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황녀의 저주 (1) (5/20)

5. 황녀의 저주 (1)

늦은 저녁, 숙소에서 쉬던 레오나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왜 갑자기 소름이…….”

팔에 닭살이 돋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뭐지, 이 불길함은?”

뭔가 불길한 것이 다가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기분 탓인가?”

아무튼 기분이 더러운 것은 맞았다.

“에이, 산책이나 좀 나갔다 와야겠다.”

잠도 안 오고,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나아지겠지 싶어, 레오나는 숙소를 나왔다.

그런데.

“응?”

연무장 근처에서 검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짙은 흑발을 휘날리며 허공으로 도약한 데미안이 유려한 솜씨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달빛보다 푸른 짙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나며 레오나와 눈을 마주쳤다.

레오나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휘두르는 검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넋을 놓고 말았다.

‘무슨 검술이…….’

저리도 아름답단 말인가.

지난번 라파엘의 검무를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그 유려한 자태와 날카로운 예기. 눈을 뗄 수 없는 그 동작에 레오나는 매료되고 말았다.

“레오나…….”

낮은 중저음이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구경은 재미있었나?”

재빨리 정신을 차린 레오나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저도 모르게 그만…….”

“고개를 들도록.”

“예? 예.”

얼떨결에 대답하며 고개를 들자, 데미안이 그녀에게 검을 던졌다.

“올라와라.”

검을 받아든 레오나는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데미안이 검 끝을 까닥거렸다.

“어울려 주겠나?”

“저, 저랑요?”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지? 검을 들어라.”

“예, 단장님.”

레오나는 수련용 검을 쥐고 기수식을 취했다.

제국 제일의 마검사라 불리는 그와의 대련은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그게 오늘 성사된 것이다.

“그럼, 기쁘게 가겠습니다.”

레오나는 힘차게 땅을 박차 순식간에 파고들어 찌르기를 하였다.

데미안은 목만 살짝 트는 것으로 간단하게 피했다.

동시에 검을 뻗었다.

뱀처럼 유유히 다가온 검 끝이 흔들리며 레오나의 명치를 노렸다.

레오나는 뒤로 공중제비를 돌아 피한 다음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뻗어 나간 검이 잔영을 남기며, 데미안의 목을 집요하게 노렸다.

데미안은 몸을 살짝 트는 것으로 간단하게 피한 다음 레오나의 뒤로 이동해 손바닥으로 레오나의 등을 후려치려고 했다.

레오나는 상체를 틀어 피했다.

데미안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이내 다시 몸을 돌려, 레오나의 공격을 받아냈다.

검과 검이 교차로 맞붙었다.

“제법이군.”

데미안이 순수하게 감탄하자, 레오나가 눈꼬리를 휘었다.

“감사합니다.”

데미안의 검을 밀어내고 뒤로 물러난 레오나가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검 끝에 힘이 실렸다.

레오나는 흔들리는 검 끝을 바로잡고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연속 찌르기.

창창창창!

찌르기 공격은 애석하게도 데미안이 모두 막아냈다.

‘틈이 없어.’

완벽 그 자체였다. 어딜 공격해도 막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틈을 만들어야 하는데 쉬워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직접 검을 맞대고 있으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검술이 이 정도라니.’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이게 내 한계구나.’

데미안을 보니, 한계가 느껴졌다.

‘아직 멀었어.’

레오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땅을 박찼다.

“헉헉.”

더 이상 검을 들 힘이 없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데미안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녀의 공격을 모두 피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녀의 급소만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나였다면 어땠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그는 강했다.

순수한 검술로만 겨뤘을 뿐인데도 그걸 체감할 수 있었다.

“레오나.”

레오나는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반가의 레오나, 그게 네가 맞나?”

레오나의 금빛 눈이 동그래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란젤로가 말해주더군.”

레오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맞습니다. 저는 칼리반가 출신입니다. 이젠 아니지만.”

“칼리반가를 나왔나?”

“네.”

“왜 실력을 숨기고 있었지. 그 정도 실력이면 칼리반가에서도 인정을 했을 터인데.”

뒤늦게 인정해 줘봤자, 무슨 소용인가. 상처받은 사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가문의 인정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저는 제힘으로 저를 검증할 겁니다.”

“칼리반가에서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하겠군.”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데미안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레오나는 그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웃으실 줄도 아시는구나.’

그의 무표정만 봐왔던 터라, 그의 미소가 생소했다.

레오나도 마주 웃었다.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단장님.”

“좋은 공부가 되었다니, 다행이군. 그만 들어가 쉬도록.”

“예, 단장님도 편안한 밤 되십시오.”

히죽 웃은 레오나는 그에게 경례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데미안과의 대련은 정말 강렬했다.

‘짜릿해.’

한 번이어서 아쉬울 뿐이었다.

* * *

음습한 기운이 풍기는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제단에 검은 로브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2황녀 비비안이었다.

2황녀 비비안은 제단 위에 그려진 커다란 핏빛 마법진 위에 서서, 황홀한 표정으로 품 안에 있는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후후후.”

수정 구슬에 찬 붉은 에너지가 영롱한 빛을 띠었다.

2황녀 비비안은 그 영롱한 빛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줄어들었던 힘이 늘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번 균열 사건으로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소비했다. 그걸 이번의식을 통해 조금 수복한 것이다.

“이걸로 다이앤에게 조금은 타격을 줄 수 있겠어.”

다이앤은 여러모로 걸림돌이었다.

황후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국민의 사랑도 받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가련한 황녀.

그 이미지 덕에 다이앤 황녀는 순수하고 고결한 황녀라 불리었다.

노력 하나 없이 적통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졌다.

가족, 사랑, 동경.

“약해빠진 주제에, 노력도 안 하는 주제에, 그런 과분한 사랑은 말도 안 되지.”

2황녀 비비안은 인정을 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어릴 적부터 혹독하게 공부를 하였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흑마법에 손을 대었다.

흑마법은 빠른 시간에 강해질 수 있는 위대한 마법이었다. 그 방법이 다소 거칠 뿐이다.

그럼 어떠한가. 세상은 강한 자의 편인 것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 그건 당연한 이치였다.

2황녀 비비안은 어릴 적부터 그것을 깨우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하였다.

“빼앗기지 않아.”

그 무엇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수정 구슬을 품에 안은 2황녀 비비안은 제단을 내려와 이동 마법진 위에 섰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지하 공간으로 이동되었다.

그녀는 수정 구슬을 받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그녀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 * *

평화로운 오전.

다이앤 황녀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녀의 취미는 정원을 가꾸는 일이었다.

지금도 정원사의 복장을 한 채 손수 흙을 만지며 꽃모종을 심었다.

옆에서 측근 시녀 세나가 그것을 도와주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꽃을 피울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설레.”

“분명, 아름답게 필 거예요.”

“그렇겠지?”

그녀는 삽으로 흙을 덮어주며 꽃모종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무럭무럭 자라렴.”

뿌듯한 얼굴로 물을 주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악!”

다이앤 황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전하!”

놀란 시녀 세나가 황녀를 살폈다.

“파, 팔이…….”

황녀의 오른쪽 팔에 감긴 붕대가 찢어지며, 검은 꽃문양이 진한 흑빛을 띠더니 사이한 기운이 다이앤 황녀를 감쌌다.

“이, 이건…….”

시녀는 황급히 시종들을 불렀다.

“황녀 전하를 침실로 모셔라…….”

시종들이 황녀를 업고 그녀의 침실로 이동했다.

황녀를 침대에 눕히고, 시녀 세나는 황제와 황후, 황태자에게 사실을 알렸다.

잠시 후, 세 사람이 황녀의 침실에 모였다.

황녀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다.

“분명 저주를 중화시켰다고 하지 않았나!”

황제의 노성에 시녀 세나가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분명 그러했습니다.”

“한데 왜 또다시 저주가 발현된 것이지?”

“그, 그게…….”

시녀가 대답을 못 하자, 황제가 화를 삭이며 말했다.

“당장 그 신관에게 연락을 취해라.”

“예, 예. 폐하.”

시녀가 서둘러 나가자, 황제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황녀의 손을 잡았다.

“왜 또다시 이런 일이…….”

황후가 황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너무 걱정 말아요. 신관에게 연락하러 갔으니, 방법이 있을 겁니다.”

“하아.”

황태자 디에고도 눈가를 일그러뜨린 채 황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더없이 맑고 순수한 아이.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졌다 자부한 그의 누이가 저주라니.

가혹한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잠시 후, 시녀 세나가 돌아왔다.

“폐하.”

“그래, 신관은 온다더냐?”

“황녀 전하의 저주가 다시 발현되었다면, 전하를 저주한 배후가 또다시 저주를 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되면 방법이 없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신성력으로 중화를 시키면 되지 않느냐!”

“죄송합니다. 신관의 말론, 중화를 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그럼, 황녀는 가망이 없다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시녀 세나가 바닥에 엎드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 다이앤 황녀가 눈을 떴다.

황후가 다이앤에게 다가가 물었다.

“다이앤……. 정신이 들었니?”

황후가 눈을 뜬 다이앤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전 괜찮아요. 어마마마.”

