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두 번째 임무 (4/20)

4. 두 번째 임무

레오나는 데미안으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3일간의 유급 휴가와 아티팩트가 그것이었다.

라파엘도 똑같은 보상을 받았고, 다른 준기사들과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았다. 다만 전투에 임해 마물을 물리친 레오나와 라파엘에게 조금 더 좋은 보상을 내렸을 뿐이다.

반경 50m 정도의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 아티팩트였다.

첫 임무에서 공을 세운 준기사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고 했다.

레오나는 마물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기에 아티팩트를 받을 수 있었다. 레오나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꿀 템이었다.

아티팩트는 목걸이 형태로 되어 있었다. 목걸이 중앙에 있는 동그란 버튼을 누르면, 아공간이 나타나고 그곳에 물건을 보관할 수가 있다.

“여기 버튼을 누르면…….”

파앗!

허공에 새카만 구멍이 생겨났다. 레오나는 여행용 가방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소환.”

집어넣었던 여행용 가방이 다시 공간 밖으로 튀어나왔다.

“가로세로 50m 정도의 크기라고 했으니까, 쓸 만하네.”

레오나는 목걸이를 목에 차고는 숙소를 나왔다.

3일간 유급 휴가를 받았으니 즐겨볼 생각이었다.

“그동안 너무 수련만 했어. 놀기도 해야지.”

준기사가 되면서 레오나의 일상은 수련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라데온의 신성 검술을 3식까지 마스터할 수 있었지만, 때론 휴식이 필요할 때도 있다.

“머리와 몸을 쉬게 해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법이지.”

그건 율리아나로 살면서 체득한 삶의 지혜였다.

숙소를 나와 연무장을 지날 때였다.

누군가 레오나를 불렀다.

“레오나.”

고개를 돌려보니 라파엘이었다.

“라파엘?”

“어디 가지?”

“센터폴에 나가 볼까 하고.”

“수련은 안 하나?”

“어떻게 사람이 매일 수련만 하고 살아, 쉬어 가면서 해야지. 그러는 넌, 수련하려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라파엘이 은근한 얼굴로 레오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레오나가 뒤로 물러났다.

“뭐야, 왜 그렇게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거야?”

“나도 센터폴에 가겠다. 너와 함께.”

“싫어, 난 혼자 갈 거야.”

레오나가 단박에 거절하자, 라파엘이 충격받은 듯한 얼굴을 했다.

“단박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군.”

“그럼,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냐.”

라파엘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디서 오는 자신감이야?”

“라이벌이니까.”

“라이벌이면 무조건 같이 다녀야 하는 거냐.”

“아닌가?”

레오나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단박에 거절해야 했다.

“난 혼자 갈 거니까, 절대 같이 갈 생각 하지 마.”

레오나는 라파엘이 대답하기 전에 후다닥 달려갔다.

그런 레오나를 라파엘은 기가 막힌단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나를 따돌릴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건가?”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라파엘은 레오나를 향해 승부욕을 강하게 느꼈다. 그의 라일락빛 눈이 번뜩였다.

“따라잡아 주지.”

라파엘도 레오나의 뒤를 따라 센터폴로 이동했다.

레오나는 라파엘을 따돌린 줄 알고 센터폴에 도착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끈질긴 놈이야. 라이벌은 무슨 라이벌이야.”

허공에 손을 휘휘 내저은 레오나는 라파엘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본격적으로 도시 구경을 시작했다.

“휘유, 이렇게 느긋하게 구경을 해본 게 언제냐.”

레오나는 가문의 수치라 손가락질받으며 저택 밖으로는 거의 나가보지 못했다.

어린 영애들이 즐긴다는 그 흔한 쇼핑도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가문의 사람들이 말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나도 즐겨야지.”

레오나는 천천히 걸으며 구경했다.

번화가로 향할수록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규모가 대단하네.”

레오나가 걷고 있는 곳은 제도 센터폴의 쇼핑 중심가였다.

규모가 대단했다.

“어디 보자, 여기서 제일 유명한 디저트 가게가 있다고 했는데.”

레오나의 기억 속에서 이곳에 리리엘이 자랑삼아 떠들던 디저트 가게가 있었다.

혀끝에 녹아드는 생크림과 달콤한 과즙,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맛을 자랑한다는 그 디저트 가게.

“이름이 <아르떼>였나.”

리리엘이 하도 자랑을 해대서 가게 이름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 저기 있다.”

레오나가 간판을 발견하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앞을 가로막았다.

“따라잡았군.”

“라파엘, 왜 네가 여기에…….”

“널 따라잡았다.”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갑자기 나타난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내가 분명 혼자 간다고 했지.”

“네가 날 도발했다.”

“내가 언제?”

“나를 두고 달려간 것은 도발이 아닌가.”

“뭐라고?”

기가 막혔다.

인상을 팍 구긴 레오나가 손을 휘저었다.

“비켜라.”

“어딜 가려는 거지?”

“어디긴, 네가 가리고 있는 저 디저트 가게지.”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가게를 보았다.

“이런 걸 즐기나?”

“남이사.”

레오나는 라파엘을 지나쳐 가게로 들어갔다. 그러자 라파엘도 따라 들어갔다.

“왜 따라와?”

“난 오늘 널 따라다닌다.”

“왜?”

“라이벌이니까.”

레오나는 골치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넌 라이벌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냐?”

“내가 진정으로 라이벌이라 생각한 사람은 너뿐이다. 그러니 내가 따라다니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논리인지 모르겠다.

레오나는 라파엘을 무시한 채 디저트 가게로 들어가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라파엘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선이 확 쏠리는 게 느껴졌다.

“어머, 저분 라파엘 공자 아니에요?”

“맞네요. 바스티안 공작가의 라파엘 공자. 그런데 저 앞의 여자분은 누굴까요?”

“그러게요,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하녀 아닐까요?”

“어머, 저도 같은 생각을 했는데. 라파엘 공자는 하녀에게도 친절한 걸 보니 상상했던 것과 다르네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느꼈답니다.”

레오나는 찌를 듯한 시선에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오늘은 제복을 입지 않고 평상복을 입고 나온 터라 레오나가 어디 소속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라파엘도 마찬가지였다.

라파엘은 수련하다 나온 차림이라 더욱 그러했는데 워낙 외모가 특출나서 눈에 뜨인 모양이다.

“라파엘, 다른 데 가서 앉아.”

“어째서지?”

“사람들이 너만 쳐다보잖아. 그럼 내가 뭐가 돼?”

사람들이 자신을 하녀라고 수군거리는 게 다 들렸다.

그것도 라파엘의 하녀라니, 기분이 더러웠다.

그런데 라파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쓰이거든. 사람들이 나더러 네 하녀라고 하잖아. 내가 어딜 봐서 네 하녀냐. 어?”

레오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라파엘이 말을 돌렸다.

“디저트를 먹도록 하지. 이 집은 케이크가 맛있다. 내가 사겠다.”

“네가 산다고?”

“그래. 내가 사겠다.”

이 집은 꽤 비싼 디저트 가게였다. 어느 정도 지출을 생각하고 온 건데 라파엘이 산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레오나는 이번만 봐주기로 했다.

“여긴 티라미수와 쇼콜라 케이크가 유명해. 음료는 과일주스가 맛있다.”

레오나는 라파엘이 추천하는 케이크와 음료를 주문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넌 이 집 어떻게 아냐?”

“여동생이 이 집 케이크를 좋아해. 가끔 사다 주곤 했다.”

