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불길한 붉은 달
단장실로 손님이 찾아왔다. 진보랏빛 머리에 남청색 눈을 신비로운 분위기의 남자였다.
그의 복장은 흑기사단의 검은 제복이었다. 왼쪽 가슴에 부착된 용트림하는 붉은 용의 엠블렘이 그가 정예 기사임을 알려주었다.
흑기사단 준기사의 엠블렘은 웅크린 붉은 용이었다. 정예 기사가 되면 용트림하는 엠블렘으로 바뀐다.
날카로운 데미안의 눈빛이 그를 향했다.
‘벌써 정예 기사가 된 것인가.’
그의 이름은 시엘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는 몇 달 전에 새로 흑기사단에 입단한 자였다.
푸른 장미의 계승자라 불리는 남자. 생긴 것은 곱상하게 생겼지만, 그 안에 잠재된 힘이 남다르다는 것을 데미안은 느꼈다.
“카이엘 단장이 보냈다고?”
“예, 단장님께서 이걸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남청색 눈을 사르르 접으며 가져온 서류를 데미안에게 건넸다.
서류를 훑어본 데미안의 눈빛이 일변했다.
“사실인가?”
“제가 직접 알아낸 것이니 사실입니다.”
“카이엘 단장에게는 감사를 전하지.”
“전하겠습니다.”
“그만 가봐도 좋아.”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데미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백기사단에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기사가 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건 왜 묻지?”
“제가 찾는 사람도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라서요.”
데미안의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사람을 찾고 있었나?”
“그렇습니다.”
“우리 기사단에 신성 마법을 쓰는 기사는 단 한 명뿐이다.”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그의 진청색 눈이 반짝였다. 묘한 위화감에 데미안은 그를 경계했다.
‘마치 뱀 같군.’
시엘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경례를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엘은 단장실을 나왔다.
“이곳에 있는 사람이 맞으면 좋겠는데.”
백기사단에서 유일하게 신성 마법을 쓰는 기사. 만나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가진 신성력의 느낌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빠르게 정예 기사가 된 보람이 있어.”
준기사보다 정예 기사가 더 활동 범위가 넓었다.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도 많고.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백기사단 건물을 나온 시엘은 순식간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시엘이 나가고, 데미안은 그가 남기고 간 서류를 보았다.
“노예들을 싣고 온 배가 도착한다라…….”
서류엔 어린 노예들을 몰래 숨겨놓은 배 한 척이 들어온다는 정보였다.
“서둘러야겠군.”
배가 도착했다면, 어린 노예들을 어디론가 데려갈 것이다. 그 전에 막아야 한다.
데미안은 즉시 부단장 란젤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임무가 생겼다.”
“임무요?”
“요하네스 지구에 수상한 배 한 척이 들어온다는군.”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은 흑기사단에서 받은 서류를 란젤로에게 보여주었다.
“어린 노예들을 사들인 배가 들어온다는 겁니까?”
“흑기사단에서 알아낸 정보니 정확할 거다.”
“그렇군요.”
“나는 지금부터 정예 기사 열 명과 준기사들을 데리고 요하네스 지구로 갈 것이다.”
“직접 가시는 겁니까?”
“그렇다. 너는 여기 남아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즉시 백기사단 정예 기사 열 명과 준기사들을 데리고 즉시 요하네스 지구로 출발했다.
쉬지 않고 달린 끝에 데미안은 요하네스 지구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요하네스 지구는 제도 센터폴에서 남서쪽으로 이동하면 나오는 도시다.
과거에는 상업지구로 활성화되었으나, 북동쪽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면서 그곳에 항구 도시가 생겨났고, 상업지구는 그쪽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요하네스는 과거의 잔재를 간직한 채 멈춘 상태가 되었다.
데미안은 단원들을 데리고 흑기사단에서 받은 정보로 배가 정박되어 있는 항구로 이동했다.
말은 요하네스를 관리하는 귀족에게 맡겨둔 상태였다.
데미안과 단원들은 배를 확인했다.
배에 새겨진 검은 색 날개 문양과 배 후미를 장식하고 있는 기괴한 목각 눈에 들어왔다. 문어와 사람을 반반씩 섞어 놓은 듯한 모양이다.
“저 배인 것 같군.”
단원들은 배가 잘 보이는 창고 건물 뒤에 몸을 낮춘 채 잠복했다.
무작정 배를 덮칠 순 없었다. 배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덮쳤다간 함정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시 대기한다.”
지금 시간은 이른 새벽.
한 시간 전에 배가 정박했다는 정보를 받았으니,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거라 판단했다.
“저기 옵니다.”
레오나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은 로브를 쓰고 있는 남자 셋이 배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배에 도착한 세 명의 남자는 한 명만 배 밑에서 기다리고 두 명만 도개교를 건너 배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두 명의 남자가 배에서 나왔다.
그들의 뒤에는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찬 아이들이 줄지어 따라 나오고 있었다.
“지금 덮칠까요?”
정예 기사 중 한 명이 말하자,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놈들의 아지트를 턴다. 뒤를 따른다.”
“예, 단장님.”
데미안이 먼저 움직였다.
그 뒤를 단원들이 조심히 따랐다.
* * *
“대장, 괜찮겠지?”
대머리 제라드가 불안한 얼굴로 묻자, 이들의 리더인 주점의 주인이자 바텐더 베논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겁먹었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기분이 좀 쎄하달까, 불안해서 그렇지. 넌 괜찮냐, 마이클?”
애꾸눈인 마이클을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린 맡은 임무만 잘하면 되는 거다. 안 그렇습니까, 대장.”
“조용히 하고 노예들이나 챙겨라, 한 명이라도 부족하면 안 된다.”
“예이!”
제라드가 히죽 웃으며 노예들을 묶은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빨리, 빨리 좀 걷자, 시간이 없다.”
제라드가 무식하게 쇠사슬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몇몇 아이가 넘어졌다.
“얼른 안 일어나냐.”
서슬 퍼런 제라드의 말에 아이들이 겁을 먹고 재빨리 일어섰다.
“시간 없다, 서두르지.”
베논이 한마디 하자, 더디었던 아이들의 걸음이 속도가 붙었다.
* * *
그들을 뒤따른 지 한 시간, 마침내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커다란 창고 건물이었는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곳 같았다.
그들은 아이들을 창고 안에 밀어 넣고는 문을 잠갔다.
그리고 보초 두 명을 세웠는데 대머리의 사내와 애꾸눈의 사내였다.
한 명은 다른 볼일이 있는지 어디론가 향했다.
데미연은 정예 기사 둘과 라파엘을 비롯한 준기사 셋을 다른 곳으로 향한 사내에게 붙였다.
“조심해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정예 기사들이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대답했다.
“쫓아라.”
“예, 단장님.”
그들이 떠나자, 데미안은 남은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나를 따라 노예들을 구한다.”
데미안이 움직이자, 단원들이 그 뒤를 땄다.
데미안과 단원들은 두 남자가 지키고 있는 건물의 입구가 아니라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단원들에게 창문을 통해 들어가 노예들을 구하라 지시한 다음, 자신은 입구를 지키는 두 놈을 처리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대머리 제라드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하암,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어야 하냐?”
제라드의 불만에 애꾸눈 마이클이 핀잔을 주었다.
“대장이 올 때까지라고 했잖아.”
“우리가 어쩌다 보초나 서는 신세가 됐는지, 참.”
“참아. 세례를 받으면 우리도 달라지지 않겠냐?”
의식이 있을 때마다 선택받은 몇몇이 세례라는 것을 받는다.
세례는 강력한 마력을 내려주는 의식이었다.
이번엔 두 사람이 선택을 받았다.
세례를 받으면 그들이 바라마지 않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되리라.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제라드가 입맛을 다시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빨리 세례받았으면 좋겠다.”
“나도 마찬가지다.”
“미안하지만, 너희가 세례를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디선가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두 사람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한 남자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데미안이었다.
“누, 누구냐!”
제라드가 도끼를 움켜쥐고 덤볐다. 마이클도 검을 뽑아 들었다.
쉬익!
섬광이 스친다 느낀 순간 제라드가 쥐고 있던 도낏자루가 잘렸다. 반 토막 난 도낏자루를 들고 있던 제라드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퍼억!
제라드는 폼멜로 배를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먹은 것을 게워냈다.
“이익!”
제라드가 나자빠지자, 마이클이 검을 휘둘렀다. 빠르고 쾌속한 검 놀림이었다.
캉!
한 번의 휘두름으로 검을 튕겨낸 데미안이 두 번의 휘두름으로 마이클의 검을 부러트렸다.
검 자루를 쥔 마이클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제, 젠장.”
검 자루를 집어 던진 마이클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가 도망을 치기 전에 데미안이 그를 먼저 따라잡아 손등으로 마이클의 목 뒤를 후려쳤다.
“컥!”
마이클이 도망가던 자세 그대로 고꾸라졌다.
데미안은 그런 마이클의 뒷덜미를 잡아 제라드가 쓰러진 곳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곤 두 사랑을 한데 모아놓고, 마법을 시전했다.
