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리치 오스먼드
지하실에서 2황녀 비비안은 베논에게서 온 소식을 들었다.
거울을 통해 베논은 그녀가 기뻐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
[주인님, 파편을 찾았습니다.]
“그게 어디야?”
[동부 지역에 숨어 있는 리치가 가지고 있습니다.]
“리치라고?”
[그렇습니다.]
베논은 2황녀 비비안의 명으로 동부 지역에서 마왕 벨지안의 파편을 수색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리치를 만나 죽을 뻔했다.
간신히 탈출한 그는 리치가 마왕 벨지안의 파편으로 마물을 부리는 것을 목격했다.
[분노한 자의 피리였습니다. 그걸로 놈은 마물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2황녀 비비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리치라니, 리치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심장과 생명을 라이프 베슬에 담아 봉인 후에 영원한 삶을 사는 족속이다.
해서 모습은 뼈만 남은 존재였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마력이 대단해 위험한 자였다.
“우리 쪽으로 회유하는 건 불가능해?”
[시도했지만, 죽을 뻔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져 보고를 올리는 겁니다.]
2황녀 비비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럼, 내가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겠어.”
리치는 흑마법사에서 진화한 존재다. 그 누구를 보내도 쉽게 상대하기 어렵다.
“베논, 계속 그자를 주시해. 내가 직접 나설 테니까.”
[알겠습니다. 주인님.]
통신을 끊은 2황녀 비비안은 고민했다.
“내가 직접 나서서 무릎 꿇리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해서 리치를 꼬드겨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꽤 유용하게 쓰일지도 몰랐다.
리치도 손에 넣고, 마왕 벨지안의 파편도 손에 넣는다.
2황녀 비비안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 * *
한적한 숲속에 위치한 동굴 앞에 검은 로브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얼굴은 하얀색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고, 후드를 삐져나온 붉은 머리칵만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2황녀 비비안이었다.
지난 번 베논이 실패를 한 후, 직접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은 어두웠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클클클, 손님이 오셨구먼.”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동굴에 울렸다. 괴인은 검은 로브 자락을 질질 끌며 그녀 앞으로 나왔다.
괴인의 눈빛이 그녀를 예리하게 훑었다. 그는 그녀가 동족임을 알아차렸다.
“이런, 오랜만에 동족 냄새가 나는군.”
2황녀 비비안이 웃음을 흘리며 괴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 리치로군요.”
“리치 오스먼드라고 하지. 귀하신 동족이 여긴 어쩐 일일까?”
“당신이 가진 피리를 원해서.”
그녀의 오만함에 리치 오스먼드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웃었다.
“캬캬캬캬. 근 이백 년에 만에 듣는 신선한 말이로군.”
웃음을 거둔 리치 오스먼드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애송아, 말을 잘못하였구나. 내가 왜 그것을 네게 내어주어야 하느냐.”
“당신이 그걸 내어주어야, 우리의 목적이 실행되니까.”
“목적?”
“마왕 벨지안의 부활.”
그 말을 들은 리치 오스먼드의 눈빛에 변했다.
“마왕 벨지안을 부활시키겠다고?”
“그래, 그게 우리의 최종 목표지. 그러니 협조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리치 오스먼드가 호쾌하게 웃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져온 영상구를 그에게 던졌다.
영상구를 받은 리치 오스먼드는 영상구를 활성화시켜 내용을 확인했다.
영상구에 담긴 장면은 지하 궁전에 있는 마왕 벨지안의 부활 의식을 위해 마련된 제단이었다.
“진심이군.”
“이제야 좀 믿겠어?”
“이유가 뭐지?”
“나는 보다 더 강한 힘을 원해. 그리고 그 힘을 내게 줄 수 있는 건 마왕뿐이지.”
“클클클, 드디어 주인을 만났군. 오랜 세월 기다려 온 보람이 있어.”
리치 오스먼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니플라인 오스먼드, 위대하신 마왕 벨지안 님의 세 번째 종이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당신이 마왕 벨지안의 세 번째 종이라고?”
“그렇다. 나는 마왕 벨지안 님의 파편을 지키기 위해 리치로 살았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을 누구보다 바라고 있지.”
“그렇다면…….”
“아직은 내어줄 수가 없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지?”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
“제국의 기사들이 이곳에 온다고 하더군. 난 그들의 힘을 흡수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 피리의 힘이 필요하지.”
오랜 세월 리치로 살았지만, 그 역시 뼛속까지 흑마법사였다. 힘에 대한 갈구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좋아, 그 정도는 기다려주지.”
그녀는 흔쾌히 그럴 생각이었다.
그리고 피리를 손에 넣은 다음 리치 오스먼드를 없앨 생각이었다.
리치 오스먼드가 가진 그 힘을 차지하고 싶어졌으니까.
* * *
제국 동부 지역이 마물이 급증해 극성을 부린다는 보고가 각 기사단에 알려졌다.
각 기사단장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했다.
“동부 지역에 지원이 필요합니다. 우리 청기사단만으론 역부족에요.”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기사단장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도 빠듯합니다. 우리 구역 마물들도 만만치가 않아서 말입니다.”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적기사단은 불가능하다니 다른 기사단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아쉽네요. 다른 분들은요?”
백기사단장 데미안과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청기사단장 블레어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도와주세요. 아시다시피 저희 지역에 본 드래곤이 출현했습니다. 근접 공격에 강한 우리 기사단엔 아주 불리하죠.”
청기사단은 검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근접 공격이 강한 기사단이었다.
하지만 본 드래곤은 하늘을 날고, 원거리 브레스를 쏘며, 마법도 날린다.
청기사단엔 불리한 마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도움을 청한 것이다.
지난번 본 드래곤을 상대하다가 부상당한 단원들이 떠오르자, 다른 기사단의 지원은 꼭 필요했다.
“이번에 도와주신다면, 도움이 필요할 때 저희도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청기사단 블레어가 저자세로 나오자, 백기사단장 데미안과 흑기사단장 카이엘은 그녀를 외면하지 못했다.
“저희가 돕도록 하죠.”
백기사단장 데미안이 도움을 주겠다고 하자,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반색했다.
백기사단은 여러 번 마물 토벌로 여유가 있었다. 신성력을 가진 레오나의 활약도 컸다.
“고마워요, 데미안 경.”
그러자 흑기사단 카이엘도 손을 들었다.
“우리 흑기사단도 도움을 드리죠, 본 드래곤은 아무래도 까다로운 놈이니, 여럿이 함께 처리해야죠.”
지난번 본 드래곤 때문에 청기사단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흑기사단장 카이엘은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청기사단만으로 상대하기엔 버거운 마물이었다.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카이엘을 보았다.
“카이엘 경……고마워요.”
두 기사단이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하자, 적기사단은 미안함에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블레어 경.”
“아니에요, 적기사단에도 사정이 있는데 어쩌겠어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습니다.”