황태자 디에고가 짜증을 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바보가. 저주가 다시 발현되었는데.”

다이앤 황녀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그의 걱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이앤 황녀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아요. 저 쉽게 안 죽어요. 아바마마, 어마마마, 그리고 오라버니.”

황제가 다이앤 황녀를 끌어안았다.

“오냐, 넌 반드시 살 것이다. 내가 그리하게 만들 것이다.”

“그럼, 넌 반드시 살 거란다.”

황제와 황후가 그녀를 위로했다.

세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이앤을 살릴 거리고 다짐했다.

* * *

어두운 지하실에서 2황녀 비비안은 거울 속에 비친 다이앤 황녀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이앤 황녀의 침실에 보낸 사역마의 눈을 통해 본 광경은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다이앤 황녀의 고통에 슬픔에 젖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태자. 그들의 그런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2황녀 비비안은 기분이 좋았다.

“더욱 괴로워해, 발버둥 쳐. 그래야 짓밟는 재미가 있으니까.”

2황녀 비비안은 검지 끝으로 다이앤의 얼굴을 쓸었다.

“그 순수한 영혼이 죽음에 물들어 무너지는 모습이 기대돼. 다이앤.”

지독한 악의가 2황녀 비비안의 오렌지빛 눈동자에서 일렁였다.

“세상은 공평해야 하잖아. 노력한 사람이 더 많이 가져야 하는 거잖아. 안 그래?”

좋은 부모의 밑에서 태어나 눈부신 사랑을 받은 그녀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비천한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혹독한 노력으로 설 자리를 간신히 마련했다.

다이앤이 미웠다. 사랑받지 못한 자신과 달리 너무나 빛나 보이는 그 모습이 싫었다.

자신이 서 있던 바닥으로 끌어 내리고 싶었다. 진창을 구르며 그 빛이 어둠에 물들어 사그라지기를 바랐다.

그것은 악의였다. 그녀가 다이앤 황녀에게 품은 악의.

악의는 힘이 되었고, 다이앤 황녀에게 저주를 내렸다.

평생 고통을 선사하는 지독한 저주를.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게 아주 보기 좋아. 그래, 그렇게 계속 발버둥 쳐. 내가 그랬던 것처럼.”

2황녀 비비안의 시선이 수정 구슬로 향했다.

절반이 넘게 남아 있던 에너지가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저주를 강화시키는 데 힘을 썼기 때문이다.

“붉은 달이 뜨면 더 많은 에너지를 모을 수 있으니 조급해할 필요 없어.”

서둘러 움직이라고 지시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레오나는 데미안 단장의 호출을 받고 라파엘과 함께 단장실을 방문했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레오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대답하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를 받아 든 레오나와 라파엘은 내용을 훑어보았다.

“마법진을 분석하신 겁니까?”

레오나의 물음에, 데미안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위치는 K197, 빈민가에 위치한 지하실이다. 정확한 주소는 여기다.”

데미안은 주소가 적힌 쪽지를 레오나에게 주었다.

“둘이 가서 조사해 보도록. 그리고 받아라.”

데미안은 두 사람에게 통신 구슬을 나누어 주었다.

“나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통신 구슬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걸로 바로 연락하면 된다.”

통신 구슬을 받아 든 레오나가 서류를 다시 돌려주었다.

“알겠습니다. 철저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라파엘도 같은 대답을 하였다.

“나가보도록.”

레오나와 라파엘은 경례하고는 단장실을 나와 바로 움직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말을 타고 황궁을 나와 빈민가로 향했다.

쪽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탐문한 결과,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위치는 낡은 판잣집이었다.

판잣집 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레오나는 검 손잡이로 자물쇠를 부쉈다. 자물쇠에 연결된 쇠사슬까지 걷어 내자, 문을 열 수 있었다.

“지하실이 확실하군.”

“불 좀 켜봐.”

레오나의 말에 라파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라이트.”

빛의 구체가 허공에 떠올라 지하실을 비췄다.

“가자.”

레오나와 라파엘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나선으로 이어져 있었고 꽤 깊었다.

밑으로 내려가니 또 다른 철문이 나왔다. 그 철문은 열려 있었다.

레오나는 의아함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보인 것은 일렬로 이어져 있는 철창 감옥이었다. 악취도 났다.

“냄새가 지독하군.”

살면서 이런 악취는 처음 맡아본 라파엘은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레오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기에 납치한 아이들을 가둬놓았던 모양이네.”

“레오나, 넌 괜찮나?”

“뭐가?”

“냄새가 심하다.”

“견디기 힘들면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어. 그리고 난 괜찮아.”

냄새와는 꽤 친숙한 편이었다.

이보다 더한 시체 썩는 냄새도 맡아봤는데 그에 비하면 이 정도 악취는 별것 아니다.

“일단 살펴보자.”

“알겠다.”

레오나와 라파엘은 철창 감옥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 철창 감옥에서 핏자국을 발견했다.

레오나는 바닥에 떨어진 피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피였다.

“여길 비운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알지?”

“여기,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어. 그렇다는 건 떠난 시간이 얼마 안 되었다는 증거지.”

라파엘이 신기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그런 것까지 알아낼 수 있다니, 대단하군.”

“이건 관찰력이야. 조금만 집중하여 관찰하면 알 수 있는 일이라고.”

“그렇군. 알려줘서 고맙다.”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여긴 버린 게 분명해. 아니면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거나.”

지하실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은 그 용도를 다했다고 봐도 옳다.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건 무슨 뜻이지?”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는 거지.”

“납치된 아이들이 전부 죽었단 뜻이라고?”

라파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많은 아이가 한꺼번에 죽다니. 그런 끔찍한 일이 어디 있을까.

레오나는 대충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본 다음 철창 감옥을 나왔다.

“일단 돌아가자. 여기서 더 건질 건 없어 보여.”

“여긴 그대로 놔둘 생각인가?”

“아니, 묻어버려야지.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도록.”

“일단 보고한 뒤에 시작하자고.”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나는 데미안에게서 받은 통신 구슬을 꺼냈다.

그런데.

“레오나,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어?”

“저기…….”

레오나의 등 뒤로 균열이 벌어졌다.

“미친…….”

벌어진 균열에서 거미 마물이 튀어나왔다.

* * *

어두운 지하 공간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던 2황녀 비비안이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거울을 손끝으로 쓸었다.

“이번엔 어떻게 빠져나오려나.”

거울 속에는 하늘빛 머리의 기사가 거미 마물과 싸우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내가 너 때문에 힘을 좀 썼거든.”

균열을 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일을 위해 특별히 K197 구역에 함정을 팠다.

그리고 그 함정에 그 여자가 걸려들었다.

“그런데 넌 좀 의외야.”

그녀의 손끝이 레오나의 옆에 선 남자에게 향했다.

“라파엘 드 바스티안 공자. 당신이 그 여자와 함께 움직일 줄이야.”

바스티안 공작가는 그녀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문이었다.

“일단 이쪽은 제외.”

그가 다치면 곤란해진다. 바스티안 공작가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테니까.

2황녀 비비안은 거울 속에 비친 균열을 향해 고대어를 읊조렸다. 그녀가 읊은 고대어는 문자가 되어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문자는 거미 마물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녀가 전달한 내용은 레오나, 그 여자만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제야 볼만하겠어.”

2황녀 비비안에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 * *

레오나는 황당한 얼굴로 자신에게만 다가오는 거미 마물들을 보았다.

“뭐야, 이것들 나한테만 몰려오네?”

라파엘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레오나가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목적이다, 이거야?”

“레오나, 돕겠다.”

라파엘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럴 때 든든한 아군이 있다는 건 꽤 마음이 놓이는 일이다.

레오나는 검을 늘어뜨렸다.

“그래, 해보자. 니들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레오나가 신성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라파엘에게 신성 마법을 걸었다.

“블레스.”

신의 축복. 공격과 방어가 향상되는 버프였다.

“레오나, 이건…….”

“신성 마법 계열, 보조 마법으로 공격력과 방어력을 올려주지. 우리 한번 제대로 날뛰어 보자고.”

라파엘이 미소 지었다.

“좋다.”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거미 마물을 향해 떨어지는 두 사람의 몸엔 은은한 황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콰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레오나가 휘두른 검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라데온의 신성 검술.

제3식. 너울거리는 빛의 파도.

레오나의 검에서 뻗어 나간 신성력이 파도처럼 일어나 거미 마물을 덮쳤다.

신성력의 파도를 맞은 거미 마물 떼가 속절없이 소멸하였다.

제3식은 검을 통해 신성력을 해일처럼 일으켜 공격하는 검식으로 대규모 살상에 유리한 공격이었다.

열 마리가 넘는 거미 마물이 한 방에 소멸했다.

라파엘은 떨리는 눈으로 그 경이로운 광경을 바라보았다.

레오나가 라파엘을 향해 몸을 날렸다.

샤아악!

레오나가 휘두른 검이 라파엘의 뒤에 다가온 거미 마물을 베었다.

흠칫한 라파엘이 타오르는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방심했군.”

