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첫 임무
레오나가 기사단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다.
기사단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기상 시간은 6시. 6시에 준기사들은 연무장에 모여 단체 체력 단련을 받는다. 2시간 동안 이어진 체력 단련이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다.
아침 식사 후에는 소화를 시킬 겸 30분 동안 구보를 한다. 구보가 끝나면 본격적인 검술 훈련을 한다.
각자가 익히고 있는 검술을 점검하고, 반복하듯 수련한 후에는 짝을 이뤄 대련을 펼친다.
그렇게 오전 훈련이 끝나면 점심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또 구보, 마나 연공법을 수련한다. 그다음은 마법 대련을 하게 된다.
저녁 6시에 마법 대련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한 다음, 7시에 마검술 대련을 시작한다. 마검술 대련은 2시간에 걸쳐 이어지고, 밤 9시가 되면 끝이 난다.
그다음은 각자의 방식대로 휴식을 취하거나 수면을 취하면 된다.
이렇게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준기사들은 적응을 해야 했다.
레오나도 다를 것은 없었다.
수련하면 할수록 실력이 느는 것이 두 눈으로 보이니 더욱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해 두었던 검술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그 검술을 사용할 수 있어.”
라데온의 신성 검술.
1식에서 5식까지 있는 검술은 성기사 라데온의 고유 검술로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미세한 신성력의 컨트롤로 파괴력을 높이는 검술이었다.
이 검술을 선택한 것은 율리아나의 검술을 익힐 수 없기 때문이다.
율리아나의 검술은 1인 전승을 사사했기에 두 명에게 전수할 수가 없었다.
그건 율리아나의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내려오는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율리아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난 이미 전수를 했어.’
그 검술을 전수받은 자는 아스텔이었다.
율리아나가 가장 믿었던 수하이자, 정이 많이 든 전우다.
타락한 선도자와 싸울 결심을 하였을 때, 이미 목숨을 내놓을 각오도 했기 때문에 그에게 자신의 검술을 남긴 것이다.
아스텔은 누구보다 훌륭하게 검술을 다룰 테니까.
그리고 이제부터는 레오나로서 살아가야 한다. 율리아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율리아나는 죽은 사람으로서 있는 게 나으니까.
‘난 이제 레오나야.’
영혼이 이 몸에 깃들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삶.
‘이번 삶은 레오나만을 위한 삶이어야 해.’
그게 불행하게 살다간 그녀에 영혼에 대한 예의였다.
* * *
모두가 잠든 시각.
레오나는 홀로 연무장에 서 수련을 하였다.
라데온의 신성 검술을 체득하기 위해서였다.
라데온의 신성 검술은 초밀도의 신성력 컨트롤이 관건이다.
“신성력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어야 해.”
그걸 위해 한 달 동안 열심히 수련했다.
레오나는 신성력을 움직였다. 단전에 자리 잡은 신성력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레오나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신성력이 몸 전체를 한 바퀴 휘돌고 나자, 레오나는 검에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신성력은 검을 타고 내려가 검 끝에 구체로 뭉쳤다. 구체의 크기는 손바닥만 했다.
검을 든 레오나는 눈을 감고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러자 구체가 일그러지더니, 뾰족하게 변했다.
레오나는 뾰족해진 신성력을 여러 개로 나눴다. 두 개, 세 개, 네 개. 신성력이 날카로운 칼날의 형태로 찢어졌다.
라데온 신성 검술, 제1식. 굽이치는 나선의 바람.
신성력의 칼날이 검을 타고 회전했다. 레오나는 검을 휘둘렀다.
슈아아아악!
네 개의 칼날이 회오리처럼 회전하며 검을 타고 뻗어 나갔다.
칼날을 맞은 목각인형이 순식간에 난도질 되어 쓰러졌다.
“네 개가 한계인가. 열 개 정도가 만들어져야 완전한 건데.”
제1식은 열 개의 칼날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상대를 공격하는 검식이다.
그런데 레오나는 네 개밖에 만들지 못했다.
“아직 이해도가 부족해 그런 거야.”
라데온의 신성 검술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면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신성 검술을 사용할 수 있다.
“신성력을 이용한 검술인가.”
뜻밖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단장 데미안이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단장님.”
레오나는 데미안에게 경례했다.
레오나의 인사를 받은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부숴놓은 목각인형으로 시선을 주었다.
“신성력은 평화로운 힘인 줄만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군.”
고개를 돌린 데미안의 짙푸른 눈동자가 레오나에게 향했다.
“마력은 전혀 다루지 못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마나 연공도 해온 터인데 신성력에 비해 마나 연공 성취도가 낮습니다.”
“한번 보여줄 수 있나?”
“예.”
레오나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심장에 만들어진 마나 고리가 회전하며 레오나의 검에 마나가 실렸다.
하지만 그 빛이 매우 약하고 희미했다.
“흐음…… 성취도가 1성이군.”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레오나는 어릴 적부터 마나 연공을 꾸준히 해왔지만, 재능이 없었던 탓에 성취도가 낮았다.
한 개의 마나 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성취도가 올라가면 마나 고리가 여러 개가 된다. 그러나 레오나는 한 개까지가 한 계였다.
물론 지금이라도 연공을 하면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신성력도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단전에 들어찬 광활한 신성력을 끌어내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마나 연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원소 마법을 배워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신성력을 사용하게 된 거군.”
“네, 제겐 마나보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게 편리하니까요.”
“그럼, 마나 연공은 포기하는 건가?”
“아니요. 신성력을 이용한 검술은 완벽하게 체득하면, 마나 연공을 다시 해볼 생각입니다.”
레오나의 막힘없는 대답에 데미안이 미소를 지었다.
“기대가 되는군.”
데미안은 반짝거리는 레오나의 눈빛을 보며, 기대감을 품었다.
그녀가 자신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녀의 가능성에 기대가 컸다.
* * *
칼리반 백작가는 레오나가 나간 이후에도 별일 없이 잘 굴러갔다.
리리엘 역시 지금처럼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눈엣가시 같던 레오나가 보이지 않으니 홀가분하다고 할까. 어차피 재능 없는 레오나는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언젠간 치워버릴 대상이었는데 스스로 나가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그래도 나가면서 깽판을 치고 간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안 풀린다.
‘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는 거야.’
이제 자신은 백작가의 유일한 영애이자 후계자니까.
그래서 고용인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마리, 오늘은 차 맛이 좋네. 차 끓이는 솜씨가 많이 늘었어.”
칭찬을 잘 하지 않는 리리엘이 그녀를 칭찬하자 마리는 얼떨떨했다.
“과, 과찬이세요.”
“아니야, 정말 늘었어. 앞으로도 쭉 잘 해내길 바라.”
“예, 아가씨.”
리리엘은 콧노래를 부르며 마리가 끓여 준 차를 호로록 마셨다.
푸르른 하늘 아래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 삼아 마시는 차는 정말 꿀맛이었다.
‘이제 나는 명실상부 백작가의 후계자야.’
레오나가 나간 이후, 리리엘은 칼리반 백작으로부터 가전 검술을 사사 받아 후계자로 자리 잡았다.
가전 검술은 까다롭고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리리엘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재능을 믿었으니까.
마나 고리도 세 개나 되었고, 소드 익스퍼트 초급에 도달했다.
소드 익스퍼트는 검술의 경지를 뜻한다. 등급은 초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나뉜다. 그리고 소드익스퍼트의 단계를 넘어서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
‘난 소드 마스터가 될 자질이라고 했어.’
