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 황녀의 저주 (2) (6/20)

검을 든 기사는 오늘도 웃는다

2

진주하 장편소설

목차

5. 황녀의 저주 (2)

6. 벼락출세

7. 불길한 붉은 달

8. 시엘

9. 매혹의 흑수정 목걸이

10. 이제는 나서야 할 때

11. 아스텔 (1)

5. 황녀의 저주 (2)

2황녀 비비안이 장미 궁으로 돌아간 후, 정원에 남겨진 영애들은 리리엘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처럼 기분이 좋았는데, 리리엘 영애 때문에 망쳤어요.”

미아 영애가 한마디 하자, 리리엘이 발끈했다.

“그게 왜 제 탓이죠?”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죠.”

“또 제가 가지고 온 에클레어가 잘못되었다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렇잖아요, 안 그래요?”

미아 영애가 동조를 구하자, 다른 영애들이 리리엘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이상하긴 하네요.”

“그런가?”

“그런 같기도 하네.”

리리엘은 열불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제가 먹어보면 될 거 아니에요, 정말 이상한지 아닌지.”

리리엘은 비비안이 앉았던 자리로 가서 그녀가 남긴 에클레어를 먹었다.

비비안이 먹은 에클레어에는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 있었다.

“맛만 있군요. 저도 이렇게 멀쩡하고.”

미아 영애가 또 비꼬았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무슨 뜻이죠?”

“영애에게만 멀쩡한 것일 수 있잖아요.”

리리엘은 화가 났다.

“미아 영애, 억지라는 건 알죠? 그리고 일부러 저한테 시비 거는 같은데요?”

“시비라뇨. 말을 가려 하세요.”

“아니면, 내가 칼리반가라서 그러는 건가요?”

미아 영애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칼리반 백작가와 에노어 백작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잖아요, 안 그래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더는 불쾌해서 들어줄 수가 없네요. 먼저 가볼게요.”

“도망치는 거예요?”

“뭐라고요?”

미아 영애가 기가 막힌 얼굴로 리리엘을 보았다.

사실, 리리엘의 말이 맞았다. 칼리반 백작가와 에노어 백작가는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칼리반 백작이 에노아 백작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에노어 백작가는 학문을 연구하는 가문이었다. 특히, 고대 학문에 일가견이 있는 가문이었다. 차기 황제를 가르치는 석학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가문인데, 칼리반 백작가가 어느 날 사교 모임에서 에노어 백작가는 고루한 가문이라고 폄하를 한 것이다.

에노어 백작가가 연구하고 있는 학문이 구시대적이라며 말이다.

그 일을 계기로 에노어 백작은 칼리반 백작만 보면 이를 갈았고, 두 가문은 얼굴을 보기만 하면 싸웠다. 그 때문에 칼리반 백작은 에노어 백작이 끼는 사교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에노어 백작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이번에 리리엘이 비비안의 티타임 멤버가 된 것이다.

에노어 백작가의 영애인 미아는 고까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말 다 했어요?”

“왜요, 찔리나 보죠?”

“하, 어이가 없어서. 이래서 무식한 사람들과는 상종하면 안 되는 건데. 기사가 될 거면 거기에만 매진할 일이지, 뭐 잘났다고 사교모임에 다니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리리엘은 미아 영애가 칼리반가를 검이나 쓰는 무식한 부류라고 비아냥거린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지지 않고 받아쳤다.

“구시대적인 학문만 연구하면 뭐 해요. 이렇다 할 성과도 없는 것을……. 학문 연구하느라 쓴 돈만 어마어마하다죠? 빚도 있다면서요?”

그 말을 들은 미아 영애가 이를 악물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때 크리스틴 영애가 미아 영애의 편을 들었다.

“미아 영애, 참아요. 다 받아주면 격만 떨어져요.”

친분이 두터운 크리스틴 영애가 제 편을 들어주자, 미아 영애는 콧방귀를 끼면서 크리스틴 영애와 돌아섰다.

“가요, 더는 말 섞기 싫네요.”

“잘 생각했어요.”

두 영애가 사라지자, 다른 영애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리리엘은 씨근덕거리며 분을 삭였다.

“뭐, 무식해? 누가 누구더러 무식하다는 거야! 기가 막혀서!”

짜증이 확 난 리리엘은 장미 궁을 한 차례 노려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황녀면 다야? 다이앤 황녀의 대역 주제에! 날 이렇게 개망신을 주다니.’

속이 뒤틀렸다.

‘일부러 나 망신 주려고 쇼한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저한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비비안의 티타임 모임에 들어오려고 선물은 물론이고, 황녀의 생일, 황녀가 다니는 무도회도 쫓아다녀 친분을 얻게 되었다.

‘힘든 검술 수련을 하는 와중에도 노력하였는데 망신을 주다니.’

리리엘은 비비안이 자신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쇼를 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자기보다 예뻐도 그렇지, 너무하잖아.’

자고로 여자의 미모는 질투를 유발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예쁜 내가 이번만 참지 뭐.’

리리엘은 2황녀 비비안이 자신의 예쁜 모습을 질투해 망신을 주려 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리리엘은 그대로 등을 돌려 장미 궁을 나와 마차 대기소로 향했다.

마차 대기소에서 마차를 기다리는 데 멀리서 익숙한 머리가 보였다.

“응?”

워낙 멀리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하늘색 머리카락 이었다.

리리엘은 두 눈을 비볐다.

“내가 잘못 봤나?”

분명 하늘색 머리카락이었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이가 없었다.

“내 눈이 미쳤나 봐, 이제 헛것이 다 보이고. 레오나가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일이었다.

독립해서 나간 레오나는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백작가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호적에서 정리도 되었고, 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지.”

제까짓 게 무슨 재주로 황궁에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너무 화가 나서 내가 헛것을 본 게 분명해.”

“아가씨, 오르십시오.”

마차가 도착했다.

리리엘은 칼리반가의 인장이 찍힌 마차에 올라탔다. 리리엘을 태운 마차는 유유히 황궁을 빠져나갔다.

* * *

레오나와 라파엘은 황녀 궁에서 교대하고 휴식을 취하러 가고 있었다.

다음 교대 시간은 저녁 6시. 그때까지는 자유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레오나는 지친 상태였다.

‘신성력을 너무 많이 썼어.’

