속의 그 머리카락 색과 얼굴 레오나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세한 건 드미트리가 확인하겠다고 하였으니, 기다려 봐야겠어.”
일단 레오나가 마탑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계획을 앞당기든지 변수를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파편을 모두 모아야 해.”
남은 2개의 파편이 손에 들어온다면, 아델라가 가진 파편까지 손에 넣고, 미첼 영애를 그릇으로 삼아 마왕 벨지안을 부활시킨다.
그렇게 되면 막강한 힘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 * *
마탑 5층에 위치한 연구실에 녹색 로브를 입은 키 작은 노인이 음흉하게 웃으며 비커에 들어 있는 검은색 액체를 바라보았다.
“클클클, 성공했다.”
비커를 든 그는 뒤에 시립해 있는 두 제자를 바라보았다. 바로 리즈와 라이카였다.
그는 비커에 든 액체를 두 개의 컵에 나눠 담은 후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자, 받거라. 마지막 잔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하며 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들이켰다.
두 사람의 눈빛이 일순간 붉게 변했다가 사라졌다.
“스승님, 몸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라이카가 희열에 찬 눈빛으로 말하자, 리즈도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요.”
그런 두 사람을 5장로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럴 것이다.”
5장로는 음흉한 속내를 숨긴 채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첫 번째 명령이다. 탑주의 제자를 내게 데려와라.”
“예, 스승님.”
“예, 스승님.”
두 사람이 동시에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사라졌던 두 사람의 초점이 돌아왔다.
5장로는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을 보았다.
“오늘은 그만 가보거라.”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5장로의 연구실을 나왔다. 그런 두 사람의 머릿속에 탑주의 제자를 데려오라는 명령이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그 명령은 곧장 행동으로 이어졌다.
바로 레오나를 찾아간 것이다.
레오나는 탑주와 마나 훈련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레오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라이카가 호의 어린 미소를 보이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내 이름은 라이카야, 이쪽은 내 단짝 리즈.”
“그래, 반가워. 난 레오나야.”
리즈가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있지, 우리 친구 할래?”
“뭐?”
리즈의 말에 라이카가 거들었다.
“우린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레오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친구가 되고 싶다며 친근하게 굴고 있었다.
리즈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가 되어줄 거지?”
“어?”
레오나는 당황스럽게 그지없었다.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친구가 되자며, 다가오다니.
‘뭔가 이상해.’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뭔가 수상한 기운 같은 것도 느껴졌다.
‘감이 안 좋아.’
레오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살피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안 될 거야 없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레오나가 흔쾌히 받아주자, 두 사람은 뛸 듯이 기뻐했다.
“고마워.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맞아,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몰라.”
리즈와 라이카가 번갈아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레오나는 피식 웃었다.
“나 그렇게 어려운 사람 아니야. 긴장하지 마.”
“그러게. 진즉에 말을 걸 걸 그랬어.”
리즈가 후회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라이카가 웃으며 레오나와 리즈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레오나,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이지? 같이 가자.”
“그래, 같이 먹자.”
리즈와 라이카가 그렇게 말하자,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식당으로 걸어 들어오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수습 마법사들이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세 사람을 응시했다.
어느 한 곳에선 세 사람을 보고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뭐야, 리즈와 라이카잖아. 그 옆엔 레오나고.”
“그러게, 같이 들어오네. 그것도 꽤 친한 듯이.”
리즈와 라이카가 레오나를 친근하게 대하자, 레오나를 경계하고 있던 수습 마법사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설마, 저 두 사람 레오나와 일부러 친해지려는 건가?”
“같은 적을 곁에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
“오오!”
여전히 경계하는 수습 마법사들과 레오나와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수습 마법들이 생겨났다.
“난 세상에서 함박 스테이크가 제일 맛있더라.”
리즈가 기분 좋게 웃으며 함박 스테이크를 바라보자, 라이카도 동의했다.
“함박 스테이크는 진리지.”
레오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일단 어울려 줘야 했기 때문이다.
