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정예 기사 레오나
하루 느긋하게 휴식을 취한 레오나는 이른 아침 출근을 했다.
동료들과 오전 수련을 하고, 점심을 먹었다. 그다음 단장 데미안과 개인 면담 시간을 가졌다.
결심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동료들과 좀 더 있고 싶어 미뤄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칼리반 백작가를 상대해야 했고, 제국 전역에 뿌리내린 흑마법사의 근원을 제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힘을 얻기 위해선 공적이 필요했다. 공적을 얻으려면 정예 기사로 승급하여 활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준기사들은 정예 기사들보다 수련 시간이 길고 임무 수행은 적다. 반면 정예 기사는 임무가 먼저다. 임무를 수행하여 공적을 쌓는다. 공적이 높으면 높을수록 보상도 커진다.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려면, 출세는 꼭 필요해. 금전적인 것도 포함해서.’
공적을 쌓는다.
출세를 한다.
돈을 번다.
이 세 가지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승급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레오나는 진지한 얼굴로 데미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단장님, 저 승급 시험을 보고 싶습니다.”
“결심이 섰나?”
“네, 섰습니다.”
데미안은 레오나의 말간 금빛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던 열의가 그녀의 금빛 눈을 통해 보였다.
“좋다. 약속은 지켜야 하는 법이니까.”
지난번에 다이앤 황녀를 구한 일로 데미안은 레오나에게 언제든 승급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그걸 언제 사용하든 레오나 본인의 뜻. 그리고 자신은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
“네 승급 시험은 마물 토벌로 대신하지. 정예 기사단과 함께 마물을 토벌해라. 그들이 인정하면 너는 승급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빡센 거 아닙니까?”
농담으로 말하자, 데미안이 피식 웃었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네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판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마물 토벌에 성공한다면 그 합당한 보상금도 나오니, 네게는 더 좋은 기회 아닌가?”
그렇게 말하니, 일리가 있다.
승급 시험도 치르고, 보상도 받는다. 좋은 기회다.
“농담이었습니다.”
데미안이 다소 놀란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농담도 할 줄 아나?”
“예. 단장님은 못 하십니까?”
순간 데미안은 뜨끔했다.
그는 농담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난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주의하겠습니다.”
“주의까진 필요 없다. 그 정도로 융통성이 없진 않으니까.”
“예.”
“네 출전은 정예 기사들에게 전달하겠다. 날짜는 내일모레 아침이다. 연무장에 집합해 함께 움직이면 된다.”
“장소는 말씀 안 해주십니까?”
“아렌이라는 폐허가 된 마을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레 아침 란젤로가 이야기해 줄 거다.”
“그렇군요.”
“더 질문 없으면 이만 나가보도록.”
“예.”
레오나가 경례를 하고 단장실을 나가자, 데미안은 보던 서류를 다시 들었다.
흑기사단에서 들어온 정보를 규합해 결론을 내리고, 정예 기사들에게 임무를 하달해야 한다.
이번 마물 토벌 건도 흑기사단이 먼저 조사를 하였고, 그 정보를 백기사단에 넘겨 진행하게 되었다.
흑기사단의 주요 업무는 정보 수집과 분석, 판별이다.
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가장 먼저 알아내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흑기사단의 존재 이유다.
그러므로 흑기사단은 매우 중요한 조직이다. 그들의 정보로 각 기사단이 움직이니까.
그리고 가장 정확해야 하는 조직이기도 하다. 그들의 정보가 잘못되면 임무를 수행하는 기사들이 피해를 본다.
흑기사단과 공조를 자주 하다 보니, 데미안은 그들 존재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다른 기사단장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들 단원들이 다치지 않는 걸 최우선으로 여기니까.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다른 기사단보다 더욱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래야만 생존 확률이 올라가니까. 아무리 위험한 순간에도 생존하는 것.
그걸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백기사단은 최강이 될 수 있었다. 개개인의 능력은 물론, 정신력도 강하게 키웠다. 위기의 순간에 가장 필요한 건 강한 정신력이니까.
그 덕분에 백기사단은 그 어떤 임무에서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건 그동안 데미안의 지시에 갈고 닦은 강한 정신력 덕분이었다.
“이번 마물 토벌로 레오나의 정신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군.”
준기사로 마물 토벌에 나서는 건 레오나가 처음이었다.
마물 토벌은 정예 기사들의 임무.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레오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라면 마물들을 상대로 잘 싸울 것이다.
“얼마나 버티려나.”
정예 기사들이 인정할 만큼 버티려면 상당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하다.
마물은 두려운 외형에 흉포한 성격을 가진 괴물이다.
거인의 모습인 개체도 있고, 무리를 이뤄 떼로 덤벼드는 개체도 있다.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개체는 무리로 덤비는 놈들이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끝도 없이 덤벼들어 체력과 정신력을 갉아먹고 지치게 한다.
반면 거인형 개체는 힘을 합치면 물리칠 수 있다. 거인형은 혼자 움직이는 개체가 많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폐허가 된 마을, 아렌.
이곳에 출몰한 마물은 루마라는 마물로 낮보다 밤에 더 흉포해진다.
특징은 스무 마리씩 무리를 짓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렌에 집계된 루마의 수는 오백여 마리.
그리고 여기에 차출된 정예 기사는 레오나를 포함하며 열여섯 명이다.
1인당 서른 마리 가량을 상대해야 한다. 데미안은 충분히 처리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인원을 열다섯 명으로 정했다.
레오나가 과연 서른 마리를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정예 기사들의 발목을 잡는다면, 레오나는 승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최선을 다해 인정을 받아야 한다.
여러모로 이번 토벌은 기대가 크다. 데미안은 서류에 레오나가 마물 토벌에 참가한다는 내용을 적어 정예 기사들에게 전달했다.
* * *
아렌으로 마물 토벌을 하러 가게 된 정예 기사들은 연무장에 모여 점검을 하고 있었다.
출전 전의 무기 점검은 당연한 절차였다.
검을 닦고 있던 정예 기사 에드가가 단장에게서 전달받은 내용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 토벌에 준기사 레오나가 우리와 함께한다는군.”
에드가의 말을 옆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캘런이 받았다.
“이번 토벌로 승급 시험을 대신한다고 하더군.”
에드가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레오나가 마물 토벌에 훌륭하게 성공하면, 정예 기사가 되는 건가?”
“그렇지 않을까?”
그때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던 또 다른 정예 기사 가일이 투덜거렸다.
“난 솔직히 레오나가 우리 발목이나 안 잡으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 말에 에드가가 레오나의 편을 들고 나섰다.
“레오나의 실력, 너도 알잖아. 설마 우리 발목을 잡으려고.”
“모르지. 마물 토벌은 이번이 처음이잖아.”
캘런이 말을 이었다.
다른 정예 기사들도 캘런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레오나가 우리 발목을 잡을지, 아니면 훌륭하게 토벌을 할지.”
몇몇은 가일과 같은 생각을 몇몇은 에드가처럼 그녀의 편을 들었다.
이번 토벌에 레오나가 합류하게 되었으니, 그녀의 승급 시험 결과는 그들의 손에 달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 * *
토벌 당일 이른 아침, 레오나는 연무장으로 나갔다.
일찍 나온 탓에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오나는 선배 기사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출발을 삼십여 분 앞두고 선배 기사들이 하나둘 연무장에 모였다.
제일 먼저 에드가가 레오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레오나, 왔구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레오나는 에드가에 이어 다른 선배 기사들에게도 깍듯하게 인사했다.
몇몇은 에드가처럼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고, 캘런을 비롯한 몇몇은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에드가가 레오나를 위로했다.
“저들도 네 실력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바뀔 거야.”
“그럴까요?”
“물론이지. 그러니까 너 우리 발목 잡으면 큰일 나. 알겠냐.”
레오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발목 잡을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네 승급이 우리한테 달려 있는데.”
“물론입니다.”
잠시 후, 단장 데미안과 부단장 란젤로가 연무장에 나타났다.
“오늘 토벌은 너희들의 역량에 따라 힘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두 전원 무사 귀가를 목표로 하도록.”
데미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정예 기사들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두 출발하라.”
데미안의 명령에 레오나를 비롯한 정예 기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움직였다.
레오나는 뒤쪽에 줄을 서서 이동했다.
“레오나.”
레오나의 곁으로 부단장 란젤로가 다가왔다.
“부단장님.”
란젤로가 레오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몸조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레오나의 시선이 데미안에게 향했다.
데미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도 화답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아렌으로 향했다.
황궁에서 아렌까지는 마법진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마법진 위에 올라선 레오나는 정예 기사들과 함께 순식간에 아렌에 도착했다.
입구 앞에 도착만 했을 뿐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사악한 기운이 맴돌았다.
이번 임무에 리더를 맡은 에드가가 앞장을 섰다.
“천천히 진입한다.”
에드가의 말에 따라 정예 기사들이 마을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레오나는 그 뒤를 따랐다.
* * *
챙- 챙!
스걱, 사악.
아렌에 들어선 지 한 시간이 흐른 직후, 레오나와 정예 기사들은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마을 입구를 벗어나 도착한 광장에 모인 수백 마리의 루마 무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 형태의 마물이었는데 얼굴엔 눈도 없이 코와 입만 달려 있었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촉수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곤 했다.
그런 마물이 수백 마리였다.
루마를 본 레오나는 눈을 빛냈다. 신성국에 있었을 당시, 다양한 마물과 싸웠었다.
루마도 그중 하나였다.
‘놈들은 눈이 없어서 소리에 반응해.’
신속 마법으로 다리의 속도를 높이고, 검을 휘둘러 빠르게 놈들의 급소를 노렸다.
놈들의 급소는 배에 있는 핵이었다. 놈들의 새카만 피부에 유독 도드라지는 붉은빛이 배에 있었다.
그 부분의 핵만 제거하면 놈들은 소멸한다.
레오나는 빠르게 이동하며 앞에 있는 놈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다가 뺐다.
그다음 연결 동작으로 양옆에서 덮치는 놈들의 배를 횡으로 갈랐다.
핵이 박살 난 세 놈이 소멸했다.
신성력을 머금은 레오나의 검은 더 빠르게 놈들을 소멸시켜 나갔다.
순식간에 십여 마리의 루마가 목숨을 잃었다.
레오나의 움직임을 본 에드가는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아? 저 나이에 저런 움직임이라니.”
“대단하긴 하네.”
“그럼, 우리도 분발해 볼까.”
에드가의 검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마력 속성은 불. 그의 검에서 쏟아지는 불꽃의 향연에 루마들이 한 줌의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에드가를 시작으로 정예 기사들도 마력을 쏟아냈다.
에드가와 같은 불꽃 마법이 터지면, 반대쪽에서는 땅을 뒤집는 땅 속성 마법이 펼쳐졌다.
또 한쪽에는 물보라와 회오리가 몰아쳤다.