가지고 있는 신성력을 거의 끌어다시피 해서 썼다. 그래서 온몸이 녹초였다.

숙소로 돌아와 레오나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침대가 출렁이며 레오나의 몸을 받아냈다.

“하, 좋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한숨만 자자.”

잠시 후, 레오나는 눈을 떴다. 벽시계를 보니 저녁 5시였다. 일어날 시간이었다.

기지개를 크게 켠 레오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눈을 좀 붙였더니 살 것 같았다.

배가 고파서 숙소 밖으로 나오니, 식사하러 가는 유릭과 라파엘이 보였다.

레오나는 후다닥 달려가 유릭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같이 가자.”

“깜짝이야.”

“그랬어? 생각보다 담이 약한데?”

“아니거든?”

유릭은 무슨 말이냐며 팔딱 뛰었다. 레오나는 빙그레 웃으며 유릭과 투덕거리고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한산했다.

호위 임무 기간에는 교대하며 밥을 먹기 때문에 식당이 꽉 차는 일이 없었다.

“오, 오늘 메뉴는 스테이크다!”

유릭이 호들갑을 떨자, 레오나는 피식 웃었다.

레오나는 동기들과 즐겁게 스테이크를 먹었다.

‘아, 추억 돋는다.’

동기들과 어울리고, 시답지 않은 주제로 대화도 나누며 지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득히 먼 옛날의 일만 같았다.

그래도 어렸을 때는 동기들과 줄곧 어울리곤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신의 선택을 받게 되면서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기들과 웃고 떠들며 지내고 있다.

평범한 것 같지만, 레오나에겐 소중한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백작가에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즐겁고 행복했다.

자신의 힘으로 이뤄내고 성취하여 나아가고 있으니까.

‘나는 잘할 수 있어.’

칼리반 백작가라는 우물 안 보다는 우물 밖을 뛰쳐나온 지금이 훨씬 좋았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빛나는 것.

그게 레오나가 바라는 이상이었다.

레오나는 식사를 마치고 황녀 궁으로 복귀했다.

* * *

첫 해주가 있은 지 3일이 지났다.

그동안 레오나는 성심을 다해 저주를 하나씩 해주했다.

3일 동안 하나씩 해주하였으니, 이제 남은 저주는 두 개가 되었다.

저주가 하나씩 지워질 때마다, 다이앤 황녀의 몸은 많이 건강해졌다.

“건강이 몰라보게 회복되었습니다.”

궁정의가 다이앤 황녀를 진찰하며 한 말이었다.

반면, 2황녀 비비안은 되돌아온 저주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오늘 다이앤 황녀를 만나보리라 다짐했다.

치료를 마친 다이앤 황녀는 황녀 궁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한 곳에 2황녀 비비안의 등장은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2황녀 비비안은 다애인의 침실 앞에서 노크를 했다.

“누구세요?”

“나야, 비비안. 들어가도 돼?”

비비안이란 이름에 다이앤 황녀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와.”

2황녀 비비안은 다이앤 황녀를 따라 티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녀 세나가 다과를 내왔다.

“다이앤.”

다이앤 황녀는 비비안보다 한 살 많았지만, 비비안 황녀는 언니라 부르지 않았다.

한 살 차이로 언니라 부르기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2황녀 비비안이 이름을 부르자, 다이앤 황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또, 그런다. 난 네 언니야, 제대로 된 호칭을 불러야지.”

제 딴에는 훈계한답시고 하는 것 같은데 커다란 눈동자를 크게 뜨고 나무라듯이 말하는 그녀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귀여웠다.

“몸은 좀 어때? 환궁한 후에 와본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많아 이제야 왔어.”

“그래, 좀 너무했어. 비비안.”

생생해 보이는 다이앤의 모습을 보니 비비안은 속이 뒤틀렸다.

“다행히 많이 좋아 보이네.”

“응, 많이 건강해졌어.”

“그래 보여.”

2황녀 비비안의 시선이 여전히 붕대를 감고 있는 다이앤 황녀의 오른팔로 향했다.

다이앤 황녀는 오른팔 때문에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황제와 황후, 황태자는 다이앤을 보호하기 위해 사교계 입성을 보류했다.

그리고 비비안 황녀로 하여금 다이앤 황녀가 건강한 모습을 되찾을 때 사교계에 입성을 순조롭게 할 수 있도록 터를 닦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놈의 적통.’

다이앤 황녀는 적통 황녀였고, 2황녀 비비안은 정통성이 없는 황녀였다.

황제는 황후를 사랑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정치적인 이유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관계일 뿐이었다.

1황비가 2황녀 비비안을 낳은 것도 단 하룻밤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랬기에 2황녀 비비안은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붕대 아직도 감고 있네?”

“보기 흉하잖아.”

다이앤 황녀가 오른팔을 왼팔로 감쌌다.

“밤에 잠은 잘 자?”

“응, 잠은 잘 자고 있어.”

2황녀 비비안은 표정을 숨긴 채 다이앤 황녀의 안색을 살폈다.

‘진짜, 잘 자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리 없다. 그녀가 다이앤 황녀에게 건 저주 중 하나는 잠의 공포였으니까.

매일 밤 공포스러운 악몽을 꾸게 되는 저주였다.

하나하나 고통을 추가하면서 2황녀 비비안은 다이앤 황녀의 고통을 늘려갔다.

그런데 잘 잔다니…….

비비안 황녀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가 사라졌다.

그건 다이앤 황녀도 눈치채지 못할 찰나였다.

‘투시.’

흑마법을 발현했다.

비비안 황녀의 오렌지빛 눈이 다이앤 황녀의 오른팔을 투영했다.

‘두 개라고?’

세 개의 저주가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비비안, 무슨 생각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2황녀 비비안은 급히 마법을 거두었다. 그러곤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른 나아서 나와 함께 파티에도 가고 그래야지.”

“걱정 마, 얼른 나을 테니까.”

2황녀 비비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있어.’

다이앤 황녀의 오른팔에 새겨진 두 개의 저주가 그것이었다.

‘나 모르는 무언가가 분명 있어.’

그걸 알아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사역마를 써야겠군.’

2황녀 비비안은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오른손을 티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조그마한 검은 덩어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덩어리는 출렁거리며 바닥에 떨어졌고, 거미의 형태로 변했다.

[다이앤을 따라다니렴.]