적기사단장 페이몬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적기사단이 담당하고 있는 구역의 마물도 만만치가 않았다.
이미 몇몇 단원이 부상을 입기도 하여서, 여력이 없었다.
청기사단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도 미안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 마물 토벌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 청기사단이기 때문이다.
추가 선발을 하려는 것도 그러한 영향이 컸다.
청기사단 블레어도 적기사단이 일부러 거절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적기사단 페이몬은 그 정도로 몰인정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들도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이다.
청기사단 블레어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음 안건을 꺼냈다.
“그럼, 본격적으로 본 드래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의논해 볼까요?”
“전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군요.”
적기사단장 페이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그를 붙잡았다.
“왜 일어나요?”
“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데 있어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무슨 소리예요? 이건 전략회의라고요. 세 사람보다는 네 사람의 의견을 모으는 게 더 좋다고요. 얼른 앉아요.”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게다가 페이몬 경은 거대 마물 전투에 능숙하잖아요. 경의 경험 어린 조언이 꼭 필요하다고요.”
청기사단 블레어가 그를 추켜세워주자, 적기사단 페이몬은 마지못해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칭찬에 약한 탓에 그의 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적기사단장 페이몬이 다시 착석하자,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전투에 앞서 회의를 통해 전략을 세우고 각 기사단을 어떻게 배치하는 등의 말들이 오갔다.
정오에 시작한 회의는 긴 시간 동안 이어져 해가 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백기사단으로 돌아온 데미안은 연무장에 모든 기사를 집합시켰다.
데미안의 집합 명령에 단원들이 줄을 맞춰 도열했다.
단상에 오른 데미안은 단원들을 쭉 훑어보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였나?”
부단장 란젤로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두 모였습니다.”
데미안은 단원들의 얼굴을 두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청기사단을 도와 동부 지역 본 드래곤을 물리치러 가게 될 것이다.”
본 드래곤을 상대한다는 말에도 단원들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들은 온갖 힘든 전투를 겪은 자들이었고, 담대했다.
하지만 준기사들만은 예외였다. 그들은 들어온 지 1년도 채 안 된 자들.
당연히 마물 토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정예 기사는 나를 포함한 20명, 준기사는 5명을 선발하겠다.”
준기사들도 간다는 말에 그들의 얼굴에 저절로 긴장이 서렸다.
데미안의 시선이 준기사들에게 향했다. 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데미안이 준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두렵나?”
준기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두렵지 않습니다.”
라파엘이 당당하게 말하자, 그의 주위에 있던 기사들도 소리쳤다.
“저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습니다.”
각각 제임스, 유릭, 말론의 발언이었다.
데미안은 그들을 제외한 다른 기사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두렵나?”
역시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 보아도 그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데미안은 알았다.
데미안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부단장 란젤로를 보았다.
“란젤로, 훈련은 제대로 하고 있나?”
란젤로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 데미안이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 그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이번 전투에는 준기사 모두를 데려가겠다.”
원래는 5명만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지레 겁을 먹은 모습을 보니 화가 났다.
백기사단은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준기사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는 성장하기 힘들다. 누구보다 독해야 한다.
데미안에 폭탄 발언에 준기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데미안은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전투에서 너희는 내가 직접 지도하겠다. 그런 줄 알고 준비하도록.”
준기사들에게 시선을 거둔 데미안은 정예 기사들을 보았다.
정예 기사들은 언제든지 출정할 수 있다는 다부진 각오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준기사들은 그런 정예 기사들을 본받아 성장해야 한다.
살아 있는 눈빛을 가질 수 있도록.
데미안은 이번에 출정하게 될 정예 기사들을 호명했다.
본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 적합한 능력을 가진 단원들로 구성해야 했다.
화력이 좋고, 민첩과 순발력이 뛰어난 자, 방패 역할을 잘하는 자로 분류하여 호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오나가 호명되었다.
미리 호명된 에드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레오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선배님,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든든한데?”
에드가를 제외한 다른 정예 기사들도 레오나에게 격려의 말을 한마디씩 건넸다.
레오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말을 받아주었다.
어디를 가도 어울리지 못했던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 *
청기사단 블레어는 진지한 얼굴로 연무장에 모인 신입 기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번에 추가 선발된 기사들이었다.
추가 선발 시험은 마물 토벌.
마법으로 만들어낸 가짜 마물을 팀을 이뤄 전략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시험 과제였다.
추가 시험에 참가한 자들은 50명.
블레어는 5명씩 조를 나눴고, 그중에서 1, 2, 3등을 차지한 조를 선발한 후, 2차 시험인 개인 전투력으로 순위를 매겨 총 10명을 선발했다.
그렇게 선발된 자들이 모두 연무장에 모인 것이다.
성별은 남자가 다섯, 여자가 다섯. 딱 절반이었다.
블레어는 그들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청기사단에 입단한 걸 축하한다.”
블레어의 격려에 그들이 환호성을 지었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준기사 제복과 검을 나누어주겠다. 호명된 사람은 앞으로 나와 받도록.”
블레어의 지시에 준기사들이 한 명씩 호명되었고, 그중에는 리리엘도 있었다.
리리엘은 드디어 청기사단에 입단했다는 사실에 감개가 무량했다.
멀리서 그녀를 응원했던 재스민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짧게 묵례로 인사를 대신한 리리엘은 단장 블레어 앞에 나와 푸른색 제복과 검을 받았다.
“그대가 이번 시험의 1등이라고 들었다. 기대가 크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리리엘은 시험에 최선을 다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두고 봐. 레오나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말겠어.’
리리엘의 눈빛이 야망으로 활활 타올랐다.
블레어는 그런 리리엘의 눈빛이 싫지 않았다. 집념이 강한 자일수록 노력을 아끼지 않으니까.
모두에게 제복과 검이 수여되자, 블레어는 깜짝 발표를 하였다.
“너희는 지금부터 부단장의 지시하에 마물 토벌에 관한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들어오자마자, 마물 토벌이라니. 준기사들이 당황했다.
그런 그들의 심리를 블레어가 모르지 않았다.
“너희는 마물 토벌을 위해 추가로 선발된 기사들이다. 하여 일주일 후에 있을 대규모 원정에 정예 기사들과 함께 출정하게 될 것이다.”
출정이라는 말에 그들은 더욱 놀랐다. 입단하자마자, 출정이라니.
블레어가 씩 웃었다.
“입단하자마자, 출정이라니 놀라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특별 선발한 이유는 마물 토벌을 위해서다. 그게 싫은 자는 제복과 검을 반납하고 나가도 좋다.”
가기 싫으면 관두라니.
그제야, 준기사들은 왜 시험 주제가 마물에 관한 것인지 이해했다.
마물 토벌을 하기 위해 추가 선발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것을.
블레어의 엄포에 준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모두 가겠다는 것으로 알겠다.”
그때 리리엘이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말해보도록.”