그 중심에서 레오나의 황금빛 검이 빛을 뿜었다.
레오나는 손아귀에 쥔 검을 힘껏 휘두르며 루마들을 베었다.
오랜만에 마물들을 상대해서 그런지 느낌이 남달랐다.
루마들은 빛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들처럼 레오나에게 덤벼들었다.
레오나가 가장 위협적이라 판단했는지, 그녀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에드가가 레오나의 옆으로 달려가 루마들을 화염 마법으로 태워버렸다.
“밤이 되기 전에 모두 처치해야 한다!”
밤이 되면 루마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진다. 루마들은 야행성이기 때문에 낮보다는 밤에 더 강했다.
“젠장, 수가 너무 많아!”
캘런이 투덜거렸다. 그럼에도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 마법은 여지없이 루마들을 난도질했다.
“힘내! 막내보다 우리가 못해서야 쓰냐.”
캘런의 시선이 레오나에게 향했다. 빠른 움직임으로 루마들을 처리하는 레오나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신성 마법을 배워 보는 건데.”
“네가, 퍽이나 배웠겠다. 읏차!”
캘런의 뒤를 공격하는 루마를 처리한 에드가가 캘런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도 분발하자고.”
“두말하면 잔소리지! 으랏차!”
캘런이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에 힘입어 다른 정예 기사들도 저마다의 기합을 지르며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전투는 해지기 직전에 끝이 났다.
“하, 젠장.”
에드가가 먼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정예 기사들이 하나둘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며 그는 동료들의 상태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두 괜찮냐?”
“걱정하지 마라. 살아는 있으니.”
“나도다.”
“죽진 않았다.”
여기저기서 농담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 피식 웃은 에드가의 시선이 레오나에게 향했다.
레오나는 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에드가는 무거운 엉덩이를 겨우 들어 올리고는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레오나, 괜찮냐?”
눈을 뜬 레오나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선배님은요?”
“나야 거뜬하지.”
레오나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대로 밤만 무사히 지나면 좋을 텐데……. 무리겠죠?”
“글쎄다. 루마들은 밤에 더 극성인 놈들이라서 말이다. 이러고 있지 말고 움직이자.”
“예.”
에드가의 독려에 숨을 고른 정예 기사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동한다.”
에드가를 필두로 정예 기사들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걸음을 옮긴 곳은 마을 회관이었다.
마을 회관은 이곳에서 가장 큰 건물로 그들이 밤을 보내기에 가장 적당했다.
이곳에 토벌을 올 때면 항상 마을 회관에서 지냈다.
일행이 마을 회관에 도착했을 때 레오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잠시만요, 선배님들.”
“왜 그래, 레오나.”
“마기가 생각보다 짙습니다.”
레오나의 말을 듣고 주위를 살핀 정예 기사들이 이상한 느낌을 알아차렸다.
유독 마을 회관 근처에만 새카만 마기가 심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그렇네.”
에드가는 가지고 온 마기 탐지 아티팩트를 꺼냈다. 동전 모양의 아티팩트에는 앞뒤로 마법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에드가가 아티팩트에 마력을 주입하자, 아티팩트에서 흘러나온 빛이 마을 회관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동전 위에 황금빛으로 숫자가 떠올랐다.
[-999]
“미친.”
평소 이곳으로 토벌을 나와 측정했던 마기의 수치는 –300을 넘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전례 없던 숫자가 떠올랐다.
“이 정도면 마왕급 아냐?”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캘런이 내뱉자, 다른 기사들도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모두 거기에만 정신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오오오오.
마을 회관 주위로 마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놀람도 잠시.
“일단, 피해!”
마기의 소용돌이가 기사들을 덮쳤다.
콰앙!
기사들이 서 있던 곳이 폭발하며 땅이 움푹 팼다.
“저길 보십시오.”
무언가를 본 레오나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소용돌이치던 마기가 걷히고마을 회관을 빼곡하게 덮고 있던 루마들이 드러났다.
“젠장.”
캘런이 욕설을 내뱉었고.
“진짜냐.”
“미친.”
“이러다 죽는 거 아냐.”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야, 온다!”
에드가가 검을 들고 나서자, 정예 기사들도 에라 모르겠다며 검을 들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캘런의 외침에 정예 기사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쥐었다.
그 모습에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선배들의 뒤를 따랐다.
곧이어 레오나를 포함한 정예 기사들은 루마들의 무리 속에 파묻혔다.
* * *
건물을 뒤덮고 있던 루마들을 절반 가까이 처리한 듯 보였다.
건물을 새카맣게 물들였던 루마들이 이제는 제법 듬성듬성해졌다.
“하, 이거 끝나기는 하는 거냐.”
캘런이 에드가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몰라. 집중해.”
“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서 캘런이 루마 두 마리를 처리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기사들이었다.
“큰일 났어. 모두 지쳤다.”
에드가의 침음에 캘런이 말했다.
“마력도 고갈된 것 같아.”
“쉬지 않고 퍼부었으니 당연해. 나도 간당간당하다.”
예상했던 루마의 수는 500마리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루마의 수는 네 배가 넘었다.
지금까지 전투하면서 절반에 가까운 루마를 죽였다. 하지만 나머지를 처치하는 동안 체력과 마력이 버텨줄지 의문이었다.
몇몇 동료들은 이미 한계였다. 실력이 좀 있다는 녀석들도 한계에 다다르는 건 시간문제였다.
여러모로 낭패였다.
“지원을 요청하자.”
캘런의 말에 에드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럴 틈이 없어.”
지원 요청을 하려면 통신을 해야 하는데 달려드는 루마들 때문에 도무지 그럴 틈이 없었다.
지금도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은 수시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상태였다.
“제기랄, 방법이 없나.”
“일단, 해 뜰 때까지만 버텨보자.”
루마들은 밤에 더욱 흉포해지는 마물이다. 해가 뜨면 그 흉포함이 사라지므로, 상대하기에 훨씬 수월하다.
“그래, 일단 버텨보는 수밖에.”
그 후에 지원을 요청하든 뭘 하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오나는 질린다는 얼굴로 루마들을 보았다.
베어내면 또 다른 무리가 달려든다. 악순환의 반복.
‘한 방에 처리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성검 에키온을 써야 한다. 최대한 숨기려고 했는데 이 외에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시간을 더 끌다간 부상자가 속출할 것이다. 이미 몇몇 선배는 지친 상태였다.
마력 고갈과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쉬지도 못하고 검을 휘둘러야 했다.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그랬다간 순식간에 루마의 무리 속에 파묻히게 될 테니까.
‘할 수 없어.’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단시간에 모두 제거한다.’
그러려면 성검 에키온의 힘이 필요하다. 성검 에키온은 모든 악의 천적.
위대한 빛의 신이 손수 빚어 만들어 내린 검이다. 성물 중의 성물.
‘휴, 어쩔 수 없어.’
지금은 동료 기사들을 위하는 게 먼저니까.
쓰던 검을 회수한 레오나는 아공간에 숨겨두었던 성검 에키온을 꺼냈다.
눈부신 새하얀 검신이 달빛에 반사되어 빛을 뿜었다.
성검 에키온을 손에 움켜쥔 레오나는 성검 에키온에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성검 에키온이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황금빛을 머금었다.
레오나는 루마들을 향해 있는 힘껏 성검 에키온을 휘둘렀다.
성검 에키온이 황금빛의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검을 타고 뻗어 나간 신성력이 사정없이 루마들을 찢어발겼다.
바닥을 박차고 공중에 몸을 띄운 레오나는 성검 에키온에 담긴 신성 마법을 펼쳤다.
“크리티컬 운즈.”
밤하늘에 나타난 황금빛 검 수백 자루가 루마들의 급소를 꿰뚫었다. 순식간에 수백의 루마가 소멸했다.
그 장엄한 광경에 에드가는 할 말을 잊었다.
그는 두 눈을 비볐다.
어느새 그를 감싸고 있던 루마들이 순식간이 소멸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수백의 루마를 향해 공격을 쏟아붓는 레오나는 신이 강림한 듯한 모습이었다.
레오나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루마들이 순식간에 소멸했다.
그 찰나의 시간에 그들을 괴롭히던 수많은 루마들이 모두 소멸해 버렸다.
레오나 한 사람이 휘두른 황금빛 검에 의해.
“에드가, 이거 꿈이냐.”
언제 왔는지 캘런이 에드가 옆에 서더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꿈이겠냐.”
“아니겠지.”
그러한 감정을 느낀 이는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정예 기사가 같은 감정을 느꼈다.
숨을 가다듬은 레오나는 성검 에키온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함께 싸우니 감회가 새롭네. 너도 그렇지? 에키온.”
우우웅.
대답하듯 성검 에키온이 울음을 토해냈다. 그때 성검 에키온이 거친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에 레오나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레오나는 몸을 날려 마을 회관 건물 지붕 위에 올라섰다.
“저건…….”
마을 너머 인근 숲에 짙은 마기 덩어리가 보였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검은 마기의 덩어리는 덩치를 불리더니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급히 건물에서 내려온 레오나는 에드가에게 달려왔다.
“선배님, 저쪽에 마기 덩어리가 있습니다.”
“뭐?”
“확실해?”
캘런이 묻자,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쪽에 있습니다.”
확신에 찬 레오나의 대답에 에드가는 급히 전열을 가다듬었다.
“확인하러 간다.”
에드가가 앞장서자, 레오나가 길 안내를 맡았고 그 뒤를 정예 기사들이 따랐다.
“정말이군.”
레오나의 말대로 마을 너머에 검은 마기의 덩어리가 보였다.
“서두르자.”
레오나와 정예 기사들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거대한 고목나무가 그들을 맞이했다.
마기는 고목나무 전체를 감싸 휘돌고 있었다.
“엄청난 위압감이야.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겠어.”
마기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캘런이 인상을 찌푸리자, 에드가가 침음을 삼켰다.
그렇다고 마기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이 마기가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제가 해보겠습니다.”
레오나가 나서자, 에드가가 인상을 굳혔다.
“위험하다.”
“괜찮습니다. 제 능력은 마기와 천적이니까요.”
레오나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에드가는 동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동료들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이걸로 신호를 보내. 구하러 갈 테니까.”
에드가가 신호탄을 건네자, 레오나는 군말 없이 신호탄을 받았다.
“염려 마십시오.”
에드가가 레오나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러자 캘런도 그녀의 반대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심해라.”
“예, 선배님들.”
싱긋 웃은 레오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곤 고목나무를 둘러싼 마기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농도가 짙은 마기는 오랜만이야.’
꿀렁이는 마기가 당장에라도 레오나를 집어삼킬 듯 너울거렸다.
프로텍션으로 신성력 방어막을 몸에 두른 레오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성검 에키온을 휘둘렀다.
마기는 고목나무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에 있는 무언가가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레오나가 휘두른 검이 고목나무를 세로로 갈랐다.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목나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 안에서 레오나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발견했다.
