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로운 출발, 독립
유프란 제국의 황궁이 있는 중심 도시 센터폴. 제국의 수도라 할 수 있겠다.
레오나는 독립 이후의 계획을 미리 세워둔 참이었다.
첫 번째 임시 거처를 마련한다.
두 번째 황실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른다.
일단 이 두 가지다.
그건 레오나의 몸에 적응하며 며칠 동안 고민하여 생각해 낸 계획이었다.
레오나는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재능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율리아나의 영혼과 힘이 레오나의 몸 안에 안착했다.
그건 레오나에게 일어난 처음 있는 행운이자 기적이었다.
임시 거처는 센터폴에 위치한 괜찮은 숙박업소를 생각해 두었다. 한 일주일 정도만 머물 생각이었다. 그리고 입단 시험에 합격하면 기사단 전용 숙소를 배정받을 수 있다. 즉, 합격만 하면 숙식이 제공된다는 말씀.
레오나는 <하늘과 달>이라는 이름의 여관에 일주일 숙박비를 지불하고 방을 얻었다.
배정받은 방은 여관 3층이었고, 테라스가 딸려 있는 괜찮은 방이었다.
테라스가 없는 다른 방들보다 조금 더 값이 나갔지만.
방에서 짐을 푼 레오나는 여관 1층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대장간을 찾았다.
시험을 치르려면 괜찮은 장비가 있어야 했다. 레오나가 가지고 온 장비는 모두 낡았다.
레오나에게 그 어떤 지원조차 없었다는 것이 지금의 장비 상태가 알려주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레타 부인에게서 반협박으로 얻어낸 새 수련복과 의복이 있었다는 거였다.
의복은 살 필요가 없어서 돈 굳었다. 하지만 장비는 새로 장만해야 했다.
레오나는 후끈한 열기가 가득한 대장간에 들어섰다.
퉁탕거리는 망치질 소리가 귀를 울렸다.
“케일로, 안에 있어?”
큰소리로 외치자, 구릿빛 피부의 건장한 중년인이 나왔다. 그는 레오나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 레오나 아가씨께서 오셨군요.”
케일로는 레오나가 장비 수리를 자주 맡기던 대장장이였다. 그를 찾아온 것도 레오나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장비를 수리하러 오셨습니까?”
레오나는 고개를 저었다.
“새 장비를 마련하려고 왔어.”
그 말에 케일로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백작님께서 새로 장만해 주시는 겁니까? 잘 되었군요.”
“그건 아냐. 나 백작가에서 완전히 나왔거든.”
이번엔 케일로가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백작가를 나오셨다고요?”
“응, 나 독립했거든.”
케일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곤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잘하셨습니다. 진즉 하셨어야 했어요.”
케일로는 칼리반 백작이 그간 레오나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알고 있었다.
레오나가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는 상처를 받을 때마다 어머니의 친우였던 케일로를 찾아와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케일로는 레오나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레오나가 헌 장비를 수리하러 올 때마다 그게 너무 안타까워 무상으로 새 장비를 만들어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레오나는 공짜로 또는 동정심으로 얻은 장비는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
그런 면은 또 백작 부인을 쏙 빼닮아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백작 부인은 대가 없는 호의는 받지 않기로 유명했으니까.
“만들어둔 새 수련용 장비 있어?”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케일로가 수련용 장비를 한 아름 안고 왔다.
경갑, 손목 보호대, 각반 등 종류가 다양했다.
레오나는 그중에서 가죽으로 만들어진 경갑과 손목 보호대, 각반을 선택했다.
시험을 치르기엔 가벼운 게 좋을 것 같다.
“이게 괜찮을 것 같아. 얼마야?”
“다 합쳐서 30실버입니다.”
“가격 너무 후려친 거 아니야?”
“마음 같아선 그냥 드리고 싶은데 받지 않으실 거잖습니까, 30실버만 받겠습니다.”
“고마워, 케일로.”
레오나는 30실버를 계산했다.
레오나의 손에서 30실버를 받은 케일로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독립 축하드립니다. 이제 훨훨 날아가십시오.”
“안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그렇다고 이 케일로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야, 케일로만큼 잘 만드는 대장장이는 없는걸.”
“인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예, 살펴 가십시오.”
케일로는 대장간을 나서는 레오나의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백작 부인께서 보셨다면 좋아하셨을 텐데…….’
백작 부인은 그에게 큰 은인이었다. 시골에 있는 자신을 제도로 데려와 자리 잡게 만들어준 은인.
그런 은인의 딸인 레오나도 그에겐 남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진심으로 레오나가 잘 되길 바랐다.
‘진짜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이 케일로 진심으로 빌어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레오나가 상처받지 않기를.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그는 간절히 바랐다.
* * *
여관에서 머문 지 삼 일째 되는 날, 레오나는 입단 시험 신청서를 냈다.
이름은 성이 없는 레오나, 신분은 평민이라고 적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신청서를 내고 삼 일이 더 지났다. 그리고 입단 시험을 치르는 날이 되었다.
기사단 입단 시험은 20세가 된 성년이 되면 누구나 볼 수 있었다.
공평하게,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뽑겠다는 기사단의 방침이었다.
레오나는 장비를 챙겨 입고, 검을 허리에 찼다. 그리고 시험이 열리는 곳인 대형 경기장으로 향했다.
대형 경기장은 황실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각종 무투 대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3년에 한 번, 입단 시험이 치러진다.
대형 경기장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귀족도 있었고, 평민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백기사단의 시험이 열리는 날이었다.
백기사단은 제국의 4대 기사단 중 으뜸이며, 단원들 모두 마검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레오나가 선택한 길은 마검사의 길.
가장 익숙한 길이자, 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레오나는 검술과 신성 마법을 결합시킬 수 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레오나 몸에 깃든 율리아나의 영혼이 그것이 가능했다.
율리아나 폰 그라시아스는 신성국의 마검사였으니까.
그것도 신성 마법과 검술을 결합시킨, 이례적인 마검사.
‘마검사가 제일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마법과 검술을 함께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난 마검사가 될 거야.’
그게 레오나가 백기사단을 선택한 이유다.
레오나는 안내자를 따라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황금빛 망토를 걸치고 은색의 갑주를 입은 정예 기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경기장 한가운데 도열해 있었다. 하나같이 잘 벼려진 검을 보는 것 같았다.
서 있는 자세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야말로 군기가 잘 잡힌 예라 할 수 있겠다.
‘예술이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강맹했다.
그들에게서 뿜어지는 에테르로 인해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저게 백기사단 상징이구나.’
정예 기사들의 왼쪽 가슴엔 육망성 안에 검이 꽂혀 있는 듯한 엠블렘이 달려 있었다.
저 문양을 가슴에 다는 것이야말로 기사를 꿈꾸는 사람들의 로망이었다.
레오나도 그러했다.
‘레오나는 청기사단에 들어가려고 했었지.’
청기사단은 순수한 검술만 사용하는 기사단이었다. 대부분이 여성으로 구성된 기사단으로 원래의 레오나가 희망했던 기사단이었다.
레오나가 청기사단을 선택한 이유는 마법을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모로 청기사단이 적합하다 판단했을 것이다.
적기사단은 창술을 사용하고, 흑기사단은 쌍검을 사용하는 특수한 기사단이라 제외되었다.
백기사단은 그녀가 넘볼 수 있는 수준의 기사단이 아니라 더욱 그러했고.
‘청기사단도 나쁘지 않지만……. 백기사단이 나아.’
지금 레오나의 적성은 백기사단이 더 낫다.
마력과 신성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데다, 그걸 모두 활용할 수 있는 곳은 백기사단이니까.
놀랍게도 본래의 레오나는 꾸준한 노력으로 심장에 마나 고리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나 고리 하나 가지고는 그 힘이 매우 약해 제대로 된 활용을 할 수가 없다.
마나 고리 두 개 정도는 되어야 검에 마나를 씌울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레오나가 가지고 있는 마나 고리는 있으나 마나다.
이것도 겨우 만들었다.
‘마나 고리 하나 만드는 데 10년이 걸리다니.’
둔재긴 둔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
사용할 수 있는 건 신성력을 바탕으로 한 신성 마법뿐이다. 마력에 적합한 원소 마법은 아직 체득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처음부터 시작해서 올라가리라.
가문에서 천대받던 레오나가 성장하여 출세했을 때, 칼리반 백작은 후회하게 되리라.
‘높은 곳에 올라가 보여주겠어.’
그렇게 다짐했다.
경기장 안에 도착하자, 지원자들이 레오나를 힐끔거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기사단에 응시한 지원자 중 레오나가 유일한 여성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특이한 하늘빛 머리카락 색까지 더해져 더 눈에 띄었다.
지원자들 모두 레오나를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백기사단이 얼마나 힘든 곳인지 알고 지원한 건가?”
“뭐, 실력이 되니까 지원했겠지. 여기가 아무나 지원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그렇겠지?”
