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아발로인 후작가의 영애
무사히 토벌을 마친 기사들은 제도로 귀환했다.
기사들은 각 기사단에 복귀한 뒤 황실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황실은 수고한 기사들에게 하루의 휴가와 포상금을 내려주었다.
레오나는 백기사단 연무장에 집결해 단장의 치하를 받고, 포상금을 받았다. 포상금을 받은 다른 기사들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기뻐했다. 특히, 제임스는 첫 실전에서 받은 포상금이라 그런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포상금을 받다니.”
“나도.”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임스에 이어, 말론, 유릭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였다. 라파엘만이 당연하다는 듯이 덤덤했다.
“제임스, 포상금으로 뭐 할 거냐?”
유릭이 묻자, 제임스가 씩 웃었다.
“뭐 하긴, 술 마셔야지. 휴가도 받았겠다, 실컷 마셔야 하지 않겠냐?”
그러며 은근슬쩍 유릭과 말론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너희도 동참할래?”
유릭이 재빨리 제임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난 됐다. 첫 포상금을 그런 데 허비할 순 없어서.”
“나도 마찬가지다.”
유릭에 이어 말론도 제임스의 품에서 벗어났다.
“뭐야, 너무하네.”
제임스가 레오나와 라파엘을 은근히 바라보았다.
“너희는…….”
제임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라파엘이 끊어냈다.
“난 쓸데가 있다.”
제임스의 시선이 레오나에게 향했다.
레오나가 혀를 날름거리며 웃었다.
“미안, 나도 따로 쓸데가 있어.”
제임스가 입술을 부풀렸다.
“쳇, 이러기냐.”
보다 못한 유릭이 한마디 했다.
“제임스, 너도 술 마시는 데 쓸 생각 말고 의미 있는 데 쓸 생각 하는 게 어떠냐?”
“의미 있는 데 쓰라고?”
“그래.”
제임스가 유릭에게 다가왔다.
“의미 있는 데 쓰는 게 어떤 건데?”
유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내가 말해줘야 아냐. 생각이란 걸 좀 해보지?”
“뭐야, 나 무시하냐.”
제임스가 발끈하자, 유릭이 혀를 내둘렀다.
“두고 봐라, 너희보다 훨씬 의미 있는 데 쓸 테니.”
“그래, 기대하마.”
마지못해, 유릭이 그렇게 대답하자 제임스가 두고 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레오나는 그들의 실랑이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은 철들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단장 데미안의 해산하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사들은 기쁜 얼굴로 각자 갈 길로 돌아섰다.
레오나도 노블레스 타운에 있는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깨끗이 씻고 싶은 이유도 컸다.
전투를 치르다 보니, 제대로 씻지 못해 몸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식솔들이 보고 싶었다.
그들은 레오나에게 있어 유일한 가족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을 타고 저택으로 돌아오니, 휴버트와 엠마가 맞아주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뭘.”
휴버트에게 재킷을 넘기고 레오나는 엠마에게 목욕을 부탁했다.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후, 레오나는 엠마와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따듯한 물에 목욕을 하였다.
“냄새 많이 나지?”
“조금요.”
엠마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레오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너무 솔직한 거 아냐?”
“저는 거짓말을 못한답니다. 자, 고개를 뒤로 젖히세요. 머리에서도 냄새가 납니다.”
“아, 진짜.”
레오나는 겉으로 짜증을 내었지만, 입가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뒤로 젖혀 주었다.
그러자 엠마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마사지해 주었다.
“아, 기분 좋다. 엠마의 손길은 정말 최고야.”
“별말씀을요.”
엠마의 손길을 받으며 레오나는 머리에서 나는 냄새를 털어냈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근 레오나는 노곤해지는 기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목욕을 마치고 레오나는 오랜만에 저택 식구들과 즐거운 식사를 하였다.
휴버트가 요리장한테 일러, 특별 보양식을 내왔고, 레오나는 음식을 그들과 나누어 먹었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레오나가 같이 안 먹으면 자신도 안 먹겠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원래는 그러면 안 되지만, 레오나는 혼자 먹는 밥이 별로였다.
외로움을 더욱 많이 탄다고 할까?
그래서 늘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도 싫어하진 않았다.
레오나의 외로움을 짐작한 탓이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즐긴 시간은 꽤 유익했다.
그리고 다음 날, 레오나는 오랜만에 평상복을 입고 쇼핑을 나왔다.
선물을 사기 위해서 짐을 실을 마차가 필요해, 이번엔 말이 아닌 마차를 타고 나왔다.
아제트티아 남작 가문의 인장 유니콘이 새겨진 마차를 타고 나서는 첫 외출이라 기분이 묘했다.
레오나는 제일 먼저 만년필 가게에 들렀다.
휴버트에게 무얼 선물할까 고민하다가 만년필을 선택했다.
휴버트가 쓰고 있는 만년필이 너무 낡아 보인 탓도 컸다.
레오나는 가게 주인이 보여주는 만년필 중 그립감이 가장 괜찮고 가벼운 것으로 선택했다.
그런 다음 만년필에 휴버트의 이름을 새겼다.
이름을 새기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서 다른 가게에 들려보기로 하고 나섰다.
다음에 들른 가게는 액세서리 가게였다. 엠마에게 줄 선물로는 브로치가 좋을 것 같았다.
진주 알이 박힌 꽃 모양의 브로치였는데 엠마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레오나는 브로치 말고도 하녀들에게 줄 팔찌를 사고 액세서리 가게를 나왔다.
“요리장한테는 모자가 좋겠어.”
저택의 요리장은 늘 모자를 쓰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오나는 모자 가게에 들러 요리장이 쓰는 하얀 모자를 골라 샀다.
풍채가 있어서 조금 넉넉한 크기로 골랐다. 그리고 정원사에게 줄 밀짚모자도 샀다.
정원사는 일할 때 햇빛에 오래 노출되어 있어, 모자가 필수였다. 그도 마침 새 모자가 필요해 보였고 말이다.
선물 들을 사고 만년필 가게로 돌아가니 휴버트에게 줄 만년필이 완성되어 있었다.
제법 그럴싸했다.
만년필을 포장해서 선물을 마차에 실었다.
“오랜만에 나왔는데 디저트 좀 먹고 갈까?”
결심을 한 레오나는 마부에게 쉬고 있으라 말한 뒤, 디저트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언젠가 제임스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제도에 어머니가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가 있는데 아주 맛있다고.
전통도 오래된 장인이 만든 디저트라고 어찌나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는지 모른다.
나온 김에 그곳에 가보기로 하였다.
“이쯤에서 모퉁이를 돌아서 가면…….”
제임스가 일러준 대로 길을 따라가다 보니, 분홍색 간판이 보였다.
“저긴 것 같은데.”
한 번에 찾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레오나는 곧장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꺄악!
비명이 들렸다.
무심코 몸을 돌려 비명이 나온 곳을 찾았다.
비명은 디저트 가게와 옆 건물 사이에 있는 골목에서 들려왔다.
골목을 바라보니, 불량배로 보이는 남자 셋이 귀족 영애를 겁박하고 있었다.
* * *
미첼은 아발로인 후작가의 차녀로 위로는 오빠가 한 명 있었다.
오늘은 오빠가 맛있는 디저트를 사준다고 하여 마차를 타고 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나온 탓에 시간이 남아 거리를 구경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번번이 그녀를 따라온 호위들이 방해하였다.
노점상에 파는 거리 음식과 액세서리에 관심을 보이면, 귀족 아가씨는 이런 거에 관심 가지면 안 된다며 눈길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게 너무 귀찮아 혼자 구경하고 싶어진 미첼은 호위들을 따돌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호위들을 따돌리는 것에 성공한 그녀는 마음껏 거리를 구경했다.
그런데 문제는 길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거기다 뒤늦게 길을 찾아가던 중 골목길에서 불량배들을 만나고 말았다.
불량배들은 얼굴도 험악해서 너무 무서웠다.
“왜, 왜 이러세요?”
“왜긴, 우리랑 좀 놀자니까? 우리가 아주 재밌게 해줄게.”
“크크킄.”
“시, 싫어요.”
“에이, 좋으면서 앙탈 부리는 거야?”
미첼이 울상을 지었다.
“이러지 마세요. 소, 소리 지를 거예요!”
“오, 우니까 더 예쁜데. 더 울어봐.”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려는 순간.
퍼억!
눈앞에 있던 남자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미첼은 눈물이 쏙 들어갔다.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인 불량배가 벌떡 일어나 화를 냈다.
“누구야! 감히 누가 내 엉덩이를 발로 차!”
“내가 찼다.”
불량배의 시선이 하늘빛 머리카락을 올려 묶고 가벼운 셔츠 차림에 바지를 입은 늘씬한 여인에게 향했다.
그녀는 레오나였다.
레오나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불량배를 보았다.
“할 일이 없어 여인을 희롱하고 다니냐.”
“이게 미쳤나!”
불량배가 레오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자, 미첼은 놀란 나머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레오나는 불량배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고 그의 뒷덜미를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화가 난 불량배가 동료들을 다그쳤다.
“야, 뭐 하고 있어! 족쳐!”
세 명의 불량배가 한꺼번에 레오나에게 달려들었다.
레오나는 날렵한 발차기로 한 명을 날려 보내고, 다른 한 명은 턱에 주먹을 올려쳤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중심을 걷어찼다.
중심을 걷어차인 남자는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그러자 불량배들이 두고 보자고 외치며 줄행랑을 쳤다.
불량배들을 쫓아낸 레오나는 겁에 질린 여인을 바라보았다.
금발에 귀여운 소녀였다.
“괜찮아요?”
레오나의 말에 두 눈을 번쩍 뜬 그녀가 레오나를 보았다.
“그 사람들은…….”
“내쫓았어요, 안심해요.”
“가, 감사합니다.”
그녀가 눈가에 매단 눈물을 훔치며 레오나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건넸다.
레오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이런 데 혼자 있으면 위험해요.”
“그, 그게 길을 잃어서요.”
“그랬군요. 저와 함께 가요.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 줄게요.”
“감사합니다.”
레오나는 그녀를 데리고 골목을 나왔다.
그리고 치안대가 보이는 곳으로 향하려는데 그녀가 레오나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
“네?”
그녀가 수줍은 얼굴로 물었다.
“이름을 어떻게 되세요?”
레오나는 선뜻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레오나예요.”
“아, 레오나…… 저는 미첼이에요. 미첼 아발로인.”
미첼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레오나를 보며 물었다.
“레오나 님은 혹시 기사님이세요?”
레오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불량배를 쫓아내신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아서요.”
레오나는 민망함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치안대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레오나는 치안대에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여기 계시면 안전할 겁니다. 그럼.”
레오나가 뒤돌아서 가려고 하자, 미첼이 다급한 얼굴로 그녀를 붙잡았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연이 닿는다면요.”
그렇게 말하며 레오나가 빙그레 웃자, 미첼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오나는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제임스가 알려준 디저트 가게로.
멀어지는 레오나를 바라보며 미첼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멋진 분이야.”
다시 디저트 가게 앞으로 돌아온 레오나는 가게로 들어가려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저기 저년입니다! 형님.”