“대규모 토벌이라 하셨는데 다른 기사단도 함께 가는 것입니까?”
“좋은 질문이다.”
리리엘을 칭찬하며 블레어가 설명했다.
“이번 토벌엔 백기사단과 흑기사단이 함께할 것이다.”
백기사단이 나선다는 말에 리리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백기사단의 레오나는 기사도 가는 겁니까?”
리리엘의 입에서 레오나가 나오자, 블레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 레오나 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소문을 들었습니다.”
“흐음, 그래?”
“네.”
“레오나 경이 출정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선발 권한은 단장인 데미안 경에게 있으니까. 하지만 내 예상에 레오나 경은 선발되었을 것 같군.”
레오나의 능력은 특별하다.
특히 마물들에게는 천적인 것과 같은 힘이다. 그러니 블레어는 데미안이 레오나를 데려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레오나는 신성 마법으로 아군을 치유할 수 있고, 보호도 가능했다.
그런 유능한 인재를 데려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레오나가 출정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리리엘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블레어는 리리엘의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적개심? 아니면 라이벌 의식인가. 재미있군.’
하지만 그 감정에 전투에 영향을 미치면 곤란하다.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
리리엘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아직 서툰 면이 있었다.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부단장에게 따로 일러 가르치라 해야겠어.’
리리엘 같은 인재가 성장하여, 청기사단에 도움이 된다면 그건 매우 기쁜 일이다.
하지만 감정만 앞세운 채 과다한 의욕으로 아군에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건 반드시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출정은 일주일 후다. 모두 차질 없도록 준비에 임하도록.”
“예, 단장님.”
준기사들이 한목소리도 대답하자, 블레어는 흡족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나머지는 부단장이 저들을 가르칠 것이다.
돌아가기 직전, 블레어는 부단장에게 리리엘에게 절제하는 법에 대해 가르칠 것을 지시했다.
리리엘이 잘 따라와 주길 바랐다. 게다가 서신으로 칼리반 백작이 그녀에게 리리엘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칼리반 백작이 직접 가르쳤다고 하니, 기대가 되는군.’
부디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기를 바랐다.
* * *
출정 준비를 앞둔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의 부름을 받아 라일락 궁을 찾았다.
“레오나 경.”
레오나를 발견한 다이앤 황녀가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예는 되었어요. 일어나요.”
“예, 전하.”
다이앤 황녀는 레오나의 손을 잡고 후원으로 이끌었다. 후원엔 가볍게 티타임을 즐길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곧 출정한다고 들었어요.”
“네, 전하.”
“오라버니한테 듣기론 굉장히 위험한 마물이라고 하던데…….”
레오나를 바라보는 다이앤 황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저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단장님과 다른 기사분들도 함께 가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다이앤 황녀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드릴게요.”
“이건…….”
“제가 직접 만든 파스망트리예요.”
다이앤 황녀가 건넨 파스망트리는 레오나의 머리 색과 같은 하늘색이었다.
“무사히 돌아오시라는 염원을 담아 만들어봤어요. 부적이라 생각하시고 지녀주세요.”
“감사합니다, 전하.”
황녀가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고 하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다이앤 황녀가 레오나의 두 손을 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그러겠습니다, 전하.”
레오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빙그레 웃은 다이앤 황녀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이런, 차가 다 식겠어요. 특별히 준비한 건데 얼른 들어요.”
“전하께서도 드십시오.”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가 먼저 차를 마시는 것을 본 후에 자신도 찻잔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말을 하는 쪽은 다이앤 황녀 쪽이었고, 레오나는 맞장구를 쳐주거나 들어주는 쪽이었다.
그렇게 티타임이 무르익어갔다.
* * *
동부 지역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각 기사단은 각자 출발하여 동부 지역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레오나는 오랜만에 준기사 동기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뻤다.
“레오나, 나 은근 긴장되는 거 있지.”
제임스가 긴장한 얼굴로 말하자, 레오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이해된다. 거대 마물은 처음일 테니까.”
“본 드래곤이라고, 말로만 들어봤던 마물을 직접 상대하러 간다니, 다리가 다 떨린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제임스의 말에 말론과 유릭이 거들었다. 그들도 제임스만큼이나 긴장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준기사 전체가 긴장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런 그들이 한심해 보였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겁들이 많군.”
그 한마디에 제임스가 눈을 흘겼다.
“미안하네, 겁이 많아서. 넌 겁 하나도 안 나서 좋겠다.”
“부럽나?”
“그래 부러워 죽겠다.”
“부러우면 정진하면 된다.”
“그걸 누가 몰라서 안 하냐.”
두 사람의 눈빛에 불꽃이 튀었다.
보다 못한 말론이 끼어들었다.
“야야, 그만들 해. 그러다 싸우겠다.”
레오나는 투덕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웃음이 났다.
하지만 웃음은 거기까지였다. 단장 데미안이 나왔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등장하자, 떠들던 사람들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데미안은 모인 인원을 확인했다.
“다 모인 것 같으니 출발하도록 하겠다. 란젤로 뒷일을 부탁한다.”
“염려 마십시오.”
부단장 란젤로에게 격려의 말을 건넨 데미안은 기사들을 이끌고 출발했다.
란젤로는 출정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무사 귀환을 기도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돌아오길 바라겠습니다, 단장님.’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란젤로는 남은 백기사단의 훈련을 맡게 되었다.
출정한 인원은 정예 기사 20명, 준기사 전체다.
꽤 많은 인원이 출정했지만, 지원 요청을 해올 수도 있는 일이라, 언제든지 출정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게 란젤로가 남아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란젤로는 지원 요청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단장 데미안이 지원 요청을 한다는 것은 백기사단이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 될 테니까.
‘그런 일만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단장 데미안이 함께 가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란젤로는 그렇게 믿었다.
* * *
백기사단을 포함한 출정한 기사들은 모두 차례대로 이동 마법진을 통해 동부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동 목적지는 동부 지역에 있는 도시 이브란.
이브란은 홀랜드 백작이 성주로 관리하는 곳이었다.
이브란은 목축업, 농업이 발달했고, 제국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육류와 곡식을 유통하고 있었다.
그만큼 제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한 곳에 나타난 본 드래곤이라니.
황제가 서둘러 처리하라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동부 지역의 피해가 커지면, 생산되는 식자재에 유통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이브란의 홀랜드 백작이 마련해준 공터에 막사를 치고, 준비를 하였다.
막사의 색깔도 기사단의 특징상 각각 달랐다.
백기사단은 하얀 막사, 청기사단은 푸른 막사, 흑기사단은 검은 막사였다.
그리고 각 막사에는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정중앙에 마련된 커다란 막사에 각 기사단의 단장들이 모였다.
막사 안에는 본 드래곤인 출현하는 지역의 지도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고, 지도를 살피며 전략을 의논했다.
