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랑이 끝나더라도
에일린은 먼저 방문을 열어 밖에 대기한 하녀들을 손짓해 불렀다. 그들이 들어오자 휘장을 쳐둔 침대를 가리키며 잔뜩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영애께서 주무시니 조용히 하고 어서 식탁을 치우거라.”
“예.”
서너 명의 하녀가 능숙한 몸놀림으로 상을 치우자 앞서 방을 나가게 했다. 제퓌의 말대로 그들은 별 의심 없이 맡은 임무를 행했다. 이대로라면 방문 밖으로 나가는 일도 문제없어 보였다. 하녀들을 앞세운 후 에일린이 뒤를 따라 걸어갔다. 방문을 막 벗어날 때가 되자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결계는 들어올 때가 문제지 나갈 때는 별다른 방해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강한 결계일수록 그런 편이니 이곳도 그럴 가능성이 많아요.’
제퓌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발을 뻗었다.
“……!”
정말 어떤 거북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밖을 지키던 두 명의 마법사도 별다른 낌새나 움직임 없이 정중한 인사를 보내왔다.
“안녕히 가십시오. 자작부인.”
에일린은 즉시 묵례로 대답했다. 목소리를 가능하면 내지 말아야 했다. 제퓌는 하급정령이기에 그가 건 암시는 일시적인 데다 시각적인 면에 한정돼 있다 한다. 그나마 밤이라 주위가 어두운 게 다행이랄까. 밤이니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도 낮보다는 덜 수상해 보일 것이다. 마법석이 꽂힌 조명시설이 두어 개 눈에 들어왔으나 그리 밝지 않았다. 에일린이 약간 고개를 숙인 채 두 마법사를 지나치는데 앞쪽에 아두스와 프리기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조금 걸음 속도를 높이려는 찰나였다.
“자작부인.”
“……!”
별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살짝 돌아봤다. 치렁치렁한 베일을 쓰고 있었지만 어느새 땀이 차 끈적이는 손이 부르르 떨려온다. 한 마법사가 공손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송구합니다만 저희 야식을 좀 올려달라고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음식 냄새를 맡으니 조금 시장해져서요.”
이 상황에서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뭐라고 입을 열면 그대로 탄로 날지도 몰랐다. 할 수 없었다. 에일린은 되도록 애플턴 부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려 노력했다.
“그, 그러죠.”
“부인? 잠깐만요!”
예리한 마법사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모양이다. 이내 뚜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서둘러! 얘들아.”
“응!”
상황을 파악한 세 정령이 재빨리 에일린에게 날아와 마법주문을 외웠다. 마법사가 손을 뻗으면 거의 닿을 듯한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순식간에 정령들의 마법주문이 완성되며 에일린의 몸 주위로 눈부시게 빛나는 둥글고 푸른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헉! 뭐야?!”
마법사가 빛에 튕겨 나가며 내지른 날카로운 외침이 희미하게 메아리쳤다. 동시에 주변 풍경이 일그러졌다. 에일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눈을 꼭 감았다. 일단 탑을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다.
***
에일린이 눈을 떠보니 의외의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거대한 바위 절벽이 우뚝 솟아 길게 이어져 있는 공간. 언젠가 한 번 다녀갔던 곳이었다. 가운데 동굴 모양의 입구가 뻥 뚫린 채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여긴…….”
가늘게 눈을 뜬 채 두리번거리며 주변 풍경을 살펴보았다.
“에일린!”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동굴처럼 생긴 커다란 입구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루카스!”
그가 곧장 그녀 곁으로 뛰어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동그랗게 뜬 두 눈에 반가움과 염려의 빛이 가득했다.
“괜찮은 거야? 에일린. 그동안 황궁에 잡혀있었다고 들었어.”
“예.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공중에 떠다니던 아두스가 서둘러 용건을 꺼냈다.
“지금 다른 정령들의 거처에 갈 수 없어서 부득이 이곳으로 모셨어요.”
“왜요?”
“에일린 님과 친분이 있던 정령들 모두 대자연 어머니께 이런저런 벌을 받으셨거든요. 모든 정령왕들의 궁전에 인간의 출입을 금하게 하셨어요. 어머니의 허락 없이 인간을 돕는 행위 또한 막으셨고요.”
제퓌가 조금 망설이다 다른 설명을 덧붙였다.
“저번 전쟁에 가담한 상급 이상의 모든 정령에게 10년간 숲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벌도 함께 내리셨대요. 그리고 그분들도 아직 빛의 궁전에 계신 상태고요.”
“아……, 그랬군요.”
에일린은 가슴 속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울러 그들 정령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들이 그런 벌을 받게 된 것도 자기 때문이니까.
“그래서 이번에 빛의 궁전에 가실 때는 다른 정령왕들이나 상급 정령들의 도움을 받으실 수가 없어요.”
“예? 그럼?”
아두스가 팔짱을 끼며 모여선 이들을 죽 훑더니 비장한 얼굴로 일렀다.
“여기 있는 우리끼리 길을 떠나야 한다고요.”
“……!”
***
“에일린 님, 여기서 조금 쉬다 갈까요?”
“예, 그게 좋겠어요.”
에일린이 곧바로 대답하며 유난히 힘들어 보이는 하급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루쿨루스 숲에 있는 유니콘의 궁전에 잠시 들러 여행준비를 한 후 지체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세 정령이 힘을 모아 순간이동마법을 행했지만 아무래도 힘에 부친 듯했다. 여전히 한밤중인 데다 에일린도 별로 안 지쳤는데 세 정령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에일린, 피곤하지? 바로 치유술을 행할게.”
“어, 고마워요. 루카스.”
유니콘으로 변한 루카스가 신비로운 빛으로 반짝이는 긴 뿔을 에일린 가까이 가져다 대며 말했다. 마나가 거의 없는 에일린의 몸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루카스까지 동행한 터였다. 그 바람에 세 정령의 부담이 더욱 커졌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루카스의 뿔에서 나온 영롱한 빛이 에일린의 몸으로 스며들 듯 깃들더니 이내 사그라졌다.
“어때? 에일린.”
“좋아요. 정말 기운이 펄펄 나는 것 같아요.”
곧 인간형으로 변신한 루카스가 뿌듯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우쭐거렸다.
“그렇지? 유니콘 중에서도 내 치유술이 최고라고. 장로들이나 아빠도 인정해주신 솜씨란 말이지.”
“그렇군요. 저기, 루카스. 정령들 몸도 회복시켜 줄 수 있나요?”
루카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우물거렸다.
“음, 그건 불가능해. 정령들을 치유할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정령들뿐이야. 우린 그냥 마나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 주는 수밖에 없어.”
“그런가요?”
에일린이 시무룩하게 대꾸하자 제퓌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에일린 님. 저흰 좀 쉬면 금방 괜찮아질 테니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예. 조급해하지 말고 푹 쉬세요, 정령님 들.”
“그럴게요.”
에일린 역시 유난히 활기차게 답하며 싱긋 웃어주었다. 하지만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에 이 길을 갈 땐 세 명의 정령왕이 함께 했었다. 그런데도 사흘이 꼬박 걸렸는데. 지금은 에일린 자신 외에도 순간이동 마법을 행하지 못하는 유니콘까지 함께 가야 했다.
‘하급정령 셋이 감당할 수 있을까?’
어찌어찌 간다 해도 과연 제시간 안에 당도할 수 있을지.
‘이레 안에 도착해서 히에무스를 만나 설득하는 게 가능할까?’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음습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어야 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히에무스를 위해서, 하급정령조차 저 작은 몸으로 분발하는 중인데 자신이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충분히 쉬도록 해요. 루카스랑 저도 뭘 좀 챙겨 먹고 한숨 잘게요.”
에일린은 세 정령이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자칫 무리라도 할까 싶어 얼른 제의했다.
“예! 그게 좋겠네요.”
기다렸다는 듯 루카스가 자신이 가져온 꾸러미를 뒤적여 요깃거리를 꺼냈다.
“이거 먹어봐, 에일린.”
유니콘들이 준비해준 음식이었다. 거친 호밀빵, 마른 과일과 육포와 물. 인간인 에일린의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감사히 생각하며 한 입 뜯어서 입안에 넣었다.
***
닷새 정도가 지난, 밤이었다. 하지만 일행은 아직 절반도 가지 못했다. 에일린은 루카스로부터 막 치유술을 받은 후 일행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에일린 자신은 행색이 엉망이긴 해도 루카스 덕분에 몸 상태는 괜찮았다. 하지만 순간이동술을 행한 세 정령은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루카스 역시 길어지는 여행에 다소 지치고 싫증난 얼굴이었다.
히에무스에게 최종 판결이 내려지게 되는 날까지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빛의 궁전이 있는 곳까지 절반도 채 이동하지 못했다. 절로 초조함과 조바심이 밀려드는데 일행이 쉬는 시간은 계속 늘어났다. 세 정령이 마법의 힘을 쓰면 쓸수록 한층 더 쇠약해졌으니까.
“이만 쉬고 그만 출발하도록 해요. 에일린 님.”
제퓌가 비틀거리며 에일린이 쉬고 있는 나무 밑으로 다가왔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서두르지 않으면 늦고 말 거예요.”
“제퓌…….”
에일린은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올려다봤지만 좀 더 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애써보고 싶었다. 작은 정령들에게 너무나 미안했지만 지금 형편에선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다시 출발해 볼까요?”
“……예.”
충분히 쉬지 못한 세 정령이 파리해진 얼굴로 주섬주섬 일어났다. 에일린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보고 있으면 모든 걸 포기하고 말 것 같았기에. 다들 침묵을 지킨 채 서 있었다.
세 정령이 시행하는 순간이동 마법의 감각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에일린은 왠지 목에서 울컥거리는 기운을 느꼈지만 얼른 삼키고 말았다. 그렇게 두어 번인가 이동을 계속했다.
한 번에 시도할 수 있는 거리가 예전에 정령왕들이 순간이동을 행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았다. 그래서인지 에일린의 상태는 여전히 양호했다. 어느 한 장소에 멈춘 후에도 에일린은 눈꺼풀을 꼭 닫은 채 가만히 있었다.
“어, 에일린! 큰일 났어!”
