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스텔 (1)
드넓게 펼쳐진 제국의 도시. 제국의 상징이자 중심.
언덕에 서서 그곳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하얀색 로브를 입고 있는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제도를 내려다보았다. 눌러쓴 후드 사이에서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금발이 비쳤다.
그녀는 제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드디어 당신이 있는 곳에 제가 왔습니다.”
제도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맴돌았다. 천상의 미소였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군.”
남자의 뒤에서 진보랏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진청색 눈이 못마땅한 얼굴로 남자를 향했다.
남자가 그를 돌아보며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찬란한 금발이 흘러내리며 눈부신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시엘.”
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남자의 옆에 섰다.
“기어코 신성국을 떠나 여기에 오셨군. 고귀하신 신성의 별.”
“그녀를 만나고 싶으니까. 내가 없는 동안 그녀의 마음을 훔치겠다는 꿈은 이뤘어?”
시엘이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그 모습만 봐도 그가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런…….”
“지금 네가 날 동정할 처지야? 너도 나와 다르지 않을걸, 아스텔.”
“그럴까? 그나저나 검은색 제복이 잘 어울리네. 네가 정말로 흑기사단에 들어갈 줄은 몰랐어.”
“너만큼이나 나 역시 그녀를 위해선 못할 것이 없으니까. 그 덕분에 그녀를 만날 수 있었고.”
“보고 싶네.”
시엘이 짓궂게 웃었다.
“난 절대 너와 만나게 해주지 않을 거야.”
“네가 만나게 해주지 않아도 우린 만나게 될 거야.”
“자신만만하네.”
아스텔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느껴지거든.”
“신성의 별이 되더니, 예지 능력이라도 생겼나 봐?”
아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난 이제 신성의 별이 아니야. 그 자린 진즉에 내려놓았으니까.”
시엘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였다.
“정말로 신성국을 버리고 왔다고?”
“버린다기보다, 정리했다는 것이 옳겠네. 애초에 그 자린 그녀가 있었기에 있었던 것이니까.”
“지고지순하네.”
“너도 만만치 않아, 너 역시 네 자유를 버리고 그녀를 선택했으니까.”
그건 인정이었다.
시엘 역시 버린 것이 있었으니까.
“이제 어쩔 생각이냐?”
“그녀를 위협하는 것들을 치울 생각이야.”
시엘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흑마법사겠군.”
아스텔이 빙그레 웃었다.
“신성국에서나 여기서나 그녀는 흑마법사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워. 난 이곳에 뻗쳐 있는 그녀를 위협하는 흑마법사들을 치워 버릴 거야.”
“그건 나도 동감이다. 그녀가 흑마법사 때문에 괴로운 건 이제 싫으니까.”
“오랜만에 뜻이 맞는 것 같네.”
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하였다.
“네 거처는 내가 알아봐. 나한테 빌붙을 생각하지 말고. 난 절대 너 안 도와줄 거야, 넌 내 연적이니까.”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그 정도 준비도 안 하고 왔을 것 같아?”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야?”
아스텔은 입을 다물었다.
시엘도 굳이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목표가 같지만,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서로를 필요로 할 뿐이었다.
그게 레오나라면 더더욱 양보할 생각이 없는 두 남자였다.
“난 레오나나 보러 가야겠네. 이제 도착한 양반은 잘해 보시길.”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시엘을 보며 아스텔은 피식 웃었다.
“여전하네. 그 성격. 자, 그럼 나도 이제 슬슬 가볼까.”
아스텔의 연녹빛 눈동자가 설렘으로 반짝였다.
* * *
오랜만에 저택으로 돌아온 레오나는 잘 꾸며진 정원을 산책했다.
집사 휴버트가 정원사를 고용하여 꾸몄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정원이 정갈해졌다.
지저분한 부분을 걷어내고, 다듬어 놓으니, 아름다운 정원으로 변모했다.
그런 정원을 바라보며 걷는 기분은 몹시 상쾌했다.