본 드래곤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곳은 이브란을 둘러싼 숲의 중앙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직접 상대해본 청기사단의 정보였다. 그들은 숲의 마물을 처치하다가 동굴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본 드래곤을 마주쳤다고 하였다.
“일단, 우리 흑기사단이 동굴 부근을 탐색하겠습니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단장 데미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탐색한 흑기사단이 본 드래곤을 발견하면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근처에 잠복하고 있던 기사들이 본 드래곤을 물리친다.
본 드래곤의 방패 역할과 원거리 공격은 백기사단이, 근접 공격은 청기사단이 맡아 총공격을 가한다.
백기사단의 역할이 중요했다.
본 드래곤의 시야를 사로잡아,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기사단과 청기사단이 데려온 준기사들은 본 드래곤의 후방 공격을 맡았다.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데미안이었고, 정예 기사를 지휘하는 것은 에드가에게 맡겼다.
에드가는 수많은 전투에서 단원들을 지휘한 경험이 많았고, 단원들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에드가를 신뢰했다. 레오나도 정예 기사들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그렇게 작전이 완료되었다.
여독을 풀고 다음 날, 흑기사단이 본 드래곤의 근거지로 움직였다.
단장엔 카이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은밀하게 침투하여 탐색했다.
몇몇은 동굴 근처를, 몇몇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으로 들어간 것은 단장 카이엘과 몇몇 단원이었고, 동굴 밖은 시엘을 중심으로 한 단원들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을 헤치며 카이엘은 나아갔다. 어둠 속에서도 그는 눈이 밝았다.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으면, 흑기사단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어둠은 익숙한 것이었다.
동굴은 일직선으로 뻗어 있어 꽤 깊었다.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본 드래곤이 커다란 덩치를 숨을 정도로 말이다.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간 카이엘은 낯선 바람 소리를 느꼈다.
쉬이익! 쉭!
마치 무언가가 숨을 쉬는 듯한 바람 소리였다.
걸음을 멈춘 카이엘은 근처에 느껴지는 기운을 탐색했다.
마력을 운용하여 지정된 범위를 탐색하자 강렬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놈이다.’
바로 근처에서 본 드래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카이엘의 시선이 동굴 왼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카이엘은 단원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 뒤, 본인이 직접 동굴 왼쪽 벽에 몸을 붙이고 천천히 움직였다.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에 번뜩이는 붉은 눈이 보였다.
본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본 드래곤만 있는 건 아니었다.
“클클클, 손님이 오셨구먼.”
화들짝 놀란 카이엘이 고개를 홱 돌렸다.
새카만 로브를 입은 괴인이 사이하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제 발로 제물이 되려고 찾아오다니, 감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검은 로브를 입은 괴인이 양팔을 벌리자, 바닥에서 검은 넝쿨이 튀어나와 카이엘을 비롯한 단원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카이엘과 단원들은 제국의 위대한 기사들. 넝쿨쯤은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다.
괴인은 카이엘의 검에 서린 마력의 기운을 보며 눈을 빛냈다.
“기사들인가.”
“그렇다. 네놈은 누구지?”
“클클클, 나는 위대한 지배자 오스먼드다. 너희는 나의 귀중한 제물이 되어주어야겠다.”
카이엘이 검을 어깨에 걸치고 비죽 웃었다.
“누구 마음대로 제물이야.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순식간에 몸을 움직인 카이엘이 흑의 괴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괴인은 블링크로 몸을 피했지만, 그의 로브 자락은 무사하지 못했다.
카이엘의 검에 베인 로브의 가슴 부분이 갈라진 것이다.
그사이 카이엘은 단원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단원 하나가 동굴 밖으로 사라졌다.
히죽 웃은 괴인이 품 안에서 검은색의 피리를 꺼내 불었다. 기괴한 음악 소리였다.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했다.
그 소리에 본 드래곤이 움직였다. 거대한 몸집을 일으켜 괴인의 뒤에 자리 잡았다.
카이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이 본 드래곤을 부리고 있었군.”
그 말에 오스먼드가 괴소를 터뜨렸다.
“클클클, 나는 모든 마물을 내 발아래 두고 있지. 그만 죽어라.”
본 드래곤이 움직였다.
하지만 카이엘은 공격하지 않고 동굴 밖으로 은신술을 이용해 움직였다. 감쪽같은 은신술이었다.
그림자 이동술이라는 것으로 흑기사단만이 익힐 수 있는 술법이었다.
“쫓아라.”
본 드래곤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동굴 밖으로 향했다. 뼈로만 이루어진 본 드래곤은 가슴 부근에 붉은 핵이 존재했다.
붉은 핵은 본 드래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핵을 없애면 본 드래곤을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워낙 거대하고 핵을 마법으로 보호하고 있어 깨뜨리는 게 쉽지 않다.
청기사단이 실패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굴 밖으로 나온 카이엘은 잠복해 있는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본 기사들이 잠복을 풀고 나왔다.
동시에 본 드래곤이 동굴 밖으로 나왔다.
제일 먼저 데미안이 정예 기사들을 데리고 나섰다.
그다음 청기사단과 흑기사단이 합류했다. 동굴 안에서 또다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데미안과 블레어에게 가까이 다가온 카이엘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동굴 안에 본 드래곤을 부리는 괴인이 있습니다.”
“괴인이 본 드래곤을 부린다고요?”
청기사단 블레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카이엘이 재차 설명했다.
“그자가 검은색 피리로 괴상한 소리를 내자, 본 드래곤이 움직였습니다. 곧 나올 겁니다.”
카이엘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본 드래곤이 동굴 밖으로 튀어나왔다.
괴인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동굴 안에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크와아아아앙-
크게 포효한 본 드래곤이 입을 쩍 벌렸다.
브레스가 발사되었다.
브레스는 데미안이 이끄는 정예 기사단을 향해서였다.
데미안은 검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베었다. 그러자 브레스가 반으로 갈라지며 양옆으로 퍼졌다.
브레스가 막히자, 본 드래곤이 뼈만 남은 날개를 퍼덕거렸다.
엄청난 강풍이 불었다.
강풍에 기사들을 날려 보내려는 모양이었지만, 기사들은 자세를 잡고 굳건하게 강풍을 견뎌냈다.
백기사단은 실드 마법을 펼쳐 버텼고, 청기사단은 그런 백기사단의 뒤에서 굳건한 다리로 버텼으며, 흑기사단은 뿔뿔이 흩어져 강풍을 피했다.
날개를 펼친 본 드래곤이 하늘 위로 비상했다. 동시에 날개 주위로 마법진 여러 개가 나타났다.
하늘에서 마법을 퍼부을 모양이었다.
“각자 위치로!”
데미안의 외침에 기사단이 전술대로 위치를 잡아 이동했다.
“레오나!”
데미안이 부르자, 고개를 끄덕인 레오나가 앞으로 나섰다.