겉은 안 그런데 속은 다정한 오라버니라 이건가. 그놈의 승부 근성만 좀 아니면 괜찮은 놈인데.

자신을 라이벌로 의식하는 게 영 별로였다.

‘입단 시험에서부터 꼬였어. 그냥 적당히 져줄걸.’

라파엘에게 1등을 양보했다면, 그가 자신에게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갖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레오나는 생각을 접고 라파엘의 추천으로 선택한 쇼콜라 케이크를 떠서 한 입 먹었다.

‘으, 달다.’

완전 지옥의 단맛이었다. 그래도 맛은 있었다.

레오나는 시원한 키위주스로 입가심을 했다.

“맛있나?”

“응, 엄청 맛있어.”

“많이 먹어라.”

“고맙다, 잘 먹을게.”

레오나는 신이 난 얼굴로 케이크를 먹고 주스도 마셨다.

그런 레오나를 보며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었다.

* * *

리리엘은 오랜만에 친우인 벨리타 영애와 쇼핑을 나왔다.

벨리타 영애는 샤보니에 백작가의 영애였는데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부유한 가문이었다.

가문끼리도 사이가 꽤 나쁘지 않은 편이라 리리엘은 벨리타 영애와 친하게 지냈다.

“리리엘, 쇼핑 끝나고 우리 오랜만에 <아르떼> 갈래요?”

벨리타 영애의 제안에 리리엘은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요. 마침 저도 오랜만에 가보고 싶었던 참이거든요.”

두 영애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쇼핑을 하였다. 취향도 서로 비슷해서 대화가 잘 통했다.

쇼핑을 마친 두 영애는 <아르떼>로 향했다.

그런데.

“어머, 저기 라파엘 공자 아니에요?”

“정말요?”

벨리타 영애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자, 리리엘의 루비빛 눈동자가 벨리타가 영애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빛 머리칼과 라일락빛 눈동자, 다부진 몸과 큰 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외모가 단박에 리리엘의 눈을 사로잡았다.

“정말이네, 라파엘 공자예요.”

라파엘은 천재란 수식어가 아까울 정도의 인재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바스티안 공작가에 태어난 불세출의 인재.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말이다. 그런 그를 가까이서 보게 되다니.

“그런데 저기 옆에 있는 여인은 누구죠? 낯이 익은데.”

“여인이요?”

“네, 라파엘 공자랑 대화를 나누고 있잖아요.”

리리엘의 시선이 벨리타 영애가 가리킨 여인에게로 향했다. 그 여인을 본 리리엘의 두 눈이 커졌다.

“레, 레오나?”

차림새는 평범하지만, 눈에 띄는 하늘빛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는 그녀가 아는 여인의 것이었다.

리리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벨리타 영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리엘, 레오나라면, 칼리반 백작가의 그…….”

“맞아요.”

벨리타 영애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라파엘과 레오나를 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무슨 사이일까요. 상당히 친해 보이는데.”

그렇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무척 친근해 보였다.

입술을 질끈 깨문 리리엘이 말했다.

“가서 알아봐요.”

“네?”

리리엘은 벨리타 영애의 손을 붙들었다.

“우리 가서 인사하자고요. 아는 얼굴이잖아요.”

리리엘의 의도를 알아챈 벨리타 영애가 싱긋 웃었다.

“그렇네요. 인사해야죠.”

리리엘과 벨리타 영애가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 * *

디저트를 먹고 가게 밖으로 나온 레오나는 라파엘과 각자 갈 길 가자고 말했다.

“싫다.”

“싫으면 다야?”

“나도 경험이 없다.”

“무슨 뜻이야?”

답지 않게 라파엘은 말하기 어려운지 한참을 망설인 후에 대답했다.

“누군가와 함께 디저트를 먹어본 게 처음이란 말이다.”

“그래서.”

“나쁘지 않아서 즐겨보고 싶어.”

“그래서 나랑 같이 즐겨보겠다고?”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는 라파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동안 라파엘과 지내면서 알게 된 한 가지.

‘이놈도 친구가 없을 것 같아.’

딱 그런 인상을 풍겼다.

동기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도 어려워했다. 그는 늘 혼자 수련하고, 동기들이 대련을 요청하면 해주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한 조라는 핑계로 어울렸다. 넉살 좋은 제임스처럼 친근하게 굴거나 그런 건 하지 못했다.

‘사교성이 좀 부족한 놈이긴 해.’

자신이 놀아주지 않으면, 평생 혼자 놀 그런 놈이었다.

마음이 약했던 레오나가 입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어머, 이게 누구야?”

레오나의 앞에 고운 드레스 차림의 두 영애가 나타난 것이다.

그중 분홍빛 머리에 루비빛 눈동자를 한 귀여운 여인이 레오나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레오나.”

“리리엘.”

여기서 리리엘과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본 터라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궁금했는데……. 잘 지내나 보네.”

레오나의 옷차림을 보며 비웃음을 던진 리리엘은 라파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공자. 저는 리리엘 칼리반이라고 해요. 여기 있는 레오나 언니의 동생이랍니다.”

“그런가?”

“그렇답니다. 한데 공자는 저희 언니와 어떻게 아세요?”

“우리는…….”

라파엘이 사실대로 말할 기세라 레오나는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라파엘, 그만…… 하고 가자.”

라파엘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레오나는 그를 이끌고 멀어질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리리엘은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리리엘 영애. 저 두 사람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리리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라파엘 공자를 이름으로 불렀잖아요.”

“저도 그게 이상해요.”

친근하게 라파엘이라 부르며 거침없는 손길로 그를 잡아끌었다. 라파엘도 거부하지 않았고 말이다.

웬만한 친분이 있지 않고서는 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대체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인지 모르겠다.

“근데 레오나는 제도에 살고 있나 보네요. 난 멀리 떠난 줄 알았는데.”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칼리반 백작은 레오나를 완전히 호적에서 지웠다.

이제 레오나는 칼리반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 레오나가 제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바스티안 공작가의 라파엘 공자와 함께.

‘알아봐야겠어.’

레오나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 * *

라파엘을 무작정 끌고 거리를 벗어난 레오나는 인적이 드문 골목에 숨어서 숨을 돌렸다.

“왜 내 입을 막은 거지?”

“네가 쓸데없는 말을 할까 봐.”

“쓸데없는 말?”

레오나는 양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래, 내가 어디 소속인지 밝히려고 했잖아.”

“그럼, 안 되는 거였나?”

“어, 내가 아주 곤란해져.”

“그건 네가 칼리반가의 사람이라서 그런 건가?”

레오나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무튼 복잡한 사정이 있어.”

레오나가 한숨을 내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파엘이 물었다.

“네가 정말 레오나 칼리반인가?”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야. 독립했거든.”

“믿기지 않는군. 내가 아는 레오나 칼리반은…….”

“아둔하고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솔직히 그렇다.”

레오나 칼리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명망 있는 기사 가문에 태어난 최초의 둔재.

칼리반 백작가에서 태어난 아이는 지금껏 둔재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레오나가 그런 둔재로 태어났다.

그러니 당연히 칼리반 백작가에서 그녀를 수치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역사에 먹칠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재능이 없어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어. 내가 마력 대신 신성력을 얻은 것처럼.”

“그렇군.”

지금의 레오나를 보면 소문의 그 사람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라파엘이 보기에도 그러했다.

