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다시 태어난 레오나 (1/20)

검을 든 기사는 오늘도 웃는다

1

진주하 장편소설

목차

서장

1. 다시 태어난 레오나

2. 새로운 출발, 독립

3. 첫 임무

4. 두 번째 임무

5. 황녀의 저주 (1)

서장

처음 놈을 쫓을 때는 역겨웠다.

수많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흔적은 누가 봐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율리아나는 지겨움을 느껴야 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놈의 실체에 짜증이 났고 역겨움은 분노로 덧칠해졌다. 그리고 오늘, 그 지루한 여정의 종지부를 찍을 날이 도래했다.

그녀의 검 끝이 마왕의 첫 번째 종, 타락의 선도자를 날카롭게 겨눴다.

“그만 끝내자.”

미려하게 뻗은 검신에 신성이 타올랐다.

성검 에키온. 주인을 택한다는 성검이었다.

사람들은 성검이 당연히 신에 대한 믿음이 두터운 이를 선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율리아나가 선택받았다.

왜였냐고 물어본다면 강해서.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성검은 믿음 충만하고 신성력 넘치는 이를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 실력자를 택했다.

그게 율리아나. 신성 제국의 기사단장이자, 용맹의 기사로 선택받은 자.

율리아나 폰 그라시아스다.

“건방지구나, 성검 하나 들었다고 위대한 어둠의 군주를 섬기는 나를 이길 성싶더냐?”

“어.”

율리아나의 검끝이 불량하게 까닥거렸다. 그러자 타락의 선도자의 눈구멍에서 검은 불길이 타올랐다.

“너의 살을 짓씹고 영혼을 그분께 바쳐 영원한 노예로 만들어주마!”

선도자의 앙상한 손가락이 수인을 맺자 불길한 마력이 솟구쳤다.

율리아나는 마법이 완성될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의 다리가 대지를 박차자 성검 에키온이 신성 마법으로 자연스럽게 보조했다.

그녀의 몸은 그림자조차 떨쳐내며 선도자의 앞에 다다랐다.

“네가 오늘 뒈지는 이유가 뭔지 말아?”

율리아나의 오러가 성검 에키온에 주입됐다. 신성에 오러가 더해지자 눈부신 광휘가 타올랐다.

성검이 선도자의 강력한 배리어를 무 자르듯 쉽게 가르며 길을 만들었다.

선도자의 검은 눈두덩에 경악이 서렸다.

“이, 이, 무슨……!”

성검 에키온이 선도자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성검 하나 든 게 아냐. 내 손에 성검이 들린 거지. 그 차이를 네가 알아?”

“말도 안 되는…….”

타락의 선도자의 검은 기운이 위태롭게 일렁거렸다.

“그만 버티고 뒈져. 내가 좀 많이 짜증 나거든?”

“크윽…….”

성검 에키온이 막대한 신성력을 뿜어내며 놈의 몸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 이렇게 끝낼 수는…….”

선도자가 성검 에키온을 두 손으로 잡았다.

놈의 앙상한 손이 하얗게 타올랐으나 놈의 눈은 흉흉한 기운을 뿜어냈다.

“크흐흐, 혼자 가진 않겠다!”

놈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기가 뿜어졌다.

그것은 놈을 이루는 근원, 타락한 영혼을 집어삼켜 얻어낸 마왕의 권능이었다.

마기는 곧 검붉은 구체로 변했고, 놈은 구체와 한 몸이 되었다.

“그분께서 기다리신다. 나와 함께 가자.”

율리아나는 놈의 구체에 속박되었다. 그리고 구체는 그 크기를 늘려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커졌다.

마왕의 권능으로 빚어진 구체안에서 소멸되면 그녀의 영혼은 마계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율리아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쓰레기가 끝까지 질척거려?”

율리아나의 몸에서 눈부신 광휘가 번쩍였다.

“똑똑히 기억해.”

광휘는 수십, 수백, 수천의 검이 되어 검붉은 구체를 꿰뚫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네가 죽은 건 이 나를 몰라봤기 때문이라고.”

파아아아아-

빛으로 만들어진 검은, 눈부신 파도가 되어 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그 여파로 검붉은 구체는 소멸했고, 빛은 이내 위로 솟구치며 하늘에 닿았다.

“안 돼!”

그 현상을 멀리서 확인한 한 남자가 절규하며 달려왔다.

“율리아나!”

찬란했을 금발과 본래는 새하얬을 로브는 선도자가 불러낸 마수의 피와 흙먼지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빛을 잃지 않았던 그의 연녹빛 눈동자에 지금은 슬픔과 후회가 가득했다.

그는 율리아나를 품에 안았다.

“안 됩니다, 율리아나. 이렇게, 이렇게 보낼 수는…….”

“아스텔, 미안…….”

율리아나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젖은 뺨을 쓸었다.

“……너무 화가 나서 힘을 너무 많이 써버렸네.”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녀는 짓궂은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아스텔은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죽어선 안 된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아, 안 돼. 이렇게 가면…… 아직 당신께 갚을 것이 많은데!”

율리아나를 꽉 끌어안은 그는 결연한 얼굴로 목에 걸린 펜던트를 풀어 율리아나의 가슴에 대었다.

딱 한 번.

죽은 영혼에게 새 육체를 부여하는 고대의 아티펙트였다.

그 대가로 그의 수명이 대폭 줄어들겠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만 살릴 수 있다면.

파앗!

펜던트가 부서지며 빛이 흘러나와 율리아나의 몸을 감쌌다.

잠시 후, 율리아나의 몸에서 눈부신 황금빛 구체가 떠올랐다.

아스텔은 황금빛 구체를 결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찾아갈게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반드시. 그러니 살아줘요. 다시 만날 때까지.”

말을 알아들은 듯, 황금빛 구체는 허공을 선회하더니 어디론가 날아갔다.

아스텔은 차갑게 식어버린 율리아나의 몸을 끌어안은 채 멀어지는 황금빛 구체를 바라보았다.

“믿어요, 율리아나. 당신이라면 어떤 모습으로도 꿋꿋하게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남자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손가락 사이로 하얗게 물들어가는 황금빛 머리칼이 보였다.

1. 다시 태어난 레오나

좁은 방 안에서 연이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방의 주인은 하늘빛 머리에 금빛 눈동자를 한 귀족가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주저앉더니 머리를 양손으로 헝클며 자학했다. 누가 보면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할 상황.

“이게 말이 되냐고.”

천장을 바라보며 하소연도 해보고, 혼자서 중얼거려 보기도 했다.

“난 분명 죽었는데…….”

도저히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아.”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 몸에서 깨어나다니,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해?”

게다가 율리아나가 죽은 지 5년이나 지나 있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일주일 전에 깨어나 지금까지 이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레오나는 자학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눈을 뜬 순간 낯선 감각과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몸의 주인, 레오나 칼리반에 대한 기억이었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날 수 있는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일주일간 별의별 생쇼를 다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누구 한 명 들여다보는 이가 없었다.

철저히 고립된 삶.

레오나는 그런 삶을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그래. 인정.”