칼리반 백작가에 있었을 때는 늘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봐야만 했던 기억이 있었다.
레오나의 기억이었다. 레오나는 백작가의 아름다운 정원을 두 눈으로 마주해 보지도 못한 채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그런 기억 때문이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낯설면서도 기뻤다.
자신만의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
그게 이런 느낌인 모양이었다.
“평화롭네.”
이 평화가 계속되면 좋겠다.
“평화롭게 될 겁니다.”
깜짝 놀란 레오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시엘이 서 있었다.
“자꾸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날 거야?”
“별로 놀라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너, 누구 허락받고 내 집에 들어온 거야?”
시엘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제 발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너도 참 한가한 모양이다.”
“당신 곁에 있고 싶어서 노력 중입니다.”
“그 노력, 안 해도 돼.”
시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서운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이밖에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시엘이 레오나의 옆에 바짝 붙었다.
“이렇게 친밀한 사이?”
“안 떨어져?”
레오나가 금빛 눈을 치켜뜨자, 시엘이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났다.
“저는 당신이 그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볼 때가 가장 무섭습니다.”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시엘을 보았다.
“네가 무서운 게 다 있어?”
“네, 있습니다.”
시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저는 다른 무엇보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제일 두렵습니다.”
걸음을 멈춘 레오나가 시엘의 진청색 눈을 바라보았다.
“너 정말로 그게 두렵구나.”
시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시엘은 혹여라도 자신이 다시 사라질까 두려운 얼굴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진지해. 무슨 일 있어?”
아스텔이 왔다고는 절대 말해줄 수 없어, 시엘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레오나의 곁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간절한 눈빛으로 레오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레오나는 제지할 수가 없었다.
시엘의 눈빛이 너무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제 마음을 받아 달라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웃는 모습으로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레오나는 주인에게 매달리는 강아지 같은 시엘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만, 일어나. 시엘.”
시엘의 진청색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얼른 일어나. 나 어디 안 떠나니까.”
“그 말, 믿어도 됩니까?”
“내가 가긴 어딜 가. 말했지, 난 여기서 살 거라고.”
그 말에 시엘이 안심된다는 듯 웃었다.
레오나는 시엘의 미소를 외면한 채 걸음을 옮겼다. 산책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날씨도 좋았고, 공기도 좋았다.
피부를 간질이는 바람도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과 평화였다.
그 뒤를 시엘이 조용히 따랐다.
레오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 * *
리리엘은 수련에 집중했다.
칼리반가의 가전 검술은 리리엘에게 있어 버거운 편이었다. 힘이 강한 검술이기 때문이다.
힘이 약한 리리엘에겐 검식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게 아니다, 리리엘. 자세를 다시 잡아라. 다리를 좀 더 벌리고 검 끝에 정신을 집중해라.”
“네, 아버지.”
리리엘은 칼리반 백작의 지시에 몸을 움직였다.
“아직 힘이 부족하구나.”
리리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마에선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리리엘은 검 끝에 정신을 집중하고 한 동작, 한 동작에 힘을 실어 휘둘렀다.
내 뻗어진 검이 힘 있는 파공음을 내었다.
칼리반 백작은 생각보다 잘 따라와 주고 있는 리리엘이 기특했다.
“오늘은 이쯤 하자구나.”
“더 하고 싶어요.”
“네 수준에 벌써 두 번째 검식을 익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레오나는 마검사가 되었다고요.’
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레오나보다 뒤처진다는 사실이 리리엘은 못내 싫었다.
아직 부족했다.
“리리엘.”
칼리반 백작이 리리엘의 어깨를 잡았다.
“초조해하지 말거라.”
그 말에 리리엘이 심호흡을 하였다.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조급했나 봐요.”
칼리반 백작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충분히 잘해 주고 있다. 내 후계자는 너뿐이다.”
“네, 아버지.”
“그만 가자꾸나.”