“무슨 상관이야, 우린 시험에나 집중하자고.”
레오나에게 쏠렸던 이목은 금세 사라졌다. 의외이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잠시 후, 단상 위로 흑발에 짙푸른 눈동자를 한 남자가 올라왔다.
장신의 키와 다부진 체격. 전체적으로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제복의 어깨에 달린 금색 술과 왼쪽에 가슴에 달린 훈장과 기사단 엠블렘이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데미안 폴 라이오닉.
라이오닉 공작가의 가주이자, 백기사단의 단장이었고, 최연소 소드 마스터였다.
레오나가 꿈꾸는 경지에 오른 남자다.
‘대단하군.’
레오나는 그를 보며 감탄했다.
그는 정말 강자였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아우라가 여기에 있는 사람들과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과거의 나보다 더 강하다.’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레오나의 금빛 눈이 반짝였다.
‘나도 될 수 있어.’
이미 몸과 그릇은 완성된 상태, 나머진 쌓아 올라가면 된다.
게다가.
‘신성 마법을 쓰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지.’
유프란 제국은 원소 마법이 발달한 곳이어서 신성 마법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공격력이 약하고, 보조만 하는 마법인지라 모두가 신성 마법을 경외시했다.
그러다 보니 신성 마법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줄어들었고, 급기야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게 벌써 500년 전이었다.
그렇다 보니 신성 마법은 제국에서 고대 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곳은 아프로티아뿐이지.’
유일하게 신성을 중요시하는 나라. 종교를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가 바로 신성국이다.
율리아나는 그런 아프로티아의 기사단장이었다.
하지만 모두 과거의 일.
이제는 레오나가 되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오나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었다.
그게 불행한 삶을 살다간 그 여인에겐 유일한 위안이 될 터였다.
“그런데 저 남자…….”
레오나의 시선이 향한 곳엔 은발에 라일락빛 눈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 보였다.
그에게선 다른 지원자들에게 없는 남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그가 강자란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레오나뿐만이 아니었다.
“라파엘 공자가 입단 시험을 치르러 왔다더니, 저기 있군요.”
부단장 란젤로가 가리킨 방향에 은색 머리의 청년이 몸을 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검술 천재라…….”
“검술뿐만 아니라 창술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다고 합니다. 마법 실력도 출중하고, 바스티안 공작가가 자랑할 만합니다.”
백 년엔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 그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런데 또 한 사람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오, 저기 여자가 한 명 있습니다.”
“그렇군.”
“의외군요. 실력이 좋으면 좋겠습니다.”
“사심은 접어 두도록.”
백기사단은 남자 지원자가 많았다. 이상하게 그랬다. 마법과 검을 다루는 특수성 때문이라고 해도 여성 지원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올해 한 명이 지원을 했다. 그래서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란젤로, 시험 주제를 발표하도록.”
“예.”
목소리를 가다듬은 란젤로가 지원자들을 바라보며 시험 주제를 발표했다.
“이곳에 모인 지원자 여러분, 모두 환영하는 바이다. 여러분은 엄격한 서류 심사를 거쳐 올라왔다. 그런 만큼 최선을 다해 시험에 임해주길 바라겠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박수 소리가 그치자, 란젤로가 시험 주제를 발표했다.
“지금부터 1차 시험을 시작하겠다. 1차 시험 주제는 기초체력 테스트이다. 나누어 주도록.”
기사들이 지원자들에게 철로 된 팔찌와 발찌를 나누어 주었다.
란젤로가 말을 이었다.
“나눠준 팔찌와 발찌는 중량 마법이 걸린 장비다. 한쪽당 20㎏의 무게를 자랑하지. 너희는 이걸 차고 두 가지 방법으로 1차 테스트를 받을 것이다. 그 첫 번째가 팔굽혀 펴기 100회, 두 번째가 경기장을 100바퀴 도는 것이다.”
발표된 시험 주제에 지원자 몇몇은 벌써부터 큰일 났다는 표정을 지었고, 몇몇은 자신 있다는 얼굴을 했다.
란젤로가 말을 이었다.
“먼저 팔굽혀 펴기를 시작한다. 먼저 100회를 한 사람은 그다음 단계인 경기장 100바퀴를 돌면 된다. 이 두 가지를 빠르게 완수한 사람에 따라 등수를 매기겠다. 합격자 수는 50명이다.”
그의 말에 지원자들의 눈빛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시험에 응시한 지원자 수는 총 100명. 합격자 수는 50명, 여기서 반드시 50명 안에 들어야 2차 테스트를 치를 수 있었다.
“준비가 되었으면, 모두 팔찌와 발찌를 착용하도록.”
란젤로의 지시에 지원자들이 팔찌와 발찌를 찼다.
“윽.”
몇몇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가볍군.”
몇몇은 발찌를 차고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레오나도 여유로운 편이었다.
‘조금 무겁긴 한데 견딜 만해.’
레오나의 육체는 이미 율리아나가 가진 힘을 사용하기 위해 변화되고 강화된 몸이었다.
20㎏의 중량을 양쪽 손목과 발목에 달아도 거뜬했다.
삐이이이-
란젤로가 휘슬을 불었다.
그러자 지원자들이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한다.’
레오나는 과거 수도 없이 해왔던 팔굽혀펴기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옆을 돌아보니, 그녀보다 빠른 속도로 하는 사람이 보였다.
눈에 띄는 은발의 미남자였다.
그는 빠르게 팔굽혀펴기를 끝내고, 몸을 일으켜 뛰기 시작했다.
레오나도 지지 않기 위해 팔굽혀펴기 100회를 빠르게 마무리 짓고 그의 뒤를 쫓아 달리기를 시작했다.
레오나가 2등으로 일어나자, 다른 지원자들도 서둘러 끝내고 달리기에 합류했다.
처음부터 빠르게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느리게 뛰는 사람도 있었다.
‘장거리는 페이스가 중요해.’
적당히 호흡을 조절하고, 체력을 안배하는 것. 그게 관건이었다.
이미 지겹도록 해온 일이었다.
그 경험과 노하우가 고스란히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
레오나는 일정한 보폭으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를 유지한 채 달렸다.
체력을 안배하지 않고, 무작정 빠르게 달리던 지원자들은 시간이 지나자, 호흡이 가빠져 뒤처졌다.
레오나는 그들을 가볍게 제쳤다. 그러자 여유로운 출발을 시작했던 지원자들이 레오나를 보며 이채를 띠었다.
하지만 그뿐, 그들은 이내 강렬한 눈빛으로 꼭 이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다리를 움직였다.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경기장을 도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 50바퀴가 되었다.
그쯤 되자 5명 정도가 낙오되었다. 체력을 안배하지 않고 달린 후유증이 큰 탓이었다.
“거기까지다.”
선두를 달리던 은발의 미청년 라파엘이 바짝 따라붙은 레오나를 보며 한 말이다.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라파엘을 따라잡았다.
“난 이제 시작이야.”
라파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림없다.”
미소를 띤 레오나는 그대로 라파엘을 추월했다.
라파엘도 지지 않겠다는 듯 레오나를 따라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70바퀴를 돌았다.
그사이 상위 선두 그룹이 생겼다.
레오나, 라파엘을 비롯한 대여섯 명 정도였다.
“30바퀴 남았다. 분발해라!”
란젤로의 외침에 지원자들이 의지를 불태웠다.
이제 남은 바퀴는 20바퀴.
선두를 유지해야 한다.
“후우, 후우.”
레오나는 일정한 호흡을 유지한 채 멈추지 않고 달렸다. 라파엘도 질세라 악착같이 레오나와 엎치락뒤치락하며 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란젤로가 데미안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 두 사람, 제법이지 않습니까?”
“아직 1차일 뿐이다.”
그래,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2차와 3차 시험은 기초체력 시험인 1차보다 난도가 높다.
과연 저 두 사람이 얼마만큼의 능력을 보여줄지 기대가 컸다.
“마지막 바퀴다! 등수를 매기겠다.”
란젤로의 외침에 치열한 경주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50등 안에 들겠다는 지원자의 의지가 후끈 달아올랐다.
지원자들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치열하게 달렸다.
레오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작해 볼까.”
안배한 체력을 쏟아부을 때였다.
쌩-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레오나의 다리에 속도가 붙었다. 빨라진 레오나의 다리가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갔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그런 레오나의 모습에 라파엘도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질 수 없었다.
그도 속도를 올렸다.
쌔엥-!
순식간에 그가 레오나를 따라잡았다.
“왔냐?”
“1등은 나다.”
라일락빛 눈을 부릅뜬 라파엘이 속도를 올리자 레오나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어려울걸.”
파앗-
빛과 같은 속도로 레오나가 쭉쭉 뻗어 나갔다.
이미 레오나의 몸은 단단하게 강화된 몸, 민첩성과 순발력 또한 상위에 도달했다.