고개를 홱 돌리니 좀 전에 도망친 불량배가 무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우락부락한 근육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레오나를 노려봤다.
“너냐, 네년이 내 동생을 이 꼴로 만들었냐?”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용한 데로 가자.”
레오나는 몸을 돌려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어딜 도망가!”
불량배들은 레오나가 도망가는 줄 알고 부리나케 쫓아왔다.
골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레오나가 불량배들을 보았다.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덤벼.”
“이, 미친년이 돌았나.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불량배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히죽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자 열 명의 불량배가 각자 무기를 들고 레오나에게 달려들었다.
레오나가 달려드는 불량배들을 향해 검을 뽑았다.
“난 적당히 안 봐준다.”
레오나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두 눈이 좇을 수 없을 정도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무기를 든 불량배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모두 다리를 베였기 때문이다. 죽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부하들이 부상을 당하고 쓰러지자, 불량배 대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는 겁을 상실한 채 분노한 얼굴로 레오나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죽엇!”
“그런 실력으로 내가 죽겠냐?”
불량배 대장의 손목을 검 등으로 후려치자, 불량배 대장이 도끼를 놓치며 뒤로 물러났다.
레오나는 그를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검 끝이 그의 턱 끝에 닿았다.
“어떻게, 여기서 죽을래, 그냥 꺼질래.”
“이, 익! 두, 두고 보자!”
그 말을 외친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냅다 줄행랑을 쳤다.
레오나는 쓰러진 자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남 등쳐먹을 생각 말고, 똑바로 살아, 이것들아.”
그렇게 말한 레오나는 치안대를 불러 놈들을 연행시켰다.
선물 사러 나왔다가 불량배 소탕을 하게 되다니. 하루가 정말 길었다.
아무래도 디저트는 다음에 먹어야 할 것 같아 레오나는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디저트를 먹는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온 레오나는 사 온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당연하게도 선물을 받은 장본인들은 너무도 기뻐했다.
“너무 예쁩니다, 잘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할게요.”
진주 브로치를 받은 엠마와 하녀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만년필을 받은 휴버트는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고, 모자를 받은 요리장은 맛있는 요리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으며, 정원사는 의욕에 넘치는 얼굴로 정원을 더 예쁘게 가꾸겠다며 다짐을 하였다.
선물을 받고 기뻐해 주니, 선물을 건네준 레오나 역시도 기분이 좋았다.
* * *
아발로인 후작저로 돌아온 미첼을 먼저 돌아와 있던 그녀의 오라버니가 맞았다.
“미첼, 호위들까지 따돌리고 어딜 갔다 온 거야. 내가 널 얼마나 찾은 줄 알아?”
미첼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오라버니를 보았다.
“미안, 오라버니.”
사과를 건넨 미첼이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오라버니를 보았다.
“오라버니 적기사단 소속이지?”
“그런데 왜?”
“혹시 기사분 중에 레오나라는 분 알아?”
“레오나?”
“응.”
“어디서 들어봤는데…….”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미첼을 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그분이 날 구해주셨거든.”
“뭐?”
미첼은 자신이 불량배들을 만난 일을 오라버니인 다니엘에게 설명했다.
“그분은 정말 멋진 분 같아. 특히, 하늘빛 머리카락이 너무 황홀할 정도야.”
황홀경에 젖은 동생 미첼을 바라보는 다니엘은 인상을 찡그렸다.
“너 또…….”
다니엘이 이마를 쓸어 올렸다.
자신의 동생 미첼은 귀엽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금방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레오나, 레오나라면…….”
그제야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걸 미첼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오빠, 알아, 몰라?”
“모, 몰라.”
“같은 기사인데 왜 몰라?”
“우리 기사단에는 없으니까 모르지.”
“그럼, 그분은 다른 기사단 소속이라는 거네.”
미첼의 두 눈이 더할 나위 없이 반짝거렸다.
“좋아, 내가 직접 찾아봐야지.”
“네가 무슨 수로 찾아?”
“다 방법이 있어, 헤헤.”
“미첼, 다 좋은데 부모님 걱정시킬 일은 하지 마.”
“오빠는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인 줄 알아? 나도 곧 성인이라고.”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미첼은 신이 난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표정은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철이 아직 덜 든 여동생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그건 집안에서 너무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운 탓도 컸다.
어릴 때 크게 앓았던 미첼은 바깥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너무 좋아했다.
특히 로맨스 소설은 마니아 수준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본격적인 사교활동이 많아지면서 로맨스 소설에 빠지는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금방 사랑에 빠지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특히, 그 대상이 기사들에 한해서였다. 미첼이 가진 기사들에 대한 로망 탓이었다.
다니엘이 기사가 된 것도 동생의 바람 때문이기도 했다.
기사의 여동생이 되고 싶다는 소망 때문에 그는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기사가 되어 연약한 동생을 지켜주고 싶기도 하였다.
동생에 사랑에 빠지는 기사들을 상대하려면 본인도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이번엔 그 상대가 레오나였다.
레오나라면 백기사단 소속으로 신성 마법을 사용하기로 유명한 기사가 분명했다.
그가 아는 기사 중에 레오나라는 이름을 가졌고, 하늘빛 머리카락의 소유자는 그녀뿐이었다.
하늘빛 머리카락은 흔한 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사람인지 만나봐야겠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동생이 금.사.빠에 걸리면, 반드시 상대를 확인했다.
그래서 동생의 환상을 깨뜨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번에도 동생의 환상을 깨뜨려주는 역할을 맡아야 할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백기사단으로 출근한 레오나는 아침 훈련을 마치고 점심시간에 시엘을 찾아갔다.
시엘은 개인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레오나가 그를 찾아오자, 시엘은 기쁜 얼굴로 훈련을 멈추고 그녀를 반겼다.
“레오나, 여긴 어쩐 일입니까?”
“너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
시엘이 기대된다는 얼굴로 웃었다.
“저와 단둘이 말입니까?”
“그래.”
“그럼,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군요. 따라오십시오.”
시엘이 레오나를 데리고 간 곳은 흑기사단 건물의 지붕 위였다.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시엘을 보았다.
“여기가 조용한 곳이냐?”
“여기보다 조용한 곳은 없습니다.”
“넌 여전히 지붕을 좋아하는구나.”
“기억해 주셨군요.”
시엘은 건물 꼭대기나 건물 지붕 위에 드러눕는 것을 유독 좋아했다.
그래서 그를 찾을 때면 건물 꼭대기를 찾으면 쉬웠다.
시엘이 지붕에 자리를 잡고 앉자, 레오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너, 아스텔 만났지?”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시엘이 깜짝 놀랐다.
“아스텔이요?”
“시치미 떼지 마, 만났지?”
레오나가 금빛 눈동자로 집요하게 바라보자, 시엘은 시선을 회피했다.
“없습니다.”
“정말이야?”
“정말입니다.”
“하늘에 맹세코?”
“하늘에 맹세코 없습니다.”
시엘이 끝까지 시치미를 떼자, 레오나는 말을 돌렸다.
“아스텔과 연락은 했어?”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는 했습니다.”
“그랬구나. 날 찾았단 이야기는 안 했어?”
시엘이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제가 미쳤습니까? 당신의 이야기를 하게.”
시엘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 레오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스텔한테 연락 오면 나한테도 알려줘.”
시엘은 진지한 얼굴로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전부터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그 말을 그는 내뱉고야 말았다.
“레오나…… 당신에게 아스텔은 어떤 존재인 겁니까?”
“바보 같은 놈, 그리고 소중한 사람.”
“그럼, 저 역시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입니까?”
“글쎄.”
레오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시엘은 확실한 답을 듣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는 게 조금은 두려웠다.
자신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아서.
그럼,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레오나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는 이제 만족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린다면 레오나는 더 멀어질지도 모른다.
시엘은 그게 싫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여기서 더 멀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지금 같은 관계라도 그녀의 곁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그녀가 살아 숨 쉬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레오나, 만약 아스텔이 당신 앞에 나타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레오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 녀석은 이미 내 가까이에 와 있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겁니까?”
“그래.”
“그렇군요.”
두 사람은 말없이 하늘만 응시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레오나였다.
“난 그만 가볼게.”
시엘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십시오.”
시엘을 뒤로한 채 흑기사단 건물 지붕에서 내려온 레오나는 백기사단으로 향했다.
‘시엘이 모르고 있는 걸 보니, 아직 두 사람은 만나지 않은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레오나가 백기사단으로 돌아오니, 선배인 에드가가 다가왔다.
“레오나, 널 찾아온 손님이 있다.”
“제 손님이요?”
에드가가 손짓으로 가리키자, 연무장 벤치 근처에 모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금발에 훤칠한 미남이었는데 적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적기사단엔 아는 사람이 없는데 이상했다.
* * *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레오나의 물음에 남자가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하였다.
“제 이름은 다니엘 아발로인입니다.”
들어본 적 있는 성에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지난번 불량배들에게 구해주었던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의 이름이 미첼 아발로인이라고 하였다.
“혹시 미첼 영애의…….”
“맞습니다. 제가 미첼의 오라버니 됩니다.”
“그렇군요.”
레오나는 의아했다. 그녀의 오라비가 자신에게 무슨 볼일인지 말이다.
“제게 무슨 용건이십니까?”
“일전에 미첼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정도는 아닙니다.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다니엘의 시선이 레오나의 전신을 훑었다. 기분 나쁜 시선은 아니었고,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오는 시선이었다.
“미첼은 제 하나뿐인 동생입니다. 당연히 감사를 전해야지요.”
너무나 정중한 태도에 레오나는 대충 감사를 받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감사는 받아두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점심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레오나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아쉽군요.”
레오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훈련 시간이라서요.”
“이런, 제가 시간을 너무 빼앗았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요.”
“실례했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한 그는 몸을 돌렸다.
레오나는 멀어지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히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뭐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무언가 의도가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레오나, 전술 훈련하러 갈 시간이다.”
에드가의 부름에 레오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본격적인 전술 훈련을 할 시간이었다.
전술 훈련은 연무장이 아닌 기사단 건물 뒤쪽에 있는 숲에서 이뤄졌다.
전술 훈련은 다섯 명씩 팀을 나눠 제일 먼저 목적지에 도착해 기사단의 깃발을 뽑는 팀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도착 과정에서 상대팀과의 전투는 물론,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여 이동해야 하기에 매우 힘든 훈련 중 하나였다.
백기사단은 체계적인 전술 훈련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패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전술 훈련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고, 다양한 방식으로 훈련을 하였다.
지금 하는 훈련은 가장 기본이 되는 전술 훈련이라고 하였다.
기본을 갈고닦아야 다른 전술도 소화할 수 있기에 백기사단은 기본에 충실했다.
훈련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 다 되었다. 레오나는 식당에서 선배기사들과 저녁 식사를 하였다.
선배들의 첫인상은 모두 까칠해 보이긴 했지만, 레오나에겐 호의적이었다.
그동안 레오나가 보여주었던 활약도 있었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단 생활을 하는 데 레오나는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레오나는 자신이 백기사단의 소속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느끼게 되었다.
소속감이 생긴 것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생겼다는 점에서 레오나는 행복했다.
* * *
제도 내에 조용한 주점에서 시엘은 아스텔을 만났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화가 났기 때문이다.