크르르르.
송곳니가 울음을 토해내듯 마기를 마구마구 뿜어냈다.
‘마계의 것인가?’
범상치 않은 물건임은 틀림없었다.
레오나가 송곳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퓨리피케이션.”
레오나는 손을 통해 뻗어 나온 신성력으로 정화를 시도했다.
송곳니는 신성한 빛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마기로 맹렬하게 밀어냈다. 하지만 레오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레오나는 신성력을 더욱 많이 끌어 올렸다.
파앗!
섬광이 터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정예 기사들은 눈부신 빛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파스스스.
레오나의 신성력에 마기가 정화되기 시작했다.
크기를 부풀렸던 마기는 점차 크기가 줄어들더니 이내 콩알만 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빛으로 화했다.
마기를 정화한 레오나는 신성력을 거두고 송곳니를 쥐었다.
송곳니가 레오나에게 속삭였다.
-모두 먹어치워라, 세상 전부를.
“시끄러.”
레오나가 한마디 하자, 송곳니가 파르르 떨더니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레오나는 송곳니를 쥔 채 에드가에게 다가갔다.
에드가는 얼떨떨한 얼굴로 송곳니와 레오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에드가의 뒤에 있던 정예 기사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레오나가 이렇게 뛰어난 인재였다니.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불만을 품었던 사실이 창피했다.
자신들이 얼마나 옹졸했는지 깨달았다. 레오나가 아니었다면 여기 있는 인원 몇은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레오나가 나서서 루마 무리를 처리하고, 마기도 정화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한 레오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이거 마계의 물건 같습니다.”
“그, 그래.”
에드가가 만지려고 하자, 레오나가 고개를 저었다.
“위험합니다.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혹되거든요.”
“현혹? 넌 괜찮아?”
“네. 저는 신성력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레오나의 말대로 신성력을 두른 그녀의 손에선 송곳니가 꼼짝을 못 했다.
“그렇군. 그 물건은 단장님께 전할 때까지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예. 그러겠습니다.”
레오나는 송곳니를 향해 신성 마법을 시전했다.
“홀리 체인.”
촤르르르.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쇠사슬이 송곳니를 둘둘 감았다. 조여지는 느낌에 송곳니가 부르르 떨었다.
레오나는 그것을 아공간에 보관하고는 에드가를 보았다.
“이제 되었습니다.”
“수고했다. 모두 정비하고 마을 회관으로 돌아간다.”
에드가의 지시에 정예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 이후로도 전투는 이어졌다.
숨어 있던 루마들이 모습을 드러내 기사들을 공격했다.
레오나 덕분에 마력과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던 정예 기사들은 문제없이 남은 무리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레오나, 너 정체가 뭐냐.”
뜬금없이 에드가가 물어보자,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제 정체요?”
“그래. 난 네 신성력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거라곤 예상 못 했거든.”
레오나는 검지로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과찬이세요.”
“과찬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레오나 난 널 인정한다.”
“그 말씀은…….”
“맞아. 난 널 정예 기사로 인정해.”
에드가의 말을 시작으로 그녀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기사들까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인정.”
“나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그들은 레오나를 정예 기사로 인정했다.
레오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인정을 받아들였다.
* * *
아렌으로 파견 나간 기사들이 복귀한다는 소식이 데미안에게 전해졌다.
이번 토벌은 레오나가 정예 기사가 될 수 있는 시험이기도 하였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스케일이 다르다.
“한 방에 수백의 루마를 소멸시켰다라…….”
이번 토벌의 리더인 에드가가 보내온 정보였다.
레오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상의 활약을 보였다.
“더 강해졌다는 건가.”
혼자서 수백이 넘는 루마 무리를 처리했다. 그 광경을 정예 기사들 모두가 두 눈으로 목격했다.
“크게 한바탕했군.”
그 자리에 있던 정예 기사 모두 충격을 받았으리라. 레오나가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을 테니까.
모두가 레오나를 인정했다.
하루라도 빨리 레오나를 정예 기사로 승급시켜 달라고 에드가가 요청했다.
“돌아오면 시험해 봐야겠군.”
레오나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가늠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데미안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 * *
아렌으로 마물 토벌을 하러 갔던 정예 기사들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 귀환을 하였다.
이동 마법진을 통해 기사단으로 돌아오니, 단장인 데미안과 부단장 란젤로가 연무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예 기사 열여섯 명 외 준기사 한 명의 무사 귀환을 보고드립니다.”
에드가가 한쪽 무릎을 꿇자, 이어서 다른 정예 기사들과 레오나도 부복했다.
그들을 바라보며 데미안은 치하했다.
“수고했다. 일어나도록.”
“충!”
기합과 함께 레오나와 정예 기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는 들었다. 전원 다치지 않아 다행이군.”
그러며 데미안은 레오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오나, 앞으로 나오도록.”
“예, 단장님.”
레오나가 앞으로 나오자, 데미안이 정예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다시피 이번 토벌은 레오나의 승급 시험 과제이기도 했다. 전원 평가를 들어보도록 하지.”
제일 먼저 리더인 에드가가 나섰다.
“레오나는 훌륭하게 이번 임무를 마쳤습니다. 저는 레오나의 승급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에드가에 이어서 불만이 많았던 캘런도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처음엔 못마땅했지만, 제 눈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의 없습니다.”
에드가와 캘런의 대답을 시작으로 단원들이 하나같이 모두 레오나를 인정했다.
“모두 이의가 없는 모양이군.”
모두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 정예 기사로의 승급을 축하한다.”
데미안이 선언하자, 레오나는 모두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임무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오나의 당찬 포부에 정예 기사들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란젤로, 그걸 레오나에게 주게.”
“예, 단장님.”
란젤로가 레오나가 미리 준비해 온 새 제복과 검을 주었다.
“레오나, 정예 기사가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한다.”
란젤로의 치하에 레오나는 기쁜 얼굴로 제복과 검을 받았다.
정예 기사의 제복은 준기사의 제복과 달리 특별한 기능이 있었다.
바로 제복에 마법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물리 방어력과 마법저항력을 높여주는 마법이었다.
이는 전투 시에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는 이점이 있었다. 정예 기사가 되면 본격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는 노릇이어서, 백기사단정예 기사의 제복에는 마법이 부여되어 있다.
제복의 디자인은 준기사 제복과 비슷하지만, 엠블럼과 단추 색이 달랐다.
준기사는 은색, 정예 기사는 금색의 엠블럼과 단추가 달렸다.
이제부터는 준기사가 아니라 정예 기사가 된 것이다. 초특급 승급이 아닐 수 없었다.
레오나는 선배들이 자신을 인정해 줬다는 사실에 무척 기뻤다.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었다.
‘레오나, 드디어 너도 정예 기사가 되었어. 네가 바라던 기사 말이야.’
떠나고 없는 레오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너 대신 내가 꿈을 이뤄주었노라고.
그리고 네 몫까지 기사로서 행복하게 살아주겠노라고.
레오나가 기뻐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식 서임은 내일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해주실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레오나는 정식으로 백기사단의 정예 기사가 된다.
가슴이 설레었다.
“모두 그만 쉬도록.”
데미안은 정예 기사들에게 해산을 지시했고, 레오나에게 눈빛을 보냈다.
“레오나, 날 따라오도록.”
“예, 단장님.”
레오나는 데미안과 함께 단장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와 단둘이 독대를 하였다.
아렌에서 가지고 온 송곳니 때문이었다.
레오나는 아공간에서 조심스럽게 송곳니를 꺼내 데미안에게 보여주었다.
신성 마법으로 제압해 놓은 송곳니는 끈질기게 반항하고 있었다.
“이게 거기에 있었다고?”
“네, 엄청난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그걸 네가 정화했고?”
레오나는 수줍게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확실히 이 세상 물건은 아닌 것 같군.”
“네, 이게 대체 뭘까요?”
“흐음……. 이건 따로 알아봐야 할 것 같군. 내가 보관하지.”
데미안은 서랍에서 검은색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건.”
“항마의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다. 여기에 넣도록.”
데미안이 상자를 열자,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송곳니를 상자 안에 넣었다.
상자를 닫은 데미안은 그것을 본인의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레오나, 수고했다.”
“아닙니다.”
“정예 기사가 된 걸 다시 한번 축하하지. 앞으로 잘해보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네.”
레오나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했다.
단장실을 나오자 부단장 란젤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단장님.”
“그래, 단장님과 이야기는 잘 끝냈어?”
“네.”
“그럼, 가자.”
“어디를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자, 란젤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디긴. 새로 배정된 네 숙소로 가는 거지.”
“새로 배정된 숙소요?”
“그래, 너 승급했으니까. 정예 기사단 숙소로 옮겨야 해.”
“아…….”
“얼른 가자.”
“저, 부단장님. 내일 옮기면 안 될까요? 저 아직 동기들과 인사도 못 했거든요.”
서두르던 란젤로가 레오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어쩔 수 없지. 난 내일 외부에 볼일이 있어서 안내해 줄 수 없으니, 에드가한테 말해놓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빙그레 웃은 란젤로가 레오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정예 기사가 된 걸 축하한다. 앞으로 많이 힘들 거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자세가 좋네. 그럼, 쉬어라.”
“예, 부단장님.”
란젤로와 헤어진 레오나는 곧장 동료들을 만나러 갔다.
동료들은 숙소 건물 1층 휴게실에 모여 있었다.
준기사들 전부가 그곳에 모여 레오나를 반겼다.
제일 먼저 레오나에게 다가온 사람은 라파엘이었다.
“레오나, 정예 기사가 되었군.”
라파엘이 분하다는 얼굴로 표정을 굳혔다.
“나도 최대한 빨리 정예 기사가 될 거다. 기다려라.”
“어, 그래. 얼른 돼라.”
“네가 정예 기사가 되었어도 넌 여전히 내 라이벌이다. 잊지 마라.”
레오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라파엘의 뒤에서 제임스가 나타나 레오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레오나, 너 우리보다 상급자 되었다고 무시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별걱정을 다한다.”
“아니면 다행이고.”
제임스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척 연기를 했다.
“흑,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니.”
“이제 레오나는 우리랑 같이 밥도 못 먹고, 선배님들이랑 함께하겠지.”
제임스에 이어서 유릭이 말을 이었다.
말론도 한마디 했다.
“너 우리 잊으면 안 된다.”
“나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 아니거든? 너희는 영원한 내 동료라고. 설마 내가 정예 기사가 되었다고 같이 술도 안 마셔주고 어울려 주지 않을 생각이야?”
그 말에 제임스가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어울려줘야지. 안 그러냐, 애들아.”
제임스가 동기들을 바라보며 묻자 라파엘이 말했다.
“당연한 소릴 하는군.”
“그래, 어떻게 레오나를 빼놓을 수 있겠어.”
유릭이었다.
“레오나, 나도 동감이다.”
다음은 말론이었다.
