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제는 나서야 할 때
2황녀 비비안에게서 초대장을 받은 리리엘은 들뜬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오늘은 티모임 날이 아닌데도 초대를 해준 것이다. 그것도 자신 혼자만.
정확하게 초대장에 자신과 단둘이 차를 마시고 싶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애쓴 보람이 있었어.’
티모임이 든 이후 차를 대접할 때나, 디저트를 대접할 때 각별히 신경을 썼다.
모두 최고의 것들만 준비했다.
그 덕분에 이렇게 단둘이 만나 친분을 쌓을 기회도 생기지 않았나.
‘비비안 황녀가 적통은 아니지만, 사교계에선 입김이 세지.’
1황녀가 몸이 안 좋은 관계로 사교계는 1황녀 대신 비비안 황녀가 황실을 대표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그 위에 황후가 있지만, 그녀는 아픈 황녀를 보살피느라 거의 활동을 못 하고 있었다.
그 대신 비비안 황녀가 황실을 대표하여 사교 모임에 참석하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사교계에선 비비안 황녀의 입김이 제법 강했다.
리리엘은 그녀가 주최하는 티 모임의 멤버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끊임없이 어필하고, 노력해서 멤버가 될 수 있었다.
어느새 마차는 장미 궁 앞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시녀가 리리엘을 맞이했다.
리리엘은 시녀의 안내를 받아 정원에 있는 가제보로 향했다.
가제보에 도착하자, 2황녀 비비안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리리엘 영애.”
“2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일어나세요.”
“예, 전하.”
“앉으세요.”
리리엘은 2황녀 비비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2황녀 비비안이 손수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제가 좋아하는 차랍니다. 영애의 입맛에도 맞았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전하.”
“들어요.”
리리엘은 조심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는 홍차였다.
디저트는 머랭 쿠키와 스콘이 있었다. 평소 2황녀 비비안이 즐겨 먹는 디저트였다.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전하.”
“영애와 단둘이 차를 마시는 건 처음인가요?”
“예, 처음입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2황녀 비비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창한 것이 날씨가 정말 좋았다.
“날씨가 정말 좋아요.”
“예, 전하.”
리리엘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2황녀 비비안의 말대로 날씨가 정말 화창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 2황녀 비비안이 물었다.
“영애의 언니인 레오나 양 말인데요?”
갑자기 레오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리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희 언니요?”
“레오나 양의 머리색이 하늘색 맞죠?”
“네, 맞아요.”
“눈동자는 금빛이고요.”
“그렇습니다만.”
리리엘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2황녀 비비안을 보았다.
자신을 불러내서 갑자기 레오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제가 얼마 전에 레오나 양을 봤어요.”
“저희 언니를요?”
“맞아요. 근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리리엘은 절로 긴장되었다.
“글쎄, 레오나 양이 백기사단에 있지 뭐예요.”
“예?”
이번엔 진심으로 놀랐다.
“백기사단이요?”
“그렇다니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리리엘도 레오나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알아낸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2황녀 비비안이 레오나가 백기사단에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잘못 보신 걸 거예요. 백기사단이 어떤 곳인데요.”
“아니요, 분명 백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었어요.”
“그럴 리가…….”
2황녀 비비안 황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애, 지금 제 눈을 의심하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말이 안 돼서요. 아시다시피 저희 언니는 백기사단에 입단할 만한 실력이 안 되거든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죠. 소문도 있고, 무엇보다 영애의 말을 믿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된다.
레오나는 자신의 발치에도 못 미친다. 그래서 가문에서도 축출되지 않았나.
“못 믿겠죠?”
“예,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 확인하러 가볼까요?”
“확인이요?”
“우리가 직접 백기사단에 가보는 거예요. 그것보다 확실한 건 없잖아요?”
리리엘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2황녀 비비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리리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요.”
리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2황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닐 거야. 황녀 전하께서 착각하신 걸 거야.’
레오나가 백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을 리 없다. 그럴 만한 실력이 못 된다는 것을 리리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절대 그럴 리 없어.’
리리엘은 2황녀 비비안과 함께 백기사단으로 향했다.
그 시각, 레오나는 연무장에서 동료들과 수련을 하고 있었다.
가벼운 체력단련부터 시작해 대련으로 마무리를 하고는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목이 말라 수통을 꺼내 목을 축인 레오나는 옆에 앉은 라파엘을 보았다.
라파엘은 땀으로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라파엘, 너 실력 많이 늘었다.”
“칭찬, 고맙군. 레오나, 너도 만만치 않다.”
“그래?”
“검이 제법 매서워졌더군.”
레오나와 검을 맞대본 라파엘은 레오나의 검이 전에 비해 더 날카로워진 것처럼 느꼈다.
“그럼, 우리 한 판 더 할까?”
레오나의 제안에 라파엘이 수건을 벤치에 걸어 두고는 일어났다.
“좋다.”
레오나는 씩 웃으며 연무장 위로 올라섰다. 그 뒤를 라파엘이 뒤따랐다. 그런 두 사람을 동료들은 고개를 저으며 구경했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더 있었다.
바로 2황녀 비비안과 리리엘이었다.
두 사람은 기사단 입구에 서서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애, 제 말이 맞죠?”
“그, 그게…….”
리리엘은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연무장 위에서 레오나가 대련을 하고 있었다.
저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그녀가 아는 레오나가 맞았다.
“어떻게…….”
말도 안 된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레오나가 대련하고 있는 상대는 자신도 아는 사람이었다.
라파엘 드 바스티안.
바스티안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사교계에서도 손꼽히는 신랑 후보.
그때 문득 지난번 거리에서 레오나와 라파엘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굉장히 친해 보였다.
‘맙소사, 그럼 정말로…….’
두 사람이 기사단 동기라면 거리에서 친해 보였던 이유가 설명이 된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레오나가…….’
리리엘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 그녀를 2황녀 비비안이 달랬다.
“영애, 괜찮아요? 안색이 나빠요.”
“죄송합니다, 전하.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실례가 안 된다면 그만 돌아가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얼른 가서 쉬세요.”
“송구합니다.”
리리엘이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돌아서자,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비비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리리엘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황궁에서 두 눈으로 보고 온 레오나가 믿기지 않아서였다.
“어떻게 레오나가 백기사단에 들어갈 수가 있지?”
대련을 마치고 내려온 레오나가 어깨에 걸친 재킷, 그건 분명 백기사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리리엘은 제국 4대 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각 기사단의 상징, 무력, 특징까지 외웠다. 그리고 하얀 제복을 입는 제국의 기사단은 백기사단이 유일했다.
“내가 동경하는 기사단에 정말로 레오나가 입단한 거야?”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알아보아도 알 수 없었는데, 황궁에서 보게 되다니.
그것도 백기사단에서!
“짜증 나.”
자신은 아직 기사단 시험도 치르지 못했는데 레오나는 벌써 입단해 있다니.
“대체 시험을 어떻게 통과한 거야?”
애초에 말이 안 된다.
백기사단은 마법과 검을 동시에 다루기 때문에 두 분야 모두 뛰어나야 했다.
게다가 레오나는 자신보다 마력도 낮았다.