루카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리자 곧바로 눈을 떴다.
“……!”
세 정령이 땅바닥에 쓰러진 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제퓌! 아두스! 프리기!”
에일린은 세 정령의 이름을 부르며 작은 몸을 안아 올렸다. 모두 의식을 잃은 상태. 게다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각자가 지닌 정령의 빛까지 점점 잦아드는 중이었다.
“아…….”
또다시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하다니. 자신 때문에 또 이렇게……. 목 안에 애써 욱여넣었던 탄식과 흐느낌이 튀어나왔다.
“미, 미안해요…….”
루카스가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 에일린. 울지 마.”
“미안해요, 제퓌······, 정령님 들.”
굵게 방울진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에일린은 그들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하염없이 되뇌었다.
“미안해, 미안해요. 또 이렇게 만들다니······.”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불가능한 여정이었다는 걸. 그런데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계속 고집을 부린 것일 뿐. 한 번은 더 히에무스를 만나고 싶고, 그리고 한 번은 자신의 손으로 그를 구하고 싶었기에. 결국은 스스로의 과욕에 지나지 않았는데. 애초부터 혼자 힘으로 달성할 수 없는 일에 다른 이까지 끌어들여 폐를 끼치고 말았다.
“으흐흑…….”
한 번 터진 울음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계속 어깨가 들썩였다. 그러다 급속도로 빛을 잃어가는 세 정령의 모습을 보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루카스.”
“으, 응?”
“제 부탁을 좀 들어줄래요?”
에일린은 입술을 잘게 깨물며 말했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조차도 그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다. 루카스의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럴게. 무슨 부탁이야?”
“정령들을 데리고 곧장 루쿨루스 숲으로 돌아가 줘요.”
“뭐?”
“유니콘들은 숲 밖을 나올 때는 순간이동을 못하지만 숲에 있는 보금자리로 돌아갈 땐 가능하다던데……. 정말 그런가요?”
소설책에서 그런 구절을 읽었다.
“그, 그래. 맞아. 그렇긴 한데…… 그럼 이제 다 포기하는 거야?”
에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나는 계속 갈 거예요. 가야 해요. 하지만 정령들은 이대로 가다간 죽고 말거예요. 한시라도 빨리 겨울의 궁전으로 데려가야 해요. 그럼 눈의 여왕이 살려줄 거예요.”
“에일린…….”
“부탁할게요. 루카스.”
***
저 멀리 펼쳐진 낮은 지평선에 어스름한 새벽빛이 밝아왔다. 아젤란으로부터 이동한 거리가 꽤 되기에 이곳이 겨울인지 봄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에취!”
에일린은 재채기를 한 번 한 뒤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계절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어둠이 내리면 제법 쌀쌀한 날씨. 밤사이 휴식을 취했던 바위굴 밖으로 나와 굳은 몸을 풀어주었다.
“후…….”
이제 슬슬 다시 길을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히에무스의 최종 판결이 내리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아니, 이제 그런 건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혼자 몸으로 가야 하므로 결과는 이미 나와 있었다.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는 걸 택했다.
‘그럴 순 없어! 어떻게 에일린 혼자 놔두고 가란 말이야?’
지난밤 소리치던 루카스의 얼굴이 설핏 떠올랐다.
‘그래야 해요. 세 정령을 죽게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도 이대로 포기 못 하고요.’
‘하지만 에일린!’
‘가게 해줘요. 루카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요.’
‘무모해! 불가능할 게 빤한데 뭣 때문에 계속 간다는 거지?’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요.’
‘응?’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음 말을 이었다.
‘끝까지 하지 않으면 사람은 후회하게 되니까요.’
그래.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일 뿐. 히에무스가 끝까지 그녀와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도 그를 구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기다려. 에일린. 내가 정령들을 데려다주고 곧 다시 널 찾아올 테니까.’
절대로 혼자 두고 가지 않겠다는 그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예, 그렇게 해요. 루카스. 고마워요.’
“…….”
에일린은 간밤의 기억을 그만 되새기고 루카스가 주고 간 음식 자루를 묵묵히 꺼냈다. 이제 믿을 건 자신의 체력뿐이니 억지로라도 뭔가 먹어둬야 했다. 찬물로 대충 목을 축이고 딱딱한 여행식을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머지않은 곳에 제법 큰 마을이 환한 아침 햇살 속에 윤곽을 드러냈다. 저기 잠시 들러 말을 한 필 산 다음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
계속 길을 갔다. 빛의 궁전이 있다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채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말을 타고 가기도 하고 그냥 걷기도 하면서. 해가 뜨기 시작할 때 출발해서 해가 저물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갈 수 있으면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그날은 어느 허름한 마을의 여관을 잡아 서너 시간 머물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엔 황량한 노상에서 황혼을 맞이하고 말았다. 게다가 눈앞에 중간 크기의 강이 가로 놓인 채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어떡하지?”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건너야 할까? 아니, 그럴 시간이 없다. 조금도 쉴 틈 따위는 없었다. 뭐라고 푸념할 겨를조차도.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온전한 하루도 아니다. 이 밤이 지난 후 찾아오는 정오에 히에무스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게 될 테니까. 에일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고 결심한 것 아니었던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보자고. 아직 여전히 빛이 남아 있으니 바로 도강을 시도하기로 했다. 가뭄이 지속된 탓인지 육안으로 봤을 때 별로 깊어 보이진 않았다.
“이럇!”
쉬지 않고 몰아친 덕분에 말도 사람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기온이 점점 떨어지고 시야도 흐려졌으나 에일린은 말의 배를 가볍게 치며 재촉했다. 적어도 내일 정오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히힝!”
엉겁결에 강물에 발을 내디딘 말이 차가운 강물의 감촉에 화들짝 놀라 꿈틀거렸다. 에일린은 고삐를 더욱 꽉 움켜쥔 채 앞으로 진입하라고 부추겼다.
“히힝!”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나아가는 걸 거부하던 말이 펄쩍 뛰어오르더니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앗!”
풍덩!
그만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잔뜩 골이 난 말이 저 혼자 강기슭으로 튀어 오르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아, 안 돼! 기다려!”
생각보다 강이 깊었다. 발이 땅에 잘 닿지 않았다. 어설프게 헤엄을 칠 줄은 알았지만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와 치렁치렁한 망토가 잔뜩 물을 먹은 채 무섭게 휘감겨들었다. 몇 번 강기슭으로 올라오기 위해 시도했으나 번번이 빠른 유속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팔에 힘이 빠지면서 자꾸만 몸이 떠내려갔다.
“아, 안 돼…….”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밤이 거의 다가온 이 시각에 이런 곳을 지나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헛된 외침이라도 질러봐야 했다.
“누구, 누구 없어요?!”
몸이 점점 더 강 중앙으로 떠밀려갔다. 무거운 옷자락이 물귀신처럼 달라붙어 강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출렁거리는 강물이 입과 코로 넘칠 듯이 흘러들어왔다.
“어푸, 거기, 아무도 없나요?!”
여기까지인 걸까? 자신의 도전은.
“도, 도와주세요!”
누구든……. 순간 떠오른 어떤 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곳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의 이름을.
“아벨라 님!”
유속이 더욱 빨라졌다. 자신과 함께 강물 위에 떠 있는 잎과 나뭇가지 따위가 더 세차게 한 방향으로 치닫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저 아래 폭포라도 있는 것일까?
“아벨라 님!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콰콰콰콰!
대량의 물이 숨넘어갈 듯 어디론가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음이 사방에 울렸다.
“아벨라 님!”
폭포 소리인 게 분명했다. 에일린은 악을 쓰듯 필사적으로 외쳤다.
“제발!”
막 넘어가는 태양 빛에 갑자기 허리가 댕강 잘린 듯한 강물의 끝자락이 비쳐 보였다. 예상한 대로 폭포였다.
“아…….”
줄곧 참고 있었던 눈물이 두 눈에 가득 고였다. 이미 푹 젖었기에 아무런 표시는 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야.”
자신의 사랑은.
그리고 기묘했던 이 두 번째 삶도. 넘쳐흐르는 눈물 때문에 더는 눈을 뜨고 있기 힘들었다. 눈꺼풀을 꾹 닫았다.
“히에무스…….”
보고 싶었던 단 하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른 후회는 없었다. 사람의 삶이란 대개 예기치 못한 곳에서 느닷없이 끝나는 법이니까.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모든 상념이 잦아들며 떠돌던 몸이 뚝 잘린 검푸른 강줄기의 끝에 다다랐다.
그 찰나였다.
파앗!
갑자기 영롱한 황금빛 구가 나타나 순식간에 에일린의 몸 전체를 완전히 감쌌다.
“……!”
잠깐 에일린은 놀란 눈으로 그 현상을 지켜봤지만 이내 의식을 잃었다.
***
에일린이 정신을 차렸을 땐 어딘가에 누운 채 물 위를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갈대 줄기를 엮어 만든 조각배 같은 물체 위였다. 어디선가 맡은 기억이 있는 은은한 풀냄새와 물 향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 같은 빛이 사방에 일렁이는 공간, 하늘이라 생각한 곳은 아련한 금빛 광채만 서려 있고 영롱한 빛을 내뿜는 나비 같은 존재들이 이리저리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여긴…….”
“내 궁전이다.”
위쪽에서 울려 퍼지는 위엄 서린 목소리, 언젠가 들어봤던 여신의 음성이었다.
“……!”
에일린은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금빛 잎사귀를 무수히 매단 거대한 은빛 나무가 당당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을 온몸으로 발하는 존재가 조각상처럼 앉아 있었다.
“아벨라……님?”
“그래. 인간 여인. 내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더 달라고 청했느냐?”
“그, 그렇습니다.”
여신의 물음이 던져지자 에일린은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고 대답했다. 흐드러진 신록처럼 선명하게 빛나는 여신의 초록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자신의 뇌리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굳이 이렇게 묻고 있지만 사실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기회를 말인가?”
“내일 정오에 히에무스를 벌하는 최종 판결이 내려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해독약을 먹으면 그의 죄를 묻지 않으실 거라 들었는데요?”