일주일을 이 방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느낀 건, 자신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현실을 부정해 봐도 살아 있다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살을 꼬집어 보고, 음식도 거부해보고, 머리를 벽에 박아보고, 창문에서 뛰어내릴 생각도 해보았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면 뭔가 변화가 있겠거니, 싶었으니까.

그렇게 일주일간 온갖 생쇼를 다해 본 결과 자신이 처한 상황은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율리아나의 영혼이 레오나라는 사람의 몸에 들어온 게 분명했다.

그때 불현듯 떠오른 기억 하나가 있었다.

“아스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아스텔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지만, 꽤 중요한 말 같았다.

“아스텔이 설마 내게 뭔 짓을 한 건…… 아니겠지.”

한숨이 또 한 번 흘러나왔다.

“아스텔, 이 멍청한 자식. 정말로 내게 무언가 한 것이라면 가만 안 둬.”

레오나는 마음을 추슬렀다.

바뀌는 것은 없다.

어차피 레오나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의 자학은 필요 없으리라.

레오나는 자신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정확하게는 레오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불행한 사람.”

7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쭉 혼자서 살아내야 했던 외로운 사람.

아버지란 작자는 레오나의 어머니가 죽은 지 며칠 안 있다가 재혼했다.

재혼 상대는 그레타 부인.

그녀에게는 레오나보다 1살 어린 딸이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거기다 그 아이에겐 레오나에게 없는 재능이란 것이 있었다.

칼리반 백작가는 검술 명문.

검술 재능이 없는 직계는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

레오나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레오나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였다. 손바닥이 찢어질 정도로 수련했다.

그러나 검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이복동생 리리엘에게 늘 뒤처졌다.

그러다 보니 레오나의 마음은 절망만 가득하게 되었다.

주위에서도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못난이, 반푼이, 가문의 수치. 레오나의 평판이 나빠질수록 리리엘의 평판은 좋아졌다.

칼리반 백작가에 사랑받는 영애.

그에 비해 레오나는 미운털이 박힌 미운 오리 새끼였다.

그게 레오나 칼리반이었다.

율리아나의 영혼이 차지한 몸.

“꿈이 기사였다, 이 말이지.”

그런데 재능이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재능 없는 자가 재능 있는 자를 이기는 건 힘든 일이니까.

“그래서 자살을 선택한 건가…….”

협탁 위에 놓은 독약 병이 그 증거였다.

레오나는 절망의 끝에서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한 삶이라.”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삶이 너무 절절해서.

“참으로 처절한 삶이었네.”

어쩌면 율리아나의 영혼이 레오나의 몸에 들어온 것은 그러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련한 영혼이 덧없이 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신의 작은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정했어.”

이제부터 레오나가 된다.

덧없이 가버린 그 영혼을 대신해 율리아나 폰 그라시아스가 레오나의 삶을 더욱 빛나게 살아주겠다.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레오나는 설렁줄을 당겼다.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누군가를 불러본 적이 없었다.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씻겠다고 하지도 않은 채 일주일을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누군가를 부른 것이다.

살기 위해선 첫 번째로 배고픔을 달래야 했으니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하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다시 들어와.”

“네?”

“노크를 잊었잖아. 주인의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해야 한다는 기본 상식도 없어?”

하녀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이제 됐습니까?”

굉장히 아니꼬운 표정.

“표정 풀어. 누가 주인에게 그딴 표정을 짓지?”

하녀는 레오나가 뭘 잘못 먹었나 싶었다.

“표정 풀라고 했어.”

하녀는 하는 수 없이 표정을 풀었다.

“좋아, 이제부터 나를 향해 그런 불경한 표정은 짓지 말아야 할 거야.”

하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답 안 해?”

“……예.”

하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식사를 가져와.”

“지금 이 시간에요?”

지금은 식사할 시간이 아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난 지금 배고프니까, 가져와.”

하녀가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나갔다.

잠시 후, 하녀가 식사를 가지고 왔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하녀는 가져온 식사를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레오나는 하녀가 가져온 식사를 보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은 딱딱한 빵조각과 차갑게 식은 스튜였다. 조리한 지 오래된 음식들이었다.

테이블 앞에 앉은 레오나가 하녀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지금 이걸 나더러 먹으라는 건가?”

“무슨 문제라도…….”

“아주 많지. 이리 와. 꿇어.”

“네?”

“너의 주인은 나다. 그런데 일개 하녀가 주인을 내려다보는 건 무슨 경우지?”

서슬 퍼런 레오나의 말에 하녀가 이를 사리물고 몸을 낮췄다.

레오나는 하녀의 머리 위에 식어버린 스튜 그릇을 들이부었다.

“이게 무슨 짓…….”

“무슨 짓은 네가 하고 있지. 이런 쓰레기 같은 음식을 백작가의 장녀인 내게 내오다니.”

하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레오나가 테이블에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포크를 들어 하녀를 겨냥했다.

“따듯하고 제대로 조리된 음식으로 다시 가져와. 그리고 다음부터는 나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알아들었으면 나가봐.”

하녀가 이를 악물고 음식을 가지고 나갔다.

레오나의 방문을 닫고 나온 하녀는 분을 삭였다.

“재수 없는 년, 인정도 못 받는 주제에.”

일주일간 방에 처박혀만 있더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당장 부인께 사실을 알려야겠다.

그리하면 레오나의 그 건방진 태도를 부인이 고쳐주리라.

하녀는 곧장 안주인인 그레타 부인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지?”

그레타 부인은 방 안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레오나 아가씨께서 앞으로 식당에서 식사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녀는 레오나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쳤다.

당연하게도 그레타 부인은 기가 막혀 했다.

“레오나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예, 분명히 제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녀가 넙죽 엎드렸다.

하지만 그레타 부인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레오나가 누군가. 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니고, 자신의 눈치를 보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하녀에게 막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겠다고 말을 하다니.

그래서 쉬이 믿기가 어려웠다.

“그럴 리가 있겠니,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데.”

자신의 앞에서 고개 한 번 든 적이 없는 아이였다. 주는 대로 먹고 주는 대로 입었다.

말이 안 된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래?”

“네!”

“그럼, 그 아이에게 따듯한 식사를 다시 갖다 줘보렴. 그때도 태도가 똑같으면 내게 알리고.”

“예, 알겠습니다.”

하녀가 나가자, 그레타 부인은 화분에 물을 주던 것을 멈추었다.

“레오나가 요구를 했다.”

그 아이가 말이다.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정말로 그랬다면, 곧 알게 되겠지.”

그레타 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달라져 봤자, 제까짓 게 뭘 할 수 있겠는가.

레오나는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다. 기어오르면, 벌을 주면 된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 * *

하녀는 따듯하게 조리된 음식을 들고 다시 들어왔다.

“식사 다시 가져왔습니다.”

갓 구운 빵과 고기가 들어간 스튜, 싱싱한 야채 샐러드가 테이블에 놓였다.

“거기 놓고, 목욕물 좀 받아놔.”

“목욕물이요?”

“그래, 시중들 하녀들도 대기 시켜 놓고.”

하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그동안 그녀가 알던 레오나가 아닌 것만 같았다.

“뭘, 그렇게 보고 있지?”

“아, 아닙니다.”

하녀가 부리나케 나가자, 레오나는 하녀가 가져온 식사를 했다.

