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덫에 걸려들다
“이상하군.”
히에무스는 브로미오스와 렌투스 등과 함께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스파니아 왕국과 드라코니아 왕국의 접경지에 있는 한 성에 도착했다. 드라코니아에서 출발한 5만 군대와 합류해 싸우기로 한 지점이었다.
“어디 간 거지?”
맞은편에 넓게 펼쳐진 적진 속에서 용의 행적을 찾아봤지만 흔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크나 오거 등 다른 마물들과 소수의 아칸 왕국 병사들만 눈에 띌 뿐이었다. 그들조차도 목책으로 둘러싸인 진지 속에 잔뜩 웅크려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군. 분명히 이 지역에 용이 활보한다고 하지 않았나?”
히에무스의 물음에 브로미오스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게. 정말 묘하군. 혹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겁이 나서 숨은 것 아닐까?”
물론 그들은 인간 황제의 명령 그대로 용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붙잡아서 힘을 묶어두거나 혼을 내줄 수는 있을 것 같아 기꺼이 길을 나선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용이 활약하지 못하도록 만들면 어느 정도는 인간 황제의 요구에 부합될 테니까. 백룡 렌투스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엔 용이 없습니다. 있다면 마나로 낌새를 알아챌 수 있었을 겁니다.”
근처 성 안에 겨우 살아남은 아젤란 제국군이 있어 물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여기저기서 미친 듯이 활개를 치던 붉은 용 한 마리가 그날 히에무스 일행이 나타나기 전에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브로미오스가 한결 편안한 낯빛으로 말했다.
“뭐, 어디선가 우리가 온다는 정보를 듣고 겁이 나서 숨기라도 했나 보지. 잘된 것 아닌가? 용이 없으면 인간들도 다른 마물들을 상대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야. 우리도 쓸데없이 힘 빼지 않아도 될 테고.”
“…….”
“그냥 이곳 성 주위에 진을 치고 아젤란의 대군이 도착하길 기다리자고.”
히에무스가 렌투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짓으로 의향을 물었다. 렌투스도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겠군요. 드라코니아 군의 마법사를 전령으로 보내 아젤란 군에 알리고 우린 좀 쉬면서 적의 동태나 파악하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다.”
며칠 후 황제가 이끄는 아젤란 군이 당도해 히에무스 휘하의 드라코니아 군과 합류했다. 대지의 정령왕의 마법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당도할 수 있었다. 광활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제법 넓은 계곡이었지만 55만에 달하는 대군이 진을 치자 더는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일 만큼 꽉 차 보였다. 에일린도 히에무스 일행과 만나 인사하고 적당한 장소에 천막을 치고 자리를 잡았다. 인근 성은 이미 파괴될 대로 파괴된 터라 시설을 활용할 수 없는 상태여서 황제도 일단은 노상에 자리를 잡았다. 병사들이 재빠른 몸놀림으로 근처 숲에서 나무를 베어왔다. 이내 능숙하게 목책을 세워 진지를 구축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렉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그렇게 큰 소동을 벌이던 용이 어째서 사라졌단 말인가? 전혀 행방을 모르는 것인가?”
히에무스가 그동안 모은 소식을 알려주며 대답했다.
“예. 드라코니아 정찰병을 보내 인근 지역을 탐색해 보라고 명했으니 좀 더 기다려 보십시오.”
“음.”
리히트 시종장이 몸을 녹일 뜨거운 차를 준비해 황제가 있는 막사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한 기사가 급히 들어와 보고했다.
“폐하!”
“무슨 일인가?”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드라코니아 남쪽 테라티오 지방에 붉은 용이 출몰해 들쑤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테라티오 지방이라면 히에무스의 영지가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아젤란과도 국경을 접하고 있는 장소였다. 렉스를 위시해 아젤란 제국인들의 얼굴에 검은 먹구름이 끼었다. 허를 찌르다니. 이곳에서 남하하는 적을 막기 위해 거의 전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한발 앞서 뒤쪽을 친단 말인가?
“좀 더 자세한 상황을 말해 보라. 얼마나 많은 적이 움직이고 있다던가?”
“20만 정도의 군대와 붉은 용 한 마리가 휘젓고 있는 상태랍니다.”
“이런…….”
렉스는 입술 끝까지 맺힌 욕지거리를 억지로 삼켰다. 잠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병무대신을 향해 말했다.
“우리 측도 20만 군대를 그쪽으로 보내 대응하도록 해야겠소. 아울러…….”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라케르타 공작과 파인스 백작도 함께 그쪽으로 향하도록.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해서 먼저 가서 상황을 지켜보고 대응하도록 하시오.”
히에무스는 황제 앞이란 것도 상관없이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인간 귀족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라지만 이래라저래라 명령받는 일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다시 에일린과도 떨어져 지내야 하니 그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눈치 빠른 브로미오스가 즉시 히에무스의 옆구리를 찌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명대로 하겠습니다.”
백룡 렌투스도 열심히 눈치를 줬다. 할 수 없었다. 인간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그리고 에일린이 황제를 돕기를 원하니 그도 그녀의 뜻을 존중해 할 수 있는 일은 기꺼이 해줄 작정이었다. 히에무스도 마지못해 머리 숙여 절하고 입을 열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재차 길을 떠났다.
***
그 후로 며칠 동안 비슷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히에무스 일행이 용이 출몰한다는 지역으로 급히 길을 떠나 당도해 보면 용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아젤란의 대군이 싸우고 있는 지역으로 합류하기 위해 이동이라도 할라치면 금방 또 다른 엉뚱한 지역에서 용이 분탕을 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 같군.”
히에무스가 속이 상해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테라티오 지역에서 헛물을 켰다가 안드로스 대륙 서쪽 끝 지역에 용이 출몰했다는 전갈을 받고 갔다가 거듭 허탕을 쳤다. 히에무스는 일행들과 나란히 말을 탄 자세로 높은 언덕 위에 서서 아래를 굽어봤다. 옆에 함께 있던 브로미오스가 싱글거리는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나쁘게만 생각할 건 아냐. 제법 재미있지 않은가?”
“재미있다고?”
“그래. 적당한 기대감과 긴장감까지 생기니 놀이로 따지자면 최고로 재미있는 놀이인 셈이지.”
“재밌긴커녕 짜증만 날 뿐이야.”
이대로는 언제 승부가 난단 말인가? 듣기로는 용이 빠진 전쟁터에선 아젤란 군도 꽤 선전 중인 모양이다. 하지만 문제는 기습적으로 나타난 용이 들쑤시고 간 곳은 어김없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는 한시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용의 흔적을 쫓아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워낙 신출귀몰하니 언제 어디서 출현할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바람의 정령이라도 동원해야 하나?”
히에무스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브로미오스가 조언했다.
“가능하면 정령왕으로서의 힘은 쓰지 않는 게 좋아. 우린 지금 정령왕의 자격이 아닌 인간 귀족의 자격으로 와 있는 거니까.”
그가 발아래 펼쳐진 성을 바라보며 살짝 얼굴을 굳혔다. 용이 헤집고 떠난 흔적이 처참했다. 형편없이 파괴된 성채와 불타버린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널브러진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람결에 실려 온 역한 탄내가 코를 찔러왔다. 인간들의 신세가 딱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들 스스로 야기한 문제는 그 스스로가 감당해야 마땅할 운명이니까. 인간 흉내를 내는 중인 그들은 인간 정도의 힘만을 보탤 뿐이었다.
“너무 과한 힘을 쓰면 인간들에게 엉뚱한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어. 우리 정체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나.”
렌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힘 조절을 잘하셔야 합니다. 오랫동안 인간으로서 잘 지내려면 적절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지요. 자질이 너무 출중해 보이는 것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
히에무스도 튀어 보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불확실한 임무에 묶여있는 동안 에일린과 헤어져 지내야 한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이런 어쭙잖은 기사 역할을 하고자 인간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자꾸만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언제까지 이런 지루한 일에 매여 있어야 한단 말인가?”
“글쎄요. 어쨌든 당분간은 전념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렌투스가 자신 없는지 낮고 희미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브로미오스가 활기찬 표정을 지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자자, 일단 용이 옮겨갔다는 곳으로 우리도 가보도록 하세. 히에무스여, 잊지 말게나. 우린 그저 인간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이 역할에 너무 심취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히에무스도 더는 투덜거리지 않았지만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얼굴을 구긴 채 다른 일행을 따라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
그날 저녁 아젤란의 황도 카르디아에 있는 제 1신전이었다. 일찍이 이곳으로 피신해서 지내고 있던 엘시아는 대신관 전용 식당에서 로드미오와 함께 막 저녁 식사를 끝낸 참이었다. 마법사인 안드레아스도 이제 더는 여장을 하지 않고 정식 마법사의 복장을 갖춘 채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성심껏 마련한다고 했습니다만 음식이 입에 맞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엘시아.”
“예, 맛있게 잘 먹었어요, 로드미오. 정말 고마워요.”
그사이 둘은 놀라울 정도로 가까워졌다. 로드미오 대신관이 눈물겨울 정도로 헌신적인 자세로 엘시아의 맘에 들고자 갖은 노력을 다한 덕분이었다. 그가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그야말로 여왕도 부럽지 않을 만큼 최고의 환대를 한 것이다. 엘시아도 그가 보여주는 극진한 대접과 그녀를 향한 진심 어린 행동, 무엇보다도 황제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대신관이 지닌 엄청난 능력에 감동해 제법 마음을 열게 되었다.
“다행입니다. 내 사랑.”
로드미오가 은근하게 달아오른 눈빛을 보내며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엘시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대신관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하얗게 셌던 머리도 짙은 갈색으로 변해있었고 주름졌던 얼굴도 팽팽하게 당겨져 매끈해진 상태였다. 꽤 미남이라 할 만했다. 순전히 엘시아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젊은 모습을 유지하는 데 상당한 신성력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그런 여러 노력에 힘입어 엘시아는 로드미오에게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감을 지녔다. 젊음까지 유지할 수 있다니 어떻게 보면 황제보다도 더 엄청나고 경이로운 능력을 지닌 거라 할 수 있었다. 안드레아스는 둘의 그런 모습을 마뜩잖은 눈으로 쏘아봤다.
“이제 처소로 가시지요. 공주님.”
안드레아스는 시녀 역할은 벗어났으나 여전히 어떤 사명감을 갖춘 듯 그녀의 일정을 챙겼다. 오늘 밤쯤이면 스킬라 공주가 보낸 기별이 올 터이니 미리 준비하고 있는 편이 좋았다. 엘시아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로드미오에게 밤 인사를 했다.
“그만 가볼게요. 로드미오. 내일 봐요.”
“안녕히 쉬십시오. 엘시아. 아침 해가 떠오르길 기다리기 힘들 겁니다.”
둘은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안드레아스의 미간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엘시아가 머무는 처소로 함께 걸어가는 동안 그가 낮고 딱딱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공주님. 대신관과 친해지는 건 좋지만 진짜 마음을 주는 건 곤란합니다. 그를 이용할 정도로만 적당히 상대해 주셔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
“설마, 진짜 그를 마음에 두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엘시아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공주님!”
“아, 걱정말아요. 그저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 본분을 잊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다 싱긋 떠오르는 미소와 함께 말을 꺼냈다.
“그가 꽤 내 맘에 든 건 사실이에요. 저런 젊은 모습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평생을 함께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도 안 됩니다!”
그의 붉은 입술에서 거칠고 날카로운 말투가 삐죽 새어 나왔다.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호박색 눈동자에 짙은 분노와 혐오가 어렸다. 엘시아는 순간 조금 놀란 듯 움찔거렸으나 곧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았다.
“나도 알아요. 저 모습은 그저 눈속임뿐이라는 걸.”
“…….”
어느새 둘은 그녀가 지내는 방 앞에 당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방을 지키던 시녀 비안나가 황급히 다가와 알렸다.
“공주님. 스킬라 공주님께서 보낸 사람이 왔습니다.”