“자, 우리 다시 한번 가자고.”

균열은 닫히지 않았고, 마물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방심할 틈이 없었다.

라파엘이 굳은 얼굴로 마력을 일으켰다.

바스티안 공작가의 검식이 발현되었다.

바스티안가 검식.

제1식. 섬광의 일섬.

검을 타고 번개의 기운이 파지직 거렸다.

쾌속하게 내지르자 검에 찔린 거미 마물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새카맣게 타버렸다. 빠르고 패도적인 검술이었다.

레오나는 감탄스러운 얼굴로 보았다.

‘저게 바스티안가의 검식이로군.’

두 눈으로 보니, 굉장히 패도적인 쾌속의 검이었다. 지금의 바스티안 공작가를 있게 한 대단한 검식이다.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레오나는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거미 마물을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쪽에서 이렇게 나오면, 이쪽에서도 그에 걸맞게 어울려 주는 수밖에.

레오나의 검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신성력은 떼로 몰려드는 거미 마물을 향했다.

* * *

2황녀 비비안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게 무슨…….”

거울 속에 비친 눈부신 섬광과 신성한 빛.

그 빛에 그녀가 소환한 거미 마물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렇게 강하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그 무능한 레오나 칼리반이 이렇게 강한 자였다고?”

기가 막혔다.

거울을 쥔 그녀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2황녀 비비안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악의로 일렁였다.

신성한 빛에 의해 거미 마물이 모조리 소멸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경고로는 이 정도면 적당해.”

오늘의 일은 일종의 경고였다.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파고들지 말라는 경고.

그리고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레오나가 생각보다 강해서 놀랐지만, 비비안은 오늘의 목적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음번엔 어림없어.”

거울을 바라보며 2황녀 비비안은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균열이 닫혔다.

레오나와 라파엘의 활약 덕분에 거미 마물이 소멸했다.

두 사람은 전투의 여파로 체력이 다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몇백 마리의 거미 마물을 상대했다. 숫자가 그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레오나, 대단했다.”

“나야말로, 바스티안가의 검술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라파엘은 바스티안가의 검술을 수련할 땐 늘 혼자 했다.

그래서 다른 동기들은 그가 바스티안가의 검술을 수련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보여줘서도 안 되었다.

가문의 검술을 엿보는 것은 상당한 실례에 해당했으니까.

레오나가 라데온의 신성 검술을 혼자 수련하듯, 라파엘 또한 그러했다.

“우리 해냈다.”

“이만 귀궁하는 게 좋겠군.”

“그러자. 보고도 해야 하니까.”

레오나는 라파엘과 함께 지하실을 나왔다.

밖은 벌써 밤이 되어 있었다.

레오나는 히죽 웃으며 판잣집을 보더니 신성 마법을 일으켰다.

“버닝핸드.”

레오나의 손이 황금빛으로 일렁였다.

“레오나, 뭐 하려는…….”

“부숴야지.”

레오나는 판잣집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황금빛 주먹을 맞은 판잣집이 허물어졌다. 이어서 레오나는 땅바닥에 손바닥을 대었다.

“포스.”

무너진 잔해 속으로 스며든 신성력이 땅을 뒤집어엎었다. 그야말로 매장을 시켜버린 셈이다.

라파엘은 기가 막힌단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는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손을 탈탈 털었다.

“가자.”

“넌 대체…….”

“내가 뭐?”

“아니다.”

라파엘은 진심으로 레오나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기사단으로 복귀한 레오나와 라파엘은 데미안을 찾아가 보고를 했다.

“조사하러 갔더니, 균열이 열리고 마물이 습격했다고?”

“네.”

“그것도 레오나, 네가 목적이었다?”

“그렇더라고요. 그놈들이 저만 노렸습니다.”

라파엘도 레오나의 말에 동의했다.

데미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레오나가 노출된 것 같았다.

“둘 다 다친 곳은 없나?”

레오나가 씩 웃으며 엄지로 라파엘을 가리켰다.

“라파엘이 도와줘서 마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네가 가진 신성력을 보고 그쪽에서 경계한 것일 수도 있겠군.”

마물의 천적은 신성력이다. 레오나가 신성력을 지녔으니, 거슬리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경고의 의미도 함께 있었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앞으론 더욱 조심해야 할 것 같군. 너를 노리는 이상, 언제 어디서든 공격해 올 수 있으니.”

“조심하겠습니다.”

레오나의 대답에 데미안이 다음 건을 꺼냈다.

“지하실이 비어 있었다고 했나?”

“예,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 장소를 옮긴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레오나는 본 대로 말했다.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흔적?”

“사람이 머물렀다 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먹다 남은 음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누군가 흘린 피가 굳지 않았습니다.”

“낌새를 알아차리고 장소를 옮긴 것이 맞겠군. 용의주도한 자들이야.”

“꼬리가 밟힌 것을 알았으니, 조사하기 더욱 힘들어지겠군요.”

“장소를 옮긴 건, 그곳에 너희가 찾아갈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거기에 함정을 파놓았던 것이 분명하다.”

데미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신성력을 거슬려 하는 걸 보면 확실히 흑마법사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맞겠군.’

짐작이 그렇게 갔다.

데미안은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레오나는 준기사가 된 지 3개월이 조금 넘은 신입 기사다. 황녀 호위는 물론, 상당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는 인재.

‘그런 인재가 칼리반 백작가의 유명한 무능아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군.’

아이러니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레오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데미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다. 그만 가서 쉬도록.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일어나겠습니다, 단장님.”

레오나와 라파엘이 차례대로 경례하고 나가자, 혼자 남겨진 데미안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신성력을 가진 자의 등장과 흑마법사의 등장이라…….’

무언가 상당이 공교롭다. 잘 짜여진 극본처럼 흘러가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단장실의 문을 열고 부단장 란젤로가 들어왔다.

“단장님.”

“무슨 일이지, 란젤로?”

부단장 란젤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황녀 궁을 호위하라는 명이 내려왔습니다.”

“황녀 궁을?”

란젤로가 무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황녀 전하의 저주가 다시 발현되셨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데미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주가 다시?”

“예. 오늘 낮에 갑자기 쓰러지셨는데, 저주가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데미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단원들을 소집해 황녀 궁에 배치하도록.”

“준기사들도 포함시킬까요?”

“전부 배치한다.”

“예, 단장님.”

란젤로가 나가자, 데미안도 채비를 하였다.

황녀의 상태가 위중하니, 호위를 철저히 해야 한다. 호위 임무는 백기사단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 * *

늦은 밤. 긴급 소집으로 백기사단은 황녀 궁으로 향했다. 정예 기사와 준기사들이 모두 함께였다.

레오나와 라파엘은 황녀 궁의 입구를 지켰다. 내부는 정예 기사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레오나는 임무가 내려오면서 선배 기사들로부터 황녀에 대한 극비 사항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건 백기사단과 황실, 황실 측근 일부만 아는 극비였다.

바로 1황녀의 저주였다.

‘황녀가 저주라니.’

전혀 예상 밖이다.

레오나는 굳게 닫힌 황녀 궁의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 그 불길한 기운은 저주가 분명했군.’

황녀에게서 느껴진 불길한 기운. 그건 황녀가 저주에 걸렸기 때문에 느낀 기운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매우 더럽더라.’

대체 무슨 저주일까?

‘흑마법사의 저주인가?’

여기서도 흑마법사의 손길이 닿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 황녀 궁의 문이 열리며 다이앤 황녀가 정예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왔다.

다이앤 황녀는 레오나와 라파엘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레오나 경과 라파엘 경이 여기 계셨네요.”

레오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드세요.”

레오나와 라파엘이 고개를 들자 다이앤 황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레오나가 물었다.

“안 주무셨습니까?”

“잠이 안 와서요.”

“밤바람이 찹니다.”

“괜찮아요. 숄도 둘렀는걸요. 조금만 걷다 들어갈 거예요. 두 분도 같이 가요.”

“저희도요?”

레오나와 라파엘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이앤 황녀가 재촉했다.

“같이 가요.”

레오나와 라파엘은 선배 기사들을 보았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다이앤 황녀에게 같이 가겠다고 하였다.

두 사람은 1미터 간격을 유지한 채 황녀의 뒤를 따랐다.

혼자 앞서 나가던 황녀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멈춘 곳에는 갓 심은 꽃모종들이 있었다.

“이 아이들, 제가 심은 거예요. 곧 예쁜 꽃을 피울 거에요.”

레오나와 라파엘은 황녀가 심은 꽃모종을 보았다.

‘패랭이꽃이군.’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었다.

“제가 이 아이들이 예쁘게 피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저주 때문인가.’

레오나의 시선이 그녀의 여린 팔로 향했다. 그녀의 오른쪽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저주의 흔적이 팔에 남았나?’

그런 생각을 하려는데 황녀 다이앤이 머리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황녀 전하.”

레오나와 라파엘이 그녀의 한쪽 팔을 나눠 잡고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윽…….”

황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통을 느끼는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안 되겠습니다. 침실로 다시 모시겠습니다.”

레오나가 황녀를 안아 올렸다.