“아무튼, 난 이제 칼리반 백작가와는 연관도 없으니, 거기랑 연결 짓지 말아줘.”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네 사장을 모르고 함부로 말을 하려고 했던 것도 사과하겠다.”

“사과는 됐어.”

“아니, 이건 내가 사과해야 할 일이다.”

“그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아. 그리고 그만 여기서 나가자,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네.”

“네가 힘이 그렇게 셀 줄 몰랐다.”

“뭐?”

“내 입을 막고 나를 잡아끌었던 힘이 세더군.”

그땐 급해서 그랬던 것뿐이다.

“과연 내 라이벌이다.”

“라이벌…….”

라파엘이 라일락빛 눈동자를 진지하게 뜨고는 레오나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게 무슨 사정이 있든 너는 내가 인정한 나의 진정한 라이벌이다. 나는 너를 레오나로, 내 라이벌로서 보겠다.”

레오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비명이 들렸다.

레오나가 라파엘을 보았다.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는 라파엘과 함께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여인이 울먹거리며 레오나에게 매달렸다.

“제발, 제 아이를 구해 주세요. 저 사람이 제 아이를 데려갔어요.”

레오나의 두 눈이 아이를 안고 뛰어가는 흑의인이 보였다.

“기다리세요. 라파엘, 이 여인을 부탁해.”

레오나는 라파엘에게 여인을 맡기고 흑의인을 쫓았다.

신성 마법인 초가속으로 달리자 빠르게 흑의인을 따라잡았다.

레오나가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 흑의인이 아이를 안은 채 건물 위로 뛰어올랐다.

레오나도 비행 마법을 이용해 흑의인의 뒤를 쫓았다.

흑의인이 건물 지붕 위를 넘나들었다. 레오나도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거기서!”

레오나는 신성 마법을 발현했다.

“바인드!”

황금빛 밧줄이 흑의인을 향해 날아갔다.

휘리리릭!

“컥!”

흑의인이 밧줄에 포박되었다. 빠르게 흑의인을 따라잡은 레오나는 그의 품에서 아이를 빼앗았다.

그리고 흑의인의 멱살을 잡고 정체를 확인하려는 순간, 흑의인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로브를 타고 사람의 것이 분명한 뼈다귀들이 떨어져 내렸다.

“뭐야, 이거……. 설마…… 사역마?”

주인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흑마법사들의 인형, 사역마.

흑의인은 그런 사역마였다.

“하아, 여기서도 흑마법사야?”

레오나는 기절한 아이를 바라보았다. 다섯 살 남짓한 여자아이였다.

“대체 뭐지?”

아주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음모의 불길함이었다.

레오나는 사역마가 남긴 뼈다귀를 주워 아공간 아티팩트에 집어넣고는 라파엘이 있는 곳으로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아이를 아이 엄마에게 돌려주자, 그녀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허리를 숙였다.

“아아,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앞으로 조심하세요.”

“예, 그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존함이라도 알려주시면…….”

“레오나예요. 이쪽은 라파엘이고. 무슨 일 있으면 백기사단에서 저를 찾으세요.”

“나도 있다.”

두 눈을 가늘게 뜬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정정했다.

“혹시라도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백기사단으로 저나 라파엘을 찾아오세요.”

“예, 예.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그만 가보세요.”

모녀는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모녀가 사라지자, 레오나는 심각한 얼굴로 라파엘을 보았다.

“돌아가자, 이 일을 단장님께 보고해야겠어.”

“같은 생각이다.”

레오나는 라파엘과 함께 기사단으로 복귀해 데미안을 찾아갔다.

* * *

쾅!

“또야!”

어두운 방 안에서 흑의 로브를 입고 있는 여인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을 향해 이를 갈았다.

사역마를 통해 본 그 여자는 하늘빛 머리칼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레오나, 또 그 여자야!”

하필 거기에 그 여자가 나타나다니. 우연이 따로 없다.

“그 여자, 대체 뭐야?”

여인의 시선이 뒤쪽에 놓인 투명한 수정 구슬로 향했다.

수정 구슬엔 붉은빛을 띠는 에너지가 영롱하게 절반가량 채워져 출렁거리고 있었다.

“아직 모자라, 다른 사역마들의 상황을 좀 봐야겠어.”

여인은 거울에 손바닥을 대고 휘저었다. 그러자 거울 속의 장면이 바뀌었다.

“다행히 다른 사역마들은 무사해.”

잡히는 즉시 소멸하도록 손을 써두었기 때문에 쉽게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는 놓쳤지만, 다른 게 있으니 괜찮아.”

다른 사역마들이 잘해주고 있으니 그녀로선 그게 큰 위안이 되었다.

에너지원이 채워지면 다이앤의 저주를 강화시켜, 영원한 고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다이앤이 고통스러워하면 가장 슬퍼할 사람은 황제와 황후, 황태자다.

그들의 슬픔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쟁취할 것이다.

그녀의 입가에 짜릿한 미소가 맴돌았다.

* * *

기사단으로 복귀한 레오나는 라파엘과 함께 센터폴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아이를 납치한 자가 누군지 모른다?”

“네, 제가 잡자마자 소멸했습니다.”

“소멸했다라…….”

“예.”

“그리고 이걸 남겼습니다.”

레오나는 아공간 아티팩트에서 주워 온 뼈다귀를 꺼냈다.

“이건…….”

“사라진 그자가 남긴 겁니다.”

레오나가 꺼낸 건 사람의 뼈다귀였다.

“아무래도 사역마였던 것 같습니다.”

“사역마라고?”

“네, 이 뼈다귀를 매개체로 만들어진 사역마 같습니다.”

데미안이 심각한 얼굴을 하였다.

“흑마법사의 소행이란 말인가?”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라파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레오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사건이 있는지 조사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게 좋겠군. 정말 흑마법사의 짓이라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건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너희는 나가봐도 좋다. 수고했다.”

두 사람은 경례하고 단장실을 나왔다.

데미안은 레오나와 라파엘을 내보내고 서랍에서 검은색 통신 구슬을 하나 꺼냈다.

마력을 주입하자, 통신 구슬이 연결되었다.

[오, 데미안 경. 웬일로 제게 다 연락을 주셨습니까?]

통신 구슬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흑기사단장 카이엘이었다.

흑기사단은 정보 수집, 잠입, 암살 등 특수 임무를 맡는 기사단이라, 사건을 알아보는 분야에선 최고였다.

그래서 데미안은 카이엘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다.

“오늘 낮에 우리 단원이 납치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대낮에 말입니까? 그것참 대담한 놈이군요.]

“단원의 말론 그자가 잡히자마자 소멸했다고 합니다.”

[소멸이요?]

“그렇습니다. 제 생각으론 흑마법사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좀 심각한 사안이군요, 흑마법사라니. 제가 뭘 도와드리면 좋겠습니까?]

“혹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는지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라면 문제없습니다. 알아봐 드리죠. 대신 술 한 잔 사셔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크……. 역시 경은 말이 잘 통한단 말입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죠.]

통신 구슬이 끊겼다.

데미안은 통신 구슬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라파엘과 레오나가 이른 저녁부터 대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피곤했을 터인데 대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대견했다.

“혈기 왕성하군.”

보기 좋았다.

* * *

이틀 후 아침, 레오나와 라파엘은 데미안의 호출을 받았다.

데미안은 두 사람에게 서류를 던져 주었다.

“너희가 겪었던 납치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고 하는군. 그 명단이다.”

레오나의 라파엘은 데미안이 건넨 납치 사건 명단을 훑어보았다.