확실히 기강을 잡아 놓으니, 제대로 된 식사를 가져온다.

그동안 레오나는 주는 음식만 받아먹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눈칫밥을 제대로 먹고 있다는 증거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눈칫밥 먹는 레오나는 이제 없을 테니까.

식사를 마치고,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했다.

목욕을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자, 방문을 열고 중년의 여인이 들어왔다.

와인색의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귀부인, 현 백작가의 안주인인 그레타 부인이었다.

“레오나!”

레오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의 방에 들어올 땐 노크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도 없으신 겁니까?”

“뭐?”

“용건이나 말하고 나가주시죠. 피차 얼굴 보고 싶진 않을 테니.”

그레타 부인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하녀에게 앞으로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겠다고 했다는데 사실이니?”

“그게 왜요?”

“왜라니…….”

“저도 이 가문의 직계인데 따로 방에서 식사해야 한다는 법은 없죠. 안 그런가요?”

비웃음엔 비웃음으로.

똑같이 비웃어주자 그레타 부인의 얼굴이 제법 볼만해졌다.

“용건 끝났으면, 나가주시죠. 그리고 다음부턴 노크 잊지 마시고요.”

“일주일 동안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길래 반성 좀 하는 줄 알았더니, 버릇만 더 나빠졌구나.”

“반성, 그거 먹는 건가요?”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니?”

“하도 우스운 말을 하시니까요.”

“우스운 말?”

“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반성이라니, 웃기잖아요.”

“너…… 대체…….”

레오나의 태도가 너무 이상했다. 그간 그녀가 알던 레오나가 아닌 것만 같았다.

“전 좀 쉬고 싶으니 더 할 말 없으면 나가주시죠.”

“아니, 나는 오늘 네 버릇을 고쳐 놓을 거란다.”

그레타 부인이 씩 웃으며 하녀들에게 손짓했다.

“잡아.”

레오나는 자신의 팔을 잡은 하녀의 손목을 잡아 꺾었다.

“악!”

하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레오나는 손목을 비튼 하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앞으로 제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이건 경고예요.”

“이익! 뭣들 하는 거야. 그거 하나 못 잡고!”

그레타 부인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러자 하녀들이 조심스럽게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레오나는 다가오는 하녀들을 모조리 쳐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레타 부인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 이제 나갈 생각이 좀 드시나?”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자, 그레타 부인이 부들부들 떨었다.

“너, 나중에 보자꾸나.”

그레타 부인이 이를 갈며 말하더니, 휙 나갔다.

하녀들도 레오나의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자, 레오나는 가벼운 수련복으로 갈아입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방을 나와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는 리리엘을 비롯한 가문의 기사들이 수련하고 있었다.

분홍빛 머리카락과 사랑스러운 루비빛 눈동자, 전체적으로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인 리리엘은 백작가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문의 기사들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그래서 기사단장인 니블모어가 리리엘을 가르치기를 희망하였다.

오늘도 리리엘은 사랑스러움을 무장한 채 기사단장 니블모어 경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 레오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기사들은 물론 기사단장 니블모어와 리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레오나는 그 모든 시선을 무시한 채 몸을 풀었다. 그리고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기사단장과 리리엘이 아니었다.

“레오나 아가씨, 지금은 리리엘 아가씨의 수업 시간입니다.”

그러니 방해하지 말고 꺼지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언제부터 가문의 기사단이 사람을 차별하게 되었지, 누구보다 공명정대해야 할 기사단이 말이야.”

리리엘은 칼리반 백작과 그레타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칼리반 백작은 어머니 몰래 그레타 부인과 바깥에서 다른 살림을 차렸다.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칼리반 백작은 그녀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이후로 레오나의 삶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레오나에게 없던 재능이 리리엘에게서 발현되면서 그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아가씨는 자격이 없습니다.”

니블모어는 재능 없는 레오나가 못마땅했다. 칼리반 백작가는 검술 명가. 그러한 가문에 재능이 없는 직계라니.

그녀는 가문의 몰락만을 가져올 뿐이다. 그래서 니블모어는 재능 있는 리리엘이 차라리 낫다고 판단했다.

“내가 재능이 없어서 자격이 없다는 거야?”

“잘 아시는군요.”

“그렇다고 연무장을 쓰지 말란 법은 없지, 안 그래?”

“네?”

“내가 경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니 내가 연무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없잖아.”

“그건…….”

할 말이 없었다.

“더 할 말 없으면, 마저 가르치던 거나 리리엘한테 가르쳐, 나한테 신경 끄고.”

니블모어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는 그런 그를 무시한 채 연무장에 비치된 연습용 목검을 쥐었다.

그러자 리리엘이 레오나의 팔을 붙잡았다.

“너 미쳤어?”

“언니한테 미쳤다니, 말을 좀 곱게 쓰렴. 리리엘.”

“누가 내 언니야?”

“네가 나보다 1살 어리니, 내가 네 언니지.”

“너, 뭐 잘못 먹었어?”

“매일같이 썩은 음식만 가져다주니, 잘못 먹은 것은 맞지. 그리고 치사하게 음식 가지고 차별하진 말자.”

리리엘이 기가 막힌단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할 말 없으면 비켜줄래. 수련해야 해서.”

“내가 왜? 여긴 내 연무장이야.”

그 말에 레오나가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백작가 전용 연무장이 언제 네 연무장이 된 거야? 설마, 아버지가 너만 쓰라고 한 거야? 그럼 가문의 기사단은 앞으로 여기서 수련도 못 하겠네?”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뭔데?”

리리엘은 반박할 말을 찾으려고 했지만,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나한테 거짓말한 거였군.”

“그, 그건…….”

리리엘은 말을 얼버무렸다.

“나 같으면 거짓말할 시간에 수련을 더하겠어. 지금 너를 봐. 귀중한 수업 시간을 다 까먹고 있잖아. 시간은 금이라고. 오늘 수업은 내일 돌아오지 않는다.”

리리엘은 줄줄이 내뱉는 레오나의 말을 들으며 어이가 없었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반박할 말도 없어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너, 너, 두고 봐.”

이런 유치한 말밖에.

이를 간 리리엘이 몸을 돌렸다.

레오나는 리리엘을 무시하고, 연습용 목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몇 번 휘둘러보니, 손목에 착착 감겼다.

‘확실히 달라.’

힘이 느껴졌다.

처음 레오나의 몸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의 육체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율리아나의 영혼과 힘이 깃들면서 기존의 몸이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바뀌었다.

탈피를 했다고 할까?

그 이유는 단전에 자리 잡은 신성력 때문이었다.

율리아나는 강력한 신성력을 품은 기사였다.

그 힘은 영혼에 남겨져 있었고, 영혼이 레오나의 몸에 들어오면서, 힘도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몸이 힘을 받아들일 만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건 율리아나의 영혼이 가져온 기적이었다. 이제 레오나는 재능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신성력은 완전히 자리 잡았어.’

작았던 원래의 그릇이 깨지고 몸 전체가 그릇으로 변화되었다.

신성력을 완벽하게 사용하기 위한 조치였다.

‘체력 단련으로 몸을 좀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겠어.’