다년간 수련으로 단련된 몸이 이런 용도로 쓰이게 될 줄이야.

“내가 할까?”

“아니, 괜찮아.”

레오나가 선배 기사들을 보았다.

“황녀 전하를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가자.”

레오나는 라파엘, 정예 기사들과 함께 황녀를 안고 급히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황녀를 눕히고 나가려는 데 황녀가 레오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황녀 전하?”

“……나가지 말고 곁에 있어 줘요.”

레오나가 라파엘과 선배 기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먼저 나가 있겠다는 말을 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려움에 떠는 다이앤 황녀의 얼굴을 보았다.

“알겠습니다. 주무실 때까지 제가 곁에서 지키겠습니다.”

다이앤 황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안심이 되었는지 다이앤 황녀가 레오나의 손목을 놔주었다. 그러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황녀가 잠들었을 때,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부디 편안한 밤 되시기를.”

레오나의 손에서 신성력이 흘러나왔다. 신성력은 황녀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것으로 당분간은 고통이 없을 겁니다.’

황녀의 몸에 있는 저주를 당분간 잠들게 해주는 신성 마법이었다.

침실 문을 닫고 나온 레오나는 선배 기사들에게 경례하고는 근무지로 복귀했다.

* * *

햇살이 스미는 아침. 다이앤 황녀는 개운한 얼굴로 잠에서 깼다.

축 처졌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무척 가뿐했다.

“정말 오랜만에 푹 잤어.”

밤마다 찾아오는 고통도 어젯밤에는 없었다.

“레오나 경이 지켜줘서 그런가?”

어젯밤에 레오나는 그녀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주었다. 그 덕분인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황녀 전하, 일어나셨군요.”

침실 문을 열고 시녀 세나가 들어왔다.

“응, 좋은 아침이야. 세나.”

시녀 세나는 다이앤에게 있어 친언니 같은 사람이었다. 늘 곁에 있어 주었고, 다정다감했으며, 섬세했다.

“세안수를 가져왔습니다.”

다이앤 황녀는 시녀 세나의 시중을 받으며 세안을 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머리를 빗겨드릴게요.”

“응.”

시녀 세나가 꿀을 발라놓은 것만 같은 다이앤 황녀의 금발에 빗질을 하며, 거울 속에 비친 다이앤 황녀의 얼굴을 살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오랜만에 잠을 푹 자서 그런 가봐.”

“매일 밤 힘들어하셨는데 어젯밤은 편안하셨던 거예요?”

“응.”

시녀 세나는 다이앤의 머리를 반묶음으로 해주고 분홍리본으로 장식해 주었다.

“오늘은 반묶음으로 해봤어요. 마음에 드세요?”

“당연하지. 세나가 해주는 건 늘 최고인걸.”

“자, 그럼 이제 옷을 갈아입으러 가실까요?”

다이앤 황녀는 빙그레 웃으며 시녀 세나와 함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드레스룸에서 연보랏빛 드레스를 골라 입은 다이앤 황녀는 무척 사랑스러웠다.

“폐하께서 보시면 놀라시겠어요.”

“왜?”

“너무 사랑스러우셔서요.”

“세나도 참.”

칭찬에 약한 다이앤 황녀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이제 식당으로 가세요.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그럴게.”

식당으로 향하는 다이앤 황녀의 발걸음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다.

무엇보다 오늘은 밝은 모습으로 가족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다이앤 황녀가 황녀 궁을 나오자, 레오나와 라파엘이 인사를 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두 분 다 고개 드세요.”

레오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다이앤이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시는군요.”

라파엘의 말이었다.

“네, 아주 잠을 잘 잤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이제 갈까요? 가족들이 기다려서 서둘러야 해요.”

“다녀오십시오.”

레오나가 대답하자, 라파엘도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멀어지는 다이앤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제임스와 말론이 다가왔다. 교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고생했다. 가서 쉬어라. 레오나.”

“수고해라.”

제임스가 어깨를 다독거리자, 레오나도 피식 웃으며 말한 뒤 걸음을 옮겼다.

“라파엘, 너도 쉬어라.”

“알겠다.”

말론이 그렇게 말하자, 라파엘도 답한 뒤 레오나의 뒤를 따랐다.

레오나는 라파엘과 나란히 걸으며 배를 문질렀다.

“아, 정말 배고프다. 넌 괜찮냐?”

“나도 배고프다.”

“그래, 그럼 서두르자.”

레오나가 걸음을 재촉하자, 라파엘도 빠른 걸음을 했다.

두 사람은 곧장 기사단 식당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레오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황녀 궁을 호위하느라 밤을 새워서 그런지 자꾸 하품이 나왔다.

레오나가 연신 하품하자, 라파엘이 레오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많이 졸린 가보군.”

“넌 안 졸리냐?”

“괜찮다.”

“나만 졸린가?”

“네가 유독 졸음을 못 참는 것 같긴 하더군.”

밤새 호위를 서면서, 레오나가 몇 번이나 하품을 했는지 라파엘은 알고 있었다.

“잠에 있어선 내가 강자인 것 같군.”

“뭐래.”

“잠은 내가 너보다 강하다.”

“아, 그러셔?”

“비꼬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그렇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강하니 뭐니 하냐.”

“사소한 것도 승부에 포함된다.”

레오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재수 없어.’

도저히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 * *

레오나는 아침 식사를 한 뒤,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잠을 좀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라파엘은 숙소로 가지 않고,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는 게 보였다.

레오나가 그런 라파엘의 팔을 붙잡았다.

“너, 뭐 하려고?”

“수련.”

“피곤하지도 않아? 좀 쉬었다가 해. 어차피 저녁 시간까지는 시간이 비는데.”

저녁 시간이 되면 다시 교대하러 가야 한다. 낮에는 동기들이, 밤에는 레오나와 라파엘이 호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라파엘은 전혀 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시간은 금이라는 말이 있다.”

“뭐?”

레오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라파엘을 보았다.

“나의 성장을 키우는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다. 그럼.”

레오나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라파엘은 연무장으로 걸어가, 수련을 시작했다. 스트레칭부터 시작해, 기본적인 기술을 수련했다.

레오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독한 놈.’

라파엘을 보면 자신이 무척 게으름뱅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난 쉴 거야.’

쉴 때는 쉬어줘야 한다는 것이 레오나의 생각이었다.

레오나는 수련하는 라파엘의 모습을 두 눈에 담으며 숙소로 들어갔다.

침대에 그대로 몸을 던진 레오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잠이 보약이란 말이 있듯이, 레오나에겐 지금 잠이 중요했다.

잠든 레오나는 저녁 시간 즈음에 눈을 떴다.

잠을 좀 자고 났더니, 몸이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흐아, 잘 잤다.”

기지개를 쭉 켜고 몸을 일으켰다.

창밖을 바라보니,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5시였다. 교대 시간까지는 한 시간가량이 남았다.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니, 라파엘은 보이지 않고 유릭이 혼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라파엘은 그새 갔나 보네.”

레오나는 숙소를 나와 유릭에게 다가갔다.

유릭은 간식을 먹고 있었다.

“유릭, 뭐 먹어?”

레오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자, 닭 다리를 뜯고 있던 유릭이 깜짝 놀랐다.

“레오나?”

“응.”

레오나의 시선이 유릭이 먹고 있는 닭튀김으로 향했다.

“닭튀김 먹고 있었어?”

“어, 어.”

“웬 닭튀김이야?”

“식당 요리사가 만들어준 간식이야.”

레오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식당에서 안 먹고 혼자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그냥, 저녁노을 보면서 먹으려고.”

유릭의 시선이 하늘로 향하자, 레오나도 덩달아 하늘을 보게 되었다.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좋네.”

“그렇지?”

유릭이 웃자, 레오나가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하나만 줘봐.”

유릭이 조심스럽게 닭 다리를 레오나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어.”

“잘 먹을게.”

레오나는 유릭이 건넨 닭 다리를 뜯어 먹었다.

기름기를 쫙 뺀 것이 담백하고 쫄깃했다.

“근데 너, 라파엘 못 봤냐?”

“라파엘? 아까 잠시 집에 갔다 온다고 하고 가던데?”

“그래?”

“금방 온댔어. 여기서 멀지 않다고 했으니까.”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나는 닭고기를 마저 뜯어 먹었다.

“근데 마실 건 없냐?”

“마실 거라면 이거밖에 없는데?”

유릭이 자신이 마시던 잔을 보여주자, 레오나는 덥석 잡았다.

“한 모금만 마시자.”

유릭이 대답할 사이도 없이 레오나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포도 주스네?”

“응, 그냥 기분 좀 내보려고.”

“맛있네.”

“그렇지?”

유릭이 수줍게 웃자, 레오나가 유릭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유릭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좋다.”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며 닭튀김을 뜯어 먹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 * *

라파엘은 정확하게 교대 시간에 맞춰서 돌아왔다. 시간은 정말 칼같이 지키는 녀석이었다.

오늘도 황녀 궁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선배 기사 하나가 레오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세요?”

“황녀 전하께서 너를 찾으신다.”

레오나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선배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라.”

“아, 네.”