“1등, 레오나…….”
란젤로의 얼떨떨한 외침이 이어졌다. 팔굽혀펴기는 2등이었으나, 마지막 승자는 레오나였다.
“2등, 라파엘, 3등 말론, 4등…….”
줄줄이 등수가 매겨졌다.
충격적인 결과였다.
모두의 시선이 레오나에게 향했다.
그중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2등으로 들어온 라파엘이었다.
그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2등이란 숫자는 그가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늘 1이란 숫자와 가까웠다.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받은 2등이라는 숫자가 다소 충격적이었다.
“대단하군.”
“그러게 말이야…….”
모두가 감탄 어린 시선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그러나 당사자는 담담할 뿐이었다.
1차 기초체력 테스트에서 50명이 가려졌다.
나머지는 탈락되어 경기장을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2차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50명 안에 든 것을 축하한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진짜 시험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란젤로의 시선이 레오나와 라파엘에게 향했다.
제법이었다.
흐뭇했다. 올해 인재 농사는 백기사단이 잘 지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란젤로, 2차 시험 주제를 발표하도록.”
“예, 단장님.”
란젤로가 모여 있는 지원자들을 바라보며 2차 시험 주제를 발표했다.
“지금부터 2차 테스트의 주제를 알려주겠다.”
란젤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경기장 위에 25개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마법진 위에는 각각 붉은 깃발이 한 개씩 꽂혀 있었다.
“2차 테스트는 마법 테스트다. 마법을 사용하여 하늘에 떠 있는 마법진을 파훼하고 깃발을 차지하면 된다. 이 테스트는 순발력과 마법 응용력이 중요하다. 깃발은 25개, 합격자는 깃발 수와 같은 25명이다.”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질문을 던졌다.
“상대방이 차지한 깃발을 빼앗아도 됩니까?”
“물론이다. 대신 깃발을 빼앗긴 사람은 자동 탈락이다. 이점 명심하길 바란다.”
깃발을 바라보는 지원자들의 눈빛이 뜨거웠다.
레오나는 허공에 랜덤으로 떠 있는 깃발 마법진을 보며 웃었다.
‘식은 죽 먹기네.’
삐이이이-
란젤로가 휘슬을 불었다.
레오나는 신속 마법과 레비테이션을 동시에 시전했다.
레비테이션으로 몸을 띄우고, 신속 마법으로 속도를 높였다.
쐐액-
그런데 언제 왔는지 라파엘이 레오나와 같은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저건 내 거다.”
아무래도 목표물이 라파엘과 겹쳤다. 그래도 양보할 순 없었다.
“내가 먼저 점찍었거든?”
“내가 먼저다.”
레오나와 라파엘이 동시에 마법진에 도달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디스펠 매직.”
레오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라파엘은 두 눈을 부릅떴다.
디스펠 매직은 신성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레오나가 신성 마법을 사용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손쉽게 마법진을 파훼한 레오나가 깃발을 움켜쥐었다. 라파엘이 어떻게 해볼 틈도 없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내 거라고 했지.”
“이! 쳇!”
짜증 섞인 얼굴로 레오나를 바라보던 라파엘이 몸을 홱 돌려 다른 깃발을 향해 날아갔다.
거기서도 다른 사람과 부딪쳐 충돌했고,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사이 바닥에 착지한 레오나는 이번에도 1등으로 깃발을 란젤로에게 건넸다.
란젤로는 놀란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놀랍군.”
“별말씀을요.”
레오나가 씩 웃자, 란젤로도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네가 1등이다. 레오나.”
이어서 차례대로 등수가 매겨졌다.
라파엘이 2등으로 가져왔고, 차례대로 지원자들이 깃발을 가져왔다.
25명이 추려졌다.
당연하게도 깃발을 차지하지 못한 25명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데미안과 란젤로는 2차 시험을 통과한 25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중 유일한 여자인 레오나에게 더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다.
‘제법이야. 라파엘을 제치다니.’
그는 이번 시험에서 당연히 라파엘이 1등을 차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레오나라는 지원자가 라파엘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이런 인재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지?’
그야말로 진흙 속에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건 데미안도 같은 생각이었다.
“제법이군.”
그의 말에 란젤로가 데미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장님도 저랑 같은 생각을 하셨습니까?”
“같은 생각?”
“예, 저도 레오나 지원자가 라파엘을 이길 거라고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렇군.”
두 사람의 시선이 레오나의 라파엘에게 향했다.
데미안은 좋은 인재를 영입하게 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반면, 라파엘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두 번이나 1등을 놓치다니. 그의 인생에서 이런 치욕은 없었다. 그는 늘 1등만 해온 남자였다.
검술 스승도 그에게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으며, 마법 스승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최연소로 검술과 마법을 융합하는 데 성공했고, 마검사의 반열에 올랐다.
거기다 새로 배운 창술까지 더해져, 그는 다시 없을 천재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저 여자한테서 두 번이나 1등을 빼앗겼다.
승부욕이 활활 타올랐다.
“다음번 1등은 나다.”
라파엘이 노골적으로 경쟁심을 드러내자, 레오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세요.”
저렇게 대놓고 투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오랜만이었다.
“란젤로, 3차 시험을 시작하도록.”
“아, 예.”
란젤로가 앞으로 나섰다.
“2차 시험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이제 마지막 3차 시험만 통과하면 너희는 백기사단의 준기사가 된다. 그러니 더욱 열심히 해주길 바란다.”
25명은 모두 서로를 견제하며 란젤로의 말을 경청했다.
“3차 시험은 깃발 쟁탈전이다. 너희가 갖고 있는 깃발을 지키면서, 상대의 깃발을 쟁탈하면 된다. 가장 많은 깃발을 쟁탈한 순서대로 등수가 매겨진다. 총합격자는 10명, 제한 시간은 1시간이다.”
깃발을 움켜쥔 지원자들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상대를 향한 견제도 치열했다.
“시작!”
란젤로의 신호를 시작으로 지원자들이 거리를 벌리며 서로를 탐색했다.
“그 깃발, 내가 갖지.”
라파엘이 레오나에게서 깃발을 빼앗겠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야, 그전에 말이야. 다른 사람의 깃발을 먼저 빼앗는 게 낫지 않을까? 너랑 나랑 붙어봤자, 다른 지원자들 좋은 일만 시킨단 생각 안 들어?”
라파엘이 흠칫했다.
눈앞의 승부욕에 눈이 멀어, 잠깐 이성을 상실했다. 시험에선 실리를 추구해야 하거늘.
“그렇군. 네 말이 맞다.”
레오나와 라파엘이 대치하는 동안 다른 지원자들이 깃발을 쟁탈해 개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너와는 마지막에 겨루겠다.”
“탁월한 생각이야.”
두 사람은 각자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쟁탈전에 끼어들자 지원자들이 긴장했다.
몇몇은 깃발을 사수하기 위해 마법으로 방해했고, 몇몇은 선제공격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레오나와 라파엘은 훌륭하게 공격을 피하고, 급소를 노리는 공격으로 깃발을 쟁취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손에 각각 5개의 깃발이 쥐어졌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레오나와 라파엘은 또다시 대치했다.
깃발도 쟁탈했고, 이제는 승부만이 남았다.
“간다!”
라파엘이 먼저 달려들었다.
동시에 레오나도 라파엘을 향해 달렸다.
“윈드 커터!”
바람의 칼날이 레오나에게 쏟아졌다.
“디스펠 매직.”
마법이 무효화되었다.
“나한텐 마법 안 통해.”
“알고 있다. 진짜는 따로 있다.”
쉬이이익!
레오나의 등 뒤에서 짜릿한 충격이 다가왔다.
“일렉트릭 스파크!”
하늘에서 레오나를 향해 전기의 불꽃이 쏟아졌다. 연이은 마법 공격에 레오나는 감탄했다.
하나의 마법을 시전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데, 두 개의 마법을 시간차로 캐스팅하다니.
‘괴물 같은 놈이잖아.’
그렇다고 물러설 순 없었다.
“앱솔루트 배리어.”
레오나의 주위로 투명한 막이 생성되었다.
콰아아앙!
전기의 불꽃은 레오나의 앱솔루트 배리어와 충돌해 폭발을 일으켰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틈에 라파엘은 레오나의 지척에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 끝에 뇌전이 흐르고 있었다.
검과 마법을 융합시킨 마검술이었다.
레오나 역시 검을 들어 막았다. 그냥 막은 것이 아니라 신성력을 검에 덧씌웠다.
그냥 막았으면, 라파엘의 검에 레오나의 검이 부서졌을 것이다.
파앙!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레오나와 라파엘은 서로 1m 정도 떨어진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법이군.”
레오나가 피식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너도 제법이야.”
그때.
삐이이이이-
애석하게도 제한 시간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레오나와 라파엘은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승부는 다음에 겨루지.”
“그러든지.”