***
예상대로 스킬라 공주의 시녀인 알리샤였다.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한, 도무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분위기를 지닌 여인. 그녀가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엘시아 공주님. 제 주군이신 스킬라 공주님께서 보내신 전갈이 있습니다.”
엘시아도 언제든 그녀의 소식이 오리라 생각하고 각오해 왔기에 담담히 말했다.
“어떤 거죠?”
“전에 해주시기로 한 일을 이제 슬슬 시행해달라고 하십니다. 스킬라 공주님께서 약속하셨던 일은 지키셨으니까요.”
전에 해주기로 한 일이라면 당연히 에일린을 처리해 달라는 요구일 터이다. 안드레아스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엘시아는 자신 있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당연히 해 드려야죠. 저도 구체적인 계획을 다 세워놨답니다. 근데…… 한 가지 일만 좀 더 신세를 져도 될까요?”
“뭐죠?”
“덫은 설치했는데 괜찮은 몰이꾼이 준비되지 않아서요. 그 역할만 좀 해결해 줬으면 해서요.”
“몰이꾼이라고요?”
“그래요. 그 평민 여자가 집에 얌전히 있었다면 제가 다 알아서 했을 텐데 알아보니 그새 전쟁터에 따라갔다더군요. 그곳은 제가 접근하기 좀 힘들어서요.”
“그렇겠군요.”
“거기서 그 여자만 불러내 주면 나머진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확실히 처리할 자신이 있어요. 스킬라 공주님이 아주 만족할만한 결과를 보여드릴 수 있어요.”
엘시아가 봄에 피어나는 꽃처럼 활짝 웃으며 무뚝뚝한 얼굴의 시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줄곧 생각했던 계획을 설명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알리샤가 투명한 유리알 같은 연푸른 눈동자를 굴리며 입꼬리를 약간 끌어올렸다.
“알겠습니다. 스킬라 공주님께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해요.”
***
알리샤를 배웅한 후 엘시아가 피로한지 소파에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시녀에게 포도주를 한잔 가져다 달라고 말하며 어깨를 푹 기댔다. 스킬라의 시녀를 상대하느라 조금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계속 눈치를 살피던 안드레아스가 말을 꺼냈다.
“공주님. 정말 전에 말씀하신 계획대로 하실 생각인지요?”
엘시아가 눈을 감은 채 짧게 대꾸했다.
“물론. 쓸데없이 그런 계획을 세우진 않았겠죠.”
“…….”
시녀 비안나가 크리스털 술잔과 포도주병을 은쟁반에 올려서 대령하자 엘시아가 비로소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안드레아스가 급히 다가가 직접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계획을 조금 변경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말이죠?”
“그게, 그냥 그들 눈에 다시는 띄지 않도록 멀리 숨기는 정도로만 하셔도…….”
엘시아가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는 그 여인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왜죠? 스킬라 공주는 죽이든 살리든 내 마음대로 처분하라고 했는데요. 혹시 당신, 그새 그 평민 여자에게 반하기라도 한 건가요?”
안드레아스의 얼굴에 붉은 열기가 확 피어올랐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냥 그 여자가 가여워서 그렇습니다. 사실 잘못한 일도 없지 않습니까?”
“존재하는 게 잘못이에요.”
“예?”
엘시아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째려봤다. 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침없이 속에 담아뒀던 말을 내뱉었다.
“내 눈앞에 알짱거렸던 게 잘못이라고요. 계속 거슬렸단 말이에요. 하지만 뭐, 이젠 고맙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깟 여자 하나를 제거해주는 대가로 얻는 이익이 상당하니까.”
“…….”
“철저하게, 가장 비참한 모습이 되게 해줄 거예요.”
엘시아가 손에 든 빨간 루비를 깎아 만든 듯한 술잔을 쳐들어 감상하듯 훑어봤다.
“죽이지는 않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자비를 베푼 거 아니겠어요?”
“하지만 공주님…….”
“그만.”
엘시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짧은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당신은 이래서 안 되는 거예요. 안드레아스!”
“예?”
“이렇게 매번 단호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니 안 되는 거라고요. 도대체가 제대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
안드레아스는 좀 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딴 모습이나 보이니 믿음직스럽지가 않아요. 로드미오처럼 과감하고 결단 있는 행동 좀 보여주면 안 되나요?”
그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모멸감에 대답 없이 고개 숙인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엘시아 역시 한동안 침묵하며 포도주만 들이켜다 짜증이 나는 듯 손을 휘둘렀다.
“그만 나가보세요.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번 일이 잘 성사되도록 준비에나 전념해요.”
“……알겠습니다.”
안드레아스는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인사하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스산하고 어두운, 좁고 긴 신전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참 무겁고 지난하게 느껴졌다.
“후…….”
문득 벌어진 그의 잇새에서 휘파람처럼 긴 한숨이 하얗게 새어 나왔다.
“지치는군.”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깊은 밤이었다. 히에무스는 연일 용을 쫓다 잠시 루쿨루스 숲으로 간 상태였다. 드라코니아의 5만 병력을 더한 제국군 20만이 주둔한 진영도 불침번을 서는 소수의 병력을 제외하곤 대부분 잠에 빠져들어 고요했다. 백룡인 렌투스는 아까 히에무스를 배웅하고 난 후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웠다. 유난히 잠자는 걸 즐기는 용족답게 금방 잠에 빠져들었으나 수상한 기척에 번쩍 눈을 떴다.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침상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
큰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익숙한 마나의 빛과 성질,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도 전혀 지장 없이 볼 수 있는 용의 몸이니 곧바로 정체를 알 수 있었으니까.
“스킬라?”
큰 키, 양 갈래로 길게 땋아 내린 새까만 검은 머리와 숯불처럼 빛나는 오렌지빛 눈동자. 그가 오랫동안, 수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모했던 여인이었다.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오랜만이야, 렌투스.”
렌투스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환하게 웃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게 어쩐 일입니까? 공주님께서 이곳에 오시다니.”
용으로서의 관계는 어떻든지 간에 일단 인간세계의 신분대로 대했다. 목소리 끝에 기쁜 기색이 알알이 맺혀 있었다. 스킬라는 한층 농염해진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가 앉은 곳 바로 옆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내가 와서 좋은 거야? 렌투스.”
“다, 당연하지요. 그걸 말이라고…….”
의아하긴 했다. 서로 알고 지낸 지 2000년이 넘어도 그녀가 그를 먼저 찾아온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녀의 아비인 퀴리오스가 드라코니아 왕국을 세워 인간 왕족 노릇을 하고 난 후로는 더욱 그를 멀리했었다.
“우린 여전히 좋은 친구 사이잖아. 안 그래?”
“물론……이지.”
친구 사이를 강조하니 렌투스의 말투도 자연스레 좀 더 격의 없게 바뀌었다.
“몸은 어때? 이제 괜찮은 거야? 스킬라.”
스킬라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선득한 한기가 그대로 느껴져 렌투스는 흠칫 놀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낫지 않았구나.”
“정령왕의 벌을 받은 거니 쉽게 괜찮아질 순 없겠지. 매일매일 괴로운 나날을 보내.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 때문에 단 한시도 편하지 않고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해. 드래곤 하트를 지녀도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
렌투스는 심장이 저리듯 안타까운 마음에 찡그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그대로 의식한 스킬라가 고개를 숙이더니 용건을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몸을 침범하는 한기 때문이리라.
“부탁이 있어. 렌투스.”
“부탁이라니?”
“언제까지나 이런 몸으로 살아갈 수 없잖아? 히에무스 님께 용서를 구해서 벌을 거둬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어. 하지만 화가 나셔서 그런지 날 만나시려고 하지 않아.”
“스킬라…….”
“알아, 당연하겠지. 내가 그분께서 사랑하는 여인을 힘들게 했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고개를 휙 들더니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갑자기 맞부딪혀오는 강렬한 눈빛에 렌투스는 순간 숨을 들이마신 채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 여인에게 먼저 사과하고 화해해야 할 것 같아. 그 자리를 네가 좀 마련해 주면 안 될까? 난 그 여인이나 히에무스 님에게나 신뢰받지 못한 처지라 기회조차 만들 수가 없거든.”
“……!”
“응? 부탁이야. 렌투스.”
렌투스는 아주 짧은 찰나 그녀가 거짓을 말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하나 곧 더 크게 밀려드는 감정의 홍수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얼음처럼 차갑게 변한 손과 그녀답지 않게, 아니 용족답지 않게 끊임없이 떨리는 가는 목소리에 그만 한없는 연민 속에 푹 젖어 버렸다.
“그래, 좋아. 스킬라.”
“정말이지? 도와주는 거지? 렌투스!”
“그래.”
스킬라가 두 팔로 그의 목을 와락 감싸 안았다.
“고마워! 렌투스. 역시 넌 내 둘도 없는 친구야. 네 도움 절대 잊지 않을게. 내 몸이 낫게 되면 그건 순전히 네 덕이야.”
그는 언제나 이런 순간을 꿈꿔 왔었다. 스킬라가 자신의 품속에 스스로 파고드는 그런 장면을. 지금은 그저 친구로서 하는 감사 표현일 뿐이었지만 렌투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그 역시도 그녀의 사악한 계획을 눈치챈 것인지도 몰랐다. 애써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기회일지 모르니까. 스킬라처럼 강인한 존재가 자신의 도움을 구하는 일 같은 건 좀처럼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뭐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히에무스에게나 그 인간 여인에게나 그 무엇보다도 스킬라에게 최상의 결과가 나오는 좋은 일일 거라고.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말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련한 희망을 품으며 설핏 미소를 떠올렸다.
***
다음 날이었다. 스파니아 왕국과 드라코니아 왕국 사이 접경지인 ‘라크네’ 평원. 황제가 이끄는 아젤란의 대군은 여전히 처음 당도했던 이곳에 주둔 중이었다. 출발할 때 55만에 달했으나 지금은 35만 정도였다. 드라코니아에서 온 5만 군대를 포함한 20만 병력은 라케르타 공작과 함께 용을 잡기 위해 안드로스 대륙 각지로 빠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마물로 구성된 아칸 왕국의 군대도 엇비슷한 수준으로 줄어든 모습이었다. 그들 역시 다른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것 같았다. 용이 가담하지 않아서인지 별다른 움직임 없이 며칠째 요지부동이었다. 서로 공격할 적당한 기회를 엿보는 중일 테지만 그저 대치한 상태로 여러 날이 지나자 조금씩 군 기강이 느슨해져 갔다.
“아, 따분해.”
“그러게. 별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참 지루하네.”
세 정령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니 좀이 쑤신 모양이었다. 반쯤은 꾸벅꾸벅 졸다 일어나 투덜거렸다. 전투가 없으니 다친 병사도 없어 의무대가 세운 막사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대원들도 각자 일을 보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흩어진 탓에 몇 명만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에일린이 한 침상에 앉은 채 붕대를 말아서 정리하다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따분하긴 해도 이런 게 낫지 않아요? 전투가 일어나 다친 이들이 생기면 정말 끔찍하고 비참할 테니까요.”
“그렇긴 하겠지만요…….”
“인간 여인.”
대지의 정령왕 텔루스가 그들 앞에 불쑥 나타났다.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를 비롯해 루쿨루스 숲에서 온 이들과 함께였다. 에일린은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났다.
“예. 텔루스 님.”
“미안하지만 나는 루쿨루스 숲으로 돌아가려 한다. 여기 일손이 모자라면 힘을 보태려고 했는데 의외로 한가한 듯해서 말이지. 일단 내 궁전에 가서 일을 본 후에 필요해지면 다시 오도록 하겠다.”
“예, 그러세요.”
대지의 정령왕은 계절의 정령들과는 달리 휴식기가 없으니 마냥 한가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와 나무의 정령 아그로스도 연이어 말을 꺼냈다.
“우리도 잠시 다녀올게. 여긴 별로 할 일도 없어 보이니 말이야. 다시 바빠지면 불러줘.”
“어, 예. 그럴게요. 다음에 봬요.”