언령으로 명령을 내리자,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거미의 눈동자가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2황녀 비비안은 내렸던 손을 다시 올려 쿠키를 집어 아그작 베어 물었다. 그러곤 샤샤삭 움직이며 다이앤 황녀의 침대 밑으로 숨어드는 거미를 보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내야 해.’

비비안 황녀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났다.

* * *

비비안 황녀가 나가고 시녀 세나가 티 테이블을 정리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전하, 비비안 전하와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세요. 그분 겉보기와 다르다고요.”

“다르다고?”

“네.”

다이앤 황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비비안은 자신이 없는 동안 황녀로서 사교계에 진출해 자신을 대신해 활동해 왔다.

자신이 건강해졌을 때 활동하기 편리하도록 비비안이 입지를 다져놓은 것이다.

그러한 희생을 하는 아이에게 겉보기와 다르다니. 다이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세나, 비비안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비비안이 나를 대신해 얼마나 열심히 황녀 업무를 하고 있는데.”

“하아, 너무 공교로워서 그렇죠. 5년 전 일,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

“그 얘긴 왜 또 꺼내.”

정확히 5년 전, 1월 1일에 유프란 제국 건국제가 열렸다.

건국제는 칠 주에 걸쳐 치러지는 대규모 축제로 유프란 제국을 건국한 프리드리히 황제를 기리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은 다이앤 황녀가 처음으로 공식 행사에 얼굴을 보이는 날이었다.

다이앤 황녀는 첫 공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유명한 디자이너를 섭외에 드레스와 장신구를 의뢰하고, 그날 황태자와 추게 될 춤곡을 연습하기도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행사 첫날 아침에 준비를 하는데 저주가 발현되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황제와 황후는 물론, 황태자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재빨리 정신을 차린 황제는 냉철한 판단으로 다이앤 황녀에게 일어난 일을 비밀에 부쳤다.

다이앤 황녀는 급히 은밀한 곳으로 옮겨져 신관들의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건국제 행사에 빠질 수 없었던 황제와 황후, 황태자는 황녀 대행으로 비비안 황녀를 대신 참석케 하였다.

또래 영애들을 선도하는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가 그때만 생각하면 복장이 터진다니까요? 그때 그 일만 아니었어도 비비안 황녀 전하는 그 자리에 없으셨을 거예요. 뿐이에요? 무사히 사교계에 입성도 하셨을 거라고요. 게다가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전하는 저주 때문에 나갈 수 없게 되셨죠.”

공식 행사는 건국제만 있는 건 아니었다.

황제와 황후, 황태자의 탄신일도 있었고, 수확제도 있었다.

그때마다 다이앤 황녀는 저주의 고통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때마다 전하의 자리를 대신하신 건 늘 비비안 황녀 전하셨어요. 공교롭게도 말이죠.”

다이앤 황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비안 황녀 전하는 전하가 없는 사교계에서 입지를 점점 넓히고 있어요. 결코, 전하에게 호의적이신 분만 아니란 거죠.”

그래도 다이앤 황녀는 비비안 황녀를 믿고 싶었다. 그리고 가족의 정을 모르고 자란 비비안이 가여웠다.

황제와 황후는 적통 핏줄에게만 다정하다는 것을 다이앤 황녀는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이 낳은 아이.

황제는 그 아이를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았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보석, 그 모든 건 다이앤 황녀에게 최우선으로 제공되었고, 비비안 황녀에게는 다이앤 황녀가 고르고 남은 것을 갖게 되었다.

그게 안쓰러워 자신이 고른 최고의 보석을 비비안 황녀에게 주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비비안 황녀는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며 보석을 돌려주었다.

다이앤 황녀는 비비안 황녀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싶어 친하게 지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비비안 황녀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저주로 인해 공식 행사에 참석 못 하고, 비비안 황녀가 대리로 참석하게 되었을 때, 그녀를 원망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괜찮아. 건강해지면, 내 힘으로 시작하면 돼.”

“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비비안 황녀님보다 멋지게 입성하셔야죠.”

“응, 그럴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세나.”

다이앤 황녀는 저주가 이제 두 개 남았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 일은 그녀와 가족들, 레오나와 데미안 단장만 아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나에게 미안하지만,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줘, 세나. 금방 건강해질 테니까.’

그리되면 세나의 걱정을 덜게 해주리라.

* * *

다이앤 황녀는 황제의 궁으로 갈 채비를 하였다.

다이앤 황녀가 침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조그마한 거미가 스르륵 기어 나와 다이앤 황녀의 치맛단에 붙었다.

치맛단이 삼 겹의 레이스로 되어 있어서 거미는 레이스 틈 속에 교묘하게 숨을 수 있었다.

다이앤 황녀가 침실 밖으로 나오자, 레오나와 데미안 단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녀 전하, 마법을 걸겠습니다.”

다이앤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왜 황녀 전하의 몸에서 흑마법의 기운이…….’

저주의 기운은 아니다.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그건 레오나만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감지였다.

‘확인해 봐야겠어. 센스 이블.’

사악한 마법을 탐지하는 신성 마법이었다.

레오나의 두 눈이 짙은 황금빛으로 일렁였다. 레오나는 빠르게 다이앤 황녀를 스캔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무언가 포착되었다. 정확히 다이앤 황녀의 뒤쪽 치맛단에.

‘저기 있군.’

치맛단에 앙큼한 것이 숨어 있었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황녀 전하,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다이앤 황녀가 의아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는 무릎을 굽혀, 다이앤 황녀의 치맛단을 펴주는 척 털었다.

손에 거미가 잡혔다. 거미가 발악하려 하자, 레오나는 거미를 움켜쥔 채 신성력으로 정화시켜 버렸다.

다이앤 황녀가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왜 그래요?”

“별것 아닙니다. 치맛단에 벌레가 붙어 있어 처리했습니다.”

“아, 그런…….”

“이제 되었으니, 다시 마법을 걸겠습니다.”

레오나는 신성 마법을 발현했다.

“홀리 에리어.”

다이앤 황녀를 포함하여 레오나, 데미안 단장 주위로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가시죠.”

“매번 고마워요.”

“아닙니다.”

황제의 궁, 비밀의 방에 도착한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의 저주를 또 하나 해주하였다.

“이제 한 개 남았네요.”

다이앤 황녀의 오른팔에는 한 개의 꽃문양이 남아 있었다.

“얼마 안 남았네요.”

