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시엘
늦은 밤, 숙소에서 잠을 청하던 레오나는 두 눈을 번쩍 뜨고 창가로 다가갔다.
“거기 숨어 있는 거 아니까, 나와.”
창문을 열고 말하자,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런, 들켜 버렸네?”
전혀 들킨 사람 같지 않은 태도에 레오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레오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본 레오나는 순간 숨을 집어삼켰다.
‘시엘!’
밤하늘을 닮은 진보랏빛 머리카락과 진청색 눈, 장미처럼 붉은 입술, 얼굴 자체로만 봐도 여자라고 착각할 만큼의 미인이었다.
그런 얼굴을 레오나는 딱 한 사람 알고 있었다.
시엘.
푸른 장미의 계승자이자, 현 대륙 최고의 학살자.
레오나는 그를 미친놈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선량한 사람은 죽이지 않지만, 악한 자는 살려두지 않는 잔인함을 가졌고, 그와 만날 때는 언제나 피 튀기는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레오나는 시치미를 뗐다.
“넌 누구지?”
모른 척을 하자, 시엘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절 모르신다니, 서운합니다.”
“날 알아?”
“물론이죠.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완전 미친놈이잖아. 난 너 모르니까, 꺼져.”
“역시 당신은 절 알고 있군요.”
“무슨 헛소리야.”
“나를 미친놈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입니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그 말을 오랫동안 듣고 싶었습니다. 나의 빛.”
저 말투를 듣고, 레오나는 그가 시엘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잊어버리신 것 같아 알려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시엘,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이 왜 내 종이야, 난 그런 거 둔 적 없어.”
피식 웃은 시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상했던 반응입니다. 아스텔이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아스텔이란 말에 레오나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시엘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아스텔이란 이름에 반응을 하시는군요.”
레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런 사람 몰라. 처음 듣는 이름이야.”
“입으로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눈빛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표정을 숨기지 못하시는군요. 율리아나.”
그 이름을 누군가 불러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레오나는 흠칫했다. 심장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겉모습은 레오나지만, 속은 율리아나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레오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율리아나는 과거의 이름일 뿐이다. 이제 그 이름으로는 살 수 없다.
자신은 레오나다. 그렇게 정하지 않았던가.
레오나의 금빛 눈이 날카로워졌다.
“난 레오나야. 레오나 아제르티아. 그게 내 이름이야.”
레오나의 금빛 눈을 마주한 시엘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신다면 그리해 드리지요. 나의 빛.”
“나의 빛이란 소리 좀 집어치워, 내가 왜 당신의 빛이야?”
시엘이 손을 뻗어 레오나의 뺨을 쓸었다.
“당신은 저만의 영원한 빛입니다.”
레오나는 시엘의 손을 쳐냈다.
“어디서 수작질이야. 죽고 싶어?”
“이런, 서운합니다. 모처럼 구미가 당길 만한 정보를 가지고 왔는데.”
시엘이 서운하다는 듯 턱을 쓸었다.
“들으면 정말 놀라실 텐데…….”
뜸을 들이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시엘이 말을 이었다.
“성검 에키온이 나타났습니다.”
“뭐?”
레오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역시, 놀라시는군요.”
레오나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성검 이야기를 하니까 그렇지.”
“성검 에키온이 암시장 경매에 나온다고 하더군요.”
“경매에 나온다고?”
“그렇습니다. 구미가 좀 당기십니까?”
“그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시엘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제가 아는 당신이라면 궁금해하실 테니까요.”
“대단한 친절이군. 그런데 어쩌지, 나는 별 관심이 없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가까이 다가온 시엘이 레오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생각이 있으시다면 흑기사단으로 저를 찾아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그는 레오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
방심한 틈에 당한 터라 레오나는 어이가 없었다.
“야! 이 개자식아. 무슨 짓이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나의 빛.”
허공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허공을 노려본 레오나는 창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는 화를 삭였다.
‘시엘이 여기에 나타나다니.’
게다가.
‘나를 알아보았어.’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진청색의 눈이 자신이 율리아나임을 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 아스텔이 내게 뭔가를 해서 내가 이 몸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시엘이 나를 찾아낸 것이라면.
아스텔도 곧 자신의 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다.
‘끊어낼 수 없는 인연이었던 것인가.’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율리아나는 이미 죽었으니, 그들은 그들만의 삶을 살기를 바랐으니까.
‘아스텔, 정말 네가 그런 거니? 네가 날 살린 거야?’
그 절절했던 아스텔의 얼굴이, 그의 연녹빛 눈동자에서 떨어지던 눈물이 기억난다.
너무 아리고 슬퍼서, 미안해지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성검 에키온이 암시장 경매에 나온다고?’
성검 에키온은 율리아나가 사용하던 검이었다.
성검 에키온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다. 아무나 휘두를 수 있는 검이 아니다.
‘그런데 경매에 나온다고?’
골치가 아팠다.
시엘을 만나러 가야 하나 고민하게 되었다.
성검 에키온은 율리아나의 것이었다.
율리아나가 죽었으니, 이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하는데 마음이 자꾸 흔들린다.
성검 에키온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안 좋은 일에 사용하게 된다면…….
‘아니야, 그럴 일은 없어.’
성검 에키온은 까다로운 놈이었다. 선택하지 않은 주인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런 검을 누군가 가진다 한들 제대로 사용이나 할 수 있을까?
그때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다르게 사용하려고 했던 놈들이 있었어.’
미치광이들의 집합체라 불리는 연금술사 집단.
율리아나의 손에 들어오기 전, 성검 에키온은 그들의 손에 있었다.
그들은 성검 에키온을 분해하고 실험하기 위해 미친 짓을 벌였다.
그때 신성국의 기사로서 그들의 음모를 막고 성검 에키온을 탈취했다.