고개를 끄덕인 리리엘은 빙그레 웃으며 칼리반 백작과 나란히 걸었다.
‘조급할 필요 없어. 후계자는 나야, 아버지도 인정하셨잖아.’
리리엘은 살며시 칼리반 백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전 검술을 완벽하게 익혀서 레오나보다 뛰어난 기사가 되겠어.’
현재 레오나는 백기사단에 입단해 있다. 마력이 아닌 신성력을 가지게 된 건 기적 같은 일이지만, 레오나가 오를 수 있는 자리는 거기까지다.
레오나는 가문에서 축출되었으니, 평민이나 마찬가지였다.
평민이 아무리 공적을 세워봤자, 귀족들을 밀어낼 수는 없다.
‘레오나는 평민이야, 평민이 출세해 봤자, 어디까지 할 수 있겠어? 금세 앞지를 수 있어.’
그럴 자신도 있었다.
훗날, 자신이 칼리반 백작가의 가주가 되면, 레오나는 뭐가 되어 있을까. 일개 평기사가 되거나, 그뿐이다.
운 좋게 귀족의 작위를 받아도 백작인 자신보다는 못하다. 레오나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의미다.
‘여러 의미로 내가 우세해. 내가 기사단에 입단해서 레오나보다 더 훌륭한 공적을 세우면 되니까.’
그럴 자신도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야.’
분명 자신이 더 우월한 상황인데 레오나한테 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건 패배감과 비슷했다.
연무장에서 레오나에게 한 방 먹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여태 잊어버리고 잘 지냈는데 레오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 자꾸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짜증 나,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럼 아무 걱정도 하지 않을 텐데. 레오나는 여러모로 자신을 정말 귀찮게 만드는 존재다.
* * *
제국의 지하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조직 플랑드르.
소매치기부터 매춘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플랑드르는 정보 길드였다.
그리고 그 정보 길드를 이끌고 있는 것은 폴렌이었지만, 진짜 운영자는 따로 있었다.
폴렌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조직을 만들고 키워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그 사람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믿고 존경하는 사람이다.
마침내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하얀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대장!”
폴렌이 기쁜 얼굴로 다가갔다.
“보고 싶었습니다.”
남자가 후드를 벗자, 찬란한 금발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잘 빚어진 이목구비가 어우러진 천상의 얼굴이 미소를 띠었다.
“폴렌, 수고가 많았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스텔 형님.”
아스텔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폴렌이 그의 옆에 붙어 앉았다.
“이제, 제국으로 완전히 넘어오신 겁니까?”
“그래. 완전히 정리하고 왔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아스텔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녀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그녀를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만 했다.
두 번 다시 허무하게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지만, 그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덕분에 시엘이 먼저 선수를 치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시엘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폴렌, 이제 때가 되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제국의 정보를 움켜쥐게 되었지만, 이제는 돈줄을 움켜쥐어야지.”
아스텔은 제국에 분포되어 있는 정보 길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플랑드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통합하는 과정에서 피를 보기도 했고, 돈으로 회유하기도 했다.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섞어가며 사용했고, 플랑드르는 제국에 자리를 잡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제국의 정보는 어느 정도 손아귀에 쥔 셈이다. 플랑드르 덕분에 제국에 자신이 있을 곳도 마련해 두었다.
그녀를 만날 날이 무척 기대되었다.
* * *
흑기사단 카이엘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부단장이 가져온 서류를 살펴보았다.
“결국 건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네.”
“너무 잘 숨어서 말입니다.”
흑기사단장 카이엘은 서류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플랑드르에 세력이 커질 동안 우린 아무것도 못 했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정확히 말하면 그쪽이 우리보다 수완이 더 좋다고 인정해야죠. 예산만 충분했어도 충분히 막았을 겁니다.”
흑기사단을 운영하는 예산은 모두 황실에서 나온다.
하지만 플랑드르는 누군가 돈을 들이붓는지 예상할 수 없는 범위로 세를 불려 나갔다.