“앱솔루트 배리어!”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레오나는 개인의 보호가 아닌 구역 전체를 보호하는 배리어를 펼쳤다.
황금빛 막이 기사단 전체를 보호했다. 곧이어 마법이 쏟아졌다.
화염구와 낙뢰가 떨어졌다.
화염구와 낙뢰는 앱솔루트 배리어와 부딪쳐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귀청을 찢는 폭음이 울렸다.
수차례 마법을 쏟아부었음에도 소용이 없자, 본 드래곤은 화가 나 앱솔루트 배리어를 향해 몸통 박치기를 하였다.
쾅! 쾅! 쾅!
본 드래곤이 몸통 박치기를 할수록 레오나의 다리가 뒤로 밀렸다.
“지금입니다.”
레오나의 외침에 백기사단이 마법을 난사했다.
파이어볼과 윈드 커터가 본 드래곤을 움직이는 핵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법을 맞은 본 드래곤이 타격을 받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틈을 노리지 않고 기사들이 본 드래곤을 향해 총공격을 가했다.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본 드래곤이 포효했다.
그때 어디선가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신이 우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본 드래곤이 다시 한번 날개를 퍼덕여 날아올랐고, 다양한 마물 떼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준기사들을 보았다.
“너희는 마물을 맡아라.”
그런 다음 에드가를 불렀다.
“에드가, 준기사들을 도와주도록.”
준기사들이 긴장된 얼굴로 에드가를 따라 마물 떼를 맞이했다.
“에라, 모르겠다!”
제임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검을 휘둘렀다. 유릭과 말론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마물을 베었다.
“제법이군.”
눈앞에 놓인 마물을 베며, 라파엘이 칭찬하자, 제임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용기가 생겼는지 열심히 검을 휘둘러 마물을 처리했다.
제임스, 말론, 유릭, 라파엘이 앞서서 마물들을 사냥하자, 겁을 먹었던 다른 준기사들도 용기를 내어 그동안 받아왔던 훈련의 성과를 보였다.
청기사단도 준기사들을 하여금 마물을 처리하라 지시했다.
준기사들이 힘을 내어 마물들을 사냥하는 사이,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데미안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동굴 안 그자를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기사단장 블레어의 말에 두 단장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우리 청기사단이 처리하겠습니다.”
블레어가 자신 있게 말하자, 데미안과 카이엘은 그녀의 의견을 들어주었다.
“놈은 흑마법을 사용합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혹시 모르니 레오나를 데려가십시오,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어요.”
자신 있게 대답한 청기사단 블레어는 청기사단을 데리고 동굴로 향했다. 그리고 레오나를 불러 함께 이동했다.
남은 기사들은 본 드래곤과 마물들을 맡았다.
레오나가 청기사단을 따라가자, 시엘도 그녀를 따라 동굴로 움직였다.
“뭐야?”
“같이 가려고요.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을 지켜야죠.”
“내 몸은 내가 잘 지켜.”
“그래도 혹시 모르잖습니까.”
레오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려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마음대로 해, 대신 방해하지 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동굴로 들어온 레오나는 청기사단의 뒤를 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동굴 안에 괴인이 있었다.
그것도 함정을 파놓은 채.
검은 안개가 청기사단을 덮쳤다. 하지만 그들은 항마의 힘이 깃든 아티팩트를 몸에 지니고 있어 위험하지 않았다.
블레어가 이죽거리며 리치 오스먼드를 보았다.
“네놈이로군, 이 모든 일의 원흉이.”
“클클클,”
리치 오스먼드가 괴상한 웃음을 흘리며 마법을 펼쳤다.
“나와라, 스켈레톤 워리어!”
바닥을 뚫고 방패와 칼을 든 스켈레톤 수십여 구가 솟아올라 왔다.
청기사단 블레어는 가소롭다는 듯이 스켈레톤 워리어를 베었다.
그녀를 따르는 청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물 토벌인 처음은 리리엘은 당황했다. 시험으로 치른 것과 실전은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리리엘은 주눅 들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녀에겐 칼리반 백작이 직접 가르친 가전 검술이 있었다.
하지만 리리엘이 더 이상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턴 언데드.”
레오나가 외친 한마디에 주변이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무시무시했던 스켈레톤 워리어가 다시 땅으로 사라졌다.
리치 오스먼드가 감탄스러운 얼굴로 박수를 쳤다.
“호오, 신성 마법을 쓰는 자가 있었군.”
레오나의 활약에 청기사단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그중에 단장 블레어는 엄지를 추켜올렸다.
“잘했습니다, 레오나 경.”
청기사단이 레오나를 주목하자, 리리엘은 이를 꽉 깨물었다.
두 눈으로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쓰는 것을 보게 될 줄이야.
급기야 그 마법 한 방으로 스켈레톤 워리어를 정리했다. 분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클클클, 고작 스켈레톤 워리어를 처리한 것 가지고 기고만장하기는.”
리치 오스먼드가 또다시 마법을 펼쳤다.
이번엔 바닥에서 데스 나이트가 올라왔다. 데스 나이트는 상위 마물로 턴 언데드로 정화할 수 없는 마물이었다.
리리엘은 원망 섞인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가 스켈레톤 워리어를 처리하는 바람에 놈이 더 강한 마물을 불러내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러 데스 나이트의 머리를 쪼갰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데스 나이트를 움직이는 핵이 부서졌다.
당연히 데스 나이트도 소멸했다. 이는 레오나가 데스 나이트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머리를 베세요.”
레오나의 말에 청기사단이 데스 나이트의 머리를 집중 공격했다.
그 결과 아군의 피해 없이 데스 나이트를 처리할 수 있었다.
리치 오스먼드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제법이군.”
하지만 그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나를 잊은 것 아냐?”
어느새 다가온 블레어가 리치 오스먼드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리치 오스먼드의 머리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해골을 본 블레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해골?”
바닥에 떨어진 해골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웃었다.
“클클클, 난 죽지 않는다.”
목이 떨어진 몸이 저절로 움직여, 해골을 주워 다시 목에 고정했다.
그 기괴한 모습에 블레어를 비롯한 청기사단이 당황했다.
레오나만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너 리치로군.”
리치 오스먼드가 감격스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칭찬했다.
“오, 내 정체를 알아채다니, 제법이로군.”
리치란 말에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레오나 경, 방금 리치라고 했습니까?”
“네, 저자는 리치입니다.”
리치라니, 아주 골치 아픈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선 죽일 수 없겠군요.”
“놈의 라이프 베슬을 찾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걸 찾는 게 어렵다.
레오나는 청기사단장 블레어를 보았다.
“제 생각엔 이 동굴 어딘가에 있을 확률이 있습니다.”
동굴이 처박혀 살았으니, 라이프 베슬은 동굴 안엔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레오나는 과거에 상대한 리치들을 떠올렸다.
‘대개 리치들은 라이프 베슬을 멀리 떨어뜨려 놓지 않아. 자신이 머무는 장소 어딘가에 숨겨놓지.’