“콜드 바인드.”
얼음의 밧줄이 두 사람을 묶었다.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데미안은 손과 발도 묶어 버렸다.
두 사람에게 무엇이라도 알아내려면 제압해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두 남자를 기절시키고, 단원들이 있는 창고로 향했다.
* * *
레오나와 라파엘, 준기사들은 선배 기사들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다.
창고 안에는 커다란 감옥 같은 우리가 있었는데, 그 안에 손과 발에 쇠고랑을 찬 아이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모두 7세 미만의 아이들이었다.
아이 중에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었다.
‘뭔가 급하게 데려온 티가 나.’
마력을 지닌 아이들을 주로 납치해 가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어린 노예 중에는 평범한 아이들도 끼어 있었다.
‘가릴 처지가 아니게 된 것인가.’
선배 기사가 긴장된 얼굴로 준기사들을 보았다.
“저기 무언가가 있다. 너희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도록.”
아이들이 갇힌 우리 반대편에 굉장히 위험한 기운을 풍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선배 기사들도 그걸 느낀 모양이었다.
레오나와 라파엘, 준기사들은 우리로 다가갔다.
그러자 아이들이 겁을 집어먹었다.
“사, 살려주세요.”
“자, 잘못했어요.”
아이들이 겁에 질린 채 울면서 애원했다. 바닥에 절을 하는 아이도 있었고, 손바닥을 비비며 비는 아이도 있었다.
레오나가 상냥한 얼굴로 아이들을 달랬다.
“애들아, 걱정 마. 우리는 너희를 구하러 온 사람들이야. 안심해.”
“저, 정말이에요?”
한 아이가 떨리는 눈으로 묻자, 레오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러니 믿으렴.”
레오나가 라파엘을 바라보자, 라파엘이 우리를 잠근 자물쇠를 검 손잡이로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자물쇠를 비롯한 우리의 철창이 파지직 하며 라파엘의 검을 튕겨냈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어딘가에 덜컹거리며 철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키에에에엑!”
기괴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빠르게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것을 본 선배 기사가 외쳤다.
“키메라다! 모두 전투 준비!”
그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키메라들이 덤벼들었다.
잿빛의 피부와 흰자위 없는 검은 눈, 귀밑까지 찢어진 입은 송곳니가 톱니바퀴처럼 솟아 있었다.
거기다 기다란 손톱이 매우 위협적이었다.
레오나는 라데온의 신성 검술을 이용하여 키메라들을 베어냈다.
라파엘도 바스티안 가의 검술을 사용하여 키메라들을 베었다.
선배 기사들도 준기사들도 각자의 검술로 키메라들을 상대했다.
마법이 난무했고, 섬광이 빗발쳤다. 그러한 폭발적인 공격에 키메라들은 바스러졌다.
바닥엔 키메라들이 흘린 피가 흥건했으며, 비릿한 냄새가 지독하게 올라왔다.
기사들의 검에선 키메라들의 것으로 추정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오나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나는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라파엘과 준기사들을 보았다.
“괜찮냐?”
“물론이다.”
“우리도 괜찮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레오나는 선배 기사들을 보았다.
“선배님, 여기 마법 트랩이 걸려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라.”
허락이 떨어지자, 레오나는 철창에 손을 뻗어 신성 마법을 발현했다.
“디스펠 매직.”
마법 무효화.
철창을 감싸고 있던 마법적 기운이 레오나가 발현한 신성 마법에 의해 사라졌다.
레오나는 검 손잡이로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어주었다.
“이제 나오렴. 애들아.”
레오나가 손짓하자, 아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이 모두 철창 밖으로 나오자, 레오나와 라파엘, 준기사들은 선배 기사들을 보았다.
선배 기사들이 손짓으로 데리고 나가라는 행동을 취했다.
“가자, 애들아.”
레오나는 준기사들과 함께 아이들을 통솔하여 건물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데미안이 보였다.
“단장님.”
레오나의 부름에 데미안 단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전투가 있었군.”
“예, 아이들이 갇힌 우리를 건드렸더니 갑자기 키메라들이 나타나 공격했습니다.”
“마법 트랩이군.”
“그런 것 같았습니다.”
“키메라는 모두 죽었나?”
“예, 선배님들께서 나서주신 덕분에 모두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데미안이 표정을 굳혔다.
“아직 끝난 건 같지는 않군.”
“네?”
“저길 봐라.”
데미안이 가리킨 곳에 죽은 키메라들의 시체가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체들은 한곳으로 모여들더니 뭉쳐지고 있었다.
“저게 무슨…….”
“일반적인 키메라는 아니란 뜻이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라. 저건 내가 처리하겠다.”
일단 아이들의 안전이 우선이었기에 레오나와 기사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창고를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건물 앞에 얼음으로 된 밧줄에 묶인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입구에 보초를 서던 대머리와 애꾸눈이었다. 데미안이 제압하여 묶어 둔 모양이었다.
레오나는 그들도 챙겨서 단원들과 함께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단장이 미리 준비해 둔 안전 가옥이었다. 항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이어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안전 가옥 안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간 레오나와 단원들은 아이들의 손과 발에 묶여 있는 쇠고랑을 풀어 주었다.
쇠고랑을 부수니까,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에 쓸린 듯한 상처가 많이 나 있었다.
“많이 아프겠다.”
레오나는 아이들의 발과 손목을 신성력으로 치유를 해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의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
아이들이 신기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그중 한 소녀가 레오나를 보며 물었다.
“언니는 천사예요?”
“어?”
“아픈 걸 낫게 해주는 사람은 우리 엄마가 천사랬어요.”
“엄마가 그렇게 말씀해 주셨구나. 그런데 어쩌지, 언니는 천사가 아닌데. 실망시켜 미안하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도 난 언니를 천사라고 믿을래요.”
레오나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넌 이름이 뭐야?”
“루니예요. 아빠가 지어줬어요.”
“루니, 예쁜 이름이네.”
루니를 시작으로 레오나는 다른 아이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들에겐 안정이 필요했다. 레오나를 비롯한 준기사들을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레오나뿐만 아니라, 준기사들도 아이들을 위로해 주었다.
* * *
데미안은 기괴한 괴생명체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크르르르르.
커다랗게 뜨여진 새카만 눈동자가 데미안을 비췄다.
“라이트.”
허공에 빛의 구슬이 떠올라 사위를 밝혔다.
그래서 괴생명체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잿빛의 피부, 동그랗고 커다란 몸에 울퉁불퉁하게 달린 팔과 다리.
“변종 키메라인가.”
보통 키메라와 달리 끈질긴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재생되는 키메라들이 있었다.
주로 몬스터를 융합하여 만든 키메라들이 그러했다.
데미안은 검을 늘어뜨렸다.
그의 전신에서 북풍한설과도 같은 지독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산산조각 내어주마.”
얼음의 마력이 그의 검을 타고 흘러내렸다.
놈이 움직였다.
그러나 공격하지 못했다.
데미안이 X로 검을 휘두르자, 검을 타고 뻗어 나간 냉기가 놈을 얼려버렸다.
검을 집어넣은 데미안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 * *
베논은 주인님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그런 그를 백기사단이 따라붙었다.
베논은 골목을 누비며, 이동했다.
그 뒤를 백기사단이 바짝 따랐다.
한참을 이동한 베논은 모퉁이를 돌아 3층짜리 건물로 들어갔다.
백기사단은 베논이 들어간 건물을 포위하며 감시했다. 물론, 존재감을 지우는 마법을 건 채였다.
정예 기사들은 적을 추적하기 위해 존재감을 감춰주는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베논은 백기사단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간 베논은 바닥에 덮어놓은 거적때기를 걷었다.
그러자 검은색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마법진 위에 올라선 베논이 마정석을 부수려고 할 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불의 화살이 그의 손을 노렸다.
급히 몸을 튼 베논은 마정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떨어진 마정석에 시선이 간 사이, 순식간에 포위를 당했다.
베논이 굳은 얼굴로 포위한 자들을 보았다.
“누구냐, 너희는?”
“그건 알 거 없고, 우리와 함께 가줘야겠다.”
베논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건 곤란하겠는데?”
쉭쉭쉭쉭쉭!
베논은 기습적으로 단도를 집어 던졌다.
챙챙챙챙챙!
날아간 단도는 그들이 휘두른 검에 의해 모조리 튕겨졌다.
베논이 양손에 단검을 쥐었다.
그것을 신호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팔에 상처를 입은 베논은 이를 악문 채 도주했다.
생각보다 강한 놈들이었다.
검과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공격하는데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될 수준이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자들이…….’
한 가지 추측이 가는 곳이 있었다.
제국에서 검과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검사 집단 제국 4대 기사단 중 으뜸이라는 제1백기사단이 떠오른 탓이다.
‘백기사단이 어떻게 알고 날 찾은 거지?’
그간 행적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랬는데도 알고 찾아왔다.
‘어디서 어디까지 알고 온 것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혹시나 하고 든 생각.
‘설마, 노예들을…….’