카이엘로서는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제 플랑드르는 흑기사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정보를 움켜쥐게 되었다.
“어느 쪽 세력인지 전혀 짐작하는 곳도 없고 말이야.”
만약, 플랑드르가 다른 나라가 손을 써서 만든 조직이라면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
문제는 플랑드르가 제국 내에서만 움직일 뿐, 타국과 접촉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할까.
어느 날 번개처럼 나타나, 제국의 정보 길드들을 통합하고 하나의 길드로 만들어 버린 플랑드르.
“너희는 도대체 목적이 뭐냐.”
카이엘은 서류를 덮고 부단장을 보았다.
“더 지켜봐,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말고 관찰 수준으로.”
“또 지켜봅니까?”
“아직까지 이놈들의 목적이 불분명해. 제국에 해를 끼치는 것도 없고.”
오히려 플랑드르가 나타나고 나서 제국의 밤거리가 조금 안전해졌다고 할까?
치안적인 면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좋게만 봐줄 수도 없었다.
그들의 목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사고도 없었으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나쁜 쪽만 아니면 되니까.”
“너무 긍정적이신 것 아닙니까?”
“분쟁보다는 평화가 낫잖아. 나도 이제 싸우는 거라면 지긋지긋하거든.”
“매번 전투가 있을 때마다 최전방에 나서시는 분이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
카이엘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네, 늘 그러셨습니다. 전쟁터의 미친 광견이란 별명이 괜히 붙으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카이엘이 불만을 토로했다.
“아무리 그래도 개에 비유하는 건 너무하지 않냐?”
“왜요, 다들 잘 어울리는 호칭이라고 합니다만.”
“누가 그래? 어울린다고?”
카이엘이 싱긋 웃으며 부단장을 바라보았다. 부단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단원들이 평소에 나를 그렇게 부르고 다니는 거야?”
식은땀을 흘린 부단장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화 푸십시오.”
뿌득, 뿌득.
뼈 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드니 카이엘이 손가락 마디 마디를 풀고 있었다.
“책상 앞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몸이 좀 찌뿌둥하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부단장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카이엘이 걸음을 옮기며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 연무장으로 집합하라고 전해.”
광견이 광견답게 날뛰어 주겠다는 경고였다.
그날 흑기사 단원들은 하루 종일 지옥을 맛보아야 했다.
다음 날, 모두 쓰러져 휴식을 취했다는 소식은 흑기사단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 * *
레오나의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며칠간은 그러했다.
백기사단에서도 경매장 사건 이후로 별다른 임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준기사들은 평소대로 수련을 하면서 지냈고, 정예 기사들도 수련을 하거나, 마물 토벌을 나가기도 하였다.
마물을 토벌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주로 정예 기사들이 임무를 맡아 하였다.
아직 준기사들은 입단한 지 1년도 채 안 된 신입들이어서 위험한 임무로부터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물들의 힘이 강해진다는 보고입니다.”
부단장 란젤로가 가져온 정보에 데미안은 서류를 살펴보았다.
“정찰 나간 정예들이 살펴본 결과입니다.”
정예 기사들이 이번에 토벌에 나선 장소는 피레니아 숲이었다.
피레니아 숲은 오래전부터 마기에 침식당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이 유난히 마기가 많은 이유는 마왕이 봉인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죽은 마족의 잔해가 남아 있는 탓이기도 하다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존재했지만, 여태까지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리고 피레니아 숲뿐만 아니라 다른 몇 곳도 마기에 참식당해 있었다.
제국은 주기적으로 그곳으로 토벌하여 마물들의 침범을 막고 있었다.
백기사단이 주로 맡고 있는 지역은 피레니아 숲과 폐허 마을 아렌이었다.
다른 곳은 적기사단과 청기사단, 흑기사단이 분담하여 맡고 있었다.
“다른 기사단에서도 같은 현상이 났다는 보고는 없었나?”