두 사람이 물러나자, 란젤로가 집합하라고 소리쳤다. 지원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란젤로가 깃발을 확인했다.
“레오나, 라파엘. 각각 5개의 깃발을 획득, 공동 1등이다. 그리고 2등은…….”
차례대로 등수가 매겨졌다.
“깃발이 없는 자는 탈락이다.”
25명 중, 15명이 탈락해 남은 사람은 레오나와 라파엘을 포함 10명이었다.
란젤로가 남은 10명을 향해 박수를 쳤다.
“준기사가 된 것을 축하한다.”
10명의 지원자는 합격이란 달콤한 단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해 환호성을 질렀다.
“합격한 너희에게 백기사단을 상징하는 검을 주겠다. 한 명씩 나와서 받도록.”
란젤로가 검을 나누어 주었다.
그 검에는 황금빛으로 된 폼멜의 중간에 육망성이 새겨져 있고, 육망정 중앙에 검 모양이 꽂혀 있었다. 검집은 흰색이었고, 폼멜의 끝에는 은색 술이 달려 있었다.
검을 받은 합격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라파엘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이 어깨를 폈고, 레오나도 기쁜 얼굴로 검을 받았다.
그때 단장인 데미안이 레오나와 라파엘에게 다가왔다.
“레오나, 라파엘. 너희의 활약을 기대하겠다.”
레오나가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라파엘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데미안을 바라보는 라파엘의 눈은 경외감이 가득했다.
“란젤로, 마무리를 부탁하지. 나는 먼저 복귀하겠다.”
“예, 단장님.”
데미안은 합격자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고는 몸을 돌려 경기장을 나갔다.
그러자 란젤로가 다음 일정을 설명해 주었다.
“주목, 다음 일정을 설명해 주겠다.”
란젤로의 말에 합격자들이 자세를 바로 하고 경청했다.
“너희는 내일 아침 7시까지 짐을 챙겨 황궁 앞에 모여라. 배정될 숙소와 장비를 지급하겠다. 모두 늦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이후의 일정은 오전 일정이 끝나는 대로 알려주겠다. 알겠나?”
모두 동시에 ‘알겠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럼, 해산이다. 오늘 하루를 마음껏 즐기도록.”
와아아아-
합격자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란젤로는 특히 레오나와 라파엘을 눈여겨보았다.
“레오나, 라파엘. 백기사단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잘해보도록.”
“감사합니다.”
“잘하겠습니다.”
레오나의 라파엘이 순서대로 대답하자, 란젤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합격자들에게도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렇게 모든 시험이 끝나고 지원자들은 해산했다.
레오나도 짐을 꾸려 나갈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라파엘이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레오나.”
“어?”
“나를 똑똑히 기억해 둬라. 나는 라파엘 드 바스티안이다.”
그 말을 남긴 라파엘은 레오나를 지나쳐 멀어졌다.
레오나는 멍한 얼굴로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라파엘이 언급한 성 때문이었다.
‘바스티안이라고? 정말 그 바스티안?’
레오나의 기억 속에서 소문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바스티안 공작가는 제국의 기둥이라 불리는 4대 공작가 중 한 곳이었다.
바스티안 가문은 뛰어난 검사를 배출해 내는 가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대에 백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천재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출중한 외모는 물론, 검술과 마법, 창술까지 두루 섭렵한 불세출의 천재.
레오나가 가장 부러워했던 인물이었다.
‘저놈이 그놈이었어?’
생각했던 것과 달라 조금 놀랐다.
승부에 쓸데없이 열정적인 놈. 지고는 못 사는 성격.
레오나가 보기에 라파엘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역시 세상은 좁다.
* * *
기사단 사무실로 돌아온 란젤로는 단장실에서 기쁜 얼굴로 데미안과 대화를 나눴다.
“그만 좀 웃지?”
“기쁘면 웃는 게 당연한 겁니다. 단장님도 좀 웃으십시오!”
“쓸데없는 소리.”
“사실, 단장님도 기쁘시지 않습니까.”
올해 백기사단은 훌륭한 인재 둘을 수확했다.
레오나와 라파엘.
레오나는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이였고, 라파엘은 두 가지의 원소 마법을 구사하는 인재였다.
하나의 원소 마법을 익히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런데 두 가지를 익히다니, 바스티안 공작가가 라파엘을 천재라 부를 만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뭐지?”
“레오나, 어디서 본 듯하단 말이죠.”
특이한 하늘빛 머리카락도 그렇고, 금빛 눈동자가 낯설지가 않았다.
그때 불현듯 란젤로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가만, 칼리반 백작가의 장녀가 하늘빛 머리에 금빛 눈동자를 가졌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름도 레오나라고 했던 것 같고.”
란젤로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웃었다.
“설마, 아니겠죠? 그럴 리가.”
데미안은 못마땅한 얼굴로 란젤로를 보았다.
“란젤로, 아까부터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거지?”
“아, 그게 말이죠. 레오나가 혹시 칼리반 백작가의 장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칼리반 백작가?”
“예, 그 기사 명문가 말입니다.”
칼리반 백작가는 대대로 기사를 배출해 낸 가문이다.
“레오나가 칼리반 백작의 장녀라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단정 짓는 이유는?”
“우선 특이한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가 칼리반 백작가의 장녀 이미자와 같습니다.”
“그녀를 실제로 본 적 있나?”
“본 적은 없습니다만, 소문만 무성했죠. 그녀를 지칭하는 호칭들도 유명했고. 예를 들면 미운 오리 새끼라든가 하는 거 말이죠.”
그 말에 데미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지금에 와서 중요한가?”
“만약, 사실이라면 대박이지 않습니까. 실력이 없다고 버려질 위기에 처한 영애가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특이한 케이스가 되다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라. 그녀가 누구든 백기사단에 들어온 이상 그녀는 우리가 이끌어야 할 준기사다. 쓸데없는 사감은 접어두도록. 알겠나?”
란젤로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데미안은 란젤로를 내보냈다. 단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 * *
여관으로 돌아온 레오나는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으, 피곤해!”
끝내주는 하루였다. 그래도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레오나는 당당하게 차지한 검을 보았다.
은색 술이 달린 백기사단의 상징.
드디어 손에 넣었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이런 성취감. 오랜만이야.’
해냈다는 충만감.
‘드디어 나도 기사에 한 걸음 다가갔어.’
준기사가 되었다. 준기사는 일종의 견습 기사였다.
준기사는 견습 기간 동안 쌓은 공적과 수련의 성취도에 따라 정예 기사로 승급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승급 시험을 통과하면 그때부터는 완전한 기사라 할 수 있는 정예 기사가 된다.
레오나는 이제 한 걸음 내디딘 것이다.
‘열심히 해서 정예 기사가 되는 거야.’
정예 기사가 되려면 공적과 수련 성취도가 높아야 한다.
백기사단이 추구하는 성취도는 다른 기사단에 비해 월등히 높아, 그 기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승급 시험을 볼 자격을 얻을 수 없다.
‘일단 오늘은 자자.’
몸이 너무 피곤했다. 시험을 치르느라 몸을 너무 많이 썼다.
휴식이 필요했다.
레오나는 행복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레오나는 부스스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눈을 비비자, 눈 부신 햇살이 창문 너머로 스며 들어왔다.
“지금 몇 시지?”
레오나는 창밖 테라스로 나가, 저 멀리 보이는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시계탑의 바늘이 정확히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으, 서둘러야겠다.”
얼른 방으로 돌아온 레오나는 대충 세안을 하고 짐을 챙겨 일주일 동안 머물렀던 여관을 나왔다.
이제 이 여관에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숙소 생활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레오나는 배낭을 둘러메고 서둘러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 앞에 도착하니 어제의 동료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왔군.”
짧고 굵은 라파엘의 인사였다.
“어서 와라.”
“다시 만나니 반갑습니다.”
다른 합격자들도 레오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레오나도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모두 반가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인사를 마치자 란젤로가 나타났다.
단장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모였나?”
모두가 동시에 ‘예!’라고 외쳤다.
열 명 모두를 확인한 란젤로가 출입증을 나누어 주었다.
출입증은 직사각형 모양의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그 안에 각자의 이름과 소속이 적혀 있었다.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백기사단만의 전용 출입증인 것이다.
레오나는 출입증을 받으니, 이제 정말 준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란젤로가 말했다.
“모두 나를 따라와라.”
란젤로가 앞장서자, 경비병이 그에게 경례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경비병들은 햇병아리 준기사들의 출입증을 확인하더니 그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레오나는 란젤로를 따라 황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궁 안으로 들어간 레오나는 그 위용과 웅장함에 또 한 번 놀랐다.
‘신성국보다 배는 더 웅장하군.’
제국의 황궁에 비하면 신성국의 성전은 정말 새 발의 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며 란젤로가 기사단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각 기사단은 황궁의 외궁에 건물을 두고 있었다.