그 생각이 맞다면, 눈앞에 리치 또한 이 동굴 어딘가에 라이프 베슬을 숨겨놓았을 확률이 높다.
놈이 리치인 이상 이곳에 아무리 공격해도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 자와 싸우는 것은 매우 힘들다. 오히려 아군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
‘겪어봐서 잘 알지.’
레오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청기사단장 블레어에게 속삭였다.
“단장님, 여길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놈은 동굴 어딘가에 라이프 베슬을 숨겼을 겁니다. 놈을 바깥으로 유인한 다음 동굴에 폭격을 가하는 겁니다.”
레오나의 말뜻을 이해한 블레어가 눈을 빛냈다. 놈을 바깥으로 유인하고 동굴을 무너뜨린다.
라이프 베슬이 동굴 안에 있다면, 무너진 동굴에 파묻힐 것이다.
놈도 본인의 생명줄을 쉽게 찾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동굴이 무너진다 해도 라이프 베슬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리치들은 자신의 라이프 베슬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해 이중 삼중으로 보호 마법을 걸어 놓았다.
그러니 동굴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라이프 베슬은 무사할 것이다.
‘놈이 라이프 베슬을 찾는 순간 처리하면 돼.’
머릿속에 계획을 세운 레오나는 행동으로 옮겼다. 청기사단장 블레어도 레오나의 뜻이 따랐다.
“모두 후퇴!”
그녀의 후퇴 명령에 기사들이 어리둥절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청기사단장 블레어는 절대 허투루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무언가 계획이 있는 것이다. 단원들은 그렇게 믿었다. 다만 리리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장님, 왜 후퇴를 해야 합니까?”
“여기선 놈을 해치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단장 블레어는 레오나의 말을 듣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리리엘은 그것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이 모두 따르는데 그녀 혼자만 의문을 가지고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짜증 나.’
분명 본인이 활약할 기회인데 레오나 때문에 망친 기분이었다.
정말 짜증이 났다.
기사들이 모두 후퇴하자, 리치 오스먼드가 그들을 비웃었다.
“도망가는 것이냐! 그렇게는 못 한다.”
기사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리치 오스먼드가 마법을 날렸다.
검은 구체가 날아와 기사들이 향하려는 입구를 공격했다.
천장을 무너뜨려 입구를 봉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검은 구체는 목적지에 닿지 못했다.
레오나가 막았기 때문이다.
검은 구체는 레오나가 펼친 실드에 막혔다.
“얼른 나가세요.”
“고맙다.”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감사의 말을 하며 움직였다.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자, 리치 오스먼드가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너라도 먹어야겠다.”
리치 오스먼드가 새로운 언데드를 소환했다.
“나와라, 용아병. 저년을 잡아라.”
바닥에서 솟아올라온 용아병이 레오나를 공격했다.
용아병은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스켈레톤으로 웬만한 공격에도 끄떡없었다.
하지만 레오나는 반격하는 것이 아닌 피하는 것을 택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놈을 바깥으로 유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용아병이 매섭게 달려들었지만, 레오나는 다리에 신속 마법을 걸어 동굴 밖으로 향했다.
레오나가 고군분투하는 사이 먼저 동굴 밖으로 나온 청기사단장 블레어는 데미안에게 다가왔다.
“데미안 경.”
심각한 얼굴로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다가오자, 데미안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동굴 안에 리치가 있었습니다.”
“리치?”
“네.”
그러면 상당히 골치가 아프다. 그러고 보니 청기사단과 함께 갔던 레오나가 보이지 않았다.
“레오나는 어딨습니까?”
“곧 나올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오나가 동굴 밖으로 튀어나왔다. 동시에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말한 리치도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해골 병사를 거느린 채였다.
레오나는 재빨리 단장 데미안에게 달려왔다.
“단장님, 동굴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동굴을?”
“예, 동굴 안에 있던 건 리치였습니다. 분명, 놈은 동굴 안에 라이프 베슬을 숨겨놓았을 겁니다. 놈이 바깥으로 나온 지금 무너뜨려야 합니다.”
“알겠다. 내가 직접 가지.”
“저도 돕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은 레오나와 함께 리치가 나온 동굴로 향했다.
바깥으로 나온 리치는 생각보다 자신이 부리는 마물들이 고전하지 화가 났다.
‘제국군이 이렇게나 강했단 말인가. 안 되겠군.’
그는 품 안에서 검은색 피리를 꺼내 불었다. 최강의 마물을 소환하기 위함이었다.
분노한 자의 피리는 마물을 부리는 힘을 가졌다. 그 어떤 마물도 분노한 자의 피리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분노한 자의 피리는 마왕 벨지안의 힘이 깃든 파편. 마물은 마왕의 힘 앞에 무릎 꿇게 되었다.
“나와라, 마계 최강의 마물!”
커다란 붉은 마법진이 바닥을 붉게 태우려는 순간.
콰콰콰쾅!
그의 등 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데미안이 쏜 파괴의 마법이 동굴을 직격한 것이다.
동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안 돼!”
기겁한 리치 오스먼드가 괴성을 질렀다. 소환은 물거품이 되었다.
“내, 내 라이프 베슬이…….”
리치 오스먼드의 눈이 동굴을 무너뜨린 장본인에게 향했다.
“네놈 짓이구나! 용아병, 놈을 죽여라!”
용아병이 데미안을 향해 달려갔다. 데미안의 검이 용아병을 향해 춤을 추었다.
어둠 속성의 마력을 머금은 그의 검이 잔인하게 용아병을 유린했다.
단단한 용아병의 뼈는 데미안이 휘두르는 검게 쉽게 잘려나갔다.
하지만 사라진 용아병의 자리는 리치 오스먼드가 소환한 또 다른 용아병이 자리를 차지했다.
라이프 베슬을 부수지 않는 한 무한 반복이었다. 동굴을 무너뜨려 놈의 라이프 베슬을 파묻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파묻었던 라이프 베슬을 꺼내 파괴해야만 했다.
그때 시엘이 히죽 웃으며 레오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레오나, 이 공은 당신에게 줄게요.”
“뭐?”
시엘이 한 손에 든 항아리를 레오나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시엘이 씩 웃었다.
“놈의 라이프 베슬.”
레오나의 동공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동굴에 같이 들어갔던 시엘이 보이지 않았었다.
“이걸 찾아낸 거야?”
“내가 누굽니까.”
그는 추적과 암살에 탁월한 힘을 가진 자였다. 가히 세계 최강의 암살자라 할 수 있다.
레오나가 들고 있는 항아리를 본 리치 오스먼드가 화들짝 놀랐다.
“네년이 그걸 어떻게!”
레오나가 리치 오스먼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게 중요해? 이게 내 손에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냐?”
리치 오스먼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는 이내 씩 웃었다.
“너는 그걸 깨뜨리지 못한다.”