창고에 제라드와 마이클에게 맡겨 두고 온 노예들이 생각났다.
만약, 그곳에 백기사단이 나타났다면 제라드와 마이클로서는 상대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보루는 남아 있었다.
창고 안에 가둬 둔 키메라.
만일을 위해 준비해 둔 장치였다.
‘키메라들이 백기사단을 상대로 잘 싸워줘야 할 텐데.’
일단 지금은 몸부터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가지고 있는 이동 스크롤을 모두 사용해 도망에 성공한 베논은 제도 센터폴에 있는 아지트로 숨어들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아지트는 아주 은밀해서 흔적을 찾기 힘든 위치에 있었다.
이동 마법진이나, 이동 스크롤이 있어야 이동이 가능해 따로 출구는 없었다.
“후우, 후우.”
아지트에 도착해 숨을 돌린 베논은 곧장 통신 구슬을 꺼내 연락을 취했다.
* * *
2황녀 비비안은 황궁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있었다.
신성 마법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황궁 도서관은 대륙 전역에서 끌어다 모은 보고였다.
“적을 무찌르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하는 법이야.”
설마하니 흑마법의 천적인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자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다.
그 이유는 제국에서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서 지금은 사라진 마법이었다.
신성력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오로지 신전뿐이었다.
신전도 예전만 못해서 치유나 정화나 조금 할 줄 아는 수준이었다.
제국을 건국한 프리드리히는 본인이 신이 되기를 희망하여, 유프란 제국에서 거의 신전을 없애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신전은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다. 그렇기에 2황녀 비비안은 흑마법사로서 활동해 올 수 있었다.
아무도 그녀가 흑마법사라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붉은 달 의식을 완벽하게 치르기 위해서라도 대비해 놔야 해.”
의식을 치를 때 레오나 그 여자가 또다시 방해하러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자신이 하는 일에 꼭 훼방을 놓았으니까.
이번엔 훼방을 놓게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함정을 파든, 방어를 철저히 하든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가 사용하는 신성 마법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책을 펼쳐 신성 마법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통신 구슬이 신호를 보내왔다.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2황녀 비비안은 황궁 도서관을 나와 조용한 장소로 이동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황궁 도서관의 뒤편에 있는 낡은 창고 안이었다.
그곳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 창고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안엔 피로 그려진 이동 마법진이 있었다.
이동 마법진을 통해 지하 밀실로 향한 2황녀 비비안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가면을 쓴 다음 통신 구슬을 켰다.
“무슨 일이야, 베논?”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백기사단이 요하네스 지구에 와 있습니다.]
“뭐?”
[저는 지금 그들에게 쫓기다가 간신히 탈출해 아지트에 있습니다.]
“노예들은?”
[죄송합니다.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백기사단도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노예들을 가둔 장소에 키메라를 풀어 두었으니 말입니다.]
“하아, 노예들을 지키지 못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이틀 후면 의식인데 어쩔 거냐고.”
[다행히 1차로 들여온 노예들은 의식 장소에 가두어 둔 상태입니다. 진행에 문제는 없습니다.]
“모자라. 천 명의 피가 필요한데 고작 절반 가지고 의식을 하라는 거야?”
[면목이 없습니다.]
입술을 짓씹던 2황녀 비비안은 최후의 수단을 꺼내기로 하였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위험하지만 도박을 하는 수밖에.”
[도박이라 하시면…….]
“마법사. 마법사를 제물로 바치는 수밖에.”
베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법사는…….]
“걱정하지 마, 적당한 사람이 있으니까.”
2황녀 비비안의 입가에 뱀 같은 미소가 걸렸다.
“너는 제물이나 잘 관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2황녀 비비안은 길게 심호흡을 하였다.
“멍청한 놈들. 그깟 일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다니.”
화를 간신히 억누른 2황녀 비비안은 다른 통신 구슬을 꺼냈다.
통신을 연결하자,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제안을 할까 해.”
[제안?]
“이번 의식에서 특별히 당신에게 세례를 내려주지.”
세례란 말에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떴다.
[정말입니까?]
“그래, 대신 당신이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2황녀 비비안이 차가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마법사 제물이 필요해. 가능하겠어?”
[마법사를 말입니까?]
“그래.”
[몇 명이 필요하십니까?]
“열 명이면 좋겠지만, 세 명만이라도 데리고 와. 데리고 온다면 그날 당신은 보다 많은 세례를 받게 될 거야.”
통신 구슬 너머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내일모레 의식 장소에서 봐.”
[알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2황녀 비비안은 통신을 끊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나머진 의식에만 집중하면 되겠어.”
마계의 기운이 강해지는 붉은 달이 뜨면 보다 강한 악마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모든 것을 만회할 수 있으리라.
2황녀 비비안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 * *
6월 5일 자정.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밤하늘을 가득 채운 것은 새빨간 달이었다.
레드문.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번져가는 사이한 빛은 악마의 힘이 강해짐을 나타낸다.
이날은 모든 사람이 문을 걸어 잠그고 꼭꼭 숨는다.
힘이 강해진 악마가 먹잇감을 찾아 내려온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는 불길함을 가득 품은 밤하늘을 숙소 테라스에서 바라보았다.
“붉은 달…….”
정말 기분 나쁜 달이 아닐 수 없다.
“붉은 달이 뜨면 많은 피가 뿌려지기도 하지.”
레오나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피가 뿌려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늘 데미안이 말해준 것이 있다.
레드문이 뜨는 날에는 아무도 밖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제국에 오래된 전통이라고 하였다.
악마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숨어야 하는 날.
“레드문은 정말 기분을 더럽게 만들어.”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레드문이 뜨는 날이면, 어김없이 전투를 치렀다.
그날은 흑마법사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기였으니까.
신성국의 오랜 염원이었던, 흑마법사의 괴멸이라는 사명을 짊어지고 레드문이 뜨는 날이면 레오나도 검을 들어 피를 뿌렸다.
물론, 흑마법사의 피로.
이날은 무척 힘든 싸움을 해야 했다.
레드문은 악마의 힘이 강해지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사의 힘이 약해지는 달이기도 하다.
신성력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힘들었지.”
레드문이 뜨는 날에 강한 악마의 힘을 등에 업은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때 레오나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이건…….”
강한 흑마법사의 기운이 느껴졌다. 레드문이 뜨는 날에 흑마법사의 힘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강해……. 대체 어디서?’
이렇게 가까이서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라니.
레오나의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가까이에?’
레오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빛이 넘실거리는 레드문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기?’
붉은 달에 모여드는 검은 구름.
붉은 달을 중심으로 검은 구름이 한곳에 모였다.
아주 강력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검은 구름의 틈에서 레오나는 섬뜩하게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를 보았다.
레오나의 얼굴이 경악의 빛으로 물들었다.
‘대악마의 눈.’
검은 구름 주위로 번개가 요동쳤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레오나는 검을 챙겨 들고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검은 구름이 모여 있는 그 아래,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 * *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제단은 피로 물들었다. 새빨간 피가 바닥을 적시고, 그 위에 새겨진 거대한 마법진은 붉은빛을 뿜어냈다.
그 가운데에 검은 로브를 쓰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신도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둥글게 원진을 그리며 절을 했다.
여인은 2황녀 비비안이었다.
2황녀 비비안은 수정 구슬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위대하신 존재께 피를 바치노니, 그 힘을 내려주소서.”
바닥을 적신 핏물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하늘 높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한 피의 기둥이 천장을 뚫고 치솟았다. 바닥에 뿌린 모든 피가 사라지고, 거대한 기운이 내리꽂혔다.
2황녀 비비안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안간힘으로 버티며 그 힘을 받아냈다.
수정 구슬로 붉은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새카만 블랙홀이 천장에 생겨났다. 블랙홀 속에서 커다란 눈이 2황녀 비비안을 응시했다.
[나를 부르는 자가 누구인가.]
2황녀 비비안이 떨리는 얼굴로 외쳤다.
“미천한 종이 위대하신 분을 배알하나이다.”
붉은 눈이 2황녀 비비안을 눈에 담았다.
[나의 종이 되길 원하느냐.]
“원합니다. 부디 저를 당신의 종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흑마법사들의 가장 큰 염원은 강한 힘을 가진 악마와 계약을 하는 것이다.
[나는 마계의 악마 대공 벨리알이다. 네가 바친 피와 살, 네 영혼을 받아들이마.]
“감사합니다.”
[계약의 증표를 주마.]
2황녀 비비안의 손등에 새빨간 육망성이 새겨졌다.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수정 구슬에 어마어마한 기운이 담겼다.
[다음 붉은 달이 뜨는 날, 완성된 그릇을 통해 강림할 것이다.]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블랙홀이 사라졌다.
사방을 옥죄던 마기도 사라졌다.
2황녀 비비안은 환희에 찬 얼굴로 손등에 새겨진 붉은 육망성과 수정 구슬을 보았다.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것이 악마 대공의 힘…….’
2황녀 비비안이 음험한 미소를 띠며 신도들을 바라보았다.