‘5장로에 대해 알아내려면, 이 두 사람과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5장로가 수상한 만큼, 두 사람을 이용해 알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레오나는 리즈와 라이카와 어울려 다녔다. 다른 수습생들은 그런 세 사람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레오나 혼자였다. 오랜만에 숙소에 돌아와 쉬려는데 뒤따라 들어온 메리벨이 문에 몸을 기댄 채 레오나를 흘겨보았다.
“너 무슨 속셈이야?”
레오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무슨 소리야?”
“요즘 부쩍 리즈와 라이카랑 어울려 다니는 것 같아서.”
“그게 왜?”
“두 사람은 내 친구야.”
“그래서?”
“설마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접근한 거라면…….”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메리벨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그렇게 유치한 사람 아니야.”
“뭐?”
“너 하나 골탕 먹이려고 다닐 만큼 유치하지도 한가하지도 않다는 소리야.”
메리벨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레오나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오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며 손을 내저었다.
“난 좀 쉬고 싶으니까,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
그 말을 남기며 레오나가 두 눈을 감아버리자, 할 말을 찾지 못한 메리벨은 주먹만 꽉 움켜쥔 채 몸을 돌렸다.
메리벨이 걸음을 옮긴 곳은 리즈와 라이카가 수련하는 장소였다.
두 사람은 5장로의 수업이 끝나면 늘 같은 시간에 수련을 하곤 하였다.
종종 두 사람과 어울렸기에 메리벨은 잘 알고 있었다.
“리즈, 라이카.”
메리벨의 부름에 서로 합을 주고받으며 마법 수련을 하고 있던 리즈와 라이카가 하던 것을 멈추고 다가오는 메리벨을 보았다.
리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메리벨.”
라이카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와.”
“할 말이 있어.”
“뭔데?”
리즈가 해맑은 표정으로 묻자, 메리벨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희 요즘 탑주의 제자랑 어울려 다니던데…….”
“그게 왜?”
“이해가 안 되어서.”
그때 라이카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맞다, 너 레오나랑 같은 방 쓰지? 소문 들었어.”
“소문?”
라이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사이가 나쁘다고.”
“모든 룸메이트가 사이가 다 좋지는 않아.”
“그런데 너 유독 레오나를 싫어하더라. 설마, 레오나가 탑주의 제자라서 유치하게 질투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지?”
정곡을 찌르는 라이카의 말에 메리벨은 순간 당황했다.
라이카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뭐야, 너 진짜로 레오나를 질투하는 거야?”
그러자 리즈가 정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리벨을 응시했다.
“메리벨이 질투를 한다고, 진짜?”
“그런 거 아니야.”
뒤늦게 발뺌을 해보았지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에이, 정말이네. 웬일이야, 네가 질투를 다 하고.”
“아니라고 했잖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메리벨은 순간 아차 싶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맞는 모양이네.”
리즈의 말에 메리벨은 입을 다물었다. 리즈가 사근사근하게 다가와 메리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레오나, 그렇게 나쁜 애 아니야. 잘 지내봐.”
“너희는 그 애와 안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렇게 편을 드는 거야?”
메리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보면 자신보다 레오나가 두 사람과 더 친한 친구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보니 두 사람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듯했다.
‘리즈와 라이카의 분위기가 원래 이랬었나?’
리즈는 맑고 청량한 느낌이 강했고, 라이카는 훈훈하고 따듯한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은 뭐랄까, 분위기가 타락한 듯 보인다고 할까.
아무튼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뭔가 좀 더 성숙한 느낌이라고 할지.
메리벨은 인상을 찡그렸다.
예전은 두 사람을 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졌는데 언제부턴가 두 사람을 보면 좋았던 기분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터 그랬던 거지?’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변했어?’
그래, 변했다.
그게 맞는 표현 같았다.
‘왜?’
어째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메리벨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리즈, 라이카. 조심해.”
“왜, 레오나가 우릴 해코지라도 할까 봐?”
라이카의 농담 섞인 말에 리즈가 피식 웃었다.
“메리벨, 넌 너무 조심성이 많아. 의심도 많고. 매사에 그러면 정말 피곤하다, 너?”
“라이카의 말이 맞아. 메리벨, 너 요즘 너무 예민해진 것 같아, 우릴 대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리즈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5장로님의 제자가 된 뒤로 너는 우리랑 말도 안 섞으려 하고, 그렇잖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하기 싫어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 때문이었다.