에일린이 조금 당황한 낯빛으로 대답하자 그들이 싱긋 웃어준 후 푸른빛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사라지는 장면을 지켜보다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에게 물었다.
“에스타스 님은 여기 남아 있어 주실 거죠?”
지금 아무 일이 없다고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지속될지 아무도 몰랐다. 언제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난 계속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에일린. 그리고 혹시 전투가 벌어져 다른 이들의 손이 필요해지게 되면 내가 그들을 다시 소환해줄 테니 안심하도록 해라.”
“예. 감사합니다!”
절로 고마운 마음이 샘솟았다. 정령들에겐 감사하다는 인사 외에는 고마운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막사 안에 남아있던 몇몇 의무대 대원이 감탄하는 시선으로 에일린을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정령사의 능력을 지닌 아가씨가 정령과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언제 봐도 참 신기하고 기이한 광경이었다.
“에일린 님!”
막사 입구에서 하녀인 제니가 들어오며 조금 큰 목소리로 알렸다.
“렌투스 님께서 오셨어요. 잠시 뵙자고 하시네요.”
“렌투스 님이?”
깜짝 놀랐다. 히에무스와 함께 용을 처치하기 위해 떠났을 텐데. 무슨 일인 걸까? 어쨌든 무척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히에무스의 소식이 궁금했는데. 앞장서 걸어가는 제니를 얼른 뒤따라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눈에 띄게 훌쩍 솟은 키에 짧은 은백색 머리를 한 백룡 렌투스가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에일린 님.”
“예, 덕분에요. 당신도 잘 지내셨어요? 히에무스는 어떻게 지내는지…….”
물론 그동안 히에무스가 짬이 날 때마다 정령의 모습인 채로 다녀가긴 했다. 요 며칠 그가 루쿨루스 숲에 가야 했기에 보지 못했지만.
“히에무스 님께선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십니다. 아시잖습니까?”
“그렇겠죠.”
“해서 제가 왔습니다. 에일린 님, 혹시 시간이 나시면 저와 함께 가보시지요.”
“히에무스를 보러 가자고요?”
“그렇습니다. 히에무스 님도 만나 뵙고 그분이 이끄시는 드라코니아 진영에도 의무대를 두면 좋을 것 같다고 한번 와서 살펴봐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요?”
“예, 마법사가 끼인 의무대를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좀 미비한 면이 있어서요. 항상 그런 부분은 신관들이 도맡았던 터라. 에일린 님이 잠깐 가셔서 점검해 보고 덩달아 두 분이 만나는 시간을 가지시면 어떻겠습니까? 공작님께 여러모로 힘이 될 겁니다.”
에일린은 얼굴을 붉혔다. 언제 왔는지 옆에 와있던 샤샤가 제니와 함께 부추겼다.
“갔다 오세요, 에일린 님. 지금 여긴 한가하잖아요. 렌투스 님의 마법이라면 금방 다녀오실 수 있을 거예요.”
렌투스도 어느덧 마법사로 알려져 있었다. 마법사 주군을 모시는 보좌라면 역시 마법사가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하지만…….”
에일린이 망설이며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가 넌지시 권했다.
“잠시 다녀오는 거라면 상관없지 않을까? 에일린. 아까도 말했듯 혹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내가 있으니 크게 걱정할 것 없단다.”
“정말 감사드려요, 에스타스 님.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려면 먼저 황제 폐하께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의용 부대이긴 하나 정식 아젤란 군에 소속돼 임명장까지 받았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렌투스가 즉시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황제 폐하께 들러 윤허를 구했으니까요. 그다지 달가워하시진 않았습니다만 의무대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허락하셨습니다.”
에일린 역시 간호나 의료부문에 대해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줄곧 신관들에게 병영의 의무대 운영을 전적으로 의존했던 탓에 그쪽 방면에 무지한 게 사실이었다. 에일린이 데려온 지원 인력 중에 포함된 민간 의사와 간병인의 지식이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녀가 현대에서 접하며 익힌 위생 개념과 병동 운영 등의 경험과 안목도 여기 사람들에 비하면 탁월한 편에 속했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 주둔하는 동안 각 부대의 의무대를 정비하는 일을 도맡았던 것이다. 정령을 부리는 능력을 빼더라도 꽤 유능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자, 보십시오. 폐하의 서신입니다.”
렌투스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품 안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더니 휘릭 펼쳐 보였다. 외출을 허가한다는 내용에 황제의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에일린은 비로소 안심돼 활짝 웃었다.
“그랬군요. 알겠어요. 함께 가 보도록 해요. 금방 준비해서 나올게요.”
간단한 여행을 위해 짐을 싸는 거라 단시간에 채비가 끝났다. 제퓌를 비롯한 세 정령이 어김없이 에일린을 수행할 셈으로 곁으로 바싹 붙어 날아올랐다.
“그럼 갔다 올게요.”
“예. 안녕히 다녀오세요, 공작님께도 안부 전해 주시고요.”
“잘 다녀오너라. 에일린.”
제니와 샤샤를 비롯한 의무대 일원과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 등과 연이어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백룡 렌투스가 다가와 재촉했다.
“조금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해가 짧으니까요. 바로 순간이동 마법을 시행하겠습니다.”
“예.”
그가 손을 내밀어 에일린의 어깨를 슬며시 잡더니 곧 마법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세 정령은 정확한 이동 지점을 몰랐기에 서둘러 렌투스의 양쪽 어깨 위에 걸터앉았다. 모두 그의 마법만을 이용해 이동할 계획이었다. 눈이 따가울 만큼 강렬한 푸른빛과 함께 둥근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에일린은 용이 시전하는 마법을 이용해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다. 인간 마법사가 행하는 마법이나 정령이 행하는 마법과도 다른, 미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딱 중간 형태의 느낌이랄까. 심하게 울렁거리거나 어지럽진 않았으나 뭔가 의식이 몽롱해지는 듯했다. 에일린은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
눈을 떠보니 기이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초록빛 광채로 뒤덮인 공간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마치 깊은 밀림에 온 것처럼 나무라고 추정되는 물체들이 사방에 쭉 늘어선 광경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뭔가 하나같이 흐릿하고 뭉개진 형태였는데 그림으로 따지면 거친 붓질로 대략 형태만 표현한 배경처럼 느껴졌다. 옆이 허전해 주위를 둘러보니 렌투스와 세 정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 혼자 우두커니 그 기묘한 공간에 서 있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휘몰아쳐 얼른 입술을 달싹였다.
“렌투스 님?!”
“…….”
이상했다.
“오랜만이군요.”
렌투스 대신 언젠가 들어봤던 미성이지만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에일린은 깜짝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
봄 햇살처럼 반짝이는 금발 머리, 연한 상아색 얼굴에 파란 보석처럼 황홀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비웃음을 머금은 도톰한 입술이 유난히 붉고 촉촉하게 익은 열매처럼 번들거렸다.
“엘시아 왕녀! 당신이 어떻게?”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분명히 렌투스와 함께 이동했는데 그는 온데간데없고 뜬금없이 엘시아가 나타나다니. 기가 막혔다. 당혹감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살펴보니 그녀 뒤에 안드레아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신관이 입는 하얀 신관복을 걸치고 금빛 지팡이를 든 젊은 남자 한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에일린은 섬뜩한 예감에 입술을 악물었다. 아마도 저 신관이 쳐놓은 결계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또 엘시아가 쳐놓은 덫에 걸려든 것이다.
“제게 왜 이러는 거죠? 당신들! 원하는 게 뭐예요?”
에일린은 찡그린 표정으로 엘시아와 안드레아스를 번갈아 노려보며 물었다. 정말 무슨 원한이 있다고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일린 자신이 그들에게 품은 원한이 더 강할 텐데 말이다. 그녀와 마주치자 안드레아스가 당황한 낯빛으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미간이 깊이 팬 걸 보니 그도 별로 달가워하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언제나 명령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니 그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을 터다.
“뭐 하는 겐가? 마법사! 속히 그 일부터 하지 않고?”
금빛 지팡이를 든 젊은 신관이 안드레아스를 향해 나무라듯 소리쳤다. 안드레아스의 눈 밑이 불만스럽게 씰룩거렸으나 곧 마법 주문을 읊으며 에일린을 향해 마법사의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에서 한줄기 은빛 광이 터져 나와 공중에 둥근 원을 한 바퀴 그렸다. 그것이 그녀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무슨……!”
무슨 짓을?! 끝까지 묻지 못했다. 에일린의 목덜미에 그 은빛 광선이 만들어낸 고리가 한 차례 목에 걸린 후 밑으로 내려가 발목을 휘감은 뒤 사라졌다. 통증이 느껴지진 않았으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와 함께 그 자리에 묶인 듯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목소리와 다리를 속박하는 마법에 걸려든 것이다.
“……!”
젊은 얼굴의 신관이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으며 칭찬의 말을 건넸다.
“정령을 불러 도움을 구할 수도 있다 하니 미리 방지해 둬야지. 잘했다, 마법사. 실력만큼은 제법 쓸 만하구나.”
안드레아스가 인상을 잔뜩 구기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시오! 난 당신 부하가 아니잖소. 당신을 위해서 한 일도 아니오.”
“허, 참. 까칠하긴. 칭찬을 해줘도 불만인가?”
“당신이 해주는 칭찬 따윌 바랄 것 같소? 천만에, 내 쪽에서 사양이오.”
신관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듯 중얼거렸다.
“완전히 삐뚤어졌군. 여장을 오래 해서 성격마저 여자처럼 바뀐 것인가?”
“이……!”
안드레아스가 표정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며 신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팡이를 짚지 않은 한쪽 손을 불끈 움켜쥐고 위로 쳐든 모습이 금방이라도 상대방 쪽으로 내지를 것 같았다. 잠자코 지켜보던 엘시아가 앙칼진 음성으로 경고했다.
“그만! 도대체 왜 그러죠? 안드레아스. 왜 그렇게 로드미오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냐고요?”
“하지만 공주님, 이 자가 자꾸만 제 속을 긁지 않습니…….”
엘시아가 또다시 그의 말을 끊었다.
“됐어요.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짓이에요. 당신은 그냥 얌전히 로드미오의 명에 따르세요.”
“공주님!”
화가 난 안드레아스가 울대를 세우며 항의했다. 엘시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의 경고를 날렸다. 안드레아스가 어금니를 악물며 쳐들었던 주먹을 마지못해 밑으로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신관 로드미오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빛이 떠올랐다. 마치 수컷끼리의 경쟁에서 작은 승리라도 얻은 듯 뿌듯한 기색이었다. 에일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들을 주시했다.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로드미오와 엘시아가 다시 에일린에게 시선을 맞추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에일린이 공포로 떠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더욱 크게 미소 지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로군요. 걱정하진 말아요. 지금 당장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요.”
당장 죽일 생각은 없다고? 그럼 나중에 죽이겠다는 말인가? 도대체 왜 자신을 이렇게 납치하고 괴롭히는 걸까?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왜 벌이는지 알고 싶나요? 이번 일은 사실 다른 사람이 내게 부탁해서 하는 일이에요. 당신을 나 못지않게, 아니 나 이상으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녀의 부탁으로 이러는 거니까 너무 나만 원망하지는 말아요.”
‘뭐라고?!’
그녀의 부탁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지? 설마…… 그 흑룡 공주? 로드미오 대신관이 위엄이 서린 중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나마 행운이라고 생각하거라. 비천한 여인이여. 자비를 베풀어 고통만은 느끼지 않는 방법으로 처리해 줄 테니.”
‘……!’
***
“그 방법을 쓸 거라고 했죠? 로드미오.”
그 방법이라니? 에일린은 자신의 심장이 쾅쾅 울리는 걸 느꼈다. 긴장감에 목이 바싹 타들어갔다. 엘시아가 로드미오 대신관의 한쪽 팔에 바싹 붙어선 채 기대감에 찬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그가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상냥하게 대답해 줬다.
“그렇습니다, 엘시아. 저 여인에게서 생기를 빼앗아 순식간에 꼬부랑 노파로 만들 겁니다.”