“뭔가 꼼수를 부린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일단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절대 이 사실을 알아선 안 돼.”
레오나가 백기사단에 기사가 된 것을 안다면, 아버지의 태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레오나를 다시 받아들이려 할지도 몰라. 절대 안 돼!”
정말 짜증 난다.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들어간 리리엘은 곧장 그레타 부인을 찾았다.
“엄마!”
“리리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니?”
방 안에서 사교 모임에 갈 드레스를 고르고 있던 그레타 부인은 딸의 방문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리리엘은 3시간 전에 2황녀 비비의 초대를 받고 황궁에 부름을 받았다.
오전 10시에 나간 아이가 겨우 정오가 되었는데 돌아오니 걱정이 되었다.
“리리엘, 황녀 전하께 실수라도 한 거니?”
“실수 안 했어, 그게 문제가 아니야. 엄마.”
리리엘이 심각한 얼굴을 하자, 그레타 부인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나, 레오나를 봤어.”
“뭐?”
“글쎄, 레오나가 백기사단에 있지 뭐야.”
“그게 무슨 말이니, 백기사단이라니?”
“엄마도 알잖아, 백기사단이 어떤 곳인지.”
“그럼, 모를 리가 있나, 네가 그토록 동경하던 곳이잖니.”
리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레오나가 있었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레오나가 백기사단의 단원이 된 것 같아.”
그레타 부인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오나가 그 실력으로 어떻게 백기사단에 들어갔다는 거니?”
“나도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백기사단은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다뤄야 해, 그런데 레오나는 아니잖아. 마력도 나보다 못한 수준이고. 그런데 백기사단이 가당키나 해?”
“그건 그렇지. 그런데 정말 레오나가 맞았니?”
“내가 두 눈으로 봤으니까, 이러지. 나도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니까. 오늘 황녀 전하께서 알려주시더라고.”
“2황녀 전하가 말해주었다고?”
“어, 본인 눈으로 직접 봤다는 거야. 그래서 확인도 시켜주셨어.”
그랬는데 거기에 레오나가 있을 줄이야.
“이 사실을 네 아버지가 알면…….”
“모르시게 해야지. 아버지가 알면 분명 레오나를 불러들이려 하실 거야.”
그건 그레타 부인도 동감하는 바였다.
“걱정 말렴, 리리엘. 엄마에게 좋은 생각이 있단다.”
“그게 뭔데?”
“오늘 엄마가 나가는 모임에 백기사단에 부단장으로 있는 란젤로 경의 어머니가 참석하시거든.”
리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의심을 심는 거지, 검증되지 않는 실력을 가진 레오나에 관해서. 소문이 퍼지면 레오나는 실력으로 재검증을 해야 할 거야. 만약, 제 실력으로 입단한 게 아니라면 매장당하게 되지 않겠니?”
“그렇지, 레오나는 사기를 친 거니까.”
리리엘이 그레타 부인의 팔에 매달렸다.
“역시, 엄마밖에 없어.”
“뭘, 이 정도 가지고. 리리엘 염려 말렴. 네 걱정은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고마워, 엄마. 그런 의미로 오늘 모임에 나갈 드레스는 내가 골라줄게.”
“어머, 그럴래?”
“물론이지.”
리리엘은 신나는 얼굴로 그레타 부인의 드레스와 장신구를 골라주었다.
그리고 그레타 부인은 리리엘이 골라준 드레스와 장신구를 한 채 사교 모임에 참석했다.
* * *
오늘 사교 모임은 그림 품평회였다.
평소 그림에 조예가 깊은 부인들이 작은 전시회를 열어 그림에 대한 감상평을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그런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참석하는 귀부인들의 신분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레타 부인은 초대장을 들고 모임을 주최하는 미겔 백작 부인의 저택에 도착했다.
“어서 와요, 그레타 부인.”
미겔 백작 부인이 직접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부인.”
“별말씀을요. 이리 오세요.”
“예, 부인.”
그레타 부인은 미겔 백작 부인과 함께 전시 장소에 들어갔다.
“오늘은 제가 후원하는 화가의 품평회랍니다. 좋은 의견 주시기 바라요.”
“물론이에요, 부인. 저 역시 그림에 관심이 아주 많거든요.”
“잘 되었군요.”
미겔 백작 부인은 그레타 부인을 다른 부인들에게 직접 소개했다.
“이분이 백기사단의 부단장인 란젤로 경의 어머니 헬레나 부인이에요.”
“어머, 이런 자리에서 귀한 분을 뵙다니, 영광이에요.”
그레타 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헬레나 부인도 인사를 받아주었다.
“반가워요. 헬레나 그라시프예요.”
그레타 부인은 더욱 친근하게 웃으며 헬레나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겔 백작 부인과 함께 그림을 감상하며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나누었다.
품평회가 끝나고 작은 티모임이 열렸다.
그레타 부인은 헬레나 부인에게 다가갔다.
“헬레나 부인, 잠시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물론이에요.”
두 사람은 함께 산책을 빌미로 대화를 나눴다.
“할 이야기라는 게 뭐예요? 부인.”
헬레나 부인의 질문에 그레타 부인이 머뭇거리며 억지로 입술을 열었다.
“그게,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란젤로 경이 계신 백기사단에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아이가 들어가서 말이에요.”
“예, 그게 무슨…….”
“레오나라는 그 아이는 사실 제가 키운 딸인데 백기사단에 들어갈 만한 아이가 아니라서요. 외람되지만 아무래도 그 아이가 부정한 방법으로 들어간 것 같아서, 어미 된 입장에서 걱정이 크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상심이 크시겠어요.”
“저번에도 그 아이가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이 눈 밖에 나서 쫓겨났거든요. 그래도 제가 엄마인지라 너무 걱정이 되어서 그이 몰래 보살폈는데 그 아이가 그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어요.”
그레타 부인은 손수건을 꺼내 일부러 눈물을 훔치는 척 연기를 했다.
“저런…….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봐 드릴게요. 정말로 부정을 저질렀다면 벌은 받아야겠지만, 최대한 선처하도록 해줄게요.”
“정말 고마워요. 부인.”
그레타 부인은 우는 척 연기를 했다. 그 연기에 헬레나 부인은 그녀를 다독거려 주었다.
“헬레나 부인, 이런 말씀하기 뭐하지만, 우리 아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물론이에요. 너무 걱정 마요.”
“네, 부인만 믿을게요.”
그레타 부인은 헬레나 부인의 손을 잡고 재차 다짐을 받았다.
헬레나 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응해 주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군요. 그만 갈까요?”
“예, 부인.”
두 부인은 산책을 마치고 다시 미겔 부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귀택한 란젤로는 어머니 헬레나 부인을 만났다.
“오셨습니까, 어머니.”
“란젤로, 오랜만이구나. 요즘 통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 찾아왔단다. 네가 좋아하는 피칸 파이도 줄 겸 해서 말이다.”
“그러셨군요.”
란젤로는 헬레나 부인이 가져온 피칸 파이를 집사를 시켜 준비하게 하였다.
잠시 후, 따듯한 차와 피칸 파이가 테이블에 차려졌다.
란젤로는 피칸 파이를 한 입 잘라 먹으며 안부를 물었다.