이어서 다른 준기사들도 레오나에게 다가와 축하의 말과 인사를 건넸다.
레오나는 이런 동기들의 환대와 훈훈한 분위기에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레오나는 오늘 밤이 동기들과 같은 숙소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럴 줄 알았다며, 제임스가 준비한 게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레오나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서니 향기로운 고기 냄새가 풍겼다. 제임스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오늘 내가 네 준기사 졸업을 축하해 주려고, 요리장한테 특별히 부탁했다.”
“제임스!”
레오나가 제임스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냐.”
레오나는 제임스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 그만.”
겨우 레오나의 손에서 벗어난 제임스가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하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아무튼 오늘은 우리 모두 즐기자고.”
“물론이지!”
동기들이 기쁜 얼굴로 외치자, 제임스가 레오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 앉으실까요. 정예 기사님?”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기꺼이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고기 파티가 시작되었다.
고기는 제임스가 공수했고, 요리장에게 요리를 부탁했다고 했다.
맥주도 빠지지 않았다.
과하지 않을 정도로 먹고 마시며, 레오나는 모두의 환대 속에 준기사 졸업식을 마쳤다.
단장인 데미안과 부단장 란젤로가 묵인한 밤이었기에 준기사들은 레오나를 마음껏 축하해 줄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술에 취한 레오나는 식당을 나와 동료들과 연무장에 드러누웠다.
이곳에서 동료들과 처음 만났고, 수련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같이 술도 마시고, 시답지 않은 대화도 많이 나눴다. 그 모든 일상이 레오나에겐 평화로움이었다.
결코 잃고 싶지 않은 그런 나날들이다. 비록, 레오나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그녀도 이러한 삶을 꿈꿨을 것이다.
인정받고, 동료들과 우정을 쌓으며 함께 전투하고 나아가는 것.
예전의 레오나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레오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 대신 내가 행복하게 살아줄게.’
그녀가 이루지 못했던 목표를 이뤄주고 살아가는 것.
이제는 그 누구도 레오나를 손가락질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거니까. 아니,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더 이상 칼리반 백작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겪었던 불행의 고리를 완전히 끊을 것이다.
‘정예 기사가 되었어.’
오늘 밤이 지나면 달라진 환경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 * *
“……이로써 그대를 제국의 정예 기사로 임명하는 바이다.”
제국의 상징이라 불리는 검을 들고 황제가 직접 레오나에게 세례를 내렸다.
“충성을 다해 제국을 지킬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레오나의 맹세에 황제는 흡족하게 웃으며 기사 서임을 마무리 지었다.
“정예 기사가 된 것을 축하한다, 레오나 경.”
“감사합니다, 폐하.”
레오나가 정중하게 예를 올리자, 황제는 온화하게 웃으며 레오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겠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사 서임이 마무리되자, 레오나는 황후와 다이앤 황녀의 오찬 초청을 받았다.
“축하해요, 레오나 경.”
“축하합니다, 레오나 경.”
다이앤 황녀와 황후가 번갈아 가며 레오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과분한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다이앤 황녀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으로 기사단 제복을 입은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레오나 경은 제복이 정말 잘 어울려요.”
“그렇습니까?”
“멋있어요, 안 그래요. 어마마마?”
다이앤 황녀가 황후를 바라보자, 황후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란다.”
레오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시선을 회피했다. 부끄러웠다.
“레오나 경, 이것 좀 드셔보세요. 제가 특별히 황실 요리사한테 부탁한 요리예요.”
다이앤 황녀가 건넨 요리는 버터를 발라 구운 랍스터였다. 그녀는 직접 랍스터의 살을 발라 레오나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레오나는 사양하지 않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 사르르 녹는 것이 정말 맛있었다.
“전하께서도 드십시오, 정말 맛있습니다.”
“레오나 경, 이것도 좀 들어요.”
이번엔 황후가 직접 연어 스테이크를 잘라 레오나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레오나는 연어 스테이크를 레몬소스에 찍어 입에 넣었다.
상큼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감돌아 입맛을 돋우었다.
그때 다이앤 황녀가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전하? 제가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실은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이요?”
다이앤 황녀가 해맑게 웃으며 레오나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제가 요즘 그림 그리는 것에 빠져 있거든요.”
“그러시군요.”
“그래서 말인데, 경이 제 모델을 해주실 수 없을까요?”
레오나가 놀란 눈으로 다이앤 황녀를 보았다.
“제가 모델을요?”
“네, 저 경을 그리고 싶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부탁하는 다이앤 황녀를 보니, 도저히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모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전하.”
“정말이죠?”
다이앤 황녀가 기쁜 얼굴로 되묻자, 레오나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일 내로 준비한 다음 서신을 보낼게요.”
“그러십시오.”
다이앤 황녀는 레오나의 허락에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하였다.
그런 다이앤 황녀를 바라보는 황후도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다이앤 황녀가 지금처럼 활기차진 것은 모두 레오나가 저주를 물리쳐준 덕분이었다.
레오나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밝은 모습의 황녀를 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레오나 경,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게 말해요.”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황후 폐하.”
다이앤 황녀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한테도 꼭 말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전하.”
다이앤 황녀가 밝게 웃으며 디저트를 권했다.
“제가 만든 케이크인데 먹어봐요.”
“이걸 직접 만드셨습니까?”
레오나가 놀란 얼굴로 다이앤 황녀를 보았다. 케이크가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상큼한 과일이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였는데 부드러운 크림과 신선한 과일의 조화는 레오나가 좋아하는 조합이었다.
“맛있습니다, 전하.”
그 말에 다이앤 황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오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오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레오나는 황태자를 만났다.
황태자도 레오나가 정예 기사가 된 것을 축하해 주었다.
“레오나 경, 아바마마께서 무척 기뻐하시더라. 경이 정예 기사가 된 게 무척 기꺼우신가 봐.”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경, 힘내. 데미안 단장이 아주 독하다고 들었거든.”
레오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황태자는 몇 마디 격려의 말을 건네고는 갈 길을 갔다.
그리고 레오나는 백기사단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연무장에서 단장인 데미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연무장 주위에 선배 기사들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레오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오나?”
“그렇습니다만, 기다리셨습니까?”
피식 웃은 데미안이 검을 들고 연무장에 올라섰다.
“올라와 검을 잡도록.”
“예?”
데미안이 어서 올라오라는 듯 턱짓하자, 레오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당당한 걸음으로 연무장 위에 올라섰다.
“신고식이다. 검을 뽑아라.”
데미안의 말에 선배 기사들이 레오나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다.
“레오나, 힘내라.”
“응원하마.”
데미안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준비되었으면 와라.”
짧게 심호흡한 레오나는 검을 뽑아 겨눴다.
“사양 않고 가겠습니다.”
레오나가 바닥을 박찼다. 그녀의 눈빛이 고요하게 빛났다.
그 눈빛을 마주한 데미안의 입가가 미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레오나는 짧은 기합과 함께 데미안에게 짓쳐 들었다.
후웅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궤적이 최단거리로 데미안의 허리를 노렸다.
그러자 데미안의 검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레오나의 검을 막아냈다.
아니, 막혔다고 생각한 순간 레오나의 검이 튕겨 나갔다.
뒤로 공중제비를 돈 레오나는 침착하게 균형을 잡고는 몸을 회전시켜 빠르게 데미안의 다리를 노렸다.
“제법이군.”
칭찬과 함께 데미안이 반격했다. 데미안은 검의 손잡이로 레오나의 검을 막고 발을 들어 복부를 걷어찼다.
레오나는 빠르게 뒤로 피했다. 하지만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던 탓에 복부에 그 충격이 닿았다.
조금만 피하는 게 늦었어도 복부에 데미안의 발자국이 남았을 것이다.
뒤로 밀려난 레오나는 다시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다리에 힘을 모아 쏘았다.
쏜살같이 달려나간 레오나의 검이 기묘하게 휘어지며 데미안의 목을 노렸다.
데미안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레오나의 검을 튕겨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역시 만만치 않단 말이야.’
지금은 그보다 한 수 아래란 사실을 실감했다. 데미안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단련하다 보면 그를 따라잡을 일이 있으리라.
“레오나, 전력을 다해라.”
빙그레 웃은 레오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데미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덤비기로 하였다.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레오나가 공격하는 쪽이었고, 데미안이 방어하는 쪽이었는데, 그는 제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레오나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그래서 레오나는 오기가 생겼다.
“후우.”
숨을 가다듬은 레오나는 황금빛 눈을 치켜뜨며 데미안의 지척까지 파고들어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역시나 데미안의 검이 레오나의 검을 막아내려는 순간, 레오나가 검을 뒤틀었다.
유연한 움직임으로 뱀처럼 데미안의 검을 타고 들어간 레오나의 검이 그의 목을 그었다.
그에 데미안이 상체를 틀어 피하려고 하자, 레오나의 검이 따라붙어 끝까지 그의 목을 노렸다.
결국, 데미안은 뒤로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비껴간 검을 회수한 레오나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뒤로 한 발 물러서셨네요.”
그 말에 데미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법이었다.”
그 말을 남기며 데미안은 검을 거뒀다.
“정식으로 정예 기사가 된 것을 축하한다.”
레오나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무장을 내려온 레오나는 선배들의 격려를 받으며, 짐을 옮겼다.
새로 배정받은 정예 기사 숙소는 준기사들 숙소보다 두 배나 넓었다.
침대와 소파는 물론 커다란 창문과 넓은 테라스가 있었다.
욕실도 무척 넓었다.
샤워만 할 수 있었던 준기사단 숙소와는 달리, 정예 기사단의 숙소엔 욕조까지 있었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땀에 젖은 레오나는 욕조에 물을 받아 따듯하게 목욕을 하였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피곤한 하루였어.”
그렇지만 여러 사람에게 축하를 받았다. 신고식으로 치른 데미안과의 대련도 뜻깊었다.
“정말 강한 인간이야.”
그는 살면서 만난 몇 안 되는 강자 중 한 명이었다.
“뛰어넘을 거야.”
언젠간 반드시 그 인간을 이기리라.
머리를 뒤로 젖힌 레오나는 손바닥에 물을 묻혀 세수하고는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찰랑거리는 하늘빛 머리카락이허리 아래로 내려와 달라붙었다.
레오나는 긴 머리를 한 손으로 돌돌 말아 수건에 감싸 물기를 제거했다.
그리고 가운을 걸친 다음 욕실을 나와 시원하게 물 한 잔 들이켰다.
창밖을 바라보니, 새카만 밤하늘에 별이 총총 빛났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머리와 몸의 물기를 마법으로 제거한 레오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테라스로 나왔다.
넓은 테라스에는 티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테라스에 몸을 기대 바람을 느꼈다. 시원한 밤바람이 레오나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음, 시원해.”
이런 기분, 정말 좋다.
가슴이 시원해지고, 상쾌해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정예 기사가 된 걸 축하해, 레오나.”