“그래? 보호 마법을 잔뜩 걸어놨나 보지?”
리치 오스먼드가 뜨끔했다.
“그런데 어쩌나, 이 분야에선 내가 좀 알아주는데.”
항아리에 손을 댄 레오나가 신성력을 움직였다.
항아리를 보호하고 있는 마법진 다섯 개가 떠올랐다. 레오나는 신성력을 움직여 마법진 하나를 손쉽게 파훼했다.
리치 오스먼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떻게…….”
“말했잖아, 내 전문이라고.”
또 하나의 마법진이 그녀의 손에 파훼되었다.
리치 오스먼드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였다.
레오나가 또 마법진을 파훼하여 두 개의 마법진이 남았을 때 리치 오스먼드가 급하게 말렸다.
“그만! 원하는 게 뭐냐!”
“네 죽음.”
레오나는 리치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리치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괴물들, 살려두면 또 어떤 악행으로 사람들을 괴롭힐지 알 수 없었다.
마법진이 또 하나 파훼되었다.
“어찌 그렇게 쉽게…….”
“파훼할 수 있냐고?”
레오나가 씩 웃었다.
“내가 그걸 알려줄 것 같냐.”
마지막 마법진이 파훼되었다.
“안 돼!”
리치 오스먼드가 절규했다.
“자, 이제 마법진은 모두 파훼됐네?”
리치 오스먼드가 경악했다.
“마, 말도 안 돼.”
레오나가 항아리를 깨뜨리는 시늉을 했다.
기겁한 리치 오스먼드가 애원했다.
“그러지 마.”
“싫은데?”
“워, 원하는 게 뭐냐?”
그는 원래 비굴한 자였다.
강자에겐 비굴해지고, 약자에겐 한없이 잔인해지는 자였다.
그만큼 생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리치가 된 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였다.
결코, 마왕 벨지안의 부활이라는 숭고한 이유 따윈 없었다.
마왕 벨지안의 종이었지만, 언제나 그를 뛰어넘기를 바랐고, 마왕 벨지안이 전쟁에 패해 사라졌을 때 누구보다 빨리 파편 하나를 건져 도망친 그였다.
2황녀 비비안이 마왕 벨지안의 부활이라는 목적으로 찾아왔을 때 솔직히 반갑지 않았다.
제국 기사들을 모조리 잡아먹고 강해진 다음, 그녀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렵게 되었다.
제국의 기사들이 생각보다 강했던 탓이다. 그들은 자신이 부리는 마물들을 처리했다.
“원하는 거 없는데?”
리치 오스먼드가 급한 마음에 품 안에서 검은 피리를 꺼냈다.
“이, 이걸 주마. 그러니 목숨만은 살려다오.”
레오나는 리치 오스먼드가 내민 검은 피리를 보았다. 상당한 마기를 품고 있는 요물이었다.
“그게 뭔데?”
“이건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다. 이것만 있으면 마물을 부릴 수가 있지.”
“그건 널 죽이고 빼앗으면 될 것 같은데?”
레오나는 망설임 없이 항아리를 던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던지려고 하는 순간 무언가에 맞은 항아리가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리치 오스먼드가 절규했다.
“안 돼!”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고, 그의 생명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검은 로브를 입은 여인이 내려섰다.
하얀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리치 오스먼드가 죽어 남기고 간 검은 피리를 주웠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리치 오스먼드의 로브 자락을 발로 짓이겼다. 그런 그녀를 레오나가 놀란 얼굴로 보더니 공격했다.
레오나가 휘두른 검이 그녀의 가슴을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가뿐하게 공격을 피하고 허공에 몸을 띄웠다.
레오나가 그녀를 쫓아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녀는 블링크로 피했고, 레오나에게 경고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너와 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또 보자고. 그리고 이건 내 선물.”
그녀가 검은 피리를 불려는 순간 데미안이 마법을 쏘았다.
그녀는 손을 휘둘러 데미안이 쏜 마법 화살을 튕겨냈다.
“이런, 귀찮은 것이 많다는 걸 깜박했네. 하지만 선물은 주고 가야지.”
그녀가 다시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바닥을 가르고 엄청난 크기에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의 파수꾼 켈베로스였다.
세 개의 머리를 가진 마수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마계의 마수였다.
켈베로스를 본 레오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검은 로브를 입은 여인이 웃었다.
“수고해. 여기서 죽으면 좋겠지만, 그렇진 않겠지.”
그 말을 남긴 그녀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것은 켈베로스였다.
리치 오스먼드가 죽은 덕분에 용아병은 사라졌고, 마물들도 기사들의 활약으로 처리되었다.
주먹을 꽉 움켜쥔 레오나가 켈베로스를 바라보았다.
“이거 제대로 엿 먹었네.”
두렵진 않았다.
다만, 화가 났다.
먹잇감을 빼앗긴 사자의 심정이 이러할까?
레오나의 앞으로 데미안과 시엘이 막아섰다.
“레오나 물러나라.”
데미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시엘도 거들었다.
하지만 레오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저도 하겠습니다.”
레오나가 그렇게 대답하자, 기사들도 나섰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이곳에 모인 각 기사단의 기사들이 모두 켈베로스를 향해 검을 들었다.
“그럼, 내가 먼저 선제공격을 할 테니, 너희는 후방 공격을 해라.”
데미안이 그렇게 지시하자,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끌어올린 데미안이 켈베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세 개의 머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데미안의 움직임을 쫓아 공격했다.
커다란 앞발이 데미안을 짓누르려는 듯 휘둘러졌다.
공격을 피한 데미안은 켈베로스의 머리 위로 도약해 왼쪽 머리 놈의 눈을 베었다.
크아아아!
왼쪽 머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에 동조한 두 개의 머리가 포효하며 데미안을 미친 듯이 공격했다.
“파이어볼!”
“워터 애로우!”
“윈드 커터!”
데미안이 놈의 시야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백기사단이 마법을 연사했다.
청기사단은 놈의 후미를 맡아 다리를 집중 공격했다.
시엘도 데미안을 도와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놈의 몸에 생채기를 내었다.
레오나도 거들었다.
레오나는 신성력이 깃든 검으로 놈의 다른 머리를 공격했다.
신성력이 깃든 검에 맞은 켈베로스의 오른쪽 머리가 펄쩍 뛰었다.
오른쪽 머리는 레오나를 향해 산성 브레스를 뿜었다.
레오나는 프로텍션으로 방어한 다음 신성 마법을 날렸다.
“홀리 애로우!”
황금빛 화살 여러 개가 놈의 이마를 강타했다. 신성력 공격이 먹혔는지 놈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순식간에 날아온 놈의 발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퍽!
“윽!”
옆구리를 맞은 레오나가 바닥을 굴렀다. 방심한 탓에 공격을 허락하고 말았다.
“젠장, 방심했네.”