“세례를 받을 자들은 나오라.”
“오, 주인이시여!”
세례를 받고자 세 명의 신도가 그녀의 발 앞에 엎드렸다.
2황녀 비비안은 첫 번째 신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는데 상당히 강한 마력을 보유한 마법사였다.
“드미트리, 그대에게 첫 번째 세례를 내리겠다.”
2황녀 비비안이 수정 구슬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수정 구슬 속에 들어찬 기운이 그녀의 손을 타고 빠져나왔다.
그녀의 손에 붉은빛이 넘실거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드미트리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축복이 있으라.”
그녀의 손에 맺혀 있던 붉은빛이 드미트리의 머리에 스며들었다.
그의 눈빛이 붉게 변했다 사라졌다.
“이건 의식의 대한 공을 높게 사, 특별히 두 배의 힘을 그대에게 주었어요.”
그가 제물로 데려온 마법사들이 없었다면, 대 악마 소환은 불가능했으리라.
2황녀 비비안은 어중간한 악마와 계약할 생각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대악마와의 계약이었다.
드미트리는 강하게 꿈틀거리는 강대한 마력에 취해 환희를 느꼈다.
십 년이 넘도록 넘지 못한 벽을 단숨에 넘은 힘이 그의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강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강한 힘을 왜 이제야 접했을까, 진즉 알았더라면 좀 더 젊은 나이에 강해질 수 있었을 텐데.
“주인이시여. 당신을 만난 것이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나는 당신의 종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2황녀 비비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나머지 두 명에게도 세례를 해주었다. 한 명은 베논이었고, 다른 한 명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세례를 받은 두 사람 역시 2황녀 비비안을 바라보며 절을 했다.
그렇게 붉은 달 의식이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 * *
레오나는 제도 센터폴에서 떨어진 외곽 숲에서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사라졌어.’
검은 마기는 이 호수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도착하자 사라졌다.
레오나의 금빛 눈이 호수를 뚫어질 듯 향했다.
곧 그녀의 두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호수가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광경에 레오나는 몸을 숨긴 채 지켜보았다.
호수가 갈라지고 바닥이 드러났다. 호수 바닥엔 거대한 마법진이 있었고, 그 위로 붉은빛이 일렁이며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이 나타났다.
레오나는 그들이 흑마법사임을 알아차렸다.
신성 마법의 존재감을 완벽하게 지운 채 레오나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하얀 가면을 쓴 여인이 섬뜩한 기운이 깃든 구슬을 들고 갈라진 호수 사이를 걸어 나왔다.
흑마법사들로 보이는 이들이 두 줄로 서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레오나의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서 흑마법사 무리를 보게 될 줄이야.
순간, 레오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레오나를 향해 손을 든 순간.
퍼엉!
레오나가 서 있던 자리가 터져 나갔다. 폭발의 여운으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 * *
손을 내린 2황녀 비비안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쥐새끼가 있었네요.”
그녀의 말에 따르는 흑마법사들이 놀라운 얼굴로 2황녀 비비안을 보았다.
손짓 한 번에 폭발을 일으킨 그녀의 힘에 놀란 것이다.
수정 구슬을 소중하게 쓰다듬은 2황녀 비비안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네요.”
그녀의 시선이 먼지구름을 향하자, 흑마법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2황녀 비비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높은 나무 위에 몸을 숨긴 레오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큰일 날 뻔했어.’
조금 전에 자신을 향해 날아온 그 힘은 마기가 분명했다.
‘그 정도 힘이라니……. 악마와 계약한 게 틀림없어.’
그녀가 가지고 있던 수정 구슬, 그건 악마의 힘을 담는 매개체였다.
‘그걸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흑마법사 무리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갈라졌던 호수가 제 모습을 찾아갔다.
‘사라졌어.’
레오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쉭!
레오나를 향해 검은 화살이 날아왔다. 레오나는 급히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 순간, 등 뒤로 강력한 힘이 다가옴을 느꼈다. 공중에서 급히 몸을 틀어 피한 레오나는 바닥에 착지했다.
동시에 레오나를 공격했던 흑마법사가 레오나의 앞을 막아섰다.
강한 마력을 가진 것이 느껴졌다.
“후후후, 좋은 제물이 되겠구나.”
쇠를 긁는 듯 한 목소리를 들으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누가 제물이야?”
검을 뽑아 겨눈 레오나가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용기는 가상하다만…… 넌 오늘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후후후.”
“아, 그러셔?”
검을 어깨에 걸친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일으켰다.
“블레스.”
공격과 방어의 축복이 레오나의 몸에 서렸다.
“홀리 웨폰.”
무기가 강화되었다.
“스트렝스.”
전체적인 힘이 올라갔다.
“초가속.”
다리에 속도가 붙었다. 순식간에 흑마법사의 코앞에 도착한 레오나가 씩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두 눈을 부릅뜬 흑마법사가 블링크를 시전했다.
공간 전이.
눈앞에서 사라진 흑마법사는 레오나의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검은 화살을 쏘아 보냈다.
“다크 애로우!”
레오나가 검을 들어 올렸다.
“프로텍션.”
황금빛 막이 레오나의 전신을 보호했다. 검은 화살은 황금빛 막에 막혀 튕겨 나갔다.
초가속으로 흑마법사에게 달려든 레오나의 검이 황금빛을 머금었다.
라데온의 신성 검술.
제1식.
굽이치는 나선의 바람이 레오나의 검을 타고 뻗어 나갔다.
열 개의 칼날이 흑마법사를 난도질하였다.
실드를 펼쳐 방어한 흑마법사가 눈에 핏발이 섰다.
“실드가…….”
황금빛을 머금은 열 개의 칼날이 마기로 만들어진 실드를 찢었다.
“신성력?”
레오나가 씩 웃었다.
“이제 알았어?”
검을 재차 겨눈 레오나가 땅을 박찼다.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레오나의 검이 흑마법사의 심장을 노렸다.
“다크 월!”
마기로 만들어진 장벽이 레오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곧이어 장벽이 파도처럼 무너지며 레오나를 덮쳤다.
레오나가 검을 뻗었다.
라데온의 신성 검술 제3식.
너울거리는 빛의 파도.
레오나의 검을 타고 뻗어 나간 신성력이 거대한 빛의 파도를 만들어 내어 레오나를 덮치는 마기 위에 쏟아졌다.
빛의 파도를 뚫고 레오나가 흑마법사에게 다가왔다.
흑마법사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다크 웨이브!”
마기의 회오리가 레오나를 향했다. 하지만 마기의 회오리는 레오나의 빠른 검 놀림에 소멸하였다.
“이게 끝이야? 그럼, 넌 뒈졌어.”
라데온의 신성 검술 제2식
몰아치는 파괴의 바람.
응축된 신성력이 검을 타고 뻗어 나가 흑마법사의 어깨를 관통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깨에 구멍이 생겨났다.
“크악!”
흑마법사는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레오나가 천천히 흑마법사에게 다가왔다.
“오, 오지 마. 다크 애로우.”
레오나는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검은 화살을 피했다.
“다크 볼!”
이번엔 검은 구체 여러 개가 레오나에게 날아왔다.
레오나가 검을 휘두르자 다크 볼이 황금빛을 머금은 검에 산산이 조각났다.
“발악은 다 한 거야?”
“이, 이익!”
“죽이진 않을게. 물어볼 게 좀 있거든.”
초가속으로 흑마법사에게 다가간 레오나가 검이 아닌 주먹을 뻗었다.
“버닝 핸드!”
황금빛을 머금은 주먹이 흑마법사의 복부를 강타했다.
“커억!”
갈비뼈가 부서지며, 흑마법사가 바닥을 굴렀다.
거기다 흑마법사의 몸 안에 흘러 들어간 신성력이 흑마법사가 가지고 있던 마기를 공격했다.
“끄아아악!”
흑마법사가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괴로울 거야. 이걸 맞고 괴로워하지 않은 흑마법사가 없었거든.”
괴로움에 흑마법사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흑마법사의 귀와 코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레오나가 몸을 굽혀,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자, 이제 우리 대화를 나눠보자.”
핏발선 흑마법사의 눈이 레오나를 노려보았다.
“넌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그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거든.”
최근 신성력이 성장하면서, 쓸 수 있는 신성 마법이 늘어났다.
조금 전 사용했던 스트렝스가 그중 하나였다.
레오나가 손을 뻗어 흑마법사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흑마법사가 발악했다.
그는 괴로운 와중에도 레오나에게 마법 공격을 퍼부으려 하였다.
“뭐야, 아직도 그럴 힘이 남아 있어? 못 쓰겠네.”
레오나가 흑마법사의 양 손목을 부러뜨렸다.
손목이 부서진 흑마법사는 비명만 질러댈 뿐이었다.
“자, 이제 다시 시작.”
흑마법사의 머리를 움켜쥔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일으켰다.
“메모라이즈.”
손바닥을 타고 흘러나온 신성력이 흑마법사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기억들이 레오나에게 전송되었다.
그런데.
“꺽!”