눈살을 찌푸린 레오나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시엘이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기척 좀 내라고 했지.”
그 말에 시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안, 습관이 돼서 그만.”
배시시 웃은 시엘이 눈을 갸름하게 떴다.
“당신의 잠옷 차림을 보는 것도 꽤 신선하네요.”
금빛 눈을 부릅뜬 레오나가 슬리퍼를 벗어 시엘에게 집어 던졌다. 당연하게도 시엘은 가볍게 슬리퍼를 피했다.
그리고 애석하게 슬리퍼가 테라스 밖으로 떨어졌다. 테라스에서 뛰어내린 시엘이 레오나의 슬리퍼를 주어 다시 올라왔다.
“물건을 함부로 던지면 안 되죠.”
그러며 레오나의 맨발 앞에 슬리퍼를 놓아주었다.
레오나는 시엘을 걷어차려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앉았다.
“축하해 주러 온 거면, 축하면 해주고 가.”
“쫓아내시다니, 너무해요.”
“모르겠지만, 난 지금 무척 피곤해. 너랑 긴 대화를 할 생각이 없다고.”
곰곰이 생각한 시엘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인정합니다. 서임식이다 뭐다 하루 종일 끌려다니는 거 정말 피곤하죠. 저도 경험해 봐서 압니다.”
레오나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시엘을 보았다.
“그런 거 싫어하던 인간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정예 기사가 된 거야?”
시엘이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을 만나야 하니까요. 당신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정도 귀찮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도 정말 어지간한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해 이렇게 필사적으로 움직이다니.
어떨 때는 짠하기도 하였다.
“난 그만 들어갈래. 너도 그만 가라.”
작별을 고한 레오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시엘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쯤 그 자식도 소식을 들었겠군.’
레오나가 정예 기사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들었다면 지금쯤 아스텔은 무척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자신만큼이나 그녀에 한해서는 바보였으니까.
하지만 절대 레오나에게 아스텔에 대한 것을 알려주진 않을 것이다.
아스텔이 마음만 먹는다면 만날 수 있겠지만, 그는 아직 그럴 마음이 없었다.
완벽한 타이밍과 완벽한 순간에 짠하고 나타날 궁리를 하는 중일 테니까.
깊은 밤하늘을 바라보던 시엘은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순식간이 자취를 감추었다.
시엘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 * *
이른 아침 데미안은 아델라를 만났다. 레오나가 가져온 물건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상자를 열어본 아델라가 인상을 쓰며 물건을 보았다.
“송곳니?”
품 안에서 안경을 꺼내 쓴 아델라는 송곳니를 꺼내 살펴보았다.
손끝으로 안경의 다리 부분을 매만지자, 안경이 은은하게 빛났다.
특별한 물건을 감정할 때 쓰는 아티팩트였다.
“흐음…….”
송곳니를 확대해서 보자, 기묘한 글자가 한 줄 새겨져 있었다.
“마계의 문자야.”
기억을 더듬은 아델라가 심각한 얼굴로 데미안을 보았다.
“이걸 마물 토벌에 나갔다가 찾았다고?”
“그렇습니다.”
데미안은 송곳니를 얻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랬군, 그 아이가 큰일을 했어.”
아델라가 송곳니를 내려놓았다.
“이거 아주 위험한 물건이야.”
“짐작했습니다.”
레오나가 송곳니를 보여준 순간 위험한 물건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마계의 것 같더군요.”
“바로 봤어. 이건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야.”
아델라가 안경을 벗고는 송곳니가 들어 있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마왕 벨지안이요?”
“들어봤어?”
“조금은 압니다.”
“하긴 유명한 이야기니까.”
아델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것의 정식 명칭은 ‘포식자의 송곳니야’.”
“그럼, 천 년 전쟁에서 패한 마왕의 파편을 들고 사라졌던 종이 남긴 것일 수도 있겠군요.”
“맞아, 그중 하나야. 그리고 네가 지난번에 내게 맡겼던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도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야.”
“그렇군요.”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 나타났다는 건 안 좋은 징조인데.”
아델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데미안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파편이 다 모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델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마왕이 부활하지.”
“파편이 마왕 부활의 도구란 말씀이십니까?”
“정확히 말하면 매개체. 마왕 벨지안은 완전히 죽은 게 아니니까.”
천 년 전쟁에서 마왕 벨지안은 패했고 그의 영혼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그의 한 줌 영혼은 마계 깊은 곳에 숨었다.
숨는 과정에서 마왕 벨지안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힘이 깃든 파편을 종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언젠가 파편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날, 그 힘이 그를 부활시킬 것이다.
종들은 파편을 이용하여 마왕 벨지안의 힘을 키웠다. 그 힘을 받은 파편들은 더욱 강력해졌고, 마왕 벨지안의 힘이 될 터였다.
마왕 벨지안은 파편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날을 고대하며 마계 깊은 곳에 꼭꼭 숨었다. 그리고 마침 때가 되었다는 듯이 파편 두 개가 나타났다.
아델라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파편이 두 개나 나타났다는 것은 곧 나머지 파편들도 나타날 거란 징조야.”
데미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예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겁니까?”
“그게 가능했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부쉈지.”
“방법이 없는 겁니까?”
“없는 것은 아니야, 강한 신성력으로 정화하면 부술 수 있어. 거의 신급의 힘이어야 가능해.”
“불가능하다는 거군요.”
아델라의 말은 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과 같았다. 사실상 그건 불가능했다.
“남은 방법은 파편을 모두 찾아서 봉인하는 수밖에 없군요.”
“그게 최선이야.”
만에 하나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 파편들이 흑마법사들 손에 들어가 마왕이 부활하면 대륙에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파편 두 개가 이쪽에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두 개만이라도 지켜야 했다.
“봉인을 부탁합니다.”
“걱정 마. 나도 이 세상에 마왕이 부활하는 건 꿈도 꾸기 싫으니까.”
그건 데미안도 동의하는 바였다. 마왕 부활이라니, 생각도 하기 싫은 재앙이었다.
* * *
어두운 밤, 이올레타 공국 성에 피바람이 불었다.
피바람의 주인은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이상한 주문을 외울 때마다 끔찍한 괴물들이 나타나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였다.
그 중심에 한 사람이 있었다.
유일하게 그 사람만이 검은 로브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공왕의 애첩 헤라였다. 얇은 침의 차림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옆에 누워 있던 남자를 밀었다.
놀랍게도 그는 공왕이었는데 가슴에 구멍이 난 채 죽어 있었다.
침대는 피로 물들었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에 묻은 피를 침대에 대충 닦고는 일어났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흑의 차림을 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정리는 다 끝났어?”
헤라의 말에 흑의 차림을 한 사람들이 부복하며 피로 물든 주머니 두 개를 바닥에 던졌다.
“정리를 마쳤습니다.”
주머니 안을 살펴본 헤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그분이 원하시는 진짜 목적을 이루러 가볼까?”
이미 공왕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모두 빼낸 그녀였다.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공왕이 꼭꼭 숨겨두었던 보물, ‘붉은 성배’를 찾는 것이 말이다.
그날 밤, 공국은 불탔고 공국의 보물이었던 붉은 성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남자가 불타는 왕성 근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잿빛 머리에 자수정 같은 눈동자를 지닌 그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는데, 더욱 특이한 것은 이마 한가운덴 십자 모양의 흉터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불타는 공국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뱉었다.
“한발 늦었군.”
공국이 불타고 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붉은 성배를 노리고 벌인 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쉽게 됐어.”
멀리서 온 보람이 없게 되었다.
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곳에 온 목적이 상실되었으니, 더는 볼일이 없다.
“일단은 마스터에게 보고해야겠군.”
결심을 마친 그는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다음 날, 레오나는 노블레스 타운에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다이아몬드 광산을 시찰하러 가는 날이었다.
저택으로 들어가니, 집사랑 휴버트와 하녀장 엠마가 레오나를 반겼다.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축하드려요.”
“대단한 것도 아닌데 뭘.”
휴버트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 휴버트 주인님께서 염원하시던 것을 이룬 모습을 보니 감격스럽습니다.”
“저도요, 정말 정말 축하드려요.”
두 사람의 진심 어린 축하에 레오나는 머쓱해졌다.
“앞으론 더 바빠질 거야. 지금처럼 잘 부탁해.”
“물론입니다.”
“걱정 마세요.”
든든한 두 사람이 있으니 안살림은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참, 휴버트 전에 부탁했던 사람은 오셨어?”
정예 기사가 되기 전에 레오나는 휴버트에게 미리 광산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를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다행히 휴버트의 지인이 광산 전문가라고 했었다. 그래서 레오나는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어, 바로 가자.”
레오나는 휴버트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휴버트와 비슷한 나이의 중년인이 레오나를 반겼다.
“안녕하십니다, 벤자민이라고 합니다. 남작님.”
“만나서 반가워요.”
레오나가 손을 내밀자, 벤자민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였다.
“일단 앉으시죠.”
레오나가 자리를 권하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다. 그사이 휴버트가 다과를 가져왔다.
“광산에 궁금하신 게 많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제 재산 중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광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이렇게 모셨어요.”
“그러셨군요.”
“저와 함께 시찰하러 가주셨으면 해요.”
벤자민은 흔쾌히 승낙했다.
“좋습니다. 저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남작님께 정확한 정보를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럼, 지금 출발하죠.”
레오나가 휴버트를 바라보았다.
“마차를 대기시켰습니다.”
“수고했어, 휴버트.”
“잘 다녀오십시오.”
빙그레 웃은 레오나는 벤자민과 함께 마차를 타고 광산으로 향했다. 다이아몬드 광산은 황후가 소유하고 있는 광산 중 하나로, 알짜배기였다.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두 시간여를 달린 끝에 광산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에 내린 두 사람은 광산 입구로 향했다. 광산에는 광부들이 열심히 다이아몬드를 채굴하고 있었다.
레오나와 벤자민은 수레에 담긴 다이아몬드 원석을 만져보았다.
세공된 보석만 보았지, 세공되지 않은 원석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규모가 꽤 크군요.”
“저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광산은 절대 작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광산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쾌적하게 뻥 뚫려 있어 넓었다.
벤자민은 광산 내부를 꼼꼼하게 살피고, 다이아몬드 매장량까지 확인했다.
“이 정도면 100년은 족히 채굴할 수 있는 양입니다.”
“그 정도인가요?”
“예, 게다가 품질도 좋습니다.”
매장된 원석을 자세하게 살핀 벤자민이 감탄했다.
“세공만 잘해서 팔면, 금방 부자가 되시겠군요.”
그 말에 레오나가 곤란한 얼굴을 하였다.
“문제가 있어요.”
“문제요?”
“채굴한 원석을 세공사들이 가공하고 세공하고 있지만, 아직 판매 루트를 잡지 못했어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아는 상회를 소개시켜 드려도 될까요?”
레오나가 기쁜 얼굴로 벤자민의 손을 잡았다.