“그랬지. 하지만 그가 고집을 부리며 먹지 않겠다고 버텼다. 계속 그런 태도라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지. 상응하는 벌을 내려야만 하겠지.”
“영원히 정령왕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그렇다.”
“제가 그를 설득하게 해주십시오. 해독약을 먹도록 타이르겠습니다.”
“그대가 해독약을 먹게 하겠다고?”
“예.”
여신의 낯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무 표정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조금 미소를 짓는 것처럼 바뀌었다.
“설득이 통하지 않으면? 그냥 포기한 채 그가 벌을 받는 모습을 지켜볼 작정인가? 하긴, 그래도 상관은 없겠지. 어찌 됐든 그대들의 사랑이 끝나는 건 똑같을 테니까.”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끝나더라도.
“응?”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수를 쓰겠습니다.”
“다른 수? 그게 뭐지?”
가슴이 다시 찌릿찌릿 저려왔다. 목 안쪽에서 젖은 뭔가가 금방이라도 울컥 튀어나올 듯했다. 하지만 꾹 참고 말해야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줄곧 다짐했던 그 일을 실행할 것이다.
“예전에 당신께 약속드렸습니다. 제가 히에무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스스로 그의 곁을 떠날 거라고요.”
느릿하게 자신의 계획을 입 밖에 내놓았다.
“그 약속을 이행하겠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려 노력했으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제 손으로 직접 해독약을 먹일게요.”
“……!”
“두 가지 약을 제게 주세요. 해독약과 붉은 마법약을요.”
“붉은 마법약을?”
“예. 잠시 인간이 되게 해주는 약 말입니다.”
“그대의 계획을 자세히 이야기해 보라.”
“알겠습니다.”
에일린이 말을 마치자 아벨라 여신의 두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싱그러운 초목의 향기가 스미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잠시 들었다. 그녀 뒤에 우뚝 서 있던 은빛 나무에 매달린 금빛 이파리들이 찰랑거리는 경쾌한 음을 만들어냈다. 여신은 곧 빛의 정령들을 여럿 불러 이런저런 명령을 내렸다. 이어 에일린에게 말했다.
“좋다, 인간 여인. 그대의 바람대로 해주겠다. 그대의 손으로 히에무스에게 해독약을 먹인다면, 그동안 히에무스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씻어주겠다.”
“감사합니다.”
“허나 알아 둘 것이 있다. 히에무스가 해독약을 먹으면 그대 자체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해도 그대를 사랑했던 모든 마음을 잊게 될 것이야. 그야말로 그대의 사랑이 끝나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가?”
“……예.”
괜찮다. 자신은 잊지 않을 테니까. 어느 한쪽이라도 기억한다면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니다. 유한한 생명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행복한 기억이 가지는 힘이란 생각보다 강하다. 때로는 그 기억만으로 버티며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이전의 삶에서도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 그러니…….
“괜찮아요.”
입술을 악물었다. 괜찮았지만 자꾸만 가슴 한쪽이 아려왔기에.
그 후 에일린은 빛의 정령의 안내로 낯선 곳으로 이동했다. 루쿨루스 숲에 있는 곳과 비슷한 온천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에 묵묵히 씻고 빛의 정령들이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볍고 하늘하늘한 감촉에 별다른 장식 하나 없는데도 신비로운 빛이 감도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옷 속에 아까 여신이 줬던 두 마법약을 소매 속에 챙겨 넣었다. 정령들이 마법으로 금방 몸을 말려주고 머리도 깔끔하게 빗겨 준 뒤 꿀물과 과일을 가져다 줬다. 이내 그들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향했다. 지금까지 본 곳과는 다르게 기이한, 금빛 나무 덩굴이 빽빽하게 무리 지어 얽혀 있는 장소였다.
유난히 크고 밝은 빛을 내뿜는 한 정령이 다가가 주문을 외자 한쪽이 입구처럼 활짝 벌어졌다.
“들어가세요. 인간 여인.”
에일린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누구냐?”
날카롭지만 익숙한 중저음이 들렸다. 그도 곧 그녀를 알아보았다.
“에일린?”
“히에무스.”
겨울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기세로 그가 다가왔다. 잠시 눈꺼풀과 입술을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일린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히에무…….”
“정말…….”
그의 커다란 몸이 기울어지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에일린, 정말 에일린이구나. 에일린이야!”
설렘과 기쁨이 알알이 맺힌 음성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 불렀다. 숨을 쉬기 힘들 만큼 밀착한 그의 몸에서 익숙한 겨울 숲의 향기와 서늘한 한기가 전해졌다.
수없이 그리워하고 염원했던 장면. 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체온을 느끼게 되는 이 순간을 얼마나 바랐던가?
“히에무스…….”
목이 멨다.
“그래, 에일린.”
“히에무스…….”
눈물이 가득 넘쳐흘렀다.
“응.”
한참을 몇 번이고 반복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꼭 감싸주었다. 정령의 몸이기에 비록 그는 울지 않았지만 에일린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붉은 마법약을 먹지 않아도 뜨겁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모든 걸 말해주었으니까. 그렇게 서로를 다시 만난 기쁨을 나누다가 에일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해줘야 할 사항이 있었다. 다른 모든 이들이 오해한다 해도 히에무스에게만은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다.
“저, 히에무스. 당신의 진명을 밝혀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믿어줘요. 결코 제 의지대로 행한 일이 아니에요. 케일론의 마법에 걸려서…….”
“쉬, 알아. 이미 알고 있어. 그대가 그럴 리 없다는 걸 난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어.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절대 그대의 탓이 아니니까.”
“아…….”
“그러니 에일린. 나 때문에 그 파렴치한 인간 황제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도 없단다. 그 어떤 책임감이나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돼.”
어차피 정령왕의 지위를 영원히 잃고 천 년 동안 빛의 궁전에 갇혀 지내야 할 테니까. 인간들이 자신의 이름을 안다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모든 건 사실 내 부주의로 일어난 일일 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에일린.”
“저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에일린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이 순간에도 히에무스는 그녀만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비참한 상황은 생각지도 않은 채. 히에무스는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 에일린의 얼굴을 다시 한번 눈 안에 담았다.
이제 오랫동안 보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다른 벌을 받는 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일린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그녀와 나눴던 사랑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울지 마, 에일린.”
그렇게 말했지만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히에무스…….”
손을 들어 에일린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귀중한 보석이라도 받아내는 듯 한없이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느릿느릿 한참을 쓸어주다 질끈 눈을 감았다.
‘아아, 헤어지고 싶지 않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정령이기에 메마른 눈에선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으나 가슴 속은 이미 넘치는 슬픔으로 완전히 푹 젖어 있었다.
“저, 히에무스. 그냥…… 해독약을 드시면 안 될까요?”
“뭐?”
에일린은 그녀의 얼굴 위에 여전히 머문 그의 손을 조용히 맞잡았다.
“저도 들었어요. 모든 걸 사랑의 묘약 때문에 했던 행동이라 주장하고 해독약을 먹는다면 당신의 죄가 없어진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난 그대를 사랑했던 마음을 잊게 된다. 우리의 사랑이 끝나게 된다고. 그래도 좋단 말이냐?”
에일린은 가슴이 찌르르 아팠으나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저도 그건 원하지 않지만 당신이 벌을 받게 되는 건 더 싫어요. 어차피 우리가 더는 함께할 수 없잖아요? 그렇다면 그냥…….”
“그럴 수 없어.”
히에무스의 은청색 눈동자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에일린의 눈을 응시했다.
“난 그럴 수 없어. 에일린.”
역시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이제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다 해도 그대와의 사랑을, 그 마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어. 그러지 않을 것이다.”
“히에무스…….”
“더 이상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에일린.”
“…….”
약간의 떨림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분명한 대답이었다. 어떤 이도 그의 결심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역시 하나밖에 없었다. 에일린이 계획했던 대로 실행하는 것 말고는.
“고마워요. 히에무스. 그렇게 말해줘서.”
“응?”
“저도 사실은 기뻐요. 당신이 그렇게 말해줘서.”
“에일린.”
그의 품에 다시 와락 안기며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손아귀가 다가와 에일린의 몸을 힘주어 안아주었다. 서늘하지만 상냥한 손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히에무스, 오늘이 서로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요.”
“…….”
“그래서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어요.”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다고?”
에일린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둘만의 의식을 치르고 싶어요.”
“무슨 의식?”
“결혼식이오.”
“……!”
***
에일린이 붉은 마법약을 건넸다.
“이건?”
“하레나 성에 있는 걸 가져왔어요.”
히에무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별 말없이 바로 한 방울 삼켰다. 즉시 그의 몸에서 내뿜던 정령의 광휘가 사그라들었다. 그 사이 에일린은 밖에 있던 빛의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조롱박에 담긴 포도주를 한 병 얻었다. 방 안을 휘 둘러보니 황금빛 덩굴에 이름 모를 꽃이 잔뜩 피어있는 걸 발견했다. 그 꽃을 따서 화관을 두 개 만들어 히에무스와 자신의 머리에 나눠 썼다. 준비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았다. 서로를 마주 보며 나란히 선 후 에일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히에무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에일린. 영원히, 영원히 사랑할 거야.”
“저도 그럴 거예요.”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다른 이런저런 말들은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둘에게는 오직 그 한 마디 말이면 충분했다.
에일린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조각처럼 반듯하고 미려한 얼굴선과 놀랍도록 투명하게 빛나는 은청색 눈동자와 신비로운 은빛으로 반짝이는 긴 머리를. 조금 시선을 옮겼다. 훌쩍 커다란 키와 넓고 단단한 어깨와 가슴, 곧고 긴 팔과 다리, 따뜻한 두 손······.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듯 응시했다.
눈물이 차올라 끝까지 다 훑을 수가 없었다. 더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후드득 쏟아지는 눈물을 그의 따스한 손이 다가와 가만히 씻어주는 게 느껴졌다.
“에일린.”
살짝 낮고 탁해진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어 촉촉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와 닿더니 꽃잎처럼 닫힌 눈꺼풀 위에 새처럼 가볍게 머물렀다. 천천히,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에일린의 얼굴선을 따라 물고기가 헤엄치듯 내려왔다. 이내 멈춘 곳은 그녀의 입술이었다.