“아직 없습니다. 알아볼까요?”
“그러는 게 좋겠지.”
마물의 힘이 강해지면 피해를 입는 것은 제국의 백성들이다.
그 피해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제국의 기사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정예 기사들은 복귀했나?”
“아직 못하고 있습니다. 지원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도록.”
란젤로를 내보내고 데미안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조금 평화로워지나 싶더니, 또다시 사건이 터지려는 모양이다.
“이번엔 마물이라…….”
피레니아 숲에 토벌을 나간 정예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랐다.
기사로서 싸우다 보면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하지만, 보는 입장에선 안타깝다.
그래서 그는 더 혹독하게 기사들을 훈련시킨다. 모든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그 덕분에 백기사단은 제국 최강의 기사단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연무장에서 준기사들이 수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데미안은 연무장으로 걸음했다. 직접 준기사들을 지도해 주기 위해서이다.
레오나는 제임스, 말론, 유릭을 상대로 대련을 하였다.
레오나가 부탁한 것이었다.
시작은 라파엘이 먼저 했고, 뒤를 이어서 레오나가 시작한 것이다.
일 대 다수의 싸움.
라파엘이 검술로 세 명을 아웃시키며 레오나를 도발한 것이다.
레오나도 싸움에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응해주었다.
그래서 지금의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제임스의 찌르기가 레오나의 목을 노렸다. 이어서 연계로 말론의 발이 레오나의 다리를 노렸고, 유릭의 검이 레오나의 허리를 노렸다.
레오나는 빠른 움직임으로 세 사람의 공격을 피해내고 그 찰나의 순간에 공격을 하였다.
제임스, 말론, 유릭은 기가 막힌단 얼굴로 레오나의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가 동시에 공격하였다.
정면, 등, 옆에서 다양한 공격이 레오나를 향해 쇄도했다.
그 공격을 모두 피한 레오나는 제임스의 뒷목을 가격하고, 말론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유릭의 검을 튕겨냈다.
제임스가 볼멘소리를 냈다.
“레오나, 목을 치다니 너무해!”
그 말에 말론이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나 제임스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야, 내 엉덩이가 더 아파.”
“그렇다고 남의 귀한 엉덩이를 차냐? 너도 맞자.”
“누가 맞아준댔냐.”
유릭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레오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집합.”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수련하고 있던 준기사들이 모두 연무장에 집합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데미안이었다.
“오늘은 내가 직접 너희를 지도해 주겠다.”
늘 준기사들을 지도했던 란젤로의 몫이었다.
데미안도 준기사들을 지도해 주긴 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데미안은 주로 정예 기사들을 지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준기사들을 지도할 모양이다.
“모두 진검을 잡아라.”
지시에 따라 준기사들이 모두 진검을 잡았다.
“한 명씩 나를 상대한다.”
데미안이 한 명을 지목했다.
“네가 먼저 시작해라.”
“예, 단장님.”
“모두 내려가서 지켜보도록.”
연무장에는 데미안과 그가 지목한 준기사 한 명만이 남았다.
“시작하지.”
공격은 준기사 쪽에서 시작하였고, 데미안은 그의 공격을 받아주었다.
“너는 움직임이 훤히 보인다. 정석적인 움직임 말고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공격을 연구해 보도록.”
“알겠습니다.”
지도를 받은 준기사가 내려가면 다른 준기사들이 차례대로 올라가 데미안의 지도를 받았다.
그들 모두 데미안에게서 한 가지씩 숙제를 받고 내려왔다.
제임스와 말론, 유릭도 차례대로 올라가 지도를 받았다.
제임스는 민첩함을 길러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고, 유릭은 손아귀 힘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리고 말론은 헛된 동작이 너무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다음 차례는 라파엘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라파엘과 데미안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바닥을 박찬 라파엘은 있는 힘껏 데미안에게 검을 휘둘렀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라파엘의 검을 쳐낸 데미안은 이어진 라파엘의 검도 가볍게 걷어냈다.