“소개시켜 주신다면 정말 더할 나위가 없죠.”
“폴라리스라고 이번에 시작한 신진 상단인데 아이템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조만간 제가 그곳 상단주를 데리고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벤자민. 사례는 넉넉히 치를게요.”
“별말씀을요.”
벤자민과 헤어진 레오나는 오랜만에 저택 식솔들과 오붓하게 식사를 하였다.
가족 같은 식솔들이 곁에 있어서 레오나는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 * *
“그러니까, 네가 도착한 시간에 이올레타 공국이 이미 불타고 있었다?”
아스텔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다니까.”
아스텔은 맞은편에서 보고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지크, 바람의 마법을 사용하는 암살자 출신이었다.
“나도 네 원대한 계획에 문제가 생긴 게 참 아쉬워.”
그 말에 아스텔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일부러 늦게 간 건 아니겠지?”
지크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변했다.
“날 못 믿어? 난 제시간에 갔어.”
그 말에 아스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성배는 물 건너갔다는 소리군.”
“내 생각도 그래, 붉은 성배를 노리지 않고서야 공국을 불바다로 만들 일은 없으니까. 그놈들 짓이 분명해.”
그놈들을 떠올린 지크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그가 암살자가 된 것은 흑마법사들에게 가족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스텔이 세운 흑마법사 말살 계획에 흔쾌히 동참했다.
일단 붉은 성배는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다. 그건 흑마법사일 확률이 높다.
“일단 정말 그놈들 짓인지 확인해 보러 가야 할 것 같군.”
“직접 움직이려고?”
아스텔이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였다.
“나보다 흑마법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게 이 세상에 없으니까.”
“그건 인정.”
“너도 같이 가. 혹시 알아, 네가 찾는 원수가 한 짓일지.”
“물론이지.”
“그럼, 출발하지.”
그렇게 아스텔은 지크와 함께 이올레타 공국으로 향했다.
확실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 * *
거대한 지하 궁전.
양옆에는 거대한 기둥이 일렬로 떠받들고 그 사이사이에는 악마 대공을 상징하는 동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중심을 걷던 2황녀 비비안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황궁 지하에 이러한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곳은 2황녀 비비안이 오랜 공을 들여 만든 곳으로,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졌다.
“드디어 완성되었어. 그분만을 위한 궁전이.”
저 높은 권좌에는 그녀에게 무한한 힘을 줄 단 한 사람이 앉게 될 것이다.
한참을 지하 궁전에 심취해 있던 비비안에게 흑마법사 하나가 나타나 부복했다.
“주인님, 헤라 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이리로 데려와.”
“예, 주인님.”
잠시 후, 흑마법사와 함께 헤라가 도착했다. 완공된 지하 궁전을 바라본 헤라는 감탄을 터뜨렸다.
“드디어 완성되었군요.”
“어때?”
“무척 황홀합니다. 주인님.”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빙그레 웃은 비비안은 헤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헤라가 품 안에서 붉은 성배를 꺼내 비비안에게 바쳤다.
붉은 성배를 받아 든 비비안은 홀린 듯한 표정으로 붉은 성배를 보았다.
“충분히 먹여줬겠지?”
헤라가 웃으며 말했다.
“원하는 만큼 충분히 피를 먹여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붉은 성배가 더욱 짙은 핏빛을 띠었다.
“수고했어, 헤라.”
비비안은 헤라에게 새카만 구슬을 내밀었다.
“약속한 마정이야.”
마정은 마기를 구슬 모양으로 뭉친 것이었다. 헤라는 기쁜 얼굴로 마정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헤라는 망설이지 않고 마정을 입에 넣었다. 마정은 입안에서 순식간에 녹아 그녀의 몸 안에 스며들었다.
곧이어 헤라의 입에서 검은 마기가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헤라는 황홀한 표정으로 마정의 힘을 만끽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비비안은 무표정했다. 흑마법사들은 강한 힘을 숭배하는 족속들이다.
헤라 역시 강한 힘을 좇아 자신에게 온 여인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강하게 힘을 탐닉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비비안에게 있어 헤라는 이용하기 좋은 말이었다.
언제든지 필요 없어지면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런 존재가 이용하기에 적합하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비비안은 붉은 성배를 들고 권좌로 향했다. 권자를 중심으로 둥근 마법진이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붉은색의 마법진 위에는 빈공간이 있었다. 비비안은 그중 한 곳에 붉은 성배를 올려놓았다.
“여섯 개 남았어.”
마왕 벨지안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일곱 개의 파편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인 붉은 성배는 찾았고, 나머지 여섯 개를 빨리 찾아야 한다.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는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아니까, 나머지 다섯 개를 손에 넣어야 해.”
부릴 수 있는 흑마법사들로 하여금, 마왕 벨지안의 파편을 찾도록 해놓은 상태였다.
파편을 찾을 수 있도록 악마 대공 으로부터 특별한 힘을 받았다.
바로 마왕 벨지안의 파편을 알아볼 수 있는 마안의 힘이었다. 비비안은 마안의 힘을 수정에 담아 각 흑마법사에게 주었다.
흑마법사들은 마안으로 열심히 파편을 찾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뿌리든 알 바가 아니었다.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니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그게 다년간 그녀가 황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황궁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황제나 황후, 황태자, 다이앤이 관심을 가져줘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비비안은 안다.
자신은 결코 그들의 진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다이앤을 보고서야 느꼈다.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다이앤과 자신은 천지 차이였으니까.
아무리 자신이 그들과 섞여 살아도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진짜가 되려면 빼앗아야 한다는 걸 비비안은 깨달았다.
빼앗아서라도 힘을 갖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으리라.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 내 발 앞에 무릎 꿇고 빌게 될 거야.”
살려달라고 비는 황제 부부와 절망으로 가득한 황태자와 다이앤의 표정이 기대되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리라.
“이 제국은 나의 것이야.”
그리하여 위대한 왕관을 차지하리라.
* * *
저택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른 아침 출근한 레오나는 단장의 호출을 받았다.
단장실에 들어가니, 데미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부르셨습니까.”
“앉지.”
“예, 단장님.”
레오나의 맞은편에 앉은 데미안이 용건을 꺼냈다.
“얼마 전 이올레타 공국이 멸망했다.”
그 말에 레오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입니까?”
“사실이다.”
레오나가 침음을 삼켰다.
‘이올레타 공국이 멸망하다니…….’
이올레타 공국은 작은 소국이었지만, 조용하고 풍요로운 나라라고 들었다.
그런 나라가 멸망하다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내가 널 부른 것은 그곳에서 흑마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흑기사단의 정보 때문이다.”
흑기사단은 한발 빠르게 이올레타의 정보를 수집했고, 그곳에서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흑마법의 기운이었다.
흑마법은 사악한 마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마법으로, 마법을 쓰면 그 기운이 땅속에 스며들어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누군가의 원념이다. 수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힘일수록 그 기운은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흑기사단이 그 흔적을 왕성에서 발견한 것이다.
“흑기사단에서 네 지원을 받고 싶다는군.”
“저를요?”
“그래,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직접 너를 지목했다. 네 신성 마법이 필요하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혼자 보낼 순 없으니, 에드가가 함께할 거다.”
에드가는 정예 기사로 화염계열 마검사였다.
단장실을 나오니, 에드가가 레오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어.”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인사는 그쯤하고 서두르자.”
“예, 선배님.”
레오나는 에드가와 함께 흑기사단을 찾았다. 흑기사단에 도착하니 두 사람이 그들을 맞이했다.
한 명은 시엘이었고, 다른 한 명은 칸나였다.
“레오나 경.”
시엘이 레오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뭐야, 너도 가는 거야?”
“레오나 경이 가는 곳이라면 내가 같이 가야지.”
그런 시엘의 모습을 보며 칸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레오나는 칸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우리 구면이죠.”
“정예 기사가 되었군요.”
레오나의 가슴에 달린 엠블렘을 본 칸나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정예 기사가 되다니, 대단하네요.”
그녀의 눈빛에 호승심이 일었다.
“서두릅시다.”
에드가가 한마디 하자, 시엘과 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은 이동 마법진을 통해 이올레타 공국으로 향했다.
장거리여서 마법진을 여러 번 갈아타야 했다.
네 사람 모두 익숙해서 구토하는 등의 볼썽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착했군요.”
“그런 것 같네요.”
칸나의 말을 레오나가 받았다.
도착한 곳은 이올레타 공국의 초입이었다. 이올레타 공국은 왕성으로 중심으로 펼쳐진 큰 도시로 구성된 나라였다.
규모는 작지만, 각종 공예기술이 발달하여 장인이 많았다.
이올레타 공국에서 만든 가구나 물건들은 섬세하고 아름다워서 비싼 값에 팔렸다.
그 수익이 이올레타 공국을 활성화 시키는 밑거름이었다. 그런데 모두 불타 없어졌다.
도시며 왕성이며 여기저기 화마가 집어삼킨 흔적이 가득했다.
네 사람은 곧장 왕성으로 향했다. 흑기사단이 조사한 흑마법의 기운이 왕성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고 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는 화염으로 그을린 성벽과 무너진 잔해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곳에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는 신성력을 일으켜 왕성 전체를 탐지하는 마법을 발현했다.
“디텍션.”
레오나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의 신성력이 왕성 전체로 뻗어 나갔다.
레오나는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기운이 풍기는 곳을 찾아냈다.
“저쪽에서 아주 강한 기운이 느껴지네요.”
레오나가 앞장을 서자, 세 사람이 뒤를 따랐다.
칸나는 신기한 얼굴로 앞서 걸어가는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가 신성력을 쓴다고 듣긴 했지만, 옆에서 직접 보니 뭔가 경이롭고 신기했다.
“여기예요.”
레오나가 세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은 침실로 보이는 공간이었다.
레오나는 그곳에서도 디텍션을 펼쳤다.
“역시, 흑마법사의 소행이네요.”
레오나의 확언에 칸나가 의문을 던졌다.
“확신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레오나는 신성 마법을 펼쳤다.
“디스클로즈.”
레오나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이 공간을 장악하더니 무언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곳을 스쳐 간 흑마법사들의 잔영이었다. 홀로그램처럼 흑마법사들의 모습이 레오나와 일행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레오나가 손을 거두자, 칸나가 놀라운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정말이군요.”
에드가도 신기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그는 새삼 다시 레오나의 대단함을 깨달았다.
시엘은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했다.
“공국을 멸망시킨 건 흑마법사들이네요.”
의문이 풀리지 않는 건, 그들이 왜 공국을 멸망시켰냐 하는 것이다.
“흑마법사가 공국을 왜 멸망시켰을까요?”
레오나의 의문에 칸나가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했다.
“제가 알기론, 공국에 귀한 보물이 있다고 했어요. 아마도 그걸 노린 게 아닐까 추측합니다.”
“보물이라…….”