“아…….”
작은 탄식과 함께 둘의 입술이 단단히 맞물렸다. 잊고 있던 갈증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 같았다. 처음에 느리던 움직임에 점점 속도와 세기를 더해갔다. 서로의 모든 것을 느끼고 기억해 두고 싶었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곧게 선 콧날의 부딪힘, 단단한 턱선의 감각, 뜨겁게 흘러나오는 숨결과 입안을 적시는 촉촉하고 달콤한 열기를. 오래도록 희롱하고 지분거리고 매만졌다. 내쉬는 호흡이 한층 거칠어졌다.
히에무스의 희고 우아한 긴 손가락이 에일린의 뒷머리를 다소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헤집었다. 이리저리 각도를 틀어가며 다디단 한숨을 다급하게 마시고 삼켰다. 그의 남은 한 손은 에일린의 한 손과 굳게 엮인 채 연이어 달아오르는 더운 기운을 가득 담아 서로에게 흘려보냈다.
“에, 일린…….”
격정을 이기지 못한 히에무스의 입술이 그녀의 이름을 끊임없이 속살거렸다. 그러다 하얗게 드러난 에일린의 목덜미를 단숨에 한입 머금었다.
“아!”
에일린은 파르르 떨며 선연한 탄식을 토해냈다.
“사랑해, 에일린.”
세차게 두근거리는 두 개의 심장 소리가 터져 나와 한데 뒤엉켜 들었다. 그녀도 물기 어린 나직한 목소리로 계속 읊조렸다.
“사랑해요, 히에무스.”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설레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그 어떤 복잡하고 비참한 결과도 떠올리지 않고 오직 서로의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만을 심장에 아로새길 작정이었다.
‘그저 한 번의 겨울이었어.’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고, 행복한 순간은 더욱 짧았다. 그러니 낱낱이 붙잡아야 했다. 이 찰나의 모든 기억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할 수 있도록. 다행히 그 무엇도 방해하지 않는다. 빛의 궁전에도 밤이 찾아드는지 사위가 짙은 어둠에 휩싸이며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부산했던 정령들도 어디론가 물러난 듯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세상에 오로지 둘만이 존재하는 듯한 고즈넉함만 남아 있었다. 서로가 나누는 거친 숨소리와 낮고 부드러운 속삭임만이 간간이 울려 퍼지는 그날 밤. 그들은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
히에무스의 고른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있던 에일린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녀가 줄곧 맘먹었던 일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고개를 숙여 확인해 보니 그는 여느 인간 남자들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에일린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부드러운 머리끝을 살짝 어루만졌다. 얼굴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혹 깨어날지도 모를까봐 자제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널브러진 드레스를 집어 들어 걸쳐 입었다. 이내 소맷자락을 뒤적였다. 찰랑거리는 파란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 병이 손안에 쥐어졌다. 차가운 감촉에 선득한 느낌이 들었다.
“후…….”
작게 심호흡을 한 다음 눈앞에 약병을 들어 확인했다. 잡은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미 머릿속으로 여러 번 생각했던 일이고 각오했던 일이지만 어쩔 수없이 긴장이 되었다. 눈을 잠시 감으며 마음을 안정시킨 다음 곧바로 눈을 떴다.
딸칵.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지체하지 않고 잠든 히에무스에게 다가가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약을 주르륵, 넉넉히 털어 넣었다. 양은 별 상관이 없다고 들었다. 몇 방울만 삼켜도 효과는 충분할 거라 했지만 만약을 위해 제법 많은 양을 먹였다. 뭐든 확실한 게 좋을 테니. 이제 다 된 것일 테지.
“안녕. 히에무스.”
상체를 숙여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내키지 않은 걸음을 억지로 재촉해 뛰듯이 밖으로 나왔다. 어딘가 숨어 있던 빛의 정령들이 기다렸다는 듯 마중을 나왔다. 그들을 따라 다시 여신을 알현하러 갔다.
“일을 잘 끝마친 것이냐?”
아벨라 여신이 그녀를 보자마자 건넨 질문이었다.
“예.”
“수고했구나. 그대는 이제 어찌할 셈이지? 어디든 보내줄 테니 원하는 장소를 말하거라. 아젤란의 황제가 머무는 곳으로 가기를 원하느냐?”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한 가지 여쭐 게 있어요.”
“뭐지?”
“히에무스가 모든 죄를 씻게 됐지만 인간들이 여전히 그의 진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또 속박당하게 될까요?”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적룡을 공격한 일로 받은 벌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백 년간 정령왕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일말이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백 년 동안 빛의 궁전에 피해 있으면 해결되겠지. 그만큼의 세월이 지나고 나면 거의 모든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고 없을 테니 상관없다. 누군가 전해 들었다면 그땐 내가 친히 나서 세상에 남은 관련된 기억을 모두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렇……군요.”
어째서 당장 없애주지 않는 것일까? 그의 죄를 전부 사해줄 작정이라면 인간들의 기억도 바로 사라지게 해주면 좋을 텐데.
“왜 지금 기억을 없애주지 않는지 궁금한가?”
“어, 예.”
여신이 희미한 웃음소리를 내며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
“전에도 일러주었듯 나는 가능하면 인간들이 행하는 일엔 구태여 관여하지 않는다. 세계를 멸망시킬 만큼 심각한 사안이 아니고선.”
“……!”
“인간들이 가진 특권이라 해도 좋겠지. 짧은 생을 살다 가는 만큼 각자의 운명은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여신인 나조차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를 부여받은 셈이지.”
“아…….”
“그대가 오늘 히에무스에게 행한 일도 같은 이치. 나는 그에게 직접 손을 쓰지 않지만 인간인 그대가 하면 괜찮은 것이다.”
“그런 거군요.”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수긍하긴 했으나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안심됐지만 동시에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먼발치에서나마 히에무스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내심 했는데. 정말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란 말인가?
“미련을 버리거라.”
“!”
“이제는 인간인 그대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이니까. 제대로 해독약을 먹였다면 히에무스가 깨어났을 때는 그대에 대해 어떤 감정도 품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구나.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구나. 연인도, 친구도, 그저 아는 이웃조차도 되지 못해. 가슴에 또다시 찌르르 통증이 밀려왔다. 현실의 먹먹함에 에일린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조각배처럼 잘게 흔들렸다.
“정말…… 조금도 떠올리지 못할까요?”
“그렇겠지. 혹여 해독약을 먹었는데도 그대에 대한 사랑을 기억해 낸다면 그건 진정 대단한 일이 될 거다.”
“예?”
“평범한 보통 인간이 유일하게 휘두를 수 있는 마법의 힘이 발현된 것일 테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신의 신신한 초록빛 눈동자가 초저녁 초승달처럼 여리게 휘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도 기꺼이 인정해 줄 것이다.”
“……?”
그녀가 덧붙이는 말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뭘 인정해 준다는 걸까? 에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재촉하는 무심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 의문이 풀렸으면 어서 말해 보라. 그대는 어디로 갈 것인지.”
“저는…….”
***
딱 한 달이 지났다. 나른한 오후의 해가 높이 떠 있다 조금씩 고도를 낮추었다. 길게 드리워진 누런 햇살 사이로 향긋하고 달짝지근한 꽃향기와 풀내음이 넘실거렸다. 봄의 절정에 오른 초목들과 분주한 동물들이 한꺼번에 발산하는 생명의 기운이 어디든 가득해 보였다.
푸드득. 짹짹짹.
어느새 잎이 무성해진 나무에 둥지를 튼 새들이 새끼를 돌보느라 바쁘게 드나들며 내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에일린은 그 모습들이 새삼스러워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저런 별것 아닌 장면만 봐도 괜히 눈가가 시큰해졌다.
“뭘 그렇게 멀뚱히 서 있는 거야?”
갈색 머리를 질끈 묶은 아담한 키의 또래 여인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유난히 붉은 볼과 툭 튀어나온 입술에 수줍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곳에서 같이 일하며 방도 함께 쓰는 동료 ‘도나’였다.
“어, 으응? 아무것도 아냐.”
에일린은 겸연쩍게 웃으며 속히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뒷마당 한쪽에 놓인 닭장에서 달걀을 모으는 일이다.
“빨리해. 주인아주머니가 신경이 곤두섰더라고. 느긋하게 일하다 갑자기 손님이 몰려드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나 봐. 좀 전에도 잔뜩 몰려왔거든.”
“뭐? 손님이 더 온 거야?”
“응. 주방에서 속히 달걀을 가져오라고 성화야.”
“알았어. 서두를게.”
조금 통통하지만 귀여운 얼굴의 도나가 손에 든 양동이의 구정물을 수채에 쏟아내며 말을 건넸다.
“있지. 너,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에일린은 커다란 닭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대충 대꾸했다. 도나의 수다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도나는 성격도 쾌활하고 다 좋은데 말하기를 너무 즐겨서 탈이었다. 한 번 입을 열면 좀처럼 닫을 줄을 몰랐다.
“아젤란의 황제 폐하 소식 말이야.”
에일린은 아직 별다른 말을 들은 것도 아니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으응? 폐하께서……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대?”
“그럼, 생겼지. 얼마 전에 국혼을 올리려고 하셨는데 갑자기 취소됐잖아?”
“그랬지. 황후 되실 분이 편찮으셔서 요양 중이라고 발표했지 않아?”
“그랬는데 다른 소문이 돌더라고. 사실은 그 아가씨가 아픈 게 아니라 혼인하기 싫어서 도망을 간 거래.”
“그, 그래? 그런 소문이 났어?”
도나가 들고 있던 빈 양동이를 바닥에 턱 내려놓더니 허리를 쭉 폈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사실은 어느새 잊어버린 듯했다.
“황제 폐하께서 요즘 안드로스 대륙 각지를 돌며 순행 중이시잖아? 전쟁 후에 해이해진 각 나라 기강을 바로잡으신다면서.”
“그런데?”
“그것도 사실은 그 아가씨를 붙잡으려는 목적이 더 크대!”
“……!”
에일린의 등줄기에 싸늘한 감각이 지나갔다. 도나가 주변을 한 번 휘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약간 줄였다.