리리엘은 검술 스승들로부터 칼리반 백작가가 염원하던 그 경지를 이룰 수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
칼리반 백작은 초대 가주 이후로 다수의 기사를 배출했지만, 소드 마스터를 배출하지 못했다.
현 가주 또한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염원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가능성을 리리엘이 가지고 있다고 하니, 칼리반 백작이 그녀를 레오나보다 아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리리엘은 자신이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호적 정리를 안 하시는 거지?’
칼리반 백작은 한 달이 넘었는데도 레오나를 호적에서 정리하지 않았다.
레오나가 나가고 바로 호적을 정리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고.’
그래도 핏줄이라고 레오나를 싸고돌고 싶으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서서 정리해 달라고 할 순 없었다.
그건 칼리반 백작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일 테니까.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 보자. 백작가의 영애는 이제 나 하나뿐이니까. 그리고 차기 가주도 내 것이고.’
그거면 되었다.
가전 검술을 완벽하게 익혀서, 칼리반 백작의 인정을 받고, 차기 가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당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것이다.
‘그분의 곁에 서기 위해선 내가 완전무결해야 돼. 나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없도록.’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 * *
칼리반 백작은 집무실에서 로임 자작과 독대를 하였다.
그의 얼굴은 알 수 없는 수심으로 가득했다. 로임 자작을 부른 이유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로임 자작, 레오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게 있나?”
“궁금하기는 하신가 봅니다.”
칼리반 백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비꼬지 마시게.”
“저도 모릅니다. 가문은 나가신 직후 행적이 묘연해지셨습니다.”
레오나가 독립을 선언하고 저택을 나선 후, 로임 자작은 그녀의 행방을 찾아보려 하였다.
그녀가 어느 여관에 머물렀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그 후에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여관에서 며칠 머무시다가 어디론가 가신 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칼리반 백작은 착잡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가문을 위해서 레오나를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레오나가 나가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자식은 자식인 모양이었다.
“호적 정리는 안 하실 겁니까?”
“…….”
칼리반 백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 나가게 두신 것을 후회하시는 겁니까?”
“후회라……. 그렇지는 않아.”
후회하지 않는다. 애초에 독립하겠다고 나간 건 레오나였다.
자신이 부추긴 것이 아니다. 레오나가 선택한 것이다.
“리리엘 아가씨께 가전 검술을 전수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아이만큼 어울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럼, 된 것이 아닙니까.”
로임 자작도 리리엘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레오나를 말리지 않은 것이다.
이곳에서 천덕꾸러기로 살 바에야 독립하는 것이 그녀에게도 나을 거라 여겨, 재산을 처분해 준 것이니까.
“……서류를 정리하도록 하지.”
이제야 마음의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로임 자작은 씁쓸했지만, 이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아가씨가 백작가에 계속 있었으면, 상처만 받으셨을 테지.’
그럴 바에야 독립을 하는 것이 낫다. 레오나가 불행하게 백작가에 얽매여 있지 않길 바랐다.
그건 그가 아꼈던 전 백작 부인에 대한 배려였다.
그녀는 자신의 딸만큼은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서류 정리를 돕겠습니다.”
그렇게 칼리반 백작은 레오나를 완전히 호적에서 지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레오나는 이제 칼리반 백작가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칼리반 백작은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 * *
한 달이 더 지났다.
레오나는 여전히 해가 뜨지 않는 이른 새벽에 수련을 하고 있었다.
라데온의 신성 검술, 제2식. 몰아치는 파괴의 바람.
검에 신성력이 모여들었다.
응축되고 단단하게 뭉친 신성력이 황금빛으로 너울거렸다.
레오나는 목각인형을 향해 찌르기를 하였다.
슈우우우욱!
응축된 신성력이 검을 타고 쭉 뻗어 나가 목각인형을 부쉈다.
펑!
북 터지는 소리가 났다.
레오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제2식 마스터 완료.”
1식을 완벽하게 마스터했고, 2식까지 터득했다. 한 달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겠어.”
이렇게 제3식, 제4식, 제5식까지 터득하고 나면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리라.
“좋았어, 완벽해.”
레오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목각인형의 결과물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신성력 사용이 더욱 편해졌어.”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전에는 정신을 오랫동안 집중해야만 사용할 수 있었던 신성력이 지금은 단순한 의지만으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치료하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신성력이 발현되는 것이다.
역시 단련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지금이라면 신속의 위의 단계인 초가속도 가능하겠는데?”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레오나는 신성 마법을 발현했다.
“초가속.”
쉭!
빗살처럼 쏘아져 나간 레오나는 순식간에 연무장 한 바퀴를 돌고 되돌아왔다.
“초가속은 원소 마법으로 치면 블링크랑 맞먹지.”
숙련도가 오르면 블링크를 사용하는 마법사와 대결해도 해볼 만했다.
“그건 뭐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라파엘이 서 있었다.
“라파엘.”
“레오나, 방금 그 빠름은 뭐지?”
“그 빠름?”
“순식간에 네가 저 끝에서 여기에 나타났다. 블링크는 아닌 것 같은데, 뭐지?”
블링크는 단거리 이동 마법이었다.
레오나는 아직 사용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라파엘이 본 것은 초가속이었다.
“신성 마법이야.”
“신성 마법?”
“응, 대상의 속도를 올려주는 마법으로 초가속이라고 하지.”
“그렇군.”
그제야 그 빠름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난번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 데…….”
역시 예리하다. 눈썰미도 보통이 아니다.
“맞아, 전에 사용하던 거는 신속이란 신성 마법이었거든. 초가속보다는 빠르기가 약하지.”
“그렇군.”
라파엘이 호승심 가득한 눈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그가 두 눈으로 본 레오나의 그 빠른 가속은 자신도 흉내 낼 수 없는 빠르기였다.
‘블링크라면 가능하지.’
그의 현재 마법 서클 수준은 5서클이었다.
‘블링크를 사용해서 싸우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레오나.”
“어?”
“지금 시간 되면, 나랑 대련 어떤가?”
“대련? 좋지.”
대련은 레오나도 좋아했다. 특히 라파엘 같은 천재와의 대련은 많은 공부가 된다.
레오나가 받아들이자, 라파엘이 연무장에 올라와 검을 뽑았다.
레오나도 검을 뽑고 거리를 벌렸다. 레오나는 바닥을 발로 툭툭 치며 라파엘을 보았다.
“그럼, 간다.”
라파엘이 언제든지 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발현했다.
“초가속.”
슉!
눈 깜짝할 사이에 라파엘의 코앞에 도달한 레오나는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가슴을 향한 쾌속의 찌르기.
눈썹을 꿈틀거린 라파엘이 간발의 차이로 블링크로 벗어났다.
레오나는 등 뒤에 느껴지는 예기에 빠르게 옆으로 피했다.
그녀의 다리는 지금 초가속이 걸린 상태라 빠른 회피가 가능했다.
두 사람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서로 검을 주고받았다.
라파엘은 지속적으로 블링크를 사용하다 보니 마력이 점점 고갈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에 비해 레오나는 지속적으로 빠르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가진 거대한 신성력이 라파엘이 가진 마력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벌써 지친 거야?”
레오나가 검 끝으로 도발하자, 라파엘이 오랜만에 미소를 입에 걸었다.
“아직이다.”
두 다리의 힘을 준 라파엘은 블링크로 레오나의 목을 노렸다.
허를 찔린 급소 공격이었다.
레오나는 허리를 뒤로 젖혔다.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레오나의 턱 끝을 스쳤다.