놀라운 것은 그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라파엘은 자신의 검이 데미안에게 이미 간파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허를 찌르는 방법으로 공격했다.
측면에서 공격하는 척하다가 기척을 죽이고 뒤로 이동해 검을 찔러 넣었다.
데미안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검을 뒤로 넘겨 튕겨냈다.
“좋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아직 호흡이 모자라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레오나의 차례가 되었다.
연무장에 올라선 레오나는 데미안과 검을 마주 대고 섰다.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격할 데가 없어. 다 막힐 거야.’
어딜 어떻게 공략해도 데미안은 다 막아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이건 승패와 상관없는 대련이야. 내 최선을 보여주면 돼.’
가장 자신 있는 공격으로 데미안을 상대한다.
이미 데미안은 그녀보다 아득히 먼 위치에 올라선 강자. 아직은 레오나가 그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건 인정해야만 한다.
레오나의 신형이 빠르게 앞으로 쏘아졌다.
찌르기가 아닌 베기를 선택한 레오나는 급소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레오나의 검이 데미안의 쇄골을 비켜 베었다.
데미안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체를 틀어 레오나의 검을 흘려보내고 그녀의 손목을 쳤다.
레오나는 검을 놓치지 않고 자세를 바꿔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었다.
데미안의 상체가 뒤로 기울어지더니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데미안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레오나가 유일하게 그의 한 걸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공격을 실패한 레오나가 데미안의 발을 보며 히죽 웃었다.
“방금, 한 걸음 움직이셨습니다.”
데미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군. 잘했다.”
“감사합니다.”
데미안은 레오나의 검이 한 층 더 성장한 것 같아 기뻤다.
“실력이 많이 늘었군.”
“다 가르침 덕분이죠.”
데미안의 레오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기대가 크다.”
레오나라면 마물 토벌에 참가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레오나를 제외하고 몇몇 준기사에게도 희망이 보였다.
‘앞으로 준기사들은 레오나와 라파엘을 중심으로 성장하겠어.’
뛰어난 자들이 함께 있으면, 뒤처진 자들도 시너지를 얻어 성장하게 된다.
백기사단의 미래가 밝았다.
* * *
피레니아 숲.
마기로 가득한 그곳은 마물의 서식지였다.
최근 들어 증가한 마물들 때문에 인근 마을과 도시가 겁에 질려 있었다.
이에 백기사단에서는 토벌에 나섰고, 지금 그 정예 기사단이 토벌 중이었다.
“헉헉, 젠장. 숫자가 너무 많아. 지원은 오는 거야?”
정예 기사 한 명이 투덜거리자, 마물 한 마리를 베어 넘긴 다른 정예 기사가 그를 위로했다.
“올 거다. 우리는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젠장.”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부상자가 셋이나 되었다.
이곳에는 백기사단 정예 15명만 왔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피레니아 숲은 늘 정예 기사 15명이 해결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늘어난 숫자는 물론, 거대한 마물들까지 나타났다.
덩치 큰 마물들을 처리하느라 달려드는 자잘한 마물들까지 상대하기가 벅찼다.
게다가 숫자는 왜 그렇게 많은지, 벌써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최대한 버텨라!”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원이 왔다.
“모두 무사하냐!”
숲을 헤치며 나타난 사람은 부단장 란젤로의 정예 기사들이었다.
“부단장님!”
상황을 파악한 부단장이 혀를 찼다.
“다쳤군.”
부상당한 세 명이 고개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고개 들어, 일단은 여기를 정리하는 게 먼저니까, 이유는 나중에 듣지.”
란젤로가 함께 온 정예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빠르게 정리하고 복귀한다.”
“충!”
란젤로를 선두로 한 정예 기사들이 한데 뭉쳐 마물들을 공격했다.
란젤로의 지휘 아래 움직인 정예 기사들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마물들을 정리해 나갔다.
그 한가운데 란젤로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덕분이다.