입에 고인 피를 퉤 하고 뱉은 레오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시엘이 다가왔다.
“레오나, 괜찮습니까?”
“괜찮아. 얼른 놈을 쓰러뜨리자고.”
레오나가 시엘과 함께 켈베로스를 향해 가려던 순간 눈부신 빛이 터졌다.
“광휘의 빛!”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의 고리가 켈베로스를 마구잡이로 때렸다.
키에에에에에-
켈베로스가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빛의 고리가 켈베로스의 머리를 자르고 지나갔다.
레오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빛의 고리를 보았다.
시엘은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곧이어 머리를 잃은 켈베로스가 쿵 하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모두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레오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엘, 방금 그거…….”
시엘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거라니요?”
레오나가 인상을 구겼다.
“그 녀석의 마법이야.”
레오나가 그 녀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아스텔.
후배이자, 전우이자, 친구였던 소중한 사람.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살린 사람.
레오나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 아스텔이었다.
그리고 방금 펼쳐진 마법은 아스텔만이 할 수 있는 마법 공격이었다.
광휘의 빛.
아스텔이 창안하여 만들어낸 마법이었다.
그는 마력과 신성력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제 뜻대로 힘을 다룰 수 있었다.
광휘의 빛은 신성력을 압축시켜 고리 형태로 만들어내 펼치는 마법이었다.
신성국에선 그 형태가 천사의 고리 같다고 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남긴 마법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레오나는 알 수 있었다.
아스텔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결국, 그 녀석이 왔구나.’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 여자.’
리치를 죽이고 검은 피리를 가지고 사라진 여자.
그녀는 분명 흑마법사였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체형으로 봤을 때 젊은 여인인 듯싶었다.
켈베로스가 죽자, 기사들이 지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몇몇은 다친 사람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리리엘이었다.
리리엘은 마물과의 전투에서 자잘한 상처를 입었다.
가전 검술을 익혀 상당히 자신이 있었는데 첫 실전은 그녀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처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리리엘의 시선이 레오나에게 향했다.
다친 자신과 달리 레오나는 너무나 멀쩡했다.
게다가 단장 데미안의 보호와 흑기사로 보이는 남자의 보호도 받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
“리리엘, 괜찮니?”
같이 전투를 치른 정예 기사 재스민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리리엘은 애써 웃는 모습을 보였다.
“전 괜찮아요. 언니, 아니, 선배님은요?”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선배님은 너무 딱딱하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
재스민이 리리엘의 팔과 다리엔 상처를 보며 혀를 찼다.
“첫 실전이라 힘들었겠다.”
“제가 피하지 못한 탓이에요.”
“조금만 기다려, 레오나 경한테 부탁해 볼게.”
리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한테 부탁을 한다고요?”
“레오나 경, 아, 이런…… 미안.”
재스민은 레오나와 리리엘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잠시 깜박했다.
“내가 말실수를 했네. 약 가져다줄게.”
리리엘은 재스민의 손을 붙잡았다.
“언니, 레오나 언니가 상처 치료도 할 수 있어요?”
재스민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응. 기사단에선 제법 유명해.”
“그렇군요.”
리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신성력을 가진 레오나가 처음으로 부러워졌다.
‘평생 패배자로 있으면 좋았을 것을…….’
레오나는 정말 눈엣가시다.
치워버렸다고 생각하면, 다시 눈앞에 나타나고, 앞길을 가로막는다.
‘가문에서 쫓아내는 정도로 끝내면 안 되는 거였어.’
아예 세상에서 지워 버렸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진한 패배감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오나가 기사로서 잘나가는 모습을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투가 마무리되자, 레오나는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레오나는 그곳에서 리리엘을 보았다. 리리엘은 청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었다.
레오나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리리엘이 과거에 그녀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미웠지만, 지금 이곳은 전쟁터였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었다.
“치료해 줄게.”
리리엘이 레오나를 쏘아보았다.
“필요 없어.”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네 팔에 입은 그 상처 꽤 깊어서 흉터가 남을 거야. 알아 두라고.”
흉터라는 말에 리리엘의 두 눈이 흔들렸다.
흉터가 남는다는 것은 여인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리리엘은 뒤돌아서는 레오나의 손을 잡았다.
“……치료해 줘.”
레오나는 리리엘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리리엘은 레오나의 시선을 회피했다. 본인도 민망한 것이리라.
레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리엘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상처가…….’
리리엘은 상처가 빠르게 아무는 것을 바라보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겉으로 내보이진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치료를 마친 레오나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부상자들도 모두 치료해 주었다.
그렇게 이번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여인이 의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절대, 그냥 넘겨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듯싶었다.
* * *
지하 궁전으로 돌아온 2황녀 비비안은 손에 든 검은 피리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리치 같으니라고.”
마왕 벨지안에게 그런 멍청한 종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리치 오스먼드는 생각한 이상 강하지도 않았다. 그런 자에게 당한 베논이 못마땅했다.
“이 정도도 해결 못 하고 쩔쩔매는 꼴이라니.”
그에게 내려준 세례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베논이 거기까지라면, 적당히 이용하다 그에게 준 힘을 다시 돌려받는 수밖에.
2황녀 비비안은 검은 피리를 가지고 왕좌로 걸어갔다. 그리고 검은 피리를 마법진 위에 배치했다.
이제 남은 건 다섯 개의 파편뿐이다.
“서둘러야겠어.”
다른 파편도 얼른 찾아야 한다.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와 포식자의 송곳니는 마탑주 아델라가 가지고 있을 것이니 빼앗으면 되고, 나머지 세 개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대륙 곳곳에 보낸 수하들에게선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는 것만큼 답답한 것은 없었다.
“마탑주가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빼앗는 게 나을까, 아니면 다른 파편을 기다리는 게 나을까.”
2황녀 비비안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일단, 다른 파편들을 먼저 찾아내는 게 낫겠어.”
그 후에 마탑주의 것을 빼앗아도 늦지 않으리라.
“그나저나, 그 여자.”
레오나라는 여자가 영 거슬린다.
리리엘에게 레오나를 처리하게끔, 시기심을 부추겼지만, 지지부진이다.
안 좋은 소문을 내어 레오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리리엘은 실패했다.
백기사단이 가진 레오나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다.
거기다 다른 기사단까지 레오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황실 일가 또한 레오나를 신뢰한다. 레오나는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거기에 그녀가 가진 신성력은 굉장히 골치 아픈 능력이었다.
여러모로 거슬리는 존재다.
“내가 직접 나서야 하나…….”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리리엘이 질투심에 눈이 멀어 레오나를 죽이는 게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인데 말이야.”
아무래도 자신이 판을 좀 만들어 줘야 할 것 같았다.
“하여간, 정말 귀찮다니까.”
왜 이렇게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을까.
2황녀 비비안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리리엘에게 깔아줄 판을 곰곰이 생각했다.
아주 그럴듯한 제대로 된 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