아스텔은 주점에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시엘이 아스텔 앞에 나타났다.
시엘은 아스텔이 마시려던 잔을 빼앗아 본인의 입으로 털어 넣었다.
아스텔은 잔을 빼앗아간 시엘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안 좋은가 보군.”
“어, 더럽게 안 좋아.”
“왜 그러지?”
시엘이 아스텔을 노려보았다. 시엘은 솔직한 감정으로 물었다.
“거기에 왜 나타난 거야?”
“거기?”
“켈베로스가 나타난 숲.”
그 한마디에 아스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리치를 쫓고 있었거든. 정확히 말하면 리치가 갖고 있던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며 아스텔은 인상을 썼다.
“하필 거기에 제국의 기사들이 올 줄은 몰랐지.”
아스텔의 시선이 시엘을 향했다.
“네가 그 정보만 알려주었어도 좋았을 텐데.”
그는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시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날 원망하는 거야?”
“원망하는 게 아니라, 아쉽다는 소리였어.”
“그게 그거지. 그리고 내가 왜 그 정보까지 네게 줘야 해.”
“레오나가 속해 있지 않았다면 줬을 거야, 그렇지 않아?”
“…….”
시엘은 대답 대신 술을 따라 한 잔 마셨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연거푸 석 잔을 마신 시엘은 다시 아스텔을 보았다.
“거기서 광휘의 빛 쓴 거 너 맞지?”
아스텔은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 나야.”
“왜 나선 거야?”
“그녀를 위해서.”
“거짓말하지 마. 그녀에게 네가 그곳에 왔다는 걸 남기고 싶었던 거잖아.”
아스텔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레오나가 눈치를 챈 모양이지?”
“네가 가까이 와 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 나한테 묻더군. 널 만났느냐고.”
“그래서?”
시엘이 피식 웃었다.
“내가 네 존재를 내 입으로 말할 줄 알아?”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군.”
“그렇다면?”
시엘은 시치미조차 떼지 않았다.
그런 솔직함이 가끔 짜증 날 때도 있었지만, 아스텔은 싫지 않았다.
“나머지 파편들도 나타날 거야. 그리되면 나와 레오나는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게 되겠지.”
“그게 네가 바라는 만남이냐?”
“글쎄.”
아스텔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시엘은 그런 아스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가끔 생각을 알 수가 없어.”
“그게 내 장점이기도 하지.”
“퍽이나.”
시엘은 인정하지 않았다.
“켈베로스를 소환한 여자, 알아봤어?”
시엘이 제일 궁금한 건 그것이었다. 그날 현장에 나타난 수상한 여자가 켈베로스를 소환하고, 마왕 벨지안의 파편을 가지고 사라졌다.
“그러는 넌?”
“찾은 게 없으니, 네게 묻는 거잖아.”
“내 생각은 그 여자가 이번 일의 주모자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켈베로스를 소환할 수 있는 흑마법사는 많지 않아. 게다가 엄청난 양의 마기를 품고 있더군. 그 정도의 마기를 품고 있다면 대악마와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일 확률이 높아.”
“그 여자가 우두머리다?”
아스텔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야?”
“한 가지 더 알아낸 게 있지.”
“그게 뭔데?”
“마탑에 흑마법사가 숨어 있다는 거.”
시엘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야?”
“나머진 네가 조사해 보면 확실해지지 않을까?”
시엘이 혀를 찼다.
“쳇, 그 말은 더 이상의 정보는 줄 수 없다는 거군.”
아스텔이 씩 웃었다.
“난 뛰어난 네 능력을 믿으니까.”
“얄미운 놈.”
“너도 만만치 않아.”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다.
* * *
아발로인 후작가 저택 안.
미첼은 자신의 방 창문 앞에 고개를 내밀고 다니엘의 귀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멀리서 후작가 정문을 지나 말을 타고 다니엘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니엘이 저택에 가까워지자, 미첼은 서둘러 방에서 뛰어나갔다.
“오라버니!”
다니엘은 계단에서 뛰어내려오는 미첼을 바라보았다.
“미첼, 그러다 넘어져.”
“안 넘어져.”
미첼이 다니엘의 팔짱을 꼈다.
“오라버니,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그녀를 바라보던 다니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궁금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레오나 경, 만났지?”
다니엘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왜?”
“만난 거 다 알아.”
“네가 어떻게 아는데?”
미첼이 히죽 웃으며 가슴을 쫙 폈다.
“감이지.”
다니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버님께 인사드려야 하니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알았어. 응접실에서 기다릴게. 인사드리고 바로 와야 돼.”
“알았다.”
미첼을 겨우 달래서 보낸 다니엘은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 노크하고 들어가자, 금발의 노신사가 다니엘을 맞이했다.
그가 바로 아발로인 후작가의 가주 패트릭 아발로인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그래. 어서 오너라.”
다니엘의 표정을 살핀 아발로인 후작이 물었다.
“또 미첼이 귀찮게 군 것이냐?”
다니엘은 대답 대신 미소로 대신했다. 후작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게로구나. 이번엔 또 누구더냐?”
다니엘은 있는 그대로 설명을 했다.
“허허, 이번엔 여성이 상대라고?”
“그렇습니다.”
“진즉 특이한 건 알았다면, 갈수록 더하는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만나는 보았느냐?”
“만나보긴 했지만, 아직 파악을 못 했습니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이런 일이 생길 때면 다니엘이 알아서 해결을 해왔기에 믿고 맡겼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인사를 마친 다니엘은 집무실을 나와 미첼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오라버니! 빨리 와요.”
소파에 앉아 손짓하는 미첼을 바라보며 다니엘은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첼은 사랑스러운 그의 동생이었다. 도저히 미워 할 수 없었다.
“어땠어?”
“어땠냐니?”
“레오나 경 말이야.”
“글쎄다. 네가 말한 것처럼 정의롭거나 그런 건 아직 잘 모르겠던데.”
“그분은 날 구해주셨어. 감사 인사는 전했지?”
“그래. 내가 직접 감사를 전했어.”
미첼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식사 초대는 했어?”
“네 부탁대로 했지만, 거절하더라고.”
“그래서?”
다니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당연히 알았다고 했지.”
“그게 끝이야? 한 번 더 권해보지 그랬어.”
미첼이 서운하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미첼,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권하는 건 민폐야.”
“그렇지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알았어.”
미첼의 기가 팍 죽자, 다니엘은 조금 안쓰러웠다.
“기회가 되면 다시 권해볼게.”
“정말?”
“그래, 그러니 그런 일로 풀 죽지 마.”
미첼이 배시시 웃었다.
“내가 언제 풀이 죽었다고 그래. 헤헤.”
다니엘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도 동생은 귀여웠다.
자신도 어지간히 팔불출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동생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 * *
시엘은 조용히 데미안을 찾았다. 사람이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났는데도 데미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안 놀라는군요.”
“그럴 필요가 있나?”
그 말에 시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단장님도 보통 분은 아니시니까.”
데미안의 짙푸른 눈동자가 시엘을 날카롭게 향했다.
“용건은…….”
“앉으라고 하지도 않습니까?”
그러며 시엘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건방진 태도임에는 데미안은 추궁하지 않았다.
그가 온 용건이 궁금할 뿐이었다.
시엘의 입에서 용건이 튀어나왔다.
“마탑에 관련된 일입니다.”
데미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마탑이라고?”
“마탑에 흑마법사가 숨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지 뭡니까?”
데미안의 푸른 눈이 커졌다.
“흑마법사가 마탑에 숨어 있다고? 정말인가?”
“제가 이 밤에 설마 거짓 정보를 가지고 왔겠습니까? 사안이 심각합니다. 자칫하다간, 마탑주가 봉인시킨 파편이 그놈들 손에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시엘의 말을 들은 데미안은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가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흑기사단의 단원이었고, 흑마법사에 관한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추적하고 있었다.
“마탑에 흑마법사가 숨어 있다라…….”
“아무래도 마탑주를 만나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아보니 단장님께서 마탑주와 긴밀한 사이라더군요.”
“그래서 날 찾아왔군.”
“저보다는 단장님께서 훨씬 수월하게 마탑주를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데미안은 마탑주 아델리아와 직통으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탑은 견고하다. 증거도 없이 흑마법사가 있다고 한들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하여간, 보수적인 양반들이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뭐지?”
“레오나 경을 데리고 가십시오. 그녀는 흑마법사들의 천적인 능력을 가졌지 않습니까.”
“레오나라면 흑마법사를 알아볼 수 있단 뜻이군.”
“그렇죠.”
시엘이 한마디 더 붙였다.
“물론, 저도 함께 갈 겁니다. 레오나 경이 마탑에서 위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나를 못 믿는군.”
“단장님의 실력은 믿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요.”
데미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엘이 가진 레오나에 대한 관심이 유독 지나친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일단, 마탑주는 내가 먼저 만나보지. 그 후에 연락을 주겠다.”
“조심하십시오. 마탑주가 흑마법사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럴 리 없다.”
“세상일이라는 게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죠.”
“……충고 새겨듣지.”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락 기다리죠.”
인사를 남긴 시엘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자, 데미안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처럼 제국에도 암운이 드리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뭐라고?”
늦은 밤,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아발로인 후작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보고하고 있는 집사를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아가씨께서 심상치 않으십니다.”
인상을 와락 구긴 아발로인 후작이 걸음을 옮겼다.
“직접 가서 보겠다.”
아발로인 후작은 집사와 함께 미첼의 방으로 향했다.
미첼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녀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전신엔 핏줄이 돋아나고 목 주위엔 검은 그물 같은 것이 나타났다.
아발로인 후작은 미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 집사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아발로인 후작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발로인 후작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넨 나가 있게.”
“하지만…….”
“나가 있게. 그리고 여기서 본 것은 함구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가자, 아발로인 후작은 미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진정하거라, 아가.”
미첼에게 가까이 다가간 아발로인 후작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미첼의 이마를 쓸었다.
미첼을 바라보는 아발로인 후작의 눈빛이 애틋했다.
“미첼, 내 사랑스러운 아가.”
안타까운 얼굴로 미첼을 바라보던 아발로인 후작은 품 안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아비가 편안하게 해주마.”
아발로인 후작은 펜던트를 그녀의 심장에 올려놓고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잠시 후, 펜던트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흘러나와 그녀의 심장 부근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곧 잠잠해졌다.
그녀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아버지?”
“그래, 아비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 일도 아니란다.”
미첼이 졸린 눈을 비볐다.
“졸려요.”
“그래, 시간이 늦었구나. 어서 자렴.”
아발로인 후작은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 채로 잠든 미첼을 바라본 아발로인 후작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른 아침, 데미안은 마탑주를 만났다. 마탑에 관한 사항이라 마탑에서 만나는 것이 꺼려, 바깥에서 따로 만났다.
찻집을 통째로 빌린 데미안은 그곳에서 마탑주 아델리아와 단둘이 만났다.
“네가 긴급으로 나를 만나자고 하다니, 어지간히도 급한 모양이구나.”
“마탑에 관련된 일입니다.”
아델리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무슨 일이지?”
“마탑에 흑마법사가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웃고 있던 아델리아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탑에 흑마법사가 숨어들었다니, 말도 안 된다.”