레오나는 그대로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켜 라파엘의 발목을 향해 검을 횡으로 그었다.
라파엘은 점프로 그것을 피한 다음, 착지하면서 레오나의 머리 위에서 검을 종으로 내리그었다.
레오나는 초가속으로 빠르게 뒤로 물러나 피했다.
잔영을 남기며 빠르게 멀어지는 레오나를 보며 라파엘은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승부욕이 훨씬 더 활활 타올랐다.
두 사람은 두 시간 동안 검을 주고받았다. 승자는 레오나였다.
라파엘은 마력이 고갈되어 레오나의 빠르기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내가 졌다.”
레오나의 검 끝이 턱 끝에 닿자, 라파엘은 패배를 시인했다.
레오나는 씩 웃으며 검을 거뒀다.
역시 초가속은 사기적인 마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
레오나는 벤치에 걸어둔 수건으로 얼굴과 목에 흐르는 땀을 닦고는 수통을 열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라파엘도 힘겹게 일어나 벤치로 걸어와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그런 다음 물을 마시는 레오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흘렀다. 그 모습이 라파엘은 왠지 눈이 부시다는 느낌을 받았다.
* * *
어느덧, 레오나가 백기사단에 들어온 지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3개월 동안 레오나는 집중적으로 단련에만 매달렸다.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단련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초가속을 조금 더 수월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라데온의 신성 검술 1식과 2식을 정교하게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1식에서 사용할 수 있던 칼날의 수는 열 개가 한 계였다.
그런데 레오나는 그 한 계를 돌파하여 열다섯 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례적인 성장이었다.
또한 2식도 폭발력이 처음보다 두 배 이상 커졌다. 이 역시 한계를 돌파하여 강해진 것이다.
‘이제 3식을 수련해도 되겠어.’
3식과 4식, 5식은 1식과 2식에 비해 난이도와 파괴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3식은 검기를 사용하는 것이고, 4식은 검기를 뿌리는 것이며, 5식은 강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검기는 검에 신성력이 맺혀 있는 형태로 황금빛을 뿜어낸다.
그보다 위 단계인 강기는 눈 부신 빛이 검에 머물러 있는다. 빛의 검이 되는 것이다.
‘빛의 검을 사용하기 위해선 더욱 단련해야 돼.’
아직 레오나가 원하는 수준까지 신성력 단련이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선 꾸준한 단련이 답이다.
똑똑.
그때 레오나의 방문을 누군가 노크했다.
“레오나, 안에 있냐?”
목소리를 들어 보니 제임스였다.
레오나는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단장님이 집합하래.”
“단장님이?”
“어, 얼른 나와라.”
“알았어.”
레오나는 수련복 차림으로 연무장에 집합했다.
연무장에는 준기사들만이 도열해 있었고, 정예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준기사들만 집합시킨 모양이었다.
잠시 후, 데미안이 연무장 단상 위에 올랐다.
“모두 모였나?”
“예!”
준기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준기사들의 눈을 일일이 맞춰본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를 집합하라 한 것은 너희에게 임무를 주기 위해서이다.”
임무라는 말에 준기사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드디어 첫 임무를 맡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맡게 될 첫 임무는 여름 별궁에서 요양 중이신 황녀 전하를 황궁으로 무사히 모셔오는 것이다.”
여름 별궁은 제국 남부에 있는 궁전으로 황족들이 요양을 가거나, 휴양을 즐기기 위해 지어진 궁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엔 1황녀 다이앤이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건강이 최근 들어 매우 좋아져, 황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그녀를 호위하여 황궁으로 모셔 오는 게 이번 준기사들에게 내려진 첫 임무였다.
물론, 만일을 대비해 정예 기사들을 붙여줄 생각이었다.
데미안은 첫 임무에 들뜬 준기사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너희가 충분히 잘 해내리라 믿는다. 최선을 다하도록.”
“잘하겠습니다!”
준기사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너희는 영광스러운 백기사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 명성에 걸맞은 기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데미안의 말에 준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데미안은 이어서 첫 임무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전달했다.
“너희는 출발할 때 이동 마법진이 아닌 말을 타고 이동하게 될 것이다. 이 역시 훈련의 한 과정이다.”
원래는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는 것이 맞으나, 데미안은 일부러 말을 타게 하였다.
기사는 승마도 수준급이어야 했다. 기마를 통한 전투 역시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준기사들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필요했다. 말을 타고 이동하다 보면 몬스터를 만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전투를 벌일 수도 있게 된다.
그런 실전이야말로 준기사들에게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말을 타라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황녀 다이앤은 몸이 약해서 장거리 이동 마법진을 탈 수가 없다.
장거리 이동 마법진은 일반인에겐 무리한 압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녀 다이앤은 요양을 떠날 때도 백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느리게 이동했다.
이면 역시 황녀의 환궁을 백기사단이 맡게 되었다. 데미안은 그 임무를 준기사들에게 내리는 것이다.
“출발할 때 너희는 2인 1조가 되어 움직이게 될 것이다.”
단체로 움직이게 되면, 움직임에 제동이 걸리고,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숙소를 잡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2인 1조로 짝을 지어 출발한다.
그다음은 단체로 황녀를 호위하며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조는 제비뽑기로 진행하겠다.”
데미안이 손짓하자, 정예 기사 한 명이 기다란 종이가 든 원통을 들고 왔다.
“이 안에는 같은 번호 두 개가 들어 있다. 같은 번호를 뽑은 사람이 한 조가 되는 것이다. 모두 나와 하나씩 뽑도록.”
준기사들은 앞 열부터 차례대로 나와 제비뽑기를 하였다.
레오나는 2번을 뽑았다. 같은 2번을 뽑은 사람이 누구인지 두리번거리는데 종이를 든 라파엘이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네가 2번이냐?”
“그렇다.”
라파엘이 종이에 적힌 숫자 2를 레오나에게 보여주었다.
“어째 너랑 나는 자주 붙어 다니게 되는 것 같다?”
대련도 같이해, 식당에서도 마주 보고 밥을 먹는다. 게다가 이번 임무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과 바꿔줄 마음이 없으니까.”
“바꿔 달라고 하지 않았거든.”
“네 얼굴과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한 조가 되고 싶다고.”
라파엘은 레오나를 향해 진한 라이벌 의식을 내비쳤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알았다, 알았어.”
그때 데미안이 모두를 주목시켰다. 짝을 이룬 준기사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조가 모두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데미안이 이어서 말했다.
“지금부터 출발 시간을 알려주겠다. 출발 시간은 내일 아침 7시다. 그동안 필요한 것을 챙기도록. 알겠나?”
“예!”
준기사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오늘은 이만 해산한다. 무운을 빌겠다.”
말을 마친 데미안이 단상에서 내려가자, 준기사들은 서둘러 숙소로 들어갔다.
장거리에 필요한 물건을 미리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라파엘, 짐 챙겨서 내일 아침 7시에 보자.”
“알겠다. 늦지 마라.”
“안 늦어, 너야말로 늦지 마.”
“난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를 보며 레오나는 웃음이 났다.
“암튼 내일 아침에 봐.”
레오나는 라파엘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레오나도 짐을 챙겨야 했다.
레오나는 배낭을 꺼내,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물통, 비상식량, 여벌 옷 등이었다.
짐은 최대한 가벼운 것이 좋으니까.
“대충 다 싼 것 같은데, 그만 잘까?”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드디어 첫 임무란 말이지.”
내일이면 첫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황궁을 떠난다. 최소 며칠은 걸릴 여정이었다.
“오랜만엔 설레네.”