“모두 어린아이들이군요.”

레오나의 말에 라파엘이 이었다.

“환경도 비슷합니다. 모두 가난한 아이들입니다.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그런 아이들.”

“그래, 제국 내에서 상당히 많이 일어났더군.”

서류를 덮은 레오나가 데미안을 보았다.

“이걸 저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가 있으신 것 같군요.”

“맞다. 너희에게 임무를 하나 맡길까 해.”

레오나와 라파엘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데미안을 보았다.

“너희 두 사람에게만 주는 특별 임무다.”

“어떤 임무입니까?”

“이자들을 조사해라.”

레오나는 데미안이 내민 서류를 확인해 보았다.

서류는 누군가의 신상이 적혀 있었다.

“이자들은 누구입니까?”

“이번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는 가장 의심스러운 자들이다.”

조사해야 할 대상은 네 명.

“라파엘과 제가 각각 두 명씩 맡아서 하면 되겠군요.”

“그렇다.”

레오나는 네 장의 서류 중 두 장을 라파엘에게 주었다.

“그자들을 조사해 나한테 보고해라.”

“무력 행사 가능합니까?”

“필요시에 전투는 허가하지만, 살인은 금한다.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꼭 완수하겠습니다.”

레오나가 대답했고, 라파엘이 의지로 타오르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번 임무는 너희만 알고 있어야 한다. 절대 발설하지 말도록.”

흑마법사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꼬리를 밟혔다고 생각하면 숨으려고 들 테니 말이다.

‘숨기의 달인들이지.’

흑마법사들이 한 번 숨기 시작하면 정말 찾기 힘들 정도로 꼭꼭 잘 숨었다. 그래서 조사를 할 때도 은밀히 해야 한다.

그들이 모르게.

“알겠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있기에 레오나와 흔쾌히 대답했고, 라파엘도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

“그만 나가보도록.”

레오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경례하고는 단장실을 나왔다.

라파엘이 의욕이 충만한 얼굴로 말했다.

“레오나, 잘해보지.”

“그래, 잘해보자.”

“이번 임무는 내가 먼저 조사를 마치겠다.”

“그러든가.”

“너는 아무렇지 않나?”

레오나가 의아한 얼굴로 라파엘을 보았다.

“이번 임무는 너와 나를 경쟁시키기 위함이다.”

“그게 그렇게 되나?”

“그렇다. 누가 먼저 빠르게 임무를 완수하는지 단장님께선 시험하고 계신 거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 줄이야.

“그래서?”

“승부다.”

“어?”

“나는 너를 반드시 이길 것이다.”

라파엘의 라일락빛 눈동자가 열정적으로 타올랐다.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레오나는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이놈의 머릿속에는 모든 일이 승부로 귀결되는 게 틀림없었다.

* * *

방으로 돌아온 레오나는 가져온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먼저, 첫 번째 사람이다.

[이름: 제라드.

나이: 32세.

인상착의: 빡빡머리, 정수리에 흉터가 있음. 키는 170㎝로 추정

특기: 도끼를 잘 다루나 무력 수준은 하급임.]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라는 거네.”

다음.

[이름: 마이클.

나이: 30세.

인상착의: 곱슬거리는 장발의 애꾸눈. 키는 175㎝으로 추정

특기: 검사, 수준은 중급.

*제라드와 한패임.]

레오나는 손에 든 두 장의 서류를 흔들며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이 같이 붙어 다닌다는 건데.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나.”

일단 두 남자는 제도에 있는 주점들을 전전한다는 거다. 딱히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 다닌다고 보면 된다.

“조심스럽게 움직일 거란 말이지.”

꿍꿍이가 있는 놈들은 드러내놓고 다니지 않는다. 몰래 숨어서 다니지.

“딱 쥐새끼 스타일인데.”

구멍으로 숨어들 놈들.

“납치 사건이 연관이 있다면, 배후가 있을 거야. 그럼, 배후에게 지시를 받고 움직이겠지?”

똑똑.

한참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데 누군가 레오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나야, 레오나. 제임스.”

제임스의 방문이 의아해 서류를 서랍 속에 넣어놓고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제임스?”

제임스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엄지로 바깥을 가리켰다.

“오늘 유릭이랑 말론, 라파엘이랑 한잔할 거라 했는데 너도 가자.”

“술 마셔도 돼?”

“유급 휴가받았잖아, 괜찮아.”

휴가 기간에는 자유 시간이 주어지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술을 마셔도 된다.

“어디서 마실 건데?”

“유릭네 부모님이 운영하는 주점. 거기 모이기로 했어.”

잠시 생각한 레오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갈게.”

“준비하고 나와, 바깥에서 기다릴게.”

“응.”

고개를 끄덕인 레오나는 제복 위에 외투만 살짝 걸치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제임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먼저 가 있어, 너랑 나만 가면 돼.”

“그렇구나.”

“얼른 가자.”

레오나는 제임스와 함께 말을 타고 제도 센터폴로 나왔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유릭의 부모님이 운영한다는 주점 <별빛 창가>였다.

주점에 들어서자 유릭이 멋쩍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왔어, 레오나. 저기로 가자.”

“이 자식이!”

제임스가 유릭의 목에 헤드록을 걸었다.

“형님은 안 보이고 레오나만 보이냐?”

“그만해, 인사하려고 했어.”

“장난이다, 자식아.”

유릭이 툴툴거리며 안내했다.

“자리로 가서 앉자. 라파엘은 먼저 와 있었어.”

레오나는 의외란 얼굴로 라파엘을 보았다.

“라파엘, 여기서 다 보네.”

“이제 왔군. 앉아라.”

레오나는 라파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제임스가 레오나의 옆에 앉았다.

그 옆을 유릭이 앉았고, 유릭의 옆엔 말론이 앉아 있었다.

레오나는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

“이게 다 뭐야, 엄청 맛있어 보여.”

“너희 온다고 주방장이 특별히 만들어준 거야. 많이 먹어라.”

“잘 먹을게.”

제임스가 웃으며 말하자, 말론, 라파엘, 레오나도 잘 먹겠다는 말을 하였다.

음식은 맛있었다.

야채가 듬뿍 올라간 소시지볶음은 새콤달콤했고,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닭튀김은 소스와 함께 먹으니 일품이었다.

“정말 맛있어.”

레오나가 순수하게 감탄하자, 유릭이 수줍게 웃었다.

“맛있군.”

라파엘도 신세계를 만난 듯한 얼굴로 음식에 몰두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제임스와 유릭, 말론, 레오나와 라파엘은 맥주를 세 잔만 마시고 가게를 나왔다.

맥주와 안줏값은 모두 유릭의 부모님이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다.

“저녁 맛있게 잘 먹었다, 유릭.”

레오나가 웃으며 말하자, 유릭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다.”

그러자 말론, 제임스가 우리도 잘 먹었다고 말했다.

“술도 깰 겸, 조금만 걷다 가자.”

제임스의 제안이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다섯 사람은 거리로 나와 걸었다.

그런데 레오나는 거리를 걷던 와중 낯익은 두 사람을 보았다.

‘저자들은…….’

데미안 단장이 조사해 보라고 준 서류 속 남자들이었다.

빡빡머리와 애꾸눈.

흔한 조합은 아니어서 눈에 띄었다.

게다가 그들의 허리춤에 달린 무기, 각각 도끼와 검이었다. 그리고 빡빡머리의 정수리에 난 흉터.

‘확실해.’