레오나는 선배 기사의 뒤를 따라 황녀 궁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 앞에 도착하자, 선배 기사가 턱짓으로 들어가 보라고 하였다.

“그럼.”

레오나는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레오나 경.”

레오나를 본 다이앤 황녀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황녀 전하?”

“제가 잠들 때까지 경께서 저번처럼 저를 지켜주시면 안 될까요?”

다이앤 황녀의 다이아몬드 빛 눈동자가 간절함으로 물들었다.

“오늘도 두려우신가요?”

침대 위로 올라간 다이앤 황녀가 다리를 그러모아 얼굴을 파묻고 힘없이 대답했다.

“밤은 항상 두려워요. 그러니 경이 좀 지켜줘요.”

“알겠습니다. 누우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다이앤 황녀가 몸을 눕혔다. 그러자 레오나가 가슴께로 이불을 올려 덮어주었다.

다이앤 황녀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레오나는 오늘도 황녀가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그녀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신성 마법을 일으키자, 다이앤 황녀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레오나는 곤히 잠든 다이앤 황녀를 바라보다, 침실을 나왔다.

오늘 밤도 그녀는 편히 잠들 것이다.

* * *

레오나가 지켜줄 때마다, 편안하게 잠을 잔 다이앤 황녀는 매일 레오나를 찾았다.

레오나가 곁에 있으면 이상하게 잠이 잘 왔다.

오늘도 다이앤 황녀는 레오나를 곁에 두고 눈을 감았다.

레오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막 신성력을 사용하려는데, 황녀가 눈을 떴다.

“경, 뭐 하는 거예요?”

레오나는 급히 손을 거두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이앤 황녀가 고개를 저었다.

“경이 분명 제 머리에 손을 얹었어요. 무언갈 하신 거죠?”

“별것 아닙니다.”

“마법인가요?”

레오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신성 마법입니다.”

“신성 마법이요?”

“예.”

다이앤 황녀가 신기한 얼굴로 레오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고대의 마법을 경이 사용한다는 건가요?”

“신성 마법에 대해 아십니까?”

“관심이 있어서, 공부한 적이 있어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신기해요.”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워낙 신비로운 마법이잖아요.”

신관들이 신성력을 이용해 치유와 정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건 마법이라기보다는 신성력을 쏟아붓는 것에 더 가까웠다.

신성 마법은 다른 마법들보다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것이었다.

마력 대신 신성력을 이용해 발현하는 마법. 그 성질 때문에 주로 보조 계열로 많이 사용되지만, 공격용으로도 변환 가능하다고도 했다.

여기까지가 다이앤 황녀가 아는 신성 마법이었다.

레오나도 다이앤 황녀가 신기해하는 것을 이해했다. 신성국과 달리 제국에서는 신성 마법이 오래전에 사라진 마법이기 때문이다.

즉, 고대의 유물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제 그만 주무시는 게 어떠십니까?”

다이앤 황녀가 레오나의 손을 잡고 자신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마법을 걸어주세요.”

레오나가 피식 웃었다.

“경이 마법을 걸어주면 더 잘 잘 것 같아.”

다이아몬드 빛 눈동자로 초롱초롱하게 바라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신성력을 일으켜 숙면에 도움을 주는 마법을 걸었다.

“오늘도 편히 주무십시오.”

다이앤 황녀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며, 그녀의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걸렸다.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가슴께로 올려주고는 일어섰다.

침실 문을 닫고 나오자, 선배 기사가 레오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황녀 전하께서는 잠이 드셨나?”

“네, 잠드셨습니다.”

“다행이군.”

선배 기사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의 저주를 그 역시도 무척 안타까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주만 아니라면 더없이 밝고 쾌활하실 텐데, 저주가 황녀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그때 침실 안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기운은…….’

레오나는 황급히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레오나의 행동을 선배 기사들이 제지하기 위해 뛰어 들어왔다가, 기이한 광경이 놀라고 말았다.

다이앤 황녀가 누워 있는 침대 위에 검은 구름 같은 것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레오나는 한달음에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다이앤 황녀의 침대 위에 떠 있는 불길한 검은 구름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선배 기사들도 구름을 보며 인상을 굳혔다.

“이게 뭐지?”

“저주입니다.”

“저주라고?”

“네.”

저주의 형태를 처음 본 그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반면 레오나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새로운 저주야. 저주를 중첩시키려는 게 분명해.’

저주 위에 또 다른 저주를 거는 것. 그건 사람을 고통 속에 밀어 넣겠다는 뜻이다.

“으…….”

다이앤 황녀가 신음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 기분 좋게 눈을 감으셨는데, 지금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때 황녀의 오른팔이 허공에 들리며, 붕대가 뜯겨져 나갔다. 새로운 저주가 다이앤 황녀의 오른팔에 새겨지려는 것 같았다.

레오나의 시선이 황녀의 오른팔로 향했다. 그곳엔 주먹만 한 검은 꽃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도 무려 다섯 송이나 피어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다섯 겹씩이나…….’

놀랍게도 다이앤 황녀의 팔에 새겨진 검은 꽃문양에서 레오나는 다섯 가지의 저주를 보았다.

황녀의 몸엔 다섯 가지의 저주가 중첩되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저주를 중첩시킨다고?’

이건 그녀를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다. 처절하게 고통받게 죽게 하려는 것이다.

지독한 악의가 느껴졌다.

레오나는 침대 위에 뜬 검은 구름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둘 것 같아?’

흑마법은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이를 악문 레오나가 먹구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리무브 커즈.”

레오나의 손에서 쏟아져 나온 황금빛이 검은 구름을 집어삼켰다.

검은 구름이 발버둥 쳤다. 그러나 레오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주가 황녀에게 닿아서는 안 된다.

“꺼져.”

레오나의 강력한 의지가 황금빛에 힘이 실려 검은 구름을 몰아냈다.

선배 기사들은 그 광경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아아아-

검은 구름이 완전히 정화되었다. 그리고 황녀의 얼굴이 다시 평안을 되찾았다.

그제야 레오나는 숨을 돌렸다.

선배 기사들이 떨리는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 방금 뭐 한 거지?”

레오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별것 아니란 듯이.

“저주를 해주하는 신성 마법을 썼습니다.”

“저주를 해주했다고?”

“네, 방금 나타난 건 새로운 저주였습니다.”

“새로운 저주?”

레오나는 굳은 얼굴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워 있는 다이앤 황녀를 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팔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그녀의 팔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선배 기사들을 보았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낫겠군.”

레오나는 선배 기사들과 함께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누군가 또 다른 저주를 황녀 전하의 몸에 새기려 한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합니다. 저주는 중첩될수록 그 효력이 강력해지니까요.”

“끔찍한 일이군.”

“네,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죠.”

그건 겪어봐서 잘 안다.

흑마법사와 싸우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저주도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와 싸우던 수하 기사가 저주에 걸린 적이 있었다. 아주 끔찍한 저주여서, 해주하는 데 애를 먹었었다.

‘지긋지긋했는데.’

여기서도 저주를 만나게 될 줄이야.

* * *

“악!”

어두운 지하 공간에서 수정 구슬을 붙들고 있던 2황녀 비비안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커억.”

가슴을 부여잡은 그녀는 비틀거리며 테이블에 놓인 거울로 다가왔다.

“무슨…….”

거울 속엔 다이앤 황녀의 침실이 보였고, 그 안엔 침대에 누워 있는 다이앤 황녀와 그 곁을 지키는 두 명의 기사가 있었다.

“또 너냐!”

거울 속에 비친 하늘빛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거슬렸다.

“크윽.”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실패한 저주가 주인에게 돌아와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거울을 붙든 2황녀 비비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핏발 선 눈으로 거울 속 레오나를 노려보았다.

“경고했는데도 또 방해를…….”

눈에 거슬린다. 거슬려 죽을 것 같았다.

입가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낸 2황녀 비비안은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손봐주고 싶지만, 아직은 안 된다. 붉은 달 의식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수정 구슬의 힘이 많이 줄어 있었다. 붉은 달 의식이 마무리될 때까지 힘을 아껴둬야 했다.

“이번 것만 성공했으면 더 큰 고통을 주었을 텐데, 아쉽게 됐어.”

방해꾼 때문에 실패했다.

“레오나……. 언젠가 이 빚은 반드시 갚아주지.”

어둠 속에서 거울을 바라보는 2황녀 비비안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 * *

레오나는 황녀에게 또 다른 저주가 뻔했다는 것을 데미안에게 보고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선배 기사들도 있었다.

데미안이 놀라운 얼굴로 되물었다.

“새로운 저주라고?”

“예, 그렇습니다. 선배님들도 함께 보았습니다.”

레오나가 선배 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자, 선배 기사들도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레오나가 신성 마법으로 정화했다는 것까지 다 말했다.

“네가 신성 마법으로 정화했다는 건가.”

“네.”

“대단하군.”

신성 마법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그동안 레오나가 보여준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과는 또 다른 차원의 능력이라고 할까?

“저주를 정화했다라…….”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 신관이 있었다면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정화는 신관들도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이다.

저주가 상대의 몸에 달라붙기 전에 처리하는 것은 쉬우니까.