“각 나라 수도나 큰 도시뿐만 아니라 가끔 작은 도시나 시골 마을에도 불쑥 나타나신다잖아. 그게 그런 이유라서 그렇대.”
“뭐? 정말?”
“그래. 황제의 비밀 수하들이 안드로스 대륙 각지에 흩어져있다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으면 즉시 보고를 올린대.”
“……!”
“아니면 그 뭐라더라? 추적마법인가 하는 걸 걸어둔 건지도 모르지.”
“추적……마법?”
“응. 머리카락 같은 신체 일부가 있으면 그런 마법도 가능하다잖아. 전에 내가 여관 손님으로 온 떠돌이 마법사에게 들은 적이 있거든? 실력 좋은 마법사는 그런 것도 할 줄 안대.”
“그, 그렇구나.”
“또 그 마법사가 말하길…….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주방에 가봐야 하는데.”
도나가 이제야 생각난 듯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내려뒀던 양동이를 급히 집어 들었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 로잘린, 너도 어서 들어와.”
‘로잘린’은 에일린이 지금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지난번 아벨라 여신이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을 때, 에일린은 아젤란 제국과 멀리 떨어진 장소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다시 렉스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평생 보지 않고 살아갈 작정이었다.
그녀의 뜻을 내보인 후 여신이 어디론가 이동을 시켜줬는데 눈을 떠보니 이 근처였다. 아젤란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베로니아’라는 나라의 지방 도시. 그 후 어찌어찌 주점을 겸한 이곳 여관에서 하녀로 일하게 되었다. 변두리에 위치한 곳이니 시내보다는 한적한 것 같아 택한 곳이다.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세라 이름까지 바꿔가며.
“알았어. 곧 가져갈게.”
대답을 마친 에일린은 분주히 달걀을 거둔 후 앞서가는 도나에게 물었다.
“저기, 지금 오신 손님들은 어떤 분들이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어?”
“굉장히 높은 분들 같았어. 여기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여행 중인 모양이야. 걸친 옷도 고급스럽지만 다들 얼굴이 끝내주게 잘생겼지 뭐야. 엘프처럼 생긴 마법사까지 있어.”
“엘프처럼 생긴 마법사라고?”
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흥분한 듯 한 손을 머리로 가져가며 말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머리를 이렇게, 허리 밑까지 늘어뜨렸는데 정말 잘 생겼더라고. 좀 깐깐한 인상이지만 키도 크고 보랏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예쁜 게…….”
“뭐?”
“아, 함께 온 다른 사람도 하나같이 미남이야. 모두 높은 귀족이나 기사처럼 보였어. 특히 그중 신분이 제일 높아 보이는 한 명이 있는데…….”
에일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커다란 키에 날렵한 얼굴선이며 까만 고수머리가 완전 내 취향이더라니까. 새파란 눈빛이 얼마나 근사한지 몰라.”
퍽! 에일린이 쥐고 있던 바구니를 떨어뜨렸다. 담겨있던 달걀이 데구루루 구르고 깨지며 이리저리 파편이 튀었다.
“으아! 너 왜 그러는 거야?”
“아, 이런…… 어, 어쩌지?”
분명했다. 여기까지 렉스와 케일론이 찾아온 것이다. 아마도 그녀를 추적해온 것이 분명했다. 놀란 심장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도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잽싸게 다가왔다. 에일린 옆에 바로 쪼그려 앉아 땅에 뒹구는 달걀을 살폈다.
“다 깨진 건 아니지만…… 망가진 게 꽤 많아. 너 오늘치 급료는 포기해야 될 걸? 그러게 좀 조심하지 그랬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도나!”
에일린이 다급한 어투로 불렀다.
“왜?”
“저기, 나…… 배, 배가 좀 아파.”
“응? 으응.”
“미안! 급해서 그러니까 누가 나 찾으면 적당히 둘러대 줄래?”
“그래, 그럴게. 내가 달걀도 가져갈 테니까 넌 어서 뒷간에 가봐.”
처음에 도나는 에일린이 주인아주머니의 잔소리를 듣는 게 무서워 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린 표정이 참으로 급박해 보여 얼른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그 흔한 꾀병 한 번 부린 적도 없었다.
“고마워.”
에일린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세상에, 얼마나 급했으면…….”
도나가 정말 안타까운 낯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에일린이 화장실이 있는 건물 방향이 아니라 풀숲으로 통하는 사립문으로 사라졌기에.
***
같은 시각, 빛의 궁전에 오랜만에 누군가가 방문했다. 수많은 빛의 정령들이 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입구로 쏟아져 나왔다.
“어서 오세요. 사랑의 여왕이시여.”
“이리로.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붉은빛이 흐르는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불꽃처럼 하늘거리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였다.
“그래. 바로 안내해다오.”
그녀는 곧장 빛의 정령들을 따라 대자연 어머니가 있는 알현장으로 향했다. 여느 때와 똑같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엄숙한 공간. 들어서자마자 휙 날아올라 공중에 뜬 채로 인사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어머니시여.”
“그래. 어서 오너라. 딸아.”
“무슨 일이신지요?”
그리 바쁜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정말 다급한 일이었으면 호출이 아니라 소환을 했을 테니까. 짐작 갈 만한 일이 있긴 했다. 대자연 어머니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히에무스 때문에 불렀단다.”
예상 대로였다.
“한 달 전 해독약을 복용한 후 잠에서 깨어나선 얌전히 이곳에 머물렀었지. 그런데 오늘 아침 제멋대로 여길 나가 버렸단다. 대충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지만 네 의견을 들어보고 싶구나.”
“그러시군요. 제 생각엔 해독약의 부작용 때문인 듯합니다만.”
“역시 그런 것인가?”
“예. 좀 과한 양을 먹었다면 다소 혼란을 느껴 충동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가끔 죽기도 하니까요.”
“사랑이 끝나는 충격 때문에 심장이 멎는 일 같은?”
“예. 하지만 그는 정령의 몸이니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잠시 인간의 몸 상태로 만들어 주는 약까지 먹은 상태에서 해독약을 복용하다 보니 어떤 영향을 받은 걸 겁니다.”
“나도 그리 생각했단다. 그 인간 여인에게 양은 별 상관없다고 알려줬더니 너무 과하게 쓴 모양이군.”
“예.”
“혹 그 인간 여인을 떠올리고 찾아간 건 아니겠지?”
사랑의 정령왕 키프리스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아닐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인간 여인의 마법이 성공한 것일 테지?”
“그렇습니다.”
***
날이 차차 흐려지더니 금방 짙은 어둠이 깔렸다. 설상가상으로 검고 무거운 구름이 몰려들더니 곧 굵은 빗방울로 변했다. 보아하니 제법 많은 양이 올 것 같았다. 한창 키를 키우던 초목들에겐 반가운 봄비겠지만, 숲속에 몸을 피하는 중인 누군가에겐 결코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에일린은 재게 놀리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어느새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어둡고 울창한 숲 한가운데 와 있었다.
“이런…….”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몸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너무 정신없이 숲속 깊이 들어온 모양이다. 보나 마나 길을 잃은 것일 테지. 쿵쿵 울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추적자들에게서 멀어져야겠다는 일념만으로 내달린 결과였다. 그나마 좀 전까지 앞을 분간하게 해주던 희미한 빛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후둑. 후드득!
나무와 풀숲에 닿는 빗소리만 어둠이 싸인 공간을 뚫고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에일린은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일단 비를 피하고 날이 밝길 기다리는 게 좋으리라. 완연한 봄이긴 해도 체온이 내려가면 견디기 힘들 게 분명했다.
“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사방을 분간하기 힘들었으나 에일린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더듬어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바위굴이나 나무 굴 같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잎이 풍성하게 나있는 커다란 나무 밑을 택해 들어갔다. 간혹 묵직한 빗방울이 방울져 떨어지긴 했으나 그냥 비를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보다 더 괜찮은 곳을 찾기는 힘들어 보였다. 마음을 정한 에일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후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댔다.
“아윽.”
뼈마디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날 듯 지독한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추워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쏴아아아.
쉴 새 없이 퍼붓는 빗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로 변한 나무들이 되는대로 쭉쭉 뻗어 위로 솟은 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까만 그림자 괴물처럼 변한 수풀이 바람과 빗줄기에 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기괴해 보였다.
“으…….”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낫겠다. 나뭇잎 지붕을 뚫고 들어온 빗줄기에 몸이 점점 젖기 시작했다. 싸늘한 한기가 달라붙어 사시나무처럼 온몸이 떨려왔다. 무릎을 세운 채 자신의 두 팔을 감싸 안으며 잔뜩 웅크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습관처럼 누군가가 떠올랐다. 이렇게 막막하고 서러운 기분이 들 때마다, 혹은 외롭고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얼굴. 추위로 파리하게 변한 입술 사이로 그리운 그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히에무스.”
부질없는 눈물도 주르륵 따라 흘러내렸다.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었다. 백 년간 빛의 궁전에서 지낼 거라니 겨울이 돼도 보지 못할 것이다. 진명을 부르며 소환을 한다 해도 나타나지 않겠지.
“히에무스 글라키에스.”
아름다운 겨울의 왕.
“히에무스…… 글라키에스.”
참 고마웠던 나의 연인.
“히에무스 글라키에스…….”
보고 싶다. 되풀이해 말할수록 그리움이 더 커져 가는 것 같았다.
“보고 싶…….”
파아아!
별안간 눈이 부실 정도로 현란한 황금색 빛의 소용돌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뭐지?!”
예전에 그를 소환할 때 발생하던 빛과 비슷했다. 설마 그를 소환해낸 건가? 너무나 강한 빛에 놀라 에일린은 일순간 눈을 감고 몸을 틀었다. 그러다 가늘게 실눈을 뜬 채 서서히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
그녀의 두 눈동자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한껏 벌어졌다. 영롱한 황금빛의 소용돌이가 사그라지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였다. 그가 똑바로 서 있었다. 에일린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히에무스!”
너무나 놀랐기에 그녀는 주저앉은 모습 그대로 굳은 채 올려다보았다.