다이앤 황녀는 기쁜 얼굴을 하였다.

이제 하루면 모든 저주가 사라진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 * *

서재에서 2황녀 비비안은 각계에서 보내온 초청장을 보고 있었다. 각종 사교 모임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그중에는 전통 있는 사교 모임과 그렇지 않은 곳이 섞여 있어서 걸러낼 필요가 있었다.

참석해야 할 곳과 하지 않을 곳을 가려내어 답장을 보내야 했다.

정말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일을 대신해 줄 사람도 없었다.

2황녀 비비안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 이 황궁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고, 모든 일을 직접 처리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인형처럼 웃고 있어야 하는 건 정말 짜증 나는 일이야.”

때론 본 모습을 숨기고 가식을 떨어야 하는 자리가 있다. 그런 자리에선 늘 인형처럼 미소를 잃지 않아야 했다.

적정한 선을 유지하며 인맥을 쌓는 것. 그리하였기에 지금의 비비안 황녀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초대장 정리를 하고 있는데 찌르르한 감각이 그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 감각은…….’

사역마가 사라졌을 때 드는 감각이었다.

‘붙여둔 사역마가 사라졌다.’

다이앤 황녀를 쫓아다니도록 남겨둔 사역마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2황녀 비비안은 서재를 나와 급히 지하 밀실로 향했다.

밀실에서 테이블에 놓인 거울에 손바닥을 대었다.

다이앤 황녀의 방 안 모습이 비쳤다.

다이앤 황녀의 침실은 비어 있었다. 욕실, 드레스룸, 서재에도 보이지 않는다.

2황녀 비비안은 다이앤의 궁에 감시 마법진을 설치해 놓았다.

침실과 욕실, 드레스룸 천장에 새긴 마법진은 언제든지 다이앤 황녀를 감시할 수 있는 마법진이었다.

그 마법신을 새기기 위해 굉장히 공을 들였다.

흑마법의 기운이 노출되지 않아야 하며, 마법진 자체도 보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놓았다.

‘없어.’

어디에도 다이앤 황녀가 없었다.

황녀 궁을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행적을 쫓지 못하도록 누군가 없앤 것이 분명해. 누굴까?’

딱 한 사람 짚이는 사람이 있었다.

‘설마, 또 레오나 그 여자인가.’

그 여자가 다이앤 황녀를 가까이서 호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사역마를 눈치채고 없앴다고?’

최대한 흑마법의 기운이 남지 않도록 조절하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마법까지 걸어둔 사역마였다.

그러한 것을 찾아내 없앴다.

‘정말, 그 여자가?’

또 하나의 가능성이 2황녀 비비안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설마, 저주도 그 여자가 해주한 건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신성력을 있는 대로 쏟아부어야 할 정도가 아니면 말이다.

그녀가 알기로 제국에 그 정도로 많은 신성력을 보유한 신관은 없었다. 그래서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저주를 건 자신이 직접 해주를 하지 않는 한, 다이앤 황녀는 고통받다 죽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저주가 계속해서 해주가 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아니면 정말로 그 여자가 그 정도로 많은 양의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골치가 아팠다. 2황녀 비비안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다이앤 황녀의 저주가 해주되면 곤란하다. 그녀가 건강해지면 자신이 다져놓은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비비안은 그 자리를 양보할 마음이 없었다.

‘내 것이야,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어떻게 이뤄낸 일인데. 흑마법에 손을 대면서까지 이뤄낸 일이었다.

‘너는 계속 고통만 받다가 죽는 게 어울려. 다이앤.’

그 해사한 얼굴이 싫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한 얼굴로 동정심을 내비치는 손을 자신에게 내밀 때마다 역겨움이 치솟았다.

지독한 악의가 용솟음쳤다.

자신이 가질 수 없던, 가져 보지 못한 사랑을 가진 다이앤이 죽도록 싫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너도 가질 수 없어, 다이앤.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거울을 붙든 비비안 황녀의 두 손의 힘줄이 불거졌다.

‘어떻게 해서든 붉은 달 의식을 성공시킨다.’

그 힘으로 너를 나락으로 밀어 버리겠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지옥 끝으로.

‘저주가 해주되는 것을 막을 순 없겠어.’

되돌아올 저주의 타격이 크겠지만, 지금은 막을 여력이 없었다.

‘에너지도 얼마 없어.’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일단 놔두는 수밖에 없어.’

곧 있으면 붉은 달 의식을 하게 된다.

의식이 끝나면,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럼, 더욱 고통스러운 저주를 선사해 줄 수 있다.

‘내 자리를 네게 양보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야.’

2황녀 비비안은 거울 속의 손바닥을 대었다.

그러자 다이앤 황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한 남자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점의 주인 바텐더 베논이었다.

“제물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여의치 않습니다. 말씀하신 수량까지는 힘들 것 같습니다.]

“후우, 어쩔 수 없지.”

은밀히 제물을 모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다.

그리고 생각해 둔 방법이 있다.

얼마 전, 독서 사교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솔깃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살라만 왕국이 잦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고 하더군. 왕실은 무너졌고, 백성들은 타국의 노예로 팔리고 있다고 해. 거기서 어린 노예들을 사들여.”

[질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 질이 좋으면 좋겠지만, 최대한 많은 양의 제물이 필요하니까. 그거로라도 만족해야지. 자금은 내가 보내 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 살라만 왕국에 가야겠군요.]

“시간이 없어, 최대한 서두르도록 해.”

[예, 주인님.]

대화를 마친 2황녀 비비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거울에서 손을 떼었다.

‘마력을 가진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어. 구색이라도 맞춰야 해.’

2황녀 비비안은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 * *

드디어 마지막 저주를 해주하는 날이 되었다.

마지막 저주는 꽤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다른 저주보다 배는 더 힘이 들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덜덜 떨려 왔지만, 레오나는 끝까지 신성력을 쏟아부어 저주를 밀어냈다.

‘이제 그만 떨어져!’

지겹게도 붙어 있었다.

신성력에 발악하던 저주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사그라졌다.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의 팔에서 손을 떼었다.

그녀의 오른팔은 이제 붕대를 감을 필요가 없었다.

레오나는 마지막 신성력을 이용해 다이앤 황녀의 몸을 깨끗하게 정화했다.

“퓨리피케이션.”