흑마법사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손을 거둔 레오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금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흑마법사의 몸이 변화를 일으켰다.
꼬리가 생겨나고, 머리에 뾰족한 뿔이 돋아났다. 두 눈은 산양의 눈처럼 쭉 찢어지고, 피부는 붉게 물들었다.
“악마화…….”
흑마법사들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하, 꼭 이럴 때 악마화가 된단 말이지.”
레오나가 짜증 난다는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크흐흐흐.”
악마화가 된 흑마법사의 입에서 검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이제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이지를 잃은 괴물일 뿐이었다.
“크와아아아!”
악마화된 괴물이 입을 쩍 벌렸다. 괴로움의 비명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오나가 혀를 찼다.
“내가 이걸 한두 번 당해 본 게 아니라서 말이야.”
악마화된 괴물의 몸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괜히 신성력을 그 몸에 심었겠니?”
악마화된 괴물에게 가까이 다가간 레오나가 손을 뻗었다.
“익스팅션.”
“끄아아아아아-”
악마화된 괴물의 몸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신성력은 악마화된 괴물을 집어삼키며 소멸시켰다.
손을 거둔 레오나는 어딘가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오나는 몸을 돌렸다.
* * *
높이 솟아오른 나무 꼭대기 위.
붉은 용이 새겨진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검은 제복을 입고 고고한 학처럼 서 있던 남자가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바람에 나부끼는 진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는 남청색의 두 눈으로 멀어져 가는 레오나의 뒷모습을 담았다.
잊지 않기 위해서.
“드디어 당신을 찾았습니다. 나의 빛.”
그가 남청색 눈동자를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여기 온 보람이 있었군요.”
붉은 달이 떠오르는 날이면 항상 그녀가 생각났다.
그날 밤만 되면, 그는 그녀와 함께 질주를 하였다.
흑마법사의 괴멸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그녀는 그가 가진 목표와 일치했다.
처음은 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나중엔 같은 목표를 가진 동료가 되었다.
눈부신 광휘를 가진 그녀는 그에게 있어 가질 수 없는 찬란한 빛이었다.
“나는 당신이 가진 빛을 압니다. 그 빛의 위대함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내가 당신의 빛을 지킬 겁니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바닥에 내려선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맹세했다.
* * *
숙소로 복귀한 레오나는 따듯한 물로 샤워하고, 흑마법사 놈에게 꺼내 온 기억을 뒤졌다.
“금제가 걸려 있어서 건진 게 별로 없어.”
그녀가 건진 기억은 단편적인 장면들뿐이었다.
“역시, 세례를 받은 놈이었군.”
단편적인 장면 중에서 놈이 세례를 받는 장면이 있었다.
“그 여자…….”
호수 중앙을 앞장서서 걸어가던 여자. 그 여자가 그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하아, 골치 아프게 되었어.”
레오나는 깍지를 낀 채 머리를 받치고 침대에 누웠다.
“아무래도 강력한 악마의 힘을 손에 넣은 것 같단 말이지.”
조만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 여자가 배후인가…….”
황녀 전하를 해하려 한 흑마법사가 왠지 그녀가 맞는 것 같았다.
레오나의 오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자고 내일 보고를 해야겠군.”
대비책을 세워놔야,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레오나는 흑마법사의 기억들을 지웠다.
“그나저나, 거기에 나 말고 누군가 또 있었던 것 같단 말이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왠지 잘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그 녀석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이미 율리아나의 영혼은 레오나와 한 몸이 되었다.
대륙 건너에 있는 녀석들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잠이나 자자.”
생각을 털어버린 레오나는 잠을 청했다.
창밖을 비치는 붉은 달이 어스름하게 졌다.
* * *
흑기사단 건물 지붕 위에 한 남자가 붉은 달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밤하늘과 어울리는 진보랏빛 머리카락이 붉은 달빛에 물들었다.
그는 손에 든 통신 구슬을 통해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찾은 것 같아, 아스텔.”
그가 든 통신 구슬 너머에서 놀란 기색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인가?]
“정말이야, 그녀가 가진 광휘의 빛, 그걸 봤어. 그녀는 이번에도 흑마법사와 인연을 맺은 모양이야. 참 질긴 악연이다, 그치.”
아스텔은 말이 없었다.
긴 침묵 끝에 아스텔이 겨우 말을 꺼냈다.
[그곳에서도 흑마법사와 싸우고 있나?]
“아마도?”
아스텔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태어난 그녀는 여전히 흑마법사와 깊은 악연을 이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아스텔은 시엘에게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시엘, 그녀는 어떤 모습이었지?]
시엘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걸 내가 말해줄 것 같아?”
[시엘.]
“내가 먼저 찾았으니, 내가 먼저 만날 거야.”
[나도 곧 유프란 제국으로 갈 것이다.]
“언제 오는데?”
[곧.]
“그 전에 선수를 쳐야겠네.”
시엘의 남청색 눈동자가 반달처럼 휘었다.
“이번엔 양보 절대 안 할 거야.”
[네 양보 따윈 필요 없다.]
“오, 대단한 자신감.”
[또 연락하겠다.]
“그러든지.”
통신이 끊겼다.
통신 구슬을 집어넣은 시엘은 오늘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하늘에 덧그렸다.
올려 묶은 하늘색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 여전히 강렬한 광휘를 가지고 있는 그 빛의 힘.
모습은 달라도 그녀라는 것을 시엘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건 그녀뿐이니까.”
이 두근거림과 설렘, 그리고 짜릿함. 그건 모두 율리아나 그녀에게만 느꼈던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율리아나가 분명했다.
‘다시 태어났다고 하더니, 이번에도 기사가 되어 있을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에 있을 줄이야.
‘백기사단에 입단한 신입 기사가 그녀라니…….’
시엘은 레오나에게 대해 조사를 했었다. 백기사단에 입단한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기사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백기사단에 입단한 신입 기사 레오나가 그와 아스텔이 그토록 찾던 여인이었다.
‘아스텔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만나야 해.’
그녀를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짜릿했다.
‘날 알아볼까? 아니면 모른 척할까?’
어느 쪽이든 재미있을 것 같았다.
시엘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 * *
다음 날, 아침 레오나는 단장실을 찾았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부단장 란젤로가 있었다. 레오나는 두 사람에게 경례했다.
그러자 부단장 란젤로가 흐뭇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신뢰 가득한 눈빛이었다.
레오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슬쩍 피했다.
“란젤로, 그만 나가보도록.”
“예, 그럼 저는 아침 훈련을 시작하러 가보겠습니다.”
란젤로가 레오나에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툭툭 쳤다.
레오나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란젤로가 나가자, 데미안의 짙푸른 눈동자가 레오나를 향했다.
“무슨 일이지?”
레오나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보고했다.
“흑마법사와 싸웠다고?”
“예.”
데미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무모한 짓을 하였군.”
“죄송합니다.”
데미안의 말대로 무모한 짓을 벌이긴 하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흑마법사들이 모두 그녀를 죽이려 들었다면, 레오나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치기는 했겠지.’
붉은 달이 뜨는 날에 전투를 치르면 항상 상처를 입었다.
어젯밤에는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한 놈만 공격했으니까.
“다친 곳은 없나?”
“없습니다.”
“보고도 없이 독단으로 움직인 일은 네 잘못이다.”
레오나는 고개를 숙였다.
데미안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다친 곳이 없다니 다행이군. 마저 보고하도록.”
고개를 든 레오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흑마법사의 리더로 보이는 여자가 악마와 계약을 한 것 같았습니다.”
붉은 달을 가리고 있던, 검은 구름. 그 속에서 보였던 섬뜩한 눈동자. 그건 악마의 눈이었다.
“힘이 더 강해졌다는 뜻이군.”
“네, 그 여자가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대비해야 합니다. 아마, 황녀 전하의 저주도 그 여자가 배후인 것 같습니다.”
데미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녀 전하를 보호해야겠군.”
“황녀 전하의 거처를 옮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황녀 궁은 이미 흑마법사에게 노출이 되었다.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미 그 건은 폐하께서도 고심하고 있는 부분이다.”
황녀 궁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황제 일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녀의 거취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제가 찾아봐도 되겠습니까?”
“네가 찾겠다고?”
“예, 제가 황궁 내에 안전한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황궁 내에?”
“먼 곳은 보호하기 어려우니,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황녀 전하를 보호하는 게 낫습니다.”
“괜찮겠나?”
레오나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가 그곳에 결계를 만들 겁니다. 결계 안에 계시면 황녀 저하는 안전할 겁니다.”
데미안의 짙푸른 눈동자가 커졌다.
“결계?”
“예, 저느 신성력으로 결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가능했나?”
레오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범위가 그리 넓지 못합니다.”
“그래서 네가 직접 찾겠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알겠다. 네게 맡기지.”
“감사합니다, 단장님.”
단장실을 나온 레오나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와 황궁 지도를 펼쳤다.
‘오늘 안으로 찾아야 해.’
악마와 계약한 그녀가 제일 먼저 노리는 것은 다이앤 황녀일 확률이 높았다.