마탑은 오랜 시간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마탑주를 중심으로 장로들과 그 휘하 마법사들이 주축으로 이루어진 마탑은 오랜 세월 견고하게 긍지를 지켜왔다.
“그럴 일 없다.”
“흑기사단에서 알아낸 정보입니다.”
흑기사단이란 말에 아델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흑기사단은 제국 최고의 정보 기사단.
그곳에 나온 정보라면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근거는 있나?”
“아직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확인할 생각이지?”
“흑마법사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사가 저희 기사단에 있습니다.”
아델리아는 데미안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자를 마탑에 들여 달라?”
“그렇습니다.”
마탑은 폐쇄적인 곳이라 외부인의 침입을 좋게 보지 않는다.
“만약 그리했다, 아니란 것이 밝혀지면 어떻게 할 거지?”
“책임을 면할 수 없겠죠.”
“어떤 책임이든 지겠단 뜻이냐?”
“네.”
아델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데미안의 말을 믿을 순 없지만 만약에라도 흑마법사가 있다면 문제가 크다.
“마탑에 그자들이 침투해 있다면, 내가 가진 파편을 노릴 수 있겠구나.”
“예, 제가 염려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아델리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흑마법사를 색출해 낼 수 있는 자의 능력은 확실한 것이겠지?”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제 휘하 기사입니다.”
“레오나라는 그 아이 말이구나. 확실히 그 아이의 능력이라면 흑마법사들에겐 천적이지.”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흑마법사와 마왕 벨지안의 파편에 관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락을 주도록 하마. 그때 그 아이를 데리고 마탑으로 오거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데미안의 말을 들은 아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마.”
“예, 스승님.”
아델리아를 배웅한 데미안은 기사단으로 복귀해 레오나를 불렀다.
마탑에서 연락이 오면 레오나를 데리고 가기로 하였으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단장실로 레오나가 들어오자, 데미안은 경례를 생략하고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레오나가 소파에 앉자, 데미안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탑에 흑마법사가 숨어 있다는 정보를 흑기사단에서 주었다.”
레오나의 금빛 눈이 커다래졌다.
“마탑에 말입니까?”
“그래. 조금 전 마탑주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놀라셨겠군요.”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네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 힘이라면…….”
“곧 마탑을 방문할 것이다. 그때 너는 나와 함께 마탑에 갈 것이다.”
“제가 흑마법사를 찾아내면 되는 겁니까?”
“그래, 할 수 있겠나?”
레오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자신감이 넘쳐서 좋군.”
“흑마법사는 박멸해야 하는 대상이니까요.”
당당한 그녀의 대답에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의 말대로 흑마법사는 없애야 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세상에 나오면 항상 재앙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마왕 벨지안의 파편을 모아 마왕 부활을 획책하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 * *
미첼은 기분이 좋았다. 적기사단에 있는 오라버니 다니엘이 기사단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초대를 한 것이다.
그건 미첼이 백기사단에 가보고 싶다며 조른 탓이었다. 다니엘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아가씨, 오늘은 평소보다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시네요.”
“응, 드디어 그분을 만날 수 있게 되었거든.”
“그분이요?”
미첼이 생각만으로도 황홀한지 두 손을 모아 두 눈을 감았다.
“아주 멋진 분이셔. 가슴이 설레는 거 있지. 그러니 최대한 예쁘게 꾸며줘.”
“암요, 그런 일이라면 우리 아가씨를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꾸며드려야죠.”
하녀가 신이 난 얼굴로 미첼의 치장을 도왔다.
발랄해 보이는 노란 드레스와 챙이 긴 모자를 씌우니 사랑스러운 소녀가 따로 없었다.
“자, 다 됐어요.”
“응, 얼른 가자. 오라버니가 기다리실 거야.”
미첼이 뛰듯이 계단을 내려가자, 하녀가 안절부절못한 얼굴을 하였다.
“아가씨, 그렇게 뛰시면 넘어지신다니까요.”
“걱정 마.”
사뿐하게 계단을 내려오자, 다니엘이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준비는 다 했어?”
“응, 나 예뻐?”
“물론이지. 갈까?”
미첼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니엘의 팔짱을 꼈다.
“얼른 가요, 오라버니.”
“그래.”
두 사람은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마차는 저택을 빠져나와 황궁을 향해 달렸다.
후작가의 인장이 찍힌 마차는 순조롭게 황궁 정문을 통과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리렴.”
다니엘이 손을 내밀자, 미첼이 수줍게 웃으며 다니엘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가 적기사단이야.”
“여기가 오라버니가 있는 곳이군요.”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기사단 건물을 중심으로 넓은 두 개의 연무장이 위치했다.
그리고 연무장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기사단 숙소와 식당이 있었다.
“황궁의 기사단 건물의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아.”
미첼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다니엘을 보았다.
“오라버니, 백기사단도 보고 싶어요.”
“이 오라비가 있는 곳은 시시하다 이거냐.”
데미안이 섭섭한 표정을 짓자 미첼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물론, 오라버니가 계신 적기사단은 아주 훌륭하죠. 제가 그걸 왜 몰라요. 저는 그저 다른 기사단도 궁금해서…….”
피식 웃은 다니엘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농담이다. 가자, 백기사단 구경해야지.”
“네, 오라버니.”
밝은 미소로 대답한 미첼이 냉큼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백기사단으로 향했다.
새하얀 건물을 바라보는 미첼의 두 눈이 커졌다. 백기사단은 그 이미지에 걸맞게 모든 것이 새하얀 색이었다.
미첼이 건물 구경에 여념이 없는 동안 다니엘은 백기사단 소속인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이다, 헨리.”
“그러게, 너무 오랜만이야. 다니엘.”
헨리가 피식 웃으며 다니엘의 뒤를 가리켰다.
“동생?”
“맞아. 내 동생이 백기사단에 관심이 좀 많아서 견학을 시켜주려고. 괜찮지?”
“나야 괜찮지.”
다니엘이 미첼에게 손짓했다.
“미첼, 인사해. 여긴 내 친구 헨리.”
“만나서 반갑습니다, 헨리 크로포드라고 합니다.”
“미첼 아발로인이에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헨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견학하러 가실까요?”
“네, 좋아요.”
다니엘과 미첼은 헨리의 안내를 받으며 백기사단을 견학했다.
견학하는 동안 헨리와 미첼은 말을 탔다.
“저어, 헨리 오라버니.”
“응?”
“백기사단 분들은 언제 훈련하세요? 훈련하는 모습 보고 싶은데.”
“음, 그럴 줄 알고 내가 시간을 맞췄지. 지금쯤 훈련하러 나올 시간이야.”
미첼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정말요.”
“그래, 저기 앉아서 기다려볼까?”
헨리가 가리킨 곳은 나무 그늘 아래에 위치한 벤치였다. 연무장과도 가까워서 훈련하는 모습이 잘 보이는 위치였다.
잠시 후, 백기사단 기사들이 하나둘 연무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미첼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헨리가 다니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니엘, 네 동생은 기사들을 정말 좋아하나 보네.”
“말도 마.”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는 듯 다니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미첼의 눈에 목표로 했던 인물이 포착되었다.
하나로 묶어 올린 하늘빛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연무장으로 올라오는 기사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몇 가지 동작으로 준비 운동을 하고는 검을 잡았다.
검을 잡고 여러 가지 동작을 펼치더니,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때 그녀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은발에 장신의 남자였다.
“헨리 오라버니, 저 사람은 누구예요?”
헨리는 미첼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라파엘.”
“누군지 아세요?”
“어, 바스티안 공작가의 장남이지. 아마.”
“레오나 경이랑 굉장히 친해 보이시네요.”
헨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첼을 바라보았다.
“레오나를 알아?”
“그럼요, 저를 구해주신 분인걸요.”
“그랬어?”
“네, 얼마나 멋졌다고요.”
그때 생각만 하면 미첼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인사시켜 줄까?”
“정말요?”
“물론이지. 기다려봐.”
미첼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벤치에서 일어나 헨리가 레오나에게 다가갔다.
“레오나.”
헨리의 부름이 고개를 돌린 레오나가 인사를 했다.
“네, 선배님.”
“잠깐 시간 좀 있어?”
“시간이요?”
“곤란해?”
레오나가 슬쩍 라파엘을 보았다.
“다녀와. 기다릴게.”
“그럴래?”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나가 헨리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세요?”
헨리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너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저를요?”
“잠깐 가자.”
“네.”
레오나는 헨리와 함께 나무그늘 아래 위치한 벤치로 향했다. 그곳에 익숙한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인사해, 레오나. 이쪽은 내 친구 다니엘이고, 여긴 여동생 미첼이야.”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오나입니다.”
“우리 구면이죠.”
다니엘이 웃으며 악수를 청하자, 미첼이 잽싸게 그 손을 가로챘다.
“오랜만이에요. 레오나 경.”
“네, 오랜만이에요. 미첼 영애.”
미첼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레오나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셨군요.”
“그럼요.”
레오나가 빙그레 웃자, 미첼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저어, 레오나 경. 괜찮으시면 제가 다음에 초대장을 보내도 될까요?”
“초대장이요?”
“네, 절 구해주셨는데 아무것도 안 받으셨잖아요. 식사 대접이라도 꼭 하고 싶어요.”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저는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미첼의 눈망울이 간절함으로 번졌다.
“안 될까요?”
어떻게 해서든 꼭 초대하고 싶은 간절함이 그녀의 눈망울에 맺혔다.
게다가 촉촉해지기까지.
레오나는 얼떨결에 수락하고 말았다.
“아, 알겠습니다. 초대장을 보내주십시오.”
그러자 미첼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정말요, 고마워요. 레오나 경.”
헨리와 다니엘은 레오나를 대하는 미첼을 바라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헨리가 물었다.
“다니엘, 네 동생의 목적이 레오나였냐?”
다니엘은 긍정의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가 다니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친구야, 힘내라.”
그 말에 다니엘이 인상을 썼다.
“그게 위로냐.”
두 사람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미첼의 관심은 온통 레오나에게 쏠렸다.
레오나는 미첼이 자신에게 갖는 호감이 과한 것 같아 부담스러웠지만, 그녀의 눈동자를 보니 순수한 동경의 감정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전과 달리 레오나는 미첼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손이 차.’
사람의 온도라는 게 어느 정도 따듯해야 하는 것이 옳은데 미첼의 체온은 차가웠다.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미첼은 분명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데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이 시체와도 같다니.
기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엔 왜 몰랐지?’
직접적으로 오래 접촉을 하지 않아 놓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손을 잡고 있어 보니, 확실히 차가웠다.
레오나는 다니엘을 보았다.
그는 가족이니, 미첼의 체온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저, 미첼 영애.”
“네?”
“아무래도 안색이 너무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만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안색이요?”
“예, 무척 창백해 보입니다.”
순수한 걱정에서 한 말인데 미첼이 화들짝 놀랐다.
“아, 그렇군요. 이런 모습을 보여서 죄송해요.”
미첼이 서둘러 레오나의 손을 놓았다.
“레오나 경, 초대장을 보낼 테니 꼭 오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뒤돌아선 미첼이 다니엘을 보았다.
“오라버니, 우리 그만 가요. 저 쉬고 싶어요.”