“건강은 괜찮으신 거죠?”
“그렇게 걱정되면 본가에 얼굴 좀 비춰주렴. 네 아버지도 널 무척 보고 싶어 하신다.”
“조만간 들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헬레나 부인은 용건을 꺼냈다.
“란젤로, 너희 기사단에 말이다.”
란젤로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헬레나 부인을 보았다.
“혹시 레오나라는 기사가 있니?”
“있습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실은 말이다.”
헬레나 부인은 그레타 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란젤로에게 전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란젤로는 피칸 파이를 먹다가 체할 뻔했다.
“레오나가 부정한 방법으로 입단을 했다고요?”
“그래, 그렇다는구나. 만약 사실이라면 큰일이 아니니, 너의 기사단 체면도 있고.”
그 말에 란젤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니, 부정한 방법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레오나는 올해 입단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치러낸 인재입니다. 부정한 방법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정말이니? 듣기론 실력이 형편없다고 하던데.”
“뭐, 과거엔 그랬겠죠. 저도 소문은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레오나는 재능이 늦게 개화를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레타 부인 말로는…….”
“어머니, 레오나가 칼리반 백작가에서 지낼 때 실력이 없었다는 건 저도 압니다. 그래서 칼리반 백작가에서도 축출당했죠.”
“문제를 일으켜서 축출당한 거라고 하던데?”
“그 문제가 칼리반가의 장녀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거였죠.”
“그럼,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쫓겨났다는 거니?”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헬레나 부인은 레오나가 조금 측은해졌다.
“그럼, 정말 실력으로 입단했다는 거니?”
“당연하죠. 실력이 안 되면 저희 기사단은 입단이 불가능합니다. 어머니도 잘 아시잖습니까. 부당한 방법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건 저희 기사단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레오나가 신성력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레오나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나가 신성력을 가졌다는 것은 기사단과 황실만이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어머니, 레오나는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그 어떠한 부정도 없었습니다.”
란젤로가 단호하게 말하자, 헬레나 부인은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크흠, 미안하구나. 괜한 말을 들어서 그만…….”
“어머니, 너무 남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마세요. 저는 어머니가 그런 일에 휘말려 상처받으실까 걱정됩니다.”
“걱정 말렴, 그 정도 일로 상처받는 일은 없다.”
헬레나 부인은 그레타 부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의아했다.
자신이 키운 딸이라면서, 부정을 저질러 입단했다고 하지 않나, 사고를 쳐서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하지 않았나.
‘왜 그렇게 말한 거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레오나와 그레타 부인의 관계가 보기와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다음 날, 레오나는 부단장 란젤로를 만났다. 란젤로가 레오나를 불러낸 것이다.
“부단장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일단, 앉지.”
란젤로가 벤치에 앉자, 레오나도 그의 옆에 앉았다.
“레오나, 어제 내 어머니가 다녀가셨는데 이상한 말을 하셨다.”
“이상한 말이요?”
“네 어머니가 내 어머니께 네가 부정한 방법으로 우리 기사단에 입단했다고 한 모양이다.”
레오나는 기가 막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쪽 부인과 너, 관계가 안 좋냐?”
“좋지는 않습니다.”
“그쪽에서 네가 우리 기사단에 입단한 사실은 모르고 있었겠군. 네가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럴 겁니다.”
칼리반 백작가는 레오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레오나가 축출된 이후로도 아버지란 작자는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사실상 칼리반 백작가와는 끝이 난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제 안 모양이다. 자신이 백기사단에 입단했다는 것을.
‘그레타 부인이 알았다면 절대 아버지께 말하진 않았을 거야.’
가문 내에서 알고 있을 확률이 높은 사람은 아마도 리리엘과 그레타 부인, 두 사람뿐일 것이다.
‘내가 백기사단에 있다는 걸 아버지가 아시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자신이 부정한 방법으로 입단했을 거라고 입을 놀리다니.
그건 좀 화가 났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자신은 이미 그곳을 나왔고, 완전히 연을 끊었으니까.
란젤로가 진지한 얼굴로 레오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내라.”
“……예.”
“아참, 그리고 이번 경매장에서 네가 단장님과 함께 악마들을 물리쳤다고 들었다.”
“단장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란젤로가 레오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절대 딴 데 가지 말고 우리 기사단에 꼭 붙어 있어, 너 같은 인재는 빼앗기고 싶지 않거든.”
“딴 데로 갈 생각 없습니다. 저는 백기사단이 좋으니까요.”
“그럼, 됐고.”
란젤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할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난다. 공 좀 세웠다고 훈련 게으르게 하면 알지?”
“물론입니다.”
레오나가 미소를 짓자, 란젤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란젤로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레오나는 칼리반 백작가에 관해서 생각했다.
백기사단에 입단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지만, 칼리반 백작가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완전히 정리를 해야 하는 건가.”
서류상으로는 이미 그녀는 칼리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천륜이라는 것이 서류 한 장으로 끝날 사이는 아니다.
“귀찮게 굴면 곤란한데…….”
“제가 처리해 드릴까요?”
갑자기 시엘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레오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척 좀 내고 다녀.”
“놀란 척하지 마십시오. 다 알고 계셨으면서.”
레오나는 오감이 예민해서 시엘이 다가와 앉는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기분 나쁘거든?”
“그럼, 사과드려야겠군요. 앞으론 조심하겠습니다.”
레오나는 그런 시엘을 무시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만 가, 혼자 생각 좀 하게.”
“없는 듯이 있겠습니다. 마음껏 생각하십시오.”
레오나가 질린다는 얼굴로 시엘을 보았다.
“너 스토커냐?”
“당신만을 위한 스토커라 할 수 있죠.”
레오나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시엘을 보았다.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은 놈이 자신의 스토커가 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푸른 장미의 계승자가 울겠어, 그 희귀한 능력을 스토킹하는 데 쓴다고.”
“오히려 영광이죠. 제 희귀한 능력이 당신을 위해 쓰이는 거니까.”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나가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죠.”
“떨어져.”
“싫은데요.”
“짜증 나거든.”
“마음껏 내십시오. 전 당신의 모든 감정을 받아줄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레오나가 머리를 싸쥐었다.
“갑자기 아스텔이 보고 싶어졌어.”
적어도 아스텔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었으니까, 시엘처럼 청개구리 기질은 전혀 없는 착한 놈이었다.
“제가 아스텔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습니다. 아니, 제가 아스텔보다 낫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
레오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시엘이 자신 있게 말했다.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저라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아스텔은 정말 지독한 놈입니다.”
“아니거든, 아스텔은 너보다 백배는 착한 놈이야.”
레오나가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시엘을 보았다.
시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은 모르고 있어요. 아스텔이 얼마나 여우 같은 놈인지.”
“내 앞에서 착한 우리 아스텔 욕하지 말아줄래.”
시엘이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오, 답답해.”
“답답하면 그만 가.”
“싫습니다. 당신과 나란히 걸을 겁니다.”