다이앤 황녀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한 몸이 되었다. 저주의 흔적은 이제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다 끝났어요, 황녀 전하.”

다이앤 황녀가 떨리는 눈으로 오른팔을 보았다.

흉측하게만 느껴졌던 검은 꽃문양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매끈한 피부색이 오른팔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예, 완벽하게 해주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다이앤 황녀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레오나를 보더니 두 손으로 레오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레오나 경 덕분이에요. 경이 저를 살렸어요.”

다이앤 황녀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왜 우세요. 기쁜 일인데 웃으셔야죠.”

“헤헤, 그러게요.”

다이앤 황녀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가족들을 보았다.

“아바마마, 저 이제 괜찮대요.”

“그래, 다이앤.”

“어마마마, 저 이제 건강해요.”

“안다, 내 아가.”

황후가 다가와 다이앤 황녀를 끌어안았다.

다이앤 황녀가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이제 저도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어요.”

“넌 이제 뭐든 할 수 있어, 다이앤.”

방 안이 훈훈해졌다.

황제가 레오나를 보았다.

“고맙다.”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황제의 얼굴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대는 짐의 은인이다. 언제나 그대의 뒤에는 언제나 짐이 있겠다. 짐은 결코 경을 잊지 않을 것이다.”

“폐하,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너무 과분합니다.”

“아니, 과분하지 않다.”

황후도 나섰다.

“저 또한 경의 앞날이 빛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황태자도 빠지지 않았다.

“저도 빠질 수 없지요. 제 동생을 구해 준 은인입니다. 아바마마, 소자가 청하건대, 레오나 경에게 작위를 하사하심이 어떠십니까?”

“물론이다. 짐은 그 어떠한 것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황제 내외와 황태자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황후가 레오나의 손을 잡았다.

“저는 그대를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할 거예요. 황녀를 구해주어 고마워요, 레오나 경.”

“황공하옵니다.”

황후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접으며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황제와 황태자도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황후마마, 황태자 전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게.”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요.”

“얼른 가서 쉬게.”

황제 내외와 황태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레오나는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오자, 데미안이 레오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히 잘해낸 것 같군.”

“다 믿어주신 덕분이죠.”

레오나가 배시시 웃자, 데미안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웃으시니, 보기 좋네요. 이번엔 발뺌하지 마세요.”

“그런 적 없다.”

“저번에 아니라고 그러셨잖아요.”

“그건…… 됐다. 아무튼 고생 많았다. 백기사단에서도 합당한 보상이 내려질 것이다.”

“기대하겠습니다.”

그 말에 데미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레오나는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황녀 전하의 몸에 사역마가 붙어 있었다고?”

“예, 제가 황녀 전하 모르게 처리했습니다. 그건 분명 흑마법사의 사역마였습니다.”

데미안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정말인가?”

“네.”

“혹시 배후가 눈치챈 건가?”

“그건 진즉에 눈치챘을 겁니다. 저주를 해주하게 되면 저주를 건 사람에게 되돌아가 타격을 주니까요. 첫 저주 해주 때 이미 배후는 타격을 받았을 겁니다.”

사역마를 붙였다는 건, 저주가 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저주가 어떤 식으로 풀리고 있고, 푸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한 정보 말이다.

“대비를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군,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예, 단장님.”

대화를 마치자, 황제 내외와 황태자, 다이앤 황녀가 나왔다.

이제 이 비밀의 방에 올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 * *

“끄아아악!”

2황녀 비비안은 가슴을 움켜쥐며 침대를 굴렀다.

“끄윽, 끅.”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다이앤 황녀의 저주가 완벽하게 해주된 모양이다. 그간 들였던 공이 수포로 돌아갔다.

침대에서 몸을 웅크린 비비안 황녀는 핏발 선 눈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비명에 놀란 시녀들이 들어왔지만, 비비안 황녀는 모두 내쫓았다.

“후욱, 훅.”

숨이 가빠왔다.

되돌아온 저주는 2황녀 비비안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온몸이 바늘에 찔리는 것만 같았다.

고통을 견디면 견딜수록, 비비안 황녀는 다이앤 황녀를 향한 증오를 끌어올렸다.

지독한 악의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들끓었다.

“이,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다이앤.”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침대 시트를 적셨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물들었다.

“하아, 하아.”

고통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울컥.

한 움큼의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침대 시트가 붉게 물들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거칠게 닦은 2황녀 비비안은 웅크렸던 몸을 폈다.

‘생각보다 타격이 컸어.’

심장에 품고 있던 마나 고리 하나가 깨졌다. 피를 토한 건 그 충격으로 인한 것이다.

‘저주가 되돌아올 때마다 느낌이 안 좋았는데 마나 고리를 하나 잃었어.’

마나 고리는 마법사들의 경지를 가리킨다. 몇 개의 마나 고리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차이가 엄청나다.

비비안 황녀는 다섯 개의 마나 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하나가 깨져서 네 개가 되고 말았다.

‘괜찮아, 붉은 달 의식을 마치면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설 수 있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쯤 기분이 날아가겠군.’

다이앤 황녀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자, 짜증이 솟았다.

‘지금을 즐겨 둬, 다이앤. 네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시트를 꽉 움켜쥔 비비안 황녀는 피 묻은 침대 시트를 걷어 냈다. 흑마법을 일으켜 피 묻은 시트를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다.

입가에 묻은 피 또한 손수건으로 박박 닦았고, 손수건도 태워 버렸다. 그런 다음 설렁줄을 당겨 시녀들을 불렀다.

“침대 시트를 다시 깔고, 목욕 준비를 하도록 해.”

“예, 황녀 전하.”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바라본 비비안 황녀는 목욕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욕실로 들어갔다.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근 2황녀 비비안은 곤두섰던 신경이 누그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 * *

다이앤 황녀의 마지막 저주를 해주한 지 하루가 지났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레오나는 단장실에서 데미안과 독대를 하였다. 전날 끝맺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몸은 좀 괜찮나?”

마지막 저주가 좀 강하긴 했다.

저주를 밀어내는 데 신성력을 배나 더 쏟아부어야 했다.

‘단전이 찢어지는 줄 알았지.’

그 정도로 강력한 저주였다. 아마 대단한 악의가 담겨 있었던 모양이다.

흑마법의 저주는 악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효력이 강해진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다이앤 황녀를 엄청나게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체 누굴까?’