과거에도 첫 임무를 맡았을 때 가슴이 무척 설레었었다. 지금도 그랬다.
“정말 예전으로 돌아온 기분이야.”
율리아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몸은 완전히 다르지만…….”
두 번째의 삶도 꽤 괜찮을 것 같았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침대에 몸을 던진 레오나는 몰려드는 수마에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 늦지 않게 출발하려면 잠을 푹 자둬야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연무장에 집합하니 정예 기사들이 준기사들에게 말을 나눠주고 있었다.
레오나와 라파엘도 각각 한 마리씩 받았다. 품종이 꽤 좋은 말이었다.
준기사들이 모두 말을 받은 것을 확인한 부단장 란젤로가 단상 위에 올라가 입을 열었다.
“지금 너희에게 지급된 말은 앞으로 너희와 동고동락을 하게 될 전우이다. 잘 대해 주도록. 알겠나?”
“네!”
준기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레오나는 자신에게 지급된 갈색 말을 보았다. 갈기는 검은색이었고, 발목은 흰색의 암컷 말이었다.
레오나는 말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웃었다.
“앞으로 네 이름은 엘이야. 마음에 들어?”
푸르르르.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엘이 푸르르 거렸다.
“엘은 빛난다는 뜻이야, 앞으로 나와 함께 잘 지내보자.”
푸르, 푸르.
엘이 레오나의 얼굴이 머리를 들이댔다. 그녀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레오나가 그러했듯 다른 동기들도 말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교감을 하였다.
라파엘도 그러했다. 말은 온순하지만, 난폭해지기도 하기에 초반에 주인으로 잘 인식시켜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라파엘이 받은 짙은 갈색의 말이었고, 수컷이었다. 갈기는 연한 갈색으로 터프해 보였다.
동기를 모두 레오나와 라파엘처럼 비슷비슷한 색의 말들을 지급받았다.
품종은 카레얀 종이라고 하였다.
카레얀 종은 전투를 위해 특화된 품종으로 몸집이 크고, 다리가 튼튼했다. 비교적 온순해서 길들이기도 편한 품종이다.
게다가 준기사들에게 지급된 말들은 모두 길들이기를 완료한 말들이라 쉽게 탈 수 있었다.
란젤로가 말했다.
“출발하기 전 너희가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너희는 반드시 정확한 시간에 합류 지점에 모여야 한다. 시간과 장소는 지금 나눠주는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란젤로는 준기사들에게 지도를 나누어주었다.
지도에는 도착 지점이 어디인지, 또 몇 시까지 모여야 하는지 적혀 있었다.
“시간 엄수 또한 중요한 훈련 포인트다. 반드시 지키도록 한다. 알겠나?”
“예!”
준기사들이 결연한 얼굴로 모두 대답했다.
란젤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출발하도록.”
란젤로의 지시에 준기사들이 말에 올라탔다.
레오나와 라파엘도 각각 말에 올라타고 출발했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점차 빨라지며 두 사람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두 사람이 탄 말은 순식간에 황궁을 벗어나, 제도를 달렸다. 그런데 자꾸 라파엘이 경주하듯이 말을 몰고 있었다.
“라파엘, 지금 나랑 경주하는 거냐?”
“그렇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레오나는 어이가 없었다.
“우리 임무 중이거든, 승부욕 좀 접어두지?”
“임무도 승부의 연속이다. 그리고 난 이번 승부 역시 양보할 생각이 없다.”
레오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내가 어쩌다 너와 같은 조가 됐을까.”
“후회해도 늦었다.”
“나도 알아.”
“먼저 가겠다.”
라파엘이 레오나를 추월했다.
“같이 가!”
레오나가 소리치며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서로 경주하다시피 달려 제도를 벗어났다.
그렇다 보니 다른 동기들보다 월등하게 앞서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린 결과 두 사람은 조그마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제도로 향하는 길목이자 통과점 같은 곳이었다.
레오나와 라파엘은 마을에 있는 유일한 여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묵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관 앞에 말을 묶어 놓은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방을 얻었다.
다행히 빈방이 있어서 각자의 방을 얻을 수 있었다.
식사는 1층에서 할 수 있다 하여, 레오나와 라파엘은 대충 방에 짐을 올려다 놓고는 1층으로 내려와 저녁을 먹었다.
여관에서 주는 음식은 평범한 가정식이었다. 보리로 만든 빵과 야채를 넣은 간단한 식사였다.
“이건 무슨 빵이지?”
“보리빵이야.”
“보리빵이란 것도 있나?”
“처음 보나 봐?”
“그렇다. 이 빵은 생소하군.”
“이게 제국민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먹는 가정식이야.”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그들의 가정식이라고?”
평생 귀한 음식만 먹고 자라온 라파엘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기사단 식당만 해도 질 좋은 음식들이 나오는데, 일반인들이 먹는 음식이 이렇다는 걸 알았으니 놀랄 만도 했다.
“난 제국민들이 이런 음식을 먹고 있는지 몰랐다.”
“맛있는 고기나 귀한 재료의 음식들은 모두 귀족들이나 먹을 수 있어. 일반 제국민들은 그럴 형편이 못 되지.”
잘 사는 나라든, 못 사는 나라든 일반인들이 먹는 음식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가끔 고기도 사 먹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보리빵과 야채스튜도 감지덕지하며 먹고 산다.
그리고 이런 작은 마을에 귀한 고기를 취급할 만한 여력이 있을 리가 없다.
“먹어봐, 맛은 괜찮아.”
고개를 끄덕인 라파엘은 보리빵을 뜯어 먹었다.
“먹을 만하군.”
“앞으로 이런 걸 먹어야 하는 일이 많을 거야, 적응해 두는 게 좋아.”
전투가 있을 때는 먹는 것을 가릴 수가 없다.
사냥을 해서 먹기도 해야 하고, 당장 구할 수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할 때도 있다.
레오나도 과거에 별의별 것을 다 먹어 봤다. 뱀을 잡아먹어 본 적도 있었다.
라파엘은 신기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넌 이런 걸 많이 먹어 본 것 같군.”
“나는 이보다 더한 것도 먹어본 사람이야.”
“더한 것도 먹어봤다고?”
“그래.”
“상상이 안 되는군. 이것보다 더한 음식이라면 쓰레기가 아닌가. 그걸 먹는다니.”
“너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라파엘은 바스티안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온갖 귀한 것을 누리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라파엘, 너는 모르겠지만. 그런 쓰레기조차 감지덕지하며 먹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어. 생존을 위해서.”
라파엘은 대답이 없었다.
“만약 네가 그러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을 때 너는 먹을 수 있어야 해.”
“생존을 해야 하기 때문인가?”
“그래.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 앞으로 너와 내 인생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고.”
“나는 그동안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군. 깨달음을 줘서 고맙다.”
레오나의 말을 듣고 나자, 라파엘은 열심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적응이라는 걸 해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레오나는 싫지 않았다.
“다 먹었으면 올라가서 쉬자.”
“그러지.”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레오나와 라파엘은 여관에서 나왔다.
“이제 다시 달려볼까?”
“좋다.”
동시에 말에 올라탄 두 사람은 여름 별궁을 향해 질주했다.
* * *
오 일 후, 레오나와 라파엘은 낭만의 도시라 불리는 몽디엘에 도착했다.
몽디엘은 1황녀가 요양 중인 여름 별궁이 있는 도시였다.
제도에서 장거리 이동 마법진으로 가면 순식간이지만, 말이나 마차로는 오 일이 걸리는 거리였다.