“어, 그래.”
미첼의 손을 잡은 다니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이 아까와 달리 너무 차가웠다.
다니엘은 힘을 주어 미첼의 손을 꼭 잡았다.
“헨리, 레오나 경.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헨리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살펴 가십시오, 두 분.”
레오나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미첼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헨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 힘내라.”
“예?”
“미첼이 좀 귀찮게 굴지도 모르거든.”
레오나가 의아한 얼굴로 헨리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헨리가 작게 속삭였다.
“미첼이 기사들 광팬이거든. 유명해. 이번 타깃은 아무래도 넌 것 같다.”
레오나는 오싹한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농담이시죠?”
“농담 아닌데?”
“선배님.”
“아무튼, 힘내. 파이팅!”
헨리가 파이팅까지 외쳐주며 자리를 떠나자, 레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마차에 오른 다니엘은 미첼의 안색을 살폈다.
“미첼, 괜찮아?”
“오라버니, 나 가슴이 아파요.”
“가슴?”
“응, 욱신거려.”
그 말에 다니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둘러야겠다.”
다니엘이 마차의 벽을 두드리자, 마차의 속도가 올라갔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아발로인 후작가로 향했다.
마차가 도착하고 미첼은 다니엘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오라버니.”
“왜 그래?”
“아버지를 불러줘.”
“알았어, 일단 들어가자.”
다니엘의 부축을 받으며 미첼은 방으로 향했다. 미첼을 침대에 눕혀준 다니엘은 미첼의 부탁대로 아발로인 후작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다니엘은 급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님, 미첼이 아버님을 찾습니다.”
“미첼이?”
“예, 안색이 무척 안 좋습니다.”
표정을 굳힌 아발로인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다.”
아발로인 후작은 급한 걸음으로 미첼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백한 얼굴의 미첼이 그를 맞이했다.
“미첼, 내 아가.”
“아버지.”
아발로인 후작은 미첼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체온이 너무 차가웠다.
“이런…….”
미첼의 심장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렸다.
방 안의 사용인들을 모두 내보낸 아발로인 후작은 급히 품 안에서 펜던트를 꺼내 그것을 미첼의 가슴 위로 올리고 마력을 주입했다.
펜던트에서 신성해 보이는 황금빛이 흘러나와 미첼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미첼의 체온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미첼의 혈색이 돌아온 것을 본 아발로인 후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언제부터 있었는지 다니엘이 서 있었다. 다니엘의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아버님, 미첼 많이 아픈 겁니까?”
아발로인 후작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다.”
“그럼, 방금 사용하신 그건 뭡니까? 신성력이 아닙니까?”
“넌 몰라도 되는 일이다.”
“아버님!”
아발로인 후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니엘, 미첼을 잘 돌봐주거라. 네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그 말에 다니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버지와 미첼 사이에 분명 뭔가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자신에게 그걸 숨기고 있었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
‘분명 뭔가 있는데…….’
아버지의 그 표정. 그건 평소 아버지가 보여주던 표정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숨겨야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대체 왜…….’
이유를 모르겠다.
아발로인 후작의 치유 덕분인지 미첼은 다시 건강해졌다.
미첼은 상쾌해진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몸이 가벼웠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다니엘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첼, 아까 왜 아버님을 찾은 거야?”
미첼은 순수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아플 때마다 아버지가 곁에 계시면 안 아팠거든.”
“네가 아플 때마다 아버님이 곁에 계셨어?”
“응, 항상 내 곁에 있어주셨어. 그럼, 아픈 게 다 날아가 버렸어.”
다니엘은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건 분명 신성력이었어.’
신의 힘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힘.
그의 아버지 아발로인 후작은 미첼에게 그것을 사용했다.
그리고 미첼이 건강을 되찾았다.
‘아버지, 대체 미첼에게 무엇을 해오신 겁니까.’
미첼이 수심으로 가득한 다니엘의 얼굴을 보며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 무슨 걱정 있어? 아버지에 대한 건 왜 물어본 거야?”
다니엘은 애써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피식 웃은 다니엘은 미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발, 아프지 좀 마.”
“미안…….”
미첼이 혀를 쏙 빼물자, 다니엘은 미첼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오라버니!”
“그렇게 소리치는 걸 보니 이제 정말 안 아픈가 보구나.”
“정말!”
미첼이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다니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다니엘은 동생이 건강해졌다는 것만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궁금증은 차자 알아보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걱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만 쉬어.”
“응.”
방문을 닫고 나온 다니엘의 얼굴에서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의 무거운 발걸음이 복도를 울렸다. 아버지가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알아야만 했다.
미첼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아는 게 옳았다. 아버지가 미첼에게 신성력을 사용한 것이라면, 미첼의 병과 관계있으리라.
미첼은 어려서부터 심장이 약했다. 조금만 뛰어도 쓰러지기 일쑤여서 뜀박질은 꿈도 꾸지 못했다.
미첼이 열 살 때 의사들이 하나같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다.
정말 그럴 것처럼 미첼은 하루하루 메말라갔다. 보기 힘들 정도였다.
미첼이 11살 되던 해였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데려온 유명한 치료사가 미첼의 병을 치료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치료사는 거짓말처럼 미첼의 병을 고쳐 주고는 사라졌다.
‘그때 단순히 치료만 한 게 아닐 수도 있어.’
의심이 들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졌다.
* * *
레오나는 선배 기사 헨리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직접 미첼 영애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좀…….”
숙소 앞에 놓인 꽃바구니하며, 직접 구운 디저트 배달, 직접 만들었다는 파스망트리 등 별의별 것을 선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편지와 함께.
그리고 선물과 편지 배달은 조용한 새벽에 레오나가 있는 기사단 숙소 앞에 정확하게 이름표를 달아서 배달되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진풍경이 펼쳐졌다.
“누군지 몰라도 레오나를 열렬히 사모하는 모양이네.”
“그러게 말이야, 부럽다.”
지나가던 선배들이 한마디씩 던지며 부러움의 시선을 레오나에게 보냈다.
그때마다 레오나는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민망했기 때문이다.
“하아, 헨리 선배가 왜 힘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네.”
이런 식의 공세가 이어질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으니까.
“레오나 경.”
선물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미첼의 오라비인 적기사단 다니엘이 다가왔다.
“마침 잘 오셨어요.”
다니엘이 레오나의 선물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미첼이 보낸 선물이로군요.”
“아시면 좀 말려주시겠어요? 보시다시피 제가 좀 곤란해서.”
“미첼의 성의를 봐서 받아주십시오. 그거라도 안 하면 그 아이 상심이 클 겁니다.”
“그래도 부담스럽습니다만.”
“그렇게 부담스러우십니까?”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매일 아침 이렇게 선물을 보내는 건 제겐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럼, 하루걸러 보내는 건 괜찮으신 겁니까?”
놀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얄밉게 말하는 다니엘의 태도가 레오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예, 안 받을 수는 없는 겁니까?”
“글쎄요. 그 아이 마음이라서요.”
“말씀 좀 드려주시죠.”
“그럴 게 아니라, 오늘 직접 미첼을 만나서 말씀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오늘 직접이요?”
레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잊으신 건 아니시죠? 미첼이 초대하면 응해주시겠다고 한 약속.”
“잊지는 않았습니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설마, 거절하시는 겁니까? 약속하셨던 것 같은데.”
레오나는 뭐 이런 사람 다 있냐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한 말이 있어서 레오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늘 가죠. 마침 오늘 훈련은 일찍 끝나니까요.”
“그럼, 끝나고 적기사단으로 와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죠.”
레오나가 대답하고 돌아서려는데 다니엘이 붙잡았다.
“레오나 경, 잠시만요.”
레오나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또 하실 말씀이라도?”
“레오나 경도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다니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부탁 하나 드려도 괜찮습니까?”
“부탁이요?”
다니엘이 뜸을 들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걱정거리가 있는 듯했다.
마침내 다니엘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미첼을 만나게 되면, 그 아이의 몸 상태를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뜬금없는 부탁에 레오나는 의아했다.
“미첼 양이 어디 아픕니까?”
“그런 건 아닌데, 혹시나 해서요. 어릴 적부터 워낙 아픈 적이 많았던 아이라, 걱정이 좀 됩니다.”
“그런 건 치료사에게 부탁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다니엘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섣불리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제가 괜한 말을 하였군요.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그럼.”
말을 마친 다니엘은 순식간에 레오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레오나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미첼 영애의 몸 상태를 살펴 달라니, 왜 그런 부탁을 자신에게 했던 것일까, 이상했다.
그리고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별일 아니겠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워낸 레오나는 걸음을 옮겼다.
* * *
오후 3시, 훈련이 일찍 끝난 레오나는 적기사단을 찾아갔다. 적기사단에서 다니엘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연무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무기를 정돈하고 있었으니까.
“훈련 끝난 겁니까?”
레오나의 말에 다니엘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웃었다.
“이제 막 끝난 참입니다. 레오나 경은 일찍 끝나셨나 보군요.”
레오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씻고 나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천천히 하십시오.”
다니엘이 씻으러 들어가자, 레오나는 적기사단을 둘러 보았다.
창기사단답게 다양한 창을 들고 훈련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파괴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 레오나의 눈에 연습용 창이 들어왔다.
‘한번 휘둘러보고 싶어.’
그러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실례가 아닐 수 없었다.
레오나는 휘둘러 보고 싶은 욕망을 누른 채 다니엘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다니엘이 말끔한 모습으로 건물에서 나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갈까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레오나는 다니엘과 함께 적기사단을 나와 마구간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마구간에서 말을 꺼내 타고 아발로인 후작저로 향했다.
* * *
아발로인 후작가의 저택은 생각보다 화려하진 않았다.
회백색의 건물에 칼같이 정돈된 정원은 저택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었다.
다니엘과 말을 타고 아발로인 후작저에 도착한 레오나는 깔끔한 외관과 칼로 깎은 듯한 정원의 단정함에 감탄했다.
“굉장히 깔끔한 정원이네요.”
“그렇습니까?”
“네.”
“이 저택은 제 아버님의 성향이 짙게 묻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후작저 저택 앞에 도착했다.
“오라버니, 레오나 경.”
이미 레오나가 집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미첼이 저택 앞에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미첼의 시선에 레오나에게 꽂혔다.
“와주셔서 기뻐요.”
미첼은 프릴이 풍성한 연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다.
“반가워요, 미첼 영애.”
레오나의 미소에 미첼이 수줍게 웃었다.
“응접실로 제가 안내할게요.”
레오나와 다니엘은 미첼과 함께 저택 안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달콤한 디저트와 티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한다고 했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맛있어 보이네요.”
“맛도 있을 거예요.”
레오나에게 칭찬을 듣고 싶은 미첼의 태도에 다니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미첼, 나는 안 보이니?”
“오라버니 아직 계셨어요?”
“뭐?”
“전 볼일 보러 가신 줄 알았죠.”
자리를 비켜달라는 미첼의 의도를 다니엘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순순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미첼, 오늘 레오나 경이 저택을 방문한 건, 네게 할 말이 있어서야.”
“알고 있어요.”
미첼이 웃으며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 경, 어서 앉으세요.”
“아, 네.”