궁금했지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데미안이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레오나, 지난번에 대비를 해야 한다고 했던가?”

“예.”

“그 이유는 황녀 전하의 저주가 완전히 해주가 되었기 때문인가?”

“예, 황녀 전하께 저주를 건 이는 대단한 악의를 가진 자입니다. 그러한 자가 황녀 전하의 해주를 놔둘 리 없죠.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다시 황녀 전하를 공격해 올 겁니다.”

상대는 다이앤 황녀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니 또다시 움직일 것이다.

맹수가 한 번 문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것처럼.

그러기 위해선 다이앤 황녀의 안전이 확보되어야 하며, 하루라도 빨리 흑마법사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

“그자들의 움직임은 아직 없습니까?”

특별 호위 임무를 맡게 되면서, 흑마법사와 연관된 자들을 조사하는 일이 보류되었다.

그자들이 숨은 탓도 있었다.

“그 일은 흑기사단에 부탁한 상태이다.”

“그러셨군요.”

데미안은 백기사단을 다이앤 황녀의 호위로 돌리면서, 사건의 관련자들을 조사하는 일을 잠시 흑기사단에 맡긴 상태였다.

흑기사단과 동조 수사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조사 진행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내가 흑기사단과 연락하여 알아보도록 하지.”

“그렇다면 저는 납치 사건의 피해자들을 만나보겠습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단서가 될 만한 게 나올 수도 있으니. 라파엘과 함께 움직이도록. 혼자보단 둘이 낫다.”

“예.”

역시, 그 녀석과는 한 팀이 되는 모양이다.

입단 시험부터 쭉 라파엘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첫 임무 때 라파엘과 마물을 처치했고, 두 번째 임무, 다이앤 황녀의 호위까지 같이했다. 그리고 이번 임무까지.

그러다 정들 것 같았다. 물론 친구로서.

잠시 후, 라파엘이 들어왔다. 임무 하달을 위해 데미안이 부른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어서 와, 라파엘.”

레오나가 반갑게 인사하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있었군.”

레오나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단장과 함께 임무를 수행했다.

무슨 임무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로 황녀 전하와 관련된 임무인 듯싶었지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앉아라, 라파엘.”

“예, 단장님.”

라파엘은 레오나의 옆에 앉았다.

“라파엘, 지금부터 너는 레오나와 한 조가 되어 피해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는다.”

“피해자들이라면, 납치 사건의 피해자들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 그들을 만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알아 와라. 작은 것이어도 좋다.”

납치 사건은 다이앤 황녀의 호위로 인해 보류되었었다. 그걸 다시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다시 조사를 진행하시는 거군요.”

“그렇다. 특별 호위 임무로 보류되었던 사건이니 다시 시작하는 게 맞지. 잠시 사건을 흑기사단에 맡겼지만, 마무리는 우리가 하는 것이 맞다.”

데미안의 말에 라파엘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단서를 찾아내겠습니다.”

“믿겠다. 지원이 필요하면 언제든 내게 연락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레오나와 라파엘은 대답을 한 뒤 단장실을 나왔다.

“레오나.”

“응?”

“임무는 잘 완수했나?”

“완벽하게 완수했지.”

“다행이군. 그리고 부럽다.”

“부럽다고? 뭐가 부러운데?”

레오나가 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파엘을 보았다. 그가 부럽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데미안 단장님과 임무를 수행하는 행운을 가졌지 않나. 언젠가 단장님과 임무를 함께하는 것, 그게 내가 백기사단을 선택한 이유다.”

라파엘의 우상은 데미안이었다.

제국 제일의 마검사. 한 번의 검격에 산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힌다는 실력을 가진 마스터.

라파엘은 어릴 적부터 데미안처럼 되고 싶었다. 우뚝 솟은 거대한 산처럼 크고 거대한 존재가.

그런 존재와 같이 임무를 수행한 레오나가 부러운 건 당연했다.

“이번엔 너였지만, 다음에 단장님과 임무를 수행하는 건 내 차례다.”

라파엘의 라일락 빛 눈동자가 의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건 승부욕이자, 결의였다.

“어, 너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열의가 장난 아니다.

‘데미안 단장님을 정말 좋아하나 보네.’

또 옛날 생각이 난다.

신성국에 있을 때도 신입 기사들이 율리아나와 임무를 수행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곤 하였다.

라파엘을 보니 그 생각이 문득 났다.

‘자식들, 잘 지내고 있겠지.’

이제는 어엿한 기사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아스텔이 잘 이끌어 주겠지.’

율리아나는 자신이 죽으면, 아스텔이 신의 선택을 받을 것이라는 걸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정도로 녀석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였다.

‘넌 내 뒤를 잇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밥 먹듯 해주곤 하였다. 그때마다 녀석은 수줍게 웃곤 하였다.

“라파엘.”

“왜 그러지?”

“같이 나가서 술 한잔 어때? 제임스랑 유릭, 말론도 같이 불러서. 내가 살게.”

“술을 마시자는 건가?”

“어. 특별 호위 임무도 끝났겠다, 조사 임무는 내일 시작하기로 했으니, 오늘은 오랜만에 마시자.”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그럼, 가는 거다?”

“알겠다.”

월급도 꼬박꼬박 저축하고 있고, 유산을 처분한 돈도 있었다. 밥 한 끼 사는 것 정도야 문제 되지 않았다.

* * *

레오나는 오랜만에 동기들끼리 모여 술 한잔했다.

이번엔 유릭의 음식점이 아니라, 제임스가 단골로 다닌다는 다른 주점이었다.

매번 같은 곳을 가는 것보다 새로운 곳을 가보는 것도 좋다며 제임스가 제안했다.

유릭도 딱히 자신의 집이 운영하는 식당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제임스가 데려간 주점은 꽤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손님들 대부분이 귀족이었다.

“여기가 고급 주점으로 유명한 곳이야.”

제임스의 설명에 레오나가 눈을 샐쭉하게 떴다.

“그래서 가격이 이렇게 비싼 거냐, 너 일부러 여기 왔지?”

“네가 산다며. 기왕에 살 거면 좋은 거 먹어야지, 안 그러냐?”

“맞아.”

“산다고 한 사람이 잘못이다.”

유릭과 말론이 제임스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때 라파엘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

“돈이 모자라면 보태주지.”