커다란 마물의 머리를 검으로 날려버린 란젤로가 정예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대충 정리가 끝난 것 같군.”
란젤로의 지휘와 정예 기사들의 활약 덕분에 그 많던 마물이 모두 시체가 되었다.
“부상자는?”
“다섯 명입니다.”
그사이 벌써 두 명이나 부상을 당했다. 다행히 경미한 부상이라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다.
“복귀한다.”
란젤로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제히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백기사단의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에 도착한 정예 기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모두 숨을 고르는 것이다.
란젤로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정예 기사 둘을 보았다.
하나는 허벅지가 깊게 뜯겨 나갔고, 다른 한 명은 등짝이 걸레가 되었다.
게다가 둘 다 피를 많이 흘린 상태라 위험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살짝 베인 경상이었다.
레오나는 수련 도중 갑자기 나타난 부단장과 정예 기사들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기 때문이다. 레오나뿐만 아니라, 함께 있었던 라파엘, 제임스를 비롯한 준기사들도 놀란 얼굴로 엉망이 되어 돌아온 정예 기사들을 보았다.
그중 레오나의 시선을 끈 것은 부상자였다.
피를 많이 흘리고 있어서 위독해 보였다.
레오나는 즉시 달려갔다.
허벅지가 깊게 파인 정예 기사를 보니 안타까웠다.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두 손을 상처 부위에 올린 레오나는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치유.”
레오나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이 상처를 치료했다.
찢어진 살이 봉합되며 상처가 나았다. 아픈 다리를 붙잡고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순식간에 상처가 낫자, 놀란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빙그레 웃은 레오나는 다음 부상자에게 향했다.
등이 걸레짝처럼 찢어진 부상자였는데 레오나가 신성력으로 치유하자, 말끔하게 나았다.
레오나는 다른 부상자들도 모두 신성력으로 치료해 주었다.
정예 기사들은 신성력을 가진 레오나가 새삼 다시 한번 대단하게 느껴졌다.
“고맙다, 레오나.”
란젤로가 레오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자, 다른 정예 기사들도 레오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앞으론 다치지 마십시오.”
“물론이다.”
피식 웃은 란젤로가 정예 기사들을 다독였다.
“모두 돌아가 쉬도록. 특히 부상자는 후유증을 생각해서 각별히 주의해라.”
“예, 부단장님.”
정예 기사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란젤로는 몸을 돌렸다.
레오나가 그의 옆을 따라붙으며 물었다.
“마물 토벌을 다녀오신 겁니까?”
“맞아.”
“전에는 이렇게 부상자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도 정예 기사가 되면 해야 할 일이니, 마물에 대한 지식을 완벽하게 숙지해 놓도록 해.”
“당연하죠. 저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 있는 레오나의 대답에 란젤로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네가 우리 기사단에 있어서 다행이다.”
“칭찬 감사합니다, 부단장님.”
란젤로와 헤어져 곧바로 숙소로 돌아온 레오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생각했다.
“마물이라…….”
마물은 끔찍한 생물이다.
그들은 잔인하고 피에 굶주린 괴물들이다. 끊임없이 살육을 갈구하며, 오로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움직이는 괴물들.
또한 끈질기며 집요하며 고통을 모른다. 팔이 잘려 나가도, 다리가 절단되어도 상대를 물어뜯는다.
그래서 상대하기 버겁고 무섭다.
각 기사단에서 마물을 토벌하는 이유는 숫자가 늘어나 민간인들을 공격하려는 그들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반드시 토벌은 필요하다.
‘흑마법사도 그렇고, 마물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은 건 무언가 일어날 징조인데…….’
이번 생은 조금 평화롭게 살아보려나, 했더니, 그러긴 틀린 모양이다. 마치 운명처럼 누군가 자신을 또다시 전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으려는 그런 느낌이다.
‘운명인가?’
신성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그래야 하는 것일까.
모르겠다.
레오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무얼 생각한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임하는 것뿐이다.