레오나는 두 사람을 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른 볼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겠다, 너희 먼저 가라.”

제임스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레오나는 서둘러 일행과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보자, 제임스, 유릭, 말론, 라파엘.”

“알았어.”

“알았다.”

“나중에 봐.”

“조심해라.”

제임스, 라파엘, 유릭, 말론이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레오나는 네 사람의 인사를 뒤로하고 두 남자를 쫓았다.

두 남자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골목 안쪽에 위치한 낡은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레오나도 두 남자를 따라 낡은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주점 안에는 험악하게 생신 용병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레오나의 제복을 보더니 인상을 굳히며 수군거렸다.

“백기사단에서 무슨 일이지?”

“그러게. 혼자 술 마시러 온 건 아닐 테고.”

백기사단은 마검사로 이루어진 제국의 4대 기사단 중 으뜸이었다. 용병들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레오나는 그런 그들의 시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노린 것은 구석에 앉아 있는 두 남자였으니까.

레오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바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바텐더가 능글맞게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이런 허름한 곳에 백기사단의 기사분께서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레오나의 기사단 제복을 알아본 바텐더가 아는 척을 하자, 레오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여긴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인가?”

“그럴 리가요.”

“그럼, 얼른 술이나 좀 내오지?”

“여기, 주문하신 맥주입니다. 안주는 서비스.”

서비스로 준 안주는 치즈였다.

“서비스는 사양할게. 난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믿는 주의라.”

“무척 조심스러우시군요.”

레오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바텐더를 보았다.

“저 두 사람 여기 자주 와?”

바텐더는 레오나가 가리킨 사람을 보았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오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 술만 마시다 가나?”

“한 시간 정도 있다가 갑니다.”

한 시간 동안 술만 마시다 간다.

레오나는 두 사람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그런 그녀를 바텐더 역시 유심히 바라보았다.

* * *

“이번엔 어디로 옮겼대?”

빡빡이 제라드가 묻자, 애꾸눈 마이클이 대답했다.

“K197 구역. 여기 지도도 있다.”

마이클이 꺼낸 지도를 본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쯧, 골치 아프게 됐어. 경비가 이렇게 삼엄해질 줄이야.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됐잖아.”

제라드가 험악한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마이클 역시 상황이 짜증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최근 있었던 납치에 실패해서 그래. 하필이면 제국 기사들에게 걸려가지고.”

“당분간 몸을 사려야겠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위험한 것 아냐?”

제라드의 말에 마이클도 동의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제라드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가자, 시간 됐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

“그래, 서두르자고.”

두 사람은 테이블에 술값을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나는 그런 두 사람을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가게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더 깊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레오나는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종횡무진하는 그들을 따랐다.

‘어딜 가는 거지?’

은밀히 움직이는 모양새가 수상쩍었다. 구린내가 난다고 할까.

두 사람을 따라간 결과.

‘폐가?’

두 사람이 폐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레오나는 폐가로 다가가 창문 틈을 통해 엿보았다.

그런데 폐가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순식간에 빛과 함께 사라졌다.

레오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폐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동 마법진?”

폐가의 바닥엔 이동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주위에 마정석 가루가 떨어져 있었다.

마정석을 이용해 두 남자가 어디론가 이동한 모양이었다.

“어디로 통하는 마법진이지.”

게다가.

“피로 그려졌어.”

폐가 안에 풍기는 비릿한 혈향.

마법진은 무언가의 피로 그려진 것이었다.

“진짜 흑마법사가 있다는 거야?”

그것도 제도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고?

레오나는 마법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타락한 선도자를 죽이기 위해, 흑마법에 관한 공부도 무지막지하게 한 그녀였다.

레오나는 마법진 중앙에 새겨진 거리를 나타내는 숫자를 보았다.

“장거리는 아니야. 단거리를 이동하는 거야.”

그리고 사방에 적힌 숫자.

“이건 좌표고. 이 좌표가 어디를 가리키는지만 알면 좋겠는데.”

레오나는 마법진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폐가에서 나오기 위해 문을 열었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레오나는 급히 배리어를 펼쳤다. 배리어를 펼치자마자, 레오나가 서 있던 입구가 폭발했다.

퍼엉!

레오나의 몸이 폭발에 휩싸였다.

다행히 배리어를 펼친 덕분에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폭발에 의해 폐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떨어졌다.

레오나가 떨어진 곳은 골목 안에 있던 건물의 옥상이었다.

“콜록, 콜록.”

먼지 구덩이에 빠진 레오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런, 이런. 회심의 공격이었는데 그걸 피하다니.”

레오나의 앞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레오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공격이 꽤 화려하네.”

“이번에도 화려할 겁니다.”

남자가 양손의 손가락 사이에 비도를 끼웠다. 비도술을 사용하는 모양이다.

레오나는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멀쩡히 돌아갈 생각은 버리십시오.”

“여기서 누가 멀쩡히 나갈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레오나는 검을 뽑았다.

레오나에게서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남자가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전력을 다해야 할 것 같군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몸을 날리며 비도를 뿌렸다.

열 개의 비도가 무작위로 레오나에게 날아들었다.

챙챙챙챙!

레오나는 빠르게 움직이며, 비도를 모조리 쳐냈다.

그러나 비도는 살아 있는 것처럼 방향을 바꾸어 레오나를 재차 공격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이 달린 것처럼.

레오나는 신성력을 일으켜, 검에 씌웠다. 그리고 날아오는 비도를 향해 휘둘렀다.

신성력을 머금은 검에 부딪힌 비도가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그러자 이를 악문 남자가 허벅지에 달려 있는 단검을 뽑아 양손에 쥐고는 은신술을 펼쳤다.

순식간에 레오나의 뒤를 점한 그가 단검으로 레오나의 목을 그었다.

레오나는 앞으로 몸을 숙여 단검을 피하고 뒤로 발차기를 했다.

급히 뒤로 몸을 피한 남자가 은신술로 모습을 감추고 이번엔 레오나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양손으로 휘두른 단검이 서로 교차하며 레오나의 허리와 다리를 그으려 했다.

레오나는 점프로 피한 다음, 검을 휘둘렀다. 종으로 베어오는 검이 남자의 정수리를 노렸다. 간신히 뒤로 물러난 남자의 앞으로 레오나의 검이 스쳤다. 그러자 남자의 후드가 갈라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뭐야, 당신 바텐더잖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레오나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런, 들키고 말았군요.”

“당신이 주점의 주인이었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럼, 당신이 더 중요한 인물이겠네.”

레오나가 히죽 웃었다.

두 남자를 쫓는 것보다, 저 남자를 잡는 게 더 이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바텐더가 레오나를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작전상 후퇴를 해야겠군요.”

“어딜 도망치려고.”

레오나는 초가속으로 땅을 박찼다. 그리고 빠르게 바텐더에게 쇄도했다.

“미안하지만,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엔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목걸이를 만지작거린 바텐더는 순식간에 지워지듯 사라졌다. 허공에서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하하하.”

“다시 만나지 말고, 지금 만나자니까!”

레오나는 탐지 마법을 발동시켰다.

주위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탐지되었지만 그 기운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말 쥐새끼가 따로 없네.”

공격할 땐 언제고, 뒤로 내빼는 솜씨 하나는 끝내준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보고를 하고 다시 생각하자. 이쪽도 노출된 것 같으니.”

남자가 사용한 건 공간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아티팩트인 것이 분명했다.

“귀찮게 됐어.”