기사단의 수는 총 4개. 위치는 동서남북이었다.
동쪽은 청, 서쪽은 흑, 남쪽은 적, 북쪽이 백이었다.
그리고 외궁의 북쪽에 위치한 백기사단의 건물은 총 3개였다.
가운데 건물이 단장과 부단장이 머무는 방과 업무를 보는 공간이었고, 가운데 건물을 중심으로 왼쪽은 정예 기사들의 숙소, 오른쪽은 준기사들의 숙소였다.
그리고 세 건물을 중심으로 중앙엔 대형 연무장이 두 개 있었다.
한쪽은 검술을 수련할 수 있는 곳이었고, 한쪽은 마법을 수련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대형 연무장을 가로지르면, 기사들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설명을 들으며 이동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동할 수 있었다.
레오나는 숙소를 배정받았다.
그녀가 여자라고 하여서 다른 동기들과 떨어진 방을 받는 혜택은 없었다.
란젤로는 정말 공평하게 차례대로 방을 배정해 주었다.
숙소 건물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은 공용 공간으로 동기들끼리 모여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2층은 개인 방이었다.
레오나는 2층에서 첫 번째 방인 201호를 배정받았다. 순서는 입단 성적순이었다.
라파엘은 레오나의 맞은편인 202호였고, 나머지 동기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방을 배정받았다.
방의 크기는 모두 동일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적당한 크기의 침대가 있었고, 옷장, 책장과 책상,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책장은 비어 있었다. 그 이유는 필요한 책은 직접 구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래도 레오나가 머물던 여관에 비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테라스가 있어서 더욱 좋았다.
테라스는 뷰는 다르지만, 방마다 하나씩 있다고 하였다.
레오나의 방에 있는 테라스는 연무장이 보이는 위치였다. 그리고 레오나의 방 맞은편에 있는 라파엘의 테라스는 숲 뷰였다.
기사단 건물 뒤쪽엔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으니까.
숲은 백기사단이 야외 훈련을 할 때 사용하는 장소라고 부단장 란젤로가 설명해 주었다.
대충 방을 둘러본 레오나는 짐을 풀었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백작가를 나올 때 가져온 수련용 의복 몇 벌과 지금 착용하고 있는 수련용 장비가 다였으니까.
옷을 넣기 위해 옷장을 여니, 세 벌의 제복이 걸려 있었다.
백기사단의 정복이었다.
레오나는 제복을 보며 정말 이제 준기사가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제복을 꺼내 살펴보았다.
상의는 하얀색이었고, 어깨에 은색의 술장식이 있었다.
단추 역시 은색으로 백기사단을 상징하는 육망성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왼쪽엔.
“엠블렘이 없네.”
기사들의 상징인 엠블렘이 빠져 있었다.
“원래 없는 건가? 아니면 따로 받아야 하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레오나는 제복을 다시 걸어두고, 의복을 정리했다.
“3년이라…….”
준기사로 있어야 할 시간은 3년.
3년 동안 정예 기사들과 임무를 수행하며 공적을 쌓아야 한다.
수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3년 동안 갈고 닦아 정예 기사가 될 수 있는 승급 시험 자격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3년 후면 또 다른 준기사들이 들어오겠지.”
3년 안에는 준기사들 모두 정예 기사로 승급한다는 이야기다.
그중에서 조금 더 빨리 승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늦는 사람도 있겠지만, 3년 안에는 꼭 모두 승급한다.
3년이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그 안에 열심히 공적을 쌓으면 작위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검을 수련하는 자들이라면 기사를 꿈꾸는 것이다.
기사는 신분의 고하 없이 순수하게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니까.
‘그나저나 준기사 월급이 50골드라고 했던가?’
란젤로가 설명해 주었었다.
준기사는 매월 50골드씩, 월급이 지급된다고. 정예 기사에 비하면 적은 돈이지만, 이제 막 기사로서의 길을 내딛는 새싹들에겐 큰돈이라고 말이다.
50골드면 일반인이 1년을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 정도로 큰 금액이다. 절대 적다 할 수 없다.
게다가 레오나한테는 유산을 처분한 돈도 있었다.
독립 자금으로는 충분했다. 돈 때문에 속이 썩을 일은 없는 것이다.
‘로임 자작이 일 처리를 잘해준 덕분이야.’
로임 자작은 생각보다 빨리 처분해 주었다. 고마웠다.
‘나중에 따로 찾아가 답례라도 해야겠어. 일단 오늘은 좀 쉬자.’
레오나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첫날은 자유 시간이라고 했으니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레오나는 휴식을 선택했다.
* * *
4대 기사단의 단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이 모인 장소는 원탁 회의실.
원탁 회의실은 기사단 건물이 아닌 외궁 사령부에 있는 곳이었다.
사령부는 군대를 통솔하는 기관으로 각 기사단장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적기사단은 창병 부대를, 흑기사단은 암살부대를, 청기사단은 보병부대를, 백기사단은 마법 부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심엔 그들이 이끄는 기사단이 있었다.
기사단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기사단장들은 종종 사령부 원탁 회의실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거나, 소통을 목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었다.
오늘의 소통주제는 준기사 선발 시험에 관한 것이었다.
“백기사단에 뛰어난 인재 둘이 입단했다 들었습니다.”
적기사단장 페이몬에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흑기사단장 카이엘이 질문을 던졌다.
“듣자 하니, 신성 마법을 사용한다던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데미안의 대답에 기사단장들 모두 눈을 반짝거렸다.
“신성 마법이라니……. 그 사라진 마법을 사용한단 말입니까?”
“이거 조금 탐이 나는데요.”
놀라워하는 사람은 적기사단장 페이몬이었고, 욕심을 내는 사람은 흑기사단장 카이엘이었다.
청기사단장 블레어가 라파엘을 언급했다. 그녀는 기사단장 유일한 여자였다.
그녀의 파란빛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백기사단에 라파엘 공자가 입단했다던데…….”
그러자 다른 단장들 모두 눈을 빛냈다.
“라파엘 공자가 백기사단에 입단했단 말입니까?”
“그렇다는군요.”
“그것참 아깝네요. 내심 창술을 선택하길 바랐는데, 결국 그쪽으로 갔군요.”
적기사단장 페이몬이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적기사단은 창술을 사용하는 기사들이 모인 곳이었기에 라파엘을 탐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데미안은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내일은 적기사단의 시험이 있는 날이군요.”
“아주 기대가 큽니다. 라파엘 공자 못지않은 대어가 나와야 할 텐데.”
백기사단을 제외한 단장들 모두 시험에 기대가 큰 모양이었다.
기사단별 준기사 선별 시험은 같은 날에 치러지지 않았다.
제비뽑기를 통해 순서를 정하고, 첫 번째로 선택된 기사단이 제일 먼저 시험을 치르게 된다.
이는 혼선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오래전에는 한꺼번에 치른 적이 있었다. 대형 경기장에서 같은 날 한꺼번에 치르다 보니, 사고가 잦았다. 인원수도 많았고, 서로 부딪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다치는 지원자도 생겨났고, 심사가 혼란스러워져 방식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순서대로 다른 날짜에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말이다.
적기사단장 페이몬이 호기롭게 말했다.
“백기사단만 잘나가라는 법은 없으니, 두고 보시죠, 우리 적기사단도 걸출한 인재를 발굴해 낼 테니.”
“그건 우리 청기사단도 마찬가지예요. 인재 욕심에서 밀려날 순 없죠.”
“우리 흑기사단만큼 인재 보는 능력이 뛰어난 기사단은 없을 겁니다. 올해 인재 농사는 우리 흑기사단의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인재 발굴에 대한 기사단장들의 기 싸움이 살벌했다.
데미안만 제외하고.
“그나저나 백기사단은 이제 준기사들을 뽑았으니 신고식을 치르겠군요.”
적기사단 페이몬의 말이었다.
신고식은 기사단마다 존재하는 신입 기사들에게 하는 이벤트였다.
신고식은 신입 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 선배 기사들과의 친목을 도모하는 일종의 작은 이벤트였다.
신고식의 방식은 기사단마다 방법이 달랐다. 그리고 백기사단의 신고식은 독하기로 유명했다.
“백기사단의 신고식은 마물의 숲에 있는 동굴에서 엠블렘을 찾아오는 거였지요, 아마. 올해도 그리할 겁니까?”
이번엔 흑기사단장 카이엘의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엠블렘은 제복 왼쪽 가슴에 부착하는 기사단의 상징이었다.
백기사단은 그 상징을 그냥 내어주지 않았다. 역경을 헤치고 쟁취해야만 했다.
쟁취하지 못하면 쟁취할 때까지 도전은 계속된다.
그래서 엠블렘을 쟁취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이 걸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들이 과연 신고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이번에도 오래 걸리는 거 아닙니까?”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그릇이겠지요.”