레오나는 악동같이 구는 시엘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 * *
그레타 부인은 기분이 좋지 못했다. 사교 모임에서 만난 헬레나 부인이 그레타 부인에게 모욕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이 그러는데, 레오나 양은 정당한 시험을 치러 합격한 인재라고 하더군요, 부인은 무슨 근거로 내게 그런 말을 한 거죠?’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아이의 실력으로 백기사단에 입단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럼, 우리 아들이 거짓말을 내게 했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아무튼 부인은 앞으로 말을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확인되지도 않은 말은 분란을 낳게 마련이니까요.’
헬레나 부인의 말에 차를 마시던 다른 부인들도 그레타 부인의 경솔한 행동을 질책했다.
얼굴이 붉어진 그레타 부인은 서둘러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방 안에서 혼자 화를 삭여야만 했다.
“레오나, 그게 정당한 방법으로 시험을 치러 합격을 한 거라고? 말도 안 돼.”
레오나는 어릴 적부터 늘 리리엘보다 못한 실력을 가진 아이였다. 장녀임에도 불구하고 가문에서 축출된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래놓고 백기사단의 입단했다.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길래.’
백기사단은 리리엘도 들어갈 수 없는 최강의 기사단이다.
백기사단은 검술과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자 집단.
아직 리리엘은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청기사단으로 선택을 한 것이다.
청기사단이 백기사단보다는 못하지만, 제국의 정예 기사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리엘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기도 했다.
청기사단에 입단한 기사 대부분이 명문가 출신의 영애들이었다. 그들과 친분을 쌓아둔다면, 리리엘로서도 나쁠 것은 없었다.
‘레오나가 백기사단에 기사가 되다니…….’
여러모로 짜증 나는 아이다.
‘언젠간 그이도 알게 될 거야.’
백기사단에 들어갔으니, 기회가 된다면 공을 세우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름을 알리게 될 것이다.
승승장구하게 될 레오나를 칼리반 백작이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이의 핏줄이니까.’
어떻게 해서든 다시 데려오려고 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내어 줄지도 몰라.’
칼리반 백작가는 기사 가문. 그리고 레오나는 그런 가문의 장녀였다. 레오나가 다시 칼리반 백작가에 입적된다면, 리리엘에게는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어.’
그걸 막으려면 레오나를 백기사단에서 쫓겨나게 만들어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머리가 아프다. 멀리 치워 버린 줄 알았던 레오나가 다시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다니.
‘끈질긴 계집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럼, 마음이 참 편할 텐데.
‘그냥 죽여버릴까?’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자칫하면 자충수를 둘 확률이 높았다.
‘하아.’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 * *
리리엘은 카페에서 재스민을 만났다. 재스민은 아카데미에서 만난 선배였고, 리리엘과 가까운 사이였다.
가끔 만나 대련도 하고, 사교 모임에서도 자주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리리엘이 입단하게 될 청기사단의 단원이었다.
리리엘에게 청기사단에 입단할 것을 권한 것도 그녀였다.
“잘 지냈어? 리리엘.”
리리엘은 재스민이 입고 있는 제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푸른색 재킷과 왼쪽 가슴에 달린 엠블렘은 그녀가 청기사단의 기사임을 증명했다.
“언니는 언제봐도 청기사단 제복이 정말 잘 어울려요.”
재스민이 빙그레 웃었다.
“새삼스럽게, 너한테도 잘 어울릴 거야.”
“그럴까요?”
“물론이지. 얼른 네가 입단했으면 좋겠다.”
“왜요, 선배님들이 언니한테 못되게 굴어요?”
“으음……. 그건 아닌데, 네가 들어와야 나도 갈굴 후배가 생기잖니.”
재스민은 청기사단에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였다. 그래서 기사단 내에서 그녀는 말단 후배였다.
그녀 밑으로 후배가 들어오기 전까진, 그녀가 선배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입장이었다.
“언니, 그 이유로 저한테 입단하라고 꼬시는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
“너무해요.”
재스민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너는 그걸 또 진심으로 듣니.”
“저도 장난이었어요. 헤헤.”
리리엘이 배시시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저기 언니…….”
“응?”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재스민이 앞에 놓인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켜고 리리엘을 보았다.
“뭐가 궁금한데 뜸을 들여?”
“혹시 언니 백기사단에 대해서 좀 아세요?”
“백기사단?”
“네.”
재스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리리엘을 보았다.
“뭐야, 너 백기사단에 관심 있어? 거기 입단하려고?”
리리엘이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저는 청기사단에 입단할 거예요.”
“그런데 백기사단은 왜 물어봐?”
“백기사단에 입단한 레오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레오나?”
“네.”
재스민이 생각하는 척 턱을 괴었다.
“음……. 들은 것 같기도 해. 기사단 내에서 좀 유명하긴 했으니까.”
리리엘이 루비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명했다고요?”
“유명하지, 왜 유명한지 말해줄 순 없지만.”
“말해줄 수 없다고요?”
“응, 우리 4대 기사단만 알아야 하는 거라서 말이야.”
“그게 기밀이라는 건가요?”
“뭐, 백기사단에서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나 봐.”
“이해가 안 되네요. 그런 게 비밀이라니.”
“으음, 아마도 소문나면 안 되니까. 조금 이해가 된다고 할까?”
재스민이 그렇게 말하니 더욱 궁금했다.
“언니, 저한테만 말해주면 안 돼요? 비밀 지킬게요.”
리리엘에 간절한 얼굴로 재스민을 바라보았다.
“저도 곧 청기사단에 입단할 건데 괜찮지 않나요?”
“흐음,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저만 알고 있을게요. 언니, 네?”
리리엘이 두 손을 모아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재스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물론이에요. 저만 알고 있을게요.”
“이리 가까이 와봐.”
“네, 언니.”
재스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리리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은 그 사람이 오래전에 사라진 신성 마법을 쓰는 마검사래.”
“신성 마법을 쓰는 마검사라고요?”
“쉿.”
“아, 죄송해요.”
리리엘이 입을 틀어막고 재스민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신성 마법이라니.
“정말이에요?”
“진짜야.”
“말도 안 돼요.”
“응?”
“……그 사람 제 언니거든요. 언니도 알지 않나요?”
“네 언니라고?”
“네.”
재스민의 눈이 커졌다.
“백기사단에 입단한 그 사람이 레오나 칼리반이라고?”
재스민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리리엘을 보았다.
“맞아요.”
“말도 안 돼.”
“저도 직접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직접 봤다고?”
“네, 2황녀 전하의 초대로 황궁에 입궁했다가 봤어요.”
“네가 잘못 본 거 아니야?”
“아니에요, 분명 제 언니였어요. 설마, 제가 언니도 못 알아볼까요.”
“그렇긴 한데, 믿어지지 않아서.”
“저도 믿기지 않는걸요. 그 언니가 신성 마법을 쓴다니.”
작게 속삭인 리리엘의 말에 재스민은 놀람 반 어이 반이었다.
레오나는 그녀가 아카데미에 다녔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기사 학부에 턱걸이로 들어온 레오나는 늘 꼴등을 면치 못했다.
이론은 잘했지만, 실기에서 늘 낙제를 받았다.
리리엘이 말했다.
“언니, 우리 언니가 정말로 신성 마법을 쓴다는 거죠?”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동기들이 그렇게 말했어. 백기사단에 들어온 신입 여자 기사가 신성 마법을 쓴다고.”