그리고 성검 에키온은 율리아나를 주인으로 선택했다.
‘잊고 있었어.’
연금술사 집단이 아직 존재하고, 그들이 성검 에키온을 노리고 있다면…….
성검 에키온은 그들의 손에 산산이 분해되어 어떤 실험의 도구로 전락하리라.
‘내가 그 꼴을 또 못 보지.’
애지중지하던 검이 엄한 놈 손에 들어가 그런 꼴을 당하는 걸 어떻게 보겠나.
“하아.”
어쩔 수 없다.
‘이번에도 내가 구해야겠네.’
성검 에키온은 타락한 선도자를 해치운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고마운 검이다.
그런 검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시엘을 찾아가야겠군.’
결국, 레오나는 놈이 원하는 대로 하게 되었다.
* * *
이른 아침, 오전 훈련을 마친 레오나는 흑기사단을 찾아갔다.
흑기사단은 외궁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레오나는 건물 위에 나부끼는 흑기사단의 깃발을 보았다.
검은색 깃발에 붉은 용이 수놓아진 깃발은 흑기사단의 상징이었다.
마치 흑기사단이 이곳에 있다고 광고하는 듯했다.
흑기사단의 입구에 들어서니, 넓은 연무장이 나왔다.
연무장에는 몇몇 흑기사가 서로 대련을 하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레오나는 어디 가면 시엘을 만날 수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연무장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눈앞에서 쌍검이 튀어나왔다.
급히 뒤로 물러나자, 양손에 쌍검을 쥔 여인이 레오나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백기사단의 준기사가 흑기사단엔 무슨 일이지?”
살벌함에 레오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못 올 데 온 것도 아닌데 검은 좀 거두시죠.”
“그렇게 못하겠다면?”
“여기서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이길 자신은 있나?”
“글쎄요.”
레오나는 그녀의 왼쪽 가슴에 달린 엠블렘을 보았다.
용트림하는 붉은 용의 엠블렘은 그녀가 흑기사단의 정예 기사라고 알려주었다.
기사단에 입단한 후, 레오나는 4대 기사단에 대해 배웠다.
란젤로가 알려주었기 때문에 각 기사단을 상징하는 엠블렘을 알고 있었다.
“칸나, 그만해, 내 손님이야.”
그녀의 뒤로 요염한 미소를 지은 진보랏빛 머리의 남자가 걸어왔다.
“빨리 찾아왔네, 좀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엘을 보았다.
“아는 사이야?”
“응, 아주 긴밀한 사이지.”
“긴밀은 무슨 긴밀, 오해받기 싫으니 말장난은 그만하지?”
레오나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자, 시엘이 레오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럼, 장소를 옮길까?”
레오나는 그의 팔을 떨쳐내고 앞장섰다.
“안내해.”
시엘은 군말 없이 레오나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칸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시엘이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있다니…….’
시엘은 흑기사단에 입단하고 나서 늘 혼자 지냈다. 동료들이 그와 잘 지내보려고 다가갈 때마다 벽을 세우고 돌아섰던 시엘이었다.
그녀 역시도 시엘과 일적인 것 외에는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살벌한 기운을 늘 풍기고 있는 데다, 곁에 누가 있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수련도 개인 수련실에서 혼자 했다. 동기들과 어울리는 법이 없었다.
칸나는 그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강자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시엘이 그런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엘은 동기 중 그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정예 기사가 되었다.
주어지는 임무를 너무도 완벽하게 처리하는 데다가 압도적인 무력.
정예 기사 중에서도 시엘을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시엘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칸나로서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레오나.’
백기사단에서 유일하게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마검사가 입단했다고 하더니, 그녀인 모양이었다.
‘아는 사이라고?’
레오나에 관해선 칸나도 알고 있었다.
칼리반 백작가의 장녀로 재능이 없는 기사 지망생.
그런데 갑자기 신성력을 개화하여 백기사단에 입단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비밀 임무에 성공하여, 작위와 상당한 재산을 받았다고 하였다.
레오나가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백기사단과 황실만이 아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요주의 인물이야.’
게다가 시엘과도 아는 사이라니. 칸나는 레오나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만 갔다.
* * *
시엘이 레오나를 데리고 간 곳은 그가 사용하는 개인 연무장이었다.
“성검 에키온이 암시장 경매에 나온다는 게 사실이야?”
“사실입니다. 제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요.”
“넌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시엘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제 임무가 암시장에서 열리는 경매장을 감시하는 것이거든요.”
“감시하다가 발견했다?”
“그런 셈이죠.”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그렇게 나올 거라 예상했는지 시엘이 품 안에서 구슬을 하나 꺼냈다.
“이건…….”
“영상 구슬입니다.”
시엘은 마력을 주입해 영상 구슬을 작동시켰다. 영상 구슬이 빛을 발하며 허공에 장면을 띄웠다.
암시장 경매 물품을 보관하는 곳에 유리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 검 한 자루가 보였다.
황금을 품은 검자루와 미스릴을 녹여 만든 새하얀 검신, 그리고 검신에 새겨진 신의 문자.
“성검 에키온이 왜 저기에…….”
“글쎄요, 저도 그게 궁금하더군요. 신성국에 있어야 할 성검이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을까, 하고 말이죠.”
레오나는 시엘을 노려보았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시엘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스텔을 만났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을 찾아냈죠. 당신을 찾느라 이 대륙을 전부를 뒤졌습니다.”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레오나는 느꼈다.
시엘이 진심으로 기쁘다는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좋습니다. 율리아나.”
레오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시엘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내 이름은 율리아나가 아니라 레오나야. 그새 잊었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레오나라 불리길 바라는군요.”