‘뭐?!’
에일린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자신의 생기를 빼앗아 늙은이로 만들겠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좀 전보다 더 심하게 몸이 덜거덕거렸다. 어떡해야 좋을지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채 오직 두려운 감정만 높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원래 금지된 술법이라 아는 이가 적지만 저처럼 고매한 신관이라면 으레 익혀두는 술법이지요. 저 여인의 생기를 빼앗으면 저는 신성력을 보충해서 좋고 당신의 일도 도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게다가…….”
그가 은근한 비웃음을 머금은 채 에일린을 힐끗 쳐다봤다.
“바로 죽이는 건 아니니 죄책감도 덜 수 있고요. 당신도 맘에 들지 않습니까?”
“호호호, 그래요. 정말 최고로 멋진 방법이에요. 내게 일을 의뢰한 분에게도 말씀드렸더니 매우 흡족해 했다더군요. 자신이 원하던 방식이 딱 그런 거였다나요.”
“하하, 잘 됐군요.”
엘시아가 공포에 질린 에일린의 반응을 한껏 즐기며 건들건들 약을 올렸다.
“이봐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쭈글쭈글한 벙어리 노파로 변할 테니 그때 다시 밖에 내보내 줄게요. 그럼 참 볼만한 광경이겠죠?”
만면에 해사한 미소를 지은 채 잠시 더 에일린을 놀리다 로드미오에게 부탁했다.
“로드미오, 이만 슬슬 시행해 줄래요?”
“그러지요.”
그가 금빛 지팡이를 앞세워 에일린 맞은편으로 느릿느릿 걸어왔다.
“아, 잠깐! 로드미오.”
엘시아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그가 돌아보자 그녀가 깜빡 잊었다는 듯 품속에서 황금빛 단검을 꺼내 들었다.
‘저건!’
달의 마력이 깃든 정령의 마도구인 ‘루눌라’였다. 한번 베이면 다시는 그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익숙한 생김새를 대한 순간 에일린과 엘시아의 뒤쪽에 서 있던 안드레아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하마터면 깜빡 잊을 뻔했어요. 의뢰인의 요구를 들어주기 전에 묵혀둔 내 원한을 먼저 갚고 싶거든요.”
“풀지 못한 원한이 있으셨습니까?”
로드미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저 여자의 얼굴에 이 검으로 칼자국 하나 내주면 되니까 금방 끝날 거예요.”
“공주님!”
안드레아스가 큰소리로 외치며 그들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만두십시오! 정말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짓까지 저지르지 않아도 충분히, 이미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흥, 저리 비켜요. 내가 저 여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는지 알면서 그따위 말을 하나요? 잔말 말고 저 여자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이나 잡아주세요. 아니면 아까처럼 팔을 묶는 마법이라도 걸든가.”
“하아, 공주님께선…… 질리지도 않으십니까?”
안드레아스가 눈썹을 늘어뜨린 채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빛으로 웅얼거렸다. 고양이처럼 늘 치켜 올라갔던 눈매가 힘없이 잦아든 모습이었다. 분노와 실망, 무엇보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뭐라고요?”
“이런 더러운 짓을 계속하는 게 질리지도 않느냔 말입니다.”
“오호호호…….”
별안간 엘시아가 이리저리 상체를 흔들며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대놓고 웃다 보니 눈에 눈물까지 찔끔 맺혔다. 그녀가 단검을 쥐지 않은 한쪽 손등으로 닦아내며 터져 나온 웃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는 듯 했다.
“호호호…….”
안드레아스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이 되었다. 엘시아는 한참 후에야 정색한 얼굴을 되찾고는 그에게 대꾸했다.
“전혀. 난 전혀 질리지 않아요. 매일, 평생이라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평생…… 할 거라고요?”
“그래요. 평생! 내가 살아있는 마지막 날까지!”
“그런…….”
평생이라고? 평생 이런 역겨운 짓을 저지르며 살아갈 거라고? 평생? 평생을 말인가? 순간 그의 마음속에 있던, 그를 줄곧 지탱해주던 뭔가가 “뚝”하고 끊어졌다. 동시에 지독한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잠시 그 기묘한 초록빛 결계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소리만으로 그 공간 안에 몇 명이 있는지 셀 수 있을 정도로.
카랑!
엘시아가 칼집에서 검을 꺼내면서 생긴 비릿한 쇳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은 정적을 깨뜨렸다.
“안드레아스, 어서 그 여자 팔을 속박해줘요. 직접 잡든지, 마법을 걸든지, 어서요.”
“…….”
그는 그 자신이 속박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미동 없이 선 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태도에 갑갑함을 느낀 로드미오 대신관이 그녀에게 제안했다.
“그냥 제가 잡아드릴까요?”
엘시아가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지금은 꼭 안드레아스가 잡아줘야겠어요.”
엘시아가 미묘한 미소를 품은 눈빛으로 도발하듯 그녀의 마법사를 재촉했다. 어쩌면 다시 말을 잘 듣도록 길들이려는 시도인지도.
“어서 해요! 안드레아스, 명령이에요.”
에일린은 절망에 빠져버렸다. 무기력하고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안드레아스의 눈을 응시했다. 그를 도와줬던 대가가 이런 식으로 돌아오다니. 자신이 좋아했던 소설 속 캐릭터였기에 나름 애정을 가지고 호의를 보였던 것인데 이런 어이없는 결과가 나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친절과 진심을 보여줘봤자 결국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인가? 너무나 기가 막히고 허탈했다. 눈물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허무했다. 에일린과 안드레아스, 둘의 허망한 시선이 마주쳤다.
“!”
그의 흐린 호박색 눈동자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원망 어린 에일린의 시선을 온전히 견뎌냈다. 제법 오랜 시간 뭔가를 고민하듯 망연히 서 있다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지팡이를 고쳐 잡더니 응답했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그는 에일린을 직접 붙잡고 싶지는 않은지 곧 입술을 움직여 마법 주문을 읊조렸다. 아까처럼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에일린을 향해 날아들었는데 이번엔 은빛이 아니라 황금빛이었다. 그 금빛 광이 만들어낸 고리가 에릴린의 몸 구석구석을 낱낱이 훑듯이 지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히 사라졌다.
‘……엇!’
에일린은 뭔가 이상한 변화를 느꼈다. 잠깐 그 변화의 성질을 분명히 구분하기 힘들어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그녀의 몸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 좀 전에 시전한 마법이 어떤 것인지 알아챈 순간 엘시아가 단검을 높이 든 채 재빠르게 다가왔다. 그녀의 한쪽 뺨을 정확히 겨눈 채였다. 예리한 황금빛 단검의 끝이 뺨에 거의 와 닿으려는 찰나 에일린은 두 손을 내밀어 있는 힘을 다해 엘시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힘껏,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엘시아의 몸 쪽으로 밀어붙였다. 차갑게 번득이는 마도구 루눌라의 칼날이 그대로 엘시아의 왼쪽 어깨 위에 깊이 박혔다.
“……!”
워낙 순식간이었다. 또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다. 엘시아는 화들짝 놀라 처음에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를 뚫고 나와 장미꽃잎처럼 사방에 흩뿌려지는 선홍색 피를 보기 전까진.
“아악!”
“엘시아!”
***
로드미오 대신관이 절규하며 달려와 비틀거리는 엘시아의 몸을 받쳐 안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마법사!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에일린은 그들을 번갈아 노려보며 헉헉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온몸을 덜덜 떨었으나 표정만큼은 굳건하고 단호했다. 몸을 속박하는 마법은 풀렸으나 목소리를 묶는 마법은 아직 그대로라 말을 할 순 없었다. 안드레아스는 계속 멍한 얼굴에 초점 없는 눈빛으로 서 있을 뿐이었고.
“감히 안드레아스. 내 명을 어기다니……. 되레 저 여자에게 건 마법을…… 해제한 건가?”
엘시아가 로드미오의 팔에 기댄 채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쏘아붙였다.
“전, 지쳤습니다. 공주님.”
“뭐라고요?”
꾹 닫힌 채 영원히 벌어질 것 같지 않던 안드레아스의 말문이 천천히 열렸다.
“지쳤다고요.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
“평생 더러운 짓만 일삼으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언젠간 끝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으리라 하시니 저로선 다른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무슨…… 우욱!”
엘시아가 고통을 참지 못해 신음과 함께 피를 울컥 토해냈다.
“엘시아! 그만 말하십시오. 회복되면 그때…….”
로드미오는 엘시아의 치료가 우선이었기에 더는 따지거나 다른 대화를 잇지 못하고 급히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박히지 않은 칼날의 길이로 짐작해 봐도 상처가 꽤 깊은 듯했다. 치료하기 위해선 먼저 칼을 제거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하얀 신관복을 벗어 대충 몇 조각으로 북북 찢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끊임없이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말을 늘어놓았다.
“괜찮을 겁니다. 엘시아, 대신관인 제가, 이 로드미오가 있지 않습니까? 이까짓 상처는 금방 아물게 할 수 있습니다.”
“로……드미오.”
로드미오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엘시아 앞에 무릎을 꿇고 자리잡았다. 이내 두 손으로 힘을 주어 검의 손잡이를 잡고 단숨에 뽑아냈다.
“악!”
새된 비명과 함께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는 뽑아 든 검을 아무렇게나 휙 내던지고 재빨리 하얀 옷 조각을 뭉쳐 상처 부위에 갖다 대고 눌렀다. 그리고 입을 달싹이며 신성력을 발현시켰다. 그의 몸에서 시작된 붉은 광채가 그의 손을 따라 이동하더니 이내 엘시아의 몸 전체로 전해졌다. 상처 부위에 그 눈부신 생명의 빛이 집중적으로 모여들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대신관은 제법 오랜 시간 그 일을 진행했지만 지혈이 되지 않았다. 상처를 막고 있던 하얀 옷 조각이 금세 새빨간 피로 물들어 축축해졌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듯 사방으로 흔들렸다.
“어, 어째서…….”
어째서 피가 멎지 않는 것인가? 그의 오랜 신관 경험을 통해 봤을 때 이 정도 상처는 정말 별거 아니었다. 제대로 된 신관이 한 번 정도만 신성력을 발현시켜 치료하면 씻은 듯이 사라질 상처였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힘을 주입하는 데도 아물기는커녕 지혈조차 되지 않는단 말인가? 뭔가 잘못되었다. 그의 뒤쪽에 서 있던 마법사가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연히 치료가 되지 않겠지. 정령의 마도구니까. 당신 정도의 재주로는 어림없지. 정령왕 정도나 되면 모를까.”
“뭐?! 그게 무슨 말이냐?”
“그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베기 위해 정령이 만든 검이다. 그 검에 베인 상처는 절대 낫지 않는다고.”
“이, 이놈!”
로드미오는 눈을 부라린 채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그 외 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다. 엘시아에게서 한시도 손을 뗄 수 없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낫게 하지 못할 상처는 없어. 이 몸이 치유하고 말겠다. 내 모든 힘을 쏟아 붓더라도 반드시 엘시아를 살려내고 말 거라고. 암, 그렇고말고. 네놈! 이다음에 두고 보자.”
포효하듯 거칠게 내지른 후 얼른 엘시아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다정한 목소리로 일렀다.
“그러니 엘시아, 아름다운 내 공주님. 힘을 내십시오. 제가 있으니까요.”
“로드……미오…….”
엘시아는 고통에 찌푸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오는지 눈을 몇 번 부릅뜨다 감는 걸 반복했다. 붉은 생명의 광채에 휩싸인 채, 희미해져 가는 의식 중에 점점 노인으로 변해가는 대신관의 모습을 흐린 시야에 담았다.
“아, 역시…… 노인……이었……나.”
처음엔 살짝 주름진 얼굴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정도였지만 점점 흉측할 정도로 쭈글쭈글한 늙은이로 바뀌어 갔다. 그녀의 감긴 두 눈이 더는 열리지 않게 됐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신성력을 발현시켰다.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끝없이, 부질없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새하얗게 센 머리가 우수수 빠지고 치아까지 죄다 삭아서 투둑 떨어졌다. 그런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그가 지닌 생명력을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변한 채 차갑게 식어버린 엘시아의 몸 위로 삐걱거리며 스러질 때까지.