“그럼, 언니도 직접 본 건 아니라는 거네요.”
“그렇지.”
리리엘이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가 좀 알아봐 줄 수 있어요? 우리 언니가 정말로 신성 마법을 쓰는지.”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해? 이제 상관없지 않아?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들었는데.”
“그렇죠. 한데 아버지는 아직 미련을 못 버리셨나 봐요. 그래서 제가 먼저 레오나 언니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서요. 안 될까요?”
재스민은 고민했다.
리리엘의 말을 들어보니 궁금해졌다. 레오나가 정말 신성 마법을 쓰는지 아닌지 말이다.
“좋아, 알아봐 줄게. 나도 궁금하거든.”
“고마워요, 언니.”
리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재스민도 마주 웃었다.
자신이 알던 레오나가 백기사단에 입단한 그 사람이라니.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백기사단의 단장실로 청기사단의 단장 블레어가 찾아왔다.
“대련을 하자고 하셨습니까?”
“맞아요.”
“작년에 일방적으로 그쪽 단원들이 우리 단원들에게 패해 다친 걸 그새 잊은 겁니까?”
“어떻게 잊어요. 당연히 못 잊지. 그때 이후로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절치부심하여 훈련에 임했는지 압니까? 그러니 단장으로서 당연히 갚아줘야죠.”
“또 부상을 입을지 모릅니다.”
“설마,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왔으려고요.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예요. 작년에 우리 아이들이 아니라고요.”
작년 가을, 청기사단은 백기사단과 단체 대련을 하였다.
결과, 청기사단이 무참하게 깨졌다. 백기사단이 워낙 괴물들이 모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청기사단은 지독하게 훈련에 임했다.
백기사단을 이기기 위해서.
그건 청기사단뿐만 아니라, 적기사단, 흑기사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기사단 모두 백기사단한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으니까.
특히, 청기사단은 백기사단에 대한 승부욕이 대단했다.
블레어 자신이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기도 해서 그 영향이 단원들에게도 미쳤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럼, 삼 일 후에 이곳으로 저희가 오겠습니다.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백기사단장님.”
블레어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씩 웃었다.
“기대하겠습니다. 작년처럼 허무하게 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안 져요! 절대 안 질 겁니다. 두고 보세요.”
블레어는 그렇게 으름장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장실의 문을 열고 나간 블레어는 부단장 란젤로와 마주쳤다.
“블레어 단장님?”
“란젤로 경, 오랜만이야.”
“예, 오랜만입니다.”
블레어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삼 일 후에 리벤지 하러 올 거니까, 준비 잘하고 있어.”
그 말을 남기며 블레어는 란젤로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블레어를 바라보다가 란젤로는 단장실로 들어갔다.
“단장님, 방금…….”
“삼 일 후, 청기사단과 대련하기로 했다.”
“예? 작년에 그렇게 깨지고도 또 덤빈다는 겁니까?”
“절치부심했다더군.”
“우린 놀았답니까?”
“방심은 금물이다.”
“방심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이거, 아델라 님께서 보내온 서신입니다.”
데미안은 란젤로가 건넨 서신을 읽었다.
“무사히 봉인시켰다는군.”
“다행이군요.”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를 아델라가 봉인시켰으니,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진 못할 것이다.
이로써 제국에 닥칠 재앙을 막아낸 셈이다.
데미안은 서신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를 알현하고 오겠다. 그때까지, 훈련 게을리하지 말라고 전해. 청기사단과의 대련도 알려주고.”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은 단장실을 나와 황제를 알현해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에 대한 것을 보고했다.
보고를 들으며 황제는 안심하는 눈치였지만, 데미안은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 봉인의 위치를 알아내, 그걸 깨고 다시 재앙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었다.
아델라의 봉인은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방심할 순 없지.’
자신의 사명은 제국을 지키는 것.
그 어떤 재앙도 용납할 수 없었다.
* * *
어두운 지하 공간.
2황녀 비비안은 거울을 통해 드미트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마탑주가 직접 봉인을 시켰고, 위치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장로인 당신도 알아내지 못한 장소란 말이지.”
[탑주님은 항상 예상에서 벗어나시는 분이십니다. 탑 내의 장로들 모두 그분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150년을 산 괴물이다.
그에 절반도 살지 못한 장로들이 그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건 시간을 두고 계속 알아봐, 나도 알아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드미트리와의 통신을 끊은 2황녀 비비안은 베논과 통신을 연결했다.
베논은 벨지안의 파편을 찾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를 제국에 두면 추적하려는 자들 때문에 곤란했다. 그래서 2황녀 비비안은 베논을 외부로 돌렸다. 벨지안의 파편을 찾는 것 역시 몹시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베논, 진행 사항은?”
[이올레타 공국에서 벨지안의 파편으로 추정되는 단서를 하나 찾았습니다.]
“단서?”
[검은 뱀의 눈동자입니다.]
“검은 뱀의 눈동자라…….”
[조사해 본 결과 이올레타 공국의 건국자가 마왕 벨지안의 하수인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2황녀 비비안이 미소를 지었다.
“용케 거기까지 알아냈군. 수고했어, 계속 찾아봐. 될 수 있으면 우리 쪽으로 회수하면 더 좋고.”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비비안은 손에 턱을 괸 채 빙그레 웃었다.
“파편은 곧 찾아낼 거고, 레오나, 그 여자만 처리하면 순조로워. 리리엘은 어쩌고 있으려나.”
거울에 손을 댄 비비안은 리리엘에게 붙여 놓은 사역마를 소환했다.
사역마의 눈을 통해 지켜본 리리엘은 청기사단과 접촉하고 있었다.
“청기사단이라…….”
리리엘이 청기사단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레오나와 관련된 일임은 틀림없었다.
레오나의 존재를 리리엘에게 보여준 사람은 그녀였다.
백기사단에 있는 레오나를 바라보던 리리엘의 표정, 그건 분명 질투였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를 향해 지을 수 있는 표정.
그런 리리엘이라면 레오나를 이대로 두고 보지는 못할 것이다.
실력이 형편없어 쫓아낸 레오나가 사실은 숨겨진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칼리반 백작가의 가주가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일이니까.
“다시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이겠지.”
그건 절대 리리엘이 바라는 일이 아닐 것이다.
“리리엘은 욕심이 많지,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야.”
그러기 위해서라도 리리엘은 어떻게 해서든 레오나를 처리하려 들 것이다.
결국, 자신은 손 하나 대지 않고 골칫거리를 치울 수 있다.
레오나를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분란에 대한 죄는 리리엘과 칼리반 백작가가 지게 될 테니, 자신으로선 손해 볼 일이 없다.
* * *
연무장에서 수련하던 레오나는 제임스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누가 날 찾아왔다고?”
“어, 저기.”
제임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웬 여인이 서 있었다.
제임스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너 근데 청기사단 기사와 아는 사이였냐?”
“아니, 아는 사람 없는데.”
“그래? 그런데 저쪽은 널 아는 눈치던데.”
레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푸른색 제복을 입고 있는 그녀는 다가오는 레오나를 보며 인상을 썼다.