시엘은 자신이 율리아나란 사실을 확신하는 듯했다. 그래서 레오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레오나여야 한다. 그래서 레오나는 시엘에게 경고했다.
“다시는 율리아나란 이름, 입 밖에 꺼내지 마.”
“당신이 바란다면 그러죠.”
한숨을 내쉰 레오나는 개인 연무장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암시장 경매 날짜가 언제야?”
“성검 에키온이 눈이 밟히시는 모양이군요.”
“당연한 거 아냐, 경매장에서 팔려 엄한 놈한테 가느니 차라리 내가 찾고 말지.”
“낙찰받으려면 돈이 많이 들 겁니다.”
“내가 그 정도 돈도 없을까 봐?”
작위에 광산에 물려받은 재산까지 돈은 충분히 있었다.
레오나가 금빛 눈동자를 빛냈다.
“암시장 경매를 한다고 했지? 그럼 거기에 성검 말고 다른 게 또 나오나 보군.”
시엘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건 흑기사단의 비밀 임무라 공유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언제부터 조직에 충성을 바쳤다고. 넌 자유로운 영혼 아니었나?”
그가 진청색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저 미소에 사람들이 곧잘 넘어가곤 하였다.
시엘은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었다.
“제 자유는 당신이 빼앗았습니다. 나의 빛.”
“내가 언제 네 자유를 빼앗았다고 그래?”
“제가 당신을 마음에 품은 그 순간 제 자유는 모두 당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나의 빛.”
“말했지, 난 네 빛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
손을 뻗은 그가 레오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려고 하였다. 그 순간 레오나가 재빠르게 손을 뺐다.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주시지요.”
“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레오나의 하늘빛 머리카락을 쥐고 입을 맞췄다.
그는 손끝에 빠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을 손수건에 소중히 감싸 품에 넣었다.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시엘을 보았다.
“경매 날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날짜는 일주일 후 요하네스 지구에서 열립니다.”
“요하네스?”
거긴 지난번 데미안과 함께 어린 노예들을 구출하러 간 곳이기도 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제가 성검을 찾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레오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시엘을 보았다.
“네가? 아무 대가도 없이?”
“대가는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이놈이 공짜로 도와줄 리가 없었다.
레오나는 시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시엘은 공짜로 도와준 적이 없는 놈이었다.
꼭 무엇이든 대가를 받아냈다.
“대가가 뭔데?”
“대가는 성검 에키온이 무사히 당신의 품에 안기게 되면 그때 알려드리죠.”
“이상한 걸 요구할 건 아니지?”
“당신이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입니다.”
“이상한 걸 요구하면 안 들어줄 거야.”
레오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들어주기로 하였다.
‘실력만큼은 믿을 수 있는 놈이니까.’
괴짜 같은 성격이 문제지.
설마, 자신을 찾기 위해 대륙을 뒤졌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시엘에게 그런 집요한 구석이 있는지도 오늘 처음 알았다.
죽었으면 그런 줄 알고 있으면 될 일이지, 뭐 좋다고 찾으러 다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난 그만 가볼게.”
“벌써 가시는 겁니까, 점심 식사라도 같이하시죠?”
“싫어.”
레오나는 뒤돌아섰다.
시엘은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흑기사단을 나온 레오나는 곧장 백기사단으로 복귀했다.
시간은 점심시간이었고, 배가 고파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동기들이 먼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음식을 받아 들고 동기들이 있는 자리로 가서 식사를 하려는데 웅성거림이 들렸다.
레오나는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오늘의 메뉴로 나온 촙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야, 저거 흑기사단 아냐?”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제복은 흑기사단이야.”
흑기사단이란 단어가 귀에 거슬렸다.
식당 안을 울리는 발소리도 유독 크게 들렸다.
“안녕, 여기서 또 만나니 반갑네?”
어느새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시엘을 보며 레오나는 입에 있던 음식을 뿜을 뻔했다.
간신히 음식을 씹어 삼킨 레오나가 두 눈을 부릅떴다.
“네가 왜 여기에…….”
시엘이 꽃받침을 한 채 진청색의 두 눈을 반짝이며 레오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헤어졌는데도 보고 싶어서.”
레오나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시엘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곁에 있던 동기들이 레오나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제임스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레오나, 아는 사람이야?”
“어?”
레오나는 제임스와 시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무 놀라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린 아주 친밀한 사이랍니다.”
손을 뻗은 시엘이 레오나의 손등을 잡아끌더니 입을 맞췄다. 여기저기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레오나는 얼른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먼저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거슬리는군.”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던 라파엘이 일어서며 시엘을 바라보았다.
“흑기사단은 한가한 모양이군. 남의 기사단에 찾아와 수작을 부리는 것을 보면.”
시엘의 시선이 라파엘에게 향했다. 라파엘의 라일락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시엘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백기사단에 천재 마검사 라파엘 경이로군요.”
“레오나에게서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난 시엘이 라파엘에게 다가왔다.
그의 진청색 눈이 라파엘을 꿰뚫어 보았다.
“이런, 당신도 레오나 경을 좋아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런 곳에서 경쟁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레오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기가 막혔다.
제임스를 비롯한 유릭, 말론이 상당히 놀란 얼굴로 라파엘을 보았다.
“라파엘, 레오나를 좋아했던 거야?”
“정말로?”
“헉.”
제임스가 물었고, 유릭과 말론이 숨을 들이켰다.
“레오나의 상대는 나뿐이다. 나만이 레오나를 라이벌로 인정할 수 있다. 다른 놈은 사양이야.”
시엘이 재미있다는 듯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상당히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레오나 경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계신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하지만…….”
웃음을 거둔 시엘이 날카로운 기세를 뿜었다.
“레오나 경의 상대가 당신뿐이란 말은 상당히 거슬리는군요.”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중간에 낀 레오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둘 다 그만하고 따라 나와!”