“아…….”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히에무스.”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름만을 겨우 읊조리는 게 고작이었다. 황금빛 빛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은백색 정령의 광휘만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우뚝 선 채 에일린을 내려다보던 히에무스도 놀란 표정이었다. 한동안 침묵한 채 지켜보기만 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인간 여인.”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
“그대가 나를 부른 것인가?”
***
“히에무스?”
뭔가가 좀 이상했다. 에일린이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는 달랐다. 처음에 에일린은 몹시 당황했지만 곧 상황을 깨달았다. 아마도 해독약을 마신 상태이기에 그럴 것이다. 사랑의 묘약에 중독돼 있을 때와 똑같을 수 없을 테니까. 그녀 자체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긴 하지만 사랑했던 마음은 사라진다고 했었다. 그게 어떤 상태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 그는 그녀를 알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것일 터.
“아……, 그렇구나.”
그런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 그저 아는 지인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울컥 목이 멨다. 서운하고 안타깝긴 했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이렇게 얼굴이라도 다시 보게 된 게 어디인가?
“예. 제가…… 불러냈어요.”
“무슨 일이지?”
“그게…….”
그냥 보고 싶어서요. 하지만 그런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며 두근두근 한없이 벅차올랐다. 자꾸만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이미 흠뻑 젖은 얼굴이니 표는 나지 않을 것이다. 히에무스는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다 주변 상황을 점검하듯 휘 둘러봤다.
“이것 때문인가?”
“예?”
“어둠과 비를 피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 꼭 그런 건…….”
“그렇기도 하단 말이군.”
“……예.”
다른 이유를 대기 힘들었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온통 그를 만난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뭔가를 꾸며낼 여유가 없었다. 히에무스가 서늘한 손을 내밀어 에일린의 팔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옮겨주겠다.”
그는 말을 마치자 에일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순간이동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녀도 그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몸을 내맡기고 눈을 감았다.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이동했다. 이 느낌마저도 너무나 그리웠기에 그저 감격스럽기만 했다.
“이곳이면 되겠는가?”
여전히 무뚝뚝한 어조였지만 이제는 별로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에일린이 눈을 떠보니 낯선 바위 동굴 안이었다.
“여긴…….”
“아까 있던 장소와 조금 떨어진 숲에 있는 동굴이다.”
“아, 그렇군요.”
정령들은 동굴 같은 장소를 잘 찾아내는 것 같았다. 자연계의 원초적인 힘이나 기운을 읽는 능력이 남다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한쪽 손이 계속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에일린이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가 얼른 손을 거뒀다. 왠지 허전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머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그는 별다른 말없이 바라보다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손수건이었다. 언젠가 에일린이 만들어서 그에게 준 것.
“이건…….”
“많이 젖었다. 인간 여인. 좀 닦는 게 좋겠지. 이렇게 젖는 건 인간의 몸에 좋지 않다고 들었다.”
“이걸 아직 갖고 계셨네요?”
“그대가 준 것 아닌가? 내게 필요한 건 아니지만 버릴 이유도 없으니까. 아니, 왠지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셨군요.”
에일린은 순간 목이 꽉 멨다. 히에무스는 지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다. 잠시 그 손수건을 손에 쥔 채 바라보다 묵묵히 펼쳐서 얼굴과 머리를 닦았다.
“잠깐 기다려라.”
“네?”
그가 한마디 말을 툭 던지더니 순간이동 마법을 펼쳐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잠시 에일린은 영원히 가버린 줄 알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작별인사 한마디 없이 헤어지게 되는 건가 해서. 그러다 금방 그가 다시 나타났다. 손에 마른 나뭇가지를 한 움큼 쥐고서. 이어 말없이 가져온 것들을 바닥에 쌓아놓더니 자신의 마법공간을 열어 붉은 마법석을 하나 꺼냈다.
“그건…….”
“불의 힘이 담긴 마법석이다. 나는 겨울의 정령이라 불의 마법을 쓰지 못해서 마련해둔 것이지. 혹시나 쓸데가 있을까 해서.”
“아…….”
아마도 그것 역시 자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를 위해 불을 피우려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다.
“가까이 와라. 그렇게 떨지 말고.”
불을 피운 히에무스가 무심한 듯 그녀를 향해 일렀다.
“어, 예.”
에일린이 조금 머뭇거리다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훈훈한 모닥불의 열기가 차게 식은 몸을 금세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나란히 앉아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왠지 예전에 그의 궁전에서 함께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서로가 조금 어색했지만 한없이 다정하고 고맙게 대해 주었지. 지친 얼굴에 설핏 미소가 감돌았다. 헤어졌다는 게 실감 안 날 정도로 그가 가깝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진명을 아는 인간들이 마수를 뻗쳐올지 모르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빛의 궁전 밖에 나와 있는 건 위험한 일일 것이다. 아쉽고 서운했지만 이제 보내야 하리라.
“폐를…… 끼쳤네요. 정말 죄송해요. 이제 가 보세요. 히에무스, 여기 이렇게 있으면 위험할 거예요.”
“죄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에일린의 재촉에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불길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줄곧 그대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저를 찾았다고요?”
“그래.”
쿵. 쿵. 쿵.
심장이 고장난 시계추처럼 요동쳤다.
“왜……요?”
긴장으로 목이 쉬어 약간 거칠고 탁한 음성이 나왔다. 설마 자신을, 아니 자신을 사랑했던 기억을 잊지 않은 것일까?
“계속 그대의 얼굴이 생각났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째선지 그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어.”
“잊지…… 않은 건가요?”
“뭘 말이지?”
“저와…….”
사랑했던 사이란 걸. 에일린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냥 부질없는 자신의 바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여인. 뭘 말하는 것인지 대답해라.”
인간 여인이라고 지칭한다. 자신에 대한 걸 잊은 게 틀림없겠지. 에일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물어보았다. 정말 자신을 사랑했던 기억을 모두 잊은 것인가 하고.
“제 이름을 혹시 모르시나요?”
“……기억나지 않는다.”
“!”
“그래서 더 그대를 찾아다녔다.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인간 여인인데 어째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가 해서.”
순간 에일린은 숨이 턱 막히는 것처럼 아찔해졌다. 각오하던 대답이지만 날카로운 비수가 박힌 것처럼 가슴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해주던 사람인데 지금은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존재라니.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진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계속 참으려고 했는데 기어이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한번 흐르기 시작하자 봇물이 터진 것처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왜…… 우는 것인가?”
“그냥 가슴이 아파서요.”
그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 흔들리는 은푸른 눈동자에 그늘이 살짝 드리워졌다. 영문을 모르는 듯 했지만 왠지 신경 쓰이는 그런 것일까? 미련을 떨치고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왕……이시여.”
“뭔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기로 했다.
“저를 찾으셔서 뭘 하실 생각이셨어요?”
겨울 호수처럼 얼어붙은 듯 다시 차가운 한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키스를 한번 해 볼 생각이었다.”
“……키스……라고요?”
“그래.”
에일린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의 얼굴은 놀랍도록 진지해 보였다. 눈빛 역시 금방이라도 자신을 꿰뚫어버릴 듯 냉철하기만 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신 거죠?”
그의 눈썹이 밑으로 조금 늘어졌다. 설명하기 곤란한 이유인 걸까? 느리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키스를 해 보면 알 것 같았기 때문이야.”
“예?”
“그대가 어떤 존재인지 입맞춤을 해 보면, 그러면 알게 될 것 같다고.”
책 밖의 세상에서 이런 말을 하는 남자를 만났다면 뺨이라도 한 대 휘갈겼을 것이다. 그가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하다 여겨졌는지 좀 주저하다 말을 덧붙였다.
“늘 뭔가 안개가 끼어있는 듯했다. 그대가 떠오를 때마다 단편적인 기억만 드러날 뿐 이어지질 않았지. 뭔가가, 기억 사이를 연결해주는 뭔가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계속 들었다.”
그런 느낌이었구나.
“뜬금없지만…… 왠지 그대와 키스하게 되면 그 안개가 걷힐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 막연하지만 말이야.”
정말 그럴까?
“안 되겠느냐?”
에일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게 뭐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히에무스라면 언제나 허락하고 싶은 일인걸.
“괜찮아요.”
아니, 어쩌면 더 지체하다간 그녀가 참지 못하고 먼저 청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키스해달라고 떼를 썼을지도.
“정말인가?”
“예. 괜찮아요.”
에일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자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맞춘다고 뭔가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여신에게도 그를 떠날 거라고 약속했으니 반드시 지킬 거였다. 다만 헤어질 때 그에게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었다. 다시 못 보게 되더라도 부디 잘 지내라고, 행복하게 잘 살라고 하는 그런 인사 정도는 건네고 싶었으니까. 지금 그런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 될 터이다. 그래. 그 정도 의미면 충분했다.
“그럼.”
그가 에일린 쪽으로 자세를 틀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조금 세웠다. 이내 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끌어당겼다. 청량한 겨울 숲과 결빙된 호수의 향기, 환하게 부서지는 신비로운 정령의 빛이 한꺼번에 휘몰아쳐 왔다.
얼어붙은 수면처럼 고요한 그의 눈동자에 요요하게 흐느적거리는 모닥불의 춤사위가 발갛게 비춰 보인다. 그 바람에 하얗게 얼어붙은 정령왕의 낯빛에 농염한 열망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에일린은 순순히 그 손길에 기댄 채 다가갔다. 곧 그의 얼굴이 자신의 위로 바싹 드리워지더니 촉촉하게 젖은, 부드러우면서 차가운 입술이 와 닿았다.
익히 알던 감각이지만 그렇기에 더 고조된 기대감에 에일린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왔다. 기억 속에 머물던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눌러왔다. 처음엔 다소 머뭇거리는 듯 느리고 굳은 동작이었다. 그러다 용기를 낸 듯 좀더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곧 예전과 다름없이 열정적인 분위기로 변했다. 그녀의 입술을 맛보듯 살짝 비비고 문지르다 이어 삼킬 듯 빨아들이고 쓸어 내려갔다.
그녀의 얼굴을 잡았던 한쪽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곧바로 다른 손마저 그녀의 목덜미에 달라붙듯 휘감기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서늘한 그의 몸이지만 그 사이 붉은 마법약이라도 마신 것처럼 뜨겁게 피어오르는 열기가 느껴졌다.