리리엘의 말을 듣고 확인하러 오긴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그녀가 레오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오나 칼리반.
칼리반 백작가의 수치이자, 최악의 둔재.
그런 둔재가 당당하게 백기사단의 정복을 입고 있다니, 두 눈이 의심스러웠다.
“누구시죠?”
레오나의 물음에 재스민은 피식 웃었다.
“너, 나 몰라? 아카데미에서 너 내 후배였는데. 나, 재스민이야.”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정말로 기억에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는 뜻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우리가 얼굴 맞대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제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궁금해서 말이야. 어떻게 너 같은 둔재가 백기사단에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할까? 너 정말로 신성 마법 써?”
“대답해 줄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요.”
“이상하잖아, 아카데미 때에 넌 마법에 입문도 못 했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신성 마법을 쓰는 마검사가 되었을까?”
레오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 또한 대답해 줄 이유는 없습니다만.”
“비밀로 하고 싶으시다?”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조만간 내가 꼭 알아낼 거야,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거든.”
“그러든지요. 더 할 말 없으면 가볼게요.”
재스민은 레오나를 붙잡지 않았다. 다만 묘한 눈빛으로 레오나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확실히 달라지긴 한 것 같은데…….”
리리엘에게서 레오나가 예전과는 다를 거라는 말을 들었다.
주눅 들고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했던 레오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고 말했다.
직접 만나보니, 레오나가 달라진 건 맞는 것 같았다.
“정말 신성 마법을 쓸 줄 안다고?”
검술에 재능도 없었고, 마력도 다른 동기들에 비해 월등히 수치가 낮았다.
그런 아이가 하루아침에 신성 마법을 쓰는 마검사가 되었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기적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뭐, 그건 조만간 알게 되겠지.”
청기사단장 블레어에게서 백기사단과 대련을 할 거라고 전해 들었다.
상대를 파악하려면 검을 맞대보면 된다고 하였다.
재스민은 레오나를 지목하여 대련할 생각이었다.
타 기사단과의 대련엔 도전자가 도전받는 상대를 지목할 권한이 있었다.
재스민은 그 권한으로 레오나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레오나의 검이 예전 같다면, 실망일 것이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뭔가를 알게 되지 않을까.
“오랜만에 대련이 기대되네.”
빙그레 미소를 지은 재스민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 * *
푸른 제복을 입은 청기사단이 위풍당당하게 백기사단 연무장 앞으로 다가왔다. 나타났다.
백기사단 역시 하얀 제복을 입고 연무장에서 청기사단을 맞았다.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백기사단 앞에 서 있는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데미안 경, 오늘 각오 단단히 하라고.”
데미안은 미소로 답했다.
두 기사단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신경전을 벌였다.
“란젤로 경, 작년의 설움을 오늘 갚겠습니다.”
란젤로를 도발한 것은 청기사단의 부단장 마커스였다.
“나도 기대하지.”
마커스가 입매를 굳혔다.
그는 작년 대련에서 란젤로에게 5분 만에 나가떨어지는 굴욕을 맛보았다.
란젤로는 언뜻 가벼워 보이지만,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남자다.
그가 괜히 백기사단의 부단장이 된 것은 아니란 의미다.
그래서 마커스는 피가 나도록 수련했다. 굴욕을 갚기 위해서.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기사단 전체가 백기사단을 향해 칼을 갈았다.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준기사들부터 시작해 볼까?”
데미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연무장에 올라섰던 두 기사단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백기사단은 연무장의 왼쪽, 청기사단은 연무장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심판은 흑기사단장 카이엘과 적기사단장 페이몬이 맡아주었다.
카이엘은 준기사들의 대련을, 페이몬은 정예 기사들의 대련의 심판을 각각 맡았다.
각 기사단의 대련이 잡히면, 다른 기사단의 단장들이 심판을 맡아주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적기사단과 흑기사단의 대련이 있었다. 그때에는 청기사단장 블레어와 백기사단장 데미안이 심판을 맡는다.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연무장에 올라섰다.
“이번 대련의 지목권은 청기사단에 있습니다.”
카이엘이 청기사단을 보았다.
“청기사단의 대련자, 앞으로 나오도록.”
청기사단에선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남자가 올라섰다.
“지목해라.”
카이엘의 지시에 그는 백기사단을 쭉 훑어보더니, 한 명을 지목했다.
“저는 저 사람과 하겠습니다.”
그가 지목한 사람은 제임스였다.
제임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그렇습니다.”
제임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기수식을 취하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시작!”
카이엘이 휘슬을 불자, 두 기사가 서로 맞붙었다.
레오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제임스를 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말론이 슬쩍 물었다.
“레오나, 넌 누가 이길 것 같냐?”
“제임스.”
“제임스가 이긴다고?”
“응.”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말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임스가 저래 보여도 검술엔 진심이거든. 집중력은 누구보다 강해.”
레오나는 같이 수련하며 제임스나 말론, 유릭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다들 실력이 비슷한 수준이지만, 검에 집중하는 정신력만큼은 제임스가 가장 우수했다.
말론은 힘이 세고, 유릭은 민첩했다. 그리고 제임스는 정통파로 정면승부를 즐겼다.
레오나나 라파엘이 워낙 발군이라 가려져 있을 뿐, 제임스도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대련은 제임스가 승리했다.
“거봐, 내가 이길 거라고 했잖아.”
승리하며 손가락 브이 그린 제임스가 레오나와 유릭, 말론을 바라보며 웃었다.
대련은 막상막하로 진행되었다.
제임스가 이긴 직후, 백기사단이 우세하였으나, 청기사단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승부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저는 라파엘 경과 겨루겠습니다.”
청기사단의 단원이 자신 있게 지목한 라파엘을 향해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오레온 백작가의 장남 브릭이었다. 그는 라파엘과 아카데미 동기였는데, 재능이 있고 실력이 좋았다.
그러나 괴물 같은 라파엘 때문에 늘 이인자에 머물러야 했다.
라파엘은 덤덤한 얼굴로 연무장 위에 올라섰다.
“라파엘, 오늘은 반드시 너를 이기겠다.”
라파엘은 대답 대신 검을 들어 올렸다.
먼저 공격을 한 것은 브릭이었다.
“차압!”
기합을 지르며 빠르게 내달린 브릭의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단 일검에 브릭의 검을 날려버린 라파엘은 바닥에 엎어진 브릭의 목에 검을 겨눴다.
굴욕적인 패배에 브릭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패배를 선언했다.
“미친……. 라파엘.”
“완전 괴물이야.”
제임스와 말론이 혀를 내둘렀다.
“난 전혀 못 봤어.”
유릭은 두 눈을 비벼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결정된 승부였기 때문이다.
연무장에서 내려온 라파엘이 레오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난 일검에 보냈다.”
레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파엘을 보았다. 그러자 라파엘이 어느새 연무장 위에 올라선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널 얕보고 있다.”
레오나의 시선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 올라선 여인이 히죽 웃으며 레오나를 향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레오나는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와 시비를 걸었던 여자였던 것이다.
“참을 수 없군.”
“네가 왜 참을 수 없는데?”
“내 라이벌을 우습게 여기는 건 참을 수 없다.”