그러나 저주가 상대의 몸에 달라붙어 활개를 치기 시작하면 복잡해진다.

그 사람의 몸에 신성력을 쏟아부어 몰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황녀의 몸에는 무려 다섯 가지의 저주가 걸려 있다. 그걸 모두 몰아내려면, 엄청난 신성력이 필요할 것이다.

레오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정화의 힘이라면, 황녀 전하의 몸에 있는 저주를 완벽하게 없앨 수도 있나?”

“그랬다면 요양을 가셨을 때 신관들이 정화했을 겁니다.”

데미안의 짙푸른 눈동자가 레오나를 날카롭게 훑었다.

“너는 신관들이 못한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군.”

“……예, 사실은 새로운 저주를 정화할 때 황녀 전하의 오른팔을 보았습니다.”

그건 정말 끔찍한 저주였다.

“계속 말해 보도록.”

“황녀 전하의 몸에는 다섯 가지의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이번에는 데미안도 놀랐다. 선배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몸에 그렇게 많은 저주가 걸릴 수가 있나? 그렇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닌가.

“다섯 가지의 저주라고 했나?”

“네, 황녀 전하의 오른팔에 각인된 다섯 개의 꽃문양이 그 증거입니다. 그건 저주의 각인이라고 합니다. 꽃문양이 다섯 개라는 것은 다섯 가지의 저주가 걸려 있다는 걸 뜻합니다.”

“끔찍하군.”

데미안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그런데 넌 저주에 어떻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거지?”

“신성력을 각성하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였습니다. 거기엔 저주도 포함되어 있었고요.”

거짓말이다. 레오나는 신성력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다. 그건 오직 율리아나의 지식이었다.

그걸 털어놓을 수는 없어서 거짓말을 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자신이 레오나가 아닌 율리아나라고 한다면 믿어주기나 할까?

율리아나의 영혼이 레오나의 몸에 깃들었다는 말을 누가 믿기나 할까. 본인 스스로도 믿기 힘든데.

그런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데미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해주할 방법은 없나?”

“엄청난 양의 신성력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해서 신관들도 함부로 해주하지 못한 겁니다.”

신관들이 지닌 신성력은 그릇의 크기가 있다.

신성력을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릇에 담긴 만큼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릇보다 많은 양이 필요할 경우엔 신관들도 답이 없다.

서로 돌아가며 한다고 해도, 다섯 가지나 되는 저주를 해주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저주의 발현을 잠시 눌러놓는 정도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양이 필요한 거지?”

“한 번에 한 사람의 몸을 가득 채울 정도입니다.”

“그럼, 해주할 수 없다는 건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뭐지?”

레오나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입니다.”

데미안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제가 하면 됩니다.”

“엄청난 양의 신성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신관들도 못 하는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관이 아니니까요.”

레오나가 가진 신성력은 신관이 가진 그릇의 크기로 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신성력은 이미 그릇을 넘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응축되고 응축된 신성력이 단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제 신관들의 것보다 신성력은 조금 특별합니다.”

“특별하다고?”

“네,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레오나는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데미안을 보았다. 그녀의 진심이 느껴진 것인지 데미안은 추궁하지 않았다.

“레오나, 너를 믿겠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레오나는 진심을 다해 허리를 숙였다. 레오나는 진실을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데미안이 물었다.

“너만 할 수 있다 했나?”

“네, 저만 할 수 있습니다. 대신 하루에 하나의 저주만 해주가 가능합니다.”

“다섯 가지 모두 하려면 5일이 걸린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일단, 알겠다. 이 일은 폐하와 논의를 해보겠다.”

레오나는 의외란 얼굴로 데미안을 보았다.

“제 말을 믿어주시는 겁니까?”

레오나는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런 자신을 믿어주려는 데미안이 의아했다.

게다가 선뜻 황제의 논의해 보겠다고 답을 줄 줄도 몰랐다.

“못 믿을 이유가 있나?”

레오나는 볼을 긁적거렸다.

“사실 안 믿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레오나는 입단한 지 몇 개월 안 된 신입일 뿐이었다.

일개 신입일 뿐인 자의 말을 믿고, 황제의 상의해 보겠다고 답을 주다니. 놀랍긴 했다.

“레오나, 자신이 없나?”

“아닙니다.”

“그런데 뭘 걱정하는 거지? 난 너를 믿는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데미안은 정말로 그녀를 믿어주고 있는 것이다.

레오나는 그게 의아하면서도 자신을 믿어주는 데미안이 좋았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오나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데미안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일단, 임무에 복귀하도록.”

레오나는 경례를 한 뒤 단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레오나는 선배 기사들과 나란히 건물을 나왔다.

* * *

데미안은 단장실을 나와 황제궁으로 향했다. 황제를 만나 레오나에 대한 것을 상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황제궁에 도착하자, 데미안은 알현실로 들어갔다.

알현실에 들어가니 시종장이 데미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폐하를 뵙고자 한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그러지.”

데미안은 알현실에 있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잠시 후, 시종장과 함께 황제가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부복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일어나 앉게.”

“예, 폐하.”

황제가 먼저 의자에 착석하자, 데미안도 황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시종장이 다과를 내왔다.

“그래, 내게 할 말이 있다고?”

“예.”

“말해보게.”

데미안은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말에 황제가 손을 내저어 시종장을 내보냈다. 민감한 사항이라 말조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 말해보게.”

데미안은 레오나가 어젯밤에 황녀 궁에서 저주를 해주했던 일을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황제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새로운 저주가 황녀를 노렸다니…….”

“다행히 저희 단원이 저주를 해주하였습니다.”

황제가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였다.

“백기사단에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기사가 입단했다고 하더니, 그자인가?

“그렇습니다.”

“고마운 일이군.”

“폐하,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데미안은 레오나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황제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당연히 놀람을 금치 못했다.

“황녀의 저주를 해주할 수 있다고 하였나?”

“예, 폐하.”

“믿을 수가 없군, 그건 신관들도 못 한 일이야. 그런데 그 신입이 할 수 있다고?”

“신관들과 다른 특별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황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의 저주는 많은 양의 신성력을 쏟아부어야 해주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관들이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 말뜻은 신관들이 지닌 신성력이 부족해 황녀의 저주를 해주하지 못하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

두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레오나가 황녀 전하의 저주를 해주하는 모습을 폐하께서 직접 곁에서 지켜보시는 겁니다. 두 눈으로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경은 그녀를 믿는가?”

데미안이 확고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 단원입니다. 믿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단장이 단원을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줄까. 믿음이 없는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데미안에게 백기사단은 그랬다.

그는 단원들을 믿었다. 단원들도 그를 믿었다. 그랬기에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가 되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게 바로 데미안이 백기사단을 이끄는 모토였다.

“좋네,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차피 희망이 없는 일이었다. 무엇이든 해보는 게 나쁘지는 않으리라 판단했다.

그렇게 결정이 내려졌다.

* * *

레오나는 데미안의 호출을 받았다.

단장실로 들어가니, 데미안이 창밖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레오나가 경례를 하자, 데미안이 뒤돌아섰다.

“앉지.”

“예, 단장님.”

레오나가 의자에 앉자, 데미안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폐하께서 윤허하셨다.”

“그랬습니까.”

생각보다 레오나의 반응이 담담했다.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그리고 공짜도 아니지 않습니까.”

“성공하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거면 됐습니다. 저는 받은 만큼 최선을 다하는 타입니다. 맡겨주시죠. 그리고 폐하께 한 가지 청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청?”

“네.”

“그게 뭐지?”

“해주할 장소를 비밀스러운 곳으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황녀 궁은 노출되어 있어서 피해야 합니다.”

레오나의 감이 맞다면, 다이앤 황녀를 노리는 누군가가 황녀 궁을 감시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대단한 악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상대를 철저히 감시하게 마련이니까.

“알겠다. 말씀드려 보겠다.”

“감사합니다.”

“대신 실패하지 마라. 백기사단은 실패하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패할 일은 없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자만함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데미안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따로 연락을 주실 것이다. 그때까지 임무에 집중하도록.”

“예, 명심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레오나는 황제를 알현실에서 만났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레오나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하자, 황제가 근엄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일어나라.”

“예, 폐하.”

레오나가 자세를 바로 했다.

“정말 그대가 황녀의 저주를 해주할 수 있는 건가?”

의심이 가득한 눈빛.

이해한다. 갑자기 나타난 신입 기사가 황녀의 저주를 해주하겠다고 했으니,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 제가 할 수 있다고 데미안 단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믿어도 되나?”

“믿어 달라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제가 실패한다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하나 제가 성공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고 싶습니다.”

“패기는 좋군. 단 성공했을 경우다. 그렇지 못하면 황제를 기만한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만한 각오도 없이 나섰을까.

레오나가 금빛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외람되오나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 이야긴 데미안 경에게 들었다. 해주할 장소를 바꿔 달라고 하였다지?”

“예.”

“그건 내가 알아서 준비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그대가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황녀를 해주할 때, 그대는 나와 황후, 황태자의 입회하에 하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것으로도 되었다.