율리아나의 힘으로 육체가 기존의 틀을 벗어나 강화되었지만, 꾸준히 단련해 줘야 만들어진 그릇이 더 단단해지는 법이다.

레오나는 목검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기본적인 체력 단련을 하였다.

그런 레오나의 모습을 리리엘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눈을 빛냈다.

그러곤 니블모어 경에게 걸어갔다.

“단장님, 우리 대련해요.”

리리엘의 의도를 눈치챈 니블모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곧이어 두 사람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리리엘은 단장을 공격하는 척하며 레오나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곤 실수인 척 목검을 레오나에게 휘둘렀다.

리리엘이 휘두른 목검이 레오나의 다리를 노렸다.

레오나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리리엘의 검을 피하고 다리를 걸어 리리엘을 넘어뜨렸다.

“악!”

“앗, 실수. 그러게 왜 거기 있어.”

두 눈을 부릅뜬 리리엘이 니블모어 경에게 눈빛을 보냈다.

리리엘의 눈빛을 본 니블모어 경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리리엘을 공격하는 척하다가, 검의 방향을 틀어 레오나의 허리를 노렸다.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그런데.

레오나가 리리엘의 뒷덜미를 잡아 방패막이로 세웠다.

놀란 니블모어가 황급히 검의 궤도를 틀었다.

가까스로 검이 리리엘을 비껴갔다. 놀란 리리엘은 분노의 화살을 레오나에게 쏘았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레오나가 발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러게, 왜 거기 있었니.”

“그건 네가!”

레오나는 리리엘의 말허리를 잘랐다.

“계속 방해할 거야? 아님, 계속할까? 그럼 재능 있는 너만 창피당할 텐데.”

“이익!”

리리엘이 이를 악물었다.

“너, 너!”

너무 화가 나서 혀가 마비되었다. 리리엘은 니블모어 경에게 다가갔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죠.”

너무 화가 나서 더는 수업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리리엘이 쌩하고 돌아서자, 니블모어 경도 기사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연무장은 이제 레오나의 독차지가 되었다.

“이제야 조용해졌네.”

* * *

리리엘은 울먹이는 얼굴로 그레타 부인의 방으로 들어섰다.

“엄마!”

리리엘은 그레타 부인의 품에 안겨들어 눈물을 훔쳤다.

그런 리리엘을 그레타 부인이 놀란 얼굴로 달랬다.

“오, 아가. 무슨 일이니? 왜 울어?”

리리엘은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들었다.

“글쎄, 레오나가…….”

“뭐?”

그레타 부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레오나 그것이 네게 그런 짓을 했단 말이니?”

“그렇다니까! 내가 기사들 보는 데서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알아. 흑흑.”

“울지 말렴.”

리리엘이 분해 죽겠다는 듯이 그레타 부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레타 부인은 리리엘을 다독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엄마한테 맡기렴. 내 그것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을 테니.”

“응, 엄마. 꼭 그렇게 해줘.”

그레타 부인의 품에 안긴 리리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레오나는 이 백작가의 실질적인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 * *

한바탕 수련을 마치고 방으로 향한 레오나는 뜻밖의 상황에 봉착했다.

그녀의 방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는 곧장 하녀를 불러 물었다.

“왜 방문이 잠겨 있지?”

“그, 그게 이제부터 아가씨의 방은 다른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어딘데…….”

하녀가 우물쭈물했다.

“말해.”

“따, 따라오십시오.”

하녀가 안내해 준 방은 저택에서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다락방이었다.

그곳에 레오나의 옷과 짐이 들어가 있었다.

“여기가 이제부터 내 방이라고?”

“네, 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아, 이렇게 나오시겠다?

원래는 시간을 좀 벌다가 깔끔하게 독립선언을 한 뒤 나갈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 로임 자작을 만나 어머니의 남겨진 유산을 처분할 생각이었다.

로임 자작은 백작가의 가신으로 재산 관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해 백작가에 빌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그레타 부인의 횡포 때문에 말이다.

예전의 레오나였으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당하고 있었을 테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예전의 레오나는 이미 죽고 없으니까, 지금의 레오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니까 말이다.

‘당하고 살 수는 없지.’

그건 율리아나의 성격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가만있을 수는 없지.’

백작가 저택의 내정 살림은 안주인인 그레타 부인의 손에서 꾸려지고 있었다.

칼리반 백작은 내정 살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내정 살림을 맡은 그레타 부인은 어머니의 흔적부터 지웠다.

어머니를 모셨던 집사와 레오나를 보살폈던 유모와 하녀들을 내보내고 자신의 사람들로 채웠다.

레오나를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레오나는 철저하게 방치되었다. 친아버지인 칼리반 백작조차 그녀를 외면했다.

그러한 방치가 레오나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절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다.

레오나는 하녀를 보았다.

“너, 리리엘의 방으로 나를 안내하도록.”

“예? 예.”

“얼른.”

“아, 네.”

레오나는 하녀의 안내를 받아 리리엘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넓고 쾌적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면을 가득 채운 통창과 그 앞에 놓인 고급스러운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왼쪽에 자리 잡은 넓은 침실과 리리엘을 위한 드레스 룸까지.

현재 레오나가 지내던 방과는 천지 차이의 방이었다.

리리엘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레오나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네가 내 방엔 허락도 없이 왜 들어와. 당장 나가.”

레오나는 무시한 채 리리엘의 방을 둘러보았다.

“넓고 좋네.”

“뭐?”

레오나는 하녀를 바라보았다.

“너, 당장 가서 내 짐을 가지고 와.”

“예?”

하녀가 놀란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이제부터 여기가 내 방이니까.”

그 말에 리리엘이 얼굴을 구겼다.

“여기가 왜 네 방이야? 네 방은 저 위에 있잖아.”

그녀가 가리킨 곳이 어디인지 뻔했다. 창고로 쓰고 있는 다락방이었다.

레오나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여기, 원래 내 어머니가 쓰던 방이었잖아. 그러니 충분히 내게도 자격이 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뭐 해, 당장 짐 가지고 오지 않고.”

하녀가 리리엘과 레오나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봤다.

“너, 가져오기만 해, 그 자리에서 해고니까.”

“히익!”

하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너, 끌어내기 전에 당장 나가.”

“나가야 할 사람은 너야. 내 어머니의 딸도 아닌 네가 이 방을 쓰는 게 말이 되니?”

“뭐라고!”

그때 소식을 들은 그레타 부인이 리리엘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리리엘!”

“엄마!”

리리엘이 그레타 부인의 품에 안긴 채 레오나를 노려봤다.

“레오나가 나더러 이 방에서 나가래.”

“하, 감히.”

그레타 부인이 리리엘을 등 뒤로 보내고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네가 아주 간이 부었구나. 이 가문의 안주인에게 대들다니.”

레오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그레타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내 권리를 이행하려는 것뿐입니다.”

“권리?”

“이 가문의 장녀인 나는 방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설마, 제가 지저분한 다락방을 고분고분 사용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시죠?”

“그 방도 네겐 감지덕지야. 분수를 알아야지.”

“제 분수가 어떤데요? 적어도 부인보다는 낫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레타 부인의 눈빛이 타올랐다.

“네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구나. 당장 일어나지 못해?”