저주를 걸면서까지 다이앤 황녀를 해코지하려고 하였으니까.
‘서둘러야 해.’
어떻게 해서든 오늘 안에 다이앤 황녀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한다.
‘땅의 힘이 강한 곳을 찾아야 해.’
강한 힘을 품은 땅은 결계를 놓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신성력의 힘이 강해지면서, 레오나는 결계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정할 수 있는 결계 범위는 제한적이야.’
지금의 능력으로는 지정할 수 있는 결계 영역의 범위가 작았다.
땅의 힘이 강하며, 규모가 작은 곳이 필요했다.
레오나는 내궁 내에서 적당한 몇 곳을 정한 다음, 숙소를 나왔다.
“첫 번째로 향할 곳은 황제 궁의 동쪽.”
내궁에서 찾아낸 장소는 세 곳이었다. 이 세 곳 중에 조건이 맞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외궁을 살펴야 하는데 외궁은 황제 일가가 머무는 내궁과 떨어져 있기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다이앤 황녀가 불안해 할 수도 있었다.
레오나가 첫 번째로 향한 곳은 거베라 궁이었다.
내궁에 존재하는 작은 궁은 총 세 곳인데, 거베라 궁, 메리골드 긍, 라일락 궁이었다.
거베라 궁에 도착한 레오나는 그곳을 살펴보았다.
‘땅이 메말랐어.’
그래서인지 식물이 거의 죽어 있었고, 궁 또한 관리가 안 된 지 오래된 듯했다.
‘여긴 아니야.’
걸음을 옮긴 레오나는 메리골드 궁으로 향했다. 메리골드는 내궁 가장 위쪽에 있는 궁전으로 방향으로 치면 북서쪽에 가까웠다.
메리골드 궁은 거베라 궁보다는 덜 황량하지만, 이곳 역시 땅의 기운이 약했다.
‘메마르진 않았지만, 약해.’
땅의 힘이 약하면, 결계가 파훼될 확률이 높았다. 강한 흑마법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이제 남은 것은 라일락 궁.
라일락 궁은 내궁의 남동쪽에 위치한 작은 궁이었다.
‘그나마 여기는 관리가 좀 되는 편인 것 같네.’
레오나는 라일락 궁 앞에 몸을 숙여 손바닥을 땅에 대었다.
‘여기야.’
강력한 땅의 힘이 느껴졌다.
‘여기라면 견고한 결계를 설계할 수 있어.’
왜 이곳에 이렇게 강대한 힘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궁 쪽에서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을 하였다.
레오나는 곧장 기사단으로 복귀했다. 복귀하니 연무장에서 개인 수련을 하고 있는 동기들을 볼 수 있었다.
레오나를 발견한 제임스가 반가움에 손을 흔들었다.
“여어, 레오나. 너 요즘 얼굴 보기 힘들다?”
피식 웃은 레오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좀 바빠서.”
“뭐가 그렇게 바쁘냐. 듣자 하니, 너만 또 임무를 받은 것 같던데. 너무 잘나가는 거 아니야?”
“잘나가긴 뭐가, 잘나가.”
“공을 세워, 작위도 받고, 보상도 두둑이 받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부럽냐?”
“부럽지. 여기 있는 동기들 모두 널 부러워한다고. 안 그러냐?”
제임스가 수련하는 동기들을 바라보며 말하자, 동기들이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부럽긴 하지만, 나도 꼭 공을 세워서 보란 듯이 출세할 거다.”
“나도 그럴 거다.”
“레오나, 긴장해라. 우리가 곧 널 따라잡는다.”
레오나가 미소를 지었다.
“얼마든지 따라잡아 봐. 난 너희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올라갈 거니까.”
“오, 대단한 포부.”
그때 라파엘이 한마디 했다.
“네가 닿는 곳엔 나도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난 바빠서 이만 가볼게, 수련 열심히 해라.”
“좋겠다. 임무 때문에 수련도 빠지고.”
제임스가 부러운 얼굴을 하자, 레오나가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제임스, 넌 열심히 수련해라. 넌 더 강해질 필요가 있어.”
“그 말에 나도 동감.”
유릭이 거들고 나섰다.
“제임스는 너무 뺀질거려.”
“야, 너!”
제임스가 헤드락을 걸려고 하자, 유릭이 재빨리 피했다.
“이제 그 수는 안 통한다. 이놈아.”
“허, 많이 컸는데?”
“너보다는 많이 컸지.”
“뭐, 이 자식아!”
레오나는 제임스와 유릭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기사단으로 복귀하는 데미안과 마주쳤다.
“단장님.”
“찾은 모양이군.”
레오나의 밝은 표정을 보며 데미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예, 마침 내궁에 적당한 곳이 있었습니다.”
“단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예.”
레오나는 데미안과 함께 단장실에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다.
“라일락 궁이라고?”
“그곳이 제일 적당합니다.”
“그렇군. 그럼, 그곳으로 정하도록 하지.”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조금 전에 폐하께 황녀 전하의 궁을 옮기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네 결계 이야기도 포함해서 말이지.”
“허락을 하셨습니까?”
“네가 정한 곳이라면 믿고 맡기겠다고 하시더군.”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를 저주로부터 구한 공이 있었다. 그 이후로 황제 일가는 레오나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럼, 제가 라일락 궁에 결계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허락이 떨어지자, 레오나는 라일락 궁으로 향했다.
라일락 궁에 도착해 매개체가 될만한 나무를 찾았다.
라일락 궁은 작은 궁인데도 불구하고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정원도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어서, 적당한 나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궁의 양옆에 두 그루의 나무가 세워져 있어서, 안성맞춤이었다.
레오나는 미리 준비해 온 단검을 꺼내 나무줄기에 신의 문자를 새겨 넣었다.
신성력을 담기 위한 장치였다.
새긴 글자 안에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나무에 새겨진 글자가 신성력을 머금었다.
레오나는 반대쪽 나무에도 글자를 새겨 신성력을 주입했다.
그리고 양쪽 기둥 중심에 자리를 잡고 신성 마법을 발현했다.
“세크리트 월.”
신성한 장벽.
궁전을 비롯한 대지에 황금빛 물결이 일었다. 물결은 점점 위로 솟아올라 라일락 궁 전체를 감쌌다.
그 어떤 사악한 힘도 미치지 못하도록 견고하게 레오나는 결계를 펼쳤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렇게 쏟아부은 신성력이 강력한 결계를 만들어냈다.
“이걸로 안전해.”
마기를 품은 자는 절대 이 안에 들어올 수 없다. 들어오는 순간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이제 이곳은 신성한 대지가 되었으니까. 사악한 것이 이 땅에 발을 들이는 순간 신성력에 의해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은 레오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벽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얼핏 보면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레오나의 두 눈엔 이 영역에 흐르는 신성력이 보였다.
그건 오직 신성력을 가진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기운이었다.
* * *
다이앤 황녀는 라일락 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다이앤 황녀는 황녀 궁에서 짐을 꾸리느라 바빴다.
그러한 곳에 황제가 방문했다.
“다이앤.”
이름을 부르자, 침실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다이앤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오셨어요, 아바마마.”
“그래.”
황제는 미안한 얼굴로 다이앤 황녀를 보았다.
“다이앤, 너를 그런 누추한 곳에 보내게 되어 미안하구나.”
다이앤 황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라일락 궁도 좋은걸요. 황녀 궁을 흑마법사가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거긴 이제 있고 싶지 않아요. 저는 라일락 궁이 마음에 들어요, 아바마마.”
“다이앤.”
다이앤 황녀가 황제의 품에 안겼다.
“거기다 레오나 경이 튼튼한 결계도 만들어 주었는걸요. 라일락 궁이라면 저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다이앤 황녀가 해맑게 웃으며 황제의 품에 파고들었다. 황제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이앤 황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곳에서 기다려 주거라. 내 반드시 너를 해한 흑마법사를 찾아낼 테니.”
“믿어요, 아바마마.”
황제는 다정한 손길로 다이앤 황녀를 어루만져 주고는 황녀 궁을 나섰다.
다이앤 황녀는 라일락 궁에 필요한 짐만 챙겼다.
그리고 라일락 궁에는 새 가구가 들어왔다. 황녀 궁에서 쓰던 가구는 찝찝해서 가져오지 않았다.
라일락 궁은 황녀 궁에 비해 작았지만, 무척 예쁜 곳이었다.
새하얀 건물과 보랏빛의 라일락 꽃이 무척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다이앤 황녀는 라일락 궁이 마음에 들었다.
짐은 시녀들이 정리하고 있어서 다이앤 황녀가 할 일은 없었다. 그저 가져온 짐을 확인하고, 어디에 둬야 할지만 정해주면 되었다.
“전하, 레오나 경이 왔습니다.”
시녀 세나의 말에 다이앤 황녀가 반가운 얼굴로 궁 밖으로 나섰다.
정원을 가로지르며 레오나가 다이앤 황녀에게 다가왔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와요, 레오나 경.”