“장소는 정해지는 대로 데미안 경을 통해 알려주겠다. 나가봐도 좋아.”

“예, 폐하.”

일어나기 전 레오나는 혹시 몰라 한 마디 더 건넸다.

“폐하, 혹시 몰라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황녀 궁에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은 최대한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뭐지?”

“감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시?”

“네, 황녀 전하에 몸에 저주를 한 자는 대단한 악의를 가진 자입니다. 그런 자가 황녀 궁을 감시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알겠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레오나가 인사하고 나가자, 황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황후와 황태자를 만나 사실을 이야기했고, 다이앤 황녀를 황제 궁으로 불렀다.

직접 가려고 했으나, 레오나의 말이 걸려 그리한 것이다.

잠시 후, 다이앤 황녀가 황제 궁의 응접실에 들어왔다.

다이앤 황녀는 응접실에 모여 있는 가족들을 보며 기쁘게 웃었다.

“어마마마, 오라버니까지 계셨군요.”

“이리 와 앉거라.”

“예, 아바마마.”

다이앤 황녀가 황제의 맞은편 소파에 앉자, 황제가 다정한 얼굴로 다이앤 황녀를 보았다.

“다이앤, 네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 불렀다.”

다이앤 황녀가 긴장된 얼굴로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시선이 다이앤 황녀의 오른팔을 향했다. 다이앤 황녀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감쌌다.

“다이앤, 내일 네 저주를 해주할 자가 올 것이다.”

다이앤 황녀의 다이아몬드빛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제 저주를요?”

“그래, 해주해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단다.”

“그게 정말인가요?”

다이앤 황녀의 얼굴에 기쁨이 들어찼다.

“그분이 누군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대답은 황태자가 하였다.

“레오나라고 백기사단에 들어온 신입 기사라고 하더라.”

다이앤 황녀의 눈이 커졌다.

“레오나 경이요?”

“그래. 솔직히 못 미덥지만, 아바마마께서 한번 해보자고 하시니까.”

황태자의 말에 다이앤 황녀가 배시시 웃었다.

“오라버니,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레오나 경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자가 아무리 신성 마법이 뛰어나다 해도, 글쎄…….”

다이앤 황녀도 황태자의 마음을 이해했다.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이 어미도 걱정되는구나, 혹여나 네가 잘못되면…….”

다이앤 황녀가 황후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어마마마, 레오나 경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절 구해 주시기도 하셨는걸요. 전 믿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다이앤.”

황후가 다이앤 황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네가 다시 건강해지길 바란단다.”

“저도요. 어마마마.”

황제가 말을 이었다.

“다이앤, 네 저주는 이곳 황제의 궁에서 하게 될 거다.”

“여기서요?”

“그래. 레오나 경이 말하길, 황녀 궁은 너를 그렇게 만든 자가 감시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구나.”

다이앤 황녀가 이번엔 정말로 놀란 얼굴을 하였다.

“황녀 궁을 감시하고 있다고요?”

“그래, 그러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네가 어디에서 해주되고 있는지 알려지면 곤란해지지 않겠니.”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그자는 분명 다이앤 황녀가 해주되는 걸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

“명심할게요. 아바마마.”

“모처럼 이렇게 모였으니, 함께 저녁이 들자꾸나.”

황후의 제안에 황제도 황태자도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다이앤 황녀는 행복한 얼굴로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즐겼다.

* * *

다음 날, 레오나는 황제와 황후, 황태자의 입회하에 황녀의 저주를 해주하게 되었다.

장소는 황제의 궁에 있는 방 중 가장 은밀한 곳이었다.

사람들의 출입이 적고, 눈에 뜨이지 않는 곳.

방을 책임지는 시종장과 황제, 황후, 황태자, 데미안, 레오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방의 위치를 모른다.

그리고 시종장은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건 황제 일가와 레오나, 데미안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이동할 때 레오나가 다이앤 황녀에게 특별한 마법을 걸었다.

그건 바로 존재감을 없애주는 마법이었다.

황녀가 대놓고 지나가도, 사람들은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다. 그녀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하여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를 비밀의 방까지 호위했다.

비밀의 방에 도착하니, 황제 내외와 황태자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오라버니.”

다이앤이 들어오자, 황제 내외와 황태자가 다정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니?”

황후의 말에 다이앤은 다이아몬드 빛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레오나 경이 호위해 준 덕분에 괜찮았어요.”

“그랬구나. 이리 오렴.”

황후가 다이앤 황녀를 이끌고 침대로 데려갔다.

그러자 황제가 평소보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레오나를 응시했다. 황녀가 잘못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살벌한 눈빛이었다.

“그대가 했던 말을 책임져야 할 걸세.”

“물론입니다.”

황후와 황태자도 레오나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 다이앤 황녀의 신변에 이상이 없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에 레오나는 담담하게 그러겠다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 내외와 황태자가 길을 터주었다.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전하며, 다이앤 황녀에게 다가갔다.

“황녀 전하.”

레오나가 다가오자, 다이앤 황녀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경을 믿어요.”

“그러십니까?”

다이앤 황녀가 신뢰 가득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는 마물에게서 그녀를 지켜주었고, 매일 밤 그녀를 지켜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이앤 황녀는 레오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저는 경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오나가 손을 내밀었다.

“오른팔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잠시 머뭇거린 다이앤 황녀가 오른팔의 붕대를 풀어 레오나에게 보여주었다.

오른팔에 새겨진 다섯 개의 검은 꽃문양.

가족들을 제외하고 타인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목에 있는 것부터 시작해 차례대로 하루에 하나씩 해주하겠습니다.”

다이앤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황제 일가가 긴장된 얼굴로 지켜보았다.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의 손목에 손을 올려 신성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단전에 있는 신성력이 꿈틀거렸다.

레오나의 손을 타고 나온 신성력의 빛이 다이앤 황녀의 오른쪽 손목 위로 쏟아졌다.

“리무브 커즈.”

파아아앗-

단전이 팽창하는 느낌이 들었다.

신성력을 끌어모아 다이앤 황녀의 오른쪽 손목에 불어 넣었다.

다이앤 황녀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 황제 일가는 넋을 잃었다. 이렇게 크고 강렬한 빛의 크기는 처음 보았던 것이다.

신관들도 이런 빛은 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기적 같은 빛이었다.

레오나는 두 눈을 감고 다이앤 황녀의 전신에 신성력을 끊임없이 채워 넣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이 메말랐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저주가 쨍하고 깨지는 것을 느꼈다.

깨진 저주는 황금빛에 의해 새카만 재가 되어 사라졌다.

다이앤 황녀의 손목에 나 있던 검은 꽃문양 중 한 개가 스르륵 사라졌다.

마침내, 레오나의 금빛 눈이 떠졌다. 동시에 손을 떼었다.

황금빛이 잦아들었다.

다이앤 황녀의 오른팔에는 네 개의 꽃문양이 남아 있었다.

“이제 네 개 남았군요.”

레오나의 말에 다이앤 황녀는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다이아몬드 빛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정말로 없어졌어요…….”

매일 봐온 오른팔이었다.

다섯 개의 검은 꽃문양은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아프게 그녀의 눈동자에 박혀 들었다.

영원히 사라지 않을 것만 같았던 끔찍한 각인이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사라졌다.

정말로 사라졌다.

다이앤 황녀의 볼을 타고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다이앤!”

황태자가 달려와 그녀의 오른팔을 살펴보았다.

“하, 하나가 사라졌어.”

정확하게 오른쪽 손목 위에 있던 꽃문양 하나가 사라졌다. 이어서 황후도 달려와 확인했다.

“정말이야, 이럴 수가.”

뒤이어서 황제도 다가왔다.

사라진 꽃문양이 위치한 자리엔 원래의 피부색이 있었다.

황제가 떨리는 눈동자로 레오나를 보았다.

“정말 그대가…….”

의심을 했다. 정말 그녀가 저주를 해주할 수 있는지 믿지 못했다. 그런데 정말로 저주 하나가 사라졌다.

다이앤 황녀가 눈물이 그렁그렁 채 레오나를 보았다.

“고마워요, 레오나 경.”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다이앤 황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황후도 울었다.

다이앤 황녀는 황후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냈다.

황태자도 눈시울이 붉어졌는지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추스른 황제가 날카로운 눈빛이 아닌 감사의 눈빛을 담고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레오나 경, 남은 저주도 잘 부탁하네.”

진심 어린 부탁이었다.

황태자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나 경, 다이앤을 잘 부탁해. 경만 믿을게.”

황태자의 은색 눈동자에 의심이 아닌 진심이 담겼다.

“최선을 다해 해주하겠습니다.”

“믿겠네.”

황제가 레오나를 신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이 방에 들어섰을 때와는 상반된 태도였다.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를 보며 웃었다.

“황녀 전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레오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다이앤 황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레오나 경.”

레오나가 의아한 눈으로 다이앤 황녀를 보았다.

“역시 경은 좋은 사람이에요. 제 말이 맞죠?”

해사하게 웃는 다이앤 황녀를 바라보며 레오나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거예요.”

“아닙니다.”

그렇게 첫 번째 해주가 성황리에 끝났다.