시엘이 한마디 거들었다.
“흑마법사들이 노릴 만한 보물이라면 보통 보물이 아닐 것 같은데, 필시 그놈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을 거야.”
레오나도 수긍했다.
“제 생각도 같아요.”
흑마법사들에게 필요한 물건, 그게 과연 뭘까. 곰곰이 생각한 레오나는 얼마 전 마물의 숲에서 발견한 송곳니가 떠올랐다.
‘혹시…….’
가능성이 있다.
이올레타 공국에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 있었고, 흑마법사들이 그것을 노린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얼추 들어맞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우선 공국의 보물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레오나의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레오나는 흑마법사의 흔적을 찾아냈고, 꽤 많은 수의 흑마법사들이 공국을 공격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놈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공국을 침략한 것이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요.”
흑마법사들이 공국을 멸망시켰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이보다 더한 재앙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생에서도 흑마법사들과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흑마법사와 싸움이라니…… 정말 지긋지긋하구나.’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그리고 흑마법사들과 이미 엮인 상태였다.
그것도 무려 마왕 부활을 꿈꾸는 흑마법사 무리다. 쉬운 싸움은 아닐 터였다.
시엘이 다가와 레오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엔 반드시 당신을 지킬 겁니다.”
레오나는 시엘의 손을 털어냈다.
“부담스러운 소리 하지 마.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야, 나는 내가 지켜.”
시엘이 다가와 속삭였다.
“그 말 정말 오랜만에 듣습니다.”
“뭐?”
“예전에 마굴 소탕할 때 제가 당신을 지켜주지 않았습니까. 그때 당신이 방금 한 말을 했죠.”
레오나는 시치미를 뗐다.
“내가 그랬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지킨다고 말이죠.”
레오나는 시엘의 기억력에 감탄했다.
십 년도 넘은 일을 기억하다니. 본인도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데 시엘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왕성 조사는 끝난 것 같습니다. 도시로 내려갈까요?”
칸나의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러죠.”
“그럽시다.”
“가죠.”
레오나, 에드가, 시엘 순이었다. 네 사람은 왕성을 나와 도시로 내려왔다.
“아무래도 왕성에서 번진 불이 도시로 뻗어 나간 것 같군.”
불의 흔적을 찾아낸 에드가가 설명했다.
“맞는 것 같아요.”
칸나도 에드가와 같이 불의 흔적이 도시까지 이어진 것을 찾아내 에드가의 말에 동조했다.
불은 왕성에서 났고, 그 불똥이 도시로 튄 것이다. 웬만한 불씨가 아니었을 것이다.
레오나는 추측해 보았다.
왕성을 점령한 흑마법사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냈고, 그 불을 도시 전체로 퍼지게 하였다.
그 이유가 뭘까, 왜 굳이 도시까지 불을 냈을까.
보물을 얻기 위한 것치고는 너무 과했다.
‘보물 말고도 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게 분명해.’
예감이 그랬다.
도시에 불이 나면서 많은 사람이 화마에 휩싸였을 것이다.
생존한 사람도 있겠지만, 사망한 사람도 상당할 것이다. 그것을 흑마법사와 연관해 보면 결론은 하나다.
‘산 제물이군.’
어떤 보물인지 모르지만, 산 제물이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 틀림없었다.
그게 흑마법사의 손에 들어갔으니 더욱 큰일이다.
더군다나 그게 정말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라면 더욱 큰일이 아닌가.
“레오나, 그만 돌아가자.”
생각에 골몰해 있느라 에드가의 말을 듣지 못해 레오나는 뒤늦게 대답했다.
“아, 죄송해요. 생각을 좀 하느라. 돌아가죠.”
더 이상 건질 게 없다고 판단한 일행은 귀환을 택했다.
귀환 후 레오나는 에드가와 함께 곧장 단장 데미안에게 보고하였다.
“정말 흑마법사의 짓이었다는 건가?”
에드가가 확답했다.
“레오나가 신성 마법으로 확인했고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흑마법사들이었습니다.”
정말로 흑마법사들이 공국을 멸망시켰다니, 데미안은 인상을 구겼다.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 출현한 것도 그렇고, 흑마법사들이 움직이는 것 또한 심상치 않다.
“다른 건 없었나?”
레오나가 심각한 얼굴로 데미안을 보았다.
“아무래도 도시 전체에 불을 지른 건 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또 다른 목적?”
“보물만 원했던 거라면 굳이 수고스럽게 도시까지 불을 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일리가 있군.”
“제 생각엔 산 제물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산 제물이란 말에 에드가가 끔찍하다는 얼굴을 하였다.
“도시의 사람들을 산 제물로 삼았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에드가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추측이야, 아니면 확신이야?”
“확신입니다.”
레오나는 누구보다 흑마법사에 대해서 잘 알았다.
“궁금한 건 공국의 보물이 어떤 것이었으며, 왜 산 제물이 필요했냐는 겁니다.”
“공국의 보물이라…….”
데미안이 침음을 삼켰다.
“이 건은 조사를 해봐야겠군.”
“예, 그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레오나의 대답에 에드가도 수긍했다.
“수고했다, 그만 나가 쉬도록.”
레오나와 에드가는 데미안에게 경례하고는 단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 볼일을 보기 위해 헤어졌다.
* * *
며칠 후, 백기사단으로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찾아왔다.
데미안을 찾아온 그녀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데미안 경, 도움이 필요해.”
“소식은 들었습니다. 청기사단의 피해가 크다고 하더군요.”
블레어가 이를 갈았다.
“예상하지 못한 마물이 나타났어.”
블레어가 이끄는 청기사단이 마물 토벌에 차출되어 원정을 떠났다.
청기사단이 담당하고 있는 토벌 구역은 제국의 동쪽 국경에 있는 숲이었다.
그곳의 마물은 토벌하지 않으면, 숫자가 늘어나 국경 인근 지역이 피해를 입히곤 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토벌을 나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예상 못 한 마물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블레어는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갔다면, 청기사단이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며 자책했다.
“그곳에 본 드래곤이 있을 줄 내가 알았겠어?”
본 드래곤은 뼈만 남은 드래곤으로 크기와 단단함은 물론, 마법과 브레스를 구사하는 최상급 마물이었다.
청기사단이 만난 마물은 그런 본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토벌을 나갔던 청기사단의 인원은 정예 기사가 15명. 15명이 본 드래곤을 상대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청기사단원들은 부상을 입고 돌아와야만 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과 중상자, 경상을 입은 자들까지, 다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레오나 경의 신성 마법이 필요해. 부탁할게, 우리 단원들을 살려줘.”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했다.
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들은 오늘 밤이 고비였다.
의사들도 고개를 내저었고, 치료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블레어는 백기사단의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쓴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달려온 참이었다.
“그 부탁은 레오나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지.”
“고마워.”
데미안은 곧장 레오나를 불렀다.
잠시 후, 레오나가 단장실로 들어왔다.
레오나는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레오나를 본 블레어는 다급한 얼굴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레오나 경, 부탁 좀 들어줘.”
“예?”
“우리 단원들을 치료해 줄 수 있을까?”
“다치셨습니까?”
대답은 데미안이 했다.
“이번 마물 토벌에서 부상을 당했다는군. 도와줄 수 있나?”
“그렇습니까?”
“맞아, 부탁할게.”
단장이 단원들을 생각해 일개 기사에게 부탁하러 오다니, 레오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고마워, 레오나 경.”
레오나는 블레어와 함께 청기사단이 치료를 받고 있는 치료실로 향했다.
치료실에는 15명의 부상당한 기사들이 있었다. 그중 몇몇은 심각한 중상을 입었고, 몇몇은 가벼운 상처였다.
그리고 제일 심각한 건 안쪽에 누워 있는 부상자들이었는데 상처가 깊었다.
총 세 명이었다.
레오나는 그중 한 명의 손을 잡고 신성 마법을 펼쳤다. 고난도의 치유 마법이 필요했다.
그 정도로 눈앞의 기사 상처는 심각했다.
“리스토레이션.”
레오나의 주위로 꽃 모양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마법진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솟아 올라와 부상자의 상처를 치유했다.
엄청난 양의 신성력이 쑥 하고 빠져나갔다.
레오나는 부상자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뀐 것을 확인하고 다음 환자를 치료했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블레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레오나는 죽어가는 세 명의 기사를 살려냈다.
자신이 살아났다는 것을 느낀 세 명의 기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세 명 다 살아난다 하더라도 불구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오나가 신성 마법으로 살려준 것이다.
다시 검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들은 자신들을 치료해 준 레오나를 선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는 꼭 갚고 죽겠습니다.”
레오나는 자신의 힘으로 그들을 살릴 수 있어 기뻤다.
“별말씀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레오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남은 부상자들도 모두 신성 마법으로 치료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레오나의 신성 마법을 경이로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15명 모두 치료가 끝나자, 블레어는 레오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몸 둘 바를 모르겠어. 레오나 경.”
레오나를 놓아준 블레어가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정말이야.”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신성력을 너무 써댄 탓일까, 살짝 현기증이 와서 이마를 붙잡았다.
“레오나 경, 괜찮아?”
“괜찮습니다. 조금 어지러워서 그만.”
“아, 무리했구나. 미안. 내가 숙소까지 데려다줄게.”
“괜찮습니다.”
“가다가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데려가 줄게.”
블레어의 굳은 의지에 레오나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숙소까지 안전하게 도착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무리시켰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푹 쉬어.”
“예, 그럼.”
인사를 꾸벅한 레오나는 숙소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레오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하, 피곤한 하루였다.”
고난도 치유 마법을 세 번이나 연달아 써대고, 가벼운 치유 마법도 남발했다.
신성력이 고갈되는 건 당연했다.
‘그나저나 본 드래곤한테 당했다고 했지.’
기사들을 치유하며 그들에게서 본 드래곤에 관한 것을 들었다.
그들을 공격한 것은 본 드래곤이었다고.
‘본 드래곤은 막강하지.’
웬만한 무기로는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뼈에 어마어마한 덩치, 게다가 브레스와 마법도 사용한다.
여간 까다로운 마물이 아니다.
본 드래곤에게 부상을 당했으니, 물리치진 못하고 퇴각한 모양이다.
다행히 본 드래곤을 만난 곳은 깊은 숲속 안이어서 일반인의 피해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본 드래곤이 숲을 나와 마을이나 도시를 습격하게 된다면, 피해가 엄청나리라. 하루라도 빨리 토벌해야 한다. 그 심각성은 단장들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졸려, 그만 생각하고 자자.”
하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 * *
리리엘은 2황녀 비비안과 단둘이 만남을 가졌다.
“2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요. 리리엘.”
“예, 전하.”
비비안은 리리엘의 전신을 훑었다.
“그동안 수련을 열심히 한 모양이네요.”
“가전 검술을 익히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비비안은 화단에 핀 꽃에 물을 주며 말했다.
“그런데 소식 들으셨나 모르겠네요.”