‘메리벨, 리즈와 라이카가 내 제자가 된 이상 어울려 주는 것은 삼가 주면 좋겠구나. 두 사람은 장차 나를 도와 큰일을 도모할 인재들이다. 그런데 너 같은 불순물과 어울리면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구나. 적어도 마탑에 남아 계속 수련을 할 생각이라면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음흉하게 웃으며 독설을 던지던 5장로는 메리벨에게 있어, 짜증 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제자가 된 리즈와 라이카가 이해되지 않았다.
“리즈, 라이카. 난 진심으로 너희가 걱정돼.”
“메리벨, 왜 네가 우리를 그렇게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라이카는 괜찮아. 그리고 너도 레오나 그렇게 싫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레오나가 너희 친구니까?”
“그것도 있고, 기왕 이렇게 된 것 넷이 함께면 더 좋잖아.”
리즈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메리벨은 입을 다물었다.
“이만, 가볼게. 내가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네.”
그 말을 남긴 메리벨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리즈와 라이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걸음만 빨리할 뿐이었다.
* * *
다음 날, 레오나는 리즈와 라이카의 권유로 5장로를 만나기로 하였다.
5장로는 자신의 연구실이 아닌, 마탑 밖에 있는 수련의 숲으로 초대를 하였다.
수련의 숲은 마법사들이 광범위 마법을 수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장소였다.
아무리 파괴력이 큰 마법을 난사해도 다시 복구되는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레오나는 두 사람과 함께 수련의 숲 가운데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녹색의 로브를 입은 키 작은 노인이 스태프를 쥔 채 서 있었다.
세 사람이 다가오자, 노인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클클클, 어서 오거라.”
리즈와 라이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레오나도 따라서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오나라고 합니다. 5장로님.”
“호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왜 탑주가 자네를 제자로 들였는지 이해되는구먼.”
“그렇습니까?”
“훌륭해.”
5장로가 리즈와 라이카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 순간 리즈와 라이카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지며 마네킹이 되어 5장로의 뒤에 시립했다.
레오나는 눈을 빛내며 5장로를 응시했다.
“그래서 거슬리는구나.”
갑자기 5장로가 스태프를 휘둘렀다. 주문을 영창하지 않았는데도 마법이 발동되었다.
다수의 녹색 구슬이 레오나를 향해 쏘아졌다.
레오나는 프로텍션을 펼쳐 녹색 구슬을 막아냈다. 그 순간 프로텍션에 막힌 구슬이 녹아 내리며 레오나의 발밑으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레오나가 밟고 풀밭이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졌다.
레오나는 긴급히 뒤로 물러났다.
“순발력이 제법이군.”
레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5장로를 노려보았다.
“저를 여기에 묻으실 생각이십니까?”
“내 공격이 그렇게 느껴진 모양이군.”
“아닙니까?”
“아니라곤 하지 않겠네. 자네는 정말 거슬리는 존재거든.”
“저를 없애면 탑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건 뒤에 생각하지.”
5장로가 다시 스태프를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에 뿌려졌던 녹색 물이 다시 하나로 뭉쳐지더니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녹색 괴물이 레오나를 향해 덤벼오기 시작했다. 레오나는 5장로를 만나기 전, 탑주를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5장로가 의심스럽다고?’
‘네.’
‘확실히 그 인간은 조금 음흉한 편이긴 하지. 독을 아주 좋아하는 미친놈이거든.’
5장로가 오랫동안 독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는 것과 그 분야에선 1인자라고 하였다.
게다가 성격도 음흉해서 흑마법에 빠져들 수 있는 여지는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도 하였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조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에 하나 있을 전투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다.
‘그놈은 단 한 명의 장로를 제외하고 모두 겨루기를 꺼리지.’
‘단 한 명이요?’
‘그래.’
‘그게 누군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때 아델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1장로지. 1장로는 백마법의 대가거든. 그리고 또 한 명 생기겠네.’
‘네?’
‘바로 너 말이다. 독을 정화할 수 있는 신성력을 가졌으니, 그놈이 싫어할 사람이 는 셈이지.’
그때는 그저 웃어넘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성력은 독을 정화할 수 있으니까.