비밀의 방에서 나오자, 데미안이 그녀를 반겼다.

“해냈군.”

“믿어주신 덕분이죠.”

“잘했다.”

레오나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실패하지 않는다고. 저 그 말 지켰어요. 단장님.”

“이제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다.”

“남은 저주도 문제없이 해주할 겁니다.”

“그래.”

데미안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레오나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단장님, 방금 웃으신 거 맞죠?”

레오나의 장난 어린 말투에 데미안이 다시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니다.”

“맞잖아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웃으시는 거.”

데미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단장님도 웃으실 줄 아시는구나.”

항상 데미안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때론 날카롭게 벼린 듯한 얼굴로 다녔다. 차갑다 못해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태도 또한 그렇다. 그런데 그가 미소 지으니 얼었던 얼음이 사르르 녹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게 레오나는 신기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황녀 전하를 황녀 궁까지 호위하는 데 집중하도록.”

“예.”

잠시 후, 다이앤 황녀가 감정을 추스르고 방을 나왔다.

“가요, 레오나 경.”

“그럼, 마법을 걸겠습니다.”

“네.”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발현했다.

“홀리 에리어.”

투명한 막이 다이앤 황녀와 데미안 단장, 그리고 황제 내외와 황태자를 덮었다.

존재감이 사라지는 신성 마법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비밀의 방에서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 * *

2황녀 비비안의 티타임 모임이 장미 궁 정원에서 열렸다.

티타임 모임은 2황녀 비비안이 주최하는 모임으로 선택된 영애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사교 모임이었다.

장미 궁은 황제가 2황녀 비비안의 어머니였던 1황비에게 내주었던 궁이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2황녀 비비안을 낳고 죽자, 장미 궁은 2황녀 비비안의 차지가 되었다.

입지가 탄탄하지 못했던 2황녀 비비안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아버지인 황제와 괜찮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건 자신의 쓸모를 어필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교양을 익히고, 학문도 배웠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차츰차츰 인맥을 쌓아 나갔다.

사교계에 인맥을 쌓아 자신의 입지를 만들었다. 황제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이앤 황녀가 건강을 되찾으면, 그녀가 무사히 사교계에 입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황제에게 쓸모가 있었기에,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교 모임에 지출하는 예산도 황제에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장미 궁을 가꾸고 관리하는 데에도 예산을 분배해 주었다.

그랬기에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사교계에선 그녀를 붉은 장미가 가장 잘 어울리는 황녀라고 알려져 있었다.

황제의 혈통이 아닌 1황비를 닮아 붉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 이름으로 불리기 전에는 비운의 황녀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었다.

비비안 황녀는 그러한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그녀를 비운의 황녀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비비안 황녀님은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아요.”

2황녀 비비안은 빙그레 웃으며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러자 그녀의 귀에 걸린 귀걸이가 드러났다.

“어머, 그 귀걸이 얼마 전에 경매로 나온 핑크 다이아몬드 아닌가요?”

비비안 황녀는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우아한 손길로 찻잔을 들었다.

“역시 미아 영애는 안목이 있군요.”

2황녀 비비안의 말에 다른 영애들도 놀란 눈으로 그녀의 귀걸이를 주목했다.

“꽤 비싼 값에 낙찰되었다고 들었는데, 그 보석의 주인이 황녀님이실 줄이야.”

“잘 어울리세요. 황녀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했다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되었을 거예요.”

“칭찬이 과하군요.”

2황녀 비비안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 맛이 좋군요. 이번 차 담당은 크리스틴 영애지요?”

“예, 황녀 전하.”

크리스틴 영애가 수줍게 웃었다.

2황녀 비비안이 주최하는 티타임은 모임에 속한 영애들이 순번을 정해 차례대로 돌아가며 차 담당과 디저트 담당을 맡아 대접하는 방식이었다.

이번 차례 차 담당은 크리스틴 영애였다.

“이 차는 남부에서 가져온 찻잎으로 우린 홍차예요. 남부의 찻잎은 최상품으로 유명하죠.”

2황녀 비비안의 말에 크리스틴 영애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아버님께서 남부에 가실 일이 있으셨는데 제가 비비안 황녀 전하께 진상하고 싶어 특별히 부탁을 드려서 공수해 왔답니다.”

그런 수고를 하였으니,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모양이다.

2황녀 비비안은 칭찬 대신 시녀에게 손짓했다.

“가져오렴.”

“예, 황녀 전하.”

잠시 후, 시녀가 기다란 은색 상자를 들고 왔다.

“칭찬보다는 선물이 나을 것 같군요. 받아요, 크리스틴 영애.”

“선물이라니…….”

뜻밖의 선물에 크리스틴 영애가 상기된 얼굴로 상자를 받았다.

“열어봐요.”

크리스틴 영애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부채가 들어 있었다.

“공작새 깃털로 만든 부채랍니다, 크리스틴 영애에게 어울릴 것 같아 준비해 봤어요.”

“이런 귀한 선물을…….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지난번 티타임에는 미아 영애가 브로치를 선물로 받았었다. 크리스틴 영애는 그게 정말 부러웠었다.

그래서 이번에 좋은 차를 구하기 위해 특별히 아버지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선물을 받다니, 너무 기뻤다.

영애들이 선물을 받은 크리스틴 영애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오면, 2황녀 비비안의 마음에 드는 차와 디저트를 준비하리라 다짐했다.

2황녀 비비안의 시선이 이번엔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은 분홍빛 머리의 영애에게로 향했다.

“리리엘 영애, 이번엔 영애가 가져온 디저트를 맛볼 차례 같군요.”

이번 디저트 담당은 칼리반 백작가의 리리엘이었다.

“물론이에요.”

리리엘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들고 온 바구니를 꺼냈다.

이 자리에 오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2황녀 비비안의 티타임은 저명한 가문의 영애들만 엄선한 멤버들로 구성된 사교 모임이었다.

리리엘도 이 모임에 들어오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여야 했다. 2황녀에게 잘 보여서 사교계에 이름을 떨치는 것 또한 그녀의 목표였으니까.

‘난 검술은 물론 사교계에서도 유명해질 거야.’

양쪽 다 훌륭히 접수한 영애를 누가 마다할까.

리리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준비한 디저트를 꺼냈다.

“제가 준비한 디저트는 에클레어에요.”

에클레어는 달콤한 크림으로 속을 채운 페이스트리다. 모양은 길쭉하고, 속에는 다양한 크림이 들어가 있다.

리리엘은 에클레어를 2황녀 비비안을 시작으로 영애들에게 차례대로 나누어 주었다.

2황녀 비비안이 포크로 에클레어를 잘라 입에 넣었다.

커스터드 크림이 입안에 퍼지며 달콤함을 선사했다.

“맛있군요.”

2황녀 비비안의 칭찬에 리리엘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이에요.”

그런데.

“윽.”

갑자기 2황녀 비비안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놀란 영애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2황녀 비비안에게 다가왔다.

그중 제일 먼저 달려온 이는 미아 영애였다.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2황녀 비비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었다.

“괜찮아요.”

2황녀 비비안을 부축하며, 미아 영애가 리리엘을 쏘아 보았다.

“리리엘 영애, 혹시 황녀 전하께서 드신 에클레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니에요?”

리리엘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모두 맛있게 드셨잖아요.”

“이상해서 그렇죠. 황녀 전하께서 영애가 가져온 에클레어를 드시고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시니…….”

“전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리리엘은 자신을 몰아붙인 미아 영애를 노려보았다.

“모두 그만하죠.”

2황녀 비비안의 말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티타임은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겠군요.”

비비안 황녀의 선언에 리리엘은 당황한 얼굴을 해야 했다.

이 디저트를 공수해 오기 위해 제도 센터폴에 있는 유명한 디저트 가게 엘리시앙에서 특별 주문하여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2황녀 비비안의 환심을 사서 크리스틴 영애처럼하사품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모두 물 건너가고 말았다.

‘내 선물은…….’

2황녀 비비안이 시녀를 불러 자신을 부축하게 하였다.

“오늘은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2황녀 비비안의 사과에 영애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렇게 2황녀 비비안은 장미 궁으로 돌아왔다.

침실로 들어간 2황녀 비비안은 모두 내보냈다.

시녀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였으나, 차갑게 나가라고 말하자, 군소리 없이 나갔다.

혼자 남게 된 2황녀 비비안은 올라오는 구토를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울컥.

토해낸 것은 검붉은 피였다.

‘또…….’

저주의 타격이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이게 어떻게 된…….’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2황녀 비비안은 서둘러 지하 비밀의 방으로 향했다.

비밀의 방에서 테이블에 놓인 거울을 작동시켰다. 거울에 상이 맺히며, 다이앤 황녀의 모습을 비췄다.

‘평소와 다르지 않아.’

다이앤 황녀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2황녀 비비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지, 분명 저주가 되돌아왔는데…….”

다이앤 황녀는 평화롭게 침대에 누운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게다가 다이앤 황녀가 팔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어쩔 수 없군, 조만간 만나러 가는 수밖에.”

저주가 멀쩡한지 확인해야 했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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