라파엘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눌러줘라, 네가 누구의 라이벌인지.”
레오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알아서 해.”
두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한 레오나가 자신을 지목하고 있는 상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에 올라서서 마주 보자, 그녀가 도발을 했다.
“실력 좀 볼까?”
“얼마든지.”
“그럼, 먼저 간다.”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움직인 재스민의 검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녀가 자신하는 쾌검술이었다.
눈앞에 검의 형상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허상, 진짜는 허상 속에 숨어 있었다.
캉!
레오나는 허상 속에 숨은 진짜 검을 찾아내 쳐냈다.
재스민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오, 제법인데?”
재스민이 순수하게 감탄하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닐 것 같은데?”
씩 웃은 레오나가 재스민의 검을 따라 그리며 찌르기로 뻗었다.
“……!”
그 검을 본 재스민이 숨을 들이켰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검의 잔영이 모두 진짜 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스민은 어느 것이 진짜 검인지 알 수 없었다.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모두 쳐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재스민의 손과 발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레오나의 검을 쳐냈다.
“하, 너 대체…….”
재스민은 현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레오나에게 밀리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스텝을 옆으로 밟은 재스민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레오나의 눈을 어지럽혔다.
연속 찌르기 공격이 레오나의 전신 요혈을 노렸다.
하나하나가 모두 급소를 노리는 일격이었다.
놀랍게도 레오나는 재스민의 검을 가볍게 피했다.
피하는 타이밍이 절묘하고 칼 같았다.
‘모두 예측한다고?’
레오나의 움직임은 자신의 검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않고서는 보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레오나가 이렇게 강해졌다고?’
직접 검을 맞대보니 예전에 그녀가 알던 레오나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정말로 신성 마법을 쓴다는 건가?’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미소를 지은 재스민이 마력을 움직였다. 그녀의 검이 은은하게 빛났다.
마나소드, 소드 익스퍼트에 든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게다가 재스민은 이미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었다.
“이것도 막아낼 수 있나 보자.”
재스민이 검을 휘둘렀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그 안에는 숙련자들만이 알 수 있는 묘리가 담겨 있었다.
세타나 검식.
제1식.
춤추는 칼날.
재스민의 검이 춤을 추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레오나는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춤을 추는 무희처럼 움직이는 재스민의 움직임은 유연함의 극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얀 궤적을 그리며 쏟아지는 연속 공격.
검 끝이 목을 향했다가 허리로 향하고, 발목을 스친다.
그 모든 일련의 동작이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재스민이 대단한 실력자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레오나도 만만치 않았다.
레오나의 신성력이 움직였다.
줄기줄기 뻗어 나간 신성력은 황금빛으로 물들며 레오나의 검신을 감쌌다.
두 눈 앞에 펼쳐진 황금빛 검신에 재스민은 감탄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레오나가 신성력을 쓴 것이다.
레오나의 검에서 느껴지는 깨끗하고 고귀한 기운이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레오나의 검식이 펼쳐졌다.
라데온의 신성 검술.
제1식.
굽이치는 나선의 바람.
뻗어 나간 검의 파편이 나선처럼 회전하며 재스민의 검을 압박했다.
휘몰아치는 검술에 재스민은 유연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받아쳤다.
레오나는 연속 공격을 펼쳤다.
제2식.
몰아치는 파괴의 바람.
황금빛 칼날의 바람이 재스민의 검을 집어삼켰다.
챙강!
재스민의 검이 두 동강 났다.
재스민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반 토막 난 검을 바라보았다.
레오나의 검 끝에 재스민의 턱 끝이 닿았다.
재스민은 레오나의 강렬한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소름이 돋았다.
‘이게 내가 알던 레오나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재스민이 부러진 검을 내렸다.
“내가 졌다.”
패배 선언에 레오나는 검을 거뒀다.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한 레오나는 몸을 돌려 연무장을 내려갔다.
그런 레오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스민은 피식 웃었다.
‘리리엘, 네가 생각한 것보다 레오나는 아주 많이 강해진 것 같다.’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오나가 신성력을 가진 건 확실했다.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보았다. 레오나의 검에 맺혀 있던 황금빛을.
황금빛은 신성력 고유의 색.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정말이었군.’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다.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력을 쓸 수 없었던 건가?’
그렇다면 레오나가 왜 마나 연공법을 익힐 수 없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레오나가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것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깨달은 건가?’
레오나가 변한 것은 최근이라고 하였으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이로써 궁금증은 어느 정도 풀린 셈이다. 재스민은 나름 후련했다.
그렇게 준기사들의 대련은 백기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이제 남은 정예 기사들과 부단장들의 대련뿐이었다.
잠시의 휴식이 주어진 후, 대련은 재개되었다.
절치부심했다는 말이 옳을 정도로 청기사단의 실력은 대단했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청기사단을 상대하는 백기사단의 정예 기사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압도적으로 패배했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선방을 하고 있어 청기사단장 블레어는 만족스러웠다.
“데미안 경, 제가 작년과는 다를 거라고 말했죠?”
“확실히 많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점 염두에 두시죠.”
백기사단은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사용하는 마검사들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오늘 대련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검술로만 대련에 임하고 있었다.
순수한 검술로만 상대하고 있는 데도 청기사단을 누르고 있었다.
청기사단이 나름 선전하고 있긴 했지만, 패배한 사람이 백기사단에 비해 많았다.
“이제 마지막 대련만 남았네요.”
정예 기사들의 대련 역시 백기사단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부단장들과의 대련이 남아 있었다.
백기사단 부단장 란젤로와 청기사단 부단장 마커스의 대결.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마커스가 란젤로 경한테 지고 나서 정말 지독하게 수련했습니다. 아마, 오늘은 조금 버거울 겁니다.”
“란젤로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데미안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란젤로는 데미안이 신경 써서 수련을 봐주고 있었다.
부단장의 책임 또한 단장 못지않게 막중했다.
자신이 없을 때 부단장인 그가 백기사단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치더라도 단원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어야 하니까.
레오나 역시 기대 어린 눈빛으로 란젤로를 보았다.
란젤로가 정예 기사들과 수련하는 모습은 종종 봤지만, 그가 제대로 싸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기대가 컸다.
그건 다른 준기사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모두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련을 지켜보았다.
삐익-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리자마자, 두 사람은 동시에 달려들었다.
빠르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서로를 탐색했다.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고수들의 싸움은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너무 빨라서 눈이 다 아프다.”
제임스가 투덜거리자, 말론이 동조했다.
“그래도 넌 보이나 보네?”
“조금은…….”
유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 전혀 안 보여.”
세 사람의 시선이 레오나의 라파엘에게 향했다.
“너희는 보이나 보네.”
레오나의 라파엘은 대답이 없었다.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로 대련을 지켜볼 뿐이었다.
“란젤로 부단장님의 검이 생각보다 무거워.”
“확실히 마커스 부단장님께서 란젤로 부단장님의 검을 버거워하고 있어.”
레오나와 라파엘이 주고받은 대화를 들은 제임스, 말론, 유릭이 입을 쩍 벌렸다.
“란젤로 부단장님은 마커스 부단장님의 검술을 완전히 간파한 것 같아.”