두 남자를 쫓았더니, 다른 놈이 눈치를 깠다.

아마 그 바텐더가 두 남자를 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복귀해야겠네.”

레오나는 괜스레 허공만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다음 날, 아침.

레오나는 단장실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보았던 것과 전투 상황에 대해 털어놓았다.

“폐가에 마법진이 있었다?”

“예.”

레오나는 종이에 마법진의 형태를 그려서 보여주었다.

“이동 마법진이군.”

역시, 그는 단박에 그게 이동 마법진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단거리 이동 마법이야.”

레오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여기서 흑마법에 대해 안다고 떠벌릴 순 없으니까.

그걸 털어놓으면, 흑마법을 접하게 된 경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율리아나의 지식이었기 때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숨겨야 하는 것만 제외하고 보고 했다.

“이동 마법진이었군요.”

“피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했나?”

“네, 가까이서 맡아보니 진한 피 냄새가 났습니다.”

“흑마법사가 만든 것이로군.”

레오나는 정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습니까?”

“피로 마법진을 그리는 방식은 흑마법사들이 이용하는 방법이지. 알아두도록.”

“알겠습니다.”

“전투를 벌였다고 했는데, 다친 곳은 없나?”

레오나가 씩씩하게 웃었다.

“없습니다.”

“위험한 자들인 것 같으니 각별히 몸을 조심하도록. 너는 우리 백기사단의 중요한 인재다.”

“명심하겠습니다, 단장님.”

레오나의 보고가 끝나자, 라파엘이 들어와 보고를 했다.

레오나도 라파엘의 보고를 함께 들었다.

“네가 조사한 곳에서도 레오나와 똑같은 마법진이 있었군.”

라파엘이 조사한 사람은 여인들이었다.

범죄자로 낙인찍힌 여인들이었는데, 그 여인들이 빈민가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여인들이 사라진 곳을 살펴보니, 레오나가 봤던 것처럼 비슷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주점은 놈들의 거점인 듯싶습니다. 주점을 옮겨 다니는 것은 놈들이 거점으로 삼은 주점이 자주 바뀐다는 것일 테고요.”

바텐더가 자신을 죽이려 하였다. 거점을 담당하는 것은 어쩌면 그 바텐더일 확률이 높다.

즉, 빡빡이와 애꾸눈, 바텐더가 한패라는 뜻이다.

“네 말대로 놈들이 옮겨 다니는 주점이 거점인 건 맞는 것 같군. 하지만 정말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거점인 건 알았지만,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러한 일을 벌인 것인지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너희는 이자들의 행적을 계속 쫓도록 해라.”

“예, 단장님.”

“예, 단장님.”

레오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만 나가보도록.”

레오나와 라파엘은 데미안에게 경례하고 단장실을 나왔다.

“이번엔 내가 늦었군.”

“응?”

“너의 승리다.”

라파엘이 진지하게 레오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다음번엔 나의 승리가 될 것이다.”

라파엘은 승리에 대한 열의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레오나.”

“왜?”

“다치지 마라.”

뜬금없는 말에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라파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걱정 고맙다, 너도 다치지 마라.”

“……알겠다.”

라파엘이 살포시 웃었다.

* * *

“뭐라고?”

어두운 방 안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거울을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

“들켰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주인님.]

거울 속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텐더였다.

“제물은?”

[거점을 옮겨 안전하게 숨겨 두었습니다.]

“총 몇 명이지?”

[열 명입니다.]

로브의 여인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뒤에 있는 붉은 수정구로 향했다.

열 명으로 수정구의 에너지를 채우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꼬리가 밟혔으니, 당분간 조심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열 명이라도 사용하는 수밖에.”

[언제까지 준비할까요?]

“5일 후에 의식을 한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면 붉은 달이 뜰 거야.”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블루문과 레드문은 천사와 악마를 상징한다.

그리고 1년에 두 번. 푸른 달과 붉은 달이 번갈아 뜨는 날이 있다.

그리고 푸른 달이 뜨고 정확히 한 달 뒤, 붉은 달이 떠오른다.

붉은 달이 떠오르면 천사의 개입이 약해져, 마계의 통로가 넓어지고 악마들이 힘을 얻는다.

“당분간은 움직이기 힘들겠지만, 조금 지나면 상황 봐서 움직이도록 해. 붉은 달이 뜨면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날 의식을 통해 악마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힘을 얻어낼 것이다. 그게 그녀의 목적이었다.

‘이번엔 어쩔 수 없지만, 붉은 달 의식 때까지는 제물을 준비해야 한다.’

여인은 거울 속을 휘저어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레오나, 또 그 여자야. 대체 그 여잔 뭐지?”

난데없이 나타난 신성력을 소유한 기사 하나가 눈에 거슬리고 있다.

“그런데 대체 조사하란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이래저래 짜증이 확 치솟았다.

그때 마침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져 왔다. 정보단체와의 연락 수단인 통신 구슬에서 신호가 온 것이다.

통신 구슬을 켜자, 조사보고를 하러 왔다고 하였다.

그녀는 서둘러 움직여 거울이 있는 테이블 뒤쪽의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마법진은 이동 마법진이었다.

그녀는 검은 마력으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잠시 후, 음습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더니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곳은 또 다른 지하 공간이었다.

그녀는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탐스러운 붉은 머리가 물결치듯 허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다소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서 오렌지빛 눈동자가 요요하게 빛이 났다.

놀랍게도 그녀는 2황녀 비비안이었다.

그녀는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뻗어 벽에 그려진 마법진에 손바닥을 대었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지며,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 위로 올라간 그녀가 벽을 밀자 벽이 회전하며 입구가 열렸다.

그 틈새로 들어간 그녀는 화려하게 꾸며진 자신의 방 안을 둘러보다 허공에 손짓했다.

“나와서 보고해.”

허공이 일그러지며, 흑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여자에 대해 조사한 보고서입니다.”

두툼한 서류 뭉치를 받아든 2황녀 비비안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훑어보았다.

“칼리반 백작가의 장녀라고?”

“그렇습니다.”

2황녀 비비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레오나 칼리반. 칼리반 백작가의 장녀. 재능 없는 가문의 수치. 무능아, 불순물, 미운 오리 새끼.

온갖 안 좋은 별명을 다 가지고 있는 여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 여자가 백기사단의 기사가 되고, 신성력까지 가지고 있다고?”

말이 안 된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그녀가 알고 있던 여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거 사실이야?”

2황녀 비비안이 부복한 흑의인을 노려보았다.

“사실입니다. 행적, 출신, 모든 인력을 동원해 찾아냈습니다. 그 여자는 레오나 칼리반이 맞습니다.”

“말이 안 되잖아. 그 무능력자가 신성력을 가진 백기사단의 기사라니…….”

“힘을 각성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문에는 비밀로 하고 독립을 한 것 같습니다.”

“칼리반 백작가에서 완전히 축출된 게 맞아?”

“예, 최근에 서류 정리가 끝났다고 합니다.”

“하, 어이가 없네. 정말.”

백작가에 버려진 망아지가 신성력을 각성해 백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니.

“차라리 잘됐어. 처리하기 편리하겠어.”

배경이 있다면 여러 가지 걸림돌이 생기게 마련인데, 레오나는 이제 혼자였다.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죽든 아무도 그녀의 죽음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수고했어, 그만 가봐.”

“예.”

흑의인이 스르륵 사라졌다.

2황녀 비비안은 서류를 움켜쥐고 레오나를 어떻게 요리할까 궁리했다.