“소파가 너무 아늑해서 일어나기 싫어지네요.”

“뭐 하고 있어. 당장 끌어내지 않고!”

그레타 부인이 일갈하자, 하녀들이 다가왔다.

“멈춰, 내 몸에 손을 대면 손목이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날카로운 레오나의 눈빛에 하녀들이 멈칫했다.

그레타 부인이 재차 소리쳤다.

“당장 끌어내! 모두 해고되고 싶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하녀들이 레오나를 붙잡았다.

“아가씨, 그만 일어나심이.”

레오나는 하녀들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스스로 일어났다.

“하녀들의 해고를 무기로 삼다니, 참 치졸하네요.”

“뭐라고?”

“그런다고 제가 이 방을 포기할 거란 생각은 마시죠.”

“엄마, 어떻게 좀 해봐.”

리리엘이 그레타 부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레오나, 계속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곤란하게 될 거란다.”

안주인은 그녀다. 레오나에겐 그럴 힘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말에 레오나가 씩 웃었다.

그러곤 주위를 살펴보다가 리리엘이 사용하는 검을 발견하고는 집었다.

상당히 비싸 보이는 고급스러운 검이었다.

“그거 안 내려놔?”

리리엘이 손을 뻗자, 레오나는 검을 뽑아 검집을 리리엘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검집을 받은 리리엘은 황당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는 검에 서린 예기에 감탄을 터트렸다.

“제법 날카롭네. 아주 잘 벼려졌어.”

그 말에 리리엘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그 검의 가치를 알아?”

“알지, 이 검은 백작가의 차기 후계자에게 주는 검이잖아.”

“잘 알고 있네. 내가 가전 검술만 전수받으면 백작가의 후계자는 내가 되는 거야. 알아?”

“잘됐네.”

“그래, 잘 됐…… 뭐?”

생각보다 담담한 레오나의 반응에 리리엘은 당황하고 말았다.

실망하고 절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저리 담담한 태도라니.

레오나는 리리엘을 무시하며 검을 몇 번 휘둘러 보았다. 기겁한 리리엘이 소리쳤다.

“너,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레오나는 검을 든 채로 테이블로 걸어갔다. 꽤나 고급스러운 테이블이었다.

레오나의 손이 테이블을 쓸었다.

“이 테이블, 내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테이블이 낡았다고 교체한 거였죠, 아마.”

리리엘은 레오나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방인 것을 알고 이 방을 자신의 방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레오나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쓰시던 가구들을 불태워 버렸다.

“뭐, 뭐 하려는 거야.”

“이런 짓.”

레오나가 씩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휘두른 검에 고급스러운 테이블이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그만큼 검이 날이 잘 서 있다는 방증.

리리엘이 경악한 얼굴로 반 토막만 테이블을 보았다.

“그게 얼마짜리인데!”

제도 센터폴에 있는 유명한 가구 장인에게서 아주 비싼 값에 주문 제작한 테이블이었다. 그 테이블이 허무하게 반으로 갈렸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뭐?”

리리엘이 목각인형처럼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도저히 지금 벌어진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레오나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짓을 웃으며 할 수가 있지?

“이런 기분이었어, 네가 내 어머니의 가구를 태우고 날 바라봤을 때 말이야.”

“너, 너!”

“벌써부터 흥분하면 곤란하지, 이제 시작인데.”

“뭐?”

레오나가 리리엘의 검을 손에 든 채 주위를 둘러봤다.

“오, 저기가 좋겠다.”

레오나가 향한 곳은 리리엘의 드레스 룸이었다. 기겁한 리리엘이 레오나의 앞을 막아섰다.

“거기 서지 못해! 엄마!”

리리엘의 외침에 그레타 부인이 정신을 차리고 나섰다.

그녀도 레오나가 이런 식으로 막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해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니?”

“무사하지 못하면요?”

“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생각은 해봤니?”

“아버지한테 이르시겠다?”

“왜, 두렵니?”

그레타 부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레오나의 말에 웃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르세요.”

“뭐?”

“이르시라고요.”

“……후회할 것이다.”

“후회…… 글쎄요. 후회는 두 사람이 할 것 같은데요?”

리리엘의 드레스 룸에 들어간 레오나는 검을 휘둘렀다.

“꺅, 그만둬!”

리리엘이 레오나의 팔을 붙잡았다. 검술 수련을 한 탓에 리리엘의 팔 힘도 상당했다.

“당장 놔.”

리리엘이 검을 잡은 레오나의 손목을 붙든 채 노려봤다.

리리엘의 루비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일부러 살기를 흘려 레오나를 겁주려고 했다.

레오나는 자신의 살기를 받아내지 못할 거라 여겼으니까. 금방이라도 오금이 저려 무릎을 꿇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레오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오금이 저린 것은 리리엘 본인이었다.

“무, 무슨…….”

손이 덜덜 떨렸다.

레오나가 리리엘의 손목을 떼어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런, 겁먹었구나.”

리리엘의 루비빛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마, 말도 안 되는…….”

리리엘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레오나가 그런 리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리리엘은 레오나를 올려다보며 커다란 산을 마주한 기분을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가!”

그레타 부인이 리리엘에게 달려왔다. 리리엘을 감싸며, 레오나를 밀쳤다.

“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니!”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리리엘이 넘어져?”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절 건드려요.”

“뭐?”

“제가 앉아서 가만히 당해줄 줄만 아셨어요?”

그레타 부인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가 이런 아이였나 싶었다.

레오나는 언제나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아이였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쩔쩔매고 눈치를 보던 그런 아이.

“제가 선택권을 드리죠.”

“선택권?”

“이 방을 주시든가, 제 방을 다시 원래대로 해놓으세요. 더러운 다락방 따윈 가지 않을 거니까.”

“싫다면?”

“넌 다락방이 잘 어울려! 그것도 감지덕지해야지!”

그레타 부인이 비웃었고, 리리엘이 이죽거렸다.

“그래, 알았어.”

몸을 돌린 레오나가 리리엘의 드레스 룸에서 검을 휘둘렀다.

서걱서걱.

드레스 자락이 검에 잘려 나갔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하녀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고, 리리엘과 그레타 부인은 황망한 얼굴로 드레스가 찢겨 나가는 걸 바라봤다.

레오나는 리리엘의 드레스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고급스러운 드레스들이 걸레 조각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레오나! 당장 그만둬!”

“싫어, 너도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 더 했잖아. 안 그래?”

리리엘도 레오나의 드레스를 엉망으로 만든 전적이 있었다.

레오나에겐 거지 같은 곳이 더 잘 어울린다며 말이다. 그러곤 자신이 입다 버린 옷을 적선하듯 내던졌다.

“이제야 좀 공평하다. 그렇지?”

“너, 가만 안 둬!”

리리엘이 흥분했다.

레오나에게 달려드는 리리엘을 그레타 부인이 말렸다.

“이거 놔, 내가 저것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진정하렴, 흥분하면 지는 거란다!”

“엄마도 봤잖아, 저게 무슨 짓을 했는지!”

레오나가 검으로 바닥에 떨어진 드레스를 툭툭 쳤다.

“어떻게, 더 할까요?”

안 그랬다간 레오나가 더욱 날뛸 판이었다.