“엘시아…… 내 사랑…….”
대륙 최고의 미녀 엘시아와 대륙 유일의 대신관 로드미오, 두 사람의 최후였다.
***
‘우웨엑!’
벌써 몇 번째 하는 구역질인지 몰랐다. 에일린은 다섯 번째까지 세다가 더는 헤아리는 걸 관뒀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탓에 구토 소리조차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제 게워낼 것도 남지 않았지만 자꾸만 속이 메슥거렸다. 엘시아와 대신관의 끔찍한 최후가 떠오를 때마다.
“괜찮습니까?”
화장실 밖으로 나오니 붉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호박색 눈동자의 아름다운 마법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두어 시간 전 에일린은 다시 안드레아스에게 잡혀 순간이동 마법을 이용해 이 낯선 건물에 도착했다. 치유마법을 걸어주겠다는 말도 거절한 채 아까부터 화장실만 계속 들락거리던 차였다. 그를 힐끗 쏘아본 후 고개를 휙 돌리고 터덜터덜 걸었다. 안드레아스가 바싹 뒤따랐다. 바닥과 벽체가 온통 검은 돌로 만들어진 차갑고 휑한 복도를 걷다 잠시 멈춰 섰다. 눈매를 좁힌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해가 진 저녁 시간. 무거운 어둠과 적막이 내려앉은 공간. 군데군데 뚫린 벽감마다 놓인 해묵은 장식품, 금빛 촛대에 꽂힌 값비싼 마법석 등으로 인해 제법 격조 있고 유서 깊은 귀족의 성처럼 보였다.
“여긴 저의 집입니다. 아칸 왕국에 있는.”
오래전 비워진 듯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유능한 마법사답게 결계를 단단히 쳐둔 덕분인지 잘 정돈되고 깨끗한 분위기였지만.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 몸을 휘청였다. 그가 재빨리 다가와 부축하려 들자 에일린이 손을 내저어 거절했다.
“제가 싫은 겁니까? 아니면…… 두려운 건가요?”
둘 다였다. 무섭고 혐오스러웠다. 아까 그에게 신세를 약간 지긴 했지만 어떤 고마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엘시아나 그나 결국 똑같은 부류니까. 그가 조금이라면 더 나은 존재였다면 벌써 그녀를 풀어주고 이런 터무니없는 마법도 해제해줬겠지. 도대체 이자는 자신에게 뭘 원하는 걸까? 말을 할 수 없으니 그저 눈빛과 표정으로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대를 데려왔는지 궁금한가 보군요.”
그가 에일린이 건넨 무언의 질문을 용케 알아채고 말했다. 에일린은 발걸음을 조금 늦추고 귀를 기울였다.
“처음부터 무슨 목적을 가지고 그랬던 건 아닙니다. 그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서…….”
‘…….’
“지금은 바람이 하나 생기긴 했지만요.”
그러니까 그 바람이란 게 도대체 뭐냐고? 의문을 가득 품은 채로 맨 처음 이 성에 왔을 때부터 머물던 방 앞에 도착하자 그가 얼른 방문을 열어주었다.
“이 성은 남작가의 상속녀였던 제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곳이죠. 튼튼하고 상당한 규모에 널찍한 영지도 딸려 있지요. 연간 거둬들이는 수입도 어느 정도 됩니다.”
에일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저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일까?
“음, 영민에게서 거둬들이는 수입이 없다 해도 재물이 넉넉한 편입니다. 제 아버지께선 고귀한 엘프족의 왕자셨거든요. 그분께서 남겨주신 보물도 적지 않지요.”
에일린은 그를 한층 경계하며 주시했다. 점점 더 의도를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으니까.
“한 가족이 일평생 아무 걱정 없이 호화롭게 살아도 될 정도로 충분합니다. 제국이나 왕국의 간섭을 받기 싫으면 조용한 시골이나 낯선 도시로 떠나 살아도 좋죠. 그러니…….”
듣는 순간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앞으로 저와 함께 살지 않겠습니까? 에일린.”
에일린은 얼굴에 인상을 잔뜩 썼다. 밑도 끝도 없이 같이 살자고? 그의 의도가 뭔지 아까보다 더 혼란스러워졌다. 실없는 농담이라도 하나 싶어 노려봤다. 그도 겸연쩍은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놀랍도록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다. 그냥 심심해서 건넨 말 같지도 않고 잠시 실성해서 꺼낸 말 같지도 않았다.
“당혹스럽게 느껴질 거란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게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늘…… 그대처럼 함께 있으면 편안하게 해주는, 따뜻한 사람과 살고 싶었으니까요.”
오랫동안 품어온 생각인지 그가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정령의 숲에 있는 온천에서 얘기를 나눴던 그 날 밤부터. 그대 같은 사람과 함께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줄곧 했었죠. 그래서 오늘…… 구해준 겁니다.”
글쎄. 이 자가 구해줬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저 살아남는 데 조금 도움을 준 정도겠지.
“그대에게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남자입니다. 지금껏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장을 했을 뿐이죠.”
‘…….’
“이름도 ‘안드라’가 아니라 ‘안드레아스’입니다. 안드레아스 루이스 엘 캐스카트.”
이미 짐작했던 일이기에 놀랍진 않았다. 아니, 여전히 몰랐다 해도 워낙 경악할만한 일의 연속이라 지금은 어떤 일을 접하더라도 별로 동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이만하면 제 외모도 꽤 준수하지 않습니까? 저를 탐하는 여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대 옆에 있어도 부끄러울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곁눈질로 에일린의 반응을 살피더니 다시 주절거렸다.
“그쪽도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게 힘들지 않습니까? 그들에게서 벗어나 앞으로 저와 함께 살면 어떻겠는지요. 제가 잘 보살펴줄 자신이 있습니다.”
에일린은 좀 전보다 더 심하게 찌푸린 표정으로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외관상으론 어디 나무랄 데 없이, 탄복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또다시 구토가 올라와 억지로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찌 되었건 오랜 기간 모셔왔던 주군의 죽음을 방관한 자였다. 그 덕에 자신이 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혐오와 두려운 감정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쓰러지지 않으려 문틀을 힘주어 꽉 붙잡았다.
“에일린?”
그가 대답을 구하는 듯 자못 간절해 보이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얼굴에 어린 호의적이지 않은 표정을 읽고는 움츠러들었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한참 만에 그가 나직이 일렀다.
“일단 쉬십시오. 먹을 걸 마련해올 테니 그동안 생각해 보세요. 강요는 하고 싶지 않지만 되도록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싶군요.”
‘…….’
꽉 닫힌 그녀의 입술 쪽으로 눈길을 주며 덧붙였다.
“마법은 그때, 당신의 대답을 듣고 나서 풀어주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풀어주지 않겠다는 뜻일까?
“물론 그대가 거절한다 해도 해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풀어줄 건가?
“혹 거절한다 해도 방법은 있으니까요. 저는 무력 면에선 케일론에게 밀릴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부분에선 결코 솜씨가 뒤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이지? 순간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눈빛에 강한 의문을 표했으나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제 마음대로 살 겁니다. 다시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일을 하지도 않을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작정이지요.”
벌레가 기어가듯 싸늘한 감각이 등을 관통했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말길. 이 방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마법을 걸어놓을 테니까요. 그럼 있다 뵙지요.”
그는 에일린을 방 안에 밀어 넣고 한차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닫았다. 거침없이, 묘하게 자신감이 넘치는 몸짓을 보며 에일린은 직감했다. 저 마법사가 자신을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저자의 수중에서 벗어날 방법을 궁리해야 했다. 꾹 다물었던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한 시간 남짓 지나자 안드레아스가 쟁반에 음식과 음료를 준비해 가져왔다. 뭘 도저히 삼킬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힘을 내기 위해 억지로 빵을 약간 뜯고 물을 마셨다. 에일린이 식사를 한쪽으로 물리자 긴장된 낯빛으로 바라보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습니까?”
‘…….’
순간 에일린은 몸을 굳혔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대답은? 긍정인가요?”
한 번 더 머리를 주억거렸다. 흐린 마법석 불빛을 뚫고 그의 얼굴에 걸린 환한 미소가 빛났다. 기쁜, 넘치는 환희로 물든 목소리와 함께 몸을 성큼 붙여왔다.
“진실입니까? 앞으로 저와 더불어 살 거라고 결심했나요?”
반짝반짝 오묘한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 가까이 바싹 다가왔다. 에일린은 최대한 속을 드러내지 않도록 표정을 더 딱딱하게 만들며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였다. 케일론처럼 이 마법사도 사람의 거짓말을 구분하는 데 일가견이 있을지 모르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오, 이렇게 기쁠 수가!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에일린. 절대 그대가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그가 두 손을 내밀어 에일린의 손을 상냥하게 감싸 쥐었다. 둥글게 휜 눈매에 기대감과 수줍음, 설렘, 여전히 남은 약간의 의구심이 두루 섞여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에일린이 억지로 입술 근육을 끌어당겨 웃어 보이자 그 의심의 빛이 조금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그가 눈에 띄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도 혹시…… 저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습니까?”
에일린은 어떤 미동 없이 그저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드레아스가 그녀의 두 손을 꼭 쥔 채 조바심 나는 듯한 어투로 질문을 이었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
에일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자신의 목과 입술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런, 그렇군요. 그런 대답은 그대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야 할 수 있을 테죠.”
망설이던 안드레아스가 에일린을 다시 한번 경계하듯 바라봤다. 에일린은 더 화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한층 부드러운 눈빛을 내보였다. 마침내 그가 결심을 굳힌 듯했다.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대를 믿겠습니다, 에일린. 이제 마법을 풀어드리죠.”
도박일지도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마법을 건 채로 둘 수도 없었다. 마법을 풀어주는 순간 그녀가 정령을 불러내 도망치거나 아니면 그를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일단 부딪혀 봐야 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사실 그가 손해를 볼 일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작은 하급정령을 서너 마리 불러내는 정도일 테니. 그 정도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럼…….”
마음을 정한 그는 마법 공간에 넣어뒀던 지팡이를 꺼내 들고 마법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밝은 황금빛으로 형성된 고리가 공중에 떠오르더니 에일린의 목과 얼굴을 휘감았다. 그 빛의 흔적이 사라지자마자 몇 시간이나 묶여있던 그녀의 목소리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
그녀는 본능처럼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아, 흠흠.”
그런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는지 지켜보던 마법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얼마 만에 이렇게 소리 내 웃는 것일까?
“우, 웃지 마세요. 내 목소리지만 왠지 좀 낯설게 느껴져서 그러는 거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니까요. 좀 친숙해지도록 연습을 해야겠어요.”
에일린이 눈을 살짝 흘기며 쑥스러운 듯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몇 번인가 이런저런 소리를 내며 그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중얼중얼 반복해 뭐라고 되뇌었다. 그 귀여운 행동이 멈춘 순간이었다.
파아앗!
그녀의 앞에 갑자기 눈을 멀게 할 만큼 아찔한 황금색 빛의 소용돌이가 솟아났다. 좀 전에 그가 에일린의 마법을 풀기 위해 만들어냈던 광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차가운 눈보라와 뒤섞여 나타났다. 싱글싱글 가는 호선을 그리던 그의 두 눈이 화들짝 열렸다.
“……!”
안드레아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 손에 느슨하게 쥐고 있던 지팡이를 황급히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그녀가 결국 정령을 소환한 것이다. 그는 좀처럼 입에 담지 않던 소리를 지껄였다.
“제길!”
눈앞에 출현한 건 조그만 하급 정령이 아니었다. 지팡이를 쥔 두 손이 덜덜 떨려왔다.