서슬 퍼런 레오나의 말에 라파엘과 시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잔말 말고 따라 나와라. 여기서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단단히 화가 난 말투에 시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죠.”
“알겠다.”
두 사람은 순순히 레오나의 말을 들으며 식당을 빠져나갔다.
세 사람이 나가자 식당 안이 시끄러워졌다.
“세상에 라파엘이 레오나를…….”
“게다가 저 남자까지 레오나를…….”
제임스가 입을 틀어막았고, 유릭이 그를 따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말론이 고개를 저었다.
* * *
레오나는 두 남자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공터로 향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레오나는 시엘을 노려보았다.
“시엘 경, 남의 기사단에 와서 무슨 짓입니까?”
“보고 싶은 사람을 보러 온 것뿐인데 무슨 짓이라뇨, 너무하군요. 레오나 경.”
“흑기사단이 그렇게 한가합니까?”
시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분간 저는 한가합니다. 레오나 경을 언제든 보러 올 수 있지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은 레오나는 이번엔 라파엘을 보았다.
“라파엘, 너 나 좋아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한다. 내 라이벌은 이 세상에서 너뿐이니까.”
“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라이벌이라서 좋아한다는 거야?”
“너는 성별을 뛰어넘어 나를 긴장시키는 존재다. 나는 너의 자체를 라이벌로서 좋아한다.”
말이 안 통한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런데 시엘이 라파엘에게 한마디 했다.
“저는 당신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절대 레오나 경의 상대가 될 수 없으니까요.”
“레오나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로군.”
“적어도 당신보다는 제가 가장 잘 알지요. 안 그렇습니까, 레오나 경?”
“알긴, 뭘 알아! 앞으로 그딴 말 내 앞에서 하지 말아요. 난 당신을 모르니까.”
시엘이 진청색 눈을 접었다.
“이런, 서운합니다. 레오나 경, 우리가 얼마나 많은 밤을…….”
레오나는 시엘의 입을 급히 틀어막으며 짓씹듯이 말했다.
“그 입안 다물어? 여기서 확 꿰매버린다?”
레오나의 손바닥이 자신의 입술에 닿자, 시엘은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레오나가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를 찾아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오나는 얼른 손을 치웠다. 그러자 시엘이 레오나를 끌어안았다.
“뭐 하는…….”
레오나가 뭐라 하려는 찰나 라파엘이 끼어들었다.
“떨어져라.”
라일락 눈을 치켜뜬 라파엘이 시엘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시엘이 날카로운 눈으로 라파엘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라파엘의 손을 떨궈냈다.
“제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레오나 경뿐입니다.”
레오나는 몸을 비틀어 시엘에게서 떨어졌다.
“시엘 경, 내가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죠?”
“저런, 화가 났습니까?”
레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눈을 치켜뜨고 입을 열었다.
“둘 다 내 말 잘 들어요. 앞으로 내 앞에서 좋아한다느니, 그런 말은 일절 내뱉지 말아요. 특히 오해받기 좋은 말은 더더욱 용납 못 해요. 알아들었어요?”
“왜 그래야 하지?”
라파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좋아하면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걸 하지 말라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날 좋아한다 말하겠다고?”
“나는 널 좋아하고 있다. 그건 사실이다.”
“라이벌로서잖아! 라이벌이란 단어는 왜 빼먹어!”
“그럼, 나는 앞으로 너를 라이벌로서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는 건가!”
레오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말해. 그게 낫다.”
앞뒤 주어 다 빼먹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레오나는 이번엔 시엘을 보았다.
“시엘 경, 용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개인적인 만남은 사절입니다. 불쑥 찾아오지도 마세요. 아셨습니까?”
“싫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얼굴을 한 대 쥐어패고 싶었다.
시엘이 말했다.
“저는 보고 싶은 걸 참는 성격이 못됩니다. 레오나 경.”
아, 저 곱상한 얼굴이 너무 얄미웠다.
“그 얼굴에 멍 자국 하나 내드릴까요? 네?”
레오나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시엘이 입을 틀어막았다.
금빛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옴팡지게 들어 올린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레오나 경이라면 얼마든지 제 얼굴에 멍 자국을 내도 됩니다. 그건 오히려 영광이죠.”
레오나는 조용히 주먹을 내렸다.
완전 미친놈이다.
“멍 자국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얼굴을 들이미는 시엘을 보며 레오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멍 자국, 내가 내주지.”
레오나의 앞을 막아선 라파엘이 주먹을 휘둘렀다.
턱!
라파엘의 주먹은 시엘의 손에 붙잡혔다.
“말했을 텐데요. 제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이라고.”
“나도 말했다. 레오나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제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분이시군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불꽃을 튀기는 두 사람을 보며 레오나는 혀를 내둘렀다.
미친놈들끼리 만나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레오나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시엘이 한마디 했다.
“당신 때문에 레오나 경이 가지 않습니까.”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다 레오나가 점점 멀어지자,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레오나의 뒤를 따르던 시엘은 고개를 돌려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 * *
세 사람이 떠난 자리.
시엘이 바라보았던 나무 위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칠흑 같은 흑발에 짙푸른 눈동자가 멀어지는 세 사람을 응시했다.
그는 바로 데미안이었다.
‘모처럼의 휴식이었는데…….’
방해꾼이 나타날 줄이야.
그는 나무 위에 누운 채 세 사람의 대화를 다 들었다. 듣기 싫어도 들려와서 어쩔 수 없었다.
‘라파엘이 레오나를 좋아하고 있었군.’
그리고 흑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남자, 그는 일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정예 기사였다.
‘찾는다던 사람이 레오나였나?’
순간적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었다. 그가 강자라는 걸 알았지만, 자신의 기척까지 알아낼 줄이야.