“그런다고 내가 물러날 것 같니?”

“그래요? 하는 수 없죠. 오늘부터 이 방에서 자는 수밖에.”

“누구 마음대로! 뭐 하고 있어! 당장 끌어내라니까!”

리리엘의 서슬 퍼런 말에 하녀들이 움찔거리며 다가왔다.

하녀들이 레오나를 붙잡았다.

“내가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레오나는 자신의 양팔을 잡은 하녀들의 손목을 틀어쥐고 꺾었다.

“아악!”

하녀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레오나는 그런 그녀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곤 모녀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을 향해 레오나는 살기를 피워 올렸다. 오로지 두 사람에게만 향하는 살기였다.

그레타 부인과 리리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다가오는 레오나가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모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자, 이래도 선택을 안 하실 건가요?”

차갑게 내려다보는 레오나의 금빛 눈이 맹수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기세.

“하, 하겠다.”

“엄마…….”

리리엘이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레타 부인은 여기서 물러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레타 부인이 하녀를 불렀다.

“잠근 방을 열어주거라. 이제 됐니?”

“아니요. 마음이 바뀌었어요. 기존에 쓰던 방보다 넓은 방을 준비해 주세요. 새 가구들로 채워서.”

“욕심이 지나치구나.”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하는데요? 게다가 전 값비싼 가구를 사달라고 하진 않았잖아요. 아니면, 여기서 더 해볼까요?”

“……알겠다. 그리해 주마.”

그레타 부인이 하녀에게 새 방과 새 가구를 준비하라 지시했다.

“이제 만족하니?”

레오나가 씩 웃었다.

“앞으로 서로 얼굴 붉힐 일은 하지 말자고요.”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렴. 이 빚은 반드시…….”

“갚겠다고요?”

레오나가 말허리를 자르자, 그레타 부인이 두 눈을 치켜떴다.

레오나가 말을 이었다.

“그 말, 항상 악당들이 꼭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악당들은 꼭 당하곤 했죠.”

그레타 부인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잊었다.

레오나는 손에 든 검을 바닥에 던지곤 리리엘의 방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방문이 닫히고 안에서 리리엘의 고함이 터졌다.

레오나는 한쪽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후벼 파며 걸음을 옮겼다.

“시끄러워 죽겠네. 돼지 염통을 삶아 먹었나.”

* * *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나니 넓은 새 방과 새 가구가 생겼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레오나는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로임 자작을 만나러 갔다.

그는 백작가 내에 있는 가신 전용 집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 레오나가 방문했다.

똑똑.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자, 안에서 정중한 목소리로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레오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로임 자작님.”

레오나의 방문에 로임 자작이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는 외알 안경을 고쳐 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레오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십시오.”

레오나는 그가 권하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자 로임 자작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아니요, 바쁘신 것 같으니 용건만 하고 가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굉장히 사무적인 말투였다.

“제가 자작님을 찾아온 것은 제게 남겨진 어머니의 유산을 처분해 달라는 말을 하려고 온 거예요.”

“전 백작 부인의 유산을 말입니까?”

“네, 이제 저도 성인이 되었고 유산에 관한 권리를 이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처분해 주세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레오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독립하려고요. 백작가에 더 남아 있어봤자, 사람대접도 못 받는데 이럴 바에야 차라리 독립하는 게 낫죠. 안 그래요?”

적나라한 레오나의 말에 로임 자작은 씁쓸한 얼굴을 하였다.

“알겠습니다. 뜻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자작님. 그럼, 전 이만 일어나볼게요.”

용건을 끝낸 레오나가 집무실을 나가자, 로임 자작은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응시했다.

레오나의 말대로 그녀는 백작가에 있어 봤자, 피폐해져 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 레오나의 말마따나 차라리 독립하는 게 나았다.

책상으로 돌아온 로임 자작은 레오나의 어머니가 남긴 유산에 대한 자료를 찾아 검토했다.

빠른 시일 내로 처분해 달라 했으니, 그리해 줄 생각이다.

* * *

레오나는 아침 일찍 세안을 하고 당당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용인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레오나는 식기가 세팅되어 있는 자리를 바라보다가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가 누구의 자리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세팅되어 있는 자리 중 한 곳을 골라앉았을 뿐이다.

거침없는 레오나의 행동에 고용인들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레오나가 앉은 자리는 리리엘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고용인 중 한 명이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나섰다.

“아, 아가씨. 그 자리는 리리엘 아가씨의 자리예요. 식사는 올려다 드릴 테니, 그만 일어나심이…….”

“나도 식당에서 식사를 할 거라고. 전해 듣지 못했어?”

들었다. 하지만 진짜로 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곧 있으면 백작 내외와 리리엘이 올 것이다.

백작님이 노하시기 전에 레오나를 내보내야 했다.

“그러다 백작님이 노하셔요.”

레오나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버지가 화를 내는 건 무섭고, 내가 화를 내는 건 무섭지 않나 봐?”

“네?”

“내가 왜 아버지를 피해 따로 식사를 해야 하지?”

“그, 그건…….”

“잔말 말고 음식이나 내와. 곧 오시겠어.”

하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물러났다.

그때 정말로 식당 문이 열리며 그레타 부인과 리리엘, 칼리반 백작이 들어섰다.

세 사람의 시선이 레오나에게 향했다.

레오나는 싱긋 웃으며 세 사람을 맞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너.”

“네가 아침부터 여긴 왜……!”

그레타 부인과 리리엘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레오나, 뭐 하는 짓이냐.”

칼리반 백작이 차가운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아주 불쾌한 것을 본 듯한 눈빛이었다.

레오나는 자신을 낳아준 친아버지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포마드한 적갈색 머리, 날카로운 인상의 눈매와 고집스러운 입술.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다부진 체격은 백작가의 가주로서 위엄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레오나는 그런 아버지를 볼 때면 늘 주눅이 들고 말도 제대로 못 했다.

특히 백작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레오나일 뿐. 새롭게 태어난 레오나는 백작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고도 웃을 수 있었다.

“저도 함께 식사를 하려고 나왔습니다.”

“누가 너더러 식당에서 식사하라고 했지?”

차가운 일갈에도 레오나는 미소로 받아쳤다.

“웬만하면 그런 걸로 차별하지 마시죠.”

“뭐?”

“치사하게 음식 가지고 차별하는 거, 너무 유치하잖아요. 매번 아버지와 부인, 리리엘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는 것도 이제 질렸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

칼리반 백작의 시선이 고용인들을 향했다. 고용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모르셨구나.”

레오나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명색이 백작가의 장녀인데 남이 먹다 남긴 쓰레기를 먹고 자랐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버지를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안 그래요?”

“너…….”

“계속 그렇게 서 계실 건가요? 전 배고픈데.”

칼리반 백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레타 부인도 못마땅한 얼굴로 레오나를 보더니 칼리반 백작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리리엘은.

“거기, 내 자리야.”

레오나가 앉은 자리를 가리키며 서 있었다.

“내가 먼저 왔으니 다른 데 앉아. 의자 많잖아.”

기다랗게 뻗은 식탁엔 의자만 20개가 놓여 있었다.

“하!”