“작은 궁에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작은 궁을 선택한 데에는 레오나가 펼칠 수 있는 결계의 범위가 그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다이앤 황녀는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경 덕분에 저는 안심하고 지낼 수 있게 되었는걸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전하.”
레오나는 방문한 용건을 꺼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걸 드리기 위함입니다.”
레오나가 건넨 것은 펜던트였다.
“이게 뭔가요?”
은으로 만든 메달 안에 기이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황녀님의 몸에 사악한 것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펜던트는 레오나의 신성력이 담겨 있었다. 다이앤 황녀를 흑마법사로부터 보호해 주는 방패 같은 것이었다.
“이걸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십시오. 그러면 그 어떤 흑마법도 황녀 전하의 몸에 닿지 못할 겁니다.”
“고마워요, 레오나 경.”
다이앤 황녀가 펜던트를 목에 걸고는 레오나의 두 손을 잡았다.
“경을 만나게 된 건, 제 인생에 행운이에요.”
“황공합니다, 전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우리 차 한잔해요. 제가 맛있는 차로 준비할게요.”
“알겠습니다.”
다이앤 황녀를 뒤로한 레오나는 기사단으로 복귀했다.
일단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해두었다. 다이앤 황녀는 안전할 것이다.
‘일단, 황녀 전하는 안심해도 돼.’
문제는 흑마법사를 찾는 일이었다. 한 놈은 잡아서 처리했지만, 더 많은 수의 흑마법사가 이 제국에 숨어 있었다.
‘그 여자의 뒤로 족히 10명은 넘어 보였어.’
호수를 가르며 나오던 그녀의 뒤로 보이던 흑마법사들.
잡은 놈의 기억으로 몇 명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녀를 따르는 추종자가 10명은 넘을 거라 짐작했다.
‘일단, 지난번 항구에서 잡은 두 놈에 대해서 물어봐야겠어.’
두 놈을 직접 잡은 데미안은 그 두 사람을 어찌 처리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레오나는 곧장 단장을 찾아갔다.
레오나가 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는 인사도 받지 않고, 레오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일은 잘 처리했나?”
“예, 황녀 전하는 안전합니다.”
“수고했다.”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단장님.”
“뭐지?”
“지난번 항구에서 잡은 자들을 어찌 처리하셨습니까?”
데미안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흑기사단에 맡겼다. 정보를 캐내는 것은 그쪽이 전문이니까.”
“정보를 얻으셨습니까?”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는 것이 별로 없더군. 그저 시키는 일만 했다고 떠든다는군.”
“그렇군요.”
“그건 그쪽에 맡겨둬라. 뭐라도 건지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라면 가장 잔인해질 수 있는 곳이 흑기사단이었다.
기다리면, 단서가 될 만한 정보를 그들은 반드시 캐낼 것이다.
* * *
지하 밀실에서 2황녀 비비안은 사이한 빛으로 일렁이는 수정 구슬을 바라보며 황홀한 얼굴을 하였다.
“온전한 나의 힘.”
대악마 벨리알과의 계약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그 대가로 강대한 힘을 얻었다. 수정 구슬에 일렁이는 이 빛이 그 증거였다.
2황녀 비비안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비안은 테이블로 돌아와 거울에 손바닥을 대었다. 거울이 일렁이며, 황녀 궁의 모습이 비쳤다.
그런데.
“뭐지?”
다이앤 황녀가 보이지 않았다. 시녀들도 없었다.
“무슨…….”
황녀 궁이 텅 비어 있었다. 비비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황녀 궁이 비었다.
그렇다면.
“설마, 궁을 옮긴 건가?”
웃음이 나왔다.
“내 눈을 피해 숨어보시겠다?”
그럴 만했다. 간신히 저주가 해주되었다. 그러니 안전한 곳에서 건강을 회복하려는 속셈인 게 분명했다.
‘난 더 강해졌어. 네가 어딜 가든 내 눈을 피할 수 없어.’
비비안은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에서 강대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마기는 새의 형태로 변했다.
“찾아라. 나의 적을.”
검은 새가 붉은 눈을 번뜩이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검은 새는 지하 밀실을 벗어나, 황궁 위를 높이 날아올랐다.
비비안은 검은 새의 붉은 눈동자를 통해 황궁 전역을 스캔했다.
천리안. 먼 곳을 내다볼 수 있는 마법이었다. 황궁 전역을 샅샅이 훑은 2황녀 비비안은 다이앤 황녀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수 있었다.
‘저기 있었군.’
다이앤 황녀는 내궁 남동쪽에 위치한 작은 궁전에 있었다. 라일락 꽃으로 가득한 곳에서 꽃향기를 맡으며 그녀는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라일락 궁에 숨어 있었군.’
행복해 보이는 다이앤 황녀의 얼굴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다이앤, 그 행복도 오늘이 끝이야. 내가 네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버릴 거니까.’
다이앤 황녀를 바라보는 비비안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비비안은 수정 구슬이 놓인 곳으로 걸어가 양손으로 수정 구슬을 잡았다.
“제게 힘을 주소서.”
수정 구슬 안에 깃든 힘이 꿈틀거렸다.
비비안은 다이앤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대어를 읊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고대어가 허공에 문자로 나타났다.
문자는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모습을 감추었다. 다이앤 황녀가 있는 곳으로.
‘괴로운 고통을 선사하소서.’
강력한 마기를 품은 문자가 라일락 궁을 향해 날아갔다.
‘다이앤, 이번엔 저주로 안 끝나. 네게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을 선사할 거니까.’
비비안은 다이앤 황녀가 병을 얻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천리안을 통해 지켜보았다. 그런데.
흑마법을 품은 고대문자가 라일락 궁에 닿는 순간, 섬광이 번쩍이며 고대어가 사라졌다.
“무슨…….”
빛이 터지는 바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녀는 볼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비비안은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똑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흑마법은 다이앤 황녀에게 닿지도 못한 채 바스러졌다.
“대체 뭐지? 왜 안 통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었다.
강대한 마기를 품은 흑마법이었다. 그러한 것을 막아낼 것은 없을 거라 믿었다.
‘설마, 또 그 여자가 뭘 한 건 아니겠지?’
백기사단에 입단한 신성력을 소유한 기사.
‘그 여자 때문에 흑마법사 하나를 잃었어.’
흑마법사의 금제가 발동되면서, 그와 연결되어 있었던 고리가 끊어졌다.
흑마법사는 세례를 통해 그녀에게 종속되었다. 종속된 자는 자동으로 금제에 걸리게 되고, 그녀를 배신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금제가 발동된다.
그리고 바로 어제 흑마법사의 금제가 발동되었다. 그렇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어제 그 자리에서 내 손으로 죽여 버렸어야 했어.’
흑마법사 하나만 보낸 것이 실수였다.
갓 담아낸 수정 구슬의 마기를 안정화하기 위해 그 흑마법사에게 일임하였건만, 설마 그 쥐새끼가 그녀였을 줄이야.
금제가 발동하면서, 흑마법사의 눈을 통해 그녀는 레오나를 볼 수 있었다.
레오나 그 여자가 흑마법사를 처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다이앤 황녀에게도 무언가 조치를 취했다면, 다이앤 황녀는 흑마법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다이앤을 직접 만나야 해.’
자신의 마법이 라일락 궁에 닿지 못한다면, 다이앤 황녀를 직접 만나면 된다.
자리에서 일어난 비비안은 다이앤 황녀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하였다.
다이앤 황녀에게 먹일 디저트로 직접 준비했다. 그러니 다이앤 황녀는 자신을 밀어내지 못할 것이다.
2비비안은 자신 있는 얼굴로 시녀를 대동한 채 라일락 궁으로 향했다.
라일락 궁 앞에 도착한 비비안은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뭐지?’
2황녀 비비안의 눈이 라일락 궁을 향했다. 라일락 궁이 그녀를 밀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윽.’
온몸이 바늘이 박히는 것처럼 아팠다. 2황녀 비비안이 비틀거리자, 시녀가 다가와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전하?”
“……괜찮아. 잠시 어지러웠던 것뿐이야.”
시녀를 밀어낸 비비안이 라일락 궁을 노려보았다. 라일락 궁 전체가 그녀를 거부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다이앤 황녀가 비비안을 발견했다.
“비비안!”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이앤 황녀가 반가운 얼굴을 하였다.
“어서 와.”
비비안은 라일락 궁의 문턱을 넘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보았다.
“들어가자.”
비비안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를 거부하고 있었다.
최대한 표정을 숨긴 비비안은 아쉬운 얼굴로 다이앤 황녀를 보았다.
“미안. 난 이것만 전해 주려고 온 거라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다이앤 황녀는 비비안이 건네는 바구니를 받았다.
“궁을 옮긴 선물이야. 내가 만들었어.”
“고마워, 비비안.”
비비안은 아쉬움을 달랬다. 직접적으로 마법을 걸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다이앤 황녀와 그녀는 입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으니까. 다이앤 황녀는 라일락 궁 안에, 그녀는 라일락 궁 밖에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2황녀 비비안은 그 안으로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디저트를 준비하길 잘했어.’