레오나가 의자에 앉자, 다니엘도 의자에 앉았다. 그 사이에 미첼이 앉았다.
미첼은 레오나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며 가장 맛있는 디저트를 접시에 놓아 주었다.
“제가 직접 만든 에클레어예요.”
레오나는 기꺼이 그녀가 권한 디저트를 먹었다. 솜씨가 좋은지 맛은 일품이었다.
“맛있습니다.”
“아, 다행이다. 맛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 많이 했거든요. 맛있다고 해주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이것도 좀 드셔보세요.”
레오나의 칭찬에 미첼은 여러 가지 디저트를 레오나에게 권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다니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동생의 저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거북했다.
어느 정도 디저트로 배를 채우자, 레오나는 미첼에게 산책을 권했다.
당연하게도 미첼은 기쁜 듯이 응했고, 다니엘과 함께 산책하게 되었다.
레오나의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미첼의 마음을 모른 척, 다니엘은 두 사람 사이를 끼어들었다.
미첼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는 할 일이 있으시잖아요.”
“할 일 없어.”
“정말 이러실 거예요?”
“레오나 경을 만나게 해준 게 누군지 알고 말하는 거야?”
거짓말처럼 미첼의 입이 다물어졌다. 미첼이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몸을 돌린 미첼은 표정을 금방 싹 바꾸고, 레오나의 앞에 섰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산책을 했다. 그 뒤를 다니엘이 따랐다.
레오나는 미첼과 후작저의 정원을 거닐었다. 고개를 돌려 미첼을 보니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미첼 영애.”
“네, 경.”
“앞으로 제가 선물을 보내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미첼의 두 눈이 커졌다. 커다란 눈망울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것만 같았다.
“선물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고심해서 준비한 건데…….”
“그래도 매일 선물을 보내시는 건 부담스럽습니다.”
미첼은 머릿속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느낌을 받았다.
“부, 부담스러우셨다고요?”
“네.”
단호한 레오나의 말에 미첼은 충격받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경께서 부담스러워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도 당연한 것이 그동안 그녀가 선물을 보냈던 사람들 모두 선물이 부담스럽다고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고맙다며 감사편지까지 보내주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선물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해질 기회를 만들려고 했는데 레오나에겐 부담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앞으론 보내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부담스럽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된 말에 미첼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레오나 경의 기분을 생각하지도 않고 부담스럽게 만들었어요.”
한없이 땅으로 파고 들어갈 것 같은 그녀의 어깨가 레오나는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첼 영애, 제 말에 혹시 상처를 받으신 겁니까?”
그 말에 미첼이 숙였던 고개를 바짝 들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상처라니요. 전 괜찮아요.”
레오나의 눈에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애써 웃는 모습이라니.
레오나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하였다.
“미첼 영애, 왜 제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져주시는지 궁금합니다.”
미첼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멋지시니까요. 레오나 경은 제가 상상해 왔던 아주 멋진 기사분이세요.”
저렇게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저는 그렇게 멋진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요, 제 눈은 정확해요. 레오나 경은 아주 멋진 기사분이 분명해요.”
대체 저런 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선물과 편지는 이제 안 하시는 걸로 알아도 되겠습니까?”
“……네, 부담스러우시다면…….”
그때 갑자기 미첼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쪽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미첼은 반대쪽 손으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윽…….”
갑자기 미첼 영애가 비틀거리자, 레오나가 재빨리 부축했다.
“영애?”
미첼 영애가 힘겹게 말했다.
“저, 저는 괜찮아요.”
급기야 미첼 영애가 주저앉았다. 그 순간 레오나는 그녀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한 기운을 보았다.
“이게 대체…….”
미첼이 정신을 잃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다니엘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입술을 질끈 깨문 다니엘이 미첼을 받아 안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미첼을 안고 돌아서는 다니엘에게 레오나가 말했다.
“제게 영애의 몸 상태를 봐달라 하셨죠?”
다니엘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레오나의 시선이 정확히 미첼의 가슴을 향했다.
“영애의 가슴에서 사악한 기운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사악한 기운이라니.”
“못 믿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경도 알고 있죠? 제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니엘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레오나가 말을 이었다.
“영애에게서 보았던 기운은 제 신성력과는 상극입니다.”
다니엘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말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그 말을 남긴 다니엘은 황급히 미첼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본 레오나는 인상을 썼다.
‘분명 마기였어.’
미첼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려던 검은 기운, 그건 분명 마기였다.
그런데 어째서 마기가 미첼 영애의 가슴에서 나왔던 것일까, 그게 의문이었다.
하지만 더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원인을 말해줄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네.’
상대방이 알려주길 꺼려 하는데 굳이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그건 이 가문의 일일 수도 있으니까.
레오나는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오늘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으니 만족하기로 하였다.
* * *
미첼의 침실 문을 박차고 아발로인 후작이 들어왔다.
“미첼이 쓰러졌다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발로인 후작은 침대에 누워 있는 미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 다니엘!”
다니엘은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미첼이 만나고 싶어 하는 기사를 초대해 티타임을 가졌고, 산책하던 도중 쓰러졌다고.
레오나가 사악한 기운을 보았다고 했던 말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 미첼의 병이 대체 뭐죠?”
후작이 멈칫하며 다니엘을 보았다.
“병이라니?”
“아버지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오시기 전 치료사가 다녀갔습니다. 원인을 모른다고 하더군요.”
아발로인 후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병 같은 거 없다.”
“그럼, 대체 미첼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몇 번 입술을 달싹인 아발로인 후작은 다니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나가 보거라.”
“아버지!”
“나가래도!”
매서운 눈초리로 나가라고 종용하는 아발로인 후작을 바라보며 다니엘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제게 숨기시는 게 뭡니까?”
“그런 거 없다.”
“저 기억 났습니다.”
“기억이라고?”
“저희 가문에 어떤 치료사가 미첼을 치료한 직후 미첼이 건강해졌다는 걸 말입니다. 대체 그때 무슨 치료를 하신 겁니까?”
다니엘이 기억을 하고 있을 줄은 예상 못 했던 아발로인 후작은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네가 잘못 기억하는 것이다.”
다니엘의 눈에 핏발이 섰다.
“왜 제게 감추시는 겁니까! 저는 가족이 아닙니까.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발로인 후작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너는 몰라도 되는 일이다. 나가거라. 강제로 끌어내야겠느냐?”
다니엘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발로인 후작이 저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니, 별다른 수가 없었다.
다니엘이 나가자, 아발로인 후작은 미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품 안에서 펜던트를 꺼내 미첼의 가슴에 올렸다.
다니엘은 방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황금빛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건 신성력이 분명해.’
아버지인 아발로인 후작은 미첼에게 신성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레오나 경이라면…….’
정원에서 레오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미첼의 가슴에서 사악한 기운이 보였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미첼의 가슴에서 왜 사악한 기운이 보였던 것일까.
그걸 레오나라면 알지 않을까?
다니엘은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레오나를 만나 상의해 보는 것이었다.
그 방법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 * *
청기사단에 입단한 직후 리리엘은 한 번도 훈련을 빼먹은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했다.
그건 지난번 토벌 때 겪었던 경험이 컸다. 자신이 약해서 부상을 입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레오나에게 치료받는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
‘내가 레오나에게 구걸하다니…….’
처음 받아본 레오나의 치료는 그녀가 느끼기에도 대단했다.
‘그런 대단한 힘이라니…….’
마력을 가진 자신보다 훨씬 신성하게 느껴지는 힘이었다.
“왜…… 레오나에게 그런 힘이…….”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그때부터 이상했지.’
갑자기 당당해지질 않나, 자신과 어머니, 심지어 아버지에게 대들기까지 하였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뀐 것처럼.
‘진짜로 바뀐 것 아냐?’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말이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해?’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은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언제 다가왔는지 선배 재스민이 리리엘의 굳은 어깨를 두드렸다.
“아, 언니.”
재스민이 구겨진 리리엘의 미간을 검지로 펴주었다.
“뭘 그렇게 인상까지 쓰고 있어.”
리리엘은 진지한 얼굴로 재스민을 바라보았다.
“언니, 레오나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냐니, 뜬금없이 질문이 왜 그래?”
“언니도 레오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잖아요.”
“그랬지, 과거의 일이지만.”
“지금은 어때요?”
“대단하다?”
의외의 말에 리리엘의 눈동자가 커졌다.
“대단하다고요?”
“응.”
“어디가요?”
“그렇잖아, 최악의 둔재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하루아침에 대단한 기사가 되었잖아.”
“그, 그런가요.”
리리엘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재스민의 입에서 레오나의 칭찬을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리리엘, 내가 알아보니까. 신성력이라는 거 대단하더라. 직접 보니 더 그랬고. 우리 기사단 치료해 주는 거 보니까,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나뿐만 아니라, 청기사단 내에서도 레오나 경을 그렇게 생각할걸?”
재스민이 리리엘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러니, 너도 그만 내려놔.”
“내려놓으라고요?”
“우리와는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이잖아, 열 내봤자, 소용없다고.”
리리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했다.
기사단 내에서 레오나에 대한 평판이 이렇게까지 좋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깟 힘이 뭐라고…….’
리리엘은 청기사단에 입단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아버지인 칼리반 백작에게 전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합격은 당연한 것이다. 그깟 일로 축하라도 해주길 바란 것은 아니겠지?’
당연하다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식 시험도 아니고, 고작 추가 시험 합격으로 만족하는 거냐.’
추가 시험으로 합격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여서, 리리엘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적어도 축하한다 한마디 정도는 바랐지만, 아버지인 칼리반 백작은 여전히 엄격했다.
그러니까, 핏줄인 레오나를 매몰차게 버릴 수 있는 것 아니었을까?
칼리반 백작은 자신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레오나보다 재능이 있었기에 인정받은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레오나처럼 자식 취급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레오나가 자신보다 잘나가는 기사가 되었다.
레오나는 수습 3년도 거치지 않고 초고속으로 정예 기사가 되었다.
기사단 내에서 자신보다 더 인정받고 있었다.
‘이게 다 그 신성력 때문이야.’
어느 날 갑자기 레오나에게 생긴 신성력이 그녀를 정예 기사로 만들어 주었다.
‘하루아침에 그런 능력이 생긴다는 게 말이 돼?’
그것도 신성력이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이 설명이 안 된다.
‘레오나에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그게 뭘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리리엘, 훈련에 집중해.”
재스민의 다그침에 리리엘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해요. 언니. 집중할게요.”
“자, 자세를 다시 잡아봐.”
“네, 언니.”
정신을 가다듬은 리리엘은 훈련에 집중했다.
* * *
다음 날, 오후.
다니엘이 레오나에게 찾아왔다.
그는 제일 먼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레오나에게 사과했다.
“어제는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레오나가 사과를 받아주자 다니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영애는 좀 어떻습니까?”
“그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밤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다니엘의 분위기를 보아 사람 많은 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한적한 황궁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니엘이 힘겹게 용건을 꺼냈다.
“어제 미첼에게서 사악한 기운을 보았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미첼에게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아버지인 아발로인 후작이 사용한 힘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하였다.
그리고 레오나는 손끝에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레오나의 손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후작 각하께서 사용하신 것이 신성력이 맞다면 제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확인해 보시죠.”