담담한 데미안의 말에 적기사단장 페이몬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간, 봐주는 법이 없군요.”
적기사단 페이몬이 어깨까지 으쓱거리자, 데미안이 한마디 했다.
“신고식은 적기사단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압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마물과 직접 싸우게 하지는 않습니다.”
데미안도 그건 인정했다.
* * *
숙소 입소 첫날이 지난 다음 날 아침, 란젤로는 준기사들을 집합시켰다.
“모두 모였나?”
준기사들이 ‘예’라고 대답하자, 란젤로는 용건을 꺼냈다.
“내가 오늘 너희를 모이라 한 이유는 조를 나누기 위함이다.”
준기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란젤로가 말을 이었다.
“너희는 지금부터 호명하는 대로 다섯 명씩 한 조를 이룬다. 인원은 총 10명이니, 1조와 2조로 나뉠 것이다.”
준기사들은 진지한 얼굴로 란제로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란젤로가 호명했다.
“레오나, 라파엘, 제임스, 말론, 유릭, 너희가 1조다. 그리고 남은 다섯 명은 자동으로 2조가 된다. 조를 나눈 기준은 입단 시험 성적순이다.”
그 말에 2조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너희가 2조가 되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올해 마지막 여름에 너희는 또 한 번 겨루게 된다. 거기서 2조가 이기면, 자동으로 너희가 1조가 된다. 패배한 조는 당연히 2조가 되겠지.”
정기적 경쟁 시스템.
백기사단은 정기적으로 경쟁을 벌여 서로의 투쟁심을 키우고 실력도 키워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약육강식.
강자는 강자로 남을 것이고, 약자는 약자로 남을 것이다.
이게 백기사단이 지향하는 바였다. 그랬기에 더욱 치열하고 독하다. 백기사단이 독하다고 한 이유는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할 말은 끝이다. 그럼 맛있는 식사를 하도록. 그리고 식사를 마치만 다시 모여라. 다음 일정을 설명해 주겠다.”
란젤로가 자리를 떠나자, 레오나는 1조 동기들과 함께 식당에 모여 아침 식사를 했다.
메뉴는 비프 촙스테이크와 토마토 스튜였다. 식당 메뉴는 요리사가 정한 식단표가 있어 매일 바뀐다고 하였다. 단백질이 필요한 기사들의 영양을 생각해, 주로 단백질 위주의 식단이라고 하였다.
레오나는 한자리에 모인 동기들과 자기소개를 나눴다.
그들은 레오나에게 본인을 각각 유릭과 제임스, 말론이라고 소개를 했다.
유릭과 제임스는 남작 가문의 영식들이었고, 제임스는 백작가의 차남이었고, 말론은 평민이었는데 동생만 줄줄이 있다고 했다.
나이도 레오나와 동갑인 20세였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을 트기로 하였다.
라파엘도 딱히 반대하진 않았다.
“내가 1조라니…….”
제임스가 감격했다.
“부단장님 말씀 못 들었냐, 한시적인 거라잖냐.”
말론이 툭 내뱉자, 제임스가 히죽 웃었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1조다.”
“그렇게 좋냐?”
“어, 당연히 좋지. 안 그래, 유릭?”
이번엔 유릭에게 불똥이 튀었다.
“나도 좋아. 2조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거야.”
유릭이 다부지게 말하자, 제임스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라고 덧붙였다.
그때 말론이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너희 오늘 신고식 하는 거 알아?”
말론의 말을 제임스가 받았다.
“난 이미 알고 있었어. 밥 먹고 모이라고 한 이유도 그걸 설명해 주려는 것 같던데?”
유릭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신고식이 뭔데?”
답은 의외의 인물, 라파엘의 입에서 나왔다.
“신고식은 백기사단의 전통이다, 마물의 숲에 있는 동굴에서 엠블렘을 찾아오는 것이지.”
유릭이 그제야 의문이 풀린다는 얼굴을 했다.
“어쩐지 제복에 엠블렘이 없더라니, 그 이유였군.”
라파엘이 말을 이었다.
“신고식은 몇 날 며칠을 도전해도 얻지 못한 기사가 한둘이 아니지. 선배 중에는 몇 달이 걸린 사람도 있지.”
라파엘의 말에 말론과 제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씩이나……. 쉽지 않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그러나 라파엘은 다른 답을 하였다.
“나한텐 쉬운 일이다. 너희에겐 어렵겠지만.”
입가에 미소를 매단 라파엘이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긴, 라파엘한테는 쉽긴 하겠네.”
그 유명한 검술 천재 아닌가.
라파엘에겐 무엇이든 잘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레오나, 너는 할 수 있겠어?”
제임스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레오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
“무시무시한 마물이 나오는 숲이야. 무섭지 않아?”
말론이 걱정 어린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하지만 레오나는 마물을 질릴 대로 봐온 사람이었다. 하도 죽여 봐서, 이제 물린다고 할까.
“글쎄, 괜찮을 것 같아.”
“정말 대담하네, 존경스러워. 난 솔직히 조금 겁이 나는데.”
유릭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레오나가 유릭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겁먹지 마, 생각보다 별것 아닐 수도 있잖아. 미리 겁을 먹으면 초장부터 지고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 용기를 내라고.”
“알았어, 열심히 해볼게.”
레오나의 격려에 용기를 얻었는지 유릭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제임스가 파이팅을 했다.
“신고식, 우리 한번 잘해보자고.”
“좋아.”
“나도.”
유릭과 말론이 파이팅에 동조하자 레오나도 함께 파이팅해 주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파이팅 안 해도 잘할 수 있다며 먼저 나가버렸다.
그런 라파엘을 바라보며 세 사람은 동시에 ‘재수 없어’라고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다.
레오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좀 재수 없긴 해.’
천재들은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 * *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자, 부단장 란젤로가 준기사들을 집합시켰다.
“모두 모였나?”
“예!”
준기사들이 우렁차게 답하자, 란젤로가 흐뭇한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내가 너희를 불러 모은 것은 신고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준기사들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란젤로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지도를 나누어 주겠다.”
란젤로가 준기사들에게 지도를 나누어 주었다.
“지도에는 백기사단을 상징하는 엠블렘이 숨겨진 장소가 표기되어 있다. 너희는 각자 지도에 표시된 곳을 찾아가 엠블렘을 획득하여 돌아오면 된다. 이건 개인플레이다. 절대 타인의 도움을 받아선 안 된단 뜻이지. 알았나?”
“알겠습니다!”
란젤로의 말에 준기사들이 외쳤다. 그리고 지도를 움켜쥔 그들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란젤로가 말을 이었다.
“엠블렘을 숨겨둔 위치는 하급 마물이 나오는 곳이라, 너희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도록.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선배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준기사들의 표정이 무척 진지했다.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상관없다. 엠블렘을 찾아서 돌아오기만 해라. 너희를 믿겠다. 출발.”
그렇게 신고식이 시작되었다.
이건 개인의 역량과 용기를 시험하는 일종의 관문이었다.
그때 라파엘이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라일락빛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하게 레오나의 얼굴을 담았다.
“이번엔 내가 1등이다.”
그렇게 말하며 라파엘은 몸을 돌려 멀어졌다.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놈은 1등에 한이 맺힌 게 분명했다.
“그래, 네가 1등 해라.”
* * *
백기사단 본관 건물 안, 단장실에서 데미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엔 준기사들이 신고식을 위해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단장실의 문을 열고 부단장 란젤로가 들어왔다.
데미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출발했나?”
“네, 출발했습니다.”
그제야 데미안이 몸을 돌려 란젤로를 바라보았다. 란젤로의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걱정이 많군?”
“그들이 죽을까 봐 그러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준기사들의 신고식을 지켜볼 때마다 저는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그건 그가 그만큼 정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넣도록, 그 정도도 해내지 못한다면 백기사단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건 아니겠지?”
백기사단에 필요한 건 강인함이었다. 그리고 강한 정신력이었다.
강한 정신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헤쳐나갈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상황에 잡아 먹혀 버린다.
데미안은 그런 겁쟁이들을 키울 생각이 없었다. 겁쟁이들은 반드시 누군가의 발목을 잡을 테니까.
그건 발목을 잡힌 자에게도 큰 시련이다.
그러니 백기사단은 그런 자가 나오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시킨다.
“정예들은 제대로 배치했나?”
“예, 단원들이 도착할 곳에 인원을 분배해 잠복시켜 두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위치마다 잠복해 있는 정예 기사들에게 통신 구슬이 있으니, 유사시에는 부단장이나, 단장이 직접 나설 수 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데미안은 준기사들이 잘 버텨주길 바랐다.
이번 신고식으로 그들의 역량이 드러나리라.
* * *
마물의 숲 입구에 도착한 준기사들은 각자의 방향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레오나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나는 길목에 서서 지도를 보았다.
지도에 표시된 곳은 입구에서 왼쪽으로 뻗은 길이었다.