레오나는 녹색 괴물을 향해 손을 뻗어 신성력을 분출했다.
레오나의 손을 타고 흘러나온 새하얀 빛이 녹색 괴물을 뒤덮었다.
순식간에 독이 정화되며 녹색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5장로가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하였다.
“내 짐작이 맞았군.”
5장로가 비릿하게 웃으며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 칼리반, 백기사단의 정예기사가 마탑엔 무슨 볼일로 오셨는지 모르겠군. 게다가 탑주의 제자라니, 우습구나.”
5장로의 태도가 달라졌다.
“죽어줘야겠다.”
그 말에 레오나가 비웃음으로 받아쳤다.
“그건 어려울 것 같군요.”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5장로가 스태프를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자 사방에 녹색의 연기가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레오나는 재빠르게 신성력으로 방어막을 만들어 몸을 보호했다.
독 연기는 레오나에게 닿지 않았다. 레오나가 신성력으로 독 연기를 정화하려는 순간 공격이 날아들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녹색의 화살 수십 다발이 쏟아졌다. 녹색의 화살은 레오나의 방어막을 부술 기세로 쏟아졌다. 거기에 독 구슬도 포함되었다.
“클클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허공에 울려 퍼지는 5장로의 웃음소리가 짜증이 났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공격이 멈췄다.
어디선가 풀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래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레오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독 연기를 뚫고 익숙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보랏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시엘이 남청색의 눈을 반짝이며 레오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시엘…… 네가 왜 여기에…….”
시엘이 씩 웃었다.
“글쎄, 내가 왜 여기 있을까?”
그것도 잠시.
“네놈은 웬 놈이냐!”
날카롭게 날아든 5장로의 말에 시엘이 웃으며 대답했다.
“공주님 곁에는 늘 왕자님이 있게 마련이거든.”
그러며 레오나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그 황당한 비유에 레오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 그럼 이 상황을 이제 정리해 볼까?”
여유로운 시엘의 말에 레오나는 웃고 말았다.
5장로는 갑자기 나타난 방해꾼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포이즌 월!”
독으로 만들어진 파도가 레오나와 시엘을 덮쳤다. 시엘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레오나의 앞을 막아선 시엘이 능력을 펼쳤다.
그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가시덩굴이 겹겹이 쌓이며 거대한 벽을 만들어 파도를 막아냈다.
급기야 가시덤불 벽은 독에 내성도 가지고 있어, 녹아내리지도 않았다.
굳건하게 포이즌 월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 아예 찍어 눌러 버렸다.
그 위용에 5장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레오나는 당연하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시엘을 보았다.
시엘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독에 아주 강했다.
5장로에 입장에선 레오나뿐만 아니라 시엘이라는 천적이 생겨난 것이다.
포이즌 월을 막아낸 시엘은 어느 한 곳을 향해 암기를 날렸다.
날카롭게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암기는 정확히 5장로가 숨어 있는 곳을 노렸다.
5장로는 실드를 펼쳐 암기를 막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시엘의 암기는 실드마저 뚫어버리는 위력을 자랑했다. 시엘이 날린 암기에는 오러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암기가 실드를 뚫었다.
두 눈을 부릅뜬 5장로는 블링크로 급히 피했다. 그러자 시엘이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런, 아까워라. 뚫어버릴 수 있었는데.”
“이놈……!”
5장로가 시엘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시엘은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아주 죽이고 싶은 눈빛인데?”
5장로는 한심하게 공격을 당해 쓰러진 리즈와 라이카를 보았다.
두 사람은 어떤 공격을 맞았는지 바닥에 쓰러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심한 것들.”
최후의 수단을 쓰고 싶지만, 아직은 저 두 사람을 이런 곳에서 쓸 수는 없었다.
그동안 들인 공과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그건 너무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레오나를 없애지 못하면, 더욱 낭패였다. 이 자리에 레오나를 불러낸 것은 확실하게 없애버리기 위함이었으니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리스크가 컸다. 하지만 여기서 레오나를 죽이지 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결심을 굳힌 5장로가 스태프를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대량의 마력을 방출시켰다.
5장로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마법진은 숲 전체를 뒤덮으며 퍼져 나갔다.
쿠우웅!