“일단은 두고 봐야겠어. 의식에 신경도 써야 하니.”

보고서를 든 그녀의 손에서 검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보고서는 순식간에 검은 불꽃에 집어삼켜졌다.

불꽃을 바라보는 2황녀 비비안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 * *

레오나는 모처럼의 여유가 좀 생겼다. 추적 임무를 맡고 있었지만, 놈들은 잠잠했다.

그날의 전투가 영향이 컸는지 놈들이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수십 개가 넘는 주점을 일일이 다 살펴볼 수도 없었다.

데미안에게 보고했더니, 당분간 틈을 주자고 말했다. 틈이 생기면 놈들은 반드시 움직일 거라고.

맞는 말이었다.

너무 고삐를 꽉 쥐고 있으면, 오히려 더 숨으려고 든다.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주면, 순간의 방심으로 놈들도 틈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레오나는 모처럼 라데온의 검술을 수련했다.

제3식까지는 마스터했지만, 아직 제4식과 5식이 남아 있었다.

신성력을 검에 주입한 채 분검을 만들어 쏟아내는 기술이다.

레오나는 기사단 건물 뒷산에 올라 검식을 펼쳤다.

수련용 철검에 신성력을 주입하자, 황금빛이 검에 일렁였다.

레오나는 신성력을 중첩시켰다.

한 겹, 두 겹, 세 겹 차례대로 일곱 겹으로 중첩을 시켰다.

검에 일렁이는 황금빛이 짙어졌다. 레오나는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쇄에에엑!

공기를 가르며 뻗어 나간 검이 흔들렸다.

검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일곱 개의 빛의 검을 만들어냈다.

레오나는 빛의 검을 위로 쏘았다.

라데온의 신성 검술.

제4식. 떨어지는 유성의 폭우.

하늘에 솟아오른 분검이 갈라졌다. 일곱 개에서 열네 개가 되더니 스물여덟 개의 분검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콰콰콰콰!

쏟아져 내린 분검이 일대를 휩쓸었다. 풀들이 깎여나가고 땅이 파였다.

레오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너무 과했네.”

분검이 떨어진 곳의 땅이 크게 파였다. 군데군데 구멍이 난 것처럼.

“진짜 너무 과했어.”

민망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더 했다간 자연에 미안해질 것 같았다.

뒷산에서 내려오자, 라파엘이 연무장에서 동기들과 대련을 벌이고 있었다.

역시 난 놈은 난 놈이다. 동기들 그 누구도 라파엘을 이기지 못했다.

게다가 공격 중간에 적절하게 섞은 마법 공격은 피하기 까다로웠다.

레오나는 벤치에 앉아 라파엘의 대련을 구경했다.

대련을 꽤 오래 했는지 라파엘이 입고 있는 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마에 흐른 땀방울이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완전히 그림이었다.

‘저 정도면 완전 사기 캐릭터지.’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은빛 머리칼, 맹수처럼 번뜩이는 라일락 빛 눈동자,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턱선과 하얀 피부. 장신의 키, 다이아몬드처럼 단련된 근육까지.

뭐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대단한 놈이야.’

그렇게 생각하는데 라파엘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라파엘이 수련용 검으로 레오나를 가리키더니 도발했다. 대련하자고.

동기들도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연무장 위에 올라섰다.

한바탕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라파엘과는 자주 대련해서 그런지, 그의 도발이 귀엽게 받아들여졌다.

* * *

기사단장들이 원탁에 모였다.

이유는 준기사들을 뽑는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흑기사단에서 대단한 인재가 들어왔다고 하던데…….”

물꼬는 적기사단장 페이몬이 텄다.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어깨를 쭉 폈다.

“푸른 장미의 계승자가 입단했습니다.”

“푸른 장미의 계승자라면…….”

적기사단장 페이몬이 놀란 얼굴을 했다.

“생각하시는 자가 맞습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 흑기사단장 카이엘을 보며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입니까, 대단하군요.”

전설적인 어쌔신, 푸른 장미.

신출귀몰하고, 실패를 몰랐던 최강의 어쌔신.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정체가 불분명한 푸른 장미는 전 세계를 휩쓸며 활약한 대단한 어쌔신이었다.

특히 푸른 장미가 사용하는 특별한 이능. 가시덤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공격력을 지닌 능력이었다.

그런데 그 계승자가 흑기사단에 준기사로 입단한 것이다.

“대체 왜 흑기사단에 입단한 건지 모르겠군요.”

푸른 장미의 계승자라면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행동해도 되었을 텐데. 조직에 들어오다니.

“글쎄요.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게 이유라더군요.”

“아무튼 축하합니다.”

청기사단장이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이번 인재 발굴은 백기사단과 흑기사단의 승리로군요.”

데미안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도 나름대로 흡족해하고 있는 것이다.

데미안의 미소를 본 청기사단 블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미안 경, 방금 웃었죠?”

“아닙니다.”

데미안이 표정을 갈무리했다.

“제가 봤습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거. 이번에 영입한 인재들이 꽤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넌지시 말을 던지자, 흑기사단 카이엘이 그 말을 받았다.

“이번에 황녀 전하 호위에 그 두 사람이 마물을 훌륭하게 처리했다죠. 경험이 부족한 준기사들이 마물을 상대로 말이죠.”

적기사단장 페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들었습니다. 신입치고는 대단하였다고.”

청기사단장 블레어도 인정했다.

“그래서 기쁘신 거군요. 데미안 경.”

데미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능력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하아, 부럽습니다.”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이 데미안과 흑기사단장 카이엘을 바라보았다.

“청기사단은 눈에 띄는 인재가 없었습니까?”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넌지시 묻자.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올해는 그저 그렇군요. 인원수 채운 것으로 만족하려고요. 잘 훈련시켜서 키워야죠.”

“걱정 마십시오. 우리 적기사단도 같은 처지니까.”

적기사단장 페이몬이 우리도 망했다며 한탄했다. 그러자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미소를 지었다.

“동지가 생겨서 기쁘군요.”

“우리, 잘 키워봅시다.”

“물론이에요. 겨울 동계 훈련에서 만회하려면, 혹독하게 굴려서 준비시켜야죠.”

겨울 동계 훈련은 4대 기사단 전부가 참여하는 전지훈련이다.

장소는 제국 북부 설산 지대.

지독한 추위와 설산 몬스터와의 전투를 벌여야 하는 극한의 훈련이다.

겨울 동계 훈련을 통해 각 기사단의 능력치를 가늠하고, 인내와 담력은 물론, 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지옥 훈련이다.

그리고 겨울 동계 훈련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다.

그 기간 안에 준기사들을 훈련시키겠다는 의지가 청기사단장과 적기사단장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이거, 우리도 분발해야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데미안 경.”

“걱정 없습니다.”

흑기사단장 카이엘의 말에 데미안은 전혀 걱정 없다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원탁 회의실에서 나온 데미안은 흑기사단장 카이엘을 불렀다.

“카이엘 경, 잠시 저와 이야기를 나누시죠.”

흑기사단장 카이엘도 데미안이 무슨 이유로 보자고 한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건 때문이군요.”

“그렇습니다.”

“소회의실로 가시죠.”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흑기사단장 카이엘과 함께 소회의실로 들어갔다.

소회의실은 기사단장들의 모임 장소인 원탁 회의실 옆에 있는 작은 회의실이었다.

주로 서로 독대를 할 일이 생길 때 이용하는 곳이었다.