“됐거든. 나도 돈 있어. 이것들이 사람을 아주 물로 보고 있어.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이 누님이 제대로 쏜다.”

제임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너, 그 말 철회하기 없기다.”

“내 사전에 철회는 없다.”

“오예, 얘들아 맛있는 거 시켜 먹자.”

동기들이 메뉴판을 돌려보며 이것저것 주문했다. 물론, 술도 주문했다. 와인으로다.

음식은 푸짐했다.

칠면조 구이와 곁들임 채소, 버터를 발라 구운 바닷가재,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등심을 꾸덕꾸덕하게 말린 생햄과 야채가 들어간 버거, 입가심으로 선택한 올리브 절임까지.

술안주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가 고급스러운 와인까지 더해지니, 술 파티가 따로 없었다.

“고생한 우리를 위하여 건배!”

제임스가 장난처럼 건배를 외치자, 레오나와 동기들은 웃으며 잔을 들어 건배를 외쳤다.

라파엘은 유치하다고 말하더니, 본인도 잔을 들어 건배했다.

레오나는 모처럼 신나게 먹고 떠들었다.

좋은 동기들이 곁에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음식도 맛있었고, 와인도 끝내줬다.

제임스가 추천할 만했다.

레오나는 동기들과 거나하게 마시고 놀았다.

술값이 무지막지하게 나오긴 했지만, 그 정도 살 돈은 충분히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 * *

이른 아침 눈을 뜬 레오나는 갑자기 밀려온 두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오, 머리야.”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났다. 게다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 어떻게 집에 왔지?”

집에 어떻게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많이 마시긴 했어.”

머리가 띵하고 아플 정도면 정말 많이 마시긴 했다.

“으, 속이야.”

속도 쓰리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다섯이서 와인을 몇 병이나 비운 것 같았다.

“그렇게 먹어 댔으니, 속이 아픈 건 당연하지.”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즐겁게 술을 마셨으니까.

동기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생활이 레오나는 만족스러웠다.

“으, 안 되겠다.”

속이 너무 아프다. 게다가 오늘 라파엘과 임무를 해야 한다.

레오나는 신성 마법을 시전했다.

“큐어.”

신성력이 온몸을 휘돌며 아픈 속과 두통을 치료해 주었다.

“신성 마법이란 건 이럴 땐 참 쓸 만하단 말이지.”

머리가 개운하고, 몸도 가볍다.

기지개를 쭉 켠 레오나는 벽시계를 보았다.

“7시네. 준비해야겠다.”

오늘은 아침 식사 후, 라파엘과 납치 사건 피해자들을 만나기로 하였다.

아침 식사 시간이 8시니까, 서둘러야 했다.

레오나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다음 기사단 제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아, 갈아입을 옷이 한 벌밖에 안 남았네, 세탁해야겠다.”

레오나는 여벌로 남은 제복을 갈아입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올린 다음, 숙소를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동기들이 레오나를 반겼다.

“레오나, 여기다.”

먼저 와 있던 제임스가 레오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레오나는 음식을 받아 들고 동기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에 앉았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에그 스크램블과 베이컨 볶음밥, 감자샐러드였다.

“레오나, 넌 속 좀 괜찮냐?”

“보시다시피 멀쩡해.”

“와, 엄청 부럽다. 난 아직도 속이 쓰린데.”

말론이 옆에서 제임스를 놀렸다.

“난 네가 먼저 쓰러질 줄은 몰랐다. 제임스.”

“그러는 넌, 너도 같이 갔거든?”

“그래도 난 너보다 좀 더 버텼다.”

“그게 몇 분 차이 난다고, 잘난 척은.”

말론과 제임스가 투덕거리자, 유릭이 중재를 했다.

“야, 밥 좀 먹자. 얼른 먹고 선배님들한테 가기로 했잖아.”

레오나는 베이컨 볶음밥을 한 숟가락 넣고는 우물거리며 의아한 얼굴로 유릭을 보았다.

“너희, 선배님들한테 가?”

“어, 오늘 우리 셋 특별 단련시켜 주시기로 하셨거든. 레오나랑 라파엘은 임무 수행한다며, 아쉽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유릭이 아쉬운 얼굴을 하자, 레오나가 피식 웃었다.

“나랑 라파엘 몫까지 너희가 열심히 받아.”

“하긴, 너랑 라파엘은 굳이 받을 필요 없잖아. 우리보다 훨씬 강하니까.”

제임스가 인정한다는 듯 엄지를 추켜세웠다.

“밥 다 먹었지, 가자 선배님들 기다리실라.”

“오케이.”

“선배님들을 기다리게 할 순 없지.”

제임스와 말론이 번갈아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나, 라파엘. 우리는 먼저 가볼게. 임무 수행 잘해라.”

제임스가 유릭, 말론의 어깨에 양팔을 걸치며 레오나와 라파엘에게 인사를 했다.

레오나는 세 사람에게 훈련 잘 받으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선배님들한테 단련 잘 받아라.”

“물론이지.”

호기롭게 대답한 제임스가 유릭, 말론과 함께 식당을 나갔다.

셋이 나가자, 테이블이 텅 빈 것만 같았다.

“우리도 그만 가자.”

레오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파엘도 따라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식당을 나와 마구간에서 말을 꺼내 올라탔다. 그리고 곧장 제도 센터폴로 나갔다.

센터폴 분수 광장에 도착한 레오나는 라파엘과 분담하기로 했다.

“나는 동쪽으로 가서 조사해 볼게, 너는 서쪽을 맡아.”

“그러지.”

레오나는 들고 온 명단을 반으로 나눠 라파엘에게 건넸다.

“자, 여기 명단 받아. 조사를 마치면 누가 먼저 오든지 여기 이 광장에서 만나자.”

“알겠다.”

“그럼, 출발하자.”

“조심해라.”

“별일이야 있겠지만, 조심할게. 너도 조심해.”

“걱정 마라. 무슨 일 있으면 지원 요청하는 것 잊지 마라.

“당연하지, 너도 혼자서 하려고 하지 말고 지원 요청해, 알았냐?”

“명심하지.”

라파엘의 라일락 빛 눈동자가 진중하게 빛났다.

“나 먼저 간다.”

말머리를 돌린 레오나가 동쪽으로 달려갔다.

멀어지는 레오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라파엘도 말머리를 돌려 서쪽으로 향했다.