“리리엘, 소란 떨지 말고 앉거라.”

칼리반 백작의 말에 리리엘이 이를 사리물고는 다른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하녀들이 재빨리 리리엘의 자리에 식기를 세팅했다.

잠시 후, 식사가 나왔다.

연어를 얇게 저며서 올린 샐러드와 옥수수를 넣은 크림수프, 소 등심 스테이크와 구운 채소가 나왔다.

모두 갓 조리된 따끈따끈한 음식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음식은 레오나의 배 속으로 사라졌다.

“후식 가져와. 달콤한 망고 푸딩이 좋겠어.”

“그, 그건…….”

망고 푸딩은 리리엘이 즐겨 먹는 디저트였다.

“리리엘이 먹을 거라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그, 그게…….”

“와, 정말이야?”

“다, 다른 걸 드리겠습니다.”

“다른 거 뭐? 딱딱한 마늘빵을 가져오게?”

레오나가 간식을 달라고 할 때마다 고용인들은 그녀에게 딱딱한 마늘빵을 가져다주었다.

레오나는 그것도 감지덕지 받아먹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난 망고 푸딩이 먹고 싶어, 그걸 내 앞으로 가져와.”

“그건 내 거야.”

보다 못한 리리엘이 한마디 하자, 레오나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내가 먼저 가져오라고 했잖아. 그러니 넌 다른 걸 먹어.”

“뭐라고?”

“뭐 해, 얼른 가져오지 않고.”

고용인들이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칼리반 백작이 차가운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레오나, 예절을 지키거라. 망고 푸딩은 리리엘의 것이다.”

명확하게 선을 긋고, 너는 원하는 것을 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우스웠다.

레오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참으로 우스운 행태가 아닌가.

레오나는 서빙되어 나오는 망고 푸딩이 리리엘의 접시에 놓이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디저트를 빼앗았다.

그러곤 그걸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 실수. 손이 미끄러졌네.”

“네가 일부러 그랬잖아!”

리리엘이 화를 냈다.

칼리반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레오나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레오나, 버릇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

“먹는 건 공평해야죠. 누군 먹고, 누군 못 먹는 거, 그건 좀 아니잖아요.”

“레오나!”

칼리반 백작이 화를 냈다.

“화내지 마시죠. 저도 간신히 참고 있으니.”

“뭐?”

“아버지만 화내시는 줄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도 화낼 줄 압니다.”

칼리반 백작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레오나를 보았다.

“네가 지금 정신이 나간 것이로구나.”

“그러니까, 먹는 것 가지고 차별하지 말자니까요. 그러면 이렇게 서로 화낼 일도 없잖아요.”

“버릇이 없구나.”

“제대로 된 가르침을 못 받았으니 버릇이 없는 건 당연한 겁니다.”

칼리반 백작은 이를 사리물었다. 그러곤 냅킨으로 입가를 슥 닦더니 팽개치듯 식탁 위에 던져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맛이 없군.”

칼리반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가 버렸다.

그러자 그레타 부인과 리리엘이 대놓고 언성을 높였다.

“식당에서 무슨 버릇이니. 레오나.”

“너 때문에 아버지가 화나셨잖아.”

레오나는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소리 좀 낮춰, 교양 없이.”

“뭐, 교양?”

리리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오나는 계속 말했다.

“앞으로 나도 식당에서 식사를 할 거야. 그때마다 얼굴 붉힐 거 아니면, 음식 가지고 차별하지 말자. 알았니?”

레오나가 뒤에 시립해 있는 고용인들에게도 말했다.

“그러니 너희도 명심해. 앞으론 내 몫의 자리 세팅과 디저트도 준비해 놓도록 해. 알았어?”

고용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나가 모녀를 바라보았다.

“먹고 입는 걸로 뒤에서 꼼수 같은 거 그만 부려요. 그것만큼 치사한 건 없답니다.”

“너, 말 다 했어?”

리리엘이 소리치자, 레오나가 차갑게 말했다.

“응. 내 말 안 끝났으니 마저 들어.”

“하!”

레오나의 시선이 그레타 부인에게 향했다.

“저도 새 옷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의상실에 주문 좀 넣어주시죠. 리리엘의 단골 의상실에다가.”

“네가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내가 그래 줄 거라 생각하니?”

“해주셔야 할 거예요. 어제의 푸닥거리를 또 하실 게 아니면.”

대놓고 깽판을 부리겠다고 하니, 그레타 부인은 섣불리 말을 하지 못했다.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리리엘의 말이었다.

“매달 값비싼 드레스와 장신구를 사들이는 너보다는 제정신이야. 적어도 난 검소하니까.”

“이게! 진짜, 해보자는 거야?”

“내가 말버릇 좀 고치라고 말했지? 언니한테 막말은 좀 아니지 않아?”

“누가 내 언니야! 나한테 너 같은 언니 필요 없어.”

“네가 필요 없다고 내가 언니가 아닌 건 아니잖니? 네가 나보다 1살 어린 건 사실이니까.”

리리엘은 점점 혈압이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어쩜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 약을 바짝 올리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그레타 부인이 그런 리리엘의 손을 붙잡고 다독이고는 레오나에게 차갑게 말했다.

“레오나, 네가 가문에 먹칠한 건 그새 잊은 모양이구나.”

“맞아, 너 때문에 가문의 명이 다할까,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검술 명가에서 너 같은 멍청이가 나오다니. 네 주제를 좀 알아.”

상처를 후벼 파는 언행에도 레오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내가 재능이 없으면, 네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될 것 같아?”

“뭐?”

“인성이 그 모양인데 제대로 된 사람이나 될 수 있겠니? 너, 인성 못 고치면 너야말로 백작가를 말아 먹을걸?”

“이게! 그래도 난 너처럼 버려지진 않았어. 아버진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고, 알아들어?”

“그래, 그럼 계속 그렇게 아버지가 주는 사랑만 먹고 살아. 난 줘도 안 가지니까.”

“줘도, 안 가져?”

“어, 너나 많이 받으렴.”

적선하듯이 말하는 레오나를 보며 리리엘은 화가 났다.

제까짓 게 뭔데 그런 식으로 말하는가. 아버지에게 인정조차 받지 못한 주제에!

“버려진 주제에 잘난 척은!”

레오나는 그런 리리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식당을 나갔다.

그 태도에 리리엘은 더욱 약이 올랐다.

* * *

식당을 나온 칼리반 백작은 기분이 저조했다. 달라진 레오나의 태도 때문이었다.

식당에서의 그 태도와 말투.

그가 알던 레오나가 아니었다.

‘그 건방진 말투라니…….’

칼리반 백작은 레오나가 자신에게 그렇게 대들 줄은 몰랐다.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이네요. 아버진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시니. 제가 명색이 백작가의 장녀인데 남이 먹다 남긴 쓰레기를 먹고 자랐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버지를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안 그래요?’

레오나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방치했다.

그에게 있어 레오나는 버리기도 곁에 두기도 애매한 존재였으니까.

레오나가 검술에 대한 재능만 뛰어났어도 자신이 이렇게 모질게 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전 검술을 직계가 잇지 못한다면 그건 백작가의 대가 끊긴다는 의미.