그 뻗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또다시 세 갈래의 갈림길이 나오고 그중에서 두 번째 길에 들어서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레오나는 지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숲은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공기도 습했고, 바닥도 질퍽했다.
레오나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천천히 움직였다.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
“이런 긴장감은 오랜만인 것 같네.”
전투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맥박이 뛰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극도의 긴장감을 극복한 순간, 희열을 맛보게 된다.
그건 그동안 경험해 왔던 수많은 전투에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타락한 선도자와의 마지막 전투 이후 레오나의 몸에 들어와 치르는 첫 전투였다.
묘한 설렘도 가지고 있었다.
레오나는 숲을 향해 조금씩 깊게 들어갔다. 그러자 사방에서 섬뜩한 살의가 느껴졌다.
열 쌍의 붉은 눈빛이었다.
크르르르르르.
찰박, 찰박.
축축한 바닥을 밟고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 개의 꼬리와 두 개의 머리, 새카만 털을 가진 늑대 형상의 하급 마물이었다.
마물의 입을 타고 흘러내리는 침이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감회가 새로웠다.
늑대 마물을 잡아 본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분명 그러한 때가 있었을 텐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레오나는 검을 뽑았다.
“홀리 웨폰.”
무기 강화, 새하얀 검신을 타고 황금빛이 일렁였다.
신성력으로 강화시킨 검을 늑대 마물에게 겨눴다.
‘어서 와라, 아가들아. 이 언니가 저세상으로 보내줄게.’
그것을 시작으로 마물들이 레오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오나는 검을 휘둘렀다.
황금빛 검이 단숨에 마물의 목을 갈랐다. 목을 잃은 마물은 빛으로 화해 소멸했다.
레오나는 신속 마법을 걸어 빠르게 마물들을 처리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총 열 마리를 베었다.
“간단하네.”
신성 마법은 마물들에겐 천적이었다.
그들이 레오나를 만난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레오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레오나는 덤벼드는 마물을 단신으로 처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늑대 마물, 악어 마물, 도마뱀 마물들이 레오나의 검에 빛으로 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레오나는 목적지인 동굴에 단시간에 도착했다.
그녀의 전신은 마물을 베고 묻은 피로 가득했다.
“클린.”
레오나는 신성 마법으로 몸에 묻은 더러움을 씻어냈다.
이럴 때 신성 마법은 정말 유용하다.
레오나는 성큼성큼 걸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깊지 않았다. 군데군데 지푸라기 같은 것이 보이는 것이 어떤 짐승의 잠자리였던 것 같았다.
레오나는 지푸라기 더미에서 반짝이는 엠블렘을 꺼냈다.
육망성의 가운데에 검이 꽂혀 있는 모양은 틀림없는 백기사단의 상징이었다.
레오나는 엠블렘을 왼쪽 가슴에 달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선배 기사 세 명이 레오나를 반겼다. 그들은 놀라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오나라고 했나? 너, 제법이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네가 1등이다. 이렇게 단시간에 통과할 줄이야.”
“나도 이렇게 빨리는 못 했는데.”
“축하한다. 정식으로 백기사단의 단원이 된 것을.”
“고맙습니다, 선배님들. 앞으로 좋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오나가 깍듯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하자, 선배 기사들이 흐뭇한 얼굴을 하였다.
“이제 그만 가자.”
“예.”
레오나는 선배 기사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푸스스스스.
갑자기 새들이 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나무 부러지는 소리도 났다.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선배 기사들이 잔뜩 긴장했다.
곧이어 괴성이 울려 퍼졌다.
쿠오오오오-
맞은편에서 거인이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5m에 달하는 커다란 덩치, 한 개의 눈, 잿빛의 피부를 가진 거인이었다.
“키클롭스다! 모두 전투태세!”
갑작스러운 키클롭스의 등장에 선배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레오나도 선배들을 따라 검을 뽑았다.
키클롭스가 쿵쾅거리며 달려왔다. 키클롭스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나무가 부러졌다.
무식하게 길을 트며 나타난 키클롭스의 커다란 눈이 번쩍였다.
“모두 엎드려!”
쩡!
키클롭스의 눈에서 쏘아진 붉은빛이 전방을 휩쓸었다.
다행히 엎드린 덕분에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전투 대형!”
선배 기사들이 삼각형 형태로 전투 대형을 이루었다.
“레오나, 넌 물러나 있어.”
“저도 돕겠습니다.”
“키클롭스는 네가 상대할 만한 마물이 아니다. 물러나 있어라.”
“알겠습니다. 대신…….”
레오나는 신성 마법을 발현했다.
“블레스.”
선배 기사들에게 빛의 축복을 내렸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향상되는 일종의 버프였다.
선배 기사들이 눈빛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레오나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선배 기사들의 말대로 방해가 되지 않게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방에 있는 선배 기사가 키클롭스의 이목을 끌고, 후방에 있는 선배 기사들이 공격을 퍼부었다.
검술과 마법이 융합된 공격이었다. 레오나는 선배 기사들의 전투를 두 눈으로 담았다.
다른 사람의 전투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
제국과 신성국은 다르니, 그 전투 방식도 다를 터.
신성국에선 마검사가 율리아나 한 명뿐이었기에, 마검사들의 합동 공격을 볼 일이 없었다.
“이건 좋은 공부가 될 거야.”
선배 기사들은 각기 자신 있는 원소 마법을 이용하여 전투에 임했다.
원소 마법과 검술이 하나로 융합되어 펼쳐지는 기술은 놀라운 것이었다.
‘원소 마법, 욕심이 나는데…….’
배워보고 싶었다.
유프란 제국은 원소 마법이 발달했다.
불, 물, 바람, 땅, 뇌 이 다섯 가지를 기본으로 한 마법이었다.
‘신성 마법과 원소 마법을 같이 사용하는 최초의 마검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아주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쿵!
선배 기사들의 활약으로 키클롭스가 쓰러졌다.
적절한 급소 공격과 중심을 잘 잡아준 리드가 있었기에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대단해요, 선배님들.”
레오나가 금빛 눈을 초롱초롱 빛내자, 선배 기사들이 멋쩍게 웃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이건 완전 쉬운 전투에 불과하다.”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선배님들.”
“앞으로 이런 기회는 많을 테니, 열심히 봐두도록 해.”
“예, 선배님.”
“이제 진짜 가자.”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 기사들과 함께 기사단으로 복귀했다.
연무장 앞에 도착하니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늦었군.”
라파엘이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 1등이다.”
레오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 그래. 축하해.”
그때 레오나의 옆에 서 있던 선배 기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안타깝군, 키클롭스만 아니면 네가 1등인데.”
“아닙니다, 선배님들 덕분에 좋은 공부를 했으니 그걸로 만족합니다.”
“자세가 좋군. 기대가 크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선배들의 칭찬에 레오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입니까?”
연무장엔 준기사는 레오나와 라파엘뿐이었다.
라파엘이 당연하다는 듯이 턱을 오만하게 세웠다.
“보면 모르나, 그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렇구나.
힘들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말 힘든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과거에 수도 없이 마물을 베어봐서 이골이 났다 치더라도 지금 동기들은 완전 햇병아리들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마물을 접하는 것일 테니, 쉽지 않을 것이다.
‘나도 처음부터 잘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처음 마물을 접했던 때는 12살 때였다.
검술을 가르쳐 주던 스승이 실전 투입을 시켰고, 율리아나는 12살의 나이에 처음 마물과 만나 싸워야 했다.
‘그때 참 두려웠지.’
그랬던 기억이 있어서일까, 동기들이 지금 어떤 기분일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에 비해 라파엘은 정말 난 놈이었다.
‘난 놈은 난 놈이지.’
그때 라파엘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레오나, 정말 키클롭스를 봤나?”
“어, 엠블렘을 찾고 나오는 길에 키클롭스가 나오더라고, 선배님들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지.”
“그렇군.”
라파엘의 눈빛이 진지했다. 무언가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결정을 했는지 입을 열었다.
“레오나, 그래도 이번 승부는 나의 승리다.”
레오나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라파엘을 보았다. 거기서 승부란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이겨서 좋냐?”
“당연한 걸 묻는군.”
“넌 왜 그렇게 승부에 연연하냐?”
“백기사단엔 승자만이 필요할 뿐이니까.”
“뭐?”
“그래서 난 패자가 될 수 없다. 언제나 승자가 될 것이다. 백기사단에서만큼은 네게도 지지 않겠다.
“그래, 열심히 이겨라.”
그것 말고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 * *
늦은 저녁.
숙소로 돌아온 레오나는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다음 연무장으로 나왔다.
수련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먼저 온 선객이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빛 머리칼, 라일락빛 눈동자, 세밀한 근육으로 만들어진 다부진 몸이 제법 근사했다.
‘열심히도 하네.’
레오나는 벤치에 앉아 라파엘이 검무를 추는 모습을 구경했다.