***
그날 히에무스는 잠시 짬을 내 겨울의 궁전에 들른 상태였다. 겨울이 끝나는 시기가 다가오긴 했으나 여전히 그의 일이 많이 남아있어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며칠 동안 밀린 업무를 본 후 서둘러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려는데 눈의 여왕과 북풍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짓이지?”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왕이시여.”
“뭐가 안 된단 말인가? 너희 둘이 감히 왕인 내가 가는 길을 막을 셈이냐? 무슨 호기로 이러는 것이지? 어서 비켜라.”
히에무스의 서슬 퍼런 기세에 둘은 잠시 주춤거렸으나 곧 단호한 표정을 되찾았다.
“저희도 다 압니다. 당신께서 어디로 가실 작정이신지. 인간 노릇을 하러 가시는 것 아닙니까? 겨울의 권속으로서 당신의 잘못된 행보를 막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히에무스의 은푸른 눈썹이 파들거렸다.
“뭔가? 둘이 그동안 나를 미행하고 감시했던 것인가?”
“송구합니다만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행적을 파악해야 했으니까요. 이제 정신 차리시고 그런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그만두십시오.”
“뭐가 우스꽝스러운 행동이라는 건가? 내게는 그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인데?”
“왕이시여!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언제까지 그 알량한 묘약에 중독된 채로 계실 겁니까? 어서 해독약을 드시고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십시오.”
히에무스의 낯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찌푸린 미간 사이로 당장이라도 이글이글 타오를 듯한 분노가 번득였다. 낮게 으르릉 거리는, 지독히도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공간을 더욱 꽁꽁 얼어붙도록 만들었다.
“비키라고 했다, 너희 둘.”
순간 눈의 여왕과 북풍은 자신들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며 바짝 움츠렸다.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정령왕의 위엄에 둘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린 채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히에무스는 잠시 그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다 겨울의 궁전 밖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별안간 그의 몸이 지난번처럼 강하고 세찬 황금빛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
또 누군가가 그를 소환한 게 분명했다. 히에무스는 직감적으로 에일린일 거라 생각했다. 또다시 그녀가 어떤 위험에 처했음이 분명했다. 그대로 그 강제적인 마법 현상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했다. 아마도 에일린이 있는 곳이리라.
“왕이시여!”
눈의 여왕과 북풍이 동시에 소리쳤다. 둘의 얼굴에 의아함과 경악의 표정이 여과 없이 떠올랐다. 뭐라고 제지하거나 물어볼 새도 없이 히에무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건……!”
북풍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외치자 눈의 여왕이 입술을 꽉 물며 말했다.
“틀림없어. 이건 누군가가 왕의 진명을 입에 올려 소환한 것이다. 아마도 그 인간 여인이겠지.”
“이런, 기어이 그 방법을 쓰다니.”
“큰일이군.”
눈의 여왕이 더욱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휙휙 가로저었다.
“정말 좋지 않아.”
***
짐작대로였다. 히에무스가 아찔한 황금빛 빛의 속박에 묶인 채 어딘가 빠르게 이동해 당도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에일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껏 가본 적 없는 낯선 장소였다.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일린!”
“히에무스!”
얼핏 살펴보니 다행히 어디 아프거나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긴장으로 경직되고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괜찮은 거냐? 에일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을 확인하자마자 히에무스는 그 공간에 있는 다른 존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십중팔구 에일린을 괴롭힌 놈일 것이다. 붉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인간 마법사. 잔뜩 찌푸린 표정에 당혹감과 두려움, 경이로움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황궁에서 몇 번 스친 기억이 있는 자다. 어느 왕녀를 모시는 시녀였을 텐데. 그때 분명 여장을 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남자 모습인 게 좀 이상했다.
“넌 뭐냐?”
“…….”
히에무스의 질문에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긴 누구든 상관없었다. 여자든 남자든, 인간이든 아니면 다른 뭐든 간에. 에일린을 위험에 빠지게 했다면 그 누구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에게 잡혀 온 거냐? 에일린.”
“예.”
“그렇구나.”
아직 자세한 정황이야 모르겠지만 대충 무슨 일인지 알 만했다. 그동안 인간과 용들이 벌인 행태를 돌이켜보면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에일린 옆에 세 하급 정령이나 다른 호위 인력이 없는 걸 보니 누군가가 유인해 위험에 빠뜨린 게 분명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저런 사정 같은 걸 잴 필요도 없었다. 주저하거나 지체할 이유도 없었다. 히에무스는 바로 손을 쳐들었다. 되레 에일린이 더 당황해 재빨리 소리쳤다.
“죽이면 안 돼요!”
위험을 느낀 마법사가 곧장 지팡이를 앞세우며 뭐라고 마법 주문을 읊조렸다. 히에무스는 당연히 그 주문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위로 쳐들었던 손을 그대로 휘둘러 푸른빛의 화살을 쏘아 보냈다. 인간 마법사가 정령왕을 상대로 반격할 기회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인간 마법사의 몸이 은푸른 빛 속에 갇히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얼굴을 제외한 몸의 나머지 부분이 차가운 얼음덩어리로 둘러싸였다. 물론 죽이지는 않았다. 그리 두텁지 않은 얼음 감옥이니까. 하지만 한동안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당분간 마법을 쓰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몸 상태가 될 터였다.
“으윽…….”
꽤 볼만한 미모였던 인간 마법사의 얼굴이 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히에무스가 냉혹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다시는 에일린을 괴롭히지 마라, 인간! 또다시 내 눈에 띈다면 그땐 죽여버리겠다.”
“괴롭힐 생각은 없었습니다. 난 그저, 그저…….”
곁에 두고 싶었을 뿐. 그가 가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에일린을 응시했다. 그녀가 잠시 연민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다 조용히 옆으로 다가왔다.
“어쨌든 절 도와주신 건 감사드릴게요. 이제 당신을 속박하는 건 없을 테니…… 앞으로는 자유롭게, 원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랄게요, 안드레아스 님.”
“…….”
“가자, 에일린.”
히에무스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바로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에일린은 얼음 속에 갇힌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한번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러곤 곧이어 나타난 푸른 마법의 빛 속으로 녹아들 듯 자취를 감춰 버렸다. 혼자 남겨진 안드레아스는 떨리는 눈빛으로 그들이 사라진 곳을, 그 빛의 잔상이 없어진 후에도 계속 바라보았다. 이내 몸을 파고드는 고통에 머리를 떨구며 신음을 냈다.
“우욱…….”
심장이 아픈 것인지 마음이 아픈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부들부들 온몸이 떨려왔다. 당연히 몸을 침범하는 한기 때문이겠지만 그보다는 가슴 속을 할퀴고 지나간 절망과 고독의 흔적이 더 스산하게 느껴졌다. 마법이 풀릴 때까지 혼자 남은 채 버티고 싶지 않았다. 아니, 혼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굳어가는 입술을 억지로 달싹이며 자신의 몸에 남은 마나를 모조리 끌어 모아 주문을 외웠다. 지금 이 순간 누구라도, 누구라도 옆에 함께 있어 주길 바랐다. 당장 와줄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계절의 처음을 여는 이여…….”
가늘게 부서지는 말을 내뱉자 어두운 방 안 허공에 하얀 마법 문자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만물의 시작을 가능케 하는 존재. 고결한 봄의 여왕이신…… 베르누아여, 여기 당신과 계약한 자 앞에 그 모습을 보이소서…….”
주문이 끝나자마자 공중에 떠 있던 흐릿한 마법 문자가 하나로 뭉쳐지더니 크고 새하얀 빛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그 속에 밝게 드리워진 햇살 같은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서 있었다. 얼음 속에 갇힌 그를 보는 순간 그녀의 눈과 입술이 한껏 벌어졌다.
“안드레아스!”
안타까운 외침과 함께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곧장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나긋나긋한 말을 건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안드레아스. 무슨 일을 당한 거야? 이 마법은 겨울의 왕의 것 같은데. 그가 왜 이런…….”
아름다운 봄의 여왕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정말 속상하고 걱정되는 듯한 표정과 말투였다. 안드레아스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깐 기다려 봐. 내 능력으로 겨울의 왕이 건 마법을 완전히 풀지는 못하지만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어. 내가 곧…….”
베르누아는 서둘러 이런저런 마법 주문을 외며 그의 몸에 가해지는 통증과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애썼다. 계속 이어진 그녀의 처치 덕분에 조금씩 온몸이 훈훈해져 왔다. 안드레아스는 가만히 몸을 맡긴 채 마치 혼이라도 나간 듯 베르누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뭔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튀어나오자 질끈 눈을 감았다.
“어째서…….”
“응?”
“어째서…… 늘 당신밖에 없는 겁니까?”
베르누아가 머리를 갸우뚱거리다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주룩 흘러내렸기에.
“안드레아스?”
“내 곁엔 어째서 늘 당신밖에는 없냔 말입니까? 어째서…….”
“…….”
“우욱…….”
한 번 터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베르누아가 따스한 손길로 끊임없이 닦아주었다.
“저, 부탁이 있습니다.”
“뭐지?”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물론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줄 거야. 그대의 부탁이니까.”
겨우 울음을 그친 안드레아스가 희미한 미소를 보내다 까만 어둠이 내린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어 물끄러미 한곳을 응시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창문 너머에 있는 먼 어딘가였다.
“전 이 땅을 떠나고 싶습니다.”
“떠나고 싶다고? 어디로?”
“글쎄요. 제 아버지가 향했다던 바다 너머의 땅은 어떨까요. 혹 저와 함께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베르누아는 아주 잠시 머뭇거리며 답을 미뤘다. 그러다 재빨리 손을 내밀어 안드레아스의 붉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그래. 그러도록 할게, 안드레아스. 그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꺼이 함께 갈 거야.”
“베르누아 님…….”
안드레아스는 거듭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오랜 시간을 엉엉 소리 내 울었다. 마치 어린애처럼, 한없이 따뜻한 봄의 여왕의 어깨에 기댄 채, 그동안에 쌓인 설움을 모두 모아 씻어낼 듯 그렇게.
***
에일린과 히에무스는 아젤란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는 라크네 평원으로 바로 가지 않고 잠시 중간 지점에서 멈췄다. 에일린이 당한 일의 전말도 듣고 에일린의 상태도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괜찮은 거냐? 에일린.”
“예,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에일린은 일부러 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쾌활하게 말했다. 히에무스는 그런 그녀가 한층 안쓰럽게 보여 품 안으로 끌어당겨 꼭 안아주었다. 미세하게 떨리던 몸이 즉시 안정을 되찾는 게 느껴졌다. 가녀린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그러니까 렌투스가 와서 내 핑계를 대며 그대를 데려갔단 말이냐?”
“예. 당신이 있는 군대의 의무대 시설을 점검해달라는 부탁을 했었어요.”
“난 그런 적 없다.”
“그럼…….”
히에무스의 두 눈썹이 꿈틀거렸다. 렌투스가 자신과 에일린을 속이다니. 자신들을 배신하고 흑룡의 사주를 받아 움직인 것인가? 그를 누구보다도 신뢰해 왔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히에무스는 어금니를 깨물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빌어먹을 용족들! 이 나를 농락하고 에일린을 또 위험에 빠뜨리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히에무스의 얼굴에 떠오른 섬뜩한 표정에 에일린은 어깨를 흠칫 들썩였다. 잠시 그의 기색을 살펴보다 깜빡 잊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저, 히에무스. 제퓌와 아두스, 프리기는 어떻게 됐을까요? 렌투스와 함께 사라졌거든요. 혹시 그들도 고초를 겪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그녀를 안심시켰다.
“별일 없을 거다. 내가 한번 소환해 보마.”
곧 입술을 움직여 세 정령을 불렀다. 지켜보는 에일린은 조바심이 나 침을 꿀꺽 삼켰다. 세찬 눈보라와 하얀 빛 덩어리와 함께 세 정령이 모습을 드러났다.
“제퓌, 아두스, 프리기!”
“에일린 님!”
“다행이군요! 모두 무사했군요.”
에일린이 반갑게 맞아주자 세 정령도 포옹하듯 에일린에게 다가왔다. 잠시 서로 안부를 물은 후 아두스가 그동안 그들이 겪은 일을 얘기했다.