그런 자가 찾는 사람이 레오나였다니. 대체 레오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계속해서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늘 새롭군.’
나무에서 뛰어내린 데미안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휴식은 아쉽게도 끝인 것 같았다.
단장실로 복귀한 데미안에게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찾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이곳에 찾아올 일은 한 가지뿐이지 않습니까.”
“임무 공조를 하러 왔습니까?”
“일단 이걸 좀 봐주시죠.”
흑기사단 카이엘이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데미안은 그가 건넨 서류를 검토했다.
“요하네스 지구에서 암시장 경매가 열린다라…….”
“중요한 건 거기에 출품되는 물건입니다.”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건 검은 마녀의 목걸이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데미안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천 년 전에 나타난 검은 마녀, 블러드 메리아. 그녀는 대륙 전역을 현혹시킨 희대의 마녀였다.
그녀의 현혹에 걸린 사람들은 그녀를 신으로 모시고,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걸 가능하게 해준 것이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였다.
대륙을 재앙으로 몰고 갔던 희대의 마녀의 물건이 지금 나타난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요.”
“그래서 저도 다시 저희 단원들을 보내 다시 확인했습니다. 진짜였습니다.”
“그렇게 확신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목걸이에 접근했던 저희 단원 중 한 명이 목걸이에 손을 대었다가 현혹에 넘어갔습니다. 시엘 덕분에 그는 무사히 빠져나와 그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시엘이 아니었다면, 그는 목걸이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데미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물건이 세상에 다시 나오다니…….”
“반드시 회수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공조를 하겠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다른 자에 손에 목걸이가 넘어가기 전에 회수해야 했다.
천 년 전에 재앙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뒤돌아 나가려던 카이엘이 불현듯 뭔가 생각이 난 듯 손뼉을 쳤다.
“아, 제가 이 말을 깜박했군요.”
“하십시오.”
“제가 가장 아끼는 단원인 시엘이 레오나를 이번 임무에 포함시켜 달라더군요.”
“레오나를 말입니까?”
흑기사단 카이엘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시엘이 찾는다던 그 사람이 레오나인 것 같습니다.”
“확신하시는 겁니까?”
“시엘이 그러더군요. 자신이 찾는 사람은 백기사단에 있다고. 이번 임무에 레오나를 포함시켜 달라고 한 걸 보면, 그 이유가 아닐까 싶었지요.”
흑기사단 카이엘이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레오나를 꼭 포함시켜 주십시오.”
“별일이군요. 카이엘 경이 단원의 개인적인 요구를 들어주려고 제게 부탁을 하시다니.”
흑기사단 카이엘이 민망한 얼굴을 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시엘 그 녀석이 임무 보상으로 원한 거니 말입니다. 다른 보상은 필요 없으니 레오나를 이번 임무에 함께 해달라고 하지 뭡니까.”
“그랬군요.”
“백기사단도 임무가 있을 땐 항상 준기사들을 차출하는 걸로 압니다. 부탁드립니다.”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레오나를 포함한 준기사 몇을 차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데미안 경.”
데미안은 다시 한번 레오나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 * *
2황녀 비비안은 지하 밀실에서 거울을 통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암시장 경매의 물품이 뭔지 확인했어?”
[물론입니다. 말씀하신 물건이 있었습니다.]
“정말 있었단 말이지?”
[예.]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비비안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가 진짜로 나타났단 말이지.”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는 천 년 전에 나타난 검은 마녀 블러드 메리아의 물건이었다.
전 세계 사람들을 매혹시킨 희대의 마녀인 그녀의 목걸이가 경매에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의 진짜 용도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마왕 벨지안의 파편이지.”
그리고 검은 마녀는 마왕 벨지안을 따르는 종이었다.
마왕 벨지안이 천 년 전쟁에 패하면서 그의 육신은 산산이 조각났고, 남은 파편을 그의 종들이 가지고 사라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꼭 필요해…….”
마왕 벨지안을 이루는 첫 번째 파편인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파편도 모아서 궁극의 힘을 얻을 것이다. 그게 바로 그녀가 계약한 대악마가 바라는 것이었다.
“베논에게만 맡길 수 없으니, 대비를 해놓을까.”
비비안은 거울을 열어 통신을 연결했다.
연결한 사람은 로브를 쓴 여인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그대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요하네스 지구로 가서 우리 일을 방해하는 자들이 암시장 경매장에 있는지 감시하세요. 일이 틀어지면 그대가 나서서 목걸이를 회수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멍청하게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훗, 걱정 마십시오.]
만족스러운 얼굴로 통신을 끊은 비비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흑마법사가 아닌 비비안 황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데미안은 레오나와 라파엘을 단장실로 불렀다.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은 임무가 생겼기 때문이다.”
레오나와 라파엘은 진지한 얼굴로 데미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준기사 중에서 실력이 가장 출중한 너희 둘이 준기사들을 대표하여 정예 기사들과 함께 임무를 맡게 될 것이다.”
“어떤 임무입니까?”
레오나가 물음에 데미안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레오나, 넌 흑기사단의 시엘과 무슨 사이지?”
“예?”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시엘이 파트너로 너를 지목했다.”
레오나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를요?”
“그렇다.”
레오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렇군.”
데미안은 더 묻지 않았다.
“너희 둘은 요하네스 지구에서 열리는 암시장 경매에서 어떤 물건을 회수해 오는 일을 도우면 된다.”
데미안은 두 사람에게 물건이 그려진 종이를 보여주었다.
“너희가 회수해야 할 물건은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다.”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라 하시면…….”
질문은 라파엘이 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 네가 생각하는 그 물건이 맞다.”
라파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오나는 궁금하다는 얼굴로 라파엘을 보았다.
“이게 뭔데 그렇게 놀래?”