만일을 대비해 다이앤 황녀에게 먹일 디저트를 준비해 왔다.
디저트는 그녀가 흑마법으로 만들어낸 음식이었다. 다이앤이 그것만 먹어준다면, 다이앤 황녀는 또다시 흑마법에 빠질 것이다.
게다가 다이앤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도록 해놓아서 디저트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디저트를 만들 때 다이앤 황녀를 각인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다이앤 황녀 외에는 누구에게도 해가 가지 않도록. 절대 들킬 일이 없다.
비비안은 일단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이거 잘 먹을게.”
“그래, 그럼 먼저 가볼게.”
“잘 가.”
다이앤 황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비비안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다이앤 황녀가 디저트를 먹어주길 바라면서.
다이앤 황녀가 라일락 궁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몸을 다시 돌린 비비안이 시녀를 먼저 보내고 라일락 궁 근처로 다가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미세한 마기를 라일락 궁으로 흘려보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절대 모를 정도의 양이었다.
손끝에서 빠져나간 마기가 라일락궁에 닿자, 푸시시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멸했다.
비비안은 그게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결계를 쳤군.’
라일락 궁 전체에 보이지 않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힘과 상극인 신성력으로.
‘그 여자 짓이 분명해.’
다이앤 황녀를 보호하기 위해 레오나가 결계를 만든 것이 분명했다.
‘짜증 나는 여자야.’
화를 가라앉진 비비안은 조용히 몸을 돌려 장미 궁으로 돌아갔다.
* * *
다이앤 황녀는 비비안이 주고 간 디저트를 정원 앞에 놓인 가제보에서 열어 보았다.
“다쿠아즈네.”
무척 맛있어 보였다.
꺼내서 한 입 먹어보려는데 시녀 세나가 막았다.
“제가 먼저 먹어볼게요.”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
“모르는 일이죠.”
시녀 세나는 다쿠아즈를 꺼내 맛을 보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것이 맛은 좋았다.
“괜찮은 것 같네요.”
“거봐, 괜한 의심은.”
“그래도 조심해야 해요.”
“알았어, 조심할게.”
빙그레 웃은 다이앤 황녀는 다쿠아즈를 손으로 집었다. 그녀가 다쿠아즈를 입으로 가져가려던 순간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응, 이게 왜 이러지?”
다쿠아즈를 내려놓은 다이앤 황녀가 펜던트를 꺼냈다. 펜던트가 그녀의 손에서 진동했다.
곧이어 펜던트에서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황금빛은 다이앤 황녀의 앞에 놓인 다쿠아즈 바구니를 노렸다.
바구니가 바닥에 떨어지며, 다쿠아즈가 쏟아졌다. 그러더니 다쿠아즈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 놀라운 광경에 다이앤 황녀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펜던트가 진동하더니, 다쿠아즈를 부쉈다. 시녀 세나도 불안한 얼굴로 다이앤 황녀를 보았다.
다이앤 황녀가 말했다.
“세나, 지금 당장 레오나 경을 불러줘.”
이 일의 해답은 레오나만이 알 거란 판단이 들었다.
“예, 전하.”
시녀 세나가 부리나케 나가자, 다이앤 황녀는 굳은 얼굴로 사라진 다쿠아즈와 펜던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잠시 후, 레오나가 라일락 궁에 도착했다.
레오나는 응접실에서 다이앤 황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다이앤 황녀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황녀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레오나 경. 와줬군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다이앤 황녀가 뒤늦게 레오나가 온 것을 알아차렸다.
“앉으세요.”
고개를 끄덕인 레오나가 다이앤 황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레오나 경, 조금 전에…….”
다이앤 황녀는 조금 전에 겪었던 일을 레오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다이앤 황녀가 레오나가 준 펜던트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게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거죠?”
“그건 황녀 전하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겁니다.”
“저를 보호해요? 별다른 위험은 없었는걸요.”
“다쿠아즈가 든 바구니를 공격한 것 같다고 하셨지요?”
“맞아요, 제가 다쿠아즈를 집어 드니까. 갑자기 펜던트가 진동했어요. 그러더니 황금빛이 나와 바구니를 부쉈어요.”
레오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드린 펜던트는 사악한 힘으로부터 황녀 전하를 보호하게끔 강한 신성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펜던트를 주며 레오나가 말해주었기에 알고 있었다.
“펜던트가 그러한 반응을 보인 것이라면, 사악한 무언가가 다쿠아즈에 있었다고 봐도 됩니다.”
다른 물건은 멀쩡하고 다쿠아즈가 든 바구니만 부서졌다.
“그럼, 비비안이 준 디저트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가요?”
“누군가 몰래 디저트에 사악한 마법을 걸어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하지만 세나는 멀쩡했어요.”
제일 먼저 다쿠아즈를 맛본 사람은 시녀 세나였다.
레오나는 시녀 세나를 보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습니까?”
시녀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 괜찮았어요.”
바구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펜던트가 반응했다는 건 다이앤 황녀가 위험했다는 뜻이기는 하나, 그게 정말 다쿠아즈 때문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 바구니를 부순 것을 보면, 거기에 뭔가 있는 건데.’
레오나가 굳은 얼굴로 다이앤 황녀를 보았다.
“그 디저트를 2황녀 전하께서 주셨다고 하셨습니까?”
“맞아요. 새 궁으로 옮긴 것을 축하한다며 비비안이 내게 선물로 준거예요.”
“그런데 비비안 황녀 전하께서는 이곳을 어떻게 안 겁니까? 황녀 전하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건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데미안 단장님을 비롯한 백기사단의 소수만이 아는 비밀인데 말이죠.”
다이앤 황녀가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게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비비안은 내가 여기 있는 줄 모를 텐데…….”
“혹시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중 한 분이 알려주신 걸까요?”
“제가 확인해 볼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백기사단에 말을 흘린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레오나는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2황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만난 적도 없었다.
소문으로는 사교계에서 인맥이 상당하고, 황가의 혈통이 아닌 붉은 머리카락과 오렌지빛의 눈동자는 1황비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황제와는 닮은 구석이 없는 황녀, 세간에는 그녀가 황제의 핏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비비안 황녀 전하와는 친하십니까?”
레오나의 질문에 다이앤 황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난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비비안은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적대 관계는 아닌 모양이었다. 친하지는 않지만, 친분이 있는 관계는 흔하니까.
다쿠아즈를 선물한 걸 보면 조금은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직접 찾아와 주었다고 했으니까.
‘일단 비비안 황녀 전하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어.’
뭐든지 의심 가는 부분이 있으면 알아야 한다는 것이 레오나의 생각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다쿠아즈가 문제였던 건지, 아님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외부에서 들여온 음식은 되도록 입에 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게요. 그리고 미안해요. 자꾸 이런 일로 경을 귀찮게 해서.”
레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황녀 전하를 지키는 것은 제국의 기사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레오나의 말에 다이앤 황녀의 다이아몬드 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럼.”
인사를 한 레오나는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다이앤 황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녀 세나에게 말했다.
“세나, 정말 멋지지 않니?”
“네?”
“레오나 경, 말이야. 나도 저런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다이앤 황녀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났다.
시녀 세나는 그런 다이앤 황녀를 바라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다이앤 황녀가 다쿠아즈를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2황녀 비비안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다이앤 황녀가 다쿠아즈를 먹었다면, 자신에게 반응이 와야 한다.
그런데 기다리던 반응은 안 오고, 불길한 반응만이 느껴졌다.
‘흑마법이 깨졌어.’
흑마법이 파훼되었을 때의 감각이 찾아왔다.
‘대체 왜?’
다쿠아즈는 다이앤 황녀가 좋아하는 디저트 중 하나였다. 그러니 당연히 먹을 줄 알았다.
먹기만 하면 되는 거였기에 기대했다. 그런데 먹지 않았다.
‘흑마법이 어떻게 파훼된 건지?’
라일락 궁을 감시할 수 없으니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첩자라도 심어야 하나.’
2황녀 비비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첩자를 함부로 심을 수는 없다.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난감해져.’
그런 불안한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역시 그 여자를 없애야 해.’
이 모든 일은 레오나 때문이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일을 방해할 일도 없었을 터다.
‘그 여자부터 처리해야겠어.’
다이앤 황녀를 타깃으로 삼는 건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다이앤 황녀를 노리는 건 황제 일가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던 딸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들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 틈을 파고들어 황제 일가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게 2황녀 비비안이 바라던 일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발 앞에 엎드려 비는 모습을 보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 소중한 딸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없앤다면, 그들도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레오나, 그 여자부터 죽여야 해.’
레오나는 가장 거슬리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하필, 그 여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내 계획이 엉망이 되고 있잖아.’
그녀만 아니었다면, 모든 일은 순조로웠을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녀 때문에 일일이 점점 안 풀리고 있었다.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주지.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내 일을 방해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
2황녀 비비안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선 곤란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방해하는 자들을 모조리 없애야 한다.
‘내 일을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주먹을 꽉 움켜쥔 2황녀 비비안은 다짐하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