“확실히, 그렇군. 마커스 부단장님의 환영 검술을 란젤로 부단장님께서 모두 간파하여 파훼하고 있어.”
환영 검술은 상대의 시야를 어지럽혀 집중력을 흩트려 놓는 효과가 있지만, 란젤로 부단장은 환영에 현혹되지 않고, 마커스 부단장의 검식을 모두 파훼했다.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 공방은 란젤로 부단장의 승리로 끝이 났다.
마커스 부단장이 후련하다는 얼굴로 부러진 검을 바라보았다.
“아끼던 검이었는데 부러졌군.”
“내가 하나 사주지.”
피식 웃은 마커스 부단장이 두 손을 들었다.
“졌군.”
“인정하지.”
“다음번엔 반드시 이기겠다.”
“나도 기대하지.”
그렇게 대련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 마무리되었다.
청기사단 단장 블레어가 데미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저희도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악수를 하였다. 대련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대련이 끝난 직후 데미안은 고급 주점에서 흑기사단 단장 카이엘을 초대했다.
그곳은 그의 가문이 운영하는 곳으로 오늘은 카이엘과 단둘이 마시기 위해 손님을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은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 드디어 약속한 와인을 맛보다니,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
“실컷 즐기게.”
와인을 홀짝인 카이엘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진정 여왕의 와인이란 말이지. 내가 이걸 영접하게 되다니! 페이몬 경이 알면 부러워 죽을지도 모르겠어.”
그 말에 데미안은 피식 웃었다.
“자랑할 생각이군.”
“당연한 것 아닌가?”
살랑살랑 눈웃음을 치는 카이엘은 영락없는 여우였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레오나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는 거 알아?”
“악의적인 소문?”
“레오나가 비겁한 방법으로 백기사단에 입단했다 뭐, 그런 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군.”
“헛소문인 거 나도 인정.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쓴다는 걸 아는 사람은 우리 기사단뿐이니까.”
그는 오늘 레오나가 대련에서 어떻게 이겼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레오나는 마법을 쓰지 않고 순수한 검술로 이겼다. 그런 실력자가 비겁한 방법으로 입단했다니, 말도 안 된다.
시엘 역시 레오나는 대단한 실력을 겸비한 기사라고 칭찬했었다.
칭찬에 인색한 그 녀석이 그런 말을 할 정도면 믿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엘은 그녀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시엘이 찾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무슨 사이인지 알지 못하지만, 긴밀한 사이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녀를 찾기 위해 먼 땅에서 건너왔다고 했으니까.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쓴다는 게 알려지면, 레오나를 향한 저격이 우호적으로 바뀔 수도 있어.”
“본인이 알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카이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언제까지고 비밀이 지켜질 거라 장담하지 마. 언젠간 알려질 일이야.”
“그렇겠지.”
데미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오나의 관한 비밀은 기사단 내에서만 알려진 상태지만, 그 사실이 언제 바깥으로 새어 나갈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알려지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알리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도 하다.
레오나도 그것을 알 것이다.
“난 본인의 의견을 존중하겠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더 이상 말 안 하련다.”
카이엘에 데미안에게 잔을 내밀었다.
데미안은 카이엘의 잔에 건배를 하며 와인을 마셨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리리엘은 침실에서 서성였다.
재스민에게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쓴다니…….”
신성 마법은 제국에서 사라진 마법이었다.
신성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제국에 있는 신전들은 쥐꼬리만큼의 신성력으로 간간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도 머지않아 사라질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일까?”
레오나가 정말로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신성 마법은 신성력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다.
그렇다는 것은 레오나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재스민 언니가 알아봐 준다고 했으니, 일단 기다려 보자.’
지금으로서는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쓴다는 사실이 거짓이기를 믿는 수밖에 없다.
‘거짓일 거야.’
그럴 리가 없다.
그녀의 기억 속에 레오나는 자신의 발밑도 못 따라오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레오나가 가문을 나가기 전, 변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검술 재능만큼은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다.
리리엘은 그렇게 믿었다.
‘엄마가 소문을 안 좋게 퍼뜨리긴 했지만…….’
레오나가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공을 세운다면 소문은 금세 레오나에게 우호적으로 바뀔 것이다.
‘레오나가 신성 마법까지 쓴다는 것까지 알려지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좋은 수가 없을까?”
레오나가 제대로 망신을 당할 수 있는 방법 말이다.
“생각해, 리리엘. 넌 할 수 있어. 그 팔푼이가 내 앞길을 막게 놔둘 수는 없잖아.”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똑똑.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재스민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화들짝 놀란 리리엘은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재스민 언니가 왔다고?”
“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어, 안내해.”
리리엘은 하녀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푸른색의 제복을 입은 재스민이 리리엘을 보았다.
“언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
“앉으세요.”
재스민이 소파에 앉자, 리리엘은 하녀에게 다과를 준비하라 지시한 한 다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과가 차려지자,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알아보셨어요, 언니?”
재스민은 고개를 저었다.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재스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이었어.”
“사실이었다고요?”
“응, 정말로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어.”
“그게 무슨…….”
“내가 직접 검을 맞대봤어. 어제 대련이 있었거든.”
“레오나 언니와 대련을 하셨단 말씀이세요?”
“응. 정말로 신성력을 쓰더라. 완전 깜짝 놀랐지 뭐야.”
리리엘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레오나, 많이 강해졌더라.”
“강해졌다고요?”
“엄청 강해졌어. 내가 졌잖아.”
리리엘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언니가 졌다고요?”
“그래, 내가 밀렸어. 아직도 믿기지 않아.”
“말도 안 돼. 어떻게 언니를……. 언니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잖아요, 그런 언니를 이겼다니 말이 안 돼요.”
“내 회심의 기술을 보기 좋게 받아치더니, 반격하더라. 그 황금빛 검을 네가 두 눈으로 봤어야 하는 건데. 아, 다시 붙어 보고 싶다.”
리리엘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재스민을 보았다. 재스민은 그런 리리엘을 위로했다.
“리리엘, 비밀 지키는 거 잊지 마.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아, 그렇군요.”
재스민이 리리엘의 어깨를 다독였다.
“넌, 우리 청기사단에 들어올 입단 테스트에만 집중해.”
리리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만 가볼게.”
“예, 언니.”
리리엘은 멀어지는 재스민을 바라보다가 방금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레오나가 정말로 신성력을 썼다고?’
재스민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정말로 레오나가 백기사단에 어울리는 합당한 실력을 가졌다고?’
재스민이 직접 붙어보고 이야기를 해준 것이니 사실이다.
게다가 재스민은 본인 입으로 레오나에게 졌다고 말하였다.
‘정말로 진 거야.’
레오나가 재스민을 이긴 것이다.
‘나도 이기기 힘든 재스민 언니를 레오나가 이기다니……. 말도 안 되는…….’
레오나는 늘 자신보다 못했다.
그래서 리리엘은 레오나가 자신을 앞지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리리엘은 뭐든지 레오나보다 잘했고,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그런데.
“안 돼. 레오나가 나보다 더 빛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그건 죽기보다 더욱 싫었다.
자신이 레오나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건 정말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