“넌 이걸 모르나?”
“모르겠는데?”
“이건 천 년 전에 있었던 검은 마녀 블러드 메리아의 물건이다.”
“블러드 메리아?”
“희대의 마녀라 불리는 여자다. 사람들을 현혹시켜 대륙 전체를 피로 물든 악녀다.”
“그럼, 이게 그 여자 물건인 거야?”
“그렇다, 이 물건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천 년 전의 일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심각하게 말하는 라파엘을 보며 레오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성검도 찾아야 하고, 잘 됐어.’
어차피 요하네스 지구에 갈 일이 있었다.
데미안에게 어떻게 허락을 받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임무라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출발은 내일 아침이다.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예, 단장님.”
씩씩하게 대답한 레오나는 라파엘과 함께 단장실을 나왔다.
“너와 또 임무를 같이하게 되었군.”
“그러게. 잘해보자.”
레오나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완수해 보이겠다.”
레오나는 라파엘의 기분이 평소보다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 * *
다음 날 아침, 레오나는 데미안의 통솔하에 요하네스 지구로 출발했다.
이동수단은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레오나를 포함하여 데미안과 라파엘, 정예 기사들이 이동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데미안이 이동 마법진을 발동시키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이동된 곳은 요하네스 지구 백기사단 거점이었다.
건물 안 회의실에서 데미안은 레오나와 라파엘에게 흑기사단 대표로 온 시엘을 소개했다.
“서로 인사해라. 앞으로 너희와 임무를 함께하게 될 흑기사단 단원이다.”
시엘이 싱긋 웃으며 레오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레오나 경.”
레오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시엘과 악수를 했다. 오래 했다. 결국 레오나가 먼저 손을 뺐다.
“그만 손 좀 놓으시죠.”
“아, 이런 제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요.”
“라파엘이다.”
라파엘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하자, 시엘이 웃으며 말했다.
“그쪽은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왔네요.”
“유감이군.”
악수를 하는 두 남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레오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쯤하고 앉지.”
데미안의 말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자리에 앉자, 데미안이 임무를 말해주었다.
“너희 둘은 지금부터 시엘 경과 함께 움직인다. 독단적인 움직임은 금하겠다. 시엘 경의 명을 잘 따르도록.”
레오나가 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레오나 경, 라파엘 경.”
레오나와 라파엘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그만 쉬도록. 본격적인 임무 수행은 내일 경매가 열리는 저녁 8시에 시작이니 이점 명심해라.”
“예, 단장님.”
레오나와 라파엘이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나는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창문을 열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레오나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남의 방 창문에서 뭐 하는 거지?”
“반가워서 인사하려고 왔습니다. 나의 빛.”
“인사는 조금 전에 했잖아.”
“그건 공적인 인사고, 이번엔 사적인 인사입니다.”
레오나는 기가 막혔다.
“인사 다 했으면 그만 가.”
“그럴 수야 없지요. 선물은 드려야 하니까요.”
“선물?”
“오늘 밤, 성검 에키온이 경매에 나옵니다.”
“뭐?”
레오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경매는 내일이잖아.”
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매혹의 흑수정 경매고요. 오늘은 성검 에키온의 경매 날입니다.”
레오나기 이를 갈 듯 말했다.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해.”
“물어보지 않았잖아요.”
레오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그것도 오늘 8시에 시작하는 건가?”
시엘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초대장을 꺼냈다.
“어떻게, 가시렵니까?”
“그건 경매 초대장이야?”
“그렇습니다. 준비는 이미 제 쪽에서 다 해둔 터라 레오나 경은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난 지금 백기사단 소속이야. 단독 행동을 할 순 없어.”
“지금은 임무 수행 중이 아니죠. 그리고 휴식 식간입니다.”
맞는 말이다.
지금 레오나는 휴식 중이다. 기사가 휴식 시간에 무얼 하든 그건 자유였다.
법에 접촉되는 일만 아니라면 말이다.
“좋아. 가, 계획은 있는 거지?”
“물론이죠.”
시엘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무척 불안해 보였지만, 성검 에키온을 포기할 수 없기에 넘어갔다.
* * *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지?”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시엘을 보았다.
“장난이라니 말이 심합니다. 그렇게 원하던 성검이 아닙니까?”
레오나는 시엘에 손에 이끌려 드레스숍에 도착했고,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 테이블에 놓인 성검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간 레오나는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황금빛의 검 자루와 새하얀 검신, 보는 것만으로도 추억에 잠기기 충분할 정도로 아꼈던 검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야. 오늘 밤 경매에 나온다며?”
“그전에 제가 쓱싹해 왔죠. 아마 지금쯤 난리 났을 겁니다.”
안 봐도 뻔하다.
경매에 출품할 물건이 사라졌으니, 혼비백산했으리라.
“이걸 주려고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거야?”
“서프라이즈 좀 해봤죠. 마음에 드십니까?”
레오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엘을 보았다.
“아까 보여준 초대장은 뭐야.”
“그건 진짜입니다. 가짜로 속일 순 없죠.”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성검으로 날 여기로 꼬드기는 것도 그렇고, 그걸 선물로 내놓다니.”
시엘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당연히 제가 당신과 더 많이 엮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랑 엮이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과 아주 가까이 엮이고 싶습니다.”
시엘의 진청색 눈빛이 진지하게 반짝거렸다.
레오나는 성검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거절할게.”
레오나의 대답을 예상했는지 시엘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너무합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애를 썼는데…….”
“나는 너와 엮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그럼, 성검을 포기하시는 겁니까?”
레오나는 갈등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이 이상한 놈들 손에 들어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하아, 대단하시네요.”
시엘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름 완벽한 계획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레오나가 성검이란 말에 혹할 줄 알고 있었다.