그래서 리리엘에게 가전 검술을 가르쳐 주려고 하고 있었다.

재능 없는 레오나보다 재능 있는 리리엘이 익히는 게 나으니까.

그리되면 레오나는 이제 정말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그걸 알기에 일말의 동정심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레오나도 그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아버지, 리리엘이에요.”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상큼한 미소를 단 리리엘이 들어왔다.

“어서 오너라.”

리리엘을 바라보는 칼리반 백작의 얼굴이 미소가 떠올랐다. 레오나에겐 보인 적 없는 따듯한 미소였다.

리리엘을 보고 있으면, 조금 전의 걱정이 말끔히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말해 보거라.”

“전 언제쯤 가전 검술을 배울 수 있나요?”

“…….”

칼리반 백작은 리리엘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리리엘은 의외로 욕심이 많았다.

욕심이 많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욕망하기에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칼리반 백작은 리리엘의 욕망을 귀엽게 봐주었다. 백작가의 영애가 그 정도 욕망도 없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리리엘이 가전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은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을 뿐.

레오나의 문제도 있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리리엘이라면 가전 검술을 훌륭히 소화해 낼 것이다. 레오나와 달리 말이다.

그래서 칼리반 백작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안 그래도 가르쳐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요?”

“그래.”

“약속하신 거예요?”

“물론이다.”

리리엘이 배시시 웃었다. 칼리반 백작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버지, 저 갖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보렴.”

리리엘은 신이 난 얼굴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아버진 날 사랑하셔. 레오나가 아닌 날 말이야.’

게다가 가전 검술의 전수까지 약속을 받았다.

가문의 가전 검술을 잇는다는 것은 백작가의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레오나 따위와 달리 자신이 완벽한 칼리반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감히, 자신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설 것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짓밟아 주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 * *

드디어 대망의 날이 밝았다.

로임 자작으로부터 어머니의 유산을 처분한 돈을 계좌에 입금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칼리반 백작의 귀에도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레오나는 칼리반 백작의 호출을 받았다.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분노한 칼리반 백작이 서류를 레오나에게 던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서류를 주워 든 레오나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어머니의 유산을 처분한 것 때문에 화가 나신 겁니까?”

칼리반 백작이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레오나를 노려보았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레오나는 놀라지도 않았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해?”

레오나는 서류를 주워 칼리반 백작의 책상 위에 도로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그건 엄연히 제 몫이고, 제게 권한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죠.”

“네가 그 유산을 받을 자격이 있다 여기는 것이냐.”

“어머니가 제 명의로 물려주신 겁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자격이 있다는 거죠?”

“너는 가문에 먹칠을 했다. 그런 주제에 재산을 탐내?”

“그래서요. 다시 빼앗기라도 하시게요? 아버지께 그럴 권리가 있을까요?”

그 재산은 서류상 완벽하게 레오나의 몫이었다.

백작이라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 재산은 전 백작 부인이 친정에서 물려받은, 그녀만의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내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을 처리한 것은 잘못한 일이다.”

칼리반 백작기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레오나가 피식 웃었다.

“아버지, 아버진 제가 가문의 먹칠을 했다고 하셨죠?”

“그래. 넌 가문의 수치다.”

“가문의 수치인 저는 칼리반 백작가에 있어선 안 되겠군요.”

칼리반 백작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래, 넌 백작가에 어울리지 않는 불순물이다.”

그런 말을 듣고도 레오나는 담담했다.

이제 그런 말로 상처받지 않는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잘 되었군요.”

“뭐?”

“마음 편히 가문을 나가도 될 것 같습니다.”

“나가?”

“네, 저 독립하겠습니다.”

레오나는 당당히 선언했다.

칼리반 백작은 어이가 없었다.

“가문을 나가면 너는 두 번 다시 칼리반의 사람이 될 수 없다. 그걸 알고 하는 말이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저를 호적에서 지워주시죠.”

레오나가 강경하게 나오자, 칼리반 백작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성을 버리고 나가면, 살 수 있을 거라 여긴 게냐. 그리되면 너는 평민이 된다.”

“여기서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보단 차라리 평민이 되는 게 낫습니다.”

“구질구질?”

“네, 저를 언제든 버리고 싶어 하는 아버지와 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리리엘과 그레타 부인까지. 제가 왜 그런 모멸을 견뎌가며 백작가에서 살아야 합니까? 그럴 바에야 평민이 되는 게 낫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레오나에게 어떤 취급을 해왔는지 그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알고도 묵인해 온 것이 그 자신이었다. 그로서도 레오나가 제 발로 나가준다면 환영할 일이었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후회 안 할 것 같습니다.”

단호한 레오나의 말에 칼리반 백작은 이를 사려 물었다.

혈연의 관계를 완벽히 끊어내겠다는 레오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너무 낯설었다.

자신이 그동안 레오나에게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짐은 바로 챙겨서 나가겠습니다. 우리, 두 번 다시는 얼굴 보지 말죠.”

“너…….”

“저는 더 할 말이 없으니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서류 정리는 최대한 빨리 끝내주시길 바랍니다.”

깔끔하게 절연을 선언한 뒤, 미련 없이 레오나는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칼리반 백작은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탁!

집무실 문이 닫혔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칼리반 백작은 무언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을 하였다.

* * *

방으로 돌아온 레오나는 짐을 꾸렸다.

돈도 생겼겠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며칠 동안 누릴 것은 다 누렸다.

맛있는 음식, 푹신한 침대, 따듯한 목욕에 새 가구와 새 옷까지.

그동안 받아내야 했던 것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되었다. 앞으로 누리면 되니까. 그럴 자신도 있고.

레오나는 배낭을 메고 방을 나왔다. 그러자 리리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분홍빛 머리를 늘어뜨리고, 상큼한 미소를 지은 채.

벌써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너, 진짜 나가는 거야?”

“어.”

“가문의 성까지 버리겠다고 했다면서?”

“그런데?”

“그럴 거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설치고 다닌 거야?”

“그냥 나가는 게 아쉬워서?”

“하, 어이가 없어서.”

“시비 걸려고 온 거면 그만 꺼져줄래. 아시다시피 갈 길이 바빠서.”

“시비? 너, 그거 알아? 가문의 성을 버리면 너는 평민에 불과해. 평민이 귀족인 나한테 대드는 게 가당키나 하니?”

“그건 아버지가 호적에서 내 이름을 완전히 지웠을 때의 일이고, 지금은 아니니 해당되지 않지. 그러니 얼른 비켜. 네 얼굴 보는 것도 이제 지겹다.”

“뭐, 지겨워?”

“그래, 너도 지겹잖아. 좋게 좋게 헤어지자고.”

그렇게 말한 레오나는 리리엘의 어깨를 한 차례 다독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하! 제 까짓게! 넌 이제 아무것도 아냐! 내 발톱의 때만도 못한 존재라고!”

레오나가 나갔으니, 백작가의 영애는 그녀 하나였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백작가 영애이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기사가 될 아이.

핑크빛 미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래, 나도 지겨워.”

넓은 아량으로 리리엘은 레오나를 봐주기로 했다.

백작가에서 사라져 준다는데 막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레오나는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저택을 나섰다.

이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때였다. 진짜 레오나의 꿈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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