“렌투스가 시전한 순간이동 마법이 멈췄을 때 저희는 낯선 장소에 있었어요. 에일린 님도, 렌투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 정말 난감했었답니다.”
제퓌와 프리기가 이어 설명했다.
“용들이 사는 계곡 같았지만, 너무 낯선 곳이라 빠져나오기 힘들었어요. 사방에 용들의 마력이 넘쳐나는 곳이어서 그런지 순간이동 마법마저 잘 듣지 않더라고요.”
“아마 용이 쳐둔 결계가 아닌가 싶어요. 지금껏 그곳을 헤맸지 뭡니까.”
아두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왕에게 울분을 토했다.
“렌투스가 그런 얍삽한 짓을 하다니, 혼쭐을 내주십시오! 왕이시여.”
“그래, 그래야겠구나. 용들을 이대로 둬선 안 되겠군.”
“암요, 그렇고말고요.”
히에무스는 잠시 용들의 처분에 대해 고민하다 일행을 돌아보며 제의했다. 밤도 깊었고 날이 꽤 차가웠다.
“일단 에일린이 쉬어야 하니 라크네 평원에 있는 주둔지로 가도록 하자.”
“예.”
에일린과 세 정령이 합창이라도 하듯 동시에 대답했다.
***
“으아악! 뭐죠? 이건!”
“이런…….”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렸다. 양 진영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휙휙거리며 하늘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불덩어리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쿠쿵!, 우지끈!
거대한 투석기에서 쏘아 보내는 돌덩어리가 연신 날아와 박혔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흔들리고 땅이 깊게 파였다. 임시로 나무 기둥을 세워 만든 방책이 파괴되면서 생겨난 파편과 흙과 돌 조각이 사방으로 마구 튀었다. 공중에서 퍼부은 불덩이 때문에 불타 무너지는 막사도 부지기수였다. 당연히 피해를 당하는 사람도 많았다. 몸에 불이 붙은 채 고통에 차 바닥에 뒹구는 병사들, 경기를 일으키며 미친 듯 히힝 울부짖으며 날뛰는 말들이 서로 뒤엉켰다.
으아악!
끔찍한 비명이 여기저기 울려 퍼져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에일린은 그곳에 당도하자마자 목격한 광경에 몸을 경직시킨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됐던 참혹한 장면이 그대로 눈앞에 재현된 것이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처참하고 두려운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히에무스를 올려다봤다. 그가 냉큼 그녀를 자신의 망토 속으로 숨기며 말했다.
“마물을 앞세운 아칸 왕국 군대가 기습해온 모양이구나.”
한동안 지루한 대치상태가 이어진 탓에 느슨해져 있던 경계상태를 노리고 야습을 해온 게 틀림없었다. 전투가 발생한 시간은 별로 오래되지 않은 듯했다. 아젤란 측의 대응이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걸 보니.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 바로 곁에 커다란 불덩어리가 날아와 떨어졌다.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꺅!”
히에무스가 즉시 손을 휘둘러 그들 몸 주위에 결계를 쳤다. 눈을 가늘게 뜬 채 화염이 날아온 쪽을 바라봤다. 검은 밤하늘에 거대한 붉은 몸체를 지닌 마물이 커다란 날개를 펄럭거리며 여유롭게 바람을 타는 형상이 보였다. 오만하게 빛나는 오렌지빛 두 눈동자로 아래를 굽어보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입에서 쉴 새 없이 불의 공을 만들어내 토해냈다. 히에무스는 무심하고 냉정한 말투로 놈의 정체를 입에 올렸다.
“적룡이로구나.”
“적룡이라고요?”
“그래.”
그것도 안면이 있는 개체로군. 알 만했다. 그 흑룡 여자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걸 깨닫고 또 다른 수를 시도해 보는 거겠지. 렌투스도, 저 적룡도 모두 그녀 주변의 용이니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걸림돌이 되는 자신과 브로미오스를 다른 곳으로 유인해 묶어두고 이곳에서 행동을 취할 셈이었는가. 물론 그 행동이란 에일린을 제거하는 것이겠지. 뭔가 걸리적거리는 걸 치우는 데 전쟁만큼 좋은 기회도 없을 테니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내놓을 변명거리도 무진무궁할 거고.
“감히!”
짧고 나직한 한 마디가 마치 온 천지를 얼려버릴 듯 싸늘한 어조로 새어 나왔다. 옆에 있던 에일린과 세 정령이 두려움에 어깨를 화들짝 추켜올릴 정도였다. 그는 즉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에일린도 들어본 적이 있는, 바람과 빗소리를 닮은 정령의 소환술이 발동되었다.
“δΣΫΨΩϊΝξΏΰπΐβδΚΓΔΐΠΟίφΘ!”
눈이 아릴 만큼 강렬한 황금빛 빛의 소용돌이가 생겨나더니 큼직한 타원형 빛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안에 깃든 이는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였다. 그녀가 히에무스 일행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에일린! 이제 온 것이냐?”
에일린은 경황이 없긴 했으나 다소곳한 자세를 취하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예. 에스타스 님. 다녀왔어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부르러 가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단다.”
히에무스가 미간을 구기며 쏘아붙였다.
“이런 위험한 장소에 일부러 부를 생각을 했다고?”
“어, 그렇긴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에일린이 필요한 상항이니까.”
에일린이 얼른 수긍하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서 의무대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상자들이 많이 생겼겠죠?”
“그렇겠지. 사실 아직은 제대로 상황파악조차 안 된 상태지만. 보다시피 아젤란 군은 이제야 겨우 반격할 준비를 하는 형편이라서 말이야.”
뿌우우!
때맞춰 아젤란 군의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야 대열을 정비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모양이었다. 히에무스가 잠시 아젤란 군의 정세에 귀를 기울이다 에스타스에게 말을 건넸다. 정령어였기에 에일린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히에무스는 그녀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 이 언어를 택했다.
“이대로는 아젤란 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어. 용이 공중에서 계속 화염 덩어리를 내보내는 데다 마물들까지 지휘하고 있으니까.”
마물은 인간과 소통하지 않고 인간의 명령도 듣지 않는다. 마물을 움직이고 통솔하는 것도 당연히 용의 능력일 것이다.
“에스타스, 그대가 에일린을 책임지고 지켜주길 바란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에스타스의 볼살이 씰룩거렸다. 히에무스의 저런 말투는 언제 들어도 불쾌했다.
“그야 당연하지,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거야? 나 역시 정령왕이라고.”
“자신 있으면 됐다. 믿고 맡기도록 하마.”
“나 참, 기가 막혀서. 됐고. 그럼 그대는 뭘 할 생각이지?”
“저 용을 해치울 작정이다.”
에스타스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해치우다니? 죽여버리겠다는 거야?”
“그러고 싶지만…… 그럼 여러모로 골치 아파지겠지. 적당히 힘을 쓰지 못하도록 제압해둘 생각이다. 아쉽긴 하지만.”
“그래. 하지만 그것도 정령의 몸으로 행하면 좋지 않을 거야. 되도록 인간 정도의 몸 상태로 시도하는 게 좋지 않을까? 뒷말이 없게 하려면 말이지.”
“안 돼. 그래선 부족하다.”
“……!”
“제대로 혼내줄 수 없지 않은가. 다시는 이런 어이없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어두려면 정령의 힘이 필요해.”
“하지만 히에무스, 그러면 대자연 어머니께서…….”
“됐어, 그런 건. 그렇게 따지면 저 용들의 행태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먼저 도발했으니 죄도 더 크겠지. 어서 에일린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도록 해.”
“알았다.”
에스타스도 그의 얼굴에 어린 굳건한 의지를 읽고는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먼저 시작한 건 용들이었다. 그들의 당돌함이 점점 도를 지나치는 것도 사실이고. 죽이지 않고 힘을 묶는 정도라면 그리 큰 죄에 해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대자연 어머니에게 직접 고발하지 않는 이상 바로 벌을 받게 될 일도 없을 것이다.
“에일린. 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 잠깐 어디 들렀다 갈 테니 우선 에스타스와 함께 피해 있도록 해라.”
히에무스가 손등으로 에일린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예, 잘 다녀오세요.”
에일린은 그가 하러 가는 일이 궁금했지만 참고 묻지 않았다. 뭔가 정령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는 것 같은데 자꾸 캐묻고 참견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에스타스가 다정하게 그녀의 팔을 잡고 말했다.
“우린 다른 일을 하도록 하자구나, 에일린. 의무대 일도 잔뜩 밀려있단다.”
에스타스가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하자 세 정령도 뒤를 따랐다.
***
에일린을 에스타스에게 부탁한 후 히에무스는 곧장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겨울의 왕이 나아가는 궤적을 따라 차가운 은빛과 푸른빛의 잔상이 밀가루처럼 흘러내렸다. 공기 중으로 거침없이 솟아올라 금방 붉은 용이 머무는 고도를 따라잡았다.
“……!”
계속 화염으로 된 공격을 내리퍼붓고 마물과 소통하느라 정신없던 적룡의 두 눈동자가 그를 발견해냈다. 이내 당혹감과 불쾌함, 그리고 의아함을 느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노려봤다. 둘의 눈빛이 그대로 충돌했다. 한쪽은 바라보는 모든 걸 검은 재로 만들어버릴 것처럼 뜨거운 붉은 눈빛이었고, 다른 쪽은 닿는 즉시 만물을 꽁꽁 얼려버릴 것 같은, 차가운 은빛 눈빛이었다. 정령왕을 감싸는 찬란한 은빛과 푸른빛의 광휘로 인해 왠지 불보다는 얼음의 위세가 한층 더 선명하고 강하게 느껴졌다. 잠시 맞부딪혔던 두 존재의 시선이 박제라도 된 듯 제자리에 고정되었다. 그러다 적룡은 맞은 편 정령왕의 눈에 서린 묘한 기색을 눈치채곤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선한 존재에 가까운 정령이 좀처럼 내비치지 않는 어두운 기운이었다. 좋게 말하면 ‘위협’이고 나쁘게 말하면 ‘살기’.
“꼴사납군.”
분노에 찬 싸늘한 한마디가 전해졌다. 정령은 좀처럼 생명체를 해치지 않으니 저건 그냥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어찌 됐든 두려운 감정을 갖게 하기엔 충분했다.
“도저히 더는 봐줄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런 강한 힘을 가지고 아무 힘도 없는 인간 여인을 괴롭히는데 힘쓰는 것인가?”
“…….”
“부끄럽지도 않더냐?”
적룡은 그 자리에서 육중한 날개를 휘저어 약간 뒤로 물러났다. 저런 눈빛을 가진 정령왕을 상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 피하는 게 좋을 것이다. 히에무스가 한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가 좀처럼 읊는 일이 없는 마법 주문까지 입에 올리자 사방에 매서운 한기가 휘몰아쳤다.
“……!”
도망쳐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적룡은 서둘러 마법 주문을 외웠다. 한데 거대한 용의 몸뚱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오늘따라 매우 느리게 목구멍을 벗어나는 듯했다. 초조해졌다. 겨우 주문이 완성되고 푸른 마법진의 문양이 희미하게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보다 먼저 정령왕의 손에 차가운 은빛으로 형성된 긴 창이 쥐어졌다. 그가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빛의 창을 손에 꽉 움켜잡더니 팔을 크게 휘둘러 냅다 집어 던졌다.
쉬익!
“캬오-!”
정확하게 적룡의 배를 꿰뚫었다. 뜨거운 피가 솟구쳐 까만 밤하늘에 붉은색으로 된 긴 띠가 춤추듯 휘날렸다. 적룡이 만들어냈던 푸른 마법진이 신기루처럼 부서져 사라졌다. 동시에 상처에서 비롯된 영롱한 은빛과 푸른빛의 얼음 결정이 용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온몸이 얼어가는 용이 거칠게 꿈틀거리며 고통에 찬 몸부림을 쳐댔다. 공중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몸을 뒤틀다 어느 순간 그대로 딱딱하게 굳은 채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캬아악!”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하던 적룡이 남은 힘을 짜내 마물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 [계속, 계속 진격하라! 너희 생명이 다할 때까지!]