레오나와 라파엘은 정확히 오 일째 되는 날에 낭만의 도시 몽디엘에 도착한 것이다.
레오나는 지도를 펼쳐 위치를 확인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몽디엘의 입구, 가야 할 곳은 데미안이 알려준 거점이었다.
“합류할 거점이…….”
“저쪽인 것 같군.”
지도를 본 라파엘이 방향을 가리키자,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도로 집어넣고 동기들과 합류할 거점으로 향했다.
“서두르지. 늦으면 곤란하다.”
“알고 있어.”
부단장 란젤로가 반드시 정확한 시간에 합류 지점에 도착하라고 했었다.
임무를 수행할 때는 동기들 간에 시간 약속이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서로가 어긋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레오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에 율리아나였을 때 그녀는 수많은 임무를 수행했었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어긋나 동기들과 합류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시간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정확한 시간 내에 목표 거점에 도착하는 것. 그래서 시간 엄수는 어떤 임무를 맡든지 꼭 지켜야 한다.
레오나와 라파엘은 정확한 시간에 몽디엘의 거점에서 동기들과 합류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먼저 거점에 도착했고, 이어서 다른 동기들이 합류했다.
몽디엘의 거점은 백기사단이 숙소로 이용되고 있는 백기사단 소속의 건물이었다.
제국의 여러 도시에는 각각 기사단의 건물이 존재했다.
그곳을 거점이라 칭하고, 임무를 수행할 때 주로 이용하는 곳이 되었다.
레오나와 준기사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1황녀가 있는 여름 별궁으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 첫날의 밤이 저물었다.
* * *
황녀 다이앤은 찬란한 금발에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황후의 소생으로 제국의 제1황녀였다. 그리고 제국엔 그녀 말고도 황녀가 한 명 더 있었다.
다이앤 황녀보다 한 살 어린 황녀였는데 그녀는 1황비의 딸로 이름은 비비안이었다.
비비안은 1황녀가 요양을 떠난 사이 사교계에 화려하게 등장에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활발하게 사교계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반면 다이앤 황녀는 몸이 약해서 사교계에서도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자주 요양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꾸준한 신관의 치료 덕분에 몸이 많이 나아져 환궁할 수 있게 되었다.
환궁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러 갈 수 있다는 의미여서 황녀 다이앤은 하루라도 빨리 환궁하고 싶어 했다.
“황녀 전하, 바깥에 전하를 호위할 기사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측근 시녀인 세나의 말에 다이앤은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서둘러야겠네. 짐은 다 꾸렸어?”
“예, 마차에 실어 놓았습니다.”
“얼른 가자.”
다이앤 황녀는 서둘러 궁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커다란 마차와 함께 호위 기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사들 전부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데미안 경은 함께 오지 않은 거야?”
그녀가 이곳에 올 때는 데미안이 이끄는 백기사단이 함께였다. 그런데 이번엔 전혀 다른 얼굴들이었다.
“예, 이번에 온 기사들은 백기사단의 신입 기사들이라고 합니다.”
“그래?”
다소 불안해 보이는 다이앤 황녀의 표정을 읽은 시녀가 그녀를 달랬다.
“실력만큼은 최고인 자들이니 안심하셔도 된다고 데미안 경께서 전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시는 얼굴도 있습니다.”
“누구?”
“라파엘 공자가 백기사단에 입단하여 함께 왔습니다.”
측근 시녀 세나가 가리킨 곳에 라파엘이 기사단 제복을 입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다이앤 황녀의 눈동자에 반가움이 스쳤다.
“라파엘!”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라파엘이 정중하게 예를 올리자, 다이앤이 싱긋 웃었다.
“정말, 백기사단에 입단한 거야?”
“예, 황녀 전하.”
다이앤 황녀는 라파엘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잘됐다, 아는 얼굴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라파엘이 있어서 다행이야.”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믿을게.”
“마차에 오르시지요. 황녀 전하.”
“응.”
다이앤 황녀는 시녀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이제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오라버니, 어머니를 얼른 보고 싶었다.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다이앤 황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레오나는 마차에 오르는 다이앤 황녀를 바라보았다.
한 떨기 여린 꽃 같았다. 거센 바람에 쉽게 꺾어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연약하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네. 그런데 뭐지, 이 익숙한 기운은…….’
황녀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매우 불쾌한 기운이었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
‘기우인가.’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군 것 같기도 했다.
‘올해 18살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눈부신 금발과 다이아몬드 빛 눈동자는 그녀를 고결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레오나가 보기에도 1황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황족은 황족이라 이건가…….’
그녀에게선 황족 특유의 우아함이 있었다. 그게 레오나의 눈에는 보였다.
“레오나, 자리로 가라.”
생각에 빠져 있는 레오나를 라파엘이 일깨워 주었다.
“아, 미안.”
레오나는 얼른 말에 올라타 마차 옆에 붙었다. 그러자 마차가 출발했다.
황녀를 태운 마차는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 몽디엘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으며 달렸다.
마차는 무사히 몽디엘을 벗어나 북으로 향했다.
여정은 순조로운 듯 보였으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황녀를 태운 마차가 제도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숲을 지나칠 때였다.
히히히힝!
마차를 몰던 말이 갑자기 놀라 날뛰었다.
그러자 레오나가 얼른 나서서 말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런데 무엇에 놀란 건지 말들은 진정을 하지 못했다.
그때 레오나의 눈에 불길한 것이 보였다. 레오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주시했다.
“저건…….”
마차가 지나갈 길목 앞에 새카만 블랙홀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설마, 균열?”
공간이 세로로 쭉 찢어지며 새카만 블랙홀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크기는 점차 커졌다.
놀란 건 레오나뿐만이 아니었다. 라파엘도, 동기들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저게 대체…….”
“나, 들은 적이 있어, 저거 균열이야.”
“균열이라고?”
동기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그러자 라파엘이 굳은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 저게 정말 균열인가?”
그는 레오나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그녀는 분명 균열이라고 말하였다.
“맞아, 균열이야.”
라파엘의 두 눈이 떨렸다.
균열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레오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균열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말에서 내려 황녀가 있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황녀 전하,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죠?”
다이앤 황녀가 놀란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갑자기 잘 달리던 마차가 덜컹거리며 말들이 날뛰었으니 놀란 것은 당연했다.
레오나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앞에 균열이 나타났습니다. 곧 있으면 마물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서둘러 피하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다이앤 황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 마물이라고요?”
“예, 얼른 내리십시오.”
레오나가 손을 내밀자, 다이앤 황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내렸다.
그러자 정말로 균열이 커지는 게 보였다.
레오나는 라파엘을 불렀다.
“라파엘, 황녀 전하를 모셔!”
“너는?”
“나는 남아서 시간을 번다. 곧 있으면 마물이 쏟아져 나올 거야.”
“너 혼자 막겠다는 건가?”
“그래. 너는 다른 단원들과 함께 황녀 전하를 모시고 피해.”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 시간을 버는 건 무리다! 내가 돕겠다.”
“우리도 돕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선배 기사들이 웃으며 나타났다.
“선배님께서 어떻게 여기에?”
“단장님의 명을 받고 너희를 지켜보고 있었지. 위험한 일이 생기면 도와주라고도 하셨고.”
“그랬군요.”
“그럼, 이제 싸워볼까?”
“예, 선배님.”
라파엘도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선배 기사들이 준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황녀 전하를 모시고 최대한 멀리 피해라. 여긴 우리가 돕겠다.”
“알겠습니다.”