레오나의 손을 본 다니엘의 눈이 떨렸다.
“맞습니까?”
다니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맞는 것 같습니다.”
레오나의 손에서 느껴지는 신성한 빛은 전에 아버지가 사용했던 과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아버지가 신성력을 미첼에게 사용한 것이었군요.”
레오나는 자신이 생각한 의견을 말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각하께서 신성력으로 미첼 영애의 몸 안에 있는 사악한 기운을 억누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거였군요.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악한 기운이 어째서 미첼의 몸 안에 있는 것입니까?”
“그건 저도 살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미첼 영애를 살펴보고 싶습니다만…….”
다니엘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미첼의 몸 안에 있는 사악한 기운을 없앨 수 있습니까?”
“그건 살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없는 일인지.”
“알겠습니다. 미첼이 건강을 되찾는 대로 제가 다시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다니엘이 결심한 듯 대답하자,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만남은 생각보다 빨리 성사되었다.
미첼을 3일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다니엘은 미첼과 나들이를 핑계로 외출하였다. 그리고 여관을 통째로 빌려 레오나와 만났다.
레오나를 만난다고 하니, 미첼은 당연히 좋아했다.
“건강해 보여 다행입니다. 영애.”
“염려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이렇게 다시 만나 뵐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미첼이 기쁜 얼굴로 말하자,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며 용건을 꺼냈다.
“영애, 제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시나요?”
“예, 알고 있어요.”
“그럼, 제가 신성력으로 영애의 몸을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줄 수 있어요?”
“제 몸 상태를요?”
미첼이 뜻밖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자 다니엘이 한마디 거들었다.
“지난번에 네가 쓰러진 것 때문에 걱정하셨어. 그래서 내가 부탁드렸어.”
“아, 그랬군요.”
잠시 망설이던 미첼은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좋아요. 허락할게요.”
“감사합니다, 영애. 그럼, 손을 좀 내어주시겠습니까?”
레오나가 미첼에게 손을 내밀자, 미첼은 수줍은 얼굴로 레오나에게 손을 내주었다.
“지금부터 제 신성력이 영애의 몸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느낌이 이상하더라도 참아주십시오.”
“……참아볼게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미첼의 손을 잡은 레오나는 신성력을 일으켰다.
신성력이 미첼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레오나는 미세하게 신성력을 움직여서 미첼의 몸 안을 탐색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성력이 미첼의 몸 안 곳곳을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한 심장.
두근.
레오나의 신성력이 심장에 닿자, 심장이 반응을 보였다. 거부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미첼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러자 미첼이 가슴 부근을 움켜쥐었다.
“윽.”
고통스러운 듯 미첼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레오나는 심각한 얼굴로 신성력을 거두었다. 몸 안에서 신성력이 사라지자, 미첼의 심장은 다시 얌전해졌다.
“괜찮습니까?”
레오나는 손수건으로 미첼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미첼은 상당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레오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미첼이 충격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나중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서요.”
“어떤…….”
레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다니엘을 보았다.
미첼이 가슴을 부여잡을 때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얘졌었다.
다행히 미첼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그는 안심했다.
“영애, 잠시 쉬세요. 제 부탁에 응해주어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레오나는 미첼을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러곤 슬립 마법을 걸어 그녀를 잠재웠다.
미첼이 잠이 들자, 레오나는 굳은 얼굴로 다니엘을 보았다.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미첼이 잠든 방을 나와 옆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관을 하루 통째로 빌렸기에 어느 방을 쓰던 자유였다.
“하십시오.”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충격받으실지도 모르겠군요.”
레오나는 미첼의 가슴 안에 잠들어 있던 심장을 느꼈다. 그건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절대 인간의 몸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그런 것 말이다. 엄청난 양의 마기를 품고 있는 그것은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만약, 그것이 폭주하기라도 한다면 미첼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아발로인 후작은 신성력으로 억눌러 놓은 것이다.
“준비되었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레오나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미첼 영애의 가슴에 있는 심장은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새카만 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심장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어마어마한 마기다.
그리고 그러한 마기를 심장에 담을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다.
“마족의 심장입니다.”
다니엘의 입술이 떨렸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마, 마족의 심장이라고요?”
“네. 그건 분명 마족의 것입니다.”
“그게 왜 미첼의 몸 안에…….”
레오나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어렸을 때 미첼 영애의 병이 심장과 관련이 있었습니까?”
“네, 맞습니다. 미첼은 어릴 적부터 심장이 약했습니다.”
레오나는 일의 전말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딸을 위해 아발로인 후작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첼 양의 몸에 누군가 마족의 심장을 이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네, 가능합니다. 악마와 계약한 흑마법사라면 말이죠.”
믿을 수 없는 말에 데미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충격받을 걸 알기에 레오나는 그가 정신을 추스를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후우…….”
레오나의 말을 들으니 다니엘은 어릴 적 보았던 치료사를 떠올렸다.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던 수상한 사람.
그 사람이 다녀간 이후 미첼은 건강해졌다.
‘그렇다면 그게 치료가 아니라, 레오나 경의 말대로 마족의 심장을 이식한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말이 안 된다.
인간이 어떻게 마족의 심장을 이식받을 수 있단 말인가.
다니엘은 떨리는 눈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인간의 몸에 마족의 심장을 이식해도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겁니까?”
“마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의 경우 마기가 몸 밖으로 새어 나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미첼 영애의 심장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폭주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들여 마기를 제어했다는 것이죠.”
다니엘은 제어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지난번 아버지 아발로인 후작이 미첼에게 사용했던 그 신성력, 그 힘이 마기를 제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는 느꼈던 대로 말해주었다.
“조만간, 폭주하게 될 겁니다.”
“폭주한다고요?”
“예전에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한 여인이 흑마법사에게 의뢰해, 마족의 심장을 이식받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인 어떻게 되었습니까?”
레오나는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기를 제어하지 못해 폭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인 마물이 되었습니다.”
끔찍한 이야기에 다니엘의 손끝이 떨렸다.
“그럼, 미첼도 그리될 수 있단 뜻입니까?”
레오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니엘이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바, 방법은 없는 겁니까?”
레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신성력으로 마기를 정화할 수 있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마족의 심장입니다. 정화하는 순간 심장도 가루가 될 겁니다. 그리되면 미첼 영애의 생명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가…….”
다니엘이 비틀거리며 한 손으로 벽을 붙잡았다.
미첼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잔혹했다.
“만약 마기를 계속 제어한다면, 미첼은 괜찮은 겁니까?”
“시간은 벌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언젠가 폭주하게 될 겁니다.”
“확신하시는군요.”
레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로서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첼의 몸 상태를 살펴보지 못했다면 몰랐을 일이었다.
하지만 알게 된 이상,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미첼의 마기가 폭주하게 된다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될 테니 말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미첼이 받을 충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마물이 된 아이는 주변의 지인들을 해쳤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의 손으로 지인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정신을 놓았다.
제정신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괴로움에 절규하며 폭주하였다. 그 결과 그는 스스로 목숨을 놓았다.
그렇게 죽은 아이를 정화한 것이 율리아나였다.
마족의 심장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 물건이었다. 율리아나는 살아서 맥동하는 심장을 정화하였다.
그때 느꼈던 안타까움은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도 비슷한 일을 겪게 될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단, 제 신성력으로 시간은 벌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레오나는 자신의 신성력으로 미첼의 심장을 억눌렀다.
강력한 신성력이 족쇄를 채우니 움직이려 했던 심장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일시적인 겁니다. 이 족쇄는 금방 느슨해질 테고, 그걸 풀고 마기가 움직일 겁니다. 그때 이 물을 먹이십시오.”
“이 물은…….”
“성수입니다. 신성력이 깃들어 있죠.”
다니엘이 놀란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가 말을 이었다.
“이 물을 마시면 마기가 새어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때 제게 연락을 주세요. 제가 다시 억눌러 놓겠습니다.”
“그 방법이 최선이겠죠.”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다니엘의 얼굴이 우울한 빛으로 물들었다. 동생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차근차근 진행되는 계획에 2황녀 비비안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두 개의 파편이 모였고, 나머지도 곧 모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통신 구슬이 찡하게 울렸다.
귀부인들과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던 2황녀 비비안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티타임은 멜번 백작 부인이 주최하는 모임이어서 불참할 수 없었다.
멜번 백작 부인은 사교계에서 알아주는 지식인이었다. 그녀의 해박함에 매료된 귀족들이 그녀가 주최하는 모임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썼다.
2황녀 비비안도 그런 그녀의 영향력이 탐이 나 모임에 들어가기 위해 돈을 많이 써야 했다.
왜냐하면 멜번 백작 부인의 모임에 초대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유명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친분을 쌓아 놓으면 손해 볼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모임에 참석한 것인데 연락이 온 것이다.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 들어간 2황녀 비비안은 문을 걸어 잠그고 사일런스 마법을 펼쳤다.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으로 완벽한 방음이었다.
“무슨 일이야, 아이라?”
아이라는 그녀의 수하 중 한 명인 흑마법사로 파편을 찾기 위해 보낸 수하였다.
[찾으시던 파편을 찾았습니다.]
2황녀 비비안의 눈동자가 반달처럼 휘었다.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어딘데?”
[가까운 데 있었습니다. 바로 아발로인 후작가입니다.]
“뭐라고?”
[십 년 전 아발로인 후작의 딸 몸에 마왕 벨지안의 추종자 중 한 명이 어둠의 심장을 이식했습니다.]
“그게 정말이야?”
[네, 제가 그 추종자를 찾아냈는데 그가 써놓은 일기에 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좋아, 나도 그 일기를 봐야겠어. 가지고 지하 궁전으로 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통신이 끊기자, 마법을 풀고 휴게실을 나온 2황녀 비비안은 멜번 백작 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궁으로 복귀했다.
옷을 갈아입고, 잠을 자겠다는 핑계로 시녀들을 물린 2황녀 비비안은 환영으로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침대에 눕혀 놓고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지하 궁전으로 이동했다.
지하 궁전에 도착하자, 아이라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어, 아이라.”
“아닙니다.”
“가지고 온 물건 이리 줘봐.”
“예, 주인님.”
2황녀 비비안은 아이라에게 받은 낡은 일기장을 살펴보았다.
“마왕 벨지안의 두 번째 종이 쓴 것이로군.”
일기장을 읽은 2황녀 비비안은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나는 훗날 주인님의 부활을 위해 어둠의 심장을 맡게 되었다.
어둠의 심장은 주인님이 부활하시는 데 아주 중요한 파편이다.
그리고 나는 그 파편을 심을 그릇을 마침내 찾아냈다.
아발로인 후작가의 딸, 미첼이란 소녀다. 그녀는 주인님께서 부활하시는 데 아주 적합한 그릇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해, 접근하기 쉬웠다.
자고로 자식을 살리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는 것이 부모 마음이니까.
나는 마침내 어둠의 심장을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내 생명은 다했지만, 이 일기장만은 남긴다.
주인님을 부활시킬 위대한 후손을 위해서.
후손이여, 들으라.
주인님의 파편이 모두 모이는 날, 어둠의 심장을 가진 그릇에 주인님이 부활하실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쉽도록 장치를 해놓았을 줄이야.