성검 에키온은 그 정도로 그녀에게 애정이 깊은 검이었으니까.
예상대로 그녀는 성검에 관심을 보였다. 경매에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보였던 표정이 그러했으니까.
임무를 핑계로 그녀를 이곳으로 끌어들이고 깜짝 선물로 그녀를 감동시키려 한 것이었는데 실패했다.
“하는 수 없죠, 선물은 선물이니 그냥 드리겠습니다.”
레오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시엘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좀 짓지 마시죠. 상처받습니다.”
레오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시엘.”
“예.”
“이제 그만 날 잊어라. 너도 네 갈 길 가.”
그 말에 시엘이 눈가를 붉혔다.
“싫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나의 빛.”
“율리아나는 죽었어.”
“아니요. 살아 있습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당신이 그 증거입니다.”
“난 레오나야. 율리아나가 될 수 없어.”
“괜찮습니다. 레오나로 사시겠다면, 저는 당신을 레오나로 대하겠습니다.”
레오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손속을 가진 남자였지만, 이럴 때 보면 정말 아이 같다.
“성검은 당신을 다시 만난 선물로 드리려던 겁니다. 가지십시오.”
“아무런 대가 없이 이걸 선물로 네가 나한테 준다고?”
“그렇습니다.”
“넌 늘 대가를 바랐잖아.”
“당신을 잃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대가 없는 마음도 있다는 것을. 대가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 선물을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레오나.”
결국, 레오나는 시엘에게 져줄 수밖에 없었다.
“좋아, 이걸 받겠어. 대신, 공짜로 받진 않을 거야.”
레오나가 시엘이 준비한 드레스와 장신구를 보았다.
“저거, 나한테 입히려던 거지?”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준비한 옷을 입고 장신구를 단 당신을 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런 다음에 뭐 하려고 했는데?”
“데이트요.”
“데이트?”
“네, 저는 단 한 번도 당신과 데이트를 한 적이 없더군요.”
시엘과 만났던 것은 항상 싸움의 한복판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피 튀기는 곳이었으니까.
“좋아. 오늘 밤 내가 데이트 상대가 되어주지.”
시엘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레오나는 지금껏 시엘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입는 거 어려운 건 아니지?”
“그럴 줄 알고 도와줄 사람도 미리 준비했습니다.”
시엘이 손뼉을 치자, 중년의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레오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와 시엘을 번갈아 보았다.
“이분은 이 드레스숍의 주인입니다. 나의 빛.”
“그 나의 빛이란 소리 좀 하지 말아줄래?”
“싫습니다.”
레오나는 고개를 흔들고는 여인을 보았다.
“입는 것 좀 도와주세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레오나는 그녀와 함께 피팅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보리색의 드레스였는데 진주알이 포인트로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레오나가 진줏빛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시엘이 박수를 쳤다.
“역시, 잘 어울릴 줄 알았습니다.”
거기에 더해 진주로 만든 머리핀까지 꽂자, 레오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공주님 같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그러했다.
하늘색 머리를 풀어 헤치고 반묶음을 한 다음 진주로 만든 머리핀을 꽂자, 정말 공주님처럼 보였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레오나.”
시엘이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레오나는 그런 시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가자.”
“물론입니다.”
시엘이 손을 내밀었다.
레오나는 잡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잡았다.
오늘 밤만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정했으니까.
* * *
모두가 잠든 시각.
노예 경매장이 발칵 뒤집혔다.
경매장의 주인인 애런은 수하의 보고에 인상을 구겼다.
“성검 에키온이 감쪽같아 사라졌다니, 그게 말이 돼?”
“진짜라고요, 대장. 직접 가보시면 알 겁니다.”
“안내해.”
모처럼 집에서 애인과 황홀한 밤을 보낼 예정이었는데, 변수로 인해 휴식을 망쳤다.
“거짓말이기만 해봐, 내가 너부터 조진다.”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애런은 수하와 함께 경매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로 향했다.
은밀한 경매이므로, 철저한 보완 속에 숨겨놓고 있었다.
특수 설치한 마법 트랩은 그가 지정한 사람 외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보안이었다.
“이게 무슨…….”
그런데 창고에 도착하니, 마법 트랩이 모조리 파훼되어 있었다.
두 눈을 비비고 봐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얼굴이 창백해진 애런은 수하를 밀치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깔아놓은 카펫을 치우고 문고리를 잡아 올렸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자, 급한 걸음으로 내려갔다.
횃불이 밝혀지며, 넓은 공동에 경매에 팔릴 물건들이 전시된 것이 보였다.
일단 한시름을 놓은 애런은 문제의 물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물건을 보관하고 있던 유리관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모든 물건은 특수 마법 처리를 한 유리관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누군가 손을 대면 경보음이 울리고, 곧바로 자신에게까지 신호가 오게끔 되어 있었는데, 유리관은 멀쩡하고, 그 안에 있던 물건만 감쪽같아 사라졌다.
“이 무슨 개 같은 경우가…….”
애런은 뒤따라 들어온 수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가 잘 지키라고 했지!”
“저도 미치겠습니다.”
“자세히 얘기해 봐.”
수하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애런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성검이 사라졌다고?”
“예, 저도 귀신에 홀린 기분입니다. 분명 바깥에서 찰리랑 보초를 섰다고요. 찰리에게 물어보십시오.”
“찰리 데려와.”
“예, 예.”
잠시 후, 수하가 찰리라는 또 다른 수하를 데려왔다.
“찰리, 맥이 한 말이 사실이냐?”
“예, 대장. 저와 맥이 분명 보초를 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잠이 쏟아지지 뭡니까? 단순한 졸음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강제로 잠을 재우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애런이 인상을 구겼다.
“젠장.”
“그래도 다행히 성검만 가져갔습니다.”