* * *
레오나 덕분에 상처가 치유된 정예 기사들은 다시 임무에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며칠은 정양해야 할 상처들이었다. 그걸 레오나가 신성력으로 깨끗하게 치유해 준 것이다.
그들은 레오나가 지닌 신성력의 대단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레오나가 백기사단에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레오나, 얼른 정예 기사가 되라. 네가 있으면 정말 든든할 것 같다.”
“그래, 레오나. 넌 언제든 시험을 치를 수 있잖아. 하루라도 빨리 정예 기사가 되라고.”
“네 실력으로 준기사에 있다는 게 정말 아까워.”
정예 기사들이 한마디씩 거들자, 레오나는 멋쩍게 웃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시험은 생각해 볼게요.”
“그래, 우린 언제든 환영이니까. 잘 생각해 봐.”
정예 기사들이 그렇게 말해주니, 레오나는 승급 시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언제까지 준기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정예 기사가 되긴 해야겠지.’
레오나는 단장에게 진지하게 상의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오나.”
제임스가 다가와 레오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제임스는 어딜 가나 넉살이 좋아 친화력이 정말 좋았다.
레오나에게 거리낌 없이 어깨동무하는 것도 그렇고.
“넌 정말 대단해.”
“너까지 왜 그래?”
“부러워서 그렇지. 내가 그런 능력을 가졌다면 아주 끝내줬을 텐데, 안 그러냐?”
“넌 지금도 좋잖아.”
“좋긴. 너나 라파엘에 비하면 한참 멀었지.”
레오나는 피식 웃었다.
“나나 라파엘만 의식하지 말고 네 길을 가. 넌 너만의 스타일이 있잖아.”
“그런가?”
“그래, 넌 너무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어. 그러지 마.”
“내가 좀 그렇긴 하지.”
그는 재능이 있지만, 라파엘처럼 천재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항상 평균 이상만 하는 그런 정도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레오나나 라파엘을 보면 아득히 먼 산을 보는 듯했었다. 그런데 레오나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너무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오늘 뭐 하냐?”
“왜?”
“오랜만에 술 한잔하자고. 우리 뭉친 지 좀 됐잖아.”
“그렇긴 하네.”
이런저런 사건이 많아서 다 같이 모여 술을 마셔본 적이 최근에는 거의 없었다.
“그럼, 가는 거다?”
“알았어, 갈게.”
제임스는 신이 난 얼굴로 유릭, 말론에게도 이야기를 했고, 라파엘에게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흔쾌히 가겠다고 하였고, 라파엘은 고민하더니 레오나가 간다는 말에 따라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불청객이 한 명 더 따라붙었다.
레오나가 동료들과 술을 마시러 간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시엘이 귀신같이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제 귀와 눈은 항상 당신을 좇고 있거든요. 당신에 관한 거라면 모르는 게 없을 겁니다. 게다가 술을 마시러 간다는데 안 나타날 수가 없죠.”
“너도 참 한가하다.”
시엘은 빙그레 웃었다.
“레오나!”
때마침, 제임스와 동료들이 나타났다. 레오나는 미소로 그들을 반겼다.
“많이 기다렸냐?”
“아니.”
“그런데 옆의 분은 누구야?”
“아, 그게…….”
레오나가 나서려는 순간 시엘이 가로챘다.
“안녕, 난 시엘. 레오나와 둘도 없는 친구지. 술 마시러 간다고 하길래 나도 껴달라고 하던 참이었어. 같이 가도 되지?”
시엘이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제임스는 동료들을 보았다.
“난 상관없어.”
“나도.”
유릭과 말론이 말했고, 라파엘은 레오나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해 보니 시엘은 이곳에서 자신 외에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는 듯 보였다. 지난번 흑기사단에 갔을 때도 혼자 겉도는 느낌이었다.
레오나는 시엘이 도무지 떨어질 것 같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가자.”
레오나의 허락에 시엘이 기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