* * *

레오나는 말을 몰아 제도 동쪽 구역에 있는 주택가에 도착했다.

거기서 첫 번째로 만나 봐야 할 사람은 피터라는 남자였다.

그는 짐승의 가죽으로 옷이나 가방을 만드는 무두장이였다.

레오나는 낡은 나무집의 문 앞에 말을 묶어 놓고, 노크를 했다.

“실례합니다. 안에 계십니까?”

“…….”

잠시 후, 문이 삐그덕거리며 열렸다.

“누구쇼?”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인이었다.

레오나는 밝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백기사단 소속 레오나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납치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데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피터는 레오나의 기사단 복장을 보고,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그녀는 피터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레오나와 피터는 테이블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물어볼 것 있으면 얼른 하쇼.”

레오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따님이 실종되기 전, 뭔가 특별한 일 같은 게 있었습니까? 평소와 다른 무언가 말입니다.”

“글쎄올시다.”

피터는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따라 조금 이상하긴 했소.”

“어떻게요?”

“딸이 갑자기 마력이 있다고 그러지 뭐요.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하더이다.”

“마력이요?”

“그렇소. 마법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고 했었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말이오. 그게 딸아이와의 마지막 기억이 될 줄은 몰랐소.”

그때 생각만 하면 후회가 되었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해줄 순 없었을까.

“정말 마력이 있었나요?”

“모르겠소. 어떤 사람이 와서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지녔다며, 자랑을 했었소.”

간혹, 특출나게 마력을 타고나는 존재가 태어나곤 한다.

피터는 자신의 딸이 그런 재능을 지녔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믿지 않았다. 딸아이에게 마법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마법사가 될 거라며 자랑하더니.’

다음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피터와 아내는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일도 그만두고 딸을 찾아 돌아다녔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아이를 보았다는 제보가 있으면, 한달음에 달려가 확인했다.

하지만 딸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하늘로, 땅으로 꺼진 것처럼.

그 이후 아내는 충격으로 마음의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 딸을 기억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혼자였다.

“도움이 되셨을지 모르겠소.”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혹시 말이요.”

피터는 딸이 살아 있을 가능성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였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절망적인 말을 듣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레오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짐작했다. 그래서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피터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나는 피터의 집을 나와 주택가를 걸으며 생각했다.

‘마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라…….’

피터의 딸은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났고, 마법사가 될 자질이 있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 이후 사라졌다.

‘역시 제물로 사용된 것인가.’

레오나는 말을 타고 다음 집으로 향했다.

다음 집은 노부부의 집이었는데 그들은 손자를 잃었다.

노부부의 손자 역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고, 마법사가 될 자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레오나는 계속해서 이동하며 피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이들 모두 마력을 가진 아이들이라는 것.

‘마력을 가진 인간은 가장 맛있는 영혼을 가진 먹잇감이지.’

흑마법사들이 좋아할 만한 제물감이다.

‘그 많은 아이를 제물로 대체 뭘 얻은 거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악마와의 계약인가?’

흑마법사들은 제물을 이용해 악마와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다.

제물의 질과 양에 따라 계약할 수 있는 악마의 등급도 달라진다.

‘타락한 선도자는 마왕과 계약하려 하였지.’

마왕, 마계의 지배자.

마계의 지배자가 이 세상에 강림하면 아주 큰 재앙이 닥친다.

악마라는 족속들은 끊임없는 욕망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굶주려 있다. 그런 그들에게 흑마법사는 굶주림을 채워주는 아주 좋은 자들이다.

마왕이 이 세상에 강림하면, 세상은 욕망에 삼켜질 것이다.

율리아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흑마법사 로드와 싸웠다.

그리고 숭고한 희생을 치렀다.

‘역시, 난 흑마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만나 볼 사람은 거의 만나본 것 같으니 돌아가야겠다.”

특별히 위험한 일은 없었다.

말에 올라탄 레오나는 라파엘과 만나기로 한 장소 센터폴 분수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 도착하니, 라파엘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레오나는 말에서 내려 분수대에 걸터앉아 라파엘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사라진 아이들 모두 마력을 가진 아이들이야. 그 아이들은…….’

아마 죽었을 것이다.

제물로 사용된 것이라면, 지금까지 살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진즉 제물로 써 버렸을 것이다.

‘망할 흑마법사 놈들. 신성국도 모자라 이젠 여기서도 그 지랄이냐.’

아이들을 제물로 삼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는데 레오나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래 기다렸나?”

라파엘이었다.

“왔어?”

“단서는 얻었나?”

“그건 복귀해서 이야기하자.”

“알겠다.”

레오나는 라파엘과 함께 기사단에 복귀했다.

늦은 저녁이었다.

단장실에서 레오나는 조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아이들 모두 마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네. 제가 만나본 피해자들의 아이들 모두 마력을 가진 아이들이었습니다.”

“라파엘, 너는 어떻지?”

데미안의 짙푸른 눈동자가 라파엘을 직시했다.

“레오나가 조사한 것과 같습니다. 제가 조사한 아이들도 마력을 지닌 아이들이었습니다.”

“마력을 지닌 아이들만 골라 납치를 했다라…….”

데미안이 레오나와 라파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레오나가 대답했다.

“마력을 지닌 존재는 악마들에게 맛있는 먹잇감입니다. 아마, 아이들은 모두 악마 계약을 위한 제물로 바쳐졌을 거라 추측됩니다.”

“흑마법사들이 자주 하는 짓이군.”

데미안은 낮게 읊조리며 책상에서 서류 뭉치를 가지고 왔다.

“흑기사단에서 보내온 조사 보고서다. 읽어보도록.”

레오나가 먼저 서류뭉치를 읽었다. 내용을 읽은 레오나가 금빛 눈을 반짝였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그래, 이번엔 납치가 아니라 노예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정보다.”

“노예들을요?”

데미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항구 도시 요하네스에서 수상한 배가 밤에 들어왔다고 하더군. 흑기사단이 잠복해 조사하니, 그 안에서 어린 노예들이 끌려 나오고 있었다고 했다.”

“납치도 모자라, 노예까지 사들여서 또 뭔가 벌이려는 모양이군요.”

도대체 이번엔 뭘 하려는 걸까.

납치가 어렵게 되자, 노예를 사들이고 있다. 그것도 어린 노예들을.

무언가 끔찍한 일이 진행될 거라는 것을 예고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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