애런이 맥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지금 그걸 다행이라고 말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대장.”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린 애런은 다른 경매 물품은 이상이 없는지 확인을 했다.
“일단, 다른 물건들은 이상이 없는 것 같으니 안심이군.”
애런이 찰리와 맥을 보았다.
“찰리, 맥 오늘 안으로 경매 물건들을 다른 장소로 옮긴다.”
“오늘 안으로요?”
“그래, 내일이 경매다. 오늘 안에 안전한 곳에 옮겨놔야지.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곤란하지 않겠어?”
“그, 그렇지요.”
“예, 대장.”
찰리와 맥이 번갈아 가며 대답하자, 애런은 직접 지휘를 하여 수하들을 움직여 경매 물건들을 다른 창고로 이동시켰다.
그곳은 만일에 사태를 대비에 여분으로 마련해 둔 두 번째 창고였다.
나머지는 팔렸고, 남은 물건은 내일 팔릴 15품목이 전부였기에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고용한 마법사를 이용해 새로운 마법 트랩을 짜고, 보안을 철저히 하느라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찰리, 맥 이번엔 잘 지켜라. 두 번은 없는 거 알지?”
“염려 마십시오. 이번엔 마법사님께서 주신 마법이 무효화되는 특수 약도 마셨고, 잠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대장.”
“그래.”
애런은 두 동생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창고를 나갔다.
휴식처로 돌아오며, 그는 왜 성검만 없어졌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건 놔두고 성검만 가져갔다는 것은 그것만 노리고 왔다는 뜻이겠어.’
그런데.
‘대체 성검이 경매에 나올 거라는 걸 어떻게 안 거지?’
경매 물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숨겼다. 무대에 올라서야 경매 물건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지하에 저장되어 있는 물건을 누군가 안다는 건 힘든 일이다.
‘어디서 새어 나간 거지?’
분명, 안에서 새어 나간 정보일 것이다. 바깥에서 알아내는 건 어려우니까.
‘쥐새끼가 누굴까?’
조금 전 만난 찰리와 맥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들은 아니다.
‘그런 덜렁거리는 놈들이 스파이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찰리와 맥은 시키는 일만 잘하는 수하들이다. 정보를 빼내어 판다는 일 같은 건 할 놈들이 아니다.
‘나랑 십여 년을 굴러먹던 놈들이 배신할 리는 없어.’
찰리와 맥은 불법 경매를 함께 시작한 핵심 멤버였다.
‘그래, 그놈들은 아니야.’
다른 수하들을 떠올려 보았으나, 마땅한 자들이 없었다.
‘내일 경매만 생각하자.’
성검 에키온을 잃은 건 큰 손실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다른 물건이 남아 있다.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만 잘 팔아도 성검 못지않은 수확을 거둬들일 수 있어.’
이번 경매의 하이라이트는 성검 에키온과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였다.
양대 산맥 중 하나를 잃었다.
큰 손실은 맞았다.
하지만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 또한 귀한 물건이다.
‘값을 더 올려서 팔아야겠어.’
그러기 위해선.
‘바람잡이들에게 금액을 올리라고 미리 언질을 주어야겠군.’
모든 경매에는 물건값을 올리는 바람잡이들이 존재한다.
그 역시 바람잡이들을 고용해 경매를 진행해 왔다.
애런은 애써 위로를 하며 휴식처인 건물로 들어갔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는 데에는 애인과 한바탕 뒹구는 일이 최고였다.
* * *
노예 경매장이 발칵 뒤집히던 날.
숙소로 돌아온 레오나는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드레스를 입고 시엘과 데이트를 하게 될 줄이야.”
성검이 사라진 노예 경매장은 난리가 났을 텐데, 레오나는 시엘과 한가롭게 데이트를 하였다.
시엘은 데이트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코스를 모두 돌았다.
멋진 연주를 들으며 저녁 식사를 하고, 황홀한 야경을 감상하며 와인도 한잔했으며,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시엘은 계속해서 웃었다. 레오나는 그렇게 밝게 웃는 시엘을 처음 보았다.
그와는 늘 피가 튀는 싸움터에서만 만났기에 그가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는 모습이 낯설었다.
‘시엘이 그렇게 웃는 사람인 줄 처음 알았어.’
그렇게 기뻐하는 얼굴이라니.
그가 율리아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마음에 와닿았다.
하지만 씁쓸하기도 했다.
율리아나는 죽었으니까.
‘그만 잊었으면 좋았으련만…….’
율리아나가 남기고 떠난 인연들이 하나둘 찾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중에서 제일 안타까운 사람은.
‘아스텔…….’
절절했던 그의 마음이 아직까지 생생해서 가장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깊게 숨을 들이쉰 레오나는 몸을 일으켜 아공간에서 성검 에키온을 꺼냈다.
황금빛을 머금은 성검은 그녀의 손에 착 감겼다.
“너도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검이 우웅 하고 울었다.
주인을 반기는 듯해서 레오나는 피식 웃었다.
“미안,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을 많이 시켜서.”
우우우웅!
성검이 항의하듯 소리를 냈다.
성검을 바라보는 레오나의 눈동자가 따스함으로 물들었다.
“네가 이렇게 다시 내게 돌아온 것을 보면 우린 정말 운명인가 보다.”
우웅!
성검도 그렇다는 듯 울었다.
“녀석.”
성검을 쓰다듬은 레오나는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당분간은 아공간에서 잠들어 있어야 할 것 같아. 난 지금 율리아나가 아니거든.”
시무룩한지, 성검의 우는 소리가 작았다.
“미안하다, 에키온.”
우우웅.
성검 에키온이 괜찮다는 듯이 황금빛을 뿜었다. 성검이 품은 따스한 성력이 레오나의 몸을 감쌌다.
레오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