제임스가 크게 대답하자, 다른 동기들도 대답하며, 황녀를 호위에 자리를 벗어났다.
레오나가 라파엘을 보았다.
“가자.”
“좋다.”
레오나와 라파엘이 균열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선배 기사들도 따랐다.
다이앤 황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달려 나간 라파엘과 레오나, 정예 기사들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괜찮을 겁니다. 황녀 전하.”
“그렇겠지?”
“물론이죠. 걱정 마셔요.”
측근 시녀 세나의 말을 들으며 다이앤 황녀는 준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몸을 피했다.
최대한 멀리 피해 주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으리라.
레오나와 라파엘은 완벽하게 열린 균열에서 튀어나오는 마물을 보았다.
쿠르르르르.
균열을 뚫고 나온 마물은 긴 손톱을 가진 카이야스라는 마물이었다.
카이야스는 2족 보행 마물로 팔이 땅에 끌릴 정도로 길고, 손톱도 갈고리처럼 길었다.
또한 붉은 두 눈과 커다란 귀, 뾰족한 꼬리가 특징이었고, 붉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카이야스가 기다란 혀를 쭉 내밀고 포효를 터뜨렸다.
키아아아아-
“카이야스다.”
선배 기사의 말에 레오나와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기사가 설명을 이었다.
“카이야스는 하급 마물이다. 기다란 팔을 채찍처럼 휘둘러 공격하지. 놈들의 약점은 배다. 배에 심장이 있으니 거길 노리도록.”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굳은 얼굴로 전투를 준비하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카이야스가 레오나와 라파엘, 정예 기사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레오나의 라파엘, 정예 기사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더니, 다른 곳을 향해 움직였다.
그곳은 바로 다이앤 황녀가 피한 방향이었다.
“이런!”
아무래도 놈들에게 타깃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 누군가 일부러 목적을 가지고 균열을 일으킨 것이다. 자연적으로 일어난 균열은 타깃을 쫓지 않기 때문이다.
레오나가 땅을 박찼다. 그들을 다이앤 황녀가 있는 곳으로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레오나는 초가속으로 단숨에 카이야스의 앞을 막고 섰다.
그러자 카이야스가 점프를 하며 레오나에게 긴 팔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레오나는 검으로 놈들의 팔을 쳐내고 라데온의 신성 검술을 사용했다.
제1식, 굽이치는 나선의 바람.
검에 모인 신성력이 열다섯 개의 칼날로 갈라져 나선처럼 회전했다.
회전하는 칼날은 그대로 카이야스들의 배를 난도질했다.
배가 찢어진 카이야스가 신성력에 정화되어 소멸했다.
순식간에 세 마리를 해치운 레오나는 라파엘 쪽을 바라보았다.
라파엘도 바람의 마법을 이용해 카이야스의 배를 공격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선배 기사들도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큰 걱정 없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오나는 라데온의 검술 1식으로 카이야스들을 처리해 나갔다.
두 사람이 활약한 결과 더 이상 카이야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거대한 몸이 균열을 비집고 나왔다.
레오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길레스의 거인…….”
세 개의 머리, 여섯 개의 팔, 단단한 푸른색 피부.
맷집이 강한 중급 마물이었다.
웬만한 검은 피부를 뚫지도 못할 정도로 단단하다.
그래서 철갑의 거인이라고도 불리는 놈이었다.
“제기랄, 안길레스의 거인이야.”
선배 기사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안길레스의 거인이라고 하셨습니까?”
라파엘의 질문에 선배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놈은 철갑의 거인이라 불리는 놈이다. 엄청난 맷집을 자랑하는 중급 마물이지.”
라파엘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안길레스 역시 레오나와 라파엘, 정예 기사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안길레스가 향한 곳 역시 다이앤 황녀가 있는 방향이었다.
“저놈도 우릴 공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라파엘의 말에 선배 기사가 동조했다.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막아야 한다.
선배 기사가 약점을 알려주었다.
“안길레스의 약점은 관절이다, 레오나와 라파엘 너희는 다리 쪽을 공략해라. 우리가 목을 공략하겠다.”
레오나와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배 기사들이 움직였다.
레오나와 라파엘도 놈의 앞을 막아섰다.
레오나는 검을 쥔 손에 오랜만에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등골이 서늘하고 온몸의 세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안길레스가 레오나와 라파엘을 향해 커다란 발을 들어 올렸다.
짓밟아 죽이려는 것이다.
5m나 되는 거대한 덩치의 발이 무섭게 아래로 내려왔다.
레오나는 초가속으로 피했다. 그런 다음 놈의 다리 관절을 공략했다.
라데온의 신성 검술 제1식, 굽이치는 나선의 바람이 놈의 다리를 할퀴었다.
“크와아아악!”
그사이 라파엘도 놈의 한쪽 다리를 공격해 상처를 내었다.
선배 기사들이 말해준 대로 다리 관절을 집중 공략한 모양이다.
놈의 몸이 기우뚱했다.
그 여세를 몰아 레오나는 라데온의 신성 검술 제2식, 몰아치는 파괴의 바람을 사용했다.
검을 타고 뻗어 나간 신성력의 줄기가 놈의 무릎 뒤 관절을 관통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선배 기사들이 놈에게 총공격하였다.
그 결과 놈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었다. 생명을 잃은 거구는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놈이 죽자, 균열도 사라졌다.
선배 기사들이 레오나와 라파엘을 격려했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레오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대답하자, 선배 기사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만 가자.”
“예, 선배님.”
“예, 선배님.”
이번에도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다이앤 황녀가 무사한지 확인해야 했다.
* * *
어두운 방 안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가슴을 붙잡고 검은 피를 토해냈다.
“윽……. 실패라니.”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는 다이앤 황녀와 그녀의 호위대가 비치고 있었다.
거울에는 그녀가 부리는 사역마의 눈을 통한 장면이 비치고 있었다.
거울 속 에서 사역마가 중급 마물을 해치운 기사들을 비추었다.
“중급 마물을 해치우다니…….”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하늘빛 머리카락의 여인을 눈여겨보았다.
“제국에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오늘 처음 보았다.
단숨에 중급 마물을 해치운 그 빛은 신성력이 분명했다.
“대체 누구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녀는 제국의 제1기사단 백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백기사단을 상징하는 푸른 망토에 새겨진 은빛의 육망성이 그 증거였다.
“내 일을 방해하다니.”
이번 일을 계획하느라 가지고 있는 에너지원을 많이 사용했다.
균열을 만들어내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절반이나 사용했는데 실패라니, 다이앤이 환궁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어.”
그녀의 목적은 다이앤의 환궁을 막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다이앤 황녀가 크게 다치면 더욱 좋았다.
“아직 죽이면 안 되니까 크게 다쳐서 못 오게 해야 했는데.”
실패했다.
여러모로 손해만 보게 된 계획이었다.
“어쩔 수 없게 되었어.”
다이앤 황녀의 환궁은 이제 막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주지.”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하늘빛 머리카락의 기사를 향해 눈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 * *
레오나와 라파엘은 선배 기사들이 펼친 탐지 마법으로 일행과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다.
선배 기사들은 다시 잠복하기로 하고는 레오나와 라파엘만 합류를 시켰다.
다이앤 황녀는 동굴에 몸을 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동굴로 다가오자, 제임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레오나! 라파엘!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
레오나와 라파엘이 순서대로 대답하자 제임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제임스에 이어 유릭, 말론도 그녀와 라파엘을 걱정했다.
레오나는 괜찮다는 얼굴로 안심시켜 주었고, 라파엘도 괜찮다는 말로 안심시켜 주었다.