“소식이라 하시면…….”
“저런, 소식이 느리시네요. 레오나 경이 백기사단의 정예 기사가 되었답니다.”
“……!”
그 말을 들은 리리엘의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많이 놀랐나 보군요.”
“예, 조금. 근데 정예 기사가 되려면 준기사로 3년만 복무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단기간에 정예 기사가 되는 게 가능한 겁니까?”
기사단마다 정예 기사 승급 방법이 달랐다. 백기사단은 준기사로 3년간 복무해야만 승급할 수 있었다.
그런데 레오나는 입단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정예 기사가 되었다.
“특례가 있어요. 합당한 공적을 세워 인정을 받으면 승급이 가능하죠. 단장인 데미안 경도 준기사 시절 특례로 승급했다고 들었어요.”
리리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레오나가 정예 기사가 되었다면, 그만한 공적을 세웠다는 뜻이다. 대체 어떤 공적을 세웠기에 정예 기사가 되었단 말인가.
“리리엘, 그렇게 제자리만 맴돌고 있다간, 언젠가 그대는 레오나 경의 그림자만 밟게 될 거예요.”
그건 리리엘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사단 입단은 공정하게 시험을 치러 입단할 수 있으니까.
비비안은 초조해하는 리리엘을 위해 꿀을 던져주었다.
“이번에 청기사단에서 인원 충원을 위해 추가 선발을 한다고 해요. 나이 제한도 18세 이상으로 정했고요. 영애에겐 딱일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리리엘의 눈빛이 번뜩였다.
“정말입니까?”
“물론이에요. 얼마 전 토벌로 청기사단이 피해를 입어, 블레어 단장이 추가 선발을 하기로 한 모양이에요. 폐하께서도 윤허하셨다더군요.”
비비안은 리리엘을 바라보며 격려했다.
“행운을 빌어요. 그대라면 합격할 거라 믿어요.”
“감사합니다, 전하. 최선을 다해 꼭 청기사단에 입단하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게요.”
집으로 돌아온 리리엘은 곧장 칼리반 백작을 찾아갔다.
“아버지.”
“무슨 일이냐, 리리엘?”
“이번에 청기사단 추가 선발 시험 치른다면서요.”
“벌써 소식을 들은 게냐?”
“2황녀 전하께서 친히 알려주셨어요.”
리리엘의 입에서 2황녀가 튀어나오자 칼리반 백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리리엘, 2황녀 전하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거라.”
“그건 제가 알아서 해요.”
나직이 혀를 찬 칼리반 백작이 리리엘의 용건을 꿰뚫어 보았다.
“날 찾아온 건 시험에 응할 생각이로구나.”
“네, 좋은 기회잖아요. 허락해 주세요.”
“대신 꼭 합격해야 한다.”
“염려 마세요.”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길로 리리엘은 곧장 신청서를 작성하여 청기사단에 하인을 보내 제출했다.
시험은 일주일 후 원형 경기장에서 치른다고 하였다.
‘반드시 합격하고 말겠어.’
레오나만 생각하면 가슴에 불이라도 나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벌써 정예 기사가 되다니…….’
준기사가 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예 기사가 되었다.
‘대체 어떤 공적을 세웠기에…….’
가장 궁금한 것은 레오나가 세운 공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비밀에 부쳐졌는지 2황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대단한 공적을 세웠다면 소문이 날 법한데 그러지도 않았다.
‘상관없어, 나도 공적을 세워서 따라잡으면 되니까.’
그래서 최단기간에 정예 기사가 되고 그다음엔 부단장, 단장까지 오를 것이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짜릿했다.
리리엘의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났다.
* * *
며칠 후, 레오나는 벤자민을 만났다. 그가 상단 주인을 소개시켜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응접실에 들어가니 벤자민과 키가 큰 여인이 함께 있었다.
그 여인이 벤자민이 소개시켜 준다던 사람인 모양이다.
“남작님, 이쪽은 일전에 말씀드렸던 폴라리스 상단의 상단주 케이들린입니다.”
짧게 자른 밤색 머리를 가진 그녀는 구릿빛 피부에 커다란 링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악수를 청하자 레오나는 악수를 받아주었다.
“레오나 아제르티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케이들린 경.”
악수를 나눈 후 레오나는 두 사람과 차를 마시며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세공하신 다이아몬드를 저희 상단을 통해 판매하고 싶단 뜻인가요?”
“네, 맞아요. 아이템을 찾으신다 들었어요.”
“그렇긴 합니다.”
다이아몬드라면 비싼 값에 거래가 가능한 품목이다.
케이들린은 레오나의 거래를 통해서 얻게 되는 수익에 관해서 빠르게 계산해 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고가의 제품이라는 것이다. 싼값에 매입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일단, 수량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두 눈으로 보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렇게 해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말한 김에 지금 가보실래요?”
케이들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벤자민은 거절 의사를 밝혔다.
“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벤자민 경, 좋은 분을 소개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되었습니다.”
벤자민과 헤어진 레오나는 케이들린과 함께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는 창고로 향했다.
창고는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레오나가 창고 문을 열고 나타나자, 일하던 사람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레오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모두들 수고 많아요.”
레오나는 일꾼들의 인사를 받으며 한 사람을 지목했다.
그는 레오나가 휴버트를 통해 고용한 세공사 중 한 명이었다.
“라디. 잠시만 와줄래.”
“예, 주인님.”
라디라는 청년이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라디, 세공된 다이아몬드를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안내 좀 부탁할게.”
“예.”
레오나는 라디를 따라 보관 창고로 향했다. 보관 창고에는 세공된 다이아몬드들이 품질별로 분류되어 보관되어 있었다.
“보시겠어요, 케이들린 경.”
창고를 본 케이들린은 깜짝 놀랐다.
넓이도 넓이지만, 진열대마다 놓인 다이아몬드의 품질이 하급부터 최고급까지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양이 엄청 많으시네요.”
“벤자민 경에게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제가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지고 있거든요. 거기서 채굴된 원석을 이곳에서 세공을 거쳐 보관하고 있어요.”
“저희 상단이 수용하기엔 양이 너무 많군요.”
그 점은 걱정 말라는 듯 레오나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것을 한꺼번에 처리할 생각은 없어요. 당신의 상단에서 수용할 수 있을 만큼만 거래해 주면 돼요.”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거래를 해주시는 거죠?”
케이들린은 흔쾌히 수락했다.
마침 괜찮은 아이템이 없나 찾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단 역시 사치품을 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녀는 군소귀족 출신이었고, 장신구 쪽에 관심이 많아 장사를 시작하였고, 상단주까지 되었다.
“라디, 수고해.”
“예, 들어가십시오.”
라디의 배웅을 받으며 레오나는 케이들린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와 자세한 계약 사항을 조율했다.
폴라리스 상단이 한 달에 한 번 다이아몬드를 원하는 품질, 수량을 매입하고, 판매를 통한 이익을 6:4의 비율로 나누는 것이다.
6이 폴라리스 상단이고, 4가 레오나의 몫이었다.
“후한 거래네요.”
케이들린은 귀족들의 심리를 잘 알았다.
대부분의 귀족이 더 놓은 배분율을 갖기를 원하는데 레오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요, 전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제안한 건데.”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팔아보겠습니다.”
“그래주면 저야 좋죠.”
케이들린과 좋은 거래를 한 것 같아 레오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후로는 휴버트와 의논해서 하시면 돼요.”
레오나는 백기사단의 기사로서 할 일이 많다. 임무를 수행해야 하고, 훈련도 게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전반적은 세부사항은 휴버트와 조율하기로 하였다.
이후에 이루어지는 거래 승인도 휴버트가 담당하고, 레오나에게 보고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 * *
아스텔은 레오나의 최근 행보에 관한 소식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는 씩씩하게 잘살고 있었다.
칼리반 백작가를 나와 독립하고, 기사가 되었으며, 공적을 세워 작위도 받았다.
어떠한 공적을 세웠는지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아마도 이 나라의 왕녀를 그녀가 구해주었을 것이다.
그녀에 대해서라면 아스텔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하사받은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생산된 보석을 폴라리스 상단과 연계하여 판매할 모양이다.
그녀가 믿고 거래하는 곳이니, 그도 알아야 할 것 같아 조사하였다.
아스텔은 수하가 가져온 폴라리스 상단에 관한 자료를 훑어보았다.
폴라리스 상단은 나름 튼실했다.
상단주는 케이들린이라는 여인으로 큰 키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여장부라고 하였다.
초상화를 보니,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성장한 곳이었다. 적어도 레오나를 상대로 사기를 칠 것까진 없었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니 인복은 많다니까.”
과거에도 그녀는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녀가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었다. 그녀 자체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걸 타고난 카리스마라고 하였다. 레오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몸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주위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 자신은 모르겠지만, 곁에서 지켜본 아스텔은 잘 알았다.
“빨리, 만나고 싶어.”
지금 당장에라도 가고 싶지만, 참아야만 했다. 그녀를 위험하게 만드는 흑마법사의 존재를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그들이 마왕 벨지안의 파편을 모으고 있다는 것만 알 뿐, 그들의 실체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아스텔은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들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잃은 경험은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두 번째는 없다.
“내 손으로 끝낸다.”
그녀가 희생하는 일이 없도록, 이번은 반드시 지켜주리라.
* * *
“단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여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시엘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시엘은 아스텔이 보고 있는 서류들을 보며 혀를 찼다.
“레오나에 관련된 것들뿐이네. 대단한 추종자 납셨어.”
“빈정대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쳇.”
시엘은 품 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내려놓았다.
“마왕 벨지안의 또 다른 파편이 있는 곳을 알아냈어.”
그 말을 들은 아스텔은 시엘이 가져온 서류를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역시, 수완이 좋아.”
시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전문이잖아.”
추적, 암살은 시엘의 전문분야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분노한 자의 피리’라…….”
“최근 급증하고 있는 마물 아무래도 이게 원인 같아.”
“이게 마물을 부른다는 건가? 그리고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리치.”
“골치 아픈 놈이 나타났군.”
리치는 흑마법사가 자신의 생명을 라이프베슬에 담아 영생을 얻은 자이다.
라이프베슬을 찾아 깨뜨리지 않는 한 리치는 죽지 않는다. 그러한 놈이 마왕 벨지안의 파편을 가졌다.
“동부에 나타난 본 드래곤도 그놈 짓이야.”
골치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해결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동부로 직접 가야겠군.”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협조 고맙다.”
“별말씀을, 그녀를 위한 일인데.”
아스텔이 그녀를 지키려는 것처럼, 시엘 또한 그 부분에선 아스텔과 같은 입장이었다.
그래서 돕는 것이다.
아스텔이 세운 계획이 제대로 실행된다면, 더 이상 그녀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앞으로 일어날 재앙은 그녀가 아닌, 아스텔과 자신이 막을 것이다.
그녀를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은 아스텔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