안 그래도 마왕 벨지안의 그릇이 필요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고맙게도 그릇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황녀 비비안은 아이라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아이라, 지금부터 너는 아발로인 후작가에 대해 조사해 내게 보고하도록 해.”
“예, 주인님.”
아이라가 사라지자, 지하 궁전에 홀로 남은 2황녀 비비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남지 않았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이 말이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을까.
* * *
다니엘은 아버지에게 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번 일은 심각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가니, 다행히 아버지는 혼자 계셨다.
“무슨 일이냐?”
“왜 그러셨습니까?”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이냐?”
아버지 아발로인 후작에게 가까이 다가간 다니엘은 이를 갈 듯 말했다.
“미첼의 심장, 마족의 심장이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아발로인 후작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발로인 후작의 입매가 굳어졌다.
“네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더 잘 알겠지.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위험한 일인 줄 아시면서 저지르셨습니까.”
다니엘이 울 듯 그를 바라보았다.
“미첼을 살릴 방법은 그게 최선이었다.”
“마족의 심장을 얻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
아발로인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아버지의 표정에서 다니엘은 알고 있음을 알았다.
“알고 계셨군요.”
“미첼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다 미첼이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발로인 후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일은 없다.”
“없다고요, 확신하세요?”
“그래, 그자가 그리 말했다.”
“그 말을 믿으십니까!”
다니엘이 소리치자, 아발로인 후작이 미간을 좁혔다.
“목소리를 낮추거라,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화가 나서 그럽니다. 제가 미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걱정 말거라. 미첼은 절대 마족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신성력만 있으면 미첼은 인간으로 살 수 있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미첼은 언젠가 마족이 될 겁니다.”
“그럴 일은 없다.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아.”
아발로인 후작의 얼굴에는 단호함이 서렸다.
다니엘은 참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제게 숨기셨습니까?”
“너는 모르길 바랐다.”
“저는 알아야 했습니다. 저는 그 애의 오라비니까요.”
“네가 충격받길 원하지 않았다.”
그건 진심이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며 다니엘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
“만에 하나, 미첼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 마기를 내뿜는다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럴 일은 없다고 했다.”
“만약이라고 했습니다. 앞일은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 가문은 살아남지 못한다. 너도 그걸 명심하고 미첼을 잘 살피거라.”
“미첼을 계속 사교계에 내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너도 알지 않느냐. 미첼이 바깥세상을 동경해 벌인 일들을.”
다니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첼이 마족의 심장을 갖게 된 후, 아발로인 후작은 미첼을 바깥세상과 단절시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미첼은 바깥세상을 동경했다. 몰래 탈출했다 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첼은 자신을 저택 안에 가둬 두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아발로인 후작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첼은 단식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미첼은 하루하루 말라갔다. 그러자 다니엘이 나서서 미첼을 옹호했다.
결국, 아발로인 후작은 져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외출 시에 반드시 호위기사를 대동할 것. 절대 혼자 다니는 짓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니엘에게 신신당부했다.
미첼을 잘 살피라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왔다.
다니엘도 어쩔 수 없음을 알았다.
“만에 하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면, 절대 다른 사람들 눈에 띄게 해선 안 될 것이다.”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그 말을 남긴 다니엘은 아버지의 집무실을 나왔다.
집무실에 혼자 남겨진 아발로인 후작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결국, 알게 되었구나.’
하지만 다니엘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
미첼을 아끼는 다니엘이라면 더더욱 이해할 것이다.
아발로인 후작은 그렇게 믿었다.
* * *
노블레스 타운에 있는 저택으로 돌아온 레오나는 침실로 들어가 그대로 몸을 던졌다.
미첼 영애의 일 때문이었다.
미첼 영애가 마족의 심장을 품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또다시 그 일이 반복되려는 건가.’
과거에서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어리석은 어미가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선택한 일.
그 일은 결국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결말을 맞이했다.
레오나는 이번 생에도 그런 일을 겪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런 일은 한 번으로 족했으니까.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한 이가 또 있을 줄이야.’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부모는 못 할 짓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것이 아닌가.
만에 하나, 미첼 영애가 인간이 아니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를 위해 그녀를 정화해야 하는 것이 옳을까?
그리되면 그녀는 죽게 될 것이다. 심장이 없는 인간이 살 방법은 없으니까.
“왜 하필, 그런 일이 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성수를 주긴 했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언젠가 마기가 드러날 것이다.
최악의 상황만 아니면 좋을 뿐이다. 그건 바로 많은 사람 앞에서 마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되면 레오나는 한 명보다는 다수의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미첼 영애에게는 미안한 일이지.’
마기가 일반인에게 노출되면 매우 위험하다. 마력을 다루는 자들은 자신을 보호할 힘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마기의 공격을 피할 방법이 없다.
마기는 죽음의 힘, 산자의 생명의 갉아먹으려 드는 무시무시한 힘이다.
그렇기에 위험하다.
‘그런데 걸리는 게 있어.’
미첼의 심장이 과거에 보았던 것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아주 깊고 깊은 샘 같았어.’
마기의 샘.
그리고 그 샘은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심해처럼 깊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다.
대체 어떤 마족의 심장이 미첼의 몸 안에 있는 것일까.
‘대악마나, 마왕급이라면…….’
재앙이다.
‘대악마나 마왕급이라면 그녀 자체를 강림의 그릇으로 쓸 수도 있어.’
성서에서 본 적이 있다.
마왕이 현세에 강림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그릇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릇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가 마왕의 파편을 그릇에 심는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있으려고.’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자꾸 심각한 상황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주인님,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때마침 휴버트가 식사 시간을 알려왔다.
레오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워내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배가 부르면, 그런 생각도 안 하게 되리라.
“밥이나 먹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레오나는 침실 문을 열고 나갔다.
* * *
아스텔은 시엘과 함께 여관방을 빌려 단둘이 만났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눴다.
“아발로인 후작가 어떻게 생각해?”
뜬금없는 질문에 시엘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거긴 왜?”
“좀 아는 거 있어?”
“중립 귀족의 중심?”
“그런 거 말고, 그들 가족에 대한 거 말이야.”
시엘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뭐 알아낸 거 있구나.”
아스텔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쪽지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뭔데?”
“보고 말해.”
쪽지를 펴서 읽은 시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사실이야?”
“우리 조사원이 알아낸 정보야.”
시엘은 기가 막혔다.
“마왕 벨지안의 두 번째 종이 아발로인 후작가를 다녀갔다고? 이게 믿겨져?”
“못 믿을 건 뭐지?”
“아발로인 후작가는 청렴하기로 유명한 귀족 가문이니까. 그런 가문에 마왕 추종자가 다녀갔다니, 안 믿기지.”
아스텔은 피식 웃었다.
“제국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 네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무리지.”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시엘,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란 뜻이야.”
시엘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가 살펴봐.”
“내가 왜? 네가 하면 되잖아.”
아스텔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쉽지 않더라고. 워낙 삼엄해서, 정보원을 침투시켜 보려고 했지만, 헛수고만 했어. 너라면 가능할 것 같아서 하는 제안이야.”
“내가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야 하는데.”
아스텔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레오나가 관련된 것 같거든.”
그 말에 시엘의 눈이 커졌다.
“레오나가?”
“그래.”
“레오나가 그 집안이랑 왜 엮이는데?”
“글쎄,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신이 만들어 놓은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시엘이 화를 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신이라도 가만 안 둬! 레오나가 어떤 희생을 치렀는데 또 그런 일을…….”
“그걸 막으려면, 아발로인 후작가가 무얼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야 해.”
“마왕의 추종자가 다녀간 건 확실한 거지?”
“그래, 마왕 벨지안의 파편을 추적하던 도중 알아낸 정보니까.”
시엘의 눈빛이 달라졌다.
레오나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레오나를 두 번 다시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발로인 후작은 내가 조사해 보지.”
“그래. 너만 믿을게.”
아스텔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시엘이 강조했다.
“널 위해서 하는 게 아니야. 레오나를 위해서 하는 거라고.”
“그래, 나도 레오나를 위해서 네게 부탁하는 거야.”
“어련하시려고.”
시엘이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근데 너 언제까지 숨어 지낼 거냐? 레오나가 네가 가까이에 있다는 거 눈치 챘어.”
“너는 당연히 모른다 했겠지.”
시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연하지. 난 절대 너와 레오나를 만나게 해주고 싶진 않거든.”
아스텔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답답한 놈.”
시엘은 투덜거리며, 술잔을 비웠다.
“먼저 일어난다.”
“그러든지.”
미련 없이 등을 돌린 시엘은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아스텔은 빈 술잔을 채우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간 만나게 되겠죠. 당신은 기뻐할까요?”
그때 레오나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반가워할지, 아니면 원망을 쏟아낼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아스텔은 생각했다.
그때 광휘를 사용한 것은 레오나가 자신이 가까이 와 있음을 알아달라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의지가 그런 행동을 하게 한 것이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일로 그녀가 알아챈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보고 싶습니다, 레오나. 당신은 지금 무얼 하고 있습니까?”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그녀가 무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게 답답할 때도 있지만,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텔은 채워진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늦은 저녁, 미첼은 걱정되는 마음으로 다니엘의 서재를 찾았다.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다니엘이 소파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오라버니.”
미첼의 방문에 다니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반겼다.
“어서 와, 미첼.”
미첼은 다니엘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 어떻게 된 거예요? 레오나 경이랑 같이 있었는데 눈떠보니 제 침실에 누워 있지 뭐예요.”
“아, 그거. 네가 너무 피곤했는지 잠들어서 도통 깨어나질 않아서.”
“제가요?”
“응, 네 몸이 레오나 경의 신성력을 받아들인 걸로 네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더라고.”
미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오나 경이 그렇게 말했나요?”
“맞아. 네 걱정 엄청 하셨어.”
그 말에 미첼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제 걱정을요?”
“응,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
“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는 없는데.”
그 모습에 다니엘이 피식 웃으며 미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미첼. 내가 네 몸을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해서.”
“오라버니…….”
미첼이 다니엘을 꽉 끌어안았다.
“오라버니는 걱정이 많아.”
“내가 그런가.”
“그럼, 얼마나 내 걱정을 하는데. 미안해, 오라버니. 내가 좀 더 건강했으면…….”
“미첼, 그런 말 하지 마. 넌 건강해. 이제 아프지 않잖아.”
미첼이 해맑게 웃었다.
“응, 그건 맞아. 나 아주 건강해.”
다니엘은 그런 미첼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행복하게 웃는 미첼의 모습을 언제까지나 곁에서 보고 싶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미첼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다니엘을 보았다.
“오라버니.”
“응?”
“레오나 경, 언제 또 만날 수 있어?”
다니엘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미첼의 이마를 검지로 살짝 튕겼다.
“너 언제까지 레오나 경만 쫓아다닐래.”
“그치만 멋있는걸. 가까이서 보고 싶단 말이야.”
“너, 레오나 경이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알지?”
그 말에 미첼이 시무룩해졌다.
“알아.”
지난번에 찾아와 선물을 거절했을 때 레오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친해지고 싶단 말이야.”
“기회가 있을 거야.”
“정말?”
“그래.”
미첼이 배시시 웃었다.
“기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다니엘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말하는 미첼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