데미안과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데미안은 흑기사단장 카이엘에게 레오나와 라파엘이 가져왔던 마법진 그림을 보여주었다.

“이건…… 마법진이 아닙니까?”

“저희 단원들이 찾아낸 것입니다. 붉은색의 피로 그려진 이동 마법진입니다.”

“피로 그려진 거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흑기사단장 카이엘의 두 눈이 커졌다.

“흑마법사라니.”

골치 아프게 되었다.

데미안이 말했다.

“카이엘 경께서 알려준 자들을 조사하던 중 그자들이 이 마법진을 통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렇군요.”

“제 생각엔 이 마법진에 그려진 좌표와 거리를 분석하면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받아 들었다.

“이게 또 우리 전문이죠. 맡겨주시죠.”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술은 언제 사실 겁니까?”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저택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오, 그럼 경이 그토록 아낀다는 퀸즈블러드를 맛볼 수 있는 겁니까?”

퀸즈블러드는 여왕의 피라고 불리는 1년의 한 병밖에 생산할 수 없는 귀한 와인이다.

여왕의 피라 불리는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이거, 아주 열심히 도와야겠군요.”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데미안을 보았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러자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전투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조심하십시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주의 시키겠습니다. 그럼.”

소회의실을 나온 두 사람은 각자 갈 길을 갔다.

* * *

라파엘과 대련을 마친 레오나는 그와 함께 나란히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며 땀을 식혔다.

라파엘이 땀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레오나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레오나, 실력이 전보다 늘었더군.”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대련의 결과는 무승부였다. 서로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동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네 빠름은 내 상상을 초월한다. 역시 따라잡는 건 무리인가.”

“무리일걸? 네가 초가속을 배우지 않는 이상.”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라파엘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클린.”

황금빛이 일렁이며 땀에 젖은 라파엘의 몸이 깨끗하게 씻긴 듯이 뽀송뽀송해졌다.

라파엘이 신기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이런 건 정령사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신성 마법도 가능한 거였군.”

“신성 마법은 보조 계열이지만, 꽤 쓸 만하지.”

레오나도 자신의 몸을 클린 마법으로 씻어냈다.

“그만 일어나자. 한바탕 몸을 굴렸더니, 배고파 죽겠다.”

“동감이다.”

두 사람이 벤치에서 일어나자, 1조 동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어이, 거기 둘! 밥 먹으러 가자!”

제임스의 외침에 레오나와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제임스가 생선커틀릿을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야, 이번에 흑기사단에 누가 입 단 했는지 아냐?”

“누가 입단했는데?”

유릭이 물었다.

제임스가 생선커틀릿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푸른 장미의 계승자.”

유릭을 비롯한 라파엘, 말론, 레오나도 놀란 얼굴로 제임스를 보았다.

“푸른 장미의 계승자라고?”

레오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묻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레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계승자는 한 명뿐인데, 그사이에 또 계승자가 나온 건가?’

레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 녀석이 여기 올 일이 뭐가 있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계승자라니 궁금하긴 했다.

“제임스, 넌 어디서 그런 정보를 가져오는 거야?”

제임스는 이상하게 정보에 밝았다.

황궁에 도는 소문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려주는 사람이 그였고, 각 기사단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까지 알고 있었다.

레오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너 혹시 스파이냐?”

그 말에 제임스가 길길이 날뛰었다.

“사람을 뭐로 보고! 아니야! 맹세코 아냐.”

“그럼 어디서 그런 고급 정보를 아는 건데?”

“내가 발이 좀 넓어서. 각 기사단에 친구가 많아.”

밝은 제임스의 성격을 보더라도 그가 사교성이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교성이 4대 기사단에 모두 적용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대단하네. 난 네가 그렇게 발이 넓은 사람인 줄 몰랐다.”

유릭이 웃으며 말하자, 제임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너, 지금 비꼬는 거냐.”

“아니, 칭찬인데.”

“아닌 것 같은데.”

제임스가 밥 먹다 말고 유릭의 머리를 끌어안고 헤드록을 걸었다.

“감히, 이 형님을 비웃었겠다!”

“아, 쫌!”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본 라파엘이 한마디 했다.

“식당에서 그런 행동은 삼가라. 예의가 없다.”

“어, 미안.”

제임스가 유릭을 놓아주었다. 유릭은 목을 매만지며, 제임스를 흘겼다.

“넌 맨날 나만 만만하지?”

유릭이 볼멘소리를 내자, 레오나는 그런 네 사람을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옛날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이런 녀석들이 있었는데.’

신성국의 기사단장이었던 시절의 멤버들이 떠올랐다.

유난히 밝은 성격을 지닌 녀석과 소심한 성격의 녀석이 있었다.

그 두 녀석은 지금의 제임스와 유릭처럼 지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중재하는 또 한 사람.

‘아스텔.’

그리운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눈물을 흘리던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미안했다.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미안했다.

‘잘 지내고 있겠지.’

워낙에 잘난 녀석이니, 자신의 뒤를 이어 신성국의 기사들을 이끌고 있을 것이다.

* * *

황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옥상.

옥상 지붕 위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하나로 묶은 진보랏빛 머리카락과 황궁을 내려다보는 남청색의 눈. 날렵한 얼굴선과 대비되는 장신의 키. 한 송이 장미처럼 붉은 입술.

그는 다리 꼬고 양손에 깍지를 껴 머리를 받친 채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여기도 하늘은 똑같네.”

그때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구슬을 꺼냈다. 그것은 통신 구슬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통신 구슬을 켰다.

“오랜만이야, 아스텔.”

통신 구슬 속에서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로 제국으로 갈 줄이야.]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네가 그랬잖아.”

[확실하지 않은 짐작일 뿐이다.]

“짐작이라도 찾아는 봐야지. 그 짐작이 맞을지 어떻게 알아.”

[그렇다고 정말 거기로 기어들어 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시엘.]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찾든가 말든가 할 거 아냐.”

[하아. 정말 제국의 흑기사가 된 거냐? 알려지는 거 싫어했던 거 같은데.]

그랬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사람들이 아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 몇 명만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날 주목하지.”

자신의 정체가 밝혀져야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고 나타날 테니까.

“그리고 내가 가장 싫은 건 내 정체가 밝혀지는 게 아니라, 그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거야. 난 그게 못 견디게 싫어, 아스텔.”

[……정말 거기서 찾겠다고?]

“네가 못 하니까, 내가 해주겠다는 거잖아.”

[조심해라, 시엘. 제국은 만만치 않은 곳이다.]

“걱정 마,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금방 흑기사단의 실세가 되어 그녀를 찾아낼 거야.”

흑기사단을 선택한 건 흑기사단의 특수성 때문이다.

정보.

흑기사단에서 위치가 올라가면,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많아진다.

그 권한을 얻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혔으니, 흑기사단에서도 그를 주목할 것이다.

푸른 장미의 계승자라는 타이틀은 그 정도로 가치가 대단한 이름이니까.

율리아나.

오로지 그녀를 위해 그 이름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가 알아서 찾아와 주기를 바라며.

[열심히 찾아봐. 나도 곧 간다.]

“그래, 정리 끝나면 너도 넘어와라. 기다릴 테니.”

[알겠다.]

통신이 끊겼다.

통신 구슬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참 맑다.”

하늘에서 시선을 거둔 그는 황궁을 내려다보았다.

“이 하늘 어딘가에 네가 있단 말이지.”

가슴이 떨린다.

그녀와 재회할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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