그러자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클클클, 이곳이 너희가 무덤이 될 것이다.]
허공에 울려 퍼진 5장로의 말을 끝으로 숲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무덤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바닥이 꺼지고 흙이 위로 솟구쳤다.
그 광경을 본 5장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쓰러진 리즈와 라이카를 데리고 순간 이동 마법으로 몸을 피했다.
멀리서 수련의 숲 전체에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5장로는 두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며 유유히 사라졌다.
“레오나, 꽉 잡아.”
순식간에 레오나가 다가온 시엘이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바닥에 가시덤불을 생성시켜 위로 솟구치게 하였다.
시엘은 위로 솟아오르는 가시덤불을 밟고 하늘 높이 오르더니, 날 듯이 허공을 밟았다.
레오나도 신성 마법으로 시엘과 자신에게 신속 마법과, 공중부양 마법을 걸어 그곳을 피하려고 했는데 투명한 막이 두 사람을 막았다.
“결계?”
5장로가 결계 마법까지 건 모양이었다. 레오나와 시엘은 결계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
바닥은 무저갱처럼 꺼지고 있고, 하늘은 막혔다.
이대로 마력이 고갈되면 두 사람은 추락하게 될 것이고, 5장로의 말대로 이곳에 묻히게 될 확률이 높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계를 부숴야 했다. 시엘이 소환한 가시덤불로 결계를 공격했다.
콰아앙!
가시덤불과 결계가 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그러나 결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단단하다는 뜻이었다.
“망할 노인네.”
시엘이 욕설을 내뱉었다.
“나한테 맡겨.”
레오나가 아공간에서 신검 에키온을 꺼냈다.
신검 에키온이 베지 못할 것이 없었다.
황금빛을 머금은 신검 에키온이 결계를 베었다. 그러자 결계가 갈라졌다.
결계는 거미줄처럼 갈라지더니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두 사람은 사라진 결계를 뚫고 공중부양 마법으로 하늘을 날아 숲을 벗어났다.
안전한 곳에 착지한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신검 에키온이군요. 제가 선물해 드리길 잘한 것 같습니다.”
“뭐, 네 덕분에 이 녀석과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된 건 맞지.”
레오나는 신검 에키온을 도로 집어넣고, 시엘을 보았다.
“그건 그렇고, 시엘,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시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백기사단에 갔더니, 장기 임무를 맡았다고 하지 뭡니까. 그래서 흑기사단의 정보를 이용해 찾아봤죠.”
사실, 이 정보는 아스텔이 준 것이었다.
레오나가 장기 임무를 맡아 떠난 직후, 시엘은 아스텔을 만났다.
‘시엘, 데미안 단장이 레오나를 마탑에 보냈다. 그녀를 도와줘. 그곳에 흑마법사가 있어.’
아스텔의 말을 듣는 순간, 시엘은 뒤도 안 돌아보고 마탑으로 뛰었다.
그래서 제때 레오나를 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를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낸 데미안이 미웠다.
“대체 백기사단의 단장님은 무슨 생각으로 당신을 이곳에 홀로 보낸 겁니까? 제가 제때 안 나타났으면 위험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아니어도 그 정도 위험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해결은 무슨, 제가 다 지켜봤습니다. 고전하던데요?”
“그건 상대의 속성이 고약해서 그런 거야. 단장님 탓이 아니라고.”
시엘이 놀란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지금, 데미안 단장의 편을 드는 겁니까? 설마, 데미안 단장을 좋아하는 겁니까?”
레오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데미안 단장의 역성을 드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시엘, 기사단 임무 중에 위험하지 않은 것은 없어. 단장님은 나를 믿고 맡기신 것뿐이야.”
“그래도 단신으로 보내다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내 걱정을 해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지나친 걱정은 하지 말아줘. 나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레오나는 시엘이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곁에 머물며 지켜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도 시엘이 나타나 준 덕분에 쉽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제때 나타나 줘서 고마워, 시엘.”
그 말 한마디에 시엘의 표정이 풀어졌다.
“공짜로요?”
“뭘 바라는데?”
“술 사주십시오.”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역시 너는…….”
“왜요?”
“아니다.”
“술 사주시는 겁니다?”
레오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