“하아······.”
둘은 동시에 저 깊숙한 어느 곳에 숨겨놓았던 탄식을 바삐 토해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둘의 움직임이 분주해질수록 쿵쿵거리는 심장의 울림 또한 한층 크게 메아리쳤다. 정지해 있던 둘만의 시간이 다시 운행을 시작했다. 아니, 헤어진 후 줄곧 얼어붙어 있던 세상이 이제야 녹아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달아오른 그의 입술에서 겨울바람 같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에……일린.”
“!”
순간 에일린은 움찔거리며 모든 행동을 그쳤다. 잘못 들은 것일까? 동그래진 눈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상냥하고 따스한 은청색 눈빛을 머금은 히에무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자신도 이제야 인지한 듯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에일린.”
“히에무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 거였다. 그렇다면…… 기억이 돌아온 것일까?
“히에무스!”
“그래, 에일린!”
이미 빈틈없이 얽혀있던 그들이었지만 새삼 다시 만난 것처럼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와락 얼싸안았다.
“제가, 제가 생각난 거예요?”
“음, 기억났어. 그대에 대한 모든 것들이, 그대를 사랑했던 내 마음이 떠오르기 시작해.”
“어……떻게?”
그 역시 알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곧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언제나 그녀만을 향했던 따스하고 황홀한 그 미소 말이다.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어 낮게 잦아들어 조금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늘 눈앞에 끼어있던 안개가 걷힌 기분이다.”
“아…….”
에일린은 다시 그의 품에 감겨들었다. 너무나 기뻤다. 아무려면 어떤가? 그가 자신을 제대로 기억해 냈는데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을 것이다. 히에무스도 마찬가지인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에일린을 힘껏 감싸 안았다.
“기뻐요. 히에무스. 나를 다시 기억해주다니.”
“아아, 그래. 나도 정말…….”
그때였다.
파아앗!
절대 떨어지지 않을 기세로 껴안고 있던 둘 앞에 느닷없이 영롱한 빛의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
찬란한 오색으로 빛나는 빛 덩어리를 보자마자 히에무스는 황급히 에일린의 얼굴을 감싼 채 품 안 깊숙이 숨겼다. 정령왕인 그는 이 빛 덩어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미간을 씰룩거리며 그 빛의 기둥이 누군가의 모습으로 형성될 때까지 마치 경계하듯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 실체가 드러났다. 에일린도 익히 알고 있는 두 존재가 뭐라 묘사하기 힘든 특별한 기운을 내뿜으며 모습을 보였다.
“아!”
바로 찬연한 빛을 휘감은 아벨라 여신과 사랑의 정령왕 키프리스였다.
***
에일린은 진정 당황스러웠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여신이 이곳까지 나타나다니. 히에무스를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일까? 또 어쩌면 히에무스를 떠나겠다고 했으면서 다시 함께 있는 자신을 탓하기 위해 온 것인지도 몰랐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에일린은 여전히 그녀가 약속한 일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히에무스를 위해서도 그만 그를 놓아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빛의 궁전 밖에 있다가 언제 케일론이나 렉스의 마수가 뻗어올지 몰랐다. 입술을 악물며 자신의 결심을 말하기 위해 히에무스의 몸을 살짝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가 바위처럼 굳건히 버틴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히에무스…….”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은 팔을 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표정 역시 마찬가지.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다시는 에일린을 놓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다소 퉁명스럽게 느껴지는 낮고 진중한 음성이었다. 아벨라 여신의 입술이 둥근 호를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싱그러운 신록의 빛이 가득 어린 두 눈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어 마치 맑은 어느 봄날에 이는 바람처럼 청명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경계할 것 없단다. 아들아. 네 너희들에게 기쁜 소식을 들려주러 왔으니까.”
“기쁜 소식이라뇨?”
여신의 말을 듣고도 히에무스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딱딱한 자세로 물었다.
“두 사람은 이제 헤어지지 않아도 될 테니, 원하던 일이 아니겠느냐?”
에일린의 어깨가 화들짝 들썩거렸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녀가 히에무스의 곁을 떠나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 여인이여.”
여신이 바로 말해주지 않고 신비롭고 찬연한 미소를 지은 얼굴로 에일린을 굽어보듯 응시했다.
“예, 아벨라 님.”
즉시 대답했다. 히에무스에게 안겨 있었지만 조금씩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여신이 발산하는 거대한 기운에 압도당해 머리가 어질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르고 분명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대가 건 마법이 성공했구나.”
“예?”
자신이 건 마법이 성공했다니,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마법을, 누구에게 걸었다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히에무스도 같은 느낌인지 미간을 찌푸리며 항의하듯 질문했다.
“제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혼란스럽게 들리니까요.”
“그러마. 인간 여인이여, 그대처럼 마나가 거의 없는 평범한 인간이 걸 수 있는 마법이 단 하나가 있지.”
“……?”
“바로 진실한 사랑의 마법 말이다.”
“!”
“너희 둘이 그걸 해냈구나.”
에일린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저희가…… 진실한 사랑을 했다고요?”
“그래. 적어도 히에무스는 그런 것 같구나. 그렇기에 해독약을 마셔도 그대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은 것이다.”
심장이 두근두근 가슴을 두드려댔다.
“어, 히에무스의 사랑이…… 진짜였다고요?”
“그렇단다.”
“정말…… 사랑의 묘약 때문이 아니라 정말, 진짜로 저를 사랑한 거였다고요? 정말로?”
대자연 어머니의 반달 모양 눈매가 옆으로 더욱 가늘게 늘어졌다.
“후훗, 그래. 진짜였더구나.”
“아아……!”
에일린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온 세상이 떠나갈 듯 소리치며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퐁퐁 샘솟듯 눈물이 흘러나왔다. 물론 너무나 기뻐서 흘리는 환희의 눈물이었다. 곧고 긴 손가락이 다가와 다정하게 뺨을 매만지며 눈물을 훔쳐주었다. 히에무스의 손이었다.
“히에무스…….”
“그래, 에일린.”
의외로 그의 얼굴은 기쁜 얼굴이긴 했지만 평온하고 담담해 보였다. 별로 놀란 것 같지도, 새삼스러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전 항상 제 사랑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늘 확신하던 걸 다시 확인시켜 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냐?”
아벨라 여신의 곁에 수행인처럼 따라온 사랑의 여왕 키프리스가 역시 밝게 웃는 낯으로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당신답군요. 항상 오만하고 잘난 체하는 건. 부연하자면 그때부터라고 할 수 있어요. 당신의 몸을 지배하던 지독한 갈증이 사라졌을 때부터.”
“응?”
“그즈음부터 당신에겐 이미 사랑의 묘약으로 인해 생긴 중독 증세는 사라졌던 거예요. 그런데도 그 여인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은 건 당신의 사랑이 진짜 사랑으로 변했기 때문이죠.”
“그런 거였나?”
키프리스가 흐뭇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더욱 환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사랑의 정령왕으로서 이런 사랑의 마법이 완성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언제나 만족스럽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히에무스가 대자연 어머니를 향해 가장 궁금하게 여기던 일을 물었다.
“그럼 이제 저희 둘은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그래.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내 특별히 선심 쓰도록 하지. 이런 멋진 마법을 접하게 되는 건 참 드문 일이니까.”
에일린은 기쁜 와중에도 히에무스가 걱정되었다.
“저, 하지만 아벨라 님. 히에무스의 진명이 인간들에게 노출돼서 곤란합니다만.”
“둘이 함께하기 위해선 두 가지 선택지가 있겠지. 인간 여인, 그대가 빛의 궁전에 와서 100년간 살든지, 아니면 히에무스 네가 진짜 인간이 된 후 인간 세상에서 100년을 보내든지.”
“제가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 내 능력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 노릇을 하는 것과 달리 진짜 인간이 되어 산다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아벨라 여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때 맞춰 먹고 자고 씻고 배설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때로는 병들고 세월이 지나갈수록 늙고 쇠약해져 갈 것이다. 마지막엔 죽음까지도 한 번 겪어야만 한다.”
“……!”
“자, 어떡할 것이냐? 히에무스.”
에일린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떨리는 목소리로 히에무스에게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다.
“저, 히에무스. 제가 빛의 궁전으로 가서 살게요.”
그가 잠시 에일린의 눈을 바라보더니 단호한 동작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인간이 될게.”
에필로그
뎅그랑 뎅 뎅그랑 뎅 데엥…….
청명한 초여름의 대기를 뜨겁게 달구는 햇살이 드높이 솟은 날이었다. 드라코니아의 왕도 ‘발레리움’에 있는 열두 신전에서 그날의 경사를 알리기 위해 일제히 친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바로 새로 등극하는 왕의 즉위식과 혼례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어이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군.”
행사가 열리는 1신전은 드라코니아 왕궁 내에 위치했다. 신전 입구 앞에서 드라코니아의 외무대신 일을 맡은 콜루베르 후작이 이마에 맺힌 땀을 씻어내며 투덜거렸다. 백룡인 렌투스와 알리샤의 아비인 자였다. 그는 연신 분주히 움직였지만 밀려드는 여러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자니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각국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하는 것도 그의 임무였다. 물론 다른 고위 관료와 귀족들도 도와줬지만, 그가 직접 나서야 할 자리가 많았다. 퀴리오스 왕을 위시해 기존 왕족들이 모두 사라졌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용인 자신이 점검하고 살필 일이 잔뜩 널려 있었다.
“오, 친히 왕림해 주시다니.”
저 멀리 느릿한 움직임으로 걸어오는 고귀한 신분의 하객들을 발견하곤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아젤란 제국에서 온 특별 사절단이 와 있던 것이다. 원래 보내기로 한 외무대신과 바니스터 공작 외에도 생각지도 못한 거물급 인사가 갑자기 참석을 결정했다.
바로 아젤란 제국의 황제인 렉스와 대마법사 케일론이었다. 콜루베르 후작은 원래 용의 몸이기에 그들이라 해서 딱히 더 꺼려지거나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참으로 황송합니다, 폐하.”