달빛 아래 너울너울 춤추는 그의 검무는 아름다웠으며, 날카롭고, 패도적이었다.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라파엘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검무를 멈춘 라파엘이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구경은 재밌었나?”
“잘하던데?”
라파엘은 벤치에 걸어둔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감동했나?”
“조금?”
“훗, 그럴 만하지.”
자신 있게 말한 라파엘은 수통을 열어 목을 축였다.
“수련하러 나왔나 보군.”
“그러려고 했지.”
라파엘이 호전적인 눈빛으로 땀을 닦은 수건을 도로 벤치에 걸며 레오나를 보았다.
“그럼 나와 대련하겠나?”
레오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아.”
“올라와라.”
레오나는 빙그레 웃으며 검을 들고 연무장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 보며 검을 겨눴다.
“간다.”
“얼마든지.”
레오나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라파엘도 레오나와 동시에 움직였다.
새카만 밤하늘 아래 두 사람의 검무가 어둠을 수놓았다.
* * *
단장실에서 데미안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이 검을 겨루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막 준기사 된 신입들이었다.
“레오나와 라파엘인가…….”
부단장 란젤로에게 보고를 들었다. 두 사람은 오늘 신고식을 빠르게 치르고 왔다.
그에 비해 아직 다른 준기사들은 오지 않았다. 월등히 두 사람이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특히 레오나는 키클롭스를 만났다고 했다.
미리 대기시켜 둔 정예 기사들이 처치하긴 했지만, 놀라긴 했을 터인데도 레오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근성은 좋군…….”
웬만한 자들은 마물을 본 순간 겁에 질려 꼼짝을 못한다.
신고식을 치렀던 과거 몇 명의 신입 기사도 마물을 대면하고 겁을 먹고 돌아왔다.
그들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도전하여 엠블렘을 차지했다. 그들에 비하면 두 사람은 월등했다.
내심 기대가 되었다.
“기대가 크군.”
두 사람은 앞으로 백기사단에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될 것이다. 데미안은 그렇게 예상했다.
“이번 인재 농사는 성공적이군.”
3년마다 돌아오는 준기사 선발 시험에서 매번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아니다.
진흙 속의 진주를 찾는 일은 바늘구멍으로 하늘 보는 것보다 어렵다.
그런데 올해는 대풍년이었다.
‘레오나와 라파엘이라…….’
앞으로 두 사람은 백기사단의 기둥이 될 것이다. 데미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잘 어울리는군.’
검을 섞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후우, 후욱.”
“허억, 허억.”
넓은 연무장 위에 레오나와 라파엘은 대자로 뻗어 누웠다.
두 사람 다 손엔 검이 쥐어져 있었다. 라파엘이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했다.
“허억, 헉, 이번에도 무승부로군.”
“마법을 두 가지나 사용하다니, 너 괴물이냐.”
라파엘은 놀랍게도 하나도 어렵다는 두 가지 원소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공격을 받아본 레오나로서는 기함할 일이었다.
레오나의 핀잔에 라파엘도 지지 않고 맞섰다.
“신성 마법도 사기다.”
라파엘은 강했다. 그는 바람과 뇌전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레오나를 공격했다.
그런데 레오나는 교묘하게 공격을 흘려내고 급소만을 노리는 일격을 날렸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훅 들어오는 공격에 라파엘은 당황해야만 했다.
예상했던 것을 막아내는 것은 쉬우나, 돌발적으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을 공격당하면 당황하게 마련이었다.
나름대로 자신 있었는데 레오나와 검을 섞으면 섞을수록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라파엘은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레오나, 넌 진정한 내 라이벌이다.”
상체를 일으킨 라파엘이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선언했다.
레오나는 누운 채로 대답했다.
“그래, 나도 인정한다. 라이벌.”
레오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만에 대련다운 대련을 해보니 기분이 날아갈 듯 개운했다.
“그만 쉬는 게 좋겠군.”
먼저 일어선 라파엘이 레오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감이다.”
레오나는 라파엘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나란히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밤이 지나갔다.
* * *
백기사단에 입단한 지 며칠이 지났다.
준기사들이 마물의 숲에서 엠블렘을 가지고 차례대로 복귀했다.
몇몇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하였다.
제임스와 말론, 유릭은 무사히 돌아왔다. 레오나는 그런 그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수고했어요.”
레오나의 위로에 말론과 제임스, 유릭이 고마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고맙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나도.”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네요. 안 그래, 라파엘?”
라파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저녁은 요리사님이 특식을 준비했대요.”
“특식?”
“네, 란젤로 부단장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오늘 돌아오신 분들을 위해 특식을 드린다고요.”
레오나와 라파엘도 엠블렘을 찾고 돌아온 날 저녁, 아주 푸짐하게 특식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은 몇 명의 준기사가 돌아왔다. 그래서 오늘도 특식이라고 하였다.
제임스가 기쁜 얼굴을 했다.
“특식이라니!”
“아싸!”
“오랜만에 배가 기름기로 꽉 차겠는데?”
세 사람은 무척 기뻐했다.
“이따 저녁에 식당에서 봐요.”
“그러자, 그전에 난 먼저 씻어야겠어.”
“나도.”
“나도 씻어야겠네.”
제임스, 말론, 유릭이 차례대로 말했다.
“그래요. 얼른 가서 씻고 저녁에 봐요.”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숙소로 들어갔다.
레오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서숙소로 들어갔다. 그러자 라파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숙소에 들어온 레오나는 휴식을 취했다.
요즘 매일같이 라파엘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라파엘도 레오나와의 대련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
자신의 라이벌은 레오나뿐이라며, 자신과 대련할 수준이 맞는 상대도 준기사 중에선 레오나뿐이라고 하였다.
레오나도 싫지 않았다.
원소 마법을 직접 상대해 보는 것만큼 큰 공부는 없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더욱 원소 마법이 탐이 났다.
“원소 마법을 배워보고 싶단 말이지.”
신성 마법은 치유, 정화, 방어에 치중된 마법이었다.
공격용으로 활용할 수는 있지만, 범위가 한 정적이었다. 반면 원소 마법은 응용이 자유로웠다.
특히 공격력에 강했다.
“검의 뇌전 마법을 담아 쏘아낼 수도 있고, 검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도 흥미로워.”
배워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다.
“일단, 검식부터 익혀둬야겠지.”
신성 마법과 검을 융합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강화나 보조 역할이 더 강했다.
그렇다 보니 신성력을 공격용으로 활용하기엔 문제가 조금 있었다.
‘신성력을 이용한 검식을 익혀야 해.’
신성력을 이용한 검식은 파괴력이 남다르다. 신성력을 오로지 공격에만 치중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신성력을 이용한 완벽한 공격 검술이 필요해.’
지금 레오나가 가지고 있는 마력은 하나의 고리뿐이다. 하나의 고리로 할 수 있는 것은 검에 마력을 덧씌우는 일이 전부다.
게다가 원소 마법을 익히기에도 마력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 보니 지금 당장은 신성력을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검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어떤 검식이 레오나의 몸에 맞는지 생각해 둔 게 있었다.
‘그 검식을 익히면, 신성력을 공격용으로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어.’
한참을 생각에 잠긴 레오나는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헤어 나올 수 있었다.
레오나는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하니, 동기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여어, 빨리 와.”
“미안.”
레오나는 재빨리 착석했다. 그런데 테이블에 못 보던 음료가 놓여 있었다.
“맥주?”
“어, 오늘만 특별히 허락하는 거래.”
“정말?”
레오나가 금빛 눈을 반짝거리며 말하자, 제임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꽤 동한 얼굴이네.”
“엄청, 빨리 마시고 싶어.”
군침이 돌았다.
제임스가 피식 웃으며 먼저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럼, 우리 건배할까?”
“좋아.”
레오나가 잔을 들어 올리자, 유릭, 말론, 라파엘도 잔을 들었다.
“준기사들을 위하여!”
레오나는 식당에서 1조 동기들과 맥주와 함께 나온 안주인 칠면조 구이와 감자튀김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0살 레오나가 즐길 수 있는 젊은 시절의 시간이었다.
20살의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즐길 때 즐기는 것이 후회가 남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레오나는 동기들과 웃고 떠들며 시간을 마음껏 즐기기로 하였다.
불행했던 과거의 레오나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면서 말이다.
‘그래, 즐겁게 사는 거야. 웃으면 복이 온다잖아.’
한 번뿐인 인생 즐거워도 모자랄 판에 불행만 겪고 살았으니, 훌훌 털어버리고 즐겁게 살아야지.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율리아나가 가장 후회했던 것은 수련으로면 점철된 삶만 살았다는 것이다.
강해지는 것만 생각했고, 정작 자신의 즐거움 따위는 누리지 못했다.
그걸 율리아나는 레오나의 몸을 통해 느끼고 싶었다.
그건 율리아나에게도 레오나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