선배 기사들이 도와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선배 기사들이 자신들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말하면 안 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안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안심은 곧 방심을 불러오기도 하기에 긴장하라고 일부러 숨어서 지켜보는 거라고 하였다.
그래서 레오나와 라파엘은 선배 기사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제임스, 황녀 전하께서는?”
“무사하시다.”
“다행이네.”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에게 다가갔다.
레오나와 라파엘이 무사한 얼굴로 다가오자, 다이앤 황녀는 기쁜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두 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전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다이앤 황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레오나는 상황을 정리했다.
마차는 부서졌고, 이동 수단이라고는 말들뿐이었다.
아무래도 인근 마을까지는 말을 타고 이동해야 할 것 같았다.
“황녀 전하, 말을 타고 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오나가 정중하게 물어보자, 다이앤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 정돈 탈 수 있어요.”
“그럼, 인근 마을까지만 말을 타고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곳에서 마차를 구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일단은 오늘은 날이 어두워 이곳에서 야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위대가 다이앤 황녀를 데리고 피한 곳은 다행히 야숙하기 편한 곳이었다.
“알았어요.”
레오나는 망토를 끌러 다이앤 황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동굴 안에 불을 피워 따듯하긴 하지만, 그래도 냉기가 돌고 있었다.
다이앤 황녀는 연약한 몸이므로 보호를 해주어야 했다.
그런데 다이앤 황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익숙한 기운이야. 대체 뭐지.’
무척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었다.
‘설마, 흑마법?’
그녀가 아는 그런 기운은 흑마법뿐이었다.
‘어째서 황녀 전하의 몸에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그리고 이상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다이앤 황녀의 오른팔에 감긴 붕대였다.
팔을 감추고 있다.
뭔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망토를 여며주었다.
“밤바람이 찹니다. 덮고 계십시오. 저는 먹을 것을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레오나가 여며준 망토를 틀어쥔 다이앤 황녀가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워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레오나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레오나 경, 잊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그럼, 쉬고 계십시오.”
레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동기들이 군데군데 불을 피워놓고 먹을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유릭이 그릇을 들고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레오나, 마셔.”
유릭이 내민 그릇은 따끈한 스튜가 담겨있었다.
“황녀 전하는?”
“드렸어.”
유릭이 턱짓으로 가리키자, 시녀가 스튜 그릇을 황녀에게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레오나는 스튜를 후루룩 마셨다. 맛이 좋았다.
“제법인데?”
“우리 집이 식당을 운영해. 그래서 나도 조금은 할 줄 알아.”
“그렇군, 부럽다.”
“부럽긴.”
“부럽지, 매일 맛있는 거 먹을 거 아냐.”
“뭐, 그게 좋은 점이긴 하지.”
유릭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라파엘에게도 스튜를 퍼 주었다. 라파엘도 군말 없이 스튜를 받아 마셨다.
“맛있군.”
라파엘에게 칭찬을 들을 줄 몰랐던 유릭은 다소 놀란 얼굴을 하였다.
“더 주지?”
라파엘이 그릇을 내밀자, 유릭이 스튜를 퍼서 주었다.
“네가 맛있다니, 다행이네.”
“맛있다.”
“어, 어. 고마워.”
레오나도 그릇을 내밀었다.
“유릭, 아직 남았지. 나도 더 줘.”
“얼마든지.”
유릭은 기분 좋게 웃으며 스튜를 퍼 주었다.
진심으로 유릭이 끓인 스튜는 맛이 좋았다. 그래서 동기들도 달라고 달려들었다.
유릭은 스튜를 한 번 더 끓여야 했다.
그렇게 밤이 저물어갔다.
* * *
아침이 밝았다.
일행은 바지런히 움직여 떠날 채비를 하였다.
레오나는 황녀를 말에 태우고 고삐를 잡았다.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저 때문에 경을 걷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해요.”
“미안해하시지 마십시오.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
“고마워요.”
“그럼, 움직이겠습니다.”
레오나가 걸음을 옮기자, 준기사들이 황녀를 에워싸며 호위했다.
황녀의 건강과 안전을 생각해 걸음은 더뎠다. 그렇게 반나절을 걷고 나니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는 광활한 농경지를 중심으로 세워진 비센이라는 농경 도시였다.
비센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규모는 작았다.
레오나와 일행은 비센에 있는 호텔에 방을 얻었다.
반나절이나 말을 탔으니, 힘들어할 황녀를 위해 목욕할 수 있는 곳으로 골랐다.
레오나는 황녀가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한 다음, 황녀가 타고 갈 만한 마차를 대여하기 위해 움직였다.
다행히 이곳에 관리자인 브레인 백작이 제도에서 내려와 머물고 있다 하여, 그에게서 마차를 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를 브레인 백작가의 마차에 태우고 제도 센터폴로 출발했다.
이동은 순조로웠다.
최대한 황녀의 건강과 안전을 생각해 일정을 조율했다. 충분한 휴식과 좋은 음식만 먹게 하였다.
그 결과, 다이앤 황녀는 5일간의 여행 일정을 소화해 낼 수 있었다.
다이앤 황녀가 탄 마차가 제도에 접어들자, 소식을 들은 데미안이 백기사단 정예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왔다.
다이앤 황녀는 데미안을 보며 반색했다.
“데미안 경.”
“황녀 전하, 큰 위험을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다이앤 황녀가 해맑게 웃었다.
“경이 보내준 든든한 호위 기사들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어요.”
다이앤 황녀의 시선이 레오나와 라파엘을 향했다.
“특히, 저 두 분이 많이 도와주셨답니다.”
데미안이 레오나와 라파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레오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대답했다. 동시에 대답한 것이 민망했는지 레오나가 라파엘을 보았다.
라파엘도 레오나의 시선을 회피했다.
“너희도 고생 많았다.”
데미안은 다른 기사단원들에게도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러곤 다이앤 황녀의 마차를 호위해 무사히 황궁까지 이동했다.
다이앤 황녀의 마차가 황궁에 도착하자, 황제와 황후, 황태자가 다이앤 황녀를 맞이했다.
“다이앤!”
황태자 디에고가 다이앤을 부둥켜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오라버니.”
“몸은 이제 괜찮은 거니?”
“응, 이제 괜찮아.”
다이앤 황녀는 황태자의 품에서 벗어나, 황제와 황후와도 재회의 포옹을 나누었다.
다이앤 황녀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무척 애틋했다.
레오나는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래, 저게 가족이지.’
황제 일가의 모습이 무척 따듯해 보였다. 그래서 레오나의 가슴은 조금 쓰라렸다.
그녀에게 다정한 가족은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없었으니까.
백기사단은 황녀 호위를 무사히 마치고 기사단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레오나와 라파엘은 데미안의 호출을 받았다.
두 사람은 단장실에서 데미안을 만났다.
레오나와 라파엘이 들어와 경례하자, 데미안은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아주며 자리를 권했다.
“앉지.”
“예.”
“예.”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데미안이 용건을 꺼냈다.
“내가 너희를 부른 건 너희가 마물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고 들었다. 맞나?”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레오나와 라파엘이 이번에도 동시에 대답했다.
“상황이 어떠했는지 듣고 싶군.”
준기사들을 지켜보라며 보낸 정예 기사들로부터 듣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황녀의 마차 앞에 균열이 나타났고, 마물이 쏟아져 나온 것. 그리고 전투까지. 그리고 마물들이 황녀를 노렸다는 것도 말했다.
“마물들이 황녀 전하를 노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라파엘도 한마디 거들었다.