황제답게 나무랄 데 없이 당당한 풍채와 높은 기품이 느껴졌으나 왠지 전에 봤을 때보다 수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옆에 붙어 선 마법사 역시 다소 인상이 달라 보이는 게 이채로웠다. 늘 차갑고 빈틈없어 보이던 깐깐한 얼굴이었는데 기세가 한풀 꺾인 듯 하달까. 다들 뭔가 큰 시련이라도 겪은 듯, 아니 뭔가 상심이라도 한 표정이었다. 황제 렉스가 그를 향해 고개를 한번 까딱이며 짧게 격려하는 말을 건넸다.
“수고가 많소.”
“아닙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음.”
제국 황제의 방문이기에 거기 모여 있던 수많은 이들이 일제히 몸을 숙이며 길을 내주었다. 콜루베르 후작 역시 황제의 모습이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접은 채 서 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후…….”
주변 나라에 신경 써서 설명한 덕에 이번 새 왕의 즉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세간에는 유서 깊은 드라코니아의 왕족 일원들이 내내 앓아왔던 특별한 유전병이 발병했다고 발표했다. 퀴리오스 왕은 생을 마감했고, 케레시아 왕후와 스킬라 공주는 어느 모처에서 요양 중이지만 회복하기 불가능하다고 알렸다.
후계를 정하기 위해 고심하다 양자이긴 했으나 가장 높은 왕족이었던 라케르타 공작으로 정하자는 의견이 유력해졌다. 제국의 공작 작위까지 받은 자이니 그보다 더 적당한 자가 있을 수 없었다.
‘잠시 그의 행방마저 사라져 난감했었지.’
그러다 어느 날 겨울의 왕이 아내가 될 여인을 데리고 불쑥 나타났다. 정말 놀랍게도 진짜 인간이 된 채로 말이다. 그간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왕으로 세울 적당한 자가 출현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후 일사천리로 라케르타 공작을 드라코니아의 왕으로 추대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혼례식 준비까지 모두 마무리 짓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노고가 많구나. 늙은 백룡이여.”
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보다도 더 특별한 손님 무리가 다가와 있었다. 약간 짙은 피부에 주렁주렁 매달린 나뭇가지 같은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 대지의 정령왕 텔루스였다. 그의 바로 옆에 가을의 정령왕 브로미오스와 그의 권속인 서풍, 그 외에도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와 나무의 정령인 아그로스,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까지 있었다.
“!”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자리에 올 거라고 도무지 상상하기도 힘든 눈의 여왕과 북풍까지 무심한 표정을 한 채 끼어 있던 것이다. 백룡 콜루베르 후작은 그 보기 드문 손님들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더없이 정중한 어투로 인사했다.
“오, 영광입니다. 정말 귀하신 분들께서 걸음해 주셨군요.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모두 정령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다른 인간 하객들을 맞이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 고맙군.”
그들 무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다음 일행이 뒤를 이었다. 다행히 앞선 손님에게 하던 것처럼 몸을 낮추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바로 유니콘 계곡에서 온 젊은이들이었으니까.
“정말 반갑군. 어서들 오게.”
순진한 촌뜨기 청년들 몇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들 어찌어찌 인간 모습으로 변하고 차려입긴 했지만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물론 그런 사소한 건 아무 문제없었다. 그들 역시 정성을 다해 대접할 작정이었다. 콜루베르 후작은 그들이 신전 안으로 향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의외로군. 유니콘들까지 찾아오는 혼례식이라니.”
전직 겨울의 정령왕이었던 히에무스의 손님이 아니라 오늘 그의 왕후이자 신부가 될 여인의 손님이라고 했다. 자세히 알진 못하나 그분의 이력도 평범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로써 대충 마무리가 된 듯하군.”
각국에서 온 사절단도 벌써 자리를 잡았고 이제 모두가 의식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콜루베르 후작은 허리를 한 번 쭉 편 다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야흐로 새로운 드라코니아의 왕을 영접할 시간이었다.
“전직 겨울의 정령왕이라니.”
앞으로 얼마나 황당하고 재미난 일들이 많이 생길까? 그 왕을 보필할 자신의 역할도 쉽지는 않겠지만 왠지 걱정보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자꾸만 입가에 둥그런 미소가 그려졌다.
***
“아, 아직도 준비가 덜 됐어요?”
화려한 귀족의 옷으로 차려입은 유니콘 루카스가 조바심이 나는 듯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히에무스와 에일린이 모든 단장을 끝내고 잠시 쉬고 있는 대기실 안이었다. 두 사람 곁에 있던 세 하급 정령이 휙 날아와 루카스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이 참, 루카스. 경망스럽게 무슨 짓이에요! 이제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의 시종이 될 거면 좀 더 바른 몸가짐을 익히도록 하세요.”
“으응? 그, 그런가?”
제퓌가 근엄한 얼굴로 말을 떼자 아두스가 이때다 싶었는지 연이어 설교를 시작했다.
“왕이시여, 이래서는 안 되겠어요. 시종의 모습이 이렇게 형편없으면 왕의 명성에도 누가 될 겁니다. 따끔하게 혼내서 더 철저히 교육을 시키든가 아니면 다른 능력 있는 자로 바꾸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 말에 루카스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아, 알았어! 이제부터 행동 하나하나 조심할 거니까 그만 잔소리하란 말이야. 나도 너희들에게 할 말 있어.”
“뭔데요?”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데? 정령의 몸으로 여기 계속 머무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즉위식이 끝나면 루쿨루스 숲으로 돌아갈 거지?”
루카스는 성가신 참견쟁이들을 보내고 싶은 자신의 희망을 슬쩍 내보였다. 잠자코 있던 프리기가 냉큼 대답했다.
“어, 모르셨어요? 대자연 어머니께서 저희 맘대로 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히에무스 님의 귀양살이가 끝날 때까지 보필하라고 명하셨는데요?”
“뭐라고? 그럼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서 지내는 거야?”
세 정령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렇구나. 앞으로도…… 다 같이 지내는구나.”
“뭐예요? 루카스는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싫은 것 같군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싫은 거구만!”
“그래, 싫다! 잔소리를 항상 해대니 정말 귀찮고 성가시단 말이야.”
“그야 루카스가 늘 엉망이니 그런 거잖아요!”
“뭐라고?”
히에무스와 에일린은 미소 띤 얼굴로 아옹다옹 다투는 그들을 응시했다.
“시끄럽지 않아? 에일린. 그만 저들을 말릴까?”
히에무스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엔 따뜻하고 온화한 빛이 가득했다. 저번에 대자연 어머니께서 그에게 황금빛 액체가 든 마법약을 하나 건네셨다. 바로 정령의 몸을 100년간 완벽한 인간의 몸으로 되게 해주는 약이었다. 그걸 먹고 히에무스는 지금 인간의 몸을 갖게 되었다. 정령의 광휘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 황홀한 아름다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전보다도 더 매력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전보다 짧게 자른 머리 때문인지 남자로서 풍기는 이미지가 더욱 강해져 에일린은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어 혼날 지경이었다.
“그냥 두세요. 곧 알아서 그만둘 거예요.”
“그렇겠지?”
에일린은 싱긋 웃으며 새삼 그를 찬찬히 훑었다. 호화로운 크림색과 자줏빛,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의상을 걸치고 황금빛 보관을 머리에 쓴 모습이 정말 멋졌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화사하게 피어난 모습이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생기 넘치는 커다란 연초록 눈동자가 투명한 보석처럼 반짝이고 풍성한 머리칼도 부드럽게 굽이쳤다. 연분홍 홍조로 물든 두 뺨과 전보다 훨씬 뚜렷해진 이목구비, 거기에 왕후가 입는 아름다운 드레스에 보관까지 갖추자 온몸에서 빛이 나는 듯 했다. 히에무스 또한 그녀에게서 내내 눈을 떼지 못했다.
“전하. 이제 의식을 거행할 시간이옵니다.”
하얀 예복을 갖춰 입은 상급 신관이 들어와 예식 시간을 알리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격태격하던 시종들도 얼른 입을 다물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제법 의젓해 보인다.
“내 손을 잡아, 에일린.”
그가 단단한 손을 내밀었다.
“예, 히에무스.”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손을 꽉 붙잡았다. 다정하면서도 포근하고, 든든한 느낌이 전해졌다.
“이제 항상 이 손을 놓지 않을 거야, 에일린. 함께 걸어가자.”
그래. 언제나 함께 가자. 이제는 절대 그대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겪어야만 하는 모든 고통의 길도 함께 걸어가고 함께 이겨나갈 것이다. 그리고 같이 배워 나가자.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행복해지는 방법을.
“예, 언제나 함께해요.”
둘은 꿈결처럼 달콤한 미소를 나누며 서로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스치듯 잠깐 머문 입술이었지만 무척 뜨겁게 느껴졌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홧홧한 열정이 타오르는, 그런 진실한 키스였으므로.
***
하얀 대리석 기둥이 열 지어 선 드라코니아의 1신전 안에서 새 왕의 즉위식과 혼례식이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가장 존귀한 신분의 하객이 머무는 이층 중앙 발코니에서 아젤란의 황제인 렉스와 그의 마법사인 케일론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둘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먼저 진행된 즉위식 순서가 끝나고 뒤를 이어 두 사람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망부석처럼 앉아있던 렉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조금, 동요를 보였다.
“……!”
줄곧 곁에서 수행하던 케일론이 즉시 접근해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가늘게 몸을 떨며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다행히 흘러내릴 정도는 아니니 망신을 당하지는 않을 것 같아 케일론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그저 담담한 태도로 황제의 안부를 물었다. 사실 그 자신도 가슴이 떨리고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아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처지였다면 그 역시 주저앉아 꺽꺽거리며 통곡이라도 하고 있을지도.
“괜찮지 않아.”
씁쓸하고 짜디짠 물기가 진하게 배어든 탁한 음성이었다.
“어쩌면 저 여인의 옆에 내가, 짐이 서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럴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랬다면 저렇게 환하게 미소짓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을 테지.”
케일론은 다시 시선을 옮겨 혼례를 치르는 두 사람, 아니 신부의 얼굴로 향했다. 그에게는 언제나 그녀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니까.
“그랬겠지요.”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에 여태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정말 다행이군요.”
그거면…… 충분했다.
<겨울의 왕과 불의 키스를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