***
며칠이 지났다. 마물들의 행동을 통솔하던 용의 힘이 사라지자 지상에선 더 혼란스러운 상황이 펼쳐졌다. 주로 마물로 구성된 아칸 측 군대가 오히려 전보다 한층 거칠고 강하게 밀어닥친 것이다. 마치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듯 막무가내로, 죽음 따위는 모른다는 기세로 공격의 강도를 높여왔다. 용이 하늘에서 뿌리던 화염 공격이 사라졌지만 오거와 아칸 왕국 군에 속한 마법사들의 수가 상당했다. 마물인 오크 개개인의 위력은 별로 크지 않았으나 그 수가 워낙 많기에 계속 처치해도 좀처럼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도무지 지칠 줄을 몰랐다.
물론 용이 가담하지 않은 덕분에 한동안은 두 진영의 힘이 그럭저럭 대등한 수준을 보였다. 그런 결과가 나는 데는 에일린의 역할도 컸다. 그녀를 돕는 정령들이 활약한 덕에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마법사들은 전투에만 전념하는 게 가능했다. 처음에는 신관들이 참여하지 않아 아젤란 측의 사기가 많이 저하됐으나 지금은 정령들이 아젤란 측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상당히 고무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적 열세에 따른 피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에일린 님! 또 부상자들이 들이닥칠 것 같아요.”
의무대에 소속된 제니와 샤샤가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에일린이 황급히 일어나 물었다.
“몇 명 정도지?”
“40명쯤이에요.”
“이쪽 막사는 다 찼으니까 옆 막사로 데려가도록 해!”
“예!”
에일린은 방금 그가 돌보던 병사를 바라봤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가 바로 옆에서 치유력을 행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올려다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흘렸다.
“에일린. 이곳은 내가 물의 정령과 일각수들과 함께 치료할 테니 그대는 다른 데 가봐도 괜찮아.”
에스타스가 그동안 자리를 비웠던 다른 정령들을 소환해 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병사를 치유하던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가보도록 해.”
수줍은 표정의 유니콘 몇 명도 치유술을 행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연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정령들과는 달리 인간의 눈에도 보이는 몸이기에 좀 더 찾는 이들이 많았다. 에일린이 머리를 꾸벅 숙이며 고생하는 모두에게 인사했다.
“예, 다들 잘 부탁드릴게요.”
“그래.”
애플턴 부인을 비롯한 의무대 대원들이 에일린이 보이지 않는 존재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지켜보다 감탄하는 시선을 보냈다. 에일린은 그들에게도 나머지 일을 당부하고 서둘러 옆 막사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히에무스에게서 그녀의 안전을 부탁받은 대지의 정령왕 텔루스가 바싹 다가왔다. 히에무스와 브로미오스는 인간 귀족의 자리로 돌아가 드라코니아의 병력과 합류한 다음 속히 이곳으로 와 아젤란 군 측에 서서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휘익!
쿵!
밖으로 나오자마자 전개되는 아찔한 광경에 에일린은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장에서 불덩이와 바람 덩어리, 물 폭탄이 끊임없이 날아다녔다. 양 진영의 마법사들이 던지는 마법 공격이었다. 목책 안에 서 있는데 한쪽 벽에 화염 공이 처박히며 불타오르자 병사들이 재빨리 끄는 장면이 보였다. 이어 적의 투석기에서 날린 것인지 아니면 마법의 힘으로 보낸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묵직한 뭔가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
“앗!”
에일린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순간, 대지의 왕 텔루스가 재빨리 손을 휘둘렀다. 제법 큰 돌덩어리가 밝은 빛에 휩싸이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괜찮으냐?”
“예. 감사합니다.”
각종 무기류가 부딪히는 둔탁한 쇳소리와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비명, 마법 공격으로 인해 나는 소음들로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텔루스가 굳은 얼굴로 목책 너머로 눈길을 보냈다.
“오랜 세월 질리도록 마주했지만 언제 봐도 이해되지 않는 광경이구나. 인간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이란.”
“예. 생각보다도 더…… 처참하네요.”
에일린도 그의 말에 동조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처음 경험한 전쟁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하고 비참한 모습이었다. 중간에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매번 마음을 다잡으며 그런 유혹을 이겨냈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이들을 위해서도,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그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견뎌야만 했다. 떨리는 손을 꽉 틀어쥐며 입술을 악물었다. 이내 몸을 돌려 부상자들을 수용한 옆 막사를 향해 달려갔다. 그 뒷모습에 텔루스가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이런 것이겠지.’
인간들이 서로 물어뜯고 할퀴는 추악한 다툼 속에서도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의미와 가치, 아름다움이란 게 있다면.
에일린이 발걸음을 재촉해 다른 막사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막 들어온 부상자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에일린이 모집해서 따라온 의무대 지원자들이 그들을 부축해 눕히고 상처를 확인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곳에는 나무의 정령인 아그로스와 유니콘인 루카스, 그리고 가을의 궁전에서 나온 정령들 몇 명이 부지런히 환자들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루카스가 아는 체를 했다.
“에일린! 어서 와. 나 보러 온 거야?”
에일린이 짧은 눈인사로 대답을 대신했다. 서둘러 부상자들의 상황을 지켜보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여 깜짝 놀랐다. 기사단장인 엘로드가 끼어 있는 게 아닌가. 그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 귀족 출신의 기사가 재빨리 소리쳤다.
“이봐요! 여기, 기사단장님부터 치료해 주시오.”
당연히 부상 정도가 심한 이들부터 먼저 치료하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황제의 안위를 책임지는 자였기에 에일린은 잠자코 다가가 그를 살폈다. 상대 마법사가 날린 것으로 보이는 화염 공격에 당한 것 같았다. 미스릴로 된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은 부분에 꽤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다. 엘로드는 인상을 찡그렸으나 제국의 기사단장답게 고통을 꾹 참고 있었다. 에일린은 곧장 나무의 정령 아그로스를 불렀다.
“아그로스 님, 그쪽 분을 치료하고 나시면 여기, 이 분을 좀 봐주세요.”
“그러지.”
아그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그를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 치료술을 행했다. 정령의 손길이 닿자 금세 상처가 아물었다. 역시 인간 마법사나 신관이 치료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효과가 뛰어났다. 게다가 쉽게 지치지도 않았기에 거의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고통이 사그라지자 비로소 엘로드가 편안한 표정을 되찾았다.
“저, 엘로드 님. 폐하께선 괜찮으신가요?”
황제의 지척에서 보필하던 이가 이런 심한 부상이라니 렉스는 괜찮을지 걱정이 됐다. 요 며칠간 너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에 서로가 제대로 안부를 묻거나 지켜볼 새가 없었다. 마법사 케일론을 못 본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터였다.
“하아…….”
엘로드가 긴 한숨을 내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직은 괜찮으시나 심려가 크십니다. 적들이 도통 쇠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가 잔뜩 피로에 찌들어 붉게 충혈된 눈을 느릿하게 치뜨며 말했다. 눈에 띄게 지쳐 보이고 생기를 잃은 듯한 모습. 마치 뭔가 상심한 사람처럼 보여 그새 한 10년은 늙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며칠 동안 한시도 쉬지 못한 채 계속 공격에 임했던 터라 많이 약해진 상황입니다. 쓰러지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지요.”
그의 옆에 있던 병사가 덧붙여 설명했다.
“기사단장님도 폐하께 그대로 적중하는 적의 마법공격을 대신해 막다 다치신 겁니다. 대마법사님도 극도로 탈진하신 상태여서 잠깐 집중력을 잃으셨죠.”
“아…….”
체력과 인내심, 정신력이 바닥나기 시작하니 아젤란 측이 조금씩 밀리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할 것이다.
“그렇군요.”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 같았다. 부상자가 더 생기는 걸 막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에일린은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대지의 정령왕 텔루스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저, 텔루스 님. 정령들께서 조금만 더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텔루스가 곤란해진 듯 눈썹을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음, 그게 그대도 알겠지만 정령들이 인간사에 너무 관여하는 건 금지라서 말이지. 이유 없이 마물들이나 인간들에게 무력을 행사해선 안 된단다.”
“그럼 아까 저를 구해주시는 것도 안 되는 건가요? 제게 날아오는 마법 공격을 막아주셨잖아요.”
“그건 좀 다른 경우라 할 수 있지. 그대는 우리와 친한 존재지 않느냐? 친구라고 할 수도 있겠지. 친구를 보호한다는 이유, 즉 명분이 있으니 괜찮은 것이다.”
“어, 그런 거예요? 저를 보호하기 위해 힘을 쓰는 건 괜찮은 거예요?”
에일린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유난히 명랑한 목소리로 되묻자 텔루스는 뭔가 어색해져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그렇지. 그런 거야 괜찮다고 할 수 있겠지. 우리의 규칙도 결국은 뭐랄까, 그래, 일종의 법인데 그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거겠지.”
“그래요? 알겠어요.”
“응?”
에일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루카스와 아그로스를 향해 말했다.
“두 분 저를 좀 도와주세요. 부상자들은 잠시 가을의 정령들에게 맡겨 두시고요.”
“……?”
***
에일린은 유니콘으로 변한 루카스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언제나처럼 세 정령이 수호신처럼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앞에 모여든 거물급인 네 정령을 향해 당부했다.
“저, 지금부터 루카스를 타고 전장을 이리저리 둘러볼 예정이에요. 여러분들은 저를 좀 보호해 주세요.”
“으응? 그게 무슨…….”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현장으로 침투해 부상자들을 살필 거라고요. 그럼 많이 위험하겠죠? 그러니 좀 부탁드릴게요!”
대지의 정령 텔루스와 여름의 여왕 에스타스, 나무의 정령 아그로스와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는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에일린이 루카스의 배를 살짝 때리며 세 정령을 옆에 거느린 채 거침없이 달려 나가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의도를 읽은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자신들의 힘을 입맛대로 이용하려는 시도니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기발하고 귀여운 생각이라 할 수도 있었다.
“허, 참. 어쩔 수 없겠군.”
혀를 한번 차긴 했지만 제일 먼저 텔루스가 에일린의 곁을 바싹 쫓자 뒤에 남아있던 에스타스가 중얼거렸다.
“뭐, 원래 정령사들이 하는 일이 그런 거잖아? 정령들의 힘을 이용해 자신들 뜻대로 휘두르는 것 말이야. 계약을 직접 맺은 인간은 아니지만 친구니까 지켜줘야지. 나도 가볼테니 그대들은 원하지 않으면 관둬도 좋아.”
아그로스와 엘레스트라도 피식 웃으며 에스타스보다 한발 앞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
에스타스도 미소를 머금으며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친구를 보호해 주기 위해 분주히 활약했다. 물의 정령 엘레스트라는 에일린이 불길이 치솟는 장소에 가면 물을 뿌려 진화하거나 반대로 물 폭탄을 만들어 그녀에게 다가오는 적들에게 투척했다. 대지의 정령왕 텔루스는 에일린 쪽으로 날아오르는 돌덩이를 사라지게 하거나 밀려오는 적들이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땅에 구덩이를 파서 죄다 빠지도록 만들었다. 에스타스도 화염 공격을 날려 보내 적들의 접근을 막았다. 아그로스는 나무의 정령답게 쓰러진 목책을 다시 세우거나 적들의 발을 나무 넝쿨로 묶어 저지하는 일을 했다. 작은 세 정령도 부지런히 얼음 공을 날리며 도왔다.
“와아아!”
“정령사야! 정령사가 나타났어!”
지켜보던 이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눈에 정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새하얀 유니콘을 탄 한 여인이 긴 밤색 머리를 휘날린 채 전장을 누비는 모습이 무척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녀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보이지 않는 정령의 힘이 거침없이 발현되며 적들의 기세가 꺾여나갔다.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