“마물들은 저희를 공격하지 않고, 곧바로 황녀 전하께서 피하신 방향으로 움직이려 하였습니다.”
레오나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 황녀 전하를 노리고 균열을 일으킨 게 아닌가 싶습니다.”
“타깃이 정해져 있었으니 그럴 확률이 높지.”
데미안이 메마른 턱을 쓰다듬었다.
“수고했다. 너희에겐 특별한 보상이 내려질 것이다. 그만 가서 쉬도록.”
레오나와 라파엘은 데미안에게 경례를 하고는 기사단 건물을 나왔다.
레오나는 보상이란 말에 기분이 좋았다.
“보상이 뭘까?”
“나도 궁금하군.”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때 라파엘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마물에 대해 공부를 좀 해야겠군.”
라파엘은 마물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마물을 상대로 싸워본 적도 없었다.
그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무예를 익혔고, 실전은 산적 토벌이나, 마적 떼를 상대로 토벌해 본 경험뿐이었다.
몬스터나 마물을 상대해 본 적은 없었다.
백기사단에 지원하게 된 것도 그러한 실전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바스티안 가에선 반대를 했지만, 그도 이제 성인이니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존경하는 데미안 단장 밑에서 배우는 것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아는 게 곧 힘이긴 하지.”
“넌, 마물에 대해 좀 아는 게 있나?”
레오나가 빙그레 웃었다.
“적어도 너보단 내가 더 많이 알걸?”
“그런가.”
라파엘이 강렬한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기다려라.”
“응?”
“네 지식을 금방 따라잡아 주겠다.”
라파엘의 라이벌 의식이 활활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또 승부냐?”
“그렇다.”
더 할 말이 없었다. 대신 레오나는 얼른 그의 곁을 벗어나는 것을 선택했다.
“난 먼저 가서 쉰다. 나중에 보자.”
레오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겨 라파엘과 멀어졌다.
두 번 다시는 한 조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숙소로 돌아온 레오나는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더러워진 제복을 보니, 황녀에게 준 망토가 기억났다.
“아, 돌려받는 거 깜박했다.”
다시 받으러 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래도.
“여벌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기사단 제복은 기본적으로 여벌로 세 벌이 주어졌다. 한 벌 정도는 망토가 없어도 괜찮을 듯싶었다.
황녀에게 준 망토를 다시 돌려달라고 찾아가기도 모양이 좀 그랬다.
“일단 좀 쉬자, 쉴 땐 쉬어 줘야 해.”
레오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이른 잠을 청했다.
* * *
황녀 궁으로 돌아온 다이앤 황녀는 그사이 변하지 않은 자신의 방의 모습에 감격했다.
“어마마마께서 네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시며 방을 관리해 오셨다.”
황태자 디에고의 말에 다이앤 황녀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이앤, 넌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다 커서도 눈물이 이리 많다니.”
“흑, 그래도 좋은걸요.”
다이앤 황녀는 황태자 디에고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다이앤 손에 든 망토는 뭐야?”
“아, 이거 백기사단에 있는 기사분 건데 제가 그만 가지고 와 버렸네요.”
다이앤은 시녀를 불러 망토를 맡겼다.
“이거 깨끗하게 세탁 좀 부탁해.”
“예, 황녀 전하.”
시녀가 물러가자, 다이앤 황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황태자 디에고의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 우리 오랜만에 차 한 잔 어때요? 바쁘신 거 아니죠?”
“차 한 잔 정도는 괜찮아.”
다이앤 황녀는 기쁜 얼굴로 황태자 디에고와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평화로운 날이었다.
* * *
다음 날, 레오나에게 다이앤 황녀가 찾아왔다.
다이앤 황녀는 레오나가 동기들과 수련하고 있는 연무장으로 직접 찾아왔다.
“레오나 경.”
“황녀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걸 돌려드릴 겸 왔어요.”
다이앤 황녀의 손엔 들린 건 레오나의 망토였다.
“황녀 궁으로 저를 부르셨어도 되는데 이렇게 걸음 하시다니…….”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장으로서 그건 예의가 아니죠.”
레오나는 다이앤 황녀가 건넨 망토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뭘요. 그나저나 신기해요.”
“예?”
“백기사단은 남자 기사님들뿐이잖아요. 그러한 곳에 레오나 경 같은 여성분이 계시니 신기하다고 할까요?”
“그렇습니까.”
다이앤 황녀가 반짝이는 두 눈으로 웃었다.
“그래서 경이 더 멋져 보여요.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 동료분들과 나눠 드세요.”
다이앤 황녀가 들고 온 바구니를 열어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쿠키가 들어 있었다.
다이앤 황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거 제가 직접 구운 거예요.”
“황녀 전하께서 직접요?”
다이앤 황녀가 얼굴을 수줍게 물들였다.
“다른 분들께는 비밀이에요. 혹시라도 맛이 없으면, 절 원망할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이앤 황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절 구해주신 것도요.”
“저 혼자 한 일도 아닙니다.”
“알아요. 대표로 레오나 경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동료들에게는 제가 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전 그만 가볼게요. 훈련에 방해될 순 없으니.”
빙그르르 몸을 돌린 다이앤 황녀가 해맑게 웃으며 레오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또 봐요.”
“살펴 가십시오.”
레오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레오나는 멀어지는 다이앤 황녀를 바라보며 또다시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역시 이상해. 뭔가 있어.’
그게 뭔지 모르겠다.
‘알아보면 되겠지.’
다이앤 황녀가 떠나자, 레오나는 그녀가 준 쿠키를 동료들과 나눠 먹었다.
다이앤 황녀가 준 쿠키를 먹은 동료들이 감격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레오나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젊음은 역시 좋은 것이다.
* * *
화려한 방 안에서 붉은 머리를 한 여인이 누군가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비비안. 제국의 2황녀였다.
비비안은 보고를 하고 있는 흑의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은밀하게 고용한 정보 길드의 일원이었다.
“레오나라고?”
“예, 이번에 백기사단의 준기사로 입단한 기사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올해, 백기사단에서 새로운 기사를 뽑았다고 했었다. 거기에 그 여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여자가.
“공교롭게 되었단 말이지.”
비비안은 흑의인을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흑의인에게 돈주머니를 던졌다.
“그 여자에 대해 더 알아 와. 어디 출신인지, 가족은 누가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알겠습니다.”
돈주머니를 챙겨 든 흑의인이 모습을 감추었다.
방에 홀로 남겨진 비비안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창문의 커튼을 걷었다.
“다이앤이 돌아오고 말았어.”
짜증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 어떻게 치료를 한 거지?”
듣기로 신관의 도움이 컸다고 하였다. 건강이 회복될 정도의 힘을 가진 신관이 아직까지 이 땅에 있었던가.
비비안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불안할 때 나오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내 저주의 효과가 그렇게 약하진 않았을 텐데.”
다이앤 황녀를 치료한 신관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대체 그 신관의 정체가 뭐야?”
궁금했지만,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어. 다이앤의 몸에 저주가 아직 남아 있으니까.”
그건 거울을 통해 확인했다.
다이앤이 치료를 받은 건 완치가 아니라 임시적으로 저주의 발현을 막은 것뿐이었다.
해주되었다면 자신에게도 타격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저주가 해주된 건 아니란 이야기다.
‘일단 에너지가 더 필요해.’
저주가 약해졌다면, 더욱 강하게 만들면 된다.
해야 할 일이 생긴 비비안은 통신 구슬을 꺼내 누군가에게 은밀히 연락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